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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터널을 지나서(Too Long a Sacrifice)

시간의 터널을 지나서(Too Long a Sacrifice)

Yvonne Whit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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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대기실은 오전 중으로 진찰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환자들로 꽉 들어차 있다. 서류함 위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구식 선풍기는 악명 높은 트란스발의 더위를 식히기엔 역부족이다. 남아연방의 1월은 여름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줄리아 핸더슨은 노련한 간호사답게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12시가 되자 대기실에는 소피 브릿 한 사람만이 남았다. 그녀는 60살이 넘은 여인으로 여전히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뚱뚱한 몸을 소파에 묻고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던 소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줄리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책을 한켠으로 밀어 놓고 고개를 든다.

"하니웰을 팔았수" 명랑한 음성이긴 하지만 노르스름한 눈동자에는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아이도 없고, 조지도 세상을 떠났는데 계속 농장에 눌러 있기가 어설펐어."

줄리아는 가끔 환자들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일 때가 있었다.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원칙에 따른다면 꽤나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디로 옮기시죠?"

돈필드 주민들 사이에서는 소피 마님이라고 불리는 상대방이 입을 열었다.

"내 동생도 혼자 살거든. 당분간을 그애랑 지낼 작정이우. 그러다가 따로 집을 구하든지..."

"농장은 이 지방 사람한테 파셨어요?" 줄리아는 예약철을 덮고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니, 요하네스버그에서 온 의사인데 값을 아주 후하게 쳐줬어. 직접 만나진 못했는데, 내 변호사에 의하면 그 사람 이름이 네이슨 코르베라든가?"

네이슨 코르베라니! 줄리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새파랗게 질렸다. 의학계에 또 다른 네이슨 코르베라는 전문의가 있을 가능성은 백만분의 일도 기대할 수 없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으리라고 믿었는데....

"안색이 안 좋아. 어지러운 모양이지?"

줄리아는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뇨, 괜찮아요." "어지간히 더워야 말이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지 소피는 머리를 내둘렀다. "나도 이 더위에 익숙해지는 데는 몇 년이나 걸렸다우"

진찰실 문이 열리면서 젊은 임신부가 나타났다. 덕분에 줄리아는 완전히 평정을 회복할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소피의 차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세요, 소피 마님" 그녀는 침착한 태도로 소피를 부축해 일으켰다.

소피의 등 뒤에서 진찰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양쪽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쑤셨다. 집까지 무사히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일이 뭔지부터 차근차근 정리해야 한다. 무사히? 기가 막혔다. 네이슨 코르베가 코앞에 농장을 샀는데 어떻게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로란드 드 넥커가 30분쯤 지나 진찰실에서 나왔다. 소피 브릿은 오랫동안 사귄 친구이자 주치의인 그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듯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눈물을 떨구는 소피를 보내고 의사를 따라 진찰실로 들어간 줄리아의 가슴은 납덩이라도 걸린 듯 뻐근했다. 로란드는 가죽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토요일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군."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안경을 벗어 들고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낸 그는 줄리아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녹색 눈동자가 심각하게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소피 브릿이 농장을 팔았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줄리아는 시선을 떨구었다. "소피가 얘기하더군요."

"하니웰을 샀다는 네이슨 코르베가 당신이 알던 바로 그 인물이라고 할 수만은 없잖소."

그녀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의학계에 네이슨 코르베라는 이름의 전문의가 몇 명씩 되던가요?"

로란드 드 넥커는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할 말이 없군. 아무튼 또 달아난다든지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지?"

"이젠 도망칠 이유가 없어요."

여전히 가슴 아픈 추억이었다. 로란드가 책상을 돌아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다.

"자신의 행복 대신 타인을 위한 희생을 감수한 용기는 칭찬할 만하지. 하지만 너무 오래 혼자 괴로워하지 않았소?" 그의 손에 살짝 힘이 가해졌다. "내 곁에서 일한 지도 거의 3년이 돼가는데, 다른 남자를 가까이 하는 걸 한 번도 못 봤소. 그날 이후로 아예 마음을 닫아 버렸다는 편이 옳겠지. 그러다가 막상 사귀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는 대체 어쩔 셈이오?"

목이 메어서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녀는 대답 대신,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로란드의 손을 살며시 건드렸다. 로란드 드 넥커 내외는 항상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든든한 친구들이었다.

가까운 남자가 한명도 없었다는 말을 엄밀히 따지면 틀린 것이었다. 워렌 첸들러와의 교제는 그녀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돈필드에 정착한 직후, 그녀는 어떤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네이슨에 비길 만한 남자는 없으리란 느낌에서였고, 그후론 아예 흥미를 잃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워렌 챈들러는 꾸준히 그녀에게 접근해 왔고,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부담을 주지 않는 그와의 관계는 그런대로 안정감 있게 지속되고 있었다.

갑자기 온몸에 으스스해졌다. 27살쯤 되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나이였다. 하지만 그런 욕심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그럭저럭 혼자만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란드의 말대로 너무 오래 희생을 감수해 온 걸까?

로란드와 함께 진찰실을 나와 집으로 향하며, 그녀는 일단 복잡한 문제는 잊어버리자고 결심했다.

자카란다 나무가 늘어선 중심가는 한산했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 심은 꽃들 역시 열기에 못 이겨 축축 늘어져 있었다.

돈필드는 남아프리카 저지대의 중심부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이다. 4년 전 마을 변두리의 토지를 대상으로 연료탐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돈필드는 문명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곳이었다. 광부들의 유입으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탓에 학교와 종합병원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돈필드 본래의 평화로움은 아직도 그대로다.

줄리아는 자기 집으로 향하는 좁은 차선으로 접어들면서 속도를 줄였다. 구불구불한 자갈길은 그녀의 집을 지나 강변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돈필드 주민들이 주말이면 낚시를 즐기거나 유칼리 나무 그늘 아래서 느긋하게 쉬곤 하는 곳이었다.

이내 집에 도착한 그녀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침실로 들어가 구두를 벗어던졌다. 주위는 더할 수 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웠지만 화장대 앞에 앉아서 머리를 풀어 내리는 줄리아의 머릿속은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동안 많이 변한 걸까? 그녀는 무의식중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깨끗한 곡선을 그린 눈썹 아래, 정직한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되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코는 작은 편이었지만 콧날은 반듯했다. 그리고 양끝이 살짝 올라간 부드러운 입은 그녀가 잘 웃는 사람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5년 전에 몹시 체중이 줄었고 그 절반도 회복하지 못했지만 그녀 특유의 탄력 있는 몸매는 여전했다.

줄리아는 더 지체하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줄리아는 누구나 다시 한번 돌아볼 만한 미모의 소유자였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외모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몹시 피곤했다. 차를 마시려고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스위치를 넣는데, 흰색 유니폼이 땀에 젖어 끈끈하게 들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신이 공들여 가꾼 정원에도, 강가의 절벽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아득한 곳을 더듬고 있었다. 과거로 통하는 문은 단단히 잠겼다고 믿었는데, 소피 브릿의 한마디가 자물쇠를 비틀어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줄리아는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가슴 아픈 과거의 기억들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녀와 네이슨은 데미안 스콰이어즈의 소개로 만났다. 데미안 역시 전문의로서 두 사람과는 비슷하게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처음엔 그저 외모에 혹해 네이슨에게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표면에 드러나는 매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그는 자기가 권위 있는 신경외과 전문의인 반면 줄리아는 수술방의 견습 간호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이도 8살이나 많았지만 줄리아는 그때까지 만났던 어떤 남자와도 그렇게 격의없이 대화를 즐겨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두뇌회전이 매우 빠른데다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는 예리한 유머 감각도 갖추고 있었다. 줄리아는 일종의 도전의식까지 느끼며 그와 가까와졌고, 결국에는 스스로도 두려울 만큼 깊이 빨려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약혼을 한 것과 네이슨이 유럽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병원의 연구원으로 초청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네이슨으로서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네이슨의 출국 날짜에 맞춰 둘은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결혼식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어느 날, 운명은 엉뚱한 방향으로 그녀를 밀어 넣어 버렸다.

커피포트의 칙칙거리는 소리에 놀라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황급히 찻잔 준비를 하고 목재 탁자 앞에 앉자 또 다시 과거의 화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할머니가 암에 걸리셨다는 통보를 받은 날은 줄리아가 평생토록 잊지 못할 하루였다. 엘리샤 핸더슨에게 남은 삶은 1, 특수치료를 받는다 해도 2,3년이 고작이라는 진단이었다. 줄리아가 그때만큼 방황했던 적은 없었다. 네이슨을 미친듯이 사랑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부모를 잃은 후까지 사랑으로 보살펴 온 할머니를 외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네이슨의 출국이 코앞에 닥쳤을 때, 그녀는 두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네이슨도 뭔가 이상한 눈치를 챈 듯했지만 그녀에게 직접 다그친 적은 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네이슨 코르베라는 인물을 너무 잘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유럽행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아는 자기 때문에 네이슨이 희생당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네이슨은 장래가 보장된 유망한 의사였다. 그녀의 이성은 희생할 쪽은 바로 너라고 충고를 했다.

마치 지금 네이슨과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그 당시 그녀는 네이슨과 직접 얼굴을 맞댈 용기가 없었다. 뭐라고 둘러대건 네이슨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사람이었다. 결국 편지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 좀 더 부드러운 표현은 없을까 하고 며칠을 앓던 그녀는 가장 직선적인 쪽을 택했다. 말꼬리를 돌린다고 해서 상처 입은 마음이 회복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녀는 짤막한 쪽지와 약혼반지를 함께 싸서 손수 네이슨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가 편지를 발견했을 무렵, 그녀는 할머니와 함께 요하네스버그를 떠난 후였다. 네이슨이 남아프리카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그녀는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벌써 5년전 일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데미안뿐이다. 그라면 굳게 입을 다물어 주리라고 줄리아는 아직도 확신하고 있다.

2년쯤 지나 할머니가 세상을 뜨자 줄리아는 그동안 정이 들 대로 든 집을 팔아 버렸다.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돈필드는 이상적인 운둔처였다. 소도시 특유의 평화로움 속에서 그녀는 내면의 평화와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다시 찾으려고 애썼다.

두 잔째 차를 따라 놓고 줄리아는 주방으로 가서 두통약을 꺼내 왔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쥐어짜는 것 같았다.

네이슨이 농장을 샀다고 해서 의아해할 필요는 없다. 최근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교외나 별장을 고집하는 추세니까. 복잡한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운을 충전할 장소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돈필드일까? 어째서? 그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걸까? 그녀의 소재를 발설했을 만한 사람을 아무도 없다. 데미안은 의심할 필요도 없고, 이제 와서 네이슨이 새삼 그녀를 찾아 나섰다는 가정도 우습다. 그렇게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고서야.... 그렇지만 난 그당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줄리아는 네이슨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그 후로 한번이라도 생각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두통이 어지간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줄리아는 낡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럴 땐 땀을 흘리는게 최고의 요법임을 그녀는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있었다. 맨발에다 구멍이 숭숭 뚫린 밀짚 모자를 쓰고 그녀는 화단에 쭈그리고 앉아 호미질을 시작했다.

한시간 남짓 흙을 파헤치고 나자 기운이 빠졌다. 그녀는 응달에 앉아 가지고 나온 찬 과일 주스를 단숨에 비웠다.

잔디는 파릇파릇했지만 모서리 쪽은 다시 다듬어 줘야 깨끗해질 것 같았다. 맨 구석 자리를 차지한 포인세티아가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진홍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문 옆으로는 히이비스커스와 색색의 장미들이 얕으막한 울타리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하얗게 벽을 칠하고 창문에는 초록색 셔터를 단 아담한 집은 실용적이라기보다는 귀여운 장난감처럼 보였다.

평화로운 정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차츰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공포에 사로잡혔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네이슨이 하니웰을 샀다고 해서 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주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그녀가 돈필드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늙어 죽을 때가지 돈필드에 눌러 살 작정은 아닐 테니까....

 

줄리아는 초조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소피브릿이 돈필드를 떠난 뒤로는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는 건 예사였고, 혹시 쇼핑이라도 할라치면 어디선가 네이슨의 모습이 불쑥 나타나지나 않을까 싶어 곁눈질을 하는 버릇까지 생길 정도였다.

"요즈음은 어째 평소의 줄리아 핸더슨답지가 않군." 금요일 아침, 진료가 시작되기 직전에 커피를 마시던 로란드가 불쑥 내뱉었다.

"그렇게 눈에 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글쎄, 다른 사람들이라면 잘 모르겠지만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당신을 깊이 알고 있거든." 금테 안경 너머로 로란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네이슨 탓이겠지. 그렇지 않소?"

줄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길 모퉁이만 돌면 그 사람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서 무서워요."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거요, 아니면 자신이 못 미더워서 겁이 나는 거요?"

"아마 두 가지 다겠죠." 그녀는 빈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모르는데다 막상 다시 마주치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조차도 장담할 수 없어서 두려워요."

"미리 경계해 두는 게 제일 좋은 방책이지. 게다가 네이슨보다는 당신이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가 있으니 유리하잖소."

"뭐 그다지 유리할 것 같지도 않은걸요." 그녀는 피식 웃었다. "만일 소피의 농장을 네이슨이 샀다는 소식을 못 들었더라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잠시 입술을 내밀고 생각에 잠겨 있던 로란드가 느닷없이 딴 얘기를 끄집어냈다. ", 일요일에 시간이 좀 있는지 모르겠군."

"무슨 일인데요?"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해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자 로란드도 빙그레 웃는다. "엘리자베스가 양다리 통구이를 하겠다고 들떠서 야단이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다 먹어치우지도 못할 거야."

"기꺼이 참석하죠. 엘리자베스의 요리라면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해도 상관없어요." 줄리아는 자신의 문제도 잊고 환하게 웃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꼭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요란한 벨 소리가 더 이상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대기실로 나가는 줄리아의 뒤를 따라 로란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부인과의 머레이 간호사에요." 그녀는 한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속삭였다. "젠슨 부인의 진통이 거의 막바지라는군요."

"곧 간다고 해요." 그는 재빠르게 청진기와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줄리아가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을 때는 이미 그가 나간 후였다.

그 뒤로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야단법석이었다. 로란드가 예상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줄리아는 짜증내는 환자들을 달래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칠 줄 모르고 능란하게 환자들을 다루는 자신이 기특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일단 집에 도착하자 상황은 급변하고 말았다. 문제는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낮 동안은 까맣게 잊고 있던 두려움이 새롭게 엄습해왔다. 일이 또 다른 망각의 시간을 열어 줄 새벽녘까지 줄리아는 엎치락뒤치락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드 넥커 내외의 저택은 제법 넓은데다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들어차 있다. 집안 구서구석에서 자상한 안주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엘리자베스가 장만한 푸짐한 요리들을 느긋하게 즐긴 줄리아는 거실에서 차를 마실 무렵이 되자 눈꺼풀이 자구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얘기를 하는 사람은 주로 엘리자베스였다. 사실, 병원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오기 직전까지 로란드는 흔들의자에서 기분 좋게 졸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으로 갈 채비를 하는 로란드를 따라 줄리아가 덩달아 일어나자 엘리자베스가 은근히 그녀를 붙들었다.

"차나 한잔 더 들고 천천히 가요." 그녀로서는 안주인의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엘리자베스 드 넥커는 남편보다 불과 두어 살 아래였다. 하지만 교묘히 손질한 금발이 이마 주위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잘 가려 주는데다 군살조차 없는 날씬한 몸매는 젊은 사람도 부러워할 만큼 탄력이 넘쳤다. 게다가 함께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상냥한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3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줄리아는 첫눈에 그녀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란 확신을 가졌다. 줄리아가 요하네스버그를 떠난 이유를 아는 사람은, 돈필드 안에서는 그들 내외뿐이었다. 그리고 줄리아와 진정한 친구 사이로 발전한 후로는 그 문제가 다시 거론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기분 나빠하진 말아요."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하지만 요즘엔 하니웰의 새 소유주가 어디서나 화제에 오르고 있거든."

"알아요." 줄리아는 손에 든 찻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진료실에서도 다들 그 얘기로 열을 올리더군요."

"당신은 어때요?"

우물거릴 필요는 없는 사이였다. 줄리아는 솔직하게 심경을 토로했다. "멀잖아 네이슨을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게 몹시 거북하게 느껴져요."

엘리자베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가 진지한 빛으로 반짝였다. "아직도 그이를 사랑해요?"

그렇게 불안해하면서도 아직껏 자기 스스로도 되짚어 보지 못한 사항이었다. 돌연 현기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직도 네이슨을 사랑하고 있을까?

"나도 정확하게 답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군요." 그녀는 한참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빈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는 창가로 걸어갔다.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이 가지각색의 꽃과 관목들로 한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다. "5년 전에 이미 그 사람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금껏 그렇게 견뎌왔어요. 한 번도 그 사람 생각을 안했다면 거짓말이겠죠. 생각한 적은 자주 있어요. 그렇지만 늘 그 사람은 과거에 속해 있다고 여겼는데, 새삼 현실로 돌아온다는 게 너무 두려워요."

"당신이 아직도 그일 사랑하고 있는 걸 깨달을까 봐 두려운가요?"

"두려움의 대상이 뭔지도 확실히 모르겠는걸요." 줄리아는 심각하게 양미간을 좁혔다. "5년 전에 내린 결단은 우리 두 사람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요. 하지만 그걸 후회하진 않아요. 그 동기가 순수했다는 것만으로도 자기위안은 충분히 되니까요. 할머니가 병상에서 날 필요로 하는데 등을 돌릴 수는 없었어요. 그땐 네이슨을 위해서 그게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란 느낌이 들어요." 그녀는 두 팔을 맥없이 늘어뜨렸다. "결혼을 며칠 앞두고, 신부가 될 여자한테서 느닷없이 자기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편지를 받는다면 대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당연히 화가 치밀었겠죠. 그렇지만 마음이 변한 이유를 알아보겠다고 결심하지 않았을까요?" 논리 정연한 말투였다. 다음 순간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요, 줄리아. 당신의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설명할 기회가 꼭 올 거예요. 그 후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야 누가 알겠어요?"

"난 당신의 낙관론이 좋아요." 도로 자리에 앉으며 줄리아는 서글프게 웃었다. "그렇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리란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군요."

"어려울 이유는 또 뭐죠?"

"첫 번째 이유는, 모든 게 우리들의 상상이란 점이죠." 줄리아는 침착하게 지적했다. "두번째는 네이슨이 어느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구요. 그저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건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존심을 건드린 것까지 용서할지는 미지수예요." 온몸이 점점 경직돼가고 있었다. 무릎 위에서 깍지를 낀 양손이 뻣뻣하게 저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염두에 둘 게 있죠." 그녀는 꺼질 듯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 사람이 이미 안정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내가 그간의 일을 설명하고 싶어진다 해도 그쪽에선 별 흥미가 없을 거예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엘리자베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든 난 그게 서로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길 바라겠어요, 줄리아"

그 말을 끝으로 얘기를 일단락된 셈이었다. 줄리아는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사무실들이 들어선 거리 한편의 공원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쨍쨍 울려퍼지는 아이들의 환성을 들으며 줄리아는 어린 시절이 불현듯 그리워졌다. 자유롭기만 한 유년에 비한다면, 성인이 된다는 것은 힘겨운 문제에 부딪치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고행의 연속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뒤돌아보면 아차 싶은 순간도 셀 수 없이 많았으니까....

줄리아는 한적한 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인생에는 연습이란 단어가 통하질 않아. 강으로 뚫린 좁은 길로 핸들을 꺾으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에 익은 집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속도를 줄이고 기어를 낮췄다. 마지막 모퉁이를 막 도는데 난데없이 새빨간 자동차 한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이 그녀는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황급히 핸들을 꺾었다. 그녀의 토요다가 차선 옆의 도랑으로 미끄러지는 순간 빨간색 괴물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비껴 지나쳤다. 정신없이 급 브레이크를 밟고 얼굴을 들어 보니 코앞에 엄청난 고무나무 둥치가 버티고 선 게 아닌가. 시동은 꺼졌지만 줄리아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저 놀라기만 한 탓에 그 돼먹지 못한 운전수가 누군지 살필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양팔을 핸들 위에 올려놓고 얼굴을 파묻었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다급한 발소리도 듣지 못한 채, 그녀는 자동차의 문이 열릴 때까지도 그냥 엎드려 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건드리더니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이번에는 새로운 충격이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 폐부의 산소가 일시에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잊어버리기엔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목소리만큼이나 친숙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네이슨 코르베의 손이 마치 나병 환자라도 건드린 것처럼 어깨에서 툭 떨어졌다. 한걸음 물러서는 상대방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기막힐 정도로 재빨리 평정을 되찾았다. 잘 다듬어진 얼굴이 석고상처럼 차디차게 변하는 것을 보며 줄리아는 내심 모서리를 쳤다.

"세상이 그다지 넓지는 않군 그래" 그가 쓰디쓰게 한마디 내뱉었다. 냉랭한 시선이 가뜩이나 겁에 질린 그녀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다쳤소?"

입술이 바싹 말라붙어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줄리아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렇지도 않아요."

"웬일로 돈필드까지 왔소?"

고통스러운 기억이 잠시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핸들을 잡은 손이 땀에 젖어 축축해지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넋을 잃고 네이슨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언뜻 봐서는 그다지 변한 것 같지도 않았다. 볼이 전보다 조금 패인 듯하고 잔주름이 눈에 띄는 정도일까.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새파란 눈은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듯 매서웠다.

"여기 살고 있어요." 그녀 자신의 귀에도 낯설게 들리는 껄끄러운 음성이었다. "강으로 꺾어지기 바로 전에 있는 집이 내 거처예요."

"아무 일도 없는 건가요, 달링?" 줄리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바로 뒤에 멈춰선 빨간색 페라리의 운전석에서 한 여자가 미끄러지듯 내려 다가왔다. 네이슨의 부인인가? 노란색의 헐렁한 바지와 붉은 블라우스를 걸치고 가느다란 허리를 요란한 가죽끈으로 졸라맨 여자를 보며 줄리아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상당히 젊게 차려입었지만 자기 의도대로 보일 만큼 젊은 것 같지는 않았다.

"잘 돼가고 있소." 네이슨의 대꾸에 줄리아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잘 돼간다고! , 하느님, 정말 그렇다면야!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네이슨의 한마디가 가뜩이나 혼란스럽던 가슴속을 사정없이 헤집어 놓은 격이었다. 어떻게 집까지 갈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네이슨은 왜 꾸물거리고 있는 걸까?

"지독하게도 좁은 도로군요. 아무도 안 다친 게 기적이야." 여자가 네이슨의 곁으로 바싹 다가붙으며 종알거렸다. 줄리아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번뜩였다.

"마샤, 이쪽은 줄리아요." 네이슨은 무감각한 말투로 두 사람을 소개시켰다. 그러나 마샤라는 여자가 과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는지는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샤라는 여자가 냉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네이슨도 적잖아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줄리아 역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몬드 모양의 눈을 향해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마샤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지만 따뜻하다거나 상냥하다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야겠어요, 달링. 안 그러면 손님들보다 늦게 농장에 도착하겠어요." 마샤가 짜증스럽게 재촉했다. 줄리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그녀는 과시하는 듯한 태도로 네이슨의 팔에 찰싹 들러붙는다.

네이슨은 다소 망설이는 표정이었지만 줄리아는 더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방해가 되었을까 봐 염려되는군요."

그녀는 입을 꽉 다물고 시동을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즉시 부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이슨은 묵묵히 문을 닫고 그녀가 도랑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길을 비켰다. 줄리아는 기어를 넣고 클러치를 밟은 후 감히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2

무슨 정신으로 무사히 집에까지 도착해서 차를 제자리에 세웠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그녀는 터덜터덜 침실로 걸어들어가 침대에 푹 엎어져 버렸다.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막상 정신이 들자 네이슨 코르베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았다는 게 그렇게 꺼림칙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마주치건 쉽지 않으리란 예상 정도야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중심부까지 뒤흔들릴 줄은 미처 몰랐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저녁이랍시고 대충 넘긴 뒤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올 리 만무였다. 동이 틀 무렵에야 선잠이 깜박 들었다가 일어나니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몇 주일 동안이나 네이슨 코르베를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나름대로 상상했었는데 막상 부딪치고 나니 발작에 가까운 충격밖에 없다는 게 분명해진 셈이다.

"오전 내내 허공에 뜬 사람 같은데" 점심식사 후의 짧은 휴식을 틈타 함께 차를 마시며 로란드가 쿡 찔렀다. 그의 예리한 시선이 눈이 쑥 들어간 줄리아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소?"

"잠은 설쳤지만 아프진 않아요." 담담하게 대꾸한 그녀는 찻잔을 비우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제 오후에 집으로 가다가 네이슨과 잠깐 마주쳤어요."

로란드의 눈썹이 금테 안경 너머에서 찡긋 올라갔다. 줄리아는 어쩔 수 없이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아야만 했다.

"네이슨이 마샤라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하나?" 로란드의 물음에 그녀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전혀 모르겠어요."

로란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믿을 만한 사람이 그러는데, 네이슨이 그 농장을 개조하려고 실내장식 전문가를 미리 보냈었다는군. 아마 한 달포쯤 하니웰에 머무를 계획인 것 같다는데"

누구한테 들었느냐고 캐물어 볼 필요까지는 없었다. 네이슨의 체류소식을 안 것만으로도 그녀의 불안은 점점 커질 뿐이었다. 돈필드는 그녀와 네이슨에겐 너무 비좁은 곳이었다. 두번째 만남까지는 바라지 않는데....

"아직 부딪치지도 않은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을 필요는 없소, 줄리아" 그녀의 두려움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로란드가 다정하게 말했다. "평소처럼 생활하면 돼요. 그때그때 해결책을 찾아도 충분히 여유가 있는 법이오."

줄리아는 고마운 마음으로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느 날, 낯익은 빨간색 페라리가 자기 집 대문 옆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야 로란드의 충고를 다시 떠올렸다. 그녀는 바싹 긴장해서 차를 차고에 집어넣었다. 부겐빌리아가 만발한 나무 아치 곁에 네이슨이 비스듬히 기대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할머니도 여기서 함께 사시는 줄 알았소."

줄리아는 잠시 그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다리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는 꼭 맞는 청바지에다 소매가 없는 흰색티셔츠가 힘찬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갑자기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도리질을 해봐야 자신이 네이슨의 출현에 몹시 당황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할머닌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의 곁을 지나쳐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며 줄리아는 사무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네이슨이 기다렸다는 듯 뒤를 따랐다.

"유감이군. 좀처럼 앓아 누우실 것 같지 않은 건강하고 의지가 굳은 분이셨잖소.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실감이 나지 않는 걸"

말을 하기엔 머릿속이 너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었다. 열쇠를 찾아 문을 여는 짧은 순간만이라도 그녀는 침착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섰을 때, 네이슨의 얼굴에는 빈정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들어가도 되겠소, 줄리아?"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단둘이 있고 싶은 생각은 정말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렇지만 거절한다면 더 이상하게 보일 건 뻔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먼저 집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오세요."

줄리아는 등가구로 꾸민 아담한 라운지로 그를 안내했다. 핸드백이며 자질구레한 소품들을 곁에 있는 의자 위에 대강 밀어 놓는 동안에도 네이슨의 눈길은 시종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쿠션이며 창가에 드리운 커튼과 하이파이 시스템을 올려놓은 붙박이 장까지 꼼꼼히 뜯어보았다.

네이슨은 클래식 레코드를 꽂아 놓은 스탠드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더니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왜 저러지? 뭘 찾으려는 심산일까? 줄리아는 감히 묻지도 못하고 가슴만 죄고 있었다.

"음악에 대한 취미는 예전이나 똑같군." 그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돌아서면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최소한 그 한 가지는 변하지 않은 모양이지?" 분명히 비난이었다. 몇 년 전의 그 변덕스러음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도 소스라칠 정도로 가슴이 뜨끔했지만 줄리아는 절대로 내색해선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웬일로 여기까지 찾아왔죠, 네이슨?"

"남편이 있는지 궁금했소. 그런데 반지를 끼지 않은 걸 보니 아직 혼자인 것 같군." 그의 웃음은 거의 조롱에 가까웠다. "왜 그랬지, 줄리아? 결혼을 결심할 배짱이 아예 없는 사람인가?"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심문이라도 할 작정인가요?"

"단순한 호기심이오."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그는 벽에 걸린 풍경화가 비뚤어진 것을 보고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그 집에도 걸려 있던 그림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네이슨의 눈은 유리구슬처럼 차가웠다. "왜 요하네스버그를 떠났소? 떠나야 될 정도로 성가시게 구는 남편 후보들이 득실거렸소? 아니면 순전히 일시적인 충동이었소?"

이 비슷한 경우가 있으리란 짐작은 했었지만 대처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그의 분노는 납득이 가고도 남았다. 그래,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네이슨의 한마디 한마디는 정말 살 속으로 파고드는 섬찍한 아픔이었다.

"날 모욕할 셈이라면 내가 이성을 잃기 전에 떠나 주시면 고맙겠어요." 5년 동안 훈련시킨 그녀의 침착한 방어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당신에게도 이성이라는 게 존재하는 줄은 몰랐소." 그가 비꼬았다. 예전의 네이슨이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 절실하게 들었다. "당신의 본성을 그토록 교묘하게 숨겼던 거나, 이성을 간직할 능력도 있었다는 거나, 내가 축하해 줘야 할 사항인 것 같소." 네이슨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할 수도 없는 신랄한 말투였다. 그녀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점에 관해 할 얘기가 있을 법도 한데"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기회만 있으면 그녀를 괴롭히려고 허점만 찾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재주로 대항하란 말인가? 이미 칼자루를 쥔 쪽은 네이슨이고 그녀는 그런 그를 비난할 자격도 없었다.

"하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요, 네이슨" 의자 등받이를 붙들고 간신히 서 있으면서도 그녀는 냉담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여기 온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겠어요?" 그는 엄지손가락을 청바지 포켓에 찌른 자세로 서서히 거리를 좁혀 왔다. 그의 앞에 서면 늘 난장이처럼 줄어드는 듯하던 해묵은 느낌이 새삼 되살아났다. 그녀의 시선은 곱슬곱슬한 털이 비죽비죽 보이는 네이슨의 가슴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다. 하트비스프트 댐으로 피크닉을 갔을 때였지. 저 사람의 팔을 베고 누워 바로 저곳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날은....

안돼! 지금 와서 추억 속을 방황하다니! 그리고 저 사람이 내게 있어서 어떤 존재였던가 하는 것도 지금은 기억해선 안 돼!

"당신이 왜 요하네스버그를 떠나왔는지 알고 싶소." 나지막하지만 위압적인 음성이었다. 재촉하는 듯한 눈초리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몰아붙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서 집을 팔고 돈필드로 옮기기로 결심했죠." 적어도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그녀는 위험을 감수하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 지방에 농장을 마련할 생각까지 했죠?"

"돈필드에 팔려고 내놓은 농장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까.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못 견딜 정도가 되면 어딘가 혼자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피난처가 필요하지"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째서 개인 진료실의 간호사 따위의 막일을 하고 있지? 당신 경력이면 어느 병원에서나 환영을 받을 텐데"

"3년 전에 여기 왔을 때는 이게 유일한 자리였어요. 일하다 보니까 점점 애착이 생겨서 그냥 주저앉았죠." 네이슨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가 즐겨 쓰는 스킨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줄리아는 그를 피해 문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 그녀는 공손하게 물었다. "혹시 서둘러서 그...부인한테 돌아가야 한다면..."

"커피를 들지" 그녀가 말을 더듬자 그는 웃을 듯 말 듯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탐색하는 듯한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샤는 손님들과 함께 오늘 오후에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갔소. 그리고 그 여잔 내 아내가 아니오."

"그래요?" 그 소리를 들은 소감이 어떤지는 그녀 자신도 확실히 말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럼 약혼녀인가요?"

"그런 단계까지 가진 않았소." 분위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변했다. 네이슨의 태도는 상당히 방어적이었다.

줄리아는 심장을 얻어맞은 것처럼 흠칫 놀라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내심 짜증스럽게 반문해 보았다. 그가 자신을 향한 성실함을 간직하고 있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혼 직전에 버림을 받은 남자가 독신을 고수해 주기를 기대한 것도 물론 아니다. 내가 그런 기대를? 아냐, 그렇지 않아! 그녀는 마음속으로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럼 왜 이렇게도 네이슨에게 여자가 있는 것에 연연해하는 거지? 네이슨을 향한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깨끗이 정리되지 않았는가?

"물을 끓여야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후딱 등을 돌린 줄리아는 도망치듯 주방으로 향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커튼을 젖히고 커피포트를 꺼내 물을 채웠다. 찾잔을 늘어놓고 커피를 덜면서도 자기가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나 가슴속이나 똑같이 뒤엉켜 어지럽게 돌아갔다. 그녀는 양손을 찬장에 얹은 채 양볼이 얼얼해질 정도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네이슨에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자유가 있고, 그 점은 그녀에게도 마찬가지다. 마샤와 어떤 관계이건 상관할 것 없지 않은가?

등 뒤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신경을 자극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돌아섰다.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네이슨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나 때문에 당신의 고귀한 금욕정신이 상처를 입은 거요?" 눈빛만큼이나 차갑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아무리 참아야 한다지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현대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난잡한 남녀관계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진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요. 하지만 돈필드 주민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몸가짐을 조심해야 된다는 건 알아 두세요." 포트에서 칙칙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플러그를 뽑고 달달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잔을 채웠다. "이 지방의 유지들은 모두 초기 이주민들의 자손이에요. 그래서 아직 보수적인 관습을 고수하고 있죠. 대부분 혼전관계를 집안의 수치로 아는 사람들이에요."

"내 평판에 상당히 신경을 써주는 것처럼 들리는군." 짧은 웃음소리가 줄리아의 분노를 한층 부채질했다. 그녀는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고 홱 돌아서서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당신에 대한 평판이 어떻든 그건 당신의 문제죠. 난 이 지방 사람들의 도덕관념이 어떻다는 걸 알려 줘야 할 의무감에서 말한 것뿐이에요." 그녀는 냉담하게 응수했다. 비좁은 주방에서 네이슨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더구나 네이슨의 눈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고 있었다. "라운지로 갖고 나갈까요?"

한옆으로 비켜서는 네이슨의 얼굴이 불가사의한 가면을 덧씌운 것처럼 보였다. 그는 줄리아의 뒤를 따라 라운지로 나왔다.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그의 시선을 의식하던 줄리아는, 찻잔을 놓고 마주앉아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일순의 휴식마저 곧 사라져 버렸다. 부자연스런 침묵 속에서 네이슨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다는 것 자체가 지독한 고역이었다. 그의 시선이 단정하게 묶은 갈색 머리칼을 지나 굽이 낮은 구두를 신은 발까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민망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서 줄리아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도덕이란 주제를 놓고 본다면" 한참 만에 그가 주방에서 나누던 화제를 끄집어냈다. 그는 빈 찻잔을 내려놓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부드러운 입가가 냉소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자 줄리아는 또 무슨 폭언이 퍼부어질까 싶어 가슴이 떨렸다. "당신의 도덕 교과서에는 혹 이런 조항은 없던가? 결혼식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상대방으로부터 느닷없이 파혼 통고를 받은 남자는 그에 합당한 설명을 들을 자격이 있다..."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이 너무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그녀는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네이슨이 진짜 이유를 알 단서를 잡을지도 모른다. 이미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인데 지금에 와서 그에게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할 얘긴 편지에 남김없이 썼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는 조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차마 네이슨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 그래. 편지..."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네이슨은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창가로 다가가 등을 돌리고 섰다.

"당신 편지는 모든 걸 얘기해 줬지만 내겐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똑같았어!"

, 하느님! 그 편지가 내 일생에 있어 가장 가슴 아픈 시련이었다는 것을 저 사람이 어떻게 알까? 내 행복은 뒷전으로 밀어 둔 채 그의 장래를 위하는 일념으로 썼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5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굳이 지금에 와서 거론해야 할까요? 벌써 잊혀졌어야 하는 일일 텐데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의 감정을 수습했다.

"잊혀져야 한다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선 네이슨의 표정은 목소리만큼이나 험악했다. 가능하다면 어디로든 숨어 버리고 싶을 뿐이다. "똑똑히 들으시오, 친애하는 줄리아 핸더슨 양. 난 한가지도 잊지 않았고 잊으려 한 적도 없소. 당신이 나로 하여금 자기가 날 사랑한다고 믿게 만든 방법도 기억할 뿐 아니라, 차마 내 면전에서 마음이 변했다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써보낸 그 알량한 쪽지의 마침표까지 기억하고 있소. 내가 약혼반지를 어떻게 했을 것 같소?" 네이슨답지 않은 난폭한 어투였다. "화장실 변기 속에 처넣었지. 속이 시원하더군. 당신이란 존재도 반지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당신을 다시 만나자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소. 당신이 날 속인 이유를 알 때까지는 그 사건을 깨끗이 잊을 수 없다는 거요."

속이다니! 그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아무튼 그의 분노를 받아들일 각오는 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수술용 칼을 들이댄다 해도 이보다 참기 어려운 아픔은 아닐 것 같았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사항 외엔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어서 유감이군요." 그녀는 빈 잔들을 주방으로 가지고 가려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네이슨이 당장 앞을 가로막았다.

"이것 봐, 줄리아!" 그는 냅다 고함을 지르며 그녀의 팔을 꽉 붙들고 돌려세웠다. "난 납득할 만한 해명을 요구했어. 들을 때까진 이 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어! 당신이 왜 마지막 순간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으면서 처음엔 왜 날 속여서 당신

혼자 쾌감을 즐겼는지 알아야 되겠단 말이야!"

5년 전 그 뼈아픈 결단을 내릴 때는 이렇게까지 터무니없는 오해가 부딪칠 줄은 몰랐었다. 뭐라고 대꾸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퍼붓지 말아요. 쓸데없는 억측이에요." 될 수 있는 한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며 줄리아는 입을 열었다. "약혼을 깨뜨린 건 당신을 평생 동반자로 선택할 만큼은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후회할 결혼을 강행한다는 건 어리석은 고집이잖아요."

"편지를 그대로 읽고 있군.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은 믿지 못하겠소!"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른 네이슨 앞에서 그녀는 견딜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 잡혔다. "이유가 뭐지, 줄리아?" 탑처럼 그녀 앞에 버티고 선 채 네이슨은 여전히 찍어 누를 듯한 말투로 다그쳤다. "무슨 일로 돌연 계획을 바꿔 버렸지? 결혼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다른 상대를 골라 그 흥미진진한 놀이를 처음부터 다시 즐겨 보고 싶었소?"

"어처구니없는 소리만 골라 하는군요! 제발 좀 그만둘 수 없겠어요?" 그녀는 빌고 싶은 심정으로 외쳤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계속 시달리다간 사실을 털어놓게 될 것만 같았다. "결혼해서 같이 떠날 만큼 사랑하진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요!"

"거짓말이야!" 그는 줄리아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당신은 지금도 날 속이려 들고 있어!"

순간적이지만 그냥 다 얘기해 버릴까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워낙 누구에게든 솔직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신조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사실대로 말하고 나면 네이슨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두려웠다. 단순한 비웃음으로 넘길지, 아니면 어떤 책임감을 느낄지 알 수가 없었다. 주제넘은 짓을 했다고 책망한다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연히 책임의식에 사로잡힌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마샤라는 여자도 있지 않은가. 줄리아의 결심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은 것은 바로 마샤의 존재였다.

"진실은 이미 밝혔어요!"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끝내 굽히지 않았다.

"빌어먹을!" 그는 난폭하게 그녀를 끌어안더니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줄리아의 두 손은 그의 가슴에 얹혀 있었다. 상대방을 밀어내려고 애쓰면서도 그녀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꾸 그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건 일종의 공포와도 흡사했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그녀는 있는 힘껏 네이슨을 뿌리쳤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네이슨을 쏘아보았다.

"이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죠."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당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내게 무관심하진 못하다는 걸 확인했소."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만하면 당할 만큼 당했고 더는 참아 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숨을 길게 내뿜었다. "가주세요."

"가겠소. 그렇지만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위협이었다. "난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소. 적당히 넘어가려고 들었다간 곤란할 거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그쯤에서 잊으면 되잖아요? 새삼 왈가왈부 봐야 더 나올 것도 없는데!" 그녀는 등을 돌린 채 내뱉었다. 표정까지 숨길 자신은 없었다. 어째서 자꾸 꾸물거리는지 네이슨이 원망스러워지기만 했다. "날 다그칠 여유가 있으면 마샤 생각이나 해요." 그녀는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당신의 미래는 내가 아니라 그녀에게 달려 있어요."

그녀는 심장에 칼날이 닿는 기분으로 뇌까렸다. 그러나 막상 최후의 일격을 가한 쪽은 네이슨이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그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언제든 내가 필요로 할 때면 마샤에게 의지할 수 있으니까 당신이 간섭할 일은 아니오."

줄리아는 발작적으로 떨기 시작했다.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 같았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었던지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녕히 가세요." 더 이상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투로 줄리아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또 봅시다, 줄리아" 그녀의 등 뒤에서 네이슨의 체온이 느껴졌다. "꼭 다시 만나야 하잖소. 그때까지 심사숙고해보시오. 당신은 내게 진실을 밝힐 의무가 있소. 안 그 외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소."

그의 음성에서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느껴졌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도 그녀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일 수 없었다.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곁에 있던 등나무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면서 격렬한 흐느낌이 새나왔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엉키면서 그녀는 어느새 사기꾼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동안 난 아무렇지도 않다고 얼마나 되풀이했던가. 이제는 정말 그렇다는 확신이 드나 싶었는데 결국은 지금껏 자기 자신까지 속여 왔다는 게 증명되고 말았다. 네이슨을 향한 사랑은 세월이 치유할 수 있는 종류의 아픔이 결코 아니었다. 지금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왜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느낀단 말인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그리고 언제든 내가 필요로 할 때면 마샤에게 의지할 수 있으니까 당신이 간섭할 일은 아니오....

네이슨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괴롭힐 작정으로 한 얘기라도 그렇게까지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줄리아에겐 변명의 여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필요로 했을 때 그녀는 그의 의지가 되어 줄 수 없었다. 더욱 절실하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때문에 그녀는 네이슨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최선의 방법이라고 택한 길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사실도 그녀에겐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창밖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앉아 있던 그녀는 불이라도 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시시 일어났다.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고 주방으로 가서 일단 두통약부터 꺼냈다. 머릿속만 뒤엉킨 게 아니라 전신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과거엔 분명 정당하다고 여긴 일이 지금은 왜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 거지? 그렇지만 그녀에겐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었다.

냉장고를 열고 남겨 둔 스테이크 조각을 꺼냈던 줄리아는 잠시 고기 덩어리를 내려다보다 말고 도로 냉장고를 닫아 버렸다. 빵 한조각이라도 삼켰다가는 그대로 체할 것만 같았다. 대신 목욕이나 하는 편이 낫겠지.

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참담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그때는 할머니를 돌보기를 바빠서 앓아 누울 겨를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할 일도, 정성을 쏟을 대상도 없지 않은가.

그만두자. 이대로 있다간 내 자신이 불쌍하단 기분이 들 거야. 그런 느낌은 딱 질색이라구.

밤이 깊어서야 자리에 든 줄리아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오후에 네이슨과의 사이에 오갔던 얘기들이 하나 둘씩 되살아나며 그녀를 괴롭혔다. 새벽녘이 되어 세찬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릴 때까지도 그녀는 눈을 붙이지 못했다. 전날 오후부터 날씨가 찌뿌둥하더니 기어코 쏟아붓는 모양이었다. 잠깐 지나가는 비가 아니라는 걸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금요일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녀의 우울한 기분을 부채질이라도 하듯 월요일 아침까지 쉬지 않고 내렸다. 날씨가 굿다고 환자들이 줄어들 리는 없는지라 대기실 주변은 레인코트와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로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병원에서 회진을 마친 로란드가 진료실에 도착했을 때는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3시간도 더 지나서야 줄리아나 로란드나 겨우 한숨 돌렸을 정도였다.

워렌 챈들러가 전화를 한 것은 줄리아가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제의를 즉각 거절하려던 줄리아는 이내 마음을 바꿨다. 안될 이유도 없다. 벌써 한달 남짓 워렌을 만나지 못한 것도 그렇고, 말벗도 없이 텅 빈 집안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느니 워렌과 같이 보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제안에 동의하자, 몹시 바쁘다는 것을 익히 아는 워렌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7시에 데리러 가겠소."

막상 집에 돌아오자 차라리 거절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지칠 대로 지친데다 마음까지 안정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상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한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고....

워렌이 약속한 시간에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는 비도 멎어 있었다. 키가 크고 금발인 그는 검은색 예복으로 말끔히 차리고 있었다. 푸른색 시퐁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현관에 나타나자, 그는 감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푸른색 옷은 늘 잘 어울리는군. 당신 눈빛과 꼭 맞는데다 그 흰 피부가 석고처럼 눈부시게 보이거든."

그의 칭찬은 들을 때마다 좀 거북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그렇지만 다소 기분이 나아지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화사하게 웃어 보인 줄리아는 문을 잠그고 그의 뒤를 따라 워렌의 메르세데스가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모파니 레스토랑은 그녀의 집에서 제법 떨어진 마을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2년 전 워렌이 문을 연 이래, 주민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장소로 통했다. 손님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내나 옥외, 어느 곳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면 낮에는 시원한 모파니 나무 그늘 아래서 식사를 즐겼고, 밤에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색색의 꼬마전구들이 빚어내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했다.

오늘 저녁엔 다들 안으로 들어온 탓에 건물 안이 몹시 복작거렸다. 워렌과 줄리아는 그들의 자리로 정해 둔 한갓진 구석 자리의 테이블로 향했다. 줄리아가 워렌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포도주가 날라져 왔다. 잔을 채운 음료 담당 웨이터는 술병을 아이스박스에 넣고 조용히 물러났다.

촛불을 밝힌 식탁 맞은편에서 워렌이 먼저 잔을 들었다. 메뉴를 훑어보는 동안 주로 얘기를 한 쪽도 워렌이었다.

"에스카고를 권하고 싶은데 어떻겠소? 그리고 야채로 입가심을 하면?"

줄리아는 워렌의 얼굴과 메뉴를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레몬을 얹은 영계 구이라도 고맙게 먹겠어요. 달팽이 요린 생전 처음이라구요."

"달팽이를 백포도주와 마늘을 넣고 살짝 튀긴 다음에, 크림과 파슬리를 얹어 찐 거요." 워렌이 아버지 같은 말투로 설명했다. "틀림없이 맛있게 먹을 걸"

"그럴 듯하게 들리네요." 좀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녀는 워렌이 권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마친 워렌이 그녀의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알코올 기운이 그녀의 용기를 북돋아 준 건지 그녀는 처음 맛보는 달팽이 요리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지난주에 닥터 코르베가 여기 들렀었소." 식후의 커피가 날라지자 워렌이 불쑥 내뱉었다. 줄리아는 예상외의 화제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피 브릿의 농장을 그 사람이 샀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겠지?" 줄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사람도 그 사람이지만 같이 온 여자는 정말 대단한 미인이더군."

"코르베 씨는 전문의예요. 그냥 보통 의사가 아니구요." 부드러운 커피 내음을 즐기며 그녀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는 사람이오?" 워렌의 질문은 불의의 일격이었다.

"그래요."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가 요하네스버그의 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얘기했죠?"

상체를 기울인 워렌의 눈빛이 이상하게 날카로워졌다. "어느 정도나 알고 있소?"

"당신한테 그 사람이 대단히 유능한 신경외과 전문의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요." 그녀는 신중하게 대꾸했다.

"그럼 개인적으론 잘 모른다는 뜻이오?"

"워렌, 어떤 결론을 끌어내고 싶은 거죠?" 조금 성가신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내가 그 사람 얘길 꺼냈을 때 당신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소. 그래서 그 뒤에 숨은 이유를 알아내려고 하는 거지"

"괜한 억측이에요." 뜨거운 커피를 한모금 마신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워렌을 타일렀다.

"누가 당신더러 서투른 거짓말장이라고 한 적은 없소?"

"누가 당신한테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캐묻는 건 실례라고 가르쳐 준 적은 없나요?" 그녀는 날카롭게 맞받았다.

"그럼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뜻이군?" "아녜요!" 상대방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퍼지는 것을 보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묻으며 체념했다는 투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얘기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군요. 좋아요, 난 그 사람과 약혼까지 했었어요."

워렌의 표정이 차츰 심각하게 굳어졌다. "누가 취소했소?"

"내쪽에서요." 그녀는 시선을 떨군 채 중얼거렸다. "부탁이니까 이유까지 묻진 마세요."

워렌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줄리아, 나와 결혼해 주면 좋겠소."

"농담치곤 너무하군요."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농담이 아니오."

농담이 아니란 건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당한 일이라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불가능했다.

"안돼요. , 그러니까 내 말은..."

"이 자리에서 대답을 할 필요도 없고, 공연히 경계할 필요도 없소." 그가 가로막았다. "그저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가 어떤 심정이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을 뿐이오. 만일 당신이 의지하고 싶은 사람을 찾고 있다면 기꺼이 그역할을 맡고 싶소."

눈 깜짝 하는 순간에 워렌을 두 사람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녀는 차츰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짐작도 못했어요."

"난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오."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참고 기다리는 사람에겐 복이 온다는 진리도 터득했지"

그가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는 바람에 그녀는 몇 주 만에 처음으로 거리낌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원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그의 제의는 그녀에겐 좋은 자극제가 된 셈이었다. 그녀는 기분 좋게 찻잔을 기울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거의 10시가 가까워서였다. 느긋한 기분으로 그녀는 워렌의 차에 몸을 실었다.

"다 늦게 손님이 오신 모양이군." 줄리아의 집 문 옆에 서있는 빨간 페라리가 눈에 띄자 워렌이 먼저 운을 뗐다. 팔짱을 끼고 차체에 비스듬히 기댄 네이슨을 보는 순간 그녀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있어 줄까? 아니면 혼자 들어가겠소?" 네이슨의 차 뒤에 자신의 메르세데스를 세우며 워렌이 물었다.

"혼자 가겠어요." 이게 정말 내 목소린가? "오늘 저녁엔 참 고마웠어요. 내리지 말아요."

"또 만날 수 있겠소?"

"내일 전화하세요."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잽싸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3

문 가까이에 있는 나무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네이슨 곁에 그녀를 남겨 놓은 메르세데스의 불빛이 차츰 멀어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이 주위를 어슴푸레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줄리아가 네이슨을 향해 돌아서는데 다시 한번 부엉이의 울음이 들렸다.

어둠에 가려 네이슨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는 거인을 연상시킬 만큼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나무 울타리를 붙들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용건이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그의 음성이 나지막하게 울렸다. "당신이 손아귀에 넣은 사내를 만나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달아나 버려서 유감이군. 그 멍청한 작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틈도 없었소."

손아귀에 넣다니! 목구멍에 돌덩이라도 걸린 것처럼 몹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썩 꺼져요!" 문에 가로놓인 빗장을 더듬으며 그녀는 거칠게 내뱉었다. "날 좀 편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나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청하는 것뿐이오." 그는 끄떡도 하지 않을 태세였다. 어둠속에서 친숙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늦었어요. 그리고 난 너무 지쳤다구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그를 쫓아 버릴 수 있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벌써 서서히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마음 상태였다.

"오래 있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네이슨 특유의 단호한 말투였다. 그녀는 무력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자기가 한번 마음먹은 일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 사람이란 건 전부터 익히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녀의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네이슨은 손수 빗장을 벗겼다. 그는 그녀를 현관 쪽으로 밀었다. 그녀가 열쇠를 꺼내자 네이슨이 기다렸다는 듯 낚아채 문을 열었다. 복도의 스위치를 올린 그는 줄리아에게 길을 터주려고 옆으로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네이슨을 돌아보지도 않고 오른쪽으로 난 문을 손짓했다. "라운지에서 기다린다면 곧..."

"주방이 훨씬 아늑하겠지" 그녀의 말을 가로챈 네이슨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불을 켜고 핸드백을 식탁에 던져 놓은 후 그녀는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의 두 눈이 자신의 움직임을 쫓고 있다는 걸 의식하자 머리칼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플러그를 꽂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찻잔을 꺼내고 커피를 덜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왜 날 현미경 아래 놓인 곤충표본처럼 취급하는 거야?

"난 늘 당신이 파란색 옷을 입었을 때가 제일 좋았소."

의자가 바닥에 부딪치는 마찰음이 그녀의 신경을 몹시 자극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네이슨이 그녀의 등 뒤로 바싹 다가왔다. "딱 한군데 고칠 게 있군."

"안돼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녀가 절망적으로 부르짖었지만 미처 말릴 틈이 없었다. 머리에 꽂았던 장식용 핀이 뽑히면서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칼이 폭포처럼 어깨 위로 쏟아졌다. 네이슨의 손가락이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군. 내가 기억하던 대로 여전히 부드러워"

그가 얼굴을 머리칼 속에 묻자 줄리아는 겁에 질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네이슨의 체온은 흡사 고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더 흩어지기 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이슨, 이런다고..."

"아직도 당신을 처음처럼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랍군."

네이슨은 들은 척도 않고 말을 이었다. 강하고 섬세한 의사 특유의 손길이 그녀의 목덜미를 더듬어 내려왔다. "여기쯤 점이 있었는데...그래, 찾았어. 내가 입을 맞추면 당신은 새끼 참새처럼 바르르 떨었지. 이렇게 말이야..."

민감한 피부에 닿은 네이슨의 입술은 불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가벼운 떨림과 함께 나른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또 한 사람의 줄리아가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혹시 네이슨이 이미 꺼져 버린 장작에 불을 붙이려 든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복수심에서이기 때문이었다.

"그만둬요!"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커피포트가 칙칙거리고 있는 주방구석으로 달아났다. "제발 부탁이니까 이러지 말란 말예요!"

"당신의 새 남자도 이렇게 전율하도록 해주던가?" 네이슨의 빈정거림에 줄리아는 더욱 위축됐다. "그 불행한 사내가 턱없이 희망에 부풀어 있겠군. 당신이야 어디까지나 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아직은 모를 테지?"

"장난?" 줄리아는 순간적으로 멍청해졌다.

"아무렴" 그가 피식 웃었다. 아래 위로 검정색 옷을 입어서 그런지 네이슨은 한층 강인하고 무자비한 인상을 풍겼다. "당신은 상대방을 터무니없는 환상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재주가 있소. 하지만 상대가 꿈에 젖어서 마지막 시도를 하기 전에 칼로 베듯이 돌아서 버리지"

"세상에!"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서 숨을 훅 들이켰다.

"나 역시 그런 얼간이였잖소." 쇳소리를 내며 웃는 네이슨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결혼할 걸로 철석같이 믿었던 통에 당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지. 그런데 당신은 등을 돌리는 순간까지도 그런 내 꼴을 즐겼던 거야."

네이슨이 지금 자신을 어떤 여자라고 여기고 있는지 똑똑히 알게 되자, 줄리아는 발밑이 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까스로 네이슨과 마주서면서 그녀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아녜요. 그런 식으로 덮어씌우지 말아요."

"그러면서 어떻게 항상 얌전하고 성실한 숙녀처럼 행동할 수 있었는지 신기해" 그가 한껏 경멸하는 투로 덧붙이더니 돌연 그녀의 어깨 너머를 흘끔 곁눈질했다. "물이 끓는군."

그때서야 요란하게 칙칙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줄리아는 황급히 스위치를 껐다. 손이 제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급기야 그녀는 찬장을 짚고 있던 손 위에 펄펄 끓는 물을 들이붓고 말았다.

네이슨의 입에서도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그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낚아채 싱크대에 담그고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지자 처음의 화끈거리는 아픔은 조금 줄어들었다.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온 그가 싱크대의 배수구를 막고 얼음을 털어 넣었다. 줄리아는 빳빳이 선 채로 그가 자신의 손을 물속에 담그는 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손등을 때리는 물줄기가 얼얼하도록 세찼다. 입술을 꽉 깨물어 보았지만 저절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감당할 재주가 없었다.

네이슨은 그녀 곁에 붙어 서서 같이 물속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돌아서서 그의 넓은 가슴에 기대 실컷 울고 싶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그 대신 자신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길고 날렵한 손가락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이 사람은 내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다는 걸 알까?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결코 가까워질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을까?

"바보 같은 짓을 했군!" 한참 만에 그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꾸짖는 듯한 말투에 그녀는 새삼 서러워져서 또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좀 나아졌소?"

". 고마워요."

"심하게 데진 않았지만 피부가 적당히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 아플 거요."

그가 손을 놓아 주자 그녀는 싱크대를 붙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맥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네이슨은 벽에 걸린 행주를 벗기더니 불그스름하게 물든 그녀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감싸서 물기를 찍어냈다. 의외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자, 줄리아는 새로운 떨림이 몸속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과 마주친 네이슨은 뭐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행주를 집어던지고 경련이 이는 그녀의 두 볼을 감싸 쥐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에 젖은 눈언저리를 가볍게 문질렀다. 눈과 눈이 마주친 짧은 순간에 그녀는 흑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이 갔지만 이미 저항할 기력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의 얼굴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네이슨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헤어진 후로 줄곧 애태워 그리던 달콤한 감촉이 아닌가. 잠시 고개를 드는가 싶더니 네이슨은 격렬하게 그녀를 더듬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의 두 팔은 네이슨의 등 뒤로 돌아가 넓은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달아오르고 있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녀는 거칠게 밀쳐졌다. 얼마나 호되게 밀어붙였는지 뒷걸음을 치다가 찬장에 부딪쳤을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분노로 뒤틀린 네이슨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제기랄!" 자기도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네이슨은 거칠게 쏘아붙였다. "내가 아직도 당신을 원할 수 있으리라곤 믿지 않았소. 그런데 이럴 수 있다니! 내 자신이 혐오스럽군."

그는 빙글 돌아서더니 뚜벅뚜벅 걸어 나가 버렸다. 얼마나 세게 문을 닫았던지 창틀이 덜커덩거릴 지경이었다. 줄리아의 입술 사이로 꺼질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컵을 가지런히 엎어 놓은 붙박이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네이슨이 바란 게 커피가 아니었다는 걸 왜 깨닫지 못했을까. 불현듯 시야가 흐려졌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콧등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네이슨이 떠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참을 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침실로 향하다 잠시 창밖을 살폈을 때는 이미 네이슨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엎어진 그녀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줄리아는 자명종 시계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것도 모르고 자다가 시끄러운 전화 벨 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7시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가운을 걸친 그녀는 맨발로 라운지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괜찮소, 줄리아?" 수화기를 들자마자 몹시 염려하는 듯한 워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가까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녀는 힘주어 대답했다. 아직 붉게 흔적이 남은 왼쪽 손등이 어젯밤의 기억을 생생히 되살려 주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소?"

자신이 없는 듯한 워렌의 음성에 그녀는 문득 그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옳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몰아치는 폭풍우를 피해 숨을 수 있는 은신처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언제든지요."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녀는 의식적으로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주말에 바쁘지 않으면 모파니에 오겠소?"

"기꺼이 가겠어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쏜살같이 욕실로 달려 들어가 샤워를 하고 부랴부랴 근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침도 못 먹고 화장대 앞에서 남은 시간을 보냈지만 부풀어 오른 눈두덩은 유감스럽게도 잘 감춰지지 않았다. 회진을 하러 나갈 준비를 하던 로란드가 그녀를 보자마자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시간이 뒷걸음질을 쳤나?"

무슨 소린지 알고도 남았다. 돈필드에서 보낸 처음 몇 달 동안 그녀는 울다 지쳐 잠이 드는 통에 거의 매일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출근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란드 내외의 자상한 배려로 점차 안정을 찾게 되자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울 만한 일도 없을 거라고 자위했던 자신이 바보스럽게만 느껴졌다. 네이슨이 그녀의 생활 속에 다시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평온하기만 하던 삶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그를 향한 사랑은 이미 과거 속에 묻혔다고 믿었던 것이 최대의 실수였다. 괴로움은 더욱 격렬하고 다양한 형태로 다시 찾아온 것이다.

 

비가 갠 후로는 끈끈하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됐다. 금요일 정오의 휴식 시간을 틈타 점심을 먹으러 나온 그녀의 몸은 온통 땀에 젖어 끈적거렸다.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하려던 그녀는 길 모퉁이에 세워 둔 은색 재규어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차에 기대선 남자가 이상하게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표범 가죽으로 띠를 두른 챙 넓은 모자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낯익은 모습이었다.

"태워다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가씨?" 등을 곧게 펴는 남자의 입에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데미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옛 친구를 만난 기쁨으로, 그녀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그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세상에, 너무 오랜만이군요!"

"그게 누구 탓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모자를 뒤로 젖히며 그가 싱글거렸다.

"죽을죄를 지었어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생긋 웃은 그녀는 다음 순간 다시 심각해졌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죠?"

"주말 초대를 받았소. 그래서 농장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렀지" 눈이 부신 듯 그는 초록색 눈동자를 깜박였다.

"이 신에게 버림받은 땅에도 온전한 식사를 할 만한 장소가 있을까?"

"모파니라는 곳이 좋아요." 그녀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작은 마을을 그렇게 표현하는 데미안을 보자, 별 수 없는 도회지 사람이구나 싶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틀림없이 못 보고 지나쳐 왔을 거예요."

그가 운전석 옆자리의 문을 열었다. "길을 가르쳐 줘야지?"

"점심식사에 초대한다는 소린가요?"

"물론이오. 그리고 싫다는 대답은 인정하지 않겠소."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문을 닫은 데미안이 운전석에 앉았다.

"난 가끔 왜 하필이면 돈필드를 택했는지 의혹을 품곤 했소." 중심가로 통하는 길로 접어들면서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기분이야 짐작하고도 남지만 왜 더반이나 케이프타운쪽은 염두에 두지 않았소? 좋은 병원들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론 그저 조용히 지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지금은 돈필드보다 좋은 곳은 없다 싶어요."

게다가 쉬어야 한다는 진단이 덧붙여져 있었다는 얘기까진 할 수가 없었다. "왼쪽으로 곧장 가세요." 차가 갈림길에 닿자 그녀는 이때다 싶어 화제를 돌렸다.

"제법 괜찮은데" 잎이 무성한 모파니 나무 아래에 가까스로 빈자리를 찾아 앉자, 데미안이 흡족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아주 좋아"

줄리아는 워렌이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뜻밖의 시간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 곁에 서서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데미안 쪽으로 쏠린 눈 속에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온 옛 친구예요, 워렌. 데미안 스콰이어즈 박사예요. 데미안, 이쪽은 워렌 챈들러 씨고 이 레스토랑의 주인이에요."

"만나 뵙게 되서 기쁩니다, 닥터 스콰이어즈" 악수를 나눈 후 워렌이 흰 제복 차림의 웨이터에게 손짓을 했다.

"필요한 건 뭐든 조세프에게 말씀하십시오. 유쾌한 시간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워렌이 사라지자 조세프가 다가와 메뉴를 내밀었다. 줄리아와 데미안은 차가운 과일 주스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상당히 인상이 좋은 친구로군."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데미안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특별한 사이라도 되나?"

줄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알고 지내는 정도예요."

"여전히 네이슨 타령이군, 아닌가?" 데미안의 예리한 질문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부럽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당신처럼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여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나도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네이슨에겐 마샤가 있어요." 조세프가 과일 주스를 받쳐 들고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짐짓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마샤는 미인이긴 하지만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여자요." 데미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또렷하게 대꾸했다.

"네이슨에게 그때 파혼을 통고한 이유를 설명해 줬소?"

"아뇨" 그녀는 공연히 앞에 놓인 주스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어요."

"어째서?"

"피차 좋을 게 없으니까요."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오."

줄리아는 손을 내둘렀다. "제발, 데미안. 우리 다른 얘기해요."

대답 대신 그는 얼굴을 그녀의 코앞에 들이댔다. "당신은 네이슨에게 사실대로 얘기해야 돼!"

"나와 함께 있기 위해 필생의 기회를 포기하는 게 염려스러워서 약혼을 취소했다고 말하면 네이슨이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그녀의 표정은 절망으로 어둡게 일그러졌다. "내가 가장 불안해하는 건 네이슨이 공연한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만일 그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다면 틀림없이 그렇겠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희생이라는 장벽이 놓여 있어선 안 되는 법이오." 데미안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포도주는 머릿속을 흐려 놓기 일쑤고, 장미엔 가시가 있다는 걸 잊으면 안돼요.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을 감수한다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일 수도 있지만 미련할 정도로 혼자 끙끙 앓는 것과는 달라"

"드 넥커 박사도 그 비슷한 소릴 한 적이 있어요." 줄리아는 어느새 데미안의 얘기에 심각하게 빨려들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마음을 닫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정작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하겠냐는 거죠."

데미안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당신은 마음을 닫은 적이 없소. 늘 네이슨을 향해서만 열려 있었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 그러니 그에게 사실대로 얘기해야 한다는 거요."

"그럴 수 없어요!"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네이슨이 마샤를 사랑하고 있다면 사실을 알고 어쩔 줄 몰라할 거예요. 그 사람한테나 내게나 전혀 득 될 게 없다구요."

"최소한 네이슨이 냉혈 동물에서 보통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은 해줄 거요." 막 입을 열려던 줄리아는 조세프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도로 움츠러들었다.

냉혈동물? 네이슨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으로 변했단 말인가? 앞에 놓인 샐러드 접시를 내려다보며 줄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그답지 않은 거칠고 폭력적인 면과 맞닥뜨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네이슨이 아직도 그녀에게 미련을 갖고 있다는 표현은 아닌 게 분명했다.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그가 마침내 상대를 만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몹시 가슴 아파하면서도 그녀는 네이슨의 분노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네이슨이 내일 저녁에 자기 농장에서 가든파티를 연다는군." 접시가 거의 비어 갈 무렵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마샤는 물론 참석할 테고,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부부가 두 쌍 올 예정이오. 아직 최후의 결단을 내리지 못했소. 내 파트너를 구하지 못했거든."

줄리아는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떨어질지 즉각 알아차렸다. "나보고 같이 가잔 얘긴 하지 말아요, 데미안. 그렇게는 못해요."

데미안은 잠자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줄리아는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네이슨에게 죄다 털어놓으면 좋겠소?"

"안돼요!" 그녀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주스를 엎지를 뻔했다.

"그럼 따라와서 내 입을 막아야지?"

"이건 협박이에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데미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라고 하든 당신 마음이지만 어쨌거나 난 진심이오."

"난 당신이 내 친구인 줄만 알았어요."

"지금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소, 줄리아. 하지만 난 네이슨의 친구이기도 하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이런 꼴로 갈라져 있는 걸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소."

손이 덜덜 떨려서 그녀는 들었던 주스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마샤에 대한 감정을 확인할 때까진 사실을 밝힐 수 없어요."

"내가 얘기하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데미안이 귀찮다는 듯 뇌까렸다. "그 여자는 아름답고 쓸모가 있소. 그리고 네이슨의 이기심을 옆에서 북돋아 주는 데도 한 몫 단단히 하고"

"네이슨과 결혼할지도 모르는 여자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돼요."

"마샤 그랜트와 결혼을 한다면 네이슨은 둘도 없는 얼간이야!" 데미안이 버럭 화를 냈다.

"당신이 네이슨의 진의를 꿰뚫어볼 수는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구요."

"네이슨과는 무관하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쓰지?"

줄리아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느낌이 들었다. "자꾸 어렵게 끌고 가지 말아요, 데미안"

"줄리아, 난 당신의 절반만큼도 네이슨에게 신경을 안 써요. 하지만 주가 보든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게 지배적인 의견일 거요." 안타깝다는 듯 말을 잇는 그의 얼굴에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제기랄, 그 똑똑한 머릴 갖고도 그 작자는 알아차린 게 없을까?"

"데미안..."할 말을 잃은 줄리아는 그저 눈짓으로만 그를 제지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지 않은가.

"내 파트너가 돼주겠소, 아니면 내가 지금 당장 끝을 보도록 내버려 두겠소?" 그가 다그쳤다. 단순한 허풍이 아니란 건 줄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가겠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말없이 잔을 비우고 나자 그는 조세프에게 손짓을 했다. "계산서를 갖다 주겠소?"

안으로 들어갔던 조세프가 잠시 후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챈들러 씨께서 줄리아 양과 친구 분께서는 저희 식당을 이용해 주신 걸로 계산이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데미안이 줄리아를 힐끗 쳐다보더니 지갑을 열고 좀 많다 싶은 액수의 돈을 조세프에게 건넸다.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전하시오.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말도 잊지 말고..."

입이 벌어진 조세프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멀어지자 그는 줄리아를 재촉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렌 챈들러가 인심을 쓴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소." 차를 몰면서 데미안이 재미있다는 듯 툭 던졌다.

"그저 친구 사이라니까요."

"당신이야 그렇겠지만 그 사람 생각은 그게 아닐걸" 그가 정곡을 찔렀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으흠, 좋아. 저런 상대가 있으면 네이슨도 자기가 최고라는 아집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겠지"

그녀는 감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 설마 네이슨에게 이상한 얘길 하려는 건..."

"진정해요, 줄리아" 환자를 안심시킬 때 종종 듣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네이슨은 지금 날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워렌과 의 관계를 언급한다면 그 사람의 오해를 더 굳히는 결과가 될 뿐이에요. 내가 장난삼아 워렌을 건드렸다고 믿고 있거든요."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데미안이 그녀의 손을 살짝 쥐었다. "내 앞에선 절대로 그런 얘길 지껄일 수 없게 할 거요."

", 데미안!" 불현듯 눈앞이 흐려졌다. "당신이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더 고마울 거예요."

데미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내로 향하는 차안에서 그녀는 혹시나 데미안이 그럼 가든파티엔 가지 말자고 하지나 않을까 싶어 초조하게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료실 앞에 차가 멎자 그녀는 데미안이 묻는 대로 주소를 가르쳐 줄 수밖에 없었다.

"내일 5시에 데리러 가겠소." 그는 그렇게만 얘기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줄리아는 질식할 것처럼 답답한 가슴을 싸쥐고 그의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자리에 서 있었다.

 

4

줄리아는 하니웰에 가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혹시 돌발 사고라도 일어날까 싶어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았지만 데미안은 어김없이 5시에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가지 않겠다면 그가 정말 자신의 위협을 실행에 옮길지 미지수였지만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꼭 네이슨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줄리아 자신의 입으로 밝혀야 마땅할 것이다. 데미안의 차가 하니웰로 뻗은 북쪽 도로로 접어들었다. 속력이 빨라질수록 그녀의 신경도 덩달아 곤두섰다. 토양도 기름진데다 기후도 감귤이나 채소 재배엔 안성맞춤이었지만 하니웰에선 대대로 목장을 운영해 오고 있었다. 하니웰에서 생산되는 쇠고기는 품질이 좋기로 평판이 자자했다. 네이슨은 앞으로 어쩔 작정일까?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점점 가중되었다. 무릎 위에서 모아 쥔 두손에 땀이 배어 축축했다.

"네이슨도 오늘 내가 당신 파트너라는 걸 알고 있겠죠?"

"숨길 이유가 없었소." 데미안은 도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줄리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썩 즐거워하지는 않았겠군요."

"아무 말도 없었소. 하지만 당신 이름이 나오니까 마샤그랜트가 못마땅해 하는 표정을 짓는 건 똑똑히 봤소."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네이슨과 내가 한때 약혼을 한 사이였다는 걸 마샤도 아는 것 같아요?"

"글쎄 네이슨이 뭐라고 얘기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데미안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샤는 소유욕이 강한 여자야. 다른 여자는 모조리 자기와 네이슨의 사이에 끼어드는 장애물이라고 여길 정도지"

줄리아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내부에 일고 있는 갈등을 잠시라도 좋으니 잊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두 쌍도 온다고 했죠?"

"말로와 샘슨 내외요." 고개를 끄덕이는 데미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네이슨보다는 마샤의 친구들이란 표현이 어울리겠지. 마샤는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고르지 않는다는 것 외엔 별로 아는 게 없소."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줄리아는 자기가 입고 있는 평범한 흰색 면바지와 소매없는 노란 티셔츠를 내려다보았다. 가든파티라면 대체로 야외에서 부담 없이 즐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좀 더 신경을 쓸 걸 하는 후회가 일기 시작했다.

"당신은 마샤를 그다지 좋게 평하지 않는군요." 그녀는 데미안의 옷차림을 훑어보며 말했다. 다행히도 그는 다 낡은 청바지에 학생들이 즐겨 신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당신의 관점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오." 데미안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렇지만 당신도 자기가 어떤 인간과 마주치게 될지 미리 알고 있는 편이 나을 거요."

처음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수간호원에게 주의사항을 듣던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냉소적인 웃음소리가 새나왔다. "마샤와 내가 대판 싸움이라도 벌일 것처럼 들리는군요."

"그럴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 데미안이 피식 웃었다. 결코 농담인 것 같지만은 않았다. "마샤는 자신의 경쟁상대라고 생각되면 재빨리 간사한 재주를 피우곤 하거든."

"난 그 여자와 겨룰 의사가 전혀 없어요."

"엄밀히 말해 본심은 아닌 것 같군." 데미안이 반박했다.

"만일 재차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도 놓치진 않을 걸"

그는 정확하게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쉽사리 손을 들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 기회는 바라지도 않아요. 5년 전에 파혼을 통고했을 때, 네이슨이 속한 장면은 이미 깨끗이 삭제된 거로 했으니까요."

"당신은 머릿속에서 네이슨을 깨끗이 지웠을지는 몰라도 마음속에선 결코 지워 버리지 않았소, 줄리아"

자기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데미안 앞에선 어떤 허울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줄리아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는 자조적인 투로 뇌까렸다. "난 실패했지만 네이슨은 성공했겠죠."

"줄리아, 혹시 우스운 수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소. 그렇지만 사내들이란 자기가 얻지 못한 여자를 쉽게 잊지는 않는 법이오."

이러지 말아요, 데미안! 그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한 희망에 매달려 일을 그르치게 만들지 말아요!

하니웰의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데미안의 차가 풀을 뜯고 있는 소들 사이를 지나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건물을 향해 달리는 동안 줄리아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다. 농장이 소피의 소유일 때도 로란드와 함께 두어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때의 환대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융숭한 것이었다. 그러나 네이슨에게선 똑같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데미안은 건물을 빙 돌아가는 베란다 밑의 얕은 층층대 아래 차를 세웠다. 줄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란다 지붕을 받친 석재 기둥을 손본 외에는 건물의 외양이 아직 달라지지 않은 탓이었다.

핸드백을 집어 들고 차에서 내려 데미안을 기다리는 그녀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현관에 네이슨이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그가 베란다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한걸음 내딛자마자 당장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줄리아의 오감은 제 기능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몸에 걸친 갈색 셔츠와 폭이 좁은 크림 색 바지가 보기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안녕, 네이슨" 그녀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모조리 짜내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두 사람을 향해 내려오자 그녀는 손을 내밀었지만 네이슨의 시선은 그녀를 비껴갔다. 마치 줄리아란 존재는 눈앞에 있지도 않다는 태도였다. 지나친 푸대접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꾹 참고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갑자기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일찍 왔군." 데미안이 그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자, 네이슨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한마디 던졌다.

"줄리아의 가장 큰 장점중의 하나가 시간을 엄수한다는 거지, 자네는 벌써 잊어버린 건가?" 교묘하게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데미안 때문에 그녀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네이슨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무슨 소리가 나올까 싶어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는데 때마침 마샤가 다가왔다.

반짝이는 검은색 티셔츠와 바지가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재빨리 줄리아를 아래위로 훑어본 그녀는 과시하듯이 네이슨의 팔에 찰싹 매달렸다. "달링, 이제 불을 피워야잖아요?"

고개를 끄덕인 네이슨은 이번에도 데미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들어와서 한잔 들게"

네이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기가 몹시 두려웠다. 그녀는 주저하면서도 데미안의 든든한 팔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저 돼먹지 못한 사내를 용서해 줄 수 있겠소?" 네이슨과 마샤가 멀어지자 데미안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듯 속삭였다.

"당신이 협박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뿐이에요." 네이슨의 무례한 행동 때문에 내심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네이슨이 당신을 괴롭히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만 그에게 승리를 안겨 줄 만큼 당신이 만만한 여자는 아니지"

줄리아는 데미안을 올려다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용기를 줘서 고마워요."

"이리 오시오.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한잔 마십시다."

데미안을 따라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밝고 화사하게 꾸며진 거실을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얼마나 지저분하고 우중충한 곳이었던가. 거실에 새로 낸 유리문을 통하면 뒤뜰로 나갈 수가 있었다. 이미 준비를 끝낸 바비큐 구이판이 보였다. 줄리아에게는 와인 잔을 들려 주고 자기도 맥주 캔을 골라 든 데미안은 손님들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잭 말로와 윌터 샘슨은 요하네스버그에서 온 사업가들이었다. 다들 서른다섯 안팎으로 보였다. 편안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계층 특유의 여유가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아의 염려와는 달리 두 쌍 다 아주 소탈하고 상냥했다. 베아트리스 샘슨은 자기도 결혼 전에는 간호사로 일했다며 반색을 했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처음의 위축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불이 피어오르면서 나무 타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리고 차츰 분위기가 고조되는데도 줄리아는 겨우겨우 참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마샤가 이따금 의혹에 찬 눈초리로 자신을 흘겨보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데미안은 남자 손님들과 같이 구이판 앞에서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줄리아에게 소흘하진 않았다. 그녀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라도 구해 주러 달려올 태세였다.

해가 저물자 베란다와 뜰에는 색색의 전등이 밝혀졌다. 고기가 군침을 돌게 하는 냄새와 함께 지글거리기 시작했지만 줄리아는 과연 한 점이라도 삼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오후 내내 그녀의 목을 죄던 불안이 이제는 말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네이슨이 서 있는 쪽을 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번번이 시선은 그쪽으로만 향했다. 그가 자신을 깨끗이 무시한 것처럼 그녀도 똑같이 되돌려 주고 싶었지만 헛수고였다. 숨 쉴 때마다 그녀는 네이슨의 존재를 새롭게 새롭게 느꼈다. 그리고 마샤와 네이슨 사이의 친근한 몸짓과 주고받는 대화까지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웃을 때마다 가슴속에서 찬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저 이혼란스러운 마음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기만 빌 따

름이었다.

마샤는 명랑하고 싹싹한 안주인 노릇을 무리 없이 해내고 있었다. 요리사의 도움을 받으며, 그녀는 베란다 끝의 긴 테이블에 마련해 두었던 샐러드 재료들을 날라 왔다. 고기가 테이블로 옮겨지자 손님들은 다투어 접시를 손에 들었다. 최소한 먹는 시늉만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줄리아는 제일 작은 고기 조각을 접시에 덜었다. 그때 예기치 않게 네이슨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관심도 없다는 듯 쌀쌀맞은 표정으로 자기가 할 일만 계속했다. 줄리아는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얼굴을 돌려야만 했다.

마치 위험신호라도 들은 듯 데미안이 때맞춰 다가 왔다. 다른 사람이 그녀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는 재빨리 유쾌한 화제를 끄집어내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감사의 미소를 보내자 데미안은 격려의 윙크로 답했다. 마샤가 집안에서 하이파이 시스템을 꺼내 넓은 베란다에 설치하자 부드러운 댄스 음악이 울려 퍼졌다.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데미안의 제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소 거리를 두고 춤을 추고 있는데 갑자기 데미안이 그녀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네이슨이 돌덩어리 같은 얼굴로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줄리아를 힐끗 쏘아보고 데미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친구의 자격으로 충고하겠네" 네이슨의 얼음 같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전해져 왔다. "염치를 모르는 여자와 어울리는 것만큼 위험한 짓은 드물걸세. 자네의 감정을 교묘히 부추겨 놓고 일시에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걸 즐기는 여자에 불과해"

"이봐, 네이슨! 이제 자네도..."

"데미안!" 줄리아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비밀을 폭로할 지경으로 데미안의 분노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의 얼굴은 일시에 창백해졌다.

"이런 식으로 당신을 모욕해도 좋다는 거야?" 데미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귀를 의식해서 최대한으로 음성을 낮추긴 했지만, 그의 초록색 눈동자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제발, 데미안!" 그녀는 데미안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애원하다시피 속삭였다.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건 자기가 더 잘 알걸" 네이슨이 끼어들었다. "저 여자를 믿는다면 자넨 스스로 바보가 되길 자청하는 걸세. 그게 그녀의 의도겠지"

데미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데미안이 이렇게 화가 난 모습을 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그가 비밀을 폭로해 버린다해도 나무랄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지금은, 지금 이런 식으로는 안 돼!

그가 한참 만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보게, 네이슨. 내가 자네와 알고 지낸 지도 꽤 되지만 자넬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건 정말 이번이 처음일세. 그러나 오늘 저녁에 이대로 참는 건 우리 사이의 오랜 우정 때문은 아닐세. 언젠가 자네가 그 지독한 욕설을 후회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가 올 걸로 확신하기 때문이지" 데미안의 얼굴이 차츰 풀어지면서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내가 더한 얘길 입에 담기 전에 산책이나 나가지"

줄리아는 고분고분 데미안의 뒤를 따라 달빛이 아른거리는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이나 걸은 다음에야 비로소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데미안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이 답답해진 줄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날 걱정해 주는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내 문제에 공연히 말려드는 건 안타까운 노릇이에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5년 전에도 당신은 내 편이 되어줬죠. 내 진심을 아는 사람도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그렇지만 나 때문에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사람들 간에 틈이 생긴다는 건 참을 수 없어요."

"네이슨은 반드시 진실을 알아야 해, 줄리아"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음성이었다. "당신이 계속 침묵을 지킨다면 그는 더욱 의기양양해질 거요. 그 터무니없는 오해가 굳어지기만 할 거라구"

"내가 직접 얘기하겠어요. 내 스스로 이때라고 판단될 때 말예요."

데미안은 들을 척도 하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두 사람이 서 있는 곳까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거의 포기한 심정으로 데미안의 팔을 붙들었다.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있겠죠?"

"물론이오."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드라이브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소."

"핸드백이랑 옷을 갖고 오겠어요."

"같이 가지"

"아니, 괜찮아요. 차에서 기다리는 게 낫잖아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가 픽 웃었다. "아직도 죄다 얘기해 버리고 싶은 기분이거든."

"그게 내가 두려워하는 거죠." 그녀는 데미안을 그대로 두고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베란다의 의자에 놓아 둔 핸드백을 챙길 때까지도 그녀는 네이슨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가 찾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줄리아가 일동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베아트리스가 말했다. 그러나 마샤의 얼굴은 정반대의 뜻을 표시하고 있었다.

줄리아가 급히 밖으로 나오려는데 뜻밖에도 마샤가 그녀를 붙들었다. "가기 전에 당신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줄리아"

그녀는 호젓한 라운지로 통하는 문을 조금 열고 줄리아가 들어가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마샤는 탐색하는 눈초리로 줄리아를 바라보다가 문을 닫자마자 당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한때 네이슨의 약혼녀였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난일이죠. 그 점에 있어선 네이슨도 같은 생각이에요."

줄리아는 웃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마샤는 지금 저항할 의사도 기력도 없는 적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녀는 오랜 간호사 생활로 단련된 자신의 침착한 대처능력에 감사했다.

"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욕심은 조금도 없어요. 그리고 이미 해묵은 얘기가 돼버린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생각은 더더구나 없죠." 줄리아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반가운 얘기군요. 하지만 우리들 사이를 조금이라도 간섭한다면 참지 않겠다는 정도는 미리 말해 둬도 해로울 게 없겠죠." 마샤의 새빨간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나 그녀를 똑바로 쏘아보는 까만 눈동자는 매섭게 번득이고 있었다. "당신에게도 네이슨을 차지할 기회는 있었어요. 그러나 당신이 그를 버렸을 때는 이미 끝난 게 아닐까요? 그리고 네이슨은 그렇게 모욕적인 경험을 하게 만든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 그인 내 거예요. 똑똑히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따지고 보면 마샤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마샤 같은 여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스러웠다. 왠지 되갚아 주고 싶다는 충동이 울컥 솟았다.

"당신은 네이슨에게 확신이 없군요, 그렇죠?"

"무슨 소리예요?" 마샤는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입술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물론 난 네이슨을 믿고 있어요!"

"아뇨, 그렇지가 않아요." 줄리아는 조용히 대꾸했다. 그녀의 평온한 태도가 마샤의 초조함에 불을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당신에 대한 네이슨의 감정을 확신하고 있다면 내게 경고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마샤의 불룩한 가슴이 눈에 뛰게 오르내렸다. 검은 눈동자에 순간적이지만 무서운 적의가 엿보였다. 줄리아는 자기들 두 사람이 최후의 대결을 앞두고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있는 맹수들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먼저 공격을 시도한 쪽은 마샤였다.

"네이슨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부분을 당신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물론 인정할 수도 없을 테구요." 그녀는 자신만만하다는 투로 지껄였다. "우린 서로의 필요성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 관계를 지속시킬 예정이구요."

줄리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결혼할 건가요?"

마샤의 화사한 미소는 대답이 되고도 남았다. 줄리아는 가슴속에 남아 있던 불씨가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난 네이슨이 바라는 것 이상을 그에게 제공할 수 있어요. 우리 아버진 상당히 유력한 인사로 통하죠. 네이슨의 빛나는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도록 넉넉히 뒤를 봐줄 수 있는 지위에 있는 분이에요." 마샤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당신은 네이슨이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을 차지할 기회를 빼앗고 싶진 않겠죠?"

역겹다 못해 헛구역질이 나올 판이었다. 어쩌면 마샤를 너무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른다. 상대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고, 잔인하게도 신은 그녀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쥐어 준 것이다. 그래, 네이슨에게 어떤 피해도 입히고 싶지 않아. 혹 내가 실수라도 한다면 5년 전의 희생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거야.

"그래요. 절대로 방해할 마음은 없어요."

줄리아가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마샤는 냉소를 흘리며 스스로 자기 질문에 대답을 했다.

"당신은 아직도 네이슨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이를 다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을 거예요. 그는 지금 내게 속해 있고 자기도 그 점에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이 여자와 5분만 더 같은 방에 있다가는 정말 쓰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마샤 곁을 스쳐지나 밖으로 나왔다.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괜찮은 거요?" 그녀가 차에 오르자 데미안이 불안한 눈초리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부랴부랴 뛰어나오는 모습이 어째 이상하던 걸"

"아무렇지도 않아요, 데미안. , 어서 집으로 가기나 하세요."

더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즉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줄리아로서는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네이슨에게 무시당한 것만도 마음이 아픈데, 마샤에게까지 당하다니....마샤의 악의에 찬 목소리가 귓가에서 쉴 새 없이 메아리쳤다.

우린 서로의 필요성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 관계를 지속시킬 예정이구요. 우리 아버진 상당히 유력한 인사로 통하죠. 네이슨의 빛나는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도록 넉넉히 뒤를 봐줄 수 있는 지위에 있는 분이에요. 그이를 다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을 거예요. 그는 지금 내게 속해 있고 자기도 그 점에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네이슨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힘을 이용할 사람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5년이란 세월은 한 인간의 도덕적 기준을 바꿔 놓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전에도 자기 학문을 향한 열정은 남달랐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네이슨이 이제는 자신의 세속적인 평판에 더욱 야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밑바닥까지 변할 수도 있는 걸까?

"커피 한잔 마시고 가도 되겠소?" 데미안의 목소리에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퍼뜩 주위를 둘러보니 차는 어느새 그녀의 집 앞에 멎어 있었다.

"어머, 그럼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차에서 내려 먼저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과해야겠소." 그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온 데미안이 등 뒤에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돌아서자 그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이슨이 그렇게 비열하게 나올 줄 알았더라면 당신을 억지로 끌고 가는 일은 없었을 거요."

"괜한 소릴!"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켰다. "그 사람의 행동이 불쾌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해할 수 있어요."

"하느님보다도 관대하군." 그가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몹시 창백한데다 싸늘하게 식었군. 정말 괜찮다고 장담할 수 있소?"

"정말이라니까요." 그녀는 돌아서서 찻잔을 꺼냈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을 때까지 두 사람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마샤의 부친을 알고 있나요?"

"개인적으론 친분이 없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익히 알고 있소." 호기심으로 가득 찬 초록색 눈동자가 식탁 맞은편에서 반짝였다. "그건 왜 묻소?"

"궁금해서요." 그녀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상당히 유력한 사람이라면서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도대체 손을 뻗지 않은 분야가 없거든. 요소요소에 자기와 힘을 합칠 수 있는 사람들을 심어 놓은 건 물론이고"

"의학 분야에도 손을 댔나요?"

"이건 또 뜻밖의 질문인 걸" 그가 굵은 눈썹을 찡긋거렸다. "바실 그랜트는 새로운 병원을 짓는 계획에 주주 자격으로 참가하고 있소. 돈 많은 사람들이나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비싼 진료비를 받는 병원이오. 그래서 네이슨을 신경외과 과장으로 영입할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다고들 수근거리더군."

줄리아의 가슴속에서 싸늘한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군요."

"당신의 관점에 달렸다고도 할 수 있지" 미소를 지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얼굴엔 찬성할 수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네이슨이 확고부동한 명성을 얻을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영혼을 싼값에 팔아넘기는 거요. 지금은 어디서든 자유롭게 자기 뜻을 펼칠 수 있지만 그 자리에 앉으면 오직 그 병원에만 묶여 있어야 할 테니 말이오. 게다가 이사랍시고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작자들도 적지 않겠지"

줄리아 역시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에 동참하리라곤 상상할 수도 없었다.

"혹 그런 제안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소린 않던가요?"

"요즘은 통 자기 얘길 하지 않아서 말이오. 일에 몰두하거나 정신없이 놀거나 둘 중 한 가지 모습밖에 보질 못했소." 그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 사람은 당신이 알던 네이슨 코르베가 아니오, 줄리아"

뜨거운 덩어리가 목줄기로 울컥 치솟았다. "날 책망하는 거예요, 데미안?"

"글쎄..."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때문에 충격을 받은 거야 확실하지만 그보다 더 호된 시련을 겪고도 변함없이 일어서는 사람들도 많더군."

빈 찻잔이 받침 접시에 달그락하고 부딪쳤다. 그녀는 두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내가 내 판단이 옳았는지를 생각하면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겠죠. 그렇지만 결론은 항상 같았어요. 난 그 사람의 발전을 가로막고 싶지 않았어요. 혼자 유럽으로 떠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점에 대해선 잘못한 게 없소." 그가 힘주어 대꾸했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소. 그리고 언젠가는 네이슨도 당신에게 감사할 때가 있을 거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는 인사 따위를 바라는 거 아녜요." 그녀는 똑똑히 덧붙였다. "내가 원하는 건 그사람의 행복이에요."

자기 자신도 놀라긴 했지만 그건 진심이었다. 그녀에겐 네이슨의 행복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네이슨이 마샤에게서 안정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녀 자신의 감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당신이야말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오."

"아녜요, 데미안" 줄리아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지만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당신 말마따나 네이슨은 변했어요. 난 더 이상 그가 바라는 걸 줄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은 자기가 뭘 원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소. 여기 오기로 결정한 게 아마 그 사람이 내린 최상의 결단일 거요."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데미안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도록이라도 앉아있고 싶지만 벌써 너무 늦었소. 유감스럽지만 난 하니웰로 돌아가 봐야겠소."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줄리아가 물었다.

"힘들 걸" 그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주 귀여운 아가씨와 약속이 있어서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이오.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월요일에 다리 수술을 받기 전에 꼭 만나 주겠다고 했거든."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기뻐요, 데미안"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슬픔과 감사가 뒤섞인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사려 싶은 마음씨를 간직하고 있군요."

그는 손을 내저었다. "병원에서 근무할 때가 그립진 않소?"

"때로는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수많은 의료진들 틈에서 일하는 것이 생동감 넘치는 작업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로란드와 같이 일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고 로란드 부부는 그녀를 한 식구처럼 대했던 것이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요, 줄리아"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자주 연락하겠소."

그가 떠난 후에도 줄리아는 한동안 어둠 속에서 멍청히 서 있었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운명은 다시 한번 네이슨과 그녀를 만나게 해주었지만 그들이 함께 할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네이슨의 삶에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이미 없다. 그는 마샤와 결혼할 것이고 탄탄한 미래를 보장받게 될 테니까.

 

5

석양 무렵의 강가는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 버린 풀밭은 한적하기만 했다. 워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줄리아는 마음껏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새 한마리가 강위를 낮게 선회하고 있었다. 적막을 뚫고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바로 아프리카의 외침이지" 다시 걷기 시작하자 워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게 표현될 때가 많더군요." 그녀는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맞장구를 쳤다. 하늘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기억은 2주일 전 데미안과 함께 갔던 하니웰의 파티로 뒷걸음치고 있었다. "도시 생활에 젖어 있을 때는 이런 한가로움은 상상도 못했어요. 이젠 여길 떠나선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워렌이 돌연 멈춰서더니 그녀의 양 어깨를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설마 떠날 작정은 아니겠지, 줄리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고려해 볼 수도 있는 사항이라는 뜻이죠." 하지만 마샤와 네이슨이 결혼하게 되면 계속 돈필드에 머물 용기는 없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된 모습을 본다는 건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우린 2주일 동안 전보다 훨씬 자주 만났소." 워렌의 눈빛은 심각했다. "당신이 날 좋아하기 시작했다고 믿어도 좋겠소?"

"난 언제나 당신이 좋았어요. 단지 당신이 순수한 우정 이상의 관계를 원하게 될까 두려워서 한 번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거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요." 그녀는 피식 웃었다.

"줄리아..."

"서두르지 말아요, 워렌" 그녀는 자기를 끌어안으려는 워렌을 황급히 제지했다. "난 당신을 좋아해요. 함께 있으면 즐겁구요. 하지만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예요."

"주제넘은 요구는 하지 않겠소, 줄리아" 그가 어린애라도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난 당신이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은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아요. 그러나 당신만 허락한다면 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소."

불현듯 눈물이 핑 돌았다. "노력해 볼게요."

"결혼합시다, 줄리아"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난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해요."

"그건 당신 생각이오." 그가 고집을 부렸다.

"워렌..."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이 사람과 결혼해 버릴까? 아냐, 그건 결코 옳은 일이 아냐. "당신은 내게 용기를 줬어요, 워렌. 그렇지만 당신과 결혼할 수는 없어요."

워렌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면 즉시 알려 주겠다고 약속하겠소?"

있을 법한 요구였다. 줄리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좋아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음이 바뀌면 가르쳐 드리죠."

워렌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살짝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줄리아의 갈등은 서서히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워렌이 없었더라면 지난 2주일은 지옥을 방황하는 것 같았으리라. 그러나 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이기적인 처사였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해두지 않은 건 그녀의 불찰이었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까지 가증스럽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며칠 전에 토미 듀란트가 몹시 다쳤다더군. 자기네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타고 있던 트랙터가 뒤집혔다더군."

워렌이 침묵을 깨뜨렸다. 줄리아는 퍼뜩 자신만의 생각에서 깨어났다. 돈필드에서는 소식이 급속도로 퍼지는 게 특징이었다.

"목숨을 건진 것만도 천운이라고 해야 될 거예요."

"얼마나 심각한데?"

"중태였어요." 줄리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로란드가 3일 전에 그를 시내의 병원으로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환자의 일을 사사로운 화제로 삼으면 안돼요."

"사고를 당하기 전에 토미는 학교 럭비 선수로 뛰었는데" 워렌이 싹싹하게 말을 이었다. "그 애가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을까?"

"판단하기엔 아직 일러요." 줄리아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워렌은 커피를 한잔 얻어 마신 후 곧 돌아갔다. 고맙게도 꼭 그녀가 혼자 있고 싶어하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늘 그녀의 기분을 재빨리 알아차렸고, 그 점 또한 그녀가 감사하는 것중의 하나였다. 워렌은 열심히 일하는 호인이었고, 누군가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자기가 그의 아내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를 좋아하긴 했지만 한 여인이 자신의 결혼상대를 향해 바쳐야 하는 종류의 사랑은 결코 아니었다. 워렌은 그 이상의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네이슨,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만 있다면! 그는 줄리아가 원하는 모든 것이었지만 운명은 그가 결코 그녀의 사람이 될수 없도록 장난을 부렸다. 어째서 난 아직도 그를 이렇게 사랑해야 하는 걸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로란드의 진료실은 월요일만 되면 평소보다 훨씬 붐비는 게 통례였다. 줄리아는 바쁜 편이 더 좋았다. 쓸데없는 잡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후의 휴식 시간이 되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그녀는 찻잔을 받쳐 들고 로란드의 진찰실로 들어갔다. 그는 줄리아가 차를 따르는 동안 의자에 등을 기대고 스캐너에 붙여 놓은 X선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토미 듀란트 사진인가요?"

"그렇소." 무뚝뚝하게 대꾸한 그는 스캐너의 불을 끄고 사진을 뽑아 커다란 갈색 봉투에 넣었다. "걱정이군."

"경과가 좋지 않은가요?" 그녀가 찻잔을 내밀며 신중하게 물었다.

"점차 안정돼 가고 있소. 그리고 대체로 회복될 것 같은데, 문제는 척추 좌상이야. 합병증을 일으킬 조짐이 보이거든."

"다리는요?"

"제 기능을 할 수 없소." 로란드가 딱 잘라 대꾸했다. "2X선 사진이 오후 늦게 나올 예정이오. 그럼 전문가에게 맡길 작정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도 의자에 앉았다. "그럼 토미를 피터스버그로 보내려구요?"

로란드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머리를 저었다. "우리 지방에도 저명한 의사가 있는데 왜 중상자를 그 먼 곳까지 보낸단 말이요?"

가슴이 철렁했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네이슨을 두고 하는 말씀은 아니겠죠?"

"바로 그 사람이오." 로란드는 힘주어 대꾸했다. "5시에 X선 사진을 보러 올 거요. 같이 병원에 가기로 했소."

"그럼 그가 맡겠다고 했단 말인가요?"

"즉석에서 수락했소." 로란드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신은 네이슨이 거절했으리라고 예상했소?"

"아뇨, 글쎄...잘 모르겠어요."

"토미 듀란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네이슨 코르베뿐일 거요." 재빨리 차를 마신 로란드는 찻잔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난 2년 동안 네이슨이 종종 의학 잡지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었다는 걸 얘기해 줘야겠군. 기적을 창조하는 사람으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네이슨은 자신의 분야에서 제1인자가 될 걸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5시 이후엔 내가 없어도 되잖아요, 그렇죠?" 네이슨이 오기 전에 피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애원하다시피 물었지만 로란드는 그녀의 희망을 일축해 버렸다.

"우리한테 차 준비를 해줄 정도의 시간만 할애해 주겠소?"

"알겠어요." 그녀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아" 로란드의 부름에 문앞까지 갔던 그녀는 반쯤 몸을 돌렸다. "토미에겐 최대한의 정성이 필요해"

"알아요. 물론 그래야죠." 주저없이 대답하고 진찰실을 나왔지만 대기실 한켠에 붙은 작은 간이 주방으로 향하는 줄리아의 걸음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나머지 시간을 별다른 실수 없이 보낸 게 신기했다. 온 신경이 네이슨에게 쏠린 탓에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것조차 두려웠다. 또다시 그의 얼굴을 맞대야 한다는 사실이 바위 덩어리처럼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5시간 가까워지자 손바닥이 축축해지도록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네이슨이 늦게 와서 로란드가 그만 가보라고 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유일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시계바늘이 12를 가리키기가 무섭게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네이슨의 모습이 나타났다.

맥박이 뛰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까지 들리는 느낌이었다. 서류함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의 소음이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네이슨 앞에서 그녀의 자존심은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는 가벼운 베이지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고 하얀 셔츠의 윗 단추가 풀어져서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가 엿보였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차가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드 넥커 박사가 기다리십니다." 그녀는 될 수 있으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쪽으로 오세요."

"2주일 동안 몇 번이나 전화를 했소." 그가 앞을 가로막았다. "계속 밖에 나갔던 거요, 아니면 일부러 집을 비운 척한 거요?"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침착한 태도로 맞섰다. "왜 날 만나려 했는지 모르겠군요. 서로 할 얘기가 없을 텐데요."

"난 아직 해야 될 얘기가 남았다고 생각하오. 그렇지만 잠시 미뤄두기로 하지" 그가 한발 물러섰다. "안내하시오."

진찰실 문을 두드린 줄리아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코르베 씨가 오셨어요."

", 그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로란드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코르베 박사"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는 사이를 틈타 줄리아는 재빨리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로란드의 부탁대로 커피 준비를 하면서도 하도 떨려서 몇 번이나 손을 놓아야 했다.

빌어먹을! 제가 뭔데 날 이렇게 만든담. 나도 네이슨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줄리아가 진찰실로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은 새로운 사진을 스캐너에 끼워 놓고 낮은 목소리로 열심히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눈에 띄기 전에 달아나고 싶어서 살그머니 빠져나오려는데 로란드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고맙소, 줄리아. 이제 그만 가봐요."

네이슨이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쏘아보는 모습이 왠지 불길한 암시처럼 느껴졌다. 황급히 문을 닫고 나온 줄리아는 소지품을 대충 챙겨서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을 워렌과 함께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는 유쾌하게 떠들어댔지만 줄리아는 도무지 대화에 열중할 수가 없었다.

네이슨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토미 듀란트의 수술을 맡기로 했을까? 아니면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을까? 커피를 갖고 들어갔을 때, 왜 그렇게 이상한 시선으로 뚫어져라 쳐다봤을까? 그 눈빛은 어떤 의미를 담고...,, 싫어! 내가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야 되는 거야?

"오늘 시간을 내줘서 정말 다행이오." 후식이 나오자 그녀의 불안한 시선을 쫓던 워렌이 한마디 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내 여동생이 결혼을 하거든. 어머니께서 도와 달라는 전갈을 보내셨소."

"그래서요?"

"내일 아침에 더반으로 떠날 거요." 그는 테이블 너머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식탁에 놓인 촛불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내가 없으면 보고 싶어 하겠소?"

"그럴 거예요."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짓자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같이 갔으면 좋겠소. 어머니께선 틀림없이 당신을 좋아하실 거요."

이럴 때 왜 네이슨이 떠오르는 걸까. 그의 부모님들은 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혈육이라곤 결혼해서 짐바브웨에 살고 있는 누이가 있을 뿐이었다.

"실례합니다." 죠세프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핸더슨 양께 전화가 왔습니다."

줄리아는 화들짝 놀랐다. 누구길래 모파니에까지 전화를..., ?

"내 사무실에서 받으시도록 해주게" 워렌은 줄리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조세프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이쪽이오, 줄리아" 워렌도 몹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더 캐묻지 않고 그녀의 팔을 잡고 자기 사무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미안하다는 눈짓을 하자 그는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럼 우리 자리에서 기다리겠소."

그녀는 그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오, 줄리아. 하지만 급히 좀 와줘야겠소."

로란드의 음성이 천둥처럼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러세요?" 그녀는 초조하게 물었다. "무슨 사고라도 있었어요?"

"전화론 자세히 얘기할 수가 없소. 워렌이 여기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집에까지 가는 건 내가 책임지지."

"곧 가도록 하겠어요." 그녀는 의료인의 책임을 생각하며 동의했다. 그러나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지?" 테이블로 돌아온 그녀가 핸드백과 숄을 챙기자 워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드 넥커 박사가 꼭 할 얘기가 있다면서 집으로 와달라는군요. 급한 일인가 봐요."

"그럼 어서 갑시다." 그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요." 워렌과 메르세데스를 타고 모파니를 떠나며 그녀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란드의 갑작스러운 소환이 그녀를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토미 듀란트의 일인 거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뭐가 그렇게 급해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불러야 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리지 마세요." 차가 드 넥커의 집 앞에 멎자 그녀는 문 쪽으로 손을 뻗으며 워렌을 만류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잘 다녀오시길 바랄게요."

"더반에 도착하면 곧 연락하겠소."

"고마워요."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차에서 내렸다.

워렌은 그녀가 현관까지 걸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양치식물 화분이 늘어선 현관 계단을 올라가는 줄리아의 가슴은 마구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벨을 누르자 엘리자베스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맞아들였다. "로란드가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집안 구조를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펫이 깔린 홀을 가로질러 가는 그녀의 입속은 모래라도 뿌린 듯 깔깔했다. 복도에서 그녀는 땀에 젖은 손바닥을 드레스 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어느 정도 괜찮아진 느낌이 들어 그녀는 서재의 문을 가볍게 두드린 후 고개를 들이밀었다.

로란드는 자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 놓인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당장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와줘서 고맙소, 줄리아" 로란드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린 줄리아는 로란드가 손짓하는 빈 의자를 향해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급한 일이라면서요?" 그녀는 짜증 섞인 투로 물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소." 로란드가 자기 책상에 놓인 유리 주전자를 손짓했다. "커피 한잔 들겠소?"

"아뇨, 됐어요." 네이슨이 도로 자리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줄리아는 로란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토미 듀란트 때문인가요?"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래요." 로란드가 끄덕였다. "내가 얘기할까요? 아니면 당신이 직접 말하겠소, 네이슨?"

"내가 말하죠."

"뭘요?" 네이슨이 다가오자 그녀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책상 한쪽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그녀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잘만 하면 토미 듀란트가 다시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없지도 않소. 그렇지만 대수술을 거쳐야 하오. 집도는 내가 하기로 했고 수술 시간은 내일 오후 5시부터요. 그래서 당신이 날 도와 줬으면 좋겠소."

"농담이겠죠!" 줄리아는 질겁을 하며 로란드와 네이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참석하는 조건으로 수술에 동의했다면 너무 비겁한 처사잖아요!"

"조건이 아니라 부탁이오." 네이슨이 냉담하게 되받았다. 푸른 눈동자가 분노의 빛을 띄우고 있었다.

"수간호사가 당신 결정을 달가워할지 의문이군요. 그 병원엔 훌륭한 수술실 근무 간호사가 얼마든지 있는 걸로 아는데요."

"병원 측의 승인은 이미 얻었소. 수간호사 역시 동의했소."

"동의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겠죠. 게다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결정해 버리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울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참으며 그녀는 분명하게 반박했다.

"그래서 지금 부탁하고 있잖소." 네이슨의 태도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날 도와 주겠소?"

방안 공기가 갑자기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사방의 벽이 점점 가까이 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몸에 걸친 실크 드레스가 사르륵사르륵 소리를 냈다.

"수술실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게 벌써 5년 전이에요." 그녀는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해요. 도저히 수락할 수가 없군요."

"난 내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 꼭 필요하오." 네이슨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하고 주의를 요하는 대수술이오, 줄리아. 같이 일할 간호사가 서투르면 난 참을 수가 없소."

"내가 실수를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어요?" 그녀는 엉겁결에 언성을 높였다. "제발, 네이슨! 5년 전처럼 능숙하게 움직일 수가 없다구요!"

그의 입가가 비뚤어졌다. "믿을 수가 없군."

"뭐라고 좀 해봐요, 로란드" 그녀는 자신의 고용주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결과는 천만 뜻밖이었다.

"내일 오후엔 엘리자베스가 도와주겠다고 했소." 그의 조용한 대답이었다. 덫에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무슨 이유에서 네이슨은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또 다른 굴욕감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뜻일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수락하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군요."

네이슨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고맙소, 줄리아"

"아직은 아녜요!" 그를 피해 제자리로 돌아가며 그녀는 매섭게 외쳤다. "커피라도 마셔야겠군요."

로란드의 얼굴에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도저히 용서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환자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네이슨이 수술을 맡은 것에 마땅히 감사해야 했지만 수술실에 그와 함께 들어갈 일을 생각하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5년이라면 무척 긴 시간이다. 그동안 녹슨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여 줄지가 의문이었다. 덜덜 떨면서 커피를 따른 그녀는 설탕도 넣지 않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얼어붙은 가슴속으로 따스한 온기가 퍼졌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바뀔 리는 없었다.

"집까지 태워다 주겠소." 재킷을 걸치며 네이슨이 제안했다. 잠시 주저하던 줄리아는 숄과 핸드백을 집어 들고 로란드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집을 나설 때까지도 엘리자베스와 마주치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찌나 화가 끓어오르는지 호화로운 차의 내부 장식조차 기분 나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집에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네이슨의 은근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차가 멎자마자 그녀는 용수철처럼 뛰어내렸다.

"태워다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거칠게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러나 문까지 가기도 전에 네이슨이 그녀를 따라잡았다.

"같이 들어가겠소." 그는 그녀의 팔을 틀어쥐고 현관 쪽으로 떠다 밀었다.

"안돼요!"

"말리지 못할 걸"

미처 저항도 하기 전에 그는 핸드백을 낚아챘다. 그녀는 네이슨이 열쇠를 꺼내는 걸 보면서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그녀는 주먹을 틀어쥐며 부르짖었다.

"3류 드라마 같은 수작은 그만두시오!" 그는 문을 열고 복도의 불을 켠 뒤, 반항하는 그녀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난 그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왔을 뿐이오. 그러니 납치당할까 봐 벌벌 떠는 순진한 처녀처럼 굴 필요는 없소."

뺨을 얻어맞았다 해도 이보다 더 모욕적일 수는 없으리라.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난 피곤해요, 네이슨. 게다가 너무 늦었구요."

"10시 반이군." 그는 팔목에 찬 시계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워렌 챈들러가 이 시간까지 붙들었대도 과연 불평을 했을까?"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워렌과 같이 있으면 즐거워요."

"나와 있으면 즐겁지 않다는 뜻이오?"

"그래요!" 그녀는 라운지로 걸어가 안락의자 옆의 스탠드를 켰다.

"당신에게 사과할 일이 있소, 줄리아" 그녀의 뒤를 따라온 네이슨이 불쑥 내뱉었다. "하니웰에 왔던 날 내 태도가 몹시 무례했던 게 사실이오. 데미안이 옳았지....후회하고 있소."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는 바람에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사과 한마디에 보호막처럼 그녀를 둘러쌌던 분노는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잊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잊어버리세요." 그녀는 꺼져가는 음성으로 겨우 속삭였다. 그의 따뜻한 손이 그녀를 돌려세웠지만 차마 그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용서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겠소?"

"그래요."

"제기랄, 그러지 말라구, 줄리아!" 그는 돌연 거칠게 고함을 쳤다. 어깨에 놓인 손가락이 아프게 살 속으로 파고 들었다.

"뭘요?"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숨을 죽이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늘 너그러운 척하지 말란 얘기요!"

"그렇다면 좋아요. 용서하지 않기로 하죠!" 그의 가슴을 세차게 떠다 밀며 그녀는 사납게 소리쳤다. "무례한데다 날 모욕하기까지 했어요. 사실 당신은 용서받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

"그편이 낫군." 그가 피식 웃었다. 맥이 풀려 버린 줄리아는 그가 이끄는 대로 등나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척했소? 그렇게까지 우리 관계를 발전시킬 마음은 애초에 없었으면서 말이오."

줄리아는 반사적으로 벤치 한구석으로 몸을 웅크려 붙였다.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 뒤에는 분명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빠져 버리기가 십상이다.

"마샤한테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잖아요?"

"마샤와 함께 살고 있지는 않소." 그의 시선이 찌르는 듯 날카로웠다. "그녀는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유수한 화장품 회사의 사장이오.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오."

"마샤와의 관계를 듣고 하니웰에서 같이 살고 있는 줄 알았어요."

"엉뚱한 상상이었소." 그의 팔이 그녀의 등 뒤를 돌아 의자 등받이에 걸쳐졌다. "마샤 얘긴 그만두지. 난 우리 두 사람의 얘길 하고 싶을 뿐이오."

"과거를 끄집어내는 건 싫어요, 네이슨" 그에게 닿는 것이 두려워 그녀는 슬며시 몸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미 끝난 일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잖아요."

"만족할 수 있는 설명을 들을 때까진 절대로 끝낼 수 없소. 왜 결혼 직전에 변덕을 부렸소?"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받치더니 강제로 자기 쪽을 향하게 했다. "내일 일은 어떻게 생각하지?"

"그저 두렵기만 해요." 온몸의 신경이 네이슨의 손가락이 닿은 곳으로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도 그렇소."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날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겠죠."

"극도로 복잡한 수술이 될 거요.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했소. 우린 한때 호흡이 잘 맞았었지. 난 최소한의 행운도 놓쳐서는 안될 입장이오."

"행운에까지 의지할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담담하게 응수했다. "당신은 노련한 외과의사예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최선을 다했잖아요."

과거의 기억이 현재와 엉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네이슨의 손이 차츰 목 뒤로 미끄러지면서 그의 손이 점점 확대되어 다가왔다. 그녀 자신도 네이슨이 하려는 일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샤 그랜트의 얼굴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녀는 숨을 훅 들이키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가야 돼요, 네이슨. 제발..., 너무 피곤해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그가 자신을 일으켰을 때, 줄리아는 그대로 그의 품속으로 쓰러지고 싶었다. 비참한 기분과 누그러지지 않는 갈망이 뒤섞여 당장이라도 앓아 누울 것만 같았다.

"내일 봅시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치켜들며 중얼거렸다. "한 시간 전에는 병원에 와줬으면 고맙겠소."

"알았어요." 겉으로는 지극히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과연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4시요, 늦지 마시오." 그가 사무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네이슨이 밖으로 나가고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줄리아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공허감은 오로지 네이슨밖에 채워 줄 사람이 없는데....

"너무해!" 그녀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 미련을 버려야 한단 말이야!"

 

6

돈필드 종합병원의 수술실은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곳이었다. 줄리아는 나머지 스텝들과 함께 네이슨의 지시 사항들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기 위해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썼다. 상상했던 것만큼 허둥거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순식간에 수술실 간호사로 탈바꿈한 자신이 신기했다. 마치 이제껏 한 번도 수술실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화요일 오후 4시에 그녀가 어김없이 병원에 닿았을 때, 네이슨은 이미 와 있었다. 그는 수술 과정에 관해 정확하고도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다. 수술실의 시계는 5시를 향해 바쁘게 달음질치고 있었다. 수술을 앞두고 항상 그랬듯이 그녀의 신경은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환자가 실려 들어와서 수술대에 뉘어졌다. 마취과 의사가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수술 기구가 놓인 상자를 최종적으로 점검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면서 네이슨이 나타났다.

"코르베 씨가 오셨읍니다." 앳된 간호사 하나가 소곤거리자 존경의 눈길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예의 독특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녹색의 수술용 가운데 싸인 떡 벌어진 어깨가 줄리아를 과거로 실어다 주었다. 혹시 누가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 자신도 자기감정을 꼬집어 표현하기가 힘들었으니까. 존경심이랄까, 아니면 일종의 자랑스러움? 믿음? 아무튼 갖가지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그의 마스크 끈을 묶어 주려고 반사적으로 한 발 내딛었다. 하얀 마스크 위에서 픈룬 눈동자가 유난히 돋보였다. 조용하면서도 확신에 찬 눈길과 마주치자 한조각 남아있는 불안도 깨끗이 녹아 버렸다.

"준비됐소?"

굵은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마스크 위로 치켜뜬 그녀의 눈은 말없이 웃고 있었다. "끝났어요."

네이슨이 마취과 의사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장갑을 낀 손을 그녀 쪽으로 뻗었다. "메스!"

줄리아는 메스를 그의 손에 얹었다. 이젠 자신이 있었다. 밝은 무영등 아래서 수술이 진행되는 3시간 반 동안은 수술과정 외에 어떤 일도 존재할 수가 없었다. 네이슨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신경 조직의 처치에 몰두하는 동안 그녀는 능란하면서도 끈기 있는 손놀림에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전에도 그와 함께 수술에 임했을 때마다 그의 역량을 새롭게 깨닫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엔 나무랄 데 없이 다듬어진 전문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기적의 창조자라던 로란드의 표현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네이슨은 이 젊은이의 척추를 문자 그대로 재창조하고 있었다. 그녀는 토미 듀란트가 다시 걸을 수 있으리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침내 환자는 밖으로 실려 나갔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찬탄과 존경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스크와 소독 장갑을 벗는 네이슨의 표정 역시 그지없이 밝았다.

"고맙소, 줄리아" 옷을 갈아입고 수련의들을 위해 마련된 라운지에 마주앉아 네이슨이 그녀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여전히 내가 본 최고의 수술실 간호사이더군."

그의 칭찬을 듣자 가슴속이 훈훈해졌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 놓는 불가사의한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최고의 외과의사예요. 함께 참여할 수 있었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녀의 찬탄은 결코 겉치레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테크닉이었지만 정말 놀랐어요."

"유럽에 있는 동안 새로운 방법을 연구할 기회가 많았소.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경험들이었지"

"알아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네이슨은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기쁨으로 새롭게 젖어들었다. 5년 전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한 대가로 네이슨은 마침내 그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들고 있는 찻잔에만 신경을 집중시키려고 애썼다. 네이슨은 두 다리를 쭉 뻗고 반쯤 누워있는 자세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느긋해 보였지만 그녀는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녀의 시선은 그의 얼굴과 넓은 어깨를 더듬다가 허리를 죈 벨트에까지 미끄러졌다.

과거에도 네이슨의 외모는 항상 경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전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동물적인 매력에 자신이 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자기 자신이 역겨워질 지경이었지만 솔직한 그녀의 육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네이슨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입술이 야릇하게 치켜 올라가자 그녀는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알고 있었구나! 그녀는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자신을 꾸짖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그런 기분을 털어 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그녀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벗어나야 해! 그녀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기 전에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찻잔을 치우면서도 혹시 바닥에 쓰러지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벌써 돌아가려고?" 핸드백을 집어드는 그녀의 등 뒤로 네이슨의 시선이 따갑게 날아와 꽂혔다.

"늦었어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어찌나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는지 말이 제대로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렇군." 그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난 떠나기 전에 토미를 다시 한번 보고 가야겠소."

줄리아는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 네이슨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정도로 마구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병원 복도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을 한층 재촉했다. 현관을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섬뜩하게 와 닿았다. 좀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지만 차까지 걸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제대로 시동을 거는 데도 시간을 꽤 잡아먹었을 정도였다.

"너 정말 왜 이러니, 줄리아 핸더슨!" 그녀는 자꾸만 헛손질을 하는 자신을 소리 내어 꾸짖었다. 마침내 엔진이 부르릉거리기 시작했다.

9시가 지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몸에서 소독약 냄새가 계속 풍겼다. 그녀는 당장 옷을 벗어던지고 뜨거운 욕조 속으로 뛰어들었다.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한참 동안 김이 오르는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니 딱딱하게 굳어있던 근육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부끄러울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로서는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고요한 라운지에서 그녀를 엄습한 충동은 거의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의 몸은 이성으로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욕구에 떨며 네이슨을 간절히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줄리아는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네이슨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짐작이었을까? 아니, 내가 너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지레 겁을 먹은 건지도 몰라.

그녀는 욕조에서 나와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그 기억도 이렇게 쉽게 털어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푸른색 타월 가운의 허리띠를 매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샤워캡을 벗고 머리를 풀어 내린 그녀는 푹신한 슬리퍼로 바꿔 신고 주방으로 향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달걀을 삶고 커피에 곁들일 토스트를 구웠다. 빵조각은 겨우겨우 씹어 삼켰지만 커피 맛만은 변함없이 그윽했다. 다소 진정이 된 그녀는 천천히 커피 내음을 즐기며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누군가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그녀는 기겁을 하고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시계에 눈길이 쏠렸다. 10시 반인데!

후다닥 의자를 밀치고 뛰어나간 그녀는 복도로 나가서야 걸음을 늦추었다. 감히 누군지 생각해 볼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본능은 한 사람의 이름을 끈질기게 되뇌이고 있었다.

"누구세요?" 겁에 질린 음성으로 그녀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네이슨이오."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흠칫 뒤로 물러서며 훅하고 숨을 들이켰다. 안 돼! 들어오게 해서는 안 돼!

"문 열어, 줄리아!"

차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빗장을 벗겼다. 맑은 밤공기에 실려 달맞이꽃의 향기가 그녀를 휩쌌다. 들어오란 소리도 기다리지 않고 네이슨이 성큼 비집고 들어왔다. 그때서야 그녀는 자기가 목욕 가운차림이라는 것을 깨닫고 질겁을 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죠?" 그녀는 네이슨에게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불이 켜진 걸 보고 우연히 들렀다고 하고 싶소. 하지만 그럼 거짓말이 되겠지"

그녀의 가슴속에서 경고등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병원에서 본 옷차림인 채 서 있는 네이슨을 보자 다소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까지 병원에 있었어요?"

"환자가 편안히 잠드는 걸 확인할 때까진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소."

줄리아의 눈길은 목뒤를 주무르는 그의 손에 못 박혀 있었다. 몹시 피곤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틀림없이 식사도 거르고 수술 생각에만 몰두했을 것이 분명하다.

"배고프지 않아요?"

"말이 났으니 말이지, 죽을 지경이오."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내둘렀다. 줄리아는 즉시 문을 닫고 앞장서서 라운지로 향했다.

"뭘 좀 먹고 나서 집으로 가야겠군요." 방 한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티크 캐비닛 쪽으로 향하며 그녀는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준비할 동안 셰리주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그녀는 네이슨을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좋지, 고맙소."

"편하게 앉으세요." 그는 푸른색 블레이저 재킷을 벗고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녀는 술잔을 건네주었다.

"음식 준비가 다 되면 부를게요."

라운지로 나서자마자 그녀는 침실로 뛰어 들어가 옷부터 바꿔 입었다. 대충 머리를 다듬고 나니 벌거벗은 것 같았던 느낌은 다소 가셨다. 그녀는 천천히 주방으로 나갔다.

오븐에 스테이크를 넣어 놓고 빵 접시를 테이블에 차리는데 반쯤 비운 술잔을 손에 든 네이슨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왔다.

"계속 라운지에 있다간 잠이 들어 버릴 것 같더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눈빛이 재미있다는 듯 반짝였다. "나 때문에 성장을 할 필요까진 없는데, 미안하게 됐군."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잠자코 토마토만 썰고 있었다. 네이슨이 식사 준비가 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탓에 줄리아는 하마터면 손가락을 벨 뻔했다. 스테이크가 거의 익자 그녀는 스토브 위에 올려놓았던 프라이팬에다 달걀을 깨뜨려 넣었다.

"당신이 없는 동안 농장을 관리할 사람은 있나요?" 답답할 정도로 침묵이 흐르자 그녀는 무슨 얘기든 꺼내야겠다는 생각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구해 놓았소."

"하니웰은 목장이에요."

"이제 와서 바꿀 생각은 없소." 그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요하네스버그의 집은 어떻게 했소?"

할머니 얘기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그녀는 저으기 긴장했다. "가구랑 같이 팔았어요."

"어째서 돈필드 같은 곳으로 옮길 생각을 했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잖아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행복하오, 줄리아?"

"물론이에요."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나요?"

"글쎄" 네이슨이 그녀를 아래위로 쓱 훑었다. 실제로 그의 손이 닿기라도 한 듯 그녀는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체중은 좀 줄었지만 그런대로 보기가 좋군." 그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을 견뎌낼 재간이 없어서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스테이크를 꺼내고 달걀을 옮겨 담는 동안에도 네이슨의 눈길은 내내 그녀를 쫓아다녔다.

"급히 준비하느라고 엉망이에요." 스테이크와 달걀 접시를 내려놓고 식탁을 살펴본 후 줄리아는 우물쭈물 사과를 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오. 틀림없이 기막힌 맛일 거요." 빵에 버터를 바르고 토마토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가 빙긋 웃었다.

그는 부지런히 포크를 놀렸다. 하루종일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게 확실했다. 문득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커피포트에 스위치를 넣으려고 등을 돌렸다. 두 손에 찻잔을 들고 돌아와 보니 접시는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워렌 챈들러 얘길 좀 해보지" 그가 돌연 엉뚱한 화제를 끄집어냈다. "얼마나 가까운 사이요?"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사귄 지 2년쯤 됐어요."

"그런 대답이 무슨 의미가 있소?" 네이슨이 코웃음을 쳤다. "연인이오?"

화가 나서 얼굴이 굳어졌지만 그녀는 굽히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당신이 얘기한 것처럼 내가 장난삼아 그를 가까이하고 있다면 어떻게 연인 사이가 되겠어요?"

그의 얼굴이 대뜸 굳어졌다. "홧김에 그랬던 거요."

"그랬겠죠."

"그럼 워렌과는 정말 사랑하는 사이인가?"

그녀는 찌르는 듯한 그의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아뇨"

"다른 사람이 있소?"

"없어요." 왜 이런 걸 물을까? 자기한테는 뭐든 바라는 대로 해줄 수 있는 마샤가 있는데.... 그녀는 성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왜 이런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되죠?"

"그저 호기심에서 묻는 거니 그렇게 화낼 것까진 없소."

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자석처럼 그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위험스러운 일이 발생하기 직전처럼 그녀는 불안과 흥분에 휩싸였다.

그가 아직도 자신에게 이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전에는 이렇게 약해져 본 적은 없었는데. 사냥꾼에게 쫓기는 동물처럼 그녀는 마음속으로 무섭게 떨고 있었다.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군. 그렇지 않소?" 줄리아가 그렇게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을 네이슨이 하나씩 들추고 있었다. "우리가 수술실에서 늦게 나오는 날이면 당신이 손수 저녁 준비를 해서 시장기를 달래곤 했지. 기억하오?"

기억이 나느냐고? 하느님, 맙소사! 두 사람이 함께 하던 그 즐거운 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얼른 고개를 떨구었다. 이 격렬한 떨림을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기억나요." 그녀는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할머니께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문을 꼭 닫고, 냉장고 속에 있는 식품들을 깡그리 긁어모아 정신없이 먹어치우곤 했지"

그는 웃음 섞인 말투로 계속했지만 그녀는 또다시 온몸이 생소한 전율에 싸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 와서 과거를 회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웃음소리, 두 사람만의 꿈과 사랑..., 모든 것이 사라진 뒤였지만 사랑은 여전히 남아서 그녀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움츠러들었던 사랑이 하필이면 오늘밤, 그녀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녀는 네이슨을 곁눈질했다. 저 사람이 꼭 여기 있어야 하는 걸까. 그의 눈 속에서 낯선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흠칫 놀라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가슴의 근육이었다. 자신의 손끝으로 그 감촉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그녀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이미 자기 자신의 미칠 듯한 감정에 서서히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분명했다. 뻔히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동물적인 매력은 그녀 스스로가 파놓은 함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네이슨은 그녀의 마음속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저 그녀가 마지막 자제력을 잃고 허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커피 드세요."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기 전에 제발 돌아가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싱크대에 쌓아 놓은 접시들을 내려다보았다. 막 수도 꼭지를 틀려는 순간, 언제 다가왔는지 네이슨의 손이 그녀를 붙들었다.

"아침에 씻도록 해요." 그는 다른 한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얇은 옷감 한겹으로 버티기엔 불가능한 열기가 몸속으로 퍼졌다. 그는 그녀를 돌려세웠다. 어디론가 피해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찬장 한 모퉁이었다. "떨고 있군. 당신 맥박 뛰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소."

, 맙소사! 그녀는 마음속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젠 끝이야. 더 이상은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가 얼굴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부드러운 손길이 목줄기를 따라 움직이는 동안 그녀는 얼어붙은 듯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숨을 쉬기도 두려웠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의 눈 속에 자신의 애타는 요구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다. 네이슨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왔을 때 그녀는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네이슨에게 매달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의 입술이 굶주린 듯 달려들자 그녀는 온몸을 삼킬 것처럼 밀려드는 열기에 자신을 내맡겨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이성은 아직도 가냘프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 사람은 널 사랑하지 않아, 줄리아! 다른 여자와 결혼할 사람을 원하다니! 이 사람은 줄리아 핸더슨이 아니라 마샤 그랜트의 남자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구!

그녀는 비틀거리며 네이슨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네이슨은 어림없는 짓이라는 투로 피식 웃었다. 말 그대로 그녀는 코너에 몰려 있었다. 네이슨이 비켜 주지 않는 이상은 벗어날 도리가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전혀 놓아 줄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가요!" 그녀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애원했다. "제발 가줘요, 네이슨"

그러나 네이슨의 손은 이미 무력해진 그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이 가슴을 스치자 고통스럽기까지 한 쾌감이 그녀를 떨게 했다.

"왜 좀 더 솔직해지지 못하는 거지?" 네이슨이 그윽하게 속삭이며 여유 있게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안아 주기를 원하고 있소. 인정하는 게 좋을 거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안돼요!"

"안 된다구?"

그가 여유 있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저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아 있던 단추 두 개가 마저 풀어졌다. 그녀는 옷자락을 여미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네이슨의 손은 이미 그녀의 허리에서 차츰 위쪽으로 더듬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의식의 외침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네이슨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운명이 정한 시련의 시작이었다. 쌓이고 쌓였던 갈망이 언젠가는 이렇게 폭발하리라는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댐에 갇혀 있던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거 같았고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제어할 마지막 한조각의 힘마저 잃고 있었다.

"이러지 말아요!"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네이슨의 따뜻한 입술이 목덜미를 누르자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뒤로 꺾였다.

"바른 대로 대답해" 그가 귓가에 대고 뜨겁게 속삭였다. "이게 바로 당신이 원하는 거야, 그렇지 않소?"

"그래요!"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통에 찬 고백이 흘러나왔다. ", 그래요. 하지만 이건...이러면 안돼요!"

"날 봐요, 줄리아" 그녀는 겨우 눈을 떴다. 타오르는 듯한 푸른 눈동자가 커다랗게 다가왔다. "우리 둘 다 오래전부터 바라던 일이오. 부끄럽게 여길 성질의 일이 아니지" 그가 신음처럼 덧붙였다. "내가 얼마나 애타게 원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거요."

그의 손이 허리에 닿나 싶더니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힘도 안 들이고 그녀를 싱크대 위에 올려 앉힌 네이슨은 거침없이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가슴에 파묻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자극이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네이슨의 목덜미를 매만지고 있었다.

", 네이슨!" 그녀는 네이슨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베일처럼 쏟아졌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한동안 그녀를 응시하던 네이슨은 한쪽 팔을 그녀의 무릎 아래로 넣었다.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리고는 그는 곧장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고풍스런 더블베드 위에 그녀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때 그녀의 블라우스가 어깨에서 미끄러져 카펫 위에 떨어졌다. "날 말리지는 않겠지, 줄리아?"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그녀는 네이슨만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미친 듯이 요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말릴 능력이 없었다.

"아뇨" 그녀는 띄엄띄엄 속삭였다. "말리지 않겠어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희미하게 남아있던 불안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네이슨의 손이 남아있던 장애물을 벗겨내는 동안 그녀는 벅찬 기대로 떨고 있었다. 네이슨이 갑자기 몸을 뗏다.

"이번엔 당신 차례야."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자기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터질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의 울림이 손끝에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이상하게도 어색하다는 기분은 전혀 없었다. 아니, 단추가 하나씩 풀어지면서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가 조금씩 드러남에 따라 그녀의 흥분도 한층 고조되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원하는 남자의 옷을 손수 벗긴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떨리는 일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사소한 표정의 변화조차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손이 벨트 언저리에서 주춤거리자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네이슨은 서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네이슨의 목을 두 팔로 정신없이 감았다.

"당신은 날 기쁘게 해줄 거야." 그가 침대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줄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뜨거운 불길이 번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하나가 되는 순간에도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단지 점점 달아오르고 있는 자신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녀는 네이슨을 사랑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육체는 그렇게도 바라던 것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과연 잘못된 일일까? 어째서?

그녀는 미친 듯이 네이슨에게 매달렸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쾌감은 그녀를 절정의 순간으로 이끌었고 그녀는 놓칠 수 없다는 듯 네이슨을 온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네이슨의 입에서 야수의 울음을 연상시키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란히 몸을 뉘었다.

네이슨의 얼굴이 목덜미에 닿자 까칠까칠한 턱의 감촉이 그녀를 소스라치게 했다. 방금 두 사람이 공유했던 일치감은 그녀를 압도했고 사랑한다는 한마디가 입가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네이슨이 돌아 눕는 순간 그녀는 황급히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팔꿈치를 괴고 상체를 일으킨 그의 얼굴은 어둠에 싸여 희미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예전에 비웃음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아무튼 내가 처음이라 기쁘군." 그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만은 너무 행복에 겨워서 그의 말을 되새겨 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다정하게 네이슨의 뺨을 어루만졌고 네이슨은 그녀의 콧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줄리아는 자신의 감정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네이슨의 손길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뭔가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접어두고 네이슨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금 줄리아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7

날카로운 자명종 소리가 줄리아의 달콤한 꿈을 뒤흔들어 놓았다. 끙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는 손을 뻗어 자명종을 탁 꺼버렸다. 따뜻한 침대 속에서 나오기가 싫어서 그녀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꿈지럭거렸다. 그러나 갑자기 어제의 기억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시트로 몸을 가리면서 후다닥 일어났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네이슨의 옷가지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쥐죽은 듯 고요한 집안 공기가 그녀의 혼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일찍 떠나게 되어 유감이오. 병원에 알리느라고 당신 전화를 좀 썼소. 토미 듀란트는 탈 없이 밤을 넘겼다지만 농장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병원에 나가봐야겠소. 저녁에 봅시다. 네이슨.>

줄리아는 화장대 앞의 동그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젯밤의 일들이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랐다. 한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돌연 온몸에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지칠 줄 모르고 서로를 찾았다. 두 번째 경험은 느긋하고도 유쾌한 여행 같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네이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곯아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어젯밤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의 사랑은 무모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그러나 밝은 아침 햇살 아래 떠오르는 기억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뒤범벅이 된 것이었다. 네이슨에게라기보다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 맙소사! 네이슨이 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단순히 표피적이기만 한 갈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는 조심성도 체면도 한순간에 내던져 버린 것이다. 더구나 혹시 아이라도 갖게 된다면! 그리고 마샤는!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줄리아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모두들 뻔뻔스런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이슨의 쪽지가 바닥으로 팔랑팔랑 떨어졌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네이슨에게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순간적인 격정에 못 이겨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이다. 그렇다고 네이슨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는 줄리아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감지한 것뿐이니까. 그리고 네이슨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그녀를 다루기 쉬운 여자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자신의 행동이 충분히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무리 애써도 자꾸 불어나는 죄책감을 누를 길이 없다. 하룻밤 새 이렇게 후회할 일이라는 걸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진작 냉정히 따져 볼 수만 있었다면....

그날, 하루종일 줄리아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간단한 지시사항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두 번씩이나 로란드의 질책을 받아야 될 정도였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러지, 줄리아?" 환자들이 모두 돌아간 뒤, 로란드는 대기실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다소 짜증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오늘은 어째 딴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소."

"정말 죄송해요." 책상 위에 늘어놓았던 차트들을 주섬주섬 치우고 그녀는 맥없이 자리에 앉았다. "어제 잠을 설친 후유증인가 봐요."

로란드의 굵은 눈썹이 불안하게 꿈틀거렸다. "토미 듀란트의 수술 경과는 괜찮은 걸로 알았는데..."

", 물론이에요!" 그녀는 황급히 대꾸했다.

"그럼 뭐요?"

그녀는 단번에 얼굴색이 흐려져서 시선을 돌렸다. "그냥 개인적인 문제예요."

"알겠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로란드가 화제를 돌렸다. "다시 수술실에 들어가 본 소감이 어떻소?"

줄리아는 온종일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곤혹스러움에서 겨우 벗어났다.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로란드는 빙긋 웃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다. "날 떠나서 병원 근무를 할까 생각하고 있소?"

"천만에요!"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정말 제게 잘해 주셨어요. 아니, 당신과 엘리자베스라고 해야 옳겠군요. 전 여기서 일하는 게 좋아요. 물론 다시 수술에 참가할 수 있어서 상당히 흥분하긴 했지만 여기서 당신과 함께 있는 쪽이 훨씬 좋아요. 그냥 빈말이 아이라구요."

"그 소릴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 오늘 아침에 병원에서 회진을 돌다가 네이슨을 만났소. 토미 듀란트의 수술 후 치료에 관해서 의논했지"

"그런데요?" 그녀는 초조한 기분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주로 당신 얘기였소."

"내 얘기였다구요?" 그녀는 갸날프게 되풀이했다.

"너무 걱정스러운 얼굴은 하지 마시오."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는 보자 로란드는 미소를 지었다. "네이슨이 당신에 관해 여러 가지로 궁금해하더군. 하지만 이 지방사람 누구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얘기 외엔 해준 게 없소." 한동안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로란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대로 얘기할 때도 되지 않았소, 줄리아?"

"그럴 수 없어요!" 목구멍이 죄어 들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5년 전에 내가 결단을 내렸던 이유는 이제 중요성을 잃었어요."

"어째서?"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인 마샤 그랜트와 결혼할 거예요."

"네이슨이 그렇게 얘기했소?"

그녀는 힘없이 머리를 저었다. "마샤한테 들었어요."

말없이 앉아 있던 로란드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가봐야지. 오늘은 푹 잘 수 있길 바라겠소."

푹 자고 싶은 소망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 한 시간이나 눈을 붙일 수 있을지. 어쨌거나 그녀는 가방을 챙겨 들고 로란드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그녀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서 돌아가서 푹 쉬고 싶다는 마음과 텅 빈 집안에 혼자 있기가 싫다는 마음이 반반이었다. 문을 열고 침실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그 모순된 감정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어제 저녁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의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 탓이었다. 네이슨의 모습이 여전히 침대 위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화장대 위에 놓고 구두를 벗어던진 후, 슬리퍼도 신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당장 눈앞의 일이나 생각하자고 다짐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저녁 준비를 할 생각을 하니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저녁에 보자던 네이슨의 쪽지가 생각났다. 덕분에 하루 온종일, 네이슨이 불쑥 대기실로 들어올 것 같은 두려움에 갈팡질팡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해야 오늘 저녁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불을 끄고 집을 비운 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네이슨이 문을 두들겨대는 소리를 듣고 있을 자신은 더욱 없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동안에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 제대로 먹어치우지 못할 게 뻔한데도 그녀는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는 꼭 미쳐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걸로 하자고 나름대로 궁리해서 준비한 음식들이었지만 그녀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밀어 놓았다. 언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질겁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워렌일 거야. 그녀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더반에서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네이슨의 낮은 음성이 울린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직 농장에 있소. 당신한테 가기 전에 정리할 일이 좀 있어서 미리 알려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냉정을 잃고 있었다. 네이슨이 지금 눈앞에 없는 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오늘 저녁엔 오지 않는 편이 더 나을 텐데요."

잠깐 동안이지만 가슴이 얼어붙을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유를 가르쳐 줄 수 있겠소?"

"너무 피곤해서 앉아 있기도 힘들어요. 일찍 자고 싶어서요." 그녀는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제발....

"오래 있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지"

"안돼요!" 무의식중에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다른 시간이라면 몰라도 오늘은 정말 곤란해요. 혼자 있고 싶은 마음도 그렇고, 할 일도 많아요."

"난 내일 아침 요하네스버그로 떠나. 그리고 주말까진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지" 그가 성급하게 말을 이었다. "떠나기 전에 얘길 하고 싶소."

"돌아와서도 할 수 있어요."

"그래, 좋아. 하지만...어젯밤 얘긴데, 줄리아,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네이슨!" 그녀는 애원하듯 네이슨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게 어젯밤의 일이 별의미가 없다고 강조할 필요는 없다. 네이슨 역시 그녀를 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으니까. "돌아와서 얘기하자고 했잖아요." 그녀는 차갑게 덧붙였다.

입을 다물고 있던 네이슨이 불쑥 내뱉었다. "좋아! 그럼 주말에 만나지"

뚜뚜 하는 신호음이 울렸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녀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목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줄리아는 얼른 손을 뻗지 못하고 흠칫 뒤로 물러섰다. 또아리를 튼 독사가 금방 달려들 태세로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전화는 줄기차게 울리고 있었다. 겨우 수화기를 든 그녀는 전화를 건 사람이 워렌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을 법도 한데 워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리아는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보고 싶소." 워렌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그녀는 그냥 우물거리고만 있었다. "희망을 가져도 괜찮겠소, 줄리아?"

당연히 그럴 수 없다고 해야 옳을 일이었지만 그녀는 로란드의 충고를 떠올렸다. 언제까지나 마음을 꼭꼭 닫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네이슨과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솔직이 말해서 워렌을 퍽 좋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줄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이 그녀에겐 여전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하지만 워렌, 거짓말을 할 수는 없군요. 적어도 아직은요." 혹시 거부의 표시로 해석할까 봐 그녀는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좀 더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겠군. 그렇겠지?" 실망한 듯 한숨을 쉬긴 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 따뜻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유감스럽지만요." 그녀는 워렌에게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여동생 결혼식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소."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얘기들이 오갔다. 그러나 휘청휘청 주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참담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건드리지도 않은 저녁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접시를 싱크대에 담그면서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의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네이슨이 하려던 말이 귓가에서 뱅뱅 돌았다. 얼떨결에 가로막긴 했지만 그 뒤에 어떤 얘기가 이어졌을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자기행동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라는 내용이었겠지. 하긴 그 외에 또 무슨 얘길 했겠는가? 그는 마샤와 결혼할 테고 어제 일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장난 정도로 일축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거의가 그녀의 책임이었다. 네이슨이 자기 손안에 굴러든 기회를 그대로 놓쳐 버릴 사람인가! 5년 전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린 여인에게 복수를 한다는 쾌감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

아무튼 자기가 처음이라서 기쁘다고! 그때는 무심히 흘려들은 한마디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보다 더 신랄한 빈정거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비눗물이 묻은 손으로 싱크대 한켠을 짚었다. 다시 목구멍이 얼얼해졌다. 이번에는 흘러내리는 눈물은 참을 재간이 없었다. 울지 않을 거야! 그녀는 손을 씻고 종이 타월을 뜯어 눈과 뺨을 북북 닦아냈다. 그녀에겐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워렌이 있지 않은가. 그의 결혼신청을 좀 더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지. 자기가 원하는 남자를 소유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가족과 가정이라는 포근한 울타리를 쉽게 포기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토요일, 오후 내내 줄리아는 정원에서 일을 했다. 일주일동안 쌓였던 긴장과 피로가 조금씩 풀리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울타리 아래 쭈구리고 앉아 흙을 파헤치면서 그녀는 일요일이면 돌아오겠다던 워렌을 만날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그녀는 페라리에서 내리는 네이슨을 보고 심장이 멎을 뻔했다. 끼익 하는 문소리와 함께 그가 희미한 웃음을 띠우며 정원으로 들어왔다.

"잘 있었소, 줄리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다닐 것 같은 푸른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면으로 된 셔츠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다. 꼭 맞는 갈색 바지가 길고 단단한 다리의 근육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었고 부드러운 크림 색 셔츠 덕분에 적당히 그을린 갈색 피부가 한층 돋보였다. 그녀는 또 부질없이 환상에 젖기 시작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표정이 왜 그렇소?" 네이슨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내가 온 게 영 달갑지 않은 모양이지?"

그녀는 조그마한 삽을 흙에 쿡 찔러넣고 손을 털며 일어났다. 네이슨의 시선이 자기 옷차림을 살피고 있다는 걸 느끼자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 낡아빠진 작업복을 꿰고 물집이 생길 것이 두려워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챙이 너덜너덜해진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오후 시간은 정원 손질에 할애할 작정이었어요. 손님이 올 거라곤 예상도 못했으니까요." 그녀는 얼굴까지 붉히며 열심히 설명했다. "과일 주스 한잔 마시겠어요?"

그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는 테이블과 정원용 의자가 놓인 나무 그늘 쪽을 가리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줄리아는 작업장갑을 벗고 집으로 들어갔다.

벌써 그녀는 평정을 잃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고 주스 병을 꺼내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쟁반을 받쳐 들고 정원으로 향하는데 잔 속에서 얼음조각들이 달그락달그락 부딪쳤다.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던 네이슨이 그녀를 향해 나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발 좀 침착해, 줄리아 핸더슨!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녀는 자신을 꾸짖었다. 부탁이니까 떨지 말라구!

용케 엎지르지 않고 주스를 따른 그녀는 네이슨에게 잔을 건네며 잊어버리지 않고 덧붙였다.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네이슨이 한 모금 맛보더니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주 산뜻한 맛이군. 이게 뭐지?"

"오렌지 주스에다 레몬 즙하고 소다를 조금 쳤어요." 그녀는 밀짚모자를 빈 의자에 벗어 놓고 시원한 주스를 정신없이 들이켰다. "오늘처럼 푹푹 찌는 날 정원에서 일을 하다가 한잔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들죠."

그의 눈길이 스카프로 묶어 내려뜨린 그녀의 머리채에 멎었다. 그의 눈속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빛이 스치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날씨였다. 평화롭고 한적한 정원에 앉아 있으면서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잘 다듬어진 그의 옆모습을 흘끔거리며 그녀는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방문의 목적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혹시 그녀가 오해할지도 모르는 사건에 대해 자기입장을 분명히 밝혀 두려는 뜻이겠지.

"그날 저녁 얘긴데요." 더 견딜 수가 없어진 줄리아는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걸 분명히 하고 싶어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어요. 앞으론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이죠."

"이유는?"

왜 갑자기 이렇게 둔한 척하지? 빈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네이슨을 매섭게 흘겨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슨 이유에선지 눈물이 왈칵 솟는 바람에 얼른 얼굴을 돌려야만 했다.

"그 대답은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요." 제 딴엔 제법 따끔하게 꾸짖었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는 그저 떨리기만 했다.

"어째서?" 나무 의자가 삐걱거렸다. 네이슨이 주스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 일이 5년 전에 파혼을 통고한 원인과 관련이 있소?"

불현듯 화가치민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눈물이 쑥 들어가 버리는 것 같았다. "전혀 무관하다는 걸 알잖아요!"

"아니, 모르겠소." 조용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굳어진 표정이기는 했다. "나와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가 대관절 뭐요?"

"전에도 물었던 기억이 있군요. 내 대답도 그때나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네이슨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었다. 발가락이 발밑의 흙을 헤집고 있었다. "결혼할 만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요."

"결혼할 만큼 사랑하진 않았지만 당신은 아직도 날 원하고 있소. 날 그냥 내버려 뒀을 때 확인한 사실이오."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자기가 얼마나 기꺼이 그의 팔 안에 몸을 던졌던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네이슨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차츰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지 그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달아나서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새삼 얌전한 척하기엔 너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네이슨은 이미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어깨를 들썩해 보였다. "반드시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는 데요."

"당신에겐 적용되지 않는 이론이오, 줄리아" 그가 짤막하게 웃었다. "당신이란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함부로 몸을 내맡길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오."

"실없는 소리 작작해요!"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네이슨의 예리한 분석이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던 것이다.

"내 얘기가 틀렸다고 한다면 왜 그때까지 처녀였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건..." 어쩔 줄 모르고 더듬거리던 그녀는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 일일이 설명할 의무가 어딨어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당장 돌아가 주는 거라구요! 혼자 있고 싶어요."

"내 질문은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오.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기 전엔 돌아갈 수 없소."

"오라, 그래요?"

"당신 할머님은 왜 돌아가셨지?" 줄리아의 빈정거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암이었어요." 이러다가 본론까지 끄집어내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하면서도 그녀는 곧이곧대로 대꾸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했소? 끝까지 곁에서 보살펴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줄리아는 할 말을 잃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꼭 집어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얼굴 근육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은 털어놓을 시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심문이나 당하면서 앉아 있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차갑게 한마디 내뱉고는 쟁반을 집어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왜 그러지, 줄리아?"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선 채 그가 조롱 섞인 미소를 띠우며 물었다. "내가 진실에 가까이 접근했다는 뜻인가?"

사방의 벽들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향해 죄어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숨을 훅 들이켰다. 그가 바라는 대로 모조리 털어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그렇지만 네이슨의 반응이 어떨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동안의 세월은 두 사람 모두에게 상당한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과거의 일을 끄집어낸다 해도 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네이슨이 마샤 그랜트와 결혼한다는 사실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또다른 부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평생토록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절대로!

"돌아가세요, 네이슨" 홱 돌아선 그녀는 찬장 모서리를 짚은 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요, 제발. 혼자 있게 해줘요."

"나도 당신한테 지쳤소.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요!"

그는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는 줄리아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돌려세웠다. 그녀의 눈이 눈물에 젖어 반짝이는 것을 본 네이슨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더니 다짜고짜 그녀를 끌어당겼다. 눈이 휘둥그레진 줄리아가 저항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의 단단한 입술이 먼저 그녀를 점령해 버렸다.

주방의 바닥이 빙그르르 도는 거 같아서 그녀는 얼결에 네이슨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반사적인 행동은 엉뚱한 오해를 빚고 말았다. 네이슨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셔츠의 등 뒤로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줄리아의 방어능력은 조금씩 무너졌다. 뿌리치기에는 그녀 자신이 너무 간절하게 네이슨을 원하고 있었다. 한동안 자신의 걱정에 못 이겨 떨던 줄리아는 네이슨의 손이 앞으로 돌아왔을 때야 제정신이 들었다.

"안돼요!" 줄리아는 네이슨의 품속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그녀는 있는 힘껏 네이슨의 가슴을 떠다 밀었다. "이러지 말아요!"

"난 당신을 원하고 있소, 줄리아" 그가 사납게 외쳤다. "그리고 당신이 날 원한다는 것도 알아"

"아녜요! 난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거짓말이야. 내가 증명해 보이겠소!"

또 그의 손길이 닿는다면 이번엔 정말 무너지고 말 게 분명했다. 그녀는 네이슨을 피해 잽싸게 식탁 뒤로 돌아갔다.

"당신, 뭐 잊어버리고 있는 것 아녜요?" 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마샤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하나요?"

"마샤? 마샤가 우리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줄리아는 말문이 막혀 멍청해지고 말았다. 아니, 자기하고 결혼할 여자한테 이토록 무관심한 남자가 또 있을까?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마샤의 믿음을 저버리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단 말인가?"

"당연히 관계가 있죠!"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네이슨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갈겨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네이슨은 정신이 나갔느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마샤와 난..."

"마샤 그랜트와의 관계 따위엔 관심 없어요." 그녀는 비참한 심정으로 네이슨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당장 나가 줬으면 하는 것뿐이라고요. 다시는 찾아오지도 말아요. 난 자유롭고 싶어요, 네이슨. 몇 주일 전까지만 해도 난 자유로웠어요. 아무리 당신이라지만 내 의사를 존중해 줄 정도의 양심은 남아 있었으면 고맙겠군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참으며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주워섬겼다. 그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창밖에서 구구거리는 비둘기의 울음소리가 신경을 자극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침묵이 감돌았다. 네이슨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간신히 체중을 지탱하고 서 있으면서도 그녀는 네이슨의 시선을 피하려 들지 않았고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네이슨은 입을 꽉 다물고 휙 돌아서더니 싸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나가 버렸다. 줄리아는 발밑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멍청히 서 있었다. 희미하게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에서 일시에 긴장이 풀어졌고 그녀는 무너지듯 의자에 쓰러져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8

월요일부터 날씨는 차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태풍이 한차례 지나갈 성싶었다. 저기압성 기후의 전형적인 날씨가 계속되었다. 목요일 오전 진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줄리아는 땀에 젖어 버렸다. 오늘 하루도 꽤나 덥겠구나 싶어 속으로 혀를 차면서 그녀는 서류함 위에 달린 선풍기의 스위치를 틀었다. 몹시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나마 환자들의 짜증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줄리아는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책상 위의 차트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아직도 네이슨의 생각으로 복잡하기만 했다. 네이슨과 만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돼가고 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던 말에 차갑게 일그러지던 그의 얼굴이 평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 자신 역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지만 갈가리 찢긴 자존심을 한 조각이라도 움켜쥐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찰실 문이 열리고 굵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늙은 농부가 들어왔다.

그는 모자를 들어올리며 빙긋 웃더니 가까이 다가와서 예약자 명단을 들여다본다. 일단 그의 서류를 뽑아 놓은 다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환자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환자들을 맞는 로란드의 태도는 변함없이 침착하고 상냥했다. 그러나 한 젊은 임신부의 진찰을 돕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로란드의 얼굴에 떠오른 피로와 짜증을 알아차렸다. 참기 어려운 더위가 로란드에게서 평소의 활력을 빼앗고 있는 모양이다. 자기도 눈을 떴을 때부터 혼신의 힘을 다해 겨우 지탱하고 있으면서도, 줄리아는 로란드가 몹시 안쓰럽게 느껴졌다. 워렌과 모파니에서 만나기로 한 점심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전 근무는 힘들고 맥이 빠졌다.

"오늘은 내가 늙었다는 걸 실감하겠군." 대기실이 비자 로란드는 기운 없이 웃어 보였다. 그는 줄리아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오전근무가 끝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려 보긴 난생 처음이오."

줄리아는 서류함 앞에 서 있다가 그를 돌아다보고 딱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런 찜통 속에선 누구라도 배겨나지 못할 거예요."

"문을 닫을 시간인가?" 시계를 보는 것도 귀찮다는 투로 그가 물었다. 줄리아는 벽에 붙은 전자시계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5분 일찍 닫는다고 불평할 사람이 있을까요?"

"적어도 나만은 절대로 불평하지 않겠소." 그가 팔걸이를 짚고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 나갑시다."

로란드가 가운을 갈아입으러 안으로 사라지고 나자 줄리아는 재빨리 핸드백을 열었다. 그녀가 콤팩트를 들여다보며 얼굴을 매만지는데 로란드가 나왔다. 그는 콤팩트를 닫고 핸드백을 챙기는 줄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점심 먹으로 집에 갈 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건물 밖으로 나서는데 그가 물었다.

"워렌과 만나기로 했어요."

"최근 들어 그 사람과 자주 만나는 것 같더군." 열쇠 꾸러미를 포켓에 집어넣으며 그가 눈썹을 찡끗해 보였다. "내가 모르고 있는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니오?"

"난 워렌이 좋아요. 같이 있으면 기분이 가벼워지거든요." 그녀는 우물쭈물 대꾸했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라서 유감이지만"

로란드가 뭐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주차장까지 걸어 나온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차에 올랐다.

그늘에다 세워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안은 말 그대로 찜통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녀는 모파니 레스토랑을 향해 중심가로 차를 몰았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부근에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닷새째 되풀이되는 현상인데도 돈필드 주민들이 고대하는 비는 쏟아지지 않았다.

모파니 레스토랑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열기 속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줄리아는 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웠다. 옥외에 놓인 테이블 사이를 헤치고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짧은 동안에도 햇볕은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그러나 일단 냉방이 된 실내로 발을 들여놓자, 열이 오른 이마 위에 얼음주머니라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워렌과 약속한 테이블은 언제나처럼 홀 뒤편에 조용한 장소였다.

"시간을 내줘서 고맙소, 줄리아" 식탁에 마주앉아 워렌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빨리 주문을 할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운 제의로군요. 근무 시간에 늦고 싶진 않거든요."

줄리아는 그가 넘겨준 메뉴를 황급히 훑어 내렸다. 워렌은 넙치 구이를 짚었지만 그녀는 샐러드 쪽이 더 좋았다. 조세프가 주문을 받아적고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줄리아는 편안한 자세로 레스토랑 안에 흐르는 감미로운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몹시 지쳐 보이는군." 한참 만에 워렌이 딱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성 들여 화장을 했지만 눈가의 그늘을 숨기기엔 부족했던 모양이다.

"더워서 그래요." 그녀는 딴청을 부렸다. "비라도 왔으면 좋겠는데"

워렌이 어린애처럼 웃었다. "비가 오면 우리 레스토랑은 파리만 날릴 걸"

"그런 뜻이 아녜요." 그녀도 덩달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행복해지기란 불가능한 일이죠."

"당신은 웃을 때가 훨씬 아름답소." 그는 돌연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테이블 너머로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그런데 통 웃질 않더군."

뭔가 즐거운 농담으로 응수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덮고 있는 워렌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네이슨 코르베의 여자 친구가 돌아왔소." 예기치 않은 워렌의 한마디에 그녀는 고압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뻣뻣해지고 말았다. "한 시간쯤 전에 코르베 씨가 오늘 저녁에 두 자리를 예약하겠다고 전화를 했소."

줄리아는 천천히 손을 뺐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 사람한테는 관심이 없어요."

"가망이 있는데!"

워렌의 미소는 또 다른 부담이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조세프가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줄리아는 자기가 주문한 샐러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싱싱하고 푸짐했지만 마샤 그랜트가 하니웰에 버티고 있을 걸 생각하니 통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언제쯤 되어야 껄끄러운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머니께서 편지를 보내셨는데 당신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더군." 워렌의 음성이 그녀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워렌을 쳐다보았다.

"내 얘길 했군요?"

"난 당신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소. 왜 그러느냐고 캐묻는 데야 당할 재간이 있어야 말이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 달쯤, 나랑 며칠 더반에 다녀오지 않겠소?"

워렌의 가족을 만나다니 상상만 해도 움츠러드는 기분이다. 공연히 특별한 관계라고 지레 결론을 내릴까 봐 두렵기도 하고, 가족들이 성급하게 판단해 버리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11월까지는 틈을 낼 수가 없어요."

"글쎄, 당신이 부탁만 한다면 로란드가 며칠 쉬는 정도는 쾌히 승낙해 줄 걸로 믿는데"

꼼짝없이 궁지에 몰린 셈이었다. 자기 표정이 지금 어떨지 넉넉히 짐작이 갔다. "나도 로란드가 거절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도..."

"이봐요, 줄리아" 그녀는 머뭇거리는 이유를 눈치 챈 워렌이 끼어들었다. "우리 가족을 만난다고 해서 꼭 나와 결혼해야 한다는 건 아니오!"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머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렸어요?"

"내가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것 외엔 다 말씀드렸소."

"그분이 어떤 결론은 내리셨을지는 묻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녀는 다소 씁쓸하게 대꾸했다. 그의 눈빛이 개구쟁이처럼 반짝였다.

"전에도 다른 여자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적은 많았지만 막상 결혼까지 간 적은 없소."

"맙소사!" 그녀는 기가 막혀서 피식 웃고 말았다.

"샐러드가 초절임이 되기 전에 어서 들어요." 그가 놀려댔다. 줄리아는 억지로 포크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다른 손님들도 쾌적한 실내를 떠나기가 못내 아쉬운 듯 얼른 일어날 눈치가 아니었다. 곁에 앉은 사람들이 커피를 또 주문하는 것을 보자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손목시계는 2시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가야겠어요." 냅킨을 입 언저리를 두어 번 꼭꼭 누른 후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더반에 가자는 얘기 농담이 아니니까 잘 좀 생각해 봐요." 그녀는 따라 레스토랑을 나오며 워렌이 중얼거렸다.

"그러죠." 그녀는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 이마에 손을 갖다 대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곧 연락해 주겠소?"

"가능하면 빨리 알려 드릴께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대답은 이미 정해진 뒤였다.

절대로 워렌의 가족을 만날 수는 없다. 그리고 워렌과 결코 맺어질 수 없으리란 것도 명백했다. 그를 좋아하고 그의 자상한 배려가 고맙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진료실로 돌아오는 그녀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녀의 머릿속에 펼쳐지는 미래의 그림은 쓸모없는 황무지처럼 쓸쓸하기만 했다. 그러나 네이슨을 마음속에 묻어 두고 있으면서 워렌과 결혼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워렌처럼 좋은 사람에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는 없다. 설사 결혼을 한다 해도 둘 사이엔 네이슨이란 그림자가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 파멸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일요일이 되자 더위는 절정에 달했지만 비가 올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줄리아는 정원의 꽃들이 무색하도록 축 처져 버렸다. 접시를 씻어서 치울 기력조차 없는 지경이었고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누워 있어 봐야 점점 힘들어질 게 뻔했다. 도대체 뭘하면 좋을까 하고 이 궁리저 궁리 하는 게 전화벨이 숨넘어갈 듯 울리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손을 뻗는데도 힘이 들었다.

"차라도 마시러 와요." 엘리자베스의 음성이었다. "로란드는 병원에 갔어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라구요."

줄리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보다야 백배 낮다 싶어 그녀는 엘리자베스의 제의를 쾌히 받아들였다. "30분만 기다리세요."

스폰지를 차가운 물에 적셔 얼굴을 닦아낸 줄리아는 끈 달린 레몬 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빗다 보니 네이슨이 자연스럽게 풀어 내린 머리를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정말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정확히 30분 후에 그녀는 로란드의 집에 닿았다. 자카란다 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워 놓고 그녀는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분을 늘어놓은 베란다에 엘리자베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유, 너무 너무 고와요." 얼싸안을 듯 그녀를 안으로 맞아들이며 엘리자베스는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일요일 오후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까 참담한 기분이 들더라니까요. 당신도 혹시 그렇지 않나 싶었죠."

"실은 워렌을 만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취소에 버렸어요." 널찍한 거실에 발을 들여놓으며 줄리아가 설명했다. 푹신한 소파를 양 옆으로 하고, 작은 탁자 위에 찻잔과 스콘 접시가 놓여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아끼는 꽃무늬 찻잔에 조심스럽게 차를 따랐다. 그녀는 갓 구워낸 스콘을 집어 줄리아에게 권했다. 엘리자베스와 함께라면 언제든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재치있고 박식하지만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사태의 판단이 빠르고 사소한 일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감각도 갖추고 있었다.

"어째 좋아 보이지 않아요, 줄리아" 차 주전자와 스콘 접시가 거의 동시에 비어갈 무렵 엘리자베스가 심각하게 뇌까렸다. "지난번에도 꼭 3년 전에 여기 왔을 때처럼 보였거든요."

대꾸할 말이 없었다. 누군가 목을 죄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피해 무릎 위에서 깍지 낀 손으로 눈길을 떨구었다.

"아직도 네이슨 코르베를 사랑하고 있군요." 엘리자베스의 딱 부러질 듯한 결론은 그녀를 더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솟구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 줄리아, 가엽게도!" 엘리자베스가 머리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그녀의 상냥한 위로가 줄리아의 슬픔을 더욱 부채질했다. 줄리아는 얼굴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격하게 흐느꼈다. "그래도 살긴 하겠죠."

그래도 살겠지! 그 한마디는 줄리아의 묘비명이나 마찬가지였다. 5년 전에도 똑같은 얘기를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만큼 쉽지가 않을 것 같았다. 스스로가 불쌍하게 생각되는 걸까? 아냐, 적어도 자신에 대한 연민은 금물이다! 그럭저럭 울음이 멎기는 했지만 가슴에 얹혀진 바위 덩어리는 여간해서 내려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어떻게 할 거죠?" 엘리자베스가 수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수시로 네이슨과 그...그의 부인을 만나게 될 게 뻔한데 어떻게 내가 돈필드에 계속 머물 수 있겠어요?"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떨렸지만 그녀는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절대로 성급하게 굴면 안돼요, 줄리아" 엘리자베스가 온화하게 타일렀다. "네이슨이 아직 결혼한 건 아니잖아요."

줄리아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희망은 어차피 사라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네이슨은 마샤와 결혼할 것이다. 마샤가 자기 입으로 당당히 밝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줄리아도 끼어들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었다. 더구나 마샤와 같은 좋은 조건을 갖춘 여자와 어떻게 상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차도를 구르는 자동차의 소음이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런데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또 차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로란드가 왔나 봐요." 엘리자베스가 들뜬 표정으로 창가에 다가서더니 밖을 내다보았다. "그래도 생각보단 일찍 돌아 온 셈...어머나!" 그녀는 깜짝 놀라며 레이스 커튼을 툭 떨어뜨렸다. 줄리아를 불안하게 곁눈질하는 폼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네이슨과 그 여자도 같이 왔어요."

줄리아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비틀비틀 일어났다. 어디로든 좋으니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옆문으로 나간다면..., 아차! 차를 집 앞에 세워 놓았으니! 세 사람이 차를 못 보고 지나쳤을 리는 없다. 그러니 놀란 토끼처럼 달아났다가는 비웃음만 살 게 분명했다.

"엘리자베스!"

로란드가 큰소리로 불렀다. 줄리아의 얼굴은 아예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그녀는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 들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

"여기 있어요, 여보!" 줄이아에게 얼른 안심하라는 눈짓을 해놓고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이내 로란드와 네이슨이 거실로 들어왔다.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쳤길래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모셔 왔소." 로란드는 줄리아를 향해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마샤, 이쪽은 우리 집사람이오. 여보, 마샤 그랜트 양을 소개하지"

"뵙게 되서 정말 반가워요, 드 넥커 부인"

마샤의 음성은 꿀이라도 바른 듯 달콤했지만 줄리아는 엘리자베스의 반응을 살필 정신조차 없었다. 이미 네이슨의 성난 눈빛이 그녀는 사로잡고 있었다.

"줄리아 핸더슨 양은 구면이 아니던가, 마샤?" 로란드가 말했다. 줄리아는 등줄기가 빳빳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마샤의 살피는 듯한 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차를 새로 끓여야 되겠군요. 편히들 앉아요." 엘리자베스가 용케 침묵을 깨뜨렸다.

"내가 돕죠, 엘리자베스" 단 몇 분만이라도 감옥 같은 거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일념으로 줄리아는 서둘러 쟁반을 챙겨 들고 엘리자베스의 뒤를 따랐다.

"미안해서 어쩌나" 주방으로 들어오자 엘리자베스가 숨죽인 음성으로 소근거렸다. "당신 기분이 얼마나 엉망일지 짐작하고도 남아요. 저 여자까지 끌고 오면서 로란드가 왜 전화도 한번 못했는지 모르겠소!"

"공연히 마음 쓰지 말아요." 줄리아는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지금 돌아가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얼른 차 준비나 하죠."

"미안해요, 나도 참! 내가 당신 오후를 망쳐 버렸잖아요!"

"엉뚱하긴!" 소매를 걷고 앞으로 다가서며 줄리아는 살짝 눈을 흘겼다. ", 그 잔들은 내가 헹굴께요. 그리고 나머지 잔들이 어디 있는지 좀 가르쳐 주세요."

"그 뒤에 봐요. 똑같은 무늬가 있을 테니까" 커피포트에 물을 채워 스위치를 꽂으면서 엘리자베스가 대꾸했다.

엘리자베스를 돕는다는 핑계로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줄리아의 신경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웅얼거림에 쏠려 있었다. 간간이 구르는 듯한 마샤의 웃음소리가 대화를 중단시키곤 했다. 줄리아에게는 여간 신경이 곤두서는 소음이 아니었다. 생각하기도 싫고, 느끼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하얀 바지와 라임 색 셔츠 차림의 눈부신 마샤의 미모가 문득문득 떠올랐다. 마샤가 자신의 관리를 과시라도 하듯 그 유연한 팔을 네이슨에게 두르고 있던 모습 또한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다.

, 하느님, 내가 왜 더 이상 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향한 갈망으로 끝없이 괴로워해야 하죠? 어째서 마샤가 그를 행복하게 해주리란 사실을 믿기가 이다지도 힘이 든단 말입니까?

"다 됐어요?" 잠시 후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줄리아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이죠."

"착한 아가씨군요!"

엘리자베스는 스콘과 차를 올려놓은 쟁반을 들었다. 줄리아는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고서야 그녀의 뒤를 따라 주방을 나섰다.

"제가 들어 드릴까요?" 두 사람이 거실로 들어서자 네이슨이 정중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육이 팽팽히 드러나는 짧은 티셔츠와 회색 바지 차림의 그를 보는 순간 줄리아는 심장이 튀어나오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니, 나 혼자로도 충분해요. 고마워요, 네이슨" 엘리자베스가 상냥하게 대꾸했다. "여기다 놓는 게 좋겠군요. , 이리 가까이들 오세요."

네이슨은 마샤 옆에 다시 앉았다. 엘리자베스는 손님들 시중을 들기에 편하도록 테이블 뒤에 자리를 잡았다. 자기 곁으로 다가앉은 줄리아에게 로란드는 온화하면서도 아버지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보냈다.

"집안 분위기가 그만이군요, 드 넥커 부인" 마술에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묵묵히 찻잔만 기울이고 있는데 마샤가 침묵을 깨뜨렸다. "특히 옛 것과 새 것들을 적절히 조화시킨 면이 돋보였다. 이런 실내 장식 솜씬 요하네스버그에서도 드물어요."

"일부러 디자인한 게 아니라 늘어놓다 보니까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이에요." 마샤야 미처 느끼지 못했겠지만 평소답지 않게 엘리자베스의 말 속에는 가시가 숨어 있었다. "내 목표는 언제나 밝고 포근한 가정을 꾸미는데 있어요. 남편이 환자들한테서 겨우 놓여나면 마음 편히 쉴 공간이 절실하니까요."

"의사들은 거의 숨 돌릴 틈도 없이 격무에 시달리죠. 하지만 고맙게도 당신 경우는 예외일 거예요, 네이슨" 마샤는 정성스럽게 매니큐어를 바른 매끈한 손을 네이슨의 허벅지에 올려놓으며 드 넥커 부부를 향해 자랑스러운 듯 지껄여댔다. "우리 아빤 요하네스버그에 새로 세워질 병원의 수술실을 네이슨에게 맡기고 싶어 하셔요. 8시부터 5시까지만 근무하면 그 후엔 자유시간이라서 편하죠. 주말이야 물론이구요."

로란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과연 그게 그렇게 좋을까 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멋진 직업이오, 네이슨"

"완공되면 좋은 병원이 될 겁니다." 네이슨이 사무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줄리아는 그가 어쩐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럼 그 자리를 맡게 되는 게 확실하군요?" 엘리자베스도 적당히 관심이 있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좋은 제안이 들어왔지만 아직 생각해 보는 단계입니다."

짧은 순간 네이슨과 눈길이 부딪쳤다. 줄리아는 새파란 눈동자 속에 떠오르는 분노의 빛을 읽었다. 왜 아직도 내게 화를 내고 있을까? 자기도 그날 일은 옳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 그녀가 나가 달라고 한 게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최상의 길이었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걸까?

"아빤 네이슨이 그자리를 사양한다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셨어요. 네이슨도 잘 알고 있죠." 마샤의 달콤한 목소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새 병원은 설비나 인력 면에서 전국 최고로 꼽히게 될 거요."

그리고 진료비도 가장 비싸겠지. 줄리아는 데미안 스콰이어즈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란드와 엘리자베스 역시 몹시 속이 거북한 눈치였다.

"고마웠어요, 엘리자베스. 전 그만 실례해야겠어요." 줄리아는 어서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 있는 곳까지 바래다줄게요." 자기도 답답한지 엘리자베스는 절호의 기회라는 듯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네이슨은 고개만 끄덕였고 마샤는 쌀쌀맞은 눈초리로 힐끗 쳐다보았을 분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로란드는 다정하게 그녀를 감싸며 아버지가 딸에게 하듯 뺨에 작별 키스를 했다. 가슴속까지 훈훈해진 줄리아는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풀밭 위로 길게 나무 그늘을 던져 주고 있었다. 네이슨과 마샤가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를 옭아매고 있던 사슬이 겨우 풀리는 느낌이었다. 줄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샤 부녀가 네이슨의 장래를 치밀하게도 엮어 놓았군요. 네이슨도 굳이 반대할 눈치는 아닌 것 같고. 그런데 나 어째 이름이나 떨쳐 보려는 수작처럼 생각되요." 줄리아가 차를 세워 놓은 길가로 걸음을 옮기며 엘리자베스는 못마땅한 투로 혀를 찼다.

"마샤 그래트가 얘기한 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죠. 네이슨은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걸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환자에게 기꺼이 최선을 다하고 싶기 때문에요. 유명해지겠다는 야심 따윈 사소한 것에 불과해요."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연민의 빛이 잠깐 스쳤다. "사람들이란 바뀌게 마련이에요."

"알아요." 문 앞에서 발을 멈춘 줄리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다들 변하죠. 하지만 난 한 인간의 가치관이 그렇게 무서운 폭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걸 믿기가 겁이 나요."

"당신 판단이 옳기를 바래요." 엘리자베스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네이슨에 대한 첫인상이 변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도 안심이겠어요."

줄리아는 비통한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5년 전에도 그녀는 네이슨이 정상의 위치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포기했다. 이번에도 물러서는 이유는 마찬가지다.

 

9

로란드의 집에서 네이슨과 마주친 지도 거의 2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줄리아로서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우연이었다. 며칠 동안 줄기차게 내린 폭우로 돈필드 일대의 도로망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불안과 비에 젖은 듯한 우울은 결코 날씨 탓이 아니었다. 어쩐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화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수요일 오후, 진찰실로 들어온 줄리아를 보자 로란드는 초조하게 책상 위에 놓인 비망록을 두들겼다. 그녀의 우울한 기분이 그대로 옮겨지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무슨 일이죠?"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요." 무뚝뚝하게 대꾸한 로란드는 기분을 달래려는 듯 의자를 뒤로 젖혔다. "토미 듀란트의 경과 때문에 네이슨과 얘길 해야 했소. 그런데 하니웰에 전화를 했더니 벌써 이틀째 요하네스버그에 머무르고 있다는군."

"토미 듀란트의 회복이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나요?" 네이슨의 이름을 듣자 당장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속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염려하는 건 환자 문제가 아니오." 로란드는 안경을 벗더니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그는 도로 안경을 썼다. "자기 입으로 이번 주엔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해놓고 훌쩍 도망쳐 버려서 몹시 짜증이 나는 게 문제지"

"뭔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랬겠죠." 줄리아는 자기가 네이슨을 변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네이슨의 행동이 뜻밖이라는 것은 그녀 자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랬겠지" 그만두자는 듯 손을 내저으며 그가 겨우 동의했다. "첫 번째 환자를 들여보내요."

시키는 대로 따르면서도 그녀는 침착한 태도와 온화한 표정 뒤에 숨은 파문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그녀 쪽이 더 심했다. 어째서 로란드에게 언제든 괜찮다고 장담해 놓고 연락도 없이 요하네스버그로 가버렸을까? 혹시 마샤 때문에 예정에도 없는 일을 벌이게 된 건 아닐까?

줄리아는 절실하게 휴식을 필요로 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그녀는 전부터 벼르던 책을 들고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 주질 않았다. 왜 운명은 이렇게도 심술을 부리는 걸까? 그녀가 애써 가꾸어 온 평화로운 삶이 또 네이슨이란 남자 때문에 흔들려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지난 2주일 내내 그녀는 혹시 임신이나 하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했었다.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겨우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그건 또다른 후회를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는 좌절감이 엄습해왔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내가 미쳤지! 그녀는 다시 책에 신경을 집중시키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때 마침 바로 집 앞에서 차가 멎는 소리가 들렸다.

네이슨이다! 그녀는 페라리의 엔진 소리를 알아차렸다. 곧이어 묵직한 발소리가 차츰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현관을 노크하는 소리가 흡사 천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였다.

문을 여는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러나 계단에 우뚝 선 네이슨의 모습과 마주치는 순간은 아예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몹시 우울한 표정이었다. 입 언저리에 우묵하게 패인 그늘이 한층 깊어진 것으로 보아 지칠 대로 지친 게 분명했다. 회색 양복저고리는 되는 대로 한쪽 팔에 걸친 데다 셔츠 소매는 팔꿈치 위까지 말아 올려져 있었다. 셔츠 위 단추가 풀어져서 넥타이가 축 늘어진 품이 영 후줄근했다.

측은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는 마음속으로 황급히 머리를 저었다. 약해져서는 안 돼!

"들어가도 되겠소?" 그의 묵직하고 억제된 음성이 그녀의 상념을 깨뜨렸다.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눈빛은 어두웠다.

"안 들어온다면 더 고맙겠군요."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네이슨의 짙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제기랄! 이봐요, 줄리아. 난 이틀 동안 요하네스버그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소. 옷을 갈아입으러 농장에 들를 틈도 없이 왔단 말이오. 이런 푸대접을 참고 견딜 기분이 아니오!"

그가 성큼 들어서는 바람에 그녀는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의 팔을 꽉 움켜 쥔 네이슨은 문을 닫고 그녀는 강제로 라운지로 끌고 가더니 재킷을 곁에 놓인 의자에 집어던졌다.

"놓지 못하겠어요?" 그녀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네이슨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돌려 세워져 그의 얼굴과 마주쳤을 때의 고통에 비하면 사소한 아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게임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줄리아, 이젠 단념하는 게 좋아!" 그가 짐승처럼 무시무시하게 으르렁거렸다.

게임? 게임이라고 표현한다면 책임이 있는 쪽은 오히려 네이슨이 아닌가! 그에게 잡힌 팔이 저릿저릿하게 아팠다. 그러나 줄리아는 조금도 위축되는 기색이 없이 당당하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난 게임 같은 걸 즐기는 사람이 아녜요."

"그래?" 그가 이를 갈듯 응수하더니 갑자기 손을 탁 놓아 버렸다. 줄리아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뒤에 있던 의자를 붙들고서야 몸을 가누었다. "당신은 내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소. 아니, 기꺼이 응했다는 게 옳지. 그런데 다시 만났을 때 보인 그 태도라니, 이유가 뭐요?"

"그래야 당연한 일이었으니까요. 날 위해서 뿐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도요."

네이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좀 더 숨김없이 털어놓을 수는 없소?"

하느님!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내가 겪은 죄책감과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안돼, 감히 설명한다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그녀는 가장 납득할 만한 이유라고 떠오르는 것부터 얘기 하자고 결심했다.

"워렌이 결혼신청을 했어요. ..."

"당신은 워렌 챈들러와 결혼할 수 없소!" 그녀가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네이슨이 사납게 가로챘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난 누구든 내 마음에 드는 상대와 결혼할 자유가 있어요.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내게..."

"당신은 워렌을 사랑하지 않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의 일격이었지만 그녀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언제부터 내 감정을 평가할 권리를 갖게 된 거죠?"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소, 줄리아!" 그의 분노는 전혀 의외였다. 가슴속이 바작바작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백지장같이 질린 얼굴에서 급기야 식은땀이 솟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시커먼 회오리바람이 이는 것 같아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네이슨의 면전에서 쓰러질 수야 없지 않은가.

"당신, 미쳤구요!" 그녀는 온몸을 떨며 소리쳤다.

"내가 미쳤다고, 줄리아?" 그의 얼굴이 냉소로 일그러졌다. 눈빛이 야릇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는 타이를 풀어 헤치고 남은 단추를 모조리 풀어 버렸다. 갈색으로 그을린 가슴이 드러나면서 곱슬거리는 털이 그녀의 눈에 확 들어왔다. "그래서 그때 당신의 반응은 단순한 육체적 행위였다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소?"

"그래요. 그냥 육체적인 욕구에 불과했다구요!"

"거짓말도 이만저만이 아니군." 그가 한층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늘 그랬소. 앞으로도 변함이 없겠지"

그녀는 본심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 "당신은 마샤와 결혼하잖아요. 그런데 왜 날 가만히 두지 않는 거예요?"

그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누가 당신더러 내가 마샤와 결혼할 거라고 했소?"

줄리아는 끝내 가볍게 입을 놀리고 만 자신을 마음속으로 저주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뿐이다.

"마샤가 그런 암시를 하더군요. 아니, 똑똑히 밝힌 거나 다름없어요. 데미안이 날 하니웰에 데려갔던 날이었어요."

나오지도 않는 말을 억지로 짜내느라 그녀의 음성은 꽉 잠 겨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했군." 네이슨의 빈정거림에 그녀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아녜요?" 혹시나 싶은 마음에서 그녀는 물었다. "마샤와 결혼하지 않나요?"

", 세상에!" 네이슨이 외쳤다. 마치 때리기라도 할 듯 손을 치켜 드는 통에 그녀는 기겁을 하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겨우 분을 삭이며 도로 손을 떨어뜨렸다. "날 손톱만큼도 믿지 않는군. 다른 여자와 결혼할 예정이면서 당신과 관계를 가지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내가 그런 인간인 줄 믿는 거요?"

"마샤가 거짓말을 했다고 믿을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곧 결혼하리라고 짐작한 게 당연하잖아요!"

그녀는 오히려 자기 쪽에서 화를 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당신과 마샤가 만난 지도 꽤 됐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하니웰의 새 주인이 된 후로 마샤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구요."

네이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점점 겁이 난 그녀는 마음속으로 방어태세를 취했다. "질투를 하고 있소?"

"질투라뇨! 그건 억지예요." 그녀는 홱 돌아섰다. 가슴 속이 뜨끔했다. 네이슨에게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 사실이야. 지난 몇 주 동안 질투라는 놈은 그녀의 가슴속에서 암세포처럼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상태에서는 아직 시인하고 싶지가 않은 사실이었다.

"당신은 내가 프로포즈를 했던 유일한 사람이오. 무슨 이유로 최후의 순간에 그렇게 돌아서 버렸지, 줄리아?"

처음의 논쟁이 이런 식의 심문으로 이러지리란 걸 처음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네이슨이 마샤와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말에 너무 놀라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질문은 전기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이 그녀를 순간적으로 멍청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지금도 믿을 수가 없소.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으리란 결론을 내렸지" 줄리아가 입을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뇌까렸다. 그의 음성이 무서운 울림으로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나가요, 네이슨!" 그녀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붙들고 있는 의자가 부러져 나갈 것만 같았다. "부탁이니까 그만 가줘요. 날 좀 편하게 해달란 말예요!"

"줄리아..."

"싫어요!" 그녀는 자기 어깨 위에 닿는 네이슨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그를 향해 돌아선 줄리아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날 내버려 두라니까요!"

방안의 공기는 금방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일생일대의 결투를 눈앞에 둔 사람들처럼 둘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꽉 다문 네이슨의 입은 지는 쪽은 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사실을 알 권리가 있소. 이건 내가 스스로 부여한 권한이오. 지금 당장 설명하시오!"

네이슨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전신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데미안 스콰이어즈의 말이 떠올랐다. 진실을 털어놓아야 네이슨이 냉혈동물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던가.

그녀는 가슴속에서 애써 쌓아올린 성벽이 일시에 무너져 가루가 되는 소리를 들었다. 장거리를 무리하게 달려온 끝에 지칠 대로 지쳐서 이젠 한 발자국도 더 떼어 놓을 기력이 없는 것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네이슨이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더는 버틸 기력이 없다. 그후의 여파를 생각해보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줄리아의 이성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맥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목이라도 조를 듯 강렬하게 내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줄리아는 멍청히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줄리아!"

"그래요, 바라는 대로 다 얘기하죠. 더 숨겨봐야 뭐하겠어요. ..." 목구멍에 뜨거운 기운이 왈칵 치솟는 통에 줄리아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결혼식이 두어 달쯤 남았을 때, 할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그분이 날 위해 희생하신 걸 생각하니까... 남은 시간만이라도 곁에서 보살펴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네이슨은 입도 떼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그녀는 혓바닥이 입천장에라도 들러붙어 버린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5년 전에는 운도 떼지 않았지?"

믿지 못하겠다는 걸까? 혹시나 싶어 돌아선 그녀는 분노로 일그러진 네이슨의 얼굴과 마주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떨리는 두 다리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창틀에 기대섰다.

"내가 그렇게 고백했더라면 당신이 어떻게 나왔겠어요?"

"그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괴로워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거요." 예상치 못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항상 그런 대답이 나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막연한 추측이 바로 현실로 굳어지자 더욱 불안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우린 결혼할 수 있었소." 그가 덧붙였다. "유럽행은 연기했겠지"

"그런 기회가 매일 찾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네이슨. 우리 둘 다 그걸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맥없이 웃어 보였다. "난 당신 장래를 가로막고 싶진 않았어요."

"세상에!"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창틀에 바싹 붙어 움츠린 그녀 앞에 네이슨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우뚝 버티고 섰다. "그래서 결혼이 코앞에 닥쳤는데 일방적으로 파혼통보를 했소?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나 알고 있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가느냐 주저앉느냐 하는 결정은 내가 하는 거지 당신 몫이 아니었단 말이오, 줄리아!" 그가 대뜸 그녀의 양 어깨를 움켜잡더니 목이 부러지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구 흔들어댔다. "당신을 날 놓고 혼자 판단할 권리가 없어!"

"당신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그대로 따랐을 뿐이에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네이슨이 그녀를 세차게 밀어젖히는 바람에 그녀는 휘청휘청 뒤로 밀려났다.

"날 위한 최선의 방법? 이런 빌어먹을!" 그가 이를 갈았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마구 머리를 쥐어뜯던 그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핀에 찔린 곤충 표본처럼 꼼짝도 못하고 떨며 서 있었다. "내가 그 정중하고 사무적인 쪽지를 받고 나서 겪었을 갈등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소? 변명이라도 듣고 싶어서 미친 듯이 당신을 찾아 헤매리란 걸 짐작도 못했소? 아니,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소?"

맙소사, 어떻게 이런 걸 묻는단 말인가? 네이슨이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으며 그를 위해 내린 결정이라는 걸 어떻게 알까? 괴로움에 싸여 방황하던 기억이 새롭게 그녀를 휩쌌다. 헤어지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잠을 설치며 뒤척였던가. 언제나 자신이 옳은 길을 선택했다고 자부해왔고, 그 확신 하나로 5년이란 세월을 버텨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결정이 옳았다는 느낌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네이슨의 분노는 어쩌면 정당한 것이 아닐까?

"미안해요." 그녀는 꽉 잠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할 말이 그게 전부요?" 그가 날카롭게 내뱉는다.

그녀는 발끈해서 시선을 옮겼지만 이내 움츠러들고 말았다. 파고드는 듯한 네이슨의 눈길이 그녀에게서 합리적으로 사고할 능력까지 빼앗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럼 또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네이슨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멍청해져 있던 줄리아는 새롭게 엄습해오는 공포에 몸서리를 쳤다.

"이런, ..."

그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눈앞이 가물가물 흐려지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녀를 와락 끌어당긴 네이슨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통증을 느낄 정도로 거친 키스를 퍼부었다. 실컷 울고 싶었지만 목이 잠겨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차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쉽게 잊을 수 없는 형벌이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줄리아는 네이슨의 단단한 가슴에 안겨 있었다. 도망치려고 해봐야 고통만 더해질 게 분명했다. 그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다는 게 어떤 의지에서 나온 행위라기보다는 그저 탈진한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편이 옳았다. 그녀의 영혼 역시 조금씩 멍들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과연 내가 이런 아픔을 겪을 만큼 잘못을 저지른 걸까 하는 의혹이 머리를 든다는 사실이었다.

네이슨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를 놓아 주었지만 그 짧은 시간이 줄리아에게 있어서는 영원보다 길게 느껴졌다.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눈앞이 흐려져서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도 없었지만 그가 내뱉은 욕설은 그녀의 귓가에 따갑게 울렸다. 이내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세차게 현관문이 닫혔다.

그날 밤 줄리아는 뜬눈을 밤을 밝히고 말았다.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네이슨과의 일을 몇 번이나 곱씹어 봐야 했다. 한때는 그렇게도 옳다고 확신했던 일이 한 순간에 정반대로 뒤집어질 수도 있는 걸까? 그 해답을 찾기에는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싸여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 느낌 때문에 더욱 위축되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끙끙거리던 그녀는 창밖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질 때에야 자기가 깜박 잊고 지나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이슨은 자기를 철면피라고 생각했느냐는 의미의 비난을 퍼붓지 않았던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 예정이면서 그녀와 아무렇지도 않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인 줄 알았느냐고.... 그게 무슨 뜻일까? 그럼 마샤는 과연 어떤 존재란 말인가? 자기가 네이슨과 결혼할 거라고 당당히 밝히던 그녀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을까?

곰곰이 따져 보기엔 너무 지친 상태였다. 줄리아는 가물가물 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껏해야 3시간이나 잤을까. 눈을 뜨자 머리가 평소 무게보다 두 배는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간신히 일어나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를 대체 어떻게 지탱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뜨거운 커피와 두통약 덕분에 두통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피멍이 든 입술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립스틱을 고쳐 발라야 했다.

로란드는 틀림없이 이상한 눈치를 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네이슨과 약속이 있다면서 그가 병원으로 가고 나자 줄리아는 긴장이 풀려 자기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몸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에너지까지 깨끗이 빠져나가 버린 기분이었다. 온종일 날렵하고 싹싹하게 움직이던 노련한 간호사는 온데 간 데 없어지고 눈이 쑥 들어간 가련한 얼굴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그만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잠도 보충해야 했지만 일단은 혼자 심사숙고할 여유가 필요했다.

그러나 줄리아가 바라던 평화로운 저녁 시간의 꿈은 워렌의 뜻하지 않은 출현으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누굴 만날 기분은 아니었지만 두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생각해서 그녀는 워렌을 맞아들이기로 했다. 빨리 해결하면 할수록 양쪽에게 이롭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녀가 커피를 들고 라운지로 나가자 워렌이 등나무 벤치에 붙들어 앉혔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대수롭지 않은 얘기들이 오갔다. 아니, 의논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녀가 적절한 시간을 택하느라 화제를 두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쪽으로 유도했다는 편이 옳다. 그러나 워렌의 팔이 자신을 감싸려는 순간 더 이상 우물거려서 는 안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꼭 할 얘기가 있어요, 워렌" 그의 팔을 슬그머니 밀치며 그녀는 후회에 잠긴 음성으로 속삭였다. 대뜸 어두워지는 그의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 고개를 들어 차마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당신의 프로포즈에 얼마나 감동했었는지 알아 주셨으면 해요. 그때부터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봤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당신과 결혼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었어요. 처음부터 결과는 뻔한 일을 가지고 당신이 계속 미련을 갖게 만든다는 건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데 불과하죠. 난 당신이 좋아요, 진심이에요. 하지만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진 않아요."

"예상하고 있었소." 비교적 담담한 말투였지만 워렌의 입가에는 다분히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네이슨 코르베겠지.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소?"

그의 대꾸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더 이상의 회피를 허락하지 않는 선언에 가까웠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었다. 사실이었다. 아직도 네이슨을 향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남자도 그녀의 삶에서 네이슨이 차지한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미안해요, 워렌" 서로의 우정이 이런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머뭇거리고 있었던 자신을 책망하며 그녀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워렌의 상처입은 마음을 위로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은 항상 좋은 친구였어요. 늘 감사했어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워렌의 분노와 실망을 생각하니 차마 얼굴을 들 용기도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항의를 한다 해도 그녀로선 할 말이 없었다. 어떤 비난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그녀는 발밑에 깔린 카펫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워렌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정중히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항상 당신 친구로 남고 싶소.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주저 말고 부르기만 해요." 손을 놓고 일어서며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꼭 기억해요, 줄리아"

그녀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나가 버렸다. 차가 떠나는 소리를 듣고도 그녀는 한참이나 라운지에 그냥 앉아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워렌 때문인지 그녀 자신 때문인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네이슨 때문에 워렌을 보냈지만 네이슨이 돌아와 주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그녀에겐 아무도 없었다.

토요일 오후, 한시가 좀 지나서 집에 도착한 그녀가 차를 세우는데 집안에서 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네이슨일까? 숨이 턱에 닿아서 달려 들어갔지만 막 수화기를 집으려는 찰나에 뚝 끊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다시 벨이 울렸다. 그러나 데미안의 음성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반짝 떠올랐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뉴스가 있소." 거두절미하고 데미안은 본론부터 꺼냈다. "믿을 만한 사람한테 들은 얘긴데, 네이슨이 그 호화로운 병원의 자리를 거절했다더군."

"마샤가 좋아할까요? 혹시 그 일이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안 해도 좋을 말까지 해놓고 그녀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데미안이 말하기만 기다렸다.

"내 생각으론 네이슨은 이미 오래전에 손을 뗀 것 같소. 하지만 마샤는 이만저만 끈질긴 여자가 아니라서 말야. 네이슨은 지금까지 뭐가 어떻게 되든 전혀 개의치 않았소."

"왜요?" 가슴이 떨려서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뭣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확실한 단안을 내린 걸까요?"

"당신이 설명해 줄 수 있지나 않을까 했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또 머릿속이 마구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미래가 가시나무 위를 떠다니는 비누거품처럼 아슬아슬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나더러 뭘 어쩌란 말이야?

"네이슨에게 다 털어놓았소?" 데미안이 불쑥 물었다. 잠시 어리둥절했던 그녀는 겨우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얘기했어요."

"그런데?"

그때 네이슨의 행동을 기억해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말 한마디, 음성, 분노로 일그러지던 얼굴..., 밤낮없이 그녀를 괴롭히던 기억들이 아닌가. 과연 그 기억들을 깨끗이 지울 수가 있을까?

"불같이 화를 내더군요." 목이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그녀의 손가락은 네이슨이 사납게 공격한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겐 자기 장래를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꼭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그때로선 네이슨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한 거요."

"당신 생각이 아직 그렇다니 안심이에요." 떨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돌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바람에 그녀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날 네이슨을 만난 후로 걸핏하면 눈물이 쏟아지곤 하는 것이었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튼 내가 모든 걸 망쳐 버린 느낌이 들어요. 네이슨이 용서해 줄지 의문이군요. 그날 아주 불쾌해하면서 나가 버렸거든요. 그리곤 만나지도 못했고 연락도 없었어요. 어쩌면 좋을까요, 데미안?"

"글쎄, 충고랍시고 하기도 우습군. 아무튼 줄리아, 서두르는 게 좋을 거요." 데미안의 심각한 경고였다. "네이슨은 수일 내로 요하네스버그에 돌아와야 하오. 얼마나 스케줄이 빡빡한지는 당신도 알겠지"

"고마워요, 데미안"

막상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니 정말 고마운 건지 어쩐지 의심스러워졌다. 다음 행동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하긴 데미안의 말마따나 빨리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점차 짙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네이슨은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 줄리아는 솔직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와 마주서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머리털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5년 전에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녀의 차가운 통고는 네이슨을 오랫동안 분노로 떨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직도 네이슨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도 보장할 수 없었고, 그녀는 네이슨이 끈덕지게 늘어진 이유가 그저 앙갚음을 하겠다는 의도였던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웠다. 그렇다면 또 한 차례의 모욕을 감수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일단은 네이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날 오후, 줄리아는 또다른 반갑지 않은 전화를 받았다. 카랑카랑한 마샤 그랜트의 음성이 그녀가 얼마나 약이 올랐는지 짐작하게 했다.

"댁에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네이슨은 우리 아버지가 제의한 자리를 거절했어요. 이건 당신 책임이에요!"

마샤의 비난에 잠시 멈칫했지만 줄리아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군요.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런 화제는 입에 올린 적도 없는데요."

"그 제의를 거절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예요. 그런 기회가 또 올 줄 알아요? 틀림없이 후회하고 말겠죠." 마샤가 잔뜩 독이 올라 퍼부어댔다. "당신도 분별이 있는 여자라면 이기적인 욕구는 희생할 줄 알아야죠. 왜 네이슨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두는지 모르겠군요."

희생? 가슴속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었다. "난 내 인생의 황금기를 네이슨의 성공을 위해 희생했어요." 줄리아는 차디차게 대꾸했다. "하지만 모든 일엔 한계가 있는 법이죠. 이번엔 행복이 내게 미소를 짓는다면 멍청히 물러나진 않겠어요."

"네이슨이 당신한테 결혼이라도 신청할까 봐서요? 글쎄, 나하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꼴이군요." 마샤가 코웃음을 쳤다. "네이슨은 여자를 자기 목표에 이르는 디딤돌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녜요. 당신이란 여자가 그렇다고 정식으로 식도 올리지 않고 같이 살 타입을 아닐 것 같군요. 노력해 보는 거야 당신 자유지만 나중에 왜 진작 말리지 않았느냐고 날 원망하진 말아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마샤의 날카로운 비웃음이 귓가에 쟁쟁했다. 줄리아는 하니웰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10

토요다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부연 먼지가 비쳤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더니, 줄리아가 하니웰로 이어지는 포장도로 쪽으로 핸들을 꺾었을 무렵에 급기야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자신을 엄하게 꾸짖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이상,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네이슨과의 사이에 과연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지는 막연하지만 이대로 주저앉는다는 건 줄리아 자신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농장으로 가는 도로 양편에는 가축들의 캠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새로 세운 울타리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탓인지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었다. 차츰 거세진 빗줄기는 창문의 먼지를 흙탕물로 바꿔놓았다. 와이퍼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 위로 나무에 매단 전등 불빛이 느껴졌다. 어찌나 핸들을 움켜쥐었는지 기둥을 세운 베란다 앞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에는 손목이 시큰 거릴 지경이었다.

"지금부터야!" 스스로에게 경고한 그녀는 현관 계단 곁에 바싹 붙여 둔 빨간 페라리 뒤에 차를 세웠다.

줄리아는 키를 뽑고 차에서 내린 뒤 쏜살같이 빗속을 달렸다. 그러나 베란다의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흠뻑 젖어서 옷이 찰싹 들러붙어 버린 뒤였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불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또 불현 듯 그냥 갈까 하는 망설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젖은 머리를 대충 매만진 후 벨을 눌렀다.

곧 문이 열렸다. 네이슨의 얼굴이 코앞에 나타나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방금 샤워를 끝내 참인지 젖을 곱슬머리가 이마에 매력적으로 흩어져 있다. 흰 셔츠 앞자락은 허리까지 풀어지고 갈색 바지에 싸인 하체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화강암처럼 굳어진 무표정한 얼굴과 맞닥뜨리자 이제까지 그녀를 버텨 주던 용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뜻밖이군." 한참 만에 간신히 입을 뗀 그는 숨이 차서 할딱거리고 있는 줄리아를 아래위로 찬찬히 훑어본다.

반기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떨고 있다는 것만 눈치 채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약속한 기억은 없어요. 그렇지만 찾아와선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번갯불의 섬광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는 몹시 힘들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얘길 해야 돼요, 네이슨"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녀는 면전에서 문이 닫히지나 않을까 싶어 몹시 두려웠다. 다행히도 그는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거실 쪽을 손짓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치미는 화를 겨우 참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셰리주 한잔 하겠소?" 그가 창밖의 빗소리만큼이나 거친 말투로 물었다. 굶주린 사자 굴에 발을 들여놓은 꼴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유를 상기하면서 줄리아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침착해. 지금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는지 들키면 끝장이라구.

"좋겠죠. 고마워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받았다. 그러나 그가 술잔을 찾으러 가고 나자 또다시 소리 없이 떨림이 엄습해왔다.

도랑을 흐르는 빗물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녀는 방안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화도 서서히 고개를 드는 두려움을 씻어 줄 수는 없었다. 불쑥 하니웰에 찾아온 게 아무래도 실수 같았다. 지난번에 얼마나 혹독한 대접을 받았는지 잊어 버렸단 말인가.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녀는 침착하게 돌아서서 셰리주가 담긴 작은 술잔을 받아들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얼굴 근육이 굳어진 느낌이었다.

"건배!"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쭉 뻗으며 그는 줄리아를 향해 자신의 위스키 잔을 들어오렸다.

"건배!" 그와 좀 떨어진 소파 끝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으며 그녀 역시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그녀가 겨우 한 모금 목을 축인 반면 네이슨은 단숨에 절반이나 위스키를 비워버렸다.

피차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째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고 있는 줄리아의 눈에 네이슨의 벌어진 가슴팍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거만하고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네이슨은 야수적일만큼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진 줄리아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입을 열었다. "며칠 내로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가신다면서요?"

그 다음 순간 그녀는 자기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런 사실을 가르쳐 줄 유일한 인물이 누구라는 것쯤은 네이슨도 똑똑히 알고 있다. 데미안의 이름을 밝힌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일자리가 있으니 돌아가야지" 그가 피식 웃으며 뇌까렸다. 그녀는 얼른 방안을 둘러보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꽤 낡은 집이었는데 무척 잘 고쳤군요."

"마음에 든다니 고맙군."

세상에! 이따위 잡담이나 나누려고 하니웰까지 온 건 아닌데! 지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네이슨이 저렇게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이상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속이 뒤틀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녀는 다시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하니웰이 바쁜 일상에서 빠져나와 쉬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여겼나 보죠?"

"여길 사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한 생각이오." 그는 마저 잔을 비웠다. 의자 곁에 놓인 낮은 탁자 위에 술잔을 내려놓은 그의 눈 속에는 빈정거리는 빛이 역력했다. "이제 서두는 이 정도면 충분하오. 느닷없이 여기에 나타난 이유나 들읍시다."

"언제 떠나죠?"

"내일 아침이오."

그녀는 갑자기 절박한 느낌에 싸였다. 그래, 서두는 정말 이 정도로 충분하다. 더 이상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오늘 오후 늦게 마샤가 전화를 했어요." 예상대로였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불가사의한 네이슨의 표정에 압도되어 그녀는 누가 재촉하기라도 한 듯 급히 주워섬겼다. "바실 그랜트 씨가 제의한 병원의 자리를 거절했다면서요?"

"사실이오."

어디까지 얘기하면 좋을지 몰라 그녀는 일단 셰리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숨김없이 털어놓는 게 여러 모로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마샤는 내 탓이라고 우기더군요. 당신이 생각을 고치느냐 마느냐는 나한테 달렸다면서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당신을 틀림없이 후회할 거라나요." 그녀는 물끄러미 네이슨을 바라보았다.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가르쳐 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맞았소. 당신과는 무관한 일이오." 거칠게 내뱉은 그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마샤가 당신을 걸고넘어진다니 한마디 해두지. 난 축복받은 꼭두각시가 되기 싫어서 그 관대한 제의를 거절했소. 후회할 결정은 절대 아니오. 당신 탓이라고 한다면, 글쎄..."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냉랭하게 웃었다. "자기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지 못한 여자란 의례 그런 반응을 보이는 법이지"

그럴 듯했다. 그 문제는 이쯤에서 일단락 짓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보다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고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있다.

"..."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음성을 가다듬는 동안 그녀는 양손으로 잔을 꼭 싸쥐었다. 겨우 조금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작별인사도 않고 떠날 작정이었나요?"

네이슨은 소파에 파묻힌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푹 쉬고 있구나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줄리아는 언제라도 튀어오를 준비가 된 용수철처럼 그의 근육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게 마음에 걸렸소?" 정말이냐는 투로 그는 줄리아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내가 작별인사도 않고 돈필드를 떠난다는 게 당신에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나?"

"그래요." 그녀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려웠지만 그녀는 네이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거예요."

"어째서?"

그의 성급한 물음이 공허하게 울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를 향한 도전이자 동시에 경고였다. 지금은 감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니웰에 도착한 후 줄곧 찾고 있던 기회를 그가 제공한 셈이다. 그냥 놓쳐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내가 5년 전에 한 행동 때문에 내 스스로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설명할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요."

몇 번이나 연습했던 보람도 없이 그녀는 더듬더듬 쏟아놓고 말았다. 그러나 그건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네이슨이 확실히 알아듣는 게 중요했다. 바로 그것이 줄리아가 바라는 점이었다. "그날 저녁에 당신이 내겐 당신 미래를 결정할 권리가 없다고 했죠.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는데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 5년 전엔 그땐 당신의 미래를 가로막는..., 그게 내겐 너무 큰 부담이었어요."

하마터면 그녀는 들고 있던 술을 엎지를 뻔했다. 얼른 잔을 고쳐드는데 네이슨의 눈동자에 희미한 의혹의 그림자가 스쳤다.

", 물론 당신에겐 앞뒤 없는 변명으로 들릴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날 필요로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할머니 곁을 떠날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신경외과 전문의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포기하도록 놓아 둘 수는 더더욱 없었죠. 당신에게 의논했더라면 어떻게 나왔을지야 분명하잖아요. 당신은 결혼하겠다고 우겼을 테고 혹시 결혼했다면 난 들을 떠밀어서라도 당신을 유럽에 보냈겠죠. 하지만 3년씩 떨어져 있으면서 뭘 장담할 수 있겠어요? 당신 공부에도 지장이 있을 게 당연한데 난 그걸 바라진 않았으니까요. 난 당신이 자유롭게 하고 싶어 하던 일에 전념할 수 있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쪽지 한 장만 남기고 할머니와 함께 소리 없이 사라졌소?"

"그래요." 죄인처럼 허겁지겁 요하네스버그 공항을 빠져나가던 날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차마 당신 면전에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혹시 내 마음이 변해 버릴까 봐 두렵기도 했구요. 만약 당신이 내 곁에 있기로 하면 언젠가는 공부할 기회를 잃었다고 날 원망하지나 않을까도 생각했어요."

네이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누그러지지 않는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줄리아는 그가 자기 말을 믿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고 있지 않은가.

"결정은 내가 내렸어야지. 그리고 당신을 원망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요."

"입 밖에 내지는 않았을는지 몰라도 내심 그런 기분을 느꼈을 거예요." 그녀는 우울하게 뇌까렸다. "분노라는 건 마음속에 소리 없이 자라나는 법이에요. 난 우리 둘 사이에 그런 벽이 생긴다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네이슨은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줄리아가 불안하게 뒤척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얼굴을 번쩍 들었다.

"데미안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겸연쩍게 털어놓았다. "그에게 의논을 하러 갔었죠. 하지만 마지막 판단은 절대로 내 뜻이었어요."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고맙소.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내가 더 이상 쓸데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파혼 후에 겪은 갈등과 무서운 방황의 시간을 지울 수 있는 건 물론 아니오."

네이슨의 냉담한 태도에 그녀는 오싹 한기를 느꼈다. 그의 날카로운 비난은 5년이란 세월로도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상처를 다시 아프게 찔렀다.

"혹시 당신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진다면 나도 그랬다는 걸 숨기진 않겠어요."

네이슨은 새로 따른 술을 단숨에 비웠다. 스탠드의 불빛이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을 더욱 뚜렷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유리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거칠게 밀어젖혔다. 줄리아의 가슴속이 시시각각으로 죄어들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번갯불의 섬광에 넋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들보라도 무너뜨릴 듯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지루하도록 창가에 붙어있던 그가 돌아서더니 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그 자리에 못 박히도록 만들었다.

"당신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처음이오." 네이슨은 그답지 않게 거친 몸짓으로 머리칼을 긁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떠오를 자조적인 미소가 그녀의 마음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내가 감사하고 있다는 건 하느님은 아시겠지. 하지만 줄리아, 그보다는 분노와 고통이 앞서고 있소."

"용서를 바라고 온 건 아녜요, 네이슨. 물론 감사할 것도 없어요." 본심과는 딴판으로 그녀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날 저녁에 급히 털어놓았던 것보다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덧붙이죠."

몸을 일으키려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용케 네이슨의 시선을 견디고 있는 것도 한조각 남아 있는 자존심 덕분이었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귀에조차 들릴 듯 말 듯한 가냘픈 속삭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같이 지냈던 날, 당신이 육체적인 반응 이상이라고 했던 말은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날이 밝으니까 내 자신이 몹시 수치스러웠어요. 난 감정에 따라 행동했고 마샤한테도 죄책감을 느꼈죠. 당신과 결혼할 거란 얘길 곧이곧대로 믿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당신 앞날에 막강한 후원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닫도록 해줬어요. 당신도 그걸 원한다고 느꼈죠. 결국 나와의 접촉이 잦아지면 당신의 출세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났어요. 그래서 더 이상은 서로에게 신경 쓰지 말자고 우겨댄 거예요."

네이슨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한달음에 그녀의 코앞에 다가온 그는 무시무시하게 버티고 서서 벼락치듯 고함을 질렀다. "내가 출세밖에 모르는 뻔뻔스런 사내인 줄 알았소?"

"미안해요, 하지만..." 금방이라도 악마로 변해 버릴 듯한 그의 얼굴을 보자 줄리아는 갑자기 울어 버리고 싶어졌다. "5년은 긴 세월이에요. 인간이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잖아요."

"변하긴 해도 그렇게 극과 극을 달릴 수는 없소!" 그가 무섭게 꾸짖었다. "당신은 손톱만큼도 변하지 않았잖아! 그 빌어먹을 성공인지 뭔지 때문에 또 자기 행복을 포기하려고 했잖소. 마치 그게 당신한테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워낙 지척의 거리에 서 있는 탓에 희미한 화장품 냄새가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지금 그에게 안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바람이야말로 무슨 짓을 해서든 억눌러야 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미 자존심 따위는 남아 있지도 않았다. 다만 모욕적인 거절을 감수할 용기가 없는 탓이었다.

"꼭 그래서 물러선 것만은 아녜요." 그녀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끓어오르는 갈망과 싸우느라 줄리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만일 당신이 마샤와 결혼한다면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상황에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깨끗이 잊는 게 제일 좋다는 판단을 내렸죠."

"당신 감정은 어쩌고? 아니, 순교자 흉내라도 낼 작정이었소?"

"그런 게 아녜요." 줄리아는 가냘프게 뇌까렸다. "당신에게 가장 좋은 길을 원했을 따름이에요."

"알겠소."

방안의 분위기가 돌변해 버렸다. 줄리아는 절망에 싸여 잠자코 앉아 있었다. 네이슨의 차가운 표정이 누그러질 가망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마침내 진실은 밝혀졌다. 앞으로의 삶이 비록 공허한 것이 된다 할지라도 최소한의 평화는 바랄 수 있으리라.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셰리주도 잘 마셨구요."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 들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줄리아!" 그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몇 걸음 가지도 않아서 그녀의 덜미를 잡아챘다. "이리 와!"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깨까지 늘어진 갈색 머리칼이 물결치며 흔들렸다. "제겐 이제 아무것도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밖에 나갈 수는 없소. 잠자코 이리 오라니까"

변함없이 굳은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차가운 눈빛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넋이 빠진 사람처럼 고분고분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그가 있었다.

"또다시 당신을 놓아 주리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오!" 핸드백을 빼앗아 의자 위에 던져 버리는 그의 행동에서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거친 말투에도 불구하고 놓칠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는 한마디였다. "우린 5년이란 시간을 허비했소. 그리고 난 당신을 나무라는 것 이상으로 내 책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소. 이제 더 이상은 1분도 낭비할 생각이 없소."

목에 뜨거운 덩어리가 걸린 것 같아서 그녀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당신... 어떻게 아직도 날 원할 수가..." 그녀는 띄엄띄엄 속삭였다.

"원하는 것 이상이오, 줄리아. 그렇지만 이런 상태로 새 출발을 할 수는 없지"

그의 손이 줄리아를 붙들더니 억지로 자기 옆에 끌어다 앉혔다. 그의 체온은 얼어붙은 그녀의 가슴속에 희미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지만 아직도 의혹은 남아 있었다. , 하느님! 자신의 손을 붙든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소리 없이 애원했다. 진심이 아니라면 제발 그만두면 해주세요!

"당신을 잊겠다고 결심했었소." 그의 음성은 낮고 비통했다. "5년 내내 당신은 미련을 가질 가치도 없는 여자라고 끊임없이 되풀이해 봤지만 허사였소. 그 경박스러운 마샤의 운전 솜씨 때문에 당신과 마주쳤던 날, 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몹시 충격이 컸소."

"난 예상하고 있었어요." 뜻밖에도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빛이 따스하게 바뀌는 것을 느끼자 새로운 희망이 마음 한 구석에서 일기 시작했다. "소피 브릿에게서 당신이 새 농장주가 되리란 얘길 들었죠. 그래서 언젠가는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하다 보니 제 정신이 아니었소. 그래서 앞뒤 가리지도 않고 함부로 퍼부어댔던 거요." 네이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데미안이 백 번 옳았소. 언젠가 후회하며 될 거라더니..."

네이슨 때문에 주먹다짐이 오갈 뻔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질문을 할 용기가 움텄다. "마샤와 결혼 문제로 의논한 적은 있나요?"

"한 번도 없소!" 그의 짙은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5년 동안 내 곁을 스친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오. 어느 누구와도 결혼할 마음은 없었소."

줄리아는 황급히 손을 뺐다. "제발, ..."

"기분 좋은 얘기가 아니란 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내겐 우리 사이에 어떤 비밀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더 중요하오."

", 미안해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양손을 맞잡았다. "계속하세요."

그가 뺨을 가볍게 쓸자 줄리아는 갑자기 맥박이 두 배로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마샤와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에 청산했어야 마땅했소. 하지만 뻔뻔스럽게도 난 그녀가 내게 매달리고 있다는 데서 모종의 쾌감을 느꼈던 모양이오. 당신과 함께 지냈던 날, 난 마샤에게 통고를 하겠다고 결심했소. 하지만 당신이 고집을 부리니까 마음이 변하더군. 당신의 본심을 알아내는데 마샤가 도움이 될 것 같았소. 그래서 끝내는 그녀가 여기서 하루 이틀 머물겠다고 했을 때 그냥 내버려 뒀지"

"썩 잘한 짓은 아니네요."

"그렇소. 하지만 난 그 정도로 필사적이었소." 계속 서성거리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또 하나 고백할 게 남았소. 일요일 오후에 로란드의 집에 간 건 우연이 아니었소. 지나가다가 길가에 당신 차가 있는 걸 보고는 그 길로 병원으로 갔지. 멋도 모르는 로란드가 우릴 집으로 데려간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었소. 마샤와 날 같이 만나면 당신도 동요하지 않을까 했는데, 얄미울 정도로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더군. 아주 미칠 지경이었소." 그의 눈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왜 웃는 거지?"

사실 그녀는 자기가 웃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태연한 얼굴로 거기 앉아 있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나도 똑같은 기분이었다면 한결 위로가 되겠소?" 그의 입가에 자조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다는 느낌뿐이었소. 그러나 차츰 이대로 주저앉아 있다간 아무 일도 안되겠다 싶어지더군. 그래서 요하네스버그로 떠났소. 일단은 바실 그랜트에게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지. 그리고 나서 마샤를 만났소.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긴 싫어요. 어쨌든 그쪽과는 깨끗이 끝났다고만 하면 충분할 거요." 그는 어깨를 곧게 폈다. "돈필드에서 돌아오자마자 당신에게 달려갔소. 꼭 답을 얻어야 할 사항이 있었지. 그렇지만 그런 충격적인 사실에 접하게 되리라곤 짐작조차 못했소."

그녀의 고백을 들은 네이슨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녀는 새삼 몸서리를 치며 돌아서서 발아래 깔린 양탄자에 시선을 떨구었다.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죠.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죠?"

"난 당신을 갖고 싶소." 그가 줄리아의 어깨를 꽉 붙들고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가능한지는 모르겠소. 그렇지만 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당신을 원하고 있소."

"함께... 살자는 건가요?"

"난 당신을 사랑하오, 줄리아. 한 번도 그 마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소. 우리가 함께 지낸 날 이후로 내가 줄곧 말하고 싶어 했던 건 이 한마디였소."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결혼하자고 묻고 있는 거요. 그리고 허락할 때까진 이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다닐 거요."

믿을 수 없는 기쁨으로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 햇살이 평화롭게 내리쬐는 들판에 나온 기분이었다.

", 네이슨"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그녀는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사랑해요.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결혼하겠어요."

그녀를 끌어안는 네이슨의 팔 역시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줄리아의 입술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격렬히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줄수록 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그녀의 목덜미를 누르던 네이슨의 입술이 다시 한번 뜨겁게 위로 올라왔다.

줄리아의 가슴속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멀어질 때까지도 그녀는 네이슨에게 안긴 채 하염없이 떨고만 있었다. 네이슨의 눈동자는 또 다른 욕망으로 어둡게 번뜩였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아무 거리낌 없이 그의 가슴에 묻었다. 그녀의 가슴만큼이나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녀는 네이슨의 허리에 팔을 감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갑자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 예정대로 떠나나요?"

"아니"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저녁에 당신 집으로 찾아갈 작정이었소. 하지만 당신이 내 계획을 또 뒤집어 놓았소. 아무튼 당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잖소?"

"원 세상에, 그럼 내가 전전긍긍하는 걸 즐기고 있었군요?" 그녀는 네이슨에게 비스듬히 기대며 그를 살짝 흘겨주었다.

하지만 애써 화가 난 척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그녀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리자 네이슨의 감미로운 입술이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줄리아가 나른한 꿈속을 헤매고 있는 사이에 그는 슬금슬금 그녀를 소파 쪽으로 밀어붙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등이 소파에 닿은 후였다.

"워렌 챈들러 얘길 해봐" 블라우스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네이슨이 부추겼다. 그녀는 기대에 찬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워렌은 참 좋은 친구였어요. 앞으로도 그렇겠죠." 그녀는 다소 비감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게 결혼을 신청하긴 했지만 우리 사이엔 순수한 우정만 오갔을 뿐이에요. 그 사람도 아마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을 거예요."

"난 그 사람 때문에 질투로 눈이 멀 지경이었다구" 네이슨이 으르렁거렸다. 부드러운 실크 블라우스가 옆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럼 마샤를 대했을 때 내 기분은 어땠겠어요?" 그녀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그의 교묘한 손놀림 때문에 차츰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네이슨이 입을 실쭉해 보였다.

"샘이 났소?"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네이슨의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까실까실한 털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 다음 순간 그녀는 돌연 심각해졌다.

", 네이슨"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네이슨의 목을 끌어안았다. "혹시 다시 한번 삶이 찾아온다면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의심한 적은 없나요?"

"글쎄, 가끔은 그런 의혹도 품었지. 특히 요 며칠간은 그랬소. 하지만 해답을 찾지는 못한 것 같아"

"우린 시간을 너무 허비해 버렸어요." 그녀는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그랬지" 그는 줄리아의 얼굴을 살며시 치켜들었다. "내일 아침에 로란드를 찾아가서 당신을 놓아 달라고 부탁해야겠소. 내가 준비를 끝내면 즉시 결혼식을 올립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더 중요한데..."

그녀를 안아 올리는 네이슨의 눈이 뜨겁게 빛났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거실을 나가서 침실로 이어지는 긴 복도로 성큼성큼 발을 옮겨 놓았다.

"당신도 동의하겠지, 줄리아?" 어깨로 침실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간 네이슨이 뒷발로 문을 닫으며 물었다.

"절대 찬성이에요." 그녀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할 얘기는 아직도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그가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가기 전에 결정해야 할 문제도 산더미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지금은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운명이 허락한 두 번째 기회를 마음껏 즐기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