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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8-2

궁녀 해방(宮女解放)

 

심온의 일로 인하여 폐비 논란이 일어났던 일도 이제는 옛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세종전하는 왕비와 삼빈을 거느리고 화락한 왕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전하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아버님 상왕이 계신 수강궁에 나가 문안을 드리고 조반을 자신 후에는 신하들의 입대를 받은 후에 국정을 살폈다. 밤에는 삼빈을 번갈아 대하면서 화락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이지 날이 몹시 가물었다. 정월서부터 농촌의 '보릿고개'라고 하는 오월이 되도록 눈도 한 번 아니 오고 비도 아니 왔다. 서울 안뿐이 아니었다. 팔도강산이 다 그러했다. 서울 근교를 위시하여 지방에서는 논틀 밭틀에 먼지가 펄썩펄썩 일었다. 봇물은 끊어지고 저수지에도 물이 말랐다. 백성들은 못자리를 못 하겠다고 울상이었다.

전하는 각읍 수령들이 올리는 장계를 받았다. 전하는 승지를 불러서 호판과 이판에게 긴급명령을 내렸다. 각읍 수령에게 지령을 내려서 논두렁마다 우물을 파게 하고 물고를 터서 모판을 앉힌 후에 하지 전에 우선 호미모라도 심으라 했다. 전하는 친히 후원에 나가 기우제까지 지냈다. 그러나 비는 여전히 오지 아니했다. 해는 쨍쨍하게 눈이 부시도록 날마다 푸른 하늘 한복판에 높이 떠올랐다. 마치 젊은 세종임금의 애타하는 모습을 비웃는 듯했다. 젊은 세종은 나라의 농사 형편과 서민들이 굶주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죄어서 밤에 잠이 오지 아니했다. 아침마다 일관을 불렀다.

"비는 언제쯤 오겠느냐?"

"글쎄올시다. 아직 같아서는 비 올 가망이 망연합니다. 황공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답은 날마다 신통치 아니했다.

"옛사람은 바람도 일으키고 비도 오게 해서 호풍환우도 했다 하는데 그래 그런 재주도 없단 말이냐?"

젊은 세종은 초조했다.

"그런 말은 다 야사나 패설에서 나온 이야기옵지, 현실로는 불가능한 일이올시다. 탕 임금 시대에도 칠년대한이 있었다 합니다. 그저 하늘 뜻이 돌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이란 말이냐? 이 가엾은 백성들을 장차 어찌한단 말이냐!"

"그저 진인사대천명이올시다. 나라 안에 원통해하는 모든 원기를 사라지게 하시고, 지성으로 하늘을 감동케 하옵소서."

세종은 일관을 탓하고 꾸짖을 수도 없었다. 또다시 비원에 올라 진종일 기우제를 지내고 팔도에 영을 내려 모판을 마르지 않도록 하라고 분별했다. 전선에게 영을 내려서 수라상에 반찬을 줄여서 감선을 하고, 옥문을 크게 열어서 사람을 죽였거나 패륜한 극악한 죄수 이외에는 모두 다 백방을 시키라 했다. 세종임금의 지성스런 소식을 들은 팔도의 백성들은 밤을 도와 우물을 파고 용두레질을 해서 모판에 물을 부었다. 팔도 감사와 육십여 고을의 수령들은 대왕의 본을 떠서 백성들과 함께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나 가뭄은 여전히 해소되지 아니했다. 다시 한 달이 지나도 비는 오지 아니했다. 세종전하는 용안이 초췌하게 되었다. 마치 당신이 정치를 잘못해서 이러한 가뭄이 계속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구름이 끼었나 하고 뜰에 내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이 이슥하면 단신으로 후원을 거닐며 별빛이 구름장에 가리지 아니했나 하고 천기를 살피기도 했다.

하루는 저녁 수라를 마친 후에 농사에 대한 서적을 밤 깊도록 뒤적거리다가 홀로 후원에 내려 별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은 깊어서 이미 삼경이 지났다. 대궐 안에는 퇴등령이 내려 전각과 누각은 어둠 속에 잠겨 있고 움직이던 사람들은 모두 다 잠 속에 들어서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하늘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황황한 빛을 뿜고 허허한 한복판에는 은한이 부옇게 가로질러 좁쌀 같은 별빛이 가물거렸다. 아직도 비는 올 가망이 없다. 세종전하는 한숨을 길게 쉬고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또 한 굽이 후원에 당도했다. 온 궁중이 등불을 꺼서 어둠 속에 잠겼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멀리서 은은히 한 점 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전하는 괴상한 일이다 생각했다. 불빛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희미하게 불빛이 비치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말단 나인들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전하는 괘씸하게 생각했다.

'퇴등령이 내렸는데 영을 무시하고 불을 켜고 있으니, 요망한 년이다.'

호통을 치려 했다. 걸음을 빨리 하여 걸었다. 가까이 가보니 불빛이 비치는 곳은 한 곳뿐이 아니다. 또 한 채 나인의 처소에도 불빛이 송림 사이로 은은히 비쳤다. 전하는 이제는 노여움보다도 호기심이 움직였다.

'무슨 까닭에 자지 않고 불들을 켜고 있을까?'

전하는 가만가만 걸었다. 발자취 소리를 얕게 했다. 먼저 불빛을 찾아낸 곳으로 가까이 갔다. 사람의 소리가 도란도란 들렸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전하는 귀를 의심했다. 다시 발길을 멈추고 조용히 들었다. 한 사람의 음성은 앳된 여인의 목소리요, 한 사람의 말씨는 사나이의 목소리다. 전하는 깜짝 놀랐다. '해괴한 변이 생겼구나.' 생각했다. 어수가 부르르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입이 뻣뻣했다.

'지엄한 궁중 안에 이러한 변이 생길 수 있나!'

열화 같은 노한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쳤다.

'사내놈은 별감 놈이냐? 무감 놈이냐?'

와싹 창문을 발길로 박차고 들어가 보려 했다. 그러나 교양 높은 전하였다. 더구나 참는 공부를 해서 인의 철리를 실천궁행하려고 노력하는 전하였다. 꾹 참았다. 좀 더 동정을 살피리라 했다. 더 한 걸음 창 앞으로 다가서서 귀를 기울였다. 불빛은 창 앞에 우연히 비치는데 방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주고받는 목소리가 완연했다.

"밤이 깊었소이다. 자아, 이제 첫날밤 신방을 치릅시다."

사나이 목소리다.

"부끄러워 어찌하나, 불을 먼저 끄십시오."

애원성을 지닌 처녀 색시의 음성이다. 전하는 가슴이 죄었다. 다리가 다시 떨렸다. 방안에서는 또 목소리가 났다.

"불을 끄면 어떻게 옷을 벗기나, 껌껌해서."

"어림치고 벗기시구려!"

"첫날밤에 불을 끄고 옷을 벗기면 내외지간에 금슬이 좋지 않다는데."

전하의 가슴은 뜨끔했다. 바짝 창 앞으로 다가섰다. 문틈이 빠끔 벌어졌다. 눈을 창틈에 대고 숨을 죽여 들여다보았다. 뜻밖이었다. 방안에는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있는 줄 알았더니 단지 궁녀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맞은편에는 백지로 싸논 인두판 한 개를 벽에 기대 놓고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로 혼자 대화를 해서 신랑 신부의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 맥이 탁 풀렸다. 다리가 휘청했다. 불쌍하고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강하게 머리를 엄습했다.

'모두 다 내 죄로구나. 살피지 못한 탓이로구나!"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행여나 궁녀가 알세라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바로 곧 대전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멀지 아니한 또 한 곳에 송림 사이로 어른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저곳에도 과년한 처녀 궁녀가 궁중에 들어와서 꼼짝 못 하고 갇혀 있게 되니 회춘의 정이 간절해서 신방 놀이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침전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기왕 궁중 속이나마 민정을 살피는 길이니 더 한 번 보고 들어가리라 생각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걸어서 송림 사이로 들어섰다. 이곳에도 은은히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는 또다시,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는 시늉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솔바람 소리가 일어나는 곳에 청아한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 왔다. 여자의 구슬을 굴리는 듯한 우아하고 맑은 목소리다. 전하는 발길을 멈췄다. 다음에 남자의 목소리가 나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음성은 나타나지 아니했다. 전하는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시 발길을 옮겨서 창문 가까이 갔다. 전하는 귀를 기울였다. 여인의 아름답고 고운 목소리는 은방울을 굴리는 듯 끊어졌다 이어졌다 높고 낮은 음향을 내었다. 솔바람 소리가 간간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흐리게 했다. 역시 남자의 음성은 나타나지 아니했다. 전하는 비로소 당신이 지레짐작했구나 생각했다. '또 하나 다른 미정을 살필 기회가 왔구나!' 했다. 다시 발자취 소리를 죽이고 조심조심 창문 앞으로 갔다.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는 사람과 대화하는 이야기 소리도 아니요, 글 읽는 소리도 아니다. 노랫소리다. 전하는 바싹 귀를 창 앞에 댔다. 요요하게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듯 가만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름 우에 대님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어름 우에 대닙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 둔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기막힌 시다. 노래조로 높고 나게 길고 짧게 장단을 맞춰서 곱게 불렀다. 전하는 노래 사설을 언제 어디서인가 들어보았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출렁했다. 노랫소리는 또다시 일어났다.

'경경고침상에

어느 잠이 오리요

서창을 열어하니

도화 발하도다.

도화는 시름없이

소춘풍하나다.'

목소리는 더한층 애조를 띠었다. 전하의 마음도 애틋한 심사가 가득했다. 노랫소리는 계속된다.

'넋이라도 님을 한데 녀잇경 너기더니

넋이라도 님을 한데 녀잇경 너기더니

뉘러시니이까, 뉘러시니이까.'

'올하, 올하, 아련비홀하

여흘란 어데 두고

소에 자라온다

소 곧 얼면, 여흘도 좋으니

여흘도 좋으니.'

전하는 아름다운 사설에 명연히 넋을 잃었다. 다음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가시를 안아 누어

남산에 자리보아 옥산을 베어 누어

약든 가슴을 맞추옵사이다. 맞추옵사이다.

아소 님아, 원대평생에 여힐 줄 모르옵세.'

기막히도록 정염을 일으키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농도 높은 연정을 하소연하는 노래다. 전하는 고려 때부터 불러오던 '만전춘'이란 가사인 것을 깨달았다. 전하는 문틈으로 노래하는 궁인의 모습을 살폈다. 궁녀는 이십 가량 된 여자다. 베개를 껴안고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베개는 임이요, 임은 남자다. 베개가 대신 궁녀의 임이 된 것이다. 임 대신 베개를 껴안았다. 얼음 위에 댓잎으로 자리를 삼아 옥돌같이 추운 겨울밤, 얼어 죽을망정 뜨거운 포옹으로 정든 오늘 밤을 더디더디 새워 보자는 노래다.

외로운 베개 위에 눈은 반반,

잠은 아니 오고 시름만 가득하다.

벌떡 일어나 창문을 밀어 보니

도화는 활짝 피어 만발했다.

도화는 시름이 없어

봄바람에 한들한들 웃는구나.

육신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만

넋이라도 임을 한데 모시려 했더니,

한데 모시려 했더니,

누가 우리들의 기막힌 이 사랑을 뻐개 놓으셨나.

여인은 한이 깊어 비오리를 불러 보는 것이었다.

비오라 비오라 어여쁜 비오라

장류수로 소리쳐 흘러가는 여울물은 어디 두고

답답한 늪속에서만 자랐느냐.

늪이 얼거든, 소리쳐 흘러가는 자유스런 여울에서 놀려무나.

금수산 이불 속에 향기론 가시를 안아 뉘어 남산에 자리를 보아,

옥 같은 임을 베고 누워 향기로운 가슴을 맞추어 봅시다.

이리하여 길고 긴 원대평생에 헤어지지 맙시다. 헤어지지 맙시다.

사랑의 정열이 빙산도 녹일 듯한 작열된 노래다. 전하는 자신이 이 정열 속에 흽싸여 감겨지는 듯했다. 노여움보다도 가련하고 가엾은 정을 느꼈다. 꾸짖고 나무랄 수가 없었다. 임금인 당신이 무슨 큰 죄를 저지른 듯한 야릇한 느낌이 일어났다.조용히 창 앞에서 떨어져 발길을 돌렸다.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했다. 다리가 휘청휘청, 걸음이 가볍지 아니했다. 솔밭을 향해 걸었다. 서늘한 솔바람이 와스스 전하의 머리를 식혀 주었다. 새로운 정신이 전하의 선뜻해진 이맛전에 일어났다. 당신은 오늘 밤에 가뭄을 근심하여 천문을 살피러 후원으로 나온 것이다. 새삼 하늘의 별빛을 더 한 번 살펴야 할 생각이 났다. 머리를 들어 허허한 창공을 바라본다. 하늘엔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다. 북극성은 그대로 황황한 빛을 뿜는데, 북두칠성은 사경이 넘어서 자루가 앵돌아졌다. 은한은 연기 같은 빛을 뿜으며 수천 개 별이 여전히 깜박거린다.

'이 가뭄을 어찌하나!'

전하의 머리에는 다시 가뭄을 탄식하는 시름으로 가득 찼다.

'내가 임금이 된 후에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었다는 사람이 이 나라에 있어서는 아니 된다!'

'어찌하면 비를 오게 한단 말인가?'

전하는 또다시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슬이 축축하게 전하의 용포를 적시었다. 전하는 연침에 돌아가 의대를 풀었다. 모든 궁인들은 전하가 퇴등령을 내린 후에 침소에 듭신 줄만 알았다. 온 궁중은 조용히 잠 속에 들었다. 전하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아니했다. 이 생각 저 생각 뜬눈으로 밤을 꼬빡 새웠다. 새벽이 되었다.

'어찌하면 단비가 쏟아져서 가뭄이 풀리고 모를 심게 하나!'

여전히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초조하고 있을 때, 돌연 창문 밖 복도에서 후닥닥 짐승이 뛰닫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뛰달리는 소리가 아니다. 두서너 마리가 뛰닫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는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고양이의 강렬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미처 또 한 마리 고양이의 받아넘기는 앙탈하는 소리가 강하게 일어났다. 고양이 떼는 후닥닥거리면서 괴상야릇한 음향을 냈다. '아옹, 아옹', 으르렁거리며 복도로 달렸다. 쫓기고 쫓고 앙칼지고 함축성 있는 교성을 발산했다. 고양이 떼는 상감의 존전인지도 모르고 앙탈을 하고 으르렁거리고 복도로 뛰달렸다. 수직하던 내시가 빗자루를 들고 쫓아 들었다.

"요놈의 고양이, 어느 존전이라고 감히 여기까지 뛰어 들어왔느냐."

내시는 빗자루를 휘두르며 고양이 떼를 쫓았다. 고양이 떼는 얼른 달아나지 아니했다. 눈이 뒤집힌 모양이다. 여느 때 같으면 인기척만 나도 쏜살같이 달아날 텐데 새파란 눈깔에 불을 붙이고 내시를 쏘아보면서 꼼짝달싹을 아니했다. '아옹 아옹', 으르렁대는 소리는 여전했다. 내가는 부아가 벌컥 났다. 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고양이 떼를 후려쳐 갈겼다. 고양이 떼는 그제야 후닥닥 분합 밖으로 뛰어나갔다.

"왜들 그러느냐?"

방안에서 전하의 옥음이 떨어졌다. 내시는 황망해 빗자루를 박에 던지고 전하 앞에 부복했다.

"왜들 소란을 떠느냐?"

"홀레 고양이들이 무엄하게 복도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하와 쫓느라고 소란을 좀 떨었습니다."

"내버려 둘 것을 그랬구나. 봄이 된 것이로구나."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이내 침묵 속에 빠졌다. 내시가 물러간 후에 신빈 김씨는 조반상을 받들고 들어왔다.

"무어냐?"

"조반 수라올시다."

신빈이 조용히 아뢰었다. 전하는 정색하고 분부한다.

"오늘부터 조반은 아니 들기로 하겠다. 상을 물리도록 해라."

신빈은 깜짝 놀랐다.

"조반을 들지 아니하시면 어찌합니까? 옥체에 해로우십니다."

"날이 이같이 가문데 내 어찌 세 끼니를 다 먹겠느냐. 백성들은 굶는 사람이 많을 텐데, 점심과 저녁 두 끼만 먹어도 족하다. 조반은 아니 들기로 한다."

"지난번부터는 감선까지 하셨는데, 또다시 조반을 아니 드시면 어찌합니까?"

"단비가 내기기만 하면 다시 먹기로 한다. 내 마음이 편치 않아 먹을 수 없구나."

신빈은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황공한 마음을 지닌 체 조반상을 받들고 물러가려 할 때 전하는 다시 분부를 내린다.

"내가 의논할 일이 있다. 중전마마께 아뢰고 너희들 후궁 세 사람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들어오시라 아뢰어라."

신빈은 분부를 받고 물러났다. 전하가 이른 조반을 물리치고 받지 아니했다는 소식을 신빈을 통해서 들은 비전하는 깜짝 놀랐다.

"웬일이시냐?"

"굶주리는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가뭄이 해소될 때까지 점심과 저녁 두 끼만 잡수시고 조반은 폐하겠다 하십니다. 옥체에 해로우시다고 지성스럽게 간해 아뢰어도 막무가내십니다."

"큰일이로구나!"

비전하의 얼굴에도 수심이 엉키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의논하실 말씀이 계시다고, 마마께 듭시라 하셨습니다. 소인들도 마마를 뫼시고 함께 들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빈과 혜빈한테도 기별해서, 곧 모이도록 해라."

신빈은 두 후궁에게도 즉시 전갈을 보냈다. 이윽고, 왕비 심씨는 신빈 김씨, 영빈 강씨, 혜빈 양씨를 거느리고 대전 연침으로 들어가 전하께 문후를 드렸다.

"듣자오니 전하께서는 조반을 받지 아니하시고 물리치셨다 하니 황공 송구하와 하정의 민망한 말씀드릴 길이 없습니다. 혹시나 이로 인하여 용체 허약하시면 어찌하십니까? 다시 분부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소리를 높여 껄걸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내 몸은 아직 장년인데, 아침 조반쯤 궐했기로 지장이 있을 리 만무하오. 가뭄이 극심해서 백성들은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 하는데 내 어찌 삼시 끼니를 하겠고. 가뭄만 해소되면 다시 시작할 테니 마마는 과히 염려하지 마시오."

"그렇지 아니합니다. 저하께옵서 강년하시와야, 백성들의 일도 보살피십니다. 물리치지 마시고 다시 조반을 드시옵소서."

"염려 마오. 그는 그렇고 노늘 마마와 세 후궁을 청한 것은 간절히 부탁할 말이 있어 청한 것이오."

"무슨 말씀인지 교시를 내려줍시오."

비전하는 치맛자락을 단정히 쓸고 대답했다.

"요사이 날이 너무 계속해서 가문 것은 궁중에 원기가 가득해서 이같이 윤기가 없나보오. 이 억울한 원기를 풀어주어야 하겠소."

"궁중에 원기가 있을 리 있습니까.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친히 기우제를 지내시고 또 천하에 대사령까지 내리시어 옥에 가둔 죄수들을 풀어주셨습니다. 천하의 원기도 풀어졌을 텐데, 궁중에 원통한 기운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비전하는 궁중에 원기가 서려 있다는 전하의 말씀에 부정의 태도를 취했다. 전하는 껄걸 웃으며 비전하의 말씀에 대답한다.

"비전하께서도 모르는 말씀요. 궁중에 원기가 서려 있다는 과인의 말을 듣고 마마는 놀라셨으리라 마는 사실상 궁중에는 원통한 기운이 서려 있소이다.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더니, 과연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었습니다. 과인도 여지껏 이 원통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가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원기가 서려 있는 이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고 깨달았소이다."

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은근하게 말씀을 내린다.

'어젯밤 오늘 새벽에 궁중에 원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깨달았다'는 전하의 말씀에, 비전하를 위시하여 세 후궁들의 얼굴엔 놀라는 빛이 현연히 드러났다. 멍하니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볼 뿐이었다. 전하는 말씀을 계속한다.

"궁중은 권력이 집중되어있는 곳입니다. 이러므로 보통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궁중은 호화스럽고 휘황하게만 보여지는 법입니다. 부귀영화가 하늘 끝까지 뻗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십상팔구입니다. 보시오, 삼각, 북악이 장엄하게 자리 잡은 아래 주란화각은 칭송 사이에 은은하게 벌여 있고 기화요초와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만간들이 그 잔디밭에는 녹의홍상의 삼천 궁녀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쌍쌍이 짝을 지어 다니니 겉으로 보아 이곳에 무슨 한이 있고 무슨 시름이 있어 보이겠고. 겉으로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하고 그저 행복스럽게 보이기 마련이오, 이 까닭에 여염에서는 딸을 낳아서 대궐 안에 궁녀로 들여보내기를 소원했소. 한 번 제왕의 눈에 드는 날은 부귀영화가 따라가게 되니 그야말로 '딸의 덕에 부원군'이란 말도 생겨났고, '부중생남중생녀'란 그도 명시가 되었소. 그러나 한평생 임금의 눈에 들지 못한 궁녀들은 그대로 늙어 병들어 해골이 돼야만 궐 안에서 나가게 되니 그 아니 딱하고 가엾은 일이 아니겠소. 그 애들이 감히 말은 하지 못하나 얼마나 가슴에 한이 서려 있겠소. 그리하여 나는 궁중에 있는 장년 궁녀들을 모조리 내보내서 자유롭게 시집을 가도록 하기로 결심을 했소이다. 그래서 비마마를 청해서 의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궁중에 가득히 서려 있는 이 원한의 기운을 풀어줍시다."

비전하와 모든 후궁들은 비로소 궁중에 원한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비전하의 어진 눈매에 감격한 빛이 떠돌았다. 신빈, 영빈, 혜빈 세 후궁들도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어쩌면 아이들의 심정을 이같이 밝고 넓게 살피셨습니까. 삼천 궁녀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만고에 드무신 성은이십니다. 하느님도 감복하시어 흐뭇하게 단비를 내리시어 삼천리강산에 가뭄이 해소될 것입니다."

비전하의 말씀을 듣자 전하의 용안은 활짝 화려했다.

"어처께서도 나의 생각이 가합하다 생각하신다면 곧 상궁을 불러서 이 말씀을 내리시고 장성한 나인들을 조사하라 이르시오."

비전하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미소를 짓고 아뢴다.

"곧 분부대로 제조상궁에게 장년 된 궁인들을 일일이 사실해서 아뢰라 하겠습니다마는, 아까 전하께서 하교하신 말씀 중에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궁중에 원기가 서려 있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셨다고 하셨으니 그 점이 무한 궁금하옵니다. 무슨 일을 보셨습니까? 황공하온 일이오나 한 말씀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궁녀를 감독하는 책임은 신첩에게 있삽기 감히 아룁니다."

전하는 비전하의 말씀을 듣고 껄껄 웃었다.

"그 점은 밝히지 아니하겠소이다. 그저 나 홀로 그러한 원기가 궁중 안에 감돌고 있는 것을 짐작하고 잘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과인에게 맡겨 두시고 장성한 궁녀들이 몇 명이나 되는 것을 알려주시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비전하는 옥안에 엄숙한 빛을 띠었다.

"아까도 말씀을 올렸습니다마는, 빈 이하의 모든 내명부와 궁인들을 통독하는 책임을 신첩은 가졌습니다. 어떠한 궁녀들이 어떠한 행동을 해서 원한의 기색을 발산했기에 전하께서 그 점을 느끼셨습니까? 앞으로 궁중을 다스리는데 좋은 참고가 될까 하와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는 근엄한 왕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비의 성격은 부드러운 듯 강하고, 엄하면서도 화했다. 만약 어젯밤에 본 궁녀의 풍경을 솔직하게 말씀한다면 엄한 성격을 가진 비전하는 궁녀를 그대로 둘 리 만무했다. 도리어 한 가닥 풍파가 소용돌이쳐 일어날 것 같았다. 여전히 미소를 풍기며 말씀한다.

"그저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도 비가 내리지 아니하니 천기를 살피러 단신으로 후원을 거닐었습니다. 홀연 고양이 떼가 앞을 가로막으며 회춘의 울음을 울었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우연히 잠을 깨니, 복도에서 역시 수코양이와 암코양이가 으르렁대는 소리가 났습니다. 내시가 빗자루를 들고 쫓기에 내버려두라 했습니다. 천지간에 자연한 이치올시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과인은 임금이라 해서 마마이신 정궁 이외에 신빈, 영빈, 혜빈을 거느렸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삼천 궁녀들은 한창 꽃다운 나이에 조롱속에 가두어둔 새들과 같이 한평생 대궐 안에 가두어두었다가 병들어 해골이 된 후에야 비로소 내보내니 그 아니 딱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임금이라 해서 나 혼자 특권을 누리고 유자생녀할 젊은 처녀들을 가두어둔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어찌 원기가 서려 있지 않겠습니까. 하늘도 노할 것입니다. 이리해서 혹심한 가뭄이 계속된 줄 압니다. 이러므로 오늘 과인은 마마와 상의해서 젊은 처녀 궁인들을 제집으로 돌려보내려 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괘념하지 마시오."

전하의 해명을 듣자 비전하는 비로소 원통한 기운이 궁중에 서려 있다고 말씀한 전하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옥안이 부드럽게 풀렸다.

"전하의 넓으신 뜻을 비로소 짐작하겠습니다. 곧 상궁을 불러서 장성한 궁인들을 조사하겠습니다."

"오늘 해 안으로 젊은 궁녀들을 조사해서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합시다."

비전하는 즉석에서 제조상궁을 불렀다.

"전하께서 장성한 궁녀들이 현재 대내에 몇 명이나 있는지 조사해 아뢰라 하시니 해 안으로 보고하도록 하라."

제조상궁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아뢰옵기 홍공하오나 젊은 궁녀들이 무슨 불미한 일을 저질렀습니까?"

세종은 옆에서 웃으시며 말씀을 내린다.

"그것은 네가 알 바가 아니다. 빨리 몇 사람이 되는가 조사하라. 그리고 신빈, 영빈, 혜빈도 제조상궁과 함께 일을 거들어라."

세종은 특별히 삼빈에게도 장성한 궁인을 조사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영빈이 고한다.

"막연하게 장성한 궁녀라고 하교하시면 추리기 극히 어렵습니다. 연기를 지정해 주심이 좋을까 합니다."

"그도 그렇구나, 십육칠 세부터 삼십 세까지로 규정하는 것이 좋겠다."

"삼가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신빈, 영빈, 혜빈은 제조상궁과 함께 어전에서 물러났다. 삼빈은 제조상궁과 함께 궁인의 명부를 펴놓고 연치를 참고하면서 젊은 나인들을 한 명씩 불러 대조했다. 궁녀들은 한 사람 두 사람 계속해서 불려 들어갔다. 궁녀마다 나이를 묻고 태도를 살폈다. 나인청에 소문이 쫙 퍼졌다. 모두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 죄도 없는데 웬일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이중에 두 사람의 젊은 궁녀는 부들부들 떨었다. 간밤에 객들이 한 짓이 있기 때문이다. 한 궁녀는 인두판을 마주 대해서 새 서방님과 새색시가 동방화촉을 밝히는 신방놀이를 했고, 또 한 궁녀는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 임과 나와 어어 죽을망정,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하는 애련한 연가를 밤이 지새도록 부렀던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다 자격지심이 들어서 간밤 일로인하여 그 일이 탄로되어 크나큰 벌을 받게 되나 하고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그러나 제조상궁과 신빈. 영빈, 혜빈 세 빈마마는 생년월일과 부모들의 형편을 묻고 궁녀 명부와 대조할 뿐 아무 꾸지람도 내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물러가 있으라 했다. 두 젊은 나인은 더 불안하고 궁금했다. 자기 처소로 물러간 후에도 손에 일이 잡히지 아니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불려들어간 젊은 나인의 수는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아니했다. 오십여 명이나 되었다. 의아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인청만이 아니다. 내관들이 모인 공사청을 위시하여 별감, 무예청, 액정 소속의 모든 처소에서도 수군대며 까닭을 몰라서 의구심을 품었다.

십육칠 세로부터 삼십 세까지의 묘령의궁녀들은 무려 오십이 넘었다. 해 안에 조사하라고 분부를 내린 전하의 말씀에 따라, 초저녁 때나 되어서 조사는 겨우 끝이 났다. 신빈, 영빈, 혜빈 세 후궁과 제조상궁은 명단을 받들고 어전으로 들어갔다. 전하와 비전하는 묘령 궁녀들의 명단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었다.

"늦었구나. 어찌 그리 더디었느냐?"

신빈을 위사하여 영빈, 혜빈과 제조상궁이 대답했다.

"의외로 어리고 젊은 애들이 많사와 해 안에 마치지 못하고 저물게야 끝이 났습니다."

전하와 비전하 앞에 명단을 받들어 올렸다.

"모두 몇 명이나 되느냐?"

"오십여 명이나 되옵니다."

신빈이 웃음을 머금고 아뢰었다.

"오십 명씩이나 된단 말이냐. 내가 일찍 살피지 못해서 크나큰 적악을 했구나!"

빈전하가 명단을뒤적거리며 말씀을 받는다.

"나라법이 애당초 그러했지, 어찌 전하께서 적악을 하신 것입니까. 지나치신 겸사의 말씀입니다."

"천만에, 소위 임금이란 백성들의 부모라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리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정권을 잡았으니 그 백성들은 자기의 어린 아들과 딸처럼 사랑하고 보살펴주라고경계하는말입니다. 그러기에 서민들을 적자라고도 했습니다. 갓난이기 같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어린애같이 사랑하고 보살펴라는 말입니다. 내가 임금 노릇한 지 비록 일천하다 하나 임금의 자리에 임해 있는 이상 벌써 이 젊은 궁녀들의 한스럽고 원통한 사정도 살펴주었어야 한 텐데 이제야 비로소 오십여 명씩이나 되는 아이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책임을 맡은 과인으로서 미안하고 죄스럽지 아니하겠소. 당연히 하늘이 노해서 꾸지람하는 책망을 받아 싸게 되었소이다. 기우제를 천 번, 만 번 지내도 삼천리강산이 땅이 갈라지도록 타게 되는 그 까닭을 알게 되었소."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스스로 자신을 책하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비전하를 위시하여 세 후궁들은 고개를 숙연히 숙였다. 제조상궁도 비로소 전하가 젊은 궁녀들을 사실해서 올리라는 저의를 미미하게 잠작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어찌하는 수 없다. 삼빈과 상궁은 내일 일찍 일제히 오십여 명 젊은 나인들에게 기별해서 과인과 비전하가 임어해 있는 정전으로 모이게 하라."

삼빈과 제조상궁을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 전하는 다시 비전하께 지시를 내린다.

"내수사에 분부하시어 내보내는 궁녀 오십여 명에게 줄 거핵 오백여 근과 수목 오백여 필을 내탕고에서 들여오라 이르시오. 내보내는 궁녀들에게 혼수감으로 비전하께서 내리셔야 하겠소이다."

"삼가 명을 받들어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내수에서는 전하와 비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전하 전용인 내탕고에서 거핵() 오백여 근과 수목 오백여 필을 밤 안으로 내전에 들여왔다.

다음날 이른 아침이 되었다. 전하는 수강궁에 나가 아침 문안을 드린 후에 경복궁으로 돌아와 삼정승과 육조판서를 불렀다. 돌연 부름을 받은 장관들은 무슨 분부가 계신가 하고 서로들 면면이 바라보면서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전하는 외전에 출어하여 옥좌에 좌정한 후에 서서히 말씀을 내린다.

"요사이 일기가 너무 가물어서 백상들의 농사 형평이 말이 아니다. 과인뿐 아니라 나라의 국록을 먹으면서 유사의 책임을 맡은 경들도 크게 근심하는 마음이 절실했을 줄 안다. 과인은 대사령을 놓아 억울한 죄수들을 석방하고 팔도강산에 기우제를 지내서 정성을 다했건만 하늘은 아직도 비를 내리자 아니한다. 과인이 덕이 없어 하늘이 과인을 징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밤과 낮으로 나의 잘못을 반성해 보는 중 궁중에는 어느 때부터 시작된 풍속인지 모르지만 여염의 귀한 딸을 아기나인으로 뽑아 들여서 인생의 행악을 모르는 체 칠팔 십이 되어 해골이 된 후에야 비로소 본집으로 돌려보낸다. 이 어찌 차마 할 일인가. 이것은 인간 본연의 생태를 무시하고 사람의 인권과 자유를 말살해 버리는 크나큰 죄악이다. 과인은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젊은 궁녀들을 해방시켜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사람 본연의 길을 걷게 할 적정이다. 오늘 이 일을 결행하려 하니 경들은 그리 알라!"

모든 신하들은 비로소 전하의 명소한 뜻을 알았다. 어느 한 사람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영의정 유정현이 군신을 대표하여 아뢴다.

"이제 전하의 하교를 듣자오니 너무나 크신 왕은에 황감하와 다시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늘도 전하의 성심에 감동이 되어 패연히 단비를 내릴 것입니다."

전하는 다시 예조판서에게 말씀을 내린다.

"모든 유사들이 다 나의 뜻에 찬동하니 기쁘기 한량없다. 예판은 나가는 궁녀들의 혼처를 간음해 맡아서 좋은 낭재들을 구하여 유자생녀하는 즐거운 일에 극력 협조해주라!"

예조판서 허조가 아뢴다.

"해방시켜 내보내실 젊은 궁녀의 수는 몇 사람이나 되옵니까?"

"어제 비전하와 빈마마들에게 십육칠 세부터 삼십 안팎의 젊은 애들을 조사해보라 했더니 무려 오십여 명이나 된다 하오."

허조가 다시 아뢴다.

"젊은 나인들이 나간 후에 궁중 일에 지장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세종전하는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속담에 '꿩 대신 닭'이란 말도 있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는 말도 있지 아니한가. 늙은 궁녀 오십여 명을 대신 배치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하하하."

전하의 웃음소리는 쾌활했다. 전하는 군신을 불러 젊은 궁녀들을 해방하는 일을 선포한 후에 내전에 돌아가 제조상궁을 불렀다.

"오늘 아침에 젊은 궁녀들을 내보낼 것을 대신들에게 선포했다. 비마마께 어제 조사한 젊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입대하시라 일러라."

제조상궁은 청명하고 물러났다. 이윽고 왕비 심씨와 신빈, 영빈, 혜빈 세 후궁은 제조상궁과 함께 어제 심사했던 젊은 궁녀 오십여 명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타났다. 전하는 옥좌에서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궁녀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른 저고리 붉은 치마, 노랑 저고리 남치마, 연두색 저고리에 분홍치마, 자주깃에 백설 같은 흰저고리, 그야말로 만자천홍의 꽃봉오리 같은 어리고 젊은 여인들이다. 오십여 명 아름다운 여인들이 전각 안으로 일시에 들어서니, 전 안에는 때아닌 봄이 찾아 들어 백 가지 꽃이 일시에 만발한 듯했다. 전하는 제조상궁에게 분부를 내린다.

"명단에 오르지 아니한 늙은 궁녀와 여러 직책을 맡은 상궁들도 다 함께 모이라 해라."

대내 안에 있는 모든 궁녀들은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의상을 정돈하여 대전 안으로 모여들었다. 부름을 받은 오십여 명 젊은 궁녀들을 위시하여 늙은 상궁과 늙은 궁녀들은 까닭을 몰랐다. 무슨 분부가 계시려나 하고 마음속으로 모두 다 떨면서 모여들었다. 전각 안은 녹의홍상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한 폭의 현란한 여인군상도를 이루었다. 전하는 비전하와 함께 옥좌에 앉아 옥음을 내리기 시작한다.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은 그 본연의 슬기로운 지혜로 사람의 직분을 다할 수 잇는 자유를 지닌 때문이다. 자유는 하늘이 사람에게 준 특권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의 위치에 있으면서 강압적으로 다른 사람의 특권을 꺾어 버리고 말살시켜서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채우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하늘의 이치를 무시하고 거역하는 무리들이다. 내가 왕이란 자리에 오른 지 비록 일천하나 가만히 궁중의 모든 배치를 살펴보니 이치에 맞지 아니한 일이 많다. 그중에 하나는 궁중에 있는 아기 나인들의 일이다. 어쩌자고 어린것들을 대궐 안에 끌어들여서 나이 장성한 후에도 사람 구실을 못 하게 하고, 한평생 남녀의 정을 모르고 지내다가 해골이 되어 병든 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내보내주게 하니, 이 어찌 가엽고 불쌍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제 나는 깊이 생각한 바 있어 중전마마께 말씀을 드리고 십육칠 세부터 삼십 세 사이의 궁녀들을 모조리 해방시켜서 제집으로 돌아가 자유스런 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너희들 젊은 궁인 오십여 명은 집에 돌아간 후에 좋은 서방을 구해서 유자생녀하면서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라. 그리고 궐 안에 남아 있는 늙은 궁인들은 더욱더 갑절이나 노력해서 왕비 전하와 빈마마를 받들어 궁중의 질서를 엄하게 하라."

뜻밖에 전하의 말씀을 듣는 묘령의 젊은 궁녀들은 별빛 같은 맑은 눈동자에 안개가 서렸다. 자유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기쁨보다도, 사람마다 우러러보는 낙원 같은 궁중을 떠나가는 서운한 마음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옆에 시측히 있는 노상궁과 삼십이 넘은 궁인들은 전무후무한 전하의 처사에 감동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불혹지년을 넘어선 늙은 궁녀들이다. 궁중 안의 지엄한 풍속을 샅샅이 알았다. 꽃다운 청춘을 허송해 버린 지나간 세월이 한스러웠다. 회한의 정이 가슴을 울먹였다.

'나이 좀 젊었던들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을.'

이같은 생각들을 했다. 왈칵 눈물이 흘러서 속눈썹을 적셨다. 한편으론 왕은이 홍대무변한 것을 감격하고, 한편으론 쓸쓸하게 푸른 봄을 흘려보냈던 옛일을 생각해서 눈물이 눈시울을 적신 것이다. 제조상궁이 전하께 고한다.

"해방이 되어 돌아가게 되는 아이들이 하직을 고하는 숙배를 올려야겠습니다. 어찌하오리까. 한 명씩 사은을 올리오리까, 일제히 올리오리까? 하교를 내리시옵소서."

"오십여 명이 어찌 따로따로 사은을 하겠느냐. 일제히 배를 올리도록 하라."

제조상궁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아기 나인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이제 융숭하옵신 상감마마와 중전마마의 은총을 입어 자유로운 몸이 되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하직을 고하는 큰절을 올려야 한다. 일제히 일어나 하직을 고해라."

제조상궁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한 궁인이 조용히 반열에서 일어나 아뢴다.

"왕은이 지중하시어 쇤네들에게 자유의 몸이 되게 하시니 바다같이 넓으신 은총을 그저 감읍할 뿐이옵니다. 연하오나 쇤네는 열한살때 대궐로 들어와서 이제 삼십이 되었습니다. 거의 이십 년의 세월을 궐 안에서 보냈습니다. 모두 다 상왕 전하와 상감마마의 덕택으로 잔뼈가 굵어졌습니다. 지금 가라하신들 갈 곳이 없습니다. 굽어 통촉해 주시고 그대로 궐 안에 머물러 있게 해주옵소서."

궁녀는 말을 마치자 눈물이 비오듯했다. 또 한 궁녀가 고한다.

"황공하오나 상감마마와 중전마마께 아뢰옵니다. 소녀는 다박머리 때 궁중에 들어와서 궁중의 모든 어른들을 부모같이 섬겼습니다. 집에 비록 어미 아비 있다하나 정이 아니 들어 남과 매일반이올시다. 정든 이곳을 떠나서 어느 곳으로 갑니까? 갈 곳이 망연합니다. 시집을 아니 가도 좋습니다. 한평생 이곳에 두시어 중전마마의 시중을 들게 해줍시오."

이십대의 궁녀다. 이내 슬픔이 폭발해서 목을 놓아 울었다. 터지는 울음소리에 따라 오십여 명의 젊은 궁녀들은 일제히 울음보가 터졌다. 정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이 중에는 신방놀이를 하고 '얼음 위에 댓잎자리'의 노래를 불렀던 궁녀도 다함께 목을 놓아 울었다. 울긋불긋 만자천홍의 꽃밭을 이루었던 대전 안 넓은 처소는 이별의 정을 아쉬워하는 울음바다로 변했다. 제조상궁은 소리를 높여 젊은 궁녀들을 꾸짖는다.

"무엄하게 어전에서 이것이 무슨 해거들이냐. 빨리 울음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모든 궁녀들은 슬픔을 억제하고 목소리를 죽였다. 저하와 비전하의 용안에도 척연한 빛이 감돌았다. 이윽고 세종전하는 오십여 명 젊은 궁인들에게 말씀을 내린다.

"정이란 대단한 것이다. 사람이 정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이 십 년 또는 이십 년 대궐 안에서 살았으니 떠나게 되는 오늘날 어찌 서운한 마음이 없겠느냐. 당연히 목을 놓아 울만도 하다. 그러나 정만으로 한평생을 지낼 수는 없다. 사람은 공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공연히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 노릇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를 맞이하고 여자는 남편을 만나서 배필이 된 후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유자생녀해서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게 하는 것이 인간의 원칙이다. 이별하기 아쉬운 정으로 인해서 너희들이 하늘 이치를 꺾어 버린다면 그 허물은 임금이 나에게 있다. 욕심대로 말한다면 너희들 오십여 명의 젊은 궁녀들을 모두 다 내 후궁을 만들어서 너희들 본능을 만족시키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오늘 너희들을 자유스럽게 내보내는 것은, 사감이면서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악법을 깨뜨려 버리고 너희들에게 사람다운 권리를 찾아 주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잠시 정을 꺾고 집으로 돌아가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서 유자생녀하고 잘살도록 하라. 그리고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들은 예조판서에게 부탁했느니 예조에 나가 소지를 올리라."

전하의 말씀은 봄바람이 이는 듯 훈훈했다. 인두판을 세워 놓고 신방놀이를 하던 궁녀도 고개를 숙여 눈시울을 닦았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하는 연가를 노래하던 궁녀도 머리 숙여 눈물을 닦았다. 모두 다 눈물을 닦았다. 제조상궁은 모든 젊은 궁녀들에게 영을 내린다.

"일제히 일어나 전하와 비전하께 사배를 드리라."

오십여 명 젊은 궁녀들은 일제히 상감과 중전께 하직하는 절을 올렸다. 비전하가 옥음을 내린다.

"너희들의 혼수로 상감마마께서 거핵 열근과 수목 열필씩을 내리셨다. 상궁들은 빠짐없이 나누어주도록 하라."

상궁들은 청명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전하와 비전하는 삼빈을 거느리고 침전으로 돌아갔다. 젊은 궁녀들은 거핵 열 근과 수목 열 필씩을 받아 들고 자유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사흘이 채 못 되서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까고 쾌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이내 장마로 변했다. 팔도강산의 농부들은 격양가를 높이 부르게 되었다.

 

대마도 정벌

 

한국말에 바닷속에 있는 육지를 ''이라 불렀다. 일본 사람들을 '시마'라 한다. '시마'의 음을 자주 부르면 곧 ''이 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일본말 '시마'는 곧 우리나라 ''이란 말이 옮겨간 것이다. 대마도는 한자로 쓰면 대마도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두섬'이라 불렀다. 일본 사람들도 '두시마'라 부른다. 우리나라 사람은 학을 '두루미'라 부른다. 일본 사람들도 학을 '두루'라고 부른다. 곧 우리나라 사람들의 학을 부르는 소리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대마도, 곧 두섬은 일본 본토보다도 우리나라에 가깝게 있다. 그리해서 우리나라 '동국여지승람' 경주편 고지도에도 우리나라에 부속돼 있는 섬으로 뚜렷하게 바닷속에 그려져 있다. 원래 신라의 영토였던 것을 쓸모없는 척박한 땅이라 해서 내버려 두었던 모양이다. 날씨 좋은 날 부산서 멀리 동편을 바라보면 대마도가 바다 위에 가물가물 보인다. 그러나 대마도는 땅이 척박한 바윗덩어리로 된 섬인 때문에 섬 속에 사는 토인들은 섬만 의지하고 살 수가 없었다. 우리 본토의 해변가로 기어들었다. 낮에는 고기잡이 어부가 되어 배를 타고 섬과 포구로 횡행하다가 사람을 만나면 협박하고 죽이고 약탈하고, 밤이 되면 인가의 담을 뛰어넘어 동네로 돌아다니면서 간 상배와 결탁해서 물건을 밀수하고 싸움질하고 간음하는 해적떼로 변했다.

'고려사'를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공민왕 17년 가을 7월에 대마도 만호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품을 바치니 윤7월에 강구사 이하생을 대마도로 보내다. 11월에 대마도 만호 종종경이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니 종종경에게 쌀 천 섬을 하사하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대마도 종종경은 고려의 만호 벼슬을 했고 속국이라 해서 세미 천 섬을 내렸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도 우리나라에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고, 우리나라 땅에서 단국물을 얻어먹으려 했고 또 얻어먹어야 살 수 있었다. 때로는 복종하는 체, 때로는 대항하는 체해서 대마도 해적의 떼는 역대로 우리 나라의 두통거리요, 자차분하게 귀찮음을 끼치는 화근덩어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고려 공양왕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공양왕 원년 봄에 경상도 원수 박위는 병선 백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해서 왜선 삼백 척을 불살라 버렸다.'

무한 까불어댔던 모양이다. 경상도 원수가 병선을 거느리고 가서 까불어대는 놈들에게 삼백 척을 불살라서 지진두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세종은 한동안 가뭄을 걱정하여 젊은 궁녀들을 대궐에서 해방시켜 자유의 몸이 되게 한 후에 단비가 계속해 내려서 근심이 적이 풀렸을 때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바로 세종 원년 음력으로 57일의 일이다. 충청도 관찰사 정진은 급히 파발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다.

'이달 초5일 새벽에 왜적은 50여 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비인현 도두음곶에 나타나서 우리 병선을 포위하고 불살라 버렸습니다.'

세종은 급히 사실을 상왕인 태종께 고했다. 태종은 크게 노했다.

"요망한 해적들이 무서운 줄을 모르고 까불어대는구나!"

곧 승지를 불러 대마도 해적떼를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총제 성달생으로 경기, 황해, 충청도 수군도처치사를 삼고, 상호군 이각으로 경기 수군첨절제사에 임명하고, 이사검으로 황해도 수군첨절제사를 삼아 물길의 왜적을 격퇴케 하라. 해주목사 박영으로는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겸직시켜서 육지로 침범하는 적을 막게 하고 상호군 평도전으로 충청도 조전병마사를 제수해서 충청도로 상륙하는 해적들을 막으라."

명령을 내렸다. 원래 평도전은 본시 왜인으로 대마도에서 귀화한 자였다. 일부러 항왜인 대마도 왜인을 발탁해서 막으라 한 것이다. 특히 평도전에게는 그의 부하인 반왜 열여섯 사람을 거느리고 충청도로 내려가게 했다. 세종과 태종은 막 모든 장수들의 직책을 맡겨서 출전의 태세를 취했을 때 충청도 관찰사 정진은 또다시 파말마를 달려서 급히 장계를 올렸다.

'만호 김성길은 왜적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했고 성길의 아들 윤은 전사했습니다. 적병은 이긴 힘을 빌려 뭍으로 올라 서천성을 여러 겹 포위하여 하마터면 함락될 찰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기일발에 서천군수 김윤과 남포진 병마사 오익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와서 적병은 겨우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습니다.'

장계를 보자 세종전하는 비로소 적세가 만만치 않은 것을 알았다. 급히 어가를 몰아 수강궁 상왕전으로 나가 두 번째 올린 충청 관찰사의 장계를 올렸다.

"만호 김성길의 아들이 전사했다 합니다. 다행히 서천군수와 남포진 군사들이 도착해서 적병은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하오나 만만치 아니한 모양이올시다. 좀 더 유능한 장수를 빨리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종전하는 한 사람의 젊은 군인이 전사한 것을 가엾게 생각했다. 상왕 태종은 한동안 침묵을 지켜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분부를 내린다.

"병조판서를 불러 첨총제로 있는 이중지를 충청도 조전병마도절제사를 시키고 상군 '조치'로 충청도 체복사를 제수하여 해안으로 군사를 조발하여 상륙하는 적을 격퇴케 하라."

세종은 상왕의 명을 받았다.

"곧 병조판서에게 상왕 전하의 어명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리하옵고 한 가지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만호 김성길의 아들 '' 이 젊은 나이로 적과 싸워서 전사했다 합니다. 갸륵한 일이올시다. 충청감사에게 명하여 만호 김성길의 자식 죽인 것을 위로하시고 ''이란 아이에게는 후하게 부의를 내려 표창해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종전하는 간곡하게 아바마마께 고했다. 태종은 미소하며 대답한다.

"전하의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는 인자한 마음을 짐작해 알겠소. 전하가 특명을 내려 감사에게 시행하도록 하오!"

뜬뜬하기 바윗덩이같이 정에 휩쓸리지 않는 상왕 태종이건만 세종전하의 애민하는 태도에 마음이 움직였다. 세종은 곧 경복궁으로 돌아가 병조판서를 불러 상왕의 명령대로 이중지와 조치에게 군사를 거느려 당일로 충청도로 내려가게 하고, 한편 감사에게 교유를 내려서 만호 김성길을 위로하고 전사한 그 아들에게 부의를 내려 의기를 표창하게 했다. 이중지 병마도절제사와 체복사 조치의 거느린 군사가 충청도로 내려가고, 만호 김성길과 그 아들 전사한 ''을 위로하는 세종전하의 특별한 은전이 감사를 통하여 전달되니, 충청도 일대와 서천을 위시하여 서해의 방어진은 세종대왕의 백성을 아끼는 지극한 정성을 보고, 민심과 사기가 더욱 고조되어 적을 소탕할 의기가 바다와 육지에 창일했다. 충청도로 도절제사가 내려간 지 얼마 아니 되어 이번에는 황해도 감사가 파발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다. 세종은 급히 장계를 뜯었다.

'이달 열하룻날 조전절제사 이사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막기 위하여 해주 연평도에 대기하고 있는 중, 적선은 안개가 자욱한 틈을 타서 섬을 포위하고 양식을 달라고 공갈 협박이 대단했습니다. 이를 거부했더니 적의 무리는 말하기를, 저희들은 본시 중국으로 가려고 항해하는 도중에 양식이 떨어져서 이곳까지 왔다 하고 만약 양식만 주면 곧 물러간다 하므로 이사검은 아전을 시켜서 쌀과 술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무리는 쌀과 술을 받아먹은 후에 물러가지 아니 하고 오히려 아전을 구속한 채 또다시 양식을 토색합니다. 괘씸하기 짝없는 놈들이올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 배를 구속하려 합니다. 지금 이사검과 대치해서 상지 중에 있습니다.'

세종전하는 두통거리라 생각했다. 한동안 방침을 연구하고 있었다. 세종은 병서에 허즉실 실즉허의 원리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곧 장계를 손수 품 안에 품고 상왕전으로 향했다.

"이번엔 황해감사한테서 급한 장계를 올렸습니다."

"어떠한 장계인가?"

전하는 품 안에서 황해감사의 장계를 꺼내 친히 읽었다. 상왕 전하의 안색은 누르락푸르락 노기가 대단했다.

"요망한 해적 놈들이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고 방자하게 날뛰는구나! 곧 대신들을 불러 의논한 후에 대군을 발동해서 일거에 지진두가 되도록 하오!"

상왕은 전하에게 분부했다.

"일이 가볍지 않으므로 상왕 전하께 아뢰고 곧 대신들을 명소하여 어전회의를 열려 했습니다."

세종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즉석에서 내관을 불러 도승지의 입시를 명했다. 도승지는 부르시는 어명을 받고 급히 들어왔다.

"아까 황해감사의 장계를 받았거니와 여기 대해서 상왕 전하를 모시고 어전회의를 열겠으니 곧 대신들을 입시케 하라."

도승지는 청명하고 정원으로 물러가 모든 대신과 대장들에게 지급히 입시를 명했다. 대신 유정현, 박은,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 대언 이명덕이 두 분 전하 앞에 부복했다. 상왕이 먼저 말씀을 내린다.

"대마도의 해적들이 발호해서 처음에 서천에 들어와 작란을 한 것은 경들도 이미 잘 아는 사실이지만, 이놈들은 다시 서해 바다 연평도로 올라가서 '중국으로 가는 길인데 양식이 떨어져다' 하므로 첨사 이사검은 회유책으로 쌀과 술을 보냈더니 이놈들은 도리어 곡식을 가지고 간 아전을 잡아 놓고 지재지삼 곡식을 또 달라고 할 뿐 아니라 우리 병선들을 납치하려 한다 하니 천인공노할 일이다. 이 요망한 무리들을 어찌 처치하는 것이 좋을 지 여러 대신들은 의논해보라!"

좌의정 박은이 아뢴다.

"지금 충청도 방면에는 여러 절제사들이 내려가 적을 방어한 까닭에 육지로 상륙은 하지 못하고 서해 쪽으로 올라가 노략질을 하는 모양이올시다. 방어첨사 이사검이 연평도까지 가서 대기하고 있는 일은 잘한 일이올시다. 전하께서는 다시 유능한 장수를 뽑아서 서해 바다의 병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일이 타당한 줄로 아뢰오."

우의정 이원이 아뢴다.

"박의정의 말이 옳습니다. 대마도 해적들은 중국으로 노략질을 하러 가는 모양이올시다. 적세는 불과 오십여 척의 병선을 가졌다 하니, 우리는 오십여 척의 갑절되는 백여 척의 수군을 출동시켜서 엄하게 방비한다면 적은 저절로 다른 곳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바위를 튼튼히 해서 수세를 취하는 일이 안전한 대책인가 합니다."

두 대신의 의견은 공세를 취하지 말고 수세를 취하자는 것이다. 이때 영의정 유정현은 침묵을 지키고 말이 없다. 상왕은 유정현에게 묻는다.

"영의정은 아직껏 말씀하지 아니하니 의사를 말해 보는 것이 어떠하오?"

유정현은 눈같이 흰 수염을 흩날리며 장중한 목소리로 아뢴다.

"신은 여러 중신들의 의견을 더 들어본 후에 천천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종전하는 경솔하지 아니한 노재상의 말을 미덥게 생각했다. 상왕은 다시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묻는다.

"병판의 생각은 어떠하오?"

조말생이 아뢴다.

"대마도 해적의 떼는 오십여 척의 배로 노략질을 하러 나왔습니다. 대마도로서는 전 군력을 움직여서 노략질을 하러 나온 것입니다. 병법에 '허즉실이요, 실즉허'란 말이 있습니다. 천고의 격언이올시다. 지금 대마도의 병력은 텅 비어 있습니다. 저놈들이 실한 체하고 나왔지만 저희 곳은 텅 비어 있을 테니, 이 틈을 타서 한편으로 우리의 해안의 방어태세를 튼튼히 하고 한편으로 명장을 선택해서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로 직충해서 해적의 소굴을 소탕해 버린다면 앞으로 다시는 더 교만방자하게 까부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의 아뢰는 말은 조리가 있었다. 세종전하는 당신이 연구하고 생각한 뜻에 부합이 되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상왕께 아뢴다.

"소자 한 말씀 아바마마께 아뢰겠습니다. 소자는 아까 황해감사의 장계를 받고 한동안 연구하고 생각했습니다. '실즉허요, 허즉실'은 병가의 일뿐 아니라 모든 처세하는 일에도 좋은 참고거리가 되는 격언이올시다. 지금 병조판서의 아뢰는 말씀이 극히 타당하다 생각됩니다. 이미 나온 왜적들은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저희가 중국으로 간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마는 양식을 약탈하는 노략질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능한 수군들을 황해, 경기, 충청도에 배치시키는 한편 수군 대부대를 편성시키시어 적의 소굴인 대마도를 무찌른다면 이미 나온 자들은 독 안에 든 쥐새끼가 될 것이요, 대마도는 속수무책,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병조판서의 말씀을 들으시어 양면 작전을 취하시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국가의 위신을 바다와 뭍으로 크게 떨치게 하시옵소서."

세종전하는 병조판서 조말생의 편을 들어 상왕께 아뢰었다. 박은이 아뢴다.

"전하! 불가하옵니다. 대마도를 가볍게 보지 마시옵소서. 대마도는 본시 오리의 땅이었다 하나 이제는 왜국 본토 구주와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대군이 깊이 대마도로 들어갔다가 본토 왜적의 항전을 만나게 된다면 크나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그저 대마도 해적들만 쫓아 버리게 하시옵소서."

좌의정 박은은 대마도 정벌을 반대했다. 대마도 정벌을 반대하는 좌의정 박은의 말을 듣자 우의정 이원이 아뢴다.

"좌의정 박은의 말이 옳습니다. 바닷길 천 리에 수백 척의 전선을 움직여 대마도를 정벌한다는 일은 큰일이올시다. 막대한 국비를 소모하고, 적을 쳐부순다 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저자들은 항상 주림을 못이겨 노략질을 하는 무리들이올시다. 우리는 저자들에게 항상 세견미를 주어 회유해왔습니다. 이미 들어온 무리들을 격퇴시키고 원정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언 이명덕도 아뢴다.

"소신의 의견도 좌상과 우상의 뜻과 같습니다. 크게 일을 벌이지 말고 나라 안으로 침입한 왜적들을 쫓아내는 일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다 무사주의로 나라 안에 침입한 왜적을 쫓아내자고 주장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좌의정이나 우의정과 이대언은 너무나 무사주의를 취하십니다. 대마도 놈들은 난화지맹이올시다. 강하게 누르면 쥐새끼마냥 구멍을 찾아 엎드리고, 내버려 두면 승냥이 떼같이 날뛰는 요망한 무리들입니다. 고려 때 대마도를 무찔러 혼뜨검을 내게 한 일이 있습니다마는, 아조에 들어와서는 들어온 놈들에게만 혼을 내게 했고 항상 쌀과 잡곡을 주어 저들을 회유했을 뿐입니다. 이제 나라가 건국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저자들은 한번 까불어대는 모양이올시다. 국위를 선양시키기 위해서라도 적의 소굴은 한번 무찔러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좌상은 일본 구주 본토의 왜인들이 항전을 할까 염려하지만, 일본 원씨의 사신들은 지금도 조공을 바치고 우리나라에 와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우리는 침략해 들어온 대마도 해적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소탕하는 것이고 결코 일본 본토를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해서 돌려보내면 됩니다. 조금도 주저할 것이 없습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왜적의 성격과 대마도의 허실이며 일본 본토와의 관련성을 들어 청산유수같이 도도하게 논리를 폈다. 세종전하가 천천히 입을 열어 상왕께 과한다.

"아바마마께 아룁니다. 신도 대마도의 일에 대해서 문적을 살핀 일이 있습니다. 본시 신라 때 서라벌 경주에 소속된 땅이었으나 바윗덩이와 돌부리로 된 불모지였습니다. 소용이 없으니 방치해 두었던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 사람은 살지 아니하고 오랜 세월에 해적 떼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대마도의 지리적 위치로 볼 때 일본 구주보다도 우리 부산진이 가깝습니다. 이리하여 이자들은 항상 우리 땅에 와서 노략질을 하고 무법천지의 행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회유도 정도가 있습니다. 때로는 봄바람이 화하게 부는 듯한 춘풍대아의 정치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가을 서리가 내리는 듯한 추상열일의 기상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병조판서의 판단이 극히 가한 줄로 아뢰오!"

세종전하의 말씀은 씩씩하고 호방했다. 안상하고 얌전하고 문기가 의표에 항상 넘치는 전하의 풍채에서 이같은 강경하고 호쾌하고 대담한 주장이 나올 줄은 뚯밖이었다. 좌의정 박은과 우의정 이원은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크나큰 힘을 얻었다.

"명철하신 성상 전하의 말씀이 지극히 타당하십니다. 상왕 전하께서는 쾌하게 대마도 정벌을 윤허하시옵소서."

상왕도 세종전하와 병조판서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했다. 영의정 유정현에게 묻는다.

"영상은 아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다 들은 연후에 소신을 말씀하겠다 했는데, 이제는 왜적을 토멸하는 일에 대하여 두 의견이 대립되어있으니 어느 편을 취하는 것이 좋다 생각하오, 말씀해보오."

묵묵히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영의정 유정현은 천천히 입을 열어 아뢴다.

"좌의정과 우의정의 수세를 취해서 들어오는 왜적들의 행패를 막자는 의견도 일리는 있습니다마는, 만약 이것이 버릇이 되어 왜적들이 우리의 힘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자꾸 침노해 들어온다면 그자들의 방자한 행동을 나중에는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성상 전하와 병판의 판단대로 적의 오십 척 병선이 우리 땅에 들어온 틈을 타서 적의 소굴을 무찌르고, 한편으로는 서해에 들어왔다가 돌아가는 적을 소탕한다면 일거양득의 전과를 올리리라 생각합니다. 신도 대마도 정벌을 찬성합니다."

영의정도 비로소 대마도 정벌을 찬성했다.

"그렇다면 나도 대마도 원정 계획을 찬성한다. 그러나 일이 가볍지 아니하니 호반대장을 한번 불러서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구를 불러 의논하는 것이 좋을꼬?"

세종대왕이 상왕께 고한다.

"대장 이종무는 노련하고 담략이 있는 장수올시다. 종무를 불러 하문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아드님 세종의 말씀을 듣자 상왕은 만면에 쾌활한 웃음을 띠었다.

"우리 전하는 문치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무장의 일까지 소상히 알고 있으니 이제는 내가 근심이 없다. 이종무는 수륙 전투에 모두 능통한 노련한 대장이다. 전하의 말대로 이종무를 불러 의논하리라."

상왕은 합문 밖에 대령하고 있는 어전 내관을 불렀다.

"대장 이종무를 급히 명소하라. 어전회의가 있으니 시각을 지체 말고 입시하라 이르라."

어전 내관을 청명하고 직접 자신이 대장청으로 나갔다.

"지금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상왕마마와 상감마마께서 임석하신 자리에 영상 이하 병판들 모든 대감들이 시립해 계십니다. 상왕 전하와 상감마마께서는 대감께 급히 입시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대장 이종무는 벌써 대마도 정벌로 인한 어전회의가 열린 것을 짐작했다. 적이 벌써 서천에서 연평도까지 올라가서 혹작질을 하고 있는 모든 보고를 병조를 통해 받았다. 마음속으로 전략을 연구하고 있었다. 명소를 받은 대장 이종무는 잠시 생각속에 빠졌다가 문득 문갑을 열었다. 둘둘 말은 두루마리 한 축을 꺼내서 천천히 품 안에 간직했다.

"곧 알현을 하겠네."

한마디를 한 후에 대전 내관을 따라 수강궁으로 들어갔다.

"대장 이종무 알현이오."

하는 어전 내시의 아뢰는 소리와 함께 지밀 연침문은 활짝 열렸다. 상왕 태종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들라 해라!"

허락을 내렸다. 구군복 밀화패영에 공작미 화려한 깃을 안올림벙거지에 꽂은 대장 이종무는 잠시 눈을 들어 전후좌우를 살폈다. 전면 옥좌에는 상왕 전하 태종과 주상전하 세종이 진좌해 계시고, 좌편에는 영의정과 좌의정이 부복해 앉았고, 우편에는 우의정과 병조판서가 모시고 앉았다. 대장 이종무는 어전 삼 보 밖에 나가 두 분 전하께 재배를 드렸다.

"신 이종무 부르심을 받자와 입시하옵니다."

세종전하는 미소를 지어 대장 이종무를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상왕 태종은 호방한 음성으로 말씀을 내린다.

"경은 국가의 간성이다. 근래 대마도 왜추들의 작란에 대하여 심모원려를 이미 깊이 연구했으리라 믿는 바이다. 왜추들의 작란은 비록 서절구투라 하나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경도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서천으로 들어와 백령도에서 작란하는 적의 무리에 대해서는 수륙양면으로 철통같은 작전을 시도하고 있거니와, 왜적을 섬멸하는 근본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경을 불렀으니 경은 수륙양면에 경력이 많은 대장이다. 어찌하면 적의 망동을 영구하게 제어할 수 있는가, 좋은 방책을 말하라."

이종무가 부복해 아뢴다.

"신은 외람되이 대장의 직책에 있어 미리 왜추의 발동을 방비하지 못하고 두 분 성상께 심려하시게까지 했사오니 죄 태산 같사옵니다. 역사적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고려 때 크게 적의 소굴을 무찔러 소탕한 일이 있을 뿐이옵고 그 후에 아조에 들어와서는 항상 들어오는 왜추들을 몰아냈을 뿐, 소굴을 소탕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적은 우리의 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간 틈을 타 오십여 척의 배로 노략질을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이자들이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려면, 대군을 출동시켜서 한편으로는 서해 바다로 들어온 적은 돌아갈 길을 끊어서 독 안의 쥐를 만들고, 한편으로 큰 군사는 대마도 소굴을 무찔러서 다시는 야망을 품지 못하도록 양면 작전을 취하는 일이 제일가는 상책이라 아뢰옵니다."

이종무는 쾌활하게 소신을 아뢰는 말씀을 듣자, 세종전하와 병조판서 조말생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돌았다. 대마도 정벌을 반대하던 좌의정 박은이 대장 이종무 앞에서 한마디 하고 싶었다.

"왜국은 대마도 이외에도 구주 등 본토들이 있다 하오. 섣불리 대마도를 건드렸다가 그 뒤에 있는 왜국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크나큰 사태를 빚어내게 될 테니, 장군은 이 뒷일을 어찌 처리하려고 대마도 정벌을 주장하시오?"

박은은 깐깐하게 이종무를 향해 묻는다. 이종무는 정색하고 대답한다.

"좌의정께서는 지나친 염려를 하십니다. 왜국은 지금 통일된 나라가 아니올시다. 지역마다 번벌을 이루어서 영토를 차지하고 대명들이 제각기 대장군이 되어 전국시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마도는 왜국 본토에 예속되어있는 땅이 아닙니다. 본시 우리나라 서라벌에 소속되었던 땅입니다. 그리하여 한문으로 대마도라 하지만 우리말로는 '두섬'이라 부릅니다. 저 사람들도 '두섬'이라 부릅니다. 지리적으로도 왜국 본토보다도 우리 부산이 더 가깝습니다. 땅이름이 우리말인 것으로 보아, 본시 우리 땅이란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지도를 보아도 우리 땅이 확실합니다. 섬 자체가 척박한 돌산과 바윗덩이로 되어 있는 때문에 서라벌 때 다스리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입니다. 이 불모지에 죄지은 왜신과 해적들이 몰려들어서 지금의 대마도로 변했습니다. 그 증거로는 왜국 본토의 원씨가 지금 국서를 바치고 서울에 유하고 있지 아니합니까? 절대로 왜국 본토의 무리가 대마도를 소탕하는 데 항의하거나 합세하지 못합니다. 자아, 전하께 아뢰기 위해서 소장이 옛 지도를 가지고 왔소이다.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대장 이종무는 품 안에서 고지도 두루마리를 꺼내서 천천히 어전에 펼쳐 놓았다. 한국의 삼천리강산이 점점이 그려 있고 남해 바닷물 속에 제주도, 대마도, 울릉도, 독도 등이 소상하게 실려 있다.

"자아, 보십쇼, 대마도도 제주도, 울릉도, 독도와 함께 우리 판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이놈들은 예로부터 우리한테 와서 곡식을 얻어먹고 배가 고프면 또다시 강도질을 하고 노략질을 합니다.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서 다시는 못된 짓을 못하도록 혼뜨검을 내주어야 합니다."

좌의정 박은은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 했다. 두 분 저하를 위시하여 박은을 제외한 모든 대신들은 이종무가 펼쳐 논 고지도를 자세히 살폈다. 한동안 후에 상왕이 다시 말씀을 내린다.

"대마도를 소탕한 후에 아주 우리 땅으로 다시 환원시키면 어떠할꼬?"

상왕 태종은 세종 이하 좌우 시신을 둘러본다. 세종전하가 상황께 아뢴다.

"아바마마께서 하교하신 말씀은 일리가 있사옵니다마는, 어리석은 생각에는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어찌해서?"

상왕 태종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전하에게 묻는다.

"신라 때부터 두섬을 버려둔 것은 소용없는 불모의 땅이라 해서 불문에 부쳐버린 것입니다. 이곳에 왕화가 미치도록 하자면 우선 우리 백성을 이민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리해서 산업을 일으키고 문화를 전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척박하니 농경을 할 도리가 없습니다. 백성을 이민시켜 놓고 차마 굶어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선한 우리 백성들을 몰아서 악한 무리로 전락되게 하기 십상팔구올시다. 그저 적의 소굴을 소탕해서 앞을 징계할 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세종전하의 아뢰는 말씀은 사리에 지극히 적절했다. 땅을 점령했다 해서 문화 수준이 높은 백성들을 불모지인 굶주리는 땅에 도저히 몰아 놓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영의정 유정현이 아뢴다.

"주상전하의 말씀은 실로 애민여자하시는 성군의 말씀이올시다. 상왕 전하께서는 그저 대마도의 적의 소굴을 소탕하시어 까부리는 무리들을 응징하시고 이민하시는 일은 중지하시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

상왕 태종도 마음속으로 아드님 전하의 백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 크게 감동되었다. 호방하게 쾌활한 웃음을 웃고 말씀을 내린다.

"나는 욕심이 항상 많아서 대마도가 본시 우리 땅이니 불모지지라도 도로 찾으려는 생각인데, 어진 상감은 백성을 적자같이 생각해서 추호도 고생을 시키려 하지 아니하니 내 어찌 전하의 뜻을 좇지 아니하겠소. 그럼 대마도 정벌은 적굴을 소탕해서 국위를 선양시키고 적의 무리를 응징하는 데 그치도록 하오."

세종전하는 별빛같이 밝은 눈을 들어 다시 상왕께 아뢴다.

"아바마막게 다시 아룁니다. 만약에 우리 군사가 대마도를 정벌한 후에 비록 불모지라 해도 영구하게 점령한다면 그때 가서는 왜국 본토의 무리들이 그대로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크나큰 병화를 일으켜서 백성들을 전화 구덩이로 빠지게 할 우려가 십중팔구 있습니다. 다만 대마도의 왜추들을 응징하시는 데 그치시기 바라옵니다."

세종전하의 평화를 사랑하는 갸륵한 말씀은 어전회의를 더욱 훈훈한 화기로 이끌었다. 대마도 정벌을 반대하던 박은도 비로소 전하의 큰 뜻을 알았다. 부복해서 세종전하께 아뢴다.

"소신 미욱하와 처음에 대마도 정벌을 반대했습니다. 그것은 공연히 크나큰 병화의 혼단을 일으켜서 국난을 초래할까 염려한 까닭이올시다. 이제 성상전하의 강유겸전하신 심모원려를 배청하오니 소신 너무나 미련하고 불초하기 짝 없습니다. 삼가 성지에 따라 반대하던 의견을 철회하옵니다."

세종전하는 빙긋이 웃고 대답이 없었다. 어전회의의 모든 의논은 침범해 들어온 왜적들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 소탕해버리고 한편으로는 국가의 위세를 크게 드날려 다시는 망동을 못 하도록 대군을 휘동하여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결정했다. 상왕 태종은 대장 이종무를 향하여 묻는다.

"대마도 원정은 이미 결정하였거니와 안팎으로 양명 작전을 취해야 할 터인데, 전함의 모든 장비와 수군들의 인원은 충분하게 조달될 수 있는가?"

이종무가 부복하고 아뢴다.

"내륙과 영해로 침범해 들어온 왜구를 소탕하기 위하여 출전한 장병에게는 좀 더 강력한 후송부대를 파견하시면 넉넉히 소탕될 것이옵고, 대마도로 원정하는 수군과 전함은 각도에서 징발해서 거제도로 집합시키면 됩니다. 지금 대마도에는 우리 군사를 대항할 만한 적군이 없습니다. 적의 배 오십여 척이 함빡 우리 땅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전함 2백여 척과 군사들이 먹을 석 달 양식을 싣고 간다면 파죽의 형세로 대마도를 소탕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자 이종무는 다시 지도를 펴들고 거제도 앞바다에서 주사를 출동시킬 계획을 아뢰었다. 태종은 크게 기뻤다. 곧 세종전하께 분부를 내린다.

"대마도 정벌에 대한 일은 이종무에게 맡기고 병조판서와 함께 의논해서 모든 일을 처리하라!"

세종전하는 승명하고 대신과 대장들을 거느리고 상왕전에서 물러났다. 어전회의를 마치고 경북궁으로 돌아온 세종전하는 곧 대마도 정벌의 태세를 취했다. 먼저 승지를 불렀다.

"대마도를 정벌한다는 국가의 결정을 먼저 중외에 선포하라!"

승정원에서는 지체없이 명을 받들었다. 서울 사대문에 크게 방이 붙었다.

'대마도의 왜적들이 오십여 척의 배를 몰아 바다를 어지럽게 한다. 그대로 좌시할 수 없다. 국가의 위엄을 보여 적의 소굴 대마도를 소탕할 것을 정부는 결정하였다. 관민은 다 함께 힘을 합하여 적을 응징하라!'

파발은 각도 감사와 각읍 수령에게 말을 달렸다. 감영 앞과 고을 삼문마다 서울 사대문에 붙인 방과 똑같은 방문이 붙었다. 모든 백성들은 의분을 참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주는 세견미로 처자식들을 먹여서 잔명을 보전하는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배은망덕을 하고 흑작질을 한단 말이냐! 쌩 요놈의 새끼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한번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 놓아야 하겠다. 나도 자원 출정을 한다!"

고을마다 감영마다 출정을 원한다는 사람들이 백절치듯 모여들었다. 감사와 원들은 사람들의 직업을 살폈다. 나루터 도선장과 포구에서 생장한 노 잘 젓는 뱃사공이 그중 많고 한량, 재인, 향리, 평민 중에 헤엄 잘치는 사람들이 다음이었다. 각읍 수령들은 병조에 상신했다. 병조에서는 노수를 주어 각도의 수군과 함께 거제도로 모이게 했다.

한편 세종전하는 대마도에 출정할 장성을 임명했다. 영의정 유정현으로 삼군도통사를 삼아 전국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이종무에게는 숭록대부 장천군의 군호를 봉한 후에 대마도를 정벌하는 주장을 삼아 삼군도 체찰사의 중직에 임명했다. 중군 절제사에는 우박, 이숙무, 황상이요, 좌군 도절제사는 유온이요, 좌군 절제사는 박초, 박실이요, 우군 도절제사는 이지실이요, 우군절제사는 김을화, 이순몽이다. 삼군 장성의 부서가 결정되니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전국에 훈령을 내렸다.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병선 2백 척은 하번갑사 별패 시위패와 수성군, 영속재인, 화척이며 한량, 인민, 향리, 양반 중에 배 잘 타는 사람들은 왜구의 돌아가는 길을 끊으면서 유월 팔일로 기약을 정하여 각도의 병선과 함께 견내량으로 모이라!'

세종전하의 선전포고가 내리고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의 격문이 각도 감사에게 번개같이 파발마를 달려 전해지니 경상, 충청, 전라도 각읍 수령들은 동원 준비에 바빴다.

세종전하는 다시 병조판서 조말생을 명소했다. 조말생이 어전에 추창해 들어와 부복했다.

"우리가 적을 응징하기 위하여 대군을 휘동하여 정벌하는 마당에, 비록 적이라 하나 그 죄상을 수죄하여 엄주하는 뜻을 밝혀야 할 것이다. 지금 대마도 도주의 이름은 종정성이란 자가 아닌가?"

", 그러하옵니다. 점잖게 부르는 이름은 종정성이옵고 저희들끼리 부르는 이름은 도도웅환이라 합니다. 왜말로는 '구마마루'라 하옵는데, 우리말로 한다면 곰같은 놈이라 하는 소리라 합니다."

세종전하는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셨다.

"과연 그놈 참 곰같이 미련한 놈이로구나! 어쩌자고 배은망덕을 하고 악당들을 몰아 노략질을 하는가? 좌우간 놈들에게 대군이 당도하기 전에 정벌하는 까닭을 밝히는 글월을 보내도록 하라!"

조말생이 아뢴다.

"도체찰사 이종무가 대마도에 당도하기 전에 호유하기는 글월을 보내기는 좀 난처한 듯합니다."

"? 글월을 가지고 갈 사람이 없다 하는가?"

", 그러합니다. 인명을 상할까 염려올시다."

"그깐 놈들에게 무슨 사신을 보낸단 말인가? 항왜가 있지 아니한가. 이번에도 항복한 자들이 많이 있지 아니한가. 이자들을 보내도록 하오."

병조판서 조말생은 마음속으로 전하의 슬기로운 임기처사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세종전하의 밝은 슬기에 감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주상전하의 총명하신 판단은 어리석은 소신이 감히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항복한 왜추들에게 효유하시는 글월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글월은 내가 부를 테니 경이 받아 쓰라!"

병조판서 조말생은 또 한 번 놀랐다. 당연히 홍문과 제술관이나 승지를 불러서 효유문은 짓는 것이 전례인데 전하가 친히 글을 지어서 불러주겠다 하시니, 어느 겨를에 이러한 어려운 글까지 친히 지을 줄 아시나 하고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는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어전에 지필묵을 벌여 놓았다. 전하는 글월을 구술했다. 아직 한글을 창조하기 이전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한자로 불렀다. 필자는 한글로 바꾼다.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적에 소소하게 기재되어 있다. 다만 땅이 심히 협소하고 또 해중에 있어서 왕래가 막혔고 백성들이 살지 아니하니 왜국에서 추방되어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모두 모여들어서 굴혈이 되었다. 때로는 좀도둑이 되어 평민을 겁략하여 돈과 곡식을 양탈하는 등 해를 거듭할수록 극악 국흉했다. 태조 강헌대왕께서는 문화로 덕을 펴시고 무위로 징발하시어 은위로 회유하셨고, 짐이 대통을 이은 후에도 또한 선왕의 뜻을 받들어 더욱 너희들을 무휼하였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혹시 좀도둑질을 하는 불공할 태도를 갖는다 해도, 너 도도웅환의 아비 종정무의 모의수성한 충성을 생각해서 너희들의 사자가 올 때마다 관에 유숙케 하고 예조로 하여금 후하게 위로해 주었을 뿐 아니라 너희들이 살기 어려운 것을 생각해서 장사하는 배가 왕래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해마다 수만 섬의 경상도 곡식을 주어서 너희들의 형제를 기르게 하고 너희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뜻밖에 배은망덕하는 너희들은 요망하게 변경을 어지럽게 하여 화태를 자초해서복망의 길을 취했다.'

전하는 여기까지 부르자 잠깐 숨을 돌렸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전하의 숨돌리시는 틈을 타서 조용히 아뢴다.

"부르신 선지의 문맥으로 보아 주상전하께옵서 대마도 왜추에게 내리시는 글이 아니옵고 상왕 전하께서 내리시는 글이 됩니다."

"그렇지!"

세종전하는 얼굴빛을 정색하여 대답했다. 조말생이 다시 아뢴다.

"대외적으로 주상전하께서는 나라의 대표이신 국왕이십니다. 상왕 전하께서 내리시는 선지로 해서는 아니 될 듯합니다."

"잔말 말고 그대로 쓰라!"

전하의 용안은 엄숙했다. 조말생의 가슴이 뜨끔했다. 지난번에 상왕 전하께 죽임을 당했던 전임 병판이요, 영의정이요, 부원군이었던 심온의 일이 생각났다. 아차 실수를 했구나 생각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새삼 전하의 넓고 큰 도량에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의 엄숙했던 얼굴빛은 다시 화기가 가득한 빛을 지었다.

"다시 계속해서 받아 쓰라."

조말생의 망건편자에는 진땀이 솟았다. 다시 붓을 잡았다. 전하는 계속해 글을 불렀다.

'그러나 평일에 투하한 자와 흥리통신하기 위하여 오는 자 및 이번에 항복하는 자들은 모두 다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배치해서 옷과 밥을 주어 생활을 보장해 줄 테다. 한편 변방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거느려 너의 소굴을 포위해서 권토내항하기를 기다리라 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도 망설이고 깨닫지 못했다. 나는 심히 민망하게 생각한다. 섬 안의 토지는 모두 돌산이요, 기름지지 못해서 농사가 부실했다. 이 까닭에 틈을 타 도둑이 되어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쳐서 그 죄악은 하늘과 땅에 가득했으니 어찌 주륙을 면할까 보냐! 그러나 번연히 뉘우쳐서 항복을 한다면 도도웅환 너에게는 좋은 벼슬과 후한 족을 줄 것이요, 다음 대관들에게는 항왜 평도전과 같은 대우를 할 것이다. 또 그 나머지 군소에 대해서도 모두 옷과 양식을 넉넉하게 주어서 기름진 땅에 살게 하여 우리 백성과 같이하여 일시동인 모두 도둑의 누명을 벗고 의리에 사는 기쁨을 알게 할 것이다. 이것은 자신하는 길이요, 생활하는 원리다. 만약 너의 본토로 돌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하지도 아니하고 도둑질할 마음을 먹어 계속해서 섬에 머물러 있다면 크게 병선을 바다에 띄워 십만 대병으로 섬을 포위하여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화와 복이 달려 있는 소소하게 밝은 일이다. 항복하든지, 본토로 돌아가든지 둘 중에 한길을 택하라!'

세종전하는 부르기를 마쳤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붓을 놓았다. 전하의 부르는 글은 진실로 명문이었다. 그대로 글만 잘 지은 것이 아니다. 천지의 조화를 그대로 형성시키려는 평화로운 사상이 글 안에 가득했다. 비록 까불어 대는 부랑패류의 흉악한 왜인이라 하나 항복만 하면 좋은 벼슬을 주어 우대하고 좋은 옷과 밥을 주어 기름진 땅에 농사를 짓게 해서 우리 국민과 같이 일시동인하는 혜택을 준다 했다. 뿐만 아니었다. 세종전하는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다. 일본 본토인 왜국과는 흔단을 일으키지 아니하려 했다. 대마도는 척박하지만 본시 우리 땅이다. 항복을 할 테면 항복을 하고, 그렇지 아니하다면 대마도를 비워 놓고 너희의 본토인 왜국으로 돌아가라 했다. 본토인 왜국의 평가나 원씨들도 꼼짝달싹할 말이 없도록 글을 썼다. 정벌을 대마도 국지정벌로 만들고, 더 이상 왜국 본토는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수단 높은 정치외교의 뚜렷한 자세를 취한 선포문이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세종전하의 능란한 외교정책과 빛을 뿜는 예지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조용히 붓을 놓고 아뢴다.

"항복하면 일시동인의 혜택을 주고 그렇지 아니하면 대마도를 비워 놓고 왜국 본토로 돌아가라! 만약 두가지 일을 다 이행하지 않는다면 십만 대병으로 도륙을 시키겠다는 말씀, 과연 적의 간담이 서늘할 것입니다. 분만 아니라 본토의 왜인들도 대마도의 국지정벌만인 것을 밝히 알아서 전하께 심열성복할 것입니다. 소신이 비록 병판이라 하오나 감히 생각도 못했던 바올시다."

"흔단을 내는 무리들을 응징할 뿐, 죄 없는 무리들을 정벌한다는 일은 화기를 숭상하는 왕도정치가 아니라 생각하오!"

세종전하는 간단하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조말생이 다시 아뢴다.

"효유문을 가지고 수강궁에 나가 상왕 전하께 아뢰고 항왜들에게 주어 대마도주 도도웅환에게로 보내겠습니다."

"그리하오. 그리고 병조판서는 왜국 본토에서 조공하려 들어온 원씨의 사자를 병조로 불러서 대마도로 보내는 효유문을 또 한벌 써서 준 후에 대마도 정벌이 대마도에만 국한된 일이고, 왜국 본토를 정벌하는 일이 아닌 것을 밝혀주오."

"명심해서 거행하겠습니다."

조말생은 세종전하가 구술한 효유문을 받아 들고 상왕전으로 향했다. 상왕 전하는 조말생이 올리는 효유문을 친히 보았다. 만족한 모양이었다.

"홍문관의 어느 제술관이 지었는가?"

"주상전하께옵서 친히 구술하시고, 소신이 어전에서 받아썼습니다."

상왕 태종은 깜짝 놀라는 기색이 용안에 현연하게 나타났다.

"평소에 어릴 때부터 손에 책을 놓지 아니하고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글을 독실하게 공부하더니 제술하는 글도 천하 명문이로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아뢴다.

"홍문관 옥당, 교리는 말할 것이 없고 나이 지긋한 대제학, 부제학이라고 이에서 더 훌륭한 제술은 못할 것입니다."

상왕의 용안에는 희색이 가득했다.

"대마도 왜추들에게 너희 본토로 돌아가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항복을 하든지 두 길에서 한길을 택하라. 만약 항복하면 우리 백성들과 함께 일시동인을 하겠다는 말은 경이 상감한테 가르쳐 주었는가?"

"아니올시다. 신은 감히 생각도 못 한 일이올시다. 모두다 상감께서 계책을 정해서 부르셨습니다. 신은 그저 받아쓰기만 했을 뿐입니다. 주상전하의 평화로운 왕도정치를 본받으시라는 넓고 넓은 큰 뜻에 소신은 그저 놀랐을 따름입니다. 그리하옵고 왜국 본토는 공격하지 말고 대마도 왜추들에게 혼뜨검이 나도록 국지공격만 하란 말씀에 더욱 탄복했습니다."

"좋아, 그대로 처리하라!"

상왕은 쾌하게 효유문 보내는 모든 일을 허락했다.

 

구주 본토 회유

 

병조판서 조말생은 상왕과 세종전하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에 귀화했던 항왜등현의 무리 5명을 병조로 불렀다.

"주상전하께서 대마도 왜추들의 장난을 크게 노하시어 효유하시는 글월을 도도웅환에게 내리시는 한편, 병선 수백 척과 수군 10만을 동원하여 대마도를 소탕하라고 엄한 분부를 내리셨다. 만약 도도웅환이 항복한다면 일시동인하시는 갸륵하시니 뜻으로 용서를 포섭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구주 본 곳으로 돌아가고 대마도를 비워놓으라 하셨다. 두가지 중에 한 가지도 실행하지 아니하고 노략질을 계속해서 저항한다면 대마도의 소굴을 정병 10만으로 포위하여 한 놈도 남기지 아니하고 말끔하게 소탕할 테다. 이뜻을 도도웅환에게 전하고 주상전하의 효유문을 전하라."

",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등현의 무리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려, 세종전하의 효유문을 받들어 품 안에 넣었다.

"배는 부산포에서 타고 바로 대마도로 직행하라! 너희들의 신분은 보장해 주고, 노수와 여비는 충분하게 주리라!"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등현의 무리 다섯 사람은 고두백배하고 물러갔다.

한편 예조판서 허조는 병조판서 조말생과 함께 세종전하의 명을 받들어 일본 구주절도사 정우의 무리 네사람을 불렀다. 정우는 승려의 몸으로 일본 구주의 사자가 되어 여러날 전부터 조선에 와 있던 자였다.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는 연회하는 자리를 베풀고, 정우의 일행을 대했다. 정우의 일행은 두 장관을 향하여 합장하고 자리에 꿇어앉았다. 예조판서 허조가 곡차를 정우에게 권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왜국 본토의 사신들을 청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대마도 왜구들의 침입에 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청한 것이다. 대마도 무리들이 병선 오십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 바다로 노략질하러 들어온 일은 그대들도 이미 소문 들어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왜역관이 통역했다. 왜승 정우는 합장을 올리며 자리를 피하여 대답한다.

"대마도는 왜국 본토보다도 항상 조선의 힘을 입어 굶어 죽지 않고 사는 무리들이온데 배은망덕하고 물길을 따라 장난을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업습니다."

왜승 정우는 몸 둘 곳을 몰랐다. 천 번 만 번 고개를 굽실거렸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위엄기 있는 음성으로 말한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침입해 들어온 대마도 왜추들은 독 안의 쥐를 만들어 징계하시고 전함 수백 척과 수군 십만으로 대마도를 정벌, 소탕하랍시는 엄한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나 왜국 본토에 대해서는 조금도 다른 뜻이 없으시니 이 점을 본토 대명들에게 알려주기 바란다. 그러나 만약 구주 등 본토에서 대마도 왜추들을 두둔해서 흔단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또한 너의 본토에까지 대군을 휘동하여 불의를 응징할 것이다! 이 뜻을 전하라."

왜국 구주총관 원도진의 사신 중 정우는 손을 모아 굽실거리며 대답한다.

"대마도 해적들의 난동을 저희 본토에서 진압하지 못하고 귀국의 국경과 바닷가를 소란케 했으니 죄송한 말씀 이루다 아뢸 길이 없습니다. 저희 본토에서는 대마도 정벌하시는 일에 대하여 추호만치라도 불쾌한 감정을 갖지 아니합니다. 배은망덕하신 일입니다. 더구나 저희 본토를 원망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대마도를 정벌하신다 하니 당당한 정의를 지키는 왕군에 대하여 다만 감사를 그릴 따름입니다. 거룩하신 국왕 전하의 크고 넓으신 뜻을 저희 본토 장군한테 전달하겠습니다."

왜승 정우는 합장을 올리며 백배치사했다. 술이 서너 순배 돈 후에 정우는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를 향하여 고한다.

"소승은 조선에 와서 보니 찬연한 문화와 법도 있는 예절과 당당한 의기에 감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한동안 조선에 유하면서 모든 학문과 불교에 관한 일을 배우고 연구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허락해 주신다면 은혜를 길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왜통사는 다시 이 뜻을 통변했다. 예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의 얼굴에는 화기로운 웃음이 가득했다. 예조판서가 대답한다.

"왜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 문화를 숭상해서 오늘의 문명을 이룩한 것이다. 왜국의 글과 말과 직조와 도자와 건축이며 회화 등 모든 생활고 예술이며 기예는 모두 다 우리 고구려, 신라, 백제 사람들로 인해서 조성되고 전수되지 않은 것이 없다. 불교도 역시 우리나라를 거쳐서 건너간 것이니 공부하는데 많은 참고가 되리라. 우리 주상전하께 아뢰어 좋은 기회를 줄 테니 안심하기 바란다."

왜승 정우는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꼭 전하께 아뢰시어 얼마 동안 유해서 좋은 공부를 하도록 해주시옵소서."

본토 왜인을 대접하는 연회는 화기애애한 속에 파했다.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는 연회를 파한 후에 대궐로 들어가 세종께 아뢰었다.

"왜국 본토 원씨의 사자 중 정우를 음식을 주어 우대하고 우리는 대마도를 응징할 뿐 본토는 공격하지 아니한다 했더니 백배치사를 했습니다. 곧 부하를 저희 장군한테 보내서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세종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지으셨다.

"잘 처리했소!"

한 말씀을 내렸다. 예조판서가 다시 아뢴다.

"사자 왜승은 우리의 찬연한 문화와 의리있는 풍속에 심취돼 좀 더 묵으면서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어찌하오리까?"

"그래? 그렇다면 묵게 해주지. 그것이 왕화라는 거야! 하하하."

세종전하의 용안에는 만열의 빛이 떠돌았다. 예조판서 허조가 다시 아뢴다.

"그렇다면 왜승을 어느 곳에 두어 공부를 하게 하오리까?"

세종전하는 답을 내린다.

"정동에 흥천사가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 두어 우리나라 승려들과 함께 불경 공부를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정동의 흥천사는 태조대왕의 계비인 방석의 모후의 능 정릉의 원찰이 있었습니다. 규모가 대단히 크고 우람합니다. 외국 사신을 거처케 할 곳이 못 됩니다."

"강비의 묘소는 상왕 전하께서 연전에 성북 정릉동으로 이장해서 능침이 없으이, 왜국사람이 거처한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고, 또 사찰의 규모가 크고 화려한 것은 나라의 자랑거리도 되는 것이니, 왜사를 우대해서 대접하는 뜻에서 흥천사에 묵게 하는 것이 좋겠소."

"전하의 의향이 정 그러하시다면 성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예조판서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왜승 정우를 흥천사에 유하게 하고 모든 것을 우대해 대접했다. 왜승 정우는 조선 정부에서 능소의 원찰이었던 웅장 화려한 흥천사에 유하게 하여 극진하게 편의를 보아주니 심열성복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부사를 본국으로 보내서 빨리 조선국왕께 사은하는 뜻을 표하라 했다. 정우의 편지를 받아 본 일본 서해로 축전주 석성부관사 평만경은 곧 사신을 보냈다.

'조선국 예조판서께 아뢰옵니다. 조선국 왕 전하께서 의 아니 대마도 무리를 응징하시고, 구주 본토는 정토하지 아니 하신다 하니, 감격한 마음 형언할 길 없습니다. 조공으로 토산품을 바치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옵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통호에 주시는 기념으로 소인 평만경의 인자를 한 벌 내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예궐해서 세종전하께 아뢰었다.

"전하의 흥대하신 외교정책이 크나큰 효력을 내렸습니다. 일본 구주의 서해로 총관 평만경은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고, 본토 공격을 아니 하신다는 성지에 감격하여 원합니다. 그리하옵고 통호하는 것을 윤허하시는 기념으로 자기의 도장을 새겨서 하사하신다면 한평생 저희 국가문서에 사용하겠다고 원합니다."

세종전하는 두 신하의 말씀을 듣자 용안이 화려했다.

"옛말에 이이제이란 말이 있지 아니한가! 이것이 왕도정칠세, 평화로운 속에 만백성을 어거하는 것이 천도요 곧 인도가 아니겠는가. 왕도정치란 별것이 아닐세. 사신을 우대해 주고, 좋은 옥돌로 도장을 새겨서 주도록 하게. 도장이 조각된 후엔 내가 친히 왜사를 인견하고 회유해 보내기로 하리라!"

두 신하는 청명하고 물러났다. 왕도정치를 하는 천자의 나라에서는 제후가 조공을 바쳐서 변방이 되기를 원하면 면복과 도서를 내리는 것이 전례다. 일본 구주의 서해로를 총관하는 평만경이 통호하기를 원한 후에 도장을 내려줍소사 하고 조선 국왕께 청구한 것은 역시 이러한 전례와 관습에서 위해진 일이었다. 한편 대마도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예조판서는 도자전 도영수를 불렀다.

"지금 대왕께서는 침입해 들어오는 대마도 외적을 정벌하기 위하여 대군이 출동을 개시하는 중이거니와 일본 본토의 왜인들은 우리나라 위엄에 눌려서 조공을 바치고 도장을 내려줍시사 원하므로 상감께서는 좋은 인재를 구하여 조각해주라 하셨고, 전하께서 왜왕에게 하사하시는 도장이니 특별히 홑벌로 새겨야 하겠소. 좋은 옥돌로 된 인재가 있겠소?"

도자전 도영수는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마침 백옥으로 된 인재가 한 벌 있기는 합니다마는, 크기가 얼마나 하면 되겠습니까?"

"사방 두치 가량이면 볼품이 있어 좋겠소."

"사방 두치 되는 백옥 인재라면 극히 귀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위신을 보여 전하께서 왜왕에게 내리시는 인장이니 극력 조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각은 어찌 새기오리까?"

"일본 서해로 총과 평만경인이라 전자로 새기게 하오."

"전서는 사자관에 명하시어 도자전으로 보내주십쇼."

"며칠이나 걸리겠소? 전하의 엄하신 분부시오."

"글씨만 써서 보내주시면 밤을 도와 일을 하겠습니다. 국가 비상시에 처한 중대한 일이온데 어찌 한만히 거행하오리까. 이틀 말미만 주시옵소서."

예조판서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사자청에서는 고전체로 왜왕의 이름을 써서 도자전으로 넘겼다.

이틀 후였다. 도자전 도제조는 사방 두 치의 백옥 도장을 비단으로 바른 도장함에 넣어 예조에 바쳤다. 형산의 백옥 한 덩이가 조선으로 굴러 들어와서 도자전 도영수의 손에 보장되었던 일품이었다. 예조판서도 난생처음 보는 백옥 인장이었다. 말쑥하게 티 한 점 없는 깨끗한 백옥 도장은 차가운 듯 부드럽고 부드러운 듯 차가웠다. 맑은 기운이 사람의 눈을 현란케 했다.

예조판서는 감탄했다.

"이것이 무슨 옥인가?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구려."

"그것은 형산백옥이란 옥돌입니다!"

"형산백옥? 글에서 읽기만 했더니 실물을 얻어서 인제 보는구먼! 옛날 중국의 진시황이 화씨벽을 얻어서 이사를 시켜 새겼다는 옥새와 비슷한 그 옥돌인가?"

"화씨벽만은 못합니다마는 우리나라에 몇 개 아니 되는 형산백옥이올시다."

"왜인에게 주기는 너무나 과한데."

예조판서는 아까운 듯 이리저리 옥도장을 어루만졌다.

"정 그러시다면 상감마마께 아뢰어 보시고 처분을 내려줍시오, 그 다음가는 옥돌은 여러 개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조판서는 도자전 도영수가 새겨 바친 백옥도서를 들고 대왕께 뵙기를 청했다. 세종전하는 지체치 않고 연침으로 예판을 불러들였다.

"전하께옵서 왜왕에게 내리실 도서가 완성되었습니다."

허조는 소매 안에서 도서를 꺼내 받들어 올렸다.

"경이 보아서 좋다면 그대로 전할 일이지 과인에게까지 감하게 하지 아니해도 좋지 아니한가?"

전하는 웃으며 말씀을 내렸다.

"너무나 과한 듯하와 뵙고 바꾸려 합니다."

"얼마나 좋은 물건이란 말인가?"

전하는 미소하시며 어수로 도서를 받으셨다. 비단 상자가 열었다. 맑고 깨끗한 백옥 도장이 광채를 뿜었다. 세종전하는 옥돌의 품질도 짐작했다.

"이것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형산백옥의 일종이로구나.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옥이로다!"

"그러합니다. 도자전 도영수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도 몇개 없는 물건이라 합니다. 너무나 과해서 처분을 묻자옵고 다음 가는 옥돌로 바꿀까 합니다."

전하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이왕 주는 바에야 홑벌로 주어야지 않겠소. 큰나라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상품 도장을 주어야지. 뿐만 아니라, 공손하게 조공을 바치는 성의를 보아서라도 가상하게 대접을 하는 것이 좋겠소. 그대로 주도록 합시다."

언제나 전라의 마음은 크고 너그러웠다.

"성의 그러하시다면 그대로 봉행하겠습니다. 평만경의 사신을 전하께서 친히 인견하시고 도장을 내려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와 있던 승려 정우까지 입시케 한 후에 사신을 불러서 주는 것이 좋겠소."

예조판서 허조는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 이윽고 전하는 근정전에 임어했다. 전상과 전 아래 품계석 앞에는 영의정 이하 만조백관들이 순서를 따라 금관조복과 사모품대로 엄숙히 나열해 있고, 좌우편에는 기치창검의 의장이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휘황했다. 조금 뒤에 예조참판은 일본 구주 평만경의 사신과 승려 정우를 대동하고 들어와 세종전하께 사배를 드려 알현케 했다. 일본 구주 사신은 예조에 올렸던 평만경의 통호를 구하는 글월을 전하 앞에 부복해서 낭독했다.

세종전하는 친히 옥음을 내린다.

"일본 구주의 서해로 총관 평만경이 조공을 바치고 통호하기를 청하면서 도장을 하사하라 하니 가상한 일이다. 앞으로 더욱 정성을 다해서 대마도 해적들을 제압하라. 먼저 건너온 승려 정우도 우대해서 흥천사에 유아게 했다. 이 뜻을 만경에게 전하라. 그리고 원에 의하여 형산백옥 도장을 평만경에게 내리니 더욱 정성을 다하여 평화롭게 통호하는 일을 계속하게 하라!"

세종전하의 옥음은 낭랑하고도 엄숙했다. 구주 본토의 왜국 사신과 승려 정우는 머리를 조아리고 백번이나 절을 드려 사은했다. 전하께서는 다시 예조판서에게 분부했다.

"예조판서는 평만경에게 내리는 옥도장을 왜사에게 전하라!"

예조판서 허조는 준비했던 옥도장과 곽을 비단보에 싸서 사자에게 전했다. 왜사는 다시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분부를 내린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에게 영을 내려서, 구주 본토에서 조공을 바치매 왕래하는 왜사들에게는 절대로 적대행동을 취하지 말고 보호케해서 차질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병조에서는 일일이 표신을 홰사에게 주어서 대마도 해적이 아닌 것을 증명해주도록 하라."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는 전하의 작은 일에까지 빠짐없이 소명하게 처리하시는 일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아뢴다.

"왜인들의 복색이 본토와 대마도의 구별이 없사와 판단하기 극히 곤란합니다. 이제 주상전하의 특별하신 분부를 받들어 병조에서는 표신을 마련해 줄 뿐 아니라 내보낼 때마다 비당 한 사람씩 안동에서 모든 해방진에 통고하여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세종전하는 다시 한 말씀을 내린다.

"난폭한 무리를 정토하고 평화를 숭상하는 선민을 유도하여 보호하는 일은 천지조화의 원칙이요, 왕도정치의 근본이다. 비록 겨레가 다른 이족이라 하나 착하고 죄 없는 자에게 해가 되는 일이 있게 한다면 이것은 하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다. 비록 정토하는 왕군을 움직이는 이때라 할지라도 옥석이 구분되지 않도록 명심해서 처리하고 모든 장병들에게 나의 뜻을 선포하라."

장중한 전하의 말씀을 듣자 만조백관들은 도량 넓은 성주를 모신데 대한 흐뭇하고 느긋한 회포가 가슴마다 가득했다. 왜국 사신들도 전하의 말씀을 왜역을 통해서 듣고 감격한 눈물을 머금었다.전하의 명에 의해서 남해바다 삼엄한 경비속에서도 왜국 본토의 사신들은 무사하게 왕래할 수 있었다. 소문은 일본 전토에 퍼졌다. 조선은 대마도의 국지정토를 할 뿐 왜국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 뜻을 확실하게 알았다. 본토 왜인들은 기뻤다. 일본 서해로 구주총관 우무위 원도진은 평만경이 사신을 보내듯이 조공으로 토산품을 바치고,

'남만선의 해적의 떼가 조선해협으로 향하는 듯하오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상소를 올렸다.

이때 서양해적의 배가 구주해협으로 침범했던 모양이다. 예조에서는 원씨의 사자를 우대해 주고,

'대마도 적도들이나 잡아 보내라!'

답서를 주어 보냈다. 그 후에 남만선은 조선해협으로 오지 아니했다. 세종전하의 평화를 사랑하는 왕도정치는 왜국 본토에 자자하게 퍼졌다.

 

대군 진격

 

삼군도체찰사 이조무는 대마도 정벌의 대명을 받은 후에 모든 군비를 정돈했다. 경기, 충청, 전라, 경사 사도의 수군과 전선들은 속속 거제도로 집결되었다. 세종 개해 유월 십칠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중군, 좌군, 우군의 삼군을 통솔하고 아홉 명 절제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 대마도 출정을 결행할 것이다. 모든 준비는 다 되었느냐?"

"질서정연하게 삼군의 전함과 수군들이 함빡 정돈해 있습니다."

아홉 절제사는 일제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곧 출동명령을 내리라. 천기를 바라보니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바다에 물결 또한 드세지 않다. 곧 거행하도록 하라!"

모든 아장들은 일제히 삼군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북소리가 '두둥둥' 울렸다. 병선마다 대장기가 바람에 펄펄 날렸다. 항구 안에 겹겹이 정박해 있던 전함은 일제히 돛대를 올리고 닻줄을 풀기 시작했다. 군사들의 들레는 소리와 전성마다 북을 울리는 소리는 산과 바다를 뒤흔들었다. 호탕한 기세에 놀라 어룡도 물결을 박차고 바다 밑으로 쭈그렸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갑옷 입고 투구 쓰고 장검을 비껴들고 장대 위에 높이 올라 군례를 받았다. 아홉 절제사는 단 아래 서고 바다 위에는 전함이 학익진의 형세를 이루어 북소리를 울리며 기를 높이 들어 삼군도체찰사를 향하여 군례를 드렸다. 취타 소리, 징소리, 나팔소리, 태평소 소리, 바라 소리는 군례를 드리는 동안 천지를 진동했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군례를 받은 후에 절제사들에게서 보고를 받는다. 도절제사가 구군복 화려한 옷에 전통 메고 장대 앞에 나와 아뢴다.

"삼군 병선 총수는 227척이옵고 장사의 총수는 17,280명이요, 그리하옵고 군사들이 싸우면서 먹을 양식은 65일 동안 밥을 지어 먹을 양곡을 확보해서 배에 실었습니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전군에 향하여 훈령을 내린다.

"너희들은 하늘을 대신하여 대대로 우리 땅에 침략해 들어오는 악한 무리 대마도 해적들을 토벌하는 정의로운 군사다. 다만 대마도를 포위하여 항복 받을 뿐 구주 본토의 왜인들은 정벌하지 아니하기로 했다. 이것은 왕도정치의 크나큰 덕화를 펴시는 우리 왕상전하의 너그럽고 크신 신책시다. 절대로 무죄한 백성과 늙고 어린 자들에게는 손을 대지 말도록 하라!"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청령했다. 대답 소리는 또다시 하늘과 땅을 흔들었다. 이종무는 또다시 훈시를 계속한다.

"우리가 행군하는 길은 바다다. 지금 날씨는 무척 청명하고 바람 한 점 없다. 그러나 바다의 천후는 삽시간에 변한다. 극히 조심해서 척후배 세척은 앞을 서서 나가라! 전후를 살피며 기를 흔들어 군호하며 나가라!"

모든 장사들은 도체찰사 이종무의 명령에 복종했다. 대장군인 도체찰사 이종무는 담력과 효용이 절륜할 뿐 아니라 조수의 간만과 천후의 변화를 빨리 살필 줄 아는 명장이었다. 스스로 중군이 되어 전함 장대 위에 높이 올라앉아 망망한 만경창파를 박차며 진군을 개시했다. 227척의 전함이 중군 전함을 호위하고 좌우 함대가 학의 날개를 편듯 호호탕탕 기세 좋게 현해탄을 향해 나갈 때 홀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끼기 시작하면서 돌풍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앞에 나갔던 척후배 세척에서 기가 힘차게 흔들렸다. 대장군 이종무가 중군 장대 위에서 바라보니 세척의 척후배에서는 일제히 검은 기를 높이 흔들며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종무가 당초에 척후배를 앞질러 보낼 때 푸른 기, 붉은 기, 검은 기 세 벌씩을 나누어주었다. 붉은 기는 비가 쏟아질 때 흔드는 거요, 푸른 기는 일기가 청명한 것을 알려주는 거요, 검은 기는 돌풍과 해일이 일어날 조짐이 있을 때 흔들기로 약속한 신호기다. 대장군 이종무는 침착했다.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발생되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곧 장대 위에 친히 올라 대장기를 흔들고 북을 울렸다. 학익진을 벌여 나가던 전함들은 대장선에서 흔드는 기를 보고 북소리를 듣자 일제히 닻을 내렸다. 대장군 이종무는 급히 전령을 내렸다.

"천기가 수상하다. 하루 이틀 진군이 늦다 하더라도 한 척의 전선이나 한 명의 군사라도 희생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빨리 뱃머리를 돌려 거제항으로 집결시켜라!"

대장군의 전령은 순식간에 전군함에 전해졌다. 학익진을 이루었던 227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돛대를 내리고 키를 돌렸다. 전함들은 시각을 지체치 않고 일제히 거제항으로 집결되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또다시 전령을 급히 내린다.

"오늘 초저녁 때부터 크나큰 폭풍과 해일이 일어날 것이다. 연환계를 써서 2백여 척의 배를 함빡 철환으로 연결시켜서 배가 전북되지 않게 하고 수군들은 밤을 도와 수직하라!"

대장군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군사들은 일제히 배에 닻을 내리고 쇠고리로 배와 배를 연결시켜 폭풍우와 해일에 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밤 초저녁 때부터 바람이 강하게 불고 비가 쏟아지면서 바다 위에는 돌풍과 해일이 길길이 솟구쳐 일어났다. 그러나 거제항은 예로부터 바람과 해일과 돌풍을 막는 양항이었다. 흉악하고 무서운 돌풍과 해일 속에 배 한 척 전복되지 아니하고 군사 한 명 다친 사람이 없었다. 돌풍과 해일은 이틀 동안을 계속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이틀동안 쉬는 사이에 군사들에게 고기와 술과 밥을 배불리 먹였다. 사기는 충천하고 대장군 이종무의 슬기로운 용병을 찬양하는 소리가 높았다.

227철의 대함대는 이틀 밤을 거제 남면 주원방포에서 묵었다. 619일 임진이 되었다. 날은 다시 쨍쨍하게 개고 바다에는 바람도 드세지아니했다. 해변은 다시 안온하도록 고요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새벽부터 천기를 살핀 후에 전 함대에 영을 내렸다.

"돌풍과 해일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일기가 명랑한 법이다. 그러므로 태풍일과 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이제부터는 하늘에는 아무런 이변이 없을 것이다. 모든 장병들은 마음을 턱 놓고 다시 전 함대를 출동시키라!"

원래 명장의 믿음직한 지휘였다. 모든 장수와 사병들은 이틀 동안 배불리 먹어 기운이 왕성했다. 어깨를 으쓱거려 출전준비에 바빴다. 사시가 되었다. 227척에 분승한 17,280명의 수군 용사들은 일제히 전함을 띄워 대마도로 향했다. 바다의 물결은 잔잔하고 징소리, 북소리 나팔소리에 놀란 백구때들은 산지사방 펄펄 날았다. 하루낮, 하룻밤을 지나 동이 환하게 텄다. 대마도가 바로 지척에 보였다. 20일 오시가 되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먼저, 전함 10척은 기를 내리고 전함대의 앞에 서서 대마도로 상륙하라. 나머지 2백여 척은 서서히 대마도를 포위할 것이다!"

대장군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전위부대였던 전함 10척은 기를 내리고 쏜살같이 대마도로 향했다. 대마도 왜적들은 10척의 배가 쏜살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조선으로 노략질하러 갔던 저희들 배가 크나큰 재물과 양식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잘못 알았다.

"배가 온다! 조선으로 갔던 우리 배가 온다!"

바닷가에 나갔던 한놈이 헐레벌떡거리고 대마도로 뛰어 들어갔다.

"무어야, 배가 몇 척이나 오느냐?"

"여남은 척이 오는 것 같다."

"50여 척 간 배 중에서 선발대가 오는 구나. 애를 썼다. 물건을 많이 뺏어 올 것이다. 빨리 나가서 마중을 해라."

늙은 놈팡이가 지껄였다. 이 소문은 대마도 온 동리에 퍼졌다. 여자들이 뛰어나왔다.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아버지가 온다. 금은보화 조선 보물을 산더미같이 싣고 오는 모양이다. 어서 빨리 해변으로 나가보자."

한편에서는 늙은 놈팡이들이 지껄였다.

"마중을 나가는데 빈손으로 나갈 수 있느냐. 곡식과 재물을 태산같이 싣고 오는데, 죽다가 살아오는 사람들을 어찌 빈손으로 나가 맞이한단 말이냐. 술을 거르고 소를 잡아서 고생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온 섬사람들은 노소남녀를 말할 것 없이 술을 거르고 고기를 재어서 제각기 아비와 자식과 형제들 도둑놈들 맞이하러 해변으로 나갔다. 대마도 앞바다에는 새까맣게 왜추들이 모여들었다. 늙은 자는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손에 술병을 들었다. 젊은 계집은 새끼를 업고 바구니에 담은 고깃덩어리를 들었다. 어린것들은 누런 코를 줄줄 흘리며 손가락을 입에 물고 도둑질해 돌아오는 아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점점 가까이 왔다. 늙은 놈, 늙은 어미, 젊은 계집, 어린 자식들은 가깝게 포구로 들어오는 열 척의 배를 보고 깡충깡충 뛰면서 손뼉을 치고 손을 흔들어 환성을 오렸다. 젊은 여자들은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었다. 저희 남편이 돌아오는 줄 알고 팔이 떨어져라 하고 수건을 흔들어 댔다. 열 척 배는 포구에 닿아졌다. 배 안에서 사람들이 우둥우둥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왜추들이 바라보니 저희들 대마도 사람들이 아니다. 칼과 창과 활을 답은 조선 장사들이었다. 수백 명 조선 군인들이 날랠 용 자 벙거지를 머리에 쓰고 범같이 소리치며 육지로 달려들었다. 대마도 왜추들은 '으악' 소리를 치며 기절초풍을 했다.

"조선 군사들이다!"

고꾸라지며, 자빠지며, 술병과 고기 뭉치를 내던지고 혼비백산이 되어 섬 안으로 달아났다. 대마도 섬 안은 발끈 뒤집혔다.

"조선 군사가 쳐들어온다. 수백 척의 큰 병선에 십만 대병이 쳐들어온다."

"무어야, 조선 군사 십만 대병이?"

모두 다 경풍이 되어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노략질하러 갔던 우리 군사가 오는 줄 알았더니 조선 군사가 온다. 우리 군사는 모두 다 함몰이 되어 죽은 모양이다. 어찌하면 좋으냐?"

발들을 동동 굴렀다.

"도망을 가야 한다. 어서 빨리 달아나자. 잘못하다가는 다 죽어 버린다."

"어디로 가느냐?"

"별수 있느냐, 산골 속으로 피해가야 한다."

섬 백성들은 양식 보따리를 들고 어린 자식들을 업은 채 험난한 산골 속 바윗돌 틈으로 기어들었다.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조선 수군이 대병이 풍우같이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자 황겁하기 짝이 없었다. 갈팡질팡,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일지병마를 거느리고 배를 타고 장기로 달아났다.

한편 열 척의 척후배를 선두로 했던 220여 척의 병선과 17천여 명의 아군은 대장군 이종무의 지휘에 따라 서서히 섬으로 상륙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항왜를 통하여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에게 항복하라는 격문을 보냈다. 그러나 섬은 이미 텅 비다시피 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상륙한 대부대는 길을 세 곳으로 나누어 상도와 하도의 적을 수색했다. 왜추들은 해변과 산골 험한 바위틈에 복병을 구고 아군을 대항했다. 전투는 사흘 동안을 계속했다. 아군은 파죽의 형세로 적의 병선 129척을 노획하고, 적호 1,939호를 불살랐다. 적병 114명을 목 베고 121명을 사로잡았다. 이밖에 중국 사람 남녀 131명을 노획했다. 중국에서 물길을 따라 대마도에 거접했던 한인들이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한인들을 진무한 후에 도망친 왜추들의 상황을 물었다.

"너희들은 배은망덕한 왜추들이 아니고 한인이다. 너희들의 목숨을 보장해 줄 테니 겁내지 말고 이실직고하여 묻는 말에 대답하렷다."

한인 부로들은 고두백배하고 대답한다.

"저희들은 중국에서 배를 부리던 사공들의 후손입니다. 선대적에 풍랑에 휩쓸려 이곳에 왔다가 이내 거접해 살고 잇는 무리들입니다. 살려주신다니 은혜로운 말씀 이루 다 아뢸 길 없습니다. 물으시는 대로 왜추들의 사정을 은휘하지 아니하고 아뢰겠습니다."

"저항하는 왜적 수백 명은 이미 다 죽이고, 항복 받았거니와 꼭지 두목인 도도웅환의 무리는 어디로 달아났느냐?"

"도도웅환은 처음에는 배 열척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 노략질하러 갔던 저희 배가 들어오는 줄 알고 무한 기뻐했다가, 급기야 상륙하는 군사가 조선 군사인 것을 알자 친위군의 일부를 매복해서 대항하라 했다가, 수백 척의 큰함대가 계속해서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지소조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직속 부대의 일지병마를 거느리고 황황히 배를 저어 장기로 달아났습니다."

"장기는 왜국 본토 구주의 서편 끝이 아니냐?"

", 그러합니다."

"데리고 달아난 군사의 수효는 얼마나 되느냐?"

조선으로 노략질하러 나간 군사가 천여 명이고, 이번 장군의 위하를 대항하다가 죽고 상한 자가 백 여명이 넘었으니 데리고 달아난 군사는 불과 천 명 이내일 것입니다. 저자들은 필시 구주 본토의 구원을 얻으려고 그곳으로 달아난 모양이나, 구주 사람들은 이번 싸움에 개입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조선 국왕 전하께 조공을 바치고 좋게 지내자고 사자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니, 도도웅환을 도와줄 리 만무합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한인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주주 본토의 사자들이 조공을 바치러 본국에 드나드는 것을 이종무는 잘 알고 있는 때문이다. 다시 한인에게 묻는다.

"적이 배에 싣고 장기로 달아난 군량은 얼마나 되겠느냐?"

"잘해야 수십 섬밖에 못 실었을 것입니다."

"수십 섬을 가지고 천 명 군사를 어찌하여 먹여 살린단 말이냐?"

"구주 사람들한테 얻어먹을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마는, 구주 사람들이 대마도 사람들에게 군량미를 대어 줄 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해마다 기막힌 흉년이 들었습니다. 돈 많은 부자들도 달아날 때 창졸간의 일이라 한두 말밖에 가지고 달아나지 못했습니다. 전쟁은커녕 모두 다 굶어 죽을 판입니다."

이종무는 한인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밤에 대장군 이종무는 좌우중군 삼군의 아장들을 장청에 불러 놓고 전략을 협의했다. 이종무는 아장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제장들도 한인에게 적의 정보를 들어 알았거니와, 지금 적의 괴수 도도웅환은 아군의 위세에 눌려서 황겁하게 일지병마를 이끌고 대마해협을 거쳐 구주 본토의 서편인 장기로 도망을 쳤다하오. 그러나 구주 본토의 대명들은 우리나라에 조공을 드리고 있으니 절대로 대마도 군사들을 도와줄 리 만무하오, 말을 들으니 천여명 대마도 군사들은 급히 달아나느라고 군량미조차 싣고 간 것이 불과 수십 섬이라 하니, 우리 군사를 대항하기는커녕 굶어 죽게 되어 자중지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오. 멀리 잡고 한달 가량만 지나간다면 적들은 항복하고 말 것이니, 오래 묵을 계획을 차리는 것이 좋겠소."

우군도절제사 이지실이 출반하여 말한다.

"대장군의 말씀과 같이 구주 본토의 왜인들은 상왕 전하의 위엄에 눌려서 대마도 정벌에 대항하지 아닐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하나 우리는 도도웅환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까지 도로 와서 항복하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 장기까지 나가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군도절제사 이지실의 말을 듣자 좌군절제사 박실이 출반해 말했다.

"이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날쌔고 용맹스런 군사들입니다. 전쟁터에 나와서 적과 대결할 기회가 없다면 도리어 기운이 떨어지고 권태증이 생기는 법입니다. 바다 물결을 박차고 장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옳습니다. 이 도절제사와 박 절제사의 의견이 가한 줄 아뢰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다 대마해협을 건너서 도도웅환이 도망가 있는 장기까지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이종무는 역시 이름난 장수다. 독선을 취해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지 아니했다.

"여러분의 의향이 정 그러시다면 한 번 장기까지 나가서 대마도 도둑의 괴수를 생포하기로 합시다. 병선이 2백여 척에 여룡여호한 수군이 수만 명이고 또한 양식까지 넉넉하것다 무엇을 주저하겠소.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에 출정 준비를 완료한 후에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대마해협으로 건너기로 합시다."

대장군 이종무는 쾌하게 결단을 내린다. 모든 장군들은 다시 출정준비에 바빴다.

한편 이종무는 또다시 삼군에 전령을 내린다.

"지금 오월기후다. 척박한 땅이라서 아직도 보리 타작을 아니한 곳이 많다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적의 식량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구주 장기로 출발하기 전에 말끔하게 타작을 해서 우리 전함에 싣고 청야를 하도록 하라."

청야란 말쑥하게 들을 깨끗하게 치워서 적군의 양식이 되지 않도록 하게 하는 병법 중의 하나다. 대장군의 명이 떨어지니 수만 명의 조선 군사들은 일제히 농군이 되어서 상도, 하도에 흩어져 있는 보리밭을 샅샅이 찾아서 타작하기에 바빴다.

 

장기원정

 

만여 명의 아군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일변 보리를 베고 일변 타작을 해서 곡식을 털기 시작했다. 타작한 보리는 무려 수천 섬이었다. 작석을 해서 병선마다 가득가득 실었다. 만여 명이 두어 달 먹고도 남을 만한 풍부한 군량미다. 사기는 백 배나 솟구쳤다. 대장군 이종무는 대마도의 청야를 마친 후에 일진 좋은 길일을 택하여 장기로 향하는 진격명령을 내렸다. 일기는 온화하고 바람은 잔잔했다. 창파를 헤치며 2백여 척의 병선은 북을 '둥둥' 울리며 대마도 해협을 건넜다. 바다 위에서는 위풍당당한 아군의 기세에 눌려 왜선 한 척 대드는 일이 없었다.

망망대해다. 하루낮, 하룻밤을 행선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중군장대에 높이 올라 바다 밖을 바라본다. 구주 반도의 서편 첨단인 장기 항구가 가물가물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급히 북을 쳐서 전령을 내린다.

"장기 항구가 가까워졌다. 일기 해협만 지나가면 바로 장기다! 병선마다 크게 위세를 보여 징과 꽹과리와 북을 어지럽게 쳐라. 그리하고 모든 군사는 일제히 긴장된 태세를 취해서 활과 창을 들어 임전 태세를 취하라!"

좌군, 우군, 중군은 대장군의 명령을 듣자 질서정연하게 학익진을 이루어 일기 해협을 통과했다. 이때 돌연 왜선 큰 배 한 척이 흰기를 어지럽게 흔들며 바다 위로 나타나 쏜살같이 우리 병선을 향하고 달려왔다. 척후배가 급히 대장군 이종무의 중군선에 가까이 가서 아뢴다.

"왜배 한 척이 백기를 흔들며 저어옵니다. 대마도 왜추의 항복하는 배인가 봅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구주까지 달아난 대마도 해적의 괴수가 아직 항복하러 들지는 아니할 것이다. 협사를 하고 온 놈인지 모르겠다. 배 안에는 몇 놈이 타고 있더냐? 그리고 복색은 어떻게 차렸더냐?"

"관원 복색을 차린 세 사람뿐입니다. 무장은 하지 아니했습니다."

"어디서 오는 자인지 똑똑히 물어보고 몸수색을 한 후에 나한테로 데리고 오너라!"

척후배는 다시 살 같이 달려갔다. 이윽고 왜선 한 척을 인도해서 대장 군선으로 가까이 왔다. 척후배 장교가 다시 고한다.

"일기주총관의 사자이온데 우리나라 왕상 전하께 조공을 바치러 가는 길이라 합니다. 때마침 조선 수군 대장의 함대를 만났으므로 장군께 경의를 표하고 조선으로 들어가는 허가를 얻으려 한다 합니다."

이종무는 비로소 일기의 왜인들이 조선 수군의 위세에 놀라서 혹시나 장기로 향하는 도중에 일기를 공격할까 두려워서 구주총관들의 본을 떠서 부랴부랴 조선 정부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 것임을 짐작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척후배 장교에게 명령을 내린다.

"왜국 일기주총관의 사자라는 자들을 대장선으로 인도해라."

이때 조선 병선 2백여 척은 왜배 한 척이 대장선으로 접근해오는 것을 바라보자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대장선을 호위해 둘러쌌다. 왜추들은 어마어마한 조선 병선의 기세에 눌려 부들부들 떨었다. 척후장교는 일기주총관의 사신이라는 자들을 대장선으로 인도했다. 왜추들은 대장군 이종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배를 드렸다. 이종무는 갑주에 투구 쓰고 호상에 높이 앉아 묻는다.

"너희들은 어느 곳에 소속된 왜추들이며 요망하게 일엽편주를 저어 감히 나를 만나보겠다 했느냐? 왕군의 항해를 방자하게 범했으니 군법 시행을 해서 목을 베리라."

이종무는 일부러 노기를 얼굴에 가득 띠고 추상같이 얼러댔다. 왜추들은 바들바들 떨었다. 턱에 경련이 일어났다. 이빨이 다그락 다그락 소리를 내며 달달 떨었다.

"그저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목숨을 살려줍시오. 철이 없고 무식해서 대함대의 항해를 멈추게 했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하오나 좁은 소견에 급히 아뢸 일이 있어 백기를 흔들어 충정을 전하려 했습니다."

"무슨 소회가 있어서 내 배를 멈추게 했더냐?"

이종무는 여전히 노기등등하였다.

"소인들은 일기주총관 상만호 도영의 신하로서 토산품을 받들고 조선 국왕께 조공을 바치러 가는 길이옵니다. 뜻밖에 해상에서 대마도를 토벌하시는 대장군의 대함대를 만났습니다. 경의를 표해서 이 사실을 장군께 고하고, 허가를 얻어서 조선으로 향하려 합니다. 저희들은 대마도의 해적과는 다른 구주 본토에 소속된 왜인들이옵니다. 굽어살피시어 귀국으로 조공드리러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고 무사하게 한양에 당도하도록 표신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왜추들은 이내 품 안에서 일기총관이 조선 예조판서에게 보내는 국서와 조선 국왕 전하께 바치는 조공 물목을 꺼내 보였다. 대장군 이종무가 받아 보니 틀림없는 일기총관이 조선 국왕께 신하가 되어 통호하기를 원하는 글월이었다. 이종무는 즉석에서 놋쇠로 만든 수묵통 뚜껑을 열고 필낭에서 붓을 꺼내서 부산포 진관에게 보내는 글월을 썼다.

'왜국의 일기주총관이 우리나라 주상전하께 칭신을 하고 조공을 바치기 위하여 사자 세사람이 가는 길이니 입국을 허락해 주고 한양까지 가는 편의를 보아주기 바라오. 정동대장군 도체찰사 이종무.'

이종무는 쓰기를 마치고 수결을 두어 일기 사신에게 내주었다. 일기 사신들은 고두백배하고 대장군의 글월을 품안에 간직한 후에 자기 배로 돌아가 일로 조선으로 향했다. 세종대왕을 주상전하로 모신 조선의 위세는 바다 밖 모든 나라의 추앙하는 좌표가 되었다. 조선함대 2백여 척은 일기 사신을 떠나보낸 후에 더한층 사기가 왕성했다.

"구주 본토의 왜추들이 우리나라 위세에 눌려 변방이 되기를 원해서 조공까지 바치러 가는 판국인데 우리의 옛땅이었던 대마도에 사는 해적들이 까불어 댄들 몇 푼어치나 까불어댈 테야! 아주 이번에 씨를 말려 버리고 대마도는 무인지경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저놈들이 장기로 달아났지만 일본 국왕 이하 구주의 모든 총관들이 우리나라의 신하 되기를 원하는 판인데 대마도 놈들을 도와줄 리 만무하다. 빨리 해적 괴수들이 도망간 곳을 수탐해서 깡그리 산 채로 잡아서 항복을 받아야 한다.!"

2백여 척의 병선에서는 군사들이 노를 저어 푸른 물결을 박차며 박장대소들을 하여 떠들어댔다. 위풍당당한 대함대는 호호탕탕 승전고를 울리며 일기 해협을 지나 서편으로 내려가 장기현 하현군 대선월이란 곳에 당도했다. 옛 지명으로는 훈내곶이라고도 하는 곳이다. 대장군 이종무는 급히 전령을 내렸다.

"먼저 적의 정세를 살펴야 할 것이다. 다음 명령이 내릴 때까지 병졸들은 전함 위에 머물러 있고 일체 상륙하지 말라!"

대장군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학익진을 벌여 호탕한 기세로 바닷가에 들어왔던 2백여 척의 대함대는 일제히 북소리, 징소리를 거두고 일자진을 쳐서 해상에 닻을 내린 채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모든 아장들과 향도로 데리고 갔던 항왜 두 명을 거느리고 장대 위에 올라 육지를 바라보았다. 멀리 항구 뒤에는 겹겹이 둘러싼 산줄기가 솟아 있고 해변가에는 촌락이 점점이 벌어져 있었다. 다시 부두 앞을 바라보니 본토 백성들이 고기잡이배와 대마도 해적들이 끌고 간 병선들이 함께 섞여서 수백 척 나열해 있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향도에게 물었다.

"이곳이 대마도 도도웅환이란 자가 피신해온 곳이로구나!"

", 그러합니다."

"저기 보이는 저 산 이름은 무슨 산이라고 부르느냐?"

"누까오까라고 하는 산이올시다. 이곳에서 삼십 리가량 되는 곳에 있는 두지포라는 곳에 있는 산이올시다."

"산이 좀 험상맞아 보이는구나!"

"그렇습니다. 가파르고, 험한 골짜기가 많습니다."

"나무도 무성하구나!"

"왜국은 기후가 습하고 안개가 많아서 어느 곳이나 나무가 많습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 어떠한 전략을 생각해 보는 모양이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다시 항왜한테 묻는다.

"대마도 해적의 괴수 도도웅환이란 놈은 필시 저 산골 속에 숨어 있을 듯하다. 너희들은 이곳 지리를 짐작하고 있느냐?"

", 잘 알고 있습니다. 도도웅환은 구주 본토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해안선 일대에 숨어서 조선군의 동정을 엿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 구주 본토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 있지 못하느냐?"

이종무는 구주 왜인과 대마도 왜인과의 관계를 대강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한 번 물었다. 향도가 대답한다.

"구주 대명들은 조선국왕께 통호를 하자고 조공을 바치고 있습니다. 만약 도도웅환을 받아들인다면 구주까지 조선군이 토벌을 할 것입니다. 이러하니 도도웅환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뿐만 이니라 지금 구주도 식량이 부족한 형편인데 대마도에서 쫒겨온 군사들을 어떻게 먹여 살립니까? 이러하므로 구주에서는 도도웅환의 군사를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향도들에게 분부했다.

"이제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르리라."

향도들이 물러간 후에 이종무는 모든 아장들을 불러 명령을 내린다.

"오늘 하루는 군사들을 배 안에서 편히 쉬게 하고 내일은 이른 새벽에 밥을 지어 먹인 후에 일제히 상륙을 개시해서 야산에 올라 나무를 작벌하여 해안선 일대에 목책을 두르게 하라."

좌군 지휘관 박실이 묻는다.

"지금 군사들의 사기는 충천해 있습니다. 상륙하는 즉시로 절이 있는 곳을 수탐해서 적의 괴수를 사로잡는 일이 상책이올시다. 공연한 힘을 나무 베는 데 허비해서 사기를 태만케 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뢰오."

대장군 이종무는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웃고 대답한다.

"자리를 모르고 군사를 함부로 움직인다는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먼저 목책을 해안선 일대에 둘러쳐서 적의 도망갈 길을 끊고 적의 전선을 모조리 불살라 버린다면 적은 진퇴유곡이 되어 항복하고 말 것이니 공연히 군사들을 위험한 땅에 빠뜨리게 할 까닭이 없소. 대장은 항상 군사들의 귀중한 생명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오."

대장군 이종무의 말을 듣자 좌군 지휘관 박실의 얼굴엔 약간 무안한 빛이 떠올랐다.

"용장이 지장만 못하다고 합니다마는, 싸울 때는 싸워야하지 않겠습니까. 공연히 우유부단한다면 날짜만 천연할 뿐입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박실의 말을 듣고 껄걸 웃었다.

"우유부단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정세와 지리를 살피자는 것이지. 그리한 후에 용병을 한다면 백전백승하는 법이오. 두말 말고 대장의 군령을 지키시오."

좌군 지휘관 박실은 무료하게 물러났다.

 

적전상륙

 

대장군 이종무가 군사들을 일제히 상륙시켜서 야산 숲 속의 나무를 베어 해안선 일대에 목책을 두르자 한 것은, 돌 한 개를 던져서 새 두마리를 맞히자는 계획이었다. 첫째로 장기 훈내곶이포에는 부둣가에 고기잡이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약간 보일 뿐 대마도 왜병들의 모습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아니했다. 조선의 대함대가 이곳까지 쫓어온 것을 적의 괴수 도도웅환이 모를 리 만무하다. 반드시 복병을 숲속에 매복시켜서 대항할 것이 분명했다. 비교적 평탄한 곳에서 적을 유인해서 진살시켜 버리자는 것이요, 해안 일대에 목책을 두르자는 것은 오도가도 못하는 피곤한 왜적이 주림을 면치 못하여 저절로 항복하러 올 것을 예기한 계획이었다. 이때 대마도 해적의 두목 도도웅환은 훈내곶이에 있지 아니하고 두지포에서 10리 되는 험준한 산악지대 '누까오까'라는 곳에 있었다. 대마도에서 쫓겨온 도도웅환은 조선 수군의 대병이 설마 구주 본토인 나가사키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다. 당황하고 낭판이 떨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본시 구주로 도망쳐 온 것은 구주의 모든 대명들에게 구원병을 청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여러 곳 대명들에게 교섭했으나 모든 대명들은 조선과 통호하기를 원해서 제각기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는 중이라 모두 다 냉담하게 고개를 가로 흔들어 구원할 것을 거부했다. 식량은 얄팍얄팍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훈내곶이 포구에 배치해 둔 오십여 척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해적질을 하며 달아나고도 싶었다. 그러나 훈내곶이에는 벌써 조선의 대함대 2백여 척이 일자진을 쳐서 정박하고 있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리할 수도 없었다. 강악 산골 속에 갇힌 몸이 군사들과 함께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되었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하나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장탄식을 했다.

밤은 이미 깊었다. 도도웅환은 깜박거리는 호롱불 아래 이리 뒤치락, 저리 뒤치락 한숨만 쉬고 누웠을 때 보발 군사가 급히 뛰어와 문을 두드리며 고한다. 어부 복색을 하고 정탐꾼이 되어 훈내곶이로 내려갔던 자다.

"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훈내곶이에서 돌아왔느냐? 무슨 큰 일이 났느냐"

"내일 이른 아침에 조선 수군 일만 칠천여 명은 일제히 훈내곶이로 상륙을 한다 합니다."

도도웅환은 크게 놀랐다. 혀가 굳어서 말꼬리가 얼얼했다.

"또 한 가지 큰일 난 일이 있습니다."

"무어냐, 또 큰일 난 일이 있다? 무어냐?"

"야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서 해안선 일대에 책을 두른다 합니다."

"저런 변이 있나, 꼼짝달싹 달아날 길이 막혔구나. 어찌하면 좋으냐?"

도도웅환은 좌불안석을 했다. 도도웅환의 아장 한 사람이 고한다.

"지금 우리 군사의 형편으로 보아서는 조선군에 항복하지 않는다면 중국으로 달아날 탈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바다로 달아나자면 배가 필요합니다. 지친 우리들의 배는 함빡 조선군이 정박하고 있는 훈내곶이에 매어두었습니다. 조선군이 배에 불을 질러 태워버리기 전에 빨리 밤을 도와 전군을 휘동하여 훈내곶이로 달아나 야산 기슭에 숨었다가 상륙하는 조선군을 뚫고나가서 배를 타고 달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 수천 정병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어두운 밤을 터서 장군께서는 전군을 휘동하여 훈내곶이 야산으로 내려가시는 것이 상책이올시다."

또 한 장수가 고한다.

"아장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군사가 누까오까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면 독 안에 든 쥐의 형국이올시다. 굶어 죽게 됩니다. 때마침 일이 잘되었습니다. 조선국이 해안선에 목책을 두르기 위하여 내일 아침에 야산으로 상륙을 한다 하니 밤을 도와 야산에 복병을 두었다가 상륙하는 조선군을 시살하고 배를 저어 달아나게 하십시오. 하늘이 우리를 살게 하는 절호한 기회올시다."

도도웅환은 두 장수의 말을 듣자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곧 전군에 출동명령을 내려서 밤 안으로 훈내곶이로 내려가 야산에 매복을 끝내도록 하라!"

도도웅환의 허락이 떨어지니 대마도 해적들은 일제히 무장을 한 후에 어두운 밤을 타 발자취를 죽이며 훈내곶이로 내려갔다. 앞에는 도도웅환이 갑옷 투구에 일본도를 들고 말을 달려나가고, 뒤에는 아장들이 군사를 거느려 길고 긴 야산 일대 으슥한 숲속에 왜병들을 매복시켰다. 어언간 날은 밝았다. 한편 조선군 대장 이종무는 큰북을 울려 전 장병을 집결시키고 엄한 군령을 내린다.

"지금 곧 상륙작전을 감행하는데 주의할 몇 가지를 일러둔다. 나무를 작벌하러 가는 야산 숲에는 반드시 적의 복병이 있을 것이다. 군사들은 뿔뿔이 헤어져 단독 상륙을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열사람씩 대오를 지어서 일제히 돌격작전을 취하라. 한 대오 열사람 중에 다섯 사람은 도부수가 되어 도끼를 들고 기어들어 가 먼저 나무를 찍어 쓰러뜨리고 다섯 사람은 궁수가 되어 화살을 쏘아 적병을 쓰러뜨리라. 적이 쓰러지면 적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날 것이다. 궁수들은 반드시 화살 백 대씩을 준비해서 활을 쏘면서 돌격을 개시하라. 또 한 가지 당부할 일이 있다. 육박전이 개시될 때 왜적들은 장검을 잘 쓴다. 우리 군사들은 날카로운 장극 한 벌씩을 준비해서 창으로 적을 찔러 죽여라. 만약 열 사람씩 대오를 짜지 않고 단독 상륙하는 군사가 있다면 참형에 처하리라!"

대장군 이종무의 엄한 군령이 떨어지니 좌군, 우군, 중군 삼군의 일만 칠천여 명의 군사는 일제히 몇 사람씩 대로를 짰다. 한 대오마다 다섯 사람은 양편 손에 날카로운 도끼를 들고 다섯 사람은 화살을 가득히 전통에 꽂아 어깨에 메고 예리한 창을 등에 메었다. 삼군의 지휘관들은 일제히 대오 짠 군대를 점검했다. 큰북이 '두둥둥' 울렸다. 대장선의 기수는 대장기를 높이 흔들었다. 대장군 이종무의 호령이 떨어진다.

"적전 상륙을 개시하라!"

2백여 척의 전함에는 일만 칠천여 명의 전투부대가 뛰어내렸다. 일만 칠천여 명이 대장군의 명령대로 열 사람씩 대오를 짰다. 일천칠백의 소대는 가로 횡대를 이루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간밤에 누까오까에서 야산 일대로 집결되었던 마마도 왜적들은 숲속에 잠복했다가 조선군의 돌격작전을 보자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조선군의 도부수들은 도끼를 들고 엉금엉금 숲속으로 기어들었다. 뒤에서는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 엄호작전을 취했다. 큰 솔, 작은 솔, 이름모를 나무들이, 기어들어 간 도부수들의 억센 도끼날로 '우지끈 뚝딱' 잘려지고 쓰러졌다. 울창한 푸른 숲속에 몸을 숨겨서 화살을 쏘아붙이던 대마도 복병의 모습은 청천백일 아래 환하게 드러났다.

원래 조선군은 활을 잘 쏘는 명궁들이었다. 뿐만 인다. 대장군의 주밀한 명령을 받들어 한 군사가 백 대씩 화살을 가졌다. 적의 살이 열 대가 날아왔을 때 조선군은 백번을 쏘아붙일 화살을 풍부하게 가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끝마다 독을 칠했다. 맞기만 하면 독이 퍼져 죽어버린다. 때마침 바다에는 강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은 산과 숲으로 향하여 강하게 불었다. 적이 내려쏘는 화살은 바람에 막혀서 날아가는 힘이 약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쏘아대는 화살은 강하게 부는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날아서 적을 쏘아 맞혔다. 나무는 도끼로 갈겨 계속해서 쓰러지고 복병들은 살을 맞아 고꾸라졌다. 머리가 깨지는 놈, 눈알이 빠지는 놈, 명치에 살이 박혀 비명을 질러 자빠지는 놈, 아비규환의 구슬픈 소리가 조선군의 함성과 함께 천지를 진동했다. 왜적들은 조선군을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풍비박산이 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마상에서 장검을 빼어 들고 아장들과 함께 군사를 지휘하다가, 전세에 불리함을 보다 급히 말머리를 돌려 누까오까를 향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때 좌군 지휘관 박실은 달아나는 도도웅환을 발견하자 급히 전통에서 화살을 뽑아 화궁을 당겼다. 살은 시위소리를 강하게 내며 푸르르 날았다. 급히 달아나는 도도웅환의 투구 끝을 쏘아 맞혔다. 투구는 땅에 떨어지고 도도웅환의 간담은 싸늘해서 콩알만큼 오그라졌다. 도도웅환은 겁결에 목이 떨어진 줄 알았다. 급히 아장에게 물었다.

"내 목이 어디로 굴러떨어졌느냐?"

"아니올시다. 목은 붙어 있습니다. 투구가 떨어졌습니다."

아군의 고함소리는 천기를 진총했다. 박실은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는 도도웅환의 뒤를 쫓았다. 다시 화궁을 가득히 당겼다. 달아나는 도도웅환을 쏘았다. 살은 또다시 도도웅환의 어깻죽지를 맞혔다. 그러나 철갑을 입었다. 살을 꿰뚫지 못했다. 도도웅환은 철갑에 화살이 꽂아진 채 아장의 구원을 받아 누까오까 깊은 골속으로 달아났다.

 

강악대전

 

이때 대장군 이종무는 멀리 장대 위에 서서 전투를 바라보다가 왜적이 대패해서 누까오까로 구명도생해 달아나는 것을 보자, 급히 쟁을 쳐 군사를 거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군과 중군은 훈내곶이 야산 앞에서 군사를 거두니, 적의 죽고 상한 자가 무려 오백여 명이나 되었다. 좌군 지휘관 박실은 좌군 일대를 거느리고 누까오까로 달아나는 도도웅환의 무리를 쫓아 몰살을 시키려다가 대장군이 급히 쟁을 쳐 군사를 거두라는 명령을 듣자 발을 동동 굴렀다.

"반나절만 전투를 더 계속했더라면 왜적들을 씨를 남기지 아니하고 다 처치해버릴 것을 아깝구나, 일이 분하다!"

박실은 장탄식을 하면서 군사를 거두어 훈내곶이 야산 아래로 내려갔다. 삼군이 모두 다 집결된 후에 대장군 이종무는 다시 명을 내린다.

"모든 장병들의 신출귀몰한 슬기와 용감무쌍한 전투로 인하여 왜적을 쾌하게 무찔러 크게 국위를 떨치게 했으니, 군사를 통솔한 책임자로서 기쁨을 이길 수 없다. 모든 전공을 일만 칠천여 명 장병들에게 돌려보낸다. 아직 싸움은 일단 중지하고, 처음에 선언한 바와 같이 군사들은 야산에서 작벌한 나무로 해안선 일대에 목책을 두르게 하라!"

모든 장병들은 고개를 숙여 대장군의 명령을 들었다. 이종무는 다시 명령을 계속한다.

"군사들은 배불이 점심을 먹은 후에 삼군으로 나뉘어 우군 6천여 명은 목책 두르는 소임을 맡고, 좌군 6천여 명은 바닷가에 정박해 논 적의 전선을 모조리 불살라 버려라. 그리고 중군 5천여 명은 적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고 상한 적병들은 포로로 삼아서 상처에 약을 발라주라. 비록 적이라 하나 인도를 지켜 덕화를 베풀라."

일만 칠천여 명의 장병들은 대장군 이종무의 슬기롭고 너그러운 처사에 환성을 올려 '조선군 만세'를 높이 불렀다. 점심때가 되었다. 음식 맡은 숙수들은 전승한 군사들을 위하여 소를 잡아 곰국을 끓였다. 야산 앞 넒은 벌에는 가마솥을 수백 개 걸어 놓았다. 가마솥마다 곰국 끓는 구수한 냄새가 뿌연 김을 뿜어 푸짐하게 일어났다. 특별히 전승한 좋은 날이라 해서 잡곡으로 밥을 짓지 아니하고 흰쌀로 밥을 지었다. 일만 팔천여 명이 먹을 밥이요, 국이었다. 넓은 야산 벌에는 수백 개 가마솥에서 밥이 익어가는 더운 김과 고깃국이 용솟음쳐 끓는 누릿한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승전고를 울리는 장병들의 코를 벌름거리게 했다. 모두 다 비위가 꿈틀거

렸다. 일만 칠천여 명의 군사들은 숙수 병졸들이 국자로 퍼주는 국과 밥과 고깃덩이를 뚝배기에 받아 들고 단번에 먹어댔다. 꾀 많고 눈치 빠른 군졸들은 곰국을 두 그릇 세 그릇씩 뒷손질해서 받아먹었다. 양지바른 쪽에 누워 네 활개를 펴고 배를 두드리며 콧노래를 부르는 천진난만한 광경도 이곳저곳에 보였다. 대장군 이종무는 장대에서 내려 친히 군사들의 배불리 먹는 모습도 살폈다. 미소를 풍기며,

"많이 먹어라. 더 먹어라!"

군사들의 등을 일일이 어루만져 주었다. 점심이 끝난 후에 군사들은 대장의 명령을 받들어 세 부대로 나누어 작업을 개시했다. 중군 5천여 명은 살에 맞아 죽은 적병들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이룩해 주고, 상한 군사들에게는 부러진 팔과 다리를 접골시켜서 포로수용소로 보냈다. 우군 6천여 명은 해안선 일대에 목책을 둘러서 다시는 적의 침범이 없도록 요새 지대를 만들어 놓고, 좌군부대 6천여 명은 일제히 적선 50여 척에 불을 질러서 적의 달아날 길을 막아버렸다. 그럭저럭 밤이 되었다. 화광은 충천하고 바닷물은 이글이글 끓었다. 나가사키 항구 일대는 연옥의 불바다를 이루었다. 목숨을 구해서 누까오까 깊숙한 산골 속으로 달아나던 도도웅환은 기진맥진이 되어 자리보전을 하고 신음하며 누웠을 때 홀연 군사들이 뛰어들어 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신음하며 누웠던 도도웅환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무슨 또 큰일이 났단 말이냐?"

도도웅환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놀란 가슴이다. 경풍이 될 지경이었다.

"바다가 시뻘겋게 타오릅니다."

"바다가 시뻘겋게 타다니?"

해적의 괴수 도도웅환은 아장의 부축을 받고 굴 밖으로 나가 해변을 바라보았다. 과연 50여 척의 대마도 배가 일일이 불을 뿜어 화광이 하늘을 사를듯했다. 멀리 조선 전함 2백여 척은 바다 한복판에 위풍당당하게 군림하였고, 부두 앞에 매어두었던 자기 군사의 배 50여 척은 돛대가 '우지끈 와지끈' 부러지고 거꾸러지면서 연기와 불길을 뿜고 있다.

"저것이 모두 다 우리 배로구나!"

도도웅환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렇습니다. 50여 척 우리 배가 함빡 타버립니다."

"이제는 옴치고 뛸 수도 없구나, 꼭 죽었구나!"

도도웅환은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습니다. 다시는 도망갈 길도 없어졌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적병들은 적의 괴수의 손을 마주 잡고 발을 동동 굴러 대성통곡을 했다.

"공연한 짓을 했다. 배은망덕을 하고 조선으로 노략질을 하러 들어가라고 허락했던 것이 내 잘못이다.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구나!"

말을 마치자 도도웅환의 목구멍에서는 대갈일성에 붉은 피가 쏟아졌다. 화기가 가슴으로 치밀어 토혈이 된 것이다. 아장과 패잔병들은 깜짝 놀랐다. 급히 도도웅환을 등에 업고 황황히 굴속으로 들어갔다. 피를 거의 한 말이나 쏟았다. 패잔병들은 지혈제 등 갖은 수단을 써서 겨우 생명을 구했다. 패잔병들은 눈을 붙이지 못한 채 꼬박 밤을 새웠다. 새벽이 되었다. 배가 고팠다. 굴속에 세로 가로 쓰러졌다. 주보에는 곡식도 떨어져서 얄팍해 갔다. 주먹밥 한 덩이씩으로 겨우 주린 창자를 채웠다. 한편 조선군 우군은 나가사키 해안선 일대에 목책을 끝마쳤다. 훈내곶이에서부터 두지포까지 뻗친 길고 긴 방위선이었다. 목책이 끝난 후에 대장군 이종무는 영을 내렸다.

"비록 목책 두르는 방위선이 완성되었다 하나 수직하는 보초를 두지 아니한다면 소용이 없는 일이다. , , 중 삼군은 각기 책임을 맡아 방위선 일대에 보초를 두게 하라. 우군과 중군은 훈내곶이 일대의 책임을 맡고 좌군의 전 병력을 두지포 일대를 수직하라."

모든 아장들은 대장의 명을 받들어 해안선 목책에 경비하는 군사를 배치하였다. 대장군 이종무는 다시 군령을 내린다.

"지금 적은 누까오까라고 하는 강악에 잠복해 있다. 강악에서 내려오는 길목은 바로 두지포다. 2백여 척의 전 함대를 두지포로 이동시켜서 적의 무리를 위압하라."

군령이 한 번 떨어지니 모든 부대에서는 책임 맡은 각부대의 척후병과 보초병을 남겨놓고 2백여 척의 대함대는 서서히 배를 움직여 두지포에 닻을 내렸다. 누까오까 굴속에 숨어 있던 대마도 척후는 조선군 대함대가 두지포로 옮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병들어 누워 있는 괴수 도도웅환에게로 급히 달려갔다.

"큰일 났습니다. 조선의 대함대가 함빡 두지포로 이동을 했다. 무슨 계교를 쓰려고 전함을 이동시키는지 알 길이 없다. 그대들은 조선군의 계책을 추축해 보라!"

한 장수가 고한다.

"조선군은 우리들의 식량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해안선 일대에 목책을 둘러놓고 우리 배를 모두 다 불살라버렷습니다. 우리들의 도망갈 길을 영영 끓어버렸습니다. 고스란히 굶어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다가 우리가 잠복해 있는 누까오까에서 가장 가까운 길목 두지포에 대함대를 이동한 것은, '이놈들 꼼짝 말라'고 위협하는 전술을 쓴 것입니다."

한 장수가 또 고한다.

"그렇습니다. 굶어 죽든지 항복하든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하라는 엄포올시다!"

도도웅환은 또다시 간담이 서늘했다. 땅이 꺼져라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기운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은가. 굶어 죽어야 옳은가? 항복을 해야 하나?"

왜추들은 독종이었다. 한 장수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한다.

"차라리 배를 갈라서 할복자살을 할지언정 어찌 차마 항복을 합니까?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가 죽어야 합니다."

말을 마치자 눈을 부릅떴다.

"무슨 힘으로 만칠천여 명의 조선군을 대항해 싸운단 말인가. 천여 명 군사가 반 넘어 죽었고, 양식 또한 떨어졌는데. 할복자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닐세. 처자식과 늙은이들은 함빡 대마도에 떨어져 있고."

도도웅환은 눈물이 비 오듯 했다. 한 장수가 도도웅환에게 고한다.

"소장에게 한 가지 묘한 계책이 있습니다."

모두들 바라보니 대마도 왜장 중에 가장 젊은 얼굴이었다. 눈알에 정기가 초롱거렸다.

"무슨 묘한 계교가 있단 말이냐?"

도도웅환이 묻는다.

"우리는 굶어 죽을 수도 없고 항복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배를 갈라서 할복자살한다는 것은 더구나 무의미한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걱정이 아니냐. 도대체 묘책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냐? 속 상한다. 어서 말해보아라."

"달아나야 합니다."

"달아나? 어디로 달아난단 말이냐. 승천입지를 한단 말이냐. 둔갑법을 쓴단 말이냐. 얘가 미쳤나, 헛소리를 하는구나!"

도도웅환은 기가 막혔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듯 껄껄 웃었다.

"에잇, 못난 자식!"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내던졌다. 모든 아장들도 조롱하는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젊은 장수는 정색하고 고한다.

"웃으실 일이 아니올시다. 차근하게 저의 말씀을 들어봅시오."

도도웅환은 화를 벌컥 냈다.

"그래 어떻게 달아난단 말이냐?"

"지금 우리가 있는 누까오까는 일부당관에 만부막개하는 천험의 요지올시다. 지난번 훈내곶이 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우리가 패했습니다마는, 만약에 조선군이 누까오까까지 추격을 해왔더라면 만여 명 군사가 아니라 10만 대병이라도 참담하게 패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조선군에는 슬기로운 장수가 있어서 쟁을 쳐 군사를 거둔 때문, 강세가 꺾이지 아니했습니다."

대마도 왜추의 꼭지 도도웅환은 화증을 벌컥 낸다.

"도대체 너는 조선군 칭찬만 하고 앉았느냐. 어서, 어서 달아날 묘책이란 것을 말해보라!"

"첫째로 조선군은 누까오까 산악지대로 유인해 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째 달아나는 길이란 말이냐?"

"굴속마다 복병을 매복시켜서 조선군이 들어오는 족족 활로 쏘고 칼로 찔러 죽여버립니다. 소장은 누까오까에 있는 석굴을 조사 해보았습니다. 두지포에서 산으로 올라오는 연도에 굴이 수백 개 있습니다. 군사를 매복시킬 절호한 곳이올시다. 이리해서 조선군을 지진두를 만든 후에 두지포로 내려가서 조선함대를 뺏어가지고 대마도로 승전고를 울리면서 돌아갑니다. 어떻습니까. 이 묘책이?"

도도웅환을 위시하여 모든 왜추들은 굴을 이용해서 조선군을 패하게 한다는 젊은 왜추의 말에 약간의 마음이 동했다.

"그렇다면 누까오까까지 조선군을 어떠한 방법으로 유인한단 말이냐? 네 말대로 조선 편에는 슬기로운 장수가 많다. 처음에 조선군의 일부가 쫓아오는 우리 뒤를 추격해올 때 저편에서는 쟁을 쳐서 군사를 거두지 아니했더냐. 만약에 우리가 유인을 해도 꾀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어찌하느냐. 지혜있는 장수라면 싸우지 아니하고 우리가 굶어 죽기를 기다릴 것이다."

도도웅환은 말을 마치자 또다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짓는다. 젊은 왜추가 고한다.

"조선 편에 아무리 슬기로운 대장이 있다 하나 격노시켜서 유인할 방법이 있습니다."

"격노시켜 유인을 한다?"

도도웅환이 묻는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감정적 동물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하나 격하게 감정이 움직이면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덤벼듭니다. 이러한 격동적인 감정을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먼저 야음을 타서 결사대 십여 명을 내보내서 두지포를 막은 목책을 뚫고 조선 병선에 불을 지릅니다. 그리된다면 조선편에서는 깜짝 놀라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때 가서 결사대는 목책을 넘어서 누까오까로 성난 범같이 뛰어들 것입니다. 이때 우리들은 굴속에 분산되어 매복해 있다가 돌격해 올라오는 조선군을 무찌르고 두지포로 내려가 조선 배를 타고 다시 대마도로 달아나든지, 중국으로 달아나든지 맘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 참 된수다."

모든 왜장들은 젊은 왜추의 말을 듣자 박수갈채를 했다. 도도웅환도 그렇 듯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늘밤으로 곧 이 일을 결행케 해라!"

왜추들은 도도웅환의 명령이 떨어지니 패잔병들로 결사대를 조직했다. 질끈질끈 머리에 검은 수건을 동여매고 단검과 장창과 활을 들었다. 백여 개 석굴과 바위틈마다 사오 명씩 결사대를 매복시켜서 조선군이 쳐들어올 길목을 지키게 한 후에 밤이 깊은 자시 때 열 명의 결사대는 두지포로 향해 내려갔다.

만물이 잠든 깊은 밤이었다. 2백여 척의 조선 병선이 정박된 바다 위에는 파도 소리만 높았다. 길고 긴 해안선 일대 목책을 두른 곳에 보초를 보는 군사와 배 위에서 번을 든 병졸을 제쳐놓고는 만여 명의 군사가 모두 다 혼곤하게 잠이 들었다. 두지포 일대의 방위선은 좌군 지휘관 박실의 책임 아래 있었다. 대마도 왜적 열 명의 결사대는 캄캄칠야 한밤중에 누까오까 산악지대 험한 산길을 내려와 발자취를 죽이고 가만히 목책 안에 잠복해 있었다. 보초 보는 군관들은 백보마다 한사람씩 서 있었다. 왜적의 결사대들은 한 시각 동안이나 잠복해서 보초의 동정을 살폈다. 보초는 긴긴밤에 한 곳에만 서 있을 수 없었다. 전통을 어깨에 메고 장검을 비껴든 채 백보 안을 순찰하고 있었다. 왜적의 결사대들은 이 틈을 노렸다. 보초하는 군사가 목책을 등지고 백 걸음 끝까지 나갔을 때 결사대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나머지 한 놈의 어깨를 타고 사뿐사뿐 목책을 뛰어넘었다. 마치 도둑고양이가 지붕을 타고 뛰어내린 듯했다. 번개보다 빨랐다. 백 걸음 밖에 있던 보초는 캄캄한 어둠 속에 무엇이 뛰어내리는 것을 희미하게 발견했다.

'누구냐!' 소리를 쳤다. 장검을 뽑아 들고 쫓아 들었다.

왜적 결사대들은 장검을 들고 쫓아드는 보초에게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두 놈은 장창을 들고 달려드는 보초의 칼 잡은 손등을 후려쳐 갈겼다. 두 놈의 보초의 뒤로 돌아 준비했던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보초는 호통을 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섯 놈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보초를 결박지어 목책 기둥에 묶어 놓았다.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보초는 아무리 고함을 치고 몸부림을 쳤으나 꼼짝달싹 할 도리가 없었다. 네 놈은 묶어논 보초 옆에 지켜 섰고, 다섯 놈은 미리 준비했던 기름통을 들고 쏜살같이 조선 배로 내려가 번든 군사가 졸고 있는 틈을 타 수십 개 화승을 기름에 담가 불을 붙여 배 안에 던졌다. 별안간 배 한 척에 화광이 일기 시작했다. 번든 군사가 놀라서 '불이야' 소리를 치며 옆배로 뛰어내렸다. 왜적의 결사대들은 불길이 이는 것을 보자 도둑고양이 모양 한 놈, 두 놈 모두 다 목책을 사뿐사뿐 넘어 누까오까로 향해 달아났다. 좌군 병선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군사들은 황황망망, 불붙은 배를 격리시켜 불을 끄고 보초들은 횃불을 들어 목책을 둘러보았다. 기막히지 않은가. 보초 한 명이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로소 왜적의 결사대가 목책을 넘어 들어와 보초를 묶어 놓고 포구로 내려가 배에 불을 지른 것을 알았다.

좌군 지휘관 박실은 불같이 노했다.

"훈내곶이 싸움 때 강악으로 쫓아 올라가 이놈들을 다 몰살시키는 것을 공연히 쟁을 쳐 군사를 거두는 바람에 이같은 후유증이 생기게 하는구나!"

말을 마치자 곧 군령이 내렸다.

"좌군 전부대는 동이 트는 대로 곧 누까오까로 진격할 것이다. 전투준비를 완료하라."

좌군 지휘의 영이 한번 떨어지니 좌군 전부대는 일제히 전투준비를 끝냈다. 좌군 모사 한 사람이 박실에게 고한다.

"좌군이 출동하기 전에 대장군께 출사한다는 말씀을 아뢰고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박실은 불같이 노했다.

"일이 급한데 어느 하가에 삼사십리 밖에 있는 훈내곶이까지 내려가 대장군께 고하고 간단 말이냐? 용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적을 멸할 수 없다. 내가 떠난 후에 대장군께 아뢰어도 좋다. 좌군 지휘는 내가 맡은 책임이다."

박실은 모사의 말을 물리쳤다. 어느덧 동이 환하게 터졌다. 박실은 좌군 일대를 거느리고 누까오까로 치달렸다. 삼백여 명의 정예부대다. 지난번 훈내곶이 싸움에 누까오까로 달아나는 적병을 추격하려다가 대장군 이종무가 쟁을 쳐 군사를 거두는 바람에 무료하게 날랜 기세를 펴보지 못했던 부대다. 용기가 하늘도 찌를 듯 용솟음쳤다.

"우리들 좌군의 힘으로 대마도 해적들을 항복 받고 승전고를 올려 돌아온다."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기치창검은 아침 햇빛 아래 번득였다. 강악은 가파로웠다. 오르기에 힘이 들었다. 그러나 사기는 왕성했다. 한 번 싸워서 크게 이기고 항복을 받을 뻔했던 왜추들이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도도웅환을 산채로 묶어서 대마도로 끌고 갈 배짱이었다. 험하고 가파른 길로 고함치며 기어올랐다. 적병이 나타나기만 하면 모조리 쏘아 죽일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산골 속은 너무나 조용했다. 산새 소리조차 들리지 아니했다. 적의 순라도 보이지 아니했다. 한 고개를 넘었다. 두 고개를 지났다. 양장구곡같이 구불구불 험한 길 사이로 땀을 흘리며 올랐다. 좌우편에는 크나큰 바웟덩이와 깎아지른 절벽이 푸른 숲 사이에 즐비하게 벌여 있었다. 앞을 서 가던 지휘관 박실은 산길이 하도 조용하니 불안한 마음이 약간 들기 시작했다.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화궁에 살을 메게 조심조심 나갔을 때, 돌연 고개 위에서 적병이 고함치며 쏟아져 내려왔다. 박실은 몇째 안가는 활 잘 쏘는 명궁이었다. 전통에서 백우전을 민첩하게 뽑아 적장 서너 명을 쏘아붙였다. 왜추는 쓰러지고 자빠졌다. 그러나 적의 예기는 꺾어지지 아니했다. 칼과 창을 휘두르며 좌군을 돌격하여 쫓아 들었다. 좌군에서도 지휘관 박실을 위시하여 용기가 꺾이지 아니했다. 화살은 날고, 칼과 창은 번득였다. 싸움은 백병전으로 들어갔다. 적의 쓰러지고 죽는 자가 수십 명이 넘었다. 적이 적세가 꺾이려 할 때, 돌연 바위틈마다 굴속마다 검은 수건을 쓴 왜적의 결사대들이 뛰어나왔다. 일본도를 휘두르며 좌군을 에워싸고 육박해 들어왔다. 박실은 비로소 복병의 유혹을 받아 포위망에 빠진 줄 알았다. 급히 쟁을 쳐 군사를 거두면서 악전고투하며 포위를 뚫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올라갈 때 무인지경이라 생각했던 좌우편 바윗돌 틈에서는 가는 곳마다 십여 명씩 왜적 결사대가 나타났다. 좌군 지휘관 박실은 기막힌 곤경에 빠졌으나 담력이 컸다. 한편으로 장검을 휘둘러 적의 목을 후려쳐 갈기고 한편으로 활을 당겨 쫓아드는 적의 눈알을 쏘아 맞혔다. 아군 편에서도 죽고 상하는 군사가 많았다. 그러나 예기는 꺾이지 아니했다. 싸우면서 달아나고 달아나면서 싸웠다. 그러나 누까오까의 산골 속은 길고 깊었다. 용기가 충천해서 올라갈 때는 괴로운 줄을 몰랐으나, 전세가 불리해서 포위망을 뚫고 내려오기란 어렵고 괴로웠다 굽이쳐 도는 길목마다 또다시 바위틈에서는 오륙 명씩 사오 명씩 왜적의 결사대가 길을 막고 덤벼들었다.

이제는 용장이라 하나 박실도 기진맥진되었다.뒤를 돌아보니 삼백여 명의 좌군 정예부대 중에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박실이 정히 초민하고 있을때 홀연 강악 언덕길에 티끌과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나며 조선 군사들의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박실은 조선 군사들의 고함소리를 듣자 정신이 번쩍 났다. 앞을 바라보니 티끌과 연기가 자욱한 곳에 '정동대장군 도체찰사 이종무'라고 쓴 대장기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좌군 지휘 박실은 대장군 이종무가 대군을 휘동해서 구원하러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용기가 백 갑절이나 솟구쳤다. 쫓겨 내려오던 좌군을 향하여 소리쳤다.

"좌군 일동은 용기를 내어 다시 돌격정을 개시하라! 대장군의 구원병이 당도했다!"

좌군 일동이 바라보니 과연 티끌과 연기가 자욱한 곳에 대장군의 군기가 바람에 번뜩이며 위풍당당 앞에 서서 달렸다. 좌군은 다시 기운을 회복하여 몸을 돌려 돌격전을 개시하고, 적병들은 조선군의 대부대를 바라보자 혼비백산이 되어 좌왕우왕 어찌할지 몰랐다. 대장군 이종무는 친히 말을 달려 대군을 지휘했다. 15천 명은 활과 쇠뇌를 잡은 궁노수들이었다. 화살과 쇠뇌를 쏘며 산상으로 치닫고, 25천 명은 홰를 묶어 불을 댕겼다. 햇빛이 쨍쨍한 대낮이건만 만 여개의 횃불이 일시에 타오르니 화광은 충천했다. 35천여 명은 도부수들이었다. 칼과 창과 도끼를 들어 1, 2진을 호휘하며 강악 산길로 치달았다. 대장군 이종무는 마상에 높이 앉아 호령을 내린다.

"1진 궁노수들은 활과 쇠뇌를 쏘면서 급히 능선으로 뛰어올라 좌군 지휘 박실 이하 모든 장병들을 구출하라!"

1진 궁노수들은 일제히 적진으로 활과 쇠뇌를 쏘면서 장병의 포위를 풀기 시작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계속해서 군령을 내린다.

"2진 홰를 든 군사는 바위 밑 굴속마다 횃불을 던져서 굴속에 잠복해 있는 적병을 화공법을 써서 질식시키라!"

"3진 도부수들은 굴속에서 쫓겨나오는 적병들을 발견하는 족족 생포해서 결박지어라!"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만여 개의 횃불을 든 군사들은 길고 긴 관악 산골, 석굴과 바위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조선군 궁노수들이 쏘아붙이는 화살과 쇠뇌는 적병을 향하여 우박 쏟아지듯 쏟아졌다. 죽고 상하는 자가 부지기수다. 좌군 부대를 포위했던 적병들은 완전히 싸울 맘을 잃었다. 뿔뿔이 흩어지면서 굴속으로 몸을 감춰 버렸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굴속으로는 햇불이 던져지며 불벼락이 떨어졌다. 홰마다 기름을 뿌려서 불을 댕긴 횃불이었다. 불은 이글이글 타오르면서 굴속에 퍼져 있는 잡초의 짚더미로 옮아 붙었다. 독한 연기와 뜨거운 불길 속에 적의 결사대들은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한 놈 두 놈씩 뛰어나왔다. 3진인 도부수들은 굴속에서 뛰어나오는 결사대들을 도끼와 창으로 위협하면서 모조리 결박 지어 항복 받았다.

 

대군 개선

 

대장군 이종무는 좌군 지휘 박실을 구출하고 대마도 왜적의 결사대들을 결박지어 항복받은 후에 항왜의 젊은 장수에게 물었다.

"너희 괴수 도도웅환이 잠복해 있는 곳을 밝히라!"

항복한 왜장은 손을 들어 누까오까의 상상봉을 가리키며 대답한다.

"이곳에서 십 리 가량 올라가면 크고도 넒은 암굴이 있습니다. 굴속은 구불구불 천엽 속같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려진 석종유의 기암괴석으로 이룩된 암굴입니다. 장군님께서 천병만마를 거느리고 들어가신다 해도 길이 현란해서 우리 대장을 생포하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도도웅환을 호위하고 있는 군사는 얼마 가량이나 되느냐?"

"아직도 이삼백 명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대장의 친위군이올시다. 그러나 양식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저희들의 패한 꼴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진맥진이 되었습니다. 항복하지 말래도 항복할 것입니다."

"도도웅환은 훈내곶이 싸움에서 두 번씩이나 살을 맞았는데 상하지는 아니했느냐?"

"한 번은 투구가 떨어졌고 한 번은 팔에 화살이 떨어졌으나, 철갑을 입어서 상한 곳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놀라서 정충증이 생겼습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이때 해는 이미 신시가 넘어서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다시 대군을 휘동하여 양장구곡의 험한 길을 올라가서 천엽 속 같다는 석종유골 속으로 들어간다면 아무리 횃불을 밝힌다 하나 밤 안으로 도도웅환을 생포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머리에 퍼뜩 병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궁구막추!'

궁한 도둑을 쫓지 말라 했다.

적이 주저하고 있을 때 홀연 산꼭대기에서 왜적 일대가 백기를 흔들며 달려왔다. 모두들 바라보니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의 부장이 일지 군대를 거느리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대장군 앞에 군례를 드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장군 이종무는 향도로 대동했던 한인 통사에게 물었다.

"누구냐?"

"도도웅환의 부장인 가봅니다."

이종무는 점두한 후에 엄숙한 표정으로 적장을 향하여 물었다.

"요망한 무리들이 어찌해서 또다시 대군의 진머리를 범하느냐?"

적의 부장은 백기를 높이 흔들며 아뢴다.

"소장은 도도웅환의 부장이옵니다. 도도웅환의 항복하는 글월을 가지고 왔습니다. 다행히 죽이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신다면 다시는 노략질을 아니하고 오래오래 조공을 바쳐서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장은 품 안에서 하서를 올렸다. 이종무가 받아보니 틀림없는 도도웅환의 항복하는 글이었다. 항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고두백배하옵고 정동대장군 휘하에 글월을 올립니다. 저희들의 부하 군졸들이 배은망덕하고 바다를 건너 변경에 작란을 일으킨 일은 만 번 죽이셔도 마땅한 일이올시다. 그러나 대마도는 아시다시피 땅이 척박하와 민생이 아사지경에 빠졌습니다. 어리석은 무리들이 죽지 못하여 대역부도의 죄를 범했사오니 그저 호생지덕을 내리시어 전명을 보존해 주신다면 분골쇄신해서 장군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삼가 항복하는 글월을 아장편에 보내오니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마음속으로 슬며시 항복을 허락할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한번 엄포를 놓아 꾸짖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얼굴빛을 엄숙하게 하여 벼락같이 호통을 내렸다.

"요망한 도도웅환이 친히 와서 항복을 한다 해도 받을 둥 말 둥한데 방자하게 아장을 보내서 항서를 바치니 반드시 협사한 것이 분명하다. 이제 대군을 휘동하여 너의 소굴을 소탕한 후에, 너 도도웅환을 산 채로 잡아 목 베어 효수하리라!"

아장은 머리를 땅에 박고 두 손을 들어 싹싹 빌었다.

"도도웅환은 두 번씩이나 살을 맞고 이내 정충증이 생겨서 험한 산길에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저 굽어살피시고 항복을 받아 주십시오. 다시 바다를 건너 노략질을 아니할 것입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또다시 꾸짖는다.

"교활하기 짝없는 네놈들의 말을 누가 곧이듣겠느냐? 잔말 말고 도도웅환을 데리고 오너라!"

이종무는 장검을 뽑아 땅을 드르륵 긁었다. 겁에 질린 왜추의 목은 자라목 오그라지듯 했다.

"네 이놈, 도도웅환이 친히 와서 항복하지 아니한다면 네놈의 목을 먼저 베리라!"

말을 마치자 이종무는 또다시 칼을 번쩍 들어 옆에 있는 생나무 가지를 후려쳤다. 가지가 와지끈 부러지며 적장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적의 모가지는 또 한 번 오그라지고 간담은 싸늘하게 핏기를 잃었다. 함께 왔던 또 한 자의 아장이 벌벌 떨며 고한다.

"장군께서 친히 도도웅환을 보시고 항복을 받으신다면 아무리 병들었다 하나 소장이 기어코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한 말씀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을 내려 달라 하느냐?"

이종무는 눈을 부릅떠 호통을 치며 물었다.

"장군께서 도도웅환을 죽이지 아니하신다는 한 말씀을 확실하게 내려주신다면 소장은 도도웅환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이종무는 소리를 높여 드높게 껄걸 웃었다.

"어진 장수는 대항하는 적은 죽일지언정, 항복하는 적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내 어찌 쥐새끼 같은 무리들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진정으로 항복할 뜻이 있다면 도도웅환이 친히 와서 항서를 바치라!"

말을 마치자 이종무는 항복한다는 항서를 적장의 머리위로 내던졌다. 백기를 흔들고 항서를 받들어 내려왔던 적의 아장들은 벌벌 떨며 황황망망 내던진 항서를 받들고 다시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원래 도도웅환은 이종무가 죽일까 겁이 나서 아장을 보내서 항복하는 글월을 드렸던 것이다. 아장들이 백기와 항서를 들고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자 도도웅환은 겁이 더럭 났다.

"조선대장군이 항복을 받지 아니하더냐?"

"말씀 마십쇼. 장군께서 친히 내려와 항서를 바치지 아니했다 해서 항복을 받지 아니한다 합니다!"

아장들은 목이 메어 울었다.

"내가 친히 항복하러 내려갔다가 죽임을 당하면 어찌한단 말이냐!"

도도웅환은 벌벌 떨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좌불안석을 하면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짓는다. 항서를 가지고 갔던 아장이 아뢴다.

"그런 염려가 있사와 저희들은 다짐해 묻고 왔습니다. 만약에 우리 주장께 해를 끼치는 일이 있으면 어찌할 테냐 물었더니 '어진 장수는 대항하는 적은 죽일지언정, 항복하는 적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내 어찌 쥐새끼 같은 무리들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진정으로 항복할 뜻이 있다면 친히 와서 항서를 바치라!' 하는 답을 받고 왔습니다."

도도웅환은 아장의 말을 듣고도 안심이 되지 아니했다.

"그야, 말은 번드르해서 좋다마는 누가 아느냐. 구천에 떠도는 원통한 귀신이 될 뿐이로구나!"

도도웅환은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하고 한숨을 쉰다. 옆에 있던 도도웅환 종정성의 아우 종준이 고한다.

"제가 형님을 대신해서 항복하러 나가겠습니다."

왜추 중에 의표가 늠름했다.

"날 보고 친히 나오라는데 네가 나간다고 항복을 받을 리 만무하다. 공연히 일만 그르칠 뿐이다."

종준이 다시 고한다.

"제 얼굴은 형님의 얼굴과 비슷합니다. 우리 군사들이 보아도 구별해 알아내기 어려울 판인데 황차 조선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종준은 쾌활하게 대답했다. 대마도의 늙은 장수 중도만호 좌위문대랑이 출반하여 고한다.

"젊은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선대장과 군사들이 알 까닭이 없습니다. 젊은 장군의 충성과 우애를 높이 찬양하기고 주장님으로 가장하시어 항서를 받들어 나가시도록 하십시오."

"일이 탄로나면 어찌하느냐. 그리고 내 어찌 차마 아우를 죽는 땅에 몰아넣는단 말이냐!"

"늙은 항서를 받들어 나가시도록 하십시오."

"일이 타로나면 어찌하느냐. 그리고 내 어찌 차마 아우를 죽는 땅에 몰아넣는단 말이냐!"

늙은 장수 좌위문랑이 다시 고한다.!"

"염려 마십시오. 저편에서 말한 대로 항복하는 장수는 절대로 죽이지 아니합니다. 소장이 들으니 지난번에 새로 등극하신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젊으신 분이지만 인자하고 덕이 높으신 분이라 합니다. 이런 임금 밑에 있는 신하가 한번 말한 이상 일구이언은 할 리 없습니다. 마음 놓고 젊은 장군이 가시도록 합시오."

늙은 장수의 간곡하게 고하는 말을 듣자 도도웅환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

"모르겠다! 아우가 정 간다 하면 나도 어찌하는 수가 없구나! 다만 무사하게 돌아오기만 기다릴 뿐이다."

교활하고 완패한 왜적의 괴수건만, 그래도 형제간 우애의 정은 대단했다. 종준이 씩씩한 모습으로 고한다.

"대마도 영수인 듯 몸을 의젓하게 가져서 절대로 탄로가 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조선은 예의범절이 높은 관후장자의 나라올시다. 한 번 해치지 않겠노라 말한 대장이 항복하는 주장을 죽일 리 만무합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기다려주십시오."

늙은 장수 좌위문대랑이 말한다.

"젊은 장군의 씩씩하신 모습은 대마도의 복이올시다. 소장이 나이비록 늙었으나 아직도 세 치 혀를 놀려서 저편 대장을 감동시킬 만한 언변이 있습니다. 젊은 장군을 뫼시고 가겠습니다."

도도웅환은 늙은 장수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넋두리를 한다.

"중도만호가 내 아우를 호위해 간다 하면 내 괴로운 마음이 적이 놓이리로다!"

"염려 마십쇼!"

늙은 장수와 젊은 종준은 대답하고 준비를 차렸다. 종준은 대마도 수호의 화려한 복색을 차렸다. 은투구, 은갑주에 장검을 왼편 허리에 차고 등에는 엄나무 가시를 묶어 얹었다. 항복하는 장수가 부형하는 죄인의 모습을 취한 것이다. 늙은 장수도 가시나무 가시를 등에 짊어지고 아까 올렸던 항서를 허리춤에 간직한 후에 막대를 짚고 나섰다. 이때 정동대장군 이종무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강악 중턱 평평한 곳에는 조선에서 세종대왕의 특사 훈련관 최기가 조칙을 받들고 건너왔다. 대마도의 첩보를 받으신 세종전하께서는 이 사실을 상왕께 아뢰고 격려하는 글월을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에게 내리신 것이다. 이종무는 서향하여 네 번 절하고 조칙을 받들었다.

'크게 이겼다는 첩보를 받으니 기쁘기 한량없으며, 국가의 홍복이다. 경 이하 모든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왕자는 호생지덕을 가져야 한다. 되도록 투항케 하고 죽이지 말도록 하라. 또한 이겼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 방심하고 태만하지 않도록 하라. 7, 8월 사이에는 대마도에 폭풍이 많다. 빨리 개선하고 해상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라!'

진실로 어질고 착하고 너그럽고 후한, 만물을 생육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대왕의 말씀이었다. 조칙을 받들어 읽는 이종무의 눈에는 감격한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종무는 모든 장병을 모아놓고 대왕 전하의 성지를 전달했다. 이겨서 기쁘고, 격려해 주신 말씀도 좋지만, 칠팔월에는 대마도에 폭풍이 많으니 오래 머무르지 말고 빨리 개선해 돌아오라는,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 같은 말씀에 모든 장졸들은 감격한 눈물이 비오듯 흘러서 옷깃을 적시었다. 모든 장병들이 세종전하의 인자스런 유시에 감격한 눈물을 뿌리고 있을 때, 대마도 부수호 종준과 늙은 장수 좌위문대랑이 등에 가시를 지고 나타났다. 진문 앞에 당도하여 보초에게 고했다.

"아까 대장군의 꾸지람을 듣고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황공한 마음을 이길 길 없어 친히 나와 항서를 올립니다."

늙은 왜장 좌위문대랑이 통역을 통하여 뜻을 전했다. 보초는 진문 안으로 들어가 장대 위에 앉은 대장군 이종무에게 품했다.

"적의 괴수 도도웅환이 친히 항서를 받들고 항복을 청합니다."

이종무는 세종전하의 칙사가 와 있는 이때 적장의 항복을 받는 일은 절호한 기회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틀림없는 대마도 수호라 하더냐?"

", 그러합니다. 확실한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이라 합니다. 늙은 장수를 대동하고 가시를 등에 지고 죄를 청하러 왔습니다."

이종무는 급히 모든 장성들을 소집했다. 단상에 칙사와 좌,,중군 모든 절제사들을 배석시키고 다시 전령을 내렸다.

"삼군 전대는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후에 항장을 인도하라!"

기치 창검이 휘황하게 번뜩이며 만 칠천 명의 삼군은 좌우편으로 갈라서서 엄숙하게 도열되었다. 창을 비껴 든 순령수가 대장군의 명을 받들어 호령을 내린다.

"항장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을 진 속으로 인도하라!"

채장 군사가 총총걸음을 걸어 진문 밖으로 나갔다. 대령하고 있는 왜장들에게 영을 전한다.

"항장은 들어와서 항서를 바치라. 대장군의 분부가 내리셨다. 빨리 행동을 개시하라!"

대마도 부수호 종준은 허리에 찼던 칼을 풀어 두 손으로 가로 받들고, 늙은 적장은 짚었던 작대기를 땅에 던진 후에 몸을 굽혀 삼군이 나열한 진 속으로 들어섰다. 대장군 이종무가 단상에서 바라보니 대마도주란 자는 은투구, 은갑주에 등에 엄나무 가시를 짊어지고 무장해제를 해서 두 손으로 칼을 가로 뉘어 들어오고, 늙은 왜장 한 명은 역시 가시를 등에 진 채 주장을 따라 들어왔다. 이종무는 경험이 많은 백전대장이다. 마음속으로 저놈도 진짜 대마도주 도도웅환이 아닌 것을 직감했다. 화살을 두 번씩이나 맞고 토혈까지 해서 병이 들었다는 도도웅환의 걸음걸이가 저같이 꿋꿋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체했다. 대마도 부수호 종준은 장대 앞 열 걸음밖에 엎드려 패검을 받들고 이종무를 향하여 머리를 숙여 네 번 절을 올렸다. 종중의 뒤에는 늙은 왜장이 종준이 절하는 대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대장군 이종무는 세종대왕의 칙사 이하 모든 장성들이 배석한 중에 호피 교의에 걸터앉아 적장을 굽어보며 꾸짖는다.

"너 이놈 듣거라. 이번에는 진짜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이냐?"

", 그러하옵니다. 도도웅환이란 별명을 가진 종정성이올시다. 몸이 불편해서 대신 아장을 보냈던 아까 일은 만사무석이올시다. 꾸지람을 들어 당연합니다. 그저 몸이 아파서 그랬사오니 통촉해 주시고 항복하는 글월을 받아주옵소서."

옆에서 늙은 왜장 좌위문대랑이 대신 대답한다.

"저놈은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 왜 네가 대신 대답하느냐?"

이종무는 벽력같이 호통을 쳐 꾸짖는다.

"장군님, 그저 통촉해주옵소서. 두 번씩이나 화살을 맞고 또다시 배가 전부 타는 것을 보고 놀라서 토혈을 한 말이나 했습니다. 얼이 빠지고 정충증이 생겨서 나오지 못하는 것을 소장이 억지로 부축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굽어살피시고 그저 항복을 받아줍시오."

대마도 부수호 종준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칼을 두 손으로 받들고 있다. 이장군 이종무는 늙은 왜추의 교활한 언변인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궁한 도둑을 더 쫓지 않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일부러 옆에 있는 좌군절제사 박실을 향해 물었다.

"좌군절제사는 훈내곶이 싸움에서 저자를 두 번이나 쏘았으니 저자의 용모를 짐작하겠구려. 틀림없는 도도웅환인가 자세히 살펴보오."

누까오까 싸움에 패군지장이 된 박실은 기운이 떨어졌다가 대장이 묻는 말에 기운을 얻었다. 얼굴 모습이 도도웅환과 비슷했다.

", 틀림없는 도도웅환이올시다."

황망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일부러 호통을 놓았다.

"도부수들 어디 있느냐? 저놈, 도도웅환의 목을 베어라!"

호령이 추상같았다. 좌우편에서 도부수들이 장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늙은 왜추가 종준의 몸을 가로막으며 엎드렸다.

"병서에 어진 장수는 항복하는 적을 죽이지 않는다 했습니다. 더구나 조선 나라는 인의의 나라요, 예절이 높은 상국이십니다. 그저 죽을 죄를 범한 쥐새끼 같은 무리에게 호생지덕을 내려주십시오. 정 죽이실 생각이 계시다면 소인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늙은 왜추는 교활하게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했다. 이종무는 다시 호령을 내린다.

"네가 진정으로 항복할 의사가 있다면 대마도는 본시 조선 땅이니, 영토 전부를 우리나라에 바쳐서 권토 항복할 의사가 있느냐?"

", 그저 먹여 살려주신다면 백 번이라도 땅까지 바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이 가련하다. 목숨을 살려줄 테니 항서를 바치라!"

종준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칼을 바쳤다. 다음, 늙은 장수는 품 안에서 항서를 꺼내서 종준을 주어 바치게 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사자가 받아 올리는 칼과 항서를 받은 후에 다시 왜추를 향하여 명령을 내린다.

"내가 개선해 돌아간 후에 너희들은 우리의 왕상전하께 권토내항한다는 항서를 정식으로 올리도록 하라! 만약에 사자가 오지 않는다면 다시 재정을 할 것이다. 알아듣겠느냐?"

종준과 좌위문대랑은 연거푸 ', ' 소리를 치며 고두백배를 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다시 곡식 맡은 아장을 불렀다.

"저놈들이 비록 침략했던 적장들이라 하나, 양식이 떨어져서 기지사경일 것이다. 보리 스무 섬만 배에서 내려주어라!"

적장들은 죽이지 않고 곡식까지 주는 이장군의 분부를 듣자 이번엔 진정으로 감격함을 느꼈다. 대마도 왜추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장군께 고한다.

"저희들을 죽이지 아니하시는 은혜만 생각해도 백골난망이온데 소중한 양식까지 주시니 하해 같은 홍덕을 어찌 다 갚사오리까. 대마도로 돌아가는 날 곧 국왕 전하께 항복하는 사자를 정식으로 보내겠습니다."

"빨리 시행하도록 하라!"

대장군 이종무는 장중하게 대답을 내렸다. 이때, 두지포에 정박한 전함 위에서는 양식 스무 섬을 하륙했다. 지난번 대마도에서 청야를 해서 보리를 수확했던 곡식 중에서 적장에게 기아를 면케 하기 위하여 돌려주는 것이었다. 곡식 맡은 부장이 짐을 풀고 장군 앞에 나타나 고했다.

"곡식 스무 섬을 하륙했습니다."

"적장에게 운반해서 가져가라 일러라!"

이종무는 분부를 마친 후에 대군을 휘동하여 두지포로 내려가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동이 트자 일만 칠천여 명의 대부대는 전함 2백여 척에 문승한 후에 승전고를 울리며 일기 해협과 대마도 해협을 지나, 개선의 길에 오르니 대조선의 위풍은 망망대해를 격하여 일본천지를 휩쓸었다.

한편 칙사 최기는 경첩한 배를 타고 부산포에 상륙하여 한양 천 리 길에 마을 달려 궐하에 들어가 대군 개선의 첩보를 올렸다. 세종전하를 위시하여 상왕 전하의 기쁨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세종전하는 친히 최기를 인견하셨다. 최기는 당악에서 대장군 이종무가 도도웅환에게 항복을 받던 일이며, 나중에는 청야해서 전함에 싣고 갔던 군량미 중에서 보리 스무 섬을 항복한 적장에게 주림을 면케 하기 위하여 내어준 사실을 일일이 품달했다. 세종대왕은 미소를 용안에 띠시고 칭찬의 말씀을 내렸다.

"이종무는 과연 명장이로다! 추상같은 무위로 적을 항복 받은 일도 쾌한 일이지마는, 호생지덕을 내려서 기아를 면케 한 일고 또한 어진 장수의 높은 솜씨니라!"

최기은 또 좌군절제사 박실이 훈내곶이에서는 크게 이겼으나, 강악에서는 패전을 해서 군사 백여 명이 상한 일을 아뢰었다. 세종전하는 미간을 잠깐 찡그리셨다.

"나중에 사실하려니와 용맹만 믿는 장수와 교만한 장수는 슬기로운 장수만 못하니라!"

탄식하는 말씀을 내렸다.

정동대장군 이종무는 개선 장병 만 칠천 명과 사로잡은 항왜와 한인 수백 명을 2백여 척의 병선에 분승시켜서 승전고를 울리며 호호탕탕 거제항에 개선하니 때는 73, 일진으론 병오의 일이다. 619일 거제도에서 출정하는 장한 길에 올라서 불과 10여 일에 적의 배 129척을 뺏고, 적호 1,939호를 불사르고, 앞뒤 싸움에 적장 114명을 목 베고 다시 구주 장기까지 대마도주 도도웅환의 항복을 받고 돌아오는 이 사실은 왕조 건국 이래 전무했던 쾌한 승리였다. 이종무 장군의 해상작전은 질풍신뢰와 같았고, 바람과 조수의 형세를 치밀하게 살펴서 한 척의 전함도 손실이 없게 한 일은 시로 슬기로운 명장의 신묘한 전술이었다. 개선주사가 거제도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파되자, 왜구의 노략질을 받아 항상 불안 속에 빠졌던 부산포, 내이포, 염포(울산)와 남해 바다 일대에 살고 있는 수만 수천의 주민들은 구름 뫼듯 모여들어 소를 잡고 술을 걸러 환호성을 울리며 개선 장병들을 환호했다. 개선장군 이종무는 밀화패영에 화려한 구군복 차림으로 모든 장졸들을 대표하여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백성들에게 일일이 답례를 했다. 늙은 부로들이 갓 쓰고 막대 짚고 허리 굽은 몸으로 장군 앞에 가까이 가서 치하의 말씀을 보낸다.

"장군의 덕택으로 삼포의 백성들뿐 아니라 연해의 생업하는 어민들이 모두 다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자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위세를 드높이시어 왜적들을 항복 받으신 일도 크게 감사합니다나는, 가난한 고기잡이들이 이제는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러한 기쁜 일이 또다시 어디 있겠습니까. 장군의 은혜 잊을 길이 없습니다."

이종무 장군은 쾌활하게 웃으며 늙은이의 손을 잡고 대답했다.

"어찌 나 혼자의 힘으로 완악한 왜적을 항복 받았겠소. 모두 다 명철하신 성상전하의 홍복이시고 모든 장졸들이 잘 싸워준 덕택이외다."

또 한 사람의 늙은이가 앞으로 나가 말한다.

"도대체 불과 열흘 동안에 어떻게 두 섬을 정벌하시고 또다시 왜국 본토인 구주까지 가셔서 왜추들을 섬멸하셨습니까? 자운의 용병하시는 솜씨는 시를 질풍신뢰와 같습니다. 장자방이나 제갈양이 부생한다 해도 장군의 용병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천만에, 지나친 과찬이오."

이종무 장군은 손을 흔들어 사례하고 전함으로 돌아갔다. 경상도에 주둔하고 있던 도통사 유정현도 참찬 최윤덕과 함께 육정대를 거느리고 개선주사를 맞이하러 말을 달려 거제로 내려왔다. 거제 일대는 승전고를 울리며 며칠 동안 환락의 거리를 이루었다. 정동대장군, 사문도체찰사 이종무는 진무 송유인을 먼저 한양으로 보내서 개선함대가 거제도에 돌아온 것을 세종전하께 고했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돈수백배하옵고, 삼가 상왕 전하와 성상전하께 아뢰옵니다. 대마도 도도웅환을 항복 받은 일은 이미 전편에 장계를 올려 상세하게 아뢰었거니와 주사 전군은 배 한 척의 손상이 없이 무사하게 거제도로 돌아왔습니다. 619일에 거제항에서 출범하와 73일에 개선했사오니 불과 10여 일에 대마도와 구주 장기를 토벌하와 나라의 위세를 떨쳤습니다. 모두 다 명철하옵신 상왕 전하와 성상전하의 홍복이시옵니다. 삼가 개선함대가 거제에 돌아온 것을 아뢰옵니다.'

대마도 정벌에는 나가지 아니하고 경상도에 육전대를 거느려서 후방전선을 통솔하고 있는 영의정 겸 삼군도통사 유정현도 장계를 올려 대군의 반사를 고했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크나큰 전과를 올려서 대마도 왜추를 항복 받고, 거제도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나라의 근심이 덜어졌습니다. 모든 군사를 휘동하여 한양에 당도하자면 거의 한 달이 걸리겠습니다. 두 분 전하의 강녕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우선 장계를 올립니다.'

두 대장의 장계를 받아보신 제종전하와 상왕 전하의 만족하시는 모습은 말할 것 없고, 육조판서와 삼사 백관들은 궐하에 나가 전승의 쾌보를 축하하고, 온 나라의 서민들은 백 년의 암이었던 대마도 해적의 무리를 섬멸했다 해서 어깨를 으쓱거리고 팔을 뽐내 자랑했다.

한편 나라 안으로 침략해 들어왔던 대마도 왜적들은 황해도 웅진 백령도에서 우리의 주사에게 크게 패해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침입했다. 때마침 중국에 사신으로 따라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통사 김청은 패해 달아났던 왜적의 정세를 정부에 보고했다.

'대마도에서 서해로 침략해 들어왔던 왜적은 백령도에서 우리 수군에 대패한 후에 금주위로 침입했습니다. 명의 도독 유강지는 대군을 휘동해서 왜적들을 몰살시키고 산 채로 잡은 포로들은 북경으로 압송하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돌아왔소이다.'

연달아 쾌한 소식이었다. 승정원에서는 이 사실을 세종전하와 상왕께 아뢰었다. 세종전하는 좌의정과 병조판서에게 분부를 내렸다.

"대마도의 소굴을 무찔러 항복 받고 또다시 노략질해 들어왔던 왜추들이 우리 수군에게 패전을 당한 후에 명나라 금주를 침범했다가 섬멸을 당했다 하니 모두 다 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혹이나 사잇길로 배를 저어 대마도로 도망가는 무리들이 있을지 모른다. 병조판서는 아직 돌아오지 아니한 장병들에게 서해 바다와 동해 바다를 엄하게 초계해서 유루가 없도록 만전의 태세를 취하라!"

세종전하의 분부를 받은 병조판서 조말생은 다시 한번 전하의 주밀한 배려에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감격한 말씨로 세종께 아뢴다.

"밝고 주밀하신 배려를 조수하지 않도록 받들겠습니다. 나라 안에 있는 장졸들에게는 아직 출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아니했습니다. 성상전하의 명철하신 뜻을 받들어 방비를 튼튼히 하여 미꾸리새끼같이 빠져 달아나는 왜적들이 비록 몇 놈 아니 된다 하더라도 모조리 잡아 버리겠습니다."

좌의정 박은이 아뢴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대마도를 재정케 하시옵소서."

좌의정 박은은 엉뚱한 소리를 한마디 했다. 좌의정이라 가만히 낮아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재정이라니?"

세종전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면으로 박은을 바라보고 말씀을 내렸다. 박은은 반문하시는 세종전하의 말씀에 얼른 대답을 아뢰지 못한다.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다. 세종전하는 다시 하문하신다.

"이종무보고 다시 대군을 휘동해서 대마도를 정벌하라고 영을 내리란 말인가"?

", 그러합니다."

"이종무는 대마도뿐 아니라 대마도주 도도웅환이 도망가 있는 구주장기까지 가서 크게 이겼을 뿐 아니라 항복을 받고 승전고를 울려 거제로 돌아왔는데, 좌의정은 무슨 까닭에 또다시 재정을 하라 하는가? 도대체 항복 받은 놈을 어찌해서 또다시 치라 하는가?"

"중국 명나라에서 노략질을 하다가 쫓겨서 대마도로 달아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아주 씨를 말리기 위하여 다시 대마도를 치자는 것입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어이가 없었다. 어전이었다. 껄걸 웃을 수도 없었다. 엄숙한 얼굴로 좌의정 박은을 향하여 말한다.

"도대체 대감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왜구가 처음 우리나라로 노략질하러 들어왔을 때 소인은 대마도를 쳐부수자고 정벌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대감은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대마도를 정벌하면 후환이 크게 두럽다고 극력 반대론을 제창하셨습니다. 그러던 분이 이번엔 다시 치자고 주장을 하시니 도대체 대감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항복 받은 적을 무슨 까닭에 재정해야 합니까. 군사를 움직여 적을 치는 데는 당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중국에서 쫓겨 달아나는 몇 명의 왜적이 있을까 해서 2백여 척의 큰 전함과 만 칠천 명의 많은 군사를 움직여서 다시 바다를 건넌다는 일은 가소롭기 짝없는 일이올시다. 처음에는 출전을 반대했다가 이제 크게 이기고 나니 또 한번 쳐보자는 말씀입니까? 좌의정 대감, 생각해보시오. 왕사는 당당한 정의와 대의명분을 밝히고 움직이는 법입니다. 다 쓸어버려서 항복 받은 잔적을 왜 다시 치자 하십니까? 절대로 아니 됩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쾌쾌하게 좌의정 박은을 공박했다. 세종전하는 미소를 지으시며 병조판서가 박은을 공박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박은은 무안에 취해서 얼굴빛이 홍당무가 되었다. 박은은 원래 자기의 이름자 그대로 비평하기를 좋아해서 강직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상왕인 태종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벼슬이 좌의정의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다. 나랏일을 다스리는데 사건 전체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아니하고 입바른 것으로 자기의 주장을 삼아서 다른 사람과 타협하기를 싫어했다. 이러한 까닭에 세자를 폐하여 양녕으로 강등시킬 때도 박은이 앞장을 서서 적극 주장했고, 양녕을 광주로 쫓아낸 후에 세종이 동궁이 된 후에 어마마마의 뜻을 받들어 다시 서울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사람도 박은이었다. 다음 세종이 즉위한 후에 국구인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자진해 죽게 한 배후의 장본인도 박은이었다. 왜구가 서해 바다로 쳐들어와서 정벌론이 일어났을 때, 박은은 절대로 대마도를 정벌해서는 아니 된다고 여러 차례 역설했다. 오직 병조판서 조말생만이 이 기회에 배은망덕하는 왜추들을 응징하지 아니하면 마침내 크나큰 두통거리가 된다고 힘차게 주장해서, 결국 이종무로 대장군을 삼아서 대마도 정벌을 단행해서 적구의 소굴을 소탕하고 멀리 구주 장기까지 적을 추격해서 유사 이래의 큰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제 대마도 정벌을 반대하던 박은이 이종무의 첩보가 들린 후에는 돌연 첫 번째 자기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고, 당당하게 항복 받은 적을 재정하자고 주장하니 병조판서 조말생은 귓구멍이 막힐 지경이었다. 뒤늦게나마 재정론을 주장해서 먼젓번 반대했던 어리석은 일을 씻어 버리고 새판으로 논공행상에 한몫 끼여보자는 배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의정 유정현은 영의정인 까닭에 최고지휘관 도통사가 되었고, 병조판서 조말생은 적극 주전론자인 역시 수훈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좌의정은 이번 대마도 정벌에는 아무런 공이 없다. 공이 없을 뿐만이 아니다. 대마도 정벌을 적극 반대한 사람이었다. 크게 이겨서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2백여 척의 전함과 만 칠천여 명의 개선군을 맞이하게 되니, 좌의정의 높은 자리에 있어서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명나라에서 쫓겨서 대마도로 달아나는 피라미새끼 같은 왜적 몇 명을 잡기 위해서 다시 대마도를 치자고 주장해 본 것이다. 세종은 명철하고 관후장자의 품격을 지닌 임금이었다. 만면의 웃음을 용안에 띠고 좌의정과 병조판서 두 신하를 바라보고 말씀을 내린다.

"좌의정의 주장도 옳기는 옳소. 원래 왜추들은 간휼무쌍한 놈이라 면종복배하는 일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칠월, 팔월은 바닷바람이 억세고 위험하오. 그러기에 이종무한테도 칠팔월이 되기 전에 항복을 받았으면 속히 돌아오라고 칙사를 보낸 일이 있었소. 이제 크게 이기고 돌아왔으니 하회를 보아 다시 의논하기로 합시다."

세종전하는 둥글게 두 신하를 타일렀다.

 

논공행상

 

그러나 좌의정 박은은 마음이 흡족하지 아니했다. 첫째로 병조판서한테 논박을 당한 것이 분하고, 주상전하가 얼른 동조해주지 않는 것도 마음속에 불만이 있었다. 경복궁에서 물러난 후에 바로 수강궁으로 향하여 상왕께 알현을 청했다. 상왕은 좌의정 박은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편전에서 술까지 대작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당신의 비위를 잘 맞추는 때문이다. 박은이 알현을 청하니 상왕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알현을 허락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박은을 맞이했다.

"좌의정이 어찌해서 알현을 청했소?"

"군국대사에 대하여 긴히 아뢸 일이 있사와 뵙기를 청했습니다."

군국대사란 말을 듣자 상왕은 깜짝 놀랐다. 나라에 또다시 왜구가 침략한 줄 알았다.

"군국대사라니, 나라에 무슨 이변이 생겼단 말인가?"

"아니올시다. 변란이 생긴 것은 아니옵고 대마도에 대하여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대마도 정벌에 대해서는 이미 대첩했다는 장계가 들어왔고, 이종무는 거제도로 개선을 해서 곧 한양으로 반사를 하는 도중에 있지 아니한가?"

", 그렇습니다. 그러나 소신은 대마도 재정을 주장합니다."

"개선하는 군사에게 대마도를 다시 정벌하란 말인가?"

상왕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 그렇습니다. 이종무의 개선부대가 한양까지 돌아오기 전에 급히 개선군을 돌려서 더 한 번 대마도를 무찌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까닭을 말해보오."

"명나라에서 돌아온 통사 김청의 말을 듣자오니 우리나라로 노략질하러 들어왔던 대마도 왜적들은 중국 금주로 들어갔다가 도독 유강지한테 몰살을 당하고 산 채로 잡힌 놈들은 북경으로 잡혀갔다 합니다. 그러나 필시 중간에서 도망을 쳐서 대마도로 달아나는 놈이 있을 것입니다. 이종무의 거느린 군사는 한양으로 돌아오지 말고 거제에서 다시 배를 돌려서 대마도로 갔다가 중국에서 도망쳐서 소굴로 돌아가는 놈들을 모조리 시살해버린다면 영영 후환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반공배올시다. 힘 안 들이고 대마도 놈들의 씨를 아주 말려 버리는 일이올시다. 전하께서는 또 한 번 용단을 내리십이오."

상왕 태종은 박은의 말이라면 어느 때나 그럴듯하게 생각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좌상의 말도 일리가 있소. 그럴듯한 생각이오. 그리해봅시다."

박은은 군국기무의 중하고 큰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건의가 통과되는 것만이 기뻤다.

"꼭 재정을 하도록 성지를 내려주십시오."

박은은 배례를 드리고 물러났다. 의기가 양양해서 빈청으로 나갔다. 병조판서 조말생을 청했다.

"이제 상왕 전하께서는 대마도 재정을 허락하셨소. 곧 삼군부에 하명이 계시오리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박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가만히 좌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박은하고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말한댔자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침묵을 지켜 대답을 아니 하고 곧 경복궁으로 들어가 세종대왕께 뵈었다.

"좌의정 박은이 상왕 전하께 아뢰고 대마도 재정을 주장해서 곧 이종무에게 다시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릴 듯합니다. 공연히 국력만 소비하고 해적들에게 비웃음을 받는 당치 않은 일이올시다. 이 일을 막으실 분은 오직 주상전하께서 계실 뿐이올시다. 속히 상왕전에 납시어 재정하랍시는 분부를 막아주십시오."

세종전하도 깜짝 놀랐다.

"상왕 전하께서 재정하라는 분부를 내리실 것이라는 말을 누구한테 들었는가?"

"좌의정이 소신으로 빈청으로 청해서 곧 재정 분부가 계실 것이라고 대기하고 있으라 말했습니다. 필연코 좌의정이 건의를 올린 듯합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일은 삼군부 회의를 열어서 처리할 일이지, 어찌 좌의정 한 사람의 의사로 결정이 되겠소. 과인이 곧 상왕 전하께 아뢰어 바로잡으리다. 병판은 염려 말고 물러가오."

"명철하신 처분이올시다. 재정은 절대로 불가합니다."

"삼군부 회의가 열리거든 지체없이 나오도록 하오."

병조판서 조말생은 마음속으로 '과연 명군이시로구나!' 하고 탄복했다. 조말생이 퇴궐한 후에 세종전하는 곧 수강궁으로 상왕께 문안을 들어갔다. 상왕은 아드님 배례를 받은 후에 웃음을 머금고 말씀을 내린다.

"그러지 아니해도 전하를 청하여 의논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 들어왔소."

세종전하는 무릎을 꿇고 상왕께 묻는다.

"무슨 하문하실 일이 계시오니까?"

"아까 좌의정 박은이 입궐해서 이종무의 개선부대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전에 다시 대마도로 가서 중국에서 도망쳐 오는 왜적들을 모조리 섬멸시키자 하기에, 일리가 있는 말이라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다고 허락했소."

세종전하는 조금도 용안에 흐린 빛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말씀으로 대답한다.

"군국의 대사는 모두 다 아바마마께서 처결하시는 일이올시다마는 아바마마를 도와드리는 삼군부가 있습니다. 한번 회의를 열어 처결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종전하는 아바마마의 불덩이 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비단결같이 곱고 부드럽게 말씀을 올렸다.

"전하의 말이 옳소. 내 비록 처결하는 권한을 가졌다 하나 군사를 움직이는 큰일을 어찌 독단하겠소. 지난번 대마도 정벌을 결정할 때도 전하와 함께 중신회의를 열어서 비로소 단행했던 것이오."

비단결같이 곱고 곱게 아뢰는 세종전하의 말씀에, 독재적 강한 성격을 가진 상왕도 한결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영의정인 도통사 유정현이 돌아오고, 실전을 치른 이종무도 온 후에 다시 의논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하리다."

이리해서 박은이 주장한 대마도 재정론은 일시 보류가 되었다. 가을 하늘 드높은 팔월이었다. 들에는 고개를 숙인 벼 이삭이 황금 물결을 이루고, 산에는 밤나무 가지마다 송이송이 아람이 부풀어 터졌다. 촌락마다 충성한 가을을 맞이하는 즐거운 한가위 철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흠뻑 평화와 풍윤 속에 격양가를 높이 부르고 있을 때, 또 한 가지 국민들의 마음을 더한층 기쁘게 해주는 일이 있었다. 우리 수군 만 칠천여 명은 바닷가 변지를 시끄럽게 했던 해마도 왜적의 소굴을 무찔러 소탕한 후에, 도망치는 도주 도도웅환을 구주 장기까지 추격해서 크게 싸워 항복을 받고 승전고를 울려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개선하는 대군이 거제에서 한양까지 돌아오는 천 리 길에는 고을마다 역말마다 남녀노소들이 줄을 지어 연도에 나와서 개선군을 환영했다. 동리마다 닭을 잡고 돼지를 삶았다. 술을 거르고 밥을 지었다. 국을 끓여 동이로 나르고 떡을 쳐서 소래기로 옮겨서 개선하는 병사들을 대접했다. 마을마다 동리의 풍헌과 약정들이며 칠십 팔십 나이 많은 노인들이 막대를 짚고 나와서 개선장군 이종무 이하 모든 절제사들한테 치하를 했다.

"간휼무쌍한 대마도 왜적들을 일망타진해서 무찌르시고 국가의 위엄을 사해에 떨치셨으니 이런 기쁠 때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제는 우리들 변지에 사는 백성들은 베개를 높이 해서 마음 놓고 자겠습니다."

"불과 열흘 동안에 험한 풍랑과 독한 장기를 물리치시고 완패한 왜적을 소탕해 돌아오신 과연 불세출의 명장이십니다. 우리들 변지 백성들은 이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폐부 속에 길이길이 새기오리다."

대장군 이종무는 모든 아장들과 함께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모두 다 주상전하의 홍복이시고 국민 여러분들이 한데 뭉쳐서 뒤를 받쳐 주신 덕택입니다."

가는 곳마다 이장군은 간곡하게 환영하는 부로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보냈다. 다만 이중에 얼굴빛이 쾌활하지 못하고 우울한 표정을 항상 띠고 있는 장군이있었다. 용기만 믿고 싸우다가 잠시 패전을 한 박실이다. 서울로 향해 돌아오는 개선군이 한강변에 당도하니, 상왕 전하와 세종전하는 칙사를 보내서 어사주를 내리고 대장군 이하 모든 장병을 위로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곧 서울로 들어가 세종전하와 상왕 전하께 뵈었다. 세종전하는 병조판서와 모든 승지들이 시립한 중에서 우악한 말씀을 내렸다.

"불과 열흘에 대마도 왜적을 소탕하여 항복받은 일은 청사에 길이 빛을 낼 일이다. 경에게 찬성사의 높은 벼슬을 주어 노고를 치하한다."

이종무는 감격한 눈물을 머금고 교지를 받들었다. 다음에 논공행상에 참여한 장병은 그 수가 2백여 명이나 되었다. 한편 병조판서 조말생은 구주 장기 강악 대전에서 일시 패전한 박실을 어찌 조처할 것을 세종전하께 물었다.

"개선 중에 잠시 하자라고 할 수 있는 좌군절제사 박실의 패군한 죄를 어찌 처결하려는지 감히 아뢰옵니다."

세종전하는 한동안 말을 아니 하고 깊은 생각 속에 빠졌다가 천천히 말씀을 내렸다.

"박실은 효자다. 이 까닭에 상왕 전하께서 극히 사랑하시는 사람이다. 비록 강악에서 패군한 죄가 있다 하나, 훈내곶이에서는 적의 괴수 도도웅환을 두 번이나 화살로 쏘아 크게 이긴 공로가 있다 한다. 공과 죄를 상쇄해서 공, 죄를 밝힌 후에 삭탈관작을 면케 하라!"

원래 박실은 무과 출신 박자안의 아들이다. 태조가 왕위에 있고 태종이 아직 잠저에 있을 때 박자안은 경상도 절제사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군기를 태만하게 처리했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옥에 가두고 참형에 처하려 했다. 자안의 어린 아들 박실은 정안군(태종이 되기 전의 군호)을 찾아보고 울면서 아비 대신 죽여 달라 간곡하게 고했다. 정안군은 나어린 박실의 효심에 감동이 되었다. 태조께 아뢰고 박자안의 죽음을 면케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박실은 항상 정안군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게 되었고 정안군이 방석을 토벌했을 때, 장교의 한사람으로 출전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았던 것이다. 세종전하는 아버지 상왕과 박실의 인연을 생각해서 죄를 공으로 상쇄해서 관작을 그대로 두라는 분부를 내린 것이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세종전하의 특명을 받들어 병조로 나가 회의를 열었다. 아무리 주상전하의 특명이라 하나 병조판서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비록 왕권이 존엄하다는 왕조의 제도라 하나, 그대로 유유낙낙해서 임금의 말에 덮어놓고 복종하지 아니하는 것이 또한 왕조 신료들의 꿋꿋한 기풍이었다. 임금도 맘대로 못하고 대신도 맘대로 못했다. 반드시 여론을 들어서 판정했다. 이것이 전제 왕조이면서도 임금 혼자도 독재를 못 하게 했던 왕조의 엄연한 질서요, 이로 인해서 왕조는 비록 전체적 통치시대였다 하나 그 수명이 5백여 년이라는 길고 긴 역사와 세월을 유지했던 것이다. 병조에서는 판서 조말생을 위시해서 병조참판, 참의, 정랑, 좌랑들이 질서정연하게 모여 앉았다. 먼저 병조의 장관인 판서 조말생이 말을 꺼냈다.

"이번 대마도 개선 장병에 대하여 논공행상을 하는 중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에게는 장천군의 군호를 내리시고 의정부 찬성으로 특진을 시켰으며, 모든 은전을 받은 장병들이 2백여 명이나 된 것은 여러분들도 다 아는 일이지만, 잠시 패군을 한 좌군절제사 박실에 대하여 어찌 처리할 것을 전하께 아뢰었더니 비록 허물이 있었으나 공과 죄를 상쇄해서 삭탈관작을 면하도록 하라는 분부가 계시었소. 어찌 처리해야 할지 여러분의 의견을 말씀하시오!"

그중 벼슬 계제가 나은 병조좌랑이 말한다.

"공과 죄를 비겨서 상쇄하기 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패군지장을 불러서 패군한 죄를 묻지도 아니하고 덮어놓고 주상의 명령이라 해서 미리 공과 죄를 상쇄한다는 일은 군법을 문란시키는 일입니다. 박실을 구금시켜서 치죄한 후에 처단하는 일이 당연합니다."

새로 대과급제를 해서 좌랑에 임명된 새파란 청년 학사의 주장이었다. 다음에 삼십 대를 겨우 넘어선 병조정랑이 말한다.

"좌랑의 말이 옳습니다. 먼저 치죄를 하고 증심을 한 후에 상을 주든지 벌을 주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덮어놓고 공으로 죄를 속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아니합니다. 아무리 주상전하나 상왕 전하의 분부라 할지라도 봉행하지 못하겠습니다."

정정당당한 정랑의 태도다. 병조참의가 말을 꺼낸다.

"좌랑과 정랑의 말이 옳습니다. 한번 군법이 구부러진다면 장차 다음번 군법처리를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정실관계로 군법을 굽힐 수는 없습니다. 먼저 박실을 문초하여 죄상을 다스린 뒤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 처결하는 일이 옳습니다. 덮어놓고 주상전하의 분부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병조참의는 박실과 상왕의 인연이 깊은 일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정정당당하게 정론을 주장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좌랑, 정랑, 참의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은 후에 잠자코 침묵을 지켜 앉았는 병조참판에게 의향을 묻는다.

"참판 영감의 의향은 어떠하오? 말씀해보시오."

병조참판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참의 영감 이하 모든 관원들의 말씀이 다 옳은 줄 생각합니다. 사실의 곡직은 여하간에 먼저 패군지장을 하옥한 후에 치죄를 해야 합니다. 이리해야 만 칠천여 명의 장병들이 비로소 납득이 될 것입니다. 그리한 후에 삼군도통사와 삼군도체찰사가 임석한 후에 증언을 들어서 공죄를 결정할 것입니다. 더구나 삼군도체찰사는 현지 일선에서 주상전하의 몸을 대신해서 삼군을 지휘한 사람입니다. 휘하 장수 박실의 공과 죄를 잘 알아 판단할 것입니다. 당연히 도체찰사와 도통사가 임석해서 병조에 심증을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오늘 우리들 병조의 회의한 일을 주상전하께 아뢰고 박실을 치죄하자 주장하십시오."

병조판서 조말생도 식견이 높은 사람이다. 대마도 출정을 적극 반대했던 좌의정 박은을 누르고 기어코 대병을 출동시켜서 오늘의 큰 승리로 국위를 드높이게 한 녹록지 아니한 병조의 장관이었다. 모든 막료들을 향하여 장중하게 말한다.

"여러분의 정당한 말씀을 나도 옳다고 생각하오. 곧 입궐해서 상왕 전하와 주상전하께 병조의 정론을 아뢰고 박실을 우선 치죄하기로 합시다."

병조 장관인 판서의 당당한 태도에 모든 사람들은 미덥게 생각했다.

"정정당당하게 병조의 질서와 법을 지키시오록 합시오."

젊은 좌랑이 한 마디 덧붙였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자비를 타고 곧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주상전하께 아뢰옵니다. 박실의 패군의 일에 대하여 결정했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일을 취하지 아니한다면 상벌이 분명치 아니하게 됩니다. 상벌이 분명치 않게 된다면 기강이 없어져서 군령을 내릴 수 없고, 군령이 행하지 아니한다면 앞으로는 왜적을 토벌하는 군사를 출동시킬 수 없습니다."

조말생은 차근차근 조리를 따져 아뢰었다. 세종전하는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과인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당연히 치죄를 하는 일이 옳은 줄 안다. 그러나 경에게는 아직 말을 하지 아니했으나 저번에 과인이 상왕전에 문안을 들어가 대마도의 일을 아뢰었을 때 박실의 첫째 번 승리와 둘째 번 패한 일을 말씀드린 일이 있었다. 그때 상왕께서는 '공과 죄를 비겨서 상쇄하는 것이 좋겠다' 하신 말씀이 있었으므로 상왕 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려고 경에게 부탁한 말이다. 내 비록 임금이라 하나 어찌 국가의 군법을 어길 수 있는가? 상왕께 간곡하게 아뢰고 병조에서 잘 처단하라!"

어디까지나 경우에 밝고 명철한 임금이었다. 병조에서 처단할 것을 허락하였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신하들의 말을 눌러버리고 독재의 위세를 뵈지 않는 냉철한 전하의 말씀에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다만 부왕인 상왕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려 하여 공과 죄의 상쇄론을 분부한 일을 알게 되었다. 박실도 효자지만 세종대왕도 효자라고 생각했다.

"전하의 효심이 해와 달같이 빛나신 것은 조야의 창생들이 다 아는 바이옵니다. 상왕 전하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내리신 말씀인 줄 비로소 알고 황공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법은 법이옵니다. 법을 한번 굽힌다면 앞으로 만백성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전하의 효심은 깊이 가슴속에 간직한 채 상왕전에 아뢰어 공평무사하도록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어전에서 물러난 후에 궐하에서 자비를 돌려 수강궁으로 나가 상왕께 뵈었다.

"대마도에서 개선한 장병들에 대하여 아뢸 일이 있사와 알현을 청했습니다."

"장천군 이종무 이하 2백여 명에 대하여 논공행상은 이미 끝난 줄 아는데 또 다시 누구에게 상을 줄 일이 있는가?"

"상을 주는 일이 아니오라 패군한 죄를 진 박실에 대하여 치죄를 해야 하겠습니다."

"일전에 나는 상감에게 박실이 비록 패한 일이 있다 하나 먼젓번에는 대마도 괴수를 두 번씩이나 활로 쏘아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니, 공과 죄를 서로 비겨서 전직에 그대로 머물러 두게 하라 말한 일이 있다. 경은 아직 상감에게 어떠한 분부를 받지 아니하였는가?"

병조판서 조말생은 능소능대한 재상이었다. 행여나 상감과 상왕 사이에 털끝 나치라도 틈이 벌까 염려했다.

"먼저 군사권을 장악하신 상왕 전하께 품달한 연후에 상감께 아뢰려고 아직 말씀을 드리지 아니했습니다. 상왕 전하의 하교를 바라옵니다."

상왕 태종은 만면에 웃음이 화려했다. 병조판서의 대답이 비위에 맞는 모양이었다.

"아까 내가 상감한테 말했다 하지 아니했던가. 치죄할 것 없이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네."

상왕은 유아독존의 분부를 거침없이 내렸다. 조말생이 다시 고한다.

"패군지장을 심사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둔다면 묘당에 여론이 비등할 뿐 아니라 앞으로 사기에 크나큰 영향이 미칩니다. 병조에서는 군법을 무시할 수 없다 하여 일단 치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법을 유린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병조판서는 정색하고 아뢰었다. 상왕의 화려한 웃음빛은 금방 사라졌다. 독재의 화신인 상왕의 용안은 돌연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다면, 병조에서는 꼭 박실을 잡아다가 치죄를 하겠단 말인가?"

", 조정 여론이 무섭고 죽도록 싸워서 이기고 돌아온 수군 만 칠천여 명의 사기의 크나큰 영향이 미칩니다."

조말생은 꿋꿋하게 대답했다. 상왕의 안색은 현연하게 불쾌한 빛이 역력히 떠돌았다. 가슴속에는, '감히 내 말을 어떤 놈이 항거한단 말이냐!' 불덩이 같은 화기가 치밀었다. 그러나 조말생은 병조에 못 중진이다. 또한 패군지장을 치죄하겠다는 이 일을 가지고 병조 장관을 호통쳐서 꾸짖을 일도 못 된다. 상왕은 목까지 뻗쳐오르는 불덩이 같은 화기를 꽉 참았다. 잠깐, 마음을 돌렸다.

"그렇다면, 병조에서는 기어코 박실을 잡아다가 치죄를 해야 하겠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병조의 여론이 그러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왕 전하께서는 국가의 군국기무를 금상전하께 맡기시지 아니하시고 친히 통솔하시는 처지에 계십니다. 박실이 패군의 죄를 어찌해서 저질렀는지 사실해보지도 아니하시고 덮어놓고 면해주신다면 뒷날 사관들이 춘추필법으로 사실을 쓰기 어려울 것입니다."

병조판서의 조리정연한 말에,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맹호 같은 성격을 가진 상왕이건만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병조의 여론이 정 그러하다면 박실을 의금부로 넘겨 심문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뜻을 상감께 전하라!"

조말생은 비로소 숨을 돌렸다.

"영명하신 상왕 전하의 뜻을 상감께 품하겠습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상왕전에서 물러나 다시 자비를 경복궁으로 돌렸다. 세종은 미소를 풍기며 병조판서를 인견했다.

"박실의 일을 상왕께 아뢰었는가?"

", 아뢰었습니다. 치죄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조말생도 화색이 만면해서 대답했다.

"용하게 허락을 맡았구려!"

세종전하는 소리를 높여 웃으셨다.

"상왕 전하께서 주상전하를 대신해서 군국기무의 중대한 책임을 통솔하시는 처지에 패군지장을 문죄도 아니하고 벼슬을 위임시킨다면 뒷날 사관이 춘추필법으로 붓을 들기 어렵습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필경엔 허락을 내리셨습니다. 전하께 아뢰옵고 의금부에 나수하여 치죄하라 하셨습니다. 소신도 이제는 병조 여론에 대하여 면목이 서게 되었습니다."

"영명하신 상왕 전하께서 어찌 병판의 강직하고 조리 있는 말을 아니 들으시겠소. 일이 잘 처리되리다."

말씀을 마치자 도승지를 불러 의금부 제조 변계량에게 입시를 명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상왕인 태종의 강인한 성격과 아드님 세종의 우아한 성정이 제각기 특색을 가져 현저하게 판이한 것을 새삼 느꼈다. 이윽고 의금부 재조 변계량이 도승지의 인도로 어전에 부복했다. 변계량은 호를 춘정이라 부르는 당대의 글 잘하는 재상이었다. 세종전하는 옥좌에서 일어나 배례드리는 춘정을 맞이했다.

"경에게 당부할 일이 있소. 이번 대마도 정벌은 적굴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도주를 항복 받아 크게 국위를 선양했으나, 좌군 박실이 약간 패전을 했다 하오. 상왕께서 박실을 사실하라는 분부가 계시니 의금부에 나수하여 패군한 까닭을 묻게 하오."

병조판서가 시립한 속에 변계량에게 장중한 분부를 내렸다. 변계량은 국궁하고 대답했다.

"하교대로 봉명하여 전말을 품달하겠습니다."

세종은 또다시 한 말씀을 당부한다.

"박실이 비록 패군한 일이 있다 하나 먼저 싸움에는 적장을 두 번씩이나 쏘아서 산골 속으로 쫓아버렸다 하오. 모든 일을 상세히 사실해서 원통한 일이 없도록 처리하오. 또한 박실은 공신의 아들일뿐 아니라, 극진한 효자라 해서 상왕 전하께서 매우 촉망을 두셨던 사람이오. 의금부 제조는 잘 처리하도록 하오."

자상하고 어질고 자비스런 말씀이었다. 강직한 병조판서 조말생도 시측해 듣고 전하의 어진 마음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의금부 제조 변계량은 병조판서와 함께 어전에서 물러났다. 의금부에서는 곧 박실을 나수했다. 제조 이하 모든 당상관들이 좌기를 차리고 박실을 문초하기 시작했다. 박실은 지장은 되지 못하나 용장이었다. 금부 당상들 앞에 나타나 부끄럼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구주 장기 두지포 일대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소. 왜적의 결사대들이 목책을 넘어서 보초를 묶어 놓고 해변으로 내려와 우리 배에 불을 질렀소. 왜추들은 이 틈을 타서 달아나자는 배짱이었소. 어찌 가만히 앉아 보겠소. 곧 좌군 일부대를 휘동하여 강악까지 적을 쫓다가 복병을 만나 패전을 한 것이오. 곧 이종무 대장군께 연락을 취한 후에 행동하고 싶었으나 일이 급하니 좌군만 데리고 산악지대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때 어떠한 장수라도 참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이종무 장군이 대군을 휘동해서 굴속에 있는 적병들을 화공하는 바람에 마지막 판에 큰 승리를 얻어서 도도웅환을 항복 받았소. 나는 성정이 너무나 급했던 것을 후회할 뿐이오. 그리고 용장이 슬기 있는 장수만 하지 못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소. 패군한 죄를 받아야 마땅하오."

박실은 조금도 비겁한 태도가 없었다. 솔직하게 자기가 성미 급한 탓으로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험한 산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복병을 만나 패전한 까닭을 진술했다. 의금부 제조 변계량은 증인으로 배석해 있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에게 묻는다.

"좌군절제사 박실의 진술에 대해서 틀림이 없습니까?"

"틀림이 없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금부 당상 변계량은 다시 증인으로 불러온 목격자 한인 포로에게 물었다.

"너는 좌군에 예속되었던 한인 포로로서 강악 싸움을 목격한 자라 한다. 박 장군의 진술이 틀림없느냐?"

한인 포로는 뜰 아래서 대답했다.

", 틀림없습니다. 박장군은 비록 일시 패했다 하나 훌륭하신 장군이십니다. 맨 처음 훈내곶이 싸움에 적을 추격해서 도도웅환의 투구룰 쏘아 떨어뜨리고, 두 번째 화살은 도도웅환의 어깻죽지를 맞혀서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습니다. 어쨌든 박장군은 잠시 복병을 만나 패군한 일이 있다 하나, 첫 번 싸움에 크나큰 공을 세운 분입니다."

금부 당상 변계량은 서리에게 명하여 모든 공초를 기록하게 했다. 변계량은 다시 임석해 있는 영의정에 도통사를 겸한 유정현한테 묻는다.

"대감께서는 이번 대마도 정벌에 삼군을 통솔하시던 도통사이십니다. 새선하는 즉시 어찌해서 패군지장을 죄주지 아니하시고 병조에서 규탄하는 물의가 일어날 때까지 아무 말씀을 아니 하셨습니다?"

도통사 유정현이 정색하고 대답한다.

"내가 비록 도통사라 하나 군에는 질서와 관장하는 책임이 따로 있습니다. 전방 전지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은 삼군도체찰사가 있습니다. 나는 박실이 패군한 일을 보고받고, 현지의 총지휘관인 이종무 장군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해서 패군한 죄를 묻지 않느냐 했더니, 이장군의 대답이 박실은 약간 패군한 일이나, 그때 그 경우를 당하면, 누구나 어찌하는 수가 없고 첫 번 훈내곶이 싸움에서는 박장군이 적장을 두 번씩이나 쏘아서 수백 명을 참획했을 뿐 아니라 적의 세력을 크게 꺾어 치명상을 이루게 했으니, 죄를 공으로 비겨서 논죄를 하지 않겠다 했소이다. 군대를 다스리는 것은 전방 지휘관의 관할에 속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임금이 대장에게 군권을 맡길 때 대장이 탄 수레를 밀어주면서 곤이내는 과인이 치지하고 곤이외는 장군이 치지한다는 말이 있소이다. 내 비록 도통사라 하나 현지 지휘관의 말을 어찌 아니 듣겠소. 이리해서 불문에 부치고 위에 말씀을 드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영의정 겸 도통사 유정현은 사리를 따져서 여유작작하게 대답했다. 금부 당상은 다시 이종무 장군에게 묻는다.

"장군께서는 일선의 총지휘관으로 어찌해서 패군지장을 죄주지 아니하셨습니까?"

"패군이란 전쟁터에 나가 적과 싸워서 패해 돌아와야만 패군입니다. 전쟁을 하는 중에 국부전으로 일승일패는 병가상사입니다. 전체를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 장병에게 무슨 패군지장이란 불명예를 씌웁니까. 이 까닭에 나는 박실을 죄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당당한 개선장군의 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내가 대마도 정벌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면 패군지장의 죄를 내가 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당하게 우리들 부하와 함께 대마도 소굴을 소탕한 후에 대마도 왜추의 항복을 받고 돌아왔소이다. 어찌 내 부하의 한 사람이라도 패군했다는 허물을 씌우리까. 이 까닭에 나는 잠시 패군한 일을 거론도 하지 아니하였소. 박실은 나와 같이 당당한 개선장군입니다."

이종무는 씩씩한 말투로 정정당당하게 박실을 두둔해서 대답했다. 도통사의 대답과 이종무의 말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수긍시키지 아니할 수 없었다. 금부 당상 변계량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물었다.

"병판 대감은 두 분 말씀을 다 들으셨습니다. 병조에서는 다시 이론이 없겠습니까?"

병조판서 조말생이 천천히 대답한다.

"대마도 정벌을 적극 주장한 것은 병조입니다. 이제는 쾌한 승리를 거두어 적을 항복 받고 국위를 선양해 돌아왔으니 국가의 큰 복이올시다. 모든 개선 장병의 크나큰 노고에 대하여 치하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논공행상하는 일도 또한 병조의 임무입니다. 박실의 패군 한 일이 있어 장교 중에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사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통사와 도체찰사는 아무러한 말씀이 없으니 논공행상을 하기가 극히 어려웠습니다. 이러하므로 병조에서는 박실의 패군이 비록 국지에 제한되었던 일부분의 패전이라 하나 논공행상을 위하여 그 죄를 명확하게 밝히자는 것입니다. 삼군을 통솔하셨던 도통사와 도체찰사 두 분이 미미한 죄라 해서 다 함께 불문에 부치신다 하면 병조에서도 더 우기지는 아니하겠습니다. 다만 두 분 전하의 처분을 따를 뿐입니다."

병조판서는 경위를 밝혀 대답했다. 금부 당상 변계량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사문을 끝낼 것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금부에서는 공초를 마치고 위의 처분을 받들어 결정하겠소이다."

변계량은 금부의 사문을 끝내고 곧 수강궁 상왕전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세종전하도 상왕을 모시고 있었다.

"금부에서 박실의 패군한 일을 소상하게 사문하여 아룁니다."

"도통사와 도체찰사도 임석을 하게 했는가?"

"두 사람뿐 아니라 박실이 패군했을 때 좌군에 소속되었던 목격자 한인 호로도 불러서 패군한 일을 자세하게 알아봤습니다."

"무어라고들 하던가?"

"박실은 솔직하고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의 결사대 몇 놈이 목책을 넘어 들어와 보초를 결박진 후에 해변으로 내려와 우리 배에 불을 지르고 이 틈을 타서 왜추들이 달아나려 하니, 급한 마음에 직속부대 좌군만 데리고 적의 소굴인 험한 산중으로 올라갔다가 복병을 만나서 패군을 했다고 솔직하게 고했습니다. 그리고 용맹스런 장수는 슬기로운 장수만 못 하다고 한탄을 했습니다."

"눈으로 보았다는 한인도 그같이 말하던가?"

"그뿐만 아니라 박실이 첫 번 훈내곶이 싸움에는 왜추를 두 번이나 쏘아서 큰 공을 세웠다 합니다."

"도체찰사는 무어라 말하던가?"

"패군이란 적과 싸워서 패해 돌아와야만 패군이지 전쟁을 하는 도중에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것은 병가상사인데, 전체를 이기고 돌아온 개선 장병에게 패군장이란 누명을 어찌 씌울 수 있는가? 그러므로 박실한테 죄를 묻지 아니했다 증언했습니다."

"병조에서는 무엇이라 말하던가?"

"논공행상에 명분을 밝히기 위하여 여론이 일어난 것이라 했습니다. 도통사와 도체철사의 증언을 들은 후에 병조판서는 비로소 마음이 석연히 풀렸습니다. 두 분 전하의 뜻을 따를 뿐이라 했습니다."

상왕은 금부 당상 변계량의 소상하게 아뢰는 말을 듣자 아드님 세종전하에게 의향을 물었다.

"지금 금부 당상의 보고를 종합해 들으니 도통사와 도체찰사도 박실을 죄주려 하지 않는 모양이니 전하의 뜻은 어떠하오?"

"전면 전투에 있어 국위를 크게 드날려서 개선한 장병들이올시다. 작은 실수를 따져서 죄를 준다는 일은 지나친 일이라 생각합니다. 너그러운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세종전하는 안상하게 대답했다. 상왕은 만면의 미소를 띠고 말씀을 내린다.

"주상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나도 주상의 뜻을 따르겠소. 박실은 공신의 아들일 뿐 아니라 이름난 효자니 죄를 면하게 해줍시다.

말씀을 마치자 시립했던 승지에게 분부를 내렸다.

"병조판서 조말생을 들게 하라."

이윽고 병조판서가 배알했다.

"이제 금부의 공초받던 말을 들은즉, 박실이 비록 일시 패전한 일이 있다 하나 공이 또한 클 뿐 아니라 도통사와 도체찰사도 대승적 안목으로 보아 박실을 죄줄 수 없다 하니 불문에 부치고 죄를 면케하라. 내 혼자서 독선하는 일이 아니다. 병조에서 우겨대는 대로 금부에 부쳐서 사실한 것이니 병조판서는 다시 여론이 없겠는가?"

상왕은 미소를 풍기며 병조판서를 향하여 물었다.

"병조에서 또다시 이론이 있을 리 만무하옵니다. 처음네는 박실의 패전한 사실을 묻지도 아니하시고 죄를 면해주라 하시었으므로 여론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제, 금부에 넘겨 모든 공죄를 사실했으니 여론이 일어날 까닭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직언하는 신하 두신 것을 기뻐하시옵소서."

상왕은 아드님 세종전하 이하 모든 신하들을 둘러보며 호기롭게 성음을 높여 웃었다.

"세상에서는 나를 사람 호랑이요, 독재자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한다. 그러나, 나는 독재자가 아니다. 내 맘대로 하던 일을 굽혀서 병조의 의견대로 박실을 의금부에 넘겨서 사실해 묻지 아니했던가? 나는 사람 호랑이도 아니고 독재자도 아니로세. 하하하?"

상왕 태종은 옥음을 높여 호방하게 웃었다. 모든 일이 당신의 마음 먹은 대로 되고 왜적을 쳐서 크나큰 승리를 거둔 때문이었다. 이날 상왕은 세종과 함께 수강궁 선양정에 잔치를 베풀고 유정현, 이종무, 최윤덕, 이지실, 이순몽, 우박, 박초, 박서양 등 대장과 종사관들을 불러 어사주와 사찬을 내려 개선을 축하했다. 술이 서너 순배 지난 후에 도통사 유정현이 대표로 말씀을 드린다.

"전하께서는 잠시라도 창업하기 어려운 것과 수성하기 또한 쉽지 아니한 것을 잊으셔서는 아니됩니다."

상왕은 아드님 전하를 바라보시며 말씀한다.

"영의정의 말이 옳다! 잘 들어라."

세종전하는 고개를 속여 말씀을 받았다. 잔치가 파할 때 위에서는 좋은 말 한 필과 화사한 말안장 한 벌씩을 공신들에게 내렸다.

 

대마도의 걸항과 일본 국왕의 통호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정동대장군 이종무한테 약속한 대로 정식으로 항복하는 글월과 토산품으로 조공하는 예물을 예조에 바쳤다. 사자로는 도이단도로라는 대마도의 원로였다.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삼가 항복하는 글월을 대조선국 예조판서 합하께 올립니다. 대왕 전하께 아뢰시어 모든 배은망덕한 죄를 사해주시옵소서. 다시는 방자한 행동이 없을 것입니다. 크나큰 홍덕을 내리시어 불쌍한 무리들을 돌봐주시옵소서. 번신이 되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어여삐 여기시어 인신을 내려주신다면 천은을 길이 폐부에 새겨서 자손만대에 전하겠습니다.'

인신을 청하는 것은 천자가 제후에게 내리는 전례에 따라 정식으로 항복하는 글을 올리고 신하되기를 원한 것이다. 대마도 수호는 조선 국왕과 대등한 지위에 있지 아니하므로 직접 왕 전하에께 항복하는 글을 올리지 못하고 조선 예조판서한테 항서를 올려서 왕 전하의 재가를 받자는 것이다. 예조판서 허조는 대마도 사자를 접견하고 항서를 받아 읽은 후에 곧 세종전하께 알현하고 항서를 받들어 올렸다. 전하는 친히 항서를 받아본 후에 말씀을 내린다.

"대마도 도도웅환은 궁해서 항복하고 조공을 바쳐서 애걸했으나 땅을 송두리째 바쳐서 권토내항한다는 말이 없으니 아직도 가증하구려! 원래 간특하고 속임수가 많은 무리들이 아닌가. 권토내항한다는 말이 없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시측에 있던 우의정 이원이 아뢴다.

"말이 그렇지 권토내항을 한다 해도 처치하기 곤란할 것입니다."

전하가 말씀한다.

"수만 명밖에 아니 되는 무리들인데, 처치하기가 무엇이 곤란할 것이 있는가?"

우의정 이원이 다시 아뢴다.

"비록 수만 명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마는 실지로 땅을 바쳐서 항복한다 하면, 귀치 않은 일이 많을 것입니다. 또 저자들도 궁하니까 하는 수 없어 조공을 바치고 신하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땅을 바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대로 항복하는 것을 받으시고 좋은 낯으로 교호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수밖에-좌우간 항복하는 글은 받게 하라."

예조판서 허조가 아뢴다.

"대마도를 정벌하기 전에도 일본 사신이라 해서 칼 한 자루쯤 바치고 내왕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이자들은 떼거리를 쓰며 물건을 사고팔고 해서 열읍에 폐를 끼치는 일이 많았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는 해마다 1만여 섬의 곡식을 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통호를 허락하신다면 따로 왜관을 도성밖에 정해주시고 성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세종전하는 예조판서 허조의 아뢰는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통호를 다시 허락한다면 경의 말과 같이 특정한 지역에 왜관을 정해서 그 부근에서만 왕래하게 하고 도성 안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않게 하도록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세종전하는 예조판서에게 다시 말씀을 내린다.

"이번에 들어온 대마도 사자는 병조판서와 함께 잘 타일러서 다시는 배은망덕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고, 저자들이 권토내항을 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엄포로 기한을 정해서 권토내항하라는 글월을 도도웅환에게 보내서 혼뜨검이 나도록 하라. 답서는 전례에 의하여 예조판서의 이름으로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소위 대마도의 사자라는 자가 만약 알현을 청한다면 어찌하오리까?"

예조판서의 묻는 말을 듣자 우의정 이원이 아뢴다.

"전례에 의하면 대마도 사자는 국왕 전하께서 직접 인견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마도에서 항상 예조판서를 상대로 하여 글월을 보내왔습니다. 이번 항서도 예조판서를 통하여 국왕 전하께 항복한다는 뜻을 표했으니, 아까 전하께서 분부하신 대로 예조판서와 병조판서가 사자를 대면해서 타이른 후에 인신과 답서를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정 알현을 청한다면 궐하에서 망배를 드려서 사직을 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의정의 말이 옳다. 그리 시행하도록 하라."

예조판서 허조가 우의정을 향하여 묻는다.

"소문 들으니 이번에 우리 수군이 대마도와 구주 장기에서 전무했던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우리의 국위는 온 일본천지를 습복시켰다 합니다. 그리해서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고 통호하기를 청한다 합니다. 만약 일본 국왕의 왕신이 온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예조판서가 우의정에게 묻는 말씀을 전하께서 듣자, 미연히 웃으며 말씀한다.

"그야 대마도 수호와 일본 국왕의 지위는 다르지 아니한가. 하늘과 땅의 차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일본 국왕의 사신이 온다 하면 신하의 예로 대접해서 알현을 허락해야 하겠지."

"전하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일본 국왕의 사신과 대마도의 사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국왕의 사신은 만나보셔야 합니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전례도 있는 것이니 그때 가서 결정하기로 하고, 예판은 병판과 함께 예조로 나가 과인을 대신하여 사자를 불러보고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대마도 사자에게 순순히 도리로 타이르라."

우의정 이원과 예조판서 허조는 어전에서 물러났다. 이원은 빈청으로 돌아가고, 예조판서 허조는 병조로 나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전하의 분부를 전한 후에 함께 예조로 들어가 대마도 사자를 불렀다. 예조 대청에는 예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이 대마도의 원로사자 도이단도로를 불러놓고, 준절하게 타이른다.

"대마도 수호의 애걸하는 항서는 우리 왕상전하께 바쳤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크게 진노하셨다. 어찌해서 대장군 이종무와 약속한 대로 권토내항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항복한다고 애걸만 했느냐?"

늙은 사자는 고두백배하고 고한다.

"농사도 아니되고 수목조차 무성치 아니한 척박한 상도와 하도 두 섬을 바친들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설혹 바친다 해도 상국에서는 돌보실 틈이 없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대마도 수호가 두 섬을 조선에 바친다면 구주의 모든 대명들이 도도웅환을 죽일 것입니다. 이러므로 신하가 되기를 원하면서 애걸해서 항복합니다."

구주의 모든 대명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도도웅환을 죽이려 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예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은 시침 딱 떼고 꾸짖는다.

"대마도 두 섬은 본시 신라 때 우리 땅이 아니냐? 그러므로 너희들도 두시마라 부르지 않느냐. 조선 땅을 조선에 도로 바쳐서 귀순하는데, 어느 놈이 감히 이러니저러니 말을 한단 말이냐. 금년 섣달까지 기한을 정해줄 테니 도도웅환에게 자세히 말해서 대마도를 조선에 바쳐라."

늙은 사자는 더 앙탈하지 아니했다.

", 말씀대로 수호한테 이르겠습니다."

병조판서의 말이 끝나자 예조판서는 왜사에게 답서와 인신을 주며 말한다.

"답서의 내용은 지금 병조판서께서 말씀한 대로 권토내항하면 우리 왕상전하께서 너희들을 우리 백성과 같이 일시동인으로 먹이고 입혀서 살릴 테니 도둑질을 하는 악한 마음을 먹지 말고 선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뜻을 적은 것이다. 그리고 이 도장은 청동으로 '대마도 수호' 다섯 글자를 부어서 만든 것이다. 대마도를 잘 수호하라는 뜻이다. 전하께서 너희들의 원에 의하여 내리시는 것이니 자손백대에까지 길이 사용하도록 하라."

대마도 사자는 공손히 예조판서의 답서와 세종전하께서 내리시는 청동 인신을 받들어 품안에 거두고 감격한 인사를 두 번 세 번 드린 후에,

"내일은 곧 서울서 떠나겠습니다. 궐하에 나가 왕은이 융숭하심을 사은하겠습니다."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는 영을 내려 곧 자비를 차렸다. 판서들은 남녀를 타고, 대마도 사자는 마부를 곁들여 제주말에 오르게 했다. 승정원에 연통하여 알현을 청하니, 승지는 전하께 아뢴 후에 대마도 사자를 근정전 대문, 근정문밖으로 인도하여 정상을 바라보며 사은숙배를 드리게 했다. 대마도 사자는 장엄화려한 경복궁을 바라보며 아찔하게 현기를 느꼈다. 고두백배를 드리며 황공해 물러갔다.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평정한 후에 우리나라의 위엄은 일본 전국을 휩쓸었다. 일본 국왕 원의지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원로 승려 양예를 사신으로 하고, 대마도 왜추들이 처음 서천으로 침입했을 때 납치돼 갔던 전 사정 강인발과 대마도 정벌 때 사로잡혔던 갑사 김정명 등 네 사람을 데리고 부산포로 들어와 조공을 바치기를 원했다. 원래 일본에는 이름뿐인 천황이 있고 일본의 군사와 정치를 통솔 장악한 실권자는 원씨의 성을 딴 대장군 족리였다. 우리나라에서 일본 국왕이라고 한 것은 족리의지의 아버지 도의에게 명황제가 일본 국왕의 칭호를 내린 데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족리는 자기 위에 허수아빌망정 천황이 있으니, 공문서에는 ''이란 글자를 쓰지 아니했다. 다만 '일본국 원의지'라고만 썼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왕의 권력을 능가하는 대장군으로 일본 전국을 통솔했다. 대마도 도도웅환에게 엄명을 내려서 우리나라 안에서 납치해갔던 사람과 박실의 강악 싸움 때 잡혔던 세 사람을 내놓으라 해서, 통호하자는 글월과 조공 바칠 물건과 함께 부산포로 데리고 들어와 입국 허가를 원한 것이다. 병조와 예조에서는 보고를 받자 곧 전하께 아뢰었다.

"일본 국왕이 통호하자는 글월과 조공을 바치면서 입국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옵고 대마도 왜추들이 처음 서해 바다에 침입했을 때, 서천에서 납치됐던 사정 벼슬 했던 강인발과 대마도 강악 싸움 때 포로가 되었던 갑사 세 사람을 송환해왔다 합니다.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치니, 일본 국왕이 조공을 바치고 친화하기를 원하는 것이올시다. 새삼 전하의 성덕이 융숭하심을 느끼옵니다."

"일본 국왕의 사신은 어떠한 자라 하던가?"

"고승 양예라 합니다. 일본에는 불교의 고승이면 대개 왕족이라 합니다."

"국왕의 사신이라면 구주의 여러 대명과 대마도 사자와는 유가 다르다. 한 등을 올려서 대접하고 입국을 허락하라."

예조와 병조에서는 전하의 윤허를 받자 곧 경상감사에게 입국을 시키라는 공문을 보냈다. 육로로 오는 행차다.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예조에서는 한양에 당도한다는 기별을 듣자 육품관을 한강까지 내보내서 환영한다는 뜻을 표하고 문밖 객청에 사처를 정해주었다. 사신을 따라온 일행은 십여 명이었다. 병조에서는 정랑과 좌랑이 객청으로 나가서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강인발과 포로로 잡혔던 김정명 등 세 사람을 인계해 받고, 예조에서는 왜통역사를 대동하고 객청으로 나가서 모든 편의를 도와주었다. 일본 사신 양예는 불도에 통하는 고승일 뿐 아니라 시를 잘 짓고 글씨도 쓸 줄 알았다. 양예는 예조 관원에게 청했다.

"조선은 동방에 제일 가는 예의지국일 뿐 아니라 글 잘 하는 나라라 합니다. 글하는 선비와 불도 높은 고승들과 함께 이야기하기를 원합니다."

첫 술회를 했다. 예조정랑은 빙긋 웃으며,

"먼저 국왕 전하를 알현한 후에 소견을 아뢰시오."

흔연히 대답해주었다. 정부에서는 일본 국왕의 사신이 전하께 알현하는 시기를 정했다. 백관이 정초에 조하드리는 날을 택하여 겸행하기로 했다. 일본 국왕의 사신은 곧 일본 국왕의 몸을 대신해 온 것이다. 일본 국왕을 신하로 대접하여 인견하는 것이다.

세종 2년 경자 정월 초육일 을사가 되었다. 해가 바뀐 새해에 만조백관들이 신년 새해에 처음으로 조하를 드리는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창덕궁 인정전에는 동천에 떠오르는 새 아침의 욱일승천하는 찬란한 햇빛을 받아 만줄기 청기왓장에 서기가 오색을 뿜어 영롱하고, 전각 앞 넓은 뜰에는 동서 양반의 품계석의 위치를 따라 문무백관들이 금관홍포와 사모품대로 두 손에 백옥홀을 잡고 숙연히 늘어섰다. 이때, 예조정랑은 일본 국왕의 사신 양예를 인도하여 서반 삼품 서열에 서 있게 했다. 일본 국왕을 삼품 벼슬로 대우하여 신하의 반열에 세운 것이다. 이윽고 악사들의 주악이 자지러지게 일어나면서 세종대왕은 면류관 곤룡포의 대례복으로 옥교에서 내려 만조백관들에게 미소를 던지며 정전 용상 위에 올랐다. 풍악을 아뢰는 소리는 여전히 자지러졌다. 주악이 멈춘 후에 월대에서는 찬자가 만조백관들에게 조하를 드리라는 구호가 떨어졌다.

"국궁, 배하, ."

만조백관들은 찬자가 부르는 구호에 따라 전각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다시 절하고 바라보고 이같이 하기를 네 번 반복해서 사배를 드렸다. 만세를 부르는 소리는 북악을 흔드는 듯했다. 영의정이 백관을 대표해서 전상에 올라 신년하사를 올렸다. 육조판서가 한 사람 한 사람씩 차례로 전상에 올라 자기의 맡은바 새해 계획을 글월로 써서 바쳤다. 이윽고 조하가 거의 끝날 무렵, 전하는 예조판서에게 하문했다.

"일본 국왕의 사신이 조하에 참례했다 하는데, 서열에 배치되어 있는가?"

", 서반 삼품 서열에 입시해 있습니다."

"예우해서 전상으로 오르게 하라."

예조판서는 어명을 받들고 통사 윤인보와 함께 백관들이 늘어서 있는 서반 삼 품석 앞으로 가서 일본 국왕의 사신인 양예한테 일렀다.

"지금 우리 성상 전하께서 별은전을 내리시어 전상으로 올라 알현하는 것을 윤허하셨으니 나의 뒤를 따르오."

양예는 황공 감격했다. 의복을 바로잡고 예조판서와 통역의 뒤를 따랐다. 화강석 용틀림 조각이 미의 극치를 이룬 열두 층 포석을 추상해 밟았다. 주란 화각 단청이 어른거리는 전상으로 올랐다. 양예는 잠시 눈을 들어 전상을 바라보니 청산에 해와 달이 둥두렷이 솟아 있는 벽화를 배경으로 하여 황금장식과 주칠한 향목으로 난간을 조각한 용상 위에 세종대왕은 인자한 봉안에 미소를 지어 앉아 계셨다. 양예는 기가 질렸다. 손을 모아 합장한 후에 머리를 조아려 사배를 드렸다. 세종대왕은 일본 국왕 사신에게 말씀을 내린다.

"풍수 험난한 길에 조공을 바치러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구나!"

통사 윤인보가 통역을 했다. 양예가 부복하고 아뢴다.

"저희 나라는 상덕을 하도 많이 입사와 감사한 말씀을 무어라 형용해서 아뢸 길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다시 말씀을 내린다.

"너희는 과인에게 무엇을 구하고 싶어하느냐?"

"그저, 황공합니다. 대장경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풍기시며 대답한다.

"대장경은 우리나라에서도 희귀한 책이다. 그러나 한 부를 내려주리라."

양예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부복해 아뢴다.

"저희 나라는 항상 전하의 은혜를 많이 입사와 이루 다 황공한 말씀 아뢸 길 없습니다."

세종전하는 다시 하문하신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숨김 없이 다 말을 해라."

이때 전하의 옥음이 어찌나 부드럽던지 마치 대자대비한 부처가 말씀을 도란도란 내리는 듯했다. 양예가 대답해 아뢴다.

"입을 벌려 말씀으로 아뢸 길이 없습니다. 다만 시를 지어 성덕을 읊어서 충성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양예는 말씀을 마치자 품안에서 시축을 꺼내서 시측해 있는 예조판서에게 전했다. 예조판서는 양예가 지은 시를 전하께 바쳤다. 세종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시축을 받아 보신다. 단필로 쓴 한시다.

산천을 넓히시니 우임금의 공덕이요,

요임금의 하늘같이 해와 달이 높았어라.

성조의 황화를 무엇으로 갚으리,

단정하게 손잡아 세 번 만세 부르네.

일본 국왕의 사신 양예가 세종대왕께 올린 시는 대왕의 위대한 성덕을 극구 찬양한 글이다.

'산천을 넓히시니 우임금의 공덕'이란 구절은 세종전하가 대마도를 정벌해서 국토를 넓게 개척한 것을 찬양한 말이요, '요임금의 하늘같이 해와 달이 높았어라' 한 것은 대왕의 덕화가 마치 요지일월 같은 거룩한 선덕으로 나라 안이 태평연월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성군의 황화를 무엇으로 갚으리' 한 글귀는 일본이 대왕의 황화를 입어서 갚을 길이 없다고 영탄한 소리요, '단정하게 손잡아 세 번 만세 부르네'라는 구절은 대왕의 높은 덕을 숭배하고 사모하여 오래오래 만만년을 사십쇼 하고 축수를 하는 시다.

대왕은 보시기를 다하고 옆에 시측해 섰는 홍문관 대제학에게 넘겨주었다. 대제학도 양예의 시를 읽고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전하는 다시 양예를 굽어보고 말씀을 내린다.

"네가 일본으로 돌아가거든, 너희 국왕한테 이르라. 내가 대마도를 정벌한 것은 무단히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마도 해적들이 기아와 곤궁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해마다 만 섬 곡식을 주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번에는 오십여 척의 배를 움직여 우리의 변지로 침입하여 백성들을 살육하고 불놓고 약탈해서 방약무인한 악한 행동을 취하니 참다 못해서 소굴을 소탕한 것이다. 그리하여 도도웅환이란 자가 구주 장기로 달아나고보니 두지포까지 추격해서 적의 항복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권토내항을 하라 한 것이니 너희 국왕도 알아두라 이르라!"

", 알았습니다. 저희 대장군도 잘 알고 있습니다."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두섬이라 부른다. 너희 나라에서도 '두시마'라 하지 않은가. 이것은 윗섬과 아랫섬으로 된 때문, 두섬이라 부른 것이요, 너희들도 우리가 부르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두시마'라 부른 것이다. 이것은 우리 땅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고도 남는 고증이다. 너희 국왕한테 이점도 말을 해두어라."

", 그리하겠습니다."

양예는 두 번 세 번 고두하며 대답했다.

"만약 대마도가 권토내항해서 부모와 자녀들을 다 거느리고 땅을 바쳐 온다면 나는 우리 백성과 같이 일시동인해서 대마도 사람들을 잘 무육할 것이다. 이 점도 국왕한테 전해라."

", 전하의 성지를 전하겠습니다."

양예는 또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는 옆에 모시고 있는 내관에게 분부했다.

"일본 국왕의 사신에게 사찬을 내리고 네가 대접하라."

특별한 은전이었다. 양예는 내관의 인도로 어전에서 사찬을 받고 객청으로 돌아갔다. 일본 국왕의 사신 양예는 한 달 동안을 조선에서 유하고 있었다. 팔도의 명산대찰을 두루 구경하고 아름다운 산천과 품격 높은 삼한 예술에 마음속 깊이 감탄했다. 글 잘하는 선비와 불도 높은 고승을 찾아다니며 시와 글씨를 청했다. 한 달 후에 양예는 예조에 찾아가 귀국할 것을 고하고, 한 번 또다시 세종전하께 뵙기를 원했다. 예조판서는 이 일을 전하께 고하니 전하는 기억력이 대단했다. 만기를 보살피는 중에도 한 달 전에 일본 사신이 원했던 일을 잊지 아니했다.

"일사가 돌아간다 하니 생각이 나는구나. 대장경을 달라 했는데, 갈 때 선물로 주어야 하겠다. 곧 준비해서 궐 안으로 들여라."

예조에서는 사찰에 명해서 대장경 한 벌을 구해 올렸다. 전하는 어전에 드신 후에 양예의 입궐을 허락하셨다. 양예는 전과 같이 예조판서와 어전통사와 함께 전상에 올라 부복했다. 전하는 미소를 머금고 하문하셨다.

"네가 온 지가 한 달이 되었구나. 이제 귀국을 한다 하니 과인의 마음이 서운하구나."

전하의 말씀은 부드러운 봄바람이 부는 듯 훈훈하고 다정했다.

"성은을 이루 다 갚사올 길이 없습니다. 그동안 조선의 훌륭한 문물을 많이 배워 돌아갑니다. 하직을 고하려고 배알을 청했더니 이같이 허락하시어 천안을 다시 우러러 뵙게 되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전하는 웃으시며 탁상에 놓인 대장경 한 벌을 내관을 통해 내리셨다.

"이것은 네가 처음 입궐했을 때 원했던 대장경이다. 네 정성이 갸륵하기에 선물로 보낸다."

양예는 두 손으로 대장경을 받들고 목이 메어 감읍했다.

"융숭하신 성은을 어찌 다 갚사오리까. 본국으로 돌아가 불법을 더욱 홍통시키면서, 성덕을 길이길이 잊지 아니하오리다."

양예는 고두백배하면서 대장경을 받들어 하직을 고하고 예부에 나아가 모든 관원을 작별한 후에 부산포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국왕의 사신이 돌아간 후에 왜국의 모든 대명들은 서로들 다투어 조공을 바치며 통호하기를 원했다. 대마도 도도웅환도 한 달에 거의 한 번씩 사자를 보내서 공물을 바쳤다. 뿐만 아니라, '가라산에 대마도 사람들을 옮겨서 농사를 짓도록 해주시고 대마도를 조선 경내에 주군을 두시는 전례에 따라 고을 이름을 정해주시고 군수의 인신을 내리신다면 신절을 다하겠습니다.'하고 시응계도라는 사자를 보내서 글월을 올렸다.

전하는 예조에 명해서 답서를 보냈다.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해 있다. 모든 품계는 반드시 관찰사에게 정보하고, 직접 예조로 바치지 말라. 원하는 인장은 회개편에 보내노라. 요사이 그대의 대관과 만호들이 제각기 사람을 보내서 통관하기를 원한다. 정성은 좋으나 심히 체통에 어긋난다. 그대가 친히 서계를 써보내면 예접하리라.'

보낸 도장은 '종씨도도웅환'이라고 각했다. 이같이 하여 대마도의 확실한 항복을 받았다.

 

집현전

 

세종대왕은 대마도를 평정하고 일본 국왕을 회유한 후에 나라 안의 예악문물을 더욱 발달시켜서 겨레의 문화를 찬연케 할 것을 결심했다. 외적을 막는 데는 무비를 든든히 하여 장성의 재목을 길러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치를 바르게 하자면 글 잘 하는 어진이들을 양성해서 과학과 문학을 권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량의 재목이 되게 한 후에 구세안민의 정치를 하는 것이 나라를 통솔하는 지도자의 맡은 바 소임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대왕이 어릴 때부터 항상 손에 책을 놓지 아니하고 밤늦도록 글을 읽은 독서의 힘이었다. 여기서 그의 인품이 한 사람의 의젓한 격을 이루었고, 여기서 그의 슬기로운 예지가 백금빛을 싸느랗게 뿜었다. 예지는 경륜을 낳고 경륜은 실천으로 행해졌다. 전하는 책을 읽으면 한 번이나 두 번만 읽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집을 반드시 백 번씩 읽었다. 더욱이 '춘추좌전''초사'같은 책은 백번에 또다시 백 번을 더 읽었고, 구양수와 소동파의 문집은 천 번가량이나 읽었다. 이러하니 그의 머리에는 예와 이제, 국가를 영도한 제왕들의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린 일을 밝고 밝게 판단할 수 있었고, 사람을 쓰고 어거하는 방법을 글 속에서 얻었다. 전하는 무엇보다도 인재를 기르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어느 날 연침에서 대제학 변계량과 젊은 학사 정인지를 불렀다. 변계량은 호를 '춘정'이라 하고 자를 '거경'이라 했다. 고려 말년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 영리해서 열네 살 때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열일곱 살에 대과에 급제했다. 왕권이 바뀐 뒤에 왕조에 벼슬해서 예문관 직제학, 예조참의를 거쳐 오늘날 대제학이 된 사람이다. 모든 나라 안의 유시와 제문이며, 외국에 대한 외교 문한이 거의 춘정의 솜씨로 되어 있었다. 정인지는 호를 '학역재'라 하는 소장학사다. 세종보다 한 해가 연상인 병자생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격전에 기도를 드린 후에 학역재를 낳았다는 것이다. 다섯 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해서 열여섯 살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십구 세때 대과급제를 해서 태종의 신임을 받았다. 어느날 상왕 태종이 아드님 세종과 함께 자리를 같이했을 때 정인지가 알현했다. 상왕은 세종에게 말씀을 내렸다.

"저 사람이 정인지로구나. 말은 익히 들었으나 처음 본다. 후일 주석지신이 될 테니 잘 유념해두라!"

하는 말씀을 내린 일이 있었다. 이리하여 전하는 나이 많은 변계량과 당신과 연상약한 정인지를 연침으로 부르신 것이다. 전하는 나이 지긋한 대제학 변계량과 소장학사 정인지를 향하여 말씀을 묻는다.

"집을 짓는 데 좋은 기둥과 좋은 보를 구하려면 재목이 없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미리 나무를 심어야 하고, 국가 다스리는 동량의 재목을 구하려면 사람다운 사람이 귀하다고 탓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심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과인의 의사가 어떠하오?"

의미 깊은 전하의 말씀에 늙고 젊은 두 신하는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나이 많은 변계량이 먼저 아뢴다.

"그렇습니다. 예로부터 경제에 밝은 지도자는 산과 들에 나무를 무성하게 길러서 재목으로 이용하고, 어진 인국은 흥학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학교를 이룩하여 인재를 양성합니다. 그러므로 아조에도 사학을 두시고 성균관을 설립하시어 국가에서 인재를 기를 뿐 아니라 시골마다 향교가 있고, 또다시 사사로운 서당이 있어서 향학하는 열이 대단합니다."

전하는 변계량이 대답하는 말을 듣자 미소를 풍기며 말씀한다.

"대제학이 말씀하는 사학과 성균관에서 유생을 양성하는 일은 과인도 잘 알고 있소. 과인이 지금 동량의 인재를 기르고자는 뜻은, 좀 더 나의 측근에 젊은 학사들을 양성해서 직접 국가정책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크나큰 인재를 양성하자는 것이오. 다시 말하자면 대과급제를 해서 이미 출륙이 되어 벼슬자리에 있는 준재들에게 더욱 학문을 연마해서 모든 문화를 창조케 하자는 말이오."

서장학사 정인지가 아뢴다.

"이제 하교를 듣자오니, 진실로 명철하신 배려이십니다. 총명하고 영민한 준재들이 성균관에 나가서 소과급제를 치르고 다시 대과에 뽑힌 후에는 그대로 벼슬자리에만 연연하여, 그 좋은 자질을 연마할 기회가 없습니다. 학문의 길은 한정이 없습니다. 연구하고 토론하여 옥을 다루듯 갈고 갈아야만 빛이 납니다. 이 빛나는 윤기로 국가정치에 방광하는 것이 곧 겨레의 찬란한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이러한 기구를 측근에 두시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자문하신다면 크나큰 힘을 얻으실 것입니다."

학역재 정인지의 아뢰는 말씀을 듣는 전하의 용안엔 화사한 웃음이 활짝 열렸다.

"학역재의 말이 옳다. 과인의 뜻이 역시 그곳에 있소. 한번 과거에 급제만 하면 어서 낭에서 대부의 자리로 올라가기에만 급급해서 영영 공부는 하려고 들지 않는단 말야. 다만 자신의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바랄 뿐 그 좋은 천질을 썩여버리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탐관오리로 떨어져 버리기가 십상팔구란 말야. 그러하니 나라 꼴이 될 수 있는가. 벼슬을 준 것은 나라를 번영시키기 위하여 제각기 책임을 맡긴 것이지 결코 특권계급을 양성하기 위하여 만든 자리가 아니거든-."

전하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 늙고 젊은 두 신하의 폐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변계량과 정인지는 이구동성으로 일제히 아뢴다.

"명철하신 하교십니다. 그러한 기구를 전하의 측근에 두시어 젊은 학사들의 연구하는 기관을 만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는 대제학 변계량을 향하여 말씀한다.

"지금 대제학이 영도하고 있는 예문관은 글 잘 하는 젊은 학사들이 국가의 사령과 문한을 맡고 있을 뿐 더 이상 학문을 탐구하고 사색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지 못하단 말씀요."

", 그렇습니다. 좀 더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관은 되지 못합니다. 다만 지난날에 공부했던 실력을 그대로 발휘해서 글을 제술할 뿐입니다."

젊은 학사 정인지가 솔직하게 아뢰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태상왕 재위시에 집현전이란 기구를 잠시 두신 일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했단 말야. 어진이들이 모여 있는 전각이라 했으니 이름이 참 좋지 아니한가? 다시 집현전을 설치해서 젊은 학사들이 더욱 학문을 연마하는 기관을 두는 것이 좋겠소."

"좋습니다."

두 신하는 일제히 대답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옛날 당에서도 집현전을 대궐 안에 두고, 그곳에 젊은 학사들을 입직시켜서 경서를 간행하고 흩어진 고서를 수집해서 문화에 이바지한 일이 컸던 것이오.뿐만 아니라 우리 고려 때도 수문전, 집현전, 보문각이란 것들을 두어서 중국과 비슷한 제도를 두었지만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벼슬하는 사람들의 일보는 기관만이 되지 않게 하고 실지로 학문과 예술을 더욱 탐구하고 사색하는 연구하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오."

원래 고전과 역사가 정통한 전하다. 대제학 변계량이나 젊은 학사 정인지가 입을 벌리지 못할 정도로 술술 전고를 고증해서 말씀했다. 두 신하는 마음속으로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태상왕 전하 때의 집현전을 부활시키고 기구를 대궐 안에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신들과 의논해서 결정할 테니 경들은 집현전을 새로 설치하는 기구와 인원에 대하여 안을 만들어 올리라."

변계량이 고한다.

"집현전의 기구를 구성한다면 역시 다른 관아의 전례에 의하여 대신들이 운영하는 기구에 참여하도록 하고, 그 아래 연구하는 학사들을 배치시켜서 학문을 연마케 하는 것이 어떠하올지 감히 아뢰옵니다."

"좋소. 앞으로 국가의 문화를 창달시킬 최고기관이 될 것이오. 문관인 대신들로 운영하는 소임을 겸임케 하고 가장 우수한 젊은 학사들을 극소수로 뽑아서 전문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부서를 형성하도록 하오."

두 신하는 명을 받고 물러났다. 다음날 변계량과 정인지는 집현전을 구성하는 시안을 전하께 바쳤다. 집현전을 영솔하는 영전사 2인을 두는데 정일품이요, 대제학 2인은 정이품이요, 제학이 2인인데 종이품이다. 이 사람들은 영의정, 좌의정 등 지위 높은 사람들로써 겸직을 하게 했고, 다음에는 부제학 정삼품, 직제학 종삼품, 직전 정사품, 응교 종사품, 교리 정오품, 부교리 종오품, 수찬 정육품, 부수찬 종육품, 박사 정칠품, 저작 정팔품, 정자 정구품으로 집현전에 전속시켜서 경연에 참여하고 학문을 연구하게 했다. 학사의 정원은 모두 10명으로 궐이 있어야만 보결을 하게 했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를 임명하는 방법은 가장 엄중했다. 집현전 당상과 이조 당상이며 의정부 의정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인물을 전형하여 망에 붙여서 전하께 올린 후에 전하가 점을 찍어서 임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번 집현전 학사가 되기란 아무리 준재라 하나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세종전하는 변계량과 정인지 두 신하가 올린 시안을 보시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칭찬하셨다.

"좋다. 이래야만 집현전 학사의 권위가 설 것이다. 곧 대신과 의논해서 경들의 시안을 결정한 후에 규정에 의하여 집현전 학사 10명을 선정하리라."

변계량, 정인지 두 신하도 기뻤다. 진정 나라를 위하여 기둥과 보가 될 만한 인재들을 뽑아서 전속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기관을 만들게 되니 장차 국가에는 크나큰 문명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루 속히 집현전을 이룩하시어 이 나라 이 백성들을 더욱 복되게 하시옵소서."

"염려 말라. 그리고 집현전은 과인의 측근인 궐 안에 두어서 모든 학사들을 입직시켜서 낮과 밤으로 내 곁에 있게 하리라."

"감격하온 왕은을 이루 다 아뢸 길 없습니다."

두 신하는 마음이 느긋했다.

숙배를 드리고 물러갔다. 전하는 삼공을 불러 안을 보이고 집현전을 새로 둘 것을 자문했다. 전고가 없는 갸륵한 처사다. 누가 감히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 전하는 곧 규정대로 의정부와 이조에 교지를 내려 영전사 이하 대제학까지의 겸관과 부제학 이하 열 사람의 전임 집현전 학사를 전형해 올리라 했다. 이조판서는 인사권을 맡은 때문에 정승들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관례를 가졌다. 의정부 빈청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판서가 모였다. 특히 이조에서는 이조정랑과 좌랑도 참석을 했다. 비록 팔품과 구품에 지나지 않는 벼슬아치지만 전관의 청환이 되는 때문에 회의에 참석해서 결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회의는 극비 속에 연삼일을 열려서 겨우 결정이 되었다. 이조와 정승들이 연석회의에서 전형된 명단은 세종전하께 바쳐졌다. 전하는 이조판서가 올린 새로 구성되는 집현전 학사들의 명단을 살펴보았다. 좌의정 박은과 우의정 이원이 영전사요, 유관·변계량이 대제학이다. 탁신·이수가 제학이요, 신장·김자가 직제학이요, 어변갑·김상직은 응교요, 설순·유상지는 교리요, 유호통·안지는 수찬이요, 김돈·최만리는 박사다. 세종은 새로 천망에 오른 집현전 학사의 명단을 세 번 네 번 반복해 보셨다. 전하의 의중이 인물이 많이 빠졌다.

전하는 이조판서에게 물었다.

"영의정 유정현은 과거 보지 아니한 음관이라 해서 최고의 영의정이면서도 영전사로 뽑히지 못했는가?"

", 그러한 줄로 아뢰오."

이조판서가 대답했다. 전하는 또다시 하문했다.

"최만리는 집현전 학사의 명을 받았는데 어찌해서 정인지는 이번에 끼지 못했는가?"

가장 전하가 인재로 인정해서 크게 관심을 갖는 정인지다. 더구나 정인지는 세종과 자치동갑이었다. 뿐만 아니라 집현전의 시안까지 마련한 사람이다. 처음 설치되는 집현전 학사 중에 정인지가 빠진 것이 매우 서운했다. 이조판서가 아뢴다.

"정인지도 처음에는 물망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최만리가 나이가 좀 많은 때문에 겨우 끝으로 뽑혔습니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약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도 내색하지 아니했다. 부드럽게 말씀을 내린다.

"원래 학문의 길은 글을 많이 읽어서 경험이 풍부한 노사숙유가 관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설치하는 집현전은 순전히 젊은 문사들의 연구를 조장시켜서 새로운 동량의 재목을 양성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대제학까지는 나이 많고 지위 높은 재상들을 겸임하도록 한 것이요, 부제학 이하의 전임학사들은 될 수 있으면 젊은 문사들을 등용해 쓰자는 것이다. 이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만 우선권을 준다면 과인이 애당초 집현전을 구상한 그 근본 뜻과는 어긋나지 않는가?"

전하의 말씀을 듣자, 이조판서는 황공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손을 모아 공손히 아뢴다.

"전하의 성의 그러하시다면 다시 회의를 열어 젊은 학사들로 보충해 뽑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전하는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이조와 의정부에서 이번 뽑은 사람들은 법을 어겨서 뽑은 것은 아니다. 다만 좀 더 젊은이들을 집현전에 참예치 않게 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이름이 정해졌는데 과인이 퇴짜를 논다면 그 사람들에게 미안치 아니한가? 돌려가며 하는 것이니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자."

전하의 크고 너그러운 성격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세종은 집현전을 편성한 후에 대궐 안 승정원 서편 전각 한 채를 내려서 학사들의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을 만들고 어필로 '집현전'이라 크게 써서 현판을 달았다. 전하는 날마다 정사를 보살피는 일이 끝나면 친히 집현전에 출어하여 경연을 열었다. 경연에는 전임인 집현전 학사 이외에 좌우의정인 영전사와 대제학들, 원로대신의 겸관들이 참예하는 것이 전례다. 주로 사서오경을 토론했다. 정치학에 대한 자문에 응대하고 제도와 역사를 고증해서 학문에 대한 의의를 밝혀놓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만 권 고서를 수집하여 학문을 연구하는 기틀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고 선현의 고전을 간행하는 등 크게 문은을 진작시켰다. 전하는 집현전을 신설한 후에 경연에 임어해서 학문을 토론할 때마다 항상 전임된 학사의 정원수가 너무나 적을 뿐 아니라 장래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젊은 학사들이 끼여 있지 않은 것을 탄식했다. 대제학 변계량을 어전에 불렀다.

"금년에 과거령은 어느 때쯤 내리게 되는가?"

"곧 과거령을 내려서 모춘 삼월쯤 시관을 정해서 개장하려 합니다."

"모춘 삼월이면 기후가 대단히 온화할 때다. 이번에는 창덕궁 비원 춘당대에 과장을 설치하라. 과인이 친히 임어하여 준재들의 모습을 바라보리라."

"상감께서 직접 과장에 임어하시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올시다. 문묘에 배알하실 때 알성과를 성균관에 개장합니다. 그때 상감께서 친림하시는 것이 전례올시다.”

"국가에 소용되는 훌륭한 인재를 뽑기 위하여 과거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무 때라도 내가 나가서 창방하는 구경을 한다면 좋지 않겠나. 긴말 말고 시행하도록 하오"

"전하께서 알성과 이외에도 과장에 친림하신다 하오면 팔도 유생들이 얼마나 황감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나라의 인걸들이 구름모이듯 모일 것입니다."

대제학 변계량도 전하께서 젊은 인재들을 구하려고 무한 애쓰시는 정성을 잘 알고 있었다. 쌍수를 높이 모아 찬성한다.

"그렇다면 곧 기일을 정해서 과거령을 내리도록 하오."

"영전사와 예조에 의논해서 곧 과거령을 내리고 기일을 정해서 팔도에 반포하겠습니다."

변계량은 어전에서 물러난 후에 집현전 영전사와 예조판서 허조와 의논한 후에 과거령과 과시장을 공포하고, 이번 과장은 춘당대인데 상감께서도 친림하신다고 반포했다. 과거령은 팔도 감사를 통해서 감영과 고을마다 전파되었다. 이번 과장에는 세종대왕께서 춘당대에 친림해서 취재를 하신다 하니 평소에 전하의 명철하신 성덕을 추앙하는 선비들은 어깨가 으쓱했다.

 

춘당대

과거 날이 되었다. 팔도의 선비들은 구름 모이듯 비원 춘당대로 모여들었다. 선비들은 대궐 삼문 안에 들어서자 먼저 웅장화려한 주란화각 아름다운 건축미에 눈이 현란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 다 경이의 눈빛으로 사면을 둘러보면 춘당대로 향했다. 생전 처음 대하는 왕궁의 장엄미다. 다섯 걸음에다 정자가 세워졌고 열 걸음마다 전각이 웅장하다. 울긋불긋 단청을 칠한 처마는 천줄기 기왓골을 머리에 인 채 학의 날개를 벌려 벽공에 솟아 있고, 익랑 월대는 병풍처럼 둘러 있다. 수양버들은 천사만사를이루어 청청하게 어구로 드리웠고, 옥수 같은 물은 서편에서 동편으로 소리치며 흘렀다. 정면에 돌다리가 번듯하게 보인다. 왕궁 안의 금교다. 연꽃을 아로새겨 난간을 만들었고, 난간 좌우편에는 해태 한 쌍씩을 앞뒤로 조각해놓았다. 명공의 솜씨다. 인정문 안에 인정전이 있고 인정전 동편에는 선정전이 있다. 아득히 비취빛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대궐 안에 제일 큰 두 채 전각이다. 인정전은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대전으로 군신들의 조하를 받는 정전이요, 선정전은 전하의 연침인 편전이다. 기와는 푸른 유리빛으로 된 청기와요, 천장은 황금으로 쌍룡의 용틀임을 했다. 계단에 오르는 포석마다 봉황과 공작을 아로새겨서 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다. 선비들은 비원 문을 거쳐 춘당대로 향했다. 영화당 남쪽 만간들이 금잔디밭에 크고 작은 차일들이 수백 채 벌여 있었다. 높고 큰 차일 안에는 시관들의 자리가 포진되고, 작은 차일 안은 과거 보러 선비들이 응시할 장소다. 수백 선비들은 과지와 필묵을 갖춘 후에 차례차례 질서를 지켜 자기의 글 지을 장소로 찾아들었다.

이윽고 시관들이 들어왔다. 집현전 영전사와 대제학, 부제학이 예조판서와 함께 시관 자리에 참석했다. 조금 뒤에 세종대왕은 도승지와 시신들을 거느리고 모든 유생과 시관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시관의 자리로 임어했다. 임금이 친히 도시관이 되어 시관석에 앉은 일은 전고에 없던 일이다. 유생들은 감격했다. 세종대왕께 '천호만세'를 했다. 세종대왕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어수를 들어 유생들에게 답례를 보냈다. 천천히 옥좌에 진좌했다. 이윽고 집현전 학사는 글제를 달았다. 큰 글씨로 써 있는 시제는 '치국지도'라 씌어 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서술하라는 것이다. 세종전하가 즉석에서 글제를 낸 것이다. 시관들도 까맣게 몰랐다. 며칠 전부터 시관들은 전하께 글제 낼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전하는 시장에 임어한 후에 이번에는 친히 과제를 내겠다고 하교가 계신 때문, 시관들이 감히 과거 글제를 내지 못한 것이다. 전하는 말씀 없는 중에 모든 시관들의 협사한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행동을 막기 위하여 이같이 직접 당석에서 과제를 내신 것이다. 시관들은 글제를 보고 면면이 서로 보며 혀를 홰홰 둘렀다. 대제학은 유생들을 향하여 이번 과제는 전하께서 임석하신 후에 시관들도 모르게 전하께서 직접 출제하신 것을 선포했다. 유생들이 있는 정막 속에서는 또다시 '천호만세' 소리가 높았다. 대왕의 명철하신 처사에 감격한 기쁨을 발로하는 환호성이다. 여태껏 장원을 뽑는 과거에 시관들은 공평무사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면을 들추어보면 별별 추태가 많았다. 시관들한테 권문세가의 콧김이 들어가서 미리 과제를 알아서 장원급제가 되기 일쑤요, 엉뚱한 사람이 천금을 받고 글을 대신 지어서 장원급제가 되는 사람이 겅성드뭇했다. 이 까닭에 하향 먼 시골 사람으로 권문세가에 등을 댈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경학에 달통하고 시문이 주옥같이 유려하다 해도, 칠십 팔십이 되어도 과거에 장원은커녕 급제도 못 했다. 과거 때마다 괴나리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한양 천 리 길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올라왔다가 낙방거자가 되어 한숨만 짓고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기에 과거에 깨끗하게 급제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도 더 어려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천하에 기댈 곳 없는 궁조대가 되어 글 배운 것을 한탄하면서 서당의 훈장질을 하다가 굶어 죽는다. 이것이 왕조시대의 커다란 폐풍이었다. 이제 전하가 시관들에게 글제를 내게 하지 아니하고 직접 과장에서 당신이 출제를 했다 하니 권문세가의 자제를 빼놓고 세력 없는 진짜 선비들의 기쁨은 형용해 말할 수 없었다.

과장마다, 진짜 선비들은 싱글벙글 웃었다. 가만가만 수군거렸다.

"이번에 홍판서의 막내아들이 과거를 본다 했는데, 과제를 미리 알지 못해서 탈이로군!"

"홍판서의 아들뿐인가, 판서보다도 더 세력이 센 서 보국대감의 큰아들도 똑 될 줄 알았는데, 시관들도 꼼짝을 못 하게 되었으니 낭패로다! 흐흐흐."

"이 사람, 서보국의 아들은 이번에 장원급제를 해서 어사화를 머리에 꽂기만 하면 김의정의 막내딸하고 혼인을 할 야망을 가졌는데 다 틀렸구나. 하하하!"

"거참, 김의정의 딸은 천하절염이라네.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는 사람이라야 딸을 준다고 그랬다네!"

"자네 한 번 장원급제가 되어서 어사화도 꽂아보고, 천하절염한테 장가도 들어보게나!"

"어림도 없네. 나 같은 하향 선비가 장원급제를 한다 한들 정승의 고명딸이 내 차례에 오겠나. 어서어서 나라 다스리는 방책이나 지어보세."

"이번에는 세력 없는 선비들 속에서 장원급제가 꼭 나올 것일세. 상감은 과연 영특한 분야!"

공신들의 집안과 고관대작들의 아들들을 제외하고 세도 없는 시골 선비들은 흥그러운 마음으로 제각기 붓을 들어 글을 짓기 시작했다. 세종전하는 옥좌에서 일어나 모든 시관들과 함께 젊은이들이 글 짓고 있는 과장을 미소를 머금고 둘러보았다. 성미 급한 유생들은 치국하는 길을 일필휘지로 갈겨 써서 시관석에 바치는 사람도 많았다. 글을 짓는 과장에서 주어진 시각이 다 되었다. 시관석의 집사들은 종을 쳐서 마감이 된 것을 알렸다. 유생들은 일제히 시권을 접어 시관석으로 올렸다. 도시관인 세종대왕을 위시하여 모든 시관들은 주필을 들고 끊기 시작했다. 전하는 백 통이 넘는 유생들의 제술을 일일이 친감했다. 시권은 상··하로 매겨지고 차상, 차중, 차하도 있었다. 그중 잘된 것은 상지상이요, 더 잘 지은 것은 가상지상이었다. 책상 아래로 차하, 차중, 차상이 낙엽 떨러지듯 흩어졌다. 장원급제는 원래 세 사람을 뽑는 것이 전례다. 그러나 인재가 없으면 두 사람, 또는 한 사람만 뽑는 것이다. 차상이 떨어진 후에는 하짜리가 한 뭉치가 되어 떨어지고, 다음에는 중이 한 묶음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백여 장의 시권은 열 장으로 줄어들고, 열 장의 시권은 다시 시관들을 통하여 전하께 바쳐졌다. 가상지상의 알 관주를 맞은 시권이 두 장 나타났다. 알 관주와 주점이 가득 찍혀진 두 장의 시권이 전하 앞에 단정히 놓여졌다. 전하는 두 번 세 번 다시 살폈다. 용안에 미소가 감돌았다.

"성명을 뜯어보라!"

시관 중의 한 사람인 대제학이 시지 끝에 밀봉해 붙인 끝 폭을 뜯었다.

'박팽년. 본관 순천, 부 중림.'

대제학이 아뢴다.

"박팽년이올시다. 본은 순천이옵고 그의 부친은 박중림이라 합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박팽년의 글을 읽어보았다. 글줄마다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방책을 도도하게 진술했다. 시관들이 붉은 붓으로 칭찬한 비점과 알 관주가 글귀 옆에 가득했다. 대왕은 기쁜 빛이 용안에 가득헀다.

"가상지상이 또 한 편 있지 아니한가?"

", 또 한 편 있사옵니다."

"뜯어보라!"

대제학은 또 한 편의 시지 끝을 뜯었다.

'최항. 본관 삭녕, 부 담.'

대제학은 전하께 아뢴다.

"최항이올시다. 본은 삭녕이고 부친은 담이라 합니다."

"최담의 아들 최항이라!"

전하는 다시 최항의 글을 재심했다. 역시 시관들의 주점이 많았다.

"난형난제로구나! 또다시 가상지상은 없느냐?"

"가상지상은 두 편뿐이옵니다."

"그렇다면 이번 장원은 두 사람으로 해서, 곧 창방을 하라! 그리고 어사화는 준비되었느냐?"

",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측했던 도승지가 대답했다. 모든 유생들은 시관석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창방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권문세가의 자제들은 대왕께서 즉석에서 글제를 내신 때문, 미리 과제를 알지 못한 탓으로 게발개발 엉망진창으로 글을 지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에서 대감, 영감, 낯익은 시관들의 얼굴의 표정을 살피며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집현전 유사는 큰 소리로 방을 불렀다.

'장원급제에 박팽년!'

'급제에 최항!'

유사는 목청 좋게 세 번 불렀다. 춘당대 넓은 뜰은 물로 씻은 듯 조용했다. 유생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 들었다. 장원과 급제는 다만 두 사람일 뿐, 모두 다 낙방거자가 되었다. 엄선 중에도 엄선이다. 일호의 사가 없는 친시다. 장원급제는 전하께 임관 명령을 받아 배알하는 것이 관례다. 이조판서가 전하께 아뢴다.

"장원과 급제들에게 무슨 직책을 맡기오리까?"

"장원 박팽년에게는 수찬 벼슬을 주고 최항에게는 부수찬의 직함을 주라!"

도승지는 이조판서와 함께 장원급제의 홍패와 수찬, 부수찬의 지첩을 써서 미리 준비했던 어사화 두 벌과 함께 어전 탑 아래 올렸다. 이윽고 사알 두 사람은 준비했던 사모품대에 단학을 수놓을 흉배를 곁들여 장원급제한 박팽년과 최항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 조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검은 유건과 푸른 도포를 벗고 새로 임관이 되어 조복으로 바꾸어 입는 박팽년, 최항 두 사람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박팽년과 최항은 생전 처음 입는 관복에 명예로운 백학 흉배를 가슴과 등에 달고 사알에게 인도되어 어전으로 올랐다. 박팽년과 최항의 일대의 광영이었다. 수백 유생들의 부러워하는 눈동자가 두 사람의 몸으로 집중되었다. 어전 지척에 들어선 두 젊은 학사에게 사알이 창을 불렀다.

"국궁, 사배, 사은!"

두 학사는 좌우편으로 갈라서서 사알이 부르는 대로 몸을 굽히고 절하고 부복해서 사은을 올렸다. 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먼저 장원급제 박팽년에게 말씀을 내리신다.

"네가 박중림의 아들이로구나! 공부가 무던하다. 너에게는 특별히 수찬을 제수하는 것이니 더욱더 공부를 해서 나라의 동량이 되게 하라!"

전하는 친히 어수를 들어 장원급제의 홍패와 한림학사 수찬의 직첩을 내리시고, 또다시 어사화를 사모 위에 꽂아주었다. 다음엔 최항의 차례다.

"급제 최항도 많은 공부를 쌓았다. 갈충보국하도록 하라!"

전하는 박팽년에게 주시듯 홍패와 작첩과 어사화를 친히 내리시었다. 전하는 두 사람의 젊은 인재를 얻어 마음이 흐뭇했다. 과장은 파하고 전하는 환궁을 했다. 예문관에서는 전임학사들이 모여들었다. 박팽년과 최항을 어깨에 메고 헹가래를 치며 신래를 불렀다. 신래란 새로 들어온 학사를 환영하는 뜻에서 얼굴과 눈에 먹칠을 하고 사지를 번쩍 들어 공중으로 솟구쳐서 환영하는 장난을 치는 것이다. 새로된 집현전에는 열 사람의 정원이 있으므로 새로 뽑힌 두 학사는 아직 예문관에 소속되어 있게 되므로 예문관 학사들이 나와서 신래를 불려 주는 것이

. 이 나라 학사들이 모여 있는 관습법에 지체가 낮은 사람이나 덕행이 부족한 사람들의 자제는 아무리 고관대작의 아들이라 해도 신래를 불려주지 아니하는 것이 전례다. 학사원에서 환영을 하지 않는 뜻을 강하계 표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탐관오리의 자식이 협잡으로 과거를 했으니 학사 자격이 없다고 동료로 치지 않고 거부해버리는 것이다. 이리해서 과거에 급제를 해도 신래를 받지 못한 집안에서는 좌청우촉해서 신래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학사들은 아무리 콧김이센 영의정이나 부원군의 자식이라도 텁텁하고 구린내가 나는 권문세가의 자제들은 일체 신래를 불려 주지 아니했다. 이러므로 과거 보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신래를 당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크나큰 영광이었다. 박팽년과 최항은 명예로운 신래를 받은 후에 얼굴에 먹칠한 광대모습을 세수해 닦은 후에 미리 대령해논 은안백마에 올라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로 들어섰다.

'삼일유가'란 왕명으로 장원급제에게 호강을 시키고 한편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이같이 잘 해서 장원급제가 되면 영광과 우대를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면학하는 기풍을 조성시켜주는 아름다운 풍속의 하나다. 삼현육각의 길풍악을 아뢰는 악공들이 전도가 되고 구종별배들이 좌우로 호위한 속에, 백팽년과 최항은 사모품대에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장안을 사흘 동안 돌았다. 젊은 두 학사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안 안 남녀노소 만백성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글도 잘해서 장원급제가 되었지만 어쩌면 저같이 선풍도골들인가. 남중일색들일세!"

"박팽년은 호리호리한 키에 몸이 학체로구나! 얼굴도 미소년이지만 성성이 강직하겠다. 깔끔하게 생겼는걸! 나중에 큰 기둥감이다!"

또 한 사람은 최항을 평했다.

"박평년 학사에 비해서 얼굴에 기름기가 흘렀구나! 무척 순하게 생겼는데. 남하고 시비는 하지 않을 사람이다."

"최학사는 박학사보다 강직하지는 못할 거야!"

"그럼 사방미인이 될 사람이란 말인가, 하하하."

모두들 한편으로 부러워하고 한편으로는 인물평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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