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권 대마도 정벌
영화는 슬퍼라
상왕 태종이 친국령을 내린 날 좌의정 박은은 상왕께 알현을 청했다.
"급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명나라에 사은사를 보내시는데 한장수를 임명하신 일이 있습니다. 아직 떠나지 아니했으니 영의정 심온으로 바꾸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명나라에서 태종이 세종한테 선위한 것을 인정했다 해서 사은사를 보내게 된 것이다. 상왕은 박은의 말을 듣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무슨 연유로 바꾸라 하는가?"
"병조의 옥사가 일어난다면 자연 전임 병조장관이었던 심온에게 누가 미칠 듯합니다. 일국의 대신인 영의정을 대우하는 예가 아닐 듯합니다. 잠시 몸을 피하여 명나라로 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리석은 의견을 감히 아뢰옵니다."
상왕은 박은의 말을 듣자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심온은 며느님 되는 왕비의 아버지다. 옥사를 다스리는데 두 가지로 난처한 일이 있다. 심온은 영의정이다. 아무리 실권 없는 영의정이라 하나 죄수를 다스리는데 영의정의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는 전임 병조판서다. 심온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옥사가 전복되어 성립되지 않기가 십상팔구다. 심온이 서울 안에 있는 것이 첫째로 마땅치 않은 일이요, 옥사가 성립되어 죄상이 판명되는 날 만약 심온이 개재하게 된다면 왕비의 아버지요, 또다시 일인지하에 만인지상인 영의정을 옥에 내려 국문하기 어려운 일이 둘째 이유다. 상왕은 한동안 생각한 후에 좌의정 박은의 말을 좇았다. 이심전심 뜻이 통했다.
"사은사를 바꾸기로 합시다."
상왕은 말씀을 내린 후에 곧 내관을 불러서 정원 승지의 입내를 명했다. 이윽고 승지가 추창해 부복했다.
"무슨 분부가 계시오니까?"
"사은사로 임명했던 한장수를 대신해서 영의정 심온에게 사은사의 직책을 맡게 하고 불일로 곧 채행해서 떠나게 하라. 상감한테도 이 일을 알리고 전송하는데 극히 우대해서 떠나게 하라."
"봉행하겠습니다."
승지는 명을 받들고 경복궁으로 들어가 상감 세종께 아뢴 후에 곧 영의정 심온의 집으로 나가 사은사로 임명한 첩지를 전했다. 까닭을 모르는 심온의 집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되어 가는 행차 준비에 바빴다. 심온은 내심에 약간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병조에 옥사가 생긴 일이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자기가 없더라도 무사하게 타첩이 되려니 하고 생각했다. 곧 자비를 차려서 경복궁에 사은을 한 후에 다시 수강궁으로 들어가 고별하는 숙배를 드렸다. 상왕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우악한 말씀을 내린다.
"이번에 경으로 사은사의 중임을 맡긴 것은 신왕의 즉위를 인정한 명황제에 대한 인사인지라 경 같은 일급대신이 가야만 저편의 환심을 사겠기에 특명을 내린 것이니, 국가의 일을 위하여 원로에 수고를 해주어야 하겠소."
"힘을 다하여 성지를 받들겠습니다."
심온은 감읍하며 물러나왔다. 심온은 수강궁과 경북궁 두 분 전하께 하직 숙배를 드린 후 왕비전에 고별승후를 하러 들어갔다. 왕후 심씨는 이때 보령이 24세다. 대왕보다 두 해가 위다. 그러나 벌써 세 분 아기씨의 어머니다. 세자빈이 되기 이전 18세 문종이 될 큰 아드님을 낳았고 21세 때는 세조가 될 수양대군을 생산했고, 올해 또 연년생으로 뒤에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높았던 안평대군 용을 낳았다. 요사이 스물네 살쯤 된 여자라면 아직도 완성된 한 사람의 여인 구실을 하기 어려운 나이지만 지난날의 한국 여인들은 스물네 살이면 완전히 한 사람의 여자구실을 했다. 더구나 심왕후는 영의정까지 지낸 심덕부의 손녀다. 자연 가풍이 좋고 교양이 풍부한 가정교훈을 받았다. 침선방적에 막힐 것이 없고 사서삼경을 섭렵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용모는 십오야 밝은 달밤 달덩이같이 덕성스럽고, 온후 겸허한 마음씨는 유한하고 정정했다. 웃어른을 받드는 데 극진한 정성을 다하고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 데 너그럽고 두터웠다. 만사람의 찬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젊은 왕후다.
친정 아버지 영의정이 돌연 사은사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로 나가는 고별승후를 하기 위하여 알현을 청한다는 내관의 아뢰는 말씀을 상궁을 통하여 듣자, 심왕후는 곧 인견하기를 허락했다. 심온은 상궁에게 인도되어 장지문밖에 부복했다. 심왕후는 달덩이 같은 환한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풍기며 보료에서 일어나 아버지 영의정을 맞이했다.
심온은 아뢴다.
"신은 이번에 상왕 전하의 분부를 받자와 사은사의 임무를 띠고 중국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삼가 고별문후를 드리러 들어왔습니다."
심왕후는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서서 미소를 지으며 옹용한 태도로 아버지 영의정에게 말씀을 내린다.
"이번에 또 중책을 맡으시고 명나라로 가시게 되니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염려되는 바 많소이다. 더구나 일기 차차 찬 계절이온데 노래에 몸조심하시어 안강하게 돌아오시기 축원합니다."
"천은이 감격하옵니다."
심온은 여전히 부복한 채 고개를 들고 아뢴다. 젊은 왕후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단정히 서서 다시 말씀을 내린다.
"소녀 생각하기에 아버님께오서는 영광이 너무나 과해서 항상 염려되옵니다. 소녀 전하의 배필이 된 탓으로 아버님께오서 부원군이 되신 일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왕은이 망극하시와 아버님께 또다시 일인 지하에 만인지상인 영의정의 대명을 내리시고 이번에 또 사은사의 중임을 맡기시니, 너무나 영화가 겹치고 겹쳐서 과중하옵니다. 원로에 왕반하시는 데 건강에 조심도 하시려니와 부귀영화가 너무나 극하오면 시기하는 사람이 많사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극히 조심하옵소서."
낭랑하게 내리는 심왕후의 말소리는 슬기로운 예지를 싸안은 백옥 구슬이 금반에 구르는 듯했다. 심온은 따님인 왕후의 영롱한 말씀에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퍼뜩 머릿속에 좌의정 박은과 병조 탄핵의 일로 다투던 일이 떠올랐다. 병조참판 강상인 이하 병조의 관원들이 의금부에 하옥된 일도 머리에 떠올랐다. 사은사로 내정되었던 한장수를 명나라에 보내지 아니하고 돌연 영의정인 자기로 바꾼 일도 어쩐지 달갑지 아니한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이러한 외부의 정치적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왕비의 슬기로운 말씀은 노련한 심온의 가슴에 폭폭 배어 들어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온당하옵신 분부올시다. 벼슬이 높고 영화가 한몸에 넘칠수록 항상 두렵고 조심스럽습니다. 더구나, 마마의 생정아비라는 이 일로 인하여 신은 엷은 얼음장을 밟고 강을 건너듯 조심조심 치세를 합니다. 내리신 말씀, 삼가 폐부에 새겨두겠습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할 말은 태산 같았으나 지엄한 궁중 지밀에는 엄한 규율이 있었다. 더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심부원군은 심왕후께 배를 올리고 물러난다.
"안녕히 몸조심하시고 돌아오십쇼."
때는 9월 초순, 소슬한 늦가을 바람이 서리를 재초하는 계절이었다. 수강궁 상왕 전하는 경복궁에서 아침 문안 들어온 세종대왕께 분부를 내렸다.
"날이 제법 쓸쓸하구려. 부원군 심온이 길을 떠난다고 내게 숙배를 드리고 물러갔는데, 행장을 차려서 떠났는가?"
"내일쯤 떠난다 합니다."
대왕은 시립해서 대답했다.
"갔다가 온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거야. 동지섣달 찬 겨울이 되겠지. 늙은 사람이 감기들면 큰일이나 전하는 특별히 사은사에게 잘배자와 모관을 내려서 중신을 대접하는 예를 소홀하게 하지 말도록 하오."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세종은 상왕의 명을 받들고 곧 경복궁으로 환어하자, 중관을 심부원군 집으로 보내서 상왕 전하의 특명이라 이르고 초구와 모관을 내렸다. 실로 왕은은 바다보다도 깊었다. 심온은 눈물을 머금고 잘배자와 모관을 받았다. 마음으로 결초보은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다음날 떠나는 날이 되었다. 상왕 전하는 또다시 내관을 경복궁에 보내서 전갈을 했다.
"오늘은 심부원군이 떠나는 날이다. 나도 내관을 모화관까지 보내서 심부원군을 전송할 테다. 전하와 중전도 특사를 보내서 원로에 평안히 다녀오라고 전송하라."
모화관 심온이 떠나는 곳에는 상왕의 특명으로 백관들은 말할 것 없고, 상왕 전하와 왕 전하, 왕비 전하의 특사가 나와서 전별했다. 심온은 또 한 번 감읍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상왕 태종의 정치적 수단은 이같이 높았다. 심온이 사은사가 되어 천여 리 의주 길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을 때, 금부에서는 병조의 모든 직원을 대여부도로 모는 옥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친국령을 내린 옥사다. 모든 죄수의 공초를 상왕이 친히 수강궁 안에서 받았다. 이 까닭에 왕 전하인 세종은 무슨 옥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내용을 자세히 몰랐다.
먼저 병조참판 강상인이 친국청으로 잡혀 들어갔다. 상왕 전하는 수강궁 정전에 옥교를 타고 친림해 앉았고, 월대 아래에는 금부 당상들이 좌기를 차리고 있었다. 뜰 아래는 형틀이 놓여 있고 주장, 곤장을 든 금부 나졸과 집장사령들을 위시하여 금도끼, 은도끼와 기치창검을 든 무사들이 위엄을 떨쳐 늘어섰다. 현직 병조참판이건만 강상인은 죄인으로 지목을 받은 사람이었다. 갓과 탕건을 벗기고 맨상투 바람으로 뜰에 꿇려 있었다. 주심인 판의금이 먼저 강상인을 향하여 묻는다.
"그대는 아경 지위에 있는 국가의 중신이지만 이네 죄인의 의심을 받았으니 당연히 죄수로 대접할 것이다. 조금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
강상인은 현직인 아경을 별안간 역적이라 해서 친국명령을 내리고 죄상을 심문한다 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다. 더구나 상왕 전하가 친국령까지 내렸으니 기가 막히고 미칠 지경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금부 당상은 소리를 높여 묻기를 시작한다.
"너는, 이놈, 네 죄상을 네가 알리라. 어찌하여 내역부도의 죄를 지었느냐?"
'대역부도'란 소리를 듣자 강상인은 기가 막혔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 대역부도란 말은 곧 역적질을 했다는 말인데, 제가 일개 병조참판의 힘으로 어떻게 역적모의를 할 수 있었겠소. 천부당만부당한 문초요."
"잔말 말고 이실직고하렷다. 횡설수설하면 장살을 면치 못하리라."
"천위지엄하신 어전에서 제 어찌 감히 횡설수설을 하오리까. 추호도 불충한 일이나 불충한 말을 한 일이 없소이다. 밝고 밝은 하늘이 소스하게 굽어보십니다. 저를 보고 대역부도라고 지목하시니 죄목을 말씀해주시오."
"네가 천위지엄하신 앞에 빨리 죄상을 실토하지 아니하니 내가 대신 네 죄상을 밝여주리라. 상왕 전하께서 금상전하께 선위하실 때 모든 행정은 금상이 재결하려니와 단지 군사에 대해서는 상왕께서 친히 재가해서 결정하시겠다 했는데, 너희들은 어찌해서 병조판서 이하 참판, 참의와 미관말직인 정랑, 좌랑에 이르기까지 한데 모의를 하고 상왕 전하께는 재결을 받지 아니하고 상감전하께만 품한 후에 너희들 맘대로 처결해버렸느냐. 이것은 곧 상왕 전하를 무시한 일이다. 대역부도의 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판의금은 추상같이 얼러댔다. 병조참판 강상인은 기가 막혔다. 군사 일에 대해서 상왕의 재가를 받지 아니하고 병조에서 마음대로 처결한 일은 추호도 없었다. 고개를 번쩍 들고 대답한다.
"절대로 군사면에 대한 일을 병조에서 마음대로 처리한 일은 없소이다. 현임 병조판서는 박습이지만, 전임 병조판서는 영의정이요, 금상전하의 국구인 심온입니다. 심부원군은 국가의 국척으로 충성이 극한 근신하는 분입니다. 어찌 이러한 분이 금상전하께만 재가를 맡고 상왕 전하께는 품달하지 아니했을 리 만무합니다. 그분 밑에 있는 참판, 참의나 정랑과 좌랑이 감히 일을 소홀하게 했을 리 있겠습니까. 만약에 상왕 전하께 재가를 받지 않고 처리한 일이 있다면 어느 날 어느 시에 무슨 일을 재가받지 아니하고 처리했는지 일을 일일이 들어서 증거를 보여주시오."
재가받지 아니하고 병조에서 맘대로 처결한 증거를 보여달라는 말에 판의금의 말문이 잠깐 막혔다. 전사에 임어한 상왕의 봉안이 노기를 띠어 치솟았다. 안정에 열기를 뽐았다.
"폼을 했어야 문서가 증거가 남아 있지, 애당초 품을 하지 아니했는데 '비망기'에 무슨 증거가 남아 있겠느냐. 무고로다. 바른말이 토설되도록 엄하게 다스리라."
상왕 전하의 호령이 추상같이 떨어졌다. 판의금은 어명을 받아들였다.
"죄인을 형틀에 매달고 엄치하랍신다. 시각을 지체치 말고 거행하라."
금부 니졸들은 비호처럼 달려들어 병조참판 강상인을 형틀 위에 달았다. 집장사령들이 주장을 들고 좌우편으로 갈라섰다. 둔부가 드러나면서 주장대로 허공을 박차면서 세차게 떨어졌다. 병조참판은 몸부림을 쳤다.
"되게 치라!"
엄한 호령이 전상에서 다시 떨어졌다. 매는 강상인의 애절한 외마디 소리 속에 십여 개가 떨어졌다. 볼기살이 흩어졌다.
"매를 그치고 다시 물어라."
전상에서 또다시 옥음이 내렸다. 판의금은 강상인을 묶은 채 다시 묻는다.
"너 이놈, 그래도 대지 못하겠느냐. 상왕 전하께서 친국을 하시는데, 증거를 대라 하니 괘씸하기 짝 없는 놈이다. 다리뼈가 부러지기 전에 바른 대로 토설하라. 다시 횡설수설한다면 장살을 면치 못하리라."
강상인은 아픔을 참지 못했다. 더구나 장살시킨다는 말에 겁이 더럭 났다. 벌벌 떨면서 대답한다.
"군국대사에 대하여 상왕전에 재가를 맡지 않고 처결환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마는 병조의 관원들이 이 일에 대하여 공론들을 한 일이 있소."
당하에 있는 판의금과 전사에 임어한 상왕의 귀가 번쩍했다. 판의금은 주먹으로 상을 치며 묻는다. 전상에 임어한 상왕도 귀를 기울였다.
"무어야, 병조의 관원들이 모여서 공론을 했다? 무슨 공론을 했단 말이냐?"
"일을 품해서 처리하는 데 천천히 할 일도 시각을 지체치 않고 빨리 처결할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오랑캐 군사가 쳐들어온다고 경보를 가지고 파발말이 급히 달려 들어왔을 때 한편으로 상감께 주달해서 처분을 묻고 또다시 상왕전에 아뢰어서 결재를 얻은 후에 대비책을 세운다면 적병은 벌써 변방을 함락했을 테니 이 일이 장차 어찌 되겠소? 우왕좌왕하다가 일은 다 그르치고 말 것이니 딱한 일이 아니냐고 탄식들을 한 일은 있소."
판의금은 호통을 치면서 병조참판 강상인을 꾸짖는다.
"일이 급하게 되었다면 군사권에 대해서는 상왕께서 결정하시겠다 했으니 상왕 전하께만 아뢰어 빨리 처결하면 그만 아니냐. 쓸데없는 논법이다."
강상인은 고개를 번쩍 들고 대답했다.
"판의금도 이 나라의 신자십니다. 말이 그렇지 그 자리에 앉아보시오. 엄연히 주상전하께서 계신데 비록 상왕 전하께서 군사권에 대해서는 당신이 처결하시겠다 했으나, 어찌 신자된 도리에 주상전하께는 알리지 아니하고 상왕 전하께만 아뢴단 말씀요. 그렇다면 적병이 쳐들어와도 나라의 왕이신 주상전하는 까맣게 모르고 앉아 계셔도 좋단 말씀요. 그러하니 간소하게 한 군데서만 재가를 해주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공론들을 한 일이 있을 뿐이요."
판의금은 신자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말문이 막혀 더 묻지도 못하고 멍하고 말았다. 전상에 임어한 상왕은 강상인의 대답하는 말을 듣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결재하기가 번거롭다는 말은 곧 상왕 자신에게 행정뿐 아니라 군사권도 상관하지 말고 상감인 세종께 맡기라는 말과 같았다. 노여운 생각을 금할 길 없었다. 판의금에게 분부를 내린다.
"공론했다는 놈들이 누구누군가, 이름을 대어보라 하라."
상왕의 분부를 받은 판의금은 음성을 돋우어 강상인에게 묻는다.
"두 곳으로 다니면서 결재를 받기가 번거롭다고 말한 자들이 누구누구냐?"
강상인은 소인스럽게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대기 싫었다.
"병조의 관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같이 한뜻을 가졌습니다."
"너도 그런 뜻을 가졌느냐?"
"뜻만 가진 것이 아니라 한군데서 결재를 해야 일이 속하게 되겠다고 말까지 했소."
"너 이외에 누구누구냐? 어명이시다, 빨리 이름을 대어라."
"병조 관원은 모두 다 그런 생각을 가졌다고 말하였소. 더 물을 것이 없지 않소. 우리는 나랏일을 위하여 전일하게 충성을 다한 것뿐 아무 다른 뜻이 없소."
전상에서 상왕의 열화같이 진노한 음성이 또 떨어진다.
"저놈의 입에서 공모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도록 되게 치라!"
주장, 곤장을 든 나졸들은 다시 비호처럼 달려들어 강상인의 흩어진 볼기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형틀 위에 유혈이 낭자하게 흘렀다. 매는 또다시 십 도가 넘었다. 강상인은 아픔을 참을 길 없었다. 소리쳐 고한다.
"이름들을 대오리다."
매질은 그쳐졌다. 판의금이 묻는다.
"그럼, 함께 공론했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숨김 없이 대어라."
강상인은 불기를 시작한다.
"병조판서 박습, 참의 이각, 정랑 김자온, 이안유, 양여공, 좌랑 송을개, 이복숙, 채지지 등이 다 불평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병조에 있는 관원 전부가 상왕께 군사에 대한 일을 보고 하지 않았단 말이로구나!"
판의금은 또다시 뒤집어씌우면서 을러댄다.
"보고하지 아니한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두 분 전하께 다 아뢰어 재가를 맡았습니다. 다만 일이 급할 때 두 곳으로 뛰어다니며 재가를 맡아야만 하니 번거로울 뿐 아니라 정말 큰일이 벌어진다면 탈이니 한 군데서만 결재를 맡도록 해야겠다고 말한 것뿐이오."
전상에서 병조참판 강상인의 공초를 귀기울여 듣던 상왕은 판의금에게 분부를 내린다.
"공론한 무리 중에 전임 병조판서는 끼어 있지 아니했나 물어보아라."
판의금은 상왕의 하문을 강상인한테 전했다. 강상인은 고개를 번쩍 들고 반문한다.
"전임으로 있던 병조판서가 하도 많은데 막연하게 누구라고 대답할 수 없소. 명확하게 이름을 대어주오."
전상에서 상왕의 벼락 불덩이 같은 노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현임 바로 직전의 판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놈 못 알아듣겠느냐? 심온이 말이다!"
"예, 현임 영의정 심온이 말입니까? 심온은 병조판서로 있을 때 뿐 아니라 요사이 영의정이 된 후에도 저희들과 함께 개탄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방에 대한 보고와 대책을 결정하는 데는 한 군데서 처리해야만 한다고 항상 주장했소이다."
강상인의 공초를 받자 상왕의 얼굴빛은 주톳빛으로 변했다.
"심온이 영의정이 된 후에도 그따위 언행을 취했더란 말이냐. 금부 서리는 일일이 죄인의 공초를 빠짐없이 기록해두라. 그리고 이놈들은 대역부도다. 능지처참에 처해야 할 것이다. 의금부 당상들과 판의금은 아까 죄인의 입으로 토설한 현임 병조판서 박습 이하 모든 병조 관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하옥하고 다름 내 명령을 받으라!"
상왕은 친국을 마치고 노기가 등등하여 수강궁으로 돌아갔다. 상왕인 태종은 자부심이 강했다. 정치와 국방을 자기만큼 처리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자였던 아우 방석을 죽여서까지 군사혁명으로 왕위를 차지했던 분이었다. 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군사권은 자기 자신의 한평생 동안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지 아니했다. 이 위대한 군사권을 내놓는 날은 자기는 한 개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기 때문에 아드님 세종에게 선위하는 날, 만조백관들을 앞에 불러놓고,
'다른 행정은 다 신왕에게 맡길 수 있으나 다만 군사권만은 과인이 장악한다.'
선포했다.
뿐만 아니었다. 그는 의구심이 너무나 지나치도록 많았다. 외척을 지극히 두려워했다. 그 실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태종은 처음에 양녕을 세다로 봉했을 때 세자의 외숙이요, 자신의 처남인 정란 좌익공신 민무질, 민무구 형제를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그리해서 왕후 민씨의 가슴에 일평생 원한의 못을 박아주었다. 이것이 기틀이 되어 양녕은 폐세자의 행동을 자취했던 것이다. 이같은 태종에게 대사헌 허지는 병조의 장관인 판서 이하 모든 관원들이 상왕 전하의 명령을 어기고 군사에 대한 일을 보고하지 아니했다고 탄핵했다. 태종은 불같이 노했다. 이리하여 신왕 세종이 즉위한 벽두에 큰 옥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지 아니해도 태종은 며느님 심씨로 세종 왕후를 봉해서 공비의 칭호를 내린 후에, 그의 친정아버지 심온의 병조판서의 직위를 내놓게 하고, 거죽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서 부원군 겸 영의정의 자리에 앉게 했다. 왕후의 아버지에게 삼군을 통솔하는 병조판서의 직권을 맡기기 싫었던 때문이다.
한편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인 영의정의 대명을 받았다고 기뻐했던 심온은 허수아비의 대배를 받았다. 정승의 실권은 함빡 태종이 신임하는 좌의정 박은에게 있었다. 이리해서 대사헌 허지의 탄핵 상소가 들어간 후에 좌의정 박은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노한 심온은,
'영의정의 자리를 내놓고 좌의정이 되겠다.'
하고 한탄을 했었다.
좌의정 박은은 심온의 말을 꼬부장하게 생각하고 상왕인 태종께 좌의정의 사표를 내겠다고 아뢰기까지 했던 것이다. 상왕은 심온을 병조옥사에 관련시켜서 의심했다. 전임 병조판서였던 때문이다. 심온이 나라 안에 있으면 병조의 의옥사건이 흐지부지될 것을 염려했다. 상왕은 돌연 중국으로 보낼 사은사로 내정했던 한장수를 체임시키고 심온으로 사은사를 임명해서 융숭한 대접으로 잘배자와 모관까지 내리고 잘 다녀오라고 칙사를 모화관까지 보내어 전송했던 것이다. 친국을 마치고 수강궁으로 환어한 상왕은 좌의정 박은에게 입시를 명했다. 박은은 소명을 받고 상왕전에 입대했다. 상왕은 엄숙한 얼굴로 좌의정 박은에게 묻는다.
"병조에서 과인의 명을 거역하고, 군국대사에 대하여 공론이 분분한 중에 또다시 보고를 태만했으니 대역부도의 일이오. 다른 일은 참을 수 있으나 이 일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소. 오늘 과인이 친국을 하여 그들의 죄상이 역력히 드러났으므로 대역의 죄로 처단하려 하니, 경의 의향은 어떠하오?"
박은은 황공한 얼굴빛을 지으며 부복해 아뢴다.
"상왕 전하의 분부를 거역한 죄는 태산보다도 더 중하옵니다. 더구나 이 일은 군국대사에 관한 일이오니 단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엄벌에 처하시는 일이 타당한 줄로 아뢰오."
상왕은 고개를 끄덕여 점두하며, 다시 묻는다.
"병조의 말단 관원들은 당연히 참형에 처하려니와 판서와 참판은 정경과 아경들, 지위 높은 사람이라 말단 관원과 함께 극형에 처하기 극히 곤란하오. 경의 의향은 어떠하오?"
상왕은 짐짓 좌의정의 의향을 떠보았다. 박은은 정색하고 아뢴다.
"군국대사를 품하지 아니한 일은 말단 관원보다 장관의 허물이 더 크옵니다. 대역의 죄로 처리하신다면 당연히 해조의 장관이 당해야 합니다."
상왕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현임 병조판서 박습은 모든 병조의 관원과 함께 대역부도의 죄로 처결하려니와 전임 병조판서로 이에 관련이 되었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박은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반문해 아뢴다.
"전임 병조판서가 누구오리까?"
"영의정 심온이 말이오. 두 군데서 재가를 맡는 것이 부당하다 하고 공론한 것은 전임 병조판서 심온 때부터 논란이 되었다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소. 뿐만 아니라 영의정의 대배를 받은 후에도 이와 같은 말을 방언했다 하니 주동자는 심온이 분명하오. 제 감히 국구의 몸으로 근신하는 태도가 없을 뿐 아니라 현직 영상으로서 아름답지 못한 마음을 품고 조정의 물의를 일으켰으니 대역부도의 죄명을 도망치 못할 것이오.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 정형에 처하게 하오."
박은은 심온을 구원하는 말을 내지 아니했다.
"지당하신 처분이십니다."
겨우 한 마디를 아뢰고 부복해 있었다.
"심온이 만약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조정에서 잡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도망갈 우려가 있으니 절대로 비밀에 부치도록 하오."
박은은 '예' 하고 대답했다.
국구 심온에게 사사를 내릴 것을 이미 마음속에 결정한 상왕의 눈에는 어렴풋 유순하고 공손한 며느님 공비의 아리잠직하고 착한 얼굴이 떠올랐다.
'제 아비 어찌 감히 역적질을 모의했으리까. 원통한 죄명이옵니다. 다시 한번 살펴주옵소서.'
어질고 맑은 눈매에 나타나는 며느님 왕비의 가련한 환상을 얼른 쓰러뜨려 버렸다.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한번 마을을 굳혔다.
"좌의정!"
큰 소리로 좌의정 박은을 불렀다.
"예."
박은이 황망하게 대답했다.
"심온이 내 명령을 거역하고 군국대사를 나에게 보고하지 아니한 죄를 경복궁에 들어가 상감에게 말하오. 그리고 대역부도로 몰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대로 곧 사사를 내리기로 결정했다고 이르오."
상왕은 말을 마치자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박은은 상왕께 배를 드리고 추창해 물러갔다. 곧 평교자를 몰아 경복궁으로 들어가 상감께 알현을 청했다. 젊은 상감은 때마침 편전에서 '춘추좌전'을 탐독하고 있다가 내관을 통하여 좌의정이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자 곧 편전으로 들 것을 허락했다. 박은이 입대하자 젊은 상감은 읽던 책을 덮으며 미소를 지어 신하를 대했다.
"좌상이 어찌 들어왔소. 무슨 좋은 일이 있소?"
'무슨 좋은 일이 있소?' 하고 하문하시는 젊은 전하의 말씀을 듣자, 박은의 가슴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상왕 전하의 하교를 받들어 좋지 아니한 말씀을 아뢰러 왔습니다."
젊은 상감의 용안이 잠깐 흐려졌다.
"그저 황공하옵니다."
좌의정 박은은 얼른 사유를 아뢰지 못한다. 인자하고 도량 넓은 상감이지만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좌상은 말을 하오. 무엇이 황공하고, 무엇이 좋지 않은 일이란 말요."
전하의 음성이 약간 높았다. 박은은 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수그렸다.
"상왕 전하께서 전하께 선위하실 때 만조백관을 부르시어 앞에 앉혀 놓으시고 다른 행정은 다 새 상감이 맡아서 처리하겠지만 다만 군국기무에 대해서는 상왕께서 친히 처리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렇지, 다 아는 일이지."
"그러한데 병조에서 상왕 전하께 보고를 태만히 해서 지금 의금부에 판서 이하가 모두 다 하옥이 되고, 오늘은 상왕 전하께오서 친국까지 하셨습니다."
"그 일은 나도 보고를 받아 짐작하고 있소."
젊은 전하는 용안에 화기를 잃지 않고 말씀했다.
전하의 오뇌
박은은 전하의 용안을 곁눈질해 살피며 다시 아뢴다.
"신은 몸둘 바를 모르며 감히 아뢰옵니다. 오늘 알현을 청하온 것은 소신의 뜻이 아니오라, 상왕 전하의 전교를 받들어 아뢰옵니다."
전하의 용안은 긴장된 빛을 띠었다.
"상왕 전하께서 무슨 전교를 과인에게 내리셨소?"
"이번 병조옥사에 대하여 상왕 전하께오서는 죄인들을 친국하시와 공초를 받으신 후에 병조판서 박습 이하 모든 병조 관원들을 대역의 죄로 결정하시고 정형에 처하여 북음을 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옵고 전임 병조판서였던 심온도 주모자의 우두머리가 되니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로 사사를 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옵고 이 뜻을 전하께 아뢰라는 하교가 계시와 황공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젊은 전하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심온에게도 죽음을 내리라 했다는 한마디는 전하의 가슴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전하의 용안이 잠깐 흐려졌다. 순간 전하는 젊은 용안에 태연한 빛을 띠고 장중한 옥음을 내렸다.
"심온이 비록 국구의 신분을 가졌다 하나 죄가 있다면 도망치 못할 것이오. 상왕 전하의 분부를 받드는 것이 당연하오."
젊은 전하는 말씀을 마치고 무겁게 입술을 닫았다. 놀라는 빛이 없이 태연하게 상왕의 뜻을 받아들이는 전하의 장중한 태도를 뵙자, 박은은 더 아뢸 길이 없었다. 마음 한편 구석에 불안한 생각을 품은 채 몸을 굽혀 아뢴다.
"상왕 전하의 하교를 품달했사오니 소신은 물러가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말없이 대답했다. 박은이 물러간 후에 전하는 좌우 시자를 물리치고, 고요히 눈을 감고 명상 속에 빠졌다. 병조에 옥사가 일어나 친국까지 하신 일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옥사의 불똥이 왕비의 아버지 심온에게까지 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젊은 전하 자신이 알기에는 군국기무에 대한 일은 상왕 전하께서 선위하실 때 선포하신 대로 병조에서는 일일이 수강궁에 아뢰었다. 전하가 상왕께 아뢰어 재가를 맡은 일을 소상하게 아는 것은 병조에서는 반드시 상왕 전하의 재가를 맡은 후에 전하 자신께 또 한 번 아뢰고 일을 처결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상왕 전하께서 군사에 대한 일은 전결하신다 했으나, 병조에서는 신자된 도리에 금상전하인 당신에게 아뢰지 아니할 도리가 없어서 경복궁에 또 한 번 재가를 청하는 것이다. 당연하고 또 타당한 일이었다. 이리해서 병조의 사무는 번거로웠다. 때문에 말단 관원들이 두 곳으로 다니면서 번거롭다고 한 소리도 전하의 귀에까지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말단 관리들에게 견책 정도로 꾸짖을 일이요, 정경 이하 모조리 대역 보도로 처단하기는 너무나 심한 일이다.
더구나 현임 병판 이외에 전임 병판이었던 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주모자로 몰아 죽인다는 일은 전하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젊은 전하는 다시 명상 속에 잠긴다. 왕비의 아버지 심온이 역적이 될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심온이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질을 하겠는가. 그의 아버지는 정묘조 때 좌의정을 지낸 청성군 심덕부요, 자기 자신은 친정아버지로 부원군의 칭호를 받으면서 불과 며칠 전에는 상왕 전하의 은총을 받아 영의정의 대명까지 받았을 뿐 아니라 지금은 또 상왕 전하의 특지를 받들어 사은의 큰 임무를 띠고 명나라로 간 사람이다. 무엇이 부족해서 심온이 대역부도의 역적질을 했을 것인가. 어느 모로 보나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그러나 역적으로 한번 몰린 이상 심온을 구할 도리는 없다. 당신은 온 나라 사람이 받드는 금상전하다. 그러나 당신 위에는 상왕 전하가 계시다. 불덩이 같은 성질이요, 한번 결당한 일은 돌릴 줄 모르는 성격이다. 비록 당신이 임금이라는, 조선에서 제일인자의 권위에 서 있으나, 아버지 상왕 전하를 간할 도리는 없다. 사사로운 체계로 본다면 심온은 장인이요, 아내의 친정아버지다. 당신이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아내의 아버지를 구해주지 못하니 딱하기 한량없는 노릇이다.
"어찌하면 좋을꼬----."
전하는 혼자 말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서 생각해도 별도리가 없다. 곤룡포 두 자락을 바로잡고 어수를 옥대뒤로 넘겨 뒷짐을 지고 어정어정 거닐어본다. 가슴이 답답하다. 숨이 막힐 듯하다. 한숨을 길게 쉬어본다. 별도리가 없다. 영의정을 죽인다는데, 간곡하게 간할 만한 사람은 그래도 삼정승 중의 두 사람인 좌의정과 우의정인데, 좌의정은 상왕 전하의 죽이라는 명령을 받들고 왔으니 말할 것이 없고 우의정은 꼴도 보이지 아니한다. 이 답답한 심정을 누구한테 말하고, 호소할 길이 없다. 사랑하는 아내 왕비 심씨의 아리잠직 예쁜 얼굴이 눈앞에 아렴풋 떠올랐다. 안개 같은 눈물이 기름한 속눈썹을 적셨다. 울음보가 터질 듯한 슬픈 표정을 억누르고 가련한 목소리로 소곤소곤 애원한다.
'상감마마, 첩의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제 아비 어찌해서 역적이 되어 죽음을 당합니까. 제 아비 역적이라면 신첩도 역적이올시다. 역적의 딸년이 어찌 왕비의 자리에 앉아 있겠습니까. 먼저 신첩을 죽여 주시고, 제 아비를 죽이시옵소서.'
슬프게 호소하는 왕비 심씨의 애절한 목소리가 당글당글 구슬을 옥반에 굴리는 듯 높고 낮게 애원성을 지어 전하의 귓전을 울리는 듯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완자창문을 밀었다. 마치 왕비 심씨가 창문밖에 서서 흐느껴 우는 듯한 느낌이 든 때문이다. 아무도 없다. 내관과 시녀들을 멀리했으니,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전하는 문을 다시 소리 없이 닫았다. 다시 방 안에서 넋을 잃고 어정어정 거닐었다. 마치 몽유병에 든 사람처럼 휘적휘적 거닐었다. 인왕산 너머로 석양은 꺼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늦은 가을 서늘한 바람은 경복궁을 휩싸안았다. 등촉방 내시가 어전 전각에 등불을 켜려 했으나 좌우 시자를 물리쳤으니, 감히 전에 올라 불을 켜지 못했다. 젊은 전하는 어둠이 깃든 줄도 살피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오뇌가 심했다. 한동안 괴롭게 거닐다가 펄썩 보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눈을 감았다. 어마마마의 늙고 수척하신 얼굴이 떠올랐다. 낙치가 되어 오물오물 주름진 입으로 말씀을 내리신다.
'네가 아직도 영문을 몰랐구나. 네 아버지의 잔인무도한 가혹한 성격을 ---- 너의 외숙들도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너의 외조부도 분통이 터져 돌아가셨다. 너는 바보요, 천치다. 선위를 받았을 때, 내일을 생각하지 못했더냐? 너의 아버지는 의심 많은 사람이다. 외척들은 씨를 남겨놓지 아니하고 죽여버리고 가산까지 적몰해서 폭삭 망하게 한 사람이다. 네 형 양녕이 일부러 미친 놈이 되어 세자의 자리를 내논 일을 너는 생각지 못하느냐. 양녕은 지인지감이 있는 사람이다. 두고 보아라. 한동안 나를 폐위시킨다고 떠들썩하듯이, 네 장인을 죽인 후에는 반드시 네 아내도 내쫓는다고 할 것이다! 내가 왜 이같이 병객이 되어 바스러진 것을 너는 모를 게다. 내 동생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 친정을 망해논 것이 철천지한이 되어 병객이 되었다. 너는 양녕만큼 슬기롭지 못한 바보다!'
어마마마의 병들고 야윈 모습이 안개 속으로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가 스러지고 스러졌다가 나타났다. 젊은 전하는 또 한 번 넋을 잃고 한숨을 쉬면서 눈앞에 스러지는 어마마마 민왕후의 환상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어마마마의 환상은 잡혀지지 아니했다. 전하의 가슴은 답답하고 괴로웠다. 어마마마의 환영이 푸념을 하신 대로 과연 자기는 양녕 형님만큼 슬기롭지 못했다. 어리석게 둘째 형 효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덥석 왕세자의 자리에 나갔다. 진실로 바보였다. 전하는 곰곰 생각해본다. 아바마마께서 외삼촌들을 역적이라 해서 몰살해 죽일 때, 당신은 철이 나지 아니했다. 어찌 된 까닭을 몰랐다. 정말 외삼촌들이 왕의 자리를 뺏으려고 역적질을 한 줄로만 알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아바마마는 어느 외척을 막론하고 권력이 커지는 듯하면, 모조리 처치해버리는 상습적인 수법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젊은 전하는 캄캄한 절벽 같은 어둠 속에서 또다시 일어서본다. 괴로워서 그대로 배겨낼 도리가 없다.
뒷짐을 지고 또다시 어둠 속을 거닐었다. 창창한 제왕의 길이다. 항상 이같은 어둠 속에서 일평생을 해맬 것만 같았다.
"장차 어떻게 내 손으로 내 장인의 목을 벤단 말인가!"
전하는 절벽 같은 어둠 속을 거닐면서 혼자 말했다. 밤은 점점 깊었다. 장지 밖에서 옥비녀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깨어지는 옥비녀 소리
"똑 똑 똑똑똑 똑똑똑!"
아자창 문틈을 조심성스럽게 옥비녀로 두드리는 맑은 음향이 일어났다. 그러나 젊은 전하는 생각 속에 골똘하게 파묻혀 있었다. 옥비녀 두드리는 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극히 조심성스럽게 두드리는 소리다. 음향은 맑았으나 크지 못했다.
"똑똑, 똑, 똑똑똑!"
백지종이로 바른 창호지 한 겹을 통해서 캄캄한 절벽 같은 어둠 속에 은은하게 불빛이 비쳤다. 미미하게 비치는 불빛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빛을 뿜는 광력은 캄캄한 방 속에서 오랫동안 헤매고 있는 전하의 눈이 부시도록 환한 느낌을 받았다. 젊은 전하는 꿈속에서 깬 듯 비로소 창문으로 눈을 보냈다.
"똑똑, 똑똑, 똑!"
전하의 귀는 비로소 창밖에서 두드리는 옥비녀의 맑은 음향을 들었다.
"누구냐?"
"저올시다."
곱고 안상한 여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저가 누구냐?"
"공비올시다."
전하의 가슴이 출렁하고 물결쳤다. 공연히 용안이 화끈하고 달았다. 순간 대답을 못했다. 만약 내관이나 궁녀가 문을 두드렸다면, 우울한 심정에 금잡인을 하라 했는데 어찌해서 당돌하게 문을 두드렸느냐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왕비는 창문을 두드리던 옥비녀를 머리에 꽂은 후에 조용히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비 심씨의 등 뒤에는 시녀가 촛불을 받들고 섰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전하의 옥음이 얼른 떨어지지 않는다. 전각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다만 시녀가 받들고 서 있는 촛불만이 미풍에 흔들려 벌룽거릴 뿐이다. 전하의 옥음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오뚝 창밖에 서 있는 심씨는 갑갑한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누구냐?'
하는 전하의 옥음을 듣고 나이 염려되고 궁금했던 마음이 적이 풀리기는 했으나, 직접 용안을 뵙지 못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창문밖에 서 있습니다.'
하는 군호를 보내고 싶었다. 가벼운 목소리로 서너 번 기침을 했다. 반응이 있었다.
"들어 오시오."
장중한 전하의 옥음이 비로소 떨어졌다. 왕비 심씨는 영리하고 총명했다. 전하가 어떠한 고민속에 빠져 있는 것을 짐작했다.
시녀에게서 촛불을 받아 손수 들었다. 뒷손질을 해서 시녀를 멀리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 없이 창문을 열었다. 왕비의 손에 들려진 촛불빛이 캄캄했던 방 안에 가득했다. 젊은 왕비는 젊은 전하께 목례를 올린 후에 손에 든 황납초를 윗목에 놓인 와룡촛대에 꽂아놓고 전하 앞에 남스란치마를 휩싸안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고민 속에 빠져 있는 젊은 전하의 용안은 윤기를 잃어 야윈 듯했다. 그 별빛보다도 광명을 뿜던 총명한 눈동자도 빛을 잃었다. 번민 속에 빠져 있는 모습이 완연하게 불빛 아래 드러났다. 왕비 심씨는 명모를 들어 전하의 용안을 살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큰 곡절이 있는 듯했다. 안상한 음성으로 전하께 묻는다.
"전하, 웬일이시오니까? 무슨 근심이 계시오니까?"
전하는 사랑하는 왕비를 눈앞에 대하고 보니 그의 아버지 심온의 얼굴이 힐끗 떠올랐다. 머리 풀고 약사발을 받는 흉악한 모습이 떠올랐다. 젊은 전하는 등에 소름이 쭉 끼쳤다. 눈앞에 나타난 심온의 환영을 얼른 후려쳐 쫓았다. 억지로 얼굴빛을 화하게 지었다. 겨우 왕비의 묻는 말에 대답을 보낸다.
"내가 무슨 근심될 일이 있겠소. 잠깐 고단해서 시자들을 물리치고 누워있었을 뿐이오. 중전은 어찌해서 여기까지 나왔소?"
"내관과 궁녀들이 모두 다 큰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낮에 시자들을 물리치신 후에 밤이 어두워 술시가 지나도록 부르시는 동정이 없사옵고, 수라를 젓술 시각이 지났건만 문을 닫으신 채 감감소식이 없으시니 황공쩍어 신첩에게 전하의 동정을 살피라 했습니다. 신첩도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황공함을 무릅쓰고 황망히 나온 길입니다."
전하는 이 기막힌 사정을 왕비한테 알으켜 줄 수 없었다.
"무엇 그것쯤을 그다지 놀랐단 말요. 임금의 자리가 그리 쉬운 줄 아오. 왕이 되어 보니 이런 일 저런 일 생각이 많구려. 내가 밤이 늦도록 불을 켜지 아니하고 앉아 있는 일을 과히 염려하지 마오."
"어째 안색이 좋지 아니하신 듯하오이다. 환절기에 혹시 감기가 들지 아니하셨나 염려되옵니다. 열이 있는 듯합니다."
왕비는 옥수를 들어 전하의 이마를 짚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전하의 이마에 닿았다. 왕후의 장심은 전하의 이마에서 미열을 느꼈다.
"에구머니나, 미열이 계신 듯합니다. 내국에 기별해서 약을 지어 올리오리까?"
"하하하, 중전은 과히 근심하지 마시오. 아무리 환절기라 하나 젊은 사람이 무슨 감기가 든단 말요. 아무 일 없소. 염려 마오."
왕비는 그래도 맘이 놓이지 아니했다. 전하의 이마를 짚은 채 다시 아뢴다.
"너무 시장하셔도 미열이 뜨시옵니다. 지금 술시가 지났습니다. 아무리 만기를 살피어 바쁘시다 해도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수라를 드셔야 합니다. 저녁 수라를 받드오리까?"
전하는 입맛조차 잃었다. 아무것도 자시고 싶지 아니했다. 그러나 지성으로 보살펴 주는 왕비의 간곡한 마음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직 생각이 없소이다마는 마마가 하도 권하니 그럼 수라상을 내오라 하오."
왕후 심씨의 입숙가엔 비로소 안심하는 웃음이 흘렀다. 창문을 향하여 시녀에게 분부했다.
"빨리 대전마마의 수라를 올려라."
창밖에 대기하고 서 있던 시녀는 왕후마마의 분부를 받고 종종걸음을 걸어 수라간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전하의 수라상이 나왔다. 왕후 심씨는 손수 수라상을 어전에 받들고 전하께 들기를 권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 않던 전하는 돌연 술을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났다. 이 울적한 심정을 술로 달래보자는 것이다.
"마마, 술 한 잔을 주구려."
왕후 심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전하는 대군으로 있을 때도 술을 멀리하고 들지 아니했다. 더구나 왕위에 오른 후에는 더욱더 몸을 조심하고 술을 들지 아니했다. 형님 되는 양녕대군이 너무나 지나치도록 술과 색을 가까이해서 아바마마께 근심을 끼쳐드리고 마침내는 폐세자까지 된 것을 잘 기억하는 때문이다. 심왕후는 총명한 눈매를 흘려 전하의 용안을 살피며 묻는다.
"약주를 달라 하셨습니까?"
"음, 오늘 밤엔 어째 술 생각이 간절하오. 한잔 가져오라 시녀에게 분부하오."
"평상시에 별로 젓숫지 않던 술을 오늘은 웬일이십니까?"
"그저 마시고 싶소. 어서 가져오라 이르오."
전하는 일부러 너털웃음을 껄껄 웃으며 술을 재촉했다. 왕후는 친히 일어나 내주로 향했다. 때마침 구월이라 국화주가 농익었다. 왕후 심씨는 친히 입에 대어 맛을 본 후에 청자수주에 향기로운 국화주를 가득 담아 손수 들고 나왔다. 전하는 은쟁반에 청자수주를 손수 받들고 나오는 왕비의 침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우울한 심사가 잠깐 풀리는 듯했다. 미소를 풍기며 왕비를 향하여 말씀한다.
"궁녀들을 시킬 것이지, 마마가 친히 가져오니 미안하구려."
심왕후는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아뢴다.
"국화주는 신첩이 손수 담근 술이오라 잘 익었는지 먼저 맛을 보느라고 수라간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고맙소. 어처의 나에게 대한 지극한 정성은 무엇으로 보답할지 모르겠소."
전하는 국화주 술병을 상 앞에 고요히 놓고 남치마 자락으로 무릎을 휩싸는 젊은 왕비의 불수같이 고운 손을 이끌었다. 무한한 애정이 전하의 가슴 속에 소용돌이쳐졌다. 젊은 왕비는 부드러운 손을 전하의 손에 맡긴 채 아미를 다소곳 숙이며 아뢴다.
"아이들이 보옵니다. 어수를 내리시옵소서."
유연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듯 속삭였다. 단순호치 사이로 그윽하게 새어나오는 젊은 왕비의 고운 목소리는 향내가 이는 듯했다.
"아이들이라니?"
"시녀들 말씀이올시다."
전하는 왕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껄껄 웃으며 말씀을 보낸다.
"궁녀들이 본들 무슨 흉허물이 되오. 의좋은 내외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어처는 새색시 모양 부끄럼이 많구려. 하하하."
"그래두 그렇지 아니합니다. 점잖으신 체통에, 약주를 따라 올릴 테니 손을 놓아줍시오."
젊은 전하는 슬며시 젊은 왕비의 손을 놓았다. 왕비는 수라상 위에 놓여 있는 청자상감 국화잔에 국화주를 가득히 부어 두손으로 받들어 전하께 올렸다. 국화, 싱그러운 꽃내음이 전하의 코에 스쳤다. 코에 스칠 뿐이 아니었다. 마시기 전에 맑은 향기는 배 안에 가득했다. 전하는 한 손으로 잔을 들었다. 잔대는 왕비가 두 손으로 받들고 있다. 전하는 국화주를 입술에 댔다. 감국 꽃판 떨어진 꽃잎이 두세 올 잔 위에 떴다. 전하는 주욱 국화주를 단숨에 마시었다. 맑은 향기가 입안에 가득했다. 창자 속까지 향기가 스며드는 듯하다. 스며드는 맑은 향기에 시름과 근심도 스러지는 듯했다.
"과연 술맛이 좋소. 어처가 손수 담그고 또다시 손수 따라주니 술맛은 더할 나위가 없는데 국화잔, 국화주에 국화잎까지 떴으니 속된 내 창자가 어처의 덕분에 향기로운 창자로 바뀌는구려. 하하하. 이 밤이 지새지 말고 오래오래 멈췄으면 좋겠소."
왕비는 상아저를 들어 동자송이 한 점을 진장에 찍어 전하의 입에 넣었다.
"안주를 젓수시고 약주를 드셔야 합니다."
이번엔 담박한 송이 향기가 전하의 입에 가득했다. 전하의 용안엔 웃음이 연파를 지었다.
"어처의 밝은 덕으로 인해서 내 시름이 다 스러지는구려. 국화 향기에 취하고 송이 향내음에 어리고 ----."
젊은 왕비는 이때를 놓치지 아니했다. 얼굴빛을 바로 하고 묻는다.
"전하! 무슨 시름이 계셨습니까?"
젊은 전하는 마음속으로,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
후회했다. 급히 변명했다.
"아니, 시름은 무슨 시름. 그대로 멋지게 한번 해본 말이지. 어서, 술이나 한 잔만 더 따라주구려."
"취하시면 어찌하옵니까?"
"내 비록 술을 자주 마시지 아니하나, 한 잔 술에 취할 리 있소? 어서 한 잔만 더 따라주오."
젊은 왕비는 슬기롭고 영리했다. 전하의 초조하고 근심하는 까닭을 알고 싶었다. 술로 전하의 마음을 풀어 시름하는 원인을 알고 싶었다.
"정 젓수고 싶으시다면 한 잔을 더 올리오리다."
왕비는 다시 청자 술병을 들어 상감 국화잔 위에 국화주를 따라 올렸다. 전하는 또다시 국화주를 마시었다. 왕비는 전하의 마시고 난 빈잔을 잔대에 받들어 내렸다. 날렵하게 상아저로 전복쌈을 집어 전하의 입에 넣어드렸다.
"술비위엔 짭짤한 것으로 안주를 하셔야 합니다."
말린 전복을 물에 촉촉하게 축여서 얇게 저민 후에 실백으로 소를 넣어 만두 빚듯 양편 부리를 얌전하게 접어서 쌈을 싸는 전복쌈은 천하의 일미였다. 전하는 전복쌈을 맛본 후에 정색하고 왕후에게 말씀을 내렸다.
"이것은 울산 전복을 말려서 실백으로 쌈을 싼 것이 아닌가?"
"그러합니다."
"곤전! 앞으로 전복쌈은 내 밥상이나 술상에 놓지 않도록 하시오. 너무나 사치스럽소. 이러한 진미에 맛을 들인다면 백성들을 어찌 다스리겠소. 궁항벽촌 농가에서는 쌀이 귀해서 먹지를 못한다는데 내 어찌 이러한 귀한 물건을 혼자 먹겠소. 사치스런 입버릇을 기르면 마음이 해이해지는 법이오. 이담부터는 아예 이러한 사치스런 음식은 내 밥상에 놓지 말기를 바라오."
시름이 첩첩한 속에서도 젊은 전하는 사치를 멀리하고 백성들을 생각했다.
"앞으로는 명심해서 전하의 수라상에는 전복쌈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내수사에서 상왕전에 올리고 경복궁으로 진상을 보냈삽기 신첩이 손수 장만했던 것입니다. 굽어살피시고, 용서하옵소서."
유한정정한 왕비는 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용서를 청했다. 전하의 용안에는 다시 만족한 웃음빛이 돌았다.
"술 한 잔을 더 따라주시오."
"어머나, 아니 젓수시다가 또 젓수시면 취하실 텐데 ----."
"주불쌍배라니, 두 잔 술이 어디 있소. 어서 따라주오."
왕후 심씨는 어명을 어길 수 없었다. 다시 국화주를 따라 올렸다. 전하는 석 잔 술을 자시고 난 후에 또다시 술을 청했다. 칠팔 배가 넘었다. 취기가 돌았다. 그러나 시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장인 심온이 압록강을 건너오기만 하면 당장 죽임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힐 지경이다. 더구나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촛불 아래 유한정정한 태도로 지성껏 당신을 받드는 젊은 왕비를 대하고보니 가련한 생각이 밀물 일듯 밀려들었다.
전하는 왈칵 왕비의 손을 이끌었다. 너무나 돌발적인 전하의 행동이었다. 아까 손목을 이끌던 부드럽던 그 풍경이 아니었다. 격렬하게 돌풍이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광경이었다. 젊은 왕비는 깜짝 놀랐다. 전하의 용안을 바라보았다. 안정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전하는 젊은 비의 손목을 강하게 잡은 채 외친다.
"불쌍하구나. 아까운 사람이 죽는다. 가련하구나!"
큰소리로 외쳤다. 왕비 심씨는 깜짝 놀랐다. 전하의 외치는 소리가 가슴에 뭉클하고 걸렸다. 순간, 몸을 틀어 잡힌 손을 뽑고 일어났다. 비의 몸이 흔들거리면서 칠흑 같은 머리쪽에 꽂혀 있던 옥비녀가 '댕그렁'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아까 문을 두드리던 그 옥비녀다. 옥비녀 떨어지는 소리에 전하도 놀라고 비전하도 당황했다. 전하의 술기운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스러졌다. 불길한 예감이 전하와 비의 가슴을 휩싸안았다. 밖에 대령하고 있던 궁녀들이 수라상을 물리고 깨어진 옥비녀를 쓸었다. 궁녀들이 물러간 후에 비전하는 전하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죄를 청했다.
"신첩 몸가짐이 칠칠치 못하와 지존이신 전하 앞에 소루한 행동을 취하와 경망한 죄를 범했사오니 만사무석이옵니다. 대죄를 청하옵니다."
"무슨 말씀요. 과인이 주기를 띠어 격한 언동으로 비마마를 놀라게 했으니 허물은 과인에게 있고 마마한테 있는 것이 아니오. 과히 심려하지 마시오."
전하는 미소를 지어 비를 위로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비전하는 다시 전하를 우러러뵙고 아뢴다.
"수라상을 다시 받드오리까?"
"아까 술과 안주를 많이 들어서 생각이 없소."
"시장하시면 어찌합니까? 신첩의 미거한 죄로 ----."
"천만에, 마마가 그저 미안해한다면 과인이 미안하오. 딴말은 말고 조용히 이야기나 합시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한숨 소리를 듣는 비전하의 가슴은 쥐어짜지는 듯했다. 쾌활하고 상냥하고 다정하던 젊은 전하가 난데없이 온종일 밤중까지 금잡인을 하고 깊은 고민 속에 빠지신 일, 옥비녀를 여러 차례 두드려도 생각에 골몰해서 비녀 소리도 못듣던 일, 평상시에 멀리하시던 술을 자포자기로 마시던 일, 급기야는 취기를 띠어 혼자 말씀으로,
'불쌍하구나. 아까운 사람이 죽는다. 가련하구나!'
큰소리로 외쳤던 일 모두 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깜짝 놀라 낯을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옥비녀는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졌다. 아까 창문을 두드리고 난 후에 엉겁결에 비녀를 설꽂아서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쩌면 산산조각이 나도록 부서져 버리는가. 모두 다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지금 전하는 술기운이 가신 후에 가만히 한숨을 쉬지 않는가. 젊은 비전하의 안은 타는 듯했다. 입술이 바작바작 말랐다. 까닭도 모르고 공연히 마음이 슬펐다.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전하께 까닭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물어야 좋을지, 아니 물어야 좋을지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가슴은 두근두근 두 방망이질로 치는 듯했다. 비전하는 전하께 꾸지람을 듣더라도 물어보리라 결심했다.
"전하!"
전하를 부르는 비전하의 옥음은 가늘고 떨렸다. 가만한 바람결에 머리털이 흔들리는 듯했다. 기름한 속눈썹에 눈물이 이슬을 머금듯 했다.
"왜?"
전하의 음성도 작았다. 용안에도 강잉히 미소를 흘렸다. 전하는 기름한 속눈썹에 맥맥히 눈물을 머금고 바라보는 비전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묻는다.
"마마, 무슨 할 말이 있소?"
"신첩이 뵈옵기는 모든 일이 심상치 않은 듯하옵니다."
"무슨 일이?"
전하는 또다시 용안에 억지로 미소를 짓고 딴전을 한다.
"평소에 쾌활하시던 전하께서 오늘은 온종일 금잡인을 하신 채 수라도 젓수지 아니하시고, 아니 젓수던 약주를 많이 드신 일이라든지, 또 누구를 향해 하신 말씀인지는 모릅니다마는 가련하고 불쌍타신 말씀, 도무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신첩, 비록 우둔하오나 전하의 배필입니다. 한 말씀 내리시어 신첩의 애타는 심정을 녹여주시옵소서."
전하는 대답을 해주어야 좋을지 아니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만약에 심온의 일을 대답해준다면, 착하고 마음이 소명한 비는 당장 곧 까무러쳐 쓰러질 것같이 생각되었다. 술기운에 공연히 '불쌍하구나! 가련하구나!' 하고 탄식했던 말을 모두 후회했다. 그러나 전하 자신의 괴로운 심경은 또다시 무심코 터져나왔다.
"양녕 형님은 과연 철인이야. 나도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양녕처럼 매인 데 없는 자유스럽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소!"
말을 마치자 전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비전하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깜짝 놀란다.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시다니, 무슨 말씀이오니까. 이 나라는 어찌하시고, 이 백성들은 어찌하실 텝니까.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다 전하의 어지신 덕과 밝은 정치를 바라고, 원하고 있습니다. 왕의 자리를 내놓으시다니 말씀이 됩니까."
비전하는 총명한 눈을 반짝 들어 전하를 우러러보며 아뢴다. 이제는 속눈썹에 반짝반짝 서렸던 눈물도 보이지 아니했다. 호수같이 맑은 눈매가 촛불 아래 빛났다.
"세상만사가 모두 다 귀찮구려!"
전하는 또다시 고개를 가로 흔들며 한숨을 지었다. 한숨을 짓고 전하는 혼잣말을 했다.
"임금 노릇은 독한 사람이라야 해!"
비전하는 다시 전하의 용안을 살폈다.
"독하지 않게 하시고 어질게 하시면 그만 아닙니까?"
"내 맘대로 되지 않을 것을, 나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과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하는 말에 총명 영리한 왕비는 퍼뜩 느꼈다.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 들었다.
"상왕 전하께서 누구를 죽이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까?"
전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오리까?"
전하는 대답을 아니했다.
"신첩의 친정 아비 부원군이 아닙니까?"
왕비는 매섭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백지장보다도 더 희게 질렸다. 옥안에는 눈물 한 점 비치지 아니했다. 전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왕비가 벌써 알았나 했다.
"전하! 상왕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제 아비를 죽이십시오!"
비전하의 음성은 싸늘하면서 장중했다.
소헌의 원광
젊은 전하의 간담은 서늘했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 일을 알았소?"
이제는 숨기려야 숨길 도리가 없다. 비전하는 온후한 얼굴에 아미를 찡그렸다. 차근하게 아뢴다.
"달이 만월이 되어 둥근 후에는 반드시 기울어 그믐달이 됩니다. 꽃이 화사하게 핀 뒤엔 반드시 떨어지고야 맙니다. 이것은 소소한 하늘 이치올시다. 제 아비, 병조판서로 부원군이 되고 또다시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부원군으로 영의정이 될 때 신첩은 벌써, 아비가 죽는다는 예감을 가졌습니다. 부귀영화가 한 사람에게 영속할 수는 없습니다. 아비가 돌연 사은사로 떠날 때 저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아비, 사은사로 떠날 때 벌써 병조의 옥사는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 옥사를 주시했습니다. 신임 병판 박습이나 병참 강상인을 죽이려는 옥사가 아니라 신첩의 아비를 장차 죽이려는 옥사입니다. 신첩은 아비가 고별하러 들어왔을 때 지위가 높을수록 근신을 하라고 일렀습니다. 판연히 죽을 줄 알면서도 ---- 역시 피가 통하는 지친이라 아니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말을 이루지 못했다.
"전하, 상왕 전하께오서는 모조리 외척을 죽이셨습니다. 역적질을 했다고 몰아 죽이셨습니다. 전하의 외숙 여러 형제분도 모두 다 죽이셨습니다. 왕권을 혹여나 외척에게 뺏길까 보아 죽이셨습니다."
비전하가 여기까지 아뢰었을 때 전하는 새삼 왕비의 소명한 통찰력이 비범한 것을 느꼈다. 비전하는 다시 아뢴다.
"전하! 신첩은 다만 전하께오서 장차 성주 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큰일을 하시자면 작은 불평과 작은 근심은 참으셔야 합니다. 첩의 아비의 일신상 문제로 이같이 근심하시고 고민하시는 일, 참으로 감격한 마음 이루 다 아뢸 길 없습니다. 하해 같으신 은총은 머리털을 베어 신을 삼는다 해도 갚사올 길이 없습니다. 폐부에 새겨 지성으로 전하를 받들겠습니다. 그러하오니 신의 아비에 대한 일은 잊으시옵소서. 사사로운 작은 일이올시다. 장차 천하를 경륜하시는 전하에게는 창해 바다에 좁쌀을 던지는 듯한 하치 아니한 일이올시다. 그저 시름을 억제하시고 참으시옵소서."
전하는 비전하의 넓고 넓은 태도에 이제 어이가 없었다. 친아버지의 죽음을 직면한 비가 슬픔과 놀라움과 원한 속에, 초조하게 굴기는커녕 도리어 고민하고 자학에 빠지려는 자기를 향하여 참으라 했다. 전하는 비의 높고 큰 인품에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번 비의 신색을 살핀다. 옹용하고 조신한 채, 단아하고 장중했다. 슬픔을 보이지 아니하고 한을 풍기지 아니했다. 너무나 지나친 숙녀의 모습이었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참는 것도 분수가 있지 저럴 수가 있는가?' 생각했다. 전하는 비의 태도를 위선이라 의심했다. 장중한 말씀을 내린다.
"아직 일은 실행이 되지 아니했소. 그러나 몇 달 후에 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상왕 전하께서 내 이름으로 부원군을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 곤전은 어떠한 태도를 취하겠소?"
비전하는 또렷이 전하를 우러러보며 아뢴다.
"놀라지 않겠습니다."
너무나 간결하고 소명한 대답이었다.
"슬프지 않겠소?"
"왜 아니 슬프오리까. 그러나 참겠습니다. 이 몸은 전하를 위하여 이미 살아온 몸, 전하의 장차 다가올 성업을 위하여 참겠습니다."
명료한 대답은 만 근의 무게가 있었다. 은근히 전하를 격려하는 말씀이었다. 비전하의 말씀은 절대로 위선이나 가작이 아니었다. 전하의 마음도 차차 안정을 얻기 시작했다. 다시 왕후에게 묻는다.
"부원군에게 사사를 내린 후에 상왕께 첨하는 무리들이 혹시 마마를 폐하라고 떠들어댈는지도 모르오. 마마는 어떠한 태세를 취하겠소? 너무나 잔인한 말을 물어서 미안하오마는 ----."
"대비마마 적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외숙 어른들을 죽이신 후에 폐비론이 대두된 줄로 아옵니다. 그것은 전하의 하실 탓이지 신첩에게 하문하실 바 아닙니다."
대를 쪼개는 듯한 쨍쨍한 비전하의 음성이었다. 전하의 입가에는 엷은 고소가 떠돌지 아니할 수 없었다. 다시 묻는다.
"과인이 마마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상왕 전하의 엄하신 분부를 받들어 마지 못해서 폐했을 때 마마는 어찌하겠소?"
"일편단심 전하의 성업이 성취되기를 바라고 축원하는 신첩이올시다. 궁중에 있으나 여염에 있으나 다만 왕실과 이 나라가 잘되기를 빌 뿐입니다. 또다시 아뢸 것은 전하께서 자의로 버리신 신첩이 아니라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신첩을 생각하시어 어전으로 다시 부르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자 비전하는 조개볼을 지어 입가에 미수를 머금었다. 말끝마다 향기가 이는 듯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비전하의 손을 당겼다.
"현처는 나의 스승이오. 오늘 나는 배운 것이 많소. 현처의 말씀대로 참으리다. 만사를 참으리다."
왕비 심씨는 다시 조용하게 아뢴다.
"전하께서는 마치 달에 비한다면 초승달이십니다. 이제 겨우 빛을 뿜기 시작하십니다. 만월이 될 때까지 참는 공부를 하시옵소서. 괴로워도 참으시고, 화가 나시어도 참으십시오. 무능해서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대성이 되시기 위하여 참으십시오. 양녕대군께서도 큰 인물이십니다. 그러나 참지를 못하시어 백성들을 버리셨습니다. 나라를 버리셨습니다. 전하! 전하의 뒤에는 억조창생이 있습니다. 조선이란 나라가 있습니다. 참으십시오!"
젊은 전하는 비의 손길을 굳게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전하의 번민을 대범하게 위로하고 내전으로 돌아온 비전하는 조용히 침실에 들었다. 이번에 자기 아버님을 상왕께서 죽이는 일로 말미암아 대왕도 양녕대군마냥 까딱 잘못하면 자학의 길로 떨어지시기 십상팔구였다. 큰일이었다. 죄가 없으면 역적의 누명은 언제든지 벗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서 나라가 결딴이 난다면 큰일이었다. 모처럼 일어난 이 이씨 조선이 또다시 어지러운 혼란 속에 빠져서, 만백성이 도탄에 빠진다면 이씨 조선은 영영 보존이 되지 못할 것이다. 자기는 이미 이씨 왕실로 시집온 이씨 집 사람이었다. 왕실과 종묘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전하는 남편이신 전하의 총명 영리하고 박학다문하신 인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하가 아니면 이 나라를 중흥시킬 사람이 종실 안에 또다시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해서 놀라움과 슬픔을 억제하고 대왕의 감정으로 흐르는 자학하려는 싹을 누르고, 국가의 큰 형편과 억조창생을 도탄에서 건지시라고 격려했던 것이다. 작은 일에 구애하시지 말고 참아서 장래에 크나큰 성주가 되시라고 눈물을 머금고 아뢰었다.
그러나 막상 침실로 돌아와 조용히 앉아보니 슬픔은 홍수 때 봇물 터지듯 복받쳐 쏟아졌다. 아버지가 죽는다! 그래도 와석종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비명횡사를 한다. 비명횡사를 한다 해도 자식의 정리에 땅을 쳐서 통곡할 텐데, 역적으로 몰려서 사사를 당한다! 기막힐 일이다. 그나 그뿐인가, 자기는 역적의 딸이 된다. 역적의 딸로 어찌 나라 지존의 배필인 왕비가 될 수 있는가? 반드시 폐위가 되고 말 것이다. 말썽 많은 조신들은 큰일이 난 듯 폐위를 주장할 것이다. 더구나 상왕전에 아부하는 무리들은 기어코 폐비가 되도록 공작을 하고 말 것이다. 비전하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애가 굽이굽이 끊어지는 듯했다. 눈물이 샘솟듯 쏟아진다. 소리를 죽여 울었다. 측근에 모신 시녀들은 전하와 비전하의 비밀한 심정을 알 까닭이 없었다. 문밖에서 비전하의 동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전하는 저녁 수라상을 받으셨지만 비전하가 저녁 진지를 젓숫지 아니한 일은 잘 알고 있었다. 명이 내리기를 기다렸으나 감감하게 아무런 분부가 없다. 시녀들은 초조하게 방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참다 못하여 한 시녀가 문밖에서 조용히 아뢰었다.
"중전마마께 아뢰옵니다. 저녁 진지를 어찌하오리까?"
애통 속에 잠긴 비전하의 귀에 시녀의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시녀는 다시 아뢰었다.
"저녁 진지를 어찌하오리까?"
비로소 비전하의 귀에 들어갔다.
"아니 먹겠다. 물러들 가고 퇴등을 시켜라."
슬픔에 싸인 비전하의 음성이 고요히 흘렀다. 시녀들은 조심스런 표정으로 퇴등령을 놓아 등불을 물리고 조용히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비전하는 시녀가 물러간 후에도 여전히 침소에 들지 못하고 체읍속에 파묻혀 있었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심씨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 것이다. 공연히 까닭도 모르고 왕실로 시집온 것이 한이 된다. 왕실로 시집올 때 왕비가 될 것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이것은 대왕 자신도 양녕대군 대신 세자가 될 줄 몰랐고, 또다시 세자가 된 후에도 태종께서 생존해 계신 동안에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모두 다 운명이라 생각해본다. 그러나 왕비라는 이름을 띤 지 몇 달이 채 못 되어서 이같은 혹화를 당하게 될 줄은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몰랐을 것이다. 왕비는 촛불을 끄지 않은 채 금침 위에 엎드려 무한한 슬픔을 안았다. 밤은 이미 깊어 삼경이 넘었다. 비전하의 전각은 깊은 가을 어둠에 싸여 호수 밑바닥같이 조용했다.
이때 조용조용 걸음을 옮기는 발자취 소리가 외전 복도에서 내전 복도로 향했다. 발자취 소리는 비전하의 침실 앞에 딱 멈춰졌다. 부드럽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세 번 들렸다. 비탄 속에 빠져 있는 비전하는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삼경이 넘었는데 누가 감히 침전문을 두드릴 리 만무했다. 시녀가 왔다 해도 '아뢰오' 소리를 낼 것이지, 방자하게 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일이다. 비전하는 슬픔에 잠겼던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바로한 후에 장중한 음성을 냈다.
"누구냐, 깊은 밤에 감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창밖에서는 두세 번 기침 소리가 났다.
"나요, 놀라지 마시오."
전하의 음성이었다. 비전하는 소스라쳐 놀랐다. 급히 일어나 문을 열고 시립했다.
"웬일이시오니까. 기별도 없이 단신으로 ----."
촛불에 비쳐지는 전하의 용안엔 고요한 미소가 흘렀다.
"마마가 잠을 이루지 못하실까 해서 위로하러 왔소."
젊은 전하는 미소를 지어 옥음을 내리고 비전하를 바라본다. 등불에 비쳐진 비의 얼굴은 슬픔에 휩쓸려 구름 같은 머리는 흐트러지고 별빛 같은 안정은 충혈이 되어 부었다. 전하의 마음은 민망한 정을 이길 길 없었다.
"울으셨구려!"
전하는 어수를 늘여 비전하의 등을 어루만졌다. 비전하는 비통한 모습을 전하 앞에 나타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두 손길을 마주 잡고 고요히 미소를 지었다.
"아까는 마마가 과인을 위로하러 왔지만 이번엔 과인이 마마를 위로하러 왔소이다. 통기도 없이 별안간 온 것을 허물하지 마시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비전하의 옥수를 이끌어 자리를 같이해 앉았다. 전하는 촛불 아래 고요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비전하를 바라보며 다시 부드럽게 옥음을 내린다.
"내가 한밤중에 곤전을 찾아뵈오러 온 것은 아까 곤전이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준 그 큰 정을 감사하는 뜻으로 위안하러 왔소이다."
비전하는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미며 나직이 대답한다.
"왕은이 너무나 융숭하십니다. 신첩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눈물 흔적이 마르지 아니한 채 초연히 수심을 머금어 대답을 올리는 비전하의 태도는 하룻밤 폭풍우에 휩쓸린 한 떨기 황모란의 자태다. 대왕은 정을 이길 수 없었다. 비전하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짓는다.
"아까 마마는 내 마음을 평정하게 해주고, 바로잡게 해서 짐짓 여장부인 듯, 나랏일을 걱정하고 억조창생을 생각해서 앞으로 큰 사업을 완성하라고 격려해주었소. 이제 내 마음은 얼마쯤 안정이 되었소. 그러나 마마가 내전으로 돌아간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찌 마마의 속마음이 평안하실 리 있겠소. 아버지와 딸, 혈육을 같이한 지친의 사이라, 비록 나라 풍속에 출가외인이란 말이 있으나 천륜을 어찌하겠소? 혼자 계실 때 마음이 평온하실 리 만무하오. 그리하여 마마의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잠시라도 위안해드리기 위하여 밤늦게 찾은 길이니 용서하시오."
전하의 다정하신 말씀을 듣는 비전하는 부부애의 지극한 정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방울방울 옷깃으로 떨어진다. 젊은 전하의 정은 더한층 흔들렸다. 용포 소매에서 눈빛 같은 손수건을 꺼내 비전하의 눈물을 닦았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비전하는 감격에 넘쳐 목이 메었다.
"신첩의 아비 일로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극직하신 왕은에 감격화와 우옵니다."
이내 말끝을 어우르지 못했다. 젊은 전하는 또다시 왕비를 달랜다.
"아까 마마는 과인더러 참으라 하지 않았소."
"네."
왕비의 목 메인 소리는 아직도 가라앉지 아니했다. 가늘고도 떨렸다.
"비마마도 참으시오. 참아야 합니다."
"……."
아까 왕 전하께 참으라고 간곡하게 권하던 비전하는 참으라는 말씀에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아니했다.
"마마!"
전하는 다시 마마를 나직하게 불렀다.
"네----."
"마마는 장차 세자가 될 큰아들이 있지?"
전하는 '장차 세자가 될 큰아들'이란 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비전하는 대답하지 아니할 수 없다.
"네----."
"다음에 둘째 수양이 있지?"
"네!"
"다음에 셋째 안평이 있지?"
"네!"
"또다시 몇 아이를 생산할지도 모르지만, 우선 세 아이를 보아서라도 마마는 참아야 하오. 슬픔을 참아야 하오!"
비전하는 또다시 '네!' 하고 대답했다.
산호동곳
젊은 전하는 다시 비전하의 등을 쓸었다. 조용히 말씀을 계속한다.
"마마! 마마가 아까 지성으로 나에게 참는 학문을 일깨워주었듯이, 나는 지금 마마한테 참으라는 인생철학을 권하오."
비전하는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소?"
"전하는 장차 조선을 중흥시키실 영주시고, 신첩은 비록 왕비라 하나, 역시 치마 두른 한낱 여자올시다. 실상 말씀이지 아녀자의 감정으로 죄 없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아비의 일을 바라보고 어찌 감히 참사오리까. 할 말씀이 무궁무진 많사오나 이미 가라앉으신 성상의 마음을 다시 흔들까 저어하와 말씀을 줄이겠사옵니다."
전하는 소리를 드높여 껄껄 웃었다.
"나는 이미 태산부동이오. 양녕 형님의 본을 떠서 만승제왕의 자리도 내던지려 했더니, 마마의 바른 말씀을 들어 황연히 깨닫고 태산부동이오. 아버지가 다 못하신 일, 할아버지가 다 못하신 일을 내 힘으로 다 성취할 작정이오. 모두 다 아까 마마가 깨우쳐준 덕택이라 하겠소. 마마 아니었다면, 아마 나도 미칠 뻔했소. 내가 이 밤 안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것은 모두 다 현처의 덕택이오."
"전하는 과연 명철하십니다. 이제는 신첩이 비록 이 세상에 살지 못한다 해도 마음을 놓겠습니다."
비전하의 한마디 말씀은 전하의 귀에 거슬렸다. 가슴이 아팠다.
"마마! 무슨 말씀요. 방수에 꺼리는 좋지 못한 말씀 하지 마시오. 이 세상에 살지 못한다는 말씀은 도섭스런 말씀요. 아예 다시는 입에 담지 마시오. 부원군이 비록 비명횡사를 한다기로서니 딸이 어찌 하종을 하겠소. 만고에 없는 말씀요. 그저 참으시오. 날 보고 참으라고 권하듯이 마마도 참으시오."
비는 이제 상왕께 대한 반항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기름한 속눈썹에 서렸던 눈물방울도 이제는 말랐다.
"아비, 죽어서 슬프고 아니 슬픈 일은 신첩의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마는 역적의 딸이라 하여 내치는 경우, 참는 것으로 일이 펴게 될 리 만무합니다. 신첩은 왕비로 있으나 서인으로 있으나 다만 전하의 불세출 대업이 완성되시기를 정성껏 축원할 뿐이옵니다."
전하는 비전하의 말씀을 듣자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마마, 과인은 마마 앞에 다짐하리다. 내 힘으로 장이의 비명횡사는 구하지 못할망정, 절대로 마마를 폐위시킨다는 말이 일어날 때는 임금의 특권으로 실행하지 못하도록 하리다."
정숙하고 단아한 비전하이언만 전하의 말씀을 듣자 냉소하는 웃음이 입가에 돌았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상왕 전하께서는 당신을 도와서 창업지주까지 되게 하신 대비마마도 페하려 하셨는데, 황차 저 같은 미미한 존재겠습니까."
전하는 다시 비전하를 달랜다.
"그 일은 곤전이 궁에 들어오시기 전의 일이라 내막을 잘 모르고 남의 말만 듣고 그저 생각하시는 것인가 하오. 실상은 어마마마께서 너무나 의지가 강하셔서 후궁들을 푸대접하신 때문, 폐비론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비전하는 또다시 차갑게 웃으며 말씀한다.
"그것은 전하께서 너무나 상왕 전하만 두둔하시는 말씀이십니다. 대비마마의 동생들, 민무질, 민무구 형제분은 당시 세자이셨던 양녕대군 어른의 외삼촌이시지만 전하의 외삼촌도 되십니다. 세자를 빙자해서 다소간 권력을 좀 부렸기로서니 역적으로 몰아서 민씨네 일족을 깡그리 멸문시키신 일은 너무나 잔인하신 처사였습니다. 이리해서 양녕대군께서도 임금의 자리가 싫다 해서 양광 행세를 하셨고, 대비마마께서도 격분하신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계셨던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오니까. 이로 인해서 조강의 아내이셨던 대비마마를 폐위까지 하자고 주장하셨던 일은 너무나 혹독하신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어른이 군사권에 대해서 병조의 말단 관원들이 두 군데로 다니며 재가를 받기가 난처하다 했다고 현직도 아닌 제 아비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라 하셨으니, 저 같은 것은 역적의 딸이라 해서 폐서인을 만들어 내쫓으시기는 여반장의 일인가 합니다."
비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고개를 숙여 한숨을 짓는다. 대왕 전하는 잠시 말씀이 막혔다. 비전하는 얼굴빛을 다시 화하게 지었다.
"신첩은 이미 전하께 향하여 앞으로 이 나라와 이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불만과 불평을 참으시라 아뢰었습니다. 신첩도 참겠습니다. 이 나라가 흥왕하게 되어 전하께오서 성주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을 때까지 빌고 바라겠습니다."
"고맙소. 이제 과인과 마마는 사사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씨 왕조의 주춧돌이 되고 굄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백성의 공복이 되어 이 나라를 부강케 하고 나라의 학문과 문화를 높여서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 지지 않는 훌륭한 국가와 국민이 되게 해야 하겠소이다. 모두 다 마마가 아까 나의 괴롭고 아팠던 마음을 풀어주고 돌려준 때문입니다. 과인은 이제 이같은 굳은 결심을 했소이다. 마마도 더욱더 과인을 도와서 나를 격려해주시오."
"신첩은 다만 전하를 위하여 생겨난 몸, 비록 운이 비색해서 아비 죽음을 당한 후에 궁문 밖으로 쫓겨난다 할지라도 자나깨나 전하를 도와 성주가 되시게 하오리라."
비전하는 아직도 가슴 한복판에 불안한 마음이 서려 있는 것을 씻어버릴 수 없었다. 씻을 도리가 없었다. 감정을 누르고 참겠다 하면서도 역적의 딸이란 낙인이 찍혀서 쫓겨난 것만 같았다. 공포감이 항상 검은 그림자처럼 몸을 엄습했다. 말끝마다 쫓겨난다는 말씀을 되풀이했다. 전하의 마음은 쥐어짜지는 듯했다. 비의 앞으로 나가 다시 등을 쓸었다.
"과인을 믿으시오, 과인을."
비전하는 와룡촛대 벌룽거리는 촛불 아래 다소곳 고개를 숙여 쓴웃음을 짓고 아뢴다.
"믿으라는 말씀, 신첩이 어찌 아니 맏겠습니까. 제가 하늘 같으신 전하의 정중하신 말씀을 아니 믿고 누구의 말씀을 믿겠습니까? 그러나……."
비전하는 '그러나……' 하는 한 마디로 간명하게 회의하는 심경을 표명했다.
"그러나…… 어찌했단 말씀이요?"
전하도 고소를 던지며 묻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왕 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하께서 무슨 힘으로 막겠습니까?"
"과인이 비록 우유부단하다 하지만 후마마를 폐하라는 분부가 만약 내리신다면 왕의 자리를 내놓을지언정 결코 봉행하지 아니하겠소. 삼수갑산으로 쫓겨간다 할지라도 마마를 내치고 떨어져 살 수는 없소!"
전하의 음성은 열에 띠어 높았다.
"신첩은 아까 대전에서 고민하실 때 내두일을 생각하시어 나라를 위하여 참으시라고 아뢰었습니다. 신첩도 전하를 위하여 참겠다고 아뢰었습니다. 일신의 파탄! 국가의 파탄 나는 꼴을 전하께서는 어찌 차마 보시렵니까. 그러하니 첩은 비록 페비가 되어 쫓기는 모이 될지라도 참고 불평을 아니하면서 그늘에서 전하의 성업이 성취되시기만 바라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백만 가지 일은 다 참는다 해도 마마를 폐하는 일에 대해서는 참을 수가 없소. 다투고 간하리다. 다투고 간해도 듣지 않는다면 왕의 자리를 헌 짚신짝같이 버리리다. 내 비록 양녕만큼 결단성이 없다 하지만 이 일만에 대해서는 참을 수가 없소! 당신을 버리고 누구와 함께 이 나라를 다스린다 말요. 당신의 내조 없이 내 어찌 임금 노릇을 하겠소!"
전하는 격했다. 용안이 불그레 상기되었다.
"……."
비전하는 침묵을 지켜 대답이 없다.
"자 ---- 천지신명이 굽어보시는 앞에 맹세하오리다. 대신들이 폐비론을 들고 일어나고 상왕전에서 엄한 분부를 내리실지라도 나는 당신을 놓지 아니하오리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머리에 쓴 인모탕건을 훌떡 벗었다. 상투 끝에 꽂혀진 동곳을 쑥 뽑았다. 황금마구리 산호동곳이 불빛 아래 찬란한 빛을 뿜는다.
"자 ---- 이것으로 맹세하는 신표를 삼아 마마께 드리오리다!"
전하는 휘황찬란한 산호동곳을 장심에 받쳐 비전하께 전한다. 비전하는 감격한 생각이 뼛골 속속들이까지 스며들었다.
"아니 받자올 도리 없습니다!"
비전하는 두 손으로 전하의 산호동곳을 받든 채 회오리바람 같은 격정에 휩쓸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전하 앞에 쓰러져 울었다. 맹세를 다짐하는 전하의 산호동곳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고, 감격한 정에 휩쓸려 느껴 우는 비전하의 칠흑 같은 머리쪽은 비녀 없이 쪽을 튼 탓으로 구름같이 풀어졌다. 전하는 사랑에 넘치는 웃음을 용안에 가득 풍기고 비마마의 어깨를 받들어 일으킨다.
"자아, 그만 우시고 마음을 진정하시오. 너무나 정에 얽매이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전하는 비를 어루만져 달랬다. 울음을 그치고 일어 앉는 어깨 위로 구름같이 풀어졌던 검은 머리채가 툭 떨어졌다. 연분홍 저고리 날씬한 어깨 위로 꿈틀거려 떨어진 검은 머리채는 불빛 아래 아름다운 풍정울 일으켰다. 비마마의 자태는 전하의 눈에 유난히 매력 있게 뵈었다. 비전하는 황망히 두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채를 올렸다.
"죄송하옵니다. 복에 넘치는 왕은을 입사와 복받치는 정을 누를 길 없어, 꼴사나운 모습을 어전에 보이니, 만사무석이옵니다."
전하는 비의 아름다운 자태에 취했다가 이내 껄껄 웃으셨다.
"옥비녀가 깨어진 탓으로 마마의 풍정 있는 자태를 바라보게 되었소. 좀 더 바라볼 것을 공연히 황급하게 다스리는구려."
전하는 말씀을 마치고 소매 속에서 백옥비녀 한 개를 꺼냈다.
"자 ---- 깨어진 비취옥비녀 대신 결곡한 백옥비녀를 꽂으시오. 아까 비녀 없이 발길을 돌리시는 마마의 모습을 보고 마마의 애운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비녀를 가져왔던 것이오."
불빛 아래 조요하게 비치는 비녀는 눈보다도 더 깨끗한 백옥죽절 비녀다. 옥에도 제일가는 백옥이요, 곧고 굳은 뜻을 상징하는 죽절비녀다. 비전하는 급히 손에 쥐었던 황금마구리 산호동곳을 치마춤에 감추고 무릎 꿇어 두 손으로 백옥죽절비녀를 받아들었다. 눈으로 감사한 뜻을 펴하는 목례를 올린 후에 구름같이 흩어진 머리채를 풀어 죽절옥비녀를 꽂았다. 다시 단아하고 단정한 왕비의 자세다. 몸을 굽혀 전하께 아뢴다.
"이제 아비의 일로 깨어졌던 비취옥비녀의 일은 다 잊어버리겠습니다. 새로 내리신 옥죽절을 한평생 꽂아, 전하의 크나큰 위업을 돕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비전하는 조용히 일어났다. 눈빛같이 흰 면말이 가볍게 남치마 자락을 찼다. '사각사각' 치마 끌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비전하는 주홍빛 이층 장문을 열었다. 이윽고 조그마한 자개 상자를 꺼내 어전에 바쳤다.
"신첩도 전하께 맹세를 드리옵니다. 신표로 이 물건을 드리고, 아비의 일을 잊겠습니다. 참겠습니다."
상자에서는 금동곳이 나왔다. 천 년을 지나도 빛이 아니 변한다는 순금 동곳이다. 비전하는 손수 전하의 상투에 산호동곳 대신 금동곳을 꽂아드렸다. 전하는 만열의 기쁜 표정을 지으셨다. 내외분의 정리는 비 내린 후에 다져진 땅과 같았다.
심부원군의 최후
병조옥사는 엎치락뒤치락 두 달을 끌다가 마침내 판서 박습과 심온의 아우 심정을 서교로 끌고 나가 참형에 처하고, 참판 강상인은 수레에 끌어 조리돌려 죽이고, 이각, 채지지, 송을개 등 말단 직원들은 고부와 무장으로 귀양보냈다. 상왕은 특히 영의정 겸 부원군 심온을 군국대사를 품달하지 아니한 주모자로 판정했다. 금부에 엄명했다.
"사은사로 명나라에 나갔던 심온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금부에서 진무를 의주로 보내서 압록강에서 건너오는 대로 시각을 지체치 말고 포박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금부 당상은 하교를 받들었다. 상왕 태종은 또다시 영을 내린다.
"심온이 만약 명나라 사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오거든, 심온은 병이 들었다고 명사에게 속여 말하고 심은을 딴 곳에 감금해두라. 만약 사신이 알게 되면 귀찮은 일이 많을 테니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상왕은 분부를 내린 후에, 마침 문안을 들어온 전하에게 말씀을 내린다.
"전하에게 할 말이 있소. 병조옥사에 대해서는 형조판서와 글부 당상이 자세한 전말을 전하에게도 품달했으려니와, 옥사를 다스려보니, 일의 주모자는 부원군 심온으로 판명이 되었소. 심온이 비록 왕비의 생정 아비고 전하의 국구라 하나 대역부도의 죄를 저지른 바에야 어찌할 도리가 없소. 일간 심온이 압록강을 건너온다 하니, 오는 대로 곧 포박을 하라고 금부 당상에게 영을 내렸소. 전하도 알고 품달하거든 윤허하시오!"
의논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전하는 마침내 '올 때가 왔구나!' 생각했다. 눈앞에 퍼뜩 왕비의 현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옥비녀가 떨어져 깨지던 모습, 산호동곳을 비에게 주며 달래던 장면, 금동곳과 죽절비녀를 주고받던 모든 일이 숨바꼭질하듯이 눈앞에 나타났다.
'앞으로 큰일을 하시기 위하여 모든 일을 참으셔야 합니다!'
'양녕대군같이 되시면 아니 되십니다.'
'참으십시오. 저도 참겠습니다.'
현숙한 왕비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전에 쟁쟁했다. 전하는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심온이 국가에 대하여 대역부도의 죄를 저질렸다면 아무리 왕비의 생정 아비라 하나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유사가 품하는 대로 허락하겠습니다."
전하의 음성은 장중했다. 얼굴빛조차 변하지 아니했다. 상왕은 눈을 들어 슬며시 전하의 표정을 살폈다. 화하고 부드럽고 장중한 태도는 비록 나이 젊으나 법도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나보다 낫구나!' 생각했다.
"이것은 다 나라를 위하고 전하를 위해서 하는 일야 ----."
상왕은 한 마디로 대답했다. 전하는 다만 '네!' 하고 대답했다.
한편 금부의 진무사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심온을 잡기 위하여 의주로 말을 달렸다. 상왕은 또다시 내관을 보내거 진무사에게 일렀다.
"심온을 의주에서 잡은 후에 서울로 포박해온다면 체모에 되지 아니한다. 경기 수원으로 데려가서 죄를 다스려라."
진무사는 영을 받고, 다시 말을 달려서 의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심온은 사은사의 임무를 무사하게 치르고 북경에서 요동을 지나 압록강에 당도했다. 섣달 찬바람에 강은 얼어붙고 산과 들은 허연 눈으로 덮였으나 오래간만에 고국산천을 바라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먼저 집안일이 궁금하고 왕 전하와 왕비 전하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강물이 얼어붙었으니 배는 다니지 아니했다. 사람들은 얼음을 타고 국경을 넘었다. 심온의 일행은 가마를 타고 강을 건넜다. 압록강 찬바람은 잎 떨어진 나뭇가지를 뒤흔들고, 교군꾼들의 수염은 삭풍에 입김이 서려서 고드름이 달렸다. 심온이 탄 가마에는 찬 바람을 막기 위하여 휘장을 두 벌, 세 벌 둘렀건만 펄럭거리는 창경 틈에서 들어오는 매운바람은 심온의 콧부리를 떼가는 듯 매웠다. 심온은 상왕 전하가 명나라로 갈 때, 모화관까지 내관을 보내서 특별히 내리신 잘배자를 입었다. 새삼 상왕인 태종의 은총을 느꼈다.
'상왕 전하께서 잘배자를 아니 내리셨던들 큰 병이 날 뻔했구나!'
'때로 엄하시기는 해도 정말 다정하신 분이다!'
'갈충보국하리라. 더구나 나는 왕비의 아버지가 아닌가!'
심온은 이같이 생각하면서 쌀쌀한 삭풍이 천지를 뒤흔드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 땅에 당도했다. 선발대는 기세 좋게 의주 통군정으로 향했다. 사은사의 일행은 가마를 타고 뒤를 따랐다. 보통 사은사가 아니다. 부원군에 영의정까지 겸한 심온의 행차였다. 수행하는 역관과 서리는 말할 것 없고 가마를 멘 교부까지 거드름을 빼면서 의기가 양양해서 통군정으로 올랐다. 통군정 앞에는 의주 목사가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나와서 취타를 불면서 영의정 겸 사은사의 행차를 맞이했다. 이때 의주의 지방 장관은 부윤이라 하지 아니하고 목사라 했다. 기치창검은 햇빛을 가리고, 북소리, 징소리, 취타 소리는 강변을 흔들었다. 의주 목사는 구군복 화려한 복색으로 사은사 심온을 향하여 예를 드린 후에 문후를 했다.
"일기 찬데 무사히 왕반하시니 감축하외다."
심온은 거드름을 피고 대답했다.
"수고하오."
한 마디가 채 떨어지기 전에 목사의 뒤에 섰던 진무사가 붉은 기를 높이 흔들었다. 매복했던 금부 나졸 수십 명은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범같이 달려들었다. 오랏줄이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심온의 어깨로 떨어졌다. 꽁꽁 묶어졌다. 불의의 변을 당한 심온은 어이가 없었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노기가 충천했다.
"이놈들, 너희 놈들이 누구냐? 감히 영의정을 포박하느냐?"
목이 터지도록 호통을 쳤다. 진무사가 앞에 나와 대답한다.
"어명이오. 대감은 대역부도로 몰리셨소----."
심온은 기가 막혔다.
"어명야? 누가 대역부도야? 주상전하의 어명이란 말이냐?"
자기의 사위 되는 상감이 자기를 포박하라고 할 리 만무했다.
"상왕 전하의 어명이십니다."
심온의 머릿속에는 명나라로 갈 때 내관을 모화관까지 보내어 춥겠다고 잘배자까지 내리신 상왕 전하가 두 달이 못 되어서 포박 명령을 내리실 리 만무했다. 아까까지도 자기는 가마 속에서 상왕 전하의 은총을 다시 한번 되새겨봤던 것이다. 기막힌 일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어명이란 증거를 보여라!"
진무사는 소매 속에서 병부 한쪽을 꺼내 뵈었다. 확실했다.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왕전 병부의 반쪽이 분명했다. 심온의 머리에는 명나라로 떠날 때,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권의 일로 금부에 투옥되었던 일을 생각했다. 좌의정 박은이 영의정인 자기한테는 말하지 아니하고 빈청에 같이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판의금을 불러 강상인을 하옥하라고 분부하던 일이 생각났다. 상왕전에 들어가 심온이 권력 좋은 좌의정이 되어봤으면 좋겠다 말했다고 사표를 올렸다는 소문이 떠돈 일도 머리에 떠올랐다.
'틀림없이 좌의정의 조화로구나!'
탄식했다. 왕명을 반항할 수는 없었다. 그대로 묶인 채 사관으로 들어갔다. 기가 막혔다. 앞으로 변명을 하면 사필귀정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잠이 올 리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호기롭게 사신이 되어 상왕과 왕 전하며 왕비가 보내신 칙사의 전송을 받으며 명나라로 나갔던 영의정은 돌아올 때는 결박을 당한 죄수의 몸이 되어 한양 천리를 달렸다. 무악재 고개를 넘어 서울에 당도했다. 집에서 누가 나와 보나 했다. 그러나 아들도 아니 나오고 아우의 얼굴도 뵈지 않았다. 혹여나 궁에서 왕비가 나인이라도 내보내지 아니했나 하고 두루두루 살폈으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아니했다. 서대문으로 들어섰다. 의금부로 끌려가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로를 지나 남대문 밖으로 나섰다. 칠패, 팔패, 청패를 거쳐 삼남대로로 나가는 것이다. 심온은 버썩 의심이 들었다.
"나를 죄인으로 몰아 잡아간다면 의금부로 가지 아니하고 어디로 가는 거요?"
진무사한테 물었다.
"수원으로 가서 문초를 하라 하시었소."
금부 진무는 간단히 대답했다. 말죽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한양성에서 팔십 리 길 되는 수원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심온을 수원으로 압송한 진무사는 밤을 도와 말을 달려 한양으로 올라왔다. 무사하게 심온을 수원에 하옥한 일을 상왕전에 아뢰었다. 심온을 그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상왕은 판의금을 불러 분부를 내렸다.
"판의금은 금부 당상들과 함께 수원으로 내려가 심온을 심문하라. 먼저 처형된 박습, 심정, 강상인들의 토설로 보아, 심온이 대역의 죄를 범한 것은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한 차례 형신을 아니할 수 없으니, 엄하게 문초한 후에 사사에 처케 하라."
심온에게 대역의 죄목으로 죽음을 내리는 일은 이미 기정의 사실이었다. 다만 형식적으로 공초를 받아보라는 것이다. 금부에서는 상왕의 명을 받들고 금부 당상과 판의금들이 수원으로 내려가 심온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때 심온은 아직도 자기 아우 심정과 병조판서 박습이며 참판 강상인을 참형에 처하고 조리돌려 죽인 것을 감감하게 몰랐다. 첫 번째 형신에 심온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병조의 옥사를 나는 알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 있지 아니하고 연경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인데 내가 어찌 알겠소. 당치 않은 일에 나를 관련시키지 마시오."
쾌쾌하게 죄 없는 것을 밝혔다. 추관들은 강상인과 박습이 전임 병조판서 심온과 함께 의논했다는 공초를 들려주었다.
"이 같은 증거가 있는데도 감히 불복을 하겠는가?"
호통을 치며 고문을 시작했다. 심온은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왕명을 거역하고 역적질을 하겠소. 내 사위가 금상 전하고, 내 딸이 중전마마요. 세 살 먹은 동자한테 물어보더라도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할 것이오. 더구나 병권을 잡지 아니한 내가 역적질을 어찌하겠소."
추관들도 딱한 줄 알면서도 상왕 전하의 지엄한 명령이었다.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심온에게 복죄를 시켜야만 했다.
"대감이 아무리 불복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소. 모든 사람들의 공초에 대감이 주모자라고 한 것을 어찌하오. 빨리 자백을 하시오!"
"한 일이 없는 것을 자백을 하라 하니 말이 되는 소린가. 청천하늘이 굽어보시오. 나는 복죄할 수 없소. 압록강을 건너오면서도 상왕 전하께서 내리신 잘배자를 입고 왕은이 화해 같으신 것을 감읍한 나요. 나하고 공모했다는 사람들을 무릎맞춤해서 대질시켜주시오."
심온은 목구멍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다. 고함쳐 부르짖는다. 판의금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한다.
"대질해서 변명할 상대편이 한 사람도 없소. 병조판서 박습과 대감의 아우 도총제 심정은 서대문 밖에서 참형이 되고 병조참판 강상인은 조리돌려 갈려 죽었소!"
영의정 심온은 이 소리를 듣자 '앗' 소리를 치며 까무러쳤다. 형리들은 기절된 심온의 얼굴에 냉수를 뿜었다. 한 식경 만에 소생이 되었다. 판의금은 다시 심에게 묻는다.
"어찌할 테요. 조용히 복죄를 하시오. 피하려야 도리가 업소----."
심온은 자기 아우와 병조 장관들을 벌써 다 처형했다는 말을 듣자 죽을 것을 각오했다. 기막히고 원통했으나 소용이 없다.
"복죄한다. 내가 역적질을 하려고 했다 ----"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침을 탁 뱉었다. 가래가 끓어올랐다. 붉은 피가 점점이 섞였다.
"우리 딸이 지존을 모신 왕후이건만, 나는 역적이 되었다!"
심온은 또 한 번 고함치고 붉은 피를 탁 뱉었다. 금부 당상과 판의금은 심온이 복죄한 것으로 인정했다. 문서를 꾸민 후에 심온을 다시 옥에 내리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상왕전으로 올랐다.
"어찌 되었느냐?"
상왕은 물었다.
"자복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금부에서는 내 명을 받들어 약사발을 내려라."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판의금이 아뢰고 마악 발길을 돌리려 할 때, 상왕은 다시 판의금을 불렀다.
"얘, 국구인데, 내 어찌 차마 약사발을 내리겠느냐. 저보고 자진하라고 일러라."
상왕 태종은 심온을 죽이면서도 며느님 공비한테 미안한 생각이 약간 들었다.
"네 - 성지를 전하고 자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왕은 또다시 하문한다.
"경복궁에 가서 심온이 복죄한 일을 품했느냐?"
"아직 아니 올렸습니다. 수원서 올라와서 상왕 전하께 아뢰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경복궁에 가서 상감에게도 심온이 복죄한 일을 아뢰고 다시 내가 약사발을 내리기가 미안해서 저보고 자진하라는 명을 내린 것을 소상하게 고해라."
상왕은 심온을 죽이면서도 대접해서 죽인다는 일을 경복궁에 알리려고 애를 썼다.
"지금 곧 경복궁으로 가서 상감께 아뢰고, 바로 수원으로 내려가겠습니다."
판의금은 상왕전에서 물러난 후에 경복궁으로 들어 입대를 원했다. 정원 승지는 판의금을 어전에 인도했다.
"황공하오나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압록강에서 심온을 수원으로 압송하여 병조에 대한 일을 자백받았습니다. 그리하와 상왕께 품달했더니 상왕 전하께서는 특별히 생각하시고 약사발을 내리지말고 자진케 하셨습니다."
젊은 전하는 '올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얼굴빛을 고치지 아니하고 태연히 말씀했다.
"처분대로 거행하라!"
판의금이 물러갈 떼 젊은 전하는 다시 분부를 내린다.
"심온이 자진한 후에 금부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복명하라."
장중한 분부를 내렸다.
"지체치 아니하고 복명하겠습니다."
판의금은 경복궁에서 물러난 후에 다시 수원으로 내려갔다. 옥에서 나오게 한 후에 사처방을 정했다. 옥 속에서 죽이지 아니하고 예우해서 죽게 하려는 대접이었다. 심온은 옥에서 석방이 된 혹시나 하는 일루의 희망을 잠시 가지게 되었다. 금부 관원들은 좋은 음식으로 심온을 배불리 대접했다. 얼마만큼 시각이 지났다. 판의금이 나타났다. 왕명을 받으라 했다. 심온은 의관을 정제하고 상을 앞에 논 후에 꿇어앉았다. 판의금은 상왕의 칙지를 읽었다.
"대역부도의 죄인 심온에게 약사발을 내릴 것이나 여러모로 보아 자진하도록 한다."
판의금은 형리를 시켜서 약그릇과 목을 졸라맬 수건을 내놓았다. 자기 손으로 약을 마시고 죽든지 목을 매 죽든지 양단간에 한 가지를 취하여 죽으라는 것이다. 심온의 눈에서는 더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말문이 막혔다. 아무 말도 못 했다. 판의금이 묻는다.
"유언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댁에다가 전하겠습니다."
기막힌 소리다. 심온은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한 마디를 남겼다.
"우리 집에 돌아가거든 죄의정의 집안하고는 대대로 혼인을 말라고 이르시오."
좌의정은 박은을 가리킨 말이다. 심온은 말을 마치자 앞에 놓인 약그릇을 들어 단숨에 마시었다. 이때 심온의 나이는 44세였다. 만사는 이미 다 끝나버렸다.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이었다. 판의금은 심온이 자진한 후에 수강궁으로 들어가 상왕께 일이 끝난 것을 아뢰고, 이내 경복궁에 들어가 심온의 최후를 고했다. 젊은 전하의 용안에는 잠시 척연한 빛이 돌았다.
"자진해 죽은 날짜를 기록했느냐?"
"12월 25일 경자올시다."
판의금은 날짜 적은 쪽지를 올렸다. 젊은 전하는 받아 상 위에 얹은 후에 다시 묻는다.
"죽을 때 다른 말은 없더냐?"
"할 말이 있으면 유언을 하라고 했더니, 서울에 돌아가거든 집안사람들에게 좌의정의 집안하고는 대대로 혼인을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전하는 묵묵히 듣고 대답이 없었다. 판의금이 물러난 후에 전하는 심온이 절명된 날짜 적은 쪽지를 용포 소매 속에 넣었다. 잠자코 침묵 속에 빠졌다. 예와 이제, 제왕들이 나라 다스리는 법도와 조정에 참여하여 벼슬하면서 영화와 환란을 겪고 누리던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회상해보았다. 젊은 전하는 심온의 죽음으로 해서 크나큰 인간 생활의 새로운 철학을 배웠다. 예나 이제나 세상은 각박하고 잔인했다. 심온이 한번 역적으로 몰려 자진해 죽은 후에 심온에게 줄을 대고 등을 대서 벼슬자리를 구하고 먹을 것을 청하던 모든 무리들은 모두 다 외면을 하고 돌아섰다. 그도 그럴 것이, 심온과 평시에 친분이 있었던 사람은 덮어놓고 잡아들이고 일가친척들 삼족을 멸하는 판이니, 외면하고 몸을 사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약간 심온과 사이가 좋지 아니했던 자들은 덮어놓고 심온을 헐뜯고 모함했다. 금부에서는 왕 전하께 입대를 청해서 건의했다.
"심온이 이미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받았으니 국법에 의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심온의 아내와 모든 자녀들은 속천을 해서 관비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금부 당상의 아뢰는 말을 듣는 젊은 전하는 등골에 소름이 쪽 끼쳤다. 머리에 퍼득 양녕대군이 생각났다. 판의금이 아뢰는 나라 법이란 것은 너무나 잔인했다. 가사, 심온이 정말 역적질을 했더라도, 어찌 차마 이 일을 시행하라고 인정상 허락을 내릴 수 있는가. 가산을 적몰한다는 것은 도리어 둘째 문제다. 어찌 차마 현재 왕비로 있는 사랑하는 아내 공비의 어머니를 관비로 만들고, 동생들을 종으로 삼겠다 하는가? 젊은 전하는 입술에 침이 말랐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또다시 왕의 자리를 박차버리고 나간 양녕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양녕은 호방한 웃음을 전하를 바라보는 듯했다. 현숙한 왕후 심씨의 향기로운 모습이 떠올랐다. 울면서 아뢴다.
'참으십시오. 전하께서는 참는다 하시지 아니하셨습니까! 그저 참으십시오.'
'전하께서는, 신첩보고 참으라 하지 아니하셨습니까? 저고 참겠습니다. 전하! 그저 참으십시오.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참으십시오!'
"어찌하오리까?"
판의금이 재촉해 아뢰는 바람에 전하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섰다.
"군국기무에 대한 뒤처리가 아닌가? 상왕전에 나가 재가를 얻으라. 상왕 전하께서 가타 하시면 과인도 윤허하리라."
전하는 참는 공부를 해왔다. 무한히 참았다. 의젓하게 말씀을 내렸다. 판의금은 더 아뢸 말이 없었다. 수강궁으로 들어가 아뢰었다. 상왕은 대뜸 판의금에게 하문했다.
"경북궁에도 이 일이 품했느냐?"
"주상전하께서는 군국기무에 대한 일은 상왕 전하께서는 전결하시는 것이니, 상왕 전하의 재가만 맡으면 윤허하겠다 하셨습니다."
상왕은 만족한 얼굴빛을 지었다.
"정리에 박한 듯하나 어찌하느냐. 나라 법은 어길 수 없다. 국법대로 처리해라."
이같이 해서 급부에서는 현 왕비의 친정집 재산을 적몰하여 국가의 소유로 하고, 왕비의 어머니는 관비를 박고, 아들과 딸들은 천민을 만들어 노예가 되게 했다.
중전 풍경
부원군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서 자진해 죽은 일은 극비에 부쳐서 중전에서는 모르도록 했다. 그러나 싸고 싼 사향내도 퍼지게 되는 법이다. 소문이 아니 날 까닭이 없었다. 중전에서 거행되는 무예청과 별감이며 내시들의 입을 거쳐서 중전 소속의 나인과 상궁의 귀로 심부원군의 역적으로 몰려 자진해 죽은 일이며, 금부에서는 왕후의 친정 어머님인 국대부인을 관비로 박고 가산을 적몰했다는 기막힌 소식이 들어갔다. 중전엔 침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별감은 별감들끼리, 내시는 내시들끼리, 나인은 나인들끼리 공론이 분분했다. 더구나 왕비를 지척에 모신 급높은 상궁들의 놀라움은 그지없었다. 면면이 서로들 얼굴을 바라보며 귀엣말로 탄식했다.
"여보, 항아님, 이거 웬 변고요. 부원군 대감께서 역적으로 몰려서 자진을 하셨다니?"
급 높은 늙고 젊은 상궁들은, 존칭해서 서로들 항아라 불렀다. 선녀 곧 월궁항아라는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명나라에서 오시는 길로 댁에도 못 들어가게 하고 바로 수원으로 압송을 해서 들어가시게 했다 하니 이것이 웬일이고!"
"그나 그뿐인가. 국대부인을 관비로 박고, 가산을 적몰했다 하니 세상 천하에 이런 변괴가 어디 있단 말씀요."
"그리고 또 염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소."
"무슨 일이?"
"중전마마의 신상이 큰 염려요."
"구중궁궐 깊은 곳에 가만히 계신 중전마마께 무슨 누가 끼친단 말씀요?"
"아니 그렇지 않아. 역적의 따님이라 해서 그대로 둘 리가 만무하오. 반드시 무슨 조처가 있기 십상팔구요. 아무 영문조 모르시는 어지신 우리 마마께 누가 기친다면 이거 큰일이구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
나이 많은 상궁들은 한숨을 짓고 한탄했다.
"아까 아침 문안을 들어갔을 때도 뵈었지만 중전마마께서는 아직도 아버님이 자진하신 일을 모르시는지 전과 다름없이 태연하게 계십디다."
"까맣게 모르시는 모양입디다. 저도 아까 들어가 세숫물 시중을 하고 나왔습니다마는 조금도 다른 눈치가 아니 계십디다."
젊은 상궁이 대답했다.
"만약, 조정 대신들이 역적의 따님이라 해서 폐비론을 주장한다면 이거 큰일이오, 마마께서 까맣게 모르고 계시다가 돌연 이 끔찍한 일을 당하신다면 속수무책이 될 것이니 우리는 어떻게 폐비론이 일어나더라도 실행이 되지 못하도록 대비책을 세워놓아야 하겠소이다."
노상궁이 말을 꺼냈다.
"조정 대신들이 상왕마마를 공송해서 폐비론을 주장하는 것을 우리들 중전 시녀들이 무슨 힘으로 막아냈단 말씀입니까?"
젊은 상궁이 탄식했다. 여보, 항아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아니하오. 우리, 그 예쁘고 고우신 중전마마께서 사지에 빠지시는 것을 보고 어찌 차마 가만히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겠소. 어떠한 방편을 찾아서라도 마마를 구해내야 합니다."
늙은 상궁이 주장했다.
"어떤 방법으로 중전마마를 구해드립니까?"
젊은 상궁은 노상궁에게 물었다.
"마마께서는 부원군 대감께서 역적으로 몰리셔서 수원으로 잡혀가 자진하신 일을 전혀 모르시는 모양이니, 비록 놀라신다 하더라도 이 일만은 알려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강궁의 엄하신 태도를 마마께 자세히 말씀드려서 앞으로 설혹 페비론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중전마마께서 미리 대왕마마께 말씀을 드려서 이 끔찍한 일이 실현되지 않도록 막아줍시사 하고 당부를 하시라고 아뢰는 일이 가장 좋은 방책인가 하오."
"좋은 말씀입니다. 노상궁의 말씀이 옳은가 합니다."
여러 상궁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이날 밤에 모든 상궁을 대표해서 늙은 상궁이 중전의 침실로 사후를 들어갔다. 침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와룡촛대의 밀촛불빛도 전과 같이 안온하고 명랑했다. 비마마의 신관도 아무런 일도 없는 듯 그대로 화평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늙은 상궁은 비전하의 침소를 위하여 금침을 내렸다. 비전하는 전과 같이 아무런 말씀도 없이 안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늙은 상궁은 마음속으로, '부원군의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전혀 모르시는구나!' 하고 괴탄했다. 금침을 다 편 후에 늙은 상궁은 혹시나 비전하가 무슨 말씀이 계실까 하고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서 있었다. 그러나 비전하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말씀도 아니 계셨다. 늙은 상궁은 또다시 비전하의 신관을 살폈다. 여전히 태평한 얼굴 빛이었다. 이윽고 말씀이 떨어졌다.
"금침을 다 깔았으니 물러가 쉬는 것이 좋겠다."
늙은 상궁에게 편히 나가서 쉬라는 다정한 분부를 내렸다. 늙은 상궁은 마음속으로 기가 찼다.
'이같이 세상 소문을 모르신단 말인가. 과연 구중궁궐 속에 파묻힌 왕비의 팔자는 딱하기도 하구나!'
혼자 탄식했다. 그러나 아까 상궁들이 의논한 대로 도저히 비전하께 부원군의 일을 아니 아뢸 수 없었다. 자기네들마저 아렵고 무섭다 해서 이 일을 휘하고 아니 알린다면 비전하는 영영 폐서인이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반드시 구해드려야 하겠다도 결심을 했다.
"황공하오나 중전마마께 한 말씀 아뢸 일이 있습니다."
늙은 상궁은 떨리는 목안의 소리로 겨우 말문을 열어 아뢰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아직 밤도 깊지 아니했으니 앉아서 말해보라."
비전하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늙은 상궁에게 앉기를 권했다.
"황공하오나 마마께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상궁이 말하는데 허락 여부가 있을 까닭이 있나. 어서 말을 하게나."
젊은 왕비의 옥안은 여전히 화기가 가득했다.
"아니 아뢸 길이 없사와 감히 아룁니다. 놀라지 마시옵소서 부원군 대감께오서 압록강을 건너시자마자 금부도사한테 수원으로 압송이 되시와 불우의 변을 당하셨습니다.!"
늙은 상궁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왕비의 옥안이 잠깐 핼쑥하게 변했다. 기름한 속눈썹에 이슬이 서렸다. 그러나 조금도 금언한 태도를 잃지 아니했다.
"어디서 들었는가?"
"싸고 싼 사향내도 나는 법이옵니다. 아무리 함구령이 내렸다 하오나 중전 일판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변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늙은 상궁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했다. 젊은 왕비는 여전히 몸가짐이 단정했다. 조용히 말씀을 내린다.
"모든 일은 하늘에 달려 있다. 천도를 어길 도리는 없느니라.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요. 꽃이 피면 지는 법이다. 내 어찌 마음이 타고, 가슴이 아프지 아니하랴!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랴. 지나친 부귀영화가 나의 친정에 주어진 탓이다. 눈물을 씹고 참고, 조심하는 것만이 이 기막힌 절벽에 서 있는 순간, 나의 취할 태도다. 너희들도 말조심을 하고 나한테 친정집에 대한 일은 일체 말하지 말라."
심왕후의 태도는 상냥하면서도 엄숙했다.
"마마, 마마께서는 그럼 이 일을 벌써 아셨습니까?"
"복이 과하면 화가 쫓는 법, 나는 항상 엷은 얼음을 밟는 듯한 심경이었다. 다시 나에게 더 묻지 말라."
늙은 상궁은 차마 소회를 아니 아뢸 수 없었다.
"황공무지하오이다. 마마의 갸륵하신 심경은 천백 번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더 아뢰지 않겠습니다. 그러하오나 꼭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라."
"부원군 대감의 뜻 아닌 일로 인하와, 혹여나 마마의 신상에 해가 미칠까 하와 감히 아뢰옵니다. 대전마마께 말씀을 아뢰시어 어떠한 불미한 여론이 조정 신하들의 입에서 나온다 할지라도 절대로 윤허하시지 않도록 미리 아뢰어두시옵소서. 저희들 시녀들 일동이 일편단심으로 아뢰는 바올시다."
젊은 왕비는 눈물을 머금고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의 간곡한 부탁, 내 어찌 저버릴까마는 천기는 누구도 모르는 것, 다만 지성을 다하여 삶은 누리려 한다. 긴말 말고 조용히 물러가서 아무 일이 없는 듯 대기하고 있으라! 너희들의 고마운 뜻은 가슴 안에 새겨두리라."
젊은 왕비는 안상하게 늙은 궁녀에게 타일렀다. 늙은 궁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머금고 물러갔다. 한편 상왕의 어명을 받들고 수원에 내려가 심온을 자진하여 죽게한 의금부 진무 이양은 일을 마친 후에 수강궁 상왕전에 나가 심온을 처치한 일을 아뢰었다. 상왕 태종은 이제 며느님인 왕후 심씨의 우익을 꺾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거뜬했다. 그러나 체면을 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승지를 불러 분부했다.
"심온이 이미 자진해 죽었다 하니 역적으로 죽임을 당한 자에게 예장은 지내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왕비의 아버지다. 박하게 장사를 지내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승지 네가 수원으로 가서 장지를 택하고 수원부에게 장비를 당해서 후하게 장사지내게 하라."
상왕은 또다시 내관을 불러서 본부했다.
"내가 내리는 부의를 가지고 수원으로 내려가서 호장을 하고 수원 부사에게 치제케 하라."
승지와 내관은 어명을 받고 심온의 마지막 길을 처리하기 위하여 수원으로 향했다. 일변, 진무 이양은 상왕전에 보고를 드린 후에 경복궁으로 들어가 젊은 전하께 심온의 최후를 아니 아뢸 수 없었다. 알현하기를 청했다. 전하는 용안에 우울한 빛을 띠고 진무 이양을 대했다.
"황공무지하옵니다. 심온은 자진해 죽었습니다."
"상왕 전하의 홍은이 갸륵하다. 대우해서 자진을 하게 하셨구나!"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입술을 다무셨다. 이양이 다시 젊은 전하께 아뢴다.
"상왕 전하께서는 승지와 내관을 불러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이니 예장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차마 박장은 할 수 없으니 승지와 내관이 내려가서 산지를 정해서 수원부사가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고 국가에서 부의를 내리라' 하셨습니다."
젊은 전하는 고요히 눈을 감고 진무의 아뢰는 말씀을 들었다. 진무이양의 아뢰는 말이 끝나니 젊은 전하는 고요히 어진 눈길을 들어 이양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린다.
"심온도 지하에서 허물을 뉘우치고 상왕 전하의 넓으신 은택에 감읍하리라."
젊은 전하는 이같이 조심하는 언동을 취했다. 행여나 상왕의 비위를 거스를까 저어한 때문이다. 이양이 아뢰기를 마치고 물러가려 할 때 전하는 다시 하문했다.
"심온이 자진한 날짜를 똑똑히 기억하느냐?"
간단하게 한 마디를 물었다.
"네, 알고 기억했습니다. 적바림해 가지고 왔습니다. 무술년 12월 25일 경자올시다."
이양은 소매 속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 올렸다. 젊은 전하는 조용히 쪽지를 받아 문간 위에 놓았다. 진무 이양이 아뢰기를 다하고 어전에서 물러나려 할 때 젊은 전하는 또다시 묻는 말씀을 내렸다.
"심온이 죽을 때 아무런 말이 없이 죽더냐? 혹시 유언 같은 말을 하지 않더냐?"
"예, 유언을 한마디 하고 죽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사오나, 박은의 집안하고는 대대로 혼인을 하지 말라고 자손들한테 전해 달라했습니다."
전하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여 점두하고 계실 뿐이었다. 진무 이양이 물러난 후에 전하는 온종일 깊은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이날 밤이 깊은 후에 젊은 전하는 좌우 시자들을 물리치고 단신으로 중전의 침실로 향했다. 중전 시녀들도 전하께서 훗훗이 비마마의 침전으로 향하시는 것을 뵙고 몸을 사려 피했다. 전하의 친림하시는 것을 뵙자 왕비 심씨는 옥안에 미소를 머금고 공손히 맞이했다.
"밤늦게 기별도 없이 왕림하시니 황감하여이다. 무슨 알리실 말씀이 계시오니까?"
젊은 전하도 태연히 웃음빛을 용안에 띠었다.
"알리긴 무엇을 알릴 일이 있겠소. 그저 불현듯 비마마가 보고파서 왔구려."
전하는 아무 일이 없는 듯, 중전이 앉았던 보료 위에 앉았다. 왕비 심씨는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어전에 시측해 아뢴다.
"시녀에게 듣자오지 오늘 밤 저녁 수라를 적게 젓수셨다 합니다. 찬이 구미에 당기지 아니하셨습니까? 마음에 송구그러웠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는구려. 백성들는 쌀밥으로 고루 풀칠을 못한다 하는데 과인이 어찌 찬이 부족하다 말하겠소. 아침 수라를 많이 들어서 저녁밥은 조금 들었을 뿐이오. 중전은 수라를 드셨소?"
전하는 다정하게 왕비의 저녁 자신 것을 물었다.
"네, 벌써 저녁을 마쳤습니다."
중전은 조신하게 대답했다.
"다리 아프겠소. 내 앞으로 가까이 와 앉으시오."
전하는 비마마에게 앉기를 권했다. 왕비 심씨는 아버지의 일이 있은 후부터 전하의 마음을 혹여나 괴롭힐까 저어하여 항상 얼굴에 화한 기운과 아름다운 웃음빛을 더한층 잃지 아니했다. 왕비는 전하 앞에 치마를 쓸고 앉으면서 조용히 아뢴다.
"차를 올리오리까?"
"차, 좋지. 무슨 차가 있소?"
"겨울이라, 귤병다를 장만해두었습니다."
"귤향이 높은 귤병다로구려. 말만 들어도 입안이 개운하오. 한 잔 맛을 보게 해주오."
젊은 왕후는 미소를 머금고 어전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전하는 혼자 마음속으로 탄식한다.
'진선진미한 사람이로다!'
'어쩌면 이 기막힌 슬픔 속에서 저같이 유한정정할 수가 있는다!'
전하는 비의 고운 마음씨를 혼자 감탄하고 있을 때, 장지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젊은 왕후는 손수 다반을 들고 들어왔다. 비의 걸음걸이는 그림같이 고왔다. 행여나 다수가 다종에서 넘칠까 하여 조심조심 걸었다. 눈같이 흰 버선코가 가볍게 남갑사 치맛자락을 찼다. '사각사각' 끌리는 차맛자락 소리가 사죽 소리같이 고왔다. 귤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젊은 전하는 귤 향기에 취아고, 비전하의 걸음걸이에 취했다. 비전하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귤병다를 다반에 받들어 올렸다.
"따뜻합니다. 식기 전에 젓수시옵소서."
젊은 전하는 미에 취하고 향에 취했다. 한동안 사랑하는 비전하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만족한 웃음을 소리 없이 보냈다.
"차가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귤병다는 따끈할 때 젓수셔야 합니다. 감기 기운도 막는다 합니다."
젊은 비전하는 두 손으로 다반을 받든 채 눈웃음을 머금고 젊은 전하를 마주 바라본다. 백자 다종에서는 더운 김이 안개를 뿜으며 보얗게 일어났다. 전하는 비가 권하는 대로 어수로 다종을 들어 입술에 대었다. 따뜻한 다종이 한겨울에 싸늘해진 전하의 손길을 녹여주었다. 귤 향기가 입안에 가득했다. 혀끝이 거뜬했다. 전하는 천천히 다종을 기울였다.
"과연 천하의 진품이다. 귤향도 좋거니와 얼었던 몽이 훗훗하게 풀리는구려."
"귤병다는 감기에도 좋거니와 위장에도 양약이라 합니다. 전하께서는 귤병다와 같이 정치를 하십시오. 만백성의 병을 낫게 하시고, 만백성의 몸을 훗훗하게 해주시옵소서."
젊은 왕비의 의미 깊은 말씀에 전하의 마음은 흐뭇함을 느꼈다. 소리를 높여 드높게 웃는다.
"허, 허, 허. 국모로구려. 자나 깨나 과인보다도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염려하는구려. 비는 나의 스승야-- 하, 하, 하."
"스승이란 말씀은 농담의 말씀이시고 신첩은 다만 전하께오서 대임을 맡으신 이상, 다만 성주가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편단심으로 이같이 아뢰는 것뿐입니다."
심왕후는 정색하고 고했다.
"옳은 말씀요. 앞으로 지성껏 나라를 다스려서 어느 나라에 지지않는 조선국을 건설해보기로 마음을 굳혔소이다. 할아버님과 아버님께서 울타리만 짜놓으신 조선이란 나라를 충실하게 안으로 다스려보겠소이다. 형님 양녕과 같이 왕위를 박차버리지 아니하고 받은 이상, 내 슬기와 힘을 다하여 이 나라를 다스려보겠소이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다종에 남은 귤병다를 다시 들었다. 총명 영리하고 부덕이 높은 젊은 왕비였다. 전하가 깊은 밤에 급히 단신으로 통지 없이 임어하신 일은 반드시 곡절이 있다고 생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무슨 일로 왕림하셨느냐고 아뢰기는 난처했다. 정녕코 친정아버지의 불길한 일을 전하기 위하여 오신 것을 십중팔구 짐작하면서도 전하의 마음과 침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왕후 심씨는 귤병다를 먼저 전하께 올려서 이 슬픈 밤의 장면을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전하가 다종을 내리자 왕비는 여전히 화기 가득한 얼굴빛을 띠고 전하께 묻는다.
"전하께오서, 왕비인 신첩의 침실로 깊은 밤에 단신으로 듭시는 일은 당연하신 일이옵니다마는 연통도 없이 듭신 일이 이상스럽고, 듭신 후에 용안에 비록 화색을 잃지 아니하셨다 하나 억지로 지어서 하신 일이 판연합니다. 저에게 이르실 말씀이 계시다면, 휘하지 마시고 일러주시옵소서."
젊은 비전하는 간곡하게 심정을 털어 고했다. 전하도 이제는 딴전을 해서 시각을 보내기 난처했다.
"중전이 용하게 나의 온 일을 짐작하고 물었소. 사실은 마마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소문내지 아니하고 조용히 왔소이다."
말을 마친 젊은 전하의 얼굴빛은 근엄하게 변했다.
"말씀해주옵소서. 무슨 일이오니까?"
전하는 용포 소매 속에서 쪽지를 꺼내 들었다.
"부원군은 운명을 했소!"
간단한 한 마디였다. 젊은 왕비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소문을 듣고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운명했다는 소리를 듣고 보니 가슴이 출렁하고 염통이 뚝 떨어지는 듯했다. 정신이 아뜩했다. 쓰러질 뻔하는 몸을 겨우 가누었다. 비의 눈에는 가슴츠레 눈물이 흘렀다.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어느 날이오니까? 어떻게 운명을 했다 합니까?"
겨우 목 안의 소리로 물었다.
"12월 25일 경자에 운명했다 하오."
전하는 쪽지를 비전하에게 내주었다. 비전하는 이제 눈물도 말랐다.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받들었다.
"날짜나 기억해두었다가 일후에 안정이 되거든, 아이들보고 제사나 정성껏 받들라 하오."
얼마나 인자하고 후한 소리였던가. '일후에 안정이 되거든, 아이들보고 제사나 정성껏 받들라 하오' 기막히도록 고마운 말씀이었다. 비전하의 가슴에는 전하의 한마디 말씀이 폭폭 스며들었다. 하도 고마운 말씀이라, 무어라고 감사로운 말씀을 올려야 할지 입이 열리지 아니했다. 그대로 아버지가 돌아간 날짜 적은 쪽지를 받든 채 꿇어앉아 있었다. 전하는 심온이 죽을 때 박은의 집안하고는 대대로 혼인하지 말라는 유언을 일부러 말하지 아니했다.
"자아 만사는 끝이 났소! 이제는 나라를 도와서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해주시오."
전하는 비전하의 손을 굳게 잡았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전하는 대전으로 납시면서 비전하께 훈수를 했다.
"나는 있다가, 내시를 비마마한테 보내서, 부원군이 자진한 일을 정식으로 선포할 테니, 비마마는 발상을 한 후에, 곧 수강궁 상왕전으로 나가서 대죄를 하시오. 이같이 하면 앞으로 처신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소."
전하는 다정하게 왕비에게 타일렀다. 왕비도 총명했다. 밝은 눈을 들어 전하께 묻는다.
"죄인의 딸이 어찌 발상거애를 할 수 있습니까. 왕후의 정복을 벗고 몸을 피하여 아래채로 내려가 두문불출하겠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다. 보통 죄인도 아니다. 상왕 전하께 사사를 받았다가, 특별히 왕비의 낯을 보아 자진해 죽게 한 역적의 딸이었다. 엄연히 정전에서 발상거애를 할 수 없었다. 만약, 이같은 일을 한다면 단통 상왕전에 이 소식이 들어가서 숙호충비 격으로 크나큰 야단이 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비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마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요. 지금 중천 처지에 발상을 해서 아버지의 복을 입는다면 되지 못한 조정 대신들의 여론이 또 한 번 물 끓듯 할 것이오. 그러나 죄인의 딸이 되었다 해서 상왕전에 대죄하기 위하여 머리를 풀고 소복 입고 상왕전으로 나간다면 감히 누가 말할 사람이 없으리다. 이러한다면 자식이 되어 한편으로는 부모의 거상을 입는 일도 되고 한편으로는 상왕 전하의 마음도 녹여드리는 일도 될 테니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 되는 일이오. 앞으로 폐비 문제가 나오더라도 얼마쯤 도움이 되는 일이 될 테니 내 말대로 명심하고 단행하시오."
"명심하고 전하의 말씀대로 실행하겠습니다."
젊은 전하는 더 한 번 비의 등을 어루만져 위로한 후에 대전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한낮이 지난 후에 젊은 전하는 대전내시를 불러 심온이 대역의 죄를 얻어 명나라에서 건너오는 즉시 수원에 압송되어 자진한 일을 정식으로 중전에 선포하라 했다. 소문으로만 듣고 뒷구멍으로 쑥덕공론만 하고 있던 중전의 시녀와 액정들은 놀라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중전 심씨는 전하를 통하여 미리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장지 문밖에서 정식으로 전갈을 올리는 대전내시의 보고를 받자, 상궁들이 시립한 중에 눈물을 머금고 왕후의 정복을 벗었다. 이내 젊은 왕비는 다시 상궁에게 분부를 내렸다.
"뜻밖에 내가 역적의 딸이 되었다. 안연히 중전 정침에 거쳐할 수 없다. 뜰 아래 작은 채를 치워서 거처케 하라."
상궁들은 눈물을 머금고 아래채를 치웠다. 비전하는 중전 정침을 비워놓고 아래채로 내려갔다. 죄인의 딸이라 하여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한 것이다. 머리를 풀고, 눈같이 흰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상궁에게 분부했다.
"내 이미, 사약을 받아 자진한 죄인의 딸이 되었으니, 안연히 아래챌망정 평안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수강궁 상왕전으로 나가 대죄를 할 작정이다. 내관에게 명하여 거적과 소교을 대령케 하라."
비전하가 죄인의 몸이 되었다 해서 상왕전에 대죄를 하겠다 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만류할 사람이 없었다. 중전 상궁은 곧 내관에게 왕비의 뜻을 전하고, 내관은 무예청에 기별해서 불시로 소교를 장만해서 대령했다. 비전하는 상궁 두 사람을 거느리고 곧 수강궁 상왕전 뜰 앞에 나가 머리를 풀어 산발한 채 거적 자리에 엎드렸다. 중전 상궁은 수강궁 상왕전 상궁을 통하여 상왕인 태종께 아뢰었다.
"왕비마마께오서 상왕전에 석고대죄하고 계십니다."
태종은 며느님 되는 왕비가 돌연 석고대죄를 드린다 하니 의아하게 생각했다.
"왕비가 대죄를 드린다? 무슨 일이냐!"
태종은 깜짝 놀랐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사를 받은 죄인의 딸이 되었다 하여 안연히 왕후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다 하와 대죄를 드린다. 합니다."
태종은 비로소 까닭을 알았다.
"어떤 모습으로 대죄를 드리더냐?"
"소복으로 머리를 풀어 산발하옵고 짚 깔고 엎드렸습니다."
상왕은 마음속으로 맹랑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아니해도 지금 상왕 태종의 마음속에는 심비를 폐하고 다시 어진 규수를 물색해서 왕비로 봉하려고 간택령을 내리려는 참이었다. 대신 중에 어느 대신이든지 누가 먼저 폐후론을 주장하기만 하면 곧 이 일을 단행하려던 판이다. 아비를 역적으로 몰아 죽여놨으니, 그의 딸로 도저히 왕비를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겉으로 원한을 나타내지 않는다 해도 이미 가슴 속에는 철천의 한이 못 박혀져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이미 원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몸에서 나온 아들들로 세손을 봉해서 왕사를 삼기도 난처하다. 역시 할아비가 외할아비를 죽인 일을 잘 알 것이다. 대대로 한이 되어 금이 가기 십상팔구다. 인정상 매정하고 쌀쌀한 일이지만 애당초 싹을 잘라서 심씨를 폐비 시키려는 생각이 농후했던 것이다. 태종은 며느님의 석고대죄를 받을 수가 없었다. 나가서 받기만 하면 정상을 생각해서 그만두라는 영을 내려야만 한다. 그만두라는 영을 내리기만 한다면 체면상 폐비는 시킬 수 없다. 대죄를 받을 수도 없고 아니 받을 수도 없다. 태종은 며느님 왕비한테 선수를 뺏긴 셈이 되고 말았다. 왕비가 석고대죄를 드린다고 상왕전 상궁이 아뢰는 말에 태종은 침묵을 지키고 아무런 대답이 없다. 상궁은 지엄한 상왕께 다시 더 아뢸 수 없었다. 조용히 장지문을 닫고, 밖으로 물러났다.
한낮부터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거적 자리 위레 엎드려 대죄를 드리는 왕비 심씨는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 당거미질 때까지 몸 한 번 움직이지 아니하고 죄를 청하고 있었다. 섣달그믐, 막바지였다. 날씨는 혹독하게 차다. 궁궐 안 넓은 마당엔 삭풍이 가끔가끔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왕비는 추위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엎드려 있었다. 손이 얼고 발이 얼었다. 콧부리가 빠지는 듯했다. 창자까지 얼어들어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왕비 심씨는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상감과 약속하고 맹세한 대로 모든 일을 참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고 엎드려 있었다. 수강궁 뜰을 완전히 어둠 속에 파묻혔다. 등촉방 내시는 전각 앞에 청사초롱을 달아 불을 켰다. 오들오들 떨며 엎드려 있는 왕비 심씨의 모습을 보는 모든 액정과 궁녀들은 동정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왕 태종이 어떤 분부를 내리기 전에는 꼼짝달싹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모든 상궁들은 너무나 태종의 엄한 태도에 불만이 자자했다.
"너무나 무뚝뚝하시구려. 섣달 대목 엄동설한에 진종일 밤중까지 대죄를 드리시는 왕비에게 가타부타 한 마디 말씀도 아니하시니, 너무나 지독하시오. 저러다가 강시나 되면 어찌하오."
"아무리 친정 아버님이 역적으로 몰렸다 하나, 현재 왕비신데, 왕비 대접을 저같이 할 수 있소. 빨리 말씀을 드려서 대죄를 받으시든지 아니 받으시든지 판단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소. 도대체, 무엇을 우물쭈물하고 있는 거요."
"제조상궁도 하오 엄하시니 무서워서 감히 아뢰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소. 딱하다고 말만 하지 말고 어서 제조상궁을 충동해서 상왕마마께 아뢰어서 처분을 내려달라 합시다."
상궁들은 제조상궁을 재촉해서, 상왕께 다시 품해 달라 했다. 제조상궁은 벌벌 떨면서, 다시 상왕 침전으로 들어갔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처분을 내려주시옵소서."
상왕은 노안을 들어 제조상궁을 바라보며 반문한다.
"무슨 처분을 내려달라 하느냐?"
시침을 뚝 뗐다.
"공비마마께서 아직도 뜰 아래서 대죄하고 계십니다. 날씨 극한이온데 병이 날까 두렵습니다."
"여태 있었단 말이냐. 네가 나가서 말을 전하고 대죄하는 일은 알았으니 물러가라 일러라."
상왕은 간단히 대답해버렸다. 아직도 마음속으로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수강궁 제조상궁은 상왕전에서 물러나 모든 궁녀들과 함께 대죄하고 있는 왕비의 앞으로 나갔다.
"마마, 옥체를 일으키시옵소서. 상왕 전하께서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대죄하는 일은 알았으니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이제 날씨 극한이온데 공연히 감환이 드시면 큰일이올시다. 어서 일어나 환궁하옵시오."
머리 풀어 산발하고 엎드려 있는 왕비는 귀를 기울여 제조상궁의 전하는 말을 들었다. 상왕이 내렸다는 분부는 아무리 해도 석연치 않은 분부다.
'대죄하는 일은 알았으니 물러가라.'
너무나 며느리 자식을 대접하지 않는 분부다. 며느리라도 사사로운 민가의 며느리가 아니다. 명색이 왕비다. 옥동 같이 얼 부풀어 오르는 섣달 막바지 혹독한 추위 속에 진종일, 밤중까지 한데서 떨면서 죄를 청하고 있으니 상왕이 친히 나와서 한 마디쯤 위로의 말씀이 있어야 할 텐데, '알았으니 물러가라' 하는 전갈은 너무나 사람대접이 아니다. 상왕의 마음속에는 안중에 왕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안중에 왕비가 없는 것은 장차 곧 비를 내치려는 생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전하는 한편으로 억울하고 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젊은 전하의 앞길을 위하여 모든 일을 참아야 하겠다 생각했다. 짚자리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 제조상궁한테 말씀을 내린다.
"죄를 용서하신다는 쾌한 분부가 계실 때까지 그대로 이곳에 있겠소."
모든 상궁들은 일제히 비전하를 부축해 일으켰다.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이 추운 겨울에 어찌 한둔해서 밤을 새운단 말씀입니까. 마마는 국모십니다. 환후 계시면 큰일이올시다. 대죄드린신 일을 상왕께서 아셨다 하니, 어서 환궁하사이다."
궁녀들은 억지로 비전하를 부축해서 소교 위로 모시었다. 다정하고 착하고 어진 왕 전하였다. 경복궁에서는 왕 전하가 왕비 전하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전하가 상왕전으로 대죄 드리러 간 것을 이미 알고 계신 때문이다.
"중전마마께서 돌아오셨느냐?"
몇 번인지 시측한 궁녀들에게 물었다. 전하는 밤이 깊어도 비전하가 돌아오지 아니하니, 친히 내관을 불러서 분부를 내렸다.
"어찌 되었느냐? 상왕전으로 대죄하러 가신 비전하께서 아직도 돌아오지 아니하시니, 네가 나가서 동정을 살피고 오너라. 날은 옥동 같이 추운데 병이 나면 큰탈이로구나!"
젊은 전하는 안절부절못하고 비전하의 신상을 생각했다. 얼마 후에 내관은 궁녀들과 함께 비전하의 소교를 배행하고 돌아왔다. 전하는 저 밖까지 나가 소교에서 내리는 비전하를 맞이했다.
"얼마나 추웠소. 몸이 꽁꽁 얼었구려!"
폐비론
비전하가 밤늦게 경복궁으로 돌아간 후에 상왕 태종은 제조상궁을 불렀다.
"왕비는 어찌 되었느냐, 돌려보냈느냐?"
"아니 가시고, 밤이 새도록 대죄를 드리겠다고 하시는 것을 저희들이 상왕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억지로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필시 엄동설한에 큰 병환이 나셨을 듯합니다."
"대죄를 드릴 때 어떤 모습으로 드렸느냐?"
"머리 풀어 산발하시고 소복에 맨발 벗고 대죄를 드렸습니다."
"경복궁에서는 정침에 여전히 거처한다더냐?"
"아니올시다. 전하께서 정식으로 심부원군의 사사를 발표하시자 곧 죄인의 딸이라 자처하시고, 아래채 조그마한 궁녀방에 문을 첩첩이 닫고 두문불출하신다 합니다."
"혹시 나를 원망하는 행동이나 기색이 없다 하더냐?"
"황공한 말씀을 하문하십니다. 착하고 유순하고 효성스런 왕비올시다. 누가 말씀도 올리지 아니했건만 죄인의 딸이라 해서 먼저 정침에서 몸을 피하여 아래채 궁녀의 방으로 내려가셨고, 다음에는 자진해서 머리 풀어 산발하고 발 벗어서 폐비 되시기를 원하면서 밤 깊도록 대죄하셨습니다. 상왕 전하께서 만약 돌아가라신 분부를 아니 내리셨던들, 비금 자시가 다 되었습니다마는, 아직까지도 대죄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태종의 마음은 약간 풀리기 시작했다. 왕비의 태도는 지나치도록 법도에 맞았다. 자기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정침에서 몸을 피하여 아래채로 내려갔고 또다시 대죄까지 드려서 분부를 물었다. 더구나 당신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다는 말에 마음이 흐뭇했다.
"내일 또 대죄를 드린다 하거든, 번거롭게 또 하지 말라 일러라."
태종은 고민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앞뒤 생각 없이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목숨 죽이듯 죽여놓고 뒤처리를 해서 휘갑을 치기가 극히 곤란했다. 왕비 자신이 나쁘지 아니한데, 며느리 되는 왕비를 폐위시키기란 극히 난처한 일이다. 더구나 첫째로 아드님인 왕의 뜻을 물어야 한다. 다음엔 왕비의 몸에 아들이 셋이나 있다. 왕비를 폐한다면 세 아들도 관련이 된다. 더구나 장손은 장차 세자감이다. 곤란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해본다. 만약에 왕비를 폐하지 아니했을 경우에 비록 왕비는 겉으로 유순하고 효성스런 체했으나 마음속에는 한평생 원이 되어 자기를 원망할 것이다. 또다시 그 아들, 많은 아들들, 곧 자신의 손자인 왕손들은 모두 다 자기를 원망할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만약 폐비를 한다면 다시 새 왕비를 간택해서 맞아들여야 한다. 새 왕비가 들어오게 되면 또다시 아들이 생길 것이다. 그리된다면 이 아이가 당연히 세자가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집안 꼴, 곧 왕실 꼴은 말이 아니 될 것이다. 또다시 골육상잔이 된다. 태종은 번민에 빠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상왕 태종의 비위를 맞추어서 왕비의 아버지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무리들은 육조판서와 함께 대사헌 허지와 사간 정수홍을 앞장세우고 수강궁 상왕전과 경복궁 왕 전하의 계신 곳으로 나가서 하례하는 말씀을 올렸다.
"성상의 명단이 아니었다면 어찌 대역을 목 베이셨겠습니까? 과연 잘 처치하셨습니다. 신의 무리는 기뻐서 하례를 올립니다."
수강궁의 상왕은,
"하늘이 시킨 일이고 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 하례할 것까지는 없느니라."
의젓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왕 전하는 다만 고개를 끄덕여 점두할 뿐이었다. 장차 이 무리들은 앞으로 폐비를 주장하기 위하여 먼저 대역부도의 역적을 잘 처치했다고 치하를 한 것이다. 다음날 조정 빈청에는 유정현, 박은, 이원, 허지들이 모였다. 좌의정 박은이 먼저 발론을 한다.
"왕비 전하는 대역부도로 죽음을 받은 죄인의 딸인데 이분을 왕 전하의 배필로 모시기는 난처하오. 당연히 폐위를 시키고 다른 분을 간택해서 새 왕비를 모시도록 해야 하겠소. 상왕께 품해서 실천하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하오."
영의정 유정현이 대답했다.
"소문 들으니 왕비 전하께서는 죄인의 딸로 자처하시며 정전에서 몸을 피하여 아래채로 내려가시고, 또다시 머리를 풀어 산발하시고는 상왕전에 대죄까지 드렸다 하니 우리가 주장할 것이 아니라 상왕께서 처분이 내리실 때까지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소."
유정현의 말을 듣자 대사헌 허지가 말한다.
"금부에서는 상왕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심온을 사형에 처했으니 금부는 죄인의 사후처리도 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오. 금부 당상은 당연히 폐비하는 주장을 올려야 할 것이오."
대사헌 허지는 맨 처음 병조에서 상왕께, 군자에 대한 일을 한만히 했다고 탄핵한 인물이었다. 금부에서는 폐비론을 올리라 주장했다. 좌의정 박은이 판단을 내렸다.
"허대사헌의 말씀이 옳소. 폐비에 대한 금부에서 주달하는 일이 옳다 생각하오. 금부당상은 지체치 말고 죄인의 따은 왕비가 될 자격이 없으니 폐비를 해야한다고 상소를 드리시오."
좌의정의 말이었다. 누가 감히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소위 정부의 대관이란 무리들은 백성들의 질고와 나랏일을 다스릴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일신의 영화를 위하여 궁중 지밀 왕비의 일까지 참견을 하고 간섭을 했다. 금부에서는 상왕께 상소를 드렸다.
'왕비 심씨는 역적 심온의 딸이올시다. 역적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습니다. 심씨를 폐하여 서인을 만드시옵소서.'
상왕은,
'생각해보는 중이다!'
하교를 내렸다.
금부에서는 같은 뜻으로 왕 전하께도 상소를 올렸다. 왕 전하는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곧 금부 당상을 파면시킬 생각을 가졌으나 꾹 참았다. 아무런 비답도 내리지 아니했다. 다음날 젊은 상감 세종은 수강궁으로 상왕 태종께 아침 문안을 들어갔다. 문안이 끝난 후에 상왕은 세종을 향하여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묻는다.
"어제, 의금부에서 올린 상소를 전하도 보았소?"
"네, 보았습니다."
세종은 장중하게 대답했다.
"폐비를 하라고 하는 거지?"
"네, 그러합니다."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비답을 내렸는데 전하는 어떻게 비답을 내렸소?"
"소자는 아직 비답을 내리지 아니했습니다."
"금부의 주장도 그럴듯한 소리야. 역적의 딸이 어찌 국모가 될 수 있나. 그대로 왕비의 자리에 있게 된다면 백성들이 의심할 거야!"
태종의 의사는 폐지하는 편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어느 때나 항상 아버지 상왕의 의사를 존중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던 세종은 정색하고 아뢴다.
"금부 당상들의 주장은 주제넘고 건방집니다. 자기들의 직분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날뛰는 일인가 합니다. 금부는 죄인을 다스리는 곳. 다만 죄인에 대해서 처분을 물어서 결정할 것이고, 나라의 왕비가 죄인이 아닌 이상 저희들이 감히 왕비를 폐해라, 말아라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유사라는 것은 다 각각 맡은 바 책임이 있습니다. 월권을 해서 지껄이는 무리들, 가증하기 짝없습니다. 아바마마의 의향을 받들지 못하여 유보하고 비답을 아니 내렸습니다마는, 이따위 월권해서 까부는 무리들은 당연히 파직을 시켜야 합니다. 그대로 둔다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유순하기 양 같다고 생각했던 태종은 가슴이 뜨끔했다.
"전하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금부에서는 원래 역신들을 다스리던 곳이니만큼 그런 건의를 한 듯하니 과히 꾸짖지 마오."
상왕 태종은 폐비를 하자고 주장한 금부 관원들을 휩싸서 말한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상왕 태종은 노안을 들어 젊은 상감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묻는다.
"좌우간, 일은 결정해야 하겠는데 어찌하면 좋은가?"
"왕비 심씨가 만약 죄가 있다면 당연히 폐해야 하고 죄 없다면 경솔하게 '폐비' 두 글자를 거론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왕비 심씨가 죄가 있나 하는 것을 생각해서 처리하십시오."
젊은 상감 세종의 말씀은 씩씩했다. 아버지 태종은 말문이 막혔다. 젊은 상감은 또다시 아뢴다.
"옛 시절 무식한 법에는 연좌법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아비가 역적이면 자식은 죄가 없건만 연좌되고, 자식이 역적이면 죄 없는 아비까지 잡혔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벌써 폐기된 지 오랩니다. 황차 심씨는 여자올시다. 여자 중에도 궁궐 속에 들어 있는 왕비올시다. 어느 겨를에 친정 아비와 함께 역적모의를 할 틈이 있겠습니까. 사실하시어 만약 죄가 있다면 내치시옵소서."
젊은 상감의 말씀은 구구절절 사리에 맞았다. 상왕은 코가 맥맥했다. 젊은 상감은 다시 아뢴다.
"지금 왕비 심씨는 소생이 삼 형제나 있습니다. 만약 심씨를 내치고 다시 왕비를 구한다면 반드시 어미 다른 왕자가 또 생산될 것입니다. 이때 가서 왕사 문제를 어찌합니까? 만약 소자가 왕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군으로 있었다면 관계가 없겠습니다마는 왕으로 있는 이상 반드시 분규가 일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한 번 이 나라에는 골육상잔의 슬픈 풍파를 겪어야 할 것입니다. 왕실에서 겪는 기막힌 풍파는 국민들의 비웃음과 탄식 속에 왕실의 추태를 연출할 뿐 아니라 백성들은 헐벗어서 궁지에 떨어지고 나라의 힘은 말이 아니 될 것입니다. 비록 아바마마께서 폐비를 하시고 싶은 뜻이 계시다 할지라도, 소자는 단연코 봉행치 못하겠습니다. 이미 아바마마께서 밟으셨던 그 뼈아픈 전철을 소자는 도저히 다시 밟을 수 없습니다. 만약 소자가 그대로 순종한다면 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
젊은 상감 세종은 뜻밖에 강경했다. 결연히 폐비할 것을 반대했다. 이미 방석의 난을 겪어 아름답지 못한 부자상극과 골육상잔의 쓰라리고 비참한 경험을 가졌던 태종은 가슴이 뜨끔했다. 얼굴이 화끈 달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한동안 후에 상왕은 입을 열었다.
"왕비 심씨는 정전을 피하고 아래채로 내려가 두문불출한다 하니, 전하는 적적하기 짝이 없겠소. 그래서 하는 말이지."
혼자 소리로 한마디를 했다. 젊은 전하는 다시 아뢴다.
"적적한 것은 한때 일이올시다. 이 한때 적적하고 불편한 일로 인하여 백 대의 피비린내 나는 화근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젊은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결연히 입술을 다물었다. 상왕 태종이 말하는 적적하다는 뜻은 왕비 심씨가 죄인으로 자처해서 정침에 있지 아니하고 몸을 피하여 아래채로 내려가 있으니 왕의 시중을 들 사람이 없다는 아버지 태종의 노파심이었다. 젊은 상감 세종은 적적한 것은 한때 일이고, 또다시 새 왕비를 맞이하여 왕자를 낳는 경우에 골육상잔의 환란이 또 일어나는 것은 백 대의 치욕이요, 국가의 손실이라고 일축했다. 젊은 상감은 다시 고한다.
"소자, 경험이 없으므로 군사권에 대해서는 일체 관여하지 아니하고 아바마마께서 처리하시도록 했습니다마는 왕비를 폐하고 아니 폐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자의 아내올시다. 소자의 뜻을 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젊은 상감은 정정당당하게 당신의 뜻을 표명했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일호의 차착이 없는 젊은 전하의 논리였다. 약간 마음에 거슬리게 생각되기도 했으나 원체 옳은 말인 것을 어찌할 길 없었다.
"나도 왕비가 죄 없는 것은 잘 알고 있소. 다만 대신들이 우겨대니 난처한 일이로구려."
어름어름 한 말씀을 했다.
"일을 모르는 대신들은 파면시키십시오!"
젊은 전하는 씩씩하게 한 마디를 남기고 물러갔다. 이때 태종의 신임을 가장 두텁게 받아서 정부 세력의 중추적 인물이 된 사람은 좌의정 박은이었다. 전세자 양녕을 폐위시키자고 주장한 사람도 박은이요, 양녕이 폐세자가 된 후에 한양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역간한 사람도 박은이다. 황희가 양녕의 폐세자와 민비의 폐위를 적극 반대한 때문에 귀양을 간 것도 박은 때문이요, 세종을 세자로 봉하자고 주장한 사람도 박은이다. 이번에 영의정 심온을 역적의 주모자로 만든 것도 박은이다. 이쯤 되니 조정 세력은 함빡 좌의정 박은한테로 집중되었다. 육조판서인 행정부는 말할 것 없고 기강을 다스리는 사헌부, 법을 장악한 금부, 언론을 맡은 사간원이 함빡 박은의 계통이요, 박은의 편이었다. 그의 관록은 이같이 무거웠다. 박은은 벎은 상감 세종한테보다 상왕인 태종께 더한층 충성을 드렸다. 크고 작은 일을 상감인 세종을 제쳐놓고 태종께 아뢰어 결정했다. 이러한 까닭에 상감이 두 분이란 불평이 일어나서 결국 심부원군은 역적으로 몰려 죽은 것이다. 의금부 당상들은 젊은 상감이 상왕께 문안을 들어가서 폐비에 대한 일을 적극 반대한 일을 알 까닭이 없었다. 다만 태종이 '생각해보겠다' 한 한 마디 비답을 받고, 용기를 다시 내었다.
'역적의 딸로 정궁을 삼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옵고 심온은 상왕 전하의 원수올시다. 아버지의 원수인 심온의 딸로 전하께서 어찌 왕비를 삼을 수 있습니까? 빨리 폐위를 하십시오.'
하고 또 상소를 상왕한테 올렸다.
그들은 젊은 전하는 안중에 두지도 아니했다. 두 번째 금부의 상소를 받은 상왕 태종은 여러 대신들을 연침으로 불렀다.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원임 이원, 대사헌 허지들이 입대를 했다. 상왕은 모든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씀을 내린다.
"금부에서 여러 차례 왕비를 페하라고 주장을 하는데 나의 생각에는 금부에서 이러한 일을 주장하는 것은 월권이라 생각하오. 금부는 죄인을 다스리는 곳이니 죄인이 아닌 왕후까지 참견해서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 생각하오."
상왕은 왕 전하가 주장했던 말을 옮겨서 말했다. 대사헌 허지가 아뢴다.
"그것은 금부의 뜻만이 아닙니다. 조정공론이 그러합니다. 당연히 중궁은 폐해야 합니다. 심온은 상왕 전하의 원수입니다. 아드님 되시는 전하께서, 어찌 아버님의 원수의 딸을 정궁으로 삼으실 수 있습니까? 내치셔야 합니다."
옆에 있던 좌의정 박은이 슬며시 거든다.
"뿐만 아니라, 듣자오니 왕비 전하는 죄인으로 자처하시어, 정침에 피하시어 아래채로 별거하신다 합니다. 전하의 시중들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적막해서 어찌하십니까?"
정면으로 폐위시키라는 말보다도 한층 더 교묘한 말이다. 태종은 어제, 젊은 상감이 '골육상잔하는 전철을 또다시 밟는다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에, 이미 마음이 흔들렸다. 상왕 태종은 다시 모든 신하를 돌아보며 말한다.
"나라의 연좌법에도 출가한 여자는 적용이 되지 않는 법인데, 황차 왕비는 효성이 지극하고 법도가 있는 사람이라, 경들의 말은 너무나 지나친 일이니, 다시 두말하지 말라. 그 대신 한 가지 일을 경들과 의논하려 한다."
상왕은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모든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니까?"
전임대신 이원이 묻는다.
"좌의정 박은이 아까 말하기를 궁중이 너무 적막할 것이라 하니 생각이 나오. 예로부터 제왕은 후궁을 두는 법인데 금상은 아직 후궁을 두지 아니하였소. 후궁을 두서너 사람쯤 두어서 궁중이 적막하지 않도록 하면 어떠하겠소?"
영의정 유정현이 얼굴에 가득 웃음빛을 띠고 아뢴다.
"과연 밝으신 조처올시다. 옛법에 제왕은 한 중궁과 아흡 후궁을 거느리는 법입니다. 그리하옵고 왕실에는 왕자들이 많으신 것이 좋습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상왕 태종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나도 전에 예관의 말에 따라서 후궁들을 몇 사람 두었소. 모두 다 큰 도움이 되었소. 그렇다면 곧 금혼령을 내려서 젊은 상감의 후궁울 간택하도록 하겠소."
폐비론을 주장하던 박은, 허지들은 딴소리가 나와버리니 주먹 맞은 감투 격이 되어버렸다.
"후궁을 간택하시는 일은 역시 젊은 상감께서 아셔야 합니다."
상왕은 껄껄 웃었다.
"후궁을 간택하는 일은 내가 주장할 일이지 상감이 아는 체할 일은 아닐세. 곧 간택령을 놓겠네."
모든 신하들은 더 폐비론을 주장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때 박은은 병조에 나가서 당상관들에게 말했다.
"상왕께서는 폐비하는 일을 보류하시자 하시지만 심왕후는 죄인의 딸인데 어찌 정궁이 될 수 있는가. 말도 아니되는 일이오."
하고 또다시 조정여론을 일으키려 했다. 그는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장본인이다. 심왕후를 그대로 둔다면 일후 자기에게 해가 일어날 것이 두려웠던 때문이다. 이 소리는 다시 상왕의 귀로 들어갔다. 상왕은 다시 의정부 삼공과, 예조판서 허조, 대사헌 허지들을 불렀다.
"또다시 폐비일건으로 조정여론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있다 하니 딱한 일이다. 내가 일전에 금상에게 후궁을 몇 사람 간택해서 두자 한 것은 한편으로 궁중에 쓸쓸한 기운이 들지 않게 하고 한편으로는 왕손들을 번영케 하자는 것이다. 경들은 아직도 내 뜻을 모르는 모양일세. 전에 상왕비 민씨가 그의 오라비들이 불충한 일로 인하여 잠시 폐비를 하려 했을 때, 황희 같은 사람은 목숨을 내걸고 역간했을 뿐 아니라 모두 다 폐비를 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는데 어찌해서 오늘 그대들은 극성스럽게 폐비를 주장하는가. 모를 일이다. 다시 두말하지 말라. 곧 금혼령을 내려서 후궁을 간택케 하라."
모두들 '좋습니다' 하고 물러갔다. 젊은 상감의 강유겸전한 의연한 태도로 인하여 상왕과 대신들이 심왕후를 내치려던 일은 좌절되고 말았다.
인의 조화
다음날 젊은 상감 세종은 상왕 태종께 아침 문후를 들어갔다. 젊은 상감이 날마다 아버님 노상왕께 효성을 드리는 일과다. 그러나 오늘 드리는 문안은 꿋꿋하게 아내인 왕비 심씨를 폐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던 다음날의 대면이었다.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나 서로 상대편의 마음을 더듬어보려는 미묘한 심경 속에 들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문안 절을 받은 후에 상왕은 젊은 상감에게 미소를 지어 말씀을 시작했다.
"어제 상감의 의사를 들은 후에 나는 왕비의 일에 대하여 무한 생각하였소. 대신들을 불러 물어보니 모두 다 폐비를 주장했으나, 나는 차마 죄 없는 왕비를 폐위시키는 데 동의할 수 없었소. 그리하여 강경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대안을 내었소."
대안을 내었다는 상왕의 말씀에 젊은 상감은 귀를 기울였다.
"대신들은 왕비가 정침에서 피해서 아래채에 근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궁중이 너무 적막해서 어찌하느냐고 우겨대는구려. 그들의 근본 뜻은 상감을 위해서 쓸쓸할 것을 걱정하면서, 한편으로는 폐비를 한 후에 새 왕비를 맞아들이자는 주장이지. 그래서 나는 후궁 두 서너 사람을 두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대안을 냈어!"
상왕은 다시 말씀을 계속했다.
"원래 제실에는 정궁인 왕비 이외에 구빈을 두는 것이 옛법인 거야----. 그러니 구빈까지는 둘 수 없으나. 우선 양가의 현숙한 처녀를 간택해서 두서너 사람쯤 후궁을 삼는 것이 좋겠다 했소. 그랬더니 여러 대신들은 모두 다 좋다고 했소. 처녀를 간택하는 일은 내가 담당할 테니, 상감은 그리 알고 앞으로 후궁을 맞아들이도록 하오."
젊은 상감은 귀가 번쩍 떠졌다. 우선 사랑하는 심비가 폐위되지 않는 것만이 기뻤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상감의 허락을 받은 상왕의 얼굴빛은 화창했다. 당신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 기쁜 때문이다. 상왕 태종이 당장 폐비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후궁 두는 것으로 대안을 삼은 것은 뒷일을 생각한 것이다. 후궁 중에서 왕자가 생산되면 생긴다면 심비를 폐하고, 후궁으로 정비를 봉할 수도 있는 자유자재한 길을 취하려는 까닭이었다. 상왕은 다시 젊은 상감에게 다짐하는 말씀을 내린다.
"그렇다면 나는 금혼령을 내려서 양가의 처녀들을 간택하라 하겠소."
젊은 상감은 또다시.
"네."
하고 대답했다.
세자가 된 후부터 자나 깨나 인간의 처세할 길을 생각하고 생각한 전하였다. 이제는 틀이 잡힌 젊은 상감이었다. 인의 철학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젊은 상감은 슬기로웠다. 상왕의 폐비 대안인 후궁 둘 것을 승낙한 후에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상왕께 아뢴다.
"성의 융숭하시어 이미 폐비 아니하실 것을 결정하시었으니 공비, 이 소식을 듣는다면 하해 같으신 은총을 저버릴 길이 없을 것입니다. 듣자오니 공비는 그 아비의 죄로 인하여 자기 역시 죄인이라 하여 상왕전에 석고대죄를 드렸삽고 아직도 정전에서 몸을 피하여 궁인 처소에 칩복해 있다 하오니 후궁을 맞는 날, 체모에 마땅치 않은가 합니다. 특별히 생각하시어 정침으로 돌아가라 분부를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젊은 전하의 경위 밝은 말씀은 상왕으로 하여금 꼼짝없이 허락을 내리게끔 만들어놓았다.
"전하의 말을 들으니 과연 그렇구나! 후궁인 빈들이 가례를 치르고 현신을 할 때 어찌 아래채에서 절을 받겠는가. 전하의 말이 옳으니 내가 친히 상궁을 보내어 정전으로 올라가도록 타이르리라."
상왕은 말씀을 마치자 호협하게 웃음을 웃었다. 젊은 상감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다시 고한다.
"아바마마께 또 한 가지 처분을 묻자 올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태종은 손으로 수염을 쓸며 묻는다.
"왕비가 폐위되지 아니하고, 그대로 정궁에 머물러 있게 된다 하오면 그의 친정 어미와 동생들을 천민인 관비와 관노로 박아 둘 수 없습니다. 이미 그의 아비는 죄를 받아 자진했습니다. 이 점 어찌하올지 감히 아룁니다."
총명 영리한 전하의 말씀을 듣는 상왕은 이번에도 또다시 꼼짝할 도리 없이 허락을 내리게 되었다.
"전하의 말이 당연하오. 심온의 일은 이미 처치된 일이니 다시 거론할 거리가 없고, 현존한 왕비의 어머니와 동기들을 그대로 종이 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에게 분부해서 왕비의 어머니에게는 국대부인의 칭호를 다시 내리게 하고 그의 자손들은 면천을 하도록 하오. 그리고 적몰했던 가산도 돌려주라 이르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젊은 상감은 문안을 마치고 유유하게 수강궁에서 물러났다. 슬기로운 젊은 상감은 사랑하는 아내 왕비를 위하여 물샐틈없이 한편으로 체면을 갖추게 하고 한편으로 호신책을 마련해 놓았다. 이 일은 다만 왕비의 체면을 유지시키고, 왕비의 몸을 보호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니었다. 장차 앞으로 후궁들이 들어와서 왕서자를 무수하게 탄생하는 날, 또다시 상왕의 전철을 되풀이 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튼튼하게 거멀못을 박아놓는 훌륭한 일이기도 했다. 상왕 태종은 젊은 전하를 돌려보낸 후에 마음속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
하고 두 번, 세 번 감탄했다.
이날 젊은 전하 세종은 수강궁 상왕전에서 경복궁으로 돌아온 후에 내관을 통하여 중전 아래채에 임어할 것을 정식으로 통고했다. 지난번에는 상왕궁에 소문이 들릴까 하여 항상 미행을 했으나 이번에는 드러내놓고 근신하고 있는 아래채 왕비의 처소를 찾으려는 것이다. 중전 궁녀들은 전하가 정식으로 왕비를 찾으신다는 연총을 받자 비전하께 아뢰고 분주하게 아래채 왕비의 침실을 정리했다. 이윽고 전하는 내관에게 호위되어 중전 아래채로 임어했다. 왕비 심씨는 아직도 죄인으로 자처해서 머리에 나무비녀를 꽂고, 몸에는 백설 같은 무명소복을 입었다. 한편으로는 나라의 죄인으로 자처하는 것이요, 한편으로는 마음속으로 원통하게 누명을 쓰고 세상을 버린 아버지의 거상을 입은 것이었다. 전하는 내관과 궁녀들의 옹위를 받으며 만면에 미소를 띠고 아래채 침실로 들어섰다. 심비는 조용히 일어나 젊은 전하를 맞이했다. 검은 머리 흰옷으로 초연하게 일어서서 상감을 맞이하는 비전하의 모습은 지난날 풍유했던 화용월태는 아니었으나 약간 야윈듯한 고운 얼굴은 마치 휘몰아치는 첫서리 속에 청초하게 고절을 지니고 서 있는 백운타 흰국화 한 송이 같았다. 비전하는 전하가 정식으로 임어하실 것을 통지하고 오시는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한층 정중하게 몸을 가졌다. 얼굴에는 미소조차 보이지 아니했다. 고개를 다소곳 숙여 두 손을 마주잡고 아뢴다.
"돌연 죄인을 찾으시니 왕은이 망극하옵니다."
젊은 전하는 껄껄 웃었다.
"죄인은 무슨 죄인, 어서 앉으시오."
시녀와 내관들은 전하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뒤로 두고, 조용히 발길을 돌려 물러갔다. 장지문이 소리 없이 닫혀졌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건넨다.
"오늘 내가 정식으로 마마를 찾은 것은 상왕 전하의 의사를 미리 전달하러 온 것이오. 조금 있으면 수강궁에서 내관이나 궁녀가 올 테니 미리 알고 계시오."
왕비는 수강궁에서 내관이나 궁녀가 온다는 전하의 말씀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폐비가 되는구나!' 했다. 대신들이 자기를 폐위시키자고 상왕께 아뢴다는 말은 궁녀들을 통해서 귀에 젖도록 들었다. 아무리 젊은 전하께서 자기를 두둔해주시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무섭고 엄한 상왕이었다. 그분이 한번 결단을 내린다면 젊은 전하도 별도리가 없는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산호동곳까지 뽑아서 주었던 전하의 맹세도 상왕의 말씀 한마디에는 한 굽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있다. 비전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입이 굳었다. 아무 대답도 못했다. 전하는 비전하의 우울한 표정을 살폈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풍기며 말씀을 계속한다.
"놀랄 것은 없소. 상왕께서는 반가운 소식을 마마께 전할 것이오. 먼저 마막 아래채에 거처하는 것을 아시고 정침으로 올라 거처하라는 분부가 계실 것이고, 다음엔 국대부인을 관비로 박았던 일을 풀어서 원래대로 복원시킬 뿐 아니라, 적몰했던 가산집물을 도로 환수하라 하시었소.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내관과 상궁을 보내실 것이오."
전하의 말씀을 듣는 비전하의 얼굴엔 비로소 안도와 환희의 빛이 떠돌았다.
"과연이십니까. 성은을 어찌 갚사옵니까!"
비전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과연이라니, 내가 말씀을 듣고 온 길이오. 상왕께서는 대신들이 폐비하자고 우기는 말씀을 듣지 아니하시고 이같은 처분을 내리신 것이오. 오늘 아침 문안 때 내가 친히 말씀을 듣고 왔소이다. 모두 다 마마가 잘 참고 슬픔과 괴로움을 견디어낸 덕이라 하겠소."
왕비는 자리를 피해 앉으며 말씀을 올린다.
"모두 다 전하께서 변변치 못한 신첩을 지도해 주시고 두호해주신 덕택이올시다. 황공무지하여이다."
"그러나 한 가지 미안한 일이 있소……."
전하는 광채 나는 눈으로 왕비를 바라본다. 차마 말씀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미안하시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리어 듣기에 죄송스럽습니다."
비전하는 상감이 또 무슨 말씀을 꺼내나 하고 유심하게 상감의 용안을 바라뵙는다.
"날 보고 후궁을 두라고 하시는 거야, 하하하."
전하는 웃음으로 말끝을 맺었다. 비 앞에 조금 쑥스럽고 무색한 모양이었다.
"전하께 후궁을 두라 하셨습니까?"
"음, 그래."
"상감이 되시면 으레껀으로 후궁을 거느리시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늦으셨습니다."
왕비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은 했으나 아름다운 눈초리에 미미한 경련이 이는 듯했다. 눈치 빠른 젊은 전하다. 비의 눈초리에 가만히 이는 경련을 놓칠 리 없었다.
"나는 도대체 후궁 두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 사람요. 두면 일이 많거든, 하하 하하. 도대체 사람들을 어거하기 귀찮은 중에 여자를 어거하기란 더욱 귀찮은 거야. 옛 성인의 말씀에도 여자를 다루기는 소인을 다루기보다도 더 어렵다 했거든, 하하하. 그래서 나는 반대를 했는데, 상왕께서는 대신들과 폐비를 아니하는 대신 후궁 두서너 사람을 두시는 것으로 약속을 하셨다고 나에게 강제로 후궁을 두라고 금혼령을 내리셨다 하오. 어찌하오, 조건부로 하신 일이니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구려."
"염려 마십시오. 신첩은 소인이 아닙니다, 호호호. 전하의 참으시라는 분부를 한평생 고이 간직하려 합니다. 절대로 투기는 아니하겠습니다."
비전하의 푸른 살쩍이 파르르 흔들렸다.
"원, 별말씀을. 비마마가 어찌 소인이겠소. 하하하."
전하는 이제 왕비에게 더 알릴 것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씀한다.
"모든 일은 마마의 말씀대로 참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소. 사람은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네 가지 감정을 가졌소. 그러기에 다른 동물보다 존귀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감정을 제한 없이 그대로 펼쳐논다면 결국에 가서는 방종으로 흘러서 파탄이 나고 마는 법이오. 이 네 가지 감정보다 당신과 나에게는 더한층 크고 중요한 사업이 있소. 곧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오. 남의 나라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나라로 만들어놓아야 하겠소.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지 않는 부유한 생활을 하도록 해야겠소. 외적이 침범하지 못하는 강대한 국가가 돼야 하겠소. 그래서 나라의 문화가 훨씬 높아져서 중국을 능가하는 겨레가 돼야 하겠소. 나나 당신이나 조그마한 사정 속에서 한평생을 얽매여 지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소."
젊은 대왕의 크고 넓은 포부를 듣는 심비는 캄캄한 운무 속에서 한 줄기 큰 빛을 바라보는 듯했다. 형언할 수 없는 크나큰 희망이 가슴 안에 벅차게 부풀어 올랐다. 젊은 대왕의 모습엔 오늘따라 더한층 위대한 힘이 발산되는 듯했다.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더욱 참겠습니다. 그리하여 대왕을 도와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소!"
젊은 전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대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하가 환어한 지 한 식경이 지났을 때였다. 수강궁 상왕전에서는 상궁과 내관이 분부를 받들어 나왔다. 적막하고 쓸쓸했던 중전 아래채에는 별안간 활기가 가득했다. 뜰에는 깨끗한 황토를 뿌려놓고 당상에는 홍보를 덮은 사선상이 반듯하게 놓였다. 왕비는 소복으로 상왕의 특사를 맞이했다. 상왕전 상궁은 사선상 앞에 서서 상왕 태종의 전갈 말씀을 전했다.
"지난번 석고대죄한 가상한 일은 잘 알고 있다. 비는 조금도 죄스러울 것이 없으니 안심하라. 죄를 받은 심부원군원의 일로 인하여 국대부인을 관비로 박았던 것이다. 그러나 왕비의 친정어머니를 오랫동안 천민으로 대우할 수 없다. 도로 국대부인의 칭호로 환원시키노라. 국법에 의하여 심씨네 가산을 적몰했으나 이미 국대부인의 칭호와 명예를 환원시켰으니 가산집물을 도로 환급하는 것이다."
왕비는 수강궁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상왕전의 전갈을 받들었다. 상왕이 왕비에게 내리는 전갈 중에 젊은 상감에게 후궁을 두게 하기 위하여 금혼령을 내리고 가례도감을 설치하겠다는 분부는 쑥 빠졌다. 아버지인 상왕의 절대한 권한으로 아드님에게 후궁을 두게 하는 일이므로 며느님 되는 왕비한테는 알릴 필요가 없다고 태종은 생각한 때문이다.
상왕 태종의 분부는 곧 실행되었다. 왕비 심씨는 아래채에서 중전 정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예절을 존중하고 근신하는 심비는 정당 옆에 따로 짚을 덮어 여막을 짓고, 상복을 입고 채 짚베개를 짚고 있었다. 여전히 죄인의 몸으로 자처하여 죽은 아버지의 삼년 거상을 입자는 것이다. 궁녀를 시켜서 상왕과 젊은 상감께 전갈을 올렸다.
"왕은이 망극하시어 죄인의 딸을 내치지 아니하시고 다시 곤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은 공이요, 사는 사입니다. 자식의 도리로 죽은 아비의 상복을 입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중전 옆에 초막을 짓고 삼년 거상을 하려 하오니 윤허해주시옵소서. 삼년 거상 중 상왕 전하께 문안을 드리지 못하옵고 상감마마의 수라와 건즐을 받들지 못하오니 더욱 황공하기 짝 없습니다. 듣자오니 상왕 전하께오서 이곳 사정을 통촉하시어 상감마마께 후궁을 두시게 한다 하니 거상 중이오나 기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루바삐 가례를 치르시어 궁 안에 화한 기운이 감돌게 하옵소서."
전갈을 받은 젊은 상감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잘 참는구나 ……. 이만하면 집안과 나랏일이 잘되겠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전갈 나온 궁녀에게 물었다.
"상왕전에도 이 뜻을 아뢰었느냐?"
"예, 소인이 가서 아뢰라는 분부를 받자왔습니다."
"어서 가서 아뢰어라. 상왕께서도 무한 기뻐하실 것이다."
전갈을 받들고 나온 궁녀도 기뻤다. 생기가 났다. 활개를 치면서 수강궁으로 들어가 상왕께 같은 말씀을 올렸다. 상왕은 더한층 기뻐했다. 아비의 거상을 입어 초막을 짓고 짚베개를 짚어 삼년상을 입겠다는 것보다 젊은 상감의 수라상과 시중을 들지 못하겠다는 말과 빨리 후궁을 두어, 궁 안에 화기가 돌도록 해달라는 부탁이 더욱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혹여나 며느리 되는 왕비가 오해할까 해서 아드님에게 후궁을 두게 한다는 말을 전하지 아니했는데, 도리어 먼저 후궁을 두어 자기의 일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당부를 하니 세상 천하에 이같은 미덕을 가진 여자는 드물다고 생각했다.
"과연 예법과 범절이 높은 왕비로다. 곧 돌아가 왕비한테 답전갈을 해라. 왕비가 청하는 대로 곧 가례색을 설치하여 좋은 규수를 가려서 후궁 두서너 사람을 뽑아 왕비의 일을 돕도록 하리니 안심하라."
상궁은 노상왕의 전갈을 받들고 왕비의 초막으로 돌아가 두 분 전하의 전갈과 상왕의 만열하는 모습을 아뢰었다. 이후부터 심비는 상중울 핑계하고 젊은 상감의 수라를 받들지 아니하고 침전에도 들지 아니했다. 젊은 상감이 부탁한 모든 일을 참고 견디도록 노력했다. 이로 인하여 심온의 집안은 다시 햇빛을 보게 되고, 무사하게 유지되어 나갔다.
상왕 태종은 예조판서 허조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전자에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한 대로 왕비는 폐하지 아니하고 후궁을 두어 주상 궁중의 적막을 제거하려 하니, 경은 예조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라 가례색을 설치하고 나라 안에 금혼령을 내려서 규범 있는 후궁 두서너 사람을 간택케 하라."
허조가 부복해서 아뢴다.
"전자에 전하께서 여러 대신들과 함께 왕비 전하를 폐위한다는 의논을 철폐하시고, 후궁을 두어 주상전하의 건즐을 받들게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신은 마음속으로 전하의 넓으신 성덕에 감동하였습니다. 곧 분부대로 예조에 돌아가 가례색을 설치하고 금혼령을 전국에 내려서 어진 규수를 간택하여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예조판서 허조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하기로 이름 높은 사람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분부를 내렸다.
"경의 말이 옳다. 무엇보다도 어질고 덕이 있는 여자라야 한다. 비록 자색이 뛰어나게 절묘하다 할지라도 심덕이 없으면 마땅한 여인이라 할 수 없소. 삼가 성의를 받들어 먼저 가문과 규범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하옵고 한 말씀 성상께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후궁을 거느리시는 일은 상왕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오라, 주상전하의 적막하신 것을 풀게 하기 위하여 주상전하께서 거느리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상전하의 뜻에 맞아야만 일이 순조로울 것이니, 최후로 인물을 선택하는 일음 주상전하께 맡기도록 하시는 일이 가할 듯합니다. 심히 황공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허조는 태종의 성격을 잘 안다. 마치 아드님의 후궁 두는 것을 당신의 후궁을 두는 듯 독재를 하려 드는 때문이다. 허저의 강직하게 아뢰는 말은 한편으로 태종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고 한편으로 태종의 얼굴을 무색하게 했으나 원체 바르고 옳은 말이었다. 더욱이 예조판서 허조는 강직하기 짝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을 탄해서 꾸짖을 도리가 없었다. 태종은 하는 수 없이 껄껄 웃었다.
"경의 말이 옳다. 모든 일을 주상께 품하여 잘 결정하라."
허조는 일부러 미리 한 마디를 올려서 자기의 바른 뜻을 밝혔다. 만약 미리 말씀을 하지 아니하고 후궁 두는 일을 젊은 상감과 의논했다가는 심온의 모양 역적으로 몰릭 십상팔구인 까닭이다. 허조는 상왕의 다짐을 받고 물러간 후에 경복궁에 나가 알현을 청했다. 젊은 상감은 항상 허조의 강직하고 예의바른 인품을 존경했다. 지체치 아니하고 알현을 허락했다.
"예관이 오늘 불시에 어인 일로 만나기를 청했소?"
만면에 화색을 띠고 하문했다. 허조 역시 얼굴에 화색을 띠고 아뢴다.
"좋은 일을 아뢰기 위하여 알현을 청했습니다."
젊은 전하는 다시 미소를 띠고 하문했다.
"무슨 좋은 일을 말하러 왔소?"
"상왕 전하께서 주상전하의 궁위가 너무나 적적할 것을 염려하시어 소신에게 가례색을 설치하여 금혼령을 내린 후에 후궁울 간택하라 하셨습니다. 이 어찌 좋은 경사가 아니오리까. 감히 이 뜻을 전하께 아뢰어 가례색을 설치하옵고 온 나라에 금혼령을 내려서 현숙한 규수를 선택하려 합니다."
전하는 이미 부왕인 상왕께 비를 폐하지 않는 교환조건으로 후궁 둘 것을 면종한 일이 있었다. 반드시 어떤 대신이든 상왕의 명을 받들어 가례색을 둔다고 연통이 올 줄 예측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당신이 항상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허조가 올 줄은 몰랐다. 짐짓 허조를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과인은 평시에 항상 경의 근엄하고 강직한 인격을 존경했는데 오늘 경은 나에게 후궁 두기를 권고하니 괴이쩍은 일이오. 한 지어미는 한 지아비를 받들고 한 지아비는 한 지어미를 거느리라고 주장하는 경으로서, 오늘날 과인에게 후궁을 두라 권하니 우습지 아니한가? 내가 평일에 경에게 바라던 바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구려 ----."
허조는 옷깃을 바로잡고 경건한 태도로 아뢴다.
"황공무지한 말씀이올시다. 당연하신 분부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권도가 있습니다. 죄 없으신 중전마마를 폐하시는 대신 후궁을 두시라 하시는 일이니 전하께서는 묵묵히 순종하시는 것이 가한 줄 아뢰오. 그리하옵고 군왕은 예로부터 후궁을 5, 6명 내지 7, 8명씩이나 거느리셨습니다. 과히 변될 일고 아니올시다."
허조의 아뢰는 말을 듣자 젊은 상감은 정색하고 대답한다.
"경의 주장은 항상 일부 일부가 좋다고 했는데, 어찌해서 좋다고 주장했는가?"
"서인의 집에 처첩이 많으면 항상 투기와 압력이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나서 나중엔 집안이 패하여 결딴나는 일이 많은 까닭에 반드시 한 지아비는 한 지어미를 맞이해서 화락한 가정을 이룩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은 어찌해서 과인에게 후궁을 많이 두라 하는가?"
"그것은 예로부터 군완은 구빈을 두라 했습니다."
젊은 상감은 다시 정색하고 말씀을 내린다.
"군왕은 첩을 많이 두어도 망신패가가 되지 않는가?"
허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코가 맥맥했다. 등에 땀이 흘렀다. 임기응변으로 대답한다.
"왕가는 번영해야 좋은 것이올시다. 그러기에 '시전'에도 '종사우선선'이란 글이 있습니다. 왕자가 많으라고 비빈을 많이 두었습니다."
젊은 상감 세종은 빙긋 웃으며 야유하는 말씀을 내린다.
"그것은 임금이란 독재자가 자기의 색욕을 채우기 위하여 아름다운 여색을 제한 없이 구했고, 그 밑에서 벼슬깨난 하는 작자들은 독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양기 좋은 메뚜기가 씨를 많이 퍼뜨리는 거와 같이 후궁 속에서 자식을 엄청나게 두었다고 예찬한 글이란 말요. 아첨이지. 경같이 강직한 사람이 꿋꿋하게 간하지는 못할망정 나에게 첩을 세 사람씩이나 두라고 금혼령까지 내리라 하니 평일에 내가 존경하는 허조가 아니로구려."
허조의 등에 흐르는 땀은 관디 등솔까지 배어 올랐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배다른 왕자가 많아서 나라가 어지러웠던 일은 예나 이제나 똑같은 길을 밟고 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극간하지 못하고, 나로 하여금 전철을 또 밟으라 하는가?"
허조는 겨우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해 아뢴다.
"어리석은 소신은 다만 폐비되지 아니하시는 일만이 기뻐서 그저 순종하고 극간을 못한 것뿐이올시다."
대왕은 또다시 미미하게 웃으며 말씀한다.
"경은 과부의 재혼하는 것까지 못 하도록 법을 마련한 사람이 아닌가?"
"네, 그러하오이다."
"어찌해서 그 법을 마련했는가?"
"삼강오륜을 밝혀서 한 번 출가한 여자는 윤기를 지켜서 수절하도록 권장한 것입니다."
젊은 전하는 껄껄 웃었다.
"경은 일부함원에 오월비상이란 글 뜻을 아는가?"
"네, 압니다. 그러나 삼강오륜을 밝히지 아니하면 짐승이나 매한가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과부들의 원망은 많이 받을 줄 알면서 이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이 나를 위해 온 나라에 금혼령을 내려서 처녀 색시를 혼인하지 못하게 하고, 왕비의 눈엣가시가 되는 후궁울 뽑는 일은 오월비상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것은 일부함원이 아니라 천부함원이요, 만부함원이 되는 일일세. 경은 아직 이 일을 생각해보지 아니했던가?"
명철한 말씀이었다. 과부의 재가를 금지시킨 일보다도 더 크고 무서운 죄악이었다. 허조는 이제 무어라 더 변명할 말이 없다. 전 바닥에 고개를 푹 박고 엎드렸다.
"나도 아름다운 여색이 싫지 않소! 팔선녀도 꾸며보고 싶고, 삼천 궁녀를 모두 다 내 손아귀에 집어넣고도 싶소. 그러나 욕심대로 한다면 왕실이 결딴나고 나라가 망하오. 나도 사람이오. 왜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욕심이 아니 나겠소. 욕심을 한량없이 편다면 넓고 넓은 저 푸른 하늘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오. 그러나 욕심을 줄이면 주먹 안에도 들 수 있소. 나는 참으려 하오. 이것이 극기라고 생각하오."
젊은 상감의 말씀은 구구절절 크나큰 인간 철학이었다. 허조는 젊은 상감의 심오한 인생관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낫살 먹은 소신이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전하께서 깨우쳐주시니 고루하고 완고했던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합니다."
젊은 상감은 미연히 웃으며 다시 허조를 향하여 말씀을 한다.
"후궁을 두게 하는 일은 과인도 상왕 전하께 분부를 받들었소. 그러나 과인이 적극적으로 반대해서 아뢰지 아니한 것은 아까 경이 말한대로 무죄한 왕비를 까닭 없이 내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묵송한 것뿐이오. 이제 경은 상왕께 후궁을 간택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아니 거행할 도리가 없소. 상왕 전하의 분부대로 가례색을 두게 하오. 그러나 절대로 금혼령을 내려서는 아니되오. 왕비를 간택하는 것도 아니고 일개 후궁을 뽑는데, 전국에 금혼령을 놓아서 처녀와 총각이 시집과 장가를 가지 못하게 한다는 일은 아까도 말했지만 일부함원에 오월비상이 아니라. 천부함원격이 되는 일이니 예판은 절대로 금혼령을 내리지 마오!"
말씀을 마친 상감 세종의 얼굴은 엄숙했다. 허조는 금혼령을 내리지 말라는 말씀을 듣자, 엄두가 나지 아니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성상전하의 어질고 밝으신 뜻은 잘 알겠습니다마는 금혼령을 내리지 아니하고 어떻게 양가의 규수를 선택하올지 밝으신 하교를 묻자옵니다."
"경은 과인이 존경하고 신임하는 재상이다. 경이 문벌과 덕행 있는 집 규수를 조용히 수소문해서 나에게 천거하라. 중전이 보시고 선택하면 되리라. 그리고 권문세가의 딸들은 절대로 취하지 말라!"
중전이 보시고 선택하면 된다는 것과 권문세가의 딸들은 절대로 취하지 말라는 말씀에 허조는 마음속으로 또 한 번 감복했다. 젊은 상감의 명철한 예지를 경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과연 전하는 제가를 잘하는구나!'
생각했다.
"중전께 어진 규수를 간택하라 하신다면 앞으로 왕실의 화기는 면면하시고 국가는 번영할 것입니다."
전하는 또다시 예조판서 허조에게 주의를 준다.
"경의 의향에 맞는 양가의 규수가 있다 하더라도 혼자 마음속으로 결정해서 나에게 천거해서는 아니 되오. 반드시 그 부모와 당자의 쾌한 허락을 받은 후에 천거케 하오. 그리고 이미 다른 사람에게 허혼한 규수가 있다면 절대로 거론하지 말라. 남에게 적악을 하는 일이니 조심하오."
허조는 더한층 경복했다.
"명심해서 거행하겠습니다."
상감 세종은 또다시 당부하는 말씀을 내린다.
"경은 상왕 전하께서도 특별히 신인하시는 터이니 '금혼령을 내렸느냐'고 하문하시거든 '내렸습니다'고 대답하고 중전이 간택한다는 말씀은 올리지 않도록 하라. 다만 경이 천거한다고만 아뢰라."
"일일이 명심하겠습니다."
허조는 젊은 상감 세종의 지시를 받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예조에는 가례색이 설치되고 허조는 당상관이 되었다. 젊은 전하 세종의 하교대로 전국에 금혼령은 내리지 아니하고 조용히 사대부집 규수를 물색했다. 그러나 권문세가의 딸들은 절대로 취하지 않기로 했다. 세종대왕의 뜻을 그대로 받든 것이다. 금혼령을 반포하지 아니하니 온 나라 안에 당혼한 총각과 처녀들의 물 끓듯 하는 소란도 없었다. 그러나 욕심 많은 권문세가에서는 가례색인 예조에 좌청우촉하면서 자기 딸로 젊은 전하의 후궁을 삼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대감이란 자들이 많았다. 삼정승의 청도 들어오고, 육조판서 중에 청편지를 하는 자도 많았다. 겉으로는 청백한 체하는 간관들 중에도 제 딸을 후궁으로 뽑아 달라고 예조판서에게 청탁을 하는 자도 있고, 국가의 풍기와 백성들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헌부의 고관대작들도 당년한 딸이 있으니 간택에 끼이게 해달라고 예판에게 뇌물을 보내는 자까지 있었다. 어떤 심한 대관은 딸이 없으니 급작스럽게 양녀를 만들어서 친딸이라 하고 협잡을 한 후에 생년월일의 사주를 적어서 단자를 만들어 예조에 바치기도 했다. 모두 다 이 김에 국권의 한몫을 단단히 잡아보자는 컴컴하고 더러운 배짱들이었다. 이자들은 모두 다 폐비하려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딸이 한번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서 왕자를 낳는 날 상왕의 비위를 잘 맞추고 젊은 전하의 은총을 독점한 후에 무의무탁한 심왕비를 폐위시키고 자기 딸로 왕비를 삼아서 외손으로 세자를 삼아 보자는 비루한 생각이 오장육부 속에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다. 허조는 청백하고 꼿꼿한 곧은 사람이었다. 이자들의 배짱을 유리 붙인 듯 들여다보았다. 권문세가에서 보내온 단자를 일체 기록에 올리지도 아니했다. 섣불리 뇌물을 보내는 자가 있으면 단자는 받지 아니하고 뇌물을 돌려보냈다. 어떤 대신은 허조를 위협까지 했다.
'한평생 그대는 가례색만 보고 있을 것인가. 내 청을 아니 들어준다면 그대는 심온이 꼴이 되고 말리라!'
무서운 협박편지다. 빗발치듯 날라 들어왔다. 그러나 허조는 끄떡도 하지 아니했다. 깐깐하고 청백하고 강직한 성격도 성격이려니와 뒤에는 젊은 상감 세종이 계셨다. 대왕의 근엄한 분부를 받든 때문이었다. 젊은 상감의 갸륵한 분부를 받들어 악법 중의 하나인 금혼령을 내리지 아니하고 조용히 양가의 처녀를 물색해서 부모와 당자의 허락을 받고 간택에 참례케 한다는 갸륵한 소문은 서울을 위시하여 시골 변지에까지 퍼졌다. 노소남녀 백성들은 모두 다 세조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
"이 나라에 오래간만에 성주가 나셨구나!"
"임금은 백성들의 부모라 했지만, 백성들의 사정을 알아주는 분이 나셨구나!"
"민폐를 알 줄 아는 임금이면 진짜 임금이지!"
더구나 혼담이 이룩돼서 당혼한 아들과 딸을 둔 부모들은 더한층 세종을 예찬했다. 가례색의 장관인 허조가 세종대왕의 명을 받들어 권문세가의 딸들을 취하지 아니하고 청백하고 깨끗한 규범 있는 처자들을 뽑는다 하니, 서울과 시골에서는 금혼령을 내리지 아니했건만 자원하는 규수들이 많았다. 순연히 젊은 상감 세조의 너그럽고 어진 덕을 흠모한 때문이다. 허조는 이중에서 처녀 십여 명을 뽑았다. 모두 다 청빈한 선비집 딸들이었다. 교양이 높고 재색을 겸비한 처자들이었다. 먼저 상왕께 고한 후에 젊은 전하 세종께 품했다.
"가례색에서는 후궁의 후보로 십여 명을 뽑았습니다. 삼가 명단을 바치오니 처분을 내려주시옵소서."
세종은 명단을 받기 전에 먼저 하문했다.
"어떠한 방법으로 그들을 뽑았는가?"
"성지에 따라서 금혼령을 전국에 내리지 아니하고 청백하고 범절 높은 선비 집 딸 중에서 초벌간택을 했습니다. 모두 다 성덕을 흠모하여 자원한 처녀들이올시다."
"민원이 없도록 했는가?"
"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권문세가의 딸들을 취하지 말라 했는데 어찌했는가?"
허조는 고소하며 아뢴다.
"삼정승. 육조판서, 사헌부, 사간원, 쩡쩡 울리는 대관들이 쟁두를 하며 자기 딸들을 뽑아 달라고 좌청우촉이 대단했습니다. 어떤 자는 자기 딸이 없건만, 급작스럽게 호적을 고쳐서 양딸로 만들어놓고 간택에 참여케 해달라는 자도 있었고, 어떤 자는 편지로 위협과 공갈을 마구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젊은 세종은 용안에 노기를 띠었다.
"어떻게 위협 공갈을 했더란 말인가?"
"너는 밤낮 가례색 차지만 하고 있겠느냐? 내 딸을 뽑아 주지 아니하면, 역적으로 몰겠다고 했습니다. 망유기극한 노릇이올시다."
세종은 기가 찼다.
"어떤 자가 그랬단 말인가?"
"미친 자의 성명을 거론할 거리가 못됩니다. 전하께서는 다만, 세태가 이러한 줄만 알아두십시오."
젊은 상감은 껄껄 웃었다.
"기막힌 세정이로구려,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소?"
"앞으로 전하께서, 덕으로 이러한 무리들을 감화시키신다면 악한 무리들은 선한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과히 염려하지 마시고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을 다스립시오."
허조는 후궁 뽑는 일을 아뢰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려 달라고 아뢰었다. 젊은 전하는 허조의 인품을 사랑했다.
"경의 말을 명심하리라. 그리고 간택에 대한 일은 과인이 어찌 남의 집 처녀를 함부로 대해 보겠소. 두서너 사람만 뽑을 작정인데 왕비께 간택을 하라 할 테니 단자만 두고 나가시오."
젊은 상감의 도량 넓은 말씀에 허조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복했다.
"명철하신 하교올시다."
허조는 처녀 명단을 두고 물러갔다.
화음
대왕은 허조가 물러간 후에 한동안 묵상 속에 잠겼다. 무슨 일을 생각했는지 한 식경 후에 대왕은 어전 내시를 불렀다.
"상궁에게 내가 중전으로 들어간다고 연통을 해두어라."
대왕은 왕후 심씨가 아래채에서 상왕의 명에 의해서 정침으로 오른 후에, 아직 왕비를 찾지 아니했다. 심비는 폐비를 면한 후에도, 상중에 있다 해서 정침 옆에 여막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전하의 시중을 받들지 아니한 때문이다. 전하의 임어한다는 기별을 받은 상궁은 여막에 있는 왕비를 모시고 정침으로 올랐다.이윽고 전하는 내관을 거느리고 중전 정침으로 발길을 옮겼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비전하를 향하여 묻는다.
"그동안 별일 아니 계신 줄 아오마는 침식이 어떠하시오?"
"잘 자고 잘 먹고 지냅니다. 아무 염려 마시옵시오."
비전하는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아직도 옥안에 혈색이 붉지 아니하고 두 볼이 야윈듯합니다. 지난 일을 다 잊으시고, 마음을 턱 가라앉혀서 평심서기를 하시오."
"전하께오서 이같이 신첩을 염려하시어 괴이시는데 제 무슨 까닭에 마음을 상하오리까. 거상 중이오나, 그저 어린 것들을 보살피면서 잘 지냅니다."
어린것들을 보살피고 잘 지낸다는 비전하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불현듯 세 왕자들이 보고 싶었다. 옆에 모시고 서 있는 늙은 상궁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내가 그동안 정무에 바쁠 뿐 아니라, 자주 중전에 들지 못해서 아기씨들을 본 지 오래다. 봉보부인들에게 말해서 세 아기씨를 다 이곳으로 데려오라."
상궁은 청명하고 물러갔다. 이윽고 봉보부인 세 사람은 왕자 아기씨들과 함께 들어왔다. 큰 왕자 '향'은 올해 여섯 살이었다. 영리하고 똑똑했다. 얼굴은 왕비 심씨를 닮아서 얌전하고 유순했다. 그러나 몸이 가냘프고 약해 보였다. 분홍 중지막을 입고 머리를 땋서 갑사 댕기를 늘였다. 봉보 부인에게 인도되어 전하와 왕비 전하께 절을 드렸다. 뒷날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문종 임금이 될 아기씨다. 다음에 둘째 아기씨가 들어왔다. 금년에 세살이 되는 왕자다. 이름을 '유'라 했다. 겨우 발을 옮겨서 내디딜 줄 알았다. 얼굴판이 마치 조부 태종을 닮았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콧대가 오뚝 섰다. 입술이 두껍고 귀가 짚신짝만 했다. 심술 궂고 욕심 깨나 있어 보였다. 셋째 아기씨가 들어왔다. 금년생이다. 이름을 '용'이라 지었다. 아직 갓난이라 확실하게 누구를 닮았다고 판정할 수는 없으나, 입매 콧매 눈매가 총명 영리하고 착하게 생겼다. 대충 닮은 모습을 살펴본다면 금상전하인 세종의 모습과 약간 비슷했다. 전하가 앉아 계신 어전에 왕자의 유모인 봉보부인들이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아기씨들을 전하와 비전하 앞에 두고 뒷걸음을 쳐서 문밖으로 물러났다. 측근에 모시고 있던 상궁도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비전하는 봉보부인이 비전하 앞에 뒤고 나간 갓난 아기씨 '용'을 포대기에 싼 채 가로 안고, 전하는 세 살 된 '유'를 안았다. 여섯 살 된 '향'은 전하와 비전하 두 분 무릎 앞에 앉았다. 물샐틈없는 오붓하고 알뜰한 다섯 식구의 아늑한 풍경이었다.
"이놈은 꼭 저의 할아버님 상왕 전하의 모습을 닮았어!"
전하는 귀여운 듯 '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짓고 말씀했다.
"엉뚱하게 상왕 전하를 왜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전하도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도 웃으며 대꾸한다.
"유전이지. 대를 걸러서 닮기도 하거든."
전하는 한동안 세 살짜리 '유'를 어그다가 한 손으로 앞에 앉힌 '향'의 뒷머리를 쓸었다.
"이제 '향'은 벌써 여섯 살이 되었으니, 해만 바뀌면 곧 일곱 살이 된다. 내년에는 글씨를 배우기 시작해야지!"
여섯 살 된 '향'은 흑수정 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굴려서 전하의 용안을 바라보며 말한다.
"궁녀들한테 듣자오니 일곱 살이 되면 입학을 한다 합니다. 어서 빨리 일곱 살이 되어서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향'의 목소리는 또렷또렷했다. 옆에서 향'의 말을 듣는 비전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렴, 어서 글을 배워야지. 그래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 너도 큰아들이니까 앞으로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할 세자감이다. 더욱 열심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전하는 든든한 듯 '유'를 안은 채 '향'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씀했다.
"아바마마, 세자란 무엇입니까?"
여섯 살 된 '향'은 별 같은 눈을 다시 반짝거리면서 전하의 용안을 쳐다보고 묻는다.
"하 하 하, 고것 똑똑하다. 세자라는 것은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릴 임금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책임이 무거운 자리다. 앞으로 나의 뒤를 이어서 왕 노릇을 하는 것이 세자다. 많은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
'향'은 아바마마의 말씀을 어렴풋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입학을 하면, 열심으로 공부하겠습니다."
비전하는 전하가 '향'을 쓰다듬으며 '장차 세자감이다' 하는 말씀을 듣자 마음이 새삼 흐뭇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향'아. 한 달만 지나가면 해가 바뀌어서 네가 일곱 살이 된다. 아바마마와 상왕전에 어서 입학을 해주십사 해서 내년부터는 글을 열심히 배워라."
'용'을 안았던 한팔 손을 내려서 '향'의 딴 머리채을 쓰다듬어주었다. 이때, 전하는 별안간 용포 자락이 차근차근함을 느꼈다.
"아, 이놈이 오줌을 싸는 구나!"
"저를 어쩌나!"
비전하는 황망히 '용'을 내려놓고 '유'를 전하한테서 받아서 기저귀를 뽑았다. 기저귀를 뽑는 동안 세 살 난 '유'는 심술 사납게 목통을 내어 발버둥을 치며 큰 음성으로 울었다. 장차, 자라서 수양대군이 될 아기다. 봉보부인이 뛰어 들어왔다. 제각기 세 아기씨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유모들이 세 아기씨를 안고 나간 후에 대왕은 만열된 심경으로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놈 심술 대단한데---- 보통내기가 아니야. 형제 중에 그중 왈패가 되겠는데, 까딱 잘못하다가는 형을 윽박지르겠는데---."
"어린것이 심술이 대단합니다. 유모가 젖을 조금만 늦게 주어도 발버둥을 치고 목을 놓아 울어댑니다. 그리고 한번 울기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모릅니다. 어린 것이 무섭습니다. 너무 심술이 과합니다. 앞으로 자라게 되면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놓아야 하겠습니다."
"하 하 하, 그야 사내자식이 좀 곁기도 있고 심술도 있어야지, 너무나 얌전만 하고 나약해도 못쓰거든. 하여튼 외양도 그렇지만 성격도 제 조부 상왕 전하를 많이 닮은 듯해 ---- 하 하 하."
"황공한 말씀이오나 어지러운 세상에는 상왕 전하 같으신 성격이 좋습니다마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승평세월에는 상왕 전하 같으신 대담 쾌할하신 성격은 도리어 분란을 일으키지 십상팔구올시다. '유'는 자라는 대로 전하께서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더한층 엄하게 교훈을 내려주셔야 할 것입니다."
비전하는 어린 아기씨들의 장래를 위해서 슬기롭게 말씀을 올렸다. 세종은 점점 더 마음이 흐뭇했다.
"좌우간 중전은 앞으로 또 훌륭한 아들을 많이 낳겠지만, 지금 저 애들 삼 형제가 다 영특해서 사람으로서의 한 구실씩은 다 할 테니 과인의 마음이 진정 기쁘오. 모두 다 마마가 어질고 슬기롭고 덕이 높으신 때문이오."
"무슨 말씀을 황공쩍게 그리하십니까. 모두 다 전하의 갸륵하신 심덕으로 용속지 아니한 어린것들이 생산되었나 봅니다."
비전하는 고개를 숙여 미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어린이들 삼 형제를 앞에 놓고 바라보는 왕과 왕비의 마음은 모든 시름과 근심을 잊은 채 한결같이 훗훗하고 흐뭇했다.
"한평생 우리 잘 지냅시다. 좋은 일 많이 하고 ----."
전하는 마음이 푸근했다. 소복 입은 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씀한다. 비의 마음도 흐뭇했다. 그러나 유학의 훈육을 엄하게 받고 자라난 심왕후다. 무의식중에 제이천성으로 고질화된 유교의 체취를 발산했다. 정색을 하고 몸을 피하여 아뢴다.
"신첩의 몸에는 아비의 거상 옷을 감았습니다. 친압하시는 전하의 손길을 감히 받자옵지 못합니다. 오늘날 신첩이 전하의 건즐을 받들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때문이올시다. 굽어살펴주시옵소서. 삼년상을 마친 후에 다시 전하를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몸을 피해 앉으며 쌀쌀하게 아뢰는 목소리는 옥을 바수는 듯 쨍쨍하면서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전하는 무색했다. 머쓱해 앉았다. 비는 다시 아뢴다.
"상왕 전하께서 후궁을 구하라시는 것도 그 때문이십니다. 대신들이 궁중이 적막하겠다고 한 말도 신첩이 거상 중인 때문인가 합니다."
전하는 비를 향하여 껄껄 웃었다.
"하하하, 대신이란 자들이 나를 동정하는 체하고 궁중이 적막하겠다고 말한 것은 당신을 내쫓고 새 왕비를 맞이하자고 반론하려고 한 말이지 결코 당신이 아버지의 상중에 있어서, 내 시중을 못 들게 되므로 궁중이 적막하겠다고 한 말은 아닙니다. 마마가 장인의 거상을 위하여 나를 소박한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지, 하하하. 마마의 효심을 꺾을 수야 있소. 삼 년 동안을 수절하고 고이 기다리리다. 하하하."
비도 웃음을 짓고 아뢴다.
"세상 천하에 남자 수절도 있습니까? 그러기에 신첩 대신 후궁을 두시라는 것이 아닙니까. 호 호 호."
"꿩 대신 닭이란 말인가? 하하하."
전하는 호탕하게 웃었다. 비전하의 겉으로 쌀쌀했던 얼굴 표정도 봄바람이 이는 듯 부드러워 졌다. 소리 없는 웃음을 입술가에 풍겼다. 이윽고 전하는 정색하고 말씀을 꺼낸다.
"실상인즉, 오늘 나는 후궁에 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마마를 찾았소."
비는 얼굴을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슬기로운 눈으로 대답하는 표정을 보냈다.
"아침에 예조판서 허조가 들어와서 후궁으로 자원해 들어온 처녀 십여 명을 나더러 간택하라 하는데, 내 어찌 남의 집 처녀들을 몸소 대면해서 간택하겠소. 내 대신 마마가 후궁 서너 사람을 뽑아주시오."
"정궁을 뽑으시는 일이 아니고, 후궁을 선택하시는 일인데 삼간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친히 보시고 뽑으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야, 대상이 세 사람인데 세 사람을 뽑는다면 아무 관계가 없겠소마는 십여 명 처자 중에서 단지 세 사람만 뽑는데 나머지 낙선된 처녀들의 처지가 곤란하지 아니하겠소? 이 애들은 점박이가 되어서 앞으로 시집을 가는데도 난처한 일이 많을 테니 이번 간택은 꼭 마마가 친히 선을 보아서 뽑아주어야만 하겠소. 다시 두말 말고 후궁 뽑는 일을 맡아주시오."
전하는 앞으로 궁중의 화기를 더한층 조성시키기 위하여 궁리 끝에 이같은 넓은 도량을 취했다. 비의 마음도 흐뭇했다.
"신첩이 뽑았다가 만약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시면 어찌합니까. 무를 수도 없고--- 호호호."
"어처는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내 배필인데 어처가 뽑아주는 내 후궁이 어찌 마음에 들지 아니하겠소. 조금도 탓하지 아니할 테니 두말 말고 뽑아주시오. 만약 어처가 못 뽑아 주겠다고 굳이 사양한다면 상왕전에서 뽑는다고 하실 테니 다시 제론하지 말고 책임을 맡으시오. 그래야만 왕실은 화기가 애애하게 돌고 자손들에게도 후환이 없게 되오."
자손들에게 후환이 없게 되고 왕실은 화기가 애애하게 된다는 전하의 슬기로운 말씀에 왕후 심씨는 황연히 깨달았다.
"정 하교가 그러하시다면 책임이 중하오나 삼가 간택하는 일을 봉행하겠습니다."
"옳게 생각했소. 당부하오."
이날 전하는 왕비와의 화목한 대화를 나누고 의전으로 돌아갔다.
일비삼빈, 이상침
후궁을 뽑기 위하여 예조 안에 설치된 가례색에서는 황도길일, 좋은 날을 택하여 자원해서 세종대왕의 후궁이 되기를 원하는 처녀, 십여 명을 대궐 안으로 들여보내게 되었다. 전하로부터 예조판서 허조에게 후궁을 뽑는 일은 왕비 심씨가 친심한다는 분부를 내린 때문이다. 궐 안에서는 내관과 상궁 수십 명이 말과 보교를 타고 나와서 처녀들을 맞이해 들어갔다. 예조판서가 말을 타고 앞에 서고 내관이 뒤에 따랐다. 상궁이 탄 보고 십여 체와 처녀들이 탄 꽃가마 십여 채는 판서와 내관의 뒤를 따라 줄을 이어 거리를 휩쓸었다. 장안 한복판 종로 네거리에는 구경꾼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가마 옆 채에 꽃가마 십여 채가 줄을 지어 나가고 호위 군사에 등롱꾼과 교부까지 합쳐서 육칠십 명이 벽제 소리를 치며 길을 메워 나가니 지나가는 남녀노소의 이목을 끌지 아니할 수 없었다. 더구나 유소보장의 오색이 휘황한 꽃가마 십여 채가 줄을 지어 나가는 행차는 더한층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무어냐, 무슨 행차냐? 꽃가마 십여 채씩이나 나가니, 예쁜 각시들이 한날 한시에 한꺼번에 시집을 갈 리도 없고----."
떠꺼머리 거러지 총각 한 녀석이 지껄였다. 낫살먹어서 세상 물정을 다소 짐작하는 늙은 홀아비 거지가 대답한다.
"나라님이 첩을 뽑으라고 간택령을 놓았는데 뽑아 달라고 자원해서 들어가는 꽃각시 행차란다."
"어이구 나라님도 망령이다. 한꺼번에 첩을 십여 명씩이나 둔단 말인가? 제기랄, 나 같은 놈은 떠꺼머리의 총각으로 사십 평생을 지나건만 씨암탉 같은 계집년 한 명 따라오지 않는데--- 십여명씩이나 자원해 들어가다니 참말 콧구멍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기에 세상일이 고르지가 못하단 말이다. 야, 이놈아. 너만 그런 줄 아느냐. 나도 상처를 해서 아내가 죽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마는 자식새끼는 우글거리고 홀아비 생활이 말이 아니다. 너는 씨암탉 같은 계집년 한 명 안 따라온다고 한탄을 하지만 나한테는 메주덩이 같은 헌 계집 한 명도 따라오지 않는다. 이놈아, 계집년도 다 빨아먹을 것이 있어야 따라오지 집 한 칸 없어서 세 발 막대 거칠 것이 없는 우리들한테 어느 년이 따라온단 말이냐?"
"여보 영감님, 우리도 한번 임금질을 해봅시다. 제기랄. 공평치도 못한 세상이야----."
떠꺼머리 거지 총각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늙은 걸인은 그래도 세상 물정을 짐작했다. 떠꺼머리 총각이 임금질을 해보자고 큰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간이 콩알만큼 오그라졌다.
"쉬---."
소리를 치면서 떠꺼머리 거지 총각의 입을 꽉 틀어 막았다. 순간 어디서 뛰어왔는지 벙거지에 날랠 용자를 딱 붙인 검은 더그레를 입은 군노사령이 떠꺼머리 거지 총각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놈아, 무어야? 임금질을 해보겠어?"
별안간 청천벽력이었다. 뺨을 맞은 떠꺼머리 눈에서 불이 났다.
"왜 때리는 거야?"
떠꺼머리 총각은 고함을 치며 반항했다.
"이놈아, 임금질을 해보겠어? 역적질을 해보겠단 말이지. 이놈, 가자!"
벙거지에 날랠 용자를 딱 붙인 군노사령은 떠꺼머리 총각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벙거지에 날랠 용자를 딱 붙인 군노사령은 떠꺼머리 총각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본 늙은 거지는 겁이 덜컥 났다. 어마 뜨거라 하고 앞을 향하여 줄달음질을 쳤다. 늙은 거지가 달아나는 것을 보자, 떠꺼머리 총각도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서 달아나는 것이 제일 상책이라 생각했다. 멱살 잡힌 군노사령의 손을 뿌리치고 늙은 거지의 뒤를 따라 줄달음질을 쳤다. 떠꺼머리 총각을 놓친 군사령은,
"저놈 잡아라!"
소리를 치며 뒤를 쫓았다. 군노사령이 '저놈 잡아라' 소리를 치며 떠꺼머리 총각의 뒤를 쫓는 것을 보자, 가례색 처녀들의 꽃가마를 호위해가던 동료 군노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를 잡으려 했다.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 달아나 꽃가마를 영솔해 나가는 예조판서의 행차를 앞질렀다. 군노사령들도 거지들을 놓칠세라 이를 악물고 뒤쫓았다. 이 통에 꽃가마 행차는 길이 막혀서 나갈 수가 없었다. 예조판서는 크게 노했다.
"무엄하고나. 어찌해서 이같이 소란들을 떠느냐? 누가 감히 이 행차를 막느냐? 상감마마의 후궁을 뽑는 행차다!"
호통이 추상같이 떨어졌다. 배행하던 내관들도 말 위에서 내시 특유한 기이한 말소리로 군노사령들을 꾸짖었다.
"왜 이리 무질서하냐? 어떠신 행차인데 감히 앞을 막느냐?"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은 군노사령들에게 휩싸인 채 주먹다짐의 격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는 결국 군노사령들의 오랏줄에 묶어져서 예조판서의 행차 앞에 꿇렸다. 예조판서는 거지들을 바라보면서 군노에게 물었다.
"웬일들이냐? 곡절을 말해라!"
처음에 떠꺼머리 총각을 붙들었던 군노가 대답한다.
"이놈들이 색시들의 꽃가마 행차가 줄을 지어 나가는 것을 보고 저희들도 임금질을 해보겠다구 했습니다. 역적모의하겠단 뜻입니다. 그대로 놓아둘 수가 없어서 잡느라고 부산을 떨었습니다."
"무어, 임금질을 해보겠다구 했어? 무엄한 놈들이로구나. 금부에 넘겨서 치죄케 해라!"
옆에서 듣던 대전내시도 발을 동동 구르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거지들의 뺨을 갈긴다.
"임금질이라니? 임금 노릇을 해보겠단 말이자, 이놈들. 임금질을 하기 전에 치도곤을 먼저 맞알. 괘씸한 놈들!"
거지들은 금부 나졸한테로 넘겨지고, 꽃가마 행차는 다시 줄을 지어 종로 거리를 휩쓸면서 황토마루 고개를 지나 해태를 바라보고 광화문을 거쳐 영추문으로 돌아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예조판서와 내관은 편전으로 들어가 세종께 복명했다.
"가례색에서는 후궁으로 자원한 처녀 십여 명을 꽃가마에 태워 지금 대내에 도착했습니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여 점두한 후에 예판 옆에 모시어 섰는 내시에게 하문했다.
"도중에 별일은 없었느냐?"
"아무러한 지장은 없었습니다마는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 한 놈을 잡아서 금부에 넘겼습니다."
세종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왜 거지들을 잡아서 금부에 넘겼단 말이냐?"
"임금질을 하겠다고 해서 잡아 넘겼습니다."
"임금질을 하다니?"
예조판서가 옆에서 아뢴다.
"무식한 놈들이라서 말을 할 줄 몰라서 임금질을 해보겠다구 한 것 같습니다. 임금 노릇을 해보겠다는 말인가 봅니다."
세종은 빙긋이 웃었다. 내시가 까불어대면서 아뢴다.
"아주 무엄하기 짝없는 놈들입니다. 임금질을 한다는 말은 역적질을 해보겠단 말입니다. 대역부도올시다. 능지처참을 해야겠습니다."
세종은 계속해서 미연히 웃으며 말씀한다.
"가만있거라. 거지 놈들은 어디 있었고, 임금질 하겠다는 말은 누가 먼저 들었느냐?"
예조판서가 아뢴다.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는 구경꾼 틈에 끼어있었고, 그놈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호위 군사인 군노가 듣고 쫓아가 잡느라고 잠시 소란을 떨었습니다."
"처녀들의 궐 안으로 들어오는 행차가 좀 분요했구려. 그러기에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지?"
"예, 조금 분잡했습니다. 마중나간 상궁들의 가마가 십여 채에, 처녀들이 탄 꽃가마가 십여 채가 되고 호위 군사와 등롱꾼까지 합쳐서 칠팔십 명이 움직였으니 거리가 좀 분요해서 구경꾼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민폐를 끼친 일은 없는가?"
"절대로 없습니다."
"꽃가마와 가마가 근 삼십 채나 움직였으니 거리는 한동안 화려했겠군."
"예, 그러합니다."
"꽃가마에 누가 탄 것을 백성들은 알았는가?"
"가례색이 설치되고 금혼령이 내린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나라에서 후궁을 뽑기 위하여 처녀들이 대궐로 들어가는 행차인 것은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전하는 비로소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들의 임금질을 해보겠다는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예판에게 분부한다.
"금부에 기별해서 잡아 가두었다는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를 지체 말고 궐 안으로 불러들이게 하라."
예조판서와 어전 내시는 천만뜻밖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명을 아니 받들 길 없었다. 곧 총각과 거지를 대내로 데려오라고 금부에 영을 내렸다.
해오민지온혜
금부에서는 세조의 어명을 받들어 잡아 가두었던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를 대궐 안으로 호송했다. 근정전 넓은 뜰에는 기치창검이 휘황찬란하고 호위 군사가 나열한 속에,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가 벌벌 떨면서 가쁜 숨을 쉬고 엎드려 있었다. 금방 곧 죽이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세종은 예조판서와 금부 당상이며, 모든 시신을 거느리고 전상에 납시었다.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는 벌벌 떨면서 머리를 땅에 박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세종대왕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먼저 늙은 거지를 향하여 엄숙하게 옥음을 내린다.
"고개를 들고 내 말을 듣거라."
늙은 거지는 이제는 죽나보다 하고 후들후들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보아하니 낫살깨나 먹어서 철이 날 만한 위인인데 부지런히 일을 해서 살아나갈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어찌 저꼴을 하고 다니느냐?"
"본시 어렵게 지내는 중에 중년 상처를 해서 홀아비로 지냅니다. 홀아비로 어미 없는 자식새끼들을 길러 나가려니 아무리 노동을 하오나 밑 빠진 가마솥에 물 붓깁니다. 그래서 이 꼴이올시다."
"네 나이가 몇 살이냐?"
"마흔다섯 살입니다."
"어찌해서 임금질을 하자고 했느냐?"
그런 말을 한 적은 절대로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팔자 한탄만 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후궁들을 꽃가마에 태워서 십여 명씩이나 데려가는데, 나는 팔자가 왜 이 꼴인가 하고 마음속으로만 부러워했을 뿐입니다. 임금질을 하겠다고 말한 것은 저기 떠꺼머리 총각 놈입니다. 소인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저놈의 입을 틀어막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저 살려줍시오."
손을 들어 싹싹 비비며 말했다.
"죄가 없는데 그럼 어찌 달아났느냐?"
세종은 일부러 음성을 높여서 호령을 했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 하지 아니합니까. 저놈하고 같이 있었으니 잡히기만 하면 큰일이 날 체니 달아난 것뿐입니다."
늙은 거지는 솔직하게 고했다.
"자식이 몇이나 되느냐?"
"어미 없는 어린것들이 담불담불 다섯 놈이나 됩니다."
늙은 거지의 누에서는 더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임금을 원망했구나 ----."
늙은 거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 못 씻은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대답한다.
"억울한 말씀이올시다. 소인이 어찌 임금님을 원망했겠습니까. 다만, 중년에 상처를 해서 자식새끼들은 기르지 어렵고 ---- 기구한 제 신세를 한탄했을 뿐입니다. 제가 죄를 범했다면, 쉬---- 소리를 치고 달아난 죄밖에 없습니다. 그저 죽여주십시오. 자식새끼 기르기도 어렵습니다."
세종은 늙은 거지의 대답하는 말을 다 들은 후에 떠꺼머리 총각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듣거라. 너는 무엇 하는 놈이며 어찌해서 임금질을 해보겠다 했느냐? 만약에 일호라도 기만하는 일이 있다면, 큰 벌을 면치 못하리라."
큰 벌을 면치 못한다는 대왕의 으름장 놓는 말씀을 듣자, 총각은 겁이 덜컥 났다. 우둔한 눈을 번쩍 들어 전상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나는 원래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일 줄 모르는 놈이올시다.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실토해서 말하는 놈이올시다. 그런데 아무리 속이지 않고 바른 대로 토설을 한다 해도 믿지 아니하고 거짓말이라 하고 벌을 준다면 큰일입니다. 내 말을 거짓말이라 하지 않고 곧이 들어서 받아주겠습니까?"
너무나 당돌하고 고지식한 대답이었다. 총각은 소인이란 말도 쓸 줄 몰랐다. 임금 앞에서 나 라고 대답했다. 옆에 시립해 있던 판의금은 황공하고 민망하게 생각했다.
"이놈아, 무엄하고나. 어전에서 내가 무어냐? 소인이라고 아뢰지. 그리고 방자하게 잔소리가 너무 많구나!"
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나는 소인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오. 왜 욕을 하고 꾸지람을 하오? 나는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후에 오늘날까지 나를 나라구 했소. 큰 벌을 준다 하니까 속이지 않고 말을 해도 거짓말이라고 하면 어찌하겠느냐고 물어본 것이 무엇이 잘못이오?"
"이놈, 방자한 놈이다. 저놈을 매질해라."
판의금은 나졸들에게 호령을 내렸다. 전상에서 대왕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아서라, 매질은 하지 마라. 내가 다시 물어보리라 ……."
곤장을 들고 달려들던 집장 나졸이 물러났다.
"도대체 네놈의 나이 몇 살이냐?"
"똑똑히 나이는 모릅니다마는 근 삼십 되었습니다."
"이놈아, 네 나이도 모른단 말이냐?"
"아비 어미가 일찍 죽었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압니까? 대충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대왕을 위시하여 모든 사람들은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무슨 생업을 하느냐?"
대왕은 다시 물었다.
"장돌뱅이 노릇을 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돈이 모이지 아니합니다."
"왜 돈을 모으지 못했느냐?"
"남을 속여서 거짓말을 할 줄 알아야 돈이 모이는데, 죽어도 거짓말은 하기 싫고 비싸게 속아 사서 싸게 파니 돈이 모이지 아니하고 밤낮 이 꼴로만 지냅니다."
"그래서 여태껏 총각으로 있고 장가를 못 들었구나."
장가 소리를 듣자 떠꺼머리 총각 녀석은 싱글벙글 웃고 대답을 아니 했다. 대왕은 다시 미소를 짓고 물었다.
"왜 임금질을 하겠다고 말했다가 붙들렸느냐?"
"임금님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도 한번 임금질을 해보았으면 좋겠다구 혼잣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군노사령들이 덤벼들어서 따귀를 치고 나를 잡았습니다."
떠꺼머리 총각의 꾸밈없는 순직한 대답에 대왕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아니했다. 계속해서 묻는다.
"어찌해서 임금이 부러웠느냐?"
대왕의 용안에 항상 미소가 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본 떠꺼머리 총각은 공포에 휩쓸렸던 마음이 차차 풀리기 시작했다. 벙긋벙긋 웃으며 대답한다.
"꽃 같은 처녀색시 한 사람을 첩으로 두는 일도 나 같은 장가 못 든 놈에겐 부러운 일인데, 꽃가마를 탄 처녀 색시 십여 명이 나라님의 첩이 되어 대궐로 들어간다 하니 어찌 부럽지 않겠소. 그래서 나도 한번 나라님이 되는 임금질을 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소. 그랬더니 저 늙은이가 쉬! 하고 내 입을 틀어막았소."
좌우 시자들은 떠꺼머리 총각의 기탄없이 대답하는 말을 듣자,
"저런 무엄한 놈이 있나!"
발들을 동동 굴렀다. 대왕은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며,
"가만두어라. 정말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놈이다. 진솔해서 좋다!"
말씀을 마친 후에 다시 묻는다.
"그래서 군노사령들한테 잡혔구나 ----."
"지금 생각해도 기막힙니다.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사령이 뛰어나오더니 날 보고 역적질을 했다고 따귀를 갈깁니다. 어찌 부아가 나지 않겠습니까? 사령의 복장을 쥐어지르고 저 늙은이를 쫓아가다가 여러 사람한테 잡혔소. 원통하오. 내가 무슨 역적질을 했단 말씀요? 나는 나이 삼십이 넘도록 장가를 못 든 놈이올시다. 꽃 같은 처녀 색시를 십여 명씩이나 꽃가마를 태워서 대궐로 데려가는 나라님이 부러웠을 뿐이오."
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사정을 잘 알겠다."
말씀을 내린 후에 예조판서와 판의금에게 분부를 내린다.
"두 사람을 다 무죄 석방시켜라! 총각은 나이 삼십지년이 되었건만 장가를 들지 못했으니 화려한 꽃가마 행차를 보고 괴탄하는 소리를 낸 것은 인간의 상정이고, 늙은 홀아비가 자식들 거느리기 또한 극난한 일이다. 예판은 총각에게 색시를 구해서 장가를 들게 하고, 늙은이에게는 과부를 구해서 속현을 해주도록 하라."
뜰 아래 엎드렸던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은 전상에서 내리는 대왕의 옥음을 듣자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눈을 둥그렇게 떴다. 대왕은 다시 어전 내시에게 분부한다.
"너는 내수사에 나가서 별좌에게 내 말을 전해라. 총각과 늙은이의 혼수비용을 내수사에서 일체 부담할 뿐 아니라 초가삼간씩을 마련해서 신접살이를 장만해주라 해라. 그리고 생계가 마련될 때까지 매월 쌀 한 섬씩 대주라 하라."
세종은 다시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에게 말씀을 내린다.
"너희들을 무죄백방하고 아내를 구해주라 했으니 앞으로 부지런히 일하면서 유자생녀하고 잘살아라."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전 뜰 앞에서 뭉울 덩실덩실 추었다. 예조와 내수사에서는 대왕의 분부를 일일이 받들어 시행하니 대왕의 성덕은 바다같이 넓었다.
한편 꽃가마 십여 채는 상궁들의 인도로 영추문을 통과해서 금교에서 내린 후에 처녀들은 보행으로 합문을 지나 중전에 당도했다. 이때 왕비 심씨는 소복단장으로 제조상궁과 감찰상궁 등 일곱 상궁들을 거느리고 처녀들을 맞이했다. 처녀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왕비의 앞으로 나가 절을 올렸다. 모두 다 달덩이같이 환하고 꽃송이같이 아름다웠다. 노랑 회장저고리에 분홍 치마를 입은 처녀, 연두 회장저고리에 진당홍 치마를 두른 처녀, 옥색 회장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은 처녀, 색동저고리에 염분홍 치마를 입은 처녀, 은회색 회장저고리에 은옥색 치마를 두른 처녀, 사람의 꽃밭을 이루었다. 저고리 앞섶마다 성씨와 아버지의 직위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왕후는 대왕을 대신해서 후궁을 뽑는 소중한 임무를 맡았다. 어렵고 무거운 책임이다. 뿐만 아니라 한번 잘못 뽑아 논 뒤엔 왕후 자신의 한평생 한이 될 장본인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얼굴이 아름답고도 심덕이 있는 규수를 뽑아야만 했다. 왕비는 예조에서 올린 명단과 처자들의 저고리 앞섶에 붙인 성씨를 일일이 대조해보면서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예조 가례색에서 훌륭하다고 추천해 올린 십여명의 처녀 중에서 단지 세 명만을 뽑는 어려운 간택이었다. 왕비는 조심하고 신중하게 인물과 명단을 살피면서 항상 미소를 띠어 상냥한 말씨로 처녀들에게 물었다.
"아버님은 무엇을 하시느냐?"
"글 읽은 선비올시다."
"너도 글을 좀 배웠느냐?"
"소학까지 읽었습니다."
"여자가 소학까지 배웠으면 족하지. 바느질도 할 줄 아느냐?"
"아버님의 도포도 지어봤습니다."
"도포까지 지었어? 무던하구나. 반찬은?"
"청빈한 선비집에서 무슨 찬수를 잘해 먹겠습니까? 된장찌개쯤은 끓일 줄 압니다."
"된장찌개 간을 맞출 줄 알면 그만이지. 다른 음식은 차차 배우면 된다."
왕비는 이러한 조로 처녀색시들을 상냥스럽게 취재했다. 마음속으로 세 사람을 점찍어놓았다. 그러나 당장 이 자리에서 발표할 수 없었다. 심왕후는 처녀들의 점고를 마친 후에 얼굴에 가득 화색을 띠고 처녀들에게 분부를 내린다.
"참, 잘들 생겼다. 용모들도 아름답거니와 행동거지가 모두 다 향기롭다. 옛말에 난형난제한 말이 있더니, 그야말로 너희들을 두고 이름 말 같다. 내 욕심 같아서는 모두 다 대왕 전하의 빈을 삼아 건즐을 받들게 하고 싶다마는 상왕 전하의 하명에 의하여 다만 세 사람만 궐내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유감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비록 입궐되지 않는다 해도 너희들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좋은 집으로 출가하여 양처현모가 되게 하라. 뽑힌 사람은 추후 기별하리라."
왕후는 처녀들을 위로한 후에 제조상궁을 향하여 분부했다.
"오늘 입궐한 처자들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비단 열 필에 거핵 열 근과 백미 열 섬씩을 주어서 앞으로 입궐이 되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시집을 가게 될 때 저축해두었다가 혼수에 보태 쓰게 하라. 그리고 나갈 때는 들어올 때와 같이 꽃가마를 태워서 공주와 같은 대우를 해서 나가게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제조 상궁운 승명하고 처녀들을 휘동하여 중전 정전에서 물러났다. 꽃가마는 한 채씩 한 채씩 궐문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꽃가마 뒤에는 왕후의 어명에 의해서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이 가자에 실려나가고, 그 뒤에는 백미 열 섬을 실은 마바리가 줄을 이어 따랐다. 의장은 공주와 같은 대우를 해서 나갔다. 왕비는 낙선된 집안의 처자들이 혹시나 나라의 대왕을 원망할까 하여 공주의 대우까지 내리면서 돌아가는 처녀들을 후하게 치송했다. 자진 간택을 원했던 처녀들의 집안에서는 모두 다 흐뭇하게 생각했다. 집집마다 처녀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서로들 칭송하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왕후의 덕을 찬양했다.
"젊은 상감이 착하고 어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왕비께서도 무한 후덕하신 분이로구려. 입선이 안됐다 하더라도 자유스럽게 좋은 집으로 시집을 가서 현모양처가 되라 하셨다니, 얼마나 고마운 말씀요."
"그나 그뿐요, 장래 일까지 생각해서 혼수에 보태 쓰라고 비단 열 필에 거핵 열 근, 그리고 백미 열 섬씩을 내리셨다 하니 이같이 후덕한 분이 세상 천하의 어디 또다시 있겠소."
"어디 그것뿐이가, 돌아갈 때는 공주님의 대우를 해서 의장까지 내리셨으니, 이런 우대가 어디 있겠소. 역사에도 없는 일이란 말야 ----."
"내 딸이 비록 후궁으로 뽑히지 못한다 해도 조금도 섭섭한 생각이 아니 드오. 공주 대우를 받았는데 더 말할 것이 있나. 하하하."
"우리 딸이 설사 후궁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공주님의 대우를 받았으니 인제 부마 같은 사위를 얻어야 할 거야. 호 호 호."
간택에 들어갔던 여자의 집에서는 뉘집을 말할 것 없이 모두 다 이같이 지껄이고 왕후와 대왕의 덕을 기렸다. 이날 심왕후는 처녀들의 간택을 마친 후에 최후로 뽑아 논 세 처자의 명단을 책상 반 위에 단정히 놓고 제조상궁에게 분부했다.
"대전에 나가서 대왕 전하께 간택을 마쳤습니다 아뢰고, 명단을 어찌하오리까, 분부를 물어 오너라."
제조상궁은 비전하의 명을 받들어 대전으로 나갔다. 때마침 전하는 시전 관저 편을 읽고 있다가 상궁이 아뢰는 왕비의 전갈을 받았다. 천천히 시편을 덮고 회답을 내렸다.
"중전으로 들어가 뽑으신 명단을 본다고 아뢰어라."
상궁은 승명하고 물러갔다. 이윽고 전하는 옥보를 중전으로 옮겼다. 왕비는 화한 얼굴로 전하를 맞이하여 자리에 좌정한 후에 단자 세 통을 홍보 덮은 책상 반에 받쳐 전하 앞에 놓았다.
"처자 세 사람을 어명에 의하여 뽑았습니다."
전하는 미소를 머금고 간지를 펼쳐보기 시작했다.
김씨 라 적혀 있었다.
다시 한 장을 펼쳤다.
강씨 라 적혀 있었다.
또 한 장을 펴 보았다.
양씨 라 적혀 있었다.
대왕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왕비에게 말씀을 건넨다.
"김씨, 강씨, 양씨 세 사람을 뽑으셨구려. 권문세가의 딸들은 아닙니까?"
"아니올시다. 모두 다 얌전한 선비인 양가의 딸들이올시다. 외양과 심덕이 난형난제격으로 무던들 합니다. 가례 때 보시면 전하께서도 마음이 흐뭇하실 것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절색을 뽑았다고 꾸지람을 마십쇼, 호 호 호."
"꾸지람을 할 리가 있소. 마마가 뽑았는데, 세 사람이 모두 한결같이 마마의 심덕을 닮고, 또다시 절색이라면 다시 더 말할 나위가 있겠소. 권문세가가 아닌 청빈한 집 딸이라 하니 내 마음이 흐뭇하오."
"그리하옵고 한 말씀 다시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십여 사람 중에서 세 사람을 점찍어놓고 곧 그 자리에서 발표한다면 나머지 사람의 처자들은 무안하기 짝 업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기별하기로 하고 그대로 다 돌려보냈습니다."
"잘했소이다."
"또 한가지 아뢰지 아니하고 실행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십여 사람 처자 중에 세 사람만 간택에 뽑히고 나머지 사람이 낙선되었으니 처녀들의 실망이 클 것입니다. 앞으로 시집을 가게 될 때 공주가 출가하는 예를 취하게 하고, 신랑감은 결혼예식 중에는 부마의 대우로 대접하라 일렀습니다. 그리고 퇴궐할 때 비단 열 필과 거핵 열 근과 백미 열 섬씩을 내수사에 주라고 기별해서 앞으로 혼수에 보태 쓰라고 전갈해서 내보냈습니다. 추호라도 전하와 나라에 원성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같이 처리했습니다."
대왕의 용안은 활짝 열렸다.
"잘했소. 잘했어. 과연 현처의 훌륭한 처사요!"
"전하께서 세 처녀가 가합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곧 가례색을 부르시어 처녀 집에 기별한 후에 좋은 날을 가려서 입궐시키시는 일이 가할까 합니다."
"예조판서를 불러서 명단을 넘기고 상왕전에 아뢴 후에 곧 가례를 거행하도록 이르리다."
대왕은 상궁에게 명단을 받들게 하여 대전으로 돌아간 후에 예조판서 허조를 불러 명단을 넘겼다. 허조는 명단을 받들고 상왕전으로 나가 승인을 얻은 후에 처녀 집에 연통하고 황도길일을 택하여 가례를 치르기로 했다. 예조 가례색에서는 황도길일을 택했다.
세 후궁이 한날 한시에 대궐로 들어가 가례를 치르게 되었다. 후궁 한 사람이 가례를 치르러 대궐로 들어가는 행차도 화려찬란한데 후궁 세 사람이 일시에 대궐로 들어가게 되니 전배, 후배의 옹위해 들어가는 행차는 지난번 꽃가마 열 채가 들어갈 때보다도 더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꽃가마는 변하여 황금덩 세 채가 되고, 상궁과 하님들은 녹색저고리 남치마의 예장으로 줄을 지어 호위했다. 청사초롱, 황사초롱이 오십 쌍씩 황금덩을 옹위했고 향불을 받든 아기 나인들은 쌍쌍이 황금덩의 앞을 섰다. 금전지 상모술에 근봉을 달아맨 붉은 함보와 청청한 미나리 한줌을 붉은실로 한 허리를 질끈 동여 청수에 띄워 하님이 이고 가는 밥소라며 청동화로에 창출을 피워 푸른 향연으로 사기를 헤치고 가는 하님들의 행렬도 볼 만했다. 부원군의 참혹했던 일로 인해서 냉락하고 소조했던 중전엔 봄빛이 활짝 찾아들었다. 궁녀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대전 별감과 내관을 위시하여 모든 액정들의 어깨도 으쓱거렸다. 후궁들의 입궐하는 행렬은 이같이 화려했으나, 왕비를 맞아들이는 정궁이 아닌 때문에 세종대왕은 초례와 친영례를 하지 아니했다. 세 후궁들은 먼저 왕비 심씨의 중전으로 들어가 활옷과 낭자로 차례차례 사배를 올린 후에 다시 왕비의 인도로 대전에 나가 대왕께 배알했다.
대왕은 처음으로 김씨, 강씨, 양씨의 세 후궁을 대면했다. 왕비 심씨가 아뢴 대로 모두 다 안존하고 아름답고, 품격을 갖춘 고운 처녀들이었다. 대왕은 우선 마음에 싫지 아니했다. 이윽고 세 후궁에게는 사찬이 내려졌다. 민간에서 신부가 혼인날 받는, 큰상을 받는 행사와 매한가지의 일이다. 넓고 큰 교자상에 생과, 유과가 자가 넘게 괴어지고 다담상에는 면이 올랐다. 그러나 형식적인 허례였다. 아무리 후궁이 되겠다고 자원해서 간택에 뽑힌 여자요, 산해진미가 앞에 놓였다 하나 식욕이 움직여질 까닭이 없었다. 상궁들이 권하건만, 젓가락질만 두어 번 하다가 저를 놓았다. 상은 물리고 후궁들은 이미 도배단장을 말쑥하게 꾸며논 후궁으로 인도됐다. 후궁은 채채로 나뉘어 따로따로 떨어져 있었다. 채마다 장원이 둘러 있고 분벽사창에 죽세렴이 어른거렸다. 김씨에게 한 채를 내리고 강씨가 한 채를 차지하고 양씨에게 한 채를 내렸다. 채마다 시녀 두 명씩을 배속시켰다.
이윽고 해는 기울고 어둠이 전각으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대왕은 후궁과 더불어 동방화촉을 치러야 했다. 세 후궁을 한꺼번에 괴일 수는 없었다.
동방 화촉
왕비 심씨는 늙은 상궁을 거느리고 대전 연침에 나가 세종대왕께 미소를 머금고 아뢰었다.
"밤이 이미 깊었습니다. 오늘 황도길일 좋은 밤에 전하께서는 동방화촉 신방에 듭셔야겠습니다. 한밤 한시에 후궁 세 사람을 다 거느리실 수는 없습니다. 어느 처소에서 먼저 신방을 치르시겠습니까?"
대왕도 마주 웃으며 왕비에게 말씀한다.
"새 신랑 새 서방님이 어느 처소에서 신방을 치르겠다고 부끄러워서 자원할 수가 있소? 중매아씨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 그저 처분만 기다리겠소. 하 하 하."
"제가, 아무리 중매할미라 하나 신부가 한 사람이 아니고, 세 사람씩이나 되니 어디로 가십소사고 아뢰기가 난감합니다. 새 서방님께서 이미 신부 세 사람을 보셨으니, 명토를 박아서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호호호."
"나는 신부들 방에서 신방을 치르는 것보다도 중매아씨 방에서 동방화촉을 꾸며보았으면 종겠소. 하 하 하."
전하는 여자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시앗을 보는 왕비의 서운한 마음을 만분의 하나라도 위로하기 위하여 이같은 농담을 건네보았다. 심비의 옥안양협에 약간 홍조가 돌았다.
"망령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가례까지 치르시고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더구나 신첩의 몸에는 아비의 거상을 입었습니다. 희롱의 말씀을 내리시지 마시옵소서."
비의 옥안엔 홍조는 사라지고 흑수정 같은 슬기로운 눈동자에는 싸늘한 빛이 서렸다.
"마마, 내가 일부러 좀 농담을 했소이다. 사과를 하리다. 그러나 진정 어느 곳으로 먼저 가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소. 귀치 않지만 마마가 지시해주시오. 일이 그렇지 아니하오. 하하하."
전하는 다시 눅여서 말씀을 내렸다. 비전하도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같이 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전하께서도 보셨지만 모두 다 나이도 비슷비슷하고, 난형난제올시다. 그러나 생일이 조금씩 다릅니다. 한 날이라도 먼저 난 신부에게 우선권을 주어서 전하를 모시도록 하는 일이 좋겠습니다."
"그것 참 희한한 명답이로구려. 좋소. 그같이 합시다. 그렇다면 누가 제일 생일이 먼저 되오?"
"김씨의 생일이 먼저올시다."
"그다음에는?"
"강씨올시다. 다음엔 양씨올시다."
"그렇다면 오늘 밤엔 김씨한테로 가서 신방을 치르고, 내일 밤엔 강씨한테로 가서 신방을 치르고, 모레는 양씨한테로 가서 신방을 치르도록 합시다."
"삼일 신방을 치르지 아니하시고 단 하룻밤씩 동방화촉을 밝히시렵니까? 너무 박정하십니다."
"삼일씩 신방을 치른다면 33은 9, 아흐레 동안인데, 나라 정사는 살피지 아니하고 신방만 치르겠소. 생략하고 하룻밤씩만 치르기로 합시다. 하 하 하."
"그러시다면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상궁들에게 분부해서 오늘 밤엔 김씨의 처소에 화촉을 꾸미게 하겠습니다."
처녀 김씨의 처소에는 첫 번째로 신방이 꾸며졌다. 정면에는 백자동십첩병풍을 명화의 솜씨로 그려서 아늑하게 둘러쳤고, 아랫목에는 홍공단에 청룡 한 쌍을 수놓은 이불에 봉황장침을 곁들여 황홀하게 펴놓았다. 금박대홍초는 와룡은촉대 초꽂이 위에 빛을 뿜어 어룽거리고, 촛대 옆에는 처녀 김씨가 족두리 큰머리에 대홍단 활옷을 입고 단정히 앉았다가 왕후와 전하의 임어하시는 것을 보자, 시녀들의 부축을 받고 단정히 일어서서 두 분 전하를 맞이했다. 비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처녀 김씨에게 말씀을 내린다.
"네가 생일이 먼저인 까닭에 후궁 중에서 맏이 되었다. 그리해서 오늘 첫날밤은 네가 먼저 전하를 모시게 되었다. 모든 일을 너한테 맡기니 진선진미하게 전하를 모시도록 해라."
비전하는 부드럽고 다정한 말씀을 김씨에게 내린 후에 다시 함박꽃 같은 웃음을 전하께 향하여 풍기며,
"이제 중매어미는 소임을 다했습니다. 물러갑니다. 침소 안녕히 듭시고 즐거운 밤을 보내시옵소서."
세종은 눈에 가득 웃음을 머금고 말없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시녀들도 비전하의 뒤를 따라 물러갔다. 신방에 남은 사람은 전하와 처녀 김씨 단 두 사람뿐이었다. 전하는 무거운 예장으로 단정히 서 있는 김씨에게 첫 말씀을 내린다.
"앉거라. 온종일 큰머리 낭자에 거창한 예복을 입었으니 몸이 매우 고단하리라. 어려워하지 말고 자리에 앉거라."
김씨는 자원해 들어와서 간택에 뽑히기는 했으나 하늘 아래 제일 높은 이라는 임금을, 그리고 생전 처음 남성을 홋홋하게 대하고 있게 되니 그저 무섭기만 했다.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전하는 처녀 김씨의 두려움에 빠져 있는 빛을 살폈다.
"두려울 것이 없다. 어서 게 앉거라."
전하는 어수를 처녀의 어깨에 얹었다. 애무의 뜻을 표했다. 처녀는 숨을 죽이고 사르르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공포에 싸여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전하는 바들바들 떠는 숫처녀 김씨의 가련한 모습이 먼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마치 독수리에게 채여진 씨암탉의 모습 같기도 했다. 전하는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두려울 것이 없다. 마음을 놓아라. 사람과 사람이 대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임금이니 상감이니 하는 것은 명칭일 뿐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는 똑같은 사람이다. 너와 나는 오늘부터 내외지간이 된다. 마치 저 왕비마마가 나를 도와주듯 너는 나를 도와주는 소임을 맡은 것이다.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다."
처녀 김씨는 다소곳 고개을 숙이고 전하의 다정한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다.
"자아, 이제는 예복을 벗어라."
첫날밤이었다. 신부는 자기 손으로 예장을 끄를 수 없는 것이 이 나라의 아름다운 예절이요, 풍속이었다. 신부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앉아 있었다.
"목이 아프겠다. 내가 친히 큰머리 낭자를 내려주리라."
전하는 여러 해 전에 왕비 심씨와 가례를 치를 때 첫날밤에 왕비의 의상을 벗기던 그때 일을 연상했다. 먼저 칠보 구슬로 꾸민 족두리를 내리고, 다음 큰머리에 가로질러 꽂아 논 길고 긴 황금용잠을 뽑았다. 가체, 큰머리를 상자에 담고 경대 서랍에서 죽절백옥 비녀를 꺼내 밑머리를 틀어 꽂아주었다. 공작을 수논 화사한 붉은 활옷을 벗겨놓으니 노란 바탕에 자주깃과 자주끝동을 단 회장저고리가 궁초남치맛자락과 함께 촛불 아래 빛의 조화를 이루어 처녀 김씨의 얼굴은 달덩이같이 환했다. 거추장스런 대례복과 번폐스런 덧머리를 내려 밑맵시로 대하고보니 열 배나 돋보이고 아름다웠다. 눈은 호수같이 맑은 중에 정기가 별빛마냥 서려 있고, 솜털같이 부드럽게 누워 있는 검은 눈썹 사이는 답답하지 않게 양미간이 트여서 마음씨가 넓을 것 같았다. 입술은 주홍을 칠한 듯 혈색이 좋고, 녹빈에 풍성하게 드리운 두 뺨은 희고도 윤이 흘렀다. 이마는 넓고 좁도 아니하고 상아로 다듬어논 듯한 도둑한 코는 높지도 않고 얕지도 않았다. 턱은 복성스럽게 받혀서 상중하 삼정이 고르게 균형을 잡았다. 여자로서의 원만하고 나무랄 곳 없는 복상이었다. 첫째로 슬기스럽고, 덕이 있고, 입이 무겁고, 참을성이 많은 것 같았다. 세종은 와룡촛대리 화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신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비록 후궁이라 하나 일후에 왕실에 재난과 풍파를 일으켜서는 아니 될 것을 절실하게 느낀 때문이다.
세종은 우선 만족했다. 처녀의 몸에서 발산되는 슬기와 덕기를 느낀 때문이다. 동방화촉의 밤은 점점 깊어서 삼경으로 접어들었다. 사면에는 사람의 발자위 소리조차 없었다. 다만 들리는 것은 와룡촛대에 등심이 튀는 소리만 들렸다. 대홍초 청심이 툭툭 소리를 내며 불로초의 형국을 그리며 쌍심지로 벌룽거렸다. 이제는 진짜로 신부의 밑옷을 벗길 참이 되었다. 세종은 신이 아니었다. 거짓 인간의 본능을 외면하는 체하는 썩은 선비도 아니다. 순수하게 착하고 어빌고 슬기로운 한낱 사람이었다. 사람 이상의 사람도 아니고 사람 이하의 사람도 아니다. 한 사람의 인간다운 성실한 사람일 뿐이었다. 사람인 이상 사람의 테밖으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다만 극한과 극한에서 조절하고 탈피하려는 인의 철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일 뿐이었다. 사람인 세종은 달덩이같이 아름다운 처녀 김씨를 동방화촉 아래 대하고 보니 인간 본연의 춘정이 아늑하게 움직였다. 후궁을 정하게 된 것은 이미 기저의 사실이었다. 어떠한 이유로 후궁을 두게 된 동기는 말할 것 없이, 이미 가례까지 치렀다. 뿐만 아니었다. 동서고금의 역대 제왕은 모두 다 삼천 궁녀와 비빈 등 첩을 두었다. 새삼스럽게 변덕을 피워서 색을 멀리한다는 가짜 성인의 가식을 본받고 싶지는 아니했다. 다만 인생을 바르고 아름답게 미로 조절해서 살아나가려 했다. 와룡은촛대 벌룽거리는 촛불 아래 노랑회장저고리 남치마로 눈을 내리까고 조용히 앉아 있는 처녀 김씨의 달덩이같이 환한 모습은 전하의 눈에 볼수록, 볼수록 더욱 아름답게 뵈었다.
멀리서 닭이 홰를 치며 꼬끼오 울었다. 촛불이 벌룽거렸다. 불빛이 바람을 타서 꺼질 듯하다가 이내 환했다. 전하는 어수로 화선을 돌렸다. 화선 뒤에 비치는 신부 김씨의 얼굴은 은은한 불빛을 받아 더한층 춘정 있게 보였다. 전하의 마음은 봄바람이 이는 듯 움직였다. 어수를 들어 처녀 김씨의 손을 잡았다. 혈분이 좋은 탓인지 처녀의 손길은 명주를 만지는 듯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처녀 김씨는 조용히 앉은 채 전하의 손길을 받았다. 놀라지도 아니하고, 피하지도 아니했다.
"밤이 깊었구나! 눈을 붙여야 하겠다."
처녀는 대답 없이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새침하게 앉았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노랑회장저고리의 자주고름을 풀었다. 다시 속고름을 끌렀다. 모시 분홍 속적삼이 나타났다. 한산 세모시를 다듬어서 당홍물을 들여 지은 속적삼이다. 전하의 손은 처녀의 등에 촉촉히 땀이 서린 것을 느꼈다. 처녀 김씨의 살내음이 전하의 코에 스쳤다. 전하는 적삼 단추를 풀으려 했다. 단추만 풀면 속살이 드러난다. 처녀는 단추고를 손으로 막았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빛을 띠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록 후궁이라 하오나 가례를 치르고 빈의 자격으로 맞아들이신 소인이올시다. 천첩과 다르옵니다."
처녀 김씨의 얼굴빛은 깔끔했다. 전하는 놀랐다.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
생각했다.
"내, 미처 생각이 들지 못했구나. 용서해라."
말을 마치자 소맷자락으로 와룡촛대의 촛불을 후려쳐 껐다. 촛불은 꺼지고 심이 타는 내음이 잠시 방 안에 가득했다. 어둠 속에 들어 있는 처녀 김씨의 얼굴에는 만족한 미소가 고요히 흘렀다. 백옥같이 깨끗하고 고귀한 숙녀의 승리 웃음이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전하는 어둠 속에서 이 향기로운 웃음을 바라볼 수 없었다. 불을 끈 전하의 손길은 어둠 속에서 다시 처녀의 적삼 단추를 찾았다. 이제 처녀의 손은 대왕의 손을 막지 아니했다. 단추는 풀어지고 세모시 분홍 적삼은 전하의 두 손으로 곱게 벗겨졌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김처녀의 젖가슴은 관음보살의 조각같이 미끈하고 화사했다. 따스한 동정의 살내음이 전하의 후각을 교란시켰다. 전하의 심장은 총각마냥 두근댔다. 도다시 핀잔을 맞을까 두려웠다. 순수한 동정의 향훈이 떠도는 살결에 손을 대지 못했다.
전하의 할 일은 또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역시 첫날밤 신방을 치르는 행사의 하나다. 저고리를 벗긴 전하의 손길은 더듬더듬 어둠 속에서 치마끈을 찾았다. 전하는 또다시 처녀의 손길이 막을까 겁을 냈다. 아무러한 지장도 없었다. 이제는 불빛 없는 어둠 속에 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만 가지를 모두 다 전하께 맡긴 몸이었다. 적나라한 육체를 마음으로 숭배했던 전하께 아낌없이 바치는 모양이었다. 처녀 김씨는 사모의 절정에서 이제 광대무변한 사라의 심연으로 몸을 던지려는 것이다. 사각사각 남치마를 끄르는 소기라 어둠 속에서 일어났다. 온몸에서 솟아오르는 처녀의 훈향은 난향보다도 짙었다. 전하는 또 한 번 동정의 여향에 취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망연히 자신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전하는 번개치듯 김처녀의 알몸을 가로 안았다. 마치 솔개가 병아리를 채가듯 청룡 황룡이 어우러져 있는 수단 금침 속으로 집어넣었다. 김처녀는 아무런 저항도 아니했다. 이제는 전하가 자신의 의대를 벗을 차례다. 앞으로는 삼빈을 맞아들였으니 김씨, 강씨, 양씨 세 사람이 번을 들어서 뒷배를 보다 드리겠지만 아직은 동방화촉의 첫 밤을 치르는 때라 스스로 옷을 벗어야만 했다. 옷을 끄르고 면말을 벗었다. 신부를 뉜 금침 속으로 들어가 함께 누웠다. 먼 곳에서 바람결에 개 짖는 소리가 콩콩 들려왔다. 은한은 삼경이 지났고, 북두칠성도 기울어진 듯했다. 전하는 잠이 오지 아니했다. 팔을 늘여 처녀 김씨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이란 따로 있는 별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두 이성 사이에 마음이 기울어지기만 하면 사랑이 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하는 신부 김씨를 말없이 애무하기 시작했다. 처녀 김씨도 대왕을 사모하는 정이 홍수처럼 부풀어 올랐다. 소리 없이 전하의 애무하는 손길을 받았다. 전하는 처녀 김씨를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나의 후궁이 되기를 자원했느냐? 부귀영화를 취하려고 궁중에 들어오기를 자원했느냐?"
"아니올시다. 부귀를 취한다면 하필 부자유한 궐내에 들어와 후궁 노릇을 하겠습니까? 떳떳한 정실이 될 곳이 민간에도 허다하게 많습니다. 소인은 부귀를 누리기 위하여 후궁을 자원한 것이 아닙니다."
뜻밖에 두려움 없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자원을 했느냐?"
"소문으로 상감마마의 어지신 덕을 듣고, 마음으로 사모해서 마마의 후궁 되기를 자원했습니다."
"내가 무슨 어진 덕이 있기에 네가 소문을 들었단 말이냐?"
"말씀을 아뢰어도 좋습니까?"
"어서 말해보아라."
"상왕 전하께서는 심의정 대감에게 사약을 내리신 후에 역적의 따님이라 하시어 중전마마까지 내치시려 했다 합니다. 그런데 상감마마께서는 죄 없는 왕비를 폐하느냐고 극력 간하시어 결국 폐위가 되지 아니하셨다 합니다. 이 일로 인해서 민간의 백성들은 상감마마의 칭송이 대단합니다. 소인도 아비한테 이 말씀을 듣자옵고 상감마마를 숭배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이만큼 아내를 사랑하실 줄 아시는 상감마마라면 후궁도 넉넉히 거느리실 것이라 생각하와 방자하게 전하의 건즐을 받들 마음을 먹었습니다."
전하는 김씨의 솔직하게 아뢰는 말씀을 듣자 처녀의 마음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운 마음이 더한층 일어났다. 전하는 다시 김씨를 애무하며 말씀한다.
"궁중이란 곳은 근엄해서 처신하기 극히 어려운 곳이다. 더구나 남자보다도 여자들이 많아서 말이 많은 곳이다. 극히 몸조심을 해서 위로 중전마마를 받들고, 아래로 삼백 궁녀들을 거느려야 한다. 네 책임이 실로 무거우니라."
" '소학' 을 읽어서 처신하는 법을 약간 배웠습니다. 여자 셋이 모이면 간자가 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위로 상감마마와 중전마마를 받들고, 아래로 동료들과 함께 궁녀들을 거느려서 온 궁중이 화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온 궁중이 화목하도록 하겠다는 김씨의 대답을 듣자 전하는 크게 기뻤다. 우선 이만하면 좋은 후궁의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구나. 뜬눈으로 밝힐 수는 없다. 무궁무진한 이야기는 살면서 말하기로 하고 이제 잠을 청하기로 하자."
전하는 김씨의 몸을 이끌어 당겼다. 어둠 속에 따듯한 포옹이 이루어졌다. 멀리서 닭이 또 한 번 홰를 치며 울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전하는 신부 김씨가 바치는 은대야에 세수를 마치고, 외전으로 나가 정무를 살폈다. 한낮이 지난 후에 김씨에게는 신빈의 칭호가 내렸다. 이리하여 신부 김씨는 신빈 김씨가 되었다. 신빈 김씨와 동방화촉을 치른 다음날 저녁이었다. 전하는 저녁 수라를 새로 맞이한 신빈의 시중으로 맛있게 마치고 다시 외전 연침으로 나가 정무를 살피고 있었다. 이, 호, 에, 병, 형, 공의 육조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의 품의화 상소를 일일이 살피며 재결하는 비답과 수결을 두고 있었다. 밤은 술시를 넘어 해시에 가깝게 되었다. 제조상궁이 어전에 나와 아뢴다.
"오늘 밤에도 가례를 치른 후궁의 처소에서 신방을 치르셔야겠습니다. 어느 처소에 동방화촉을 밝히실는지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전하는 비로소 오늘 밤에도 새 사람을 대해야만 하겠다고 깨달았다.
"어제 중전마마께서 너희들한테 분부를 내리셨을 줄 안다. 그대로 시행하려무나."
"세 후궁의 나이가 비슷하므로 생일을 따져서 신방을 꾸미라 하교하셨습니다."
"분부대로 하면 좋지 않겠느냐?"
"신빈 김씨의 다음은 강씨올시다. 양시보다 생일이 위올시다."
"그렇다면 강씨 처소에 침소를 차리도록 하라."
상궁은 명을 받고 물러갔다. 전하는 여전히 유사들이 올린 품의를 재결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왕비 심씨와 제조상궁이 어전에 나타났다.
"중전이 어찌해서 또 왕림을 하셨소?"
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물었다. 왕비 심씨도 옥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아뢴다.
"오늘 밤도 중매어미 노릇을 해야 합니다. 어제는 신빈의 매파가 되었습니다마는 오늘 밤엔 강씨와 전하의 월로승 노릇을 해야 하겠습니다. 내일 밤까지만 소임을 마치면 신첩은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삼일 신방을 치르신 후에 뺨 세 번을 때리시든지 술 석 잔을 내리시든지 마마의 처분대로 하십시오. 호호호."
비전하는 명랑하게 웃음을 웃으며 전하의 일기를 재촉했다. 면랑하게 웃고 말씀하는 비전하의 태도에 세종의 마음도 흐뭇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설마, 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기로서니, 감히 중전마마의 뺨을 내 어찌 세 번씩이나 때릴 수 있겠소. 맘에 들지 않는다면 상급으로 약주 석 잔을 드리는 대신 벌주로 석 잔을 드리오리다. 하하하."
전하와 비전하는 이같이 무르녹도록 화합했다. 모든 일을 서로 이해하고, 모든 일을 서로 믿고, 모든 일을 서로 참는 때문이었다. 전하는 결재하던 모든 서류를 손수 정돈했다.
"갑시다!"
쾌활하게 한마디를 한 후에 비전하의 뒤을 따랐다. 또 다른 한 채 아담한 전각이었다. 그러나 주란화각이 아니었다. 민간의 여염 집모양 단청을 칠하지 아니한 아담한 집이다. 흰나무를 대패로 밀어서 그대로 지은 소박한 건축이었다. 세종은 검소한 기풍을 조성하기 위하여 후궁의 전각들은 일체 단청을 칠하지 아니하고 민가와 같이 건축을 하도록 일찍부터 분부를 내렸던 것이다. 일각문에 들어서면 괴석 서너 개를 화단 위에 세워논 잔디밭이 있고 두견, 철쭉, 동청이며 수양버들 네댓 주가 어른거리는 맞은 편에는 한 채 백옥이 두 벌 석계 위에 학이 날개를 편 듯 천 줄 기왓골이 활짝 팔을 벌려 푸른 하늘을 멋지게 이고 있다. 미끈한 모기둥과 아자 영창엔 일부러 주칠을 아니한 탓으로 청청한 관솔향내가 싱그럽게 코를 엄습했다. 명공의 솜씨가 울연히 이조의 건축미를 자랑했다. 육간 대청에 안방이 사간, 건넌방이 삼간, 뜰 아랫방이 이간, 찬간이 삼간, 부엌이 삼간, 순전한 민가의 구조 그대로다.
전하는 왕비 심씨와 상궁의 인도로 안방에 들어섰다. 방 안에는 홍초가 빛을 뿜고, 처녀 강씨는 상감이 임어하는 발자취 소리를 듣자 족두리와 당의 대례복으로 함께 있던 시녀의 부축을 받고 사뿐 일어서서 전하와 왕비를 맞이했다.
왕비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처녀 강씨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내렸다.
"오늘은 네가 전하를 모시어 동방화촉을 치르는 밤이다. 수줍어하지 말고 전하를 편안하게 모시어 다복하게 지내도록 해라."
분부를 내린 후에 다시 왕 전하께 치하하는 말씀을 올렸다.
"요조숙녀를 잘 다루십시오. 신첩은 이제 물러갑니다. 둘째 번 소임을 마치었습니다."
"미안하오. 연일 고단하시겠소."
전하 역시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화한 기운이 방 안에 가득했다. 왕비와 상궁이며 시녀들은 조용히 장지문을 닫고 물러섰다. 둘째 번 신방에는 전날 밤처럼 전하와 신부 단 두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처녀 강씨는 촛불 아래 두 손길을 마주잡고 그림같이 초연히 섰다. 오늘 밤부터는 몸과 마음을 오로지 전하에게 바치겠다는 초연한 태도다.
"앉거라."
전하는 손을 늘여 처녀 강씨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는 지난밤 신빈 김씨의 손길보다 싸늘했다. 혈분이 약간 김씨보다 부족한 모양이다. 그러나 강씨는 신빈 김씨모양 무서움을 타지 아니했다. 황겁하지 아니했다. 차근하게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예복을 벗어야 하겠다. 내가 큰머리를 내리고 예복을 벗겨 줄 테니 놀라지 말아라!"
처녀 강씨는 친정집 부모한테 미리 신방을 치르는 방식을 교양받은 모양이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했다. 안상한 얼굴빛으로 태연한 자세를 취했다. 전하는 전날 밤 신빈 김씨의 대례복을 풀듯 처녀 강씨의 큰머리와 낭자를 내리고 머리를 틀어 비취옥비녀를 꽂아준 후에 한삼 당의를 벗겼다. 평상복이 드러났다. 연둣빛 바탕에 자주깃과 끝동을 단 청초한 모습이 신빈 김씨보단 다른 또 하나의 일취가 있었다. 신빈 김씨는 달덩이같이 환한 얼굴이라면, 처녀 강씨는 마치 백수정으로 아름답고 균형 있게 명공의 솜씨를 빌려 조각해 논 차갑고, 맑고, 말쑥한 조형예술의 싸늘한 미를 풍기는 듯한 얼굴빛이었다. 눈은 흑수정이 까맣게 움직이는 듯했다. 코는 오똑하고, 얼굴은 비둘기 알 같이 색깔이 희고 갸름했다. 전하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러나 약간 성깔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전하는 처녀 강씨의 평복을 끄르기 위하여 전날 밤에 신빈 김씨에게 하듯 은촛대의 불을 끄려 했다. 순간, 처녀 강씨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첩은 한평생 전하를 받들어 모실 몸이올시다. 조급하게 굴지 마시고 먼저 침소에 편안히 듭시옵소서. 신첩은 몸을 끄르지 않은 채 불을 밝히고 전하를 모시오리다."
처녀 강씨의 말소리는 싸늘했다. 그러나 부드러운 애운성을 잃지 아니했다. 전하는 흠칫했다.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보통 여자가 아니라 생각했다. 전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물었다.
"불을 끄지 아니하고 자려 하느냐?"
"네, 신첩의 지극한 정성스런 소원이올시다. 전하께서는 먼저 편안히 침소에 드시옵소서."
"그러면 너는 자리에 들지 아니하려 하느냐?"
전하는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동침을 거부하는 줄 알았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괘씸하다고도 생각했다.
"어찌 신첩이 전하를 모시지 아니하오리까. 한평생을 전하께 바친 몸이온데 ---- 전하께서 침소에 듭시면 옷 입은 채 전하 옆에서 시측을 해서 자겠습니다."
전하는 어이가 없었다.
"첫날밤에는 새 서방이 신부의 옷을 벗겨주고 동침하는 것이 이 나라에 몇천 년 내려오는 풍속이 아니냐? 만약 그렇게 아니한다면, 신부 집에서는 신부가 소박을 당했다고 불길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냐?"
처녀 강씨의 아름다운 입가에는 미소가 약간 흐르는 듯했다. 지체치 않고 대답을 올린다.
"그러한 속담은 민간에 자자하게 떠도는 어리석은 통설이올시다. 앞으로 성주가 되실 전하의 취하실 일이 아닌가 합니다. 한평생 부부의 길을 의롭게 지키기를 천지신명께 맹세한 전하와 신첩이올시다. 모시는 첫날밤부터 친압한다는 것은 창부의 짓과 다름이 없습니다. 두고두고 전하의 우악하신 사랑이 감천에 샘물이 솟듯, 항상 새로워서 마지않기를 바라옵니다. 그리고 또 말씀을 아뢰겠습니다. 전하께오서는 어젯밤에 신빈 김씨의 처소에 신방을 치르셨습니다. 오늘 밤에는 편안히 취침하시어 피로를 푸시옵소서. 만약 육체 과로하신다면 큰일이올시다. 이 점 깊이 통촉하시옵소서."
처녀 강씨의 도란도란 아뢰는 화한 음성은 마치 옥소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했다. 조리가 있고 명랑했다. 전하는 비로소 신부 강씨의 불을 끄지 아니하고 옷을 벗지 아니하는 차원 높은 심경을 황연히 깨달았다. 경건한 마음이 가슴에 벅차게 물결쳤다. 과로할까 염려하는 지극한 정서이요, 교양 높은 의연한 태도다.
"네 말을 들으니 내가 오히려 부끄럽구나. 네 비록 한 여자에 지나지 않는 몸이라 하나 내 어찌 제 간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랴. 너는 앞으로 나의 스승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길이길이 나를 도와 복되게 하라."
전하는 말을 마치자 처녀 강씨의 원하는 대로 은촛대의 불을 끄지 아니했다. 처녀의 몸에도 더 손을 대지 아니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자신의 의대를 끄르고 금침 안에 들어 편안히 누웠다. 방 안의 온도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했다. 이불을 덮지 아니해도 취를 느끼지 아니할 정도다. 처녀 강씨는 조용히 일어나 은촛대의 화선을 돌렸다. 행여나 불빛이 전하의 얼굴에 비쳐서 잠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한 때문이다. 저하는 금침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아니했다. 눈을 감은 채 처녀의 동정을 살폈다. 처녀는 사뿐 일어났다. 전하는 은촛대의 화선 돌리는 것을 실눈을 떠서 보았다. 불빛이 가려지고 전하의 누운 곳에는 그늘이 졌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백령백리하구나!"
전하는 잠이 든 듯 약간 코를 고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여자가 전하의 누운 금침 곁으로 가까이 갔다. 전하가 손수 덮은 이불은 귀가 들리고 자락이 쏠렸다. 처녀는 전하의 잠이 깰세라 조심스럽게 이불귀를 누르고, 비뚤어진 이불자락을 꼭꼭 눌러서 바로잡았다. 행여나 방 안의 외풍이 전하가 덮은 이불 안으로 새어 들어갈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전하는 거짓 잠을 자고 있었다. 처녀의 하는 짓을 다 살피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희한한 여자다!’ 하고 차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다음 동정을 살폈다. 처녀는 뺨을 전하의 얼굴 위로 향했다. 귀를 기울여 전하의 숨소리를 들어보는 모양이었다. 전하는 잠이 깊이 든 듯 코를 골았다. 처녀는 안심이 된 듯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굽혔던 몸을 조용히 일으켜 이불을 덮지 아니한 채 치맛자락을 단정하게 매만지고 소리 없이 전하 곁에 누웠다. 자신도 잠을 청하는 모양이다. 저하는 고요히 눈을 감은 채 이 영리하고 소명한 여자의 행동을 살피자 감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불 속에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잠이 들었다가 깨는 시늉을 했다. 하품을 한 번 크게 했다. 옆에 누웠던 여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전하는 옆에 있는 여인을 누운 채 바라보았다.
"여태껏 자지 않았느냐?"
놀라는 채 물었다. 여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마악 모시고 자려고 누웠다가 일어난 길이올시다."
"네 고집도 무던하구나. 감기 들면 어찌하려고 이불도 덮지 아니하고 누웠더냐?"
"방안이 훈훈하와 덮지 아니해도 좋습니다. 그저 전하께서 피로하지 아니하시도록 안녕히 침소에 듭신 것만 고마웠습니다."
처녀 강씨는 상긋상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는 시침을 떼고 대답했다.
"네가 속옷을 벗지 말고 그대로 자라는 바람에 나는 편안하게 한잠 잘 잤다. 옷을 벗지 않았을망정 내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줄 알았더니, 그대로 댕그머니 누웠더란 말이냐? 얄밉도록 악지가 세구나."
전하는 귀여운 정을 이길 길 없었다. 이불 속에서 손을 빼어 여인의 손을 이끌었다.
"소인은 그저 전하께오서 안녕히 취침하시는 숨소리를 듣잡고 마음에 행복을 느꼈을 뿐이옵니다. 그저 전하께선 항상 강건하시어 이 나라, 이 백성들을 영화롭게 다스려 주시기만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옵니다."
전하는 참으로 양처현모감이라 생각했다. 또 한 번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네가 나를 위하고 생각해준 그 덕으로 오늘 밤은 초저녁부터 평안하게 잘 잤다.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테니 옷 입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오너라."
전하는 이불자락을 헤치고 여인의 손을 강하게 이끌었다. 옷 입은 채 이불 안으로 들어오라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여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항거하지 아니했다. 안심하고 전하의 곁으로 들었다. 이제는 비로소 완연한 한 쌍 내외다. 전하는 예절 높은 처녀의 행동에 더 한 번 도취되었다. 베개를 함께 한 전하는 처녀에게 물었다.
"너희 부모는 다 구존하냐?"
"네, 다 살아 있습니다. 양친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슨 벼슬을 했느냐?"
"백두올시다. 벼슬은 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합니다. 소과 때 급제해서 진사올시다."
"왜 벼슬을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다 하더냐?"
"벼슬을 하면 추한 사람이 되기 쉽다 해서 일부러 대과 과거를 보지 아니했습니다."
전하는 비로소 처녀의 교양이 높은 까닭을 짐작했다.
"벼슬이 추하다고 생각하는 집안의 딸로, 너는 어찌해서 간택에 자원을 했느냐?"
"아비가 항상 추한 세상을 한탄하므로 어진 전하께서 더욱 성주가 되시도록 하올 주제넘은 생각이 있사와, 아비의 반대를 물리치고 감히 자원했더니 다행히 간택에 뽑혔습니다."
"무슨 글을 읽었느냐?"
"대학과 논어를 읽었습니다."
전하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어허, 그랬더냐 ----."
전하는 한 마디를 하고 다시 또 한 마디를 했다.
"나를 잘 도와서 밝은 임금이 되게 해다오!"
이러해서 둘째번 신방을 치렀다.
날이 밝자, 대왕은 대전으로 나가 전과 다름없이 모든 정무를 살핀후에 승지를 불러, 강씨에게 영빈의 칭호를 내리라 했다. 승지는 명을 받들고 정원에 나가 첩지들을 쓴 후에 어보를 눌러 대왕께 올리고, 대왕은 첩지를 감한 후에 내관과 상궁을 시켜 강씨에게 전달했다. 이리하여 강씨는 빈의 대우를 받아 영빈 강씨가 되었다.
어느덧 석양은 꺼지고, 또다시 황혼에 접어들었다. 전하는 신빈 김씨와 영빈 강씨가 거행해 올리는 수라를 마쳤다. 등촉을 밝히고 어전에서 거닐고 있을때, 왕비 심씨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나타났다.
"저녁 수라를 진어하시었다는 말씀, 궁녀들을 통하여 듣자 왔습니다. 새 사람들의 거행이 소루하지나 아니하였습니까?"
"곧잘들 거행하는구려. 어처의 주밀한 것만은 못하지만, 그만들하면 급제야! 하하하."
"공연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무엇 잘했습니까. 그러나 모두 다 소명하고 영리한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신첩보다 백 배나 나을 사람들입니다. 이제 스스럼이 가시면 진선진미할 것입니다. 중매어미의 부탁이올시다. 많이 괴어주십시오."
"어처의 부탁을 내 어찌 받지 아니하오리까. 분부대로 고루고루 괴이오리다. 하하하."
전하와 비전하 양위분의 화음으로 주고받는 말씀을 듣자, 옆에 모시었던 신빈 김씨와 영빈 강씨도 고개를 다소곳 숙여서 미소를 머금었다.
"전하께 또 한 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또 있소? 어서 말씀하시오."
"오늘 밤은 중매어미의 소임이 끝나는 날이올시다. 유종의 미를 거두려 하와 전하를 모시러 왔습니다. 삼 일째 되는 신방을 치러줍시오."
비전하 심씨는 말씀을 마치자 방긋 웃음을 옥안에 띠었다. 입술 사이로 흰 이가 산뜻 드러났다. 맑고 고운 자태다.
"어처의 수고가 과연 많구려. 앙탈을 한들 되겠소. 중전마마의 분부대로 복종을 하오리다. 지상명령이니 어찌할 수가 있나, 하 하 하."
비전하는 이내 장지 밖에 있는 상궁을 불렀다. 상궁이 응답하고 들어왔다.
"너는 신빈과 영빈을 모시어 자기 처소로 돌아가게 하고 제조상궁을 들라 해라."
비전하는 다시 신빈과 영빈에게 분부했다.
"너희들은 각기 네 처소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해라."
두 빈은 비전하와 전하께 배를 올리고 상궁의 뒤를 따랄 어전에서 물러났다. 이윽고 제조상궁은 등촉을 밝히고 어전으로 들어왔다. 전각 앞에는 등촉방 내지 두 사람이 청사초롱을 받들어 전하와 비전하를 또 한 채의 후궁으로 인도했다. 또 한 채의 후궁은 영빈 강씨의 처소와 같이 아담하고 정결한 일좌별당이었다. 전하는 비전하의 인도를 받고 대청을 거쳐 큰방으로 임어했다. 세 번째 신부는 처녀 양씨다. 역시 신부의 대례복을 입고 전하와 비전하를 맞이했다. 두 분 전하께 배를 올리고 두 손을 모아 초연히 섰다. 비전하는 전하께 당부해 아뢴다.
"신빈과 영빈보다 어린 태가 많습니다. 마음이 풀솜같이 곱습니다. 길이길이 괴어줍시오. 신첩은 이제 큰 임무를 다했습니다. 물러가옵니다."
미소를 지어 전하의 마음을 편안케 한 후에 양씨의 어깨에 손을 얹어 다정하게 말씀을 내린다.
"오늘부터 한평생 전하께 몸을 의탁해서 지내야 할 너다. 일편단심으로 전하를 받들어 모시어라. 신빈과 영빈을 형같이 생각하고 궁중이 화합해 지내야 한다."
비전하는 안상하게 말씀을 내리고 제조상궁과 함께 어전에 목례를 드린 후에 걸음을 옮겨 중전으로 돌아갔다. 전하는 이제 삼일 신방을 치르기에 능숙했다. 신부 양씨에게 먼저 분부했다.
"앉거라."
신부 양씨는 전하가 시키는 대로 사르르 앉았다. 어찌나 얌전하게 앉는지 팔보화관 족두리에 달아논 금나비조차 흔들리지 아니했다. 전하는 한동안 양씨를 바라보았다. 중전의 말씀대로 마음이 무척 곱겠다고 생각했다. 모도 약해 보였다. 옷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 얼른 무거운 짐을 풀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족두리를 내리고 큰머리를 거두었다. 산호비녀를 꽂아 머리를 틀어얹었다. 활옷을 벗기고 나니 회장저고리에 남끝동을 단 처자의 모습은 마치 연연한 진달래꽃 한 가지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듯했다. 전하는 애처로움을 느꼈다. 더 이상 어리고 고운 처녀를 시달리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영빈 강씨에게 하듯 첫날밤 옷 벗기는 풍속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
"아비가 있느냐?"
양씨는 가만한 음성으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미는?"
"양친이 다 있습니다."
"네 어찌 후궁 되기를 원했더냐?"
"그저 상감마마께서 어지시단 말씀을 듣잡고 후궁 되기를 원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어진 것을 알았느냐?"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전하께서 어지시다 한다고 아비와 어미들이 항상 공송하는 말을 하기에 소녀는 한평생을 전하께 의탁하려 하와 자원을 했습니다."
대답 소리는 너무나 소박하고 솔직했다. 전하는 더 한 번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은 후에 고이 안아 금침 속에 눕게 했다. 이튿날 대왕은 신부 양씨에게 혜빈의 칭호를 내렸다.
누흔
이제 세 후궁의 동방화촉의 행사는 끝이 났다. 궁중 의례에 의해서 왕비 심씨는 정식으로 삼빈의 알현을 받아야 했다. 이 일은 마치 조정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조현하는 예절과 흡사했다. 왕비는 내전의 자존이요, 빈 이하의 모든 후궁들은 신하의 명분이 뚜렷이 있는 때문이다. 삼일 신방을 치른 후 나흘째 되는 아침, 중정 소속 제조상궁은 새로 은총을 받은 삼빈의 처소로 궁녀들을 보내서 중전께 배알하라는 영을 내렸다. 신빈 김씨, 영빈 강씨, 혜빈 양씨들은 일제히 족두리를 머리에 얹고 푸른 빛 당의의 예복을 갖춘 후에 제조상궁의 인도로 왕비 심씨도 왕비의 대례복인 적의에 봉황을 수놓은 홍배를 달고 중전 정침에 임어했다. 넓고 넓은 대청에는 화탄자가 깔려 있고, 화탄자 위에는 백간들이 화문석이 펼쳐졌다. 좌우 옆에는 빈의 다음 가는 계급인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들, 상왕인 태종의 후궁과 궁인의 직위로 상궁, 상의, 상복, 상식, 상침, 상공, 상정, 상기, 전빈, 전의, 전선, 전설, 전제, 전언, 전찬, 전식, 전약, 전등, 전채, 전정, 주궁, 주상, 주각, 주변치들, 주치, 주우, 주변궁, 내명부가 일제히 눈을 현란케 하는 여장의 대례복으로 좌우 편에 직위의 순서에 따라 비전하를 시립하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왕비는 있으나 아직껏 후궁이 없었다. 이러므로 이번에 신방을 치른 신빈, 영빈, 혜빈이 비로소 후궁이 되었다. 빈의 다음가는 귀인서부터 숙원까지의 내명부는 함빡 상왕인 태종의 후궁들이었다. 비록 아버님인 상왕의 후궁이라 하나 왕비에게는 신하가 된다. 이러하므로 크나큰 예식인 조현례식에 내명부의 자격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궁서부터는 비록 내명부라 하나 육체적으로 임금의 은총을 받은 후궁이 아니다. 다만 제각기 궁중의 소임을 맡은 궁인들이다. 비록 아버님인 상왕의 후궁이라 하나 왕비에게는 신하가 된다. 이러하므로 크나큰 예식인 조현례식에 내명부의 자격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궁서부터는 비록 내명부라 하나 육체적으로 임금의 은총을 받은 후궁은 아니다. 다만 제각기 궁중의 소임을 맡은 궁인들이다. 상궁은 상감과 왕비의 측근에 있어 모든 궁중 안의 일을 보살피는 책임이요, 상의는 의례의 책임을 맡은 궁인이요, 상복은 의복의 책임을 맡았고, 상식은 음식의 책임을 맡았다. 상침은 임금의 침소의 일을 맡고, 상공은 궁녀들의 공과를 심사하고, 상정과 상기는 기록을 책임맡았다. 전빈 이하는 손님을 대접하는 책임을 맡고, 전약은 약을 맡은 여의요, 전등은 등불을 차지한 나인이다. 주궁 이하는 궁상각치우의 음률하는 나인들이다. 이 가지각색의 내명부들은 삼빈의 조현례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왕후 심씨를 시립해 있었다.
주궁, 주상, 주각, 주우들이 녹의 홍상의 관복을 입고 악기를 타서 오음의 풍악을 알연히 아뢰는 속에 신빈 김씨, 영빈 강씨, 혜빈 양씨는 단정한 걸음으로 제조상궁의 인도를 받아 삼층 옥계를 밟고 중전에 서서히 올랐다. 태종 대왕의 후궁들을 위시하여 모든 내명부들의 시선은 삼빈의 들어오는 태도로 집중되었다. 이번에 왕비 전하가 친히 간택해 뽑은 세 사람 후궁들의 자색과 걸음걸이 등 일거수 일투족의 모든 행동을 주시해 보는 것이었다. 삼빈은 상궁의 인도를 받아 차례차례 줄을 지어 들어왔다. 푸른 당의, 붉은 치마에, 석웅황, 비취옥, 산호주, 자마노, 백옥, 야광주, 진주, 자수정 등 팔보 구슬을 단 족두리를 머리에 얹고, 사뿐사뿐 소리 없이 걸어 들어오는 삼빈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눈을 현황케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마치 움직이는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신빈 김씨의 얼굴은 달덩이같이 환하고, 영빈 강씨의 모습은 한 떨기 흰 백합이 훈향을 뿜어 움직이는 듯 청초하고, 회빈 양씨의 모습은 달빛 아래 진달래꽃이 이슬을 머금고 걸어 들어오는 듯했다. 모두 다 걸음걸이가 우아하고 유유해서 여유가 작작했다. 눈같이 흰 면말이 홍상을 가볍게 차면서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고개를 다소곳 숙이고 화문석을 가볍게 밟았다. 혹공단 족두리 한복판에 단 팔보 구슬들이 바르르 떨렸다. 세 사람의 새 후궁들은 왕비 어전 열 걸음밖에 횡으로 줄을 지어 조용히 섰다. 난형난제의 절대가인들이었다. 좌우편에 벌여 서 있는 내명부들은 모두 다 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비전하의 눈은 과연 보통이 아니시군. 어쩌면 저같이 일매지게 아름답소."
소곤소곤 속삭였다.
"어지신 비마마시라 성심을 다해서 어진 사람들을 고르셨으니 저같이 아름답구려."
"모두 다 심덕이 있어 보이기도 하는구려."
"왕실에 대하여 흥복이요, 국가에 대해서도 큰 경사올시다."
이때 제조상궁은 상의 세 사람에게 지휘했다.
"배알을 드리게 하오."
상의 세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삼빈의 곁으로 나갔다. 왕비가 진좌하신 옥좌를 향하여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주궁들이 아뢰는 풍악 소리가 또 다시 자지러지게 일어났다. 청아한 풍악 속에 큰절을 네 번, 비전하를 향하여 올렸다. 사배는 끝이 나고 풍악은 멈춰졌다. 비전하는 옹용한 화한 얼굴로 삼빈의 배알을 받은 후에 미리 준비했던 예물을 상궁들을 통하여 내렸다. 오동궤에 홍보로 싸서 내리는 예물이었다. 수백 명 내명부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예물상자를 바라보았다. 상궁은 신빈, 영빈, 혜빈에게 하나씩 하나씩 예물상자를 내렸다. 왕후 심씨는 예물을 받든 세 사람 빈에게 미소를 머금고 말씀을 내린다.
"내가 너희들에게 내리는 예물이다. 끄러보아라."
신빈, 영빈, 혜빈 세 후궁은 무릎을 꿇고 공손히 옹보를 끌렀다. 오동 상자 뚜껑을 열었다. 모든 내명부와 궁녀들은 금은보화의 찬란한 패물들이 들어 있는 줄 알았다. 침을 삼키며 눈을 똑바로 뜨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금은보화가 아니다. 책이 한 권씩 들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뜻밖이라 생각했다. 실망의 표정을 짓는 궁인까지 있었다. 왕비 심씨는 삼빈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예물은 속인들이 생각하는 금은주옥의 패물이 아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책이다. 서중자유황금옥이라고 한 옛 철인의 말씀이 있느니라. '소학'이란 책이다. 틈나는 대로 자꾸 읽어라. 반드시 너희들한테 큰 도움이 되리라."
세 후궁들은 일제히,
"삼가 의지를 받들어 교양을 쌓겠습니다."
아뢴 후에 책을 받들어 사은하는 절을 올렸다. 모든 내명부들은 근엄한 왕비 심씨를 새삼 다시 우러러보았다. 왕비는 다시 세 후궁에게 말씀을 내린다.
"너희 세 사람은 오늘부터 나의 다름 가는 지위에 있는 빈이다. 정일품의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조정으로 친다면 삼공의 지위에 해당한다. 승상접하해서 왕실을 번영케 하고, 국가를 중흥시키는 굄돌이 되게 하라."
순순히 이르는 왕비의 옥음은 엄숙하면서 다정했다. 왕비는 계속해서 말씀을 내린다.
"궁중은 여자가 많은 곳이다. 자연 말이 많다. 수구여병격으로 말조심을 해서 항상 화기가 애애하도록 하라!"
삼빈을 위시하여 모든 내명부들은 숙연히 옷깃을 바로잡고 귀를 기울여 듣는다. 비전하는 또 한마디 분부를 내린다.
"이곳이 비록 구중궁궐 깊은 곳이라 하나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자면 가시덤불 같은 고난의 길이 있고 때로는 천 길 절벽과 같은 험난한 행로도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을 참고 극복하는 곳에 비로소 해탈과 광명이 나타나는 법이다. 너희들은 의와 신을 근본으로 해서 참는 경지를 개척해야만 한다. 나도 이러한 철리를 전하께 배워서 한평생을 노력하는 중이다. 너와 나다 함께 이 길을 밟아서 전하께서 성주가 되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 비와 빈의 맡은 바 임무다. 우리 다 함께 노력하면서 전하를 받들기로 하자!"
모든 내명부와 시로 된 삼빈은 자애 깊은 비전하의 말씀에 감동되어 눈물을 머금는 이까지 있었다. 말씀을 마친 왕비 심씨의 기름한 속눈썹에도 촉촉히 이슬이 서린 듯 눈물 흔적이 보였다. 인의 철리를 새 후궁들에게 말할 때 아련히 비명횡사한 친정아버지 심의정의 원한 품은 모습이 떠올랐다. 폐비를 막기 위하여 상왕께 후궁 세 사람을 둘 것을 승낙한 전하의 명철한 처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기도 했다. 왕후 심씨의 품 안에는 한평생 마음을 변치 않겠다고 상투에 꽂았던 산호동곳을 거침없이 뽑아 맹세했던 전하의 신표를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참읍시다. 참읍시다. 나도 참고 당신도 참읍시다!'
이같이 당부하던 전하의 옥음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모든 지난 일을 생각하고, 오늘 후궁 세 사람의 조현례를 받고 보니 눈에 눈물이 안개 일 듯 서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상궁이 비전하께 아뢴다.
"이제 조현 의식은 끝났습니다."
비전하는 미소를 지어 묻는다.
"다음엔 무슨 절차가 남아 있느냐?"
"사찬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사찬 의식 때는 전하께서 비전하와 함께 임어하시어 같이 즐기십니다."
"그렇다면 의식을 마치고 자리를 바꾸도록 하라."
비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연침으로 돌아갔다. 또 한 곳 연회장에는 사찬상이 준비되었다. 정면으로 남향해서 왕과 왕비의 수라상이 놓였다. 좌편에는 신빈, 영빈, 혜빈 세 후궁의 사찬상이 놓이고, 우편과 북향판에는 귀인 이하 내명부들의 사찬상이 벌여 있었다. 분합 밖에는 여악들이 화관당의로 거문고, 비파, 가야금, 아쟁 줄을 고르고 있었다. 생과, 유과, 당속, 다식이며 정과, 편육, 전유어, 약식, 편들을 벌여논 산해진미의 음식상 위에는 상마다 공작미와 수파련 꽃을 꽂아서 봄기운이 무르녹았다.
상의는 삼빈 이하 내명부들를 차례차례 맞이하여 사찬장으로 인도했다. 알현할 때 입었던 대례복들을 고치지 아니했다. 넓고 넓은 사찬장은 녹의홍상으로 꾸민 화사한 내명부들의 의상으로 인해서 백화난만의 꽃동산을 이루었다. 이윽고 삼현육각이 어련히 전각 안에 화음을 아뢰는 속에 세종대왕과 왕후 심씨는 상의와 상궁의 인도로 옥좌에 임어했다. 춘산이 뭉그러지는 듯 울긋불긋 녹의홍상의 내명부들은 일제히 일어나 두 분 전하를 맞이했다. 전하는 손을 들어 내명부들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뜻을 표했다. 일제히 일어나 천자만홍의 화려한 동산을 이루었던 미인들은 또 한 번 옥산이 뭉구러지는 듯 소리 없이 물결을 지며 자리에 앉았다. 전선 차지 궁인들이 분주하게 수라상과 사찬상의 분과한 백지를 끄르기 시작했다. 상선 차지 궁녀가 옥잔에 가득 술을 부어 전하께 올렸다. 세종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잔을 들며 궁인에게 분부했다.
"비마마께도 한 잔 올려라."
비전하도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제 어찌 술을 마실 줄 압니까. 그만두어라."
"오늘 조현례를 받으신 날인데 사양하시면 아니 됩니다. 새 후궁들의 낯을 보시어 집배만 하십시오."
왕비 심씨는 전하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었다. 궁녀가 따르는 술을 잔에 받아 조용히 상위에 놓았다. 새 후궁 이하 모든 내명부들도 저를 들었다. 전하는 석 잔 약주를 마신 후에 왕비 심씨에게 묻는다.
"조현례를 받으신 후에 필시 후궁들에게 예물을 내리셨을 터인데 무슨 예물을 내리셨소?"
"그저 미미한 예물을 내렸습니다."
왕비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제조상궁이 옆에 모시었다가 아뢴다.
"소중한 큰 예물을 내리셨습니다. 책을 내리셨습니다."
책을 내렸단 말을 듣자 전하도 의외라고 생각했다.
"책을 내리셨다니 무슨 책을?"
"세 빈 마마께 '소학'을 한 권씩 내리셨습니다."
전하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더 한층 왕비를 존경하는 생각이 가슴 안에 벅차게 올랐다.
"'소학'을 내리셨어! 그것 참 크나큰 예물이로구나. 과인도 미처 생가지 못한 바다. 비마마께서는 과연 나의 스승이로구나!"
전하의 용안에는 경건하면서 흐뭇해하는 모습이 떠돌았다. 왕비 심씨는 치마를 쓸며 조용히 대답했다.
"모두 다 평시에 전하께서 신첩을 항상 가르치시고 지도해주신 덕택이올시다. 제 무슨 슬기가 있어 패물 대신 책을 내렸사오리까. '소학'은 신첩이 전하의 교시를 받들어 항시 읽던 책이올시다. 후궁들에게 크나큰 교양이 될까 하와 예물로 내린 것이올시다."
전하와 비전하의 수작하시는 말씀을 듣자 사찬상을 받고 앉았던 신빈, 영빈, 혜진은 저를 내리고 끓어 앉아 두 분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있다. 모든 내명부들도 저를 놓고 두 분 전하의 말씀을 듣는다. 제조상궁이 곁에 시립해 있다가 다시 세종전하께 아뢴다.
"중전마마께서는 '소학' 예물을 내리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속인들이 생각하는 좋은 금은주옥의 패물이 아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책이다. 서중자유항금옥이다.'하시는 좋은 말씀까지 내리셨습니다."
"중전마마께서 그같은 말씀까지 내리셨더란 말이냐! 과연 그러니라. 황금의 집뿐이랴. 글 속에는 우주와 천지간의 모든 섭리가 가득하게 있느니라."
세종대왕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제조상궁이 또 아뢴다.
"그리하옵고 중전마마께서는 이런 말씀을 또 내리셨습니다. '너희들은 승상접하해서 왕실을 번영케 하고, 국가를 중흥시키는 굄돌이 되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국가를 중흥시키는 굄돌'이 되게 하라고 후궁들에게 당부했다는 말을 세종전하는 상궁에게 듣자 왕후를 향하여 고개를 숙였다.
"진실로 고맙소. 모두 다 나라를 위해서 굄돌이 되어주시오. 중전의 크나큰 내조의 공을 과인은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다만 감격할 뿐이오."
왕후 심씨는 자리를 피하여 아뢴다.
"새 사람들에게 당연히 행할 길을 지도해준 것뿐이옵니다. 불감하여이다."
상궁은 곁에서 또 아뢴다.
"중전마마께오서는 도 다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궁중은 여자가 많은 곳이다. 자연 말이 많다. 수구여병 격으로 말조심을 하라.' 하셨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궁은 또 아뢴다.
"중전마마께서 또 이런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이곳이 비록 구중궁궐 깊은 곳이라 하나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자면 가시덤불 같은 고난의 길이 있고 때로는 천 길 절벽과 같은 험난한 행로도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을 참고 극복하는 곳에 비로소 해탈과 광명이 나타나는 법이다. 너희들은 의와 신을 근본으로 해서 참는 경지를 개척해야만 한다. 나도 이러한 철리를 밟아서 전하께서 성주가 되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 비와 빈의 맡은 바 임무다. 우리 다 함께 노력하면서 전하를 받들기로 하자!' 이같은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곁에서 듣던 소인들도 어찌나 훈훈하고 다정하시면서 명철하신 말씀인지 마음이 감동되어 눈물들을 흘렸습니다."
세종대왕은 상궁을 통하여 이 말씀을 듣자 형용해 말할 수 없는 감사로운 마음을 느낀다.
더구나 '나도 철리를 전하께 배워서 한평생을 노력하는 중이다. 너와 나, 다함께 이 길을 밟아서 전하께서 성주가 되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 비와 빈의 맡은 바 임무다.' 하는 대목에 가서는 전하의 안정에도 감격한 눈물이 눈시울을 적셨다.
"어어참, 오늘 말을 들었군!"
전하는 한마디를 한 후에 또다시 말씀한다.
"이제 우리나라는 훌륭한 나라가 아니되려야 아니될 수가 없다. 어진 왕후가 계시어 여러 후궁들을 지도하시고 모든 빈들은 왕후전하의 뜻을 받들어 한맘 한뜻으로 나를 도와줄테니 내 무슨 걱정과 근심이 있으랴! 실로 복스럽고 기쁘구나."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다시 신빈, 영빈, 혜빈을 향하여 사은하는 절을 올리고
"내 말을 들어라."
신빈, 영빈, 혜빈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전하를 향하여 큰절을 드린 후에 조용히 서서 전하의 말씀을 기다렸다.
"상궁을 통하여 중전마마께서 너희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들으니 마디마디 내 마음까지 감동시키게 하는 갸륵한 말씀이다. 너희들은 이 말씀을 폐부에 새겨서 왕실과 국가를 번영케 하는 굄돌이 되라. 내가 할 말을 중전께서 다 하셨으니 나는 도리어 할 말이 없다. 중전마마를 자모같이 길이길이 모시어라!"
전하는 삼빈에게 당부한 후에 천천히 어상에서 일어나 비전하와 함께 중전으로 향했다. 삼빈 이하 모든 내명부들은 두 분 전하의 뒤를 이어 제각기 처소로 돌아갔다, 복스러운 조현례와 사찬잔치는 화기 가득 찬 속에 파연이 되었다. 전하는 중전까지 왕비 심씨를 들게 한 후에 다시 정무를 살피기 위하여 외전으로 출어했다.
날은 저물고 밤은 차차 깊어 들었다. 왕후 심씨는 예복을 벗은 후에 편복으로 고쳐 입고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온종일 행사를 치른 피로가 온몸으로 엄습했다. 조현래를 받은 오늘 하루의 피로뿐만이 아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전 날도 삼일 동안 신빈, 영빈, 혜빈의 신방을 치르기 위하여, 전하를 모시고 행여나 실수가 있을 가 하여 만 가지 신경을 썼던 피로가 일시에 조수 밀듯 몰려들었다. 온몸이 풀솜처럼 풀리고 나른했다. 단지 이것뿐이 아니다. 왕후도 사람이다. 사람 중에도 감정이 날카로운 여자다. 비록 현숙하고 참을성이 많은 심비라 하나 홀로 사랑했던 전하를 세 사람의 젊은 여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교양과 범절이 무던한 심비다. 모든 것을 참고 참아서 겉으로는 항상 부드러운 미소와 온화한 말씨로 전하와 후궁들을 대해서 그야말로 승상접하하는 가지가지의 일을 향훈이 돌도록 진선진미하게 잘 맞추었으나, 마음 하편 구석엔 쓰리고 아프고 섭섭하고 서운한 생각을 씻으려야 씻을 길 없었다. 전하의 후궁 맞아들이는 크나큰 행사를 무사하게 마치고 나니 몸의 피로와 마음의 한이 일시에 밀어닥쳤다. 뿐만인가. 이 후궁을 맞아들이는 일은 전하가 자의로 맞아들이는 후궁이 아니다. 상왕인 태종의 명을 받아 자기를 폐비시키는 대신 맞아들이는 가례다. 마음은 더 한층 쓰리고 죄스럽고 괴로웠다. 자리에 누워 지난 일을 곰곰이 생각하니 만 가지 회포가 복받쳐 올랐다. 등촉방 상궁이 불을 켜러 들어왔다. 비전하가 동그마니 누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연일 피로하시어 고단하신가 봅니다. 금침을 내리오리까?"
"아서라. 그만두어라. 잠시 쉬었다가 일어나리라."
"촛대에 불을 켜겠습니다."
"불도 켜지 마라. 잠시 편히 누우리라. 물러가 있거라. 부를 때까지."
등촉방 상궁은 비전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조심조심 물러났다. 왕비 심씨는 다시 눈을 감고 고요히 누웠다. 아버지 심의정의 원통하게 돌아간 모습이 감은 눈 속으로 어렴풋이 나타난다. 참는다고 전하와 천 번 맹세를 했으나 이 일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아닌 체하고 태연했으나 도무지 참을 수 없다. 그리고 또 전하의 사랑을 분산시켜서 뺏긴 일도 참을 수 없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씻고 씻어도 자꾸자꾸 흘렸다. 베겟모가 촉촉하도록 젖었다. 밤은 점점 짙어 들었다. 등촉방 상궁은 중전 연침에서 나온 후에 비전하의 태도가 염려스러웠다. 제조상궁의 방을 찾았다.
"제조상궁님께 고합니다."
"왜, 항아님, 무슨 일이 있소?"
"중전마마께서 사찬연을 받으시고 들어가신 후에 너무나 큰일을 많이 치르셔서 몸살이 나신 모양입니다. 그대로 동그마니 누워 계십니다. 등촉을 밝히러 들어갔더니 불도 켜지 말라 하시고, 금침을 내려 드리려 해도 그만두라 하십니다. 감기가 듭실까 염려올시다. 제조상궁님께서 들어가 보십시오."
"불도 켜지 말라 하시고 누워 계시단 말씀요? 아마 몸이 몹시 불편하신 모양이로구만."
제조상궁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진둥한둥 중전 연침을 향하여 걸었다. 등촉방 상궁도 뒤를 따랐다. 이때 마침 세종전하는 저녁 수라를 마친 후에 연일 후궁들의 가례를 위하여 진심으로 심혈을 기울여 수고해준 왕비에게 감사한 뜻을 표하기 위하여 아무런 연통도 내리지 아니하고 옥보를 중전 침실로 옮겼다.
'너와 나 다 함께 전하를 도와서 성주가 되시도록 하자.'
후궁들에게 내린 중전의 고마운 말씀이 가슴 깊이 서려서 그대로 지내버리기 어려웠던 때문이다. 전하가 길고 긴 복도를 지나 중전 침실에 당도했을 때 제조상궁과 등촉방 상궁의 발길도 침실 문 앞에 나타났다. 상궁들은 허리를 굽혀 대왕을 맞이했다. 장영창 문은 캄캄한 어두운 빛으로 휩싸여 있었다. 전하는 상궁들에게 물었다.
"웬일이냐. 밤이 깊었는데 어찌해서 침전에 등촉을 밝히지 아니했느냐?"
전하는 등촉방 상궁과 제조상궁은 황공했다. 사실대로 고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까 승석 때 쇤네는 침전에 등촉을 밝히러 들어갔사옵니다. 그러나 중전마마께서는 몹시 피로하신 듯 누워 계시어 불을 켜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하옵고 금침을 내려 드리려 해도 잠시 누워 있을 테니 내리지 말고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혹시 감기나 드실까 염려옵니다. 그리하와 쇤네는 제조상궁과 함께 다시 문후를 아뢰러 들어오는 길입니다."
세종전하는 깜짝 놀랐다. 병환이 나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침전에 들어가지 전에 어서 이곳에서 불을 밝혀라!"
등촉방 상궁은 황망히 침전 밖에서 등불에 불을 밝혔다. 어둠 속에 가라앉았던 침전 장영창에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침전 안에서,
"누구냐?"
하는 심왕후의 음성이 가늘게 드렸다. 목소리는 흐느껴 오열한 후에 일어나는 콧소리다. 전하는 반가웠다.
"나요, 나야!"
제조상궁이 곁에서 고한다.
"상감마마께서 듭십니다."
제조상궁은 침전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전하는 침전 안으로 옥보를 옮겼다. 등촉방 상궁이 와룡촛대에 불을 밝혔다. 불빛이 환하게 방안에 가득했다. 전하가 듭시는 것을 안 비전하는 황망히 일어났다. 의상이 약간 흐트러졌다. 불빛에 비쳐지는 비전하의 옥안엔 눈물을 흘렸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났다. 비전하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짓고 한 손으로 옷깃을 매만지며 전하께 묻는다.
"어떻게 연통도 없이 임어하셨습니까. 미리 나가 맞이하지 못하와 죄송스럽습니다."
전하는 이슬 서린 비전하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엉클어진 가늘고 가는 세립자의 눈물방울은 와룡촛대 휘황한 불빛을 받아 자그마한 오색 무지개가 영롱했다. 비전하의 애수 어린 모습은 무한한 풍정을 자아냈다. 미소 속에 엉클어진 애수를 바라보는 전하의 마음은 죄어짜지는 듯 뭉클했다. 직감적으로 왕비의 애수 어린 심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연히 말씀했다.
"과인 때문에 연일 수고를 많이 하셨기에 불현듯 뵙고 싶어서 연통도 없이 왔소이다. 그랬더니 복도에서 상궁들을 만났소이다. 불도 아니 켜시고 금침도 펴지 아니하신 채 누워 계셨다 하니 몸이 편치 아니하십니까, 염려됩니다."
전하는 다정하게 비전하의 손을 잡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전하는 오른편 손을 전하께 잡힌 채 왼편 손은 슬며시 뒤로 감추고 보이지 아니했다. 여전히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아무렇지도 아니합니다. 다만 몸이 조금 고달프기에 불을 켜지 아니하고 누워 있었을 뿐입니다. 불을 켜면 눈이 부신 탓으로."
등촉방 상궁은 두 분의 다정히 말씀하시는 것을 뵙자 자리를 피하여 물러났다. 전하는 손을 이끌어 자리에 함께 앉았다. 비전하의 속눈썹엔 이제는 이슬방울도 말라서 보이지 아니하고 오색 무지개도 스러졌다. 다만 입가에 미소가 여전히 떠돌 뿐이었다. 전하는 비전하의 애수 띤 눈물 흔적이 마음에 걸렸다. 상궁들도 물러갔다. 조용히 비전하의 심경을 더듬어보고 싶었다. 비전하의 오른편 손을 잡은 채 상냥하게 묻는다.
"왜 우셨소? 마마!"
"언제 신첩이 울었습니까?"
"어질고, 착하고, 순진한 비전하도 거짓말을 하십니까? 나는 속이지 못합니다."
"절대로 운 일이 없습니다."
비전하의 눈웃음은 도담한 두 볼 사이로 흘러 입가로 아름답게 서렸다. 그러나 비전하의 왼편 손은 여전히 뒤로 감추고 보이지 아니했다. 전하는 빙긋 웃으며 비전하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씀한다.
"아까 과인이 들어올 때 마마의 안정에 눈물이 서려 있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불빛에 반사되어 가름한 속눈썹에 오색이 영롱한 이슬이 방울방울 맺힌 것을 보았습니다."
왕비는 이제, 더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미소를 짓고 대답이 없다. 전하는 왕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왜 우셨소?"
전하의 음성은 면화송이같이 포근하고 다정했다. 비전하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을 뿐 답이 없다.
"아버님 생각이 나서 우시었소?"
"아니올시다. 지난 일을 생각한들 소용이 있습니까. 아니 생각했습니다."
비전하의 얼굴엔 잠시 미소가 사라지고 쓸쓸한 빛이 떠돌았다.
"그럼 무슨 회포가 일어 우시었소?"
이때, 비전하의 왼편 손은 여전히 뒤로 돌려 감추고 있었다. 전하는 손을 감추고 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보고 싶었다.
"마마! 무엇을 손에 감추고 계시오?"
"아니올시다. 감춘 것이 없습니다."
비전하의 얼굴엔 약간 당황한 표정을 띠었다.
"아까부터 자꾸 손을 뒤로 돌리셨는데!"
전하는 치맛자락 뒤로 돌린 비전하의 팔을 이끌었다.
"무엇입니까, 손에 잡으신 것이? 나한테 보여서는 아니 되실 것입니까?"
"대범하신 전하께서 아녀자의 소소한 일을 물어 무얼 하십니까? 묻지 마시옵소서."
비전하는 손을 펴지 아니한 채 방긋 웃었다. 전하도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남자는 대범해야 한다지만 마마와 과인은 부부간이올시다. 왕과 왕비라 해서 체통을 지킨답시고 마음과 마음이 천리만리로 갈려 있다면 왕실 꼴도 아니 되고 나랏일도 아니 됩니다. 모든 일을 말씀해주시고, 모든 회포를 설파해주십시오."
전하의 용안엔 만인지상의 제왕이라는 독선의 위엄보다도 한 사람 지성스런 필부의 소박하고 순후한 진정이 서려 있었다. 비전하는 여전히 손바닥을 펴지 아니한 채 조용히 아뢴다.
"전하의 고결하신 인품과 수신제가하시는 갸륵한 점을 신첩이 어찌 모를 리 있사오리까. 전하의 넓으신 금도와 크나큰 홍은 밑에 잔명이 부지해 살아가는 신첩이올시다. 어찌 추호인들 전하를 기이오리까. 그러나 지금 신첩의 손에 감추어 있는 물건은 전하도 이미 다 아시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보여드리지 않습니다. 신첩이 어찌 전하를 기이오리까."
비전하의 옥안엔 여전히 화평한 미소가 떠돌았다. 전하는 풀지 않는 비전하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다시 말씀을 내린다.
"과인이 이미 아는 일이라 하니, 더욱 알고 싶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일은 마마가 무엇 때문에 불을 끄고 금침도 아니 덮고 눈물을 흘리셨는지, 그 점을 알고 싶어서 이같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마마의 손에 쥐신 물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소이다마는 그 물건과 관련해서 마마는 눈물을 흘리셨으니 비록 과인은 마마의 눈에서 다시는 눈물이 나지 아니하도록 하오리다. 그러기 위하여 이같이 안타깝게 보여 달라고 보채는 것입니다."
전하의 지성에 비전하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 살몃 손바닥을 폈다. 전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펼쳐진 손바닥에는 찬란한 빛을 뿜는 황금마구리 산호동곳이 놓여 있었다. 벌써 오래전 일이다. 한창 폐비 문제가 일어나고 후궁을 두어야 하느니, 마느니 하고 온 궁중이 불안 속에 빠졌을 때 전하는 마음이 변치 않는다는 신표로 상투에 꽂았던 산호동곳을 거침없이 뽑아서 비마마에게 주었던 바로 그 산호동곳이다. 전하는 비로소 왕비의 눈물을 머금고 울었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불도 켜지 아니하고 금침도 아니 한 채 애수에 잠겼던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너그럽고 참을성 많은 착하고 어진 왕비라 하나 역시 여자다. 폐비가 되는 대신 당신의 손으로 후궁들을 비록 뽑았다 하나 마음 한구석에는 섭섭하고 서운한 생각이 아니 들 리 만무했다. 혼자 차지했던 전하의 사랑을 세 사람 후궁에게 고루고루 나누어주게 되니 슬프기도 했다. 시름이 안개 일듯 가슴 안에 첩첩이 서리기도 했다. 더구나 크나큰 절차, 세 사람 후궁들의 가례와 신방 시에 알현례와 사찬연까지 다 치르고 아니 몸도 고단했지만 마음은 허탕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왈칵 울음보가 터졌던 것이다. 전하는 다정하게 비전하를 바라보며 묻는다.
"마마, 혹시나 내 마음이 변할까하여 신표를 바라보며 울으셨구려?"
"아니올시다. 전하의 마음이 변하실 리야 있겠습니까? 우연히 몸에 지녔던 신표를 꺼내보니 까닭 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왕비의 음성은 조용하면서 애원성을 머금었다. 전하는 다시 왕비를 위로한다.
"마마! 마마는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단 하나인 나의 귀의처입니다. 조금도 시름하지 마시오,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사오리까. 비마마는 나의 계심으로 해서 나라의 모든 일이 잘됩니다. 내 어찌 비마마께 대한 지성스런 마음이 추호인들 변하오리까? 다시 더 한 번 천지신명 앞에 맹세합니다. 산호동곳을 고이고이 한평생 지니시옵소서."
비전하의 눈에서는 감격한 눈물이 또 한 번 방울방울 떨어졌다. 전하는 용포 소맷자락으로 떨어지는 왕비 심씨의 눈물방울을 씻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