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권 위업(偉業)의 대하(大河)
경석이 남양에 나다
취옥은 상침이 된 후에 날렵하고 연삽한 행동으로 전하와 소헌왕후 두 궁의 침실을 보살폈다. 수라상을받들고 침구를 보살폈다. 세숫물을 받들어 올리고 수건을 대령했다. 상침의 거처하는 방은 항상 전하의 협실에 있었다. 밤이 깊으면, 전하의 심부름을 받아 악에 대한 말씀을 대답해 아뢰기도 하고, 악을 연구하시게 하기 위하여 전하를 모시고 거문고를 타고 가얏고를 타기도 했다. 근엄한 전하련만, 역시 인간이었다. 정이 움직였다. 사랑하기도 했다. 취옥은 전하께만 거행을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리하고 똑똑했다. 소헌왕후께도 입의 혀같이 받들었다. 왕후도 상침 취옥을 귀엽게 생각했다. 분부할일이 있으면 항상 상침 취옥을 불러서 명을 내렸다. 양궁의 총애가 극진하니, 구중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취옥에게 부탁하고 청하는 일이 많았다. 부탁을 하기만 하면 순조롭게 일이 잘 피어나갔다. 모든 궁인들은 모두 취옥을 부러워했다. 전하의 괴임을 받은 총희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한편 전하는 하루바삐 경석을 구해서, 편종과 편경을 정리해서 아악을 완성하려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관습도감 제조 박연을 어전에 부르시어 하문했다.
"하늘이 무심치 아니하여 거서가 해주에 나서 십이율관을 제정하였거니와, 편경과 편종을 만들지 못한다면 완전한 아악을 조성치 못할 것이다. 그동안 좋은 소식이 있는가?"
박연은 전하보다도 더 한층 경석을 구하려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얼른 반가운 소식이 들리지 아니했다. 전하가 물으실 때마다 등에 땀이 흘렀다.
"팔도 감사에게 어명을 전해서 두루 명산을 찾아서 경석을 구하라 했으나 아직도 이렇다 할 반가운 소식이 없습니다. 그리하와 신이 몸소 경기, 충청, 전라, 황해, 경상도와 평안도까지 찾아다녔습니다마는 아직도 소득이 없습니다. 황공무지하오이다."
"경의 노고를 치사한다. 그런데 경이 친히 명산을 두루 살폈다 하니 어느 곳을 찾았는가?"
"황해도 구월산, 평안도 묘향산, 강원도 오대산, 전라도 구례 지리산을 두루 찾았으나 경석은 찾을 길이 묘연했습니다."
전하는 박연의 말씀을 듣자 예지가 문득 번개 치듯 돌았다.
"경이 일찍이 과인한테 말한 일이 있지 않은가? '서전' 우공편에, 속이 빈 현옥 같은 무늬 있는 돌이 사수빈에 떠있는 것을 경돌이라 했다고 말하지 아니했는가? 구월산, 묘향산, 오대산, 지리산은 모두 다 우리나라의 명산이라, 기암괴석이 많겠지만, 분명히 경돌은 나타나지 아니할 것일세. 헛수고만 했네그려. 하하하. 바닷가에 가까이 있는 산들을 찾아보기로 하게."
이름 놓은 산을 찾지 말고 바닷가에 있는 산을 찾아서 경돌을 구해보라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박연은 꿈속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났다. 전하의 말씀이 과연 옳다. 지난번에 자기자신은 거서를 가지고 십이율관을 정한 후에 전하께서 고력해서 경돌을 구해보라고 분부하셨을 때 일찍이 자기가 읽었던 '서전' 우공편의 경돌은 중국 사수빈에 뜬다는 말씀을 들었고, 사수빈에 뜬 경돌은 중국 안휘성 영벽현에 있는 경산에서 나서 사빈부라는 말씀을 드린 일이 있었다. 확실히 글을 읽어서 고증을 얻었으려면도 기암괴석이 많다는 명산대천만 찾아다녔다. 경돌은 속이 비었으니 산에서 뭉그러져 떨어진 돌이 물 위에 떠 있었고 속이 텅비고 가벼우니 아름다운 음향이 나타나는 것이 확실했다. 박연은 전하의 슬기로운 말씀을 듣자 황연하게 깨달았다.
"소신은 도능독으로 한갓 글만 읽고 물가에 있는 산을 찾을 것을 잊었습니다. 내일이라도 곧 다시 여로에 올라 바닷가에 있는 산을 두루 찾아보겠습니다."
박연은 마음속으로 전하의 총명한 기억력과 섬광을 뿜는 예지를 무한 탄복했다. 전하는 다시 박연을 향하여 격려의 말씀을 내린다.
"경은 한 번 더 수고를 해서 기어코 경돌을 찾아보라. 대자연의 이치는 매일반이다. 중국에 나는 경돌이 우리나라에 아니 날 리가 없다. 다시 한번 바닷가에 있는 산을 찾아보라."
박연은 등에 땀이 흘렀다
"곧 내일이라도 다시 발정해서 다시 바다 근처에 있는 산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박연은 부복해 아뢰고 퇴궐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선 가까운 경기도 바닷가에 있는 고을을 생각해 보았다. 퍼뜩 수원 남양이 생각났다. 이튿날 죽장망혜로 당나귀를 타고 남양으로 향했다. 남양은 수원 서편 이십 리허에 있다. 수원 팔달문 밖에서 하룻밤을 쉬고 다시 남양을 향해 당나귀를 달렸다. 당시의 남양은 수원과 동격인 도호부라 해서 부사가 원님으로 있었다. 박연은 부사도 찾지 않고 판관도 만나지 아니했다. 이자들에게는 관습도감의 이름으로 경돌을 찾아보라는 어명을 전했으나 감사, 부사, 군수, 판관이라 하는 자들은 육방관속들에게만 경돌을 구해보라고 동헌 마루에서 길다란 장죽 담뱃대만 두드리고 호통만 치고 앉았으니 무식한 육방관속이나 군노사령배들이 경돌을 알아낼 리 만무했다. 박연은 미복으로 당나귀를 달렸다. 남양엔 50리밖에 서해로 통하는 바다가 있다. 섬이 별같이 바닷속에벌여 있다. 수흘도, 선감미도, 대부도, 영흥도, 소흘도, 덕적도, 독갑도, 승황도, 풍도등 무수한 섬 이외에, 사나천이란 큰 내가 바다로 흘러간다. 박연은 남양에 당도하자, 해문역이란 역말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곳 백성 중에 지리에 밝은 사람을 한 명 구했다. 남양 땅의 산천경개를 구경하러 왔다고 이르고 먼저 남양의 이름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바다 가까운 남양산천에 경돌이 있을까 찾아보려는 때문이다. 촌사람에게 먼저 물었다.
"남양 땅에 제일 높은 산이 몇 군데나 되는가?"
"남양은 바다를 격해 있으므로 수려한 명산이 여러 곳 있습니다. 제일 높은 산은 염불산 봉수대, 해운산 봉수대가 있습니다."
촌백성이 대답했다.
"봉수대라는 것은 병화의 변이 있으면, 봉화를 들어서 온 나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경보대일세 그려"
"그렇습니다. 예로부터 팔도강산엔 고을마다 봉홧불을 드는 봉수대가 있어서 서울 남산 봉홧둑까지 경보를 전달합니다. 재빠른 통신망이올시다. 더구나 우리 남양 땅은 바닷길로 해적들의 침범이 잦은 곳이올시다. 그래서 봉수대를 두 곳이나 두었습니다."
"그럼 우선 두 곳 봉수대를 구경하기로 하세."
박연은 높은 산길을 타는 데 당나귀로는 오를 수가 없었다. 촌백성과 함께 걸어서 남양 고을 부편에 높고 높게 솟아있는 해운산으로 올랐다. 과연 장관이었다. 눈앞에는 멀리 망망대해가 보였다. 안개와 구름과 바닷빛이 한데 어우러져서 눈에 황홀하고 가슴이 탁 열려지는 듯했다. 북편으로 멀리 바닷속 섬 하나가 가물가물 보였다.
"저것이 섬 아닌가?"
"네, 바로 보셨습니다. 안산 땅에 속하는 오질리도라 하는 섬이올시다."
박연은 몸을 돌려 남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구름 밖에 장산이 보였다.
"저 산은 무슨 산인가?"
"그 산은 아까 말씀드린 염불산 봉수대올시다."
박연은 두루두루 큰 바위와 작은 돌을 살펴보았다. 박연이 하도 바위틈의 돌 부스러기를 찾느냐고 애를 쓰니 촌뱃성은 이상하게 여겼다.
"샌님, 무엇을 그리 찾으십니까?"
"자네 혹시 경돌이라는 가벼운 돌이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들었나?"
말도 못 들어보던 이름이었다. 촌백성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런 돌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하고 본 일도 없습니다."
박연은 해운산에서 온종일 찾았으나 아무러한 소득이 없었다. 해는 점점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바연은 하는 수 없었다. 손을 툭툭 털고 촌백성과 함께 역말로 내려왔다. 이튿날, 박은 이른 아침밥을 재촉해 먹은 후에 해운산과 마주 보이는 염불산으로 올랐다. 남양 고을 남편에 있는 높은 산이다. 산마루에 올라보니 역시 장관이었다. 멀리 바다가 보였다. 동편으로는 수원 흥천산 봉화대가 보이고, 북편으로는 어제 보던 해운산이 우쭐우쭐 연봉을 이루었다. 박연은 이곳에서도 진종일 옥과 같으면서 속이 텅 비었다는 경돌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역시 온종일 헛수고만 했다. 박연은 낙망을 하지 아니했다. 전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대자연의 섭리는 같은 법이다. 중국 바닷가에 생산되는 경돌이 우리나라에 아니 날 리가 없다.'
대왕의 말씀이 귀에 쨍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남양의 산천을 모조리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박연은 촌백성을 앞세우고 다시 남양의 명산이라는 비봉산으로 올랐다. 남양부의 진산으로 고을 동편 7리허에 있는 산이다. 산새는 마치 봉황새가 깃을 활짝 양편으로 펴고 푸른 하늘을 향하여 날으는 듯했다. 한 고을의 주산다워 보였다. 이곳에서도 돌을 만지고 두드려 보았다. 현무암과 화강석뿐, 경돌의 모습은 보이지 아니했다. 하루 종일 허탕을 치고 사관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또다시 촌백성을 앞세우고 청명산이란 곳으로 올랐다. 남양읍에서 서편으로 가면 20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아있는 명산이다. 박연은 이 산에 올라 온종일 경돌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경돌은 없고 화강석 바윗돌만 있었다. 박연은 또다시 하루해를 보내고 역말로 돌아갔다. 그러나 철석같은 굳은 의지와 기어코 경돌을 찾으려는 성의는 조금도 변하지 아니했다. 하룻밤을 지낸 후 이튿날 또다시 촌백성을 불렀다.
"이제 남양의 명산은 몇 군데나 남아 있는가?"
"읍에서 시오리쯤 가면, 사나천이란 큰 내가 흐르고 내를 건너가면 사나산이 있습니다. 이제 샌님께서는 이 산만 보시면 남양부 안에 있는 명산은 모조리 밟아보시는 것입니다."
박연은 한편으로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실망이 되기도 했다. 해운산, 염불산, 비봉산, 청명산 등 4대 명산에 올라 경돌을 구했다. 나흘 동안이나 허비해서 남양 명산을 두루 밟았으나, 소득이 없었다. 이제 사나산 한 곳만 남았다 하니 한편으론 서운하고 한편으로는 아슬아슬한 실망을 느꼈다. 만약 다섯 번째 오르는 이 사나산에서도 경돌을 찾지 못한다 하면 경기도 해변에 있는 명산에서는 경돌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 확실했다. 다음엔 어느 해변가로 또다시 가야 할 것인가 하고 마음이 답답했다. 박연은 한 곳밖에 아니 남았다는 사나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내가 남양에 내려와서 닷새째 되는 날인데 사나산까지 보면 5대 명산을 모조리 구경하는 셈이로군. 좌우간 사나산에 마지막 올라가 보기로 하세!"
박연은 길잡이 촌백성을 재촉해서, 밥을 든든히 먹인 후에, 짚신감발로 거뜬하게 차리고 마자막 등산길에 올랐다. 읍에서 한 시오 리쯤 걸어가니 과연 큰 내가 십 리 계곡을 이루어 소리치며 흘렀다. 냇물은 수세가 웅장했다. 십 리에 뻗친 계곡이 소리치며 감돌아 흘렀다. 계곡마다 반석엔 이끼가 푸르고, 즐비하게 흩어진 바위 사이엔 옥수 같은 깨끗한 물이 자그마한 폭포를 군데군데 이루어 비말을 뿜으며 바람을 일으켜 굽이치며 흘렀다. 그야말로 수락석출, 물은 떨어지고 돌은 물 위로 솟아나서, 천하의 절경을 이루었다. 박연은 상쾌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절경을 가까운 시오리 밖에 두고 다른 명산만 돌아보았네. 그때 애당초 먼저 구경을 시켜줄 것이지, 이 사람아!"
호쾌하게 웃음을 웃었다.
"샌님께서 산만 찾으시기에 먼저 산 구경만 시켜드린 것입니다. 오늘도 사나산을 보여드리려고 온 것이옵지, 사나천을 구경시켜드리려고 온 것은 아니올시다. 그저 사나산을 가시는 길에 사나천을 보시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이 냇물은 어디로 흘러가는 냇물인가?"
"샌님도 딱한 말씀을 물으십니다. 냇물은 흘러서 결국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닙니까? 남양읍을 끼고 돌아서 서해 바다로 들어갑니다."
내가 참 어리석은 말을 물었구나. 하도 경개가 좋아서 무심코 그런 말을 했구나, 과연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다."
"샌님, 소인은 그런 어려운 문자 소리 못 알아듣습니다. 우리말 같지 않구요. 우문현답이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촌백성도 오륙일 동안을 박샌님과 함께 지내고 보니, 제법 친숙해졌다. 박연은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너한테 잘못 문자를 썼구나, 우문현답이란 말은, 내가 너한테 물어본 말이 어리석고 네 대답이 똑똑하고 옳은 대답이란 말이다."
"샌님, 그럼 진작 소인 같은 무식한 놈도 쉽게 알아듣게 말씀을 하시죠. 영락없이 남의 나라 말 같습니다."
"내가 과연 잘못했다. 용서해다오, 하하하."
난계 선생 박연도 농지거리로 소리를 높여 웃었다.
"자아, 그럼 어서 내를 건너 산으로 올라가자!"
"업어서 내를 건너드릴까요?"
"월천을 해주겠단 말이냐? 내 다리가 아직 튼튼하니 바윗돌을 디디고 건너가겠다."
"샌님, 또다시 남의 나라 말을 하시네. 월천이 무슨 말입니까?"
"아차, 내가 또 한 번 너한테 실수를 했구나! 다시는 너한테 문자를 쓰지 않겠다. 그만, 입에 올라서 자꾸 문자 말이 나오는구나!"
난계 선생은 크게 웃으며 짚신감발로 촌백성과 함께 내를 건넜다. 박연이 험한 사나천을 건너 사나산 중턱에 올랐을 때, 홀연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면서 소나기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박연과 촌사람은 댓줄기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면서 산마루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다. 당황했다. 좌우를 살펴보았다. 바로 언덕 아래 자그마한 절 한 채가 보였다. 촌사람은 손으로 절을 가리키며 말했다.
"샌님, 저기 절이 있습니다. 잠깐 비를 피해서 절로 들어가십시다."
박연도 하는 수 없었다. 촌사람과 함께 급히 언덕 아래로 내려가 절문 앞에 당도했다. 절문 문루 위에 '사나사'라고 크게 쓴 현판이 고색창연하게 걸려 있었다. 박연은 마음속으로 '사나산 속에 있으니 사나사라고 절 이름을 지었구나' 하고 절문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 어린 동자승 한 명이 합장을 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비를 피해 오셨습니다그려."
"잠깐 폐를 끼쳐도 좋은가?"
박연은 웃으며 물었다. 사람구경을 못하는 동자승은 점잖은 손님을 대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폐라니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어서 이리로 들어오십쇼."
동자승은 박연과 촌사람을 판도방 툇마루로 인도했다. 이때 법당에서 호호백발의 노장 수님이 예불을 마치고 석장을 짚고 내려오다가 비를 피해 들어온 박연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석장을 짚고 서너 층 보석 아래로 내려섰다. 먼저 동자승에게 묻는다.
"손님이 오셨느냐?"
"네, 귀하신 손님이 비를 피해 들어오셨습니다."
동자승의 대답이 떨어지자 호호백발의 노장승은 박연을 향하여 합장을 해서 경의를 표했다. 박연도 황망히 일어나 읍을 해서 답례를 했다. 나이 많은 노승의 합장을 그대로 앉아서 받을 도리가 없었다. 노승은 눈을 들어 잠깐 박연의 의표를 살폈다. 은조사싸개 음양립 갓 아래엔 탕건을 쓰고, 탕건 밑에 드러난 망건편자에는 백옥관자가 양편에 달려 있다. 노장승은 손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동자승에게 분부한다.
"귀하신 손님을 어찌 판도방 마루에 모시었느냐? 내 방으로 모시도록 해라."
노장승은 앞을 서서 박연을 자기의 선방으로 인도했다. 동자승이 뒤를 따랐다. 촌사람은 호호백발인 노장 스님의 기풍에 눌려서 감히 선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판도방 마루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노승은 박연을 만수향내 그윽한 선방으로 인도하여 상좌에 앉게 한 후에 다시 공손히 합장을 하고 묻는다.
"귀한 손님께서 어떻게 산중에 오셨다가 비를 만나셨습니까? 비가 인연이 되어 저희 절까지 왕림하게 되었으니 무한 영광이올시다."
난계 박연도 노승의 풍채를 바라보니 연치도 높아 보이거니와 눈에는 정기가 돌아 보통 뜨내기 승려 같지 아니했다.
"귀한 손이라 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그저 산수 간에 놀기를 좋아해서 이곳 남양에 와서 명산 사나산에 올랐다가 비를 만나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난계 박연도 노승의 풍채에 눌려서 존경하는 말을 썼다. 노승은 선방 문밖에 서 있는 동자승을 불렀다.
"차를 올려라!"
창밖에는 여전히 소나기가 멎지 않고 쏟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동자승은 다반에 향다 두 잔을 받들어 난계 선생과 노장승 앞에 놓았다. 다향이 난계의 코에 가볍게 스쳤다. 방 안에 피워 논 만수향 냄새와 다종에서 모락모락 김을 뿜는 다향이 한데 조화를 이루어 난계의 심심을 청정세계로 이끄는듯했다. 노장 스님이 다반을 난계 앞으로 당겨 권하며 말한다.
"산중에서 창졸간 귀빈을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우선 향다나마 한잔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난계 박연은 말을 마치자 손을 들어 다종을 잡으려 했다. 바라보니 속세에서 쓰는 다종이 아니다. 소박하게 꾸밈없는 솜씨로 돌을 파서 만들었다. 빛깔은 검푸르면서 하얀 무늬가 아름답게 수를 놓은 뒤 윤을 뿜어 흩어졌다. 돌 다종이다. 사기로 구워 만든 다종이 아니고 돌을 파서 만든 다종이다. 상당히 무거우리라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다종을 받들었다. 뜻밖이었다. 너무나 가벼웠다. 돌이 이같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난계는 향다를 공손히 두 손으로 받들어 한 모금을 마신 수에, 가벼운 다종을 조심스럽게 다반 위에 놓았다. 천천히 노승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다종이 무슨 다종입니까? 구워 만든 사기 다종이 아니고, 돌을 파서 만든 다종으로 알았는데, 돌이 어찌 이리 가볍습니까? 확실히 돌 같지 아니합니다."
노승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한다.
"돌이올시다."
"돌이 어찌 이리 가볍습니까?"
난계의 머릿속에는 번개 치듯 자기가 찾아다니는 경석이 아닌가 하고, 번쩍 의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가벼워도 돌이지요."
"돌이라니, 참 기이합니다. 스님은 도대체, 이 돌을 어디서 구해서 다종으로 쓰십니까?"
난계는 남아 있는 향다를 다 마시고 빈 다종을 곱게 들었다.
"바로 사나산, 이 산속에서 구했습니다."
난계는 정신이 번쩍 났다.
"많지는 않습니다마는 약간 있습니다."
노승은 난계 박연을 유심하게 바라보면서 또 한 번 빙긋 웃고 대답했다. 창밖에는 소나기가 여전히 소리치며 내렸다. 난계는 다종을 왼손바닥 안에 받들어 들고 바른편 손가락으로 가볍게 튀겨보았다. 맑은 음향이 옥을 튀기는 듯 일어났다. 난계는 깜짝 놀랐다. 마음속으로 '경석이 분명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난계는 조심스럽게 다종을 다반 위에 놓고 노승을 향하여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는 이 돌 이름을 아십니까? 도대체 무슨 돌이 이같이 가볍고 옥 소리가 납니까?"
노승은 여전히 빙긋 웃고 대답한다.
"영감은 보통 분이 아니신 듯합니다. 돌 이름을 잘 아실 텐데 하필 빈도에게 물으십니까?"
난계는 글로는 경돌이 사수 물가에 떠 있었다 해서 사빈부수라고 읽기는 했으나 실지로 경돌을 대해본 일은 없었다. 다종을 들어보고 튀겨봐서 가볍고 음향이 맑은 것까지는 알았으나 확실히 경돌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노승한테 졸라대며 돌 이름을 묻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모릅니다. 이러한 희귀한 돌은 한평생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습니다. 아시거든 돌 이름을 가르쳐줍시오."
노승은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박연을 향하여 말한다.
"영감께서는 난계 박연 선생이 아니십니까?"
노승은 돌 이름을 가르쳐주지는 아니하고 돌연 이같이 물었다. 난계 박연은 깜짝 놀랐다. 산중에 깊이 파묻혀 있는 노승이 자기 이름을 알 까닭이 없었다. 난계는 놀라고 당황했다. 아니라고 숨길 수도 없었다.
"대사께서 어찌 내 이름을 아십니까? 과연 난계 박연이올시다."
노승은 역시 방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빈도는 난계 선생께서 이곳 사나산으로 찾아오실 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박연은 또 한 번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노승이 자기가 이곳 사나산으로 찾아올 줄 미리 알았다 하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일이다.
"대사께서 생이 사나산으로 찾아올 것을 미리 아셨습니까?"
"빈도는 일찍이 난계 선생을 뵈온 적은 없습니다마는, 난계 선생의 말씀은 우레같이 듣고 있었습니다. '뇌동강산 적막심'이란 시가 있지 아니합니까? 우레 소리는 강산의 적막한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올시다. 아무리 심산궁곡 속에 엎드려 사는 늙은 중이라 하오나, 금상전하와 난계 선생이 아악을 창제하시려고 밤과 낮으로 애를 쓰신다는 말씀은 우레같이 들었습니다. 거서를 얻어서 십이율을 제정하신 말씀도 소문으로 들었고, 기왓장 조각으로 중국에서 만든 와경을 진짜 경석으로 고쳐서 십이율에 맞추어 편경을 하려고 노력하시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팔도 감사에게 영을 내려 경석을 구하신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팔도 감사한테서 아득히 소식이 없으니, 난계 선생께서 친히 팔도강산을 편답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난계 선생께서 팔도강산을 두루 밟으신다면 반드시 남양 이곳에도 한 번 찾아오실 줄 짐작한 것이올시다. 빈도가 향다를 내었을 때 유심히 다종을 들어보시고 손끝으로 튀겨서 음향을 시험해보시는 것을 보고, 비로소 확실히 난계 선생이신 줄 알았습니다.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이 없습니다."
호호백발인 노승은 동안에 미소를 가득 풍기고 자기 자신이 난계 박연을 알아본 까닭을 일장설파했다. 난계 박연은 대왕의 아악을 창제하시는 성업이 산중에 깊이 묻혀있는 고승에게까지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을 흐뭇하게 생각했다.
"성상전하의 크나크신 사업을 산중에 깊이 계신 도학 높은 고승께서 이같이 알아주시니, 전하의 밑에서 보필하는 사람으로 기쁜 마음 주체할 길 없소이다."
난계 박연은 고승에게 합장을 올려 경의를 표했다.
"성상께서 새로이 아악을 창제하시는 일은 나라의 문화를 더욱 찬란하게 하시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일입니다. 백성 쳐놓고 기뻐하지 아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빈도도 산중에 깊이 처해 있다 하오나 역시 백성 중의 한 사람이올시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고, 관심이 없으오리까? 이리하여 역시 경석을 구해보려고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노승의 말이 여기까지 미치자, 난계 박연은 노승 앞으로 무릎을 바싹 밀며 묻는다.
"그럼 이 다종은 확실히 경돌로 만든 다종이올시다그려!"
"네, 그렇습니다. 경돌이올시다."
노승은 웃으며 박연을 바라본다. 다종이 확실히 경석이란 말을 듣자, 난계 박연은 기쁜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노승의 손을 덥석 잡고 묻는다.
"그러면 경돌을 이곳 사나산 속에서 구해서 다종을 만드셨습니다그려!"
"네, 그렇습니다!"
노승은 또다시 미소하고 대답했다.
"어떻게 해서 이 돌이 경돌인 줄 알고 구하셨습니까?"
"나라에서 팔도 감사에게 전령을 내려 구해도 경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분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감사나 군수들이 한 번이라도 산에 올라, 돌을 찾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식한 군노사령배들만 보내서 벌제위명 격으로 산을 뒤지고 보니 그것들이 경석을 알 까닭이 있습니까? 기막힌 일이지요, 그래서 빈도는 그 소식을 듣고 경석을 찾아볼 궁리를 했습니다. 전에 '서전'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우공편에 경석이 사수 물가에 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경석은 돌은 돌인데 속이 텅 비어서 물에 뜨는 것이고, 반드시 바다를 끼고 있는 산중에서 떨어져서 사수 같은 큰 내네 뜬 것이 분명합니다. 남양 고을은 바닷가에 있고 또다시 빈도가 있는 사나산 아래는 중국의 사수 같은 큰 냇물 사나천이 바다로 향하여 소리치며 흘러갑니다. 한동안 궁리한 끝에 석장을 짚고 매일같이 동자승을 데리고 사나천으로 내려가 낚시즐을 하듯 바윗돌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늘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경석은 꼭 중국 우 시대나 주 시대에만 나란 법은 없을 것입니다. 바닷가에 나서 속이 비었다는 것은 돌이 해풍의 수기와 습기를 몇천 년 동안 풍마우세하고 바다에서 빛이 현옥같이 되고 속이 텅 비게 된 것이올시다. 그리해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줄곧 사나천으로 내려가서 떠내려가는 돌을 구해보았습니다. 하루는 큰비가 온 뒤였습니다. 역시 싫증을 내지 아니하고 사나천으로 내려가 바윗돌에 걸터앉아서 경돌이 떠내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른 아침에 가서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거무스름한 주먹만한 덩어리가 떠내려오다가 바윗돌 틈에 걸렸습니다. 동자승을 시켜서 얼른 주워봤습니다. 돌은 돌인데 속이 텅 비어서 무척 가벼웠습니다. '서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로 사빈부수 따위의 격석이었습니다. 가뿐했습니다. 아까 난계 선생이 하시듯, 손끝으로 두드려보았습니다. 맑은 음향이 옥을 굴리는 듯 일어났습니다. 어찌나 기쁜지 몰랐습니다. 확실히 경돌이 사나산에 있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그리해서 이제는 사나천을 찾지 아니하고 사나산 바윗돌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열흘 만에 한 곳에 다다르니, 기암괴석 틈 사이에 군데군데 현옥 같은 경돌이 끼어있었습니다. 그리해서 한쪽을 떼어다가 다종을 만들었습니다."
노승은 경석 찾은 내력을 일장설파했다. 박연은 노장승의 경돌을 발견한 내력을 듣자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하늘이 도와서 노장승에게 경돌을 찾게 해서 대왕의 성업을 완성케 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손을 모아 합장하고 고승에게 사례하는 말을 보낸다.
"과연 대사께서는 범인이 아니십니다. 천지신명이 우리 성상전하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게 하기 위하여 대사께 경석이 남양 땅에 있다고 지시해주셨나 봅니다."
"그런지도 모르지요."
노승은 미소해서 대답했다. 이때 창밖의 소나기 내리는 소리가 차차 주춤하기 시작했다. 난계는 기뻤다. 어서어서 경석이 있다는 곳으로 찾아가 보고 싶었다.
"비가 그치는구려. 스님, 어려우시지만 경석이 있는 곳을 좀 가르쳐주십시오."
노장승은 창문을 열어제쳤다. 과연 소나기가 그치기 시작하고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군데군데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보십시다."
호호백발 노장승은 석장을 짚고 선방 밖으로 나섰다. 동자승과 난계가 뒤따랐다. 판도방 툇마루에 앉아 있던 촌사람도 뒤를 따랐다. 노장승은 산을 타고 난계 선생의 일행과 함께 오 마장쯤 걸었다. 기암괴석과 반석 바윗돌이 층층이 절벽을 이루어 병풍 치듯 둘러 있는 곳으로 발길을 멈추었다. 석장으로 바위틈에 끼어있는 맷돌덩이만한 새까만 큰 돌덩이를 가리켰다.
"이것이 경돌이올시다. 자아 보시오. 저 절벽 사이에 군데군데 박혀 있소이다."
난계 선생이 가까이 가보니 볼품없이 생긴 거무스름한 돌덩이다. 아무리 보아도 선방에서 보던 경석 다종 같지 아니했다. 윤기도 나지 아니하고 문의도 보이지 아니했다.
"아까 스님 방에서 보던 다종과 같지 아니합니다."
노장승은 소리 높여 껄껄 웃었다.
"난계 선생께서는 '옥탁불이면 불성기'란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옥은 쪼아서 자꾸자꾸 갈아야만 비로소 광채가 나는 법이올시다. 형산백옥도 묻혀있을 때는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아는 사람이 쪼아서 갈고 갈아서 백옥이 되는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화씨벽도, 다른 사람은 다 발견하지 못한 것을 화씨라는 이가 발견해 가지고 갈고 갈아서 비로소 천하의 보배 화씨벽이 된 것이올시다. 범안으로는 경석을 발견하기 극히 어렵습니다. 하하하."
말을 마치자, 노승은 석장을 번쩍 들었다 힘차게 갈겼다. 천하장사다. 돌 한 귀퉁이가 떨어졌다. 귀퉁이가 떨어진 돌을 가볍게 들었다. 난계 눈앞에 보였다. 속이 텅 비었다. 무늬가 보였다.
"이 돌을 갈아서 다종을 만든 것입니다."
난계가 받아보니 과연 가뿐했다.
"서울 올라가시면 종로 뒷골목에 도자전이 있습니다. 도자전에 가서 도자장이를 데리고 내려오셔서 갈고 갈아서 대왕께서 소원하시는 편경을 만드십시요."
난계 박연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호호백발 노장승이 석장으로 내리쳐서 떼어준 경돌 한 조각을 수건에 곱게 싸서 직령 소매 안에 간직한 후에 노승을 향해 사례하는 말을 보낸다.
"스님이 아니었더면, 범안으로는 도저히 구하지 못할 보배로운 경석을 찾아냈소이다. 성상께서 들으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나라의 큰 복이올시다. 성상께서 반드시 법사의 존성대명을 하문하실 것입니다.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백발 노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세상을 떠나서 산중에 출가를 한 자가, 성과 이름이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그저 빈도인, 승려일 뿐입니다. 하하하"
"성씨는 아니 알려주시더라도 법명은 가지셨을 것입니다.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법명도 없습니다. 그대로 공이지요. 하하."
"지나치신 사양이십니다. 말씀해주십쇼."
난계는 간곡하게 다시 묻는다.
"사실 없습니다. 그저, 남양 사나산, 사나사에 우거해 있는 늙은 중으로만 기억하시면 그만입나다. 어서어서 경돌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시어 주상전하께 보여드리십시요. 전하께서는 우리 땅에 경돌이 나오기를 일각이 삼추같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어서 빨리 올라가십시요. 한시라도 빨리 알려드리는 것이 신하의 도리올시다!"
난계는 안타까웠다.
"그래도 그렇지 아니합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하문하실 것입니다. 그저 법명만 알려주십시오."
노승은 홀연 노기를 띠고 큰 소리로 뱉듯이 말한다.
"남양 사나이의 늙은 중이 경돌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고 아뢰면 그만 아닙니까? 어서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도자장이를 데리고 내려오시오. 그때 다시 만납시다."
노정승은 말을 마치자 석장을 짚고 몸을 돌이켰다. 백발홍안에는 노기가 등등해서 위엄이 넘쳐 흘렀다. 난계는 다시 더 말을 붙일 도리가 없었다. 뚜벅뚜벅 걸어서 사나사 문 앞에 당도했다. 노승은 뒤에 따라온 동자승에게 엄한 안색으로 지휘한다.
"이제는 절문을 닫아라!"
말을 마치자 백발 노승과 동자승은 사나사 문우로 들어서면서 육중한 절문을 덜컥 닫아버렸다. 빗장을 질렀다. 난계는 다시 말을 붙여 인사를 하려 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멍청하게 철벽같이 굳게 닫혀진 절문을 바라보며 어이없이 발길을 돌렸다. 산길을 가르쳐주었던 촌사람과 사나산에서 내려와 다시 사나천을 건넜다. 얻은 돌을 한 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소매 속에서 돌을 꺼내어 물 위에 띄웠다. 둥실둥실 떠내려가다가 바윗돌 틈에 끼였다. 확실히 경석부수였다. 박연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흘러가다가 바위틈에 끼어있는 경돌을 얼른 집어서 수건에 다시 싸서 소매 속에 간직한 후에 사관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지냈다. 너무나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첫새벽에 촌사람과 작별한 후에 나귀를 모아 서울로 향했다. 남태령 고개를 넘어 청파역을 거쳐서 칠패, 팔패를 지나, 남대문 안으로 나귀를 몰았다. 난계 선생은 대궐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노장 스님이 말해준 종로 뒷골목 도자전을 찾았다. 도자전 안에는 도자장인들이 둘러앉아서 줄과 칼이며, 송곳과 톱을 벌여놓고, 비취옥, 백옥, 자마노, 밀화, 호박, 금패덩이와 상아, 적대모, 화대모등 가지각색의 보패들을 벌여놓고 줄로 쓸고, 톱으로 자르고, 칼로 오비고, 정으로 쪼면서 석류잠, 주절잠 등 가지가지의 옥비녀와 노리개, 물부리, 단초관자, 풍잠들을 정성껏 만들고 있었다. 난계 선생은 나귀를 문밖에 매고 도자전으로 들어섰다. 도자전 안에 있던 도자장인들은 점잖은 분이 나귀를 문밖에 매고 들어서는 것을 보자, 모두들 목례를 올려서 경의를 표했다. 난계 선생은 도자장이 한 사람을 향하여 말을 건넸다.
"보패 하나를 가져 왔으니, 수고스럽지만, 좀 깎아주겠나?"
"수고랄 것이 무어 있습니까. 보여주십시오."
젊은 장인이 대답했다. 난계 선생은 사나산에서 노승이 떼어준 경돌을 소매 속에서 꺼내어 보여주었다. 모든 도자장이의 시선이 난계가 꺼내 보이는 물건으로 집중되었다. 모두들 바라보니 보패가 아니라, 괴석같이 생긴 시커먼 물건이었다. 평생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젊은 장인은 받아들고 자세히 살폈다. 돌덩어리로 알았는데 너무나 가벼웠다. 쓸모없는 물건으로 보였다. 한동안 유심하게 들여다보았다.
"이것, 어디 보팻니까?"
도자장이는 픽 웃었다.
"글쎄, 두말 말고 갈아서 주게. 형산백옥도 갈아야만 광채가 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서 갈아보게."
"옥돌은 묵직합니다. 이같이 가벼운 옥돌이 세상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검부저기같이 아무 짝에 쓸 수 없는 허섭쓰레기올시다."
"이 사람아, 아무리 버릴 물건이라 해도 손이 갈아 달라는데 못 갈아줄 까닭이 무어 있나. 공전을 후하게 많이 줄 테니 어서 갈아보게."
젊은 도자장이는 고집이 셌다.
"저희들은 돈만 바라고 이 짓을 하는 무리들이 아니올시다. 하늘이 인간에게 준 귀중한 물건을 더 한층 정성을 들여 아름답게 만드는 무리들이올시다. 돈에 욕심이 나서 아니 될 일을 하는 무리들은 결코 아니올시다. 비록 조그마한 일을 하는 장인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다 뼈대 있는 무리들이올시다. 나리님, 너무 우리들을 깔보지 마십쇼!"
젊은 도자장인은 난계 선생의 망건 편자에 단 옥과자를 바라보며 꼬장꼬장 말을 했다. 난계 선생이 잠깐 무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그중에 나이 많은 장인 한 사람이 젊은 장인을 타일렀다.
"점잖은 어른께 무슨 말씀을 그리 대답하나. 이리 다오, 보패라는 물건을..."
젊은 장인은 난계가 가져온 물건을 늙은 장인한테 넘겼다. 늙은 장인은 난계가 가져온 물건을 손에 받아 들었다. 형상은 돌안데, 너무나 가벼웠다. 한평생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호기심이 버썩 일어났다.
"어디 한번 갈아보겠습니다."
늙은 장인은 숫돌을 꺼내 놓고 물을 축였다. 까만 물건을 갈기 시작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힘을 주어 갈기 시작했다. 매끈매끈 숫돌 위로 갈렸다. 광이 나기 시작했다. 가벼우면서 마치 현옥 같았다. 노르께한 줄무늬가 드러났다. 난계는 침을 삼키며 옆에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늙은 장인은 희한하게 생각했다.
"나리, 무슨 돌인지 모르지만 희한한 보패올시다. 마치 현옥 같은데 무늬가 있고 속이 텅 비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보패를 구하셨습니까?"
난계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너희도 이 돌 이름을 모르는가?"
"이름을 알기는커녕 평생 만져보지도 못했던 돌이올시다."
"악기에 쓰이는 경돌이라는 돌일세. 한번 두드려 보게나."
늙은 장인은 자그마한 상아장도로 현옥같은 돌을 두드려 보았다. 맑고 맑은 음이 전방 안에 가득하게 퍼졌다. 모든 장인들의 눈이 둥그레졌다. 난계한테 갈아볼 필요조차 없다고 꼬장꼬장 대답했던 젊은 장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난계 앞으로 나가 꿇어앉아 사과를 한다.
"아까, 소인의 철없이 지껄인 말씀을 용서해주십시오."
난계는 껄껄 웃었다.
"내가 도리어 실수를 했네. 돈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처럼 말한 것이 내 실수일세. 젊은 장인의 기백이 그래야 쓰지!"
난계는 도리어 젊은 장인의 꼿꼿한 마음씨를 찬양해주었다. 늙은 장인은 와전하게 경돌 껍데기를 벗겼다. 광채가 빛나는 검은 옥이다. 늙은 장인은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은 후에 다시 줄로 문질렀다. 광채가 더욱 빛났다. 난계는 경돌을 받아서 다시 소매 속에 간직한 후에 장인들에게 치사하며 일렀다.
"고맙소, 노인! 며칠 후에 관습도감에서 여러분을 불러서 중한 소임을 맡길 것일세. 그때 수고들을 많이 해주어야 하겠소."
여러 장인들은 비로소 이분이 관습도감의 높은 관원인 것을 짐작했다.
"부르시면 언제든지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늙은 장인이 국궁하여 대답했다. 박연은 깨끗하게 껍질을 벗긴 경돌을 고이 간직하고 도자전에서 나와 나귀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다. 여장을 풀어, 관복으로 바꿔입은 후에 곧 정원으로 들어가 전하께 뵙기를 청했다. 정원 승지도 난계가 경석을 구하러 팔도강산으로 찾아다니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경돌을 찾으셨습니까?"
난계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관디 소매 속에서 경돌을 꺼내 보였다.
"천우신조해서 경돌이 남양에서 나타났소이다. 상감께 기쁜 소식을 아뢰려고 한 조각을 구해왔소이다. 빨리 아뢰어주시오."
승자가 바라보니 과연 검은 옥같이 윤과 빛이 자르르 흐르는 물건이었다. 승지도 대왕의 초조하게 경석을 구하시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승지 역시 기뻤다.
"참말 용하게 찾아내셨습니다. 전하께옵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곧 알현을 청하겠습니다."
승지는 급히 발길을 옮겨 어전으로 올랐다. 편전으로 들어가 전하께 아뢰었다.
"관습도감 제조 박연이 경석을 구해가지고 알현을 청합니다."
박연이 경돌을 구해 가지고 왔다는 말에 전하의 귀는 번쩍 열렸다.
"무어, 박연이 경석을 구해 가지고 왔더란 밀이냐? 빨리 입대하도록 하라!"
승지는 급히 정원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는 난계를 어전으로 인도했다. 박연의 사후가 채 끝나기 전에 전하는 용안에 가득 웃음 띠고 하문한다.
"유지자사경성이라 하더니 내 나라 안에서 기어코 경석을 구했구나! 경의 노고를 치하한다."
난계 박연도 전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바라뵙자 더한층 마음이 흐뭇하게 기뻤다.
"성상전하의 홍복이십니다. 하늘이 감동하시어 진짜 경석을 나라 땅에 내리셨습니다."
"어디서 구했는가?"
"전하께옵서 깨우쳐 일러주신 대로 해변에 있는 명산을 찾았습니다. 멀리 서해 바다를 끼고 있는 남양 사나산에서 구했습니다."
전하는 어수로 무릎을 치며 말씀한다.
"용하다! 남양은 바다를 끼고 있는 곳, 여러 천년 풍마우세한 바윗돌이 해풍을 쐬어서 속이 텅 빈 경석이 날만 한 곳이다. 과연 남양으로 잘 찾아갔다!"
"소신이 아무리 남양을 찾았다 해도 소신 한 사람의 슬기와 힘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이 도학이 높은 호호백발의 고승을 만나서 경석을 찾았습니다."
박연은 말을 마치자 관디 소매 속에서 수건에 싼 경돌을 꺼내어 전하께 받들어 올렸다. 세종전하는 박연이 받들어 올리는 경석을 받아 보시었다. 가무스름하고 윤을 뿜는 현옥인데 노르께르한 무늬가 줄을 지어 빛을 뿜었다. 가뿐했다. 전하는 필통에서 붓대를 뽑아 들었다. 돌을 가만히 두드려 본다. 맑은 음향이 그윽하게 일었다. 진짜 경석이다. 전하는 용안에 가득 웃음이 떠올랐다.
"진짜 경석이다. 희한하구나!"
연거푸 기쁜 말씀을 내렸다.
"그래, 남양에 이 경석이 얼마나 많더냐? 그리고 이 경석을 지시해준 고승의 이름은 무어라 하더냐?"
전하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연거푸 세 번째 말씀을 내린다. 박연은 전하의 암시를 받아서, 다시 바닷가에 가깝게 있는 명산을 찾기로 결심하고 먼저 서울서 가까운 남양 땅을 찾은 일을 아뢰었다. 부사, 군수, 판관 따위들에게 알린댔자, 또다시 무식한 군노사령배를 동원시켜서 찾아보라 할 것이 분명하므로 짚신감발의 미복으로 나귀를 몰아 남양 땅에 당도한 일이며, 촌 백성 한 사람을 구해서 남양의 명산들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마지막 판에 사나천을 건너서 사나산으로 오르다가 산에서 비를 만나, 사나산으로 들어갔다가, 호호백발 도승에게 인도되어 선방에서 현옥 같은 다종을 바라본 일이며, 비가 멈춘 후에 노승의 인도로 다시 산에 올라 경돌 한 귀퉁이를 떼어가지고, 서울 도자전에서 돌 껍질 벗긴 사건을 일일이 아뢰었다.
"그리하옵고 노장승은 일체 자기의 성명과 법명을 알려주지 아니합니다. 여러 번 간곡하게 물었으나 다만 사나산에 있는 노승으로만 알면 그만이라고 하고 번번이 거절을 당했습니다."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일일이 귀담아들으신 전하는 크게 감동해서 탄식하는 말씀을 내린다.
"허허, 호호백발의 노장승은 보통이 아니구나..."
"네, 그러합니다. '서전' 우공편에 사빈부수했다는 돌이 경석인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옵고 전하깨오서 아악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거서로 십이율관을 제정하신 일이며, 중국의 와경을 순수한 경석을 고치기 위하여 소신이 팔도강산을 편답한 일까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와 그는 전하의 경석 구히는 일을 은근히 돕기 위하여 사나천으로 내려가 여러 날 동안 혹시, 경석이 떠내려올까 지켜보다가 마침내 떠내려가는 경석을 발견하고 사나산에 확실히 경돌이 있는 것을 안 후에 절벽 틈에서 경돌을 찾아내서 갈고 갈아서 다종을만들었다 합니다. 반드시 전하께서 사나산으로 사람을 보내시어 경석을 구할 줄 알고, 미리 다종을 만들어 두었다고 합니다."
전하는 다시 박연의 자상하게 아뢰는 말씀을 듣자, 또 한 번 탄식하신다.
"허허, 보통 승려가 아니로구나. 그대로 학식만 높은 승려가 아니다. 이인이로구나!"
"그러합니다. 그 홓안백발의 청수힌 얼굴이며. 석장으로 절벽에 붙은 바위를 후려쳐서 떼내는 기운은 보통 사람이 아니올시다. 신인에 가깝습니다."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는 세종대왕의 눈앞에는 남양 사나사에서 경석을 지시해주었다는 홍안백발의 노장승의 청수한 풍채가 아련히 나타나는 듯했다. 전하는 박연에게 분부했다.
"노장승은 확실히 고승이요, 이인이다. 불경에 통달할 뿐 아니라 '서전'까지 달통해서 경석이 물에 뜨는 것까지 알고, 또다시 과인이 악을 정리하는 일까지 짐작해서 미리 경돌을 찾아내어 경에게 주었다 하니, 어찌 이러한 고승을 헛되이 산속에만 묻어두게 하겠는가? 악리에도 달통할 것이다. 곧 초빙하여 국사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성상전하의 의도가 그러하시다면, 이번 경돌을 캐러 내려가는 길에 노승을 찾아 성지를 전달하겠습니다."
"그리하라!"
대왕은 말씀을 마치자 옆에 모신 승지에게 분부한다.
"사나사 고승을 초빙하는 교서를 써두었다가 관습도감 제조가 남양으로 다시 내려가는 편에 고승에게 내리도록 준비해두라!"
승지는 명을 받들었다. 대왕은 다시 박연에게 묻는다.
"그러면 하루속히 경석덩이를 캐내서 편경을 시작해야 하겠다. 언제쯤 남양으로 다시 내려가려 하느냐?"
"일각이 삼추같이 느껴집니다. 내일이라도 곧 석공의 명수들을 데리고 내려가서 사나사 노장승과 함께 경석덩이를 캐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서 도자장인들을 동원해서 편경을 시작하겠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내일 곧 발정하라."
대왕은 분부를 마치자 다시 시립해 있는 승지에게 말씀란다.
"선공감에 기별해서 일등 석수로 열 명을 뽑고, 사복시에 영을 내려 준마 삼십 필을 뽑아서 관습도감 제조의 지휘를 받아 경석을 캐어 서울로 실어 나르도록 하라. 그리고 사나사의 고승을 초빙하는 일을 잊지 말도록 하라."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박연이 아뢴다.
"소신은 곧 물러가 모든 주리를 차리겠습니다."
"좋다! 승지와 의논해서 내일 지체없이 떠나도록 하라"
박연은 대왕께 하직을 고하는 절을 올리고 승지와 함께 어전에서 물러났다. 승지와 함께 정원으로 나온 박연은, 대왕께서 사나사 고승을 부르는 교서를 받아들고 관습도감으로 돌아왔다. 관습도감에서는 악사와 악공들이 경석을 발견하고 돌아온 난계 선생을 환성을 질러 맞이했다.
"나라 안에서 경석을 발견하신 공덕은 길이길이 청사에 남을 것입니다."
"내일 경석을 캐러 남양으로 행차하신다 하니 저희들도 경돌의 원형을 보았으면 합니다. 함께 모시고 가도록 허락을 내려 주십시오."
난계 선생도 후생들에게 경돌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좋다! 함께 가도록 하자."
쾌히 허락했다. 이튿날 박연은 노장승을 국사로 초빙하는 대왕이 교서를 품 안에 품고, 선공감에서 나온 일등 석수 열 명과 악사와 악공들을 사복시에서 나온 준마 삼십 필에 태워서 남양 사나사로 향했다. 사나천을 넘어 절 앞에 당도하니, 절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한동안 문을 두드리니, 동자승이 나와 문을 열었다. 초면이 아니라 구면이다. 동자승은 웃음을 지어 합장을 올렸다. 박연도 반가웠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노장 스님께 지난번 왔었던 박연이 왔다고 사뢰어라."
동자승은 다시 합장하고 고한다.
"노스님은 지금 이곳에 아니 계십니다."
"아니 계시다니, 어디로 가셨느냐?"
"악을 캐러 가신다고 나가셨습니다."
"어디로 악을 캐러 가셨느냐?"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너한테 가는 곳을 알려주지 아니하시고 가실리가 있느냐?"
"스님께서는 어느 때나 악을 캐러 나가시면 가시는 곳을 알려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한번 나가시면 한 달도 되고 두 달도 되고 석 달도 됩니다. 정처 없이 산을 찾아 떠돌아 다니십니다."
박연은 낙심이 되었다.
"무어야, 한 달이 되고 석 달도 되셔? 내가 다시 찾아올 줄 짐작하실 텐데... 그래,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고 떠나셨단 말이냐?"
동자승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대답한다.
"아니요,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고 떠나셨습니다."
박연은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전하께서 부르시는 교서를 전할 길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사나산 경석이 있는 곳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대왕께서 고승을 부르시는 교서를 당장 전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다음 행보에 전하리라 생각하고 일행을 재촉해서 산으로 올랐다. 노승과 발견했던 절벽을 찾았다. 경석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석공들에게 경돌의 원석을 가리키며 정으로 쪼아서 떼게 했다. 모두 다 일등 가는 석공들이었다. 절벽으로 기어올랐다.
"상하면 아니 된다. 곱게 떼어 내려라!"
박연은 장대로 일일이 경돌을 가리켰다. 석공들은 절벽 바위에 점점이 박혀 있는 경돌을 쪼아 내렸다. 악사와 악공들이 받아 내렸다.
"무척 가볍습니다."
"돌 같지 아니합니다. 대장지 한 장 무게 밖에 아니 됩니다. 과연 희한한 돌이올시다."
악사와 악공들은 신기했다. 제각기 한 마디씩 지껄였다.
"지껄이지 말고 조심조심 받아 내려라. 떨어뜨리면 큰일난다!"
박연은 수다를 떨어 지껄여대는 악사와 악공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보패로운 남양의 경돌을 한 덩이 두 덩이 떼어내기 시작했다. 박연은 악사와 악공들이 받아 내리는 경돌을 손수 받았다. 한 덩이라도 깨뜨릴세라, 떨어뜨릴세라, 조심조심 받았다. 절벽 틈에 끼어있는 경돌은 있는 대로 다 쪼아 내렸다.
"이제는 경돌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석공들은 절벽에서 외쳤다. 절벽 아래서 악사와 악공들과 박연이 받아 내린 경석덩이는 삼십덩이도 넘었다. 난계 선생 박연의 마음은 흐뭇했다.
"그만 내려와도 좋다!"
석공들은 일제히 절벽에서 기어 내렸다
"장한 일들을 했다."
난계는 석공들을 칭찬한 후에 미리 준비해 가지고 왔던 배낭 열 개에 경돌을 세 덩이씩 담았다.
"석공들은 배낭 한 벌씩을 짊어지고 준마를 타라. 극히 조심해서 경돌이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석수장이들은 일제히 배낭을 어깨에 짊어지고 마상에 올랐다. 난계는 다시 악사와 악공글에게 분부를 내린다.
"너희들은 앞뒤로 경돌을 가지고 가는 석공들을 호위해 나가라! 나는 맨 뒤에서 너희들을 영솔해 나가리라."
난계 선생은 행여나 보패스런 경돌 행렬에 생각지 아니했던 변이 있을까 하여 이같은 만반의 태세를 차리고 서울로 향했다. 준마 삼십 필에 배낭들을 짊어지고 나가는 기이한 행렬은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이 행렬이 장차 천하에 다시 둘도 없는 장중한 아악의 중요한 악기가 될 경돌을 캐가는 행렬인 것을 아는 이는 없었다.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가 관습도감에 짐을 풀었다. 난계는 곧 배낭 한 벌을 가지고 대궐로 들어가 전하께 복명했다
"경돌 삼십 덩이를 남양에서 캐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어전에서 배낭을 끌러 경돌 한 덩이를 전하께 받들어 올렸다. 대왕은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용안에 웃음 빛이 활짝 열렸다. 어수로 큼직한 경돌을 받아 들었다. 커다란 돌덩이건만 거뿐했다. 마치 종이 뭉텅이를 드는 듯했다. 안상에 놓인 서장대를 들어 두드려 본다. 맑은 음향이 아련히 일어났다. 대왕의 용안은 더 한 번 활짝 핀 꽃판같이 화려했다.
"평생에 한 번 하고 싶었던 내 소원과 경의 소원을 이제야 풀게 되었구나."
대왕은 감탄하기를 마지않았다.
"해주에 거서가 나서 십이율과을 완성하시고, 남양에 경석이 나서 와경을 경석으로 편경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다 하늘이 전하께 내리는 홍복이올시다. 소신 또한 기뻐서, 감격한 마음 주체할 길 없사옵니다."
박연도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아뢰었다. 대왕은 박연을 아뢰는 말씀을 듣자, 미소를 띠고 대답하신다.
"하늘이 어찌 과인 한 사람에게만 내리신 복이랴. 온 나라 백성들에게 내리신 복이다. 이로부터 동방의 찬란한 문화는 하늘과 땅 사이에 화음과 윤기를 자아낼 것이다. 경은 속히 편경과 종을 완성해서, 이 기쁨을 국민과 함께 즐기기로 하자."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경돌의 원석을 박연에게 돌려주었다.
"곧, 도자장인들은을 동원해서 원석 껍데기를 벗기고 다시 잘라 갈라서 편경을 시작하겠습니다."
대왕은 다시 박연에게 하문한다.
"경돌에 황홀하게 도취되어 미처 묻지 못하였거니와, 경돌이 있는 곳을 알려준 남양 사나사의 도승은 어찌 되었느냐? 함께 데리고 왔느냐?"
"도승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명소하시는 교서를 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왔소이다. 황공무지하오이다."
"만나지 못하다니 무슨 소린가. 사나사에 없더란 말이냐?"
"석공을 데리고 산에 올라 경석을 캐기 전에 먼저 도승을 만나려고 사나사에 당도했습니다. 절문은 굳게 닫혀 있고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문을 두드렸더니 동자승이 나왔습니다. 구면이라 반가웠습니다. 도승을 만나어 왔다 했더니 도승은 약을 캐러 갔다 합니다. 어디로 갔느냐 물으니, 정처없이 떠났다면서 행방을 모른다 합니다. 언제쯤 돌아오느냐 물으니, 한 달만에 돌아오기도 하고 석 달 만에 돌아오기도 해서 기약을 정키 어렵다 합니다. 그리하와 교서를 전하지 못하고, 경석 있는 곳을 알았으므로 석공을 데리고 산에 올라 경돌만 캐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박연은 사실대로 도승을 만나지 못한 일을 상세하게 아뢰었다. 대왕은 박연의 아뢰는 말을 듣자, 크게 감탄하는 옥음을 내린다.
"어허, 과연 도승이로다! 경석이 있는 곳만 가르쳐주고 일부러 몸을 피한 것이 아닌가? 옛글에 '언사채약거'라고 하는 시가 있더니, 도승은 내가 부를 것을 미리 알고 몸을 피한 것이 분명하구나! 과연 갸륵한 도승이다. 속세의 부귀영화가 싫다 해서 일부러 몸을 피한 것이로다! 허허, 아깝구나, 어찌할꼬! 기어코 종적을 찾아보라!"
"다시 한번 사나사로 가서 종적을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편경과 편종이 급합니다. 큰일을 마친 후에 곧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대왕은 난계 박연의 말씀을 듣자, 고개를 가로 흔드신다.
"이러한 고귀한 인재를 산속에 묻혀있게 할 수는 없다. 유가나 불가나 도가를 막론하고 국가에 도움이 될 인재라면 모두 다 받아들여야 한다. 보라!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경돌을 어찌 구했으랴. 편경과 편종은 앞으로 여러 달에 걸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인재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 다시 한번 찾아가 보라."
대왕의 인재를 아끼시는 심정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삼가 분부대로 다시 한번 사나사로 가서 도승을 찾겠습니다."
박연은 경석을 받들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난계 선생 박연은 대왕께서 하신 말씀, '유가나 불가나 도가를 막론하고 국가에 도움이 될 인재라면 모두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에 크게 감동되었다. 이튿날 난계는 종로 도자전의 도자장인들을 함빡 관습도감으로 불러, 사나사 절벽에서 캐온 경돌의 원석을 갈고 다듬어서 치석을 하게 한 후에, 한 필 푸른 나귀를 타고 다시 대왕의 교서를 받들어 남양 사나사로 도승을 찾았다. 절 앞에 당도해보니 전과 같이 절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렸다. 한동안 후에 문이 열리며 중 한 사람이 나타났다. 고괴하게 생긴 젊은 중이었다. 코는 매부리코요, 눈은 애꾸눈인데 광대뼈는 한쪽으로만 주먹만큼 툭 불거졌다. 난계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보지 못하던 중이다. 합장을 하고 섰는 고괴하게 생긴 중을 향하여 물었다.
"동자승은 어디 있소?"
"동자승이라뇨?"
괴상하게 생긴 중은 도리어 난계에게 반문했다.
"이 절에서 노장승을 모시고 있던 동자승 말이오."
"소승은 그런 아이를 모릅니다."
난계는 어이가 없었다. 다시 묻는다.
"그럼 노장 스님은 돌아와 계시오?"
"노장 스님이라뇨? 소승은 모릅니다. 전에 이 절에 동자승과 노장승이 있었던가요?"
괴상하게 생긴 중은 또다시 반문했다. 난계는 기가 막혔다. 화가 벌컥 났다. 이자가 사람을 놀려대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중인데 사나사의 주지 스님인 노장 스님도 모르고 상좌인 동자승도 모른다 하시오? 도대체 노장 스님과 동자승은 어디로 갔소?"
애꾸눈 중은 얼굴에 머쓱한 표정을 짓고 대꾸한다.
"나리께서는 여러 차례 이 절에 와보신 일이 있습니까?"
"와보았으니까, 노승과 동자승을 찾는 것이 아닌가?"
난계는 뱃듯이 대답했다. 애꾸 중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한다.
"그렇군. 이 절에 노장승과 동자승이 살고 있었군!"
난계는 화가 더 한 층 폭발했다.
"도대체 대사는 이 절 중이 아니더란 말인가? 어디서 굴러들어온 말뼈다귀야?"
"네, 소승은 조선 팔도 명산대찰로 떠돌아다니는 객승이올시다. 말하자면 만천석지하는 운수의 신세올시다. 달포 전에 전라도 구례 화엄사에서 떠나서 엊그제 이곳 사나사에 당도해보니, 절 문은 활짝 열리고 절 안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습니다. 떠돌이 객승이 이제는 거접할 곳을 얻었구나 하고 이곳에 몸을 담아 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난계 선생은 애꾸눈의 말을 듣자 망연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깨비에게 홀린 듯도 했다.
"남의 절을 뺏어서 든 셈이로군!"
"흐 흐 흐, 뺏은 것은 아닙죠. 불도를 닦은 놈이 절을 뺏을 리가 있습니까. 빈 절이니까 들어 왔습죠. 흐 흐 흐."
애꾸눈이 중은 매부리코를 어루만지며 흐흐거려 웃었다. 난계는 애꾸눈이 중과 더 말을 하기 싫었다. 천천히 발길을 옮겨 법당으로 올랐다. 연화대 위에 자그마한 금불이 놓여 있을 뿐, 법당엔 향연조차 적막했다. 다시 뜰 아래로 내려 판도방을 둘러보고 호호백발 노장승이 거처하던 선방으로 올랐다. 자기를 대접했던 경석 다종 한 벌이 안두에 놓였을 뿐, 역시 향연은 끊어지고 선방은 쓸쓸했다. 동자승마저 없으니 물어볼 곳도 막연했다. 발길을 돌려 무료하게 절문을 향해 나왔다. 애꾸눈이 중이 문 앞에 섰다가 묻는다.
"도대체 여기 살았다는 호호백발 노장 스님의 법명은 무어라고 합디까? 혹시 돌아오면 전하오리다."
"이름을 몰랐네. 아무리 물어봐도 대주지 아니하데."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찾는단 말씀요. 흐흐흐."
애꾸눈이 중은 혼자 허리가 부러지도록 웃다가 또다시 웃는다.
"동자승의 이름은 기억하십니까?"
"동자승의 이름도 알지 못했네."
애꾸눈이 중은 또 한 번 '흐흐' 웃음소리를 치며 허리가 부러지도록 웃으며 말한다.
"예이 여보시오! 하늘에 날아가는 구름을 잡는 것도 도리어 쉽겠소. 구름은 이름이나 있지,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씀요. 헛물 켜지 말고 어서 빨리 돌아가시오. 흐흐흐흐..."
애꾸눈이 중은 밉도록 웃어댄다. 마치 난계를 조롱하는 듯도 했다. 난계는 한편으로 무색하고 한편으로 무료했다.
"잔소리 작작하고 사나사나 잘 지켜주게."
난계는 품 안에서 통보 한 꾸러미를 꺼내서 애꾸눈이 중에게 시주하니, 애꾸는 엽전 꾸러미를 받아 웃으며 공기를 놀았다. 박연은 마음이 씁쓸하고 서운했다. 나귀를 몰아 서울로 돌아왔다. 허탕 친 일을 대왕께 아뢰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정원에 올라 알현을 청했다. 대왕은 박연이 남양서 돌아와 뵙기를 청한다는 승지의 아뢰는 말을 듣자, 이번엔 경석을 구해준 노장승을 데려오는 줄 알았다. 시각을 지체치 않고 박연을 인견했다.
"도승은 만났느냐?"
박연은 몸 둘 곳을 몰랐다. 황공했다. 부복해 아뢴다.
"소신이 변변치 못하와, 도승을 만나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왔습니다."
"약을 캐러 갔다는 도승이 아직도 돌아오지 아니했더냐?"
"도승은커녕, 이번엔 동자승마저 없어져서 맥이 풀려 돌아왔습니다."
품 안에 도승에게 내리시는 교서를 꺼내어 옆에 시립해 있는 승지에게 받들어 올렸다. 대왕은 깜짝 놀라신다.
"동자승 마저 없어졌다? 절이 텅 비었더란 말이냐?"
박연은 애꾸눈이 중과 만난 수작한 일을 자상에게 아뢰었다.
"허허, 영영 도승을 놓쳤구나! 애꾸눈이 중도 보통 중이 아니다! 도승의 제자가 분명하다! 과인에게 단념을 시키기 위하여 그러한 외수를 꾸몄구나."
편경 편종
'애꾸눈이 중도 분명, 도승의 제자다. 초빙하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하여 도승이 외수를 꾸민 것이 틀림없다.' 하신 전하의 말씀을 듣자, 박연은 황연히 깨달았다. 전하의 명민하신 판단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히히덕거려 웃으면서 시주로 준 옆전 꾸러미를 받아들고 공기를 놀던, 외눈박이 매부리코가 눈에 선했다.
"소신의 눈이 무디어서 외눈이 중을 그저 객승으로만 봤습니다. 전하의 교시를 듣고 보니, 시주로 준 통보를 받아서 공기를 노는 것하고 히히덕거려 대답하는 폼이 확실히 보통 탁발승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또 한 번 남양으로 내려가서 외눈이 중을 달래서 도승의 종적을 알아보겠습니다."
"과인이 복이 없구나! 훌륭한 인물이 정치에 참여하지 아니하려고 그같이 피하는 모양이다. 하는 수 없다, 벼슬하기 싫다는 사람을 어찌하랴. 숨어 있어도 국가를 도와줄 사람이다. 그냥 산중에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 대신 도승의 뜻을 받아서 속히 아악을 완성하도록 하라. 도승은 산중에 숨어 있어도 편경이 완성됐다는 소문을 들으면 크게 기뻐하리라. 경은 빨리 편종과 편경을 끝마쳐라!"
"분부 그러하시다면 도승은 단념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편종과 편경에만 전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박연은 아뢰기를 다하고, 어전에서 물러나 관습도감으로 돌아갔다. 도감 안 넓은 헛간에는 도자전 도자장인들이 판을 차리고 둘러앉아서 경석을 만들기에 바빴다. 먼저 원석덩이를 숫돌에 갈아서 껍질을 벗겨냈다. 십여 명의 장인들이 숫돌을 놓고 제각기 갈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생긴 돌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매끈한 현옥이 되었다. 그러나 현옥보다도 더한층 기이했다. 아름다운 무늬가 드러났다. 감동을 하고 앉아 있는 난계의 입이 활짝 열렸다. 날마다 원석을 가는 일만이 한 달의 세월을 소비했다. 난계는 악서에 의해서 경석 덩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작은 톱으로 자르고 작은 줄로 썰었다. 너부죽한 기역자 모양이 되게 먹줄로 치수를 잘랐다. 기역자로 꺾여지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니 장차 경틀에 달아매려는 때문이다. 경틀은 두 단으로 만들었다. 윗단에 경석 여덟 개를 달고, 아랫단에 여덟 개를 달았다. 모두 열여섯 음계를 아뢰게 되는 것이다. 난계는 한편으로 편경을 시작하고 한편으로는 편종에 착수했다. 편경, 편종이 한꺼번에 이루어져야만, 아악이 완성되는 때문이다. 난계는 편경을 하자면 먼저 종을 만들어야만 했다. 종도 역시 경석과 같이 팔음계를 두 층으로 된 종틀에 달아서 십육음을 내서 편경의 음향과 조화를 이루어 화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난계는 주종할 곳을 물색했다. 한강 강변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개흙으로 틀을 만들어서 구리쇠와 납을 끓여 부어서 종을 만드는 까닭이었다. 난계 박연은 경시주부 정양과 함께 촌가도 없이 바빴다. 한편으로는 관습도감에서 도자장인들이 만드는 경돌의 음향을 정리하고, 한편으로는 한강에서 부어 만드는 종소리로 율려에 맞도록 바로 잡았다.
난계는 밝은 임금, 알아주는 주상을 만난 것이 기뻤다. 자나 깨나 어서어서 아악을 완성해서 이 나라의 문화를 높이는 한편, 지성스런 대왕 전하의 큰 소월을 풀어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항상 손가락을 들어 장단을 맞추는 시늉을 하고, 입과 입술로 율려에 맞추어 높은음, 낮은음, 맑은소리, 탁한 소리를 내서 노래를 불러보았다. 아악의 악기를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 자기 자신이 음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난계 선생의 음을 판단해서 가려내는 경지는 관습도감의 악공이나 악사 따위가 감히 따를 수 없는 경지에까지 도달되었다. 관습도감과 한강 나룻가에서는 계속해서 경석을 만들고 종을 제작했다. 노련한 늙은 장인은 경돌에 열여섯 개 경석을 달아맨 후에 난계한테 감정을 청했다. 악사가 뿔 방망이를 들어 여섯 개 경석을 때리기 시작했다. 난계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들었다.
"윗단 셋째 번 경석 소리가 너무나 높구나! 높아서는 협률이 되지 않는다!"
모든 악공들이 셋째 번 경석을 자세히 살펴보니, 줄로 썰다가 돌 찌꺼기가 조금 붙어 있었다. 악공은 깜짝 놀라 경석을 떼어 내려서 부드러운 수건으로 찌꺼기를 씻어 달았다. 음은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게 창아하게 일어났다. 악사는 또 한 번 열여섯 개 경돌을 두드렸다.
"아랫단 다섯째 번 경돌 소리가 율에 맞지 아니한다. 낮은 소리가 나니 이상하다. 너무 깎아서 그런가 보다. 경돌 치수를 한 푼만 더해서 바꾸어보아라!"
도자장인들은 다시 치수를 재어서 경돌을 끊어 달았다. 악사는 윗단과 아랫단의 열여섯 경석을 다시 치기 시작했다. 열여섯 조화된 음향이 청아하게 퍼졌다. 관습도감 악공들을 위시해서 도자장인들은 난계 선생의 지음하는 데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영감께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십니다. 신이십니다. 어쩌면 그같이 몇째 번 몇째 번 경석의 불협화음을 귀신같이 집어내십니까?"
난계 선생은 미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신이라니, 말이 되나! 누구나 공부를 하면 되는 것일세. 공부들을 아니하니까 음의 불협화음과 화음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것이지, 나 같은 사람은 아직도, 입에서 젖내가 나는 사람일세. 상감마마께서는 나보다 열 갑절 율에 대해서 정통하신 어른이실세. 편겅이 다 된 후에 친히 하감하신다면 반드시 무슨 잘못이 있다고 분부가 내리실 것일세!"
모든 사람들은 난계 선생의 말씀을 듣고 대왕을 더 한 번 존경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인간의 끈기 있는 노력과 정성은 반드시 공을 이루고 마는 것이 천연의 이치다. 난계 박연 선생의 줄기찬 연구와 세종대왕의 크나큰 관심과 격려는 중국에서도 부활되지 못했던, 주 시대에 주공이 창설했던 기막힌 아악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난계 박연의 기쁨은 하늘만큼 컸다. 목수를 시켜서 종을 달아맬 편종 틀과 경을 달아맬 편경 틀을 만들었다. 틀도 함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법이 있었다. 나무는 이태 묵은 추목이나 상목을 쓰고, 틀 위에 장식해 얹어놓는 사자와 범과 오리와 기러기며 용과 봉을 조각할 나무는 단목을 써야 했다. 목수도 보통 목공으로는 틀을 짤 수가 없다. 조각을 교묘하게 할 줄 아는 목수라야 편종 틀과 편경 틀을 짤 수 있는 것이다. 틀도 두 가지로 구별해 짜야만 한다. 편종 틀은 위아래 두 단을 만들고 양편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 받침은 장방형으로 난간을 조각한 대 위에 사자 한 쌍을 새겨서 앉히고 그 위에 양편 기둥을 세웠다. 두 기둥 사이에 가로 두 개의 횡목을 질렀으니 윗단 아랫단의 공간이 되고, 그 사이마다 여덟 개씩 종을 달아서 도합 열여섯 개의 아름다운 음을 발하는 편종이 되는 것이다. 양 기둥 위에는 판목을 대어 아름다운 무늬를 조각하고, 양편에 용두를 아로새겨 붙이고, 용의 입에는 황금 고리를 물리고, 고리 끝에는 일곱 층의 술을 늘이고, 술마다 채색 구슬을 달아서 눈이 부시도록 화려했다. 다시 용대가리고 꾸며논 판자 위에는 다섯 마리의 큰 새가 깃을 하늘로 향하여 훨훨 날아가려는 형상을 조각해놨으니, 아름다운 음향은 허공을 통하여 사방으로 퍼지고, 편종 틀은 장엄한 미를 이루어 편경 틀과 함께 대해 서서 악공들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편경 틀은 편종 틀과 장식을 조금 달리했다. 기둥을 받치는 대 위엔 사자를 조각하지 않고, 기러기를 새겼다. 두 기둥 위에 붙인 판목 양편에 조각한 짐승은 용머리가 변해서 봉황을 조각하고, 봉황새 주둥이엔 역시 황금 고리에 일곱 층의 화사한 오색 술실을 달아 늘였다. 경틀의 맨머리, 판목 위에는 편종 틀과 같게 나는 새 다섯 마리를 아로새겨놓아서 편종과 대를 이루었다. 틀의 길이와 넓이와 장식과 조각은 그대로 화려하고 보기 좋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음향의 퍼지는 공간과 간격을 연구해서, 크고 작고 길고 짧은 치수가 악서에 뚜렷하게 정해있었다.
난계 박연은 종틀과 경틀을 만드는 데도 일일이 목수들을 지휘했다. 한 치와 한 푼이 틀리지 않게 했다. 관습도감 안에는 새로 된 종틀과 경틀이 화려하게 조성되어 놓였다. 난계는 주종 장인과 도자 장인을 시켜서 새로 조성된 종과 경을 틀에 달아놓았다. 손수 뿔 방망이를 들어 편경, 편종을 울려본다. 맑은 음향이 도감 안에 가득했다. 난계는 악공들을 시켜서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편경, 편종을 꺼내 놓은 후에 새로 창제한 종경과 비교해보았다.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난계 선생은 기쁨을 말할 것도 없고 악사와 악공들의 환호성은 하늘과 땅을 흔들 듯했다. 난계는 이 기쁜 소식을 한시바삐 전하께 알리고 싶었다. 곧 조복을 갖추고 어전으로 들어갔다.
"전하께오서 항시 관심을 가지시고 격려해주신 편경과 편종이 오늘 완성이 되었습니다."
"무어, 편경과 편종이 완성되었단 말이냐!"
전하의 용안엔 화사한 웃음이 물결쳐 넘쳤다. 다시 말씀을 내린다.
"경의 정성이 갸륵하다마는 실로 천우신조한 일이다. 이 기쁨을 어찌 주체하랴. 하하하, 고마운 일이다!"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옵고 민초의 다행이올시다."
난계도 기쁨이 넘쳐서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 생전에 경과 같은 지음하는 신하를 얻고. 또다시 거서와 경석이 나타나서 이러한 큰일을 완성하게 되었으니 기쁘기 한량없다. 이로써 종묘대제와 조회악에 십이율관과 편경, 편종을 합주해서 문화의 극치를 이루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다. 경은 곧 나로 하여금 편경, 편종의 새 모습과 새로운 음악을 듣게 하라."
"곧 거행하겠습니다."
박연은 말씀을 마치자 관습도감으로 돌아가 새로 만든 악기들을 대내로 운반하고 악공들을 거느려 합문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전하는 모든 악기와 악공들을 편전으로 불러서 십이율관과 편경, 편종을 합주해보라는 영을 내렸다. 전하의 분부 말씀이 떨어지자 편전 월대에는 유소로 장식한 편종, 편경들이 놓여지고, 한편에는 십이율관을 든 악공들이 나열해 있었다. 전하는 월대 앞에 옥좌를 배설하고 옥좌 뒤에는 병풍을 둘렀다. 병풍 뒤에는 궁중의 여악들과 지음하는 상침 취옥을 앉게 했다. 새로 창제한 아악의 음정을 살피게 하려는 것이다.
"아뢰어라!"
박연의 지휘가 떨어지니 악사는 박을 치고 악공들은 일제히 십이율관과 종경을 울리기 시작했다. 맑고 그윽한 아악의 화음이 편전 뜰 안에 가득했다. 전하는 고요히 눈을 감고 들었다. 화음이 연속되는 진정한 정악이었다. 중국의 와경 따위는 감히 견주어볼 여지도 없었다. 전하는 악공들의 경돌을 치는 소리가 높은음, 낮은음으로 변해질 때마다 용안에 만족한 미소가 떠돌았다. 홀연 악공이 경틀 윗단의 여덟 번째 이음이 나야 할 경돌을 때렸을 때다. 전하의 용안은 별안간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때 돌연 병풍 뒤에서 금방울을 굴리는 듯한 여인의 예쁜 소리가 대왕의 귓전을 울렸다.
"전하! 바로잡으십시오. 이음이 틀렸습니다."
전하는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나도 알았다!"
병풍 뒤에서 돌연 금방울 굴리는 듯한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하! 바로잡으십시오. 이음이 틀렸습니다.' 하고 아뢴 여인은, 악리와 지음을 잘하므로, 일약 궁중에 뽑혀서 총희가 된, 상침 취옥이다. 전하는 새로 창제된 아악을 감상시키기 위해서 병풍 뒤에 상침 취옥과 궁중의 여악들을 배치해서 경석의 음향을 판단케 했던 것이다. 이때 벌써 전하는 상단 제팔음계의 이의 소리가 조화된 해성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알았다. 용안을 잠시 찌푸렸던 것이다. 때를 같이해서 취옥의 아뢰는 소리가 병풍 뒤에서 들려왔다. 전하는 취옥의 음을 듣는 경지가 전하와 일치된 것을 기특하게 생각했다. 가만히 대꾸하고 웃음을 웃었던 것이다. 경돌의 아랫단 팔음계를 아뢰는 소리도 끝이 났다. 전하는 박연에게 하문한다.
"애를 많이 썼다. 그러나 경에게 묻는다. 윗단 여덟 번째 이음이 맑고 깨끗한 해음을 내지 못하니 어찌 된 셈인가?"
박연은 깜짝 놀랐다. 급히 편경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윗단의 여덟째 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먹으로 금을 그어 논 한묵이 다 갈리지 않고 머리털끝만큼 남아 있었다. 박연은 급히 몸을 돌려서 전상으로 추창해 올랐다.
"이의 음을 내는 경석이 다 갈리지 아니하옵고 조금 덜 갈려서 한묵이 남아 있습니다. 죄당만사옵니다."
전하는 비로소 까닭을 알았다.
"악의 묘한 이치는 과연 놀랄 만하다. 털끝만한 차이가 이러한 불협화음을 내는구나! 만백성을 다스리는 정치도 그러하고, 넓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는 길도 털끝만한 틀림이 있다면 부조리와 불협화가 나타나게 되는 법이다. 한묵을 다 갈지 못한 것은 도자장인이 조금 마음을 놓은 것이지 경에게야 무슨 허물이 있으랴. 죄당만사라는 말은 당치 않다! 곧 경돌을 더 갈아서 다시 한번 악을 아뢰게 하라!"
박연은 황공했다. 곧 월대로 내려가 급히 도자장인을 불렀다. 부름을 받고 들어온 도자장인은 황황망망 어찌할 줄을 몰랐다. 배낭 속에서 모든 제구를 꺼내놓고 경틀 윗단, 맨 끝에 달려있는 경돌을 떼어 내려서 먹줄이 통겨진 한선까지 조심스럽게 갈았다. 다시 곱게 손질하고 다듬어서 제자리에 달았다. 전하는 끝까지 옥좌에 앉아서 경석을 숫돌에 다시 가는 과정을 바라보고 계셨다. 경돌 이석이 다시 제자리에 달려진 모습을 본 전하는 분부를 내린다.
"다시 한번 울려보라!"
악공들은 뿔 방망이를 들고 경돌을 다시 때리기 시작했다. 윗단과 아랫단의 열여섯 음은 서로 화음을 일으켜 음색이 화사했다. 전하는 비로소, "잘되었다!" 한 말씀을 내렸다. 이로써 만고에 자랑할 우리 겨레의 독특한 아악은 이같이 완성이 되었다.
명황계감
진기하고 구하기 어려운 경석을 남양에서 얻어서 천하에 둘도 없는 아악을 완성한 전하의 심경은 마치 대붕새가 구만리 푸른 하늘을 박차고 나는 듯했다. 이날 밤에 전하는 유쾌한 마음으로 저녁 수라상을 받았다. 사라상을 거행하는 궁인은 상침 취옥이었다. 전하의 수라상은 크지 아니했다. 항상 검소한 음식을 좋아하는 까닭에 산해진미를 벌여놓지 아니했다. 나물은 무나물에 무도라지생채요, 고기는 섭산적에 콩팥회갓이었다. 탕은 토란국에 양즙이 별미로 놓이고, 표고버섯을 띄워서 끓인 된장찌개가 반 위에 보글보글 끓었다. 극히 서민적이다. 전하는 언제나 밤이 깊도록 독서를 즐기시므로 반주를 들지 아니했다. 이 까닭에 수라상에는 잔이 오르지 아니했다. 상침 취옥은 전하 앞에 수라상을 조심스럽게 놓고 반갱 뚜껑을 벗기려 했다. 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취옥에게 분부한다.
"아악을 완성하고 보니 내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다. 오늘같이 좋은 밤에 술 한 잔 아니 마실 수 없구나! 반주를 가져오너라."
취옥도 기뻤다. 술을 멀리하시던 전하가 아악을 완성한 기쁨을 안고 오래간만에 반주를 청하시니, 지음을 한다 해서 궁인으로 뽑힌 취옥인지라 아악을 완성한 이날 밤에 취옥도 전하 못지않게 기뻤다.
"반주를 드시려 하십니까? 곧 거행하겠습니다."
취옥은 벗기려던 탕 뚜껑을 다시 덮고 사뿐 일어나 수라간으로 향했다. 이윽고 취옥은 청자 술병과 청자 술잔을 은쟁반에 받들어 전하 앞에 놓은 후에, 백옥 같은 미끈한 손으로 비취빛 술병을 잡아 잔 위에 '퐁퐁' 따랐다. 잔 위에 술 떨어지는 음향이 전하의 귀에는 마치 궁, 상, 각, 치, 우의 아악 소리같이 들렸다.
"네가 제법 술 따르는 법도 아는구나! '퐁퐁' 떨어지는 그 소리가 마치 십이율관의 음률처럼 들린다!"
취옥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여 보시시 웃음을 머금고 술잔을 전하께 올렸다. 전하는 어수를 늘여서 청자 술잔을 받아 마시었다.
"술맛이 좋구나! 무슨 술이라 하더냐?"
"천일 묵은 천일주라 하옵디다. 마마께옵서 약주를 즐기지 아니하시니 술을 담근 지 삼 년이 넘어서 천일주가 되었다 합니다."
"오늘, 내가 아악을 완성한 날 비로소 천일주 뚜껑을 열었구나! 내 마음이 더한층 흐뭇하구나!"
말씀을 마치자 전하는 다시 남은 술을 마시고 빈 잔을 반 위에 놓았다. 취옥은 날렵했다. 은젓가락으로 섭산적 한 점을 집어서 전하의 입에 재빠르게 넣어드렸다. 전하도 인간이었다. 아름다운 여자의 날렵한 거행이 싫지 아니했다. 전하는 안주를 받아 잡순 후에 취옥을 바라보며 다시 분부한다.
"내 마음이 오늘 밤은 제법 호탕해지는 것 같다. 술 한 잔을 더 따르라!"
취옥은 대답 없이 청자 술병을 다시 들어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올렸다. 이번에는 술 따르는 소리가 나지 아니했다. 병에 술이 줄어진 때문이다.
"이번에는 술 따르는 소리가 나지 않는구나."
취옥은 웃으며 대답한다.
"첫 번째가 제일이올시다. 첫사랑이 지중합지요!"
전하는 귀여웠다. 왈칵 취옥을 포옹했다. 전하의 돌연한 포옹으로 인하여 취옥은 전하께 올리려던 천일주는 잔대에 어지럽게 넘쳐흘렀다. 취옥은 당황했다. 전하께 올리려던 술이 잔대에 난잡하게 넘쳐 흘렀으니, 이 잔을 그대로 전하께 바칠 수는 없었다. 무엄한 일이다. 그렇다고 전하께 올리려던 술을 퇴주 그릇에 버릴 수도 없었다. 더욱 무엄한 일이다. 퇴주는 제례 때나 하는 행사다. 순간 결심을 했다. 몸을 전하께 맡긴 채 잔대에 넘친 술을 홀연 두 손으로 받들어 들이켰다. 전하는 이 모양을 바라보자 깜짝 놀랐다. 두 팔로 껴안았던 취옥의 몸을 풀었다. 마음속으로 방자하다고 생각했다. 어용을 바로하고 취옥에게 묻는다.
"네가 술을 마실 줄 아느냐?"
"마실 줄 모르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들이켰느냐?"
용안은 더한층 엄숙했다.
"죽사오려고 마셨습니다."
취옥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숙여 대답했다.
"죽다니, 어찌해서 죽으려 했단 말이냐. 그리하고 술을 들이켜서 죽었다는 말은 못 들었다. 요망스럽게 꾸며대는 소리가 아니냐?"
취옥은 다시 조심스럽게 아뢴다.
"어전에 올리는 술을 엎질렀으니 죄당만사이옵니다. 잔대에 넘쳐서 불결한 술을 어찌 감히 전하께 드리오리까? 그렇다고 따라서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전하께 올리려던 존귀한 술을 함부로 버릴 수가 있습니까. 무엄하기 짝없는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와 창졸간에 쇤네는 가슴은 마실 줄 모르는 술을 마시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옵니다. 곧 죽을 것 같습니다."
이때 취옥의 보드라운 두 볼과 가을 물같이 맑은 눈언저리엔 홍훈이 들기 시작했다. 마치 홍도화 두어 점이 뺨과 눈가에 아른아른 핀 듯했다. 전하는 비로소 취옥이 마실 줄 모르는 술을 들이켠 까닭을 알았다. 괘씸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슬며시 풀리기 시작했다.
"술을 엎지르게 한 장본인은 나다. 네가 아니다. 그대로 올려도 좋았을 것을 그랬구나."
"아까도 아뢰었습니다마는 어찌 엎질러진 술을 감히 전하께 올리옵니까? 그렇다고 퇴주로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한다면 더욱 무엄한 짓이 됩니다!"
이때, 취옥의 아뢰는 음성은 약간 혀가 꼬부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신을 모아 단정하게 꿇어앉아 아뢴다. 아름다운 얼굴에 홍조가 떠도는 모습하며, 혀끝을 약간 부드럽게 돌리지 못하며 아뢰는 어운은 취옥의 아름다운 교태를 한층 돋우어주는 듯했다. 진정 천하의 절색이다. 전하는 당명황의 양귀비 같다고 생각했다. 귀여운 생각이 더한층 일어났다. 어수를 늘여 취옥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잔대에 넘친 술을 버려도 좋았을 것을 그랬구나!"
"황공하옵니다. 무엄하게 감히 아뢰옵니다. 퇴주는 제향 때 초헌, 아헌, 삼헌을 올리면서 퇴주 그릇에 술을 물리는 예법이올시다. 어찌 감히 이러한 방식을 생존하신 전하께 쓰옵니까?"
전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옥음을 높여 껄껄 웃으며 말씀한다.
"허허허. 그렇구나! 네 가상한 마음씨를 비로소 짐작하겠구나! 자아, 그럼 다시 한 잔 새 술을 따라라."
취옥은 마실 줄 모르는 술 기울이 전신에 물결치듯 돌았다. 홍훈은 호수 같은 눈가에서 점점 번져서 푸른 살쩍가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녹빈홍안의 절염이었다. 전하의 안정이 취한 듯 취옥의 아름다운 얼굴로 흘렀다. 취옥은 바싹 정신을 수습했다. 수라상 옆에 놓인 냉수 대접에 어배를 담가 깨끗하게 씻었다. 정한 행주로 다시 물기를 닦은 후에 청자 술병을 조심스럽게 들어 천일주를 다시 따랐다. 정신을 바싹 차려서 전하께 두 손으로 올렸다. 전하는 오래간만에 미인을 앞에 앉히고 술을 마시니 운치가 있었다. 신이 아니다. 전하도 인간이었다. 마음이 흐뭇했다. 쾌하게 천일주를 단번에 마시고 말씀을 내린다.
"이번에는 내가 무한 조심해서 잔을 받았다. 네가 또 마실 줄 모르는 술을 들이켤까 해서.....하하하."
취옥은 엎어진 술을 마신 것은 반 잔뿐이었다. 아무리 마실 줄 모르는 술이라 하나 양이 적었다. 더구나 정신을 바싹 차려서 조심하니 술기운이 차차 스러지기 시작했다. 저를 들어 전하께 콩팥회갓을 안주로 입에 넣어드렸다. 전하는 주기가 있으면서도 조금도 실태가 없이 단정하게 거행하는 취옥을 더한층 기특하고 귀엽게 생각했다. 안주를 젓순 후에 용안에 화려한 웃음을 띠고 취옥에게 분부한다.
"주불쌍배다! 두 잔만 마실 수 없구나. 한 잔 더 따라라."
취옥은 대답 없이 청자병을 기울여 잔에 가득 술을 부어 전하께 올렸다. 전하는 석 잔 술을 마신 수에 다시 취옥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아까 새로 편경된 아악을 들을 때, 너는 편경 상단의 이음이 탁하게 나는 것을 듣고, 병풍 뒤에서 바로잡으라고 일깨워주었다. 나는 네가 어느 정도 지음하는 것을 짐작했다마는, 이같이 악음을 가려내는 데 정통할 줄은 과연 몰랐다. 네가 말한 후에 경돌을 갈기 위하여 먹줄을 퉁겨논 한묵이 다 갈리지 않고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갈아서 맑은소리가 나게 했다마는 네 어찌 병풍 뒤에서 편경을 보지도 아니하고 몇째 줄, 몇째 음이 불협화음이 난다고 알았느냐?"
취옥은 이맛전을 다소곳 숙여 보시시 웃으며 아뢴다.
"전하께옵서도, 윗단 끝의 음이 마땅치 않다고 다시 살피라고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쇤네가 병풍 뒤에서 아뢴 것은 조금도 신통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편경을 앞에 놓고 보았으니 악공들이 때리는 몇째 번 경돌의 탁한 것을 알았다마는, 너는 보지도 아니하고 병풍 뒤에서 어찌 알았단 말이냐?"
취옥은 상긋상긋 웃으며 다시 아뢴다.
"악음은 눈으로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귀로 들어서 알게 됩니다. 첫소리 둘째 소리, 이같이 분간해 나가면 몇째 줄 소리는 맑고, 몇째 줄 소리는 탁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와 쇤네는 윗단 끝의 경돌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상긋상긋 웃음을 머금고, 나불나불 아뢰는 조그마한 붉은 입술 사이엔 가지런한 흰 이빨이 촛불 아래 윤을 뿜어서 더한층 아름다운 매기를 뿜는다. 영리하게 아뢰는 취옥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매혹되니 아니할 수 없었다. 귀여웠다. 전하는 신이 아니었다. 인간이었다. 또 한 번, 어수를 늘여 취옥을 안으려 했다. 전하가 애무를 하시려는 찰나 취옥은 홀연 몸을 틀었다. 어주에서 벗어났다.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돌아앉았다. 수라상의 그릇을 덮었던 백지 봉과를 사뿐 찢었다. 청수 그릇에 담갔다. 섬섬옥수로 꼭 짜서 입에 물었다. 잘강잘강 씹었다. 한동안 백지를 입에 넣고 씹었다. 옥좌를 등지고 돌아앉지 아니했다. 전하는 또다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해괴하다고 생각했다. 어용에 불쾌한 빛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돌아앉아 무엇을 하고 있느냐?"
꾸지람이 내렸다. 취옥은 비로소 입에 물고 한동안 씹고 있던 백지를 뱉어서 쟁반 귀통이에 놓고, 몸을 돌려 어전에 부복했다.
"황공무지하여이다."
"돌아앉아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전하의 봉안에는 노기가 등등했다.
"백지를 입에 물어 씹었습니다."
"백지를 입에 물어 씹다니? 그게 무슨 짓이냐?"
취옥은 황공한 어조로 아뢴다.
"아까 엎지른 술을 들이켜서 입안에 아직도 술 냄새가 나옵니다. 그리하와 악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백지를 씹었습니다."
전하는 난생처음 듣고 보는 일이다.
"백지를 씹으면 술 냄새가 나지 않느냐?"
"네, 그러하다고 들었습니다."
전하는 또 해괴하다고 생각했다.
"누구한테 들었느냐?"
"전에 어렸을 때 제 아비가 술기운이 있어, 할아비한테 문안을 드리러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백지를 입에 물었다가 뱉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와 입을 닦아본 것이옵니다."
전하는 일찍이 태종이나 태조를 뵈오러 들어갈 때 한 번도 술기운을 띤 일이 없었다. 더구나 구중궁궐에 있었으니 이러한 방문을 아실 까닭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아까 엎지른 술을 들이켠 후에 즉시 백지를 씹지 아니하고 이제 새삼스레 백지를 씹었느냐?"
전하의 옥음은 또다시 엄숙했다. 취옥은 서슴지 아니하고 아뢴다.
"아까 처음으로 굄을 받자왔을 때는 쇤네의 입에 술이 닿지 아니햇사옵고, 어주가 쏟아져서 망지소조하와 쇤네가 들이켠 후에는 비록 입안에 주기가 있다 하오나 수라상을 격하여 거행했으니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제 홀연 다시 괴시는 은총을 받자옵게 되오니 어찌 누추한 술 냄새를 용포 자락 앞에 피우리까? 추한 냄새를 제하려하와 돌아앉아 백지를 씹었사옵니다. 굽어살펴주시기 바라옵니다."
취옥의 바들바들 떨면서 아뢰는 태도는 마치 대붕 앞에 암탉 한 마리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꼴꼴거려 아뢰는 듯했다. 전하는 비로소 취옥이 백지를 입에 물어 씹은 까닭을 알았다. 다시금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어디 보자. 가까이 이리 오너라. 네 입에서 술내가 아니 나는지 시험해보자!"
전하는 다시 취옥을 가까이했다. 취옥의 아름다운 붉은 입술이 전하의 입가에 닿았다. 술 냄새는 깨끗이 스러지고 향긋한 지분 냄새가 용비에 스쳤다. 취옥의 호수 같은 맑은 추파가 담뿍 정염을 실어 용안에 어르며 소리 없이 흘렀다. 전하의 봉안이 취옥의 명모와 지척에 부딪혔다. 정열의 쌍불꽃을 튀겼다. 전하와 취옥은 한동안 법열의 경지에 들었다.
한 식경이 지났다. 전하는 팔을 풀었다.
"수라상을 물려라!"
취옥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협실에 대령하고 있는 궁녀를 불렀다. 수라상은 물려지고 침실은 깨끗이 청소되었다. 취옥은 상침이었다. 전하의 침구를 포진했다. 그럭저럭 밤은 깊었다. 전하는 취옥에게 분부했다.
"오늘 밤엔 네가 침실을 지켜라!"
상침 취옥에게는 무한한 영광이었다. 취옥은 이 밤부터 춘삼월 촉촉이 내리는 봄비 같은 은총을 밤마다 입게 되었다. 이후부터 취옥은 악리를 연구하기 위한 이름만의 총희가 아니었다. 우로의 은택을 입은 진짜 총희가 되었다. 눈치 빠른 궁중의 궁녀와 액정들이었다. 취옥이 진짜로, 대왕의 굄을 받는 소문은 온 궁중과 향간에까지 자자하게 퍼졌다. 궁녀는 궁녀대로, 내시, 별감, 무예청들은 제각기 취옥에게 청을 해서 가까이하려고 무궁무진 애들을 썼다. 궁중 바깥에서 벼슬하는 무리들도 어떻게 하면 취옥에게 줄을 대나 하는 철없는 궐자들도 많았다. 모든 사람들이 취옥을 떠받들게 되니 취옥은 차차 마음이 도도해지기 시작했다. 별감의 청을 들어서 대왕께 아뢰어 대전 별감이 되게 만들기도 하고 무예청들의 청탁을 들어서 통장으로 승진시킨 일도 있었다. 궁녀들도 취옥을 떠받들었다. 취옥에게 청을 해서 무수리가 나인으로 뽑히고, 나인이 상궁으로 승진까지 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소문은 궁중의 질서와 규범을 엄하게 지키는 소헌왕후의 귀로 들어갔다. 소헌왕후는 난처했다. 애당초 전하께서 아악을 창제하기 위하여 박연과 함께 십이율관과 경돌을 마련하실 때, 관습도감에서 취옥을 뽑아 편전에 무상 출입하게 한 것을, 궁중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여, 싫다고 하시던 상감을 권해서 전하의 침실을 보살펴드리는 상침을 삼게 했던 것이다. 궁중질서를 바로잡으려 했던 일은 이제 와서 보니 도리어 궁중질서를 더욱 문란케 하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소헌왕후는 번민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천거해놓고 당신이 전하게 취옥을 내보내시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점잖은 왕후마마가 질투한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팔구다. 번민하던 차에 세자가 문후를 들어왔다. 당초에 소헌왕후는 세자의 제청을 옳게 여겨서 전하의 아악을 완성하시게 하기 위하여 취옥을 후궁으로 천거했다가 상침이 되게 한 것이었다. 왕후는 문안 들어온 세자한테 설파한 후에 의견을 물었다.
"모든 일은 세자가 아는 터이니 결자해지를 하라."
세자는 어마마마의 말씀을 듣고 한동안 생각했다.
"하루 동안만 궁리하도록 해주옵소서."
아뢴 후에 중궁에서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에 세자는 책 한 권을 받들고 모후궁에 올랐다. 문안을 아뢴 후에 책 한 권을 어마마마께 바쳤다.
"아바마마께서 외전으로 출어하신 후에 어마마마께옵서 친히 편전에 듭시어 아바마마 책상 위에 책을 놓아두옵소서. 그리하시면 만 가지 일이 모두 다 해결이 될 것입니다."
소헌왕후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무슨 책인가?"
"그저 하문하실 것 없이 아바마마 책상 위에 올려만 놓으시고 내전으로 환궁하시면 됩니다."
소헌왕후는 믿는 세자의 말씀이었다. 더 묻지 아니했다. 세자가 물러간 후에 소헌왕후는 대전내시를 불렀다.
"전하께서는 지금 편전에 계시냐?"
"외전으로 납시어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십니다."
내시가 대답해 아뢰었다.
"그렇다면, 내가 편전에 나가리라. 잠시 볼일이 있다. 너와 함께 나가기로 하자."
소헌왕후는 말씀을 마치자 세자가 올린 책을 홍보에 친히 싸 들고 대전내시와 함께 편전으로 올랐다. 편전 안에는 옥좌 앞에 화류 책상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소헌왕후는 홍보에 싼 책을 화류 책상 위에 반듯이 놓고 대전내시에게 일렀다.
"전하께서 외전에서 듭신 후에 책상 위에 이 홍보가 놓여 있는 것을 보시면 반드시 '누가 갖다 놓았느냐?'하고 너에게 하문하실 것이다. 은휘하지 말고 내가 갖다 놓았다고 분명하게 아뢰어라."
소헌왕후는 분부를 내린 후에 중전으로 돌아갔다. 전하는 종일 외전에서 대신 이하 육조판서를 불러서 정사를 보살핀 후에 황혼 때 편전으로 환어했다. 상침 처소에 있던 취옥은 전하가 외전에서 편전으로 듭신다는 소식을 듣자, 열쇠같이 내달았다. 화용월태에 가득히 교태를 짓고 전하를 맞이했다. 전하는 온종일 정무를 살펴서 몸이 솜같이 피로했다가, 활짝 핀 백모란 한 떨기같이 방싯방싯 웃음을 터뜨리며 맞이하는 취옥을 바라보자, 피곤했던 기운이 봄눈 스러지듯 스러졌다.
"상감마마, 너무나 일이 많으십니다. 피로하시겠습니다."
꾀꼬리 소리 같은 취옥의 음성이 떨어졌다.
"오냐, 관계치 않다. 별일은 없었느냐?"
"아무 일도 없었사옵니다."
취옥은 전하를 부액해서 편전으로 모시었다. 익선관을 내리고 곤룡포를 벗겨드렸다. 탕건을 바로 만져드리고 편복으로 갈아드렸다.
"피로하실 텐데 잠깐 누우시옵소서. 다리를 쳐드리오리다."
전하는 신이 아니다. 역시 인간이었다. 피로가 풀릴 듯했다. 취옥이 하자는 대로 어체를 맡겼다. 녹신녹신 피곤했던 어체가 풀리는 듯했다. 전하는 유열을 느꼈다. 전하는 유열을 느끼며 혼곤하게 잠이 들려 했다. 취옥은 어체를 평안히 한 후에 가볍게 일어나 발걸음을 옮겨서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은쟁반에 은대접과 은수저와 소금 종지를 받들고 들어왔다. 살랑살랑 상감의 옥체를 흔들었다. 전하는 깊은 잠이 들지 아니했다. 눈을 떠보았다. 취옥이 은쟁반에 은대접을 받들어 옆에 놓고 전하의 옥체를 조심스럽게 흔들고 있었다.
"깜빡 졸음이 왔구나. 왜 그러느냐?"
"상감마마, 피곤하셔서 잠깐 조셨습니다. 아직 수라를 진어하실 때는 아니 되었삽고 시장하실 텐데 이것을 조금 젓수옵소서."
취옥은 전하의 옥체를 껴안아 일으켰다. 전하는 일어나 은쟁반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어냐?"
"시장하시고 피로하신 듯하와, 잣죽을 조금 쑤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전하는 온종일 정무를 살피고 여러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고보니, 조금 시장기가 들었다. 취옥은 은대접에 담긴 잣죽에 소금을 조금 뿌려서 간을 맞추었다. 은수저로 담뿍담뿍 떠서 전하의 입에 넣어드렸다. 약간 시장도 했지만, 과연 일미다. 잣죽이 입안으로 술술 넘어갔다. 전에 왕후 심씨가 간혹 잣죽을 올린 일이 있지만, 이같이 맛이 있기는 처음이었다. 과연 취옥은 잠겨진 자물쇠를 연삽한 열쇠같이 여낙낙하고 날렵하기 입안의 혀 같았다.
"잘 먹었다!"
전하는 취옥을 향하여 칭찬하는 말씀을 내렸다. 취옥은 대답 없이 상긋 웃고 은쟁반을 받들어 조심스럽게 나갔다. 전하는 대답 없이 상긋 웃는 취옥의 모습이 기막히도록 예쁘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취옥이 나간 후에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았다. 상 위에 붉은 보가 놓여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붉은 보를 놓은 일이 없었다. '누가 감히 편전에 들어와 붉은 보를 놓았나?' 하고 생각해보니, 방자하고 무엄하기 짝이 없었다. 설렁줄을 흔들었다. 궁녀가 들어왔다.
"상침 취옥을 들라 해라!"
이윽고 취옥이 들어왔다. 전하는 책상 위에 붉은 보를 가리켰다.
"이것이 뉘 짓이냐?"
취옥은 전하가 외전에서 들어오신 이후에 의대를 갈아 입혀드리고 다리를 쳐 드렸다. 다음에는 잣죽을 쑤어서 드린 일까지 있었으나 책상 위에 홍보가 놓인 것은 살피지 못했다.
"황공하옵니다. 쇤네는 상감마마께오서 외전에서 환어하신 후에 의대를 받들어 갈아드리고 잣죽을 쑤어 올리느라 책상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죄당만사옵니다."
그럴듯한 소리다. 전하는 또다시 설렁줄 방울을 흔들었다. 궁녀가 들어왔다.
"대전내시를 불러라."
이윽고 대전내시가 들어왔다. 전하는 책상 위의 홍보를 가리켰다.
"이 홍보를 누가 갖다 놓았느냐?"
"아까 상감마마께서 외전에 납신 동안 중전마마께서 친히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왜 나한테 알려주지 아니했느냐?"
"중전마마께오서 분부 계셨습니다. 상감마마께서 보시면 아실 테니 미리 말씀드릴 것이 없다 하시와 죄송하오나 아뢰지 아니했습니다."
전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중전이 친히 갖다 놓았다 하는데 취옥이나 내시를 더 꾸짖을 수는 없었다.
"나가들 있거라!"
취옥과 내시는 어전에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전하는 촛불을 돋우고 붉은 보를 끌렀다. 홍보를 헤쳐보니 책이 한 권 나타났다. 책 제목을 살폈다. '백낙천 시집'이라고 큰 글씨로 써 있다.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중전마마가 별안간 '백낙천 시집'은 왜 갖다 놓았나 했다. 뒤적뒤적 책장을 넘겼다. 중간에 책장 한 장이 접혀져 있었다. 무심코 접혀진 책장을 펴보았다. 책장 머리에는 백낙천의 서사시 '장한가'가 나타났다. 전하의 가슴이 뜨끔했다. 백낙천의 '장한가'는 전하가 젊었을 때 한두 번 읽어본 일이 있는 시다. 백낙천이 당명황과 그의 사랑하는 총희 양귀비 사이의 사랑을 그려서 마침내 양귀비로 인하여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을 꼬집어 야유한 시다. 전하는 책장을 펴놓고 '장한가'를 읽어본다.
한 나라 임금, 색이 좋아서 경국미인 생각했다.
임금 노릇 여러 해에 구해도 못 찾았네.
양씨네집 딸이 있어, 안방 속에 자라나니, 세상 사람 몰랐더라.
천생의 고운 얼굴, 버려질 리 만무로다. 하루아침 뽑혀져서 임금 곁에 있게 되니
머리 돌려 웃는 모습, 교태가 가지가지. 여섯 궁의 궁녀들, 아하 안색 없구나.
백낙천은 당나라 때 시인이었다. 당나라의 시인으로 자기의 임금 당명황의 망국 연정을 막바로 묘사할 수 없었다. 슬쩍 한 시대의 한왕으로 바꾸어 '장한가'의 서두를 꾸몄다. 전하는 첫머리의 시를 읽고 백낙천이 당명황을 한왕으로 돌린 것을 미소하며 읽었다. 전하는 다시 다음 시를 읽는다.
봄밤은 을씨년스럽다. 화청지에 목욕하네.
온천물 미끄러워 옥 같은 살기름 젖빛으로 엉키고.
시녀가 일으키네. 아리따워라, 힘이 없구려.
아아 임금의 굄을 처음 받는 첫날 밤.
구름 살쩍 꽃 얼굴에 사뿐사뿐 걸어가니
머리의 금나비는 한들한들 흔들리고 부용장 따뜻한 방 속에 밤은 깊어라.
봄밤은 고단해라, 일고삼장 일어났네. 이로부터 임금님 아침 정사 못 본다.
전하는 여기까지 읽었을 때 가슴이 뜨끔했다. 한두 번 취옥을 시침시켰다가 늦게 일어난 아침이 있었다. 전하는 다음 시를 읽어 본다.
굄 받아 잔치 참석, 한가한 틈 없구요, 삼춘 좋은 시절, 밤마다 밤마다로다.
후궁의 고운 이들 삼천 명인데, 삼천 명 받든 사랑 한몸에 지녔어라.
금집이 꾸며지니 교태 부려 모시는 밤, 옥루에 잔치하니 술기운에 봄바람, 아니 취코 어쩌리.
언니, 동생, 오빠, 아우 모두 다 공후 되니, 좋을시고 양씨일문, 으리으리 빛이로다.
전하는 이 대목을 읽자 잠깐 마음이 괴로웠다. 상침 취옥의 형과 아우, 동생들에게 벼슬자리를 준 일은 아직 없으나, 취옥의 청을 들어서 나인을 상궁으로 올려준 일도 있고, 무예청 통장으로 승진시킨 일도 있었다. 극히 미미한 일이었다. 그러나 취옥에게 사랑하는 정이 기울어져서 취옥의 청을 들어준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공연한 짓을 했구나.' 하고 마음에 가책을 느꼈다. 아악을 완성하기 위해서 지음하는 취옥을 가까이했던 것이다. 당현종이 양귀비한테 휘감기듯 색에 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약간 색에 취했던 것도 사실이다. 전하는 입맛이 씁쓸했다. 다시 다음 시를 읽어본다.
천하의 부모된 사람들, 아들 낳기 원치 않고 딸 낳기만 원했네.
여궁 높은 곳엔 푸른 구름 감돌고, 풍악 소리 바람에 날려 곳곳마다 들린다.
느린 노래, 느린 춤, 거문고와 퉁소 소리에 엉클어지고, 임금은 해가 지도록 풍류에 취했다.
어양곡에 북치는 소리 지둥치듯 일어나고, 예상우의 마지막 마금 소리에 깜짝 놀란다.
전하는 자신의 아악을 창제한 정신과 당현종의 풍악을 좋아하는 행위와 비교해본다. 당신의 아악을 창제한 일은 국가의 예악을 바로잡아서 정악을 마련하는 일이요, 당명황의 행위는 풍류와 색에 도취되어 나라의 정사까지 살피지 않게 된 것이다.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시를 읽는다.
구중궁궐에 난리가 일어났다. 천승만기는 서남으로 쫓겨간다.
임금의 푸른 일산 흔들흔들 가다가 멈추고, 도성 서편 백 리 밖으로 달렸다.
양귀비 탓이라고 군사들 떠들고 가지 않네.
할 길 없구나! 어찌하리. 천하절색 양귀비는 말 앞에 죽는다.
꽃비녀 땅에 떨어졌건만 줍는 이 없고, 비취잠, 금비녀, 옥귀개 낭자하구나.
전하는 한숨을 짓고 다음을 읽는다.
임금은 얼굴 가려 외면하고 양귀비를 살리지 못하네.
머리 돌려 마주 보며 피눈물만 흘린다.
누른 티끌 하늘 땅에 뒤덮고, 바람은 스산한데,
구름다리 돌고 돌아 검각으로 올랐네.
아미산 아래는 오가는 사람 드물고, 날리는 깃발 기운 없는데 햇빛 마저 엷어라.
강물도 푸르고 산빛도 청청쿠나.
임금의 마음 아침마다 저녁마다 그리운 임의 생각.
전하는 또 한 번 한숨을 짓는다. 여자로 인하여 국가가 흥할 수도 있고 여자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는 일도 있다. 하필 나라뿐이랴. 자그마한 집안일도 매한가지라 생각했다. 모든 일은 무한대한 욕망을 억제해서 극기복례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다음 시를 읽는다.
행궁의 달빛 보아도 마음 상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밤 빗소리, 처마 끝에 들리는 풍경소리
아하, 단장성이로다. 난은 평정되었다. 서울로 돌아간다.
그러나 주저주저 가지 못하네.
마외역 언덕 아래 진흙 구덩이, 옥 같은 임의 얼굴 죽었던 그곳, 차마, 차마 볼 수 없구나!
임금과 신하들, 서로 붙들고 눈물 비 오듯, 함빡 옷이 젖었네.
하릴없다! 도성문 바라보고 다시 말을 달린다.
전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다시 길게 한숨을 짓는다. 다음 시를 훑어본다.
돌아와 보니, 연못과 후원, 모두 다 옛 모습 그대로다.
태액지의 부용꽃, 미앙궁의 능수버들, 부용꽃은 그녀의 얼굴, 버들잎은 그녀의 눈썹.
이 모양 바라보며 눈물 어찌 아니 나리.
봄바람 도리화 흐드러진 밤, 가을비 오동잎에 떨어질 때라.
서궁 남원엔 가을풀도 많구나! 홍엽은 뜰에 가득 쓸지도 않았다.
전하는 탄식했다.
"백낙천 백거이는 과연 대시인이다. 사람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는구나!"
거이는 백낙천의 자다. 전하는 혼자 말하며 다음 시를 읽는다.
이원의 악공들, 백발이 성성하고, 초방의 아감(=내시) 청아(=궁녀) 다 늙었구나.
전각에 반딧불 날으니 임 생각해 시름하고, 돋우고 돋운 외로운 등불 심지마저 다했건만 잠 이루지 못한다.
더디고 더디어라! 오경 북, 길고 긴 밤. 은하수 가물가물, 동이 트려 하네.
원앙기와 싸늘타, 상화는 내렸는데, 비취이불 차가워라, 뉘와 함께 지내리.
전하는 읽기를 다하자, 잠시 명상 속에 잠겼다.
"다정도 병이로다! 정이 길면 벽파에 휘감기듯 헤엄쳐 나올 수가 없구나!"
크게 탄식했다. 전하는 '장한가'를 계속해 읽는다.
생과 사로 갈린 지 해가 넘건만 혼백은 꿈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임공도사 홍도 사람, 정신으로 넋을 부른다 하네.
임금 시름, 민망해서 도사 시켜 찾아보네.
바람을 헤치고 대기로 달려 번개 치듯 날았다.
하늘에도 오르고 땅속에도 들어갔네.
위로는 푸른 하늘, 아래로는 황천까지 살폈다.
그러나 아득하다. 만날 수 없네.
홀연 들으니, 바다 위에 선산이 있다 하네.
산은 허무하고 아득한 곳.
전각은 영롱한데 오색구름 일어나고, 그곳엔 어여쁜 선녀들이 많았다.
이 중에 한 여자, 자는 옥진인데, 눈 같은 흰 살, 꽃 같은 모습, 진짜 양귀비. 황금 전각 서편 집, 옥창문을 두드렸다.
소옥, 쌍성 두 시녀 전갈을 받들었다. 한나라 천자의 사신 왔다는 말 듣고, 비단 휘장 속에 어린 듯 취한 듯 옥진은 놀랐다.
옷을 갈아입고 베개를 밀어 천천히 일어났네.
구슬 박은 은병풍을 살며시 열었다.
선잠을 깬 구름 같은 살쩍 반 넘어 기울어졌고, 화관은 비뚜스름 매만지지 않았다.
의젓이 당 아래로 내려선다.
선녀의 소맷자락 펄펄 날으니, 흡사 예상우의의 멋진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얼굴엔 눈물이 글썽글썽, 이화 한 가지가 봄의 빗방울 머금은 듯하다.
추파에 정을 실어 임금을 생각한다. 한 번 이별한 뒤 옥음과 용안이 모두 다 아득하군요.
소양궁중의 사랑은 끊어졌고, 봉래궁 옛일, 세월이 오래외다.
머리 돌려 인간처 굽어보니, 장안은 보이지 않고 티끌과 안개뿐이군요.
전하는 또 한 번 탄식하는 한숨을 짓는다. 백낙천의 '장한가'는 차츰차츰 휘몰이로 들어간다. 전하는 다시 시를 계속해서 읽어본다.
옛 물건을 보내서 깊은 정을 표합니다.
소란 박은 금비녀를 갖다드리시오.
비녀 한 자루에 부채 한 자루, 황금비녀에 소란을 박은 것입지요.
마음이 금전같이 굳으시라고요, 선녀와 사람이 서로 만나사이다.
이별할 때 은근히 다시 부탁한다. 부탁하는 말 속에 맹세하는 두 마음 아시지요?
칠 월 칠 일 장생전에, 사람 없는 한밤중 속삭이는 말씀.
하늘에 있게 되면 비익조되고요, 땅에 있게 되면 연리지 되사이다.
하늘처럼 길고 땅처럼 오래도록 무궁무진 다할 때까지 사랑하사이다.
이 한은 면면이 끊어질 리 만무외다.
전하는 읽기를 다하자 길게 한숨을 짓고 백낙천의 '장한가' 책장을 덮었다. 잠깐 눈을 감고 명상 속에 빠졌다. 백낙천이 지은 서사시 '장한가'의 주인공 당나라 8대 임금인 당현종과 양귀비의 옛일은 어렴풋 들어본 적 있으나, 좀 더 그들의 망국애련의 사실을 고증해서 알고 싶었다. 전하는 마악 설렁줄을 흔들어 내시를 부르려 할 때, 침전문을 '똑똑' 두드리는 가벼운 음향이 들렸다.
"누구냐?"
"쇤네올시다."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고운 목소리와 함께 상침 취옥이 아름다운 얼굴에 매력 있는 웃음을 띠고, 전하 앞으로 나와 반절을 드리고 아뢴다.
"수라를 진어하실 때가 벌써 한 시각이나 지났사옵니다. 너무나 시장하시어 어찌하십니까? 수라상을 받으신 후에 다시 책을 읽으시는 것이 어떠하올지 감히 아뢰옵니다."
방싯방싯 웃음을 머금고 아뢰는 취옥의 고혹적인 예쁜 얼굴은 흡사 백낙천의 시 속에 나타나는 양귀비의 고혹적인 모습 같았다. 곧 전하의 마음을 뇌쇄시킨다. 전하의 눈앞에는 홀연 당현종의 모습이 나타났다. 양귀비한테 고혹되어 정사를 보살피지 않더니 안녹산의 반란을 만나 촉 땅으로 달아나다가 친위군들이 요망한 여인 양귀비를 죽여야 행군을 하겠다고 분노가 화산 터지듯 폭발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양귀비는 백릉대 긴 수건으로 목을 매어 죽에 되는 그 장면이 나타난다. 전하는 취옥을 바라보던 용안을 얼른 돌렸다. 고개를 외면한 채 대답했다.
"아까 든든하게 먹어서 밥 생각이 없다. 오늘 저녁 수라는 아니 받기로 하겠다."
"어머나! 수라를 궐하시면 어찌하옵니까. 조금 입매라도 하셔야 합니다."
전하는 눈에 보이는 취옥의 모습을 뿌리쳤다. 외면한 채 언성을 높였다.
"잔소리 말고 물러가거라. 수라상 대신 내시를 불러라."
취옥은 깜짝 놀랐다. 전하께 승은한 이후 이같이 무정한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황하고 무안했다. 감히 더 아뢰지 못하고 조심조심 뒷걸음질 쳐 물러갔다. 공사청을 불러서 대전 편전으로 들어가 뵈라 이르고, 우울한 마음을 가슴에 안은 채 자기 처소로 들어갔다.
한편 어전 내시는 취옥을 통해서 상감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총총걸음을 걸어 어전에 대령했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의 용안은 적이 풀리기 시작했다.
"집현전에 나가서 당 시대의 열전을 달래서 가지고 들어오너라."
이윽고 내시는 '사기 열전'을 받들고 들어와 어전에 바쳤다.
"나가 있거라."
내시가 나간 후에 전하는 촛불을 돋우고 '사기 열전'을 폈다. 열전 속에서 먼저 당현종의 사적을 읽어본다.
당현종은 예종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름은 융기다. 처음에 임치왕을 봉했다. 천성이 영특하고 패기가 있었다. 위씨의 내란이 일어나니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무찌르고 위씨를 목 베어 난을 평정한 후에 아버지 예종을 받들어 황제가 되게 했다. 곧 성위를 받아 황제가 된 후에 연호를 개원이라 하고 어진 재상과 슬기로운 장수를 발탁해 쓰니,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들은 태평세월을 구가해서, 개원의 치적은 그의 선대인 당태종의 정관시대만큼 훌륭한 정치를 했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연호를 고쳐서 천보시대가 된 후에 그는 귀비 양씨를 지나치게 총애해서 그녀의 말을 듣고 소인과 간사한 무리 이임보, 양국충, 안녹산 따위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들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마침내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켰다. 현종은 하는 수 없어 양귀비를 데리고 촉으로 달아나면서 난을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외산 마외역에 당도했을 때 친위병인 육군은 행군을 하지 아니하고, 요망한 계집 양귀비로 인하여 나라가 결딴났다고 고함치고 떠들어댔다. 또다시 반란 중에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군심을 무마하기 위하여 양귀비는 목을 매서 죽었다. 난리가 평정되니 태자는 영무 땅에서 임금 위에 나가고 현종은 상황으로 높였다. 그러나 현종은 자나깨나 목매어 죽은 양귀비를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도사를 청해서 양귀비의 죽은 혼을 불러 달라 했다. 도사는 현종의 산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천상옥경십이루에서 양귀비의 변신인 옥진을 만났다 하고 거짓으로 양귀비가 금비녀와 부채 한 자루를 주면서 일 년에 한 번 칠월 칠석 밤이면, 장생전에서 사람 없는 한밤중에 만나자 했다. 이리하여 현종은 도사의 말에 고혹되어 장생전을 짓고, 선녀가 된 양귀비가 칠월 칠석 한밤중에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다정이 병이었다. 슬기롭던 군왕이 어리석은 임금으로 변했다.
시인 백낙천은 이 열전을 골자로 해서 '장한가'를 지었던 것이다. 전하는 다시 양귀비의 열전을 헤쳤다.
'양귀비는 양원담의 딸이다. 어렸들 때 이름을 옥가락지라 했다. 장성한 후에는 태진이라 고쳤다. 처음에 수왕비가 되었다가 궁중에 들어가 여관이 되었다. 현종의 눈에 들어 삼천궁녀들을 제쳐버리고 한몸에 사랑을 받았다. 천보 연간에는 일약 귀비의 책봉을 받았다. 그녀는 노래와 춤을 잘할 뿐 아니라 음률에도 밝았다.'
전하는 여기까지 읽어 내려오다가 가슴이 철렁하고 머리털이 쭈뼛했다. 상침 취옥도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었다. 십이율과 경석율 편성할 때 '만전춘'과 '삼진작'이며 '정읍사'를 명창으로 노래했고 처용무, 연화대희까지 잘 추었다. 뿐만인가, 지음을 잘했다. 그 까닭에 궁중으로 불러들였다가 이내 상침을 명했던 것이다. 흡사 양귀비의 옛일과 비슷했다. 대왕의 마음은 약간 불안한 충격을 아니 받을 수 없었다. 대왕은 다시 아랫글을 읽어본다.
'천성이 지나치게 총명하고 민첩했다. 현종의 비위를 잘 맞췄다. 삼천 궁녀들은 낭자하고 받들고, 대우는 황후와 동등하게 했다. 형과 아우는 모두 다 군후를 봉하고 재치 있는 안녹산을 양아들로 정해서 귀비의 침실에 밤과 낮으로 무상출입을 하게 했다. 안녹산은 마침내 현종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려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로 쳐들어갔다. 현종은 황황망망 양귀비를 데리고 파촉으로 달아났다. 일행이 마외역에 당도했을 때 호위해 나가던 친위병들은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녀의 형 양국충을 죽이라고 야료를 쳤다. 마침내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는 길가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대왕은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지었다.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양귀비의 형 양국충의 열전을 읽는다.
'태진의 종형이다. 술 마시고 노름을 즐기는 무뢰배다. 일가친척들은 사람으로 치지 아니해 상종하지 아니했다. 종부 양담이 촉주에서 죽으니 국충은 종부의 집을 보살펴주다가 누이 괵국부인과 통했다. 뒤에 양귀비의 덕으로 어사가 되었다가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다. 고관대작은 모조리 지내서 벼슬한 수가 사십여 가지나 되었다. 그의 행동은 더욱더 황음무도했다. 한편 양귀비의 사랑을 받는 안녹산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생각해서, 현종한테 안녹산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놈이라고 여러 차례 고했다. 안녹산은 항상 양국충의 박해를 받는 것이 두려웠다.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서 동관을 함락했다. 당현종은 양귀비와 양국충과 함께 황황망망 파촉으로 달아났다. 마외역에 당도했을 때 친위병들은 나라를 망하게 한 양국충의 목을 베고 고기를 씹었다.'
대왕은 양국충의 열전을 읽자 크나큰 교훈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안녹산의 열전을 펴놓았다.
'안녹산은 영주 유성호인이다. 첫 이름은 아뢰산이라고도 하고 알뢰산이라고도 불렀다. 어려서 아비가 죽으니, 어미는 안연언이란 사람에게 다시 시집을 갔다. 녹산은 어미를 따라 의부의 성인 안가로 행세를 해서 안녹산이라 불렀다. 차차 장성하니 총명 영리해서 여섯 나라 말에 능통했다. 장군 정수규는 기특하게 생각해서 비장을 삼았다가 발탁해서 평로절도사를 삼았다. 이로 인하여 현종께 뵙는 기회를 가졌다. 현종은 인재라 생각해서 범양절도사 겸 하북채방사를 삼고 평로군을 영솔케 했다. 녹산은 현종의 신임을 얻게 되니 양귀비를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녹산은 양귀비의 비위를 맞출 것을 잊지 아니했다. 현종의 신임을 얻듯이 양귀비한테도 신임을 받았다. 아첨하는 말은 청산유수와 같았고, 사내다운 씩씩한 기상은 양귀비의 정염을 부채질해 일으켰다. 안녹산은 양귀비의 양아들이 되기를 원했다. 양귀비는 현종한테 아뢰니, 현종은 크게 기뻐해서 양귀비의 양아들 되는 것을 허락했다. 양귀비에게 고혹된 현종은 그녀의 말이면 사슴을 말이라 해도 곧이 듣는 때문이다. 이로부터 안녹산은 양아들이 되어서 양귀비의 침실로 무상출입을 했고, 벼슬은 점점 더 올라서 운중태수에 하동절도사를 겸해서, 삼도를 통솔하게 되었다. 녹산은 차차 마음이 방자해졌다. 당명황을 죽이고 스스로 천자가 되려 했다. 반란군을 조직하고 맹렬한 훈련을 계속했다. 삼도의 군사를 거느려 서울로 쳐들어가 함락한 후에 국호를 연이라 하고 웅무황제라 자칭했다. 한 해가 지난 후에 그의 자식 경서의 손에 시해되었다.'
대왕은 안녹산의 전기를 다 읽은 후에 가만히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탄식했다. 전하는 다시 양귀비의 형 괵국부인의 열전을 찾아보았다.
'양태진의 형이 셋이 있다. 모두 다 잘생긴 미인들이다. 언변이 좋고 익살을 잘 부렸다. 멋들어진 계집들이었다. 천보 연간에 큰 사람에게는 한국부인의 첩지를 주고, 셋째한테는 괵국부인의 칭호를 내리고, 여덟 째한테는 진국부인의 교지를 내렸다. 모두 다 왕비의 대우를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현종은 분값이라 해서 한 달에 10만 금씩 내렸다. 호화로운 분값이었다. 그러나 괵국부인은 일체 얼굴에 지분을 더하지 아니했다. 천연스런 본 얼굴의 아름다운 것을 자부하는 때문이다. 이리하여 대궐에 들어가 천자인 당명황을 뵐 때도 얼굴을 매만지지 아니했다. 그의 용모는 이같이 아름다운 때문이다.'
전하는 읽기를 다하자 열전 책을 덮었다. 전하는 '국가의 흥망성쇠가 모두 다 여인의 조화에 달렸구나!' 하고 탄식했다. 깨닫는 임금이 되고 용렬한 임금이 되지 아니해야만 나라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열전을 밀어놓고 홍보에 싸여 있는 백낙천 시인의 '장한가'를 다시 바라본다. 아내인 소헌왕후 심씨가 '장한가' 책을 책상 위에 갖다 놓은 뜻을 황연히 깨달았다. 왕후는 말 없는 중에 '백낙천 시집'을 갖다 놓고, 전하께 정신을 차려서 밝은 임금이 됩시사 하고 깨우친 것이 분명했다. 전하의 등에 찬 땀이 흘렀다. 하마터면 당명황이 양귀비한테 홀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같이, 취옥의 요염한 태도에 넘어갈 뻔했다. 전하는 아내인 소헌왕후의 말없이 간하는 엄숙한 태도에 감복했다. 홍보에 싸여 있는 '백낙천 시집'을 문갑 위에 고이 간직했다. 밤이 깊었다. 편전 문밖에서 상침 취옥이 문을 가볍게 두드리고 들어와 어전에 아뢴다.
"밤이 깊었사옵니다. 자리를 펴오리까?"
취옥의 나직나직 아뢰는 목소리는 여전히 감칠맛이 있도록 고왔다. 옥반에 금구슬을 굴리는 듯 아름다웠다. 말소리가 아니라, 곧 높고 낮게 화음을 일으키는 악의 음향이었다. 항상 귀엽던 그 고운 목소리다. 소헌왕후가 갖다 놓은 백낙천의 '장한가' 글자가 홀연 눈에 떠올랐다. 전하는 대답 없이 얼른 귓바퀴에 손을 댔다. 들려오는 취옥의 아름다운 음성을 막아보려는 것이다. 취옥은 전하가 자기의 아뢰는 소리를 못 들으신 줄 알았다. 붉은 입술가에 웃음을 가득 띠고 다시 아뢴다.
"밤이 깊었사옵니다. 자리를 펴오리까?"
전하는 귓전을 어루만지며 무심코 앞을 바라본다. 촛불 아래 취옥의 절염한 모습이 아른거렸다. 웃음을 머금고 아뢰는 붉은 입술 사이로 상아빛 고운 이가 풍정 있게 윤을 뿜었다. 전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조수 물 밀어닥치듯 하는 취옥의 교태를 마음의 성벽으로 막아보려는 것이다. 전하는 대답할 틈이 없었다. 마음이 산란한 때문이다. 취옥은 세 번째 아뢴다.
"밤이 깊었사옵니다. 자리를 펴오리까?"
전하의 마음은 비로소 정해졌다. 흔들리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사색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별안간 소박을 해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했다. 태연한 목소리가 전하의 입에서 떨어졌다.
"오오, 자리를 깔아라."
취옥은 침소에 자리보전을 했다. 그녀는 다시 전하의 지척에 시립해 아뢴다.
"자리보전이 다 되었습니다."
전하는 큰 산이 움직이지 아니하듯 태연하게 앉았다.
"의대를 벗겨드리오리까?"
"오오, 벗겨라!"
취옥은 전하의 의대를 끄르고 자리옷으로 갈아입혀드렸다. 취옥은 전하를 부액해서 금침으로 모시었다.
"촛불을 꺼라!"
전하는 분부를 내렸다. 취옥은 섬섬옥수를 흔들어 촛불을 껐다. 그녀는 또다시 내릴 어떠한 분부를 기다리고 물러가지 아니했다.
"오늘 밤은 내가 고단하다. 나가 자거라!"
취옥은 무엇을 잃은 듯 조용히 물러갔다. 전하는 아무 별다른 일이 없는 듯, 털끝만큼도 사색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중궁인 소헌왕후께도 백낙천의 '장한가'를 어찌해서 갖다 놓았느냐고 묻지도 아니했다. 취옥에게도 전과 같이 수라상과 침소 일을 보살피게 했다. 소헌왕후 역시 진중한 분이었다. 백낙천의 '장한가'를 읽어보셨느냐고 묻지도 아니했다. 전하는 여전히 취옥을 괴는 체했다. 다만 한밤중에 애무가 드물 뿐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전하는 밤늦도록 집현전 학사들과 외전에서 경학을 토론하고 침전으로 돌아왔다. 용안에 약간 피로한 빛이 나타났다. 취옥은 전과 같이 전하를 부액해 맞아들였다. 침실에 금침을 깔아드리고 조심조심 묻는다.
"상감마마, 옥체를 돌보시옵소서. 너무나 밤늦도록 정사를 살피셨습니다. 용안에 피로하신 빛이 선연히 나타납니다."
"정사 일을 살핀 것이 아니다. 젊은 학사들과 학문을 토론했다. 약간 노곤하구나!"
취옥은 여러 날 동안 시침하는 은총을 입지 못했다. 감히 아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무한 번뇌하고 초조했다. 전하의 피곤해하시는 태도는 취옥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다리를 쳐 드리오리까?"
요염하게 아뢰는 아리따운 목소리는 전하의 귓전을 울렸다. 전하는 이미 마음의 성을 굳게 했던 것이다. 아무런 사색도 없이 태연히 대답했다.
"아무려나 하려무나!"
취옥은 무릎을 밀고 전하의 옥체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시원하구나! 네 손은 약손인가보다."
전하는 짐짓 취옥을 칭찬했다. 홀연 취옥은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기회를 얻지 못해서 아뢰지 못했던 일이다.
"상감마마, 쇤네, 감히 청조할 일이 있습니다. 아뢰어도 좋겠습니까?"
"무슨 청이냐? 말을 해보라."
"감히 아룁기 황공하옵니다."
"관계치 않다. 말을 해보아라."
"그럼 말씀 아뢰겠습니다. 소인의 아비 나이 오십이 넘었건만 아직 백두올시다."
"글을 읽었느냐? 글을 읽었으면 과거를 보면 백두를 면할 수 있느니라."
"항상 과거 때마다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이 됐습니다."
전하는 껄껄 웃었다.
"좀 더 공부를 하라고 일러라. 과거에 참방이 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백두를 면할 수 있느냐?"
"듣자오니 선공감 가감역은 과거를 보니 아니해도 음관인 남행으로 감투를 쓴다 하옵니다. 상감마마, 제 아비의 백두를 면케 해주옵소서!"
취옥의 목소리는 가냘프면서도 간드러졌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요년, 어린것이 자라면 큰 굿 해먹을 년이로다!'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 태연히 말씀했다.
"어디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튿날 전하는 외전에 나가 정사를 살핀 후에 중궁으로 어가를 옮겨 왕후를 찾았다. 전하께서 임어한다는 내관의 연통을 받자, 소헌왕후는 총총히 전하를 맞이했다. 전하는 용안이 화사했다.
"만 가지 정무를 종일 살피시어 어체 피곤하실 텐데 이곳까지 행차하시니 황공하여이다."
소헌왕후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아뢰었다.
"며칠 동안 중궁을 뵙지 못하여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했소이다. 돌연 찾은 것을 용서해주시오. 하하하."
전하는 화기 가득하게 소리를 높여 웃었다.
"영광이올시다"
소헌왕후도 옥안에 활짝 웃음을 폈다. 이윽고 시녀는 향다를 올리고 물러났다. 전하는 차를 두어 모금 마신 후에 왕후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며 말씀한다.
"후마마의 말씀 없이 보내신 훈계는 고이고이 가슴 속에 감명 깊이 간직했소이다!"
소헌왕후는 시침 떼고 대답해 아뢴다.
"무슨 하교신지 얼른 알아듣지 못하겠소이다. 신첩이 감히 어찌 상감마마를 훈계하오리까? 황공스런 말씀을 내리시옵니다. 몸 둘 바를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후마마도 과인을 기이(속인다는 말)십니까? 홍보에 싸서 책상 위에 얹어놓으신, 백낙천의 '장한가'를 잘 읽었습니다. 하마터면 과인이 당명황이 될 뻔했소이다. 하하하....."
전하는 소리를 높여 웃으셨다.
"신첩이 어찌 전하를 기이로이까? 하루는 동궁이 문안을 들어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백낙천의 시집을 품 안에서 꺼내주면서 전하의 책상에 올려놓으라 하옵기, 시키는 대로 얹어놓은 것뿐이옵니다. 신첩이 어찌 백낙천의 시를 아오리까? 통촉해주옵소서."
전하는 동궁이 백낙천의 시집을 책상 위에 얹어두라 했다는 소헌왕후의 말씀을 듣자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세자가 풍간을 했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을 때 등에 땀이 솟았다.
"일심상조무언중 이라고, 후마마와 동궁의 뜻을 잘 알겠소이다. 사실, 과인은 보내신 백낙천의 '장한가'를 읽고 당명황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결심을 했소이다. 마마께서는 내일 상침 취옥을 저의 사가로 내보내십시오. 시량을 후히 대어주도록 하시고 궁중 안에 두지 않게 하소서."
소헌왕후는 마음속으로 백낙천의 시가 이같이 빨리 효력을 낼 줄은 몰랐다. 시침 떼고 다시 아뢴다.
"취옥이 무슨 불미한 행동이 있었사옵니까?"
"어린것이 지나치게 방자하고 대담합니다. 좀 더 나이 들면 몹쓸 듯합니다."
전하는 이같이 서두를 꺼낸 후에 취옥이 제 아비를 남행으로 벼슬을 주어서 선공감 가감역을 시켜 달라던 말을 일장설파했다.
"전하께오서 그리 생각하셨다면 궁중의 기강을 위해서 분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궁중의 여관을 뽑아 들이고 내치는 일은 왕후궁에서 처리하는 일이었다. 이튿날 소헌왕후는 취옥을 중궁으로 불렀다. 취옥은 돌연 중궁의 부르심을 받자, 무슨 일인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황황히 중전 상궁에게 인도되어 왕후마마께 뵈었다. 소헌왕후는 취옥의 배알을 받은 후에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너는 오늘부터 네 집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그동안 전하를 모시어 애를 많이 썼느니라. 아악과 십이율을 제정하시는 데 많은 도움을 드렸고, 상침이 된 후에 침수 범절을 받드느라고 수고가 많았다. 상감마마께서는 네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 한평생 시량 범절을 넉넉하게 대주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그리 알고 집으로 돌아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면서 편히 지내도록 하라."
취옥은 별안간 청천에 벽력을 맞은 듯했다. 정신이 아뜩했다.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찌할 줄 몰랐다. 취옥은 전하께서 양귀비와 당명황의 사랑을 묘사한 백낙천의 '장한가'를 읽으신 것을 알지 못했다. 무슨 까닭에 이같이 청천 하늘에 벼락을 치듯 나가라는 어명이 내리신 연유를 깨닫지 못했다. 고개 숙인 얼굴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한동안 후에 취옥은 머리를 겨우 들어 중전마마를 바라보고 아뢴다.
"황공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쇤네가 무슨 죽을 죄를 저질렀사온지 쇤네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마마께오서 혹시 아신다면 죄상을 밝혀주시기 바라옵니다."
소헌왕후는 중전 상궁에게 분부를 내린다.
"너는 잠깐 나가 있거라."
상궁이 물러간 후에 왕후는 안상하게 말씀을 내린다.
"나도 자세한 일을 모르겠다마는 너, 혹시 상감마마께 사사로운 일을 청탁해서 아뢴 일이 있느냐?"
취옥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비에게 가감역 벼슬을 시켜 달라고 말씀드린 일이 있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고개를 숙이고 차마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
"말을 해봐라!"
중전은 다시 안상하게 물었다. 취옥은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고 떨리는 음성으로 아뢴다.
"쇤네, 나이 어리고 철이 들지 못하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무엄한 말씀을 한마디 아뢴 일이 있었습니다. 아비에게 미관말직인 가감역 벼슬을 한자리 줍소서 하고 죽을죄를 범했습니다."
취옥은 후회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중전마마의 앞이라, 터져 나오는 울음보를 참았다. 눈물만 비 오듯 흘렀다. 소헌왕후는 다시 부드럽게 말씀을 내린다.
"네가 아직 나이 어려서 상감마마께 큰 실태를 저질렀다. 궁중의 규율은 지극히 엄한 것이다. 너 한 사람만이 궁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 궁녀들이 아비나 형을 위해서 청탁을 한다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느냐? 생각해보아라. 큰 죄를 주지 아니하시고 한평생 시량을 후하게 대주라 하시니, 상감마마의 은총을 고이 간직하고 물러가 있거라."
취옥은 더 아뢸 길이 없었다. 중전께 큰절을 올려 하직을 고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초연히 물러났다. 중전마마께 하직을 고하고 물러난 취옥은 상감마마께 하직을 고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왕실의 법도가 추상같이 엄하고 쌀쌀하니, 감히 다시 대전마마를 뵐 도리가 없었다. 제조상궁의 지휘를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가 짐을 꾸렸다. 밤마다 밤마다 전하의 굄을 받던 일을 생각하니 구곡간장이 비틀어지고 금창이 메어지는 듯 쓰리고 아팠다. 제조상궁의 재촉을 받으면서 눈물을 머금고 아니 돌아서는 발길을 돌렸다. 초연히 궁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수백 궁녀와 내시, 별감, 무예청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밤까지도 대전마마 침실에서 전하의 수라상을 받들고 침수를 보살펴드리던 취옥이었다. 그나 그뿐인가. 그대로 전하의 침실 지척에서 거행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당명황의 애희 양귀비가 삼천 궁녀를 무색하게 했듯이 전하의 총행을 독차지했던 취옥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상전이 벽해가 되듯, 이같이 쫓겨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모두들 삼삼오오 귀퉁이 귀퉁이마다 모여 서서 놀라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중에는 취옥에게 청을 대서 무수리가 나인이 되고, 나인이 상궁이 된 궁녀들도 있었다. 무예청이 통장으로 오르고, 별감이 대전 별감으로 발탁된 액정들도 있었다.
"웬일인가? 상침 항아님이 봇짐을 싸 가지고 궁 문밖으로 나가니 이상한 일이다."
"글쎄 말이다. 상감마마께서 아악을 창제하시기 위해서 지음을 한다고 칭찬하시고 상침까지 봉해서, 삼천 궁녀의 사랑을 한몸에 독차지했던 취옥인데 이게 웬일이냐?"
한 옆에서는 취옥을 헐뜯는 항아들도 많았다.
"잘코사니다. 고년 불여우같이 전하께 아양을 떨더니 보따리 들고 쫓겨나는구나! 화무십일홍이라더니 꼭 맞혔구나!"
"고년이 대전 침실에서 더 오래 거행했더라면 넉넉히 양귀비같이 요사를 부려서 나라를 망칠 년인데 잘되었다. 그래도 상감마마께서 명군이 되셔서 미리 내치신 모양이다."
한편, 중전 상궁을 통해서 취옥이 내쫓기는 연유를 짐작하는 궁녀들은 이간이 속삭였다.
"취옥이 방자하여 제 아비에게 벼슬 한자리를 줍소사 했다가 상감마마의 눈에 나서 내쫓기는 모양이다!"
"상감마마께서는 중전마마께 취옥의 일을 말씀하시고 내치라고 분부를 내리신 모양이더라."
취옥의 발길이 궁 문밖으로 스러진 후에, 아비를 위하여 벼슬 한자리를 청했다가 내침을 당한 이 사실은 자자하게 퍼졌다. 궁중 안에는 찬 서리가 내린 듯 싸느랗고 엄숙한 기운이 떠돌았다. 중궁마마께서 당현종과 양귀비를 야유한 백낙천의 시집을 말씀 없이 책상 위에 놓아드려서 요염한 취옥이 쫓겨났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궁중의 기율은 더한층 엄숙해졌다. 전하가 애희인 상침 취옥을 내치신 일은 조정대신과 문사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희, 맹사성 등 노재상과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소장 문사들은 사랑방에 모여서 담소할 때마다 대왕이 취옥을 내치신 데 대해서 찬양하는 말로 꽃을 피웠다.
"상감께서는 과연 명철하신 성군이십니다. 엄숙하시면서 다정하시고, 다정하시면서 강의하신 분입니다. 상침 취옥을 내치신 일은 도저히 범인으로서는 단을 내릴 수 없는 일이외다."
"우리들이 복이 많아서 천 년에 한 번 나올 듯 말 듯한 밝은 임금을 모시었소이다. 이번 취옥의 일만 하더라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일이지요. 세상에서는 전하께서 취옥을 어찌나 사랑하셨던지 당명황의 양귀비한테 비했소이다그려. 춤을 잘 추어, 노래를 잘 불러, 여기다가 또 천하절염이거든. 하하하."
"당현종도 애초에는 기막힌 명군이었지요. 그러나 천보 연간에 와서, 양귀비한테 고혹되어서 나라가 거의 망할 뻔하지 아니했습니까? 한번 정해에 빠져 논 후에는 헤엄을 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운 모양이지요. 하하하."
"그러나 우리 전하는 용하게 정을 끊어버렸으니, 총명 예지한 분이 아니면 도저히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당현종과 우리 전하의 경국지색을 애희를 가지고 논한다면 그 경위가 조금 다릅니다. 당명황은 경국지색을 취하다가 양 귀비를 얻어서 침혹이 된 것이구, 우리 전하는 아악을 창제하기 위해서 지음하는 취옥을 만나서 총희를 삼았던 것이니 경위가 다르지요."
"천만에, 양귀비의 경국지색이나 지음하는 경국지색이나, 경국지색은 매일반이거든. 한번 침혹이 된 후엔 빠져나오기가 어려운 법인데, 우리 전하는 용하게 반성해서 정을 끊어버렸으니 그 결심이 도저히 당현종에 비교할 바가 아니란 말씀이오. 하하하."
노재상 황희가 말한다.
"아무튼 성상의 영단도 영단이어니와 뒤에는 궁중의 규율과 기강을 엄하게 바로잡으시는 중궁마마 내조의 힘이 또한 큰 듯하오. 내가 들으니 중전마마께서는 말씀 없이 전하의 편전 책상에 백낙천의 '장한가'를 놓으셨다 하오. 전하께서는 외전에서 정사를 살피고 환어하셨다가, 당현종의 일을 노래한 '장한가'를 보시고 크게 반성하시어 취옥에게 후한 양식을 주어 내보내라 하셨다 하오--."
황정승의 말을 듣는 젊은 문사들은 심왕후의 근엄한 처사에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일심이 무언중에 서로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젊은 학사들이 대답했다. 이 비화는 뒷세상, '공사견문록'에 실려서 오늘까지 전한다. 전하는 상침 취옥을 궁중에서 내보낸 후에 집현전 학사와 도화서 제조를 대전에 불렀다.
"과인이 느낀 바 있어 경들에게 명한다. 옛사람들이 당명황과 양귀비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서 병풍을 만들어 두고, 바라보는 일이 허다하게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술 마시며 바라보는 희완거리밖에 아니 된다. 당현종이 총명 영리했던 임금으로 처음엔 나라를 잘 다스려서 개원 연간의 지치를 이룬 명군이었다. 그러나 천보시대로부터는 망국지주가 되어버렸다. 과인은 어찌해서 그리된 그 까닭을 문헌으로 채집해서 한 권의 책자를 만들어 널리 세상에 반포하고 싶다. 첫째로 임금인 내 자신을 경계하고, 둘째로 후생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가 아뢴다.
"책에도 간간이 그림을 넣어서 읽는 이에게 실감이 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좋은 의견이다. 그리하여 과인은 도화서 제조를 이 자리에 참석케 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망국지주인 주왕이 달기라는 요망한 계집을 끼고 앉아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나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 그림을 그려서 병풍을 만들어 제왕의 침실에 쳐놓았다. 이것은 임금이 자신을 경계한 것뿐 아니라 뒤에 오는 후손들을 경계해서 거울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림을 그려서 책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성삼문이 아뢴다.
"안녹산이 양귀비의 양아들이 되어 양귀비의 침실에 밤과 낮으로 무상출입하던 그 추태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좋은지, 감히 아뢰옵니다."
"뒷사람들이 전철을 밟지 않게 하자면 숨김없이 다 그려야 한다. 그리고 기록과 그림뿐 아니라, 선유들의 시와 논도 실어서 정당한 비평을 하도록 하라!"
박팽년이 아뢴다.
"전기와 시가에, 양귀비가 목매어 죽은 후에 명황은 죽은 넋이라도 만나보려 하여 도사를 시켜서 천상에 올라사 양귀비의 후신 옥진을 만나서 금비녀와 부채를 신물로 받아 가지고 와서 해마다 칠월 칠석 밤이면 장생전에서 밀회를 하였다 한 이야기도 기록하오리까?"
"허황된 소리다. 그러나 주자도 '강목'에 '임금이 공중에서 신어를 들었다.'고 썼다. 나라를 망친 임금의 행동을 밝혀서 뒷세상 사람들을 경계한 것이다. 있는 대로 써서 해망한 것을 밝혀야 한다!"
도화서 제조가 아뢴다.
"양귀비가 임금과 함께 안녹산의 난리에 쫓겨 달아나다가 마외역에서 친위군의 협박을 받아 백능대 긴 수건으로 목을 매어 죽는 장면은 끔찍끔찍한 일이오이다. 이런 것도 그림으로 그리오리까?"
전하는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그 장면이 제일가는 귀감이 될 장면이다. 핵심을 안 그리고 어찌할 거냐? 양귀비의 형 양국충이 군사들에게 맞아 죽는 장면도 그려라."
이리하여 세종대왕 자신과 후생들을 경계하는 '명황계감'은 편집되었다.
인생 번뇌 읍 폐세자빈
세종전하는 국가의 예악을 제정하기 위하여 십이율관과 경석으로 악의 화음을 창조했다. 화한 기운과 해조된 음향은 예술의 세계에서도 필요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하합한 기운과 따뜻한 기상은 예술의 화음 이상으로 더욱 필요한 것이다. 대왕이 국가의 아악을 창조한 것은 온 나라 국민의 성정을 화한 기운으로 도야시키는 데 있었다. 천하의 만 가지 화한 기운을 잃어서는 되는 법이 없다. 자그마한 집안일도 그러하고 크나큰 나라의 일도 그러하다. 한 집안의 가족들이 화한 기운으로 지내야만 그 집안은 윤과 미를 이루어 융성하게 되고, 한 나라의 국민들이 화한 기상으로 일을 하는 날 그 나라는 부강하게 되는 것이다. 나라 안의 일만이 아니다. 나라와 나라, 다른 겨레 사이에도 화한 기운을 잃게 되면 파괴와 전쟁이 일어난다. 하필 인간과 인간, 겨레와 겨레 사이의 일뿐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도 화한 기운을 잃으면 재앙이 생기는 법이다. 이리하여 대왕은 종묘와 문묘에 제례를 지내는 데도 항상 정성을 다하여 경건한 태도를 취했고, 아악으로 화기를 돋우는 제례악을 제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왕은 아악의 화음 못지않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한 기운을 이룩하려 노력했다. 세자로 있다가 마악 왕위에 올랐을 때 젊은 왕후 심씨는 크나큰 망극의 통한을 당했다.죄 없는 아버지 부원군이 명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압록강변에 마악 발길을 들여놓자마자 상왕의 명령으로 역적으로 몰려서, 수원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것은 독자들이 앞에서 이미 읽어서 다 아아는 사실이다. 이때 전하는 아버지 상왕 밑에서 아무런 힘이 없었다. 번연히 죄 없는 장인이 사약을 받아 죽는 것을 바라보고도, 털끝만한 힘이 없었다. 결국 구원하는 길을 취하지 못했다. 다만 진심으로 젊은 왕후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위로하고 감싸주어서 무시무시한, 그 흉악하고 처절한 인생고의 고비를 넘어서 오늘의 평안한 화기를 이룩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전하는 한평생 왕후 심씨를 극진히 사랑했다. 왕후 또한 전하의 지성스런 사랑을 감로같이 받아들여서, 그 높고 깊은 은덕을 폐부에 깊이 간직해서 화한 기운은 왕실에 가득했던 것이다. 전하는 왕실의 규범에 의하여 정궁인 심왕후 이외에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상침 송씨, 숙원 이씨 등 다섯 사람의 후궁을 두었다. 소헌왕후 심씨는 항상 화한 기운으로 후궁들을 어거하고 질서를 유지해서 전하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이러한 결과는 왕가를 더욱 번영하고 창대케 했다.
정궁인 소헌왕후 심씨의 몸에는 동궁인 장남 이외에 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8형제에 정소공주, 정의공주 10남매를 두었고, 후궁의 몸에서도 10남 2녀를 낳으니, 결국 세종대왕의 소생은 22남매다. 아드님이 18명이요, 따님이 4명이다. 기막힌 생산이었다. 더구나 정궁인 소헌왕후 한 분의 몸으로 여덟 명의 대군과 두 명의 공주, 도합 10명을 생산했다는 일은 크게 놀랄 만한 일이다. 이것은 모두 다 대왕이 화합한 기상으로 왕실을 어거한 소치라 할 것이다. 세종전하는 왕실의 화기를 이룩하려 하여 노력할 뿐 아니라, 궁중의 화한 기운이 항상 감돌기를 축원했다.
전하는 즉위 초에 궁중에 있는 젊은 궁녀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내보냈다. 천연의 성의 본능을 억제시킨다는 일은 인도에 버스러지는 일이요, 천지간의 화기를 꺾는 일이라 해서, 자유롭게 시집을 가게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독자들이 또한 앞에서 읽어서 역시 잘 아는 일이다. 이같이 화한 기상과, 화한 기운을 온 나라 안에 가득하게 펴려는 전하 앞에 뜻밖에 왕실에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궁에 아름답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세자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명을 받들어 상호군 김오문의 딸을 동궁빈으로 맞아들였다. 세자빈의 옥책을 봉하고 휘빈 김씨의 칭호를 내렸다. 이때 세자궁은 경복궁 안 동편 자선당 옆에 있었다. 동궁에는 동궁빈을 모시고 있는 내명부로 종이품 양제가 있고 다음 계제로 종삼품 양원, 종사품 승휘, 종오품 소훈이 있다. 이들은 세자빈 이외에 임금의 후궁과 같이 동궁이 별실을 삼았을 때 내리는 직첩이요, 다음엔 세자궁의 나인으로 수규, 수칙, 장찬, 정정, 정서, 장봉, 장장, 장식, 장의가 있으니 모두 다 동궁의 일을 건사하는 궁녀들이다. 세자는 부왕의 호학하는 풍도를 계승해서 소년시절부터 근엄할 뿐 아니라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했다. 더욱이 장성해서는 성리학의 연구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날마다 서연을 열고 집현전 젊은 학사들과 밤이 깊도록 강론을 했다. 이러한 까닭에 세자는 자연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하고 장기, 바둑이며 모든 잡희에 눈을 돌리지 아니했다. 다만 글을 읽을 뿐이었다. 이같이 해서 세자는 어느 때나 동궁 외전에서 침식을 하고, 빈이 거처하는 내전에는 별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 없었다. 이쯤 되니 세자빈 김씨는 항상 공규를 지킬 뿐이었다. 가례를 마치고 사흘 동안 신방을 치른 후에는, 세자빈 김씨는 단 하룻밤도 세자저하와 함께 아기자기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진짓상도 어린 궁녀들이 외전에서 받들었다. 침실의 자리보전과 세숫물 거행도 어린 시비들이 외전에서 거행했다. 세자궁의 후궁으로 양제, 양원, 승휘, 소훈을 두었으나 이름 뿐의 후궁이요, 세자는 어느 여인이고 가까이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 글뿐이다. 사시사철 밤과 낮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했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대전과 중전께 문안을 드린 후에는, 어느 때나 서연을 열어서 젊은 학사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고 제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동궁에는 봄이 찾아왔다. 훈훈한 봄바람 속에 연분홍 진달래꽃과 황금빛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꿀벌은 잉잉거리고 범나비는 쌍쌍이 춤을 추었다. 동궁빈 김씨는 한숨을 지었다. 혹여나 동궁의 옥보가 내실로 옮기실까 밤마다 기다려보았다. 어느덧 한여름 녹음은 푸름을 뿜고 제비는 쌍쌍이 주렴을 박차며 조잘댈 때 노곤함을 못 이겨 낮잠 속에 들었다. 그리운 동궁마마와 반갑게 말씀을 하며 꿀 같은 행복을 누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홀연 쇠되게 짝을 부르는 꾀꼬리 소리에 잠을 깨었다. 눈을 떠보니 그리운 동궁마마와의 꿀 같은 밀어는 남가일몽이었다. 동궁빈 김씨는 목침을 밀어제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한숨을 지었다. 거울을 향하여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구더러 보라고 머리를 곱게 빗고 단장을 했는지 가슴이 쓰리도록 아팠다. 칠흑 같은 머리에서 비취옥비녀를 쑥 뽑아서 자리에 내던져버렸다. 동궁빈 김씨는 이같이 고독과 탄식 속에 세월을 보냈다. 밤마다 밤마다 외로운 베개 위에는 눈물이 홍건하게 젖었다. 동궁에는 동궁저하의 침소와 진짓상을 거행하는 여비 효동과 덕금이 있고, 동궁빈 김씨의 침실에서 가까이 거행하는 호초와 순덕이 있었다. 호초는 원주목사 이반의 첩의 딸이요, 순덕은 동궁빈 김씨가 친정에서 데리고 온 비자다. 호초는 동궁빈의 침실을 보살피고 있었고, 순덕은 동궁빈의 음식상을 거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호초는 동궁빈의 금침을 깔고 걷을 때마다 빈의 베개에 언제나 눈물이 홍건하게 괴어서 축축한 것을 발견했다. 동궁마마가 동궁빈을 자주 찾아주지 아니하여 밤마다 이같이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도 궁녀로 들어온 한도 많고 시름도 많은 여자지만, 동궁빈이 항상 외롭게 지내는 것을 동정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가득했다.
여름은 지나가고 어느덧 추칠월 기망이 되었다. 달빛은 휘영청 뜰 앞에 밝고 찬 이슬은 기와 끝에 가득한데, 이곳저곳 풀숲에서 일어나는 귀뚜라미 소리는 처량하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무런 시름이 없는 사람이라도 공연히 마음이 을씨년스러운데, 짝사랑 상사에 애를 끊는 동궁빈의 마음은 구곡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지는 듯했다. 동궁빈 김씨는 싸늘한 금침을 껴안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길고 짧은 한숨만 쉬고 있었다. 시침하고 있던 시비 호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옥등잔에 심지를 돋우면서 동궁빈을 위로했다.
"빔이 깊었사온데 마마, 눈을 좀 붙이셔야 하지 않습니까? 뒤채질만 치시고 주무시지 아니하시니 어찌하십니까. 이불을 덮으시고 편히 누우시어 잠을 좀 청하시옵소서."
"잠이 와야지. 오지 않는 잠을 어찌하느냐? 저 처량한 귀뚜리 소리에 구곡간장이 끊어지는 듯하구나."
"이런 때 동궁마마께서 잠시라도 들러주셨으면 방 속에 훗훗한 봄바람이 불어서 잠이 잘 오시련만, 무정도 하시지. 동궁마마는 너무하셔!"
호초는 혼자말하듯 하며 동궁빈 김씨를 위로했다.
"소박을 맞은 몸이 어떻게 마마가 오시기를 바라겠느냐?"
김씨는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조로 대답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호초는 깜짝 놀라는 듯 쇠된 목소리로 재잘댄다.
"어머나, 소박은 왜 소박입니까? 동궁마마께서 바쁘셔서 못 들어오시는 것입죠."
"아니다. 동궁마마께서는 확실히 나를 소박하신다. 보려무나, 상감마마께서는 얼마나 바쁘시냐? 정사를 친히 다스리셔서 만 가지 일을 친히 살피시면서도 중전마마와의 의초가 얼마나 좋으시냐. 그러고도 날마다 경연을 차리시지 않느냐? 동궁마마께서는 공부밖에 하시는 일이 더 있느냐. 암만 생각해보아도 나를 소박하시는 것은 침실을 보살펴드리고 진짓상을 거행하는 요사스런 두 년 때문인가보다!"
"효동이와 덕금이 말씀입니까?"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년들한테 빠지셔서 나를 소박하시는 것 같더라."
김씨는 길게 한숨을 지었다. 호초는 동궁빈 김씨의 비위를 맞췄다.
"아닌 게 아니오라 효동이란 년과 덕금이란 년은 과연 불여우 같은 요마스런 년들이올시다. 효동이란 년이 금침을 펴 드리면 그 점잖은 동궁마마께서 만면에 웃음을 띠시고 좋아하시고, 덕금이란 년이 진짓상을 받들고 있으면 찬의 간이 잘 맞는다고 칭찬이 놀라우시다 합니다.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 두 년을 동궁에서 쫓아내도록 하십시오!"
"소문이 자자하냐?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어디 내 맘대로 내보낼 수가 있느냐. 모두 다 중전마마의 분부를 받아야 한다. 너도 다 뻔하게 짐작하는 일 아니냐. 아이구, 내 가슴야."
빈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으로 복장을 친다. 잠시동안 빈과 시비는 시름 속에 잠겼다. 이윽고 호초는 동궁빈 김씨의 귀에 바싹 입을 대고 속삭인다.
"마마! 소박을 면하는 비방이 있다 합니다."
동궁빈 김씨의 귀가 번쩍 떠졌다.
"무어야, 소박데기가 소박을 면하는 법이 있단 말이야?"
"쉬! 말씀을 크게 하지 마십시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합니다. 가만가만 말씀을 하십시오. 소박을 면할 뿐 아니라 첩년들은 떨어져 나가고, 벌어졌던 내외지간의 의초는 아주 찰떡같이 끈질기게 붙여진다 합니다. 한번 시험해보사이다."
김씨는 목소리를 죽이고, 호초 앞으로 무릎을 바싹 밀고 묻는다.
"어떻게 한다더냐? 부슨 방수가 있느냐?"
"사랑을 뺏어간 계집들의 신을 훔쳐다가 싹둑싹둑 썰어서 불에 태워 재를 만든 후에 술을 타서 남편에게 먹이면, 첩년들은 떨어져 나가고 남편의 정은 함빡 본실한테로 돌아온다 합니다."
동궁빈 김씨는 눈을 깜박거리며 자세히 들었다.
"그렇다면 효동이년과 덕금이년의 신을 훔쳐다가 싹둑싹둑 썰어서 불에 태워 재를 만든 후에 술에 타서 동궁마마께 드려야 하겠구나!"
"네, 그렇습니다."
"거창하고 무서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마마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쇤네가 단행하겠습니다."
동궁빈 김씨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한동안 생각을 했다.
"확실히 효험이 있을는지 의심스럽구나. 어디서 그런 비방을 들었느냐?"
"예전에 중가이란 여자한테 들었습니다."
"중가이란 어떠한 여자냐?"
"박신기란 사람의 첩이온데, 저의 어미한테 자주 놀러다니던 사람이올시다."
"정말 효험이 있다 하더냐?"
동궁빈은 몸이 달아 물었다.
"백발백중인데, 자기 친구가 한 번 당해봤다 합니다. 그 사람도 그 친구한테 들어서 비방을 알았다고 깨가 쏟아지도록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동궁빈 김시는 호초의 말에 솔깃했다.
"그렇다면 네가 효동과 덕금의 신을 훔쳐 가지고 오너라. 한번 시험해보기로 하자!"
"염려 마십쇼. 기회를 보아 곧 두 년의 신을 훔쳐 오겠습니다."
호초는 굳게 약속했다.
며칠 후의 일이다. 호초는 깊은 밤 동궁시녀들이 곤히 자는 틈을 타 효동과 덕금의 신을 훔쳤다. 분홍색 청목당혜 가죽신이었다.
"훔쳐 왔습니다."
호초는 개선장군이나 된 듯 동궁빈 김씨에게 속삭였다. 깊은 밤중의 일이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동궁빈과 함께 효동과 덕금의 신을 칼로 썰었다. 풍로에 불을 피우고 썰어놓은 가죽신 조각을 화호에 집어넣어서 까맣게 태웠다. 사기막자로 갈고 체로 쳐서 가루를 만들었다. 다음날 호초는 사람 없는 틈을 타서 찬간으로 가만히 들어갔다. 세자께서 반주로 자시는 자그마한 술단지에 까만 가루를 넣었다. 모든 일은 끝났다. 호초는 도둑고양이처럼 동궁 안팎으로 살살 다니면서 동정을 살폈다. 동궁시녀의 방에서는 야단법석이 났다. 효동의 청목당혜와 덕금의 신이 한꺼번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시녀들은 떠들어댔다. 덕금과 효동은 울상이 되었다.
"낮에 없어졌느냐? 밤에 없어졌느냐?"
"밤중에 없어졌단다."
"괴상한 일이다. 궁녀들은 제각기 모두 다 홑벌 신들이 있는데 궁녀들이 가져갈 리는 만무하고--. 웬일이냐?"
"외간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면 도둑의 짓이라고도 하겠지만 지엄한 궁중에 이게 도대체 웬일이냐?"
두 시녀의 신이 없어졌다는 일은 제조상궁한테까지 보고가 들어갔다. 제조상궁은 이러한 소소한 일을 웃어른인 동궁빈이나, 중전마마께 아뢸 수는 없었다. 그대로 수수께끼가 된 채 덮어두었다. 내수사에서는 두 시녀에게 새로 신을 보내주었다. 한편 이날 밤에 세자는 저녁상을 받았다. 반주 한 준을 덕긍미 따라 올리는데 잔에 까만 티가 떠올랐다.
"이게 무엇이냐? 티가 떴구나. 불결하구나!"
세자는 잔을 놓고 마시지 아니했다. 덕금은 황공해서 어찌할지 몰랐다. 다시 약주를 잔에 따랐다. 또 역시 티가 떠올랐다. 세자는 이내 화증이 났다.
"집어치워라. 아니 마시겠다!"
덕금은 죽을죄를 진 듯했다. 세자는 원래 장중하고 침묵한 분이었다. 더 꾸짖지 아니하고 진지만 자시었다. 그러나 세자저하가 잡수실 반주에 티끌이 두 번씩이나 술잔에 떠올랐다는 일은, 시녀들이 신을 잃은 일에 비할 수 없는 놀라운 큰일이었다. 우선 덕금은 찬수를 거행하는 책임을 맡은 시비였다. 자기 자신의 발뺌을 하기 위하여 이 사실을 제조상궁에게 고하고, 제조상궁은 중전마마께 아뢰었다. 중전마마는 크게 진노했다. 제조상궁에게 엄한 분부를 내렸다.
"만약 술잔에 두 번씩이나 떠올랐다는 가루가 독약이었더라면 어찌할 뻔했느냐? 동궁이 아니 자셨기에 망정이지, 자셨더라면 어찌할 뻔했느냐? 술주전자와 술단지를 엄하게 조사해서 무슨 물건이 들어 있는지 사실해보아라!"
소헌왕후의 엄한 분부가 떨어지니 동궁 안은 발끈 뒤집혔다. 제조상궁은 먼저 지난밤에 동궁이 젓숫지 아니한 주전자의 술을 쏟아보고, 다시 찬비들을 불러서 술단지에 남아 있는 술을 쏟아보았다. 두 곳에 모두 다 까만 티가 떠 있었다. 그러나 무슨 가루가 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제조상궁은 엄하게 찬비들을 문초했으나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도둑고양이 모양 살살 돌아다니며 동정을 살피던 호초는 발이 저렸다. 우선 선수를 쳐서 변명할 여지를 만들어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책임도 아니건만 앞으로 나서서 참견을 했다.
"제조상궁께 아룁니다. 만약 술단지에 들어 있는 가루가 중전마마 말씀대로 독한 물건이라면 어찌합니까? 이것은 꼭 밝혀놓으셔야 할 일입니다. 술단지를 잘못 부시어서 먼지가 들어갔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마는, 가루가 독물이라면 이같은 불상사가 또다시 어디 있겠습니까? 위태함을 무릅쓰고 쇤네가 단지의 술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독이 퍼져 죽는다면 동궁마마의 대수대명으로 죽는 것이니 찬비들을 엄하게 문초해줍시오!"
호초는 말을 마치자 단지에 보시기를 넣어 티 있는 술을 떠서 들이켰다. 모두들 겁이 나서 감히 마시지 못하는 술을 호초가 대담하게 마시는 것을 보자, 제조상궁 이하 모든 시녀들은 흥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정말 참 충복이다!"
"동궁빈마마의 신임을 받는 호초가 아닌가베. 충성을 다할 만도 하지!"
"어떻든 대담하다!"
모두 다 제각기 수군댔다. 한 식경이 지났다. 호초는 술이 깼다.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결국 술단지에 떠 있는 티끌은, 단지를 잘 부시지 아니해서 약간의 먼지가 들어간 것으로 판정되고 말았다. 제조상궁도 더 일을 벌이고 싶지 아니했다. 중전에 들어가 소헌왕후께 아뢰었다.
"반주에 티가 뜬 것은 단지를 잘 부시지 않은 탓이옵고, 독약이 아닌 것을 확실하게 안 것은 빈마마의 침실을 보살피고 있는 호초란 년이 죽기를 무릅쓰고 술을 마시어 다만 티끌인 것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술차지 시비는 정성이 부족한 년이다. 무수리로 내려뜨려라.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독이 있는지 없는지 실제로 술을 마시어 확인해 본 호초란 년은 제법 충성스런 비자다. 가상한 계집이니 상급으로 비단 한 필을 내려라!"
이리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술차지 찬비는 호초의 장난으로 해서 무수리로 떨어져 버리고, 요망스럽고 재치 있는 호초는 동궁빈은커녕 소헌왕후의 신임까지 받으면서 상급으로 비단 한 필까지 받는 광영을 입게 되었다. 동궁빈 김씨와 간특한 호초가 저질러버린, 술단지에 신가죽을 살라서 세자께 드리려던 일은 수포로 돌아갔고, 두 궁녀의 신을 잃은 일은 의연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술단지에 대가 뜬 사건이 일단락을 지은 후에, 호초는 동궁빈과 홋홋하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아이구, 쇤네는 동궁마마께서 신가죽을 태워서 집어넣은 술을 아니 잡수신 까닭에 일이 탄로날까 보아 일촌 간장이 오그라들었습니다. 만약에 탄로가 나면 마마의 신상에 해가 미칠까 해서 간이 타서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 참, 네가 슬기를 잘 내서 단지의 술을 잘 마셨다. 그렇지 아니했더라면 일이 크게 벌어졌을 것을..... 고맙다!"
"그런데 참, 마마, 쇤네가 멍청해서 일을 잘못했습니다. 별로 약주를 즐기시지 않는 동궁마마께 신가죽을 태운 가루를 약주에 넣어드리려 했으니 당장 발각이 될 것 아닙니까? 쇤네가 정말 천만 번 멍청했습니다. 이번에는 감쪽같이 아무도 모르게 할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소박을 면할 수 있다면 열 번이라도 해봐야지!"
"동궁마마께서 좋아하시는 계집들의 신을 한 짝씩만 훔쳐다가 짝짝 찢어서 마마께서 주머니 속에 넣고 차고 다니시면 그년들과 동궁마마 사이의 정분이 싹 떨어지고, 사랑은 함빡 마마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신발은 짝이 있어야 하는데 짝이 떨어졌으니 의가 떨어질 것 아닙니까? 한 짝 신을 뺏어다가 마마께서 차고 다니시면 효력이 날 것입니다."
"그런 방수는 또 누구한테 들었느냐?"
"이 방법도 어미와 박신기의 첩 중가이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먼젓번에 그 방법을 시행했더라면 떠들썩하지 않고 좋았을 것을 그랬구나!"
"쇤네 생각에는 동궁마마께서 계집들의 신을 태운 약주를 잡수시면 효험이 더 빠를까 해서 첫째 번 술법을 써본 것이온데 죽도 밥도 아니 되고 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네 말대로 어디 둘째 번 방법을 한 번 더 써보자꾸나!"
동궁빈 김씨는 외쪽 상사에 애가 탔다. 마치 소갈병이 든 사람이 물을 찾는 격이었다.
"그럼 며칠 동안만 기다리십쇼!"
도둑고양이 때를 노리듯 호초는 며칠 후에 조용한 밤을 타서 효동과 덕금의 신 한 짝씩을 또다시 훔쳤다. 이튿날 효동과 덕금이 일어나보니 이번엔 신이 한 짝씩만 없어졌다. 외짝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가까운 시녀들한테 울상이 되어 일렀다.
"이번엔 신이 한 짝씩 또 없어졌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친구 궁녀들도 깜짝 놀랐다.
"무어야, 신이 또 없어졌어?"
"웬일이냐, 도깨비 장난이란 말이냐?"
"그것 참 괴상하다. 지난번엔 한 켤레씩 몽땅 없어졌더니 이번에는 한 짝씩만 없어졌다 하니, 확실히 도둑놈이나 도둑년의 짓은 아니다. 도깨비 장난이 분명하다!"
"하필이면 왜 효동이와 덕금이 신만 도깨비가 가져가느냐? 도깨비도 덕금이와 효동이가 예뻐서 귀여운가보다!"
이 소리를 듣자 덕금이와 효동이는 등에 소름이 쪽 끼쳤다. '어머나!' 소리를 치며 놀라 쓰러졌다. 효동과 덕금이 또다시 신발을 잃은 일은 쫘아하니 동궁 안의 놀라운 화제거리가 되었다. 이제는 확실히 도깨비 장난이라고 떠들어댔다. 효동과 덕금은 공포에 떨면서 음식 맛을 잃고 어찌할지를 몰랐다. 한편 호초는 효동과 덕금의 가죽신 한 짝씩을 훔쳐서 동궁빈 김씨와 함께 칼로 저며서 주머니에 차곡차곡 집어넣은 후에 속곳 중동허리띠에 차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한편 호초와는 사생을 함께 하자고 약속한 한 동궁시비가 또 한 명 있었다. 이름을 금봉이라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금봉은 호초의 방으로 놀러 왔다. 이야기가 도깨비 장난으로 자연 번졌다. 금봉은 호초더러 말했다.
"얘 호초야, 요사이는 밤이 되면 무서워서 잠을 잘 수 없구나!"
"무엇이 무서우냐? 잠을 자지 못하도록 무섭단 말이냐?"
호초가 대꾸했다.
"얘는 캄캄절벽이로구나. 동궁 안에 있으면서도 도깨비 장난을 모르느냐?"
"도깨비 장난? 나는 까맣게 몰랐다. 어디 도깨비가 나왔느냐?"
"참말, 호초 너는 벽창호다! 효동이와 덕금이가 두 번 씩이나 신을 잃어버렸어. 너는 소문도 못들었느냐. 같은 동궁 안에서 살면서도!"
'같은 동궁 안에 있으면서도 소문도 못들었느냐?' 하고 면박을 주자, 호초는 사생을 같이 하자고 맹세까지 한, 세상에 다시 둘도 없는 동성애를 하는 금봉에게 두 번씩이나 신을 훔쳐내고도 까맣게 숨긴 것을 미안하고 죄스럽게 생각했다. 자격지심이 들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쭈뼛쭈뻣, 표정이 달라졌다. 얼른 말대답을 못 했다. 금봉은 호초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 혹시 알고도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이 아니냐? 온 동궁 안이 발끈 뒤집혀서 야단법석들인데, 효동이와 덕금이가 두 번씩이나 신 잃어버린 일을 어찌 소문도 못 들었다 하느냐. 참 괴상하구나!"
호초는 입이 굳어졌다. 붉었던 얼굴빛은 다시 누르락푸르락했다. 금봉은 호초의 얼굴빛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수상했다.
"너, 왜 말대답을 못 하느냐? 이상하구나! 얼굴이 누르락푸르락하고--."
호초는 더욱 혀가 굳어서 말을 못 했다.
"너, 참 수상하다. 왜 말대답을 못 하느냐? 섭섭하구나."
호초는 여전히 말대답을 못 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가슴만 답답했다. 금봉은 화를 벌컥 냈다.
"너, 사생을 같이하자고 고름까지 맺어서 맹세했던 나에게도 무엇을 숨기는 모양이로구나!"
호초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죽고 살기를 서로 맹세한 사랑하는 아이한테 끝까지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호초는 한숨을 지었다.
"미안하다, 여태껏 너를 속인 것이---. 그렇지만 크나큰 비밀 일이기에, 너한테까지 말을 못 했다. 용서해다구."
크나큰 비밀이란 말에 금봉이 깜짝 놀랐다. 긴장이 되었다.
"무어야, 크나큰 비밀이 있어서 나를 속였더란 말이냐? 무슨 비밀이냐?"
금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초는 금봉의 귀에 소리를 죽이고 속삭였다.
"동궁빈마마의 심부름으로 내가 효동과 덕금의 신을 두 번씩이나 훔친 것이다. 너만 꼭 알아두어라. 도깨비 장난이 아니다."
"무어야, 도깨비 장난이 아니고 동궁마마의 심부름으로 네가 훔쳤단 말이야? 동궁빈마마께서는 무엇에 쓰려고 신을 훔쳐오라 하셨단 말이냐?"
금봉은 깜짝 놀랐다. 호초는 다시 금봉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너, 왜 동궁마마와 동궁빈마마의 사이를 모르느냐? 빈마마는 항상 동궁마마께 소박을 당하고 계시지 않느냐? 삼일 신방을 치르신 후엔 영영 빈마마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시고 외전에서 효동이와 덕금이만 가까이하신단 말이다. 그래서 신을 훔쳐오라 하신 것이다!"
"신을 훔쳐다가 무엇에 쓴단 말이냐?"
금봉의 눈은 또다시 똥그래졌다.
"시앗의 신을 훔쳐다가 칼로 저며서 불에 태운 후에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서 술에 타서 남편에게 먹이면 시앗들은 떨어져나가고 본댁네와는 다시 의초가 좋아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고, 그대로 시앗의 신을 찢어서 본댁네가 주머니에 차고 다니면 시앗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궁빈마마는 나를 시켜서 효동이와 덕금이의 신을 훔쳐오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이 오죽 비밀한 일이냐. 그래서 미안하지만 너한테도 말을 아니 하고 입을 꼭 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변 보아. 큰일 날 일이로구나. 동궁마마와 중전마마께서 아시면 어찌하느냐!"
"그러기에 나는 입을 꼭 봉하고 너한테까지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그래 효험이 있었느냐? 동궁마마께서는 빈마마께 가까이하시더냐?"
"아직 모르겠더라. 처음에는 두 아이들의 신을 훔쳐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든 후에 동궁마마께서 잡수시는 약주 단지에 넣었더니, 마마께서는 술에 뜬 티를 보시고 잡숫지 아니 하시고 버리셨더란다. 그래서 실패를 했고, 두 번째는 좀 더 편한 방법을 취해서 두 아이의 신을 한 짝씩 훔쳐다가 칼로 썰어서 빈마마께서 주머니에 차고 계시다. 그런데 아직 아무 효험이 없다. 그런데 너 절대로 남한테는 이야기하지 마라!"
"미쳤느냐. 내가 왜 그런 말을 함부로 남한테 한단 말이냐. 탄로가 나면 심부름한 네 몸에 큰 해가 미칠 것이다. 너를 위해서라도 왜 이 말을 입 밖에 내겠느냐? 그대로 도깨비 장난으로만 알아두마. 그리고 너한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다. 빈마마께서 친정에서 데리고 오신 교전비로 시녀가 된 순덕이는 이 일을 아느냐?"
"그 애도 모른다. 도깨비 장난으로만 알고 있을 게다. 호호호."
호초는 금봉이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듣자, 비로소 안심이 되는 듯 깔깔 웃었다.
"왜 그 애는 이 일을 모르느냐? 친정에서 데리고 오신 사람 아니냐. 빈마마께서 가장 신임하시는 터인데 왜 이 일을 모르느냐?"
"그 애가 알면 단박 친정에 가서 정부인께 말씀을 할 테니 그 점이 두려워서 그 애하고는 의논을 하지 아니하신 것이다."
금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깊은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금봉은 한동안 무슨 생각 속에 빠져 있다가 호초에게 주의를 준다.
"너, 다시는 그런 심부름 하지 마라!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만약 탄로가 나는 날, 너는 죽는 몸이다. 나는 너하고 죽고 살기를 함께 약속한 몸이다. 네가 화를 당한다면 나는 어찌하느냐. 궁중의 기율은 지엄한 것이다. 만약에 이런 일이 중전마마의 귀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큰일 난다. 몸조심하고 다시는 이런 심부름을 하지 말아라."
"네가 입 밖에만 내지 아니한다면 도깨비 장난으로만 알지 쥐도 새도 모를 것이다. 다만 너한테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를 할 뿐이다. 나는 기왕 빈마마의 신임을 받는 터이니 다만 그분에게 충성을 다할 뿐이다. 호호호."
호초는 간드러지게 자포자기하는 웃음을 웃었다. 만약 탄로가 난다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마음의 작용이 간드러진 웃음으로 변했다.
"충성이란 것은 윗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충성이지, 나쁜 일을 도와주는 것은 충성이 아니다. 네가 한 짓은 좋은 일이 아니다!"
"너도 생각해보아라. 빈마마의 처지도 불쌍하지 않은가? 구중궁궐 호화로운 대궐에 동궁빈마마라고 말로만 떠받들고 있지만, 이팔청춘 고운 몸을 게발가락 내던지듯 빈방만 지키게 하고 동궁마마는 한 번도 돌보지 않고 계시니 참말 불쌍하고 가엾지 않느냐 말이다. 너도 좀 생각해보려무나."
"그도 그렇다마는, 빈마마는 장차 일국의 국모가 되실 분이다. 체면과 범절도 좀 지켜야 하시느니라."
"인생이 한 번 살지 두 번 사느냐? 체면만 지키고 살다가는 한평생 낙이라는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다. 즐겁게도 좀 살아보아야 하지 않느냐. 시녀의 신발쯤을 훔쳐서 예방을 한 것은 무슨 큰 죄악을 범한 것이 아니다. 그래, 생각해보아라. 사람을 해쳤느냐, 상했느냐? 다만 예방을 해서 동궁마마의 사랑을 도로 찾아보겠다는 것뿐이다. 나는 절대로 빈마마를 동정한다!"
금봉은 아끼는 호초와 더 상지를 해서 말다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좌우간 몸조심을 하란 말이다. 궁중이 하도 떠들썩하니 극히 조심해서 행동을 해라. 나는 너를 금싸라기같이 아껴서 부탁하는 말이다."
금봉은 호초를 작별하고 일어났다. 금봉은 자기 처소로 돌아온 후에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 탄로가 나는 경우에는 동궁빈이 위태할 뿐 아니라 호초의 신상이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일이 탄로나기 전에 먼저 시녀들의 가죽신을 오린 증거를 없애버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동궁빈의 교전비로 왔던 시녀 순덕을 찾기로 했다. 순덕은 동궁빈의 친정 김씨 집에서 어렸을 때부터 자라난 몸종이었다. 영리하고 똑똑하고 민첩했다. 김오문의 신임을 받아서 동궁빈 김씨가 가례를 치른 후에 이내 동궁 시녀를 삼아서 궁중에 머물러 있었다. 동궁빈 김씨는 친정에서 데리고 온 순덕이므로 모든 일을 신임해서 부렸다. 그러나 다만 이번 호초하고 예방으로 신을 훔친 일은 일체 순덕에게 알리지 아니했다. 친정 부모한테 알려지면 크나큰 꾸지람을 들을까 염려한 때문이다. 또 한편 순덕의 성품은 부드럽고 진중했다. 호초처럼 요사스럽지 아니했다. 순되고 정직했다. 순덕은 반가집 가풍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고 호초는 기생첩의 딸이었다. 여기 두 여자의 인품이 판이하게 구별된다. 금봉은 마음이 초조했다. 밤을 넘길 수 없었다. 곧 순덕의 거처하는 방을 찾았다. 순덕은 뜻밖에 금봉이 찾아온 것을 반갑게 생각했다.
"너,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한밤중에 나를 찾아왔느냐?"
손을 벌려 웃으며 금봉을 맞아들였다.
"바람은 무슨 바람, 그저 너를 보고파서 왔다."
금봉은 순덕의 손을 반갑게 잡고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순덕아, 너 요새 도깨비 소문 들었느냐?"
금봉은 먼저 도깨비 소문으로 화제를 꺼냈다.
"얘가 사람을 미치게 하네. 한밤중에 찾아와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니. 나는 동궁 안에 도깨비 장난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고 요새는 무서워서 잠을 자지 못한다. 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니?"
"에이 바보야! 무서울 것 조금도 없다. 그것은 도깨비 장난이 아니라 사람의 작희다. 나도 처음엔 도깨비 장난으로 알고 밤이면 무서워서 꼼짝달싹을 못 했는데, 호초한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도깨비 장난이 아니라 사람의 장난인 것을 알았다."
"뭐여, 호초한테 이야기를 듣고 도깨비 장난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럼 어떤 년들이 그따위 못된 짓을 두 번씩이나 했단 말이냐?"
순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쉬, 떠들지 마라. 도깨비 장난이 아닌 것을 자세히 이야기 해주마!"
금봉은 말을 미치자 바싹 순덕의 귀에다 입을 댔다. 빈마마가 동궁마마의 소박맞는 것이 하도 딱해서 호초는 빈마마의 눈의 가시인 효동과 덕금의 신을 훔쳐다가 짝짝 찢어서 불에 태운 뒤에 재를 만들어 술에 타서 동궁께 드렸다가 실패한 일이며, 두 여자의 신을 또다시 한 짝씩 훔쳐다가 가죽을 오려서, 빈마마가 염낭주머니에 차고 있는 일들을 소상하게 말했다. 순덕은 아무리 빈마마의 교전시비였으나 금시초문이었다. 깜짝 놀랐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탄로가 나면, 장차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으냐?"
순덕은 금봉의 손을 덥석 잡고 묻는다.
"빈마마의 신상이 위태하니 먼저 증거를 없애야 한다."
"어떻게 증거를 없애느냐?"
"너는 빈마마의 친정에서 온 시녀가 아니냐? 그러니 먼저 빈마마께 신상이 위태로운 것을 아뢰고, 빈마마께서 차고 계신 주머니를 빼앗아다가 네가 감추어두어라. 그리해서 증거를 없애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빈마마도 무사하시고 호초란 년도 죽음을 면할 것이다."
순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매우 급하다. 지금 제조상궁은 날마다 동궁으로 나와서 시비들의 행동을 일일이 주목하고 있고, 대전에서는 내금장이 동궁 수문장에게 분부해서 액정의 행동과 도깨비 장난에 대한 일을 엄하게 사실하고 있다. 너는 빨리 빈마마가 차고 계신 신발 가죽 오린 주머니를 감추어버려라. 그러지 아니하면 빈마마의 신상은 말할 것 없고 김씨댁 일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순덕은 금봉의 말을 듣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튿날 순덕은 동궁빈의 침실로 들어가 문안을 드렸다. 마침 호초도 빈마마를 모시고 있었다. 순덕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빈마마한테는 아뢰지 아니하고 먼저 호초에게 말을 건넸
다.
"호초야, 너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왜 태평한 동궁 속을 소란케 하느냐."
호초는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한다.
"내가 왜, 태평한 동궁을 소란케 했단 말이냐. 별소리가 다 많구나---."
"효동이와 덕금이가 신을 두 번씩이나 잃어버려서 도깨비 장난이라고 야단법석들이다. 이 일이 생긴 후부터 시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무서워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제조상궁은 시녀들의 행동을 샅샅이 살피고, 내금장은 수문장에게 엄명을 내려서 동궁 액정들의 신분을 조사하고 있다. 이제는 도깨비 장난이 아니라 사람의 짓이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놀라지 마라. 열에 아홉은 너한테로 지목이 간다더라. 왜 그따위 짓을 했느냐?"
호초는 냉랭하고 쌀쌀하게 대꾸를 했다가 '열에 아홉은 너한테로 지목이 간다.'는 순덕의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느 년이 그따위 소리를 하더냐? 내가 효동이와 덕금의 신을 훔쳤다고--."
"어느 년이 무어야, 온통 궁안의 시녀들이 다 지껄이는 소린데. 왜 우리 빈마마께 그런 못된 짓을 가르쳐드려서 마마의 신상까지 위태롭게 하느냐. 효동이와 덕금의 신을 도려낸 가죽 조각을 어서 빨리 내놓아라. 화색이 박두했다. 증거를 없애버려야 한다."
순덕은 일부러 엄포를 놓았다. 호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말하는 순덕에게 아니라고 앙탈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열에 아홉이 신 훔친 것을 자기한테로 지목한다는 말에 호초는 겁이 덜컥 났다. 더 다시 항변할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토설을 한다.
"신을 도려낸 가죽은 빈마마께서 염낭에 넣어서 차고 계시다."
옆에 앉은 빈마마의 얼굴이 말없이 창백해졌다.
순덕은 빈마마의 앞으로 나가 엎드려 울며 고한다.
"빈마마께 아룁니다. 좀 참으시죠. 이게 무슨 짓이옵니까? 점잖은 댁의 금지옥엽 같은 따님으로서 글쎄 이게 무슨 짓이오니까? 마마께서는 앞으로 국모가 되실 막중한 자리에 계신 분이올시다. 쇤네는 친정에서부터 마마를 모신 년이올시다. 마마! 어쩌자고 요사스런 저 호초의 말을 들으시고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아까 호초한테도 말을 했습니다마는 화색이 박두했습니다. 증거를 없애야 하겠습니다. 허리에 차고 계신 주머니를 내놓으십시오. 쇤네가 감춰두겠습니다."
순덕은 울면서 지성스럽게 주머니를 내놓으라고 졸랐다. 화색이 박두했다고 울며 졸라대는 교전비의 말에, 동궁빈 김씨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얼굴빛을 붉히며 치마끈을 끌렀다. 단속곳 허리띠에 찬 노랑 주머니를 끌러서 순덕이한테 내주었다. 순덕이 염낭을 끌러보니, 과연 주머니 속에는 청목당혜 가죽신을 도려낸 오락지가 가득하게 들어 있었다. 순덕은 귓구멍이 막혔다. 더 다시 동궁빈과 호초를 괴롭게 할 수는 없었다.
"쇤네가 맡아서 증거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빈마마의 신상을 구하고 호초한테도 해가 아니 가도록 하겠습니다."
순덕은 눈물을 머금고 문제의 염낭을 허리춤에 간직하고 돌아갔다. 순덕은 동궁빈 김씨의 신상을 크게 염려했다. 일이 탄로 나기 전에 모든 일을 수습해버려 했다. 우선 엄포로 호초가 지목을 받는다고 거짓말을 해서, 동궁빈한테서 주머니를 거둔 후에 틈을 타 수유를 얻어서 빈마마의 친정으로 향했다. 정부인을 뵙고 전후 사실을 고했다. 정부인은 크게 놀랐다.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순덕에게 선후책을 물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빈마마께서 차고 계신 주머니를 쇤네가 엄포를 놓아 가지고 왔습니다. 정부인께서 없애버리시든지 맡아주시든지 하십시오."
동궁빈의 친정 어머니 정부인은 펄쩍 뛰었다.
"내가 그 물건을 어찌 맡느냐? 대감 마님께서 아시면 큰 꾸지람이 내리실 것이고, 나중에 혹시 말썽이 생겼을 때 마치 친정에서 내가 시킨 것같이 될 테니 절대로 맡을 도리는 없다! 네가 없애버리든지 잘 생각해서 처리해라. 그리고 궁가의 기풍은 극히 엄하다. 김문에서는 한 번 딸을 궁중으로 들여보낸 후에는 다시는 간섭과 내왕을 못 하는 법이다. 네가 빈마마의 신상을 염려해서 애쓰는 심정은 잘 알겠다마는, 나도 가슴이 답답하다마는 어찌하는 수가 없구나!"
김빈의 어머니 정부인은 근엄하게 거절했다. 순덕은 다시 더 정부인께 아뢸 도리가 없었다. 순덕은 하는 수 없었다. 주머니를 김빈의 친정에 맡기지 못한 채 동궁으로 돌아왔다. 한편 제조상궁은 아무리 효동과 덕금의 신 잃은 일을 사실해보았으나 얼른 단서를 잡지 못했다. 유야무야한 중에 몇 달이 지나갔다. 이제는 도깨비 타령도 차차 식어져버리고 말았다. 호초는 성격이 자기 이름과 같이 뜨겁고 맵고 독한 여자다. 한번 하려던 일을 못 하면 직성이 풀리지 아니하는 성격이었다. 효동과 덕금의 신을 두 번씩이나 훔쳐다가 예방을 했으나, 두 번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고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효험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었다. 공연히 동궁 안이 떠들썩해서 도깨비 장난이라는 둥, 순덕이가 열에 아홉은 자기한테로 지목이 간다는 둥 엄포를 놓아서, 깜짝 놀라게 한 것이 분하기 짝없었다. 호초는 곰곰 다시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소박을 당하고 있는 동궁빈을 위해서 동궁마마와 빈마마 사이가 화합이 되게 해야겠다고 다시 결심했다. 빈마마 이상으로 초조했다.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하던 끝에 또 한 가지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친구 기생 하봉래가 놀러와서 깔깔거려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호초는 어느 날 동궁빈을 모시고 자는 조용한 밤에 빈에게 속삭였다.
"빈마마께 아룁니다. 쇤네는 빈마마께 뵈올 낯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당치 않은 말이냐. 너같이 내 사정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또 있느냐. 뵐 낯이 없다니 말이 되느냐!"
동궁빈은 한숨을 짓고 호초를 위로했다.
"두 번씩이나 일을 한다고 한 일이 낭패만 되고 아무런 효험도 없었을 뿐 아니라, 공연히 궁 안만 소란케 해서 마마의 마음을 괴란케 했으니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동궁빈 김씨는 한숨을 짓고 대답한다.
"어디 그게 네 탓이냐? 모두 다 내 팔자가 기구해서 그렇지!"
"팔자가 무슨 팔자입니까. 사람과 사람이 하기에 달린 노릇이올시다. 사람이 노력해서 아니되는 일이 없습니다. 마마, 또 한 번 해볼 일이 있습니다."
"얘, 그만 다 두어라. 시틋하다. 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서 마음을 죌 까닭이 없다. 이러쿵저러쿵 이제는 입에서 신물이 난다."
"아니올시다. 이번에는 신을 훔치는 일과는 다릅니다. 쇤네와 마마 단둘이만 알고 있으면 그만이올시다. 쇤네가 입 박에만 내지 아니하면 쥐도 새도 모르는 방법입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일도 결코 아니고, 저와 마마께서 행하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동궁빈은 세상만사가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귀가 솔깃했다.
"너와 나 단 둘이만 행하면 된다 하니 어떤 방법이란 말이냐?"
"상사뱀 암컷과 수놈이 서로 어우러져서 기뻐했을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치마 속에 차게 되면 내외가 화합해서 사랑이 무궁무진하다 합니다."
호초의 말을 듣자 빈은 까르르 웃어댔다.
"아이구, 징그러워라. 그 더러운 수건을 어떻게 몸에 지니느냐? 호호호."
"이 판국에 추하고 깨끗한 것을 어찌 가리겠습니까. 그리고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려서 차는 것이니 관계치 아니합니다."
호초도 웃으며 대답했다.
"너, 계집애가 그런 방술은 누구한테 배웠느냐?"
"어렸을 때, 생모와 기생 하봉래가 깨가 쏟아지게 재미나게 주고받고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생 하봉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정문기란 사람한테 살림을 들어가서 소실이 되어 의좋게 잘 지내고 있다 합니다."
"놀던 계집이라 경함이 많겠구나!"
"그러문입쇼. 상사뱀의 수건을 찬 것도 실지로 자기 자신이 다 경험해본 것을 재미나게 웃으며 이야기한 것인가 합니다."
이때 동궁빈 김씨의 마음은 상사뱀 수건을 차볼 생각이 팔 분이나 기울어졌다. 취한 듯 어린 듯 추파를 흘려 호초에게 웃으며 묻는다.
"그렇지만,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상사뱀이 토정한 수건을 어떻게 구한단 말이냐?"
호초는 생긋생긋 웃으며 대답한다.
"마마, 아무 걱정 마십쇼. 허락만 하신다면 쇤네가 구해오겠습니다. 금강산 만이천봉이 모두 다 상사뱀의 소굴이고, 한양 천지만 해도 삼각산, 인왕산, 남산, 낙산, 허다한 곳에 상사뱀이 들끓고 있습니다. 땅꾼한테 부탁하면 단박 가져올 것입니다."
"그대로 뱀을 잡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우러져 좋아할 때 토정한 것을 수건에 묻혀서 가져온다 하니, 땅꾼이 며칠이고 상사뱀이 있는 곳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무척 힘이 들겠구나!"
"아무 문제 없습니다. 마마께서 끼신 금가락지 한 쌍만 내주십시오. 수건 열 벌이라도 구해오겠습니다."
"소문 안 날 일이니 땅꾼한테 부탁해보아라!"
휘빈 김씨는 손에 낀 금가락지 한 쌍을 호초에게 선뜻 내주었다. 꼬리가 길면 결국은 밟히거나 잡히는 법이다. 사람 없는 깊은 밤 휘빈 김씨의 침실에서 호초와 김씨가 소곤소곤 가만가만 상사뱀의 방술을 밀어로 주고받았을 때, 창문밖에는 발자취를 죽이고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두 시녀가 있었다. 한 여자는 효동이요, 한 여자는 덕금이었다. 두 시녀는 두 번씩이나 신을 잃은 후에 다른 시녀들이 떠들어대는 것과 같이 도깨비 장난으로만 알았다. 공포 속에 잠겨서 며칠 동안을 단잠을 이루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했다. 얼굴과 몸까지 수척했다. 그럭저럭 한두 달이 지났다. 다시는 도깨비 장난이 없었다. 씻은 듯 부신 듯 아무 일도 없었다. 몸에 큰 해도 없었다. '도깨비도 염치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궁녀들이 모여서 지껄여대는 방으로 놀러갔다. 벌써 한두 달 지난 일이지만 효동과 덕금이 찾아온 것을 보자 또다시 신 이야기가 화제가 되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도깨비 장난이 아니다. 사람의 짓이 분명하단 말이다. 도깨비 장난이라면 하필 효동이와 덕금의 신만 두 번씩이나 가져갈 리가 있더냐. 우리들의 신도 계속해서 가져갔을 텐데. 확실히 사람의 짓이다. 전에 들으니 예방을 하는 데 신을 훔쳐간다는 말을 들었다."
"아, 참, 그렇다더라. 소박을 당한 본댁네가 시앗의 신을 뺏어다가 불에 살라 술에 타서 남편에게 먹이면 사랑이 본댁네한테로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동궁 안에 시앗과 본댁네 싸움을 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하하, 암만해도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는다."
시녀들은 이같이 지껄여대고 긴긴 밤 시각을 흘렸다. 효동과 덕금은 말없이 궁녀들의 이야기를 듣자 크나큰 암시를 받았다. 휘빈 김씨는 항상 효동과 덕금을 미워했다. 동궁 외전에서 침실과 진짓상을 거행하는 때문이다. 이 까닭에 그녀들이 내전으로 문안만 들어가면 김빈은 도끼눈을 떠서 항상 흘겨보았다. 그녀들은 까닭 없이 미움을 받는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지난밤에 동료들의 처소로 놀러갔다가 도깨비 타령이 다시 나오고 본댁네와 시앗 사이에 시새는 갈등 이야기를 들었다. 더욱이 시앗의 신을 훔쳐다가 불에 살라서 가루를 만들어 남편에게 마시게 하면 시앗은 떨어져 나가고 남편의 사랑은 본댁네한테로 다시 돌아간다고 했다. 효동과 덕금의 머리에는 번개치듯 사건의 실마리가 풀어지는 듯 생각되었다. 자기네들은 동궁마마의 침소와 찬수를 거행하는 임무를 맡았을 뿐 인격 높은 동궁마마였다. 추호도 특별한 총애를 내린 일이 없었다. 그러나 휘빈 김시는 동궁마마께서 내침하지 않는 원인이 자기네들한테 있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다. 더욱이 의심나는 일은, 동궁마마가 젓수려던 반주에 까만 티가 떠 있었다. 술단지에도 떠 있었다. 휘빈 김씨의 신임을 받는 호초는 가장 충성스러운 듯, 제 책임도 아닌데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술단지의 술을 들이켰다. 대수대명으로 죽어도 좋다고 호들갑을 떨고 들이켰다. 이리해서 호초는 중전마마께 비단 한 필까지 상급으로 받았다. 이것은 확실히 호초가 빈마마를 위해서 자기들의 신을 훔쳐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든 후에 찬비 모르는 사이에 술단지에 탔다가, 일이 발각날 듯하니 일부러 자기의 죄상을 감추기 위하여 독약인가 아닌가 마셔본다고 앙큼을 부린 일이 확실하다. 효동은 아무리 동궁마마의 침소를 보살피는 임무를 맡았으나 동궁마마와의 사이에 한 점의 티가 없는 백옥 같은 몸이라는 것을 빈마마께 알리고 싶었다.
"덕금아, 우리 신을 훔쳐간 것이 도깨비 장난이 아니고 호초년의 짓인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빈마마께서 항상 우리들을 미워하는 까닭도 알았다. 우리 반마마께 가서 우리 몸이 명명백백하게 결백하다는 것을 밝혀내야 하겠다."
효동의 말을 듣자 덕금은 픽 웃었다.
"너는 아직도 나이 어려서 너무나 순진하구나. 네가 한 점의 티도 없는 백옥 같은 몸이라는 것을 백 번 말한댔자 빈마마가 곧이들을 리 만무하다. 동궁마마께서 내침을 하셔야만 우리들의 의심은 풀리게 되는 것이다."
효동은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면 어찌한단 말이냐. 첫째로 동궁마마께 미안하고, 둘째로 우리들의 몸이 까닭 없이 누명을 쓰고 있으니 일이 참 딱하구나!"
"일은 저절로 밝혀져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변명을 한댔자 소용이 없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신을 훔쳐간 장본인과 술단지에 티를 집어넣은 사람을 밝혀내야 한다. 우선 호초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되면 모든 일이 차차 드러날 것이다."
덕금은 효동보다 두 살이 위였다. 효동을 타일렀다. 이리하여 효동과 덕금은 날마다 한밤중이면 휘빈 김씨를 모시고 자는 호초의 동정을 살폈다. 동궁의 밤은 깊었다. 퇴등령이 내려 방마다 불빛이 희미했다. 회색 장막 속에 싸인 정원 나뭇가지엔 새소리조차 멎었다. 효동과 덕금은 외전 침실의 모든 일을 보살핀 후에 자기 처소로 돌아가 밤을 자는 체하다가, 자시가 넘은 후에 어둠 속에서 조심조심 내전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자취를 죽여 빈마마의 침실 앞에 당도했다. 가만한 음성으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덕금은 효동의 손을 이끌고 귀를 창문가에 대었다. 빈마마의 한숨을 짓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그게 네 탓이냐? 모두 다 내 팔자가 기구해서 그렇지.‘
덕금은 효동의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확실히 빈마마의 목소리다!"
효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또 한 번 해볼 일이 있습니다.'
덕금은 효동의 귀에다 소곤댔다.
"호초의 목소리다!"
효동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휘빈 김씨의 음성이 또 들린다.
'얘, 그만 다 두어라. 시틋하다. 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서 마음을 죌 까닭이 없다. 이러쿵저러쿵 이제는 입에서 신물이 난다.'
호초의 대답하는 음성이 또 들린다.
'아니올시다. 이번에는 신을 훔치는 일과는 다릅니다. 쇤네와 마마 단둘이만 알고 있으면 그만이올시다.'
덕금과 효동은 캄캄한 방문 앞에서 소리 없이 허리를 얼싸안았다. 호초의 입에서,
'이번에는 신을 훔치는 일과는 다릅니다.'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신을 훔친 년은 호초가 분명했다. 도둑질한 계집의 단서를 확실하게 잡은 효동과 덕금은 기쁨을 이길 길 없었다. 어둠 속에서 서로 얼싸안았다. 소리를 차마 내지 못하고 뺨과 뺨을 서로 비볐다. 도둑을 발견한 기쁜 눈물이 볼과 볼 사이로 주르르 흘렀다. 덕금과 효동은 다시 귀를 기울였다. 호초의 목소리가 또 들린다.
'상사뱀 암컷과 수놈이 서로 어우러져서 기뻐했을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치마속에 차게 되면 내외가 화합해서 사랑이 무궁무진--.'
효동과 덕금의 눈은 어둠 속에서 동그랗게 떠졌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효동의 입에서, "에구머니나, 망측스러워라!" 소리가 나올 뻔했다. 덕금은 잽싸게 효동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김씨의 목소리가 또 들린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어떻게 구한단 말이냐?"
효동과 덕금은 호초의 대답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
'마마, 아무 걱정 마십쇼. 허락만 하신다면 쇤네가 구해오겠습니다. 금강산 만이천봉이 모두 다 상사뱀의 소굴이고, 한양 천지만 해도 삼각산, 인왕산, 남산, 낙산, 허다한 곳에 상사뱀이 들끓고 있습니다. 땅꾼에게 부탁하면 단박 가져올 것입니다.'
휘빈 김씨의 대답하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호초의 대답소리가 또 들린다.
'금가락지 한 쌍만 내주십시오. 수건 열 벌이라도 구해오겠습니다.'
이때 금가락지 던져주는 소리가 '댕그랑' 났다. 효동과 덕금은 입을 딱 벌렸다. 다람쥐 달아나듯 자기 처소로 사라졌다. 여성의 심리는 대범하기 극히 어려운 모양이다. 효동과 덕금은 신을 훔쳐가서 요사스런 방술을 쓴 장본인이 호초인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그녀들의 백금선 같은 날카로운 감정은 그녀들로 하여금 이 일을 그대로 덮어둘 수 없게 했다. 첫째로 자기의 몸을 담고 있는 소중한 신을 갈기갈기 찢어서 불에 살라 무엄하게 동궁이 자시는 술단지에 탄 일이 분했고, 둘째로 결백하기 짝 없는 자기들의 몸이 세자의 굄을 받았다는, 질투하는 마음을 품어서 추한 누명을 쓰게 한 일이 분했다. 효동과 덕금은 새파란 비수 같은 감정을 품 안에 품고 호초를 벼르고 있었다. 이튿날 두 여인은 제조상궁의 처소로 향했다.
"항아님께 조용히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제조상궁은 효동과 덕금이 일시에 찾아와서 할 말이 있다 하니 신을 잃었던 시녀들이라, 보통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곧 좌우에 있던 궁녀들을 내보냈다. 궁녀들이 나간 후에 제조상궁은 시녀들에게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기에 찾아왔느냐?"
덕금이 대답한다.
"신을 훔쳐 간 장본인을 알았습니다. 저희들의 신을 훔쳐다가 요망한 짓을 했습니다."
"요망한 짓이라니?"
"호초란 년이 휘빈과 짜고 저희들의 신을 갈기갈기 찢어서 불에 태운 후에 가루를 만들어서 동궁마마께서 잡수시는 술단지에 넣었다 합니다."
제조상궁은 깜짝 놀랐다.
"그것이 웬 해거냐? 무슨 일로 그따위 짓을 했단 말이냐?"
"시앗을 떼는 방법이라 합니다. 동궁마마께서 자주 내침을 아니하시니, 외전에서 거행하는 저희들로 인하여 소박을 당하는 것이라 곡해하고, 저희들의 신을 칼로 찢어서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 동궁마마께서 마시도록 한 것이올시다."
제조상궁의 얼굴에 엄숙한 기운이 떠돌았다.
"너 어떻게 호초년의 짓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얻었느냐?"
"술에 티가 떠서 동궁마마께서 진어를 아니하시고 단지의 술을 또 다시 살폈을 때, 호초란 년은 찬비 책임도 아닌데 독약인지 아닌지 시험해본다고 훌떡 단지 술을 들이켰습니다. 그때 항아님께서는 중전마마께 아뢰시고 호초한테 비단 한 필까지 내리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그리했느니라."
"그때부터 저희들은 호초년을 의심했습니다. 아무리 충성심이 대단하기로, 독약이 아닌 것을 알기 전에는 어떻게 그 술을 마십니까?"
제조상궁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궁중에서 시녀들은 한동안 도깨비 장난이라고 소동을 피우더니, 요사이는 시앗의 신을 태워 술에 타 남편에게 먹게 하면 소박을 면한다는 말이 동료들의 입에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그리하와 저희들은 호초의 동정을 살피느라고, 죄송스러우나 호초가 자고 있는 빈마마의 침실을 밤마다 엿보았습니다."
덕금과 효동은 휘빈과 호초가 말한 모든 일과, 심지어는 땅꿈을 시켜서 상사뱀의 정기를 구해서 차려고 한 비밀한 일까지 털어 고했다. 제조상궁은 또 한 번 놀랐다. 제조상궁은 이 일을 그대로 덮어둘 수는 없었다. 곧 소헌왕후께 아뢰었다. 소헌왕후는 크게 노했다. 세자빈은 장차 이 나라의 왕후가 될 존엄한 자리에 있어서 만 사람의 귀감이 될 여인이었다. 과연 이같은 일이 있었다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곧 제조상궁한테 엄명을 내렸다.
"궁중의 규율과 기강을 문란케 하는 큰일이다. 곧 호초를 잡아 대령하라. 내가 친히 문초하리라!"
제조상궁은 중전의 명을 받자 궁녀들을 대동하고 동궁으로 나갔다. 먼저 휘빈 김씨에게 거래를 드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중전마마께서 동궁시녀 호초를 명소하십니다."
마침 호초는 휘빈 김씨의 곁에 있었다. 중전마마께서 명소하신다는 제조상궁의 전갈을 받자, 휘빈 김씨와 호초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모든 일이 탄로된 것을 깨달았다.
"중전마마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오리까, 데려가시오."
휘빈 김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자아, 들어가자!"
제조상궁은 호초에게 명했다. 호초는 앙탈할 길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조상궁과 궁녀들은 호초를 앞세우고 중전으로 향했다. 중전에는 삼엄한 찬 기운이 가득하게 돌았다. 뜰 앞에는 형틀과 매질할 싸리채가 등대되었고, 중전궁녀들은 좌우 편에 줄을 지어 나열해 있었다. 제조상궁은 호초를 거적자리에 꿇린 후에 전상을 향하여 아뢰었다.
"동궁시녀 호초를 잡아 대령하였소이다."
이윽고 소헌왕후는 분합문을 열고 옥좌에 임어했다.
"네가 동궁시녀 호초란 년이냐?"
소헌왕후는 거적 위에 엎드린 호초를 향하여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호초는 벌벌 떨면서 모기 소리만큼 대답했다.
"네가 효동과 덕금의 신을 두 번씩 훔친 일이 있느냐?"
소헌왕후의 음성은 추상 같았다.
호초는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발발 떨면서 대답한다.
"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에 쓰려고 훔쳤느냐?"
호초는 휘빈이 죄를 당할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주저주저했다. 얼른 대답을 못했다.
"왜 대답을 못하느냐?"
호초는 여전히 대답을 못하고 발발 떨고만 있었다.
"저년을 토설이 나올 때까지 되게 쳐라!"
소헌왕후의 벼락치듯 하는 호령이 떨어졌다. 궁녀들은 호초를 잡아끌어 형틀에 묶었다. 굵은 싸리채로 볼기를 치기 시작했다. 호초는 아픔을 이기지 못했다.
"바른 대로 아뢰오리다."
울부짖으며 고했다. 매는 그쳐지고 호초는 토설을 했다. 동궁과 빈 사이에 의가 좋지 아니한 것부터 시작해서 외전에 거행하는 효동과 덕금을 시기한 일이며, 어렸을 때 어미 친구 중가이와 하봉래한테 들은 방자질하는 법을 그대로 시행해서 효동과 덕금의 신을 훔쳐서 불에 태워 술에 타서 동궁께 드리려 하던 일이며, 상사뱀의 정기를 얻어서 휘빈에게 차게 하려던 일을 일일이 토설했다. 소헌왕후는 큰 괴변이 궁중에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곧 호초를 중전에 감금시키고, 대전으로 들어갔다. 대왕께 문안 말씀을 드린 후에 장중한 음성으로 말씀을 올렸다.
"궁중에 요변이 있사와 은휘할 수 없어 감히 아룁니다."
궁중에 요변이 있다는 말에 전하는 깜짝 놀랐다.
"요변이라니, 무슨 말씀이오니까?"
소헌왕후는 제조상궁이 아뢴, 휘빈 김씨와 호초가 동궁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효동과 덕금을 시기하여 신을 훔쳐서 불에 태운 후에 가루를 만들어 동궁에게 마시게 했다가 실패한 일이며, 또다시 신을 훔쳐서 칼로 저며서 몸에 지닌 일 등을 일일이 고하고, 호초를 문초해서 자백을 받은 일까지 자세하게 아뢰었다. 하도 엄청난 변스러운 일이었다. 대왕은 말씀을 아니 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호초란 년을 의금부로 내리시어 정식으로 치죄하옵소서."
소헌왕후는 대왕께 아뢰었다. 전하는 깊은 생각 속에 빠진 듯 여전히 말씀을 내리지 아니했다. 왕후는 전하의 말씀 내리기를 기다리고, 용안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전하의 마음은 무한 괴로운 모양이었다. 이윽고 전하는 천천히 말씀을 내린다.
"좀 더 신중하게 내용을 살펴야 하겠소이다. 호초란 년은 동궁에서 중전으로 옮겨서 감시하시고,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왕후는 옹용한 안색으로 말씀을 드린다.
"동궁과 궁전의 모든 궁녀들이 이미 다 알고 수군거리는 일이올시다. 덮어둘 도리가 없습니다."
왕후는 말씀을 사뢴 후에 입술을 힘차게 다물었다. 벌써 어떠한 결심이 굳어있는 듯했다.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사람이 여럿 상합니다."
전하는 뒤를 두고 말씀을 내린다.
"다치고 상해도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궁중의 기율 문제만이 아니올시다. 동궁빈은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릴 임금의 왕후가 될 사람이올시다. 그러한 소문만 있어도 불미하고 부덕한 일이온데, 사실이라면 단연코 휘빈은 폐출해야 합니다!"
왕후의 말씀은 강경했다. 대왕이 말씀한다.
"왕실의 망신이올시다. 북을 치면 소리가 더욱 날 뿐이올시다."
"아름답지 못한 소리는 이미 궁중에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추한 일을 그대로 덮어두기만 한다면 썩고 문드러져서 나중엔 걷잡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더러운 종기는 곧 도려내야 합니다. 내버려 둔다면 수종다리가 되어 병신이 됩니다. 종기는 곧 파종을 해야 합니다."
소헌왕후의 말씀은 더한층 강경했다. 전하는 다시 침묵 속에 잠겼다. 한동안 후에 말씀을 내린다.
"종묘사직에 관한 막중한 일이니 하룻밤만 더 생각해보겠소이다."
전하는 더 한번 신중한 태로를 취했다. 소헌왕후가 중전으로 돌아간 후에 전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밤을 세웠다. 큰일이었다. 전하는 세자가 학문에 전심해서 주색을 멀리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미덥고 기쁜 일이었다. 앞으로 당신의 업적을 이어받아서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세자는 지나치게 여인을 멀리했다. 역시 좋은 현상의 하나다. 그러나 가례를 치른 정실에까지 돌보지 않는다는 일은 지나친 일이라 생각했다. 병적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왕의 처지로 앉아서 세자에게 휘빈을 소박하지 말라고 훈계하기도 극히 난처한 일이었다. 전하는 항상 이 일을 근심했다. 인생의 모든 일은 지나쳐도 못 쓰는 법이다. 모자라도 아니 된다. 기울어지면 쓰러지고, 미치지 못하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이러므로 인생 행로는 말과 행동이 항상 중용의 길을 택해야만 기구를 면한다. 정정당당하게 탄탄대로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전하가 세자에 대하여 항상 염려했던 일이 이제 한 점 파탄이 되고 말았다. 전하는 어체를 뒤척이며 밤새도록 번뇌 속에 들었다. 하늘은 태고로부터 남성과 여성을 두었다. 성숙이 된 후에는 이성과 이성 사이에 서로 끌려서 합치는 마의 매력을 갖게 했다. 부드러운 정과 강렬한 열이 화사한 불꽃을 튀긴 후에는 아들딸을 낳아서 기르고 가르쳐서 화락한 가정을 이루고,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인생과 정의 본연한 천리다. 여자가 사춘기에 들게 되면 남자를 그리워하고, 남자가 장성하면 여자를 애무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떠한 강압과 권위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막아버리고 만다면 그것은 마치 홍수가 질렸을 때 봇물이 터지듯 등이 터지고 땅이 두려 빠져서 기어코 파탄이 오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이 남녀 애모의 정도 무궤도로 달리면 금수의 세계가 되고 만다. 이러하므로 선현들은 사람만이 지킬 수 있는 무형한 자율의 선을 두어서 불행의 장본이 되는 모든 난행을 억제케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하는 즉위초에 봄을 부르는 고양이들의 난동 소리를 듣고 사춘기에 처해 있는 젊은 궁녀들을 궁안에서 내보내서 자유롭게 결혼해서 인간 본연의 행락을 취하게 했던 것이다. 이제, 휘빈 김씨는 가례를 치른 지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세자의 돌봄을 받지 못했다 한다. 딱한 그 정경을 가긍하게 생각할 점도 있다. 휘빈은 이러한 번민 속에서 세자의 애정을 이끌려 하여, 요망한 시비의 말을 듣고 어리석게 미신의 일을 저질렀다. 휘빈의 정상을 생각한다면 동정할 점도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왕후의 말씀대로 동궁빈이란 자리는 막중한 자리다. 이 아름답지 못한 일이 궁중에 자자하도록 소문이 퍼졌다 하니 덮어둘 수도 없는 일이다. 전하는 밤을 새워 번민했다. 이튿날 전하는 외전에 나가 정무를 살핀 후에 중전으로 옥보를 옮겼다.
"내가 친히 호초란 년을 불러 물어보겠소이다."
전하는 궁녀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작은 일에도 시기와 질투와 모함으로 일을 잡치는 일이 많았다. 세자빈에 대한 중대한 일이다. 친히 정상을 살펴야 하겠다는 신중한 생각이었다.
"그리하옵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헌왕후는 전하의 뜻을 받들었다. 제조상궁에게 명했다.
"호초란 년을 대령해라."
제조상궁은 곧 감금되었던 호초를 전하 앞에 대죄케 했다. 전하는 소란을 피하여 일부러 형구를 쓰지 아니했다. 그러나 엄숙한 빛을 용안에 띠고 묻기 시작했다.
"네가 동궁 시녀 호초냐?"
호초는 전하의 엄한 위풍에 눌렸다. 형틀과 매질이 없어도 감히 은휘할 수 없었다. 벌벌 떨면서 대답한다.
"네, 그러하옵니다."
"네가 효동과 덕금의 신을 두 차례나 훔친 일이 있느냐?"
"네, 그러합니다."
"무엇에 쓰려 했느냐?"
호초는 자초지종을 일일이 자백했다.
전하는 다시 물었다.
"둘째 번에 도려낸 신가죽은 지금 휘빈이 차고 있느냐?"
"같은 시비 순덕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해서 순덕이란 년이 가지고 있느냐?"
"순덕이가 비밀을 알고, 탈로가 나면 큰일이 난다 해서 증거를 없이하기 위하여 빈마마가 차고 계신 것을 친정으로 보내서 감추려 했습니다."
전하는 다시 순덕을 불렀다.
"네가 쉬빈이 차고 있는 주머니를 뺏어서 가지고 있느냐?"
"네, 그러하옵니다."
"어찌해서 네가 가지고 있느냐?"
"호초가 요사스런 짓을 하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제 상전의 몸이 위태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와 증거를 없애려고, 빈마마를 엄포로 달래가지고 가죽 담은 주머니를 뺏었습니다. 빈마마 친정댁에 가서 정부인께 이 사유를 고하고 맡으라 했더니 정부인은 펄쩍 뛰시고, 궁중에 출가한 빈의 일을 왜 참견할까 보냐 하고 거절하므로 하는 수 없어 쇤네가 가지고 있습니다."
"신을 도려낸 가죽을 담았다는 주머니를 가져오너라."
순덕은 저의 처소로 나가서 휘빈이 찼던 노랑 주머니 한 벌을 가지고 들어와, 전하와 소헌왕후 앞에 바쳤다. 틀림없는 세자빈의 화려한 노랑 주머니다. 전하는 소헌왕후에게 분부했다.
"주머니를 끌러보시오."
며느님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아니하시려는 것이다. 소헌왕후는 휘빈의 붉은 당사끈으로 잡아맨 노랑 주머니를 끌렀다. 효동과 덕금의 청목당혜 신을 도려낸 가죽 오락지가 무수하게 쏟아졌다. 증거가 확실했다. 전하는 다시 더 세자빈을 구할 길이 없었다. 제조상궁에게 분부했다.
"호초를 금부로 보내서 정식으로 국문케 하라!"
호초는 정식으로 의금부로 넘겨져 국문을 받았다. 호초는 모든 일을 다 털어 자백했다. 금부 당상은 호초의 자백한 문안을 어전에 바쳤다. 소헌왕후가 친국을 하고 전하가 문초하시던 말과 일호의 차착이 없었다. 전하는 다시 더 휘빈 김씨를 구할 길이 없었다. 소헌왕후께 한 말씀으로 결정할 의사를 전했다.
"종묘사직에 중대한 일이외다. 대신들과 의논해서 폐빈시킬 수밖에 도리가 없소이다!"
전하는 곧 대신과 백관들에게 입시를 명했다. 황희 이하 만조백관들이 입궐했다. 전하는 정전인 근정전에 출어하여 교지를 내린다.
배필이란 것은 민생이 살아가는 시초다. 운수와 복조의 길고 짧은 것과 국가의 흥망성쇠가 관계되는 것이다. 내가 지난해에 누대 명가인 김씨의 딸로 세자빈을 책봉했더니 뜻밖에 김씨는 미도압승의 일이 발로되었다. 과인은 듣고 크게 놀랐다. 곧 궁인을 보내어, 김씨를 심문하니 시녀 호초가 가르쳐준 일이라 했다. 곧 호초를 불러 까닭을 물으니, 호초가 말하기를, 지난해 겨울에 빈마마가 "여자가 남자한테 사랑을 받는 방술이 있느냐?" 묻기에, 모른다 했더니 빈마마는 자꾸 졸라대므로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을 살라서 가루를 만들어서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이편은 사랑을 받고, 저편은 소박을 향하게 되니 효동과 덕금, 두 시녀의 신을 훔쳐 시험해보자." 했다 한다. 효동과 덕금 두 시녀는 김씨의 시기하는 시녀들이었다. 곧 두 사람의 신을 가져다가 손수 친히 도려서 차고 다닌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그러나 틈을 타지 못해서 시행하지 못했고, 또 김씨가 호초한테 다른 방법이 없느냐 물으니, 뱀이 교접한 정기를 수건으로 씻어서 차고 다니게 되면, 남자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다 했다. 가르쳐준 두 방술은, 모두 다 전에 들은 바로서 첫 번째 술법은 박신기의 첩 중가이에게 들었고, 두 번째 술법은 정문기의 기생첩 하봉래에게 들었다 한다. 또 세자궁 시녀 순덕이란 애가 있는데, 본시 김씨 집 종이었다. 김씨의 약주머니에 도려낸 신가죽이 있는 것을 보고, 호초에게 보이면서 누가 우리 빈마마에게 이러한 짓을 하게 했느냐고 책망한 후에 곧 거두어 감췄노라 했다. 과인은 이 말을 듣고, 순덕을 불러 다시 물어보니, 조금도 틀리지 아니했다. 순덕이 또 말하기를, 쇤네는 빈마마의 친정댁에 가서 신 도려낸 가죽 오라기를 내어 뵈고 연유를 이야기 한 일이 있었고, '아직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내어 뵈었다. 이에 과인은 중궁에게 물어본 후에 김씨를 불러 사정을 물으니 일일이 자복하였다. 신가죽이 뚜렷하게 있고 증언이 명백하다. 전세의 애매하고 의심스런 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슬프다. 실로 이런 일이 있었다. 아아, 세자를 정하고 그 배필을 간택한 것은 장차 종묘의 제사를 받들며 어머니로서의 범절이 높아 만대에 큰 복을 연장하려 한 것이다. 지금 김씨는 세자빈이 되어 아직 수년도 못 되었는데, 그 꾀하는 일이 요망하고 사특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 투기하는 마음이 없기를 바랄 수 있으며, 오용한 덕행이 닭이 세 번씩이나 울었다고 남편을 깨울 수 있으며, 많은 자손을 거느려 백 가지 상서를 누리게 하는 내조가 있을 수 있는가. 이는 조종도 흠향하지 아니하실 것이요, 왕실에도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폐출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 어찌 그대로 둘 수 있으랴. 선덕사년 칠월 이십일, 종묘에 고하고 김씨를 폐하여 서인을 삼고 옥책과 인을 거두어 사저로 내보낸다.
만조백관들은 숙연히 전하의 교시를 들었다. 비로소 동궁에 불상사가 일어난 일을 알았다. 전각 아래는 서리가 내린 듯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전하는 교시를 마친 후에 편전으로 들었다. 먹을 갈아 친히 종묘에 고하는 축을 쓴다.
맏며느리 덕을 잃어 세자궁의 배필을 삼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의로 은애를 끊어 폐빈하옵니다. 감히 고합니다. 밝게 감하소서.
정이 많은 전하였다. 축을 쓰면서 눈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금부에서는 '호초의 죄상이 명백하니 의율처참하겠소이다.' 하고 계했다. 전하는 그리 하라 허락했다. 휘빈 김씨가 내치게 되고 호초가 처형을 당하게 되니, 전 총제 김오문과 원주목사 이반은 직첩을 회수하고, 돈녕부승 김중엄을 파직시켰다. 김오문은 김씨의 친정아버지요, 김중엄은 김씨의 형이요, 이반은 호초의 의부인인 때문이다. 사헌부 장령 취문손은 상소를 올렸다.
'교서를 받들어 보니 호초가 김씨에게 가르쳐준 방술은 박신기의 첩 중가이와 정문기의 기생첩 하봉래한테 들었다 하니 두 여자를 의금부로 잡아다가 국문하옵소서.'
전하는 곧 비답을 내렸다.
'중가이와 하봉래는 직접 호초에게 가르쳐준 일이 없고, 호초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을 전지 전청으로 전해 듣고 한 것이다. 중가이와 하봉래를 죄준다는 일은 경위에 닿지 않는다. 윤허할 수 없다.'
윤허하지 아니했다. 사헌부 장령이 계를 해도 전하가 호초 이외의 관련된 사람들을 죄주지 아니하니, 이번엔 언관인 사간원 좌사간 유맹문이 여러 언관과 함께 글월을 올렸다.
'호초는 이미 죄상이 명백하여 처형되었습니다마는, 풍속을 괴란시킨 장본인 중가이와 하봉래는 직접 관계되지 아니했다 해서 처벌을 하지 아니하셨고, 김씨의 친정 아비와 어미는 순덕이 신가죽 도린 것을 보여주었건만 이 일을 알고도 모르는 체해서 상달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불상사가 일어나도록 방관하고 있었으니 괘씸하기 짝 없는 일이올시다. 중가이와 하봉래와 김오문 부처를 국문하시어 처벌하시옵소서.'
전하는 상소를 본 후에 또다시 불윤한다 하고, 허락하지 않는 비답을 내렸다. 감관과 헌관들이 상소를 올려도 대왕은 허락하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헌관의 총수인 사헌부 대사헌 김효손이 상소를 올렸다.
'폐빈 김씨와 아비 김오문과 그의 아버니에 대해서 직첩을 거두신 일은 있으나 죄를 주지 아니하신 일은 온당치 아니합니다. 교전비로 있던 순덕이가 신가죽 도린 것을 가지고 가서 보여주고 못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시치미 떼고 있었으니, 이것은 자식의 악한 행동을 보고도 덮어두어서 큰 죄를 범하게 한 것이니, 당연히 국문하시어 형벌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옵고 박신기의 첩 중가이와 정문기의 첩은 비록 방술을 직접 호초에게 전해주지 아니했다 해도, 미풍양속을 해롭게 해서 그 악한 행동을 부녀들 사이에 전파시킨 죄가 크옵니다. 풍기를 맡은 헌부로서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김오문과 두 여인을 국문하시어 엄벌에 처하시옵소서.'
전하는 이 아름답지 못한 일을 더 크게 벌여놓고 싶지 아니했다. 대사헌에게 비답을 내린다.
'형벌이란 것은 일벌배게하는 것이 원칙이다. 벌은 죄를 저지른 당사자에게 한하는 일이 온당하다. 폐빈이란 막중한 벌을 단행했고 요망한 시비 호초를 참형에까지 처했다. 이만하면 추상같은 법을 세운 것이다. 죄 없는 사람들을 공연히 법망에 우그려 넣는 것은 밝은 정치가 아니다!'
온당한 비답이었다. 언관과 헌관들은 다시 입을 벌리지 못했다.
가련 동성애 희생화 봉빈
휘빈 김씨가 폐출된 지 며칠 후에 나라에서는 금혼령을 내렸다. 다시 세자의 배필을 뽑으라는 것이다. 금혼령이란 시집갈 나이에 해당되는 적령기에 처해 있는 사대부 집 딸들에게 시집을 가지 못하게 잠시 혼인을 중지하도록 금하는 것이다. 덕행과 용모가 뛰어난 규수를 널리 구해서 삼간택을 하여 세자빈감을 확정한 뒤에 비로소 금혼령을 푸는 것이 국혼을 하는 관례이다. 대궐로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소헌왕후 심씨는 다시 세자빈을 간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아가씨 중에서 초간태으로 십여 명이 뽑히고, 다음 재간택에 오륙 명이 뽑히고, 삼간택에서 마지막으로 한 명이 뽑혔다. 영광스런 세자빈감으로 지목된 아가씨는 종부소윤 봉여의 딸이었다. 상궁은 봉여의 집으로 나가 영광스런 세자빈으로 간택된 것을 고하고 곧 택일을 해서 납채할 날을 정했다.
세종대왕 십일년 시월 기유 십오일 무자에 왕은 면류관 곤룡포의 대례복으로 근정전에 임어했다. 만조백관들은 금관조복의 예복으로 뜰에 나열했다. 장차 납채례를 행하려는 것이다. 대왕은 어수로 친히 기러기를 보함에 넣었다. 판부사 허조로 정사를 삼고 이조참판 정흠지로 부사를 삼아서 종부소윤 봉여의 집으로 나가 전안을 했다. 전안이란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의 집에 가서 하는데, 백년해로하는 뜻을 맹세하는 결혼의식의 하나다. 기러기란 새는 수놈이 죽으면 암놈이 따라 죽는 의조다. 이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사가에서도 혼인할 때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기러기를 독좌상에 올려놓고 하늘에 절하며 맹세를 하는 정중한 의식을 한다.
이날 대왕 전하는 경연에 임하여 여러 문신들과 학문을 토론한 뒤에 새로 맞아들일 세자빈의 칭호를 정했다. 순빈이라 했다. 다음 십육일 기축엔 전하가 역시 면류관 곤룡포로 근정전에 올라 만조백관이 시립한 속에 왕세자의 납징례를 행하고, 판부사 허조로 정사를 삼고 총제 하연으로 부사를 삼아서 속백으로 현 여섯 가지와 훈 네 종류와 승마 한 필을 소윤 봉여의 집에 납징했다. 다음에 십팔일 심묘에 전하는 또다시 면류관 곤룡포의 대례복으로 근정전에 나가 만조백관이 시립한 속에 왕세자빈의 책빈례를 거행했다.
이번 정사는 역시 허조요, 부사는 정흠지다. 세자빈으로 책봉하는 책인과 관교며, 명복, 수식 등 아홉 개나 되는 함을 궁녀들이 이고 정사, 부사가 인도하여 종부소윤의 봉여의 집으로 나갔다. 이것이 납폐의 의식인 것이다. 경복궁 대궐 정문인 광화문을 크게 열고 열두 하님이 늘어섰다. 이 화려한 행차는 육조 앞을 지나 종로 큰 거리로 나갔다. 구경하는 백성들은 백절 치듯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봉씨라지?"
백성들은 주고받았다. 왕세자빈으로 봉하는 책빈과 납폐하는 의식은 대단했다. 정사와 부사가 봉소윤 집 악차로 들어가니 전알이 정사 이하 상궁들, 모든 집사를 인도하여 대문밖 서편에 마련된 자리로 나가 차례로 동향해 서게 했다. 주인 봉여는 사모관대로 대문 밖 동편으로 나와 서편을 향하여 손들을 맞이한 후에 대궐을 향하여 북향재배를 했다. 전알이 사신을 인도하여 대문 좌편으로 들어가고 뒤에는 책인을 받든 종자들이 따랐다. 주인 봉씨는 대문 우편으로 들어가 중문밖에 당도하니, 책인을 받든 시자가 부사에게 책인을 전하고, 부사는 정사에게 전했다. 정사는 책인을 받아 내시한테 주고, 내시는 전내에게 전했다. 전내는 책인을 받들어 합문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놓고 부복했다. 비로소 빈이 될 신부 봉씨가 부모한테 인도되어 마당 한가운데로 나타난다. 장서 상궁이 책인을 받들고 진 앞에 모시어 섰고, 장엄 상궁 이하 수식과 의복을 받든 궁녀들이 뒤를 따라 빈 옆에 시립했다. 빈이 대궐을 향하여 북향 사배한 후에 사규 상궁이 장서 상궁과 장엄 상궁한테서 책인과 수식이며 의복을 받아서 빈 앞에 부복해놓고, 빈은 다시 북향 사배를 한 후에 부모에게 인도되어 정당에 올라 모든 궁인들의 재배를 받았다. 이리하여 책빈례는 끝이 났다.
사신들이 대궐로 돌아간 후 해질 무렵에 전하는 근정전 월대레 차려놓은 악차에 예복으로 친림하고, 백관들은 뜰 앞에 조복을 입고 차례로 나열했다. 왕세자의 초계례를 행했다. 세자는 원유관에 강사포를 입고 전하의 경계하는 말씀을 들었다. 초계례가 끝나자 왕세자는 은안백마에 높이 앉아 모든 시위들을 거느리고 봉여의 집으로 친영례를 행하러 나갔다. 이리하여 왕세자의 두 번째 가례는 끝이 났다.
한성 거리는 연일 왕세자저하의 가례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어 분잡했다. 김씨가 폐해 나가고 봉씨가 다시 세자빈이 되어 대궐로 들어가는 일은 서울 안의 크나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친영례를 마친 다음 날, 전하와 소헌왕후 심씨는 사정전에 임어하여 순빈의 알현례를 받았다. 김씨를 내친 후에 대궐 안은 우울하고 쓸쓸했다. 연일 가례를 치르는 경복궁과 동궁엔 겨울철이건만 만화가 방창한 듯했다. 근정전 뜰 앞에는 날마다 울긋불긋, 화려한 금관조복의 옥패소리가 화한 음향을 일으키고, 대내 안 중전과 동궁엔 남치마 분홍저고리 등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상궁과 나인이며 무수리들의 흥겹게 조잘대는 웃음소리가 수양버들 가지의 꾀꼬리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새로 세자빈이 된 순빈 봉씨는 부모의 곁을 떠나 구중궁궐에 들어온 것이 한편으로는 외롭고 섭섭했으나, 장차 삼천리강산이 모두 다 자기의 차지요, 삼천 궁녀와 만조백관들이 모두 다 자신의 치맛자락 밑에 굴복할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크나큰 희망을 가슴 안에 가득하게 안고 있었다. 부풀어 오르는 즐거운 꿈을 안고 세자빈이라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더 어려운 영광스런 자리에 오른 순빈 봉씨는, 혼인한 지 몇 달이 아니 되어 차츰차츰 외롭고 쓸쓸하고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은 폐빈 김씨의 뒤를 이어 들어온, 말하자면 재취빈이다. 대궐로 들어올 때도, 친정 부모한테 말을 들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와 보니 상궁 이하 모든 궁녀들의 눈초리는 함빡 자기 자신의 일거일동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빈마마라 해서 극진하게 받드는 그녀들의 공손하고 부드러운 눈결 속에는 날카로운 응시가 칼날같이 번득였다. 쫓겨난 김씨와 자기를 샅샅이 견주어보는 것이다. 말 없는 그녀들의 주시는 마치 부드러운 면화 속에 비수를 품은 듯했다. 그녀들은 자기의 행동을 살펴보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불나불 입을 놀렸다. 김씨보다 예쁘다는 둥, 김씨보다 의젓하다는 둥, 나중에는 별의별 소리가 다 많았다. 김씨보다 키가 크다는 둥, 김씨보다 성미가 느긋해서 괄괄하지 않겠다는 둥 입들을 모아 지껄여댔다. 이같이 지껄여대는 소리는 상궁이나 제조상궁들을 통해서 궁전으로 돌아 들어가게 된다. 후취로 들어온 빈의 자리는 진정 엄나무 가시덩굴 속에 발을 벗고 올라선 것과 같은 괴롭고 불안한 자리였다. 여기다가 조정 대관들도 폐빈의 일이 있은 뒤라 나랏일을 걱정해서 상소를 올렸다는 소문도 있다. 친정에서 데리고 온 교전비 시녀가 밖에서 듣고 옮기는 말에 의하면, 사헌부 대사헌 김효손이란 노인은 가례를 치른 다음 다음날 아래와 같은 상소를 올렸다는 것이다.
왕세자의 교양하는 방식을 삼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바르고 곧은 사람을 택해서 항상 조석으로 모시게 한 연후에 덕성이 훈도되는 것입니다. 이제 동궁우시직으로 있는 김개의 어미 왕씨는 세 번씩이나 사내를 바꾼 여자올시다. 실로 방자한 계집입니다. 그러한 여자의 자손이 벼슬자리에 있어 동궁을 가까이 모신다는 일은 매우 편치 아니한 일입니다. 개의 익위하는 직책을 거두시기 엎드려 바랍니다.
국가의 풍기가 관장하고 있는 대사헌이 이같이 동궁을 감시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다. 전하께서는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하나, 동궁에 대한 일은 안팎으로 화제거리가 되고,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 상소는 동궁 외전에 대한 일이요, 직접 동궁빈에 대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폐빈 김씨의 전철이 있기 때문, 나라의 재상들까지 이같이 극성을 떨었다. 보통 사갓집 시집살이도 고초 당초보다도 맵다 하지만, 왕실의 시집살이는 과연 외롭고 꽤 까다롭고 쓰렸다. 이러한 중에 또 한 가지 새아기씨 순빈을 근심과 한숨으로 세월을 흘리게 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 세자빈이 되어 동궁으로 들어온 순빈 봉씨를 또 한 가지 우울하게 하는 일은 순빈에게 있어서 가장 큰 단장거리다. 세자는 친영을 해서 삼일 신방을 형식적으로 치른 후에, 별로 자기에게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가례를 치른 후 비록 삼 일밖에 아니 되는 짧은 날짜지만 자기 자신은 지성껏 세자를 받들었다. 간택에 뽑혀서 세자빈으로 내정된 후에 대궐 안에서 나온 보모상궁이 왕실의 절차를 가르쳐준 대로 세자의 침소를 정성껏 받들었다. 새벽에 닭이 세 번 홰를 치면 반드시 일어나 잠드신 세자가 깨실세라, 곱게 장지문을 열고 윗간으로 나와 빗접을 펴놓고 소리 없이 머리를 빗었다. 세수를 한 후에 거울 앞에 앉아 세자에게 아름답게 뵈도록 향유와 백분을 발라 얼굴을 매만졌다. 화려한 노란 회장저고리에 대화단 붉은 치마로 갈아입었다. 아미를 다시 한번 다스렸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자기가 보아도 아름답고 예뻤다. 다시 손을 씻고 세자의 기침하기를 기다렸다. 단정히 앉아 기다렸다. 새벽에 혼자 오뚝 앉았으니,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백은 와룡촉대에 벌룽거리는 금박대홍촉의 퉁겨지는 등심을 사슬에 달린 전도로 똑똑 따면서 무료한 시각을 보내기도 했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세자의 기침 소리가 자리 속에서 일어났다. 잠을 깨신 모양이었다. 장지문을 소리 없이 열고 세자의 자리 앞으로 외씨 같은 발을 옮겼다. 궁중의 예법은 허식이 많았다. 함께 동침을 했으면서도 세자의 누워 계신 앞으로 나가,
"침수 안녕히 하셨습니까?"
하고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세자는 너무나 대범했다. 웬만한 남자 같으면 선뜻 반갑게 껴안아주기도 하련만 덤덤하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참, 글만 제일로 아는 도학군자로구나!'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새아기씨인 자기 자신은 사색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윽고 세자는 기동했다. 자리 옷을 의대로 갈아입혀 드렸다. 승휘가 받들고 들어온 세숫물을 세자 앞에 갖다 놓고 씻으시기를 기다렸다. 수건을 두 손으로 받들고 그림같이 서 있었다. 세자가 수세를 마치니 수건을 공손히 받들어 올렸다. 이부자리를 개켰다. 조반으로 양원이 쑤어 올린 잣죽을 은쟁반에 은수저를 곁들여 자기 자신이 꿇어앉아 친히 받들었다. 세자는 잣죽을 다 자신 후에 수저를 놓았다.
"웃옷을!"
세자는 처음으로 간단하게 한 말씀을 했다. 자기 자신은 황망히 강사포를 의장에서 꺼내서 친히 입혀드렸다. 세자는 곧 외전으로 나갔다. 이것이 삼 일 동안 반복해서 치른 일과다. 그 후에 세자는 다시 순빈인 자기 방에 금침을 펴란 말이 없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다시 세자의 봉안을 가까이 대할 기회가 없었다. 이같이 해서 크나큰 꿈과 희망은 점점 저녁놀처럼 스러지고, 가슴 안에는 검은 구름장이 스산한 바람과 함께 가득하게 서리기 시작했다. 김씨의 폐출 사건이 일어나고 다시 봉씨를 동궁빈으로 맞이해 들인 후에, 대왕과 소헌왕후의 동궁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 이번엔 세자와 새 빈 사이에 의가 좋아서 궁중이 태평하고 세손이 탄생해서 국본이 튼튼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전하는 왕후와 자리를 같이해 앉았을 때마다 항상 동궁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순빈과 세자의 사이는 어떠합니까?" 화합한 모양입니까?"
전하는 소헌왕후한테 물었다.
"아직, 일천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이었다. 소헌왕후도 아직 세자와 세자빈 사이의 일을 알지 못했다.
"세자가 학문에만 전심하고 여자들을 가까이하지 않는 일은 참 좋은 점이올시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는 일도 상도가 아닙니다. 정실과는 항상 화합해서 왕자가 번성해야 합니다. 미치 나와 중전 사이같이! 하하하."
"이를 말씀입니까. 왕가나 사가나 매일반이올시다. 내외가 화합해야만 그 집안이 잘되는 법이올시다. 오늘의 왕실이 화락한 것은 전하께서 항상 비빈에 대하여 어거를 잘하신 덕택이올시다."
소헌왕후는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의좋은 전하와 왕비의 구수한 대화다. 전하는 다시 말씀한다.
"세자가 어서 아들을 낳아야만 내가 세손을 모겠는데, 아직 손자가 없으니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렇습니다. 둘째와 셋째한테는 벌써 아들이 생겼는데 세자한테는 아직 아들이 없습니다. 하루바삐 세손을 정해서 국본을 튼튼하게 정해야 하겠습니다."
"중전께서 가끔 상궁 아이들을 시켜서, 동궁의 동정을 살피십시오. 그저 내외가 화합해야 합니다.!"
"분부 아니 계시더라도 동궁한테 항상 관심이 큽니다. 앞으로 주밀하게 동정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대왕과 왕후는 이같이 동궁과 빈 사이의 행동에 대하여 관심이 깊었다. 소헌왕후는 조용히 제조상궁을 불렀다.
"순빈이 새로 들어온 후에 동궁은 가끔 순빈 처소에 내침을 하느냐?"
"가례 후에 삼일 신방은 잘 치르신 줄 압니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은 소인이 직접 동궁에 출사하지 아니하므로 사정에 어둡습니다. 어찌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의가 좋아야 할 텐데 어찌 지내는지 모르겠다. 네가 동궁시녀들에게 넌지시 물어서 나한테 경과를 알려다오."
"삼가 봉명하겠습니다."
이같이 해서 소헌왕후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제조상궁에게 동궁과 새 빈 사이의 동정을 알아들이라 했다. 제조상궁은 중전으로 돌아와 사실대로 소헌왕후께 고했다.
"동궁 시비들한테 물어보니, 동궁마마께서는 삼일 신방을 치르신 후에 외전에서 공부만 하시고, 별로 내침을 하시는 일이 없었다 합니다."
상궁의 아뢰는 말을 듣는 소헌왕후의 얼굴빛은 우울했다. 다음날 전하와 왕후는 다시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그동안 동궁의 형편을 살피셨소이까?"
전하는 왕후한테 물었다.
"상궁을 보내서 은밀히 알아보았습니다. 삼일 신방을 치른 후에는 항상 외전에서 공부만 하고 한 번도 내전을 찾은 일이 없다 합니다."
전하는 왕후의 말씀을 듣자 한동안 침묵 속에 빠졌다. 이윽고 말씀을 내린다.
"세자가 아침 문안을 들어오거든 우리 두 사람이 돈독하게 타일러야 하겠소이다."
"그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외분은 이같이 마음속으로 정하고 세자가 문안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에 세자는 두 분께 아침 문안을 들어왔다. 전하는 세자의 문후를 받은 후에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내가 세자한테 부탁할 말이 있다."
세자는 부왕께서 부탁할 말씀이 있다는 옥음을 듣자, 두 손을 모으고 시립해 섰다.
"세자가 학문에 전심하여 덕행을 닦으려고 하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할 말이 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데는 학문을 탐구하는 한 가지 일로만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을 탐구하고 덕행을 닦으려 하는 일은 실제로 인생의 과정을 자 치러 나가기 위한 준비인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는 없다. 먼저 실가를 가져야 한다. 집안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혼인은 백복의 근원이 된다고 옛사람들이 말한 것은 바로 이점이다. 부창부수해서 지아비가 부르면 아내는 따라서 화답해서 화락한 집안을 이룩한 연후에 자손이 창성하고 백 가지 일이 형통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가나 왕가나 매일반이다. 지난번 김빈을 내치게 된 그 원인을 캐어 본다면, 세자가 성리학 공부만 하고 그 공부를 가정에 실천해서 옮기지 못한 것으로 나는 본다. 그러하므로 파탄이 난 것이다. 성리학을 가정에 실천해보라! 글을 도능독으로 읽기만 해서는 아니 된다. 모든 일은 부부사이의 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세자는 전철을 밟지 말고 성리학 공부를 생활에 실천케 하라!"
세자는 전하의 정중하게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았다. 고개를 숙여 듣고 있다. 소헌왕후가 말씀을 잇는다.
"들으니, 동궁은 가례를 치른 후에 자주 내실에 들지 않는다 하오. 전하께서는 이 점을 근심하시는 것이오. 더구나 원손을 두어야 국본이 튼튼하게 되는 것이니 세자가 잘 알아서 왕실의 법도가 화락해지기를 바라오!"
두 분 전하의 간곡한 말씀에 세자의 고개는 더욱 수그러졌다.
"삼가,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세자는 아뢰고 물러갔다. 세자는 어마마마와 아바마마의 간곡하신 부탁을 받자, 부모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이날 밤에 시녀를 불렀다.
"오늘 밤에는 나의 금침을 내실에 포진해라."
세자의 한 말씀이 떨어지니 동궁 시녀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명심해 거행하겠습니다."
대답을 올리고 한걸음에 내전으로 달려갔다. 시녀들이 모여 있는 속에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순빈 봉씨에게 고했다.
"마마, 동궁마마께서 오늘 밤엔 금침을 내실에 포진하라 하셨습니다."
뜻밖에 분부에 모두들 귀를 의심했다. 입들이 딱 벌어졌다.
"정말이냐?"
시녀들이 흥분해서 물었다.
"어떤 일이라고 내가 감히 허튼 수작을 한단 말이냐?"
옆에서 듣고 있던 순빈 봉씨의 입도 소리 없이 벌어졌다. 가슴이 설레었다. 시녀들은 봉씨를 둘러쌌다.
"엄동설한은 가고 양춘가절이 돌아왔나 봅니다!"
순빈 봉씨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서 두 손을 꼭 잡고 감격에 넘쳐서 바르르 떠는 시녀도 있었다. 삼일 신방을 치른 후에 세자가 처음 내린 분부다. 순빈 봉씨의 입은 활짝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는다.
"마마, 어서 어서 목욕을 하십쇼! 탕물을 따끈하게 데우겠습니다. 해가 금방 넘어갑니다."
"머리는 소녀가 빗겨드릴 테니 어서 어서 목욕을 하십쇼. 너는 빨리 빛깔을 맞춰서 홑벌 의상을 대령해놓아라!"
시녀들은 뜻밖에 세자저하가 내침하겠다는 말씀을 듣자, 제 일같이 기뻤다. 흥분이 되어 조잘댔다.
"왜들 이리 수선을 떠느냐."
순빈 봉씨는 내심으로 무한 기뻤다. 너무나 즐거웠다. 바다의 파도가 소용돌이치듯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겉으로 한 마디 아니할 수 없었다.
"왜들 이리 수선들을 떠느냐, 조용조용히 입을 놀려라. 남이 보면 웃는다."
순빈 봉씨는 말을 마치자 시녀가 받들어 올리는 함지박만한 은대야에 장지문을 꼭 닫고 몸을 씻었다. 시녀 한 명은 향 섞은 팥가루 비누를 옥 같은 살에 문질러서, 엷은 지방을 닦았다. 살결은 보드랍고 탄력이 있었다. 순빈은 자기 자신의 몸이건만 새삼 아름다움을 느꼈다. 등을 밀고 비누로 닦아내던 시녀가 속삭이었다.
"이같이 아름다운 우리 마마를 동궁마마께서는 왜 밤마다 괴지 아니하시나. 아마 백옥 같은 이 살결을 못 보신 것이-."
순빈도 흥분이 되었다.
"미친년! 그만 지껄여라!"
시녀의 등판을 주먹으로 때렸다.
"못 보셨기에 삼일 신방을 치르신 후엔 한 번도 안에서 주무시지 아니하시지, 만약 보셨더라면 내침을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밤에 듭신다 하니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올시다. 꼭 동궁마마께 옥 같은 흰 살을 보여드리십시오!"
순빈 봉씨는 듣기 싫지 아니했다. 또 한 번 흥분이 되었다.
"미친년, 못할 말 없이 맘대로 지껄이는구나!"
또 한 번 시녀의 등판을 우렸다. 순빈 봉씨는 욕탕물을 물린 후에 화려한 용봉 큰 빗첩을 경대 앞에 펴놓았다. 구름 같은 검은 머리채를 활활 풀어, 전주월소로 가려내고 담양 참빗으로 머리때를 뽑았다. 물소뿔 비치개로 가르마를 단정하게 가르고 섬섬옥수 동백향유를 자그마치 따라, 구름 같은 머리채에 발랐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는 자르르 윤이 흘러 검다 못해 푸른 빛을 뿜었다. 시녀는 등 뒤에서 주빛 댕기를 감아 머리쪽을 틀어 올렸다. 황금봉잠을 가로질러 꽂고, 작은 월소로 다시 푸른 살쩍을 곱게 다스렸다. 밀기름으로 이맛전과 아미를 손질한 후에 황금봉황첩지를 머리에 얹었다. 손을 씻고 지분을 엷게 얼굴에 발랐다. 거울에 비춰본다. 거울 한복판이 환했다. 한 송이 붉은 함박꽃이 화사하게 거울 안에 강하게 정열을 뿜었다.
"이같이 단장을 하시고보니, 빈마마는 천하절색이십니다. 인제 동궁마마께서 보시면 아주 홀딱 반하실 것입니다."
"미친년!"
순빈은 한마디를 하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바라본다. 자기 자신도 화사하다고 생각했다. 짐짓 한 번 거울을 향해 웃어 본다. 어글어글한 눈에는 이글이글 욕구의 정염이 불꽃을 퉁겼다. 또 한 명의 시녀가 새 옷을 바쳤다. 초록 바탕에 자줏빛 회장을 단 저고리와 진달래빛 연분홍 저고리를 빈 앞에 내놓았다.
"어떤 저고리를 입으시렵니까? 초록 회장저고리를 입으시렵니까, 연분홍 저고리를 입으시렵니까? 마음에 드시는 대로 분부하시옵소서."
순빈은 시녀가 내놓은 저고리를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초록 회장저고리가 내 얼굴에 걸맞는다. 연분홍 저고리는 너무나 빛깔이 엷어 싫다.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나는 짙은 색이 좋더라."
"그럼 초록 회장저고리를 입으십시오."
시녀는 초록빛 회장저고리를 입혔다. 자줏빛 대화단 고름이 멋지게 빗장고름으로 매여졌다. 시녀는 다시 치마 두 채를 의장에서 내렸다. 궁초 남치마와 불구슬빛 같은 진당홍 대화단 치마를 순빈 앞에 내놓았다.
"치마는 어떤 것을 입으시렵니까?"
"남치마는 예복으로 항상 입는 것이다. 의식이 아닌데, 남치마를 입을 까닭이 없다. 불구슬 같은 진당홍 치마를 입겠다."
"에구, 빈마마께서는 너무나 짙은 빛을 좋아하시네!"
"나는 담박한 빛깔을 싫더라. 언제나 짙은 색, 화려한 빛깔을 좋아한다."
"그럼, 불구슬 같은 진당홍 치마를 입으십시오."
시녀는 새빨간 정열의 빛깔 진당홍 대화단치마를 빈에게 입혔다. 치마 위에 띠를 둘렀다. 약식으로 비취옥 자마노 백옥 소삼작 노리개를 찼다. 순빈은 등신대의 체경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덩이 같은 환한 얼굴에 정열적인 초록빛과 진당홍빛은 애욕의 정염이 이글거리는 호수 같은 추파와 함께 육감을 풍기는 한 폭 대작의 미인도다.
"에그나, 화려하셔라!"
시녀는 탄복하는 소리로 말했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세자는 아직도 내실로 들어오는 동정이 없었다. 순빈 봉씨는 그저 좋기만 했다. 몸단장을 차린 후에 열 번 스무 번 체경 앞에 몸을 비춰보았다. 세자가 오신다 하니 방마다 휘황하게 촛불이 밝았다. 불빛 아래 거울에 비치는 빈의 의상은 더한층 화려 찬란했다. 찬비들은 내실에서 세자와 빈이 함께 자실 저녁상을 차려놓고 세자가 듭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는 항상 외침을 하면서 진짓상을 밖에서 받았다. 세자가 내침을 하겠다는 영을 내렸으므로, 오늘 밤만은 세자와 함께 저녁상을 받아보겠다는 순빈의 간절한 뜻이었다. 그러나 순빈의 간절한 소망은 어그러졌다. 외전 시녀가 들어와서 찬비한테 전했다.
"동궁마마께서 진짓상을 밖으로 내오라 하신다."
"웬일이냐? 내전으로 들어오신다 하기에 빈마마께서는 함께 잡수시려고 겸상으로 보아놓고 기다리고 계신데-."
"아마 밖에서 잡숫고 듭시려는 모양이다. 빨리 거행해라."
찬비가 누구의 분부를 받들어야 할지 몰랐다. 급히 빈의 처소로 들어가 물었다.
"외전 시녀가 들어왔습니다. 동궁마마께서 저녁 진짓상을 밖으로 내오라 하신답니다. 겸반상으로 차려놓았는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순빈은 낙담천만이 되었다. 오래간만에 동궁저하와 함께 저녁상을 대하면서 웃으며 이야기 해보려던 건절한 소망은 안개 슬 듯 스러져버리고 말았다.
"아니 들어오신다더냐?"
순빈의 애가 끊어지는 듯했다.
"그 말씀은 아니 계시고 다만 진짓상을 밖으로 내오란 말씀만 계셨다 합니다."
"하는 수 없다! 외상으로 고쳐서 내보내도록 해라."
순빈의 입에는 침이 말랐다. 혀가 타는 듯했다. 찬비는 부랴부랴 겸반상을 외반상으로 고쳐서 외전으로 내보냈다. 시녀들은 순빈의 우울한 눈치를 챘다. 동궁의 저녁반상이 나간 후에 조심조심 순빈에게 묻는다.
"마마께서도 저녁 진지를 젓수셔야 하지 않습니까? 외반상으로 고쳐놓았습니다."
순빈 봉씨는 화를 벌컥 냈다.
"내가 저녁밥을 먹게 생겼느냐? 너희들의 소가지는 밴댕이 속 같구나. 눈치코치를 좀 차려라."
시녀들은 굽실하고 물러났다. 순빈 봉씨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거닐면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화가 나지만 악을 쓸 수도 없었다. 소리를 칠 수도 없었다. 어정어정 방안을 헤매면서 자꾸자꾸 걸어만 다녔다. 이윽고 외전에서 상을 물리고 퇴상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순빈은 궁금증이 났다. 배겨낼 수 없었다. 상을 받들고 들어온 외전 시녀를 불렀다.
"진짓상을 물리셨느냐?"
"네, 다 젓수시고 퇴선을 받들고 들어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려는 기색은 없더냐?"
"양치질을 하신 양치기를 물리고 바로 상을 받들고 들어왔습니다. 아직 들어오실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순빈은 더한층 초조했다. 또다시 한 식경이 지났다. 세자는 아직도 내실로 들지 아니했다. 순빈 봉씨는 목에 침이 말랐다. 애가 탔다.
"얘, 궁금하구나. 동궁마마께서 들어오시나 아니 들어오시나 동정을 좀 살피고 오너라-."
시녀는 외전으로 나가 동정을 살피고 순빈께 고했다.
'촛불을 돋우고 글을 읽고 계십니다."
순빈은 어이가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덤덤하니 앉아 있었다. 밤은 점점 깊었다. 순빈은 화려한 의상을 입은 채 그림같이 앉아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시녀들도 물러가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사모하는 사람을 기다리기란 과연 난감한 일이었다. 천리만리 떨어진 먼 곳도 아니다.바로 지척에 계신 동궁이건만 만나기가 이같이 어려웠다. 순빈은 안절부절못하면서 몇 번인지 한숨을 지었다. 자시가 가까이 된 모양이다. 시녀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이같이 아니 듭실 테면 숫제 금침을 포진하라는 분부를 내리지 마실 것이지!"
순빈은 혼자말로 한탄했다.
"너 한 번 더 나가서 동정을 살펴보아라."
순빈은 참다 못해서 또 한 번 시녀를 외전으로 내보냈다. 이윽고 길고 긴 복도에서 여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동정을 살피러 나갔던 시비가 먼저 뛰어 들어왔다.
"동궁마마 듭십니다."
순빈 이하 모든 시녀들이 벌떡 일어났다. 두 손을 모아 세자를 맞이했다. 세자는 청수한 봉안에 풍채 좋은 아름다운 수염을 늘이고 한 손에 책을 들고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달덩이 같은 육감적인 빈의 얼굴과 조촐하고 청수한 세자의 얼굴이 서로 마주쳤다. 이글이글 정열의 불길이 타오르는 순빈의 큼직한 눈과, 청아한 빛을 흘리는 세자의 눈동자가 똑바로 마주쳤다. 짙은색 초록 삼회장저고리 자주고름에 불구슬빛 같은 진당홍 치맛자락은 정염을 흘리는 큼직한 순빈의 눈과 함께, 세자의 맑은 눈을 강하게 압박했다. 세자는 너무나 벅찬 압박감을 느꼈다. 천천히 침실로 발길을 옮겼다. 순빈이 말없이 뒤에 따랐다. 세자의 저모립 갓을 내리고 도포를 벗겼다. 시녀들은 내외분이 침실로 듭시는 것을 뵙자 제각기 처소로 돌아갔다. 순빈은 세자의 저고리를 벗기고 요 밑에 따뜻하게 갈아두었던 자리옷을 입혀드렸다. 순빈의 얼굴을 매만진 짙은 향분 냄새가 세자의 코를 강하게 엄습했다. 세자는 고개를 돌렸다. 못마땅해하는 혼자 말씀을 가만히 내렸다.
"분내음이 너무 강하군."
순빈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세자는 금침 안으로 몸을 뉘었다. 순빈은 불구슬빛 같은 진당홍 치마끈을 끌렀다. 짙은 초록 삼화장저고리 고름을 끌렀다.
"의상이 도에 넘치도록 너무나 화사하구먼!"
세자는 또 한마디를 했다. 이후에 세자는 또다시 내실에 자리를 깔라는 분부가 없었다.
한편 전하와 소헌왕후는 세자가 내침하고 아니 한 일을 알고 싶었다. 제조상궁을 불렀다.
"요사이 동궁이 가끔 내침을 하는지, 동궁에 나가서 시녀들에게 물어보고 들어오너라."
제조상궁은 두 분 전하의 명을 받들고 동궁으로 나가 시녀들에게 은근히 물어보았다.
"달포 전에 한 번 내실에 금침을 포진하란 말씀을 내리신 후에 다시는 말씀이 아니 계셨습니다. 빈마마께서는 호젓하게 지내십니다."
제조상궁은 중전으로 돌아가 들은 대로 고했다. 두 분 전하의 마음은 우울했다. 이날 밤에 문안 들어온 세자에게 두 분 전하는 다시 당부하는 말씀을 내렸다.
"사가나 왕실이나 내외가 화합해야 모든 일이 순탄하게 되는 법이다. 들으니, 내가 지난번에 세자에게 타이른 후에 한 번 내실을 찾았고 그 후에는 다시 들르지 아니했다 하니, 세자는 되도록 내외가 화합한 길을 취하도록 하라!"
"명심해서 분부를 어기지 않겠습니다."
세자는 간단히 대답하고 물러갔다. 그 후에 세자는 두 분 전하의 뜻을 어길 수는 없었다. 내침령을 또 한 번 내렸다. 순빈과 시녀들의 기쁨은 말할 나위 없었다. 세자의 마음이 범나비가 꽃을 탐하듯 순빈에게로 기울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자의 마음은 담담하게 흐르는 물 같았다. 강렬한 순빈의 정열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또 한 번 내실에 침구를 편 후에는 외전에서 서연에만 마음을 모았다. 소헌왕후는 계속해서 동궁내외의 동정을 살폈다. 두 분 전하가 두 번째 말씀을 내린 후에, 세자는 부왕과 모후의 말씀을 어길 수 없어서 대접상으로 또 다시 한번 더 내침을 했을 뿐 그 후에는 다시 내실을 찾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소헌왕후는 어느 날 조용히 전하께 아뢰었다.
"세자는 전하께서 한 물씀 내리신 후에 저하의 분부를 어길 수 없어 한 차례 내실을 더 찾은 후에는 또다시 외전에서만 침식을 한다 합니다."
"자식이 배필과 화합하지 못한 일을 번번이 내가 간섭할 수 없고, 과연 딱한 일이외다. 그러나저러나 나도 이제는 세손을 보아야 할 텐데 큰일이외다."
전하는 왕실의 뒷일을 근심했다. 전하의 말씀하는 기색을 살피자, 소헌왕후가 아뢴다.
"전하께서 하루바삐 세손을 두시어 국본을 튼튼하게 하시려는 생각은 당연하신 일인가 합니다. 지금 동궁에는 후궁을 두는 제도는 있으나 아직 후궁이 없습니다. 범절있는 양가의 처녀 두서너 사람을 택해서 세자궁의 후궁을 삼게 하는 것이 어떠하올지? 혹시 여기서 아들이 탄생된다면 세손의 후보를 삼아도 좋을 줄 압니다. 감히 아뢰옵니다."
"좋은 의견이십니다. 그렇다면 양가의 처녀들을 선택해서 세자궁의 후궁을 마련하시기 바라오!"
전하는 세자궁의 후궁 둘 것을 원했다. 며칠 후에 소헌왕후는 문안 들어온 세자에게 간곡하게 전하의 뜻을 전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원손이 탄생되지 아니한 것을 매우 걱정하시었소. 그리하여 나에게 범절 있는 사대부집 규수를 택해서, 후궁을 봉하라 하셨소. 세자의 뜻은 어떠하오?"
세자는 언제나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뜻을 거역하지 아니했다.
"동궁에는 후궁을 두라는 제도는 있으나 필요 없사와 아직껏 후궁을 둔 일이 없습니다. 두 분 의향이 정 그러하시다면 좋을 대로 처리 해주시옵소서."
세자는 후궁 둘 것을 허락했다. 소헌왕후는 곧 양가의 처녀들을 수소문했다. 동궁의 정빈이 아니라 후궁이었다. 공공연하게 금혼령은 내리지 아니했다. 공식으로 삼간택하는 절차도 밟지 아니했다. 그러나 소헌왕후는 면밀하게 사대부집 규수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권씨네 집과 홍씨네 집에 규범이 도저한 아리따운 규수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제조상궁을 차례차례 두 집으로 보냈다. 부모들에게 소헌왕후의 간고한 말씀을 전하고 규수들의 인품을 살핀 후 동궁 후궁으로 대내에 들여보낼 것을 청했다. 두 집에서는 며칠 동안 생각한 후에 규수들의 동의를 얻어서, 동궁의 후궁으로 들여보낼 것을 허락했다. 소헌왕후는 대왕께 아뢴 후에 곧 날짜를 택해서 두 규수를 대궐로 들어오게 했다. 권씨와 홍씨는 상궁에게 인도되어 세자가 시립한 중에 전하와 왕후께 알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두 규수는 모두 다 청초하고 요조했다. 권씨는 유곡에 맑은 향기를 뿜는 난초와 같고 홍씨는 백합같이 향기로웠다. 큰절을 올리고 진퇴하는 모든 행동이 그지없이 가합했다. 전하는 권씨에게 양원의 칭호를 내리고 홍씨에게는 승휘의 직품을 내렸다. 양원 권씨와 승휘 홍씨는 전하와 왕후께서 내리신 첩지를 받든 후에, 동궁으로 나가 순빈 봉씨께 뵈었다. 순빈은 동궁의 정궁이요, 새로 들어온 권씨와 홍씨는 동궁의 후궁이 되니, 정궁에 알현을 해야만 했다. 순빈은 앉아서 두 후궁의 절을 받았다. 아무런 의논도 없이 뜻밖에 두 후궁을 거느려야 하는 순빈 봉씨의 심경은 평온할 수가 없었다. 동궁과 순빈 사이에 은애가 깊은 중에 후궁을 맞는다 해도 심사가 좋을 까닭이 없는데, 동궁과의 사이가 탐탁하지 못한 중에 돌연 후궁을 두 사람씩이나 맞이하게 되니 봉씨의 마음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궁중의 제도라 하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받기 싫은 절을 억지로 받았다. 사사로운 여염집 같으면 첩을 한꺼번에 둘씩이나 둔다고 남편에 대하여 야료라도 치련만 궁중의 규율은 지엄했다.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시앗의 절을 억지로 받았다. 순빈 봉씨는 적의 가득 찬 날카로운 눈으로 권씨와 홍씨를 바라보며 절을 받았다. 권씨의 행동은 유순하기 비단결 같고, 홍씨의 모습은 청아하고 정숙했다. 때묻지 아니한 옥 같은 규수들이었다. 그러나 순빈 봉씨의 눈에는 가시처럼 보였다. 적으로만 보였다. 눈을 굴려 절을 받고 아무런 말도 내리지 아니했다. 권씨와 홍씨는 그들대로 마음이 불안했다. 부모의 명에 의해서 대궐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정실이 아니고 부실이었다. 먼저 부실이라는 데 좌절감을 느꼈다. 동궁빈을 대해서 막상 절을 올리고 보니 달덩이같이 환한 얼굴엔 욕심 많은 거염과 변덕이 줄줄 흘렀다. 커다란 눈을 떠서 살기가 가득하게 흘겨본다. 인자스런 눈매가 아니다. 공연히 마음이 불안했다. 무서웠다. 손발이 떨렸다.
'어떻게 이분을 한평생 정빈으로 받들어 모시나?'
제각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궁이 아니라 친영례의 절차는 없으나 크나큰 잔치를 하고 화촉동방에 삼일 신방을 치렀다. 세자는 새로 된 두 후궁에게 직책을 맡게 했다.
"양원 권씨는 나의 의복과 침실을 맡아서 보살펴주고, 승휘 홍씨는 나의 음식 일체를 맡아서 간검하라."
세자는 두 후궁에게 친히 직책을 내렸다. 두 후궁은 세자와 세자빈을 극진히 받들었다. 현숙하다는 소문이 대전, 중전, 동궁에 자자하게 퍼졌다. 양원 권씨는 판한성부사 권전의 딸이다. 판한성부사라는 벼슬은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직위다. 이만하면 권씨네 집안의 교양과 가풍이 어떠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미리 한 마디 해두거니와, 양원 권씨는 뒷날 이씨 왕조 중의 가장 슬프고 외롭고 가엾고 불쌍했던 비극의 주인공인 소년 제왕 단종의 어머니가 될 분이다. 권씨는 천성이 부드럽고, 온화하고, 총명하고, 민첩했다. 여기다가 범절 있는 집안의 교양은 은연중 궁중의 화한 기운을 일으켰다. 위로 세종전하와 소헌왕후를 지성으로 받들고, 동궁과 순빈 봉씨를 공경해서 승순했다. 손아래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하고 후한 덕을 내렸다. 세자를 받드는 범절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세자빈인 순빈 봉씨를 받드는 범절은 모든 사람들이 탄복할 정도였다. 아침, 저녁으로 순빈께 문안을 드리고 손수 조반과 저녁상을 받들었다. 세자께 잣죽을 쑤어 올리면 순빈께도 손수 잣죽을 쑤어 올리고, 세자께 봉탕을 끓여 올리면 순빈한테도 손수 봉탕을 끓여 올렸다. 나이 비슷한 순빈이건만, 존비의 질서를 유지해서 부모같이 받들었다. 순빈은 처음에 권씨를 적의 가득 찬 도끼눈으로 대했다. 그러나 권씨는 조금도 사색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태연하게 유순하고 부드러웠다. 까닭 없이 꾸지람이 내리고 톡톡 쏘아붙여도 한결같이 순빈을 공경해 받들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이 감동하는 법이다. 도끼눈으로 흘겨보던 순빈의 눈도 점점 평탄하게 떠졌다. 벼락 치듯 하는 불호령도 차차 도수가 줄었다. 승휘 홍씨도 권씨의 행동에 좇아 웃어른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덕으로 대접했다. 김씨가 폐빈이 되고 봉빈이 뒤를 이은 후에도 세자가 봉빈을 탐탁하게 대하지 아니해서 스산하고 쓸쓸했던 동궁에는 화기가 돌기 시작했다. 서연에만 마음을 쓰고 내전에는 발길을 끊다시피 했던 세자는 가끔 권씨와 홍씨의 처소를 찾았다. 정염이 강한 순빈 봉씨보다도 맑은 향기를 그윽하게 뱉는 난초 같은 권씨와 백합 같은 요조한 홍씨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대왕과 소헌왕후는 권씨와 승휘 홍씨 두 궁인을 동궁으로 보낸 후에 세자의 동정이 궁금했다. 제조상궁을 불렀다. 전하가 친히 하문했다.
"양원 권씨와 승휘 홍씨가 동궁에 입궁한 후에 순빈의 태도는 어떠하고 동궁의 태도는 어떠하냐?"
제조상궁은 사실대로 아뢰었다.
"양원 권씨와 승휘 홍씨는 사람이 극가하옵니다. 상봉하솔에 빈틈이 없습니다. 순빈께서도 처음에는 불쾌하게 생각했던 권씨의 지성스런 봉양에 마음이 약간 풀린 듯합니다. 그리하옵고 동궁마마께서는 가끔 권씨의 처소와 홍씨의 처소로 들르시어 담소하신다 하옵니다."
전하는 상궁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웃음을 지어 점두하시고 소헌왕후는,
"천만다행이로구나!"
한 말씀을 내린 후에 양궁은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순빈 봉씨는 여전히 적막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일년이 지나고 이태가 지났다. 세자는 서연이 끝나면 간혹 권씨의 침실이 아니면 홍시의 침실로 들러 금침을 펴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궁인 순빈 봉씨의 침실에는 들르지 아니했다. 홀연히 동궁에는 기쁜 소식이 돌기 시작했다. 양원 권씨가 수태를 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은 대전과 중전으로 들어갔다. 두 분 전하의 기쁨은 대단했다.
"이제 손자를 보려나 보오!"
"작히나 좋겠습니까."
전하와 소헌왕후는 웃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동궁의 정실인 순빈 봉씨는 이 소식을 듣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하는 수가 없었다. 밤과 낮으로 한숨과 탄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열두 달이 지났다. 양원 권씨는 첫딸을 낳았다. 공주감이 탄생된 것이다. 전하와 소헌왕후는 섭섭하게 생각했다.
"딸을 낳으니, 차차 아들도 낳겠지!"
두 분 전하는 서로 희망을 두었다. 그러나 순빈 봉씨의 마음은 조금 위안이 되었다.
"아들은 내가 낳아야 할 텐데!"
혼자말을 했다.
한편, 궁중에는 아름답지 못한 풍습이 유행되었다. 동성애의 풍습이 은밀한 속에 백지에 물이 번져들 듯 번졌다. 이성의 사랑을 구할 길 없는, 사춘기에 들어선 궁녀들은 변칙적으로 동성끼리 은밀하게 사랑을 주고받았다. 원래 대궐 안 궁녀들이 있는 곳에는 남자들은 얼씬도 못했다. 대전 별감이나 무예청들도 궁녀들이 있는 곳에는 출입을 못 했다. 궁녀들과 가깝게 접촉할 수 있는 남자들은 성의 불구자인 고자만을 허락했다. 이리해서 내시가 생긴 것이다. 어릴 때 한번 궁중에 뽑혀 들어가서 나인생활을 하게 되면, 나이가 차서 성년이 된 후에도 수도하는 여승처럼 금욕생활을 하게 된다. 조금만 잘못하면 처형이 되어 목숨을 잃게 된다. 수도 여승은 산간벽지에서 남자의 세계와 인연을 끊었으니 금욕생활을 하기가 용이하지만, 궁중의 나인들은 여승과는 다르다. 매일 대하는 것이 호화로운 장면이다. 먼발치에서라도 공자왕손의 잘생긴 풍채에 마음이 흔들이고, 주지육림 속 현란한 춤과 노래가 번민과 번뇌를 일으켰다. 이러한 화려한 곳에서 꽃 같은 젊은 궁녀들이 금욕생활을 하기란 과연 어려운 중에도 어려운 일이다.
공자와 왕손들은 비빈과 첩들을 다섯 명, 여섯 명 내지는 십여 명씩 두고 남녀가 맘대로 연락을 취한다. 여기에 시기가 생기고 질투가 일어나고 음해가 생긴다. 꽃 같은 시녀들은 이 꼴을 바라보고 시중만 들고 있다. 사랑과 욕구에 굶주린 묘령의 궁녀들은 동성끼리 서로서로 사랑을 구했다. 그러나 겉으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우정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동침을 하듯 변태의 향락으로 쾌한 즐거움을 취했다. 누구는 누구의 짝이 되고, 누구는 누구의 배필이 되었다. 이 풍습은 가득하게 궁중에 퍼졌다. 동궁에는 소쌍이란 봉씨의 시녀와 단지라는 권씨의 시녀가 있고, 봉씨의 친정에서 데리고 온 석가이란 시비가 있었다. 모두 다 이십을 넘을 둥 말 둥 한 묘령의 처녀들이었다. 소쌍은 동탕하게 잘생긴 환한 얼굴에 성격이 활발해서 남성적이고 단지는 아리잠직한 고운 자태를 가진 내성적인 처녀였다. 궁중에서 터지는 동성애의 물결을 소쌍과 단지한테도 번져들었다. 단지는 소쌍을 애모하고, 소쌍은 단지를 연모했다. 한 궁 안에 있으니 만날 기회는 많았으나 제각기 직책이 다르니 낮에는 가까이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밤에 한가한 틈을 타서 두 시비는 서로 찾았다. 일년, 이태 지나는 동안에 정은 점점 깊어졌다. 서리 찬 가을 하늘 밤, 기러기 울부짖을 때와 동짓달 기나긴 밤, 명월이 만정할 때 두 시녀는 회포를 억제할 길 없었다. 소쌍은 단지의 처소로 찾아가서 회포를 풀며 함께 자기 시작했다. 정은 산처럼 높아지고 늪처럼 깊어갔다. 기러기 같은 사생을 함께 할 꿈을 꾸었다. 소쌍은 남편이 되고 단지는 아내가 되었다. 소쌍은 밤마다 단지를 찾아가고, 단지는 밤마다 소쌍이 오기를 기다렸다. 눈치 잘 채고 말 많고 시기 많은 궁녀들이었다. 소쌍과 단지가 좋아지낸다는 소문을 동궁 안 시녀들 입에 자자하게 퍼졌다.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둥궁빈 봉씨는 소쌍을 찾았다. 그러나 소쌍은 보이지 않았다. 여러 차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친정에서 데려온 사비 석가이가 대신 들어왔다.
"소쌍이를 불렀는데 왜 네가 대신 들어왔느냐?"
"소쌍이는 지금 없습니다."
"없다니 무슨 말이냐? 내 곁을 떠나서 어디로 갔단 말이냐?"
"단지의 방으로 간 모양 이올시다."
"단지의 방에서 밤늦게 무엇을 한단 말이냐?"
"함께 자고 있습니다."
"어찌해서 권씨의 시녀하고 한데 잔단 말이냐?"
"내외가 되어 동침을 하고 있습니다."
봉씨는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냐, 여자끼리 어찌 내외기 되느냐?"
"궁중의 젊은 애들한테는 그런 풍습이 있다 합니다. 쓸쓸하고 적막한 세월에 배겨날 길이 없어서 여자끼리 동성애로 해서 남편이 되고 아내도 된다 합니다."
"불쌍한 일들이로구나!"
순빈 봉씨는 탄식했다. 자기 자신이 쓸쓸하게 세월을 흘려보내는 생각을 하니, 소쌍을 괘씸하게 생각하기보다 동정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빈은 다시 물었다.
"소쌍이와 단지 이외에 이같이 내외를 정하고 지내는 것들이 많다 하더냐?"
"어느 때부터 내려온 풍습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동궁뿐 아닙니다. 궁중에는 이 풍습이 많다 합니다. 지위 높은 상궁들도 모두 다 짝이 있다 합니다."
동궁에 후궁으로 권씨와 홍씨가 들어오고, 더구나 권씨는 동궁의 굄을 자주 받아서 딸을 난 후에 순빈 봉씨는 고적하고 쓸쓸하고 스산한 마음을 억누를 길 없었다. 독수공방, 큰 궁실을 외롭게 지키면서 긴 탄식, 짧은 한숨으로 긴 세월을 흘렸다. 이같은 절벽 같은 인생의 궁지에 빠졌을 때, 궁중에 동성끼리 상사하고 사랑해서 변칙적으로 내외가 되어 동침까지 한다는 시비 석가이의 전하는 말은 순빈 봉씨의 호기심을 일으켰다. 본능을 극기할 수 없는 욕구불만의 치정은 마침내 자기 자신이 동궁빈이라는 고귀한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을 망각했다. 다음날 밤 봉씨는 소쌍비를 불렀다.
"어젯밤에는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아니하니 어디로 갔더냐?"
"황공하옵니다. 아이들 방으로 놀러 갔었습니다."
봉씨는 더 꾸짖지 아니했다. 벼락이 내릴 줄 알았는데 순빈의 얼굴에는 노한 기운이 없었다. 소쌍은 안도의 숨을 지었다.
"오늘 밤에는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
음성이 매우 부드러웠다. 소쌍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부대로 안에 있겠습니다."
소쌍은 순빈의 곁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저녁상을 받들고 침실을 청소했다. 밤이 이슥했다. 순빈은 소쌍에게 명했다.
"침방에 내 자리를 펴라."
소쌍은 순빈의 금침을 이불장에서 내려서 단정하게 폈다.
"밤이 이슥했다. 잘 때가 되었다. 덧문을 걸어 잠가라!"
소쌍은 덧문을 걸어 잠그면 자기 처소로 나갈 수가 없었다. 침실방 덧문은 언제든지 순빈이 손수 걸어 잠그고 혼자서 취침하는 것이 전례였다. 소쌍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쇤네의 손으로 문을 잠그면 쇤네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밤부터는 나하고 함께 자기로 하자!"
소쌍은 깜짝 놀랐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빈마마의 말씀을 어길 도리는 없었다.
"네-."
하고 대답했다. 덧문을 닫고 고리를 걸었다. 쌍창을 닫고 갑창을 닫았다. 장지문밖에 손을 모아 처분만 기다리고 조용히 섰다.
"장지문을 닫고 이리로 들어오너라."
소쌍은 조심조심 발길을 옮겨 장지 안으로 들어섰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순빈은 고개를 들어 촛불에 비치는 소쌍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글어글 시원스럽게 잘생긴 눈이 풍정 있게 윤을 흘렸다. 남자다운 모습이다.
"촛불을 꺼라."
순빈의 목소리는 흥분이 된 듯 약간 떨렸다. 소쌍은 명에 의하여 촛불을 껐다. 침실은 칠흑의 늪 속이었다. 순빈 봉씨의 해의성이 들렸다. 어둠 속에서 봉씨는 소쌍의 손을 잡았다.
"너도 벗어라."
소쌍은 당황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서 벗어라."
소쌍은 하는 수 없었다. 치마를 끌렀다. 캄캄한 밤빛은 동굴같이 어두웠다. 이후부터 순빈 봉씨는 밤마다 소쌍과 함께 동침을 했다. 그러나 소쌍은 항상 권씨의 시비 단지를 연모했다. 낮에 틈만 있으면 권씨의 처소 단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밤마다 전과 같이 단지와 함께 사랑을 속삭이지 못하는 한을 호소했다. 단지 역시 소쌍의 사랑을 순빈한테 완전히 뺏긴 일이 분했다.
"옛정을 헌신짝 버리듯 매정스럽게 버려서는 아니 된다. 그래 아무리 빈마마와 새 정이 깊었기로서니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너무나 쌀쌀스럽구나!"
단지는 뾰로통한 입술로 소쌍한테 쏘아붙였다.
"어디 내가 너한테 정이 없어 그러는 것이 아니로구나. 어떻게 하니. 빈마마가 꼭 붙들고 꼼짝도 못 하게 하니 어찌하느냐. 노하지 말고 바꿔 생각해 보아라. 매인 목숨 아니냐? 마음을 돌려서 풀어다오! 내가 틈을 타서 초저녁 때라도 잠깐씩 다녀갈게."
소쌍은 단지에게 애원하며 빌었다.
"모르겠다. 맘대로 해라!"
단지는 여전히 소쌍한테 풀리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소쌍은 몸이 달았다. 틈만 있으면 미꾸라지같이 순빈의 처소에서 빠져나와 권씨의 처소로 가서 단지와 만났다. 사랑을 속삭였다. 순빈 봉씨는 한때라도 소쌍과 떨어질 수 없는 심경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시시때때로 소쌍을 찾았다.
"소쌍이 어디 갔느냐, 보이지 아니하니?"
"소쌍이는 아까부터 찾아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친정에서 데려온 시비 석가이가 대답했다.
"그년이 아마 단지한테로 가 있나 보구나. 빨리 가서 데려오너라!"
석가이는 권씨의 처소 단지가 있는 곳으로 달음질쳤다. 과연 소쌍이 있었다.
"빈마마께서 찾으신다. 빨리 가보자!"
소쌍은 하는 수 없었다. 단지와 헤어져 순빈 처소로 들어갔다. 순빈은 소쌍을 크게 꾸짖었다.
"이후부터 내 허락이 없이는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한다."
소쌍은 하는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아니 했다. 순빈은 조용히 석가이한테 분부했다.
"앞으로 소쌍의 행동은 네가 감시해야 한다. 만약 내 명을 어기는 때는 너도 큰 벌을 받으리라!"
이후부터 석가이는 소쌍의 들고 나는 행동을 일일이 감시했다. 소쌍과 단지는 사랑을 나눌 기화가 영영 끊어졌다. 순빈 봉씨는 밤마다 소쌍을 독점했다. 소문은 번개치듯 빨랐다. 더구나 궁녀들의 납신거리는 입부리였다.
"순빈마마는 밤마다 밤마다 소쌍와 동침을 하신다더라."
"단지와 소쌍은 단짝 같은 사인데, 단지는 소쌍을 빈마마한테 뺏기고 울상을 하고 있단다!"
소문은 쫘아하게 퍼졌다. 순빈이 소쌍을 사랑해서 침실에 동침한다는 기괴한 소문은 마침내 세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자는 크게 노했다. 곧 소쌍을 불러 엄하게 물었다. 소쌍은 벌벌 떨었다. 기실 도리가 없었다. 사실대로 대답했다. 세자는 이 일을 도저해 덮어둘 수 없는 일이라 판단했다. 소헌왕후께 문안을 드린 후에 시녀들을 물리치고 조용히 고했다.
"순빈 봉씨를 내보내야 하겠습니다."
소헌왕후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요, 내보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동궁빈이란 막중한 자리에 있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세자의 음성은 장중했다.
"무슨 불미한 일이 있었소? 자세하게 곡절을 말씀하오."
세자는 순빈이 소쌍을 사랑해서 밤마다 동침한 일이며, 소쌍을 불러서 자백을 받은 일을 일일이 고했다.
"폐빈을 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니, 신중히 사실해서 대전마마께 품달한 연후에 처분을 들어야 하겠소."
소헌왕후는 세자가 동궁으로 나간 후에 곧 제조상궁을 불렀다.
"들으니 순빈의 행동이 궁중규범에 크게 어그러진 일이 많다 한다. 일일이 사실해서 복명하라."
제조상궁은 벌써부터 순빈이 소쌍을 사랑해서 밤마다 동침한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입을 벌려 이야기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분부대로 사실해서 아뢰겠습니다."
하고 무르는 체 대답했다. 제조상궁은 소헌왕후의 명을 받들고 동궁 시녀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 모든 딜을 조사했다. 소쌍과 동성애를 한 일은 상궁이 벌써부터 소문을 들어 잘 아는 일이지만 별의별 흉과 험이 들춰졌다. 세자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아기를 수태했다고 거짓 외수를 꾸몄다가 낙태를 했다고 소문을 낸 일도 있었고, 세자의 좋은 의복 둘을 친정집으로 보내서 부모들에게 주어 고쳐 입게 한 일이며, 친정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세자의 허락도 없이 당고모부를 시켜서 노제를 지내게 한 일 등 말할 수 없는 험이 드러났다. 제조상궁은 은휘할 길이 없었다. 궁녀와 시비들에게 사실한 대로 소헌왕후께 고했다. 소헌왕후는 대전으로 들어가 전하께 아뢰었다.
"신첩이 덕이 없어 궁중을 덕화로 다스리지 못하고, 거듭거듭 동궁에 아름답지 못한 일이 생기게 했사오니 신첩을 죄주시옵소서."
대왕은 깜짝 놀랐다.
"무슨 아름답지 못한 일이 동궁에 또 있었소이까?"
"이루 형언해 아뢰기 어려운 일이올시다."
소헌왕후는 허두를 꺼낸 후에 한숨을 짓고, 세자가 친히 문후를 드리고 폐빈을 해달라고 아뢴 일과, 상궁을 시켜서 순빈의 행동을 조사한 결과를 일일이 아뢰었다. 세종대왕은 깜짝 놀랐다. 청천하늘에 벽력이 내린 듯한 소리다.
"세자가 폐빈을 주장한단 말씀요?"
"네, 그러하옵니다."
대왕은 약간 현기를 느꼈다.
"두 번씩이나 폐세자빈을 하게 되다니 과연 기막힌 일이로구려! 막중한 일이니 잠시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어안이 벙벙했다. 입을 꽉 다물었다. 당신의 일이 아니고 세자의 일이건만 또 한 번 인생의 번뇌를 착실하게 느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소헌왕후는 전하의 기색이 약간 진정된 후에 서서히, 세자가 소쌍을 불러 신문한 일이며 제조상궁이 사실한 일을 일일이 아뢰었다. 전하는 묵묵히 왕후의 말씀을 들은 후에,
"아직 발설을 마시고 잠시 기다려주시오."
은근히 당부했다. 왕후는 정색하고 아뢴다.
"온 궁중이 다 아는 일이온데, 어찌 발설을 말라고 분부하십니까? 세자가 우기는 일이오니, 속히 처단을 내려주시옵소서."
"과인이 혼자 처결할 일이 아닙니다. 막중한 일이니 대신과 종실의 의견을 들어야 하겠소이다."
왕후는 더 재촉할 수 없었다.
"다시 분부 내리시기를 기다리고 물러갑니다."
소헌왕후는 조용히 내전으로 돌아갔다. 왕후는 돌아간 후에 대왕은 침식이 불안했다. 신하들을 대할 낯이 없고, 백성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세자의 일이건만 제가를 못한 책임이 크다고 자책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전하는 마음이 괴로웠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남자는 아내 되는 여자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남자 되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 이러한 속에 화한 기운이 구름 일 듯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즐거움이다. 마치 악에 있어서 십이율이 서로 응해서 화음을 내고, 종과 경이 맑은 소리를 주고 받아서 화성을 내듯이, 인간인 사람의 부처도 애정이 무르녹아서 화음을 일으켜야만 한다. 화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음에 오는 것은 부조리한 격음이 일어날 뿐이다. 격한 소리가 음악이 될 수는 없는 것과 매한가지로, 남자와 여자의 불협화음은 도저히 한 집안을 잘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전하는 이러한 불협화를 없이하기 위하여, 소헌왕후와 자리를 함께하고 세자를 불러서 내외가 의좋게 지내라고 여러 차례 타이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자와 순빈 사이는 의연히 불협화음이다. 악의 불협화음이 난다면 종과 경돌을 갈아야 한다. 마치 와경을 경석으로 갈아 내듯 했다. 그러나 내외간의 불협화음은 어찌해야 되는가? 전하는 고민했다. 사흘 밤을 꼬박 안온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론을 얻었다. 역시 기왓장 조각으로 된 경석을 현옥으로 갈 듯, 사람도 갈아야만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단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안평대군과 임영대군을 불러 대신들의 입시를 명했다. 승지를 통해서 대신들을 부르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두 아들 안평과 임영을 통해서 부른 것은, 순빈의 일을 아직 비밀에 부치려는 의도였다. 영의정 황희, 우의정 노한, 찬성 신개는 명소를 받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대군들을 보내서 입시를 명하시는 일은 여태껏 전례 없는 일이었다. 황황히 자비를 몰아 입궐했다. 전하는 좌우 시자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에 편전에서 세 대신과 두 왕자를 인견했다. 세 대신의 배알이 끝난 후에 전하는 천천히 말씀을 꺼냈다.
"오늘 영의정과 우의정이며 찬성, 세 대신을 대군들을 사자로 해서 부른 것은 나랏일이 아니라, 사사로운 왕실의 일이므로 정원을 통하여 부르지 아니하고 집안 아이들을 보내서 청한 것이니 미리 알아주기 바라오."
세 대신은 비로소 왕실의 일을 자문하시려는 전하의 뜻을 알았다.
"황감하여이다."
영의정 황희가 대표로 감격하다는 뜻을 표했다.
"과인이 덕이 없어 제가를 잘못하여 궁중에 아름답지 못한 일이 생겼으니, 과인은 실로 대신들을 볼 낯이 없소! 여기 대해서 경들의 높은 뜻을 참작해서 일을 처리하려 하는 것이오."
궁중에 아름답지 못한 일이 생겼다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대신들은 모두 다 눈이 둥그레졌다. 전하의 말씀이 다시 내리기를 기다린다.
"지난 해에도 동궁빈 김씨를 폐출하여 내 마음을 몹시 번뇌케 한 일은 대신들도 이미 다 잘 아는 바이거니와, 그 후에 봉씨 집 딸을 세자가 친영해서 동궁빈을 삼았으나 이번에도 동궁과의 금슬이 화합치 못했소. 과인과 중전은 여러 차례 세자를 불러 타이른 일이 있었으나 역시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소. 일찍이 과인은 허조를 불러 사사로이 이 일을 의논했더니, 허조는 왕실의 장래 일을 근심해서 동궁에 후궁을 두라 했소. 허조의 의견을 들어서, 법전에도 있는 일이므로 서너 명 후궁을 두었더니, 다행히 권씨한테 아기가 있어 딸을 낳았소. 이후부터 봉씨의 투기는 도를 넘었고 이루 입에 올려 말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이 많았소. 지금 세자는 폐빈하기를 주장하오. 일이 극히 난처하여 경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오."
전하는 허두를 꺼낸 후에 세자가 시녀 소쌍을 불러 순빈과 동침한 일을 자백받은 일이며, 제조상궁이 사실해 올린 모든 불미스런 순빈의 행동을 일일이 말씀했다.
"어찌해야 좋은가. 실로 내 마음이 칠흑 같은 운무 속에 싸인 듯 담담하고 괴롭기 한량없구려!"
하도 엄청난 일이었다. 대신들은 입을 봉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인정상 가긍한 일이올시다마는 세자빈은 장차 다음 세대의 왕후가 되실 분이올시다. 부덕한 분을 곤위에 처하게 할 수 없습니다. 동궁의 주장대로 폐출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영의정 황희는 한동안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동궁빈 봉씨의 폐출을 주장했다. 세종전하는 다시 우의정 노한에게 묻는다.
"우의정의 생각은 어떠한가?"
"애석한 일이요, 불상사올시다마는 신의 의사도 영의정과 같습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공자 같은 성인도 부덕한 아내를 내치셨고, 자사 같은 현인도 품성이 좋지 않은 아내를 버렸습니다. 폐하시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겠습니다."
전하는 다시 찬성 신개한테 물었다.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신의 의사도 영상과 우상의 의향과 같습니다."
전하는 세 대신의 의향을 듣자 길게 탄식하는 한숨을 짓고 괴로워하는 말씀을 내린다.
"내 덕이 어찌 이리 박해서, 사삿집도 아닌 왕실에서 두 번씩이나 세자빈을 내치게 된단 말인가? 장차 무슨 낯으로 조종께 이 일을 아뢰고, 만조백관과 만백성을 대한단 말인가? 실로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로다!"
영의정 황희는 전하를 위로하는 말씀을 올린다.
"전하께옵서는 과히 상심을 마옵소서. 이러한 일은 절대로 전하의 부덕하신 소치가 아니올시다. 전하께서 동궁빈의 사사로운 일까지 어찌 다 이루 간섭하시어 교화시키실 수 있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다만 그분들의 교양이 부족하와 그리된 일이올시다. 이러하므로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법이 있고 율이 있는 것 아니옵니까. 전하께서는 과히 성려를 번거롭게 마시옵소서."
우의정 노한이 아뢴다.
"전하께서는 인정에 너무 치중하십니다. 사람의 몸에 큰 종기가 났다면, 파종을 해서 불결한 고름과 근을 뽑아버려서 새로운 살을 나게 해야만 뒷근심이 없는 법이올시다. 잠시 마음과 인정으로 괴롭고 아프신 것을 참으시고 왕실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일을 바로잡으십시오. 그리하신 후에 국가를 크게 중흥시키시는 것이 전하의 맡으신 바 임무요, 만백성들이 바라는 바올시다. 왕실의 사사로운 일로 결코 뇌신하실 일이 아니올시다."
우의정 노한의 아뢰는 말은 논리가 정연한 위로의 말씀이었다. 옆에 모시어 있는 젊은 왕자 안평대군과 임영대군도 논리 정연한 우의정의 아뢰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 찬성 신개가 아뢴다.
"전하께서는 국가를 중흥시키실 큰일이 앞에 무궁무진 놓여 있습니다. 작은 일에 마음을 상하지 마시고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큰일을 해주시옵소서. 이러한 일로 노심하실 일이 아니올시다. 우의정의 말씀대로 쾌한 칼로 어지러운 삼풀을 끊어버리시고 정사에 대한 큰일에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전하는 세 대신의 아뢰는 말씀을 묵묵히 들었다. 홀연 한숨을 지었다.
"대신들의 의견을 존중하리다!"
전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들은 후에 여러 날 동안 우울했던 고민이 적이 풀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세종전하는 궁중으로 들어가 세자를 들라 했다. 세자는 부왕의 부르심을 받고 급히 궁중으로 들었다. 전하는 소헌왕후와 동석하여 세자에게 말씀을 내린다.
"세자 듣거라. 내가 덕이 없어 제가를 잘못해서 동궁에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위로 조종과 아래로 백관들이며, 만백성 앞에 얼굴을 들 수 없구나! 그러나 사사로운 집안일도 아니고 동궁빈으로서 그러한 아름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 하니, 이러한 사람으로 장차 왕비가 되어 사람의 의표가 될 수는 도저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중궁께 이 소식을 듣고 여러 날 동안 고뇌 속에 빠졌었다. 중대한 일을 나 혼자 독단하기 과연 어려웠다. 조용히 대신들을 불러 물어보았다. 모두 다 종기를 도려내듯 폐출해야만 한다 하므로, 모든 인정을 물리치고 순빈 봉씨를 폐출하기로 결정을 내렸으니 세자는 그리 알라!"
세자는 손을 모아 아바마마의 말씀을 조심해서 들었다. 등에는 땀이 흘렀다. 말씀이 끝난 후에 세자는 눈물을 머금고 전하 앞에 꿇어 엎드려 죄를 청했다.
"소자, 제실을 잘못하와 아름답지 못한 일이 두 번씩이나 있게 했사오니 불효의 죄 크옵니다. 순빈을 폐출하시는 동시에 소자의 세자의 지위도 폐해주시옵소서."
세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실을 잘못한 죄를 복죄하고 세자의 자리를 내놓겠다고 아뢰었다. 이때 벌써 궁중에는 유언비어가 잔잔히 흘렀다. 세자가 두 번씩이나 정빈을 어거하지 못하여 폐빈을 시키게 되니 체면상 세자는 동궁의 자리에 있을 수 없을 것이요, 둘째인 수양대군이 세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방정맞은 궁녀들의 입부리로 철없이 조잘댄 일이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전하는 지난번 대신들을 불러 폐빈하는 일을 의논했을 때 둘째인 수양대군을 제외시키고, 셋째인 양평대군과 넷째인 임영대군을 비밀하게 황정승과 노정승이며 신찬성에게 보내서 왕실의 일을 의논했던 것이다. 세자의 자리를 내놓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청하는 세자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세종전하와 소헌왕후는 악연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무슨 당치 아니한 소리냐? 불효의 죄를 더 저지르려 하느냐!"
전하는 옥음을 높여 세자를 꾸짖었다. 옆에 모시어 있던 소헌왕후가 사죄를 청하는 세자의 팔을 친히 붙들어 일으켰다.
"쓸데없는 말씀을 아뢰어 아바마마의 성심을 어지럽게 하지 말고 어서 물러나 동궁으로 돌아가 서연에 임하라!"
세자는 다시 아뢸 길이 없었다. 눈물을 거두고 양궁께 배를 올린 후에 묵묵히 동궁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자책하는 마음이 여러 각도로 일어났다. 그러나 시루는 이미 깨지고 말았다. 동궁빈 봉씨를 폐하기로 결심한 세종전하는 사정전에 임어하여 좌우 시자를 물리치고 도승지 신인손, 동부승지 권채를 불렀다. 두 신하가 배알을 마치니 전하는 어수를 들어,
"이리들 가까이 오너라."
탑전으로 불렀다. 두 신하는 몸을 굽혀 탑전 지척에 부복해 꿇어앉았다. 세종대왕은 말씀을 내린다.
"필자는 실록을 한 글자의 더하고 덜함 없이 그대로 옮기고, 다시 한글로 풀이하려 한다. 이사이 해를 거듭해서 일이 화하게 되지 아니하여 마음이 실로 무료했다. 요사이 또 한 가지 괴이한 일이 있으니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나의 조상 이래로 가법이 바로잡혔고 내 대게 미쳐서도 또한 중궁의 도움을 많이 힘입었다. 중궁은 성정이 극히 부드럽고 아름다워서 투기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태종께서는 매양 '시전'의 문자를 옮겨서, '큰 나무의 늘어진 가지가 아래에 있는 가지까지 덕이 미쳤다.'는 말씀을 하시어 칭찬하신 일까지 있었다. 이러므로 집안 가도가 화목해서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정미년에 세자의 나이 14세가 되니 신하들이 후사를 잇는 일이 가장 중대하니 속히 배필을 정하라 하므로 세족인 김씨의 딸을 간택해서 세자빈을 삼았었다. 그러나 김씨는 어리석고 우둔해서 마침내 기유년의 폐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에 다시 봉씨를 뽑았더니 세자는 친영을 한 후에 뜻밖에 금실이 좋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나는 중궁과 함께 항상 세자를 타일렀다. 화합하게 지내라 했다. 약간 가깝게 대하는 듯하더니, 역시 매일반이었다. 그러나 침실의 일까지야 부모가 어찌 일일이 자식에게 말할 수 있는가? 생각컨대 세자는 임금의 후계자다. 체계를 잇는 길은 아들을 두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동궁 내외가 이같이 화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세자의 나이 아직 연소한데 처첩을 많이 둔다는 것도 건강상 좋지 아니하므로 근심하고 망설인 지 오래였다. 이 일을 허조에게 물었더니, 허조는 작은 일이 아니라 큰일이니, 작은 일에 구애하지 말고 큰 것을 위해서 덕망이 있는 집안에서 후궁감을 널리 구해서 세자의 후계를 도모하는 일이 옳다 했다. 그리하여 나는 중전과 의논하고 세 사람의 승휘를 동궁에 두게 했던 것이다."
도승지 신인손과 동부승지 권채는 왕실의 불행한 일을, 믿는 신하에게 감추지 아니하고 말씀하시는 전하의 인격에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품었다. 경건히 귀를 기울여 듣는다. 전하는 말씀을 계속한다.
"봉씨의 성품은 지나치게 투기하는 편이었다. 당초에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오랫동안 원망코 분해하다가, 권승휘가 마침 아기를 배니, 봉씨는 더욱 한탄하고 분개했다. 항상 궁녀들에게 말하기를, 권승휘가 아들을 낳게 되면, 우리들은 당연히 쫓겨나게 된다 하고, 때로는 울고 불고 하는 소리가 궁중에까지 들렸다. 나는 중궁과 함께 봉씨를 불러서 타일렀다. 네가 매우 우매하다. 너는 당당한 세자빈이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다행히 승휘가 아들을 낳게 된다면 정궁인 너의 아들이 될 것 아니냐? 정리상 기뻐할 것인데 도리어 원심을 품는 일은 괴상한 일이다.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서 안온케 하라." 이같이 타이르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봉씨는 조금도 뉘우치는 빛이 없었다. 전에 세자의 젖어미가 있었다. 항상 궁 안의 모든 일을 보살펴주었던 것이다. 젖어미가 늙어서 죽어버리니 중궁은 다시 늙은 비자를 골라 대신 보냈다. 비자는 순직하고 말이 없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중궁께 말하기를, 빈이 몰래 세자의 의복과 신이며 띠 등속을 친정아버지께 보냈고 또 속옷과 한삼이며 치마 등속을 여자의 옷으로 고쳐 지어서 친정어머니에게 보냈다 한다. 나는 어버이를 위해서 한 일이므로 허물하지 아니했다. 다만 더러운 헌옷으로 부모의 의복을 만들어드리는 일은 불가한 일이라고 책망했을 뿐이다. 나는 항상 세자에게 말하기를, 여러 승휘가 있다 하나, 어찌 정실의 몸에서 아들을 낳는 것만큼 귀하겠느냐 했다. 세자는 그 후에 차츰 우대해서 내실로 드나든 일이 있었다. 그 후에 봉씨는 태기가 있다 말하니, 온 궁중은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놀라는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 중전으로 옮겨서 조영하게 공궤하면서 달포 동안을 지내게 했다."
전하는 여기까지 말씀하자 잠깐 한숨을 지었다. 대왕은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하루는 봉씨가 낙태를 해서 물형을 가진 딴딴한 물건이 나왔는데 아직까지도 이불 속에 있다 했다. 늙은 궁녀를 보내서 살펴보니 이불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했다. 아기를 뱄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또 지난해 세자가 종학에 옮겨 있을 때 봉씨는 시녀들의 변소로 가서 틈으로 외부 사람을 엿보았고, 항상 궁비들에게 남자를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또 손수 내시들의 호슬과 주머니며 향대를 만들기를 좋아했다. 이로 인해서 세자의 생신 때 전례로 진상하는 물건을 틈이 없어서 만들지 못했고, 가만히 지난해 생신 때 바쳤던 옛 물건을 꺼내서 새로 지은 것이라고 속여서 바쳤다. 뿐만 아니라 궁중에 썼던 물자와 찬수 등 남은 물건들을 친정집으로 보내겠다고 청했다. 세자는 내가 먹고 난 나머지 음식을 어찌 부모들에게 보낼까 보냐 하고 금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내시들에게 세자께는 품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사사로이 보냈다. 또 그의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당고모부 송기에게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서 노제를 드리게 한 후에 송기가 제사지낸 친족들의 성명을 써서 바치고 봉씨에게 사사로이 보이니 봉씨는 호슬 한 벌씩을 친족들에게 주어 사례한 일이 있다. 이런 일들은 모두 다 세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행한 일이다. 이같은 부덕한 일이 파다하지만 나는 다 여자들이 대체를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 해서 덮어두었다. 요사이 들으니 봉씨는 궁비 소쌍이란 아이를 사랑해서 항상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궁녀들이 서로 말하기를, 빈마마와 소쌍은 항상 한곳에서 동침을 한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졌다. 하루는 소쌍이 궁 안을 청소하는데 세자가 '너와 빈이 동침을 한다니 정말이냐?' 물으니, 소쌍은 깜짝 놀라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후에 봉씨는 소쌍을 지나치도록 사랑해서 소쌍이 잠시라도 보이지 아니 하면, 나는 너를 끔찍하게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소중하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분해하며 꾸짖었다. 소쌍 또한 다른 사람한테 말하기를, 빈마마가 나를 사랑하는 정도는 보통 애정이 아니다, 다른 점이 매우 많다, 그래서 황공하다고 했다 한다."
대왕은 두 승지에게 말씀을 계속한다.
"소쌍은 또 권승휘의 사비 '단지'와 서로 좋아해서 혹시 동침까지 하니, 봉씨는 사비 '석가이'로 항상 '소쌍'의 뒤를 따르게 해서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했다. 전에 봉씨는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시비를 시켜서 금침을 거두게 하더니 '소쌍'과 동침을 한 후엔 시비를 시켜 이불을 개키게 하지 아니하고 봉씨 자신이 손수 개켰다. 그리고 더러운 금침은 가만히 그의 비자를 시켜서 빨게 했다. 이 일이 궁중에 파다하게 퍼지므로 나는 중궁과 함께 '소쌍'을 불러서 진상을 물었다.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달 밤에 빈께서 저를 안으로 들어오라 부르시므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다른 시비들은 문밖에 있었습니다. 빈은 함께 자자고 하시므로 사양했더니 빈은 걍요했습니다. 하는 수 없어 반쯤 옷을 벗고 병풍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빈은 저의 옷을 강제로 다 벗겼습니다. 억지로 자리에 눕게 하고 마치 남자가 교합하는 모양으로 서로 희롱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항상 들으니, 시녀와 종비들이 서로 좋아하여 동침한다 하므로, 이를 심히 미워하여 궁중에 금하는 영을 엄하게 세워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사찰하는 상궁이 아뢰어 곤장 칠십 대를 때리게 하고 그래도 고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곤장 1백 대를 더 때리게 했다. 그리 한 후에 그 풍습이 조금 그쳐지게 되었다. 내가 이러한 풍습을 미워하는 것은, 아마 하늘이 내 마음을 이끌어 이 풍습을 없이하려 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 세자빈이 또한 이러한 풍습을 본받아 이와 같이 탕일할 수 있겠는가? 이에 빈을 불러 이 사실을 물으니 대답해 말하기를, 소쌍이 항상 단지와 사랑하고 좋아해서 밤에 함께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껴안고 혀를 핥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그 애들의 하는 짓이오며, 저는 처음부터 함께 잔 일이 없습니다. 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모든 증거가 명백하다. 어찌 끝까지 속일 수 있는가. 그리고 소쌍과 단지가 목을 껴안고 혀를 핥은 일을 빈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항상 그 꼴을 보고 부러워했다면 그 행세를 반드시 본받았을 것이다. 더욱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하는 말씀을 계속한다.
"그 나머지 시비를 시켜서 노래를 부르게 한 일이며, 벽 틈을 엿본 일들은 모두 다 자복했다. 그러나 나머지 일은 다 경한 일이다. 만일 소쌍과의 일이 아니었다면 덮어두어도 좋겠으나 소쌍과의 일을 안 연후에 내 뜻은 단연코 폐빈을 하기로 결심했다. 대저 맏며느리의 직책은 막중한 것이다. 이러한 실덕한 일이 있으면서 어찌 조상의 제사를 이어 받들며, 일국의 어머니로서의 의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폐하고 세우는 일은 역대의 소중하게 여기는 바이다. 한의 광무제와 당의 현종이다 그 아내를 내쳐서 뒷세상의 논의를 면치 못했는데, 황차 이제 두 번씩이나 폐세자빈을 한다면 나라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할 것이다. 나는 이를 심히 염려해서 어찌 처리할 바를 몰랐다. 어제, 안평과 임영 두 대군을 보내서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노한, 찬성 신개를 불러서 의논하니, 모두 다 당연히 폐해야 한다고 했다. 나도 또한 반복하여 생각해 보았다. 공자와 자사도 그 아내를 내쳤고, 옛사람도 어버이 앞에서 개를 꾸짖었다. 해서 내친 일도 있었다. 진실로 소중한 사유가 그곳에 있는 때문이다. 대의로 끊어서 부득불 폐출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경들도 앞뒤 일을 자세히 알고 교치초를 작성해서 올리게 하라. 옛적에 김씨를 내칠 때는 내가 나이 젊고 기운이 날카로워서 중대한 폐립하는 일을 애매하게 할 수 없어서 그 사실을 자세하게 교서에 밝혔다. 지금은 그리 할 필요가 없다. 봉씨가 궁비와 함께 같이 잔일은 극히 추잡한 일이니 교서에 싣는 일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성정이 투기하고 무자한 일이며 노래를 부른 일 등 너더댓 가지만 적게 하라. 세 대신과 함께 의논해서 교지를 지어서 올려라."
전하의 길고 긴 속상하는 말씀은 겨우 끝이 났다. 도승지 신인손과 동부승지 권채는 어전에서 물러나 빈청으로 나갔다. 영의정 황희, 우의정 노한, 찬성 신개 등 삼대신에게 함께 교지를 초하라는 말씀을 전달했다. 세 대신과 두 승지는 봉씨를 폐한다는 교서를 서로 초해서 어전에 바쳤다. 전하는 세 대신과 두 승지가 초해 올린 순빈 봉씨를 폐하는 교서를 받아 읽어본 후에 곧 입직 중추부사 김맹성으로 행향사를 삼아서, 종묘에 봉고하고 봉씨의 옥책과 인신을 거두어 서인을 삼아서 친정인 사제로 내보내고 조정과 국민들에게 교서를 반포했다. 세자는 한 나라의 근본이요, 배필은 삼강 중의 중한 것이니 인생의 길을 바로하는 시초다. 기유년에 봉씨를 명가의 후손이라 해서 세자빈으로 삼았더니, 그 후에 뜻밖에 규중의 범절을 잃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 한두 가지 일을 들어서 말한다면 성품이 투기가 심하고, 또 아들을 낳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항상 궁녀들을 시켜서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또 세자가 공부하기 위하여 종학에 옮겨 처했을 때는 시녀들의 변소에 들어가 벽 틈으로 외인들을 엿보았고, 또 손수 내시들의 주머니와 향대와 호슬을 만들기를 좋아해서, 이로 인하여 세자의 생신 때 전례에 의하여 진상하는 물건을 미리 만들 틈이 없어서 지난해 생신 때 만들어 올렸던 옛 물건을 가만히 가져다가 새로 만든 것처럼 속여서 바쳤다. 또 궁중에 공용하는 물건을 세자께 품하지 아니하고 명령도 없이 가만히 내시를 시켜서 친정집으로 보냈다. 이러한 일은 애매한 일이 아니라 내가 친히 물어서 자복을 받은 일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부부의 도는 나라의 풍습과 교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폐하고 다시 세우는 일은 역대의 소중하게 여기는 바다. 하물며 이제 세자빈의 일에 대해서는 두 번씩이나 폐를 하게 되니 더욱 보고 듣는이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맏며느리의 직책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이같이 덕을 잃은 사람을 어찌 세자의 배필로 하여 종묘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한 나라 어머니의 의표로 삼겠는가? 이에 부득이해서 모든 대신들에게 의논하고 종묘에 고하여 그 옥책과 인장을 거둔 후에 폐서인을 했으니, 너희들 정부는 나의 지극한 회포를 받들어 중외 국민에게 밝히 알리라."
조정의 일반 신하들과 모든 국민들은 전하의 교서를 읽고 비로소 동궁빈 봉씨가 투기와 규범을 잃어서 또다시 폐빈이 된 줄 알았다. 그러나 선비의 붓끝은 무섭다. 사관의 필치는 서릿발 같았다. 춘추필법대로 세종전하가 쓰지 말라고 승지에게 당부했던 봉씨와 소쌍 사이의 동성애의 사실을 직필해서 싣지 말라는 전하의 말씀까지 실록에 기록했다.
필자는 그때, 그 시대 사관들의 꼬장꼬장한 기풍을 존경하면서 '세종대왕' 창작에 있어서 궁중의 동성애로 희생된 불쌍한 봉씨의 사실한 토막을 잡아서 왕조시대 궁중 여성들의 성적 고민상을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