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보다 깊은 사랑
맷지 스윈델스
도버의 새하얀 절벽은 바로 그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햐얗다기 보다 푸르게 보였다. 존재의 참혹함에서 벗어난 자연의 정원으로 현지인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곳이었다. 컴프리와 야생 백리, 보라색 난초와 실잔대 뿐 아니라 파슬리가 만발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보통 여행객들에게 그 절벽은 백악질 구릉지대의 날카로운 끝자락에 지나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그 능선을 뒤덮었던 관목과 풀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백악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절벽은 늠름하게 제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태풍과 포효하는 바다에 맞서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더 이상은 안돼!' 이 절벽처럼 말 없고 강인한 주민들은 그 인내력에 경외심을 품었다.
여기까지가 자갈 해변에서 성을 바라보던 후리후리한 청년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곳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직관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한동안 해변가를 어슬렁거리던 그는 저 멀리 영국 해협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반짝이는 햇살이 일렁이는 바닷물에 반사되어 빠르게 항해 중인 호버크래프트에 눈부신 아지랑이가 겹쳐졌다. 6월 중순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았고 태양은 중천에 떠 있었지만 묘하게 피를 끓게 만드는 동풍의 기운이 감돌았다.
"여름의 절정에서 겨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네....."
그는 활력이 온몸에서 샘솟듯 영감이 분출할 듯한 예감을 느끼며 속삭였다. 하지만 참담한 공백의 시간만 연장되었고, 그는 수첩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반바지를 벗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몸을 움츠리게 했지만 그는 온몸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무릎 깊이의 바닷물에 배치기로 뛰어든 다음에 방파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빠른 크롤형으로 헤엄치는 짬짬이 물에 둥둥 떠서 휴식하며 해안선을 뒤돌아보았다. 평서처럼 위풍당당한 성과 초라한 마을의 대조에 우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과연 저 마을이 서사시 감일까? 영어 선생인 피트만 씨는 그에게 다음 호 대학잡지에 실을 작품을 기대하고 있었다. 소금기어린 물방울에 눈이 아렸다. 그는 찝찌름한 바닷물을 거푸 들이켜 가며 전속력으로 수영했다. 그때 작은 배 한 척이 눈에 띄었다. 돛이 느슨해진 채 바람에 펄럭이고 파도에 이리저리 떠 밀려다니는 모양새가 승선한 사람이 없는 듯했다. 그는 방향을 바꿔 그쪽으로 향했다. 뱃전을 부여잡고 힘차게 몸을 솟구친 반동력으로 가뿐하게 갑판에 올랐다.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예쁘장한 나체의 소녀가 몸을 쭉 펴고 누워 있다 말고 얼른 수건을 잡고 몸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에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속에서 환희와 욕망이 동시에 솟구쳤다.
"우와!"
그가 말했다.
"미안해요, 저기 뒤쪽에서 보니까 이 배가 표류한 것 같아서요. 저기, 아무도 보이지 않기에....."
"돌아서요, 아니면....."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 말투로 보아하니 그녀는 이 지방 소녀였다. 격렬한 성적인 흥분에 동요한 그는 마지못해 뒤돌아 섰지만 그녀의 영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의 피부는 흠집 하나 없이 매끈했고 황금빛 긴 고수머리는 햇살에 반짝거렸다. 그녀의 큰 눈동자는 바다처럼 초록인 동시에 푸르렀고 종알거리던 그 입술은 키스를 절로 불러들일 만큼 매혹적이었다.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겁니다! 방파제에 너무 가까이 왔어요."
그는 그녀의 씨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었다.
"어휴! 내가 잠들었어요. 일광욕을 하던 중이었거든요. 이제 뒤돌아서도 돼요. 난 옷을 다 입었어요."
그는 반색을 하며 그 말에 따랐지만, 그녀는 닻을 걷어 올리느라 그런 눈치를 채지 못했다.
"풍향이 바뀌었어요."
그녀가 소리 질렀다. 물 빠진 청 반바지와 낡은 회색 저지 차림인 그녀는 여전히 매혹적이었고, 그는 몸을 감출 수 있는 옷가지가 그리웠다. 이제 스스로를 소개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난 로버트 맥라렌이고, 도버대학에 재학 중이에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제 배는 경쾌하게 파도를 갈랐고, 그녀는 미소 지으며 고물에 앉아 키를 잡고 있었다."꽤 좋은 배인데요." 그가 말을 걸었다.
"어떤 기후도 견딜 수 있는 배예요. 오늘처럼 좋은 날씨에는 즐거움을 주지만 악천후 속에서 생명을 의지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죠. 우리 아빠가 이 배를 건조하셨어요. 돌아가기 전에 한바탕 달려 보고 싶으세요?" 그녀가 방파제 쪽을 가리켰다."좋다마다요."
그가 동의했다. 그녀가 배를 조정하는 솜씨는 일류급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그녀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전복될 만큼 돛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거친 해수면에 배의 옆구리를 거의 맞댄 상태에서 숨이 멈출 만큼 빠르게 항해했다. 세찬 마파람에 배가 전복되려는 아찔한 순간, 그들의 배는 집어삼킬 듯 돌진하는 파도 사이를 날쌔게 달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물에 젖고 두 눈은 발갛게 충혈되고 젖은 상의는 풍만한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고 있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용감한 소녀인가. 마침내 그녀는 그에게 겁을 주려던 시도를 포기하고 방향을 돌렸다.
"그래서 당신은 항해하지 않을 때 뭘 하죠?" 정신을 되찾자마자 그가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화가 덜 풀린 눈치였다."이봐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 배가 무인 상태로 방파제 쪽으로 표류하는 줄 알았어요.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옳았겠어요? 당신이 정 원하면 난 그냥 헤엄쳐서 돌아갈게요." "아녜요, 이제 됐어요. 당신을 데려다줄게요. 내가 고마워해야 마땅하겠지만 사실.... 그런 모습을 들킨 게 좀 약이 올랐어요. 음, 일광욕이란 게..... 기회를 잘 잡아야 하잖아요."
그녀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삐진 걸까? "차와 스콘을 들면서 그 지루한 상견례를 하는 게 어때요?"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로버트가 제의했다.
"난 알아야 할 것을 전부 알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에요. 가령, 당신이 언제부터 변기를 사용했는지, 매일 플로스로 이빨을 닦는지, 키스를 몇 번이나 해봤는지 등등 모든 남자들이 알고 싶지만 물어 보길 두려워하는 그런 질문들이죠."
그가 오랫동안 뜸을 들인 다음에 재차 물었다.
"케이크를 좋아해요?"
"쵸코렛 케이크라면."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자 불그스레한 양볼에 보조개가 들어갔고 길고 관능적인 목이 진동을 쳤다. 저지 상의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탓에 풍만한 가슴이 흔들렸다.
"댁은 꽤 괜찮네요. 하지만 내 대답은 '싫어요'예요. 그런 것을 알기 위해 케이크를 살 필요는 없어요. 그냥 가르쳐 드릴게요."
"함께 가겠다는 거죠?"
"물론이에요. 그리고 내 이름은 마조디 하디예요."
그녀는 짤막하게 말했다.
어깨에 책가방을 맨 두 소녀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집으로 향했다. 그 옆에 펼쳐진 바다의 부드러운 동작에 따라 미묘한 광채가 반짝거렸다. 바다는 성숙한 여성처럼 끝없는 가슴 한가운데 불타오르는 정열을 감추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 바다와 닮은 소녀들이 재잘거리며 황혼 속을 걷는 모습은 마치 천상의 것 같았다. 친구이자 이웃인 바바라는 눈치 없이 마조리의 변변찮은 옷가지에 대한 화제를 계속 입에 올렸다. 마조리에게는 가족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민감한 그 화제를.
"자, 어서 털어놔. 너는 오늘 뭘 입고 합창 연습을 갈 거니?"
마조리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교복을 입고 가는 줄 알았는데."
"아냐! 선생님 말씀이 수수한 복장을 하래. 청결한 흰 블라우스를 받쳐입은 얌전한 정장 차림 말이야."
마조리는 친구의 말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감색 교복 코트는 인물을 몇 곱절 볼품 없고 뚱뚱해 보이게 했지만, 다들 교복이란게 워낙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 외에 야광 노랑색 방수 코트와 3 년 전에 구입한 야한 오랜지색 코트가 각각 한 벌씩 있었다. 하지만 그 코트는 길이도 짧고 품도 작아졌기 때문에 단추를 전부 잠그면 아예 숨쉬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엄마가 두 벌뿐인 치마와 단벌 바지의 단을 덧댔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바지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깡총했다. 게다가 아무리 적게 먹어도 가슴은 왜 자꾸 부풀기만 하는지. 그녀에게는 점잖은 블라우스는 한 장도 없는 실정이었다. 바바라가 옆에서 계속 수다를 떨었지만 그 말이 마조리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한 손이 그녀의 팔 위에 살포시 얹혀졌다.
"고양이가 네 혀를 잘라먹어 버렸니?"
친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미안해. 네가 무슨 말을 했더라? 난 깜박 다른 생각에 빠졌어."
"전에 만났던 그 대학생 생각을 했구나?"
"어머! 아예 그를 잊고 있었는걸."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의 모습이 좀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파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결이 굵고 곱슬거리던 머리칼과 깊고 맑은 암갈색의 그 눈동자.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에 스치는 바람 같은 표정 변화는 그의 성질이 만만치 않은 데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정열적임을 말해 줬다. 가무잡잡한 구릿빛 피부. 키가 크고 강한데다 내적인 차분함까지 갖췄다. 그래, 그는 집시여야 마땅해. 아니면 스페인의 혈통이 흐르거나. 하지만 그 멋진 목소리에는 스코틀랜드 억양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함께 차를 마셨던 그 짧은 한 시간 동안 그는 그녀를 계속 웃기면서 그녀의 인적사항을 모두 이끌어냈지만,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의 영어에 대한 애착뿐이었다. 그는 전력을 기울여 옥스퍼드로 진학하여 영어를 공부하고 시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시를 써서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글쎄? 한평생 죽도록 가르쳐야 나의 뮤즈를 먹여 살릴 수 있을 거야. 워낙 뮤즈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요정들이거든."
그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로버트가 카페 밖에서 명랑하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을 때, 그녀는 마음 한 귀퉁이를 그에게 남겨두고 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그가 꼭 그래야 할 이유도 없지 뭐. 그날 이후 그녀는 밤마다 그의 꿈을 꿨지만 어젯밤은 특히 생생했다. 그가 나체로 수영해 와서 일광욕을 하고 있던 그녀의 보트로 쓱 올라왔다. 두 사람은 갓 태어난 아기들 마냥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그다음에 얼굴 붉힐 만한 일이 벌어졌다.
"어머머! 네 뺨이 발개졌어. 왜 그러니?"
"그냥 좀 더워서 그래. 햇살이 뜨겁네."
"흥! 알 만하다. 얘, 해는 이미 지평선으로 넘어갔어. 그 남자 생각에 온몸이 달아오른 거지?"
바바라는 깔깔거리며 웃은 다음 마조리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소녀들은 마조리의 집에 도착했다. 마조리는 친구에게 재빨리 작별인사를 건네며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엄마."
지하 부엌에서 그녀의 인사를 받아 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이 옷 이야기를 꺼낼 좋은 기회야. 그녀는 계단 주변에서 서성거리다가 결국 마음을 굳혔다. 최근에 뭘 해달라고 졸라 본 적도 없다. 요즘 부쩍 아빠에게 걱정거리가 많은 눈치였지만 지금쯤 차를 마시고 쓴 맥주 한잔으로 빵과 청어 맛을 가셔냈을 테니까 기분이 좋으실 거야. 게다가 오늘은 수요일, 좋은 날이었다. 아빠의 생활은 축구내기를 축으로 돌아갔다. 토요일 오후에 벌어지는 시합은 아빠의 기분을 최저로 떨어뜨렸다. 번번히 내기에서 졌기 때문이다. 주말과 월요일에는 바닥세를 기었지만, 화요일에 희망이 다시 솟아났고 수요일은 낙천적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다가 목요일에 기대감이 고조되었고, 금요일에 절정에 이른 기분이 토요일 정오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따뜻한 오후였다. 아빠와 엄마는 조금 있다가 바닷가를 한바퀴 산책하고 선술집에서 목을 축이시겠지.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간 그녀는 짐작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두 분은 마침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 시간에 늦었구나."
엄마가 말했다.
"네가 먹을 것을 남겨 뒀다. 저기 보자기로 덮어놨어."
"고마워요. 그런데 엄마, 난 도버대학에 가야 해요. 우리가 거기 학생들과 헨델의 메시아를 노래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내일 저녁부터 얼마 동안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될 거예요."
엄마가 그녀의 어조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래서?"
"엄마, 새 코트를 사주실 수 없어요? 내 것은 품이 너무 꼭 껴요. 겨드랑이 아래가 아플 지경이라구요. 그리고 길이도 너무 짧아요."
"바보 같은 소리! 물과 기름을 섞는 꼴이야. 그 대학생 나부랑이들을 쳐다보지도 말아라. 얘야, 부자는 부자들끼리 결혼하는 법이야."
"어휴, 엄마는! 난 합창 연습을 하러 간다는데 엄마는 왜 결혼 운운하세요?"
그녀가 깔깔거렸다.
"지금 당장은 새 코트를 사줄 형편이 못돼. 불경기의 조짐 덕분에 화물 선적이 큰 타격을 입었거든. 네 아빠가 벌써 여러 주일 동안 과외 수당을 벌지 못하셨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단다. 하지만 생각해 보렴, 이제 몇 주만 있으면 네가 스스로 돈을 벌게 되잖니. 넌 어엿하게 자립한 아가씨가 될 거야. 나 같으면, 내가 내 주머니를 꿰어찰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겠다."
마조리는 솟구치는 공포를 꾹 삼키려 했다. 엄마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주말 아르바이트? 두분 모두 그녀가 교사가 되려는 것을 아실 텐데. 항상 엄마는 모든 사람을 어물쩡 속여넘겼고,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한 것인 양 왜곡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아빠는 신문을 읽는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모녀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아빠, 용돈 좀 주실 수 없으세요?"
마조리가 아버지에게 호소했다.
"쟤가 도버대학의 합창단에서 노래를 하게 된대요."
엄마는 아빠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아빠는 거북한 눈치였다.
"네 교복 코트는 아무 문제도 없어. 학교에 입고 가기 적당한 옷은 고관대작과 만나는 자리에도 통해."
"하지만 밤에는 사복을 입어요."
그녀가 말을 받았다.
"그럼, 네 오랜지색 코트를 입으렴."
엄마가 제안했다.
"그건 정말 예쁘잖니."
"너무 짧고 꽉 낀다니까요."
마조리가 받아쳤다.
"그건 그래. 우스꽝스러워 보여."
아빠가 동의했다.
"내 치마랑 바지도 전부 짧아요. 난 도대체 뭘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조리는 드디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해줬잖니. 교복을 입으라니까."
아빠가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안될 말이에요."
이번에는 엄마가 나섰다.
"다른 아이들이 다 사복을 입는데 쟤 혼자 교복을 입을 수는 없어요. 얘, 코트가 좀 짧으면 어떠니? 짧은 게 유행이잖아."
"그렇게 짧은 게 아니잖아."
아빠가 투덜거렸다. 마조리는 의자를 제치고 벌떡 일어나 부엌 밖으로 뛰쳐나갔다. 부모님을 설득할 만한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요즘 쟤는 점점 더 다루기 힘들어지고 있어."
그녀의 귓전에 아빠의 불평이 들렸다.
"아, 별거 아녜요. 크느라고 그러는 거예요. 언젠가 쟤도 우리 품에서 날아가게 될 거예요."
마조리는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사랑에 굶주린 심정으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마조리의 다락방은 두 개의 들창으로 스며든 노을빛으로 가득 찼다. 전형적인 십대의 침실답게 우상의 포스터가 사방 벽과 반쯤 경사진 천장에 빠짐없이 붙어 있었다. 마크 볼란, 로드 스튜어트, 도니 오스몬드, 엘비스 프레슬리가 공포에 질린 베트남 모자와 시위하는 미국 인디언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중고 서점에서 하나둘 주워 모은 예술과 음악, 고전과 시, 패션에 대한 책들과 라디오 한 대가 세간의 전부였다. 방바닥에는 쿠션들이 뒹굴었다. 마조리는 창문 아래의 바닥에 앉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온 패션 잡지를 펼쳤다. 여기에 뭔가 응용할 만한 게 있을 거야. 하지만 잡지 모델들이 그녀의 기를 죽여 놨다. 흠 하나 없이 매끄럽고 긴 다리, 완벽한 얼굴,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저 표정들. 거울을 들여다본 그녀는 죽고 싶었다. 조금만 더 예뻤다면..... 하지만 그녀처럼 길고 야성적인 스트레이트의 머리칼을 가진 모델은 없잖아. 그 부분은 걱정할 거리가 못돼. 화장은 갈색 아이라이너아 검붉은 립스틱으로 때우기로 하자. 그런데, 옷은 어쩌지? 그녀는 잡지 속에 화려한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처럼 한 글자도 놓치지 않았다. '70년대는 패션에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환상적인 패션이 퇴조하는 경향이고, 세련된 현대 여성이라면 거친 경제 현실에 부합해야 할 것이다.'
"그야 주지의 사실이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그녀가 응용할 만한 소재가 하나도 없었다. 그때, 팔짱을 끼고 즐겁게 거리를 뛰어 다니는 두 소녀의 사진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들은 '큐롯'이라는 무릎 길이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진을 열심히 연구한 다음 뛰어나가 엄마의 바느질 가위를 가져왔다. 단을 얼마나 많이 잘라야 할까? 꽤 많이 잘라야겠는걸. 싹둑싹둑 가이 소리에 맞춰 그녀의 심장이 방망이질을 쳤다. 바지를 망쳐놓았다간 아빠에게 혼이 날 텐데. 그녀가 바지 단을 자르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엄마가 불렀다.
"얘, 우리는 밖에 나갔다 올게."
아빠 엄마가 선술집에서 뿌리는 돈으로 나의 새 옷을 다섯 벌쯤 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소용없는 일로 마음을 끓여 봤자 헛수고였다. 그녀는 부엌으로 내려가 큐롯을 다림질한 다음에 시험 삼아 몸에 대봤다. 와! 괜찮은데. 이제 블라우스 차례였다. 대부분의 모델들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허리춤까지 풀어 놓은 스타일이 잘 어울렸다. 하긴, 다들 모델들이 훌러덩 벗기를 기대하는 데다 그들에게는 앙상한 뼈밖에 보여줄 게 없으니. 그래,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지 않으면 그게 작다는 사실이 표나지 않을 거야. 그녀의 생각에 잠긴 눈이 검정색 학교 수영복에 닿았다. 몇 벌의 옷을 주워 모아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온 그녀는 엄마의 큰 거울 앞에서 옷을 벗었다. 그녀는 맨 몸을 거울에 비쳐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리고 진지하게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붉혔다. 전보다 가슴이 더 커졌네. 젖판의 색도 짙어지고. 이게 나일까? 꼭..... 처음 보는 사람 같아. 그녀는 생각보단 훨씬 늘씬했다. 한참 후에 그녀가 손을 들어 가슴을 움켜잡자 부드러운 상아빛 피부 아래로 가슴이 단단해졌다. 로버트의 손이었다면.....? 망측한 생각에 그녀의 얼굴이 더 붉어졌고 유두가 커지고 단단해짐과 동시에 허벅지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왔다.
"아, 로버트."
그녀가 속삭였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은 이제 됐어."
그녀는 소리 내서 말했다. 얼른 수영복을 입은 그녀는 큐롯을 입고 벨트를 맨 다음 교복 셔츠를 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 슬쩍 위에 걸쳤다. 음, 봐줄 만 한걸. 하지만 신발은 어쩌지? 그녀는 한 번에 두 계단씩 위층으로 뛰어올라 가서 하나밖에 없는 하이힐을 가지고 다시 내려왔다. 사촌의 결혼식때 얻어 신은 하얀 색 신발이었지만 구두 염색약을 칠하면 돼. 이제 패션 잡지에서 빠져나온 듯한 의상을 갖게 될 거야. 오후는 금방 흘러갔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다 마쳤지만,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귀걸이! 동급생의 절반이 귀를 뚫었다. 바바라도 생일 날 귀를 뚫었고 금으로 된 링 귀걸이를 선물로 받자 마조리에게 헌 것을 줬다. 마조리는 솜을 깐 성냥갑 속에 보관했던 귀걸이를 꺼내 귀에 댔다. 그렇게 아프지 않겠지? 그녀는 커다란 안전핀을 찾아 주변을 뒤지는 동안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을 즈음 마음의 준비를 끝낸 그녀가 과감하게 안전핀으로 귀를 찔렀다. 아얏!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핀을 살 속에 더 깊이 찔러 넣자, 아픔이 참을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녀는 서둘러 얼음을 가지러 내려갔다. 얼음을 귓볼에 대고 돌아온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마조리 하디, 너 패션모델같이 보이고 싶니, 아니면 어리숙한 시골뜨기처럼 보이고 싶니? 그건 전부 귀에 달렸다구."
그녀는 안전핀을 소독 병에 담갔다가 다시 일에 착수했다. 10분 후,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렸고 눈에는 눈물이 맺힌 데다 얼굴은 절벽처럼 새하얗게 질렸지만 귀걸이는 단단하게 제자리에 달려 있었다.
줄 사다리가 있으면 원이 없겠어. 마조리는 나선형의 계단 참에 서서 용기를 불러 모았다. 모임에 늦겠다는 공포에 몰려서야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이힐 소리가 망치질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또각, 또각, 또각! 제기랄! 그녀가 허리를 숙여 구두를 벗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빠가 신문을 한 손에 쥐고 뛰어 나왔다. 그는 한참 보고만 있다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여보.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얘가 저렇게 차려입고 어디를 갈 생각인 거야?"
엄마는 폭탄을 맞은 사람 같았다.
"얘, 너무 심하구나."
"괜찮아요, 정말이라구요. 난 잡지를 모방한 거예요."
엄마는 검정색 바지가 무릎길이로 짧아졌음을 알아차리고 헐떡거렸다.
"너에게 한마디 해야겠구나....."
하지만 엄마는 아빠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고, 마조리는 속으로 그 점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 립스틱은 어디서 났니?"
"돈을 모아서 샀어요."
"너에게 잘 어울리는 색이구나. 하지만 머리를 왜 그렇게 한 쪽으로 모아 늘어뜨렸니? 뭘 숨기려는 것처럼 보이잖아."
엄마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마조리가 움찔 뒤로 물러서 난간에 몸을 기대는 바람에 머리칼이 뒤로 넘어갔다.
"하느님 맙소사! 너 귀에 무슨 짓을 한 거냐?"
"별거 아니에요." 마조리가 뚱하니 대답했다.
"이 바보 같으니! 심하게 감염되었잖니. 굉장히 아프겠는걸. 내가 치료를 해줄 테니 잠깐 기다리렴. 나는 네가 아주 근사해 보인다고 생각해."
마조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이런 다정함이 아니라 검열을 받게 될 줄 알았다. 잠시 후, 그녀는 무지막지하게 아픈 귓볼 치료와 아빠의 엄격한 훈계와 함께 엄마의 엄지손가락에 눈 화장이 다 지워지고 화장지로 입술을 닦아 낸 다음에야 요란한 또각 소리와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는 거기에 없었다. 대학 강당 주변을 재빨리 훑어본 후에 찾아온 실망감에 그녀는 배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대학 합창단 지휘자가 그들을 정렬시켰다. 여자는 오른쪽, 남자는 왼쪽, 독창자는 맨 앞으로. 마조리는 그중 한 명이었다. 합창단 지휘자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합창을 준비했다. 그들이 노래를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코 다칠 걸. 합창단의 절반은 웨일즈 출신이었다. 그들의 선조는 웨일즈 광산이 폐쇄되기 시작했을 때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잠시 후 백여 명의 애띤 목소리가 낡은 건물 안에 울려 퍼지자, 지휘자는 충격과 동시에 환희에 젖었다. 마조리의 실망감과 불안함은 씻은 듯 사라졌다. 노래는 그녀의 몇 가지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이제 그녀가 독창할 차례가 되었다.
'저기 황야를 지키는 양치기들은 밤의 외투가 드리워도 제자리를 지키네' 그녀는 독창 부분이 끝날 즈음 자신이 멋들어지게 해냈음을 알았다. 그녀의 맑은 목소리는 아빠에게 물려받았다고 엄마가 노상 말씀했었다. 아빠는 술에 취했을 때만 노래를 불렀지만, 그 맑고 청아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뽑아내는 '대니 보이'에 듣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감동하곤 했다. 지휘자는 대학 합창단의 실력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수준 이하였다. 뭐, 웨일즈 광부들이 자식을 도버대학에 보내진 않잖아? 지휘자에게는 정말 안될 일이야. 그녀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합창단원은 힘차게 마지막 부분을 마무리했다.
'그의 임무는 쉽고 멍에는 가벼워라' 곧 그들은 수다를 떨며 무대에서 내려와 우왕좌왕하며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한숨 돌릴만한 장소를 물색하러 갔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 그녀는 안전핀으로 용을 썼던 노력을 떠올리며 결론을 내렸다.
"다시 만났네."
그의 목소리야!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돌렸다. 거기에 그가 있었다. 6피트 2인치의 훤칠한 그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이군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지만 방어벽이 사라진 그녀의 눈빛은 그 이상의 말을 전했다. 그녀는 얼굴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여기서 나가자."
그가 속삭였다.
"내가 차를 책임질게. 난 오랫동안 기다렸다구. 어때, 좋지? 여기에는 곰팡내 나는 비스킷과 희여멀건한 차가 전부야."
그녀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할 말이 많지 않았다. 유원지에서 놀이기구를 탄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돌았고 숨이 가빴으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순순히 그를 다라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자동차 검정 가죽 좌석에 앉았을 때야, 그녀는 바바라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집에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아빠에게 혼날 거야."
그녀는 겨우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네가 합창단원이길 바랬어."
그의 미소에 그녀의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곧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난 강단 구석에서 노래를 들었는데,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난 명화나 티에스 엘리옷의 시를 접하거나 멋진 노을을 보면 몸에서 소름이 돋아. 명품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처럼 말야. 내 팔을 만져 봐."
그녀는 시험 삼아 한 손가락으로 그의 피부를 살짝 만지고 그의 팔에 난 검은 털의 촉감에 전율했다.
"이건 너와 네 목소리 때문이야. 네 노래는 훌륭했고 넌 너무 아름다워."
"아부하지 마."
그녀는 어색해하며 대답했다.
"넌 모르니?"
"뭘?"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의
식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현실은 그의 손가락의 감촉이었고 그 느낌은 여름 태풍의 요란한 천둥 번개처럼 그녀의 속을 뒤흔들어 놨다. 반쯤 정신이 나간 그녀는 그를 따라 강변도로 옆에 위치한 낯선 펍으로 들어갔다. 호샌디를 마셨고 그가 독특한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로비 번즈의 시를 들으며 사랑에 빠졌다.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일요일에 시간이 있니? 교외로 나가면 어떨까? 넌 승마를 하니?"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가르쳐 줄까?"
"좋아."
그녀는 황홀하게 중얼거렸다.
"좋아. 내가 11시에 데리러 올게."
"나중에 봐요."
그녀는 대책 없이 빠져들었다. 마음속은 온통 옷 걱정으로 가득 찼다. 가진 것을 이미 오늘 밤에 다 선보였잖아. 왕자와 그의 마차는 떨리는 그녀를 뒤로하고 떠나 버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쉬움으로 서성거리다가 결국 집안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그녀를 흘겨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이것아!"
일요일 아침 마조리의 집으로 향하는 로버트의 마음속에서 상반된 갈등이 충돌했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결국 그냥 밀고 나갔다. 그를 잡아끄는 것은 마조리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좀 더 깊은 매력이었다. 그 속에 그가 원하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가졌지만 그에게는 부족한 그 무엇이. 하지만 그 욕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용기에 대해 생각했다. 갑작스런 광풍 속에서 그녀가 그 작은 보트를 얼마나 잘 다뤘던가! 그녀는 그보다 더한 것에도 맞서 싸우고 미소로 이겨내리라. 그녀는 도버 절벽에 핀 푸른 실잔대처럼 차가운 바람과 눈과 얼음을 견디고, 짓밟힘에도 굴하지 않으며, 박약한 토양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 연약한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렸다. 그녀도 영국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결과 태어난 탄력적이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는 그녀의 도덕적인 힘과 선의를 감지했다. 그녀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바대로 행동할 수 있어요. 그리고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단 한순간도. 로버트는 그에게 이런 힘이 결여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돈과 권력이 결합된 상류 세계에서 성장해 왔다. 그의 개성은 그녀보다 훨씬 약했고, 그녀가 별 생각 없이 웃어넘길 고난을 견딜 수 없었다. 마조리 이 세상과 유머 감각과 뿌리에서 생명력을 취했고, 그는 그녀의 강함과 삶에 대한 싱싱한 정열을 열렬히 회구했다. 그녀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가슴에서 공포감이 분출했다. 하이 다이빙이나 고공 낙하, 또는 스쿠버 다이빙을 하려고 보트에서 깊은 심해로 뛰어들기 일보 직전이라고나 할까. 미지의 세계로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는 심정이었다. 그는 탈출하고픈 기분을 못 이겨 차의 속력을 높였다. 지금이라도 상류 사회 친구들과 특권층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한 남자가 되기 위해선 마조리와 그녀의 세상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잠시 후 그는 속력을 늦추고 유턴을 한 다음 모퉁이에 차를 세웠다. 열두어 채 되는 이웃의 절반 이상이 그를 내다봤고 어디선가 본듯한 소녀가 '안녕하세요'하고 외쳤다. 화창한 아침이었고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로버트는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알록달록한 노움 상이 거기에 없는 양 무시하고 노크를 했다. 그다음에 망사 커튼과 딸기 무늬 투성이의 커다란 초록색 깔개, 복도의 호두나무 선반과 거기에 얹혀진 싸구려 장식물이며 조화까지 전부 없는 척해야만 했다. 맙소사! 이렇게 볼썽사나울 수가. 마조리와 조금 닮은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청년이 로버트군요. 나는 마조리의 엄마예요. 들어와요. 걔는 곧 내려올 거예요. 자, 안으로 들어와요, 로버트."
그녀는 꽤 호리호리한 체구였고 창백한 얼굴에 주름이 아로새겨졌다. 검은 눈썹과 푸른 눈동자.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브 스타일로 짧게 다듬고 작은 입술이 묘하게 젊어 보이지만 그녀의 미소는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그녀는 그를 데리고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듯한 작은 거실을 가로질러 뒷정원으로 갔다. 거기에 그녀의 남편이 멜빵 바지와 조끼 차림으로 단풍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손질하던 그는 아내가 로버트에게 남편을 소개하는 말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로버트는 그 남자의 낭패스런 기분과 아울러 불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키가 작고 땅딸막한 데다 주름이 깊이 파이고 풍파에 시달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생님. 저는 로버트 맥라렌이라고 하는데, 따님을 교외 드라이브에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승마를 할 예정입니다. 참 좋은 날씨지요?"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하디씨는 인사말로 무겁게 입을 뗀 다음에 여전히 같은 톤으로 말을 이었다.
"내 보기에, 자네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 내 딸은 엄하게 자라났고, 전에 사내 녀석들과 어울려서 외출해 본 적이 없어. 그 애는 착한 딸이니, 자네가 걔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면 내 손에 쓴 맛을 보게 될 걸세, 로버트."
갑자기 고개를 쳐든 그의 반짝이는 초록 눈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 내용은 극도의 악의에 차 있었다. 맙소사! 정말 끔찍하군! 그의 서투른 경고는 아까 봤던 싸구려 장식물이나 조화의 수준과 일치했다.
"선생님,"
로버트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는 따님의 의사를 최대한도로 존중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화젯거리를 찾아 절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뒷문 옆 궤짝 속에 있는 커다란 갈색 토끼를 발견했다. 토실토실하게 살찐 그놈은 귀를 앞으로 축 늘어뜨리고 코를 쫑긋거리며 상냥한 눈으로 그들을 봤다. 로버트가 녀석의 털이 북식북실한 뺨을 긁어 주었다.
"좋은 토끼군요."
그가 말을 붙였다.
"놈의 이름은 프랭크라네. 플레미시 자이언트 종이야. 다른 종보다 뼈에 살점이 많다네. 다음 주 일요일 정찬 거리로 놈을 살찌우고 있어. 아내의 토끼 파이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거든."
"아!"
로버트는 가까운 의자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떨군 하디 씨는 더 열심히 구두를 닦으며 날씨 이야기며, 이맘 때 농작물과 장미가 잘 자란다는 둥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그의 억양에 여러 방언이 뒤섞여 있었다. 조심스러운 말 한마디 한마디에 희미한 아일랜드 쪽 여운이 묻어났지만 '흐' 발음은 스코틀랜드식이었다. 그때 마조리가 달려왔다. 발그레한 양 뺨, 쏙 파인 보조개, 반짝이는 눈. 반바지와 함께 눈 색깔에 맞춘 터키색 저지 상의와 잘 어울리는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그녀의 밤색 머리카락이 빛을 발했고 콧잔등에 주근깨가 몇 개 보였다.
"새 옷이구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냐, 엄마 거야."
"그 주근깨도?"
그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저번에 봤을 때는 없었는데."
"기억이나 하는 것처럼 말하네!"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텃밭을 가꿨어. 우리는 거기에 온갖 것을 다 기르거든. 보고싶니? 그럼, 빨리 가자. 더 이상 시간을 놓치지 말자구!“
집을 벗어나자, 로버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따뜻하고 나른한 날이었다. 차창 밖으로 들판과 작은 잡목 숲과 채석장이 지나갔다. 초원에는 양귀비와 보라색 디기탈리스가 만발했고, 금잔화와 민들레가 점점이 색을 더 했다. 그리고 일렬로 쫙 늘어선 관목 울타리가 산사 나무와 더불어 싱그럽게 빛났다.
"너는 곧 졸업하겠구나."
그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응. 두렵기도 해."
"그다음에 뭘 할 거니?"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불안을 알아차렸다.
"브리스톨 대학 입학시험을 봤는데 잘 본 것 같아. 문제는, 엄마가 나에게 곧 밥벌이를 해야 한다고 암시하는데 있어. 난 그 이유를 모르겠어. 우리는 작년에 이야기를 다 했거든. 일단 시험 결과를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자, 네 이야기를 해봐."
그녀가 서둘러 말을 잇자, 그는 그녀가 화제를 바꾸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너는 너희 집에 대해서 한번도 말하지 않았잖아. 왜 하필이면 도버대학을 선택했니? 시인 지망생에게 적당한 곳이어서?"
그가 웃었다.
"그런 것 같아. 나는 셋째 아들이야. 장남은 가업을 잇고, 둘째는 법조계에 입문해. 셋째, 즉 나는 해군에 가야 마땅하고. 그게 우리집 전통이야. 하지만 나는 해군에 입대하지 않을 거야. 난 시를 쓰고 싶거든. 전에는 그 점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군이 좋은 방안처럼 보였어. 하지만 마음이 변한거야. 우리 모두 그렇듯이 말야."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너는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나는 네가 지금 이대로 영원히 있어 주길 바래."
입 밖으로 꺼내기 쑥스러운 말이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한 손에 소원을 빌고 다른 손에 침을 뱉은 다음에 어느 손이 위로 오는지를 봐. 우리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녀의 말에 유감스러운 그녀의 가족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솟구치는 혐오감에 가책을 느끼며 그녀의 손을 슬며시 놨다. 그녀가 겉보기보다 부모님을 더 많이 닮았을까? 갑자기 그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마조리."
오랜 침묵 후에 그가 말을 꺼냈다.
"넌 애완동물을 기르는 게 걱정되지 않니? 그러니까, 그 불쌍한 프랭크처럼 잘 따르고 친근한 동물이 나중에 잡아먹히잖아?"
"아!"
그녀의 온몸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는 그녀의 가슴 윗부분의 흰 살결이 장밋빛으로 붉어지는 모습에 하마터면 차선에서 벗어날 뻔했다.
"저기, 나는 될 수 있으면 토끼들을 보지 않아."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어렸을 때, 내가 특별히 귀여워했던 토끼가 한 마리 있었어. 한쪽 눈 주변만 새까만 점이 있던 토끼였기 때문에 '넬슨'이라고 불렀었어. 그런데 어느 날 오후 학교를 갔다 왔더니 넬슨이 배가 갈린 채 뒷문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거야. 그 이후 나는 녀석들을 쳐다보지도 않아. 그 것만이 내가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이니까."
로버트의 일부는 노래를 잘 부르고, 한때 토끼를 사랑했던 이 예쁜 소녀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또 다른 부분은 여전히 안달을 부리며 확신을 구했다.
"넌 토끼고기를 먹었니? 네 토끼 말야?"
"로버트, 이제 그만 둬."
그녀가 벌컥 화를 내며 항의했다.
"뭘 하자는 거니? 날 취조하지 말란 말야. 이건 공평치 못해. 넌 우리 부모님에게도 공평치 못한 짓을 저지르고 있어. 아빠는 텃밭에서 토끼를 사육해 오셨어.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취사용이야. 양배추 양파 양상추 등 모두 말야. 가계에 큰 보탬이 되거든.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부자가 아냐. 아빠는 토끼를 길러서 한 번에 한 마리씩 살찌우셨어."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게 뭐가 잘못됐니? 넌 채식주의자가 아니잖아. 내가 장담컨대, 너는 사냥을 나가고 사냥개를 풀어 그 불쌍한 여우들을 갈가리 찢어 놓게 만들 걸, 안 그래?"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의 뺨이 붉어졌다. 입이 열 개라고 무슨 말을 하리오?
"하지만 네 질문에 대한 답을 할게, 로버트. 아니, 난 먹지 않았어.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거든. 당시 아빠는 그게 엄마가 만든 파이 중에서 최고라고 맹세까지 했지만 나는 먹을 수가 없었어. 넌 이걸 모르지? 나는 아빠보다 엄마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해. 엄마가 토끼 요리를 너무 잘해서 아빠에게 넬슨을 잡게 하셨으니까. 엄마는 다 알고 있었지만 아빠는 아무것도 몰랐으니, 아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어."
"넌 그들과 천양지차야."
그는 그녀 어머니의 배반에 깊은 유감을 느끼며 단언했다.
"그게 무슨 뜻이니? 네가 뭐길래, 그 허풍스런 태도와 속물스런 억양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거야? 우리 부모님을 깔보지마, 로버트. 그렇지 않으면 나를 보는 게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아."
"미안해."
그가 서먹서먹하게 사과했다. 그는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그녀의 끔찍한 가족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들은 한동안 침묵 속에서 드라이브를 했고, 그는 화해의 몸짓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가 호되게 거절당했다. 그는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고 자동차를 도로 가장자리 풀숲에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적대감 어린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꾹 다물린 그녀의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아버지를 꼭 좋아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니?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네 신경에 거슬린다는 거야? 나는 너를 굉장히 많이 좋아해."
그는 마조리를 끌어당겼고 그녀의 몸에서 방출된 열기에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솟구치는 정열이 그의 사고 흐름을 단절시켰다. 머리가 몽롱해서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직 불이 당겨진 정열만이 고통스럽게 인식되었다. 그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입술은 그녀의 것과 하나가 되고픈 묘한 갈망에 타올랐다. 그는 그녀의 턱을 위로 들어 올렸고 그의 입술에 녹아드는 그녀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는 진저리를 치며 정열의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아,"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난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차에서 내려서 좀 걷도록 하자."
그녀는 모호하게 자동차 문에 기대 서 있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풀이 우거진 방둑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도랑을 따라 걸었다. 둘다 성적인 흥분과 좌절감으로 쑥스러웠고 다리는 뻣뻣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디 숨을 데가 없을까? 저기 관목 울타리 사이에 움푹 파인 곳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화사한 유채꽃이 무리지어 핀 들판을 가로질렀다. 그는 코트를 벗어 풀 위에 깔았다.
"여기에 앉자."
그녀는 마지 못 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승마를 할 줄 알았는데. 오늘은 못 하겠지?"
그녀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곧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난 지금 당장 운전할 수 없어."
그는 어렵게 설명을 시도했다.
"이건 산불과도 같아. 한번 불꽃이 일면 금방 자제력의 범위를 벗어나거든. 너도 나처럼 느꼈니?"
"난 너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그래. 매일 밤 네 꿈을 꾸는걸."
마조리는 신뢰감이 담뿍 담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로버트는 용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렇게 사람을 믿으려면 배짱이 두둑해야 한다.
"나도 그래."
그가 동의했다.
"하지만 아까 일로 돌아가자. 아까 그 키스는 대단했었어. 두렵기도 하고..... 너 누구랑 자본적 있니?"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너와 무슨 짓 하리라고 생각하지 마. 난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별나게 고풍스런 반응을 보였다.
"나는 널 유혹하려고 밖으로 데리고 온게 아냐. 그 생각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그가 장난삼아 그녀를 몸위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그녀의 맨 가슴이 살짝 드러났다. 그는 그녀의 피부에 입술을 대고 혀로 간지럽혔다. 그녀가 반항하리란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오히려 끼득끼득 웃으며 몸을 붙여 왔다. 로버트는 그녀보다 훨씬 나이를 많이 먹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러니 그가 돌봐 줘야 한다. 그는 격렬한 고통과 함께 그녀를 떼어놓았다.
"내 기분이 약간 진정되었어. 이제 가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를 끌어당기려고 했다.
"어서 가자니까. 넌 승마를 배우고 싶지? 하지만 내가 너에게 다시 키스하면, 우리는 거기에 가지 못하게 될 거야."
그는 항상 여자들이 데이트에서 내숭을 피운다고 상상해 왔다. 그에게는 데이트 경험이 많지 않았고, 누이나 여동생도 없었다. 하지만 마조리가 대단하다는 것을 금방 발견했다. 그녀는 별 어려움 없이 승마의 기초를 터득했고, 안장에서 떨어져서 연못에 처박혔을 때에도 방긋 웃으며 다시 말잔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젖은 머리칼을 햇빛에 말리고 그에게 저지 상의를 빌려 입었다. 그녀는 즐거운 상대였다.
토요일 밤인데 로브가 늦었다. 함께 춤을 추러 가기로 했는데, 마조리는 바바라에게 빌린 치마가 너무 짧고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난 30분 동안 복도를 오락가락하다가 아버지에게 불려갔다. 아빠는 사랑에 빠진 청중에게 헛고생을 하시는 거야. 그녀는 쓰게 생각했다. 그녀에게 스무마디 이상 말하는 법이 없던 아빠가 다른 때와 달리 오늘 밤에는 할 말이 많으셨다. 이번 주초에 아빠는 오랫동안 염려해 왔던 나쁜 통지를 받았다. 조선소가 대규모의 인원 감축을 감행했고, 그중 아빠도 포함되었다. 다른 일자리를 갖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지라 이제 쥐꼬리만한 연금에 의지하는 조기 은퇴 생활을 눈앞에 둔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아빠의 모든 불만과 비통함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넌 그 로버트란 녀석을 지난 3주일 동안 하루도 걸르지 않고 밤마다 만나 왔어."
아빠가 다시 되풀이했다.
"내 딸아, 넌 문제를 불러들이고 있어. 부자는 부자와 결혼한다고 했잖니. 보나마나 그 녀석은 자기 계급의 부유한 처녀와 결혼을 할 테고, 넌 가슴만 미어지게 될 걸. 내가 녀석의 뒤를 조사해 봤다. 명망높고 작위를 가진 스코틀랜드 집안 출신이더라. 가령 그가 너와 결혼할 생각을 한다 해도, 그의 가족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지 않으려고 할 거야. 로버트가 한 번이라도 결혼 말을 꺼낸 적이 있더냐?"
"왜 그가 그래야 하지요? 우리는 좋은 친구 사이에요."
그녀는 오늘 밤에 벌써 여러 차례 같은 대답을 했다.
"지금은 네 말을 믿겠다만, 그게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겠니? 바보짓은 그만해라. 이제 그와의 관계를 정리해."
눈물 섞인 커다란 딸꾹질이 그녀가 계획했던 반응을 망쳐놓았다."로버트와의 우정은 내 인생에서 오직 하나뿐인 고귀한 거예요."
"네 마음대로 해봐. 하지만 녀석에게 차이고 난 다음에 나에게 울면서 달려오지나 말아라. 넌 주제를 파악해야 해."
아빠가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만두세요, 아빠."
그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빠의 그 시시한 계급 차이에 대한 말은 너무 침통한 나머지 아빠가 내일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실 수가 있을지 의문인걸요."
그 특별했던 첫 번째 일요일 이후 그들이 매일 밤마다 데이트를 해온 것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큰 즐거움을 맛보았고, 굳게 정열을 자제해 왔다.
초기에 영화와 콘서트를 다 섭렵했고 매일 값비싼 요리로 배를 채웠다. 그러다가 방파제를 따라 산책하거나, 해변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편이 더 낫다고 합의하는데 이르렀다. 하지만 토요일은 춤추는 밤으로 결정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밤은 그들이 함께 지내는 마지막 토요일 밤이 될 것이다. 이번 주로 도버대학의 학기가 끝났으므로, 그런데 그는 어디에 있을까?
한 시간 후 그가 차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들었다. 자정쯤 되자 그 생각은 강박관념이 되었다. 병원에 전화를 해야 할까? 새벽 두 시가 되자 속단을 내렸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냥 참았다. 그녀는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그가 오지 않은 이유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했다.
다음 주가 고통스러울 만치 느리게 지나고 나서야 마조리는 로버트가 작별인사도 없이 집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마지막 데이트를 아무리 되새겨 봐도 그녀가 실수한 기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 밑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겼다. 그녀는 활기 없이 걸어 다녔고 먹지도 못했다. 그동안 알아 왔던 로버트와 그녀를 잔인하게 내팽개친 그 남자가 동일 인물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학기 말이 다가오자, 그녀는 또 다른 문제 그녀의 미래와 당면했지만 너무 두려운 나머지 부모님께 그 화제를 꺼내지 못했다. 그때, 아빠가 기회를 제공했다. 부엌에서 엄마가 애플 푸딩을 만드는 동안 그녀는 아빠와 함께 신문을 읽고 있었다.
"아직 시험결과가 나오지 않았니?"
아빠의 부드러운 음성 아래에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호전성이 깔려 있었다. 특히 전에 없던 말을 할 때는 더 그랬다. 하지만 하루의 첫 맥주를 반쯤 들이켰을 때는 예외였는데. 지금이 그때에 속했다. 그녀의 사기가 고조되었다.
"미스 앨릴턴은 제가 에이급이나 비급을 받길 기대하고 계세요. 하지만 이미 브리스톨의 입학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예요. 그리고 옥스브릿지에 진학할 가능성도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떨려 나왔지만 그녀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아빠가 잔을 밀어 놓고 벌떡 일어났다.
"넌 18살이다. 난 그 나이가 되기 전부터 밥벌이를 했어. 에이급은 우리에게 과분해. 마조리. 사실 우리 형편에 주제를 넘어도 훨씬 넘어. 우리는 부자가 아니고, 이제 내 연금으로 먹고 살아야 해. 그리고 네가 돈을 벌기에는 지금이 적기야. 이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에게 좋은 직장이 도처에 깔렸더라. 그러니, 넌 고마운 줄 알아야해. 내가 알아보니, 알프의 정육점에서 경리 여직원을 구한다더라. 보수가 후하더구나."
마조리의 얼굴이 분노로 불타올랐지만, 그녀는 평정을 잃지 않고 충격적인 배신감을 가라앉혔다. 그녀가 영어와 현대어 수상자 명단에 올랐다는 미스 앨릴턴의 말은 아빠에게 먹히지 않을 거야. 그랬던 적이 없잖아? 아빠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토막난 고깃덩어리와 내장, 끔찍한 돼지머리만 보며 남은 평생을 보내게 되겠지. 지난주 고기를 갈아왔던 정육점의 저장실 생각에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다시 제자리로군. 이건 다 당신 탓이야."
아빠가 투덜거리며 아내에게 공격의 화살을 쏘았다.
"당신이 저 아이의 머릿속에 미래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심어주는 바람에 애 버릇을 망쳐 놨어. 쟤는 직장을 잡아야 해. 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단 말야."
"술집에 가서 다트나 한 게임 하시구려."
엄마는 현금 깡통을 뒤졌다. 가계비가 바닥나는 일이 있다 해도 정면충돌을 피할 분이었다. 아빠가 돈을 받아들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마조리는 아빠가 화난 이유는 죄책감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녀는 밥그릇을 밀어 놓았다.
"난 항상 네가 나보다는 낫기를 바랬단다."
엄마가 시작했다.
"내가 15살 때 ......."
마조리는 외할아버지의 병환으로 엄마가 하녀로 고용살이를 하다 아빠를 만났다는, 집안의 서사적인 일화를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버릇없는 고양이 티비가 하필이면 이때를 골라 앞발로 그녀의 무릎을 긁었다. 녀석은 청어를 달라고 난리였다. 그녀가 한 조각을 뜯어 줬다.
"맙소사, 이제 일주일에 청어 한 마리를 겨우 먹는 형편인데, 그걸 고양이에게 꼭 줘야겠니? 네가 고양이 버릇을 잘못 들여서 식사때마다 밥을 달라잖니."
마조리는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다시 간청했다.
"엄마가 항상 나에게 ..... 생활비를 분담하기..... 기대하시는 건 알지만...."
"다른 집도 다 똑같아, 마조리."
엄마가 엄하게 말했다.
"우리는 능력껏 최선을 다해 네 뒷바라지를 해왔다....."
엄마가 또 집안 이력을 늘어놓았다. 마조리는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한번 시도했다.
"네, 맞아요, 엄마. 하지만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잖아요. 내가 적당한 훈련을 받으면 더 많은 돈을 벌 거예요. 단 1년만 기술을 배우게 해주세요. 엄마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을게요. 어제 기술 학교에 다녀왔는데 학비가 무료래요. 난 돈을 아껴 쓰고 걸어서 통학할게요. 밥도 많이 먹지 않겠어요."
"넌 월급을 손에 쥐면 뛸 듯이 기쁠 거야."
엄마가 쏘아붙였다.
"네가 살 수 있는 그 예쁜 옷가지들을 생각해 보렴.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네 돈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아니? 너희 선생님들이 대학에 대한 허황된 생각을 불어넣었나 본데, 넌 나중에 나에게 고마워할 게다. 공부를 해서 뭘 하니? 나이가 차서 써먹지도 못하고 결혼할 텐데. 넌 시집을 잘 가야 해..... 우리를 좀 도와줄 수 있는 부유한 사람을 잡으란 말야. 그는 오랫동안 너에게 눈독을 들여왔단다."
"알프는 나이가 많고 밥맛이에요."
"바보 같은 소리! 그는 이제 겨우 삼십대야."
"저에게는 너무 늙었어요. 엄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어요? 난 사랑하는 상대와 결혼할 거예요."
"이 헛똑똑 아가씨야, 잘 들어 두렴.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와 사랑에 빠지기 더 쉬운 거야."
"내가 엄마와 아빠에게 맥주와 청어를 대기 위해서 높은 갚에 팔려 가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런 버르장머리없는 말을 하다니."
엄마의 눈이 분노로 빛을 발했다. 이제 진짜 성질이 났다.
"가끔 네가 정말 내 속으로 난 딸인지 모르겠구나. 제 어미에게 그런 말을 하는 딸은 세상천지에 너밖에 없을 거야."
아 맙소사! 그녀가 일을 다 망쳐놨다. 해고를 당한 사람은 아버지였지만, 그 진정한 희생자는 그녀였다. 마조리의 모든 꿈과 계획이 앤 볼링의 머리처럼 희생당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녀의 낙천성과 좋은 성적에 대한 자부심, 대학 교육을 받을 만하다는 선생님의 칭찬도 사라졌다. 게다가 어딘가 그녀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리란 굳건한 믿음마저 시들어 버렸다.
학창 시절의 마지막 날은 너무 빨리 왔다. 그 비통한 날에 태양마저 광채를 잃으리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그 반대로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 훈훈한 남서풍에 풀과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흔들렸고 새들이 노래를 불렀으며 벌과 곤충들이 달콤한 여름 내음이 밴 대기를 날아다녔다. 그리고 정원은 장미와 인동 덩굴과 꽃무의 향기로 그득했다. 바바라가 달려와서 그녀의 팔짱을 꼈다.
"내, 너 왜 그러니? 몇 주일 동안 나를 피해 다녔잖아."
그녀는 장난기와 슬픔을 반반씩 섞어 친구를 응시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애정으로 빛났고, 마조리는 로브 때문에 친구를 소흘히 대했던 죄책감을 느꼈다.
"바바라, 우리 사이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최근에 내가 정신이 좀 나가서 그래. 시험 결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거든."
"하지만 넌 항상 성적이 좋았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넌 나랑 다르잖니. 난 입에 풀칠만 해도 다행일걸."
바바라는 항상 마조리의 명석한 두뇌와 누구나 보장하는 미래의 성공을 들어 그녀를 우상시해왔다. 그녀가 속사정을 안다면.
"넌 뭘 할 거니, 바바라? 아직도 요리사가 될 생각이니?"
"물론이지, 요리업계에는 돈이 돌잖니. 나중에 자리를 얻어 분식점이나 큰 레스토랑을 경영할 수 있구. 그건 나 하기에 달렸어."
마조리는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는지 통탄스러웠다. 엄마는 요리 솜씨를 타고났고, 그녀 또한 그 재능을 물려받았다. 어쩌면 엄마가 3개월 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 주실지도 몰라.
"얼마나 공부해야 돈을 벌 수 있니?"
"난 2년 과정의 기술학교에 입학할 거야."
"그래, 대단하구나."
마조리가 중얼거렸다. 요리사가 되는 것마저 그녀의 능력 밖이었다. 그녀는 이 새롭고 열등한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다. 높은 꿈을 안고 살아왔고 교사가 되기 위해 매진해 왔건만. 마조리는 바바라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려 했지만 마음이 자꾸 딴 길로 샜다. 일단 적은 보수를 받으며 일하는 동안 배울 수 있는 기술들이 많이 있을 거야. 그걸 찾아내야만 해. 갑자기 9시부터 5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 하품을 참는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뜨끔했다.
"최근에 로버트가 안 보이더라, 마조리."
바바라의 지적에 마조리의 생각은 또 다른 재난으로 옮겨갔다.
"아, 그는 이제 학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어."
그녀는 원래 비참한 사정을 남에게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돌아올 거야."
바바라가 자신만만하게 예측했다.
"네가 가진 것 모두를 걸어도 좋아. 그는 슬슬 네가 그리워지기 시작할 테고, 곧 너를 만나러 올 거야."
모든 여학생들이 마지막으로 학교 강당에 속속 들어왔다. 모두들 잔뜩 흥분하고 행복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조리만 제외하고. 그녀에게 오늘은 꿈의 종말을 뜻했다. 확고한 여권론자인 여교장이 가장 즐기는 말로 졸업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어려운 시기에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평등이라는 맛있는 홍당무가 손안에 떨어질 듯 보이지만, 조만간 그걸 획득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마조리는 교장 선생님을 흠모했다. 그분은 키가 크고 잘생긴 여성이었다. 엄격하면서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분이었다.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미술 선생님과의 염문은 상급생들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산업 혁명으로 여성은 제자리를 잃었습니다."
교장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 전에 우리는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했고, 그로 인해 존중받았어요. 자녀 양육과 요리, 비누와 미간 약과 양초 제조, 가축 돌보기, 양잠과 직조 등. 하지만 산업 혁명으로 그 대부분의 일을 남성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절반인 모든 여성은 오로지 아이를 낳는 역할에만 매달리게 되었지만, 과잉 인구 사태로 요람을 지키는 자리마저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70년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백척간두 같은 미래에 당면했습니다. 즉 외양으로 발전과 전진을 거듭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막을 들쳐 보면 후퇴한 상황에 처한 거예요. 남성 우월주의자들은 결혼 여부를 떠나 모든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그리고 열등한 시민으로 간주합니다. 우리 대다수는 남성 우월적인 사회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무실 아내'의 역할로 말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경력으로 선택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결혼은 가장 남성에게 유리한, 합법적인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사회가 우리에게 뭘 기대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성 평등은 투쟁 없이 쟁취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투쟁의 최전방에 서게 될 겁니다. 그러니 힘을 기르세요. 가능한 최고의 배움을 추구하세요. 차선에 만족하지 말고, 남성이 여러분의 지위를 깎아내리도록 허락하지 마세요."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은 나에게 큰 만족을 가져다준 발표를 하겠어요. 네 명의 모교 학생들이 시험 결과에 상관없이 대학 입학 허가증을 따냈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마조리의 이름이 불리어졌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고꾸라져 죽고 싶었다.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으로 분리된 것 같았다. 그중 한 존재는 천장을 맴도는 파리처럼 그녀 위에서 모든 과정을 구경했다. 비현실감에 휩싸인 그녀는 영어와 현대어 상을 수상하러 연단으로 올라가다가 두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어떻게 계속 미소를 지었을까? 교장 선생님이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을 때에도 마조리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식이 끝났다.
"마조리, 네가 부러워 죽겠어."
바바라는 한 팔을 그녀의 몸에 감으며 말했다. 두 소녀는 밖에서 불타오르는 석양에 눈을 껌벅였다.
"왜?"
"여기 있는 아이들이 다 내 맘 같을 거야. 넌 미래를 보장받았잖니."
"아, 글쎄. 난 브리스톨에 진학하지 않을 거야."
마조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거든. 난 좀 더 근사한 것을 하고 싶어. 음 여행 같은 것 말야! 유람선의 승무원이 되어 세상 구경이나 할까 봐."
그녀는 어깨너머로 바바라의 응원을 확인했다. 친구는 눈물이 글썽이며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얘가 다 알아차렸어! 이제 수치심이 아물어 가는 불행에 더해졌다. 마조리는 바바라의 품에서 빠져나와 손을 흔들었다.
"얘, 행운을 빌어. 난 이쪽 길로 갈래. 나중에 보자."
그녀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절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다. 바바라와 신물 나는 동정에서 벗어나야 해!
로버트는 혐오감 어린 낯빛으로 서재를 둘러봤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이 방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은신처로, 푹신푹신한 의자와 늘어지게 낮잠에 빠진 개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어두운 색조의 페르시아 카펫이나 세심하게 배치된 검정 가죽 소파는 음울했고 밀실 공포증마저 일으켰다. 질서 정연함 속에서 아늑한 분위기는 사라졌고 개는 집안에 발을 딛지도 못했다. 심지어 고양이조차 동거 불가 판정을 받았다. 계모인 로다는 항상 자기 멋대로였고, 그 공공연한 동물 알레르기는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작임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모피 코트에는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으니까. 로버트의 속에서 뭔가 욱하고 치밀어 올라 그의 오랜 동면 상태를 깨워 놓았다. 암담함이랄지 어떤 분노가 결집되어 내적인 성숙을 촉구했다. 하지만 아직 시기상조였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에 적응할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사흘 전에 아무 책임도 없었고, 대책 없이 사랑에 빠져 있던 십대의 시인 지망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드디어 다 끝났구나."
로다가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로버트가 반박했다. 이번이 그녀에 대한 최초의 공격이었다. 그는 극히 정중하고 나무랄 데 없는 예의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6개월만에 그분의 침대를 가로챈 이 여자에 대한 적의를 감춰 왔다. 그리고 이제 두 형인 던컨과 조지 역시 비극적으로 죽어 버렸다. 그것도 조지 형이 오랫동안 탐내왔던 경비행기의 추락 사고로. 당시 그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로다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지만 결국 심리에서 드러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접하고 경미한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로버트는 슬프고 화가 났으며 또한 두려웠다. 사랑하는 형들을 영영 보지 못하리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름 끼치는 사실은 새로운 공포를 일으켰다. 이제 작위와 맥라렌 성의 후계자이자 일족의 수장으로, 공장을 운영하고 글렌티란 증류소의 배당금으로 살아가는 방계친족들을 돌봐야 할 위치에 오른 것이다. 그의 피붙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그 의무를 이행해 오셨지만, 안타깝게도 재정적인 재능이 부족했다. 아무리 하이랜드 일대에서 최고의 위스키를 생산해 낸들 별수 없었다. 로버트는 사업 요령을 배웠던 지난 몇 달 동안 그 증거를 충분히 보아온 터였다. 아니, 그게 전부였다.
"저는 여름 휴가를 떠나겠습니다."
그가 계모에게 말하고 그 선언에 그녀가 눈을 떨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던 일의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데다 생각할 것도 있습니다. 이 새로운 상황에.....익숙해지기 위해서요."
그는 사랑하는 소녀를 마지막으로 만나야 한다는 설명을 늘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휴가라니, 말도 안돼. 네가 그런 제안을 꺼냈다는 것조차 놀랍구나."
그녀가 호되게 쏘아붙였다. 로버트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불쌍한 아버지는 둘째 아내의 강철같은 의지를 당해내지 못하겠지만, 그가 평생 동안 여기에서 살면서 그녀와 맞서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그 첫발을 내딛을 좋은 때이다.
"저는 제안한 게 아니라 제 계획을 말씀드린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버님께 말씀드리겠어요. 그분은 이해하실 겁니다. 그래이엄 포브스가 공장을 잘 꾸려나갈 테고, 은행은 여름 휴가 동안 우리를 들볶지 않을 거예요."
"네 아버지가 널 필요로 하신다면?"
그녀가 냉정하게 물었다.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이제 아버지의 건강이 좋아지셨잖아요. 저는 지중해로 항해를 떠나겠으니, 연락할 일이 있으시면 도버의 리버풀 스트리트 11번지에 사는 마조리 하디라는 소녀를 찾으세요. 그녀에게 연락처를 남기겠습니다."
"여자가 있을 줄 알았다. 넌 무책임했던 네 형들과 똑같아."
그녀는 그의 등뒤에 철천지원수가 있는 것처럼 그를 비스듬히 노려보았다. 어렸을 때, 그는 이런 눈길에 기가 죽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약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는 침울한 분노가 드러난 얼굴로 그녀를 한번 쏘아보고 서재를 나섰다. 그리고 10분 후 달랑 가방 하나만 꾸려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 신선한 자유의 공기여! 소중한 6주를 어떻게 보낼까?
마조리는 제방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바라의 선의에 가득 찬 동정에서 도망친 다음부터 자주 여기에 돌부처 마냥 앉아 있었다. 꼭 쥐어진 두 주먹이 그녀의 무릎 위에 얹혀 있었다. 그녀는 절벽 아래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로버트와 마지막 데이트를,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키스와 다정한 손길을 떠올렸다. 억압된 정열이 밖으로 분출하자, 그는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온몸으로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고 그녀의 입술을 갈랐다. 그들이 숨을 가쁘게 쉬며 서로에게 엉켜든 것도 잠시 잠깐. 돌연 그가 뒤로 물러났다.
"제기럴!"
평소에 욕을 하지 않는 그가 자제력을 상실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갈 데까지 다 가든가, 아니면 더듬는 짓을 관두기로 하자. 난 발정한 수소처럼 계속 흥분해 있었어. 고통스러워 죽겠다구!"
"내가 언제 키스해 달라고 했니?"
그녀는 그처럼 거센 욕망에 몸을 떨었지만 그 욕구를 숨겼다.
"넌 얼음 덩어리야. 하여튼 난 오늘 밤에 더 이상 못 참겠어. 내일 보자. 항상 만나는 시간에."
그가 성질을 내며 떠났던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어떻게 그녀에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녀는 화가 났지만 육체는 마지막 키스의 추억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아, 로버트. 난 너를 사랑해."
뉘엿뉘엿 해가 기울었고 그녀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절벽으로 올라오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모습인데..... 설마..... 하지만 저렇게 훤칠한 이가 또 누가 있지? 튀듯 성큼성큼 걷는 사람이 또 있단 말야? 그 이외에 까치집처럼 덥수룩한 흑발을 한 사람이? 그녀는 뛰기 시작했지만 두 다리가 젤리처럼 흐느적거렸기 때문에 자리에 멈춰 섰다. 저건 환영이야. 드디어 내가 돌았구나. 하지만 진짜 그였다.
"마지!"
그가 불렀다. 그는 크게 한번 휘파람을 불어 제낀 다음 그녀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의 헤벌쭉한 미소가 그녀의 화를 불렀다. 감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소를 짓고 휘파람 한 번에 그녀가 달려오길 기대하다니! 그녀는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배에 힘찬 주먹을 날렸다.
"이건 날 내팽겨친 대가야, 로버트 맥라렌."
그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맹목적으로 냅다 달렸다.
"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로버트가 그녀를 따라 잡았다. 그 바보같은 미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거센 분노는 처음이었다.
"거 참 대단한 환영이구나."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로버트,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전화도 한 통 하지 않다니. 아, 이 망할 녀석!"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고 풀 한 줌을 뜯어다가 그녀의 팔과 다리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 바보!"
돌연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어졌다. 로버트가 그녀를 꼭 껴안자, 그녀의 기쁨이 폭발했다. 아무 설명도 필요없었다. 로버트가 돌아왔어! 그는 나를 사랑해! 보랏빛 그림자가 바다와 절벽을 은은하게 물들였고, 미묘한 및 한줄기가 메아리인양 황혼을 갈랐다.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에 사로잡힌 채 앉아 있었다. 그녀가 부르르 몸을 떨자, 그때서야 로버트는 황홀경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켓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 줬다. 옷은 따뜻하고 푸근했으며 그의 냄새가 풍겼다.
"마지, 내 말을 잘 들어. 난 너를 사랑하지만 우리 사이는 끝났어. 난 설명을 하려고 돌아온 거야. 음, 나는 자유롭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지금은 그렇지 못해."
그의 목소리는 너무 잠겼기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로버트는 그녀를 더 바짝 끌어당기고 두 형의 죽음과 아버지의 심장 발작으로 그의 세상이 뒤바꿨음을 설명했다.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마지, 정말 미안해. 나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어. 너 춥지? 나도 그래. 내 차가 바로 저기에 있으니까, 셰퍼드 웰에 있는 펍으로 가자.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녀는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에 교복 차림으로 멋진 펍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난 9월 초부터 일을 시작해. 믿어지지 않지만 내가 경영 일선에 나서게 될 거야. 물론 공장이 있기는 해. 하지만 아버지는 사업에 별 재주가 없으시고 던컨도 마찬가지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조리는 경외심을 느꼈다. 귀족 아버지, 여왕의 먼 친척뻘인 계모, 스코틀랜드산 최고급 위스키를 생산해 내는 증류소라. 그는 밤에 경영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낮에 공장 운영을 배울 참이었다. 이제 옥스퍼드는 물 건너간 셈이었다.
"우리에게는 6주일이 전부야. 지금 헤어지든가 함께 휴가를 보낼 수 있어. 어떠니? 내 친구들이 지중해를 돌아 코르시카까지 항해하는데 우리를 초대했어.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렸어, 마조리. 하지만 9월에 이별을 앞둔 마당에 기분이 어떤지 모르겠구나."
마조리는 불같은 분노를 느꼍다. 내가 그에게 모자란다 이거지? 그는 그 점을 똑똑히 밝혔다. 하지만 왜? 그는 원래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잖아. 증류소 하나와 몇 가지 자질구레한 것이 손에 떨어졌다고 잘난 척하기는. 그녀는 그가 집과 학교에서 속물근성을 주입받았음을 감지했다. 천천히 강철같은 의지가 하나로 모아졌다. 로버트는 내 남자야.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 또 나타날 리 없어. 그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 테야.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토요일 아침이 두려움과 함께 밝아 왔다. 마조리는 벽에서 춤추는 나뭇잎 그림자를 응시했다. 똑딱똑딱 초침 소리에 맞춰 그녀의 마음은 양갈래로 찢어졌다. 집은 여전했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그녀가 로버트를 사랑하므로. 그들은 지난 2주일을 함께 보냈고 조만간 한 달에 걸친 휴가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부모님께 말씀드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손으로 허벅지와 배를 어루만지며 쉼없이 몸을 뒤척였다. 로버트의 손길일 닿은 이후 그녀의 몸은 새로운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과 손의 감촉을 떠올렸다. 뜨거운 정욕의 물결이 지나가고 죄의식과 부끄러움이 뒤에 남았다. 그녀의 얼굴은 모닥불을 펴놓은 듯 발갛게 달아올랐다. 로버트는 최후의 선을 넘고 싶어 했다.
"네가 날 충분히 사랑한다면, 그 노동자 계급의 뿌리 깊은 정조 관념을 극복하고 나에게 너의 모든 것을 줄 거야."
어젯밤 그가 투덜거렸다.
"우리의 의견 차를 보일 때마다 계급 전쟁을 치뤄야하니?"
그녀가 웃으며 반박했다.
"네가 한 번만 더 그런 낡은 수법을 쓰면 난 집에 갈 테야."
그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가 옳을까? 대체 누구를 위해 그녀가 정절을 지켜야 하는 거지? 로버트보다 더 깊이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까? 그러자, 첫 경험을 그와 나눠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섰다. 그녀는 꾸물거리다가 결국 아침을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었다. 아침상에서 적당한 말을 꺼내느라, 밥이 거의 넘어가지 않았다.
"포리지를 다 먹어라."
엄마가 중얼거렸다. 아빠가 막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데가 있어서....."
지금이 아니면 안돼!
"엄마, 아빠, 저기요..... 제가 한숨 돌리고 싶은 차에 한 달 동안 지중해를 항해하는 초대를 받았어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쉴 필요가 있는 데다 여섯 명이 그룹으로 가니까 염려하실 필요도 없어요, 아빠..... 제발 진정하세요."
그녀가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 아빠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고, 엄마는 약간 난처한 기색으로 부녀를 번갈아 보았다. 아빠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식탁 모서리를 쥔 그의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드러났다.
"안돼, 넌 못 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돼."
"걱정하실 게 없다니까요. 그리고 다들 여름 휴가를 가잖아요."
마조리는 집요하게 매달렸다.
"쟤가 재미를 좀 볼 때예요."
엄마가 옆에서 거들었다.
"재미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재미야!"
아빠의 목소리는 천둥소리를 방불케 했지만, 그녀는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갔음을 감지했다.
"난 갈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마조리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식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노기 짙은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도 낯설었다. 아빠가 어깨를 으쓱거리고 신문을 집어 드는 동안 엄마는 그녀를 따라 방까지 올라왔다.
"네가 집밖에 나가 잔 적이 없으니, 우리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잖니. 난 너를 믿는다, 마
조리. 난 네 나이에 결혼했으니까 당연히....."
엄마의 잔소리가 길어지자, 마조리가 엄마의 팔을 움켜잡았다.
"엄마, 제 걱정마세요."
그녀가 못박았다.
'콜롬부스'호는 두 개의 돛대를 가진 아름다운 범선으로, 마르세이유 요트 클럽에 정박되어 있었다. 로버트와 마조리는 그보다 더 단출한 규모를 예상했으므로 그 옆을 두 번이나 지나면서도 그 배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침내 찾던 배가 그것으로 판명되자 마조리는 압도당했다. 로버트의 친구는 백만장자구나. 배 갑판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약해 두었던 호텔로 가기로 했다. 로버트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만나 아침을 먹고 항해에 나서기로 수배해 놓은 것이다. 드디어 그들은 버스를 타고 태양에 달궈진 교외로 나갔다. 노을이 질 무렵에야 호텔로 개축된 고성에 도착했다. 정원은 백리향과 라벤더 향기로 가득 찼고, 돌투성이의 언덕에 심어진 올리브 나무에 꽃들이 만발했다.
"로버트, 정말 근사한 꽃이야. 아, 고마워."
마조리는 높은 돔 형식의 천장과 타일이 발라진 홀에서 속삭였다. 로버트는 목욕탕을 사이에 둔 독실을 두 개 예약했다. 옷을 벗고 샤워실에 들어가는 이 기분이란! 그녀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따뜻하고 수증기가 가득한 그곳에 발을 디디자, 육감적인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따뜻한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그의 입술이 그녀의 것에 녹아들었고, 그의 젖은 피부가 그녀의 매끄러운 가슴과 배를 힘차게 눌렀다. 그들은 키스하고, 느끼고, 애무하며 경이로운 감각에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그의 몸에 비누칠을 하며 강단 있는 사지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비누 거품이 묻은 그녀의 손가락이 그녀의 남성을 아래위로 스치자 그가 고통스런 신음을 발했다.
"널 사랑해."
그녀가 그에게 온몸을 밀어붙이며 속삭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절실한 욕구로 그에게 몸을 뗄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온수가 냉수로 바뀌었고, 그들은 비명과 웃음을 동시에 터뜨렸다. 로버트의 품에 안겨 샤워실에서 나와 그의 손에 얼굴이며 귓속,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이 닦이는 기분이 너무 기묘했다. 그가 그녀를 꼭 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말려 주자, 그녀는 이 자세로 영원히 서 있고 싶었다.
"전에 이래 본 적 있니?"
그녀가 나른하게 물었다. 그는 장난기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모르겠는데."
"무슨 대답이 그래? 네가 모르면 누가 안다고."
"옷이나 입자. 벌써 늦었어. 난 저녁을 거르고 싶지 않단 말야, 넌 어때?"
그들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메뉴를 검토했다. 램프 불빛이 부드러운 미풍에 일렁거렸다. 촉촉한 풀과 대지의 짙은 내음에 라벤더와 재스민 향이 실려 왔다. 사방에서 마을 불빛이 반짝거리고, 부엉이의 먼 울음소리와 함께 인근 주택에서 기타선율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그들은 경외심에 침묵을 지켰다. 다음 순간, 로버트가 마법을 깼다.
"소테 드 라펭 오 빙 블랑를 추천할게."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놀렸다.
"어휴, 이제 그만 해. 그 불쌍한 토끼 한 마리를 가지고 두고두고 울궈먹는구나. 난 절대로 토끼 고기를 먹지 않을 거야. 그럴 수야 없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버트 삼촌댁 양돈장에서 화재가 난 다음부터 돼지고기도 안 먹어."
로버트는 그녀가 그 사연을 건너뛰기를 바랬지만, 그녀는 기어코 이야기를 했다. 양돈장에 불이 붙었을 때의 소름 끼치던 돼지 울음소리며, 소방수들이 보라색으로 그을린 돼지들을 밖으로 몰아냈던 광경을 생생하게 늘어놨다.
"돼지고기는 관두자."
로버트는 밥맛 떨어지는 이야기를 다 듣고 단호하게 말했다.
"난 양계장에서 사육된 닭고기도 안 먹어."
"그럼, 뭐가 남니? 파테 드 포와 그라?"
"파테의 파 자도 꺼내지 마. 사람들이 거위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아니.....?"
"송아지 고기도 싫으니?"
"당연하지."
"좋아 그려면 이렇게 하자. 다르네 드 소몽 그릴레 오 보르 다음에 수플레 오 프로마지와 포도주에 절인 배를 먹는 거야. 어때?"
저녁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달이 두둥실 올리브 나무 위에 떠올라 온 세상을 푸르스름하게 비췄다.
"여기는 달조차 더 아름다워."
그녀가 속삭였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마법에 걸린 밤과 서로의 유대감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오랫동안 커피를 마셨다.
누군가 큰소리로 말했다.
"이쪽은 누구야? 로브, 빨리 소개해 줘."
일행은 전부 네 명이었다. 네 명의 적군들이군. 마조리는 재빨리 상황 파악을 했다. 여자들은 전부 디오르와 입셍로랑의 의상을 걸치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계를 찼고, 남자들은 멋지게 재단된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다들 로버트와 같은 세계의 일원으로, 마조리가 국외자임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클리브 로렌스와 쟝 마젤은 그녀를 로버트가 시장에서 사온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대하면서 공공연하게 추파를 던졌다. 그리고 클라우디아 와인 로버츠와 다이아나 해밀튼은 전형적인 험담꾼이었다. 그녀들은 마조리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하며 대화에 끼워 주지 않았다. 특히 쟝의 상대이자 푸른 눈동자에 금발 머리인 다이아나는 마조리를 위협 거리로 간주한 눈치였다. 곧 그들은 짧은 스키대의 장점, 최근에 방문했던 리조트, 허례허식으로 치우치는 런던 파티의 경향, 누례예프의 발레 공연, 경매에서 영국 미술품을 독식하는 일본인의 행태, 영국 팀이 대서양 횡단 레이스에서 참패한 요인과 마이크 맥밀란이 어려움을 딛고 유일하게 승리한 이유를 놓고 토론에 빠졌다. 마조리는 항해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프랑스 구동선을 몰았다면 승리했을 거야. 그는 비범한 항해 실력을 가졌어."
클라우디아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콧날이 길쭉한, 금발의 장신이었다.
"항회? 참 상큼하네. 난 우리나라의 사투리가 좋더라. 그 덕분에 영어가 풍요한 어휘력을 갖게 되었잖아."
"얘, 너도 항회하니?"
다이아나가 희희낙낙해 하며 장단을 맞췄다. 마조리는 다른 여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오랫동안 냅킨을 차곡차곡 접어 깔끔한 정사각형으로 만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자."
그녀는 똑똑하게 발음했다. 로버트는 얼굴을 붉히고 그녀를 마주 보지 못했다.
"편히 쉬어."
그녀는 계단참에서 멈춰 섰다. 그렇게 맥없이 항복하지 말걸.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어. 그때 클라우디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투리가 심하네. 런던 방언이야?"
"못되게 굴지 마. 클라우디아. 그녀는 굉장히 아름답잖아." 쟝이 섹시한 프랑스 억양으로 그녀를 비나했다.
"그 미모가 아깝지 뭐."
다이아나가 한술 더 뜨면 로버트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그 심한 발음을 참을 수 있니?"
마조리는 어깨너머로 클라우디아가 로버트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녀가 한껏 몸을 숙인 탓에 젖가슴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블래이지어도 안 입었잖아! 버르장머리 없는 것. 아무리 영국 백장미 같은 혈색을 지녔으면 뭣해. 큼지막한 코와 치아가 말 같은걸. 마조리는 되돌아가서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첫 질투를 경험한 그녀는 당장 살인이라도 불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방과 연결된 문을 열어 놓고 맨몸으로 자리에 누웠다. 로버트가 그 계집애들의 조롱을 잊을 만한 획기적인 짓을 저질러야 할 긴박감을 느꼈다. 그런데 왜 그가 이렇게 꾸물거릴까? 그녀는 눈을 감고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천천히 잠들었다.
로버트는 분노와 죄책감이 섞인 심정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마조리는 너무 어려. 그렇게 뛰쳐나가는 바람에 그녀의 꼴만 우습게 되었잖아. 맞서 싸웠어야지. 그녀가 그녀들보다 열 배는 더 낫다. 둘다 영리하지 못한 계집애들인데. 그의 세계에 속한 대다수의 여자들은 줏대가 없었지만 마지는 한 번도 변덕을 떨지 않았다. 최근에 그는 그 점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 덕에 그들은 시간을 들여 견고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주된 이유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었지만 그 외에 다른 이유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오늘 밤 계급간 편견으로 비롯된 아슬아슬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는 그녀에게 미래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을까? 그녀는 고지식했지만 그것은 편협한 양육 방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 결과 배양된 그녀의 정숙함은 그를 짜증나게 하는 동시에 매료시켰다.
그런데 그녀의 부모님들은 너무 끔찍해..... 그는 중간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살그머니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침대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치약과 향수와 파우더 냄새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꽃향기에 뒤섞였다. 아, 정말 아름다워. 그녀는 한 팔을 베개 위에 던지고 나체로 잠들어 있었다. 구겨진 깃털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려 완벽한 한쪽 가슴이 드러났다. 열린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는 하얀 치아, 뺨 위에 내려앉은 긴 속눈썹, 축축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녀는 따뜻하고 육감적이었고, 그는 그녀의 곁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그는 한숨을 쉬며 클라우디아를 떠올렸다. 그녀는 마조리가 처녀임을 간파하고 깔깔거리며 속삭였다.
"그녀가 잠들었거든 내 방으로 와."
하지만 그 제안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마조리와 불가해한 연대감을 느꼈다. 그들의 다른 배경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 프랑스에서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심정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에 휴가 기분이 망쳤다. 이런 유감스러움에서 해방되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글쎄. 그는 깃털 이불을 그녀의 목까지 여며 주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쟝의 차를 타고 마르세이유로 돌아가 콜럼부스 호에 승선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범선은 남동쪽을 향해 느린 속도로 나아갔다. 일행은 갑판을 서성거리거나 일광욕을 했고, 쟝이 규칙적으로 닻을 고정시키고 사다리를 내릴 때마다 따뜻하고 투명한 바다에서 수영을 즐겼다. 마조리는 그가 코르시카 출신이고, 이 배가 그의 아버지 소유임을 알았다. 가무잡잡하고 핸섬한 데다 균형 잡힌 체격의 그가 뭘 보고 마녀같이 생긴 다이아나와 사귀게 되었을까? 마조리는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밤에 쟝은 기타를 치고 아랍풍의 단조 코르시카 양치기 민요를 불렀다. 준비한 식료품이 남아도는데 그들은 직접 잡은 생선과 적포도주로 저녁을 때웠고, 밤이 지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마조리는 쟝과 친해졌는데도 여전히 소외감을 느꼈다. 앞으로 체류하게 될 코르시카의 호텔이나 스키 별장 이외에도 쟝의 아버지는 마르세이유에 많은 사업을 벌이고 있었지만 쟝은 그 내용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코르시카 마피아가 틀림없어."
마조리와 단 둘만 있는 자리에서 로버트가 투덜거렸다.
"그는 클리브의 친구이고, 난 그의 가족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어머 말이 지나치다. 네가 쟝을 싫어하는 것과 달리 난 그가 마음에 들어. 그는 굉장히 멋있어."
"그거야 네가 그 반지르르한 얼굴에 넋이 나갔으니까 그렇지. 다이아나는 그와 결혼하고 난 다음에 톡톡히 후회할걸. 아마 시커먼 옷을 입고 산 속에 갇혀서 밤나무나 쪼개며 살게 될 거야."
"최소한 그의 곁에 있잖아."
그녀는 톡 쏘아붙인 즉시 그 말을 후회했다. 로버트는 자신의 내부로 깊이 침잠해 버렸고 그 시간 이후 왼종일 그녀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며칠 후, 조개 빛 회색 안개가 걷히고 해가 떠오를 때 코르시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와 하늘이 혼연일체가 된 새벽 빛 속에서 윤곽을 드러낸 코르시카는 아련한 보랏빛 안개로 감싸인 신비의 섬이었다. 마조리와 로버트가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고 있을 때, 쟝이 쑥쓰러워하며 다가왔다.
"너희 두 사람은 지난 이틀 동안 각 방을 쓰는 눈치니까, 규칙을 별 어려움 없이 따를 수 있을 거야. 우리 아버지 호텔과 별장에서는 서로 거리를 줬으면 좋겠어."
"우와!"
쟝이 자리를 떠나자, 마조리가 로버트에게 말했다.
"우리가 계획했던, 죄악에 가득찬 휴가에는 너무 심한 규칙인걸."
"네 문제점은 말만 많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다는 거야."
로버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슬픈 표정을 보고 그만 얼어붙었다. 이제서야 그가 지난 며칠 동안 긴장해 있었던 이유가 감 잡혔다.
콜럼부스 호가 칼비 항에 들어가자, 바다 위로 우뚝 솟은 절벽에 화강암으로 세워진 거대한 노트르 담 드 라 세라 성당이 보였다. 화려한 일출은 산을 쪽빛으로 물들였고, 그 깎인 모서리와 틈에 짙은 제비꽃 색의 그림자가 어렸다. 그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배에서 내렸지만 바다는 항구를 따라 펼쳐진 카페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여기저기에 설치된 룰렛 테이블과 인파 가득한 부두를 따라 그들은 기분 좋게 쟝의 삼촌 피에르를 찾아 나섰다. 한 카페에서 금반지와 목걸이로 장식한, 험한 눈초리의 사내가 그들을 맞았다.
"우리는 뒤로 빠지자."
로버트가 속삭였다. 그는 남몰래 그녀의 손을 부풀어 오른 남성에 대고 눌렀다.
"내가 피곤해하니까, 네가 날 요트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해. 쟝은 이해할 거야."
그녀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들은 삼각 경주에 나선 것처럼 팔짱을 끼고 허벅지를 맞댄 채 배로 돌아갔다.
"네가 왜 이렇게 슬퍼 보일까?"
로버트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의 눈은 절실한 욕망으로 핏발이 서 있었다.
"난 슬프지 않아."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슬펐다. 그녀만의 특별한 딜레마가 서로 다른 배경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다이아나와 클라우디아 때문에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로버트의 세상에 들어갈 수 있지? 그리고 별 재주나 훈련도 받지 못한 그녀가 무슨 수로 성공을 해? 하지만 어떻게든 로버트가 그녀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어야 해. 그녀는 눈물을 꾹 참았다.
"아무것도 아냐, 로버트. 저기 좀 봐!"
요염한 달이 험준한 산봉우리에 걸렸고,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 따뜻한 밤과 씁쓸 달콤한 마키 내음이 담겨 있었다.
"아름다운 밤이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범선에 도착하자, 로버트는 시선 높이보다 위에 묶여 있는 구명선이 이 배에서 유일하게 사적인 공간이라고 결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방수 천으로 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수건을 깐 다음 나란히 누웠다. 로버트는 떨리는 손길로 서툴게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녀도 그의 피부를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그의 반바지와 티셔츠가 참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찢다시피 그걸 제거해 나갔다. 헐떡거리며 그녀는 그의 엉덩이를 힘차게 잡아당겼고, 두 사람은 저 달처럼 알몸이 되어 부끄러움을 잊은 채 눈과 입을 맞추고 서로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젊은 두 사람은 두렵고도 난처했다.
"사랑을 나누자."
로버트가 쉰 목소리로 간청했다.
"약속해! 안전할 거야. 난 굉장히 하고 싶어."
"나도 그래."
아팠다. 그게 첫 충격이었다. 그에 이어 파괴할 수 없는 긴밀한 유대감이 찾아왔다. 그녀는 한껏 엉덩이를 들어 올렸고 거듭되는 결합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달콤한 침범이 그녀의 가슴을 관통했고, 그는 그녀의 영혼을 꿰뚫을 듯 돌진해 왔다. 정열에 한껏 달아오른 그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땀에 흠뻑 젖어 최후의 절정에 올랐다. 그리고 나중에 서로의 품에 안겨 사랑의 말을 주고받으며 동쪽 하늘이 미세하게 밝아 오는 새벽을 맞았다. 그제야 그들은 마지못해 몸을 풀고 살그머니 사랑의 보금자리로 찾아갔다.
그들의 아침은 몽롱하고 나른했다. 쟝과 그의 삼촌의 재촉에 일어난 두 연인은 허겁지겁 커피를 마시고 트럭에 탔다. 마조리는 산을 오르는 동안 내내 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어느덧 차는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구불구불한 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우리 마을 카스티리아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야."
쟝이 설명했다.
"예전에는 노새만 간신히 가는 길로 여러 날에 걸쳐 외부와 교류했었어. 이 길은 개통 즉시 니올로 주민들의 밥줄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의 생활 방식대로 살고 있어. 남자들은 돈을 벌러 집을 떠나고 가족들은 고향을 지키지."
마조리가 다이아나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너, 잘 들었니?"
다이아나는 거만한 시선으로 그녀를 째려보았다. 트럭이 덜컹거리며 오래된 암벽층을 지나 마지막으로 가파른 모퉁이를 돌자, 사발 모양의 평지가 나타났다. 그곳을 사면에서 둘러싼 산의 꼭대기에 쌓인 눈은 신비스럽고 접근할 수 없는 불가능을 풍겼다. 강렬한 태양이 사정없이 내리쬐였고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졌다. 차는 섬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니올로로 들어가 붉은 기와가 얹혀진 삼층 건물 앞에 섰다. 트럭에서 내린 마조리는 서늘한 산의 냉기에 몸을 떨었다. 저택의 대문이 열리고, 날씬한 한 여인이 안에서 뛰어나와 계단을 구르듯 내려왔다. 그녀는 쟝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검정 일색인 의상으로 감춰지지 못한 피부가 목련처럼 투명했다. 그녀는 금발을 뒤로 모아 쪽을 올리고 아무 화장도 하지 않았다. 그녀만한 피부와 용모의 소유자라면 화장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 쟝의 어머니는 보기 드문 미녀였다. 백랍 같은 피부에 암청색의 큰 눈동자가 두드러진, 마담 마젤은 차분하고 상냥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다이아나를 소개받는 순간 금세 사라졌다. 아들의 여자를 탐탁찮게 여김이 분명했다.
"어서 와요! 내가 여러분을 방으로 안내할께요. 다행히 여기에는 여분의 방이 많아요."
마조리는 그녀의 코르시카 억양이 강한 불어를 쉽게 알아들었지만, 다이아나와 클아우디아는 난색을 표했다.
"오후 6시에 테라스에서 주연이 있어요."
마리아나 마젤이 말했다.
마조리는 테라스 계단을 통해 정원으로 내려갔다. 거기에 열다섯 명 정도의 남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녀의 출현에 그중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버트와 쟝이었다. 늙은 장신의 한 남자가 의자에서 몸을 돌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칭송할 만한 여신이로다!"
그가 강한 억양의 영어로 외쳤다.
"네가 다이아나로구나."
맙소사? 어떻게 하지? 못 들은 척할까? 그는 생판 딴 사람에게 서정시를 바쳤다는 실수를 깨닫고 어떤 식으로 나올까?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검정색 정장에 흰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선홍색 장식 수건과 허리띠를 맨 풍모가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반세기 동안 효력을 발휘했을, 옛 마법이 통하기를 기다렸다.
"저는 다이아나가 아니에요. 그 친구 마조리 하디에요."
그녀가 불어로 중얼거렸다.
"아, 하지만 한시름 놓았다."
그가 유연하게 말을 받았다.
"네가 나를 파파라고 부를 일은 없겠구나. 아주 좋았어."
그는 마조리의 손을 잡아 옆구리에 끼고 그녀를 식탁으로 이끌었다.
"그럼 너는 바로 로버트의 친구로구나. 아가씨는 저 젊은이에게 과분한 상대야. 자, 이리 내 옆에 앉아서 영예의 손님이 되어주렴."
그녀는 쟝이 허물없이 비워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무슈 마젤이 요란한 몸짓으로 최고급 포도주를 따르며 그게 왜 상급풍 인가를 구구절절이 설명했다. 저녁상은 나무 아래 차려졌다. 생선 전채 요리와 염소 치즈, 야채가 곁들여진 돼지고기, 올리브와 각종 과일, 그리고 밤나무 열매로 만든 패스트리 등 식단은 풍성했다. 마담 마젤과 두 시누이들이 한결같이 검정색으로 차려입고 요리를 다 나른 다음에야 동석해서 식사를 했다. 다 먹고나자, 그들이 식탁을 치우기 시작하기에 마조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거들려는 찰라, 뒤에서 요란한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마조리, 이리 돌아오너라. 집에는 일손이 많아. 이리 오라니까." "가 봐요."
마담 마젤이 그녀를 슬쩍 찌르며 말했다."우리집 양반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우. 착한 사람이니까. 아가씨가 참아 주구려."
그리고 그녀는 다이아나 쪽을 가리키며 남편에게 코르시카 말로 퍼부어댔다. 마조리는 그중 '친절' '의무' '둔감한' 등의 몇마디를 알아들었다. 무슈 마젤은 의무적으로 다이아나를 남은 쪽 옆자리에 불러 앉히고 코르시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정이 지나서야 모임은 막을 내렸다. 마조리는 조심스럽게 테라스 계단을 올라갔다. 온갖 전설과 독한 곡주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넌 큰 반향을 일으켰어."
그녀는 로버트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아, 로버트."
그 순간 그녀는 그를 꼭 안아 주고 싶었다. 그의 눈은 사랑과 애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달려들자 그가 양손을 들어 올리고 뒤로 물러섰다.
"어험! 쟝의 경고를 명심해. 너는 참아야 되느니라." 그가 그녀에게 웃었다. 그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았다."네가 그리워." 그녀가 안타깝게 속삭였다.
"30분 후에 정원에서 만나자."
무성한 마키 속에 안전하게 숨어 따뜻한 대지 위에 눕는 기분은 짜릿했다. 어둠 속에서 옷을 벗고 달빛에 반사된 로버트의 열굴을 보는 것 또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바조리에게 성행위는 순수하고 숭고해 보였다. 사랑의 물결은 그들을 휩쓸고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사랑은 성스러웠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했으므로 축복받았다.
새벽녘에 마조리는 부드러운 노크 소리를 들었다. 로버트를 기대하며 문을 열었던 그녀 앞에 다이아나가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울었던지 시뻘겋게 짓물러 있었다. 놀람과 회의가 교차한 순간 다이아나가 애원했다.
"마조리 부탁이야..... 난 잠을 잘 수가 없어. 이야기를 할 사람이 필요해. 쟝과 나는.....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를 기대했지만, 그의 부모님들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이 일을 어쩌지!" 그녀는 침대에 앉아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쟝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거야. 그러기엔 위험 부담률이 크거든. 워낙 재산이 많잖아. 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쟝은 안 그래. 그래서 난 좋은 인상을 심어 줘야 해. 그동안 내가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그분들은 널 좋아하고 넌 프랑스어도 잘하잖니.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부탁이야, 제발 도와줘."
마조리는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안해, 하지만 난 항회하러 갈거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녀는 그만큼 모질지 못했다.
"네가 정말 쟝과 결혼하길 원한다면, 그보다 그의 어머니에게 신경 쓰는 편이 좋을 거야. 이 집의 실세는 바로 그분이셔. 남편이 아니라구." "정말?" "그렇다니까. 그게 신상에 이로울걸. 너 요리할 줄 아니?" "아니."
"내 솜씨를 눈썰미로 익히면 금방 요리를 잘하게 될 거야."
"나만 혼자 그들과 지내도록 하지 않겠지? 약속하지?"
"한 며칠 동안 네 옆에 있어줄께. 하지만 네가 자신감을 얻을 때까지야. 이제 가서 눈이나 붙여."
다음 날 아침 로버트는 그녀와 해변에 가려고 차를 빌려 놓고 기다렸다. 마조리는 어렵게 다이아나와의 약속에 대해 설명했다.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형편없는 계집애라고."
"그렇다고 나까지 형편없이 굴어야겠니?"
"빌어먹을! 대체 우리가 왜 여기에 온 거야? 난 너랑 단둘이만 있고 싶어."
그는 절망감에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두 소녀는 일을 하겠다고 주방을 찾아갔다. 다이아나가 서툰 프랑스어로 여자들의 일손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네가 정 한몫을 하고 싶다면 영국 요리를 해보거라."
마젤 부인이 다이아나에게 도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싸늘한 미소를 교환했다. 마조리는 약속에 묶여 꼼짝없이 그날과 다음 날의 대부분을 주방에서 보냈고, 다이아나는 전력투구를 다해 마담 마젤의 비위를 마췄다. 하지만 20인분의 점심 및 저녁 준비는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로버트는 남자들과 어울려 사냥을 나갔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 요란스럽게 집으로 돌아왔다. 포도주에 잔뜩 취해 다른 남자들 흉내를 냈지만 그에게는 여성의 시중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부족했다. 로버트는 형편없는 남성 우월주의자였다. 참다못한 마조리는 둘째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를 한쪽 구석으로 불러냈다. 로버트는 나무 아래 의자에 기대고 앉아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이미 만취한 상태였다.
"굳이 샐쭉해져서 뽀루퉁 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잘못하긴 했지만 이미 디와 약속을 했단 말야."
"네 속셈이야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우리의 휴가는 의문 투성이야. 제발 청컨대, 네가 새로 개발한 심리적인 통찰력을 발휘해서 설명 좀 해주겠어? 혹시 내가 너를 원치 않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거니?"
"난 디가 그녀의 남자를 잡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라구."
"아하, 디? 우리 관계는 어쩌구?"
"그야 나도 기회가 있을 때 너를 잡고 싶지."
그녀는 농담조로 받아넘겼다.
"정신 차려, 마조리. 네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기가 막혀서! 또다시 백마 탄 왕자님 행세를 하잖아? 그녀는 샘솟는 분노를 느꼈지만 매서운 응수를 꾹 참았다.
주말경에 두 소녀들은 레몬 응유로 마담 마젤과 친해졌고 브랜디 과자로 그녀의 환심을 사 뒀으며 돼지고기와 사과 파이로 경계심을 해제시켰고 콕카레키 스프로 그녀를 유혹했다. 그리고 체리 잼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제 더 이상 마조리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로버트는 차를 빌렸고, 그때부터 매일 아침마다 그들은 좁고 가파른 도로를 따라 바다로, 해변으로, 또는 광대하고 아름다운 자연림으로 놀러 다녔다. 세상의 눈을 피해 태양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포도주와 다이아나가 싸준 맛있는 간식을 먹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미래에 대한 것만 제외하고. 마지막 날 산행을 나선 두 사람은 얼음처럼 차가운 시냇물이 바위 웅덩이로 콸콸 쏟아져 내리는 깊은 계곡을 찾아냈다.
"난 쉬어야겠어."
마조리는 쓰러지다시피 바위에 앉았다.
"우와! 장관이다."
만화경 같은 경치였다. 강렬한 터키색 바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아련한 보랏빛 수평선과 그사이에 멀리 펼쳐진 초록의 물결이 삼박자를 이루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로버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우리가 꼭 포기해야 할 필요는 없어, 로버트."
돌연 마조리가 온몸으로 간청하듯 말했다.
"난 자기를 사랑해.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은 자기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거야."
그녀는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실패를 예감했다.
"수영이나 하자."
그녀는 바위에서 일어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맨살에 와 닿는 따뜻한 태양이 기분 좋았다. 잠시 후 로버트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난 네 가슴을 사랑해."
그는 그녀를 옆자리에 끌어다 앉히고 꼭 안았다.
"너를 원하는 마음이 강박 관념에 이르렀어. 난 너 때문에 미쳐 가고 있어. 너와 헤어지는 생각을 도저히 못 참겠어."
그녀는 그의 눈 속에서 진실을 읽고 가만히 속삭였다.
마조리는 월경을 걸렸다.
"난 자주 젖어."
그녀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바바라에게 말했다.
"최근에 꿈자리가 뒤숭숭하지 않았다면 아예 생리 주기를 의식조차 못 했을 거야. 그깟 꿈에 난리를 떨다니. 내 주기가 항상 규칙적일 수야 없지."
"가끔 넌 너희 엄마처럼 말하더라."
"아, 바바라!"
그녀는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바바라는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 없어."
바바라가 말했다.
"며칠 내로 병원에 가서 확인하고 깨끗이 잊어버려."
"그래."
그녀는 양손으로 배를 감쌌다. 그녀가 결국 찾아낸 일자리는 해변 호텔의 웨이트레스 직이었는데, 다행히도 근무 시간이 정오부터 오후 11시까지였다. 마조리는 아침에 정신을 못 차렸다. 팁이 짭짤했기 때문에 이럭저럭 저금도 좀 했지만 야간 강좌를 들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거짓된 만족을 일깨운 사람은 바바라였다.
"넌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어. 나와 함께 폭스톤에 다녀오자. 거기에 그런 일을 처리해 주는 의사가 있대. 너희 부모님께는 적당히 둘러대."
마조리는 산부인과 진찰에 지례 겁을 먹었지만 의사는 여성이었고 친절했다. 그녀의 진단은 사형 선고와 같았다. 마조리는 하얗게 질려 사시나무처럼 떨며 바바라에게 격렬하게 말했다.
"난 로버트의 분신을 중절하지 않을 거야."
11월 중순경에 그 의사가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해줄 말이 있어요. 내가 웨일즈의 수녀원에 당신 자리를 만들어 놨어요. 임신한 티가 나기 시작하면 거기에 들어가세요. 당신은 거기 세탁소에서 일하고 밤에 타자와 속기 수업을 듣게 될거예요. 그곳을 떠날 즈음 사무직을 구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출 수 있어요. 그리고 그쪽에서 입양을 주선할 거예요.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지요? 당신은 행운인 셈이에요. 이제 그곳 주소를 받아 적으세요."
"뭐라고 감사드려야 하지요?"
"내 일인데요 뭐. 하지만 절대 시기를 놓치지 말아요."
그때부터 마조리는 아이와 헤어질 순간이 두려웠다. 임신 기간이 자식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하고 소중한 기회였다. 그녀는 로버트의 분신이 태어날 때까지 그 아이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녀의 부풀어 오르는 육체는 그녀와 아이가 공유한 작은 요람이 되었다. 그녀는 아기에게 말을 걸고 그 애를 위해 과식을 삼가고 과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행 비수기 철이라 힘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의 도덕성이 마음에 걸렸다. 로버트는 사실을 알고 자식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가 있어. 그에게 연락해야 해. 그녀는 감히 아이를 기를 수 있는 방법을 로버트가 찾아 주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때, 편지 한 통이 비관적인 상황을 타개했다. 글렌티란의 소인이 찍힌 편지는 그녀를 기쁘게 했다.
“안녕 마조리 몇 자 적는다. 난 여전히 양조장에서 죽도록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셨지만 은퇴하셨기 때문에, 내가 늙은 직원 한 명과 함께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야 해. 난 전에 흥미조차 없었던 술 제조 방법과 세부 사항들을 하나 둘 익혀 나가고 있어.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다.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 머릿속에는 온통 일 생각뿐이다. 언젠가 네가 글렌티란의 성공담을 듣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난 모든 꿈을 접어두고 일에만 매진해야 해. 답장을 보내 주겠니? 어떻게 지내?
사랑을 담아
로버트”
'사랑을 담아, 로버트'가 유일하게 인간적인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이 편지는 그가 그녀를 잊지 않았다는 증표였다. 그녀는 반복해서 편지를 일고 몸에 지니고 다녔다. 로버트에게 사실을 전해야 하겠지만 그가 전혀 듣고 싶어할 내용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쉽게 용기를 내지 못했다.
기차 화장실에서 한바탕 속을 비운 터라 그녀는 춥고 풀이 죽었다. 하지만 발을 단단한 대지에 딛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녀는 역 카페에서 빵과 설탕 커피를 곁들여 먹었다. 웨스트 린턴 행 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그녀는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와 택시 밖으로 스치는 주택을 곁눈질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로버트와 함께 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죽는 날까지 그의 표정을 잊지 못하리. '냉담하다'라는 표현은 모자랐다. 그는 오직 자기 문제에만 골몰해서 그녀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리고 지금은? 당연히 동요할 거야. 내가 꼭 이래야만 할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 결정을 단독으로 내릴 권리가 없었다.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매번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 아이가 나와 그의 자식이니만큼 로버트도 아이의 운명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해. 택시가 진입로로 들어서자, 그녀의 속이 울렁거렸다. 티란 장원 바로 여기구나! 철제 대문 뒤에 작은 집 한채가 그녀의 희망에 불을 지폈지만, 택시는 그 옆을 지나 저택으로 향했다. 아니, 성이라는 편이 옳았다.
"맙소사!"
그녀가 속삭였다. 웅장한 저택이었다. 그녀는 이틀 치의 소중한 팁을 택시 기사에게 주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포치에 섰다. 자신의 부족함과 외로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검정색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맥라렌 씨."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 남자는 뒷걸음질 치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만나러 오신 분이 젊은 주인님이십니까, 아니면 큰 주인님이십니까? 던컨 경께서는 지금 몸이 좋지 않으셔서 의사의 진찰을 받고 계십니다. 맥라렌 마님을 불러드릴까요?"
그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더니 의미심장하게 배 부분에 고정되었다.
"로버트 주인님은 여기에 안 계십니다."
그는 말을 덧붙이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양조장을 경영하는 줄 알았어요. 내가 받아본 편지에 의하면....."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양조장은 하이랜드에 있습니다. 제가 맥라렌 마님께 말씀드릴 테니 서재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이쪽입니다."
지금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택시도 없는데 당장 무슨 수로? 서재는 마조리네 집 한 채가 전부 들어갈 만큼 크고 음습했다.
"빛이 더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네."
레이디 맥라렌이 들어왔을 때 마조리는 긴장했다. 그녀는 몸에 달라붙는 적색 모직 드레스와 적색 스카프, 의상에 맞춘 붉은 립스틱으로 방에 색채와 온기를 불어넣었다. 세련된 머리 모양에서 반지와 목걸이에 이르기까지 부티가 흘렀다. 한때는 진짜 미인이었겠지만 지금은 핏기 없는 피부와 대조적으로 머리가 너무 새까만 탓에 딱딱해 보였다. 마조리는 그녀의 눈에서 그녀가 그다지 마음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읽었다. 아까 느꼈던 온기는 환상이었다. 마조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 방수 외투를 입고 신발 위에 방수용 덧신을 신은 꼴이 얼마나 촌스러워 보일까? 레이디 맥라렌은 담뱃불을 붙이고 신기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까 집사와 똑같은 저 표정! 마조리는 배 위에 손을 맞잡았다.
"당신이 로버트를 만나러 왔다는 아가씨로군요. 그런데 그가 여기에 없어서 어떻게 하지요? 사실 그는 미국에 가 있어요."
마조리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갑자기 말할 수 없는 피로가 엄습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편지를 썼어요."
"약혼했다는 말도 하던가요?"
레이디 맥라렌이 오만하게 물었다. 충격이 얼음 칼처럼 마조리의 복부를 갈랐다. 신경 끝이 바르르 떨리고 눈앞에 빙빙 돌았다.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바보였어' 그녀는 수치심으로 온몸이 떨렸다. 마침내 용기를 낸 그녀가 말했다.
"저는 로버트와 함께 8월에 코르시카에 갔었고 지금 임신한 상태예요. 전 그가 원하는 바를 모르겠기에 미혼모의 집에 입소하기로 했어요. 그쪽 기관에서 출산과 입양을 돌봐 주지만 먼저 로버트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 아기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가씨는 굉장히 현명하군요."
레이디 맥라렌이 미소를 지었지만 왠지 마조리는 소름이 끼쳤다.
"정말 심지가 굳은 아가씨예요. 내 말이 당신의 결단에 도움이 될 거예요. 로버트는 작위를 계승할 테고 그의 아내는 자연적으로 레이디 맥라렌이 될 거예요. 그는 가문의 수장이자, 이 일대 토지를 거의 소유한 대지주예요. 우리는 존경받는 생활을 해야 한답니다. 다들 그걸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많은 환영을 받고 있어요. 여기는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건재하거든요. 내 말뜻을 알아들었겠지요? 당신은 이런 역할을 수행할 재목이 아니에요. 우리로서는 수수방관만 할 일이 아니에요."
"당신네들이 뭐가 그렇게 잘났기에 내가 그렇게 큰 폐를 끼친다는 거예요?"
마조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참으며 대들었다.
"그는 황태자가 아니에요. 당신네들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요. 겨우 양조장을 경영하면서. 임신은 나에게도 달갑지 않아요. 그리고 내 아이는 어떻게 해요?"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요."
앙심 깊은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객지에 나가 있는 외로운 아이의 등을 쳐먹은 거야. 그가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리라 생각하고 결혼을 노리고 임신했지?"
살모사 같은 여자야. 마조리는 그녀의 냉정한 검은 눈을 바라보며 절망했다. 뱀 앞에 선 토끼 같은 심정이었다. 저 여자는 날 한입거리로 생각하고 있어. 순간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모성적인 관대함이 말과 행동에서 풍기는 여자와 여성적인 모든 기질을 거부하고 남성보다 더 잔인하게 구는 인간 이하의 여자.
"로버트가 아이 아버지라는 증거라도 있나?"
그 말에 담긴 악의에 마조리는 현기증을 느꼈다. 제대로 생각 할 수조차 없었다.
"이만하면 당신에게 충분한 모욕을 당했어요."
마조리는 위엄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20세기예요.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로버트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레이디 맥라렌. 택시를 불러 주시면 고맙겠어요."
"안돼요! 내가 당신을 잘못 봤어요. 잠깐 기다려요."
그녀가 돌연 방을 나갔다. 책상에 필기도구가 갖춰져 있었다. 마조리는 이곳을 방문한 이유와 그의 계모에게 오해를 산 경위에 대한 편지를 로버트에게 썼다. 그리고 수녀원의 주소를 남겼다. '내 출산 예정일은 5월 15일이야. 그때까지 자기의 연락이 없으면, 아이의 입양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알겠어' 그녀는 그것을 봉투에 넣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잠시 후 로다 맥라렌이 서둘러 돌아왔다.
"조지."
그녀가 인터콤에 대고 말했다.
"손님을 역까지 배웅할 자동차를 준비시켜요."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수표를 꺼냈다.
"이 수표는 내가 주는 선물이에요. 더 이상은 곤란해요. 이것으로 내 의붓아들이 어떤 약속을 해주리란 생각을 깨끗이 정리하도록 해요."
사각사각 펜 소리와 함께 마조리는 비참해졌다. 레이디 맥라렌이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구나. 그런 절차가 필요하다고 느끼다니, 정말 불쌍한 여자야. 5천 파운드. 마조리는 그 숫자를 읽었다. 처음에는 그 수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수녀원에 기부하기로 했다. 그곳은 이 돈을 유용하게 쓸 수 있어.
"당신의 잔인함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 날이 올 거예요. 레이디 맥라렌."
마조리가 말했다.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예요.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 무릎 꿇고 빌게 될 거예요. 그럼 나는 포치에 나가 차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대의 오만방자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편지를 로버트에게 전해 주세요."
그녀가 집사에게 부탁했다. 차에 타고 대문을 지나서야, 안도감에 그녀의 사지가 떨리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8시인데도 밖은 아직 어두웠다. 바람에 시달리는 단풍나무 가지가 창들을 때렸고 빗방울이 지붕을 두들겼다. 리즈 하디는 마조리의 방에 불을 켜고 먼지를 털었다. 아직 톰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지만 청소기를 돌려야겠어. 습관의 노예인 그녀와 달리 30년 동안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 늦잠을 잘 수 있다니, 정말 웃기잖아. 딸의 책상과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가 여섯 살 때 유원지에서 딴 줄무늬 호랑이 여전히 물방울 앞치마와 모자를 쓴 곰돌이 인형 푸, 적은 용돈을 쪼개 한두 점씩 사 모은 도자기 인형들 현대 시집과 불어로 된 책들과 낡은 만화책 무더기 위에 립스틱과 브레이지어가 널려 있었다. 아이가 이렇게 빨리 성장하고 변하다니. 너무 빨라! 오래지 않아 걱정스런 생각이 리즈의 뇌리를 스쳤다. 왜 선반 위에 새 생리대가 세 봉지나 있을까? 그녀가 마조리에게 한 달에 한 번씩 공판장에서 사다 준 것도 항상 빠듯했는데. 순간 최근에 딸의 속옷을 삶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설마!"
그녀는 바삐 일손을 움직였지만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일어날 즈음, 집안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세탁기 회전이 '탈수'에 이르렀고 천둥 같은 소음이 부엌을 메웠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저 빌어먹을 기계의 스위치를 끌 수 없어?"
남편이 투덜거렸다.
"여보, 얼굴 좀 펴요. 3분이면 끝난다구요. 예전 같지 않지요? 당신이 보일러에 석탄을 채워 넣고 그 밑에 달린 스토브에 불을 지폈던 때가 생각나요? 당신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그 일을 해주셨더랬어요."
그녀는 세탁기가 뚝 그칠 때까지 남편의 비위를 맞추었다.
"세탁기로 한 빨래는 영 신통치 않아."
그가 말했다.
"보일러도 마찬가지였어요."
"마조리는 언제 돌아온대?"
"내일이요."
"흠, 신참 직원에게 휴가를 주다니, 거어참."
"그럴 수도 있지요."
그녀는 말을 흐렸지만 남편과 생각이 같았다. 그래, 맞아. 마조리가 12월에 스코틀랜드를 가다니. 정말 이상해. 그녀가 삶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항상 그렇듯이 요리를 하고 있을 때,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마조리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저 애가 예정보다 일찍 올라왔네. 일이 잘못됐구나. 리즈의 추측을 확인이나 해주듯, 딸이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부엌에 들어왔다.
"네가 내일 돌아올 줄 알았는데."
리즈가 말을 걸었다.
"일찍 왔어요. 어제 막차를 놓치는 바람에 여자 화장실에서 잤어요. 한숨도 못 잔 데다 음식 사 먹을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오늘 첫차를 탔어요. 엄마, 저 배고파요. 집에 오는 길 내내 가장 그리웠던 게 뭔줄 아세요? 당밀을 끼얹은 크럼펫이에요. 집에 당밀 있지요?"
그녀가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 당밀을 어디에 두셨어요, 엄마?"
"거기 윗칸에. 하지만 크럼펫이 없어. 대신 토스트는 어떠냐?"
"아, 좋아요. 코트를 벗어 놓고 돌아올게요."
리즈는 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앞치마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녀는 단풍나무의 헐벗은 가지 틈새로 엿보이는 손바닥 만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그친 하늘에 수상쩍은 황색기가 어렸다. 눈이 올려나? 12월 중반에? 그리고 쟤들이 언제 프랑스에 갔었더라? 아마 8월이었지? 넉 달째로구나! 무슨 수를 쓰기에는 너무 늦었어. 그래서 저 애가 로버트에게 달려갔던 게지. 그녀는 딸의 절망적인 표정을 상기하며 몸서리를 쳤다. 리즈는 아무 의식 없이 부엌일을 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고 손발이 떨렸으며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그래선 안돼! 하느님, 안됩니다! 전 헤쳐나갈 수 없어요. 하지만 아직 닥치지도 않은 문제에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 그녀는 마음을 달랬다.
3주가 지났고 마조리는 점점 창백하고 우울해졌다. 크리스마스에 이어 매서운 바람을 동반한 1월이 찾아왔다. 하디 일가는 매일 밤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영국이 유럽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특히 리즈는 변화가 두려웠지만 그중 임금 및 물가 동결 조치에 반색을 했다. 남편의 빈약한 연금과 마조리의 보조로 가계를 꾸려나가기가 힘들었다. 지난 여섯 달 동안의 인플레이션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1월 22일 하루에 주가가 폭락했고, 생활이 더 어려워지리란 것이 눈에 보였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아빠가 불길하게 말했다. 29일 자로 마조리가 19살이 되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돈을 긁어모아 그녀가 하이 스트리트의 최고급 상점에서 봐 뒀던 하이힐을 사줬다. 앞 장식이 달린 검은 양가죽 구두였다. 그날 밤 그녀가 신발을 선보이자, 아빠가 힐끔 보고 말했다.
"몸무게가 늘었구나?"
딸은 얼굴을 붉혔다. 리즈는 뜨개질거리를 내려놨다.
"이제 내가 저 애의 문젯거리를 알아낼 때가 됐어요."
어떻게 하지?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왜 그에게 아무 소식이 없을까? 그녀의 분노는 공포보다 강했다. 그가 모르는 척 한다면, 그녀는 자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비정한 행동이지만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지 못한 상황에서 아이를 기를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는 최고를 누릴 권리를 가졌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그녀는 속삭였다. 아빠가 그녀의 불어난 체중을 눈치챘으니, 이 집을 떠나야 해.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문간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다 아셨구나.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신 거야. 엄마는 항상 문제를 회피했다. 그건 엄마의 살아가는 방법일 뿐 잘못이 아니었다.
"엄마, 난 6개월 동안 직장을 구해서 멀리 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내 한 몸을 잘 돌볼게요. 모든 게 다 괜찮아요. 내 말뜻을 아시지요?"
리즈는 망연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공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네가 모두 괜찮다고 약속한다면야..... 엄마가 얼마나 걱정해 왔는지....."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다 생각해 뒀어요. 엄마, 내가 입주직을 구했다고 아빠에게 말씀해 주세요. 수녀원의 세탁소 일이지만, 밤에 타자와 속기 수업을 듣고 실습할 기회가 있어요. 난 자격증을 취득할 거예요. 이상적이잖아요? 한 가지 집을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려요. 그런데 여러 달 동안 생활비를 낼 수 없으니까 아빠의 부담이 커질텐데....."
"여섯 달 정도는 괜찮아. 마지, 넌 항상 영리한 아이였다. 네가 일을 제대로 처리할 것으로 믿는다."
엄마는 이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힘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럼, 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마."
그녀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말했다.
"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를 안심시키자 그녀의 기분도 좋아졌다. 다 사실이잖아? 여섯 달만 참으면 모든 문제에서 행방될 거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성인의 삶에 첫발을 내딛다니. 그녀가 품었던 원대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하등 동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엄마의 입버릇이 떠올랐다.
"밑바닥까지 떨어지면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어."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오랫동안 주시했다. 부은 얼굴과 기미낀 피부, 눈 밑의 시꺼먼 그림자. '마조리 하디, 넌 바보야. 네 계획들을 생각할 때마다 웃겨서 배꼽이 튀어나오겠다. 더 이상 재난을 부르지 마. 내년 크리스마스에 넌 행복하고 부자가 되어 있을 거야. 그리고 뭘 해야 할지도 알게 될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성숙해지란 말야'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약속했다.
"좋아 넌 해낼 수 있어. 내가 보장할게."
마조리는 수녀원의 세탁실에서 목청껏 노래하며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잠자면서도 다림질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각각 임신 개월 수가 다른 스무 명의 미혼모들과 합창하는 '워터루'의 음률이 마음 속 가득히 울려퍼졌다. 그들은 이 지역 최고의 합창단일 것이다. 대중 앞에서 공연이야 못하겠지만 그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터져나왔다. 노래는 시간을 보내는 특효였다. 지난 5개월 동안 그녀의 손을 거친 셔츠가 수 백장에 이르렀고, 그녀는 가장 빠르고 깔끔하게 다림질을 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세탁소에서 나오는 이윤은 이 기관의 운영 자금이었기 때문에, 미혼모들은 그냥 자선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뭔가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꼈다. 이제 곧 많은 친구들을 뒤로하고 이곳을 떠나게 되겠지.
수녀들은 친절했고, 미혼모들은 그녀의 친구였다. 그녀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던 그들 하나하나의 삶과 실망감과 실수를 알고 있었다. 마조리도 감감무소식인 로버트에 대한 비통함에 괴로워했다. 그녀와 자식을 도외시한 로버트의 처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일각이 여삼추처럼 느리고 지루한 생활 속에서 후회의 불꽃은 전보다 더 켜졌다. 최근에 그녀는 태내의 꼬마 로브와 나누는 미묘한 대화에 열중하게 되었다. 불어나는 체중은 고역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그녀의 임신 기간 중 절반은 최소한의 불편과 최대한의 경이와 만족이 뒤엉킨 나날이었다. 어서 아이를 품에 안고 싶었다. 다른 미혼모들처럼 그녀는 아기를 떠나보내는 그 날이 두려웠고, 밤잠을 설치며 자신의 결정을 고민했다. 하지만 항상 결론은 똑같았다. 그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훈련도 받지 못하고 직업도 없고 가난한 부모를 모신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제대로 키울 수 있단 말인가? 감독 수녀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만하면 됐어요, 마조리. 이제 휴식 시간이에요."
그녀는 신기하게 온몸에서 활기가 넘쳐흘렀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가 우유를 한잔 마시고 자리에 누웠다.
"잘 있었니, 로브. 운동할 시간이란다."
그녀가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꼬마 로브는 축구 연습을 즐겨했지만, 지난 며칠 동안 태내의 발길질이 뚝 그쳐서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마음이 부산했다. 침실에 먼지 하나 없었지만 다시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 양동이와 걸레를 가져다가 선반을 닦기 시작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누울 만큼 작은 방이었지만 그녀는 항상 꽃장식을 잊지 않았다. 때는 5월 중순이었고, 매일 아침마다 장미와 데이지 아이리스를 꺾어다가 꽃꽂이를 했다. 선반을 반쯤 문질러 닦았을 때, 오장 육부를 끊는 듯한 깊은 통증이 슬슬 찾아들었다. 아픔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산통일까? 이만큼 아플 수도 있을까? 그녀는 출산에 대한 교육을 충분히 받았지만 참을 수 없는 아픔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마조리는 아그네스 수녀를 불렀다. 그녀가 즉각 달려왔다.
"이제 겨우 시작이에요. 서두르지 말아요."
그녀가 마조리를 안심시켰다.
"한참 있다가 다음 고통이 찾아올 거예요. 한 6시간쯤 지나야 본격적인 출산이에요. 격통 주기를 잘 헤아리고 밖으로 나오지 말아요."
마조리는 마루 청소를 끝내고 꽃병의 물을 갈았다. 오늘 타자 수업을 거르겠네.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견딜 수 있을 테니 아무 걱정 말아요. 나중에는 다 잊고 다시 임신하게 될걸요."
아그네스 수녀는 야박하게 말하고 방에서 나갔다. 제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수녀님이 알면 얼마나 알겠어? 마조리는 공포에 질린 채로 침대에 앉아 기다렸다. 고통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은 그녀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세상에 오직 이 고통만이 존재했다. 고해의 바닷속에 퐁당 빠진 것 같았다. 시간이 정지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침대 머리에 매달렸다. 이제 지나갔다. 그녀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몽롱하고 머리가 붕 뜬 기분으로 복도로 나갔다. 발자국 소리가 달려왔다. 아그네스 수녀였다.
"마조리, 긴장을 풀고 누워요. 출산을 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동안 공부했던 내용을 기억해요. 아픔을 받아들여요. 긴장하면 아이에게 나빠요."
"하지만 ..... 이렇게 아프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가 출산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이 점을 명심해요, 마조리. 고통은 지나가요. 자연은 격통 사이에 당신이 회복할 시간을 줬어요. 당신은 모든 것을 견뎌내고, 최고 의료진의 도움을 받게 될 거예요. 하지만 지금 병원에 가기에는 너무 일러요. 진정하도록 노력해 봐요."
"아, 하느님..... 하느님..... 또 와요."
그녀는 수녀의 손을 꼭 잡고 몸부림치며 터지는 비명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아픔에 굴복했다.
"내 아기도 아플까요?"
"산모가 긴장하면, 아이가 나오기에 더 힘들어진다고 들었어요."
5시간 후 그녀는 병원 침대에 누워 아픈 와중에 초 단위로 짧아진 격통 주기를 헤아렸다. 아그네스 수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병원까지 동반하여 그녀에게 정신적인 원조를 했다.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었다. 마조리는 관장과 면도와 몸 여기저기를 쿡쿡 찔러대는 진찰 등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이 아픔과 비견될 만한 것은 없었다. 이제 그녀는 고통의 노예였다. 그져 순종하고 참고 싸우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육체는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라 고통스런 고문을 당하는 조개가 되었다. 그 안에 담긴 꼬마 로브는 시간을 끌며 꾸물거렸다. 한 간호사가 오더니 그녀의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검은 머리예요."
간호사는 지극히 객관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산도가 꽤 넓어져서 아기의 머리가 한 1인치 가량 보여요. 계속 하세요. 순산하실 거예요."
"순산?"
그녀가 아그네스 수녀에게 중얼거렸다.
"난 금방 죽게 될 거예요. 지금이 20세기 맞아요? 무슨 수를 쓸 수 없는 거예요?"
그녀는 너무 지친 나머지 그냥 누워 신음이나 하는 게 고작이었다. 한참 후에 그 간호사가 그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됐어요. 아기가 나오고 있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마조리는 간호사와 아그네스 수녀의 부축을 받고 출산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높은 출산 테이블에 올라갔을 무렵, 꼬마 로브는 세상 빛을 보기 일보 직전이었다.
"밀어요."
의사가 소리를 질렀다.
"잠깐 기다려요. 탯줄이 아기의 목에 감겼어요. 꾹 참아요."
"못해요..... 못해요....."
"힘을 빼지 말아요!"
근육에 힘을 주고 아이를 밖으로 밀어내고픈 충동을 참는데 초인적인 의지가 요구되었다.
"됐어요. 탯줄을 절단했습니다. 이제 있는 힘껏 밀어요. 숨을 크게 쉬고!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밀어요..... 조금더..... 어서요. 꼭 해야만 해요. 더 세게....."
하느님, 저에게 힘을 주시고 아기를 살려 주세요! 간호원들에게 고정된 그녀는 온몸의 근육을 불러 모아 마지막으로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헐떡거리고..... 또 헐떡거리고.....신음했다. 그때 아이가 다리 사이로 주르르 빠져나왔다.
'잘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미세요.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후산이 남았어요."
그녀는 너무 지쳤다. 완전히 탈진했다. 의사의 지시에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깊은 무기력 상태에 빠졌다.
"아기는 건강합니다. 완벽하게 정상이에요. 건강하고 예쁜 아기예요."
그녀의 귀에 의사의 말이 들어왔다.
"사내예요, 계집애예요?"
그녀는 궁금한 듯 중얼거렸다. 점점 깊은 호수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마조리.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내 아기를 보여주세요. 제발 제발요."
"미안하지만 안돼요. 지금 아기를 보면 나중에 마음만 괴로울겁니다."
"내 자식이에요. 아기를 나에게 주세요. 부탁이에요. 그 애를 꼭 안아 봐야만 해요."
그녀는 일어나 앉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간호사가 아기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마조리는 처량하게 다시 누웠다. 후산은 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아기와 헤어진 슬픔에 압도당한 마조리는 거의 해탈한 상태에 이르렀다. 나중에 병실의 구석 침대에 혼자 있게 되자, 마조리는 오열을 터뜨렸다.
책상을 가운데 두고 원장 수녀와 마주 보고 앉은 마조리는 애써 평온을 유지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손에서 땀이 나고 위장이 요동쳤다. 그녀는 문화인답게 행동하려 했지만 젖이 불어 팔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픈 데다 너무 슬펐다. 비탄으로 머리가 무거웠기 때문에 고개를 들고 있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었군요. 잘 됐어요."
원장 수녀가 말했다. 마조리는 아기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너무 힘든 경험이 아니었기를 바래요. 당시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기부한 5천 파운드 수표를 돌려줘야 할 것 같아요. 그 돈은 당신에게 필요할 거예요."
성스러운 원장 수녀는 사랑하는 것과 몸을 파는 것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
"받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마조리가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고맙게 받겠어요. 자 이 안에 당신의 타자와 속기 자격증이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사무를 과외로 도와준 보답으로 추천서를 썼어요. 직장을 찾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숙식비를 제외한 세탁소 보수도 계산해 뒀어요."
그녀는 봉투를 열었다. 10파운드 주급에서 공제액을 제한 현금 1백 파운드가 들어 있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현명하고 늙은 한 쌍의 눈이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주시했다.
"아이를 빨리 잊도록 노력해 보세요. 이미 놓친 것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적인 삶을 이끄세요. 당신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있어요. 신의 은총으로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아이와 연결될 만한 기회를 줄 수 없어요. 미안해요."
아이와 연결될 만한 기회? 9달이나 한 육체를 공유했던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야? 하지만 그녀의 등을 떠밀어 이곳에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타인을 돕는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때 비서가 입양 동의서를 가져와서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펜도 손에 쥐어졌다. 한참 후에 그녀는 팬을 내려놓았다.
"못 해요..... 제가 어리석어 보이시겠지만 입양을 동의할 수 없어요..... 아이를 보기 전까지는."
"하지만 내가 이미 그 이유를 설명했잖아요.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원장 수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글쎄..... 모르겠어요..... 전 당연한 일을 하고 싶어요."
"이 편이 당신과 아기의 미래를 위해 좋아요. 내 말을 믿어요. 당신 아기는 풍족하고 가톨릭적인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한 전문직 부부의 가정으로 입양될 거예요. 그분들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왔어요."
맹렬한 질투가 심술궂은 회오리바람처럼 그녀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다.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엄마는 바로 나야. 마조리가 펜을 집고 동의서의 첫 장을 죽 훑어보았다. 계집애로구나!
"제가 딸을 낳았군요."
이 수녀원의 육아실에 나와 로버트의 분신이 누워 있어. 귀여운 내 딸이! 그녀는 아찔한 기분으로 펜을 내려놓았고 서류를 밀었다.
"동의하지 않겠어요. 저는 아기를 원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한 거예요. 아기를 포기할 수 없어요. 그 아이에게는 제가 필요해요. 난 그애를 봐야만 해요. 제발..... 제발요......저는 그 아이를 사랑해요. 도와주세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 젊고 직업도 없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아, 마조리. 방에 가서 기도하세요. 점심을 올려보내고 사회 복지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어요. 준 톰턴은 아주 좋은 여성이에요. 그리고 신부님과도 이야기해 보세요."
원장 수녀는 걱정스러운 듯 말을 맺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4시간 후에 마조리와 신부와 준 톰턴은 휴전 상태에 도달했다. 마조리가 직장과 적당한 집을 마련할 때까지 아기는 수녀원의 탁아소에 남게 되었다.
"당신이 아이 곁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 아이는 법원의 감독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준이 설명했다.
"나중에 당신이 장시간 노동을 하다가 적발되면 복지 기관이 당신과 아기를 떼어놓을 거예요. 더 심각한 사태가 생길 수도 있어요, 마조리."
"난 내 딸을 포기할 수 없어요."
마조리가 되풀이했다.
"아기를 보러 갑시다. 우리가 왜 강경하게 입양을 권유하는지 궁금하지요? 이제 그 이유를 보여줄게요."
가까운 마을에 위치한 한 채의 집에 15명의 소녀들이 '여사감'의 보호하에 살고 있었다. 그중 16살이나 먹은 소녀도 한 명 있었다. 짙은 금발을 쫑쫑 땋아 늘어뜨린 머리채와 주근깨 가득한 콧잔등이 예쁘장한 그녀는 무려 4살 때부터 이곳에서 엄마가 집으로 데려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11살짜리 까무잡잡한 피부의 한 소녀는 세살 때 보호 시설에 들어왔고, 매주 엄마의 방문을 기다렸지만 대개 실망만 맛보았다. 가슴 절절한 사연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친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준이 마조리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리고 대부분 실망하게 될 거예요. 가끔 여러 주일만에 친모가 자식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1년에 한 두번 방문 하는게 고작이에요. 그런 주제에 약속들은 잘하지요. 주말이 되면 저 소녀들은 잔뜩 희망을 품고 대문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답니다. 아무리 주의를 돌리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준 그만 비수를 들이대세요. 말뜻을 알아들었어요."
"그럼, 갈까요?"
준이 엄격하게 말했다. 드디어 탁아소에 도착하자, 마조리는 누가 가리키지 않아도 한눈에 제 자식을 알아보았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기를 안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사랑이 솟구쳤다. 그녀는 '하느님!'하고 속삭였고 경외심에 사로잡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슬프면서도 행복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는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그녀의 딸은 어디 한군데 빠지지 않고 완벽했고 연약한 동시에 아름다웠다. 로버트를 닮은 검은 머리, 그녀를 닮은 입술, 푸른 기 도는 검은 눈동자는 로버트처럼 갈색으로 변하리라.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어쩌면 이렇게 길까!
"이 조그만 손톱 좀 보세요, 정말 아름다워요. 이렇게 사랑스런 아기는 처음 봤어요."
눈물이 아기의 손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아기를 안은 채 자리에 앉았다. 당장 아기를 데리고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그녀는 아기의 이마에 키스하고 탐욕스럽게 아기의 모습을 마음에 새겨 뒀다. 한동안 못 보게 되겠지. 살살 아기를 어루면서 그녀는 미래를 꿈꾸었다.
"그만 가야 해요, 마조리."
준이 그녀에게 말했다.
"수녀님들은 당신이 없는 동안 아기에게 세례를 주실 거예요. 생각해 둔 이름이 있어요?"
"이름이요?"
사내아이 이름은 수 백개도 넘었다.
"라나는 어떨까요? 예쁜 이름이잖아요?"
"라나, 좋네요."
마조리는 다정하게 딸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때때로 삶이란 말할 수 없이 잔인하군요."
그때, 라나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딸의 울음이었다.
"다른 아이들을 기억해 두세요. 빨리 아이를 데려갈 수 없다면 입양시켜야 해요."
준은 마조리를 수녀원까지 데려다 주며 말했다. 마조리는 딸이 버림받은 채 울고 있을 걱정에 밤잠을 설쳤다. 그녀는 일찍 일어나 런던행 첫차를 탔다. 이제 직장을 구해야 할 시간이야. 덜커덩거리는 기차 소리가 준의 말처럼 메아리쳤다. '빨리 아이를 데려갈 수 없다면 입양시켜야 해요......입양시켜야 해요......입양시켜야 해요'
"내가 황소처럼 열심히 일해서 널 빨리 데리러 올께. 그때까지 참고 있어. 다링."
하지만 암담한 현실은 그녀의 젖이 퉁퉁 불어 있는데도 예쁜 딸아이는 분유를 먹어야 했다.
마조리에게는 집과 직장과 탁아소가 차례대로 필요했다. 그녀가 전화한, 첫 번째 직업 소개소는 자식이 딸리지 않은 여성만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아이는 안됩니다. 이 업계에서 아이를 둔 여성을 원하는 고용주는 한 명도 없어요."
다른 곳에 연락했지만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직업소개소마다 뛰어다녔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기 사절' 날이 어두워지고 비마저 내리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신발굽이 하숙집 '스위스 코티지'의 밖에서 부러졌다.
"빌어먹을!"
그녀는 1주일에 5파운드짜리 작은 방을 구했다. 여주인은 아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딱 부러지게 거절하진 않았다. 잠시 후에 그 이유가 밝혀졌다. 작고 어둡고 외풍이 심한 형편없는 방이었다. 창문이라곤 좁고 그을린 발코니로 통한 프렌치 문이 전부였다. 그녀는 비극적인 분노를 경험했다. 이따위 방이 그렇게 비싸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가스대 하나와 작은 히터가 고작인 곳에서 아기를 키울 수 있을까? 이건 범죄야. 하지만 그녀는 그 방에 입주했다. 이미 날이 저문 데다 신발까지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방은 어둡고 습기 찼다. 그래서 마조리는 여주인에게 빌린 얇은 담요를 덮고 오들오들 떨며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자 그녀의 목이 컬컬했고 머리가 쪼개지듯 아팠다.
지하철이 고장으로 선로에 멈췄기 때문에 그녀는 두 시간이나 서서 생고문을 당했다. 10시에 직업소개소에 도착하자 명랑한 요크셔 아가씨가 그녀의 자격을 철저하게 확인했다. 교장 선생님의 졸업사 이후 '사무실 하녀'란 용어가 가슴 깊이 심어졌지만 찬밥 더운밥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귀한 목돈을 까먹지 말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초보자를 받아 주는 곳은 보험사 타자실 밖에 없었다. 보수는 주급 12파운드에 불과했지만 단 1주일만 근무해도 '경험자' 딱지를 붙일 수 있다고 요크셔 아가씨가 지적했다. 그래, 12파운드로 라나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방에선 아기를 못 키워 반경을 더 넓혀서 집을 찾아봐야 하겠지만 아직 산후 조리 중이었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초콜릿으로 저녁을 때우고 깊은 잠에 빠졌다.
지루해, 지루해, 지루해. 이게 나의 인생이란 말야? 절망감을 안은 채 그녀는 사무실을 둘러 보았다. 황량한 형광등 불빛 아래 모든 것이 칙칙해 보였고 꼭 닫힌 창문 덕분에 먼지가 밖으로 빠지지 않았다. 네 명의 창백한 타이피스트들은 이 무덤 속에서 늙고 시들어갔다. 애미 베이츠 양같은 경우는 35년째 여기에서 근무해 왔다. 오늘로 마조리의 보험회사 근무가 3주째 접어들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타자기에 전원을 꼽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니면 인내를 배우게 될까? 다른 동료들은 임 이어폰을 꽂고 팔자 눈썹과 강렬한 눈빛을 한 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자판 위를 쏜살같이 달렸다. 그들은 9시부터 5시까지 로봇이었고, 자유시간에도 점점 로봇이 되어 가로 있을 거야. 마조리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앞으로 그녀는 어떻게 되어 갈까? 모든 창의력과 기쁨이 곧 말라 버리겠지.
그녀의 마음 한 귀퉁이에는 항상 요람에서 울고 있는 가녀린 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까? 라나는 배불리 먹고 있을까? 외로울까?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아,우리 아기. 난 열심이란다, 노력 중이야. 휴식 시간에 마조리는 두 명의 자식이 딸린 기혼동료에게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아이들이 병에 걸리는 날에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전업주부인 동생이나 엄마에게 아이들의 병간호를 부탁하는 수밖에. 평소에는 아이들을 탁아소에 막기지만, 그 속은 불결하고 정원이 초과된지라 세심한 보살핌을 기대할 수 없어."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난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하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점심시간에 미친 듯이 쇼핑을 하고 퇴근 후에 전철로 탁아소에 들렸다가 또 다시 전철과 버스에 30분간 시달려야 집에 도착해. 저녁에 아이들 밥먹이고 목요시키고 재운 후에야 집안 일을 시작하는 거야. 난 계속 생각하지, 내 인생이 영원히요모양 요꼴은 아닐 거라고말야. 마지 내 충고를 잘 들어둬. 자기를 돌봐 줄 수 있는 남자와 결혼 해. 그렇지 안으면 자식을 갖지 말든가. 언젠가 국가에서 예산을 들여 좋은 수준의 탁아소가 늘어나겠지만, 지금 당장은 가슴 답답한 실정이야."
다음 날 마조리는 두 명의 세일즈맨이 제기한 수수료 지불 요구서를 작성했다. 두 건 모두 월급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월급 액수를 본 순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11시에 사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페티 씨와 면담을 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좋아요, 하지만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요."
비서가 말했다.
"사장님이 잠깐 휴식을 취하시는 정오에 올라와요."
12시 정각에 그녀가 모습을 보였다. 사장은 좀 실망스러웠다. 회색 정장을 걸친 지루한 남자로 실내 장식과 꼭 어울렸다. 약간 머리가 벗겨졌고 뿔테 안경으로 커버한 눈이 약간 사팔이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당신이 여기에 온 행위는 실수였소, 하디 양."
그는 도버대학 출신 풍의 점잔빼는 어조로 말했다.
"직원들 문제는 인사과장에게 맡기고 있지만, 당신이 여기 온 이상 문제를 들어보기나 합시다."
"제가 보험 상품을 팔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페티 씨. 저는 매우 근면 성실하고 유능하다고 자신합니다. 하지만 사장님께서는 저를 잘 모르실 테니까 이렇게 이력서를 작성해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제 성적은 에이급이었고 수학도 잘했으며....."
그는 손짓으로 그녀의 장광설을 잘랐다.
"당신이 당신과 내 시간을 낭비한 점이 유감이오, 하디 양. 문제의 관건은 아이큐가 아니라 신뢰감을 파는 데 있소. 우리는 고객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팔고 있소. 즉, 고객들이 우리를 믿게 만들어야 하오. 그 때문에 세일즈맨은 올바른 이미지를 가질 필요가 있는 거요. 얼굴 좀 반반한 아가씨가 나선다고 되는 일이 아니오, 알겠소?"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약이 올라서 가늘어진 사장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여기 세일즈맨의 관심사는 오직 자기들 앞에 떨어지는 수수료뿐이에요. 제가 그걸 아는 이유는, 그들의 요구서와 사장님의 답장을 제 손으로 작성했기 때문이에요, 페티 씨."
사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자 그 고상한 억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그의 변화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봐, 하디 양. 아가씨가 열심히 일하고 야심이 큰 건 알았어. 그러나 보험 판매는 어림도 없어. 아가씨에게는 태도 이미지 억양이 전부 결여되었어. 그러니 착한 여자답게 어서 타자실로 돌아가시지."
아, 저 눈 사이를 한 방 먹이면 속이 시원할 텐데.
"가정주부들은 어떨까요, 페티 씨? 저는 그들을 상대로 보험을 팔 수 있어요. 제 수준은 그들과 동등하잖아요. 가가호호 다니며 방문 판매를 하겠어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첫 달에는 무보수로 일하겠어요. 그저 일을 가르쳐만 주세요."
"내 말을 잘 듣게, 하디 양."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대다수의 아낙네들은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해. 보험 같은 문제는 남편이나 아버지, 혹은 남자 형제들에게 떠넘긴다네. 그런데 문제의 남자들은 여자를 믿지 않아. 아가씨는 양성 모두를 잘못 봤네. 난 세일즈의 법칙을 파악한 몸인데 아가씨는 그랬어."
그녀의 분노가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이 자기만족에 겨운 독선적인 남자 같으니! 그녀는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회사에 판매 여사원은 한 명도 없지요? 이것은 명백한 성차별입니다. 여성 인력이 전 노동력의 4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는 이 마당에 여성들도 얼마든지 보험 가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맞아, 하디 양. 그리고 난 내 고용인들을 선택할 수 있지. 아가씨는 모가지야!"
결과적으로 마조리에게 행운의 날이었다. 직업소개소에서 해고 석달 전 사전 경고 조항을 들어 석달치 봉급을 지불하지 않으면 고소를 걸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덕에 페티 씨가 돈을 내놓았다. 마조리는 방을 내놓고 총 244파운드를 가지고 도버로 돌아갔다.
7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하늘은 들채꽃처럼 파아랬고 바다는 그보다 더 짙었다. 미풍에 살랑거리는 꽃송이들은 윙윙거리는 벌의 침입에 다소곳이 복종했다. 마조리 역시 로버트와 가정, 라나와 안정감이 그리워 비탄에 굴복했다. 그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면접을 보았다. 그 외에는 절벽이나 들판을 쏘다니며 자연과의 일체를 향유하고 타자실에서의 탈출을 자축하거나 미래를 걱정했다. 그때 대형 사고가 터졌다. 아빠의 옛 하역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연금도 날아갔다. 커피타임에 엄마가 그 나쁜 소식을 전했다. 마침 아빠는 낮잠을 취하고 있었다.
"마지, 아빠는 일자리를 구해야 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으신가 봐. 회갑이 다 되셨으니, 마땅한 자리도 많지 않을 테고. 그래서 우리는 한 동안 네 벌이에 의존해야 할 형편이야. 제발 알프의 제의를 받아들이렴. 그는 항상 널 원해 왔어."
"최소 생활비가 얼마나 들어요?"
마조리는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알아차렸다.
"네 아빠에게 받던 생활비는 주당 16파운드였어. 워낙 빠듯해서 아빠의 맥주 값을 대지 못하겠지만, 아빠는 보트 모델을 만드는 솜씨로 용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엄마, 난 그 정도는 벌 수 있어요. 지금 당장 1주일 가계비를 현금으로 드릴게요. 한동안 먹고 살 만한 돈은 충분해요. 대신 나에게도 엄마의 도움이 필요해요. 즉 엄마가 내 등을 긁어 주면 나도 엄마 등을 긁어 드릴게요. 어떠세요?"
마조리가 로다 맥라렌의 말까지 포함한 모든 사연을 다 털어놓을 즈음, 엄마는 앞으로 놓인 시련에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다시 법령을 선포했다. 비록 마조리는 아빠가 무슨 권리로 주도권을 장악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엄마와 내가 네 딸을 입양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빌어먹을 사회 복지원 등쌀에 배겨날 수 없을 거야. 그들은 아기를 데려가려고 별 트집을 다 잡을 거야. 게다가 네 평판도 생각해야지. 언젠가 너도 결혼할 날이 올 텐데. 네 엄마와 나는 먼 친척을 맡았다고 둘러댈 거야. 그러니 너는 엄마를 모시고 웨일즈에 가서 아기를 데려오너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아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내버려 두면 어떻게 하니?"
"그럼요, 그 불쌍한 것을 당장 데려와야만 해요."
엄마가 장단을 맞췄다.
"급살을 맞아 죽을 맥라렌 놈들!"
아빠가 말했다.
"그놈들이 네 딸에게 손만 댔다 봐라, 내 본때를 보여줄 테다. 그런 일을 미연에 막고자 입양을 하자는 계야. 그놈들은 반드시 응보를 받게 될 거다. 내 말을 새겨들어."
마조리는 행복하게 가방을 꾸렸다.
마조리는 햇살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미친 방망이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침대에서 일어나 요람을 들여다보고, 소중한 딸이 아무 탈 없이 잘 자고 있음을 재빨리 확인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과 발그레한 두 뺨. 너무 사랑스러워서 딸의 모습에 마조리의 몸에서 힘이 솟았다. 잠옷 바람으로 부엌에 내려간 그녀는 아기의 인기척에 귀를 세우고 분유를 타고 우유병을 데웠다. 그리고 침실로 돌아와 커튼을 제치고 동녘 하늘을 살폈다. 보라색 기운이 감도는 연한 굴빛의 하늘이었다.
"오늘은 화창한 날이 되겠구나, 우리 아기야. 붉은 밤하늘은 양치기의 기쁨, 붉은 아침 하늘은 양치기의 경고라네."
그녀는 낮게 흥얼거렸다. 어린 시절을 풍요하게 채워 준 흘러간 옛 가락과 민간 지식을 딸에게 가르치는 일은 무한한 즐거움이었다. 갓 석달이 된 라나는 엄마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마조리가 요람에서 딸을 들어 올리자, 라나가 제 아비를 꼭 닮은 갈색 눈을 뜨고 처음으로 방긋 웃었다. 어머 세상에! 믿음과 사랑과 일체감이 모두 그 미소에 담겨 있었다.
"라나, 네가 날 알아봤구나..... 아! 요 이쁜 것!"
커다란 혹 덩어리가 목에 걸렸고 콧날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라나를 포대기에 싸고 젖꼭지를 물려 부엌으로 내려갔다. 엄마가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마조리는 식탁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진짜 사람을 알아보고 짓는 미소였어요. 얘는 나를 사랑해요, 엄마. 이거 보세요."
그녀가 딸의 통통한 턱 밑을 간지럽히자 아기는 까르르르 웃으며 손을 허공에 뻗고 뭔가 집는 시늉을 했다. 리즈는 딸에게 커피를 따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3개월은 그맘때야."
그녀는 손녀에 대한 강한 사랑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딸이 아기를 어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리즈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마지가 일자리를 구하러 집을 비운 동안 라나가 지난주에 할머니에게 웃어 보였다는 말을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 딸이 행복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앞에 놓인 험난한 역경에 눈물이 절로 쏟아졌다. 그녀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버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기는 젊은이들에게 너무 벅찬 존재야. 내 나이쯤 되면 아기가 다음에 뭘 한다는 것을 훤히 알게 되지. 그리고 마지가 무슨 수로 이 어린 것을 키우면서 우리들까지 부양할 수 있겠어? 그건 옳지않아. 어쩌면 나도 일을 구해야 할 거야. 그럴 필요가 있어. 하지만 최소한 라나를 좀더 키워놓는 일이 급선무야. 그리고 아빠는 누가 돌봐 드리지? 요즘 그는 술집은 고사하고 집밖에 나가지도 않는데. 아빠는 마치 며칠 전에 전쟁이 일어나서 생명이 경각에 달린 것처럼 굴어. 참 이상도 하지! 도화선에 불이 당겨진 폭탄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더 이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 버린 비만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이 얹혀졌어. 저 애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 리즈는 이 집에서 가장 따뜻한 부엌에서 딸이 라나를 목욕시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엄마, 도와주세요! 난 늦었어요. 옷을 입어야겠어요."
나중에 마조리가 외쳤다.
"라나가 쉽게 잠들지 않네요. 엄마, 좀 봐주세요."
마조리가 위층으로 올라간 후, 리즈는 요람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이상 없었다. 아빠가 대들보에 줄을 연결하여 흔들 요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리즈는 부엌에서 일하면서도 아기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양이가 접근하지 못한다는 이점도 있었다. 티비는 흔들거리는 것을 싫어했다. 항상 유모차와 아기 침대에 기어드는 녀석이 흔들 요람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대신 그 노랑색 눈을 아기에게 고정 한 채 장식장 꼭대기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지가 서둘러 내려왔다.
"아주 예뻐 보이는구나. 하지만 뭘 좀 먹어야지."
"안돼요! 너무 신경이 날카로워요. 엄마, 행운을 빌어 주세요." 리즈는 딸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험회사 타자실에서 근무할 때 구입했던 스위스제 레이스 블라우스와 감청색 스커트가 딸에게 잘 어울렸다. 항상 우리의 곁에 있으면 좋으련만. 마조리는 매일 기운차게 나갔다가 힘없이 집에 돌아왔다. 저 애에게는 좋은 남편이 필요해. 마조리와 라나에게 행복한 가정을 줄 수 있는 남자 말이야. 리즈가 잠깐 세탁기에 시선을 준 틈에 딸은 나가고 없었다.
완벽한 날이야. 마조리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생각했다. 8시 30분에 지방 광고지를 출판하는 작은 인쇄소 주인과 면접 약속이 되어 있었다. 시시한 겉보기와 달리 그 광고지에는 켄트의 남부를 포괄하는 수백 가지의 서비스와 매매와 구인 광고가 빽빽하게 실려 있었다. 이름도 거창한 '켄티쉬 홈 뉴스'는 격주 간행물이었고, 그 사장 제임스 씨는 세일즈맨을 구한다는 광고를 낸 바 있었다. 그녀가 잘 말해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인쇄소는 항만 뒤쪽 창고에 위치했지만 버스 정류장과 가까워서 찾기 쉬웠다. 지저분한 계단을 올라가서 종이 간판이 붙은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제임스 씨."
"안으로 들어와요."
그녀는 어두운 사무실 한구석 책상에 구부정하니 앉은 인물을 포착했다. 너무 추레해! 충격과 실망감이 교차했다. 그는 최소한 이틀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았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 실핏줄이 얽힌 피부, 충혈되고 흐리멍텅한 저 눈빛 좀 봐! 곤드레만드레 취했구나. 그녀가 발을 내딛자 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녀는 치마에 의자의 때가 묻지 않도록 살짝 앉아 다리를 꼬았다.
"저는 일을 구하러 왔습니다."
"하지만 남자 사원을 구한다고 광고를 냈는데."
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 광고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세요? 정부는 그런 일을 금지하는 안을 발표했고, 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어요. 당신은 시대에 뒤지셨군요. 제임스 씨. 혹시 '성차별'이란 말을 들어나 보셨어요?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의 눈에 지펴졌지만 그는 짐짓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위험한 남자로구나. 이런 결론을 내린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본능이랄까? 갑자기 그가 사과조의 변명을 늘어놨다.
"이 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발로 뛰어다니는 일이오."
"저는 힘든 일에 이력이 붙었어요."
그때 전화가 왔고, 제임스 씨는 바삐 광고 문안을 받아 적었다.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도 않네. 마침내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세일즈맨은 기상 조건에 상관없이 하루에 8에서 10시간 씩 광고 수주를 올려야 해요. 보수는 주급 10파운드에 건당 20퍼센트의 수수료를 더한 금액이오. 수수료는 네 번으로 나눠 지불하겠소."
전화벨이 다시 울렸고 그녀는 속에서 안달이 났다. 제임스 씨가 수화기에 대고 열 번째로 '어니라고 불러요'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여전히 거기에 앉아 계약서 작성하는 법과 광고 게재 가격을 귀동냥으로 배웠다. 광고면 인치 당 평균 가격은 75펜스, 한 면의 총 가격은 36파운드였다. 최근호가 48면을 발행했으니까, 한 부당 1만 7천 파운드어치 광고가 실리는 셈이다. 그녀가 절반만 따낸다 해도 한 달에 수수료는 170파운드를 두 번씩이나 받게 되잖아! 전화로 나머지 주문 절반도 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그녀는 탐욕스럽게 생각했다. 그가 수화기는 내려놓고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좋아 당신을 채용하겠소."
이럴 수가! 그가 통화하는 중간 중간에 그녀의 이름과 주소를 겨우 말했을 뿐인데. 그는 그녀의 놀람을 알아차렸다.
"그렇고, 이런 식이오. 내가 2파운드의 지출 경비를 준비해 뒀으니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쳐 봐요. 이것이 당신의 능력을 알아보는 유일한 방법이오. 그리고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근무 시간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요. 매일 아침 8시 정각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경과보고를 하고, 1주일에 한 번씩 실적 보고서를 제출하시오."
"언제부터 일을 시작할까요?"
"지금보다 더 좋은 때가 또 있으려고?"
"감사합니다. 당장 시작하겠어요."
오늘은 틀림없는 행운의 날이었다. 첫 수수료 수표를 보고 감탄하실 아빠의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빠가 얼마나 흐뭇해하실까."
그녀의 도전적인 태도 뒤에는 아빠의 인정을 갈구하는 깊은 열망이 숨겨져 있었다. 난 자신을 증명해 보일 거야. 아빠는 날 의심한 게 실수였음을 깨닫게 되실 거야.
마조리는 계약서와 요금표를 서둘러 챙겼다.
"내 운이 트일 때가 된 거야."
그녀는 마치 공중에 두둥실 떠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로 나섰다. 도건 씨가 운영하는 동네 약국이 첫 고객으로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그녀가 샴푸나 엄마의 두통약을 사러 들를 때마다 그는 항상 친절하게 반겨 줬다.
"잘 지냈어요, 마조리? 뭘 드릴까요?"
그가 말했다.
"난 오늘 물건을 사러온 게 아니라 팔러 왔어요."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순간 도건 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배가 아픈가? 그녀는 의아해하며 '홈 뉴스'지를 내밀었다.
"당신은 적은 돈으로 3만 5천 명의 가정에 약국을 선전할 수 있어요......"
그녀가 판매 교육을 실습하려는 찰라, 한 손님이 징징 우는 아이를 데리고 약국에 들어왔다. 한마디 말도 없이 마조리에게 고개를 싹 돌린 도건 씨는 다시 미소와 동정이 담긴 표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경악했다. 그는 손님과 세일즈맨을 대하는 두 얼굴의 남자야. 그가 다섯 통의 전화에 응대하고 네 명이 넘는 손님을 상대할 때까지 그녀는 기다렸다. 마침내 소강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균열이 갔다. 본능적으로 마조리가 침묵을 지키자, 그가 말을 걸었다.
"아직 거기에 있었어요, 마조리? 난 광고 따윈 필요치 않아요. 감당할 능력이 없다구요."
"하지만....."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손을 든 그녀는 분해서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다섯 군데의 상점을 돌아본 다음에야 그녀는 이 동네에서 도건 씨만 두 얼굴의 상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제 친구는 다 사라지고 낯선 타인만 남았다! 5분 후에 또 거절을 당한 그녀의 몸이 떨렸다. 다른 동네를 시도해 봐야겠어.
3시 30분이었다. 마조리는 하루종일 굶었고 현기증마저 났다.
"이런 추세로는 먹고살기 힘들겠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아직 한 건의 수주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중소 기업촌이 조성되고 있는 스나게이트 스트리트로 내려갔다. '죠셉 시걸 경영 상담소'라. 그녀는 한 사무실의 명판을 읽었다. 그 회사명 아래 '죠의 포장 디자인, 무한 투자 주식회사, 스포츠용품 염가상, 도매가 판매'라는 상호가 꼬리를 물었다.
"보다보다 이런 회사는 처음이네!"
진열실에는 보트 낚시 스쿠버 다이빙 장비가 즐비했다. 한번 시도나 해보자. 그녀는 용기를 불러 모아 안으로 들어갔다. 우윳빛 피부, 푸른 눈동자, 오똑한 코의 육감적인 금발 미녀가 마조리를 얕잡아 보았다.
"사장님은 너무 바쁘셔서 당신을 만날 수 없어요!"
"나 역시 바쁜 사람이지만 시간을 쪼개어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어요. 당신 상관이 들으시면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그녀가 톡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들어와요."
안쪽 사무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턱이며 긴 목의 윤곽은 청년이 분명했지만 그 검은 눈동자는 노인의 것이었다. 너무 많은 고통을 보아 버린 듯한 그런 눈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가무잡잡했고, 태양에 바랜 흑발이 어깨에 닿았다. 그가 미소를 짓는 순간 영혼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얼굴이 밝아졌고 눈에 관용의 빛이 흘렀다. 콧날에 한두 번 부러진 흔적이 있는데도 그는 아름다웠다. 민감하고 친절해 보이지만 한없이 잔인해질 수도 있는 그런 남자였다. 그녀는 사무실의 반투명 유리문을 힐끔 보았다. 거기에 '영업 부쟝 죠셉 시걸' 뒤를 이어 긴 직함이 검정색으로 적혀 있었다.
"좋소. 포문을 열어 봐요."
그는 런던 사투리와 외국어가 반반씩 섞인 묘한 억양으로 천둥치듯 으르렁거렸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의 기를 북돋웠다.
"죠셉 시걸 씨를 뵙고 싶은데요."
"당신 소원이 이루어졌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장본인이오."
"어머!"
이렇게 젊은 나이에 무슨 수로 영업부장이 되었을까? 그녀는 의자에 앉아 약간 파리한 미소를 지었다. 의기소침한 티가 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판매 권유의 말을 암송했다. 그때 일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뒤틀렸다. 온기 가득했던 눈매가 싸늘하게 얼어 붙어갔기 때문이다. 그의 화난 표정은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왜 저런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허둥거렸다. 곧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공교롭게도 오후 내내 위태로웠던, 하나로 묶은 머리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 모양을 바로 잡으려 했지만 핀의 잠금장치가 열리지 않았다.
제기랄! 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무슨 말을 해? 마지못해 손을 내리자 머리가 한쪽으로 축 기울었다. 암송이 거의 끝났지만 그 노력의 잔인한 결과가 눈에 보였다. 그는 그녀가 팔려는 게 뭔지나 알았을까? 그녀는 구사일생의 심정으로 말을 끝맺고 숨을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고맙지만 오늘은 사양하겠소, 아가씨."
그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되도록 빨리 그녀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 맙소사! 치 떨리게 모욕적인 몇 초후, 그녀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었다.
"그는 계약을 하려고 했어. 난 알아. 그런데 내가 일을 망쳐 버린 거야. 차라리 입을 다물었어야 했는데. 내가 방정맞은 입을 놀려서 일을 망쳤어. 하지만 어떡해?"
그녀는 거래를 망친 장본인이 자신이었음을 확신했다. 실패감으로 미칠 것 같았고 너무 창피해서 집에 갈 수조차 없었다.
자책감에 빠진 그녀는 어느 까페에 들어갔다. 안전한 여자 화장실의 거울을 보는 순간 '아'하는 한숨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포니테일 스타일을 고정한 머리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묶은 머리는 귓가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찬물로 얼굴을 씻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은 다음 카페 실내로 돌아왔다.
난 포기했어. 그녀는 의자에 축 늘어졌다. 속이 메스꺼웠다. 이만하면 됐어! 망할 녀석에게 퇴짜나 맞을려고 지난 몇 시간 동안 구두 굽이 닳고 비에 흠뻑 젖고 추위에 덜덜 떨며 거리를 헤맸다니. 흥, 긍정적인 면도 있어. 남자의 추악한 면을 알려거든 세일즈가 최고야. 그녀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했고 맛에 상관없이 음식을 먹어치웠다. 이제 그녀에게 뭐가 남았을까? 타자실? 하지만 타이피스트 월급은 가족들의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할 정도였다. 여자 한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액수로 하물며 세 가족들까지...... 그 전망에 소름이 끼쳤다. 최소한 우리 예쁜 라나는 안돼. 그 아이는 다른 애들처럼 고이 자라야 해.
"라나, 넌 싸울 가치가 있는 아이야.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할거야."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속삭였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자기 손으로 좀 전의 기회를 무너뜨렸음을 알았다. 죠 시걸은 그녀의 편이었는데 스스로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녀는 철저한 구제 불능은 아니었다. 그의 생각을 눈치챘으니까. 생전 처음으로 그녀는 직관력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바짝 긴장한 그녀는 잰걸음으로 그의 사무실로 향한 계단을 올라갔다. 다행스럽게도 풍만한 비서는 보이지 않았다. 마조리는 까치발로 영업부장실까지 가서 문을 열어 제쳤다. 시걸이 고개를 들고 소리 질렀다.
"뭘 남기고 갔소?"
"내 자신감이요!"
그녀는 허락을 받지도 않고 의자에 앉았다.
"처음부터 당신은 그딴 것을 갖고 있지도 않았소. 왜 돌아온 거요?"
그가 고압적으로 쏘아붙였다.
"오늘은 내 근무 첫 날이예요. 당신 이전에 열 사람을 찾아갔었는데 다들 하나같이 나를 퇴짜놓았어요. 난 처음부터 그들이 그러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신은 내 첫 고객이 될 뻔했는데 그만 내가 망쳐 버린 거예요. 내가 어느 부분에서 잘못한 거죠? 제발 말해 주세요.......?"
"그 점을 눈치챘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오. 당신에게 대성할 가망성이 있다는 뜻이거든. 난 당신의 이름조차 모르오. 그게 당신의 첫 번째 실수였소."
그녀가 입을 열자 그는 손을 흔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 이젠 너무 늦었소. 나 역시 같은 세일즈맨으로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안타깝소. 세일즈는 예술이요. 그리고 다른 예술처럼 많은 연구와 힘든 연습이 필요한 거요. 가령 어떤 사람이 당신 사무실에 불쑥 들어와서 바이올린을 형편없이 연주한다면 어떻겠소? 이제 당신은 아까 내가 겪은 괴로움을 알았을 거요. 세일즈에 대한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봤소? 당신이 자신의 일에 애착이 없다면 실패는 따놓은 당상이요."
"세일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끔찍한 직업이예요."
"예술의 한 형태라고 했잖소. 당신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냥 포기해요."
"그럴 수 없어요. 사람 목숨이 달렸다구요. 그런데 이 일에 좋아할 만한 부분이 뭐 있나요? 그저 직업일 뿐인데."
"당치도 않은 소리!"
그가 벌떡 뛰어 일어나 책장을 살폈다.
"왜 세일즈를 하고 싶은지 다시 말해보겠소?"
"돈 때문이에요. 난 우리 집의 가장이에요."
"당신은 오늘 상대했던 남자들이 마음에 들었소?"
"한 명도 빠짐없이 악당들이었어요."
"남자들의 게임에서 남자를 이기고 싶지 않소? 좀 상상해 봐요. 당신이 도전장을 던지고 세 치 혀를 놀려 승리하는 기쁨은, 검을 휘두르거나 좋은 차를 몰거나 권투 글러브를 끼는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울 거요. 노력에는 결실이 따르는 게 아니겠소? 하지만 펜싱처럼 당신은 먼저 그 방법을 터득해야 해요."
"네, 고맙군요. 나보고 서점에 가서 책이나 사라는 거예요?"
이 사람, 미치광이 아냐?
"이 책을 가져가요. 아주 유익한 내용이니 오늘밤에 다 읽어요. 그리고 내일 저녁에 여기에 와서 다시 날 설득해봐요. 당신이 정정당당하게 승리하는 날 내가 광고 계약을 하겠소. 하지만 그전에는 안돼."
"고마워요."
그녀는 급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시가 넘었다. 어휴, 엄마가 걱정하실 거야. 라나가 깨어 있기를.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버스 안에서 잠들었다. 나중에 집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악몽 같은 하루였어! 하지만 두고 봐라! 모든 가게 주인들의 도장을 받아내고야 말겠어.“
세찬 동풍에 맞추어 가랑비가 흩날리는 오후 6시였다. 8월치고는 아주 고약한 날씨야. 여름은 오지 않으려나 봐. 코트도 없이 달랑 감청색 정장만 걸친 마조리는 춥고 흠뻑 젖어 있었다. 쑤신 발가락 과 피곤의 대가는 연속적인 거절이었다. 그녀는 극한점에 도달했지만 패배를 자인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 죠가 남아 있어. 죠는 새로운 비서를 구했는데 전임자와 똑같이 금발의 요염한 미녀였다. 어디서 이런 여자들을 구하는 걸까? 비서는 그의 사무실을 가리키며 프랑스 억양의 영어로 말했다.
"들어가 보세요."
"그녀는 얼마나 버틸지 궁금한데요?"
마조리는 죠에게 일부러 들릴 만큼 크게 말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커다란 검정색 상자와 스크류 드라이버를 가지고 씨름하다가 그녀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가 날 귀찮게 하지 않는 한 난 임시 직원만 둬요. 그편이 안전하거든!"
그는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척 보기만 해도 당신이 실패했다는 걸 알겠군. 여기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요. 이번에는 오늘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계약을 따냈다는 분위기를 풍기면서 말이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녀는 의자에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리고 그가 일손을 놀리며 투덜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내가 로버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죠, 당신에게 빠졌을 거예요.
"난 모르겠소. 하지만 당신이 한 건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 얼른 나가요. 그리고 더 자신만만하게 들어오란 말이오."
"못 하겠어요. 난 너무 기가 죽었단 말이에요. 내일 그렇게 할게요."
"썩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럼, 내가 옛말을 상기시켜 주지. '결정을 내리길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당신의 승승장구하는 외양에 고객들은 더 만은 신뢰감을 품게 될 거요. 대부분의 인간은 어리석은 양떼와 같소."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무례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그냥 타자나 칠래요!"
"겁쟁이들의 전형적인 반응이군. 이스라엘에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소. 온 세상이 재난의 벼랑에서 비틀거리고, 미군은 전 세계에 주둔했으며, 소련은 자국군을 중동에 파병할 계획인 데다, 나토는 심각하게 분열되었소. 즉 세계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지만 아무도 물러나지 않았는데, 하디 양만 도부의 몇몇 장사꾼들에게 퇴자를 맞았다고 풍요로운 미래를 포기하는군."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기는! 고마워요, 죠!"
그녀의 표정은 무감각했지만 속에선 화롯불에 석유를 끼얹은 것처럼 분노가 더 깊어졌다.
"이건 전략상의 문제요. 이달 말에 당신은 평균 8명 당 한명 꼴로 계약을 따내게 될 거요. 그다음에 지금의 모든 거절이 승낙으로 변할 거요."
그녀는 처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를 설득시켜 봐요. 시간이 산처럼 쌓인게 아니잖소."
그는 짐짓 극적인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꼭 이럴 필요는 없어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 거요? 자존심이 당신을 망쳐 놓고 있소. 당신은 나와 장기 약속을 체결했소. 점점 호전되어가는 이 마당에 나를 쉽게 놓지 말아요. 조만간 나는 계약서에서 명을 하게 될 거요. 그걸 모르겠소?"
"공평치 않아 보여요."
"아! 세일이 영국에서 경시되는 이유를 알겠군. 당신의 시덥지 않은 페어플레이 정신으론 백날 가도 안돼. 내 말을 잘 들어요, 마조리."
그가 갑자기 심각하게 말했다.
"그런 태도라면 당장 그만둬요. 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봐요. 하지만 당신이 마음을 바꾸겠다면 여기 다른 책이 있소. 그 페어플레이 운운하는 말을 접어 두고 첫 광고를 따낼 준비가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아요."
"맙소사.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내가 흙털이판인 줄 아세요?"
"그래요, 당신이 스스로 그런 대접을 자청한 거요."
책을 집어 든 그녀는 비참한 심정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죠가 뒤를 따랐다.
"난 내일 다시 올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녀가 어깨너머로 소리 질렀다.
"내일 온다면 난 당신이 하루 종일 올린 실적의 두 배를 팔아 줄 거요. 이만하면 용기가 나오"
그녀는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가 천천히 되돌아갔다.
"동정은 관두세요, 죠 시걸."
그녀의 목소리에는 험악한 분노와 도전이 담겨 있었다.
"미안하요. 그 말을 철회하겠소. 동기는 좋았지만 표현이 잘못됐군. 날 용서해요."
그녀는 거짓 웃음을 지어 보이고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죠는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저 여자를 돕는 걸까? 그녀가 예쁘다는 거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는 가시가 없는 여자들도 많다. 그의 비서를 포함해서. 그렇다고 그녀와 잠자리를 하거나 친구가 되려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고독했다. 때때로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방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부분적으로 부모님의 탓이었다. 그의 모친인 버샤 골드만은 골더 그린에 있는 의상실의 재단사였고, 부친인 클라우스 시걸은 베를린에서 수학 교수로 재직했지만 전쟁통에 런던으로 피난 와서 버샤를 만났다. 그 후 아버지는 비행기 조종사, 세일즈맨, 부동산 개발업자로 차례차례 변신했다. 나중에 사업체를 팔고 아내와 이혼한 후 독일로 돌아가 랍비의 딸과 결혼하고 수학 저서 집필에 몰두한 결과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죠는 부모님들이 애초에 결혼한 이유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지적이었고 독일 문화에 푹 젖었는데 반해 어머니는 런던 토박이였고 세상 물정에 통달하신 분이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죠는 부모와 두 할머니 댁을 오가며 성장했다. 파리에 사는 친할머니 그레타는 아우슈비츠 감옥의 생존자로 감상적이면서도 약간 광기를 보였고, 외할머니 모드는 소호 거리에서 핫도그와 감자를 팔았지만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랍비의 딸인 계모와, 이스트엔드의 선술집 벽화쟁이 계부는 모두 최선을 다해 그럴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죠는 어느 곳에서도 적응했지만 실상 아무 곳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전통 종교나 문화에 편입되는 대신 독자적인 길을 발견했다. 스스로를 '탐색자'로 생각하고 진리를 추구했지만 이승에서 그것을 이룰 수 있을지 회의했다.
그는 나름대로의 법칙을 세웠다. 그를 스쳐가는 사람 중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성심성의 껏 돕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동시에 끊임없이 바쁘게 지내고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너무 지적인 정신이 광기로 치우치지 않도록 신경을 섰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마조리가 그를 스쳤고 옳은 방향으로 끌어 줘야 했다. 그렇게 애잔하고 슬픈 분위기를 풍기기에 너무 어린 그녀의 절망감이 겉으로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그녀가 생존의 벼랑에 몰려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제 그녀는 화가 나서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죠는 저녁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지나 쉬프오 협연한 콘의 바이얼린 콘서트 음반을 감상하고 한 시간 정도 클라리넷을 연습한 다음에 명상해야지.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발명을 해야겠다.
버스가 왔고, 마조리가 차에 올라탔다. 그는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는 그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이 동네는 밤에 우범 지역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문을 잠그고 자동 응답기를 켰다. 순간 저녁 데이트 생각이 떠올랐지만, 콘의 음악이 더 유혹적이었다.
마조리는 궂은 날씨에 5일이나 더 도버 일대를 쑤시고 다녔다. 그녀의 문제는 별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는 항상 일이 꼬이기 시작한 부분을 눈치채고 밤에 죠와 토론을 나누었다. '건수 좀 올렸소?' 하는 그의 질문은 그녀의 기분에 따라 수치심과 분노와 두려움을 야기시켰다.
"난 포기할래요. 죠! 오늘은 벌써 금요일이고 난 1주일 내내 호된 대접만 받았어요. 가슴에 사무쳤다구요. 난 앞으로 커피 한잔에도 '싫어요'라는 말을 하지 않을래요."
"광고 지면을 한 칸도 못 팔았소?"
"그건 공수표가 아니라 미래의 세일이요. 당신이 제대로 하면 그 공수표들이 진짜 돈으로 변할 거요. 내 말을 명심해요! 소심한 죠가 뜸을 들이거든 마음속으로 서명된 계약서를 쥔 당신 모습을 떠올려요."
"당신은 괴짜예요. 그걸 알아요, 죠?"
"당신은 말을 돌리고 있군. 어서 해봐요."
"시걸씨 당신의 흥미를 자아내게 하는......."
"맙소사!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없소?"
"빌어먹을 ! 난 더 이상 못해요."
그녀는 신경질을 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누군가를 한방 치면 헛탕만 쳤던 스트레스가 시원하게 풀릴 텐데. 다운타운에는 중고차 대리점이 있었다. 그 진열장에 한 남자가 세 꼬마를 껴안은 대형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중고차는 믿을 수 있는 짐 아저씨에게! 그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신물이 났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분노를 토해냈다. 마조리는 광고지를 그의 책상에 던졌다.
"계약을 따냈어요."
그녀가 죠의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다.
"1년간 반 페이지 광고 계약이에요. 아 주여! 내가 드디어 해냈어요. 난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그녀는 죠에게 몸을 던져 그를 꼭 껴안았다.
"고마워요, 죠. 그리고 짜증을 내서 미안해요."
그녀가 계약서를 그의 코밑에 들이밀었다.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데 5분도 안 걸리더라구요. 어때요?"
"좋은 시작이요."
그가 코믹하고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나를 설득해봐요."
"당신에게? 어휴, 죠, 난 처음에 당신에게 말할 필요조차 없었어요. 당신은 날 놀리는 동안 정작 자신의 세일 기회를 잃었어요. 그저 소심한 토끼처럼 이 굴에 앉아만 있으면서 뭘 팔겠어요? 이 작은 과고로 당신은 2만 건의 주문 전화를 받게 될 거에요. 그러니 당신이 정 넝마 굴을 벗어나고 싶지 않거든 여기에 광고를 내세요."
그녀는 무의식중에 힘찬 설득조로 말하고 있었다.
"이제 당신은 내 계약을 따냈소! 난 매 발행면 뒤 페이지에 1년 내내 광고를 내겠소."
그녀는 그를 보며 헐떡 거렸다. 발끝에서 양 볼까지 열기가 확 번졌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당신은 그럴 돈이 없잖아요."
"아니야. 난 할 수 있고, 그렇게 할 거요."
그가 으르렁거렸다.
"당신에게 너무 과해요."
"난 그걸 원한다구 당신이 내 주문을 받지 않으면 당신 상관인 그 비열한 제임스 씨에게 전화를 걸겠소. 이걸 봐요.!"
그는 몇 장의 낡은 복사지를 흔들어 댔다.
"난 항상 광고지 뒷면을 갖고 있었소. 발행 날짜를 살펴보며, 이걸 놓고 간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걸. 그건 생각 못 했지, 헛 똑똑 양? 묘한 우연의 일치지만 내가 전에 어니 제임스에게 전화를 하려더 찰라 당신이 날 찾아와서 기회를 망쳐놓았었지."
"이 악당! 당신은 맞아야 해!"
"날 때리고 싶소? 자, 해봐요. 어서. 여기를 때려요."
그는 손가락으로 턱을 가리켰다.
"어서 해보래두. 있는 힘껏 쳐요."
그는 얼굴을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럴 배짱이 없겠지?"
전광석화 같은 분노의 주먹이 그의 턱을 강타했다. 그러고도 그녀는 계속 공중에 헛 주먹을 날리다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죠가 그녀를 잡았다.
"내가 싸우는 법도 가르쳐 주겠소. 이번에는 당신도 재능을 발휘해야겠는걸."
정말 멋진 날이야. 굴뚝 위에 걸린 먹구름이나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그녀의 기분을 꺾어 놓지 못했다.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 즉 월급과 수수료를 받는 날이었다. 총액이 4백 파운드나 됐다. 지난 며칠 동안 눈요기 쇼핑을 다녔던 그녀의 욕구는 끝이 없었다. 아기 옷, 장난감, 유모차, 엄마에게 드릴 냉장고, 바바라에게 선물한 향수 등. 부두에서 싸게 파는 냉동 청어와 맥주도 들여 놔야지. 4백 파운드라! 와! 그녀는 황홀경에 빠졌다. 부유해진 상태에 전율을 느끼며 돈 쓸 궁리에 빠졌다.
"안녕하세요, 제임스씨."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한번에 두계단씩 뛰어올라 갔다.
"미끄러운 계단을 조심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주의를 쥐야 하나?"
최근에 사무실은 몰라볼 정도로 청결해졌고 그녀의 책상 위 꽃병에서 향긋한 내음까지 풍겼다. 마조리는 세일즈맨이 타박 맞는 금요일 오후와 월요일 오전에 사무실 청소를 했다.
"최근호가 내 광고들로 꽉 차 있는 것을 아세요? 다른 것은 별로 없더라구요!"
그녀가 행복하게 상관에게 웃어보이자, 그는 투덜거리며 슬며시 눈을 피했다.
"고깝게 듣지 마세요. 당신이 절 고용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잖아요."
"난 당신의 자랑에 아무 불만이 없소."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그의 기분이 썩 좋지 않나 봐. 하긴, 그녀에게 수수료를 지불할 생각으로 속이 쓰리겠지. 그녀는 약제사 도건씨의 계약서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정말 힘들었어요, 진짜 지독한 구두쇠더라구요. 네 번이나 방문한 끝에야 그가 착한 아이처럼 순순히 서명했어요. 1년 치 계약이에요. 이만하면 괜찮겠지요?"
"아주 좋아."
"오늘은 월급날이고 난 갈 데가 있어요. 지금 월급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는 그녀를 교활하게 째려보며 봉투를 꺼냈다.
"내 첫 번째 수수료네. 얼마나 흥분되는 지 몰라요."
그녀가 봉투를 열자 안에서 10파운드 짜리 지페 한 장과 25페니가 나왔다.
"이게 뭐예요?"
그녀는 불붙은 종이처럼 돈을 떨궜다.
"당신의 주급 10파운드와 보너스야."
"하지만 난 보너스를 바라고 일한 게 아녜요. 제임스 씨. 20%의 커미션을 주시기로 했잖아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그 말을 수십 번이나 하셨잖아요."
"당신은 그 돈을 주셔야 해요. 그게 우리의 기본 계약이었어요."
"그건 변명이 안 돼요. 당신이 규칙을 정하셨잖아요. 이따위 돈 몇 푼을 받자고 내가 열심히 뛰어다닌 줄 아세요....."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재빨리 전략을 수정했다.
"타자실 주급보다 2파운드가 많네요. 하지만 버스비, 전화료, 구두와 옷값, 악천후에도 밖에 나가서 흘린 땀과 사람들에게 받은 모욕과 거절은 어쩌고요....... 아! 당신이 이러실 수는 없어요. 내 돈을 주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어요."
"진정해 마조리. 내가 두둑하게 보너스까지 줬잖아.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빚진게 없어."
"우리는 계약을 했어요."
"계약서를 내놔 봐."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계약서를 작성했어야 했는데. 사태를 파악한 그녀는 책상 속에서 계약서를 전부 꺼내 가방에 넣었다.
"이봐. 그것들은 내 거야"
그의 동작이 너무 굼떴다. 그녀가 이미 계단을 쏜살같이 내려간 뒤였다.
"아, 난 어떡해."
그녀는 거리를 따라 걸으며 중얼거렸다. 집에 큰소리를 쳤던 허풍, 그들의 계획, 엄마에게 약속했던 것들이 모두 날아갔다. 그녀의 수중에는 겨우 백 파운드밖에 남지 않았고 그 절반 이상을 엄마에게 드려야 할 형편이다. 그 지독하고 잔인한 두 얼굴의 사기꾼을 가만두나 봐라! 그녀는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그들은 그게 민사 사건이라며 발뺌했다. 그래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변호사 록카이어 씨를 찾아갔다. 그는 라나의 입양을 처리해 줬던 변호사이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사정을 호소했다.
"록카이어 씨, 제발 그가 내 돈을 지불하게 해주세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탄원했다.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에서 불이 났다.
"진정해요, 마조리. 차를 한 잔 하겠소?"
"고맙지만 싫어요. 돈 말인데요, 우리 집에는 그 돈이 꼭 필요해요."
그가 그녀의 손을 토닥거렸다.
"마음을 굳게 먹어요, 마조리. 다음 번에 수수료나 보너스를 준다는 세일즈 일을 하게 되면 서면 계약서를 받아서 나에게 가지고 와요. 그의 구두 약속만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거든 향후 조건에 대한 계약을 체결해요."
"난 다시는 그의 밑에서 일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분개해서 맹세했다.
"미안해요, 마조리. 내가 그에게 말해보긴 하겠지만, 좋은 경험을 치뤘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겨우 석달이었잖소? 더 오랫동안 고생했을 수도 있었소."
그녀는 계속 그녀의 분노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라나와 엄마가 빼앗긴 것을 만회하지 못했다. 그녀는 실패감에 사로잡혔다. 가족들에게 뭐라고 말하지? 내가 바보였어. 심장이 뛰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돌아 기절할 것 같았다. 그녀는 변호사 사무실을 떠나 해변가를 배회했다. 돈 없이는 너무 창피해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일해 왔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는 얼마나 열심히 일해 왔는지 다 알고 있었다. 사업이 항상 그런 걸까? 그녀는 성공의 사다리를 반쯤 올라갔다고 확신했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어. 그 노랑이는 내 돈을 지급할 형편이 됐어. 흥, 그런 엉터리 광고지를 인쇄하는데 돈이 많이 들겠어? 가장 싼 종이를 사용하고 딱 한 가지 덧색만 썼는데. 그녀의 논리가 타당하다는 것을 누가 알아줄까? 죠라면.... 그는 작은 인쇄기로 광고 전단지를 찍어 고객에게 직접 우송했다. 최근에야 그녀는 그의 사업 방식을 알아냈다. 그녀는 죠의 사무실로 향했다.
건물 문은 닫혀 있었다. 마조리는 불안에 떨며 벨을 누르고 대답을 기다렸다.
"제발 안에 있어줘요. 죠."
세 번째 벨 소리에 죠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인터컴으로 흘러나왔다.
"죠, 나예요....... 저기...... 일하고 있었어요?"
"그만 더듬거리고 용건만 말해요."
그는 백년이 가도 매너 상은 받지 못할 거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네."
오랜 침묵이 흐른 다음 한숨 소리가 흘러 나왔다.
"맨 위층으로 올라와서 집으로 들어와요. 벨은 생략해요. 소음이라면 질색이니까."
마지막 계단에 올랐을 때 강령하고 격한 클라리넷 선율이 들렸다. 그녀는 문간에 서서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벽과 천장과 맨 마룻바닥의 넓고 텅 빈 공간에, 알루미늄 테를 두른 검정 가죽의자 두 개와 걸려 넘어지기 딱 좋은 유리 테이블이 고작이었다. 딱 한 점뿐인 그림은 음악처럼 불가사의했다. '코코스카'라는 제목이었다.
죠는 검정색 반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보면 앞에서 클라리넷을 불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가무잡잡하게 탄 근육질이었다. 꽤 멋진데, 상처가 있기는 해도. 그는 차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오디오를 켠 다음 전문가의 연주에 맞춰 클라리넷을 불었다. 그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그의 다리와 어깨 근육이 꿈틀거렸다. 몸매와 피부 관리를 어떻게 했을까?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보내지 않은 것은 확실해.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춘 그의 음악은 더욱 실감 났다. 열중한 죠는 그녀를 의식하지 않은 채 얼굴을 찌푸리고 눈을 부라렸다. 그의 손은 강하고 아름다웠다. 갑자기 음악이 뚝 그쳤다. 그는 오디오를 끄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신 탓에 정신이 흩어졌소. 그만 쳐다봐요."
시작이 좋지 않은데.
"어디서 그런 근육과 지중해서 피부를 갖게 되었어요?"
"이스라엘에서. 난 한동안 군에 복무했었소."
그녀는 최고의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죠는 이미 고개를 돌린 뒤였다. 그는 자신의 세상에 푹 빠졌다. 어떻게든 그의 지지를 얻어내야 해. 그에게 사업에 대해 더 배워야 해. 그가 종이와 적당한 인쇄소를 주선해 줘야 해. 그런데 그가 그녀를 도와줄까?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악몽 같은 날이야. 죠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그때 그녀는 죠에게 배운 가르침을 상기했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비우고 원한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돕는 모습을 상상해요. 당신 장단에 맞춰 춤추는 그들을 그려 봐.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수료에 대한 원한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이제 죠의 방법을 죠에게 써먹어 보자. 그녀는 정신을 하나로 모으고 죠와 그녀가 함께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죠는 자랑스럽게 그녀에게 집 구경을 시켜줬다. 딱히 아늑하지 못한 분위기에 괘념치 않는 눈치였다. 위층을 그 혼자 쓰고 있었기 때문에 공간은 넓었지만 가구가 많지 않았다. 침실에는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나 다른 방은 책장과 조명, 설계 테이블과 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뭔지 아오?"
그는 줄이 달린 검정색의 작은 상자를 들어 올렸다.
"인간에게 감지되지 않는 초음파를 방출해서 반 마일 내의 쥐를 쫒아내는 기계요."
"돈이 되겠는데요. 특허를 냈나요?"
"아니. 쥐뿐만이 아니라 망할 놈의 고양이들도 귀앓이를 하고 집을 나가 버렸거든. 하지만 문제점을 개선하고 있는 중이요. 이것은 내 최신작인 원형 주차장의 모델이요. 내가 이걸 런던의 한 건축가에게 팔았소."
"정말이에요? 때때로 발명품으로 돈을 버나요?"
"발명비를 벌 만큼은 충분히."
"발명 아이디어를 나에게 점검을 받는 게 어때요? 그럼 내가 쓸만한 지 여부를 판정내릴게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밤에 마루를 쓸고 돌아 다니는 원격 청소기를 발명해 보시죠? 아니면 자동 감자 껍질 벗기기는 사회에 유용한 발명이 될 거예요. 아, 당신이 천재인지 아니면 정신병자인지 분간이 안 되요."
"내가 당신에게 세일하는 법을 가르쳤잖소. 그렇지?"
"네. 하지만 책에서 배운 내용을 나에게 반복한 거잖아요. 당신이 나에게 빌려준 책이 동일한 내용이기 때문에 알아챘어요."
"사실이요.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줬지."
"그건 그래요. 고마워요. 저기 더러운 벽돌과 한 무더기의 시멘트는 뭐예요?"
"일급비밀이니 묻지 말아요. 저걸 보았다는 것조차 잊어줘요."
"그거야 쉽지요."
"그런데 당신의 문제는 뭐요? 아, 우선 한 잔 마시기로 합시다."
그들이 넓은 공간으로 돌아오자 그가 말했다.
"흔들어서 마셔요. 독한 거요. 좋아, 이제 말해봐요."
"그래서 난 내 광고지를 출판하고 직접 기사도 쓸 거예요. 하지만 회사를 세우는 방법에 대한 충고가 필요해요. 인쇄비가 얼마나 될까요?
"한가지는 분명한 사실이요. 제임스씨가 이윤도 없는 사업에 괜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요. 그러나 요술 방망이를 휘둘러서 수치를 뽑아 낼 수야 없는 것 아니겠소? 최소한 하루는 필요하오. 마조리, 이제 분을 삭혀요. 그건 겨우 돈일 뿐이요. 제임스씨는 그가 한 짓에 대한 응보를 받게 될 거요. 난 당신이 걱정되서 하는 말이요. 당신은 물건과 돈을 소유하겠다는 잘못된 목적에 사로잡혀 있소. 물질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해 봐요."
"내가 당신을 돕는 수고를 감수하기 전에 그 이유를 알고 싶군."
그녀는 혀에 무슨 이상이 생긴 사람처럼 말을 멈추지 못하고 모든 꿈을 다 고백했다. 라나의 생득권을 찾아주는 꿈, 엄마와 아빠를 위한 꿈, 그리고 로버트에게 그녀의 가치를 증명하는 특별한 꿈까지도.
그녀 말을 듣던 죠는 고민스러웠다. 불쌍한 여자 같으니. 그녀는 비참한 시작을 했고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배짱이 두둑하고 근면 성실하며, 자기 연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단호한 결심을 했다. 그녀를 보살펴 줘야지. 누군가가 그렇게 해야만 해.
"우리는 광고지의 공동 설립자가 될 수 있소."
그가 말했다.
"공정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지? 이건 거래요! 받아들이든가 거절하면 그뿐이오. 당신이 세일만 하는 동안 난 모든 문젯거리들을 처리하게 될 거요. 그리고 초기 자본금과 아울러 이윤을 올리기 전까지 당신의 주급 16파운드를 지불하겠소."
"거래를 받아들이겠어요."
그녀가 행복하게 말했다.
"좋소. 사업을 계속 성장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무너져 버릴거요. 아주 지루한 일이고 당신도 곧 흥미를 잃을 거요. 글피 아침 8시 정각에 내 사무실로 와요. 내일은 쉬도록 해요. 이제 우리가 동업자가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가장 놓아하는 곡을 연주해 주지."
그는 좀 더 강한 술을 더 따라 줬고, 그녀는 몽롱한 술기운에 빠져 그의 이상하지만 감동적인 연주 선율을 따라 둥실둥실 떠다녔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음악은 그와 비슷했다. 놀라울 만큼 자유롭고 강한 정열이 놀라울 만큼 기교적으로 숨어 있었다.
아빠가 이렇게 화를 내고, 엄마가 저렇게 두려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쟤가 우리를 파탄에 빠뜨릴 거야."
아빠는 엄마에게 삿대질을 했다. 분노로 입술을 떨면서.
"우리는 빚을 잔뜩 지고 저 애는 감옥에 가게 될 거야. 불경기가 시작되는 이 마당에 뭘 하겠다고? 그저 문제를 일으키는 것밖에 모르는 아이야. 평범한 직장이나 쓸만한 청년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어. 대신 그 대학생 놈과 연애질을 하고 애새끼를 낳아 우리에게 부담을 줬다구."
"부끄러운 줄 아세요. 여보. 귀여운 라나 없는 우리 생활이 어땠겠어요?"
엄마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훨씬 좋았겠지. 그리고 쟤는 돈을 많이 벌겠다고 큰 소리만쳤지. 벌긴 뭘 벌어?"
"넌 말뿐이야. 내 딸아. 허풍 뒤에 남은 결과는 언제나 부끄러움이 전부였어."
"아......."
그녀는 항상 하던 식으로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침실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계단 중간에 멈춰선 다음 천천히 되돌아 왔다. 생전 처음으로 맞서 싸울 상대를 만났다.
"아빠의 눈에는 제가 사업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때가 절대로 오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아빠는 항상 두려우실 테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전 아빠와 했던 거래를 지키겠어요. 제가 생활비를 버는 대신, 아빠가 예전에 저에게 했던 식으로 라나의 기를 죽이신다면 당장 라나를 데리고 떠날 거예요. 어떤 누구도 내 딸을 구박할 수 없어요. 알아들으셨어요? 아빠?"
그녀는 긴장하며 헐떡거리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요람을 들여다 본 그녀는 자못 흡족하게 자는 아이를 응시했다. 라나는 이런 말싸움을 듣지 않을거야. 최상의 교육과 최고의 기회를 갖게 될 테니까.
"넌 생득권을 되찾게 될 거야. 내 딸아. 내가 너에게 그걸 찾아줄게!“
"당장 가라니까!"
죠는 주차구역에 차를 세우고 책을 집어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마조리는 혐오스럽게 자동차의 바람막이 창을 때리는 빗줄기를 보았다. 거센 비바람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목에 나비매듭을 묶는 흰 실크 블라우스와 가장 좋은 감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시뇽 스타일의 머리, 바바라에게 빌린 진주 귀걸이, 굽 낮은 신발, 서류가방이 영락없이 성공한 여류 사업가의 모습을 창조해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모든 것이 낡은 노랑색 방수 코트와 덧신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테드 리틀 씨의 사무실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번이 그들의 새 잡지 '더 핸디 홈 가이드'의 첫 세일 방문이었다. 그녀는 최상의 견본과 요금표와 계약서를 준비했다. 첫 방문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함에 그녀의 몸이 떨렸다.
"당신은 모든 것을 두려워하잖소. 세일, 부자가 되는 것, 사는 것등. 당신은 머리를 박고 숨을 굴이 필요한 거야, 아니, 타자실이 더 좋겠군."
"나도 매일 밤마다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요. 이걸 하지 않으면 평생 남의 타자실에서 썩게 될 거라고 말에요. 보험회사의 늙고 불쌍한 애니처럼요. 그녀는 그곳에 35년이나 있었대요. 정말 슬프지 않아요?"
"이제 나가서 세일을 하겠소?"
"좋아요. 고단수 양반 같으니."
그녀가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 속을 헤치고 회전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리틀씨 본인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잘 있었소, 마조리. 안색이 핼쓱해 보이는데? 저쪽 카운터로 갑시다. 사무실에 바이어가 와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당신을 모실 수 없소. 우리 광고 때문에 왔소? 평소와 똑같이 게재하도록 해요. 아, 코트를 벗지 말아요. 시간이 얼마 없소."
"리틀씨."
그녀는 만사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징조에 머리를 짜내어 전략을 세웠다.
"저는 정반대의 이유로 여기에 왔어요. 곧 새로운 광고지가 출판될 겁니다. 이 견본을 좀 봐주세요! 정말 근사하잖습니까? 기존보다 저렴한 비용과 더 좋은 품질로 한층 수준 높은 고객 층을 대상으로 했어요."
"아, 글쎄, 마조리... 첫 발행 본을 보고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아 맙소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기절할 거야.
"리틀씨."
그녀는 단호한 용기로 절망감을 누르며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을 처음으로 찾아 뵌 이유는 당신이 이 곳의 지도자 격인 사업가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지방 사업가들은 당신의 지도에 따를 테니, 당신의 결정에 막중한 책임이 부과됩니다. 그러니 이 광고지를 그냥 사장시키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당신의 신중하신 결정의 가치를 잘 알고 그 심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 점을 꼭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정 바쁘시다면 나중에 찾아뵙도록 하겠어요."
그는 자못 호탕하게 껄걸 웃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담긴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 당신 말이 옳소. 나에게는 책임이 있지. 한 번 보도록 합시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광고지의 사장이 누구요?"
"제가 회사 지분의 반을 가졌고, 나머지 반은 회사 설립 후원자의 몫입니다. 세부적인 등록증이 여기에 있어요......."
그녀는 가방에서 여러 가지 사업 보증서를 꺼냈다. 영겁과도 같은 몇 분이 흐르는 동안 그는 그녀의 정보를 컴토 했다.
"내가 가장 좋은 지면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그의 점잔빼는 표정에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당신 몫으로 여기 창간호 컬럼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만은......."
그녀가 빨간색으로 테두리가 둘려진 지면을 가리켰다.
"내가 당신 광고지에 칼럼을 쓸 수 있소?"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좋아! 리틀 앤 햄프톤 스포츠 사의 지면을 남겨 둬요."
그는 계약서를 쓰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모든 발행지에 말이오. 나중에 복사본을 갖고 오도록 해요. 참, 행운을 빌겠소, 마조리."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녀는 극도로 흥분된 상태로 차에 올랐다. 손발이 떨리고 입술이 말랐다.
"빨리 차를 출발시켜요, 빨리요. 내가 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줘요."
그녀가 겨우 유지하던 평온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사라졌다.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가랑잎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거절했소?"
"승낙했어요."
"그런데 왜 그러는 거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요."
"난 내 자신이 점점 싫어져요. 사실, 난 그를 속여넘겼어요."
"그래선 안 돼, 마지."
죠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사업은 공명정대하게 해야 하오."
"세일은 그렇지 않아요. 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알고 내가 파는 물건에 그것을 붙였어요. 그런 방법으로 성공한 거예요."
"그가 뭘 바라는데?"
"그는 자기 부친처럼 되기를 원해요. 지역 사회에 존경받는 지도자, 만인의 추앙을 받는 인물, 자수성가한 남자 말예요. 그는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어하기에, 내가 그걸 그에게 팔았어요."
"그래서?"
"하지만 그는 그의 부친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어요. 그의 아내는 남편이 만만한 틈을 타서 돈을 물 쓰듯 쓰고, 상속받은 그의 스포츠 사업은 매일 적자만 기록하고 있어요. 벌써 3군데의 지점이 문을 닫았단 말에요."
"알겠소. 음,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어떻겠소, 마지? 당신의 암시로 말미암아 그가 고무되고 성장하여 이상형에 가까워질 수도 있잖겠소?"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긴장을 푸는데는 그만이었다. 그래, 계약을 하나 체결했다면 나머지도 다 해낼 수 있어. 드디어 해낸 거야.
오후 6시, 마조리는 모두 9명의 고객을 확보했다.
"출판업은 누워서 떡 먹기야. 내가 연구를 더 해야겠는걸."
죠가 말했다.
"그거야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그렇지요."
"겸손해 하지 말아요. 당신은 세일즈에 천부적인 재주를 타고 났어. 내가 당신을 두 번째 봤을 때 이미 알아봤소."
그녀는 그 말을 곰곰이 되씹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세일즈가 어떤 것인지 말씀드릴게요, 죠. 대어들이 사는 깊고 큰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일단 물고기들의 종류와 습관 기호를 터득한 다음에 모이를 좀 주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것들이 당신 손으로부터 먹이를 받아먹는 단계에 도달하면 적절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번에 한 마리씩 날카로운 작살로 잡는 거죠. 우정이란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빵! 물고기들은 죽은 목숨이에요!"
"하지만 당신 고객들은 팔팔하게 살아 있다는 점을 명심해요."
죠가 펍 앞에 차를 세웠다.
"자, 우리끼리 자축연을 엽시다."
그녀는 불가에서 몸을 녹이며 진토닉을 마시고 술집의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다트 소리에 긴장을 풀었다. 귀에 익은 소음, 행복한 목소리들. 죠의 아름답고 동정적인 미소는 그녀에게 안도감과 자신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비밀스런 공포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애무와 키스를 받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키스하지 않았다. 그의 느낌은 어떨까? 감각적일 거야. 그녀는 그의 관능적인 입술과 아름다운 얼굴을 탐욕스럽게 응시했다. 그의 강한 손가락이 잔 옆에 쉬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그 위에 포갰다. 언젠가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어야 해. 죠는 다른 손을 그녀의 것 위에 포갠 다음 꼭 잡았다가 놓았다.
"마지, 세일즈가 당신에게 해로운 것 같으면, 너무 늦기 전에 그만합시다. 돈은 그만한 가치가 없어."
아, 그게 아니에요. 난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난 워낙 상상력이 풍부해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 순간 그녀는 죠에게 다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도덕에 너무 연연했다. 그녀는 성공할 필요가 있었다. 라나를 위해서라면 도버의 모든 대어를 작살로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봐요. 광고주들이 당신과의 계약으로 더 많은 이익을 보게 될까?"
"두말하면 잔소리예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들을 괴롭히든 말든 난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겠소. 그게 다 그들을 위한 일이니까."
그는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다음 2주일 동안 그녀는 그의 위로를 지주 삼아 더 많은 계약을 체결했고 그 결과는 어니 제임스보다 두 배나 많은 광고주를 확보했다.
죠의 스나게이트 스트리트 건물 내의 출판 및 편집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첫 번째 종이가 인쇄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죠는 중고 석판 인쇄기를 사들이고 상업 미술가인 마크 발렌타인을 고용했다. 땅딸보 마크는 검정 고수머리에 주근깨가 많고 항상 웃음기 어린 갈색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영리하고 학교를 갓 졸업한 그는 일을 가리지 않고 열성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인쇄공 역할까지 해냈다. 하지만 타자만은 전문 회사에 용역을 맡곁다. 죠는 샴페인 병을 따서 세 잔을 채웠다.
"축배를 듭시다. 어려운 고비도 많았지만 모두 잘 극복해 냈소. 마지, 당신의 수수료와 봉급과 기타 경비를 제하고도 창간호는 5백 파운드의 이윤을 남겼소."
마조리가 죠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그들 사이에 은밀한 메시지가 오고 갔다. 그는 생각을 감추는데 도통했지만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감정이 정확히 어떻지? 로버트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죠는 그녀가 만난 가장 섹시한 남자였다. 지금 그의 눈빛이 경고를 보내 왔기 때문에 그녀는 어리석은 상상에서 깨어났다. 갑자기 아래층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갔다 올게요."
그녀가 말했다. 이 늦은 밤 시간에 누가 찾아왔을까? 죠의 여자 친구들 중 한 명일까? 낙심한 그녀가 잠금쇄를 딴 순간 문이 그녀를 벽으로 밀어젖히며 기세 좋게 열렸다. 그 바람에 그녀는 균형을 잃고 매트 위에 쓰러졌고, 각목을 든 두 명의 강도가 그녀를 뛰어넘어 계단을 올라갔다. 쨍그랑 잔이 깨지고 몸싸움에 이어 '쿵' 소리가 들려 올 즈음 그녀가 겨우 일어나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죠, 조심하세요. 죠! 강도야!"
그녀는 그들을 뒤따라갔다. 맙소사! 어니 제임스가 사주한 거야.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들이 제 때를 딱 맞췄을까? 인쇄실 문에 도착한 그녀는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강도 중 한 명이 죠에게 달려드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녀석은 각목으로 죠의 얼굴을 치고 다시 몸을 날리려다가 제도 탁자에 부딪혀 벽에 곤두박질쳤다. 죠가 비호처럼 그를 덮쳤다. 각목을 뺏어 든 죠는 큰 호를 그리며 그것을 녀석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1초 간격으로 다른 방향에서 '우지끈 '하는 소음이 났다. 다른 강도가 마이크와 엎치락뒤치락했지만, 죠가 놈의 덜미를 잡아 한 바퀴 돌려 벽에 얼굴을 박아 버렸다. 이제 이 사건의 피해자가 된 강도들이 바닥에 누워 신음했다. 그들 주변에 피가 낭자하게 튀어 있었다. 빨리 걸레질을 하지 않으면 핏자국이 영원히 남을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죠가 잠깐 자리를 비켰다가 권총을 들고 나타났다.
"썩 꺼져, 이놈들아. 어니 제임스에게 몸조심하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몸소 그를 찾아갈 테다."
"어디에서 격투술을 배웠어요, 죠?"
10분 후 그녀는 마지막 핏방울을 닦아 내며 물었다. 죠는 마이크의 이마에 난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격투술 따위는 배운 적도 없소 싸움이 나의 자구책이었을 뿐. 난 베를린의 모 학교 3백 명의 기독교 전교생들 중에서 유일한 유태인이었거든. 그런 상황에서 싸움질을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 알면 놀랄 거요. 그다음에 군 복무중에 훈련을 받았소."
베를린?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죠의 성격이나 과거는 조각 그림 맞추기와 비슷했지만, 대부분의 조각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조각들은 전혀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한둘 발견되었다.
만사가 술술 잘 풀려 갔다. 그녀는 조만간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게 될 테고 회사 측에서 차를 사줬다. 그녀는 인근 도시로 세일 반경을 넓힐 계획을 세웠다. 그녀의 놀라움은 월말에 주급을 받았을 때 극에 달했다. 주급 18파운드에 보너스로 1백 파운드까지 받았다.
"하지만 죠......"
그녀는 그가 만용을 부리는 게 아니기를 빌면서 항의했다.
"잡지가 아직 나오지 않은데다 광고주들은 후불을 내잖아요."
"요즘은 자금이 부족하지 않소. 내 돈을 좀 투자했거든. 내가 밑천을 대고 당신이 세일을 하기로 했잖소?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당신이 가끔 생각하는 것 같아. 이건 당신이 벌고, 계약상 월말에 지급하기로 한 당신의 수수료요. 단, 광고 계약이 취소되는 건은 다음 달 당신 급료에서 그만큼의 수수료를 제하게 될 거요."
어휴, 죠는 마음만 먹으면 피도 눈물도 없는 노랑이가 될 수 있다니까. 그녀는 그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뒤로 물러나 일부러 경계선을 쳤다. 그녀가 그에게 로버트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일까?
"내가 축하하는 뜻으로 당신에게 저녁을 대접하면 어때요?"
그녀는 가장 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데이트가 있소. 하지만 억지로 짬을 내면 술 한잔은 함께 할 수 있을 거요."
그녀는 호기심을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 죠는 의문의 수수께끼였다. 언젠가 그녀가 다른 물고기들처럼 그 역시 잡게 되겠지만 이직 그렇게 깊은 바다 속을 수영할 능력이 부족했다. 네스 호의 괴물처럼 그는 심해에 속했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추슬렀다.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남은 인생을 라나를 키우는데 바쳐야지. 험한 방법을 통해 배웠잖아? 남자를 이용하되 다시는 방어벽을 낮추지 않을 거야.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새벽 6시 30분 로버트가 키이스를 출발할 당시 어두웠던 주변이, 북서쪽으로 차로 달린 지 반 시간 만에 부드러운 빛으로 감싸였다. 하늘은 아직 어두웠지만 눈 자체가 발광체인 것 마냥 빛을 내뿜고 있었다. 드디어 전방이 보이고 눈 덮인 길을 가로지르는 검정색 얼음 빙판이 드러났다. 그는 발로 액셀레이터를 눌렀지만, 잠시 후 무너진 제방 더미가 일부 도로로 흘러내린 지점에서 아차 운전대를 놓쳤다. 차가 도로변의 눈더미 쪽으로 주르르 미끄러지는 순간 그는 충격에 대비해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부드러운 '쿵' 소리와 함께 차가 눈에 파묻히는 정도로 끝났다.
"젠장!"
트렁크에 있는 삽을 어떻게 꺼내지? 몇 차례 힘을 쓰자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만큼 자동차 문이 열렸다. 잠시 후 그는 삽질을 하며 계속 무너져내리는 눈더미와 싸웠다. 빌어먹을! 내가 남부 지방에서 녹녹하고 부주의해졌구나. 이러다간 공장에 늦겠는걸. 세 시간 후에야 자유를 되찾았고 그 15분 후에 그의 여행이 끝났다. 예정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늦은 11시 10분에 그는 글렌티란 증류소에 도착했다.
"당신을 찾으러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공장장 그래이엄 포브스가 태평하게 말했다. 그는 60대 중반의 바싹 마르고 강단 있는 남자로, 눈가의 주름과 듬성듬성한 머리카락만이 제 나이를 말해 줬다. 그 외에 맑고 부드러운 피부, 엷은 푸른 눈동자, 모래 빛 머리는 사십이나 오십 대로 통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증류소를 잘 운영했고 로버트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최고급 위스키를 한잔 할 수 있을까요, 보브스 씨?"
로버트는 몸을 녹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말했다. 넓은 사무실 한쪽 끝의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었다. 그는 반색을 하며 그 앞에 서서 손발을 녹이려 했지만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이건 진짜 명품입니다. 당신 부친께서 1950년에 담그신 술이에요."
포브스가 술을 두잔 따르며 말했다.
"사장님의 건강을 위하여! 내 소견으로 이 술은 이 나라 최고의 위스키예요."
"물론이지요."
로버트는 독한 술이 그의 혈관을 타고 퍼지며 얼어붙은 손발에 생명을 되살려 놓는 느낌을 받았다.
"추위로 얼굴이 시퍼래지셨어요, 맥라렌 씨. 남부의 편안한 삶으로 피가 맑아지신 모양입니다."
"예, 그런가 봐요. 세 시간 전에 차를 눈더미에 처박는 바람에 여태까지 빠져나오느라 고생했어요."
"네에. 어젯밤 날씨가 험악했어요. 눈은 여러 날에 걸쳐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어요. 검정색 얼음 빙판은 다루기 쉽지 않지요."
포브스는 로버트에게 잘못이 있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곧 익숙해지겠지요."
로버트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포브스는 노기 띤 얼굴을 돌려버렸다. 로버트는 슬퍼졌다. 그레이엄 포브스는 아버지의 친구인 동시에 스코틀랜드의 최고 위스키 제조자였고 글렌티란 증류소에 평생을 바쳤다. 심지어 아버지와 던컨 형이 3년산 위스키 전액을 전부 로우랜드의 영국인 양조장에 팔아치웠을 때에도. 이제 얼마 안 되는 개인 보유액 외에 위스키가 많이 남지 않았지만 포브스는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로버트는 공장을 둘러 보았다. 가열된 원액 위스키의 톡 쏘는 친근한 냄새를 맡으며 물탱크와 아궁이, 여전히 양파 모양의 천장처럼 보이는 청동 솥단지를 차례로 지나는 동안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일하실 때 그는 형들과 함께 여기서 놀았었고, 나중에는 이 공장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을 배웠다. 요즘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고용인들이 불안에 떨었다. 그는 그것을 그들의 눈에서 봤고 그들의 걱정을 몸으로 느꼈다. 그들이 짧은 목례만 하고 그를 외면하며 악수를 피하자, 로버트는 상처를 받았다. 사무실로 돌아간 그는 격려의 말이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포브스 씨, 작은 축하연을 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17 년산 위스키와 잔을 준비하세요. 우리 증류소 식구가 전부 몇 명이나 되지요?"
"청소부까지 합해서 32 명입니다."
포브스는 내키지 않아했다.
"그리고 회계사가 와 있습니다."
"그에게 동석해 달라고 하고, 34개의 잔을 준비하세요."
그가 불가에서 몸을 녹이고 있을 때 첫 번째 무리가 쭈빗쭈빗 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침묵을 지켰다 술잔이 채워지고 사람들에게 돌려졌다. 그때 그가 잔을 높이 들었다.
"하이랜드에서 가장 좋은 위스키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 모두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그들은 로버트를, 그들 모두를 파멸로 이끌어 갈 멋모르는 도령쯤으로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로버트는 아버지가 '셀비'라는 영국인 양조 그룹에 위스키를 팔지 못하도록 했다. 계모 로다는 수년 전에 아버지를 설득하여 '셀비'와 거래를 함으로써 쉬운 길을 택했다. 전 생산품을 그들에게 공급함으로써 로우랜드의 저질 위스키와 혼합이 가능하게 도운 꼴이 되었다. 이는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는 결과가 되었고, 그 책임을 던컨형에게 전가시키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지속적인 심장 문제로 사업을 등한시하는 동안 증류소 경영은 지리멸렬해졌다. 로버트는 이곳으로 돌아와 모든 책임을 걸머졌고 셀비 그룹과의 거래를 끊었다. 지금 글렌티란 증류소는 은행 빚으로 간신히 운영되고 그 시한에 쫒겼다. 직원들은 모두 이 사정을 알고 분개했다. 다들 로버트가 무모하게 그들의 생존권을 놓고 도박을 걸었다고 느꼈다.
"여러분,"
그가 말을 시작했다.
"소중한 우리의 위스키를 장악하려는 영국인과 전쟁을 치른게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선조들은 우리를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중세에 첫 글렌티란 스카치 위스키를 만들어 낸 이들이 그분들이셨고, 1483년 이안 맥라렌이 처음으로 그 강한 도수와 월등한 품질에 대한 글을 남기셨습니다. 1644년 우리는 영국인의 세금을 피하기 위해 위스키를 지하에 감췄습니다. 그 옛날 저장실이 바로 발 밑에 있습니다. 1707년 또 영국이 부과한 높은 주류세에 맞서 다시 한번 지하 저장실을 이용했습니다 그 후에도 국회가 불합리하게 주류세를 높였을 때, 위스키를 저장실에 숨겨놓고 영국인에게 저항했습니다. 이러한 항거에는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지만 영국인들은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스카치위스키의 원조가 이곳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일차 세계대전, 미국의 금주법, 식량 부족 등으로 위스키 생산을 제한했던 이차 대전의 시련을 겪었지만, 그 어떤 것도 강인한 스코틀랜드 인의 기를 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60년대에 하이랜드에 번영이 찾아왔습니다. 그 번영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었기에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세기에 걸친 노동의 결실에 대한 보답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위스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술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영국인은 그것을 차지하고 싶어서 많은 스코틀랜드 인의 증류소를 사들였습니다. 우리 공장의 경우, 경영 부실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영국인 측은 투자했던 대부의 상환을 요구하는 동시에 성숙한 위스키 제품 구입을 거절함으로써 증류소 경영권 이전을 요구했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우리가 항복해야만 합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대답했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노라고요. 가서 다른 햇병아리들이나 찾아보라고 말입니다. 이 곳은 우리의 터전입니다. 우리는 때를 기다리고 더 많은 희생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 빌어먹을 싸구려 양조업자들에게 최고의 위스키 제조는, 돈이나 증류소 또는 토탄 성분이 많이 함유된 소택지와 순수한 광천수 이상임을 보여줄 것입니다. 저는 진짜 훌륭한 스카치위스키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게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들의 손에 말입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포브스가 두 번째 잔을 채웠다.
"맞아, 그건 그래."
그의 귀에 방안의 웅성거림이 들려 왔다.
"우리는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버틸 재정원이 있습니다. 그 점을 여러분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지지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그들은 그의 등을 두들겼고 입을 모아 그가 이안 맥라렌의 진정한 자손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 노래를 합창했다. 술통이 빌 때까지 건배를 한 다음에야 그들은 아까보다 훨씬 행복한 표정으로 일터로 돌아갔다.
"연설을 아주 잘 하시더군요."
회계사 바트 쇼가 둘만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쇼는 30대 중반이었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하고 야망이 높았다. 짧은 갈색 머리와 불그스레한 혈색의 황소 같은 외모를 지녔지만 그의 영리한 눈에 어김없는 사업적인 통찰력이 드러났다.
"문학을 천직으로 삼으려고 했다면서요?"
로버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다고 해두지요."
지나간 일에 대한 대화는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지나간 일에는 마조리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녀가 보고 싶었다.
"이제 웅변은 끝났으니 실제적인 문제로 돌아갑시다. 돈 얘기입니다!"
바트는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우울하게 말했다.
"당신과 부친을 위하여 제가 은행 담보물을 설정해 왔습니다. 가문 소유의 그림과 가보들, 희귀본 고서와 여러 대의 차, 하이랜드 성과 증류소, 모든 부동산들이 해당됩니다. 단, 농장과 두채의 저택은 신탁에 묶여 있기 때문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당신은 처해진 상황을 잘 알고 계시므로 장황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넌지시 운을 떼려고 했지만 아까 연설을 통해 당신이 매우 영리한 청년임을 깨달았어요. 이 서류들을 좀 검토해 보십시다."
두 채의 저택이라! 로버트는 조용히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키이스의 현대적인 주택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키이스의 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물었다.
"비어 있습니다. 당신 부친께서 하이랜드에 오실 때마다 그곳에 머무르셨습니다. 한 이웃이 그곳을 돌보고 있습니다."
바트가 서류 가방을 뒤지는 동안 로버트의 생각은 마조리에게 돌아갔다. 그가 집에 돌아온 이후에도 그녀는 좀처럼 로버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몹시 보고 싶었다. 싶대 시절의 로맨스로 생각했던 마조리와의 사랑은 깊은 사랑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그녀를 자식들의 어머니로 원했다. 최근에 그는 가정을 꾸리는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오래된 저택은 텅 비었고, 아버지는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의지할 가족이 필요했다. 계모가 티란 영지에서 물러나려면 몇 년이 걸릴 테니, 그때쯤 마조리는 안주인이 될 능력을 갖추게 되리라. 그가 최근에 그녀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은 이유는 거짓 약속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에게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바트가 그 앞에 서류를 내밀었을 때에야 로버트는 현실로 돌아왔다.
"여기에 서명하세요...... 그리고 여기에도...... 또 여기에도......"
끝이 없었다.
"저당에서 풀려날 날이 올 것 같습니까?"
그가 바트에게 물었다.
"저는 당신을 굳게 믿고 있어요. 그리고 그람피안 은행에도 똑같이 말해 줬습니다. 참,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는 이유로 마님께 원성을 듣겠지만, 그래도 드려야겠습니다. 작년 12월 16일 자로 5천 파운드의 수표가 회사 잔고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마님의 개인 지출로 상정했습니다만, 마님께선 당신을 위해 쓴 돈이라고 주자 하시더군요. 그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아니오, 하지만 곧 알아보지요."
"빠른 시일 내로 연락해 주세요."
"내일 아침에 그곳에 다녀오겠어요."
아버지가 재혼한 이래 그는 영지를 '집'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로버트는 서재에 서서 정원을 내다보았다. 지금은 초라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저 정원도 한때 향기로운 꽃으로 만발했던 때가 있었지. 그는 기분이 묘했다. 그는 어느덧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예전에 즐거움과 훈훈함으로 가득했던 이 방에 다시 서 있었다. 그의 스코틀랜드 정신은 로다가 아버지와 결혼한지 2주일만에 저택에서 편안한 가구들을 전부 치워 버리고 재단장했던 실내 장식에 반발했다. 이제 그들은 거친 스코틀랜드의 성에 어울리지 않는 벨벳, 긴 의자와 술 달린 쿠션, 섬세한 도자기에 싸여 살았다. 그는 오랫동안 마음을 괴롭혀왔던 그 생생한 장면을 되살렸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걸쳐진 사다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계신 어머니, 사다리가 기우뚱하고..... 떨어지는 어머니를 막으려던 그의 힘없는 노력, 너무 늦게 도착한 구급차의 웽웽거리던 소리, 아버지가 여섯 달 동안 집을 비운 동안 안살림을 도맡아 했던 붉은 혈색의 가정부. 그리고 아버지는 영국인 계모를 데리고 돌아왔고, 로다는 조직적이고 야만적으로 유령이된 라이벌의 흔적을 모두 지워 버렸다. 그리고 이 방에서 그 역시 같은 꼴을 당했다. 아버지의 말을 빌자면 '계모에게 용서할 수 없는 무례한 행동을 한'이유로 그는 도버대학으로 추방당했던 것이다. 방문이 열리고 로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하이힐 가죽부츠와 점잖은 트위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해 마지않는 복장이었지만 현지 부인들을 접대하려면 별 수 없었다.
"로버트,"
그녀는 그를 염증나게 하는 그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 생활이 그녀를 늘게 만들었구나. 그는 덤덤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기대하고 찾던 것을 아버지의 품과 이 가정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떠세요?"
"그저 그러시다. 네가 가서 직접 만나 뵙지 그러니?"
"곧 그럴 겁니다."
그녀는 항상 자신만만했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허둥거리며 담배를 꺼냈고 불을 붙이는 모양새가 마치 온 생명이 그것에 달린 마약 중독자를 연상시켰다. 로버트는 몸을 돌려 프렌치 창문을 열었다.
"그 나쁜 버릇이 당신을 죽일 겁니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머리 뿌리가 하얗게 샌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점점 몸 매무새가 허술해졌고 한때 암갈색 머리칼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새까맣게 염색했다. 이제 트위드를 걸친 모습은 왜 그녀가 화려한 색상의 옷만 선호했는지를 대변해 주었다. 그녀는 늙고 초라해 보였고 그 옷은 진홍색 손톱과 입술과 현격한 대비를 이뤘다. 항상 빈틈없던 눈 밑에 물기가 살짝 고여 있었다. 전에 없던 새로운 변화로군.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그의 경멸에 맞섰다.
"아직 공장을 그만둔 사람은 없니?"
그녀가 난데없이 물었다. 그녀는 그의 장기 계획에 반대해 왔다. 그 어떤 것보다 그녀의 영향력이 이 위기를 불러 들였음을 로버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네, 없습니다. 제가 뵙자고 한 이유는 사소한 돈 문제 때문입니다. 5천 파운드의 수표가 제 허락도 없이 회사 잔고에서 결재되었어요. 당연히 그 용도를 알고 싶은데요."
"어디 보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오른쪽 눈가를 톡톡 치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어떤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네가 꼭 알아야겠다면 어쩔 수 없지. 난 그 도버 계집의 입을 막고 너로부터 떼 내는데 그 돈을 썼다."
그는 충격과 혐오감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마조리에게? 언제 그녀를 만나셨어요?"
교활한 즐거움이 그녀의 눈빛에 드러났고 로버트는 감정을 드러낸 자신을 저주했다.
"작년 연말이었지, 아마?"
그녀는 책상에서 다이어리를 뒤졌다. 로버트는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책상에 내놨다. 그는 증오와 공포를 감추려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수표 발행일은 12월 16일입니다. 그러니 요점만 말하세요."
"그녀는 임신한 티가 역력했어. 넉달 쯤 된 것 같더라. 그녀는 아기를 입양시킬 수속을 다
끝냈다고 말했어. 사실상 아이를 팔아넘긴 거야. 그 방법이 꽤 유행한다며? 그녀는 널 협박하려고 여기에 왔었어. 1천 파운드를 내놓지 않으면 너에게 유혹당한 후 버림받았다는 사연을 언론에 공개하겠다더라."
그녀는 기침 때문에 말을 끊었다. 저런 기침이 꽤 오래되었다고 그는 상기했다.
"아기를 이미 처리했으니 양육을 요구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스캔들을 일으켜서 우리 모두를 파멸시키겠다고 했어. 나는 네 아버지가 격노하실 것이 두려워 5천 파운드로 그녀의 협박을 막았다. 그다음에 그녀의 소식을 들은 바 없다."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난 내 자식에 대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녀가 날 찾아왔던 게 분명해요."
로버트는 현재 심정보다 훨씬 침착하게 말을 이끌었다.
"왜 그녀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했겠습니까?"
"그녀는 건달 같은 남자를 데리고 왔었어. 그 때문에 널 보고 싶지 않았던 게지."
"그녀가 날 만나게 해 달라고 하지 않던가요?"
"아니."
"다시는 내 일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그가 화를 내며 말했다.
"로버트, 넌 아직 어려. 너는 엄청난 실수를 한 거야. 그녀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교활하고 무정하고 돈만 밝히는 계집이야. 게다가 네가 그녀와 결혼할 수도 없는 일이었잖니?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 상대야."
"왜요?"
"그녀의 억양, 출신 배경, 교육, 옷 입는 법, 심지어 앉은 매무새까지도 말야."
"당신은 반세기가 뒤떨어지셨어요, 로다. 그 때문에 늙는 겁니다."
그는 그녀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고 덧붙였다.
"그 켸켸묵고 어리석은 계급 감정은 이미 사라졌어요."
"그럼 이건 어떠냐? 그녀는 너에게 말 한마디 없이 네 자식을 팔아치운 다음에 나에게 협박을 했어. 그런 여자가 네 자식의 어머니 감이란 말이니?"
그가 사랑했던 그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녀가 정말 로다의 묘사대로 잔인하고 탐욕스런 여자일까? 마조리가 그들의 아이를 팔았다는 생각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로다의 심술궂고 교활한 미소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에 그는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는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정처 없이 걸었다. 그는 로다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따로 그 진상을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세인트 메리 수녀원의 원장은 그를 반시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다. 로버트는 외풍이 심한 복도에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원장 수녀는 변호사와 의논중인 눈치였다. 벌써 12월 중순이었다. 로버트가 마조리의 임신 소식을 안 지 2주일이나 지났고, 그 이후 바트가 조사를 해본 결과 마조리의 여아가 5월 15일 세인트 메리 수녀원에서 태어났다는 출생 기록을 찾아냈다. 로버트가 첫 자식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 아이가 생후 일곱 달이 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아이는 마조리처럼 붉은 머리일까, 아니면 그를 닮았을까? 그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를 입양할 길을 찾아내겠어. 마침내 그는 원장 수녀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돔 모양의 천장과 흰 벽, 스테인드 글래스 유리창으로 된 그 방은 금욕적이었지만 아늑했다. 원장 수녀는 빳빳한 속치마가 부딫치는 소리와 짙은 파우더 냄새로 그를 맞아들였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었고 테 없는 안경 뒤에서 푸른 눈이 반짝거렸다. 영리하고 만만치 않은 상대야. 로버트는 단정했다.
"맥라렌 씨,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아일랜드 억양이 묻어나는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법적 자문에게 확인을 해봤습니다. 당신이 이미 아시는 것과 같이 마조리 하디 양의 아기는 여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두 달동안 탁아소에 있다가 입양되었어요."
그녀는 고통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는 아기의 이름이나 입양 부모에 대한 정보를 발설한 자유가 없습니다. 유감입니다만 당신은 그 아이에 대한 법적인 권리를 주장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현행법에 따라 그 아기를 찾지 못할 겁니다. 미안하지만 당신에게 그냥 이대로 떠나고 아이를 찾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릴 수밖에 없군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로버트는 망설였지만 결국 따라 일어나 그녀의 손을 살짝 맞잡았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이 시련을 견딜 힘을 주시고, 현명한 결혼을 하셔서 이런 비극을 재현하는 육욕적인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가세요, 맥라렌 씨."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림 끝에 이렇게 짧은 면담을 하다니?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그는 말을 더듬었다.
"미안합니다. 저는 더 이상 당신에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녀는 또 다른 문으로 나갔다. 그래, 여기에 바보처럼 서 있을 이유가 없지. 그는 터벅터벅 수녀원 정원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자 그는 정원 벤치에 앉아 빼앗긴 딸과 잃어버린 꿈을 애도했다. 그의 첫 아이가 어떤 이의 삶과 요람을 채우고 있을까? 그 아이는 행복할까? 너무 비통한 나머지 구역질마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여전히 마조리를 사랑했지만, 그와 동시에 증오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사랑은 완전히 부식되어 버리리. 그는 그곳에 앉아 갑작스럽게 결단을 내렸다. 일류 경영인을 고용하고 뉴욕으로 가서 향후 몇 년 동안 위스키 영업망을 구축하자. 여기에 그를 잡아둘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낮은 부드럽게 도망가고 슬픔이 밤과 함께 찾아왔다. 뭔가 아름다운 것이 영원히 파괴되었다.
최고의 크리스마스였다. 트리는 천장에 닿았고, 하늘에서 하강한 듯한 천사가 그 끝에 달려있었다. 장식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화려한 종이가 반짝거리자 라나는 경이로움에 눈을 빛내며 주변을 기어다녔다. 이제 여덟 달이 꽉 찬 라나는 일어나서 뒤뚱거리는 연습으로 날을 보냈다. 그녀는 불에 끌리는 나방처럼 트리 밑에 있는 선물 꾸러미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것은 대부분 그녀의 것이었다. 라나가 하나씩 포장지를 뜯기로 작정했으므로 그들은 선물을 그녀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치웠다. 하지만 이제 라나는 몸을 늘여 트려 아래가지를 잡아 뜯는 법을 배웠다. 그다음에 그 고사리 같은 손에 예쁜 종이 장식이 찢어지자, 그녀는 명랑하게 웃으며 환희로 눈을 빛냈다.
"쟤가 또 저러는구나."
엄마가 말했다.
"다른 것도 망쳐놓고 있어. 쟤는 억척꾼이 될 거다."
엄마는 비정상적으로 들떠 있었다. 라나가 장난감을 보는 순간을 기다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죠만 오면 되는데. 엄마는 이틀전에 미리 받은 냉장고를 보고 황홀경에 빠졌지만 저기에 다른 선물들도 준비되었다. 쵸코렛과 향수와 새 옷 등. 그런데 죠가 왜 이렇게 늦지? 마조리는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내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죠, 당신이에요? 무슨 말 좀 해보세요. 왜 이렇게 안 오세요? 당신을 기다리느라고 저녁이 늦어지고 있어요."
"난 가지 않겠소."
그는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왜요? 약속했잖아요? 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엄마는 당신을 위해서 요리를 하고 선물까지 장만하셨어요. 우리 모두 실망할 거예요. 제발, 죠, 빨리 오세요."
"난 당신네 크리스마스의 불청객이 되고 싶지 않소."
"우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만인의 것이에요,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특별히 당신의 크리스마스라구요. 당신 덕분에 오늘이 있는 거예요.죠."
"난 한 번도 영국식 크리스마스를 축하해 본 적이 없소. 게다가 난 유대인이고 사실상 불교 신자요."
"제발, 죠, 와주세요. 빨리요."
"하지만 난 채식주의자인 걸."
"당신은 못 말리는 괴짜군요. 아무래도 좋아요, 어서 오세요."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초대군."
마조리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웃음기를 들었다. 이제 된 거야.
그녀는 수화기를 놓고 위층으로 올라가 머리를 다듬고 향수를 더 뿌렸다. 몸매의 곡선이 드러나는 검정색 모직 바지와 눈 색깔과 잘 어울리는 에메랄드 초록색 캐쉬미어 스웨터를 입은 터였다. 최고의 모습에 자못 만족한 그녀는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잠시 후 그가 가슴 한 아름 선물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오지 않을 생각을 다 할 수 있수? 자네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죠."
"저기, 미처 몰랐습니다."
라나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는 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프랑스어로 말을 걸고 프랑스 노래를 부르며 아이를 안고 왈츠를 췄다. 곧 그들은 함께 마룻바닥에 앉아서 그녀의 선물을 개봉했다. 죠는 아빠의 꼬냑을 한두 잔 마시고 얼큰하게 취했다. 가끔 저 이는 너무 멋지단 말야. 짜릿하게 색시하고 무모한 면이 있어. 마조리는 그에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포착했다. 그녀는 저 감각적인 입술을 느끼고픈 불가항력적인 충동을 느꼈다. 그에게 풍기는 섬뜩한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했지만 포도주가 그녀의 용기를 북돋웠다. 죠가 우연히 미슬토우로 장식된 문가에 서자, 그녀는 목에 팔을 감고 까치발로 서서 입술을 그의 것에 살짝 눌렀다.
"메리 크리스마스, 죠."
항상 그렇듯이 죠는 종잡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의 왼쪽 손이 그녀의 작은 등을 힘차게 눌렀다. 그의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느껴졌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다. 그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그의 눈이 그녀의 것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k 서로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보는 그는 너무 짜릿한 흥분을 자아냈다.
그가 그녀를 더 가깝게 끌어당기자, 애프터 세이브 향과 뒤섞인 남자만의 독특한 사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와 닿고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애무하는 순간 그녀는 이와 같은 기분을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으리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몸에 불씨가 당겨져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번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순간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고, 그는 그녀를 놔주었다.
오후 세 시에 그들은 브랜디 소스를 끼얹은 미스 파이를 먹고 폭죽을 터뜨린 다음 의무적으로 우스꽝스런 종이 모자를 썼다. 마조리는 식탁 근처를 서성이며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높은 의자에 앉은 라나는 새 장난감을 보고 웃고 있었고, 아빠는 시를 읽고 있었으며, 엄마는 꿈같은 표정으로 포도주를 홀짝거렸다. 그 때 죠가 폭탄선언을 했다.
"우리의 새로운 잡지를 위하여 건배합시다."
그가 포도주잔을 높이 들었다. 어머, 저이가 취했나 봐.
"무슨 새로운 잡지요?"
마조리는 웃으면서 물었다.
"우리의 새로운 경영 잡지. 난 좋은 이름도 생각해 뒀소. '리더쉽' 어때 감이 오지 않소?"
마조리는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새로운 잡지 따윈 원치 않아요. 지금 이 상태로 행복해요. 우리는 많은 이윤을 내고 있는데, 왜 변화를 모색하는 거예요?"
"사업은 정지된 상태로 멈춰 있지 못해, 마조리. 우리는 최상의 파도를 타고 있으니 그와 함께 전진할 필요가 있소. 전국으로 진출해야 돼."
"당신은 미쳤어요. 경영잡지를 원하는 지방 광고주는 한 명도 없어요. 영국과 유럽 전역에 쫙 깔린 게 그런 잡지들이라고요. 그런데 누가.....? 아 안돼요! 잊어 버려요!"
공포감에 그녀의 입술이 마르고 즐거운 하루가 망쳐졌다.
"게다가 난 라나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요."
"우리 광고지는 조만간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거야."
"그 많은 광고주들은 다 어쩌고요."
"마조리, 내 말을 잘 들어요. 우리는 광고지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소. 하지만 지방 신문사는 거대한 유료 판매망을 구축했기 때문에 벌레 한 마리를 죽이는 것처럼 쉽게 우리의 숨통을 조를 수 있소. 그것도 한두 달 안에. 그들은 우리의 흑자 액수를 알아내는 즉시 그렇게 할 거요."
그녀는 두려움으로 질렸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수수료 덕분이었다. 그런데 전부를 읽게 된다고? 거의 공포에 질렸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죠는 그녀의 불안에 찬 반응을 즐기는 거야.
"그렇다면 난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계약을 따낼 거예요."
"여자들은 항상 그렇게 시야가 좁은가?"
"두 사람은 항상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는구나. 서로 단 5분도 견디지 못하고 말싸움을 해대다니, 원. 자네는 내 딸을 어떻게 생각하나, 죠? 뭔가 있을 법한데."
"엄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사업상 동업자예요."
마조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질문은 그가 스스로에게 자주 해 왔던 것이었다. 오늘 그들의 짧은 육체적 접촉은 그를 충격에 빠뜨리고 연약한 느낌을 안겨 줬다. 그는 마조리의 현실적인 인생관과 용기와 유머 감각을 사랑했다. 그녀의 육체적인 매력에도 끌렸 그는 아름다움에 집착력이 강하므로 당연히 그녀를 눈요기로 즐겼다. 가끔 외로운 밤에 그녀에 대한 정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죠는 사랑과 정욕을 착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런 오도된 감정으로 결혼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마조리에게는 그가 질색하는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사업에 대한 단기간 적인 안목이나 라나의 아버지에 대한 강박관념, 변화에 대한 거부, 영역 밖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무심함 등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똑똑한 시골 처녀인 것이다.
"하디 부인, 저는 여동생을 갖고 싶었는데 마조리가 그 자리를 채워 주었습니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피붙이를 만들어 내서 거짓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잡지에 대해 생각해 봐요, 마조리. 이제 가보겠습니다. 하디부인. 맛있는 크리스마스 저녁을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즈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죠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