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리는 죠의 전국 잡지에 대한 야망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그의 우울한 전망에 두렵기도 했다. 오한을 느낀 그녀는 벽난로 옆에 앉았다. 몇 분 후 바바라가 도착했을 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조리는 트리 아래의 선물 꾸러미 속에서 바바라의 것을 찾으며 크리스마스 기분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죠가 떠나는 것을 봤어. 그가 여기에 왔었다니, 정말 놀랍구나."
바바라는 죠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너무 영리하다는 이유때문이었지만 실상은 죠가 그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너에게 아무 선물도 주지 않았을걸?"
"응. 하지만 라나에게 선물을 12개나 줬어."
"그래도 내 생각에는 ......?"
"난 아직 로버트에게 마음이 있고 죠도 그걸 알아."
"그렇다면 이제 로버트에 대해 뭔가를 할 때야. 그에게 찾아 가든가 아니면 완전히 잊어버려."
"그래, 알았어. 생각 좀 해보자 로버트는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 이후 성장했을 테니 넌 그에게 연락을 해야 해. 지금 전화를 걸면 어떻겠니? 즐거운 성탄을 빌고 데이트 약속을 하란 말야. 네가 앞으로 10년 동안 여기에 앉아서 인생을 낭비하는 꼴이 눈에 보인다. 마지, 어서 내 말대로 해. 그의 전화번호가 뭐니? 그는 집에 있을 거야.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너에게 바꿔줄게."
잠시 후 마조리는 로버트의 부친에게, 아들의 약혼설은 사실무근이고 뉴욕에 마케팅 회사를 세웠으며 영원히 그쪽에서 지낼 계획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가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 아무 소식도 없이 떠날 수가! 아, 바바라 이 일로 내 남성관이 굳어졌어. 앞으로 난 절대로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 이용만 할 거야."
마조리는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은커녕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널 차버린 남자를 위해 눈물 흘릴 가치가 없어."
"이걸 잊어버렸소.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들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퉁명스런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죠가 창피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거기에 서 있었다. 그는 작은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마조리는 별 관심 없이 선물을 풀었다. 비싸 보이는 감청색의 긴 상자를 여는 순간 그녀의 숨이 막혔다. 거기에는 단순한 금줄에 에메랄드와 사파이어가 박힌 팔찌가 얌전히 누워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아빠가 방으로 들어오다 선물을 보고 중얼거렸다. 바바라는 질문 보따리를 풀었다. 두 사람이 언약을 했니? 함께 춤을 췄어? 관계를 가진 거야?
"처음 죠를 만났을 때,"
마조리는 서투르게 설명했다.
"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나중에 그가 라나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로브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어. 우리는 사업상 동업자로 시작했고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그리고 영원히 그럴 거야."
특히 그의 상처받은 눈빛을 본 지금.
마조리는 불행에 젖어 1월을 보냈다. 그녀는 항상 로버트가 자기의 것이 되는 날을 기다려 왔지만 이제 희망을 완전히 빼앗겼다. 비행기로 뉴욕은 짧은 거리였지만 그가 그녀에게 작별 인사도 남기지 않고 떠난 이 마당에 마치 코앞에서 문이 꽝 닫힌 기분이었다. 게다가 죠마저 쌀쌀맞고 냉정하게 구러 그녀를 더 섭섭하게 만들었다. 월말에 죠의 잡지 '리더십' 견본이 그녀의 책상 위에 올라왔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샘플 기사들과 현재 시판 중인 타자기 책상 계산기 및 구술용 레코더에 대한 샘플 광고가 보기 좋게 편집되어 있었다. 사무기기라면 지긋지긋해! 마조리는 질색을 하며 견본을 훑어보았다. 죠가 그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계획을 추진해 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와 담판을 내야겠어. 그녀는 쟁반에 두 잔의 커피와 잡지 견본을 받쳐 가지고 그의 사무실로 갔다.
"그거 조심해서 다뤄요."
그가 말했다.
"죠, 멋진 잡지예요. 내가 생각해 봤는데, 당신 말이 옳아요. 언젠가 회사를 확장하긴 해야 해요. 그런데 패션 잡지가 더 좋겠어요. 아무래도 그 쪽이 내 적성에 더 잘 맞거든요."
"흥, 난 포르쉐를 좋아하오. 내 적성에 딱 들어맞는 자동차이지만 돈이 없다는 게 문제지."
"난 사무기기를 못 팔 것 같아요. 자신 없어요. 최소한 지금 당장은요."
"당신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야만 싸우더군. 뭐, 그때가 조만간 올 거요."
짧은 대화 후에 죠는 더욱 소원해졌다. 그는 출판업에 관심을 잃은 것처럼 하루 종일 더러운 벽돌 조각이나 주물러 댔다. 그러나 이틀에 한번씩 빼먹지 않고 라나에게 선물을 사다 줬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의 광고지 사업은 순조롭게 굴러갔다. 마조리는 돈이란 것이 로버트가 남긴 상처에 아무 효과가 없음을 깨달았다.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했지만 사랑하는 라나의 존재로 그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돈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수입으로 가족이 배불리 먹고 편안히 지낸다는 사실은 뿌듯한 만족감을 주었다. 마조리는 가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샀다. 식료품 저장실과 냉장고는 그 용량이 허용하는 만큼 꽉 들어찼고 새 옷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장롱이 너무 작았다. 격주 발행일에 맞추어 광고 계약을 따야 하는 시간 제한에 쫓겨 마조리는 일에 전념했다.
그녀의 안전한 세계에 돌을 던진 사람은 약제사 도건 씨였다. 그가 새 광고를 게재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마조리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평소에는 광고비 지출에 속 쓰려 하던 그가 오늘따라 눈을 반짝거렸다. 저 눈빛의 정체가 뭘까? 동정? 즐거움? 이상도 해라! 그녀는 속으로 궁리하며 그의 다음 6개월 계약에 서명을 받았다.
"저기 있잖소, 마조리."
그가 말을 꺼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미니스커트를 입고 금발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웬 아가씨가 지방 신문사에서 나왔었어. 그쪽이 당신과 경쟁을 할 모양이던데. 당신 것과 똑같은 광고지를 매주 발행한대. 당연히 유료로 배포하고 크기도 훨씬 크다던데. 하지만 가격을 깎아 먹는 식의 경쟁이 문제야. 그쪽의 목표는 당신을 이 업계에서 몰아내는 것 같아. 아무래도 내가 당신에게 귀뜀을 해주는 게 좋겠더라구."
그녀는 공포에 질려 헐떡거리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2월말의 춥고 눈 내리는 날이었지만 온몸이 후끈거렸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곧 망할 거야."
그녀는 중얼거리며 죠를 찾으로 다녔다. 한참 헤맨 끝에야 조사실에서 그를 발견했다. 언제나처럼 그는 찐득거리는 흰 액체를 벽돌 단면에 바르고 있었다. 단단히 심취한 게 분명했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차가운 미소를 띠고 그녀에게 도건 씨의 말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거요?"
그는 '내가 전에 그랬잖소'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마조리는 그런 그가 고마웠다.
"우리는 이사회를 열어야 해요."
그럽시다. 듣고 있으니 어서 말해 봐요.
"그 지저분한 벽돌 좀 치워요."
"당시이 내 출판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는 지금 이게 내 미래요."
"아이구 맙소사!"
"마조리, 이제 벼랑에 몰렸으니, 내 책상 오른쪽 윗 서랍에서 유망한 광고주 명단을 갖고 가서 계약이나 따오는 게 어떻소? 성공한다면, 당신이 잘 나가리란 예시로 받아들여요."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구나. 왜 그가 이렇게 차갑고 심드렁하게 나올까? 그리고 왜 나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외면했던 걸까?
"죠, 내가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크리스마스 때 당신이 내 선물을 주려고 도로 왔다가 내가 울고 있던 장면을 봤잖아요, 기억나지요? 저기, 나는 항상 로버트와 나의 관계가 잘 풀리기를 바래 왔어요. 하지만 다 끝났어요. 그는.... 뉴욕으로 떠났어요. 그곳에서 영원히 살 거래요. 그러면서 나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으니, 우리 우정은 막이 내린 셈이에요."
그녀는 그날 죠의 표정을 상기하며 얼굴을 붉혔다.
"라나는?"
"난 임신 사실을 알고 그에게 편지를 써서 와 달라고 간청했어요. 그가 우리를 원치 않는다면 내 아기를 입양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는 분명히 우리를 원치 않았어요."
"그렇다면 그는 구제 불능의 바보야. 그가 없는 편이 당신에게 훨씬 났소."
이제 난 자유예요, 죠. 그게 당신에게 아무 의미도 없나요? 그 미슬토우를 기억하세요? 그녀는 그 침묵의 말이 그에게 들리기를 염원했다. 하지만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람? 그녀는 한 손을 그의 어깨에 가볍게 얹고 그의 힘을 느꼈다. 그의 등은 강철판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위쪽으로 이동해 숱 많은 머리카락 사이를 장난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의 광대뼈에 키스하고 입술을 그의 귀까지 미끄러뜨렸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고 방어적인 표정으로 그녀는 응시했다.
"당신 옷이 더러워질 거요. 저리 가요! 그 명단을 가져가서 새 일을 시작하는 편이 좋을 거요.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계약을 따낼 수 있소. 어찌 되었건 나야 편하지. 내 발명품이 있으니까. 참, 그리고 '핸디 홈 가이드' 지를 지방 신문사에 매각할 수도 있소. 내가 당신이라면 그 방법을 곰곰이 생각해볼 거요."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요? 당신이 이 더러운 벽돌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예요?"
오랜 침묵이 흐르자 그녀가 덧붙였다.
"우리는 동업자가 아니었던가요?"
"그랬었지만 내가 잘못한 것 같소."
이제 그녀는 화가 나서 싸움을 걸었지만 마음에 생채기가 생겼다.
"당신은 내가 그 잡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샐쭉해 있군요."
"그 반대야. 난 도와주려는 것뿐이오. 다른 관심거리만으로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린다구."
"출판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거예요? 새로운 장난감이 생겼다 이거군요. 후회나 변명도 없이 낡은 것을 내팽개치고 새것에 눈을 돌리셨다?"
"요약하자면 그래."
"내가 사업을 하고 싶지 않다면?"
"그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오.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을 거요."
"그럼, 우리 사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거죠?"
그녀는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하지만 난 당신 결정에 따르지 않을 거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 고통을 연장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 혼자 해 나가겠어요."
그녀는 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실수를 하나씩 되짚었다. 바보같이 안저한 기반을 구축했다고 상상하다니. 그리고 로버트에게 받은 상처를 회복할 때까지 죠가 언제까지고 출발선에서 기다려 주리라 믿다니.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걸까? 사업 그녀는 증오감을 느꼈다. 남자들이 그 체계를 구축한 이유는 옛날의 칼싸움이나 개인의 행복에 위협을 가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지방 신문사가 떼돈을 번다는 사실이야 삼척동자도 다 알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작은 몫에 눈독을 들여? 죠는 그러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사고 방식이 그들과 비슷해서? 그점에 대해 죠는 이렇게 말했었다.
"당신이 호황을 누린다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달려들 거요."
그녀는 그 뒤에 숨은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안정과 가족 부양과 함께 이 세상의 모든 가족도 넉넉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사업계는 그녀의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가 차를 준비했다. 오늘 밤 식단은 특별했다. 청어와 소시지, 집에서 만든 자두 잼과 오븐에서 갓 구워낸 빵. 아, 잘 먹었다. 그 순간 생활비가 머지않아 바닥나리란 생각이 떠올랐고, 갑자기 속이 더부룩해졌다.
"인생은 주사위 놀이와 똑같아요, 엄마."
그녀는 탄원하듯 고개를 들고 이해와 동의를 구했다.
"소처럼 열심히 일해서 염원했던 목표를 달성한 순간 인생은 혹독한 시련을 안겨 주잖아요. 저 위에서 어떤 존재가 보고 있다가, 누가 좀 잘 나가고 행복하다 싶으면 그를 사정없이 후려쳐서 진흙탕에 빠뜨리는 것 같아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너무 공평치 못하게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일은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가끔 인생은 주사위를 던지는 정도의 의미밖에 안 돼요. 정상에 도달하면 내리막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조차 모르잖아요? 미리 그것을 알았다면 기를 쓰고 정상으로 돌진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 올라가는 과정을 즐겼을 거예요. 갑자기 원점으로 곤두박질치고 남은 용기를 불러모아 긴 오르막길을 또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뭘 발견하는지 아세요? 한 발자국도 움직일 힘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 엄마가 말했다.
"오늘은 좋은 저녁이잖니. 아빠와 나는 잠깐 선술집에 다녀올 생각인데 너는 집에 있을래?"
"네. 항상 그렇잖아요."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마조리. 이 점을 명심하렴. 네가 최악의 순간에 처했다고 생각할 때, 인생은 해결책을 찾아 주는 습관이 있단다. 마술 모자에서 토끼가 나오는 것처럼 말야. 세상이 꼭 그렇게 어둡고 비참한 것은 아냐. 우리는 항상 행운이었잖니.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우리가 행운이었던 것은 내가 뼈 빠지게 일했기 때문이에요. 마조리의 성질이 끓어올랐다. 내가 엄마와 똑같았다면, 더 행복하겠지. 하지만 평생 가난에서 못 벗어날걸. 그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온 인생이 마조리에게 달린 라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굼뜨게 반응하는 불쌍한 아빠, 제대로 문제를 보지 못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들 모두 인생의 희생자가 될까? 처음으로 저 하늘에도, 정부에도, 경찰서에도 정의를 주관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경기에 임하게 하는 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쑥한 맞춤 양복과 실크 셔츠를 걸친 모든 속물스런 남자들은 해적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타인의 것 사업, 건강, 젊음, 성을 뭐든지 약탈하고 희생자를 가난에 찌든 절망 속으로 밀어 넣는다. 아니, 그보다 더한 상황으로도. 하지만 그런다고 누가 상관하니? 아무도 없다. 그녀가 그런 세상에 합류하여 그들처럼 약탈자가 될 수 있을까? 동정심을 말려 죽이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승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미안해하지 않고 적을 파산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지금 당장 포기하는 편이 좋아. 그래, 난 할 수 있어. 그렇게 될 거야.
"빌어먹을, 그렇게 하겠어."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리고 편히 잠들었다.
새 개버딘 정장, 가죽 핸드백, 하이힐 덕분에 유능한 사회인이 된 듯 했던 마조리의 자신감은 지방 신문사의 영업국장과 약속했던 장소에 도착한 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어느덧 그녀는 중년의 사업가들(언론인이 아닌)에게 둘러싸여 회의석상에 앉아 있었다. 귀족적인 코와 군살 없는 배, 아르마니 정장과 구찌 애프터세이빙 로션 등 그들에게 일류가 아닌 것을 찾기 힘들었다. 그녀는 회장, 비서실장, 변호사, 영업국장과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다들 할 일이 없어서 쩔쩔 매나? 거래를 하는데 한사람으로 부족한가 보지?
"하디 양....."
영업국장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길고 핏기없는 얼굴이 엷게 핑크빛으로 물드는 동안 금테 안경 뒤에 숨은 그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해 본 결과 '핸디 홈 가이드'가 ....."
그는 말을 끊고 빈정대는 웃음을 지었다.
"매입하고 싶을 만큼 쓸만한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농담하나? 이런 말은 전화로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남성'에, 지위에, 또박또박한 억양에, 그리고 자신감에 차 있는 태도에 협박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보세요."
그녀는 자신의 무경험과 사투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은 우리와 싸우든가 매입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인쇄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출판비용이 몇 푼 들지 않아요. 당신네가 가격을 내리겠다면 우리도 똑같이 가격 인하 정책으로 맞서겠어요. 끝판에는 여러분이 승리하겠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 후에 요금을 정상적인 수준으로 인상하려면 골치깨나 썩을테구요."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하나 하나 돌아보며 그들의 생각을 쟀다.
"하지만 매입 쪽을 택하신다면, 우리 가격이 이 업계의 최고 수준임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게다가 우리 광고지는 만인에게 유용하니, 괜한 가치 평가는 삼가주세요. 사태를 이런 식으로 볼까요? 다윗과 골리앗 식의 전쟁은 여러분들께 그다지 이롭지 못할 겁니다. 일간지 광고에도 영향을 미칠 걸요. 이만하면 후한 값을 부르셔야 할 명분이 섰겠지요?"
그녀는 잔뜩 흥분했음을 자각하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세련된 한 여성이 은제 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아, 안돼! 마조리는 공포에 질렸다. 저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네! 나에게 차 대접을 맡기진 않겠지? 난 다도를 잘 모르는데. 살려줘요! 쟁반이 그녀의 바로 옆에 놓여졌다. 그 여성은 방에서 나갔다. 마조리가 벌떡 일어났다.
"여러분은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으신 듯 하지만 저는 몇 개의 계약서에 서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 말을 잘 생각해 보시고 서면으로 알려 주세요. 명함을 놓고 가겠어요."
그녀는 명함을 내려놓고 도망갔다. 뒤에 남은 남자들은 깜짝 놀라 입만 뻐끔거렸다.
"왜 꽁무니를 뺐지?"
죠가 화를 내며 다그쳤다.
"당신은 광고지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점을 살려서 끝까지 버텼어야지. 지금쯤 수표가 주머니 속에 있어야 했단 말이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나 있소? 그들은 제2의 매입자가 나타나서 지기들과 경쟁을 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단 말이오."
흥, 드디어 공동 사업에 대해 흥미를 보이시는군. 마조리와 지방 신문사의 접촉은 별 소득이 없었지만 죠의 무관심을 뒤흔들어 놓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도 그들의 생각은 동일 선상
에 있지 않았다.
"죠, 미안해요. 난 당신의 '리더십'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잘될 것 같지 않아요."
"왜?"
"그 잡지는 너무 격이 높아요. 하지만 난 그렇지 않고 이번 모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어요. 그런데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 사투리로 무슨 말을 해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귀족적인데요. 너무 굴욕적이어서 테이블 아래에 숨고 싶었단 말이에요. 용기가 점점 줄어들었어요. 단 1초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도망나왔다구요. 난 협박당하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왜?"
그는 정말 당황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붙어 있는 코만큼 당연한 말을 왜 못 알아들을까? 그녀는 애써 설명했다.
"그들의 거드름 빼는 억양, 고상한 말, 의상, 이 세상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태도 등등. 나까지 소유한 것처럼 굴더라구요."
"그게 전부요? 그들의 억양이?"
"그리고 자신감이오."
"그 거드름 빼는 억양이 그렇게 무섭다면 당신도 그렇게 되면 되잖소? 그리고 서둘러요. 당신은 봄부터 세일즈를 시작해야만 해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제대로 된 억양으로 말하고, 제대로 된 태도로 말이오. 모델 양성 학교에도 다녀요. 자신감이 붙을 거요. 회사가 비용을 전담하지."
"정말이에요?"
"그렇소, 하지만 당신은 정말 웃겨. 대부분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거요."
"당신은 가끔 말이 안 통해요. 아, 모르겠어요, 죠. 정말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번 시도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뭐든 출판을 하려면 말이에요."
"이제 한 번만 더 말하면 벌써 열 번째야. 돼지가 진주 목걸이를 하는 꼴이야."
그날 밤 하디 가의 부엌 풍경은 아늑했다. 석탄이 난로 속에서 활활 탔고 그 위에서 물주전자가 끓었으며 라나는 고양이 티비를 쫓아 기어 다녔다. 그녀는 녀석의 꼬리 잡아당기는 것을 좋아했고 티비는 절대로 아기에게 발톱을 들이대지 않았다. 너무 평범하고 가족적이었다. 마조리는 돌연 평범한 남편과 규칙적이고 안정된 수입, 가사일 외에 두려워할 것이 없는 생활이 그리웠다. 엄마는 개수대에서 바삐 일했는데, 마조리는 그녀에게 발산되는 두려움과 실망을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창피하니, 마조리? 아니면 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식에서 등을 돌리려는 거니?"
"아휴, 엄마. 제 선호도가 아니라 돈 문제라고 누차 말씀드렸잖아요. 나는 속물들에겍 광고를 팔고 그들과 점심을 함께하고 그들의 문제를 토론할 수 있어야만 해요. 그게 세일즈를 하는 방법이나까요. 내가 지방 상인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아는지 아세요? 누가 아내나 자식 문제로 골치를 썩고 누가 통풍이나 편두통을 앓고 있는지 다 알아요. 나는 그들의 꿈과 희망과 두려움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단 말이에요. 심지어 은밀한 비밀까지도. 그들은 날 아예 없는 사람 치부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난 진짜 문제에 봉착한 거예요. 난 오늘 만난 남자들과 똑같은 수준에서 대화를 할 수 없었어요. 이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에요."
그 말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고 네 타고난 천성이 변하진 않아. 내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야."
"아, 그만하세요. 엄마."
마조리는 라나를 바닥에서 안아 올려 높은 의자에 앉혔다. 엄마의 차 준비가 끝나고 마조리는 차를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라나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은 자식 키우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딸은 좋아서 까르르 웃으며 새 새끼마냥 입을 벌렸다. 라나가 커서 예뻐질까? 마조리는 자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열달 배기치곤 너무 똑똑하기 때문이다.
"라나, 우리 귀염둥이야. 너와 내가 별을 따자꾸나."
그녀가 속삭였다.
"흥, 네가 전에 별을 따려고 했을 때 어떻게 됐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엄마가 쏘아붙였다. 마조리는 엄마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족 모두를 위해 일하고 있는데, 왜 엄마는 딸의 성공을 시기하는 걸까?
미스 드 프트롱은 정말 충격거리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데다 관절염으로 반쯤 절둑거리는 그녀는 버섯 동자 같은 머리 모양으로 더 남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한때 스키, 라크러스, 승마 종목의 영국 대표로 뛰었던 영광의 자리에서 추락을 거듭해 이제 교양 수업으로 먹고살았다. 초라하고 냄새나는 그녀의 집에 킹 챨리 스파니엘 종의 개들과 말벗 스미스 양이 함께 살고 있었다. 스미스 양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어물쩡거렸고 툭하면 눈물을 쏟았다. 눈물샘이 고장 난 모양이다. 죠가 미스 드 프트롱을 찾아낸 장본인이었다. 이 대가는 톡톡히 치러주겠어, 죠. 마조리는 벼룩에게 물린 다리를 긁으며 마음을 굳혔다.
"당신은 커피 잔 하나 제대로 못 다룬다는 말을 들었어요. 우선 그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미스 드 프트롱은 불쌍한 스미스 양에게 오만하게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벼락을 맞을 반역자 죠! 마조리는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네, 옳아유."
"네, 올아요예요! 네, 옳아유가 아니에요."
미스 드 프트롱이 쏘아붙였다. 여주인의 대갈일성을 신호로 착각한 개들이 합창으로 짖어댔다. 그녀는 벽에 걸린 사진과 상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차가 들어왔다. 난 이 늙은 할망구들이 두렵지 않아. 마조리는 한 손에 찻잔을, 또 다른 손에 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랐다.
"이 찻잔은,"
미스 드 프트롱이 말했다.
"여왕 폐하의 모친께 하사 받은 거랍니다. 이 선물을 받던 날 찍은 사진이 바로 이거예요."
마조리는 사진을 힐끔 쳐다보고 혐오감에 질렸다. 저 젊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이렇게 될 수가! 그녀는 사진과 미스 드 프트롱을 번갈아 보았다. 세월이 이렇게 파괴적일까? 정말 끔찍해!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어제저녁에 영양 크림을 바르고 잤던가? 아냐, 건너뛰었어.
"이제야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겠군요."
미스 드 프트롱이 호되게 질책했다.
"당신은 차를 양탄자에 쏟았어요. 나처럼 세련되게 균형을 잡아야지요. 바로 이렇게요. 당연히 드라이클리닝 값을 당신에게 청구하겠어요. 커피를 더 가져와요, 스미스 양. 다시 해야겠어요."
"죄송해유."
마조리는 가능한 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여자는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당신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제대로 나오려면 양탄자를 백개도 더 버려야 될 거예요."
"아!"
마조리는 바짝 쫄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다시 학교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청컨대, 손을 씻고 와도 될까요?"
"화장실을 가겠다면 떨거나, 부탁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세요."
"하지만 제 생각에 ....."
"이 집에서 당신의 흐리멍텅한 완곡 어법은 통하지 않아요, 젊은 아가씨.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하세요."
가방을 부여쥔 마조리가 뒷걸음질을 쳐서 복도로 물러 나오는 순간 커다란 장식 도자기에 부딪쳤다. 도자기는 건들거리더니 아래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마조리는 입을 벌리고 미스 드 프트롱을 보았다.
"우리가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겠군요. 당신은 우선 화장실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당신의 현재 위치부터 파악하세요. 그다음에 꼭 이방으로 돌아올 필요는 없어요. 난 징기스칸이 아니에요."
젠장! 젠장! 젠장!
"저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합니다."
그녀는 오늘 아침 같은 말을 벌써 열다섯 번씩이나 했다. 이번이 그녀의 다섯 번째 방문이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목 안쪽과 설근이 아팠다. 키가 크고 우아하지만 미스 드 프트 롱보다 더 가난한 개인 교사 던비 죤스 씨가 테이프 레코더를 틀었다.
"지는 아이스키림을 좋아해유."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말을 잘 들어요...... 잘 들어봐요."
그는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저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합니다. 당신과 나의 차이를 알겠소?"
"저는 청각 장애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할 수 없어요. 그게 문제의 핵심이에요. 저는 할 수 없어요."
"포기하고 싶소?"
"아니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디 양, 왜 이 고생을 자청하세요? 스스로를 하찮다고 생각하오? 당신의 억양은 애교 있고, 당신 표현이나 표정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생기발랄하니까....."
"허튼소리 집어치우세요. 난 표준어로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달라구요!"
그녀가 윽박질렀다.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우리는 이 특별한 표현을 가지고 오랫동안 씨름을 해오지 않았던가요? 내가 한마디 하겠소. 발음은 어렸을 때부터 형성됩니다. 일부 외국인들이 영어를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구강 근육이 적절하게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당신의 근육은 '저'라는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소."
"제가 백 파운드나 쏟아부은 다음에야 그런 말을 하시다뇨?"
"그러나,"
그는 그녀의 분노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모든 근육은 충분한 연습을 통해 개발될 수 있소. 그 과정에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는 그녀가 목을 문지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아픈 게 당연해요. 하지만 계속 연습을 해나가다 보면 제 소리를 낼 수 있어요."
"제가 좀 개선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아직은."
"난 평생 이 모양일 거예요."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그 냉소적인 웃음에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당신은 마음먹은 일에 반드시 성공할 거요. 그 점에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소. 당신은 인생의 승리자가 될 그런 사람이오."
그의 반감 어린 말에 마조리는 한결 기분이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모델 양성 학교는 별문제가 없었다. 10파운드의 교습비도 도버 억양에 들이는 비용보다 훨씬 쌌다. 하지만 만사가 옳은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어, 그녀는 낙천적으로 생각했다. 신문 경영진이 광고지의 매입가를 세 번에 걸쳐 변경, 제의한 결과 그녀와 죠는 5천 파운드라는 거금을 손에 쥐었다. '리더십' 창간에 도움이 되는 액수였다. 그녀는 바바라를 불러 축하 저녁을 먹었다. 다시 일에 착수할 때가 가까워졌다.
봄. 나뭇가지마다 싹이 돋았고, 들판에는 기운 좋은 양들과 꿋꿋한 꽃봉오리가 점점이 수를 놓았다. 새들은 환희에 젖어 노래를 불렀고 마조리는 수줍게 껍질을 벗고 전 세계의 엘리트에게 광고를 팔 준비를 마쳤다. '시갈 앤 하디 출판사' 명판이 죠의 사무실 문에 더해졌고 일층을 새로 칠할 페인트공이 고용되었다. 조만간 신입 직원을 뽑을 예정이었다. 그녀가 필요한 광고량을 팔았을 때. 마조리는 그들의 새로운 시도와 당좌대출금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짊어질 빚을 생각하면 새록새록 두려워졌다. 아직 1천 파운드 수준에 머문 빚이 탐욕스럽게 늘어나고 있었다. 아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녀의 새 이미지, 새 옷, 빨강색 소형차에 한 재산 쏟아붓지 않았던가. 지난주 일요일 그녀는 가족들을 데리고 템즈 강을 따라 드라이브하고 에윌 미니스에서 피크닉을 했다. 라나는 블루벨과 백조에 매료되었다. 그 기억에 그녀는 이런 모험을 감수하는 이유를 되살렸다. 라나를 최고로 키우려면 수입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광고를 팔아야만 한다.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불안해졌다.
"오늘은 기념비적인 날이에요."
그녀는 죠의 사무실에 들어서며 말했다.
"당신은 사무실이 다 칠해질 때까지 여기서 일해야 할거요. 봐요! 내가 당신 책상을 저기에 갖다 놨소."
정말이네.
"젠장."
그녀가 중얼거렸다. 혼자 전화 판매를 해야 더 마음이 편한데. 하지만 상관없어. 일시적인 거잖아. 그녀는 예상 고객 명단을 집어들었지만 손이 너무 떨리는 바람에 도로 내려놨다.
"나 어때요?"
그녀는 한 바퀴 돌며 물었다. 연한 청색 저고리와 주름 치마에 나비매듭을 묶는 흰 블라우스를 받쳐입고 청색 신발과 장갑과 서류 가방을 맞췄다.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는 세련된 커트 스타일이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죠는 냉정하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당신은 잘 해낼 거야."
그녀가 새로 고용한 사환에게 커피를 시키자마자 은쟁반에 받쳐 대령되었다. 모든게 신속했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지불되어야 했고, 그녀만이 돈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떨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는 편이 좋겠어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잠시 후 그녀는 철제 책상을 용접하고 칠하는 공장 사장과 통화를 했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그녀의 제안에 흥미를 보였다.
"언제든지 찾아 주세요. 저는 항상 이곳에 있습니다."
"외국인 같아요."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죠에게 말했다.
"누가?"
"아토믹 시트 메탈 사의 커비스 씨요."
"그 이름만으로도 외국인이 자명하지. 왜 그를 첫 타자로 뽑았소?"
"나는 중소기업부터 단계적으로 시작할 거예요. 그는 구켄트 거리에 작은 공장을 가졌어요."
죠가 호통을 쳤다.
"먼저 대어부터 낚아요. 그럼 잔챙이들이 줄줄이 따라올 거요."
"난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규모 기업부터 공략하려는 거예요. 그들에게 거절당하면 그것으로 이 업계의 끝이죠, 뭐."
"당신답구려!"
그는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녀는 그의 생각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가 옳았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이 종종 그녀로부터 빠져나가는 게 문제였다. 특히 절실히 필요로 할 때 놀랍게도 얀 커비스 씨는 그녀의 예상과 딴판이었다. 멜빵 바지를 걸치긴 했지만 그 속에 깔끔한 흰 셔츠와 넥타이를 맸고 모직 저고리는 사무실 문 뒤에 걸려 있었다. 그는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살폈다. 웃기게 생긴 녀석이네. 하지만 곧 그녀는 '보기 드문 용모의 소유자'라는 표현으로 정정했다. 그는 먼지를 턴 의자를 그녀에게 권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내왕에 감사의 뜻을 전한 다음에야 잡지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렸다.
"당신이 이 업계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리라는 감이 오는군요. 1면 광고를 1년간 계약하겠습니다. 우리 광고 대행사가 찬성한다면 말입니다. 여기 그들의 주소를 드릴 테니 일단 연락해 보십시오."
커비스 씨의 거래처 대표 케빈 오도노르는 그녀의 다른 예상 고객들 중 세 사람의 일을 맡아보고 있으므로 그녀는 그를 점심에 초대하여 회사 소개를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난 고객에게 당신 잡지를 추천할 수 없소."
그는 그녀의 희망을 산산조각냈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테 없는 안경 뒤에서 반짝거렸고 두 겹으로 포개진 턱이 와이셔츠 칼라에 닿았다.
"잡지 창간에는 엄청난 액수의 현금이 필요하오. 당신이 갖고 있는 이상의 돈이 말이오. 광고 대행사 입장에선 당신네의 성공 여부에 관심의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소. 세상에 차이고 널린게 광고 언론 매체란 말이오. 하지만 당신네가 좋은 잡지를 만들고 최소한 5만 명의 유료 광고주를 확보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추천하겠소. 하지만 그쪽에 지출 가능한 고객의 광고 책정비는 얼마 되지 않을 거요."
"그렇다면 우리보고 어떻게 시작하라는 거예요? 저희는 잡지를 창간할 수 있는 광고가 필요해요."
그녀는 그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감추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거야 당신네 문제예요. 내가 보기에 당신네는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으니, 난 고객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소."
그는 말하는 와중에도 굴 12개, 파테, 필레미뇽과 크렘 브릴레를 먹어 치웠지만 그녀는 다이어트를 하는 척하며 스프만 먹었다.
"개인적으로 난 경영 출판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소."
그의 입이 포도주에 얼큰해져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같은 값으로 소매업자와 최종 수요자, 두 마리의 새를 명중할 수 있거든. 게다가 소비자 광고의 수수료가 더 많소. 그러니 티브이와 라디오 신문의 비중도가 더 높아질 수밖에. 또 다른 경영 잡지가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면, 난 더 행복해질 거요."
망할 놈. 그녀는 눈물을 감추며 천문학적인 식대를 계산했다.
다음 서른 명의 면담자들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매번 그녀의 자신감은 줄어들었고 희망찬 전망이 위축되었다. 꼭 소용돌이에 휘말린 꼴이었다. 다들 핑계는 많았다. 잡지의 창간호가 발매된 다음에 광고 게재를 생각해 보겠다는 둥, 올해 광고비가 다 지출되었으니 내년 예산 책정 때나 보자는 둥, 잡지의 발행 부수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둥. 잡지를 제작하지 않고 발행 부수를 확보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이 문제를 놓고 죠와 머리를 쥐어짰다. 그는 수십 가지의 세일 아이디어를 제안했지만, 창간호를 출판해야만 직접 우편 캠페인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창간호를 출판하려면 광고비가 필요했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고리였다. 부채에도 불구하고 죠는 돈을 흥청망청 뿌려 댔다. 워드 프로세서, 책상, 의자, 인터컴, 편집대, 테이프, 레코더가 이미 주문되었다. 그리고 그 목록은 끝이 없었다. 그녀가 걱정을 할 때마다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광고를 팔게 될 거요, 마조리. 당신이 해내리란 것을 알아. 난 당신을 굳게 믿고 있소."
'나중에 두고보자'라는 대답을 쉰 번째 들은 그녀는 포기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벌써 은행 대출금이 1만 3천 파운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는데, 그녀는 창피하게도 겨우 열 페이지의 광고를 따냈다. 수입도 없고 파산할 전망에 당면한 그녀는 고질적인 긴장 상태에 몸부림쳤다.
다음 한 달 동안 그들의 부채는 1만 5천 파운드에 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창간호 제작에는 직원 봉급, 기사 및 사진 원고료, 그녀의 자동차 유지비뿐 아니라 굴이나 캐비어를 먹어 치우는 탐욕스런 광고주에 대한 접대비까지 들어갔다. 공포감이 그녀의 배짱과 목과 위장에 만성적인 고통을 야기시켰다. 그녀는 위궤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8월 말경 그녀는 연말에 창간호를 발매하겠다는 약속 하에 필요치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광고를 계약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철저한 내핍 생활에 들어갔다. 기름값을 절약하기 위해 그녀는 다 쓰러져가는 챨크 팜 아파트에 지하 공동 부엌과 목욕탕이 딸린 방 하나를 얻어 지냈고 지하철을 이용했다. 공장과 사무실 단지 돌아다니며 힘든 하루를 보내고 파이 한 조각과 토마토 하나, 빵 반 정어리와 우유를 좀 사서 집에 돌아왔다. 생선튀김 냄새나는 싼 레스토랑 옆을 지날 때마다 입에 군침이 돌았다. 일단 초라한 방에 돌아오면 음식을 먹어치우고 쓰러져 자기 일쑤였다. 그녀는 외롭고 두려웠으며 하루종일 딸아이가 보고 싶었다. 낮에는 로버트를 생각할 짬도 없었지만 밤에는 무의식이 저 심층 속에서 그를 불러냈고 어느 틈엔가 그와 코르시카 해변을 뒹구는 꿈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그다음은 더 최악이었다. 왜냐하면 사업상의 현실이 역겨울 만큼 강렬하게 밀어닥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직 생존만이 존중되는 새롭고 두려운 세계에서 악전고투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 들자 그녀의 방에 냉기가 돌았지만 난방비를 아끼려고 덜덜 떨며 지냈다.
그녀는 점점 산업 분야에 정통하게 되었다. 광고부 과장들과 영업부 부장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고, 그들의 생산 제품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원하는 '리더십'의 출판 방향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습득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판매 목표량은 좀처럼 달성되지 않았다. 이미 총 50여개의 광고 지면을 채우기에 충분한 약속은 받아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한결같았다. 잡지 발행본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자금만 넉넉하다면 석 달 치의 무료광고를 게재해 줄 수 있으련만 지금으로서는 출간 여부조차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부채가 점점 늘어나는 속에서 마조리는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영국 내의 회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쫓아다닌 결과 여행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마조리는 마지못해 짐을 꾸려 3주간 예정으로 집으로 내려갔다. 더 이상 런던에 버틸 이유가 없었다. 이런 시즌에 누가 그녀를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녀는 집안일을 도우려고 했지만 라나와 놀아 주는 것조차 마음이 아팠다. 딸에게 약속했던 많은 것들 중 뭐 하나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검소한 크리스마스가 될 거예요."
그녀가 엄마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년에는 달라질 거예요. 지금은 창간호를 출간해야만 하거든요."
그녀는 긴장을 풀고 재충전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2만 파운드의 부채에 대한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업은 게임이오."
죠는 어느 날 그녀가 사무실에서 미래의 기사들을 울적하게 검토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말했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법이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항상 뭔가를 배우게 되지."
"난 빚에 깔려 지내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그거야 은행이 할 일이오. 대부와 대출말야. 그들도 가끔 손해를 볼 때가 있소."
그는 명랑하게 웃었다. 마조리는 그런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행 지점장은 죠의 빌딩이 담보 대출로 잡혀 있다는 말을 그녀에게 귀뜀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그런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은행이 타격을 입겠지만 누가 상관하겠소?"
그가 쾌활하게 말했다.
"뭐, 우리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면 되는 거요. 최악의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당신에게는 내 비서 자리가 남아 있소."
"그거야말로 진짜 최악이군요."
하지만 그녀의 마음 뒤편에는 죠가 그녀를 돕기 위해 건물을 내놓았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녀는 결코 그를 파산시킬 수 없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했다. 더 관대하게도 죠는 그녀에게 한 달 치 월급을 크리스마스 보너스로 지급했다. 그녀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겨우 참고 그 돈을 받았다. 덕분에 가족들은 초라한 크리스마스라도 보낼 수 있었다. 마침내 명절은 지나갔고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와 다시 전투를 개시했다.
1월의 세 번째 금요일 새벽 6시에 마조리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친숙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제 2만 3천 파운드에 달한 부채 생각을 머리 속에서 몰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의 약속 계획을 점검했다. 그녀가 막 목욕을 하려는 찰라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망할!"
웬 자메이카 인이 일찍 일어난 모양이다. 이제 목욕탕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거나 아예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수건과 세면도구를 가지고 문 앞에서 떨며 기다렸다. 결국 한 남자가 나온 뒤를 따라 목욕탕에 들어가 보니, 바닥은 온통 물 천지에 시꺼먼 때와 비누 거품들로 엉망인 데다 잔뜩 김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목욕탕을 청소했다. 5분 후에야 따뜻한 물을 온몸에 받으며 비누칠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기다려요, 난 방금 들어왔다구요!"
그녀가 고함을 쳤다. 아침은 롤빵 한 조각과 커피 두 잔이 전부였다. 8시경에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역을 헤집고 다녔고 9시 30분에 첫 번째 거절을 당했다. 그리고 계속 그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약속은 3시 30분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공교롭게도 구두굽이 부러졌다. 프랭크 암브로스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인물이었다. 창백하고 구부정한 데다 영양실조에 걸린 듯했다. 그 더운 사무실에서도 검정색 정장 양복과 빳빳하게 다린 흰 셔츠, 보수적인 넥타이와 함께 장식 허리띠마저 두르고 있었다. 그의 비서가 강하고 달착지근한 차와 함께 다이제스티브 비스킷을 가져왔다.
"당신에게는 그게 필요해 보이더군요."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나달나달해진 잡지 견본을 들고 근시처럼 뚫어지게 살폈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가 최근에 가업인 문구 제조 회사를 물려받았고 매우 부자인 데다 보수적인 성향이라는 개인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리더십'의 판매 현황을 물었을 때, 그의 솔직한 회색 눈동자 속에 어린 걱정스런 빛에 그녀는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저는 광고 대행사를 뚫을 수가 없어요. 이미 15건의 계약을 체결했지만 모두 작은 업체들이에요. 대행사는 아예 우리와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열을 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들의 추천을 받은 우리가 실패하면, 그쪽에서 모든 책임과 비난을 뒤집어쓰게 될 테니까요. 전혀 안정성이 없는 셈이지요. 게다가 경영 잡지 광고는 그들에게 돈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고객 당사자들은 모두 뒤로 물러서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산업계는 이 잡지를 필요로 하지만 사람들은 확신을 원해요. 하지만 애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에요."
그녀는 어렵게 침을 삼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통 광고의 지불은 어떻게 됩니까?"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 질문이 그에게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출판 후 30일이 정상이라고 배웠습니다. 대행사에서는 45일 후에 결재를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은행에 어음을 결재하여 인쇄 및 우편비를 충당하게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그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을 돕고 싶군요, 하디 양. 저는 사무 및 컴퓨터 기기 생산 협회의 간사로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 잡지에 대한 대다수의 의견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밖에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1년 치 계약을 해주는 것 이상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텐데. 하지만 다시 한번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에 섰다.
마조리는 집에서 지긋지긋한 주말을 보냈다. 엄마는 유모차를 사야한다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그녀는 한 푼도 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지금 그녀가 처한 곤경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데다 라나에게 기본적인 필수품조차 줄 수 없는 현실에 이중으로 괴로웠다.
"넌 요즘 사업에만 정신을 쏟고 있어."
엄마가 질책했다.
"넌 쇼핑할 시간조차 내지 못하잖니. 정 네가 그렇게 바쁘다면, 나라도 가서 사게 돈을 내놓으렴, 라나는 포대기에 싸서 안고 다니기에는 너무 컸어."
신이여 굽어살피소서! 내가 나가떨어진다면 무슨 수로 부채를 갚지? 일을 그만둔다면 우리 가족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지? 라나가 노는 모습은 마조리에게 더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라나는 친부가 마땅히 베풀어야 할 좋은 생활을 누릴 자격이 있었고, 어떻게든 누리게 해줘야 해. 이 재난을 승리로 이끌 묘책이 있어야만 해. 소심한 사업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나를 후원하게 만들어야 해. 그러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냐. 아직 기회는 있어. 엄마가 계속 잔소리를 했지만 그녀는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
"엄마, 미안해요. 난 생각 중이에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충동적으로 그녀는 프랭크 암브로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놀랍게도 이 늦은 토요일 오후에 그는 여전히 사무실에 있었다. 그녀는 운을 뗐다.
"저를 도와주겠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저를 여러분의 연례모임에 초대해 주세요. 저는 회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뒷짐을 지고 서서 결단을 내리고 싶어 하지 않는 상황은 좋지 않아요. 그러니 그룹으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저를 위해서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시도할 가치는 있군요."
그가 대답했다. 마조리가 부엌으로 되돌아오자, 엄마는 아까 하던 말을 다시 꺼냈다.
"넌 돈에 환장을 했구나. 그리고 언제쯤 그 창간호를 볼 수 있는 거니? 넌 계속 말만 하지만 그 창간호라는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라."
"곧 보시게 될 거예요. 그리고 엄마, 그 유모차 이야기를 꺼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돈을 벌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 순간부터 긍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제 우울하고 암담한 날들이여, 안녕! 저 망할 사업가들에게 총이라도 들이대서 계약서에 서명을 받겠어.
다음 주 금요일 아침 마조리는 일찍 일어났다. 신경이 날카로웠다. 오늘은 협회 모임이 있는 날이고 이제 약 12시간 후에 그녀는 사업가들로 꽉 들어찬 방에 서게 될 것이다. 그녀는 전날 밤 도버로 돌아왔다. 당일 아침 내내 연설문을 작성하고 연습하고 입을 옷을 고르면서 보냈다. 마침내 단순한 검정색 실크 정장과 흰 실크 블라우스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장 안전해 보였다. 그녀는 라나를 꼭 껴안았다.
"행운을 빌어주렴, 달링. 엄마, 라나를 재워 주세요."
"넌 더 이상 가족과 보낼 시간을 내지 않는구나. 너 자신과 사업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어."
엄마가 항상 그렇듯이 투덜거렸다.
"미안해요, 엄마."
그녀는 돌아섰다. 그녀가 가족 모두를 재난의 구덩이에 몰아넣었으며, 베 식구가 가파른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일촉측발의 상황임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공기가 맑고 쌀쌀한 겨울날이었다. 마조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런던으로 차를 몰았지만 부정적인 의혹이 연거푸 떠올랐다. 파산하면 어떡하지?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끝이 쭈뼛 일어섰다. 차라리 안면이 넓은 전문 연사를 고용할 걸 그랬나? 하지만 마음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어. 그녀는 도체스터의 회의장 출구 밖에서 서성거렸다 잘 차려입은 귀빈들이 향수 냄새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좋아, 내가 고아 소녀 애니는 아니잖아? 이 옷과 던비 죤스에게 쏟아부은 한 재산을 기억해.
"열등감은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겁니다."
그는 안도의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내며 마지막 수업을 마쳤다.
"당신에게는 화술 훈련이 아니라 정신 상담이 필요해요."
지옥에 떨어진 던비 죤스 하지만 그의 생각에 그녀는 훨씬 자신감을 느꼈다. 회의장 안에 들어선 그녀는 5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홀의 규모에 질렸다. 빈자리는 회원 부부들로 빠르게 채워졌고, 모든 여성들이 이브닝 드레스와 보석으로 단장한 모습이었다. 마조리는 자신의 복장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프랭크 암브로스가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가장 가까운 그룹으로 데려가 타자기 회사 회장과 일본 사무기기 수입상을 소개시켰다. 그녀는 많은 초대객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과 대화를 두 마디도 나누기 전에 프랭크에게 이끌려 구술 기기 제조 회사의 사장과 혁신적인 사무용 의자로 상을 받은 산업 디자이너와 인사를 나누었다. 세상에! 새로운 면면들을 전부 기억할 수 있을까? 그녀는 죽도록 두려웠다. 이제 프랭크가 안내한 문가의 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잡지 견본과 요금표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가끔 사람들이 멈춰 서서 그것을 훑어보았지만 요금표를 집어 들지는 않았다. 마조리는 행인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마네킹이 된 기분이었다. 도망가고픈 심정이 굴뚝 같았지만 프랭크가 그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주요 인물들과 그동안 그녀를 박대하고 기를 꺾어 놓았던 영업부장들의 고용주를 소개시켰다. 모두들 분위기가 고조되고 관대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은 잡지에 대한 말을 할 때가 아님을 눈치채고 대신 업계의 다양한 소식과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마조리는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5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설득할 마음을 먹었을까? 어떻게 저들이 그녀의 말을 들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한 젊은 청년이 마이크와 전선을 갖고 오자, 그녀는 당장 기절할 것만 같았다. 저녁식사는 악몽이었다. 파테와 셰리, 생선과 백포도주, 오리 요리와 적포도주가 차례로 선보였다. 그녀는 한 입도 삼킬 수 없었기 때문에 먹는 시늉만 했다. 그녀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꼭 두꺼비처럼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쇠망치가 갈비뼈를 쳐대고, 양 뺨은 모닥불을 지펴 놓은 듯 화끈거렸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도망갈까? 마지막으로 디저트가 나오면 그렇게 해야지. 갑자기 이곳을 꼭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이 일을 해낼 리 없다. 아무리 파산을 눈앞에 두고 있기로, 이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연설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프랭크가 일어났다. 그들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신사 숙녀 여러분, 잠깐 대화를 멈추시고 마조리 하디 양의 말을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리 와요, 마조리."
하느님 맙소사!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으로 걸어가서 마이크를 조정했다. 그 몇 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현실인 척 했지만 당연히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려고 시도했다. 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네. 거참 이상하다.
"즐겁고 흥겨운 밤에 저를 초대해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잔뜩 곤두선 신경이 누그러들었다. 그와 함께 진짜 마조리도 어디론가 뿅하고 사라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미소도 됐다. 그녀는 뒤적거리며 연설문을 찾다 말고 그것이 의자에 걸쳐진 핸드백 속에 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맙소사! 그녀는 깊은숨을 들여 마셨다.
"한 시간 전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저는 가히 혁명적인 소형 전자계산기의 등장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사실도, 소매상들이 신상품을 6개월씩이나 창고에 쳐박아 둠으로써 구 상품으로 만든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또한 컴퓨터로 버스 운행 시간표를 짜고, 시각 장애자가 컴퓨터로 읽고 쓸 수 있고, 새 프로그램이 비행기 추락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도난 방지 장치를 작동시켜 준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아마 여기에 계신 대다수의 분들 역시 모르셨을 겁니다. 혹은 서로 그러한 새로운 발전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셨을 겁니다. 한 달에 한번 다 함께 모이는 이런 회의를 통해서만 여러분들은 제가 들었던 기술 진보를 비롯한 영업, 시장 경기, 자금에 대한 생생한 정보 등 각종 산업계 소식을 들으실 수 있겠지요? 오늘 밤 여러분이 공급자로서 한자리에 모인 것처럼 소비자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겁니다."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며 걱정스럽게 회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프랭크가 그녀에게 윙크를 보내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 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소비자들은 여러분의 영업 직원을 통해서만 각종 소식을 들을 테지만,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얻어들은 그 모든 정보를 다 입수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산업계 전체와 소비자들은 지금 당장 업계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사건, 진행 상황, 핵심 소식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회의실은 조용했다.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건 기적이야!
"신사 숙녀 여러분, '리더십'은 여러분 모두를 위한 소중한 영업 도구가 될 것입니다.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여러분의 판매량이 가일층 신장될 겁니다. 이 잡지는 여러분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대동맥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광고 대행사에게 홍보 계획을 맡깁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위해 사업적인 도박을 감수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단계에서 '리더십'을 전폭적으로 밀어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충분한 유료 판매 부수를 확보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겁니다. 그러기 위하여 여러분의 조력이 필요합니다. 즉, '리더십'이 세상 빛을 보기 위하여 여러분이 한 몸처럼, 그리고 한 회사처럼 결정을 내려 주시고 후원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금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여러분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경영잡지가 필요하다는 용단을 내려 주세요. 더 이상 오랫동안 여러분을 앉혀 두고 지루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잡지의 견본을 구경하고 미래의 구상을 들으실 기회를 이미 가지셨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 한 마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잡지가 현실화될 수 있도록 결단을 내려 주세요. 여러분 모두 그 혜택을 보게 될 겁니다."
마조리는 여기서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프랭크에게 시선을 준 채 말을 마쳤다.
"이제 여러분께서 괜찮으시다면, 이 문제를 찬반 투표에 붙이고 싶습니다.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프랭크?"
그녀는 정말 이상한 기분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시간의 행보가 변해, 매초가 생동감 있고 의미심장해졌다. 묘한 힘이 몸 속에서 들썩거리는 느낌 속에서 그녀는 프랭크의 말을 들었다. 그는 이 잡지가 업계에 필수적이라는 의견을 개진하며 '찬성' 쪽에 한 표를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선두주자 격인 컴퓨터 회사의 회장이 일어나 신제품에 대한 기사를 싣겠다는 보장을 하겠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이 빙그르 돌았다. 투표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다음에 어떻게 하지? 여기에서 살금살금 도망갈까? 그다음에는? 참담한 미래를 당면해야 하겠지. 맙소사! 아빠 말씀이 옳았어. 프랭크는 조용히 거수로 투표를 진행했고 웨이터들이 그 숫자를 집계했다. 그 긴장감은 살인적이었다. 두 다리가 점점 굳더니 등까지 퍼졌다. 줄에 조종되는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왜 프랭크가 저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협회 이사진들과 쑥덕거릴까? 그녀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 애당초 여기에 오지 말걸. 그때 프랭크가 자리로 돌아와 말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새로운 잡지 '리더십'의 탄생과 더불어 강한 투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여기 젊은 아가씨를 위해 건배를 합시다. 찬성이 450명, 반대가 23명으로 나왔습니다. 마조리, 어떤 일에나 만장일치는 드문 법이지요. 당시은 신제품 홍보 기사를 반드시 게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리더십'을 업계 여러 협회의 공식 잡지로 지정했고 모든 노력을 다해 당신네를 원조할 것입니다. 마조리,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빨강색 소형차를 타고 하늘을 날 것같은 기분으로 도버로 돌아왔다. 죠의 소중한 기사면에 8쪽이나 상품 소식을 넣어야 된다는 말을 듣고 그가 뭐라고 말할까? 하지만 그게 뭐 대수야? 살아날 구멍이 생겼는데.
혈관을 타고 흐르는 승리감은 끝에서 진동하고 두 뺨을 붉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드디어 첫 번째 장정본이 그녀 앞의 제본대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여기, 은청색 바탕에 흰색으로 '리더십'이란 글자와 사각형 창문 속에 멋진 타자기가 그려진 그녀의 잡지가 있다. 마조리는 가슴이 너무 벅찬 나머지 숨을 쉴 수 없었다. 모두 창간호의 제 일본을 원했다. 편집장 가스 클락은 내성적이지만 번뜩이는 감각과 재주가 많은 영리한 사내였다. 그가 주변을 맴돌며 그것을 잡을 기회를 노렸다. 6피트가 넘는 키에 깡마른 데다 자루걸레 같은 암적색 머리카락은 허수아비를 연상시켰다. 마이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심지어 날씬한 금발의 제작편집자마저 평소의 지루한 표정을 잃었다. 그야말로 흔치 않은 특별한 순간이었다. 여기 잡지가, 그들의 아기가 누워 있었다. 곧이어 다른 장정본도 속속 제본대로 활강했다. 죠는 제 일본을 그녀에게 건넸다.
"당신이 이걸 만들었소, 마조리. 그러니 당신이 갖도록 해요."
그녀는 잡지를 꼭 껴안았다. 평생의 보물이 되리라. 이것은 그녀가 태어난 이래 가장 피눈물 쏟는 공을 드렸던 기념물이었다. 3개월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절치부심해왔던 노력의 결실인 총 80쪽의 광고. 그 모든 방문, 끝도 없는 대화, 약속, 수백 잔의 맛없는 커피, 수십 회에 달하는 점심과 저녁 접대, 최소한 여든 번의 퇴짜, 이십 번의 성적인 유혹, 손으로 꼽을 만한 외설적인 협박 등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명멸했다. 이것은 미래의 희망이자 라나의 교육이었고, 부모님의 연금이자 그녀의 안전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마침내 해냈어!
그녀는 고독을 찾아 한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잡지를 훑어보았다. 매쪽마다 각각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여기 에이스 오피스 기계의 광고가 실렸네. 그녀는 그 특별한 재난을 상기할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다니엘 무어 주니어는 회장의 조카로, 번들번들한 푸른 눈동자를 한 잘생긴 망나니였는데 대학을 졸업한 후 2년만에 영업부장으로 낙하산 발령을 받았다. 그는 손을 써서 그녀의 런던 주소를 알아내어 다음날 10시에 집으로 찾아왔다. 당시 파자마 바람으로 티브이를 보고 있었던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고, 다니엘이 힘으로 밀고 들어와 그녀를 덮쳤다. 5분 동안 온 방을 굴러다니며 몸씨름을 한 끝에야 그녀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6피트의 자메이카 거인 존슨에게 겨우 구조를 받았다.
"세상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왜.....?"
겨우 말할 수 있게 되자 그녀가 질문을 퍼부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존슨이 다니엘을 거칠게 대하는 광경을 보고 소리 질렀다.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아요. 그는 유망한 고객 중 한 명이에요."
"입 다물어요, 아가씨. 대체 무슨 사업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요? 경찰을 부를까요?"
존슨이 물었다.
"네, 눈가에 멍이 든 것 같아요."
그녀는 검지 손가락으로 눈 주변을 만지며 말했다. 아얏!
"이봐, 잠깐만 기다려요."
다니엘이 통사정을 했다.
"그러지 말아요 , 제발! 난 당신의 신호를 잘못 읽었소.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심이오...... 당신은 목표를 달성해야잖아?"
"이런 식으로는 아니에요."
"이봐요, 당신이 이번 일을 눈감아 준다면...... 내 약속하겠소."
"아무것도 약속하지 마세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이 바보를 여기서 끌어내요."
그녀는 존슨에게 말했다. 이 형편에 오명까지 뒤집어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3일 후, 다니엘의 광고 대행사가 죠에게 전화를 걸어 전면 칼라 광고를 1년 동안 계약했다. 그녀는 다니엘의 삼촌이 은퇴하고 그가 경영 일선에 부상하리란 소문을 들었다. 쯧쯧쯧, 불쌍한 여직원들 같으니.....
마조리는 몇 쪽을 더 넘겼다.
"맙소사, 이 사람!"
그녀가 중얼거렸다. 볼드윈 경은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는 여러 기업체의 이사회와 관심을 쏟는 환경단체 문제로 바쁘다고 말했다. 그이 집안은 대대로 만년필 제조 회사를 운영해오고 있다. 그는 그녀가 계약을 맺고 싶다면 토요일 오후에 시간을 내겠다고 했다. 그래서 마조리는 옥스퍼드에 있는 그의 포트윅 영지로 갔다. 화창한 여름 오후의 기분에 젖어 찾아간 그곳은 천국이었다. 아름다운 앤 여왕 시대의 저택이 넓은 정원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잘 손질된 관목과 잔디, 눈이 부실 만큼 만발한 꽃의 장관에 그녀는 숨이 막혔다. 볼드윈 포트윅 경은 다부지고 튼튼한 체격이었고 불그레한 얼굴과 눈처럼 하얀 머리칼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부심 어린 태도로 그녀에게 집 주변을 구경시켜 주며 정확히 1전 전에 아내와 사별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깊은 유감을 느꼈으며 그의 1년 상 동안의 조신한 생활에 존경심마저 품었다. 볼드윈 경은 그녀를 세어 종마를 사육하는 마구간으로 데리고 갔다.
"어떻소?"
그는 사육사가 끌고 온 거대한 종마에 감탄사를 발했다.
"저 엉덩이를 만져 봐요!"
그녀는 종마를 쓰다듬으며 갖은 칭찬을 다 했다. 그들은 그의 아일랜드 울프하운드 종의 개 사육장으로 갔다. 사냥개들의 마리당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함부로 풀어 놓을 수 없다고 그가 설명했다.
"어떻소?"
그는 생후 6주일 된 투실투실한 강아지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한번 안아 봐요!"
그다음 그는 그녀를 장미 정원으로 안내했고 원예상을 수상한 장미들을 한 송이씩 구경시켰다.
"이 꽃은 포트윅 빨간 장미요."
그는 한 송이를 꺾어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끌며 그녀의 가슴팍에 꽂아 줬다. 마조리는 그의 저의를 서서히 눈치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둑판처럼 경작된 채소 정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호박과 토마토와 오이 등이 잘 여물어 있었고, 그는 토마토와 오이, 수상 품종인 포트윅 콩을 따 주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핸드백 속에 밀어 넣었다.
"어떻소?"
그가 소리를 질렀다.
"이 포트윅 고추를 한번 먹어 봐요."
그는 그녀에게 큼지막한 빨간 고추를 건넸다.
"맛을 봐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이런 고추를 보지 못할 거요. 자, 한입 먹어 보라니까."
그녀는 고추를 베어 물고 씹은 다음 남은 부분을 만지작거리다 손아귀에서 으깨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저택으로 가는 길에 또 다른 정원을 통과해야 했다. 사면이 키 큰 울타리로 둘러싸인 한가운데 잉어들이 뛰어노는 연못과 분수가 있었다.
"네, 그렇네요."
발걸음을 멈추고 물고기를 칭찬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신음을 내뱉었다. 저택으로 통하는 프렌치 문을 볼드윈 경이 열어 졎혔다. 그의 서재가 틀림없었다. 실내는 티브이 수상기, 바, 아늑한 양탄자, 큰 사슴 머리와 벵갈 호랑이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제 저 망할 박재들을 칭찬할 차례로군. 하지만 그녀의 착각이었다! 볼드윈 경은 바지 지퍼를 내리고 그녀가 본 중 가장 굵은 남성을 꺼냈다.
"어떻소? 이 물건은 지난 365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오."
그리고 그녀는 366일 째 포트윅 영지에 뛰어든 바보였다. 그 명품은 더 이상 쉴 의향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눈앞에서 남보라색으로 변하면서 고동쳤다.
"쟈, 손을 대봐요! 만져 봐요! 잡아 봐요!"
그가 명령했다. 그녀는 그 말에 따랐다. 아까 포트윅 고추 즙이 밴 손으로 그것을 잡고 꽉 눌렀다. 볼드윈 경은 아픔으로 귀청이 떨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그는 연못으로 뛰어들어 그의 살찐 잉어들과 함께 물장구를 쳤고 그의 살찐 울프 하운드처럼 투덜거렸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마조리는 잡지에 포트윅 만년필 광고가 게재되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오산이었다. 왜냐하면 그 1주일 후 그의 광고 대행사가 양면 컬러 광고를 1년 동안 발주해 왔다. 결국 볼드윈 경은 우아한 패배자였던 것이다.
대다수의 광고업자들과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잡지를 넘기며 그들과 함께 한 점심 식사와 공유한 신뢰감을 떠올렸다. 하지만 단 한명의 치명적인 적을 만들었다. 알프레드 케이브는 거대 광고 대행사의 미디어 부장이었다. 케이브는 아무리 좋게 묘사하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키가 작고 말랐지만 온화한 인상과 달리 그의 회색 눈에는 권력에 굶주린 빛이 번들거렸다. 그는 언론 매체를 검토하여 그 광고 효율성에 따라 다양한 영업 분야에 적소 배치했으므로, 그의 노련한 안목을 거쳐야만 회사 중역진의 검토 대상에 올라가고 최종적으로 고객들에게 추천될 수 있었다. 그녀의 첫 방문에 그는 그녀에 대한 음흉한 저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디 양, 당신이 제의한 내용이나 수치는 꽤 근사하게 들리지만 좀더 창조적인 전략을 채택할 수 있을 거요. 내 말을 알아들었소?"
그녀는 이해를 못 한 채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는 당신네에게 한 꾸러미의 광고를 밀어 줄 수 있소. 거물 고객들과 큰 자릿수의 계약만 골라서 말이오. 그건 전부 내가 당신네를 우리 윗분들에게 어떻게 소개하느냐에 달려 있소. 당신이 나에게 잘해 준다면, 나도 그만큼 보답을 하리다. 이제 내 말뜻을 알겠소?"
"어떤 식으로 잘해 달라는 거예요?"
그녀는 가방 속에 든 테이프 레코더를 작동시켰다.
"순진하게 굴지 말아요, 마조리. 내 물건을 갖고 놀아 준다면 수십개의 광고가 당신 회사로 떨어질 거요."
"저기, 내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평소대로 해요, 마조리. 당신이 뒷 수작으로 광고 지면을 팔았던 식으로 말야."
"당신같은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어요. 이건 파워게임이지요? 당신은 그저 날 굴복시키고 싶은 거예요. 정말 잔인한 사람이군요."
"잔인하든 말든, 내가 당신이라면 저 탁자 위에 누워 다리를 벌릴 거요. 예쁜이, 수십 쪽이 넘는 올 컬러의 광고를 생각해 봐요. 당신은 두둑한 수수료를 받게 될 거요. 자, 내가 문을 잠그겠소."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난 가겠어요."
그다음날 아침 그 테이프는 복사되어 그의 회사 총 경영 책임자에게 전달되었다. 이제 알프레드 케이브는 좌천당했지만, 그 대행사는 그녀의 잡지를 거부했고 아무도 그녀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전형적인 본보기였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그토록 고결한 사람일까? 매일매일 그녀의 영혼을 팔지 않았던가? 바바라가 그녀의 새로운 이미지와 머리 모양, 사투리 없는 억양과 뛰어난 세일 능력을 칭찬하는 동안 그녀 자신도 달라진 모습에 적응해 나갔다. 목표물이 방어벽을 낮추는 순간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먹이를 낚아채는 기회주의자, 편의적이며 감언이설로 꾀는 무자비한 세일즈맨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항상 존재했다. 한동안 기다리다 보면 결국 먹잇감은 긴장을 풀었고 바로 그 순간 홱, 결국 그들은 그녀의 갈고리에 걸려 바둥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리 와요, 마지. 기분 좀 내라구. 축제 분위기잖소."
죠가 소리쳤다. 그녀는 재빨리 우울한 상념에 빠졌던 변명거리를 찾았다.
"우리 빚이 얼마나 되죠?"
"이런! 마조리, 당신은 분위기 떼는데 도통했구려. 모두 5만 파운드지만, 창간호 발행으로 이번 달 경상경비와 대출 이자를 모두 제하고도 원금을 5천 파운드나 갚았소. 올해 안으로 부채를 전부 청산하게 될 거야."
"하지만 지출 경비가 급상승할 거예요."
그녀가 침울하게 말했다.
"나에게는 런던 사무실과 각각 한 명씩의 비서와 보좌인이 필요해요. 아니, 가장 좋은 방법은 회사를 런던으로 이전하는 거예요."
"당신 같은 여자 세일즈맨을 더 뽑는 게 어떻겠소?"
"난 이혼, 혹은 배우자와 사별한 여자와 미혼모만 고용할 거예요."
그녀에게 갑작스런 직관이 떠올랐다.
"단기 계약과 저임금, 그리고 높은 수수료를 제공하겠어요. 그들은 이 세상의 진정한 절망을 맛본 자들이기 때문에 사소한 고객도 놓치지 않을 거예요."
약간 몽롱한 기분으로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고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걱정 많은 엄마 비둘기들이 런던 주변을 배회하다가 통통한 벌레들이나, 카멘 주택가나 챨크 팜 하숙 단지, 혹은 과밀한 탁아소 주변의 보잘것없는 먹잇감도 소흘히 하지 않고 낚아채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이만 퇴근할게요, 안녕. 열흘 후에 봐요."
그녀가 크게 소리 질렀다.
"가지 말아요. 재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구!"
죠가 새 비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난 라나에게 가 봐야 해요. 그리고 이 잡지를 엄마에게 보여 드리고 싶어요. 나에게는 그게 재미라고요."
그녀는 딸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던 시간을 지금부터 보충할 생각이었다. 우선 라나와 단둘이서만 데본에 가서 휴가를 보내야지. 그들뿐 아니라 엄마도 숨돌릴 필요가 있었다.
1975년 6월 말에 창간호를 발매한 이후, 마조리는 구름에 닿을 만큼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이제 그녀는 중요 인사였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잡지의 공동 발행인이었다. 고객들은 붉은 융단을 깔고 그녀를 맞이했고, 기본 업무를 중단한 채 그녀와 면담했다. 색정적인 야수와 잔인한 제안과 저질 협박은 과거의 일이었다. 마조리는 그녀의 성적, 사업적인 힘을 행복하게 인식했다. 첫해 연말에 그녀는 챨크 팜에서 햄스테드의 안전하고 쾌적한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라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부모님들을 런던 근교로 모셔올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듬해 1월, 마조리는 '올해 영국의 여류 사업가'로 선정되어 저명한 사교 잡지를 장식했다. 별을 향한 마법의 사다리를 한층 더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사랑에 둘러싸인 라나는 튼튼하고 명랑하게 성장했다. 세 살 배기치곤 말도 잘 했고 영리했다. 그녀의 사전에 '아빠'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대신 '죠'가 그 자리를 메웠다. 마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바바라가 양육을 도왔다. 매주 금요일마다 마조리는 런던을 출발, 오후 5시에 집에 도착한 다음 라나를 목욕시키고 함께 놀아 준 다음에 잠자리를 봐 주었다. 일요일 저녁에 딸을 떼어놓고 떠날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찢어졌다. 1976년 7월, 죠는 다섯 개의 경영잡지로 구성된 출판 그룹의 도산 소식을 듣고 채권단으로부터 회사를 사들였다. 가스 클락은 사주의 10퍼센트를 받고 경영 이사직을 수락했고. 전 동료이자 친구를 '리더십'의 편집자로 스카웃 해왔다. 마조리에게 새로운 영역이 열렸지만, 이번에는 보석과 호텔, 플라스틱과 섬유, 교통에 대한 무지에 겁먹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날에 걸쳐 그 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동시에 사무실을 찾아다녔다. 다행히 핀클렌이의 복합 쇼핑 단지 내에 3개의 임대 사무실을 얻었다. 이제 저문 영업 팀을 발족하겠다는 그녀의 꿈을 현실로 옮길 차례였다. 그녀는 광고를 내고 면담한 결과 주부 사원들을 채용했다. 너무 많은 책임을 걸머진 것에 반해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걱정 많고 야심찬 엄마들이었다. 그녀는 단기 계약을 기본으로, 적절한 자격을 소지한 보모들이 있는 청결하고 믿을 수 있는 탁아소를 공식 후원했고 아픈 자녀들을 간호할 수 있도록 관대하게 근무 시간을 조정한데다 교통비를 보조하고 의상을 지급했다. 이렇게 생명 줄을 던져 준 보답으로 그들은 모두 헌신적인 일꾼으로 변했다. 그녀는 그들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이 경험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를 새삼 실감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새로운 팀은 도버 건물의 2, 3층을 빠르게 독식해 나갔고, 원격으로 편집부를 운영하기란 쉽지 않았다. 죠는 도버를 떠나야 했지만, 이 건물에서 그를 떼어 내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보다 힘들었다. 1976년 연말에 회사가 흑자를 냈기 때문에 마조리는 첼시에 템스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아파트를 구입했다. 마조리에게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1주일간의 휴가를 얻어 새 보금자리의 단장에 나섰을 때 죠가 등장했다. 그들은 그녀의 계획을 놓고 오랫동안 격렬하게 싸운 결과 그 노력의 대가를 받았다. 단순한 나무 바닥 위에 깔린 화려한 아프간 러그, 현대적인 스웨덴 가구, 탁 트인 공간과 몇 점의 명화 등. 그녀는 집들이 파티를 열었고 예상 밖으로 많은 지인들이 참석했다.
거의 런던 인구의 반이 모든 방과 지붕식 정원까지 가득 메웠다. 곧 유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녀는 한달 동안 그곳에 머물며 '리더십'의 유럽 증보판 창간을 지휘했다. 특유의 영업 방식은 목표량을 초과 달성했고, 증보판의 지면은 남김없이 광고로 채워졌다. 마조리는 여행을 하면서도 잡지의 성장세를 지켰다. 놀라울 만큼 그녀는 빨리 부유함에 익숙해졌다. 하루아침에 제트 족에 편입한 그녀는 돌발적인 비행을 대비하여 항상 가방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유명했고 젊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이룩한 승리자로서의 외양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오직 그녀만 알았다. 그녀의 속은 딴사람이었다. 누구일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실패자로 보았다.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을 획득하지 못한 여자, 딸의 생득권을 확보하지 못한 여자,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여자. 이렇게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면서 그녀는 마조리 하디라는 화려한 외양에 피신처를 찾았다.
마조리는 맨 어깨와 얼굴에 와 닿는 따뜻한 바람의 감촉을 만끽하며 일등석 승객들과 어울려 공항 청사로 향했다. 냉기어린 영국을 벗어나니 살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바람에 머리카락을 맡긴 채 얇은 실크 정장이 몸에 와 닿는 감각을 즐겼다. 침대에서 맞는 기분 좋은 아침 같았다. 한 남자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마조리, 마조리, 달링......."
그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하지만 저 남자가 누굴까? 여기가 어디지? 순간 기억이 끊어졌다. 물밀 듯 닥쳐온 까마득한 공포감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뒤져 일정표를 꺼냈다. 이탈리아........아, 밀라노로구나. 그렇다면 저이는 안젤로가 분명해. 친애하는 안젤로는 침대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약간 변덕스럽고 소유욕도 강했다. 그녀는 입국 절차를 밟고 세관을 통과한 뒤 안젤로의 품에 안기는 평소의 과정을 떠올리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이 곳에서 체류할 5일은 전혀 고역이 아니었다. 로마인다운 뚜렷한 용모, 관능적인 입술, 표정이 다양한 갈색 눈동자와 흑발 고수머리의 안젤로는 현생 인류 사상 최고의 남성' 호모 사피엔스'였다. 게다가 6피트나 되는 장신인 데다 강하고 섹시했으며 뛰어난 댄서였다. 또한 정열적이고 웃음을 사랑하는 천부적인 재능의 화가였다. 그녀는 그의 그런 점을 사랑했다. 최근 마조리는 사업과 유리된 분야에서 친구를 찾았다. 힘들게 터득한 요령이었다. 대다수의 광고주들이 그녀에게 데이트를 청해 왔지만 바람직한 상대가 극히 드물었다. 덧붙여 고객과의 데이트는 그 광고 계약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그들과의 정사는 세 가지 결말을 초래했다. 그녀가 차거나, 그들에게 차이지 않으면 결혼! 어느 쪽이든 그녀는 손해를 보았다. 그녀는 여행용 가방을 끌고 흰 가죽 가방을 어깨에 맨 채 입국대로 향했다. 그녀의 인생이 점점 복잡해졌다. 브뤼셀에는 프란이 있었다. 그는 남아프리카 출신의 귀화인으로 다른 귀화인들을 대상으로 모국어로 책을 출판했고 귀향을 꿈꿨다. 그는 따뜻하고 인내심이 많은 데다 강한 남자였고, 그녀는 그의 이타적인 성격과 건전한 상식을 사랑했다. 그녀는 평소 그의 시내에 있는 집에 머무르며 현지 사무실 일이 바쁘지 않을 때마다 그의 취미인 비행을 함께 즐겼다. 파리의 피에르는 작가였고,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가끔 정열적인 정사를 제공하는 여자를 원했다. 하지만 최근에 그 역시 점점 질투심과 소유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피에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고통과 맞물려 있었다. 그는 까다롭고 절망적인 분위기에 쉽게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기 넘치는 연인이기도 했다. 함부르크에선 헬무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꿈꾸듯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그가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완벽을 지향하기 때문일 거야.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그는 심각하고 진지했으며 토목 사업으로 떼돈을 벌어들였다. 아냐, 그의 연약함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걸까? 강인한 푸른 눈동자와 순수한 금발, 귀족적인 외모 뒤에 고독한 소년이 어려 있었다. 아! 그 이유에는 끝이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기착지는 말타였고, 한 귀화한 영국인이 회의 센터와 주말 별장을 제공했다. 그녀는 말타에 초행이었으므로 혼자 일광욕을 즐기는 사치를 기대했다. 여행은 힘에 버거운 수위에 도달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녀는 죠에게 런던으로 회사를 이전하자고 졸라댔다. 그러던 중 난데없이 그가 도버의 모든 사업체를 팔고 이전하는 데 동의했다. 그 이유가 뭘까? 그녀가 멀리 떠나 있는 관계로 그가 자신의 약속에서 자유로워졌을까? 죠가 출판업에 흥미를 잃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눈치챘다. 하지만 그 점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가 더 이상 필요 불가결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 그가 모든 여유 자금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이 큰 걱정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원하는 것을 모두 가졌지만 공동 이윤의 총액이나 거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 드디어! 그녀는 출입국 공무원에게 여권을 내보이고 입국을 허락받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안젤로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그의 압도적인 성적 매력과 피부 내음과 웃음 진 갈색 눈동자에서 빛나는 강렬한 즐거움이 그녀의 방어벽을 허물었다. 이 순간 그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였고 그녀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의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연인만이 보일 수 있는 긴박함으로 서로의 옷을 벗기고 사랑을 나누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가 그의 어깨를 베고 누워 꿈같은 기분에 젖어 있을 때, 안젤로가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그건 욕망이에요."
"그것도 그래요. 난 항상 당신 꿈을 꿔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왜 믿지 않죠? 당신은 나를 사랑해요?"
그녀는 그의 아름다운 손을 잡고 혀로 긴 손가락과 손바닥을 핥고 체모가 난 팔을 애무했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요. 아니, 존재한다 해도 순수한 고통일 뿐이에요. 나에게 사랑을 말하지 마세요. 정욕에 대해 이야기해요.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요, 안젤로. 당신을 보기만 해도 난 정신을 잃어요. 말에 연연해하지 말아요. 말보다 행동이 더 호소력 있잖아요? 그저 당신을 향한 내 욕망의 크기를 느끼세요."
그녀는 그의 위에 누워 양손으로 얼굴을 부둥켜안고 짧고 가벼운 키스를 퍼부은 다음 입술을 그의 것에 대고 혀로 간지럽혔다. 그가 부드럽게 신음하자, 그녀는 좀더 아래쪽으로 내려가 온몸으로 그의 배를 간질이며 그의 가슴을 빨았다.
"만족을 모르는 여자야, 당신은."
그는 그녀를 베개 위로 끌어다 눕히며 속삭였다.
"당신 같은 여자는 생전 처음이야. 난 당신을 항상 원해요. 사랑해요."
다시 그 우스꽝스런 표정이 어렸다. 그녀 자신이 사랑할 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이 마당에 그가 어떻게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는 잠깐 그의 진심 여부를 모색하다가 생각을 그만두고 안젤로가 주는 기쁨과 만족에 빠져들었다.
신데렐라처럼 그녀의 꿈은 자정에 깨졌다. 그녀는 편안하게 안젤로의 어깨를 베고 누워 그가 친구인 로마 귀족들, 정치인들과 예술가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말에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는 말을 멈추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그녀에게 팔을 둘렀다.
"달링, 당신이 깜짝 놀랄 만한 즐거운 일이 있소."
"그래요?"
그녀가 하품을 했다.
"우리 숙모님이 돌아가셨소."
"부끄러운 줄 아세요! 어떻게 그게 즐거운 일이에요?"
"그분은 연세가 많이 드셨었고, 이제 난 부자가 됐어."
"안젤로, 정말 잘 됐어요. 하지만 그림을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은 곧 유명해질 거예요."
"당연히 포기하지 않지. 하지만 결혼할 계획이오."
"당신이 그리울 거예요."
그녀는 진짜 깊은 상실감을 느끼며 속삭였다. 그녀는 눈물 맺힌 눈을 하고 그를 부둥켜안았다.
"안젤로. 당신은 최고예요."
"하지만 모르겠소? 난 당신과 결혼 할 거야."
잠이 싹 달아났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어나 앉았다.
"나와 결혼을 해요? 하지만 피에르, 난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피에르가 대체 누구요?"
"헬무트라고 하려다가...... 아니, 안젤로라고요. 젠장!"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당신의 그 잦은 여행에 대해 종종 의심해 왔소.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동행할 거요. 그리고 런던에서 결혼합시다."
마조리는 잔을 채우고 침대로 돌아갔다. 턱을 손에 괴고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집에서 그녀는 헌신적인 직장 여성이자 아버지 없는 딸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삶에 그를 위한 자리는 없다. 그녀는 살기 위해 유럽 출장을 다녀야 하고 그 몇 주일간 그동안 못 누린 즐거움을 찾는다.
"그렇다면 내가 작은 강아지처럼 당신의 여행을 따라 다니겠소. 내 항공료를 직접 물면서 말이오."
"하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이곳이 당신의 영역이라구요. 당신이 뮌헨이나 브르셀에 갈 수 없어요......"
그녀는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안젤로는 절망감에 북받쳐 화를 냈다.
"당신은 모든 영국인처럼 불성실해. 그 악명높은 영국 해군처럼 모든 공항마다 남자를 두고 있군!"
"영국인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에요? 흥. 내가 당신 삶의 유일한 여자라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아요."
안젤로가 한번 토라지면 대책이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처음 알게 되었다. 밀라노의 남은 체류기간 동안 그녀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피해 다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함부르크로 떠나는 날, 그가 그녀에게 뼈있는 한마디를 했다.
"이런 어리석은 삶은 그만두고 행복을 찾으세요. 당신은 스스로를 승리자로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거요.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서 결혼해요. 그까짓 일이 무슨 소용이 있소? 그게 침대에서 당신을 안아주나? 따뜻하고 행복하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주나? 남편 없는 여자는 반쪽 짜리요."
"제발 좀 자라서 20세기에 합류하세요, 안젤로."
그녀는 소리를 뻑 지르고 가방을 질질 끌며 그의 옆을 지났다.
"난 당신을 택시까지 배웅하지 않을 거요. 그리고 당신을 욕하고 싶지도 않소."
그는 그녀가 짐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조리는 택시 안에서 엉엉 울었지만, 평생 처음으로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
히드로 공항에서 죠를 발견하는 순간 그녀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당신이 왜 여기에 왔죠? 무슨 일이라도? 라나가 잘못되었군요?"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런!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소. 진정해요."
"그런데 왜 여기에 왔어요?"
"나를 만나기 싫다는 거요?"
"물론 아니에요. 당신이야말로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요?"
경계경보가 해제되었다. 그녀는 상큼하게 미소지으며 그가 얼마나 잘났는가를 거듭 깨달았다. 그의 눈과 이빨이 가무잡잡한 피부와 대조적으로 빛났고, 최근에 양 뺨에 깊은 홈이 파였지만 검은 고수머리는 여전히 어깨까지 닿았다. 평소처럼 그들의 남매 같은 관계가 유감스러웠다. 그녀는 애정을 담아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놀라게 해줄 일이 있소. 내가 우리 사무실을 옮겼소."
깜짝 놀란 그녀는 뒤로 물러선 다음 화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본능은 항상 적중하는데, 왜 계속 그 울림을 무시해 왔을까?
"죠, 난 당신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어요. 내가 일할 곳을 결정하는 문제에 할 말이 전혀 없을 것 같던가요?"
"더 좋은 소식이 있소."
그는 그녀의 분노를 무시하고 겸연쩍게 미소지은 얼굴로 그녀를 곁눈질했다.
"우리는 이사했소.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온 거요."
"한 달 사이에 이사를 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빨리 옮길 수 없었을 텐데."
"사실이오! 그래서 임대료를 지불하는 게 아니겠소?"
그녀는 토라진 채 입을 꼭 다물고 그의 자동차로 갔다. 런던으로 가는 동안 이런 어리석은 태도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나쁜 기분을 접어 두고 유럽에서 갈무리해 온 경영 방침과 요구 사항, 새로운 계약과 편집 아이디어를 상의했다. 한 시간 후 그녀가 이야기보따리를 겨우 반밖에 꺼내지 않았을 때 죠가 재규어를 킹스브릿지 광장에 주차시켰다. 고풍스런 테라스가 달린 높은 주택들이 작은 개인 공원을 면하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척 보기에도 매우 조용하고 품격 있으며 부티가 났다. '한스 플레이스' 그녀는 충격 속에서 건물 이름을 읽었다.
"임대료가 얼마예요?"
그녀는 경악한 나머지 숨이 막혔다.
"10만 파운드."
"한 재산이네! 우리는 남은 평생 동안 빚더미 속에서 살게 될 거예요."
"아!"
그녀가 헐떡거렸다. 죠는 일단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제 그의 입술이 꾹 다물어져 얇은 선을 그렸고 그의 표정은 그녀가 매우 싫어하는 샐쭉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회색과 흰색의 타일이 발라진 바닥, 하늘색과 흰색의 장식, 사방 벽에 걸려진 새 그림과 스웨덴 가구의 적절한 배치에 경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못 보던 접수 계원이 큰 엘자형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푸른 눈동자와 완벽한 용모, 풍만한 몸매가 보기 드문 미녀였다. 마조리를 경쟁자로 의식한 그녀의 차가운 평가와 무시가 마음에 사무쳤다.
"이쪽은 내 동업자요. 마조리, 스웨덴 출신 헬가와 인사해요."
죠가 말했다. 마조리는 손을 흔들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와, 당신 꽤나 바쁘셨겠어요. 그녀의 월급은 얼마나 되요?"
그녀는 작게 속삭이며 그와 함께 통로 쪽으로 갔다. 마조리는 심드렁하게 입을 다물고 실내를 구경했다. 1층 접수대 뒤에 영업부 사무실들과 그녀의 독립 업무실이 포진해 있었다. 높은 천장 덕에 채광이 좋고 공기가 잘 통하는 데다 후원의 나무 한 그루가 엿보였다. 2층에 가스 클락이 '리더십'팀을 관장했고, 여러 경영 잡지들의 편집부 직원들이 3, 4층을 점유했다. 죠는 맨 위층을 개인 아파트로 삼았다. 흥, 그가 여기다 돈을 쳐들였단 말이지.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해.
"당신 할 말을 잊지 않았소?"
그들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자, 죠가 투덜거렸다.
"지하에는 뭐가 있어요?"
"회계 및 경리부. 당신이 잊은 게 있다니까."
"예를 들면?"
"감사 같은 것."
"우리는 저당을 갚느라고 땀깨나 쏟아야 할 거예요."
그녀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지나쳤어요. 당신은 나를 기다렸어야 했다구요. 게다가 아무리 이곳이 완벽하고 돈 문제도 없다손 치더라도, 당신 단독으로 결정을 내릴 권리는 없어요."
그녀는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죠와의 싸움은 항상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괜히 손장난을 쳤다.
"당신은 항상, 우리가 결혼한 부부이고 당신이 곳간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 왔어요.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난 당신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슬쩍 그를 올려다본 그녀는 그의 비틀린 입매와 가늘게 떠진 실눈으로 분노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았다. 사실 너무 잘 아는 게 문제였다.
"마조리, 난 부동산 회사를 세워서 이 건물의 명의를 변경했고 그 회사의 지배주를 갖고 있으니 곳간 열쇠를 쥔 셈이오. 그게 다 내가 당신보다 돈을 더 많이 투자했기 때문이오. 알겠소? 난 도버의 건물과 항구 근처 창고를 팔았고 지난달에 선박 관련 가게를 인수하겠다는 구매자를 찾아냈소."
"뭐요! 한 달 만에 그 일을 다 해냈단 말이에요? 다른 변명을 대보시지 그러세요."
"하지만 마조리, 난 작년부터 이곳을 매입하기 위해 일해 왔소. 난 우리가 런던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 오래 걸린 것은 매매가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리고 당신도 날 귀찮을 정도로 졸라왔잖소."
그녀는 그의 반박을 무시했다.
"그럼, 내 소유분은 얼마나 되나요? 절반의 절반 정도?"
"당신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소. 하지만 우리 출판사가 지분의 49퍼센트를, 내가 개인적으로 51퍼센트를 가졌소, 향후 20년 동안 우리는 함께 대부금을 상환하게 될 거요. 이제 만족하오?"
"나도 회사 설립에 협조했을 거예요. 당신은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이건 돈이 아니라 기분 문제예요."
그녀의 상처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나도 그랬을 거요. 하지만 난 당신이 영업 쪽에 전념하기를 원했고. 그게 당신의 주특기 분야니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암시하려는 뜻이 정확하게 뭐예요?"
"난 우연찮게도 재정 및 부동산 분야에 재주를 가졌다는 거요."
"내 재산은 얼마나 되나요. 죠? 꼭 알았으면 좋겠군요."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렵소. 잠깐 기다리도록 해요. 조만간 회계 감사를 실시할 테니, 그 결과를 들어봅시다."
평소처럼 그는 정면 대결을 교묘하게 피했다. 정말 웃기게도 죠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지금은 곰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비슷한 정도였다. 아마 죠는 한두 가지 실수를 만회할 시간이 필요한 게지. 그녀는 한동안 휴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지는 않을 거야.
마조리는 죠에게 약간의 정보를 캐묻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를 특별한 단골집인 베르베넬라 레스토랑으로 초대했다 그녀의 사무실에서 한 모퉁이 건너 보샹프 플레이스에 위치한 그곳에서 중요한 계약이 수없이 많이 체결되었다. 친근한 분위기와 예술적 경지에 다다른 음식 맛은 그녀 고객의 마음을 백발백중으로 풀어 줬다.
"서류를 전부 가져오세요, 죠. 난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싶어요."
마조리가 고집을 피웠다. 그녀는 걱정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죠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저금이 많아지고 있다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본 것이라고는 정상적인 거래에서 나온 이윤 목록뿐이었다. 출판사의 주식은 제쳐 두더라도 자신의 총 자산액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특히 현금을 만져 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신용 대부로 살았고 동전 한푼까지도 죠에게 결재받았다. 그가 도박을 하는 걸까? 그들이 큰 곤란에 처한 것은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그녀가 알아야 했다. 주머니를 톡톡 털어서라도 죠의 빚을 갚아 줄 테지만 우선 일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죠."
그녀는 최고의 전략을 발휘하여 송아지 간 요리와 이 집의 장기인 크렘 브릴레를 먹는 중간에 말을 꺼냈다.
"내 몸값이 얼마나 되요?"
"시중 금값을 호가한다고 누차 말했잖소."
죠와 논쟁을 벌이는 짓은 체스를 두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넌 패자야!
"내 재산은 얼마나 되는데요? 즉, 출판사와 독립적으로 당신은 모든 경영 활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길 바래야지. 난 그 많은 세월을 허탕으로 낭비하는 짓은 사절이거든."
"하지만 죠, 우리 출판사 이윤은 모두 어디에 있어요?“
"투자를 했지. 그럼 당신은 뭘 기대했소? 침대 속에 금덩어리라도 감춰 두었어야 했나?"
그는 돌같이 딱딱한 표정을 짓고 도전적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그의 코를 꼬집었다.
"빨리 말해요! 내 돈은 얼마나 되요? 현금은 어디에 있죠? 난 부모님께 집을 사 드려야 해요. 20세기에 발맞춰 살아야 한다구요. 여성들이 자기 통장을 관리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결혼한 부부도 아니잖아요."
"재정적으로 50대 50 동업자 관계는 결혼한 것보다 더 나빠."
죠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녀는 전술을 바꾸었다.
"죠, 난 스물세 살이에요. 너무 늦기 전데 돈을 쓰며 즐기고 싶다고요."
"당신에게 너무 늦은 나이가 몇 살이오?"
"서른이요!"
"좋아, 당신이 서른이 되기 전에 내가 투자 회사를 설립하겠다고 약속하지."
그녀는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었다. 멍청한 마조리. 그녀는 포기하고 디저트에 전념했다. 침묵이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 그녀는 그 깨달음에 놀랐다. 죠는 그녀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야멸차고 오랜 침묵의 형벌을 가한 고객들처럼 안절부절못하며 헛기침을 했다.
"저기,"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당신은 투자 회사 주식의 50퍼센트를 갖게 될 거요. 내가 우리의 돈으로 회사를 설립했기 때문이지. 즉, 당신이 모든 이윤의 50퍼센트를 차지하게 된 이 마당에 왜 불평만을 토로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녀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커피에 관심을 돌렸다.
"당신이 영리하기 때문에 '올해의 영국 여류 사업가'로 선출되었지만 애초에 내 아이디어로 성공한 거잖소. 자, 욕심쟁이 양......"
그는 서류 가방을 뒤져 서류를 식탁 위에 꺼내 놨다.
"이건 나의, 아니 우리의 총 자산 세부 서류요. 당신의 복사본이니까 회계사에게 가져가요. 검토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요. 핵심은 바로 이 부분이오. 당신 몫은 ....."
그가 서류를 몇 장 넘긴 다음 어떤 수치를 가리켰다. 1천 2백만 파운드!
"우와! 내가 좀 쓸 수 있어요?"
"이 수치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오. 현금은 주식 및 기타 비용에 묶여 있소. 사정이 급박할수록 돈을 쥐기란 어려운 법이오. 우리가 갑자기 제 몫을 처분한다면, 이만큼 많이 받지 못할 거요."
"세상에! 당신이 우리를 말아먹는 줄 알았는데. 왜 그동안 수상쩍게 행동한 거예요?"
그녀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커다란 떡갈나무도 작은 도토리에서 시작된다네....."
그리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틀어막았다. 엄마의 입버릇이 그녀의 유전자에 뿌리내리고 있다가 약한 틈을 놓치지 않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난 백만장자예요."
그녀가 말했다.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리겠는걸.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한 몇 분 생각한 후에야 그 이유를 알아냈다.
"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내 배의 선장이 되는 거예요. 난 열심히 일해서 출판사를 세웠고, 내 성취에 큰 자부심을 느껴요. 하지만 이것은 자랑스럽지 않아요."
그녀는 식탁 위의 서류를 가리켰다.
"이건 모두 당신이 이룬 것이니까요. 난 돕기는커녕 알지도 못했어요. 네, 고맙긴 해요. 하지만 죠, 난 내 삶을 책임지고 싶어요. 당신은 내 마음을 이해하시지요? 난 보살핌을 바라는 어린 여성이 아니에요. 한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더 이상은 아니에요. 난 내 발로 혼자 서는 법을 배웠고 그게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완전히 독립할 거예요."
죠는 상처를 받았지만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잠시 후 죠는 떠났고 마조리는 다음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내가 잘못한 걸까? 어린 여성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점이 있어. 그녀는 안젤로의 경고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미쉬 카메론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지만 그것이 운명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훨씬 지난 다음이었다. 당시 마조리는 보기 드물게 도버 부둣가의 악명높은 성질을 냈다.
"엿 먹어요."
그녀는 경악한 남자에게 소리 질렀다.
"이 잘난 회사나, 잘난 당신도 엿이나 먹어요."
욕을 퍼부으며 마조리는 기사 자료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훨씬 훗날 사과 비슷한 것을 했다.
"내가 자제력을 좀 잃긴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았잖아요."
"흥, 지진이 난 줄 알았소."
해미쉬가 톡 쏘아붙였다.
그녀가 서서히 열을 받기 시작한 시점은 수요일 아침 10시 정각이었다. 당시 그녀는 첼시아파트의 침대에 누워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넉넉한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런던은 온화하고 화창한 6월의 날씨를 자랑했고, 마조리는 막 샤워를 하고 옷을 입은 다음 라나와 엄마를 역으로 마중 나갈 참이었다. 라나와의 짧은 휴가를 목놓아 기다려 왔던 터였다. 할렐루야! 그녀는 뭘 입을까 궁리하며 기지개를 폈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그녀의 좋은 기분을 망쳤다. 가스가 다급하게 설명했다
"데이비드가 등을 다쳤고, 당장 안내 버스로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수천 파운드가 걸린 중요한 일이에요, 쇼핑이야 다음 주에 해도 괜찮잖아요?"
가스 클락 같은 사람은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에게는 자식이 없으니까.
그게 바로 어제 일이었다. 엄마는 그녀의 회사에서 누가 누구를 위해서 일하느냐고 따졌고, 라나는 실망해서 엉엉 울었다. 그런 생난리를 겪은 후에 기다리며 오늘 아침나절을 다 낭비했다.
마조리는 신임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인터뷰 약속시간은 11시이었는데 거의 오후 한 시가 되었다. 분노가 피곤함을 물리쳤다. 글레너드 증류소 창립 10주년 특집판의 사전 조사를 위해 카메라와 케이프 레코더를 들고 런던 히드로 공항을 출발, 글래스고우를 경유하여 인버네스까지 달려온 참 이었다. 그녀는 화가 단단히 났다. 예전에도 10분 이상 기대려 본적이 없었던 데다가 이미 얼굴도 보지 못한 상황이자 죤 에스킨에게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그가 이럴 수가? 밖에서 기다리고 약속을 구걸했던 날은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최근에는 붉은 카펫트가 깔린 칙사 대접이 보통인데, 그녀는 모욕감을 느끼는 한편 전에 없던 자신의 오만함에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15분이 더 지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그가 이겼어요, 난 이만 가보겠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접수원에게 말했다. 막 몸을 돌리는 순간 그윽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막 몸을 돌리는 순간 그윽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에스킨 씨는 않게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제가 도와 드리지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녀는 이 매력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이 관리인이나 수리공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의 울이 굵은 코듀로이 바지나 체크 무늬의 반소매셔츠, 그리고 친절하지만 비굴한 태도는 깔끔한 사무실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성질이 폭발했다. 이런 사람으로 나랄 달래려고 해? 주차장을 성큼성큼 가로질러서야, 택시로 여기에 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인버테스까지 5마일을 걸어가든가, 차를 얻어타든가, 아니며 그런데 바보처럼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 전화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뒤를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절로 안심되었다."이러지 마십시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를 들었다.
"최소한 커피라도 한 잔 하세요. 여기, 제가 당신 자료를 쓰레기통에서 주워 왔습니다. 또 그였다. 그는 재미있으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대한 우호적인 인물이었기에 그녀도 미소를 되돌렸다.
"맞아요, 나에게 커피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다시 접수대로 돌아왔다.
"에스킨 씨에게 전해 줘요, 제가 미스......"
"하디 양을 모시고 식당으로 간다고요"
그는 그녀를 데리고 복도를 따라 셀프 서비스제의 큰 레스토랑으로 갔다.
"여기 앉으세요, 하디"
그는 의자를 당겨 주었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생선. 햄버거. 치킨. 칩이 전부입니다. 아니면 샌드위치는 어떠세요?"
"아, 고마워요. 샌드위치가 좋겠네요. 그리고 커피도 부탁해요. 아, 나도 함께 갈게요. 내 음식값은 내가 내야지요."
"않뇨. 이곳은 사원 무료 식당이에요."
그녀의 구원자가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움직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사과하는 듯한 미소를 던지는 동안, 그녀는 그의 동양적인 눈, 광대뼈, 뚜렷한 코와 반드시 자꾸 이마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살폈다. 저렇게 아름답고 겸손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거야. 음식을 갖고 돌아온 그는 그녀의 곁에 앉기 두렵다는 듯 옆에서 서성거렸다.
"여기 앉으세요. 그런데, 당신 커피는 어디에 있어요?"
"곧 가져올게요, 저는 보통 이곳에서 식사를 하지 않아요."
그가 다시 줄로 돌아갔다.
아!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치즈는 부드럽게 잘 녹았고 진짜 버터를 발라 구운 빵은 바삭바삭했다. 그녀의 기분이 한결 좋아지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구원자에게 말했다. 그는 그의 몫과 함께 그녀의 커피를 한잔 더 가져왔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곳은 앉아 있던 당신을 지나가면서 한 두 번 봤습니다. 당신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고 노기가 짙어지더군요."
"그게 눈에 보였어요?"
그가 웃었다.
그녀는 설명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대타로 여기에 왔어요. 그것도 막판에요. 라나오 함께 쉴 생각이었는데...... 아, 그 아이는 부모님께서 입양한 네살짜리 딸이에요..... 나는 동생을 무척 사랑해요. 동생도 나를 만날 날을 고대했기 때문에 울고 날 리가 났어요. 얼마나 심란하던지, 아이들을 실망시키는 일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거예요. 자식을 두셨어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미혼입니다."
"나는 그래요."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어쨌던, 그런 다음 오늘 아침 내내 기다렸더니 기분이 나쁘더라구요. 하긴 내 잘못이 커요...... 내가 통화로 당신네 상무이사의 반감을 샀거든요."
"우리 회사는 글렌너드 창립 100주년 특집판을 내기로 했어요. 그래서 기사를 맡자마자 여기로 전화를 걸어 당신네 회장 해미쉬 카메론과 인터뷰를하고 그분의 사진을 '리더쉽'의 표지에 싣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에스킨씨의 말씀이, 해미쉬 카메론은 보통 알프스의 처박혀 있거나 꼭지가 돌 만큼 술에 취해 있기 때문에 만나기가 힘들다더군요. 그려면서 그가 대신하겠다는 여운을 풍겼기 때문에 여기에 온 거예요." 그녀는 뜸을 들였다.
"이런 뒷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데. 자, 이젠 당시 그런데 이야기를 해보세요. 나는 아직 당신 이름도 몰라요.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세요?"
"꼭 이렇다 할 일은 없어요. 가 끔 한바퀴 둘러보며 주변이 깨끗한지 확인해요."
그래, 관리이었구나. 저 울퉁불퉁한 근육과 강한 a고을 보아하니 재고품 관리도 겸하고 하고 있나 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이 가무잡잡하고 강한 손을 훔쳐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왠지 부조화를 이뤘다.
"어디서 점잖은 영국식 억양을 배웠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적나라한 충격이 드러났고, 주의의 온도가 급속하게 영하로 떨어졌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말을 그의 동양적인 용모에 대한 지적으로 오해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서둘러 말을 바로 잡았다.
"즉, 당신같이 강인한 스코틀랜드 사람은 하이랜드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거죠. 당신은 항상 원목 던지기를 하시겠죠?"
그녀는 수줍은 기색을 감추고 밝게 미소지었다.
"그렇지라우. 샤시. 저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말할 수 있지만 에딘버러에 있는 영국인 학교를 다녔어요."
그는 그녀를 용서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녀는 그가 외모에 굉장히 민감하고 항상 방어적임을 눈치채고 그의 불편을 풀어 주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진정한 스코틀랜드 인이 되길 모든 원했고, 그들은 하이랜드의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곧 그녀는 그가 백파이프를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가 석 잔째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험악한 눈과 심술궂은 입내를 한 장신의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하디 양, 여기에 계셨군요."
그녀가 의자를 제치고 일어나련 모든 찰라 그의 손이 그녀를 말렸다.
"죤, 괜찮다면 당신도 합석해요."
그는 아첨 떠는 기미 없이 말을 던졌다.
"커피 좀 드세요. 하디 양이 원하는 사람은 바로 저예요. 그리고 이제 저를 만났으니, 그녀는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마조리는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그럴 리가......? 그가 ...... 정말......?
"당신이 ......?"
해미쉬 카메론이 윙크를 했다.
"좋습니다. 당신이 회장을 만났으니 만음껏 일을 해보시죠.하지만 전화로 설명했다시피, 해미쉬는 회사 경영에 아는 것이 없습니다. 명목상 회장이에요."
그녀는 해미쉬를 곁눈질했다. 그는 죤 에스킨의 확언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사실 전 사업이 질색입니다."
그는 부끄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 에스킨 씨가 표지에 어울릴 겁니다. 저는 정말 적당치 않아요."
그녀는 한 가지 묘안에 즉석으로 말을 지어냈다.
"나는 당신네 글렌너드 광고를 봤어요. 위스키를 마시면 누구나 다 강인한 스크틀랜드 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더군요. 광고 회사가 멋진 남성 모델들을 고용하고 창출해낸 분위기는 실제 모델이 있었어요. 바로 당신이에요. 참 아이러니컬 하지요? 그게 우리가 쓰고 싶은 소재 중 하나예요."
두고두고 곱씹어 볼수록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섣불리 해미쉬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모든 매력적인 데다 친절하기까지 했다. 이 세상에 친절한 남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겸손한 태도도 타고난 정열이나, 석탄처럼 새까만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적 매력을 다 숨길 수 없었다.
"언제 런던으로 돌아가십니까??
그가 물었다.
"내일 밤에요."
"오늘 밤 바쁘지 않으시다면, 함께 저녁을 하면서 사업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요.?"
나중에 마조리는 해미시와의 만남을 주선한 운명의 장난에 대해 종종 생각했다. 그는 좀처럼 회사에 출근하지 않지만 그날은 특별히 검토해야 할 서류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 쪽도, 등을 다쳤던 기자 데이비드가 건강이 호전되어 그다음 날 복귀했다. 가스가 이만 돌아와서 남은 휴가를 즐기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녀는 시작한 일을 잘 마무리짓고 주말에나 상경하겠다고 대답했다.
마조리가 인버네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그들은 강변의 아담하고 호화스러운 집에서 식사를 했다. 해미쉬는 그녀와의 작별에 동요하여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그녀 역시 아쉬웠다. 해미쉬는 말이 잘 통하고 춤도 잘 췄다. 등반을 가장 반드시 좋아했기 때문에 장황하게 이야기 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정열적이고 다정한 연인이 되리란 것을 감지했지만, 고객이나 잡지와 연루된 인물과 관계를 갖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감각적이던 입술이 일렁이는 램프 불빛에 맞춰 움직이며 그녀에게 하루 더 있어 달라고 설득했다.
"당신에 대해 말해 보세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 기회잖아요. 어서요."
그녀가 명령했다. 그는 구슬프게 미소 지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최근부터 시작해서 뒤로 거슬러 올랐어요."
"좋습니다. 지금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리한 여성과 저녁을 먹고 있어요. 제가 무슨 운명의 조화로 이런 행운을 잡았는지, 그녀가 또 만나 줄지 가늠할 수 없군요. 특히, 머지않아 글렌너드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판에 말입니다."
"왜요?"
그녀는 그의 절망적인 목소리에 마음이 산란해 졌다.
"글렌티란 증류소가 글렌너드를 인수하게 될 겁니다......"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로버트의 글렌티란을 의미하는 걸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맥밀란 가문이 소유한 에딘버러의 글렌티란 증류소를 아십니까? 종종 광고를 많이 하는 회사인데......"
그녀는 거짓말이 서툴렀지만 해미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당신을 지루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애초에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를 지루하게 해보세요."
"우리 가문은 저를 몰아내고 싶어 합니다. 특히 삼촌 앤드류 카메론은 글렌티란과 손잡고 그들의 인수를 돕고 있어요. 죤 에스킨도 그들과 한패라는 의심이 들어요."
그는 저녁 식사를 하는 중간중간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털어 놨기 때문에 그녀는 어렵게 그 조각들을 하나로 꿰어맞췄다. 로버트와 그의 계모 로다 맥라렌이 글렌너드 증류소의 인수 계획에 깊이 개입되었다. 글렌너드는 좋은 순수 원액 위스키를 생산하는데, 현재 경영이 어려운 상태였고 회사 주식은 조로 카메론 일가가 갖고 있었다.
"제가 글렌티란 측과 싸워야 마땅하지만 결국 그들이 승리하리란 감이 들어요. 게다가 저에게는 이길 만한 힘도 없고, 설령 있다손 쳐도 글렌너드를 회생시킬 자금이 부족해요, 제가 사업에 재능이 없는 이 마당에 그편이 주주들에게 훨씬 이로워요."
"자기 비하는 그만하세요."
그녀가 그에게 간청했다. 그녀는 해미쉬에게 동지 의식을 느꼈다. 두 사람 모두 로버트의 피해자구나. 정말 대단한 인연이네. 갑자기 인버네스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이 대결국면이 갖는 수많은 가능성에 매료 되었다.
"난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졌어요. 우선, 왜 그렇게 형편없는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그가 나른하고도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증류소와 성을 물려받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니까요. 천한 아시아인이 일족의 수장이라는 말을 들어봤어요?"
"그만하세요. 그런 심한 자기 비하는 하지 마세요."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순간 해미쉬를 조종하여 로버트를 이긴 만족감이 말할 수 없이 크리란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세요. 이번에는 맨 처음부터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리하여 슬픈 사연이 전개되었다. 그의 선친이 가문의 재산을 도박과 투기사업으로 날려 버렸기 때문에 시문은 도산 위기에 처한 홍콩의 무역상을 거점으로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려고 스물한 살에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곧 일본이 사업 자문이었던 해미쉬의 모친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아내를 일족에게 소개시키려고 딱 한 번 고향을 찾아온 것을 마지막으로 가문에 등 을 돌렸다. 두 사람은 자동차 사고로 죽었고 당시 여덟 살이었던 해미쉬는 스코틀랜드로 보내졌다.
"제가 환영받지 못하리란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어요."
해미쉬가 고백했다.
"저만 없었던들, 사촌 이안이 직계 후손으로 농장과 가축뿐 아니라 저택과 증류소까지 물려받았을 겁니다. 이안의 친구들은 저를 천민. 동양 얼간이. 일족의 수치. 황인종 놈이라고 놀렸어요. 저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에게 큰 폐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제가 저의 이름이나 집.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눈치챘어요."
"하지만 당신은 맞서 싸웠겠지요?"
그녀는 자신의 강한 호전성을 그에게 주입시키려는 듯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여덟 살의 나이로? 그 짧은 영어로 말입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어요. 저는 감정을 억누르고 분노를 자격지심으로, 호전성을 무저항으로 산에는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렇게 했어요."
"내가 옆에 있었다면 당신을 이해서 싸웠을 텐데."
그녀는 그의 눈에 아른거리는 상처를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그의 눈커플에 키스한 후 그의 손을 뺨에 대고 강하게 눌렀다.
"아. 해미쉬."
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입맞추었다.
"저는 오랫동안 회장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겁니다. 미안해요, 마조리."
하지만 왜 갑자기 사과를 하는 걸까?
"우리가 이만 일어서는 편이 졸겠어요. 산책은 어떻습니까? 강변 오솔길의 경치가 좋아요."
그가 물었다.
"네, 그렇게 해요."
밤의 고독함과 고즈넉한 달빛이 그들에게 묘한 친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어느덧 인생 역정을 털어놓고 있었다. 대학 진학의 꿈이 좌절되었을 때 느꼈던 쓰디쓴 실망감 코르시카의 여름과 웨일즈 수녀원에서 딸을 출산했던 과거 전부를.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난 절대로 대답하지 않을 테니까요. 라나는 아버지가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사람들은 그 아이가 입양되었다고 생각해요. 네, 그리고 그게 옳아요, 아, 왜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늘어 놓았을까? 미안해요."
"제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느끼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춰 서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힘찬 양팔과 등의 감촉에 숨이 막혔다. 그녀의 손이 목까지 기어 올라갔다. 그곳 역시 단단한 근육질이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흡수할 듯 그를 응시했다. 표정이 다양한 그 눈은 그이 마음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유혹적인 미소, 육체적인 강인함과 대조를 이루는 강한 인내심 등. 그는 퍠배를 예상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그녀는 그의 숱 많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 아름답고 높은 광대뼈로 미끄러져 내려와 그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계속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오히려 눈을 감은 쪽은 그였다.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이 그의 것에 포개졌다. 그 순간 긴장한 그의 양팔이 강철 수갑처럼 그녀를 조여들었지만 그 입술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남성이 뜨겁고 단단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 해미쉬."
그녀의 욕망은 기절할 만큼 강했다. 그는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며 몸을 떼었다.
"왜 당신은 압도적으로 섹시한 거예요?"
그녀는 몸을 추스르며 한숨을 쉬었다.
"제가 가증스러울 만큼 추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높게 튀어나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해미쉬 ...... 당신이 알기만 한다면......"
나중에 호텔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상한 후회에 사로잡혔다. 해미쉬는 주말을 함께 지내자고 통 사정했다. 허락해야 했을까? 아니야.!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될거야. 그리고 라나도 보고 싶어. 결국 그녀는 잠들었지만 자꾸 해미쉬의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깨어났다.
매일 신선한 꽃다발이 마조리의 사무실로 배달되었고 해미쉬는 페루 산악 기지에서 틈만 나면 전화를 걸었다. 그는 영국 팀을 이끌고 후아스카란 산을 등정하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그의 고백은 마조리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눈에 비친 본인의 영상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해 했다. 어쩜 스물여덟 살을 먹도록 저렇게 순진할 수 있지? 그녀는 그의 귀향이 몰고 올 상황이 고민스러웠다. 우유부단하게 2주일을 보낸 후 그녀는 죠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사무실 앞에서 다시 한번 냉정히 생각했다. 그가 그녀의 커다란 걱정거리로 부각된 지금 왜 그의 도움을 기대하는 걸까? 그는 출판업에 흥미를 잃었다. 심지어 발명거리도 뒷방 신세였다. 이제 온 사무실이 런던 주식 시장에 상장된 회사별 주가 그래프와 상품 선물 거래 현황판으로 도배되었다. 최근 그가 열을 올리는 대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한때 그에게 받았던 관심을 떠올렸다.
"해미쉬가 카메론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요."
그녀는 그의 책상 위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최소한 그의 또 다른 관심 분야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다는 점이 기뻤다.
"글렌티란 사의 로버트 맥라렌은 최대의 라이벌 글렌너드 증류소 인수에 깊이 개입되었어요. 내가 우연찮게 그 정보를 입수하게 된 경위는, 데이비드가 등을 다치는 바람에 대신 글렌너드 창립 백 주년 기사를 맡았기 때문이에요. 물밑에서 더러운 공작이 벌어지고 있더군요."
그녀는 뜸을 들이며 반응을 기다렸지만 죠는 침묵을 지켰다.
"당신이 흥미로워 할 줄 알았어요. 횡재를 잡을 수 있는 건이잖아요? 항상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지 않았던가요?"
죤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이오. 하지만...... 좋아. 글렌너드의 소유주는 누구지?"
"좀 복잡해요. 한 신탁회사가 종손 해미쉬 카메론을 위해 증류소 주식.부동산.성 등 일체의 재산을 전부 보유하고 있어요. 정작 해미쉬 본인은 사업보다 등반 쪽에 더 관심이 많아요. 사업을 싫어하지만 우리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로 했어요. 증류소는 사기업이에요. 원래 카메론 적자가 주식을 전부 물려받았지만, 약 50년 전에 여러 자식들에게 조금씩 분배 되었고 지금은 대다수가 방계 친척들의 손에 넘어갔어요. 해미쉬는 주식을 24%나 보유한 최대의 단일 주주로서, 대고모와 다른 친척들의 지지를 얻는다면 과반수 이상을 확보할 수 있어요. 사실 그 일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일부는 해외로 이주했어요. 하지만 글렌티란은 해미쉬의 삼촌 앤드류와 손잡고 헐값으로 주식을 매입하고 있어요. 난 그들을 방해하고 싶어요. 해미쉬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에서 말이에요. 아니면 그를 아예 회사에서 몰아내던가요."
그녀가 서둘러 덧붙였다.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텐데."
죠가 윽박질렀다.
"우리가 주식을 구입해서 로버트 맥라렌의 행보에 방해를 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뭐라 말하기엔 시기상조야. 이제 슬슬 바빠지겠는걸. 아, 정보를 줘서 고맙소."
"투자 회사의 동업자로서 내가 할 도리를 한 거예요."
죠는 약이 올랐다.
"흥 내가 당신에게 점심을 사지. 갑시다."
죠의 열광적인 반응은 안타까울 만큼 부족했다. 하지만 며칠 후 그녀가 해미쉬와 통화하고 있을 때 그가 그녀의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의자를 가르켰다.
"휴! 이렇게 자주 전화를 해대니, 그의 전화료가 만만치 않겠어요."
"그 해미쉬였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페루에서 귀향 비행기편에 오른대요."
"불쌍한 녀석! 그에게 증류소 경영은 끝이 뾰족한 우산으로 무장한 탐욕스런 친척 아주머니들에게 태형을 당하는 꼴이었을 거요. 우리가 글렌티란의 행보에 제동을 걸만큼 주식을 획득했소. 어때, 반갑지? 내가 일단 해미쉬와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소."
"왜요.?"
"아, 마음을 정하기 전에 그를 제대로 알고 싶다 고나 할까. 하지만 성숙된 위시키를 담보로 돈을 빌려줄 가능성이 있소. 글렌티란은 지저분한 수를 쓰고 있더군. 뭐, 진짜 악한은 해미쉬의 삼촌 앤드류와 그 아들 이안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그들이 죤 에스킨을 경영 이사로 임명했는데, 그 죤이 한몫 톡톡히 해내고 있더군. 일설에 의하면 그가 로버트의 계모라고 맥라렌에게 직접 보고서를 올린다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정말 못된 사람들이네. 어쩐지 그가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해미쉬가 여덟 살의 나이로 증류소를 물려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삼촌 앤드류가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요. 해미쉬는 제대로 힘도 못써 봤소. 앤드류 카메론이 글렌티란 측과 거래를 한 모양이오. 양쪽 증류소에서 출하되는 최고의 원액 위스키를 판매할 새로운 자회사의 경영권을 아들의 대까지 확보받았다는 거군."
"맙소사! 그 정보를 어떻게 얻었어요."
"주식 동향에 관한 한, 산업 정보 조사관의 서비스를 제공 받고 있소."
"스파이란 말을 뭐 그렇게 길게 해요."
"그가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거든. 캠브릿지 경영학 박사 출신의 거물이야."
죠가 낄낄거렸다.
"스파이 중의 왕 스파이네."
"당신 마음대로 불러요."
"그런데, 총 주식의 25%만 소유한 해미쉬가 어떻게 회장이 됐을까요?"
"틀렸소! 그는 빈털터리요. 해미쉬 가문의 남자 후계자를 위해 일하는 신탁자가 예전에 해미쉬 부친의 요청으로 주식의 25퍼센트가 그램피안 은행에 저당 잡혔지만 약정 기간에 도로 사들이지 못했소. 결국 은행이 관건이오. 만약 충분한 수의 주주들이 소유권 이전이 증류소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뜻을 모은다면 은행은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는 뜻이지."
"참 복잡하네요. 불쌍한 해미쉬. 우리 주식은 얼마나 되요?"
"얼마 되지 않소. 한 3퍼센트 정도."
"해미쉬를 위협하지 않를 거죠?"
"그저 그의 목숨을 간신히 연명시켜 고통을 연장시킬 거요. 어쨌든 일을 더 진전시키기 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소, 주식 구매는 일단 보류합시다."
"서두르세요. 내가 해미쉬를 막바지까지 몰아붙였단 말이에요."
"최소한 얼어죽지는 않겠지."
"곧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그녀가 반박했다.
"난 잡지 표지를 봤소. 그는 아름답더군."
"네, 하지만 그의 눈에 그는 스코틀랜드 최악의 추남이에요."
"왜?"
"그가 원치 않은 석탄처럼 새까만 눈동자에다. 핑크색이 아닌 황금색 피부이고 모래색 머리칼이나 대머리가 아니라 숱 많은 흑발이니까요......"
"대충 알만 하군. 지금 먼 재종 친척과 대고모 한 분과 협상 중이오. 워낙 회사 이윤 때문에 주식을 팔도록 설득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소. 주주들은 대부분 글레너드 배당금에 의지해 살기 때문에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소."
"아!"
웬일인지 그녀의 가슴이 뜨끔했다. 그녀는 화제를 바꾸어 농을 걸었다.
"당신은 여전히 그 더러운 벽돌들을 만지작거려요?"
"더 이상은 아냐. 이미 연구가 끝나 국제 특허를 받았소. 영국 건물의 때를 벗겨 내려고 안달을 떠는 건축 업자들에게 그 사용권을 팔아 벌어들인 돈이 백만 파운드가 그러므로 넘소. 미국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될 거요. 내 방법은 기존의 어느 것보다 훨씬 싸고 쉽고 효과적이거든."
마조리는 헐떡거리며 고통스런 전율을 맛봤다. 이게 뭘까 질투? 아니다, 날이 갈수록 더욱 흔들리는 그들의 일체감에 대한 슬픔이었다. 백만장자인 죠와 내가 어찌 한 팀이 될 수 있으랴.
"당신 말은 꼭 광고 전단 같아요."
그녀는 반감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30분 전에 가스의 원고를 봤거든."
"커피를 드실래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마조리. 이미 너무 많이 마셨어."
그녀는 그가 방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래에 대한 모호한 두려움과 더 진한 외로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이틀 후 그녀는 죠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난 준비가 됐소. 해미쉬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요. 표면상 사교 모임을 위장한 더블데이트로 합시다."
"흥, 최악의 사교 모임이겠네요. 그리고 약속을 잊지 마세요. 해미쉬의 면전에 대고 총구를 겨누지 않는 거예요."
"알았소, 알았다니까 이미 다 끝낸 이야기 잖소. 그리고 난 그렇게 도덕성이나 은근미가 없는 놈이 아니오."
"핵심을 알아들으셨군요. 하지만 죠, 누구를 데리고 올 거예요?"
"글쎄, 베로니크가 될까?"
"베로니크가 누군데요?"
"당신도 프랑스의 새 화장품의 광고를 도배한 그 얼굴을 본 적이 있을 거요."
"그 베로니크?"
"유명한 모델로 밥은 먹고 산다오."
"이 능구렁이, 그 이름은 죠 시걸이에요."
그녀는 수화기를 꽝 내려 놓았다. 죠가 유명한 모델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니, 신기해라. 그리고 왜 그가 태연자약하게 구는 걸까? 그녀는 궁금해하며 해미쉬에게 전화를 걸었다.
죠는 사랑에 빠졌다. 그가 차갑고 세련된 태도를 벗어던지고 스파니엘 개처럼 헌신으로 눈을 빛내는 고통을 자아냈다. 마조리는 처음 대하는 이런 그의 표정에 충격을 받았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예전의 상상은 착각이었다. 사랑에 빠진 죠는 강박증에 사로잡힌 남자였다. 불합리했지만 그녀는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어제까지 베로니크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베로니크는 화장품 광고 사진보다 실물이 더 아름다웠지만, 평소 죠의 이상적인 아내상과 정반대였다. 착하고 차분하고 근면하고 협조적이고 교양 있으며 지적인 유태인 여성에 부합되는 면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는 출중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꿈이 막히는 그런 미녀였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진짜 사람 같지 않은 그녀는 백금색 머리와 몽롱한 보라색 눈, 완벽한 이목구비와 더불어 흠 하나 없는 피부의 소유자였다. 북구 계통처럼 보였지만 프랑스인이었고 그 억양조차 섹시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베로니크가 철저한 이기주의란 모든 사실이 명백해졌다. 마조리는 순수한 얼음 덩어리라고 결론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경력.외모.죠의 돈 이외의 다른 화제에 싫증을 내고 초조해했다. 그녀가 남 보란 듯 손을 식탁에 올려놨을 때, 마조니는 세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와 에머랄드 반지를 발견했다.
"어머나! 정말 아름다운 반지예요. 이게......?"
"우리는 약혼했소."
죠가 냉담하게 중얼거렸다.
"죠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사실 너무 갑작스럽긴 했어요. 그렇지요, 죠?"
베로니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마조리는 숨을 몰아쉬고 얼어붙은 입술로 선언했다.
"축하해야겠네요."
"당신이 주문해요."
죠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마조리는 포도주 담당 웨이터를 불러 맛좋고 담백한 샴페인을 골랐다.
"나는 달콤한 샴페인 쪽이 좋아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로랑페리에 크레망이 어떻겠어요, 죠?"
베로니크가 눈웃음을 치며 애교를 부렸다.
"내가 입맛에 맞지 않지만, 자기가 좋다면야."
죠가 맞장구를 쳤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알았다. 정 그렇게 소유권을 자랑하고 싶으면 아예 그녀에게 침을 발라 놓지 그래요? 마조리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죠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해미쉬에게 얼뜨기 사이몬 역할을 그럴듯하게 연출했다.
"해미쉬, 난 아마추어 수준으로 주식과 상품 거래에 손을 대고 있었다. 마침 글렌너드 주식을 몇 주 가졌는데, 당신 정적들이 회사주를 사들인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그들의 매입가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당신도 그런 제의를 받았어요?"
해미쉬는 고통스러울 만치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죠와 해미쉬는 고통스러울 만치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죠는 해미쉬에게 사업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깼다. 그리고 왜 그녀에게 베로니크에 대해 침묵을 지켰을까? 마조리는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관계는 끊으셔야 만의 환상이었다. 그녀는 죠에게 어떤 존재일까? 세일즈를 할 수 있는 사람? 죠가 주변에 둘 필요가 있는 사람? 최근 잦아진 그들의 싸움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 쳤다. 그녀가 유럽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뭐라고 했더라? '세일에만 전념하는 게 어떻겠소? 당신은 그분야의 일류요' 그들의 우정이 그게 전부니까? 그녀는 모든 기억과 불길했던 징후를 파헤치며 우울하게 궁리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던 때가 언제였더라? 요즘 사업만이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음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녀가 견인마의 역할에 너무 충실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세일즈맨'이란 딱지에 너무 연연해 왔다. 그 순간 미래가 끔찍하고 불괘할 만큼 단조롭게 보였다. 식탁 아래로 해미쉬가 그녀의 무릎을 꼬집어 현실을 일깨웠다. 베로니크가 선택한 샴페인은 지독할 만큼 달콤했다.
그들은 춤을 추었다. 죠가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는 짬짬이 해미쉬에게 정보를 캐물었지만, 해미쉬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해미쉬를 초대할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한 취하기로 작정하고 술을 쉬지 않고 마셨다. 그 목표는 오래지 않아 달성되었다. 해미쉬의 혀가 구부러지고 잔을 뒤엎자 죠가 베로니크가 동시에 일어났다. 죠의 팔은 여전히 그녀에게 감겨 있었다.
"내가 베로니크를 집에 데려다 주는 편이 좋겠소. 당신은 해미쉬를 배웅해요. 웨이터들의 도움을 청하고 계산을 해요. 월요일 사무실에서 내가 처리해 주겠소."
그녀는 기가 막혔다. 죠가 그녀에게 술취한 손님을 떠맡겼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한대 후려지는 충격과 함께 고통스런 결론에 이르렀다. 아, 밤새도록 여기 앉아 있을 수 없어 그녀는 지배인을 불러 계산하고 현재의 난국을 설명했다. 즉시 건장한 두 명의 웨이터들이 해미쉬를 부축해 택시에 태웠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신속했다. 그녀는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의 숙소도 몰랐기 때문에 그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마조리는 자신을 속인 적이 없었다. 해미쉬를 향한 그녀의 감정은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정욕과 진정한 호감이 맞물렸고, 해미쉬가 로버트를 방해할 수단을 제공했다는 인식과 함께 어느 날 그에게 심한 상처를 주리라는 전망이 충돌했다. 청천벽력처럼 뇌리를 스친 그 예상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마조리 하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동시에 해미쉬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는 추측이 떠올렸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절대 사랑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말도 생각에 등을 돌렸다.
마조리는 9시에 눈을 떴다. 침실 창문 가득히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아차, 늦잠을 잤구나! 그녀는 죄책감으로 벌떡 일어났다가 오늘이 일요일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다시 베개에 누워 일요일 아침에 런던에 있는 이유를 궁리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재빨리 옷을 걸쳤다. 객실을 살짝 들여다보니, 해미쉬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가 이불을 차버린 탓에 나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에 숨이 막혔다. 은은한 황금을 연상시키는 그의 피부에 정욕의 물결이 솟구쳤다. 유연하고 초근육질의 팔다리와 길고 강한 목덜미, 방어적인 표정이 사라진 그의 얼굴에서 그녀는 감각적인 입술과 곧은 콧날을 봤다. 그녀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검지로 그의 높은 광대뼈를 따라 그렸다. 돌연 한 손이 튀어나와 그녀를 낚아챘다. 어느 틈에 그녀는 그의 위에 누웠고, 그는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당신이 훔쳐보는 현장을 잡았으니까 처벌을 받을 시간이오."
하지만 그는 키스를 하는 대신 그녀의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그녀를 꽉 껴안았다. 푸른색 면 드레스 차림으로 해미쉬의 품에 안기자, 욕망과 함께 근심 걱정이 솟구쳤다. 어젯밤 그녀는 그와 결혼할 필요성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어제는 어제였고, 샴페인에 너무 취한 상태였다. 로버트를 위해 아껴 둔 사랑을 이 남자에게 쏟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를 이용하여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과연 정당한 행동일까? 하지만 해미쉬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짐작도 못 할 거야. 그녀는 사족을 달았다. 나는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야. 정략결혼은 예나 지금이나 성행하잖아. 하지만 왜 창녀가 된 기분이 들지? 해미쉬가 다정하게 가슴을 애무하자. 그녀가 선택한 길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상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가 해미쉬를 끌어당기려 하자 그는 몸을 피했다.
"사랑과 배려 없는 섹스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는 침울하게 말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습니다. 난 알고 있어요. 당신은 오직 정욕만 느낄 뿐이에요."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슬펐다. 그가 원하는 사랑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라나의 아버지를 정열적으로 사랑했지만 이제 자신을 위해 그 마음을 봉쇄했다. 세일즈를 위하여, 사업을 위하여 단순히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앞으로도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아끼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나에게 시간을 주세요."
그녀는 그를 구슬렀다.
"난 이미 당신에게 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어요."
"나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데요."
그는 심각하게 물었다.
그녀는 심각하게 물었다.
"건강하고 생생한 욕망."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과 눈까풀과 입술에 짧고 다정한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만으로 우리 두 사람 몫이 될 거예요."
그는 한숨을 쉬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벌처럼 재빨리 키스했다. 그의 혀가 입술을 파고들어 그녀의 혀를 애무했다. 그는 다급한 동작으로 그녀의 드레스를 잡아당겼고, 그녀는 그의 뜨겁고 헐떡이는 숨결을 목덜미에 느꼈다. 그녀는 손을 뒤로 넘겨 지퍼를 내렸다. 드레스가 스르르 흘러내린 동시에 해미쉬도 몇 번에 걸친 서투른 시도 끝에 브래지어의 고리를 푸는 데 성공했다. 옷가지를 던져 버린 그는 입술을 그녀의 가슴에 대고 차례로 애무하며 그녀를 감질나게 했다. 그녀는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에 와 닿는 그의 부풀어 오른 남성을 느꼈다. 그 뜨겁게 고동치는 것은 그녀를 촉촉하게 달구어 놓았다. 그녀의 숨이 가파졌다. 그녀의 꼬인 몸이 그에게 들어 올려졌다.
"제발, 아 제발."
공기에 남성의 독특한 사향 냄새가 어렸다. 그녀는 한 손만으로 자기를 들어 올리고 속옷을 끌어 내리는 그의 무한한 힘에 진저리를 쳤다. 이제 그는 입술을 그녀의 허벅지 안에 대고 애무하며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의 혀가 여성을 애무하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충격적인 감각이었다. 충격이었다. 거의 숨 쉴 수 없었다.
"아! 난 몰랐어요.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어요...... 제발......"
그는 입술로 온몸을 탐색하고 조사한 끝에 그녀를 미치게 만드는 성감대를 찾아냈다. 그는 그녀를 엎드려 눕혀 놓고 양손으로 등을 애무했다. 온몸의 피부가 화끈거렸고 그의 뜨거운 숨결에 진저리가 쳐졌다. 천천히 그는 그녀의 허벅지 뒤쪽에 키스하고 혀로 다리를 따라 내려가 발가락을 하나씩 핥았다. 그리고 마침내 똑바로 눕혀진 그녀는 애무를 받은 이상이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누워 짧은 숨을 신음하기 시작했다. 관능의 바다에 풍덩 빠진 기분이었다.
"당신을 원해요."
그녀는 터질 듯한 허파에서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당신이 필요해요. 사랑해 주세요, 해미쉬."
"과거를 지워 버리기 위해?"
"당신...... 당신 ...... 난 당신만 원해요, 제발 ...... 해미쉬."
그녀느 긴 고통의 신음과 그를 제촉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를 기묘한 감각으로 채웠고, 양팔을 머리 위에 고정시킨 채 온몸으로 그녀에게 구애했다.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가 속삭였다. 그는 온몸을 긴장하고 신음하며 등을 휘는 한편, 그녀의 배를 들어 올리고 다리 사이로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 안에서 움직이고 맥박치는 것을 느꼈고,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강렬한 기쁨에 온몸을 내맡겼다.
"아! 멈추지 마세요, 제발, 제발, 멈추지 말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이 안에서 차올랐다. 황홀한 절정 속에서 온몸의 신경 끝이 일제히 바르르 떠올랐다. 기쁨이 점점 짙어지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환희의 손아귀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는 길게 비명을 지르며 해미쉬에게 매달려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터뜨렸다.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 그게 뭐예요? 정말 근사해요. 아, 해미쉬, 도저히 못 믿겠어요."
그녀는 사지를 쭉 펴고 누워 노래하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전에 절정에 오른 적이 없어요?"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이제 그녀의 떨림이 멈췄다.
"그랬다고 확신했지만 내 착각이었어요. 다시 느낄 수 있을까요? 꼭 지진 같았어요."
"이제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아니까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소."
그는 잘난 체하는 표정을 지으며 호언장담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녀만의 특별한 장소를 발견했다. 고개를 그의 어깨에 대고, 한쪽 무릎에 그이 배에 걸쳐놓고, 배꼽을 그의 뜨거운 허벅지로 데웠다. 한 시간 후에 깬 그녀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당신에게 아침을 차려 줄게요. 당신은 힘이 필요해요. 아주 중요하다구요, 하지만 사업을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그녀는 그를 놀렸다.
만성적인 패배자 해미쉬 카메론은 인내심 있게 주방 식탁에 앉은 채 사랑하는 여자의 등을 응시했다. 조리대 앞에 선 마조리는 자기를 꿈의 연장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그이 뻔한 시도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지난 2중일 동안 그 꿈에 사로잡혀 온 데다 난생처음으로 그 자신과 그녀로 인해 행복하고 자랑스러웠으므로, 그녀가 이런 기분을 연출하는 재주를 사업에 발휘해 왔음을 그는 알았다. 그래, 그 역시 그녀의 사업이잖아? 그는 건전한 이성과 상식을 지녔고 그녀에게 눈이 먼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인사불성이 될 정조로 술을 마셨을까? 그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고통스런 절망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보다 모든 이가 그의 것을 탐했고, 그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더 이상은. 그는 다시 그녀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한 손에 스푼을 들고 달걀을 볶는 동안 다른 손에 든 포크로 베이컨을 뒤집었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무 섹시한 여자야. 저 길고 우아한 목덜미 탓일까? 아니면 반듯한 어깨나 얇은 허리에서 탄력 있는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굴곡? 그녀의 푸른색 면 드레스는 굉장히 도발적이었다. 그는 그녀를 다시 갖고 싶었다. 사랑을 나누기에 말할 수 없이 멋진 상대였지만 그녀가 흑심을 품고 그와 사랑을 나눴다는 의혹이 그의 폐부를 왔었던 걸까?
"맞서 싸우세요, 해미쉬."
그녀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했기 때문에 그는 처음에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당신의 것을 가로채고 있어요. 당신은 바보였어요. 당신에게는 손을 뗄 이유가 없다고요. 에스킨은 이윤을 낮추어서 주주들로 하여금 글렌티란 측에 주식을 팔도록 유도하고 있어요. 결국 그들이 회사를 장악하고 당신은 밀려날 거예요. 그런 사태를 원하세요?"
"그러면 안 되나요?"
그는 실패감을 감추기 위해 초연하게 쏘아붙였다. 이제 마각이 드러나는구나 그는 마음을 옹골차게 먹었다. 죠와 마조리가 원하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려는 순간이었다.
"어머, 당신에게 상관없다니 참 잘됐네요."
마조리가 명랑하게 말했다.
"그래야 상처를 받지 않겠죠? 하지만 해미쉬, 난 상관있어요. 난 당신이 맞서 싸우기를 바래요. 내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죠의 해결 방안이 뭔데요?"
그는 냉담하게 물었다.
그녀는 뜸을 들였다. 그들의 책략을 죠의 탓으로 돌리는 짓이 옳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 지금 그게 과연 문제가 될까?
"죠는 항상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당신에게 그 낌새를 맡았어요. 그는 잔인하거나 다른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는 사람이 아니지만, 당신이 자기 파멸의 길을 걷는 동안 거리낌 없이 단물을 뽑아낼 거에요. 그는 우리 두 사람을 위해 당신네 주식을 구입해 왔어요. 글렌티란을 방해하려고요. 그는 약 8%의 주식을 손에 넣었고 그 이상을 원하고 있어요. 그의 계획은, 당신네 위스키의 한 통당 적자투성이인 대차대조표를 악용한 가격으로 쳐서 담보로 잡고 거액의 현금을 빌려주는 거예요. 당신은 그게 말도 안 되는 헐값임을 깨닫지 못할걸요. 지난날 친애하는 죤 에스킨 씨의 농간 덕에 말이에요. 그 현금으로 말미암아 몇 달 동안 늑대는 문밖에 머물 테고 당신은 스스로 만든 소용돌이에서 옴짝달짝도 할 수 없게 될 거예요. 결국 적들은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죠에게 위스키 값을 톡톡히 제의할 거예요. 그리고 한술 더 떠, 죠는 8%의 주식을 매입가의 두 배로 글랜티란에 팔 거예요. 일단 그들이 더 이상의 주식을 모를 수 없음을 알고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될걸요. 그러니 아주 훌륭한 계획이에요."
"나에게?"
"아니오! 바보같이! 죠와 나에게요. 하지만 그 계획은 현실화되지 않을 거예요.
해미쉬는 깊은숨을 들이켰다. 그의 심장 고동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릴까? 그녀는 그의 편이야. 그는 귀를 울리는 요란한 심장 박동으로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대체 나에게 원하는게 뭡니까, 마조리?"
"난 당신이 투쟁하기를 바래요. 당신이 승리하길 바래요. 당신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아니면 그 눈 덮인 알프스산에서 하산하여 진짜 모험에 달려들기를 바래요."
"진짜 모험!"
그의 숨이 다시 막혔다. 드디어 일의 전모가 드러났다.
"좋아요. 설명해 보세요. 나보고 어떻게 진짜 모험에 뛰어들라는 거요? 내가 뭘 위해서 그래야 합니까, 마조리?"
그는 그들 사이에 불꽃을 튀는 긴장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당신의 명성과 당신의 도덕을 위해서요. 상관없는 척하고 손을 떼면 당신 체면을 살릴 수 있어요. 일본인들이 그렇게 하잖아요? 그들은 체면을 중요시 여겨요. 하지만 난 당신이 스코틀랜드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요."
"당신에게 진짜 상관이 있어요?"
"상관? 물론이에요. 난 당신의 이 고귀한 검은 눈동자를 상관해요. 아름답고 강한 두 손을, 높은 광대뼈를, 사무라이 선조에게 물려받은 힘과 육체적인 용기를 상관해요.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 면밀히 숨 쉬고 있는 비열한 앵글로 색슨족의 투사를 보고 싶어요."
"자, 드세요."
그녀는 바삭바삭하게 익혀진 계란과 베이컨이 담긴 접시를 내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계획을 세워요. 봐요, 난 지금 협조를 제의하는 거예요. 해미쉬, 날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난 사업에 능해요. 내가 싸우는 법을 보여 드릴게요. 그러니 일을 주세요. 직위 고하를 막론하지 않겠어요. 비서, 영업부장 ...... 난 당신을 돕고 싶어요."
"아내는 어때요?"
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얼굴을 숨겼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할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이게 원했던 걸까? 그래, 하지만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한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 난 그를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그 모든 것을 그에게 되돌려줄 테야. 절대로 그를 상처 입히지 않겠어. 난 그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 그만하면 좋은 거래잖아. 난 그의 망할 친척들을 모두 떨궈버리고 그를 유명하게 만들 거야. 그리고 그가 정상에 우 뚝 서는 날, 난 로버와 그의 가족에게도 한 수 보여줄 거야.
"그 자리는 어때요?"
그가 초조하게 물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오랫동안 지그시 응시했다.
"당신의 프로포즈를 수락하겠어요."
월요일 오후 2시였다. 변호사에게 다녀온 마조리는 우리에 갇힌 야수처럼 긴장되고 두 배나 위험한 상태였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해. 죠와 싸워서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녀는 이성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지만 오직 분노만을 느꼈다. 비서가 질문을 연달아 퍼부었다.
"나중에요. 죠는 어디에 있어요?"
평소처럼 그는 사무실에 있었다.
그녀는 한 2분 정도 죠의 사무실 밖에 서서 그의 전화 통화 소리를 들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에 그녀는 벽에 기대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진정해"
그녀는 속삭였다. 그리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지만, 너무 침착하고 만족에 찬 죠의 모습이 전날 해미쉬의 추태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그녀의 각오가 눈 녹은 듯 사라졌다.
"이 악당! 가끔 당신이 정말 가증스러워요."
그녀는 소리 지르며 문을 힘차게 닫았다.
"무슨 일이 잘못되었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주먹을 불끈 쥔 마조리는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당신은 사업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해미쉬를 깎아내리지 않고, 창피를 주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사업을 거론했을 뿐 아니라 그를 깎아내리고 수치심을 쟁반 위에 바쳐 들이 밀다니요! 당신은 아무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 얼뜨기 사이먼 흉내를 내며 그를 저능아 취급했어요. 그리고 그에게 정보를 캐냈어요. 그가 입을 열고 싶지 않고 너무 상처받고 창피한 나머지 혼수상태가 될 만큼 술에 취하자, 당신은 뒤처리를 나에게 남겨 두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구요. 흥, 취한 모습을 보일 수 없을 만큼 그 돈에 환장한 얼음 덩어리가 특별난 존재인가요?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이 처리할 수 있으리란 것을 알았어. 그래서 어떻게 됐소?"
"그를 우리 집으로 데려갔어요. 그의 거처조차 몰랐으니까요."
"이제 제정신을 차렸소?"
"네, 숙취로 고생하진 않았어요."
"술꾼들은 안 그래. 그가 사과를 했소?"
"아뇨, 청혼했어요."
"그는 눈물 흘리며 가슴 아파했겠군?"
"기뻐하던데요."
"당신의 거절에?"
"난 승낙했어요. 축하해 주세요. 난 해미쉬와 약혼했어요. 그리고 난 내 돈을 원해요. 전부요! 증류수를 살릴 돈이 필요해요. 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할래요. 출판사와 이 건물과 모든 주식을 지금 당장요! 내 몫의 일부는 글렌너드 주식으로 대체해 주세요."
침묵은 말보다 더 웅변적이었다. 죠는 입술을 꼭 깨물고 실눈을 뜨고 있었다. 하얗게 질렸던 그의 안색이 시뻘겋게 변해 갔다. 결국 그의 분노가 전에 없던 수위로 폭발했다. 그녀의 짧은 프랑스어 육두어 지식으로 그의 풍부하고 방대한 표현을 미처 통역할 수 없었지만 '배반자'와 '사기' 등 몇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커피를 투잔 탔다. 다시 돌아오자 죠는 등을 돌린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자제력을 응시하고 찾았나요?"
그녀가 물었다.
"잘 됐어요. 사업 이야기를 해요. 하지만 우선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왜 약혼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요?"
"난 당신의 반발이 두려웠소. 지금은 더 두려워. 당신은 처음 눈에 띄는 남자를 집어내 선례를 필요가 없소."
"해미쉬와의 결혼은 반발이 아니에요. 잘난 척하지 마세요!"
"거절당한 여자들이란......"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난 항상 당신에게 모든 말을 다 했어요."
"당신은 울며불며 바바라에게 로버트를 죽도록 사랑했다고 했소. 그러나 다시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 이용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소."
"그건 오래전 일이에요. 그 당시에 우리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어요."
"난 그런 줄 알았었어."
세상에 이렇게 이상하고 내성적인 남자가 또 있을까?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단 말야?"
그녀가 물었다.
"한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소, 친애하는 모조리."
"아, 죠! 정말 그 돈만 밝히는 여자와 결혼할 거예요? 그녀가 당신의 돈을 벌어들이는 능력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어요?"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오?"
"물론 아니에요. 하지만 그녀가 돈만 노린다는 게 분명하잖아요. 그녀는 어젯밤 내내 당신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애를 썼어요."
"그녀는 우연찮게도 전 유럽에서 가장 섹시한 여자야. 난 그 때문에 아주 이성적인 요구잖아요? 난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 왔어요."
"당장 융통할 현금이 없으니까 기다려야 할거요. 한 몇 년 걸릴 거야. 그 덕에 당신은 자신과 해미쉬를 구하고 파산을 모면하게 될 거요."
"죠, 난 변호사에게 다녀왔어요. 이제 내가 아니라 엔죠 아마르티와 상대하세요. 그 이름을 들어보셨어요?"
이번에 죠는 진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안색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당신은 진심이군. 하필이면 왜 가장 악질적인 이혼 변호사를 골랐소?"
"당신이 전에 50:50 동업자 관계는 결혼보다 더 나쁘다고 했잖아요."
죠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당신에게 이 어리석은 계획을 포기하도록 만들 말이 있소?"
"없어요."
"해미쉬는 패배자요. 바보짓을 하지 말아요, 마조리. 당신은 남은 평생동안 그의 뒷감당을 무슨 수로 할 거요? 돈을 전부 잃은 다음에 뭘 할 거요?"
"그의 증류소가 우리 모두를 먹여 살릴 거예요. 그렇게 하겠어요."
"제 정신이오? 당신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어. 모두 돈 문제야. 대중은 고급 위스키를 원하고 있소. 요즘은 기본이 8년산 원액 위스키요. 그리고 향후 12년산 순수 원액 위스키가 시장을 풍미할 거요. 상류층을 대표하는 고급스러움과 생산에 소요되는 값비싼 비용 덕택에 말이요."
죠의 표정이 갈수록 진지해졌다.
"술 한 병에 들어가는 엄청난 투자를 생각해 봐요. 그래서 70년대 위스키 산업계에 통합과 인수의 바람이 불고 있는 거요. 이런 잔인한 경제 원리에 따른 운영 방침으로 대부분의 전통 증류소가 전후의 충격에서 회복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단 말이오. 거대하고 잘 조직된 영국 양조업자들이 닥치는 대로 먹어 삼키고 있소. 일부 스코틀랜드 인이 자체적으로 합병하여 위스키의 명맥을 지키고 있고, 그중 한 사람일 바로 당신의 옛친구 로버트 맥라렌이오. 그래서 그가 글렌너드를 인수하려는 거야. 글렌러드는 끝장났소. 이미 무너졌단 말이오. 당신은 성공할 수 없어. 지금 하려는 짓을 제대로 인식해요, 마조리."
죠는 격한 감정으로 부들부들 떨었고 스 순간 그녀의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당신이 모든 돈을 잃으리안 것을 모르겠소? 당신은 가문 전체와 맞서 싸울 만큼 강하지 못해. 스코틀랜드에서 계급 간의 장벽은 맞서 싸울 만큼 강하지 못해. 스코틀랜드에서 계급 간의 장벽은 영국보다 더 심하고 그 가문 사람들은 수 세기에 걸쳐 배척의 기교를 갈고 닦아 왔소."
"난 온몸의 뼈가 부러질 만큼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그리고 백만 파운드는 상당한 투자액이에요."
마조리가 반박했다.
"헛소리! 해미쉬도 당신보다 똑똑해.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과 인종과 스코틀랜드 민족주의 장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어렵게 터득했소. 은행과 주주들은 한패만 지지할 거요. 앤드류 삼촌과 그의 아들 이안, 글렌티란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는 그 작자들을!"
"그들이 성공한다면, 난 내 몫의 주식을 팔겠어요. 그게 당신의 원래 계획이었잖아요."
그녀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왜 내가 죠의 승낙을 간청하고 있지?
"마조리, 인수 제의가 시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당신이 시간을 끌거나 구매자의 끌거나 화를 둘 거요. 그다음에 풍지박산 난 회사의 주식을 거저 얻을 거야. 당신은 모든 재산을 잃게 될 거요, 전부 다."
"난 그래도 할거요. 죠, 난 꼭 해야 해요. 내 아파트를 현재 시세의 90% 가격으로 내놓을 테니, 당신이 사세요."
"출판사는 당신에게 필요해. 난 내 몫만 지키겠소. 당신 것까지 사들이지 않을 거요."
"아, 죠!"
그녀는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가 그녀의 손을 털어 버렸다.
"이 점을 기억해요. 마조리. 당신은 큰 판돈을 걸고 도박을 하려는 거요. 하지만 나 그런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소. 난 다 알고 있소. 로버트에게 한 수 가르쳐 주는 거지 당신이 그만큼 잘 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너무 빨랐다.
"당신은 사랑 이외에 다른 이유로 결혼함으로써 스스로를 타락시키고, 해미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빼앗고 있어. 그것은 결국 긁어 부스럼이 되어 당신에게 돌아올 거야. 그리고 종국에 당신이야말로 사랑을 빼앗기게 될 거야."
그의 예언처럼 들리는 말에 마조리는 떨었다.
"당신의 신임 안에 감사를 표하겠어요."
그녀는 억지로 침착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아, 마조리. 당신은 바보야, 어리석은 바보."
그의 말을 뒤로 한 채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이제 그 어떤 말도 그녀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한때 위풍당당했던 인버레이드 장원은 버림받고 황폐해졌다. 정교한 석조물은 때에 찌들었고 유리창은 깨졌으며 바람에 덜커덩거리는 문소리만이 서글픈 침묵을 깼다. 마조리는 견고한 대문의 부식된 자물쇠와 손안에 쥔 녹슨 열쇠를 번갈아 보았다. 단박에 용기가 사그라들었다. 해미쉬가 결혼한 다음에 저택을 봐야 한다고 우길 만했구나. 그는 그녀와 동행을 거절했다. 그 이유로 사업상의 압박을 들었지만 실은 꽁무니를 뺀 것이다. 그는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심한 긴장 상태에 빠져 끙끙 앓거나 술을 과음하지 않으면 격렬한 운동으로 고통을 초월했다. 전부 다 천천히 변화시켜야지. 하긴 그녀의 손으로 퇴주로를 끊은 마당에 그 외에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그 생각은 고통스러운 공포를 일으켰다. 만사가 잘 돌아가거던 시점에서 이 폐허와 망하기 직전의 증유소에 전 재산을 던져 버림으로써 어렵게 획득한 안전에 위험을 초래하다니. 죠가 옳았어. 나는 바보야. 엄마의 말이 귓전에 생생하게 들린 듯했다.
"너의 하잘 데 없는 겉멋이 우리를 망칠 게야. 내가 수도 없이 경고했듯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진 않아......"
그녀는 으스스한 분위기에 질려 감히 저택 안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무릎 높이의 잡초밭을 할 일 없이 돌아다녔다. 들판은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며 먼 호수와 맞닿았다. 무성한 풀숲에 놓인 몇 개의 석조 벤치가 이곳이 예전에 잔디밭이었음을 말해 주었고 야생화가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며 만발하게 피었다. 빨강 양귀비. 흰 광택을 내는 야생 파슬리. 무더기로 핀 산토끼꽃. 사방 온 천지에 깔린 물망초 등. 노랑붓꽃은 과거 꽃밭의 경계선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앞으로 계속 나가자 비옥한 대지와 야생 허브 향이 알싸하게 피어올랐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시에 걸린 스타킹을 살폈고. 버려진 장미 정원을 걷고 있던 참이었다. 덤불이 웃자랐긴 했지만 이른 장미 봉오리가 몇 송이 맺혀 있었다. 순간 아빠가 이곳을 가꿀 수 있으리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들의 경계선에 떡갈나무. 자작나무. 느릅나무가 울창한 작은 숲이 자리 잡았다. 그녀가 접근하자 다람쥐들이 이리저리 도망가고 비둘기들이 '구구'하며 항의했다. 숲은 온통 새와 여름 곤충 소리로 메아리쳤다.
"아, 너무 아름다워, 라나가 이곳을 좋아할 거야."
그녀의 기분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작은 숲 너머에 다 쓰러져가는 별채가 있다고 해미쉬가 말했었지. 그녀는 숲을 빠져나가 버드나무 옆에 섰다. 한 장의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었다. 이엉 진 지붕과 대문 가에 심어진 덩굴장미와 만발한 라벤더. 손톱을 두 개나 부러뜨린 다음에야 그 집에 맞는 열쇠가 없음을 발견했다. 잔뜩 약 오른 그녀는 휴지로 유리창 먼지를 닦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더러운 천에 뒤덮인 가구 몇 점과 함께 먼지와 쓰레기가 굴러다녔다. 위층 침실이 두 개인 것 같은데. 저택 수리 끝날 때까지 라나가 부모님과 이곳에 머무를 수 있을 거야.
용기백배한 그녀는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가 열쇠를 자물통에 밀어 넣었다. 대문이 알프렛 히치콕을 만족시킬 만큼 음산한 비명과 함께 열리며 그랜드 홀이 공개되었다. 여기 바닥재가 돌일까?, 아니면 대리석일까? 층층이 쌓인 땟자국으로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가구들은 전부 먼지와 얼룩으로 새까매진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제쳤고, 풀석거리며 치어 오르는 먼지 틈으로 겨우 오래된 수도사들의 의자임을 알아보았다. 우선 진공청소기로 무장한 청소부들이 열댓 명 필요하겠어. 그녀는 방
방마다 돌아다닌 끝에 결국 인내심을 상실했다. 그나마 천장이 깨끗해서 다행이야 하지만 부엌을 발견한 그녀는 기쁨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꽤 쓸만한데. 더러운 천을 걷어내자, 암갈색 떡갈나무로 된 긴 식탁과 두 개의 웰시 장식장과 구식 스토브가 드러났다. 그녀는 서랍과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고 구리 솥단지와 후라이팬, 멋진 골동품 컵과 접시 세트를 자못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일부 금이 가고 짝이 맞지 않았지만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식품 저장실과 식기실과 낡은 부츠들이 버려진 뒷방이 딸려 있었다. 여전히 바닥에는 시꺼먼 때가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재질일까? 그녀는 알아야만 했다. 수색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식기실 창턱에서 암모니아 반병과 낡은 수세미를 하나 찾아냈다.
"시작해 볼까."
그녀는 차에 코트를 벗어 놓고 그랜드 홀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앞문 근처의 바닥을 문질렀다. 몇 분 동안 강도 높은 운동을 한 결과 시꺼먼 때의 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신은 미치광이를 사랑하셔!"
그녀는 탄성을 올렸다. 그리고 목숨이 거기에 달린 양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더 많은 먼지가 벗겨졌지만 수세미의 강모도 다 빠졌다. 주먹 칼이 있었다면...... 5분 후 그녀는 여전히 땟자국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됐어.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네"
암모니아의 마지막 한 방울이 코를 자극하고 눈을 찔렀다. 그러나 마른걸레로 훔쳐내자, 핑크와 선홍색, 청색과 연한 자주색의 복잡한 문양으로 된 모자이크 타일이 바로 보았다. 그녀는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그 정교한 색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들긴 하겠지만 제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발굴해 낸 보물에 압도되었다.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안도감일까? 기쁨? 아니면 먼지와 거미줄과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시간을 낸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사함? 그녀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진짜 주님이 계실 것 같았다.
"주님, 저는 그 자신보다 가진 것을 위해,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려 합니다. 네, 옳지 않은 짓이에요. 그러기에 미리 주님의 용서를 빕니다. 하지만 그를 보살피겠노라고 약속드릴게요. 온 힘을 다해 그의 증류소를 지키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생각다. 생각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을 표현할 수 없었다.
"엄마의 말씀처럼 저는 호박에서 수박이 될 수 없지만 라나는 다르잖아요? 내 딸은 이런 집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우리를 원치 않지만 해미쉬는 안 그래요. 저는 그에게 해 될 짓을 하지 않겠어요. 맹세합니다. 이 집과 증류소의 농장과 해미쉬 그 자신까지 갈고 닦겠습니다. 너는 이 바닥처럼 그에게 더러워진 온갖 과거의 파편과 때를 말끔히 지워 버리고 그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빛나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네, 바로 그거예요. 저를 도와주세요. 주님."
갑자기 그녀의 기분이 한층 더 명랑해졌다. 그녀는 행복하게 휘파람을 불며 양동이를 뒤꼍에 내려놓았다. 빨리 일을 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한 부대를 데려와야지, 아니, 최소한 청소부들을 한 버스로 대절해 올 거야. 저 깨진 유리창이나 벽지만도 돈깨나 잡아먹을 거야, 아예 작은 건축 회사를 불러올까? 제대로 일을 하려면 평생 걸릴 거야. 참, 중앙 난방시설이 작동할까? 어디 보자, 그걸 살펴봤던가?"
그녀는 문간에 서서 얼룩이 벗겨진 작은 모자이크 타일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얘, 넌 자 견뎠구나. 내가 곧 돌아와서 네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줄게. 넌 새것처럼 깨끗해질 거야. 하지만 널 다시 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녀는 문을 잠그고 자동차로 돌아갔다. 머릿속은 온통 앞으로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해미쉬가 맑은 정신으로 '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하고 서약하게 만들자. 결혼식 따윈 필요 없어. 그리고 죠에게 돈을 받아내야지. 아, 그 문제는 변호사에서 맡기자. 부모님은 도보에서 이곳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기는 일에 내켜 하시지 않을 거야. 잠깐, 이 근처에 선술집이 없잖아. 그녀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다음에 증류소를 원상복귀 시켜야 해. 그러려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최고의 두뇌가 필요하고. 죠가 안성맞춤이지만 그는 나를 돕지 않을 거야. 뭐, 차선으로 만족할 수밖에. 그녀는 진입로를 따라 내려와 녹슨 철제 대문 옆에 차를 세웠다. 이것도 교체해야 해. 그녀는 경
외심에 가득 찬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보이는 인버레이드 장원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했다.
"곧 돌아올게. 날 믿어."
"내가 충격을 받았구나."
마조리는 혼잣말을 했다.
"그래서 삶이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 거야. 저 산도, 이 길도,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마을의 지붕들도 말야. 모든 게 꿈 같아. 그런데 왜 인버레이드까지 귀찮게 차를 몰아야 하지/ 하늘을 날아갈 수는 없을까?"
그녀는 입을 다물고 에델튼에서 북쪽으로 펼쳐진 구불구불한 도로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무리 혼잣말을 해도 꿈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녀의 계획이 야생마처럼 무모하게 돌진했고 그녀는 두려웠다. 아차 낙마라도 하는 날에 이 사나운 야수가 그녀를 넘어 거침없이 도망갈 테니까. 그리고 여기 마조리 카메론 부인은 전문 용역회사에서 파견된 열명의 필리핀 청소부와 책임자와 청소 장비가 가득 실린 두 대의 미니버스를 앞장서서 달렸다. 그 뒤를 여러 대의 자동차가 줄줄이 따랐다. 오늘 아침부터 장원을 책임지게 될 전문가들이었다. 배관공. 전기동. 카펫 및 가구업자. 더로운 천을 담당할 세탁부. 커튼 책임자. 가구를 옮길 운송업자. 지붕 전문가. 홈통점검과 창문 및 판자 수선을 담당할 작은 건설회사 직원과 페인트공 등등. 심지어 기술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요리업체까지 대동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또 있을까? 겨우 2주일 만에 해미쉬와의 결혼을 포함한 모든 성가신 법적 절차들은 종결지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여기에 있다. 마조리의 부모님들은 충격을 받고 경악했으며 마지막에는 역정을 내고 말았다.
"네가 억지로 우리를 이사시키겠다면 야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
아빠는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조리."
엄마가 우는 소리를 냈다.
"우리는 항상 라나를 돌보겠다고 약속했고 그것을 지켰어. 하지만 우리의 터전은 여기란다. 좋은 친구들도 많이 있고 아빠는 지방 다트 팀의 주장이 시잖니."
"흥, 스코틀랜드 놈들이 다트를 하리라곤 기대도 안 한다."
아빠가 투털거렸다.
"게다가 근처에 선술집도 없을걸. 이미 지도를 찾아봤어."
"하지만 자전거나 차를 타시면 돼요."
아빠는 운전을 배운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라.
"엄마가 운전면허를 따실 수 않잖아요."
"뭐야! 이 나이에? 어림도 없다."
"생각만큼 어렵지 않아요. 두 분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실 거예요. 차를 사 드릴게요."
"당신은 그렇게 해야 해, 리즈."
아빠의 동의에 모녀는 기겁을 했다.
"우리가 산간벽지에 처박힌다면 교통편이 필요해. 그지 않으면 무슨 수로 라나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겠어? 당신은 아예 그 생각조차 못 해봤을걸."
"난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라나가 투덜거리며 볼품없는 아이리쉬 테리어 잡종개를 껴안았다. 패디,또는 패디용크라고 불리는 녀석이었다. 라나는 좀처럼 울지 않았다. 제 나이보다 훨씬 조숙하고 침착한 아이였다. 마조리는 딸이 어느 곳에서나 잘 적응하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마조리는 공들여 설득했다.
"겨우 에델톤에서 5마일 떨어진, 퍼스 주변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에요. 맑은 날에 장원에서 크녹 뮤이 블라라디나 스투뤼 산맥도 보여요. 그리고 우리가 여름에 숲에서 피크닉하는 상상 좀 해보세요. 아주 재미있을 거예요."
조부모의 분노를 감지한 라나가 마조리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아주 멋질 거야, 라나. 거기에 넓은 정원이 있단다. 패디용크가 좋아할 거야."
"맙소사, 저 녀석이 온 집안에 흙을 묻혀 놓을 거야." 엄마가 소리를 꽥 질렀다.
"우리는 개를 묶어 놔야 해."
"안돼! 절대로 안 돼! 아무도 패디용크를 묶어 놓지 못해."
라나가 비명을 지르며 마조리의 무릎에서 뛰어내려 개를 껴안았다. 패디는 숨이 막혀 컥컥거리며 몸부림를 쳤다.
"그곳에는 망아지를 키울 수 있는 마구간도 있어."
"그리고 그걸 누가 돌볼 거냐?"
아빠가 쏘아붙였다.
"망아지까지 우리에게 떠넘길 생각은 말아라. 다른 아이도 안돼!"
그때 마조리는 딸의 황홀한 표정을 눈치챘다. 이상하게 생긴 아이였다. 넓은 미간, 노르스름한 피부와 악동 같은 표정 등. 코는 작고 오똑하고 입술은 선명한 버찌 색이었다. 아낌없이 웃는 미소를 지닌 그 아이는 이제 창문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망아지, 아아...... 내 망아지."
"하지만 네가 먹이를 주고 돌봐 줘야 한다."
마조리가 경고했다.
"네가 해미쉬와 헤어지는 날이면 우리는 줄 끊어진 연 신세가 되고 말 거야."
엄마가 끼어들었다.
"엄마,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평생 함께 살 거예요."
엄마가 끼어들었다.
"그가 우리와 같이 살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할래? 우리는 얹혀사는 기분이 들 거야."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두 분을 좋아할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를 보러 오지 않니?"
좋은 질문이었다. 해미쉬가 그녀의 가족과 상견례를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녀의 간청에 그의 대답은 평소와 똑같았다. '결혼 후에'. 해미쉬는 그녀의 생각만큼 녹녹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설명했다.
"난 두 집 살림을 할 형편이 안돼요. 라나가 도버에 산다면 난 이 아이를 만나지 못할 테니, 그 안은 틀렸어요. 그리고 내가 얘를 스코틀랜드로 데려간다면 두 분이 언제 우리를 만나시겠어요?"
아빠는 조약돌같이 단호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딱 1년 만이에요."
그녀가 애걸복걸했다.
"두 분이 행복하지 않으시면 제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제발요! 두 분은 그곳을 좋아하시고 우리 모두 함께 살게 될 거예요."
"그 점이 최악이라는 거야."
아빠는 통렬하게 판결을 내리고 다시 신문에 고개를 박았다. 결혼은 되도록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행사였다. 그녀는 가족과 몇몇 친구들이 메릴본 등기 사무소에 모였다. 그 음침하고 몰개성적인 건물 선반에 쌓인 먼지에 라나가 건초열을 일으켜 콧물을 질질 흘리는 바람에 일어나 그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아빠가 재빨리 아이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콧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가족을 봤으니 결혼을 취소하고 싶어요?"
그녀가 해미쉬에게 도전했다. 배경 음악으로 라나의 우는 소리, 아빠의 꾸짖는 말과 바바라의 달래는 소리가 깔렸다.
"당신은?"
해미쉬가 쏘아붙였다. 그의 눈동자는 돌덩어리처럼 냉철했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그런 말을 하지 말아요."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딱 한 마디 '네'라는 대답도 그녀에게 가 서기에게 향한 것이었다. 식이 끝난 다음 신랑 신부와 가족들은 택시 한 대에, 바바라가 가스와 데이비드는 베로니크와 함께 죠의 차를 탔다. 라나는 엄마를 잃으리란 가상의 위협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해미쉬의 무릎팍에 구토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해 해미쉬를 무시했다. 엄마는 너무 어리둥절해서 정신을 못 차렸다. 가족들의 환영에 해미쉬도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일단 그가 입을 열자 거침없는 웅변이 흘러 나왔다.
"라나가 아는 인생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해미쉬는 라나를 무릎에 앉히고 꼭 껴안았다.
"이 아이는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아이에게 인버레디드를 구경시켜 줘야 놓았어요. 하지만 문제는 제가 그곳을 싫어한다는 데 있죠."
그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자식을 소유했다든가, 자식이 우리에게 속했다는 생각은 어리석어요. 라나는 성장 기간 동안 우리에게 위임된 한 개인이에요.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 함께 있다 해도 그녀는 독립적인 인간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린 육체 속에 깃들여진 영겁의 영혼이에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곳에 배우러 왔습니다. 아이를 때려 봤자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해요. 저는 매질의 효과를 믿지 않아요. 오늘 아침 라나가 두려워한 이유는 엄마를 잃었다고 생각하고 내가 마음에 드는지의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욕을 먹어야 할 사람은 바로 저예요."
어색한 침묵이 짙게 드리워졌다.
"참 훌륭한 기독교 정신이에요."
마침내 엄마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아빠는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 하디 부인."
해미쉬가 설명했다.
"저의 어머니처럼 불교 신자예요. 아시겠지만 어머니는 일본인이셨어요."
"일본인? 난 몰랐수."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아빠는 마조리를 째려보았다. 그 눈에 살의가 가득했다.
"그는 완전히 미쳤어."
나중에 택시에서 내릴 때 엄마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착한 미치광이야. 내 말뜻을 알지?"
"아뇨, 모르겠는데요."
마조리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엄마를 무시했다. 그녀와 바바라가 라나를 목욕시키고 재우는 동안, 하객들은 건배하고 피로연 음식을 먹은 후 총총히 제 갈 길을 갔다.
부모님 생각을 지워 버리며 마조리는 버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이렇게 화창하다니, 좋은 징조야. 그녀는 차를 몰면서 자신의 몸값을 계산해 보았다. 서면상 그녀의 가치는 백만 파운드가 넘었다. 그녀는 일시불현금이 부족했지만 런던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의 단기 융자를 받았다. 8월 초 그녀와 죠의 결별은 공식화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경영 출판사를 인수했고 가스가 세일즈 부서까지 전담하게 됐다. 그는 자신도 놀랄 만큼 잘 해 나갔다. 죠는그녀의 몫 절반을 마련했고, 그들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나 동업자 관계를 청산했다. 마조리는 그날의 기억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죠의 하얗게 질린 얼굴, 충격 받은 눈동자와 떨리던 손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그가 3년 전에 라나를 위해 신탁을 마련했고 최근 발명품에서 벌어들인 총 과세이익의 5%를 축적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의 죄책감은 더 깊어졌다. 라나는 스물한 살 때 그 돈을 수령 받지만, 그 전에 필요한 경우 교육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마조리의 결심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녀는 죠의 말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내가 지금 돈을 전부 날리고 나서 그나마 기댈 데가 있을 테니까."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눈을 빛내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복수는 당신 삶의 신조가 아니야, 마조리. 내 말을 명심해 둬요. 아직 되돌리기에 너무 늦지 않았소. 이 미친 결혼을 제발 그만둬요."
그녀는 마음이 상해 그에게 덤볐다.
"당신이 틀렸어요. 그리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더니. 당신이야말로 미로에 홀려 결혼했잖아요."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염려에 눈물이 속았다. 갑자기 그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난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았어요. 죠, 하지만 당신이 그 프랑스 수전노와 결혼한 지금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어이, 이봐. 내가 언제 당신의 일본인 술주정뱅이에 대해 욕을 하던가?"
그가 윽박질렀다.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침통한 얼굴로 두 사람은 서류에 서명하고 악수한 다음 서로 각자의 길로 갔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이 앞을 가리는 통에 변호사 사무실 밖 모퉁이에서 넘어져 다쳤다. 아직도 아파. 그녀는 정강이에 앉아 딱지를 만지며 골똘히 생각했다. 더 깊은 아픔이 존재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외면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녀는 차를 세우고 열망에 찬 눈으로 철제 대문 사이를 바로 보았다. 멀리 보이는 이버레이드 장원은 황폐의 기색 없이 장엄해 보였다. 해미쉬가 함께 왔어야 했는데. 그는 왜 그렇게 이상하게 굴까? 그녀는 그에게 저택 개조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어떤 간청과 애교도 통하지 않았다.
"당신이 일을 마치기 전까진 안돼요."
그는 그 공헌한 표정으로 버텼다. 이미 그의 마음의 문이 닫힌 것이다. 그 특유의 자기 보호막이었다.
"내가 발기불능이더라도 놀라지 말아요. 그 지옥 굴은 내 정력을 모두 빼앗아간다오."
그리고 그는 알프스로 날아갔다. 떠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그녀가 앙칼지게 작별을 고했다.
"당신 물건이 얼어붙었다면 좋겠어!"
해미쉬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예상치 않은 갈망에 그녀는 문가에 서서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다음 순간 그녀가 차량 행렬을 가로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진저리를 치고 녹슨 대문을 열었다. 무슨 걱정이야? 그녀는 무거운 철제문를 밀며 생각했다. 난 행복을 쫓지 않을 거야. 그래 봤자 뭐해? 그 결말은 어느 춥고 안개 깔린 새벽녘의 도버역이었잖아. 공책에 '대문에 원격 조정 장치를 달 것!'이라고 메모하고 그녀는 장원을 향해 차를 달렸다.
"간호해, 인버레이드 장원아."
그녀는 저택 문을 열며 소리쳤다.
"너에게 이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리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거칠고 음산하게 텅 빈 홀에 울려 퍼졌다. 정오경, 먼지로 3미터 밖도 보이지 않는 실내에서 모두 마스크와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래도 청소 불들은 쉬지 않고 눈을 비비며 기침을 했다. 그 소동의 일부는, 건축업자들이 같은 방에서 복작거리며 묵은 벽지를 벗겨 내는 데 있었다. 그들은 작업이 곧 끝나리라 장담했다. 굽이 납작한 샌들과 청바지. 티셔츠와 낡은 스웨터를 걸치고 스카프로 머리를 질끈 묶은 마조리는 기쁜 드러나는 멋진 모자이크 바닥을 바라보았다. 청소 책임자가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요?"
실내 소음은 먼지만큼 심했다. 그가 양손은 입에 대고 그녀의 소리 질렀다.
"벌써 바닥 솔이 여섯 개나 망가졌다구요!"
"놀랍지도 않네요."
그녀는 그의 팔꿈치를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왔다. 소음과 인간에 놀란 새때가 나무 위를 빙빙 맴돌았다.
"별채를 빨리 청소해야 해요. 우리 부모님이 가구를 처분하시는 즉시 여기에 오실 거예요."
마조리를 앞장서서 숲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안색이 창백하시네요."
책임자가 동정을 표했다.
"난 억지로 가족들을 이 곡으로 이사하게 했는데, 아직 집안에 들어가 보지 못 했어요. 이곳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게 중요해요."
"그분들이 언제 오시는데요?"
"조만간요."
"네 알겠습니다. 영순위라!"
"아! 정답이에요."
문이 열렸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피어오르는 먼지 외에도, 바닥을 슬금슬금 기어 다니는 거미와 딱정벌레들, 깨진 유리창과 찢어진 커튼, 굴뚝에서 내려앉은 그음으로 실내는 엉망이었다. 이곳을 뭐라 표현할까......? 그녀는 적당한 묘사를 찾았지만 실패했다. 칙칙한 갈색과 베이지로 칠해진데다 새까맣게 변색된 천장, 그리고 때에 절은 시멘트 바닥 등 어두컴컴했다.
"굴뚝 청소부로 부르셨어요?"
"아뇨!"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잊었구나.
"우리가 청소를 하기 전에 굴뚝부터 손을 보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저택도 마찬가지예요.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을음이 날린다면 아무리 집을 청소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충고 고마워요."
그녀는 공책에 끄적거렸다. 그리고 속으로 신음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래층 공간의 태반은 큰 방 하나가 차지했고 북쪽 벽에 위층 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반쯤 눈을 감고 여러 가지 장식을 상상했다. 순간 하얀 벽과 타일을 바른 마루, 밝은 나무로 이은 천장이 떠올랐다. 단열재 바닥난방도 설치해야지. 이제 주방을 본 그녀는 기가 막혔다. 여기에서 건질 것이라곤 사방 벽뿐이야. 그러다가 생각을 바꿨다. 벽 하나를 허물어서 채광을 높여야지 시간 여유가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지금쯤 엄마와 아빠는 집을 세놓았을 테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으실 거야. 그녀는 어깨를 집는 손에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기운 내세요, 부인.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른 모택동이 그랬잖습니까. 난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말이에요. 나 같은 업종에 도움이 되거든요."
"네."
그녀의 절망감이 더 깊어졌다. 위층은 찢어진 벽지와 낡고 더러운 가구들, 수도꼭지 받침대가 달린 진짜 구식 욕조와 시퍼런 구리 파이프로 들어 판 난장이었다.
"아 맙소사, 맙소사......"
빨리 돌아가서 새로운 공격팀을 불러야지. 휴식 시간에 마조리는 샌드위치 한쪽과 커피잔을 들고 식품 저장실 바닥에 앉아 선반 위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당신을 찾아 헤맸습니다. 밖에 웃기게 생긴 녀석이 당신 석조물에 손을 대고 있어요. 어서 나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요."
그녀의 몸은 천근 같았고 무릎은 생고무처럼 후들거렸다. 밖에는 소형 트럭 한 대와 함께 웬 남자가 흰 아교 같은 것을 분사하는 청소 기계를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익히 잘 아는 인물이었다.
"죠!"
그녀가 소리 질렀다.
"아, 죠!"
그녀가 양팔을 버리고 그에게 뛰어들려는 찰라 그가 재빨리 한 손으로 그녀를 막으며 뒷걸음질쳤다.
"마조리, 잠깐만. 그 재투성이에 가려진 사람이 당신 맞소? 굴뚝 청소를 하다 온 거요?'
그리고 그는 옛날처럼 진짜 더러운 저택을 찾고 있었소. 내가 무료로 봉사할 테니, 그 대신 청소 전후의 저택 사진을 미국 선전용으로 사용하게 해줘요."
"고마워요, 죠. 난 정말 기뻐요. 당신 협력을 받아들이겠어요. 얼마나 걸릴까요?"
"영원히! 석조물에 수백 년에 걸친 먼지가 눌러 붙었소."
"제 색깔이 회색 아녜요?"
"아냐! 이리 와서 수정처럼 광채 나는 핑크와 흰 대리석을 봐요. 멋지지?"
그는 열을 올리며 작업 중이었던 지점을 가리켰다.
그녀는 헐떡거렸다.
"정말 아름다워요, 죠. 그리고 내가 다른 것도 발견해 냈어요. 홀 바닥이요!. 얼른 보여 드릴게요."
"해미쉬는 어디에 있고?
"알프스를 등반 중이에요. 난 이곳을 수리하고 싶었지만 그는 끼고 싶지 않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살 곳이 필요해요."
"그는 그동안 어디에서 지냈답니까?"
"친구 집을 전전했대요."
"당신이 돈 낭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소?"
"나네요, 죠, 이곳은 집을 구경시켰고 자랑스레 구상을 설명했다. 죠는 빈틈없는 눈초리로 가구들을 조사했다.
"오래되었군. 아주 오래되었어. 개중에 좋은 물건이 몇점 있지만 당신에게 그걸 가려낼 안목이 모자란다는 점이 문제요. 내가 아는 평판 좋은 골동품 수복가를 불러다가 수리 견적을 뽑고 진품 가격을 매겨 봐요. 전화 통화가 되오?"
"네. 제대로 작동되는 것은 전화뿐 이에요. 지난주에 새로 가설했어요."
"그에게 전화해야지."
그는 화장지로 까탈스러울 만큼 꼼꼼하게 수화기를 닦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 죠 전에 이야기했던 산업 정보원 기억나요? 죤 에스킨이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지 알아냈던 그 사람 말이에요." 죠는 언제나 방어적인 태세를 갖춘 다음 별 위험이 없다 싶으면 반응을 보였다.
"그의 연락처를 알려 줄래요? 내가 그에게 의뢰할 일이 있어요."
"그는 아무 고객이나 상대하지 않소."
"그럼 나를 추천하고 약속 날을 잡아 주세요."
마조리는 솟구치는 짜증을 눌러 참았다. 그가 다시 큰오빠 행세를 하려 드는군. 죠의 눈에 그녀는 항상 수수료를 사기당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도버의 여학생으로 보일 거야.
"죠, 나를 믿으세요."
일단 화를 낸 다음 살살 구슬렀다.
"당신이 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래, 그렇겠지. 내가 꿰 쓸모가 있을 테니까."
"아네요, 그래서가 아녜요."
"마지, 내 눈을 속이려 들지 말아요. 지난 5년이란 세월을 없었던 것처럼 지워 버릴 수 없어. 난 그 사실을 당신이 떠나자마자 발견했소. 우리는 공동체야. 당신만 좋다면 내가 여동생으로 삼지. 이제 사업 이야기를 해봅시다. 당신에게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정확해요."
갑자기 방안이 훤히 밝아지고 두 어깨가 가벼워지며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죠의 몫인 커피와 샌드위치를 가지러 갔다.
완벽해. 부모님의 별채는 그녀가 꿈꾸었던 그대로 예정된 시간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마조리는 위층으로 올라가 만족스럽게 라나의 침실을 둘러 보았다. 농장무늬의 벽지와 청색 커튼으로 단장되었다. 그녀가 출장 갈 때 딸이 머무를 곳이었다. 그리고 다음 몇 주일 후 아니면 몇 달 후? 저택 공사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잠들게 되리라.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숲을 가로질렀다. 빨강과 금색으로 물든 나뭇잎들과 촉촉한 안개 향이 감도는 대기, 그리고 버찌. 야생자두. 말오줌나무 등 각종 열매가 맺힌 관목 등 이곳은 전과 변함이 없었다.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홀에서 새 하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빗자루와 진공 청소기로 무장한 청소 부대는 졸라를 뒤에 남겨 놓고 떠났다. 자메이카 출신 그녀는 뇌에 손상을 입은 데다 약간 귀가 멀었기 때문에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일이 아편과도 같았다. 숲에서 열매를 낚아채는 새들처럼 그녀는 일에 달려들었다. 졸라는 이곳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자진해서 남았다. 마조리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탁자가 광택재로 흠뻑 젖어 있었다.
"윤아 나지 않아요, 사모님."
졸라가 투덜거렸다. 그녀가 막 병을 흔들려는 찰라 마조리가 종이 타월을 쥐고 박박 문질렀다.
"팔뚝 힘보다 더 좋은 광택재는 없어요. 졸라, 날 보고 배워요."
"내 의견도 같아요."
그녀의 뒤에서 어떤 목수가 동의를 표했다. 마조리가 돌아섰을 즈음 이미 그 목소리의 임자에 대한 평가가 끝나 있었다. 나이 들고 교양있는 스코틀랜드 여성. 하지만 닳고 닳은 모피와 반지가 끼워진 매 발톱 같은 손,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의외였다.
"들어 오세요."
마조리가 말했다.
"마조리 카메론이라고 합니다. 손에 광택제가 묻어서 악수를 청할 수 없네요. 제 꼴이 좀 우습지요?"
"당신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젊고 심지 굳은 아가씨처럼 보여요. 난 당신 남편의 수많은 대숙모 중 한 명인 베아트리스 카메론이에요, 해미쉬를 만나러 왔어요."
"해미쉬는 여행을 떠났어요. 하지만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지금 말해 두건데, 당신에게 대숙모만큼은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마조리."
노부인은 단장을 짚고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그들을 대표해서 여기에 온 이유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당신이 해미쉬의 폐허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던데요?"
"아니에요. 이곳은 폐허가 아니라 좀 황폐해진 거예요. 좋으시다면 집 안내를 해드릴게요."
자랑스럽게 모자이크 타일과 새 벽지, 수복된 떡갈나무 벽 서재와 수백 년에 걸친 회색 코트를 벗어 던진 석조물을 보여줬을 때, 그녀는 베아트리스 숙모의 눈에 차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노숙녀가 적나라한 분노를 표출했다.
"해미쉬가 당신에게 헛돈을 낭비하라고 했나요? 우리 대다수는 글렌너드의 주식 배당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몇 년 동안 그 액수는 쥐꼬리만큼도 안 됐어요. 우리가 고생하는 이 마당에 당신 혼자 돈을 펑펑 쓸 수 있어요?"
마조리의 첫 느낌은 불쾌감이었다. 하지만 연약하고 바싹 마른 이 불쌍한 여성을 보며 마음을 돌렸다. 쯧쯧, 얼마나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을까? 조만간 이분 같은 주주들과 얼굴을 맞대야 할 텐데, 한 명이라도 내 편을 만들어 두자.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차나 커피를 한잔 대접하면서 말씀을 드릴게요. 부인께서 부엌을 괘념치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유일하게 수리가 끝난 곳이거든요. 저는 우리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였답니다." 그녀는 베아트리스 숙모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한 마리의 새처럼 가볍고 연약했지만 그 눈초리는 매처럼 빈틈이 없었다.
"어머니는 제일 먼저 침실과 부엌에 손을 대야 한다고 하셨어요. 일단 편안하게 자고 잘 먹으면 못할 일이 없대요."
"칭찬할 만하군."
노부인이 톡 쏘아붙였다. 그녀의 표정은 변함없이 악의에 가득 차 있었다. 따뜻하고 윤이 흐르는 부엌도 강철같은 눈매를 풀어 주지 못했다.
"카메론 부인, 저는 런던의 제 아파트를 저당 잡히고 관련 사업체의 주식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해미쉬의 집과 사업에 투자할 거예요. 우선이 멋진 집을 수리하고 청소하던 중이었어요. 우리 주주들이 주식을 글렌티란에 팔 생각이니, 당신은 아무것도 못할 거예요. 방계 혈족 주주들이 조만간 한자리에 모여 글렌티란에게 더 높은 가격을 받아 낼 방법을 협의할 예정이에요."
마조리는 애써 평온을 유지하며 커피와 비스킷을 노숙에게 접대했다.
"회의 날짜는요?"
"다음 주 목요일이에요."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얼굴로 몰렸지만 마조리는 낭패감을 감추었다. 난 망했구나. 그 시간 내에 무슨 재주로 주주들의 마음을 돌릴 수 했겠어? 베아트리스 숙모가 작은 초대장을 건넸다.
"여기 있어요."
"누가 회의를 소집했어요? 전 연락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왜 당신에게 연락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저는 주주니까요."
"저도 가족이에요."
그녀는 가능한 한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 아무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결혼식을 치렀는데 우리가 어찌 알겠어요? 이건 글렌티란 측의 제의서 복사본이에요."
"해미쉬와 저는 주식을 팔지 않을 겁니다."
"주주들의 동의 없이 당신은 아무것도 못 할 겁니다."
"주주들의 동의 없이 당신은 아무것도 못 할 거예요." 마조리."
노부인의 말똥말똥한 눈은 거만한 동시에 대담했다.
"그렇다면 제가 그 회의에 참석하여 주주들께, 죤 에스킨이 글렌티란 앞잡이이고 조직적이며 의도적으로 배당금을 낮춰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겠어요. 그분들은 저를 지지해주실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더 높은 수익을 제공할 수 있음을 확신시키겠습니다."
"나부터 시작해 보세요."
"음, 시간이 더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냥 할게요."
마조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다음 15분 동안 그녀는 죠와 구상했던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5년, 10년, 15년 계획에 의해 글렌너드 증류소는 높은 이익을 올리게 되겠지만 처음 몇년 동안 최소 배당금 지급이 불가피했다.
"솔직히 처음 5년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해요."
그녀가 말을 맺었다.
"당신 계획에는 은행의 대규모 융자가 수반되어야 해요. 하지만 작은 공장 하나에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려줄 은행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우선 충분한 담보가 없잖아요."
"한 은행이 그러기로 했습니다."
마조리의 말은 노부인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떤 은행이지요?"
"4년 전 우리가 작은 출판사를 시작했을 때 거래했던 도버 은행이에요. 내 동업자가 얼마 전 발명품으로 떼돈을 벌었고 출판사의 경영 실적이 좋기 때문에 그들이 돈을 대기로 했어요."
그녀는 정말 열과 성을 다 바칠 거야. 베아트리스는 마조리의 구상을 들으며 단정 내렸다. 하지만 열성만으로 충분치 않다. 그녀에게 끈기와 강인함이 있을까? 세상 물정에 밝을까? 칼륨의 미망인이자 그램피안 은행의 총수인 베아트리스 카메론은 마조리의 배경을 조사시켰다. 그래서 그녀의 성공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중 전 동업자 죠 시걸의 공이 얼마나 되었을까? 자신의 것도 아니 집에 돈을 흥청망청 쳐들인다는 것 자체가 소갈머리 없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온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처럼 식탁을 쥔 마조리의 손을 봤다. 그녀가 정말 영업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리고 해미쉬는? 그는 머리도 나무랄 데 없고 학업 성적도 좋았지만 삶에서 도망만 쳤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힘을 불어넣는 경우가 왕왕 있지. 해미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일이 주주들에게 공정할까? 노숙녀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조금만 더 젊었어도. 좋아, 그들에게 시간을 줘보자.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그녀는 한때 남편을 위해 사업의 고삐를 잡았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여자가 사업에 참가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남편의 그림자로 남았다. 그리고 사업 전면에 나선 남편의 반석 같은 의지가 되고 통찰력 있는 눈 역할을 했다. 이 젊은 여자가 할 수 있을까?
"내가 우리 가문의 주주들을 대표하여 회의를 한 달 뒤로 연기할 테니 당신은 서면 계획서를 작성하세요. 그리고 해미쉬도 그 자리에 참석하길 기대 하겠어요. 마조리, 주주들을 설득시키려면 공허한 약속만으로 안돼요. 뭔가 확실한 것을 회의에 가져오세요."
노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장을 짚고 돌아갔다. 그리고 차에 도착해 소리쳤다.
"그리고 서둘러서 후계자를 생산해요. 그게 가장 중요해요."
"난 젓소가 아니에요."
마조리는 달콤하게 미소짓고 손을 흔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베아트리스 카메론이 떠나자, 마조리는 쥐어짠 누더기가 된 심정이었다. 그녀가 우울하게 포치 윗 계단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진입로를 따라 달려오는 차 한 대가 보였다. 엄마와 아빠야! 가슴이 울렁거렸다. 부모님이 이곳을 좋아하셔야 할 텐데. 잠시 후 자동차 문이 열리고 강아지 패디가 뛰어나왔다. 녀석은 가까운 덤불로 달려가 다리를 쳐들었다. 너무 용모가 급한 나머지 그녀에게 인사를 생략했다.
"엄마!"
라나가 달려와 그녀에게 안겼다. 마조리는 딸을 꼭 안고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땅에 내로 놓았다. 아이의 얼굴을 살피는 동안 큰 혹덩어리가 목에 걸린 것 같았다. 드디어 사랑하는 딸을 돌봐 줄 수 있게 되었어. 엄마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한숨을 몰아쉬었다. 푸른 원피스는 구김과 얼룩투성이였고 얼굴은 땀에 젖었으며 두 눈덩이가 부어 있었다.
"저 고양이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다."
엄마의 모습에 마조리의 죄책감이 더 깊어졌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라나의 손을 잡고 차로 달려가 들썩거리는 바구니를 집었다.
"자, 자, 티비. 진정해. 이 녀석을 한 며칠 동안 엄마네 식기실에 풀어 두세요. 워낙 쥐들이 많아서 녀석이 아주 좋아할 거에요."
"아이고 맙소사! 이게 웬 난리인지!"
리즈는 시뻘건 얼굴을 큰 손수건으로 닦었다.
"날이 너무 덥고, 라나는 보채고...... 쟤가 착하고 하지만 얌전히 앉아 있기에는 여행길이 너무 멀었어. 불쌍한 패디용크, 저 녀석 좀 보렴!"
개는 여전히 세 발로 서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차를 세워야 한다고 했잖아요."
라나는 깔깔거리며 주변을 뛰어다니고 꽃들을 만져 본 다음에 잔디밭을 힘차게 달려가 양귀비가 꽃무덤에 몸을 던졌다. 아빠가 충격을 받아서인지 피곤하고 약간 어리둥절해 보였다. 큰 언니는 삶의 부상병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의무 이상을 완수하고 전쟁 후에 마음의 병을 앓고 왔던 남성들이 영국 전역에 많이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깊숙이 곪아 문드려진 후에야 발병한 환자들. 아빠가 이곳에 뿌리를 박고 행복해질까? 갑자기 솟구친 애정의 물결에 그녀는 아빠를 껴안고 싶었지만, 워낙 가족 간 애정 표현을 터놓고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아빠가 쑥스러워할 것이다.
"다 오셨어요! 여기가 인버레이드 장원이에요! 아직 정돈이 덜 되었지만 천천히 제모습을 찾아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묶을 곳은 어디니?"
아빠가 부드럽게 질문했다.
"먼저 집 구경을 하신 다음에 이 근처를 둘러 보시겠어요?"
"너 좋을 대로 하려무나."
아빠는 말수를 줄이고 참견하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꼭 처형을 앞둔 사형수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는 분이었다.
"좋아요! 그럼 어느 길로 갈까요? 이 진입로는 마구간 뒤쪽으로 해서 두 분의 집으로 연결되었어요. 그리고 이쪽 길은 지름길이에요. 작은 숲을 가로지르면 바로 집현관이에요. 그럼 슬슬 산책을 좀 하시겠어요?"
그녀는 괜히 익살을 떨며 분위기를 가볍게 했다. 엄마는 걱정스럽게 아빠를 가볍게 했다.
"우리가 다리를 폈으면 좋겠구나."
엄마는 걱정스럽게 아빠를 본 다음 고용한 택시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요? 곧장 돌아갈 거예요? 하룻밤 묶어 가도록 해요. 그래도 되지, 마조리?"
"아닙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하디부인. 저는 인버네스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자기로 했어요. 그러니 짐을 내려놓는 즉시 떠나겠습니다."
마조리는 그에게 별채로 통하는 마구간 뒤쪽 길을 알려줬다.
"여기는 섣불리 손 델 수 없는 상태구나.'
아빠가 투덜거리며 바짓자락에 붙은 솜털을 털어 냈다.
"저 앞에 보이는, 들판이 딸린 불그레한 큰 저택에 네 집이냐?"
"전에는 잔디였던 것 같은데 미처 정원에 손을 못 댔어요. 시간이 없어서요."
"음, 내가 돌 볼 수 있을 거야. 잔디 깎이 기계가 있니?"
아빠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조리는 지방 조경업자와 계약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아빠의 눈에 갈망이 어려 있었다.
"아빠가 하실 수 있겠어요? 참 좋겠네요. 내일 기계를 사 올게요. 차라리 아빠가 직접 고르세요. 걸터앉아서 모는 식은 어떠세요?"
"그건 너무 비싸."
"일단 구경이나 해보세요."
"해미쉬 이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파산을 모면했니?"
"이곳은 가족 신탁에 묶여 있는 관계로 일부를 팔거나 저당 잡히거나 담보로 설정될 수 없어요. 하지만 죽도록 버거운 의무와 세금 등으로 영구적인 빚에 허덕여요. 그의 사업적인 경험 부족과 더불어 말이에요."
"그렇게 설치지 말아라, 마조리."
엄마가 잔소리를 했다."
"바보들만이 천사가 꺼리는 곳에 달려드는 법이야. 넌 이방인이고 증류소 책임을 떠맡을 필요가 없어요. 이제 집안일이나 건사하거라."
엄마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나 독립에 대한 진부한 생각은 항상 마조리의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엄마는 그녀가 출판사의 주식을 팔았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네. 엄마."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진정하게 굴어. 넌 그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니?"
그녀는 '불쌍한 해미쉬는 더 몰라요'하고 반반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그들이 무성한 장미 정원에 도착했다. 아빠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일부는 장미의 방대함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일부는 그곳이 방치된 데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나머지는 어서 손보고 싶은 열망이었다.
"이것 좀 봐라. 이건 파스칼리, 여건 미니 펄, 저건 헨델 종이야. 웃자라긴 했지만 손보기에 너무 늦진 않았다."
숲에서 라나가 비명을 지르는 통에 그들은 서둘러 다가갔다.
"여우예요, 여우! 내가 저기에서 여우를 봤어요! 패디용크가 쫓아갔어요. 여우를 구해 주세요! 빨리요!"
"패디는 여우를 못잡을 거야, 걱정하지마."
마조리가 딸의 손을 잡았다.
"여기는 다람쥐도 많아요. 난 다람쥐가 좋아."
"그리고 새들도 많구나. 저 소리 좀 들어봐."
리즈가 끼어들었다.
"어젯밤에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정말 아름다웠지만 어찌나 외롭던지...... 두 분이 여기 와주셔서 정말 반가워요."
"해미쉬가 여기에 없니?"
"네. 그는 알프스를 등반 중이에요."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에 대한 수치심을 감추었다. 그는 도망가지 말았어야 했어.
"뭐! 신혼에?"
"그가 여행을 가고 싶어 했던 반면 저는 여기 일을 하고 싶었어요."
"마조리, 년 이제 결혼했으니까 네 고집대로 할 수 없어. 너희 두 사람 일에 그래선 안 된다. 그는 신혼여행을 떠날 자격이 있어요. 너희는 결혼했잖니."
"네, 엄마 말씀이 옳아요."
그녀는 해미쉬의 불안한 재정 상태와 영국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들어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죠가 그녀를 위해 글렌너드의 주식을 사들이는 지금 절대적으로 영국 땅을 지켜야 했다.
별채에 도착한 순간 마조리는 미래가 순탄하리란 것을 알았다. 엄마는 아담한 꽃밭과 전망과 멋진 찬장에 말을 잃었다.
"준비가 충분치 못해서 미안해요, 엄마."
"네가 여기에 한 재산 들였겠구나. 어느 날 사랑에서 깨어나면 어쩔려고 그러니? 그 생각은 해봤니?"
엄마는 익숙지 않은 단호한 태도를 취하느라 땀까지 흘렸다.
"난 사랑에 빠지지 않았어요."
"이런 바보 같으니. 사랑 없이 어떻게 결혼하니? 네가 얼마나 부자고 성공했는지 모른다만 결혼의 생명은 친밀감이야. 네가 그를 간호하거나 그를 위해 특별한 일을 해야 할 순간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튼튼한 생활의 터전은 의미심장한 것 위에 세워지지만, 삶의 파고를 넘나들며 그 의미를 상실하는 법이야. 네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셔츠를 빨고 양말을 깁고 간호하는 단순한 일들이 참을 수 없이 지겨울 거야. 사랑이 그 대답이야. 사랑만 있으면 시시한 일도 최상의 의미를 갖게 된단다."
엄마 평생에 가장 긴 연설이었다.
"난 어느 누구의 양말도 깁지 않을 거예요."
"그럼 부자들은 서로를 위해 뭘 하니?"
"아무것도 안해요. 하녀가 있잖아요."
"아휴, 내가 가난해서 천만다행이구나."
"엄마,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아빠는 조용히 모녀 뒤를 따라다녔지만 침실 창문을 건너다보는 순간 그 자리에 못 박혔다.
"저게 뭐냐?"
그는 남쪽을 가리켰다.
"뭐요? 어디요? 아 저거."
그녀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중얼거렸다. 아빠의 야망은 오리를 키울 수 있는 연못을 갖는 것이었다.
"호수예요. 오리랑 여러 종류의 새들이 있어요."
"이웃집 거니?"
"아뇨. 해미쉬 거예요."
"우리가 저기에 가볼 수 있는 거냐?"
"그럼요, 난 황혼녘에 가서 오리에게 먹이를 줘요. 나무 근처에 콩깍지 부대가 있어요. 지금 백조를 한 마리 살까 생각 중인데. 아빠 생각은 어떠세요?"
"두 마리로 하거라. 너무 비싸지 않다면 말야. 마조리야, 내가 해미쉬에게 일을 달라고 해야겠다. 이 집의 임대료 대신 정원 일을 하마. 월급은 필요 없어. 당연히 그렇고말고. 정원사가 실직자보다 훨씬 낫잖니. 이 일에 대해 내가 좀 아니까 즐겁게 할 수 있어. 이곳을 잘 손질하마. 그리고 꽃을 내다 팔면 수입도 올릴 수 있어."
"네, 아빠는 잘하실 거예요. 그리고 저 너머에 오래된 채소밭도 있어요. 신선한 샐러드와 야채 대실 수 있겠어요? 요즘 채솟값이 얼마나 비싼지 잘 아시죠?"
"하다마다. 좀 기다리거라.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어."
"그럼, 됐어요."
마조리는 지난날 오래오래 가슴에 뭉쳐 두었던 근심을 한숨으로 내뱉었다.
"이제 됐어요......"
부모님이 도착한 다음 날, 마조리는 일찌감치 주변에 사는 친척 주주들을 방문하러 나섰다. 다가올 회의에서 그들의 투표 방향을 알아보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알아보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처음 세 차례의 방문은 철저한 실패로 돌아갔다. 거의 정오가 되자, 그녀는 많은 이의 적대감과 호전성의 과녁 노릇에 지치고 풀이 죽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10번지에서 차를 세우고 목록을 살폈다. 루시 카메론 부인은 초라한 방갈로에 혼자 사는 과부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마조리를 보자마자, 투터운 안경알로 확대된 분노로 눈을 빛내며 묵은 원한을 쏟아부었다.
"난 당신이 누군지, 여기 왜 왔는지 알아요. 그러니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이 더운 날에 그녀가 가디건를 추스리는 이유는 추위 때문이 아니라 방어용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조리는 그녀가 남편을 잃은 외롭고 독신 생활을 힘겨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마음 푸세요, 카메론 부인. 저는 부인을 만나뵈서 기뻐요. 업무 말고도 해미쉬의 가족들과 만나뵙고 싶었어요."
"가족! 흥! 난 그의 코빼기도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들어와요. 차를 한잔 들겠수?"
그녀의 타고난 좋은 매너가 적대감을 이겼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벌써 여러 시간째 운전했어요."
부인은 절뚝거리며 천천히 안으로 안내했다. 마조리는 텅 빈 거실에서 고독과 가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 해미쉬. 당신도 왔어야 했어요. 그리고 죤 에스킨, 당신도. 그녀는 차를 마시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음속으로 세일 전략을 숙고했다. 장밋빛 전망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은 이유가 뭘까? 그녀는 총천연색의 도표이더라도 브로셔, 향후 위스키 가격에 대한 전략 및 전망서 뿐 아니라 해미쉬가 산꼭대기에 서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실린 '리더십'의 최근호까지 지참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잘 먹혀들지 않았고 이미 세 명의 소중한 주주들을 잃었다. 그들은 회의에서 그녀에게 반대표를 던지리라. 그녀에게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재정적인 설명보다 감정적인 호소가 더 유리하리란 느낌을 받았다.
"카메론 부인, 당신은 배당금에 의지해서 힘든 세월을 견디셨는데 왜 주식을 팔지 않으셨나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부인은 신경질적으로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몸짓으로 벽난로 선반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대위 군복을 입은 한 남자의 빛바랜 사진이 자랑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남편은 항상 글렌너드 위스키가 번창하리라고 믿었어요. 회사가 2차대전과 전후의 어려운 시기를 딛고 일어날 때, 우리 가문이 스코틀랜드 최고의 증류소로 우뚝 서고 많은 배당금을 받게 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답니다. 그래서 유산은 말할 것도 없고 연금과 쌈짓돈까지 털어 그 주식을 샀던 거예요."
마조리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카메론 부인의 넋두리를 다 들은 다음 공략에 나섰다.
"사실, 제 남편과 저는 경영 일선에 복귀하여 회사를 되살리기로 결심했어요. 왜냐하면 해미쉬 본인을 포함한 많은 주주들이 도둑질을 당해 왔기 때문이죠. 제가 그동안의 경위를 설명해 드릴게요......"
그녀는 자세히 설명했고, 그곳을 떠날 때는 부인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지를 얻어냈다. 저녁이 되자 마조리는 여러 잔의 차와 프르츠 케이크로 속이 더부룩했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겨우 가족 주주의 3% 지지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그녀는 집에 가고 싶었지만 다음 날 아침 일찍 죠의 스파이와 약속을 한데다 가스도 만나기를 청했기 때문에 밤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그녀의 아파트에서 묵어야 했다. 그녀는 기가 죽은 채 자동차를 인버네스 공항에 주차시켰다. 오직 기적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데릭 올리버는 그녀의 상상과 딴판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땅값이 비싼 콘듀이트 스트리트에 있었다. 검정색 정장과 보수적인 넥타이, 회색과 흰색의 줄무늬 셔츠를 걸친 깔끔한 올리버는 노련한 변호사나 은행가를 연상시켰다. 그의 눈만이 본색을 보여줬다. 푸른 광채가 돌고 얼음수정처럼 투명한 데다 재미와 모험에 대한 열망으로 반짝거리는 젊은 청년의 눈이었다. 마조리가 다짜고짜 본론에 들어갔다.
"내 남편은 글렌너드 위스키 사의 회장이에요. 우리는 최근의 인수 공작에 대항하여 회사의 존망을 놓고 싸우고 있어요. 죤 에스킨이 적의 진영에 한발을 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분이 당신이라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분이 당신이라고 듣고......"
"진정하십시오, 카메론 부인. 차를 드시겠습니까? 제발 서두르지 마세요. 정 급하시다면 나중에 다시 오세요."
그녀는 차를 거절하고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 보여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글렌티란의 응큼한 전략을 자세히 알고 싶다는 말도 덧 붙였다.
"올리버씨 나는 글렌티란의 방법을 파악하여 그들의 확장 계획, 영업이나 투자 등 향후 사업 방향을 정확하게 집어낼 생각이에요. 그들의 장점과 약점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코앞으로 다가온 인수를 모면할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눈을 돌렸다.
"진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우린 모든 꼭 성공해야 해요."
올리버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빈틈없이 평가의 빛이 어렸다.
"저는 시걸 씨가 관심 없이 했던 배경 정보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글렌티란 주식을 매입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요."
"음, 좋은 친구들 두셨어요."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죠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을까?
"해미쉬 카메론은 모계 친척에 등을 돌리신 것 같군요. 제가 보기에, 그 점이 글렌티란의 최대의 약점이자 부군의 최대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네?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흥분의 물결이 솟구쳤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홍콩의 무역회사가 이미 망한 줄 알았는데.
"당신 부군의 동양 쪽 끈에 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선친이신 시몬은 홍콩의 인버 아시아 무역상을, 전 세계에 지점망을 둔 처남의 한국 회사와 합병시켰어요. 그 회사는 최근 싱가폴에 거점을 두고 있습니다. 요시 토하라, 부근의 외삼촌께선 세금 혜택에 따라 바람처럼 움직이며 사업을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경영합니다. 정확한 액수를 집어내긴 어렵지만, 토하라 씨가 어마어마한 거부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당신 부군의 몫이 그 절반이라는 뜻이지요. 소문이 파다합니다. 아무리 그들이 부인한다 해도 부군께 빚을 진 것만큼은 사실이니까요. 시걸 씨가 관심 없어 하시는 통에 이에 대한 심층 조사를 못 했습니다."
"빨리하세요.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럼, 그 시작으로 이 정도는 어떻습니까? "
올리버는 잘난 척하며 캐비넷에서 서류철을 꺼내 공손하게 책상 위에 놓았다. 서류를 검토하는 동안 마조리의 눈에 어린 눈물로 글자가 부옇게 번졌다. 이게 그토록 갈구하던 기적일까?
해미쉬는 밤마다 꿈에 시달렸다. 한 고지식한 여자가 접수대 옆에 서서 카운터를 주먹으로 꽝꽝 내리쳤다. 그 에머랄드 같은 눈은 결의로 빛나고 불꽃 같은 머리카락은 석약 속에서 불타올랐다. 그다음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암사슴처럼 다정하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딸을 안았다. 그녀의 눈은 이상할 만큼 자유자재로 변했다. 어떤 때는 송곳처럼 날카롭게, 또 어떤 때는 한없는 따뜻함과 약속으로 녹아들었다. 그 사람이 바로 그의 마조리였다. 그는 또한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곤히 자는 모습도 생각했다. 그녀는 청순한 동시에 관능적이었다.
그는 마조리에게 집중포화를 맞게 하고 주주총회에서 도망친 결정을 후회했다. 인수 문서에 조인하는 자리에 극성스런 기자들이 서성거리며 질문의 화살을 쏘아댔으리라. 그가 그녀의 곁을 지켰어야 했는데. 사실, 아내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그가 앤드류 삼촌과 이안에게 경영권을 뺏기고 베아트리스 숙모와 글렌티란에게 밀려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그렇다고 내가 겁쟁이는 아냐. 해미쉬는 자기 합리화를 했다. 나는 투사지만 바보는 아니거든. 그는 스코틀랜드 카메론 일족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협력 없이 삼촌과 사촌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육중한 체구와 넓은 어깨, 푸른 눈동자와 모래 빛 머리칼의 진짜배기 스코틀랜드 남자 앤드류 삼촌은 주주들이 원할 만한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미래를 수수방관한 채 알프스 등반을 선택했지만, 그를 처벌하듯 산악 등반은 처음부터 꼬였고 재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바람과 눈보라가 그치지 않는 데다 선봉팀을 잃은 통에 그들 모두 죽을 뻔했다. 결국 일행은 투표를 통해 귀향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사업을 잃었다는 소식을 마조리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이 세상의 승리자인 반면 그는 패배자였다. 조만간 그는 그녀가 마련해 준 대좌에서 굴러떨어지게 되리라. 그리고 그다음에는?
오후 3시경, 해미쉬는 인버네스 공항에 남겨 둔 차를 타고 질풍처럼 집으로 달렸다. 그곳에서 뭘 발견하게 될까? 가을 안개가 계곡 허리를 감돌았고 나뭇잎들은 황금 옷으로 갈아입었으며 일렬로 늘어선 관목은 열매를 잔뜩 달고 있었다. 새들이 긴 남쪽 여행을 준비하며 끊임없이 모였다 흩어졌다. 그러나 해미쉬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조리가 폐허가 된 집에서 먼지와 망가진 가구들을 상대로 씨름하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내가 어쩌자고 그녀에게 그런 짓을 했지? 그녀가 날 보고 싶어 할까? 날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짐을 싸가지고 런던으로 돌아갔을까? 설령 그랬다 해도 그는 그녀를 조금도 책망하지 않으리라. 그가 대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이 탔다. 그다음에야 전에 없던 초인종과 음성함을 발견했다. 그는 초인종을 눌렀다."여보세요." 라나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어 줄래, 라나야? 난 해미쉬야."
아빠라고 말할 걸 그랬나?
"가세요. 여기서 아저씨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라나는 앙칼진 말로 그를 퇴짜놨다. 해미쉬는 한숨을 쉬었다. 라나의 환심을 사는 일이 최선 임무구나. 하지만 그녀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마조리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가슴이 뛰었다. 그는 차를 세워 놓고 대문을 넘었다. 잠시 후 진입로를 따라 조깅하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호수까지 이어지는 긴 잔디밭에 경악했다. 세발자전거가 한쪽에 놓여 있었고, 저 멀리 하디 씨가 기계 위에 앉아 잔디를 고르고 있었다. 개 한 마리가 컹컹 짖으며 그 뒤를 따랐다. 저택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그사이 달라진 풍경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더러운 회색 돌을 얼마나 싫어했던가. 그는 계간을 따라 올라가 손가락으로 깨끗한 석조물을 만졌다. 이제 회색이 아니라 아름다운 핑크와 흰색을 발했다. 마조리가 한재산들였구나.
그는 서둘러 문을 열어젖히고 소리쳤다.
"마조리...... 어디 있소? 이런 세상에!"
그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오랫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그랜드 홀은 깨끗하게 새로 칠해졌고 바닥은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웠으며 옛 그림들이 말끔히 수복되었다. 완전히 달라 보였다. 저 벽들이 어떻게 된 거지 색이 바뀌었나? 그는 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동화 속의 요정이 마술 봉을 휘둘러 썰렁한 저택을 집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밖에. 그리고 그 요정은 마조리였다. 그 사람 외에 누가 2주일 만에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어?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대다수가 반만 완성된 상태였다. 넋을 잃은 그는 부엌으로 갔다. 아늑한 가정의 분위기가 흐르는 그곳 바닥은 먼지 한톨 없이 반짝거렸고 긴 식탁은 저녁 빛에 반짝거렸으며 레이스 커튼이 하늘거리고 구리 냄비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항상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시꺼먼 웰시 장식장이 이제 밝은 갈색으로 바뀌었고 선반마다 예쁜 접시와 컵과 꽃병으로 장식되었다. 식품 저장실과 뒤에 있던 총기실은 세탁실로 바뀌었고, 새로 마감한 시멘트벽이 마르는 중이었다. 그때 초록색 멜빵 바지를 걸친 가무잡잡한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들어오는 통에 해미쉬는 깜짝 놀라 위로 뛰어 올랐다.
"당신이 주인님이세요?"
그녀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해미쉬 카메론이오."
"난 졸라예요."
그녀는 자신을 가리키고 웃었다."
"식사를 하시겠어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마조리는 어디에 있소?"
"외출하셨어요. 라나는 노마님과 함께 있었어요."
"그 노마님은 어디에 계시지?"
그는 황당한 기분으로 물었다.
"저쪽 별채예요."
그는 서둘러 계단과 잔디를 가로질러 잔디깎기 기계 쪽으로 향했다. 가족들이 벌써 여기에 있단 말야? 그는 하디씨가 자신을 싫어하고 그와의 동거를 원치 않으리란 것을 잘 알았다. 순간 아까 라나의 목소리가 귀에 메아리치며 긴박감을 불러일으켰다.
"가세요, 여기서 아저씨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안녕히 지내셨습니까?"
그는 성의를 갖춰 하디 씨에게 악수를 청했다.
"해미쉬? 내가 자네 이름을 불러도 될까? 다음 주에야 돌아올 줄 알았는데. 마조리가 좋아할 거야."
"그런데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
"당연히 일하러 갔지. 걔는 항상 이일 저일 손을 댄다네, 자네도 익숙해질 거야. 저기...... 자네를 봐서 반갑네."
그가 기계에서 내려왔다.
"참견쟁이 여자들이 없는 지금 자네에게 남자 대 남자로 할 말이 있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잠깐 기다리게."
그는 기계 쪽으로 되돌아가 시동 열쇠를 뺏다.
"이 열쇠를 저기에 남겨 둬선 안 된다네. 자네도 잔디를 깍고 싶을 때마다 내 말을 명심하게나. 라나가 기회를 노리고 있어. 어제는 걔가 기계를 작동하려는 현장을 잡았다네, 워낙 영리한 데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아이야. 저기에 열쇠를 꽂아 둔 채 등을 돌렸다가는 라나가 금방 달려들걸."
하디씨는 잠시 뜸을 들리고 나서 말했다.
"해미쉬, 시실 하고 싶은 말은 이거라네."
그의 이야기가 봇물처럼 흘러나왔다. 해미쉬는 그가 이 말을 반복해서 연습해 왔음을 눈치챘다.
"마조리가 하도 고집을 부리는 통에 우린 모든 도버집을 단기 임대 놓았네. 이곳이 마음에 들지만 자네가 싫다면 우리는 당장 떠날 거야. 우리는 원치 않는 곳에서 머무는 그런 사람들이 아냐. 마조리는 머리도 좋고 당찬 아이지만 나름대로 결점이 있다네. 그중 하나가 다른 가족들의 생각을 무시한다는 거야. 우리는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가 아니라 도버에 당당한 집을 가졌네. 마조리는 그곳을 팔려 들지만 우리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 아이는 이 저택과 증류소에 투자하려고 손에 닥치는 대로 돈을 끌어모았어."
아 맙소사! 해미쉬는 기가 막혔다. 그녀가 이 집과 이제 더 이상 그것도 아니 증류소에 재산을 쏟아붓다니. 아직 총회에 대해 모르고 있나? 그는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모든 주식을 팔아 그녀의 돈을 마지막 일전까지 갚아 줘야지. 그 마지막 수단에 더 비감한 심정이 들었다. 이제 노인은 설명을 다 마친 것처럼 보였기에 해미쉬는 반색을 했다. 그가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보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인의 어깨를 잡았다.
"두 분께서 여기에 계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는 하다 시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매달리는 광경에 서글픔마저 느꼈다.
"제가 여행을 떠나고 나면 마조리가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그리고 라나에게는 모두가 필요합니다. 두 분은 라나와...... 마조리에게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근방에 이웃이 없어서 무척 고독했거든요. 옛 저택들은 대 가족용으로 세워 졌어요. 이제 우리는 한편이잖습니까?"
그는 뜸을 들였다.
"마조리가 걱정되는 구요. 제가 그녀의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까?
"마조리는 걱정 말게. 그 아이는 제 앞가림을 잘해. 자, 나와 함께 별채에 가서 한잔 들도록 하세, 해미쉬, 애 어멈이 햄 샌드위치를 만들어놨을 거야. 불교 신자도 햄을 먹나?"
"아무거나 다 먹습니다."
별채의 황량하고 폐허가 된 모습을 떠올린 해미쉬는 진저리를 치며 노인을 따라 숲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이곳이 아늑한 가정으로 변모했음을 알았다. 라나는 다림질을 하고 있었고 리즈는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아이는 그를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아저씨가 내 아빠가 될 거예요?"
라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가 원한다면 그러고 싶구나. 하지만 그건 너에게 달렸어. 며칠 기다렸다가 내가 충분한 자격이 있는지 보면 어떠니? 그다음에 선택하렴."
"뭘 선택해요?"
"내가 네 마음에 드는지 어떤지를 말야."
"아저씨는 뭐가 될 수 있는데요."
아이는 이마를 찌부렸다.
"강아지 빗질하는 사람, 오리 먹이 주는 사람, 또는 자동차 수리하는 사람, 그리고 창문 닦는 사람이 될 수 있어. 네가 결정하렴."
"내가 못되게 굴면 날 때릴 거예요?"
"아니, 절대로 안 그래."
"내가 아저씨의 입양한 딸이 되는 거예요. 아니면 진짜 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저씨는 아빠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아까 말한 것도 다 되어야 해요."
그녀는 그의 무릎에 기어올라 손가락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 운명적인 몇 초 사이에 해미쉬는 라나에 대한 사랑에 흠뻑 빠졌다.
마조리는 만족스럽게 차를 몰았다. 밤 아홉시가 다 되었건만,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황혼이 가시지 않은 대지는 하얗게 빛나는 한 점 태양과 은은한 색조 아래 마법의 장소로 변해 있었다. 마지막 교차로에 접어들었을 때, 사슴 한 마리가 도로로 뛰어나가서 8피트가 넘는 울타리를 쉽게 뛰어넘었다. 그에 이어 갈색 산토끼가 브레이크를 밟고 헤드라이트를 껐다. 그제야 공포에 질린 토끼는 부리나케 도망갔다.
평화와 만족감이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내 집! 겨우 한 달밖에 살지 않았건만,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한 깊은 애정이 우러나왔다. 아빠가 정원을 가꾸며 행복해하는 모습은 안심이자 기쁨이었다. 그녀는 아빠가 황혼녘에 호숫가에 서서 오리들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즐겨보았다. 라나는 정열적으로 숲을 사랑했다. 이제 그곳은 각종 열매의 보고였고 가시 금잔화가 때를 맞아 만발했다. 여우가 덤불 옆에 굴을 팠으며 붉은 다람쥐와 새들이 수백 마리가 넘었다. 딱따구리. 검은 방울새. 멧도요새. 개구리매, 그리고 여러종의 올빼미 등.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대문 옆 떡갈나무 아래 세워진 차가 보였다. 해미쉬가 돌아왔구나! 그녀는 행복감에 젖었다. 그런데 왜 차를 밖에 남겨 뒀을까? 알듯말듯한 그 내막에 그녀는 대문을 열고 저택으로 향했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마음에 쏙 들었다.
차고에 주차 시킨 그녀는 서둘러 연결 통로를 따라 식기실로 들어갔다. 졸라가 흔들의자에 앉아 하품하고 있었다.
"왜 늦게까지 여기에 있어요. 졸라?"
졸라의 눈과 입술이 큰 미소로 이지러졌다.
"주인님이 노마님과 댁에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주무실 곳을 알려 드리려구요."
"주인님이 아니라 카메론 씨라고 불러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가서 자도록 해요."
식기실 선반에서 찾은 회중전등을 들고 그녀는 서둘러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숲에서 두 쌍의 초록 눈과 만났다. 그녀는 멈추어 서서 얼어붙은 듯 정지한 여우를 쏘아보았다. 잠시 후 그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별채에 도착한 그녀는 걱정스런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만사가 다 괜찮을까? 그때 라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프렌치 창문이 열려 있었고 방에서 밝은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라벤더 향기와 갓 손질한 잔디 향을 즐기며 살며시 창문을 들여다보았을 때 훈훈한 분위기가 풍겨났다. 그 순간 아무도 그녀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빠가 한쪽 벽에 다트 판을 걸어 두었고 해미쉬가 다트를 겨냥하는 동안 라나는 그의 등에 매달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라나. 동작 그만!"
해미쉬가 명령했다. 그의 손이 앞으로 번개같이 나가는 순간 라나가 다리를 흔드는 통에 다트가 빗나갔다. 아이는 전보다 더 크게 웃었다.
"그 아이를 그만 내려놓게, 해미쉬."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얘는 저의 약점이에요."
해미쉬가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저는 우연찮게도 다트의 명인이에요. 라나가 지칠 때까지 매달려도 좋습니다. 자, 제가 한두 가지 묘기를 보여 드릴게요. 하디씨."
"음, 그러게. 하지만 해미쉬,"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나?"
"엄마, 엄마, 엄마."
이때 흥분에 찬 비명과 함께 라나가 바닥으로 주르르 내려왔다. 마조리가 허리를 숙이고 팔을 벌렸고, 다음 순간 딸의 헝클어진 검은 고수머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몸을 펴고 일어난 그녀의 눈이 방을 가로질러 해미쉬와 마주쳤다. 그들의 눈이 서로 얽혔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애정을 담아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그녀는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하지만 상식이 시계추처럼 돌아왔다. 사랑은 환상이다. 그리고 보호? 해미쉬는 그녀를 고사하고 자기 한 몸도 건사할 수 없다. 그의 눈에 빛나는 저것은 사랑은 아니라, 주주 및 채권자와의 대결을 도울 수 있는 강한 여자에 대한 갈망과 인정받고픈 열망이다. 그녀는 순순히 해미쉬의 품에 안겨 미소지으며 아내 역할을 했다.
"놀랐어요? 저택에 들어가 봤어요? 마음에 들어요? 집에 오는 길에 정원을 구경했어요?"
"믿을 수 없을 정도요. 당신은 마법의 손을 가진 게 틀림없어요."
해미쉬는 기쁨보다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신 마음에 들어요?"
해미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았다. 평생 여기에서 살아온 듯한 태도였다. 그는 엄마가 만든 햄 샌드위치를 맥주와 곁들여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아빠와 그는 허물없이 어울렸다. 해미쉬가 가족들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녀는 진정으로 그래 본 적이 없는데.
"어서 먹어요."
해미쉬가 잔소리를 했다.
"이건 명령이에요, 아내여. 당신은 하루종일 굶고 다녔을 걸, 그렇지요?"
아내라. 정말 이상해!.
마조리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라나 목욕시키는 일을 건너뛰었다. 그리고 저택의 낡은 난방시설이 수리될 때까지 아이가 이곳에 묵어야 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엄마가 라나를 재우는 동안 마조리는 식탁에 앉아 두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불쌍하고 가난한 주주들에게 안전하게 격리된 듯한 기분에 젖어 위스키를 마셨다. 아빠는 최근의 문제를 해미쉬에게 털어놓았다.
"여우들이 밤에 오리 새끼를 잡아먹고 있어. 멍청한 오리들은 호숫가 모래턱의 버드나무 가지 아래에서 잠을 잔다네. 보호 대책을 강구해야 해. 내 꿈은 호수 중간에 섬을 하나 만들고 버드나무들을 심는 것이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그동안 그 교활한 여우 놈들이 설쳐댈 거야. 패디를 거기에 둬보기도 했지만 아무 차이가 없더군. 그래서 이놈이 오리들 곁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거라네."
"보트 하우스 주위에 파손된 목재 방파제로 뗏목을 만들어서 호수 중간에 밀어 놓으면 오리들도 곧 거기에서 자게 될 겁니다."
해미쉬가 제안했다. 곧 지루해진 그녀는 마음속으로 묘안을 강구하기 사작했다. 어떻게 하면 은행과 주주들을 그녀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총회까지 식탁 밑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남성에 대고 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것은 청바지 밑에서 단단하게 부풀어올랐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든 그녀는 엄마가 차를 만드는 모습을 보았다.
"아빠는 어디 가셨어요?"
그녀가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패디를 데리고 오리를 돌보러 가셨다. 난 차 생각이 없는데, 넌 어떠니?"
"넌 어떠니?"
"됐어요."
"그럼, 라나에게 인사하고 갑시다. 난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해미쉬가 그녀의 손을 더 힘차게 누르며 속삭였다.
"난 당신을 간절하게 원하오."
"나도 그래요."
그녀는 자동적으로 대답한 다음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아, 해미쉬, 네, 정말이에요."
그날 밤 마조리 안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일부는 그녀의 육체적인 각성이요, 관능과 만족의 울타리의 확대였다. 또한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신뢰와 일체감이 자리 잡았다. 처음으로 한치 한치의 살이, 신체 각 부위가 특별한 기쁨의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더 많은 탐색의 가능성을 영원히 약속받았다. 그녀는 여성을 경외하는 남자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해미쉬에게 남성적인 오만함이나 여성에 대한 무시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단순하고 완전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육체를 사랑하고 경외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존재했다. 두 사람이 공유한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것이며, 이 일체감과 인연의 선물을 소중히 아끼고 잘 키워나가리란 상호 간의 지적인 이해가 그것이었다. 그녀는 해미쉬와, 그리고 그가 창조한 기쁨과 하나가 되었다. 자정에 그가 그녀를 다시 깨웠다. 그녀는 온몸에 와 닿는 그의 맨살의 감촉에 전율했지만 너무 피곤했다. 지친 나머지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반 혼수상태로 나른하게 누워 있었지만 그녀의 모든 맥박과 신경은 다가오는 감각을 붙잡기 위해 몸부림쳤다. 다시 한번 그가 혀와 손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느끼고 수도 없을 숨겨진 성감대를 찾아내며 그녀에게 구애하는 동안, 그녀의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욕망의 용암이 점점 더 뜨겁고 격렬하게 들썩거리고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체의 참을 수 없는 압력으로 지상 밖으로 분출한 화산처럼 그녀 역시 절정으로 향해 달려가 비명을 지르고 환희의 경련에 몸을 떨었다.
"해미쉬, 아 내 사랑,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흐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아주 작은 부분은 여전히 뒤로 물러서 고고하게 버텼다. 그녀는 가장 깊은 속마음까지 터놓을 수 없었다. 파멸로 가는 길이었으므로.
해미쉬는 반듯하게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이 약간 열린 창문 쪽으로 향했고 아름답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달이 그이 육체를 탐색하고 향유하고 모든 근육과 관절을 따라 그리며 그 선정적인 빛으로 그를 물들였다. 그의 쭉 뻗은 콧날, 단호한 어깨선, 두드러진 광대뼈와 높은 이마는 힘과 탄력성을 보여줬지만 해미쉬는 인간에게 등을 돌렸다. 대신 그의 적응력과 용기는 어느 이름 모를 산에 낭비되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전투를 홀로 치르고 의외의 승리를 거두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거야. 지금 마조리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그의 자신의 핏줄을 부끄러워했지만, 그것은 고스란히 그의 비범한 힘 속에 흐르고 있었다. 그의 재능과 순응성은 일본인 어머니의 유전이었다. 순간 머리를 치는 어떤 생각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해미쉬를 흔들어 깨웠다.
"해미쉬, 내 말을 들어봐요. 당신이 그걸 숨길 수 없다면 과시 해야 해요."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마조리, 왜 안 자요?"
그가 잠에 취해 중얼거리며 침대 옆에 시계를 확인했다.
"맙소사! 새벽 두 시잖아. 한밤중에 웬 봉창 두들기는 소리요?"
"해미쉬, 당신 어머니에 대해 말해주세요. 이건 중요한 일이에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갓 결혼했으니까 당신 변덕을 받아 주겠지만 영원히 이런 상태가 계속되리라고 기대하지는 마세요. 아, 난 어머니를 아주 기억하고 있소. 그분은 아주 다정하고 고상하고 나무랄 데 없는 몸가짐을 지니셨어요. 영리하고 실수가 없는 데다가 항상 여성적이었을 뿐 아니라 ......"
"그리고 당신 아버님은 처남과 동업을 하셨어요."
마조리가 초조하게 끼어들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사업에 대한 대화였소?"
"네, 당연하죠. 그게 아니면 뭐겠어요? 당신 외가댁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해미쉬."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게 긴박한 일인가요? 꼭 알아야 할 만큼?"
"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해요, 해미쉬."
"우리 아버지는 인버. 아시안 무역회사를 외삼촌 요시 토하라의 토하라 무역회사와 합병시켰어요......"
"그리고 토하라는 어디에 계세요?"
"토하라 상이오."
그는 정정해 주었다.
"그분과 당신 몫인 이윤의 절반은 어디에 있어요? 당신 아버지가 힘들여 일하신 결과가 어떻게 된 거죠? 그들이 당신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어요?
"잠깐만."
그는 투덜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밤새도록 고문을 견디려면 우선 커피가 좀 먹읍시다."
"찬성!"
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의 눈과 이마와 사랑스런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그녀를 잡으려 하자,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침대 밖으로 뛰어나갔다. 5분 후, 그들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커피에 비스킷을 적셔 먹으며 구름이 달을 지나는 모습을 구경했다. 마조리는 해미쉬와 한 몸이 된 듯한 묘한 감정에 빠졌다. 그는 사랑스럽고 충성스러우며 섹시한 남자였다. 그를 처음에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난 스코틀랜드로 온 후로 삼촌 소식을 듣지 못했소."
해미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알아본 바로, 그는 아주 부자이고 큰 권력을 가졌어요. 게다가 18년 동안이나 당신의 이윤을 떼어먹었어요. 물론 그걸 돌려주지 않을 거요. 그는 오리발을 내밀겠지만, 내심 당신에게 진 빚을 잘 알고 계실 테니 우리는 그의 죄책감을 이용해야 해요. 더 자세히 말해 보세요."
"베아트리스 숙모님이 사람을 시켜 토하라상에게 신탁금을 상환할 돈을 받아내려 하셨지만 외삼촌은 만만치 않으셔요. 토하라상은 카메론 누이에게 무례했었다는 이유로 일체의 거래를 거절하셨고 우리 아버지가 파산 직전에 죽었다고 주장했어요. 당연히 그분이 모든 회계장부를 장악했죠. 융자 상환 시기가 닥쳐오자, 베아트리스 숙모님은 은행에서 글렌티란 주식을 사들였어요. 그분은 막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혈족 주주들은 그분의 지도에 따라요."
'베아트리스? 당신 가문에 베아트리스 카메론이 몇 명이나 있어요?"
"내가 알기론 딱 한 분이오. 그분은 살짝 맛이 간 갑부예요."
"까마귀처럼 구슬 같은 눈과 반지를 잔뜩 낀 참새 같은 체구인가요?"
"비슷해요."
"그분 정신은 말짱해요. 그런데 숙모님이 주식을 얼마만큼 가지고 계세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 부질없어요. 여보, 사실은 지난 14일에 총회가 있었는데......"
그는 면목 없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이 없는 동안 베아트리스 카메론이 오셨고, 내가 시간을 달라고 통사정한 결과 회의를 9월 13일로 연기했어요."
마조리는 좀처럼 흥분을 자제할 수 없었다.
"해미쉬, 내말을 들어보세요. 상황을 바로 잡을 기회가 생겼어요. 당신의 문제는, 당신이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있어요. 당신의 동양계 핏줄을 숨길 수 없다면, 그걸 내놓고 과시해야 해요. 호랑이 들어가야 범의 새끼를 잡는다잖아요......"
"숨을 좀 돌립시다, 마조리. 당신은 꼭 장모님처럼 말하는군."
"해미쉬, 우리는 이길 거예요."
그녀는 그의 눈이 고통으로 가늘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기고 난 다음에는? 우리에게는 버틸 만한 자금이 없잖아요."
"내 재산을 전부 글렌티란에 쏟아부을 거예요. 그리고 내가 거래하던 은행이 뒷돈을 대기로 약속했고, 남은 출판사 주식을 현금으로 받아 낼 거예요. 죠도 조와 주기로 했어요. 어떻게든 사업 자금이 마련될 거예요."
"날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하겠단 말이오?"
그는 못 믿겠다는 듯하고 물었다.
그녀의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우리는 결혼했잖아요?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예요. 아, 우리는 언젠가 큰 부자가 될 거예요."
"그게 원하는 전부요?"
"아니에요, 전부는 아니에요. 해미쉬, 당신이 승리하길 바래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해미쉬는 잠들었지만 마조리는 가만히 누워 작전 계획을 짰다. 열쇠는 싱가폴에 있어. 그 토하라를 설득시켜 우리를 돕도록 해야 해. 뭐, 그분을 부추길 방법이야 무궁무진하지. 글렌티란은 확실한 사업 전망이 보이기 때문에 글렌티란를 간절히 원할 테니, 토하라 상도 값만 맞으면 구미가 당길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를 끌어들인다? 나는 항상 힘과 거래 경험에 의존했지만, 일본어를 할 수 없으니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꼴이야. 해미쉬는 의지가 못 돼. 사업이라는 정글에서 그는 아기 사슴보다 더 연약한 존재야. 일본어를 하는 나의 편이 있어야 해. 그래, 죠가 방법을 마련해 줄 거야. 그녀가 해미쉬의 등에 달라붙었다, 그는 잠결에 한 손을 뒤로 더듬어 그녀의 손을 잡고 남성에 대고 눌렀다.
"그만 주무세요. 난 생각할 게 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토하라 상에게 글렌티란 위스키의 극동 독점 판매권을 주면 어떨까? 아니면 그와 동업 계약을 맺고 증류소의 전 생산품 중 절반을 준다면? 그의 돈으로 배당금을 지급하고 회사를 확장하고..... 그리고 ......
마침내 그녀는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