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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10-1

10권 밝은 임금 어진 신하

 

김종서

 

며칠 후의 일이다. 우의정 자리에서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로 임명된 최윤덕은 새로 설치된 자성, 무창, 여연, 우예의 사군과 평안도 전지역을 순찰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어전에 배알하고 하직을 고했다. 전하는 특별히 백관을 경회루에 회동케 하고 친히 납시어 환송연을 열었다. 압록강 이남을 경계로 하여 서북면 일대의 지역이 얼마나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정부 관원과 백성들에게 인식시키자는 뜻이다. 최윤덕을 전송하는 이 자리에는 정삼품 이상의 관원은 말할 것 없고, 세자저하를 위시하여 모든 왕자와 대군들도 참집케 했다. 세종전하는 최윤덕에게 친히 전별하는 술 한 잔을 따라주시며 말씀을 내린다. 모든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 전하의 말씀을 듣는다.

"경을 위시하여 모든 장성들이 파저강 여진을 소탕한 일은 국가에 대하여 크나큰 이익과 복을 주게 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 경이 안무찰리사의 책임을 맡고 새로 설치한 사군을 지키고 다스리러 가는 일은 여진의 소굴을 응징한 그 일보다도 더 큰 책임을 맡았다 할 것이다. 첫째로 경은 득민심을 해서 서민들을 평안케 하라. 둘째로 비록 여진의 족속이라 하나 원수로 다루지 말라. 귀화해서 복종하는 자는 후하게 대접해서 원한을 품지 않도록 하라. 셋째로는 국방을 튼튼히 해서 비록 불모의 땅이라 할지라도 한 치 만한 국토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 만일 그리된다면 경이 대군을 거느려 건주위 이만주를 성토한 일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방어할 대상은 유독 여진족속만이 아니다. 명나라도 우리 땅을 노려보고 있다. 명나라는 지금 요동을 관장하고, 차츰차츰 두만강 줄기까지 손을 뻗치려 한다. 우리의 적은 여진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겉으로 명에 대해서 우방, 또는 선린으로 수교하고 있으나 명이 또한 이러한 아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들은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전하의 옥음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모든 신하들은 숙연히 고개를 숙여 말씀을 듣는다. 전하는 다시 한 말씀을 강하게 내린다.

"뜬소문이 되기를 바란다. 명에서는 지금 우리의 황폐한 땅을 범해서 공주에 공주위를 설치하려 한다는 풍설이 떠돌고 있다. 알아듣겠는가?"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결연히 입술을 다물었다. 말씀은 만조백관의 폐부를 강하게 찔렀다. 최윤덕이 국궁하고 아뢴다,

"전하의 하교는 명심하겠습니다."

세종은 친히 술 한 잔을 다시 부어 내렸다. 최윤덕은 두 손을 모아 잔을 받들고 돌아서 마진 후에 어전에 고별 인사를 올렸다, 전하는 최윤덕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다시 부탁한다.

"잘 가서 다스리라?"

말씀을 내린 후에 장중한 걸음으로 누에서 내려 육교에 올라 대전으로 환어했다. 변지로 보내는 중신 대접이 이같이 융숭하고 은근했다, 이날 최윤덕은 여진통사와 종사관, 군관 등 가십여 명을 거느리고 홍제원, 구파발, 벽제관을 거쳐 임소로 향했다.

 

말꼬리는 다시 건주위 여진 이만주에게 돌아간다. 최윤덕의 개선군이 파저강과 압록강을 건너 개선한 후에 건주위 추장 이만주는 정신을 수습하고 초토 속에서 다시 살아갈 태세를 취했다. 모든 추장들을 모아 패전 후의 대책을 강투했다. 조선군에 대항한 때문에 군량으로 서속을 많이 소비했다. 이제는 압록강을 건너 여연파 강계로 노략질하러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 정부에 대해서 전과 같이 보리와 쌀을 구걸할 염치도 없다.백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사냥하는 일을 권장해서 멧돼지와 노루며 토끼 등 야생동물을 잡아서 충복하게 냈다. 다음엔 군사를 점고해보았다. 좌군 부대는 반수 이상이 꺾어지고 좌군 부대장과 퉁맹가가 전사했다. 우군 부대 이천여 명은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이 고스란히 인솔하고 패군으로 가장한 후에 아내와 함께 우디거로 달아났다. 기막힐 일이었다. 거여, 마천, 올라, 팔리수, 임카라 등 모든 부락의 병력도 3분의 2 이상의 군사들이 죽어버렸다. 이만주는 분하고 원통했다. 더구나 우군 부대장이 조선 편에 내응을 해서 거짓 싸우다가 우디거로 달아난 그 일은 참을 수 없었다. 철천지한이었다. 이만주는 모든 추장을 향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아 한탄한다.

"조선에 대해서는 힘이 모자라서 어찌하는 수가 없지만, 이놈, 이 우군 부대장 내외의 원수를 어찌하면 갚는단 말이냐?"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거여 추장도 눈을 부릅떠 분개하며 말한다.

"그놈이 더욱 가증한 것은 우리 편의 제일가는 모사 퉁맹가를 죽이고 달아난 일이 더욱 더 분합니다. 어쨌든 우디거로 달아난 우군 부대장 내외를 잡아 죽여서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모든 추장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응한다.

"원수를 갚아야지?"

이만주는 다시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한숨을 짓고 말한다.

"원수를 갚자면 군사를 이끌고 우디거로 쳐들어가서 도성을 두려뺀 후에 사위와 딸년을 붙잡아서 능지처참을 해야겠는데, 우디거를 무찌를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어찌하면 이 원한을 풀어본단 말이냐?"

이만주는 다리를 번쩍 들어 땅을 굴렀다. 팔리수 늙은 추장이 주름지고 이빠진 얼굴에 구슬픈 빛을 띠고 기운 없이 말한다.

"막막강병인 조선 군사까지 대항하려던 우리 건주위 여진 부대가 우디거 따위를 토벌할 힘이 없으니 기막힌 일이로세! 이런 때 퉁맹가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좋은 뫼라도 낼 수가 있으련만, 모든 일이 답답만 하구나"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젊은 추장 한 사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친다.

"일은 모두 다 쥐새끼 같은 모사 퉁맹가란 놈 때문에 망쳐왔는데, 여러분은 그래도 퉁맹가만 생각하신단 말씀이오? 퉁맹가란 놈이 밴댕이 속 같은 얕은 뫼를 써서 좌군 을우디거로 변장시키고 거짓 항복한 때문, 이것이 탄로가 되어 조선룬에 응징을 당한 것 아닙니까? 건주 위를 오늘날 망하게 한 놈은 퉁맹가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밤낮 퉁맹가만 생각한단 말씀이오? 딱하기 한량없소?"

말을 마치자 부아가 끓는 듯 침을 탁 뱉었다. 모두들 바라보니 마천의 젊은 추장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상이 씩씩했다. 젊은 추장의 따지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아니했다. 보두 다 묵묵히 말이 없다. 젊은 추장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퉁맹가의 죄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계교를 한번 써보실 생각은 없소?"

이만주를 향하여 씩씩하게 말한다. 이만주는 무색한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묻는다.

"자네한테 좋은 계책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말해보게나. 좋은 계교라면 아니 쓸 리가 있나. 어서 말을 해보뻬나. 내 마음이 심히 답답하이"

"지금 우리 병력으로는 우디거를 쳐서 딸과 사위를 잡아 죽일 힘이 없소! 다른 부락의 힘을 빌려서 원수를 갚자는 거요 알아들으시겠소?"

이만주의 입이 딱 벌어진다.

"어서 빨리 말을 해보게, 다른 부락의 힘을 빌려서 원수를 갚겠다 하니, 다른 부락은 어떤 부락인가?"

여러 추장들도 귀를 기울였다.

"두만강 남안 조선 땅, 오음회에 거접하고 사는 '오도리' 부락의 추장인 퉁맹가 티무르는 죽은 퉁맹가의 아버지입니다."

"그렇지. 퉁맹가 티무르의 막내아들이지."

이만주는 대답했다. 팔리수 늙은 추장은 이만주의 말에 뒤를 받는다.

"그렇지, 퉁맹가는 퉁맹가 티무르의 막내아들로서 이곳에 장가를 들어서 이만주 지휘의 모사가 되었던 것이지"

팔리수 늙은 추장은 퉁맹가가 건주위로 온 내력을 말했다.

"아따, 그 내력을 누가 모른답디까. 내 말씀이나 들어 보시오"

젊은 추장은 늙은 추장을 윽박질렀다.

"자아, 어서 말을 해보게. 자네 계책을-"

이만주는 재촉을 했다,

"지금 두만강 유역 오음회에 살고 있는 퉁맹가 티무르는 까맣게 막내아들 숭맹가가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의 손에 죽은 것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을 급히 티무르에게 알려준다면 티무르는 반드시 우디거를 치고 말 것입니다. 이리된다면 우리는 한 사람의 병력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우디거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 어떠합니까, 내 계책이?"

마천 젊은 추장은 이만주 이하 모든 추망들을 둘러보며 씩씩하게 말했다. 이만주의 우울했던 얼굴에 활짝 기쁜 빛이 떠돌았다.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좋은 계책이다."

찬성하는 목소리가 명랑하게 떨어졌다. 모든 추장의 그늘진 얼굴에도 일제히 밝은 빛이 떠돌았다.

"과연 좋은 꾀로구나."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원수를 갚는단 말이지. 하하하"

"고것이 어부지리 라는 것이야. 하하하, "

"서투른 퉁맹가의 뫼보다 훨씬 낫구먼."

제각기 벙긋벙긋 웃으며 한 마디씩 지껄였다. 젊은 추장은 팔을 걷어붙이며 다시 말한다.

"이같이 해서 오도리 족속인 퉁맹가 티무르가 우디거를 멸한 후에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오도리족과 연합세력을 펴서 조선 땅 오음회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다시 살아날 길이 눈앞에 환하게 터집니다. 이것이야말로 돌팔매 하나로 새 두 마리를 맞히는 격입니다. 어떻습니까, 내 계책이? 퉁맹가의 서투른, 소갈머리 없는 죄보다는 백 갑절, 천 갑절 낫습지요. 하하하"

'낫다마다. 자네 죄는 정말 삼국시절의 제갈양 같은 꾈세. 퉁맹가의 죄는 오랑캐 우리 족속을 망친 죄가 아닌가베, 자네 죄는 참말 기기묘묘한 꾈세"

젊은 추장에게 항상 핀잔만 맞던 팔리수 늙은 추장이 이 빠진 얼굴에 애교를 떨어 아첨을 하며 말한다. 젊은 추장은 벌컥 성을 내며 대꾸한다.

"아무리 늙으신 분이라 하나 주견을 좀 세우시오, 주견을! 아까는 퉁맹가가 없어서 아쉽다고 하더니 이번엔 그래 내가 제갈양보다 낫단 말씀요. 노인이라도 주견이 없으면 아니되오?"

늙은 추장은 무안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이만주는 젊은 추장을 향하여 다시 계책을 묻는다.

"자아, 그렇다면 한시바삐 퉁맹가 티무르를 찾아서 아들 죽은 경위를 이야기해서 우디거를 치도록 해야겠는데, 누구를 보내어 이 일을 알리는 것이 좋겠나?"

젊은 추장이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소장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오음회로 칼을 달려, 퉁맹가 티무르를 달래서 우디거를 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만주는 마천 추장의 등을 어루만졌다.

"장하다! 빨리 갔다 오라. 그대 같은 지략을 겸비한 사람이 아직도 건주위에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으랴. 기어코 성사하고 돌아오라"

젊은 추장이 다시 고한다.

"그러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슨 청인가?"

"빈손 들고 갈 수는 없습니다. 백금 천 냥과 호피 석 장을 예물로 주셔야 하겠습니다."

"호피 석 장은 내놀 수 있지만 백금 천 냥은 내놓기가 좀 난처하군"

마천의 젊은 추장은 버럭 화를 냈다.

"큰일을 하려 하는데 백금 천 냥을 아까워하십니까? 퉁맹가 티무르를 꼬드겨 우디거를 멸한 후에 우리는 다시 티무르를 쫓아내고 조선 땅 오음회를 차지할 생각을 하십시오. 이리된다면 그까짓 백금 천냥쯤이 무엇입니까. 크게 앞을 내다보십시오."

이만주의 귀가 번쩍 열렸다.

"티무르를 이용해서 우디거의 원수를 갚은 후에, 다시 조선 땅에 살고 있는 피무르를 쫓아낸다?"

"그렇습니다. 퉁맹가 티무르가 살고 있는 오음회는 조선에서 고려 때부터 이미 포기한 땅입니다. 우리는 우디거를 멸해서 원수를 갚은 후엔 슬며시 티무르를 쫓아버린다면 우디거, 오음회가 모두 다 우리 세력권 안에 들게 됩니다. 이리된다면 여연과 강계는 저절로 우리 땅이 됩니다. 조선의 최윤덕 같은 장사 열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다시는 꼼짝달싹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만주는 비로소 입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한번 시험해보기로 하세. 백금 천 냥과 호피 석 장을 내어줌세"

"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우디거의 딸은 절세미인이라 합닌다. 화공을 시켜서 절묘하게 미인도를 한쪽 그려줍시오"

"우디거로 도망간 계집을 어찌 그린단 말인가. 실물이 없는데. 도대체 무엇에 쓰려나?"

"실물이 없더라도 예쁘게만 그리면 됩니다. 예물과 함께 가지고 가렵니다. 쓸데가 있습니다."

"어렵지 아니하이. 곧 화공에게 그리라 하겠네"

"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웬 청이 그리 많은가, 말해보게나"

"죽은 퉁맹가의 아내는 절염입니다. 과부가 된 증거로 함께 가야 하겠습니다."

말을 듣자 이만주의 얼굴엔 당황한 빛이 현연히 나타났다. 대답이 없다. 마천 젊은 추장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퉁맹가의 아내가 과부가 됐다고 장군이 짝사랑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티무르에게 자식 죽은 증거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건주위 전체를 위해서 내놓으셔야 합니다."

모든 추장들은 물끄러미 이만주의 태도를 바라본다. 이만주의 얼굴엔 고민하는 빛이 떠돌았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젊은 추장은 이만주의 고민하는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결기 있는 목소리로 외친다.

"만약 장군이 과부를 내놓지 아니하신다면, 나는 티무르를 만나러 가지 아니하겠소. 큰일을 하려면 사랑하는 아내라도 내놓는 것이 예사인데, 남의 아내 되었던 헌 계집 하나쯤을 연연불망해서 내놓지 아니하려 하니 딱한 일이오! 장군은 건주위 오랑캐 족속을 통솔할 자격이 없소 그만두시오 나도 다 집어치우고 아니 가겠소"

마천 젊은 추장은 부아가 나는 듯 걸쭉한 침을 탁 뱉어버린다. 모든 추장들이 이만주에게 권한다.

"마천 추장의 말대로 퉁맹가의 아내를 함께 가도록 하십시오. 그리해서 남편이 죽은 구슬픈 사연을 시아버지 티무르와 형제들에게 하소연해야 합니다. 과부를 불쌍히 생각해서 정을 뚜시는 듯합니다마는 건주위 장래 일을 생각해서 내주셔야겠습니다."

이때 도지휘 이만주와 과부 사이의 정사는 건주위 일판에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이만주는 하는 수 없었다.

"정 그렇다면 데리고 가도록 하게나"

기운 없는 목소리로 허락을 내렸다. 두어 날이 지났다. 우디거 딸과 흡사한 미인도는 화공의 손으로 그려졌다. 백금 천 냥과 호랑이 껍질 석 장도 이만주의 광 속에서 마천 추장에게 전해졌다. 이만주 이하 모든 추장들이 나열한 속에 마천 젊은 추장은 길 떠날 차비를 차렸다. 호사스러운 상모술과 워낭을 늘인 준마 십여 필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조선 장수들의 말 호사하는 것을 본뜬 것이다. 말 한 필마다 군복 차림의 견마잡이 마부가 두 명씩 딸려 있었다. 호위하는 기마대는 세 패로 나뉘었다. 한 패는 백금과 호피와 미인도를 담은 부담농짝 실은 말을 호위하고, 한 패는 마천 젊은 추장이타고 갈 말을 호위했고 한 패는 과부 미인이 타고 갈 말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다 되었다. 떠나야 할 시각은 얄팍얄팍 다가왔다. 그러나 절세미인의 소문이 높은 퉁맹가의 아내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떠날 시각은 지나갔다. 일고삼장이 되었다. 모두들 목을 길게 빼고 과부 미인이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마침내 젊은 추장은 부아가 터졌다. 이만주를 향하여 벌컥 소리를 지른다.

"도대체 가라는 거요, 말라는 거요?"

이만주는 무안했다. 주먹 맞은 감투가 되었다, 어슬렁어슬렁 본궁으로 들어갔다. 떨어져 가기 보다는 과부를 애가 타도록 달랬다. 앞을 세우고 나왔다. 모든 사람의 눈길이 과부의 모습으로 흘렀다. 새까만 상복을 입고 수심에 싸여 걸어 나오는 태도는 그림같이 아름다웠다.추파를 흘려 잠깐 말안장을 바라본다. 기름한 속눈썹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차마 비밀하게 사귄 두 번째 남편 이만주를 떨어지기 싫은 모양이다.

필자는 잠깐 두만강 유역에서 발호하던 여진족의 내력을 독자에게 이야기하려 한다.

고려 예종 년(1108)에 북진사상의 명장 윤관은 십칠만 대군을 거느리고 항상 변방을 소란케 하는 여진족속을 정벌해서 흑룡강성과 포염사덕에 국경비를 세우고 다시 길림성 연길현에 정계비를 세웠으며, 또다시 서백리아 수청층벽에는 고려 대장군 윤관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글을 새겨서 크게 나라의 위세를 드날렸다. 다시 예종께 상소하여 아흡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요사이 지명으로 덕원, 함흥, 북청, 단천, 길주, 경성, 종성, 경원, 혼춘이다, 경원에는 내방어소를 설치하고 혼춘에는 성벽을 굳게 쌓아서 방어선을 구축하니, 고려의 판도는 전무후무한 확장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 크나큰 위대한 사업은 2년 후에 슬프다, 한 굽이 물거품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예종 5년에 무능한 문신들은 지키기 어려운 불모의 땅이라 해서, 여진은 자자손손 대를 이어 조공을 바치고, 고려에 대하여 종노릇을 하겠다는 조건 아래 피땀 흘려 개척해 논 아홉 성을 고스란히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리해서 고려말에는 겨우 길주에 만호부를 두어 방어선을 삼았던 것이다. 천 년 전 옛일이건만 주먹으로 책상을 쳐 통탄할 일이다. 그 후에 세종대왕의 6대조 이안사는 전라도 전주에서 감사와 틈이 벌어져서 쫓기고 쫓겨서 여진족속들과 이웃해 살기 시작했다, 세종대왕의 증조부 이자춘은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가 되었고, 세종대왕의 할아버지 태조는 용맹스런 명성이 여진 일대에 자자하면서 고려에 출장입상을 했다. 이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해서 조선을 개국한 후 에 태조는 이씨의 발상한 고향이라 해서 두만강 일대의 여진을 후하게 대우했다. 두만강 하류에 사는 모련위 오랑캐와 오도리 족속은 태조가 즉위하자 부름을 받아 벼슬을 받았다. 공주에는 목조로 추존한 이안사 내외분의 능이 있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들 방원을 보내서 소분을 하고 치제를 지낸 일도 있었다. 다음 해인 태조 2년에는 여진 출신의 퉁두란을 동북면 안무사로 임명해서 공주와 갑산에 성을 쌓아 서민들을 진무했고, 7년에는 정도전으로 선부순찰사를 삼아서 지방 군현의 지계를 획정하고, 공주를 경원부라 한 후에, 단천 이북의 군량미 천 섬을 경원으로 수송하고 강상에는 10척의 병선을 배치하여 경비를 튼튼히 해서 여진족의 망동이 근절되게 했다. 그러나 국가가 어지러우면 외구는 틈을 엿보아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 상례다. 정안대군 방원이 세자인 아우 방석을 죽이고 정도전이 실각한 후에 함흥차사의 변이 나자 여진은 움직이기시작했다.

태종 9년의 일이다. 영고탑 방면에서 남으로 내려온 우디거는 경원 동편에 있는 소다로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고, 다음 해 태종 10년에는 오랑캐족과 우디거족이 합세해서 경원을 재침하니 병마사 한흥보가 전사했다. 찰리사 조연은 급히 길주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경원의 북방인 두문까지 강을 건너 쳐들어가서 오랑캐를 대파하고 추장을 죽여서 위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여진은 또다시 경원으로 쳐들어와서 병마사 곽승우가 전사하니, 공주 곧 경원을 유지랄 도리가 없었다. 뿐만이 아니다. 경원에는 태종의 5대조 이안사의 덕릉과 배위인 이씨의 안릉이 있었다. 태종은 오랑캐의 말굽 아래 짓밟히게 할 수 없었다. 단을 내려 함흥으로 이장하고 경원부를 경성으로 후퇴시키니 야인의 방어선은 겨우 경성이 되어버렸고 그 이북 땅은 마침내 여진족의 일추인 오도리족의 추장 퉁맹가 티무르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지금 필자가 묘사하는 장면, 이만주의 부하 마천 젊은 추장이 과부미인을 데리고 우디거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찾아가는 곳은 경성 이북 퉁맹가 티무르가 사는 두만강 이남, 조선이 포기한 땅이다.

마천 추장은 전사한 퉁맹가의 아내 과부 미인과 함에 천 리 길을 달렸다. 오음회에 당도하자 성을 지키는 장수에게 전갈을 전했다.

"건주위 이만주의 특사 마천 추장은 막내 자제 퉁맹가의 아내와 함께 폐백을 올리고 뵈옵기를 청합니다."

성 지키는 장수는 급히 말을 달려 추장 퉁맹가 티무르한테 품했다. 티무르는 기뻤다.

'막내며느리가 왔단 말이냐? 아들애가 지난해에 혼인했다는 소식만 듣고 아직 며느리 아이를 만나보지 못했더니 이제 나를 찾아보러 왔구나! 내외가 함께 오지 아니하고 어찌해서 며느리만 왔다 하더냐. 빨리 들여보내라?"

건주위한테 장가갔던 막내아들의 새 며느리가 근친을 왔다는 소식을 듣자 남녀노소의 추장붙이들은 구름 모이듯 모여들었다. 이윽고 성 지키는 장수에게 인도되어 마천 추당과 과부 미인은 티무르 앞에 나타났다. 모든 오랑캐들의 눈결이 두 사람에게 몰렸다. 새까만 혹의에 구름 같은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기름한 속눈썹 아래 가을 호수 같은 푸른 물결을 흘리며 티무르 앞에 선 미인의 탯거리는 천하절색이었다. 모든 오랑캐들의 눈은 부시도록 아름다움을 느꼈다. 시선은 마천 추장에게 보다 아름다운 막내아들의 아내한테로 집중되었다. 이곳저곳에서 소곤소곤 찬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과연 천하절색인데?"

"막내는 복도 많지! 어쩌면 저런 미인한테로 장가를 갔나?"

"저만큼이나 예쁘니까 고향을 등지고 건주위로 가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나,"

모두 다 침을 삼키며 미인을 바라보았다, 마천 추장은 티무르한에 정중한 인사를 보낸 후에 미인을 소개했다.

"이 아씨는 막내 아드님 퉁맹가의 아내올시다."

여인은 수삽한 탯거리로 티무르한테 공손히 절을 드렸다. 늙은 티무르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여인의 절을 받으며 말한다.

"오오, 네가 내 막내며느리로구나! 길이 멀어서 새사람을 이제야 만나는구나! 먼 길에 고생이 많았구나. 잘 왔다. 내 생전에 너를 만나보니 이런 다행한 일이 없구나"

늙은 티무르는 아름다운 막내며느리를 바라보며 대견하고 귀여운 정을 억제할 길 없었다. 티무르의 아들 형제와 아장들의 눈결은 매력에 넘치는 여인의 태깔에 취한 듯 홀린 듯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천 추장은 다시 티무르에게 홍보를 끌러 백금 천 냥과 호피를 꺼내서 두 손을 보아 바친다.

"이것은 저희 추장 이만주가 어른께 바치는 예물이올시다. 약소하오나 이웃해 사는 정리로 보낸다 합니다,"

햇빛에 백금덩이가 반사되어 눈이 부시도록 찬란했다. 호피도 상벌이다. 티무르의 입이 떡 벌어진다.

"물건을 아니 가져오면 어때서 가져왔나. 과분하이. 하하하"

늙은 추장 티무르의 웃음소리는 방 안에 가득하게 퍼졌다.

"아니올시다. 그저 정성이올시다. 더구나 새며느리가 시아버님을 처음 뵙는데 폐백을 아니 가져올 수 있습니까. 저희 추장이 그래서 특별히 보내는 것입니다."

"고맙군, 고마워 1"

늙은 티무르 추장은 백금덩이와 호피를 거두었다. 마천 추장이 다시 고한다.

"그런데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 추장은 어른께서 들으시면 놀라실까 보아 말씀을 아니 드리려 했는데, 제가 그래도 알려 드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고 우겨대서 결국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늙은 티무르의 얼굴빛이 변해진다.

"깜짝 놀랄 일이 있다니 무슨 일인가?"

티무르의 큰아들 피카르와 아장의 무리도 심상치 아니한 마천 추장의 말을 듣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놀라지 마십쇼. 막내 자제 퉁맹가가 전사했습니다."

"무어야, 내 아들이 죽었어? 전쟁터에서 죽었단 말인가?"

"조선 군사와 대결해 싸우다가 죽었으면 도리어 영광일 텐데,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과 우디거의 딸의 손에 목이 떨어졌습니다."

"웬일인가, 무슨 까닭에?"

"우군 부대장 내외는 조선군한테 매수가 되어 내응을 하면서 거짓 싸우는 체했습니다. 저희 장군은 눈치를 채고 자제를 진터로 보내서 문책을 하는 순간, 우디거의 사위는 자제를 죽이고 2천 명 군사를 거느려 우디거로 달아났습니다. 이 까닭에 조선군은 물밀 듯 들어와서 건주위는 결판이 나고 말았습니다. 어른께서는 자제의 원수를 갚아서 구천에 떠도는 외로운 혼을 위로해주셔야 합니다. 우디거를 쳐서 딸과 사위를 죽이시고 이 철천지한을 풀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혈혈단신 의탁할 곳 없는 청춘과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마천 추장의 혈혈단신 의탁할 곳 없는 청춘과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소연하는 말을 듣자, 혹의미인은 별안간 아미를 숙여 흑혹 느꼈다. 눈물이 방울방을 떨어졌다. 여긴의 애틋하게 느껴 우는 철읍 소리는 뭇 사내들의 애를 설레게 했다. 늙은 티무르는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을 친다.

"우디거 딸과 사위 놈이 그래, 내 막내를 죽였단 말이냐! 이 연놈의 간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다. 기어코 원수를 갚으리라."

티무르의 큰아들 피카르와 아장들도 일제히 소리친다.

"죽일 연놈들입니다. 속히 우디거를 쳐써 아우의 원수를 갚아주어야 합니다."

이때였다. 마천 추갈은 보 하나를 또 끌렀다. 둘둘 말은 족자를 꺼냈다. 끈을 풀었다. 한 폭 미인도가 활짝 펼쳐졌다. 기막힌 절색의 여인도다.

"이 여자가 바로 우디거 딸이올시다. 막내 자제를 죽인 장본인이올시다, 어떻습니까? 천하절색이지요 계집의 서방을 잡아서 원수를 갚으신 후에 계집은 어른의 첩으로 삼으십시오?"

티무르 이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우디거의 딸이라는 그림폭으로 쏠려들었다. 우디거 딸의 모습을 그려논 인물 그림은 과연 글자 뜻 그대로 기막힌 미인도다. 한동안 미인도를 바라보던 티무르의 입은 헤 하고 벌어진다. 마천추장의 원수를 갚으신 후에 계집은 어른의 첩으로 삼으십시오?’ 하는 말을 듣자,

"늙은 사람이 첩은 두어서 무엇하나. 하하하"

너털웃음을 크게 웃었다.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늙으실수록 소실이 있어야 합니다, 뒷배를 보아드릴 젊은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도 그래."

티무르는 손수 우디거 딸의 그림을 말기 시작했다. 큰아들 피카르와 아장들은 티무르가 손수 마는 족자를 곁눈질해보고 다시 앉아 있는 퉁맹가의 아내 과부 미인을 바라본다. 우디거의 딸도 절색이지만 청상과부는 더한층 절염이다. 두 미인을 꽃에 비한다면 우디거의 딸은 백모란 송이 같구 퉁맹가의 아내 청상과부는 요염한 흑장미 한 떨기 같았다. 티무르의 큰아들 피카르듸 추파와 젊은 아장 파쿠타의 눈결은 자주 자주 흑장미 같은 퉁맹가의 아내 청상과부의 몸으로 흘렀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손수 말아 문서궤에 간직한 후에, 엄숙한 얼굴로 큰아들과 아장들에게 명을 내린다.

"나는 우디거를 쳐서, 기어코 막내아들 퉁맹가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했다. 너희들은 내일부터 군사를 조련해서 한 달 안에 우디거를 격파할 태세를 취하라."

아들과 아장들은 일제히 명을 받았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티무르는 다시 큰아들 피카르에게 명령을 내린다.

"건주위 특사 마천 추장은 먼길에 오시느라고 매우 고단하실 것이다. 춥지 않도록 객관에 모시어 특별한 공궤를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소 너의 제수는 한적하고 깨끗한 별당에 거처하게 해서 소루한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 하겠습니다."

티무르의 큰아들 피카르는 명을 받았다. 모든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청상과부와 마천 추장은 티무르 큰아들의 인도를 받아 객관과 별당으로 제각기 거접하게 되었다. 이튿날부터 공주의 '오도리족' 들은 우디거록을 치기 위하여 군대의 훈련이 강화되었다. 궁방에서는 활과 살을 만들고, 대장간에서는 창과 칼이며, 쇠뇌를 조성하는 풀무 소리와 메질 소리가 요란했다. 넓고 넓은 황야에는 말을 달리는 마군의 뛰닫는 소리가 적막했던 강산을 뒤흔들고 즐비하게 벌여 세운 과녁 터에서는 일중, 이중, 삼중의 과녁을 맞히는 궁수들의 묘기가 나날이 계속되었다. 늙은 추장 티무르를 위시하여 아들과 비장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말을 달려 훈련하는 장병들을 격려했다. 퉁맹가 티무르의 아장 파쿠타와 큰아들 피카르는 죽은 퉁맹가의 아내 과부를 대해 본 후에 혹장미 같이 요염한 아리따운 자태에 넋을 잃었다. 마음이 설레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아니했다. 큰아들 피카르는 동생의 아내라 해서 친히 별당에 나가 청소하는 여인들을 감독하면서 정갈스럽게 청소하라고 잔소리와 분별이 대단했다. 손수 캉을 바로잡고 경대와 유경의 먼지를 털기도 했다.

"아주머니, 멀리 오시느라고 피로하셨을 텐데 편히 캉 위에 누우시오."

요염한 제수를 향하여 은근하게 갈을 붙여보기도 했다. 피카르는 아우 퉁맹가에 비하여 보잘것없는 추남이었다. 키는 늘씬하지 못하고 땅딸막했다. 누르고 검게 생긴 메주덩이 같은 얼굴에 구레나룻은 멋없이 괴살같이 뻗었다. 그러나 가슴만은 떡 벌어졌다. 눈은 부리부리하고 콧구멍은 뻥코다. 음침하고 욕심이 많게 생겼다. 퉁맹가의 아내 청상과부는 피카르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갖지 아니했다. 그러나 남편 되었던 퉁맹가의 형이라 해서 어려워하는 생각을 가졌다.

"관계치 아니합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아니합니다. 바쁘신 터에 손수 이같이 분별해주시니 황공하여이다."

나직나직 고마운 뜻을 말했다. 제수의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고운 음성은 피카르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다. 메주덩이 같은 못난 얼굴에 벙긋벙긋 웃음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터졌다.

"황공하다니 무슨 말씀요. 집안 간인데. 모두 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아우도 없는 터에 누가 당신을 보살펴줍니까. 내가 대신 돌봐주어야지"

"고맙습니다."

아우 퉁맹가의 아내는 의례적으로 살포시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메주덩이 같은 피카르는 여태껏 이와 같은 매력 있는 여자의 눈웃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금방 참혼칠백 (프챗-)이 스러지는 듯했다. 자기한테 제수는 호감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얘들아, 어서어서 세숫물도 갖다드리고 잡수실 음식도 갖다드려라"

심부름하는 여인들에게 분별을 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별당 아래로 내려간다. 이때 아장 파쿠타는 과부 미인의 부담농짝을 말에서 끌어 내려 가지고 별당으로 올라 가는 길이었다. 내려가는 피카르와 마주쳤다.

"그것이 무엇인가?"

"건주위 아기씨의 부담농짝일세. 장군께서 별당으로 갖다드리라 해서 가지고 올라가는 길일세."

"졸개 아이들을 시키지, 왜 자네가 손수 가지고 올라가는가?"

메주덩이 같은 피카르는 시기하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는 결에 생겼다. 퉁방을 같은 불량한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노장군의 명령을 어찌 내가 거역할 수 있나. 그리고 아씨의 부담 농에는 소중한 물건이 들어 있을 텐데, 어떻게 졸아치한테 맡겨서 보낸단 말인가? 젊은 장군도 망령일세"

파쿠타는 빙글빙글 웃으며 시침 떼고 부담농을 들고 별당으로 올라간다. 파쿠타도 피카르가 제수 과부한테 지분지분하며 구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다. 피카르는 말이 막혔다. 부담농짝을 들고 별당으로 올라가는 파쿠타를 잠시 바라보고 섰다가 급히 뒤를 쫓았다.

"파쿠타! 거기 잠깐 섰게나"

"왜 그러나?"

"농짝이 무거워 보이네 그려. 내가 거들어줌세. 함께 가지고 올라가세."

"무겁지 아니하이, 너끈히 혼자 가지고 올라갈 수 있네."

"아냐, 자네 말대로 농짝 안에 소중한 물건이 들어 있을지 모르네. 깨지거나 부서지면 큰일일세. 곱게 추장님 모시듯 해야 하네. 함께 가지고 가세."

피카르는 황소 뛰듯 뛰어올라 성큼 농짝 머리를 억센 주먹으로 덥석 당겨 쥐고 앞을 서서 나갔다. 파쿠타는 하는 수 없었다. 기가 찼다. '흐흐흐' 혼자 소리쳐 웃으며, 농짝 뒤편을 받들어 쥐고 피카르와 함께 별당으로 올랐다. 젊은 과부는 캉 위에 걸터앉았다나 뜰 아래를 바라보니 메주덩이 같은 남편의 형 피카르와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 장교 한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왔던 부담 농짝을 마주 들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부리나케 캉 위에서 내렸다.

"에구머니나, 미안해서 어찌하나. 아랫사람들을 시키시지 손수 이렇게 가지고들 올라오시나."

아리따운 교성과 교태는 두 젊은 사나이의 마음을 좀 집듯 했다. 피카르가 '흐흐흐' 웃으며 말한다.

"이 사람이 조심성 없이 함부로 들고 오는 것을, 혹시 상하기 쉬운 소중한 물건이 들어 있으면 어찌하느냐고 타일러 내가 함께 가지고 왔소이다,"

연해 호들갑을 떨어 공치사를 했다. 과부는 두 손으로 농짝을 받아놓고 슬며시 청년 장교를 바라보았다. 씩씩하고 잘생긴 사나이다. 눈은 어글어글하고 코는 우뚝 섰다. 이맛전은 반듯하고 턱이 받쳤다. 키도 컸다. 기상이 씩씩했다. 메주덩이 같은 피카르는 말할 것 없지만 죽은 남편 퉁맹가보다도 인품이 몇 등 윗길인 것같이 보였다. 과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추파를 흘렸다. 과부가 보내는 추파를 받자 파쿠타는 비로소 용기를 얻었다. 과부의 앞으로 두어 걸음 가까이 갔다.

"아까 건주위 마천 추장과 함께 오실 때 먼발치에서 뵈었습니다마는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죽은 퉁맹가하고는 어릴 때 친구올시다. 남편을 전쟁터에서 잃으셔서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저는 티무르 추장님의 막하에 있는 아장 파쿠타올시다. 앞으로 기어코 돌아가신 남편 뿡맹가의 원수를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과부는 새침하게 서서 파쿠타의 말을 듣다가 다정스럽게 파쿠타의 얼굴로 눈을 보내며,

"고맙습니다."

한마디를 했다, 옆에 있는 피카르는 과부 제수와 파쿠타의 눈길이 마주치는 것을 보자 시기하는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

"자아 파쿠타, 인제 짐을 다 전했으니 우리들은 어서 빨리 나가보도록 하세. 제수는 고단할 거야"

피카르는 파쿠타의 등을 가볍게 밀쳤다. 파쿠타는 불쾌했다. 그러나 처음 대하는 여인 앞에서 큰소리를 치기도 난처했다.

"나가기로 하세"

목례를 과부한테 보내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이날 저녁이었다. 큰아들 피카르는 아버지 티무르를 찾았다. 티무르는 건주위 마천 추장이 갖다 바친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펼쳐놓고 아름다운 자태에 취해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가, 아들 피카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황황하게 족자를 말아 뒤로 감추었다. 피카르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아버지도 별수 없구나. 몸은 비록 늙었어도 마음은 늙지 아니한 모양이다. 우디거의 딸을 뺏어오고 싶은 모양이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혼자서 골똘하게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들여다보다가 아들한테 들킨 것이 무료했다. 시치미를 떼고 딴소리를 한다,

"마천 추장 앞에서 우디거를 쳐서 막내의 원수를 한 달 안에 갚기로 단단히 약속을 했는데, 군비가 한 달 안에 잘 완비되겠느냐?"

"틀림없이 잘 되겠습니다. 오늘 곧 영을 내렸습니다. 대장간에서는 칼과 창이며 쇠뇌를 만들고, 활을 만드는 궁방에서는 밤을 새워 살과 활을 만들라 했습니다."

"졸개들의 교련도 곧 시작해야 한다."

"내일부터 각 부락에 영을 내려서 활쏘기와 말 달리는 연습을 맹렬하게 시작하겠습니다."

"졸개와 패장들 에게만 맡겨서는 아니 된다. 두목 되는 사람들이 솔선수범을 해서 무술의 기예를 연마해야 한다. 너도 한몫을 단단이 보는 사람이지만 파쿠타의 무예는 출중하다고 할 수 있다. 파쿠타를 시켜서 모든 패장과 졸개들의 무예를 가르치도록 해라."

"그리하겠습니다."

피카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내일이고 모레고 내가 한번 관전을 해야겠다. 전부락의 모든 추장과 족속들을 모아놓고 크게 무술을 감상하는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피카르는 마음속에 딴생각이 있어서 아버지를 찾은 것이다.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생각이 골똘했다.

", , 그리하겠습니다."

또 한 번 건성 대답을 했다. 아비 티우르가 잠시 말을 그치는 틈을 타서 자식 피카르는 말을 꺼낸다.

"아버님께 한 말씀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죽은 아우 퉁맹가의 아내가 참 가엾고 불쌍합니다. 자식도 없는 터에 혈혈단신 외로운 몸이 되어 개밥에 도토리같이 지낼 생각을 하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저한테 본처는 있습니다마는 함께 데리고 살까 합니다. 아버님께서 허락만 해주시면 그리할까 합니다."

이때 오랑캐 풍속에는 형이나 아우가 죽으면 형수나 제수를 데리고 사는 야만의 풍속이 있었다.

"대해보니 똑똑하고 묘하더라. 제수가 싫다고만 하지 않는다면 데리고 살아보려무나"

아비 티무르의 허락을 받은 큰 자식 피카르는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그럼 제수의 의견을 물어보겠습니다."

피카르는 마음이 거뜬했다. 휘파람을 불며 아비 앞에서 물러났다. 아비 티무르에게 제수를 데리고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피카르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주보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했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빼주 한 병과 양고기 튀김을 한 반 싸가지고 과부가 거처하는 별당으로 올라갔다. 밤이 이슥하니 과부는 캉 위에 금침을 펴고 누워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단했다. 대답을 아니했다. 두 번, 세번, 요란하게 문을 두드셨다.

"누구세요?"

"나요 나, 피카르요 문을 좀 열어주오."

메주덩이같이 보기 싫게 생긴, 죽은 남편 퉁맹가의 형이라는 피카르 목소리다. 귀치않게 생각했다.

"밤이 깊었는데 웬일이시오?""

"좀 의논할 일이 있어 왔소. 문을 열어주시오."

"자리에 누웠습니다. 내일 의논하시죠."

"긴히 오늘 밤 안으로 의논할 일이 있소. 빨리 문을 열어주오."

"여자 혼자 있는데, 깊은 밤중에 무슨 의논할 일이 있습니까? 내일 낮에 의논하시죠."

"아버지 티무르의 명을 받아 왔소. 어서 문을 열어주시오."

과부는 시아버지 티무르의 명을 받아 왔다는데 문을 아니 열어줄 수는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의상을 바로잡고 안으로 걸린 문고리를 벗겼다. 불쑥 들어서는 피카르의 텁석부리 입에서는 술 냄새가 물씬 났다. 마주치는 퉁맹가의 아내는 혐오의 감정이 왈칵 일어났다. 두어 걸음 물러섰다. 고개를 돌렸다. 피카르는 머리가 둔한 데다가 술기운이 거나했다. 제수의 싫어하는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흐흐흐, 내가 무어 남입니까. 한집안 식군데. 무얼 그리 스스러하시오. 흐흐흐"

치골 웃음을 연방 웃었다. 퉁맹가의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즈고 오똑 섰다.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 피카르는 술병과 안주를 사선상 위에 놓고 덥석 퉁맹가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앉으시오. 좀 할 이야기가 있소"

퉁맹가의 아내는 깜짝 놀랐다. 잡은 손을 홱 뿌리쳤다,

"손을 뿌리칠 것 무어 있어. 한집안 식군데, 흐흐흐 자아 앉으라고 아버지에 허락을 받았어."

"무슨 허락을 받으셨단 말씀입니까? 말씀을 하십쇼"

"어떻게 서서 말을 하나. 자아 앉아요."

퉁맹가의 아내는 마지못해서 캉 위에 반쯤 걸터앉았다. 피카르도 덜컥 캉 위에 앉았다. 사선상 위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자아, 술을 따라주오. 한잔 하시고 이야기를 꺼내지,"

팁석부리 시커먼 구레나룻이 뻗친 입에서는 여전히 술 냄새가 물씬물씬 났다. 퉁맹가의 아내는 구역이 날 지경이었다. 백랍으로 빚어 붙인 듯한 예쁜 코가 살몃 냄새를 피해 돌려졌다. 피카르는 술도 취했지만, 과부의 예쁜 코가 냄새를 피하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손에 든 술병을 억지로 과부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아, 어서 술 한 잔을 따라주어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할 테니!"

과부는 시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송충이같이 징글맞은 시숙을 옆에 앉힌 채 술병을 받아 잔에 따라주었다. 피카르는 제수의 고운 손으로 따라주는 술잔을 받자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단숨에 쭉 들이켰다.

"안주를 집어 달라구"

과부는 기가 찼다.

"술은 따라드렸지만, 안주야 어찌 집어드립니까?""

"술을 따라준 것이나, 안주를 집어주는 것이나 매일반의 일이 아닌가. 흐흐흐. 술까지 따랐는데, 안주쯤 못 집어준다는 것은 말이 아니되네. 어서 집어주게, 입이 텁팁하이,"

이제는 말까지 반말이다.

"도대체 시아버님이 무슨 말씀을 했습니까? 갑갑합니다. 어서 말씀합시오."

이때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했다. 피카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아무런 반응도 없다.

"누구야"

피카르는 벌떡 일어났다. 뚜벅뚜벅 걸어서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캄캄한 마루청에서 찬바람이 쏴아 하고 몰려 들어왔다.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바람 소리로구나!"

피카르는 혼자 말한 후에 안심하고 문을 드르륵 닫았다. 과부의 앞으로 가까이 가서 다시 걸터앉았다.

"자아, 어서 안주를 집어 달라구. 안주를 먹은 후에 아버지의 말씀을 전할게."

과부는 하는 수 없었다. 양고기 한 점을 집어서, 팁석부리 수염 속에 벌려진 입 속으로 넣어주었다.

"자아, 인제 어서 말씀하세요"

"가만히 있어! 씹고 난 후에 이야기를 할게,"

놈팽이는 양고기를 목구멍으로 꿀떡 삼키고 입을 열었다. 다정한 체 무릎을 과부의 다리 앞으로 밀었다. 술 냄새와 양고기 냄새가 물씬 과부의 코를 또 찔렀다. 과부는 벌떡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듣고 싶은 때문이다. 피카르는 대담하게 과부의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당신을 가엾게 생각했소 내 아우가 뜻딴에 죽어서 청상과부가 되었으니 젊으나 젊은 몸이 어찌 혼자 산단 말요. 더구나 아무런 소생도 없이! 참말 가여워요. 이곳이 비록 시집이라 하나, 혼자 산다면 외롭고 쓸쓸해서 어찌한단 말이오. 그야말로 개밥의 도토리지. 그래서 나는 아버지한테 말씀을 드렸어. 내가 당신을 아내로 삼아서 데리고 살겠다고 우리 풍속에는 형수나 제수가 흘로 되면 데리고 살아야 하는 법이거든. 그랬더니 아버지는 잘 생각을 했다고 벙글벙글 웃으면서 허락을 했어. 그리고 당자의 말을 들어보라구 해서 오늘 밤에 승낙을 받으러 온 길이야"

과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캉에서 발딱 일어섰다. 오똑 서서 대답한다.

"싫습니다."

또렷하게 대답했다. 죽은 남편 퉁맹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둘째 번으로 몸을 허락했던 건주위 투장 이만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 피카르보다 사내답게 잘생긴 남자들이다. 정절을 지키자는 것은 아니다. 두 번씩이나 사내를 겪어보았다. 메주덩이같이 못생긴 치골 피카르한테는 정이 떨어졌다. 십 리만큼 달아나고 싶었다, 아무리 과부 형수와 과부 제수를 데리고 살게 하는 이 고장 풍속이라 하나 지지리 못난 치골인 텁석부리 피카르에게 몸을 허락해서 남은 평생을 살고 싶지는 아니했다. 앞으로 시집인 이곳에서 골을 뉘게 된다면 피카르 아닌 딴남자를 얻어서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부담농짝을 가지고 들어왔던 파쿠타의 훤칠하게 잘생긴 사내다운 그 얼굴이 떠올랐다. 죽은 남편 퉁맹가보다도 잘생겼다. 이만주보다도 잘생겼다. 기왕 남편을 세 번째나 고친다면 훨씬 사내다운 남자한테 몸을 바치리라 생각했다.

", 싫어?"

피카르의 두 눈이 실쭉하게 올라붙었다. 시커먼 구레나룻이 고슴도치 털 뻗치듯 꼿꼿이 일어섰다,

"앉아서 말을 하라구"

잼처 질뚝배기 깨지는 소리가 떨어졌다. 과부는 새침하게 여전히 오똑 섰다. 피카르의 갈고리 같은 억센 손이 연약한 과부의 팔을 억세게 휘어잡았다. 우격다짐으로 캉 위에 앉혔다.

"왜 싫어? 내가 못나서 싫단 말인가?"

"아니올시다. 천만에,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싫단 말야, 바른대로 대답을 하라구"

피카르의 치떠진 눈에는 불이 붙었다. 왈칵 과부의 연약한 어깨를 흔들었다.

"나하고 살기 싫다는 까닭을 어서 대보란 말야!"

목소리는 점점 저 괄하고 높았다. 과부는 대답에 궁했다. 퍼뜩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했다.

"저는 압록강 북편에서 생장한 건주위 태생이올시다. 압록강 남안에 살고 있는 예의의 나라 조선 사람들의 훌륭한 풍속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알 뿐만이 아니라 건주위 사람들은 모두 다 조선 풍속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불취동성이라 해서 성만 같아도 피가 통했다고 혼인을 아니 합니다. 황차 어떻게 죽은 아우의 아내를 첩으로 삼고 형수를 아내로 삼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개나 돼지의 짓이올시다. 그래서 건주위 제 고장에서는 형수와 제수를 아내로 삼는 이 풍속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까닭에 저는 싫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어야, 개와 돼지 같다? 건방지타다 형수나 제수가 무슨 피가 섞였단 말야. 당치 않은 소리 말라구! 쓸데없는 객담 작작하고 나하구 살자구?"

피카르는 과부의 손을 또 한 번 잡아당겼다. 과부는 피카르의 잡은 손을 뿌리쳤다. 피카르는 말로 달래서 듣지 아니할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한테 허락을 맡았어. 너는 내 계집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우격다짐으로 과부의 허리를 번쩍 껴안아 캉 위에 자빠뜨렸다. 옷과 치맛자락이 흐트러졌다. 과부는 사람 살리라고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위기일발의 형세였다. 뜻밖이었다. 홀연 지게 문짝이 활짝 열렸다. 한 사람의 청년이 장검을 뽑아 들고 꾸짖으며 뛰어들었다.

"이놈, 이것이 무슨 개, 돼지 같은 수작이냐?"

남녀가 바라보니 아장 파쿠타다. 과부는 살았다고 한숨을 짓고 피카르는 무안하기 짝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야?"

청년은 칼을 번쩍 들어 사선상을 후려쳤다. 빼주병과 양고기 담은 소반이 와르르 상 아래로 쏟아졌다. 과부는 캉에서 일어나 의상을 바로잡고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피카르는 무안한 얼굴로 변명을 한다.

"그런 게 아냐. 제수가 하도 외롭고 불쌍하고 가엾기에 아버지한테 말하고, 허락을 얻었어, 아내로 삼아도 좋다구"

무료하고 면난한 얼굴로 파쿠타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변명을 했다.

"그래, 제수도 허락을 했나?"

피카르는 말문이 막혔다. 고개만 끄덕였다. 파쿠타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허락을 했다면 사람 살리라고 외마디 소리를 칠 리가 있나! 이 뻔뻔스런 도둑놈아?"

파쿠타는 칼끝으로 피카르의 얼굴을 향하여 상앗대질을 했다. 이제는 피카르도 참을 수 없었다. 골이 벌컥 났다. 계집 앞에서 계속해서 수모를 당할 수는 없었다.

"이 자식아, 남의 일에 무슨 참견이냐. 왜 뛰어 들어왔어? 누구를 훈계하는 거냐?"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파쿠타의 턱을 후려쳐 갈겼다. 파쿠타는 끄떡도 아니했다. 긴 칼을 짚고 떡 버키고 섰다.

"순력을 돌다가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다! 이 부락에 순력을 도는 것은 추장님이 나에게 맡긴 임무다! 들어와 보니 이 꼴이로구나! 네가 차마 이따위 개 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네가 제수가 맘에 있어 데리고 살고 싶으면, 아무리 부모의 허락을 맡았다 해도 당자의 승낙을 받아야 하는 것이 관례다. 그리고 또다시 모든 부락 사람들에게 혼인을 공포한 후에 잔치를 하고 비로소 신방을 치르는 법이다. 이것이 무슨 짐승의 짓이냐?"

파쿠타는 쾌쾌하게 피카르를 꾸짖는다. 의젓하고 씩씩한 태도는 실로 사나이 다됐다. 과부의 아름다운 눈길이 자주 파쿠타의 사내다운 모습을 취한 듯 바라본다. 파쿠타의 시원스럽게 잘생긴 눈이 과부에게로 향했다.

"아주머니는 피카르의 둘째 아내 되기를 원하십니까?""

흑의미인은 상긋 웃었다. 파쿠타에게 강한 매력을 풍겨주는 요염한 웃음이었다.

"원치 아니합니다?"

또렷하게 대답했다. 파쿠타는 슬며시 미소를 풍기며 흑의미인을 향하여 다시 묻는다.

"어찌해서 원치 아니하십니까?"

"아무리 기구하게 팔자를 타고난 계집이라 하나 아우에게 몸을 바쳤던 여자가 어찌 그 형에게 또다시 몸을 허락할 수 있습니까. 저희 고장 건주위에서는 예의지방인 조선 풍속을 배워서 금수 같은 풍속이 없어진 지 오래올시다. 사람의 짓이 아니라 금수의 짓이라 해서. 그래서 저는 이런 일을 원치 아니합니다."

과부 미인의 말을 듣자 청년 파쿠타는 유쾌한 듯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좋은 말이올시다. 형제간에 함께 살던 여자를 또다시 아내로 삼는다는 일은 과연 야만의 짓이올시다. 우리 오도리족도 대국 조선의 본을 떠서 차차 이러한 짐승의 짓을 없애야 합니다. 당신은 좋은 훈계를 우리 족속들에게 주시었습니다."

파쿠타는 말을 마치자 짚었던 칼을 칼집에 꽃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피카르의 등을 툭툭 쳤다.

"피카르! 자아, 이제 우리 나가기로 하세. 남들이 들으면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일세. 혼인 약속도 아니 하고 먼 길에서 온 불쌍하기 그지없는 과부 제수를 욕뵈려 했다구. 참으로 수치스런 일일세. 군사들이 들으면 사기까지 떨어지네. 두목이란 것이 저 꼴이냐고. 졸아치들에게 군령이 서지 않을 것일세! 그리고 자네 제수는 자네와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또렷이 말했네! 단념하고 나가세!"

이때 피카르는 몸에 촌철도 갖지 아니했다. 파쿠타는 칼을 가졌으나, 피카르는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오느라고 칼 한 자루, 화살 한 대도 몸에 지니지 아니했다. 맨주먹이었다. 생각대로 한다면 곧 파쿠타를 칼로 찌르든지, 살로 쏘아 숙이고 싶었다.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맨주먹으로 대결할 수는 없었다. 자기가 취중에 너무나 급하게 서둘렀던 것을 후회했다. 파쿠타의 말대로 부락 사람들한테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통문을 돌린 후에 서서히 잔치를 하고 아내를 삼을 것을 너무나 급히 서둘렀다고 생각했다. 못 이기는 채 기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쿠타는 또 한 번 호방하게 웃었다.

"피카르도 역시 사내대장부다! 장차 아버지 티무르의 뒤를 이어 우리 오도리족을 통솔할 큰 인물이다. 그렇지, 모든 일을 사내답게 탁 단념하고 나가야지."

파쿠타는 야유하는 듯, 추어올리는 듯 쾌활한 음성 속에 웃음을 반죽해서 말하면서 피카르의 팔을 끼고 뚜벅뚜벅 걸었다. 나가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혹의미인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밤늦게 너무나 놀라셨습니다. 이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문을 걸어 잠그시고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흑의미인은 씩씩한 청년의 행동에 취했다. 말없이 눈웃음을 보냈다. 피카르는 주먹 맞은 감투가 되어 파쿠타에게 힘없이 끌려나갔다. 원래 오도리족의 아장 파쿠타는 한선 퉁맹가의 아내였던 과부 혹의미인을 대해본 후에 피카르와 매한가지로 흠모의 정을 주체할 길 없었다. 부탁도 아니 했던 혹의미인의 행리를 별당에 자리 잡은 과부의 처소로 가져가기도 하고, 추장의 큰아들 피카르를 만나서 은근히 시샘하는 자극을 받아보기도 했다. 그 눈, 어글어글한 그 맑고 푸른 과부의 호수 같은 눈길이 매력 있는 다정을 피카르에게보다 자기에게 보냈을 때, 파쿠타는 확실히 과부가 자기에게 더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눈, 그 아름다운 다정한 눈의 세례를 한 번 받은 파쿠타는 잠시도 그 아름다운 눈을 잊을 수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눈이 머리에 떠올랐다. 말을 타고 달릴 때도 그 눈이 마와 같이 눈앞에 떠올랐다. 활을 쏠 때나 창을 쓸 때도 그 아름다운 눈은 아련히 앞에서 어른거렸다.

파쿠타는 오도리 성안을 순찰하는 책임을 맡은 두목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과부가 거처하는 별당도 파쿠타가 순력을 도는 지역 안에 들어 있었다. 파쿠타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 바퀴 성안을 돈 후엔 반드시 별당 근처로 열 번 스무 번 순력을 돌았다. 혹시나 또 한 번 요염한 과부의 자태를 가까이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염원에서였다. 이날 밤도 한 바퀴 성안을 돈 후에 별당 주위를 몇 차례 돌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으슥한 곳에서 별당의 불빛을 멀리 바라보고 있을 때 돌연 멀리서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콧노래를 부르며 별당으로 향해오는 자가 있었다. 멈칫 걸음을 멈추고 어두컴컴한 곳에 몸을 숨겨서 바라보았다. 키가 작달막하고 뚱뚱한 자가 손에 술병과 반-을 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별당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피카르다.

'저자가 또 치골의 추태를 부리러 과부한테로 올라가는구나!'

삼분의 호기심과 칠분의 시기심이 불꽃 튀듯 일어났다. 콧노래 부르며 올라가쁜 피카르의 뒤를 슬며시슬며시 들키지 아니할 정도로 따랐다. 피카르는 별당에 오르자 잠겨진 문을 두드렸다. 과부는 문을 열어주지 아니했다. 자꾸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애걸을 하는 모양이다. 과부는 밤이 늦었다고 아니 열어주는 모양이다. 피카르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서 왔다 했다. 겨우 문이 열려졌다. 파쿠타는 발자취를 죽여 가만히 별당 마루청으로 올랐다. 방 안에서 발자취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피카르는 방문을 획 젖혔다. 누구냐고 호통을 쳤다. 파쿠타는 날쌔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무도 없었다. 피카르는 바람 소리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다시 닫았다. 제수보고 술을 따르라 했다. 치태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파쿠타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사람 살리라는 소리가 일어났다. 파쿠타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위기일발의 사이에 칼을 빼어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난륜을 모면케 했던 것이다.

며칠 후의 일이다. 오도리족의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돌연 관 전령을 내렸다. 티무르는 밤마다 시자들을 물리치고 건주위 마천 추장이 갖다 바친 우디거 딸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벽에 걸고 바라보고 있었다. 볼수록 예쁘고 아름다웠다. 막내아들 퉁맹가의 원수도 갚으려니와 마천 추장의 말대로 우디거의 아름다운 딸을 뺏어다가 낙을 보고 싫은 생각이 가슴 안에 뿌듯했다, 당치 아니한 노욕이었다. 전쟁 준비를 하라고 한 달 기한을 준 그 시기가 너무나 길었다고 생각했다. 일각이 삼추 같았다. 어서어서 우디거를 쳐부숴버리고 아들의 원수를 갚은 후에 우디거의 딸을 사로잡아서 소실을 삼아놓고 무궁한 행락을 누려보고 싶었다. 티무르는 큰아들 피카르와 아장의 꼭지인 파쿠타에게, 돌연 관전명령을 내린 것이다. 두목과 졸개들의 무예가 출중하게 되면 한 달 기한이 차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군사를 휘동하여 우디거를 습격할 작정이었다. 늙은 추장 티무르의 관전명령을 받은 오도리족의 군사 오천 병마는 일제히 성 밖 넓은 벌에 집결되었다. 보병과 마군은 기치창검을 휘날리며 부서에 따라 정돈되어있고, 장대 넓은 단 위에는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를 위시하여 남녀노소 각 부락의 추장과 파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티무르의 옆에는 죽은 퉁맹가의 아내 혹의미인과 건주위의 특사로 왔던 마천 추장도 참관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관전식은 요란한 호가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보졸의 일대대가 화살 꽃은 전통을 어깨에 메고, 칼을 빼어들고 지휘하는 패장 피카르의 뒤를 이어 뚜벅뚜벅 발을 맞추며 장대 앞에 나와 티무르 노추장을 향하여 군례를 드렸다. 티무르는 만족한 듯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모든 추장들의 손뼉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티무르 노추장 옆에 앉아 있는 퉁맹가의 아내였던 과부 미인은 손뼉을 치지 아니했다. 저희 고장 건주위 보졸에 견주어 행군하는 걸음걸이와 태도는 반의 절반도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영솔한 패장은 메주덩이 같은 얼굴에 구레나룻이 고슴도치 털같이 뻗친 치골한인 피카르다. 며칠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하니 구역이 날 지경이었다. 제수인 자기 방에 연통도 없이 쫓아 들어서 욕을 뵈려던 위인이다. 칼을 들고 지휘하는 꼴도 변변치 못했다. 가래침을 메주덩이 같은 얼굴판에 탁 뱉어버리고 싶었다. 손뼉이 쳐질 까닭이 없었다. 얼굴에는 모멸의 표정이 가득하게 넘쳐흘렀다. 동행했던 건주위 마천 추장이 옆에서 말했다.

"보졸을 거느리고 나오는 패장은 오도리족의 노추장의 큰아들 피카르라 합니다. 손뼉을 쳐줍시오. 아씨의 큰 시아주버니가 됩니다."

과부는 싱긋 웃었다.

"우리 건주위 군사들의 행진하는 규율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박수를 쳐줄 건덕지가 있어야 쳐 주지요"

냉랭하게 대답했다. 보졸의 행진이 지나간 후에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마군 일부대가 줄을 지어 나왔다, 앞을 서서 지휘하고 나오는 꼭두 패장은 사내답게 잘생긴 파쿠타였다. 머리에 붉은 복닥이 쓰고 철편으로 비늘을 달아 지은 갑옷을 입었다. 철총준마 위에 높이 앉아 긴 칼을 뽑아 들고, 전군을 지휘한다. 눈에는 별빛 같은 정기가 초롱거리고 호령 소리는 장대 위 마루판을 쩌렁쩌렁 울렸다. 뚜벅뚜벅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는 보조가 척척 들어맞았다. 마군들의 모습도 씩씩하고 정돈되어 있지만, 짐승인 말들까지도 일사불란의 훈련이 되었다, 파쿠타는 장대 앞에 당도하자 장검을 비껴들고 우레 같은 구령을 불렀다. 2천 병마가 일제히 장대를 향하여 칼을 번쩍 들었다. 싸늘한 백광이 창공 위에 일제히 횐 무지개를 뿜었다. 파쿠타의 마군이 단상을 향하여 군례를 드리는 것이다. 박수갈채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며 일어났다. 단상에 앉은 흑의미인은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쳤다. 맨 처음 자기가 이곳 별당으로 왔을 때 친절하게 짐짝을 갖다 주었던 파쿠타다. 단 한 번에 그에게 정이 들었다, 너무나 사내답게 잘생긴 탓이다. 죽은 남편 퉁맹가보다도 인품이 위요, 둘째 번으로 몸을 허락했던 건주위 추장 이만주보다도 더 잘생긴 탓이었다. 더구나 지난번에는 시숙 피카르가 치태를 부려서 난폭한 행동을 하려던 찰나에 자기 몸을 구해주었던 은인이다. 흑의미인은 파쿠타에 대한 연정이 양춘가절 양지쪽에 애탕쑥 솟아나듯 파릇파릇 솟아났다. 다른 사람들이 열 번 박수를 칠 때, 흑의미인은 스무 번 서른 번 손뼉을 쳤다. 손뼉만 칠 뿐이 아니었다. 잔잔한 웃음물결이 아름다운 눈매와 입가에 다실 줄을 모르고 넘쳐흘렀다. 손뼉을 치고 웃을 뿐만이 아니었다. 공연히 마음이 군성거렸다. 옆의 사람에게 말이 하고 싶었다. 마천 추장의 소매를 지그시 손가락으로 눌렀다,

"저 사람이 마군 지휘 파쿠타라지요?"

"그렇답니다."

"사내답게 씩씩하게 잘생겼습죠?"

"잘생겼구먼-"

"말도 잘 타고 군사들의 훈련도 잘 시켰는데요."

"그렇습니다."

"아까 보졸 지휘보다 월등하게 낫죠?"

"낫습니다."

"아까 보졸 지휘는 우리 죽은 남편의 형이라는데, 천양지판이로군요. 지지리 못생겼습니다."

"얼굴도 메주덩이 같고, 텁석부리 구레나룻은 고슴도치 털같이 뽀죽뽀죽 뻗쳤군요."

혹의미인의 마음속을 알지 못하는 마천 추장은 목낭청 대답하듯 싱겁게 대답만 했다. 사열이 끝난 후에 마눈과 보졸의 무예 겨룸이 시작되었다. 먼저 활쏘기 놀음이 시작되었다. 보졸 대표로는 피카르가 전통에 백우전을 가득 꽃아 어깨에 메고 나오고, 마군 편에서는 파쿠타가 화궁을 들고 금비전을 메고 나타났다. 모두들 두 패장의 모습을 눈을 씻고 바라본다. 퉁맹가의 아내 과부도 맑은 눈을 들어 두 장수의 모습을 바라본다. 역시 마군 패장인 파쿠타의 늠름한 모습이 눈에 들었다.

과녁은 백 걸음밖에 세워 있었다. 두 장수는 뚜벅뚜벅 걸어 마주 섰다. 병졸 한 명이 뛰어나왔다. 반 위에 접은 종이를 받쳐 들었다. 누가 먼저 쏘고 나중 쏘는 차례를 정하려는 것이다. 파쿠타와 피카르는 접은 종이 하나씩을 펴보았다. 피카르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내가 먼저다!"

소리치며 과녁이 놓인 백 걸음 밖 사수가 서 있을 곳으로 달음질쳐 나갔다. 남에게 지지 아니하려는 성격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파쿠타는 유유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잘되었네. 먼저 쏘게나?"

피카르는 과녁을 향하여 깍지를 엄지손가락에 끼고 쏘려는 자세를 취했다. 북이 두리둥둥 울렸다. 활시위에 메겨진 백우전 화살은 푸르르 날았다. 살은 소리치며 허공을 끊었다. 정통을 맞히지 못하고 셋째 번 테두리 안에 꽃혔다. 단상의 모든 시선이 과녁으로 모여들었다.

"아깝다!"

소리가 일어났다. 북소리가 또 한 번 두둥둥 울렸다. 이번에는 파쿠타가 의젓이 걸어 나가 백 걸음 밖에 섰다. 금비전 한 대를 전통에서 쑥 뽑아 현에 메기고 활을 힘껏 당겼다. 금비전 화살은 바람을 끊고 과녁을 쏘아 '' 소리를 내었다. 과녁 한복판을 보기 좋게 쏘아 맞혔다. 환호성이 일어났다. 손뼉을 치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 그중에 많이 손뼉을 치는 사람은 죽은 퉁맹가의 아내 청상과부였다. 피카르는 세 번을 쏘아 겨우 한 번을 맞혀서 일중을 하고, 파쿠타는 세 번을 쏘아서 내리 삼중을 했다.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과부의 손뼉은 터질 듯했다. 삼중을 쏜 파쿠타는 태연자약했으나 피카르의 얼굴은 우르락푸르락 했다. 다음은 다시 창쓰기 경기가 시작되었다. 진짜 창을 쓴다면 상할 염려가 있다. 길고 긴 죽창 끝에 헝겊을 두둑하게 싸서 끄나풀로 매고 헝겊에는 회칠을 했다, 찔리는 대로 흔적이 남아 있어서 몸체 회 자국을 많이 받은 자가 지게 되는 것이다. 파쿠타와 피카르는 북소리와 함께 창쓰기를 시작했다. 치고 찌르고 피하고 찔렀다. 북이 울리며 싸움은 그쳤다. 파쿠타의 몸에는 휜 자국이 두 점뿐이요, 피카르의 몸에는 만신창이다. 박수 소리가 또다시 진동했다. 과부의 손뼉은 더욱 열을 올렸다. 이번에는 마군들의 무예 자랑이었다. 마군 백여 기는 일제히 청룡도와 장창을 들고 준총 위에 높이 앉았다. 위수패장은 파쿠타다. 무쇠빛 철총을 타고 장창을 비껴들었다. 위풍이 늠름했다. 붉은 복닥이 밑에 드러난 얼굴판은 두었다 보아도 정말 미남자다. 죽은 퉁맹가의 아내 혹의미인은 단상에서 얼이 빠진 듯 파쿠타의 일동일정을 바라보고만 있다. 마군들은 큰북 소리를 군호로 하여 달리기를 시작했다. 넓고 넓은 허허벌판에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앞선 말이 떨어지고 뒤의 말이 앞을 섰다. 손뼉 치는 소리가 우레같이 일어난다. 앞서기 뒤서기를 열 번 스무 번 번복했다. 그러나 언제나 유유하게 앞장을 서서 달리는 말은 파쿠타의 말 철총이었다. 말도 품이지만 말을 어거하는 마술이 능란한 때문이다. 이곳저곳에서 칭찬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파쿠타가 제일이다?"

"역시 대장감이다?"

도처에서 파쿠타를 칭찬하는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는 혹의미인의 입가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끊일 사이 없이 서려졌다. 그러나 마졸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피카르의 눈은 실북하게 올라붙었다. 다음에는 장애물이 놓인 마술경기다. 나무로 등상을 만들어서 산더미같이 쌓아놓았다. 마졸들은 두 층 세 층을 놓고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섯 층, 여섯 층을 놓고는 뛰어넘지 못했다. 파쿠타의 철총은 일곱 층, 여덜 층을 놓아도 어려움 없이 훌훌 뛰어넘었다. 손뼉 치는 소리가 또다시 하늘과 땅을 흔들었다. 혹의미인은 손에 땀이 자르르 흘렀다. 간장이 오그라질 듯하다가 펴졌다. 즐거운 외마디 소리가 쇠도 끊을 듯 분홍 장미 같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발을 동동 굴렀다. 마졸 편에 서서 바라보는 피카르는 손뼉치는 부하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다.

"말이 용하지 파쿠타가 말을 잘 타는 것은 아니다. 나도 파쿠타가 가진 철총마들 탄다면 그 이상은 뛰어넘을 것이다!"

졸아치 군사들은 외면을 하고 소리 없이 픽 웃었다. 관전식은 큰북 소리를 군호로 하여 끝이 났다. 모든 추장들은 무예가 출중했던 장졸들에게 상을 주기 위하여 일등과 이등과 삼등을 고르기 시작했다. 일등에는 활을 쏘아 삼연중을 하고 마술에 능통한 파쿠타요, 이등에는 티무르 늙은 추장의 아들 피카르였다. 늙은 추장은 파쿠타와 피카르를 단상으로 불러올렸다, 티무르는 파쿠타에게 화궁 한 개와 보검 한 자루를 주고, 피카르에게는 각궁 한 개를 내렸다.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이때 죽은 퉁맹가의 아내 혹의미인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회오리바람 일 듯 일어나는 애련의 충동을 이겨낼 수 없었다. 대담했다. 자기 목에 걸었던 분홍 산호 목걸이를 훌떡 벗어서 파쿠타의 목에 걸어주었다. 손뼉 치는 소리가 온 군중에 요란하게 일어났다. 파쿠타는 늙은 추장 티무르가 내리는 화궁 한 개와 보검 한 자루보다도 혹의미인이 아름다운 목에 걸었던 분흥 산호 목걸이를 손수 자기 목에 걸어준 뜻밖의 일이 더욱 기뻤다. 코가 사뭇 벌룽거렸다. 티무르 추장한테 예를 마친 후에 혹의미인을 향하여,

"영광스럽습니다."

한마디를 하고 뚜벅뚜벅 걸음을 걸어 단 아래로 내렸다. 피카르는 제수인 혹의미인이 흘연 산호 목걸이를 벗어서 파쿠타의 목에 걸어주는 광경을 보자 시기하는 마음이 불꽃을 뿜었다. 성난 눈으로 흑의미인을 흘겼다. 눈에 불이 활활 붙었다. 쌍심지가 타올랐다. 제수를 향하여 눈을 부릅떠 노려보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료하게 단하로 내려서서 보졸들이 나열한 곳으로 향했다. 군사들이 수군수군 지껄여댄다.

"! 파쿠타야말로 영광이로구나! 추장이 주는 상보다도 과부가 자기 목에 걸었던 산호 목걸이를 주었으니, 얼마나 좋겠느냐!"

"좋구말구. 더구나 조인광좌 중에 과부가 손수 목에다 걸어주었으니 얼마나 행복스러우냐 말이다."

"아마 과부가 파쿠타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지?"

"미상불 파쿠타야말로 여자들이 보면 마음이 아니 흔들릴 수 없게 잘생겼느니라. 거기다가 무예가 그만큼 출중하니 내가 여자라도 반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파쿠타는 마직도 장가 전인 총각이 아니냐."

이때 한 자가 '흐흐흐' 웃음소리를 크게 내며 말한다.

"흐흐흐, 배 아픈 사람이 한 사람 있을 것일세"

"누가 배를 앓는단 말인가?"

"배꼽이 두려빠지도록 배 아픈 사람이 한 사람 있단 말야!"

"사촌이 땅을 샀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배를 앓는단 말인가?"

"추장님의 큰아들 피카르 말일세, "

"피카르 패장이 왜 배를 앓는단 말인가?"

"이 사람, 아주 맹문일세그려. 그렇게 눈치를 못 챘나? 우리 패장은 연신 제수한테 반해서 사족을 못 쓰는 판일세. 건주위에서 제수 과부가 올 때부터 그 예쁜 얼굴에 흘딱 반했거든. 손수 별당을 청소해주고, 밤이면 술에다가 고기에다가, 갖은 공궤를 다해 받들었지, 그렇지만 제수는 거들떠보지도 아니했거든. 하하하, 소박을 당했단 말야. 흐흐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나는 두 번씩이나 별당 보초를 서서 대강 알고 있다. 과부는 파쿠타한테 마음이 있나보더라, 아까도 산호 목걸이를 자기 목에서 훌떡 벗어서 파쿠타의 목에 걸어주지 않더냐. 그러니 피카르 패장이 배가 아프지 않겠느냐 말이다. 일등상도 파쿠타한테 뺏기고 제수의 산호 목걸이 또 파쿠타에게로 돌아갔으니 얼마나 분하고 배가 아프겠느냐 말이다."

모두들 이와 같이 찧고 까불고 있을 때 심통이 잔뜩 뻗친 피카르가 보졸들 앞에 나타났다. 보졸들은 일제히, "--" 소리를 쳤다. 그러나 피카르는 '얼마나 배가 아프겠느냐' 하는 소리가 귓결에 들렸다. 심통이 잔뜩 난 피카르에게 불을 더한층 붙여준 격이 되었다. 피차르는 자기를 비웃는 소리인 것을 직감했다. 손에 들었던 등채를 높이 들어 지껄이고 있던 보졸들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아이쿠'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이놈들아, 무어 어쩌고 어째? 배가 아파! 누구 배가 아프겠단 말이냐? 대답을 해보아라!"

피카르는 등채로 모조리 사매질을 쳤다. 말한 놈이나 말하지 아니한 놈띠나 옥석구분 격이 되었다. 말참견도 아니 했던 한 자가 까닭 없이 사매질을 당하는 동료들을 보자 기가 막혔다.부아가 불끈 터졌다. 벌떡 일어섰다.

"패장님! 너무나 심하십니다. 졸아치들은 아주 죽을 놈들입니까? 교련을 마친 후에 패장이 수고했다고 졸아치들을 위로는 못해줄망정, 배가 아프겠다는데 왜 모조리 사매질을 치시오? 교련 끝에 체증이 생겨서 배를 앓는 놈도 있고, 구토 설사하는 놈도 있을 텐데, 배 아프단 말이 무슨 죄가 되어서 함부로 두들겨주오? 나는 입 한 번 벌린 일 없소마는 의분을 참을 길 없어 한마디 하오."

말을 마치자 불끈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피카르는 더욱 분통이 터졌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교련 뒤에는 체증이 생기는 놈도 있고 구토 설사하는 놈도 있다? 이 자식, 건방지구나."

등채를 번쩍 들어 면상과 목줄기를 사정없이 짓갈겼다. 얼굴과 목덜미에서 유혈이 낭자했다. 수백 명 보졸들은 이 잔인무도하고 포악한 행동을 목격하자 의분이 일시에 폭발되었다. 일제히 '' 소리를 치고 일어났다. 피카르를 향하여 주먹질을 하고 소리친다.

"왜 쇠 없는 군사들을 두들겨주는 거냐? 패장이면 제일강산이냐?"

금방 곧 변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이때 건너편 마군 편에서 이 모양을 바라보던 파쿠타는 보졸들이 피카르를 둘러싸고 난동질을 치는 것을 보자 심상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급히 걸음을 옮겼다. 보졸들의 얼굴엔 유혈이 낭자하고, 피카르는 주먹질이 어지러운 사면초가, 곤궁한 속에 빠져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위기일발의 상태였다. 파쿠타는 유혈이 낭자한 보졸의 얼굴을 씻어준 후에 지휘봉을 흔들어 큰 소리로 보졸들을 어루만져 위로한다.

"추갈님이 모처럼 관전을 하시고, 앞으로 우리들은 큰일을 해야 할 이 시기에 여러분 보졸들이 이같이 무질서한 행동을 취한다면 장래 일이 어찌 되겠나! 자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여러분은 참으시고 질서를 유지해주시오."

파쿠타의 목소리는 장중했다. 모든 졸아치들은 파쿠타의 인품에 눌렸다. 피카르를 둘러싼 것을 풀어놓고 한 사람 두 사람 제자리로 돌아갔다. 파쿠타는 피카르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이것이 도대체 웬일인가? 자네는 몹시 피곤했나 보이. 영 안으로 들어가 잠깐 쉬는 것이 좋겠네?"

피카르의 눈이 실쭉하게 찢어졌다. 파쿠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자 눈이 뒤집혔다.

"이 자식아, 너는 무슨 참견야?"

등채로 파쿠타의 뺨을 갈겼다. 계속해서 파쿠타의 목에 걸린 산호 목걸이를 잡아채 낚았다. 분홍빛 산호 목걸이 줄이 탁 끊어지면서 등글등글한 산호 구슬이 와르르 땅바닥으로 흩어졌다, 피카르는 흙발길로 산산이 흩어진 산호 구슬을 으깨려 했다. 이때 단 위에서 아직 물러가지 아니하고 있던 혹의미인은 급히 단 아래로 내려가 파쿠타가 봉변을 당하는 곳으로 달음질쳐 뛰어갔다. 건주위에서 동행했던 마천 추장도 급히 뒤를 따랐다. 흑의미인은 파쿠타에게 지극한 연모의 정으로 바친 잔심의 산호알이 진흙발길에 밟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산호알을 알알이 주웠다. 마천 추장도 황황히 산호 구슬을 주워서 미인에게 넘겨주었다. 보졸들도 우르르 달려 나와서 구슬을 주워 과부 미인에게 넘겼다. 한편 파쿠타의 태도는 여유가 작작했다. 등채로 자기 몸을 후려쳐 갈기는 피카르의 손을 탁 잡았다.

"이 사람아, 노갑이을도 분수가 있지, 군사들에게 노한 것을 왜 나에게 분풀이를 하나. 자네 오늘 군사훈련을 시키느라고 심신이 몹시 피로한 모양일세. 자아 나하고 영문으로 들어가 잠깐 쉬기로 하세,"

피카르는 파쿠타의 달래는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아니했다. 또다시 등채를 들어 파쿠타의 뺨을 갈겼다.

"이 사람아, 왜 이러는 건가? 머리가 돌았구나. 이쪽 뺨을 마저 때려주게나! 하하하"

파쿠타는 껄껄 웃으며 피카르의 앞에 왼편 뺨을 들이댔다. 이쯤 되니 피카르는 다시 더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등채를 홱 땅에 내던지고,

"망할 자식. 네깐 놈하고 함께 가지 아니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서 교련장 밖으로 사라졌다. 청상과부 흑의미인은 마천 추장과 보졸들의 도움을 받아 흩어진 산호 구슬을 모조리 주워서 수건에 쌌다. 파쿠타는 미인 앞으로 다가서서 목례를 보내고 은근하게 인사를 보낸다.

"모처럼 주신 패물이 땅에 떨어져서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소박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과부는 방긋 웃고 대답했다.

"관계치 않습니다. 산호알은 한 개도 깨진 것이 없습니다. 마천 추장님과 보졸들이 도와주셔서 한 알도 잃어버리지 아니했습니다. 다시 줄에 꿰어서 당신한테 올릴 테니 틈 계시는 대로 한번 들러주십쇼"

과부는 파쿠타에게 미소를 지어 인사한 후에 마천 추장과 함께 별당으로 향했다. 쿠타는 자기의 휘하인 마군들을 휘동하여 교련장에서 라가고, 패장이 없는 피카르의 휘하 보졸들은,

"멋대가리 없는 패장이다?"

"어리가 돌았나보다!"

"부하 한 명도 거느리지 못하는 패장이 어떻게 우디거를 쳐서 동생의 원수를 갚는단 말이냐?"

제각기 한마디씩 하고 무장지졸이 되어 흩어졌다. 티무르 늙은 추장은 까닭을 모르는 채 자기 처소로 돌아가고, 건주위 마천 추장은 무엇을 느꼈는지 이튿날 총총히 티무르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에 이만주한테로 돌아갔다, 며칠 후의 일이다. 파쿠타는 밤에 순력을 돌다가 산호 목걸이 생각이 났다. 과부 미인은 끊어진 산호 목걸이에 줄을 다시 레어줄 테니 틈나는 대로 자기를 찾아 달라 했던 것이다. 파쿠타는 오도리 부락의 순력을 마치고 별당 근처를 한 번 돈후에 창에 불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미인의 방을 찾았다. 부드럽게 문을 두드렸다. 미인은 피카르의 치태가 있은 후부터 어느 때나 항상 문고리를 안으로 잠그고 있었다. 파쿠타는 별당에 올라,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누구요?"

파쿠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응했다.

"나올시다. 파쿠타올시다. 일전에 한 번 찾으라 해서 올라온 길이올시다."

음성은 틀림없는 파쿠타의 목소리였다. 안에서는 반가움을 이기지 못했다. 미인은 얼른 고리를 벗겼다. 파쿠타는 웃음을 가득 얼굴에 싣고 들어섰다.

"앉으십시오. 한동안 적조했습니다, "

미인은 캉에 앉기를 권했다. 파쿠타는 권하는 대로 캉 위에 앉으며 말한다.

"잃었던 산호 목걸이를 다시 찾으러 왔습니다."

"잃어버리셨던 것은 아니시죠. 악마가 샘을 놓아서 줄을 끊어 버렸던 것이지요. 호호호. 이제 다시 새 실로 구슬을 꿰었습니다, 오늘 밤에 목에 걸어드릴 테니, 이번에는 곱게 간수하십쇼! 그럼 잠깐 기다리셔요."

미인은 흰 이를 드러내 방긋 웃고 의장으로 향했다. 다정한 목소리는 따스한 훈기를 일으켰다. 미인은 장문을 열구 차곡차곡 손수건에 싸 논 산호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은은한 불빛 아래 비치는 분홍색 산호 목걸이는 지난번 낮에 볼 때보다도 더 한결 화사한 빛을 뿜었다. 미인은 파쿠타의 앞으로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자아, 머리를 숙이셔요, 목에 걸어드릴게, "

파쿠타는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밀었다. 과부 미인의 향긋한 체취가 코에 스쳤다. 산뜻하고 매끈한 찬호 목걸이가 파쿠타의 목에 다시 걸려졌다. 과부 미인은 만족한 듯 재잘댄다.

"아름답습니다. 훤하신 신관이 더한층 훤출하십니다. 이 산호 목걸이에는 알알이 첩의 단심이 서리고 엉겨 있습니다. 고이고이 간직해줍시오."

말을 마치자, 과부 al인은 부드러운 두 손을 들어 파쿠타의 볼을 쓸었다. 파쿠타는 이내 불덩이 같은 충동을 느꼈다. 덥석 과부 미인의 허리를 껴안았다.

"내 아내가 되어주시렵니까?" 나는 아직 총각이올시다."

"원하신다면."

과부 미인은 속삭이면서 파쿠타의 든든한 가슴판에 얼굴을 묻었다.

"알알이 산호 목걸이에 엉기고 서린 당신의 사랑을 한평생 고이고이 지니오리다."

파쿠타는 무한한 유열 속에 들면서 과부 미인의 등을 쓸었다. 파쿠타와 혹의미인이 한동안 소리 없는 법열 속에 들었을 때, 돌연 밖에서 황당한 걸음걸이의 인기척이 났다, 남녀 두 사람은 바싹 귀를 기울였다. 황하게 문짝을 잡아당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안에서 문고리를 걸어 잠갔으니 열려질 까닭이 없다.

"문을 열어라."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피카르의 질뚝배기 깨지는 듯한 목소리다. 얼싸안았던 남녀의 몸과 몸은 떨어졌다.

"문을 아니 열어주면 부수고 들어갈 테다!"

분노에 찬 벽력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문고리 배목이 뚝 부러졌다, 문짝은 덜컥 자빠졌다. 피카르는 분노에 찬 눈으로 방 안을 바라본다. 호젓한 방 속, 은은한 등불 아래 파쿠타와 제수가 의좋게 캉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더구나 눈에 번쩍 띄는 것은 자기가 흙발로 짓밟았던 분홍빛 산호목걸이가 또다시 파쿠타의 목에 화사하게 걸려있다. 피카르의 눈은 뒤집어지면서 왈칵 상기되었다, 노기는 화산이 터지듯 폭발되었다. 피카르는 허리에 찬 긴 칼을 쑥 뽑아 들었다.

"이 더러운 음부년아?"

소리치며 흑의미인을 찌르려 했다. 기막힌 찰나였다. 파쿠타가 벌떡 일어났다. 환도를 뽑아 들고 마주 섰다.

"웬 해거냐!"

"저 음부년을 먼저 죽이고 너도 찔러 죽여야 하겠다!"

피카르는 눈이 찢어지도록 부릅뜨고 악성을 질렀다. 흑의미인이 오뚝 일어섰다. 눈 한 번 깜짝하지 아니했다. 씩씩한 애인 파쿠타를 믿는 때문이다. 칼칼한 쇠된 목소리로 대꾸한다.

"개만도 못한 이 치골아, 누구보고 감히 음부라고 하느냐. 제수를 겁탈하려는 놈은 성인군자냐?" 금수 같은 놈!"

혹의미인의 맑은 눈에도 핏줄이 섰다. 뺨에는 싸늘한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무어야, 개만도 못해?"

피카르는 파쿠타를 밀치고 혹의미인을 찌르려 했다. 파쿠타의 환도는 흑의미인을 찌르려는 피카르의 긴 칼을 탁 막았다.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댕그렁' 소리를 애며 불빛 아래 찬서리를 뿜는다. 혹의미인의 비단을 찢는 듯한 꾸짖는 목소리가 또 일어난다.

"사내답게 굴어라! 무어냐? 추하게 왜 과부 제수 방을 엿보고 다니느냐. 너하고 살기가 싫다는데 왜 이리 추잡하게 쫓아다니고 엿보느냐. 치태 부리지 말고 썩 물러가거라! 네 아우가 죽어서 혼이 있다면 먼저 네 목을 벨 것이다."

제수인 흑의미인의 독을 뿜는 날카로운 소리에 피카르의 등골이 써늘했다. 찌르려던 날카로운 칼이 잠깐 떨렸다. 파쿠타는 이 틈을 타서 피카르를 방문 밖으로 밀었다. 밀리는 피카르는 칼을 다시 번쩍 들어 파쿠타를 치려 했다. 파쿠타는 몸을 슬쩍 돌려 피카르의 예봉을 피하면서 소리친다.

"네가 나를 찌르려 하느냐. 무슨 까닭에 나를 해치려 빠느냐?"

"이놈, 너는 내 제수를 뺏은 놈이다. 파렴치한 무뢰한이다. 나는 너를 죽여야 하겠다!"

"네가 정 나를 죽이고 싶다면 사내답게 싸워보기로 하자! 자아, 저 넓은 마당으로 내려가 정정당당하게 싸워보자!"

파쿠타는 피카르를 끌고 별당 아래 넓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검은 하늘엔 별빛이 총총하게 초롱거렸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종콩 들렸다. 끌려 나온 피카르도 대담하게 마음을 도사려 먹었다. 긴 칼을 빼어 들고 딱 버티고 섰다. 파쿠타도 환도를 뽑아 들고 가슴에 겨눈 채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피카르를 바라보며 외친다.

"자아, 누가 죽나 결투를 해보자! 찔러보아라!"

피카르는 대답 없이 두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한동안 겨누다가 '!' 소리를 치며 파쿠타의 목을 향하여 긴 칼을 후려쳤다. 번득하며 서릿발 같은 흰빛이 캄캄한 허공을 가로 끊었다. 파쿠타의 장대한 몸집은 나비 날듯했다. 어느 틈에 피카르의 몸 뒤에 환도를 겨누고 섰다. 피카르의 긴 칼은 캄캄칠야 허공을 갈기기만 했다. 파쿠타가 등뒤에 칼을 겨누고 선 것을 직감한 피카르는 가슴이 섬뜩했다. 금방 파쿠타의 환도가 자기 어깨를 내리쳐 찍을 것만 같았다. 소름이 쭉 끼쳤다. 급히 단전에 힘을 주고 담력을 부풀어 올렸다. 숨을 쉬고 몸을 홱 돌렸다. 파쿠타는 별빛 같은 눈에 웃음을 가득 싣고 두 손으로 칼을 잡은 채 피카르를 응시하고 섰다. 찌르려고 덮치는 그 자세보다 웃음을 머금은 그 눈과 입이 더 무서웠다. 피카르는 허장성세로 '?" 소리를또산 번 쳤다. 장검을 번쩍 들어 파쿠타의 어깨를 찍었다. 그러나 장검은 또 한 번 허공을 찍었을 뿐, 파쿠타의 몸은 물찬 제비같이 피카르의 측면에 서 있다. 피카르는 약이 바싹 올랐다. 이번엔 파쿠타의 버티고 서 있는 하체를 노렸다. 긴 칼로 버티고 서 있는 -다리 정강이를 후려갈겼다. 파쿠타의 몸은 날쌔게 공중으로 솟아 후려갈기는 알을 뛰어넘었다. 온몸의 힘을 칼 한 자루에 모아 파쿠타의 정강이를 갈기려 했던 피카르는 힘을 받아줄 대거리가 없어졌다. 피카르는 칼자루를 잡은 채 왈칵 땅 위로 거꾸러졌다. 파쿠타는 날쌔게 몸을 놀렸다. 오른편 무릎을 번쩍 들어 쓰러진 피카르의 칼 잡은 팔죽지를 지그시 눌렀다, '아야!' 하고 부르짖는 피카르의 비명 소리가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파쿠타는 몸을 굽혀 피카르의 팔을 잡은 채 칼 잡은 손목을 바싹 비틀었다.

"이놈아, 아프다. 놓아라"

피카르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또 들렸다. 파쿠타는 대답 없이 씁쓸한 웃음을 소리 없이 웃으며 피카르의 긴 칼을 뺏어 들고 우뚝 섰다. 늠름한 자세다. 피카르는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파쿠자에게 이미 칼을 뺏겼다.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파쿠타는 껄껄 웃으며 소리친다.

"하하하, 너는 나의 적수가 아니다. 무기로 대결해보니 너는 아직 입에서 젖내가 난다. 차마 내 칼로 네 목을 벨 수는 없다. 인생이 불쌍해서 너를 살려주는 것이니 다시는 네 제수에 대해서 치골의 마음을 먹지 말고 나에게 절을 해서 항복해라."

피카르도 천치와 백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명색이 사내자식이었다. 더구나 추장의 아들이다. 비록 무예가 부족해서 파쿠타에게 칼을 뺏겼을망정 절을 해서 항복하기는 싫었다. 넘어져서 흙 묻은 손을 탁탁 털고 소리친다.

"무어야, 날 보고 절을 하고 항복을 하라고? 시러베 아들놈! 내가 네 깐 놈한테 항복을 할 사람이냐. 칼은 뺏겼다마는 맨주먹으로 더 싸워보자."

피카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었다. 파쿠타는 피카르한테서 뺏은 칼과 허리에 찬 환도를 풀어서 땅 위에 던지고 쾌활하게 대답한다.

"좋다. 그러지 아니해도 칼을 뺏은 것은 무기로 결투를 하다가는 네놈이 상할까 해서 뺏은 것이다. 맨주먹으로 싸워보기로 하자. 얻어터져도 치명상까지는 아니 되게 해줄 테다. , 육탄전이다. 덤벼들어라."

파쿠타는 말을 마치자 웃옷을 훌떡 벗었다. 피카르도 웃옷을 벗어버렸다. 모두 다 알몸뚱이다. 팔뚝마다 근육이 돌덩이같이 부풀어 올랐다. 가슴패기마다 젖통이 두드러져서 힘차 보였다. 젖통과 팔뚝의 근육은 비슷비슷했다. 그러나 파쿠타는 키가 크고 피카르는 키가 작았다. 피카르는 복받쳐 오르는 분한 마음을 참을 길 없었다. 주먹을 번쩍 들어 파쿠타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파쿠타는 피카르의 주먹이 들어오는 찰나, 슬쩍 몸을 돌렸다. 피카르의 주먹은 파쿠타의 둔부를 스쳤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파쿠타가 피카르의 어깻죽지를 후려갈겼다. 어찌나 주먹이 빨리 날아들었는지 피카르는 피할 겨를이 없었다. 어깨를 쇠망치로 후려치는 듯했다. 뼈가 우지직했다. 피카르는 아픔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차마 아프다 소리는 칠 수 없었다. 고양이 식혜 먹은 상을 하고 분통이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엔 주먹을 단단히 쥐고 파쿠타의 불두덩을 되게 질렀다. 파쿠타의 눈은 번갯불보다도 빨랐다. 양다리를 확 벌리고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피카르의 주먹은 파쿠타의 양다리 틈으로 들어갔다. 허탕을 쳤다. 파쿠타는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파쿠타의 차례가 되었다. 주먹을 번쩍 들어 피카르의 눈두덩을 되게 갈겼다. 피카르는 아이쿠, 사람 살려라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이때 별당 마루 끝에는 흑의미인이 두 팜자의 결투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멀리 문 앞에는 졸아치들이 보초를 보고 있었다. '아이쿠, 사람 살려라!' 하는 구슬픈 외마디 소리를 듣자 흑의미인은 별당에서 쫓아오고 졸개들은 순라청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나왔다. 졸개들은 쓰러져 있는 피카르의 앞으로 달려가 횃불을 들고 비춰보았다. 쓰러져 있는 피카르의 코에서는 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눈퉁이는 시퍼렇게 멍이 든 채 퉁방울같이 부었다. 흑의미인은 파쿠타를 또렷이 쳐다보았다. 먼저 분홍 산호 목걸이가 궁금했다.

"결투를 하시더니 그예 한 분이 쓰러지셨군요. 산호 목걸이는 말짱합니까?"

"무사합니다. 자아, 보시오! 옷은 벗었지만 목걸이야 벗을 까닭이 있습니까?"

파쿠타는 졸개들이 들고 섰는 횃불 앞에 가슴을 내밀었다. 떡 벌어진 가슴, 풍윤한 근육이 남성답게 보이는 뜬뜬한 쌍 젖통 위에 분홍 산호 목걸이는 불빛을 받아 조용하게 드리워졌다.

"저는 산호 목걸이가 또 한 번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끊어지면 다시 꿰어줄 분이 있지 아니합니까? 그러나 고이고이 간직하느라고 애가 탔습니다."

파쿠타는 조용하게 말하고 미인을 향하여 웃었다. 파쿠타는 벗어 던졌던 웃옷의 먼지를 털어 입으며 사졸들에게 이른다.

"크게 다치지는 아니했다. 코피를 닦아주고 영문으로 갖다 뉘어라. 까불어대면서 결투를 하자고 하다가 조금 다쳤느니라"

졸아치들에게 싸운 내력을 말했다. 한편 졸아치들에게 코피를 닦아주면서 부축을 받아 일어서는 피카르는 퉁퉁 부어 터진 눈으로 앞을 바라보니, 제수인 흑의미인이 서 있었다. 열이 벌컥 올랐다. 미친 듯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이년! 네가 나를 죽이라 했지? 결투를 해서 나를 죽이라 했지? 이 음부 년아."

졸개들이 있는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포함을 했다. 흑의미인은 기가 막혔다, 오뚝 서서 차가운 눈으로 피카르를 노려보며 대꾸도 아니했다. 졸개한테 부축되어 별당 대문 밖으로 나가는 피카르는 이번엔 파쿠타를 향하여 호통을 친다.

"이놈, 이 반적아! 너는 나를 죽이고 다음엔 우리 늙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리고 나서 이 오도리족을 네 손아귀에 집어넣으려고 음모를 꾸몄지! 그러한 후에 내 제수를 뺏어서 네 아내로 삼으려 했지! 이 대역부도의 도둑놈아! 그래서 오늘 밤에 나를 죽이려고 결투를 하자고 했지! 천참만육할 놈!"

피카르는 미친 듯 포함을 준다. 파쿠타는 피카르의 이성을 잃은, 발광적으로 부르짖는 말에 대거리도 하지 아니했다.

"피카르 패장이 관전식에서 진 것이 분해서 나한테 결투를 하자고 했다가, 또다시 져서 분한 모양이다. 지나치게 등분이 된 모양이니 업고들 나가서 영안에 편안히 눕게 해라."

줄개들에게 말했다. 졸개들은 기운 빠진 피카르를 덜쳐 업고 나졸 영문 패장청으로 들어가 캉 위에 눕게 했다. 보졸들이 피카르를 업고 별당 문밖으로 나간 후에 흑의미인은 대담하게 파쿠타의 손을 잡았다.

"항으로 들어가십시다. 할 말이 있습니다, "

파쿠타는 싫지 아니했다.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할 말이 있소? 감히 청할 수는 없소마는 진심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하하하"

호걸스럽게 웃었다. 미인은 이마를 찡그리고 대답한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어서 빨리 들어갑시다. 급히 한 말씀 할 말이 있소."

"접수화 해수혈하듯 따라간다니까, 염려 말라구"

"이분이 왜 이리 정신을 못 차리나. 물은 아니 자셨는데 술에 취할리도 만무하구. 어서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올라갑시다."

"임자가 나보다 열 갑절 더 재잘대면서 날 보고 노닥거린다니 기막힐 일 아닌가베. 대관절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이같이 재촉이오?"

흑의미인은 초조했다. 몸을 흔들고 눈을 흘겼다.

"일각이 삼추같이 급한 일야요. 어서어서 빨리 올라갑시다. 화색이 박두했소"

미인의 목소리는 어둔 밤 속에 비단을 찢는 듯 쨍했다.

"무어, 화색이 박두했어?"

파쿠타는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농지거리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땅에 던졌던 자기의 환도와 피카르에게서 뺏은 장검을 주섬주섬 찾아들고 혹의미인의 손을 잡고 별당으로 올랐다. 혹의미인은 파쿠타를 캉에 앉힌 후에 새카만 눈을 반짝 떠서 정색하고 묻는다.

"당신은 진정 나를 사랑하죠?"

"여부가 있나!"

"아직 아내가 없다죠? 장가 전인 총각이라죠?"

"숫배기야, 흐흐흐"

"나하고 한평생을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습니까?""

"임자가 나를 남편으로 삼아주기만 한다면 한평생뿐 아니라 저승에 까지라도 쫓아가서 함께 살지"

"진정이죠?""

"여부가 있나!"

"저를 헌계집이라 해서 버리시지는 아니하실 테죠?""

"저승에까지 함께 가서 살다가 또다시 태어나서 사람이 되든지 축생이 되든지 간에 함께 살아본다니까!"

"그것이야말로 삼생가연이라는 게죠. 저는 당신과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말을 마치자 혹의미인은 파쿠타의 뺨에 볼믈 대고 품 안으로 기어들었다. 훈훈한 연정이 봄바람 일 듯 무르녹은 속에 파쿠타는 혹의미인의 감겨진 팔을 가볍게 밀치며 묻는다.

"도대체 화색이 박두했다고 어서 올라가자고 하더니,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으니 어찌 된 일요?"

애정낭만의 회오리바람 속에 휩쓸려 도취의 심연 속으로 빠졌던 혹의미인은 잠깐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미인은 정신을 수습했다. 흐트러진 머리털을 가다듬었다.

"아 참, 곧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당신이 하도 내 손을 잡고 아니 놓아준 때문, 그만 마음이 헷갈렸어!"

미인은 정이 담뿍 실린 눈으로 파쿠타를 가볍게 흘겼다.

"기막힐 소리를 다 하네. 임자가 내 손을 결투장서부터 꼭 붙들었지, 내가 언제 임자 손을 꼭 잡았었어? 하느님 맙소사. 그리고 내 뺨에 볼을 누가 먼저 댔나. 흐흐흐 자 아, 그것은 어떻든 간에 덮어두기로 하고 화색이 박두했다고 초조하게 굴던 그 일은 무슨 일야?".

혹의미인의 새까만 눈동자가 불빛 아래 반짝했다.

"피카르는 우리 두 사람을 죽이고 말 것입니다."

"피카르가 어떻게 우리를 죽여?" 제 맘대로 죽일 수 있는가? 더구나 티무르 추장은 임자의 전 남편 퉁맹가의 원수를 갚겠다고 우디거를 치려고 군비확장을 하는 중인데-. 나를 죽이고 어떻게 전쟁을 하려구?"

흑의미인은 슬기가 가득 서려 있는 눈을 반짝 떠서 파쿠타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까 결투장에서 피카르가 당신한테 발악을 해서 푸념 주던 말을 못 들었습니까? 피카르는 먼저 나를 욕했습니다. ‘이년, 네가 나를 죽이라 했지? 결투를 해서 나를 죽이라 했지? 이 음부년아!’ 이같이 입에 못 담을 욕을 한 것을 못 들으셨습니까? 다음엔 또 당신을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이놈, 이 반적아! 너는 나를 죽이고 다음엔 우리 늙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리고 나서 이 오도리족을 네 손아 귀에 집어넣으려고 음모를 꾸몄지! 그러한 후에 내 제수를 뺏어서 네 아내로 삼으려 했지! 이 대역부도의 도둑놈아! 그래서 오늘 밤에 나를 죽이려고 결투를 하자고 했지! 천참만육할 놈피카르가 이같이 발악을 하던 소리를 잊어버리셨습니까? 피카르는 당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다음에는 말을 아니 듣는다고 나를 죽일 것입니다. 밤 안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이거야말로 진정 화색이 박두한 일이올시다."

흑의미인은 피카르의 뱃속을 환하게 들여다보는 듯 슬기로운 판단을 내렸다. 파쿠타는 진솔한 사람이었다. 흑의미인 말을 듣자 빙긋이 웃었다.

"그것이야 피카르란 자가 나한테 언제나 지게 되니 분심이 나서 떠들어댄 소리지, 제가 어떻게 나를 대역부도로 몰수가 있나? 더구나 우디거를 치려는 이때 나를 죽이고 우디거를 어찌 칠 수가 있나. 미친놈의 헛소리지"

"당신 그렇게만 아시면 큰일 납니다. 지금 우디거를 친다는 것은 나의 죽은 남편 퉁맹가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것인데, 피카르는 동생의 원수 갚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나를 겁탈하려는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나하고 당신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혹의미인의 입술은 초조해서 침이 말랐다, 혹의미인의 조리 있게 설명하는 말을 듣자, 파쿠타도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나 임자나 살 궁리를 해야지, 더럽게 피카르의 손에 개죽음을 해서야 쓰겠소 어찌하면 좋소?"

혹의미인은 총명스런 까만 눈을 굴려 파쿠타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한다.

"피카르는 이제 당신을 풍채로도 당할 수 없고, 무예로도 당할 수 없고, 힘으로도 당할 수 없으니, 못난 생각에 반드시 당신을 죽이려 생각할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들의 사이를 시기하는 탓이죠. 당신을 죽인 후에 나를 뺏으려는 것입니다."

파쿠타는 침묵을 지켜 귀 기울여 듣고 있다.

"힘으로 보나 무예로 보나 또는 사졸들의 당신에게 향하는 인망으로 보나 도저히 당신을 당해낼 도리가 없으니, 흉계를 꾸며서 당신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아버지 티무르께 고할 것입니다."

"설마?"

파쿠타는 반신반의하는 태도다.

"설마가 사람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고 보십쇼. 피카르는 꼭 그리할 위인입니다. 지난번 당신하고 다툴 때 역적이라고 악성을 질러 부르짖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이번에 그는 눈두덩이 터져서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것을 증거로 아버지 티무르한테 고자질을 해서, 당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일 것입니다."

흑의미인의 말을 듣는 파쿠타의 몸에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어찌하면 좋소?"

파쿠타의 음성은 황겁했다.

"달아나야 합니다."

"어디로?"

"우디거로 달아나야지요."

"우디거로 달아나다니 말이 되나? 당신의 그전 남편 퉁맹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군사를 조련하는 중인데, 어떻게 정벌하려는 원수한테로 달아난단 말요?"

흑의미인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새침하게 대꾸한다,

"원수를 갚는 일도 내 몸이 살아 있어야 원수를 갚는 것이지, 내 몸이 죽게 됐는데 원수이고 나발이고 다 무엇입디까. 우선 살고 봐야 합니다?"

"우디거에서 받아줄 리가 있나?"

파쿠타는 잠깐 회의에 빠졌다.

"폭로를 하면 됩니다, 오도리족이 우디거를 침략한다고?"

흑의미인의 눈에는 반짝 불이 붙었다. 애인 파쿠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대담하게 슬기를 뿜었다.

"증거가 있어야지. 오도리족이 우디거를 치려고 하는 그 증거가 있어야지"

"내가 가지고 온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훔쳐가지고 가면 됩니다. 티무르 추장이 아들 퉁맹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우디거를 쳐부숴 망하게 한 후에 우디거 딸의 미에 취해서 뺏어다가 첩을 삼으려고 한다고."

파쿠타의 남성미에 도취되어 온몸의 애와 정을 기울여 바치는 흑의미인 청상과부는, 죽은 남편 퉁맹가의 원수를 갚는 그 일보다도 새로 정이 든 애인 파쿠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혹수정 같은 눈을 반짝이며 슬기로운 지혜를 영롱하게 짜냈다.

"좋구먼."

파쿠타는 입이 헤 하고 벌어지며 손뼉을 쳤다. 혹의미인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나는 지금 곧 시아버지 티무르의 침실로 내려가서 동정을 살피고 있겠습니다. 만약 피카르가 아버지한테로 들어가 당신을 대역으로 몰고 포박 명령을 내리기로 한다면, 나는 급히 당신한테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당신은 마군 영문으로 돌아가서 심복 졸개 한 사람을 내 처소로 배치해주십쇼. 가부간 곧 연락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만일을 생각해서 우디거로 달아날 태세를 취하십시오.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파쿠타는 애인 혹의미인의 치밀하고 주도한 계획에 탄복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곧 내 처소로 돌아가 만반 준비를 차리고 연락만 기다리고 있으리다. 모든 일을 조심해서 처리하오."

"걱정마세요. 그리고 당신은 심복 마졸 한 명을 이곳 별당으로 보낼 것을 꼭 잊지 마시오."

"염려 마오. 위급한 연락을 받기만 하면 당신이 타오 달아날 준마 한 필까지 곁들여 보내리다."

고조된 젊은 남녀의 사랑은 이같이 뜨거웠다. 남편을 죽인 원수도 없고 적도 없었다. 도리어 자기네의 사랑을 박해해서 생명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일가와 친척이 원수요, 적이었다. 이런 것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 본연의 욕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활의 단층을 이루면서 변의 물결 속으로 휩쓸려 흘러가는 인간성의 원리다. 파쿠타와 혹의미인은 모든 계획을 세워서 곧 실천에 옮길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일의 성패가 어찌 될지 몰랐다. 꼭 계획대로 척척 맞아들어갈지 조바심이 생겼다.

"어서 그럼 가보세요. 당신의 마군영으로."

"나는 곧 가겠소마는 임자도 어서 티무르 추장한테로-"

"나는 당신이 가신 후에 곧 갈 테니, 염려 마시고-"

"이러다가 우리들의 영이별이 되면 어찌하나?"

파쿠타는 혹의미인에게 달려들어 버썩 가는 허리를 껴안았다. 미인은 조용히 포옹을 허락하면서, 가볍게 눈을 흘겼다.

"바보 같은, 불길한 소리 하지 말아요. 잠자코 나 하라는 대로만-"

두 남녀의 온몸엔 다시 사랑의 물결이 넘쳐 흘렀다. 혹의미인은 파쿠타의 뜬뜬한 가슴에 두어 번 뺨을 문지른 후에 가볍게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밀쳤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가봐요"

파쿠타는 비실비실 밀려 가다가 퍼뜩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럼."

한 마디를 남기고 별당 아래로 내려섰다. 혹의미인은 파쿠타의 스러지는 모습을 한동만 바라보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리와 옷매푸새를 고친 후에 별미 한 반을 들고 천천히 늙은 추장 티무르의 침실로 향했다. 이때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밤이 깊어 조용하니 건주위에서 마천 추장과 과부 며느리가 백금 천 냥과 합께 가지고 왔던 우디거 딸의 미인도를 흘린 듯 펴보고 있었다. 어서어서 우디거를 쳐서, 막내아들 퉁맹가의 원수를 갚고 천하절색인 우디거의 딸을 뺏어다가 첩을 삼고 싶었다. 우디거 딸의 미인도는 볼수록 아름다웠다.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아니했다. 어서어서 뺏어다가 무궁무진한 행락을 누리고 싶었다. 밤마다 미인도를 펼쳐놓고 즐거운 환상 속에 빠져있는 것이 늙은 추장의 일과였다. 이때, 방문이 가볍게 소리 없이 열렸다. 우디거 딸의 미인도를 펴놓고 앉았던 늙은 추장 티무르는 황망히 그림 폭을 말아 치우며,

"누구냐?"

소리를 쳤다.

"저올시다. 막내며느리올시다."

혹의미인은 만면에 웃음을 생글생글 띠고 반을 받쳐 들고 들어섰다. 초롱같이 맑은 눈은 늙은 추장이 황망하게 말아 감추는 미인도의 그림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냐?"

늙은 추장은 황망하게 막내며느리한테 묻는다. 혹의미인은 들고 들어온 별미 음식 소반을 늙은 추장 앞에 조용히 놓고 날아갈 듯 문안 절을 드렸다. 늙은 추장은 며느리의 절을 아니 받을 수 없었다. 얼굴에 웃음을 띠고 절을 받았다.

"며칠 동안 못 보았구나. 그동안 잘 있었느냐?"

", 염려해주신 덕택으로 별당에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혹의미인은 온화한 음성으로 미소를 짓고 조용히 섰다.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막내며느리가 받들고 들어온 반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것이 무엇이냐?""

혹의미인은 반에 받쳐 논 음식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맛있어 보이는 구수한 냄새가 늙은 추장의 비위를 건드렸다.

"제가 건주위에서 온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마는 아버님께 아직 효도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와 오늘은 별미를 한 가지 만들어보았습니다. 이것을 잡수시면 불로장수하시고 만수무강하신다 합니다."

불로장수하고 만수무강한다는 말에 늙은 추장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음식이기에 불로장수를 한단 말이냐?""

"원숭이의 골을 삶아서 만든 별미올시다. 저희 건주위에서는 최고급의 음식이올시다. 원숭이 골을 한 벌만 먹으면 한평생 병이 없고 백세향수를 한다 합니다."

말을 마치자, 혹의미인은 미소를 풍기면서 반을 받쳐들었다. 늙은 추장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원숭이의 골? 그것 참 희귀한 진미로구나. 쇠골을 먹어도 좋다 하는데 원숭이 골이라면 참 기막히게 좋을 것이다. 어디 한번 먹어보자?"

늙은 추장은 저를 들어먹기 시작했다. 매우 비위에 당기는 모양이었다.

'맛이 참 좋구나. 천하별미다."

"원숭이 골은 불로장수할 뿐 아니라, 슬기 있는 영물의 두뇌라 해서 이것을 한번 잡수시면 정력이 열 갑절 느시고 총명스런 슬기가 백 배나 난다 합니다."

흑의미인은 또다시 생긋거려 웃으며 반을 받들었다. 늙은 추장은 정력이 열 갑절이나 는다는 바람에 원숭이 골을 순식간에 다 먹었다.

"너희 건주위에서는 누가 원숭이 골을 먹느냐?"

"원체 귀한 물건이 오라, 여느 사람들은 먹고 싶어도 먹을 도리가 없습니다. 건주위 지휘 이만주가 겨우 한 벌을 먹었다 합니다."

"어떻게 네가 이곳에서 원숭이 골을 구했느냐?"

"아버님께 한번 봉양을 해드리고 싶어서 모아두었던 돈 천금을 써서 원숭이 한 마리를 사서 골을 꺼냈습니다."

흑의미인은 새빨간 거짓말을 야금야금 지껄였다. 사랑하는 사람 파쿠타를 구하기 위하여 염소 골을 백숙으로 고아가지구, 원숭이 골이라 해서 늙은이의 환심을 사면서, 피카르의 동정을 살펴보려 한 것이다.

"기특하다, 네 효심이! 잘 먹었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흐뭇한 마음으로 막내며느리를 칭찬하면서 저를 놓았다. 이때 문밖 마루청에서 발자국 소리가 '쾅쾅' 황당스럽게 들리면서 미닫이문이 홱 열렸다. 코가 터져서 비뚤어지고 눈두덩이 청대 빛이 되어 시퍼렇게 멍이 든 피카르가 기침을 쿨룩거리며 반송장이 되어 기어들었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반송장이 되어 기어들어 오는 큰아들 피카르의 참담한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랐다,

"웬일이냐?"

피카르는 아버지 티무르의 묻는 말에 대답할 사이도 없었다. 제수인 흑의미인이 이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깜짝 놀랐다.

"아아, 도대체 웬일이냐?" 왜 그 꼴이 되었느냐?"

늙은 추장 티무르는 아들을 향하여 펄쩍 뛰며 묻는다. 피카르는 제수 흑의 있는 곳에서 말할 수 없었다. 쭈뼛쭈뼛하고 얼른 대답을 못 했다.

"왜 그 꼴이 됐느냐? 가뜩이나 메주덩이같이 못난 얼굴이 반 동강이 나서 떨어져 달아난 것 같구나! 왜 그 꼴이 되었느냐 말이다?"

피카르는 퉁퉁 부어서 비뚤어진 입술을 겨우 벌려 대답한다.

"옆방으로 좀 가셨으면 합니다."

혹의 입은 제수는 파쿠타를 극진히 사랑하는 만이다. 제수 앞에서 참 소질을 할 수는 없었다.

", 여기서는 말을 못하겠느냐?"

"급박한 군사기밀이올시다."

피카르의 입에서 무심코 나왔다. 흑의미인은 눈치를 챘다. 못들은 체 외면을 하고 돌아섰다. 급박한 군사기밀이란 말에 늙은 추장은 깜짝 놀랐다. 며느리도 자식은 자식이지만 며느리 앞에서 급박한 군사기밀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대답 없이 옆방으로 들어갔다. 피카르도 뒤를 따랐다. 문이 드르륵 닫혀졌다. 혹의미인은 바싹 문 앞으로 다가섰다. 목소리가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아니했다. 두루두루 문작을 둘러보았다. 약간 벌어진 틈이 빠끔하게 보였다. 귀를 바싹 댔다. 피카르의 음성이 미미하게 들렸다.

"파쿠타란 놈이 별안간 흉악한 마음을 먹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믿는 사람인데."

늙은 추장 티무르의 목소리다.

"별안간 그놈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제수한테 반했습니다. 제수도 그놈에게 마음이 있나 봅니다. 아버지, 왜 관전식 날 제수가 그놈한테 산호 목걸이를 준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놈은 저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인 후에, 제수를 계집으로 삼아가지고 오도리족을 통치하려 합니다. 그래서 먼저 저를 두들겨 패서 이 꼴을 만들었습니다. 병신이 되어서 대항하지 못하게 하느라고-."

그럴듯한 말이었다. 앞뒤 부리가 맞아들어갔다.

"어느 때 맞았느냐?"

"오늘 저녁때 파쿠타란 놈이 별당에서 별안간 뛰어나와서 저를 두들겨 패서 병신을 만들었습니다. 꼭 죽을 것인데 보초 보던 군사들이 구해주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곧 포박 명령을 내려서, 옥에 가두어놓고 신문을 하리라?"

"아니 됩니다. 내일 새벽이면 늦습니다, 오늘 밤 안으로 제 부하 보졸 수천 명을 동원시켜서 마군 영문을 습격하고 파쿠타란 놈을 포박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해라!"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프는 파쿠타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엿듣고 있던 흑의미인은 일이 급했다. 자기가 미리 생각했던 추측이 꼭 들어맞았다. 급히 몸을 돌렸다. 늙은 추장 티무르가 밤낮 들여다보고 있던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아까 감추어둔 곳에서 얼른 꺼냈다. 허리춤에 급히 간직했다. 원숭이 골이라고 속였던 먹고 난 빈 그릇을 한 손에 들고, 사뿐 소리 없이 늙은 추장의 큰방에서 벗어났다. 별당으로 줄달음쳤다. 별당에는 미리 약속한 파쿠타의 심복 부하가 준총 찬 필을 끌고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혹의미인은 전갈로 파쿠타에게 설왕설래할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말고삐를 잡아주오! 나하고 함께 마영으로 달립시다!"

파쿠타의 심복 졸개는 명을 받았다. 흑의미인은 간단한 행리를 말 위에 얹은 후에 선뜻 마상에 올라 마군 졸개에게 견마를 잡히고, 나는 듯이 파쿠타의 마군 영문에 당도했다. 이때 파쿠타는 약속대로 마군 정예부대 2천 병마를 대기시켜놓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문밖에 말 뛰닫는 소리를 듣자, 파쿠타는 문을 열었다. 뜻밖이었다. 심복 졸개가 전갈을 까지고 오지 아니하고, 혹의미인이 직접 말을 타고 달려왔다.

"어찌 되었소?"

파쿠타는 혹의미인을 말 위에서 번쩍 안아 내렸다.

"일이 급하게 되었소 추측한 그대로입니다. 전갈을 보내서 왔다 갔다 할 틈이 없어서 내가 바로 곧장 왔습니다. 오늘 밤 안으로 당신에게 포박명령이 내립니다. 어서 빨리 2천 병마를 거느리고 우디거로 달아납시다!"

파쿠타도 머리는 좋았다.

"우디거 딸의 초상화는?"

"자세한 말은 나중 이야기합시다. 우디거 딸의 초상화는 내 몸에 고이 지녔소이다. 염려 마시오?"

"됐다."

파쿠타는 쾌활하게 한 마디를 부르짖은 후에 칼을 빼어 들고 영문마당으로 나갔다. 횃불이 번쩍 들려졌다. 대장의 횃불이 켜지니 2천 병마의 횃불이 일제히 줄 불 켜지듯 켜졌다. 횃불은 대낮같이 밝았다. 대기하고 있던 2천 마병은 일제히 마상에 올랐다. 파쿠타는 긴 칼을 뽑아 들고 호령을 내린다.

"너희들 마병들은 모두 다 나의 사랑하는 사졸들이다. 이제 나는 신변에 위급한 일이 생겼다. 나를 죽이려 한다. 이곳을 떠나야만 하게 되었다. 원하는 사람은 나의 뒤를 따르고 원치 않는 사람은 아니 따라도 좋다. 자아, 나는 지금 떠나야 한다. 여러 사졸들은 한길을 택하라."

2천 마병들은 파쿠타의 신상에 큰 변이 생긴 줄 비로소 알았다. 일제히 소리쳐 대답한다.

"부모 같은 장군님을 우리가 어찌 떨어져 살겠소 장군의 뒤를 함빡 따르오리다!"

마졸들의 응낙하는 소리는 우레 같았다. 파쿠타와 혹의미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파쿠짜는 쾌활하게 말 위에 올라 지휘검을 휘둘렀다.

"자아, 그렇다면 너희들은 내 뒤를 따르라!"

2천 마병은 말굽 소리 가볍게 파쿠타의 뒤를 따랐다. 파쿠타의 탄 말 뒤에는 혹의미인이 말을 타고 달렸다. 파쿠타는 다시 명령을 내린다.

"자아, 횃불을 높이 들어라. 만약 뒤에서 우리를 쫓는 군사가 있다면 누구를 물을 것 없이 활과 창으로 막아대라! 쫓는 군사는 우리의 적이다."

2천 마병은 일제히 소리쳐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모조리 쏘아대겠습니다!"

말굽 소리 드높게 앞을 바라보고 달리는 마병들의 높이 든 횃불은 줄불을 이루어 검은 하늘을 사를 듯했다, 홀연 뒤에서 일대 군마가 역시 횃불을 높이 들고 뒤를 쫓는다. 한 사람의 패장이 큰 소리로 호통친다.

"반적 파쿠타야, 달아나지 말아라. 모든 죄를 용서해줄 테다. 마병들을 거느리고 되돌아오라!"

피카르의 질뚝배기 깨지는 듯한 목쉰 소리다. 파쿠타는 껄껄 웃으며 소리를 높여 대답한다.

"사내대장부가 한 번 결단한 일을 네깐 놈의 치골의 유혹하는 말을 듣고 번복할 수 있느냐. 잔소리 말고 어서 돌아가 깨어진 눈두덩에 약이나 바르고 자빠져 있거라!"

피카르는 또다시 목청을 돋우어 소리치며 군사를 거느려 뒤를 쫓는다.

"2천 마병들아, 나의 소리를 들어라. 너희들은 오도리족의 당당한 마군이지 파쿠타의 마군은 아니다. 반적을 따르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오라. 만약 말을 아니 듣는다면 너희도 반적이다. 모조리 쏘아 죽이리라!"

파쿠타는 피카르의 떠들어대는 말을 듣자 번쩍 지휘검을 높이 들었다.

"귀치 않구나. 쏘아붙여라?"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마군들은 일제히 말머리를 돌렸다. 2천 사수들은 일제히 전통에서 살을 뽑아 활에 메겼다. 2천 개 화살은 허공을 끊으며 보졸 쪽으로 날았다. 피카르도 고합쳤다.

"이편에서도 쏘아붙여라?"

양편의 화살은 어지럽게 날았다. 그러사 원체 보졸들의 사수는 무예가 마군을 따르지 못했다. 보졸 편에서는 '에쿠' 소리를 치며 자빠지는 자의 수가 많았다. 파쿠타는 군령을 내린다.

"마군편에서는 활 쏘는 것을 중지하라! 보졸도 우리의 형제다! 크게 상해서는 아니된다. 내가 한 대 화살로 저들의 쫓는 것을 막으리라!"

파쿠타는 말을 마치자, 친히 화궁을 높이 들어 살을 메몄다. 보졸 앞에서 소리치며 지휘하는 피카르를 향하여 활을 가득히 당겼다. 살은 바람을 끊고 소리쳐 날아 피카르가 타고 있는 검은 말의 다리를 보기 좋게 맞혔다. 말은 비명을 부르짖어 쓰러지고 피카르는 말 위에서 떨어졌다. 보졸들은 급히 피카르를 구해가지고 오음회로 달아난다. 파쿠타는 자기 손으로 고향의 보졸들과 피카르를 상하고 죽이고 싶지 아니했다. 일부러 피카르의 말 다리를 쏘아서 다시는 더 쫓아오지 못하게 한 후에, 유유히 2천 마병과 혹의미인을 거느리고 우디거로 향했다. 때마침 두만강은 얼음이 굳게 얼었다. 2천 마병은 모두 다 북방 족속으로 언 강을 건너기에 익숙했다. 거침없이 강을 건너 우디거 도성 백 리 밖에 당도했다. 파주타는 2천 마병을 도성 백 리 밖에 대기시킨 후에 혹의미인과 함께 도성 문밖에 당도했다. 2천 마병과 함께 도성 가깝게 간다면 우디거의 의심을 사기 쉬운 까닭이다. 파쿠타는 수문장에게 신분을 밝히고 귀화하기를 청했다. 이때 박호문과 만났던 늙은 추장은 나이 많아서 그동안 세상을 떠나고 무남독녀인 우디거 딸의 남편이 새로 우디거의 추장이 되었다. 수문장은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추장한테 고했다.

"오도라족의 대장 한 사람이 2천 병마를 백 리밖에 주둔시키고, 검은 상복 입은 아름다운 각시와 함께 귀화하기를 청합니다."

우디거의 사위와 딸은 함께 앉아 있다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오도리족의 대장이 2천 병마를 백 리밖에 대기시키고 귀화하기를 청한다. 이상하구나. 그리고 또 검은 상복 입은 색시와 함께 왔다? 아내도 아니고 누군가. 만나보기로 하자. 그러나 군용을 정제한 후에 만나기로 한다. 성문 안에서부터 전각 안까지 의장병을 엄하게 배치한 후에 오도리족의 대장을 인도하라."

추장의 명이 한 번 떨어지니, 우디거의 군사들은 일제히 무장을 가리고 성안 십 리 길과 전각 안 전후좌우에 서릿발같은 창자 칼을 햇빛에 번득이며 위엄기 있게 도열했다. 모두 다 건주위에서 모사 퉁맹가를 죽인 후에 우디거로 데리고 온 2천 명의 정예부대다. 모든 의장이 정돈된 후에 수문장은 파쿠타와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을 우디거의 사위와 딸 앞에 인도했다. 파쿠타와 검은 상복의 미인은 공손히 젊은 추장 내외를 향하여 절을 올렸다. 젊은 추장 내외는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은 자기 손으로 목을 베어 죽인 건주위 모사 퉁맹가의 아내다. 우디거의 딸도 깜짝 놀란다. 날마다 건주위에서 끼웃해 지내던 모사 퉁맹가의 아내다. 젊은 추장 내외의 등골에는 소름이 쭉 끼쳤다.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은 예를 마친 후에 고운 얼굴에 웃음을 담뿍 싣고 우디거의 사위와 딸 앞으로 가까이 갔다.

"저를 물라보시겠습니까? 저는 건주위 모사였던 죽은 퉁맹가의 아내올시다."

우디거의 사위 전 건주위 우군 부대장은 검은 상복 입은 퉁쟁가의 아내를 향하여 대답할 말이 꽉 막혔다.

"아아, 참 그러시군요. 낯이 익습니다."

겨우 한 마디를 웅얼거리고 혀끝이 굳어졌다. 그러나 우디거의 딸은 능소능대했다. 얼른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의 손을 탁 잡았다.

"이게 누구야? 퉁맹가의 아낙 아닌가베! 얼마만야. 어떻게 왔소? 웬일야, 참 반갑구려. 이게 꿈인가 생신가? 잘 왔어, 잘 왔어!"

정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상복 입은 미인의 손을 어루만지다가 버썩 허리를 껴안았다. 혹의미인은 말없이 상글상글 웃음으로 대답을 표시했다. 우디거의 딸은 또다시 수다를 떤다.

"잘 왔어, 잘 왔어, 그런데 어떻게 오도리한테서 오는 거요?"

"까닭이 있어서 오음회 오도리한테로 갔습니다. 오도리 노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죽은 퉁맹마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저의 시부가 되고, 오도리는 말하자면 저의 시댁이 사는 곳이죠"

"아 참, 그렇구먼. 퉁맹가가 본시 오도리 사람으로 당신한테 장가를 들어서 건주위로 왔으니, 말하자면 오도리는 당신의 시댁이 사는 부락이지."

혹의미인은 다시 상글상글 웃으며 우디거 딸에게 말한다.

"자세한 말씀은 차차 드릴 테니 좌우간 오도리 마군대장 파쿠타와 저의 귀화를 받아주시겠습니까? 2천 마병도 우디거에 귀화시키겠습니다."

우디거 딸은 배짱이 컸다, 속으로는 자기들의 손에서 치명상을 당해 죽은 퉁맹가의 아내가 2천 명이나 되는 마병들을 거느리고 귀화를 하겠다 하니 의심스런 점이 있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했다. 호협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받아주지, 받아주어! 여부가 있나. 더구나 2천 병마까지 데리고 와서 우디거 군사가 되기를 원한다는데 아니 받아줄 리가 있나. 그렇죠 추장님. 받아주시겠죠?"

우디거의 사위인 남편을 향하여 묻는다. 우디거의 사위도 졸장부는 아니었다.

"받아주지."

쾌활하게 대답했다. 흑의미인은 그제서야 건주위 이만주가 마천 추장의 말을 듣고 우디거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건주위 자체는 슬쩍 빠지고 퉁맹가 티무르한테 아들의 원수를 갚으라고, 과부인 자기를 시아버지한테 보낸 일이며,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건주위 화공들에게 그려서 우디거를 친 후에 우디거의 딸을 뺏어다가 퉁맹가 티무르 늙은 추장의 첩을 삼으라 했다는 사실을 일장설파했다. 이때 옆에 있던 파쿠타는 품 안에서 우디거 딸의 초상화 족자를 꺼냈다. 젊은 추장 내외 앞에 활짝 펴놓았다.

"자아, 이것이 건주위 이만주가 마천 추장편에 오도리 추장 퉁맹가 티무르에게 보낸 추장님 부인의 초상이올시다. 뺏어다가 첩을 삼으라고-."

족자가 활짝 펴졌다. 백모란같이 청초하고도 화사한 우디거 딸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디거 사위와 딸의 눈이 깁 바탕에 그려진 미인도로 쏠렸다. 눈이 환했다. 완연히 앞에 앉아 있는 우디거 딸의 모습이다.

"실물보다 더 잘생겼는데. 하하하. 오도리의 늙은 색마가 욕심도 낼 만하군. 하하하"

우디거의 사위, 새로 된 추갈은 어깨를 으쓱거려 호걸스럽게 웃었다. 추장의 아내 우디거의 딸은 새침하게 자기 그림을 들여다본다. 눈에는 살포시 노한 빛이 떠돌았다. 우디거 사위는 아내를 향하여 농담을 했다.

"어때, 오도리 늙은 추장한테로 시집을 가보는 것이? 하하하."

우디거의 딸은 노한 눈으로 남편을 홀겼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더 들은 후에 음흉한 이만주 놈과 퉁맹가 티무르의 목을 잘라놔야겠소이다."

우디거의 사위는 아내의 말을 듣자 움찔하고 농담하던 입을 다물었다. 우디거의 딸은 손수 자기의 초상화를 두르르 말았다. 흑의미인과 파쿠타를 향하여 묻는다.

"아까 대강 이야기를 들어서, 건주위에서 오도리로 간 내력은 알았소마는, 무슨 까닭에 마군대장은 2천 병마를 거느리고 와서 과수댁과 함께 귀화하기를 원했소? 그리고 나의 초상화는 늙은 추장 티무르가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어찌해서 두 분의 수중으로 들어왔는지 까닭을 자세히 말해주오."

이번엔 파쿠타가 대답한다.

"퉁맹가 티무르에게는 이분의 남편인 막내아들 퉁맹가 이외에 큰아들 피카르가 있습니다."

"그렇지. 건주위로 퉁맹가가 장가들러 왔을 때 형이 한 사람 있다는 말을 들었지."

우디거의 사위인 추장이 말대꾸를 했다.

"옆에 두고 말하기는 미안합니다마는, 보시다시피 과수댁은 참말 미인입니다. 큰아들 피카르는 제수를 보자 그만 초면에 넋을 잃었습니다."

"저 런-."

우디거 사위인 추장의 목소리다.

"단통 제수를 아내로 삼으려 했습니다. 혼인을 하자고 강박을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 티무르한테 허락을 맡고..."

이때 혹의미인은 잠깐 얼굴을 붉히며 외면을 했다.

"오도리족들은 아직도 형이나 아우가 죽으면 둘째 아내를 삼는 풍습이 남아 있군요."

이번엔 우디거의 딸이 탄식조로 말했다,

"그래서?"

우디거의 사위가 다음을 이야기하라고 재촉을 한다. 파쿠타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때 저는 순력을 도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과수댁이 거처하고 있는 별당 앞을 도는 중인데 별안간 '사람 살리라'는 급한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쫓아 들어가 보니 욕을 당하려는 찰나이었습니다. 그때 과수댁은 형수나 제수를 범하는 일은 금수의 짓이라 하고 혼인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나는 곧 큰아들 피카르의 등을 밀어 내쫓았습니다. 이후부터 피카르는 앙심을 먹고 나를 죽이려 했습니다."

파쿠타는 말을 계속한다.

"한편 오도리 늙은 추장은 어서어서 우디거를 쳐 무찌르고 우디거 추장님의 부인을 약탈해다가 첩을 삼으려 했습니다. 일변으로는 막내의 원수를 갚고 일변으로는 절세가인을 뺏어다가 향락을 하자는 작정이지요. 그래서 전쟁 준비가 완성됐습니다. 그 후에 관전식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피카르의 모든 무예는 나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저분은 나에게 칭찬하는 뜻으로 자기 목에 걸었던 산호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 후부터 우리들의 정은 깊어지고. 피카르의 시기하는 마음은 절정에 올랐습니다. 마침내 몇 번인지 결투를 했습니다. 번번이 피카르는 나한테 졌습니다. 그러해서 피카르는 나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내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저의 아버지한테 참소하는 고자질을 해서 나를 잡아 죽이라고 포박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쯤 되니 저분은 나를 구하기 위하여 비밀하게 내린 포박 명령을 알려주고 부인의 초상화를 증거물로 훔쳐 가지고 와서, 오도리가 우디거를 공격하려는 실정을 폭로하면서 우디거로 귀화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비로소 파쿠타와 혹의미인의 귀화하기를 원하는 까닭을 환하게 알게 되었다. 젊은 추장은 덥석 파쿠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졸지에 오도리족의 침략을 받아서 큰 변을 당할 뻔했소이다. 두 분의 귀화를 쾌하게 허락하오."

젊은 추장은 파쿠타의 손을 더 한 번 굳게 잡아 흔들펐다. 한편 우디거의 딸 추장 아낙은 부끄러운 듯 외면하고 앉은 흑의미인의 허리를 껴안고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별수 없이 오도리한테로 끌려가서 늙은 추장의 첩이 되었을 것이오. 감사함을 형언해 말할 수 없소! 더구나 당신의 남편을 죽게 한 우리들 부부를 원수로 대하지 아니하고 은혜를 끼쳐주시니 이 크나큰 덕을 무엇으로 갚으오리까?"

과부인 흑의미인은 보시시 웃으며 대답한다.

"제 남편이었던 퉁맹가를 죽이신 일은, 일부러 죽이려 해서 죽이신 것이 아닌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만주의 명을 받아, 퉁맹가가 부대장님과 부인을 해하려 하므로 부대장께서 저의 남편을 죽이고 우디거로 달려오신 것이 아닙니까? 선수를 쓴 것은 저의 남편이요. 부대장님이 아니십니다. 허물은 이만주와 죽은 저의 남편한테 있습니다. 저는 절대로 두 분을 원수로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혹의미인의 대꾸하는 말은 입에서 향기가 도는 듯했다. 비록 여진족속의 여인이나, 아름다우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고맙소, 말씀만이라도-. 두고두고 당신들의 은혜를 갚으오리다."

우디거의 젊은 추장 내외는 모든 의심을 활짝 풀어버렸다.

"피곤하시겠소이다. 객관으로 인도할 테니 편히 쉬시도록 합시오."

시자에게 분부해서 편히 쉬게 했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객관으로 내보낸 파쿠타와 과수댁에게 진수성찬과 좋은 금침을 내보내서 우대한 후에 또다시 군영주보에 명을 내려, 백 리밖에 머물러 있는 파쿠타가 거느리고 온 2천 병마에게 밥을 지어 배불리 먹이라 했다. 이튿날 젊은 추장 내외는 객관으로 친히 나가 멀리 귀화해온 파쿠타와 과수댁을 위로한 후에 함께 백 리밖에 있는 오도리 2천 군마를 열병하러 나갔다. 젊은 추장과 그의 아내 우디거의 딸은 건주위에서 부대장으로 있던 경험 많은 장교였다. 오도리에서 파쿠타가 훈련 시킨 2천 병마의 무예를 시험해보려는 것이다. 파쿠타 역시 우디거 추장의 무예를 소문 들어 짐작하고 있었다. 자기 휘하에서 조리 있게 훈련된 군사들의 무예를 자랑하고 싶었다. 마상에 높이 앉아 있는 우디거 추장 내외 앞에서 스스로 장검을 빼어 들고, 2천 병마를 호령하며 지휘했다. 2천 병마는 싸쿠타의 지휘에 따라 우디거 추장 내외에게 군례를 드린 후에 무예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말달리기, 창쓰기, 철퇴쓰기, 활쏘기, 가지각색의 무술을 자랑해 보였다. 우디거 추장 내외는 항상 만족한 웃음을 띠고 무예가 끝날 때마다 손뼉을 쳐서 칭찬을 했다. 열병이 끝난 후에 우디거 추장은 파쿠타에게 말했다.

"장군은 2천 병마를 우시거에 귀속하기를 원했으니, 오늘부터 나의 휘하에 배치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겠소?"

파쿠타는 공손히 대답한다.

"허락이라니 말씀이 됩니까? 추장님께서 받아주신다면 그런 다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도와 아장이 되구 2천 병마는 곧 입성을 시켜서, 우디거의 마병에 편입시키겠소이다."

"물리치지 않고 거두어주시니 이런 다행이 없습니다. 2천 마병에게 높으신 분부를 전하겠습니다."

파쿠타는 말을 마치자 마상에서 지휘검을 빼어 들고 호령을 내린다.

"지금 추장님께서는 너희들의 좋은 무술을 사열하신 후에 매우 만족하게 생각하셨다, 너희들에게 입성을 허락하시고 나를 아장으로 삼으신 후에 너희들을 우디거 군졸로 편입시킨다 하셨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당당한 우디거의 병졸들이다. 충성을 다하여 우디거 추장님을 받들도록 하라."

2천 병사는 환호성을 높이 올렸다. 파쿠타는 다시 군령을 내린다.

"아까는 객병의 쥐치에서 군례를 드리고 무술을 자랑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들은 우디거 추장님을 대장군으로 모시었다. 우디거 병졸로서의 군례를 드리라."

2천 마병들은 파쿠타의 구령에 따라 일제히 긴 칼을 높이 빼어 들고 우디거 추장 내외를 향하여 휘하에 예속된 군례를 드렸다. 추장 내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군례를 받았다. 우디거 젊은 추장은 아내와 함께 새로 귀화한 2천 마병의 군례를 받은 후에 대장의 자격으로 군령을 내린다.

"자아, 너희들 오도리 2천 마병은 이제부터 나, 우디거 추장의 군졸이다. 충성을 다하여, 우디거의 간성이 되라."

2천 마병은 또다시 칼을 빼어 들고 군례로 대답했다.

"자아, 입성이다-."

우디거 추장은 또 한 번 군령을 내린다. 2천 마병은 구령에 따라 엄숙히 행진을 시작했다. 우디거 추장이 아내와 함께 앞을 서 말을 타 나가고, 다음에는 파쿠타와 흑의미인이 따르고, 다음에는 2천 병마가 뒤를 이어 말굽 소리 드높게 성안으로 들어갔다. 우디거 부락의 오랑캐들은 힘 안 들이고 정병 2천을 얻은 것이 기뻤다. 거리거리 손뼉을 울리며 새로 귀화한 병졸들을 맞이했다. 우디거 추장은 병졸들을 영문에 배속시킨 후에 추장의 거실로 들어가 파쿠타와 흑의미인에게 술과 안주를 내어 대접했다.

단란한 좌석이었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돌았을 때 우디거 젊은 추장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아내에게 말한다.

"나는 오늘 밤에 기럭아비가 될 테니, 당신은 중매 어미가 되는 것이 어떻겠소?"

"좋은 말씀입니다. 즐겁게 중매 어미가 되겠습니다."

파쿠타와 흑히미인의 떨어질 수 없는 연정을 짐작한 우디거 추장 내외는 파쿠타와 흑의미인을 바라보면서 슬며시 말을 던졌다.

흑의미인은 생긋 웃고 고개를 돌리고, 파쿠타는 벙글벙글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때, 파쿠타! 이제는 내 아장이 되었으니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하네!"

"여부가 있습니까. 절대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지요."

"그렇다면 자네는 오늘 밤에 흑의미인과 동방화촉을 밝혀야 하네?"

", 상관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추장의 아내인 우디거의 딸이 말을 가로막는다.

"안부로 자처한 분이 중매 어미를 제쳐놓고 동방화촉을 밝혀라 마라 하니 주제넘은 일이오. 안부란 기러기를 받들고 혼인날 신랑을 인도하는 것이오. 동방화촉을 밝히라 하는 것은 중매 어미가 할 일이지, 당신이 간섭할 노릇이 아니오"

"아아, 참 그렇던가. 그럼 임자가 총각과 색시한테 내외가 되려느냐고 물어보구려! 하하하"

우디거 추장은 괘사를 떨며 호걸 웃음을 웃었다. 우디거의 딸은 일부러 과수댁에게 묻는다.

"파쿠타가 마음에 들지?"

과부는 생긋 웃고 대답이 없다.

", 그러면 오늘 밤에 동방화촉을 밝힙시다?"

방안에는 화기가 가득했다. 이날 밤에 파쿠타와 흑의미인은 정식으로 혼인을 했다. 이리하여 파쿠타와 흑의미인은 공공연하게 내외가 되어 즐거운 사랑의 결실을 이룩했다.

한편 우디거 젊은 추장은 오도리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가 크게 군사를 조련하여 우디거를 정복한 후에 아내를 뺏어다가 첩을 삼으려 한다는 정보를 파쿠타에게서 듣자 크게 노했다. 파쿠타와 혹의미인의 삼일 신방이 끝난 후에 우디거 추장은 곧 파쿠타 내외를 불렀다,

"이제 자네들은 기회를 잘 잡아서 사랑의 결실을 이루어 소원이 성취되었네. 그러나 나도 내 일을 좀 해야 하겠네, 오도리 추장 퉁맹가 티무르를 쳐서 설욕전을 시작해야 하겠네. 좋은 의견을 말해주게!"

옆에 있던 우디거의 딸 추장의 아내가 말참견을 한다.

"나를 첩으로 삼겠다는 놈은 죽여버려서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주어야 하오. 그대로 공격만 해서는 분이 풀리지 아니하오. 죽여야 합니다."

흑의미인은 이제는 파쿠타의 아내가 되었다. 검은 상복을 벗고 화려한 푸른 옷을 입었다. 옆에서 한마디 한다.

"저도 이제는 파쿠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티무르와 피카르와도 연이 끊어졌으니 한마디 합니다. 피카르에게서 곤욕을 당하던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립니다. 피카르도 처치해줍시오."

"아무렴, 피카르도 처치해버려야지, 그놈은 나를 모함해서 죽이려던 자가 아닌가!"

파쿠타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아, 그럼 내일이라도 출군을 하면 어떠한가? 우디거의 정예부대가 2천 명이 있고 파쿠타의 마병 2천 명을 합치면 4천 명이 되니 이만하면 넉넉히 오도리족을 진압할 수 있지 않겠는가? 파쿠타, 의견을 말해보게나."

우디거 젊은 추장은 파쿠타를 향하여 물었다.

"지금 오도리 부락에는 피카르가 거느린 보졸 2천 명밖에 없습니다. 우디거의 2천 병마는 장군이 건주위에서 인솔해오신 정예부대요, 소장이 데리고 달려온 2천 마병은 오도리에서 쏙쏙 뽑아 논 날랜 군졸들이올시다. 두 편의 사졸을 합세해서 몰아 들어간다면 대쪽을 쪼개내듯 거침없이 쳐들어갈 것입니다. 아무 염려 마십쇼!"

파쿠타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 곧 출병을 하기로 하세?"

우디거 추장은 단을 내렸다. 파쿠타가 다시 말한다.

"편대에 대하여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오도리 부락이 있는 오음회로 쳐들어갈 때 소장이 선봉이 되겠습니다."

우디거 추장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내가 자네한테 부탁하려 했더니, 자네가 먼저 말을 하네그려. 지세도 알고 저쪽 형편을 잘 알고 있으니 다시 더 할 말이 없네. 자네가 선봉대장이 되어주게."

"나도 앞장서서 가게 해주시오. 내 손으로 늙은 추장 티무르를 죽여야 하겠소."

추장의 아내 우디거의 딸이 말한다.

"저도 앞에 나가서 치골 피카르를 죽이겠습니다."

이번엔 파쿠타의 아내가 청한다.

"좋다!"

우디거 추장은 쾌하게 허락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우디거 젊은 추장은 전군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우디거의 군사 2천 명과 파쿠타가 거느리고 들어온 군사 2천 명, 도합 4천 병마는 기

치창검을 창공에 번득이며 출전명령에 대기하고 있었다. 우디거 추장은 스스로 대장군이 되어 붉은 복닥이 쓰고 백마 위에 높이 앉아 청룡도를 번쩍 들어 전군을 지휘한다.

"아장 파쿠타는 소속 부대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라?"

파쿠타는 푸른 복닥이 쓰고 철총마 위에 높이 앉아 2천 마병을 거느리고 말굽 소리 드높게 앞으로 나와 도열했다.

"나의 아내에게는 좌익조전장의 명호를 준다. 아장 파쿠타의 왼편으로 나오라!"

우디거의 딸인 추장의 아내가 누른빛 복닥이 쓰고 유월내 말 타고 긴 칼 비껴들고 달려 나와 파쿠타의 왼편으로 나섰다. 추장은 다시 군령을 내린다.

"아장 파쿠타의 아내에게는 우익조전장의 명호를 준다. 아장 파쿠타의 우익이 되어 적진으로 돌격하라."

지난날 퉁맹가의 아내였고 새로 파쿠타의 아내가 된 흑의미인은 이제 상옷을 벗고 청의미인이 되었다. 남색 복닥이에 푸른 옷 입고 장창을 비껴들고 백마를 달려 파쿠타의 오른편에 섰다. 추장은 다시 또 영을 내린다.

"세 장수는 선봉이 되어 2천 마병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가라! 나는 후군이 되어 선봉의 뒤를 받치리라."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선진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장은 뒤를 이어 2천 병마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향해 나갔다. 강물은 아직도 땅땅 굳게 얼어붙었다. 도강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4천 병마는 거리낌 없이 수월하게 강을 건넜다. 선봉장 파쿠타는 오음회 지평에 당도하자 2천 병마에게 영을 내린다.

"너희들은 원래 오도리 족속들이다. 무능하고 탐욕 많은 지휘자인 티무르와 피카르로 인하여 나를 따라 우디거로 피했던 것이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티무르 부자를 응징하러 가는 길이다. 이들 부자 이외에는 절대로 군사와 백성들을 죽이고 상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칼과 창으로 엄포만 주고 화살이 비오듯 쏟아질지라도 방패를 들어 막아대기만 하라. 절대로 동족상잔을 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꼭지 두 사람만 응징할 테다."

모든 군졸들은 일제히,

"좋습니디-."

하고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한편 오도리측에서는 파쿠타가 혹의미인과 함께 정예부대 2천 병마를 이끌고 우디거로 넘어간 후에 크게 낙망이 되었다. 군사들의 사기도 뚝 떨어졌다. 일변 피카르는 파쿠타를 잡아 죽이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낙상을 한 후에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치료가 된 후에는 날마다 군사들만 패주고 볶아댔다. 사졸들의 원성은 나날이 높아갔다. 우디거를 공격해서 추장의 아내를 뺏어오려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퉁맹가 티무르와 아들 피카르는 정신이 산란하게 지내고 있을 때 돌연 오음회 성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장은 급히 말을 달려 변을 고했다.

"우디거 쪽에서 사오천 명의 마병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홍수 밀 듯 쳐들어옵니다."

"무어야, 우디거 쪽에서 군사 사오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서 홍수 밀듯 쳐들어온다?"

퉁맹가 티무르와 피카르는 깜짝 놀랐다.

", 그렇습니다. 위수대장은 파쿠타입니다. 그리고 우편에는 혹의미인이 청의미인으로 변장해서 장창을 비껴들고 파쿠타를 도와 말을 달려 들어오고, 좌편에는 일위 미인이 장검을 휘두르며 파쿠타를 도와 짓쳐 들어옵니다."

파쿠타가 위수대장이 되어 쳐들어오고 혹의미인이 조전장이 되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피카르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무어야, 파쿠타가 앞장을 서서 쳐들어오고 제수가 조전장이 되어온다? 아버지, 어찌하면 좋습니까. 파쿠타란 놈이 기어코 반란을 일으켜 쳐들어옵니다 그려!"

피카르는 부들부들 떨었다. 금방 경풍이 될 지경이었다. 아비 티무르는 그동안 우디거 딸의 미인도를 잃어버린 후에, 거의 성광 지경에 이르렀다. 일위 미인이 파쿠타의 좌익조전장이 되어 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급히 수문장에게 묻는다.

"파쿠타의 좌익조전장이 되어 쳐들어온다는 일위 미인은 우디거의 딸이 아니더냐?"

수문장은 우디거의 딸을 알 까닭이 없었다.

"소인은 우디거의 딸을 본 적이 없습니다."

", 그렇지. 그러면 지난번에 건주위 마천 추장이 가지고 온 미인도의 얼굴판 같더냐?"

수문장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대답한다.

"소인은 건주위가 가지고 온 미인도를 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미인도란 어떠한 것입니까?"

"예끼놈, 무식한 놈이로구나. 미인도란 아름다운 여자의 그림이란 말이다."

"그렇습니까?" 미인도라는 것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마는 어떻든 얼굴이 아주 예쁜 절대가인입니다."

"아아 그렇더냐? 절대가인이더냐? 반드시 우디거 딸이 분명하구나! 내가 꼭 사로잡아서 별실을 삼아야 할 텐데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늙은 추장 티무르는 노망이 든 모양이다, 적병이 쳐들어온다 하는데 적을 막아 몰아낼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미인 생각에만 골똘했다, 수문장은 급하고 초조했다.

"도대체 적병이 쳐들어오는데, 막아낼 생각은 하지 아니하시고 미인도 타령만 하시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하려 하십니까?"

퉁맹가 티무르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났다. 급히 설렁줄을 흔들어, 보졸 패장을 불렀다.

"반적 파쿠타가 군사를 거느려 쳐들어온다 한다. 빨리 보졸을 동원하여, 수문장과 함께 막아내라. 그리고 피카르는 도지휘가 되라"

티무르의 동원령이 떨어지니 피카르는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벌벌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도리의 보졸 2천 명은 피카르와 패장의 지휘를 받고 황황히 활과 살을 준비하여 오음회 성문 밖으로 나갔다. 피카르는 명색이 도지휘가 되었으니 먼저 앞을 서서 나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제수 혹의미인의 아리따운 모습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했던 파쿠타의 일이 가득하게 떠올랐다. 마음이 불안하고 산란했다. 칼을 빼어 들고 말을 달려 앞에 나갔으나 거의 지휘할 능력을 상실할 단계에 빠져 있었다. 피카르의 다음 줄에서 말을 달려나가던 패장이 엄하게 호령을 내리면서 군졸들을 지휘하고 나갔다. 성 밖 오 리쯤 갔을 때 우디거에서 오는 대군과 마주쳤다. 군사마다 일기당천의 기세로 말은 '어흥' 소리를 쳐 반공에 굽을 솟구쳐 달려들고, 군졸들은 함성을 질러 밀물 밀어닥치듯 몰려들었다. 말굽 뛰는 소리, 고함쳐 들레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켜 뒤흔들었다. 피카르는 칼을 빼 들고 쳐들어오는 적을 바라보니 과연 위수대장은 파쿠타다. 푸른 복닥이 쓰고, 철총마 위에 높이 앉아 장창을 비껴들고 전군을 지휘한다. 피카르는 다시 정신을 수습하여 바라보니, 파쿠타의 옆에는 수문장이 말한 것같이 제수인 흑의미인이 청의미인으로 변하여 남빛 복닥이 쓰고 백마를 달려 짓쳐 나오고, 좌편에는 또 한 사람의 여인이 누른빛 복닥이 쓰고 유월내 말을 달려 파쿠타를 도와 나온다. 피카르의 기가 푹 죽었다. 어찌할지 모르고 있을 때, 파쿠타는 오도리 보졸의 앞을 서서 나오는 피카르를 발견했다. 장창을 번쩍 들었다. 홍종 같은 목소리로 꾸짖는다.

"이놈 피카르야, 그동안 잘 있었느냐? 나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했지만, 이제는 네가 죽을 차례다! 목을 길게 늘여 심판을 받아라!"

파쿠타의 꾸짖는 말이 떨어지자 아름다운 여인의 교성이 꾀꼬리 소리 모양 곱게 들려왔다.

"아재, 그동안 태평했소. 치골의 짓도 많이 하고-. 이제 나는 파쿠타와 결혼을 했소! 그래서 검은 거상 옷을 벗어버리고 푸른 화복을 입었소. 이제 당신과는 아재와 제수의 의리는 끊어졌소. 천벌을 밟으오"

피카르는 비로소 제수가 혹의를 벗고 푸른 옷을 입은 내력을 알았다. 파쿠타와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듣자 오장육부를 날카로운 칼날로 난도질을 치는 듯했다. 혼백이 아찔했다. 손끝 발끝이 꽁꽁 얼었다. 잡았던 칼이 뚝 떨어졌다. 말고삐를 놓쳤다. 말이 뛰었다. 피카르는 화살 한 대 맞지 않고 말 위에서 떨어졌다. 오도리 보졸들은 낙마된 피카르를 급히 구해서 후방으로 돌렸다. 피카르가 낙상이 되어 후방으로 돌려지니, 오도리 군사들의 도지휘는 보졸 패장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칼을 빼어 들고 앞으로 나섰다. 급히 호령을 내린다.

"오도리 보졸 전군은 일제히 활을 쏘아 쳐들어오는 적을 막으라!"

오도리 패장의 명이 한 번 떨어지니, 보졸들은 일제히 활시위에 살을 메겨 우디거 마군들을 향하여 쏘았다. 화살은 소리치며 비오듯 쏟아졌다. 파쿠타는 급히 군령을 내린다.

"이편에서는 절대로 활을 쏘지 말라! 출군할 때도 일러두었다마는 2천 마병, 너희들은 모두 다 오도리와 피를 같이한 한 겨레다. 절대로 동족상잔을 해서는 아니 된다. 방패로 화살을 막으라!"

우디거 마군들은 일제히 방패를 들어 날아드는 화살을 막으며 돌진했다. 오도리 보졸들은 파쿠타의 '동족상잔을 하지 말라' 는 장중한 목소리를 듣자, 모두 다 감격했다. 더구나 파쿠타는 오도리에 있을 때 군사들의 추앙을 받던 인물이었다. 인품에 눌리고 피를 같이한 한 겨레란 말에 모두 다 가슴이 뭉클했다. 한 군사가 급히 산등성이로 올라 큰소리를 친다.

"우디거의 선봉대장은 일찍이 우리가 상사로 모시었던 파쿠타다! 우리가 어찌 상사를 향하여 화살을 쏘아 대항할 수 있느냐. 더구나 그분은 마군에게 명을 내려, 대항하지 말고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전진하라 했다. 우리를 상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도 어찌 동족을 향하여 활을 쏠 수 있느냐? 모두 다 활을 버리고 항복을 해서 다 함께 살기로 하자!"

모든 군사들은 옳다고 생각했다.

"옳다! 파쿠빠 장군이 거느린 2천 마병은 본시 우리들의 형제다. 형제끼리 어찌 칼과 창과 화살로 찌르고 쏘고 죽일 수 있느냐? 활을 내리고 화친하기로 하자!"

행렬 속에서 또 한 명의 군사가 호응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의 군사가 떠들어댄다.

"파쿠타 장군은 우리의 존경하는 대장이었다. 추장의 아들 피카르가 치골의 짓을 해서 제수를 겁탈하려 한 대문에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파쿠타 장군의 인품을 존경한다. 자아,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기로 하자!"

오도리 2천 보졸들은 일제히 활과 무기를 버렸다. 오도리 패장도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2천 군사의 의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들었던 지휘도를 땅에 던졌다. 말에서 내려 파쿠타의 앞으로 나갔다. 패장 역시 파쿠타의 하관이었던 사람이다. 공손히 예를 올렸다.

"장군의 인덕과 동족상잔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에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감격해서 활과 무기를 모두 다 땅에 버렸습니다. 군사들의 순박한 뜻을 받아주시오!"

파쿠타는 기뻤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허물로 인해서 만백성을 살육과 도탄과 초토 속에 몰아넣는다는 일은 차마 할 짓이 아니오. 오도리의 보졸들이 다 나의 뜻을 알아서 싸우기를 포기했다 하니 이런 다행한 일이 없소! 우리들의 전진을 막지만 말아주오."

", 그러하겠습니다!"

패장은 쾌하게 허락했다. 곧 길을 돌려 오도리 보졸들에게 영을 내린다.

"오도리 군사들은 파쿠타 장군의 입성을 막지 말라!"

오도리족의 보졸들은 일제히 길을 비켰다. 파쿠타의 2천 마병과 우디거 추장의 2천 군사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오도리성을 통과했다. 파쿠타와 우디거 추장은 전군에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오도리 군사들의 열복을 받아 한 사람의 생명도 상하지 아니하고 수윌하게 입성하게 되었다. 군사들의 행동이 점잖고 의로운 때문이다. 앞으로 성안에 들어갈지라도 민가에 대해서는 추호도 범하지 말고 점잖게 행동을 하라. 더구나 내가 거느린, 오도리에서 우디거로 갔던 군사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아내와 자식들이 얼마나 반갑게 그대들을 맞이할 것인가. 각별히 조심해서 의젓하게 행동을 취하라."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소리쳐 대답한다.

"삼가 군령을 받들겠습니다."

4천 명 군사들은 엄숙하게 질서를 지키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별안간 난리가 났다고 피란 보따리를 싸 들고 갈팡질팡 도망가던 백성들은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아니한 채 화평한 모습으로 입성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바라보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남부여대했던 피란 보따리를 길가에 내려놓고 바라본다.

"웬일이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더니, 벌써 싸움을 다했느냐? 이상한 일이다. 군사들은 살기 없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들어오니 웬일이냐?"

한 백성이 행진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앞에서 말 타고 지휘하는 대장이 마군대장이었던 파쿠타가 아니냐?"

한 백성이 눈을 씻고 바라본다.

"아 참, 바로 파쿠타로구나. 그리고 자세히 보아라. 파쿠타 옆에 여장군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나오는데 첫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다마는, 한 여자는 추장 티무르의 과부 며느리다. 건주위에서 서방이 죽은 후에 과부가 되어 시집으로 왔던 흑의미인이 분명하다. 지금은 청복을 입었구나!"

"아 참, 그렇구나. 바로 그 여자다!"

이곳저곳에서 이야기가 분분할 때 홀연 길 건너편에서 늙은 노파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군졸의 행렬 속으로 지팡이를 짚고 뛰어들었다.

"아이고, 네가 타루화치가 아니냐. 나는 꼭 네가 죽은 줄만 알았구나! 이생에서는 다시 못 만나볼 줄 알았더니, 이같이 만나보니 꿈이냐, 생시냐."

"아이고, 어머니!"

늙은 할미와 군사 한 사람은 얼싸안고 반가운 울음을 터뜨렸다. 파쿠타를 따라 우디거로 갔던 마군 한 사람의 늙은 어머니다. 모든 군사와 피란가던 백성들은 이 광경을 바라보자 멍하니 얼이 빠져 감격 속에 잠겼다. 이때, 파쿠타는 2천 명에게 분부를 내렸다.

"나의 부하 2천 마병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처자를 찾아라."

파쿠타의 군령이 떨어지니 2천 마병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파쿠타는 고향으로 돌아온 2천 마군을 해산하여 부모와 처자를 찾게 한 후에 우디거 추장과 함께 오도리 패장을 향도로 하여, 우디거 군사를 거느리고 퉁맹가 티무르와 피카르 부자가 있는 곳을 찾았다. 이때 티무르는 우디거가 쳐들어온다는 수문장의 보고를 받자 급히 보졸을 출동시켜 아들 피카르오 도지휘를 삼고 패장으로 지휘를 삼아 오음회 성문 밖에서 적을 방어하라 하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아들 피카르는 겁에 질려 적에게 화살 한 대 쏘지 못하고 수각이 황란해서 말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고 돌아왔다. 불안하기 짝없었다. 허리를 다쳐 누운 피카르와 함께 좋은 전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별안간 거리가 소란하면서 우디거의 2천 병마는 티무르의 궁실을 포위해버렸다. 시자가 급히 들어와 고한다.

"지난번에 과부와 함께 2천 마병을 거느리고 우디거로 달아났던 파쿠타가 우디거 군사 2천 명과 합세하여 도합 4천 명이 쳐들어왔습니다. 젊은 추장이 낙마하고 돌아온 후에 파쿠타는 동족상잔을 하지 말라고 영을 내려서 오도리 군사들에게 활을 쏘지 아니했습니다. 군사들은 여기 감복해서 모두 활과 칼을 버려서 무혈입성을 했습니다. 파쿠타는 입성을 하자 우디거로 데리고 갔던 2천 마병을 부모와 처자의 품 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환성이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파쿠타는 이제 크게 민심을 얻었습니다. 지금 우디거 2천 군사만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위급하기 짝없습니다. 풍전등화 올시다."

시자의 보고를 듣는 티무르와 아들 피카르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한마디 말을 못 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시자 한 명이 또 뛰어 들어왔다.

"지금 우디거 추장과 여장군들이 칼과 창을 비껴들고 이곳으로 들어옵니다. 빨리 몸을 피해 달아나셔야 합니다."

"어떻게 달아난단 말이냐. 2천 병마가 포위를 했다면서..."

늙은 추장 티무르는 무녀가 대를 잡고 떨 듯했다. 턱까지 떨었다. 이가 마주 부딪쳐,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낙마를 해서 허리를 다친 피카르는 꼼짝달싹을 못 하고 누워있었다. 겁에 질렸다. 얼음판에 자빠진 소 모양, 눈을 멀뚱멀뚱 뜨고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소장의 옷을 바꾸어 입고 사람 틈에 끼여 빨리 달아나십시오!"

"횐 머리와 횐 수염이 유표한데 어찌하느냐?"

"머리에는 검은 복닥이를 쓰고 횐 수염은 깎고 달아납시다!"

"나는 달아나지만 낙상이 되어 자빠진 저 피카르는 어찌한단 말이냐!"

"소장이 업고 달아나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누웠던 피카르는 소리를 벌컥 일렀다.

"나는 죽었다. 꼼짝없이 잡혀 죽는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황급하게 검은 복닥이를 센 머리에 뒤집어썼다. 칼을 뽑아 흰 수염을 잘랐다. 시자와 옷을 막 바꿔 입으려 할 때 문밖에서 ', '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방문이 '드르륵' 황하게 열렸다. 한 사람의 대장이 서릿발 같은 긴 칼을 비껴들고 들어섰다. 미목이 청수했다. 기상이 늠름했다. 뒤미처 명모호치에 쌀쌀한 기운을 얼굴에 가득히 띤 여인이 단검을 뽑아 들고 들어섰다.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겁에 질려서 수염 깎던 칼을 내던지며 바라보았다. 기막히지 않은가. 자기를 노려보고 섰는 여장군은 건주위 마천 추장이 우디거를 쳐서 아들 퉁맹가의 원수를 갚고 일석이조로 우디거 딸을 뺏어다가 첩을 삼으라고 했던 바로 그 미인도와 똑같은 여장군이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 소리를 치며 펄썩 주저앉았다. 손발이 오그라지며 벌벌 떤다. 여장군은 단검을 뽑아 들고 바싹 늙은 추장 티무르 앞으로 다가섰다.

"네가 늙은 추장 티무르냐?"

티무르는 대답을 못 하고 벌벌 떨 뿐이다.

"나는 우디거의 딸이다! 네가 우디거를 짓밟은 후에 나를 뺏어다가 첩을 삼겠다던 그 여자다. 자아, 내가 여기 네 앞에 섰다. 첩을 삼아 보아라!"

여장군은 날카롭게 티무르를 꾸짖는다.

"이 늙은 치한아, 도망을 가려고 개털 같은 센 대가리를 복닥이로 가리고 횐 수염을 잘랐구나. 어디 센 대가리 꼴이나 좀 보자"

우디거의 딸은 칼끝으로 티무르의 머피에 쓴 복닥이를 번쩍 들어 팽개쳤다. 허연 머리털이 드러났다. 우디거 딸은 까르르 웃어댄다.

"센 대가리를 해 가지고 무슨 놈의 힘이 있다고 나를 첩을 삼겠다고 했느냐? 개털 같은 구레나룻을 깎고 도망을 가려는 주제에-. 자아, 내 얼굴이나 흠뻑 바라보아라! 눈요기라도 실컷 하고 지옥으로 떨어져라."

늙은 티무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서 장검을 비껴들고 씁쓸한 미소를 풍기며 미인의 곁에 섰던 우디거 젊은 추장이 티무르의 앞으로 다가섰다. 분노에 찬 음성으로 격하게 꾸짖는다,

"늙은 놈이나 젊은 놈이나 너희 부자들은 난륜의 축생들이다. 과부 제수를 첩으로 삼으려 하고, 이웃을 정벌해서 유부녀를 약탈하러 드는 악한 무리다. 여진족속의 얼굴에 똥칠을 한 놈들이다. 천주를 받아라!"

긴 칼이 번쩍 들렸다. 횐 무지개를 뿜으며 퉁맹가 티무르의 흰머리는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우디거 젊은 추장은 다시 발길을 아들 피카르의 앞으로 옮겼다.

"지옥으로 떨어져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좋은 사람으로 환생을 해라"

아비의 목을 자른 서릿발 같은 칼날은 다시 아들 피카르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이때, 파쿠타와 흑의미인은 일부러 밖에서 대기해 있고 방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했다. 차마 자기들의 손으로 상사였던 티무르와 시숙이었던 피카르를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디거 추장 내외는 퉁맹가 티무르와 피카르를 처치한 후에 파쿠타와 혹의미인과 오음회에 사는 오도리족을 위안한 쿠에 영토에 대한 크나큰 꿈을 품고 두만강 국경을 넘나들었다. 오음회에 변란이 일어나자 오도리족의 비장 범찰과 대이는 급히 길주에 있는 함길도 관찰사 조말생을 찾아와 애통한 말로 호소했다.

"우디거 추장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음회로 쳐들어와서 추장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찔러 죽였습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지금 오음회 저희 족속들이 살던 곳은 우디거 사람들에게 세력을 빼앗겨 부지해 살 도리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오음회 조선 땅에 살게 해주셔서 크나큰 은혜와 신세를 졌습니다마는, 저희들의 사정을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경원 근처에 살게 해주신다면 은혜는 백골난망이겠습니다."

두 사람은 울면서 애걸했다. 조말생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일을 관찰사가 맘대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곧 조정에 장계를 올려서 가부간 회답을 내리려니와, 어찌 된 까닭으로 우디거가 침범해서 너희들의 추장 부자를 한꺼번에 살해했단 말이냐?"

범찰과 대이는 건주위 이만주의 농간으로 우디거를 공격해서 티무르의 막내아들 퉁맹가의 원수를 갚는 한편, 우디거의 딸을 뺏어다가 첩을 삼으라 한 일이며, 피카르가 과부 제수를 아내로 삼으려 하다가 파쿠타와 사랑의 적이 되어 파쿠타를 죽이려던 일이며, 파쿠타가 과부와 함께 우디거로 달아나서 티무르가 우디거를 공격하려던 일을 이야기해서 일이 발단된 것을 일일이 설파했다. 조말생은 범찰과 대이에게 돌아가 기다리라고 이른 후에 급히 파발마를 달려 위와 같은 사유를 보고했다. 장계가 정원에 올려지니 도승지 김종서는 곧 빈청에 을라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 삼정승과 함께 세종전하께 뵙기를 청했다. 전하는 내시를 통하여 알현을 허락했다. 도승지 김종서는 삼정승을 어전에 인도했다. 전하는 삼정승과 도승지가 입시하는 모습을 바라보자 옥음을 내려 묻는다.

"도승지가 삼정승을 인도하여 들어오니 무슨 중대한 일이 있는가?"

김종서는 장계를 올리며 아뢴다.

"함길도 관찰사 조말생이 급한 장계를 정원에 올렸습니다."

전하는 장계를 받아본 후에 어수로 무릎을 치시며 용안에 가득 미소가 떠돌았다. 장계를 책상 위에 놓고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때가 왔구나!"

눈치 빠른 도승지 김종서는 전하의 뜻을 알았다. 김종서의 입가에도 웃음이 떠돌았다. '때가 왔구나?' 말씀하는 전하의 뜻을 잘 아는 때문이다. 그러나 영의정, 좌의정들은 전하의 '때가 왔구나?' 말씀하는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건주위를 응징해서 사군을 설치한 최윤덕 우상이 어렴풋이 전하의 말씀하는 뜻을 짐작할 뿐이다. 도승지 김종서가 아뢴다.

"함길도 관찰사에게 어떠한 하교를 내리시올지, 대신과 국책을 의논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세종전하는 삼정승을 향하여 옥음을 내리신다.

"지난번에 우상 최윤덕이 서북면 도절제사가 되어 사군 설치를 단행했을 때, 도승지 김종서는 단결에 야인의 무리를 국경 안에서 추방하자고 두만강 동북면에도 동시 출병을 주장한 일이 있었소. 이곳 함경도 일대는 나의 선조의 발상지지라 내가 어찌 한시라도 이 땅을 회복하지 아니하려 했겠소? 과인은 서북면을 정리하는 그 일보다도 동북면의 잃었던 땅을 더욱 빨리 찾고 싶었소 그러나 여연으로 쳐들어오는 건주위 이만주란 놈을 그대로 버려두고 함경도 동북면에 손을 댈 수는 없었던 것이오. 당시에 김종서는 동시출병을 주장했소. 그러나 나는 두 손에 떡을 쥐는 격의 만용이라 해서 때를 기다리자고 종서한테 타일렀던 것이오. 그러나 이제는 사군을 든든하게 설치해서 압록강 대안의 야인족의 침범을 막아서 큰 근심이 없게 되었소. 이제 장계에 의하면, 동북면 일대의 야인들은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우리 땅 안에 살던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죽였다 하니, 이러한 일은 하늘이 정히 실지 회복의 기회를 준 것일라 하겠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유능한 장재를 뽑아서 육진 개척을 단행하기로 합시다."

도승지 김종서가 아뢴다.

"지난번에 여연을 침범한 이만주를 응징하실 때 신은 성정이 조급하와 함경도 일대에 살고 있는 여진족속들도 국경 밖으로 추방하자고 주장했습니다마는, 당시에 전하께서는 막대한 국력의 소비를 염려하시어 다시 때를 기다리자고 하셨습니다. 신도 역시 전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서 여태껏 정세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이제 함길도 감사의 장계에 의하면, 여진족속들은 자중지란이 나서 오도리와 우디거가 서로 다툰다 하니, 전하의 하교대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두 무리를 다 내쫓으시어 강토를 회복하시옵소서."

전하는 대신들의 의향을 듣고 싶었다. 삼정승을 향하여 말씀한다.

"나라의 큰일이다. 과인의 뜻대로 결정할 수 없나.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고려 이후 삼사백 년 내던졌던 황막한 불모지지 수만 리 땅에 잡거해 생활하는 여진족을 두만강 밖으로 몰아내고 진을 두어 개척한다면 이 일은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도 더 힘이 드는 큰일이올시다, 일년 이태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깊이 통촉하시어 처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김종서가 좌의정의 아뢰는 말을 듣자, 반박해 아뢴다.

"동북면의 6진을 개척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은 단순하게 침범해 들어온 적병을 막아서 싸워 물리치는 전쟁만이 아닙니다. 3, 4대 섞여서 살던 여진족속들을 두만강 밖으로 내쫓고 우리 백성들에게 안주의 땅을 마련해주는 일이니, 하루 이틀에 성사가 되는 일이 아닌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 땅을 외족한테 맡겨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제왕이 되어 나라 다스리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까?"

김종서는 열을 띠어 맹정승의 말을 반박한다. 좌의정 맹사성과 도승지 김종서의 찬부 양론을 들으신 세종전하는 장중한 비상으로 한 말씀을 내린다.

"일이 어렵다 해서 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선조께서 사시고 지켜오시던 땅이다. 한 치의 흙덩이라도 포기해버릴 수는 없다."

전하의 용안에는 굳센 표정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힘차게 말씀을 맺는다.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만약 이번 기회에 동북면 함경도 땅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여진족속들이 사는 것은 고사하고 명나라 땅이 되어버립니다!"

김종서는 말소리를 높언 삼정승을 향하여 말한다. 명나라 땅이 되어버린다는 김종서의 말에 정승들의 얼굴엔 놀라는 빛이 떠돌았다. 좌의정 맹사성이 묻는다.

"명나라 땅이 되어버린다니 무슨 소리요?"

김종서는 쾌쾌하게 대답한다.

"정보에 의하면,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도리족을 위무하러 왔던 흠차관 배준은 변란이 일어나니, 백여 명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만히 영북진으로 도망쳐 내려왔다 합니다. 앞으로 자칫 잘못했다가는 함경도 일판은 명나라 땅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래도 동북면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아니하시렵니까?"

김종서의 온몸은 불덩이같이 달았다. 열기 가득 찬 눈으로 대신들을 둘러본다. 명나라 땅이 된다는 말에 대신들은 비로소 간담이 서늘했다. 그럴듯한 말이다. 명나라는 차츰차츰 요동과 요서를 차지하고 여진에도 위를 두기 시작했다. 조선 땅 무인지경을 차지하기란 여반장의 일이다.

"대신들은 손바닥 안만 들여다보지 마시고 멀리 십 년 뒤, 백 년 뒤 일을 바라보시면서 정치를 하셔야 합니다!"

김종서는 또 한 번 대신들에게 대화의 폭죽을 터뜨렸다. 좌의정 맹사성도 속이 탁 터진 인물이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아뢴다,

"옛적 주의 소공은 하루에 백 리씩 나라 땅을 개척했다 합니다. 함경도 공주는 선대 왕들이 대대로 사시던 곳이올시다. 지금은 황폐하여 야인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차마 버려두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개척을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드디어 손을 들었다. 전하는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지난번에 최윤덕이 파저강을 건너 이만주의 소굴을 응징하여 크나큰 공을 이루었거니와 이제 동북면 오음회에 둥맹가 티무르 부자가 죽은 후에 그의 부하 범찰이란 자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경원으로 옮아 살겠다 한다. 만약 오도리족이 다른 곳으로 간 후에 빈틈을 타서 다른 강적이 와서 산다면 또다시 땅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영북진을 회령으로 경원을 소다로 옮겨서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한다. 나는 공을 이루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라 땅을 찾으려는 것이다. 내 뜻이 이미 정했노라"

모든 대신들은 고개를 숙여 찬동하는 뜻을 표했다. 전하는 도승지 김종서에게 명을 내린다.

"붓을 들어 유시를 쓰라. 과인이 친히 부르리라"

도승지 김종서는 붓과 벼루를 다가놓고 전하가 친히 부르는 유시문을 받아 쓴다. 세종전하는 옥음 낭랑하게 글을 부른다.

"예로부터 제왕은 왕업을 일으킨 땅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써 근본을 삼는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북으로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하늘이 만들었고 땅이 베풀었으며 웅번이 호위하여 강토를 한정했다."

"태조께서는 처음 경원부를 공주에 두셨고, 태종께서는 마을을 소다로로 옮기셨으니, 다 이룩하신 터를 소중하게 여기신 일이다. 지키는 신하가 잘 막지 못해서 부거로 물러왔다."

"태종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호인이 와서 살거든 곧 내쫓아서 도둑의 소굴이 되게 하지 말라 하셨다. 지금 소다로 공주는 잡풀이 우거졌고, 방자한 오랑캐 말발굽이 짓밟고 뛰달려서 사냥터가 되어버렸다."

"나는 항상 이를 생각할 때 아픈 회포가 간절했다. 또 알목하는 곧 두만강 남쪽 우리 경계 안에 있다. 땅이 기름져서 농사짓고 목축하기에 마땅할 뿐 아니라 바로 요충이 되는 것이니 큰 진을 합설해서 북문을 막으라."

"옛적에 퉁맹가 티무르가 공손히 귀순하니 태조께서는 사이를 두어 지키시는 뜻으로 잠시 허락하셨던 것이다. 이번에 자중지란으로 멸망이 되니 번리가 일공되었다. 찾아든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 선왕의 뜻을 이어 받들어 다시 경원을 소다로로, 영북진을 알목하로 옮겨서 백성을 모집해 지키게 하라"

"삼가 조종의 천험 봉강을 지켜서 변지 백성들의 수 자리하는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것이다. 내가 공을 이루기를 좋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나라 땅을 개척하려는 것이다. 병조에서는 이 뜻을 몸 받아 조건을 합행하고 계속해 의논해서 복명해 아뢰라."

세종전하는 청산에 물 흐르듯 병조에 내리는 유시를 친히 불렀다. 도승지 김종서는 쓰기를 다했다. 김종서는 전하께 유시문을 받들어 올렸다. 세종전하는 받아보신 후에 영의정 황희에게 주시며 말씀한다.

"삼정승은 돌려서 보라!"

황희, 맹사성, 최윤덕이 돌려가며 읽었다.

"삼가 유시를 받들어 병조에 내리겠습니다."

삼정승은 일제히 몸을 굽혀 아뢰었다. 전하는 다시 삼정승에게 하문하신다.

"넓고 황폐한, 버렸던 땅을 개척하려면 한 해 두 해의 일이 아니다. 야인을 굴복시켜서 변경 밖으로 쫓아내야 하고, 박토를 옥토로 바꿔야 하고, 이민을 시켜서 편안하도록 자리를 잡아주어야 한다. 슬기를 기울여 일을 바로잡아야 하고 용기와 담력으로 야인과 대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 아니면, 도저히 이 크나큰 일을 담당할 수 없을 것이다. 경들은 문무겸전한 장재를 천거토록 하라!"

우의정 최윤덕이 아뢴다.

"옆에 도승지 김종서가 시립해 있사옵니다마는 신은 주저치 아니하고 김종서를 천거합니다. 종서는 비록 문과 출신이오나 한 몸이 도시 담덩어리올시다. 그러하옵고 슬기로운 지혜는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올시다. 신이 일찍 압록강과 파저강을 건너 건주위를 정복하고 사군을 설치했을 때, 종서는 안에 있어 전하를 오와 병력과 군량과 군수를 조달하는 등 운주유악의 큰일을 많이 했습니다. 만약 종서가 아니었던들 신은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육진 개척은 사군 설치의 유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삼가 김종서를 전하께 추천합니다."

좌의정 맹사성이 최윤덕의 뒤를 이어 아뢴다.

"신은 처음에 함길도의 육진 개척을 반대한 자올시다. 그러나 다음에 명이 이 지역을 탐낸다는 말을 듣고 전하께 선왕의 발상지지를 회복하시라 했습니다. 역시 큰일이올시다. 이 일을 완성하자면 결국 김종서밖에 다른 인물이 없습니다."

좌의정 맹사성도 김종서를 천거했다. 다만 영의정 황희만이 묵묵히 대답이 없다. 전하는 황정승을 향하여 하문한다.

"영상은 어찌해 말씀이 없는가?"

황희는 부복해 아뢴다.

"종서는 신이 전하께 승지로 쓰십시사고 천거한 사람이올시다. 신은 후배를 앞에 두고 칭찬하고 싶지 아니합니다. 되지 않은 풋기운을 양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종서는 겸손하지 아니하고 고집과 패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후배를 아끼는 마음으로 종서를 천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꼭 필요하시다면 한번 써보십시오."

황정승은 엄숙한 얼굴로 아뢴다. 옆에 시립해 섰는 김종서의 얼굴빛은 마치 아버지의 꾸지람을 듯 황공한 빛을 띠었다. 세종전하는 껄껄 웃으며 김종서를 향하여 말씀한다.

"김종서는 복이 많구나, 경이 저 황정승 같은 선배를 모시었으니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경은 황의정께 절을 드려라!"

김종서는 어명을 받들어 황정승께 배를 드렸다. 전하는 다시 만족한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김종서도 복이 많거니와 과인도 복이 많구려. 황의정, 맹의정, 최의정, 김종서 같은 훌륭한 신하들을 두었으니 내가 어찌 복이 없다 하겠소. 하하하"

전하는 크게 만족하셨다. 쾌활하게 소리를 높여 웃으셨다. 전하는 다시 문 앞에 모시어 있는 내관을 향하여 분부를 내리신다.

"정원에 나가서 좌승지를 들라 해라"

내시는 황망히 어명을 받들고 정원으로 나가 좌승지를 데리고 들어왔다. 전하는 좌승지에게 명하신다.

"붓을 들라"

좌승지는 종이와 붓을 마련하고 어전에서 연상을 대하고 부복했다.

"도승지 김종서로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중임을 맡기라!"

좌승지는 무릎을 꿇고 교지를 써서 전하께 올렸다. 전하는 삼정승이 시립한 자리에서 친히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교지를 김종서에게 내리며 말씀한다.

"어려운 일을 경에게 맡긴다. 힘과 슬기를 다하여 나라 땅을 개척하라! 전에도 말했거니와 한 치만한 흙덩이라도 야인들의 사냥터가 되게 할 수는 없다!"

김종서는 도절제사의 교지끌 받은 후에 황공 감격했다.

"힘을 다하여 선왕의 발상지지를 야인의 손에서 회수하겠습니다."

말씀을 아뢰고 사은하는 큰절을 올렸다. 종서는 다시 교지를 받들고 삼정승을 향하여 목례를 보냈다. 전하는 다시 삼정승을 둘러보시며 말씀을 내린다.

"오늘 나는 큰일을 결정했다. 이러한 큰일은 아무리 내가 하고 싶어도 사람을 얻지 못하면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옛말에 고장난명이란 말이 있다. 외손뼉은 아무리 소리를 내려 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제 훌륭한 정승들의 보필을 받아서 어진 장수를 얻었으니 내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오늘 삼정승과 술 한잔을 함께 하리라"

말씀을 마치자 전하는 곧 내시에게 선온의 분부를 내렸다. 이윽고 내시는 담박한 선온상을 받들어 나왔다. 전하는 김종서가 따라 올리는 약주 한 잔을 받아 마신 후에 어수를 늘여 친히 삼정승과 김종서에게 한 잔씩 따라주셨다. 신하를 대접하는 은근한 전하의 지정에 신하들은 감읍했다.

 

이징옥

 

김종서는 세종전하의 망중한 부탁을 받아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큰 임무를 맡게 된 후에 집으로 돌아가 대호군 박호문을 청했다. 박호문은 일찍 최윤덕 장군을 도와 압록강 밖에 있는 건주위 오랑캐를 정복할 때, 우디거까지 가서 그의 사위와 딸을 조선 편이 되게 해서 건주위 싸움에 내응이 되게 하여,크나큰 전과를 이룩한 것을 김종서는 잘 아는 때문이다. 박호문은 흔연히 김종서를 찾았다, 김종서는 당 아래까지 내려가 박호문을 맞이했다. 박호문은 먼저 김종서의 중임 맡은 것을 치하하고, 김종서는 육진 개척에 대하여 많이 도와줄 것을 당부했다. 수인사가 끝난 후에 김종서는 박호문에게 묻는다.

"영감이 최윤덕 장군을 도와 사군을 설치할 때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오랑캐의 정세를 자세히 살폈고, 또다시 이만주 오랑캐가 우디거족에게 죄상을 뒤집어씌운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친히 우디거까지 간 일이 있었으니, 그곳 형편과 인심들을 자세히 가르쳐주기 바라오"

박호문은 서북면 압록강 밖에 사는 오랑캐와 동북면 두만강 안팎에 사는 오랑캐들의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이번에 알목하에서 우디거족이 오도리 추장 부자를 죽인 일도 연락을 받아서 잘 알고 있었다. 박호문은 김종서를 향하여 웃으며 대답한다.

"좋은 기회올시다. 이번에 우디거 젊은 추장이 오도리 추장 부자를 죽인 이 기회를 타서 야인들을 모두 다 두만강 밖으로 내쫓고 우리 백성들을 이민시켜서 경원, 종성, 회령 등 옛 강토를 찾는다면 지난번 압록강 유역에 설치했던 사군과 함께 북방의 방위는 금성철벽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크나큰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김종서는 다시 묻는다.

"우디거 추장은 영감이 회유를 시켜서 건주위 파저강 싸움에 내응까지 하게 한 인물이지만 난화지맹이 아니겠소?"

"씩씩하고 호걸스런 인물입니다. 본시 건주위 이만주의 우군 부대장이었으나 우디거의 사위가 된 때문, 내가 우디거를 응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더니 아내의 족속인 우디거가 결단날까 하여 슬며시 우리 편이 되어 내응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디거의 젊은 추장인 이 사람보다도 그의 아내인 우디거의 딸이 더 걸물입니다, 활발하고 속이 탁 터져서 앞을 바라볼 줄 압니다. 그때 이만주가 여연에서 납치해 갔던 우리 장정들을 함빡 데리고 온 것도 모두 다 그들 내외의 주선해준 힘이 큽니다. 앞으로 부임하시게 되면 이들 내외를 불러다가 잘 타이르시면 저항하지 아니하고 복종할 것입니다."

"내가 상감께 아뢰어 영감을 종사관으로 모실 테니, 고생이 되지만 사양치 마시고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써주셔야 하겠습니다."

김종서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어명이 내리신다면 사양할 도리가 없습니다."

"허락을 해주시니 감사하오. 그리고 또다시 의논할 일이 있소."

김종서는 정중하게 말을 보낸다,

"무슨 의논할 일이 있습니까?"

"야인들을 내치고 황폐해버린 땅을 옥토로 또 만들자면, 일년 이태의 일이 아닐 뿐 아니라 훌륭한 장수들을 얻어야 할 터인데, 영감은 서북면과 동북면의 일을 잘 아는 터이니 나와 함께 일할 만한 좋은 장수를 두서너 사람 천거해주시오."

박호문은 한동안 깊은 생각 속에 들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사람 좋은 장재를 천거하겠습니다. 이징옥이란 사람을 만나보신 일이 있습니까?"

"이징옥? 아직 만나본 일이 없는데, 어떤 사람이오?"

"내가 평양윤으로 있을 때 강계에서 호랑이를 때려잡아서 용맹스런 이름이 평안도 일대와 여진족에까지 자자했던 소년장사올시다. 함길도 부거의 책을 지키는 수문장으로 있다가 지금 서울에 있는 그의 형 징석을 찾아와서 무과에 급제를 했습니다, 아직 나이 이십 세 안팎이올시다 마는, 앞으로 크나큰 인물이 될 대장군 감이올시다."

"이징석의 아우라! 징석은 지금 내금장으로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징석도 훌륭한 장사지"

"징석은 징옥에 비하면 아류밖에 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함경도와 평안도 여진의 일을 잘 모릅니다."

김종서는 박호문에게 신신당부한다.

"그렇다면 이징옥을 한 번 만나보게 해주오."

박호문은 쾌하게 허락하고 이징옥의 소년 때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이징옥은 본시 양산 사람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만 모시고 있었다. 형의 이름은 징석이요, 아우의 이름은 징옥이었다. 어릴 때부터 형제가 모두 다 씨름판에서 소년장사의 이름을 듣고 황소를 땄다, 이로부터 형제는 활 쏘는 법이며 창 쓰는 기술을 배우고 말을 또한 잘 달렸다. 징옥은 점점 자랄수록 완력이 형을 능가했다. 사냥을 하면 노루와 멧돼지를 형보다 갑절씩이나 잡았다. 동네에서는 징옥을 첫째 장사라 하고 형 징석을 둘째 장사라 해서 형제장사가 한집안에 났다고 칭찬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징옥이 열네 살이 되고 징석이 열여덟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늙은 어머니는 산에 있는 멧돼지를 보지 못했다. 돼지 구경도 하고 고기도 먹고 싶었다,

"멧돼지도 집돼지 같으냐? 한 번 구경했으면 좋겠다. 너회들이 힘이 세다 하니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아 오너라. 고기 맛도 볼 겸."

두 아들은 일제히 소리쳐 대답했다.

"염려 마십쇼. 곧 잡아 오겠습니다."

두 아들은 제각기 창과 활을 들고 나갔다. 어둑어둑한 땅거미 질 때가 되었다. 사립짝 대문 밖이 요란하면서 마당에 ''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미처 동네 아이들이 떠들어댄다.

"! 멧돼지다. 살을 맞아 죽었구나?!"

늙은 어머니가 급히 나가보니 징석이 땀을 씻으며 싱글벙글 웃고 있다가 마루 끝으로 나오는 어머니를 보자 기쁜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머니, 멧돼지를 잡아 왔습니다. 힘이 워낙 세어서 산 채로 잡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죽은 놈이라도 구경을 합쇼."

"용하게 잡았구나! 다친 데는 없느냐?"

"이까짓 것을 잡는 데 다칠 까닭이 있습니까? 활로 쏘고 창으로 찔렀습니다. 산 채로 잡아 오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어머니는 기뻤다. 큰아들과 함께 멧돼지 배를 갈라서 구워 먹기 시작했다. 밤은 점점 어두웠다. 그러나 작은아들 징옥이는 돌아오지 아니했다.

"이 애가 웬일일까! 범한테 물려갔나 보다."

"설마 범한테 물려가기야 했겠습니까. 그러나 궁금합니다."

어머니와 큰아들은 걱정이 분분했다.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나 징옥이는 돌아오지 아니했다. 또다시 하루낮 하룻밤을 지냈다. 어머니와 큰아들은 초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틀째 되는 날이다. 징옥은 사립문을 열고 빈손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는 반가웠다. 무사하게 돌아온 것만 기뻤다. 그러나 아니 물어볼 수 없었다.

"남들이 말하기를, 너는 네 형보다도 힘이 더 세다 하는데 형은 그저께 멧돼지를 잡아왔다. 너는 이틀씩이나 밖에서 지냈으면서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웬일이냐?"

징옥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어머니, 죽은 멧돼지는 보셨지만 산 놈은 구경을 못 하셨을 것입니다. 산 채로 잡아서 어머니께 구경을 시켜드리려고 이틀 동안이나 멧돼지와 싸우다가 주먹으로 때려잡아 가지고 왔습니다. 나가보십쇼."

산 채로 멧돼지를 잡아 왔다는 징옥의 말을 듣자 어머니와 큰아들 징석은 깜짝 놀랐다.

"산 채로 멧돼지를 잡아 왔단 말이냐?"

어머니와 큰아들은 급히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과연 황소 만한 큰 멧돼지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 기진맥진이 돼 갈빗대를 들먹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징옥은 산속에서 멧돼지를 만나자 어머니에게 기어코 살아 있는 놈을 보여주고 싶었다. 활과 창을 쓰지 아니하고 맨주먹으로 고함을 치며 쫓았다. 앞으로 몰고 옆으로 쫓았다. 쫓기는 체하다가 덤벼들고 잡히는 체하다가 길길이 뛰었다. 산을 넘고 골짜기를 뛰어넘으며 몰았다. 이러하기를 하루 낮 하룻밤을 지내며 멧돼지와 격투를 했다. 멧돼지는 결국 힘이 탈진되었다. 숨이 턱에 차서 어릿어릿할 때 징옥은 한주먹으로 머리통을 갈겨서 산채로 끌고 왔던 것이다. 소문은 온 고을에 자자하게 퍼졌다. 뿐만이 아니다. 징옥은 범을 잡는 데도 명수였다. 눈을 부릅뜨고 한 번 소리를 지르면 어찌 된 셈인지 범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버린다, 이때 징옥은 활을 가득하게 당겨 살을 쏘기만 하면 범은 그대로 고함을 치고 쓰러져버리고 만다. 징옥은 일가 되는 사람이 김해부사로 도임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발신하기 위해서 불원천리하고 찾아갔다. 그러나 부사는 냉대하고 만나보지 아니했다. 징옥은 하는 수 없어 돌아오는 길인데 젊은 여인 한 사람이 길가에 서 땅을 두드리며 구슬프게 통곡을 하고 있었다. 까닭을 물었다.

"범이 우리 남편을 물어갔소."

"어디로 물고 갔소?"

여인은 흐느껴 울면서 푸른 대가 무성하게 우거진 대밭을 손으로 가리켰다. 징옥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대숲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아니 되어 대숲 속에서 범 한 마리를 번쩍 안고 나왔다.

"남편의 원수를 갚아주리다."

징옥은 한마디를 하자, 칼로 범의 배를 짝 갈랐다. 기막히지 않은가. 남편의 상투와 발목 한 개가 튀어나왔다. 징옥은 유골과 유발을 여인한테 내주었다.

"자아, 이제 남편의 원수를 갚았으니 선산을 찾아서 장사를 지내시오. 그리고 이 호피는 김해부사한테 전하고, 이징옥이가 원님한테 주더라고 말하시오."

징옥은 말을 마치자, 휘적휘적 다시 길을 걸었다, 젊은 여인은 백배치사를 한 후에 관가에 들어가 사또한테 고했다. 사또는 사령을 시켜서 범의 가죽을 가져다 보니 과연 허언이 아니다. 냉대한 것을 후회했다. 급히 이방을 시켜서 이징옥을 불렀다. 이방은 말을 달려 이징옥의 뒤를 쫓았다.

"사또께서, 범을 잡았다는 말을 들으시고 만나보자 하시네."

이징옥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 없다고 전하게. 나도 사내자식일세. 만나지 아니하려던 사람을 내가 다시 볼 까닭이 없네!"

말을 마치자 징옥은 뒤도 아니 돌아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소년 시절 이징옥의 행장이었다. 다음날 박호문은 이징옥을 데리고 삼군부로 김종서를 찾았다.

"이 사람이 이징옥이올시다."

박호문은 김종서에게 이징옥을 소개했다. 이징옥은 김종서를 향하여 절을 올린 후에 두 손을 모아 시립했다. 김종서가 바라보니 과연 치상이 늠름했다. 나이 약관에 지나지 않건만 얼굴은 동탕하고 눈은 이글이글 정기가 넘쳐흘렀다. 키는 구척장신이요, 허리통은 둘레가 두 아름이 넘을 듯했다. 김종서는 마음속으로 우선 장재라고 생각했다.

"너는 열네 살 때 너의 어머니께 보여드리려고 황소만 한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서 바쳤다 하니 사실이냐?"

김종서는 입가에 웃음을 띠고 물었다.

"대수롭지 아니한 일을 하문하시니 부끄럽습니다. 그저 어릴 때 장난 겸 힘을 시험해본 것뿐입니다. 자랑할 거리가 못됩니다."

이징옥은 눈을 내리깔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래, 어찌 자랑할 거리가 아니라 하느냐? 호반은 우선 힘이 세야 하는 법이다."

김종서는 기특하게 생각했다. 이같이 한 번 격려해주었다.

"힘만 강한 것은 필부의 용맹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슬기 있는 사람이라야 크나큰 장수의 재목이 된다 합니다. 소인 따위야 아직 장수의 재목이 되려면 한동안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김종서는 더한층 기특하게 생각했다.

"호랑이가 산골 속에서 너를 만나기만 하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버리면서 너의 처분만 기다린다 하니 과연 그러냐?"

"범이란 본시 어진 짐승입니다. 사람을 잡아먹어도 착하고 어진 사람은 잡아먹지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심산궁곡에 시묘하는 효자는 감히 잡아먹지 못 합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잡아먹습니다. 범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일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죄가 많은 까닭에 어린것을 잡아가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그것도 죄가 되니 정직한 사람을 보면 고개를 숙입니다."

김종서는 머리를 끄덕인 후에 벽상에 걸어 논 많은 활 중에서 그중 큰 각궁 한 개를 꺼냈다. 길이가 5척이 넘었다. 김종서는 다시 철전 세 개를 내놓았다. 화살 한 개의 무게가 여덟 냥쭝이나 되는 쇠로 만든 큰 화살이다. 삼군부 넓은 뜰 한 귀퉁이에는 과녁판이 놓여 있었다. 삼군부 대청에서 과녁판이 놓여 있는 거리는 오 백 보가 넘었다, 김종서는 이징옥을 향하여 묻는다.

"여기 내 논 철전은 전쟁 때 쓰는 화살이다. 네가 능히 이 철전으로 삼중을 하겠느냐?"

"시험해보겠습니다."

이징옥은 선뜻 대답하고 커다란 각궁을 번쩍 들어 쇠살을 메겼다. 육중한 철전이건만 원체 명수다. 철전은 새털 꽃은 화살마냥 가볍게 날아 과녁 복판을 보기 좋게 맞혔다. 김종서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진다. 삼군부 안에 모여 있는 모든 군관들도 이징옥의 철전을 다루는 수단에 모두 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징옥은 또 하나의 철전을 집어서 활시위에 메겼다. 쇠화살은 바람을 끊고 소리를 치면서 먼저 과녁에 박혀 있던 쇠 화살을 맞혀 떨어뜨렸다. 이제는 박수갈채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징옥은 남은 철전 한 개를 마저 활에 메겼다. 세 번째 쏘아붙인 쇠 화살은 두 번째 쏘아서 과력에 박혀 있는 화살을 두 동강이 내어 떨어뜨렸다. 손뼉 치는 소리가 우레일 듯 일어났다.

"신궁이다!"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김종서는 마음속으로 기뻤다. 활을 조용히 놓고 서 있는 이징옥을 향하여 손으로 삼군부 담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삼군부 담은 높이가 아홉 길이다. 네가 능히 저 담을 뛰어넘겠느냐?"

"어렵지 아니합니다."

이징옥은 직령과 갓을 벗었다. 동저고리 바지 바람으로 성큼 뜰 아래로 내려섰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솟구쳤다. 까맣게 허공으로 솟아오른 이징옥은 아홉 길 되는 삼군부 담을 거침없이 뛰어넘었다. 순간 밖으로 떨어졌던 이징옥은 다시 삼군부 안으로 넘어 들었다. 넘고 뛰고. 뛰고 넘기를 십여 차 했다. 구경하는 군사들의 손뼉은 자지러지게 쳐지고. 김종서의 위엄기 있는 눈에도 웃음빛이 끊이지 아니했다. 이징옥은 십여 차 담 넘기를 반복한 후에 허리춤에 꽂았던 수건으로 땀을 씻고 다시 의관을 정제한 후에 김종서 앞에 조용히 꿇어앉았다. 김종서는 이징옥을 향하여 장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너의 용맹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들으니 너는 그동안 동북면 함길도 부거책을 지키고 있었다 하는데, 어찌해서 한양으로 올라왔느냐?"

"소인은 본시 양산이 고향이온데 아는 사람이 김해부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발신하기 위하여 찾아갔더니 만나보지 아니하고 푸대접을 했습니다. 그래서 북관으로 가서 수자리하는 군사가 되었다가 부거에서 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년 졸아치로만 있을 수야 있습니까. 그동안 공주를 해서 무과에 급제를 했습니다."

"네 기개와 고집이 참 무던하구나. 말 들으니, 네가 김해부사한테 냉대를 당한 후에 길에서 호환에 죽은 사람의 원수를 갚아서 범을 때려잡았다는 말을 듣고 김해부사는 깜짝 놀라서 사람을 보내서 청하니 너는 선하심 후하심이냐고 코웃음을 치고 함길도로 갔다 하니, 사실이냐?"

", 그랬습니다."

"네 기개가 과연 사내답다!"

김종서는 이징옥을 칭찬한 후에 다시 묻는다.

"네가 병서를 공부했다 하니 내가 묻는 것을 대답하라. 적병이 우리 군사를 포위해서 양도를 끊어서 나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게 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전군을 살릴 수 있는가?"

이징옥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그것은 곤병이올시다, 빨리 돌격전을 전개하면 살 수가 있고, 망설여서 앞뒤를 재어보다가는 반드시 패하게 됩니다. 이런 때는 사진충격법을 써서 세 사람씩 짝을 지어 힘을 합쳐서 백병전으로 돌격해 나가야 합니다."

김종서는 빙긋이 웃으며 다시 묻는다.

"적진과 대치해 있을 때 적군의 허실을 알자면 어떠한 방법으로 알아볼 수 있는가?"

이징옥은 다시 서슴지 아니하고 대답한다.

"장수는 천도와 지리와 인사를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먼저 높은 곳에 올라 적의 진지와 병졸의 행동을 살펴보면 허하고 실한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알아볼 수 있는가?"

"적의 병사가 수백 채 벌여 있다 해도 나뭇가지에 쌔 떼들이 놀라지 아니하고 날아다니면 이 병영에는 군사가 적어서 허한 것이요,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요란치 아니하면 이것은 허장성세로 허수아비와 기치창검만을 벌여 논 것이 분명합니다. 한 번 무찔러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김종서는 다시 묻는다.

"장수의 재목을 말할 때, 어떠한 사람을 양장이라 하는가?"

"양장에 다섯 종류가 있습니다."

"다섯 종류를 말해보라."

"용장, 지장, 인장, 신장, 충장입니다."

"그들의 특징을 말해보라"

"용맹스런 장수는 감히 범하지 못하고, 슬기 있는 장수 앞에는 협사를 부릴 수 없고, 어진 장수는 사졸을 사랑하니 군사들이 복종하고, 신용 있는 장수 앞에는 군율이 철통같고, 충성스런 장수는 이심이 없습니다. 이 다섯 종류의 장수는 모두다 양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종서는 다시 웃으며 묻는다.

"네가 만약 양장이 되고 싶다면 어떤 종류의 장수가 되고 싶은가?"

이징옥은 자리를 피하며 대답한다.

"소인이 어찌 감히 양장이 될 자격이 있겠습니까마는, 꿈을 꾸어본다면 용장이 되고 싶습니다."

김종서는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상감께 아뢰어 너를 양장감이 되게 할 테니, 네가 능히 감당하겠느냐?"

이징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를 올리고 대답한다.

"버리지 아니하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다음날 김종서는 소년 무사 이징옥을 데리고 입궐했다. 징옥을 정원 문밖에 대기시킨 후에 세종전하께 배알을 청했다. 전하는 곧 종서를 인견하셨다. 만면에 미소를 띠시고 하문한다.

"언제쯤 임소로 떠나려는가?"

"불일간 떠날 예정이올시다. 그러나 중대한 임무를 받자왔으므로 좋은 인재를 모아 함께 떠나려 합니다."

"당연한 생각이다. 혼자 힘으로는 극난한 일이다. 좋은 인재가 있다면 함께 데리고 가도록 하라. 누구들이 경의 마음에 드는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리라."

"황감하옵니다. 윤허해주신다면 감히 아뢰겠습니다. 집현전 학사 신숙주를 종사관으로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학문이 넓을 뿐 아니라 슬기가 대단합니다."

"좋다. 함께 가도록 하라!"

세종전하는 쾌하게 허락했다.

"다음에 박호문을 종사관으로 쓰겠습니다. 건주위 이만주를 정벌할 때 여진의 지세와 풍속이며 허실을 살펴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이번에 퉁맹가 티무르의 부자를 죽인 우디거 추장 내외를 회유해서 내응이 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디거를 어거할 수 있는 인물이올시다."

"좋다! 종사관으로 쓰라!

김종서는 다시 아뢴다.

"다음엔 용맹스런 장재가 필요합니다. 나이 아직 약관에 지나지 않습니다마는, 오랫동안 함길도 부거책장으로 있어서 용맹스런 이름이 두만강 일대에 자자한 인물이올시다. 이 사람에게 절제사의 임무를 맡겼으면 합니다."

"성명이 무언가?"

"이징옥이라 합니다."

김종서는 이징옥의 내력을 소상하게 아뢰었다. 세종전하는 어미를 위하여 황소만한 멧돼지를 잡은 일과 김해에서 범을 잡아서 청상과부의 원수를 갚아준 일이며, 김종서가 삼군부에서 취재 본 일을 일일이 들으신 후에 말씀한다.

"신숙주와 박호문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거니와, 이징옥은 본 일이 없다. 한 번 만나보면 좋겠다."

"그러지 아니해도 정원 문밖에 대기시켜 있습니다."

"불러들여라!"

이윽고 김종서는 이징옥을 어전에 배알케 했다. 세종전하는 슬기로운 안정을 들어 이징옥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신다.

"네가 이징옥이냐?"

", 그러합니다. 하향의 천한 몸이 감히 천안을 우러러뵈오니 황공무지하오이다."

이징옥은 아뢰기를 다하자 두 손을 마주 잡고 의젓이 시립했다. 떨지도 아니했다. 나이 어리나 기상이 씩씩하고 늠름했다. 전하는 한동안 살피신 후에 김종서를 향하여 한 말씀을 내리신다.

"경이 곧잘 사람을 보았다. 데리고 쓰라!"

 

하경복

 

전하는 승지를 불러 이징옥에게 영북진 절제사의 첩지를 내리라 했다. 일개 함길도 부거책장이었던 이징옥은 김종서의 주천으로 일약 영북진 절제사가 되었다. 이징옥이 사은숙배를 드리고 물러간 후에 김종서는 다시 아뢴다.

"신에게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중임을 맡기시어 육진을 개척하라 하시니 일신에 넘치는 은총이이옵니다. 지혜와 힘을 다하여 기어코 이 일을 완성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이 크나큰 일은 일년 이태에 성취되는 일이 아니올시다. 막대한 국력과 무비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소신의 힘만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 많을 줄 압니다. 소신의 윗자리에 살펴주시는 재상 한 사람을 배치해주시옵소서."

세종대왕은 껄껄 웃으며 대답하신다.

"내가 경의 슬기와 역량을 짐작하므로 감사 겸 도절제사의 중한 직책을 맡긴 것인데, 경의 위에 또다시 재상을 보내서 감동해서 살핀다는 일은 옥상가옥을 두는 부질없는 일이다. 당치 않은 말을 하지 말고 혼자서 중임을 도맡아 처리하라."

김종서는 슬기 있는 사람이었다, 육진 개척은 일년 이태에 끝날 일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하 또한 알고 계신 일이다. 그러나 해마다 국비는 적지 않게 들고 일년 이태 삼년 사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이를 알지 못하는 무리들은 반드시 헐뜯는 조리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무게 있는 재상을 윗자리에 앉게 해서 큰일에 지장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슬기로운 생각이었다. 김종서는 다시 간곡하게 고한다.

"황공만만하오나 다시 아룁니다. 이번 일이 비록 크나큰 정벌이 아니라 하나 위엄으로 오랑캐를 쫓아내고 노력으로 폐기된 국경을 개척하는 일이올시다. 크나큰 전쟁 이상의 힘드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군제에 도절제사가 있으면 반드시 전하의 몸을 대신해서 모든 일을 감동하는 재상이 있는 법이올시다. 전하께서는 깊이 통촉하시와 소신의 뜻한 바를 윤허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비로소 김종서의 간곡하게 아뢰는 뜻을 짐작했다.

"그렇다면 전시체제를 그대로 답습해서 도절제사 위에 도체찰사를 두어 달란 말인가? 노재상 중에 이러한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은 최윤덕밖에 없는데, 최윤덕은 우의정에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임하고 있으니 난처하구나. 영의정 황희나 좌의정 맹사성은 나의 곁에서 떠나게 할 수가 없고...."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신이 외람되오나 감히 한 사람의 재상을 천거해도 좋겠습니까?"

전하는 미소를 지으시며 대답하신다.

"말해보라"

"판중추원사 하경복은 태종께오서 신임하시던 무장이올시다. 감히 천달합니다."

전하는 판중추원사 하경복을 천거한다는 김종서의 말씀을 듣자, 미연히 웃으시며 대답하신다.

"하경복은 순진한 무관출신이라 용맹은 대단하지만 우직하기만 하고 슬기가 없을 듯하다. 과인의 몸을 대신해서 모든 일을 감동하는 도체찰사의 임무를 맡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을 듯하다. 경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전하는 약간 어려운 빛을 용안에 띠고 대답하신다. 김종서는 다시 아뢴다.

"육진을 개척하는 데는 야인들을 떨게 할 용맹스런 장수가 필요합니다. 지혜와 꾀는 소신이 담당하겠습니다. 다만, 우직하고 용맹스런 장상으로 도체찰사를 삼으시어 오랑캐들이 굴복하도록 하시는 일이 상책이올시다."

전하는 옥음을 높여 껄껄 웃으시며 말씀한다.

"내가 소시 때 태종대왕께 말씀을 들으니, 태종대왕께서 정란을 일으키실 때 하경복은 대궐 안에 있는 금군 한 사람을 찾아갔다가 홍주 밀듯 몰려드는 정란군에게 잡혀서 죽게 되자 황소 같은 무서운 힘으로 군사들을 뿌리치고 어전으로 뛰어가 아뢰기를, '나 같은 장사를 죽여서 나라에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소?' 하고 소리치니, 태종께서는 담력이 무던하다고 생각하시고 목숨을 살려서 금군에 편입시키셨다는 말씀을 들은 일이 있다. 어떻든 장사는 장사니라."

김종서도 웃음을 짓고 아뢴다.

"그렇습니다. 무척 우직한 사람이올시다. 하경복은 본시 경상도 진주 사람이올시다. 금군이 되어 상림원을 지키고 있을 때 마침 동지 때였더랍니다. 따뜻한 양지에 매화를 길러서 어전에 바치려고 두서너 분을 벌여왔는데 하경복은 예쁘게 핀 매화꽃 한 가지를 뚝 꺾어서 산수 털벙거지에 멋들어지게 꽂았더랍니다. 매화꽃을 관리하던 관원이 깜짝 놀라서 꾸짖으니 경복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합니다. 우리 시골엔 울타리마다 핀 것이 모두 다 이 꽃이구 나뭇가지를 부러뜨려서 아궁이에 불을 때기도 하는데 무엇이 그리 대단한 꽃이라고 가지 하나쯤 꺾은 것을 이같이 야단들을 떠느냐고 도시어 투덜댔다 합니다. 이때도 태종께서는 우직하다고 칭찬하신 후에 죄를 주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셨다 합니다."

"무식하지만 담력이 대단한가 보더라."

"천하장사올시다. 당금 세상에 장상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는 하경복 한 사람이 있고 젊은 사람으로서는 이징옥이 있을 뿐이올시다. 야인을 굴복시키는 데는 이러한 장사가 필요합니다. 이징옥도 범을 때려잡기를 손바닥 뒤집듯 합니다마는 하경복도 심산궁곡으로 사냥을 갔다가 범을 잡았는데, 몰이꾼들은 다 도망을 가고 혼자서 범의 골통을 주먹으로 쳐서 쓰러뜨린 후에 번쩍 안아서 낭떠러지 물속으로 동댕이쳐서 박살을 했다는 천하장사올시다. 기어코 이 사람을 등용하시기 바랍니다."

"경의 의향이 정 그러하다면 하경복으로 도체찰사를 삼으리라"

세종전하는 쾌하게 윤허하셨다. 다음날 전하는 황희, 맹사성, 최윤덕, 김종서가 시립한 자리에서 하경복을 명소하여 유시를 내렸다.

"경은 일찍이 태종께 여러 차례 후은을 입은 무장이다. 이번에 김종서로 육진을 개척하라 하여 도절제사의 책임을 임명하였거니와, 경에게는 나의 몸을 대신하여 모든 군사를 감찰하는 도체찰사의 중한 임무를 맡기나니, 경은 정성을 다하여 큰일을 완성하라"

하경복은 한가로운 벼슬인 판중추원사로 있다가, 별안간 명소를 받들어 들어갔던 것이다. 뜻밖에 함길도 도체찰사라는 영광스런 대명을 받게 되니 당황해서 어찌할지 몰랐다. 도체찰사는 영의정, 좌의정 등 증경 문관 재상이 전시에 맡는 자리다. 황공하기 짝이 없었다. 하경복은 황정승, 맹정승 등 문관 재상들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이내 꿇어앉아 사양하는 말씀을 아뢴다.

"소신은 호반이올시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식합니다. 다만 젊었을 때 범을 때려잡은 일이 있사와, 장사의 헛된 이름을 들었을 뿐이올시다. 전하께서 사람을 잘못 보시고 막중한 도체찰사의 대명을 내리시니 소신은 감히 받지 못하겠습니다."

하경복은 벌벌 떨면서 떠듬떠듬 아뢴다. 우직하고 진솔한 하경복의 태도는 전하의 마음을 도리어 흐뭇하게 했다. 전하는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내가 경을 잘못 본 것이 아니다. 꼭 경이 필요해서 이번에 도체찰사를 맡기는 것이다. 사양치 말고 받으라! 범을 때려잡던 그 솜씨로 불복하는 야인들을 때려잡으면 족하지 아니한가, 하하하"

하경복은 두 번째 사양한다.

"소신이 범을 잡던 일은 소시 때 일이올시다. 지금은 힘이 많이 줄었습니다, 산골에서 범을 만나게 되면 이제는 팔이 떨려서 능히 잡을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하경복은 너무나 진솔했다. 망건편자에 진땀이 솟았다. 말소리조차 어눌했다, 전하는 옆에 시립해 섰는 별운검에게 분부하신다.

"군기시에 나가 강궁 한 벌을 가져오너라."

별운검은 황망히 군기시에 나가 백 근 무게가 넘는 단궁 한 벌을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하경복에게 말씀을 내린다.

"경이 늙어서 힘이 많이 줄었다 하니 내가 친히 경의 힘을 시험해보리라. 활을 꺾어보라!"

장중한 어명이었다. 하경복은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하경복은 백 근템이나 되는 박달나무로 만든 큰 활을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모든 재상들의 경탄하는 시선이 하경복에게로 몰려들었다. 하경복은 두 어깨와 두 팔과 두 주먹에 힘을 버썩 모았다. 사모 쓴 관자놀이에 푸른 힘줄이 불끈 솟았다. 이를 악물었다. '' 소리가 나면서 백 근 무게 나가는 박달나무 큰 활은 우지끈 부러졌다.

"장사로다! 늙지 아니했다. 사양치 말라."

세종대왕의 칭찬하시는 말씀이 떨어졌다. 하경복은 더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도체찰사가 되었다. 한 치의 땅이라도 오랑캐들의 말굽이 치달리게 하는 터전이 되게 해서는 아니 되겠다는 세종전하의 크나큰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엄청나고 장한 육진 개척의 행군은 한양서부터 이천 리 길 두만강변까지 뻗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선발대로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이 군관들을 거느려 떠나고, 다음엔 경원 절제사 송희미가 이징옥의 뒤를 이어 나가고, 다음엔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 김종서가 종사관 신숙주, 박호문과 함께 정예군관 백여 명과 만여 명의 기마대를 거느려 나가고, 다음엔 도체찰사 하경복이 군량미 수천 석과 군수품을 가득 싣고 동북면으로 향했다. 세종전하는 김종서와 하경복이 떠날 때 일일이 선온을 베푸시고 귀가리와 어의로 잘배자 한 벌씩을 내렸다. 변지의 중책을 맡기는 때문 특별한 은전을 내리시고 또다시 정중한 말씀으로 당부한다.

"북방은 매우 추운 곳이다. 겨울에는 삭풍설한에 소변을 보면 오줌 줄기도 떨어지는 족족 곧 얼어붙어서 고드름이 된다 한다. 몸을 덥게 해서 독감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

신하를 아끼시는 전하의 지극한 배려에 김종서와 하경복은 감격한 마음을 억누를 길 없었다. 눈시울이 화끈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극히 몸조심을 하여 성심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함길도 감사 김종서가 대답했다.

"국가의 천년 위업을 이룩하는 일이올시다. 아무리 풍설 사나운 북방이라 하오나 역시 사람들이 사는 곳이올시다. 소신의 몸이 비록 늙었다 하오나, 그까짓 추위쯤을 감내치 못하오리까, 성상께서는 과히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도체찰사 하경복이 아뢴다. 전하는 또다시 당부하신다.

"버렸던 땅을 개척하는 것이요, 잃었던 땅을 찾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더구나 완민들을 회유해야 하고 오랑캐들을 방어해야 하는 일이다. 그뿐 아니다. 성벽을 굳게 쌓아야 하고 불모지를 개간해야 한다, 오랑캐을 몰아내는 일이며 수자리하는 군사들을 위안시키는 일이며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일 등, 어려운 일이 거듭거듭 첩첩할 것이다. 물자와 군수는 뒤에서 과인이 다 대어줄 테니 기어코 큰일을 완성하도록 하라."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옛글에 '사위지기자사'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상께오서 소신들을 이같이 알아주시고, 모든 일을 만 리 밖에서 미리 소상하게 통촉하시니 진실로 소신들 감격하와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몸이 진토가 될지라도 육진 개척은 기어코 완성해놓고 말겠습니다."

지휘하는 임금과 명을 받드는 신하 사이에는 털끝만 한 간격이 없었다. 마음으로 기뻐하고 정성껏 복종했다. 전하는 합문까지 출어하여 두 신하를 전송했다.

 

수렵

 

알목하에 우디거 추장이 쳐들어와서 오도리족의 추장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죽인 후에 오도리족은 갈팡질팡 어찌할지를 모르고, 우디거족들은 콧대가 높아져서 이제는 알목하가 제 영토나 된 듯 국경을 넘나들었다. 한편 길주, 명천, 경성 일대의 조선 사람들은 불안 초조한 중에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돌연 파발마가 서울서 달려왔다. 함길도 감사 조말생이 갈리고, 새로 문무겸전에 도시 담덩이라고 소문 높은 도승지 김종서가 함경도 감사 겸 도절제사가 되어 부임이 되고, 당대의 명장으로, 서북면에서 파저강 야인 이만주의 소굴을 무찌르고 압록강에 사군을 설치한 최윤덕 장군과 대등한 인물. 하경복이 도체찰사가되어 내려온다는 소문이 퍼지니, 조선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돌리고, 알목하의 오랑캐들은 내두일이 어찌 되나 하고 불안한 속에 형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발대가 기세 좋게 말을 달려왔다. 이징옥이 영북진 절제사가 되어왔다는 것이다.

"부거책장으로 있던 이징옥이 일약 영북진 절제사가 되어 내려왔단 말이냐? 기막힌 발신을 했구나, 나이 겨우 이십이 될락 말락한 사람인데-."

"범을 쥐새끼 잡듯 하는 천하장사 이징옥인데, 나이 비록 어리다 하나 넉넉히 대장 노릇을 할 사람일세. 이제는 오랑캐들의 장난이 용이치 못하게 되었네. 천만다행일세."

조선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돌리고, 오랑캐들은 깜짝 놀랐다.

"무어, 이징옥이 절제사가 되어 내려온단 말인가? 부거책장으로 있을 때, 맨손으로 범을 잡아서 사지를 비비 틀어 죽였다는 바로 그 이징옥이가 절제사가 되어 온단 말이냐? 이제 우리들은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었구나."

"그렇지만 우리한테 설마 해를 끼치겠나? 우리들은 조선 태조대왕이 당신의 고향이라 해서 땅을 빌려주어서 여지껏 삼사 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아닌가? 혼날 놈들은 우리 추장 부자를 죽여버리고 우리를 박해하는 우디거 족속들일세."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살해를 당한 퉁맹가 티무르의 족속들이었다. 한편 퉁맹가 티무르의 부자를 죽이고 코가 우뚝해서 강을 건너 알목하로 넘나드는 우디거 족속들은, 이징옥이 천하장사라는 선성을 듣자 모두들 가슴이 뜨끔했다.

"소년 장사 이징옥이 절제사가 되어 내려온다니, 알목하에 인제는 맘대로 못 드나들게 되나보다!"

모두 다 겁을 집어먹었다. 이같이 조선 백성들은 안심하고 오랑캐들은 두려움과 회의 속에 빠져 있을 때, 오랑캐들에게는 더한층 두려운 소식이 전해졌다. 김종서와 하경복이 최고대장이 되어 온다는 것이다.

"조선 임금의 제일 신임을 받는 도승지 김종서가 함길도 감사에 도절제사가 되어 내려오고, 천하장사 하경복이 왕 전하의 몸을 받아 도체찰사가 되어 부임이 된다 한다."

"김종서는 최윤덕이 이만주를 굴복시키고 평안도에 네 고을을 설치했을 때 모든 슬기와 군수품을 빈틈없도록 마련해 보냈던, 옛적 장양과 제갈공명 같은 사람이라더라."

"그뿐인가, 최윤덕이 건주위 이만주를 응징할 때 여진 말을 잘하면서 외교 사정에 능란했던 박호문과 글 잘하는 신숙주가 종사관이 되어 함께 온다 한다. 소문 들으면 우리 여진족속을 두만강 밖으로 다 내보내고 성벽을 굳게 쌓아서 고려 때 윤관 장군이 하듯 국경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대대로 우리 땅으로 알고 살던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좌우간 하회를 두고 보자. 우리도 버티어 보아야지!"

야인들은 허탈한 속에 비탄과 울분으로 세윌을 보내며 조선편의 동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선발대로 영북진에 당도한 이징옥은 먼저 위엄을 뵈게 하기 위하여 첫 공사를 내렸다.

"내일모레, 나는 영북진 절제사로 도임된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수렵대회를 열기로 했다. 군관민은 말할 것 없고 여진 부락에서도 매호에 장정 한 명씩 활과 살과 창을 가지고 대회에 참가하라. 만약 명령에 불응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시행을 하리라-."

포고문은 영북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 부락과 여진 부락 방방곡곡에 붙었다. 군법시행을 한다는 엄명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다. 여진족들은 벌벌 떨었다. 한 집에서 장정 한 명씩이 활과 창과 사냥개를 끌고 나왔다. 영북진 넓고 넓은 병영에는 말 탄 군사 천여 명과 몰이꾼으로 등대한 조선 백성들이며, 야인 족속 수백 명이 기치창검이 번득이는 대장기 앞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이징옥은 밀화패영을 단, 안 올린 벙거지에 화사한 공작 깃을 비껴 꽂고 남철릭 구군복에 동개 메고 활 차고 마상에 높이 앉아 군령을 내린다.

"너희들 여진족들은 오래 이곳에 거접해서 지리에 밝을 것이다. 앞을 서서 가장 사냥하기 좋은 곳으로 인도하라. 그리고 조선 사람들은 몰이꾼이 되어 사냥개를 몰고 나오라!"

소년 장군 이징옥의 군령은 여율령 시행이 되었다. 징소리, 북소리가 '둥둥' 울리며 수렵대회의 행렬은 씩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진족속들은 말을 달려 앞을 인도했다. 산은 첩첩하고 물은 굽이쳐 흘렀다. 말굽 뛰닫는 행진 소리를 듣자 바위틈에 엎드렸던 노루와 사슴과 토끼들은 깜짝 놀라 뛰달아나기 시작했다. 몰이꾼들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소년 장군 이징옥은 급히 대장기를 흔들어 군령을 내린다.

"오늘 사냥은 절제사가 된 나와 영북진에 살고 있는 여진 야인과의 재주를 시험해보기로 한다. 나를 능가해서 가장 많이 짐승을 사냥하는 여진 사람이 있다면 전하께 아뢰어 천호희 장이 되게 하고 여진족 천 집을 거느려 비 땅에 영주케 하리라."

여진 사람들은 선성만 들었던 이징옥과 한번 무예를 겨루어보고 싶었다. 모두 다 심산궁곡에 사는 사냥의 명수들이었다, 이징옥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일제히 소리치며 대답한다.

"장군의 용맹한 선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제 무예를 비교해볼 기회를 주시니 재주 없으나 한번 대결해보겠습니다."

모두 다 웃으며 대답했다. 북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징소리, 바라소리가 뒤를 이어 소란하게 일어났다. 놀란 토끼가 바위틈에서 내다보다가 뛰어나왔다. 여진족 한 사람이 잽싸게 활을 당겼다. 토끼는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이징옥은 미소를 머금고 일부러 활을 당기지 아니했다. 여진족의 기를 꺾지 아니하려는 까닭이다. 여진족들의 환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몰이꾼들이 뛰어 달아났다. 사냥개가 뛰달려 쓰러진 토끼를 물고 돌아왔다. 다음 순간 노루가 놀라서 산골에서 뛰어나왔다. 또 한 사람의 여진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고 활을 당겼다. 노루는 눈알에 살을 맞고 쓰러졌다. 여진족들의 환호성은 또다시 천지를 진동했다. 소리쳐 뛰달리며 쓰러진 노루을 결박지어 내려왔다. 이번에도 이징옥은 일부러 미소를 짓고 활을 들지 아니했다. 구경하는 조선 사람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징옥이 활을 한 번도 당기지 않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또다시 북소리, 징소리, 몰이꾼들의 고함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꽃사슴 한 마리가 보관인 듯 고운 뿔을 머리에 이고 놀란 눈으로 산등성이로 뛰닫는 모습이 보였다. 이징옥은 비로소 활을 번쩍 들었다. 날렵하게 편전을 시위에 걸었다. 이때 여진 사람도 활을 당겼다. 두 개의 살이 한꺼번에 날았다. 이징옥의 편전은 여진 사람의 살을 맞히어 떨어뜨리고 번개치듯 계속해 날아 꽃사슴의 명치를 맞혔다. 기막힌 신궁의 솜씨다. 중간에 날으는 살의 살을 맞추어 떨어뜨리고, 계속해서 날아 사슴을 쏘아버린 것이다. 진짜 환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여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혀를 홰홰 내둘렀다. 먼저 쏘아 날아가는 자기편 화살을 맞혀 떨어뜨리고, 다시 그 남은 힘으로 뛰어 달아나는 사슴을 번개같이 쏘아 맞혔다는 것은 기록에도 없는 전무한 일이다. 얼마나 이징옥의 눈이 밝고, 조준이 정확하고, 또다시 팔 힘이 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천하에 둘도 없는 신궁이었다.모두 다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사냥은 계속되었다. 몰이꾼들의 요란한 환성 소리를 듣고 또 다른 짐승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황소만 한 멧돼지를 여진족 중의 한 사람이 활에 살을 메겨 쏘았다. 여진 사람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살은 용하게 멧돼지를 맞혔다. 그러나 시커먼 털이 사납게 뻗친 껍질 피부는 돌덩이 마냥 강했다. 멧돼지는 멱을 따는 듯 성난 울음소리를 부르짖고 뛰닫는 바람에 화살은 반발이 되어 땅에 떨어지고 멧돼지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징옥은 이번엔 활을 들지 아니했다. 길이 넘는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뛰닫는 멧돼지를 쫓았다. 산을 넘고 계곡으로 뛰었다. 빠르기 비호같았다. 달아나는 멧돼지보다 앞을 질렀다. 흘연 이징옥은 말머리를 급히 돌려, 달아나는 멧돼지의 정수리를 퍽 찔렀다. 내리치는 힘이 어찌 억세고 강했던지 멧돼지는 벽력같이 울부짖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몰이꾼들의 박수갈채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했다. 사냥개들이 줄을 지어 뛰달렸다. 입으로 물어뜯어 쓰러진 멧돼지를 끌어 내렸다. 환호하는 소리가 또 한 번 일어났다. 푸른 산이 울먹이는 듯 들먹였다, 여진족속들은 또다시 혀를 홰홰 내둘렀다. 몰이꾼들이 몰고 들어가는 산골은 더욱더 깊고 으슥했다. 찬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났다. 낙락장송들이 우거진 곳에 큰 바위들이 이곳저곳에 벌여 있고, 바위 밑에는 큰 구멍이 뻐끔하게 뚫어져 있었다. 음산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굴속에서는 몰이꾼들의 들레는 소리에 놀라 한 마리의 큰 범이 주홍 같은 입을 벌려 '어흥' 소리를 치고 뛰어나왔다. 이징옥은 말에서 급히 내려 장창을 비껴들고 눈을 부릅떠 범의 앞에 버티고 섰다. 호랑이는 이징옥의 용맹스럽게 버티고 섰는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주홍 같은 입을 다물었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징옥의 위풍에 눌린 것이다. 범은 자기를 해칠 뜻이 없는 것을 짐작한 모양이다. 꼬리를 흔들고 굴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 가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조선 사람이나 여진족을 가릴 것 없이 손에 땀을 쥐고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호랑이가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돌렸다. 이징옥이 백수지왕이요, 산중 영웅이라는 범을 꼼짝 못 하도록 다루는 솜씨를 바라보자 모든 사람들은 숙연했다. 여진족들은 이징옥의 발 앞에 엎드려 고한다.

"소인들은 눈이 있어도 망울이 없는 놈들입니다. 감히 장군님과 사냥을 해서 무예를 겨룬다는 일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는 격이올시다. 다시는 장군 앞에서 사냥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징옥은 일부러 풍을 치며 대답한다.

"너희들은 오랫동안 산중에 살아서 사냥하는 데 모두 다 훌륭한 솜씨를 가졌다. 계속해서 사냥을 해보자꾸나. 약속대로 나보다 많이 잡는 사람에게는 천호의 직책을 주리라!"

여진족들은 손을 모아 대답한다.

"천호 아니라 만호의 벼슬을 주신다 해도 장군 앞에서는 기운이 떨어지고 손이 떨려서 사냥을 못하겠습니다. 백 번 절하고 사양합니다."

"정 그렇다면 하는 수가 없구나. 사냥령을 거두리라."

이징옥은 장중하게 대답한 후에 군관들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영문으로 돌아가라는 영을 내렸다. 해는 아직도 높았다. 영북진 군사와 몰이꾼들은 이징옥이 사냥한 멧돼지, 사슴, 노루, 토끼들을 목도질해서 어깨에 메고 호탕하게 노래를 부르며 영북진으로 돌아간다. 뒤에는 여진 궁수들이 따랐다. 영북진 여진 부락에는 거리마다 여진족의 노소남녀들이 사냥하고 돌아오는 행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선 사람 절제사가 없던 영북지방에 범을 공기 놀리듯 하는 소년장사 이징옥이 강토를 정리하기 위하여 도임이 되었다 하니, 첫째로 소년 장사의 신언서판을 대하고 싶었고, 둘째로 수렵대회를 여는데 이징옥이 여진 사람들과 무예를 겨루어서 만약 이기는 여진 사람이 있다면 천호의 벼슬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궁금증이 나서 몰려 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먼저 소년 장사 이징옥의 당당한 위풍에 눌리고, 다음 이징옥이 여진 궁수의 날으는 살을 쏘아 떨어뜨렸다는 말을 듣자 구경꾼들도 혀를 돌려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징옥은 마상에 높이 앉아 전후좌우에 인산인해를 이루어 구경하는 사람들을 둘러보자 군관들에게 영을 내린다.

"오늘 수렵대회에서 사냥해 잡은 많은 짐승들을 모조리 여진 야인들에게 나눠주라."

군관들은 절제사의 영을 받들어 늙고 병든 여진 부락 사람들에게 고루고루 나눠주었다. 이징옥은 힘이 억세고 무예가 절등할 뿐 아니라, 버린 땅을 다시 찾는 데는 민심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상책이라 생각했다. 역시 병서 공부를 한 때문, 이 같은 문무 겸전한 술책을 썼던 것이다.

 

무순

 

선발대 이징옥과 송희미가 동북면으로 향해 떠난 후에, 도원수 격인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 김종서와 도체찰사 하경복이 종사관 신숙주와 박호문을 대동해서 군사와 군수품과 양곡을 싣고 나가는 제2진의 행렬은 위세가 당당했다. 연도의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난다 하고 깜짝 놀랐다. 김종서는 가는 곳마다 향리의 부로들을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오랑캐들의 발호하는 행동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국경에 진을 설치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한다는 뜻을 설명하니, 고을마다 백성들은 이마에 손을 얹어 감축한 뜻을 표했다.

김종서는 길주, 명천, 경성을 일일이 순시한 후에 한양에서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분군시켜 주둔시키고, 다시 경원, 영북에 당도하여 이징옥, 송희미에게 오랑캐들의 정황을 들은 후에 알목하로 을라갔다. 퉁맹가 부자가 우디거 오랑캐에게 참변을 당해 죽은 오도리족들의 본거지다. 오도리 족속들은 추장 부자가 죽은 후에 갈팡질팡 어찌할지를 모르고, 우디거 족속들은 제 영토나 된 듯 행패와 박해가 무쌍했다. 오도리족들은 생명과 재산의 위협을 받다가 조선 도절제사 김종서의 도임을 보자 천신이 강림한 듯 기뻐했다. 거리거리 나와서 김종서를 맞이했다. 그대로 경의를 표해서 맞이할 뿐 아니라 울면서 호소했다.

"장군님, 저희들을 살게 해주십시오. 조선의 혜택을 입사와 대대로 알목하에 살던 저희들은 우디거 족속들의 랭패로 토저히 생업을 하고 살아갈 도리가 없습니다. 황공합니다마는 저희들을 경원으로 들어가 살게 해주십시오."

경원은 알목하보다도 더한층 조선 땅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곳이다. 김종서는 껄껄 웃었다.

"너희들이 이곳에 살기 때문에 국경이 항상 소란했는데 더한층 깊숙하게 들어와서 우리 땅에 살겠다 하느냐? 아주 우리나라 수도 한양으로 들어와 살려무나. 하하하"

"그렇게 해주신다면 오죽이나 좋아들 하겠습니까. 염치없습니다."

"너희들이 머리 꼬랑이를 잘라서 상투를 틀고 호복을 벗고, 조선옷을 입은 후에 조선말을 배워서 귀화를 한다면 상감께 아뢰어서 한양에라도 살게 해주리라. 그러나 너희들이 한 달 안에 사람마다 모두 조선말을 잘 하고 조선옷을 입고 상투를 짜고 도포를 입을 수 있다면 될 법도 하다. 그리고 계집사람들도 오그렸던 발을 크게 하고 쪽을 틀어올려야 하느니라."

김종서는 반농담으로 웃으며 말했다. 오도리 오랑캐는 울면서 고한다.

"장군님, 그것은 농담이십니다. 한 달 안에 어떻게 저희들 남녀노소가 모두 조선말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리고 계집들의 전족이 어찌 별안간 펴질 수 있습니까? 한평생 가도 다시 펴질 수는 없습니다. 장군님! 그저 살던 곳에서 멀리 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아까 말씀한 대로 경원 근처에 살도록 해줍시오."

김종서는 다시 호방하게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경원이나 한양이나 모두 다 조선 땅이 아닌가? 역시 귀화를 한다면, 남자나 여자나 모두 다 조선 사람다워야 하지 않겠느냐. 발가락을 오그라뜨리고 호인 말을 하면서 어떻게 조선 백성 노릇을 하겠다 하느냐? 우디거 족속에게 박해를 당하지 않도록, 좋은 땅을 택해서 안온하게 살도록 해줄 테니 잠시 동안만 기다리고 있거라."

좋은 땅을 택해서 안온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김종서 장군의 말을 듣자, 오도리 오랑캐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사또! 그저 감사합니다. 어떻든 죽지 않고 살게만 해주십시오. 그저 하라시는 대로 복종하겠습니다."

김종서 장군은 군량관에게 분부한다.

"저 애들 오도리족은 추장 부자가 참변을 당한 후에 우디거족에게 박해를 당해서 살길이 막연한 모양이다. 우선 입에 풀칠은 해야 할것이다. 백미 이십 섬만 내려주어서 늙은 부모와 어린 자식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도록 하라."

군량관은 사또 김종서의 명을 받들어 오도리 오랑캐들에게 백미 이십 섬을 즉석에서 내주었다. 오랑캐들은 눈물을 흘리며 치사를 올린다.

"의탁할 길 없는 저희 족속들에게 살게 할 땅을 마련해주겠다 하시고, 다시 또 귀한 백미를 이십 섬템이나 내려주시니 굶주려 죽게 된 늙은 어미, 아비와 어린 자식들을 잘 먹여 살리겠습니다."

오랑캐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백배치사하고 물러갔다. 오랑캐들이 물러간 후에 김종서는 종사관 박호문을 불렀다.

"지금 이곳에 당도해 보니 마치 무법천지나 매일반이로구려 ! 본거민이었던 오도리족은 통솔하던 퉁맹가 티무르 부자가 참살이 된 후에 우디거들의 행패가 무쌍해서 살아갈 길이 막연하게 되었고, 우디거 무리들은 정복자나 된 듯 영토와 권익을 차지해서 그 행동이 망유기극하구려 나는 장차 국경 안에서 날뛰는 오랑캐들을 다 내쫓아서 육진 개척을 단행하려니와, 영감은 최윤덕 장군과 함께 서북면에 사군을 설치했을 때, 우디거를 찾아서 딸과 사위를 회유시킨 일이 있으니, 수고스럽지만 한번 찾아서 그들의 족속들이 알목하 안에서 발호를 못 하도록 엄하게 명령을 내리시오. 만약 불응할 때는 십만 대병으로 서북면 오랑캐 이만주를 무찌르듯 우디거의 소굴을 소탕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돌아오시오."

"지금 우디거의 젊은 추장은 이만주의 우군 부대장으로 조선에 내응이 되었던 우디거 늙은 추장의 사위올시다. 알아듣도록 타이르겠습니다. 만약에 응치 않는다면 사또의 말씀대로 대군을 이끌어 응징하는 것이 가합니다."

종사관 박호문은 당일로 단기를 달려,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로 향했다. 박호문은 서북면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막막강적인 건주위 이만주의 소굴을 찾았을 때도 대담무쌍하게 단검 한 자루만 품에 품고 적의 허실을 손살피같이 살피고 돌아왔던 호담무쌍한 인물이었다. 우디거쯤은 문제도 삼지 아니했다. 천리준총인 사랑하는 말을 놓아 우디거로 치달렸다. 성문 앞에 당도하여 통자를 하니, 수문장은 나는 듯이 우디거 젊은 추장에게 고했다. 추장은 깜짝 놀랐다. 아내인 우디거 딸과 의논한다.

"박특사가 왔다 하니, 어찌하면 좋은가? 반드시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죽인 것을 문책하러 온 것이 분명하니, 무어라 대답하면 좋겠나?"

활달한 우디거 딸은 웃으며 대답한다.

"무엇을 그리 무서워할 것이 있소? 사실대로 이야기하시구려. 건주위 이만주가, 우리가 조선편이 되어서 내응이 된 것을 앙심먹고. 마천 추장 편에 나의 초상화와 퉁맹가의 아내였던 청상과부를 보내서 우디거를 공격한 후에 나를 납치해서 첩을 삼으라 했다는 일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박특사도 속이 탁 트인 인물이라, 우리를 꾸짖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증인이 환하게 있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씀요. 파쿠타 내외가 있지 아니합니까? 마음을 탁 놓시오."

"그도 그렇소마는 우리의 꿈은 다 깨지는구려!"

우디거 딸은 걸물이었다.

"알목하를 우리가 차지하려던 꿈 말이죠? 오도리족을 쳐서 설욕을 한 것만으로 만족하시오. 모든 것이 천시입니다. 지금은 아직 이릅니다. 앞으로 운이 터지면 꿈을 실현할 때도 돌아오겠지요. 박호문은 결코 우리를 박해할 인물이 아닙니다, 보시오. 지난번 우리 아버지를 찾았을 때와 같이 이번에도 단기로 왔다 하지 아니합니까? 어서 만나보십시다."

내외는 의논하고 일지군마를 거느려 성문 밖까지 나가 마중을 했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객사로 들어가 박호문을 영접했다. 지난해 건주위 싸움터에서 총총히 작별한 후예 다시 만나는 화사한 모습이다. 반가웠다. 젊은 추장 내외는 먼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후에 덥석 박호문의 손을 잡았다. 박호문도 반가웠다. 마주 손을 잡았다.

"아아! 박특사, 어떻게 누추한 곳에 왕림하셨습니까?"

"참말 반갑습니다. 일차 건주위 전쟁터에서 헤어진 후에 다시 뵐 기회가 없을 줄 알았더니 참 기쁩니다. 이같이 찾아주시니 저희들 우디거의 영광이올시다. 어서어서 성안으로 들어가사이다."

우디거의 딸은 너스레를 치면서 얼굴에 가득 웃음을 싣고 박호문을 맞아들였다.

"나 역시 반갑습니다. 먼저 두 내외분이 이곳 우디거의 추장이 된 것을 축하합니다."

박호문도 외교 사령을 했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곧 박특사를 성안으로 인도했다. 진수성찬을 차려 공경히 접대했다. 사사로운 담화가 끝난 후에 박특사는 얼굴에 위엄기를 띠고 묻는다.

"알목하는 조선 땅인데 그대들이 배은망덕을 하고 함부로 군사를 거느려 침범했으니 해괴한 일이다. 우리 왕상전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시어 지금 알목하에 십만 대병을 주둔시키고 문죄를 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다, 철부지들도 아닌 터에 어찌해서 끄따위 짓을 감행했는가? 지금 알목하에는 문무 겸전한 김종서 사또가 함길도 감사에 도원수를 겸임해 있고, 범 같은 장수 하경복 장군이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도임되어 있고, 소년 장사 이징옥이 영북진 절제사로 너희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진을 치고 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반심을 먹고 대국의 국경을 범했느냐?"

박호문의 꾸짖는 말소리는 추상같았다. 박호문은 서북면과 동북면 정세에 정통했다. 서울서부터 우디거가 오도리족을 침공해서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죽인 까닭을 잘 알고 왔으면서도 일부러 엄포를 주어 꾸짖는다. 젊은 추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범 같은 장수 이징옥, 하경복에 도승지를 지낸 문무 겸전하다는 김종서가 알목하에 십만 대병을 거느려 대기하고 있다는 말에 사뭇 간담이 서늘했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배은망덕을 하겠습니까? 알목하에 오도리족을 치러 들어간 것은 막부득이한 처사였습니다. 대국에 반기를 들었던 서북면 밖에 있는 이만주란 놈의 흉계로 오도리 늙은 추장을 시켜서 저의 아내를 납치해 가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제 어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이리하여 알목하로 들어가서 늙은 추장과 치골한인 그의 자식을 처치한 것뿐이올시다. 이곳에 증인이 있습니다. 특사께서 잠시 만나보시고 김종서 대감께 억울한 사정을 말씀드려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 추장은 아내에게 말한다.

"빨리 파쿠타 내외를 불러서 박특사께 쉽게 자고 해혹해 올리도록 하게!"

추장의 아내는 급히 나가 대기하고 있던 파쿠타와 청상과부였던 파쿠타의 아내를 데리고 들어와 박특사에게 대면을 시켰다.

"이 사람이 본시 오도리의 부장 파쿠타올시다. 그리고 저 사람은 건주위 모사였던 퉁맹가의 아내였다가 지금은 파쿠타의 아내가 된 사람이올시다."

박호문은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체,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속이지 말고 지난 일을 실토해 말하라!"

파쿠타와 그의 아내는 마천 추장이 이만주의 명을 받아 오도리로 왔던 이후의 일을 자세히 설파했다. 파쿠타 내외의 말이 끝나자 우디거의 딸이 하소연을 한다.

"만약 저 파쿠타 내외의 일이 아니 일어났던들 첩은 오모리 늙은 추장의 둘째 계집이 되고 저 사람은 짐승 같은 추장의 큰아들 피카르의 욕된 계집이 될 뻔했습니다. 특사 나리, 이쯤 일이 되었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나리께서도 바꾸어 생각해보십쇼."

"그는 그렇다 하고 어찌해서 이런 사정을 상국인 우리 국왕 전하께 아뢰지 아니하고 맘대로 국경을 범했단 말인가?"

"일이 급하니 어찌합니까? 퉁맹가 티무르와 피카르는 곧 쳐들어올 형편이고, 수천 리 밖에서 어느 겨를에 국왕 전하의 윤허를 받아서 처리하겠습니까? 그것은 무정지책이올시다."

우디거의 딸은 열을 올려 변명했다. 박호문은 다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장중하게 말을 꺼낸다.

"그는 그렇다 하고, 내가 전하의 명을 받들어 김종서 장군과 함께 와보니, 지금 알목하에는 우디거 사람들이 국경을 맘대로 넘어들며 오도리족을 박해해서 그 태도가 방약무인하다. 그대들이 조선이란 상국을 무시하고 나라 땅을 짓밟는 것이 아닌가? 단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우디거 젊은 추장은 황공한 듯 이마에 손을 얹고 대답한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상국을 무시하오리까. 저희 부하들이 잠시 승전한 기세로 알목하로 넘나들면서 우쭐대는 듯합니다. 다시는 건너가지 못하도록 엄하게 단속하겠습니다."

박호문은 다시 준엄하게 꾸짖는다.

"말로만 단속한다 해서는 단연코 용서치 못하리라. 왕군이 이번에 출동한 것은 그대들 여진족속의 난폭한 행동을 우리 국경 안에서 엄금하려는 작정이다. 만약 불응하는 일이 있다면 이만주의 소굴을 무찌르듯 추호의 용서도 없을 테다. 요량해서 처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곧 사람을 알목하로 보내서 우디거 사람들을 철수시키겠습니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굳게 맹세했다. 박호문은 다시 파쿠타 내외를 향하여 말한다.

"그대들은 본시 오도리 족속이다. 추장 부자가 죽은 후에, 오도리 족들은 갈팡질팡 마음을 잡지 못해서 어찌할지를 모른다. 우리 국왕 전하께서는 정상을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두만강 밖에 따로 좋은 땅을 택해서 옮아 살도록 주선해주라 하셨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영도할 인물이 없다. 김종서 도원수께 고해서 그대 내외를 오도리 추장으로 새로 임명할 테니 그대들의 뜻이 어떠한가?"

파쿠타 내외는 오도리 추장이 되라는 말에 마음속으로는 기뻤다. 그러나 자기들은 추장 부자를 죽인 장본인이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마는 오도리 사람들이 응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은 염려 말라. 김종서 장군이 퉁맹가 티무르 유족에게 타일러 처리하리라."

"참 좋은 일을 하십니다. 그리 해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도 크게 찬동했다. 박호문은 우디거 추장 내외에게 새로 오도리 추장으로 임명될 파쿠타 내외를 도와줄 것과, 우디거 무리들은 일체 알목하에 드나들어서는 아니 된다는 다짐을 받은 후에 곧 알목하로 돌아가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복명을 했다. 김종서는 곧 박호문의 수고를 칭찬한 후에 파쿠타 내외를 불러, 오도리족을 거느리고 두만강 건너 양지바른 곳을 택해서 옮겨 살게 하고, 콧대가 세며 꺼떡거리던 우디거 무리들은 본곳으로 돌아가게 했다. 알목하와 공주 일대에 대대로 자리를 잡고 살아가던 여진 야인들은, 세종전하의 문무겸전한 위세와 덕화에 눌려 모조리 보따리를 싸가지고 남수여대하여 두만강 밖으로 물러났다. 김종서는 여진족들이 함빡 물러간 후에 거칠고 쓸쓸한 수천 리 국토를 새로 개척해야만 했다. 군사들을 수자리시켜서 한편으로 성벽을 굳게 쌓아서 국방을 튼튼하게 하고, 한편으론 밭을 갈아서 식량의 자족자급을 계획했다. 김종서는 친히 성터를 살피고 돌을 운반하여 성 쌓는 일을 감독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엄하기 추상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사와 비장들을 극진하게 사랑했다. 날마다 역사가 끝나면 비장과 군사들에게 술과 밥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보통 저녁 밥상이 아니다. 날마다 크게 연회를 차려서 공궤했다. 비장만 백 명이 넘었다. 한 사람 앞에 우각 한 다리씩을 뜯어먹게 했다. 비장만 삶아 먹는 소가 한 끼에 25필이다. 쇠다리와 족만 뜯어먹는 것이 아니다. 갈비, 양지머리, 우둔, 대접살에다가 내장으로는 허파, , 천엽, 콩팥, 우랑, 우신, 곤자소니를 푸짐하게 삶아먹고, 쇠대가리 편육에 골까지 삶아서 술안주를 해서 흥겹게 먹었다. 비장뿐만이 아니다. 졸아치 군사들까지도 일이 끝나면 곱창과 대창을 삶아서 갖은 양념을 한 후에 소주 안주를 하게 하고 곰국에 밥을 말아 먹게 했다. 비장 이하 군사들의 입은 떡 벌어졌다. 김종서 사또의 칭송이 대단했다. 날마다 돌을 날라 성을 쌓고 부지런하게 밭을 갈았다, 한 사람이 세 품 네 붐의 일을 했다.허허벌판 잡초가 무성했던 곳이 양전옥답으로 변해지고 두만강 연변엔 화강석 든든한 돌성이 높고 높게 쌓여져서 장엄한 관문과 길고 긴 성벽은 만리장성을 이루어 나날이 새 천지로 변했다. 장교와 군사들을 잘 대우해서 일만 끝나면 저녁마다 크게 잔치를 해서 소가 30필이 넘는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들어갔다. 김종서를 시기하는 재상 한 사람이 전하께 아뢴다.

"김종서는 여진족을 내쳐서 육진 개척을 합네 빙자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해서 날마다 큰 잔치를 하고, 매일 밤 소는 30필씩이나 잡아서 술을 마시고 호탕하게 논다 합니다. 하룻밤에 소를 30필씩이나 도살한다면 한 달이면 9백 두가 도살되고, 일 년이면 만여 두가 도살됩니다. 함경도의 소는 멸종이 되고 말 테니 이같이 국력을 낭비한다면 큰일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사실을 알아보시옵소서."

전하는 사신을 보내어 축성과 개간하는 일을 살피라 하시고, 유시를 내렸다.

'서울서 유사들의 말을 들으니, 경은 군사들과 매일 잔치를 해서 용도가 사치하다 하니 과연 사실인가? 조신들의 탄핵이 없도록 잘 처리하여라.'

김종서는 유시를 받자 곧 종사관 신숙주에게 장계를 쓰라 해서 올렸다.

'신 김종서는 돈수백배하옵고 삼가 성상께 아뢰옵니다. 북쪽 변방은 왕업을 일으키셨던 흥왕의 땅이옵니다. 이제 성상의 용단으로 버렸던 강토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장졸들은 멀리 고향을 떠나서 장차 십 년 동안이나 객지에서 수자리를 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후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면 울쩍해하는 그들을 위로할 도리가 없습니다. 장졸들은 무슨 낙으로 고생들을 하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장사 한 명 앞에 쇠다리 한 개를 대접합니다마는 육진 개척이 끝난 후에는 닭의 다리 한쪽도 차례에 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굽어살펴주시옵소서.'

봉명하고 내려갔던 사신은 성 쌓는 일과 박토가 옥답으로 변한 것을 아뢰고 김종서의 장계를 올렸다. 전하는 장계를 보신 후에 용안에 미소를 풍기고 말씀한다.

"삭풍이 휘날리는 옥돌같이 찬 변지에 고향을 떠나 수자리하는 장졸들이 먹는 낙도 없이 어찌 일을 하겠느냐. 더구나 완강한 오랑캐 놈들을 쫓아내면서-. 덮어두어라!"

 

이민

 

종서를 시기하는 신하들은 다시는 말을 못 했다. 한편 여진족속들은 비록 조선 땅이라 하나 대대로 오래 살던 공주와 알목하다.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가끔가끔 밤이면 아직 성벽을 쌓지 못한 곳으로 목책을 넘어 뛰어 들어오기도 하구 몰래 조선 사람의 복색으로 변장한 후에 도절제사 김종서를 암살할 것을 획책하기도 했다. 김종서는 오랑캐들의 이러한 행동과 음모를 미리 다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체 사색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쥐새끼 같은 무리들의 조그마한 반발이었다. 6진이 함빡 완성되는 날이면 이런 것들은 저절로 소멸이 될 것을 뻔하게 아는 때문이다.

하루는 전례와 같이 성 쌓기를 끝마친 후에 비장과 군사들을 불러 풍악을 갖추고 소를 잡아 크게 잔치를 하는 중이었나. 기생들 수십 명이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러서 주흥을 돋우었다. 기생들은 사또인 김종서의 앞으로 나가 권주가를 부르며 술을 권했다. 김종서는 기생들을 시켜서 비장들에게 술을 권한 후에 주흥이 도도했다. 천천히 자작 시조를 노래해 읊는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윌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수백 명 장병과 기생들은 호쾌한 사또의 청 좋은 시조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종장에, '긴파람 큰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하는 노랫소리가 끝나자 모두 다 손뼉을 치며 환성을 올렸다. 기생 한 명은 술잔에 가득 술을 붓고 사또의 노래에 화답한다.

'적토마 살찌게 먹여 두만강에 씻겨 세고 용천검 드는 칼을 선뜻 빼어 둘러메고 장부의 입신양명을 시험할까 하노라.'

여창이건만 역시 호탕 장쾌했다. 노래가 끝나면서 사또 김종서가 대백 큰 술잔을 들려 할 때 화살 한 대가 푸르르 날아와 김종서의 잡으려는 놋 술잔에 떨어졌다. 김종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화살을 집어 던지고 태연히 큰 잔을 기울였다. 호담무쌍한 김종서의 기풍에 만좌는 옷깃을 여몄다. 사또는 범인을 잡으라는 영을 내리지 아니했다. 태연히 시조 한 수를 또 한 번 읊는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랴. 어떻다, 능연각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웅장한 목성은 허공을 흔들어 푸른 하늘에 떠도는 횐 구름장을 흐트러뜨리는 듯했다. 술잔에 화살을 쏜 자는 조선옷으로 변장한 야인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쥐새끼 숨듯 숨어버렸다.

김종서는 이같이 온몸이 담덩이다. 야인들은 김종서를 시험해본 후에 다시 도체찰사 하경복의 힘을 시험해보려 했다, 이번에는 조선 사람으로 변장을 하지 아니하고 공공연하게 야인 복색으로 수십 명이 나타났다. 도체찰사에게 뵙기를 청했다.

"저희 족속들은 대대로 은혜를 입사와 오랫동안 이곳에 살다가 두만강 밖으로 떠나게 되니 섭섭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대감께 인사나 여쭙고 떠나려 합니다."

하경복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불러들여라."

선뜻 허락했다. 여진족 수십 명은 나배를 드리고 아뢴다.

"상국 토지를 제 땅인 양 사오 대 내려오면서 정 들여 살다가 이제 딴 곳으로 옳아 살게 되니 섭섭한 정을 이길 길 없습니다. 저희들은 오도리 여진족을 대표해서 물러가는 인사를 도체찰사 대감께 고하려 왔습니다. 앞으로도 먹을 것이 없으면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하경복은 얼굴에 가득 화기를 띠고 대답한다.

"오래 살던 곳을 떠나게 되니 어찌 서운들 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을 보내는 나 역시 서운하구나,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을 해다오. 함길도 감사 김종서 장군께 말을 해서 전과 같이 유루없이 잘 대접하게 하리라!"

하경복은 말을 마치자 비장을 불러 명한다.

"김종서 장군께 품해서 저 애들에게 양식 이십 석을 내주시라 아뢰어라. 그리고 주보에 기별해서 전별하는 술상을 올리도록 하라!"

비장은 청명하고 물러갔다. 이윽고 좁쌀 스무 섬이 마바리에 실려 도체찰사 아문으로 들어오고, 여진 대표들을 대접할 주안상이 떡 벌어지게 차려 나왔다. 하경복 도체찰사는 비장을 시켜 여진 대표들에게 술을 권하게 했다. 여진 대표는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큰 활을 예물로 도체찰사에게 바치고 고한다.

"이 활은 저희들의 선조가 쓰던 활이올시다. 무게가 백 근이올시다. 자손들이 점점 잔졸해지고 힘이 줄어서 도저히 이 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곳을 떠나는 기념으로 사또께 바칩니다. 사또께서는 천하장사라 하니 넉넉히 사용하시리라 믿습니다."

여진 대표 끈 두 사람이 힘을 모아 도체찰사 앞에 받들어 놓았다. 하경복이 살펴보니 과연 여진의 큰 활이다. 쇠로 만든 화살을 사용하는 활이었다. 하경복은 여진 대표들이 자기의 힘을 시험해보기 위하여 거짓 기념으로 바친다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옛날 철전에 사용하던 활이로구나."

말을 마치자 두 팔에 힘을 주어 양편 아귀를 우그러뜨렸다. '' 소리가 나며 백 근 무게 나가는 철궁의 중통이 딱 부러졌다. 여진족속들은 어이가 없었다. 놀랐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썼다.

"천하장사십니다."

여진족속들은 절을 하고 물러들 났다. 이후부터 여진족속들은 김종서와 하경복을 범같이 두려워했다. 다시는 장난들을 하지 못했다. 두만강변 수천 리 황막한 땅에 새로 육진을 개척한다는 일은 용이치 아니했다. 만여 명의 수자리 군사와 본고장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동원시켜서 우선 경원진과 영북진을 설치해놓았으나,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서 개간을 하지 아니하면 또다시 허사가 된다. 김종서는 경원, 영북 두 진을 개척한 후에 급히 파발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다.

'아뢰옵니다, 경원과 영북에 우선 두 진을 설치하옵고 절제사 밑에 토관을 두어서, 본도 백성 1,100호를 영북으로 옮기고, 1, 100호를 경원에 이주시켜서 부지런히 농사짓게 하고, 관에서는 결전을 받지 아니해서 백성들의 후생하는 방책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본도에서 옮길 만한 백성의 집은 합쳐서 2,200호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경기, 충청, 강원, 황해, 평안, 경상, 전라도에 특명을 내리시어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양인은 발탁해서 토관 벼슬을 주게 하고, 향리와 역리는 영구하게 천직을 면제케 하고, 천인들은 영구하게 양민이 되는 대우를 하도록 윤허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김종서의 장계를 받아보신 후에 비답을 내려 좋다 했고, 곧 승지를 시켜서 7도 감사에게 방을 붙여 이민을 모집하라 했다. 양민에게 토관 벼슬을 주고, 향리와 역졸들은 천한 직업에서 떠나서 자유스런 몸이 되게 하고, 천인들은 영원히 면천을 해줄 뿐 아니라 무상으로 땅을 주어 농사짓는 데 거저 해 먹고 지세도 받지 아니한다 하니, 빈궁한 생활과 역경에 처해 있는 백성들은 너도 나도 하고 다투어 함경도로 올라가기를 자원했다. 함경도 경원, 회령, 종성, 삼수, 갑산으로 남부여대하고 이민 가는 무리들은 낙역부절 길이 메어 올라갔다. 그들은 한편으로 성을 쌓아 국경을 튼튼하게 하고, 한편으로 황무한 땅을 개척해서 문전옥토를 이루었다.

김종서는 인구가 점점 늘어가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더욱더 북으로 북으로 개척해 들어갔다. 김종서는 영북진을 다시 백안수소로 옳겨서 종성군이라 하고, 알목하 최북단에 또다시 성을 굳게 쌓고 회령부라 했다. 다음 해 을묘에는 공주 옛성을 중수한 후에 첨사를 두어 진관을 설치하고 다시 현령을 두어 공성이라 이름했다. 다음에는 목조가 살던 곳을 경흥이라 하고 격을 높여 도호부를 설치했다. 다음에는 다시 북으로 올라가 성을 다온평에 쌓고 이름을 온성이라 했다. 다음에는 이민 1천 호를 부거에 옮기고 고을 이름을 부령부라 했다. 이리하여 길고 긴 세월에 군 관 민의 땀과 슬기와 일치단결된 협력으로 세종대왕의 국토를 찾아 개척한 큰 위업이 이룩되니, 이것이 곧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육진 개척의 대 위업이다.

 

밝은 임금 어진 신하

 

크나큰 육진 개척의 위대한 사업을 완성하는 동안, 삭풍설한 모진 눈바람 속에 장병과 이민들의 고생은 기막히도록 많았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김종서를 중상하고 모략했다. 무능하고 나약한 무리들이다. 나라를 망치는 자라 했다. 목을 베자고 주장하는 자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세종전하는 끄떡도 하지 아니했다. 철석같이 신하를 믿는 때문이다. 고려 때 윤관장군이 구성을 쌓아서 국경을 확장했던 것을, 나약하고 무능한 신하들이 다시 글안족에게 돌려주었던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 더구나 함경도는 조상의 발상지였다. 글안이 망한 후에 여진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세종은 한 치의 땅이라도 버려둘 수는 없다고 굳세게 선언했다. 조상이 살던 곳도 곳이지만 국가와 겨레의 만년대계를 생각했다. 이 사업은 기어코 당신 생전에 이룩해야만 하겠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김종서는 경원, 경흥, 부령, 회령 사진을 설치한 후에 다시 두만강 끝까지 올라가 종성, 온성을 축성해서 줄기차게 육진 개척을 끝마치려 했다. 조정에서는 물의가 또다시 물 끓듯 일어났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헌관이란 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지금 동북면 함길도 방면에는 경원, 경흥, 부령, 회령 네 진만 설치해도 오랑캐들은 침범해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그만 개척하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십시오. 그 동안 근 십 년 동안에 국가의 물자는 기막히도록 소모되었습니다. 북방에는 첫해에도 큰 눈이 쏟아져서 수자리하고 있는 군사와 이민 간 백성들이 동상을 당했을 뿐 아니라, 성도 쌓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했습니다. 다음에는 괴질이 퍼져서 사람과 가축이 허다하게 죽었다 합니다. 여기다가 오랑캐들은 끊일 사이 없이 앙심을 먹고 습격을 해 들어오니, 성을 쌓고 진을 두었다 해도, 모두 다 허사가 되기 쉽습니다. 또다시 김종서는 장사와 군사들을 잘 먹여야 한다고 날마다 소와 돼지를 수백 필씩 잡아서 큰 잔치를 하고 풍악까지 잡혀서 사치스런 호강으로 세월을 보낸다 하니, 밑 빠진 가마솥과 깨진 독에 물 길어 붓기입니다. 자칫하면 국력이 탕진될 테니 큰 걱정이올시다. 김종서는 육진을 개척한다고 칭탁하고 오랑캐와 부동하여 반란의 뜻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김종서는 국적이올시다. 목을 베어 죽이십시오.'

전하는 대간들의 상소를 보시자, 무능한 신하들을 타이르는 비답을 내렸다.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들의 글월은 잘 읽었다. 너희의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는 뜻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너희들의 생각은 바늘로 창구멍을 뚫고 하늘을 쳐다보며 지껄이는 소리다. 창문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혹독한 북녘땅에 군사와 백성들이 약간 동상에 걸렸다 해서 나라의 강토를 포기할 수 있는가? 따뜻한 온실에 안일하게 누워서 콧노래 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 겨레와 백성들의 만년대계를 위하여 국토를 확충하는 것이다. 약간의 국력이 소비되는 일은 당연하지 않은가? 다시 훼방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참하리라.'

대왕의 준엄한 비답이 한 번 내리니 무능하고 나약한 신하들은 다시는 중상과 모략하는 상소를 올리지 못했다. 발 없는 말은 천 리까지 날아가는 법이다 조정에서 무능한 신하들이 대왕께, 김종서는 국적이니 목을 베어 마땅하다고 글월을 올렸다는 소식은 도절제사 김종서의 귀로 들어갔다. 김종서는 곧 종사관 신숙주를 시켜서 글을 지어 소를 올렸다.

'덕으로 나라 땅을 넓히는 자는 얻기가 쉽고 잃지 아니하며, 힘만으로 땅을 개척하는 자는 얻기도 어렵거니와 잃기도 쉽습니다, 일은 같은 듯하나 길이 다른 때문이올시다.'

'진실로 길이 있는 바에 저곳으로 가서 전쟁을 해도 좋습니다마는 하물며 우리 강토를 회복하는 일이겠습니까? 이러하니 싸우지 아니하고 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왕건 태조가 잘 삼한을 통합했다 하나 위력이 삭방까지는 미치지 못했고, 다만 철령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그 뒤 예종 때 오랑캐들을 물리쳐서 구성을 설치했습니다마는 곧 잃어버리고 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국가의 경역은 모두 다 후방에 있습니다.'

'태조께서 삭방에 일어나시어 대동을 두시니, 남으로는 바다까지요, 북으로는 두만강까지 다다랐습니다. 이에 공주, 경성, 길주, 단천, 북청, 홍성, 함주 일곱 골을 설치하시니 동방에 개국한 이래 일찍이 없었던 성업이었습니다.'

'나라가 승평한 지 오래되니 지키는 신하가 막지를 못해서 경성 이북이 그만 적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상께서는 옛 강토를 회복하시는 일을 계승하시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모든 신하들이 의논해 말하기를, 경원진을 총성으로 후퇴시키면, 북방의 배치가 적당하고 민폐가 없어진다고들 했습니다.'

'성상께서는 굳게 결단하시고 미신에게 명하시어 대신들과 의논해서 영북진을 석막에 두어서 계역을 정하라 하셨습니다.'

김종서는 도도수천언에 이르렀다. 김종서의 상소문은 다시 계속된다.

'신이 지금 북방에 있어, 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듣지 아니한 말이 없습니다. 부거와 석막은 모두 다 우리 국경의 한계가 아니올시다. 그리고 용성도 또한 관이나 요새가 될 곳이 아닙니다. 물이 없어서 적을 막을 수 없고, 산이 없으니 거점을 견고하게 설치할 곳이 못 됩니다.'

'사읍 요충에 크게 진을 설치하여, 경원, 경흥, 부령, 회령 네 고을이 연락을 취한다면 좋습니다마는, 논란하는 이들의 말과 같이 용성으로 한계를 삼는다면 오랑캐들의 침범하는 근심을 면치 못할 것이요, 이쯤 되면 또다시 후퇴해서 마천령으로 한계를 삼자 할것이요, 또다시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면 또다시 후퇴해서 철령으로 한계를 삼자고 할 것입니다.'

'용성으로 한계를 삼는다면 첫째로는 의롭지 못한 일이 있고 둘째로는 이하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선조가 사시던 땅을 버리게 되니 의롭지 못한 일이고, 산천의 험한 곳이 없어서 막고 지킬 수 없는 곳이니 이하지 못합니다. 두만강으로 한계를 삼는다면 첫째로 큰 의가 있고, 둘째로 큰 이익이 있습니다. 흥왕의 땅을 회복하니 큰 의가 있는 것이요, 장강을 끼고 웅거하니 둘째로 크게 유리합니다.'

'첫해에 내린 눈이 비록 많이 왔다 하나 소와 말의 죽은 수가 많지 아니하고 다음 해 역질이 크게 퍼졌다 하나 백성들의 죽은 자는 많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의 병화는 비록 중하다 하나 옛적 경흥, 부령, 승우의 전몰과 용성이 결단나던 패전에 견준다면 진실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해 있어 여러 번 침략을 당하게 되니 성곽을 수보하는 일과 갑병을 훈련시키는 일이 다른 도에 비하여 백 갑절이나 됩니다. 비록 금년에 한성을 쌓고 명년에 또 한 성을 쌓아 해마다 성을 쌓는다 한들 무엇이 의리에 해로운 일이라 하겠습니까?'

상소문은 계속된다.

'성스러운 계획이 신묘하시어 백성 한 사람도 채찍질 아니하시고 아전 한 사람도 벌주지 아니하셨건만, 수만 명의 백성들은 겨우 한달 만에 새로운 땅으로 함빡 모여들어서 큰일이 쉽게 성취되고 새 고을은 영구하게 건설되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부박한 무리들이 초년에 내린 큰 눈과 다음해에 퍼졌던 역질을 빙마해서 뜬소문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시켰으나, 다행히 성상의 밝으신 영단으로 뜬소리가 스러지고 민심이 안정되었습니다. 더욱이 지극한 어진 혜택이 흡족하시니 백성들은 수고로움도 잊어버립니다. 오늘날 사읍을 건설하는 것은 전혀 북방을 울타리로 삼자는 것이요, 오늘날에 성곽을 쌓는 것은 변방을 든든하게 하자는 것이요, 오늘날 군사로 수자리를 시키는 것은 적을 방어해서 우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자는 것이올시다.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은 듯하나 신명합니다. 어찌 이 일을 모르고 원망해서 방자한 마음을 일으키겠습니까?'

'한 백성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령과 경원은 이미 성을 쌓았거니와 앞으로 종성과 온성에 성을 쌓아서 두 성이 완공된다면, 우리 백성들은 걱정이 없겠노라 했습니다. 모든 서민들의 마음은 이로 미루어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은 오랫동안 북방에 있어서 야인들의 정황을 잘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부자지간이라 할지라도 욕심이 발동되면 서로 죽이고 서로 해롭게 해서 구수지간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록 날마다 천금을 준다 해도 마음으로 사귈 수는 없습니다. 혹 이로써 사귄다 해도 이가 없어지면 사독해집니다. 겉으로 회유하는 체하고 안으로 비어하는 일을 한다면 우리 형세는 저절로 강대해지고 저의 세력은 굴복될 것입니다. 신이 성곽을 쌓고 병갑을 수선하고 사졸을 훈육하고 양곡을 비축하기에 급급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올시다.'

'신은 듣자오니 선한 사람이 나라를 위하여 백년대계를 마련하게 되면 잔폭한 무리를 없이할 수 있다 합니다. 그러나 비록 선인이라 하더라도 십 년 동안 다스리지 못하면 다스려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상소문은 다시 계속된다.

'하물며 신읍을 설치하는 일은 십 년이 채 못 되지 아니했습니까? 어찌 한 가지 일의 득실로 근심했다가 기뻐했다가 하겠습니까?'

'자고로 밖에서 일을 건설하는 신하는 반드시 참소와 비방을 만나서 화를 면하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 전조 신 윤관 같은 이도 그 표본의 하나올시다. 윤관은 국가의 큰 공훈을 세우고도 명공거경으로도 거의 화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신은 자와 마디 만한 공도 없을 뿐 아니라, 또 사업을 건설할 만한 재질도 없어서 일이 많이 어긋났으니 어찌 한심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만지장서의 수만 언의 상소문은 육진 개척의 어려운 충정을 피력하고, 모해하고 참소하는, 비방하는 무리들을 아프게 꾸짖으면서 국가의 만년대계를 세우는 벅차고 씩씩한 흉금을 토로했다. 한 번 읽어서 눈물이 머금어지고, 두 번 읽어 의분을 금할 수 없고, 세 번 읽어서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천하의 명문이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양의 출사표에 비길 만한 대문장이다. 세종대왕은 김종서의 상소문을 세 번 네 번 읽어보셨다. 한 마디의 첨도 없었다. 한 마디의 허식도 없다. 그대로 나라의 한 치 땅이라도 적에게 버려둘 수 없다는 것을 고생을 참아가며 훼방을 참아가며, 찾아놓고 개척해야 하겠다는 충정을 토로한 것이다. 당신의 굳은 결심을 잘 받아 이행하고 실천해주는, 조정에 다시 짝을 구할 수 없는 어진 신하다. 세종대왕은 상소문을 다시 더 한 번 읽으며 스스로 혼자 탄식했다.

"내가 복이 많아서 좋은 신하를 두어 나라 땅을 회복하는구나! 국가의 천년대계를 위하여, 또는 자손만대에 물려주어야 할 크나큰 유산이다. 국가의 정치를 맡은 임금과 신하는 반드시 이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

독백을 마친 후에 곧 승지와 집현전 학사 성삼문을 명소했다. 전하는 성삼문에게 분부한다.

"내가 불러줄 테니 김종서에게 보내는 비답을 써라."

성삼문은 붓을 잡았다.

'삭방만리에 어려운 일을 결행하는 경의 수고와 고생을 잘 알고 있다. 조정에서 경을 모해하고 비방하는 무리가 비록 천만 명이 있다 할지라도 과인은 경을 믿는다. 과인과 경은 우리들 후손을 위하여 육진 개척하는 일을 기어코 성사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여진 땅이나 명의 땅이 되고 만다. 종성과 온성을 마저 개척해서 이 큰 사업을 완성하라. 나는 결코 고려 때 윤관처럼 경을 박대하지 아니하리라. 내 옷 한 벌을 보낸다.'

성삼문은 쓰기를 다하고 어전에 받들어 올렸다. 한 글자의 착오도 없었다, 전하는 다시 승지에게 분부한다.

"상의원 별좌와 내관을 불러라."

이윽고 전하의 어의를 관장하고 있는 상의원 별좌와 내관이 배알했다. 전하는 상의원 별좌에게 하명한다.

"솜을 두둑하게 둔 나의 비단옷 한 벌을 빨리 들여오너라."

상의원 별좌는 곧 어의 일습을 자개함에 넣어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내관에게 분부한다.

"너는 곧 영북진으로 말을 달려 비답과 어의를 김종서에게 전하고 그의 노고를 위로하여라!"

내관은 어명을 받아 어의와 비답을 받들고 천리마를 타고 영북진으로 달려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연통했다. 김종서는 중관이 당도하자 삼문 밖까지 나가 맞이했다. 왕명을 받들고 온 때문이다. 운주루 앞에 한양을 향하여 배석을 깔고 네 번 절하여 비답과 어의를 받았다. 뜰 앞에는 도체찰사 하경복 이하 각진 절제사와 비장과 사병들 수천 명이 모여 도절제사의 성교와 어의 일습을 받는 광영을 배관하고 있었다. 김종서는 무릎을 꿇고 전하의 비답을 읽는 도중, 감격한 눈물이 쉴새 없이 옷깃을 적시었다. 읽기를 다하자 다시 한양 대궐을 향하여 네 번 절하여 왕은을 감사한 다음 칙사를 향하여 치사한다.

"우악하신 왕은을 어찌 다 보답하오리까. 국가와 백성, 그리고 우리들 자손만대를 위해서 분부하신 대로 종성과 온성을 마저 개척해서 성은의 만분의 일을 갚겠소이다. 이 뜻을 성상께 아뢰어주오-."

내관도 왕명을 받들어 관북 천 리 길에 말을 달리는 도중에 황폐했던 버린 땅에 곳곳마다 수천 명의 이민들이 돌성을 쌓고 밭과 논을 갈아 문전옥답을 이루어, 한편으로 야인의 침노를 막고 한편으로는 식량을 확보하는 눈물겨운 개척의 상황을 살피자, 감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김종서를 향하여 치하한다.

"여러 해 동안 고생도 많이 하셨소이다마는, 천 년 동안 황폐했던 국토가 이같이 낙토로 변했으니 모두 다 대감의 슬기와 용기와 자애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 대로 전하께 아뢰어 대감과 장병과 백성들의 노력을 주달하오리다."

의식이 끝난 후에 칙사인 중관은 전하께서 장병에게 내리는 술과 쌀과 포육을 고루고루 나누어주었다. 수자리하는 군사들은 대왕 전하의 자식같이 사졸들을 사랑하는 성심에 감동되지 아니할 길 없었다. 종성과 온성 험준한 산골 속에 또다시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중관이 돌아간 후에 김종서는 곧 두만강 끝까지 올라가, 종성과 온성을 마저 개척해서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하고, 밭과 논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어리석은 무리들이 아무리 중상하고 훼방을 했으나 이제는 두 진을 마저 개척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니 아무 거리낄 것이 없었다. 김종서가 몸소 종성과 온성으로 올라가 축성하는 일을 지휘하고 있을 때 뜻밖의 일이 생겼다. 팔순 노모가 서울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 김종서에게 부음이 전해지기 전에, 이 소식은 천청에 주달되었다. 전하께서는 곧 장비를 후하게 내리신 후에 중관에게 천리마를 달려 김종서에게 분상을 허락하시고 위로하는 글윌을 내렸다.

'경의 팔십 노모가 세상을 버렸다 한다. 천 리 객지에서 부음을 듣게 되니 망극한 마음 더한층 각별할 것이다. 국가를 위하여 육진을 개척하는 책임이 중하고 크지마는 자식된 도리에 어찌 분상을 하지 아니하랴. 잠시 부하들에게 일을 맡기고 주야배도하여 만년유택을 정하고 자손의 도리를 다하라.'

종서는 팔순 노모의 부음을 듣자 나랏일로 집을 떠나서 지성껏 봉양을 못 했을 뿐 아니라 어머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도 임종조차 못 한 일이 죄스럽고 한스러웠다. 그러나 신하를 알아주는 전하의 위로하는 글월과 분상을 허락하는 분부를 받으니 감격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눈물을 주먹으로 닦고 곧 천리마를 달려 황황히 분상길에 올랐다. 김종서가 서울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전하는 여러 차례 중관을 보내어 위문하고 장사날은 특별히 치제까지 내렸다. 김종서의 강직하고 슬기롭고 충직한 것을 사랑한 때문이다. 이때 김종서가 잠시 서울로 돌아가 어머님의 장례를 치르는 중에 동북면 경원진에는 크나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경원진 절제사로 부임되었던 송희미 관내에 일이 벌어졌다. 송희미는 술과 색이 항상 과했다. 날마다 성 쌓는 감독을 한 후엔 밤에는 반드시 술을 마시고 기생 수청을 들였다. 도절제사 김종서의 책망도 여러 차례 당했다. 조금 근신하는 체하다가 김종서가 어머니의 친상을 만나 서울로 올라간 후엔 다시 술을 마시고 기생 수청을 영문 안에 밤마다 들였다. 오랑캐들은 도절제사 김종서와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에게는 꿈쩍을 못하고 있었으나 경원진 송희미는 항상 얕잡아보았다. 밤이면 곤드레만드레 술에 대취해서 기생을 끼고 잔다는 내막을 수소문해 들은 때문이다. 더군다나 범 같은 도절제사 김종서가 어머니가 돌아가서 서울로 분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랑캐들은 이 기회를 타서 경원진을 습격해서 육진 개척을 훼방하려 했다. 경원진 북방에 칠팔백 명의 오랑캐들은 활과 창과 칼을 준비해가지고 굴을 파고 매복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송희미는 경원진 수십 리 밖에 오랑캐들이 무기를 들고 매복해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도절제사 김종서가 없는 틈을 타서 마음 놓고 술을 마셨다. 좋아하는 기생들을 데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러기를 십여 일을 했다. 오랑캐들은 조선말 잘하는 자에게 조선옷을 입혀 변장을 시킨 후에 날마다 송희미의 동정을 살폈다. 절호한 기회였다. 온유향에 빠져서 취안이 몽롱해진 송희미의 경원진을 습격할 만반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의 일이다. 송희미와 베개를 같이하고 누웠던 기생은 베개 위에서 송희미에게 꿈 이야기를 속삭였다.

"영감! 간밤에 무서운 꿈을 꾸었소. 오랑캐 군사 수천 명이 별안간 쳐들어와서 크나큰 싸움이 썰어졌는데, 구군복을 차리고 앞장서 나가시는 영감을 흉악하게 생긴 호장이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어서 영감의 목을 잘라 가지고 달아나는 악몽을 꾸었습니다. 어찌나 무서운지 온몸에 진땀이 죽 흘렀습니다. 지금까지 소름이 끼칩니다."

송희미는 기생의 꿈 이야기를 듣자 마음속에 불길한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 체했다.

"꿈이란 것은 별것이 아니다. 낮에 생각했던 일이 꿈이 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주사야몽이란 문자가 있느니라. 네가 평상시에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면 어찌하나 하고 항상 겁을 집어먹고 있으니까, 그런 꿈을 꾸었느니라."

타이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마치고 막 밥상을 대하고 있을 때, 돌연 오랑캐 칠팔백 명이 무기를 휘두르며 성을 뛰어넘어 들어왔다. 성 지키던 군사들은 급히 진관으로 달려가 변을 고했다.

"오랑캐들 칠 팔백 명이 칼과 창과 활을 들고 쳐들어옵니다."

송희미는 수청들던 기생의 꿈이 영절스럽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가기만 하면 꿈땜을 해서 목이 잘라져 죽을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겁이 벌컥 났다.

"영문을 굳게 닫고 응전을 하지 말아라."

군사들은 영문을 굳게 닫고 한 사람의 병졸도 나가서 싸우지 못했다. 오랑캐들은 마을로 뛰어들었다. 민가에 불을 지르고 대항하는 백성들을 쳐 죽였다, 곡식을 약탈하고 말과 소 수백 필을 몰아가지고 달아났다. 비장들은 송희미에게 간곡하게 간했다.

"오랑캐들의 적세를 살펴노니 천 명 미만의 오합의 무리올시다. 나가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겁을 내지 말고 싸웁시다!"

송희미는 겁에 질려 싸우자는 비장들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 꼼짝도 하지 아니하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기생의 꿈 생각만 가득했다. 군사 한 명은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칼을 빼어 들고 성을 뛰어넘어 노략질해 가는 오랑캐의 뒤를 쫓았다. 오랑캐 십여 명의 목을 자르고 노략질해 가는 마소 십여 필을 뺏어 돌아왔다. 백성들이 송희미를 원망하는 소리는 단박 서울에까지 전해졌다.

 

김 형석 한 치의 땅이라도

 

세종대왕은 크게 진노했다.

"한 치의 땅이라도 오랑캐들의 진흙밭길이 국경을 넘어 뛰달리게 해서는 아니 된다 했는데, 소위 절제사라는 중한 책임을 맡은 놈이 주색에 침혹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오랑캐들이 쳐들어와도 겁에 질려서 문을 닫고 막아내지 못했다 하니 말이 되느냐. 금부로 잡아 올려서 엄하게 국문한 후에 죽음을 내려라!"

금부도사는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함길도 경원진으로 말을 달려 금부로 잡아 온 후에 새남터 행형장에서 죽음을 주었다. 전하는 송희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쓸모 있는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귀중한 것을 알았다. 김종서 한 사람이 분상을 해서 동북면을 떠난 때문,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났다. 더한층 김종서를 신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관례에 부모가 돌아가면 벼슬을 버리고 거상을 해서 삼년상을 마쳐야만 다시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불문율의 관례이다. 세종전하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김종서로 다시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의 직책을 맡겨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승지를 특사로하여 김종서에게 유시를 내렸다.

'경이 친상을 당하여 서울로 돌아온 후에 경원진에는 송희미의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는 비로소 쓸모 있는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깨달았다. 경이 효도를 다하여 삼년거상을 한다면 육진 개척의 큰일은 완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국가의 큰일을 생각해서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는 길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기복하여 도절제사의 임무를 맡아서 곧 발정하게 하라.'

김종서는 전하의 유시를 받자 곧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죄신 김종서는 돈수백배하고 삼가 글월을 성상전하께 올리옵니다. 죄신의 죄, 태산같이 중하와 자모를 잘 봉양치 못하여 세상을 버리게 했사옵고, 또다시 죄가 바다같이 깊사와 신의 부하 송희미가 죄신이 없는 동안 적을 막지 못했사오니, 신은이 소식을 듣사옵고 거듭거듭 몸둘 바를 모르옵던 중 특사를 보내시어 죄신을 위로하시고, 또다시 기복을 명하시니, 황공한 마음 이길 길 없습니다. 하오나 죄신은 공사 간의 죄가 지중한 자올시다. 대임을 면케 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전하는 김종서의 답상소를 보시자, 다시 승지를 보내 밀유를 내렸다. 밀유란 비밀한 교시다. 명나라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경의 사양하는 뜻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송희미가 경원에서 저지를 일은 경이 없는 동안 일어난 일이니 경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내가 내 생전에 육진을 개척해서 국경을 바로잡자는 것은 다만 여진 야인의 발호를 막자는 것뿐이 아니다. 장내관이 공주에 유련하면서 해동청과 토표 사냥을 한다 한다. 경이 없는 동안에 이곳에 위를 설치한다면 큰일이다. 한 치의 땅이라도 명나라한테 뺏겨선 아니 된다. 깊이 생각하라!'

김종서는 전하의 국가를 위하여 백년대계를 정하시는 위대한 뜻을 더한층 절실하게 깨달았다. 전하의 육진 개척을 결단한 큰 뜻은 조선에 대해 종 노릇 하는 여진족의 발호를 막으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명나라는 원을 멸하고 새로 정권을 잡은 이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요서와 요동에 손을 뻗어 자꾸자꾸 위라는 것을 오랑캐 땅에 건설하고 있다. 여진의 위라는 명칭을 붙인 곳은 모두 다 명의 세력권에 속한다. 만약 명나라 내관 장이란 자가 공주에 재미를 붙여서 두만강 남안인 우리 땅에 위라는 것을 설치하겠다고 우겨댄다면, 이것은 꼼짝 도리 없이 명나라에 뺏기고 마는 것이다.

전하의 한 치 만한 땅도 내버려 두어서는 아니 된다는 큰 결심은, 드러내어 놓고 말씀은 아니했지만 실상은 강대국인 명나라가 이 땅을 뺏어갈 염려가 있는 때문이다. 김종서는 감히 다시 더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혼잣말로 독백을 한다.

"그렇다. 한 치만 한 땅이라도 뺏겨서는 안 된다!"

"여진은 막기만 하면 굴복시킬 수 있지만, 명의 손에 들어간다면 다시는 우리 땅이 되지 않는다. 싸워서 무찌를 수도 없다!"

"한 치만 한 땅이라도 명나라에 뺏겨서는 아니 된다!"

"고려 말엽에 원에게 이 땅을 뺏기듯이 명한테 뺏겨서는 아니 된다!"

김종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종서는 마음속으로 고민했다. 사대부가 아버지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삼년상을 치르지 아니한다면 크나큰 불효자식이라고, 유가에서는 사람으로 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라에 위급한 큰일이 있다. 명나라가 우리 땅으로 들어와서 위를 설치하며 군대를 주둔시킨다면 이러한 위험천만한 일은 없다. 당장 눈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마음을 태평하게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명나라 황제의 칙사인 장내관이란 자는 알목하에 있다가, 추장 부자가 참살을 당해서 여진 내란이 일어난 후에 몸을 피해서 공주인 경원으로 내려와서 토호질을 해서 해동청 보라매와 표범을 사냥한다 하고 명나라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명철한 세종전하는 이 일을 아시고 밀유를 내리신 것이다. 과연 불세출의 영주라고 생각했다. 일이 이쯤 전개되어, 오랑캐들의 흙발길 대신 명나라 군사들의 말발굽이 두만강 이남 동북면 일대를 유린한다면 여태껏 자기가 쌓아 올렸던 먼젓번의 사진 개척도 윤관 장군의 옛일처럼 노이무공이 되고 한 줌 물거품이 되어 스러져버리고 만다. 김종서는 주먹을 들어 상을 쳤다.

'사사로운 집안일로 국가의 큰일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삼년상을 아니 지켰다고 유가들의 비방을 받아도 좋다! 나라가 있고 내 집과 내 몸이 있다. 어머님도 영이 있다면 아실 것이다. 의례적인 삼년거상을 줄이고 마음속으로 삼년거상을 받들자!"

김종서가 마음속으로 전하의 기복 명령을 받들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전하는 또다시 특사를 내보내 유시를 내렸다.

'나는 경이 효도를 다하여 삼년상을 마치려고 하는 그 충정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 당연한 도리다. 그러나 어제 밀지를 내린 바와 같이, 내가 육진을 개척하여 선조가 사시던 우리의 국토를 한 치라도 버리지 아니하려 하는 것은 오랑캐들의 발호를 막으려는 것뿐만이 아니다. 강대국인 중국이 슬며시 우리 국토로 들어와 위를 설치하고 오랫동안 군대를 주둔시킨다면, 반드시 명나라 땅이 되고야 만다. 이리된다면, 나는 만대의 죄인이 되고 만다. 한 치의 땅이라도 왜 남에게 내줄 수 있는가? 경은 나를 보필하는 신하다. 내가 용렬한 임금이 되어 자손만대의 죄인이 된다면, 나를 보필하는 경도 나와 함께 무능하고 용렬한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경은 굳게 기복시키는 나의 지시를 거절하지 말라! 나와 그대는 다 함께 만대의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지극한 부탁을 저버리지 말라! 옛법에 백일종상이 있다. 경은 옛 예법을 따라 삼년거상을 단축하여 백일로 제복하고 나와 경이 다 함께 자손만대의 죄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소를 버리고 대를 취하라. 고기 열 근을 보낸다. 상제 노릇을 하느라고 나물만 먹어서 몹시 쇠약했을 것이다. 몸을 소복하기 위하여 고기를 먹도록 하라! 경이 만약 삼년상중이라 해서 내가 보낸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왕명을 거역하는 불충이다! 알아듣겠는가? 효만 중하다고 생각하고 충을 무시한다면 이것 또한 불효다! 옛말에도 효자의 집에 충신이 난다 하지 아니했는가? 어서, 고기를 들고 기운을 차려서 백일에 일어서라!'

김종서는 네 번 절하고 유시를 받들어 읽자, 눈물이 뎅겅뎅겅 굴건제복의 '눈물받이' 위로 떨어졌다. 인자하고 다정하면서 대의명분을 밝혀서, 믿는 신하에게 충정을 털어 간곡하게 부탁하는 유시다.

'상제 노릇을 하느라고 나물만 먹어서 몹시 쇠약했을 것이다. 몸을 소복하기 위하여 고기를 먹도록 하라!'

'한 치의 땅이라도 왜 남에게 내줄 수 있는가? 경은 나를 보필하는 신하다. 내가 용렬한 임금이 되어 자손만대의 죄인이 된다면, 나를 보필하는 경도 나와 함께 무능하고 용렬한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내가 보낸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왕명을 거역하는 불충이다! 알아듣겠는가? 효만 중하다고 생각하고 충을 무시한다면 이것 또한 불효다!'

김종서는 이 대목에 이르자 목을 놓아 흐느꼈다. 김종서는 눈물을 닦고 유시를 받들어 상에 올려놓은 후에 특사를 향하여 고한다.

"광대무변하옵신 왕은을 어찌 저버리오리까. 자손만대의 죄인을 면키 위하여 전하의 성지를 받들어 백일로 제복하고 동북면으로 간다고 아뢰어주시오."

김종서는 마침내 왕명을 받들었다. 김종서는 백일 되는 날 졸곡제를 마치고 탈상을 한 후에 기복이 되어 어전에 나가 고별을 올렸다. 세종전하는 만면에 기쁜 빛을 띠시고 김종서에게 말씀을 내린다.

"고기는 좀 먹었느냐? 얼굴이 야윈 듯하구나!"

지극히 신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한마디 말씀은 김종서의 뼛골 속으로 포근히 스며들었다. 김종서의 눈에는 감격한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다만 한 마디를 아뢸 뿐이었다.

"떠나려느냐?"

전하는 또 한 번 간단한 말씀을 내린다.

"오늘로 떠나겠습니다."

전하의 용안엔 만족한 빛이 현연하게 넘쳐 흘렀다.

"기어코 종성, 온성을 마저 개척해서 육진을 완성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전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좌우를 돌아보신다. 승지와 내관이 장지밖에 시립해 있었다. 어수를 들어 승지와 내관을 가리키며 말씀한다.

"너희들은 잠깐 물러가거라."

승지와 내관은 전하의 분부를 듣자 황망히 몸을 피해 물러갔다. 넓은 편전 안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김종서와의 독대다.

"온성과 종성엔 다시 더 이민을 시키고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게 하는 한편, 돌로 성을 굳게 쌓아서 국경을 확정시키겠지만 지금 공주에 내려와서, 해동청과 토표를 사냥하면서 토호질을 치고 있는 명나라 장내관은 우리에게 화근덩어리다. 어찌 조처하려 하느냐?"

"죄신도 명나라 사신 장내관에 대하여 많이 생각을 해둔 바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았단 말이냐?"

"이자는 본시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건주위 이만주의 영채를 순찰하던 자올시다. 전하께서 최윤덕 장군에게 하명하시어 건주위 이만주의 소굴을 응징하실 때, 난을 피하여 알목하로 왔었습니다. 알목하게 우디거가 들어와 퉁맹가 부자를 죽여서 난이 일어나니 혼비백산이 되어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공주(경원)에 또다시 내려와서 매사냥과 새끼 범을 잡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겁이 많은 자올시다. 문제없이 쫓아내 버리겠습니다."

"어떻게 쫓아낼 수 있느냐? 경의 의도를 말해보라."

"이번 경원진에는 송희미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곧 장나관이란 자를 경원에서 쫓아내는 좋은 기회가 되겠습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올시다."

"전화위복? 어떻게 전화위복이 된다 하느냐?"

"'우리는 오랑캐의 습격을 응징하기 위하여 크게 전투를 개시할 준비가 완성되었다. 이곳은 불바다가 되기 십상팔구다. 빨리 몸을 피해 건주위로 돌아가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리하면 그자는 겁이 많은 자올시다. 시각을 지체치 않고 달아날 것입니다."

전하의 용안엔 미소가 떠돌았다.

"좋다. 그리하라. 한 치의 땅이라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

김종서의 비밀한 독대는 끝이 났다.

"그럼, 오늘로 곧 발정해서 떠나겠습니다."

김종서는 말을 마치고 숙배를 드렸다. 전하는 분합문까지 납시어 다시 멀리 가는 김종서에게 부탁하신다.

"한 치만 한 땅이라도 뺏겨서는 아니 된다. 만일 그리된다면 경과 나는 만대의 죄인이 된다. 육진 개척은 내 생전에 기어코 완성이 돼야 한다."

전하는 더 한 번 당부가 은근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멀리 가는 김종서의 모습이 스러질 때까지 바라보신다. 전무한 광영이었다.

김종서는 마음속으로,

'밝고 어질고 결단성 있는 성주를 모시었구나!'

감탄하면서 곧 천리마를 다려 동북면으로 향했다.

백일제상을 하고 다시 임소로 돌아오는 김종서 도절제사를 맞이하자, 수자리하는 군사와 모든 백성들은 조모상을 당해서 고향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듯 한편으로는 애절한 복제인사를 하고 한편으로 태산같이 믿는 든든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송희미의 잘못으로 뜨거운 화를 겪은 뒤라 비로소 안도의 숨들을 돌렸다. 김종서는 모든 이민과 수자리하는 군사들을 위로하고, 용감하게 오랑캐를 단신으로 추격하여 마소 수십 필을 뺏어온 군사에게는 특별히 후한 상을 주어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군민의 위로를 끝마친 후에 김종서는 비장 십여 명과 종사관들을 위세 좋게 거느리고 경원에 우거하는 중국 내관 장을 찾았다. 장내관은 김종서가 모친상을 당해서 한양으로 갔다가 백일탈상을 하고 왕상전하의 특명으로 기복이 되어 다시 임소로 돌아오게 된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았다. 장내관은 겁이 많은 자였다. 부하 병졸 삼백 명을 거느리고 다니면서도 날쌔고 표독한 오랑캐들한테 변을 당할까 두려워서 항상 겁을 집어먹었다. 황제의 명을 받아 요동에 설치해놓은 위들을 순무하러 왔건만 마음은 늘 불안했다. 이만주의 소굴 건주위에 영문을 차리고 있을 때는 최윤덕 장군이 건주위를 무찌르게 되니 난리통에 횡사할 염려가 있었다. 조선진에 청을 해서 알목하로 들어와 영문을 설치하고 있었다. 알목하에 오도리족과 우디거 추장의 싸움이 벌어져서 퉁맹가 티무르 부자가 죽게 되니 또다시 경원으로 내려와 영문을 짓고 삼백 명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경원은 산천이 수려하고 논과 밭이 기름졌다. 오랑캐 땅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명나라 사신이라 해서 대우도 융숭했다. 할 일이 없으니 해동청 보라매를 잡아서 길을 들이고, 범의 새끼를 사냥해서 가죽을 벗겨 수십장의 표범껍질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조선 보라매 값과 표범껍질 값은 수천 금이 되는 때문에 일보다도 이에 눈이 밝은 장내관은 강대국의 힘을 빙자하고 오랑캐 못지않게 포수들을 들볶으며 못된 짓을 많이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경원에 두류하면서 건주위로 갈 생각을 아니 했다. 경원진에 두류하면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명나라 황제의 요동 특사 장내관은 반갑게 도절제사 김종서의 일행을 맞이했다. 먼저 김종서에게 경건하게 예를 하여 조의를 표한 후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반갑게 손을 잡으며 말한다.

"사또가 분상하신 동안 나는 오랑캐 놈들한테 죽는 줄 알았소이다. 아주 혼이 났습니다. 경원 절제사 송희미가 쳐들어오는 오랑캐들을 막지 않는 바람에 오랑캐 놈들은 동리에 불을 지르고 민가로 뛰어 들어가서 마구 약탈을 해갔습니다. 송희미는 참 겁이 많은 무능한 절제사입니다."

김종서는 호방하게 웃으며 장내관을 놀려댔다.

"왜 다인(대인의 중국말음)은 중국 군사를 삼백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으면서 오랑캐들을 쫓아내지 못했소?"

장내관은 얼굴빛이 변해졌다. 오만무례한 명나라 사람 특유의 노기를 눈망울에 띠고 대답한다.

"나는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요동을 순무하러 온 특사요! 명나라 특사가 무슨 까닭에 조선으로 쳐들어온 오랑캐들을 막을 책임이 있소? 그것은 사또의 당치 않은 책망이외다."

김종서는 장내관의 말을 듣자, 또 한 번 호방한 웃음을 웃으며 급소를 찔러 말한다.

"그야 그렇지. 다인이 잠시 우리 땅으로 피란 들어온 명나라 관리니까, 조선 땅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아 싸울 책임은 없지! 그렇지만 그때 만약, 오랑캐 마적들이 당신이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왔다면 당신은 어찌했겠소?"

장내관이란 자는 껄걸 웃으며 대답한다.

"싸워야지. 그러나 오랑캐 놈들은 너무나 악독한 놈 아닌가베! 도끼로 머리통을 막 찍어대는 놈들이니 어찌하겠소. 그날 나는 무서워서 영문을 굳게 닫고 나가보지도 못했소. 하하하."

김종서는 다시 껄걸 웃었다.

"그러면서 무슨 송희미가 겁쟁이고 무능하다고 조롱을 하오? 문을 철벽같이 닫고 엎드려 있기는 매일반 아니겠소? 다시는 송희미를 겁쟁이라고 흉보지 마시오."

장가는 무안했다. 얼굴을 붉히며 슬쩍 말꼬리를 돌려 묻는다.

", 송희미는 어찌 되었습니까? 소문 들으니 금부도사가 와서 한양으로 잡아갔다 하는데?"

"왕상전하께서 크게 노하시어 곧 군법 시행을 해서 죽음을 내리셨소이다. 귀국에서는 이런 장수가 있다면 어찌하십니까?"

또 한 번 장내관이란 자를 놀려댄다. 장가는 또다시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러나 대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매일반이올시다. 사형에 처합니다."

김종서는 점잖게 얼굴빛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꺼낸다.

"그러나 장다인, 또다시 피란을 가야 하겠소이다."

장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왜 또 무슨 난리가 납니까?"

"무슨 난리라뇨, 우리 왕상전하께서는 이번 오랑캐 놈들이 장난한 것을 크게 진노하시어 이곳에 있는 오랑캐 놈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두만강을 건너서 소굴을 응징하라 하셨소이다. 이같이 돼 경원 일대가 불바다가 될 것입니다. 빨리 피신을 하시오! 그렇지 않다면 나와 함께 일선에 나가 오랑캐와 싸웁시다!"

명나라 특사 장내관은 경원 일대가 불바다가 되고, 일선에 나가서 함께 오랑캐를 막아 싸우자는 김종서의 말을 듣자, 버쩍 겁이 났다. 둔사를 부려 변명한다.

"나는 조선 사람이 아니라 명나라 사람입니다. 조선으로 노략질해 들어오는 오랑캐들을 막아 싸울 대의명분이 없습니다."

김종서는 서슴지 않고 대답힌다.

"그렇다면 어서 피란을 가시오! 공연히 이곳에 있다가 후림불에 은사 죽음을 한다면 큰일입니다."

장내관은 당황했다.

"언제쯤 난리가 일어납니까?"

"뻔한 일 아닙니까. 내가 왕명을 받들어 삼년상도 마치지 못하고 백일제상을 하고 온 것은 오랑캐를 응징하자고 온 것이 아니겠소? 내일이라도 기병을 하겠소!"

김종서는 위엄기 있는 얼굴빛을 짓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오랑캐들을 무순시키기 위하여 요동으로 왔다가 건주위가 소란한 까닭에 알목하를 거쳐서 이곳으로 잠시 옮긴 것인데, 다시 요동으로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소. 싸움은 내가 떠난 후에 시작해주시오."

장가는 비겁한 눈웃음을 치며 청을 했다. 장내관의 말을 듣자, 김종서는 얼굴에 노기를 띠고 대답했다.

"당치 않은 말을 하는구려. 당신 한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쳐들어오는 오랑캐 놈들을 막아 싸우지 않고 내버려둔단 말씀요. 전쟁을 마음대로 늦추기도 하고 빨리 끝내게 할 수 있소? 어린애 같은 수작을 하는구려. 내일 새벽에 곧 떠나시오. 만약 내 말을 아니 듣는다면 오랑캐와 싸워서 이곳이 불바다가 되더라도 나는 당신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소!"

김종서는 쾌쾌하게 장내관을 꾸짖었다. 워낙 경위에 막히는 말을 해 놨으니 제아무리 강대한 명나라 특사라 하나, 꼼짝할 도리가 없었다. 무안에 취해서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다.

"사또께서 정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일 아침에 일찍 발정해서 건주위로 가겠소이다."

김종서는 비로소 부드러운 말씨로 대답한다.

"잘 생각하셨소. 건주위는 우리가 압록강 남안에 사군을 설치하고 성벽을 굳게 쌓은 후에 이만주가 다시는 침도할 생각을 보기했소이다. 이제는 아무런 병화도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오랑캐들을 잘 무마하고 교화시키시오. 그리하는 것이 명나라 황제의 뜻을 받드는 길이라 생각하오."

김종서는 어린애를 훈계하듯 타이른 후에 곧 큰 소리로,

"이리오너라!"

비장을 불렀다. 비장이 청령하고 군례를 드렸다.

"장내관이 우리나라 소산인 해동청 보라매와 호피를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다. 잘 길들인 매 한 쌍과 곰쓸개 한 보와 표범껍질 다섯 장을 가져다가 선물로 보내라."

비장은 명을 받들어 곧 물건을 들여와 장내관한테 전했다. 탐욕 많은 명나라 특사는 입이 딱 벌어졌다.

"사또! 감사하오. 가보로 삼겠소. 내일 곧 떠나오리다."

"그리하시오."

김종서는 작별을 하고 일어섰다. 다음날, 명나라 특사 장내관은 경원에 병화가 일어나서 불바다가 된다는 바람에 겁이 덜컥 났다. 황황히 삼백 기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서북면 압록강 밖 건주위로 향해 떠났다. 김종서는 성 밖까지 친히 나가 좋은 말로 장내관을 전송한다.

"육진을 완전히 개척해서 오랑캐들의 소요가 없게 되거든 다시 한번 다인을 청하리다. 그때 가서는 맘 놓고 녹혈도 자시고 매사냥도 하고 범 사냥도 하시오."

"또다시 놀러오거든 녹용과 인삼이며 호피와 해동청을 많이 주시오. 그럼 큰일 많이 하시기 바라오."

명나라 장내관은 섭섭한 듯 인사를 하고 떠났다. 김종서는 담략과 슬기가 훌륭할 뿐 아니라 외교수단도 이같이 능란했다. 전하가 항상 염려하는 골치덩어리인 명나라 내관을 이같이 힘안들이고 국경 안에서 쫓아내 버렸다. 애써서 개척해놓은 땅을 강대국인 명나라에서 이러니저러니 하고 욕심을 내서 도독부나 위 따위를 설치하겠다고 한다면 큰일이었다.

김종서는 알목하에서 피란온 명나라 사신을 압록강 건너 건주위로 내쫓은 후에, 경원진의 성벽을 더 수축해서, 다시는 오랑캐들이 방자한 마음을 먹지 못하게 했다. 다시 알목하로 올라가 아직도 안정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오도리 족속들을 위하여 두만강 건너 양지바른 옥토에 평안히 살도록 안주의 땅을 정해주고, 약속한 대로 죽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 대신 파쿠타와 그의 아내 흑의미인에게 양식과 우마와 농경 기구를 풍무하게 주어서 나라의 울타리가 되게 하고, 다시 종사관 박호문을 우디거로 보내서 건주위를 응징할 때, 내응이 되어 조선에 귀순했던 우디거의 딸과 추장에게 건주위 이만주의 간특한 계교를 말살시킨 공로를 찬양한 후에 천리마와 비단과 인삼을 상급으로 내려서 길이길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울타리가 될 것을 다짐받았다.

김종서는 다시 종성과 온성으로 올라가 두 진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일변으로 일을 하면서, 일변 전하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기 위해서 종사관 박호문을 한양으로 보내서 명나라 사신을 쫓아낸 일을 아뢰었다.

'경원에서 매사냥과 범사냥을 하면서 포수와 백성들을 괴롭게 하던 명나라 장내관이란 자를 서북면 국경 밖 건주위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녹용과 노루피를 마시면서 호강에 취해서 아니 가는 것을, 오랑캐가 쳐들어올 때 함께 막아서 싸우자 했더니 그만 겁이 나서 달아났습니다. 갈 때 해동청 한 쌍과 표범껍질과 웅담을 주었더니 탐심 많은 자이오라 무한 기뻐했습니다. 이제 명나라가 국경 안에 도독부나 위 따위를 설치할 기우는 없어졌습니다. 먼저 전하께 주달하와 성심을 편안케 해드립니다.'

전하는 박호문을 통하여 올리는, 명나라 사신 장내관을 국경 밖으로 쫓아냈다는 김종서의 장계를 받으시자 크게 기뻐하셨다. 박호문을 어전에 불려 인견하시고 분부를 내린다.

"김종서한테 잘 처리했다고 일러라. 앓던 이가 빠진 듯해서 시원스럽다! 수자리하는 군사들에게 거핵() 천 근을 보내니 두둑하게 옷을 지어 입히게 하라!"

삭풍이 살을 에는 듯한 극한지방인 온성과 종성에서 마지막으로 육진 개척의 충성을 하는 군사들은, 전하께서 종사관 박호문이 돌아오는 편에 거핵 천 근을 내리시어 눈보라 치는 찬 겨울에 두둑하게 옷에 솜을 두어 입으라 하셨다는 말씀을 듣자 모두 다 감격한 눈물을 흘렸다. 김종서는 곧 이민 온 백성들의 아내에게 솜옷을 지으라 해서 군사들을 두둑하게 입혔다. 수천 리 고향 땅을 떠나서 수자리 하는 군사들의 고생을 알아주시는 어진 임금의 따뜻한 정은 군사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다. 괴롭고 추운 것도 잊어버리고 이틀이나 사흘에 할 일을 하루에 해치워버렸다. 모든 군사가 합심이 되니 온성, 종성 두 진의 성 쌓는 일은 예정보다도 한 달이나 앞당겨 완성이 되었다. 김종서 이하 모든 종사관과 군사들의 기쁨은 하늘만큼 크고 벅찼다. 무한대의 기쁨이었다. 육진의 길고 긴 성곽과 높고 높은 관문은 호호탕탕 수천 리의 만리장성을 이루어 푸른 하늘가에 외외하게 솟았다. 성곽 안 수천 리, 오랑캐들의 말굽이 뛰닫던 넓고 넓은 황폐한 땅은 평안, 황해, 충청, 전라, 경상, 함경의 이민들의 억세고 힘찬 괭이질과 가래질로 옥야천리로 변했고, 청산이 병풍 치듯 둘러싼, 푸른 솔과 잣나무가 무성한 양지바른 곳에는 골짜기마다 열집, 스무 집씩 배산임류해서 아늑하게 새 마을을 이룩했다. 근 십 년 만에 육진 개척은 끝이 나고, 추위가 혹독했던 삭방에도 양춘가절이 돌아왔다. 도절제사 김종서와 도체찰사 하경복은 모든 종사관과 여러 비장들을 거느리고 경원, 경흥, 부령, 회령, 온성, 종성, 여섯 진을 순찰했다. 마을마다 질펀한 밭고랑에는 보리와 옥수수며 조이삭이 파릇파릇 싹을 뿜어서 만간들이 푸른 담요를 펼쳐 논 듯하고, 젊은 이민들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괭이질과 가래질로 개울물을 돌려내서 보 막기에 바빴다. 이민들에게는 십 년 동안 땅세를 받지 아니한다 하니 더한층 벅찬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동리마다 집집마다 아낙네들은 낮과 밤으로 부지런히 길쌈을 해서 북포를 짜고 다듬이질을 해서 남편의 옷을 지었다. 붉은 저고리를 입은 아이들은 희희낙락거리며 한편에서는 씨름을 하고 한편에서는 제기를 찼다. 동리마다 차츰차츰 자리가 잡혔다. 울타리 안에서는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고 울타리 밖 우릿간에는 돼지가 죽을 먹느라고 꿀꿀거렸다. 고려 예종 이후, 삼사백 년을 포기해버렸던 황폐한 천여 리 땅은 이제야 비로소 국경을 완전히 찾아서 호지로 변했던 불모지가 완연히 옥토로 바뀌어졌다. 완성된 여섯 진을 돌아보는 김종서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까닭 없이 국비를 너무 소비한다고 자기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던 자까지 있었다. 김종서는 그자들을 데려다가 한번 보이고 싶었다. 김종서의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번에 흐르는 눈물은, 모든 오나고한 신하들의 중상모력을 단연히 물리치고 이 크나큰 사업을 완성하도록 한 치의 땅이라도 뺏겨서는 아니 된다고 격려해주신 밝은 임금의 용단을 감사하는 눈물이었다. 김종서가 육진을 돌아보는 동안 고을마다 백성들은 아버지를 대하는 듯 반갑게 맞이했다. 김종서가 도임한 이래 여섯 진 안 천여 리 땅에는 오랑캐 군사들의 노략질하는 흙발길이 끊어졌고, 철벽같이 쌓아 올린 천리장성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은혜로운 성벽이었다.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자는 김종서의 피눈물 나는 정성과 얼이 화강석벽의 돌부리마다, 백성들의 마음속마다 깊이깊이 굽이쳐 스며든 때문이다. 더구나 멀리 전라, 경상, 충청, 경기, 황해도에서 이민 온 백성들은 하늘같이 김종서를 우러러보았다. 대대로 구박을 받아가며 간구한 생황을 해온 천민들이었다. 고리백정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양반의 자식들은 어린애들까지도 너라고 부르고 해라를 했다. 대대로 내려오며 철천지한이 되었다. 역졸도 하대를 받았다. 아전도 양반이라는 족속 앞에서는 행세를 할 수 없었다. 이제 이민이 되어 육진 개척의 돌 몇 덩이를 굴리고 나무 몇 짐을 나른 탓으로 면천이 되어 양민이 되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고개를 번쩍 들고 가슴을 활짝 펴서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의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나 그뿐인가. 양지바른 곳에 수간초옥을 짓고 처자식과 오손도손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여 먹으며 단란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생겼다. 문 앞에는 하루갈이 강냉이밭, 이틀갈이 보리밭에 사흘갈이 고량밭이며 한숨갈이 채마밭이 돈 안 주고 자기 땅이 되었다. 그나 그뿐인가. 나라에서는 십 년 이십 년 동안 결전 한 푼을 받지 않는다 한다. 이민으로 온 백성들은 노소남녀를 말할 것 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김종서에게 절을 하고 치하를 했다.

"사또! 사또 덕택에 이제는 저희들이 베개를 편안히 베고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습니까?"

"사또! 저희들은 이민이올시다. 사또 덕택에 상놈이 면천이 되어 양민 행세를 하면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개를 번쩍 들고 버젓이 살게 되었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면서 양반님들의 갖은 학대를 받던 그 철천지한을 이제는 사또 덕택에 싹 풀어버리게 됐습니다. 하해같은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사또! 땅을 거저 주시고 결전도 받아가지 안니하니 이제는 부지런하게 일만 하면 온 집안 식구들이 배를 두드리고 잘살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사또의 덕택이올시다. 오랑캐 놈들도 꿈쩍을 못하게 되고..."

김종서는 가는 곳마다 미소를 지어 백성들을 위로했다.

"모두 다 성상의 은덕이시고 너희들의 합심 협력한 덕으로 이 크나큰 육진 개척의 사업이 이룩되었다! 이제는 오랑캐들도 감히 국경을 엿보지 못할 것이다. 자자손손 복을 많이 누리어 잘들 살아라!"

김종서의 말에 백성들은 더 한 번 감격했다.

김종서는 자신의 지휘와 감독으로 완성이 된 크나큰 육진 개척의 일이 끝난 후에

전하께 장계를 올려 처분을 물었다.

'함길도 도절제사 신 김종서는 삼가 글월을 성상전하 탑전에 올리나이다. 전하의 크나크신 영산으로 결행하신 육진 개척의 위대한 사업은 이제 완성이 되었습니다. 두만강변과 압록강변에 뻗친 수천 리 황무의 땅은 인구가 풍성한 옥야천리로 변했고, 높고 굳게 쌓아 올린 성벽과 관문은 천리장성을 이루어 호기는 감히 엿볼 기회를 잃었을 뿐 아니오라 국경을 명확하게 정해놨으니, 이웃 강대한 나라에서도 딴생각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에서 옮긴 민초들은 부지런히 밭과 논을 개간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시작했고, 마음마다 계견의 소리가 한가로워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성상전하의 특명으로 옮긴 백성들에게는 면천을 해서 양민이 되게 하였고, 또다시 논과 밭을 나누어주어 세를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도록 별은전을 내리시니, 서민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 성대의 편안한 백성이 되었다고 기리는 소리가 대단합니다. 이제 소신의 임무도 끝났습니다. 함경도 출신의 정예 군사들만 수천 명 남겨두고 십 년 동안 수자리했던 서울 군사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늙은 부모를 봉양하고 오래간만에 처자식과 만나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황공무지하오나, 소신 또한 과만이 지난 지 이미 오래올시다. 도절제사의 임무를 면제해주시옵기 엎드려 바라옵니다. 연하옵고, 다시 아뢰옵니다. 도체찰사 하경복도 연만한 재상으로 십 년 가까운 세월에 노고가 많았습니다. 서울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도록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육진 개척의 큰 사업이 완결되었다는 장계가 올라가자 전하는 크게 기뻐하셨다. 곧 승지를 불러 비답을 내린다.

'한 치의 나라 땅도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경들의 지극한 노력으로 이제 육진 개척의 일이 완성되었다 하니, 내 마음 기쁘기 한량없다. 첫째로는 경 이하 여러 절제사의 슬기와 노력으로 이 큰 사업이 완성되었고, 둘째로는 수자리하는 사졸들의 끈기 있게 참은 일로 이 큰 사업이 이룩되었다. 셋째로는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생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민 온 백성들의 진지한 노력으로 이 큰 사업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기쁜 일은, 한 대의 화살과 한 자루의 칼을 쓰지 아니하고 이 거창한 사업을 이룩했으니 이제 나는 베개를 편안히 하여 다리를 뻗고 안심하며 침소에 들게 되었다. 지난번에는 만리창파를 헤치고, 대마도를 소탕하여 나라의 위엄을 드높였고, 이번에는 서북면과 동북면의 오랑캐들을 응징한 후에 국계를 명확하게 정해놓았으니, 이제 나는 선조의 업적을 계승해서 자손만대에 크나큰 복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모두 다 경 이하 군과 민에게 고맙다는 말을 보낸다. 끝으로 경의 소원에 의하여 하경복의 도체찰사와 경의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임무를 면케 한다. 그러나 경의 후계자가 있어야 하겠다. 경을 대신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 그리고 십 년 동안 수자리했던 군사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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