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탄생
봉씨가 폐빈이 되어 궁중에서 내친 후에 궁녀들의 기풍은 마치 엄동설한의 삭풍을 만난 듯 싸늘하고 엄숙했다. 여덟 해 동안이나, 왕후의 다음 가는 자리에 앉아 있던 동궁빈이 동성애로 인하여 쫓겨난 이 현실은 어느 때부터 만연되었는지 모르는 궁녀들의 악 풍습을 말쑥하게 씻어버렸다. 일벌백계의 큰 철퇴가 벽력같이 내려진 것이다. 위로 상궁들로부터 아래로 무수리까지 은밀하게 동성끼리 사랑을 속삭이던 풍습은 끊어졌다. 그러나 전하는 두 번씩이나 세자빈을 내친 후에 세자와 왕실의 장래를 생각해서, 마음이 불안했다. 낮에 온종일 정무를 보살핀 후에 밤에 홀로 연침에 들었을 때는, 깊은 생각 속에 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루바삐 세자빈을 다시 정해서 왕실의 질서를 안정시켜놓아야 하겠는데, 사람다운 사람을 얻기가 극난했다. 어려운 문제다. 겁이 났다. 남의 집 딸을 잘 골라서 데려오는 것도 문제지만, 첫째로 세자의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게 하는 일도 큰 문제다. 전하는 다시 세자빈을 간택할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번민 속에 빠져 있었다. 동궁빈의 자리가 빈 후에, 대신들의 동궁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영의정 황희, 우의정 노한, 찬성 신개들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속히 금혼령을 내리시어 양가의 규수를 다시 선택하시어, 동궁빈을 정하십시오. 왕실이 안정되어야 모든 국가의 정치가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왕실의 원손은 국가의 기본이올시다. 속히 동궁빈을 맞이하시어 국본을 정하옵소서.'
전하는 대신들의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당신도 그리 생각한다. 그러나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대신들은 속히 동궁빈을 새로 정해서, 왕가의 기초를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고 지재지삼 상소를 올렸소이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세자빈을 내치고 보니, 이제는 겁이 나는구려. 또다시 새로 세자빈을 봉했다가 내외간에 금실이 좋지 못하여 탈이 난다면, 남부끄럽기 한량없고 과연 곤란한 일이로구려!"
전하는 한탄하면서 말씀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간택할 때는 모두 다 훌륭한 집 딸로 알고 데려왔는데, 두 번씩이나 가슴을 데고보니, 겁이 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헌왕후도 수심어린 얼굴로 마주 탄식했다. 한동안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전하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묘한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하도 겁이 나니 이러한 생각이 나오. 중전의 뜻은 어떠하실는지?"
"어떠한 묘안이 계시온지 하교해주십시오."
"옛적 '사기'를 보니 후궁으로 정궁을 삼아서, 왕가가 흥왕한 예가 많소이다. 지금 세자는 양원 권씨와 승휘 홍씨와는 사이가 좋은 듯하니, 이 두 후궁 중에 한 사람을 승격시켜서 세자빈의 정궁을 삼는 것이 어떠하겠소? 더구나 권씨는 이미 딸까지 낳았으니 앞으로 아들도 낳을 수 있고--."
소헌왕후의 우울했던 얼굴에 활짝 웃음이 열렸다.
"전하! 그것 참 좋으신 생각이올시다. 두 사람은 이미 다 현숙하다는 칭송을 듣는 사람들이고 세자도 마음에 드는 듯한 눈치니, 한번 세자를 불러서 물어본 후에 그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후마마도 찬성을 하신다면 한번 세자의 의향을 물어보시오.--."
전하와 소헌왕후는 이같이 의논했다. 다음날 소헌왕후는 세자가 아침 문안을 들어왔을 때 전하의 뜻을 전했다.
"대전께서는 봉씨를 폐한 이후 세자의 일에 대하여 항상 염려가 많으신 듯하오. 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서 왕실을 평안케 하고 원손을 두시어 국본을 튼튼하게 하시라 간곡하게 아뢰었다 하오. 그러나 밖에서 또다시 좋다고 하는 규수를 선택해서 빈을 삼았다가 만의 하나라도 뜻에 맞지 아니한 경우가 있다면 큰일이니 차라리 양원이나 승휘를 올려서 빈을 삼는 것이 어떠할는지 동궁의 의향을 물어보라 하셨소. 다른 나라에도 이러한 전례가 많을 뿐 아니라 내조의 힘이 커서 국가가 왕성했다 하오. 동궁의 의견은 어떠하오?"
어질고 안존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세자는 어마마마의 안상하게 의견을 묻는 말씀에 죄송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가슴에 가득 넘쳤다. 음성을 나직이 하여 공손하게 아뢴다.
"모두 다 소자가 덕이 없어 두 번씩이나 빈을 내치게 되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심신을 괴롭게 해드렸사오니 불효의 죄, 태산 같사옵니다. 그리하와 전번에는 세자의 자리를 면케 해줍소사 아뢰었습니다마는, 크나큰 꾸지람을 내리시어 더욱 죄스럽습니다. 이제 또 소자의 신상을 염려하시어 동궁 후궁 중에서 인품을 이미 시험한 사람으로 정실에 승격하신다 하오니 소자 어찌 감히 다른 뜻이 있으리까. 하교대로 복종하겠습니다.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세자는 안상하게 대답했다. 소헌왕후는 세자의 반대하지 않는 대답을 듣자 마음이 놓였다.
"그러하다면 지금 동궁에는 권씨와 홍시 두 후궁이 있는데 두 사람이 다 어질다 하오. 세자의 의향에는 어느 사람을 올려서 빈을 삼는 것이 좋겠소?"
세자는 한동안 생각했다.
"승휘 홍씨로 빈을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소헌왕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왕후의 마음에는 홍씨 보다는 권씨가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승휘 홍씨도 얌전하고 부덕이 있는 사람이지만 양원 권씨는 총명하고, 인자하고, 의젓해서 가위 규중의 의표가 될 사람일뿐더러 기왕 생녀까지 했으니 다음엔 생남을 할 수도 있소. 권씨로 빈을 삼는 것이 어떠하겠소? 또 품계로 말하더라도 권씨가 윗사람아니 순서대로 올리는 것도 좋고--."
세자는 어마마마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다.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이면 다 좋습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분부하시는 대로 승명하겠습니다."
소헌왕후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만족한 말씀을 내렸다.
"이제 대전마마와 나도 다리를 뻗고 편안히 자겠소. 양원 권씨로 빈을 봉한 후에 하루빨리 원손을 보아서 왕실을 튼튼하게 해야 하겠소! 대전마마께 세자의 뜻을 품달하리다."
세자는 승명한 후에 사후를 마치고 물러났다. 소헌왕후는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대전 상궁을 불렀다.
"너 곧 대전으로 나가서 상감마마께 내전으로 임어하시라 아뢰어라!"
상궁은 곧 대전으로 나가 전하께 왕후의 뜻을 품달했다. 전하는 곧 내전으로 옥보를 옮겼다. 소헌왕후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전하를 맞이했다. 왕후의 웃는 낯을 대하자 전하의 마음도 느긋했다.
"오래간만에 후마마의 웃는 얼굴을 대하니 내 마음도 느긋하구려.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동궁빈의 일이 잘 결정되었습니다. 아침에 문안 들어온 세자를 불러서 전하의 성의를 전했더니 불효막심해서, 황공하기 짝이 없다 하면서 전하의 말씀에 승명하겠다 합니다."
전하의 용안에도 웃음빛이 흘렀다.
"동궁 후궁 중에서 빈으로 승격하는 일을 허락했습니까? 잘되었소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 후궁 중에 누구를 빈으로 봉할 것도 의향을 물어보셨습니까?"
"처음에 세자는 홍씨가 좋겠다 했습니다. 그러나 신첩의 의향에는 권씨가 계제도 한층 높을 뿐 아니라 생산을 하기 시작했으니, 지금은 비록 딸을 두었다 하나 앞으로는 아들을 낳기가 십상팔구니, 아직껏 아기를 두지 못한 홍씨보다 권씨를 빈으로 올리는 것이 좋다 했더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의향하시는 대로 정해 달라 했습니다. 전하께오서는 어찌 생각하실는지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의 용안은 또 한 번 활짝 열려졌다. 화사한 웃음빛이 떠돌았다.
"좋소이다. 세자도 권씨로 승격하는 것을 동의한다면 나도 찬성합니다! 그렇다면 하루 속히 빈을 봉하는 의식을 취해야 하겠소이다."
"역시 막중한 일이오니, 대신들과 의논하시어 정식으로 권씨에게 옥책과 인신을 내리시옵소서."
전하는 다음날 사정전에 임어하여 도승지 신인손과 동부승지 권채를 불러 교시를 내린다.
"전번에 세자빈 봉씨를 폐출한 후에 대신들이 빈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새로 숙덕이 있는 여자를 뽑아서 조속히 배필을 정하라 했으나, 나는 근년에 나라에 흉년이 들어 재앙을 두렵게 생각하여 수성하고 있을 때, 다시 중대한 가례를 행하는 일은 마음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여 두 번 세 번 윤허하지 아니했다. 대신들은 사체가 지중하니 입빈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고 굳이 청하기를 마지아니하므로 나는 마지못해 좇았다. 명가의 딸 약간 명을 뽑아서 길하고 흉한 것을 점치고 덕용을 상보라 했다. 사주 팔자를 본다는 이러한 말들은 다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가합한 여자가 없었다. 그들의 덕용을 상 보아도 또한 한 사람 내 뜻에 맞는 이가 없었다. 자나깨나 생각해서 어찌할 지 몰랐다. 세자빈을 두 번씩이나 폐하고 세워도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해서 변고가 일어난 것을 생각하니 모두다 죄팩을 당하는 듯 징애가 깊다."
세종전하는 두 승지를 향하여 말씀을 계속한다.
"이제 비록 새로 간택해 뽑아서 책봉을 한다 한들, 어찌 그 어진 사람을 얻는다고 보장하겠는가? 어제 홀연 생각하니 시험해보지 않은 사람을 새로이 구하는 것보다, 궁중에 본시 있어서 부도가 공손한 사람을 골라서 세운다면 후회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전에 입빈을 의논할 때 대신이 또한 양원과 승휘 중에서 승차를 시켜서 빈을 삼는 것이 가하다 했다. 그때 내 뜻은 첩으로 아내를 삼는 것은 옛사람의 경계하던 바요, 황차 우리 조종 이래 가법은 이러한 전례가 없으므로 일을 중하게 생각해서 허락하지 아니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넓게 중외에 구해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대신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도리가 없다. 어젯밤에 역대의 옛일을 상고해보게 했더니 한당 이후에 황후가 죽었거나 폐했을 때 후궁의 귀인과 비빈을 올려서 황후를 삼은 전례가 허다해서 역대가 다 그러하다. 다만 큰일을 급하게 정할 수 없으니 두 의정과 찬성은 집으로 나가서 가부를 의논해오라. 만약, 좋다 하거든 권양원과 홍승휘 중에 누가 좋을지 알아보라. 두 사람은 모두 다 세자가 우대하는 바요 나와 중전도 권애하는 바다. 세자의 뜻은 홍씨로 빈을 삼는 것이 좋다 했다. 그러나 내 뜻인 즉 권씨로 빈을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이가 같으면 덕 있는 사람을 취하고, 덕이 같으면 의표 있는 사람을 취했다 했다. 이 두 사람은 덕과 의표가 모두 있다. 다만 권씨는 나이가 조금 많고 관직도 높다. 후일에 아들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할 것과 아들을 두되 어질고, 못할 것을 미리 미리 알지 못할 것이지만 권씨는 이미 딸을 낳았으니, 의리상 마땅히 세자빈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지금 마지못하여 형편에 따라 변통해 처리하면서 의리상 당연히 세워야 할 사람을 버리고, 홍씨를 세웠다가 후일에 만약 화합하지 못한다면 그 후회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빈으로 세워야 옳을지, 아울러 의논해서 오라."
도승지 신인손과 동부승지 권채는 전하의 명을 받들고 대신들이 모인 빈청으로 나가 동궁의 후궁인 권씨와 홍씨의 지위를 올려서 빈을 봉하는 일이며, 빈을 봉한다면 권씨로 빈을 삼는 것이 좋을지, 홍씨로 빈을 봉하는 일이 좋을지, 하문하신 뜻을 전달했다. 영의정 황희, 우의정 노한, 찬성 신개 세 대신은 한동안 의논한 후에 승지들에게 대신들의 의견을 상주케 했다.
"현숙하고 덕이 있는 후궁을 정위에 올린 일은 중국의 역대 제왕 중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 또 그분들이 곤위에 오른 후에도 내조의 고이 커서 국가를 번영케 한 일은 많은 전례가 있습니다. 양가의 규수를 선택해서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동궁의 후궁 중에서 숙덕과 범절이 있는 분을 올려서 빈을 봉하시는 일이 좋습니다. 이 일은 전에도 신들이 이미 건의해서 아뢴 바올시다. 그리하옵고, 권씨와 홍씨 두 사람 중에서 어느 분을 빈으로 정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신의 무리로서는 판단키 어렵습니다. 전하의 밝으신 판단으로 가장 덕이 많고 어진 이를 가리시어 결정하시는 일이 합당한 일로 아뢰옵니다."
승지들은 대신들의 아뢰는 뜻을 받들어 전하께 복명했다. 전하는 중전과 동궁을 청하여 대신들의 뜻을 말씀한 후에,
"나의 생각에는 권씨와 홍씨가 다 현숙하나 권씨는 이미 딸을 두었으니, 앞으로도 반드시 아들을 생산할 가능성이 많다. 뿐만 아니라 권씨는 양원 계제를 받아서 홍씨보다 한 등 위에 있는 사람이니, 권씨로 빈을 봉하는 일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중전과 동궁의 뜻은 어떠한가?"
전하는 어디까지나 독단을 피했다.
"좋습니다."
중전이 대답했다.
"아바마마의 하교에 따라 승명하겠습니다."
전하는 용안에 기쁜 빛이 가득했다.
"이제 내 마음이 평안하리로다!"
전하는 한 말씀을 내린 후에 도승지 신인손을 불렀다.
"양원 권씨로 동궁빈을 삼을 것을 결정했다. 곧 행향사를 종묘에 보내서 양원 권씨로 동궁빈을 삼는 일을 봉고하고, 이뜻을 정원을 통하여 정식 발표하라."
승지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행향사를 종묘에 보내서 봉고하는 절차를 밟고, 양원 권씨로 동궁빈을 봉하는 일을 나라 안에 선포했다. 권씨는 당일로 옥책과 인신을 받고, 대전과 중궁에 알현한 후에 수백 궁녀들이 시립한 속에 동궁빈의 정위에 올랐다.
이때 세자는 스물네 살이요, 권씨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따님 아기씨 한 분이 이때 있었다. 다음날 경혜공주가 되어 영양위 증 영의정 정종에게 시집갈 공주다. 권씨는 동궁빈이 된 후에 위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공손히 받들고 세자를 지성으로 섬겼다. 상궁과 궁녀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니 궁중엔 화기가 가득한 속에 규범과 질서가 정연했다. 상봉하솔을 잘한다는 칭송이 자자하니 전하와 중궁은 동궁에 대하여 적이 안심이 되었다. 새로 동궁빈이 된 권씨는 왕실과 궁중의 칭송이 자자한 중에 삼 년만에 다시 태기가 있었다. 세종전하와 소헌왕후의 기쁨은 말할 나위 없고, 세자의 향의도 지극히 컸다. 세종전하와 소헌왕후는 특별히 상궁들에게 분부를 내려서 동궁빈권씨의 음식과 의복에 극진한 정성을 들이게 하고, 내국 전의에게 명하여 모체와 태아가 튼튼하도록 좋은 약을 달여서 바치게 했다. 하루바삐 충실한 원손을 보기 원하는 지극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럭저럭 열 달이 되었다. 동궁빈 권씨는 산기가 있었다. 이 소식은 대전과 중전으로 들어갔다. 세종전하와 소헌왕후는 친히 분부를 내렸다.
"산실을 정결히 하고 금잡인을 하라. 내국에 명하여 불수산을 달여 올리도록 하고, 혹시나 난산이 될 경우에는 녹용말이 필요하다. 녹용 가루를 준비해놓게 하라!"
세종전하는 또다시 분부를 내린다.
"산실에서 삼을 가를 때 경험 없는 상궁이 삼을 갈라서는 아니 된다. 경험이 풍부한 여의로 택해서 삼을 가르게 하라. 그리고 태항은 깨끗한 백자태항을 쓰도록 하라......."
세종전하의 분부는 더욱 주밀했다.
"삼신 메를 담당한 궁녀는 반드시 목욕재계를 한 후에 메를 짓게 하고, 미역국은 최상품 장곽 미역을 정결한 물에 빨아서 쓰도록하라---."
전하의 원손을 보고 싶은 염원은 이같이 주밀하고 주도한 분부를 내렸다.
세종 23년 신유 칠월 이십삼일, 동궁빈 권씨는 드디어 옥동 같은 아들을 탄생했다. 이가 곧 만고의 한을 껴안은 슬픔의 소년 제왕이 될 단종이다. 원손을 탄생한 기쁨은 한량이 없었다. 당신의 뒤를 이을 세자가 있고, 또다시 그 뒤를 계승할 원손이 탄생되었다. 부풀어 오르는 희망이 가슴 속에 양양하게 넘쳤다. 세자도 이때 나이 스물여덟 살이었다. 삼십에 가까운 나이다. 장래 일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역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아들을 탄생하게 되니 은근히 마음이 기뻤다. 그러나, 대전과 세자의 기뻐하던 마음은 하루가 못 되어 불안과 초조로 변했다. 동궁빈 권씨는 아기를 난 직후에 출혈이 심했다. 산후발한이 되어 동풍이 되었다. 이 기별을 들은 세종전하는 내국의 명의들을 함빡 불러들여서 어전에서 병세를 의논하면서 백 가지 약을 써서 동궁빈 권씨의 생명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산삼청심환, 우황청심환 등 온갖 약은 쓰는 대로 효험이 없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동궁빈 권씨는 마침내 동궁 자선당에서 운명했다. 단종을 탄생한 지 바로 다음 날인 칠월 이십사일의 일이다. 세종전하의 상심은 컸다.
"아기는 어떠하냐? 급히 중전으로 옮겨서 유모를 정해서 지성껏 받들게 해라....."
급히 대전상궁에게 분부를 내렸다.
"그러지 아니해도 중전마마께오서 벌써 아기씨를 중전으로 옮겨서 보호하고 계십니다."
상궁이 아뢰었다.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후일의 단종은 이같이 거적자리에 떨어지면서부터 불행했다. '으아' 소리를 질러 인간으로의 첫울음을 터뜨린 순간, 발가벗은 핏덩어리로 혈혈단신 외로운 어린이가 되었다. 동궁빈 권씨의 유해는 안산에 장사지냈다. 세자가 왕위에 나간 후에 추존해서 왕후로 책봉하여 시호를 인효순혜현덕왕후라고 하고, 안산릉을 소릉이라 이름했다. 그러나 뒷날 세종전하의 둘째 아들 수양이, 형님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어린 조카 단종을 도와준다고 하다가, 불의의 마음을 먹고 단종을 폐위시켜서 노산군을 봉하여 영월에 내쳤다가 죽여버리고, 형수의 소릉까지 파헤쳤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소릉의 변이다.
중종 때 내려와서 동구릉의 하나인 문종의 현릉 죄편 언덕에 옮겨서 장사지내니, 꽃다운 청춘 스물넷에 어린 단종을 핏덩이로 둔 채, 세상을 버린 동궁빈 권씨는 죽은 후에도 어린 아들 단종과 함께 영혼이 불안해서 능까지 파헤치는 변을 당했다. 이것은 모두 다 세종과 문종이 돌아간 뒤의 일이다. 세종전하와 소헌왕후는 동궁빈 권씨의 장례를 마친 후에 마음이 비창했다.
"세자는 처복이 너무도 없구나....."
크게 탄색했다.
세자 또한 다시는 빈을 맞이하려 들지 아니했다. 뒷날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후를 두지 아니했다. 금싸라기보다도 더 귀하고 중한 어린 아들 단종의 뒷일을 생각해서 새로 왕후를 두지 아니한 것이다. 동궁빈 권씨가 단종을 탄생하고 하루도 못 되어 가엾게 세상을 떠난 후에, 세종전하의 어린 손자에 대한 관심은 크고 간절했다. 아기씨는 오직 하나요, 둘도 없는 원손인 때문이다. 앞으로 왕통을 이을 손자다.
한편 세자는 아내에 대해서 좌절감을 느꼈다. 두 번씩이나 빈을 내친 후에, 겨우 현숙하다는 권씨를 빈으로 삼았으나 또다시 어린이를 낳은 채, 바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처복 없는 것을 비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계신 자리에서 아뢰었다.
"소자는 다시 빈을 두지 아니하겠습니다. 어미 없는 어린것을 잘 기르도록 하겠습니다."
세종전하와 소헌왕후는 세자의 정경을 생각했다. 세자뿐 아니라 자신의 정경도 생각했다. 당신들은 아들과 딸을 많이 두었다. 왕후의 몸에서 탄생된 아들이 여덟이요, 딸이 둘이다. 후궁들의 몸에서 생산된 아들이 열 명이요, 딸이 둘이다. 모두 합한다면 아들이 열여덟 명이요, 딸이 넷이니, 도합 22남매를 두었다. 근감한 일이다. 그러나 세자는 단지 딸 하나에 지금 난 아들 하나뿐이다. 이 혈혈고아인 어린 아기는 장차 왕실의 정통을 이어야만 한다. 세자와 핏덩이 어린 손자 이외에 다른 아들이 많고, 다른 손자가 번열하다 하나 그들은 모두 다 종묘사직을 받들고 왕사를 이어받을 왕자와 왕손은 아니다. 핏덩이 어린이는 실로 금싸라기보다도 귀한 손자다. 만약에 세자가 다시 빈을 구해서 아들을 낳게 된다면 왕실에는 또다시 불화와 파탄과 불행이 일어날 것이다. 세종전하와 소헌왕후는 세자의 빈을 다시 두지 않겠다는 말에 반대하지 아니했다. 전하는 세자한테 말씀했다.
"세자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좋을 대로 처리하라. 그리고 홍위를 잘 길러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전하와 세자의 마음은 서로 통했다. 홍위는 단종의 이름이다. 전하는 다시 소헌왕후께 당부했다.
"어미 없는 홍위를 중전이 잘 길러주십시오. 종묘사직의 제사를 받들 아이고 왕통을 이을 사람이외다!"
소헌왕후는 핏덩이 어린 아기를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이를 말씀이오니까. 애지중지해서 기르겠습니다. 손자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식처럼 기르겠습니다."
어마마마의 말씀을 옆에서 듣고 있는 세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같이 해서 전하와 소헌왕후와 세자는 일편단심으로 어머니 없는 어린이를 보호했다. 어린이는 소헌왕후의 지극한 정성과 세종전하의 애무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어린이는 또다시 불행했다. 여섯 살 되는 해에 할머님 되는 소헌왕후가 춘추 52세로 승하하였다. 거적자리에 떨어지면서 어머니를 잃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젖먹이를 겨우 면한 어린이는 또다시 할머님마저 잃었다. 단종은 그야말로 의지할 곳 없는 하늘 아래 외로운 어린이였다.
세종전하는 더한층 어린 손자를 사랑했다. 나랏일을 보살핀 후엔 내전으로 듭시어 어린 손자를 안아주고 업어주었다. 여덟 살이 되자 왕세손을 봉했다. 세자가 있는데 왕세손을 봉한다는 일은 전무한 일이었다. 당신 생전에 무의무탁한 장손의 지위를 튼튼하게 보장하자는 세종전하의 깊고 깊은 생각이었다. 전하는 이같이 왕실에 대하여 항상 번뇌를 품었다.
저술의 황금시대 농사직설과 삼강행실도
세종전하는 왕실 정통에 대하여 미약한 것을 항상 근심했다. 그러나 국가 전체로 볼 때 왕실의 일은 한낱 사사로운 일이라 생각했다. 전하 자신은 한 나라를 통솔하고 지도하는 책임자다. 사사로운 왕실에만 집착할 수 없었다. 서북면과 동북면의 여진족속을 응징하고, 남해 바다를 넘어서 왜구들을 소탕해서, 외환을 물리쳤다. 이같은 외환이 없어진 평화로운 틈을 타서, 안으로 내치에 힘을 써서 백성을 잘 살피게 하고 나라를 부강케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전하는 총제 정초를 어전에 불렀다.
"옛글에도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라 했다. 우리나라도 예로부터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왔다. 중국에도 농서가 있어서 우리나라에도 전해오지만, 토지의 기름지고 척박한 것이며 풍토의 다름으로 인해서 농사의 흉풍이 좌우된다. 경은 농사에도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모든 지방의 노농들에게 그 고장에 적합한 품종을 물어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반포하는 것이 좋겠다."
"신도 항상 농사에 대하여 관심이 커서, 전부터 지방과 토질에 따라서 벼와 보리와 메밀 등속의 적당하고 아니 한 것을 기록해둔 바 있었습니다. 성의 그러하시다면, 곧 지방의 부로들을 찾아서 면밀하게 조사해서 책자를 편집하겠습니다."
정초는 어전에서 물러나온 후에 팔도의 감사와 수령에게 전하의 뜻을 받들어 지방마다 경험이 많은 부로들에게 농사가 잘되고 못되는 작물의 품종을 물어서 적어 올리게 했다. 정초는 일 년을 두고 체험을 정리했다. 책의 내용은 먼저 종자를 비축해두는 방법에서 시작해서 논과 밭을 가는 방법이며 삼을 심는 법, 벼를 심는 방법, 서속을 심는 법, 피를 심는 법, 콩을 심는 법, 보리와 밀을 심는 법, 메밀을 심는 법, 참깨를 심는 법 등을 자세히 서술하고, 종자를 선택하는 기술과 비료를 사용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적어서, 이름을 '농사직설'이라 해서 전하께 바쳤다. 전하는 친히 감하신 후에 크게 기뻐했다. 정초에게 찬양하는 말씀을 내렸다.
"이제 이 책이 발간된다면 농촌의 농민들이 자기 지방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시행해서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곧 간행해서 널리 나라 안에 반포하라!"
정초는 명을 받들어 '농사직설'을 간행해서 내외에 반포하니, 전하의 뜻으로 나라 안에는 농민들의 농사를 짓는 방법이 크게 발전되었다. 전하는 또다시 국민들에게 윤리와 풍기를 확고하게 세울 것을 계획했다. 집현전 학사 설순을 불렀다.
"군신유의와 부자유친과 부부유별은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근본되는 윤리다. 이러한 훌륭한 행적을 실천한 사람들의 사적을 쓰고, 알기 쉽게 그림을 그려서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라."
설순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와 중국의 충신, 효자, 열녀들, 본받을 만한 사람들을 골라서 사실을 기록하고 도화서원에게 그림을 그려서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행적을 알게 했다. 뒷날 '훈민정음'이 제정된 후에 '삼강행실도'의 그림 위에는 누구나 알기 쉽게 한글로 번역해서 풀이해놓았다.
의방유취와 향약집성방
세종전하는 자나깨나 깊은 사색과 명상 속에 들었다. 어떻게 하든 백성들이 희희낙락하게 잘 살아갈 길을 모색했다. 농사와 상업으로 국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한 번 병이 들면 반드시 약을 써서 생명을 구해야만 한다. 한 번 역질이 유행되면 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하게 된다. 문명한 민족의 수치라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는 훌륭한 의원을 길러내야 하고, 좋은 의원을 길러내자면 훌륭한 의서를 간행해서 창생을 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집현전 학사 신석조, 유성원 등을 어전에 명소했다.
"집현전은 문학과 경학만을 연구하는 곳이 아니다. 만 가지 학문을 다 섭렵해서 이 나라 문명에 크나큰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나는 요사이 생각해 보았다. 나라는 국부병강한 것이 중요하지만, 서민들이 병이 들면 죽지 않도록 기사회생의 길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자면 좋은 의사들을 많이 길러야 하고, 좋은 의사를 양성하자면 훌륭한 의학과 의서가 발전되어야 한다. 경들은 고금의 의서를 섭렵하고 연구해서, 누구나 공부하면 병을 물리칠 수 있도록 훌륭한 의서를 편찬하라."
집현전 학사들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의서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동서고금의 의학을 참조 연구해서 상한론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오장과 육부에서 발생되는 병을 풍, 한, 서, 습으로 갈라내어 분류해서 편찬하니 의학의 큰 사전이 되었다. 전하는 편찬된 책을 감하신 후에 '의방유취'라 이름하고 곧 간행에 착수하니 264책의 방대한 저술이었다. 전하는 '의방유취'를 간행하신 후에 다신 집현전 학사 권채와 전의 감정 노중례, 부정 박윤덕을 어전에 명소했다.
"지난번에 '의방유취'를 간행 반포해서 구제창생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거니와,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민간에서 전하는 상약이 많다. 가장 간단하고 효험이 있으니, 이러한 상약도 병을 고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입으로만 전하고 책으로는 발간된 일이 없으니, 이러한 상약과 쓰는 방법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해서 한 권의 책자를 만들어 '의방유취'와 함께 후세에 전하도록 하라."
집현전 학사들은 팔도강산에서 입으로 전해온 단방으로 쓰는 상약의 약명을 기록하고, 그 약을 쓴 후에 병에 걸렸던 사람이 효험을 본 실증까지 붙여서 3년 만에 완성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은 편찬된 책을 전하께 바치니 전하는 크게 기뻐했다. 집현전 학사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세상 사람들은 정치나 국방만을 제일 큰일로 생각하지만 백성들의 생명을 의약으로 보호하는 일은 역시 정치에 근본이 된다. 곧 책을 간행하고 이름을 '향약집성방'이라 하라."
집현전에서는 명을 받들어 '향약집성방'을 간행했다. 이 두 가지 의서와 약책은 5백 년 후인 오늘날까지도 우리들 사회에 크나큰 혜택을 준다.
사정전자치통감강목과 치평요람
전하는 '고려사', '여사절요', '효행록', '삼강행실도', '농사직설', '의방유취', '향약집성방'을 저술 간행해서 민생에 크나큰 도움과 발전을 주었다. 그러나 전하는 더욱더 나라의 문화를 발전시키려 끊임없이 계획하고 노력했다. 전하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다시 명했다.
"'자치통감'의 뜻을 주석해서 모든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읽기 편하도록 훈의를 달게 하라. 너희들 집현전 학사들이 총동원이 되어 일을 한다면 용이하게 성취되리라."
집현전에서는 곧 명을 받들었다. 윤회, 권도, 설순 등 40여 문신들은 낮과 밤을 도와 '자치통감'의 훈의를 달았다. 전하께서는 정사를 끝낸 후에 집현전에 납시어 학사들이 촛불을 돋우고 훈과 의를 풀이해 나가는 일을 보시자, 마음이 흐뭇하셨다.
"나도 너희들과 함께 교정을 하리라!"
모든 학사들은 황공 감격했다. 전하는 촛불을 당기고 친히 붓을 잡아 음과 주를 다셨다. 밤이 짙어 야반에 이르렀을 때 전하는 곁에서 주를 다는 윤회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요사이 나는 이 책을 읽어본 후에 독서하는 일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총명이 나날이 늘어가고 재미가 나서 잠이 완전히 줄어들었다. 너희들도 주석을 다는 동안 신명이 날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은 전하의 말씀에 더욱 감동이 되었다. 호삼성의 음주와 모든 학자들의 해설을 참작해서 음과 구를 주석하니 글장마다 뜻과 음이 정밀하고 자상했다. 책이 완성된 후에 전하는 크게 기뻤다. 곧 내각판으로 간행케 하니 책이름은 '사정전훈의 자치통감강목'이었다. 전하는 '자치통감' 주해가 완성된 후에 집현전 학사 정인지에게 다시 분부했다.
"입금이 훌륭한 정치를 하자면 반드시, 지나간 시대의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린 자취를 짐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 역대 제왕의 사적은 너무나 호한해서 두루 살피기 어렵다. 더구나 정치하는 여가에 공부를 하자니 힘이 많이 든다. 경은 사적을 고열해서 우리 동방과 권선징악이 될 만한 일을 간략하게 편찬해서 책을 만들게 하라. 경의 혼자 힘으로는 아니 되리라. 집현전 학사를 모두 동원시켜서 분과를 정하여 일하도록 하라!"
정인지는 영을 받들어 집현전 학사 수십 명과 의논한 후에 나라와 시대를 분류하여 저술에 착수했다. 얼마 후에 책이 완성되니 전하는 크게 기뻐했다.
"이 책을 후세에 전하여 임금 된 자는 반드시 읽어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부강케 하는 공부를 하게 하라. 그리고 책 이름은 '치평요람'이라 하라!"
전하는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는 요람을 편찬해서 당신이 직접 공부할 뿐 아니라, 후세에 보감을 전해주었다.
신찬팔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
전하는 국가가 있으면 강계와 지역을 사람마다 명확하게 기억해두어야 하고, 지역이 있으면 그 지역의 산천과 산물이며 인문에 대한 만 가지 일을 손 살피는 것과 같이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지리를 소상하게 아는 일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 판단했다 전하는 우리나라의 옛 문헌을 살폈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동국지지'가 약간 기록되었을 뿐, 완전한 지리지라 할 수 없었다. 전하는 대제학 변계량에게 분부했다.
"우리나라에 지지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완전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는 상고할 길이 없다. 고로들은 점차 세상을 떠나게 되니 앞으로 물어보아도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속히 문적으로 기록해두어야 하겠다. 본국의 지지와 부군의 연혁을 일일이 기록해서 후세에 전케 하라. 그러나 이사이 춘추관에 일이 많으니 우선 지방에 기별해서 고을의 연혁이라도 빨리 편찬케 하라."
변계량이 아뢴다.
"지지와 고을의 연혁을 따로 구분할 것이 없습니다. 한데 묶어서 편집하면 되겠습니다. 춘추관 직원 외에 윤회, 탁신과 의논해서 편찬하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신은 월령문을 담당하겠습니다."
변계량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월령문은 급하지 않다. 서서히 해도 좋다! 경은 곧 지지와 주군 연혁을 빨리 시작하라."
전하는 나라의 지리를 먼저 편찬하는 일이 가장 필요한 급한 일인 때문이었다. 변계량은 명을 받고 예조를 통하여 팔도에 통문을 보내서 도지를 만들어 춘추관에 올리게 했다. 춘추관에서는 각도에서 올려보낸 도지를 다시 정리하여 '신찬팔도지리지'를 편찬했다. 전하는 보신 후에 더욱더 소상하게 지리지를 편찬할 것을 윤회와 신장에게 명했다. 두 학사를 중심으로 하여 집현전에서는 여러 해 동안 더욱 수정하여 22년 후인 단종 2년에 '세종실록지리지'를 실록 속에 실었다. 비로소 완전무결한 인문지리지가 되었다. 책머리에는 경도 한성부의 지지로부터 시작해서 옛 도읍 개성유후사의 일이 기록되고,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평안, 함길 팔도의 산천, 지세, 산물, 인문 등이 소상하게 기재되었다. 모두 다 세종전하의 지극한 배려에 의해서 편찬된 두 번째 지리지는 승하하신 후에 실록에 첨부된 것이다.
한편 먼저 발간된 '신찬팔도지리지'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서, 다시는 구할 도리가 없다. 다만 그의 일부분인 '경상도지리지'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서, '세종실록지리지'와 함께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의 한 부분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지리지는 지리와 역사의 연혁뿐만이 아니다. 당시의 정치, 사회, 재정, 경제, 산업, 군비와 교통에 대한 모든 부문을 연구하고 알아볼 수 있는 오늘날 인문지리지의 앞잡이요, 당시에 있어 이같은 훌륭한 지리지가 편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학계의 크나큰 자랑거리의 하나다.
오례의
전하의 밝고 맑고 슬기로운 지혜와 국민을 위하는 정성스런 배려는 항상 끊이지 아니했다. 전하는 '신찬팔도지리지'를 편찬케 한 후에 허조와 강석덕, 정척, 변효문, 등을 어전에 불러서 유시를 내렸다.
"예와 악은 문명한 국가일수록 그 척도가 높은 것이요, 찬란한 문화를 다른 나라에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예와 악이 없는 국가의 백성들은 무무하고 열등한 국민이 된다. 우리는 건국 초기에 모든 일이 바빠서, 나라에 예문을 갖추지 못했다. 태종께서는 허조에게 명하시어, 길례의 서례와 의식을 찬술케 했으나 다른 의례는 미처 편찬하지 못해서, 항상 큰일을 당할 때마다 예관들의 공론이 분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경들은 모든 고사를 참작해서,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를 강구하여 책정하라. 길례는 허조가 이미 찬술한 바 있으니, 가례, 빈례, 군례, 흉례만을 저술해서 '오례의'를 정케 하라."
허조 이하 모든 문신들은 명을 받고 어전에서 물러나 예문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의례와 명나라의 홍무 연간에 시행했던 옛 제도를 채택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서 우리나라 제도에 맞도록 편찬하기 시작하니 참고하고 연구하는 것만도 너무나 호대한 일이었다. 문물제도와 조복, 제복, 제기, 문무백관들의 반열도며, 대소 의식에 나열하는 기치창검과 용연, 봉연들 그림만 해도 수백 장이었다. 집현전 학사와 도화서원들이 총동원되었다. 전하는 일일이 친히 감수했다. 마땅치 못한 것은 빼게 하고 미흡한 것은 더하게 했다. 여러 해 만에 책이 완성되니, 나라에 전무후무한 기막힌 의전이요, 식전이었다. 가례의식 첫째 권에는 임금이 정전에서 백관들의 조하를 받는 의식에서부터 시작해서, 중궁이 명부의 조하를 받는 절차와, 서연에서 강의하는 의식 등 28과목의 절차를 기록했다. 둘째 권에는 왕후를 맞아들이는 납비의에서 시작해서, 과거 보는 의식인 문과전시의와 무과전시의, 향음주례를 기록하고, 다음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빈례의식 등 26개 절차와 군기, 갑주, 창검, 총통도와 군례의식 12조목이 실려 있다. 흉례 첫째 권에는 서례에 상복도와 제기도며, 대여, 소여의 그림이 있고, 의식에는 치상에 대한 절차 41항목이 기록되었다. 흉례 다음 권에는, 천전의, 입주전의, 반우의, 대소상을 지내는 절차 등 24항을 서술하여 흉례의식을 마쳤다. 길례의식은 '오례의' 중에서 전하가 말씀한 대로 태종 때 허조가 찬술한 것이다. 첫째 권서례에는 종묘와 사직과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진설하는 모든 제기의 그림과 제관들의 제복이며 제수를 벌여놓는 절차를 정교하게 그려놓았다. 다음 권에는 사직에 제 지내는 절차를 자세하게 적었다. 다시 다음 권에는 종묘에 제향 올리는 절차를 정했다. 다음 권에는 단군께 제례를 드리는 절차와 고려 시조에게 제 지내는 절차를 적었다. 그리고 길례 끝 권에는 곤룡포 면류관의 그림과 임금의 거둥하는 행차며 악기도를 실었다. 이리하여 전무후무한 세종시대의 찬란했던 문화를 보여주는 '오례의' 책은 완성되었다.
악장과 악보
임금이 정전에서 만조백관들의 회례를 받을 때는 뜰 아래 좌우 양편에서 여악들이 문무와 무무를 아악에 맞추어 추면서 악장을 지어서 군왕의 덕을 노래하는 것이 중요한 의식의 하나다. 전하는 '오례의'를 완성하여 회례의 의식을 정한 후에 문무와 무무의 악장가사가 제출되지 아니한 것을 미흡하게 생각했다. 문무는 문화로 정치를 해서 나라를 잘 다스린 임금의 공덕을 춤추며 노래하는 가사요, 무무는 호반의 위풍을 발휘하여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임금의 공덕을 찬양하는 가사다. 전하는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전임 예조판서 허조, 대제학 정초, 아악을 제정한 박연, 정양, 안숭선, 김종서 등을 어전에 불렀다. 전하는 여러 신하들을 둘러보고 말씀을 내린다.
"집현전 학사들의 노력으로 이미 '오례의'가 완결된 것은, 경들도 다 아는 바다. 이 오례 중 회례에는 반드시 문무악장의 가사를 제정해야 할 텐데, 가사의 내용을 어찌 지어야 할지, 경들은 의견을 말하라."
아악 제정에 공이 컸던 박연이 아뢴다.
"문무 두 악장의 가사 내용은 당연히 당대 천하의 훌륭하신 일을 예찬하는 것으로 지어서, 영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전하는 웃음을 짓고 박연의 말씀에 대답한다.
"문무악장의 가사라는 것은 대개 큰 공을 이룬 임금의 사적을 송덕하는 가사다. 자기 자신의 처해 있는 당세의 일을 예찬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하물며 나는 왕대를 이었을 뿐이다. 무슨 공이 있다고 송가를 받겠는가? 당치 않은 말이다. 태조께서는 전조가 쇠미할 때 백전백승을 하시어 백성들이 큰 덕을 입었고 발란반정을 하시어 창업수통을 하셨으니, 태조의 공덕을 찬양해서 무무의 가사를 아뢰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태종께서는 예법을 마련하시고 음악을 제정하시어 백성들의 교화가 아름다워지고, 국가가 태평함을 이루었으니, 태종의 공덕을 찬양해서, 문무의 가사를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 당대를 찬양하는 일은 피하도록 하라!"
모든 신하들은 당신의 공덕은 절대로 가사에 올리지 말라는 전하의 겸손하고 사양하시는 말씀을 듣자, 모두들 감동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전하의 성스러우신 높은 뜻을 신의 무리, 가슴 안에 잘 지니겠습니다. 그러하오면 태조를 찬양하는 무무의 가사를 짓게 하고, 태종을 찬양하여 문무의 가사를 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그렇다면 문무의 악장을 먼저 아뢰는 것이 좋을지, 무무의 가사를 먼저 아뢰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말하라."
정초가 아뢴다.
"무로 난을 평정하시고 문으로 덕을 펴서 수성하셨으니, 태조의 공덕을 찬양해서 정대업의 가사를 지어 먼저 무무를 추게 하고, 태종의 공덕을 예찬해서, 보태평과 여민락의 악장을 지어, 문무를 아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든 신하들은, "정초의 말이 옳습니다." 찬성했다. 이리하여 정대업, 보태평, 여민락의 가사가 지어지고, 만대에 전해질 '세종악보'가 창작되었다.
과학의 창조 칠정산내외편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의 운행은 인간사회와 긴밀한 관련을 갖게 된다. 날짜와 시각이 계산되고 일식 월식이며, 이십사절후가 순서 있게 정해진다. 이로 인하여 나라에서는 관상감을 설치하고, 천문을 관찰해서 해마다 역서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반포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농업을 근본으로 삼는 나라다. 이십사절기의 판단은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일월성신의 운행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중하게 생각한다. 이러하므로 국가의 제왕들은 천문을 살펴서 해마다 역서를 발간하여 민간에 반포하는 것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다. 이러한 역서를 만들자면 하늘에서 일월성신이 운행되는 것을 계산하는 책이 필요했다. 세종전하는 천문을 연구하면서 관상과 역서에 대하여 크나큰 관심을 가졌다. 집현전 경연 자리에서 부제학 정인지에게 말씀을 내렸다.
"경은 '제자백가서'를 많이 섭렵한 사람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써오는 역서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본 일이 있는가?"
정인지가 부복해 아뢴다.
"잠깐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신라 통일 이후에는 당에서 가져온 선명력을 썼사옵고, 고려조에서는 처음에 신라에서 쓰던 선명력을 답습해서 쓰다가 충선왕 때 와서는 원나라의 수시력으로 바꿨습니다. 원나라가 망한 후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에서 쓰는 대통력이란 것을 쓰고 있습니다."
"수시력과 대통력의 차이는 어떠한가?"
"원나라에서 쓰던 수시력을 약간 수정한 것이 대통력이올시다."
전하는 다시 정인지에게 하문한다.
"어찌해서 중국에선 당과 원과 명의 국호가 교체될 때마다 역서를 고쳐서 선명력, 수시력, 대통력이라고 고쳐서 시행을 했는가?"
정인지가 아뢴다.
"몇백 년씩 내려오는 동안에 일월성신의 운행이 약간씩 차이가 나서 이십사절기가 조금씩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왕도가 변경됨으로 인해서 천문을 관측하는 표준지역이 다름으로 해서 더욱 정확한 계산을 취해서 역법을 개량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종전하는 정인지의 말씀을 듣자 무릎을 치시며 하교한다. 크나큰 감명을 받으신 모양이다.
"그렇다. 역대마다 역법 계산에 대하여 정진한 까닭을 알겠다. 여기 대하여 나는 경들에게 할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덮어놓고 중국의 역서를 답습해서 사용한다. 불가한 일이다. 중국 북경에서 천문을 측정해서 만든 역서가 우리나라에 정확하게 맞을 이치가 없다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독자적인 천문계산법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자주적인 우리나라의 역서를 백성들에게 반포해야 한다. 우리나라 수도 한양은 중국의 북경과 위도가 다르다. 경들은 한양을 표준으로 해서 천문을 관측하면서 역법을 계산해서 역서를 만드는 기본법을 강구하라!"
정인지 이하 모든 신하들은 전하의 탁월한 지도력에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정인지 이하 모든 집현전 학사들은 곧 수도 한양을 표준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역법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전하는 밤마다 집현전에 임어하여 원나라 때 쓰던 수시력과 명나라에서 사용하는 대통력을 참작하여 한양을 표준으로 한 새로운 역법을 저술하는 작업을 살폈다. 부제학 정인지에게 분부를 내린다.
"내가 역대 역법을 살펴보니, 역서를 마련하는 근본 원리는 천체의 운행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데 있다. 해와 달과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일곱 가지 별의 운행을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이로써 이십사절후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 책상 위에서 산을 놓아 책을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실지로 관상감에 나가서 천문을 살피면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역법을 창조하도록 해라. 그리고 일곱 가지 별의 운행을 밝히는 것이니 책이름은 '칠정산'이라 하라."
대제학 정초가 아뢴다.
"전하의 하교가 지극히 옳으십니다. 책만 읽고 연구해서 수를 놓아본다 해도 그것은 공리에 불과합니다. 실지로 천문을 측정하는 관상감의 직원들을 동원해서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이 사업을 완성해야 합니다."
학사 김돈이 아뢴다.
"전하께서는 연전에 대내에 내관상감을 설치하시고, 첨성대를 두시어 일월교식과 성신의 운행을 관상감 관원에게 살피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관을 '칠정산'을 편찬하는 데 참획케하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
전하는 김돈에게 하문하신다.
"너의 말이 내 뜻과 같다. 관상감 관원들은 천문을 볼 줄 알 뿐 아니라, 수학에도 밝을 것이다. 유능한 인재가 있거든 이 자리에서 천거하라."
김돈이 아뢴다.
"전 관상감정으로 있던 윤사웅과 현재 관상감정으로 있는 최천구는 다 천문과 수학에 정통한 사람들이올시다. 이 밖에도 이무림, 정영국, 박유신, 김흥국, 이대정, 정강들은 모두 다 천문에 고명한 자들이올시다. 이들은 문과에서 뽑힌 사람들이 아니오라 중인들이올시다. 그러나 모두 다 학문에 능통한 사람들이올시다."
전하는 대제학 정초와 부제학 정인지를 둘러보시며 말씀한다.
"우리나라에는 좋지 못한 풍습이 있다. 양반의 자손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관이 되고, 중인들은 천대해서 아무리 좋은 인재라 해도 역관이 아니면 관상감이나 의원에 그치고 만다. 한심한 일이다. 이들 관상감 직원들도 함빡 '칠정산'을 편찬하는 데 참여케 하라!"
"삼가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대제학과 부제학은 명을 받들었다. 전하는 다시 분부한다.
"한번 결정한 일은 지체없이 시행해야 한다. 내일부터라도 관상감 사람들을 곧 소집해서 출사케 하라!"
김돈이 아뢴다.
"윤사웅은 나이 많아서, 관상감에서 물러나 장흥에 내려가 있습니다."
"유능한 인재라면, 내가 하루빨리 만나야 하겠다. 곧 역마를 보내어서 급히 올라오게 하라!"
정원에서 역마를 달려 장흥에 한가롭게 누워 있는 전임 일관 윤사웅을 명소했다. 전하가 특명을 내려서 전직 관상감의 미관말직을, 천 리 길에 역마를 달려 부르시는 일은 전무후무한 영광이었다. 윤사웅은 북향재배하여 명소하는 유시를 받고 곧 역마를 달려 한양으로 향했다. 전하는 윤사웅을 편정에서 인견했다. 역시 파격의 은총이었다. 호호백발인 윤사웅은 어전에 부복해서 아뢴다.
"물러나 향곡에 엎드려 있는 소신을 탑전에 부르시니 황공 감격하여이다."
전하는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을 내린다.
"늙어서 퇴임한 사람을 수고롭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새로운 우리나라의 역법을 만들기 위하여 지금 집현전에서는 '칠정산'을 편찬하는 중이다. 그대는 천문과 수리에 밝다 하니 우리나라의 역법을 창설하는 데 슬기를 다해주기 바란다."
윤사웅은 전하의 분부를 지척에서 받으니 황감하기 짝없었다.
"미천한 소신의 학식이 어찌 학사들과 어깨를 겨누오리까마는, 견마의 힘을 다하여 성은의 만분의 일을 보답하겠습니다."
전하는 다시 윤사웅에게 하문한다.
"천문으로 볼 때 우리나라와 연경의 차이가 얼마만큼 틀리는지 짐작하겠는가?"
윤사웅은 서슴지 않고 아뢴다.
"연경에서 동편으로 10도 30분에 처해 있습니다."
"한양을 표준으로 하여 북극고는 어찌 되는가?"
"37도 39분 15초올시다."
윤사웅은 막힘 없이 아뢰었다. 전하는 크게 기뻐했다. 내시에게 명하여 선온을 내리라 했다. 전무한 영광이었다. 윤사웅은 별실에서 어사주를 받은 후에 사은하고 아뢰었다.
"새로 역법을 제정하실 때 '회회력법'도 참고로 하시어 제정하시옵소서. 회회력은 서역 무치나 국왕 마호메트가 만든 것으로, 중국의 수시력이나 대통력과는 계통이 다릅니다. 이 회회력에 대해서는 학사 김담과 이순지 두 사람이 가장 정통합니다."
전하는 서역과 서양계통으로 또 다시 '회회력법'이 있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새롭고 유익한 말을 들으면 곧 실행에 착수하는 것이 전하의 부지런한 성격이었다. 곧 내시에게 명하여 집현전 학사 김담과 이순지에게 입시를 명했다. 두 학사는 시각을 지체치 않고 입시했다.
"지금 윤사웅의 말을 들으니 너희들이 서역에서 마호메트가 만든 호회력에 대하여 연구가 있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약간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두 신하는 겸양해서 아뢰었다.
"그렇다면 정인지는 수시력과 대통력을 참고해서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고, 김담과 이순지는 회회력을 고열해서 '칠정산외편'을 편찬하라."
두 학자는 명을 받고 물러갔다. 이리하여 10년 만에 '칠정산내외편'이 완성되었다.
친림 첨성대
세종전하는 친히 윤사웅을 만나보신 후에 천문에 대하여 향의가 대단했다. 날마다 윤사웅, 최천구, 이무림, 정영국 등 관상감 관원들을 편전으로 불러 밤마다 천상에 대하여 강론을 했다. 전하는 책과 말씀으로 강론하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지 아니했다. 윤사웅, 최천구 등을 돌아보시며 분부한다.
"천문을 말과 글로만 듣고 보니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친히 첨성대에 올라 천문을 관측하리라!"
임금이 친히 첨성대에 올라 천문을 관측한 일은 만고에 없던 일이었다. 윤사웅은 황공하기 그지없었다.
"전하께오서 어찌 첨성대에까지 친림하시옵니까? 분부를 거두시옵소서!"
"무슨 말이냐? 임금이 옳게 임금 노릇을 하자면 만 가지 일을 친히 다 알아야 한다. 두말 말고 앞에 서서 인도하라."
관상감 관원들은 감격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전하는 미복으로 관상감 첨성대에 올랐다. 친히 별을 바라보는 첨성관에 눈을 대었다.
"노인성은 어디 있느냐?
윤사웅은 대답해 아뢴다.
"남편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남극 노인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력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제주 한라산에 오르면 확실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서북편에서 남극성을 바라보자면 백두산 설한점에 올라 추분 때나 춘분 때 바라보면 남극 노인성이 또렷하게 보일 것입니다."
전하는 남극성을 또렷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내가 친히 내 눈으로 남극성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너희들은 내년 춘분 때 한라산과 백두산에 올라 남극성을 바라보고 그 위치를 자세하게 보고하라!"
천문에 대한 전하의 집념은 이같이 대단했다. 다음 해 춘분 때가 되었다. 윤사웅은 제주 한라산으로 남극성을 보러 가고, 이무림은 백두산으로 향하고, 최천구는 설한점에 올라 남극성을 후망한 후에 제각기 그 빛을 뿜는 광도와 위치를 복명했다. 풍찬노숙하면서 반년 이상을 걸려서 남극성을 바라보고 돌아온 관상감들의 고생은 이루 형언해 말할 수 없었다. 전하는 관상감들의 복명을 받은 후에, 기록을 집현전에 내려서 역서를 편찬하는 데 도움을 주게 하고 곧 승지를 불러 교를 내렸다.
"관상감 관원들은 나라의 문화된 학문을 탐구시키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백두산과 한라산에 올라 별의 운행을 탐사하고 돌아왔다. 장한 일이다! 상의원에 기별해서 윤사웅, 이무림, 최천구에게 겨울에는 해마다 털옷을 한 벌씩 내리게 하고, 내의원에 명해서 첨성대에서 밤을 새우며 별을 관측하는 관원에게 좋은 술 다섯 병씩 주게 하라."
상의원과 내의원에서는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관상감에 털옷과 술을 보냈다. 미관말직으로 대우를 받던 관상감 관원들은 전하의 우대를 받자, 감동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세종전하가 천문에 대하여 크나큰 관심을 가져 미복으로 자주 첨성대에 오르니, 관상감에서는 더욱 정성을 들여 밤마다 천문을 관측했다. 어느 날 밤에 돌연 꼬리 달린 혜성이 동방에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뒤를 이어 지진이 일어났다. 혜성이 한 번 나타나면 나라에 크나큰 재앙과 불길한 일이 나타난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관상감들은 깜짝 놀랐다. 윤사웅, 이무림, 최천구들은 정원을 통하여 전하께 급히 알현을 청했다.
"혜성이 동편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전하는 크게 놀랐다.
"내가 친히 첨성대에 올라 보리라."
온 나라와 궁중이 황황했다. 전하는 미복으로 윤사웅과 함께 관상감 첨성대에 올라 측관으로 동편 하늘을 바라보았다. 과연 빗자루 같은 꼬리 달린 큰 별이 황황하게 붉은빛을 뿜으며 동편 하늘에 나타나 있었다. 전하는 기록으로만 혜성이 하늘에 나타나면 국가에 불상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 실지로 목도해서 혜성을 바라보기는 처음이었다. 용안엔 수심이 가득했다. 윤사웅에게 하문했다.
"예로부터 혜성이 나타나고, 지동을 하면 나라에 재앙이 있다 하는데, 어찌하면 좋은가?"
"혜성이 나타나고, 지진이 되면 옛적의 군왕은 하늘이 천견을 내렸다 해서 정침에서 피하고, 감선, 철악을 하면서 자성하여 삼가는 태도를 취했다 합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조처를 취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리하면 혜성이 소멸됩니다."
전하는 윤사웅의 말을 옳게 들었다. 곧 정침에서 피하여 거처를 옮기고, 수라상에 음식을 간소하게 받은 후에 음악을 정지하고, 대사령을 내려서 옥문을 크게 열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한편 관상감에서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낮과 밤으로 천문을 살폈다. 전하도 미복으로 밤마다 첨성대에 올라 혜성을 관찰했다. 대왕의 정성은 지극했다. 칠 일 만에 혜성은 사라져서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아니했다. 전하는 관상감들의 노고를 크게 칭찬한 후에 승지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천문관들의 근고를 오늘 내가 비로소 알았다. 이들에게 크나큰 포상을 내려서 사기를 북돋워주어야 하겠다. 윤사웅에게 가자를 해서 남양부사를 제수하고, 이무림을 광주목으로 삼고, 최천구는 부평을 다스리게 하고, 정영국은 인천원이 되게 하라!"
전례 없는 파격의 큰 발탁이요, 은전이었다. 승정원에서는 명을 받들어 네 사람의 관상감에게 수령의 첩지를 전달했다. 네 사람은 뜻밖에 큰 은총을 입자, 황공 감격했다. 일제히 예궐하여 사은숙배를 드렸다. 전하는 네 사람에게 분부를 내린다.
"너희들은 한양 가까운 경기도의 수령으로 배치하는 것은, 혹시 또 다시 천재지이가 있을 때 급히 불러서 천문을 보게 하자는 때문이다. 다들 나가서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선치수령이 되라!"
네 사람은 감격한 눈물을 머금고 숙배를 드려 대궐에서 물러났다.
인재발탁
관상감의 미관말직들이 일약 수령방백으로 발탁되어 사은숙배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자, 조정 대관들과 간관들은 크게 놀랐다. 더구나 서울 가까운 광주목사와 남양부사는 대과급제를 한 후에 십여 년 동안이나 당하관으로 돌다가 겨우 옥관자를 망건편자에 달고 정삼품 당상관이 되어 목사, 부사로 나가는 좋은 자리다. 조정에서는 이곳저곳에서 공론이 분분했다.
"관상감의 미관말직들이 광부목이 되다니, 말이 되는가?"
"그뿐인가. 남양부사가 웬 말인가? 우리들 대과급제를 한 사람들도 십 년, 이십 년을 지내도 갈동말동한 자린데!"
"이 사람아, 광주목사와 남양부사는 동부승지 당상관 이상이 가는 자릴세."
"별일도 다 많다! 별깨나 본다고 기내의 목 부사가 되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도대체 중인이 어찌 감사의 다음 가는 경기도 안의 목사, 부사가 된단 말인가?"
젊은 대과 출신과 관때기를 쓴 양반 부스러기들은 사랑방 공론이 분분했다. 사간원의 간관들도 가만히 있지 아니했다. 전하께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미관말직인 관상감 관원들에게 광주목사와 남양부사를 제수하시는 일을 조체를 문란시키는 일이올시다. 직첩을 회수하시기 바랍니다. 천고에 전례도 없는 일이올시다.'
전하는 간관들의 상소를 보신 후에 코웃음을 치셨다. 상소문 끝에 '아니 된다' 하는 글자를 친히 써서 상소를 돌려보냈다. 간관들은 다음날 또다시 상소를 올렸다.
'어제 올린 상소를 전하께서는 불윤하셨습니다마는 이 일은 전고에 없는 일이올시다. 미관말직인 중인계급이 어찌 기내의 목사, 부사가 될 수 있습니까? 조정의 여론이 물 끓듯 합니다. 다시 생각하시어 그들의 직첩을 회수하시옵소서'
전하는 크게 진노했다. 친히 붓을 잡아 꾸짖는 비답을 내렸다.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임금의 자리에 올라서 각근하지 못한 죄로 하늘의 꾸지람을 받았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군신들은 한 사람도 천문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날을 두고 낮과 밤의 구별도 없이 의대도 풀지 못하고, 눈도 붙이지 못한 채 천견을 살폈다. 어찌 장하지 아니하랴.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천상을 살피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들은 천견이 있고 지진이 울려도 편안히 앉아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태평세월로 자고 있었다. 그들의 고생한 일은, 너희들 입부리만 놀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해서 말할 바가 아니다. 공연히 쓸데없는 공론만 일삼아서 일을 거칠게 하지 말라! 이조에서는 빨리 네 사람을 임지로 부임케 하라. 다시 두말하는 자가 있다면, 단연코 큰 벌을 주리라!'
전하의 인재를 발탁해서 등용하는 태도는 이같이 단호했다. 엄한 비답이 한 번 떨어지니 조정의 대관과 간관들은 목을 옴츠리고 다시는 말을 못 했다. 세종전하는 혜성이 나타나고 지진이 일어난 후에 더욱 천상에 대하여 관심이 컸다. 옛 시대에 제왕들이 천문을 살피면서 백성을 다스리던 전적을 살폈다. '서전'을 펴놓았다. 순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던 행적을 기록한 '순전'을 읽었다.
'선기옥형'으로 '칠정'을 가지런히 한다는 뜻이다. '칠정'이란, 전하가 이미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해서, 일월교식과 금, 목, 수, 화, 토 다섯 별의 운행을 면밀하게 관찰해서 '칠정산'을 편찬하라고 분부한 그 '칠정'이다. 전하는 당신이 '칠정산'을 편찬하게 이전, 순의 시대에, 이미 선기옥형이란 기계를 만들어서, 해와 달과 금, 목, 수, 화, 토 다섯 가지 별의 움직이는 모습을 앉아서 바라본 것을 알았다. 천문대에 올라서 한 개 한 개, 별의 운행을 실제로 바라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천체의 일월성신의 움직이는 모형을 만들어서 지상에 이십사절기가 교체되는 것이며, 일식 월식을 앉아서 판단하는 '선기옥형' 같은 기구를 만드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기옥형이라는 기계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야 할 텐데, 알아낼 도리가 없다. 전하는 다시 '순전' 책장을 넘겼다. 기막히지 아니한가? 칠정도와 선기옥형도가 나타났다. 전하는 무릎을 쳤다. 칠정도에는 일월성신의 운행하는 법칙이 자세히 적혀 있고, 선기옥형도에는 하늘이 움직이지 않는 형태와 황도와 적도며, 옥형과 지평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세종대왕은 마치 광산에서 금광을 캐던 사람이 금줄을 발견한 듯했다. 그러나 그림만을 보고서는 이 기계를 어떻게 움직여지는 것을 알 길이 없다. 수천 년 전 순임금은 이 기계를 써서 천문과 기후를 살피면서 백성들을 위하여 밝은 정치를 했는데, 수천 년 뒤에 동방의 제왕의 임무를 맡은 자신이 이러한 기계를 만들어서 칠정을 살피지 못한다면 임금 노릇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서전' 책장을 덮은 후에 천문과 지리에 밝은 모든 신하들을 생각해 보았다. 총제 벼슬에서 예문관 대제학으로 승차한 정초가 있고, '칠정산'을 편찬하는 총책임자 정인지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천문을 바라볼 줄 아는 관상감에서 특별히 제수한 남양부사 윤사웅과 광주목사 이무림이며 부평부사 최천구가 있다. 전하는 이 밖에도 천문 연구에 조예가 있다는 사람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퍼뜩 김돈과 김조의 생각이 났다. 김돈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해서 박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전하가 세자가 되기 이전 대군으로 있을 때 만나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김돈은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이 왕자의 집으로 드나드는 일은 불가하다고 거절한 일이 있었다. 전하는 항상 그의 인격을 높게 생각했다. 전하가 대군에서 양녕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되고, 다시 등극해서 왕이 된 후에, 김돈은 전하가 잠저 때 소명에 응하지 아니했던 일을 죄스럽게 생각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팔십 노모를 봉양해야 하겠다고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하는 깜짝 놀랐다. 특별히 김돈을 불러보시고 은근한 말씀을 내렸다.
"내가 잠저에 있을 때, 경은 벼슬하는 사람으로서 왕자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 해서 나와 만나기를 거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 후부터 경의 인품을 항상 존경했다. 이제 내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경은 나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니 섭섭한 일이다. 경의 팔십 노모는 내가 역마를 보내서 서울로 모셔오게 하리라! 경은 다시 더 사양하지 말고 내 곁에서 일을 보아 달라!"
김돈은 감격했다. 눈물을 흘리고 전하의 명을 받들었다. 그 후에 전하는 김돈에게 승지의 직책을 맡겼다. 전하는 선기옥형을 연구하기 위하여 박학다문한 김돈을 생각했다. 전하가 생각한 또 한 사람 김조는 역시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사람으로, 한림학사에 예조판서까지 지낸 사람이다. 문학과 천문에 능통했다. 전하는 다음날 윤대를 열었다. 정초, 정인지, 김돈, 김조, 남양부사 윤사웅, 광주목사 이무림, 부평부사 최천구 등을 불렀다. 모든 제제다사들이 모여들어 전하께 뵈었다. 전하는 여러 신하들을 둘러보시고 말씀을 내린다.
"나는 이미 집현전에 명하여 '칠정산'을 편찬하는 중이거니와, 지진이 일어나고 혜성이 나타난 후에 나의 천문에 대한 관심은 더한층 크게 되었다. '서전'을 읽어보니 이미 요순 시대에 일월성신의 칠정을 살피고, 순임금이 선기옥형이란 기계를 만들어서 하늘과 땅이며 우주 사이에 있는 모든 별들을 살펴서 이십사절기를 판단한 선기옥형도까지 있다. 요순 시대에 한 일을 우리가 아직도 착수하지 못했다는 일은 부끄럽기 한량없다. 나는 이 그림을 보고 마치 광부가 광산에서 금줄을 발견한 것같이 기쁘다. 그러나 그림만으로는 실제로 이 기구를 어떻게 만들어서 운행해야 할지 막연하다. 알 도리가 없다 이 선기옥형의 원리를 연구한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자세히 들려주어서 답답한 가슴을 풀어주기 바란다. 먼저 김돈이 이야기해보라."
김돈이 무릎을 쓸고 아뢴다.
"선기옥형이란 것은 전하께서, '서전 순전'에서 읽으신 거와 같이 요순시절에 천체와 천문을 살펴서 이십사절기를 순임금이 친히 판단했던 기계올시다. 이름을 선기옥형이라 한 것은, 둥근 틀과 가로지른 속이 빈 형관에 구슬로 장식을 한 까닭에 그같이 이름한 듯합니다. 둥근 기가 회전하면 형관을 통해서 천체를 바라본다 합니다. 원기의 직경은 팔 척이고, 원주는 두길 다섯 자, 강이라 합니다. 그리고 형관의 길이는 팔척이라 합니다."
"원의 둘레가, 두 길 다섯 자가 넘는다면 굉장히 큰 기계로구나-."
전하는 희한하게 생각했다. 선기옥형에 대하여 김돈의 말이 끝난 후에 전하는 김조를 향하여 하문한다.
"경도 '서전'을 읽었을 것이다. 선기옥형에 대하여 연구해본 일이 있는가?"
김조가 옷깃을 바로잡고 아뢴다.
"소신도 선기옥형도의 그림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와, 모든 문헌을 참고해본 일이 있었습니다. 왕번이란 사람의 혼천설에 의하면, 요순 시대에 있었던 선기옥형은 진 시대에 없어져 버렸고, 한 시대에 와서 복구되었는데, 이름을 혼천의라 바꾸었다 합니다."
전하는 다시 한 가지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그렇다면 선기옥형과 혼천의는 같은 것이로구나!"
관상감으로 있다가 남양부사로 발탁이 된 윤사웅이 아뢴다.
"그렇습니다. 선기옥형의 이름을 바꾸어서 혼천의라 했습니다. 지금 명에도 혼천의가 있다 합니다."
"무슨 까닭에 선기옥형의 이름을 혼천의로 고쳤는가?"
전하는 한 대에 와서 선기옥형을 혼천의로 고친 까닭을 물었다. 부평부사 최천구가 대답해 아뢴다.
"선기옥형은 다만 기계의 이름일 뿐, 하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기구라 해서 혼천의란 명칭으로 바꾼 듯합니다."
예문관 대제학 정초가 아뢴다.
"혼천의라고 한 것은 땅이 중간에 있고 하늘이 땅을 둘러싸 있는 까닭이올시다. 해와 달이 아침에는 하늘에 올라 있다가 밤에는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땅 밑이 곧 하늘이올시다. 그리하여 혼천의라 한 듯합니다."
김돈이 다시 아뢴다.
"소신이 읽어본 혼천설을 다시 아뢰겠습니다. 하늘의 형상은 마치 새알과 같아서 하늘이 대지를 싸안고 있어서 흡사 닭의 알의 흰자위가 노른자위를 싸안고 있는 것같이 둥글기 탄환 같으므로 혼천이라 했습니다. 하늘의 반분은 지상을 덮어 있고 반분은 지하를 덮고 있어서 그 양끝이 북극과 남극이 되고, 그 중간에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이 서지 않고 회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천이라 했습니다."
전하는 선기옥형과 혼천의의 설명을 들은 후에 모든 신하를 둘러보며 말씀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혼천의를 만들어야 할 텐데 누가 능히 이 기계를 만들 사람이 있겠는가?"
모든 학자들은 서적으로만 읽던 사람들이었다. 누구 한 사람 만들어보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입을 봉하고 대답이 없다.
"그래, 한 사람도 만들어보겠다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
전하는 답답했다. 다시 여러 신하들을 둘러본다. 모든 신하들은 역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한다. 전하는 화증이 났다.
"나도 글만 읽었지만 너희들도 도능독으로 한갓 글자만 읽었구나!"
전하는 책상을 치며 큰 소리로 탄식한다. 남양부사 윤사웅이 전하의 답답해하시는 모습을 뵙자 부복해 아뢴다.
"황공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미신이 관상감에 있을 때,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를 여러 가지 교묘하게 잘 만드는 자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올라보신 첨성대도 이 사람의 지도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수리에 밝고 천문도 짐작합니다."
윤사웅의 아뢰는 말을 듣자, 전하의 용안에는 기쁜 빛이 가득했다.
"그런 사람이 있었더란 말이냐? 왜 진작 말을 하지 아니했느냐. 관상감 관원이냐, 성명이 무엇이냐?"
"장영실이라 합니다. 집안이 너무나 한미한 천인이므로 관상감 관원도 되지 못했습니다."
"천인인 까닭에 관상감 과거도 못봤단 말이냐? 어떠한 천인이란 말이냐?"
"본시 아산 사람이온데, 그 선대에서 동래 관노 노릇을 잠시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와 아까운 재질이건만 이내 길이 막혀서, 출세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지금 어디 있느냐? 아산에 있느냐, 동래에 있느냐?"
"서울에 있습니다."
"서울에 있어? 너는 곧 나가서 이 자리로 데리고 들어오너라!"
전하의 용안에는 희색이 가득했다. 좋은 일이라면, 당장 곧 실천하라는 전하의 성정이 여실하게 발로되었다. 윤사웅도 어찌할지를 몰랐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옆에 있던 승지가 아뢴다.
"벼슬하지 못한 백두도, 감히 어전에 알현을 못하는 법이온데, 선대에 관노 노릇을 했다는 천인이 어찌 감히 탑전에 배알을 하옵니까? 하교를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승지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불같이 진노했다.
"너희들 양반은 애초부터 양반이냐! 조상이 잘나서 양반이 되었다. 하늘 아래 천한 사람이 어디 따로 있단 말이냐? 등을 댈 데 없으면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어 천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두말 말고, 당장 호군 벼슬을 주어서 불러들여라!"
전하는 과감하게 쾌한 칼로 난마를 후려치듯, 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승지는 벌벌 떨며 정원으로 나갔다. 전하는 다시 윤사웅에게 명을 내린다.
"윤사웅은 승지와 함께 호군 첩지를 장영실에게 내리고 곧 함께 들어오라!"
윤사웅은 비로소 대명을 받들고 승지의 뒤를 따라 나갔다. 대제학 정초 이하 모든 집현전 학사들은 전하의 용단성 있는 인재 발탁에 감히 입을 벌려 말을 못 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몇 사람, 불평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전하는 말 없이 꾸부리고 앉은 학사들을 둘러보고 말씀을 내린다.
"옛글에 '불치하문'이란 말이 있다. 모르면 아랫사람한테라도 물어봐야 한다. 학문하는 길도 그러하지만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하는데 훌륭한 인재가 있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귀천을 논란해서 쓸 만한 인재를 초야에 묻어서 썩여버린다면, 국가를 발전시킬 자격이 없는 임금이다-."
"황감하옵니다."
대제학 정초가 겨운 대답을 올렸다. 윤사웅은 호군 첩지를 받든 정원 사령과 함께 정영실의 집을 찾았다. 인왕산 밑 체부청골 삼간초옥에 살고 있는 장영실은, 뜻밖에 문을 두드리는 정원 사령과 윤부사를 맞이하자 황황망망, 얼떨떨했다.
"사또, 어떻게 이같이 누추한 제집을 찾아주셨습니까? 웬 일이십니까?"
허둥지둥 눈이 동그래지며 묻는다.
"상감마마께서 자네를 부르시네, 호군 벼슬을 내리시고 급히 입시를 명하셨네."
상감이 입시를 명했다는 말을 듣자, 장영실은 또 한 번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깜짝 놀랐다.
"웬 일이십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할 테니 어서 빨리 의관을 정제하고, 전하께서 내리시는 호군 첩지를 받들도록 하게."
안방에서는 장영실의 칠십 노모와 젊은 아내가, 별안간 귀한 손님이 찾아와서 상감께서 벼슬을 내리시고 급히 입시를 명하신다는 말을 듣자,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늙은 어머니는 갓집에서 찌그러진 갓을 꺼내고 낡은 배석을 시렁 위에서 내렸다. 급히 먼지를 털어 건넌방 문턱에 놓고, 아들을 불렀다.
"얘 영실아, 갓하고 배석을 문 앞에 놓았다. 빨리 의관을 정제하고, 마당에 배석을 깐 후에 북향재배하고 칙명을 받아라!"
늙은 어머니는 내외하는 풍속을 지키느라고 마루에서 말을 전하고, 안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장영실은 늙은 어머니가 방문 앞에 놓은 갓을 쓴 후에 배석을 들고 마당에 내려 자리를 편 후에 북향재배하고 무릎을 꿇어 정원에서 보낸 호군 첩지를 받았다. 대궐로 들어가 전하께 알현을 하려면 사모관대의 조복을 입어야 했다.
"조복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내가 총총히 어명을 받들고 급히 오느라고 미처 생각을 못했네그려!"
윤사웅의 괴탄하는 말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안방에서는 장영실의 늙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영실아, 염려 마라, 내가 동네 세물전에 나가서 신랑이 장가갈 때 입는 관대를 빌려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남양부사 윤사웅은 건넌방에서 장영실의 늙은 어머니의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얼굴에 웃음빛이 가득했다. 마음속으로, '역시 그 아들에 그 어머니로구나! 장영실의 머리가 좋은 것은 결국 그 어머니의 머리가 민첩한 까닭이다.' 탄복했다. 이윽고 장영실의 어머니는 지팡막대를 짚고 동네 세물전으로 나갔다. 사모품대와 교군꾼까지 안동해서 교자 한 채를 세 내어 가지고 돌아왔다. 사모를 머리에 쓰고 대궐을 향하여 거리로 걸어갈 수는 없는 때문이다. 이 모양을 바라보는 남양부사 윤사웅은 장영실의 어머니의 머리가 비상하게 민첩한 데 또 한 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장영실은 관대로 갈아입은 후에 어머니가 세내어온 교자에 올라, 남양부사 윤사웅의 자비와 함께 풍우같이 경복궁 대궐로 향하여 달렸다. 체부청골 온 동네는 불끈 뒤집혔다.
"장영실이가 호군 벼슬을 받고 상감이 부르셔서 별입시로 들어간다!"
"사람 팔자 알 수 없구나. 장영실이가 양반이 되다니."
"우리 동네의 영광이다."
동네 사람들은 떠들썩했다. 장영실은 정원에 명단을 올린 후에 승지와 윤부사의 인도로 탑전 지척에 올라 사은숙배를 드렸다. 윤대해 모시고 있던 모든 대관과 학사들은, 천인으로 일약 호군 벼슬을 받고 사은을 드리는 장영실의 태도를 바라보았다. 진퇴하는 일거일동이 예법에 맞아서 한 곳 어색하고 서투른 점이 없었다. 웬만한 선비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법도가 있었다. 미목이 청수해서 얼굴도 준수했다. 전하도 장영실의 모든 행동을 살폈다. 첫눈에 '제법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영실이 숙배를 마치고 손을 모아 시립하자, 전하는 말씀을 내린다.
"네가 장영실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남양부사 윤사웅에게 말을 들으니, 네가 천문에 대해서 조예가 있고, 관상감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든 일이 있다 하니 과연 그러하냐?"
"소인이 어찌 감히 천문을 논하오리까. 더구나 무슨 지식이 있사오리까. 다만 관상감에서 별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들어본 일이 약간 있을 뿐이옵니다. 그리하와 수리를 조금 공부한 일이 있습니다."
아뢰는 말씀은 조리가 있고 막힘이 없었다. 전하의 용안에는 미소가 떠돌았다.
"이제부터는 네가 호군 벼슬을 했으니 내 앞에서는 소인이라고 하지 말고 신이라 해라!"
"황공무지하오이다. 성은이 하늘 같사옵니다."
전하는 더욱 아름답게 생각했다.
"네가 글공부를 한 일이 있느냐?"
"공부랄 것이 무어 있사옵니까. 천문과 역법을 알려 하와 '주역'과 '서전'을 조금 읽었습니다."
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시신들은 깜짝 놀랐다.
'주역'과 '서전'은 글 잘한다는 선비들도 뜻을 해득하기 어렵다는 학문이다. 전하는 다시 묻는다.
"네가 '서전'을 읽었다 하니 선기옥형의 그림을 보았느냐?"
"네, 보았습니다."
"네가 이 기계를 만들어볼 수 있겠느냐?"
"'서전'에 그림과 기계를 만드는 치수가 적혀 있으니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마는, 다만 형관으로 천문을 관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기계가 돌아가면서 앉아서라도 천문을 살펴야 할 텐데, 단지 형관으로 천상을 바라볼 뿐이라면, 우리나라 첨성대에 있는 측관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구나!"
"'서전'에는 선기옥형의 바퀴를 어떻게 돌아가게 하는 설명이 없습니다. 무슨 힘으로 바퀴가 돌아가서 일월성신의 움직이는 형태가 드러나야 할 텐데, 바퀴를 돌리는 방법이 적혀 있지 아니합니다. 4천여 년 전 순의 시대에 사용했던 일이오라 선기옥형을 돌리게 했던 방법이 인멸된 듯합니다."
전하는 장영실의 아뢰는 말을 듣자, 선기옥형에 대해서 제법 공부가 도저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역시 그 점에 대해서 의심이 많았다. 네 생각과 같다!"
전하는 장영실의 공부를 칭찬했다. 모든 시신들도 장영실을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목간의 제작
전하는 다시 장영실에게 말씀을 내린다.
"그렇다면, 4천 년 전의 순이 한 일을 내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느냐? 나는 기어코 선기옥형이 돌아가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해보겠다. 너도 여기 대해서 같이 연구해보아라!"
장영실은 황공 감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신에게, 그같은 분부를 내리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힘을 다하여 성은의 만분의 일을 보답하겠습니다."
"좋다. 한 달 말미를 줄 테니 연구해본 후에 하회를 알리라."
전하는 다시 정초, 김돈, 윤사웅에게 하명하신다.
"경들은 장영실과 함께 선기옥형 곧 혼천의를 제작할 방법을 연구해서, 우리나라 지역에 맞는 천문관측하는 독특한 기계를 만들도록 하라. 나도 함께 연구하리라!"
모든 신하들은 명을 받았다. 장영실이 아뢴다.
"소신의 생각에는 단번에 규모가 크고 정교한 혼천의를 만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기계의 발명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올시다. 여러 차례 시험을 쌓아서 비로소 정교한 기계가 창조되는 것이올시다. 더구나 우리나라 경도와 위도에 들어맞는 기계를 창조하자면, 먼저 간편한 연구거리에 착수하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
전하의 용안엔 활짝 웃음빛이 떠올랐다.
"네 말이 옳다! 단번에 우리 땅에 맞는 훌륭한 혼천의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수리로 천시를 풀어야 하고, 슬기로 기계 돌리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과인도 하루아침에 이 일이 성취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장영실이 다시 아뢴다.
"먼저 나무로 혼천의 양식을 간략하게 만들어서 시험해본 연후에 그 부족한 것을 연구해가면서 큰 규모의 혼천의를 제작하는 일이 가할 줄 아뢰오."
전하는 어수로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나무로 간의를 먼저 만들어보기로 하라."
대제학 정초와 남양부사 윤사웅이 일제히 찬성하는 말씀을 올린다.
"장영실의 말이 옳습니다. 먼저 목간의를 만들어서 시험해 본 연후에, 진선미를 극한 혼천의 제작에 착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는 장영실에게 다시 분부한다.
"기계를 만드는 곳에는 내가 자주 나가서 의논해야 하겠다. 먼 곳에 둔다면 불편하다. 천추전 서편에 넓은 터가 있다. 그곳에 목간의를 만드는 처소를 마련케 하라."
"오늘부터라도 곧 처소를 마련하겠습니다."
승지는 명을 받들었다. 전하는 이리하여 우선 간의를 만들 것을 작정했다. 세종이 동래 관노의 아들인 장영실에게 특별히 호군 벼슬을 주어 어전에 인견한 후에 장영실의 총명한 것을 인정하고, 이 나라에 독특한 혼천의를 만들기 위하여 먼저 나무로 간략한 기계를 만들 것을 결정했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의 일부 조관들은 쑥덕공론이 대단했다.
"동래 관노의 자식 장영실에게 별안간 호군의 직첩을 내리시어 어전에 부르셨다 하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천지개벽을 해도 분수가 있지!"
"아무리 천문이 소중하기로서니 백줴 천인이 감투를 쓰고 어전 이척에 나가서 횡설수설을 하다니, 이것 참 큰일났네그려!"
"이같이 된다면 대과급제한 우리도 다 소용이 없고 한림학사들도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었네그려!"
"지난번에 윤사웅과 최천구가 목사, 부사가 되었을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큰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지만 이번에는 설혹, 꾸지람보다 더한 귀양을 간다 해도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일세. 상소를 올려서 성총을 깨우쳐드려야 하겠네"
"누가 앞장을 서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겠나?"
"자네가 하게."
"이 사람아, 나는 요사이 몸이 불편해서 상소문을 지을 수 없네. 자네가 지어보게!"
"나는 집안에 혼사가 있어서 글 지을 틈이 없네."
흰소리를 탕탕하던 옥관자 자리들은 서로 밀고 팔밀이를 했다. 한 자가 썩 나섰다.
"그럴 것 없네. 우리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세."
"그것 참 좋은 소릴세!"
모두들 겁쟁이였다. 연명을 하자는 데 일제히 찬성했다. 상소문이 그 자리에서 당장 지어졌다.
'듣자오니 관노 장영실에게 호군 벼슬을 주시고 어전 지척 윤대하는 자리에 참여케 하셨다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천문 보는 기구를 만드는 일이 아무리 소중하다 하오나, 천인에게 호군 가자를 내리시는 일은 천만고에 없는 일이올시다. 선비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집니다. 전하께서는, 장영실의 호군 가자를 거두시옵소서.'
일부 조관들의 반대하는 상소는 정원 승지를 통해서 어전에 올려졌다. 세종은 상소문을 보시자 크게 진노했다.
"너희들, 소위 사류란 것들은 수 가지 한 개 놀 줄 모르고, 이십사절기의 변동과 일월성신의 운행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상 사람이니, 선비니 하고 떠들어대느냐? 사람은 매일반이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아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 조상에도 상사람이 있었다. 때를 만나지 못해서 3대를 지나가면 상사람이 되는 법이다. 다시 또, 이따위 이론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원악도로 귀양을 보내리라!"
전하의 엄한 교시가 내리니, 일부 조관들은 다시는 입을 벌리지 못했다. 세종전하는 장영실을 천인이라고 타박하는 일부 조관들을 크게 꾸짖어서, 다시 이론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원악도로 귀양을 보내겠다고 엄포를 논 후에, 천추전 앞뜰에 우선 목간의를 만들 장소를 마련했다. 터를 닦고 집을 지었다. 간의대라 이름을 지었다. 장영실은 백 년 묵은 박달나무를 구해 들이고, 일등목수들을 초빙했다. 톱과 칼이며 파고 뚫는 연장도 장영실의 지도로 예리하게 새로 만들었다. 정초, 김돈, 김조 등이 윤사웅과 함께 날마다 간의대에 나가 감동을 했다.
한편 세종은 '서전'에 적혀 있는 선기옥형 그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중국의 모든 사적을 밤을 새워가며 열독했다. '후한서'에 장형이란 사람이 선기옥형 곧 혼천의를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타났다. 전하는 정초, 윤사웅, 장영실을 편전으로 불렀다.
"내가 처음 우리나라에 혼천의를 만들기로 결심을 하고 경들에게 우선 목간의를 제작하라 했으나, '서전'에 실려 있는 글과 그림만으로는 그 제작하는 방법이 확실하지 못하다. 모든 사적을 열독하던 중 '후한서'에 정형이란 사람이 혼천의를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여기 대해서 경들 중에 장형의 사적과 혼천의를 제작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
윤사웅이 대답해 아뢴다.
"네, 소신도 '후한서'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정형은 글을 잘할 뿐 아니라, 천문 연구에 정통하와 선기옥형의 옛일을 참고하여 혼천의를 만들었다 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도 읽어보신 바와 같이 장형이 혼천의를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 방법이 적혀 있지 아니한 것이 유감이올시다."
정초가 아뢴다.
"한 시대 이후에 역대의 제왕들은 역법과 천상에 대하여 크나큰 관심을 가져서 백성을 지도하는 정책을 삼았습니다. 지금 명에서도 계승해서, 연구가 대단하다 합니다.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현재 천문진열관에 있는 혼천의는 영종 정통 연간에 제작된 것으로서, 일체의 성체가 돌아가는 것을 소상하게 관측할 수 있다 합니다. 실제로 한번 중국으로 사람을 보내서 정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은 말이다. 우선 목간의를 만들게 한 후에 한번 중국에 사람을 보내서 살펴보고, 우리나라에 독특한 혼천의를 만들게 하리라!"
장영실이 아뢴다.
"성상께서는 너무 성려를 수고롭게 하지 마십시오. 간의를 만드는 법은 소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간의가 완성된 후에 외국에 나가서 혼천의를 참고하여 우리나라의 독특한 혼천의를 만드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장영실의 아뢰는 말을 듣자 전하의 용안엔 웃음빛이 가득했다.
"네가 간의를 만드는 비결을 안단 말이냐?"
"전하께오서 우선 나무로 간의를 만들라시는 유시를 받자옵고, 옛 서적을 파는 집을 찾아다니다가 진기한 수사본 한 책을 구했습니다."
전하는 깜짝 놀랐다. 모든 사람들도 놀랐다. 세종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 네가 구한 수사본은 누가 지은 것이냐?"
장영실이 아뢴다.
"원세조 홀필렬의 중통 연간에 소문관 태학사를 지낸 곽수경이 지은 '간의제조법'이온데 추산이 매우 정교합니다. 이 법을 응용해서 우리나라 수도 한양을 표준으로 하여 목간의를 만든다면 천하에 자랑할 만한 관측기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바퀴를 돌게 하는 법도 적혀 있더냐?"
"간의 주위에 둥글게 홈을 파서 물이 흘러 바퀴가 돌아가게 마련이올시다."
전하는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나도 '서전'에서 선기옥형의 그림은 있으나 바퀴 돌리는 설명이 없어서 무한 궁금했더니 이제야 확실하게 알았다. 물기운이나 불기운이 아니면 도저히 바퀴를 돌릴 수 없느니라! 하늘이 나로 하여금 간의와 혼천의를 만들게 하시느라고 곽수경의 수사본이 네 손에 떨어졌구나! 보배를 얻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윤사웅이 아뢴다.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올시다. 곽수경의 수사본이 우리나라로 굴러들어온 것은 필시 고려 때 문사들이 베껴 가지고 온 것이 구르고 굴러서, 옛 책 파는 집으로 떨어진 듯합니다. 이야말로 천우신조하는 일이올시다."
전하는 장영실을 더욱 기특하게 생각했다.
"너는 지금 그 핵을 가지고 있느냐? 내가 한번 볼 수 있느냐?"
"진귀한 책이오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옵니다. 그러나 손으로 베낀 오래된 책이오라, 심히 추루합니다."
장영실은 품안에서 고려지 누른 빛깔 종이가 부풀어오른, 낡아빠진 헌책 한 권을 꺼내서 전하께 올렸다.
전하는 구겨지고 부풀어오른 얄팍한 헌책을 받아서 책장을 넘겼다. 자오로 선을 그려 지평을 정하고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모습과 금, 목, 수, 화, 토 다섯 별이 돌아가는 모습이며, 적도와 황도를 분간하는 도수와 치수를 추산해서 십이시 백각을 자세하게 표시한 글과 그림이 적혀 있고, 간의 주변에는 홈을 파서 물을 흘려 동서로 움직이면서 해와 달과 별들이 돌아가는 형태를 표현했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보배를 얻었다. 곧 이 책을 참고해서 나무로 간의를 만들어보고 성공이 되거든 구리를 녹여서 동간의를 만들게 하라!"
전하는 크게 장영실을 칭찬한 후에 곽수경의 '간의제조법'을 내주었다. 윤사웅, 장영실, 정초 등 모든 신하들은 신명이 났다.
"한 달 안에 목간의는 끝을 내겠습니다."
장영실이 국궁하고 아뢰었다.
"나도 날마다 틈을 타서 간의 만드는 모습을 나가 보리라. 나라에 없지 못할 중요한 일이다. 정성을 다하여 제작하라!"
장영실은 곧 목간의 제작에 착수했다. 전하는 날마다 천추전 뜰 앞에 납시어 간의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영실이 목수들을 지도하여 만든 치수와 도수는 전하의 뜻과 일호의 틀림이 없이 들어맞았다.
"너는 기막힌 천재다!"
전하는 또 한 번 크게 장영실을 칭찬했다.
앙부일구
달포가 지나서 목간의가 완성이 되었다. 전하는 친히 살핀 후에 정초와 장영실에게 분부했다.
"일전에도 말했거니와 이제 나무로 제조한 간의가 완성되었으니 구리로 동간의를 만들어서 간의대를 짓고, 대 위에 올려놓아서 모든 사람들이 천문에 대한 상식을 갖게 하라."
정초와 장영실은 명을 받들어 개국 이래에 처음 가는 구리로 만든 동간의를 간의대 위에 높직하게 세워서 천문과학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전하는 간의대를 창설한 후에 일상생활에 만 사람이 정확하게 시작을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해가 뜨면 밝았다고 생각해서 일을 하고, 해가 지면 밤인줄 알아서 모든 일을 집어치우고 잠자리에 들어간다. 우매하기 짝 없는 일이었다. 요순시절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해가 뜨면 일어나서 농사를 짓고 우물을 파서 맑은 물을 마시니, 임금이란 이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는가?'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태평시절에 백성들이 한 말이다. 오늘날 와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치를 해도 시각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농사와 장사를 해도 시각을 판단해야 한다. 전하는 온 나라에 정확한 시각을 알리는 기구를 장만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정초와 장영실을 불렀다.
"옛적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지 못했을 때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때를 알게 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천문과 역서의 연구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각까지 알게 되었다. 만 사람이 시각을 정확하게 알아서 부지런한 생활을 해야 한다. 만백성들에게 때를 알게 하는 일은 정치를 하는 사람의 크나큰 임무다. 문헌을 참고하니 중고 이후에 해시계와 물시계가 있어서 많은 편의를 주었다 하는데, 여기 대하여 주의해본 일이 있는가?"
정초가 대답해 아뢴다.
"수 시대의 천문지를 보면, 일구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해가 돌아가는 대로 그림자가 옮겨져서 시각을 판단하게 마련한 듯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일영대올시다."
장영실이 아뢴다.
"지금, 민간에서도 한낮을 알자면 나뭇가지를 땅에 꽂아서 그림자로 대중해서 압니다. 이것이 바로 해시계의 소박한 원리올시다."
전하는 장영실에게 하문한다.
"너는 동간의까지 만들었으니, 간의의 원리를 이용해서 천하에 자랑할 만한 해시계를 한 번 만들어보겠느냐?"
"만들 수 있습니다."
장영실은 서슴지 않고 아뢰었다.
"곧 착수해보라!"
장영실은 해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동으로 반구형을 만들고 그 안에 24절기의 위선을 그려서 24절기를 아로새기고 경선으로 시각선을 그렸다. 한복판에 북극을 향한 영침이 박혀 있었다. 해가 떴을 때, 영침 끝의 그림자로 위선과 경선을 살펴보면 그때 그 절기와 날짜와 시각을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다. 여태껏 세상이 나타나지 아니했던, 기후와 날짜와 시각을 알 수 있는 절묘한 해시계가 발명되었다. 겉모양이 마치 가마솥을 젖혀놓은 듯하다 해서 이름을 앙부일구라 했다. 전하는 크게 장영실을 칭찬하고 거리마다 해시계를 설치했다.
자격루
전하는 해시계를 환성한 후에 다시 정초와 장영실, 김돈, 김조 등을 어전에 불렀다.
"너희들은 정교한 해시계를 만들어서 시각을 알게 했을 뿐 아니라 이십사절기와 날짜까지 한눈으로 보고 알게 했으니 내 마음이 흡족하다. 그러나 날이 흐리거나 비와 눈이 내려서 해가 보이지 아니했을 때, 해시계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옛적에도 신라 성덕왕 때 물시계, 곧 누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우리 태조께서도 경루를 종가에 설치하신 일이 있었다. 그러나 듣고 시각을 짐작할 수 있는 누기를 만들었으면 대단히 편리하겠다. 너희들이 능히 만들 수 있겠는가?"
정초가 아뢴다.
"기록에 보면 황제 때 누수기를 만들어서 때를 구별했다 합니다. 구리로 만든 큰 그릇에 자그마한 구멍을 밑바닥에 뚫어서 물이 흐르게 한 후에, 구리 그릇 속에는 시각을 새긴 화살을 박아놓습니다. 물이 차츰차츰 누공으로 새어나가면 누전에 새겨 논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의 시각점이 차례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옛날 누수로 시각을 아는 방법이올시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그것은 옛적에도 이미 사용해본 일이다. 아까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눈으로 일일이 보지 않고 소리만 듣고도 시각을 짐작해 알 수 있게 할 수는 없겠는가?"
장영실이 한동안 생각하다가 아뢴다.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장영실은 대담하게 대답했다. 전하는 반가웠다.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물수레를 이용해서 눈으로 때를 알게 하는 한편, 종과 북과 정을 울려서 시각과 경과 점을 귀로 들어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전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물수레를 이용해서 누기에 물을 올리는 일은 그럴듯하다마는, 때를 맞춰서 종과 북은 누가 쳐서 소리를 내게 하는냐? 생각한 대로 설명을 해보아라."
"나무로 사람을 만들어서 기계에 장치한 후에, 목인들이 때를 맞춰서 종을 치고 북을 치고 정을 울리게 할 수 있습니다."
전하는 희한하게 생각했다. 대제학 정초도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전하는 장영실을 향하여 다시 말씀한다.
"삼국 때 제갈양은 나무로 말을 만들어서 험준한 높은 산으로 짐을 날랐다 하더니, 네가 능히 나무로 사람을 만들어서 종을 치게 하고 북을 치게 해서 시각을 알 수 있게 한단 말이냐?"
"여태껏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했던 자격루 물시계를 한번 만들어볼 자신이 있습니다. 모든 물자를 대어주시고 석 달 말미를 주신다면, 눈으로 보고 귀로써 시각을 판단할 수 있는 물시계를 만들어보겠습니다."
대제학 정초는 회의를 느꼈다.
"자네가 만약 못 만든다면 어찌할 텐가?"
"어전에서 어찌 감히 자신 없는 일을 하겠다고 아뢰겠습니까. 만약 성공을 못 한다면 소인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장영실은 얼굴에 결연한 빛을 띠고 대답했다. 전하는 장영실이 대제학 정초를 향하여 씩씩하게 자신 있는 대답을 하는 것을 보시자, 더욱 장영실을 미쁘게 생각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장영실을 향하여 말씀한다.
"네가 전만고에 없던 물시계를 만들어보겠다 하니, 내 마음이 무한 기쁘다. 네 소원대로 모든 물자를 흡족하게 대줄 테니, 정성을 다하여 새 기계를 만들어보라!"
말씀을 마치자, 옆에 모시어 있는 승지에게 분부한다.
"선공감에 명하여, 장영실이 청하는 대로 모든 물자를 지체없이 대어주도록 하라."
장영실은 감격했다.
"슬기와 정성을 다하여 새로운 물시계를 완성해보겠습니다."
"좋다! 또 한 번 네 재주를 시험해보리라."
전하는 다시 격려하는 말씀을 내렸다. 승지와 장영실이 어전에서 물러가니 모든 신하들도 뒤를 따랐다. 선공감에서는 장영실이 원하는 대로 모든 물자를 풍부하게 대어주었다. 장영실은 나라 안에 제일간다는 일등편수들을 불러들였다. 경복궁 대궐 안 경희루 남편, 넓은 뜰에 삼층 누각을 짓고 나무로 삼신과 십이신을 조각했다. 전하는 시신들을 거느리고 날마다 대궐 남편 누각에 임어하여, 장영실의 물시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든 기계가 다 제조되었다. 삼층 누각 가운데 중층에 물이 담기는 누호 네 통을 층층이 올려놓았고, 아래층에는 물받이 그릇 속에 12목인신이 제각기 시각을 새긴 누전을 잡고 평륜을 중심으로 하여 둘러섰다. 아래층에는 퇴수기가 있고 그 후면에는 물수레가 돌았다. 다시 맨꼭대기 상층에는 목인삼신이 종과 북과 정을 철사로 꼬아 잡고 있었다. 모든 기구가 완성된 후에, 장영실은 전하께 친림을 청하여 물시계를 돌리기 시작했다. 만조백관들이 시립한 속에 물시계는 돌아갔다. 먼저 '누호' 네 통에 층층이 물을 부었다. 물은 물구멍으로 차츰차츰 흘러내려서, 가운데 층 12목인이 층층이 시각표를 잡고 서 있는 물통 속으로 흘러서 만수가 되었다. 물은 차츰차츰 아래층 퇴수기로 떨어진다. 가운데층 12목인이 있는 물통에 물이 줄기 시작했다. 자시를 맡은 목인의 팔꿈치가, 평륜이 돌리는 물기운으로 철근을 통하여 움직였다. 자시를 맡은 목인의 팔꿈치가 움직이면서, 이곳에 연결된 철근과 탄환과 쇠주걱은 상층에 시각을 맡은 삼신 중의 한 목인의 팔꿈치를 움직였다. 종이 울렸다. 이같이 해서 일경, 이경, 삼경이 될 때는 북을 맡은 나무 사람이 북을 울리고, 일점 이점을 알릴 때는 정을 맡은 나무 사람이 정을 쳤다. 퇴수는 아래층 수차의 힘으로 다시 누호로 채워졌다. 이같이 해서 반복되었다. 전하를 위시하여 만조백관들은 홀린 듯 취한 듯 마치 귀신의 짓으로 생각했다. 전하는 장영실의 등을 어루만졌다.
"전고에 일찍 없었던 소리치는 물시계가 네 손으로 완성되었구나!"
칭찬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전하는 소리 나는 물시계가 돌아가는 집 이름을 보루각이라 하고, 대궐문을 크게 열어 만백성들에게 보여주라는 영을 내렸다. 이 소문이 서울 안에 퍼지니, 남녀노소 백성들은 대궐 안 경회루 앞으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보루각에 배치된 물시계는 시각이 지날 때마다 종을 치고 북을 두드리고 정을 울렸다. 그대로 물시계가 종을 치고 북을 울리고 정을 치는 것이 아니다. 신인복색으로 차린 나무들이 삼신과 십이신이 되어 위층과 아래층에 둘러서서, 종을 치고 북을 두드리고 정을 울리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물수레는 물을 뿜어 번개 치듯 돌아간다. 구름같이 모여든 구경꾼들은 넋을 잃고 얼이 빠졌다. 귀신이 곡할 일이다.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저 신인은 귀신인가, 사람인가?"
"아닐세.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닐세. 나무로 만든 사람일세!"
"무어야? 나무로 만든 사람야! 나무로 만든 사람이 어떻게 저같이 팔과 손을 움직여서 종을 치고 북을 울리고 정을 치는가?"
"그러기에 희한한 일이라고 온 장안 사람들이 떠들어대지 않는가!"
"마치 요술을 부리는 귀신의 짓 같구나!"
"지난번에는 상감이 해시계를 만들어서 정확하게 때를 알게 했더니, 이번에는 전고에 없는 나무 사람이 종을 치는 물시계를 만들어서 우리들에게 한밤중에도 때를 알게 하니 과연 갸륵하신 상감님일세!"
"도대체 이 신출귀몰한 소리치는 물시계를 누가 만들었는가? 상감이 친히 만들었는가?"
"아닐세, 체부청골에 사는 장영실이란 사람이 만들었다네, 상감이 어찌 친히 만들 수야 있는가?"
"그래? 천인으로 일약 호군 벼슬을 받고 목간의 해시계를 만들었다던 바로 그 사람이 만들었구나! 기막힌 천재다. 귀신도 부릴 사람일세그려!"
남녀노소 백성들은 구름같이 모여 서서 이같이 탄식했다. 조선에서 세종대왕이 새로운 물시계 자격루를 창조했다는 소문은 명나라와 몽고와 섬라, 유구, 여진, 인도, 왜국에까지 퍼졌다. 사신들은 들어올 때마다 보루각의 물시계 보기를 다투어 원했다. 전하는 쾌하게 허락하고 접반사를 안동해서 경회루 앞에 있는 보루각을 구경시켜주었다. 사신들은 보는 족족 감탄하고 놀랐다.
"중국에도 누각이 몇천 년 전부터 전해오기는 하지만, 나무로 만든 목인들이 종과 북을 쳐서 때를 알게 한 일은 아직도 없소이다. 조선에는 기막힌 천재가 거재두량으로 많습니다."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했다. 명나라 이외의 외국 사신들은 감히 물시계에 대하여 자기 나라의 옛일을 이야기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홀린 듯 어린 듯 물시계를 바라보고 놀라서 탄식할 뿐이었다. 조선 안에 살고 있는 회회노인들은, 나무로 만든 삼신과 십이신들이 팔꿈치를 놀려서 종을 치고 북을 칠 때마다 합장배례를 드리며 진짜 신으로 우러러보았다. 천만고에 없던 종을 울리는 물시계가 완성된 것은 세종전하와 장영실만의 기쁨뿐이 아니었다. 나라 전체의 자랑이었다.
장영실의 외유
세종전하는 여태껏 외국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나무로 만든 사람이 물의 힘을 빌려 종을 울리고 북을 쳐서 시각을 보하는 자격루 물시계를 완성한 후에 장영실의 비상한 재주를 기특하게 생각했다. 남양부사 윤사웅과 장영실을 어전에 불렀다.
"지난번에 해시계를 만들고 이제 또 전고에 없던, 목인이 종과 북을 쳐서 때를 알게 하는 자격루를 완성했으니 내 마음이 흡족하다.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목간의와 동간의를 간의대에 세웠거니와, 이번에는 간략하게 만든 간의가 아니라 천하에 제일가는 선기옥형, 곧 혼천의를 만들어야 하겠다. 너희들이 능히 만들 수 있겠느냐?"
장영실은 지체없이 대답해 아뢴다.
"물의 힘을 이용해서 자격루를 만들 듯이, 여러모로 연구하면 천하에 제일가는 혼천의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 년 동안 말미를 주신다면, 한번 외국으로 나가서 더욱 지식을 넓힌 후에 천하에 둘이 없는 혼천의를 만들겠습니다."
세종전하는 말씀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옳은 말이다! 한번 남의 나라의 천문 실태를 둘러보고 돌아와서 혼천의를 만든다면 열 갑절이나 공이 클 것이다. 영실아, 네가 비록 지체는 얕다 하나 실망하지 말라! 네 재주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소원대로 한번 중국에 가서 천문에 관한 모든 실태를 둘러보고 서적을 많이 사가지고 돌아오라!"
전하는 다시 윤사웅에게 분부한다.
"경도 장영실과 함께 중국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 돌아오라!"
장영실과 윤사웅은 황감하기 그지없었다. 전하는 옆에 모시고 서 있는 내관에게 분부를 내린다.
"정원에 나가서 도승지를 부르고, 예조에 나가서 예조판서에게 입시를 명해라."
내관은 명을 받들고 종종걸음을 걸었다. 이윽고 도승지와 예조판서가 탑전에 시립했다. 전하는 도승지와 판서에게 교시를 내린다.
"경들도 혜성과 지진이 있은 후에 내가 천문과 역서에 대하여 관심이 큰 것을 짐작할 것이다. 천상과 기후에 대한 지식은 인간생활에 있어 가장 필요하고 또 중요한 일이다. 이러므로 나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칠정산'을 편찬케 했고 간으대를 지어서, 목간의와 동간의를 설치하는 한편, 만백성들에게 정확하게 때를 알게 하기 위하여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었거니와 좀 더 훌륭한 혼천의를 만들어서 정사를 맡아 다스리는 백관들과 만백성에게 천도와 인도의 소중한 것을 절실하게 깨닫도록 해야 하겠다. 지금 저기 서 있는 장영실은 세상에 드문 재예 있는 사람이다. 목인을 부려서 종과 북을 쳐서 시각을 알게 한 일은 경들도 다 아는 바다. 이러한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진 사람에게 견문을 넓혀서 더 훌륭한 기계를 만들어야 하겠다. 윤사웅과 장영실을 중국으로 보내서 유람을 시킬 작정이다. 예조판서는 중국 예부상서에게 이자해서 윤사웅과 장영실에게 모든 편으를 보아주라고 당부하라!"
예조판서는 명을 받들었다. 전하는 다시 도승지에게 분부한다.
"도승지는 호조판서에게 교를 내려라. 장영실과 윤사웅에게 은자와 물산을 흡족하도록 주어서, 역서와 산학과 기계를 연구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
도승지는 명을 받들었다. 윤사웅과 장영실은 전하께서도 도승지와 판서에게 친히 교시를 내리는 말씀을 듣자 더욱 감격했다. 어전에 나가 하직을 아뢴다.
"융숭하신 성은을 받들어 견문을 넓히고 돌아오겠습니다."
배례를 드리고, 어전에서 추창해 물러난다.
"잘 다녀오너라!"
전하는 또 한 번 격려하는 말씀을 내렸다. 인재를 극진하게 사랑하는 전하의 안상한 성격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장영실과 윤사웅은 중국 예부에 보내는 공문과 후한 노수를 호조에서 받은 후에, 역말을 의주가도로 달려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거쳐서 연경에 당도했다. 예부에 자문을 전하니 중국 관원들은 극진히 두 사람을 우대해서 모든 편의를 보아주었다. 장영실은 어학에도 천재였다. 한양에서 연경까지 가는 도중 석 달 동안에 중국말을 배워서 명나라 사람들과 넉넉히 말이 통했다. 남선북마로 중국천지를 휘돌았다. 일년 동안 각처의 천문 시설을 둘러본 후에 역서와 산학 등 수백 권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우주 만상의 집
일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장영실과 윤사웅은 정원을 통하여 전하께 알현을 청했다. 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반가워했다.
"장영실과 윤사웅이 돌아왔단 말이냐? 곧 불러들여라!"
두 사람은 승지의 인도로 어전에 나가 절하여 뵈었다. 전하는 미소를 머금고 다정하게 말씀을 내린다.
"무사하게 잘들 돌아왔다. 고생이나 많지 아니했느냐? 일년만에 돌아왔구나!"
장영실이 아뢴다.
"네, 어느덧 일년이 지났습니다. 중국 예부에서 여러 모로 편의를 보아주어서 아무 고생 없이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습니다."
"말이 통하지 아니해서 어찌했느냐? 필담으로 의사를 통했느냐?"
옆에 부복해 있던 윤사웅이 아뢴다.
"영실은 과연 천재올시다. 한양서부터 요동을 거쳐 연경까지 가는 석 달 동안에 중국말을 익혀서 무난하게 저 사람들과 말이 통했습니다. 그 까닭에 소신도 영실을 중간에 넣고 통변을 해서 많은 편의를 보았습니다."
전하의 용안엔 웃음이 더욱 화려하게 펼쳐졌다.
"석 달 동안 가는 길에 중국말을 깨쳤더란 말이냐? 머리가 좋은 줄은 알았다마는, 하려고 하는 네 정성이 갸륵하다! 옛말에 정성이 대단하면 쇠와 돌도 녹일 수 있다 했다. 너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그저 정성을 들여서 일을 해라! 만 가지 일이 다 성취되리라. 그래, 중국의 천문 시설과 혼천의와 누기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느냐?"
장영실이 아뢴다.
"중국에는 흠천감이란 관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관상감과 같은 곳이올시다. 규모가 굉장하게 큽니다. 그러나 실제 움직여서 사용하는 기계는 없습니다. 모두 다 한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기계들을 진열해놓았을 뿐이올시다."
"선기옥형과 혼천의도 움직이지 않더냐?"
전하는 실망한 듯 물었다. 옆에 있던 윤사웅이 아뢴다.
"선기옥형은 4, 5천 년 전 순 시대에 제작된 것이오라 실물은 없어지고 다만 도형만 전시되어 있사옵고, 혼천의는 한 시대 이후에 제작된 것이오라 여러 곳에 벌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게 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옵고 우리나라에서 지난해에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와 같이 녹인으로 된 삼신과 십이신이 물의 힘을 빌려서 종을 치고 북을 두드리는 절묘한 기술은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시각을 알리는 누각도 옛 모양 그대로 진열만 해 놓았더냐?"
"그렇습니다. 한, 당, 송, 원 시대의 누기는 그대로 진열만 해놓고, 명에 와서 새로 만든 누기는 누전으로 시각을 알려줍니다마는 장영실이 만든 것처럼 절묘하지 못합니다. 명나라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는 목인이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자격루가 있다했더니, 모두 다 깜짝 놀라면서 한번 조선에 와서 보기를 원했습니다."
중국에는 누전으로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는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목인이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물시계는 없다는 보고를 듣자, 전하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만든 자격루 물시계는 천하에 짝을 구할 수 없는 제일 가는 물시계로구나!"
"그렇습니다. 중국의 일관들도 희한하게 생각하고 한번 보기를 원했으나 여타의 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올시다."
윤사웅이 아뢰었다. 전하는 신명이 났다. 모시어 있는 내관에게 분부를 내린다.
"멀리 갔다가 돌아온 윤사웅과 장영실에게 별실에서 선온을 내려라!"
두 신하는 왕은의 융숭함을 감격할 뿐이었다. 전하는 다시 윤사웅과 장영실에게 말씀을 내린다.
"술들을 한 잔씩 마신 후에 다시 나한테로 들어오라."
두 신하는 더욱 감격한 마음을 억누를 길 없었다. 내관의 인도로 두 사람은 별실로 물러나, 전하가 내리는 산해진미의 선온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선온을 마친 후에, 명에 의하여 내관의 인도로 다시 어전에 시립했다. 전하는 두 신하에게 웃음을 던지시며 말씀한다.
"술들을 한 잔씩 마셨느냐? 음식이 입에 맞더냐?"
전하의 말씀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엄숙한 말씀이 아니다. 마치 아버지가 집안에서 아들과 조카들에게 내리는 말씀같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정이 뚝뚝 흘렀다. 윤사웅과 장영실은 황공 감격해서 어찌할지 몰랐다. 감히 대답을 아뢰지 못했다. 대제학 정초가 아뢴다.
"왕도정치란 별것이 아닌가 합니다. 천시를 순회해서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고 윤택하게 살게 하는 것이 왕도정치인가 합니다.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임금된 이는 항상 천도와 인도를 조화시켜서 구김살 없도록 정치를 운행하는 것이 왕도정치올시다."
"그렇다. 대제학의 말이 옳다! 내가 목간의를 만들고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고, 크나큰 규모의 혼천의를 만들려 하는 것은 천도를 만 사람에게 보여주어서 인도에 어긋남이 없게 하자 것이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일월성신의 운행과 24절기의 교체에 따라서 살아갈 길을 계획해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학문하는 길도, 농사짓는 일도, 장사하는 사업도, 모두 다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만 사람의 일이 때를 잃지 아니하고 실천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임금의 할 일이다. 나는 입으로만 말하지 아니하고 실지로 우주만상과,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인도를 시시때때로 살피기 위하여 천시와 인도를 기계로 장치하여 궁실 안에 설치한다! 경들의 의향이 어떠한가?"
전하의 말씀이 떨어지자, 집현전 학사 김돈이 아뢴다.
"전하의 하교는 실로 광대무변한 거룩한 말씀이올시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그 범위가 호호탕탕합니다. 궁궐 안에 모든 기구를 어찌 배치하올지 소상하게 분부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장영실은 그동안 목간의와 해시계, 물시계를 창조해서 외국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다. 여기다가 크게 혼천의를 배치하여 일월성신의 운행을 판단하게 하고 24절기의 절후에 따라서 사람들이 인생의 근본 목적인,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천, 지, 인 삼재의 우주만상의 집이 방불하게 형성되리라 생각한다."
윤사웅이 아뢴다.
"전하께서 하문하시는 우주만상의 집은 과연 왕도정치의 근본이 될 뿐 아니라, 천하에 유례가 없는 일 대 발명이 될 것입니다. 한번 장영실에게 이 거창한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 하문해보시옵소서."
윤사웅의 아뢰는 말이 떨어지자, 전하는 장영실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네가 능히 우주만상의 집을 창조할 수 있겠느냐?"
장영실이 한동안 생각하다가 아뢴다.
"해보겠습니다. 우주의 삼라만상을 한 곳에 배치하여 백 가지 기계가 움직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넓고 넓은 궁실을 지어주십시오. 궁실이 완성된 후에 모든 기구를 제작해서 장치하겠습니다."
전하는 장영실의 우주만상을 배치할 집을 먼저 지어 달라는 대답을 듣자, 기쁜 빛이 용안에 가득했다.
"넓은 집이라니, 몇 칸들이 집을 지어주면 족하겠느냐?"
"3백 칸 정도면 무난할 듯합니다."
"좋다! 3백 칸 집을 지어주기로 하마."
전하는 쾌하게 윤허했다. 전하는 당장 곧 도승지에게 분부했다.
"선공감에 명해서 강녕전 서편 뜰에 우주만상이 형성될 집을 넓게 짓게 하라. 그리고 정초, 김돈, 김조는 모든 일을 감독하고, 윤사웅과 장영실은 만 가지 기구를 만들게 하라!"
도승지 이하 모든 신하들은 전하의 명을 받들었다. 선공감에서는 일등목수들을 동원시켜서 강녕전 서편 뜰에 전각을 짓기 시작했다. 사람이 거처할 집이 아니라 만 가지 기구를 배치할 집이었다. 정초와 김돈은 장영실과 윤사웅과 기구를 배치할 장소를 의논해서 설계도를 그려 전하께 아뢰고 전각을 지었다. 반년만에 전각은 준공되었다. 장영실은 전각이 완성된 지 또다시 반년 만에, 우주만상이 한눈에 보이는 호화찬란하고 신출귀몰한 기구를 배치시켰다. 전각 넓고 넓은 맞은편 정면에는 경치 좋은 일좌청산이 조성되었다. 앞에는 옥루전기를 물이 소리치며 바퀴가 돌았다. 오색구름이 서기를 뿜는 울창한 산마루에는 황금덩이로 만든 탄환 같은 둥근 해가 슬며시슬며시 움직이며 자리를 옮겼다. 낮에는 벽공 위에 높이 떠서 돌고 밤에는 산 너머로 떨어졌다. 어두컴컴한 밤이 되었다. 은덩이로 만든 둥근 달이 동편 산마루에 높이 솟았다. 산마루 위 검푸른 하늘에는 북극성과 북두칠성 일곱 별이 어깨를 겨누어 층층이 벌여 있고, 은한이 하늘 한복판을 가로지른 좌우편에는 각성을 위시하여 스물여덟 개 별이 금가루 뿌린 듯 반짝거렸다. 다시 남편 하늘 끝을 바라보면 남극 노인성이 멀리 북편 하늘 북극성을 바라보며 휘황찬란한 광채를 뿜는다. 이같이 해서 혼천의는 낮과 밤으로 바뀌면서 적도, 황도 사이로 비스듬히 돌고 돌았다. 낮이 되었다. 황금빛 태양이 둥실 떠 있는 산마루와 넓고 넓은 푸른 하늘 사이엔 비천선녀 네 사람이 금방울을 들고 구름 위에 서서 동서남북에 배치되었다. 인시, 묘시, 진시가 되면 동편에 있는 선녀가 금방울을 흔들어 때를 알리고, 사시, 오시, 미시가 되면 남쪽에 있는 선녀가 금방울을 흔들었다. 신시, 유시, 술시가 되면 서편에 있는 선녀가 금방울을 흔들고, 해가 진 후에 별빛이 비치면서 해시, 자시, 축시가 되었을 때는 북편에 있는 선녀가 금방울을 흔들어 시각을 알렸다. 금방울을 흔들어 때를 알리는 비천선녀들이 서 있는 그 아래편에는 방위를 알리는 네 신장이 서 있다. 인시가 되면 검은 옷을 입은 신장이 몸을 돌려 북쪽을 향해 서고, 묘시가 되면 푸른 옷 입은 신장이 동편을 향해서 몸을 돌렸다. 진시가 시작되면 붉은 옷 입은 신장이 남편으로 향하여 몸을 돌리고, 신시가 시작되면 흰옷 입은 신장이 서편으로 향하여 몸을 돌린다. 모두 다 나무로 교묘하게 조각된 목인이 물의 힘으로 움직이고 도는 것이었다. 우주 간의 만 가지 형상을 움직이게 하는 배치는 이뿐만이 아니다. 푸른 산이 연봉을 이루어 장엄하게 펼쳐진 산허리 남향판에는 넓은 대가 있고, 대 위에는 사모 쓰고 공복을 입은 사신 한 사람이 산을 배경으로 하여 남향해 서 있었다. 그 앞에는 갑옷 입고 투구 쓴 무사 세 사람이 손에 방망이를 들고 종과 북과 정을 앞에 놓고 있었다. 시각이 되어 때를 알릴 때가 되었다. 사모 쓴 사신이 고개를 돌리면서 종을 맡은 무사에게 영을 내린다. 무사는 방망이를 들고 종을 울렸다. 때가 흘렀다. 1경을 보할 때가 되었다. 사모 쓴 사신은 북을 맡은 무사를 향하여 북을 치라고 고개를 돌린다. 무언의 명령이었다. 북을 맡은 무사는 몸을 돌려서 북을 '둥둥' 울렸다. 점을 보할 때가 되었다. 사모 쓴 사신은 정을 맡은 나무 사람을 향하여 고개를 돌린다. 정을 맡은 무사가 방망이를 들어 정을 울렸다. 요술을 부리는 듯한 기막힌 재주다. 또다시 산아래 평평한 땅에는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의 짐승 얼굴로 조각된 12신장이 둥글게 원을 그려 엎드려 있고, 그 후면에는 열두 개 작은 굴에 문이 닫혀있었다. 자시가 되었다. 쥐 형상으로 조각된 신장 뒤의 굴문이 덜컥 열리면서 예쁜 선녀가 자시패를 들고 굴 밖으로 나타났다. 엎드렸던 서신장이 벌떡 일어섰다. 자시가 되었다는 표시다. 자시가 지나갔다. 시패를 들었던 선녀가 굴속으로 들어가면서 문이 덜컥 닫혀지고 서신장은 납작 엎드린다. 다음에는 축시다. 축신장 뒤에 있는 굴문이 열렸다. 축시패를 든 선녀가 나타났다. 소머리로 조각된 신장이 벌떡 일어섰다. 축시라고 알렸다. 축시가 지나갔다. 선녀는 굴속으로 들어가고 우신장은 제자리에 엎드렸다. 인시가 되었다. 범의 얼굴로 조각된 신장 뒤의 굴문이 열렸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선녀가 인시패를 들고 나왔다. 호신장이 벌떡 일어섰다. 인시가 지나갔다. 선녀는 들어가고 호신장은 넙죽 제자리에 엎드렸다. 이같이 해서 묘시가 되면 선녀가 굴속에서 나오면서 토끼 신장이 일어서고, 선녀가 들어간 후에 토끼신장이 엎드렸다. 진시가 되면 용수신장이 일어나고, 용수신장이 엎드리면 뱀신장이 일어섰다. 뱀신장이 엎드리면 말신장이 일어나고, 말신장이 엎드린 후엔 양신장이 일어났다. 양신장이 엎드리면 원숭이신장이 일어서고, 원숭이신장이 엎드리면 닭신장이 일어서고, 닭신장이 엎드리면 개신장이 일어나고, 개신장이 엎드리면 도야지머리를 한 해신장이 일어나서 질서정연하게 12시각을 알렸다. 또다시 오위 정면에 대를 만들고, 대 위에는 의기를 놓았다. 의기는 사람의 사상과 행동을 중정하게 하도록 교훈을 주는 성인의 그릇이다. 그릇이 비어 있으면 한편으로 기울어지고, 그릇에 물이 넘치면 그릇이 엎어지고, 그릇 안에 물이 적당하게 차 있으면 반듯하게 된다. 임금 된 사람의 행동을 과불급이 없도록 훈계하는 그릇이었다. 그릇 뒤에는 목인이 금병으로 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영실의 우주만상을 전개하는 시설은 무궁무진했다. 일월성신의 천상과 일출, 일몰의 시각이며 황도, 적도, 지평을 한눈에 판단케 할 대혼천의를 움직이게 한 후에, 또다시 인간생활의 살아가는 모습을 춘하추동 네 절기로 나누어, 만상의 집속에 배치해놓았다. 닭이 움직였다. 나무와 돌로 사람과 기계와 짐승을 조각해서 움직이게 만들었다. 인간생활의 만 가지 생태가 여실하게 재현되었다. 청산이 우줄우줄 연봉을 이루어 활짝 활개를 편 수백 리 넓고 넓은 산기슭에는 춘하추동 사시경이 펼쳐졌다. 동편에는 춘삼월의 농촌생활이다. 연분홍 진달래와 황금 같은 개나리며 홍도, 벽도가 만개한 곳에 초가 십여 집이 문전옥답을 굽어보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닭이 홰를 치고 병아리가 꼭꼭거렸다. 농부들은 논갈이와 밭갈이가 한창이다. 한편에서는 가래질을 하고, 한편에서는 쟁이를 소에 메워 논을 갈았다. 여인들은 점심밥을 채광주리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가고, 붉은 저고리와 강아지는 졸랑졸랑 뒤를 따랐다. 산기슭 남쪽에는 여름살이가 전개되었다. 꽃은 지고 녹음이 우거졌다. 골짜기마다 물은 흐르고 물레방아는 소리치며 돌았다. 들판마다 흰옷 입은 농부들은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농기를 바람에 펄럭이며 모내기에 바빴다. 격양가를 부르는 노랫소리만 들리지 아니했을 뿐, 농부들은 팔짓 다리짓을 하면서 모를 던지고 모를 심는 모습이 완연했다. 산기슭 서편에는 칠팔월의 농촌 풍경이 벌어졌다. 밭에는 수수와 조가 고개를 숙여 늘어졌고, 논에는 벼가 익어 황금물결을 일으키며 들판마다 가득했다. 여인들은 집집마다 길쌈을 해서 씨아를 돌리고, 한편에서는 다듬잇 소리가 요란했다. '한 조각 밝은 달 아래 만 집이 다듬잇소리'라는 옛 시를 연상케 했다. 초가지붕마다 달덩이 같은 박이 덩굴을 지어 주렁주렁 얹혀 있고, 사립 문밖 넓은 마당에는 맏물 고추가 멍석 위에 붉은빛을 뿜어 눈이 부시다. 뿐만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붉은팥, 푸른 녹두, 흰콩, 검은콩, 들깨, 참깨를 말리는 맷방석이 이곳저곳에 벌여 있다. 풍요한 초가을의 전주곡을 드러냈다. 다음엔 초겨울 풍경이 벌어졌다. 들판마다 논두렁에 결속해서 볕에 말렸던 볏단을 농부들이 타작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농부들은 이곳 저곳에서 볏단을 날랐다. 절구통을 가로 뉘어놓고 마주 서서 두들겼다. 금싸라기 같은 누런 벼가 소복소복 쏟아졌다. 나락이 다 떨어지면 농부들은 다 떨린 볏짚을 내던지고, 다시 나락달린 볏단을 마주 서서 두들겼다. 한편에서는 매질을 해서 섬에 벼알을 담아 작석을 했다. 마소에 볏섬을 실어서 동네로 돌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바라만 보아도 배부른 추수하는 풍경이다. 한편엔 또다시 깊은 겨울 풍경이 벌어졌다. 집집마다 사랑방에서는 머슴들이 모여 앉아서 짚신을 삼고 새끼를 꼬았다. 외양간에는 황소가 한가롭게 누워 있고, 아낙네는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를 들고 쇠죽을 끓이는 모양도 만들어놓았다. 부지런한 농촌생활의 춘하추동 사시절의 생태를 여실하게 전시했다. 모두 다 목인과 철근과 물의 힘으로 우주의 만 가지 형상을 한 집속에 포괄해서 생물처럼 움직이게 했다.
장영실이 창조한 우주만상의 집에는 목간의, 해시계, 물시계, 선기옥형, 혼천의들의 모든 천상을 연구할 수 있는 기구가 종합되어 배치되었다. 뿐만 아니다. 산과 물, 논과 밭, 대지에 나타나는 만 가지 생물이 생동하도록 구현시켜놓았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사람이 우주 사이에 살아나가는 생활 과정을 여실하게 표현했다. 호호탕탕한 우주 사이에 안겨 있는 천, 지, 인 삼재의 움직이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모양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다. 모두 다 실제와 실물이 되어 움직였다. 해가 움직이고 달이 솟았다. 비천선녀가 움직이고 십이신장이 팔짓 손짓을 했다. 굴문이 열렸다가 닫혀지고 열두 선녀가 시패를 들고 나타났다. 인간사회를 표현한 농촌 풍경에서도 목인들은 산 사람같이 움직였다. 닭은 홰를 치고 강아지는 뛰었다. 나무로 사람과 금수와 풀과 꽃을 만들고, 물이 돌아가는 힘으로 철근과 철사와 쇠주걱을 교묘하게 연결시켜서 우주만상을 구현시킨 것이다. 비상한 지혜와 슬기와 기술이었다. 이 기막힌 우주만상의 집이 이룩되는 동안, 장영실의 슬기와 공도 지극히 컸지만 세종전하의 예지도 대단했다. 물차를 돌려서 수력을 일으키고, 모든 기구를 연결시켜서 목인들을 움직이게 하자면 반드시 정확한 수리의 계산이 필요했다. 세종전하는 항상 미복으로 장영실 앞에 나타나서 척수와 촌수를 지시했다. 장영실의 의사와 전하의 뜻은 여합부절 들어맞았다.
우주만상의 집이 완성되는 날, 전하는 모든 종친과 영의정 이하 백관들을 거느리고 여태껏 공개하지 아니했던 강녕전 앞 우주만상의 집으로 임어했다. 만조백관들은 전하의 뒤를 따라 궁전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기가 막혔다. 일좌청산이 활짝 열린 곳에 만 가지 기계와 농촌 풍경이 여실하게 벌어졌다. 모두들 눈이 현황했다. 장영실은 수차를 돌렸다. 물바퀴가 번개치듯 돌아가면서, 황금덩이 같은 태양이 동편 산마루로 솟으면서, 비천선녀는 종을 울렸다. 쥐가 일어서고 범이 일어났다. 북소리가 나고 정이 울렸다. 모두 다 홀린 듯 취한 듯 어안이 벙벙했다. 전하는 모든 신하를 둘러보고 말씀을 내린다.
"이제 내 소원이 성취되었다. 임금이 천시를 모른다면 임금 노릇 할 자격이 없고, 민간의 노고를 살피지 못한다면 선치를 할 수 없다. 이리하여 나는 우주만상의 집을 짓고 춘하추동 사시절의 절후와 민생고를 살펴서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을 삼으려 한 것이다. 경들도 내 뜻을 알아서 항상 천시와 민생에 유의하라!"
모든 신하는 고개를 숙여 탄복했다. 전하는 다시 장영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치하하는 말씀을 내린다.
"내가 박연이 아니었던들 아악을 성취할 수 없었고, 너 장영실이 아니었던들 천지인 삼재의 혼상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하다, 영실아!"
전하는 장영실의 어깨를 다시 세 번 어루만져주었다. 세종전하는 여러 신하 앞에서 장영실을 크게 찬양한 후에 다시 백관들을 둘러보며 말씀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혹시 미비한 점이 있을지 모른다. 경들은 이제 우주만상의 집을 구경했으니 보고 난 후에 느낀 바를 말하라."
하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감히 누구 하나 금방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한동안 후에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하도 신출귀몰하고 휘황찬란하와 다만 놀랐을 뿐이올시다."
집현전 학사 김돈이 아뢴다.
"중국 요순 시대로부터 측후 하는 기구가 있어서 역대마다 제도가 변했습니다. 당 시대에 와서는 황도유의와 수운혼천이 있었고, 송 시대에는 부루표영과 혼천의상이 있었고, 원 시대에 와서는 앙의와 간의가 정교했다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모두 한 가지씩을 성취했을 뿐, 오늘날 이 우주만상의 집에 배치된 것같이 백 가지 천 가지가 겸비되지 못했습니다. 해와 달이 돌아가는 도수와 해시계, 물시계하며 사신과 십이신에 고인, 종인, 사신, 옥녀들이 구비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저절로 움직이고 돌아가서 종이 울고 북이 쳐지니, 마치 신의 짓인 듯합니다. 보는 사람들은 까닭을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역대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천하에 자랑할 만한 측후 기구올시다."
김돈의 아뢰는 말이 떨어지자, 예문관 대제학 정초가 아뢴다.
"김돈이 아뢴 바와 같이 수천 년 이래 역대 제왕이 목인을 조각해서 산 사람같이 움직이게 한 일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오라, 춘하추동 사시절 농촌생활을 여실하게 전개시켜서 민생고를 알게 한 일은 천만고에 없는 훌륭한 일인가 합니다."
대제학 정초의 말이 끝나자,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신도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우주만상의 집 속에 누기의 물을 이용해서 의기를 만들어서 천도의 영허한 이치를 아게 하고, 위정자가 중정한 태도를 갖도록 귀감을 삼게 한 배치는 전하의 아름다우신 뜻인가 합니다."
세종전하는 여러 사람들의 논평을 듣자, 용안이 화려하고 마음이 흐뭇했다.
"이제 졍들의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흡족하다. 전각 이름을 지어야 하겠다. 무어라 이름하는 것이 좋겠는가?"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가 아뢴다.
"'서전 요전'에 '하늘 뜻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공경해서 때를 주라.'는 글이 있습니다. '흠경각'이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것 좋구나! 우주만상의 집 이름을 흠경각이라 하고, 글씨 잘 쓰는 사람을 택해서 현판을 써서 달게 하라."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양녕대군에게 사람을 보내시어 흠경각 현판을 쓰라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전하는 불현듯 형님의 생각이 났다.
"좋다. 그리하기로 하자."
전하는 곧 양녕에게 칙사를 보내어 글씨를 받아서 우주만상의 집에 높직하게 달았다.
측우기
세종전하는 천하의 장관인 흠경각을 창설한 후에, 정무 여가에 천시와 백성들의 노고를 항상 살폈다. 봄철이 지나가고 초여름 절기가 되었다. 정월달부터 눈과 비가 흡족하게 내리지 아니했다. 하늘은 쨍쨍하게 볕만 내리쬐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아니했다. 농촌에서는 못자리에서 논으로 모를 옮겨 심어야 할 시기가 지나갔다. 못자리에 물은 바작바작 마르고, 논에는 먼지가 펄썩펄썩 일어났다. 농부들은 낮과 밤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탄식들을 했다.
"올해는 꼼짝 도리 없이 흉년이 들었네!"
"수많은 식구들이 굶주릴 테니 어찌하면 좋은가?"
농촌마다 한숨이요, 시름이었다. 전하는 우주만상의 집인 흠경각까지 지어서 천시의 순환과 민생고를 잘 아는 분이었다.하지가 바라보고 초조하게 비를 기다렸다. 하지가 넘어서 초복이 되도록 비가 흡족하게 내리지 아니하면, 농사는 결딴이 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하는 승지를 불러 교시를 내렸다.
"날이 계속 가물어서 농사 형편이 말이 아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근심이 대단하겠다. 초목 이전에 이앙을 끝내지 못한다면 농사는 결딴이 나고 만다. 팔도 감사와 각읍 수령에게 급히 영을 내려서 농민들을 독려해서, 못자리에 아직 모가 있거든 마른 논에라도 호미모를 심게 해라. 하늘만 쳐다보고 탄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리고 정 비가 내리지 아니할 때는 대파라도 해야 한다. 메밀을 많이 준비해두라고 일러라. 만약 그동안에 단비가 내린다면 호미로 심은 모는 다 소생이 될 것이다."
전하는 농사짓는 일에도 밝았다. 정원에서는 곧 팔도에 영을 내렸다. 방방곡곡 농촌에서는 절망 속에서 호미모를 심느라고 부산했다. 전하는 영을 내린 즉시 승지를 다시 불렀다.
"동적전에 나가, 기우제를 지낼 테다. 간소하게 거둥 준비를 차려라!"
불시로 거둥령이 내리니, 영의정 이하 백관들이 모여들었다. 전하는 동교로 나가 적전에 단을 쌓고 향촉을 밝혀 축을 올리고 기우제를 지냈다. 쨍쨍하게 내리쬐는 볕에 온종일 엎드려 있었다. 백성들은 임금의 지성에 감동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남녀노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전하와 함께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비는 좀처럼 내리지 아니했다. 전하는 날마다 적전으로 나가서 하늘에 빌었다. 사흘째 되는 날 검은 구름장이 산봉우리에 돌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전하와 백성들의 기쁨은 헤아릴 길 없었다. 지극한 정성에 하늘도 감동된 모양이다. 장마로 변했다. 논에는 모가 청청하게 자라고, 들과 산에는 만 가지 초목이 소생되었다. 전하는 내린 비의 양을 판단해야만 했다. 관상감에게 우량을 하문했다. 정확한 대답을 아뢰지 못했다. 전하는 노했다.
"관상감에서 우량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느냐. 장영실에게 부탁해서 측우기를 만들라!"
이리하여 나라에 처음 가는 측우기는 곳곳마다 설치되었다.
한글
세종대왕의 탁월한 지도력과 성스러운 예지는, 국가의 장래와 겨레의 문명을 위하여 끊일 사이 없이 영감을 뿜어 움직였다. 아악을 창조하고 우주만상의 집을 이룩하여 세상 사람들을 크레 놀라게 한 전하는, 또다시 거룩하고 위대한 글자혁명을 이룩하려 했다. 전하는 어릴 때부터 오늘날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항상 글 읽기를 좋아했다. 만 권 서책을 독파했다. 보배로운 훌륭한 지식과 사상을 무궁무진 얻었다. 황금과 보옥보다도 귀중한 전하의 지식과 예지와 사상은, 순전히 글을 읽은 까닭으로 해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하가 반편생을 두고 읽고 연구한 글은 우리말로 된 글이 아니었다. 남의 나라의 글자로 써놓은 한문이었다. 우리나라의 말과는 전혀 통하지 않는 다른 글이었다. 한문은 뜻을 표현하는 글자다. 말과 소리를 곧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전하는 말과 글이 일치되게 할 수는 없는가 생각해보았다. 뿐만 아니다. 학문은 남의 나라 글이다. 너무나 어렵다. 10년, 20년을 공부해야만 비로소 문리를 깨닫게 된다. 이러므로 글을 배우고 글자나 안다는 사람들은 생활이 넉넉한 소위 양반계급과 선비라는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뿐이었다. 구차해서 가난한 생활을 하는 백성과 상사람들은 아예 글공부를 할 생각도 못한다. 여자들도 어려워서 한문공부를 할 틈이 없다. '삼강행실'이나 '열녀전'을 백 번 만들어놓은댔자 볼 줄 아는 여자는 몇 명이 되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당한 국가가 있는데 나라에 글이 없어서 남의 나라의 글을 빌려다가 쓴다는 일은 국가의 크나큰 수치다. 고조선 시대 때 독특한 글자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록이 없으니 고증할 길이 없다. 신라 때, 설총이 한자를 이용해서 구결을 만들어, 토를 달았고, 향가와 이두문으로 우리말을 풀이하게 해서, 관청에서 쓰는 공문서와 소지는 이두문으로 쓰고 있으나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백성들이 원통한 일이 있어서 관청에 호소하는 사연을 적어내게 되어도 반벙어리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이두로 소지를 바치게 되니, 원통한 사유가 곡진하게 원이나 감사에게 전해지지 못한다. 이러하니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은 철천의 한과 기막힌 탄식으로 변해서 군수를 원망하고, 감사를 원망하고, 나라의 임금까지 탓하게 된다. 전하는 어느 모로 보나 우리나라의 독특한 글은 반드시 새로 마련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한자같이 어렵고 수효가 많고 복잡다단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간단하면서도 만 가지 우리말과 천만 가지 대자연의 음향을 글자로 곧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글이란 것은 사람이 자기의 뜻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글자라는 부호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학문이 되고 사기가 되고 전기가 되고 사상이 된다. 뿐만 아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말 대신 글자로 뜻을 전할 수 있는 까닭에 글이 필요한 것이다. 말과 글이 다른 글자로 뜻을 전달하는 것보다 소리와 글의 어음이 일치될 수 있는 글자를 창조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세종전하는 불합리한 남의 나라의 글자를 빌려쓰지 아니하고 자주적인 훌륭한 글자를 창조하기 위하여, 밤마다 깊은 사색 속에 잠겼다. 글자의 자체도 중요한 것이지만, 사람이 입으로 말과 소리를 내는 원리를 밝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입과 혀와 목구멍을 놀려서 말을 하고 소리를 낸다.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다 같은 형태로 말을 하고 소리를 낸다. 사람마다 얼굴 모양이 다르고, 얼굴 빛깔이 다르고, 코 모양, 눈 모양, 입 모양, 귀의 형태가 똑같지 않다. 모두 다 다르다. 그러나 말과 소리를 내는 형태만은 똑같이 혀를 놀리고, 입술을 움직이고, 목구멍 속의 성대를 울려서 말을 하게 된다. 묘한 일이다. 조물주의 조화라 아니할 수 없다. 또다시 묘한 일이 있다. 남자가 말하는 소리는 우렁차고 씩씩하다. 그러나 여자의 말소리는 아름답고 곱고, 여낙낙하고, 부드럽고, 감칠맛이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말하는 소리가 그런 것만이 아니다. 만 사람이나 천 사람이나 똑같이, 남자의 목소리는 거세고 여자의 음성은 보드랍다. 아무리 메주덩이같이 못나고 추하게 생긴 여자라도 목소리만은 양금채를 울리는 듯 아름답고, 애원성이 난다. 아무리 얼굴판이 여자같이 생긴 미남이라도 목소리는 씩씩하고, 사내답다. 묘한 이치다. 또 한 가지 야릇하고 괴상한 일이 있다 당신의 곁에서 항시 거행하고 있는 고까인 내시의 말소리와 목소리는 일종 독특한 교활하고 간사한 음성을 낸다. 이것도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비슷한 같은 음성을 낸다.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닌 중성의 불구자인 때문이다. 실로 묘한 이치다.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다. 신의 조화다. 신의 조화가 아니라면, 천지간 음양의 이치라 아니할 수 없다. 전하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혼자 무릎을 쳤다. 혼자 말씀을 했다.
"그렇다. 음과 양의 조화로다."
전하는 또다시 혼자 말씀을 한다.
"하늘과 땅 사이 만 가지 물건이 음양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하늘이 있으니 땅이 있고, 해가 지면 달이 솟고, 산이 있으면 물이 흐른다. 붉은 꽃이 시들면 푸른 잎이 싱싱하다.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고, 젊은이가 있으니 늙은이가 있다. 심지어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암놈과 수놈의 목소리가 다르지 아니한가? 확실히 음양의 관계로다!"
전하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또 한번 예지가 번개치듯 머리로 스쳤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낮아지고 길고 짧고 맑고 탁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스스로 혼자 물었다. 또다시 잠깐 사색 속에 들었다. 이윽고 전하는 무릎을 다시 쳤다.
"옳다. 금, 목, 수, 화, 토 오행의 관계로다. 음양과 오행은 떼어놓으려 해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구나."
전하는 혼자 스스로 크게 깨달았다. 찬란하게 빛을 뿜는 전하의 예지가 여기까지 미쳤을 때, 홀연 전하는 당신이 박연과 함께 창조했던 아악에 대한 생각이 났다. 전하는 어느 날 한밤중에 내시에게 박연의 입시를 명했다. 아악의 최고 권위자인 박연은 돌연 한밤중에 부르시는 말씀을 받자 황황히 조복으로 갈아입고 예궐했다. 전하는 박연의 알현을 받자,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말씀을 내린다.
"그동안 무양했는가?"
"황감하옵니다. 항상 성상의 은총을 입사와 별 탈이 없사옵니다."
화기 가득한 군신의 대화다. 전하는 다시 미소를 던지며 말씀한다.
"깊은 밤에 돌연 불러서 미안하기 짝이 없다. 내가 학문을 연구하다가 의심스런 점이 있어서 경에게 물어보려 부른 것이다. 허물치 말라!"
박연은 마치 자애로운 아버님의 말씀을 듣는 듯했다. 감격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 하교하시면 소신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묻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지난해에 나는 경과 더불어 아악을 완성한 일이 있다. 당시에 경은 음률을 금, 목, 수, 화, 토 오행에 비겨서 궁, 상, 각, 치, 우 다섯 음계로 정했다. 지금 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음성을 발하는 것을 연구하는 주잉다. 이것도 역시 오행에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경의 의향은 어떠한지 한번 물어보고 싶어서 부른 것이다."
박연이 아뢴다.
"전하의 하교가 옳으십니다. 사람의 음성은 확실히 음양과 오행으로 인하여 소리가 나는 것으로 신도 생각합니다. 악이란 별것이 아니올시다. 사람이 노래하는 음정을 정돈하고 조화해서 아름다운 해성을 악기에서 나게 하는 것이니, 사람의 목을 통하여 발생되는 음의 높고 낮고 맑고 탁한 것은 당연한 음과 양 두 기운과 금, 목, 수, 화, 토 오행의 이치에서 나타나는 것이올시다. 기뻐하고 격노하고 즐거워하고 평정한 마음을 갖는 것은 결국 금, 목, 수, 화, 토 오행과 음과 양의 진리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압니다."
박연은 전하 앞에 악의 진리를 곡진하게 털어서 아뢰었다.
전하의 마음은 후련하고 흐뭇했다.
"나도 그같이 생각이 들었으나 기연가 미연가 해서 깊은 밤을 불고하고 경을 부른 것이다. 경은 나의 스승이로세! 허허허."
박연은 황공했다. 자리를 피하여 아뢴다.
"성상께옵서 어찌 그러한 교를 내리시옵니까. 모두 다 성상의 하늘이 내신 슬기시옵니다. 다시는 과분한 말씀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나는 경에게 또다시 상의할 일이 있다. 나는 나라에 자주적인 글이 없는 것이 한이 된다. 문자혁명을 일으켜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글자를 창제하려 하여 고심하는 중이다. 경도 이 사업에 한 팔 힘을 다해주기 바란다."
박연은 홀연 전하의 문자혁명을 일으켜서 독특한 자주적인 글을 창조한다는 말씀을 듣자,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정신이 황홀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박연은 옷깃을 바로잡고 일어나 절을 올리며 아뢴다.
"전하께옵서 중국을 능가하는 아악을 창설하시고, 이제 또 나라의 자주적인 글자를 구상하시어 만백성을 가르치겠다 하시니, 이 기쁨을 어찌 주체하오리까. 이제 늙은 신은 죽사와도 한이 없습니다."
난계 박연은 나라의 자주적인 글월을 만들겠다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너무나 기뻤다. 절을 올리고 말씀을 마친 후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실덩실 문무 춤을 춘다. 박연이 아악을 창설한 후에 문무와 무무를 제정해서 조종의 성덕을 기리었던 춤이다. 원래 아악에 정통한 박연이었다. 춤은 악의 반주가 없건만 는실는실 소맷자락을 펄펄 날리면서 어깻짓, 팔짓, 다리짓이 저절로 조율에 맞춰 멋들어진 춤의 극치를 이루었다. 전하는 박연의 송축하는 문무춤을 바라보시자, 마음이 흐뭇하고 유쾌했다.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박연의 멋짐 춤을 감상했다. 이윽고 박연이 춤을 그치자, 전하는 호탕하게 웃으며 칭찬하는 말씀을 보낸다.
"경은 과연 노익장이로다. 음률이 없건만 문기를 일으키는 춤가락이 악 이상의 조율을 이루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흥이 구름 일 듯하게 하는구려. 그리고 나이 높건만 조금도 숨이 차지 아니하니 내 마음이 무한 기쁘오."
박연은 다시 전하께 배를 드리고 아뢴다.
"전하께옵서 나라에 독자적인 글이 없는 것을 한탄하시어 새로 문자를 창제하시겠다는 말씀을 듣자, 신은 기쁨을 못이겨 무례함을 무릅쓰고 어전에서 감히 송축하는 춤을 추었습니다. 꾸지람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문무는 조종께 성덕을 예찬해 올리는 큰 춤인데, 비록 사사로운 자리라 하나 노재상이 친히 추는 춤을 바라보니 내 마음에 도리어 외람함을 느끼오."
지위는 비록 임금과 신하의 구별이 있었으나 전하는 박연의 아악을 알고, 박연은 전하의 하늘이 낸 귀중한 인품을 존경했다. 지기와 지기가 서로 만났다. 화한 기운이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은은히 감돌았다. 세종전하는 문밖에 기대하고 있던 내시를 불렀다. 분부를 내린다.
"이같이 좋은 밤을 그대로 허송할 수 없다. 간소하게 주안을 올려라!"
파탈한 별은전 이었다. 임금이 신하의 공을 가상하게 생각해서 대궐 안 별전이나 신하의 집으로 술을 내겨서 선온하는 일은 있으나, 임금이 신하와 자리를 같이해서 대작하는 일은 극히 드문 영광스런 일이다. 박연은 내시에게 분부하는 말씀을 듣자 몸을 피하여 아뢴다.
"신니 어찌 감히 전하를 모시옵고 잔을 들 수 있사옵니까? 분부를 거두어주시옵소서. 소신은 곧 물러가겠습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박연의 손을 이끌었다.
"경은 나를 버리려 하는가? 뜻이 서로 통하는 지기 하는 임금과 신하가 대작을 못 한다면 나는 누구하고 술을 마실 것인가? 당치 않은 말 말고 앉아 있으라!"
박연은 성주의 말씀에 또 한 번 감격했다.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윽고 내시는 어린 내시에게 주안상을 받들어 들여와, 어전에 올렸다.
"가까이 오라."
전하는 박연을 주안상 앞으로 앉게 한 후에 친히 옥장에 가득 술을 부어 박연에게 권했다. 용안엔 가득 웃음을 띠고 말씀을 내린다.
"술이란 뜻이 맞는 사람끼리 마셔야만, 마음이 화창한 법인데, 나는 부질없이 임금이란 지위에 있기 때문에 뜻 맞는 사람과 술잔을 들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니 한스럽기 짝이 없소. 오늘 밤엔 경과 내가 마주 앉아서 대작을 하면서 한번 서회를 해보기로 합시다."
나라의 큰 재목을 극진히 대접하는 대제왕의 훈훈한 말씀이었다. 박연은 황공 감격했다. 내리는 옥술잔을 받들어 몸을 돌려 마신다. 전하는 또다시 껄껄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술이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마셔야 맛이 오는 것이지, 외면을 하고 마셔서야 무슨 맛이 있소. 쓸데없는 허례는 집어치우고 바로 앉아서 마시기로 합시다. 하하하하."
박연은 돌아앉아 술잔을 비운 후에, 잔에 가득 술을 따라 전하께 올리며 아뢴다.
"신하 되는 아랫사람이 존엄하신 전하 앞에 어찌 감히 마주 앉아 술을 마시옵니까. 어른 앞에 돌아앉아서 술을 마시는 일은 허례가 아니올시다. 당연한 도리올시다."
전하는 다시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말씀한다.
"법은 고치기 어려우나 도리는 임시 변동을 할 수 있소. 경이 계속해서 돌아앉아서 술을 마시면 내 술맛이 떨어지오. 오늘 밤엔 나를 위해서 경은 마주 앉아서 대작을 합시다!"
박연도 하는 수 없었다.
"군상의 명을 거스르는 일도 신하의 도리가 아니올시다. 전하께서 그같이 명하신다면 오늘 밤에 한해서 바로 앉아서 내리시는 술을 마시겠습니다."
뜻이 맞는 임금과 노재상 사이에는 주안상을 대하여 이같이 화기가 가득했다. 술은 석 잔이 넘었다. 임금과 신하의 마음은 더욱 화창했다. 전하는 박연을 향하여 말씀을 다시 내린다.
"아까도 경에게 말한 바 있거니와 우리나라에는 말은 있으나 글이 없구려. 독특한 자주적인 글자를 만들어야 하겠소. 내 머리에는 항상 그 생각뿐이오. 지금 이 술을 마시는 순간에도 내 머리에는 그 생각뿐이오. 지난번 아악을 완성했을 때 경은 궁, 상, 각, 치, 우 다섯 가지 음계를 오행에 배속시켜서 음정을 마련하였고,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음성도 금, 목, 수, 화, 토 오행에 근원을 두어서 높고 얕고 맑고 탁한 자연스러운 소리가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했소. 경은 음과 악에 대한 대가이니, 구체적으로 그 원리를 오늘 밤에 나에게 들려주기 바라오."
난계 박연은 들었던 술잔을 상 위에 놓고 옷깃을 바로잡으며 아뢴다.
"소신이 전하 앞에 입을 벌리고 혀를 놀려서 사람의 목소리가 금, 목, 수, 화, 토와 궁, 상, 각, 치, 우에 연결되는 것을 실지로 고증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늙어 이가 빠져서, 옳게 음정이 나타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세종전하는 박연이 이가 빠져서 소리의 고증을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하겠다는 말을 듣자,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세월무정 노장부라더니 경의 나이 벌써 늙어서 낙치가 되었소그려. 아깝기 한량없소. 그렇다면 나는 한시가 급한데 어찌하면 좋은가? 오늘 밤 안으로 사람의 목과 입안에서, 오행으로 나타나는 확실한 고증을 얻은 후에, 또다시 더 한 걸음 나아가서 다른 법칙을 연구해야 할 텐데--- 이 아까운 밤을 어찌 그대로 허송한단 말인가!"
전하는 글자 연구가 한시가 급했다. 전하의 탄식하는 말씀을 듣자, 박연은 성주의 갸륵한 지성에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께서 이 밤 안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람의 소리가 오행에 통하고 아니하는 것을 실험하려 하신다면, 소신을 대신해서 여악 한 아이를 어전에 모시어 실험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하는 여악을 어전에 모시어 음성의 오행을 실험해드리겠다는 박연의 말씀을 듣자, 홀연 몇 해 전에 사랑했던 후궁 취옥을 대궐 밖으로 내친 생각이 났다.
"여악이라니, 관습도감 기생 말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관습도감 기생 중에 나이 어리지만 음리에 대하여 제법 분간을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가로 흔들며 소리를 높여 껄껄 웃고 말씀한다.
"여자 중에도 기생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은 좋지마는 가까이할 것은 못 된다고 생각하오. 하하하."
박연은 미소를 짓고 아뢴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꽃이란 멀리 바라보는 것이 좋지, 꺾는 것은 일이 아니올시다. 꺾지만 말고 바라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경도 소문을 들어서 알는지 모르겠소마는 내가 지난해 경과 함께 아악을 창제할 때, 경의 천거로 악리에 능통했던 취옥을 측근에 두어 아악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했던 일이 있었소."
"네, 그때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내 침실에 기생이 무상 출입한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었지."
박연은 전하의 말씀을 듣자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다.
"그때 나는 취옥을 데리고 음악에 대한 연구만 했지, 추호도 다른 뜻은 없었소. 다만 그 총명 영리한 행동을 귀엽게 생각했을 뿐이지."
"말씀을 계속하십쇼."
박연은 전하의 뒷말씀을 재촉했다.
"이 소식은 중전의 귀로 들어갔구려. 중전은 궁중 내명부들의 규율을 맡은 분이라 악의 창제를 위하여 나의 침실로 출입하는 취옥을 드나들지 못하게 할 수는 없고 무한 고민한 끝에 세자와 의논하고 취옥을 나의 상침으로 만들었구려. 그래서 경과 나는 중국에서도 일찍 완성하지 못했던 아악을 완성했고, 아악을 완성한 그 후면에는 취옥의 공도 약간 있었던 것이오."
"그렇습니다. 거기까지는 소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취옥을 내치신 속일은 오늘까지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말씀을 계속한다.
"취옥은 상침으로 봉한 후에 궁중에는 그 아이의 세력이 대단했소! 상궁 이하 무수리들은 취옥에게 첨을 하고, 내시, 별감, 무예청들 액정배들은 취옥에게 청탁이 대단했단 말이지. 여기다가 취옥이는 점점 마음이 교만 방자해져서, 제 아비에게 가감역 벼슬 한자리를 떼어주라고 하니 말이 되는 소린가. 그래서 궁중에 더 두었다가는 앞으로 큰일을 저지르겠기에 단연코 내보낸 것이오. 그 후부터 나는 기생이란 멀리 그 재예를 바라볼 뿐, 가까이할 것은 못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하하하."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드높게 웃었다. 박연은 주안상에서 옥잔을 들어 전하께 약주를 부어 올리며 정색하고 아뢴다.
"전하께서는 너무나 박정하셨습니다."
전하는 잔을 받아 술을 마신 후에 웃으며 대답한다.
"박정이라니,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박연은 벙긋벙긋 웃으며 아뢴다.
"꽃은 멀리 바라볼 것이지 가까이할 것은 아니라고, 전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취옥을 바라만 보지 아니하시고 꺾으셨습니다. 취옥에게 정이 이미 곡진하게 드셨던 것을, 날카로운 칼날로 매정하게 끊어버리셨으니 박정한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은 감히 술기운을 빌려 전하께 아룁니다. 신의 말씀이 불쾌하시다면, 죄를 주시옵소서."
전하는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대답을 내린다.
"내가 폭군이 아닌 바에 바른말 하는 사람을 어찌 죄줄 수 있는가? 하하하. 사실 박정한 줄은 나도 알지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 아니 끊을 수가 없었소. 그러기에 오늘까지 내수사에 명해서 취옥에게 시량은 대주라 했소."
박연은 이 빠진 음성으로 걸걸하게 웃으며 아뢴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정은 먹는 것보다 더 소중합니다. 사람이 정을 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취옥에게 정을 주어 병들여 놓으시고 한칼로 애정을 뚝 끊어버리셨으니, 취옥에게 아무리 시량을 많이 대주신다 한들 취옥이 전하를 사모하는 정을 끊기 난감할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꽃같이 바라만 보시고, 꺾지는 마실 것을 그리 하셨습니다. 하하하."
전하는 괴롭게 웃으며 대답한다.
"내, 아직 성인의 경지에 가지 못해서 마음이 정해지지 못했던 탓인가 보오. 처음엔 꽃같이 바라보려 했지만 향기가 하도 포근하게 내 옷자락으로 휘감겨 스치게 되니, 나도 모르는 결에 꺾고 말았구려. 하하하."
"기왕 꽃가지를 꺾으셨으면 시들어질 때까지 덮어두실 것을 그리하셨습니다. 지금, 취옥은 자나깨나 전하를 사모해서 얼굴이 해골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이러한 점도 바로잡으십시오. 이것 역시 전하께서 생각하셔야 할 천지 음양 오행의 소소한 이치올시다."
박연은 취옥의 일뿐 아니라 세자빈 김씨와 봉씨를 내친 일을, 명토는 밝히지 아니했으나 은연중 풍간했다. 전하는 옷깃을 바로잡고 대답한다.
"내가 임금의 자리에 있지 아니했던들, 그러한 박정한 일을 취했을 까닭이 없었을 것이오. 모두 다 만백성의 기강을 다스리는 임금이 된 탓이로구려!"
전하는 한숨을 지며 탄식했다. 난계 박연은 전하의 탄식하는 말씀을 듣자, 무릎을 꿇고 다시 아뢴다.
"전하께서는 오은과 칠음의 협화를 발견하시어 하늘과 땅 사이 화한 기운이 가득하게 일어나는 아악을 창조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기강과 만백성의 풍화를 바로잡기 위하여 사랑하셨던 상침까지 매정하게 내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전하께서 천지간의 화한 기운을 조성시키려는 대원과 노력은 끊어지고 말게 됩니다. 마치 오현금 거문고 줄이 제각기 다섯 소리를 내어 아름다운 화성을 일으키다가 한 줄이 끊어지고 보면, 그 소리는 어찌되겠습니까? 털털거리는 불협화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취옥이 상침이 된 후에 마음이 방자해져서 제 아비에게 가감역 벼슬 한자리를 줍소사 했다면, 전하께서는 온화한 말씀으로 타이르셨다면 상침 취옥은 잘못을 뉘우치고 더욱 전하를 받들었을 것입니다. 전하는 기강을 바로잡는다 하시어 매정하도록 상침까지 봉했던 취옥을 내치셨으니 벌써 천지간의 화기는 사라진 것이올시다. 일부함원에 오월비상이라 하지 아니합니까? 꾸짖으시고 그대로 두셨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임금의 지위에 있는 분은 말씀할 것도 없이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만백성을 어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기를 잃지 않으면서 기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마치 오현금 거문고 다섯 줄이 화음을 내듯이, 전하께서 창조하신 아악의 종과 경이 하늘과 땅 사이에 화평한 기운을 일으키듯이 화한 기상으로 기강을 세우셔야 합니다. 이것이 비로소 왕도 정치요, 만 사람을 지도하시는 원리올시다. 왕도정치는 별것이 아닙니다. 음악에 화음이 나는 것같이 하십시오. 지금 전하께서 나라에 없던 자주적인 독특한 우리 글자를 창제하시려는 글자의 구성도 역시 자연스런 우리말에 해조된 화음과 화성을 구하여 글자를 만드셔야 합니다. 천하 만사는 모두 다 화로써 해결이 됩니다."
박연의 논리가 정연한 말씀을 듣자, 전하는 마음속으로 뉘우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상침 취옥을 내친 일과, 어리석고 우둔하다 해서, 동성애를 한다 해서 세자빈을 둘씩이나 내친 일들을 후회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당시에 그런 일들을 처리할 때 무한한 고민과 번뇌를 가졌으나, 하는 수 없어서 내친 일들이었다. 크나큰 지도자로 앉아서 세 사람 여인에게 원한을 머금게 한 일은 사실이었다. 전하는 주안상을 앞으로 당겼다. 친히 옥잔에 술을 가득 부어 난계 박연에게 주며 말씀한다.
"난계는 아악에도 내 스승이거니와 정치에도 나의 스승이오. 앞으로 명심해서 화한 기운을 잃지 않도록 국가와 백성들을 다스리겠소. 경은 더욱더 나의 팔과 다리가 되어 나의 부족한 점을 일깨워주기 바라오!"
난계 박연은 전하의 너그러운 도량과 진실한 태도에 더욱 감복했다. 꿇어앉아 전하의 내리는 옥술잔을 받고 아뢴다.
"크나큰 꾸지람을 내리실 줄 알았더니 도리어 신의 말씀을 옳게 여기시고 잔을 내리시니 이 감격을 어찌하오리까. 요순 같으신 성주를 모신 신은 크나큰 복이올시다."
전하는 웃으며 다시 박연을 향하여 말씀한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나의 잘못한 것을 후회하오. 앞으로는 만 가지 일에 대하여 화한 기운을 잃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서 처리하겠소. 지금 내가 급하게 서둘러야 할 일은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내 평생에 우리나라의 글을 마련해놓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철석같소. 경과 함께 사람이 입으로 소리를 발하게 되는 원리를 실험해보려 했더니, 경은 낙치가 되어서 소리의 고, 저, 청, 탁을 실증하기 어렵다고 대신 여악을 천거했소. 나는 전비를 뉘우치는 마음이 간절하오. 꽃은 꺾지 아니하고 바라만 보기로 할 테니, 음리에 통한다는 기생을 곧 불러들이는 것이 어떠하오?"
박연은 미소를 띠고 아뢴다.
"전하께서는 너무나 규모를 지키시어 작은 일을 너무나 깊이 생각하십니다. 아름다운 꽃을 대하신 후에 바라보시든지 꺾으시든지 전하의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면 그만입니다. 천지간에 사람의 정이 움직여지는 것을 막을 자가 누구입니까? 아름다우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정이 움직입니다. 꽃을 꺾으시든지 꽃을 바라만 보시든지 하는 일은 모두 다 전하의 자유십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오월 따뜻한 기후에 서리가 내리지 않도록 화한 기운만 잃지 않게 하시면 됩니다. 그리하옵고 오늘밤은 이미 깊었습니다. 소리의 원리를 실험하자면 밤이 지새도록 이야기해도 끝이 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더구나 깊은 밤중에 관습도감 기생을 어전 침실로 불러들이시기에는 번잡할 듯합니다. 밝은 날 소신이 전하의 명을 받들어 입시하겠습니다."
박연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껄껄 웃었다.
"경의 말과 같이 나는 너무나 소심한 성격이로세! 우리 형님 양녕대군과 같이 호탕하지는 못하오. 그러길래 어려운 이 임금 노릇 하는 자리를 사양하지 못하고 말아서, 이 고생을 하지 않는가! 하하하. 기왕 맡아서 하는 일이니, 국가의 장래와 백성들의 생활을 위하여 지성을 다하지 아니할 수 없구려! 그러면 밤이 너무 깊었으니 내일 신시 때 별감을 관습도감으로 내보낼 테니, 경은 여악을 대동하고 들어오도록 하오."
난계 박연은 무릎을 꿇고 아뢴다.
"지금 전하께오서 양녕대군과 전하의 성격을 비교해서 하교하시니, 소신 감히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오늘날 아조로 들어와서 전하와 양녕대군은 나라의 두 성철이십니다. 전하가 아니시면 이 나라를 다스릴 분이 없고, 양녕대군이 아니라면 성대일민의 화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소신은 하교하신 대로 내일 여악을 대동하고 다시 모시는 광영을 받겠습니다. 소신 물러갑니다."
어린 내시는 주안상을 물리고, 박연은 어전에 배를 드리고 물러간다. 전하는 심허하는 노재상과 마음을 털어놓고 회포를 푼 일이 무한 기뻤다. 분합 문밖까지 옥보를 옮겨서 노재상 박연을 전송하면서 또 한 번 당부한다.
"내일은 꼭 말소리를 시험해보기로 합시다."
관습도감 기생들
다음날 전하는 아침 정사를 마친 후에 대전 별감을 불러 분부했다.
"관습도감에 나가서 제조와 여악의 입시를 명해라."
대전 별감은 초립 쓰고 미투리 신고 홍의 자락을 흩날리며 관습도감으로 향했다. 관습도감은 장악원으로 명칭을 고치기 전의 이름이다. 도감 안에는 서울과 시골에서 재색을 겸비한 일등 가는 미녀들을 고르고 뽑아서, 아악에 맞추어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음악의 원리를 강론시키는 한편, 거문고, 가야금, 비파, 양금, 피리, 통소들을 연습시켰다. 뿐만 아니다. 도감에서는 기생들의 인품과 지조를 고상하게 도야시키기 위하여 시와 글씨와 그림으로 매난국죽 사군자를 가르쳤다. 이러므로 관습도감 기생이나 장악원 기생은 보통 노는 계집 따위의 기생이 아니었다. 뭇 닭 속의 봉황이요, 새 중의 학 두루미다. 그녀들은 시, 서, 화, 금, 기에 막히는 일이 없었다. 이쯤 되어 조가 대단했다.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아니했다. 일류 재상인 명공거경들이 불러도, 사사로운 연회 자리에는 몸이 아프다고 핑계하고 놀음에 나가지 아니했다. 돈을 물 쓰듯 하는 장안의 오입쟁이 건달들도 관습도감 기생을 만나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더 어려웠다. 관습도감 기생이 놀이에 불려나가는 곳은 상감이 국가의식의 하나로 조회악을 대궐 안에 열었을 때 아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문무, 무무를 추는 일이 고작이요, 외국 사신을 접대할 때와 나라의 진연 때 대신들 앞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서 시조와 가사를 부르고 옥잔에 술을 부어 권하는 멋진 풍류에 참여할 뿐이다. 이러기에 관습도감 기생들은 안하무인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위정의 삼정승과 이, 호, 예, 병, 형, 공 육조판서 중에도 좀 모자라는 위인이 있으면 코방귀를 뀌며 개떡같이 놀리고 푸대접을 했다.
세종전하가 왕위에 올라 등극하기 이전의 일이다. 관습도감 안에는 영흥 출신 소춘풍이란 기생이 있었다. 노래와 춤은 말할 것 없고, 예쁜 얼굴은 천하절색이란 칭송이 한양 성중에 자자했다. 나이는 꽃봉오리 같은 이십 미만인 십육칠 세였다.
태종은 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송도에서 한양으로 두 번째 수도를 옮겼다. 국가의 기반이 어느 정도 정돈되었다. 태종은 새로 공신들을 봉하고 삼공과 육조판서를 임명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성균관의 임원들을 개편한 후에 태종의 마음은 흐뭇했다. 대궐 안에 큰 잔치를 열었다. 일등공신, 이등공신, 삼등공신, 문무 백관들이 구름 모이듯 모여들었다. 근정전 넓고 넓은 전각 안에는 산해진미의 사찬상이 수파련 화려한 꽃가지와 함께 배설되고, 녹의홍상의 관습도감 절묘한 기생들은 열을 지여 콧대 높은 정국공신들을 맞이했다. 태종이 정국공신들을 위로하는 공신잔치에 주흥을 돕기 위하여 동원된 명기 명창 중에는 묘령의 절색 소춘풍도 끼어 있었다. 임금이 친히 임어한 연회 자리에는 일등공신, 이등공신, 삼등공신들이 품위에 따라 사찬상을 대해 앉았고, 그들 옆에는 수십 명 기생들이 술을 따라 권하고 있었다. 술이 서너 순배 돌았을 때, 태종은 만면에 쾌활한 웃음을 띠고 호탕한 분부를 내렸다.
"오늘같이 좋은 날, 지나친 예의를 지킨다면 자리가 딱딱하고 흥이 깨진다. 양껏 술을 마시면서 권주가를 불러서, 파탈하고 놀게 하라!"
공신들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기생들을 한 명씩 옆에 앉히고 술을 마셨다. 태종은 관습도감 기생 중에도 그중 나이 어리고, 노래와 춤이 절묘한 소춘풍을 불러서, 공신들에게 권주가 시조를 부르며, 술을 따라 올리라 했다. 이때 고려의 변절한 신하로 방석의 난에 착한 사람들을 많이 죽여서 공이 큰 무사 한 사람이 자기가 제일인 체, 수상인 영의정을 제쳐놓고 임금의 자리 옆에 오만하게 앉아서 갖은 추태를 부리면서 거드름을 빼고 있었다. 영리하고 총명하고 절의를 판단할 줄 아는 소춘풍은 무인공신을 아니꼽게 보았다. 소춘풍은 먼저 옥잔에 술을 가득하게 부어 임금께 올렸다. 태종이 술잔을 비운 후에 소춘풍은 다시 옥잔에 술을 퐁퐁 따랐다. 꿇어앉아 잔을 올리려 했다. 영의정이 앉아 있을 윗자리에 거드름을 빼고 철면피가 되어 방자스럽게 앉아 있던 호반 공신이, 자기한테 먼저 술을 주는 줄 알고 손을 벌려 내밀었다. 소춘풍은 못 본 체하고 문관 수상한테 공손히 잔을 올리며 시조를 낭랑하게 읊었다.
'당우를 어제 본 듯 한당송을 오늘 본 듯, 통고금 달사리하는 명철사를 어떻다고, 저 설 데 역력히 모르는 무부를 어이 좇으리.'
시조 삼장의 청 좋은 목소리는 요요하게 전각 안에 가득하게 흘렀다. 제자리를 찾아서 앉지 아니하고, 건방지게 수상의 자리에 앉아서 첫 술잔을 받으려고 손을 벌린 호반을 야유해서, 너하고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욕하는 즉흥 시조다. 문관 재상은 빙긋이 웃으며 소춘풍이 올리는 술을 마시고, 만좌한 사람들은 까르르 웃어댔다. 거드름을 빼고 앉았던 호반은 노랫소리를 듣자, 얼굴이 누르락붉으락 변했다. 눈에는 쌍심지에 불을 켜는 듯 활활 불이 붙었다. 표범수염이 빳빳이 일어나 뻗쳤다. 곧 소춘픙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소춘풍은 태연했다. 눈을 내리깔고 옥술잔에 술을 따랐다. 잔대를 들고 목청을 가다듬어 청초한 노래를 다시 불렀다.
'앞의 노래 농이외다. 내 말씀 허물 마소. 문무일체인 줄 나도 잠깐 아옵니다. 두어라, 씩씩한 장군님 아니 좇고 어이리.'
노래가 끝나면서 소춘풍은 성이 나서 씨근거리는 호반한테 눈웃음을 쳤다. 상긋 웃으며 술잔을 올렸다. 소반의 노한 기운은 씻은 듯 부신 듯 스러지고 입은 함박만큼 벌어지면서 잔을 받았다. 소춘풍이 두 번째 시조를 불러서 소반 공신을 떡 주무르듯 한 노랫소리는 만좌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모두들 혀를 홰홰 둘렀다. 태종도 미소해 웃으며 소춘풍의 재치를 마음속으로 칭찬했다. 호반은 '두어라, 씩씩한 장군님 아니 좇고 어이리' 하고 부르는 소춘풍의 노랫소리 한 가락에, 노한 기운은 오뉴월 쬐는 볕에 얼음 녹듯 풀렸다. 호반은 소춘풍의 옥 같은 고운 손을 덥석 쥐었다. 자리 옆에 앉혔다. 지분지분하게 굴었다. 소춘풍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나를 좇겠다고 노래했으니, 오늘 밤에는 내 집으로 와서 천침을 해라!"
소춘풍은 앵두 같은 입술을 벌리고 까르르 웃어댔다.
"왜,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느냐? 속 시원하게 대답을 좀 해보아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호반과 소춘풍에게로 모여들었다. 귀를 기울여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소춘풍은 새침하게 얼굴빛을 고치고, 큰소리로 외친다.
"소춘풍이 비록 기녀외다마는 그래도 관습도감 기생이외다. 동가신 서가신 하는 장군님댁에 가서 동가식 서가숙은 못하겠습니다."
옥구슬을 소반 위에 굴리는 듯 낭랑하게 반박했다. 소춘풍은 고려의 벼슬하던 신하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조선왕조에 신하 노릇 하는 호반 공신을 또 한 번 꼬집어서 욕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소춘풍이 변절한 호반을 은근히 욕하는 소리를 듣자 모두들 얼굴빛이 변했다. 장차 무슨 큰 풍파가 일어날 줄 알았다. 가슴을 죄어 조마조마하면서 하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반은 다시 성이 불끈 났다. 퉁방울 같은 큰 눈이 부리부리 떠졌다. 손이 번쩍 들렸다. 소춘풍의 뺨을 치려는 호반을 바라보고, 쌩긋 웃었다. 이내 청을 높여 시조 한 수를 즉흥으로 또 불렀다.
'제도 큰 나라요, 초도 큰 나라다. 조그마한 등나라는 이들 사이에 끼었으니, 누구를 섬긴들 임금 아니랴, 제도 섬기고 초도 섬기리라.'
소춘풍은 노래로 또 한 번 호반 공신을 농탕쳐 주물렀다. 제와 초를 문관과 무관에 비하고, 소춘풍 자신은 조그마한 등나라에 비해서, 문관도 사랑하고 무관에게도 정을 주겠다는 노래다. 성미가 불덩이같이 치밀어서 소춘풍의 뺨을 후려갈기려던 호반의 손길은 슬며시 내려졌다. 소춘풍은 방싯방싯 웃으며 잔에 가득 술을 부어 호반에게 화해를 올렸다. 호반의 입은 다시 활짝 벌어지면서 소춘풍이 올리는 잔을 받아 마셨다. 큰 풍파가 일어날 줄 알았던 연회자리는 다시 화기 가득한 웃음판으로 변했다. 모두 다 재치 있는 소춘풍의 기지에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춘풍의 노래를 더 한 번 깊이 새겨본다면 작은 나라 등국을 소춘풍 자기한테 비한 것이 아니라, 고려에도 신하 노릇을 하고 이씨 조선에도 몸을 굽혀서 추하게 변절한 소반을 욕한 노래다. 관습도감 기생들은 보통 기생과 다르다. 이같이 견식과 기지가 있고 조가 있었다. 이것이 관습도감 기생의 전통이었다.
관습도감 제조 박연과 여악을 부르라는 어명을 받들고 도감으로 나간 대전 별감은, 초립을 젖혀 쓰고 홍의 자락을 바람에 펄펄 흩날리며, 도감문 안으로 들어섰다. 도감 안에는 아래채, 위채 방과 마루마다 노랑 저고리, 붉은 치마, 분홍 저고리, 남치맛자락의 아리따운 명기, 명창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다. 한편에서는 거문고를 타면서 시조와 가사를 노래했다. 한편에서는 장구와 북을 치며, 검무, 승무, 전모란 춤이 자지러졌고, 또 한편 누마루에서는 매화, 난초, 국화, 풍죽의 사군자와 글씨를 그리고 쓰고 있었다. 대전 별감도 오입쟁이였다. 만자천홍인 꽃밭 속에 들어서니 신명이 났다.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려졌다. 노랫소리에 취하고, 춤 장단에 멋이 들었다. 아무리 오입판에 드나들던 오입쟁이라 하나, 관습도감 안에 들어와 선녀 같은 일류기생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흥이 났다. 콧노래를 불렀다. 천방지축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곳에도 기웃거리고 저곳에도 고개를 기웃했다. 여악들의 아름다운 얼굴과 묘한 기예에 마음이 흔들렸다. 취한 듯 넋을 잃고 바라보며 다녔다. 꽃밭 속에 도취된 젊은 대전 별감은 자기 자신이 무슨 사명을 띠고 여기까지 왔는지를 돌연 잊어버렸다. 마치 범나비가 만 떨기 꽃밭 속에 들어 넋을 잃고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도감을 사찰하는 감찰기생이 멀리서 바라보니, 홍의 입은 별감 복색으로 차린 한 자가 도감 안으로 들어왔는데, 아무러한 연통도 없이 어깨춤을 으쓱거려 추면서 이곳저곳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기웃거리며 다녔다. 복색은 비록 별감 복색이지만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감찰기생은 가만둘 수 없었다. 곧 제조청으로 올라갔다.
"대감께 아뢰오. 초립 쓰고 홍의 입은 별감 복색으로 꾸민 자가 아까부터 도감 안으로 들어와서 기생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어깨춤을 추면서 돌아다닙니다. 해괴망측하옵니다."
난계 박연은 홍의 입은 별감 같은 자가 도감 안으로 들어왔다는 감찰시댕의 고하는 말을 듣자, 어젯밤에 전하와 약속한 일이 생각났다. 필시 대전 별감이 나온 듯한데, 거래는 아니 드리고 기생들한테 넋을 잃고 이곳저곳으로 기웃거린다 하니 괘씸하게 생각했다. 제조 박연은 악정을 불렀다.
"밖에서 홍의 입은 자가 연통 없이 들어와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방을 미친놈마냥 기웃거린다 하니 빨리 잡아들여라."
악정이 악공들을 거느리고 대청 앞으로 나가보니, 과연 홍의 입은 젊은 별감 한 자가 넋을 잃고 기웃거리고 있었다. 악공들은 우르르 달려들었다. 홍의 입은 별감의 멱살을 덥석 쥐고 뺨을 후려갈겼다. 넋을 잃고 기생들의 노래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별감은 눈에 불이 번쩍 났다.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 악공들의 거센 손길은 또 한번 비호처럼 별감의 뺨을 후려갈겼다. 별감은 급했다.
"이놈들아, 나는 어명을 받들고 나온 대전 별감이다."
큰소리로 외쳤다. 악공들은 별감이 놈자를 붙여서, 휘뚜루 욕하는 소리를 듣자, 일제히 분이 터졌다.
"이놈아, 별감이면 천하의 제일강산이냐! 네가 이놈, 이곳이 어딘줄 아느냐! 삼패나 더벅머리들이 모인 삼류, 사류의 기생방인 줄 아느냐? 상감마마께서 우리 제조 대감과 함께 아악을 만드시어 관장케하신 관습도감이다. 누구한테다가 놈자를 붙이느냐?"
악공들은 또 한 번 별감의 뺨을 후려갈기고, 지르르 끌어 제조청으로 올랐다. 곳곳마다, 공부하던 기생들은 노래와 춤을 그쳤다. 크나큰 구경거리가 난 것이다. 끌려가는 별감의 뒤를 따라 구름 뫼듯 제조청 뜰 앞으로 모여들었다. 악공들은 젊은 별감을 제조 대감이 앉아 있는 제조청 뜰 앞에 꿇려 놓았다. 제조 대감 박연의 좌우 옆에는 감찰기생과 제조 대감의 시중을 드는 어린 기생 비오리가 있었다. 제조 대감 박연은 뜰 아래 꿇려 앉힌 홍의 입은 별감을 향해 불호령을 내린다.
"너는 어떠한 자인데 관습도감 안에 함부로 들어와서 방약무인하게 공부하는 여악들의 방을 미친놈같이 기웃거리고 돌아다녔느냐?"
대전 별감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공하옵기 그지없습니다. 소인은 대전 별감이올시다."
"대전 별감야? 대전 별감이 왜 나왔느냐?"
박연은 어젯밤에 전하께서 여악과 함께 부르신다는 약속을 받았다. 별감이 그 일로 나온 것을 속으로 짐작하면서도 짐짓 물었다.
"어명을 받고 나왔습니다."
"어명, 무슨 어명을 받들고 나왔느냐?"
제조 대감의 음성은 엄숙했다.
"대감께 여악 한 명을 데리고 빨리 듭시라는 분부를 받들고 나왔습니다."
제조 대감의 얼굴빛은 주톳빛으로 변했다. 추상같은 호령을 내린다.
"저런 방자한 놈이 있나! 네 어찌 왕명을 받들고 나와서 진시 나한테 전달하지 아니하고 해가 반나절이 넘도록 공부하는 아이들 방을 기웃거리고 돌아다녔느냐?"
"소인 그저 입이 있사와도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한평생 관습도감 구경을 못 했다가 처음 보는 일이오라 꽃 같은 기생들의 자태에 취해 젊은 놈이 잠시 정신을 잃어서 아뢰는 일이지만되었사오니, 그저 넓으신 통촉이 계시기를 바라옵니다."
제조 대감은 더 한 번 호통을 내린다.
"이놈, 상감께서는 지금 나의 입궐하기를 기다리고 계실 텐데, 네가 이같이 왕명을 소홀히 했으니 죄당만사다! 상감께 아뢰어 큰 벌을 받게 하리라!"
상감께 아뢰겠다는 제조 대감의 엄포 소리를 듣자, 젊은 별감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렸다. 벌벌 떨었다. 손을 들어 싹싹 빌었다. 울면서 고했다.
"대감께 아룁니다. 그저 소인의 목숨을 살려줍시오. 소인의 집에는 팔십 넘은 늙은 어미가 있습니다. 소인이 죽으면, 팔십 노모는 굶어 죽습니다. 그저 상감께 아뢰지 말아줍시오. 만약 상감께 아뢰시면 소인은 죽게 됩니다."
애걸해 비는 젊은 별감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동기비오리
어깨를 으쓱거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기생들의 처소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던 대전 별감이, 제조 대감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애걸해 비는 모양을 바라보자, 뜰 앞에 모여서 구경하던 기생들은 어릿광대 같은 별감의 행동이 가소로웠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모두들 킬킬거려 웃었다. 제조 대감 박연도 속으로 웃었다. 큰 벌은 주고 싶지 아니했다. 그러나 엄포로 또다시 호령을 내린다.
"저놈의 볼기를 까고 곤장 백 도를 때려서 톡톡히 버릇을 가르칠 것이로되, 특별히 생각해서 가벼운 벌을 주기로 한다. 악공들은 저놈에게 호랑 감투를 씌워서 단단히 망신을 당하게 해라!"
호랑 감투란 남자의 바지춤을 훌떡 벗겨서 상체와 얼굴이며 머리통을 뒤집어씌우고, 볼기 판과 아랫도리를 반나체로 한후에, 거꾸로 무동을 태워 두 다리를 하늘로 뻗치게 해서 욕을 뵈는 벌이다. 악공들도 웃었다. 우르르 달려들었다. 별감의 홍의를 벗기고 바지 허리춤을 잡았다. 별감은 아니 벗으려고 발버둥질을 치고 앙탈을 했다. 뜰 아래 가득히 모여서 구경을 하던 기생들은 낄낄거려 웃었다. 이때 제조를 모시고 섰던 나이 어린 기생 비오리는 총명한 눈을 들어 제조께 아뢴다.
"소녀, 감히 대감께 아룁니다. 여자들이 보는 바에 호랑 감투를 씌우는 것은 불미할 듯합니다. 헹가래를 쳐서 벌을 주시옵소서."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대전 별감에게 호랑 감투를 씌워서 벌을 주는 것은 불미한 일이니, 헹가래를 쳐서 벌을 주시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고 제조 대감께 아뢴 비오리는 일찍 관습도감 기생으로 이름 높던 나라의 명기 소춘풍의 딸이었다. 소춘풍은 나이 많아서 퇴사하고 딸 비오리가 관습도감에 적을 두고 있었다. 비오리는 총명 영리하고 지조 있는 어미 소춘풍의 재질을 이어받아서 소명하고 절묘했다. 제조 박연은 비오리의 재질을 사랑했다. 일찍이 아악을 창제할 때, 여악 취옥을 대궐로 들여보내서 전하의 연구를 도와드리게 한 후에, 취옥의 뒤를 이을 만한 아이들을 물색했다. 제조는 수많은 관습도감의 어린 기생 중에 소춘풍의 딸 비오리의 재질을 인정했다. 관습도감 안에 제일가는 여악을 만들기 위하여 항상 좌우게 두고 음과 악의 원리를 가르치고 글씨와 매, 난, 국, 죽 사군자를 연습시켰다. 비오리는 한 가지를 가르치면 두 가지, 세 가지의 음리에 정통했다. 제조는 항상 비오리를 기특하게 생각했다. 지난밤에 전하께서 말소리가 음양과 오행에서 나오는 것을 실험해보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조는 여악을 대동해서 실험해드리겠다고 아뢰었다. 제조는 마음속으로 소리의 원리를 짐작하는 비오리를 전하께 천거하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제조 박연은 대전 별감에게 호랑 감투를 씌워 벌을 주지 말고, 헹가래를 쳐서 벌을 주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듣자,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악공들에게 다시 명을 내린다.
"비오리의 말을 들으니 그럴듯하다. 여자들이 보고 있는 관습도감 안에서 별감의 볼기 판을 까 제치고 호랑 감투를 씌워서 벌을 주는 일은 너무도 지나치다. 헹가래를 쳐서 벌을 주게 하라!"
악공들은 호랑 감투를 아니 쓰려고 앙탈하고 엎드린 별감 앞으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두 다리와 두 손을 힘차게 잡았다. 사지를 번쩍 들어 공중으로 던졌다. 까맣게 솟구쳤던 별감의 몸은 땅을 향해 떨어졌다. 찰나였다. 악공들은 선뜻 몸을 받아서 또다시 허공으로 던졌다. 도감 기생들은 손뼉들을 치며 깔깔거려 웃어댔다. 별감의 몸은 올랐다가 떨어지고, 떨어졌다가 솟구쳤다. 열 번 스무 번을 되풀이했다. 별감은 현기를 느꼈다. 어지러워서 배겨날 수가 없었다. 연해 살려 달라고 고함을 쳤다. 줄을 지어 구경하던 도감 기생들은 허리가 부러져라 하고 호호거려 웃었다. 벌은 벌이지만 풍류스런 벌이었다. 쉰 번이 넘었다. 헹가래는 그쳤다. 마당 위에 던져진 별감은 얼이 빠지고 어지러워서 한동안 정신을 찰리지 못했다. 청 위에 앉아 있는 제조 대감은 분부를 내렸다.
"냉수를 한 대접 갖다가 먹여라!"
악공들은 얼빠진 별감에게 냉수를 먹였다. 별감은 냉수를 들이켠 후에 정신을 차렸다. 뜰 앞에 던져진 홍의를 주워 입었다. 청 위에서는 제조의 꾸지람 소리가 다시 떨어졌다.
"다시는 어명을 받들고 무엄한 짓을 아니할 테냐?"
"소인이 어찌 감히 다시야 그런 짓을 하오리까. 다음부터는 명심하겠습니다."
별감은 백 번 천 번 굽실거렸다. 제조 박연은 집사에게 분부를 내린다.
"곧, 자비를 놓아라. 별감이 지만한 탓으로 상감께서 매우 기다리시겠다. 그리고 판교도 한 채 준비해라."
집사는 부랴사랴 제조의 자비와 판교 한 채를 대령했다. 제조는 비오리에게 명을 내린다.
"내가 예궐할 때, 너를 데리고 갈 테다. 빨리 옷을 갈아입어라!"
비오리는 놀랐다. 별빛 같은 총명한 눈을 들어 제조 대감을 바라보고 묻는다.
"쇤네가 대감을 모시고 대궐로 들어갑니까? 어찌 된 일이오니까?"
"들어가보면 알게 된다. 어서 몸단장을 차려라."
비오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협실로 들어가 분홍 저고리에 남치마를 둘러 정장을 차리고 나섰다. 관습도감 기생들은 부러워하는 눈으로 비오리를 바라보았다. 제조 대감은 은안백마에 오르고, 동기 비오리는 장옷 쓰고 판교를 탔다. 홍의 입은 대전 별감은 호랑 감투를 아니 쓰게 한 비오리가 크게 고마웠다. 판교채를 붙잡고 뒤를 따랐다.
"자네 덕에 내가 호랑 감투를 쓰게 되었네. 진정 고마우이-. 구름같이 둘러싼 기생 총중에 벌거벗은 알몸이 되었던들 어쩔 뻔했나. 참말 고마우이."
별감은 오입쟁이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판교채를 붙들고 달음질을 치면서 비오리를 쳐다보며 넋두리를 했다. 비오리는 새침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꾸를 아니했다. 별감은 솔직하고도 겁이 많은 위인이었다.
"혹시 상감마마 앞에서 제조 대감이, 내린 어명을 늦게 전했다고 아뢰시거든, 임자가 잘 말씀을 해서 목이 달아나지 않도록 해주소!"
별감은 판교채를 잡고 허둥지둥 따라가느라고 헐떡이며 지껄였다. 비오리는 여전히 새침하고 대답이 없다. 판교 위에 새침하게 앉아서 대답이 없는 비오리의 쌀쌀한 태도를 보자, 별감은 속이 탔다.
"아까 관습도감에서 제조 대감께도 말씀을 드렸네마는, 별감 구실이 떨어지면 팔십 노모와 어린 자식들이 모두 다 굶어 죽게 되네. 어찌하면 좋은가. 잘 말씀을 드려주게."
비오리는 여전히 새침하고 대답이 없다. 은안백마에 높이 앉아 앞에 가던 제조 대감의 귀에, 안타깝게 애원하는 별감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렸다. 제조 대감은 빙긋이 웃었다. 학문이 깊고 악에 정통해서 세상만사에 경험이 많을 뿐 아니라, 관습도감을 어거하는 도량 넓은 풍류 재상이었다. 그러기에 꽃밭 속에 취해서 상감이 부르시는 분부를 태만하게 거행한 젊은 별감에게 벌을 주는데 곤장을 때리지 아니하고 호랑 감투의 멋진 벌을 씌우려 했고, 또다시 비오리의 청을 들어서 헹가래로 벌을 마감했던 대감이다. 박연은 마상에서 고개를 돌렸다. 판교채를 잡고 천방지축 쫓아오면서 비오리에게 애원하는 별감에게 짐짓 호통을 내린다.
"이놈아, 길가에서 지분지분하게 무슨 놈의 넋두리를 하느냐. 주둥이를 닥치지 못하겠느냐."
별감은 혼뜨검이 났다. 바람에 젖혀진 초립을 바로잡고 고개를 움씰하며 뒤를 따랐다. 박연과 비오리는 궐문 밖에서 내려 걸어서 영추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안에서는 내관이 초조하게 박연과 여악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연의 입궐하는 것을 보자, 내관은 반가웠다.
"전하께서 무척 기다리고 계십니다. '별감이 모시러 나간 지 오랜데 약속한 시각이 훨씬 지나도록 아니 들어오시니 웬일이냐?' 하시고, 소인더러 문 앞에 나가보라 하시어 여태껏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들어가보십쇼."
내관은 독특한 내시 목소리로 제조 대감을 반갑게 맞아 들었다.
"그런 일이 조금 있어서 늦었네."
제조 대감 박연은 소리를 드높여 껄껄 웃고, 뒤따르는 홍의별감은 얼굴이 붉어지며 어찌할지를 몰랐다. 박연과 비오리는 내간의 인도로 녹음이 우거진 넓고 넓은 대궐 안뜰을 지나 박석을 밟고 강녕전 편전으로 올랐다. 전하는 배알을 드리는 박연을 바라보시며 만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말씀을 내린다.
"생각하는 사람을 기다리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더니 과연 경을 기다리는 마음, 간감하구려. 어제 경은 신시 때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어찌해서 이같이 더디었소? 별감이 혹시 태만하게 거행했습디까?"
"황공무지하오이다. 그러한 일이 잠시 있사와 입시가 늦었사옵니다. 황공무지합니다. 나중에 아뢰겠습니다."
박연은 얼굴에 웃음을 짓고 여유 있게 아뢰었다. 이때 전상에는 감히 오르지 못하고 편전 난간 밖에 대령해 섰던 대전 별감은 전하와 제조 대감의 대화를 듣자, 간이 콩알만큼 오그라졌다. 얼굴이 백지장이 되어 뒷말씀이 어찌 내리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박연은 별감의 허물을 덮어주기 위하여 전하의 관심을 비오리에게 돌리려 했다.
"상감마마께 알현해라."
제조 박연 대감의 뒤에 섰던 비오리가 정면으로 나타났다. 전하를 향하여 날씬한 자세로 큰절을 네 번 올린다. 백어 같은 흰 손길을 마주 모아 반듯한 이맛전에 살며시 대고 절을 올리는 모습은, 마치 백학이 깃을 거두고 조용히 춤을 추는 듯, 봉황이 날개를 펴고 벽오동 열매를 어르는 듯했다. 앉았다가 일어서고 무릎을 굽혔다가 다시 펴서 절을 올리는 자세는 풍악 소리가 없건만, 절주에 맞아 들었다. 몸가짐이 어찌나 곱고 단정한지, 일어났다 앉았다 할 때마다 '사각사각' 남치맛자락이 움직이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이 아이가 경이 어제 말한, 목소리의 오행을 넉넉히 흉내 낸다는 여악인가?"
"네, 그러하오이다."
박연은 몸을 굽혀 대답했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제법 교양을 받았구나.' 생각했다.
"네가 나한테 들어오느라고 몸맵시를 오랫동안 다스린 때문 약속한 시각을 어기었구나!"
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짓고 비오리의 청초한 모습을 바라보며 말씀했다. 비오리는 고개를 다소곳 숙인 채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아니하고 대답 없이 초연히 섰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한 폭의 청초한 미녀도가 벽에 걸린 듯했다. 제조 박연은 시각을 어긴 허물이 비오리한테로 돌아가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별감이 태만하게 거행한 일을 아니 아뢸 수 없었다. 얼굴에 웃음을 띠고 아뢴다.
"전하께오서 지재지삼 늦은 까닭을 하문하시니 황공무지하오이다. 신하된 도리에 어찌 감히 인군을 속이오리까. 약속하온 시간을 어긴 일은 저 아이가 몸치장을 오래 한 탓이 아니올시다. 잠시 우스꽝스런 일이 있어서 지체되었습니다."
이때 전각 난간 앞에 붙어 서서 방안의 말씀을 엿듣고 있던 별감은 제조 대감의 아뢰는 소리를 듣자, '이제는 죽었고나.' 하고 낙심천만했다. 바싹 창 앞에 귀를 모아 엿듣고 있었다.
"무슨 우스꽝스런 일이 있었더란 말인가?"
전하의 묻는 말씀이 떨어졌다. 제조는 될 수 있는 대로 별감을 두둔하고 싶었다. 부드러운 말씨고 아뢴다.
"어명을 받들고 나온 젊은 별감은 한 번도 관습도감을 구경을 못한 모양이올시다. 근엄하온 어전에서만 거행을 하다가 별안간 삼현 육각 소리가 흥청거리고, 노래와 춤이 자지러진 꽃밭 속으로 발길을 들여놓고 보니, 그만 얼이 빠지고 넋을 잃었습니다. 기방마다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깜빡 부르시는 어명을 잊어버리고 지체해서 전달한 까닭이올시다."
제조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는 크게 노했다.
"저런 고얀 놈이 있나. 일각이 삼추같이 기다리는 내 마음을 모르고 색에 얼이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늦게 전갈을 전했다 하니 말이 되느냐."
전하는 이내 소리를 높여 내시를 불렀다.
"내시 거기 있느냐?"
복도 마루에서 내시가 급히 들어왔다.
"관습도감에 나갔던 별감놈을 의금부에 내려서 치죄하고 목을 베도록 하라!"
이때 창 밖 난간 앞에서 엿듣고 섰던 젊은 별감은 얼굴이 흙빛으로 질렸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제조 박연이 급히 아뢴다.
"별감의 태만하고 무엄한 일에 대해서는, 황공하오나 소신이 이미 관습도감 안에서 엄하게 치죄했습니다. 톡톡하게 버릇을 가르쳐놓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못 들으신 체하시고, 진노를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창밖에서 엿듣고 있던 별감은 고마운 제조 대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전하의 말씀이 어찌 내릴는지 몰랐다.
"어떻게 치죄를 해서 톡톡하게 버릇을 가르쳤단 말이오?"
전하의 묻는 말씀이 또 떨어졌다.
"전하의 어명을 늦게 전하온 일은 큰 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마음이 있어서 한 짓이 아니옵고, 젊은 놈이 난생 처음으로 천하절색인 기생들이 구름 뫼듯 해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관습도감 안으로 발길을 들여놨으니 얼이 빠지고 넋을 잃었을 것은 정한 이치올시다. 소신도 별감놈같이 나이 젊었던들 관습도감 제조 노릇은 못 했을 것입니다. 흐흐흐."
전하의 격한 노기를 풀어드리기 위하여 제조는 이같이 너스레를 놓아 느긋하게 말씀을 아뢰었다. '소신도 별감 놈같이 나이 젊었던들 관습도감 제조 노릇은 못 했을 것입니다.' 하고 아뢰는 노재상 박연의 말씀을 듣자, 전하도 용안에 빙긋 웃음을 띠었다. 별감은 더 한층 창가에 귀를 댔다. 전하의 진노한 기색은 약간 풀린 듯했다.
"제조가 관습도감 안에서 치죄해서 톡톡하게 버릇을 가르쳤다는 일을 어서 말해보오."
제조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아뢴다.
"처음 소신의 생각에는, 곤장 백 대를 때려서 치죄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화한 기운을 조성하기 위하여 설치하신 아악의 본고장에서 볼기를 때려서 피를 흘리는 일은 너무나 살풍경한 일일뿐더러, 젊은 놈이 잠시 꽃밭 속에 들었다가 넋을 잃고 얼이 빠져서 약간 태만한 행동을 범한 것을 악형으로 다스릴 수 없사와, 수많은 여악들 앞에서 호랑 감투를 씌워 톡톡히 욕을 뵈려 했습니다."
'호랑 감투' 소리를 들으시자, 전하도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노기가 좀 더 풀렸다.
"호랑 감투를 씌우려 했다? 과연 풍류 재상의 멋진 벌이로구려!"
전하는 혼자 말씀을 했다. 제조가 다시 아뢴다.
"악공들에게 영을 내려서 별감의 바지춤을 뒤집어 벗기려 할 때, 이 아이가 여자들 앞에서 호랑 감투를 씌우는 일은 지조를 제일로 삼는 관습도감에서 할 짓이 아니라고 간해서, 헹가래를 쳐서 벌을 주어 버릇을 가르쳤습니다."
제조는 손을 들어 옆에 모시어 섰는 비오리를 가리켰다. 전하는 말씀을 듣자, 고개를 다소곳 숙이고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서 있는 비오리를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전하는 웃음을 거두고 말씀한다.
"관습도감 안에서 벌을 준 것은 경이 준 것이거니와 나도 벌을 주어야 하겠소. 그대로 둘 수는 없소! 저놈을 의금부로 넘겨라!"
대기하고 섰는 내시에게 다시 분부를 내린다. 박연은 급히 다시 아뢴다.
"전하께서는 즉위 초에 봄철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사춘기에 있는 궁녀들을 내보내시어 자유롭게 시집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모든 백성들은 전하의 크신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습니다. 실로 천지의 조화를 아시는 왕도정치올시다. 이번에 별감이 범한 일은 꽃을 본 나비가 너울너울 꽃밭 속으로 춤을 추고 다니듯 악의 없이 일어난 젊은 남자의 본연의 짓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제조의 간곡하게 다시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 속에 빠졌다가 한 말씀을 내린다.
"경은 관습도감에서 지체한 벌을 주었거니와, 대전 별감은 내 사람이오. 나도 따로 벌을 주어야 하겠소."
전하의 용안은 다시 엄숙했다. 별감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가장 위태로운 고비다. 난간 밖에서 엿듣고 섰던 대전 별감의 얼굴은 다시 창백하게 질렸다. 이때 홀연 제조 등 뒤에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조용히 서 있던 비오리가 전하께 국궁하고 아뢴다.
"소녀, 방자함을 무릅쓰고 감히 어전에 아룁니다. 전하께오서는 호생지덕을 내려주옵소서. 별감의 어미는 팔십이라 합니다. 만약 별감을 옥에 내리신다면 팔십 노모가 굶어 죽는다 하옵니다."
비오리의 아뢰는 말씀은 너무나 당돌했다. 전하는 봉안을 높이 들어 비오리를 바라보시며 엄숙한 어조로 말씀한다.
"네가 어찌 별감의 팔십 노모가 있는 줄 아느냐?"
옆에 있던 제조 박연이 대신 아뢴다.
"별감의 팔십 노모가 있다는 것은 별감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신이 처음 별감의 태만한 일을 치죄할 때 전하께 사실대로 아뢰겠다 했더니, 별감은 전하께 벌을 받아 죽게 되면 늙은 어미와 어린 자식들이 모두 다 굶어 죽게 된다고 애걸복걸 비는 말을 저 애가 옆에서 듣고 측은하게 생각해서 아뢴 듯합니다."
전하는 대기하고 서 있는 내시를 향하여 하문한다.
"별감이 늙은 어미를 봉양하고 있느냐?"
"네, 팔십 노모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많다는 소리를 전부터 소인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전하는 비로소 노기가 활짝 풀렸다. 내시에게 분부한다.
"별감을 금부로 내려서 국문하려던 일은 중지해라. 제조 대감이 이미 도감 안에서 벌을 주었다 하니 나는 다시 더 묻지 않기로 하겠다. 이후에 그러한 일이 없도록 네가 타일러 두어라."
전각 박에서 벌벌 떨면서 귀를 기울여 하회를 엿듣고 있던 별감은 전하의 부드러운 분부가 내리는 옥음을 듣자, 비로소 길게 한숨을 짓고 발자취를 죽여 별감청으로 물러갔다. 마음속으로 관습도감 제조 박연과 비오리를 재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하늘같이 넓은 전하의 은택을 다시 한번 더 느꼈다. 내관은 어전에서 물러나 별감청으로 향했다. 홍의 입은 별감과 구군복으로 차린 무감들이 수십 명 둘러앉아 있었다. 이때 젊은 별감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별감과 무감 틈에 끼여 노닥거리고 있었다. 별감과 무감들은 내시가 돌연 나타나는 것을 보자 일제히 일어났다.
"지사 대감, 웬 일이십니까?"
내시 중에도 어전 내시는 가자를 주어서 대감 칭호를 받게 했다. 내시는 특이한 목소리로 관습도감에 나갔던 젊은 별감을 불러냈다.
"얘, 이놈아, 너 한턱 단단히 내라. 죽을 뻔한 것을 제조 대감과 도감 기생 덕으로 살아났다. 상감마마께서는 특별히 불문에 부치고 나더러 톡톡히 타이르라 하셨다!"
관습도감에 나갔던 젊은 별감은 손을 모아 내관에게 빌면서 굽실거렸다.
"용서해줍시오. 그저 지사 대감의 덕분도 크십니다. 팔십 노모가 있다고 인정해주셔서, 이같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사옵니다!"
모든 별감들은 까닭을 몰랐다.
"지사 대감, 웬일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모두들 물었다. 내관은 젊은 별감이 어명을 받들고 관습도감에 나갔다가, 도감 기생들한테 얼이 빠지고 넋을 잃어서 어명을 늦게 전한 일이며, 호랑 감투 쓰는 벌을 당할 뻔했다가 동기 비오리의 덕택으로 헹가래로 수습된 일과, 상감께서 아시고 의금부로 최죄하시려던 것을 제조 대감과 비오리의 덕으로 목숨이 부지된 일을 일장 설파했다. 모든 별감들은 깔깔거려 웃어댔다.
"야! 이놈, 이제는 우리들이 호랑 감투를 씌워주어야 하겠다!"
모든 별감들은 젊은 별감의 바지춤을 훌떡 벗겼다. 호랑 감투를 씌우고 껄껄거려 웃었다. 화한 기운이 대궐 안에 가득했다. 한편, 세종전하는 내간이 나간 후에 비오리를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네 이름을 무어라 하느냐?"
"비오리라 합니다."
총명한 눈을 들어 넌지시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보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비오리?"
순수한 우리말로 된 이름이었다. 전하는 기이하게 생각했다. 신라통일 이후 당나라 문화가 휩쓸려 들어와서 산 이름, 강 이름, 마을 이름, 사람의 이름까지 모두 다 한문 글자로 바꾸어놓았다. 이래야만 문명한 민족이요, 행세하는 족속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심지어 성을 밝히지 않는 여악과 기생들까지도 한문으로 이름을 지었다. 매화니, 연홍이니, 국향이니 해서 멋진 풍류의 이름이라고 자랑했다. 겨레의 자주성을 잃은 지나친 모화다. 이러한 반면에 지지하천인 무식한 사람들은 아직도 돌쇠, 장돌이, 꺽정이, 말불이, 쇠불이 등의 우리나라 고유한 마로 복된 이름을 지어서 부르고 있었다. 자기 나라의 말로 알기 쉽게 지어서 불렀던 옛 시대의 이름이 얼마나 좋았던가. 전하는 천여 년 동안 흘러 내려온 이 옳지 못한 풍습을 하루아침에 고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이 모든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독특한 우리들을 만들려고 구상하는 이때다. 순수한 우리말로 이름을 지은 비오리를 대해보자, 전하는 신의 계시를 받는 듯 정신이 쇄락했다. 신명이 났다.
"누가 비오리라고 네 이름을 지어줬느냐?"
"제가 지었습니다."
"네가 지었어! 왜 다른 아이들처럼 자운선이니 정향이니 하는 따위의 이름을 짓지 아니하고 순수한 우리말로 비오리라고 지었느냐?"
비오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뢴다.
"첫째로 비오리는 알기 쉬운 우리말로 음향이 아름답습니다. 둘째로 새의 깃이 찬란해서 다섯 가지 조화된 화사한 빛깔을 가졌습니다. 셋째로 비오리의 짝을 부르는 소리는 청아하고 매력이 있습니다. 어미가 처음에 비연이라고 지어주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해서 제 나름대로 비오리라고 했습니다."
전하는 나직나직 아뢰는 비오리의 말을 듣자, 귀엽고 신통하게 생각했다.
"비연이? 비연이도 좋구나. 날씬하게 날아다니는 물찬 제비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예뻐 보이라고 지어준 이름이로구나!"
비오리는 다시 웃음을 머금고 아뢴다.
"상감마마 같으신 글 잘 하시는 분이나 날비자, 제비연자의 뜻을 아시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시지만 글 못배운 사람들이 비연이라 하면, 누가 물찬 제비같이 귀엽다고 생각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하와 저는 남이 부르기 좋고 알기 쉬운 비오리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전하는 더한층 비오리를 귀엽게 생각했다.
"도대체 네 어미는 누구냐?"
"소춘풍이올시다."
전하는 놀랐다.
"소춘풍? 네 어미가 영흥 명기로 관습도감에 있던 바로 그 소춘풍이란 말이냐?"
"네, 그러합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전하는 대군으로 있을 때, 공신잔치에서 명기 소춘풍이 변절한 무관재상을 즉흥 시조를 불러서 떡 주무르듯 한 일을 잘 알고 있는 때문이다. 전하는 소춘풍의 딸이란 말을 듣자 두 번 세 번 감탄했다.
"역시 똑똑한 어미가 똑똑한 딸을 두었구나! 네 어미는 지금도 관습도감에 출사를 하느냐?"
옆에 있던 제조 박연이 아뢴다.
"명기 소춘풍은 이제 늙어서 퇴기가 되어 박에 나가 있습니다. 대신 딸을 들여보냈사온데, 바로 이 비오리올시다. 외모가 천생여질일 뿐 아니라 머리도 좋아서 총명 영리하와 한 가지를 가르치면 두 가지를 터득합니다. 기특하게 생각해서 신이 항상 좌우에 두고 소리의 음향과 오행 원리를 지도했습니다. 전하께오서 어제 신에게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금, 목, 수, 화, 토 오행에 연결되는 이치를 실험해보라 하셨습니다. 신은 낙치가 되어 소리의 고저청탁이 명료하지 못하므로 여악을 대동해서 실험하겠다고 아뢰었습니다. 그리하와 오늘 부르시는 어명을 받잡고 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알현시킨 것입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비오리를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내가 네 어미 소춘풍은 대해본 일이 없다마는, 조가 있고 명창이란 말을 익히 들어 알았다. 이제 명기의 딸을 대해 보니 명불허전이다. 어미에 못지않게 소명하구나. 그리고 네 이름을 순전한 우리말로 지은 것을 보니 내 마음이 무한 기쁘다. 제조가 말씀한 대로 소리의 음향이 오행에 관련되는 것을 시험해보려니와 우선 너의 성량을 들어보기로 하자. 마음에 드는 노래를 한 곡 불러보아라."
전하는 먼저 비오리의 목놀림을 시험해보려 했다. 비오리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아뢴다.
"쇤네가 감히 어찌 소리의 이치를 아오리까. 제조 대감께서 발성을 명하시는 대로 항상 따라서 불렀을 뿐이옵니다. 그리하옵고, 마음에 드는 노래 한 곡을 불러보라 하교하셨사오나 창졸간에 얼른 생각이 나지 아니합니다. 상감마마께서 한 곡을 지정해 하명하옵소서."
전하는 홀연 고려가사 '만전춘'에 나오는 비오리의 생각이 났다.
"네 이름이 비오리라 하니 고려가사 '만전춘' 속에 나오는 비오리 한 절을 노래해보아라."
이때 옆에 모시어 있던 제조는 내관에게 장구 한 벌을 청했다. 내관은 궁중에 있는 여악청에 나가서 장구를 들고 들어와 비오리 앞에 놓았다. 비오리는 치마를 휩쓸고 단정히 앉아서 장구채를 잡았다. 장구 박자를 두세 번 울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올하, 올하, 아련 비올하, 여흘란 어데 두고 소에 자라온다.
소, 곧 얼면 여흘도 좋으니 여흘도 좋으니.
박자를 맞추는 장구 소리와 함께 비오리의 목소리는 청청하게 펴졌다. '만전춘' 가사 중의 넷째 절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오색이 영롱한 예쁜 원앙새 비오리에 비해서 유혹하는 노래다. 소에만 살지 말고 겨울이 되어 소가 얼거든 얼음이 얼지 않는 여울로 놀러 오라는 뜻이다. 원래 비오리는 고려가사 '만전춘'에서 암시를 받아서 비오리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올려진 고려가사를 부르는 비오리의 창은 성량과 조율이 아악을 창제한 전하의 높은 안목에 제법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전하는 비오리의 창법이 나이에 비하여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미소를 지어 칭찬하는 말씀을 내린다.
"청이 좋아서 성량이 제법 풍부하고, 가락이 율에 맞는구나. 많이 공부했다."
"황공하오이다. 모두 다 제조 대감과 어미 소춘풍이 지도해주신 덕분이올시다."
"아 참, 그렇구나. 네 어미가 명창으로 장안 천지를 한동안 휩쓸었으니 어미한테 배운 덕도 많았을 것이다. 잘한다는 마음을 먹지 말고 더욱 음률에 힘을 써서 공부해라."
"황공무지하오이다."
비오리는 아미를 숙이고 몸을 굽혀 공손히 아뢰었다. 전하는 더 한 번 비오리의 청을 들어보고 싶었다. 귀여워하는 눈초리로 웃음을 용안에 가득 띠고 비오리에게 말씀을 내린다.
"네 이름이 비오리라 하기에 고려가사 '만전춘' 넷째 절, 비오리 가사를 노래해보라고 했던 것이다. 이제 나의 청 좋은 노랫소리를 들으니 '만전춘' 가사 전부를 한번 듣고 싶다. 첫 절서부터 끝 절까지 불러보아라."
비오리는 생긋 웃으며 아뢴다.
"지금 이 자리, 존엄한 편전 안에서는 감히 '만전춘' 가사를 전부 노래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찌해서?"
"쇤네가 지엄한 편전에서 전하를 모시고 이 노래를 부른다면, 단번에 이 소문이 헌관과 간관의 위로 들어가서, 상소가 빗발치듯 들어와서 전하를 괴롭게 할 것입니다."
비오리의 조용히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어린 기생이 여기까지 생각을 했는가? 무한 총명하다고 생각했다. 짐짓 묻는다.
"네가 이 노래 전부를 내 앞에서 부른다면 대간들이 상소를 올려서 왜 나를 괴롭게 한단 말이냐?"
"어미 소춘풍한테 말을 들어서 그같이 아뢴 것이올시다. 인간의 정서를 모르는 완고한 조정 신하들이 공연히 지나치게 허식을 지켜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기가 십상팔구라 합니다. 그리해서 상감마마를 모신 앞에서는 '만전춘' 온 가사를 부르는 것은 삼가라고 했습니다."
이때 제조 박연은 옆에서 웃음을 띠고 전하를 바라뵈었다. 전하도 용안에 웃음이 떠돌았다. 짐짓 다시 비오리에게 묻는다.
"어찌해서 가사 전부를 내 앞에서 불러서는 아니 된다 하더냐?"
"'만전춘'은 고려 때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부르던 연가라 합니다. 이 노래가 하도 좋으니 대궐 안에 계신 고려 임금 충혜왕도 연회 때가 되면 기생들을 불러서 항상 즐겁게 들었다 합니다. 그리하여 노래 이름을 '만전춘'-곧 전각에 가득한 봄빛이라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아조에 들어와서는 완고한 유신들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 음탕한 노래라 해서 대궐 안에서 부르지 않는 것이 옳다고 태종대왕께 아뢴 일이 있다 합니다."
전하는 아버님 되시는 태종이 조정 신하들과 잔치를 하실 때 기생들이 '만전춘' 노래를 '정과정'과 함께 부르니 맹사성, 허조, 변계량 등 대신들이 좋지 않다는 말씀을 아뢴 일이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비오리의 총명 영리한 것을 더욱 기특하게 생각했다. 당신도 아악을 처음 창제할 무렵, 십이율을 시험하기 위하여 내친 상침 취옥에게 고금의 가사를 심정하면서 '만전춘' 곡을 들어본 일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음란한 노래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전하는 백성들이 사심 없는 순정에서 우러나 부르는 이 무구한 가사를 강제로 못 부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역시 민속의 풍화를 강압적으로 억눌러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했다. 마치 논두렁에 물고랑을 터주듯, 순하게 백성을 다스리자는 슬기로운 지도자의 태도였다. 전하는 비오리의 총명을 더 한 번 시험 해보고 싶었다.
"네 어미가 딸을 잘 교양시켜서 조정의 근엄한 여론까지 알게 했으니 네 어미는 과연 명기다. 네가 내 앞에서 창으로 '만전춘' 전곡을 노래할 수 없다면 이야기로 사설을 풀이할 수는 있을 것이다. 네가 능히 첫 절부터 다 옮겨서 풀이할 수 있느냐?"
비오리가 조용히 아뢴다.
"저는 아직 공부가 도저하지 못하와 우리나라의 가사와 가곡을 다 섭렵하지 못했습니다마는, 남녀가 상열하는 연가로 정과한을 솔직하게 꾸밈없이 표현한 노래는 '만전춘'을 능가할 만한 가곡이 없을 듯합니다."
비오리는 대답이 더욱 영롱했다.
"어서 말해보아라."
전하는 미소를 띠고 재촉했다.
"우선 첫 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얼음 우희 댓닙 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뎡, 얼음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얼어 죽을 망덩 정둔 오 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이것이 첫 절이올시다.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니 얼어 죽는 것도 무섭지 아니합니다. 그뿐이 아니올시다. 얼어 죽을망정 밤만 더디 새라 했습니다. 사랑의 절정이요, 청춘의 절규인가 합니다."
말씀을 아뢰는 비오리의 눈에는 정기가 팔락여서 불꽃을 튀기는 듯했다. 전하는 매서운 계집이라고 비오리를 바라보신다.
"둘째 절을 아뢰겠습니다. '경경고침상에 어느 미 오리오. 서창을 열어 도니 도화- 발하두다. 도화는 시름업서 춘풍하다, 춘풍하다.' 둘째 절에는 어미의 이름이 나와서 우습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떨어져서 외롭게 누웠으니 잠이 올 까닭이 있습니까. 벌떡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보니 도화 한 가지가 예쁘게 피었습니다. 예쁜 도화는 마치 자신같이 예쁩니다. 그러나 원래 도화는 무심하니 사랑을 알 까닭이 없습니다. 봄바람에 상글상글 웃기만 합니다. 화가 아니 날 수 없습니다. 기가 막혀서 탄식하는 노래올시다."
"셋째 절을 풀이해보아라."
전하는 점점 비오리한테 매력을 느꼈다.
"셋째 절은 좋은 일에 마가 생겨서 굄을 받다가 소박을 당한 것을 한탄하는 노래올시다. '넉시라도 님을 녀닛경 너기다니, 넉시라도 님을 녀닛경 너기다니. 뉘러시니잇가, 뉘러시니잇가.' 몸은 말할 나위도 없고, 혼이라도 항상 임을 한데 모시려 했더니, 누구의 짓인지, 이간을 쳐서 사랑하던 임이 돌보지 않게 된 것을 애원성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기가 막히도록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노래올시다."
윤이 흐르는 맑은 눈매에 정을 담뿍 실어, 혈색 좋은 입술로 낭랑하게 '만전춘' 가사를 풀이해 아뢰는 비오리의 태도는 귀엽기 한량없었다. 전하는 약간 취한 듯했다.
"넷째 절을 풀이해보아라!"
비오리는 싱긋 웃었다.
"넷째 절은 창으로 이미 아뢰었습니다."
"창과 풀이는 다르지 않으냐. '만전춘' 전부를 노래 대신 풀이하기로 약속했으니, 먼젓번에는 창을 했다마는 이번에는 풀이로 말해보아라!"
비오리는 눈웃음을 치며 풀이를 시작한다.
"'올하, 올하, 아련 비올하. 여흘란 어데 두고 소해 자라온다. 소, 곳 얼면 여흘도 됴흐니 여흘도 됴흐니.' 상감마마게서는 제 이름이 비오리라 해서 아까 넷째 절 비오리를 노래해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이름하고 이 가사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비오리의 빛깔이 하도 고울 뿐 아니라 순수한 우리말이기에 이름을 비오리라 했습니다. 넷째 절 이 노래는 사모하는 연인을 자기한테로 오라고 유인하는 노래올시다. 연인을 비오리한테 비해서 '살기 좋은 여울은 어디 두고 늪에서만 사느냐? 엄동설한에 늪이 얼면 어찌할 테냐. 추워도 얼지 않는 여울로 오라.' 는 뜻이옵니다. 비오리는 애인이고 소, 곧 늪은 연적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울은 남성인 자신인가 봅니다.
비오리는 넷째 절 풀이를 마치고 조촐하게 웃었다. 전하는 비오리의 거리낌 없이 유창하게 풀이하는 것을 듣자, 더욱 신통하게 생각했다. 옆에 있는 제조를 바라보며 말씀한다.
"모두 다 경이 자세하게 풀이해서 가르쳤구려! 장래성이 있겠소."
칭찬하는 말씀을 내렸다. 제조 박연은 웃으며 대답해 아뢴다.
"원래 총명 영리한 아이오라, 사설 풀이를 해준 적이 없습니다마는 제가 스스로 터득해서 아뢴 듯합니다."
전하는 다시 비오리를 향하여 분부한다.
"이제 넷째 절까지 풀이를 했으니 마지막 끝 절을 풀이해보아라."
비오리는 미소를 띠고 아뢴다.
"마지막 끝 절은 풀이를 하지 아니해도 누구나 다 쉽게 알 사설이올시다. 황공하오나 풀이를 못 하겠습니다. 너무나 표현이 강합니다. 정열이 화산처럼 터져서 용광로가 되어 쇠와 돌도 녹아 흐를 듯한 가사올시다. 근엄하신 전하 앞에 감히 풀이해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완고하신 조신들이 난한 노래라고 듣지 말라 한 것입니다."
전하는 껄걸 웃었다.
"네 말도 그럴듯하다. 그러나 기왕 사설 전체를 풀이하기로 했으니, 사설의 풀이는 못 할망정 가사를 외어나 보려무나!"
전하의 마음은 완고한 유신들처럼 좁고 딱딱하지 아니했다. 예와 이제의 모든 일과 이치를 환하게 알고 있었다. 작은 일에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아니했다. 명경지수의 태도다. 비오리는 다시 사양한다.
"'만전춘' 가사를 창으로 부르지 아니한 것은, 상감마마께서 선비들의 헐뜯는 말씀을 들으실까 해서 풀이로 대신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끝절을 외지 않는 것도 역시 상감마마의 구설을 막으려는 쇤네의 뜻입니다."
전하는 비오리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옥음을 높여 껄껄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내가 네 소원대로 창을 부르지 않게 하고 풀이로 대신하게 한 것은, 완고한 신하들의 떠들어대는 것이 무서워서 그리하라 허락한 것이 아니다. 조심성 있는 네 말이 가상해서 그리 하라 허락했던 것이다. 완고한 신하들의 쓸데없는 말이 무서웠다면 내가 어찌 아악을 창제해서 관습도감을 설치했으며, 중인과 천인들을 발탁해서 높은 벼슬을 주고, 그들의 힘과 슬기로 우주만상의 집을 지었겠느냐? 내가 오늘 너를 부른 것은, 수천 년 내려오는 한자 쓰는 누습을 버리고 새로 우리 글자를 만들기 위하여 음의 고저, 청탁을 시험해보려 한 것이다. 기왕 '만전춘' 온 가사를 들어보기로 한 것이니, 네 소원대로 또다시 풀이는 못 할망정 그대로 끝 절을 옮겨보아라."
비오리는 더 사양할 길이 없었다.
"하교가 지엄하시니 '만전춘' 끝 절을 그대로 외어보겠습니다."
남산에 자리보아 옥산을 벼어누어, 금수산 니불 안헤 사향각시를 아나누어,
남산에 자리보아 옥산을 벼어누어, 금수산 니불 안헤 사향각시를 아나누어
약 든 가 을 마초 사이다. 마초 사이다.
아소 님아, 원대 평생에 여힐 모세.
비오리는 외기를 다하자 흰 이를 드러내 방긋 웃었다. 전하도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애 많이 써서 풀이를 했다. 그러나 네가 너무 조심성이 많아서 끝 절에 가서 풀이를 하지 아니하고 외기만 했으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여자가 조심성이 많은 것은 역시 좋은 일이다."
옆에서 제조가 아뢴다.
"비오리는 영리하고 총명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을 합니다."
전하는 다시 비오리에게 말씀을 내린다.
"내가 처음에 너에게 '만전춘'을 창하라 한 것은 너의 창을 시험해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네가 조심하고 사양해서 풀이와 외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으니, 이제부터는 정말 너의 목놀림을 들어보아야 하겠다. 네 어미 소춘풍은 시조로 명창의 이름을 들었다 한다. 너도 시조 공부를 좋아했을 것이다. 시조를 한번 창해 보아라."
전하의 말씀이 내리자, 제조 박연은 말없이 비오리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한번 잘 불러보라는 격려하는 미소다.
"무슨 시조를 부르오리까?"
비오리는 맑은 눈동자를 굴려 용안을 우러러본다.
"네 마음에 드는 시조를 불러보아라."
비오리는 옆에 놓인 장구를 당겨놓고 채를 잡았다. 가볍게 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고, 장구 변죽을 울렸다. 가사가 시작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서 백 년까지 하리라.'
시조 삼장은 장구 소리와 함께 요요하게 전 안에 퍼졌다. 전하는 비오리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시조 창을 듣자, 홀연 용안에 정중한 빛이 떠돌았다. 부왕의 시조다. 태종이 포은 정몽주 선생을 달래면서 고려의 문란한 정권을 뒤엎고 함께 일을 해보자고 은근히 포은 선생의 뜻을 더듬어본 노래다. 전하의 마음이 숙연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비오리는 노래를 마치자, 꿇어앉아 전하께 아뢴다.
"태종대왕께서 부패한 고려조정을 뒤엎고 혁명을 일으킬 큰 계획을 품으셨을 때, 당시에 인망이 높은 포은 선생과 함께 일을 해보자고 포은 선생의 마음을 더듬어보신 시조올시다. 외람되게 감히 어제 시조를 상감마마 앞에서 불러서 황공무지하오이다."
전하는 비오리의 수단 높은 창소리에 마음이 구름과 안개 속에 떠 있는 듯했다. 다시 한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건국하기 어려웠던 옛일이 생각났다.
"잘 불렀다. 좋은 창법으로 선대왕마마의 지으신 시조를 들어보니, 내 마음이 자못 설렌다. 다음에 또 한 번 좋은 시조를 창해 보아라!"
비오리가 아뢴다.
"하늘 이치는 모두 다 음과 양으로 배판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있으니 땅이 있고,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습니다. 옳은 것이 있으니 그른 것이 있고,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아니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창제하신 아악도 음양의 이치로 화음을 이룩하시어 훌륭한 악을 만드셨습니다. 태종마마께서 읊으신 시조에 대해서 반응을 일으킨 시조를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좋다......"
전하는 허락했다.
옆에 모시고 있는 제조 박연은 비오리가 장차 무슨 노래를 부르려 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말없이 웃음을 짓는다. 비오리는 장구채를 잡고 변죽을 울리며,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처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비오리의 높고 얕게, 짧고 길게 애원성을 내어서 감칠맛 있게 가락을 돌리는 맑은 목소리는 펄펄 날리는 흰 눈이 편전 안에 가득히 날리는 듯, 싸늘한 동지섣달 찬 바람 소매 속으로 기어들어 오싹 한기를 느끼게 하는 듯했다. 노래를 마치자 비오리는 장구채를 놓았다. 사뿐 일어나 전하께 배를 드리고 아뢴다.
"상감마마께옵서 이노래를 들으시면 역하실는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역시 천지 음양의 이치로 정포은 선생의 입을 빌려서 발로된 노래올시다. 태종마마께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큰 뜻을 품으셨으니, 하늘은 포은 선생의 절의를 빌려서 반대하는 노래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음양의 이치올시다. 태종마마의 즉흥시는 음이요, 포은 선생의 즉흥시는 양이올시다. 듣자오니 상감마마께서는 새로 나라의 글자를 만드신다 합니다. 글자의 구성과 맵시도 이 천지 음양의 대도에서 벗어나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비오리의 낭랑하게 아뢰는 말씀은 조리가 정연했다. 노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심정을 표현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혁명을 함께 일으켜보자고 포은의 마음을 더듬어본 태종의 시조는 음이요, 이것을 거절하는 포은의 시조는 양이 된다. 이것은 모두 다 하늘의 밝고 밝은 이치다. 이러한 음과 양이 반복되는 이치는 우주만상에 다 적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상감마마께서 새로 문자혁명을 일으켜서 글자를 창제하실 때는 이러한 천지조화의 음양의 이치를 적용하십시오.' 하는 비오리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는 깜짝 놀랐다. 새삼 다시 비오리의 총명 영리한 것을 느꼈다.
"네가 이 기막힌 음양설을 누구한테 들었느냐?"
"악의 원리를 배울 때 제조 대감께 들었습니다."
"가상하구나!"
전하는 경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제조 박연을 향하여 치하하는 말씀을 보낸다.
"관습도감의 아이들이 이만큼 지식이 높은 줄은 과연 몰랐소. 경의 수고가 실로 많았구려!"
박연이 몸을 굽혀 아뢴다.
"모두 다 전하께옵서 아악을 창제하시고 관습도감의 격을 높여주신 덕분이올시다. 이러하니 모여서 배우는 아이들도 전과는 판이하게 공부들을 하와 수준이 높아갑니다. 모두 다 성상께옵서 문화를 진작시키는 넓은 혜택이 도감 아이들한테까지 미쳤습니다."
전하는 다시 더 비오리의 지식을 시험해보려 했다.
"너의 음양학설은 제법 들을 만하다. 다시 가사 몇 편을 창하면서 음양설을 이야기해보아라!"
비오리는 전하의 분부를 받자, 잠깐 눈을 내리깔고 가사를 생각해보았다. 이내 장구를 앞으로 당겨놓고 창을 하기 시작했다.
'대초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드리며 벼 뵌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장사 도라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노랫소리는 요요하게 그쳤다. 한가하고 부드러운 정취가 방 안에 가득했다.
"이 노래는 누가 읊은 시조냐?"
"황정승이 읊은 시조올시다."
"황희 정승의 시조란 말이냐?"
전하의 용안은 웃음으로 화려했다.
"이 시조는 흥국의 기상이 가득한 태평성대의 노래올시다. 농촌의 가을 풍경입니다. 대추나무 가지마다 대추는 익어서 뺨이 붉었는데, 밤송이는 터져서 아람이 뚝뚝 떨어집니다. 벼를 베어서 타작이 끝난 논에는 게가 엉금엉금 이어 내리는데, 때마침 체장수가 지나가니 독 속에 익은 술을 걸러 마시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하는, 풍요한 가을을 맞이한 성대일민의 정서를 노래한 시조올시다. 이것은 나라가 흥하고 있는 것을 증명한 노래니, 시상이 양에 속하는 노래라 생각합니다."
비오리는 말씀을 마치자 상긋 웃었다. 박연이 아뢴다.
"과연 오늘날 태평성대를 노래한 시조올시다. 양에 속한다는 비오리의 아뢴 말이 옳습니다."
세종전하는 마음속으로 깊이 감동되었다.
"네가 나이에 비해서 생각이 이같이 깊은 줄은 과연 몰랐다. 제조의 심오한 학문의 궁리가 이같이 너희들 여악에까지 미쳤으니, 나라의 문화를 위하여 크게 기쁜 일이다. 네 말대로 한다면 국가가 승평한 화한 기운 속에서 저절로 영가로 나타난 황정승의 시가 양성의 시라면 이와 대립될 만한 음성적인 가사가 있느냐? 한번 예를 들어보아라."
"있습니다."
비오리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장구채를 잡아 변죽을 울리면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5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구슬픈 애원성은 목이 메는 듯,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일어나는 듯 단장의 음조가 전 안에 가득했다. 전하는 옷깃을 여미고 말씀을 내린다.
"야은 길재 선생의 시조가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고려 말엽에 삼은으로 이름이 높으신 야은 선생의 시조올시다."
"어찌해서 이 시조가 음에 속하느냐?"
"하늘 아치는 반드시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흥이 있으면 다음엔 망이 있고, 성한 후에는 쇠하게 됩니다. 이것은 만고에 변치 않는 철리올시다. 야은 선생은 고려의 수절지신이올시다. 그러하니, 황정승이 읊은 시를 성대일민의 시조라 한다면, 야은 선생의 시는 망국을 한탄하는 노래니 음성에 속합니다."
전하는 비오리의 논리정연한 말을 듣자, 무릎을 치며 칭찬하신다.
"과연 그럴듯한 논리다!"
비오리는 다시 아뢴다.
"황정승릐 국가승평을 노래하는 시와 대립되는 시를 또 한 번 노래 해보겠습니다."
비오리는 다시 장구채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흥망이 유수 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손이 눈물겨워 하노라.'
노래는 그쳐지고 슬픈 기운은 전 안에 가득했다. 전하도 이 노래를 부른 주인공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고려의 옛 신하요, 아버님 태종의 스승이었던 운곡 원천석이 시조다. 태종은 옛 스승을 대접해서 벼슬을 주었으나, 운곡은 받지 아니하고 강원도 치악산에 들어가 종적을 감춘 지조 높은 선비다.
"운곡 원선생의 시조로구나!"
전하의 용안엔 숙연한 빛이 떠돌았다.
비오리가 아뢴다.
"그렇습니다. 망국한이 뼛골 속속들이 스며들어서 송도 만월대를 돌아보며 원곡 선생님께서 읊은 시조올시다. 흥이 아니고 망을 한탄한 시조니, 이 노래 역시 음에 속하는 노래올시다."
전하는 비오리의 시에 대한 해석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더한층 기특하게 생각했다. 제조 박연을 향하여 말씀한다.
"내가 처음 우리 글을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했을 때 말과 글의 소리가 일치되어야 할 것을 구상했고, 발서의 고저, 청탁이 음양과 오행에 관련되어야 하겠다고 판단을 내렸으나, 시의 사상이 음양에 관련되어있는 것까지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오. 이제 비오리의 말을 들으니, 시상에도 역시 음성과 양성으로 구별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소. 경의 여악을 지도한 힘은 과연 크오!"
제조 박연이 부복해 아뢴다.
"가르쳐준다고 다 통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비오리만이 한 가지를 말해주면 두 가지를 터득합니다. 그리하와, 오늘 전하 앞에 소리의 원리를 말씀드리기 위하여 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것이올시다."
전하는 다시 비오리를 향하여 하문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말은 서로 통하지만 발음하는 음성은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남자의 소리는 웅장하니 양에 속하고, 여자의 목소리는 가냘프고 약하니 음에 속한다. 네가 지금 해석한 대로,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중성에 속하는 시조가 있겠느냐?"
비오리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해 아뢴다.
"있습니다."
주저치 아니하고 대답했다.
"어떠한 시조가 중성에 속하는 시조냐? 읊어보아라."
비오리는 곧 장구채를 잡고 낭랑하게 시조를 읊기 시작한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험하여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초 중 종 삼장이 끝난 후에 비오리가 아뢴다. 목소리는 가냘프고 구슬프면서 처량했다.
"이 가사는 중성에 속하는 시조올시다."
전하는 가사의 주인공을 짐작했다.
"목은 선생 이색의 시조로구나!"
"그러합니다."
"어찌해서 중성에 속하느냐?"
비오리가 아뢴다.
"옛 임금은 잃어버렸고, 새 임금은 섬기기 싫었습니다. 깨끗한 선비의 지조를 지켜보려는 때문입지요. 그러하니 백설이 잦아진 험난한 세월을 한탄하면서 해 떨어지는 석양볕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모르겠다고 시름했습니다. 이때 목은의 시상은 양도 아니요, 음도 아닌 중성의 심경이었습니다."
비오리의 대답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전하는 깜짝 놀랐다. 어린 기생 비오리의 시상 풀이가 이같이 날카로운 칼날로 대가지를 쪼개내듯 쨍쨍하게 갈라낼 줄은 몰랐다. 마음속으로 맹랑한 계집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한 번 시험하기 위하여 비오리에게 묻는다.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모른다고 탄식한 시가 어찌 중성이 되느냐?"
비오리는 맑은 눈동자를 굴려 주저하지 아니하고 대답해 아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한 시조는, 태종대왕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서 백 년까지 하리라.' 한 유혹을 한칼로 끊어버린 노래니 기막힌 양성의 시조올시다. 상감마마께옵서 역하게 들으시면 쇤네는 다시 말씀을 아니 올리겠습니다."
비오리는 말을 마치자, 샛별 같은 눈을 들어 주저 없이 용안을 바라본다. 전하는 웃음을 머금었다. 장래성 있는 영특한 계집애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더러 풀이를 하라고 당부해놓고 노할 리가 있느냐."
"황공합니다마는 포은 선생은 고려에는 충신이지만 아조에는 동조하지 아니한 분입니다. 한칼로 태종마마의 어르는 시조를 끊었다고 말씀을 아뢰어서 혹시 마마께서 진노하시지나 아니하실까 하와 감히 아뢴 것이올시다."
전하는 소리를 높여 껄걸 웃으셨다.
"나는 포은 선생을 존경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분이 조정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전하의 한마디 말씀은 비오리와 제조 박연의 마음을 활짝 열리게 했다. 비오리는 홀연 자리에서 일어나 전하께 절하고 아뢴다.
"쇤네는 일개 나이 어린 여악이오나, 바다같이 넓으신 상감마마의 도량에 감복할 뿐이옵니다. 이같이 천, 지, 인 삼계의 이치를 밝게 살피시니, 우리나라가 흥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겠습니다."
"어서, 다음을 말해보라."
전하는 재촉하는 말씀을 내린다.
"야은 길재 선생의 시조를 살펴본다면, 오백 년 도읍지를 달리면서 나라 망한 것을 슬퍼한 망국의 회고시오, 운곡 원천석 선생의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라 한 시도 역시 나라 망한 것을 슬퍼한 시올시다. 모두 다 쇠잔한 것을 읊었으니, 음성의 시올시다. 그러나 목은 이색 선생의 시조는 포은 같은 날카로운 칼날 같은 양성의 시조도 아니요, 야은 선생이나 운곡 선생같이 나라 망한 한을 통곡하는 시상도 아닙니다. 세상은 눈보라를 쳐서 험악한데, 동지섣달 찬 겨울에 청향을 뿜는 설중매를 본뜨려고 연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한다 했으니 망설이는 경지올시다. 이 시의 경지는 양도 아니고 음도 아닌 중성의 경지라 하겠습니다."
비오리는 또렷또렷 거침없이 아뢰었다. 목은의 시조를 중성이라고 단정하는 비오리의 아뢰는 말을 듣자, 전하는 또 한 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뿐 아니었다. 제조 박연도 놀랐다. 비오리의 판단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은 모두 다 고려조의 이름난 신하들이다. 혁명을 일으킨 세종의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에게 절개를 지켜서 신하 노릇을 하지 아니했다. 이러한 까닭에 세상에서는 그분들의 아호인 포은, 야은, 목은의 아랫글자 숨을 은자를 따서 삼은이라고 존경해서 불렀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이몸이 죽고 죽어'의 노래를 부른 후에 조영규의 철퇴를 맞고 순절했으니, 비오리의 말대로 시조도 양성이요, 행동도 양성이었다. 야은 길재 선생은 애당초 벼슬을 버리고, 한양 성 중에 발길을 들여놓지 아니하면서 옛 임금을 생각해서 회고시만 불렀으니 그 시상이 음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목은 이색 선생은 이태조와 가까운 친구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로 도피했던 목은은 아들이 옥사한 부음을 듣고 사람 없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진종일 통곡하고 기절했다. 그러나 태조가 부르니 하는 수 없어 경연 자리에 나갔다가 '노부는 앉을 자리가 없소.' 하고 물러났다. 역시 대단한 지조다. 이러한 일로 인해서 목은은 배를 타고 여주로 돌아가는 길에 연자탄 여울에서 원인 모를 죽임을 당했다. 그의 시조, '반가운 매화꽃은 어느 곳에 피었는지 알 길 없고 눈보라는 잦아진 채 구름마저 험악하니 이 몸은 어디로 가야 할지 서서 있을 땅이 없구나! 어찌하면 좋으냐?' 하고 한탄한 시상으로 보아 중성이라고 한 비오리의 말이 그럴듯했다. 세종전하는 선대의 일이지만 정포은, 이목은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비오리가 일개 여악이지만, 제법 판단을 내렸다고 가상하게 생각했다. 웃으며 제조 박연을 향하여 멀씀한다.
"제조는 비오리에게 악리만 가르쳐준 줄 알았더니 지나간 명현들의 사적까지 일러줬구려!"
전하의 마음은 바다같이 넓었다. 조선왕조의 적이요, 고려의 충신들을 주저치 아니하고 명현이라고 불렀다. 제조 박연은 마음속으로, 전하는 과연 광대무변한 큰 제왕이라 생각했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신은 삼은의 사적을 비오리에게 가르쳐준 일이 없습니다."
전하는 미소를 풍기며 비오리에게 하문한다.
"삼은의 사적을 제조도 말씀하지 아니했다 하는데, 네가 어찌 그리 소상하게 아느냐?"
비오리는 치마를 휩쓸고 아뢴다.
"어미 소춘풍한테 귀가 젖도록 들었습니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감탄하는 말씀을 내린다.
"과연 그렇구나! 네 어미는 무변공신을 시조로 놀린 명기다. 그럴 듯하다. 족히 삼은의 일을 너한테 일러주었을 법하다. 좋은 어미가 총명한 딸을 두어서 잘 가르쳤구나!"
칭찬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전하는 비오리를 크게 칭찬한 후에 박연을 향하여 말씀한다.
"우리 글자를 창제할 때, 음양의 원리를 배합해서 획과 획이 서로 응하도록 나 역시 생각했던 것인데, 이제 다시 비오리의 말을 듣고 보니 내 마음이 더한층 정해졌소. 다음엔 약속한 대로 사람의 음성이 오행에 관련된 것을 고증해보기로 합시다."
박연이 아뢴다.
"전에도 아뢰었습니다마는, 신은 낙치가 되어서 목소리가 명료하지 못합니다. 비오리를 시켜서 목소리가 금, 목, 수, 화, 토 오행에 관련된 것을 실험해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제조 박연은 비오리에게 명한다.
"목구멍 소리를 내보아라."
비오리는 윤기 도는 흰 이를 약간 벌리고 앵도 같은 입술을 모았다. '우--' 하는 소리가 청 좋게 일어난다. 웅장한 목소리다. 전각의 소란반자가 우렁우렁 울렸다. 마치 맑은 폭포수가 콸콸 쏟아지는 듯한 음향이다. 전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듣는다. 콩팥에 기운을 모아, 목구멍을 통해 내는 소리가. 박연이 아뢴다.
"목구멍은 깊고 윤합니다. 그러므로 오행 중에 물에 해당합니다. 소리가 허하고 통해서 마치 물이 허하고 맑게 흘러내리는 듯한 소리올시다. 음악의 오음으로 따져본다면 우조에 해당하고, 시후로 따져본다면 겨울이올시다. 방위는 북에 속합니다."
전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오리의 웅장하게 목을 놓는 우조가 끝났다.
"각 소리를 내보아라!"
비오리는 백옥 같은 어금니를 살짝 벌리고 붉은 입술을 내밀었다. 간장에 힘을 주었다. '어--' 소리가 일어난다. 통나무를 때리는 소리다. 깊고 깊은 산골 속에 나무꾼이 아름드리 큰 나무를 도끼로 탕탕 찍어내는 소리다. 편전 안의 완자창문이 우렁우렁 울렸다. 제조 박연이 아뢴다.
"어금니는 길고 튼튼하므로 어금니를 거쳐서 나오는 소리는 목구멍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 비슷하나 실합니다. 그리고 마치 나무가 물기운을 받아서 생장해서 형상을 이룬 듯합니다. 수생목의 원리올시다. 금, 목, 수, 화, 토 오행으로 따져본다면 목에 속하고, 계절로 본다면 봄이고 동방에 속합니다. 악으로 따지면 다섯 가지 음 중의 각이올시다."
전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웅장한 비오리의 목소리가 끝나니 제조는 다시 명한다.
"혀를 놀려서 치음을 내보아라!"
비오리는 박씨 같은 고운 이빨을 다물고 살몃 입술을 열었다. 다문 이빨 속에서 혀를 놀리며 소리를 낸다. 심장에 힘을 주어 혀를 날름거리며 소리를 낸다. '이--' 하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가락을 굴려서 청아하게 나온다. 맑고 청아한 음향이 전 안에 가득했다. 전하는 가만히 무릎을 치며 귀를 기울여 듣는다. 박연이 아뢴다.
"이 소리는 오음으로 본다면 궁, 상, 각, 치, 우 중에 치가 되고, 오행으로 본다면 금, 목, 수, 화, 토 중의 불, 곧 화가 됩니다. 춘, 하, 추, 동 사시사철로 말한다면 여름이 되는 것이고, 방위로 말한다면 남방이지요. 혀가 구르고 움직여서 이 아름다운 소리가 나옵니다. 이 소리가 어찌해서 화에 속하느냐 하면 혀는 날렵하고 잘 움직여서, 마치 불길이 날름거리면서 이리 불고 저리 불어서 활활 타는 듯하니 불, 곧 여름입니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탄식한다.
"대자연 조물주의 이치는 과연 묘하구나!"
설명하는 박연은 신명이 났다. 비오리에게 다시 명한다.
"이번에 상성을 내어보아라!"
이때 비오리의 이맛전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솟고 연약한 두 볼에는 홍조가 돌아, 도화 두서너 점이 아련히 핀 듯했다. 우조, 각성, 치조를 내리 부르고 나니 한들한들 버들가지 같은 가냘픈 몸이 약간 피로한 듯했다. 전하는 비오리의 이맛전에 땀방울이 송골거리고 보드라운 두 볼에 홍조가 떠도는 것을 바라보시자, 용안에 웃음을 가득 띠고 분부한다.
"연거푸 세 차례나 발성을 시험했으니 약한 몸에 힘이 많이 드는 모양이다. 잠시 쉬었다가 다음번 소리를 시험해보아라."
비오리는 조용히 아뢴다.
"관계치 아니합니다. 쇤네는 본시 남보다 땀이 많습니다. 힘이 들어서 땀이 나는 것이 아니옵니다. 계속해서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비오리는 나직한 목소리로 웃음을 머금고 아뢰었다. 제조도 비오리를 바라보고 웃으며 말한다.
"상감마마께서 너를 아끼시어 조금 쉬었다가 실험하라 하시니, 잠깐 쉬기로 하자!"
비오리는 웃음을 머금고 조용히 고한다.
"일을 하다가 중단하고 쉰다는 것은 마음이 해이해지기 쉽고, 정성이 부족한 일이올시다. 상감마마 존전에서 어찌 공부를 하다가 쉬옵니까? 더구나 상감마마께서는 천고에 없던 나라의 글자를 새로 만드시려고 소리의 음양오행을 시험하시는 이 자리에 어찌 감히 태만하게 하오리까."
전하는 비오리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더욱 가상하게 생각했다.
"네 말이 대단 기특하다. 공부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쉰다는 것은 과연 말이지 마음이 해이해지기 쉬운 법이다. 네 성의가 가상하구나. 그렇다면 곧 소리를 계속해 시험해보기로 하자."
박연은 전하의 뜻을 받들어 비오리에게 다시 명한다.
"상성을 내어보아라!"
비오리는 다시 치맛자락을 단정하게 매만진 후에 자세를 바로 하여 소리를 낸다. '아--' 하고 소리가 허파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입을 열고 소리를 토한다. 잇소리다. 쇠된 소리다. 쇠를 끊는 듯한 단금의 소리다. 금가루를 불로 녹여서 마치로 금자루를 만드는 강한 쇳소리다. 쨍쨍 울렸다. 귀가 따갑도록 싸늘했다. 박연이 풀이한다.
"폐에서 소리가 나와서 이빨 사이로 스쳐 나가는 소리올시다. 이는 단단하고, 물건을 끊습니다. 이러하니 오행으로는 금에 속하고, 시절로는 가을이요, 방향으로는 서쪽이고, 오음으로는 상이올시다."
전하는 다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조 박연은 다시 비오리에게 명한다.
"궁 소리를 내보아라!"
비오리는 앵도같이 농익은 윤이 흐르는 입술을 모나게 다물고, 비장에 힘을 주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음--' 소리가 길게 일어난다. 소리는 넓고 크게 계속해서 일어난다. 소리 속에는 만 가지 물건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홍대무변한 웅장한 음향이다. 화한 기운이 전각 안에 가득했다. 길고 긴 비오리의 음조는 장쾌하게 끝났다. 박연이 아뢴다.
"궁 소리는 비장에서부터 나와서 입술을 모아서 뽑는 소리올시다. 금, 목, 수, 화, 토 오행으로 논한다면 흙이올시다. 마치 대지가 만 가지 물체를 살게 해서 넓고 큰 것과 같이, 소리가 굉대하고 홍량합니다. 시절로 말한다면 늦여름이요, 방향으로 논지한다면 중앙이올시다."
전하는 듣기를 다하자 만족했다.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이제 다섯 가지 음향과 오행의 관계를 다 시험해보았구나. 비오리, 과연 애썼다."
비오리는 맑은 눈으로 전하를 우러러 뵙고 방싯 웃었다. 비로소 콧등에 송골송골 솟은 땀방울이 저고리 고름으로 꼭꼭 눌러서 찍어냈다. 전하도 웃으며 비오리가 옷고름으로 땀방울을 씻어내는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신다. 박연이 아뢴다.
"전하께옵서 북적, 남구를 평정하신 후에 천하에 자랑할 만한 아악을 창설하시고, 다시 만백성들에게 천시와 인력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해시계, 물시계, 선기옥형 등 우주만상의 집을 설치하셨습니다. 꾸준하신 예지와 지성스런 끈기로 이제 또다시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문자를 창제하려 하시니, 실로 만고에 없는 제왕의 성덕이십니다. 이러한 큰 사업을 경륜하실 때 반드시 대자연과 인간이 서로 융합되는 원리를 글자에 구현하시도록 하시옵소서. 이리해야만 우주와 사람 사이에 조화가 이룩되리라 생각됩니다. 음악이 오음과 오행으로 조화된 화성을 자아내듯, 아름다운 말소리와 조화된 글자 모양이 서로 화합해서 만고에 자랑할만한 나라의 글자를 이룩해서 만대에 가도록 문화가 찬연히 빛나도록 해주시옵소서."
전하는 박연의 말씀을 듣자, 용안에 감동된 빛이 떠돌았다. 숙연한 빛이 양미간에 서리며 말씀을 내린다.
"제조의 말이 옳소! 나도 그같이 생각하오.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생물이 음양의 이치를 떠나서 어떻게 생활할 수 있겠소. 그러므로 사람의 음성도 다 음과 양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오. 더구나 내가 지금 글자를 구상하는 것은 한문처럼 뜻을 표현하는 것이 되게 하지 아니하고, 써서 읽으면 곧 말과 같은 글이 되도록 마련하는 것이니, 아악의 화한 소리가 오행과 연관성이 있는 궁, 상, 각, 치, 우 다섯 가지 음에서 일어나듯이 우리의 독특한 글자도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박연이 아뢴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소리는 성상의 하교와 같이 오행에 근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춘, 하, 추, 동 사시사철에 배합이 되고 궁, 상, 각, 치, 우 다섯 음에 협화됩니다."
세종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간곡한 부탁을 내린다.
"경은 음의 원리에 달통한 사람이오. 경의 힘으로 이미 아악을 창설하였거니와, 이제 내가 다시 정음을 창조하려 하는 이때 반드시 경의 슬기를 빌려야 할 것이오. 경은 이 정음을 구상하는 일에 한 팔 힘이 도어주기를 바라오."
박연은 자리를 피하여 아뢴다.
"황공만만하오이다. 그러나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전하는 놀랐다. 난계 박연과는, 계급은 군신지간이라 하나 의기가 상합했다. 지극한 지기다. 이러므로 뜻이 서로 화합해서 전무후무한 우리나라의 독보적인, 천하에 자랑할 만한 아악을 의논해서 창설했다. 아악에 비하여 더 큰 사업인, 천고에 없는 나라의 정음 글을 창제하려는 이때, 협력하라는 간곡한 부탁을 사양하는 난계의 의향을 전하는 알 길이 없었다. 전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찌해서 사양하오?"
"사람은 다 맡은 직분이 있습니다. 글자를 연구하고 제정하시는 일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맡기시옵소서. 다시 아룁니다. 사람은 다 맡은 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소신은 관습도감 제조이옵지, 집현전 학사는 아니올시다."
전하의 얼굴빛은 근엄하게 변한다.
"경은 원로재상일 뿐 아니라 음에 달통한 선배다. 젊은 학사들을 지도해서 큰 사업을 함께 협조해 달라는데, 사양하는 것은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
난계 박연은 다시 아뢴다.
"사람은 만능이 아니올시다. 글은 글하는 사람들에게 맡기시옵소서. 주제넘게 잘한다고 덥적대는 것도 일이 아니올시다. 사람은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전하는 도리어 초조했다.
"경보고 문자를 구상하는 일을 전담하라는 것이 아니로세. 음의 원리에 대하여 젊은 학사들을 지도해 달라는 부탁이로세!"
전하의 옥음은 다시 부드러웠다. 박연은 다시 아뢴다.
"전하께서는 음양오행과 음의 원리를 다 통달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옵서 넉넉히 젊은 학사들을 지도하실 수 있습니다. 신은 다만 직분을 지킬 뿐, 남에게 만능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려 합니다. 이것 또한 하늘 이치올시다. 오음과 오행의 방향이 제각기 있듯이, 사람도 자기가 맡은 직분이 다 다릅니다. 만약에 이 경계를 벗어난다면 이것은 참월이요, 분수를 지키는 일이 아니올시다. 엎드려 비옵니다. 하교를 거역하는 일 같사오나, 실상은 전하를 위하여 사람을 부리시는 방법을 말씀드리는 것이올시다."
전하는 비로소 난계의 굳은 뜻을 알았다.
"세상에 경과 같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겸허하고 슬기롭고 처세할 줄 아는 높은 선비로다. 내가 복이 많아서 경과 같은 신하를 두었으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소원대로 정음을 만들 때 경의 이름은 밝히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경에게 물어볼 때가 있을지 모른다. 뒤에서 도와주기 바라노라."
박연은 일어나 절하고 아뢴다.
"알아주시는 성은을 감읍할 따름입니다."
전하는 높은 소리, 낮은 소리, 맑은소리, 탁한 음을 시험하는 일은 끝이 났다. 박연이 아뢴다.
"전하께옵서 오랫동안 소리를 시험하시느라고 매우 피곤하시겠습니다. 그러면 신은 비오리를 데리고 물러나겠습니다."
전하는 웃으면 대답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는데 피로할 까닭이 있소? 경과 비오리가 많이 피로하셨소."
"신과 비오리는 항상 영가무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노래하고 연구하는 것이 본직이온데 이것쯤만으로는 피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오리는 전하 앞에서 음성을 시험해봤으니 일생일대의 크나큰 영광이올시다."
박연은 말씀을 마치고 일어나 숙배를 드리려 할 때, 전하는 박연을 향하여 다시 말씀을 내린다.
"경은 이제 관습도감으로 돌아가려니와, 비오리는 좀 더 궁중에 머물러 있게 하여, 나의 정음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게 해주기 바라오."
박연은 뜻밖이었다. 박연뿐 아니었다. 비오리도 어리둥절했다. 샛별 같은 눈에 놀라는 빛을 띠었다. 제조 박연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어 대답해 아뢴다.
"삼가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박연의 아뢰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초연히 이마를 숙이고 있던 비오리는 맑은 눈동자를 굴려 전하를 우러러 뵙고 아뢴다.
"쇤네는 황공하오나 감히 어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또렷했다. 너무나 당돌했다. 전하도 놀라고 제조도 놀랐다. 전하는 어이가 없었다. 전하는 한 나라의 제왕이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 이하 육조판서, 참판, 참의며, 삼군을 통솔하는 대장군까지도 감히 '전하의 어명을 받들지 못하겠소' 하고, 한 마디로 끊어 아뢴 사람은 천지개벽 이후로 없던 사실이다. 일개 조그마한 여악인 기생의 입에서 거역하는 말이 당돌하게 나오니, 전하는 도리어 당황했다. 제조 박연도 어찌할지를 몰랐다. 전하는 노할 수도 없었다. 벽력같은 꾸지람을 내릴 수도 없었다. 기가 막혔다. 도리어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묻는다.
"내가 모처럼 나라의 글자를 만들기 위하여 오늘 이 자리에 너를 불러서 소리의 고저 청탁을 시험해보았고, 계속해서 이 일을 연구하기 위해서 너를 궁중에 있게 하라고 제조한테 청을 해서 허락을 받았는데, 어찌해서 너는 한 마디로 끊어버리느냐?"
비오리는 서슴지 아니하고 또렷하게 대답해 아뢴다.
"쇤네는 구중궁궐 지엄한 속에 상감마마를 모시고 싶지 아니합니다."
윤이 흐르는 매력 있는 주순 사이로 뱉어지는 엉뚱한 목소리는 싸늘한 바람이 일어나는 듯했다.
"어찌해서 내 곁에 있기가 싫으냐?"
비오리는 또다시 당돌하게 아뢴다.
"다치기 쉽습니다."
비오리의 대답을 듣자, 전하는 또 한 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다치다니? 내가 너를 상하려 할 리가 있느냐."
"불 앞에 가까이 있으면 화상을 당하기 쉽고, 우물 앞에 가까이 있으면 빠지기 쉽습니다."
비오리의 대답은 더한층 기이했다. 전하는 기가 막혔다. 옥음을 높여서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시 비오리에게 묻는다.
"내가 불덩이가 아니고, 우물이 아닌 바에, 네가 내 곁에 있기로서니 상하고 빠질 리가 있느냐?"
비오리는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고 아뢴다.
"권문세가의 위세는 화염같이 뜨겁다 합니다. 일개 세도집의 권력이 불과 같다면 황차 상감마마께서는 만승의 제왕이십니다. 화산같이 뜨거우실 것입니다."
그럴듯한 소리다. 전하는 껄껄 웃었다. 옆에 있는 제조 박연도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그렇다 하고, 우물 타령은 왜 했느냐?"
전하는 다시 물었다.
"구중궁궐 깊은 곳은 마치 열 길, 스무 길 돌덩이로 층층이 쌓아 올린 우물 속 같습니다. 한 번 이 속에 들어가면 인생의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한 번 빠져든 다음엔 다시는 기어 나올 도리가 없습니다."
기막힌 명담이었다. 전하는 기가 막혔다.
"네가 어린것이 그런 말을 어찌할 줄 아느냐?"
"어미 소춘풍한테 들었습니다. 그러하옵고 쇤네가 실지로 목도한 일이 있습니다."
"네가 실지로 본 일이 있다 하니 무슨 일을 목도했더란 말이냐?"
비오리는 상긋 웃으며 주저주저하다가 대담하게 아뢴다.
"취옥 언니의 일을 목도해 보았습니다."
전하는 놀랐다. 더 한 번 기가 막혔다. 말씀이 막혔다. 전하의 권력을 불덩어리와 우물에 비해서 취옥의 일을 날카로운 송곳 끝으로 콕 찌른 비오리의 말은 제조 박연을 당황케 했다. 제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은 벌써 튀어나왔다. 비오리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지엄한 상감 앞에서 비오리를 꾸짖어 나무랄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였다. 등에서 땀이 솟았다. 전하는 비오리를 당돌하고 무엄하다고 생각했다. 봉안을 들어 비오리를 주시했다. 비오리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매서운 계집이었다. 재상들을 떡 주무르듯 했던 소춘풍의 딸다웠다. 전하는 잠시 명상 속에 빠졌다. 아닌 게 아니라 권세라는 것은 화염과 같고, 구중궁궐 지밀 속은 인생을 속박하는 자유 없는 곳이었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기에 전하 자신은 즉위 초에 젊은 궁녀들을 자유롭게 시집가라고 여염으로 내보내지 아니했던가? 취옥의 일로 말하더라도, 일전에 제조 박연과 말한 바와 같이 당신이 박정해서 내친 것이 아니다. 총행을 자제해서 청탁을 받아들였다. 위로 상궁서부터 액정인 내시, 별감, 무예청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틈에 자리가 올랐다. 다음엔, 제 아비까지 구감역 벼슬 한자리를 시켜달라 했다. 이 계집을 그대로 둔다면 나중엔 수령방백이 모두 다 취옥의 치맛자락에서 나오게 되고,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명황과 같은 용렬한 임금이 되고 말 것이다. 박정한 줄 알지만 아니 끊을 수 없었다. 국가를 영도하는 최고의 책임자인 임금이 된 때문, 정을 끊고 내친 것이다. 비오리가 들추어내지는 아니했지만, 세자빈을 두 차례나 내친 일도 남자와 여자의 천연의 이치를 몰라서 박정하게 내친 것이 아니다. 임금 노릇을 하자니 나라의 풍속을 바로잡아야 하고, 궁중의 기강을 세워야 하기 때문, 하는 수 없어 고민 속에서 내친 것이다. 임금 노릇을 한다는 일은 이같이 어렵다. 비오리의 말대로 구중궁궐 대궐 안은 사실상 열 길, 스무 길 층층이 돌로 쌓아 올린 우물 속이다. 한 번 이 속에 들어가면, 인간의 자유가 없다. 당신도 이 우물 속에 들어앉아 있다.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다 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일전에 제조 박연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형님 양녕대군이 부럽소!' 했다. 흠뻑 행동의 자유를 누리는 양녕이 부러웠던 것이다. 양녕은 호탕하게 산수간으로 방랑하면서 이같이 떠들어대기도 했다. '임금의 손자요, 임금의 아들이요, 임금의 형이요, 부처의 형이다. 내 지체를 누가 따를 것이냐!' 하고 호걸웃음을 웃으면서 술 마시고, 색을 취하고, 풍류세월을 보내면서 거리낌 없이 자유를 누리고 산다. 부럽기 한량없다. 그러나 당신은 임금이 된 이상, 어찌할 수 없다. 박정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도리가 없다. 천만 가지 일에 규율과 기강을 아니 세울 수 없다. 무한대의 자유를 터놓는다면 발종이 되고 만다. 문무백관을 어거하고 천만 백성을 지도하자니, 윤리와 도덕과 기강은 세워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하 자신도 층층절벽 우물 속에 자유를 앓은 몸이다. 비오리가 궁중에 있기를 거부하는 말은 당연하다. 전하의 명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비오리를 방자하고 무엄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흩어지고 매섭도록 똑똑한 양성의 계집애라 판단했다. 엄숙했던 전하의 용안에는 가득하게 웃음빛이 돌았다.
"네 어미 소춘풍이 기백 있는 명기라더니 네가 그 혈통을 받아서 은근히 나를 풍간하면서 너의 처신을 명백하게 밝혔구나! 나는 너를 방자하다고 꾸짖지 아니한다."
전하의 말씀이 이같이 떨어지니, 제조 박연은 비로소 안심하는 숨을 쉬고 비오리는 부복해서 아뢴다.
"궁중에 머물러 있어, 궁녀가 되라는 하교를 받들지 못했사오니 죄당만사올시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꾸짖지 아니하신다 하니, 바다같이 넓으신 성덕은 쇤네 한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전하는 제조 박연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이 애를 궁중에 머물러 있게 하여 밤과 낮으로 나의 글자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 했더니, 권력은 불과 같고 대궐 안은 우물 속 같아서 불에 데기 쉽고 우물에 빠지기 쉽다 하니 솔직하고 옳은 소리요. 자유스런 여악의 신분으로 후궁에 출입하면서 소리의 고저, 청탁을 나의 후궁들에게 지도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제조는 비오리에게 묻는다.
"하교 정중하시니 네 의향은 어떠하냐?"
비오리는 명랑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고한다.
"그저 궁녀만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취옥 언니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다행이올시다.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취옥의 면면한 한과 억울한 정은, 만나보지도 못한 동료 후배 비오리로 인하여 애원하는 소리가 절정에 올라 발산되었다. 전하의 아픈 상흔을 또 한 번 찔렀다. 그러나 포용성이 창해처럼 넓은 서민적인 인간 세종이었다. 옥음을 드높여 껄껄 웃는다. 제조 박연과 비오리를 둘러보며 말씀했다.
"아름다운 기화요초를 사랑하지만 바라만 보고 꺾어버리지 않는다면 사무송할 것 아니냐? 허허허. 염려 마라, 비오리야. 너를 내 곁에 두지 아니할 테다. 멀리 후궁으로 드나들게 해서, 말소리가 음양과 오행에서 나오는 것을 후궁들에게 지도해 달라고 부탁할 테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내관을 불러 분부한다.
"정원에 나가서 도감 여악 비오리가 매일 후궁으로 출입할 수 있는 출입패를 만들어가지고 오너라."
내시는 명을 받들어 정원으로 나갔다. 전하는 홀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비오리를 향하여 묻는다.
"너의 악에 대한 공부가 무던한 것은 이미 알았다마는, 글씨 공부도 해보았느냐?"
제조 박연이 대신 아뢴다.
"글씨와 사군자도 관습도감 안에서는 제일 뛰어납니다."
"글씨 공부와 사군자도 도저하단 말이냐? 어디 내 앞에서 한번 글씨를 시험해보아라!"
전하는 협실에 있는 소화자를 불렀다. 소화자란 동자 내시의 명칭이다. 동자 내시가 들어왔다.
"문방사우를 받들고 들어오너라."
이윽고 소화자 동자 내시는 용벼루와 연적이며 크고 작은 양호필과 해주먹을 얹어논 연상에 장지축을 곁들여 받들고 들어왔다.
"먹을 갈아라."
전하는 동자내시에게 명을 내렸다. 동자내시는 연상 위에서 오조룡문 연적을 꺼내어 벼루에 물을 따른 후에 한림풍월 해주묵을 갈기 시작했다. 오조룡문 연적은 고청 물감으로 용을 그려서 구워 만든 사발 만한 큰 연적이다. 용의 발톱 다섯 개를 그린 까닭에 오조룡문이라했다. 민간에서 보통 쓰는 용의 그림은 발톱을 네 개만 그려서 쓴다. 그러므로 사조룡문이라 했다. 그러나 제왕이 쓰는 어물에는 반드시 다섯 개 발톱을 그린 용무늬를 썼다. 비오리는 문방사우에도 안목이 있었다. 동자내시가 벼루에 물을 따르는 연적을 바라보았다. 발톱 넷을 그린 용연적이 아니라 다섯 개를 그린 용연적이었다. 비오리는 꿇어앉아 전하께 공손히 아뢴다.
"다른 연적으로 물을 따라서 먹을 갈라고 분부를 내려 줍시오."
돌연 아뢰는 비오리의 말을 듣자, 전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제조 박연도 비오리의 아뢰는 뜻을 몰랐다.
"무슨 까닭에 다른 연적으로 물을 따라서 먹을 갈라 하느냐?"
전하는 의아해서 물었다.
"오조룡문 연적은 상감마마께옵서 친히 어필로 휘호하실 때 쓰시는 연적이올시다. 쇤네는 참람하와 감히 그 연적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비오리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전하는 비로소 비오리의 뜻을 알았다. 제조도, '제법 아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전하는 웃으며 말씀을 드린다.
"궁중에서 먹을 가는 일이니, 그대로 써도 좋지 않느냐? 너무나 세심하게 가릴 것이 없느니라--."
비오리는 얼굴빛을 바로해서 아뢴다.
"사람은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비록 사소한 일이오나 분수에 어그러진 일을 한다면 결국 패를 당하고 맙니다. 쇤네는 감히 그대로 쓰라시는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비오리는 말씀을 마치자 앵도같이 아름다운 입술을 꼭 다물었다. 가무스름한 눈썹 사이엔 결연한 빛이 떠돌았다. 전하는 작은 일에도 반드시 자기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비오리의 말을 가상하게 생각했다. 내친 취옥이보다 몇 층 윗길의 품격이다. 매서운 계집이라 탄식했다.
"네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다른 연적으로 물을 붓게 하리라!"
전하는 동자내시에게 명했다.
"용문 연적 이외에 다른 연적이 없느냐?"
"있습니다."
명을 받든 동자내시는 진사로 칠을 해서 구워 만든 천도 연적에 물을 가득히 넣어 들여왔다. 맑은 물이 방울방울 벼루에 떨어졌다. 소화자의 손으로 갈려지는 한림풍월 해주묵에서는 먹 향기가 편전 안에 그득했다. 비오리는 장지 종이를 펼쳤다. 섬섬옥수로 양호필을 잡았다. 벼루의 먹을 듬뿍 찍어 농담을 시험해본 후에 전하를 우러러 뵙고 아뢴다.
"무슨 글을 쓰오리까?"
"네가 무슨 글씨 공부를 해보았느냐?"
"해자와 초서를 좀 공부해보았습니다."
"해자는 무슨 체로 공부했느냐?"
"구성궁예천명을 공부했습니다."
"초서는?"
"왕희지의 필법을 본떠봤습니다마는, 어려워서 꼴이 아니올시다."
"제법이로구나. 그렇다면 먼저 해자를 써보아라!"
비오리는 붓대를 잡고 장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구성궁체로 대쪽을 쪼개낸 듯 빳빳하고 정돈된 필법으로 또박또박 써놓고 붓을 놓았다. 요임금의 시절같이 성스러운 시대요, 순임금의 시절같이 어진 정치로 백성들을 다스린 천지다. 하늘은 태평한 이 세월을 연장시켜주는데, 사람들은 마음이 즐겁고 흐뭇해서 오래오래 살아서 장수한다는 뜻이다. 은근히 세종전하의 위대한 성덕을 예찬하는 뜻도 된다. 전하는 미소를 짓고, 박연은 마음이 흐뭇했다.
"제법 체를 흉내 내는구나! 언제부터 글씨 공부를 했느냐?"
"어릴 때부터 어미 소춘풍에게서 체첩을 놓고 배웠습니다."
"네 어미는 소리도 명창이거니와 글씨에도 제법 눈을 떴구나. 늙어서 퇴기된 것이 아깝다."
"사군자 치는 법도 어미한테 배웠습니다."
"허허, 네 어미는 과연 명불허전이로다!"
전하는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다시 분부한다.
"네가 초서도 쓸 줄 안다 하니 한번 써보아라!"
비오리는 다시 종이 한 장을 펼쳐 놓았다. 붓을 잡아 쓰기를 시작한다. 왕희지 초서채로 날려 쓰는 한문 용사비등하는 듯, 꿈틀거려 활기가 있었다. 전하는 초서로 휘둘러 쓰는 비오리의 글씨를 바라보시자 깜짝 놀랐다. 비오리의 슬기로운 머리가 여기까지 미칠 줄은 생각도 못 했던 바다.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제조 박연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고많은 명시와 명문이 많은데, 비오리가 어찌해서 이 같은 어려운 글을 쓰나 했다. 비오리는 쓰기를 다하자, 붓을 연상 위에 놓았다. 전하가 말씀한다.
"그것은 한자를 차용해서 이두로 지은 신라 때 향가가 아니냐?"
비오리는 목소리를 나직하게 하여 아뢴다.
"네, 그러하오이다. 신라 때 한자를 빌려 써서 우리말의 시가를 기록한 향가올시다."
전하는 기이하게 생각했다.
"네가 이 글 뜻을 능히 풀이할 수 있느냐?"
"풀이할 수 있습니다."
비오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풀이를 해보아라."
비오리는 방싯 웃고 풀이를 시작한다. 비오리는 흰 이를 드러내 낭랑하게 읽었다. 조금도 서슴지 아니하고 향가를 풀어 읽는 비오리의 태도를 보자 전하는 더욱 신통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처용의 향가어니와, 누가 이 어려운 글을 너에게 풀이해주었느냐?"
"제조 대감께서 '처용무'를 출 때 풀이해주셨습니다."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글씨를 시험해 뵈는 이때, 하고많은 시와 글이 있는데, 어찌해서 하필 이 향가를 옮겨서 썼느냐?"
비오리는 방실방실 웃으며 아뢴다.
"전하께서는 우리나라의 천여 년 사용하는 한자 쓰는 누습을 버리시고 문자혁명을 일으키시어 새로 우리글을 창제하시려 하여, 쇤네까지 부르시어 소리의 음양과 오행을 시험해보셨습니다. 앞으로 우리글을 만드실 때, 한문도 아니요 우리들도 아닌 엉거주춤한 어려운 글이 되지 않도록 새로운 글자를 만드십소서 하고 감히 풍간하는 뜻에서, 향가의 이두를 옮겨 써보았습니다."
비오리의 아뢰는 말은 구슬같이 영롱했다. 전하의 마음을 콱 사로잡았다. 전하와 박연은 비로소 비오리가 초서 글씨로 향가를 옮겨 쓴 까닭을 알았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비오리를 칭찬하신다.
"천하의 기재로다! 네가 만약 남자로 태어났던들, 집현전 학사 중에도 쟁쟁한 학사가 되었을 것을! 아깝기 그지없구나!"
전하는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했다. 다시 비오리에게 말씀을 내린다.
"모든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글을 쉽게 배워서 말과 글이 일치하고 시가의 영창이 곧 우리들로 표현되어서 존귀비천을 말할 것 없이 모두 다 글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글은 특권계급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외국의 글자인 한문만을 전용하게 된다면, 문화는 국민에게 보편되지 못해서 국가와 민족은 쇠퇴해지고 말 것이다. 이러기에 나는 너 같은 아이까지 불러서 소리의 고저, 청탁을 시험해본 것이다.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절대로 이두 따위의 글은 만들지 않을 작정이다!"
전하는 일개 소녀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때마침 어명을 받들고 정원에 나갔던 어전 내시가 출입패를 받들고 들어와 어전에 바쳤다. 상아로 둥글게 병부 비슷하게 조각해 만든 아름다운 출입패다. 전하는 비오리에게 출입패를 주시며 말씀한다.
"네가 궁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니 강제로 궁녀를 만들 수는 없다. 관습도감에 적을 둔 채 후궁에 들어와 하루 한 번씩 후궁들에게 소리의 고저, 청탁을 분별하도록 지도해다오. 네가 내 곁에 있으면 뜨거워서 화상을 입기 쉽고, 궁녀가 되어 대궐 안에 매여 있는 몸이 되면 절벽 같은 우물 속에 빠진 몸이 된다 하니 편법을 써서 출입패를 너에게 준다. 자유스럽게 후궁으로 출입하도록 해라. 비록 네 마음에 합당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나의 문자를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되어주기 바란다."
전하는 정중하게 비오리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내렸다. 비오리는 황공했다. 두 손을 모아 전하가 내리시는 출입패를 받았다. 부복해 아뢴다.
"황공무지하여이다. 미천하온 소인이 어찌 감히 상감마마께옵서 백성들을 위하여 천고에 없던 큰 사업을 경륜하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사오리까. 하교하시는 대로, 다만 여악의 신분으로 후궁마마께 소리의 음향과 오행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전하는 만족한 웃음을 띠셨다. 제조 박연을 향하여 말씀한다.
"경이 지난번 나에게 말하기를, 아름다운 꽃은 바라만 볼 것이지, 꺾지는 말라 했다. 만약에 꽃을 꺾었거든 박정하게 버리지 말라 했다. 버리고 싶어 버린 것은 아니다마는 좋은 교훈이다. 이제 비오리를 내 곁에 두게 하지 아니하고 후궁에 출입하게 한 것은 꽃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 향기만을 간직하려는 것이다. 경은 나의 충정을 알아주기 바란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소리를 높여 호방한 웃음을 웃었다. 역시 궁중에서 내친 취옥의 일이 마음에 항상 걸리는 모양이다. 박연이 아뢴다.
"전하의 지극하신 성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색을 탐하시어 비오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옵고, 만고에 없던 나라의 글을 창제하시기 위하여 비오리를 인견하신 것이옵니다. 비오리의 소원을 청허하시어 궁녀로 삼지 아니하시고 후궁으로 출입케 하시어 음리를 전달하라 하신 일, 실로 감축한 일이옵니다."
전하는 다시 비오리에게 분부한다.
"그러면 내일부터 후궁에 들어와 음리를 지도하라. 네가 지도할 후궁은 숙원 이씨가 될 것이다."
"삼가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비오리는 명을 받들었다. 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하문한다.
"비오리의 어미 소춘풍의 생계는 어떠하오?"
"관습도감에서 퇴사하여 늙은 몸으로 지내기 곤궁한 줄로 아뢰오."
"저 같은 영민한 딸을 두어서 국가에 도움이 되게 했으니 가상하오. 관습도감에서 매월 쌀 다섯 섬씩 특별히 주도록 하오."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전례에 없는 특별한 분부였다. 비오리는 감격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일어나 사배를 드리고 제조 대감과 함께 어전에서 물러났다.
정음의 시작
전하의 성격은 근엄하면서 내성적이었다. 너그럽고 넓으면서도 슬기롭고 치밀했다. 앞일과 뒷일을 차근하게 재어보았다.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새로 글자를 만든다면, 한문식으로 상형을 취해서 뜻을 표현하는 글을 만들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말은 곧 목소리로 이룩되는 것이요, 글은 말을 전달하는 부호다. 글자의 발음으로 천만 가지 가지각색의 말과 소리가 눈을 통하여 전달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다. 글을 읽으면 곧 말이 되어서, 글을 쓴 사람의 음성이 바로 옆에서 말을 하듯 심금을 울려야 한다. 어려운 문자와 괴벽한 글투는 모두 다 필요 없는 일이다. 전하는 이러한 참신한 글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고심하였다. 말과 글이 일치하도록 만들자면 먼저 사람의 음성을 연구해야 했다. 전하는 사람의 말소리가 어떻게 해서 입으로 나오나 하고 궁리해 보았다. 기막힌 조화다. 같은 겨레의 말이라도 남자의 음성과 여자의 목소리가 다르고 또다시 고자의 특이한 음성이 있다. 묘한 이치다. 하늘과 땅 사이 음양과 오행의 이치라 생각했다. 그러나 독단하기 어렵다. 일찍이 함께 아악을 제정했던 음악의 권위인 박연을 불러 고증을 청했다. 사람이 목소리를 내는 데는 목구멍과 혀와 이와 입술의 작용이 필요하다. 교묘한 이치다. 이 네 가지 요소에서 한 가지만 빠졌다 해도 오묘하고 정확한 소리는 나타날 수가 없다. 박연은 늙어서 이가 빠졌다. 정확한 발음을 낼 수 없었다. 관습도감 여악 중에 재치 있는 비오리를 천거했다. 명기 소춘풍의 딸이었다. 전하는 먼저 순수한 우리말로 이름을 지은 비오리에게 관심이 컸다. 다음 소춘풍의 딸이라는 데 호기심을 가졌다. 박연은 비오리를 천거하면서, 몇 해 전 아악을 제정할 무렵 오음을 연구하기 위하여 전하는 여악 취옥을 상침으로 정했다가, 그의 아비에게 가감역 벼슬 한 자리를 달라고 청한 일로 내친 일을 상기시켰다. 꽃은 바라만 볼 것이요, 꺾어서는 아니 된다고 풍간했다. 전하는 기강을 아니 지킬 수 없는 제왕의 처지를 한탄했다. 마음속으로는 취옥을 내친 일과, 어리석고 우둔하다고, 동성연애를 했다고 세자빈을 두 번씩이나 내보낸 일들을 후회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전하는 비오리를 통하여 목구멍소리, 혓소리, 입술의 움직이는 형태를 바라보고, 더욱더 음양과 오행의 이치로 목소리가 나타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더욱더 음성을 연구하기 위하여 비오리를 궁녀로 삼아 궁중에 두려했다. 비오리는 한마디로 거부했다. 권력은 불과 같이 뜨거운 것이니 불에 데기 쉽고, 대궐 속은 함정 같아서 자유가 없다. 미천하지만 여악으로 그대로 있게 해달라 했다. 비오리는 전하의 마음을 꽉 사로잡았다. 전하는 비오리를 놓치기 싫었다. 뿐만 아니다. 글자를 만들기 위하여 소리의 연구는 더 해야만 했다. 꽃은 멀리서 바라만 보고 꺾지는 말리라 결심했다. 역시 인간 세종의 번뇌다. 홀연, 숙원 이씨의 생각이 났다. 비오리를 당신의 편전에 두지 아니하고 후궁 이씨의 처소로 출입시켜서, 소리의 맑고 탁한 것을 더욱 연구할 계획을 차렸다. 제조 박연과 비오리가 어전에서 물러간 후에, 전하는 오래간만에 중전으로 왕후 심씨를 찾았다. 중전은 분합까지 나가서 반갑게 전하를 맞이했다.
"정사 일이 바쁘신데 어떻게 틈을 내시어 왕림하셨습니까? 부르시면 신첩이 대전으로 나가 뵈올 것을--. 황감하여이다."
소헌왕후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아뢰었다. 전하도 화한 안색을 중전을 향하여 말씀한다.
"들어가서 말씀하십시다. 중전과 좋은 일을 의논하러 왔소이다."
내외분은 침전으로 들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전하께서 좋은 일이 계시다 하니, 말씀을 듣기 전에 신첩의 마음은 흐뭇하옵니다."
전하는 옥음을 높여 껄껄 웃으며 말씀한다.
"나는 새로이 또 한 가지 큰일을 시작하려 하오. 중전도 이 점에 대해서 많이 유의해주셔야 하겠소."
큰일을 시작했다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소헌왕후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어떠한 큰일을 경륜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첩이 어찌 감히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유의해서 참견을 하오리까. 황공하신 분부올시다. 도대체 어떠한 큰일이오니까?"
"중전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는 단군이 건국하신 지 삼천 수백 년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국문이 마련되지 못했소이다. 말로 전해오기는 옛 조선에 어떠한 글자가 있었다 하나 고증할 길이 없고, 고구려, 백제, 실라 이후에 한문을 수입해서 오늘날까지 우리글처럼 사용하고 있었소이다. 그러나 글과 말은 달라서 일부 한정된 특수한 계급 사람들만이 십 년, 이십 년 전문으로 공부해야만 겨우 알게 되고, 모든 국민과 여자들은 어려워서 배울 수가 없으니 딱하기 한량없는 노릇입니다. 글은 문명의 근본인데, 일부 양반계급에서만 지식인이 되고 모든 국민과 여자들은 캄캄절벽인 무식한 사람이 되어서 일생을 허무하게 보내니 딱하기 그지없소! 이래가지고야 남의 나라와 어깨를 겨누어 생존을 유지하는 문명한 민족이 될 수 없소. 그리고 독립한 뚜렷한 나라로서 독특한 글이 없다는 일은 겨레의 수치라 하겠소.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남자와 여자를 말할 것 없이 모두 다 글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나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글자를 만들려 하오!"
전하의 말씀을 듣자, 소헌왕후 심씨는 감동된 표정이 옥안에 가득했다. 공손하게 말씀을 올린다.
"갸륵하시옵니다. 전하께옵서는 남왜 북적을 소탕하시어 변방에 근심이 없으니 백성들이 평안히 생업에 종사케 되었고, 또다시 영준을 뽑으시어 학문의 전당인 집현전을 이룩하신 외에 아악을 제정하시어 화한 기운이 신과 사람 사이에 가득하게 하시고, 또다시 우주만상의 집을 설치하시어 천지인 삼재의 조화를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알려주시고, 이번엔 더 큰 사업으로 우리나라의 글자를 새롭게 구상하신다 하니, 감격한 말씀 형언해 아뢸 길 없습니다."
전하는 웃으며 소헌왕후께 대답한다.
"마마는 나보고 갸륵하다 하지만, 그것은 과하게 칭찬하는 말씀요, 나라의 책임을 맡은 지도자가 국민의 복된 일과 이로운 일을 위하여 궁리하고 실천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어쨌든 이번 우리글을 새로 만드는 이 사업에 중전마마의 협조가 많이 있어야 하겠소이다."
소헌왕후는 공손히 아뢴다.
"글을 새로 만드시는 데 저 같은 아녀자가 감히 무슨 지식이 있다고 도와드리겠습니까마는,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기왕 새로이 우리 글을 만드신다면 한문과 같이 어렵게 만들지 마시고, 말과 글이 일치해서 말이 곧 들이 되고 글을 읽으면 말이 되는 것으로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하는 왕후의 말씀을 듣자 용안에 웃음이 활짝 열렸다.
"마마의 뜻도 내 뜻과 꼭 같구려. 내가 지금 글을 구상하고 있는 것은 한문식의 어려운 글이 아니고 우리의 말소리를 글자로 표현시켜서, 중전이 말씀한 대로 말이 곧 글이 되게 하고 글을 읽으면 곧 우리가 말하는 것과 같이 마련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리해야만 어리석고 백성들도 노소남녀를 말할 것 없이 모두 다 글을 쉽게 배우고 쉽게 익혀서 지식이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되도록 할 작정입니다."
왕후는 무릎을 쓸고 공손히 아뢴다.
"밝으신 통촉이십니다. 후궁서부터 상궁과 궁녀들에 이르기까지 진서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전하께서 연전에 간행하신 당명황과 양귀비의 이야기 '명황계감'이나, '이륜행실' 같은 것도 모두 다 한문으로 되어 있으니 일반 궁녀들은 땅띔도 못합니다. 눈뜬 장님입지요. 호호호."
"과연 그렇소이다. 그러기에 나는 문자혁명을 단행해서 자손만대에 훌륭한 우리글이 전해지도록 지성을 다해서 구상하는 중입니다. 이것이 나의 이 나라의 임금된 책임입니다. 이 사업은 기어코 내 생전에 완성이 되어야 하겠소이다."
"전만고에 없던 쉬운 글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우리들은 학문과 지식을 섭취하기에 편리하겠습니까? 국가를 위하여 크나큰 행복이올시다. 그러나 저에게 도와 달라 하시니, 신첩이 무슨 학식이 있다고 감히 전하께서 구상하시는 큰일에 말씀드릴 자격이 있습니까? 그저 마음속으로 감축하고 기쁘기만 할 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전하는 껄껄 웃으며 말씀한다.
"하하하. 중전마마께 내가 도와 달라고 말씀한 것은, 마마보고 글자를 창제하는 데 구상을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의 연구를 궁중 지밀 안에서 먼저 시작해야 하겠소이다. 만약에 내가 한문을 폐지하고 문자혁명을 일으켜서 언문을 창제한다고 조정에 공개해 놓는다면 나의 말소리에 대한 연구는 끝도 나기 전에, 한문만을 숭상하는 완고한 선비들은 반대하는 여론을 일으켜서 떠들어댈 것입니다. 밥이 익기도 전에 솥이 깨지고 말 테니, 문자혁명을 일으킨다는 말을 아직 조정엔 말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지밀 안에서 소리를 연구해보려 합니다. 그리해서 마마와 의논해 보는 것입니다."
소헌왕후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직도 도와 달라는 전하의 뜻을 몰랐다. 전하께 묻는다.
"완고한 신하들로 인하여 새로 글자 만드시는 일을 조정에 말씀하시지 않고 시작하신다는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옵서 지밀 안에서 정음을 연구하시는 데 누가 감히 감놔라 배놔라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크나큰 위업을 하루빨리 완성하옵소서. 그리하옵고 신첩에게 도와 달라 하신 일이 어떠한 일이온지 명백하게 분부를 내려줍시오."
전하는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중전마마께 허락을 얻을 일이 있어서 협조를 청한 것입니다. 허허허."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제가 어찌 감히 이론을 일으킬 까닭이 있습니까. 지나치신 분부십니다."
"내가 혼자 편전에서 정음을 연구한다면야 중전마마와 의논할 까닭이 없소마는, 후궁들과 함께 여악을 불러놓고 음의 고저, 청탁을 연구해보려 하오. 중전마마는 내외명부를 통솔하고 계신 몸이니, 어찌 중전께 말씀을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함부로 처리하겠소이까?"
소헌왕후는 비로소 전하가 도와 달라는 뜻을 짐작했다. 웃으며 아뢴다.
"후궁들에게도 소리의 고저, 청탁을 가르쳐주려 하십니까?"
"사람의 목소리는 조물주의 오묘한 이치로 음양과 오행에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글자를 새로 만들게 된다면, 이 이치를 확실하게 파악해야만, 말이 곧 글이 되고 글이 곧 말과 같이 소리를 낼 수 있는 글자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귀에 가지각색의 소리를 무르녹도록 익혀놓아야만 비로소 훌륭한 글자를 만들 성싶소."
소헌왕후는 다시 웃으며 아뢴다.
"하늘과 땅 사이의 음양과 오행의 깊은 이치를 연구하시어 글을 만드시려면, 전하께서 조용한 서재에서 음리 아는 사람을 옆에 두시고 연구하시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합니다. 어느 해가에 후궁들에게 소리 나는 이치를 가르쳐서 전하께서 연구를 하려 합니까? 난계 박연과 같은 악리와 음리에 달통한 사람을 곁에 두시고 주야로 연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왕후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허허허. 중전의 의사도 나와 꼭 같구려! 나도 그래서 관습도감 제조 박연을 청해서 음양과 오행에 관련되는 발성을 시험해 달라고 했던 것이오. 그러나, 박연은 벌써 늙었구려! 이가 빠져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해서 오늘 명기 한 아이를 천거해서 데리고 들어온 일이 있었소이다."
왕후의 눈에 광채가 반짝 돌았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그 애를 서재에 두시고 음리를 연구해보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하셨습니다."
전하는 또 한 번 크게 웃으며 말씀한다.
"나이는 열칠팔 세가량 된 계집앤데, 이름을 비오리라 합니다!"
"비오리? 홍도니, 벽도니 하는 재래의 기생들 이름과는 아주 딴판입니다그려."
"순수한 우리말이지! 어려운 한문을 버리고 우리말로 글을 만들려고 구상하는 나에게 첫 번째로 호기심을 갖게 했소이다."
첫 번째로 전하의 호기심을 갖게 했다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왕후는 입을 가리고 소리를 죽여 웃었다.
"참으로 산뜻하고 예쁜 이름이올시다. 얼굴도 묘하겠군요?"
"예뻐. 얼굴도 매우 예뻐! 그야말로 참 재색이 겸비하거든. 바로 옛날 명기 소춘풍의 딸이라는구려."
왕후의 눈이 또 한 번 번쩍 떠졌다.
"선대왕마마 때, 공신잔치에 쓸개 빠진 무변대장을 시조로 놀려서 떡 주무르듯 했다는 영흥 명기 바로 그 소춘풍의 딸입니까?"
"옳소이다. 바로 그 소춘풍의 딸입니다. 소춘풍은 늙어서 관습도감에서 나와서 퇴기가 되고 그 대신 딸 비오리를 들여보냈는데, 어찌 그리 총명하고 영리한지 글도 잘하고 글씨도 잘 쓸 뿐 아니라 음악과 성운에도 달통해서 문일지십을 하므로 제조 박연이 낙치된 자기를 대신해서 나의 연구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하여 비오리를 데리고 들러온 것입니다."
"그래, 전하께서는 소리를 시험해보셨습니까?"
"소리를 시험해보기 전에, 어찌해서 이름을 다른 기생들과 같이 한문식으로 짖지 아니하고 순수한 우리말로 지었느냐 했더니, 어미가 지어준 비연이란 이름을 싫다 하고 오색이 영롱한 우리말로 된 비오리가 좋아서 그리 지었다 하는구려! 그 말대답이 또한 이름과 같이 내 마음에 들었소이다. 지식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고려가사 '만전춘'의 비오리 노래를 아느냐 했도니, '소에만 살지 말고 여울로 오라'는 그 한 절을 기가 막히도록 잘 부르는구려. 그리고 마지막 절 '남산에 자리보아, 사향각시를 아나누어'를 창으로 한번 불러보라 했더니, 근엄하신 대궐 안 전하 앞에서는 함부로 부를 노래가 아니라고 사양하면서 절대로 아니 부르는구려. '만약 이 소문이 조정에 퍼진다면 신하들이 떠들어대서 상감마마를 괴롭게 할 테니 죽어도 못 부르겠습니다.' 하고 사양하는구려! 어린것이 제법 체통을 지킬 줄 안단 말씀야."
"가상합니다."
왕후도 칭찬을 했다.
"다음에 소리와 시조의 음양을 가지고 논란하고 영가를 하는데, 포은 정몽주의 시조를 양이라 하고 선대왕 태종마마의 시조는 음이요, 목은 이색의 시조는 중성이라 하는 등 제법 조리가 분명하게 구별하는구려. 다음에 가서 오행을 따져서 목구멍소리, 혀늘림 소리, 입소리를 분간해서 내는데 과연 놀랐소이다. 앞으로 나의 문자를 형성하는 데 크나큰 참고가 될 듯하오. 그래서 후궁으로 이 애를 드나들게 해서 숙원 이씨 방에서 모든 후궁들과 함께 연구를 하려고 마음을 정하고 마마의 도움을 청한 것이외다."
황후는 조용히 웃으며 아뢴다.
"번거롭게 그러실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문자를 만드시는 데 꼭 필요하시다면, 아까도 아뢴 바와 같이 전하께서 조용히 서재에서 비오리를 데리고 연구하시는 것이 빠른 길이라 생각합니다. 비오리를 항시 서재에 두시고 정음을 연구하십시오."
전하는 껄껄 웃으며 말씀한다.
"나도 처음엔 그 생각이 아주 없지 아니했소. 그러나 또다시 까닭이 있어서 생각을 고친 것이오."
전하의 '까닭이 있어서 생각을 고쳤다'는 말씀을 듣자, 왕후의 눈이 별빛같이 반짝했다.
"무슨 까닭이 있었습니까?"
"나도 처음에는 비오리에게 궁중에 들어와 궁녀가 되어서 나의 정음 연구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소이다. 그러나 비오리는 한 말로 나의 말을 거절했소이다."
왕후의 눈이 또 한 번 별빛처럼 빛났다.
"저런 괘씸한 계집이 있습니까. 언감생심 어전에서 감히 상감마마의 하교를 못 받들겠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방자한 계집이올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다고 했습니까?"
전하는 또 한 번 껄껄 웃으며 말씀한다.
"나도 처음엔 괘씸하게 생각했소. 노하기도 했소이다. 그러나 말을 듣고보니, 그럴듯했습니다. 대단한 계집입니다."
"대단하다니, 무어라고 아뢰었습니까?"
왕후의 음성도 약간 흥분이 되었다.
"제왕의 권력은 마치 활화산의 불길 같으니, 가까이 있으면 화상을 당하기 십상팔구요, 구중궁궐은 마치 석벽을 층층이 쌓아 올린 열 길 스무 길의 우물 속 같아서 한 번 빠지면 자유가 없으니, 아무리 지엄하신 명령이라도 죽을지언정 하교는 받들지 못하겠다 합디다. 맹랑한 계집애였습니다. 허, 허, 허."
"깜찍한 계집애올시다. 그래, 그 계집애를 그대로 두셨습니까? 금부로 내리시지요."
"바른말을 하고 옳게 행동을 취하려는 영민한 아이를 어찌 하옥을 합니까? 그리하면 내가 폭군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아쉬워 성운을 분간하려고 제조에게 청해 불러온 아이를 어찌 죄를 줍니까? 그리한다면 제 말대로 구중궁궐은 정말 함정이 아닙니까? 하하하."
왕후의 표정은 약간 못마땅한 듯했다.
"그래, 그 애를 그대로 쓰시렵니까? 도대체 지나치도록 매서운 계집이올시다."
"누구한테, 임금의 권력이 불과 같이 뜨겁고 구중궁궐이 천 길 우물 속 같아서 한 번 들어가면 자유를 잃고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들었더냐 했더니, 제 어미 소춘풍한테서 들었다 합니다. 그리고, 실지로 증거가 있어서 전철을 밟지 않겠다 했습니다."
"전철이 있다니요?"
왕후의 눈은 둥그렇게 떠졌다.
"쫓겨난 취옥의 말을 했습니다!"
왕후의 눈은 스르르 감겼다. 잠시 생각 속에 빠지는 듯했다.
"똑똑한 아이올시다!"
한 마디가 떨어졌다. 괘씸하다던 계집이 똑똑한 아이로 변했다. 전하는 또다시 크게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솜방망이로 한 대를 얻어맞은 듯했소이다! 제조 박연도, 나한테 한 말이 있었소이다. 아름다운 꽃은 바라만 보고, 꺽지는 말 것이라 했습니다. 만약 잘못해서 꺾었다면 후하게 할 일이지, 박정하게 해거는 아니 된다 했습니다. 오월 여름날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더군요! 나한테 크나큰 교훈을 준 아이올시다. 그리해서 나는 다시는 꽃을 꺾지 않고 바라만 보려고, 내 서재에 두지 아니하고, 여악의 자격으로 비오리를 후궁에 출입시켜서, 여러 후궁들과 함께 성운을 판단하려 했소이다. 그리해서 마마와 상의하는 것입니다."
전하의 말씀은 진지하고 간곡했다. 왕후의 마음은 비로소 후련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말씀한다.
"황공하오나, 어디 두고 보겠습니다. 전하께서 아름다운 꽃을 바라만 보시고 꺾지 아니하시나. 하하하."
전하도 호방한 웃음으로 대답한다.
"내 마음은 철석이외다. 한번 하기로 작정한 일은 기어코 하고 마는 성미구, 아니하기로 결심한 일은 결연히 아니합니다."
"그러나 여자에 대해서는 장담을 하시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하하."
전하는 얼굴빛을 고쳤다.
"중전, 그게 무슨 말씀요? 내가 여자에 대해서 어찌했다구?"
왕후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아뢴다.
"전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서 큰 사업도 많이 하십니다마는, 여자에 대해서도 욕심이 많으십니다. 그러니 앞으로 꽃을 꺾으실는지, 바라만 보시고 만족해하실는지, 두고 봐야만 하겠단 말씀입니다. 하하하."
"내가 여자에 대해서 무슨 욕심이 많았단 말씀요? 모를 소리로구려."
왕후는 또 웃으며 말씀한다.
"증거를 대야만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정궁인 신첩 외에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숙원 이씨, 상침 송씨들 다섯 사람의 후궁을 두셨으니 정궁인 신첩까지 친다면 여섯 여자를 거느리셨고, 내치신 취옥이까지 친다면 일곱 여자올시다. 이제 비오리까지 꺾으신다면 팔선녀가 됩니다. 그래도 전하께서는 여자에 대해서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하하."
전하는 쓴웃음을 웃으며 대답한다.
"그것은 중전이 억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임금은 후궁을 두는 법이라고, 마마가 간택을 해서 뽑아놓고 내가 호색을 해서 후궁을 많이 둔 것같이 말씀하시니, 어이가 없소이다. 그리고 내친 취옥이만 해도, 아악을 창제할 때 음리를 연구하기 위하여 편전으로 출입시킨 것을, 여악이 편전으로 출입하는 것은 궁중 기율에 좋지 않다 해서, 마마가 억지로 나에게 권해서 상침을 삼았던 것이 아닙니까? 하하하. 이거야말로 과연 무정지책이로구려."
전하는 쓴웃음을 웃었다. 대답할 말이 없다.
"그거야 잠시 방편이었지--. 하하하. 내가 아주 욕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야. 하하하. 그러기에 취옥을 내친 후에 '명황계감'을 만들어서 나 자신을 경계했거든. 하하하."
"철이 나셨군요! 하하하."
지밀 안 그윽한 내전 침실 속에서는 내외분의 밀어가 이같이 화기롭게 날개를 펼쳤다. 전하는 다시 껄껄 웃으며 말씀한다.
"철이 난 것이 아니라, 임금 노릇을 하자니 이같이 걸리는 일이 많고 얽매어서 지내게 되는구려! 비오리의 말과 같이, 구중궁궐 대궐 속은 마치 천 길 우물 속과 같아서 한 번 들어가면 자유를 잃어서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란 말야! 비오리는 어린 계집이지만, 제법 달관을 했거든--. 그러기에 나는 관습도감 제조 박연을 향하여 말한 일이 있소. 우리 형님 양녕대군이 부럽다고--. 맘대로 천지간을 두루 방랑하면서 강산풍월을 즐기고 술 마시며 노래하고, 모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매인 데 없이 한평생을 훨훨 지낸단 말야. 부럽기 한량없거든--. 하하하."
"전하뿐이옵니까. 신첩도 그러합니다. 비오리를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나이 어린것이 제법 사리를 판단할 줄 압니다. 영민한 계집애올시다. 전하께서 궁인이 되라고 분부를 내리셨다면 보통 여자들은 감지덕지해서 황공하게 처분을 받았을 텐데, 당돌하게 앉은 자리에서, 줄에 데기 쉽고, 우물 속에 빠져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사퇴하는 말씀을 어찌 올리겠습니까? 과연 똑똑한 아이올시다. 저도 정궁인 왕후가 된 탓으로 한평생 마음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비가 죄 없이 역적으로 몰려 죽어도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수원에서 사약을 받으시고 절명이 되셨다는 그 참혹한 소식을 들었을 때, 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무서우신 선대왕 태종마마의 감시를 받으면서 한 번 곡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삼 년 거상 옷도 입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지존의 배필이 된 탓입니요! 오늘 성주를 모시고 아무 근심 걱정이 없이 지냅니다마는 궁중을 통솔하는 왕후가 된 까닭으로, 근엄한 기율을 지키기 위하여 적악을 한 셈이죠! 일부함원에 오월비상이란 그 정을 알고도 과감하게 정을 끊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전하께서 취옥을 내치신 그 일에 비하여 더한층 기막힌 일이올시다."
왕후는 말씀을 마치자, 슬프고 괴로웠던 옛일을 회상하면서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지난 일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현실에 충실하게 직분을 지켜서 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소. 나는 이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할 책임을 진 사람이고, 후마마는 나와 동신일체인 배우자이구려. 이제 백성들을 위하여 새로 글을 만드는데 후마마도 힘을 많이 써주어야 하겠소."
"신첩이 무슨 학식이 있다고 감히 전하께서 나라의 글을 창제하시는 데 도움이 되오리까마는, 지시하시는 대로 받들겠습니다."
"내일부터라도 비오리를 숙원 이씨의 처소로 불러들여서, 소리의 발성과 음운의 고저, 장단을 후궁들이 깨닫도록 해주시오. 나는 틈 있는 대로 가끔 들어가서 정음을 연구하려 하오."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소헌왕후는 비오리를 편전에서 단독으로 만나지 아니하는 한편, 문자혁명을 일으키려고 노심하는 일은 아직 조정에 알리지 않으려 하여, 연구 장소를 후궁으로 택한 전하의 심정을 비로소 짐작했다. 전하가 왕후에게 부탁을 하고 대전으로 돌아간 후에, 왕후는 모든 후궁들을 중전으로 불렀다.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의 삼빈을 위시하여, 숙원 이씨, 상침 송씨가 차례로 들어와 왕후께 알현했다. 모든 후궁들은 달덩이 같고 꽃 떨기 같았다. 이 중에는 장성한 아들을 둔 후궁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얼굴이 고와서 색향이 스러지지 아니했다. 다섯 후궁 중에 빈으로 봉하여 맞아들인 강씨, 김씨, 양씨는 태종이 생존했을 때, 태종의 명을 받들어 양갓집 여자를 간택해서 뽑아 들인 후궁이요, 숙원 이씨와 상침 송씨는 전하와 왕후가 정화를 주고받을 때 전하가 말씀한 대로, 자의로 궁녀 중에서 방편에 의해서 친밀하게 되어 후궁으로 삼은 여인들이다. 숙원 이씨는 후궁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리고, 총명 영리했다. 진서를 읽을 줄 알았다. 글자도 곧잘 썼다. 매, 난, 국, 죽의 사군자도 칠 줄 알았다. 얼굴도 절묘했다. 전하의 우로의 은총이 항상 마르지 아니했다. 까닭에 전하는 이번 정음을 연구하는 태실을 숙원 이씨의 처소로 정한 것이다. 갑자기 왕후의 부름을 받은 후궁들은 까닭을 알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왕후마마께 문후를 드린 후에 좌우에 공손히 시립했다. 왕후는 모든 후궁들의 사후를 받은 다음 천천히 말씀을 내린다.
"오늘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전하의 하교를 받들어서 너희들을 부른 것이다."
모든 후궁들은 눈길을 왕후마마한테로 돌렸다. 다음 말씀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전하께서는 이번에 새로 또 큰일을 경륜하신다."
전하께서 새로 큰일을 경륜하신다는 말씀을 듣자 모두들 궁금했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전만고에 없던 우리의 글을 만들려고 노심초사하시는 중이다."
후궁들의 눈이 왕후의 얼굴로 향했다. 어리둥절했다.
"우리나라에는 어려운 진서밖에 없다. 수천 년을 두고 그같이 내려왔다. 이리해서 글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양반계급의 남자뿐이었다. 나도 무식하다마는 너희들도 진서가 어려워서 배우기 어렵다. 이리해서 숫제 여자들과 상사람들에게는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배울 생각들도 아니했다. 모두 다 눈뜬장님이 되어서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열녀전'이나 '효부록'을 백 번 간행한들 여자들과 상사람들은 읽어볼 수가 없으니 소용이 있느냐. 사람에게 있어서 지식은 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다. 글을 읽어서 지식을 섭취하지 못한다면 몽매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과 다름이 없다. 전하께서는 수천 년 내려온 이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모든 백성과 여자들이 배우기 쉬운 우리글을 새로 만들려고 노심하시는 중이다."
모든 후궁들은 전하께서 배우기 쉽고 알기 쉬운 새로운 글을 만드신다는 왕후의 말씀을 듣자, 기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후궁 중에 나이 지긋한 신빈 김씨가 아뢴다.
"갸륵하신 일이올시다. 수천 년 동안 제왕들이 감히 생각도 못 했던 나라의 글을 만드시어 서민과 여자들의 지식을 넓혀주신다 하니 국가의 경사올시다. 감축하옵니다."
왕후가 다시 말씀한다.
"전하께서는 그동안, 제조 박연과 여악 비오리를 편전으로 부르시어 글자를 만드시는 연구를 하신 일이 있었다. 앞으로 계속해서 연구를 하셔야 할 텐데, 여악을 매일 편전으로 출입시킨다면 불편한 점이 많을 뿐 아니라, 여악 비오리를 궁인으로 만들어야 할 텐데, 비오리는 죽어도 궁녀는 되기 싫다 하므로 전하께서는 생각하신 끝에 숙원 이씨의 처소로 전하의 음성을 연구하시는 장소를 정하시는 한편, 너희들에게도 소리의 음양, 오행을 시도하시자는 뜻인가 보더라."
모든 후궁들은 여악 비오리가 죽어도 궁인이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말씀을 듣자,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연옥색 저고리에 자주 고름을 떨어뜨리고 남치마의 정장으로 차린, 청초하게 생긴 강빈이 왕후께 묻는다.
"사람마다 여자들은 천안을 바라뵈옵고 지척에 모시어 승은하기를 원하는 것이 여자의 상정이온데, 비오리는 어찌해서 궁인 되기를 원치 아니합니까?"
소헌왕후는 껄껄 웃으면 말씀한다.
"나 역시 네 생각과 같아서 전하께 까닭을 물었다. 그랬더니 전하께서 비오리의 사절한 뜻을 전해주셨다. 제왕의 권위는 화염과 같으므로 가까이하면 화상을 당하기 쉽고, 구중궁궐 속은 마치 천 길 물속 같아서 한 번 빠지면 나올 길이 없으니 절대로 대궐에서 생활하는 궁인이 되기는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하하."
소헌왕후는 말씀을 마치자 드높게 소리를 높여 웃었다. 신빈 김씨가 달덩이 같은 환한 얼굴에 함박꽃 같은 웃음을 풍기고 아뢴다.
"어린년이 깜찍하도록 방자합니다. 그러나 그럴 듯, 일리가 있는 말이올시다. 호호호."
혜빈 양씨가 온화한 음성으로 아뢴다.
"그렇지만 어전에서 일개 어린 여악이 어찌 감히 그런 방자한 말씀을 아룁니까? 아무리 성음에 통달했다 하나 무엄하기 짝이 없습니다."
왕후는 또다시 미소하여 말씀한다.
"처음에 전하께서는 진노하셨더란다. 그러나 비오리는 실증을 들어 말씀하는데 전하께서도 꼼짝을 못 하셨더란다."
"무슨 증거를 들어 말씀했다 합니까?"
신빈 김씨가 물었다.
"내쫓긴 취옥의 일을 들어 말하는데, 전하께서는 그만 대답할 말씀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기특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꽃은 멀리 바라보아야지 꺾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비오리를 숙원 이씨의 처소로 출입시켜서 너희들에게 발성의 이치를 알게 하는 한편, 전하께서는 옆에서 발음을 들으시고 글자를 구상하시려 하여 나에게 분부를 내리신 것이다."
모든 후궁들은 비로소 전하께서 숙원 이씨의 처소를 글을 구상하는 곳으로 정한 뜻을 알았다.
정음의 태실
신빈 김씨가 아뢴다.
"도대체 비오리란 여악은 누가 전하께 천거했습니까?"
"관습도감 제조 박연이 천거했다 한다. 전하께서는 먼저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를 연구하시기 위하여 박연을 청해서 의논하셨다. 천지조화의 이치로 음양과 오행에 기인되어 소리가 나타나는 것을 판단하시고 이것을 박연에게 시험해보라 하셨더란다. 그러나 박연은 연로해서 낙치가 되어 정확한 발음을 내지 못한다 하면서 대신 여악 비오리를 천거했더란다. 그런데 비오리는 저 유명한 명기 소춘풍의 딸이었다 한다."
비오리가 소춘풍의 딸이란 말씀을 듣자, 모든 후궁들은 놀랐다. 진달래빛 분홍 저고리에 남치마를 두른 숙원 이씨가 아뢴다. 후궁 중에 그중 나이 젊고 날렵해 보였다.
"옛날, 선대왕 태종마마 때, 공신잔치에서 무변재상을 시조로 읊어서, 떡 주무르듯 했다는 바로 그 소춘풍의 딸이오니까?"
"그렇더란다."
왕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같이 똑똑합니다그려."
강빈이 말참예를 했다.
"전하께서는 소춘풍의 딸도 딸이려니와,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비오리라고 지은 것을 보시고 먼저 호감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그렇군요. 기생 쳐놓고 우리말로 이름을 지은 기생은 전무합니다."
김빈이 대답했다.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대단 총명 영리한 계집인가보더라. 좌우간 전하의 하교를 받들어 숙원 이씨는 정결하게 방을 치워놓고, 내일부터라도 비오리가 들어와서 성음을 시험하도록 채비를 차려라. 그리고 전하께서도 임어하실 것이다. 나도 가끔 나가서 너희들의 화성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숙원 이씨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왕후는 또다시 말씀을 내린다.
"너희들에게 한 마디 더 일러둘 말이 있다. 전하께서는 어찌해서 글자를 구상하시는데 숙원 이씨의 처소로 택하신 것을 알겠느냐?"
신빈 김씨가 달덩이 같은 환한 얼굴에 웃음을 풍기며 아뢴다.
"숙원 이씨가 총명 영리하고 예쁜 까닭이올시다. 호호호."
"그것만이 아니다."
왕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청초하고 쌀쌀하게 생긴 강빈이 아뢴다.
"비오리가 궁인 되기를 원치 아니했을 뿐 아니라, 전하께서 편전으로 비오리를 드나들게 한다면 취옥이 때처럼 말이 많을 테니, 일부러 멀찍이, 숙원 처소에 두시고 성음을 연구하시려는 뜻인가 봅니다."
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빈의 말이 옳다. 궁인이 되기 전에는, 전하의 침실에 무상출입 할 수는 없다. 그러하니 연구는 하셔야 하겠고, 잡음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너희들과 함께 무르녹게 시험해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큰 이유가 있다."
"또 무슨 곡절이 있습니까?"
숙원 이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께서 한문을 폐지하고 새로 우리글을 만드시려고 구상하는 것을 완고한 선비들이 안다면, 별별 항의하는 상소가 빗발치듯 할 테니 아직 비밀에 부치기 위해서 궁중 지밀에서 먼저 연구를 해보시려는 것이다."
모든 비빈들은 비로소 전하의 뜻을 알았다. 다음날 전하는 편전에서 별감을 불렀다. 지난번에 관습도감으로 나가서 제조 박연과 비오리를 청해왔던 젊은 별감이었다.
"너 관습도감에 나가서 제조 대감께 말씀하고, 여악 비오리를 데리고 숙원 이씨 처소로 들어오너라. 비오리에게는 미리 출입패를 주었으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수문장에게 보이면 무사통과시킬 것이다."
"삼가 봉명하겠습니다."
대전 별감은 난간 밖에서 분부를 받았다. 전하는 다시 옥음을 높여 말씀한다.
"이놈, 오늘도 전번처럼 관습도감에 들어가서 넋을 잃고 천방지축 기방만 기웃거리다가 내 말을 늦게 전한다면 참형에 처하리라!"
별감은 땅에 코가 닿도록 굽실거렸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어찌 다시 또 철없는 짓을 하오리까. 명심하오리다."
별감의 등에는 찬 땀이 흘렸다. 전하는 또 한 번 옥음을 높여 엄포를 내린다.
"어디 두고 보자. 빨리 갔다 와서 복명을 해라!"
별감은 전상을 향하여 열 번, 스무 번 굽실거리고, 대전에서 물러났다. 젊은 별감은 마음이 거뜬했다. 홍의 자락을 펄펄 날리며 쏜살같이 관습도감으로 향했다. 제조 대감과 비오리는 목숨을 구해준 재생의 은인이었다. 고맙다고 한마디 말이라도 전해야 할 텐데, 말할 틈이 없었다. 지난번에 입궐했다가 관습도감으로 돌아갈 때는 밤도 늦었을 뿐 아니라, 내관이 궐문 밖까지 전송을 했으니, 어느 때 나간 줄도 몰랐다. 일부러 관습도감에 나가서 제조 대감과 비오리한테 목숨을 구해준 큰 은혜를 고맙다고 해야 할 텐데, 대전에 매인 몸이라 촌가가 없었다. 이제 어명을 받들어 관습도감으로 나가게 되니, 인사를 차릴 종은 기회라 생각했다. 별감은 바짓가랑이에서 비파 소리가 나도록 홍의 자락을 펄펄 날리면서 미투리 신은 발길을 옮겼다. 관습도감 솟을대문 안으로 쓱 들어섰다. 도감 안에는 전과 같이 풍악 소리가 자지러졌다. 이곳저곳에서 녹의홍상의 미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천자만홍의 꽃떨기 같은 아름다운 미인들의 교성과 교태가 눈에 얼씬거렸다. 넋을 잃고 기방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제조 대감께 어명을 빨리 전하지 아니 했다고 꾸지람을 듣고, 악공들한테 잡혀서 호랑 감투를 쓸 뻔했던 생각이 났다. 별감은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는 미인들을 아니 바라보리라 했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한 손으로 귀를 막았다. 벌에 쐰 사람처럼 달음질쳐 제조청으로 올랐다. 이곳저곳에서 미녀들의 쇠된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 감투를 쓸 뻔했던 대전 별감이 또 왔다!"
"어디?"
"참말, 바로 그자로구나!"
"왜 또 왔느냐. 낯짝도 두껍구나. 부끄럽지도 않은가!"
대전 별감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빨리했다. 미인들의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악공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번에 별감에게 호랑 감투를 씌우려 했던 악공들이다. 별감을 바라보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별감은 무안했다. 얼굴을 붉히고 악공들에게 굽실했다.
"제조 대감께 어명을 전하러 왔소이다."
별감의 태도는 전번에 비해서 공손하고 순박했다.
"지난번에 톡톡히 망신을 당하더니, 인제 제법 체모를 차려서 사람다운 구실을 하는군!"
"한 번 혼뜨검을 당하더니 아주 딴 별감이 되었구나!"
악공들은 웃으며 빈정댔다. 별감은 여악과 악공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목숨을 구해준 제조 대감과 비오리의 큰 은혜를 생각해서 놀리고 빈정대는 모든 모욕을 꾹 참았다. 악사장이 나타났다. 별감은 제조 대감께 뵙기를 청했다. 제조 박연은 위에서 분부가 내릴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체없이 별감을 불러들였다. 별감은 처에 올라 제조 대감께 절해 뵙고 어명을 전했다.
"상감마마께서 대감께 아뢰고 여악 비오리를 날마다 입궐시키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비오리한테 연통을 할 테니, 잠시 기다리게."
제조의 말씀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별감은 벌떡 일어나서 경건한 얼굴로 큰절을 올리며 아뢴다.
"대감께서 소인의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그로 인하와 팔십 노모도 무사하게 지냅니다. 이 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벌써 나와서 대감께 고맙다는 말씀이라도 아뢰어야 할 터이온데, 대전에 매인 몸이오라 틈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명을 받들어 나온 길에 인사 말씀을 드리게 되었으니 죄송만만합니다."
별감의 눈에서는 감사해하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순박한 마음의 발로였다. 제조는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자네가 행실이 좋지 못해서 저지른 죄가 아닐세. 나도 자네 심정을 짐작하고 상감께 큰 허물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일세. 젊은 놈이 별안간 꽃밭 속으로 발을 들여놨으니 마음이 현혹되지 않는다면 도리어 인정이 아니지. 하하하, 이제부터는 그러한 아리따운 천자만홍의 꽃떨기를 보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의 공부를 해야 하네. 하하하."
쾌활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젊은 별감을 타일렀다. 이내, 제조 대감은 비오리를 불렀다. 비오리도 대궐에서 사람이 올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연분홍 저고리에 남치마로 정장을 차리고, 위에서 내린 상아 출입패를 손에 들고 나왔다. 별감은 비오리를 보자 벌떡 일어나 절을 올리며 말한다.
"목숨을 살려준 은인께 고마운 인사를 드리네!"
비오리는 당황했다. 어찌할지 몰랐다. 황망히 답례를 했다.
"언제나 궁중 출입을 할 때는 내가 판교채를 잡고 모시겠네!"
별감은 비오리한테 은인이라 해서 절까지 했다. 제조 대감은 별감의 순진한 마음을 가상하게 생각했다.
"그리하게나. 자네가 비오리를 잘 보호하게나!"
허락을 내렸다. 도감 마당에는 비오리가 타고 들어갈 판교와 교군이 대령되어 있었다. 비오리는 제조 대감께 인사를 드리고 별감과 함께 청에서 내려, 판교 앞으로 향했다. 악공과 동료 여악들은 비로소 비오리가 상감께 부름을 받다 대궐로 들어가는 것을 알았다. 지난번에 제조 대감이 상감의 어명을 늦게 전했다고 별감을 벌준 후에 부랴사랴 비오리를 데리고 들어간 일이 있더니, 이번에 비오리가 또다시 부름을 받고, 단독으로 입궐하는 것을 보자, 상감마마의 눈에 들어서 궁인이 되어 들어가는 줄 알았다. 앞채 뒤채에서 노래공부를 하던 여악과 악공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러운 눈으로 판교에 오르는 비오리를 바라보았다.
"비오리, 너 또 대궐로 들어가는구나!"
"아주 들어가니? 섭섭해서 어찌하나!"
"지난번 취옥 언니처럼, 아마 상침 궁녀가 되려나 보지?"
"쫓겨난 취옥 언니 대신, 네가 아마 상침으로 들어가나보다."
여악들은 한편으로 부러워하고 한편으로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조심해라. 또 쫓겨나면 어찌하니?"
비오리는 상긋 웃고 고개를 살랑살랑 가로 흔들었다.
"나는 절대로 궁인이 되지 아니한다. 다녀서 나올 테다!"
"상감마마께서 마음에 드셔서 너를 꽉 붙드시면 네가 옴치고 뛸 수 있느냐. 후궁이 되고 마는 것이지!"
"두고 보아라. 나는 절대로 대궐 안 사람은 되지 아니한다. 이따가 또 만날 것이다. 섭섭해하지들 마라!"
비오리는 상긋 웃고, 상감이 내린 상아 출입패를 번쩍 들어 보이며 판교 위에 올랐다. 침착한 비오리였다. 전하께서 어려운 한문 글자를 폐지하고 새로 나라의 독특한 글자를 구상하기 위해서 음향을 시험해보시려고 부르신다는 말은 발설하지 아니했다. 교군들은 판교를 메고 도감 문밖으로 나섰다. 젊은 별감이 판교채를 잡고 뒤에 따랐다. 별감도 전하께서 정음을 만들기 위하여 비오리를 부르시는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저 비오리가 예쁘게 생기고 총명 영리해서 귀엽게 보시고 부르시는 줄만 알았다. 그리고 잘하면 비오리가 쫓겨난 취옥처럼, 상침이 되는 줄 알았다. 은인 비오리에게 한마디 충고를 하고 싶었다.
"여보게 비오리, 자네는 나의 재생지 은인일세.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한마디 귀띔을 하니 들어주게나."
"무슨 말씀할 일이 있습니까? 일러주십시오."
"자네, 혹시 후궁마마가 되거든 절대로 남의 청을 들어서 상감께 아뢰지 말게! 자네, 상침 취옥이가 왜 쫓겨난 줄 아나? 무예청 별감, 내시, 상궁들의 청을 들어서 한 자리씩 올려 달라고 상감께 간청을 하다가 그만 진노하셔서 쫓아내셨네! 절대로 상감께 그런 청은 아뢰지 말게. 자네는 나의 은인이니까 이같이 당부하네. 조심하게!"
비오리는 판교 위에서 깔깔 웃었다.
"압니다. 저는 절대로 후궁이 되지 아니합니다. 자격도 없고. 하하하."
어느덧 비오리의 판교는 대궐 서문 영추문 앞에 당도했다. 비오리는 판교에서 내려 별감과 함께 수문장에게 출입패를 보였다. 내시가 나타났다. 별감한테 지시한다.
"자네는 대전에 들어가 상감마마께 복명을 하게. 비오리는 나더러 중전마마께 알현을 시킨 후에, 숙원마마의 처소로 인도하라 하셨네."
별감은 내시한테 몸을 굽혀 인사한 후에 대전으로 향하고, 내시는 비오리를 중전으로 인도했다. 중전에서는 대전의 지시를 받아 여악 비오리가 중전마마께 알현하러 들어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상궁들은 비오리가 들어왔다는 연통을 받자, 중전마마의 침실로 인도했다. 비오리는 상감이 계신 대전으로 출입해서 대궐 안 풍습을 잘 알고 있었다. 상궁의 인도를 받고 중전으로 들어갔다. 예모와 걸음걸이가 구김살이 없이 유한해서 여유가 작작했다. 침전으로 들어가자 먼저 왕후마마께 큰절을 올려서 뵈온 후에, 두 손을 마주 잡고 아미를 숙여 시립했다. 밝은 눈동자에 붉은 입술을 다물고 조신하게 서 있는 모습은 보통 여악이 아니라, 사대부 집의 요조숙녀의 태도가 있었다. 왕후는 비오리의 절을 받은 후에, 그림같이 모시어 서 있는 비오리를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과연 전하가 말씀한 바와 같이 총명 영리한 여자다운 여자다. 왕후는 비오리가 전하께 궁인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아뢰었다는 말에 먼저 호감을 가졌다.
"네가 여악 비오리냐?"
비오리가 목소리를 나직하게 하여 대답한다.
"네, 그러하옵니다. 미천한 여악의 몸으로 존엄하신 중전마마께 알현하는 영광을 입게 되오니 황공 감격하옵니다."
"네가 소춘풍의 딸이라 하니 과연 그러하냐?"
"네, 그러하옵니다."
비오리는 엷은 웃음을 지어 아뢰었다. 후마마는 상냥하게 웃으며 아뢰는 비오리의 태도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네가, 음리에 대하여 공부가 도저하다는 말씀을 전하께 들었다. 누구한테 배웠느냐?"
"쇤네가 감히 어찌 소리에 대한 심오한 이치를 아오리까. 제조 대감께 배워서, 음양과 오행의 이치로 발성되는 것을 조금 흉내 낼 뿐이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겸손한 비오리의 아뢰는 말은 더욱 후마마의 비위에 들었다.
"들으니 전하께서 너의 재주를 가상하게 생각하시어 궁인이 되라 하셨는데, 너는 사양했다 하니 과연 그러하냐?"
"그같이 아뢴 일이 있었습니다."
비오리는 맑은 눈매로 잠깐 후마마의 옥안을 우러러 뵙고 대답했다.
"어찌해서 싫다 했느냐? 모든 여자들은 왕실에 들어와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궁녀가 되기를 소원하는데, 너는 어찌해서 사양하고 싫다 했느냐?"
비오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한다.
"존엄한 왕실의 규범을 알지 못하는 미천한 계집이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허욕에 떠서 궁인이 된다면 궁중 질서를 문란케 하기 십상팔구올시다. 그리하와 전하의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다고 아뢰었습니다."
비오리는 대답을 전하께 아뢴 말보다 더 함축이 있었다. 후마마는 더한층 비오리의 총명 영리한 대답에 마음이 끌렸다. 사실이었다. 전하께서 내친 취옥이 적만 해도 내외명부를 통솔하는 왕후로 앉아서, 처리하기가 무한 곤란했다. 여악의 몸으로 날마다 밤이 깊도록 편전에서 전하와 악을 연구하기 위하여 독대를 드리고 있으니, 궁중에서는 무근지설이 자자했다. 고민하던 후마마는 세자와 의논한 끝에 전하께서 아악을 완성하시도록 도와드리기 위하여, 전하를 달래서 취옥을 상침으로 삼아서 아악을 완성하는 데 한 개 굄돌이 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취옥은 분수를 지키지 못했다. 허욕에 들떠서 액정과 궁녀들의 청탁을 받아서 상감께 아뢰어 승진을 시키기도 하고, 친정아버지에게 벼슬을 주시라 하기도 했다. 마침내 전하의 진노를 받아서 내쫓긴 몸이 되고 말았다. 후마마는 다 같은 여악이지만, 어른 앞에서 아뢰는 비오리의 태도는 취옥에 비하여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 지조 있다고 이름이 높은 기생 소춘픙의 딸답다고 마음속으로 탄복했다.
"내가 전하께 들으니, 네가 대궐 안에서 생활하는 궁녀가 되기 싫다 한 것은, '제왕의 권력은 화염 같고, 궁중 속은 천 길 우물 같아서, 불에 데기 쉽고 물에 빠지기 쉬우므로 궁녀되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하는데, 나에게 지금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르구나."
비오리는 다시 웃으며 아뢴다.
"전하께 아뢴 말씀이나, 마마께 지금 아뢴 말씀이 조금도 다르지 아니합니다. 배운 것이 없어서 분수를 지키지 못하니 무서운 불길에 휩쓸려 화상을 당하기 쉽고, 무지해서 질서를 지키지 못하니 우물에 빠져서 죽기 쉽습니다. 모두 다 질서와 분수를 지키지 못해서 화상도 당하고 물에도 빠지게 됩니다. 그러하므로 쇤네 같은 배움이 없는 미천한 계집은, 아예 상감마마를 모시는 궁녀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하와 쇤네는 상감마마의 편전으로 드나드는 것을 사양했사옵고, 후궁마마들을 모시고 소리의 길고 짧은 것을 시험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리 합소서.'하고 복종했습니다."
도란도란 명랑하게 아뢰는 비오리의 대답은 더욱 영롱했다. 후마마는 전하를 편전에서 단독으로 모시어 독대를 드리기는 싫고 후궁들의 처소에서 여러 마마들과 함께 소리의 장단을 연구하는 일에는 복종했다는 비오리의 대답을 듣자, 더한층 기특하게 생각했다. 후마마의 옥안엔 화한 웃음이 가득했다.
"너는 전하께서 너를 부르시어 목소리를 들어보시려는 의도를 짐작하느냐?"
"상감마마께서 제조 대감과 말씀하시는 것을 옆에서 듣고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외국의 글인 한문만 있어서 특권층에서만 글을 쓰고 있을 뿐 일반 백성과 여자들은 글을 알지 못하므로 딱하게 생각하시어 글을 새로 만들려 하십니다. 그리하와 뜻으로 풀이하는 글이 아니고 말과 글이 일치하도록 만들려 하시어 쇤네 같은 미천한 계집의 발음을 시험하시는 줄로 아뢰오."
후마마는 다시 비오리에게 묻는다. 비오리의 영리한 것을 한 번 더 시험해보려는 것이다.
"전하께서 새로 들을 창제하시려 한다면 조정에 글 잘하는 문신이 허다하게 많이 모여 있다. 그런데 어찌해서 글 잘하는 유신들을 제쳐놓으시고 궁중 지밀 안에서 글을 연구하시겠느냐. 네가 전하의 뜻하시는 바를 짐작하겠느냐?"
비오리는 손길을 마주잡고 공손히 아뢴다.
"쇤네가 어찌 감히 상감마마의 높으신 뜻을 짐작하오리까. 그러나 어리석은 생각에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니, 어디 말을 해보아라."
"첫째로 상감마마께서는 하늘이 이 나라에 백성들을 복되게 하시기 위하여 이 나라에 탄생케 하신 성인이십니다. 어떠한 글 잘하는 신하라 할지라도 상감마마의 슬기와 학식과 지성을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하니 결국 상감마마께서는 친히 이 큰 사업을 독창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므로 혼자 궁중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하시려 하여, 궁중 지밀로 연구하시는 곳을 정하신 듯 합니다."
비오리의 대답을 듣는 후마마의 입가엔 웃음이 서렸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이냐?"
"또 한 가지 이유는 쇤네의 추측만이 아니옵니다. 상감마마께서 제조 대감과 말씀하신 바를 곁에서 듣고, 옮겨서 아룁니다. 문자혁명을 일으켜서 새로운 우리글을 만든다고 조정에 공포해놓으신다면, 반드시 완고한 유신들의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치듯 할 것입니다. 이리된다면 상감마마께서는 글자도 구상하시기 전에 일은 와해가 될 테니, 아무도 모르게 연구를 쌓으신 후에 조정 신하들과 의논하실 작정이라 하셨습니다. 이러하므로 쇤네는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비오리는 차근차근 조리 있게 생각한 대로, 들은 대로 아뢰었다. 후마마는 다시 비오리에게 하문한다.
"상감마마께서 새로 글을 만들기 위하여 너를 부르시어 소리의 고저, 청탁을 시험하신 일을 밖에서 아는 사람이 있느냐?"
"상감마마께서 문자혁명을 일으키시어 새로운 글을 만들려 하시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만 제조 대감과 쇤네뿐이었습니다. 상감마마께서 제조 대감께 아직 비밀에 부쳐두라고 분부하시는 말씀을 곁에서 듣고, 쇤네는 입을 봉하고 누구한테도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관습도감 안에 있는 악공이나 여악들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는 쇤네에게 부르시는 어명을 전하러 나온 별감한테까지도 입을 봉하고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후마마는 흡족했다.
"잘했다!"
비오리에게 칭찬하는 말씀을 내렸다. 후마마는 비오리의 인품과 슬기를 가지가지로 시험해보았다. 첫째로 전하께 편전에서 독대를 드리지 않겠다 한 것이 마음에 들고, 둘째로 대궐 안에서 전하를 모시는 궁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그의 처신을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후마마는 비오리의 인품과 슬기를 시험해본 후에 설렁줄을 흔들어 협실에 대기하고 있는 상궁을 불렀다. 상궁이 들어와 부복했다.
"부르셨사옵니까?"
"숙원 이씨의 처소로 나가보아라. 어제 내가 일러두었다. 정결하게 치웠나 살펴보고 오노라. 그리고 모든 후궁들을 숙원의 처소로 모이라 일러라. 내가 상감마마를 모시고 곧 나갈 것이다."
상궁은 명을 받들고 나갔다. 이윽고 상궁은 돌아와 복명을 했다.
"숙원마마의 처소는 정결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옵고 각전 후궁마마께, 대전마마와 중전마마께서 납신다고 숙원마마의 처소로 모이시라 했습니다."
후마마는 또 분부를 내린다.
"너는 다시 대전으로 들어가서 상감마마께 내가 여악 비오리를 데리고 지금 숙원의 처소로 간다고 아뢰어라. 상감마마께서도 납신다하거든 네가 모시고 이곳으로 오노라."
상궁은 다시 명을 받들고 대전으로 올랐다. 이때 전하는 상궁이 당도하기 전에 별감의 복명을 받아서 비오리가 입궐한 것을 먼저 알고 있었다. 중전에서 어떠한 기별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전 상궁이 내시를 통해서 문후를 드렸다.
"중전 상궁 문후드리오."
전하는 음운을 기록한 운서를 읽다가 책장을 덮었다.
"들라 해라."
중전 상궁이 어전에 들어와 부복하고 아뢴다.
"중전마마의 전갈을 받들고 았사옵니다. 중전마마께서는 지금 곧 여악을 데리시고 숙원마마의 처소로 행차하신다 합니다. 상감마마께서는 어찌하시올는지 아뢰어보라 하셨습니다."
전하의 용안엔 기쁜 빛이 가득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게 되는 기쁨이었다.
"중전마마께서 친히 여악을 데리시고 숙원 처소로 가신다 하더냐?"
"네, 그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곧 중전으로 갈 테다. 함께 가시자고 말씀을 드려라."
상궁이 아뢴다.
"중전마마의 분부가 계셨습니다. 만약 대전마마께옵서 임어하신다면 쇤네보고 중전으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전하는 새로 글을 구상하는 데 중전이 이같이 향의 해주는 것이 무한 기뻤다.
"중전마마께서 그같이 분부하시더냐? 그렇다면 너하고 함께 가리라!"
전하의 마음은 명랑했다. 중전의 협조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전하는 곧 책상 앞에서 일어났다. 대전내관이 앞을 인도하려 했다.
"너는 편전에 남아 있거라!"
전하는 내관에게까지 새로 글을 만드는 일을 알리고 싶지 아니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까지 달리는 이치를 전하는 잘 아는 때문이다. 전하는 상궁을 앞세우고 중전으로 향했다. 길고 긴 중전 복도에는 상궁이 모시고 오는 전하의 발자취 소리가 들렸다. 대전으로 나갔던 상궁이 전하를 모시고 중전 정당에 채 당도하기 전에, 협실에 대기하고 있던 상궁이 급히 후마마께 아뢴다.
"상감마마께서 듭십니다."
비오리가 먼저 벌떡 일어섰다. 후마마가 일어나 분합까지 나갔다. 비오리가 뒤를 따랐다. 후마마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전하를 맞이했다.
"듭시옵니까? 여기 기화요초 한 그루가 전하의 듭시기를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후마마는 웃음을 머금고 손을 들어 비오리를 가리켰다. 비오리는 전하를 향하여 네 번 큰절을 올려, 경의를 표했다.
"오오, 들어왔느냐?"
전하는 미소를 지어 비오리의 절을 받은 후에 중전을 향하여 말씀한다.
"숙원의 처소로 곧 가십시다."
전하는 어서 어서 소리의 이치를 더욱 파악해서 글자를 구성하고 싶었다. 후마마도 전하의 심정을 알았다. 상궁을 돌아보며 분부했다.
"빨리 숙원의 처소로 나가서 상감마마께서 지금 곧 행차하신다고 연통해라."
상궁은 앞질러 달음질을 치고, 후마마는 상감을 모시고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비오리가 뒤에 따랐다. 숙원 이씨의 처소에는 모든 후궁들이 모여 있었다. 전하와 중전마마가 여악을 데리고 듭신다는 상궁의 기별을 듣자, 일제히 일어나 복도 밖으로 나가 전하와 중전마마를 맞이했다. 달덩이가 동편 하늘에 떠오르는 듯한, 언제 보아도 환한 얼굴을 한 신빈 김씨, 청초한 흰 백합이 은은히 향을 풍기는 듯한 영빈 강씨, 눈 속에 백매 한 가지가 달 떠오르는 월황혼을 기다리는 듯한 혜빈 양씨, 연못의 맑은 물을 박차며 실실이 늘어진 푸른 버들가지로 날씬하게 나는 제비 같은 숙원 이씨들이 전하와 후마마께 사후를 드렸다. 전하와 왕후는 마치 만자천홍의 꽃밭 속에 든 듯했다. 후마마는 비오리에게 분부한다.
"네가 오늘부터 목에서 나오는 소리의 조화를 함께 강론할 빈마마들이다. 일일이 인사를 올려라."
비오리는 후마마의 분부를 받들어, 전하와 왕후 앞에 시립해 섰는 후궁들에게 차례로 절을 올렸다. 모든 후궁들은 어제 왕후께 말씀 들었던 여악 비오리의 일거일동을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모든 행동이 진선진미했다. 몸가지는 태도와 절하는 모습이 교양 높은 사대부집 규수도 따라갈 수 없도록 도저했다. 전하는 여러 후궁들에게 말씀을 내린다.
"너희들은 자리를 정돈해서 앉아라! 음을 연구하는데 오랫동안 서 있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중전마마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너희는 여악과 함께 성음을 시험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옆에서 너희들의 시험하는 소리를 듣고 글을 구상할 것이다. 평심서기하고 모두들 앉아라."
모든 후궁들은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치마폭을 휩싸안고, 조용히 앉았다. 전하는 비오리를 향해 말씀한다.
"자아, 이제는 공부를 시작하자. 빈마마들에게 소리의 이치와 발음을 실천케 하라."
비오리는 전하의 분부를 받자, 여러 후궁들에게 목례를 올린 다음에 목소리를 나직하게 하여 아뢴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천한 쇤네가 감히 지존과 빈마마께서 앉으신 자리에서 소리의 이치와 발음을 아뢰게 되오니 참람하고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관습도감에서 공부한 것을 옮겨서 아뢰겠습니다."
후마마를 위시하여 모든 후궁들은 귀를 기울여 비오리의 말을 들었다. 비오리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지금 쇤네가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상감마마와 제조 대감께 배워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린 것이 주제넘다고 꾸짖지 마시옵소서."
후마마를 위시하여 모든 후궁들은 웃음을 짓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언제 적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허허한 우주 사이에는 넓고 넓은 하늘이 있고 또다시 넓은 땅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만 가지 물건이 생장하고 발육되어 갑니다. 이 만 가지 물건중에 오직 사람들민이 슬기로워서 지혜가 있고 말을 할 줄 압니다. 다른 짐승들은 수컷이 암컷을 부르고 암컷이 수컷을 부르는 소리는 낼 줄 압니다마는 말은 못합니다. 이러므로 만 가지 물체 중에 오직 사람만이 슬기도 있고 말도 할 줄 압니다. 그리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후궁들은 조용히 비오리의 말을 듣는다.
"말은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할 때 사람과 사람의 심경이 환하게 서로 통해집니다. 그러나 먼 곳에서 통사정을 할 때라든지, 자기의 생각한 바를 백 년 뒤 천 년 뒤 사람들에게 전하려 할 때, 말로는 전할 수가 없습니다. 말은 곧 스러져버리는 때문,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글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사람의 슬기로 만들어진 것입지요. 그러므로 글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먼 곳에서 편지에 글을 기록해서 자기의 생각을 전하게 됩니다."
모든 후궁들은 비오리의 조리 있는 이야기를 듣자, 긴장된 표정으로 비오리의 말을 듣는다. 비오리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글은 있습니다. 몇천 년 동안 써왔습니다. 그러나 한문이라는 남의 글이올시다. 말은 말대로 따로 있고, 글은 글대로 따로 있어서 특권계급의 선비들만이 십 년, 이십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공부를 해야만 겨우 글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러하니, 여자와 상사람들은 글을 하고 싶어도 십 년, 이십 년 동안 공부할 틈이 없습니다. 모두 다 무식한 눈뜬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감마마께서는 이 일을 딱하게 생각하시어, 말이 곧 글이 되고, 글을 읽으면 곧 옆에서 말을 듣는 듯한 새로운 우리말을 만들려 하시어 먼저 사람의 음성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오늘 빈마마들을 청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것입니다."
후궁들은 특권계급의 선비들만이 십 년, 이십 년 글공부를 해야만 겨우 한문을 읽을 수 있고, 여자와 상사람들은 공부할 틈이 없어서, 눈뜬장님이 되었다는 비오리의 말에 모두 다 동감을 가졌다. 뿐만 아니었다. 말이 곧 글이 되고 글을 읽으면 곁에서 사람이 말을 하는 듯 말과 글이 일치되는 새로운 글을 전하께서 만드시려 하여 소리를 시험하신다는 비오리의 말을 듣자, 비로소 오늘 이 자리에 자신들이 모인 뜻을 더한층 확실하게 알았다. 전하와 후마마는 미소를 지으시며 후궁들의 감격해하는 표정을 살폈다. 비오리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천지와 만물은 음양과 오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늘이 있으니 땅이 있고, 해가 있으니 달이 있습니다. 수컷이 있으니 암컷이 있고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습니다. 이와 꼭 같은 이치로 사람의 목소리도 음양과 오행으로 분류됩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씩씩해서 양성이요, 여자의 목소리는 가냘퍼서 음성이 됩니다. 닭의 울음소리만 해도 수탉의 소리는 '꼬끼오' 하는 웅장한 소리니 양성이요, 암탉의 소리는 꼴꼴거려서 얌전하니 음성이올시다. 그리하옵고 소리의 높고 낮고 맑고 탁한 것은 마치 음악의 오행 같아서 다섯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모든 후궁들은 신기하게 들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는 홀연 숙원 이씨에게 분부한다.
"벼루에 먹을 갈아, 내 앞에 놓아라."
숙원 이씨는 벼룻상을 받들어 어전에 놓고 먹을 갈았다. 먹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전하는 두루마리를 펴놓고 붓을 벼루에 다듬었다. 다시 비오리와 후궁들에게 분부한다.
"자아, 이제, 너희들은 소리의 오행과 사성을 시험해보아라. 나는 너희들의 내는 소리를 듣고, 기록하리라."
비오리는 전하의 분부를 받들고, 후궁글을 향하여 방싯 웃으며 고한다.
"황공하오나 여러분 빈마마께서는 제가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는 대로 따라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비오리는 말을 마치자, 조그마한 아름다운 입술을 예쁘게 모았다. 모든 후궁들은 비오리의 입술을 바라보며 일제히 붉은 입술을 모았다. 비오리의 입에서 '우--' 하는 소리가, 동굴 속에서 푹포수가 쏟아지는 듯 웅장하게 일어난다. 모든 후궁들은 입을 다물고 목구멍으로 소리를 뿜었다. 비오리의 음향과 비슷했다. 전하는 붓을 들어 '후성'이라 기록하고 '우조, 수, 북'이라 썼다. 비오리는 후궁들한테 말씀한다.
"이 소리는 신장에 기운을 모아 목구멍을 통해 나오는 소리올시다. 오행으로 따진다면 금, 목, 수, 화, 토 중의 수올시다."
모든 후궁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오리는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위아래 어금니를 가볍게 벌렸다. 입술을 내밀었다. 모든 후궁들이 흉내를 냈다. 비오리의 입에서 '어--' 하는 소리가 일어난다. 통나무를 치는 소리다. 모든 후궁들의 입에서도 '어--' 하는 소리가 목을 통하여 진동되었다. 전하는 비오리와 후궁들의 어금니를 벌리고 내는 소리를 듣자, 붓을 들어 기록한다. '아성, 목'이라 썼다. 비오리는 모든 후궁에게 고한다.
"이번에 낸 소리는 어금니 소리올시다. 목구멍 소리와 비슷합니다마는 더한층 뜬뜬하게 나옵니다. 오행 중에 목이올시다."
전하는 이미 목소리만 듣고 미리 기록을 했던 것이다. 비오리는 다시 생긋 웃음을 지어, 후궁마마들을 둘러본 후에,
"귀찮으시겠지만 이번엔 이를 꽉 다무십시오. 그리고 입술을 살몃 여십시오."
비오리는 말을 마치자, 고르게 난 윤이 반짝 흐르는 이빨을 꽉 다물고 붉은 입술을 벌렸다. 혀를 놀리며 '이--' 하는 소리를 낸다. 모든 후궁들은 어려웠다. 백옥 같은 아름다운 이빨을 꽐 다물었다. 입을 열고 혀를 움직였다. 그러나 혀를 재치 있게 날렵하도록 놀리지 못했다. '이--' 하고 혀를 굴려서 재치 있게 뽑는 소리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다만, 물찬 제비모양 재치 있게 생긴 숙원 이씨만이 비오리와 흡사한 혀 소리를 감칠맛 있게 곱게 냈다. 소리를 못 낸 후궁들은 웃음보가 터졌다. 킬킬거려 웃었다. 전하는 후궁들을 둘러보며 말씀한다.
"공부를 하면서 웃어대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웃음을 참아야 한다. 숙원이 그중 잘 흉내를 내는구나!"
왕후마마도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숙원은 아직 젊어서 잘합니다마는, 다른 빈들을 과히 꾸짖지 마십시오. 모두 다 아들딸들을 생산해서 장성했습니다. 혀가 굳었으니 재치 있게 놀릴 수 있습니까? 비오리야! 어디 다시 한번 더 해보아라!"
비오리는 또 한 번 이빨을 다물고 입술을 열어 혀를 놀리며 소리를 낸다. 모든 후궁들이 비오리의 뒤를 따랐다. 여전했다. 숙원 이씨만이 옳게 소리를 냈다. 나이 먹은 빈들은 얼굴이 붉어지며 서로들 웃었다.
"하는 수 없구나! 나이 먹은 것들은--. 하하하."
전하도 웃으실 수밖에 없었다. 붓대를 잡고 두루마리에 '설음, 화' 하고 적었다. 비오리는 웃으며 후궁들에게 고한다.
"지금 제가 두 번 낸 소리는 혀의 소리올시다. 혓바닥이 입안에서 불길이 이리저리 활활 붙어 일어나듯 하므로 금, 목, 수, 화, 토 오행중에 화에 속합니다. 나이 자신 분들은 혀끝이 날렵하게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젊으신 숙원마마께서 그중 잘하십니다."
만죄는 모두 다 웃음을 머금었다. 전하는 비오리에게 명한다.
"토성을 내보아라...."
비오리는 붉은 입술을 모나게 다물고 배에 힘을 주어 '음--' 하고 소리를 낸다. 약해 뵈는 숙원 이씨가 비오리의 뒤를 따랐다. 웅장한 소리다. 방안에 화평한 기운이 가득했다. 모든 빈들은 웅장한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었다. 전하는 껄걸 웃었다.
"이것은 토성이다. 대지가 화평한 기운으로 만물을 길러내는 웅대한 기상의 소리다. 알겠느냐?"
전하는 말씀을 마치고 종이에 '흙 토자'를 썼다. 전하는 비오리에게 묻는다.
"인제 시험해볼 소리가 몇 가지 남았느냐?"
"한 가지 남았습니다. 금, 목, 수, 화, 토 오행 중에 물소리, 나무소리, 불소리, 흙소리를 냈으니 쇳소리 금성이 남았습니다."
"마저 시험해보아라."
비오리는 입술을 활짝 열었다. 옥 같은 위 아랫니가 고르게 짝 벌어졌다. '아--' 하는 소리가 이빨 사이를 통과해서 일어난다. 쇠를 끊는 듯한 강한 소리다. 숙원 이씨가 제법 비오리의 목청을 따랐다. 다른 후궁들의 음향은 조화가 되지 않았다. 전하는 두루마리에 '상성'이라 쓰고 '금'이라 기록했다. 신빈 김씨가 달덩이 같은 환한 얼굴에 웃음을 가득 싣고, 후마마께 아뢴다.
"황공하옵니다. 중전마마께 아룁니다. 숙원 이씨를 제외하고 신첩들은 입술과 혀가 날렵하지 못하와 비오리의 음조를 따를 수 없사옵니다. 상감마마께 아뢰시어 혜빈 양씨와 영빈 강씨와 신첩은 발성공부를 면케 해주업소서. 공연히 상감마마의 글자를 구성하시는 데 방해만 될까 두렵습니다.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재질이 없사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신빈의 말이 옳은가 합니다."
영빈 강씨와 혜빈 양씨도 일제히 사양했다. 후마마는 전하께 웃으며 아뢴다.
"삼빈이 모두 다 나이 먹어서 소리가 날렵하게 돌아가지 아니 한다 합니다. 도리어 전하께서 전념하시는 연구에 방해가 될 듯하다 하오니 무리한 말이 아니올시다. 꾸짖지 마시고 청허해주시옵소서."
전하는 껄걸 웃으며 허락하는 말씀을 내린다.
"어려서부터 몇 해를 공부해도 될 둥 말 둥 한 음리와 목놀림을 나이 먹은 빈들이 별안간 흉내를 내려 하니 될 리가 있느냐. 다만 숙원만은 아직 나이 젊고 재치가 있어서 제법 비오리의 발성을 따라갈 줄 아니, 비오리와 함께 날마다 발성공부를 해서 나의 좋은 참고가 되게 하라."
"황감하여이다."
삼빈은 전하께 부복해서 감사한 뜻을 표했다. 이윽고 전하는 적바림한 음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원 이씨와 비오리에게 말씀을 내린다.
"해가 아직 높으니, 숙원은 비오리와 함께 발성을 더욱 시험해보라! 그리고 비오리는 밤이 깊게 되면 궐 안에서 숙원과 함께 자도 좋다."
비오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부복해 아뢴다.
"쇤네는 처음부터 궁 안에서는 묵지 않는다고 아뢰었습니다. 하사하신 출입패가 있사오니 어느 때라도 부르시면 곧 대령하겠습니다."
전하와 후마마는 다 함께 소리를 높여 웃으셨다.
"그리해라. 날마다 출입패를 가지고 들어와서 숙원과 함께 연구해라!"
말씀을 마치자 전하는 후마마와 삼빈과 함께 숙원의 처소에서 본전으로 돌아갔다. 이후부터 비오리는 전하와 명을 받들어 날마다 숙원과 함께 음리를 연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