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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10-2

천만년 지켜라

 

전하의 비답을 받는 특사는 곧 육진으로 달렸다. 김종서는 체임을 허락하시는 하교를 받자,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도체찰사 하경복에게 자랑한 후에 곧 후계자를 천거하는 생소를 특사편에 올렸다.

'왕은이 망극하시와, 하경복과 소신의 면직을 허락하시고 수자리하는 군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하시니, 군사들이 하교를 듣는다면 얼마나들 기뻐하겠습니까? 곧 성지를 사병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하옵고 신의 후계자는 오랑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으로 도절제사를 삼으시고, 도체찰사는 원만한 재상 황보인으로 정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삼가 아뢰옵니다.'

특사는 전하께 올리는 김종서의 상소문을 한양으로 돌아가 전하께 바쳤다. 전하는 다시 승지를 불러서 김종서에게 보내는 유시를 쓰게 했다.

'들으니, 이징옥은 나이 비록 젊다 하나 경의 밑에서 십 년을 일하는 동안 많은 경험과 실력을 더욱 쌓았을 줄 안다. 경의 말을 받아들일 작정이다. 서울로 돌아올 때 함께 입조하라. 그리고 황보인은 나도 생각했던 바다. 무력으로 위풍을 오랑캐들에게 떨치는 이징옥과 인자한 행정으로 서민을 지도할 줄 아는 황보인으로 도절제사와 도체찰사를 임명한다면, 크게 변경을 이롭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서울로 돌아올 때, 이징옥을 대동해 오너라.'

김종서는 전하의 유시를 받자 도체찰사 하경복과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을 대동하고 한양으로 올라가 어전에 배알했다. 전하는 곧 승지에게 명하여 삼정승, 육조판서며 사헌부, 사간원 모든 신하들을 불러 입궐케 했다. 모든 신하들은 어전에 모여 제각기 무슨 말씀을 내리나 하고 일제히 부복하여 천안의 동정을 우러러 살피고 있었다. 전하는 백관을 돌아보시며 엄숙하게 말씀을 내린다.

"내가 처음 육진 개척을 단행했을 때, 경들은 거의 모두 다 육진 개척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제 육진은 김종서 이하 모든 장병들의 슬기와 지혜로 개척이 완성되었다. 과연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김종서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무리 육진을 개척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김종서가 또한 아무리 이 일을 완성하고 싶다 할지라도 내가 아니었던들 이 일은 완성치 못했을 것이다! 영상 이하 모든 각료들은 이제 고개를 숙여 생각해보라! 고려 이래 사오백 년 동안 오랑캐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던 나라 땅은 완전히 경계를 찾아 회복했다! 이 엄연한 국토는 다시 어느 누가 침범해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공치사를 받기 위하여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들은 나라의 부를 이룩하기 위하여, 또는 자손만대에 물려주는 유산으로 경들이 반대한 이 일을 단행한 것이다. 나는 반대했던 사람들의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경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육진을 천 년 만 년이 가도록 꿋꿋하게 지켜 나가도록 하라!"

전하의 엄숙한 말씀이 떨어지니 육진 개척을 반대했던 무리들은 얼굴빛이 누르락푸르락 변하면서 진땀이 등골로 흘렀다. 더구나 김종서는 막대한 국비를 소모하면서 오랑캐들과 결탁해서 딴마음을 먹고 있는 역적이니 잡아다가 목을 베어 죽이자던 대관이니 언관이니 하는, 글치레나 하는 잔졸한 무리들은 코를 땅에 박고 입이 뻣뻣해서 한마디 말을 못 하고 바람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전하는 다시 무능하고 못난 무사주의와 안일만 취하는 군신들을 둘러보시며 또 한 번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경들은 고려 때 윤관 장군이 바로 이 두만강밖에 구성을 쌓은 큰 공을 잊어버리고 도로 글안한테 땅을 내주었던 일을 가슴 깊이 명기해서 절대로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 된다. 고구려의 요동 옛터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압록강과 두만강 이내의 현재 우리 국경은 촌토라도 빼앗겨서는 아니 된다. 경들의 자손이나 내 자손은 자손만대까지 이 땅을 지켜야 한다. 그러한 기백이 없다면 이것은 모두 다 국가를 보필하는 경들이 나라를, 이 나라를 결딴내는 용렬한 무리들이다. 그대들은 국록을 공연히 먹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자손만대의 죄인이 되지 말라."

옥음을 가다듬어 군신들을 향하여 말씀하는 전하의 온몸에 열기가 드높게 올랐다. 군신들은 숙연히 고개를 숙이고 전하의 불을 토하는 듯한 열렬한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섰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세상에 난신적자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다. 임금을 시해해서, 정권을 뺏는 것만이 난신적자가 아니다. 그것은 성즉군왕이요 패즉역적이 되어서, 성공이 되면 인군이 되고 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지만, 제 나라 땅과 제 나라 강산을 못 지켜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인군과 신하는 진실로 국가와 겨레의 난신적자다. 알아듣겠느냐? 임금은 국민의 추앙을 받아서 통치하는 권한을 잡고 있다. 임금을 보필하는 신하들은 백성들의 노력으로 생산된 세를 받아서 일하는 대가로 국록을 먹고 산다. 백성을 위하여 잘살게 해달라고 백성들은 땀흘려 일한 곡식과 물건으로 세를 바쳐서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녹을 주는 것이다. 왜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도 나라에 세를 바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녹을 먹게 하는가?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고 앞으로도 세상을 편안케 해주고 가멸케 해서 잘살게 해달라고 세를 바치는 것이다. 벼슬하는 사람들이 받아먹는 국록은 임금인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임금인 내가 무슨 재물이 있겠는가? 장사를 하니 돈이 있겠는가? 농사를 지어 곡식이 있겠는가? 국민들의 세를 받아서 나라의 행정을 잘 보아 달라고 수고하는 대가로 국민을 대신해서 그대들에게 전달하는 것뿐이다. 정치를 하느라고 장사를 할 수 없으니 처자식을 먹여가면서 더욱 잘 일을 보아 달라고 권하는 것이요, 백성들을 위하여 나랏일을 전심으로 하게 되니 농사를 지을 틈이 또한 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경들에게 세를 보내서 녹을 먹게 하는 것이다. 경들이 백성들보다 인품이 잘나서 거저 먹고 호강을 하라고 녹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국록을 먹는 공경대부들 벼슬하는 사람들이 백성을 천대하고 백성을 멸시하면서 나라 땅 하나 똑똑히 지키지 못한다면 난신적자다. 남이 죽도록 노력해서 국방을 튼튼히 하고 불모지를 개척해서 옥토로 만든 이 마당에 조정에 편안히 앉아서 가장 나라를 위하는 체하고, 일하는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해서 국토 수천 리를 오랑캐의 소굴로 되게 하고, 강대한 나라의 정령토가 되게 한다는 것은 진실로 한심하고 딱한 일이다... 일찍이 이 크나큰 일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서 쓸데없는 탁상공론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거듭 말하거니와, 내가 공을 세우기 위하여 육진 개척을 한 것이 아니라 한 치만한 땅이라도 자손만대 백성들의 행복을 위하여 단행한 것이다!"

전하의 심경을 토로하시는,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광대무변한 말씀은 진실로 제왕의 철리와 벼슬하는 신하의 도리를 투철하게 판단해서 교시하시는 민본 사상을 가진 성주의 말씀이었다. 언언구구 서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성주의 말씀이었다.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들 국가 최고의 삼정승은 모두 다 일대의 명재상이요, 육진 개척을 찬성한 사람이지만 '일 아니하고 국록을 먹는 자는 난신적자다'라는 준엄한 말에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하는 다시 한 말씀을 더 내린다.

"다시 말하거나와, 나는 육진 개척하는 일을 반대했던 사람을 책망하지 아니한다. 또 중간에 일을 폐지하라고 간하던 사람도 더 꾸짖지 아니한다.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던 사람도 꾸짖지 아니한다. 역시 그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간한 것이다. 그러나 목전의 작은 이해관계만 생각하고 앞으로 나라의 크게 발전될 일을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다. 다 반대했던 일을 잊어버리기로 하자! 다만 내가 경들에게 부탁할 것은 과인이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서북면과 동북면,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은 굳게 지켜서 우리 겨레 자손만대에 훌륭한 터전이 되게 하라. 또다시 부탁한다. 바다 밖의 대마도도 소홀히 생각하지 말라. 한 치의 땅이라도 남의 족속에게 빼앗겨서는 아니 된다!"

전하의 말씀은 엄숙하면서도 부드럽고, 화기 가득한 속에 강철보다도 단단한 결심이 있었다. 영의정 황희가 군신을 대표하여 아뢴다.

"전하의 철석같이 굳으신 결의는 장차 이 나라 백성들에게 크나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신의 무리 미욱하오나 성주를 모시어 서민들을 편안케 하옵고 성스럽게 이룩하신 육진을 굳게 지켜서 자손만대에 전하겠습니다."

전하는 황정승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용안에 만족한 빛을 띠셨다. 다시 한 말씀을 내린다.

"임금이란 자는 백성들의 추앙을 받아서 질서 있게 국가를 통솔하면서 나라를 발전시키고, 백성들을 아들같이 생각하고 사랑해서 그들의 생활을 자꾸자꾸 향상시켜주어야 할 책임자다. 백성의 세금으로 호화로운 궁궐을 짓고 삼천 궁녀를 거느려서 주지육림 속에 빠져서 갖은 행락을 다하는 것이 임금의 일이 아니다! 공경대부도 그렇다. 열두 줄행랑이 늘어서 있는 솟을내문 안에 남종 여종을 수십 명씩 거느려 놓고, 남녀, 초헌을 타고 벽제 소리를 드높게 질러 백성들을 구박하고 호통치는 것만이 관리들의 일이 아니다. 옛글에 백성들을 적자라 했다. 빨가숭이 어린애를 기르듯 보호해주고 사랑해주고 교육시켜주라는 뜻이다. 모든 백관들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백성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여 지성껏 일을 해줘라. 이것이 임금의 책무요, 벼슬하는 사람들의 임무다. 한 가지 일을 해도 이 나라 백성을 위하여 일을 해야 하고, 두 가지 일을 해도 이 국가에 생활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해야 한다. 만약 이 자리에 모인 한 사람이라도 백성을 위해서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호강을 하기 위해서 벼슬길에 나온 사람이 있다면 당장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라!"

전하의 옥음은 또렷하고 엄숙했다. 세종전하가 이같이 영의정 이하 군신들을 편전 안에 불러놓고 치국의 대도를 순순하게 긴 시간 말씀하시는 일은 즉위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육진 개척을 완성하신 후에 국가의 질서와 포부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전하는 용안을 부드럽게 해서 다시 말씀을 내린다.

"경들은 소년시절부터 글을 많이 읽고 배웠다. 글을 잘 배워서 과거에 뽑히기를 원했다. 과거에 뽑혀서 나라의 동량의 재목이 되기를 원했다. 동량이란 무엇인가? 크나큰 집의 대들보와 기둥이다. 서까래나 도리나 화방이나 창틀 조각이 되지 아니하고 대들보와 기둥이 되기를 원한 것은, 국가라는 크나큰 집을 흔들리지 않도록 버티고 유지하자는 큰 목적을 갖는 때문이다. 국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백만, 천만의 백성들이 모이고 모여서 나라, 곧 국가라는 큰 집에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들보와 기둥은 이 수많은 백성들을 받들어주고 살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복되게 해주는 소임을 맡은, 크고 중대한 책임을 맡은 재목이다. 경들은 넓게 배우고 많이 읽어서 나라에 벼슬을 해서 이 백성들을 복되게 할 생각으로 과거에 뽑혀서 벼슬을 했다. 그러나 한 번 버슬 자리를 얻은 후에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화려한 금관조복을 입고 옥퍄를 술띠에 늘이며 의젓하게 갈짓자 걸음으로 날마다 조당에 모여들어 곤두가래침을 뱉고 탁상공론만 하고 앉았다. 이것이 소위 동량의 재목들인가?"

전하는 초롱초롱한 안광으로 만좌를 둘러본다. 모두들 벌벌 떨며 코를 땅에 박고 엎드렸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나는 글 잘하는 신하들을 뽑아서 집현전을 설치했다. 모두 다 훌륭한 준재들이다. 글들을 잘 짓는다. 풍월도 잘 짓고 경학 해설도 잘한다. 한 곳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말이다. 글만 유려창달하게 지어서 무슨 국가의 동량이 되겠는가. 상량문을 잘 지어가지고 들보 속에 넣었다 한들 그 들보가 국가의 위급한 일과 백성들을 위하여 글을 지어야 한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문명의 길로 끌고 나가게 하는 글을 지어야 한다! 백성들이 잘살도록 농사짓는 법을 글로 밝혀야 한다. 백성들의 아프고 괴로워하는 병을 다스리게 하는 책도 저술해야 한다. 이것이 경들이 동량의 재목이 되어서 출장입상하는 길이다. 말로만, 또는 글자치레로 동량의 재목이 되었다고 뽐내지 말라! 실지로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동량의 재목들이 되어야 한다!"

전하의 물 흐르듯 군왕의 포부와 신하들의 책무를 말씀하는 훈훈한 훈시는 원로대신 이하 젊은 문신들의 폐부를 꼭꼭 찔렀다. 모두 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아 주옥같은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 원래 소년 시절부터 모든 경학과 제자백가의 저술이며 천문지리, 예약, 병서에 이르도록 달통한 세종이었다. 소위 경륜과 학문이 섬부하다는 노사숙유의 경연관들도 꼼짝을 못 하고 전하의 정치철학을 경청하고 있었다. 전하는 육진 개척에 대한 유시를 마치시자 도승지를 앞에 불러놓고 삼정승한테 하문한다.

"오늘 백관들은 육진 개척을 단행한 나의 심경을 이제 다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육진을 설치해놓고 계속해서 다스리지 못한다면 또다시 황무한 땅이 되어버린다. 이곳을 잘 육성하고 보존하자면 오랑캐들을 굴복시킬 만한 훌륭한 장수와 덕과 교화로 백성을 무마할 어진 재상이 필요하다. 과인의 욕심대로 한다면 하경복과 김종서에게 더 일을 보아달라고 하겠으나 십년 가까운 세월에 또다시 일을 보아 달라기 너무나 염치가 없다. 노재상 황보인으로 함길도 감사에 도체찰사를 명하고, 현임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으로 도절제사를 삼으려 한다. 경들의 의향이 어떠한가?"

황보인은 영천 사람으로 지중추원사 황보임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에 문과친시에 급제하여 군기에 밝은 중진이요, 이징옥은 청년 절제사로 일찍이 김종서를 도와서 호담무쌍한 용맹스런 행동으로 명성이 동북면과 서북면에 떨쳐서 야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크나큰 인물이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 영의정 황희가 군신을 대표하여 아뢴다.

"황보인은 군기에 밝고 경험이 많은 재상이옵고, 이징옥은 김종서와 함께 직접 육진을 개척한 사람이올시다. 비록 나이 연소하다 하오나 넉넉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할 것입니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전하는 단 한 사람의 벼슬자리를 임명할 때라도 반드시 대신들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하고 절대로 독단하는 일이 없었다. 세종은 점두하시며 말씀을 내린다.

"영상이 모든 신하를 대표하여 좋다고 말하니 이 자리에서 곧 두 사람에게 대임을 맡기리라."

말씀을 마치자 옆에 시립한 도승지에게 분부한다.

"정원에 나가 곧 두 사람의 교지를 써 올리라."

도승지는 급히 정원으로 나가 함길도 도체찰사와 도절제사의 교지를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친히 교지를 황보인에게 전하시며 부탁하시는 말씀을 내린다.

"경의 너그럽고 후한 덕망은 온 조정과 백성들이 다 아는 바다. 일기 고르지 못한 변지에 나이 많은 경을 보내는 내 마음, 미안하다. 그러나 국가와 국민의 천년대계를 생각해서 내 몸을 대신해서 도체찰사의 임무를 맡기는 것이니 사양치 말고 받아라."

노재상 황보인은 네 번 절하고 교지를 받들며 아뢴다.

"이미 김종서와 하경복이 개척해논 곳이올시다. 소신이 어찌 감히 전하의 뜻을 받들지 아니하오리까. 정성을 다하여 뒷일을 처리하오리다."

전하는 다시 이징옥에게 도절제사의 교지를 내리시며 분부하신다.

"네가 아니면 또다시 준동하는 오랑캐들을 막을 사람이 없다. 잘 지키도록 하라!"

이징옥은 감격한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네 번 절하고 교지를 받들었다. 전하는 황보인과 이징옥에게 육진을 관리하는 큰 임무를 맡기신 후에 다시 영의정 황희 이하 군신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임금된 사람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하지면 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야 하고 못 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임금 자신에게 개인으로 상과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대표해서 상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해 방자한 행동으로 서해안 일대를 침범했던 대마도를 응징해서 항복을 받았을 때 도절제사 이종무에게 좌찬성에 보국의 영예를 주었고, 지난번 서북면에 사군을 설치하고 멀리 파저강 건너 이만주의 소굴을 응징한 공로로 최윤덕에게 중의를 물어 우의정의 대배를 받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논공행상이다. 그러나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군왕이라는 내 개인이 결코 사사로이 주는 상이 아니다. 국가의 큰일을 잘해주었다고 국민들이 주는 상이요, 잘못했으면 벌을 주는 것이다. 일전에 김종서가 자모상을 당해서 소울로 분상한 동안 주색에 침혹해서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아내지 못한 송희미는 이미 죽음을 내렸거니와, 십 년 동안 긴 세월에 육진을 개척한 몇몇 사람에게는 논공행상을 해서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군신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육진을 개척해서 고려조 이래에 잃어버렸던 땅을 찾고, 황폐했던 오랑캐의 소굴에 이민을 해서 옥야천리로 만든 일은 대마도를 정벌한 일에 비할 바가 아니옵니다. 외람되온 말씀이오나 도체찰사 하경복에게는 사궤장을 하기고, 김종서에게는 대마도를 평정했던 이종무의 전례에 따라 좌찬성을 제수하시고, 종사관 신숙주는 집현전 부제학을 시키시고, 종사관 박호문은 사군 설치와 육진 개척에 다 공이 큰 사람이올시다. 호조판서로 발탁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전하는 조의정 맹사성의 아뢰는 말씀을 들으시자 마음이 심히 흡족하셨다. 미소를 지어 고개를 끄덕이신다. 이때, 침묵을 지키고 대답이 없던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좌의정 맹사성의 논공행상을 해서 처분을 묻자와 아뢰는 말이 다 사리에 적합합니다. 그러하오나 소신은 소희 있사와 감히 이론을 주달합니다. 굽어살피시기 바라옵니다."

인망 높은 영의정 황희의 말이었다. 전하는 미소를 던지시며 하문한다.

"무슨 이론이 있는가?"

"김종서는 본시 소신이 천거한 사람이올시다. 지위가 높게 될수록 소신의 마음도 좋습니다. 하오나 좌찬성의 자리는 너무나 과합니다. 곧 정승으로 올라갈 자리올시다. 아직 연부역강해서 한창 일할 때올시다. 국가에 대하여 공을 이룬 일은 당연합니다. 벌써 재상의 지위를 준다면 교만 방자한 생각이 듭니다. 김종서에게 좌찬성의 자리를 주는 일을 반대합니다."

황희 황정승이 김종서에게 좌찬성을 주는 것을 반대하는 말씀을 아뢰자,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 이하 모든 신하들의 얼굴빛은 깜짝 놀라 당황하는 빛을 띠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들 마음속으로,

'웬일인가?'

'변괴로다!'

'자기가 소시 때부터 천거한 사람을 저같이 박대할 수가 있는가?'

'황정승도 나이 먹더니 망령이 났구나!'

하고들 생각했다.

면면이 전하의 용안과 김종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나 얼굴빛이 변하지 아니한 사람은 오직 세종전하와 말씀을 아뢴 황정승과 폄을 당한 당사자 김종서뿐이었다. 김종서는 태연히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전하의 측근에서 시립해 있다. 세종전하는 잠시 눈을 감아, 무엇을 생각하셨는가 이내 눈을 뜨시고 용안에 미소를 지으시며, 황정승을 향하여 말씀한다.

"김종서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일은 어떠하다 생각하는가?"

"김종서만 빼놓고 맹정승이 아뢴 대로 다 좋다고 소신도 생각합니다."

황희 황정승의 말씀은 장중했다. 천 근의 무게가 있는 듯했다. 일국의 대임을 한 몸에 도맡은 영의정다운 진중한 태도다. 김종서는 부드러운 화한 얼굴빛으로 어전에 여전히 시립해 있다. 전하는 다시 미소를 지어 황정승에게 물어보신다.

"논공행상은 기필코 해야 한다. 그렇다면 김종서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좋겠는가?"

전하의 옥음은 화기가 가득했다. 제왕의 자리에 앉았다고 항명하는 대신의 말에 대하여 털끝만큼도 불쾌한 생각을 갖지 아니했다. 용안에는 그대로 봄바람이 훈훈하게 일었다. 믿는 때문이다. 신하를 믿는 때문이다. 대신을 존경하는 때문이다.

"김종서에게는 아직 재상 자리가 이릅니다. 정경 자리인 병조판서쯤 맡기시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 되지 않게 재상이라고 뽐내는 한가한 벼슬 좌찬성보다도 국가의 국방을 맡는 병조판서의 직책을 맡기시옵소서. 젊은 사람은 뼛골이 빠지도록 국가를 위하여 일을 해야만 합니다. 공연히 재상이 되었다고 교만 방자한 마음을 먹으면 아니 됩니다. 황공하오나 다시 전하께 아뢰옵니다. 옥은 갈수록 빛이 납니다. 지금 반둥전둥, 사람이 될둥 말둥한 김종서 따위를 재상의 자리에 앉히신다면 김종서도 반둥전둥의 인물이 되어버리고 국가에도 큰 손실이라 생각하옵니다. 명철하오신 처분을 내리시기 바라옵니다."

모든 사람들은 혀를 둘렀다. 비로소 황정승이 진심으로 김종서의 앞길을 위해주고, 공으로는 국가를 위하여 참다운 동량의 재목을 완성시키게 하려는 영의정다운 재상의 태도로 전하께 아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세종전하는 황희 황정승의 재상다운 장중한 말씀을 듣자 용안에 가득 기쁜 빛을 띠시고 말씀한다.

"영의정의 말은 과연 나라를 위하고 후배를 아끼는 지성스런 말이다. 내 어찌 영상의 말을 아니 들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김종서에게 병조판서의 임무를 맡기리라."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처음에 소신은 김종서의 큰 공적을 감안하와 좌찬성으로 승직시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제 영상의 말씀을 들으니 진실로 후배를 아끼는 지극한 마음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아뢰었던 좌찬성 추천을 유보하겠습니다."

우의정 최윤덕이 아뢴다.

"김종서는 지위의 낮고 높은 것을 가려서 불만을 품을 사람이 아니올시다. 일편단심 나라만을 생각하는 호담무쌍한 인물이올시다. 김종서는 비록 문과 출신이라 하나 문무 겸전하여 지략이 대단한 사람이올시다. 더구나 병조는 전략과 지리에 밝고 통솔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능히 전하를 보필할 수 있는 자리올시다. 김종서는 병조를 통솔할 적임자올시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승지한테 분부한다.

"함길도 도체찰사와 도절제사의 교지는 황보인과 이징옥에게 이미 넘겨주었거니와, 김종서 이하 신숙주, 박호문의 교지를 빨리 작성해서 올려라."

승지는 정원으로 달려가 주서들을 동원시켜 김종서 이하 종사관 신숙주, 박호문 등의 교지를 써서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먼저 김종서에게 병조판서의 교지를 내리시며 다시 분부를 주신다.

"병조판서의 책임은 육진을 개척한 힘보다도 더한층 크다. 군적을 엄밀하게 정리해서 백 년, 오십 년 전에 죽은 군인들의 이름을 제거시키고, 새로 군사들을 모집해서 명단을 똑똑히 삽입시키게 하라. 그리고 바다를 막는 해방 또한 엉망진창이다. 범연히 처리해서는 아니 된다. 백 년, 이백 년 전에 조성했던 배다. 대부분 썩어서 물이 새고 곰팡이가 났다. 각별히 주의해서 해방을 일신케 하라!"

모든 신하들은 국방의 선박에 대해서도 전하께서 주도하고 면밀하게 손살피같이 알고 계신 데 대해서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마음속으로 '명철하신 성주를 모시었구나'하고 새삼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김종서는 일어나 사배하고 교지를 받들었다. 김종서는 전하께 교지를 받은 후에 영의정 황희한테 나아가 두 번 절하고 감격한 눈물을 흘렸다.

"성상전하를 모신 앞에 다시 아끼시는 은혜는 폐부 속에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한편 전하는 계속해서 종사관 신숙주에게 집현전 부제학의 교지를, 박호문에게는 호조판서의 교지를 내렸다. 모두 다 일대의 영광이었다. 화기애애한 속에 육진 개척 논공행상의 큰일은 끝이 났다. 육진을 개척한 이 위대한 사업은 세종 일대의 큰 사업만이 아니다. 조선 왕조 역대 5백여 년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제국 광무, 융희에 이르기까지 두만강과 압록강, 함경도와 평안도 수천 리 땅은 천부금탕을 이루었다. 자자손손, 세종성주의 용단성 있는 명철한 계획으로 만백성의 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세종 자신이 하신 말씀 그대로 이 육진 개척의 큰 사업은 김종서가 아니었다면 이룩될 수 없었고, 김종서가 아무리 우겨대서 개척을 하자고 주장했다 해도 세종의 용단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이룩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세종의 성스런 정치 사업이 하도 엄청나도록 많지만, 삼천리강산의 나라 땅을 든든하게 정계해논 이 사업은 오백여 년동안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자리 잡고 사는 만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했고 가멸케 해서 국가의 위신을 크게 떨쳐서 경제와 문화를 향상시키고 민생의 생활을 번영케 했던 것이다. 오늘날 다시 세종의 사업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왕조 오백 년 동안에 세종 같은 제왕은 한 사람도 없었다. 김종서가 상소한 그대로 한 대의 화살과 한 자루의 칼을 쓰지 아니하고 삭풍설한에 수자리하는 군사들과 이민 온 백성들이 성을 쌓고 땅을 개간해서 무한한 고생들을 했으나, 가장 평화로운 속에서 한 진 두 진씩 여섯 진을 이룩한 것은 실로 세종대왕의 넓고 큰 덕화로 쌓여진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로 세종대왕은 불세출의 성주요, 온 겨레의 지도자다. 왕조 오백 년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어리석은 황제와 난신적자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실국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뜨려서 삼십육 년의 세월을 외인의 식민지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세종전하가 정해 논 삼천리강산은 의연히 강산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들 외인들의 이권을 찾아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금광이 터져 나오고 철광이 쏟아졌다. 무진장의 석탄의 보고가 열렸다. 무진장의 수력 전기가 불야성을 이룩했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하늘 운수가 다시 돌아서 세종전하의 정계해논 삼천리 성지에 다시 복지와 광명이 있을 줄 알았더니, 뜻밖에 또다시 슬픈 일이 벌어졌다. 우리 겨레 5천만은 다 함께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삼천리강산은 반 동강으로 허리가 잘려졌다. 겨레는 쪼개어지고 부모처자와 형제자매는 흩어져서 형상 없는 38선은 한탄의 고개와 절망의 고개를 이루면서 광복 3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스러운 일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룩된 외세의 흑책질이다! 우리는 오백여 년 전에 명철한 지도자 세종대왕이 개척했던 육진과 사군을 다시 찾아내야 할 것이다. 한 겨레가 다시 모여서 평화로운 낙토를 이룩해야 하겠다. 지하에 계신 세종대왕의 영혼이 있다면 상을 치고 발을 굴러 호통을 하실 것이다. 김종서와 이징옥이 지금 세태를 당했다면 범 때려잡던 솜씨로 오랑캐된 자들을 무찔렀을 것이다.

세종전하는 육진 개척의 논공행상을 마친 후에 다음 날, 도승지를 통해서 영의정 황희와 예조판서에게 입시를 명했다. 두 신하는 급한 부름을 받고 시각을 지체치 않고 예궐하여 어전에 알현했다. 전하는 만면에 희색을 띠고 영상과 예판에게 말씀을 내린다.

"지난해 대마도를 정벌해서 왜추의 소굴을 응징하여 쾌한 승리를 얻어 국위를 선양한 후에 곧 종묘에 봉고제를 올리고 사직에도 개선제를 지낸 일이 있다. 이번에 사군을 설치하여 서북면 평안도 일대에 노략질하는 건주위를 소탕하고, 동북면 함길도 일대 천여 리 땅에 육진을 개척해서 선조의 발상지지를 수호했을 뿐 아니라, 남도에서 이민을 옮겨서 불보의 땅을 옥야로 이룩한 일은 대마도를 소탕한 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과인의 생각에는 종묘에 크게 봉고제를 올리고 사직에도 모든 신위에 대하여 국가의 큰 경사를 고유할 생각이다. 경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황정승이 아뢴다.

"어제 논공행상이 끝난 후에 신의 소견에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고려 이후에 버렸던 땅 수천리를 금성철벽과 옥야천리로 화하게 한 일은 일찍이 역대왕조에 없었던 일이올시다. 종묘에 봉고하여 선대왕 신위에 고하는 일도 당연한 일이올시다마는, 크게 사직대제를 지내서 만백성과 함께 이 기쁨을 알리게 하는 일은 민심과 사기를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될까 합니다. 그러하옵고 또 한 가지 영의정의 자격으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 일은 역대에 일찍이 없었던 국가의 크나큰 경사올시다. 팔도 감사와 한성판윤이며, 형조판서와 의금부 당상들에게 영을 내리시어 옥문을 크게 열어, 모든 죄수들을 석방해주시는 대사령을 내리시어 국가의 큰 경사를 함께 즐기도록 하시는 일이 좋을 듯하와 감히 아뢰옵니다."

천하의 죄수들을 석방하여 나라의 큰 경사를 백성들과 함께 즐기겠다는 황정승의 의견을 들으시자, 전하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용안이 활짝 화사하게 열려지며 쾌하게 말씀을 내린다.

"대사령을 내리겠다는 생각은 과인도 미처 생각을 못 했던 바요. 이제 영상의 말을 들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대재상의 뜻을 비로소 알겠소. 그렇다면 모든 관계되는 장관들에게 곧 입시를 명하오."

전하의 기쁨은 전신에 넘쳐 흘렀다. 영의정 황희는 곧 어전에서 승지에게 소관 장관들의 입시를 분별했다. 정원에서는 어명이므로 대전 별감들을 동원시켜서 관계 분야의 장관들을 급히 입시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대전 별감들의 홍의 자락은 각부 장관의 처소로 펼럭이며 기세를 올렸다.

 

종묘와 사직대제

 

먼저 좌, 우의정이 들어오고 형조판서가 예궐했다. 금부 당상 판의금이 입궐했다. 전하는 군신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지금, 영의정과 예조판서와 의논했다. 육진을 개척한 일은 나라의 큰 경사다. 먼저 내가 친히 종묘와 사직에 봉고제를 올려 국가의 큰 경사를 열성조에 아뢰고, 만백성과 함께 사직단에 대제를 지내야 하겠다. 나 자신뿐 아니라 백대의 후손들이 한 치의 땅도 남에게 뺏겨서는 아니 된다는 굳센 정신과 강한 의지를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예조판서는 내 뜻을 받아서 종묘 친제의 사직대제를 곧 택일하여 거행케 하라. 다음에 형조판서와 판의금에게 당부한다. 고려 예종 이후 반 천년 만에 국토통일을 이룩한 큰 경사다. 소위 군왕이란 자가 아들 하나 낳아도 경사가 났다고 죄수들을 풀어주는데, 황차 이제는 우리가 뚜렷하게 삼천리강산을 지니게 되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형조판서와 판의금은 대사령을 놓아 극악죄인이라도 개전의 희망이 있는 자는 모두 다 석방을 시켜서 청천백일 아래 새로운 국민이 되게 하라. 국가를 다스리는 치민하는 정치는, 엄할 때는 가을 서리와 같이 싸늘해야 하고 화하게 할 때는 봄바람이 불 듯 훈훈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대답한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부복해 대답했다.

"특별히 대제를 성대하게 거행하게 하라."

평소에 궁중에서 검소하고 절제 있는 근검한 풍속을 실천하던 전하가, 이번에 한해서는 특별히 성대하게 거행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전하는 또 승지에게 분부한다.

"내가 종묘대제를 봉행할 때는 백관을 대동하고 지내려니와, 사직대제를 지낼 때는 만백성이 다 함께 의식에 참여하여 정신적으로 통일된 이 나라 땅을 더욱더 굳게 지켜야 하겠다는 확고한 뜻을 갖도록 해야 하겠다. 금잡인을 하지 말고 크게 사직 대문을 열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승지를 위시하여 예조와 형조와 판의금들은 일제히 명을 받들었다. 형조판소와 판의금은 퇴궐한 후에 정원을 통하여 대사령을 내렸다. 오 년, 육 년 내지는 십 년, 이십 년의 옥중 생활을 계속하던 죄수들은 진실로 꿈밖이었다. 더구나 출옥하게 되는 남편과 자식을 맞이하게 되는 가족들은 하늘판큼이나 넓고 크게 기뻤다. 죄수들은 출옥이 된 후에 비로소 육진 개척으로 인하여 대사령이 내린 줄 알았다. 세종의 위대한 큰 힘을 비로소 알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서민들은 이 소문을 듣고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띠고 전하를 칭송하는 소리가 높았다.

"우리 임금은 동방의 요순이실세!"

"요순은 우리가 보지를 못했으니 말만 들었지 알 도리가 없지만, 진짜 우리 상감은 불세출의 성주라 생각하네."

존경하는 소리가 높았다. 종묘와 사직에 육진을 개척했다는 전하의 봉고제는 명에 의하여 곧 거행이 되었다. 예관들은 오례의 알종묘 의식에 준하여 모든 절차를 차렸다. 세종전하는 특별히 왕비 심씨의 내조한 숙덕을 지극하게 생각하셨다. 이번 종묘알현에 왕세자와 함께 전배할 것을 하교했다. 그러나 겸손한 심왕후는 사양하는 말씀을 옹용한 태도로 전하께 아뢰었다.

"보통 봉고제로 열성조께 고하시는 일도 아니옵고 국가의 큰 사업을 성취하신 일을 봉고하시는 제례에 외람되이 신첩이 전하를 배종하여 참사한다는 일은 방자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삼가 성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조용조용 화기 가득한 나직한 말씀으로 아뢰었다. 전하는 껄껄 웃으시며 비전하께 말씀을 보낸다.

"나와 비마마는 일심동체가 아닌가. 비마마의 내조가 아니었던들 어찌 이러한 큰 사업을 완성했겠소. 정궁에 계신 비마마가 이번 봉고제에 배알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두말 말고 출어하도록 하시오."

전하는 사양하는 어진 후비의 태도가 마음에 더욱 흐뭇했다. 만면에 미소를 지니며 말씀을 했다. 비전하는 또 한 번 부드러운 화음으로 조신에게 아뢴다.

"아무리 몸이 중궁에 처했다 하나 궁규에 깊이 처해 있는 아녀자올시다. 하교를 거두어주시옵소서."

전하는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과인 개인의 마음으로 비전하께 동참하자는 것이 아니외다. 이것은 오례의에 뚜렷하게 규범을 정해놓은 글발이 있고 대신과 유사들이 다 권하는 일이니, 아무리 겸손한 미덕을 가지신 비마마라 하나 어찌하는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두말 말고 모든 채비를 차리도록 하시오."

만면에 웃음을 지녔던 용안은 어느 결에 엄숙한 빛으로 변했다. 비전하는 다시 더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오례의 예법에 있다 하옵고 유사들이 이미 절차를 정했다 하니 어찌하는 도리가 없습니다. 삼가 상감의 분부에 따르오리다."

비전하는 대례복 의상으로 바꾸기 위하여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전하는 다시 화색을 용안에 띠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비전하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씀을 던진다.

"내 비록 비마마를 존경하고 사랑해서 내 마음대로 예문에 없는 일을 함부로 주장했다면 단박 간관들이 들고 일어날 텐데, 내 어찌 그러한 일을 하겠소. 안심하시고 상궁들을 시켜서 의상을 고치시오. 내 역시 대례복으로 바꾸어 입어야 하겠소이다."

비전하도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신첩이 빨리 옷을 고친 후에 전하의 면복을 받드오리다."

전하와 왕비의 의초는 이같이 화락했다. 세종전하는 상왕 태종 때 국구 심부원군이 까닭 없이 간신의 참소로 비명횡사를 당한 후에도 비전하는 상왕에 대하여 일호의 원망하는 사색을 나타내지 아니하여 항상 왕실의 파탄을 일으키지 않도록 했을 뿐 아니라, 비빈과 후궁을 법도 있게 거느려 화기가 가득했으므로 그 차원 높은 아름다운 인품에 항상 감동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랑의 은정이 청산처럼 푸르고 벽해처럼 깊었던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형태란 겉으로 형상이 없다. 그러나 길고 긴 푸른 강물에 따라 흐르는 물과 배와 같았다. 장강이 흘러가듯 사랑은 물결을 따라 굽이치며 흘러간다. 삿대도 없이, 돛대를 달지 아니했건만 심왕후의왕께 향한 사랑은 일엽편주가 되어 세종이라는 분의 사랑의 물결을 따라 임자류를 했다. 종묘 제향에 참여하기를 사양했던 심왕후는. 오례의의 예문을 들어 순순하게 타이르는 전하의 말씀에 조용히 미소를 짓고 내전으로 건너가 궁녀들에게 분부하여 예복을 입었다. 왕후의 대례복인 낭자 족두리에 적의를 입은 심왕후는 내전으로 건너가 시녀들과 함께 전하의 곤룡포와 면류관을 받들어 올렸다. 전하는 흐뭇했다. 백합꽃인 양 청조한 옥안에 팔보 구슬로 장식한 족두리를 쓰고, 금사로 수를 놓은 황홀한 찬란한 적의를 입고 서 있는 심왕후의 모습은 선녀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더 한결 젊어 뵈고 더한층 고와 보였다. 존엄한 지존이건만 한 번 농담을 걸어본다.

"아니 가시겠다고 앙탈을 하시더니 부지런도 하시오. 참배하자고 졸라대던 과인보다도 더 빨리 예복을 차리셨구려!"

비전하는 미소를 머금고 대답한다.

"대명을 거역할 도리가 있습니까? 더구나 상감마마의 의대를 받드는 일은 신첩의 도리올시다. 만약 지체해서 신첩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면 전하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어찌 도리를 지키지 아니하오리까. 그리하와 일찍 몸 단장을 했습니다."

미소를 짓고 나직나직 말씀을 아뢰는 심왕후의 엷은 홍순 사이엔 옥 같은 덧니가 반짝 광채를 뿜는다. 전하는 한 마디 농담을 걸었다가 도리어 한 대를 얻어맞은 셈이 되었다. 전하는 껄껄 웃으며 다시 한번 말씀을 내린다.

"과인이 비마마께 농담을 걸었다가 도리어 주먹 맞은 감투 격이 되었소이다. 하하하... 비마마도 왕비 노릇 십 년에 말주변이 매우 늘었구려. 확실히 과인이 비마마한테 졌소이다. 하하하하하!"

두 분 전하의 정의는 이같이 청산과 녹수 같았다. 비전하는 더 말씀도 대답도 올리지 아니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여성의 높은 미덕이다. 손수 곤룡포 받침 청포를 입혀드리고, 다음엔 곤룡포를 포 위에 덧입혀드렸다. 황금 실로 쌍룡을 수놓은 둥근 흉배를 앞뒤로 달아드리고 서각에 비취옥판을 박은 제왕의 띠를 둘러드렸다. 맨 나중에 인모 탕건 위에는 황금술을 앞뒤로 늘인 황홀 찬란한 면류관을 씌워드렸다. 밖에서는 무예청 시위들이 전하와 비전하의 타실 오색이 찬란한 황금 연을 대령하고 있었다. 이윽고 승전빛 내관이 두 분 전하 앞에 나타났다.

"종묘로 행차하실 자비가 대령된 지 오래옵니다. 출어하실 시각이 임박했사옵니다."

전하와 비전하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내관과 상궁들이 뒤를 따랐다. 전하와 비전하는 월대에 대령된 연위에 부액을 받고 올랐다. 전하의 연 옆에는 무예청 통장을 위시하여 별감들이 홍의 자락을 펄럭이며 옹위해 나가고, 비전하의 연에는 상궁 이하 모든 궁녀들이 흰저고리 남치마의 예장으로 전후좌우를 옹위했다. 두 채의 연은 높고 낮은 주란화각을 돌아 만간들이 푸른 잔디밭을 밟으며 물 흐르듯 광화문 삼문 밖으로 나갔다. 삼문 밖에는 왕세자저하(뒤에 문종이 될 분, 단종의 아버지)가 원유관에 강사포를 입고 옥교에서 내려 두 분 전하의 타신 연을 지영하고 있고, 그 뒤는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을 위시하여 육조판서와 만조백관들이 몸을 굽혀 두 분 전하를 맞이했다. 이 중에는 육진 개척에 공이 큰 김종서, 하경복을 위시하여 신임 도체찰사 황보인과 도절제사 이징옥의 얼굴도 보이고, 종사관으로 애를 썼던 신임 집현전 부제학 신숙주와 신임 호조판서 박호문의 모습도 보였다. 어가는 엄숙하게 운종(종로) 거리를 거쳐 종묘 앞으로 백관의 배종으로 근감하게 나간다. 육진 개척의 큰 위업을 열성조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고유하기 위하여 전하와 비전하며 왕세자저하가 만조백관과 함께 종묘로 나간다 하니, 서울을 위히사여 부근 백 리 안팎의 서민들은 근감하고 복스러운 거둥행차를 배관하기 위하여 인산인해의 사람 물결을 이루었다. 구경하는 선비와 서민들은 행차를 바라보면서 제각기 찬탄하는 말을 한마디씩 한다.

"인제 진짜 임금이 나셨네. 나라가 되는 판일세!"

"진짜 임금이고 말고. 밤낮 부자 형제가 임금 자리싸움을 하느라고 나라와 백성들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살육지변만 냈으니, 어느 하가에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틈이 있었던가? 이제 우리들 서민들은 태평세월을 만나게 되었네."

"당저인 상감도 공부를 많이 해서 학식이 많은 영특한 분이지만, 큰아들이면서 세자의 자리를 일부러 헌 짚신짝 내던지듯하고 유유하게 평민이 되어 지내는 양녕대군도 무던한 인물야! 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거든!"

"왕가나 사가나 집안이 되려면 그런 인물들이 나와야 하네. 어떻게 우리들한테도 경사스런 일일세."

거리거리 백성들은 전하와 양녕대군의 덕을 찬양하는 소리가 높았다. 전하와 비전하의 어가는 종묘 삼문 앞에 당도했다. 영녕전 사당을 모신 곳에는 임금이라도 연을 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두 분 전하는 연에서 내렸다. 간단한 옥교에 올라 전하는 동문으로 듭시고, 왕세자는 서문으로 들어서서 동협문으로 들어가 정해논 자리에 서 있었다. 전하는 면류관과 곤룡포를 바로한 후에 홀을 잡고 정문에 들어가 판위 앞에 나가 서향해서 네 번 절을 올리고 왕세자 이하 모든 백관들은 뜰 아래서 전하의 뒤를 따라 사배를 드렸다. 이때 풍악소리가 은은히 악공들의 반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하는 다시 동계로 오르고 왕세자도 뒤를 따랐다. 제일실을 위시하여 각실을 봉심한 후에 사당 남문으로 나와 보행으로 걸어서 영녕전에 당도했다. 경건히 사배를 드리고 육진 개척의 고유를 드렸다. 이동안 승사, 시위, 백관들은 묘문밖으로 물러나고, 비전하는 적의의 정장으로 정문에 올라 동향해 서고, 전하는 다시 나와 서향해 섰다. 왕비는 네 번 큰절을 올리고, 전하의 뒤를 따라 보행으로 다시 영녕전에 올라 사배를 드리고, 전번에 전하와 세자가 하듯 봉심을 하고 봉고제를 마친 후에 환궁을 했다. 전하는 왕비와 세자와 함께 환궁한 후에 이어 사직제단으로 향하여 육진 개척을 고유하는 의식을 행했다. 사직에는 왕비는 참여하지 아니했고 세자와 백관들만이 배종했다. 전하의 어명에 따라 사직제에는 서울 장안에 있는 부로들을 모두 다 참석케 해서 나라의 발전을 크게 축복하게 했다. 아관박대로 차린 늙은 선비들을 위시하여 지게꾼, 엿장수, 등짐장수들까지 온 국민이 차별 없이 전하께서 올리는 사직대제에 참례케 하는 영광을 주었다. 만백성들에게 한 치의 나라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이 국토를 만세까지 가도록 굳게 굳게 지키게 하는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전하는 당신이 올리는, 육진 개척을 고유하는 친제에 참례케 하는 영광을 준 것이다. 전무한 일이었다. 백성들은 대마도를 평정해서 왜를 응징하고 육진을 개척해서 옥야천리를 만든 후에 오랑캐들의 침범을 막게 한 불세출의 성주인 대왕의 용안을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뵙기 위하여, 새벽부터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도시락을 싸들고 구름 일 듯 모여들었다. 사직에서도 악공들이 아뢰는 풍악 소리를 군호로하여 대제는 시작이 되었다. 전하는 역시 곤룡포, 면류관으로 단을 향하여 사배를 올리는 초헌을 드린 후에, 대신들은 아헌, 종헌 석 잔 술을 올렸다. 독축이 끝나고 사신을 한 후에 대제는 끝났다. 전하는 친히 예조에 명하여 제사에 바쳤던 소와 돼지와 양고기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 했다. 백성들 머릿속에 국토를 강하게 지켜야 한다는 정신을 깊이 심어주자는 때문이었다.

 

화음, 격음

 

세종대왕은 종묘와 사직에 육진 개척의 위업을 고유하는 친제를 백관과 서민과 함께 지내서 마음이 흡족했다. 그러나 한 가지 미흡한 생각이 들었다. 종묘와 사직에서 제례를 올릴 때 악공들이 풍악을 잡는 그 음향과 가락이 꺽꺽하고 탁탁하고, 질뚝배기를 깨뜨리는 소리 같아서 심히 귀에 거슬렸다. 소위 아악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맑고 화락하고, 유창하고 아름다운 가락을 지니면서, 속악과는 판이해서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화한 기운이 가득히 반공에 사무쳐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중하고 경건하고 평화롭게 하는 것이 아악이다.그러나 도대체 두 곳에서 올린 소위 아악이란 것은 기생들이 멋있게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고 노랫가락을 부르는 속악만도 못했다. 이래가지고 국가 대전 의식 때 올리는 아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외국의 사절들이 공식으로 찾아왔을 때 연회석상에는 반드시 풍악을 차려서 그들의 흥취를 도와야 한다. 아악이라 하면서 도리어 향악만큼도 가락이 맞지 않고 고저장단의 음계가 틀려서 엉망진창이다. 옛 예법에 제례를 지낼 때 악을 올리는 것은 음식을 흠향하는 신으로 하여금 유쾌하게 하여 제례를 잘 받아 흠향하도록 하자는 데서 풍악을 올리는 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하필 신뿐이 아니라 산 사람들이 잔치할 때도 술을 마시고 밥을 배불리 먹어서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고 장단을 맞추면서 춤을 춘다. 이것은 평화로운 민족들이 승평시대에 누가 하지 말라 해도 저절로 즐거워서 하는 것이다. 말도 못 하는 신에게 정성을 다하여 제례를 드리면서 가락도 맞지 않는 질뚝배기 깨뜨리는 악음과 격음을 낸다면 신은 오히려 불쾌해서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버릴 것이다. 신과 인의 정은 유명은 다르다 하지만 매일반이다. 도저히 이따위 풍악을 가지고 장엄 경건한 의식중에 중요한 절차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할 수는 없다고 전하는 생각했다.

전하는 젊어서부터 장중한 성격을 가졌다는 글만 읽고 글씨만 썼다. 그러나 형님 양녕의 덕으로 거문고 뜯는 소리도 들었고 가야금 타는 멋도 알았다. 명기 명창들을 가깝게 하고 애무해본 일은 없었으나, 가락의 맑은 것과 탁한 것이며 화음과 격음은 판단할 수 있었다. 전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음악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는 국민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기 위하여 훌륭한 화음으로 교화를 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밤에 등불을 돋우고 당송 팔대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당 시대의 대문호요, 철학자요, 재상이었던 한유의 '송맹동야서'라는 글을 읽어본다. 한유의 자는 퇴지니, 세상에서는 한퇴지라고도 부른다. 철학과 문학과 정치와 음악에 조예 깊은 대가다. 맹동야는 한유의 선배 친구로서 본이름은 맹교요, 동야는 자다. 역시 글을 잘하고 시도 잘 지었다. 성정이 개결하고 인격이 높았다. 권문세가에 드나들지 아니하니 나이 50에 겨우 진사가 되었을 뿐이다. 진사는 백두다. 벼슬이 아니다. 다만 명예로운 높은 선비의 자격을 가진 것뿐이다. 한퇴지는 여러 차례 나라에 쓸 만한 사람이라고 천거했다. 그러나 권문세가의 인사권을 맡은 사람들은 한퇴지의 천거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탐관오리의 그들이 깨끗하고 꼿꼿하고 자기 집으로 찾아오지 않는 개결한 선비 맹동야를 써줄 까닭이 없다. 한유는 겨우 청을 해서 미관말직을 시켰다. 맹동야는 시인으로서 훌륭한 포부를 가졌으나 나라에서 써주지 아니해서 등용이 되지 못하니 어찌하는 수 없었다. 시골 구석 강물이 흐르는 나룻가의 뱃사공을 감독하는 미관말직이 되어 떠나게 되었다. 예나 이제나 아무리 글을 지어서 이름이 높다 하나 글짓는 사람도 밥은 먹고 살아야만 했다. 변방의 나루터를 지키는 뱃사공 감독이라도 해서 구복을 채워야 했다. 맹동야는 한유보다도 오히려 연상 친구다. 미안하기 짝없었다. 맹동야는 죽장망혜로 괴나리봇짐을 어깨에 메고 터벅터벅 시골 나룻가로 향하여 떠나갔다. 한퇴지는 딱하고 애달팠다. 이리해서 연장의 벗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글을 지은 것이다. 이 글 속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벌어져 있는 동물과 식물과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자연의 발로에 붙여서 그 우러나는 소리와 만물의 관계를 흥청대서 펴놓고 비틀어댄 불세출의 명문이다. 까닭에, 전하는 종묘대제와 사직대제의 미타하게 들렸던 악공들의 반주를 듣자 먼저 음에 대한 원리를 생각해보다가 퍼뜩 한유가 지은 '송맹동야서'가 생각났다. 책을 펴놓고 읽기 시작한다.

"대개 물건이란 것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면 우나니, 풀과 나무는 소리가 없건만 바람이 와서 흔들어 울리고, 물은 소리가 없이 흘러가건만 바람이 불어와서 뒤흔들어 울려댄다."

전대문을 읽는 전하의 눈은 환하게 무엇을 깨닫는 듯했다. 전하는 계속해 읽는다.

"그 뛰는 것을 바람이 박차서 격하게 하고, 그 달리는 것을 바람이 막아서 못 가게 하며, 그 용솟음치는 것을 불로 끓이기도 하고, 쇠와 돌의 소리 없는 것을 두들겨 쳐서 울리게도 한다."

"사람의 언어도 또한 그러하다. 부득이한 경우에 말을 하나니, 노래는 생각이 있어서 나오는 것이요, 우는 것은 회포가 있어서 우는 것이니,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다 불평한 데서 일어나는 것인가?"

"악이란 것도 울적한 마음이 밖으로 새어나와서 음악이 되는 것이다. 그 잘 우는 자를 택하고 빌어서 울게 하는 것이니, 쇠와 돌과 실이며 대와 바가지와 흙과 가죽과 나무 여덟 가지 물건은 잘 울리는 물건이요, 천시만 해도 또한 그러해서 잘 우는 자를 빌려 울게 하나니 이러므로 새로써 봄을 노래하게 하고 우레로써 여름을 알리게 하고 벌레는 가을을 노래하게 하고 바람 소리로 겨울을 울리나니, 춘하추동 사시절의 추탈하는 것도 또한 반드시 그 평하지 못한 데서 일어나는 일인가 한다."

전하는 여기까지 읽어 내려가다가 무릎쳐 탄식하면서 소리를 높여 다음 글을 읽는다. 흥이 저절로 난 것이다. 한유는 이같이 말한 후에 역대 호걸, 정치가, 학자, 문장, 시인들을 벌여놓아 시세를 잘 만나서 한 세상을 잘 울린 사람들과 시세를 잘못 만나서 애닯게 썩어 문드러진 불평객들을 열거한 후에 다시 말했다.

"모르겠다, 하늘은 장차 그의 소리를 화하게 해서 국가가 융성해지도록 울리게 할 것인가? 장차 그 몸을 굶주리는 궁한 곳으로 몰아넣어서 그 마음속을 근심스럽게 하여 스스로 그 불행한 것을 울게 만들 것인가?"

한유는 이같이 끝을 막아서, 뜻을 펴지 못하고 시골구석 나룻가의 뱃사공을 감독하러 가는 연상 친구 맹동야를 보내면서 이 글을 지은 것이다. 전하는 한유의 글을 읽기를 다한 후에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해본다. 이 글은 어느 시대에 가더라도 훌륭한 진리를 내포한 명문일 뿐 아니라, 세도인심의 상태를 곡진하게 그림 그리듯 그려낸 글이다. 사람은 불평이 있으면 울분하는 것이다. 울분하면 격할 것이요, 격하면 소리치고 발을 구르는 것이다. 격하지 않고 불평이 없게 하는 방법은 없는가? 이쯤 생각해본다.

옛말에 무위이화란 말이 있다. 하늘은 말이 없다.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속에 아무 일도 아니하는 듯하면서 크나큰 일을 억천만년 해나간다. 봄에는 화한 바람과 단비를 내려서 만화방창의 시절이 되게 하고, 여름엔 더운 기운을 뿜어서 성숙의 시기를 이룩하고, 가을엔 결실하는 미덕을 가져서 백곡과 백과를 풍윤하게 하고, 겨울엔 동장의 저축을 가져서 다시 돌아오는 봄을 맞이하도록 한다. 대지는 또한 하늘과 조화를 이룩하면서 묵묵한 속에 만유를 길러낸다. 이것이 곧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크나큰 질서와 크나큰 모든 일을 운영해 나가는 진리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손뼉은 마주 부딪쳐지면 소리가 난다. 화한 소리, 화음으로 일어나는 소리는 듣기가 좋다. 사월훈풍에 벗을 부르는 꾀꼬리 소리 같은 것, 맑은 물을 쌍쌍이 박차고 나는 '물찬 제비'가 재잘대며 의좋게 나는 그 소리,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화음이다. 그러나 노기 가득한, 질뚝배기를 깨뜨리는 소리, 바가지를 발로 밟아 부수는 끔찍스런 소리들은 격음이다. 전하는 한유가 지은 '송맹동야서'를 읽고 크게 깨달았다. 정치를 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하면서, 하늘과 땅이 만물을 육성하듯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인재를 등용해 쓰는 데도 권문세가에 맡기지 말고 친히 적재를 적소에 등용해서 쓸 만한 사람을 놓치지 아니하고 국가에 헌신하도록 해서, 유능한 인재가 시세를 얻지 못했다고 하는 불평과 불만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음악도 그렇다. 화음으로써 온 사람과 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울린 종묘 봉고제 때와 사직대제 때 아뢴, 소위 중국의 아악이란 것은 악공들의 기예가 부족한 까닭인지, 중국에서 가져온 지가 오래서 그런지 도대체 화음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일어나지 아니했다. 가락도 맞지 아니했다. 소리도 탁했다. 음이 격하고 탁하고 산란했다. 차라리 향악의 멋진 화성과 흥청거리는 가락만도 못했다. 그러나 조정의 큰 의식과 종묘대제 등 거룩한 의식에 향악만을 쓸 수는 없었다. 전하는 우선 정악을 바로잡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이튿날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을 어전에 명소했다.

"악은 예로부터 예와 함께 국민의 성정을 순화시키고 정신을 고상하게 해서 화한 기운이 나라안에 가득하게 하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교양이다. 이리하여 태평한 세월에는 서민들이 사는 거리와 동리마다 거문고 타는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했다. 이것은 선현의 기록에도 현송이 부절이란 글도 있다. 이제 우리 나라는 북편 오랑캐와 남쪽 해적을 물리쳐서 외환이 줄어졌다. 예악을 강구해서 위로는 조선의 업적을 빛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화기가 온 나라에 가득해서 문물의 번영을 더욱 이룩하고 백성들의 성정을 순후하고 고상하도록 인도해야 하겠다. 한편으로 예법을 바로잡고 한편으로 화락한 정악을 정돈해서 살벌하고 난잡했던 인심을 부드럽게 해야 하겠다. 경은 예문관 대제학이다. 음률과 악에 대하여 조예가 있는 사람이 있거든 천거하라."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은 한동안 부복해서 생각하다가 아뢴다.

"한 사람, 지음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음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전하는 반가웠다. 용안에 희색을 띠고 하문한다.

"박연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박연! 조관인가?"

", 그러합니다. 지금 봉상시 판관으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곧 부르도록 하라. 누구의 아들인가?"

"영동 사람으로 삼사좌사를 지낸 박천석의 아들이올시다. 선대왕 태종 신묘년에 문과에 급제했사옵고,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서 나라에서 효자홍문까지 내린 사람이올시다."

"효자 정려까지 받았단 말인가? 훌륭한 사람이로구나!"

"아직 지위는 높지 아니합니다마는 지음을 잘할 뿐 아니라 효자로 이름이 높으니 사류의 존경을 받습니다. 초명을 연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연자로 개명을 했고, 자를 탄부라 하고 호를 난계라 하옵니다."

전하는 곧 승지에게 분부했다.

"봉상시 판관에 박연이란 사람이 있다 한다. 곧 입시를 명하라."

승지는 명을 받고 곧 대전 별감을 시켜서 봉상시에 나가서 판관 박연에게 입시의 명을 전했다. 판관은 당상관이 아니라 당하관이다. 당하관으로 어전에 입시의 명을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 난계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로 전하가 입시를 명하시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대전 별감에게 묻는다.

"무슨 일로 부르신다던가?"

"소인도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승지한테 들으니, 예문관 유대제학이 입시한 자리에서 소명이 내리셨다 합니다."

난계 박연은 황망히 조복을 갖추어 입고 예궐했다. 사모관대로 조복을 갖춘 박연은 승지의 인도로 대전에 들어가 예문관 에게 목례를 보낸 후에 분합 밖에서 전하께 곡배를 드렸다. 지존한 제왕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데 바로 정면해서 바라보며 절을 드리는 것이 공손치 못하므로 사선으로 전하를 향하여 절을 하는 것을 곡배라 하는 것이다. 전하는 박연의 절이 끝난 후에 옥음을 부드럽게 해서 말씀을 내린다.

"대제학한테 경이 지음을 한다는 말을 듣고 만나고 싶어서 부른 것이다. 오늘부터 나의 스승이 돼야 하겠다. 당부한다."

전하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를 했고, 더구나 효자의 정문까지 받은 사람인 것을 대제학을 통하여 들은 까닭에, 박연이 아직 당하관이라 하나 존경하는 뜻으로 너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특별히 경이라 불렀다. 박연은 황감했다.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소신이 어찌 감히 음을 안다 하오리까. 대제학이 과찬해서 아뢰었나봅니다. 다만 선비의 장난으로 거문고를 약간 타보았을 뿐이옵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경은 선대왕 때 효행으로 정문까지 내리시는 광영을 받았다 하니 가상한 일이다. 효행으로도 나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고마운 일이다!"

전하는 효자를 우대하는 말씀을 또 한 번 내렸다. 박연은 내리 감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부복하여 아뢴다.

"자식이 되어 어버이를 받드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일이올시다. 우연히 선대왕께옵서 유신들의 말씀을 들으시고 선비들에게 권장하는 뜻으로 내리신 일이올시다. 은총이 지중하신 것을 항상 죄송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하옵니다."

전하는 미소를 던지시며 화제를 돌린다.

"내가 오늘 경을 부른 것은 우리나라 악에 대하여 미타하게 생각해서 경에게 묻고자 하여 의논하려고 부른 것이다. 지난번 종묘대제를 거행할 때 악공들이 아뢰는 소위 아악이라는 음률이 해음을 갖지 못하여 황하기 짝이 없다. 악이란 화한 가락으로 신과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아뢰는 것이다. 이 해음을 못가진 조리 없는 음악으로 어찌 종묘의 대제와 국가의 장중한 의식에 악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가? 차라리 향악만 못하니 딱한 일이 아닌가. 내 비록 경과 같이 지음은 하지 못하나 음치는 아니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하겠다. 아까도 말했거니와 경은 나의 악의 스승이 되어 향악과 정악을 새로운 방향으로 창조해야 하겠다. 악은 국가가 태평성대가 되도록 신과 만민이 함께 즐기면서 화한 기운을 조성시키는 정치 이상의, 국가의 지도자가 행할 바 정사 중의 하나다. 예문관 대제학 이하 악에 대한 책임을 맡은 유사들은 나의 뜻을 협찬해서 예와 악을 바로잡는 일에 힘을 써라!"

대제학 유사눌과 봉상시 판관 박연은 전하의 말씀을 듣자,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악은 국가가 태평성대가 되도록 신과 만민이 함께 즐기면서 화한 기운을 조성시키는 정치 이상의, 국가의 지도자가 행할 바 정사 중의 하나다.'하시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과 봉상시 판관 박연은 기가 차도록 감탄했다. 마음속으로, '참말 불세출의 성주를 만났구나!' 생각했다.

사실상 악은 인간의 정신적 자세를 화하고 바르게 정립시켜주는 최고의 예술이다. 실로 국가의 지도자가 정치 이상의 정사로 생각해서 음악을 장려한 것이다. 제례에도 악을 쓴다. 신도 사람도 음악의 화음으로 마음을 감동시켜서 국가라는 커다란 집안을 화기속에 휩쓸리게 하자는 것이 음악이다. 박연이 아뢴다.

"전하의 분부는 과연 명철하신 판단이옵니다. 소신들의 미칠 바가 아니올시다. 악이란 하늘에서 솟아나서 인간에 의하여 무에서 발생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면서 굽이굽이 혈맥을 통하여 정신으로 흘러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동되는 바가 같지 아니함에 따라 소리가 또한 같지 아니합니다. 즐거운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유쾌하여 백학이 푸른 하늘을 박차고 나는 듯하고, 노기를 띤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거칠고 격해지고, 슬픈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애닯고 초조해집니다. 기쁜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감동되어서 덩실덩실 춤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의 용안엔 활짝 웃음이 물결쳤다. 무릎을 탁 치며 말씀한다.

"그렇지! 옳은 말이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소리의 같지 않은 것을 합쳐서, 하나의 규율로 만드는 것은 군상으로 계신 분이 지도하기에 달렸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들으신다. 박연은 말씀을 계속한다.

"인도하는 데는 정과 사의 구별이 있습니다. 음악은 크게 풍교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음악이 도로서 크게 국가 치화에 영향을 주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박연은 음악의 도가 국가의 흥망까지 관계되는 일을 순순하게 아뢰었다. 그의 음악론은 철저했다. 전하는 박연의 논리정연한 음악서론에 경건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어서 더 말을 해보라!"

"중국 오제 때의 악을 말씀드린다면, 당우 때가 가장 성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후직이 협찬해 이룩된 것입니다. 삼왕 때의 악을 논한다면 주 시대의 악이 으뜸이올시다. 주공이 만든 것으로서 당시에 실시했던 방법이 모두 다 '주례'에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박연의 말씀을 듣는 전하는 흥이 도도했다.

"옳다! 나도 '주례'를 읽어보았다. 대강 짐작한다."

 

창조 아악

 

박연은 전하의 악을 알아주시는 말씀을 듣자 역시 신명이 났다. 다시 아뢴다.

"그때 정치하는 분들은 국민교화를 하는 데 모두 예악으로 먼저 주를 삼고 형벌을 다음으로 삼아서 백성들을 다스린 까닭에 풍교가 크게 순화되어서 만백성이 악한 일을 저질러 죄를 범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옥은 텅텅 비어서 사십 년 동안의 치적을 이루었다 합니다. 악의 효과는 이같이 국가의 성하고 쇠하는 큰 기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 악은 그 나라 풍교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큰 것이다. 그러하므로 아까 나는 경들에게 말하지 아니했는가? 악은 국가에 태평성대가 되도록 신과 백성이 다 함께 즐기면서 화한 기운을 조성시키는 정치 이상의 정사라고 하지 아니했던가!"

옆에 시립해 섰던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이 아뢴다.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주공과 같이 만백성과 함께 즐기는 음악을 창조하시어 죄짓는 백성이 없게 해서 옥이 텅텅 비도록 만들어주시옵소서."

"내 어찌 주공을 따르랴! 박연은 다시 악에 대한 말을 계속하라."

전하는 박연의 음악론을 더 듣고 싶었다. 박연이 계속해 아뢴다.

"주공 이후에 세교는 쇠퇴해서 순박했던 풍속은 쓰러지고 각박하게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형벌로만 다스리는 정치를 했습니다. 이러하니 옥을 맡은 관리들은 예의 있는 선비를 천대해서 선대의 예악문물은 모두 다 탕진되어 찾을 길이 없고, 숭상하는 음악은 다만 황음부미한 음탕한 노랫가락과 무당들의 굿거리 장단, 창부 타령 따위로 변해져버렸습니다. 이쯤 되니 사광의 지음을 잘하는 총명한 인물이나 공자 같은 성인으로도 능히 이 어지럽고 난잡한 세상 풍속을 구해 내지 못했습니다."

"옳은 말이다, 그대의 말이! 그러므로 공부자도 '시경'을 산삭해서 편집하시면서도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탕한 노래를 그대로 '시경' 속에 넣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속일 수가 없는 때문입니다."

이번엔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이 대답해 아뢴다.

박연이 아뢴다.

"이같이 되니 주공이 창조했던 정악은 모두 다 흩어지고 슬어져버렸습니다. 한 시대에 내려와서 숙손통이란 이가 잿더미 속에서 겨우 의식의 문서를 얻었을 뿐 주시대의 악보는 찾을 길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진 시대의 것으로 태묘의 악을 삼았었으나 조잡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후엔 정악이 모두 다 소멸되었구나!"

세종대왕은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했다.

"그렇습니다. 한무제가 악을 바로잡으려 애를 써서 이연년을 시켜서 경방에 육십률을 만들었다 하나 억지로 부회한 누를 면치 못했습니다."

박연의 강의는 계속된다.

"진 시대와 당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공의 정악을 복구하려 했으나, 당 현종은 옥수후정화와 예상우의곡을 양귀비와 함께 방탕하게 즐겼을 뿐, 정악의 근본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송 시대에 와서도 정악의 미묘한 이치를 탐구한 사람이 몇 사람 있었습니다마는 단지 그 지엽을 어루만졌을 뿐이었습니다. 그중에 오직 채원정의 '율려신서'가 깊이 율의 원류를 연구해서 소리를 화하게 조화시키는 법칙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악의 정도를 개간했습니다마는 아직 호미질을 했을 뿐 가래질을 못한 혐이 있습니다."

동양 역대의 악에 대한 학식을 막힘 없이 장강유수처럼 탁 터놓고 아뢰는 박연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박연의 악에 대한 박학에 공경하는 마음이 은연히 일어났다.

"경은 과연 과인의 스승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해서 항상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더니 몸이 쇠약해지고 병이 자주 난 일이 있었다. 그때 태종께서 중관을 보내서 내 방에 있는 책을 모조리 거두어 가신 일이 있었다. 과인의 건강을 걱정하신 때문이다. 그러나 병풍 뒤에 마침 가려져 있는 통파 문집과 구양수의 서간집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것으로 나의 글 읽고 싶어 하는 욕심을 풀어본 일도 있었다. 악에 대해서도 몇 가지 책을 읽은 일이 있으나 아직 채원정의 글은 읽어 본 적이 없다. 학문의 길이란 과연 넓고 멀구나! 도대체 채원정은 어떠한 사람인가?"

전하는 감탄하여 박연에게 묻는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채원정은 송 시대 회암 주희의 제자올시다."

전하는 깜짝 놀란다.

"그래, 주자의 제자란 말인가?"

", 그러합니다. 채발이란 사람의 아들이온데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배워서 학문이 대단했습니다. 장성한 후에 주희를 알게 되었지요. 학문에 대하여 물어볼 일이 있어서 주자의 집을 찾았습니다. 주자는 크게 놀라서 채씨의손을 잡아 맞이하면서, 제자들에게 '이 사람은 내 옛 친구다. 제자로 대접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면서 상을 대하여 밤을 새워가며 경학을 강론해주었다 합니다."

"대단한 분이로군!"

전하는 탄복한다.

"이쯤 되니 사방의 학자들은 반드시 학문에 대하여 채원정을 찾아 질정을 받아야만 했다 합니다. 사이비학자 한모란 자가 채씨를 시기해서 위학자라고 조정에 참소하여 도주란 곳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사방의 젊은 학자들은 구름 모이듯 모여들어 그에게 배우기를 원했다 합니다. 경학에도 통달했을 뿐 아니라 음악에도 정통해서 '율려신서'를 저술했습니다."

"대단한 선비로구나!"

전하는 또 한 번 탄복한다. 대제학 유사눌이 옆에서 한 마디 아뢴다.

"주자가 그분에게 학문을 물었다 하니 다시 더 말할 나위 없는 분이올시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또 한 가지 그분을 존경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그는 제자들에게 귀양한 적소에서 이런 글을 지어서 보였다 합니다."

"혼자 갈 때라도 자기 그림자한테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을 해야 하고, 혼자 잘 때라도 덮고 자는 이불한테라도 부끄러운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 내가 비록 죄를 얻었다 하나, 그 까닭으로 짐짓 원망하고 자포자기를 해서 몸과 마음을 해이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구나! 과연 주자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그는 '율려신서'뿐 아니라 '팔진도''홍범해''태연상설', '연악원변', '황극경세', '태현습허지요', '상등서산절정', '인기독서' 등의 무수한 저술을 남겨 놓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서산 선생이라고 존경해서 불렀다 합니다. 그가 돌아간 후에 비로소 나라에서는 죄를 풀고 추시로 문절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합니다."

대왕은 손뼉을 어루만지면서 탄식한다.

"좋은 인재가 세상을 잘못 만나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했구나! 그러나 많은 저술을 해서 뒷사람들을 유익하게 했으니 고마운 일이다. 예나 이제나 간신배가 조정에 있으면 큰일이다!"

말씀을 마친 전하의 얼굴빛은 엄숙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종전하는 다시 박연을 향하여 하문한다.

"나의 공부가 아직도 미흡한 것을 한탄한다. 내가 채원정의 '율려신서'를 아직 읽지 못한 게 한스럽다. 집현전이나 예문관에 이 책이 있겠는가?"

전하는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을 향하여 물었다. 아무리 대제학이라 하나 예문관이나 집현전에 쌓인 만 권 서적을 일일이 기억할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악에 대해서는 유사눌의 전공이 아니다. 유대제학은 당황했다.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아뢸 수도 없다. 그렇다고 '조사 해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얼굴빛이 변했다.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 박연은 대제학의 심정을 알아차렸다. 대제학을 대신해 아뢴다.

"누추하오나 소신이 읽고 있던 때 묻은 책이 있습니다. 추하다 생각하지 아니하신다면 소신이 집에 나가 대전 별감편에 바치오리다."

전하는 기쁜 빛이 용안에 가득했다.

"경솔한 말이로다. 경의 책을 어찌 추하다 할 수 있으랴, 곧 들여보내라. 그리고 예문관과 집현전에 책의 있고 없는 것을 아뢰라!"

", 봉명하겠습니다."

대제학이 대답했다. 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말씀한다.

"채씨의 '율려신서'는 보내주면 내가 읽어서 공부하려니와, 다시 우리나라 향악에 대해 경에게 묻겠다. 신라 때부터 삼현 삼죽이 전해왔고 우륵의 가야금과 왕산악의 거문고에 옥보고의 새로운 가락 삼십 곡이 있다 하는데, 여기 대해서 아는 대로 강론해보라."

박연은 전하가 나라의 고유한 향악까지 연구해보려는 마음을 지니신 데 대해서 마음속으로 기쁨을 이길 길 없었다.

"남구 북적을 막으시며, 정무가 다단하신 터에 어찌 향악에까지 관심을 가지려 하십니까. 악을 연구하는 소인으로서는 황공 감격한 마음 이길 길 없습니다."

박연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이길 수 없다. 눈에 감격한 눈물이 핑 돌았다. 여태까지 소위 임금이란 이들은 음악을 천대해서 노리개감으로 알았다. 음악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악공이라 하고 여자들은 여악이라 하고 기생과 광대라 불렀다. 기껏 우대한다는 것은 사대주의로 아편 진이 노랗게 몸에 배듯,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얻어온 깨어진 종과 기왓장 조각으로 된 편경을 영광스런 소위 아악이라 해서 조정의식과 종묘제향 때 율도 맞지 않고 가락도 통일되지 않은 것을 푸대접하는 악공들을 시켜서 마구 두들겨대던 것이다. 전하의 묻는 말씀을 듣자, 악의 묘리를 아는 박연의 눈에서 감격한 눈물이 핑 돌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는 박연의 말씀을 듣자 용안에 활짝 화려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이 사람아, 경의 말로 예와 악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 말하지 아니했는가. 그뿐인가, 옛 성현이 정치를 시작했을 때 어진 위정자는 먼저 제례작악을 했던 것일세. 주가 덕화로 천하를 통일했을 때 무엇보다도 주공은 먼저 그 조카 성왕을 도와서 예를 마련하고 악을 창조했네! 정치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백성들을 잘살게 하고,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백성들의 교양을 더욱 높여서 그 나라의 문화가 풀과 나무에까지 미치도록 하자는 것이 정칠세. 그러므로 '천자문'에도 화피초목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정치를 지도하는 임금으로서 제 나라의 향악을 알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무엇이 그리 대수론 일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나라에 전해오던 악과 악기에 대해서 말을 해주게."

전하는 이제는 박연에게 해라를 하지 아니하고 하게란 말까지 썼다. 말씀하는 동안에 그의 학식의 깊고 넓은 것을 알게 되니 아무리 제왕이라 하여, 또는 미관말직인 당하관 박연이라 하나 전하의 입에서는 저절로 경대하는 말씀이 나와서 경이라고 하고 하게를 써서 말씀했다. 박연이 아뢴다.

"소신도 향악에 대해서는 더욱 아는 바가 충실치 못하옵니다. 그러나 신라 때부터 전래한 삼현 삼죽은 거문고, 가야금, 비파를 삼현이라 합니다. 줄로 타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부는 대금, 중금, 소금은 대로 만들었으므로 삼죽이라 합니다."

전하는 나라에 고유하게 전해온 향악에도 관심이 컸다.

"가야금을 창조한 우륵은 본시 신라 사람이었지?"

", 그러합니다. 우륵은 신라 진흥왕 때 사람으로 우리나라 삼대 악성의 한 사람이올시다. 본시 가야국 사람으로 가실왕 때 열두 줄 거문고를 만들고 십이율을 상징한 상가야, 하가야 등 열두 곡을 지어서 가야금이라 했습니다. 가야가 쇠하자 신라로 몸을 피했습니다. 진흥왕은 우륵의 소문을 듣고 우륵과 그 제자들을 하림궁으로 청해서 가야금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이때 우륵은 새로이 하림조와 눈죽조를 지어서 연주하니 왕은 크게 기뻐해서 그들을 굴원에 살게 하고 가야금의 수법을 계고, 주지, 만덕 등에게 전습시켰습니다. 이리하여 우륵의 가야금이 오늘날까지 전해왔습니다. 충주 대문산 아래 금휴포란 곳이 있고, 이곳에 탄금대가 있습니다. 이 금휴포와 탄금대가 우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올시다."

"옥보고도 신라 사람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옥보고는 신라 경덕왕 때, 사찬 벼슬했던 공영이란 사람의 아들입니다.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현금을 50년 동안 공부했다 합니다. 스스로 새 곡조 30곡을 창작했고, 이 금법을 제자인 속명득에게 전했다 합니다. 금오산 산턱에 금송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합니다. 이곳이 바로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고 놀던 곳이라 합니다."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는 세종전하는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이러하니, 신라는 삼국통일을 해서 백성들은 평화로운 예악으로 문화가 융성하여 잘살게 되었구나!"

전하는 언제든 항상 백성을 본위로 삼는 말씀을 했다.

"왕산악의 내력을 알거든 말하라."

"고구려 양원왕 때 진나라에서 칠현금이 들어왔으나 탈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정부에서는 상을 걸고 칠현금 타는 사람을 구했다 합니다. 왕산악은 칠현금을 개조해서 백여 곡을 지어서 타기 시작하니, 거문고 소리를 듣고 현학이 날아와서 뜰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까닭에 왕산악이 개조한 칠현금을 현학금 또는 현금이라 부릅니다. 우리말로 순전히 부른다면 검은고올시다. 현이란 글자는 까맣다 하는 글자니, 칠현금이 바뀌어 거문고가 된 것입니다."

전하는 나라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삼현 삼죽의 악기와 삼대 악성의 이력을 박연을 통하여 듣자, 연해 탄식하는 말씀을 내린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천하에 자랑할 만한 삼대 악성이 있는데, 뒤를 받치려는 사람들이 없으니 실로 한심하구나!"

세종은 모둔 학문에 대하여 지나치도록 관심이 많았다. 다시 박연을 향하여 물으신다.

"향악에 대해서는 대강 들었거니와, 소위 중국의 아악이란 것은 어느 때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는가?"

박연이 아뢴다.

"문헌에 의하면, 고려 예종 때 송휘종이 제악으로 종경 각 한 틀씩과 금, , , , 소관 등 악기 두 부를 보냈다 합니다. 그 후 공민왕 때 홍건적 난리통에 모두 다 탕진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늙은 악공 한 사람이 종경을 못 속에 던졌다가 난이 평정되자 꺼냈다 합니다. 본조에 내려와, 명에서 태조와 태종이 악기를 보냈으나 음향과 가락에 맞지 아니하고 제악도 팔음이 미비해서 말이 아악이옵지, 악이 아니올시다. 소위 경이란 것은 기왓장 조각으로 만들었고, 종이란 것도 잡박하게 달려져서 몇 개가 되지 아니하여 악의 형편이 말이 아니올시다."

전하는 깜짝 놀란다.

"무어야, 돌로 만든 경석이 아니라 기왓장 조각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러하니 화음이 날 도리가 있으냐! 질뚝배기 깨뜨리는 악성과 격음만이 날 뿐이지. 놀랄 일이로구나!"

악에 대한 소양이 없고 악기를 알지 못하는 배신들도 비로소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도 중국에서는 이것을 소위 와경이라 한다 합니다."

박연은 웃으며 아뢴다.

"경 돌이란 옥돌 같아야 그 음향이 맑아 청아할 수 있는 것인데, 기왓장 조각을 아무리 잘 쪼아 만든다 한들 청아한 음향이 날 수 있는가? 과인이 실지로 한 번 감상하고 싶다. 예문관 대제학은 예조판서와 의논해서 봉상시에 있는 악기와 관습도감의 악기와 여악을 동원해서 편전에서 한 번 보게 하라.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 이외에 악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관원도 참석케 하고, 특히 봉상시 판관 박연은 봉상시에 보관한 악기와 관습도감의 향악에 대하여 모든 절차를 지휘해 주기 바란다."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과 봉상시 판관 박연은 국궁하며 대답한다.

"이틀 동안 말미를 주시옵소서. 모든 준비를 차려 어전에 아악과 향악을 아뢰도록 하오리다."

"좋다!"

전하는 이틀 동안의 준비 기간을 주는 허락을 내렸다. 어전에서 물러 나온 박연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을 향하여 말한다.

"대감이나 시생이나 불세출의 성주를 만났소이다. 상감께서는 악은 정치 이상의, 국민의 정신을 화기로 도야시키는 정책이라 하셨습니다. 과연 달관하신 말씀이올시다. 옛적 주 시대에 주공이 제례작악을 하듯 나라의 예악을 바로 잡을 의향이 계신 듯합니다."

"그렇소이다."

유사눌도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이틀 후에 봉상시와 관습도감에서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악공들과 여악들이 궁중으로 들어왔다. 전하는 전상에서 황희 이하 삼정승과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봉상시 판관 박연, 경시주부 정양을 배석시키고 편종과 편경을 위시하여 삼현 삼죽과 모든 여악을 친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경시주부 정양이란 사람은 역시 악리에 달통했다 해서 박연이 천거해서 특별히 입시를 명한 것이다.

전각 아래는 큰 북이 좌우편으로 놓여졌다. 이것을 절고라고 불렀다. 다음엔 한 개로 된 큰 종과 한 개로 된 기왓장으로 만든 경이 양편으로 놓였다. 이것은 특종과 특경이라 했다. 그 앞에 박을 치는 악사가 오모에 청포를 입고 섰고, 다음엔 거문고를 가진 악공 여섯 사람이 검은 복두에 붉은 홍포를 입고 정제하게 앉았다. 다음 줄에는 비파를 타는 악공 여섯 명이 역시 줄을 맞춰 앉았고, 다음 줄에는 관습도감에서 뽑혀 나온 아름다운 기생 스물네 명이 화관에 푸른 옷, 붉은 치마를 입고 좌우편으로 갈라져서 두 열을 이루어 교태를 머금고 두 사람 행수기생 도창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창은 순전한 우리말로 바꾼다면 선소리를 주는 기생이다. 다음 줄 바른편엔 틀에 달린 편종이 상단 하단으로 나뉘어 한 단에 여덟 개씩 팔음계를 이루어 도합 16개가 달려 있다. 다음엔 바른편에 놓인 편종을 응해서 왼편에 편경이 역시 수를 늘인 틀에 상하 이단으로 나뉘어 여덟 개씩 16개가 달려 있다. 다시 한 계단 아래에 대, , , , 관을 들고 좌우편으로 열 사람이 앉았고, 그다음 줄에는 훈, , , 봉소를 부는 사람들이 네 사람씩 좌우편으로 여덟 사람이 붉은 홍포에 검은 관을 쓰고 정제하게 나열해 앉았다. 세종전하는 총명한 안정을 굴려 일일이 악기와 악공이며 기생인 여악들을 살펴보신다.

"악을 아뢰오리까?"

경시주부 정양이 아뢴다.

"시험해 보라! 어떤 악을 울려보려 하는가?"

정양이 아뢴다.

"우리나라에는 정악이 아직 서 있지 아니합니다. 중국에서 비록 종경이 들어왔다 하나 연구세심해서 악기의 형편이 말이 아니옵고, 이런 중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당악과 고대로부터 전해온 순수한 우리의 향악이 있습니다. 어떠한 것을 아뢸지 분부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향악이란 것은 속악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사기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팔관회라는 거국적인 국민대회의 의식 때 비로소 향악을 썼고, 향악은 대개 기녀들이 악기에 올려서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 후에 고려가사에 전해오는 '만전춘', '쌍화점', '정과정', '상대별곡', '청산별곡'들의 가사가 다 향악에 속합니다. 우선 '만전춘'을 아뢰어볼까 합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양은 악사의 앞으로 나가 '만전춘'의 곡을 올리라 했다. 악사는 여러 악공과 모든 여악들에게 박을 쳐서 '만전춘'곡조를 아뢰게 했다. 큰 북이 '두둥둥'소리를 내며 특종과 특경이 울렸다. 거문고 여섯 틀이 비파 여섯 틀과 함께 맑은 음향을 내면서 대나무로 만든 퉁소, 피리 등 여러 악기가 일제히 거문고와 비파 소리에 응해서 푸른 하늘 흰 구름장 사이로 흩어진다. 편종 열여섯 개와 편경 열여섯 개가 울렸다. 관습도감 기생 스물네 명이 일제히 '만전춘'을 가락에 맞추어 노래한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 망정

정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기생들은 첫 절을 가락 높이 부른 후에 행수기생인 도창의 뒤를 이어 둥글게 원무를 추며 다음 절을 노래한다. 기생들은 화관 족두리 화려한 녹의홍상을 입고 원무를 추며 다음 노래를 부른다. '만전춘' 가락은 더한층 흥청거렸다.

경경고침상에

어디 잠이 오리오,

서창을 열어하니

도화발하두다.

매화는 시름 없어

소춘풍하나다, 소춘풍하나다.

아름다운 미녀들은 싱긋싱긋 웃음을 띠고 단순호치를 방싯방싯 벌려 서로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노래한다.

넋이라도 임을 한데 녀닛경 너기다니

넋이라도 임을 한데 녀닛경 너기다니,

뉘러시니있가 뉘러시니있가,

올하, 올하, 아련 비올하

여흘란 어듸 두고

소에 자라온다

, 곧 얼면, 여흘도 좋으니.

노래와 춤은 관현에 맞추어 점점 고조되었다. 미녀들은 서로 잡았던 손길을 풀고 제각기 푸른 소매, 붉은 띠를 펄럭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려 춤을 춘다. 외씨 같은 희고 흰 삼승버선코 끝으로 제비가 물을 차듯 붉은 치맛자락을 가볍게 박차며 노래를 계속한다.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을 베여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각시를 안아 누워

약든 가슴을 마초압사이다

마초압사이다.

흥은 절정에 올랐다. 전하는 귀를 기울여 여악들의 노래와 관현의 조화며 종, 경의 화음을 살폈다. 거문고, 비파와 대로 만든 악기들의 해조는 제법 어울려 들어갔다. 그러나 편종과 편경은 엉망진창이다. 박이 세 번 울렸다. '만전춘'의 향악은 끝이 났다. 기생들은 전하께 향하여 국궁해 절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쳐 제자리로 돌아갔다. 전하는 친히 옥좌에서 일어나 전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시신들은 깜짝 놀라 전하의 뒤를 따랐다. 전하는 편경과 편종이 놓인 곳으로 향했다. 편경과 편종을 치던 악공들이 전하께 목례를 드리고 물러섰다. 전하는 옥보를 옮겨 친히 편종과 편경을 어수로 만져본다. 편종 틀에는 깨지고 이 빠진 종이 수두룩했다. 편경은 옥돌 같은 맑은 돌이 아니다. 모두 다 기왓장 조각을 갈아서 달아놓았다. 전하는 뒤를 따른 예문관 대제학과 집현전 대제학을 돌아보시며 탄식하는 말씀을 내린다.

"기왓장으로 경을 만들었으니 좋은 음향이 나올 수 있느냐!"

전하는 편종과 편경을 살피신 후에 다시 옥좌로 돌아가 군신을 향하여 말씀한다.

"무엇보다도 악을 바로잡자면 편경과 편종을 새로 창조해 만들어야 하겠다. 박연은 이에 대해서 연구를 해보라! 그리고 당분간 정악이 창조될 때까지는 편경과 편종을 제외시키고 삼현 삼죽으로 향악을 반주하여 화음을 내는 도리밖에 없다. 만약 깨진 편종의 이지러진 소리와 기왓장으로 엮어진 편경을 사용한다면 화성이 나지 아니하고 악성만 나와서 다른 악기에서 나타나는 좋은 소리와 아름다운 노래 곡조를 깨뜨려버리고 만다. 정악을 창조할 때까지 당분간 향악을 쓸 도리밖에 없다."

정양이 아뢴다.

"성상의 하교는 명철하신 분부올시다. 박연에게 하명하시어 우리나라 풍토와 우리나라 오행기후에 알맞은 아악을 창조하도록 하옵소서. 중국에서 온 것이라 해서 깨진 종 조각과 기와 조각으로 편성해놓은 종경을 종묘대제와 사직대제에 그대로 쓴다는 것은 쓸데없는 사대벽이올시다. 우선 삼현 삼죽, 고유한 우리의 조화된 악기와 관습도감 아이들의 청아한 가곡으로 신과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화하도록 하시는 것이 상책이올시다. 편종과 편경을 제외시킨 후에 다시 우리의 고유한 향악을 시청해보시옵소서."

정양의 아뢰는 말씀이 끝나자 박연이 아뢴다.

"향악 중에도 '정과정'의 진작은 음곡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군상 되시는 분은 한번 가사의 뜻을 음미해보실 만한 향악이올시다."

전하는 물우신다.

"진작이란 어떠한 것인가?"

"진작이란 것은 향악의 곡조를 이름한 것이올시다. 악부진작에 1, 2, 3, 4의 구별이 있습니다. 1진작, 2진작, 3진작이라 하옵는 바, 소리의 느리고 급한 것을 표현한 말이올시다. 1진작은 소리가 가장 느린 것이고, 2, 3, 4진작은 더 느린 것이올시다."

전하는 박연의 말씀을 듣자 미소하며 말씀을 내린다.

"경의 말에 의하면 인군된 사람은 한 번 그 가사의 뜻을 음미해볼 만하다 하니, '정과정'곡을 한 번 들어보기로 하자. 아까도 말했거니와, 향악을 아뢸 때 깨진 편종과 기와로 구워 만든 편경의 반주는 합주에 넣지 않기로 하라!"

소위 중국에서 전해왔다는 조잡하고 크고 작은 종이 난잡하게 달린 편종과 와경은 음의 혼란을 일으켜서 악이 될 수 없는 것을 전하는 확실히 판단을 내렸다. 봉상시 악공들은 분주하게 편종과 편경이 달린 가자틀을 중문밖으로 옮겼다. 전하의 윤허를 받은 정양은 악사에게 눈짓해서 '정과정'곡을 아뢰게 했다. 박이 울리고 이번엔 편종과 편경을 제외한 거문고, 가야금, 비파의 삼현과 대금, 중금, 소금이 청아한 음향을 일으켰다. 여기 맞추어 관습도감의 명기 명창들이 진작의 가사를 부르기 시작한다.

내 님을 그리아와 우니다니

산접동새 난 이슷(비슷)하요이다.

아니시며(아닌 체하며) 거츠르신들(거칠게 하시니) 아으

잔월효성이 아래시리다.

넋이라도 님은 한 대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과도 허물도 천만 없오이다.

말힛(말을) 마러신져 살읏부져, 아으

이미 나를, 하마(차마) 이자시니있가

아소(아스시오) 님아, 도람(돌이켜) 드르사 괴오(사랑)소셔.

기생들의 애원성을 머금은 청아하고 구슬픈 가락은 삼현 삼죽의 요요한 음향과 함께 전상에 싸늘한 가을바람을 일으키는 듯했다. 노래가 끝나고, 거문고와 퉁소 소리는 은은히 여운을 흘리며 멈춰졌다. 멀리서 바라보는 늙고 젊은 궁녀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이가 허다했다. 전하도 용안에 약간 쓸쓸한 빛을 띠었다. 박연에게 묻는다.

"이 가사는 고려조에 정서가 지었다는 노래가 아닌가?"

", 그러하오이다. '고려사 악지'에 나타난 것을 보면, 내시랑 정서는 인종의 척의가 있는 사람으로 많은 괴임을 인종에게 받았습니다. 인종이 돌아간 후에 의종이 즉위하자 참소를 입어서 그의 고향이 ㄴ동래로 내치게 되었습니다. 의종은 정서를 보낼 때 조정공론에 의하여 마지못해 보내지만 미구에 곧 다시 불러들이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근 20년이 되도록 불러들이지 아니하여 정서는 이 노래를 지어서 회포를 풀었다 합니다. 그 후에 의종은 이 노래를 듣고 감동되어 다시 불렀다 합니다. 과정은 정서의 호올시다. 하도 가사가 처절해 악부에 올라서 오늘날까지 고려가사로 전합니다."

전하가 말씀한다.

"고려 때 익재 이제현의 '소악부'를 보면 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노래를 한시로 표현한 것이로구나!"

박연이 대답한다.

", 익재 선생의 '소악부'는 바로 '정과정' 가사를 한시로 표현한 것이올시다. 그러하오나 우리말로 지은 이 가사의 아기자기하고 애원성 있으며 그 함축성 있는 처절한 맛은 아무리 한자를 빌려 표현한다 해도 십분의 일도 그 뜻을 바로 나타내지 못합니다."

세종전하는 초연히 한숨을 짓고 탄식하며 말씀한다.

"어서 어서 정악도 바로잡아야 하려니와,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창조해내야 하겠다. 이 곡진한 가사와 우리말의 오묘한 표현을 글로 나타내어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이것도 나의 할 일의 하나로구나."

전하는 혼자 말씀하듯 이같이 푸념 비슷한 말씀을 했다. 그러나 전하의 이 뜻깊은 말씀을 알아듣는 신하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영의정 이하 삼정승과 문형을 잡았다는 집현전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들도 무슨 말씀인지 전하의 참뜻을 촌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좌의정 맹사성이 딴전을 해 아뢴다.

"전하께서는 빠릴 종묘대제나 문묘석전에 아뢸 아악을 바로잡으시고 향악은 일체 폐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종은 정색하고 말씀을 내린다.

"향악은 자연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음이요, 악이다. 몇천 년 내려오는 이 겨레의 거짓 없는 순박한 노래를 제왕의 권력이나 경들의 힘으로 막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공식적인 종묘대제와 조정의식에 어서어서 정악을 바로잡아 슬 뿐이다. 향가는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노래다. 천지와 인산 가이에 조화되고 빚어지는 정과 한과 탄식을 경의 힘으로 어찌 막겠는가? 좋은 향가는 그대로 보존해서 편곡을 해두어야 한다. 경은 비록 좌상의 권위를 가졌다 하나 자연의 힘으로 발생해 나오는 향가와 향악은 막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일부러 옥음을 높여 껄껄 웃으셨다. 좌의정 맹사성은 그래도 전하의 넓고 깊은 음악 원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전하의 말씀이 끝나자 맹사성이 다시 아뢴다.

"태종께옵서 상왕으로 계실 때 일이올시다. 조정 연회 끝에 소신과 변계량을 대하여 하교를 내리신 일이 있습니다. '후진작은 그 음절이 비록 아름답고 좋다 하나 듣기가 괴란하구나. '말씀하시기에 소신이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올시다. 지금 악부에서는 그 곡만 악에 올리고 가사는 쓰지 아니합니다. 진작에는 만조와 평조 등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 진작이라는 것은 교려 충혜왕이 자못 음성을 좋아해서 사랑하는 궁녀들을 후전에 두고 새로운 음사를 짓게 해서 악에 올렸다 합니다. 이 노래를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후전진작이라 했습니다. 가사만 나쁠 뿐 아니라 곡조도 좋지 못합니다.'하고 아뢴 일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선왕의 명철하셨던 뜻을 참조해 살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외람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향가와 처용무

 

전하는 맹사성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용안에 엄숙한 기색을 띠며 말씀을 내린다.

"나도 당시에 승지를 통해서 태종께서 경들에게 연회 끝에 내리셨다는 말씀을 들었다. 태종께옵서 내리신 말씀은 조정 연회와 종묘대제 때 음풍이 있는 향악을 써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정악을 아악답게 바로잡아서 조정의식과 종묘대제 때 또는 문묘 석전 의식에 악공들을 가리켜서 아뢰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 내려오는 향악을 강제로 폐지시킬 수는 없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음탕한 곡조나 가사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하는 지도자가 음탕하고 악한 일을 하니 백성들은 음탕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이다. 죄는 음악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정과정' 같은 가사와 곡조는 군왕을 사모하는 연주의 지정이 넘쳐 흐르지 않는가? 이러한 향악은 계속해서 민간에 유지시키도록 하라."

세종전하는 재상 맹사성의 생각보다 훨씬 앞을 바라보는 원대한 악철학을 가졌다. 좌의정 맹사성은 코가 맥맥했다. 다시 아뢸 말이 없었다. 경시주부 정양이 아뢴다.

"전하께오서는 만기를 총람하시는 중에, 향악에 대해서 다시 감상하실 기회가 드물 줄 압니다.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향악정재를 한 번 살피시는 것이 어떠 하올지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는 모든 배신들을 둘러보시며 하문했다.

"어떠한가, 경들의 의향은?"

전하는 작은 일이라도 어느 때나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모두다,

"좋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무슨 정재를 보여주려 하느냐?"

"악과 춤에 대한 정재를 어람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어떠한 춤과 악이냐?"

"학연화대와 처용무를 합쳐서 정재하겠습니다."

전하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탈춤, 처용무는 원래 신라의 유명한 향가 처용 노래와 함께 발전되어 내려온 춤과 노래다. 세종전하가 앞으로 훈민정음인 한글을 창조하기 이전, 저 신라 때 유명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 난 대학자 설총이 한자를 빌려서 이두문을 만들어 이같이 우리말을 이두문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노래는 고려 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다. 한글로 풀어본다면,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어서 노니다가,

들어 자리에 보곤 가랄이 너이러라.

둘은 내해였고

둘은 뉘계런고.

본시 내해이다마는

앗어랄 어찌하릿고.

이같이 노래 부른 처용을 본떠서 향가와 탈춤을 만든 것이다. 이 노래와 춤의 기원은 신라 헌강왕 때 일어난 일이다. 왕이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개운포로 순행했다가, 해일을 만났다. 왕은 부처를 위하여 절을 지어 주겠다고 기도했다. 이상한 일이다. 다시 평온한 날씨로 변했다. 이때 동해 용왕의 아들이란 젊은이들이 왕 앞에 나타나 축하하는 노래와 춤을 추었다. 왕은 그중에 제일 미소년인 처용을 서울로 데리고 돌아와서 아름다운 여자를 골라 장가를 들이고 둘한이란 벼슬을 주어 꽃서방님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처용에게는 행복스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행복스런 일엔 마가 끼이기 일쑤다. 신라 경주 서울의 정월 대보름날 달밤은 밝고도 밝았다. 꽃서방님 화랑들은 패를 지어 달빛 속에 즐겁게 놀았다. 처용도 이 틈에 끼여 밤 깊은 줄 모르고 흥겹게 놀았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 보니 기막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자기 아내의 곁에는 알지 못할 남자 한 명이 누워있었다. 이 해괴망측스런 모양을 바라본 처용은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 간부를 찌르려 하다가 슬며시 마음을 돌렸다. 뽑았던 칼을 칼집에 도로 꽂은 후에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이 노래, '서라벌 밝은 달에...'하는 노래를 부르며 지게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간부는 처용이 꼭 자기를 죽일 줄 알았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처용은 호탕하게 노래를 부르며 나가버린다. 그 넓고 넓은 태도에 감동되었다. 나가는 처용을 쫓아가 절하며 신분을 밝혔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역신이올시다. 모든 죄를 용서합시오. 이후부터 당신의 모습을 그려 붙인 집에는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습니다."

처용은 대답 없이 껄걸 웃으며 휘적휘적 밖으로 나가버렸다. 과연 사내다웠다. 이 소문은 서라벌 전국에 퍼졌다. 온 나라 사람들은 역신을 쫓기 위하여 섣달 그믐날이 되면 집집마다 처용의 얼굴을 대문에 그려 붙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바가지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서 탈박을 만들어 쓰고 탈춤을 추었다. 역신과 사귀를 물리치는 풍속이 되어 몇천 년을 흘러왔다. 고려 때 유명한 재상이요 시인인 익재 이제현은 처용의 탈춤을 보고 시를 지었다.

붉은 얼굴 자개 이로

밤 달을 노래하고,

솔개 어깨에

자줏빛 소매로

으쓱 비쓱

봄바람에 두둥실 춤을 춘다.

이같이 탈춤 추는 풍속을 읊었던 것이다. '처용가'와 처용무는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서 조선왕조까지 흘러 내려온 향악이요, 향무다. 원래 처용 탈춤은 한 사람이 추었던 것이다. 검은 옷에 붉은 소매를 달고 처용탈박에 사모를 쓴 후에 '처용가'를 높이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탈춤을 추던 처용무는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오방처용으로 탈춤을 춘다. 천지간의 오행방위인 동서남북 중앙 다섯 방위의 빛깔에 응해서 청, , , , 흑 오방 처용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동방은 봄에 속하니 푸른 옷을 입고, 서방은 가을에 속하니 흰옷이요, 남방은 여름에 속하니 붉은 옷이다. 북방은 겨울에 속하니 검은 옷이요, 중앙은 흙에 속하니 누른빛이다. 이리하여 청, , , , 흑의 오방 처용이 구성된 것이다. 이같이 도교에서 기원을 가졌던 처용놀이는 또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적 색채가 섞여졌다. 보살의 연화희까지 이루게 되었다. 전각 앞에는 못이 있고 돌로 쌓아 올린 석가산이 있었다. 석가산 아래 백간들이 넓은 곳에 강화 화문석이 펼쳐졌다. 봉상시 판관 박연과 경시주부 정양은 관습도감 악사와 악공이며 기생들을 지휘하여 화문석 위에 학연화대 처용무를 시작한다. 화문석 동편 끝에는 기생 한 명이 청학이 되어 학의 옷을 입고 섰고, 서편 끝에는 또 한 명의 아름다운 기생이 백학의 옷을 입고 섰다. 화문석 자리 위 동편에 청련 한 송이가 화려하게 피어 있고, 서편엔 백련이 조촐하게 봉오리를 열었다. 박이 울렸다. 해금, 당비파, 향비파, 가야금, 현금, 아쟁, 대금, 장구가 일제히 화음을 일으켜 청아하게 울렸다. 모든 향악 소리에 맞추어 인도하는 기생이 화관 족두리로 무동이 되어 좌우편에서 춤을 추고 들어온다. 다음엔 절을 든 기생이 춤을 추며 동쪽 서쪽 양편에서 춤을 추고 들어오고, 다음에는 일산을 든 무동이 역시 좌우 양편에서 춤을 추며 들어온다. 화문석 북편엔 오방 처용이 나열해 섰고, 화문석 남쪽엔 꽃무동 네 명이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 밖으로 동기 열네 명이 역시 음률에 맞추어 상긋상긋 웃으며 교태를 지어 춤을 추었다. 박이 또 한 번 울린다. 오방 처용이 동서남북 중앙 제자리에 서서 탈춤을 덩실덩실 추기 시작했다. 탈춤을 위시하여 무동들의 춤이며, 기생들이 추는 춤은 향악 가락에 서로서로 조화되면서 해음과 화음을 일으켜 일호의 차착이 없었다. 전하는 귀를 기울여 해조된 향악의 열두 가락과 율에 맞추어 늠실늠실 추는 춤의 멋이 한 덩어리가 되어 조화되는 것을 느꼈다.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향악과 향무는 율의 조화가 소위 송, 명에서 건너왔다는 아악에 비할 바가 아니다. 훌륭한 가락과 춤이다. 썩은 선비들은 향악을 우습게 보지마는, 아악을 새로 정리하는 동시에 향악도 힘써 길러주어야 하겠다.'

전하는 이같이 생각하면서 늠실늠실 춤을 추는 처용들을 바라본다. 박이 또 한 번 울렸다. 율 가락이 변했다. 웅장했다. 우조다. 모든 무동과 기생들은 춤을 멈췄다. 오방 처용만이 늠실늠실 멋들어진 춤을 춘다. 기생들이 처용만기, 봉황음을 느린 조로 일제히 부른다.

신라성대 소성대

천하태평, 라후덕처용 아비

이시인생에 상불어하시관대

이시인생에 상불어사기관대,

삼재팔난이 일시 소멸하샀다.

어와 아비즈이여, 처용아비즈이여,

만두삽화 계오사, 기우러신 머리에

아으, 수명장원하사, 넘거신 이마에

산상 이슷(비슷), 길어신 눈닙(눈썹)

애인상견하사, 오알어신 눈에

풍입영정하사,

우글어신 귀에

홍도화같이 붉어신 모양에

오향 마터사, 응긔어신 코에

아으, 천금 머그사,

어귀어신 입에

백옥 유리가티 히여신 이빨에

인찬복성하사, 미나거신 턱에

칠보 계우사 숙거신 어깨에

길경 계우사 늘의어신 사매 길에

설미 모도아 유덕하신 가삼에

복지구속하사 브르거신 배에

홍정(붉은 가죽띠) 계우사 굽거신 허리에

동락태평하사

길이신 하퇴에

아으, 계면도라사 넙거신 발에

누고 지어세니오, 누고 지어세니오,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처용아비를 누고 지어세니오.

마아만, 마아만하니어

십이제국이 모다 지어세온.

아으, 처용아비를 마아만하니어,

머자, 외야자, 녹이야, 빨리나

내 신고 할매야라,

아니 옷 매시면 나리어다 머즌말

동경 밝은 달에 새도록 노니다가

들어 내 자리를 보니

가랑이 네히로세라.

아으, 둘흔 내해어니와

둘흔 뉘해어니오.

이런저기 처용아비 옷보시면

열병신이야 회갓이로다.

천금을 주리어, 처용아바,

칠보를 주리어, 처용아바,

천금, 칠보도 말오,

열병신을, 날 자바주소서.

산이여 뫼이여 천리외에

처용아비를 이여러거져.

아으, 열병대신의 발원이ㅅ다.

이십여 명의 기생들은 탈박을 쓰고 으쓱 비쓱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오방 처용을 항하여 어깨를 으쓱거려 마주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여성인 기생들이 남성인 처용을 공경하고 예찬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탈박을 쓴 오방 처용도 모두 다 아름다운 기생들이다. 이 장면에 나타난 '처용가'는 신라 때 처용 자신이 노래한 처용노래가 아니다. 뒷세상에서 열병신을 추방하면서 처용의 모습을 가사로 묘사해서 예찬한 노래다. 박연이 전하께 아뢴다.

"'처용가'와 처용무는 신라 때 역신이 죄를 범한 자기를 죽이지 아니한 데 감동되어, 처용의 화상을 문 앞에 그려 붙인 곳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데서 기인이 되어,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역신을 쫓는 민속춤과 노래올시다. 본조에서도 해마다 섣달 그믐 하루 전 오경 때 구나를 하는 행사를 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그 까닭에 처용이 직접 부른 노래와는 가사의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한다.

"가사는 우리말이지만 어려운 한문 문자가 많이 섞였다. 한문을 배우지 못한 우리 백성들 중에는 뜻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입으로만 부르니 딱한 일이다. 말과 글이 서로 통해야만 한다. 우리글을 빨리 만들어야 하겠다."

전하는 탄식하며 말씀을 내린다. 박이 울렸다. 오행으로 대열을 이룬 회무 춤이 시작된다. 삼현 삼죽의 모든 관현악이 제각기 아름다운 화음을 내며 울렸다. 오방작대의 처용이 춤을 다시 춘다. 북편에 흑처용이 늠실늠실 춤을 춘다. 중앙에 황처용이 누른 옷을 입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편에 적처용이 붉은 소맷자락을 올렸다 내렸다 멋들어지게 춤을 춘다. 세 사람의 처용이 일렬을 이루어 춤을 추고 동편에 청처용 한 사람, 서편에 백처용 한 사람이 동편과 서편에서 대무를 춘다. 오방 처용이 으쓱거려 춤을 추는 앞에 푸른 옷 붉은 치마 남치맛자락이 바람에 펄럭인다. 화관 족두리를 쓴 기생들이 둥글게 원을 그려 회무를 추기 시작한다. 절을 든 행수기생이 원무의 앞에 서서 춤을 추며 나가고, 다음엔 일산과 꽃가지를 든 기생들이 춤을 추며 나간다. 다음엔 이십여 명의 기생들이 화관 족두리에 눈같이 흰 한삼자락을 펄럭거려 장단에 맞추어 붉은 치마 남치맛자락을 맵시 있는 수혜로 가볍게 박차 나가고, 다음엔 향피리, 퉁소, 비파, 대금, 해금, 장구, 현금, 가야금, 월금, 방향, 아쟁, 대쟁, 교방고, 동발을 울리는 악사와 악공이 풍악을 잡히며 나가고, 다음엔 청학, 백학, 관음보살이 나가고, 또다시 연화꽃을 든 기생 수십 명이 뒤를 따랐다. 춤은 둥글게 원진을 이루어 풍악 소리와 함께 자지러졌다. 마치 만 떨기 붉고 푸르고 누른 꽃이 일시에 피어 둥글게 둥글에 움직이며 향과 빛을 뿜는 듯했다. 원진과 대를 이루어 멋들어지게 춤을 추고 있던 오방 처용들은 무척 흥이 난 모양이다. 중앙에 섰던 누른 옷 입은 탈박 쓴 황처용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만간들이 화초밭 같은 화려찬란한 원진 속으로 다리를 들었다 폈다하며 한몫을 같이 보자는 듯 춤을 추며 뛰어든다. 뒤를 이어 붉은 옷 입은 남방처용이 나도 한몫 보자고 늠실늠실 뛰어든다. 다음에는 북방에서 춤을 추던 검은 옷 입은 처용이 같은 자세로 원진 속으로 뛰어든다. 꽃가지를 든 기생들은 흰 이를 드러내 방싯방싯 웃으며 처용에게 자리를 열어준다. 푸른 옷의 동방처용과 흰 옷의 서방처용도 나도 한몫 같이하자고 뛰어든다. 풍악은 원진 속에서 걸어가면서 청청하게 울어대고, 울긋불긋 푸르고 누른 옷을 입은 기생들의 화사한 춤들은 음률 가락에 맞추어 묘기를 자랑해 보인다. 편전 아래 넓은 뜰에는 마치 만간의 움직이는 화단이 음악을 울리며 생동했다. 전하는 용안에 기쁜 빛이 가득했다. 박연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관습도감에서 무던히 교방 아이들을 가르쳤구나! 향악과 향무는 오히려 중국에서 왔다는 아악 종경의 음률보다 낫구나!"

박연이 아뢴다.

"향악과 향무는 어느 나라 악과 무에 견주어 보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손색이 없을 뿐 아니오라 앞으로 악사와 무사들이 열을 올려 잘 지도만 한다면 천하 악계에 첫손을 꼽을 것입니다. 다만 정악인 아악만은 전하께오서 새로 제정하셔야 국가의 장중한 식전과 종묘대제 때 점잖게 아뢸 수 있습니다."

이때 큰북 소리와 구리방울, 동발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악사의 박이 딱딱 쳐졌다. 원무가 그쳐지고 풍악도 소리를 멈췄다. 사람의 두근 꽃밭이 풀려지면서 순식간에 일렬횡대로 질서 있게 변했다. 전하의 계신 옥좌를 향하여 일제히 몸을 굽혀 배례를 올렸다. 전하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악공과 여기들의 배례에 답을 주셨다. 또다시 큰북과 동발과 박이 일시에 울렸다. 일렬횡대는 다시 정방형의 대오로 변했다. 오방 처용 다섯 사람은 전반으로 물러서고, 방진에는 연꽃이 좌우편으로 갈려서 놓이고, 그 밖에는 청학, 백학이 자리를 잡고 섰다. 이윽고 또다시 풍악이 청아하게 아뢰어지면서 흰 옷을 입은 묘령의 관음보살이 일지연화를 들고 의젓이 걸어 들어와 중앙 교의에 청초한 때깔로 앉았다. 마치 성처녀의 모습 같았다. 풍악은 다시 청초하게 일어났다. 동편에서 청학이 움직인다. 한 다리를 번쩍 들었다. 깃을 탁탁 쳤다. 펄쩍 뛰어 청련 쪽으로 달려들었다. 주둥이로 푸른 연꽃을 쪼기 시작했다. 서편에서도 백학이 움직였다. 역시 다리를 번쩍 들고 날개를 툭툭쳤다. 껑충 백련 쪽을 향해 뛰었다. 삐죽한 입부리로 흰 연꽃 봉오리를 쪼았다. 청련, 백련의 꽃판이 뚝뚝 날아 떨어진다. 꽃잎에 다 떨어지면서 연꽃 속에서는 청의미인과 백의미인이 나타났다. 나이 어린 동기들이다. 중앙 교의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관음보살을 항하여 아장아장 걸어갔다. 두 여인은 관음보살에게 합장을 올리고 배를 했다. 이때 풍악은 더 한 번 청아한 가락을 울렸다. 관음보살은 한 가지 연화꽃으로 두 여인의 머리를 번갈아 애무해 주었다. 음률은 또 한 번 자지러지게 아뢰어진다. 청학과 백학은 깜짝 놀라 화문석 밖으로 날아가버린다. 이것이 학연화대의 놀이다.

 

정읍사

 

박연이 전하께 아뢴다.

"연화대와 처용탈춤은 신라의 화랑정신과 불교의 자비의 신념으로 혼합된 향가와 향무의 최고의 악과 춤이올시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한다.

"좋은 정신을 가진 악과 춤이다. 잘 육성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학연화대에 관음보살이 되어 나온 아이는 누구라 하느냐? 이름이 무엇이냐?"

경시주부 정양이 박연을 대신해서 아뢴다.

"관습도감 중에 나이는 어리나 기예가 그중 출중한 아이올시다. 이름은 취옥이라 합니다."

"거문고도 잘 뜯느냐?"

"음률에 정통합니다. 거문고, 비파, 가야금, 퉁소, 피리에 다 능통할 뿐 아니오라, 가무가 또한 절묘합니다. 지금 관습도감 안에서는 취옥이 위에 갈 아이가 없습니다. 그리하옵고 궁, , , , 우 다섯가지의 이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점두하셨다. 이때 악사는 다시 박을 쳤다. 박 소리에 응해서 악공 열여섯 사람이 동편 난간으로 어전에 올라 북받침 열여섯 대를 전상에 놓고 나간다. 박이 또 한 번 울렸다. 악공은 북방망이 열여섯 개를 역시 동편 난간으로 안고 들어와 북 앞에 놓고 나갔다. 박이 또 한 번 울렸다. 고수 열여섯 명과 무기 스무 명이 전상으로 올랐다. 열여섯 개 북방망이가 '두둥둥'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기생 이십 명이 일제히 청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춤과 노래가 북잡이의 북 장단에 맞추어 멋진 가락으로 삼부예술을 이루었다.

달하(달아) 높이곰(높이) 도다사(돋으사)

어긔야 머리곰(멀리)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저재 녀러(가시었나요)신고요

어긔야 즌데(진 곳)를 디디올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는 데 점그랄(빠지실)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이십 명 기생들은 열여섯 명의 고수들이 북을 울리는 장단에 맞추어 어깨를 으쓱거려 목을 뽑는다.

노랫소리는 청아해서 너무나도 맑고도 고왔다. 노랫가락과 북 장단과 멋들어진 춤은 한데 어울려 절묘했다. 달빛이 비치지 않는 한낮이건만 전각 안에는 달이 휘영청 밝아서 은빛 같은 달빛을 부어내리는 듯했다. 마치 기생들은 달빛 속에서 춤을 추는 듯하고, 북은 달빛 속에서 월광곡을 울리는 듯했다. 이중에 취옥이란 기생의 춤과 노랫소리는 경시주부 정양이 전하께 아뢴 대로 뭇 닭 속의 학이요, 뭇 새중의 봉황조다. 노래와 춤과 북소리는 악사의 박소리와 함께 멈춰졌다. 박연이 전하께 아뢴다.

"이 노래는 신라에서 전해온 노래가 아니옵고 백제의 백성들이 애송하던 가사로서, 백제의 노래로서는 안타깝게도 다만 이 '정읍사' 한 곡이 남아 있을 뿐이올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도 실려 있지 아니한 것을, 다행히 전하께서 '고려사'를 고본대로 수정하라 하신 까닭에 새로 편찬한 '고려사 악지'의 고본에 의해서 이 가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전하는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크게 탄식하며 말씀한다.

"아깝구나! 백제 때 가사로는 '정읍사' 하나만이 전해진다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가사 이름만은 몇 개가 적혀 있습니다마는 내용은 전해지지 아니하니 가슴이 아픈 일이올시다."

"이름만 적혀 있다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지리산, 정읍이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정읍 이외에 네 가지 가사는 모두 다 인멸돼 전해지지 아니합니다."

"지금 '정읍사'의 가사를 들으니 순전한 우리 옛말인데... 우리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고려사 악지'에 적혀 있더란 말이냐? 이두로 씌어 있더냐?"

전하는 학에 대한 관심만이 깊을 뿐 아니다. 악과 가사에 대해서도 범연히 넘기지 아니했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정읍사''고려사 악지'에는 이름만 적혀 있습니다마는, 다행히 기생들의 입으로 전해져서 오늘날까지 가사의 명맥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읍은 전주의 속현이올시다. 정읍에는 등짐장수의 행상이 많았습니다. 남편 되는 사람이 장사하러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니, 그 아내가 혹이나 남편이 진구렁에 빠져서 해를 당했을까 염려하여 조바심을 치면서 달밤에 산에 올라 이 노래를 불렀다 합니다. 그리하와 세상에서는 서민들이 망부석 노래라고도 합니다."

전하는 또다시 하문한다.

"고구려의 가사도 전해지는 것이 없구나!"

"그러하옵니다. '고려사 악지'에 다면 내원성, 연양, 명주의 세 곡이 있다 했을 뿐 역시 내용은 기록되지 아니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솔밭같이 섰을 때, 제각기 훌륭한 가곡이 있었으련만, 신라 향가만 겨우 이두문으로 몇 수가 전해 있을 뿐,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가사는 다만 백제의 '정읍사'만이 입으로 전해졌을 뿐입니다."

"고려 김부식이 한문 아닌 우리 속어는 기재할 수가 없다 해서 일체 싣지 아니했다 하니 가소로운 사대벽이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아니었던들 신라의 향가 몇 수도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어서 어서 우리글을 만들어야 하겠다!"

세종전하는 어느 때나 말씀 끝에는 '어서 어서 우리글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강조했다. 전하는 또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그러나 '정읍사'는 너무나 오래된 옛말이 되어서, 요사이 사람들이 입으로 부르면서도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알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황공하옵니다마는 진정으로 아룁니다. 소신도 그 뜻은 대강 짐작합니다마는 자세히 풀이하라면 막히는 구절이 많습니다."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도 옥음을 높이하여 껄걸 웃으시며 말씀한다.

"나 역시 경과 매일반이다. 알 듯하면서 도 모를 곳이 있다. 하하하, 누가 아는 사람이 있다면 자세히 풀이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전하의 말씀을 듣자, 옆에 모시어 섰는 배신들도 어전이라 감히 소리를 내어 웃지는 못하나 입가엔 미소를 머금었다. 경시주부 정양이 아뢴다.

"기녀 중에 뜻을 풀이할 줄 아는 아이가 한 사람 있습니다."

전하는 의외라고 생각하셨다.

"기녀 중에 뜻을 풀이하는 아이가 있다? 희한하구나! 누구란 말이냐?"

"아까, 학연화대와 처용무 정재를 아뢸 때 일지 연화를 들고 관음보살이 되었던 취옥이가 제법 뜻을 풀이할 줄 압니다."

"그렇다면 그 애를 가까이 오게 하라."

경시주부 정양은 전각 아래 난간으로 내려가 관습도감 행수기생에게 취옥을 전하께 배알시키라고 지휘했다. 취옥은 뜻밖이었다. 일대의 광영이었다. 옷깃을 매만지고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향수기생에게 인도되어 사뿐사뿐 층계를 밟고 전상에 올라 어전으로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관습도감 기 취옥이 알현이오."

행수기생이 목소리를 곱게 가다듬어 옥좌를 향하여 아뢰었다. 취옥은 행수기생의 아뢰는 말이 끝나자 장지밖에서 손을 모아 큰 절을 네 번 올렸다. 전하의 시선과 배신들의 눈길이 함빡 취옥의 큰절을 드리는 곳으로 향했다. 나이는 열팔구 세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큰절을 올릴 때마다 화관 족두리에 달린 자그마한 금나비 한 쌍이 바르르 떨었다. 좁쌀같이 잘디잔 진주 구슬과 산호 구슬알들이 춤을 추는 금나비와 함께 황금빛, 진주빛, 산호빛이 서로 빛깔의 조화를 이루어 푸른 금삼, 붉은 금박 띠와 함께 오색이 눈을 현란케 했다. 취옥은 큰절을 네 번 드리자, 다시 뒷걸음을 곱게 걸어 장지문밖으로 나가, 한삼 속에 손을 넣고, 눈을 내리깔아 조신하게 서 있었다. 전하는 눈을 들어 취옥의 큰절을 받으며 일거일동을 유심하게 바라보신다. 밝은 눈매, 붉은 입술에 콧날이 오뚝 섰다. 비둘기 알같이 갸름하고 둥근, 아름답고 총기 있는 얼굴판이다. 허리는 한 줌인 듯 가늘었다. 까만 눈동자가 반짝했다. 재치있어 보였다. 전하는 옥음을 내린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취옥은 사양할 길이 없었다. 고개를 다소곳 숙이고 치맛자락을 왼손으로 휘어잡아 사뿐사뿐 걸었다. 비단치마 끌리는 소리가 사각사각 일어났다. 다시 두 손을 모아 어전 가까이 시립했다. 전하는 봉안을 굴려 한동안 취옥을 바라보다가 말씀을 내린다.

"네가 아까 학연화대 정재 때 관음보살로 나왔던 여악이냐?"

전하는 기생일망정 인간을 존중하게 생각했다. '기생이냐?'하고 묻지 아니하고 '여악이냐?'하고 물었다.

", 그러합니다."

취옥은 불그스름한 두 볼에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아까 '정읍사'도 네가 선소리를 주어서 가락을 메긴 줄 아는데..."

", 그리했소이다."

"'정읍사'를 메기는 네 목이 매우 곱다고 생각했다."

취옥은 몸을 굽혀 국궁하고 아뢴다.

"황공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전하는 취옥에게 다시 말씀을 내린다.

"'정읍사' 노래는 순전히 우리말로 된 가사다마는, 천 년 전 옛말이 되어서 그 뜻을 알아듣기 극히 어렵다. 네가 그 뜻을 알고 노래를 불렀느냐?"

취옥이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대답해 아뢴다.

"황공하오이다. 선생한테 배워서, 그 뜻을 약간 풀이해보았습니다마는, 정확하게 알았는지 쇤네도 모르겠습니다. 선생 역시 고로들에게 전해 듣고 쇤네에게 풀이를 해준 것입니다."

전하는 선생에게 '정읍사'의 풀이를 배웠다는 취옥의 아뢰는 말을 듣자 귀가 번쩍했다.

"너의 선생은 어디 있느냐?"

"'정읍사'의 본고장인 정읍에 살았습니다마는, 연만해서 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하는 탄식한다.

"허허, 아깝구나. 살았더라면 내가 풀이를 해달라고 할 것을. 그렇다면 네 고향도 정읍이냐?"

", 그러합니다. 그 까닭에 '정읍사' 가사를 선생한테 많이 익혔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아는 대로 한 번 풀이를 해보아라."

취옥은 입가에 방실 웃음을 띠고 아뢴다.

"선생한테 알기 쉽게 노래로 풀이해서 배웠습니다. 주변 없는 말씀으로 풀이해 올리는 것보다, 선생한테 배운 대로 노래로 풀이해 올리겠습니다. 상감마마께오서 윤허하신다면 배운 대로 풀이를 해보겠습니다."

전하는 흥취 있게 생각했다.

"그것 더욱 좋구나! 노래로 풀이를 한다면 삼현 삼죽을 다 불러들여야 하겠구나."

"아니올시다. 음의 장단을 맞춰주는 고수 한 명만 배치해주시면 좋습니다."

전하는 경시주부 정양에게 분부한다.

"그렇다면 고수 한 명을 전상으로 불러올려라."

정양은 전하의 분부를 받들었다. 이윽고 붉은 악복을 입은 고수 한 명이 북과 북채를 들고 전상으로 올라 어전 지척에 북을 놓았다.

"자아, 풀이한 노래를 시작해보아라."

전하는 친히 지휘를 내렸다. 취옥은 자리를 옮겨 곱게 일어섰다. 고수에게 눈짓을 했다. 북이 '둥둥' 울렸다. 취옥은 목을 가볍게 가다듬었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달아 높이 돋으시어

어긔야 멀리 비추어주소서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저자에 가시었나요

어긔야 진 데를 밟으실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어느 곳에 노시다가

어긔야 냇물에 빠지실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취옥은 북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맑은 노래와 묘한 춤은 전상에 전하를 모신 모든 시신들의 마음을 여지없이 도취시켜버렸다. 전하도 취옥을 귀엽게 보셨다. 은근히 봉안을 들어 미소를 보내셨다. 고수는 마지막 변죽을 북방망이로 '두둥둥' 울리고 방망이를 놓았다. 취옥의 노래와 춤도 북 장단과 함께 멈춰졌다. 고수는 자리를 떠서 물러가고, 취옥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바로잡은 후에 전하의 옥좌를 향하여 배를 드린 후에 치마꼬리를 휩싸안고 뒷걸음을 쳐 물러간다.

"게 있거라. 이제 네 선생이 요새 말로 풀이해준 네 노래를 들으니, 비로소 이 노래를 지어서 부른,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향하여 안타까워했던 그 여인의 간절한 심정을 짐작해 알겠다. 네 선생이 살아있었던들 향악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물어볼 일이 많았을 텐데,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니 아쉬운 마음 간절하다."

취옥은 영리했다. 관습도감인 교방에서 훌륭한 교양을 많이 받았다. 이런 때는 어른 앞에서 함부로 말을 많이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공하오이다."

한 마디를 올리고 화관 쓴 머리를 다소곳 숙여 조용히 섰다. 새침한 조선적 여인미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청초하게 흘렀다. 전하는 바라보시며 더욱 귀엽게 생각했다. 취옥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정읍사' 첫 연에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고 한 '머리곰'을 무슨 뜻인지 몰랐더니 네가 풀이한 노래를 듣고보니, 과연 '멀리'란 뜻이 옳고, '저재 녀러신고요''녀려'의 뜻도 '간다'는 뜻이 옳다. '천자문'에도 행을 '녈행'이라고 읽는다. 그리고 둘째 연 둘째 구에, '즌데를 디디올세라' 했으니 셋째 연 둘째 가락에 '내 가는 데 점그랄세라'는 네가 풀이해 노래한 대로 '냇물에 빠지실세라'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한자의 침자를 '잠길 침'이라 읽지 않느냐? 멀리 간 남편이 돌아올 때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니 '행여나 진구렁에나 빠지지 아니했나? 냇물에나 빠지지 아니했나?' 하고 초조하게 지내면서 산에 올라 바라보는 그 여인의 모습이 눈에 환히 보이는 듯하구나!"

취옥은 두 손길을 마주 잡은 채 고개를 숙여 미소를 지어 전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뿐 말씀 대꾸를 아니한다.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가 아뢴다.

"그러하오이다. 여악이 풀이한 노래가 맞습니다.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행자는 간다는 뜻이고, 침자는 '점기다', '잠기다' 이같이 읽습니다."

전하는 다시 취옥을 향하여 물으신다.

"노래 끝마다 나오는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란 말은 너희 선생이 무슨 뜻이라 하더냐?"

취옥은 여전히 머리를 다소곳 숙인 채 미소를 짓고 대답해 아뢴다.

"아무 뜻이 없이 본 노래를 흥취 있게 도와주는 말이라 들었습니다."

"옳다, 분명하다. 후렴이로구나."

박연이 아뢴다.

"그것은 마치 같은 고려가사 '청산별곡'의 끝절마다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 얄라'와 동동 노래에 끝마나 나오는 '아으 동동다리'와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경시주부 정양 아뢴다.

"지금도 민간에는 동동 노래가 전해옵니다. 귀여운 어린 것을 안고 얼려줄 때도 '둥둥 둥게야, 둥게 둥게 둥게야' 하고 불러줍니다. 모두 다 아무 뜻 없이 흥을 돕는 후렴이올시다."

 

거서가 해주에 나고

 

전하는 모든 배신들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오늘은 좋은 모임을 가져서 과인의 마음이 매우 유쾌하다. 나라를 다르시는 데 예와 악은 백성을 기르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경들은 과인을 도와 국가의 정악인 아악을 새로 제정하려니와 좋은 향악은 관습도감인 교방에서 더욱 육성시켜서 수천 년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를 인멸시키지 말도록 하라."

"삼가 성지를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영의정 황희는 군신을 대표하여 아뢰고 어전에서 물러난다. 모든 신하들도 영의정의 뒤를 따랐다. 기생 취옥도 전하께 하직인사를 아뢴 후에 전 아래로 내려가 악사와 악공과 동료들과 함께 관습도감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전하는 승지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봉상시 판관 박연을 불차탁용해서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하라."

불차탁용이란 등급을 뛰어서 차서를 밟지 아니하고 발탁해서 쓰는 것이다. 전하는 박연이 악리에 달통한 것을 아시자 일약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하신 것이다. 승지는 명을 받들어 교지를 곧 봉상시 판관 박연에게 전달했다. 제조란 관습도감을 통솔하는 당상관으로 관습도감의 최고의 자리다. 박연은 교지를 받들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왕의 은총이 높고 높은 것을 가지가지 느꼈다. 감격한 눈물이 글썽거렸다. 사람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데 마음이 감동된 진정한 눈물이었다. 박연은 집으로 돌아가 뿔관자를 떼고 옥관자를 망건편자에 달았다. 관디에 달았던 단학흉배를 떼고, 당상관이 관복 앞가슴과 등에 다는 쌍학흉배를 달았다. 사은 숙배를 드리기 위하여 곧 예궐했다. 정원에 들어가 전하께 알현할 것을 의뢰했다. 전하는 지체없이 박연을 인견하셨다. 박연은 전하께 네 번 절하여 숙배를 한 후에 국궁하여 아뢴다.

"왕은이 융숭하사 아무것도 모르는 미신에게 관습도감 제조의 임무를 하명하시니 황공 감격한 마음 이길 길 없소이다. 분골쇄신해서 관습도감의 모든 일을 바로잡겠습니다."

전하는 용안에 기쁜 빛을 띠고 말씀한다.

"조정에 악리를 아는 사람은 다만 경 한 사람뿐이다. 경은 전심 연구하여 나라의 독특한 아악을 제작하라."

박연이 아뢴다.

"먼저 소신이 하올 일은 교방의 악사와 악공이며 여악들에게 후한 녹봉을 주어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주면서 악에 대한 원리와 실기를 연마하고 발양시키는 한편, 전하께서 항상 미흡하게 생각하시는 정악의 종경을 새로 조성해서 가와 악이 혼연일치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악사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일은 전하께오서 호조에 하명만 하신다면 가능한 일이올시다마는, 송과 명의 종경보다 더 훌륭한 악기를 조성하기는 어려운 일이올시다."

전하는 웃으며 박연이 아뢰는 말씀에 대답하신다.

"사람 대접를 박하게 하면서 좋은 수확을 거두라고 할 수는 없다. 악사들도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이다. 가족의 생활을 보장해서 후고의 염려가 없도록 한 연후에 비로소 전심전력을 다해서 훌륭한 악을 창조할 것 아닌가? 요사이 악사와 악공의 대우가 너무나 박하다는 것은 과인도 잘 알고 있다. 호조에 명을 내려서 그들의 가족의 생활을 보장시키도록 하리라. 다음, 경이 말한 아악에 사용할 종경에 대해서는 경과 과인이 중지를 모아 화음이 나도록 악기를 새로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천하의 만 가지 일이 사람이 해서 되지 않는 법은 없다. 정성과 끈기가 없어서 항상 일을 시작했다가 귀찮다고 내던지는 바람에 일은 와해가 되어버리고 만다. 정성을 다하면 쇠와 돌도 녹인다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주 시대에 마련되었던 아악이 진, , , , , , , 명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민멸되어 정통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는 왜 주공만큼 아악을 창조치 못할 까닭이 있는가. 노력만 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일심을 다하여 악을 창조하기로 하자!"

전하의 용안엔 패기가 넘쳤다. 박연은 성주를 만나서 자기의 평생 소원인 악을 바로잡게 되는 날이 시작되는 것이 크게 기뻤다.

"전하께오서 악사와 악공들의 생활을 보장해서 후고의 염려가 없도록 하겠다고 하교하시고, 기어코 아악을 예법에 의하여 다시 창조하시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시니, 악사들의 사기는 더욱 진작이 될 것입니다. 미신도 성상의 크신 뜻을 받들어 기어코 창악의 굄돌이 되겠습니다."

박연은 말을 마치자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서 전하께 받들어 올렸다. 전하는 어수로 친히 책을 받으시며 하문한다.

"무슨 책인가?"

"일전에 아뢴 바 있는 채씨의 '율려신서'올시다. 한 번 보시겠다 하셨삽기, 집에 두었던 책을 바치옵니다."

"집현전과 예문관에도 없는 것을 경이 좋이 간직하고 있었다. 나의 음악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번 읽어보리라."

전하는 기쁘게 '율려신서'를 받으셨다. 박연은 책을 바친 후에 다시 아뢴다.

"소신은 이제 관습도감으로 나가서 전하의 성지를 악사와 악공들에게 전달하고 악리에 대하여 전심하겠습니다."

"그리하라. 과인 역시 악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보리라!"

전하는 박연의 물러가는 것을 허락했다. 박연은 사은을 마친 후에 부풀어 오르는 크나큰 희망을 가득 품고 관습도감으로 돌아간다. 박연이 물러간 후에 전하는 승지를 불러 호조판서의 입시를 명했다. 호판은 전하의 별안간 부르시는 소명을 받고 급히 예궐해 어전에 배알했다. 전하는 호판에 분부한다.

"우리나라 악사와 악공에 대한 대우가 너무나 녹봉이 박하다. 이제부터 나라의 정악을 바로잡아서 크게 예악 문물을 발양시켜야 하겠다. 악사와 악공들의 녹봉이 얼마나 되느냐?"

"악사의 녹봉은 보통 서리의 녹봉과 같사옵고, 악공들은 훨씬 그 아래올시다."

"말이 되느냐. 악사는 서리 이상의 녹봉을 주고, 악공은 서리와 동등하게 대우하라."

호조판서는 명을 받들고 나갔다. 호조판서는 어명을 받들어 악사와 악공들의 녹봉을 높이는 일을 관습도감에 기별했다. 악사와 악공들의 기뻐하는 모습은 형언할 길이 없었다. 도감의 사기는 부쩍 올랐다. 한편 전하는 박연에게서 채씨 '율려신서'를 받은 후에 밤을 도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연이 아뢴 대로 악을 구성하는 고저장단의 음의 배치와 종경의 열두 가락은 강론한 이론이 정밀하고 법도가 있었다. 전하는 세 번 네 번 읽으며 탄식했다.

이튿날 전하는 승지에게 경연 자리를 마련하라 했다. 경연은 근정전 북편에 있는 사정전에 마련되었다. 이번 경연관으로 명소를 받은 사람들은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관습도감 제조 박연, 경시주부 정양,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찬성 허주, 총제 정초, 신상, 권진들이었다. 전하는 모든 신하를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오늘 경연을 연 것은 유학을 토론하기 위하여 연 것이 아니라 국가의 예악을 상정하기 위하여 대신 이하 악에 대하여 조예가 있는 이들을 명소한 것이다. 경들은 오늘 과인이 연 경연의 특별한 뜻을 알아주기 바란다."

모든 신하들은 오늘 개최되는 경연의 뜻을 비로소 알았다. 모두 다 귀를 기울여 전하의 말씀을 경건하게 듣는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옛 선각들이 저술한 악에 대한 서론을 읽어보니 과연 탄복할 만한 심오한 천지조화의 이치를 가진 것이 음악이다. 과인이 친히 악서를 읽어서 공부해보니, 나라의 지도자로서 반드시 나라의 정악을 창조해야만 하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임금된 자가 이 일을 성취해놓지 못한다면 임금될 자격이 없다!"

전하의 봉안에는 패기와 열기가 역력히 드러났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악서에 말하기를,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나서 살게 된다. 생활을 하니 정이 있어 유정한 사람이 되고 정이 발해서 소리가 된다 한다. 그럴듯한 논리다. 그 소리는 무엇을 응해서 일어나는가? 대자연인 하늘 기운의 오분과 대지의 기운 오분이 합해서 십합이 되어 중앙의 흙, 곧 토성을 내는 관이 된다 한다. 진실로 오묘한 학설이다."

박연이 아뢴다.

"그러합니다. 요사이 음악과 악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이 흥이 나서 장단을 두드리면 그대로 음악이 되고 노래가 되는 줄 압니다마는 사람의 말하는 고저장단의 소리도 모두 다 대자연과 합하는 천, , 인 세 물체의 조화로 금목수화토 오행으로 이룩된 것이올시다."

전하는 악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시자 신명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박연은 과인보다도 악에 대하여 연구가 더 깊은 사람이니 경에게는 묻지 아니하리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테니 경은 잠자코 있으라."

말씀을 마치자 전하는 쾌활하게 웃으셨다. 모든 신하들도 일제히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경연 자리엔 화기가 가득했다. 전하는 용안에 웃음을 머금고 영의정 황희한테 물으신다.

", , , , 우의 오음은 천지와 조화를 이룬 오행에서 발생되어 다섯 가지 음계를 이루어 중앙토는 궁성이 되었거니와, 상성은 천과 지가 어떤 정도로 결합되어 소리를 내게 되었는가? 영의정은 한 번 대답해보라."

황희는 웃음을 머금고 아뢴다.

"소신은 왕은이 융숭하시어 영상의 대배를 받자왔으나 악리에 대해서는 무식하옵니다. 다만 상성은 서방에 속하니 가을 소리를 내는 줄 알 뿐이올시다."

황희는 순박한 인후장자였다. 솔직하게 꾸밈 없이 대답했다. 전하는 옥음을 높여 쾌활하게 웃으며 말씀한다.

"상성은 가을 소리라 하니, 그만하면 급제라 하겠소. 영상도 악에 대해서는 유식한 편이오. 과인도 더 이상은 몰랐는데, 채씨 '율려신서'에 의해서 큰 공부를 했소이다. 궁성은 천의 오와 지의 오, 곧 십이 합해서 중앙 토성이 되었거니와, 상성은 하늘의 다섯과 땅의 넷, 곧 구가 합해서 금기를 서방에 이룩해서 상성이 되었다 하오. 그러므로 상성은 궁성보다 약하고 애조를 띠었다 할 수 있소."

모든 신하들은 함께 놀랐다. 전하의 악학 공부가 이같이 심오한 줄은 전혀 몰랐다. 서로들 눈짓을 해 감탄한다. 좌의정 맹사성이 전하께 묻는다.

"신은 선비가 하는 짓이라 해서 거문고를 타는 체했습니다만, 악의 이치가 이같이 천지조화로 어울려 일어나는 것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각성은 천지의 어떠한 수치로 구성되었습니까?"

전하는 막힘없이 대답하신다.

"과인도 생이지지한 것은 아니오. 악서에 의하면 하늘의 삼분과 땅의 오분이 합해서 팔이 되어 목기가 동방에 생기니 이것이 곧 각성이 된다 하오. 각성은 나무 치는 소리라 대자연과 음향의 관계가 이같이 신묘하구려... 좌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이 이치를 음미해 보시오."

박연과 정양 두 사람은 악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전하의 일람첩기로 악철학에 달통하신 데 대하여 마음속으로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한다.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가 아뢴다.

"신도 악에 대해서는 알려고 노력했습니다마는, 오늘 비로소 전하께 배운 바가 많습니다. 그러하오면 치와 천지간의 관계는 어찌되는지 하교를 내려주옵소서."

전하는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하늘의 칠분과 땅의 이분, 곧 구분이 합해서 남방의 화가 되어 그 소리가 치가 된다 한다. 그럴듯한 이론이다."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이 아뢴다.

", , , 치 사음에 대한 원리를 잘 알았습니다. 나머지 우에 대하여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더한층 신명이 났다. 유사눌을 향하여 옥음을 내린다.

"우의 소리는 하늘의 일분과 대지의 육분이 합해서 칠분이 되어 북방의 수기가 되어 우성이 되었다 한다. 이리하여 다섯 가지 오음은 금, , , , 토 오행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 확실하다."

"이제 천지오행과 오음과의 관계를 대강 짐작했습니다."

예문관 대제학이 감탄하여 아뢰었다. 전하는 박연을 향하여 하문한다.

"과인은 창졸간에 악서 공부를하여 음이 오행에 관계되는 것을 짐작했거니와, 다섯 가지 음의 특징이 어떠한 것인지는 아직 연구해보지 못했다. 경은 아는 대로 그 특징을 말해보아라."

박연이 자리를 사양하며 겸손하게 아뢴다.

"신이 감히 무슨 악리를 잘 안다고 성상전하와 여러 대신들 앞에서 주제넘게 아는 체하고 아뢰겠습니까. 면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정색하고 말씀한다.

"오늘은 공부하는 경연 자리다. 임금과 신하와 대신과 막료의 구별이 있을 까닭이 없다. 바른 말과 옳은 일로 학문을 연구하는 자리다. 사양치 말고 오음의 특징을 말해다오!"

박연은 하는 수 없었다. 자기의 지식을 털어놓는다.

"궁은 중앙에 있으나 군왕의 기상이올시다. 상성, 각성, 치성, 우성을 화창케하여 통솔하게 되니 사성의 벼리가 되는 것이올시다. 음의 성정은 모지지 않고 원만합니다. 그 소리는 마치 소가 굴속에서 우렁차게 우는 듯하며 그 소리가 웅장하고 홍대합니다. 마치 임금이 만조백관의 신하들을 거느리는 듯한 기상이올시다. 그 가락이 화하면 나라가 태평하고, 그 가라기 격하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세종대왕은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용안에 숙연한 빛을 띠고 탄식조로 말씀한다.

"국가에 유행하는 음악 한 가지로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렸구나!"

"그렇습니다. 임금인 지도자가 방탕하니 백성이 방탕하고 음악이 난맥을 이룹니다. 임금이 근검하면 백성이 근검하고, 백성이 근검하면 음악도 정기를 가지게 됩니다."

"과연 지도자가 되는 임금 노릇 가기가 이같이 어렵구나!"

전하는 또 한 번 탄식하며 다시 묻는다.

"다음은 상에 대해서 성격을 말하여라."

"상성의 성격은 모집니다. 소리는 장장 쟁쟁해서 쇳소리, 돌 소리가 납니다. 마치 양이 무리 속에서 떨어져서 홀로 우는 듯하지요. 그러하니 법을 맡은 법관의 기상이올시다. 가락이 고르게 일어나면 형옥을 일으키지 아니해도 위령이 서고, 가락이 어지러우면 기강이 무너져서, 관을 불신하게 됩니다."

"다음 각에 대해서 말해보아라."

"각은 물건에 부딛쳐서 일어나는 소리올시다. 그 성정이 강직하고, 그 음향은 마치 닭이 나무를 쪼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홰를 쳐서 잘 울게 되면 그 소리가 악악확확해서 족히 큰 사업을 이룩하여 민생이 태평할 수 있고, 가락이 황란하면 민원이 창천하게 됩니다."

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물으신다.

"그러면 다음엔 치와 우에 대한 음의 성격을 설명하라."

박연이 지체치 않고 아뢴다.

"치의 음정은 한 마디로 말씀해서 복스럽다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만물이 성대하고 번화해서 그 정이 명랑하니 마치 돼지가 어린 새끼를 등에 업고 희희낙락하게 꿀꿀거리며 소리치는 형국이올시다. 가락이 조화되면 백 가지 일이 잘 다스려지고, 조율이 어지러우면 모든 공적이 수포로 돌아 가버립니다."

"우조에 대하여 말해 보라."

"우의 음정은 윤택하면서 그 소리는 마치 천리준마가 평원광야로 '어흥' 소리를 치며 뛰닫는 듯합니다. 가락이 화하게 나타나면 국가의 백곡이 창고에 가득차고, 그 가락이 난맥을 이루면 백성들은 굶주림을 면치 못합니다."

오음의 성정과 음정이며 가락의 화와 난을 강론받는 전하는, 음악은 실로 천지와 인간의 조화로 이룩되어 국가의 흥망성쇠와 치란득실에 크게 관계되는 것을 깨달았다. 전하는 모든 시신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한다.

"사람이 즐거우면 덮어놓고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고 장단을 맞추는 것으로만 알았더니, 이같이 천지조화 속에 인간이 한몫을 보면서 국가의 흥망성쇠에까지 그 영향이 크게 미치는 거임을 과인은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예적 선철이 나라를 건국하는 초창기에 있어서 제례작악을 해서 백성들이 행해야 할 예의를 정돈하고 백성들이 즐거워 할 음악을 창조한 것은 모두 다 까닭이 있는 일이다. 나라가 망하게 될 때 백성들의 부르는 노래가 황음하고, 나라가 흥했을 때 그 노래가 화창한 것은 천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그러나 우리들 지도자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결코 음과 악이 황하고 어지럽고 격해서 그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다. 죄는 황란한 음악에 있지 않고, 황음무도한 지도자한테 그 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 서민의 행동과 나라의 풍조는 지도하는 사람들을 따라가는 법이다. 임금이 황란하니 대신이 황란하고, 대신이 탐포하니 백관이 부정부패하여 황란한 짓을 감행하고, 백관이 그 꼴이 되니 황란한 음악을 좋아해서 창녀들은 백관의 비위를 맞춰서 난잡한 노래와 춤을 추니 국가의 풍속에 이러한 악풍조에 휩쓸려서 결국 온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결딴이 나는 법이다. 임금된 자와 보필하는 신하들은 다 함께 명심해서 어진 정치와 화기 가득한 문화와 심오한 학술을 창조하여 백성들을 지도해야 하겠다. 경들은 명심하라!"

전하의 말씀은 엄숙하고 장중했다.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오늘 경연은 성리학을 강론하는 자리보다 더 크나큰 수확을 얻었습니다. 신도 악의 묘리가 이같이 국가 흥망성쇠에 크게 영향이 미치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삼가 앞으로 전하께오서 정악을 창조하시는 데 극진히 보필하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아악을 창조하는 데 영의정 이하 모든 백관들의 보필을 바란다."

말씀을 마치자 이날의 경연은 끝났다. 다음날 전하는 승지를 어전에 불러 분부를 내린다.

"나라가 있으면 국민이 있고, 국민이 있으면 그들을 옳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화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교화를 백성들에게 침윤시켜서 순풍미속을 질서 있게 유지시키는 데는 예와 악이 가장 그 근본이 되는 것이다. 나는 과감하게 예악을 바로잡아서 민심을 진과 선과 미의 길로 인도하려고 결심했다. 이것은 국가를 통솔하는 왕자의 책임이다. 나 혼자 이 거창한 일을 하려하나 힘이 벅차서 되지 아니한다. 여기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이를 선택해서 마치 예문관과 집현전을 설치하여 문학에 전심 연구하듯 악에 대하여ㅛ 전문으로 연구할 곳을 마련해줄 작정이다. 너의 뜻이 어떠하냐?"

전하는 당신의 명령을 전달시키는 승지와 대언에까지도 항상 의견을 물어보는 아름다운 성격을 가졌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울 때, 불치하문이란 말이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준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왕의 최고 지위에 있으면서도 항상 아랫사람들에게 행정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전하의 하문을 받은 승지는 감격했다. 제왕이 되어 백성들을 순화시키기 위하여 따로 연구하는 기관을 설치하겠다는 말씀은 가장 적절한 의사라 생각했다.

"명철하옵신 분부올시다. 정악을 창조하자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가 합니다. 전심으로 연구하는 기관을 두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아악을 창제하는 일도 크지마는, 수천 년 전해오는 향악도 바로잡아서 난잡한 노래는 버리게 하고 아름다운 가사를 좋은 곡에 올려서 화한 기운이 한 나라에 가득하도록 정리해야 하겠다. 먼저 구악을 이정시키는 도감을 두고 또다시 의례상정소를 설치하여 소임을 배정시키도록 하여라."

승지는 명을 받들고 다시 아뢴다.

"구악 이정도감에는 누구누구를 배속시키고, 의례상정소에는 누구누구를 배치시킬는지 하교를 내려 주시옵소서."

전하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분부한다.

"의례상정소에는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총제 정초, 신상, 권진으로 제조를 삼아 의례를 상정하게 하고, 구악이정도감에는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관습도감 제조 박연, 경시주부 정양으로 소임을 겸임시켜서 구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창제하는 임무를 맡게 하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고 곧 정원으로 나가 어명에 의하여 집현전 옆에 의례상정소를 설치하고, 관습도감 안에는 구악이정도감을 두게 했다. 일변 전하께서 지명한 대신과 대제학들에게는 맡은 바 임무를 전달했다. 빈청에만 모여서 정사를 살피던 대신들은 정사가 끝나면 의례상정소에 나가 밤늦도록 의례를 심정하고, 집현전과 예문관 대제학들은 날마다 관습도감으로 나가서 박연, 정양과 함께 악에 대한 연구를 강론했다. 전하 또한, 특별히 관습도감에 분부해서 거문고와 가야금과 비파며 대금, 중금, 소금 등 삼현 삼죽을 편전에 배치시켰다. 친히 악서를 보고 악을 연구하려는 의도였다. 전하는 구악이정도감과 의례상정소를 설치한 후에 항상 오음에 율관을 조화시켜서 십이율을 창제하려고 노력했다. 십이율, 곧 열두 가락의 화성을 내는 율은 먼저 황종률을 측정해 놓아야만 열두 가락의 음조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황종은 율의 시작이 되는 때문이다. 먼저 황종을 정해놔야만 십이율이 조화를 이루는 때문이다. 그러나 황종의 율관을 측정할 표준이 없었다. 박연은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연구에 연구를 더했다. 그러나 얼른 효력을 얻지 못했다. 세종전하도 관심이 컸다. 박연을 명소하여 경과를 하문했다.

"그동안 황종에 대하여 측정할 희망이 있는가?"

"황공하오나 아직도 성취를 못 했습니다."

전하도 갑갑증이 났다.

"도대체 황종이란 무엇인가? 두드리는 종소린가?"

박연이 아뢴다.

"황종이란 십이율 중에 처음 시작되는 율관의 명칭이올시다. 십이율이란 양이 여섯 가락이요, 음이 여섯 가락이 되어 십이율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천지조화와 음양오행으로 율이 이룩되는 것이라 합니다."

전하는 더한층 갑갑하게 생각했다.

"황종률을 측정해서 똑바른 음을 내기가 어렵다면 고대에서는 어떻게 황종을 조성했더란 말인가?"

박연이 다시 아뢴다.

"옛글을 참고해보면, 주공은 태란 땅에서 거서를 얻어서 이것으로 율관을 측정해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내게 했고, 그 후에 한 시대에서는 임성이란 땅에서 거서가 나서 겨우 옛 음절에 근사했고, 수 시대에 와서는 양두산 기장을 구해다가 율관을 만들었으나 소리가 해조를 이루지 못했고, 송 시대에는 경성의 거서를 따서 율을 맞추려 했으나 역시 난조를 이루어 악이 불성 모양이 되었다 합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아무리 거서로 촌과 분을 마련해서 율관을 만든다 하나 야무진 거서를 구하기 전에는 훌륭한 정악을 제작하기 과연 어렵습니다. 이것은 묘한 이치올시다."

박연은 아뢰기를 다하자 가슴이 답답했다. 한숨을 짓는다. 전하도 위연히 탄식하며 말씀한다.

"거서란 것은 검은 기장 쌀이 아닌가?"

"그러하오이다. 검은 기장이올시다."

"우리나라에 검은 기장이 그렇게 귀하단 말인가?"

"기장이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극히 귀합니다. 남도의 쌀은 광택이 나면서 비대하고, 경기의 쌀은 수척하고 알이 작습니다. 더구나 동북면으로 가면 가늘고 윤택하지 못합니다. 이러하니 쌀과 마찬가지로 거서가 혹시 있다 해도 크고 작은 차이가 심해서 율관을 제작하는 데 치수를 맞추기 극히 곤란합니다."

전하는 박연에게 분부한다.

"중국의 아악은 주공이 태 지방에서 채취한 거서를 가져서 제일가는 황종률을 제작했다 하니, 우리나라에도 혹시 그와 같은 거서가 있을는지 모른다. 경은 낙망하지 말고 팔도 감사에게 영을 내려서 거서가 생산되는 곳을 시급하게 조사하라."

박연은 전하의 분부를 받고 팔도 감사에게 의뢰해서 거서가 나는 곳을 시급하게 조사했다. 거서란 검은 기장 쌀이다. 옛날에 생산되던 기장 쌀이다. 그러나 백미의 생산량이 풍부하고 맛이 좋으니 농가에서는 기장을 심지 아니했다. 기장을 심는 곳이 극히 드물었다. 이득이 없는 때문이다. 더구나 검은 기장쌀은 극히 드물었다. 팔도 감사는 어명이었다. 고을마다 방방곡곡에 영을 내려 기장을 구해보았다. 그러나 한 군데도 가장을 심은 곳은 없었다. 검은 기장은 더군다나 구할 도리가 없었다. 감사마다 군수마다 검은 기장 쌀은 구할 도리가 없다는 보고가 빗발치듯 서울로 들어왔다. 관습도감 제조 박연이 절망 상태에 빠져 있을 때, 홀연 해주 관찰사한테서 역마를 달려서 검은 기장 쌀 소두 한 말을 바쳐왔다. 박연이 받아보니 확실히 거서라 하는 검은 기장 쌀이다. 알도 굵고 기름져서 윤택했다. 박연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입궐해서 전하께 아뢰었다.

"거서가 황해도에서 났습니다. 황해감사가 역마를 달려서 급히 올려보냈습니다. 알도 굵고 윤기가 흐릅니다. 모두 다 전하의 흉복이올시다. 전하의 지극하신 정성에 하늘도 감동이 되어 거서가 나왔나 봅니다!"

전하도 크게 기뻤다.

"거서가 해주에서 나왔단 말이냐? 이리 가져오너라. 나도 검은 기장은 처음 대해본다. 어디 살펴보자..."

박연은 소매 속에서 봉지에 싼 거서 한 봉지를 꺼내어 바쳤다. 윤이 차분하게 흘렀다. 전하의 용안엔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이 주공이 황종률을 제정했을 때 죽관에 율을 측정했던 거서로구려..."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전하는 다시 박연을 향하여 말씀한다.

"이제 경과 과인의 소원이 성취되려나 보오."

"하늘이 주신 복이올시다. 먼저 황종을 조절할 기틀이 생겼습니다."

박연도 기뻤다. 웃음빛이 넘쳐흘러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하문한다.

"황종률이 정해진 후에는 음과 양으로 나뉘어진 십이율을 고루고루 정해놔야 하겠구려!"

", 그러하오이다. '천자문'에도 율려조양이란 글이 있습니다. 율은 양이요, 여는 음이올시다. 율이 여섯이요, 여가 여섯이 되어 십이율이 성립됩니다. 황종의 죽관은 길이가 아홉 치올시다. 거서의 알이 일 푼이 되니 거서 열 립을 쌓아서 한 치를 측정합니다. 이리해서 황종은 거서 구십 립을 누적해서 아홉 치가 됩니다. 그러나 거서의 알이 또한 크고 작아서 고르지가 못하니, 그중 충실한 놈을 골라서 밀로 크고 작은 차이가 나지 않도록 고르게 해서 황종이 성관됩니다."

전하는 박연의 악에 대한 조예를 깊이 믿었다.

"이제 다행히 해주에 거서가 나서 나라의 악을 바로할 기틀을 만들게 되었다. 경은 정확하게 십이율을 조성해서 조정의식과 종묘대제 때 만드시 아악을 아뢰도록 하라."

박연은 청령하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해주에서 거서가 나왔다는 일은 온 나라에 자자했다. 지난번 사정전에서 예악을 토론하는 경연에 참예했던 신상이, 거서가 해주에서 나서 전하와 박연이 크게 기뻐하고, 이어서 박연이 독대를 드려서 황종을 제정하는 악리를 말씀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원을 통하여 전하께 상소를 올렸다.

'거서가 해주에 나서 황종을 제정할 기틀을 얻었사오니 국가의 크나큰 경사올시다. 거서로 율관을 측정하는 일은 한 사람의 슬기만으로는 되기 어렵습니다. 박연이 비록 악리에는 능하다 하오나 중지를 모아서 정확한 아악을 조성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좌의정 맹사성과 함께 율을 조성하도록 분부를 내려 주시옵소서.'

전하는 신상의 상소를 보시고 곧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맹사성은 거문고를 사랑해서 오현금을 희롱할 줄 아는 것은 과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영악의 지위를 주어 영관습도감사를 제수시켰다. 그러나 정무에 일이 많은 좌의정으로 어찌 황종률을 제정하는 일에 전심하라 할 수 있는가? 악리를 연구하는 일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일년 이태 삼년 사년 몇 해가 걸릴지 모른다. 거서로 율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박연이 율관을 조성한 후에 중국의 황종과, 박연이 조성한 율관과 대조해서 그 음을 살펴본다면 해조가 되는지 불협화가 생기는지 누가 듣고도 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책임은 유능한 사람을 택해서 한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작사도방이 되면, 제각기 떠들어서 일이 되지 않는 법이다. 박연은 반드시 영악 맹사성에게 진행되는 일을 보고할 것이다. 딴소리 하지 말라...'

신상은 전하의 비답을 받은 후에 다시 말씀을 올리지 못했다. 전하는 한 번 사람의 능력을 판단한 후에는 어떠한 살이 천언만어를 올려도 듣지 아니했다. 능력이 있다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써서 확고부동하게 믿는 때문, 아랫사람들은 심열성복해서 온갖 정성과 심혈을 다 기울여 기어코 맡은 바 일을 성취시키고 말게 된다. 이 점이 세종대왕을, 다른 임금들이 성취하지 못했던 천백 가지 큰일을 가지가지로 성취시켜서 조선왕조의 정치와 문화를 임금 노릇 한지 겨우 32년에 세계사상 유례없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큰 공적을 쌓아 올린 성주가 되게 하였다. 대마도 정벌도 국위를 선양시킨 일이지만, 육진 개척을 단행할 때도 모든 갑론을박을 물리치고 김종서를 믿고 써서 기어코 큰 성공을 이룩했다. 세종은 항상 말씀했다. 내가 육진 개척의 엄두를 낸 것은 김종서의 장한 뜻에서 출발이 되었고, 또 내가 아니었던들 김종서는 육진 개척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이 바로 세종의 인품을 드러낸 것이요, 훌륭한 일을 가지가지로 성공해서 국가와 국민을 복되게 했던 그분의 특출한 성격이었다. 이번 아악을 창제하고 향악을 육성시키는 일에도 세종은 같은 성격을 발휘했다. 박연이라야 반드시 아악을 창제하고 보호육성시킬 만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육진 개척 때와 꼭 마찬가지 경위다. 김종서라야만 육진 개척을 할 것을 믿은 거와 같이, 아악의 창제는 박연이라야 꼭 성공할 것을 안 까닭이다. 박연은 신상이 맹정승과 함께 일을 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일과, 전하께서 작사도방이 되면 일이 성취되기 어렵다는 비답을 내리셨다는 소문을 듣자, 전하의 자기를 알아주시는 그 큰 뜻에 감격한 마음을 억제할 길 없었다. 혼자 서실에 앉아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기어코 정악을 창제하고 향악도 보호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더욱더욱 굳어졌다. 자나깨나 율에 대해서 궁리를 하고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 악서를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단정히 홀로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손으로 장단을 맞추어 보기도 했다. 높은 소리, 낮은 소리, 평성, 후성, 맑은소리, 탁한 소리를 시험해 보았다. 밤에도 홀로 앉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같이 심혼을 기울였다. 낮에는 관습도감에 나가 악사들을 데리고 밀을 녹여서 거서와 똑같은 쌀알을 만들어 깎고 저며서 아홉 치짜리 죽관을 만들었다. 악서의 치수에 맞춰서 죽관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율이 황종이 되고 여는 대려가 된다. 율은 태주가 되고 여는 협종이 된다. 율은 고선이 되고 여는 중려가 된다. 율은 유빈이 되고 여는 임종이 된다. 율은 이칙이 되고 여는 남려가 된다. 율은 무역이 되고 여는 응종이 된다. 이리하여 율의 여섯 곡조와 여의 여섯 곡조가 합해서 음양의 십이율을 이룩했다. 박연은 정양과 함께 거서를 얻은 후에 궁, , , , 우 오음에 다시 음향을 조화해서 율과 여 열두 율을 제작했다. 박연과 정양은 도제조 맹사성을 청해놓고, 악사와 악공이며 교방의 여악들을 모아 새로 만들어진 황종의 율과 여를 시험했다. 다섯 음은 열두 율로 가락을 변하면서 청아하고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과 혼을 어루만져 주고 달래주고 정숙하게 하고 인자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관습도감이 설치된 이래 일찍 아뢰어보지 못했던 아름답고 해조된 차원 높은 음향이었다. 모두 다 기쁜 빛이 얼굴에 넘쳤다. 이중에 가장 기쁜 빛을 띤 사람은 좌의정 맹사성과 창조자인 박연을 위시하여, 박연을 도와서 십이율을 성공해놓은 정양과 아름다운 새 곡조를 마음대로 희롱해서 거문고, 가야금, 대금, 중금, 소금에 올려서 가락에 맞출 만한 재능이 있는, '정읍사'를 노래하던 취옥이었다. 좌의정 맹사성은 이 크나큰 기쁨을 시급히 대왕 전하께 아뢰었다.

"전하께오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독려하고 지휘하셨던 황종을 주 시대의 옛법에 의해서 박연이 창제했습니다."

맹사성의 아뢰는 말씀을 들은 전하는 희색이 만면했다.

"뜻밖에 거서가 나와서 경들이 이러한 큰일을 무난하게 성취했으니 국가의 흥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장한 일이다!"

대왕은 영악인 도제조 맹사성에게 찬사를 보냈다.

"모두 다 박연이 침식을 잊고 밤과 낮으로 일심전력을 다하여 이룬 것이올시다. 박연에게 칭찬을 내려주시옵소서."

전하는 껄껄 웃으셨다. 심신이 상쾌한 때문이다.

"박연이 칭찬을 받을 사람인가? 좌상은 아직 박연의 인품을 짐작하지 못하는구려! 그 사람은 칭찬을 받기 위하여 잃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일은 곧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인 것을 잘 알고 있소. 내가 칭찬을 해준다면 도리어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오, 좌상은 염려하지 마시오. 하하하."

대왕의 신하를 부리는 성격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맹사성은 국축해서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고 부복해 있었다. 전하는 옆에 모시어 있는 승지를 향하여 분부를 내린다.

"이번에 하늘이 도와서 해주에 거서가 난 것을 계기로 해서 관습도감 제조 박연이 심혈을 기울여 거서를 표준으로하여 황종을 제정하고 ㄸ다시 십이율을 완성했다 한다. 내가 친히 한 번 시청해보려 한다. 지난번에 악에 대한 경연을 열었던 사정전에 당시 모였던 사람과 관습도감의 악사와 악공이며 여악들을 참여케하여 새로 제정된 황종 십이율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봉상시와 관습도감에 기별해서 오늘 안으로 거행케 하라!"

전하는 새로 모든 악을 제정하는 데 근본이 되는 황종을 창제한 것이 무한 기뻤다. 생각대로 한다면 지금이라도 곧 관습도감에 거둥령을 놓아 새로된 율을 듣고 싶었으나, 제왕의 체면상 도감으로 행차할 수는 없었다. 편전에서 새 음악을 들을 결정을 했다. 관습도감과 봉상시에서는 승지를 통하여 어명을 받고 곧 악기와 악사와 여악을 준비해서 관습도감 제조 박연의 지휘로 사정전으로 들어갔다. 한편 사정전에는 전례와 같이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예문관학 유사눌,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총제 정초, 신상, 권진, 경시주부 정양 등이 전하의 출어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공과 악사들은 새로 창제한 황종죽관과,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 등의 십이율려의 대로 만든 악기를 잡은 열두 악공들이 오모홍포로 전각 분합밖에 늘어앉았고, 다음 줄에는 황종 십이율을 반주할 예로부터 전해왔던 거문고, 비파, 향비파, 가야금을 안고 있는 악공들이 역시 오모홍포로 후열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새로 제작된 황종률 가락 열두 곡이 변할 때마다 일호의 차착이 없이 가야금으로 반주를 잘 한다고 인정을 받은 '정읍사'의 명가수요, 여악인 취옥이 화관당의에 요조한 태도로 가야금을 앞에 가로놓고 조용히 서서 전하의 납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차 새로 창제된 황종률 십이가락을 전하께 들려 드리려는 장면이다. 전각 안은 긴장될 대로 긴장되었다. 조용하고 엄숙했다. 영의정 황희 이하 관습도감 제조 박연에 이르기까지 제제다사가 금관복과 사모품대로 전하의 출어하시기를 기다려 정제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전하는 정식으로 조회받는 자리가 아니라 저모립 통영갓에 인모 탕건을 쓰고 은옥색 도포에 도홍 쌍방울띠를 가슴에 높직이 둘러띠고 승지와 내관을 거느려 만면에 기쁜 빛을 띠고 천천히 옥보를 옮기어 군신과 악공들을 둘러보시며 옥좌에 앉아 말씀을 내린다.

"오늘 영상 이하 제제다사를 한자리에 모아 새로 창제된 황종률과 이에 따른 십이죽관을 감상하는 내 마음 기쁘기 한량없다. 모두 다 경들이 과인을 잘 보필해서 여태껏 우리나라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악을 창제하게 되었으니, 이 일은 과인과 경들과 오늘에 살고 있는 모든 국민들의 경사와 기쁨만이 아니라, 이 정확하고 바른 정악을 우리 후손들에게 전하여 나라의 문물이 얼마나 훌륭했다는 것을 대대손손 자랑하고 사랑하고 지켜가게 될 수 있으니 그 기쁨이 더욱 큰 것이다. 어떻든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이미 없어진 이 갸륵한 황종률의 십이율을 제정한 것은 무한 유쾌한 일이다!"

대왕의 말씀은 마치 구슬이 옥소반에 구르는 듯 음성이 화창하고, 난초잎이 미풍에 소리없이 흔들리며 한 송이 백란 꽃에서 맑은 향훈을 발산시키는 듯했다. 모든 신하들은 전하의 격 높은 말씀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질 뿐이었다. 전각 안은 악사와 악공과 백관들의 옷빛으로 화려했으나 조용한 정적이 잠시 흘렀다. 영의정 황희가 군신을 대표하여 아뢴다.

"오늘 전하의 국가를 사랑하고 국민의 문물을 향상시키시는 이 자리에 한 가지 빠진 일이 있습니다. 동궁저하는 전하의 뒤를 받들어 민초를 육성시킬 분이올시다. 악이 창제되는 이 자리에 반드시 참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취옥

 

전하는 영의정 황희의 아뢰는 말을 들으시자 용안이 화사하게 열렸다.

"영성의 말을 들으니 내 잠깐 생각이 들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예악을 제정하는 것은 국가의 대사라, 당연히 세자를 이 자리에 참관케 해야 할 것이다. 내관은 빨리 동궁에 나가 입시를 명하라!"

내관은 곧 동궁으로 나가 어명을 전했다. 이때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은 경복궁 근정전 동편에 있는 자선당이었다. 동궁의 휘는 ''이니 다음에 문종이 될 분이다. 품성이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전하가 예악을 새로 제정하시기 위하여 항상 문신들을 모아 악에 대한 경연까지 여시고 실지로 향악과 아악을 감상하신 일이며, 해주에서 거서가 나서 박연이 황종을 제정했다는 소식을 보덕과 필선들 동궁대부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세자는 천성이 너그럽고, 인자하고 지성스러우며 근엄했다. 얼굴은 관옥같이 청수하고 칠흑 같은 수염은 길고도 화사했다. 역대 세자 중에 제일가는 미남자다. 명나라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세자의 준수한 모습을 대해보고 세상에 짝을 구할 수 없는 품위 높은 웅위한 봉안이라고 칭송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세자가 된 지 20년에 항상, 자선당과 옆에 있는 계조당에 서연을 열고, 조관 중에 학식이 깊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 첨사의 명칭을 주어 시강을 삼고, 집현전 학사 열 사람을 뽑아서 서연관을 삼아 날마다 성리학을 강론했다.

서연이란 무엇인가 하나, 제왕이 문신들과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는 경연이라 하고, 세자가 학문을 연구하는 자리는 서연이라 하는 것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서연관에 뽑힌 사람들은 정인지, 최만리, 성삼문, 신숙주 등이었다. 동궁은 항상 서연과 거실에서 학문만 연구하고 여색을 가까이하지 아니했다. 학식이 고명해서 고금서적을 아니 읽어 본 것이 없다. 더욱 성리학에 정통해서 일가견을 이루었다. 여러 서연관들과 학문을 토론할 때 학자들은 선철들의 학설을 가지고 이론이 분분하게 되면, 세자는 모든 학문이 성리 길로 귀일이 되는 것을 간명하게 주장해서 모든 학자들이 다시는 입을 벌리지 못할 만큼 세자의 학문은 정통했다. 성리학 공부에만 투철한 것이 아니다. 글씨도 잘 썼다. 체법은 조송설을 무색하게 했다. 초서와 예서도 달필이었다. 동궁은 서연 이외에도 항상 달 밝은 밤이 되면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자선당에서 내려 달빛을 밟으며 집현전으로 향했다. 시자한 사람도 따르지 못하게 했다. 집현전에는 성삼문, 신숙주 등이 숙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있었다. 돌연 세자가 연통도 없이 집현전으로 오르니, 숙직하던 신숙주와 성삼문은 당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집현전 학사 신숙주, 성삼문 둘은 급히 의관을 바로 하고 세자저하를 맞이했다. 황망히 세자를 향하여 배들을 올렸다. 세자는 손을 들어 만류하면서 답례하며 말한다.

"내가 학사들에게 학문에 대하여 의심되는 일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이같이 어렵게 생각한다면 다시는 오지 못하겠소이다. 세자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친구의 자격으로 찾은 것이니, 이다음부터는 이러한 형식의 구애는 서로 아니하기로 합시다. 하 하 하."

세자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말했다. 신숙주와 성삼문도 웃음을 짓고 조용히 대답했다.

"집현전 유신으로 있으면서 세자저하께 예를 폐한다면 이 나라에 누가 예와 의를 지키겠습니까. 동궁저하는 아예 그러한 분부는 내리지 마시옵소서. 절하여 맞이하는 것은 선비들의 예올시다."

세자도 미소를 짓고 다시 더 말을 아니했다. 집현전 시동이 향다를 올렸다. 달빛이 휘영청 집현전 마루판에 가득했다. 세자는 손으로 다종을 들었다. 찻잔에 달빛이 가득 떠 있었다. 들었던 찻잔을 다시 청 위에 놓았다. 달빛이 더한층 찻잔에 빛을 부었다. 세자는 웃으며 두 학사를 바라보고 추파를 흘렸다. 두 학사는 세자가 차를 마시려다가 마시지 아니하고 다시 청 위에 놓는 까닭을 몰랐다. 두 학사는 무심코 찻잔을 들었다. 들었다가, 세자가 찻잔을 내려놓고 마시지 않는 것을 보자 자기들이 먼저 마시기 미안했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까닭은 모르지만 세자보다 먼저 마시는 것이 예에 어긋나는 듯한 때문이다. 세자가 말씀한다.

"향다를 주어서 향기를 마시려 했더니 뜻밖에 달이 찻잔 안에 가득히 떠서 달까지 마시게 되는구려. 기막힌 운치로구려!"

그제서야 두 학사는 세자가 차를 들다가 찻잔을 내려놓고 유심하게 바라보는 뜻을 알았다. 성삼문이 대답해 아뢴다.

"저하의 말씀은 시적 운치올시다. 그러나 저의 의견은 다릅니다. 차는 실존이고 달은 허영입니다. 운치만 가지고 사물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성삼문은 고지식하게 대답한다. 동궁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성과 이는 어떠하다 생각하오?"

"성리는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향다와 월광을 한꺼번에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아니겠소? 하하하."

동궁은 소리 높여 껄껄 웃었다. 성삼문은 잠시 말대답이 궁했다. 신숙주가 고한다.

"전하의 시운은 성리귀일에 연결됩니다. 허영도 물체는 물체올시다. 허즉실 실즉허올시다."

만좌는 소리 높여 웃었다. 세자는 성리귀일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같이 달 밝은 밤에 집현전을 찾아서 학문을 토론한 것이다. 이후부터 세자는 날마다 인적이 고요한 깊은 밤중이 되면 반드시 집현전을 찾았다.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은 밤이 깊어 자정 때가 넘도록 감히 옷을 풀고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하루는 자정이 지나도 세자의 학보는 움직이지 아니했다. 집현전 학사 성삼문 등은 서로들 의논했다.

"인제 자정이 훨씬 넘어서 닭이 홰를 치기 시작했으니, 세자께서는 오시지 않는 모양일세. 자아, 이제 옷을 풀고 자리에 들기로 하세."

모두들 마음 놓고 자리에 들었다. 성학사 삼문도 단념을 하고 누웠을 때 집현전 뜰 앞에 홀연 신발 끄는 소리가 일어났다.

"근보! 근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근보는 성삼문의 자다. 세자의 음성이다. 성삼문은 깜짝 놀랐다. 황망하게 자리에 일어나 옷을 고쳐 입고 뜰에 내려 세자를 맞이했다. 밤을 지새며 날이 밝도록 학문을 토론했다. 이후부터 집현전에 있는 성삼문은 밤이 깊도록 옷을 풀지 못하고 세자의 학보를 기다려서 서로의 학문을 토론했다. 세자의 학문을 탐구하는 지성스런 노력은 이같이 대단했다. 세자는 학문의 연구가 심오해서 성리학에 일가견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고금의 제왕들의 선정과 민간의 고락이며 농경과 양잠과 원통하고 억울하게 형벌을 당하는 민정까지 자세하게 살피고 알아두었다. 앞으로 부왕을 보필하여 국가를 융성케 해보려는 책임감을 가진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세자는 글씨를 잘 쓰고 문장도 일류급에 속했다. 글씨는 해자, 행서는 말할 것도 없고 초서와 예서도 능란했다. 글은 붓을 잡으면 낙필성장이다. 생각은 번개치듯 영감을 일으켜서 학자와 유생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까닭에 세자는 거처하는 자선당과 연구하는 계조당 이외에는 나가지 아니하고, 다만 한밤중 달 밝은 밤이면 집현전으로 나가 학사들을 찾는 이외엔 별로 중문밖에 나가지 아니했다. 세종전하가 수렵하는 행차에도 사양하고 배행을 아니했다. 어느 날 세종전하는 세자궁에 좌필선을 겸한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와 우문학 최만리를 어전에 불러 물었다.

"경들은 동궁대부의 직책을 겸한 사람들이다. 동궁에 대하여 물어 볼 일이 있다. 숨김없이 대답하라."

엄숙한 얼굴빛을 짓고 물었다. 정인지와 최만리는 전하의 소명을 받들고 들어갔으나 무슨 일인지 몰랐다가, 엄숙한 빛을 띠고 동궁에 대하여 묻겠다는 하교를 듣자 두 사람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동궁은 평소에 전하의 신임을 받을 뿐 아니라, 조야가 다 존경하는 분이다. 무슨 일을 하문하겠다는 전하의 뜻을 헤아릴 길 없었다. 우문학 최만리가 아뢴다.

"전하께오서 소신들에게 돌연 동궁에 대한 일을 하문하시니, 신은 어의가 어느 곳에 계신지 알 길이 없습니다. 동궁에 대해서는 서연 자리에서 모시고 학문을 토론하는 저희들보다 전하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동궁께오서는 전하께 아침저녁으로 혼정신성을 하시고 다음에는 자선당과 계조당에서 항상 거처하시면서 한 번도 궁밖에 납시는 일이 없습니다. 다시 아뢰거니와 동궁에 대한 일은 전하께서 더 잘 아실 줄 압니다."

최만리는 고지식하고, 변통성 없는 무뚝뚝한 사람이다. 솔직하게 꾸밈없이 말했다. 아무런 말재주도 부리지 않고 불쑥 아뢴다. 전형적인 경상도 친구다. 전하는 고지식한 최만리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미소하며 대답한다.

"내가 어찌 내 아들의 성정을 모르랴마는, 근자에 세자는 일체 궁문 밖에 나갔다는 말이 없고, 궁중에만 들어앉아 있으니 혹시 몸이 불편해서 그러한가 염려가 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희완하는 데로 마음이 쏠려서 밖에 나가기를 싫어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다. 일전에 내가 교외에 거둥을 했을 때도 배행을 하지 아니했기로 경들에게 묻는 것이다."

정인지가 안상한 말소리로 아뢴다.

"동궁저하는 진실로 호학하시는 분이옵니다. 집현전에도 달 밝은 밤이면 반드시 학가를 옮기시어 밤새도록 젊은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십니다. 학문을 일심전력을 다하여 공부하고 연마하는 분이 어느 하가에 매를 날리고 성악을 좋아하며 사냥하는 구경을 하겠습니까? 실로 세자는 앞으로 대왕 전하의 정치를 문무 경전하게 이어 받들어서 국가를 번영시킬 분이올시다."

최만리가 다시 무뚝뚝한 사투리로 아뢴다.

"전하는 세자에 대하여 무엇을 근심하십니까. 세자는 성색을 멀리하시고 학문에만 열심하십니다. 어느 하가에 희완을 좋아하실 수 있습니까? 전하는 절대로 세자한테 대해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정인지가 또 아뢴다.

"듣자오니 전하께서는 앵도를 좋아하신다 합니다. 그리하와 세자께서는 자선당 옆에 앵도밭을 크게 만들어놓고 손수 정성을 들여 앵도를 심었다 합니다. 이러한 효성이 지극한 세자를 전하는 어찌하여 의심하십니까?"

전하는 웃으며 말씀한다.

"사실 나는 앵도를 좋아한다. 세자가 심은 앵도는 다른 곳에서 진상 들어온 것보다도 구슬 같은 붉은 앵도가 과연 달고도 싱싱해서 아름다웠다. 해마다 잘 먹는다."

최만리가 다시 아뢴다.

"전하는 세자에 대해서 털끝만큼이라도 염려하시는 생각을 두지 마시옵소서. 너무 지나치게 학문에 집착하십니다. 성리학 공부에 대해서는 당금에 있어서 노사숙유라도 따라갈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기뻤다.

"지나친 과찬이다!"

전하는 한마디를 하시고 마음속으로 세자를 더욱 미덥게 생각했다. 이것이 요사이 전하의 세자에 대한 심정이다. 한편 세자는 전하의 부름을 받고 사정전으로 올랐다. 전상과 전하에는 영의정과 황희, 좌의정 맹사성을 위시하여 박연, 정양, 정초, 정인지, 유사눌들 대관과 관습도감의 악사와 악공이며 여악들이 박연에 의하여 새로 제작된 가지각색의 황종 이하 악기들을 가득히 벌여놓고 있었다. 세자는 원유관, 강사포의 정복을 입고, 추창해서 전상으로 올랐다. 진실로 선풍도골의 풍채였다. 얼굴은 관옥 같고 수염은 아름다웠다. 영의정 황희 이하 모든 조관들은 들어오는 세자를 향하여 경의를 표하고 일제히 일어섰다. 세자는 옹용한 태도로 추창해 전상에 오른 후에, 옥좌에 좌정해 앉으신 세종전하께 사배를 올려 사후를 드리고 미소를 지어 조용히 어전 지척에 시립했다. 전하는 세자의 질서 있는 걸음걸이와 세자다운 전아한 태도에 마음속으로 만족함을 느꼈다. 미소를 지어 화한 옥음을 세자에게 내린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먼저 올바른 예와 악을 정해서 국민의 문화를 높이고, 화한 기운으로 국가를 편안하도록 지도해야 하는 것은 예로부터 치국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과의 관계도 화평한 기상으로 유명이 다르지만 영감을 교류시켜서 역시 국태민안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례에도 악을 아뢰는 것은 신을 즐겁게 하고 화합하게 하기 위하여 종묘대제를 위시하여 사직제와 문묘에도 악을 아뢰게 되는 것이다. 지난번에 세자도 종묘대제 때 배행해서 참배한 일이 있거니와, 옛날 고려 때 송에서 가져온 악기와 태조 때 명에서 가져온 악기의 음향을 들어보니, 모두 다 화성이 나지 아니하고 조잡하고 격한 소리가 났다. 알아보니 종경의 악기는 기왓장으로 구워 만든 것이다. 이것으로 도저히 국악이라 할 수는 없다. 다행히 지음하는 난계 박연이 있어서 오랫동안 나하고 악기를 연구하던 끝에 하늘이 도와서 해주에 거서가 나타났다. 거서는 옛적 주공이 황종률을 측정하던 표준이다. 이제 거서로 황종 이하 십이율을 새로 제정해서 오늘 새로운 음을 대신들과 함께 시험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예악을 신조하여 시청하는 자리에 세자가 동석을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입시를 명한 것이니 세자도 새로운 율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하라."

세자는 고개를 숙여 대답한다.

"황감하옵니다."

다만 간단한 한 말씀을 간명하게 올렸다. 세자의 명랑하면서도 말이 많지 아니한 성격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전하는 영의정 이하 재신들에게 말씀을 내린다.

"새로운 악기로 황종 이하 십이율을 시험하자면 상당한 시각이 걸릴 것이다. 더구나 황정승과 맹정승은 노재상이다. 섰지 말고 앉아서 새로 된 율을 감상하라."

영의정 이하 모든 시신들은 전하의 분부에 따라 조용히 질서를 차려 앉기 시작했다. 전하는 아직도 지척에 시립해 섰는 동궁에게도 분부를 내렸다.

"세자도 섰지 말고 자리에 앉으라."

시측해 있던 대전내관이 따로 세자의 좌석을 마련해 올렸다. 세자는 두어 번 사양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넓고 넓은 전각 안에는 강화 화문석을 폭을 연해 가득하게 깔아 놓았다. 중앙에는 박연이 새로 제정한 황종률 이하 십이율의 악기를 든 악공들이 음양율려의 순으로 오모홍포의 정장으로 대기하고 있고, 좌우 옆에는 여악이 열두 명씩 악기 음에 응하여 창을 부르기 위하여 화관 당의에 붉은 치마를 두르고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하면서 명모단한으로 아리땁게 추파를 흘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황종률이 제정되기 전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삼현 삼죽만으로 신라의 향기와 고려가사의 삼진작이며 백제가사 중에 다만 하나 남아 있는 '정읍사'를 시험해 보았거니와, 이제는 향가와 고려가사 이후에 나타는 시조를 창으로 불러서 궁, , , , 우에 배정하여 십이율에 응해 부르는 것이 어떠한가?"

박연이 대답해 아뢴다.

"시조는 순전한 우리말로 조율에 맞추어 창으로만 전해온 것이올시다. 황종률에 의해서 시청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지 아니해도 새로이 율을 바로잡은 후에 관습도감인 교방에서는 많이 시조창법을 가르쳐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시조의 창법을 들어보기로 하리라."

박연이 다시 아뢴다.

"시조의 가사는 고려말 이후부터 창으로 많이 전해졌습니다. 어떠한 시조를 불러 볼지 하교를 내려 주시옵소서."

세종은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이내 말씀을 내린다.

"바쁜 몸에 내가 어찌 시조를 연구해볼 틈이 있으랴. 전해 들으니, 태종께오서 포의로 계실 때 포은 정몽주 선생을 달래기 위하여 시조로 즉흥시를 지어 노래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일이 있다. 내가 새로이 황종률을 제정하고보니 선대왕 전하를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첫 번째로 태종대왕께서 즉흥으로 노래하셨다는 시조를 율에 들어보기로 하자!"

박연은 악사에게 명했다. 태종이 아직 여조에 포의로 계실 때 태조를 위하여 창업을 꿈꿀 때 정포은과 화답했던 시조를 지휘하라 했다. 악사는 여악과 악공들에게 두루 이른 후에 시작하라는 박을 울렸다. 먼저 노랫소리가 시작된다. 뒤에 따라 십이관의 율려로 배치된 화음이 높고 낮게 은근하고 씩씩하게 일어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하리라.

관악에 맞추어 시조의 창을 부르는 여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난번 처용무 학연화대에 관음보살도 되고 '정읍사'를 풀이하면서 청아하게 불러서 전하의 마음을 약간 흔들어놓았던 바로 그 취옥이다. 새로 거서에 의하여 정확한 황종률의 표준을 얻어서 만들어진 십이율 아름다운 음향은, 율과 여의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맑고도 씩씩한 악이 되어 옥자루로 금소반을 두드리는 듯했다. 여기다가 관악에 맞추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하리라.

청을 뽑아 창을 부르는 여악 취옥의 화창하고 청아한 목청은 옥을 부수는 듯 금을 울리는 듯 청청하게 넘어가는 가락은, 사정전 대들보 위 높고 높은 소란반자에 황금으로 아로새긴 황룡, 청룡의 용머리를 흔들어놓는 듯했다. 세종전하는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 시원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전하의 고막을 흔들어 여지없이 상쾌하다. 선대왕 태종의 씩씩하고 패기있는 모습이 눈앞에 환하게 떠오른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모습이 나타났다. 연엽 소반 담박한 주안상이 보였다. 전왕 태종이 청자 술병을 들어 송순주를 삼감국화배에 가득 붓고 기운차게 이 노래를 부르면서 쇠퇴해가는 고려 왕실을 버리고 함께 일을 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보자고 권하는 모습이 눈에 나타난다. 누가 옳고 그르고 간에 창을 듣는 전하의 어깨가 으쓱했다. 취옥의 노랫소리는 마지막 종장으로,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하리라.'

끝을 막는다. 십이율관의 관악이 웅장한 여운을 흘리며 스르르 멈춰진다. 일찍이 전에 듣지 못했던 율과 창의 조화된 아름다운 화성의 절정이다. 전하의 용안이 활짝 열렸다. 세자 이하 모든 시신들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하늘이 나라에 복을 주시어 황종률의 진정한 법칙을 찾았으니 기쁘기 한량없다. 영악 맹사성 이하 관습도감 제조 박연과 경시주부 정양 등의 노고에 치사한다."

맹사성 이하 박연, 정양은 일제히 일어나서 사은하는 뜻을 표했다. 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묻는다.

"지금 부른 곳은 우조인 듯한데, 과연 그러한가?"

전하는 그동안 악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했다. 박연이 미소를 짓고 대답해 아뢴다.

"그러합니다. 우조올시다."

"음조가 화창하면서 매우 씩씩하구나!"

"선대왕 태종의 늠름하신 기상과 가사의 성격에 비추어 우조로 편곡을 했습니다. 우조의 음성은 성률이 청철장려해서 대장군이 철편을 휘두르며, 천리준마를 달려서 백만대병을 지휘하는 기상이올시다."

전하의 용안은 더욱 화창했다. 박연에게 다시 말씀를 내린다.

"음률에 음향이 있고 만 가지 물체에 대가 있듯이, 선대왕 태종께서 창을 하신 데 대해서 포은 선생이 화답한 시조가 전해온다. 이 시조를 율관에 올려서 창을 부를 수 있느냐?"

모든 신하들은 전하의 바다같이 넓고 넓은 아량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포은은 태종의 반대파였던 때문이다. 박연이 아뢴다.

"성상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당장 율관과 창으로 합주케 하겠습니다."

"당시에 포은은 우리 선대왕을 따르지 아니했지만, 고려조로 볼 때 그분의 정충대절은 신하로서 당연히 취해야만 할 갸륵한 태도다. 모든 신하들은 이분의 높은 절개를 사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는 포은 선생이 선대왕편이 되지 아니했다 해서 조금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분이 화답했다는 시조를 율관에 올려서 여악으로 창하게 하라!"

모든 신하들은 유림의 정통으로서 충의를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세종전하의 너그럽고 넓고 큰 도량을 가진 말씀을 다시 한번 더 듣자, 오뉴월 삼복중에 시원한 얼음 냉수 한 사발을 마시는 듯 오장육부까지 시원함을 느꼈다. 경시주부 정양이 악사에게 전한다.

"정포은 선생이 태종대왕의 시조에 화답했던 가곡을 율관과 창으로 합주케 하라."

악사는 악공과 여악 취옥에게 눈짓을 하고 박을 울렸다. 웅장한 관악과 함께 여악인 취옥의 창이 미끈하게 청을 뽑는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창도 처절하고 관악의 울리는 소리도 처절했다. 장사가 긴 칼을 비껴들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막막강병의 적진을 뚫고 적토명마를 타고 최후의 일각까지 횡행천리하며 대항하는 듯한 장쾌한 음조다. 악공들은 자기의 놀리는 죽관 가락에 도취되어 열 손가락을 죽관 구멍에 대었다 놓았다 하며 홍포 자락에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린다. 창을 부르는 취옥도 맑고 맑은 목을 놓아 율관에 맞추어 높고 낮게, 길고 짧게 가락을 굴리면서 기막하고 벅차고, 늠름한 가사에 도취되어 붉은 입술엔 서릿발이 서리고 총기 있는 두 눈엔 진주 같은 눈물이 금방 굴러떨어질 듯 글썽거렸다. 창을 부르고 악기를 놀리는 취옥과 악공들뿐만이 아니다. 듣는 사람들, 세종전하와 세자의 눈에도 구슬픈 빛이 용안과 봉안에 선연하게 감돌았다. 영의정 황희 이하 모든 시신의 얼굴에도 추연한 슬픈 빛이 떠돌았다. 관디 소매로 잠깐 눈을 가리는 사람도 있었다. 기악과 노래는 그쳐지고 박이 울렸다. 전상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이 노래도 우조로 편곡을 했구나!"

", 그러하옵니다."

"창도 잘 불렀고, 율도 상승이다. 율과 창이 얼싸안아 어울려 들어가니, 마치 홍문연 잔치 때 번쾌가 뛰어들어 검무를 추는 듯 웅장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놓는구나! 가사도 가사려니와 악이란 이같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구나!"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거서로 황종률을 다시 찾아내어 율도 훌륭하고 창도 좋이 잘 부릅니다마는, 선대왕 태종마마의 호쾌하신 웅지와 포은 선생의 결연한 의기로 엉클어진 즉흥적인 시조가 이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감동시키는 것이올시다."

전하는 껄껄 웃으며 대답을 내린다.

"그러기에 악서에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어서 천, , 인 삼재가 조화를 이루어놓는 것이 악이라 하지 아니했는가? 그러므로 훌륭한 악은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두레에 이같이 위대한 감동과 힘을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연이 아뢴다.

"또 하나의 장쾌 웅혼한 가곡을 아뢰겠습니다."

"누구의 가곡인가?"

"이지란의 시조올시다."

"여진 사람 퉁두란으로 태조대왕을 도와 개국 공신까지 되고 태조께서 이씨로 사성을 했던 사람의 시조란 말인가?"

", 그러합니다. 시조의 가사가 하도 웅장하기로 이번에 편곡을 하와 교방에 전습시켰사옵니다."

"들어보기로 하자!"

박연은 악사에게 퉁두란의 시조를 율에 맞추어 취옥에게 창을 하라 했다. 악사의 박이 울리고 장구의 장단이 '쿵당 쿵당당'울리기 시작했다. 취옥의 청이 길게 뽑아진다. 협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초산에 우는 범과

패택에 잠긴 용이

토운생풍하니 기세도 장할시고

진나라의

외로운 사슴은

갈 곳 몰라 하더라.

창과 율과 장구는 높고 낮고 길고 짧은 웅장한 창음을 내며, 삼장을 끝마쳤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탄식해 말씀한다.

"가사가 웅장 호쾌하구나. 퉁두란은 우리 태종대왕을 패공이었던 한고조에 비하고, 고려의 공양왕을 진나라 외로운 사슴에 비하여 이 노래를 부른 것이로구나!"

"그렇습니다. 태조대왕을 잠룡에 비해서 그 영웅의 기상을 기탁해 지은 노래올시다."

세종전하는 다시 탄식하며 말씀한다.

"이 노래를 잘 보존해서 관습도감에서 더욱 익히게 하라. 취옥의 창법이 좋다고 그 애한테만 시키지 말고, 다른 여악들에게도 잘 전승케 하라. 우리말이 있고 우리 가사가 있으나 이런 가사를 우리글로 표현해서 자손만대에 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전하는 이번에도 우리글로 아름다운 가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세종은 말씀을 마친 후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전에 모시고 있는 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를 불러라."

이때 김종서는 육진 개척을 끝마치고 잠시 아뢸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내관은 어명을 받들고 융무루에 대기하고 있는 김종서에게 급히 입시의 명을 전했다. 김종서는 창황히 어전에 부복했다. 전하는 만면에 화색을 띠고 김종서에게 하문한다.

"과인이 일찍 들으니, 경이 육진 개척을 하며 여진 무리들을 쫓아낼 때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하여 기운찬 노래를 불렀다는 말을 종사관 신숙주한테서 들은 일이 있다. 그때 숙주가 옮기는 그 가사를 매우 아름답게 들었다. 지금 황종을 새로 창조해서 좋은 가사를 율에 올려서, 교방에 전습시켜 뒷세상에 전하려 한다. 입으로 옮겨보아라."

김종서는 비로소 율관을 창조한 자리에 뜻밖에 부르신 뜻을 알았다. 부복해 아뢴다.

"황감하여이다. 잠시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읊어본 노래를 어찌 감히 천청에 이바지하겠습니까? 분부를 거두어주옵소서."

"별소리가 다 많구나. 노래는 사람의 인품과 기상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양치 말고 외어보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다시 악사와 취옥을 항하여 하문한다.

"도절제사가 옮기는 말을 듣고 너희들은 곧 편곡을 해서 율관과 창에 맞출 수 있느냐?"

취옥이 아뢴다.

"어렵지 않습니다. 한 번 말씀으로 불러만 주신다면 창을 불러서 율관으로 협화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종서는 더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취옥에게 가사의 내용을 가만 외어주었다. 취옥은 한 번 듣고 초, , 종 삼장을 다 기억했다. 노래를 어떠한 조로 불러야 할 것도 판단했다. 곧 장구채를 잡았다. 장구가 '덩더쿵' 울렸다. 청청한 목소리로 시조 삼장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악공들도 취옥의 창에 따라 십이율의 가락을 맞춰준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가사도 웅장했지만 취옥의 창은 더한층 웅장 호쾌했다. 청산이 울렁이는 듯하고 천군만마가 뛰닫는 듯했다. 거서로 치수를 재어 만들어진 십이율관과 명창 취옥의 청청하게 목을 뽑는 가곡은 씩씩한 김종서의 가사와 함께 삼절을 이루었다. 전하와 세자를 위시하여 시립해 듣는 사람들은 어린 듯 취한 듯 넋을 잃었다. 노래가 그치자 전하는 다시 김종서에게 분부한다.

"또 한 수의 시조가 있지 아니하냐? 마저 일러주어서 창을 하도록 하라!"

김종서는 명을 받들어 동북면에서 불렀던 또 한 수의 시조를 외어주었다. 취옥은 다시 정신을 모아 곧 기억했다. 이내 목을 가다듬어 청을 뽑았다. 악공들의 십이율관이 취옥을 뽑아대는 가락에 맞추어 흥청대며 울었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랴.

어떻다, 능연각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취옥의 씩씩하고 장쾌한 노래가 끝났다. 십이율관이 스르르 여운을 흘리며 악은 멈췄다. 노래를 지은 김종서의 단령에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 떨어졌다. 자기의 북진사상을 쾌하게 드러낸 이 시조가, 전하와 세자며 가득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대신들 앞에 기막힌 율이 되고 청이 되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놓는 이 영예로운 장면에 감격의 눈물이 아니 흐를 수 없었던 것이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칭찬하는 말씀을 내린다.

"장하다! 창도 좋고 율도 훌륭했다마는 김종서의 사상과 정신이 더욱 탁월하구나! 그렇다. 우리는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수에 말을 씻겨야 한다! 북으로 북으로 나가서, 고구려의 옛땅을 다시 우리가 다스려야 한다."

세자 이하 자리에 가득 앉아 있는 신하들은 얼굴빛이 엄숙해졌다. 이윽고 전하는 취옥을 향하여 하문한다.

"네가 제법 창도 잘하고 율과 악의 이치를 짐작하는 모양이다. 내가 너한테 악리에 대하여 물어볼 말이 있다. 어려워하지 말고 대답하라."

취옥은 약간 얼굴빛을 붉히며 고개를 다소곳 숙여 대답해 아뢴다.

"쇤네가 감히 주제넘게 어전에서 무엇을 안다고 대답해 아뢰옵니까? 하문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목소리는 나직나직 곱고 향기로웠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는 대로 대답해보아라. , , , , 우의 다섯 소리를 네가 마음대로 청을 놀려서 노래하는데, 어떤 것이 평성이 되고 어는 것이 상성이 되고 어떤 것이 입성이 되고 어떤 것이 거성이 되느냐?"

취옥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뢴다.

"사람은 사물을 대해야만 감동이 비로소 일어나 소리를 냅니다. 소리 중에 궁이 제일이 되니 상평성이 되옵고, 상이 하평성이요, 각은 입성이 되고, 치는 상성이 되고, 우는 거성이 된다고 스승한테 들었습니다."

취옥은 또렷하게 아뢰었다. 취옥이 거침없이 궁, , , , 우 다섯 소리를 상평성, 하평성, 입성, 상성, 거성으로 구별해서 아뢰는 소리를 듣자, 전하와 세자를 위시하여 모든 경연관과 서연관들도 깜짝 놀랐다. 심지어 박연과 정양까지도 마음속으로 제법 대답해 아뢰었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기특하다고 생각했으나, 취옥이 들은 풍월로 나불나불 입으로만 지껄여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용안에 미소를 지어 다시 물어보신다.

"네가 입을 움직여 창을 하는데 어떻게 입을 움직이면 궁성과 상성과 각성, 치성, 우성으로 되느냐? 실지로 입을 움직여서 소리를 내어 보아라."

취옥은 상감이 자기를 시험해 보시는 줄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는 부끄럼 없이 당돌하게 대답해 아뢴다.

"궁 소리는 비에서 발생이 됩니다. 입술을 다물고 힘을 주어 소리를 내면 곧 궁성이 나옵니다."

말을 마치자, 취옥은 입술을 다물고 길게 소리를 뽑는다. 과연 황소가 굴속에서 우렁차게 우는 듯, 그 소리가 웅장했다. 상평성이 확실했다. 취옥은 다시 아뢴다.

"상성은 폐에서 소리를 내서 입을 딱 벌리고 소리를 토합니다. 쇤네가 시험해 뵈겠습니다."

취옥은 붉은 입술을 예쁘게 벌렸다. 소리 기운을 뱉어버린다. 쇳소리가 쨍쨍하게 일어난다. 단단한 차돌이 싸느랗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마치 어린 염소와 양이 어미를 부르는 듯 처절한 소리가 일어났다. 취옥은 또 아뢴다.

"궁성과 상성은 실험해 들으셨습니다. 그러면 각성을 시험하겠습니다. 각성은 간에서 소리를 내어, 이빨을 벌리고 입술 부리로 기운을 모아 쏟아냅니다."

취옥은 백옥 같은 위아래 이를 살며시 벌리고 붉은 입술을 모아 소리를 토한다. 그 음향은 마치 수탉이 주둥이로 나무를 쪼는 듯한 '탁탁' 소리가 났다. 취옥은 다시 아뢴다.

"다음엔 치에 대하여 시험하겠습니다. 치 소리는 심장에서 소리를 뽑아내어 이빨을 다물고 입술을 활짝 벌려서 소리를 뱉습니다."

취옥은 이를 합치고 입술을 벌려서 소리를 냈다. 마치 어미돼지가 새끼를 업고 꿀꿀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오음 중에 우성을 시험하겠습니다. 콩팥에서 소리를 내어 위아래 이를 벌리고 입술을 모아 소리를 내면 우성이 됩니다."

취옥은 이를 벌리고 입술을 슬며서 다무는 체하면서 기운차게 소리를 냈다. 부드럽고 윤택하면서 마치 천리준마가 평원광야로 '어흥' 소리를 치며 달리는 듯한 호탕한 음성이 일어났다. 취옥은 다섯 가지 음성을 전하 앞에 실지로 시험해 보여 드린 후에 어전에 사배를 드리고 사뿐사뿐 뒷걸음을 걸어 장지 밖으로 물러난다. 예쁜 얼굴에는 이맛전과 콧등에 진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어전에서 실천해 옮기기 실로 무진무진 어려웠던 때문이다. 일전에 전하가 박연에게 악리를 들은 것과 추호의 차이가 없었다. 전하는 취옥의 총명영리한 악에 대한 공부와 탁월한 기술을 무한 귀엽게 생각했다. 전하뿐 아니었다. 박연과 정양도 기뻤다. 관습도감 교방 안에 이러한 재색이 겸비한 여악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전하는 뒷걸음쳐 장지 밖으로 물러가는 취옥을 어수로 손짓해 부르셨다. 예쁜 얼굴에 힘이 들어서 이맛전과 콧등에 진땀이 송골송골 솟아오른 것을 보신 까닭이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취옥은 어명을 어길 수 없었다. 다시 걸음을 살몃살몃 옮겨 어전에 부복했다. 얼굴에는 여전히 땀방울이 송골거렸다.

"애썼다. 나는 네가 가얏고, 거문고와 창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제법 악에 대해서 공부가 도저하구나! 악사라도 감히 너를 따를 사람이 없겠다. 내 앞에서 오음을 실천해보느라고 힘이 많이 들어서 예쁜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솟았구나!"

말씀을 마치자 전하는 용포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취옥에게 던져주었다. 무한한 영광이었다. 취옥은 던져주시는 손수건을 두 손으로 받들었다. 뜻밖의 영광스런 은전이었다.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취옥은 영리하고 침착했다. 두 손으로 수건을 받들어 잡고 사은하는 큰절을 올린 후에, 한 손으로 치마고리를 휘어잡은 채 소리 없이 뒷걸음을 쳐 물러가는 것이었다.

"땀을 씻어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모든 시선들은 취옥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취옥은 나직한 음성으로 조신하게 대답해 아뢴다.

"황공하오이다. 어전에 어찌 감히 얼굴을 다스리오리까? 내리신 별은전은 한평생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전하는 더욱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시립해 있는 신하들도 취옥의 영리한 행동과 태도를 가합하게 생각했다. 전하는 다시 더 취옥을 향하여 권하지 아니하시고, 박연과 정양에게 말씀을 내린다.

"이제 경들의 발분망식한 정성을 천지신명도 가상하게 생각하여 해주 땅에 좋은 거서가 나서 수천 년 전 옛법에 의지해서 진정한 십이율을 제정하게 되었으니 국가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다. 다음엔 어서 빨리 경석을 구해서 십이율에 맞추어 편경과 편종을 정비해서 훌륭한 아악을 완성하도록 하라!"

박연이 부복해 아뢴다.

"중국에서도 고대에는 경석을 썼습니다마는, 그 후에 절종이 되와 하는 수 없이 기왓장으로 경석을 대신했습니다. 그리하와 악의 부조리를 이루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도 역시 전하께서 들으시고 마땅치 않게 생각하신 것이올시다. 다행히 거서가 나서 십이율은 정했습니다마는, 경석을 구하는 일이 큰일이올시다."

"우리 다 함께 노력해서 구해보기로 하자. 천하에 정성을 다해서 되지 않는 일이 없다. 기어코 우리는 경석을 얻어보기로 하자!"

박연이 아뢴다.

"경석이란 것은 원래 악석이올시다. '설문'이란 책에 보면 무구씨가 경을 만들었다 하고, '서전' 우공편을 읽어 보면 사수빈에 경석이 떴다 했습니다. 현옥 같은 돌이면서 속이 비었으므로 물에 뜰 수 있었던 모양이올시다. '회남자'란 책에 보면 경은 공이라 했습니다. 그리하옵고 경석이 생산되는 곳은 중국 안휘성 영벽현 북방에 있는데, 아까 말씀드린 '서전' 우공편에 말한 사빈부경은 곧 이 산에서 나는 경돌이 물가에 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이름을 경산이라 하고 또 이 산이 영벽현에 있으므로, 경석을 영벽석이라고도 합니다. 빛이 검고 질이 치밀하면서 흰 무늬가 있고, 갈수록 광채가 나서 마치 현옥 같다 합니다. '고공기'라는 옛 서적을 보면, 옥을 갈고 돌을 깎는 공인의 종류가 다섯이 있는데, 그중에 첫째로 치는 공인을 경씨라고 한다 합니다. 주로 경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세습적인 직업을 가졌다 합니다. 이제는 중국에서도 경석이 나지 아니하고 경석을 다루는 장인도 없나 봅니다. 이리하와 기왓장 조각으로 만든 와경으로 퇴보가 된 듯합니다."

전하는 박연의 경석고에 대한 고증을 듣고 크게 탄식하며 말씀한다.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가혹한 인간 전쟁과 참혹한 도탄, 환난에 빠져서 시대는 바뀌고 예약문물은 모두 다 소멸되어버렸구나. 그야말로 '오궁화초매유경이요, 진대의관성고구'란 시가 조금도 과장된 시가 아니로구나!"

"그러하오이다. 오궁의 기화요초 화려했던 문화는 오솔길 잡풀 속으로 스러져버렸고, 진 시대의 찬란했던 의관문물은 땅 속에 파묻혀버린 것과 같이 경석도 그만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경석을 만드는 경공까지도 소멸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소위 문명을 자랑한다는 당과 송에서도 기껏해서 와경을 쓴 모양이올시다."

박연도 탄식조로 아뢰었다. 전하는 기어코 와경을 진짜 경석으로 창제하고 싶은 마음이 벅차게 가슴을 흔들었다.

"하늘 땅 호호탕탕한 대자연 속에 산이 있으면 반드시 들이 있고, 들이 있으면 그중에는 금도 있고 옥도 있을 것이다. 중국 안휘성에서 생산되는 경석이 하필 우리나라 산천에 아니 생산될 리 만무하다. 팔도강산 삼천리 산악지대를 샅샅이 찾아서 기어코 경석을 찾아내도록 하라. 대자연의 이치는 반드시 중국 안휘성에만 나게 할 리 만무하다. 우리 땅에도 꼭 생산될 것이다. 노력해서 찾아보기로 하자...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옥을 다루는 도자전이 있고 훌륭한 도자장인이 있다. 이 사람들은 넉넉히 경석을 다룰 줄 알 것이다. 단 모두 다 합심해서 기어코 경석을 찾아보라!"

전하는 또다시 계속해 말씀한다.

"지금 황종률을 발견해서 십이율을 정돈했는데 편경을 못한다면 말이 되느냐? 영악 이하 모든 소임은 전력을 다하여 경석을 구해보라!"

전하는 말씀을 내리고 이날의 모임을 파했다. 세자 이하 여러 대신과 관습도감 제조 박연과 경시주부 정양이 어전에 배알을 드리고 물러가려 할 때, 전하는 '정읍사'와 시조에 창을 잘 부르던 취옥을 어수를 들어 가리키면서 관습도감 제조한테 분부한다.

"경도 알다시피 과인은 그동안 아악의 십이율이며 종경을 새로 정하기 위하여 악에 대한 학설과 악기들을 편전에 준비해두었거니와, 정치하는 여가에 악리와 실기를 시험하려 하나 서로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 시시때때로 박연을 부를 수도 없고 정양에게 당부하기도 난처하다. 내일부터 여악 취옥을 날마다 편전에 입시케 하라!"

전하는 장중하게 분부를 내리신다. 관습도감 제조는 감히 반대할 수 없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멀리 장지 밖에서 전하께서 박연에게 내리시는 말씀을 듣는 취옥은 대견하고 기쁜 마음을 억누를 길 없었다. 감격한 마음이 가슴 속에 물결처럼 흘렀다. 멀리서 사배를 드리는 악사와 악공들의 뒤를 따라 물러났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대전 별감은 어명을 받들고 관습도감에 나타났다. 제조 박연에게 어명을 전했다.

"대전마마께오서 어제 영감께 분부를 내리셨다 합니다. 아악을 연구하시기 위하여 여악 취옥을 매일 편전으로 입시케 하랍십니다. 지금 곧 대령하도록 지시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관습도감 제조는 곧 여악 취옥을 불러서 어명을 전하고 별감을 따라 대궐로 들어갈 것을 명했다. 취옥은 한편으로는 송구스럽고 한편으로는 당황했다. 하늘만큼 기쁘면서 가슴은 울렁거렸다. 취옥은 수세를 마치고 거울을 대하여 몸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전주월소로 칠흑 같은 머리를 곱게 가려서 척척 얹어 땋았다. 붉은 댕기를 머리끝에 살짝 물려서 구름같이 틀어 올렸다. 관습도감의 기생들은 모두 다 의기와 협기가 많았다. 도감 제조인 박연의 높은 교양을 받은 때문이다. 같은 동료 중에도 그중 나이 어린 취옥이 창을 잘 부르고 악에 대한 교양이 있는 까닭에 특별히 전하의 눈에 들어 날마다 편전으로 입시하랍시는 분부를 대전 별감이 받들고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기생들은 자기가 당한 영광인 양 기뻐하고 흥분했다. 조금도 시새는 빛이 없었다. 서로들 다투어 세숫물을 떠다 주고 머리를 땋아주었다. 분세수를 시켜주고 두 손에 실을 감아서 얼굴과 이맛전에 솜털을 뽑아 예쁘게 다스려주었다. 행수기생은 얼굴에 솜털을 밀어주면서 이같이 말했다.

"아무리 네 얼굴이 예쁘고 곱지만 상감마마를 지척에 모실 텐데 조금이라도 얼굴에 추한 기분이 있어서야 쓰겠느냐?"

또 한 기생은 자기가 속치마끈에 찼던 금사향낭을 끌러서 취옥의 속치마 허리띠에 채워주었다.

"이 향은 우리 어머니께서 나에게 준 별사향이다. 장뇌와 반죽을 해서 만들었다 한다. 몸이 항상 가볍고 청신한 향기가 끊임없이 몸에서 떠도는 좋은 향낭이다. 상감마마를 가까이 모시는데 몸에 추한 속기가 떠돌아서야 쓰겠느냐?"

관습도감의 동료 선배들은 이같이 취옥을 돌봐주고 격려해주었다. 취옥은 처음 단신으로 전하의 부름을 받아 대궐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맨머리에 평복으로 알현을 하러 들어갈 수는 없었다. 화관 쓰고 푸른빛 당의에 남수닌(수닌은 춘추 의상용 비단의 일종) 치마를 입었다. 관습도감 제조께 인사를 드린 후에 문밖으로 걸어 나가 판교에 올랐다. 대전 별감은 홍의에 초립을 멋들어지게 젖혀쓰고 홍의 자락을 펄펄 날리며 취옥의 판교 뒤를 쫓았다. 판교를 맨 앞채, 뒤채를 잡은 교군꾼들도 기생 취옥을 태워가지고 대궐 앞까지 들어가니 흥이 났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풍우 같이 달려나간다. 관습도감의 동료 기생들은 길거리까지 나가서, 행운을 가듣 싣고 전하의 부름을 받아 대궐로 들어가는 취옥을 기쁜 얼굴로 전송들을 했다.

"잘 다녀오너라. 정말 네 몸에는 복이 담뿍담뿍 굴러드는구나!"

"복이란 곰배에 받고 안배에 안아서 너 혼자만 누리지 말아라. 우리들한테도 좀 나누어주려마!"

"잘하면 너는 내명부 후궁이 될는지 모르겠구나! 그때 가서는 우리들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 괄세를 해서는 아니 된다."

"세상에 사람 팔자 모른다더니 취옥이 네가 이같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앞으로 금지옥엽이나 떡두꺼비같이 한 번 점지해보아라!"

동료 기생들은 이같이 축복하면서 취옥을 대궐로 들여보냈다. 거리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떤 기생인지는 모르나, 민머리에 평복으로 판교를 타지 아니하고 화관 족두리에 당의를 입고 정장을 차려서 판교를 탔는데 앞에는 상감의 하인인 대전 별감이 홍의 자락을 펄럭거리며 앞을 서서 인도해 나가는 것을 보자, 사람마다 호기심을 가지고 취옥의 행차를 바라보았다.

"놀음에 지휘를 받고 가는 기생이면 민머리 남치마로 판교를 타고 갈 텐데, 화관 족두리에 판교를 탔으니 놀음차를 받고 가는 기생이 아니로구먼!"

"화관 족두리에 판교만 탄 것이 아닐세. 앞에 가는 저 별감을 보게. 초립을 멋들어지게 젖혀쓰고 홍의 자락을 펄펄 날리며 가는 품이 제법 호기가 만장일세. 아마 상감마마의 지휘를 받고 연회잔치로 들어가는 모양인가 보이."

"이 사람, 자네 모르는 소리 하지 말게. 대궐 안에 연회가 있다면 관습도감 기생들이 열 명 스무 명씩 줄을 지어 들어가서 악사와 악공들과 함께 옷을 갈아입고 노래와 춤을 추는 법일세. 연회에 기생 한 명이 미리 정복을 입고 판교 타고 대궐로 들어가는 법이 어디 있나! 어떻든 희한한 일일세."

"아무튼 기생은 나이 어리지만 무척 예쁘고 똑똑한 절색일세."

또 한 사람이 말참견을 한다.

"전하께서 이 사이 아악을 새로 만드시느라고 무한 애를 쓰시는 중에, 해주에서 거서가 나와서 이것으로 황종률 등 십이율을 만드셨다네. 아마 아악을 더욱 연구하시기 위해서 관습도감 명창 기생에게 별입시를 분부하신 듯하이. 그러기에 홍의 입은 대전 별감이 정장으로 차린 기생을 데리고 대궐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그럴듯한 소릴세."

백성들까지 전하가 나라의 예악을 바로잡기 위해서 아악을 창조하는 데 열을 올리고 계신 것을 알았다. 취옥은 대전 별감의 인도로 궐문밖에서 판교를 내려 보행으로 편전에 들어가 전하께 배알했다. 전하는 반갑게 취옥을 대하였다.

"내가 거문고와 가야금으로 십이율을 맞춰보려 했으나 혼자서 줄을 골라보니 마음대로 율에 맞지 않는구나. 이제부터 내가 너를 부를 때마다 관습도감에서 대내로 들어와서 나와 함께 거문고를 타보기로 하자!"

전하는 벽에 기대 세운 거문고를 친히 당겨 앞에 놓았다. 천천히 줄을 고르며 취옥을 향하여 다시 말씀을 내린다.

"지난번에 우조를 십이율에 맞추어서 몇 번 들어보았다마는, 계면조를 시험해보려 하니 손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계면조에 이러한 시조가 있다. 내가 불러줄 테니 네가 한 번 노래에 맞추어 거문고를 타보아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시조를 불러주신다.

삼각산 푸른 빛이 중천에 솟아올라

울총가기는 상궐에 부쳐두고

강호에 잔 잡은 늙은이란 매양 취케 하소서.

취옥은 전하 앞에 있는 거문고를 당겨서, 노래에 맞추어 계면조로 타기 시작했다. 거문고 줄이 슬금슬금 울었다. 애원성이 일어난다. 울어대는 거문고 소리는 목이 메어 오열하는 듯 처절했다. 마치 흰 구름장이 푸른 하늘가로 펄펄 날리는 듯 싸늘한 음향이 일어나기도 하고, 굴원의 넋이 강물에 잠겨서 여한이 면면하게 흐르는 듯 기막힌 가락을 내었다. 율은 무한한 화음을 내어 조화를 이루었으나 너무나 가락이 처량했다. 전하는 취옥에게 말씀을 내린다.

"계면조는 조금 처량하구나. 음의 조화는 어울린다마는 역시 평조나 우조같이 씩씩하고 화창하지 못하구나!"

취옥이 대답해 아뢴다.

"악은 반드시 씩씩한 것만이 상승이 아닙니다. 첫째로 가사가 아름답고 좋아야 합니다. 같은 계면조로 다시 창을 하면서 거문고를 타보겠습니다."

"좋다! 시험해보라."

취옥은 거문고를 당겨놓고 줄을 골랐다. 타면서 가만히 창을 부른다. 편전에서 노래하는 때문, 큰 소리로 창을 부르지 아니하고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소리는 곱게곱게 애원성을 내며 뽑아대서 굽이굽이 넘어갔다. 그러나 아까 똑같은 계면조로 거문고를 울리던 그 멋과는 훨씬 달랐다.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흔들어놓는다. 전하는 고요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탄식한다.

"역시 거문고도 잘 탄다마는, 가사와 창이 모두 다 아름다워야 한다. 삼위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좋은 악이 구성되는구나!"

 

후궁 취옥

 

이같이 해서 취옥은 날마다 대궐 편전으로 들어가 전하의 하문을 받고 거문고를 울리고 가야금도 탔다. 전하의 고문고와 가야금을 타는 솜씨도 점점 늘었다. 평조는 말할 나위도 없고 우조와 계면조며 농과 엮음도 잘 탔다. 전하는 창법도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평시조는 말할 것 없고, 존자 진한잎, 중허리, 막내는 놈, 소용이, 엇까지 부를 줄 알았다. 전하는 풍류를 좋아해서 거문고를 타고 창을 해보는 것이 아니었다. 정악인 아악을 창제하기 위해서 이같이 창악에 대하여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취옥은 전하가 정치를 보살핀 후엔 반드시 관습도감으로 대전 별감을 보내서 입시를 명하시는 때문, 항상 교방에서도 밤을 새우며 공부를하여 거문고 타는 수단과 창을 부르는 목청이 아름답게 세련되었다. 전하는 더욱더욱 취옥을 기특하게 생각했다. 틈만 있으면 취옥을 대내 안으로 불러서 악을 즐기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궁중 안에서는 내시며 별감, 무예청, 상궁을 통하여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근엄하신 상감마마께서 날마다 관습도감 기생을 어전에 불러놓고 거문고를 타시고 창을 불러 즐기시니, 상감마마의 마음도 변하신 모양이다."

아악을 제정하기 위하여 악리를 탐구하는 전하의 뜻을 내시와 궁녀 따위들이 알 까닭이 없었다.

"관습도감에서 날마다 불려 들어오는 기생은 참말 천하절색이더라. 눈은 어글어글해서 호수같이 맑고 얼굴판은 비둘기 알같이 갸름하고 아름다운데, 입술은 오월달에 활짝 핀 석류꽃처럼 혈색이 좋고, 전하 앞에서 거문고 줄을 퉁기면서 상긋상긋 웃는 그 모습은 보조개가 오목해지면서 사람의 간장을 마구 흔들어놓더라. 내가 만약 남자라면 그야말로 홀딱 반했을 것이다."

늙은 상궁의 말이었다.

"향아님, 관습도감 기생의 예쁜 모습을 주워섬기시는 모양인데, 몇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가얏고를 안고 기생이 방긋 웃으면 박 속같은 흰 이가 방싯 드러나고, 줄을 퉁기는 예쁜 손가락은 뛰는 듯 달리는 듯 마치 백어가 푸른 호숫가에서 자맥질을 하는 듯합니다."

젊은 궁녀의 말이다.

"아냐. 또 한 가지 홀딱 반하게 하는 모습이 있어요. 연옥색 저고리에 남끝동을 달아 입은 어깨판은 어찌 그리 날씬한지, 거문고 줄을 퉁기면서 어깨를 으쓱대는 그 모습은 과연 절색이야! 천하절염이야!"

또 하나의 궁녀의 말이다. 또 한 궁녀가 내달아서 말참견한다.

"항아님, 아우님들은 기생의 앉은 모습만 바라보고 횡설수설하는 것이지만 어전에서 걸어가는 그 모습을 좀 보아요. 외씨 같은 삼승버선 끝으로 남치맛자락을 사뿐 차면서, 허리를 약간 굽혀서 치마 꼬리를 한편 손으로 휘어잡고 뒷걸음을 쳐서 물러가는 그 모습은 과연 옥황상제가 계신 백옥루의 시녀가 상감마마 앞에 하강한 듯합니다."

"아냐. 도대체, 너무나 예쁘고, 너무나 총명하고, 너무나 요사스러운 계집이란 말야. 마치 당명황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양귀비의 후신 같아!"

"양귀비가 거문고를 타고 노래했다는 소리는 못들었는데 양귀비보다도 더한층 윗길이지. 이러다가 상감마마께서 홀딱 반해서 후궁을 삼으시면 어찌하나?"

항아들은 이같이 지껄였다. 항아님이란 궁녀들이 서로 존대해서 부르는 대명사다. 편전에 날마다 관습도감 기생이 드나들면서 전하께 거문고와 가야금이며 창법을 말씀드린다는 소식은, 뒷날 소헌왕후의 시호를 받으실 중전마마 심왕후의 귀로 들어갔다. 중전은 대전 상궁을 불러 하문했다.

"관습도감 소속의 여악이 매일 전하의 부르심을 받아 편전으로 출입한다는 말이 있으니, 너도 들은 바 있느냐?"

대전 상궁은 중전의 하문에 피하여 은휘할 도리가 없었다.

",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아악을 제정하시기 위하여 요사이 율에 대하여 자못 관심이 크신 듯합니다. 그리하와 일전에도 악에 대한 경연까지 여시고 대신 이하 모든 관원들을 부르시어 강론을 하시고 감상을 하셨습니다. 때마침 악을 아뢰는데 솜씨가 좋은 총명한 여악이 있었다 합니다. 그리하와 정무를 살피신 여가에 여악을 부르시어 거문고를 타게 하시고 창도 들으시면서 악리를 연구하시는 듯합니다."

왕후는 상궁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여악이 편전으로 드나드는 까닭을 자세하게 알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조금 미타하게 생각했다. 크나큰 연회 때라든가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실 때 여악이 대내에 들어와서 여흥으로 가무를 하는 일은 불가피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매일 관습도감 기생이 편전으로 출입한다는 일은 궁중의 규범과 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안상하고 온화하고 유순하면서 근엄한 성격을 구비하게 갖춘 소헌왕후였다. 국가의 예악을 창제하는 일도 큰일이지만, 궁중의 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은 고려해볼 일이라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미흡하게 여겼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안색에 불쾌한 빛을 띠지 아니했다. 왕후의 체통을 지키는 때문이었다. 화한 음성으로 상궁에게 말씀했다.

"알겠다. 물러가거라."

아무러한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태연하게 말씀했다. 아무 일 없는 듯 훈훈한 기운은 전과 같이 왕후궁에 가득했다. 밤이 되었다. 동궁이 저녁 문후를 자전께 드리러 들어왔다. 동궁이 어마마마께 저녁 문안을 드리고 배를 드려 물러가려 할 때 소현왕후는 동궁에게 말씀을 내린다.

"잠깐 게 앉으라."

동궁은 모후의 명을 받들어 시립했다.

"요사이 드리는 바에 의하면 대전마마께서 관습도감의 여악을 매일 편전으로 부르시어 악리를 연구하신다 하니, 동궁도 소식을 들었는가?"

동궁은 미소를 띠고 아뢴다.

", 저도 알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대답했다.

"동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바마마께서는 아직까지 나라에 정악이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것을 한탄하시와, 중국보다도 더 훌륭한 아악을 제정하시려하여 악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가지셨습니다. 때마침 해주에서 거서가 나타나서 이것을 이용하여 몇천 년 전에 주공이 창제했던 옛법을 참조하여 천지와 인간 사이에 조화된 십이율관을 창제하셨습니다. 앞으로 편경과 편종이 끝나면 천하에 유가 없는 아악을 제정하실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이 일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관습도감에게 지음하는 여악을 명소하시어 정무 여가에 악리를 연구하시는 줄로 압니다."

동궁은 옹용한 태도로 자전께 아뢰었다. 동궁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왕후는 화한 안색으로 다시 말씀한다.

"나도 전하께옵서 태평소대를 이룩하시어 집현전을 창설하시고 국가의 문물을 더욱 발양시키기 위하여 제례작악하시는 홍업을 잘 알고 있다. 내 어찌 전하의 하옵시는 일에 대하여 추호인들 미타하게 생각하는 일이 있겠는가? 더한층 내조를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여악은 곧 교방의 기생인데, 일개 기생의 몸으로 매일 대궐 안에 출입한다는 일은 구중 궁궐의 성스런 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이다. 여악이 어떠한 아이인 줄은 모르나 관습도감에는 영악도 있고 제조도 있을 것이다. 여악의 지음하는 수단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나 하필 기생을 궁중에 무상출입케 한다는 일은 마땅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로 여악이라 해서 투기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동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자는 음성을 화하게 하여 아뢴다.

"일전에 소자도 아바마마의 명소를 받자와, 거서로 새로 제정한 십이율관을 감상하시는 자리에 시립해 있었습니다. 그때 취옥이란 여악이 있었습니다. 제법 악리를 알고 창이 또한 좋았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앞으로 경석을 구하여 편경과 편종을 완성하시려 하여 지음하는 대신들과 악리를 연구하려 하시나, 그들은 또한 맡은 소임이 있어 한가롭지 못합니다. 그러하시와 여악에게 별입시를 분부하시는 것을 목도해 보았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다만 악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여악을 부르신 것뿐, 다른 뜻이 아니신가 합니다."

"나도 상감마마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기생이 궁중에 무상 출입한다는 일은 궁중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단연코 묵과할 수 없다! 동궁은 아바마마께 충간하여 여악의 편전 출입을 중지하도록 하라!"

소헌왕후의 얼굴빛은 전에 없이 엄숙한 기색이 떠돌았다. 동궁은 난처했다.

"소자가 어찌 간하옵니까? 아바마마께서는 다른 뜻이 아니 계시고 다만 아악을 완성하시려는 일념에서 여악을 시시로 부르시는 것이옵니다. 그것은 마치 아악 제정을 중단하시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충간이 아니옵니다."

소헌왕후 심씨는 봉안에 엄숙한 빛을 띠고 말씀한다.

"궁중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중전의 임무다. 단연코 질서는 유지해야 하겠다!"

동궁은 더욱 난처했다.

"황공하오이다. 질서를 유지하신다는 어마마마의 의지를 잘 아옵니다. 그러하오나, 소자의 입으로서는 감히 아바마마께 아뢸 도리가 없습니다. 죄송하오나 어마마마께서 친히 아바마마께 여악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시라고 아뢰시는 것이 가장 온당한 일인가 하옵니다."

소헌왕후는 장중한 태도로 말씀한다.

"나는 한평생 전하께 대하여 여자의 일로 말씀을 드려본 일이 없다. 다만 왕실을 위하여 질서를 지켜야 하겠다. 그러나 내가 말씀을 올린다면 전하께서는 뒤늦게 내가 투기하는 줄로 그릇 아시기 쉬우니, 그래도 동궁이 잘 말씀을 드려서 여악의 궁중 출입을 금하시도록 하라."

동궁은 모후의 마음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악을 창제하려고 정성을 다하시는 부왕께, '여악을 가까이하지 맙소서'하고 아뢰기도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잠깐 침묵 속에 들었다. 예지가 머리에 섬광을 부어내렸다. 봉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자전께 아뢴다.

"황공하오나, 어마마마께 소자 감히 아뢰옵니다. 여악의 일을 어마마마께 잘 처리하도록 하시게 할 방도가 있사옵니다."

한동안 말씀이 없던 동궁이 웃음을 띠고 아뢰는 말씀을 듣자, 소헌왕후도 화색을 띠고 물으신다.

"무슨 좋은 방도가 있는가? 말해보라."

동궁은 또다시 봉안에 웃음을 가득 띠고 아뢴다.

"어마마마, 소자의 방자함을 꾸짖지 마시옵소서."

동궁은 어마마마께 응석을 피우듯 아뢴다.

"동궁은 무슨 말을 그리하는가. 내 어찌 노성한 동궁을 꾸짖으리요."

소헌왕후도 자애 가득한 눈으로 세자를 바라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어마마마께오서 꾸짖지 아니하신다면 감히 소자의 소견을 아뢰겠습니다. 아바마마께오서 아악을 창제하시기 위하여 악리를 연구하시는 일도 국가의 큰 사업이옵고, 어마마마께서 궁중의 질서를 유지하시기 위하여 편전에 여악을 출입하지 말도록 하라는 말씀도 지당하온 분부십니다. 소자의 생각에는 두 가지 일을 다 폐하지 못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소헌왕후는 미소를 띠고 세자를 향하여 하문했다.

"두 가지 일을 다 폐하지 못할 일이라면 그럼 어찌하란 말인가?"

"외람되오나 소자는 한 묘책을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어마마마께옵서 소자의 의견대로 실행해주신다면 모든 일이 다 사무송하게 될 듯하옵니다."

세자는 얼굴에 가득 웃음빛을 띠고 자전께 말씀을 사뢰었다. 엄격한 성격을 지닌 소헌왕후도 아드님 동궁의 화한 안색과 부드럽게 아뢰는 말씀에, 봉안에 미소가 떠오르며 묻는다.

"동궁은 어떠한 묘책이 있어서 사무송이 될 듯하다 하는가?"

"제왕이 후궁을 여러 명 두는 일은 예로부터 흠이 되는 일이 아니올시다. 여악 취옥을 아주 후궁으로 정하시어 관습도감에서 매일 궁중으로 출입하지 않게 하고 항상 전하를 지척에 모시어 모든 시중을 들게 하는 한편, 또한 악리를 연구하시는 데 보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올지, 감히 소자의 의견을 어마마마께 아룁니다. 이러한다면 기생이 궁중에 무상출입해서 금중의 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어마마마의 걱정도 소멸될 뿐 아니라 아바마마의 국악을 완성하시려는 크나큰 홍업에도 좌절감을 드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아름다운 일은, 어마마마께옵서 한평생 화합하게 후궁을 거느리시어 거룩하시다는 칭송이 온 나라 안에 가득하옵니다. 만약 이번에 아바마마께 여악을 궁중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아뢰신다면, 아바마마는 그같이 생각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밖의 사람들은 왕후마마께서 투기를 하시어 전하의 큰 사업을 저해하신다는 그릇된 판단을 내릴지도 모르옵니다. 소자, 감히 곡진한 충정을 어마마마께 아뢰옵니다. 꾸짖지 말아 주시옵소서. 황공하여이다."

소헌왕후는 동궁의 아뢰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다. 동궁의 안상하게 아뢰는 말씀은 과연 빈틈이 없이 사리에 합당했다. 소헌왕후는 크게 감동이 되었다.

",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일을 동궁이 깨우쳐서 의견을 말해주니, 그지없이 기쁘도다. 동궁은 역시, 글을 많이 읽어서 격물치지의 경지에 이르렀도다!"

소헌왕후는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동궁은 몸을 굽혀 다시 아뢴다.

"소자의 공부가 무엇이 깊사와 감히 격물치지의 경지에까지 당도했사오리까. 황공하옵니다만 다만 아바마마의 크나큰 일에 꺾이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고, 어마마마의 한평생 어질고 갸륵하신 덕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와 이러한 어리석은 말씀을 사뢴 것뿐이옵니다."

동궁의 다시 아뢰는 말씀을 듣자, 소헌왕후의 봉안은 활짝 열렸다.

"동궁은 과연 효성이 지극하도다. 전하도 위하고 나의 흠도 드러나지 않게 묘책을 말해주니 이것은 참으로 일석이조의 훌륭한 처사다. 그렇다면 동궁은 대전께 여악을 후궁으로 삼으시라 아뢰라..."

동궁은 소헌왕후의 말씀을 듣자, 다시 만면에 미소를 짓고 아뢴다.

"소자, 비록 동궁이라 하오나, 후궁에 대한 일을 어찌 감히 전하께 두시라, 말라 아뢰오리까. 이러한 일은 어마마마께서 친히 금중규범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고 여악을 후궁으로 봉하여, 궁녀들 간의 비웃는 일이 없도록 하시는 것이 적당한 줄로 아뢰오."

소헌왕후도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동궁의 말이 심히 옳다. 내가 친히 내일 상감께 동궁의 방책대로 아뢰어 잘 처리하리라!"

소현왕후는 동궁의 자감 있는 진언을 마음속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역시 다음 세대에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는 훌륭한 임금이 될 것이라고 당신의 아들을 믿음직스럽게 생각했다. 동궁도 어마마마께서 자기의 진언을 쾌하게 받아들여 주신 것이 기쁘기 한량없었다. 밤도 깊어갔다.

"어마마마, 그럼 소자는 물러갑니다. 안녕히 침수에 드시옵소서."

배를 드리고 물러간다.

"오늘 밤에 동궁의 좋은 말씀을 들어서, 내 가슴이 후련하다. 며칠 동안 마음에 걸렸던 일이 활짝 풀어졌다. 동궁의 너그러운 훈수를 들어서 마음이 심히 편하다. 오늘 밤에는 편지 자리라!"

소헌왕후는 문후를 드리고 물러가는 세자를 분합까지 나가 전송했다. 이튿날 아침 소헌왕후는 소세를 마친 후에 제조상궁을 불러 분부를 내렸다.

"대전에 나가 침수문안을 올린 후에 내가 대전마마를 뵈오러 대전으로 나간다고 아뢰어라."

상궁은 중전마마의 명을 받들어 대전으로 나갔다. 어전에 나가 부복한 후에 중전마마의 전갈을 올렸다.

"중전마마께오서 대전마마께 침수문안을 올리라 하시와 문후를 올리옵니다."

세종전하는 아침부터 악서를 대하여 책장을 넘기다가 인자한 눈으로 중전 상궁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중전마마께서도 안녕히 침수에 납시었느냐? 나는 별일 없이 잘 지냈다. 이 사이 내가 연구하는 일이 많이서 자주 중전에 들르지 못했느니라. 미안한 말씀을 전해다오."

세종전하는 책장을 덮고 상궁에게 분부했다. 상궁이 부복해 아뢴다.

"중전마마께서도 안녕히 침수에 납시었습니다. 그리하옵고 감히 아뢰옵니다. 중전마마께오서 아침에 아뢸 일이 있어 대전으로 납시겠다 하십니다. 틈을 주시면 뵈오러 나오시겠다고 합니다. 성의를 물어 달라는 하보가 계시었습니다."

"그러하냐. 이 사이 내가 바쁜 일이 많아서 자주 중전에 들르지 못했느니라. 미안하기 짝이 없다. 내가 곧 중전마마를 뵈러 건너가리라. 수고롭게 오실 것 없다고 아뢰어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시립해 섰던 내관에게 분부했다.

"내 곧 중전으로 들어갈 테니 그리 알고 자비를 놓아라."

내관은 명을 받들어 물러가고, 상궁은 배를 올린 후에 중전으로 돌아갔다. 중전 상궁은 곧 중전으로 돌아가 소헌왕후께 전하께서 친림하신다는 전갈을 올렸다. 이윽고 중전 앞뜰에는 무예청들의 시위 소리가 들렸다. 전하가 대전에서 옥교를 타고 중전으로 임어하는 것이다. 중전 이하 모든 상궁들은 뜰 아래까지 내려, 상감의 행차를 맞이했다. 전하는 미소를 머금고 맞이하는 중전의 옥수를 잡고 말했다.

", 너무 일이 많아서 자주 중전에 들르지 못한 것이 무한 미안하오. 용서해주기 바라오!"

소헌왕후도 봉안에 화기를 가득 띠고 대답한다.

"전하의 만기를 총람하시는 일을 신첩이 어찌 모르오리까? 더구나 요사이는 예악을 제정하시기 위해서 촌가가 없으신 일도 신첩이 잘 알고 있습니다. 흐뭇하시도록 내조를 받들지 못하와 송구하기 짝 없습니다. 그리하와 오늘도 잠시 아뢸 일이 있어 대전으로 뵈오러 나가려 했더니 바쁘신 와중에 이같이 친림을 해주시니 황감하온 말씀 이루 다 아뢸 길 없습니다."

"무슨 말씀요? 마마가 내조를 잘해주시어서 궁중에 모든 질서와 규범이 잘 유지되므로, 과인이 마음을 놓고 정치와 문교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겠소. 비마마는 언제나 지나치게 겸양을 하시니 내 마음이 도리어 미안하오."

전하는 어수로 중전의 옥수를 이끌고 중전 침실로 들었다. 모든 시자들이 물러났다. 전하는 비마마와 다정하게 앉았다. 아직도 사십 미만의 내외분이었다. 전하의 용안은 화사하고 중전의 봉안은 그대로 요조한, 아름다운 태깔이었다. 양궁의 의초는 꽃이 봉접을 부르고, 나비와 벌이 꽃을 사모해서 따르는 태도다. 전하는 다시 비마마의 손을 잡고 묻는다.

"무슨 급하신 일이 있기에 나를 찾아 대전으로 나오신다 하셧소?"

"급한 일은 아니올시다마는 하도 전갈로만 문후를 드려서, 용안을 우러러 뵙고파 뵈오러 나가려 했습니다."

근엄한 비마마연만 시자가 없는 곳에서는 전하의 마음을 슬며시 사로잡아볼 줄도 아는 여인다운 교양도 지녔다. 전하는 더욱 비마마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참말 미안하오. 임금 노릇 하기가 이렇게 어렵구려. 사랑하는 비마마를 시시때때로 대하지 못하게 되니, 초가삼간에서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놓고 의좋게 지내는 농부의 살림만도 못하구려... 하하하."

비마마는 청초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늘은 다 제각기 직분을 주시어 한세상을 지내도록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전하의 팔자는 초가삼간에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놓고 내외가 의좋게 담소하고 지내실 사주팔자가 아닙니다. 이 나라의 만백성이 모두 다 평화롭게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며 자식새끼들을 거느려 도란도란 의좋게 지내도록 해주시는 큰 임무를 두 어깨에 짊어지신 팔자올시다. 괴로워도 하는 수 없습니다. 참으십시오. 호호호."

전하와 중전은 다정하게 말씀을 나누었다. 전하도 비마마의 말씀을 듣고 소리 높여 껄껄 웃으셨다.

"비마마의 말씀이 과연 옳소. 하는 수 없구려, 팔자소관이지. 하하하. 그러기에 국가의 큰일을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중전도 자주 찾지 못하는구려! 그래 내가 보고파서, 중전이 대전으로 나오려 하셨소?"

내외분의 정담과 밀어는 깨가 쏟아지는 듯했다. 이윽고 소헌왕후는 얼굴빛을 고치며 말씀한다.

"오늘 대전마마를 뵈오러 한 것은 잠시 아뢸 말씀이 있어서 의향을 알아보려 한 것이올시다."

전하는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묻는다.

"무슨 의논할 일이 있습니까?"

중전 소헌왕후도 옥안에 미소를 띠고 아뢴다.

"신첩의 아뢰는 말씀을 들으시고 혹시 역하게 생각하실까 하와 겁이 나옵니다."

전하는 왕후의 말씀을 듣자 음성을 높여 껄걸 웃었다.

"내가 언제 마마의 말씀을 역하게 생각했거나 노하게 들은 일이 있습니까. 마마가 한평생 곤위에 오르신 이후에 과인을 불민하고 미타하게 생각하신 적이 손톱만큼도 없는데, 과인이 어찌 후마마의 말씀을 역하게 생각하고 노엽게 들을 리가 있습니까. 하하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이다마는 절대로 역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오리다. 하하하."

전하는 또 한 번 쾌활하게 웃으셨다. 왕후는 다시 방긋방긋 웃음을 짓고 아뢴다.

"전하께서 노하지 아니하신다면, 황공하오나 은휘치 않고 아뢰겠습니다. 방자하다고 꾸짖지 마셔야 합니다."

전하도 또 한 번 웃으며 말씀한다.

"후마마께서 한평생 과인에게 정당한 말씀만 하신 것을 과인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후마마의 말씀은 언제나 과인을 보필하여 내조의 큰 덕을 주신 터인데, 내 어찌 감히 하시는 말씀을 미타하게 여기오리까. 어서 말씀해주시오."

"그럼 황공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께옵서 이사이 남만북적을 물리치시어 크게 국위를 선양하시고, 다시 나라 안에 예악문물을 정리하시어 서민들로 하여금 태평연월을 누리도록 하옵시는 홍업에, 비록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신첩이오나 항상 기쁜 마음을 가슴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와 요사이 전하께오서 거서로 십이율관을 제정하시어 나라에 정악을 마련하시는 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임금으로 할 일이 아니겠소. 비마마께서 궁중의 모든 질서를 잘 유시해주고, 조정의 신하들도 훌륭하게 보필해주는 덕이라 생각하오! 국가의 일은 한 사람의 힘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거든! 마마는 궁중의 모든 질서를 잘 지켜주시어 과인으로 하여금 정사와 교화에만 힘을 쓰도록 하게 했으니, 마마의 내조하신 일은 과인이 밖에서 하는 일보다 못지 않은 큰일이오이다. 후마마의 갸륵한 공덕을 입과 붓으로 표현할 길이 없소이다."

세종전하는 정중한 말씀을 소헌왕후께 보낸다. 전하의 말씀을 듣자, 소헌왕후는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을 올린다.

"전하께옵서 궁중의 질서를 지키는 일이 또한 내조의 하나라고 하교하시니 감히 아뢰옵니다. 오늘 신첩이 전하께 알현하옵고 아뢰옵고자 하는 바는 사실 궁중질서에 대하여 품달하옵고자 감히 알현을 청조한 것이옵니다."

중전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의 용안에 잠깐 놀라는 듯한 빛이 떠돌았다.

"궁중에 무슨 불미한 일이 생겼소이까?"

중전은 안색을 변치 않고 조용하게 침착한 태도로 대답해 아뢴다.

"놀라실 것은 없습니다. 불미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올시다마는, 궁중의 풍기와 기강이 해이해질 듯한 일이 있사와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의 용안엔 여전히 긴장한 빛이 감돌았다.

"풍기와 기강이 해이해질 듯한 일이라면 어찌 무관심하게 내버려 둘 일이겠소이까. 중전마마가 이러한 일은 바로잡으시어 궁중질서를 문란치 않도록 하십시오. 중전께서 넉넉히 혼자 처단하실 일이지, 과인한테까지 물어보지 아니하셔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중전은 다시 미소를 띠고 고한다.

"황공하오나 신첩 혼자서 독단으로 처리할 일이 못되와, 감히 아뢰옵니다. 그리하와 아까도 품달했거니와 전하께옵서 말씀을 들으신 후에 노엽게 생각하지 마십사고 아뢴 것이올시다."

전하는 답답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씀요? 간단하게 속히 말씀해주시오."

"혹시나 전하께서 하시는 큰일에 방해가 될까하여 이리 주저주저하고 말씀을 얼른 드리지 못합니다."

"관계치 않소. 어서 말씀하시오."

"그러면, 방자함을 무릅쓰고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께옵서 요사이 예와 악을 제정하시기 위하여 정무 여가에 촌가의 틈도 없이 악리를 연구하시는 일은 신첩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와 관습도감의 여악을 시시로 편전에 명소하시어 시빙율을 조정하는 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국악을 제정하시는 일이 국가의 막중한 대사인 줄도, 아무리 규중에 있는 왕비라 하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관습도감의 여악은 역시 기생이올시다. 전하께서 아무 다른 뜻이 없으신 줄도 신첩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궁중에는 내명부인 후궁과 상궁 들 이하 무수한 궁녀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올시다. 내시, 무예청, 별감 이하 모든 액정들이 보는 바에 관습도감 기생이 편전으로 무상출입을 한다는 일은 궁중의 풍기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크나큰 장애가 생기옵니다."

소헌왕후는 옥안에 화한 빛을 잃지 아니하고 차근차근, 궁중의 풍기와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정정당당한 바른 말이다. 부드러운 솜방망이로 전하의 용포 자락을 쿡쿡 찔러 간하는 듯했다. 전하는 당황했다. 용안이 잠시 붉어졌다. 소헌왕후는 말씀을 계속한다.

"신첩이 이런 말씀을 올린다면 혹시 전하께옵서는 신첩이 젊지도 않은 나이에 별안간 투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이러한 말씀을 올리는 줄 오해하실까 보아 한동안 아뢰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옵서도 통촉하시는 바와 같이 지금 궁중에는 후궁들이 여러 사람있습니다마는 모두 다 전하를 받들어, 추호만한 시샘과 알력도 없이 궁중에 화기가 가득하옵고, 왕자와 옹주들을 생산해서 왕실이 창대하고 규범이 찬연하옵니다. 모두 다 성상의 덕화의 은혜로운 바람이 이러한 왕가의 번영을 이룩하신 것이올시다. 이러한 화기가 이룩되는 것은 규범과 질서가 엄격해서 왕실이 번영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구중궁궐 안에 질서가 서 있는 중에 비록 국가에 폐치 못할 아악을 제정하기 위한 일이라 하오나 관습도감 기생이 편전으로 무상출입한다는 이 사실은 궁중의 기강을 저해시킬까 두렵습니다. 신첩은 절대로 투기해서 아뢰는 말씀이 아니올시다. 궁중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왕후의 책임이올시다. 그러하와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전하는 소헌왕후의 부드러우면서 논리가 정정당당한 말씀을 듣자 용안에 숙연한 빛이 떠돌았다. 용포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씀한다.

"중전의 의도와 말씀은 언언구구 나의 폐부를 찔러서 감동케 하는 말씀이오.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생각하지 못했소이다. 내 어찌 아름다운 계집에 마음이 있어서 여악을 편전으로 불렀겠소. 다만 이사이 나의 한 가지 마음먹은 일은, 국가가 창설된 지 이미 오래건만 아악다운 국악이 없었소이다. 국가가 있으면 반드시 예악이 있어야만 문명한 국가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례작악을 하는 데 과인은 전력을 기울이는 중, 다행이 하늘이 도와서 해주에 거서가 나타나 십이율관을 정했소이다. 그러나 아직도 경석이 나타나지 아니해서 더한층 악리를 연구하는 중, 관습도감에 제법 지음하는 아이가 있기에 틈이 나는 대로 악리를 이야기하려 하여 편전으로 불렀던 것이오. 이제 곤전의 말씀을 들으니 과연 그러하오. 내명부들도 행동하기 어려운 금중에 여악을 무상출입하게 했으니 확실히 과인이 실수를 했소이다.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한 탓이오이다. 곤전에게 사과를 하는 동시에 다시는 여악의 궁중출입을 금하오리다."

전하는 정중하게 소헌왕후를 향하여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말씀을 했다. 일국의 제왕이면서 바르고 옳은 정론 앞에는 허심탄회하게 일을 뉘우쳤다. 성주 세종의 인간미가 약여하게 드러난다. 소헌왕후는 오히려 황공하고 당황했다. 잠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한동안 주저주저하다가 말씀을 올린다.

"전하께옵서 사과하신다는 하교를 내리시니 신첩은 황공 송구하와 과연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소현왕후의 옥안엔 홍훈이 떠돌았다. 전하는 다시 화한 빛을 용안에 띠고 말씀한다.

"사람이란 허물이 있으면 지체없이 고치는 것이 사람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귀중한 도리오이다. 내가 비록 군왕이라 하나 일을 잘못 처리했다 하면 당연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과인의 악리를 연구하려는 일로 인하여 궁중의 규범과 질서가 문란해진다면 어찌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을 어거할 수 있겠소. 내일부터라도 여악의 편전출입을 중지시키고 다른 방법으로 악에 대한 일을 연구할 테니 마마께서는 방심하시기 바라오."

전하는 어디까지나 너그럽고, 정직하고, 겸손했다. 손톱만큼도 제왕의 권위를 휘둘러 뽐내려 들지 아니했다. 다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당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려고 노심초사해서 정성을 다하여 노력할 뿐이었다. 인간으로서 계급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손아래 사람들의 말이라 할지라도 조정에서나 궁중에서나, 바르고 옳은 일이면 자기의 그릇된 주장을 지체없이 버리고 곧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이 어진 임금, 영특한 임금, 성스런 임금이 된 그의 인간 자세다. 소헌왕후는 전하의 말씀이 여기까지 이르자, 더욱 황감했다. 옥음을 나직하게 해서 아뢴다.

"전하께오서 신첩이 아뢴 금중질서에 대하여 크게 예지를 내리시어 통촉해주시고, 여악의 금중출입을 곧 중지하겠다 하시니 신첩으로서는 황공무지한 중에, 전하의 바다 같으신 도량에 감읍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말씀 다시 아뢸 일이 있습니다."

전하는 정색하고 묻는다.

"무슨 말씀이 또 계시오?"

비전하는 다시 공손히 아뢴다.

"국가의 제례작악을 하시는 일은 전하의 큰 임무시옵고, 금중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왕후인 신첩의 맡은 바 책임입니다. 지금 형편으로 말씀한다면 두 가지 일이 다 함께 중대한 일이올시다. 어느 한 가지를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전하께서는 전과 같이 여악을 시측케 하시어 악리를 연마하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귀를 의심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여악이 편전으로 무상출입을 함으로 인해서 궁중의 질서와 규범을 문란케 한다고 과인을 꾸짖었던 후마마가, 이제 다시 제례작악도 불가피한 일이니 그대로 여악을 편전에 시측하도록 하라 하니, 도대체 후마마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소이다. 그것은 과인을 나무에 오르라 한 후에 다시 흔들어서 희롱해보는 수작이 아니겠소? 도대체 후마마의 근본 뜻을 모르겠소이다."

전하의 용안은 엄숙했다. 소헌왕후는 차분하게 안색을 고치지 않고 아뢴다.

"황공무지하옵니다. 신첩이 어찌 감히 하늘 아래 단 한 분이신 전하를 희롱하오리까. 돌팔매 한 개로 새를 두 마리씩 맞히는 격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이 일을 허락해주신다면 두 편이 다 좋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전하는 껄껄 웃었다.

"상말에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다 하는 말이 있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있었소. 과인의 음악연구에도 좋고 주전의 궁중 규범을 지키는 데도 좋다는 말이로구려. 어떠한 방책이 있단 말씀요?"

소현왕후는 옷깃을 단정하게 매만지며 정중하게 말씀한다.

"여악 취옥이를 기생의 몸으로 편전에 출입을 하게 하지 마시고, 아주 내명부 후궁을 삼으시어 전하의 악리를 정리하게 하는 한편, 항상 옆에 두시어 전하의 건즐을 받들게 하옵소서. 이리 하오면 궁중에 잡음이 생기지 않고 질서가 엄하게 유지되니 일거양득이 되옵니다."

전하는 소헌왕후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한 말씀으로 거절한다.

"나보고 후궁을 또 한 사람 두란 말씀요? 당치 아니한 의견입니다. 과인이 취옥으로 후궁을 삼고 싶었다면 벌써 내명부의 직첩을 주어서 내 곁에 두었을 것이지, 이제 후마마가 말씀을 한다 해서 그애로 후궁을 삼겠소이까? 과인은 취옥을 데리고 다만 악에 대한 일을 연구하기 위하여 편전으로 출입하게 한 것이니, 만약 궁중의 규범에 어긋난다면 오늘부터라도 출입을 중지하도록 관습도감에 명을 내리면 관계없으니 후마마는 과히 염려치 마시오."

소현왕후는 다시 옹용한 화기를 띠어 아뢴다.

"전하께오서 제례작악하시기 위하여 지음하는 여악을 시측시키시는 일은 역시 국가발전에 큰 사업이올시다. 지의하지 마시고 신첩이 아뢰는 말씀을 청허하시어 취옥으로 후궁을 정하시옵소서. 이리하신다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로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고집하지 마시고 신첩의 의견을 들어주시옵소서."

전하는 정색하고 대답한다.

"나에게는 지금 후궁이 다섯 사람이나 있소이다. , 꼽아보십시다.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숙원 이씨, 상침 송씨, 이같이 다섯 명이나 있지 아니하오. 모두 다 후마마의 너그럽고 어진 덕화로 궁중이 화합해서, 과인이 마음을 놓고 나랏일에만 전념을 하고 있는 터인데, 또다시 나이 어린 후궁을 둔다는 일은 자식들 보기에도 부끄럽소이다. 다시는 두말 하지 마시오. 편전에 여악을 출입시키는 일은 단연코 오늘부터 중지하오리다. 나는 그동안 악서도 많이 읽어 보고 십이율의 가락도 좋이 시험해봤으니 그만하면 대강 악에 대한 원리는 짐작하게 되었소이다. 다시는 궁중의 규범을 문란시키지 아니할테니 안심하시오."

전하의 말씀은 근엄했다. 부드럽고 화하고 착하고 어질어서 가지가지로 총명한 예지를 갖춘 전하였다. 그러나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한번 정해놓은 후에는 마음이 철석같이 흔들이지 아니했다. 이러한 독특한 성질이 있는 때문에, 신하를 한 번 믿으면 만 사람이 훼방을 놓아도 탁 믿어서 기어코 일을 성공시키게 하는 훌륭한 성격을 가졌다. 소헌왕후는 전하께서 한 번 마음을 정하신 후에는 어떠한 일이라도 용이하게 바꾸지 아니하는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하의 말씀이 여기까지 이르자, 마음속으로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은 일국의 곤전이라는 왕후의 직책을 다하기 위하여, 궁중의 규범과 질서를 엄숙하게 이행하기 위하여 기생의 자격으로 궁중에 무상출입하는 일을 막고, 여악 취옥을 아주 후궁으로 봉해서 궁중의 모든 유언과 잡음을 막으려 하여 전하께 아뢴 일인데, 전하는 법도 있는 중전의 뜻을 받아들여서, 여악의 궁중 출입을 중지시키겠다고 말씀하시니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제례작악하는 국가사업을 방해하는 듯한 오해를 받기 쉬웠다. 잠시 마음속으로 괴로움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의 용안이 다시 화평한 기상으로 돌았을 때, 소헌왕후는 조용히 전하께 다시 말씀을 아뢴다.

"여악 취옥을 후궁으로 봉하시어 한편으로 궁중의 규범을 문란치 않게 하고 한편으로 전하의 제례작악 하시는 큰 사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의견은 신첩 한 사람의 의견만이 아니올시다. 궁중의 여론이올시다."

전하는 여전히 마음이 흥락하지 못했다.

"왕후의 의견이라면 모르되 궁중의 여론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요? 건방지게 어떠한 것들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단 말씀요?"

소현왕후는 웃음을 짓고 아뢴다.

"궁중의 여론이란, 신첩이 말씀을 조금 과장되게 아뢴 것이니, 용서해주시옵소서. 신첩은 내조하는 궁중의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기에, 기생 취옥의 일에 대하여 며칠 동안 마음을 괴롭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동궁이 저녁 문안차 들어왔길래, 여악의 일을 걱정했더니, 동궁은 태연한 태도로 말씀했습니다. 아바마마께 아뢰어 취옥을 후궁으로 봉하라 했습니다. 그리하오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 했습니다. 기실은 취옥을 후궁으로 봉하자는 것은 신첩의 의견이 아니옵고, 동궁의 의사올시다. 신첩도 동궁의 슬기 있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탄복해서 전하께 품달한 바입니다. 동궁의 슬기 있는 의견을 아름답게 받아들이시어 일이 규각이 나지 않도록 선처하시는 것이 온당할 줄 아뢰오."

전하는 항상 동궁의 학문과 교양 있는 행동을 마음속으로 크게 미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취옥을 후궁으로 봉하는 일이 가장 좋은 방편이라고 어마마마께 아뢰었다는 소현왕후의 말씀을 듣자, 마음속으로 동궁을 무한 가상하게 생각했다.

"동궁이 그런 말을 처음 꺼냈더란 말씀요?"

전하의 엄숙했던 용안이 슬며시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미소를 지으며 말씀한다.

"주제넘구려! 동궁이 아비의 후궁까지 걱정을 했더란 말씀요. 하하하."

전하의 굳은 마음은 차차 얼음 녹듯 풀어지기 시작했다. 소헌왕후는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동궁도 일전에 전하의 소명을 받자옵고 여러 대신들과 함께 취옥이 십이율관에 맞추어 창을 부르고, 마마께오서 하문하시는 악리에 대하여 응구첩대하는 일을 배종해서 목도했다 합니다. 취옥은 아악 제정에 크게 도와드릴 아이오니 아주 후궁을 삼아서, 한편으로는 아바마마의 큰 사업을 이루시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어미의 근심하는 일을 덜어주기 위하여 이같은 지혜를 낸 것이라 합니다. 동궁은 과연 효자이올시다."

소현왕후가 아뢰는 효자라는 말에 세종전하는 마음이 활짝 열려서 유쾌했다.

"후마마도 취옥을 후궁으로 삼으라고 말씀하고 세자도 그리하기를 원했다 하니 하는 수 없소이다. 그러나 후궁은 과하오. 내일이라도 취옥을 궁인으로 삼으시오. 모든 절차는 다 후마마께서 처리하시오. 하하하."

세종은 마침에 취옥으로 궁인 삼는 일을 윤허했다. 소헌왕후도 마음이 흐뭇했다.

"염려 맙시오. 마마께서 정 그러하시다면 궁인으로 맞아들이오리다. 절차는 모두 다 신첩에게 맡기시옵소서."

대전과 중전은 화락한 웃음을 크게 나누며 헤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동궁은 자전께 취옥을 전하께 후궁으로 맞아들이시도록 아뢰라고 말씀했으나, 일개 여악을 일약 후궁으로 봉한다는 것은 너무나 절차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소헌왕후도 전하의 궁인으로 봉하라는 분부를 옳게 생각했다. 궁중 안 내명부의 계급은 역시 질서 있고 엄하게 정해 있다. 왕후는 곤전인 정궁이니 제왕의 배위다. 임금과 일체가 되는 것이요, 그 아래 내명부가 있다. 정일품 빈 칭호를 받는 이가 있으니 왕후의 다음 가는 자리로서 동궁빈이 있다. 다음에 임금의 후궁으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후궁을 역시 빈이라 한다. 빈 다음 자리에 있는 후궁을 귀인이라 부른다. 정일품에 다음가는 종일품이다. 다음은 정이품 소의, 종이품 숙의, 정삼품 소용, 종삼품 숙용, 정사품 소원, 종사품 숙원이 있다. 동궁빈을 제하고 정일품 빈마마서부터 종사품 숙원까지는 당당한 임금의 후궁이다. 이러한 후궁들은 대개는 임금의 총애를 입은 후에 왕자와 옹주를 생산해서 종사품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다음에는 역시 내명부지만 후궁이 아니라 궁인에 속한다. 통칭해서 상궁이라 하는데, 상의는 정오품이니 의전을 맡은 상궁이다. 임금의 옷을 맡은 상궁은 상의요, 음식을 맡은 상궁은 상식이라 하는데 종오품이 된다. 다음에 임금의 침실을 상침과, 궁인들의 공적을 살피는 상공이 있다. 정육품이요, 기록을 맡은 상정과 상기가 있으니 종육품이다. 다음에는 손을 대접하는 전빈이 있고, 옷을 맡은 전의와 찬을 맡은 전선이 있으니 정칠품이다. 다음에 전설은 궁중의 모든 설비를 맡고, 제술을 맡은 전제가 있다. 또다시 언관 비슷한 전언이 있으니 종칠품이요, 궁인의 일을 협찬하는 전찬이 있고, 궁중의 장식을 맡은 전식이 있다. 다시 약을 달이는 전약이 있으니 정팔품이다. 전등은 궁전의 등불을 켜는 책임자요, 전채는 채색을 살피고, 전정은 모든 일을 바로잡는 책임을 맡았다. 모두 다 종팔품이요, 음악을 맡아서 아뢰는 주궁, 주상은 정구품이요, 주변치, 주치, 주우, 주변궁은 종구품이다. 마치 군왕 아래 조정이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관원을 정과 종으로 나누어 열여덟 계급을 둔 것과 똑같이, 왕후궁에도 정일품서부터 종구품까지 열여덟 계급을 두어서 내명부를 구성해놓았다. 궁중의 전범과 규율은 이같이 질서가 정연했다.

소헌왕후는 궁중에 매일 출입하는 관습도감의 여악 취옥을 동궁의 진언에 의하여 세종전하께 후궁을 삼아서 궁중의 질서를 유지케 하라고 아뢰었다. 전하는 후궁이 많은 터에 또다시 후궁을 두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다가 동궁의 건의라는 말씀에 감동이 되었다. 후궁은 과하니 궁인의 직첩을 주어서 궐 안에 상주케 하라 하고 모든 절차를 후마마에게 맡겼던 것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전하의 쾌한 윤허를 받은 후에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보았다. 종사품 숙원 이상은 후궁이 되니 취옥을 숙원 이상으로 봉할 수는 없었다. 정오품부터는 상궁인 궁인이다. 궁인 중에는 궁, , , , 우의 음악을 맡은 정구품과 종구품의 주궁, 주상 등이

있다. 그러나 악리에 밝다는 취옥을 그중 말단인 주변궁 따위로 임명하기가 난처하기도 했다. 한동안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한 후에 마음으로 정하고 안온한 침수에 들었다. 이튿날 소헌왕후는 대전 별감을 내전으로 불렀다. 대전 별감이 황망히 뜰 아래에 대령했다.

"너는 곧 관습도감에 나가서 도감 제조에게 일러라. 여악 중에 취옥이란 기생을 기안에서 제적시키라 일러라! 그리고 내가 따로이 상궁을 보내서 궁중으로 맞아들일 테니 기생 취옥은 대기하고 있으라 일러라!"

소헌왕후의 분부를 받자, 대전 별감은 홍의 자락을 펄럭거리고 궐문 밖으로 나갔다. 곧 관습도감을 찾아서 제조와 취옥에게 왕후의 분부를 전달했다. 소헌왕후의 분부를 별감에게 전해들은 박연은 소헌왕후께서 취옥을 부르시는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때마침 편전으로 들어가려고 몸 매무새를 곱게 다스리고 있던 취옥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취옥은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대전 별감의 인도로 전하의 편전으로 자주 드나든 일이 있었으나 한 번도 왕후마마를 뵈온 적은 없었다. 소문으로 듣기에, 왕후마마는 성정이 어질고 덕이 많으신 분이나 규율을 지키시는 데 심히 엄격하시어, 궁인들이 추호라도 게으르고 한만한 태도가 있으면 가을 서릿발같이 준엄한 꾸지람을 내리시는 분이란 말씀을 항상 귀에 젖도록 듣고 있었다. 여태껏 여러 차례 편전에서 전하를 모시어 악기를 타고 창을 불렀으나, 후마마께는 한 번도 문후를 드릴 기회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한 번 문안이라도 드리고 싶었으나 전하의 분부가 아니 계시고, 또 감히 어떤 궁인을 통해서 문후를 올리고 싶다고 말할 계제도 되지 못했다. 항상 편전으로 들어갈 때마다 멀리 내전인 왕후궁을 바라보고 존엄하게 생각만 할 뿐이었다. 이제 돌연 별감을 통하여 후마마께서 입시를 명하시니 오만가지 별의별 생각이 났다. '기생의 몸으로 무단히 편전으로 출입한다고 크게 진노하시어 극형을 내리시려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옛이야기를 들으면 중국에서는 투기가 심한 왕후가, 임금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가까이하면 잡아다가 손과 다리를 잘라서 측간에 가두어 두고 '사람 돼지'라고 한 일까지도 있었다 한다. 왕후가 잡아다가 죽이지나 아니할까 겁이 더럭 났다. 몸치장하던 일은 집어치우고 급히 관습도감청으로 올라가 제조께 뵙고 말씀을 사뢰었다.

"나리 마님, 곤전마마께서 쇤네를 부르신다 하니 웬일이오니까?"

취옥의 얼굴빛은 당황하고 말소리는 떨렸다. 난계 박연은 진중한 분이다. 얼른 경솔하게 대답하지 아니했다.

"글쎄다. 곤전마마께서 별감을 내보내시어 너 같은 여기를 부르시니 크나큰 영광이다마는, 나도 까닭을 짐작하지 못하겠구나!"

"혹시 국문하셔서 죽이지는 아니하실까요?"

난계는 웃으며 대답했다.

"곤전마마께서는 인자하고 후덕하신 분으로 조야에 명성이 대단한 분이다. 죄 없는 너를 국문해서 문초하실 일은 없을 듯하다."

"나리 마님, 세상일을 누가 압니까. 중전마마의 허락도 없이 전하의 편전으로 무상출입을 했다고 때리시면 맞았지 별수가 있습니까?"

취옥은 겁에 질려서 점점 얼굴빛이 파랗게 질렸다. 이때 별감은 밖에서 어서 가기를 재촉했다.

"곤전마마께서 명소하시는데 일개 여악이 너무나 태만하구나. 어서 판교에 오르도록 하라!"

취옥은 하는 수 없었다. 치마고름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판교 위로 올랐다. 별감이 대동한 취옥의 판교는 풍우같이 대궐로 향해 달렸다. 궐문 밖에서 내린 취옥은 별감의 인도를 받으며 전하를 모시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던 편전을 멀리 바라보면서 중궁으로 들어가 뜰 아래 대령하고 있었다. 별감이 뜰 아래서 전상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친다.

"관습도감 기생 취옥이 대령이오."

전상에서는 소헌왕후가 별감의 아뢰는 말씀을 들으신 모양이다. 상궁 전의에게 분부를 내리신다.

"네가 나가서 취옥이란 여악을 불러 올리라!"

의전을 맡은 상궁은 소헌왕후의 의지를 받고 뜰 아래로 내려서 부복해 엎드려 있는 취옥을 붙들어 일으켜 전상으로 인도했다. 이때 취옥은 비로소 안심하는 숨을 얄팍한 입술 사이로 가만히 쉬었다. '죽지 않고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죄를 해서 국문을 한다면 뜰 아래서 할 일이지 전상으로 오르라 할 리는 만무한 때문이다. 취옥의 얼굴에는 비로소 생기가 소생되고 눈에는 정신기가 돌아서 반짝했다. 상궁의 인도로 어전으로 들어가니, 넓고 넓은 전각 안에는 소헌왕후가 옥좌 위에 단정히 앉아 계시고, 전후좌우에는 빈 이하 모든 후궁과 궁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시립해 있었다. 취옥은 새물 청어가 아니었다. 전하의 총애를 입어 여러 차례 편전으로 드나들면서 궁중 안 풍습을 짐작해서 훈련된 여자였다. 들떴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두렵고 무서웠던 심정도 진정되었다. 편전에서 전하를 향하여 뵙듯, 장지 밖에서 정면으로 왕후를 바라 뵙지 않고 곡배의 형식을 취해서 보드라운 흰 손을 모아 큰절을 네 번 올렸다. 몸가짐이 가벼우면서도 참을성이 많고 진득했다. 사배를 올리며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모습이 어찌나 고운지, 치맛자락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듯 마는 듯 소르르 일어서고 사르르 앉아서 마치 한 폭의 절하는 미인도가 소리 없이 움직이는 듯했다. 소헌왕후는 취옥의 절하는 태도를 바라보시자, 마음속으로 '제법 교양을 받은 계집이로구나'하고 생각했다. 취옥은 큰절을 마치자, 치마꼬리를 왼손가락으로 곱게 휘어잡고, 살몃살몃 뒷걸음을 쳐서 서너 걸음 밖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다소곳 숙이고 조용히 섰다. 내명부들 모든 후궁과 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취옥의 왕후께 알현하는 태도로 집중되었다. 모두 다 침을 삼키며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곳 나무랄 데 없는 교양 높은 탯거리다. 수십 년 궁중에서 거행한 궁인들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마음속으로 급제 점수를 주었다. 소헌왕후는 장지 밖으로 물러서 있는 취옥의 태도를 말씀 없이 한동안 유심히 바라보셨다. 다시 마음속으로, '재치 있고, 총명하게 생긴 계집이로다! 이쯤 되니 악에 대하여 십이율을 가릴 줄 알아서, 전하의 굄을 받을 만하구나!' 생각했다. 이윽고, 왕후는 어진 눈매를 굴려 손을 들어 취옥을 부르셨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취옥은 사양치 않고 조심조심 맵시 있는 삼승버선의 발길을 옮겨서 장지문을 지나 왕후마마 지척에 모시어 섰다.

"네가 창을 잘하고 십이율의 악에 대한 공부도 도저하다는구나?"

취옥은 황공했다. 수삽한 태도로 고개를 다소곳 숙여 대답해 아뢴다.

"어려서부터 선생한테 약간 창법을 익혔을 뿐이옵니다. 어찌 감히 공부가 도저할 수 있사오리까."

조용조용 대답해 아뢰는 음성은 나긋나긋 연하면서도 금성을 내어서 은방울이 구르는 듯했다. 소헌왕후는 또 한 번 마음속으로 생각해본다.

'잘 길들이면 쓸모 있는 계집이 되겠다!'

다시 너그러운 눈을 들어 취옥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내가 오늘 너를 부른 일은 다른 일이 아니다. 요사이 상감마마께서는 아악을 창제하시려고 근념하시는 중에 하늘이 도우셔서 해주에서 거서가 나타나서 더한층 신명이 나셨다. 마침 관습도감에 너 같은 지음하는 아이가 있어서 가끔 편전으로 너를 부르시어 악리를 연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내 마음도 기뻤다. 그러나 궁중은 지엄한 규범과 질서가 있는 곳이다. 밖의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다. 더구나 상감마마께서 계오신 편전에 외인의 무상출입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소헌왕후의 말씀이 여기까지 내렸을 때, 취옥의 얼굴빛은 두렵고 황공해서 홍조가 가득히 물들면서 가슴이 사뭇 방망이질을 치는 듯 두근거렸다. 등에는 진땀이 쭉 흘렀다. 아까 전상으로 오르기 전의 두렵고 무섭던 마음이 다시 명치끝으로 솟구쳐 올랐다. 마음속으로 '이제는 꼼짝 도리 없이 전각 아래로 끌려 내려가 죽는 몸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소헌왕후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그러나 전하께오서는 국가의 큰 사업을 창제하시기 위하여 시시때때로 너를 부르시어 하문하신다 하니 이것 역시 전하의 폐하지 못한 사업의 하나다. 그리하지 맙시사고 만류할 도리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전하께 아뢰었다. 너를 내명부 궁인으로 삼아서 아주 궁중에 있게 하여 전하를 편전에서 모시게 하기로 작정했다. 네가 능히 그러한 책임을 맡겠느냐?"

소헌왕후의 마지막 말씀을 듣자 취옥은 제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얼떨떨했다. 무어라 말씀을 올려야 좋을지 몰랐다.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얼른 대답 말씀을 올리지 못한다. 취옥이 당황해서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하는 것을 보자, 옆에 있던 나이 많은 전의상궁이 취옥의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궁인이 되라 하시는 크나큰 별은전이다. ''하고 대답을 올려라."

취옥은 늙은 상궁이 시키는 대로, "." 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존엄한 자리에 무어라고 도저히 중언부언 아뢸 길이 없었다. 소헌왕후는 취옥의 소박하고 당황해하는, 세속에 때묻지 아니한 태도가 도리어 마음에 드셨다. 이내 전의상궁에게 분부를 내린다.

"기록을 맡은 상정상궁과 상기상궁이 나와 있느냐?"

", 저곳에 시립해 있사옵니다."

"두 상궁을 불러라!"

의전을 맡은 전의상궁은 상정과 상기를 눈짓해 불렀다. 두 상궁이 왕후마마 앞에 부복했다.

"모든 비빈과 궁인들이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관습도감 여악 취옥에게 내릴 상침의 직첩을 써서 가져오너라!"

상정과 상기 두 상궁은 의지를 받고 장지 밖으로 나가, 연상에 먹을 갈아 즉석에서 첩지를 썼다. 아직 훈민정음이 제정되기 전이었다. 상정과 상기는 진서를 쓸 줄 아는 자로 뽑아서 임명했던 것이다. 두 상궁은 백지장자에 먹글씨로 시를 적었다. 장지종이에 씌여진 먹글씨에는 묵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상정과 상기는 쓰기를 다하자 첩지를 받들어 왕후전하께 올렸다. 후마마는 첩지를 읽어보시자 미소를 풍기시며 취옥을 부르셨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전의상궁이 취옥을 인도해서 후마마 옥좌 앞에 서게 했다. 왕후전하는 친히 취옥에게 첩지를 내리시며 말씀한다.

"너에게 정육품 상침의 직책을 준다. 상침이란 전하의 편전과 나의 침소의 모든 일을 가암 알아 보살피는 직책이다. 품수도 높아서 육품직이다. 남자로 친다면 대과급제를 해서 장원이 된 후에 출륙을 해서 육품관이 되는 것과 똑같은 지위다. 네가 지음을 해서 악리를 짐작하여 전하를 항상 도와드리게 되므로 불차탁용해서 육품직 상침을 봉하는 것이니 명심해서 지성껏 전하를 모시도록 하라."

취옥은 황공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먼저 사배를 드려 큰절을 한 후 비마마께서 내리는 첩지를 받고, 또다시 첩지를 두 손으로 받은 채 사배를 드렸다. 첩지를 두 손으로 받든 채 사은하는 사배를 드리기란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날렵한 몸가짐과 재치있는 움직임이 아니면 도저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보통 여인들은 첩지를 옆에 올려놓고 배례를 드리는 일이 보통이다.’ 소현왕후는 또 한 번 귀엽게 생각하셨다. 소현왕후는 취옥의 사은을 받으신 후에 다시 한 말씀을 당부한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지금 외전에서 정무를 살피고 계시니, 이따 승석 때 너를 나의 침전으로 부르리라. 전의상궁은 취옥을 모든 궁인에게 상호례를 하게 한 후 내가 내리는 사찬을 받게 하고 대기하고 있게 하라."

소헌왕후는 분부를 내리자 중전 침실로 듭시었다. 의식을 맡은 전의상궁은 소헌왕후가 침실로 듭신 후에 취옥을 인도하여 모든 후궁들에게 큰절을 올리게 했다. 영빈 강씨, 신빈 김씨, 예빈 양씨, 숙원 이씨가 차례로 절을 받고, 상침 송씨 이하 모든 상궁들은 상호례로 맞절을 했다. 움직이는 우아한 취옥의 태도는 제법 범절이 있어서 모든 후궁과 궁인들의 호감을 샀다. 이윽고 중전 넓은 대청에는 소헌왕후의 분부대로 왕후의 사찬이 내렸다. 취옥을 궁인으로 봉하는 잔칫상이다. 모든 후궁과 궁인들은 취옥을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화기 가득한 속에 왕후마마께서 내리시는 사찬 잔치를 끝냈다. 이윽고 해는 기울어 승석 때가 되었다. 소현왕후는 전의상궁을 불러 전하의 동정을 살폈다. 외전에서 정무를 보살핀 후에 편전으로 듭시었다는 기별을 듣자, 전의상궁을 앞세우고 친히 취옥을 거느려 대전 편전으로 향했다. 이때 궁 안에는 등촉방 상궁들이 불을 밝혀서 등촉이 전각마다 휘황했다. 전의상궁은 먼저 편전문을 가볍게 두드린 후에 장지 밖에 부복하여 전하께 아뢰었다.

"중전마마께옵서 새로 봉한 궁인을 거느리시고 친히 듭시옵니다."

전하는 옥좌에 앉아서 악서를 보시다가 책장을 덮고 말씀한다.

"중전마마께서 듭신단 말이냐?"

말씀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전을 대접하는 극진한 예의다. 이때 소헌왕후는 미소를 띠고 편전 안으로 들어오시고, 뒤에는 취옥이 고개를 조신하게 숙여서 후마마의 뒤를 따랐다. 휘황찬란한 등촉 아래 비취지는 취옥의 태도는 낮에만 대해보는 전하의 눈에 더한층 요조한 절세미인으로 보였다. 전하의 눈이 약간 황홀했다. 소헌왕후는 옥안에 담뿍 미소를 풍기시며 전하께 아뢴다.

"관습도감 여악 취옥을 궁인으로 상침 첩지를 내렸습니다. 오늘부터 관습도감으로 내보내지 마시고 항상 전하 곁에 모시고 있게 하여 침실을 보살펴드리도록 했습니다. 전하께옵서 옥좌에 진좌하시어 새로 된 상침 취옥의 사은을 받으시옵소서."

소헌왕후는 이내 취옥을 이끌어 전하께 숙배를 드리게 했다. 취옥은 이제는 일개 관습도감의 여악이 아니다. 당당한 궁인이 되었다. 궁인 중에도 어전 지척에 조석으로 모시어 침실을 보살피는 상침상궁이다. 전의상궁의 지도로 전하께 사배를 드렸다. 전하는 사은을 받으신 후에 취옥에게 말씀을 내린다.

"중전마마의 갸륵하신 뜻으로 너를 특별히 발탁하시어 상침이란 직책을 맡기셨으니, 중전마마의 하해같은 은덕을 가슴 안에 깊이 간직해서 양궁의 상침 구실을 극진히 받들도록 하라!"

양궁은 대전과 중전 두 궁을 말씀한 것이다. 취옥은 ''하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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