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한국은 동북으로 두만강과 서북으로 압록강을 격하여 만주대륙과 접경해 있고, 남해 바다를 격하여 섬나라 일본과 이웃해 있다. 일본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문화와 식량의 혜택을 많이 입어서 성장해왔고, 대륙 만주에 흩어져 있는 여진족속들도 우리의 경제력과 문화며 식량의 뒷받침을 받아서 생활을 영위해왔다. 일본에 대해서는 부산진, 울산, 웅천 삼포를 개방하여 그들의 입주와 왕래를 허락하고, 해마다 세견미의 명칭으로 몇천 섬의 쌀을 주어서 먹여 사렸다. 여진에 대해서도 고려 때부터 그들을 위무하여 호군과 만호, 천호의 벼슬을 주고, 조공을 바치러 들어오면 후하게 상을 주어서 벼슬가자를 올려주기도 했다. 더구나 여진은 태조의 출생지인 함흥, 영흥과 거리가 가까울 뿐 아니라. 태조의 고조 이안사가 고향인 전주에서 감사와 기생을 두고 사랑싸움으로 다투다가 감사의 노여움을 사서 신변이 위태로우니 가족과 낭당 수백 명을 데리고 삼척 활기동으로 솔가도주를 했다. 그 수에 감사가 또다시 삼척의 안렴사로 부임하게 되니, 이안사는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격이 되었다. 부랴부랴 가솔을 데리고 덕원 적전사로 달아났다. 이때 이 땅은 원의 영토로 있는 때문에 감사는 다시 이안사를 잡지 못했고, 이안사는 교제와 활동을 잘해서 원의 벼슬 다루가치까지 받고 대대로 살았다. 그 후에 태조가 왕이 되어 용명을 안팎에 떨치니, 여진족속들을 한국을 상국으로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조공을 바치고 명예로운 칭호를 얻는 것을 일대의 영광으로 삼았다. 그러나 땅은 넓으나 산은 험하고 토지는 척박했다. 배가 고프면 노략질하러 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오랑캐들은 여자가 또한 귀했다. 우리 백성들의 촌락에 불을 지르고 젊은 여자와 처녀들을 겁탈해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그 행동이 마치 대마도 왜적의 떼와 흡사했다. 왜와 여진은 우리나라의 남과 북에 있는 골치 아픈 암의 존재였다. 여진은 원래 퉁구스족의 혈통을 받은 동북 만주의 원주민이었다. 우리나라 고려 시대에는 금국을 건설하여 글안의 요를 멸하고 만주를 장악한 시대도 있었다. 그 후에는 몽고인 원의 지배를 받았다. 여진족속은 세 부류가 있었다. 흑룡강 줄기와 연해주에 걸쳐서 고기잡이로 생활해 내려오는 야인여진이 있고, 수렵과 목축으로 생활하는 두만강과 압록강 북편 산간부락에 살고 있는 건주여진이 있고, 송화강 유역, 하얼빈, 장춘 등지에 걸쳐 있었던 해서여진의 세 종류가 있었다. 여진은 지세로 보아 중국의 대륙과 한국 반도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었다. 이 까닭에 한국과 중국의 미묘한 이해관계를 갖게 했다.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까지 큰 세력을 뻗었던 부여와 고구려의 시대를 지나서 고려 때는 동북면과 서북면의 지역을 불모의 땅이라 해서 돌아볼 생각을 아니했고, 중국은 왕건이 교체되어 나라 이름이 바뀔 때마다 영토의 확장을 위해서 자주 여진 부락을 정벌했다. 그러나 워낙 요동은 본토에서 먼 까닭에 정복하고 관찰하는 데 무한한 힘이 들었다. 이런 까닭에 여진족들은 제법 방자하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 우리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여 분탕질했다. 변지의 백성들은 밤에 베개를 편히 베고 잘 수 없었다. 고려 예종 때 일이었다. 윤관 장군은 조정 문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임금의 밀지를 받들어 불모의 땅으로 버려두었던 북편 땅을 찾으려 했다. 역시 북진사상의 발로였다. 고려민족이 흥왕하게 뻗어 나갈 길은 오직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서 북으로 뻗어 나가 고구려의 옛 강토를 찾아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졌다. 이러한 사상은 묘청과도 서로 통하는 생각이었다. 윤관은 17만 매병력과 승군 3백 명을 항마군이라 표방하고, 마천령 험악한 산과 고개를 넘어서 국경 안에 있는 여진을 소탕한 후에 흑룡강성과 포염사덕에 국경비를 세우는 한편, 길림성 연길현에는 정계비를 세우고, 시베리아 수청층벽엔 '고려대장군 윤관 과차'라는 글씨를 새겨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그는 이내 군사를 머물러 아홉 성을 쌓으니, 덕원, 함흥, 북청, 단천, 길주, 경성, 종성, 경원, 혼춘이다. 경원에는 내방어소를 두고, 혼춘에는 외방어소를 두어서 다시는 여진족속들이 침범치 못하도록 튼튼한 방위선을 이룩했던 것이다. 이후로부터 여진은 고여에 조공을 바치고 충성을 다했다. 이러하므로 '문헌통고'에는 '신사글안 노사고려'라 했다. 신하가 되어 글안을 섬기고 종이 되어 고려를 섬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 고려의 위정자들은 점점 문약해졌다. 윤관 장군이 십칠만 대병과 함께 피 흘려 쌓아논 아홉 성을 포기해버려, 글안이 망한 후에는 몽고족인 원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러구러 고려말이 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 황녀 노국공주와 혼인한 후에 고려에 돌아와 쌍성을 회수했다. 쌍성은 영흥과 함흥이었다. 이때 쌍성회수에 내응이 되어 공이 컸던 사람이 바로 이자춘이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요, 세종대왕의 증조부다. 이자춘은 그의 증조 되는 이안사가 전라도 전주에서 사랑하는 기생을 감사한테 뺏기고 싸움을 하다가 감사의 보복이 두려워서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로 거접한 후에 대대로 그곳에 살아서 원의 만호 벼슬을 했다. 여러 대를 살아온 그의 세력은 여진과 쌍성에서 대단한 존재였다. 원의 국세가 약해지는 것을 살펴본 이자춘은 조국인 고려의 공민왕을 찾아뵙고 자기가 내응이 되어 쌍성을 탈환할 계책을 건의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크게 기뻤다. 곧 밀직부사 유인우로 십만 대병을 거느려 쌍성을 치게 하고, 이자춘은 내응이 되어 원나라의 쌍성총관 조소생을 계교로 사로잡았다. 이로 인하여 고려 고종 때 원나라한테 뺏겼던 서북과 동북 수천 리 땅이 완전히 고려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 공로로 이자춘은 쌍성소윤이 되고, 아들 이성계는 소년 명장으로 용맹을 떨치면서 고려의 장성이 되어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는데, 마침내 원을 배반하고 명한테 호감을 사는 저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해서 칼을 본국으로 향하여, 고려조정을 쳐부수고 조선국을 창업하여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부터 여진은 태조 이성계의 위엄에 더욱 눌렸다. 조공을 바치면서 다시 종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노릇을 하는 것은 덮어놓고 종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귀하니, 먹고 입기 위하여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조공을 바치고 상급을 받아가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몇십 명, 몇백 명씩 작당을 해서 우리 촌락을 습격했다. 곡식과 소와 말을 노략질하고 여자를 뺏어갔다. 군사를 움직여 쫓으면 달아나고, 부드럽게 무마하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우리 땅에서 살았다. 땅이 기름지고 모든 물화가 자기네들보다 월등하게 좋은 때문이다. 그들은 산악지대에서 성장한 때문에 사냥을 잘하고 말을 잘 탔다. 말 탄 불한당 떼가 되기도 하고 명화적 패가 되기도 해서 촌락을 무찔러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 이럴 때마다 우리편 진관과 저편의 마적 떼와는 크고 작은 충돌이 항상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일이 조금 크게 벌어지면 여진 추장들은 사실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고 죄를 청했다. 이편에서는 화하기 어려운 백성이라 해서 언제나 항상 회유책을 썼다. 뿐만 아니다. 왕조로서는 조상이 대대로 살던 곳이요, 또 한편으로는 왕업을 이룬 발상의 땅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능묘가 있는 곳이라 해서 언제나 은혜와 위엄이 병행하는 정책을 써서 그들을 포섭하고 대접했다. 이것이, 여진족과 우리 국민이 혼동해서 사는 함경도의 끝과 평안도의 말단인 동북면과 서북면을 다스리는 국가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세종 때 크나큰 사건이 압록강의 대안에서 일어났다.
서북 사군과 동북 육진 테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에 쓰러지는 원을 멀리하고, 새로 일어나는 한족인 영에 대해서 선린 정책을 썼다. 명도 또한 신흥한 조선에 호의를 가졌다. 명나라에서는 중원을 통일한 후에 만주에 손을 뻗쳐 영토경략을 시작했다. 압록강 북편 서북 여진에, 이만주라는 추장 아래 강력한 족속이 있었다. 압록강의 큰 지류인 파저강에서 남으로 내려온 오랑카이 족속이었다. 요동에서 명나라 군사와 크게 싸우다가 패잔병의 일부인 56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서 우리 국경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명나라에서는 선린인 우리나라에 패잔병을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예조에서는 명나라에서 보낸 공문을 받자 곧 전하께 품했다.
"명나라가 건주여진 오랑캐를 정복하려고 싸우는 중, 오랑캐의 패잔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우리 땅으로 도망해 들어왔습니다. 명나라가 여진의 도망병을 자기 나라로 넘겨달라 하니, 어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감히 아룁니다."
전하는 말씀을 듣자 난처하게 생각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켜 생각 속에 빠졌다가 이내 분부를 내렸다.
"대신과 장신들로 조직된 중추원 회의를 열게 하라."
이때, 전부터 있던 삼군부는 정삼품 아문으로 강등이 되고, 의정부 대신과 대장군 등으로 조직된 최고회의의 중추원이 설립된 때문이다. 정원에서는 어명을 받들어 대신과 장신들을 급히 소집해서 어전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황희를 위시하여 육조판서가 모여들고, 장군 측으로는 최윤덕, 김종서 등 위풍당당한 범 같은 대장들이 참여했다. 중추원 인원들이 다 모인 후에 전하는 옥좌에 임했다.
"예조를 통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보낸 공문을 경들도 이미 알았을 것이다. 나 혼자 독단을 내리기 어려워 경들을 부른 것이다."
전하는 먼저 어전회의를 소집한 경위를 설명한 후에 다시 말씀을 내린다.
"명나라는 국세가 차차 신장이 되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만주에 손을 뻗쳐 건주여진과 싸움을 시작했다. 이기고 지는 판가름은 아직 나지 아니했으나. 여진 군사 수천 명이 명군과 싸우다가 패잔병 5백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우리 영토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한다. 일이 간단치 아니하고 미묘하므로 경들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극히 작은 일인 듯하나 큰일이다. 경들은 좋은 의견을 말하라."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압록강 이남 서북면 말단은 비록 우리 영토라 하나 고려 때 윤관이 구성을 쌓았다가 이내 폐기하다시피 했습니다. 지금 여진과 우리 백성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여진의 도망병을 잡기 극히 곤란할 듯합니다. 하회를 좀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좌의정 맹상성의 진언을 듣자 세종전하도 의견을 말씀한다.
"나 역시 속단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진은 우리나라를 상전같이 생각하고 있고, 명나라는 또 우리와 선린의 관계를 맺고 있다. 여진을 해롭게 할 수도 없고, 명나라의 청하는 일을 물리치기도 어려운 일이니, 극히 난처한 일이다."
전하가 막 말씀을 끝마쳤을 때, 정원에서 급히 장계 한 통을 받들고 승지가 들어왔다.
"서북면 병마절도사가 파발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습니다."
"무슨 장계냐? 읽어보아라!"
전하는 승지에게 낭독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승지는 장계를 받들어 읽는다.
"서북면 절도사 신, 삼가 장계를 아뢰옵니다. 명나라 요동총관이, 예부에 자문을 보낸 지 여러 날인데 어찌해 아직껏 소식이 없느냐 하고, 빨리 여진의 도망한 군사 5백여 명을 잡아서 넘겨 달라 합니다. 여진은 본국 사람들과 혼동해 사는 때문에 수색하기 극히 곤란할 뿐 아니라, 때로는 국경을 넘어서 노략질을 하는 무리들이올시다마는, 소국으로 자처해서 신하 노릇을 하는 오랑캐를 잡아서 인도하기는 인정상 어렵습니다. 요동 총관에게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하교를 바랍니다."
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중신들은 장계 읽는 소리를 귀기울여 들었다. 전하가 막 말씀을 꺼내려 할 때, 정원에서 또 한 사람의 승지가 장계 한 장을 받들고 어전에 바친다.
"무어냐?"
"서북면 절도사가 또 파발마를 달려서 장계를 올렸습니다."
"여러 대신들이 다 듣게 크게 읽어보아라."
"먼젓번 장계는 하감하셨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건주 오랑캐 이만주가 신에게 사자를 보내서 조선 국경을 넘어간 저희 군사 5백여 명을 명나라 군사한테 넘겨주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인정상 딱합니다. 두 틈에 끼여서 처리하기 난처합니다. 속히 교시해주시옵기 바랍니다."
세종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대신들은 사태가 점점 긴박해지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전하는 좌우에 모인 대신들을 바라보시며 말씀을 내린다.
"연거푸 들어오는 장계를 보니, 일이 미묘한 것을 벗어나 약간 긴박해지는 듯하다. 아까 맹정승의 하회를 기다려보자는 말은 이미 시기가 지난 것 같다."
"그러합니다. 좌의정 맹사성의 시기를 기다려보자는 의견은 이미 때가 늦은 듯합니다. 여진 편을 들든 명나라 편을 들든 두 길 중에 한 길을 택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입이 무거워 말이 없던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오랑캐가 바다의 왜추들과 함께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암 덩어리인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라도 조공을 바쳐서 복정하는 무리를 죽는 땅으로 넘겨주는 것도 인정상 어려운 일이로구나!"
전하는 아직도 인자한 말씀을 내린다. '다른 나라의 족속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어찌 5, 6백 명씩이나 죽는 땅으로 넘겨줄 수 있느냐' 하는 인자한 대왕의 말씀을 듣자, 명성이 일세를 진동하는 노장군 최윤덕이 백수를 흩날리려 아뢴다.
"전하께서는 너무나 어질고 착하십니다. 그러나 종묘사직과 국가의 안위는 인자하신 것 한 가지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은 고립해 살 수 없습니다. 국제간의 정세를 소상하게 살피셔야 합니다. 지금 명나라는 중원 천지를 통일하고 다시 손을 뻗어 요동을 경영한 후에 또다시 만주를 겸병하려 합니다. 만약 인정에 구애되어 여진을 옹호한다면, 반드시 명나라 조정은 우리를 의심하여 크나큰 보복 행동을 취하리라 생각합니다. 공연히 5, 6백 명의 여진 군사를 두호하다가 크나큰 해를 우리가 입게 된다면, 이것은 마치 대하의 홍수를 호미로 막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통촉하시와, 절도사로 하여금 여진의 패잔병을 명나라 군사에게 넘겨주라 엄명을 내리시옵소서."
"대장군 최윤덕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큰일을 위하여 작은 인정을 버리시옵소서. 서북면 절도사에게 급히 전교를 내리시어, 도망쳐 들어온 여진 군사를 명나라 요동 총관에게 인도해주라 하시옵소서."
전하는 길게 한숨을 짓고 말씀한다.
"그 지긋지긋한 사대를 경들은 나에게 권한단 말인가?"
대제학 변계량이 고한다.
"그것은 사대가 아니올시다. 한낱 외교의 방침이올시다. 능란한 정치외교는 물건의 중량을 저울질해 알아보듯 이해를 비교해서 처리하는 것이올시다. 태조대왕의 위화도 회군도 역시 국제정세를 재빨리 판단해서 처리하신 것이올시다. 만약에 태조대왕께서 고려조정의 말씀만 들어서 원을 돕고 명에 대하여 칼을 뽑으셨던 들, 백성들은 까닭없이 명의 병화를 입어 어육이 되고, 이 땅은 초토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덮어놓고 사대라고 폄할 것이 아니라, 기민하게 국제정세를 살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점을 살피시옵소서."
대장군 최윤덕이 다시 고한다.
"전하! 소신은 아직 늙지 아니했습니다. 만약에 건주여진이 자기편 도망병을 명군에게 인도했다 해서 공손치 않은 일이 있다면, 소장이 압록강을 건너 오랑캐의 소굴을 무찔러서 절대로 후환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너무 인정에 구애되지 마시옵소서. 오랑캐는 왜추와 같이 우리나라의 화근덩이올시다!"
최윤덕의 씩씩한 기개는 만좌를 눌렀다. 최윤덕은 자를 여화라 하고 호를 임곡이라 했다. 그의 선조는 통천에 살았고, 그의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최운해다. 최운해는 태조대왕을 섬겨서 삼군을 통솔했던 이름난 명장이었다. 최윤덕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구슬픈 이야기가 있었다. 윤덕이 거적자리에 떨어진 지 몇 달이 못되어서, 어머니는 산후에 뒤끝이 좋지 못해서 애처롭게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때 그의 아버지 최운해는 호반인 때문에 변지를 지키고 있었다. 나라의 국방을 맡은 몸이었다. 아내가 죽었다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인편으로, 이웃에 사는 고리백정의 아내에게 젖을 먹여서 길러 달라고 부탁을 했다. 백정의 아내는 항상 최씨댁 은고를 많이 받으며 살아왔던 터이다. 혈혈단신 의탁할 곳 없는 핏덩이 아기가 가엾고 불쌍했다. 친자식처럼 강보에 싸서 젖을 먹여 길렀다. 아버지 최운해는 윤덕을 백정의 집에 맡긴 후에 여전히 변지로 돌아다니며 만호, 첨사, 조방장 노릇을 했다. 남으로 가면 왜적을 막고, 북으로 부임하면 오랑캐와 싸웠다. 어린 아들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백정 내외는 윤덕을 친자식과 같이 길렀다. 윤덕도,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의 용모도 알지 못했다. 백정을 친부모로 생각했다. 돌이 지나고 세 살 네 살이 되었다. 다섯 살이 되니 동리 서당을 찾아가서 입학을 시켰다. 윤덕이 백정의 자식이 아니라 무관 최운해의 아들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뒷길을 보아 정성껏 가르쳤다. 윤덕은 총명했다. 동리의 여느 아이들보다 글공부가 일취월장이 되었다. 백정은 사냥을 잘했다. 말을 잘 타고 활도 잘 쏘았다. 노루를 잡고 사슴을 쏘았다. 윤덕은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백정을 따라다니며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백정은 윤덕에게 활 쏘는 법과 말 달리는 묘법을 가르쳐주었다. 몇 해가 지났다. 윤덕의 나이 십육칠 세가 되었다. 산속으로 말을 달려 제법 노루와 사슴을 잡아서 짊어지고 내려오기도 했다. 하루는 윤덕이 나무를 하러 산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별안간 칡범 한 마리가 숲속에서 사람 냄새를 맡고 '어흥' 소리를 치며 뛰어나왔다. 윤덕은 깜짝 놀랐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허리에 찼던 활을 잽싸게 끌렀다. 살을 시위에 메겨, 주홍 같은 입을 딱 벌리고 덤벼드는 칡범의 목구멍을 향하여 정통으로 쏘아붙였다. 칡범이 천둥 같은 비명을 지르며 붉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화살 한 대로 본때 좋게 백소지왕인 맹호를 쏘아 죽였다. 윤덕은 뜻밖이었다. 살 한 대로 칡범을 쏘아 죽일 줄은 자기 자신도 몰랐다.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유유하게 칡범을 끌고 동리로 내려갔다. 온 동리가 발끈 뒤집혔다. 소년 장사가 났다고 떠들어댔다.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동리 사람들은 호랑이를 끌고 가 관가에 바쳤다. 성주는 비로소 윤덕이 최운해의 아들인 것을 백정에게 들어서 알았다. 백정에게 가상하다고 칭찬한 후에 상금을 후히 주고 군관을 시켜서 윤덕을 그의 아버지한테로 데려다주어 장군의 재목이 되게 하라 했다. 이때, 윤덕의 아버지 최운해는 합포진 첨사로 있었다. 윤덕과 백정은 군관의 인도로 여러 날을 걸어서 합포진에 당도했다. 윤덕은 비로소 아버지를 뵙게 되었다. 백정은 윤덕이 칡범을 화살 한 대로 쏘아 잡은 일과 모든 무예가 뛰어나게 출중한 것을 자랑했다. 아버지 최운해는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윤덕을 향하여 물었다.
"말을 달릴 줄 아느냐?"
"조금 타보았습니다."
꿇어앉아서 공손히 대답했다.
"사냥도 좀 해보았느냐?"
옆에서 백정이 대신 대답한다.
"사냥을 잘 하고말굽쇼. 노루와 사슴을 부지기수로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디 내일 나하고 사냥을 한번 해보기로 하자!"
이튿날, 합포진 첨사 최운해는 군관들에게 사냥령을 내렸다. 몰이꾼이 수십 명 앞을 서서 나가고, 첨사 최운해와 아들 윤덕은 준마 두 필에 각각 올라 몰이꾼의 뒤를 따랐다. 청산은 첩첩하고 계곡은 무성한 숲 사이로 양장구곡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앞에서 말을 달리고 아들이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 달리는 기술을 구경하려 했다.
"네가 앞에서 달려라!"
길목이 몹시 좁았다. 옆은 천야만야한 낭떠러지 절벽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찌하는지 꼴을 보려는 것이다.
"아버님의 앞을 서기 죄송합니다."
윤덕은 조용하게 대답했다.
"관계치 않다."
"그러면 뛰겠습니다."
윤덕은 말을 마치자 고비를 바싹 당겼다. 발로 말 배때기를 강하게 질렀다. 말은 '어흥' 소리를 지르며 공중으로 까맣게 솟구쳤다. 앞에서 달리는 아버지의 머리 위로 퍼뜻 뛰어넘었다.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를 살짝 피해서 아버지의 앞을 섰다.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기뻤다. 그러나 칭찬하는 말은 일부러 보내지 아니했다. 산골 속에서 몰이꾼의 함성이 크게 울리면서 토끼와 노루와 멧돼지들이 몰려나왔다. 윤덕은 좌우로 번개 치듯 달리며 활을 쏘았다. 짐승들은 질펀하게 쓰러졌다. 열 번 쏘아 일고여덟 번은 어렵지 않게 맞히었다. 몰이꾼들의 환호성이 천지에 진동했다. 도령 최윤덕의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칭송이 대단했다. 아버지 최운해는 마음속에 가득히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런 칭찬도 하지 아니했다. 어린 아들에게 교만한 생각을 갖게 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얼마 후에 사냥을 파하고 내아로 돌아왔다. 밤에 군관과 백정이 있는 앞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웃으며 일렀다.
"너의 활 쏘고 말 달리는 모습을 보니 제법 민첩하고 날쌔다. 그러나 아직도 미흡한 점이 상당히 많다. 법을 배워야 한다. 병서를 읽어서 진법을 터득해야 하겠다."
이튿날부터 아버지는 아들에게 병서와 진 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몇 해 뒤의 일이다. 최윤덕은 무과를 보아 당당하게 급제를 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변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윤덕의 지위는 점점 높아졌다. 세종 원년에 대마도 왜적들이 서해 바다를 침범해 들어와서 노략질과 야료가 무쌍했다. 세종대왕은 크게 노하여 최윤덕으로 삼군도절제사의 중임을 맡겨서 도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전함 칠백여 척과 주사 만칠천 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 최윤덕은 천신산 아래서 적을 소탕하고 크게 이겨 돌아왔다. 개선군이 들어오자 세종대왕은 낙천정까지 친히 납시어 삼군을 호궤한 후에 윤덕에게는 우찬성 겸 평안도 병마도절제사에 안주목사를 염임케했다. 최윤덕은 이처럼 당대의 큰 장성이었다. 최윤덕은 장신의 높은 지위에 있은 지 삼십 년에,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청백했다. 안주 목사로 있을 때 일이다. 삼문 옆에 빈터가 있었다. 윤덕은 한 치 만한 땅이라도 공지로 버려두는 것은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공무를 본 여가에 손수 괭이질을 해서 밭을 갈고 참외를 가꾸고 있었다. 아랫사람들이 다투어 간했다.
"사또께서 어찌 손수 괭이질을 하시고 밭을 가십니까. 소인들에게 맡겨주십쇼."
"사또는 별사람이냐? 사또도 일을 해야 한다. 사람은 일을 해야만 입에 밥이 들어가는 법이다. 보아라. 일하니 저렇게 훌륭한 참외가 탐스럽게 열리지 아니했느냐? 하늘은 부지런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법이다."
모든 아전과 군노사령들은 크게 감동했다. 안주 일판에 새로운 근로 기풍이 울연히 일어났다. 먼 촌락에 떨어져 사는 젊은 백성 한 사람이 있었다. 원님한테 송사할 일이 있어 읍으로 들어왔다. 삼문 옆에서 텁수룩하게 차린 농부가 참외밭에서 참외를 가꾸고 있었다. 촌 백성은 안주 병영에서 일하는 머슴으로 알았다.
"여보게, 지금 사또께서 어데 계신가?"
"왜 그러오? 사또는 왜 찾소?"
윤덕은 시침을 떼고 물었다.
"소지를 바치고 송사할 일이 있어서 그러네."
"저기, 저 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사또가 계신 대청이 있소. 그리로 들어가서 물어보오."
윤덕은 속여서 대답하고 뒤로 돌아 운주루에 올라 관복으로 갈아입고, 청에 나와 송사를 받았다. 소지를 울리는 백성이 바라보니, 사또는 별사람이 아니라 삼문 옆에서 참외를 가꾸던 사람이었다.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서 안주 목사 최윤덕의 부지런하고 검소한 일은 안주 한고을뿐 아니라 평안도 일판에 자자하게 퍼졌다. 백성들은 모두 다 혀를 둘러 자탄하며 존경했다. 사또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실천궁행하는 행동은 평안도와 함경도 일판에 새로운 근로 정신을 물결쳐 일으켰다. 같은 해의 일이다. 하루는 젊은 여자 한 사람이 호곡하면서 삼문 안으로 들어와 사또를 뵙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안주목사 최윤덕은 지체없이 곧 여자를 청 앞으로 불러들였다. 젊은 여자는 호흡을 텅치 못할 정도로 애통한 울음을 느껴가며 울고 있었다.
"웬일이냐? 말을 해라. 슬피 울기만 하면 어찌했느냐. 울음을 그치고 말을 해라!"
"쇤네는 산골 외딴 속에 화전을 갈아 먹고 사는 백성이올시다. 간밤에 호랑이가 내려와서, 제 남편을 물어갔습니다. 호랑이를 잡아줍시오. 남편을 살려줍시오!"
여인은 말을 마치자, 이내 땅에 쓰러져 곡지통을 했다. 울음소리가 너무나 애절하고 처량했다. 목사 최윤덕은 창자를 에는 듯한 젊은 여인의 울음소리에 유연히 마음이 흔들렸다.
"간밤이라 하니 어느 때쯤 되었느냐? 초저녁이란 말이냐, 새벽이란 말이냐? 기삭을 말해보아라!"
"산골에서 시각을 어찌 짐작합니까. 한잠 늘어지게 자다가 이 봉변을 당했습니다."
"호랑이가 네 집으로 뛰어들어 물고 갔느냐?"
"아니올시다. 제 서방이 소피를 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별안간 사립 작문 밖에서 외마디 소리를 치기에 급히 쫓아나가 보니 바윗덩이만한 칡범이 쇤네의 서방을 입에다 물고 나는 듯이 달아났습니다. 그저 사또님, 남편을 살려줍시오."
"한잠 늘어지게 자다가 호랑이한테 물려갔다면 네 서방은 벌써 죽은 사람이다. 호랑이가 여태껏 살려두었을 리 만무하다. 어찌하는 수가 없구나?"
젊은 여인은 최목사의 말을 듣자 목을 놓아 통곡했다. 최윤덕은 관비를 불러, 여인을 어루만져 달래게 했다. 여인은 엉엉 울면서 당상을 바라보며 애원한다.
"사또! 제 서방이 이미 죽었다면 하는 수 없습니다마는, 사또께서 원수를 갚아줍시오, 이 철천지한을 어찌합니까?"
젊은 여인은 몸부림을 치며 데굴데굴 굴렀다. 최윤덕은 여인을 향하여 물었다.
"식구가 몇이나 되느냐?" "늙은 시어미와 단 세 식구가 화전을 갈아 먹고 살다가 이 지경을 당했습니다. 쇤네의 뱃속에는 태기가 있습니다. 사또, 그저 원수를 갚아줍시오! 명정지하에 그저 호랑이를 잡아서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여인은 또다시 목이 메어 울었다. 뱃속에 태기가 있다는 말에 최목사의 마음은 또 한 번 움직였다.
"태기가 있다니 몇 달이나 되었느냐?"
"만삭에 가까웠습니다. 아홉 달이 되었습니다." 최목사가 자세히 여인의 몸을 바라보니 과연 배가 불렀다. "화전을 갈아서 무엇을 붙여 먹고 생활을 했느냐?"
"율무와 감자를 심어서 모진 목숨을 세 식구가 살아가다가 이 지경을 당했습니다."
"어린것을 낳으면 유복자가 되겠구나!"
여인은 목에 메어 대답을 못 하다가 다시 아뢴다.
"호랑이를 잡아서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앞으로 유복자를 대할 낯이 없습니다. 그저 원수를 갚아줍시오!"
최목사는 수하 군관들 십여 명을 불렀다. 여인의 소지를 설파한 후에 군관들에게 물었다.
"여인의 정경이 하도 애절하고 딱하다. 너희들 중에 호랑이를 잡아서 불쌍한 여인의 원수를 갚아줄 사람이 있거든 앞으로 자원해 나오너라!"
군관들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갔다는 말을 듣자 모두 다 겁에 질렸다. 호랑이를 잡아보겠다고 자원해 나오는 군관은 한 명도 없었다. 최윤덕은 혀를 찼다.
"못난 것들! 그래, 호랑이가 무서워서 잡아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이냐. 이래가지고 오랑캐를 지키는 변지의 중임을 어찌 맡는단 말이냐! 그만두어라. 내가 친히 호랑이를 잡아보겠다. 너희들은 나의 뒤를 따르라!"
최윤덕은 말을 마치자, 벽상에 걸린 화궁과 전통을 친히 떼어 어깨와 허리에 차고 통인에게 분부를 내렸다.
"보행으로 가면 지체가 많이 될 것이다. 내가 탈 말 이외에 여인이 탈 조랑말 한 필을 준비해라. 그리고 군관들은 창을 들고 나의 뒤를 따르라."
사또의 분부가 한번 떨어지니, 삼문 밖에 자비가 여율령 대령되었다.
"너도 말을 타라! 그래야 빨리 가서 호랑이를 잡을 것이다. 앞서서 길을 인도해라. 그리고 군노 한 명은 이 여인의 견마를 잡아주어라!"
여자가 탄 말을 전도로 하여 최윤덕 일행은 첩첩산중으로 말을 채찍질해 달렸다. 여인이 화전을 갈아 먹고 산다는 외딴집 앞에 당도했다. 길을 좁고 산을 험했다. 이제부터는 말을 타고 달릴 도리가 없었다. 최윤덕과 여인은 말에서 내렸다.
"호랑이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가 보자!"
최윤덕은 여인을 앞세우고 숲이 우거진 험한 산길로 기어올랐다. 군관들도 창을 들고 빽빽하게 들어선 밀림을 헤치고 뒤를 따랐다. 집채 같은 바윗돌이 울창한 숲 사이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다. 홀연 강한 바람이 낙락장송 휘어진 가지를 뒤흔드는데, 누런 칡범 한 마리가 벽력 같은 소리를 치며 숲속에서 뛰어나왔다. 글자 그대로 맹호출림이다. 여인은 기절이 되어 쓰러지고, 뒤를 따르던 군관들은 꽁무니를 빼었다. 안주목사에 절도사를 예겸한 최윤덕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급히 동개에서 금비전 화살 한 대를 꺼내어 칡범의 목줄대기를 향해 쏘았다. 칡범은 비로소 비틀하고 쓰러졌다. 그제서야 군관들은 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군관들은 쓰러지는 범을 마구 찌르려 했다. 최윤덕은 급히 소리쳤다.
"범은 이미 기진이 되었다. 함부로 찔러서는 아니 된다. 뱃속엔 소중한 물체가 있을 것이다. 절대로 배는 찌르지 말아라!"
이미 범은 절명이 되었다. 금비전 두 대에 범은 왕생을 한 것이다. 이 동안에 기절했던 여인은 다시 소생이 되었다. 최윤덕은 군관과 군노들에게 명했다.
"이제 범은 무섭지 않다. 가죽만 유명할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목도질을 해서 메고 읍내로 들어가거라."
여러 사람들은 생기가 돌았다. 신명이 났다. 저희가 호랑이를 잡은 듯 떠들어대며 환성을 올렸다. 최윤덕은 젊은 여인과 함께 산에서 내려 삼문 안으로 들어가자, 죽은 호랑이를 동헌 뜰 안으로 끌어들였다. 서방을 잃은 여인은 죽은 호랑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넋을 잃고 느껴 울고 있었다. 최윤덕은 다시 명을 내렸다.
"소 잡는 백정을 불러들여라!"
이윽고 백정이 들어와 현신을 했다.
"날카로운 연장으로 호랑이의 배를 갈라라!"
백정은 사또의 영을 받자, 죽은 호랑이를 반듯이 젖혀놓고 예리한 칼로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최윤덕은 청상에서 다시 분부를 내렸다.
"칼을 함부로 놀리지 말고 조심해서 곱게 갈라라!"
넋을 잃고 느껴 울던 여인도 울음을 그치고 호랑이 배 가르는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호랑이 배 껍질은 무한 두꺼웠다. 한 가닥 한 가닥씩 갈라지고 젖혀졌다. 붉은 피가 댓줄기마냥 뻗쳐올랐다. 내장이 갈라졌다. 사람의 뼈가 튀어나왔다. 갈빗대가 토막토막 끊어져 나타났다. 손가락 발가락 뼈가 마디마디 쏟아져 나왔다. 엉클어진 머리칼이 나타났다. 구리 동곳이 꽂혀진 상투가 칼끝에 묻어 나왔다. 죽은 호랑이가 젊은 여인의 남편을 잡아먹은 것이 분명했다. 최윤덕은 여자에게 물었다.
"살과 뼈만 가지고는 누구의 것인지 분간을 못 하겠지만, 머리칼은 씹혀지지도 아니하고 삭아버리지도 않는 법이다. 너는 저 상투를 자세히 살펴보아라. 상투 끝에 동곳이 그대로 꽂혀 있다. 네 서방의 동곳인지 자세히 보아라."
젊은 여인은 바싹 백정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상투를 들여다보았다. 구리 동곳이 눈에 번쩍 띄었다. 틀림없는 자기 남편의 동곳이었다. 여인은 상투를 두 손으로 덥석 안았다. 목을 놓고 통곡했다. 새삼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마치 남편의 운명을 지키는 청상과부의 처절한 울음소리였다. 최윤덕은 관비들을 시켜 여인의 울음을 그치게 한 후에 분부를 내렸다.
"상투에 꽂혀 있는 구리 동곳은 네 서방의 것이 확실하냐?"
"틀림없습니다."
"내가 묻는 대로 대답해보아라. 네 서방과 함께 화전을 이룩해서 구명도생을 하다가 이제 네 서방은 호환을 만나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늙은 어미와 핏덩이 유복자를 데리고 어찌 지낸단 말이냐. 딱하기 한량없다. 네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관청에 두어 찬비로 부릴 테니 네 의향이 어떠하냐?"
안주목사 최윤덕의 인정 넘치는 후한 말을 듣자, 젊은 여인은 감사로운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두 번 절하며 고한다.
"호랑이를 친히 잡아서 서방의 원수를 갚아주신 일만 해도 은덕이 바다같이 깊사온데, 또다시 죽지 못해 사는 저희들의 생활을 통촉하시어 관가에서 일을 보아 먹고 살게 하시니, 하늘보다 더 큰 은택을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최목사는 옆에 시립해 있는 이방에게 분부했다.
"호랑이 뱃속에서 나온 유골은 후하게 장사지내 주게 하고, 저 여인은 늙은 시모와 함께 동네로 내려와 살게 해서, 찬비의 명목으로 요차를 주어 생계를 도와주라. 그리고 장차 유복자가 나올 것이다. 호생지덕으로 잘 기르게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방은 최목사의 명을 받고 유골과 호피를 거둔 후에, 여인과 함께 삼문 밖으로 나가 뼈를 묻어 장사지내고, 화전하던 시모와 여인은 관가 앞에 있게 했다. 한 달 후에는 유복자 어린애까지 나서, 세 식구가 걱정 근심 없이 살게 했다. 안주목사 최윤덕의 호담무쌍한 용맹과 애민여자하는 관후한 풍도는,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는 말할 것 없고, 그의 위풍은 강을 건너 여진에까지 자자하게 퍼졌다. 이 소식은 서울에까지 파다하게 퍼져서, 세종전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최윤덕의 이러한 모든 행적은 깊이 전하의 신임을 받았다. 여진에 대해서도 인심을 잃지 않고 명에 대해서도 선린정책을 포기하기 어려운 난처한 자리에서 번뇌를 느끼던 세종전하는, 용맹스런 대장군 최윤덕의 강경한 주장을 듣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윤덕은 지략을 겸비한 백전장군이다. 덮어놓고 용맹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슬기가 또한 대단하여 멀리 앞을 보고 결단하는 사람이니, 윤덕의 건의를 아니 받아들일 수 없다. 평안감사에게 명을 내려서, 압롱강 안으로 도망해 들어온 5백여 명의 여진 패잔병을 명나라 편에 인도해주라!"
전하의 분부가 승지한테 내리니, 장군 최윤덕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전하께 두 번 절하며 아뢴다.
"어려운 일을 좋게 처단하셨습니다. 만약 이번 일을 그같이 결단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장차 큰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뒤의 일은 소장이 담당하겠습니다."
최윤덕은 장담하고 아뢴다. 옆에 시립했던 김종서가 아뢴다.
"만약 전하께서 여진을 생각하시는 정에 얽매이시어 더욱 지의하셨다면 최윤덕의 말대로 큰 화가 다닥칠 것입니다. 명철하신 처사였습니다."
김종서도 여진의 패잔병을 명나라에 넘겨주는 일을 크게 찬성했다. 중추원 중대 회의는 끝이 나고, 전하의 전교는 파발마를 달려 승지가 평안감사에게 전해줬다. 세종전하의 유시를 받은 평안감사는 곧 병사와 건주여진의 도망병 잡을 계획을 의논한다. 원래 건주여진의 족속들은 압록강만 건너오면 곧 기름진 우리 땅이었다. 이 까닭에 금령을 놓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건만, 연구세심 어느 결에 들어와서 이곳 저곳에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말도 통하고 물건도 서로 교역했다. 마적떼 큰 군사가 노략질하러 들어오지 않는 한, 백성과 백성끼리는 평화롭게 오고 가며 살았다. 이만주의 도망병들은 강을 건너 쫓겨온 후에 열 명 스무 명씩 흩어져서 여진 부락에 묵고 있었다. 이편에서도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아니하니, 그들은 마음을 놓고 안온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이만주가 조선조정에 대하여 도망병을 보호해달라는 부탁을 해놨으므로, 그들은 더한층 방심을 하고 있었다. 평안병사는 평안감사에게 계교를 냈다.
"전하께서 승지까지 보내시어 도망병을 잡아서 명군에 인도하라 하시니, 정중하신 하교를 아니 받들 수 없소이다. 곧 포박을 해서 넘기기는 넘겨야 할 텐데, 수가 많아서 오륙백 명이나 되니 난처한 일입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교전 상태로 빠져서 무고한 우리 백성들이 많이 상하게 될 테니 큰 걱정이외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가졌소이다. 오백여 명을 잡는다면 마주 붙어서 싸워야 할 텐데, 그리 된다면 죄 없는 양민들 사상자가 적지 않게 생길 테니 엄두가 나지 않는구려!"
평안감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병사가 무릎을 치며 말한다.
"저에게 한 가지 계교가 있습니다. 사또께서 들어주실는지 의문이오."
"무슨 좋은 계교가 있소? 속 시원하게 말씀해보시오."
감사는 병사 앞으로 무릎을 바싹 밀었다.
"때마침 원소절이 며칠 아니 남았소이다. 저 사람네 풍속이나 우리 풍속이나 정월 대보름날 밤엔 백사를 제쳐놓고 모두 다 즐겁게 노는 날이니, 우리 병영에서 저들을 청해서 한번 유쾌하게 놀아보자 합시다."
"원소절 놀이를 한번 해보잔 말이로구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편의 오륙백 명과 우리 군사 천여 명을 대접하자면 무려 이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대접해야 할 테니 음식 준비가 대단하겠구려."
감사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병사는 픽하고 웃으며 대답한다.
"아따, 국가흥망이 달린 일입니다. 전쟁이 터진다면 그까짓 이삼천 명의 한 끼니 먹을 음식 걱정만 하게 되겠습니까? 빼주 여남은 고리쯤 모아들이고, 소 열 필에 돼지 백 마리쯤 잡으면 넉넉할 것입니다. 그리고 흥을 돕기 위하여 기생과 무당을 불러들여서 검무춤이나 추게 하고 창부타령이나 부르게 하면 족할 것입니다."
병사는 호방한 목소리로 자기의 계교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진 도망병들에게 술을 흠뻑 먹여서 대취케 한 후에 모조리 결박을 지어서 명나라 요동진관에게로 넘기잔 말이로구려."
"아니올시다."
병사는 고개를 가로 흔든 후에 감사의 귀에 입을 바싹대고 무슨 소린지 한동안 수군거렸다. 감사의 입이 차츰차츰 벌어지기 시작했다. 병사의 입술이 감사의 귓전에서 떨어지자, 감사는 무릎을 치며 말한다.
"되었소. 묘한 계책이오. 병사는 당대의 을지문덕이오!"
감사는 연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벙긋벙긋 웃었다.
정월 대보름 달 밝은 원소절이 되었다. 평안감사는 군사권을 잡은 절도사였다. 여진 부락에 흩어져 있는 도망병들을 청했다. 달도 밝고 명절도 되었으니 객지에 쫓겨와 있는 도망병에게 객회를 위로하기 위하여 소를 잡고 돼지를 삶아서 술을 한 잔 함께 하자고 사자를 보내서 청했다. 부락마다 흩어져 있는 여진 군사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희희낙락 지껄여대면서 조선 병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넓고 넓은 병영 앞에는 명석이 깔려지고 군막 휘장이 이곳저곳 바람에 날려 펄럭였다. 즐비하게 줄을 지어 걸어 논 가마솥에서는 쇠대가리와 돼지를 삶는 구수한 곰국 냄새가 도망병들의 코를 스쳐서 비위를 움직였다. 좌우 옆으로는 빼주를 담은 고리가 군막마다 열 개, 스무 개씩 놓여 있었다. 오백육십여 명의 여진 도망병들은 패장을 앞세우고 병영 뜰로 들어섰다. 평안감사는 절도사의 복색으로 밀화패영 전립에 구군복하고 육방관속과 군관이며 기생 수십 명을 거느리고 친히 운주루에서 나와 도망병들을 맞이했다. 도망병들은 조선말을 잘했다. 강 하나를 격해서 수백 년 이웃해 사는 때문이다. 패장이 앞을 서서 절도사한테 인사를 했다.
"사또, 도망해 들어온 저희들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눈감아 두시는 일도 감지덕지한 데 이같이 수많은 저희들을 불러서 좋은 음식을 주시니 고마운 말씀 사뢸 길 없습니다. 노야, 감사합니다."
평안감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오늘은 원소절 좋은 날이 아닌가. 여러분들이 만약 고향에 있었던들 오늘같이 좋고 좋은 날 부모 처자와 함께 완월장취를 할 텐데 객지에 나와 고생이 막심하오. 객지 고생의 만분의 하나라도 잊게 하게 위하여 오늘 여러분에게 박주 한 잔씩을 대접하려 한 것이니 마음 탁 놓고 유쾌하게 놀다 가시오."
감사는 말을 마치자 이내 군관들에게 지휘했다.
"손님들을 열 명 스무 명씩 군막마다 앉혀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게 하라!"
육방관속과 군관들은 여진 도망병들을 차례차례로 군막 안으로 인도했다. 이어서 군막마다 기생들이 열두 명, 열세 명씩 배치되어 들어갔다. 도망병들은 아름다운 기생들의 화사한 의상과 예쁜 자태를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대며 떠들어대고 좋아들 했다. 군막마다 병영 군사와 여진 도망병들이 자리를 함께 하여 좌우편으로 갈라 앉았다. 좌편에는 병영 군사가 앉고, 우편에는 여진 도망병들이 앉았다. 기생들도 좌우편으로 갈라 앉아서 술을 따랐다. 이때 병사는 군막 밖에서 술을 감독하고 있었다. 빼주를 담은 술병은 두 종류가 있었다. 좌편 병영 군사에게 기생이 따르는 술병은 백병이요, 우편 여진 군사에게 기생이 권하는 술병은 화병이었다. 백병에는 빼주에 물을 타고, 화병에는 독한 빼주가 담겨 있었다. 병사는 병영 군사와 기생들에게 미리 연통을 해놓고 밖에서 친히 술 나르는 것을 감독하고 있었다. 여진 군사들은 주린 김에 고기와 술을 대하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사양치 않고 돼지다리를 뜯고 빼주를 마셨다. 기생들은 교태를 지어 술을 권하고 노래를 불렀다. 노랫가락을 청 좋게 부르고 창부타령을 멋지게 뽑았다. 병영 군사들은 냉수를 마시고도 취한 체했다. 젓가락 장단을 치면서 기생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오랑캐 군사들은 진짜 빼주를 맘 놓고 마셨으니 취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창부타령을 흉내 냈다. 달은 하늘 높이 떠서 휘영청 밝았다. 군막마다 노랫소리와 흥겨운 춤이 절정에 올랐다. 기생들은 더한층 오랑캐들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승무를 추고 검무를 췄다. 취기 가득한 오랑캐들은 신명이 났다. 비틀거리며 기생들을 껴안고 활개춤을 추었다. 또다시 무녀들이 패를 지어 들어왔다. 주립에 남전복을 입고 그림 부채를 쫙쫙 펴면서 군막마다 좇아 들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오랑캐들은 손뼉을 치면서 무녀들을 맞아들였다. 무녀들은 '웬수' 소리를 치면서 빼주를 사발로 따라 오랑캐들에게 권했다. 오랑캐들은 흥에 겨워 춤을 추면서 죽죽 들이켰다. 군막마다 질탕하게 노는 오랑캐들의 고함소리는 적막한 변지 강산을 흔들었다. 어느덧 둥그런 보름달이 서편으로 기울어지고 동이 트기 시작하니, 새벽 찬바람이 소슬한 나뭇가지를 더한층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놓았다. 이때 군막 밖에서 술 나르는 것을 감독하고 있던 병사는 빼주 담은 고리에 하얀 가루를 넣었다. 오랑캐에게만 권하는 그림 그린 술병에는 흰가루를 탄 빼주가 부어져서 군막 안으로 날라졌다. 무녀들은 하얀 가루가 타진 화병 술을 오랑캐들에게 권했다. 오랑캐들은 더한층 흥겹게 마시며 뛰었다. 동이 환하게 터질 무렵, 오랑캐들은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쓰러지기 시작했다. 수십 채 군막 안에서 오백여 명의 오랑캐들이 일제히 쓰러져 정신 모르고 코를 골았다. 병영 군사들은 일시에 오랑캐들을 준비했던 동아줄로 결박을 지었다. 군막마다 주안상이 물려지고, 기생과 무녀들은 소임을 다한 후에 제각기 흩어졌다. 다만 오랑캐들만이 정신을 잃은 채 군막마다 손과 팔이 묶여서 쓰러져 있었다. 일고삼장이 되었다. 대여섯 시각이 지났다. 오랑캐들은 한 명 두 명씩 차차 정신을 차려서 소생이 되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간밤에 질탕하게 놀았던 일은 일장춘몽이 되어버리고, 자기들의 팔과 손목이 질탕하게 놀았던 일은 일장춘몽이 되어버리고, 자기들의 팔과 손목이 동아줄로 꼭꼭 묶여서 꼼짝달싹할 수 없는 부자유한 몸이 되어버렸다. 군막마다 똑같은 상태다. 오랑캐들은 비로소 계교 속에 떨어진 것을 직감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군막마다 신호를 보냈다. 오백육십여 명이 다 똑같은 경위를 당하고 있었다. 원망하고 욕하는 소리가 폭죽 터지듯 터졌다. 그러나 아무 효력도 없었다. 이윽고 감사와 병사가 전립에 군복 차림으로 천여 명 병영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병사가 군령을 내렸다.
"군막으로 들어가서 오랑캐들을 일으켜라!"
창과 채찍을 든 천여 명 병영 군사들은 일제히 군막 안으로 들어가 도망병들을 일으켜서 비웃두름 엮듯 열 명 스무 명씩 밧줄을 늘여 묵었다. 이미 팔과 손목이 묶여진 도망병들이다. 반항할 도리가 없었다. 도망병들은 소리쳤다.
"우리들을 묶어가지고 어디로 갈 테냐?"
"너희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병영 군사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병영 군사들은 도망병들 오백여 명을 소 몰듯이 몰았다. 삭풍이 내리질리는 압록강변으로 향했다.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배를 탈 필요도 없었다. 병사는 백마를 타고 앞에 나가고, 병영 군사들은 좌우편으로 갈라져서 도망병들을 호위해 나갔다. 도망병들은 모두 다 눈치를 챘다. 자기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명나라 요동 총관에게 넘겨주려는 이편 계략을 비로소 깨달았다. 오백여 명의 도망병들은 틈만 있으면 달아날 궁리를 했다. 일부러 걸음을 걷지 아니했다. 소걸음을 걸었다. 병영 군사들은 호통을 치며 채직질해 나갔다. 그렇게 청명하던 날씨가 별안간 하늘이 먹장 갈아 분 듯하면서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압록강 일대는 삽시간에 은세계를 이루었다. 함박같이 내리는 눈은 휘몰아치는 강풍과 함께 사람들의 눈과 코를 덮었다. 숨쉬기도 곤란했다. 강행군이었다. 병영 군사들은 도망병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얼음판 위의 가득히 쌓인 눈을 헤쳐나갔다. 멀리 대안이 보였다. 명나라 요동총관의 군사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요동 총관이 이미 감사의 도망병 넘겨주겠다는 연통을 받은 때문이다. 강 건너는 일이 겨우 끝이 났다. 병사는 요동 총관에게 여진 도망병 오백육십여 명을 피 한 방울 아니 흘리고 계책을 써서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빼주에 탄 흰 가루는 몽혼약이었다. 건주여진 이만주는 자기네 도망병 오백여 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조선군에 의해 명나라로 인도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얼마 후에 강을 건너간 여진 사람들에게서 이 소식을 들었다. 이만 주는 크게 노했다. 용맹스런 장수 십여 명과 말 잘 타는 기병 사백여 기를 뽑아서 압록강 굳은 얼음을 타고 여연으로 쳐들어왔다. 자성 백성들은 창졸간에 변을 당했다. 적병은 민가에 침입하여 소와 말을 뺏고,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를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잡아갔다. 하룻밤 사이에 여연 한 고을은 분탕질을 당하고 화염이 충천한 불바다가 되었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와 강계 절제사 박초는 급보를 받자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자성으로 쫓아가 적과 대치해 싸웠다. 그러나 큰 승리를 얻지 못했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는 곧 파발마를 달려 사실대로 장계를 올렸다.
'야인 사백여 기가 여연에 돌입해서 인민을 표략했습니다. 강계 절제사 박초는 곧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잡혀간 백성 이십육 명과 말 삼십 필, 소 오십 필을 뺏어왔습니다. 이 싸움에 전사자가 열세 명이요, 살에 맞아 상한 군사가 이십오 명입니다. 해가 저물어서 더 쫓아가지 못했습니다.'
정원에서는 곧 평안도 관찰사의 급한 장계를 세종전하께 올렸다. 전하는 장계를 보시자 크게 진노하셨다. 곧 승지에게 대신들의 입시를 명했다. 대신들이 급히 내전으로 모여들었다.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을 위시하여 찬성 권진, 입번도 진무 조말생, 병조판서 최사강, 집현전 대제학 정초 등이 입시했다. 전하는 평안도 관찰사의 급한 장계를 보이시며 말씀을 내린다.
"오랑캐는 항상 나라의 두통거리다. 이만주란 자는 우리가 명나라의 요구에 응하여 도망병을 요동총관에게 인도해주었다 해서 앙심을 먹고 감히 우리 땅 영연에 침범해서 일군을 소란케 했으니 가증하기 짝 없는 일이다. 당장 큰 군사를 일으켜 배은망덕하는 야인을 소탕할 작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압록강을 건너 여진으로 진격하자면 옆에 명나라의 관할인 요동이 있으니, 일단 명나라 황제한테 야인 공격하는 것을 통고하고 대군을 휘동하는 것이 어떠한가?"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상교가 지당하십니다. 그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의 의향대로 하라고 찬성했다. 대제학 정초가 마땅치 않은 얼굴빛을 띠고 아뢴다.
"전하! 명나라 황제한테 알릴 까닭이 없습니다. 이번에 이만주가 앙심을 먹고 여연에 들어와 고약한 행동을 한 것은 명나라 때문에 일어난 일이올시다. 구구하게 우리가 고개를 숙여서 저자세로 명나라 황제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제학 정초의 논지는 당당했다. 전하는 대제학 정초의 당당한 의견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승지에게 분분했다.
"최윤덕과 김종서를 명소하라!"
전하는 범 같은 두 장신의 의사를 들어보자는 것이다. 부름을 받은 노장군 최윤덕과 범 같은 인물 김종서는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급히 어전회의에 참석했다. 전하는 두 장신의 배알을 받자 마음이 든든했다. 항상 두 신하를 주석지신으로 생각하는 때문이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하문한다.
"저번에 명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건주여진의 패잔병들이 우리 땅으로 도망쳐 들어온 것을 조정 공론에 따라서 명군에게 넘겨주었더니, 여진 추장 이만주가 우리 땅 여연으로 돌입해서 백성들을 살육하고 우마를 약탈해 방약무인한 태도를 감행했다. 이제 평안 관찰의 급한 장계에 의하면, 강계절제사 박초가 곧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서 잡혀갔던 백성과 우마를 뺏어왔다 하나 크나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군사들만 수십 명이 상한 모양이다. 곧 대군을 일으켜 톡톡히 야인들의 버릇을 가르쳐야 하겠다. 그러나 출병에 대해서 양론이 있다. 압록강을 건너면 명나라 요동이 되니, 명나라 황제한테 여진 공격을 통고하고 출병하는 것이 좋을지, 명에 통고하지 아니하고 출병하는 일이 좋을지 아직 결정을 짓지 못했다. 좌의정 맹사성은 명나라에 알리고 출병하는 것이 좋다 하고, 대제학 정초는 명나라 때문에 이 분쟁이 일어났으니 단독으로 처결할 일이지, 명에 대하여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양론에 대하여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백전노장인 최윤덕이 백수를 흩날리며 아뢴다.
"일찍이 명에서 여진 도망병을 넘겨달라고 요구할 때 전하께서는 정에 끌리시어 종으로 부리던 여진 사람을 어찌 차마 명에 넘기겠느가 하고 지의하셨습니다. 그때 소신은 작은 정을 버리시고 큰 것을 생각하시라 했습니다. 만약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명나라는 반드시 우리를 의심하여 우리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형편이 다릅니다. 명에 대해서는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우리 땅을 침범한 오랑캐를 우리 힘으로 응징하는데 구구하게 명나라 조정에 연통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제학 정초의 말씀대로 여진 응징하는 일을 알린다면, 이것을 쓸데없는 저자세가 됩니다. 절대로 명나라 황제한테 알릴 까닭이 없습니다. 공연히 그자들의 코만 우뚝해집니다. 전하! 이 기회에 우리 땅에 사는 여진족속을 모조리 국졍 밖으로 쫓아내 버리고 강역의 한계를 명확하게 만들어 놓으시는 것이 가한 줄로 아뢰오."
최윤덕의 말이 끝나자, 온몸이 도시 담덩어리라는 별명을 듣는 김종서가 오 척 단신 작은 체격에 열을 띠어 아뢴다.
"최윤덕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침범한 여진을 응징하는데 명나라한테 통고할 까닭이 없습니다. 공연히 명군이 거들어준다고 하다가 우리 땅으로 건너온다면 큰일이올시다."
김종서의 아뢰는 말은 논리가 정연했다. 최윤덕 장군의, 명에 대해서 저자세를 취하지 말고 여진족속을 모두 다 국경 밖으로 내쫓아서 국토의 한계를 바로잡자는 씩씩한 말과 김종서 장군의, 쓸데없이 명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출병을 알려서 명군이 도와주는 체하다가 국경 안으로 몰려든다면 골치 아픈 일이라는 논리 정연한 말에, 만좌는 모두 다 고개를 숙여 엄숙한 태도로 귀를 기울여 들었다. 명나라 황제한테 사신을 보내서 알린 후에 출병하는 것이 좋다고 아뢰었던 좌의정 맹상성도 다시 더 이론을 내지 못했다. 전하의 마음은 두 장신의 씩씩한 주장을 듣자 명나라에 알리지 아니하고 자주적으로 출병할 것을 결심했다.
"두 장신의 씩씩한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든든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곧 대군을 일으켜 응징할 준비를 차려야 할 것이다. 아직은 압록강 물이 얼어붙었으니 개춘이 되는 대로 곧 출병할 태세를 취하라!"
장군 최윤덕이 아뢴다.
"전하께서는 한량과 무사들에게 별시를 보여서 크게 우대하시고, 훈련원에 열병을 하시어 사기를 복돋워 주시옵소서."
김종서가 아뢴다.
"우리나라의 화포는 여진이 가장 두려워합니다. 화약쳬을 확충하시고 화약장이를 우대하시어 화약을 풍부하게 저장하시옵소서."
세종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신다.
"무사를 뽑아서 훈련시키고 화약을 풍부하게 제조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얼음이 풀리게 되면 배로 군사를 건네야 할 것이다.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서 전함을 수백 척 만들도록 하라."
시립했던 병조판서가 대답한다.
"하교하신 대로 평안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서 사수색을 다시 설치하고 밤을 도와 전선을 만들게 하겠습니다."
세종전하는 또다시 분부를 내린다.
"대군이 강을 건너서 오랑캐의 소굴을 무찌르자면 군사행동이 신속해야 할 것이다. 부교를 놓아 대군을 질풍신뢰같이 전격적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경들은 부교를 놀 방법도 연구해두라!"
최윤덕, 김종서를 위시하여 모든 대신들은 전하의 슬기로운 말씀을 듣자, 마음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압록강에 부교를 놀 생각은 명장 최윤덕이나 김종서로도 생각지 못한 일이올시다. 성상의 슬기는 신들의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세종전하는 소리를 높여 웃으며 대답한다.
"그것을 무슨 슬기라 하랴. 아무리 크고 긴 강이라 하나 좁은 길목이 있다. 이러한 곳에 칡을 얽어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흙을 얹은 후에 행군을 한다면, 길목이 짧은 때문, 배보다도 속히 건너갈 수가 있을 것이다. 평안도 일대에 영을 놓아서 우선 산골 속으로 들어가 칡덩굴을 거두어서 부교 놓을 준비를 해두게 하라!"
"칡덩굴을 거두는 일도 평안 관찰사에게 하교대로 지시하겠습니다."
병조판서가 뜻을 받아 아뢰었다. 세종전하는 다시 하교를 내린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의논한 여진정벌에 대한 일은 평안 관찰에게는 비밀을 지켜서 아직 알리지 말라. 개춘이 되어 출병할 일을 미리 알린다면 소문이 야인한테로 들어갈 것이다. 앞으로 야인의 침범을 잘막으라 이르라."
병조판서는 명을 받았다. 서울과 평안도, 함경동 일대는 삭풍이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건만 은밀한 속에 전쟁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대장간에는 대장장이가 이글이글 불을 피워 칼과 창을 만들고, 궁방에서는 일류 장인들을 뽑아서 화궁과 백우전이며 금비전을 차근하게 만들었다. 화약청에서는 화포에 쓸 화약을 무진장 만들고, 청천강 일대에 즐비하게 늘어선 사수색에서는 새로운 전함을 짓기에 분주했다. 평안관찰사는 병조판서의 비밀한 지령에 의해서 백성들에게 상금을 주어 칡덩굴을 거두어 헛간마다 산더미같이 쌓아놓았다. 무슨 까닭으로 칡덩굴을 이같이 저축해 두라는 것인지 까닭을 알지 못했다. 감사도 모르고 병사도 몰랐다. 더구나 백성들은 알 까닭이 없었다.
"칡은 무엇에 쓰려고 이같이 거둬들이나?"
"약에 쓰려는 것이 아닌가?"
똑똑한 체하는 한 사람이 대답했다.
"이 사람아, 약에 쓰는 것은 칡뿌리, 갈근일세, 칡덩굴이 무슨 약제가 된단 말인가?"
또 한 사람이 말한다.
"이 사람아, 갈포가 있지 않은가. 칡을 두들겨서 실을 뽑아 가지고 베를 만들려는 게지!"
"아 참, 그렇다. 문자에도 갈건야복이란 말이 있거든. 나라에서 칡으로 베를 짜려고 상금을 주고 칡덩굴을 거둬들이나 보다."
글자나 배웠다는 서당 촌학구는 자기 멋대로 이같이 풀이를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슬기로운 머리에서 창의된 이 칡덩굴 수집이 앞으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하여 얼마나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될지 짐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조정에서 최윤덕과 김종서가 전하의 뜻을 알고 마음속으로 깊이 탄복했을 뿐이었다. 한편 서북면 압록강 연안 일대에서는, 지난번 오랑캐 추장 이만주가 양심을 품고 4백여 기를 거느리고 여연으로 쳐들어와서 사람과 우마를 끌어가고 불을 질러 초토를 만든 후에도 계속해서 지근댔다. 강계 절제사 박초는 군사를 거느려 여연으로 달려가 여진 군사를 추격하여 잡혀갔던 남녀노소 약간 명과 말과 소 수십 필을 찾아온 일이 있으니, 여진은 감사 박규와 절제사 박초의 군사쯤은 코방귀 같다고 생각했다. 이만주는 또다시 여연과 강계로 압록강 얼음을 타고 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곡식을 약탈할 후에 여자와 소와 말을 뺏어 달아났다. 여연 절제사 김경과 강계 절제사 박초와 도절제사 문귀는 지난번 이만주의 4백여 기가 여연으로 돌입해서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었을 때도 적과 싸워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번에도 적을 미리 막아내지 못하고 백성과 우마를 적지 않게 적에게 뺏겨버렸다. 평안도 관찰사는 파발마를 달려서 또다시 막아내지 못한 사실을 급히 아뢰었다. 전하는 크게 진노했다. 곧 상호군 홍사석과 의금부진무 조서강을 긍계와 여연으로 보내어 패전한 죄상을 국문하라 했다. 홍사석과 조서강은 어명을 받들고 주야배도하여 강계와 여연으로 말을 달려 패전한 실정을 살피고 평안감사 박규와 도절제사 문귀 등을 국문한 후에 지체없이 어전에 복명했다.
"평안감사 박규는 무능하기 짝이 없고, 도절제사 문귀와 강계 절제사 박초는 모두 다 장재가 아니올시다. 두 번씩이나 여진의 습격을 당했으면서 미리 방어할 태세를 취하지 아니하고 당황해하고만 있습니다."
전하는 크게 노했다. 곧 정원에 명하여 평안감사 박규와 문귀와 강계 절제사 박초의 직위를 해제시킨 후에 장군 최윤덕을 명소했다.
"오랑캐 이만주의 작란이 격심하니 여연과 강계 백성들의 고초가 대단하다. 한번 크게 응징해서 다시는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놓아야 하겠다. 지금 이 시점에 있어 큰 임무를 완수할 사람은 경밖에 없다. 경은 사양치 말고 서북면 평안도 도절제사의 중책을 맡으라!"
최윤덕은 두 번 절하고 어명을 받들었다.
"신이 비록 불민하오나, 전하의 명철하신 뜻을 받들어 오랑캐를 응징하여 강계와 여연의 백성들이 베개를 높이하여 평안히 자도록 국경을 튼튼히 하여 다시는 후환이 없게 하겠습니다. 절대로 명나라 관할인 요동의 세력을 빌리지 아니하고 자력으로 오랑캐를 격멸해서 전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세종전하는 최윤덕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용안이 화려했다. 미소를 풍기며 말씀한다.
"지난번 중추원 회의 때도 경의 정당하고 씩씩한 의견에 따라서 은밀한 속에 군비를 확충하고 있는 일은 경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바다. 평안도 사수색에서는 전함을 조성하고 있고, 화약청에서는 화약을 충분히 저장했었다. 활과 창이며 무기에 대하여 뒤를 이어 수송할 테니 경은 부임한 후에 군수품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고 병졸들을 잘 훈련시켜서 때를 가려 응징하도록 하라!"
"아직 겨울이라 압록강은 얼음이 얼어 있습니다. 봄이 되는 대로 곧 출병을 하겠습니다. 정병 만 명은 가져야 하겠습니다."
"서울에서도 그동안 한량과 무사들을 많이 양성했으니, 경이 떠난 후에도 소문 없이 뒤를 이어 서북면으로 군사를 보낼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과히 염려하지 말라."
전하는 차근하게 군수품과 병졸 수송에 대하여 계획을 말씀했다. 최윤덕이 다시 아뢴다. "전쟁에는 용맹스런 장수와 날랜 군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적에 대해서 성토문과 격서를 보내야 할 때는 글 잘하는 문사가 있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한 사람의 글 잘하는 선비를 주시어, 막하를 삼게 하옵소서."
전하는 촌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명장의 말이다. 집현전 참사 신숙주를 줄 테니 막하를 삼으라."
최윤덕의 입이 딱 벌어졌다.
"황감하오이다."
전하는 곧 내관에게 분부했다.
"집현전에 나가 수찬 신숙주를 입시케 하라."
내관은 명을 받들고, 집현전에 입직하고 있는 신숙주에게 어명을 전했다. 신숙주는 까닭을 몰랐다. 황망히 조복으로 갈아입고 어전에 올랐다. 전하는 신숙주의 문장과 재질이며 면학하는 태도를 항상 사랑했다. 잘배자까지 내려서 영광을 주신 전하다. 숙주의 배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전하는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하문하신다.
"요사이도 밤늦도록 독서를 하느냐?"
옆에는 대장군 최윤덕이 아직도 시립하고 있었다. 신숙주가 음성을 화하게 하여 아뢴다.
"요사이는 독서보다도 모든 학사들과 함께 '고려사'를 편수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고려사'를 춘추관에서 수정하지 아니하고 왜 집현전 학사들이 편수하느냐?"
"춘추관에는 인원이 부족하와 집현전에서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대제학이 춘추관의 일을 겸임한 때문에 집현전에서도 분담하여 편수 교정하는 일부분을 맡았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말씀한다.
"가상한 일이다. 춘추관이나 집현전이나 결국은 국가의 일이다. 애들 많이 쓴다!"
칭찬한 후에 다시 신숙주를 향하여 말씀한다.
"너, 이분을 짐작하느냐?" 옆에 시립해 있는 최윤덕을 손으로 가리키며 하문했다. 신숙주가 조용히 아뢴다.
"문무의 길이 달라서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하는 다시 미소를 풍기시며 말씀한다. "천하명장 최윤덕을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 범을 강아지 잡듯 하고, 대마도를 소탕해서 천하에 용맹을 드날린 최윤덕 노장군이다. 뵈어라!"
전하는 숙주를 자질같이 사랑했다. 숙주는 어명을 받들어 최윤덕 장군에게 절하고 고한다.
"우레 같은 존함은 귀에 젖도록 들었습니다마는, 문무의 길이 달라 시생이 항상 가깝게 모시지 못해서 죄스럽습니다."
최윤덕 장군은 허리를 굽혀 답례하며 대답한다.
"성상께서 잘배자까지 내리시어 격려하셨다는 말씀, 잘 알고 있소이다. 어전에서 문창성을 대하니 눈이 부신 듯하오."
세종대왕은 최윤덕과 신숙주의 주고받는 수작을 들으시자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시며 말씀한다.
"이 사람은 젊은 문창성이지만, 이 사람의 아버지는 늙은 문창성일세. 글씨 잘 쓰고 글 잘하는 신장이가 바로 이 사람의 아버지일세. 양대 문창성이지. 하하하."
"네, 신은 무변이라 무식하오나 다 알고 있습니다."
최윤덕은 미소를 머금은 채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세종대왕은 용안을 다시 장중하게 바로하신 후에 신숙주에게 말씀한다.
"오늘 이 자리에 너를 부른 것은, 너에게 중한 책임을 맡기자는 것이다. 너는 잠시 집현전을 떠나야 하겠다!"
집현전을 떠나야 한다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신숙주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안이벙벙해서 말씀 대답을 아뢰지 못한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지금 국가에는 큰일이 있다.너희들은 비록 글만 숭상하는 학사지만 서북면과 동북면의 오랑캐들이 자주 변방을 침노해서 백성들이 평안한 생활을 누리지 못한다. 지난번에는 남해와 서해를 혼란케 하는 대마도 왜적을 소탕하여 버릇을 가르쳤거니와, 이번에는 오랑캐 소굴을 응징해서 나라의 근심을 덜게 할 작정이다. 이제 최윤덕으로 평안도 도절제사를 임명하여 대임을 완수케 할 작정이다. 너에게 최윤덕의 막하를 삼아 종사관으로 임명하니 군문에 나가 성심성의로 최윤덕을 도우라."
신숙주는 전하의 하교를 듣자 두 번 절하고 아뢴다.
"삼가 어명을 받들어 군령을 준수하고 최장군의 지휘에 복종하겠습니다."
전하는 즉석에서 정원 승지를 불렀다.
"최윤덕에게 평안도 도절제사를 임명하는 교서와 신숙주에게 종사관의 직책을 주는 교지를 써 올리라."
승지는 봉명하고 정원으로 나가 두 장의 교지를 써서 받들고 들어왔다. 대왕은 최윤덕에게 교서를 친히 주시며 격려의 말씀을 내린다.
"서북면 일대의 일은 모두 다 경에게 맡긴다. 맡아서 잘 방어하고 톡톡히 오랑캐의 버릇을 가르쳐 응징하라. 그리하여 백성을 평안케하고 국가의 위신을 크게 선양하라!"
최윤덕은 두 번 절하고 교서를 받들었다. 전하는 다음에 종사관의 교지를 친히 신숙주에게 주신다.
"너에게 평안도 도절제사 종사관의 책임을 준다. 명민한 머리와 슬기로운 지혜로 최윤덕을 도와 큰 공을 이루고 돌아오라!"
교서와 교지를 어수로 친히 내리시는 일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늙고 젊은 두 신하는 감격한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묵묵히 뒷걸음을 걸어 어전에서 물러난다. 전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긴 최윤덕을 전송하기 위하여 친히 옥보를 옮기어 분합까지 나갔다. 어수를 들어, 전각을 나가는 최윤덕에게 은근한 정을 표했다. 신숙주가 최윤덕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전하는 멀리 서서 신숙주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내린다.
"요사이 우리나라에는 문관이 무관을 업신여기는 풍습이 있다. 잘못된 일이다. 문무겸전해야만 그 나라는 흥왕할 수 있다. 신숙주는 문관 학사라 해서 무인을 우습게 보면 아니 된다. 최윤덕에게는 도절제사의 절월을 주었다. 군령을 어기면 군법시행을 당할 것이다. 명심하라!"
신숙주는 발길을 멈추고 전하의 옥음을 귀담아들었다. 세종전하는 최윤덕에게 도절제사의 중책을 맡기고 신숙주로 종사관을 임명한 후에 이순몽으로 중군절제사를 삼고, 김효성에게 도진무의 책임을 주고, 최치운으로 경력을 명했다. 세종전하는 모든 장수들의 부서를 친히 임명한 후에 중추원부사 최해산을 어전에 불렀다. 최해산은 군기의 조달을 맡은 관원이었다.
"이제 야인을 응징하기 위하여 장군 최윤덕이 도절제사가 되어 장차 서북면으로 향할 것이다. 우선 서울에서만도 군사 만여 명이 출동할 계획이다. 이 밖에 서북면 일대와 동북면에 걸쳐 있는 변방 군사와 승군들을 합하면 도합 2만 대병이 될 것이다. 토벌을 하자면 주밀한 계획과 날랜 군사가 필요하지만, 예리한 무기와 방어할 갑옷도 필요하다. 이들, 장도에 오르는 장졸들에게 뒤를 대어줄 군수품이 어찌 되었는지 알고 싶다. 네가 맡은 바 군기의 비축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라."
최해산은 별안간 전하의 소명을 받았을 때, 벌써 군기조달에 대해서 하문이 계실 줄 알았다. 군기를 비축한 기록을 미리 가지고 입궐했던 것이다.
"신은 전하께오서 북벌하실 뜻이 계시와 군기에 대하여 하문하실 것을 짐작하옵고, 대충 물목을 적어 왔습니다."
최해산은 말을 마치자 품 안에서 군기를 비축한 기록을 꺼냈다. 전하는 점두하며 하문한다.
"우선 갑옷, 투구는 몇 벌이나 조성이 되어 있느냐?"
"장수가 입고 쓸 갑옷, 투구가 오십 벌이옵고, 병졸들이 입을 갑옷이 만오천 벌가량 됩니다." 전하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씀한다.
"만오천 벌도 좋이 만들었다. 그러나 외지에 있는 군사들을 생각해서 만 벌쯤은 더 만들어야 할 것이다. 도절제사의 대군이 출발한 후에라도 계속해서 더 만들도록 하라."
최해산은 고개를 숙여 대답한다.
"명심해서 계속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창과 칼은 어찌 되었느냐?"
"현재 군졸들은 한 사람 앞에 창 한 벌과 칼 한 자루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뒤를 이어 수송해 보낼 창검은 밤을 도와 풀무장이들이 만들고 있습니다."
"화약청에서 만드는 화약은 어느 정도 조성되었느냐?"
"이번에 출전할 화포는 백 문이올시다. 화약 천 궤가 조달되었습니다."
"활과 살도 충분하냐?"
"활과 살은 염려 없습니다. 대마도 정토 이후에 계속 만들어서 충분하옵니다."
전하는 일일이 살피고 만족한 빛을 띠었다. 주밀한 전하는 또다시 최해산에게 묻는다.
"도절제사 최윤덕이게도 의논한 일이지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오랑캐를 응징할 시기는 봄이 좋을 것이다. 얼음이 풀리면 배를 사용해야 한다. 사수색을 더욱 확장해서, 서울 오강에서도 전선을 짓도록 하라."
"서울에서도 전선을 짓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만들겠습니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은 수하 군관 수십 명과 중군, 우군, 좌군 삼군을 통솔한 후에 대장기를 바람에 펄럭이며 서소문 밖의주가도를 통과하여 고양, 파주, 장단을 거쳐 서관으로 향해 나가니, 기치창검은 햇빛에 반사되어 더한층 선명하고, 북소리, 징소리, 취타 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대군은 평양 대동강 얼부푼 강을 건너 안주에 당도했다. 안주 백성들은 멀리 떨어져 살던 아버지가 오래간만에 돌아온 듯 춤을 추며 기뻐했다. 옛날 안주목사 때 칡범을 친히 잡아서 화전민 아내의 원수를 갚아주고 찬비의 직책을 주어서 유복자를 잘 기르게 했던 바로 그 최윤덕 장군이었다. 지난날 목민지장이었던 안주목사 최윤덕이 삼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이 되어 만여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북면 일대를 방어하기 위하여 평안도에 당도하니, 오랑캐 무리들의 침략을 받아 항상 평안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도탄 속에 빠졌던 남녀노소 백성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대군이 지나가는 거리 거리마다 백성들은 백절치듯 모여들었다. 논두렁 밭두렁에서 정월 놀이로 잔디에 쥐불을 놓던 총각 머슴애들도 손뼉을 치며 최윤덕 장군의 근감하고 씩씩한 행군을 환영했다.
"야, 맨 앞의 은안백마에 높이 앉아 갑옷 투구로 대장기를 휘날리며 장검을 비껴들고 나가는 저분이 누군지 아느냐? 안주 목사로 있었던 최윤덕 장군이다!"
"아아, 바위틈에서 무서운 칡범을 때려 잡았다는 그 안주 목사냐?"
"그렇다. 바로 그 최목사다. 호랑이가 물어간 화전민의 원수를 갚아주고, 유복자를 잘 기르라고 그 아내를 먹고 살게 해주었던 바로 그 양반이다!"
"저같이 무서운 장수가 인정도 많구나!
"맘이 착한 사람은 잘 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이번엔 십만 대병을 거느린 대장군이 되어 우리들을 편안히 살라고 오랑캐를 무찌르러 나오는 것이다!"
행군이 안주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남녀노소들은 길에 나열해서 최윤덕 장군을 맞이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한 손에 막대를 짚고 한 손에 술병을 들어 최장군의 앞으로 나갔다.
"사또, 대장군이 되시어 안주로 다시 오십니다. 이 기쁨을 어찌합니까. 소인은, 사또께서 삼문밖 빈터에서 참외밭을 가꾸실 때 진짜 사또를 모르고 사또가 어디 계시냐고 무례한 말을 했던 바로 그자올시다. 이같이 다시 오셔서 저희들을 편안케 해주시니, 고마운 말씀 사뢸 길 없습니다. 그저 박주 한 잔을 올립니다."
최윤덕 장군은 빙긋이 웃고 마상에서 손을 내밀어 늙은이의 올리는 술을 받으며 치사했다.
"고맙소. 옛일을 아직껏 기억하는구려. 조용히 언제 한번 다시 만납시다."
늙은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뒤미처 한 여인이 총각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사또, 쇤네를 기억하십니까? 호랑이 원수를 갚아주신 화전민의 아내올시다. 그때 낳은 유복자가 사또 덕택에 이같이 자랐습니다."
"오오, 그렇더냐?"
장군은 총각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백절치듯 구경하는 사람들은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의 인기는 절정에 올랐다. 최윤덕 장군이 평안도 도절제사로 만여 명 정병을 거느리고 서북면에 도임한 일은 서북면 일대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반면, 압록강 건너편 혼강 일대에 쭈그려 있는 오랑캐 무리들에겐 크나큰 위협을 주었다. 일찍이 소년 시절부터 범을 때려잡았고, 바다 건너 왜추들이 거접하고 있는 대마도를 소탕한 최윤덕 장군의 혁혁한 명성은 몇 해 전 안주 목사로 있을 때부터 오랑캐 무리들의 가장 두려워하는 바였다. 소문은 강을 건너 단통 오랑캐 부락에 번개치듯 퍼졌다.
"조선 명장 최윤덕이 만여 명 정병을 거느리고 서북면 도절제사가되어 부임했다 안다. 큰일이다. 우리를 무찌르러 강을 건너오면 어찌하나!"
"연전에 왜추 대마도를 쳐서 지진두를 만들었다는 그 최윤덕이 아니냐?"
"그렇다. 바로 그 최윤덕이다. 지략이 겸전할 뿐 아니라 활도 잘 쏘는 천하 명궁이다. 지지난번 안주 목사로 있을 때는 화살 한 대로 범을 쏘아서 백성의 원수를 갚아주었다는 기막힌 장수다!"
"여남은 살 때부터 칡범을 주먹으로 때려잡았다는 천하장사라 하더라!"
"이만주 추장이 공연히 지난번에 여연을 집적댄 때문, 최윤덕이 도절제사가 되어 우리를 치러 온 것이 아니냐. 큰일났구나!"
오랑캐들은 공론이 분분했다. 공포와 불안 속에 빠졌다. 오랑캐 추장 이만주도 겁이 덜컥 났다. 아장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조선에서 평안감사 박규와 도절제사 문귀며 강계절제사 박초를 해임하고 최윤덕으로 도절제사를 삼아서 만여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북면에 부임했다 하니, 필시 우리를 응징하러 온 것이 아닌가?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태세를 취해야 할지, 여러 아장들은 의견을 말해보라!"
아장 한 사람이 대답한다.
"지난번 우리가 4백여 기로 여연을 돌격해서 크게 전과를 올렸으므로, 조선조정에서는 패군한 문귀, 박규 등을 해임시키고 이름 있는 장수 최윤덕을 대신 보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겁을 내지 말고 최윤덕이 우리한테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기선을 제어해서 여연과 강계를 한 번 더 무찌르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조선군의 예기를 꺾어야 합니다."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한 장수가 말한다.
"최윤덕은 박규나 문귀같이 넘볼 장수가 아닙니다. 공연히 선손을 걸어서 혼단을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형세를 살펴서 처리하는 일이 온당할 듯합니다."
또 한 사람의 오랑캐가 의견을 말한다.
"조선 군사들은 얼음 위에서 말을 달리지 못합니다. 압록강 얼음이 풀리기 전에 1천여 명의 말 탄 군사를 움직여서 이편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연, 강계는 우리들의 젖줄이올시다. 우리는 기어이 이 두 곳을 우리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랑캐 장수들은 강경론을 주장해서 더 한 번 여연과 강계를 압록강 얼음이 퓰리기 전에 돌격해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모든 아장들의 강경론을 듣고 있던 모사 퉁맹가가 손을 저으며 의견을 말한다.
"여러 아장들께서 압록강 얼음이 풀리기 전에 여연과 강계를 더 한번 공격해서 우리의 위엄을 떨치고, 우리 족속들이 마음 놓고 여연과 강계에 살아서 민생문제를 해결해보자고 한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마는, 최윤덕은 호락호락한 장수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정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여기다가 다시 동북면의 군사를 합세한다면 이만 명 이상의 큰 군사가 될 것입니다. 공연히 잘못 건드렸다가 잠든 호랑이의 코를 찌르는 격이 될 것입니다. 덮어놓고 강경론만 주창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장수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만주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는가? 퉁모사는 뚜렷하게 의사를 발표하라!"
퉁맹가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아까 아장 한 분이 말씀한 바와 같이 여연가 강계는 우리들의 젖줄이올시다. 만약 섣불리 최윤덕을 건드렸다가 일이 실패되는 날이면 게도 구럭도 다 잃어버리고 우리 부락은 대마도처럼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니 화해를 해서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은 격으로 우리의 젖줄도 아니 끊어지고 조선 편에서도 군사를 아니 움직이도록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퉁모사는 화해를 주장하는 말일세그려."
이만주는 모사를 향하여 묻는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화해하는 일을 적극 주장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난국에 처한 생왕방이올시다."
추장 이만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선 편에서 화해를 들어줄 리 만무하지. 최윤덕은 우리가 여연과 강계에 침략한 일을 앙갚음하기 위하여 대군을 휘동해왔는데, 화해하자는 우리 청을 들어줄 리 만무하지."
"장군, 저한테 한 계교가 있습니다. 말이 새어나가면 아니 됩니다. 별실로 잠시 듭시면 계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다!"
이만주는 허락하고 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든 아들은 항명할 수 없었다. 묵묵히 추장 이만주와 모사 퉁맹가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사 퉁맹가는 여러 아장들에게 눈웃음을 치며, "미안합니다." 한 마디를 하고 이만주의 뒤를 따라 별실로 들어갔다. 한동안 후에 여진 추장 이만주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아장들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뒤따라 모사 퉁맹가가 의가양양해서 간특한 웃음을 띠고 나타났다. 만주는 아장들을 향하여 호탕한 음성으로 말한다.
"퉁맹가 모사는 화해를 주장하지만 나는 결코 비굴하게 화해할 생각이 없다. 제장들의 의견에 따라 록강이 풀리기 전에 다시 4백여 기를 거느려 여연을 돌격하리라!"
호기만장하게 떠들어대는 추장 이만주의 여연, 강계를 다시 돌격하겠다는 말을 듣자 모든 아장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좋습니다! 용단을 잘 내리셨습니다. 이번에도 소장을 선봉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가겠습니다!"
"퉁모사의 화해론을 듣지 아니하신 일이 기쁩니다. 여연과 강계는 우리가 차지해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강물이 풀리기 전에 나가야 합니다. 호랑이 때려잡은 최윤덕이 무섭다고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치면 큰일입니다.!"
"조선 군사들은 얼음 위에서 싸우지 못합니다. 강물이 풀리기 전에 쳐들어가야 합니다."
뚝심만 가진 어리석은 오랑캐들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여연으로 쳐들어간다는 추장의 말에 신명이 나서 떠들어댔다. 추장 이만주는 다시 큰 소리로 영을 내린다.
"이번 돌격에는 내가 친히 대장이 되어 4백 기를 통솔할 것이다. 제장들은 일체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
한 장수가 고한다.
"지난번에도 소장들이 나가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장군께서 친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소장들에게 맡기시옵소서."
추장 이만주는 눈을 부릅떴다.
"다시 이론을 일으키는 자는 군법 시행을 하리라! 사흘 후에 출병을 한다. 모든 명령에 일체 복종하라!"
여러 아장들은 고개를 숙인채 다시는 딴말을 거론하지 못했다. 사흘 후가 되었다. 추장 이만주는 스스로 대장 옷을 입고 장창을 비껴들고 장대에 올랐다. 4백 명 기마군이 좌우편으로 2백 명씩 갈라서서 추장 이만주의 호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장대 아래는 그림 그릴 줄 아는 화공 수십 명이 화필을 들고 서 있었다. 아장과 군사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전쟁하러 나가는 데 환쟁이는 웬일인가." 했다. 추장 이만주는 군령을 내린다.
"화공들은 좌군 2백 명의 얼굴에 우디거 족속들이 자자하는 모습으로 채색을 칠해 그리라!"
명령이 한번 떨어지니 십여 명 화공들은 채필을 들고 장대 좌편에 나열해 서 있는 2백 명 좌군 앞으로 달려갔다. 울긋불긋 세로 가로 곡선과 각선으로 아름답게 칠을 했다. 흡사 토인의 원주민들이 얼굴에 먹을 넣어 자자를 한 형국과 방불했다. 좌군 2백 명의 오랑캐 군사들은 순식간에 우디거 토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모든 장수와 오랑캐 군사들은 까닭을 알지 못했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추장 이만주의 엄한 군령이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반발할 수 없었다. 다만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모사 퉁맹가와 추장 이만주뿐이었다. 좌군 2백 명의 자자가 끝난 후에 추장 이만주는 군령을 내렸다.
"자, 전진이다. 좌군 2백 명은 선진이다!"
오랑캐 추장 이만주는 대장기를 앞세우고, 우디거 복색으로 가장한 좌군 일대를 거느려 앞을 서서 나갔다. 뒤를 이어 모사 퉁맹가가 거느린 2백 명의 우군 오랑캐가 따랐다. 말굽 소리 드높게 찬바람을 헤치며 압록강 얼음 위로 달렸다. 대안이 멀리 보였다. 조선 땅 여연이었다. 최윤덕 장군이 도절제사로 부임된 후에 목책이 철옹성을 이루어 둘러쳐지고, 이곳저곳엔 망루가 세워졌다. 조선 군사들은 목책과 망루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는 전에 비하여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목책 앞에는 대환구가 이곳저곳에 걸려 있고, 보초를 선 군사들은 든든하게 방한구를 갖추고, 활을 메고 창을 잡고 있었다. 추장 이만주는 멀리 조선진의 질서정연한 형세를 바라보자 간담이 서늘했다. 마음속으로 모사 퉁맹가의 계교 들은 것을 천만다행한 일이라 생각했다. 추장 이만주는 돌연 호령을 내렸다.
"좌군 2백 명은 조선군의 보초가 서 있는 대안까지 돌진하라!"
엄한 군령이었다. 얼굴에 자자한 모습으로 칠해서 우디거족으로 가장한 오랑캐 좌군은 일제히 칼과 창을 빼어 들고 대안인 목책 앞으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기세가 흉맹했다. 조선 측에서는 대환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화살을 쏘아댔다. 돌연 추장 이만주는 백기를 높이 흔들었다. 조선 측에서는 화살이 멈춰지고 대환구의 화포가 침묵을 지켰다. 이만주는 모사 퉁맹가가 거느린 우군 앞으로 급히 말을 달렸다. 숨 가쁘게 군령을 내린다.
"우군 2백 명은 좌군 2백 명을 모조리 포박하라!"
모사 퉁맹가는 우군 2백 명을 거느리고 급히 말을 달려 우디거족으로 가장한 좌군 2백 명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좌군 2백 명은 줄지어 우군이 달려들어 잡으려 하니, 초록은 동색인데 까닭을 알 길 없었다. 분기가 탱중했다. 서로 치고 서로 갈겼다. 자빠지고 넘어졌다. 고래고래 소리치고 싸웠다. 고함소리는 얼어붙은 압록강 얼음장을 흔들었다. 조선 측에서는 급히 이 사실을 장군 최윤덕에게 고했다. 최윤덕은 살 같이 말을 달려 망루에 올라 적세를 바라보았다. 해괴하기 짝없는 일이었다. 아장이 아뢴다.
"얼굴에 먹을 넣어 자자한 놈들은 우디거족이고, 깔때기 쓴 놈들은 이만주의 오랑캐족이올시다. 지금 이만주의 오랑캐 군사와 우디거족이 서로 격투를 벌여, 싸움을 하는 모양이올시다."
최윤덕 장군은 묵묵히 듣고 강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오랑캐 우군 2백 명은 무슨 군호를 했는지 우디거족으로 변장한 좌군 2백 명을 고스란히 묶어서 말을 채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최윤덕 장군은 흩어져 돌아가는 오랑캐 군사들을 망루에서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압록강 얼음 위에서 이같은 소동이 일어난 지 며칠 후의 일이다. 오랑캐 건주위 추장 이만주는 모사 퉁맹가로 특사를 삼아 말 탄 군사 수십 기를 거느리고 백기를 흔들며 강을 건너 국경 망루 앞에 당도해서 최윤덕 장군께 뵙기를 청했다. 망루에서 수직하던 장수는 급히 말을 달려 도절제사청인 윤주루로 들어가 이 사실을 고했다. 최윤덕 장군은 한동안 생각 속에 들었다가 이내 명령을 내린다.
"따라온 오랑캐 군사들은 목책 밖에 세워두고 사자란 자만 인도해 데려오라!"
얼마 후에 오랑캐 모사 퉁맹가는 비장에게 인도되어 호피 교의에 걸터앉은 최윤덕 장군 앞에 폐백을 바친 후에 군례를 드렸다. 장군이 앉아 있는 전후좌우에서는 기치창검이 햇빛에 반사되어 엄숙한 기운이 서릿발을 날리는 듯했다. 최윤덕 장군은 통맹가의 군례를 받은 후에 홍종 같은 소리로 위엄기 있게 묻는다.
"너는 어떠한 놈인데 감히 강을 건너 나를 보기를 원했느냐?"
통맹가는 청상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아뢴다.
"소인은 건주위 이만주의 비장으로 이만주 추장의 친서를 받들어 대장군 휘하에 바치러 온 자올시다. 이름은 퉁맹가라 하옵니다."
최윤덕 장군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꾸짖는다.
"요망한 오랑캐 놈이 배은망덕하게 국경을 어지럽게 하여,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재물과 곡식을 약탈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을 감행한 자들이 건방지게 무슨 글월을 보낸단 말이냐? 네 이놈, 하늘이 무섭지 아니하냐."
최윤덕 장군은 발을 굴러 추상 같은 호통을 내렸다. 튱맹가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고한다.
"대장군께서 저희들 오랑캐들의 실정을 모르시어 그같이 오해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저희들 건주위는 대대로 조선국의 전하의 후하신 은총을 받아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태산 같은 은혜를 자자손손 각골난망 중이온데 어찌 감히 배은망덕을 하여 여연과 강계를 침략했으리까. 저희들 오랑캐는 여러 족속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여연으로 돌격해 들어간 족속들은 건주위 저희들이 아니고 우디거 족속들이올시다. 깊이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랑캐 모사 퉁맹가의 아뢰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윤덕 장군은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호통을 내린다.
"요망한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크나큰 죄를 범해놓고 간특한 둔사를 꾸며서 감히 나를 현혹하게 하느냐? 저놈의 목을 베어 뒷날을 징계하리라!"
최장군은 또 한 번 엄포를 내렸다. 건주위 모사 퉁맹가는 손을 들어 싹싹 빌며 애걸해 아뢴다.
"감히 장군전에 다시 아룁니다. 소장의 목은 백 번 베어 죽이셔도 한이 없습니다. 소장은 죽음을 각오하고 추장의 친서를 가지고 지엄한 휘하에 바치러 왔습니다. 다만 종같이 부리시던 건주위가 배은망덕하지 아니했다는 것을 소장이 죽은 후라도 아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디거 족속들이 못된 짓을 한 죄를 저희들 건주위가 뒤집어쓰는 일이 원통해서 글월을 받들고 온 것뿐이옵니다."
최윤덕 장군은 다시 호통을 친다.
"네 이놈, 지난번에 여러 차례 여연과 강계로 노략질해 들어온 것이 너희들 족속이 아니고 우디거 족속들이 짓이라는 것을 증명할 증거 거리가 있느냐?"
"장군님! 그것을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일전에 압록강상에서 큰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우디거족들은 또다시 압록강을 넘어서 여연을 침범하려 했습니다. 이 기미를 미리 안 저희 추장 이만주는 급히 기마대 2백여 기를 거느리고 추격해서 우디거족들을 모조리 포박해서 여연 침공을 막았습니다. 이 일은 목책을 지키고 있던 조선 측 망루에서도 자세히 살펴서 아셨을 것입니다. 저희들 건주위는 이같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저 평화로운 것이 좋습니다. 여연과 강계는 저희들이 젖줄이올시다. 조선으로 인해서 먹고 사는 저희들이 어찌 감히 여연을 침범해서 쑥밭을 만들 리가 있습니까? 모두 다 우디거족의 일이올시다."
최윤덕 장군은 지난번 압록강 망루에서 오랑캐들의 난동을 바라보았을 때 벌써 건주위 이만주의 교활한 복선이 있는 것을 짐작해 알고 있었다. 이제 이만주가 퉁맹가를 보내어 여연을 침범한 죄를 우디거족에게 뒤집어씌우고 슬며시 조선의 성토를 모면하자는 간특한 술책이 분명했다. 곧 사자의 목을 베고 소위 친서라는 것을 받지 않고 싶었으나 아직도 겨울이다. 강이 풀려야만 응징하는 군사를 움직일 계획이었다. 좀 더 군사행동의 기밀을 지키고 싶었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엄숙한 호령을 내린다.
"지난번 여연을 침범했던 일이 너희 족속이 아니고 틀림없는 우디거족의 작란이란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하늘을 가리켜 맹세합니다. 저희들은 지금 우디거족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어두고 있습니다. 저희 추장의 친서를 받아보시면 자세한 일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추장이 보낸 편지를 바치라!"
최윤덕 장군은 비로소 편지 바치는 것을 허락했다.
모사 퉁맹가는 다시 머리를 두 번 조아리고 품안에서 홍보에 싼 이만주의 친서를 꺼내 시립해 있는 군관에게 전했다. 군관은 청에 올라 홍보를 끌러, 호피료의에 높이 앉은 최윤덕 장군께 바쳤다. 최윤덕 장군은 이만주의 편지를 읽어본다.
'건주위 지휘 이만주는 삼가 조선국 대장군 휘하에 글월을 올립니다. 지난번에 우디거 야인의 무리가 2백여 기의 인마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또다시 여연을 침범한다 하므로 건주위의 인마 2백여 기를 거느리고 성야 추격하여 그들을 포박하였습니다. 그리하옵고 우디거들이 지난번에 납치해 갔던 남자와 여자 64명을 탈취해 왔습니다. 이들을 강계로 보내오니 관원을 보내시어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건주위 저희들은 항상 조선조정의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변방을 시끄럽게 하는 일은 모두 다 다른 부류의 짓이올시다. 굽어 통촉하시기 바랍니다."
최윤덕 장군은 편지를 다 읽은 후에 이만주의 사자 통맹가를 향하여 엄숙한 음성으로 묻는다.
"우리 사람들을 어느 때 강계로 보냈느냐?"
"소인이 떠날 때 강계로 보낸다 했으니 아마 지금쯤 당도했을 것입니다."
최윤덕 장군은 우선 납치되었던 백성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했다. 급히 행수 군관을 불렀다.
"말을 달려 강계로 가서 부사에게 말을 전하고, 납치되었던 백성들 64명을 받아들였냐고 사실해보라!"
명령을 내린 후에, 오랑캐의 사자는 별실에 대기케 했다. 행수 군관은 급히 말을 달려 강계로 향했다. 과연 건주위에서는 예순네 명의 남녀를 강계부로 인도하고 돌아갔다. 군관은 곧 말머리를 돌려 절도영으로 돌아가 백성들이 틀림없이 돌아온 사실을 보고했다. 최윤덕 장군은 이만주의 간특할 계책인 것을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속아 넘어가는 체했다. 대기해놓았던 오랑캐의 사자를 불렀다.
"너희 추장은 충성을 다하여 우디거족을 무찌르고 우리 백성들을 탈환해서 강계까지 돌려보내 주었으니 가상한 일이다. 곧 우리나라 왕상전하께 아뢰어 후한 상을 내리게 하리라.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여 흉악한 부류들의 불공한 행위를 막으라고 이르라!"
"네, 명심해 이르겠습니다."
이만주의 사자 퉁맹가는 백배사례를 드리고 물러갔다. 최윤덕은 오랑캐의 사자를 돌려보낸 후에 곧 파발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다.
'며칠 전에 건주위 이만주는 압록강 얼부푼 강상에서 우디거 족속으로 꾸민 병졸들과 난투극을 벌여 포박해간 일이 있었습니다. 소신은 이 일이 어떠한 협사가 있는 일인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이만주는 사자를 보내서 지난번 여연을 침략한 일과 이번에 다시 압록강으로 향한 군사는 모두 다 우디거의 일이라 하옵고, 납치되어 간 남녀노소 64명을 탈환해서 강계로 보낸다 했습니다. 신은 군관을 강계로 보내서 사살해보니, 과연 64명의 백성들이 강계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응징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노략질한 허물을 우디거 무리에게 전가하는 간휼한 흉계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강이 얼어서 출정할 시기가 아니므로 가상하다고 칭찬하고 사자를 좋게 돌려보냈습니다. 살피어 통촉하옵소서."
정원에서는 급히 최윤덕의 장계를 어전에 올랐다. 전하는 장계를 보신 후에 급히 영의정 황희 등 삼정승과 육조판서며 삼군도진무 등을 명소했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의 장계를 보니, 확실히 이만주는 최윤덕이 부임했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서 거짓 요공을 해서 죄책을 모면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가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최윤덕의 말대로 아직 강이 얼었고 날씨가 극한이다. 봄이 완연히 온 후라야 응징하는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마땅하다. 과인의 생각으로는, 사자를 건주위에 보내서 잘했다고 칭찬한 후에, 한편으로는 오랑캐들의 민정과 산천의 험하고 편한 길을 샅샅이 살펴서 응징하는 데 편리케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영의정 황희를 위시하여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고한다.
"과연 좋으신 생각이올시다. 먼저 이만주의 행동의 진가를 살피고 용병하는 데 필요한 지세를 탐지하고 오는 일이 좋겠습니다."
세종대왕은 모든 신하를 둘러보며 하문하신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서 건주위의 진가를 탐지하고,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살펴서 앞으로 군사행동에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는가?"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첫째로 슬기가 있고 담이 큰 젊은 사람이라야 하고, 구변이 좋을 뿐 아니라 여진 말도 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물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종서가 아뢴다.
"전하께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호조참판 박신생의 아들 호문은 소윤 벼슬을 지냈습니다. 나이 이십여 세에 총명 영오하여 문무가 겸전할 뿐 아니라 중국말과 여진 말에 능통합니다. 앞으로 크나큰 장재가 될 인물이올시다. 이 사람을 도절제사 최윤덕의 휘하에 두어서 이만주의 정상과 그곳 산천의 험하고 평이한 지세를 살피고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종전하는 옥안에 미소를 띠며 말씀한다.
"호조참판 박신생이 그러한 훌륭한 아들을 두었더란 말이냐. 그렇다면 집현전 부제학 박강생의 친조카로구나."
김종서가 다시 대답해 아뢴다.
"네, 그러합니다. 박호문의 아비가 4형제가 있사온데, 큰사람은 강성병마사 박지생이옵고, 둘째는 전하께서 말씀하신 집현전 부제학 나산경수 박강생이옵고, 셋째는 판내섬시사 박눌생이요, 맨 끝이 박호문의 아비 박신생이올시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더란 말이냐. 좋은 집안의 자제로구나. 그렇다면 박호문을 곧이 자리에 불러들여라."
시립해 있던 도승지는 곧 대전 별감을 시켜서 박호문에게 입시를 명했다. 대전 별감은 초립에 홍의 자락을 흩날리며 호조참판 박신생의 집으로 달려가 하님을 불러박호문에게 어명을 전했다.
"별입시의 분부가 내렸소이다. 빨리 입궐하시오!"
소윤 박호문은 벼슬이 갈려 집에 있다가 별안간 입시의 분부를 받자, 까닭을 알 길 없었다. 아버지는 비록 호조참판이라 하나, 일개전임 소윤에게 별입시의 은전을 내린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별안간 웬일이신가. 무슨 일인지 아나?"
박소문은 초조해서 물었다.
"지금 영의정 대감 이하 육조판서가 어전회의를 열고 계십니다. 무슨 일인지 소인도 까닭을 알 수 없소이다. 어서 빨리 들어 가십시다."
박호문은 더욱 의아하게 생각했다. 황황히 조복으로 바꾸어 입고 말을 달려 대궐로 향했다. 박호문은 대전 별감에게 인도되어 삼정승 육판서와 삼군 짐누들이 시립한 속에 전하께 숙배를 드렸다. 전하는 용안에 화려한 웃음을 띠고 하문하신다.
"네가 박호문이냐?"
"네, 그러하오이다."
"전직이 소윤이라지?"
"네, 그러합니다. 평양 소윤을 지냈습니다."
"네, 아비가 호조참판 박신생이구, 네 중부가 집현전 부제학 박강생이냐?"
"네, 그러합니다."
박호문은 샛별 같은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공손히 대답한다.
"네가 일찍 평양 소윤으로 있어다 하니, 서북면 일을 대강 짐작하겠구나."
"평양서 가끔 민정을 살피러 여연과 강계 등지를 둘러본 일이 있습니다."
전하는 박호문의 재목을 시험하기 위하여 짐짓 묻는다.
"그래, 민정이 어떠하더냐?"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올시다. 남쪽 모양으로 토지는 기름지지 못한 데다가 일기는 차고 산은 첩첩합니다. 그리하와 감자와 귀리로 겨우 월동을 하여 지내는 처지올시다. 이런 중에 오랑캐들이 변지를 침범하는 일이 잦으니 그야말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네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할 수 있느냐?"
박호문은 또렷한 눈으로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보며 주저없이 아뢴다.
"소신이 주제넘게 감히 무슨 방책을 진언하겠습니까? 맡은 임무가 없는 일개 미관말직이 어전에서 방자하게 국가의 중대한 일을 아뢴다는 것은 일이 아니올시다. 전하께서는 새로 임명하신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에게 하문하시옵소서?"
조리 정연하게 또렷한 말씨로 아뢰는 박호문의 말을 듣자, 시립해 있는 삼정승, 육판서의 입가엔 소리 없는 미소가 떠돌았다. 전하도 용안에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네 비록 맡은바 없는 연소배라 하나, 네가 일직 평안도에서 소윤을 지냈으니 민생문제에 대하여 생각한 바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변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할 수 있는가, 그 점을 말해 보라는 것이다."
박호문은 손을 마주 잡고 조용한 음성으로 아뢴다.
"성상께옵서 간곡한 하교가 계시니 방자함을 무릅쓰고 감히 아뢰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여진을 우습게 보고 업신여겨 보았습니다. 여진은 호락호락한 족속이 아니올시다. 일찍이 금국을 건설한 요의 찬연한 시대를 이룩했던 일이 있는 족속이올시다. 항상 회유책을 쓰시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는 성벽을 굳게 하여 방어를 든든히 하옵소서. 그리하여 고려 때 윤관 장군의 옛일을 본받으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짓고 박호문을 향하여 말씀한다.
"내가 평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마는, 저자들이 항상 강을 건너와 백성들의 양식과 우마를 약탈해가고 촌락을 어지럽게 하니 딱한 일이 아니냐. 그리고 우리는 구태여 여진족속을 멸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박호문은 다시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해 아뢴다.
"당돌하게 한 말씀 오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윤관 장군이 북진의 기세를 잠시 올렸으나 이내 폐기해버려서 불모지가 되었습니다. 아조에 들어와서도 적극 정책을 쓰지 않고, 거의 공한지대가 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러하니 오랑캐들이 마음대로 들어와 섞여 살고, 또다시 강을 건너 노략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신의 생각에는 한 번 응징하는 완군을 발동시켜서 오랑캐를 성토하신 후에 국경에 성곽을 굳게 쌓고 남쪽 백성들을 이민시켜서 인구와 물화를 번창케 한다면, 오랑캐들이 감히 국경 안으로 허락 없이 발길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올시다."
젊은 신하 박호문의 대답은 녹록지 아니했다. 세종전하가 마음속으로 계획하는 생각과 일치했다.
"좋은 말이다. 과인의 의사도 너의 소견과 비슷하다. 장차 네 의견에 따라 행동을 시작하겠다. 그러나 오늘 너를 부른 것은 어려운 부탁을 너에게 하려는 것이다. 네 능히 사양치 아니하고 내 부탁을 받겠느냐?"
박호문은 옷깃을 바로잡고 얼굴빛을 정색하여 아뢴다.
"국가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면 신이 어찌 물불을 가리오리까?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세종대왕은 다시 미연히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응징하는 대군을 움직이려면 먼저 적의 허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오랑캐 추장 이만주는 최윤덕이 도절제사로 부임한 후에 두려운 마음을 먹었는지 지난번 여러 차례 여연과 강계를 침범한 일을 우디거 족속이 한 일이라 하고 변명을 하면서 잡혀갔던 백성 64명을 강계로 돌려보냈다 한다. 너는 여진 말을 할 줄 안다 하니, 최윤덕 도절제사의 사신이 되어서 건주위로 건너가 적의 진가와 산천의 지세를 탐지해 오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네 능히 용기를 낼 수 있느냐?"
박호문은 서슴지 않고 아뢴다.
"누대국은을 입은 몸이온데 신이 어찌 죽는 땅이라하여 피하오리까! 하교대로 곧 출발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의 용안은 활짝 화려했다.
"장하다! 그렇다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명을 다하고 돌아오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병조판서와 도승지를 돌아보시며 분부했다.
"전 소윤 박호문에게 상호군의 직책을 주고 도절제사 최윤덕에게 이 뜻을 전해서, 주야배도하여 소임을 다하게 하라!"
병조판서와 도승지는 곧 어전에서 상호군의 첩지를 주었다. 박호문은 상호군의 첩지를 어전에서 받은 후에 사은숙배를 올리고 대궐에서 물러났다. 박호문은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호조참판 박신생과 중부 집현전 부제학 박강생께 뵈온 후에 전하의 특명을 고했다. 아버지들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했다.
"네, 능히 중한 책임을 다하고 돌아오겠느냐?"
중부인 집현전 부제학 나산경수가 물었다.
"이미 국가에 몸을 바친 자올시다. 어찌 위태로운 사지라 해서 나랏일을 피하겠습니까. 정성을 다하여 책임을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장하다, 네 뜻은! 그러나 교활하기 짝없는 오랑캐다. 극히 몸조심하고 돌아오너라!"
중부인 박강생은 조카를 격려했다. 박호문은 아버지들에게 하직을 고한 후에 안에 들어가 어머니께 뵙고 아내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한 후에 말을 달려 서북면 절제사영으로 향했다. 도절제사 최윤덕은 박호문이 당도하기 전에 벌써, 파발마를 달려온 선전관이 상호군 박호문이 어명을 받들고 내려온다는 것을 전해서 잘 알고 있었다. 흔현이 박호문을 절도영으로 맞아들였다. 군례가 끝난 후에 종사관 신숙주와 함께 주안을 차려 관대하면서 오랑캐와 접촉할 일을 상의했다.
"언제쯤 강을 건너갈 작정이오?"
"어명이 지중하시니 내일이라도 일찍 떠나려 합니다. 사또께서는 곧 저에게, 저선국 서북면 도절제사의 사자라는 신표를 주시옵소서."
"내일은 너무나 급하지 아니한가. 천여 리 먼 길을 달리느라고 몸이 몹시 피곤할 텐데, 조금 피로를 풀고 가는 것이 어떠한가?"
최윤덕 장군은 젊은 선비를 사지로 보내는 것이 애틋했던 것이다. 박호문은 얼굴빛을 바로하여 고한다.
"지금 전하께서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나라 땅을 하루바삐 정돈하실 것을 궁리하고 계십니다. 어서어서 적정을 탐지하여 오랑캐를 응징하여야 하겠습니다."
최윤덕 장군은 박호문의 등을 어루만져주면서 말한다.
"젊은 몸으로 기상이 장하오! 그렇다면 만난을 무릅쓰고 적정을 자세히 탐지해가지고 돌아오시오. 이편에서는 모든 군비를 유루 없이 정돈했다가, 봄이 되어 강만 풀리면 곧 대군을 휘동해서 응징할 작정이오."
"좋습니다. 이만주한테는, 우리 편 군사 행동은 극비에 부치겠습니다. 다만, 이번에 침범해 들어오려는 우디거족을 격파해서 결박 짓고, 전번에 납치해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탈환해주어서 사또께서는 가상하게 생각하시고, 소인을 특사로 보내셨다고 말하겠습니다."
최윤덕 장군은, 슬기로운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청년 박호문을 미덥게 생각했다.
"옳은 말이요. 첫째로 저자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눅여주고, 둘째는 진정 우디거족이 우리를 침범한 것이지, 오랑캐들이 허불을 우디거족에게 전가시켜서, 간특한 계교를 써서 압록강 위에서 소란을 떤 후에 납치했던 부녀자들을 돌려보낸 것인지, 그 진가를 판별해야 하오. 그리고 산천의 험한 곳과 평탄한 지세를 자세히 살펴서 돌아와야 합니다."
"전하께서도 상세한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삼가 사또의 분부를 명심하겠습니다."
상호군 박호문의 말이 떨어지자 최윤덕 장군은 옆에 있는 종사관 신숙주를 향하여 당부했다.
"신종사관은 상호군이 가지고 갈 나의 친서를 써주시오. 집현전 학사의 명문은 오랑캐들한테는 너무나 과분한 글이지만, 하하하."
최윤덕 장군은 회해를 부려 호방하게 웃었다. 옆에서 박호문도 웃으며 한마디 한다.
"오랑캐들한테 과분할 뿐 아니라, 사자로 가는 저도 보한대가 지은 글을 가지고 가니 품 안에 문향이 가득하게 풍겨지겠습니다."
최윤덕 장군은 박호문의 뒤를 이어 호탕하게 대꾸한다.
"여보게 상호군, 집현전 학사가 지은 글을 품고만 가도 품 안에서 향기가 난다면서 어찌해서 내 말은 없나? 정작, 내 성명을 품에 품고 가면서.... 그래, 대장군의 성명 삼자는 집현전 학사의 글만 못하단 말인가? 섭섭하이그려! 하하하."
박호문은 상긋 웃으며 응구첩대로 잽싸게 대답한다.
"사또께 아룁니다.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쇼. 소인은 사또의 몸을 대신해서 가니, 곧 호랑이를 두 번씩이나 때려잡은 대장군이올시다. 자신이 어찌 자신을 칭찬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사! 사또, 죄송합니다."
박호문은 어렵지 않게 슬쩍 받아넘겼다. 최윤덕 장군은 친히 잔에 가득 술을 부어 박호문에게 주며 말한다.
"용하다, 자네 구변이___. 잘 눅여낼 것이다. 사양치 말고 이 술을 받으라!"
박호문은 두 손으로 잔을 받들어 단숨에 마시었다. 국난을 당하여 임전태세를 취하고 있는 운주루의 광경은 이같이 여유가 작작하고, 화한 기운이 가득히 감돌았다. 종사관 신숙주는 술상을 물린 후에 오랑캐들에게 보내는 글을 지었다.
'대조선국 서북면 도원수 최윤덕은 상호군 박호문을 특사로하여 건주위 지휘 이만주 장하에 보내노라. 여진은 항상 조선을 존숭하여 조공을 바치고 벼슬자리를 원했으며, 조선은 또한 후하게 식량을 주어 자애롭게 대하여 형제의 선린을 이루었다. 그러나 요사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 여연과 강계를 자주 침범하여 부녀를 강탈하고 우마를 도적질해 가니 가증 가악하게 생각했다. 성상전하께서는 크게 진노하시어 나를 보내어 국경을 바로잡고, 포악한 무리들을 응징하라 하셨다. 나는 건주위 여진의 행동을 주시하던 중 지난번에 퉁맹가를 보내어 건주 여진의 짓이 아니고 우디거의 짓이라 하여, 우디거가 납치했던 무리를 탈취해 보낸 일을 상세하게 들어서 알았다. 가상한 일이다. 이제 내 몸을 대신해서 상호군 박호문을 특사로 보내어 우디거 물리친 일을 찬양하고 상으로 소 열 필과 돼지 백 마리와 양식 오십 석을 보내노니, 받아서 너희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라. 그리고 계속해서 우디거 족속들을 단속해서 대국의 국경을 어지럽게 하지 말게 하라.'
신숙주는 쓰기를 다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었다. 최장군을 크게 칭찬한 후에 친히 수결을 두어 박호문에게 넘겼다. 이튿날 박호문은 도절제사영에서 최윤덕 장군에게 군례를 드려 고별한 후에 단기로 소와 돼지와 양곡을 이끄는 인부들과 함께 얼음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박호문은 도시 담 덩어리였다. 아무런 무비도 갖추지 아니했다. 관 쓰고 도포 입은 선비 복색이었다. 다만 회중에 날카로운 단도 한 자루와 세 치만한 달변의 혀를 지녔을 뿐이다. 삭풍을 무릅쓰고 길고 긴 언 강을 건넜다. 소와 돼지 떼와 곡식 실은 마바리가 뒤를 따랐다. 다시 파저강인 혼강을 건너 건주위 오랑캐 땅 경계선에 당도했다. 강가에는 오랑캐 보초와 영문이 즐비하게 이곳저곳에 벌여 있었다. 단기로 소와 돼지 떼를 몰고 곡식을 싣고 들어오는 박호문을 보자, 오랑캐 보초 군사는 단통 창을 비껴 들고 누구냐고 호통을 쳤다. 박호문은 마상에서 씩씩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나는 조선국 서북면 도원수 최윤덕 장군의 아장 박호문이다. 지난번에 너희 추장 이만주가 사자 퉁맹가를 보내서 우디거 족속들의 난동을 격파하고, 그들이 납치해 갔던 조선 백성들을 돌려보냈으므로, 우리 도원수께서는 가상하게 생각하시어 나를 특사로 해서 치하하는 글월을 전하고, 상급으로 소와 돼지와 많은 곡식을 내시는 것이다. 빨리 너희 추장을 만나게 하라."
유창한 여진 말이다. 오랑캐 군사 놈들은 특사 박호문보다도, 듬직한 황소와 꿀꿀대는 돼지며 푸짐한 백미가 더욱 반가웠다. 보초 놈들은 달음질쳐 두목이 있는 영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 사실을 고했다.
"조선서 사신이 왔습니다. 여진 말을 썩 잘합니다. 소 열 필과 돼지 백 마리와 쌀 오십 섬을 가지고 와서 추장님께 뵙기를 청합니다."
두목이란 자도, 특사보다도 소 열 필에 돼지 백 마리와 백미 오십 석이 조선서 온다는 졸개의 말을 듣자, 입이 딱 벌어졌다.
"정말 여진 말을 잘하더냐?"
"잘합니다. 아주 능란합니다."
"간첩은 아니겠느냐?"
"당치 않은 말씀이올시다. 지난번에 추장님께서 모사 통맹가 편에 친서를 보내시고 납치했던 조선 사람들을 돌려보내서 고맙다고 도원수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 합니다. 특사를 어찌 간첩이라고 의심하십니까. 한번 만나보십쇼. 간첩은 몰래 잠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만나보기로 하자."
강변을 지키고 있던 현지의 두목은 박호문을 영문 안으로 청해 들였다. 두목이 바라보니 풍채가 헌앙한 젊은 선비다. 아관박대에 문기가 훈훈하게 온몸에 돌았다. 칼 한 자루, 화살 한 대 지니지 아니했다. 변지 두목은 박호문의 풍채에 눌렸다.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최윤덕 장군의 특사시라지요?"
"그렇소. 나는 최윤덕 장군의 아장 박호문이오. 도원수님의 친서를 당신의 대장 이만주에게 전하러 왔소. 빨리 대장한테 연락하오."
능란한 여진 말이다. 조선 나라 대관으로 이만큼 여진 말을 잘하는 이를 만나보지 못했다. 두목은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잠깐만 '캉'에 앉으셔서 불을 쬐십시오. 곧 모시고 가겠습니다."
옆에서는 질화로의 백탄불이 이글거렸다. 박호문이 언 몸을 녹이고 있을 때 별방으로 들어갔던 두목이 양털 호복한 벌을 들고 나와서 박호문에게 바치며 말한다.
"우리 땅은 너무나 춥습니다. 우선 추위를 막기 위하여 이 옷을 입으십시오. 지금 추장님한테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흠뻑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박호문은 아무리 춥다 하나 호복을 입을 까닭이 없었다.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속에 추위 막을 옷을 든든히 입었소. 아무 염려 마시오. 당신의 후한 뜻을 잘 받아서 가슴 안에 기억하리다."
우리나라 선비의 외유내강한 깐깐한 풍도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사양 마시고 입으십시오. 매우 춥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내 염려는 조금도 마시오. 뜨듯하게 방한이 될 내의를 속에 입었소."
박호문은 얼굴에 가득히 웃음을 띠고 손을 저어 흔들었다. 변지 두목은 호복을 입기 싫어하는 선비의 깐깐한 심경을 비로소 느낀 모양이었다.
"정 그러하시다면 어한하시도록 술이나 한잔 권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벽장 문을 열고 술병과 잔을 꺼냈다. 오지병에 담긴 상품 빼주다. 이것조차 아니 받을 수는 없었다. 박호문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손을 내밀어 술잔을 받았다.
"좋소이다. 두 번씩이나 호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지요. 하하하."
두목과 박호문은 석 잔 술을 나누고 영문 밖으로 나섰다. 영채 밖에는 호장이 탈 오추마와 박호문이 타고 온 눈같이 흰 백마가 대령되어 있고, 뒤에는 소와 돼지와 곡식 실은 마바리가 줄을 지어 있었다. 박호문이 타고 온 백설마는 은안장에 붉은 상모술을 화려하게 늘이고 금방울을 단 홑벌 준마다. 오랑캐 두목 호장은 소와 돼지와 곡식도 좋지마는 박호문의 은안백마가 탐이 났다. 역시 말을 어거해 본 장수다. 호장이건만 눈이 높았다. 문 앞에 나서자 선뜻 백설마 앞으로 가까이 갔다. 고삐를 움켜잡고 말 궁둥이를 툭툭 쳤다. 백마는 콧김을 강하게 뿜었다. 입으로 '어흥' 소리를 질렀다. 네 굽을 모아 소스라쳐 뛰는 시늉을 했다. 호장은 박호문을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좋은 말이다. 천리마로구먼. 고구려 때 을지문덕 장군이나 어거할 말이지, 선비가 타기에는 너무나 벅찬 말인데!"
오랑캐 장수는 농담을 붙였다. 박호문은 속으로 웃었다. ‘저놈이 말이 탐나는 모양이로구나!’ 슬며시 대꾸를 한다.
"하필 을지문덕 장군뿐이겠는가. 선비들도 용마를 어거할 줄알지."
박호문은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호장은 눈을 찡긋하고 묻는다.
"선비도 말을 잘 어거할 줄 압니까?"
"이 사람아, 나도 말을 타고 수천 리 길을 달려왔는데 어거할 줄 아느냐는 것이 무슨 말인가? 우리나라 선비 쳐놓고 천리마를 탈 줄 모르는 사람은 없네. 지금 자네 앞에 서 있는 나도 은안백마 천리마를 타고 왔네. 자네, 글을 못 배웠네그려. 예악사어서수란 말이 있네. 선비란 덮어놓고 글만 읽어서 문약한 것이 아닐세. 예절을 잘 지킬 뿐 아니라 풍류도 알아야 하고, 활도 쏠 줄 알고, 말도 잘 타야 하고, 글씨도 잘 쓰고, 수학도 잘 풀어야 한다는 말일세.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선비 쳐놓고 말 탈 줄 모르는 사람은 없네. 이 까닭에 우리 나라 선비들은 내 말과 같은 용마가 아니고는 타지를 않네!"
박호문은 능란한 여진 말로 풍을 한 번 흠뻑 떨었다. 호장은 무안했다.
"무식해서 조선의 선비님들이 그같이 말까지 잘 타는 줄을 몰랐습니다."
두 손을 잡고 읍을 했다.
"말만 잘 타는 것이 아닐세. 아까도 말했지만, 사정에서 활을 익혀서 쏘는 법도 제일일세. 백발백중일세."
호장은 또 한 번 두 손을 마주 잡고 공손히 존경하는 뜻을 표했다. 박호문은 호장을 주먹 안에 넣고 흠뻑 주물렀다. 천천히 호장의 오추마 앞으로 다가섰다. 처음에 호장이 하듯, 오추마의 고삐를 한 손으로 바싹 잡았다. 한 손으로는 말 궁둥이를 힘차게 탁탁 갈겼다. 호장의 오추마는 뒷발질을 사납게 했다. 박호문은 웃으며 말했다.
"기름지게 먹여서 털이 윤기가 난다마는 천리마는 못되는구나! 하루에 오백 리밖에 못 달리겠다." 호장도 빙긋 웃고 대답한다. "참말 견식이 높으십니다. 용마의 아류밖에 아니 됩니다. 우리 추장 이만주 장군이 타는 말이 제일가는 준총이고, 그다음 아장들은 모두 다 소장 같은 말을 가졌습니다."
"그래? 여진엔 좋은 말이 많다고 들었는데 어째 그런가?"
"천 리를 달리는 용마가 어디 그리 흔할 수 있습니까..그저 저희들 아장이 타는 말이 상지중이고, 추장이 타시는 말이 그중 상지상이올시다."
호장의 말이 떨어지자 박호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묻는다.
"자네, 내 말과 바꾸어 타보려나?"
호장은 기뻤다.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나 한 번 사양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까짓 것 잠시 바꿔 타면 무얼 합니까. 그대로 가십니다."
"잠시가 아니라 아주 자네한테 나의 사랑하는 애마를 넘겨줌세."
호장은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정말이십니까?"
"내가 일구일언을 할 사람인가. 아주 자네한테 나의 백설마를 넘겨줄 테니 지금부터 바꿔 타기로 하세."
말을 마치자 박호문은 호장의 오추마 위로 선뜻 올랐다. 호장은 못이기는 체하면서 화려한 상모술을 늘인 은안백마 위로 올랐다. 수백 명 오랑캐 병졸들은, 입을 헤벌리고 은안백마에 오르는 호장을 바라보고 웃었다. 박호문은 첫째 번 관문에서 호장을 떡주무르듯 해서 외교의 승리를 얻었다. 호장은 박호문의 은안백마를 바꾸어 타고 달렸다. 마음이 흠뻑 흐뭇했다. 채찍으로 연방 치며 앞으로 달린다. 백마는 호장의 채찍을 받으며 네 굽을 모아 허송을 향하여 솟구쳐 뛰었다. 박호문이 바꾸어 탄 호장의 오추마는 까맣게 뒤에 떨어졌다. 호장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속으로, '과연 천리준마로구나!" 탄복했다. 백마를 시험해 본 호장은 뒤에 따르는 오추마를 기다리기 위하여 말고삐를 늦추어 잡았다. 백마는 신통하도록 영리했다. 말곱삐가 늦춰지자 뛰달리던 굽을 슬며시 멈추고 의젓하게 뚜벅뚜벅 걸었다. 호장은 더한층 백마를 사랑하게 되었다. 호장은 만면에 웃음을 싣고 박호문에게 감사한 말을 보낸다.
"과연 명마올시다. 이같이 좋은 말을 소장에게 넘겨주시니, 은혜로운 일을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박호문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자네들한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다만 전과 같이 신의를 잘 지켜서 국경을 소란하게 하지 말고 젊은 여자와 장정들을 납치해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일세. 오늘 내가 최윤덕 도원수의 명을 받들어 자네네 추장 이만주를 만나러 온 것은, 잡아갔던 남녀노소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우디거 부류를 물리쳤다 해서 가상하다고 치하를 하러 찾아온 길일세. 전처럼 조공을 잘 바치고 신하 노릇을 잘한다면, 그까짓 천리마 한 필쯤이겠나. 백 필이라도 줌세."
"조선에는 천리마가 그같이 많습니까?"
"나 같은 선비가 천리마를 타는데, 정말 장군들이야 말할 거 있나. 모두 다 천리준총 용마를 타네. 그리고 우리 도원수 최윤덕 장군이 탄 말은 하루에 이천 리를 달리는 용마일세. 서북면에서 최장군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달리신다면 아무리 첩첩산중, 태산중령이라 할지라도 반나절이면 당도하실 것일세."
호장은 기가 죽었다. 대답 없이 말 고삐를 나란히 해서 나간다. 박호문은 호장과 함께 고삐를 가지런히 하여 재를 넘고 물을 건넜다. 도중의 모든 경광을 범연히 지나치지 아니했다. 땅 이름과 산 이름도 기억했다. 압록강과 혼강을 건너서 추장 이만주가 있는 소굴에 이르기까지 거리와 지세를 똑똑하게 살피고 기억해두었다. 산은 갈수록 험준했다. 천 갈래 만 갈래 천태만상으로 벌어졌다. 백두산 저편에서 천지만엽이 되어 흘러내린 산간 부락들이었다. 천엽 속같이 복잡했다. 이곳에 평평한 땅을 골라 마을이 생겨서 부락을 이루고 저자가 벌어졌다. 남자들은 모두 다 소매 긴 푸른 청복을 입고, 머리를 땋아 내렸다. 여인들은 머리꼬리를 땋아서 뒤통수에 붙였다. 박호문은 초롱 같은 눈동자를 굴려 말 없는 중에 모든 것을 기억해두었다. 한나절이 지난 후에 호장과 박호문은 이만주가 거처하는 추장의 궁실에 당도했다. 호장과 박호문은 말에서 내렸다. 소와 돼지와 곡식 실을 마바리도 밖에 대기시켜 놓았다. 층암절벽을 돌고 돌아서 돌로 쌓은 홍예문으로 들어섰다. 푸른 기와를 얹은 돌집 궁실이 나타났다. 오랑캐 졸개들이 창과 칼을 비껴들고 빳빳이 서서 좌우편으로 갈라서 있었다. 졸개들은 변지 호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괴상한 여진 말로 소리를 꽥 지르며 손을 번쩍 들어 예를 붙였다. 호장이 손을 들어 답례를 한 후에 두목 졸개에게 한동안 무슨 말인지 지껄여댔다. 두목 졸개는 호장의 말을 들은 후에 궁실 안으로 스러졌다. 호장이면서도 맘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두목 졸개가 다시 나타나 호장에게 들어가라는 전갈을 보냈다. 호장은 박호문을 향하여,
"잠시 좀 기다려줍쇼. 곧 다녀 나오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다정하게 인사를 하고 스러졌다. 박호문은 갑갑한 것을 참았다.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오랑캐들도 하는 시늉은 다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뒷짐을 지고 호궁의 전경을 예민한 눈으로 둘러보며 거닐었다. 두목 졸개는 아관박대에 도포를 입은 사람이 조선의 귀빈인 것을 알았다. 졸개들을 시켜서 화톳불을 피워놓고 걸상을 내다 주면서 앉기를 청했다.
"고맙네. 오랑캐 사람들은 인정이 많군그래. 우디거 사람들보다는 훌륭한 사람들이지?"
능란한 여진 말로 말문을 열었다. 오랑캐 졸개들은 아관박대로 차린 조선 귀빈이 여진 말을 하는 것을 보자, 의외로 생각했다.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조선의 대관이십니까?"
대화가 열리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는 것은 인정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기틀이다.
"조선서 이만주 추장에게 치하를 하러 온 상호군 박호문일세."
"상호군은 높은 벼슬입니까?"
"높고말고. 조선 국왕 전하의 명령을 너희 추장 이만주에게 전달하러 온 사람이다."
졸개들은 깜짝 놀랐다. 황망히 읍을 하고 다수를 바쳤다. 졸개 한 놈이 묻는다.
"조선 국왕 전하께서 무슨 하교를 저희들 추장한테 내리셨습니까?"
"너희들의 알 일이 아니다마는, 우디거 부류가 여연으로 쳐들어오려는 것을 너희 추장이 쫓아내고, 잡아갔던 우리 백성들을 강계로 곡식을 내리시는 것이란다!"
"최윤덕 장군이 치러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까?"
"미친 놈! 상급을 전하께서 내리시는데 최윤덕 장군이 어찌 감히 왕명을 어기고 너희들을 치러 오시겠느냐."
"그렇다면 참 좋겠습니다. 피난 간 사람들을 내려오라고 해야겠습니다."
"누가 어디로 피난을 갔느냐?"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모두 산속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미친 놈들, 이 추운 겨울에 늙은이와 어린것을 왜 산꼭대기로 피난을 시켰단 말이냐!"
박호문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좋은 정보를 탐지했다고 생각했다.
"조선 군사가 쳐들어올까 보아 먼저 늙은이와 약한 어린이들을 피신시키라고 대장군이 분부를 내리신 것입니다."
"너희 대장은 우리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인데, 까닭 없이 너희를 정벌할 리가 있느냐. 지난번에도 우디거 무리가 여연을 침범하려는 것을 너희 대장이 쫓아버리고, 잡아갔던 우리 백성들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라! 너희들을 괴롭게 할 까닭이 있느냐? 조선은 인의의 나라다. 죄 없는 자는 치지 아니한다. 우디거 부류를 응징할지언정, 충성을 다하는 너희를 칠 까닭이 있느냐. 급히 백성들을 피난시킨 것은 못된 짓이 있는 것이로구나. 도둑이 발이 저리다고?"
두목 졸개는 얼굴이 벌개지면서 얼른 대답을 못 했다. 박호문은 마음속으로 건주위들이 협사를 한 것이 분명하다고 심증을 얻었다. 박호문은 다시 졸개들에게 묻는다.
"우디거 부류들이 사는 곳은 여기서 거리가 얼마쯤 되느냐?"
"멉니다. 첩첩산중 길로 이백 리가량이나 됩니다."
"우디거 놈들이 우리 땅을 범하려면 반드시 너희 부락을 통과하게 되겠구나?"
졸개는 무심코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박호문은 이만주의 사자 통맹가의 말이 확실히 거짓인 것을 깨달았다. 이백여 리 밖에서 살고 있는 우디거가 건주위 땅을 통과해가지고 여연을 침공했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우디거는 모든 점이 건우쥐에 비해서 월등하게 약한 부류다. 비록 여연에서 우마과 곡식과 백성들을 약탈했다 할지라도 건주위를 통과하는 길에서 건주위에게 뺏길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미련한 우디거라 하나 그러한 무모한 짓을 할 리가 만무했다. 모두 다 이만주가 속이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더한층 갖게 되었다. 한편 이만주가 거처하고 있는 궁실 안에서는 긴장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강변 호장이 이만주에게 들어가 박호문이 조선국 도원수 최윤덕 장군의 명을 받들어 소와 돼지며 곡식을 싣고 와서 감사한 뜻을 표한다는 말을 듣자, 이만주의 입은 딱 벌어졌다. 마음속으로 자기 계책이 맞아들었다고 생각했다. 벙글벙글 웃으며 옆에 있는 모사 퉁맹가를 보며 말한다.
"우리의 책략이 맞았네그려. 최윤덕이 비록 호랑이를 때려잡은 맹장이라 하지만 모사 통맹가의 슬기를 따르려면 아직도 얼었네. 하하하. 우리 꾀에 속아 넘어갔어! 좌우간 소와 돼지와 곡식은 며칠 동안 내 배를 기름지게 하겠네. 하하하."
이만주는 기뻐서 연해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이만주와 통맹가가 모략이 맞아들어갔다고 만면에 기쁜 웃음을 띠고 손뼉을 치며 있을 때, 전후좌우로 둘어 앉았던 많은 추장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사람의 추장이 이만주를 향하여 말한다.
"장군님, 소장의 생각에는 소와 돼지와 곡식을 준다고 덮어놓고 기뻐만 하실 일이 아닌가 합니다. 혹시 박호문이 우리의 정세를 염탐하러 온 간첩이 아닌가 의심됩니다. 깊이 생각해서 처리하십시오."
늙은 추장의 말이 떨어지자 여러 추장들이 일제히 말한다.
"그렇습니다. 방심하고 기뻐만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속셈을 든든하게 차리고 앞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모사 퉁맹가가 말한다.
"우리는 최윤덕이 치러 오지 않는다고 방심을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의 힘을 기를 때까지 맹장 최윤덕의 예봉을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저편에서 보내는 호의는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간에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는 우리의 힘을 기르면서 변하는 대로 임기응변하는 계책을 써야 합니다. 이 까닭에 우리 장군께서는 우리 군사들에게 우디거 군사의 모습으로 가장시켜서 압록강상에서 격투를 시키고, 또 나를 최윤덕에게 보내서 잡아 왔던 조선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이 아닙니까? 좌우간 간첩이든 아니든 간에 조선에서 보낸 물건은 받아들이고 박호문은 좋은 낯으로 만나보셔야 합니다."
한 장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외친다.
"아니 됩니다. 지금 왔다는 박호문을 잡아 가둔 후에 목을 베어서 돌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형편을 샅샅이 알아서 최윤덕에게 보고하는 날은 큰일입니다. 소와 돼지와 곡식을 주었다고 덮어놓고 좋다고만 할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을 꺼냈던 백발이 성성한 늙은 추장이 말한다.
"박호문을 죽이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당장 최윤덕의 대군이 얼음을 타고서라도 강을 건너올 것입니다. 그저 방심을 하지 말고 우리들의 병력을 기르는 한편, 퉁맹가 모사의 말대로 임기응변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상책입니다."
박호문을 죽이라는 젊은 추장이 다시 주장한다.
"조선 군사는 대개 보병들입니다. 아무리 최윤덕이 백전백승의 장사라 하나 얼음을 잘 타지 못하는 군사를 가지고 어찌 겨울에 강을 건너겠습니까. 우리는 이 기회를 타서 한번 강을 건너서 최윤덕의 군사를 무찌르고 우리의 젖줄인 여연과 강계 땅을 손아귀에 넣어야 합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추장은 덮어놓고 떠들어댄다. 박호문을 인도해 들어간 강변 장수가 비로소 한마디 한다.
"천만에, 조선 군사는 보병만이 아닙니다. 말 잘 타는 기병이 서울에서 많이 온 듯합니다. 오악사어서수의 육예를 존숭하는 나라이라 선비들도 천리준총을 잘 어거할 줄 압니다. 지금 최윤덕의 특사로 온 박호문도 은안백마 천리준총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선비가 이러하니 황차 무관과 군사들이 말을 못 탈 리 만무합니다. 얼음을 타고 건너오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모든 추장들의 공론을 듣고 있던 이만주는 박호문이 은안백마 천리준총을 타고 강을 건너왔다는 말에 귀가 번쩍했다. 강변 호장에게 묻는다.
"박호문이 천리준총을 타고 왔더란 말이냐?"
"네, 그러합니다."
"박호문은 선비라면서?"
"얌전한 선비올시다. 아관박대에 도포를 입고, 촌철도 차지 않고 왔습니다.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희고, 손은 여자같이 부드럽습니다. 무인이 아니라 확실히 선비올시다."
"선비가 천리를 뛰는 용마를 어거해서 왔다는 일은 과연 어려운 일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선비들도 육예를 익혀서 활 쏘고 말 달리는 일을 모두 다 배웠다 합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좋은 명마가 많이 생산되는 모양이올시다. 최윤덕 장군이 타는 말은 하루에도 능히 이천 리를 달린다 합니다. 조선군은 넉넉히 얼음을 타고라도 건너올 것입니다."
이만주는 잠시 고개를 숙여 무엇을 생각했다.
"좌우간 박호문을 한번 만나본 후에 다시 의논하기로 하자."
건주위 도지휘 이만주는 비로소 단을 내렸다. 모든 추장들은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변 호장이 다시 고한다.
"그럼 박호문을 불러들이오리까?"
"곧 데리고 들어오라!"
강변 호장은 비로소 궁실 밖으로 나가, 졸개들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박호문을 청했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기 짝없습니다. 우리 지휘께서 청하시니 들어가십시다."
"지루할 것 없었네. 병졸들이 화톳불을 피워주고, 좋은 다수까지 주어서 때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네."
박호문은 미연히 웃으며 강변 호장의 인도로 이만주가 거처하는 처소로 들어갔다. 정면, 양털로 교의를 덮은 곳에 이만주가 앉아 있고, 좌우편에는 여러 부락의 추장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이만주는 강변 호장에게 인도되어 들어오는 박호문을 보자 교의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모든 추장들도 일제히 일어났다. 강변 호장이 이만주를 향하여 고한다.
"이분이 최윤덕 장군의 친서를 가지고 온 상호군 박호문이십니다."
이만주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박호문을 향하여 읍하고 맞이했다. 박호문도 답하는 읍을 보내며 맑은 눈초리로 이만주의 모습을 살폈다. 구릿빛 얼굴에 몸집이 비대했다. 눈에는 욕기가 가득하게 엉기고 서려 있었다.
"추운 겨울에 언 강을 건너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셥소이다."
이만주는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무어 대단치 않소이다. 천리준총을 타고 강을 건너니 아무리 얼음이 꽝꽝 얼었다 하나 순식간에 달려왔소이다. 아무런 고생도 없었소."
박호문은 능란한 여진 말로 천리준총을 타고 왔다고 풍을 쳐서 이만주의 기를 우선 눌렀다. 달변인 여진 말을 듣자 이만주는 깜짝 놀랐다.
"여진 말을 참 잘하십니다. 보아하니 선비신데 용하게 천리마를 잘 어거하셨습니다. 천리준총은 무인들도 어거하지 어렵습니다."
박호문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선비란 모든 것을 다 할 줄 알아야 하오. 그러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선비 되기가 극히 어렵소. 외국 말도 잘 해야 하고, 활도 잘 쏘고, 말도 잘 탈 줄 알아야 하오. 글만 잘 하는 것이 아니오. 그래야 치국안민을 하지 않겠소? 하하하."
"다시 한번 상호군 어른을 존경합니다. 무불통지이십니다."
박호문은 다시 웃으며 말꼬리를 돌린다.
"자아, 칭찬하는 외교사령은 그만 하고 우리 도원수 최윤덕 장군의 친서를 받으시오."
말을 마치자 박호문은 청포 소매 속에서 최윤덕 장군이 이만주에게 보내는 글월을 꺼내서 전했다. 이만주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상품 장지에 종사관 신숙주가 달필로 짓고 쓴 글월이었다. 옆에 섰던 모사 퉁맹가가 글 뜻을 풀이했다. 퉁맹가는 한자를 짐작하는 때문이다. 여연을 침범하려는 우디거 부류를 물리치고, 잡아갔던 남녀노소를 탈환해주었다는 대문에 이르러 이만주의 입은 딱 벌어졌다. 자기네 꾀가 맞아들었다는 기쁨이었다. 또다시 가상한 뜻을 표하기 위하여 소와 돼지와 곡식을 보내준다는 말에 더 한 번 입이 벌어졌다. 퉁맹가의 풀이가 끝나자, 이만주는 이마에 손을 대고 박특사를 향하여 감사하다는 경의를 표했다. 인해 모든 추장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자아, 최윤덕 장군이 우리에게 보낸 소와 돼지며 곡식을 보러 나갑시다."
말을 마치자 박특사와 함께 뚜벅뚜벅 걸어 궁실 밖으로 나갔다. 모든 추장들이 뒤에 따랐다. 궁실 밖 넓은 마당에는 조선에서 보낸 소며 돼지며 곡식이 즐비하게 하륙되어 있었다. 이만주는 손뼉을 치며 '좋다!'소리를 치고 기뻐했다. 홀연 이만주의 눈결은 화려한 금은주옥으로 꾸민 백설마를 발견했다. 강변 호장에게 묻는다.
"이 말이 박특사가 타고 오신 은안백마 천리준총인가?"
"네, 그렇습니다."
강변 호장이 대답했다. 이만주는 뚜벅뚜벅 말 앞으로 걸어갔다. 윤이 번지르르 흐르는 풍윤한 갈기털을 쓰다듬어준 후에 말 궁둥이를 툭툭 쳤다. 말은 '어흥' 소리를 치면서 네 굽을 모아 공중으로 까맣게 치솟았다.
"좋은 말이다. 천리준총이로구나!"
이만주는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한번 타봐도 좋습니까?"
박호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섰던 강변 호장의 가슴이 뜨끔했다. 이만주는 나무등걸에 매어놓은 견마 줄을 손수 끄르고 선뜻 마상에 올라 고삐를 잡았다. 말 궁둥이를 발뒤꿈치로 강하게 걷어찼다. 말은 소리치며 네 굽을 모아 뛰기 시작했다. 바람을 끊고 번개같이 뛰었다. 광야를 달리고 냇물을 껑충 뛰어넘었다. 삽시간에 층암절벽으로 까맣게 달렸다. 말도 잘 뛰거니와 이만주의 말을 어거하는 솜씨도 대단했다. 이 모양을 바라보는 모든 추장들은 손뼉을 치며 잘 탄다고 부르짖었다. 한동안 쾌활하게 백설마를 달리던 오랑캐 장수 이만주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본고장으로 돌아왔다. 모든 추장들은 박수갈채를 하며 이만주와 백마를 맞이했다. 이만주는 말에서 선뜻 내리자 호방한 목소리로 지껄여댄다.
"과연 천리준총이다. 세상에 드문 용마! 내 생전에 이런 좋은 말은 처음 타보았다. 훌륭한 말이다."
말을 마치자 이만주는 박호문에게 묻는다.
"도대체 이런 용마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박호문이 웃으며 대답한다.
"구하다니?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말이 거재두량입니다.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을 최윤덕 장군은 가지고 계십니다."
이만주의 얼굴에 부러워하는 빛이 현연히 나타났다. 모든 추장들도 박호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헤 하고 벌리고 있었다.
"도대체 조선에서는 이런 좋은 종자를 어디서 기르십니까?"
"우리나라 남해 속에 제주 한라산이란 명산이 있소이다.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삼신산 불로초가 나는 곳이라 해서 침을 만 길이나 흘리는 곳이지요. 이 산 아래, 넓고 넓은 청초 우거진 광야가 바닷가에까지 쫙 퍼졌고, 여기서 천리용마 수천 필을 방목하고 있소이다. 새끼 말 망아지들이 나면 불로초와 가지각색의 향초들을 따먹고 자라니 어찌 용마가 아니되겠소. 이 까닭에 글 읽는 선비 나한테까지 천리준총이 차례왔소이다."
박호문은 정색하고 풍을 치며 대답한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준총이 매우 흔한 모양인데, 어찌해서 여연과 강계에는 이러한 말을 보내지 아니하십니까?"
박호문은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여연과 강계 변장들에게 그런 용마를 주었다가 만약 당신네 여진족들이 노략질을 해서 다 가져가게 된다면 큰일이 아니겠소. 그러하니 강계와 여연 변장들한테는 준총을 주지 않는 것이오. 다만 최윤덕 장군만은 천하무적의 대장군이므로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하루에 이천 리 뛰는 용마를 내리셨소."
박호문은 여진 오랑캐들의 급소를 찔렀다. 이만주 이하 모든 추장들은 무안에 취하여 할 말이 없었다. 얼굴빛이 붉어질 뿐이다. 이만주는 얼굴 가죽이 두껍고 뱃심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내 곧 무안한 얼굴빛을 스러뜨린 후에 얼굴에 가득 웃음빛을 띠고 박호문에게 다시 말을 건넨다.
"박특사, 청할 일이 한 가지 있소이다."
박호문도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무슨 청인가?"
"소와 돼지와 곡식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오이다마는, 특사께서 타고 오신 저 백마를 나에게 넘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박호문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어찌하면 좋은가. 때가 조금 늦었는걸. 말은 이제 내 말이 아니라, 저기 서 있는 저 강변 호장의 말이 되었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얼른 못 알아듣겠소이다."
이만주는 박호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박호문은 벙긋벙긋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압록강에서 백마를 타고 건너올 때 저 친구가 하도 내 말이 좋다고 하길래 선뜻 넘겨주고 바꿔 타고 온 길이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이제는 저 친구의 말이지 내 말은 아니오. 지휘가 정 갖고 싶다면 저 친구보고 달리시오. 이제는 내 소유가 아니거든. 하하하."
이만주와 모든 추장들은 비로소 까닭을 알았다. 박호문을 인도해왔던 강변 호장의 얼굴에 또 한 번 당황한 빛이 떠돌았다.
"그렇습니까? 그것 잘되었습니다."
이만주는 쾌활하게 말하고 강변 호장에게 영을 내린다.
"그렇다면 너는 나한테 말을 양도해라. 이제부터 백설마는 내 말이다! 너한테는 대신 내 말을 주마."
강변 호장은 꼼짝달싹할 도리 없이 상사인 이만주에게 백설마를 뺏기게 되었다.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은 못 하고 가슴만 쓰리고 아팠다. 얼른 대답을 못 한다. 이만주는 다시 강변 호장에게 분부한다.
"이제부터 백말은 내 것이다!"
강변 호장은 어찌하는 수 없었다. 식혜 먹은 고양이상을 하고, "네." 하고 대답했다. 이만주는 강변 호장의 허락하는 대답을 듣자, 마음이 호쾌했다. 아장을 불러 분부한다.
"저 애한테는 내가 타던 말을 주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강변 호장은 꼼짝 도리 없이 백마를 뺏겼다. 이만주는 손수 백설마를 궁실 앞 나무등걸에 맨 후에,
"자아, 내 처소로 다시 들어가십니다."
박특사를 인도했다. 특별한 우대다. 모든 추장들은 이만주의 분부가 없으니 감히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박특사가 인도된 곳은 아까 대면했던 큰방이 아니라, 아늑한 침실이었다. 오랑캐 북색을 차린 남녀 소해자들이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주는 말채찍을 '캉' 위에 쾌활하게 내던지며 시동들에게 분부한다. 천리마를 얻어서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조선서 대관이 친서를 가지고 오셨다. 술과 안주를 빨리 준비해 내오너라."
이윽고 소해자들은 빼주와 염소탕 돼지 찜을 내어왔다.
"상품 빼주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염소탕이며 돼지찜밖에 없습니다. 식성에 맞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만주는 빼주를 권하며 말했다.
"추울 때는 기름진 음식이 좋습니다. 우리 조선에도 가리찜과 불고기며 양지머리 편육 등 기름진 음식이 많습니다. 특별히 좋은 음식을 주시니 맛있게 먹겠습니다."
박특사는 노린내나는 염소탕을 억지로 마시면서 이같이 능란하게 외교사령을 했다. 술이 서너 순배 돈 후에 이만주는 박특사를 향하여 말한다.
"아까 말씀한 제주 한라산의 준마 씨를 좀 받고 싶습니다. 망아지 몇 필을 보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박호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이만주 지휘는 항상 우리나라에 충성을 다하시는 분입니다. 지난번에도 여연과 강계로 침범해 들어오는 우디거를 막아주고, 잡아간 사람까지 빼앗아 돌려보냈으니, 우리 성상전하께서도 가상하다고 생각하시는 중이올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디거라든지 오도리족 따위를 감시하고 격파해준다면, 제주도의 용마 새끼뿐이겠소. 강원도의 펄펄 뛰는 백점박이 사슴도 보내주리다."
이만주의 입이 딱 벌어진다.
"참, 소문 들으니 강원도의 사슴뿔과 사슴피는 불로장생하는 보약이라 합니다!"
"여부가 있나. 강원도의 강용과 녹혈은 사람이 한번 먹으면 백 세 향수를 한다는 것이지요. 어디 그것뿐인가. 강원도 심심산골에서 나는 삼삼은 한 뿌리만 먹으면 역발산 기개세하는 장사가 된다는 것이죠!"
박호문의 말을 들은 이만주는 당장 녹용과 녹혈이며 산삼을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거 참, 그렇다는 소문을 들었소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인삼을 천하보배로 생각한다 합니다. 녹용 한 대와 산삼 한 뿌리만 얻어먹어 보았으면 좋겠소이다."
"중국 사람들이 만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가는 인삼도 좋기는 하지만, 강원도 장산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산삼만 할 수가 있소. 진정 이지휘가 우리 국경을 침범하지 않고 도의와 법을 지켜서 충성을 다한다면 우리 성상전하께 아뢰어 용마며 사슴이며 산삼을 상급으로 내리시게 하리다. 그저 충성만 다하라구."
박호문은 말을 마치자 다시 소리를 높여 껄껄 웃는다. 이만주의 얼굴빛이 약간 붉어졌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나 삽시간이었다. 뻔뻔스럽게 웃는 얼굴로 변했다.
"박특사! 건주위 우리들은 조선국에 대하여 항상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곡식도 많이 주시고 편의도 많이 보아주시는데 배은망덕을 할 리가 있습니까? 간혹 아랫것들이 철없이 불장난을 하면 엄하게 치죄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우디거들이 못된 짓을 하는 것을 우리가 막은 것은 귀국의 오해를 살까 보아 그놈들을 압록가에서 쫓아내고 잡아간 조선 사람을 돌려보낸 것 아닙니까? 건주위 우리들은 이같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알았소. 잘 알고 있소. 그러기에 우리 도원수 최윤덕 장군이 나를 보내서 가상하다고 찬양하고 가축과 곡식을 보낸 것이 아니겠소. 다 잘 알고 있소. 이지휘는 더한층 성의를 다하시오. 그리한다면 성상전하께 아뢰어 모든 좋은 물건을 보내주리다."
"감사합니다."
이만주는 박특사의 손을 잡았다. 박호문이 정색하고 묻는다.
"우디거 부류가 있는 부락은 여기서 몇 리나 되겠소?"
"아주 멉니다. 험준한 산골 길로 이백 리가 넘습니다."
이만주는 무심코 대답했다.
"내일은 우디거 부류가 사는 부락을 좀 찾아가 보아야 하겠소."
우디거 부류가 있는 부락을 찾아가겠다는 박호문의 말을 듣자 오랑캐 추장 이만주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얼굴빛을 고치지 않고 태연히 묻는다.
"우디거 부락은 왜 찾아가시려 합니까? 길이 몹시 험악하고 멉니다. 그리고 위험합니다."
"기왕 이곳까지 온 길이니 한번 찾아가서 추장 놈들을 단단히 꾸짖어야 하오. 무엇이 위험하단 말요."
이만주는 지난번 협사한 일이 탄로날까 겁이 덜컥 났다.
"그자들은 너무나 독종이올시다. 아직도 사람을 잡아먹는 원주민이 있습니다. 얼굴엔 자자를 해서 흉악한 악취미를 가졌고, 외국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떼를 지어 창과 칼로 난자질을 해서 죽입니다. 절대로 가시면 아니 됩니다."
이만주는 풍을 쳐서 박특사에게 위협을 주었다. 박호문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건주위 지휘 이만주가 격파한 우디거 족속인데, 대조선 박호문이 칼 한 자루 짚지 않고 평화스럽게 찾아가는 것을 어느 놈이 감히 해치겠소. 만약에 우디거 놈들이 나를 해친다면, 내 뒤에는 최윤덕 장군의 십만 대병이 대기하고 있소. 아무 염려 마시오!"
씩씩하게 말하는 박호문의 말에 이만주는 주눅이 들어서 말이 막혔다. 한동안 후에,
"그러 몸조심을 하시란 말씀입니다. 정 가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이만주는 기가 죽었다. 박특사는 다시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청하는 말을 보낸다.
"내가 초행길이라 우디거 부락을 알지 못하니, 한 사람 향도자를 내줄 수 없겠소?"
이만주는 박호문을 우디거 부락으로 아니 안도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음속으로는 꺼림칙하게 생각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기색을 취했다.
"좋습니다. 압록강서부터 특사님을 모시고 왔던 강변 변지 장수를 불러서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박호문은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요량하는 바가 있는 때문이다. 이만주는 즉석에서 시동에게 명을 내려 변지 호장을 불러 분부를 내린다.
"특사께서 이곳에 오신 김에 우디거 부락을 둘러보시고 귀국하신다 한다. 기왕 네가 이곳까지 모시고 왔으니 그곳까지 길을 인도해드려라."
변지 호랑은 '네' 하고 명을 받았다. 박호문은 다시 웃음을 얼굴에 가득 싣고 이만주를 향하여 말했다.
"자아, 이제 나는 지휘한테 친서도 전했고, 후한 대접도 많이 받았소이다. 사관으로 돌아가 하룻밤을 지낸 후에 우디거를 찾고 고국으로 돌아가겠소이다."
이만주도 겉으로 웃음을 짓고 대답한다.
"그렇습니까. 먼 길에 피곤하셨겠습니다. 그러면 사관으로 나가시어 편히 쉬시고 내일 일찍이 우디거로 향하십시오."
말을 마치자 이만주는 변지 호장에게 다시 명을 내린다.
"너는 특사를 모시고 사관으로 나가서 편히 쉬시도록 하라. 그리고 내일 떠날 때 나를 잠깐 보고 가도록 하라. 우디거 추장에게 특사를 잘 모시라고 전할 말이 있다."
호장은 '네' 하고 대답한 후에 박호문과 함께 이만주의 처소에서 나왔다. 변지 호장은 추장인 이만주 앞에서는 항상 '네네'하고 대답했으나 백설준마를 뺏긴 뒤부터는 앙앙불락했다. 얼굴에는 현저하게 우울한 표정이 떠돌았다. 박호문은 변지 호장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리를 함께 하여 누웠다. 박호문은 슬며시 변지 호장의 마음을 더듬어본다.
"모처럼 자네한테 내가 탔던 천리마를 주었더니, 그만 이만주 추장한테 뺏겼네 그려. 하하하. 이만주는 부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인물일세그려!"
변지 호장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변지 호장의 눈이 금방 실쭉해지며 충혈이 되었다.
"우리 추장 이만주는 아주 철면피올시다. 부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 도적놈이올시다. 의리도 없고 신용도 없는 불한당이올시다."
"겉으로 보아서는 점잖은 사람 같던데___."
"점잖은 것이 무엇입니까. 청보에 개똥이지요. 부하들의 마누라가 예쁘고 똑똑하기만 하면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모조리 뺏어다가 첩을 삼습니다. 지금 작은 계집만 해도 여남은 명이 넘습니다. 말도 좋다는 말은 모조리 뺏어갑니다. 아주 신의 없는 자올시다. 저런 놈은 최윤덕 장군 같은 분이 한번 오셔서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주셔야 합니다!"
변지 호장의 불평이 가득 찬 소리를 듣자 박호문은 마음속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아, 최윤덕 장군께서는 이만주가 여연과 강계로 노략질하러 쳐들어오는 우디거 부류를 격퇴해 물리치고 잡아갔던 늙은이와 여인들을 뺏어 보내서 가상하다고 상급까지 주시는 분인데, 버릇을 가르치러 쳐들어오실 리가 있나. 당치 않은 말일세!"
변지 호장은 깔깔 웃었다.
"하하하, 그것을 정말로 아셨습니까? 모두 협사올시다. 거짓말로 꾸민 수작입니다. 최윤덕 장군이 쳐들어올까 겁이 나서 그따위 어릿광대짓을 한 것입니다. 우리 추장은 참 신의가 없는 자입죠. 조선에서 그만큼 우대를 해주어서, 먹을 것이 없으면 곡식을 주고, 살 곳이 없으면 땅을 빌려주었건만, 걸핏하면 마적 같은 놈들을 몰아와서 약탈을 감행하니 참으로 신의 없는 자올시다. 필경엔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박호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협사를 했다니, 어떻게 협사를 했단 말인가?"
변지 호장은 빙글빙글 웃는다.
"그저 그렇게만 아십시오. 최윤덕 장군이 이만주 추장의 꾀에 넘어간 줄만 아십시오."
"그저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니 말이 되나, 나는 최윤덕 장군을 대리해서 온 사람일세. 속아 넘어갔다는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앉아있는단 말인가? 어서 솔직하게 말을 하게나."
"만약, 제가 다 털어놓고 말을 한다면 제 목숨은 보전하지 못합니다. 당장 이만주의 손에 목이 달아나고 맙니다."
"이 사람아, 내가 입을 다물고 자네한테 들었다고 말을 내지 아니하면 그만 아닌가? 어서 이야기를 해주게___."
호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찌 일을 아시고도 입 밖에 말을 내지 아니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 됩니다. 제 목이 달아납니다!"
박호문은 앞으로 변지 호장을 심복으로 삼을 생각이 들었다. 허리띠에 차고 있는 노란 염낭끈을 끌렀다. 호장의 눈결이 힐끗 염낭 주머니로 향했다. 박호문은 엄지, 식지, 장지, 세 손가락을 염낭 주머니 부리에 넣어 하얀 종이 봉지를 꺼냈다. 호장의 눈은 박호문이 꺼내는 종이 봉지를 주시했다.
"여보게, 그동안 자네 신세를 많이 졌네. 내일부터는 또다시 우디거까지 함께 가야 하겠네. 신세를 갚기 위하여 이 물건을 자네한테 주니 거두어두기 바라네."
박호문은 말을 마치자 흰 종이 봉지를 변지 호장에게 주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변지 호장은 의뭉하게 손을 내밀어 받았다. 손바닥에 묵직한 중량을 느꼈다. 흰 백지를 펼쳤다. 황금빛이 불빛 아래 찬란하게 빛을 뿜었다. 황금동곳이었다. 호장은 깜짝 놀랐다. 너무나 귀중한 선물이었다.
"이것은 조선 대관이 상투에 꽂으시는 동곳이 아닙니까?"
"잘 알았네. 조선 귀인들이 상투에 꽂는 금동곳일세. 금값만 해도 좋이 되지만, 앞으로 자네가 쓸 날이 있을 것일세."
호장의 눈이 둥그레진다.
"너무나 값비싼 보물을 주셔서 감격한 말씀 아뢸 길 없습니다마는, 앞으로 쓸 날이 있다 하시니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박호문은 껄껄 웃으며 호장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말한다.
"자네는 앞으로 우리나라로 귀화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때가 올 것일세. 그때 가서 이 동곳을 꽂고 우리나라 귀인이 될 수가 있네."
변지 호장은 그래도 박호문은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눈을 끔벅이며 멍하게 박호문의 표정을 살핀다. 박호문도 얼굴빛을 고쳐서 정색하고 말한다.
"자네는 이제 얼마 아니 있으면 이만주의 손에 죽을 사람일세!"
호장은 깜짝 놀란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가만히 자네 지휘 이만주의 관상을 보니, 그 사람은 시기와 의심이 많은 사람일세! 자네의 사랑하는 용마를 뺏었으니, 자네가 앙앙불락하고 있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네. 자네가 불평한 맘을 품고 있는 것을 아는 그는 반드시 자네를 의심할 것일세. 자네는 이만주가 우리나라에 대하여 간교한 수단으로 속임수를 쓴 일을 잘 알고 있네. 자네가 말 뺏긴 것을 앙심먹고 반드시 나한테 이만주가 속임수 쓴 일을 말했으리라고 의심할 것일세. 자네가 절대로 나에게 그러한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이만주는 틀림없이 꼭 그리 생각할 것일세. 그러하니 어차피 자네는 이만주의 손에 죽을 사람일세!"
변지 호장의 얼굴빛이 파랗게 질렸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추장은 의심이 너무나 많습니다. 남의 계집을 뺏고서는 반드시 본서방을 죽여버립니다!"
"그것 보게. 애첩을 뺏는 것이나 애마를 뺏는 것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불평하는 마음이 있는 자를 없애버리자는 것이 이만주의 심정이거든!"
박호문의 말을 듣자 변지 호장은 황금동곳을 손에 쥔 채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렇다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박호문은,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또다시 호장의 설레는 마음을 더 한 번 흔들어놓는다.
"자네, 말 들어보게. 많은 아장들 중에 어찌해서 나의 향도자로 자네를 우디거까지 가게 했는지 아는가?"
"그것은 제가 처음부터 대인을 모시고 온 때문, 낯익은 사람을 택해서 보내려는 것이 아닙니까?"
"자네! 참 너무나 착하고 소박한 사람일세그려. 자네를 우디거에 가는 향도로 보내는 것은 앞으로 자네를 죽이려는 전조일세. 자네가 불평을 품고 나에게 이만주와 우디거의 비밀한 일을 설파했다는 구실을 삼아서 자네를 죽일 작정일세. 두고 보게. 내일 우디거로 떠날 때 자네보고 들러 가라고 하지 않던가? 반드시 어떠한 기미가 보일 것일세."
호장은 한동안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금동곳을 손바닥 안에 바싹 쥔 채 두 번째 안타까운 말을 되풀이한다.
"그럼 저는 어찌해야 좋습니까?"
"별수 없지. 자네는 우리나라로 귀화해서 조선 사람이 되는 길밖에 없네. 그리해서 늘어뜨린 꼬리머리를 끌어올려서 상투를 틀고 황금동곳을 꽂아서 조선의 귀인이 되게나. 그리한다면 일평생 부귀영화는 말할 것 없고, 자자손손 문화민족이 되어 복록을 길이 누릴 것일세. 나하고 압록강까지 갔다가 슬며시 건너가기로 하세. 최윤덕 장군께 모든 사연을 잘 말씀해주겠네. 자, 모든 일을 나한테 토설하게나. 자네가 사는 길은 오직 이 길밖에 없네!"
호장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앉아있었다. 마음이 무한 괴로운 모양이었다. 박호문도 다시 더 긴 말을 하지 아니했다. 창밖의 관솔불이 영창문에 은은히 빛을 비출 뿐이었다. 한동안 후에 호장은 길게 한숨을 짓고 말한다. 손에는 여전히 금동곳이 꼭 쥐어져 있었다.
"하는 수 없습니다. 대인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기운 없이 대답했다. 박호문은 만면에 웃음을 짓고 덥석 호장의 몸을 끌어안았다.
"잘 생각했네. 자네는 이제 생왕방을 찾았네. 훌륭한 조선 사람이 되었네. 자아, 모든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이야기해주게."
"자아, 이제는 저도 결심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압록강상에서 결전을 했다는 우디거는 진정한 우디거가 아니라 얼굴에 자자한 모습을 그린 저희들 오랑캐 군사올시다."
박호문은 깜짝 놀랐다. 얼마쯤 협사가 있는 줄은 짐작했으나 자자한 모습을 그려서 속여댄 줄은 몰랐다. 박호문은 어이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디거가 잡아갔던 조선 사람들을 뺏어서 돌려보냈다는 것도 순 거짓말이올시다. 이만주가 여연에 침범했을 때 잡아갔던 사람중의 일부분을 돌려보낸 것입니다."
박호문은 이만주가 교활한 꾀로 미봉책을 쓴 것을 비로소 자세히 알게 되었다. "최윤덕 장군이 새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따위 수단을 썼네그려!"
"그렇습니다. 전번에 서북면을 지키던 장수들처럼 만만치 아니할 것을 알고, 모사 퉁맹가를 보내서 충성을 다하는 체하고, 최장군의 예봉을 피하려는 한 가지 간특한 수단이었습니다."
박호문은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뜻을 표시한 후에 다시 강변 호장에게 말을 건넨다.
"자네는 이제 우리나라로 귀화할 것을 결심한 사람이니, 건주위 여진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조선 사람일세. 이제 조금도 이만주가 두려울 것이 없네. 모든 일을 묻는 대로 더한층 소상하게 말해주게. 숨김없이 말해줄 수 있겠나?"
"대인께서는 저의 목숨을 구해주시는 은인이십니다. 이미 조선 사람 되기를 원한 저올시다. 이만주가 두려울 까닭이 있습니까. 아는 대로 은휘하지 아니하고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박호문은 활짝 웃으며 강변 호장의 등을 쓸었다.
"좋다, 잘 생각했네. 이제 자네는 조선 사람일세. 우리 편일세. 다 털어놓고 말을 해주게. 지금, 건주위 여진이 여연과 강계로 화적떼가 되어 들어가서 약탈해온 조선 사람들이 몇 명이나 남아 있는가?"
"일전에 퉁맹가가 우디거한테서 뺏어 보냈다고 거짓말을 하고 돌려보낸 사람들은 반수도 못됩니다. 지금도 아마 칠팔십 명의 장정과 여자들이 고생살이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장정들을 잡아다가 무슨 일을 시키고, 여자들은 어떻게 대접을 하고 있는가?"
"남자들은 산을 뭉개서 농사를 짓게 합니다. 척박한 돌산을 뭉개서 밭을 갈게 하니 고생이 대단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는다 해서 이러한 노동을 시킵니다. 돌산을 깨뜨리고 뭉개서 좋은 밭을 만들라 하니 그 고생이 어떠하겠습니까. 말을 안 들으면 죽도록 패줍니다. 고생들이 참말 대단합니다. 그리고 나어린 여자들은 추장들이 강제로 끌고 와서 첩을 삼아버립니다. 한번 추장한테 잡혀간 계집애들은 집 속에 꼭 가두어두고 세상 구경을 못하게 합니다. 도망갈까 해서 발을 묶어 졸라매 꼼짝을 못 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모두 다 계집애들만 잡아왔네그려!"
"그렇습니다. 모두 여남은 살 된 애들만 골라서 잡아 왔습니다!"
박특사는 길게 한숨을 짓고 한동안 침묵 속에 잠겼다. 어서 빨리 지옥 속에 빠져 있는 이 사람들을 구해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 때문이다. 이윽고 박특사는 고개를 다시 들고 호장에게 묻는다.
"잡혀 와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만나볼 도리는 없겠나?"
호장은 고개를 가로 흔들며 대답했다.
"도리가 없습니다. 계집애들은 추장네 집 속에 가두어두다시피 했으니 만나보실 수 없고, 장정들은 깊숙한 산속에 한데 모아놓고 파수병들이 지키고 있으니 만나보시기가 극난하실 것입니다"
박호문은 호장을 향하여 다시 묻는다.
"깊숙한 산속이라 하니 어디쯤 되는가?"
"영고탑 방면에서 내려와 사는 우디거들이 있는 중간지점인 험준한 산속에 부락을 이루게 하고, 그곳에서 강제 노동을 시키고 있습니다."
"우디거들이 살고 있는 중간지점이라면 내일 우리들이 찾아가는 길목이 아니겠나? 가고 오는 도중에 한번 우리 장정들을 만나보도록 해주게. 계집애들은 자네가 주선만 잘해준다면 만나볼 수 있지 않겠나?"
"글쎄, 그것이 어렵습니다. 파수병과 파수하는 대장들에게 만나보게 해달라고 말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 대장 이만주는 퉁맹가를 보내서 최윤덕 장군도 속였는데, 그까짓 파수대장이나 파수병쯤을 속이지 못한단 말인가. 이만주의 명령으로 조선 대관이 우디거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조선 사람들을 만나보러 왔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그것이 어렵단 말씀입니다. 조선 사람을 파수하는 대장은 우리가 만나본 후에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본부로 달려가 보고를 할 테니, 그 점이 어렵습니다."
박호문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릎을 치며 말한다.
"좋은 수가 있네. 먼저 우디거를 만난 후에, 오는 길에 만나보고 자네와 나는 쏜살같이 말을 달려 압록강을 건넌다면, 이만주가 보고를 받고 자네와 나를 잡으려 해도 잡을 도리가 없을 것일세. 내 꾀가 어떠한가?"
강변 호장은 입이 딱 벌어졌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별 탈이 없겠습니다!"
강변 호장도 쾌히 대답했다. 밤은 어느덧 점점 깊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이튿날 날이 밝자, 박특사와 강변 호장은 우디거로 향할 준비를 차렸다. 외양간에서 말을 배불리 먹이고, 강변 호장은 어제 이만주의 명령대로 궁실로 들어가 지휘를 받았다. 박특사의 추측대로 강변 호장을 향한 이만주의 태도는 엄숙했다.
"너에게 박호문을 맡긴 것은 어느 누구보다 너를 믿는 때문이다. 털끝만한 틀림이 있어도 아니 된다! 알겠느냐? 우디거들에게 비밀히 내 말을 전해라. 여연과 강계를 침범했다가 나한테 혼이 났다 하라고___. 만약 박호문에게 딴소리를 했다가는 멸종이 된다고 일러라. 그리고 가는 도중에 박호문이 납치해온 조선 사람들이 또 있느냐고 묻거든 절대로 없다고 그래라. 있는 장소를 가르쳐 주어서도 아니 된다. 지난번 퉁맹가편에 다 보냈다고 일러라. 만약에 기밀을 누설하는 일이 추호라도 있다면 참하리라!"
말을 마치자 군령장을 내밀었다.
"여기 네 이름을 써라!" 영을 어기면 목을 바치겠다는 군령장이다."
강변 호장은 벌벌 떨면서 이름을 썼다. 이만주는 군령장을 받은 후에 강변 호장을 더 한 번 노려보며 엄한 소리로 말한다.
"털끝만치라도 착오가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잘 다녀오너라."
강변 호장은 사시나무 떨 듯했다. '네' 하고 물러났다. 박호문은 사관에서 강변 호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강변 호장은 풀기 없는 얼굴로 어깨가 축 처져서 돌아왔다.
"이만주를 만났는가?"
박호문은 웃으며 물었다.
"만났습니다."
강변 호장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명령이 내렸나?"
박호문은 여전히 벙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군령장에 이름을 쓰고 왔습니다."
박호군은 다시 드높게 웃는다.
"하하하, 그저 내 말이 옳지 않은가. 자네를 죽여서 없이해버리려는 수작일세. 도대체 무어라 하던가?"
"박특사는 간첩이라구 합니다. 그리고 우디거들한테는 박특사가 물어보거든 자기네들이 여연과 강계를 침범했다가 이만주 추장한테 혼이 났다고 대답하라고 비밀히 일러두라 했습니다. 또 한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박특사가 혹시 납치된 조선 장정들이 또 있느냐고 묻거든 덜대로 없다고 대답하라 했습니다. 만약에 추호라도 명령을 거역한다면 목을 벤다는 군령장에 다짐을 두고 이름을 쓰라 했습니다."
박호문은 강변 호장의 등을 툭툭 쳤다.
"아무 염려 말게. 이제 자네는 조선으로 귀화한 사람이 아닌가? 나하고 행동을 함께 하다가 쏜살같이 압록강을 건너가면 그만일세. 조금도 겁날 것이 없네! 자아, 이제는 어서 길을 떠나세."
"그저, 대인만 믿습니다."
강변 호장은 비로소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2백 리 밖 우디거 부락을 향하여 달렸다. 박호문은 말을 달리며 좌우 산천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험하고 평탄한 곳과 냇물의 깊고 얕은 곳을 자세히 살폈다. 촌락을 지날 때마다 쓸쓸한 한촌엔 사람들의 모습이 극히 드물었다. 박호문은 강변 호장에게 물었다.
"촌락마다 사람들이 겅성드뭇하니 어찌 된 까닭인가?"
"최윤덕 장군이 서북면 도절제사로 오신 소식을 듣고 모두 다 산속과 굴속으로 피신을 한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지 아니합니다."
박호문은 지난번 이만주의 궁실 앞에서 졸개 군사들에게서 들었던 말이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박호문은 다시 물었다.
"지금 이만주 휘하에 있는 군사들은 몇 명이나 되는가?"
"많습니다. 강변에 배치된 병졸까지 합한다면 삼사만 명이나 될 것입니다."
"수자리하는 군사들 말고 오랑캐 안에 있는 군사는 몇 명이나 되는가?"
"이만 명가량 될 것입니다."
"군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아니하니 어디서 훈련을 받고 있는가?"
"모두 다 땅굴 속에서 교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종유동의 천연으로 된 땅굴이 많습니다. 삼천 병마를 달릴 만한 땅굴이 수두룩합니다. 겨울에 춥지 않고 좋습니다."
강변 호장은 조선으로 귀화할 것을 이미 결정했다. 모든 군사비밀을 박호문에게 다 털어놓곤 했다. 박호문은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은 건주위 오랑캐 지방을 벗어나 우디거 부락에 당도했다. 돌연 연통 없이 말을 달려오는 행차다. 진짜로 얼굴에 먹을 넣어서 자자한 우디거 부락의 남녀노소들은 아관박대에 도포를 입고 말을 달려오는 진기한 손님 박호문과 건주위 장수의 모습을 보자, 모두들 신기하게 바라보며 급히 늙은 추장한테 고했다. 추장은 급히 버금 추장들을 소집해 거느리고 창과 칼을 비껴들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모두 다 얼굴엔 먹과 채색을 물들인 흉악한 형상을 한 무리들이었다. 늙은 추장이 장창을 흔들며 뛰어나와 호통을 친다.
"거기 달려오는 사람들은 누구들인가? 감히 연통도 없이 어찌 남의 부락으로 방자하게 말을 달려 들어오는가?"
강변 호장이 선뜻 말에서 내려서 웃는 낯으로 대답한다.
"나는 오랑캐 지휘 이만주의 명을 받들어 좋은 친구의 부락, 우디거를 찾았소이다. 그리고 이분은 조선 국왕 전하의 특명을 받들어, 우디거 부락을 순무하러 오신 분입니다. 공손하게 영접하시오."
우디거의 늙은 추장과 젊은 추장들은 조선 국왕 전하의 특사라는 말을 듣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선비 복색으로 차린 박호문을 향하여 넙죽 절을 올린다. 박호문은 마상에서 황망히 답례를 하고 말 아래로 내렸다.
"조선국왕의 특사이신 줄 모르고 큰소리를 질러서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늙은 추장이 손을 모아 다시 예를 올린다. 박호문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이만주의 부락을 거쳐 오느라고 미리 연통할 겨를이 없어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 죄송할 것이 없소이다."
능란한 여진 말이었다. 우디거 추장은 또 한 번 놀란다. 우디거는 건주위 부락보다 조선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조선이란 나라를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부류들이었다. 아관박대에 신선같이 차린 조선 대관이 이같이 여진 말을 청산에 유수가 흘러가듯 잘할 줄은 몰랐다.
"대관께서는 어찌 그렇게 여진 말에 능통하십니까? 혹시 여진에서 오랫동안 사신 일이 있습니까?"
추장의 묻는 말에 박호문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선비란 모든 것을 다 잘 알아야 하오. 박학다문이란 말이 있지 아니한가. 넓게 배우고 많이 들어서 국가의 문화를 더한층 높이는 일이 우리들 조선 선비들의 임무거든. 내가 여진에 살아본 적은 없소마는 당신네들과 이웃해 사는데 서로 통하지 못한다면 어디 친구의 나라라 하겠소? 당신네들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 일부러 여진 말을 배웠소. 하하하."
늙은 추장을 위시하여 남녀노소 우디거 부류들은 모두 탄복하여 존경했다. 늙은 추장은 박호문과 강변 호장을 마을의 집회소로 인도했다. 건주위 부락과 비슷한, 바위와 돌을 이용해 쌓아놓은 동굴 같은 처소다. 동굴 안에서는 화톳불이 이글이글 불길을 뿜었다. 아늑하고 훗훗했다. 얼굴에 먹을 넣어 기괴한 형상을 한 남녀노소들은 조선서 온 진객을 대접하기에 바빴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을 화톳불 옆 요의에 앉게 한 후에 진기한 다래술과 기름진 양고기를 대접했다. 양털옷을 입은 젊은 남녀들은 주흥을 돋우기 위하여 우디거 특유의 악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여진 말을 잘 하는 조선의 대관이라 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최고의 대우를 하는 모양이었다. 밤이 이슥한 후에 늙은 추장을 박호문과 강변 호장을 자기 침실로 인도했다. 특별한 우대다. 우디거 추장도 조선 서북면에는 범 같은 조선 대장군 최윤덕이 여진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사를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소식을 들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캉 위에 양털 이불을 펴고 박호문과 강변 호장에게 편히 누워 쉬기를 청했다.
"멀리 오시느라고 매우 고단하실 텐데, 누추한 곳입니다마는 편히 쉬십시오."
박호문과 강변 호장에게 간곡하게 눕기를 청했다. 박호문은 웃으며 대답한다.
"노추장의 주밀하고 은근한 대우를 받아서 조금도 피곤하지 아니하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할 텐 천천히 이야기나 합시다."
늙은 추장은 얼굴에 놀라는 빛을 띠고 묻는다.
"내일 벌써 떠나시렵니까? 모처럼 오셨는데 천천히 구경이나 하고 가십쇼. 젊은이들도 모두 다 대인을 존경하고 숭배합니다."
늙은 추장은 사심 없이 진심으로 만류했다. 박호문은 얼굴빛을 고쳐 정중한 표정을 짓고 말한다.
"왕명을 받으러 온 몸이라 한만한 행동을 해서 오래 지체할 수 없소이다. 내일 곧 떠나야 하겠소이다."
"섭섭해서 어찌합니까? 모처럼 오신 고귀하신 손님을 모시고 따뜻하게 서회를 하지 못한 채 작별 인사를 여쭙게 되니 실로 마음에 아쉬움을 느낍니다."
늙은 추장의 태도는 끊임없이 순후했다. 박호문은 다시 얼굴빛을 고쳐 엄숙한 표정을 짓고 말한다.
"오늘 내가 우디거 부락을 찾은 것은 한가롭게 유람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왕 전하의 엄명을 받들어 그대들의 죄상을 성토하러 온 것이오. 지금 우리나라 서북면에는 역발산 기개세하는 천하명장 최윤덕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려, 당신네 우디거를 쳐부술 태세를 취하고 있소! 나는 먼저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이곳을 찾아온 것이오. 공연히 거짓말로 횡설수설했다가는 우디거 부락은 도륙을 면치 못하리다!"
박호문은 말을 마치자 도포띠를 풀었다. 품 안에서 날카로운 비수가 나타났다. 섬광이 불빛에 비쳐 싸늘했다. 늙은 추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다.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다.
"무슨 말씀이오니까? 저희들이 상국에 대해서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최윤덕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려 저희들을 도륙하시려 하십니까? 저희들은 그저 공손히 상국의 명을 받들 뿐이올시다. 참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죄상을 밝혀 말씀해주십쇼!"
박호문은 날카로운 비수를 들고 큰소리로 늙은 추장을 꾸짖는다. 강변 호장은 입을 다문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우디거의 늙은 추장은 다시 벌벌 떨며 대답한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언감생심 상국의 여연과 강계를 침범하겠습니까. 진정 억울한 말씀이올시다."
박호문은 새파란 비수를 번쩍 들어 캉에 꽂았다. 푸른빛이 또 한 번 불빛에 싸늘했다. "증거가 뚜렷하게 있다. 누구를 속이느냐. 얼굴에 기괴한 모습으로 자자한 너희들이 여연을 침범하기 위하여 압록강 얼음을 타고 넘어오는 것을 건주위 이만주 오랑캐가 대군을 휘동하고 와서 너희들 우디거를 모조리 잡아가는 것을 최윤덕 장군과 내가 망루에서 똑똑히 보았다. 감히 누구를 속이려고 어름어름하느냐?"
박호문의 문초는 추상 같았다.
"이거, 목도해 보셨다 하시니 이 일을 어찌하나? 저희들은 여연과 강계를 침범한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금년에는 한 번도 압록강으로 나가본 일이 없습니다. 통촉해줍시오. 그런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늙은 추장은 입에 침이 말라 혀가 굳을 지경이었다. 박호문은 다시 소리를 높여 꾸짖는다.
"그뿐 아니라, 너희들이 여연과 강계에서 납치해갔던 조선 사람들을 오랑캐 이만주가 뺏어서 우리한테 돌려보내 주었다. 이만주는 얼마나 충성스런 자이냐! 그리해서 우리 성상께서는 상급으로 소와 돼지와 곡식을 보내서 하사하시고 특별히 나를 사신으로 보내서 찬양하시는 동시에 우디거를 찾아 성토하라 하셨다. 장차 천주를 면치 못하리라!"
늙은 추장이 황황망망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홀연 병풍 뒤에서 우디거의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사뿐사뿐 걸음을 걸어 박호문 앞으로 가까이 와서 두 손을 모아 절을 올렸다. 박호문이 눈을 들어 보니 아리따운 젊은 계집이었다. 계집은 수삽한 태도로 절을 올리고 나직한 음성으로 고한다.
"소녀는 우디거의 딸입니다. 여기 계신 추장 노인은 제 아버지십니다. 조선국 대관께 잠깐 아뢸 일이 있어 무례함을 무릅쓰고 당돌하게 들어왔으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뜻밖의 일이었다. 늙은 추장을 위시하여 모두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호문이 약간 허리를 굽혀 답하면서 묻는다.
"노추장님의 따님이라 하니 반갑습니다.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극히 비밀한 말씀을 아뢰러 왔습니다."
박호문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극히 비밀한 말이 있다? 말씀해보오."
유창한 여진 말로 대답했다. 계집은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해 말한다.
"조선 국왕 전하의 대관이신 당신은 오랑캐 이만주의 간교한 술책에 속아 넘어가셨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기도 하십니다. 무슨 까닭에 불한당의 괴수 이만주 놈에게 쌀과 소와 돼지를 하사하셨습니까? 충성을 다했으니 가상하다구요? 하하하."
젊은 계집은 요염하게 웃어댔다. 계집은 우디거의 딸이라 하나, 얼굴에 먹을 넣어 꾸미지도 아니했다. 때를 벗어 말쑥했다. 여지의 딸로는 드물게 보는 미인이었다. 박호문은 다 아는 일이지만 마음속으로 까닭이 있구나 생각했다. 강변 오랑캐 호장도 짐작하는 일이지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만주의 간특한 꾀에 조선 국왕 전하와 박호문이 속아 넘어갔다는 딸의 말을 듣자, 늙은 추장은 친아비이건만 처음 듣는 말이었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말참견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이만주의 간특한 꾀에 조선 국왕 전하께서 속아 넘어가셨다 하니 무슨 무엄한 불경한 소리냐! 말조심을 해라."
계집은 쌩긋 웃으며 말한다.
"아버님께서는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우리한테 해가 돌아올까 해서 아직 말씀을 아니 드렸습니다. 차차 말씀을 들어보시면 까닭을 환하게 아실 것입니다."
계집은 말을 마치자 또 한 번 간드러지게 깔깔 웃었다. 우디거의 늙은 추장은 딸을 믿음성스럽고 귀엽게 생각했다.
"그래라. 네 말을 차차 들어보기로 하자. 나한테 먼저 말을 아니 한 것은 우리 부락에 해가 미칠까 해서 입을 봉했다니 가상한 일이다."
늙은 추장은 말을 마치자 박호문에게 비로소 딸을 소개한다.
"이 애는 나의 무남독녀 외딸이올시다. 지난해 봄에 건주위 오랑캐 부락으로 시집을 갔습지요. 남편 되는 사람은 바로 이만주의 우군 부대장입지요. 오늘 아침에 내외가 함께 휴가를 받아 친정으로 쉬러 온 길이지요. 대관께서는 딸아이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고 아뢰는 말씀을 들어보십쇼."
박호문은 비로소 딸의 내력을 알았다. 민첩한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하고 스쳤다. 계집을 향하여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한다.
"아아, 노추장의 바로 무남독녀가 되는구려. 반갑기 그지없소. 내가 이만주의 꾀에 속아 넘어가서 소중한 곡식 오십 섬과 소와 돼지들을 몰고 온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을 마음 놓고 놀려주시오. 당신의 말씀을 달게 받으오리다."
이때 강변 호장은 우디거 늙은 추장의 딸이 이만주 휘하의 우군 부대장이란 말을 듣자, 틀림없는 상관의 아내였다. 시치미 떼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계집 앞에 읍을 올렸다.
"소인은 압록강에서 수자리하고 있는 변지 호장이올시다. 이만주 추장님의 명을 받들어 이곳까지 박특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계집은 요염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히 띠고 쌀쌀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오오, 박특사의 금동곳을 받고 조선으로 귀화한 강변 호장이로군! 사람은 살아야 하지. 까닭 없이 개죽음을 해서야 쓰겠나. 어서 조선으로 가서 살게! 하하하."
계집은 대담했다. 또 한 번 요염하게 웃는다. 강변 호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박호문의 얼굴도 노랗게 변했다. 건주위 사관 밀실에서 금동곳을 주고받으며 강변 호장을 조선으로 귀화시킨 일이 탄로 난 모양이었다. 우디거의 늙은 추장은 까닭을 알지 못해 하고, 박호문과 강변 호장은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계집은 또 한 번 요염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띠고 강변 호장을 향하여 말한다.
"놀라지 말게나. 나는 결코 자네를 해치지 아니할 것일세. 목숨을 구하여 조선으로 귀화하는 사람을 내 어찌 죽게 하겠나. 절대로 이만주 추장한테는 입을 봉하고 말을 하지 아니할 것일세. 마음을 놓게나. 그리고 박특사도 놀라지 마시오. 하하하."
계집은 더한층 대담했다. 또 한 번 요염한 웃음을 웃는다. 강변 호장은 죄인처럼 어깨를 쭈그린 채 손을 모아 서 있고, 박호문도 여우에게 흘린 듯 어리벙벙해서 말대꾸를 못 한다. 계집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저희 내외는 이만주 오랑캐 추장의 명을 받들어 박특사와 강변 호장의 뒤를 미행해서 행동을 살피러 왔소이다. 박특사께서 금동곳을 강변 장수에게 주시고 조선으로 귀화시킨 일이 탄로났습니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젊은 계집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박특사와 강변 호장은 들어보십쇼! 이만주는 박특사가 강변 호장에게 준 천리준총을 뺏은 후에 도리어 강변 호장을 시기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두 분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네들이 건주위 사관에서 금동곳을 주고받을 때 저의 남편은 이만주의 비밀한 영을 받고 땅굴 밑에 엎드려 모든 일을 엿들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남편은 내두를 보려고 이만주한테는 강변 호장이 조선으로 귀화하기를 결심한 일을 고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만주는 다시 우리 남편에게 이곳으로 향해 온 두 분의 행동을 자세히 살피라 해서 두 분보다 두어 시간 앞질러 이곳으로 왔습니다. 극비의 일이라 우리들 아버지와 어머니한테도 말씀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친정에 놀러 온 것처럼 어머니한테도 말씀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친정에 놀러 온 것처럼 반갑게 형제들을 만나보고 태연히 지내면서 마음속으로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당신들은 오셨습니다. 우리 내외는 병풍 뒤에서, 우디거 일족을 도륙하겠다는 박특사의 위협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비록 건주위로 시집을 간 몸이라 하나 우디거의 피를 받은 우디거의 딸입니다. 우디거 족속이 죄 없이 망하는 꼴을 어찌 차마 바라보고 있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우디거의 대표입니다. 아무 죄도 없이 최윤덕의 장군한테 참을 당하는 꼴을 어찌 차마 보겠습니까? 그리해서 박특사 앞에 진상을 밝히려고 무례함을 무릅쓰고 급히 뛰어들어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비로소 우디거의 딸이 당돌하게 뛰어들어온 까닭을 알게 되었다. 늙은 추장은 벌떡 일어나 딸을 껴안고 뺨을 비비며 기뻐한다.
"오, 우리 딸이로구나! 어서 박특사 앞에 모든 일을 폭로해서 억울한 누명을 듣는 우디거 족속을 구해 다오!"
박호문도 우디거의 딸을 향하여 경건한 말씨로 말한다.
"당신은 참 효녀십니다. 멀리 아버지를 구하러 왔구려! 이만주의 비밀한 지령을 받고도 그같이 마음을 돌려서 궁지에 빠진 우디거를 구하러 왔으나, 참 갸륵한 우디거의 딸이오. 그렇다면 모든 일을 내 앞에 자세히 설명해주오."
우디거의 딸은 명랑했다. 활발한 어조로 말한다.
"제가 특사 앞에 백 번 변명을 한댔자 특사님께서 곧이 들이실 리 만무합니다. 이만주는 우군 부대장으로 당시 압록강상에서 가짜 우디거를 만들어 싸우는 체했던 제 남편을 불러들여서 자세한 전말을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우디거의 딸을 자리에서 일어나 병풍 뒤로 스러졌다. 이윽고 우디거의 딸은 한 사람 양털배자에 담벙거지를 쓴 헌칠하게 잘생긴 육척 장신의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늙은 우디거 추장은 벌떡 일어나 들어오는 젊은 장수를 껴안는다.
"오, 우리 귀여운 사위야!"
목을 얼싸안고 뺨을 비볐다. 이윽고 늙은 우디거 추장은 박호문에게 젊은 장군을 소개한다.
"이 사람이 바로 내 사위올시다. 건주위에서 상당히 지위가 높습니다. 아까, 내 딸이 말한 이만주의 부하인 우군 부대장이올시다."
박호문은 늙은 추장의 소개하는 말을 듣자, 자리에서 일어나 읍을 보냈다. 강변 호장은 뜻밖에 상관을 묘한 자리에서 만났다. 황망하게 일어나 군례를 드렸다. 젊은 부대장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박호문에게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말한다.
"특사께서는 저를 얼른 몰라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건주위에서 여러 차례 먼발치에서 뵌 일이 있습니다. 지금 제 장인이 소개한 이만주의 아장인 우군 부대를 지휘하는 자올시다."
"그러하시오. 뜻밖에 이곳에서 만나서 서정을 하게 되니 반갑소이다."
박호문은 역시 유창한 여진 말을 사용했다.
"사실인즉 우리 대장 이만주의 비밀한 지령을 받들어 대관과 강변 장수의 수상한 행동을 감시하러 왔다가, 아내 되는 사람이 친정 부락이 결딴나는 것을 구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그만 판관이 되어서 이만주를 배반할 것을 결심하고 이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하하하."
오랑캐 부대장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었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팔을 안으로 굽어지는 법 아닙니까? 장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구해드리고 아내의 족속들을 초토속에서 살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도원수 최윤덕 장군은 여연과 강계를 침범한 우디거를 잔뜩 벼르고 있습니다. 곧 십만 대병이 우디거를 함몰하려고 쳐들어옵니다."
박호문은 장중한 태도로 말한다.
"여보게, 어서 진상을 밝혀주게. 청천벽력도 분수가 있지, 우리 우디거가 언제 여연으로 쳐들어갔단 말인가? 한 번도 없었네, 우리는 어느 때나 조선 국왕 전하께 충성을 다했네. 왜 불공대천지수 이만주란 놈은 자기가 조선 땅을 범해놓고 우리가 쳐들어갔다고 외수를 써서 우리 족속을 망치게 한단 말인가. 어서 빨리 특사님 앞에서 해혹을 해서 나를 살려주도록 하게. 사위는 자식이 아닌가? 어서 자세한 말을 해서 우리 부락의 화를 면해주도록 하게!"
늙은 우디거 추장은 침이 마르도록 사위를 향하여 애걸했다. 우디거의 딸도 옆에서 거들었다.
"기왕 결심을 하신 일이니 시원스럽게 지나간 전말을 특사님 앞에다 털어놓고 고하시오. 우물쭈물할 것이 무엇 있소!"
건주위 부대장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박특사는 벌써 모든 일을 다 아시면서 우리 장인님을 공갈하시는 거야. 금동곳을 저 사람한테 주고 모든 일을 다 들어 아셨는데 또다시 설명할 것이 무엇 있나. 하하하."
옆에 있던 강변 호장의 얼굴이 화끈했다.
"그래도 특사께서는 더 자세한 진상을 알아보시기 위하여 우리 친정 부락으로 오신 것이니 시원하게 당신의 앞뒤 일을 조리 있게 말씀하시오!"
아내는 옆에서 또 한 번 남편을 재촉했다. 늙은 우디거 추장이 사위를 향하여 말한다.
"도대체 금동곳이니 은동곳이니 하고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전혀 영문을 모르겠네. 이만주란 놈이 어떤 거짓 수단을 써서 우리 우디거가 여연으로 쳐들어갔다고 발뺌을 하고 많은 곡식과 소와 돼지를 상받아 먹었단 말인가? 자세히 좀 말을 해주게나!"
"그러면, 특사님은 저 강변 장수를 통해서 대강 짐작하시는 일이니, 장인님의 속을 시원스럽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겠습니다."
"답답하이. 어서 말을 해주게!"
"이만주는 그동안 자주 여연과 강계를 침범해서 많은 곡식과 재물이며 양가의 처녀와 장정들을 약탈해 왔습니다. 그때 조선 서북면에 배치되어 있던 감사와 절도사들은 모두 다 용렬하기 짝없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새로이 범 같은 장수 최윤덕으로 서북면 대장군을 삼으시고 여진 오랑캐를 응징하라 하셨습니다. 지금 최윤덕 장군은 착착 행동을 전개할 준비를 차리고 있습니다. 이만주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웠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던 중에, 모사 퉁맹가의 간교한 꾀를 받아들여서, 우군과 좌군을 편성한 후에, 좌군 2백 명에게는 함빡 얼굴에 자자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우디거 군사같이 만들어놓고, 압록강 얼음판에서 서로들 격투를 벌이게 한 후에, 우군 2백 명이 우디거 병졸로 차린 놈들을 꽁꽁 묶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퉁맹가를 최윤덕 장군한테 보내서, 여연으로 침범하려는 우디거를 격파하고 우디거가 납치해 갔던 조선 장정들 몇십 명을 뺏어서 보낸다고 충성을 다하는 듯, 교활한 수단을 썼습니다. 이러하니 조선에서는, 이만주에게는 상을 주고, 우디거는 고얀 족속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특사님이 우디거를 도륙하러 쳐들어온다고 위협하시는 일도 무리가 아닙니다."
우디거의 늙은 추장은 사위 건주위 부대장의 자세한 설명을 듣자 비로소 모든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저런 죽일 놈이 있나. 이만주란 놈의 원수를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 그놈의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겠구나! 어쩌자고 그따위 짓을 감행했단 말인가? 천참만륙을 해도 시원치 않다! 어찌해서 우리 족속을 도륙시키려 했단 말이냐!"
늙은 추장은 입가에 거품을 뿜으며 길길이 뛰었다. 박호문이 말한다.
"자아, 사필귀정이오. 모든 일은 부대장을 통하여 자세히 알았소. 우리 성상전하꼐 아뢰어서 우디거의 억울한 일을 벗겨주리다. 노추장은 고정하시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늙은 추장을 위로했다. 건주위 부대장인 사위가 박호문을 향하여 말한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건주위 사람이 아니라 아내의 교향인 우디거 사람이올시다. 만약 앞으로 최윤덕 장군이 건주위로 쳐들어오는 날, 나는 우리 아내와 함께 조선 편에 가담하여 내응이 되리다!"
우디거 사위가 내응이 되겠다는 말을 듣자 박호문은 덥석 사위의 손을 잡았다.
"잘 생각했소! 이만주는 항상 배은망덕하는 자이오. 그자 밑에서 일을 하다가는 옥석구분이 되오. 아내와 함꼐 우디거 부락을 번영케 해서 뒷날 크나큰 복과 영광을 누리시오!"
늙은 추장도 기뻤다.
"고맙다! 그리해라. 상국 조선에 대해서 배은망덕을 해서는 아니 된다. 나는 무남독녀를 두지 아니했느냐? 내가 죽은 후에라도 내가 우디거로 돌아와서 내 뒤를 이어야 한다."
늙은 추장은 말을 마치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아버지의 비감한 말을 듣는 우디거 딸의 기름한 속눈썹에도 이슬방울이 서렸다. 박호문은 아까 캉 위에 꽂았던 날카로운 비수를 비로소 뽑아 품 안에 거두고 말한다.
"자아, 이제 모든 일을 잘 알았으니,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겠소. 돌아가서 왕 전하께 아뢰어 우디거는 절대로 보호하도록 하겠소."
늙은 추장은 두 손을 번쩍 들어 박특사에게 절을 올리며 감격한 뜻을 표한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습니까? 그저 백골난망이올시다."
박호문이 다시 말했다.
"내가 한 가지 청할 일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무슨 청이십니까? 말씀하십쇼. 특사의 말씀을 아니 들을 리 있습니까?"
"좋은 준총으로 삼십 필만 꾸어줄 수 없겠소? 머지않은 날 갑절 이상으로 갚으오리다."
"무엇에 쓰시렵니까? 특사께서는 타고 오신 말이 있지 아니합니까?"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나 혼자 삼삼 필템이나 쓸 까닭이 있소? 하하하, 그저 꼭 필요해서 추장한테 청하는 것이오."
"드리오리다. 염려 마십쇼."
늙은 추장은 쾌하게 승낙했다. 박호문은 다시 추장의 사위인 건주위 부대장을 향하여 말한다.
"장군은 이미 우디거를 위하여 우리나라에 호감을 가졌으니, 나의 청을 들어주실 수 있겠소?"
만면에 웃음을 띠고 부드럽게 물었다.
"말씀하십쇼.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장군은 어제 나를 미행했으니, 내가 돌아간 후에는 불가불 이만주에게 어떠한 보고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건주위 부대장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렇지요. 불가불 거짓 보고라도 해야겠지요."
"기왕 건주위로 가시는 길이라면 나하고 중간까지 동행하실 수 없겠습니까?"
이번엔 건주위 부대장의 아내가 말참견을 했다.
"함께 가시면 더욱 정답고 좋겠습니다. 건주위를 거쳐서 가시렵니까?"
박호문이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건주위를 거쳐서 가다가는 이만주에게 잡히기가 십상팔구입니다. 중간에서 두만강 하류를 거쳐서 돌아가겠습니다."
"좋습니다. 중간까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건주위 부대장이 쾌하게 대답했다. 무엇을 짐작한 모양이다. 이튿날, 우디거 늙은 추장은 간밤에 약속한 대로 말 삼십 필을 추장 집 앞에 등대해놓았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은 건주위 부대장 내외와 함께 늙은 추장 부부의 극진한 대우를 받고 길을 떠났다. 준총 삼십 필을 몰고 나갔다. 한나절이 지나 우디거와 건주위의 갈림길에 당도했다. 박호문이 건주위 부대장에게 청한다.
"저 산 속에서, 이만주가 여연에서 납치해간 우리 사람들을 혹사해서 농사를 짓게 하고 있다 하오. 나는 이 불쌍한 사람들을 그대로 이곳에 버려두고 차마 갈 수 없소. 기어코 데리고 가야 하겠소. 그 까닭에 당신의 장인한테 말 삼십 필을 꾸어 달라 했던 것이도. 그곳에는 반드시 우리 사람들을 강제로 노동시키면서 수직하는 병졸들이 있을 것이오. 당초에 나는 이자들을 죽여버리고 조선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인데, 다행히 장군을 만나서 사람을 상치 아니하고 조선 사람들을 구해낼 길이 생겼소. 장군은 나와 함꼐 가서 조선 사람들을 풀어주도록 명령을 내려주시오. 나는 이 불쌍한 사람들을 구해가지고 두만강 하류도 달려서 고국으로 돌아갈 작정이오!"
건주위 부대장 내외를 위시하여 강변 호장은 비로소 박호문이 우디거 추장에게 말 삼십 필을 빌린 일과, 건주위 부대장에게 중간까지만 동행하자던 말을 깨닫게 되었다. 건주위 부대장은 박호문의 말을 듣자 마상에서 큰 소리로 탄복한다.
"박특사의 머리는 과연 신출귀몰하십니다. 옛적의 장양, 진평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디거의 딸 건주위 부대장의 아내도 한마디 한다.
"정양, 진평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제갈양만큼이나 하십니다."
상글상글 웃으며 칭찬했다. 강변 호장은 감히 말참견을 할 수 없었다. 입을 헤 벌리고 소리 없이 소웃음을 웃고 있었다. 건주위 부대장은 호방한 남자였다. 박호문의 슬기를 칭찬한 후에 쾌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사내대장부의 말 한마디는 천금보다 무겁다 합니다. 아내의 고향 우디거를 보호하기 위하여 박특사에게 조선을 상국으로 받든다고 맹세한 나올시다. 박특사의 말씀을 거역할 도리거 있겠습니까. 잡혀서 고생하는 조선 장정들을 풀어드리오리다."
박호문은 마상에서 부대장의 손을 굳게 잡았다. 강변 호장은 의기가 양양했다. 삼십 필 말을 체질해 몰고 첩첩한 산속으로 기운차게 앞을 서서 달렸다. 자기의 상관인 우디거의 사위가 행동을 같이하는 때문이다. 무인지경 자갈밭 계곡을 넘고 건넜다. 독바위와 장군바위를 돌고 돌아서 한 곳에 당도했다. 납치된 조선 장정들을 가두어놓고 돌산을 뭉개고 깨뜨려서 십 리에 뻗친 수수밭을 이룩한 곳이다. 겨울이었다. 밭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다. 군데군데 양과 염소를 기르는 초솔한 목사들이 즐비하게 벌여 있었다. 앞에는 철책문이 닫혀 있고, 오두막 수수깡 집에는 지키는 군사가 창을 비껴들고 서 있었다. 강변 호장은 삼십 필 말을 막사 앞에 매어놓고, 건주위 부대장 내외는 말을 탄 채 오두막 막사 앞으로 나갔다. 대장 복장을 차린 부대장을 바라보자 파수하던 병졸들은 깜짝 놀랐다. 비껴들었던 창대를 받들어 들고 군례를 했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이 뒤에 따랐다. 부대장은 채찍을 높이 들고 병졸들에게 분부한다.
"나는 우군 부대장이다. 추장님의 명을 받들고 왔다. 너의 상관을 불러라."
병졸은 달음질쳐 철책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윽고 부락을 수직하는 장교가 황망히 막사 안에서 뛰어나왔다. 부대장의 얼굴을 짐작했다. 손을 들어 군례를 올렸다.
"추장님의 분부가 내리셨다. 정황에 의해서, 노동을 시키던 조선 장정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분은 조선 최윤덕 장군의 특사시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막사로 인도해라."
수직하던 장교는 황망히 영을 받고, 군데군데 즐비하게 벌여 있는 오두막 초가로 일행을 인도했다. 장정들이 이곳저곳에서 소문을 듣고 쏟아져 나왔다. 모두 다 얼굴은 때투성이요, 몸에는 모습을 보자 하늘만큼 반가웠다. 큰소리로 통곡을 하고 박특사를 얼싸안았다. 박특사는 모든 장정들을 어루만지며 외로했다.
"많은 고생들을 했네. 이제 자네들을 구해내서 고국으로 데려가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왔네. 막사 밖에 말을 삼십 필가량 등대해놨으니, 말 한 필에 두 사람씩 타도 넉넉하이. 빨리 나가도록 하세!"
박특사의 말을 듣자 모든 장정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길길이 뛰며 환성을 올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고생을 하다가 죽는 줄만 알았는데 선비님이 오셔서 이같이 구해주시니 이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장정들은 주먹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으며 기쁜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 모양을 바라보는 박특사의 눈시울에도 축축하게 안개가 서렸다. 오랑캐와 우디거들도 이족이건만 이 정경을 바라보고 감동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부대장과 강변 호장도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나 이중에 수건을 들어 가장 많이 눈물을 닦는 사람은 우디거 추장의 딸인 건주위 부대장의 아내였다. 박호문은 장정들을 재촉해서 두 사람씩 말을 타게 했다. 잡혀갔던 장정들의 수는 모두 예순한 명이었다. 한 사람은 강변 호장과 함께 말을 타게 했다. 철책 문밖으로 나가자 건주위 부대장은 수직하는 장교와 병졸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상부의 명령이 내릴 때까지 이곳에서 양과 염소를 기르며 대기하고 있거라!"
한 마디 이른 후에 마상에 올랐다. 박호문은 육십여 명 장정과 강변 호장의 행렬을 앞세운 후에 말 위에 높이 올라 부대장과 그의 아내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면 개춘이 된 후에 꼭 다시 만납시다!"
말을 마치자 일행을 거느려 두만강 하류도 달렸다. 삭풍 찬 겨울에 눈 쌓인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 이만주의 허실을 살펴보고, 우디거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장의 내외를 회유한 후에, 또다시 슬기로운 계교를 써서, 납치되어 갔던 장정들 육십여 명을 거느리고 호구에서 탈출해 나온 박호문은, 두만강 하류를 건너 고국땅을 밟았다. 이만주의 추격이 있을까 하여 일부러 지름길을 취하여 두만강을 건넌 것이다. 박호문은 주야배도하여 함경도 지방을 거쳐서 평안도 도절제사 군문에게 뵈었다. 모든 일을 일일이 보고받은 최윤덕 장군은 크게 기뻤다. 박특사의 크나큰 공을 치하한 후에 종사관 신숙주를 시켜서 전하께 올리는 장계를 짓게 했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은 삼가 글월을 성상전하께 올립니다. 지난번 특사로 하명하셨던 박호문은 엄동설한에 삭풍을 무릅쓰고 압록강을 건너 호지로 들어가 적장 이만주를 삼촌설로 위협하고 계교를 써서 강변 호장을 귀화시킨 후에 이만주의 사특한 흉계를 알아냈습니다. 다시 깊숙이 우디거까지 들어가 건주위 부대장 내외를 회유하고, 또다시 총명한 지혜로 납치되어 갔던 장정 육십여 명을 구출해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한 달만 지나면 봄이 될 것입니다. 만반준비를 다 차린 후에 얼음 풀린 압록강을 지체 없이 건너려 합니다. 자세한 일은 상호군 박호문을 보내오니 복명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돈수백배하옵고 감히 탑전에 아뢰옵니다.'
신숙주는 쓰기를 다하고 최윤덕 장군에게 올렸다. 최장군은 읽기를 다한 후에 피봉에 넣어 박호문에게 전했다.
"파발편에 올릴 것 없이 상호군이 직접 장계를 받들고 전하께 알현을 청하시오. 돌아온 장정들은 내가 안주의 곳을 마련할 것이고, 귀화한 호장은 군문에 두어 앞으로 향도를 삼을 테니, 이 뜻을 주상전하께 아뢰시오."
박호문은 최윤덕 장군에게 하직을 고한 후에 곧 서울로 향하여 말을 달렸다. 천여 리 길을 달린 박호문은 한양에 당도하자 지체치 아니하고 정원에 나가 최윤덕 장군의 장계를 올리고 전하께 복명하기를 청했다. 정원 승지는 최윤덕 장군의 장계를 어전에 올리고 박호문이 돌아온 것을 아뢰었다. 세종대왕은 최윤덕의 장계를 보신 후에 크게 기뻤다. 곧 박호문의 입시를 명했다. 박호문은 탑전에 배알한 후에 여진의 풍토와 자리며 이만주의 협사한 일과 호장을 귀화시킨 일이며 장정들을 슬기로 탈환한 일을 세세히 아뢰었다.
"위험하기 짝없는 호지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구나. 기특하고 가상한 일이다." 크게 칭찬하신 후에 승지를 불러 박호문에게 대호군으로 승차하는 직첩을 내렸다.
대군 진발
박호문은 영광스런 종이품 대호군의 직첩을 받고 사은숙배를 올린 후에 품 안에서 한 폭 지도를 꺼내 전하께 올렸다. 세종대왕이 받아서 펴보니, 압록강서부터 오랑캐 건주위와 우디거까지 뻗친 길고 먼 땅의 산천이 험하고 평탄한 곳과 작전행동에 유익한 요해처며 적이 집단교련을 하고 있다는 종유동 땅굴 등이 있는 곳이 소상하게 그려진 지도다. 대왕은 일일이 지도의 지세를 살펴보시자 크게 기뻤다.
"어디서 이 지도를 구했느냐?"
"소신이 목도한 바를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가, 밤마다 그려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앞으로 대군이 진격할 때 필요할 듯하와 전하께 품달하옵니다."
"네가 친히 그린 지도란 말이냐? 글을 잘하고 언변이 좋은 줄만 알았더니, 관찰력과 그림 그리는 재주도 대단하구나! 이 지도를 최윤덕에게도 보여주었느냐?"
"아직 도절제사한테는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전하께옵서 산천 형세와 적의 허실을 샅샅이 살피고 돌아오라는 특명이 계셨으므로, 먼저 전하께 복명한 후에 현지에 있는 도절제사에게 전달할 예정을 했습니다."
전하는 박호문의 안상하고 치밀한 머리를 기특하게 생각했다. 전하는 시측해 섰는 승지에게 분부를 내린다.
"빈청에 나가서 삼정승과 육조판서며 도승지 김종서를 급히 불러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고 급히 추창해 나갔다. 이윽고 영의정 황희를 위시하여 육조판서며 도승지 김종서가 급히 입시했다. 세종저하는 여러 중신들을 둘러보며 말씀을 내린다.
"월전에 박호문을 건주위 적진 속으로 보내어 산간과 수로의 험준과 평이한 곳을 살피고 적정의 진가를 살피고 오라 한 것은 경들도 이미 아는 일이거니와, 박호문은 적의 지형과 지세를 자세히 살피고 손수 지도를 그려왔을 뿐 아니라, 이만주란 놈이 우디거 무리를 가장해서 여연을 습격한 일을 우디거에게 전가시킨 확증을 잡았고, 또다시 용감하게 슬기로운 수단을 써서 잡혀가 고생하는 장정 육십여 명을 탈환하고 또 호장을 귀화시키는 한편, 이만주의 우군 부대장 내외를 회유하여 앞으로 군사행동에 크게 유익하게 했으니 가상한 일이다. 경들은 박호문이 손수 그려온 지도를 보고 앞으로의 전략에 대하여 의견을 말하라."
영의정 황희를 위시하여 모든 신하들은 한동안 건주위와 우디거의 지세를 지도로 살펴보았다. 영의정 황희가 먼저 아뢴다.
"지형으로 보아도 우디거가 여연을 침범했다던 이만주의 궤변은 말이 아니 됩니다. 건주위와 우디거의 거리가 이백 리나 되는데, 우디거가 건주위를 통과해서 어찌 압록강을 건너 여연을 침범했겠습니까? 박호문이 사실해온 일이 정확합니다. 곧 대군을 진출해서 이만주를 응징하시옵소서."
영의정 황희가 아뢰는 말이 끝나자, 도승지 김종서가 아뢴다.
"왕군은 함부로 병과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대신해서 죄 있는 무리를 응징하는 것이 정정당당한 왕도정치올시다. 성상께서는 집현전 학사에게 명하시어 건주위 오랑캐 이만주를 성토하는 격문을 짓게 하옵소서. 박호문이 탐지해온 그대로 낱낱이 죄상을 밝혀서 수죄하신 후에 대군을 진발시키도록 하시옵소서. 이것이 성군의 체천행도하는 왕도 정치올시다."
도승지 김종서의 말씀을 듣자 세종대왕의 용안에는 기쁜 웃음이 가득했다.
"도승지의 말이 옳다. 옛 어진 임금들은 이름 없는 정벌을 하는 일이 없다. 반드시 죄상을 밝혀서 성토를 하는 것이다. 집현전에 명하여 성토문을 짓게 하리라___."
병조판서 조말생이 아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방법은, 가장 중요한 일이 병졸들의 사기를 왕성케 하는 일이올시다. 먼저 사기를 왕성케 하자면 통솔하는 대장의 인격과 용병하는 슬기가 중요합니다마는, 또다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병법에 말하기를, '천시불여지리요, 지리불여인화'라 했습니다. 인화를 취하자면 군사들을 배부르게 먹게 하고 넉넉한 무기를 주어서 마음이 흡족하게 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대군이 행동을 개시하기 이전에 먼저 병졸들이 보는 앞에 많은 군량미와 갑주와 화살이며 화약과 대환구를 충분하게 수송하세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시는 것이 병졸들의 사기와 인화를 드높게 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말이다. 병판의 뜻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앞으로 경은 운량관과 무기 조달의 책임을 다하라!"
세종대왕은 훌륭한 신하들의 조언을 달게 받아들였다. 도승지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박호문은 치밀하고 슬기 있는 사람이니 다시 최윤덕에게로 보내시어 서북면의 군사행동을 돕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하옵고 소신이 소회 있사와 삼정승과 육판서가 모인 자리에 감히 전하께 아뢰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충정을 주달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은 흔연히 대답하신다.
"과인도 박호문을 서북면 최윤덕에게로 보내기로 이미 마음에 작정한 바 있다. 집현전 학사들의 성토문이 작성되는 대로 대호군의 임무를 주어 보내려니와, 경이 소회 있는 충정을 고하겠다 하니 어떠한 일인가?"
김종서는 옷깃을 바로잡고 장중한 음성으로 고한다. "건주위 이만주를 성토해야, 서북면 사군을 회복하는 일에 최윤덕이 능히 성곡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북면 두만강 앞쪽 경원, 경흥, 부령, 회령, 온성, 종성은 선대왕 전하들의 발상지지올시다. 그대로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세종대왕은 선왕들의 발상지지를 그대로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김종서의 말에 귀가 번쩍 떠졌다. 용안에 엄숙한 기운이 떠돌았다. 김종서와 모든 대신들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서북면의 압록강을 격해 있는 우리의 국토도 중요하지만, 동북면의 함경도 일대는 김종서가 말한 대로 나의 선조가 개척하신 땅이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이곳을 폐허로 만들어 여진 야인들의 소굴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최윤덕이 경영하고 있는 건주위 이만주를 응징한 후에는 다시 동북면을 정리할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내 어찌 여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랴!"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전하께서 명철하신 판단으로 함경도 일대의 선대왕 전하들의 기업을 등한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소신도 이미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있습니다. 서북면을 정리한 후에 동북면을 개척하신다면 또다시 큰 힘이 듭니다. 아주 단결에 동북면 황폐한 땅도 정리해서 개척하셔야 합니다."
대왕은 다시 용안을 부드럽게 하여 껄껄 웃으며 대답하신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어찌 조상이 사시던 곳을 등한히 생각하겠는가? 사실은 김종서의 생각보다 더 급하다. 오늘이라도 곧 동북면에도 대군을 몰아서 야인들을 국경 밖으로 내쫓고 황폐된 산야를 정리하고 싶다. 이곳에, 고려 때 윤관 장군이 대군을 거느려 구성을 쌓고 야인들을 쫓아낸 일이 있었다. 그 후에 무능한 여조에서 황폐한 땅이라 해서 버린 지 이미 수백 년이다. 나는 기어코 내 생전에 찾아야 하겠다. 그러나 때가 있다. 김종서도 때가 있다고 말했지만, 김종서의 때와 내가 생각하는 때가 다르다! 하하하___."
김종서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모든 노재상들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 김종서가 아뢴다.
"소신은 미욱하와 감히 전하의 하교를 얼른 분간하여 판단치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의향하시는 때는 어떠한 때이옵니까?"
"나도 나이 늙지는 아니했지만 경은 아직 나이 젊다! 용기만 가지고 때를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기틀을 보아서 때를 꽉 잡아야 한다. 경은 젊은 용기로 때를 잡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기틀을 보아 때를 잡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과 나의 기틀을 보아 때를 잡는 차이점이다. 알아듣겠는가? 하하하."
김종서는 더욱 의아하게 생각했다.
"황공만만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께서는 소신을 향하여 용기로만 때를 잡으려 한다고 하교하셨으나, 소신은 젊은 용기로만 아뢴 것이 아니옵니다. 최윤덕이 건주위 이만주를 성토하는 이때를 놓치지 말고 동북면 오랑캐도 단번에 쫓아내자는 것입니다."
김종서는 자신의 동시출정론을 변명했다. 세종대왕은 김종서의 동시출군에 대한 변명을 듣고 다시 용안에 미소를 띠고 말씀한다.
"왕도정치란 나라 안에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 밖의 다른 겨레들에게도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기뻐해서 성심껏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까닭에 왕군의 행동은 대의명분이 뚜렷해야 한다. 지금 최윤덕으로 건주위 오랑캐를 치게 하는 것은, 저놈들이 국경을 침노해서 변지를 소란케 해놓고 그 죄악을 다른 족속에게 전가하는 못된 짓을 감행했으므로 정정당당하게 문죄하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함경도 일대 동북면에는 아직 이만주의 짓 같은 악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나는,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다. 이것이 왕도정치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이해하겠는가?"
전하의 말씀이 끝나자,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 등 늙은 재상들은 일제히 부복해 아뢴다.
"전하의 하교는 과연 명철하십니다."
대왕은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그리고 양수집병격이 되고 만다. 사람의 힘은 한이 있다. 힘을 분산시킨다면 그만큼 약화되는 법이다. 앞으로 동북면을 정돈할 시기가 가까운 시일 안에 꼭 올 것이다. 경은 잠시 천기가 들 때까지 참아보는 것이 어떠한가?"
순순히 말씀을 내리는 대왕의 용안엔 평탄하고 화한 기운이 훈훈하게 넘쳤다. 김종서는 그제서야 감복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했다.
"소신의 만용을 비로소 뉘우칩니다. 전하의 넓고 크신 도량은 감히 소신 따위의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말씀마다 모두 다 진리십니다. 그러나 천기가 당도한 때가 된다면 반드시 소신에게 동북면을 개척하라는 하명을 주시옵소서!"
전하는 용안에 활짝 웃음을 실었다.
"최윤덕에게 지지 아니하려는 경의 용기를 내가 잘 알고 있다. 유사한 때에 경 같은 사람들을 쓰지 아니하고 누구를 쓰겠는가? 모수자천하듯 하지 않더라도 과인은 경을 꼭 쓰고야 말 것이다! 하하하."
전하는 쾌활하게 웃었다. 모든 대신이며 옆에 시측해 있던 박호문의 입가엔 미소가 떠돌았다. 군국대사를 의논하는 어전 회의장엔 화한 기운이 가득했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다 한맘 한뜻이 된 때문이다. 집현전에서 부제학 정인지가 올리는 성토문을 받아 보시고 하문하신다.
"부제학의 제술인가?"
"여러 학사들과 합의해 지은 것이올시다."
"모든 대신들이 함께 들어보도록 낭독해보라!"
정인지는 성토문을 받들어 읽기 시작했다.
"오랑캐 도지휘 이만주는 등에 가시를 얹고 성토하는 글월을 받들어 읽으라. 너희들 파저강에 흩어져 생활하는 오랑캐들은 우리와 경지가 상련한 까닭에 여연과 강계로 항상 들어와서 우마와 자산을 애걸한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조선에서는 너희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너희들이 청하는 대로 응해준 일이 한두 해가 아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배은망덕하여, 야인 우디거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후에 강계와 여연 등지로 마적 떼가 되어 들어와서 소와 말이며 곡식과 재물을 약탈했을 뿐 아니라, 고아와 고부며 남의 아내를 살육하고 또 납치해서 잔인무도한 행동을 자행했으니 천주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장차 대군을 출동시켜 너희 소굴을 무찔러 괴수를 생금하여 톡톡히 벌하려니와, 이제 너희들의 죄목을 일일이 들어서 밝히는 바이다."
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대신과 시측해 있는 신하들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
"첫째로, 국경을 넘어서 생활하는 너희 족속을 은혜롭게 대우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도둑의 마음을 먹고 무고한 조선 백성들을 괴롭게 해서 동네에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납치해 가서 강제로 노동을 시키니, 이는 상국인 조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 죄상이 하나요, 다음엔 이러한 죄악을 숨기려 해서 간특한 계교로 너희 군사들을 우디거 족속으로 변장시켜서 얼굴에 먹칠을 해서 자자한 형상을 하고 죄를 우디거에게 돌린 후에 거짓 사자를 보내서 했으니 그 죄상이 둘이다. 지난번에는 너를 믿고 가상하다고 생각해서 특사를 보내서 소와 돼지와 곡식을 주어 표창하였거니와, 실지로 조사해보니 사특한 계교를 써서 조선을 속인 일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대로 버려둔다면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다. 이제 10만 왕군을 파견하여 명분을 밝혀 성토하노니, 목을 늘이어 천주를 받으라!"
정인지는 읽기를 다했다. 대왕은 흡족하게 생각했다.
"잘되었다!"
칭찬하신 후에 친히 어수로 성토문을 접어, 박호문에게 주시며 분부한다.
"너는 곧 성토문을 가지고 최윤덕에게 달려가서, 출병하기 직전에 오랑캐한테 보내서, 왕군이 출동하는 명분을 밝히라 이르라. 군량미와 갑옷 투구며 화약과 궁시는 호판과 병판에게 명하여 충분하도록 보내줄 테다. 그리고 대완구는, 서북면에서 철재가 충분하게 생산되니, 그곳에서 많이 주조하도록 하라!"
박호문은 어명을 받고 숙배를 드린 후에 다시 서북면으로 말을 달렸다. 쌀쌀한 겨울바람이 내리질리던 서북면 산악지대에도 차츰차츰 봄기운이 들기 시작했다. 햇볕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뫼와 골짜기마다 허옇게 쌓인 눈은 녹아 흘러서 개울물이 소리치며 흘렀다. 차돌덩이처럼 얼어붙었던 압록강 굳은 얼음장도 따뜻한 햇볕을 받아 해빙이 되기 시작했다. 서북면 도절제사 병영에서도 군기가 하늘의 태양열과 함께 무르녹도록 익어갔다. 서울서는 군량미가 끊일 사이 없이 마바리에 실려 들어오고, 제주도 준마들은 마군과 함께 달려왔다. 대장간에서는 창과 칼을 만드는 망치 소리가 요란하고, 궁방에서는 밤을 도와 활과 살을 만드느라 부산했다. 동네마다 장정들은 헛간에 산더미같이 쌓아두었던 칡덩굴을 풀어서, 세로 가로 바둑판 모습으로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수천수만 개를 그물 뜨듯 엮어나갔다. 장차 도강작전에 이용하려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기발한 생각으로 칡다리를 만들어보라는 어명을 받아 만드는 것이다. 음력으로 사월 그믐께가 되었다. 도절제사 최윤덕은 비로소 전군에 대하여 출동명령을 내렸다. 태양이 가장 가깝게 이 땅에 내리쬐는 오월 단오 단양절을 택해서 적진을 돌격하자는 계획이었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 압록강 물도 푸른 파도를 치며 출렁거렸다. 완전히 천시를 이용해서 적진을 격파하자는 묘한 계교다. 도절제사 최윤덕은, 평안도 마군고 보병 일만 명과 서울 정병 일만 영에 황해도 군사 오천 명과 강계 분군 오천 명을 합세하여, 기치창검을 봄바람에 번득이며 호호탕탕 압록강으로 향했다. 강을 건너는 도강작전은 수륙병진의 태세를 취했다. 말 탄 군사는 세종대왕의 분부대로 압록강 하류 물길이 좁은 곳에 칡다리를 놓은 후에 흙을 덮어 건너게 하고, 보병들은 전함 백여 척을 띄어 건넜다. 대완구도 배로 건너고, 군량미도 선박으로 옮겼다. 도강작전은 배와 다리로 병행한 때문, 질풍신뢰같이 빨랐다. 중군절제사 이순몽은 정병 이천오백십오 명을 거느리고, 지난번에 귀화했던 강변 호장을 향도로 해서 박호문과 함께 이만주의 소굴로 돌진했다. 박호문은 오랑캐 이만주의 성 앞에 당도하자 집현전 학사들이 제축한 성토문을 살끝에 매어 성문 안으로 쏘아 보냈다. 이때 이만주는 박호문이 강변 호장과 함께 두만강 하류를 건너 조선으로 되돌아간 일을 뒤늦게 알고 항상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혹시나 강변 호장이, 여연을 침범한 일이 우디거의 짓이 아니라, 자기들 건주위의 짓인 것을 폭로할까 하여 근심하고 있던 판이었다. 군사들을 풀어 성문을 굳게 닫고 초조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돌연 최윤덕이 대군을 휘동하여 성문 밖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만주는 당황했다. 곧 부하 추장들을 불러 대항할 것을 결정했다. 성을 지키던 수문장이 황황망망 박호문이 화살로 쏘아 보낸 세종대왕 전하의 성토문을 주워 가지고 들어왔다. 박호문이 여진 글자로 번역해 쓴 것이다. 이만주를 위시하여 모든 추장들은 벌벌 떨면서 읽었다.
"공연한 짓을 해서 건주위가 결딴이 나는구나!"
늙은 추장 한 사람이 탄식했다.
"모두 다 모사 퉁맹가란 놈이 약은 체하여, 우리 군사를 우디거로 변장시켜서 이 꼴을 당하게 했구나. 조선군을 대항하기 전에 이놈을 먼저 찢어 죽여야겠다!"
젊은 추장 한 자가 팔을 걷어붙이고 호통을 쳤다.
"여보게, 퉁맹가란 자가 아무리 요사스런 꾀를 냈다 하나, 도지휘가 그 꾀를 쓰지 않았다면 이런 기막힌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허물은 이만주 도지휘가 져야 하네!"
늙은 추장 한 사람이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엄숙한 얼굴로 도지휘 이만주를 손가락질해 가리키며 말한다.
"애당초에 도지휘가 좌군, 우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으로 나갈 때, 우리들 각 동리의 추장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이 퉁맹가란 놈하고 귀옛말을 하고 돌연 환쟁이들을 불러다가 좌군 이백 명의 얼굴에 우디거의 모습으로 칠했던 것 아닌가. 이때 우리들 추장들도 무슨 까닭인 것을 까맣게 몰랐네. 그나 그뿐이가. 압록강으로 나가서도 별안간 우군 부대장한테 영을 내려서 변장한 좌군을 묶으라 하지 아니했던가? 이때도 우리 추장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일체 몰랐네. 이따위 얕은꾀를 써서, 그래 천하 맹장 최윤덕이 속아 넘어갈 줄 알았던가? 우리들한테는 비밀을 지킨답시구 의논도 없이 한 일이니, 이 책임도 도지휘가 져야 하네!"
이만주와 퉁맹가를 원망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이만주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건주위를 손아귀에 넣어 지휘해 온 인물이었다. 여러 추장들의 횡설수설 떠들어대는 원망하는 소리를 꾹 참고 듣고 있다가, 별안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긴 칼을 뽑아 들고 사선상을 후려쳤다.
"지금 조선군이 와서 건주위를 두려빼려는 이 판국에 너희들은 방어할 대책은 세우지 않고 나만 헐뜯으면 어찌할 테냐? 내가 우리 군사를 우디거로 변장시킨 일은 최윤덕의 예봉을 피하려 한 일이지, 결코 너희들을 해롭게 하려고 한 일이 아니다! 만약에 또다시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자가 있다면 늙고 젊은 추장을 말할 것 없이 모조리 군법을 시행하여 참하리라!"
눈을 부릅떠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모든 추장들은 군법 시행을 해서 한칼에 목을 벤다는 말에 모두들 기가 죽어 움찔했다. 이만주는 다시 칼을 번쩍 들어 지휘하는 군령을 내린다.
"우군 부대장은 군사 이천 명을 땅굴에서 불러내서 쳐들어오는 최윤덕을 방어하라. 나의 사랑하는 백마를 내주리라! 모든 동리 추장들은 본 곳으로 빨리 돌아가서, 땅굴 속에서 교련하는 동리 군사들을 출동시켜서 제 동리를 각기 방어하라!"
모든 추장들은 군령이 무서웠다. 명을 받고 흩어졌다. 이천 병마를 거느리고 제일선에서 조선군을 대항하라는 이만주의 명령을 받은 우군 부대장은 딴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디거에서 박호문과 내응을 약속했던 우디거 추장의 사위였다. 이만주가 내린 백마는 원래 박호문이 강변 호장에게 준 것을 이만주가 뺏었던 것이다. 우군 부대장은 출전 명령을 받자 급히 백마를 달려 집으로 향했다. 아내와 작별을 하려는 것이다. 온 성안이 술렁거렸다. 남녀노소를 말할 것 없이 조선군이 성 밖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남부여대해서 어린것들을 이끌고 산골로 황황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거리거리마다 피난하는 백성들이 수라장을 이루어 갈팡질팡 호곡하는 소리가 낭자했다. 동리마다 집이 텅텅 비었다. 우디거의 사위는 황망히 말을 달려 집 앞에 당도하자 급히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혹시나 아내가 난리 났다는 소식을 듣고 산속으로 피하지나 아니했나 하고 하고 염려되는 때문이다. 중문을 거쳐 안방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아내는 거울 앞에서 두려움 없이 얼굴을 매만져 단장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방싯 요염한 웃음을 웃고 사뿐 일어나 남편을 맞이했다.
"조선군이 쳐들어온다지요?"
붉은 입술이 꽃판처럼 터지며 남편인 우군 부대장을 껴안았다.
"큰일 났네. 최윤덕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 쳐들어왔어! 이만주 지휘는 나보고 이천 병마를 거느리고 제일선으로 나가서 방어를 하라는 거야! 나는 자네가 피란민과 함께 산골로 들어가지나 않았나 하고 급히 뛰어온 길일세."
"호호호, 내가 왜 피난을 가요? 무엇이 두려워서!"
계집은 요염하게 웃었다.
"조선군한테 잡히면 어찌하려구?"
"호호호, 조선 군사가 나를 잡을 리가 있소? 나는 우디거의 딸인데___. 당신은 지난번 우리 친정에서, 아버지 앞에서 조선군이 온다면 내응을 하겠다고 박특사에게 약속한 일을 잊으셨소? 조선 사람은 의로운 사람들인데, 내응하는 대장의 아내를 잡아갈 리가 있소? 두려울 것 없지요. 호호호."
계집은 태평한 듯, 또 한 번 요염하게 웃었다.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은 눈을 끔벅이며 망설인다.
"내응을 하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 내응을 한단 말인가!"
혼잣말로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이천 명 땅굴 군사를 가지고 십만 대병과 싸울 수도 없고___."
"호호호, 무엇이 그리 큰 걱정이 된단 말요. 슬며시 싸우는 체하다가 항복을 하겠소?"
"나중에 이만주가 목을 베면 어찌하나?"
"참말, 당신은 어리석기도 하오. 우리 친정으로 가서 살면 그만 아니오. 당신은 까마귀 고기를 자셨소? 어찌 그리 건망증이 심하오. 내가 무남독녀 외딸이니 늙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달라고 했던 우리 아버지의 말씀을 잊으셨소? 그때 박호문 특사도 똑똑히 들었는데 무슨 걱정이 되오? 항복한 뒤에 우리는 슬며시 우디거로 가면 그만 아니겠소. 나도 당신을 따라 전장에 나가겠소!"
"자네가 전장에 나가겠다?"
우디거의 사위는 깜짝 놀란다. 계집은 장문을 열었다. 여자의 옷을 훌훌 벗었다. 남자의 군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은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레진다.
"언제 군복을 만들어두었나?"
"반드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만들어두었죠. 호호호."
다시 보니 기막힌 건주위의 소년 장군이다.
"박특사와 강변 호장이 반드시 이번에 향도가 되어 따라왔을 것이고, 두 사람은 다 내 얼굴을 짐작할 테니, 두말 말고 당신은 나하고 이천 병마를 거느려 나갑시다."
우디거 사위는 판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내로 부관을 삼아, 이천 병마가 있는 땅굴로 향했다. 땅굴 속에 있는 이천 병마의 오랑캐 군사들은 부대장과 젊은 부관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오랑캐 우군 부대장은 젊은 부관과 함께 마상에서 전령을 내린다.
"지금 조선군이 성 밖까지 쳐들어왔다. 도지휘 이만주 장군은 나에게 너희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는 조선군에 대항하라 하셨다. 이제 나는 곧 너희들 전 장병들에게 출동명령을 내린다. 한 사람이라도 태만하는 자기 있다면, 군법시행을 해서 참하리라! 그리고 이 젊은 군관은 나의 부관이다. 모든 일을 부관을 통하여 전달할 테다. 명심해서 군령에 복종하라. 추호라도 어기는 자가 있다면 엄벌을 면치 못하리라!"
모든 오랑캐들은 손을 높이 들어 맹세했다.
"자아, 진군이다."
오랑캐 군사들은 일제히 창과 칼과 전통을 메고 우군 부대장의 뒤를 따랐다. 이천 병마는 성벽 안에 기치창검을 벌여놓고 진을 쳤다. 장차 도전하는 조선군에 대항하려는 것이다. 한동안 진세를 정돈한 뒤였다. 우디거의 딸인 오랑캐 군관은 남편의 백마를 채찍질해 타고 조선진을 향하여 기운차게 달렸다. 성문 앞 열 걸음 밖에 당도하자. 잽싸게 활을 당겨 살을 쏘았다. 살은 '윙' 소리를 내며 성문 밖으로 떨어졌다. 오랑캐 군사 이천 명은 소년 군관이 조선군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는 화살인 줄 알았다. 미남인 소년 장군의, 물을 박차는 제비인 양 날렵하게 달리는 행동을 바라보자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올렸다.
"잘 달린다!"
"활도 잘 쏜다!"
"물찬 제비 같구나!"
"우리 부관은 천하의 미남자다!"
"여자같이 약하게 생긴 군관이 어쩌면 저같이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아!"
오랑캐 군사들의 칭찬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은 진문 앞에 서서 긴 칼을 짚고, 미소를 입가에 머금어, 아내의 날렵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 군관으로 변장한 우디거의 딸은 화살 석 대를 연거푸 쏘아붙인 후에 잽싸게 말머리를 돌려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오랑캐 본진으로 돌아온다. 오랑캐 군사들은 또다시 손뼉을 두드리고 발을 굴러 환호성을 올리며 무사히 돌아오는 자기편 군관을 맞이했다. 이때 중군절제사 이순몽은 대호군 박호문과 함께 성 밖에서 성토문을 화살로 쏘아 보낸 후에 모든 군용을 정돈하고 일촉즉발의 태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박호문은 중군 이순몽과 귀화했던 향도 강변 호장을 대동하고 망루에 높직이 올라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성토문이 들어간 후에 적은 항복을 하지 아니하고 대결 행동을 취하는 모양이었다. 2천 병마가 움직였다. 적은 진세를 정돈하는 태세를 취했다. 박호문은 계속해서 적세를 응시하고 있었다. 홀연 소년 군관이 나는 듯이 백마를 달려 뛰어왔다. 박호문이 바라보니 백마를 타고 달려오는 소년 적장의 얼굴은 매우 익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얼른 나지 아니했다. 귀화한 강변 호장의 허구리를 꾹 찔렀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아니한다. 자네는 짐작할 테지? 누군가?"
강변 호장동 눈을 씻고 바라보았다.
"저 역시 낯이 익은 듯한데 얼핏 생각이 나지 아니합니다. 건주위에는 저런 소년 군관이 없는데___. 누구일까?"
강변 호장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소년 적장의 달리는 말이 점점 가까이 왔다. 논같이 흰 은안백마다. 박호문의 입에서 별안간 '앗' 하고 놀라는 소리가 나왔다.
"저 백마는 내 백마가 아닌가. 자네한테 주었다가 이만주한테 뺏겼던 내 백마야!"
강변 호장의 눈에 불이 일었다.잊었던 분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뛰닫던 소년 적장의 달리던 백마가 우뚝 서면서 화살이 퍼뜩 날았다. 바람을 끊고 허공으로 날아 성 밖으로 뚝 떨어졌다. 박호문은 강변 호장에게 소리쳤다.
"빨리 내려가 화살을 주워 오너라!"
강변 호장은 망루 아래로 뛰어내렸다. 화살 한 대를 들고 뛰어올랐다. 살 끝에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급히 뽑아 펼쳐보았다. 여진 글자다.
'박특사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우디거의 딸입니다. 이만주는 우리 남편에게 2천 병마를 주고 조선군을 대항하라 했습니다. 나는 약속한 대로 내응하기 위하여 남편을 달래서 남장을 하고 부장이 되어 나왔습니다. 당신들은 성문을 두드려 부수고 들어오시오. 나는 당신과 싸우는 체하다가 우리 남편과 함께 항복을 하리다!"
박호문은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중군 이순몽과 함께 급히 망루에서 내렸다. 중군에 급히 전령을 내렸다.
"2천5백 명의 전 중군은 일제히 성문을 두들겨 부숴라___."
대기했던 군사들은 일제히 고함 소리를 치며 철퇴와 도끼로 성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우지끈와지끈' 지동치는 소리와 함께 적의 쇠문이 거꾸로 박혀 넘어갔다. 조선군은 성문 안으로 홍수같이 밀려 들어갔다. 박호문은 급히 전령을 내린다.
"적장을 산 채로 잡을 테다. 너희들은 돌격을 중지하라!"
군사들은 주춤하고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박호문은 갑주투구에 장창을 비껴들고, 오추마 위에 높이 올라 소년 적장의 앞으로 달렸다. 양편 군사들은 진용을 정돈한 채 멀리 두 장수의 결전을 바라본다. 은안백마를 탄 소년 적장은 서릿발이 싸늘하게 흐르는 듯한 긴 칼을 햇빛에 번뜩이며 칼을 춤추어 박호문의 앞으로 나왔다. 박호문이 바라보니 틀림없는 우디거의 딸이다. 남장으로 변복한 우디거의 딸은 갑주투구의 군복색으로 차린 박호문을 선뜻 알아보았다. 서릿발 같은 장검을 휘두르며 생긋 웃었다.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칼을 휘두르며 가만한 소리로 말을 건넨다.
"박특사, 그동안 태평하셨습니까? 살에 띄워 보낸 편지는 받아 보셨지요?"
"받아 보았소."
박호문도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가만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우디거의 딸이 또다시 장검을 휘두르며 가만히 속삭인다.
"편지 사연대로 남편과 함께 항복을 하고 군사를 이끌어 우디거로 달아날 작정입니다. 그러나 십목소시에 당장 항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몇 차례 싸우는 체하다가 틈을 보아 패주하겠습니다."
계집은 또 한 번 생긋 웃었다. 소용이 가국이다.
"좋소!"
박호문도 웃으며 대답했다.
"자아, 그럼 싸우는 체합시다."
계집은 또 한 번 생긋 웃고 장검을 번쩍 들어 박호문의 어깨를 치려 했다. 박호문은 마상에서 잽싸게 몸을 피하면서 장창으로 소년 적장의 젖가슴을 향해 찔렀다. 소년 적장은 잽싸게 은안백마의 배때기를 발꿈치로 되게 질렀다. 은안백마는 껑충 뛰어 세 걸음 밖으로 물러서며 박호문의 예봉을 피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양편 진영의 무수한 군사들은 박호문과 우디거 딸의 주고받은 밀어의 대화를 알 까닭이 없었다. 젊은 두 장수의 찌르고 피하고, 피하고 찌르는 농익은 무예를 바라보며 손뼉을 치고 발을 굴러 환성을 보냈다. 박호문과 우디거 딸의 교봉을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창과 칼을 맞부딪치며 '댕그렁' 소리가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났다. 오추마와 백설마, 검고 흰 두 말은 '어흥' 소리를 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박호문이 찌르려 하면 소년 적장은 말을 달려 급소를 피하고, 소년 적장의 칼이 갑옷투구에 번뜩 닿으려 하면 박호문은 말 배때기로 몸을 피했다. 이럴 때마다 양편 진영의 군사들은 손네 땀을 쥐고 함성을 올렸다. 환성 소리는 호지의 천지 강산을 흔들어놓는다. 젊은 두 장수의 용양호박의 묘기는 겉으로 보기에 청룡 백호가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며 싸우는 듯했다. 밖에서 보기에 교봉 수백 합에 승부가 나지 아니했다. 박호문과 우디거 딸의 무예는 난형난제요, 막상막하다. 이제는 팔도 아프고 말도 피곤했다. 뿐만 아니라 해도 저물기 시작했다. 우디거 딸이 또다시 장검을 휘두르며 밀어를 꺼냈다.
"오늘도 해도 저물고 몸도 피곤하니 내일 싸우는 체합시다. 내일은 저의 남편을 싸움터로 내보낼 테니 그리 아시고 며칠 더 교전하는 형태를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박호문도 장창으로 우디거 딸의 찌르는 칼을 막아내려 대답했다.
"좋소! 조금 있으면 우리 주장이 쟁을 쳐서 싸움을 쉬라할 것이오. 그때까지 잠깐만 더 싸워보는 체합시다. 그리고 내일은 더 열성 있게 싸우는 것같이 두 패로 싸우는 것이 어떻겠소?"
계집은 또다시 생긋 웃으며, 박호문의 찌르려는 창을 칼로 막아내며 대답한다.
"그거 참 묘안입니다. 열을 내서 싸우는 체해야만 이만주가 의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럼 저도 또 내일 나올 테니, 특사께서도 나와서 한바탕 싸웁시다."
여자 군관은 또다시 방긋 웃으며 장검으로 박호문의 팔을 찍으려 했다. 멀리 밖에서 보기엔 매우 위험한 장면이었다. 박호문은 또다시 슬쩍 몸을 피하면서 우디거 딸의 허구리를 찌르려는 찰나다. 오랑캐 진에서 홀연 종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우디거 딸의 남편 우군 부대장은 아내의 칼 쓰는 모양이 어지러운 것을 보자, 피로했다고 생각했다. 종을 어지럽게 쳤다. 싸움을 쉬게 하는 군호다. 조선진에서도 중군절제사 이순몽은 박호문에게 미리 말을 들어서 거짓 싸우는 양전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적진에서 휴전을 보하는 종소리가 들려오니, 이편에서도 쟁을 쳐서 싸움을 쉬게 했다. 호지의 우디거 딸과 조선진의 박호문은 종소리와 쟁소리를 군호로 하여 제각기 본진으로 말을 달려 돌아갔다. 이날 밤에 호진에서는 우디거 딸이 그의 남편 우군 부대장에게 열성 있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남편도 나가서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하고, 조선진에서는 박호문이 이순몽 절제사와 본영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뒤에 도착한 도절제사 최윤덕에게 건의했다.
"우디거의 딸은 과연 영민합니다. 이만주에게 겉으로 열성 있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두 패로 싸우자 합니다. 그럴듯한 꾀올시다. 내일은 이순몽 장군께서 저와 함께 출전을 하셔야겠습니다."
"역시 거짓 싸우는 거란 말이지? 좋지!"
이순몽은 쾌하게 허락했다. 박호문은 다시 건의한다.
"도절제사 최장군과 중군절제사 두 분이 계신 앞에 아뢰옵니다. 우디거의 딸과 그의 남편인 우군 부대장은 정말 충복이올시다. 죽이지 마시고 살려두어야 합니다."
도절제사 최윤덕이 대답한다.
"살려두어야지. 대호군의 말이 옳소! 일우에 이용해 쓸 데도 많을거요."
"그러나 죽기가 십상팔구입니다. 살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우디거 딸 내외는 죽기가 쉽지, 살기가 어렵다는 박호문의 말에, 최윤덕 장군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박호문에게 묻는다.
"우디거 딸 내외를 우리가 아니 죽이면 그만 아닌가. 어찌해서 살기가 어렵단 말인가?"
"대감, 우리가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적장 이만주가 죽인다는 말씀입니다. 이만주는 의심이 많은 자올시다. 이틀씩이나 싸워서 승부가 나지 아니하는 것을 본다면 반드시 그들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이리된다면 그들은 죽임을 당하고야 맙니다."
"그도 그렇군요. 박호문의 말이 옳습니다."
이순몽이 옆에서 거들었다.
"글쎄, 그도 그럴듯한 말이로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디거 딸 내외를 살릴 수 있는가. 묘책이 없겠나?"
최윤덕이 묻는다.
"한 가지 묘한 계교가 있습니다. 사또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장이 실행하겠습니다."
박호문이 대답했다.
"묘한 계교를 말해보게나."
"내일 접전을 할 때 한동안 교봉을 하다 적병을 거느리고 우디거로 달아나라 이르겠습니다. 그리한다면 우디거 추장은 무남독녀인 딸과 사위를 반갑게 맞이해서 후계자를 삼을 것입니다. 이리된다면 이만주의 병력은 약화되고, 우디거 딸과 사위는 호혈을 벗어나서 무사하게 살 것입니다."
최윤덕과 이순몽은 박호문의 계책을 듣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손뼉을 쳐 찬동했다.
"좋은 생각이오. 전쟁을 해도 바르고 어진 사람은 살려줘야 하는 법이오. 그러므로 병서에 이르기를, 왕군의 행동은 추상 같은 위엄을 지니는 한편 자애로운 온정으로 호생지덕을 베풀라하였소. 박특사의 계교는 과연 훌륭하오. 한편으로 적의 기세를 꺽고, 한편으로 사람들을 구해서 비록 이족이라 하나 우리나라의 충성스런 울타리가 되게 합시다."
"두 분 사또께서 찬동해서 공명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출전할 때 이 계책을 우디거 딸에게 전하겠습니다."
박호문은 기뻤다. 중군절제사 이순몽도 한마디 한다.
"내일 두 패로 싸움을 한다니, 나도 우디거의 사위한테 싸우다가 달아나라고 생왕방을 가르쳐줘야 하겠소. 하하하."
세 장성들은 화기 가득 찬 속에 전략을 마련하고 각기 야전 움막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조선진에서는 다시 싸움을 돋우는 징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소년 장군 박호문은 어제와 같이 갑옷투구에 오추마를 타고 장창을 비껴들고 나오고, 중군절제사 이순몽은 은투구에 검은 갑옷 입고 적토마를 타고 쌍철퇴를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중군절제사의 영기가 펄럭거렸다. 위풍이 당당했다. 조선진에서 징소리가 일어나며 소년 장군이 군사를 거느려 진 앞에 나타나고, 뒤미처 위풍당당한 일원대장이 적토마를 달려 쌍철퇴를 휘두르며 나오는 것으로 버자, 오랑캐 진에서도 종소리가 요란하게 공산을 흔들었다. 오랑캐의 이천 병마가 늘어서 있는 진 문이 활짝 열리면서 이편에서도 소년 장군과 일원대장이 말을 달려 나왔다. 소년 장군은 미모의 주인공인 우디거의 딸이 남자로 변장해서 갑주 투구로 은안백마를 채찍질해 나오는 것이고, 일원대장은 우디거 딸의 남편인 적의 우군 부대장이었다. 쌍창을 휘두르며 혹다리를 타고 홍종같은 소리를 외치며 달려 나왔다. 양편 진에서는 군사들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왼편에서는 중군절제사 이순몽과 오랑캐 우군 부대장이 대결의 태세를 취하여 말을 달리고, 오른편에서는 어제 온종일 칼과 창을 맞부딪쳤던 두 사람의 소년 장군들이 오추마와 은안백마를 몰아 창과 칼을 겨누고 있다. 박호문은 장창을 번뜩이며 우디거 딸의 투구 꼭지를 향하여 후려칠 듯하면서 밀어를 보냈다.
"밤사이 태평히 잤소?"
"추장의 명을 어기고 거짓 싸움을 한 사람이 잠을 잘 수 있소.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웠소."
우디거 딸은 들어오는 박특사의 장창을 장검으로 막아내며 속삭인다.
"내가 좋은 꾀를 가르쳐줄 테니나 하라는 대로 하려오?"
"무슨 좋은 꾀요?"
우디거의 딸이 상긋 웃고 묻는다. 박호문은 다시 장창으로 우디거 딸의 목을 겨누는 시늉을 하며 밀어를 계속한다.
"오늘은 나와 당신과 이순몽 절제사와 당신의 남편이 두 패로 갈려서 싸우게 되니, 남들이 보기에는 기막힌 격전이라 생각할 것이오. 한동안 싸우다가 당신 내외는 패해 달아나는 체 2천 병마를 이끌고 당신의 친정 우디거로 달아나시오. 그리한다면 당신네 내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소. 만약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만주의 손에 당신 내외는 죽고 말 것이오! 이만주는 의심이 많은 자요. 우리들의 승부가 얼른 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만주는 오늘쯤 뒤를 밟을 것이 분명하오. 나는 지난밤에 우리 사또들과 의논하고 당신 내외의 목숨을 구해주기로 했소!"
거짓 싸움을 하면서 한 가닥 검은 구름장 같은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우디거 딸의 귀로, 칼과 창이 댕그렁거리며 부딪치는 속에 가만가만 들려오는 박특사의 밀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음으로 들렸다. 투구를 쓰고 장검으로 박호문의 찌르는 장창을 막아대는 우디거 딸의 면모가 샛별인 양 환희의 안광을 뿜었다.
"좋습니다. 하라는 대로 우디거 친정으로 달아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남편에게 알릴 틈이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우디거의 딸은 기쁘면서도 마음이 초조했다. 칼 쓰는 수법이 거칠어지고 어지러워졌다.
"마음을 놓으시오. 우리 중군대장도 당신의 남편을 절대로 해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당신 내외의 의기에 감동이 된 까닭이죠. 내가 지금 당신에게 묘계를 가르쳐주듯, 이순몽 장군이 똑같은 말을 당신 남편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니, 마음 턱 놓고 한동안 싸우다가 군사를 이끌고 말을 달려 달아나시오!"
박호문은 다시 장창을 번쩍 들고 소년 적장을 겨누며 밀어를 보냈다. 우디거 딸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몸을 피하면서 힐끗 옆을 바라본다. 남편 우군 부대장과 조선 중군대장 이순몽의 교전하는 모습이 궁금한 때문이다. 이순몽은 위풍이 당당했다. 고리눈을 부릅떴다. 시꺼먼 텁석부리 수염이 바람에 날려 구레나룻이 흔들거렸다. 적토마를 타고 쌍철퇴를 흔들며 홍종 같은 소리로 남편의 얼굴판을 향하여 후려치는 시늉을 하며 꾸짖는다.
"이놈, 배은망덕하는 오랑캐 놈의 부하야. 목을 늘여 내 철퇴를 받아라!"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거센지, 몇 리 떨어져서 박호문과 대결하는 우디거 딸의 귀에까지 쨍쨍 울렸다. 우디거 딸의 마음이 약간 불안했다. 홀연 남편의 얼굴판을 치려 했던 쌍철퇴는 빗나가면서 허공을 갈기고 말았다. 우디거 딸은 계속해서 박호문의 예봉을 피하면서 남편과 이순몽의 교전하는 동정을 살폈다. 남편의 대항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해서 까닭 없이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우리 땅을 침범하느냐!"
큰소리를 치면서 쌍창을 들어 이순몽의 적토마를 지르려 했다. 이미 쌍철퇴와 쌍창이 맞부딪쳐지면서 교봉이 농익어 들어갔다. 소곤소곤 말소리가 들릴듯 말듯 새어나왔다. 우디거 딸은 박호문을 피해 말을 달리면서 귀를 기울였다. 조선편 대장 이순몽의 홍종 같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줄어졌다. 우디거 딸은 귀를 기울였다. 박호문이 자기한테 말하듯 하는 가만가만한 음성이었다. 귀를 더 한 번 바싹 귀 기울였다.
"너를 곧 쌍철퇴로 후려갈겨서 결판을 낼 것이다마는, 박특사한테 말을 들어보니, 너희 내외는 가상한 일이 많다. 살려두기로 한다. 나 역시 박특사처럼 거짓 싸워서 헛 철퇴를 쓸 테다!"
남편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쌍창을 번쩍 들어 이순몽의 철퇴를 막는 시늉을 한다. 이순몽의 목소리가 또 가만가만 들렸다.
"이만주란 놈은 너를 의심할 것이다. 이틀이나 교전을 해도 승부가 나지 아니하면 우리와 내통이 된 것을 판단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너희 내외를 죽일 것이 분명하다. 너희들은 위험한 눈치가 있거든 빨리 우디거로 달아나거라!"
박호문이 자기한테 귀띔한 것과 똑같은 소리다. 남편의 음성이 처음으로 들렸다. 역시 가만한 음성이다.
"내 아내에게도 연통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소?"
자기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다.
"박특사가 벌써 너의 아내한테 일러주었을 것이다. 염려 말아라. 자아, 그럼 싸우자!"
우디거 딸의 입가에는 가만한 웃음이 떠돌았다. 한편 박호문은 우디거 딸이 이순몽과 적장의 밀어를 귀기울여 들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눈치챘다. 멀리서 보는 군사들이 눈치를 챌까보아 일부러 우디거 딸의 주위로 말을 달려 빙글빙글 돌면서 장창을 비껴들고 싸움을 돋우는 체, 어르는 태세를 취했다. 박호문은 우디거 딸이 안심하고 방긋 웃는 모습을 놓치지 아니했다.
"인제 마음이 놓이오?"
우디거 딸은 박호문을 향하여 안심했다는 뜻을 웃음으로 보내어 대신했다.
"자아, 그럼 이제는 싸워야 하오!"
"좋소, 싸웁시다!"
우디거 딸은 다시 기운이 솟아났다. 싸늘한 긴 칼을 햇빛에 번뜩이며 박호문의 목을 후려치려 했다. 박호문이 장창을 힘차게 잡은 후에, 들어오는 우디거 딸의 긴 칼을 후려쳤다. '땡그렁' 소리가 강하게 일어나면서 긴 칼 중등이 딱 부러졌다. 오랑캐 진에서는 이 모양을 바라보자 황급하기 짝이 없었다. 비장 한 자가 급히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들고 말을 달려 뛰어나왔다. 우디거 딸을 대신해서 박호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박호문은 장창을 번듯 들어 오랑캐 비장의 가슴을 향하여 푹 찔렀다. 교봉 일합이 채 못되어 오랑캐 비장은 말 아래로 떨어졌다. 조선진에서는 고함 소리가 일어나면서 군사들이 제각기 동아줄을 들고 쫓아 나와 반죽음이 되어 말에서 떨어진 비장 오랑캐를 꽁꽁 묶었다. 조선진으로 호송했다. 이 모양을 본 오랑캐진에서는 또다시 다음 장수가 급히 말을 달려 박호문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었다. 박호문은 장창을 안장 옆에 꽂고, 급히 화궁을 들어 살을 메겼다. 날카로운 금비전 화살 한 대가 적장의 눈망울을 종통으로 쏘아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또다시 조선진에서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이 장대 위에 높이 앉아 관전을 하다가 지휘봉을 두드렸다.
"금비전 화살 한 대에 눈알이 빠진 적장을 묶어 오너라!"
조선 군사들은 우르르 달려가 말 아래 떨어진 호장을 묶어 들였다. 한편 호진에서는 이만주와 퉁맹가가 장대에 서서 관전을 하다가 비장 두 사람이 연거푸 상해서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보자, 추장 이만주는 의심이 덜컥 났다. 옆에 있는 퉁맹가에게 묻는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글쎄올시다. 우군 부대장이 열을 내서 싸우는 것 같지 않습니다."
모사 퉁맹가도 의아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도대체 이틀씩이나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아니하니 웬일이란 말인가? 일부러 싸우는 체하여 날짜를 천연하는 것이 아닌가."
"글쎄올시다!"
"비장들이 두 사람씩이나 상해서 묶여가는데도 우군 부대장은 부하를 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조선 편 장수와 칼춤만 추고 있으니 해괴한 일이로군!"
"매우 몸을 사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특사와 교전을 하다가 칼을 부러뜨린 젊은 장수는 누군가?"
"글쎄올시다. 소년 아장인데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년 아장의 태도도 수상하지 아니한가. 칼이 부러졌으면 부러진 칼로라도 박특사를 찍어대지 못하고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힘이 모자라면 쫓겨서 본진으로 돌아와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아니하고, 양편에서는 도대체 어르고만 있으니 괴상한 일이로구나!"
이만주는 화가 벌컥 났다.
"아니되겠네. 자네 빨리 좌군 부대장과 무장을 갖추고 진터로 나가서 우군 부대장을 소환하게. 그리고 젊은 아장이 누군지 엄하게 사실해보게!"
추장 이만주의 명령은 추상같았다. 좌군 부대장은 지난해에 우디거 족속의 얼굴로 변장하고 여연으로 침범했던 꼭지 두목이었다. 흉악한 얼굴에 효용이 절륜한 자였다. 이만주의 명령을 받자, 퉁맹가와 함께 급히 달려 진터로 뛰어나갔다. 박호문과 이순몽이 우디거 딸과 우군 부대장과 다시 말을 달려 싸움을 어르면서 바라보니, 적진 편에서 말굽 뛰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면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민감한 박호문이었다. 이만주가 의심을 해서 다른 장수를 보내는 것이 분명했다. 우디거 딸에게 밀어를 보낸다.
"우리가 먼저 추측한 대로 이만주는 의심을 해서 다른 장수를 보내는 것이 분명하오. 이 기회에 적장들을 죽여버리고 우디거로 달아나시오."
우디거 딸이 눈을 씻고 달려오는 장수들을 바라보니, 한 자는 좌군 부대장이요, 한 자는 자기 친정 우디거한테 허물을 뒤집어씌우게 했던 모사 퉁맹가다.
"옳습니다. 우리들을 의심해서 잡으러 오는 것이 분명하오!"
말을 마치자 우디거 딸은, 박호문의 예봉을 피하는체 이순몽과 접전하는 시늉을 하는 남편 앞으로 달려갔다.
소탕 소굴
소년 적장 우디거 딸은 남편을 도와 이순몽을 협공하는 체, 부러진 칼을 흔들며 이순몽과 남편 앞으로 달려들었다. 가만한 말로 속삭인다.
"모사 퉁맹가와 좌군 부대장이 우리를 잡으러 옵니다. 죽이고 달아납시다!"
이순몽이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가 얼른 말참견을 했다.
"좋다! 그것이 너희들의 죽지 않는 길이다. 좌군 적장을 내가 맡아서 처결할 테니, 퉁맹가란 놈은 네가 맡아서 처치해라!"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적의 좌군 부대장과 모사 퉁맹가가 일지 병마를 거느리고 풍우같이 달려와 우디거의 딸과 우군 부대장을 꾸짖는다.
"너는 어떠한 젊은 놈인데 지휘의 허락도 없이 감히 출전을 했으며, 우군 부대장은 무슨 까닭에 싸우지 아니하여 항명을 한 채 이적 행위를 했느냐? 나는 지위의 엄명을 받들어 너희들을 수죄하러 왔다!"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도 벌컥 노했다. 눈을 부릅떠 큰 소리로 퉁맹가를 꾸짖는다.
"내 어찌 항명하여 싸우지 않았단 말이냐. 사람을 모함해도 분수가 있지 않은가. 아장을 선택하는 일은 부대장의 권한이다. 보아라. 내 아장이 칼이 끊어지도록 싸운 것을 보지 못하느냐? 모두가 퉁맹가 네놈의 모함이로구나!"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은 고함치며 퉁맹가한테로 철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우디거의
딸은 슬기로웠다. 부러진 장검을 휘두르며 남편을 도와 퉁맹가를 협공했다. 조선 측 절제사 이순몽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긴 칼을 뽑아 들고 오랑캐의 좌군 부대장의 앞으로 말을 달렸다. 박호문도 장창을 비껴들고 달려들었다. 오랑캐 좌군 부대장은 비록 날랜 장수라 하나 한 몸으로 이순몽과 박호문의 예봉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교봉 사십여 합에 기진맥진이 되었다. 이순몽의 후려치는 칼이 번뜻하면서 호장의 머리는 구슬픈 비명과 함께 말 아래로 떨어졌다. 조선 측 군사들의 고함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며, 전선으로 몰려 나와 적장의 머리를 거두어 본진으로 돌아갔다. 우디거 딸 내외와 적이 되어 대결하던 퉁맹가는 원래 모사로서 무예가 출중하지 못했다. 한 몸으로 두 사람의 협공을 당하여 칼 쓰는 수단이 황당하던 중에, 옆에서 동행했던 좌군 부대장의 목이 떨어지는 꼴을 보자 손과 발이 떨렸다. 급히 예봉을 피하여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달아나려 할 때, 우디거 사위 우군 부대장이 철퇴를 높이 들어 퉁맹가의 머리골을 후려쳐 갈겼다. "반적아!" 소리를 한마디 크게 지르고 퉁맹가는 마하에 떨어져 죽었다.
"빨리 우디거로 달아나 목숨을 구해라!"
박호문이 우디거 딸 내외를 향하여 소리쳤다. 우디거 딸과 사위는 말을 채질해 달렸다. 오랑캐 군사들은 두 장수가 패해 달아나는 줄 알았다. 눈덩이 뭉그려지듯 했다. 우디거로 달아나는 두 장수의 뒤를 쫓았다. 조선 군사들은 고함을 치며 홍수 밀리듯 건주위 본영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도절제사 최윤덕의 만여 명 군사는 대완구를 터뜨리며 뒤를 이었다. 본영 안에서 전과를 기다리던 이만주는 천지가 진동하는 대완구 소리에 깜짝 놀랐다. 측근 장교를 불렀다.
"웬일이냐, 천지를 진동하는 저 포성 소리가?"
"조선군이 대완구를 몰고 쳐들어옵니다!"
"무어야? 대완구를 터뜨리고 들어 온다? 우리 군사들은 어찌 되었느냐?"
"패해서 달아났습니다."
"어디로 달아났단 말이냐?"
"북문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우군 부대장과 아장이 쫓겨 달아나니, 군사들은 눈사태가 난 듯 뭉그러져 달아났습니다."
"퉁맹가와 좌군 부대장은 어찌 되었느냐?"
"전사를 했나봅니다. 모습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이만주는 수각이 황란했다. 급히 벽상에 걸린 장검을 떼어 들었다.
"친위군에 출동명령을 내려라!"
측근 장교는 달음질쳤다. 본영 안의 3천 병마는 명을 받았다. 이만주는 적토마 위에 높이 올랐다. 친위군을 향하여 호령한다.
"너희들은 건주위의 가장 날랜 정예부대다. 건주위의 흥망이 너희들 손에 달려 있다. 나와 함께 나가 조선군을 막아내자!"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소리치며 뒤를 따랐다. 이만주는 적토마를 달려 친위군을 지휘하여 앞으로 달려나갔다. 조선군이 쏘아대는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고, 대완구가 이곳저곳에서 천지를 뒤흔들며 불을 뿜었다. 이만주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토마를 달리는데, 두 사람의 대장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순몽과 박호문이었다. 박호문이 여진 말로 크게 소리쳐 꾸짖는다.
"배은망덕하는 건주위 이만주야, 목을 늘여 왕군의 부월을 받으라! 성토하는 글월을 네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합지졸을 몰아 대항하는 태세를 취하니 천주를 면치 못하리라!"
이만주는 박호문을 대하니 더한층 마음이 산란했다. 모든 정세를 파악해서 강변 호장을 귀화시키고, 납치해 있는 조선 사람들까지 뺏어 돌아간 박특사였다. 전쟁터에서 마주 대해보니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러나 허장성세로 박호문을 꾸짖는다.
"누가 배은망덕을 했는지 모르겠다. 여연을 침범하는 우디거를 쫓아내고 잡혀간 조선 사람을 뺏어서 돌려보냈다고 곡식과 돼지와 소를 주어 치하하던 그대가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공격하니 응전하지 아니할 도리가 있는가. 두말 말고 박특사는 내 칼을 받으라."
박호문은 눈을 부릅떠 호통한다.
"네 이놈, 무수하게 국경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해놓고 죄상을 우디거에게 전가시키는 간사한 수법이 가증하다! 너 같은 놈은 천벌을 받아야 한다!"
박호문은 장창을 들어 이만주를 찔렀다. 이만주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박호문의 예봉을 피하려 했다. 이때 이순몽이 쌍철퇴를 휘둘러 이만주의 투구 꼭지를 후려쳐 갈겼다. 이만주는 혼비백산이 되었다. 황겁결에 목이 떨어져 나간 줄 알았다. 급히 말을 달려 본영을 향하여 달아나면서, 뒤에 따라오는 젊은 아장에게 묻는다.
"내 목이 붙어 있느냐?"
혀끝이 굳어져서 말소리조차 어눌했다. 땀이 비 오듯 전신에 쏟아져 흘렀다. 아장은 황겁한 중이건만,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목이 떨어지셨으면 어떻게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목은 붙어 있고 투구 꼭지만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만주는 비로소 마음이 약간 진정되었다. 진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는 모가지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목이 완연히 붙어 있었다. 이만주는 그제서야 한숨을 길게 쉬었다. 급히 본영 땅굴 속으로 몸을 피했다. 한편 이만주의 친위군 3천여 명은 조선진의 대완구와 화살에 맞아 죽고 상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박호문, 이순몽, 최윤덕의 대부대는 세 길로 나뉘어 건주위 본영으로 각일각 육박해 들어갔다. 전구위 3천 병마는 이미 반수 이상이 꺾어져 버리고 말았다. 본영 부대는 마침내 전투능력을 상실해버렸다. 군사들은 창과 칼과 활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난다. 세 길로 나뉘어 쳐들어간 조선군은 완전히 본영을 장악했다. 박호문이 지난 겨울에 특사가 되어 이만주와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돌로 쌓아 올린 궁실이었다. 한편 중군 이외에 좌군절제사 최해산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부추장의 마을 거여로 진출하고, 우군절제사 이각은 군사 1천7백여 명을 거느리고 마천 촌락을 응징하고, 조전절제사 이징석은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올라로 육박해 들어가고, 김효성은 군사 1천8백여 명을 거느리고 임카라의 이만주 어미와 아비가 있는 곳을 돌격하고, 홍사석은 군사 1천1백여 명을 인솔하고 팔리수로 향하고, 도절제사 최윤덕은 건주위 본영에서 다시 군마를 정돈하여 건주위의 최고 정예부대가 진 치고 있는 임카라를 점령했다. 오랑캐 부대들은 우리 군사가 가는 곳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과 같았다. 흩어지고 달아났다. 최윤덕 장군은 완전히 넓고 험준한 오랑캐의 수도 건주위 일대를 자리 말듯 소탕했다. 이때 생금한 남녀가 236명이요, 목 베어 죽은 자가 170명이요, 말과 소 170필을 얻고, 우리 군사의 전사한 사람은 겨우 네 명이요, 살에 맞아 상한 자가 20명이었다. 싸움은 전광석화와 질풍신뢰같이 신속했다. 대군은 지방의 부락을 평정한 후에 건주위 이만주가 있는 본영으로 총집결이 되었다. 한편 패잔병의 일지병마와 함께 땅굴 속으로 피신해서 하룻밤을 지낸 건주위의 총수 이만주는 각처에 흩어져 있는 추장들이 군사를 거느려 구원해 들어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득히 소식이 감감하다. 이만주는 굴속에서 초조했다. 아장들에게 급히 명령을 내린다.
"각처의 추장들은 본영이 함락된 것을 알면 반드시 구원병을 보낼 텐데 감감하게 소식에 없으니 웬일이냐? 올라와 임카라와 거여의 추장들은 막막강병을 거느리고 있다. 밖에 아무런 동정도 없느냐?"
"아무런 동정도 없습니다. 건주위 소속의 오랑캐 군사라고는 그림자 하나 없습니다. 조선 편 군사들이 거리마다 동네마다 승전고를 올리며 길길이 뛰고 즐거워할 뿐이올시다."
"내가 거처하던 대본영 안에는 누구누구들이 거접하고 있느냐?"
"박호문, 이순몽, 최윤덕이 있다 했는데, 범같이 무섭다는 최윤덕은 또다시 수천 병마를 거느리고 출진을 한 모양인데, 어디로 갔는지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최윤덕이 또다시 출전을 했다? 이거 큰일났구나. 각처의 구원병이 오기는 틀린 노릇 아니냐? 이것 큰 탈이다. 나는 꼭 죽었구나!"
이만주의 얼굴 빛이 해쓱하게 핏기를 잃었다. 발을 동동 굴러 탄식했다. 한숨짓는 소리가 땅이 꺼질 듯했다. 한숨짓는 소리가 땅이 꺼질 듯했다. 아장들은 딱했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한 자가 말을 꺼낸다.
"저희 아장들이 땅굴 밖으로 뛰쳐나가서 각처의 동정을 살피면서 구원병을 청해 가지고 오겠습니다."
"나가다가 잡혀 죽으면 어찌하느냐?"
"조선 군사들은, 죄 없는 백성들은 절대로 잡아 죽이지 아니합니다. 무기를 버린 후에 땅굴 뒷문으로 변장을 하고 나가면 관계치 않을 듯합니다."
"어떻게 변장을 하려느냐? 너희들마저 다 나가고 나 혼자 남았다가 죽으면 어찌하느냐!"
이만주는 초조했다.
"시위하는 군사들이 있으니 잠시만 참으십시오. 저희들은 거지 복색을 하고 땅굴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가 곧 정세를 살피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무려나 해라!"
이만주는 또다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오랑캐 아장 세 사람은 군복을 벗고 무기를 버린 후에 누더기 옷을 입고 얼굴에 숯검정을 칠했다. 바가지 쪽을 들고 막대를 짚어 절름거리면서 한 사람 두 사람 굴문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본영을 점령하고 있는 조선 군사들은, 병졸 아닌 백성들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취했다. 더구나 병신 거지들이었다. 관심을 갖지 아니했다. 변장한 아장들은 비렁뱅이 거지의 행동으로 제각기 자방 추장들이 있는 부락을 살폈다. 가는 곳마다 아비규환의 초토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조선 군사들이 흰옷 입은 모습으로 승전고를 울리고 있었다. 환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거지 복색을 한 아장들은 맥이 탁 풀렸다. 제각기 굴 속으로 몰려 들어가 이만주에게 복명을 했다.
"큰일 났습니다. 건주위 전 지역이 함락되었습니다. 구원병이 들어오기를 바랐던 일루의 희망이 다 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락마다 조선 군사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아장들의 복명을 듣자 이만주는 금방 동풍이 될 듯했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썼다. 입술이 굳었다.
"본영으로 쳐들어온 병력 이외에 또 다른 조선 부대가 있었구나!"
"말도 마십쇼. 지금 이곳 본영을 함락한 군사들은 중군이올시다. 좌군 수천 명은 거여를 점령했고, 우군 수천 명은 마천을 접수하고, 유격부대는 삼로로 돌진해서 올라와 팔리수와 임카라를 함락했습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구원병이 올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과연 기막힌 일이올시다. 사면천지에 들리는 소리는 모두 다 조선 군사들의 승전고를 울리는 북소리와 노랫소리뿐이올시다."
"고성낙일에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이만주는 큰 소리로 탄식하는 한 마디를 부르짖자, 별안간 목구멍에서 붉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했다. 이장들은 황급했다. 급히 이만주를 침상에 뉘어놓고 손과 팔을 문질러 안정을 시켰다. 한편 조선진에서는 건주위 일대의 소굴을 평정한 후에 거리거리마다 방을 높이 붙였다.
'이번에 왕군이 건주위에 출사한 일은, 이만주가 배은망덕하고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노략질한 죄상을 응징할 뿐 아니라, 그 허물을 우디거에게 전가시킨 악락한 행동을 벌죄하려 한 것이다. 추호도 양민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아니할 것이다. 전일과 같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그리고 이만주는 당연히 체천행도하는 왕군의 천주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왕도정치는 관용으로 근본을 삼는다. 이만주가 성심성의로 옛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할 것을 다짐 두어 항복한다면 특사를 내려 목숨을 살려주고 옛 영토를 지키게 하리라.'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의 이름으로, 고유문은 거리와 동네마다 곳곳에 붙여졌다. 건주위 백성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산으로 피란 갔던 사람들이 집을 찾아 쏟아져 내려왔다. 이 소식은 이만주와 아장들이 엎드려 있는 땅굴 속에도 전해졌다. 아장 한 자가 거직 복색으로 밖에 나가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만면에 웃음빛을 띠고 보했다.
"장군님, 마음을 놓으십시오. 인제 우리들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던 이만주의 귀가 번쩍 했다.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어야, 살아나게 되었어?"
"최윤덕 장군이 거리마다 높이 방을 붙였습니다. 개과천선을 해서 다시는 노략직하지 않을 것을 다짐 두고 군문에 나와 항복을 한다면 목숨을 살려준다 했습니다!"
"되었소! 장군, 나가서 항복을 하십시다."
모든 아장들의 얼굴 생기가 돌았다. 이만주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다. 원래 이만주는 의심이 많은 자였다. 항복을 하면 살려준다고 방이 붙었다는 아장의 말을 듣자, 반신반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굴속에 피신을 하고 나타나지 아니하니, 최윤덕이 유인책으로 항복하면 죽이지 않는다고 방을 붙인 것이 아닌가?"
"천만에, 당치 않은 말씀이올시다. 조선 국왕 전하의 명령으로 왕도정치를 실행하는 도원수 최윤덕이 속임수로 거짓말을 할 리가 있습니까. 마음 놓고 항복하십시오."
여러 아장들도 일제히 권한다.
"건주위 전 지역을 자리 말듯 한 조선 군사가, 우리가 숨어 있는 이 땅굴을 찾아내기란 여반장의 일이올시다. 그들은 향도를 대동하고 있습니다. 건주위의 지세와 요해처를 손살피같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진정 장군을 잡으려면 벌써 이 땅굴 속으로 쳐들어왔을 것입니다. 자진해서 항복을 하라고 방을 붙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좌우 아장들의 우겨대는 말을 듣자 이만주는 비로소 항복할 것을 결정했다. 먼저 아장 한 사람을 사자고 해서, 백기를 등에 꽂고 본영으로 들어가 이만주가 친히 나와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최윤덕 장군은 죽이지 아니하고 항복을 받는 일을 쾌하게 허락했다. 기라 별같이 모인 장성들은 최윤덕 도원수를 중심으로 하여 금부은월이 햇빛에 번쩍이는 앞에 군용을 정제하고 오랑캐 괴수 이만주의 항복을 받을 채비를 하였다. 이윽고 땅굴 속의 이만주는 무기를 다 버린 채 아장 오륙 명과 함께 발가벗은 나체에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조선군 대본영으로 나와 고두백배를 드리며 항복하는 의식을 가졌다. 최윤덕 장군은 호피 교의에 갑옷 입고 높이 앉아 모든 장성과 함께 항복을 받았다. 이만주의 항복을 올리는 고두백배가 끝나자 최윤덕 장군은 큰 소리로 훈계를 내린다.
"네가 이번에는 진심으로 항복을 하느냐? 지난해 퉁맹가를 보내서 노략질한 허물을 우디거에게 전가한 따위의 간특한 항복은 아니냐?"
이만주는 벌벌 떨며 대답한다.
"그저 지난번에는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리석은 소견에 장군의 위엄이 두려워 그리 한 짓이올시다. 그저 목숨을 살려주시옵소서. 다시는 변경을 침범하지 아니합니다. 진심으로 항복합니다."
이만주는 울면서 애걸했다.
"상왕 전하의 자애로운 성의를 받들어 너의 항복을 받고 특별히 목숨을 살려두는 것이니, 명심해서 충성을 다하라!"
"왕은을 길이길이 가슴 속에 지녀 충성을 다하오리다."
이만주는 다시 머리를 조아려 백 번 천 번, 아장들과 함께 절을 올렸다. 최윤덕 장군은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분부한다.
"이제 왕사는 너의 항복을 받았다. 너의 본영을 돌려주기로 한다. 전과 같이 이곳에 거처해서 백성들을 잘 애무하고 절대로 도둑의 마음을 먹지 말라!"
말을 마치자 최윤덕 장군은 대군을 휘동하여 개선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전군에 내렸다.
대군 개선
최윤덕 장군은 날짜를 천연하지 아니하고 건주위 이만주의 본궁을 선뜻 내준 후에 대군을 휘동하여 승전고를 기세 좋게 올리며 개선의 길에 오르니, 기치창검은 백 리에 뻗쳤고, 호탕한 기상은 호지의 천지를 뒤흔들었다. 오랑캐 백성 남녀노소들은 위풍이 늠름한 최윤덕 장군의 정제한 군용을 거리거리마다 바라보자 찬탄하는 소리가 높았다.
"조선 군사들의 군용은 정제도 하려니와, 정쟁 중에도 우리들 백성들에게는 털끝만큼도 해를 끼치지 아니했으니, 과연 의로운 왕군의 태도다!"
"조선 국왕 전하의 어진 덕을 받들어 응징하러 온 최윤덕 장군이니, 우리들 서민에게 해와 누를 끼칠 리가 있는가? 과연 훌륭한 군사들이다."
"이만주가 배은망덕을 해서 공연히 여연과 강계로 자주 넘나들어서 조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게 했으니, 참다 못해서 응징하는 군사가 나와서 버릇을 톡톡히 가르친 것이 아닌가? 이만주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일세!"
"글쎄, 해마다 적지 않은 곡식과 물화를 받아 먹으면서도 국경을 침범해서 불을 지르고 부녀를 약탈했으니, 그것도 크나큰 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그 죄상을 우디거한테 넘겨 씌우려고 얼굴에 먹칠을 해서 우디거 군사가 노략질을 한 것처럼 꾸며 논 후에 거짓 항복을 하는 체했으니, 그 일이 어찌 탄로 나지 않겠나. 그따위 얕은꾀를 낸 얼간 망둥이 퉁맹가란 놈을 발기발기 찢어 죽여야 하네. 그놈 때문에 우리들 죄 없는 백성들은 공연히 피란을 가서 숱한 고생들을 하지 않았나. 퉁맹가란 놈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백성들은 그놈을 먼저 잡아 죽여야 하네. 또다시 못된 술책을 써서 우리를 괴롭게 한다면 큰일일세!"
"그러지 아니해도 퉁맹가란 놈은 전쟁터에서 죽었다네!"
"무어, 퉁맹가가 전사를 했다? 그놈 그야말로 천주를 받았네그려!"
"죽어도 조선편 군사한테 죽지 아니하고, 우디거로 패해 달아난 우군 부대장의 손에 죽었다네!"
"웬일야?"
"우군 부대장이 이틀씩이나 조선 측과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아니하니, 이만주는 의심이 덜컥 나서 퉁맹가를 보내서 독전을 한 모양일세. 우군 부대장은 퉁맹가한테 더디 싸웠다고 반적 소리를 들으니 어째 부아가 나지 않겠나. 퉁맹가의 목을 한칼에 베어 떨어뜨리고 이천 병마를 이끌어 우디거로 달아났다네."
"아아, 그랬구나. 그래서 이만주는 게도 구럭도 다 잃은 채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결딴이 나버렸네그려!"
건주위 서민들은 근감스럽게 개선하는 최윤덕 장군의 행군을 바라보면서 뉘우치고 탄식하는 전후담이 난만했다. 오월 단오가 훨씬 넘어선 따뜻하고 화창한 초여름 날씨였다. 칼을 압록강 푸른 물결에 씻고 청천강 맑은 물에 전진을 털어버린 이만여 명의 개선병들은 호방한 기상으로 승전고 큰북을 울리며 개가를 높이 불러 안주 도절제사 병영으로 들어가 평화로운 속에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최윤덕은 개선병을 안주 병영과 여연, 강계에 분군하여 주둔시킨 후에 곧 장계를 써서 상호군 박호문을 특사로 하여 어전에 올리게 했다. 박호문은 한양 천 리로 말을 달려 정원에 장계를 바쳤다. 정원에서는 건주위를 소탕한 장계를 어전에 바쳤다. 전하는 친히 장계를 뜯어 보셨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은 돈수재배하옵고 삼가 장계를 탑전에 올리옵니다. 성상의 높으신 덕화와 크나큰 복력으로 오랑캐 건주위의 소굴을 소탕하여 이만주의 항복을 받고, 대군은 개선해 돌아와서 안주 병영과 강계, 여연에 분군시키고 다시 분부를 기다립니다. 추장 이만주는 당연히 참할 것이오나, 호생지덕을 베푸시는 전하의 뜻을 받들어 후일을 경계하고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이번 싸움에 생금한 자가 236명이요, 참수한 자가 170명이요, 마소 170여 필을 얻었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전사자가 겨우 4인이옵고, 활에 맞은 자가 20명뿐이올시다. 불행 중 다행이옵고,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신가 합니다. 자세한 말씀은 상호군 박호문에게 하문하옵소서. 이만 아뢰옵니다."
전하는 크게 기뻤다. 승지에게 분부했다.
"국가의 큰 경사다. 상호군 박호문에게 입시를 명해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고 정원에 대기하고 있는 박호문에게 분부를 전했다. 박호문은 승지의 인도를 받아 어전에 곡배를 드리고 부복했다. 전하는 용안에 화사한 웃음을 띠고 찬양하는 말씀을 내린다.
"도절제사 최윤덕의 공도 크다마는, 상호군 너의 공도 작다 할 수 없구나! 지난번에는 강변 호장을 귀화시켜서 이번 싸움에 향도가 되게 하고, 또다시 우디거의 딸과 사위를 회유해서 내응이 되게 했으니 너의 슬기가 가상하다. 필연코 이번 싸움에도 많은 지혜를 짜냈으리라."
"황공만만하오이다. 작은 지혜를 무슨 슬기라 하오리까. 다만 우디거 딸과 사위를 회유해서 모사 퉁맹가를 죽이게 하고, 우디거로 패해 달아나는 행동을 취해서 왕사의 응징을 수월케 했을 뿐이올시다. 황공만만하오이다."
"도절제사의 중간 징계로 너의 행장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국가를 위하여 더욱 주석의 힘을 다하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옆에 시립한 내관에게 분부했다.
"박호문에게 별전에 사찬을 내려 수고한 공로를 위로하라!"
박호문은 황공 감격하여 몸 둘 곳을 몰랐다. 숙배를 드려 사은을 올린 후에 내관의 인도로 별전에서 어사주와 사찬을 받는 영광을 입었다. 이튿날 세종전하는 종묘에 친히 배알하여 파저강 야인을 진압한 대첩봉고제를 올리고, 환궁한 후에 근정전에 출어하여 왕세자와 문무백관들의 대첩을 축하하는 하례를 받고, 곧 교를 내려 만백성들에게 야인 평정한 일을 포고했다. 한편 최윤덕은 박호문의 편에 장계를 올려 야인 평정의 정황을 주달한 후에, 한양 본영에서 출전했던 군사들을 거느리고 개선의 길에 올랐다. 연도 수천 리의 개선장병을 환영하는 인파의 환호성은, 이종무가 대마도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의 환호성과 방불했다. 전하는 궁중에 알현 들어온 최윤덕 이하 모든 장성들을 편전 분합밖까지 나가 맞이했다. 만면에 화려한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국경을 튼튼히 하고 도탄에 빠진 서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만리 이역에 깊숙이 들어가 개선을 올리고 돌아온 경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최윤덕 이하 모든 장성들은 일제히 곡배를 드려 사은한 후에 최윤덕이 대표하여 아뢴다.
"소신들의 출정은 국가의 간성으로 당연히 할 일을 수행한 것뿐이옵니다. 성덕이 높으시와 오랑캐들이 굴복했으니,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시옵니다."
전하는 곧 승지에게 분부를 내려 대신들을 회동시키고, 선위연하는 잔치를 근정전 안에서 열라 했다. 세자를 위시하여 만조백관들이 근정전으로 모여들었다. 수파련을 꽂아놓은 화려한 사찬상이 외상으로 한 상항 상씩 질서정연하게 들어왔다. 세종전하는 시측해 있는 왕세자에게 분부를 내린다.
"국경을 평안케 하고 국가의 위세를 이적들에게 보여 큰 공을 세운 최윤덕 장군에게 네가 친히 술을 한 잔 따라 권하라!"
전무후무한 파격의 은총이었다. 최윤덕은 황공 감격하여 몸둘 곳을 몰랐다. 세자는 부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최윤덕의 앞으로 나가 옥잔에 천일주를 가득 부었다. 최윤덕은 감히 앉아서 술잔을 받을 수 없었다. 일어나 재배하고 서서 술잔을 받는다. 세종전하는 이 모양을 바라보시자,
"앉아서 술을 받으라!"
최윤덕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최윤덕은 감히 앉을 수 없었다.
"사양 말고 앉아서 받으라. 세자의 팔이 괴로울 것이다!"
최윤덕은 하는 수 없었다. 꿇어앉아서 술잔을 받았다. 전하가 신하를 사랑하는 지극한 정리는 이같이 두터웠다. 술이 서너 순배 돈 후에 전하는 친히 한 잔 술을 최윤덕에게 더 권하시고 말씀을 내린다.
"국태민안한 이 좋은 날, 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내 먼저 춤을 출 테니 경들도 따라서 춤을 추자!"
전하는 옥좌에서 일어나 용포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최윤덕 이하 만조백관들도 전하의 춤에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초여름 신록이 우거진 경복궁 대궐 안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태평세월을 구가하는 화기 가득 찬 춤이 절정에 올랐다. 다음날 세종전하는 병조판서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이번 야인을 응징하러 부정한 군사 중에 전사한 자가 극히 적어 천만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국가의 간성이 되어 전몰한 장병의 외로운 혼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성대하게 초혼제를 지내서 충혼을 위로하라.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찾아서 평생에 의식 걱정이 없도록 시량을 대어주라. 다음 이십 명의 상한 군사에 대하여는 극진한 치료를 베풀어 완인이 되게 하라."
병조판서는 지체없이 어명을 받들었다. 병영 안의 장졸이 도열한 속에서 초혼제를 성대하게 지내는 한편, 전몰한 병졸의 가족을 찾아 구휼하는 은전을 배풀고, 평안감사에게 어명을 전해서 살에 맞아 상한 군사들을 유감없이 치료케 했다. 전하는 밤이 깊건만 침소에 들지 아니했다. 승지를 불러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병조판서 조말생을 명소했다. 대신들은 어명을 받고 급히 모여들었다.
"깊은 밤에 경들을 불러서 미안하다. 파저강 야인을 평정한 장성들에게 논공행상을 해야 할 것이다. 나의 독단으로 처결하기 어려워 경들과 의논하려 한 것이다. 경들은 나의 의향을 듣고 불가한 점이 있거든 말하라."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전하께서는 영명하십니다. 뜻하신 대로 처리하옵소서."
세종전하는 껄껄 웃으시고 대답한다.
"국가는 만백성의 국가요, 임금 혼자의 국가가 아니다. 나라의 임금 된 자는 다만 만백성을 대신해서 심부름을 할 따름이다. 그리고 경들은 과인을 보필하는 재상이다. 내 어찌 독재를 하랴. 백성들 대신해서 처리하는 일이 민의에 어긋난다면 큰일이다. 나의 의견을 듣고 혹시나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영의정 황희 이하 모든 대신들은 전하의 투철한 말씀에 얼굴빛에 모두 다 엄숙해졌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그러면 과인은 경들에게 의견을 물으리라."
"하교를 내리시옵소서."
이번엔 도승지 김종서가 아뢴다. 전하는 미소를 띠고 만좌를 둘러보며 말씀한다.
"최윤덕으로 우의정을 삼으려 한다.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모두들 얼굴에 당황한 빛을 띠었다. 얼른 대답들을 못 한다. 세종전하는 여전히 미소를 풍긴 채 대신들을 향하여 말씀한다.
"경들이 얼른 찬성하지 아니할 줄 알았다. 그러기에 과인은 경들에게 먼저 물은 것이 아닌가. 독재를 하기 싫다고___. 경들은 최윤덕이 무인이라 해서 얼른 대답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라가 어려울 때는 호반도 정승이 되어서 국가 대사에 참획해야 한다! 그러나 경들이 정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보류하기로 하리라."
대신들은 반대할 도리가 없었다. 일제히, "좋습니다." 했다. 전하의 어인하는 수단은 이같이 높았다. 이튿날 전하는 세자를 위시하여 정승과 판서들을 정전에 모이게 하고 개선 장성들의 논공행상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전하가 어느 때나 공식 의식에 세자를 참석케 하는 것은, 장차 앞으로 세자가 왕위에 나가서 정사를 보살필 때 훌륭한 정치를 하도록 교양을 쌓게 하자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에서이기도 했다. 최윤덕 이하 모든 출정했던 장성들은 숙배를 드린 후에 어전에 시립했다. 전하는 내관에게 분부한다.
"최윤덕 장군 이하 개선 공신에게, 상의원에서 가져온 옷 한 벌씩을 전하라."
내관은 명을 받자 최장군 이하 모든 공신에게 주단으로 지은 어사의를 한 벌씩 내렸다. 융숭한 대우요, 지극한 영광이었다. 최윤덕 이하 모든 출정공신들은 사은을 드린 후에 차례차례 어사의를 받았다. 도승지 김종서는 어명에 의해서 논공행상하는 승직을 반포했다.
"최윤덕을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한다."
호반으로 정승의 대배를 받는 일은 극시 드문 일이었다. 전하가 충신들의 의견을 들어 결정한 일이다. 최윤덕 한 몸의 영광일 뿐이 아니었다. 국가의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우대하는 전하의 깊은 뜻에 신하들은 모두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윤덕은 다시 사은숙배를 올리고 교지를 받들었다. 김종서는 계속해서 어명을 전달한다.
"중군절제사 이순몽을 판중추원사에, 조전절제사 이징석을 중추원사, 홍사석을 중추원부사로 임명한다. 평안도 관찰사 박안신을 공조우참판에, 상호군 박호문을 통훈대부 봉상시윤으로 삼는다. 최치운을 통훈대부 지승문원사로 승진하고, 최숙손, 최숙정에게 절충사호군의 가자를 내린다."
모든 공신들은 일제히 절을 올리고 교지를 받들었다. 논공행상의 의식이 끝난 후에 전하는 편전에 임어하여,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새로 임명된 우의정 최윤덕, 도승지 김종서를 명소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제 서북 일대에 준동하던 야인들을 응징했으니, 행정하는 구역을 확실하게 정해서 자성, 무창, 여연, 우예의 네 고을을 설치하고, 변지의 백성들이 마음놓고 농사에 편안히 종사하도록 하는 안보의 방침을 확립하라."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오랑캐들은 비록 기세가 꺾였다 하나, 기운을 소복하는 날 또다시 못된 짓을 하기 십상팔구올시다. 유능한 장수로 사군을 통솔케하고 튼튼하게 성을 쌓아서 다시 불우의 변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영의정의 의견은 과인이 생각한 바와 같다. 건주위 이만주의 소굴을 평정했다 해서 안심하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황폐했던 그 지방을 복구하려면, 먼저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짓고 가축을 잘 길러서 안심하고 거주케 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방책을 강구하라."
새로 우의정에 임명된 최윤덕이 아뢴다.
"국가의 일이나 사가의 일이나 교만하고 안일하면 반드시 화가 미치는 법이올시다. 이제 야인을 응징해서 굴복시켰다고 방심을 해서 버려둔다면 해가 도리어 열 배나 클 것입니다. 먼저 궁정과 백성들의 환심을 사야 할 것입니다. 파저강에 종군했던 향리와 공사천인들을 모조리 양민이 되게 면천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농사짓는 백성과 목축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체 호포와 결전을 받지 아니해야 합니다. 그러하고 축성하는 백성들에게는 그냥 부역을 시키지 말고 반드시 노력한 대전을 주도록 하십시오. 또 수자리하는 군사들의 가족들에게는 후한 요차를 주어서 후고의 염려가 없도록 하시옵소서."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좋은 말이다!"
옆에 시측했던 도승지 김종서가 아뢴다.
"이러한 모든 일을 수행하려면 만백성이 존경하고 숭배할 수 있는, 청렴결백하고 통솔력이 있는 사람이 사군을 요리해야 합니다. 먼저 인재가 필요합니다."
전하는 미연히 웃으며 대답한다.
"도승지의 말이 옳다. 과인 역시 그리 생각한다. 첫째로 서북면 일대에서 고생하는 백성들은 지도하는 그 사람을 믿어서 의지해야 하고, 변지 밖에 있는 오랑캐 무리가 두려워하는 인물이라야 능히 정토한 후의 야인의 부동을 진정시킬 것이다. 우의정 최윤덕은 수고스럽지만 다시 한번 서북면을 관장해 다스리라."
영의정 황희 이하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찬성하는 뜻을 표한다.
"명철하신 분부올시다. 다시 더 누구를 몰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받는다.
"과인이 최윤덕으로 우의정을 삼은 뜻은, 국가의 중대한 이 일을 위임하려 한 것이다. 경은 사양하지 말라!"
세종전하는 최윤덕을 향하여 은근한 분부를 내린다. 최윤덕이 국궁하고 아뢴다.
"하잘것없는 신에게 다시 중책을 맡기시니 어찌 감히 사양하오리까. 힘을 다하여 변지의 백성들을 평안케 하겠습니다."
전하는 도승지 김종서에게 다시 분부한다.
"최윤덕은 이제 정승인 대신이다. 대신에게 도절제사의 직명을 주어서는 아니 된다. 평안도 도안무찰리사의 명칭을 주라."
도승지 김종서는 명을 받들었다. 이윽고 정원에서 승지가 교지를 써서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친히 보신 후에 우의정 최윤덕에게 교지를 내렸다. 최윤덕은 두 번 절하고 도안무찰리사의 교지를 받들었다.
"힘을 다하여 변방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전하의 용안에 믿음직한 미소가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