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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7-2

걸식하는 양녕

 

세종은 경기감사한테 또다시 특별한 전교를 내렸다.

'경기감사는 광주유수와 함께 다른 도의 수령보다 더한층 노력하여 양녕대군의 행방을 찾으라. 양녕이 가셨다 해도 보행으로 가셨을 것이니 멀리 가셨을 리 만무하다. 관속들을 독려하여 관하 각군에 긴밀한 연락을 취하라. 양녕을 예우하는 일에 대하여는 지난번 교서에 이미 자세히 말했으므로 더 말하지 아니한다.'

경기감사는 상감의 뜻을 받들어 관하 각군에 양녕을 예우하여 찾을 것을 두 번 세 번 당부했다.

한편 양녕은 괴나리봇짐 하나를 어깨에 메고 삿갓을 머리에 쓴 후 죽장망혜로 산성에서 내려서 장터로 향했다. 나올 때 아무런 지향도 없이 나왔다. 장터를 지나 삿갓을 젖히고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넓고 넓은 푸른 하늘이 가이 없이 머리 위에 퍼져 있다. 가슴이 시원했다. 세자의 자리도 우스웠거니와 소위 양녕대군이라는 칭호도 개 콧구멍 같았다. 푸른 하늘에 흰구름장이 둥둥 떠갔다. 아름다운 빙산 같기도 했다가 뭉그러지는 바윗돌로 변했다. 태산 같은 솜뭉텅이 같기도 했다가 부드러운 흰털을 가진 양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양의 모습은 다시 백룡으로 변하고 굼틀거리는 용의 몸은 바람에 날으는 순간, 흰범으로 변하고 또다시 천의무봉의 비천선녀 의 치맛자락으로도 변했다. 자유자재다. 거리낌이 없고 매인 데가 없이 유유했다. 양녕은 푸른 하늘에 날으는 자유자재한 구름장이 자기의 앞으로의 취할 태도라고 깨달았다. 젖혔던 삿갓을 내리고 막대를 짚고 일어섰다. 지향 없이 걸었다. 해가 저물면 들판에서 자고, 해가 뜨면 길을 걸어가기로 했다. 무념무상으로 산수를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다리가 팽팽하고 발가락이 아팠다. 해는 으스름 황혼이 되었다. 앞에 내가 보이고 내 건너편에 잔산반락으로 오붓하게 청산이 주춤 앉아 있는 곳에 십여 집 초가가 보였다. 저녁밥을 짓는 푸른 연기가 마을에서 일어났다. 양녕은 비로소 시장기를 느꼈다. 제왕의 아들로 한번 거지의 노릇을 하는 것도 일취가 있다고 생각했다. 초가집 중에 그중 기름이 흐르는 집을 찾았다. 과객 노릇을 했다. 안에서 개다리소반에 보리밥 한 사발과 고추장 한 종지를 놓은 밥상이 나왔다. 양녕은 민간의 순후한 인심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골육상쟁하는 궁중 형태보다 천백 배 낫다고 생각했다. 밥을 내어 대접해 준 주인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치르고 막대를 짚고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날은 이미 어두워 캄캄했다. 주인의 인심은 제법 순후했다. 주인은 양녕을 알 까닭이 없었다. 다만 걸식하는 과객으로만 알았다. 주인은 친절하게 말을 보낸다.

"밥이 되어 어두운데 길을 걸어가기 곤란하리다. 내 집의 헛간이 비록 누추하나 하룻밤 드새고 가구려."

말이 후하고 구수했다. 그러나 양녕은 남에게 더 신세를 지기 싫었다.

"주인장의 후하신 말씀은 고맙기 그지없소이다. 그러나 맨 데 없는 몸이니 걸어가다가 노숙이라도 하겠소이다."

양녕은 치사하면서 문밖으로 나섰다. 시장기를 이기지 못해서 밥은 한술 얻어먹었으나 잠까지 잔다는 일은 너무나 미안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개결하고 깨끗한 이상은 높았으나 아직 경험이 없는 탓이었다. 양녕은 촌가에서 나온 후에 평생소원인 막천석지를 해 볼 생각으로 어둠을 헤치고 동리 뒷산으로 기어올랐다. 삿갓을 벗어서 괴나리 보따리와 함께 청솔가지에 걸고 편편한 바윗돌을 찾아서 넓고 넓은 검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두 다리를 쭉 뻗고 번듯이 누워보았다. 아직 달이 뜨지 않은 밤이었다. 별빛이 더한층 초롱거렸다. 하늘에 가득한 것이 모두 다 별이었다. 은하가 하늘 한복판을 가로질러 물빛으로 흘렀다. 은하수 너머로 북극성이 광망을 뿜는다. 북두칠성이 푸른빛을 뿜어 대화를 하며 속살거리는 듯했다. 홀연 서울 상감이 계신 대궐 생각이 났다. 먼저 어머니의 생각이 간절했다. 어머니는 지금 자기를 보고 싶어서 식음을 전폐하고 피골상접이 되어 계시다 한다. 뵙고 싶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양녕은 얼른 눈앞에 떠오르는 모습을 쓰러뜨렸다. 보기 싫은 얼굴이었다. 제왕의 권세를 탐하는 얼굴, 여인의 색을 탐하는 얼굴,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구망측한 일이라고 기어코 하고 말아야 하는, 억세고 줄기차고 강하고 탁한 얼굴, 진정 보기가 싫었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맑은 별빛을 바라본다. 맑은 바람이 청솔가지를 뒤흔들며 일어났다. 여름 베짱이 소리가 수풀 속에서 은방울 수천 개를 흔드는 듯 아름답게 들렸다. 아우 세종대왕의 얼굴이 나타났다. 성격이 안상하고 머리가 슬기로웠다. 정기를 쏘아 반짝거리는 눈이 양녕을 향하여 미소를 짓는다. 함초름하게 예지를 머금은 눈이었다. 총명하고 인자하고 외유내강한 얼굴이다.

일찍이 효령이 자기의 자리에 은근히 침을 삼켰을 때, 얌전을 피면서 세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을 때, 자기는 웃으면서 효령을 발길로 찬 적이 있었다. 그때 아바마마는 가희아의 아들 경녕군한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자기를 폐한 후에 가희아의 아들로 세자를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때 어마마마는 극력 반대했다. 황희 황정승도 장자를 폐하는 법이 없다고 적극 주장했다. 자기 자신은 골육상쟁이 하기 싫어서 일부러 허랑방탕한 짓을 했던 것이다. 아바마마는 하는 수 없어서 자기를 폐하고 셋째 충녕으로 세자를 삼았다. 어머니는 다 같은 자기 아들이면서도 장자는 폐할 수 없다고 적극 반대했다. 어머니는 치마 두른 여자지만 대범하고 명분을 지킬 줄 알았다. 어머니의 큰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그러나 자기는 임금의 자리를 주어도 아니 받을 것을 이미 결심했던 것이다. 추하고 악해야만 하는 그 임금의 자리가 몸서리가 나도록 싫은 때문이다. 그러나 아바마마는 충녕을 세자로 삼은 후에 몇 달이 아니 가서 충녕한테 왕위를 선위했다 한다.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탐욕 많은 아버지가 어떻게 왕의 자리를 충녕한테 내주었을까? 아버지도 늙어가니 마음이 차차 변해가는구나 생각했다. 양녕은 다시 하늘 북편에 번쩍거리는 자미원 안에 있는 북극성을 바라보며 새로 상감이 된 충녕을 생각해 본다. 자미원 안에 있는 북극성은 제왕의 별이라고 예로부터 알려진 때문이다. 새 임금은 인자하고 안상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예지가 비범한 인간이다. 함부로 권욕을 탐해서 골육상쟁을 할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다. 강하고 탐욕 많고 극성스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후한 덕과 슬기로운 예지로 만백성의 지도자가 된다면 나라는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형제간에 골육의 변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국태민안하다면 이만 다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밑에 있는 소위 대신이란 위인들은 아직도 고루한 무리들이었다. 형제지간의 골육의 변을 조장하려 했다. 자기가 반란을 일으킬까 겁을 집어먹고 자기의 입성을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어머니 되시는 상왕비께서 척골이 되도록 자기를 생각해서 서울로 불러 달라 했건만 아니 된다고 펄쩍들 뛰고 반대를 했다. 뿐만인가. 자기가 변을 일으킬까 보아 상왕께 아뢰어서 자기의 수족들을 끊어버렸다. 팔장사를 쫓아내고 명보 내외까지 좌우에서 시중을 들지 못하게 했다. 그뿐인가. 광주 판관을 보내서 수직하게 하고 행동을 염탐하기 위하여 관비까지 보내서 밥을 짓게 했다. 가소롭기 짝 없는 일이다. 자기 자신은 임금의 자리를 주어도 받을 사람이 아니다. 나라의 큰아들로 세자가 되었건만 그 추하고 구역질이 나는 제왕의 자리에 나가기가 싫었다. 일부러 미친 체하고 떡가게에 엎드러지는 격으로 장래 임금이 되는 세자의 자리를 떠나기 위해서 매사냥을 하고, 기생을 동궁으로 불러들이고, 남의 첩을 뺏고, 갖은 방탕한 생활을 다 해서 오늘날 폐세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의 참뜻을 몰랐다. 폐세자된 것이 분해서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까 겁을 집어먹었다. 그래서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 역시 별수 없었다. 자기의 본심을 몰라주었다. 아버지는 마음을 붙이라고 달래는 것인지, 광주에다가 새로 집을 지으라 했다. 그러나 광주 판관을 시켜서 자기를 보호해준다는 아름다운 이름 아래 군노사령배를 거느리고 파수를 보게 했다. 모두 다 개똥같은 수작이었다. 꼬락서니가 보기 싫었다. 슬며시 몸을 빼쳐 나온 것이다. 가만히 뒤에 숨어서 그들의 당황해하는 꼴이 보고 싶었다. 양녕은 검은 하늘에 금모래를 끼얹은 듯한 황홀 찬란한 여름밤의 별빛을 바라보면서 슬며시 잠이 들었다. 맑은 바람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밝은 달은 그의 몸에 자애로운 빛을 던져주었다. 인간 세상에서 사랑을 모르고 자라난 양녕은 가이없는 무변대 우주의 넓은 사랑을 받으며 혼곤히 잠이 들었다.

양녕이 항상 소원하던 막천석지의 대경지를 실천해 보는 것이다. 얼마 후에 양녕은 홀연 잠이 깼다. 동이 환하게 터졌다. 온몸이 축축하게 이슬에 젖었다. 옷은 후줄근해지고 다리팔이 쑤시고 아팠다. 온몸이 노곤했다. 등에는 으스스 오한을 느꼈다.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몸이었다. 막천석지를 항상 이상으로 생각했으나 막상 당해놓고 보니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날마다 한데서 잠을 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소나무 가지에 걸었던 삿갓과 괴나리 보따리를 걸머지고 막대를 짚고 일어섰다. 몸은 으스스하면서 배가 고팠다. 어젯밤 촌가에서 얻어먹은 보리밥은 하룻밤 사이에 다 내려간 모양이다. 막대를 짚고 서 보았다. 지향이 없다. 갈 곳을 잠깐 생각해 본다. 어제 승석 때 식은 밥을 얻어먹었던 그 동네로 다시 내려가서 구걸하기는 싫었다. 아직 걸인의 때가 물들지 아니한 양녕이었다. 염치와 체통을 지켜보겠다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동네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산을 타고 걸어보기로 했다. 산을 넘었다. 또 한 산을 넘었다. 구불구불 산길로 십여 리를 걸었다. 크고 푸른 산에 으쓱 고개를 들어 흰구름장을 어루만지고 있는 일좌청산 아래 아담한 절이 보이고 종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양녕은,

'절이로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가만히 기뻐했다. 잠시 절에 몸을 의지해보리라 생각했다. 양녕은 절 동구를 지나 산문으로 들어섰다. 보전 안에서는 목어 치는 소리와 함께 늙은 노장의 독경 소리가 들리고 뜰 아래는 상좌 중 두어 명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양녕은 한 손으로 막대를 짚고 한 손으로 삿갓을 쳐들었다. 상좌중을 향하여 말을 건넸다.

"지나가는 과객이 헐각을 하러 들어왔으니 잠깐 법당 마루에 쉬어 가게 하는 것이 어떠하냐."

양녕은 아직도 양반티를 버리지 못했다. 바라보니 나이 어린 상좌 중이었다. 해라를 해 붙였다. 상좌 중들은 거지꼴에 말하는 투가 아니꼽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빌어먹던 말뼈다귀가 거만하게 해라를 하나 하고 대답을 하지 아니했다. 양녕은 화증이 벌컥 났다. 자기가 지금 빌어먹는 거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잊었다. 생각도 아니했다. 세자로 있을 때 아랫사람들을 꾸짖던 풍도가 새삼 일어났다.

"이놈들, 어찌 대답이 없느냐?"

호령이 추상같았다. 상좌 중들은 거지의 꾸짖는 소리를 받을 리 만무했다.

"어디서 빌어먹던 말 뼈다귀가 이곳이 어디라고 큰소리를 치느냐. 여기는 도량이다. 과객을 받는 곳이 아니다. 빨리 물러가거라."

상좌 중 하나가 지지 않고 호통을 치며 해라를 해 붙였다. 양녕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을 딱 부릅떴다.

"이놈, 뉘 앞에 해라를 하고 호통을 치느냐."

거지가 호통을 치면서 눈을 부릅뜨는 것을 보자 상좌 중들은 어이가 없었다.

"뉘 앞이라니 참 별꼴 다 보겠다. 거지꼴에 뉘 앞이 다 무어냐. 여기는 거지 대접하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촌으로 내려가서 빌어먹어라."

상좌 중들은 지지 않고 기승기승 대거리했다. 양녕은 참을 수 없었다. 손에 들었던 막대를 들어 상좌 중들의 등판을 후려갈기며 꾸짖는다.

"이놈들, 대자대비한 불가의 법을 배우고 불경을 공부하는 놈들이 사람 대접을 이같이 할 수 있느냐. 너희 주지를 나오라 해라."

양녕은 벽력 같은 소리로 호통을 쳐 꾸짖었다. 상좌중들은 고분고분 거지의 매를 맞을 리 없었다.

"밥을 빌어먹으러 온 거지놈이 노구한테 손찌검을 하느냐. 적반하장이라더니 별꼴을 다 보겠구나."

상좌중들은 소리를 치며 빗자루로 양녕에게 대거리했다. 절 안이 불끈 뒤집혔다. 이곳에서도 장삼 입는 중이 나오고, 저곳에서도 가사 맨 중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다 양녕을 향하여 꾸짖고 욕했다.

"거지 놈의 주제에 누구한테 대거리하느냐. 저놈을 잡아서 법소에 넘겨라."

"그깐 놈의 거지 놈을 법소까지 데리고 갈 것 무어 있느냐. 법당 앞에 꿇어 놓고 매질을 쳐라."

중들은 고함을 치며 떠들어 댔다. 양녕은 중과부적이었다. 곤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곤욕을 당하게 되었다. 양녕은 막대 한 개를 들고 사냥할 때 창 쓰던 법으로 에워싸고 잡으러 들어오는 대중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때 홀연 보전 정문이 활짝 열리며 노장 중 한 사람이 뜰 아래로 굽어보며 대중들을 꾸짖는다.

"어째, 이리 소란들 하냐."

늙은 음성이건만 명랑하고 쨍쨍했다. 대중들은 일제히 훤화를 그치고 노장 중을 향하여 공손히 예배를 올렸다. 노장 중은 다시 음성을 가다듬고 묻는다.

"웬일들이냐?"

마당을 쓸던 상좌 중이 대답한다.

"웬 걸인 하나가 와서 밥을 달라고 하기에 이곳은 도를 닦는 곳이지 과객을 대접하는 곳이 아니라 했더니 욕설을 막 퍼붓고 막대로 사람을 함부로 칩니다. 젊은 자가 심보가 아주 고약합니다."

상좌 중은 노장 중에게 하소연했다. 듣고 있던 양녕이 버럭 소리를 높여 상좌 중을 꾸짖는다.

"이놈, 거짓말을 하지 말라. 신문에 불도를 닦고 있는 놈이 거짓말을 해서 쓰느냐. 내가 다리를 쉬어 간다 했지 언제 밥을 달라 했느냐. 이놈, 거짓말을 하면 혀를 뽑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양녕은 시장기가 돌면서도 남에게 굽히기는 싫었다. 까치 뱃바닥 같이 흰소리를 탕탕했다. 목소리가 쨍쨍 울렸다. 비록 삿갓을 쓰고 괴나리 보따리를 어깨에 메었을망정 걸식하는 과객의 티가 나지 아니했다. 어딘지 귀인의 풍모가 드러났다. 호호백발인 노장 중은 눈같이 흰 수미 아래 반짝이는 노안을 들어 양녕을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결코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과객이 아니었다. 의복은 비록 초라하고 죽장망혜에 과객의 모습으로 차렸으나 범상한 사람같이 보이지 아니했다. 어디서 한두 번 본 얼굴 같은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아니했다. 머리에 번쩍하고 섬광이 스쳤다. 걸인의 풍모는 요사이 자주 상종하는 효령대군의 모습과 비슷했다. 우뚝한 코와 큼직한 눈이며 기름한 얼굴판이 바로 효령대군의 얼굴판이었다. 목소리조차 비슷했다.

'웬일일까?'

혼자 생각하는 찰나, 문득 광주산성에 폐세자가 내려와 있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호협하고 맨 데 없어서 상왕의 눈에 나서 폐세자가 된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폐세자가 걸인 행색을 하고 뛰어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노장 중은 석장을 짚고 뜰 아래로 내려섰다. 상좌 중과 대중들을 꾸짖어 물리쳤다.

"찾아오신 손님한테 무례한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된다. 저리들 물러가거라."

모여 섰던 제자들을 물리친 후에 노장 중은 양녕 앞으로 나가 합장을 올리며 사과하는 말을 보낸다.

"산속에 칩복해 있어서 견문이 없는 애들이 손님께 실경을 했으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은근히 인사를 했다. 노장 중은 말을 마친 후에 양녕의 손을 잡았다.

"빈도의 처소로 올라 가십시다."

양녕은 노장 중의 공손한 태도에 역정이 적이 풀렸다.

"폐가 되면 어찌하오."

비로소 부드러운 음성이 나왔다.

"천만에 말씀이올시다. 폐될 까닭이 없습니다. 잠깐 빈도의 방장으로 가십시다."

"잠시 다리를 쉬어 가려던 것이 미안하기 짝이 없소."

양녕은 사양하면서 못 이기는 체 노장 중의 뒤를 따랐다. 노장이 당으로 오르자 방장에 있던 동자중이 급히 끌에 내려 노장과 양녕을 맞이했다. 양녕은 삿갓을 벗고 괴나리 보따리를 마루 끝에 놓은 후에 짚신 감발의 먼지를 털고 당으로 올랐다.

노장 중은 동자중에게 명한다.

"손님께 세숫물을 드려라."

동자중은 노장의 명을 받들어 오지 대야에 바위 큼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떠서 바쳤다. 양녕은 마루 위에서 씻기가 미안했다. 오지 대야를 들고 돈대 아래로 내려섰다. 노장 중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만류한다.

"청 위에서 씻으실 것을."

"아니올시다. 돈대 위에서 씻기도 미안합니다."

양녕이 말을 마치고 오지 대야에 손을 담가보니 물은 얼음같이 차서 뼈가 저리도록 시리다. 두 손으로 물을 가득히 움켜서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이 쇄락했다. 오장육부까지 맑고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진세의 티끌이 다 한꺼번에 씻겨버리듯 했다. 양녕은 맑은 물로 발까지 씻고 청 위로 올랐다. 노장을 향하여 치사했다.

"맑은 샘물이 인간 세상의 물 같지 아니하오. 진세의 티끌이 다 씻겨지는 듯하오. 거러지의 행색으로는 너무나 과분한 공양을 받는 것 같소."

노장 중은 양녕의 말하는 투를 듣자 자기의 추측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말하는 어휘가 고상했다. 확실히 빌어먹는 거지가 아니었다. 노장 중은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지금 손에 담그신 물은 세심대에서 흘러내리는 세심천이올시다. 이 물로 몸을 씻으면 인간 세상에 물들었던 티끌이 단번에 다 씻겨집니다."

노장 중을 말을 마치자 동자중을 불렀다.

"다를 올려라"

동자중은 뜰 아래서 달이던 다를 올렸다. 다종은 광주분원에서 만든 소박하고 깨끗한 백자였다.

"자아, 다를 들어보십쇼."

노장 중은 자기가 먼저 다종을 들고 양녕한테 권했다. 양녕이 두 손으로 다종을 받아들고 웃으며 대답한다.

"거러지의 주제에 다를 마시기 과분합니다. 다 맛을 알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마시는 다올시다. 하느님이 사람을 내셨을 때 왕자 공손과 걸인을 구별해서 내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람이면 모두 다 밥도 먹고 다도 마실 자격이 있습니다."

노장 중은 의미 깊은 대답을 했다. 마치 선 같은 문답 속에 뜻이 깊었다. 양녕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중이 나의 본색을 짐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적이 마음이 불안했다. 노장이 다종을 들어 마셨다. 양녕도 다종을 입술에 대었다. 다수가 혀끝에 닿기 전에 맑은 향기가 가득히 코에 스쳤다. 혀가 거뜬했다. 창자로 스며드는 청향에 온몸이 거뜬했다. 양녕은 노장 중을 향하여 물었다.

"내가 비록 걸인이오마는 약간 다 맛을 본 일이 있소이다. 이 다가 무슨 다요?"

양녕은 다향에 취하여 무심코 말을 해놓고 '아뿔싸, 내가 경솔했구나' 하고 후회했다.

"이 다는 세심대 앞에 천연으로 돋난 작설입니다. 세심천 샘물로 다를 우리면 이같이 맑고 향기롭습니다. 그러기에 이 다를 세심다라 합니다."

양녕은 노장 중의 세심타령이 귀에 거슬렸다.

"이 다는 우리나라 상감이나 탐관오리한테 마시게 하면 꼭 좋겠소이다. 나 같은 거러지야 미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노장 중은 짐짓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어째 그렇습니까?"

"내 몸은 비록 겉으로는 더러우나 마음은 깨끗합니다. 걸인 쳐놓고 마음이 깨끗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겠소. 마음이 청백하니 할 수 없어 거지가 되는 것 아니겠소. 하하하."

노장은 다시 걸인의 심중을 떠보기 위해서 묻는다.

"걸인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요. 게을러서 인간의 낙오자가 되어 거지가 되는 사람이 있고, 공연히 결벽증에 걸려서 고집이 세어서 거지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류가 몇 가지 되지요. 그러나 무슨 연유로 나라님한테 세심 다를 드려야 한다 하십니까?"

"허허, 노스님은 모르시는구려. 임금 노릇 하는 이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 골육상쟁을 해야 하고, 벼슬을 하는 자들은 탐관오리가 되어야 하니 이자들한테 세심 다를 마시게 할 것이지. 나 같은 거지한테는 권할 필요가 없소이다. 배가 고프니 밥이나 주시오. 하하하."

거지 양녕은 말을 마치자 호탕하게 웃었다. 노장 중은 이분이 확실히 폐세자로구나 생각했다. 노장 중은 설오란 중이요, 절은 수종사란 절이었다. 설오는 무학의 뒤를 이어 이름이 높았던 고승이었다. 왕가의 대접을 받아서 태조와 태종께 여러 차례 알현한 일이 있었고 근자에는 양녕의 아우 효령대군과 교분이 두터웠다. 항상 효령대군의 부름을 받아서 양주 회암사로 놀러 가기도 하고, 효령이 설오를 찾아서 광주 수종사로 놀러 오기도 했다. 설오는 양녕이 세자로 있을 때 상면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우인 효령대군을 통해서 양녕의 성격이 활달하고 호협해서 녹록지 아니할 뿐 아니라 일부러 세자의 자리를 그의 셋째 아우인 충녕에게 내주기 위해서 거짓 미친 체하면서 황음방탕한 짓을 거침없이 했다는 사실을 자세히 들어 알았다. 뿐만 아니었다. 효령이 불교에 의존하게 된 내력도 역시 양녕이 효령의 얌전 피우는 것을 발길로 차서 세자 될 사람은 따로 있다고 야유한 때문, 효령은 크게 깨닫고 불교로 귀의했다는 사실도 효령의 술회를 통하여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설오는 양녕을 항상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것이다. 그 후에 과연 양녕은 폐세자가 되었고, 충녕은 양녕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되었다가 태종이 선위를 해서 왕위에 나갔고, 양녕은 광주로 쫓겨서 산성 안에 우거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후에 설오의 귀에는 또다시 소문이 들어왔다. 상왕과 왕 전하는 상왕비 전하의 애원하시는 말을 듣고 양녕을 서울로 불러들이려 했으나 정부 대신들이 필사적으로 반대를 하여 결국 양녕은 서울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수족들까지 다 쫓아 보낸 후에 광주 판관이 군노사령들을 거느리고 양녕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설오는 마음속으로 깊이 양녕을 동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과객의 얼굴과 그의 언동을 살펴보니 보통 걸인이 아니었다. 의지가 헌앙한 중에 얼굴판은 효령대군과 비슷했다. 확실히 양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설오는 양녕에게 차를 대접한 후에 손을 모아 공손히 합장을 하며 미안한 인사를 한다.

"상좌 중들이 무엄해서 귀인을 몰라뵙고 방자한 행동을 했으니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양녕은 노장 중이 자기를 향하여 귀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자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양녕은 잠깐 놀란 마음을 진정한 후에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빌어먹는 걸인이 젊은 사람들한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 아닙니까. 공연히 언성을 높여서 대사를 놀라게 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 역시 나이가 젊어서 성정이 급했습니다."

양녕도 노장한테 사과를 했다. 노장은 양녕이 시장할 것을 짐작했다. 뜰 아래 시립해 섰는 동자중을 불렀다.

"너 부엌에 가서 내 밥과 손님의 진지를 가지고 오너라."

동자중은 노장의 명을 받들어 법당 뒤 부엌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노장과 양녕의 밥상이 겸상반으로 들어왔다. 바리때에 밥이 담기고, 나무로 만든 탕기에는 표고국이 향기로웠다. 도라지 생채나물에 튀각이 한 조각씩 놓였다.

"산중에 찬이 없습니다. 맛없는 산채와 해초 튀김이 있을 뿐입니다. 맛이 없더라도 달게 잡수시기 바랍니다."

양녕도 겸손한 말을 아니 보낼 수 없었다.

"말씀을 낮추어 주십쇼. 지나가는 과객을 이같이 우대해 주시니 감격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향기 높은 표고국과 도라지 생채며 구미 도는 튀각은 진세의 음식이 아니올시다. 오늘 노장 스님을 모신 나는 평생에 처음으로 청복을 누립니다."

노장 중은 걸인의 말하는 수작이 너무나 격이 높은 것을 느꼈다. 확실히 걸인이 아니라 폐세자 양녕인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양녕은 시장한 판에 밥 한 바리때를 순식간에 치웠다. 비로소 시장한 후에 밥을 먹어야만 밥맛이 배나 나는 것을 짐작했다. 노장과 양녕은 상을 물린 후에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양녕이 먼저 묻는다.

"이 절 이름은 무슨 절이고 노장 스님의 법명은 무어라고 부릅니까?"

노장은 절 이름과 자기의 법명을 휘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절의 이름은 수종사라 하고 빈도의 법명은 설오라 합니다."

양녕은 마음속으로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설오는 무학대사의 후배다.

"설오 스님이시면 바로 저 유명한 무학대사의 제자이신 설오 스님이십니까?"

설오는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대답했다.

", 그러하옵니다. 무학대사는 바로 빈도의 선배이십니다. 어찌 무학대사를 아십니까?"

"무학대사와 설오대사의 이름은 아동주졸이라도 다 아는 큰 이름입니다. 내 비록 걸인이라 하나 어찌 높으신 두 분 대사의 이름을 모르겠습니까?"

양녕은 웃으며 대답했다. 설오는 양녕을 시험하기 위하여 슬며시 묻는다.

"무학대사를 혹시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양녕은 무심코 ''하고 대답을 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내 다시 말한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종적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러지의 몸으로 어찌 감히 나라의 국사였던 무학대사를 만나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양녕은 시침을 뚝 떼고 대답한다.

"불가에서는 존비귀천이 없습니다. 만승천자나 떠다니는 걸인이나 사람이면 다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우대하고 공경합니다.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아니합니다. 그렇기에 석가세존께서 설산수도를 하시고 난 후에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태자의 지위도 버리셨습니다. 도를 깨치신 그분의 눈에는 제왕도 아무것이 아닌 것을 아셨습니다. 다만 사람, 올바른 사람의 선행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때문이올시다. 이것은 당신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다같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의 인간성과 인격을 가진 것이라고 인정하신 말씀이올시다. 불타 같으신 성인도 인간을 차별하시지 아니하셨는데 황차 저희 같은 승려가 어찌 망자존대해서 빈자와 부자를 차별하고, 귀인과 천한 이를 구별하겠습니까. 무학국사를 만나보셨다면 불가의 진리를 황연히 깨달으실 것을 그랬습니다."

양녕은 석가세존이 장차 제왕이 될 태자의 지위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설산수도를 한 후에 유아독존이라 해서 가지의 인격을 수양했다는 설오 노장의 말을 듣자 마치 석가세존의 심경이 자기의 심경과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제왕이 되기 싫어서 일부러 세자의 지위를 헌신짝 버리듯 했다. 세자의 지위를 내던지기도 과연 힘이 들고 어려웠다. 일부러 공부를 아니하는 체했다. 탄자를 돌리고 매사냥을 했다. 술을 마시고 풍악을 좋아했다. 기생을 데리고 놀고 남의 첩실을 뺏기도 했다. 보통으로 게으른 짓을 하고 공부를 싫어하는 체하는 조건만으로 도저히 이 불인을 해야 하고 불의를 해야 하고 탐학을 해야 하는 권력의 자리, 제왕의 굴레를 벗어 내던지기 어려웠던 때문이다. 양녕은 비로소 설오가 보통 승려보다 낫다는 점을 느꼈다. 마음속으로 이름있는 중은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생각했다. 양녕은 일부러 못난 체하고 바보 소리를 해본다.

"석가여래의 빈부귀천을 차별하지 않는 불경 공부를 하는 스님의 제자들이 어찌해서 걸인인 나를 구박했습니까? 하하하."

양녕은 청을 높여 가락 높게 웃었다. 설오는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대답한다.

"그러기에 빈도가 사죄하는 말씀을 드리지 아니했습니까. 아직 철없는 것들이라 그런 짓을 했습니다. 넓으신 금도로 용서해주십시오."

설오는 경건한 자세로 합장을 했다. 양녕의 호협한 풍도가 자기도 모르는 결에 무심코 나왔다.

"빌어먹는 걸인한테 노장 스님이 자꾸 합장을 하니 미안하기 짝이 없소."

설오는 수미가 길게 뻗친 눈썹 아래 별빛 같은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한다.

"불가의 눈에는 귀천이 없다고 아까 말씀을 드리지 아니했습니까."

양녕은 슬며시 말꼬리를 돌린다.

"무학대사도 도통한 중인 줄 알았더니 우리 걸인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속물입니다."

설오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놀랐다. 이 걸인이 확실히 보통 거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빙긋 웃으며 묻는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니까? 무학대사는 도를 닦아 공부한 중이올시다."

양녕은 고소를 했다.

"안변 설봉산에서 이태조의 등극할 것을 해몽한 공으로 일약 국사가 되었고 그 후에도 한양에 왕궁 터를 구하러 다니는 등 중으로서 부귀영화를 탐해서 왕가의 심부름으로 구질구질하게 쫓아다니는 등, 거지인 내 눈으로 본다면 별수 없는 속물입니다. 무학대사의 한평생 한 짓이 점쟁이가 아니면 지관질을 하는 풍수쟁이지 무슨 도통한 중이라고 하겠소."

설오는 또 한 번 놀랐다. 가슴이 뜨끔했다. 자기도 국사의 대접을 받으면서, 함흥으로 가서 태종의 심부름으로 문안드리러 간 신하들을 모조리 목을 베어 죽어서 함흥차사를 만든 태조를 무학과 함께 달래러 갔던 일이 있었던 때문이다.

설오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대답한다.

"그렇지 아니합니다. 무학대사를 점이나 치는 점쟁이나 풍수를 보는 지관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너무나 지나친 혹평입니다. 무학대사는 확실히 공부한 중이올시다. 불가의 대자대비한 정신으로 구제창생을 하기 위해서 한 짓입니다."

걸인인 양녕은 설오의 말을 듣자 픽 조롱하는 웃음을 웃었다.

"구제창생! 하하하. 그래, 무학이 구제창생을 했단 말이오? 아전인수도 분수가 있지. 하하하."

설오가 얼굴을 붉히며 묻는다.

"어째 구제창생이 아닙니까?"

"그래, 무학이 무슨 구제창생을 했더란 말요?"

"고려 말기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건져내서 이씨 왕조를 창업하게 했으니 어찌 구제창생이 아닙니까?"

양녕은 또 한 번 껄껄 웃는다.

"그래, 구제창생을 한다는 짓이 사람들을 산더미같이 죽였단 말요?"

설오는 분개한 태도로 말한다.

"무학이 언제 사람을 산더미같이 죽였습니까?"

걸인 양녕은 지지 않고 대답한다.

"보시오. 이태조가 돌연 고려에 대하여 반심을 먹고 위화도에서 회군을 해서 평양서부터 송도까지 고려 왕실을 무찔러 쳐들어갈 때 얼마나 사람이 상하고 죽었소. 이것이 구제창생이란 말요? 왕씨란 왕씨는 모조리 바닷속에 쓸어 넣어 죽였으니 이것이 구제창생이란 말씀요? 최영, 정몽주, 이숭인, 이종학 등 두문동 칠십여 인을 모조리 죽였으니 이것이 구제창생이란 말씀요? 나중에는 이태조가 왕위에 나간 후에도 방번, 방석, 방간을 죽인 형제의 싸움, 태조와 지금 상왕과 부자간의 싸움, 이 모든 잔인하고 불의한 골육상쟁의 일이 구제창생의 일이란 말요? 하하하, 참 대사도 크게 궤변을 파는 구려."

설오의 얼굴빛이 무색했다. 다시 의심이 버썩 났다. 만약에 이 걸인이 폐세자 양녕이라면 아무리 걸걸하고 호방하고 욕심이 없는 큰 인물이라 하나 어찌 차마 자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죄상을 이같이 폭로하고 이태조니, 방석, 방번, 방간이니 하고 이름을 턱턱 불러댈 수 있을까 하고 의혹이 벌컥 났다. 그러나 무학을 위하여 변명을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위화도에서 회군을 해서 고려조정을 무찌른 일이나 정포은, 최영 장군을 죽이고 왕씨를 몰살시킨 일들은 다 이태조와 지금 상왕 전하의 한 일이지 어찌 무학대사가 권한 것입니까. 무학대사한테는 아무 허물도 없습니다."

걸인 양녕은 정색하고 설오를 꾸짖듯 말한다.

"만일 무학이 정말 도통한 승려라면 애당초 안변 설봉산으로 이태조가 찾아갔을 때 해몽을 해주었을 까닭이 없소. 만약 무학이 아니고 석가여래 부처님이었다면 절대로 해몽을 해주었을 리 만무하오."

"어째 그렇습니까?"

설오가 묻는다. 양녕은 또 웃으며 야유하는 말을 보낸다.

"석가여래 부처님께서 해몽하는 점쟁이는 아니 되었을 것입니다. 하하하."

양녕의 말을 듣자 설오는 말문이 막혔다. 양녕이 말을 계속한다.

"'화락기무실, 경파기무성', 꽃이 떨어지니 어찌 열매가 없을쏘냐, 거울이 깨지면 어찌 소리가 나지 않겠소 하고 해몽한 것이 무학대사입니다. 이태조한테 해몽을 해주고 그리고 국사가 된 것이 아니겠소? 맨 처음에 이태조가 아직 고려조정을 뒤엎기 전인 고려 신하로 있을 때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꿈을 꾸고 동리의 유명한 점쟁이 할미한테 해몽을 해달라 청했더니, 노파 할미 대답이 '요망한 여자가 어찌 감히 그런 큰 꿈을 풀겠습니까. 안변 설봉산 밑에 굴이 있는데 그곳에 훌륭한 도승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 물어보시오.' 하고 무학을 소개해 준 것 아닙니까. 그러하니 무학은 여자만도 못한 속물입니다. 부귀영화가 탐이 나서 이런 해몽을 해 주었다고 나는 판단하오."

걸인 양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한다.

"그리고 이태조가 또 꿈에 허물어진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으니 무슨 꿈이냐고 물었더니, 무학의 대답이, '허물어진 집은 고려 왕실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는 것이고 서까래 셋을 등에 업었으니 임금 왕자가 분명합니다' 하고 예언을 해서, 이태조는 마침내 이 말에 힘을 얻어서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일을 감행했고, 이신벌군을 했으니 결국 무학은 조걸위학한 사람이 됩니다. 대자대비한 석가여래불은 결코 해몽을 해서 조걸위학을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합니까, 대사!"

거러지 양녕은 고담준론을 했다. 설오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양녕은 또 말한다.

"도통한 승려 중에 원효대사나 의상대사가 이따위 해몽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이다."

설오는 걸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걸인 양녕은 또 말한다.

"무학은 해몽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신벌군한 분을 도와서 한양에 정도를 하도록 했습니다. 왕십리에다 국도를 정하려 하다가 밭을 갈던 늙은 농부가 소를 때리면서 하는 말이 '미련하기도 하다. 무학이 같구나. 십 리를 더 가서 갈아야 할 땅을 머뭇거리고 있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하고 소를 꾸짖는 소리를 듣고 무학은 비로소 깨닫고 십 리를 더 가서 한양에 도읍을 정했으니 풍수 공부도 농부만 못한 위인 아니겠소?"

거지 양녕의 의기가 헌앙했다. 도승이란 설오는 완전히 기가 죽었다. 설오는 처음에 이 걸인을 폐세자 양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폐세자 양녕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폐세자가 아무리 호방하고 맨 데 없는 걸걸한 성격을 가졌다 하나 그의 할아버지를 이태조라고 부르고 그의 아버지를 부자상극하고 골육상쟁한 사람이라고 폭로해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설오는 의심이 더럭 났다. 걸인은 확실히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글도 잘하고 말도 잘했다. 누군가 하고 새로 의아심이 났다. 어떻든 보통인물이 아니었다.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궁금하기 한량없었다. 손을 모아 합장하고 경건한 태도로 공손히 묻는다.

"황공하오나 존성대명을 듣고자 합니다."

양녕은 껄껄 웃었다.

"빌어먹는 거러지가 무슨 성명이 있겠소. 아비의 성도 모르고 어미의 본도 알지 못합니다."

설오는 어이가 없었다. 더 묻지 못했다. 어느덧 해는 저물었다. 설오는 양녕과 함께 저녁밥을 같이 했다. 달이 환하게 떠올랐다. 설오는 걸인을 한번 시험해 보리라 생각했다.

"이런 때는 시를 짓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시를 한 수 지어보십시다."

설오의 말을 듣자 양녕은 빙긋 웃었다.

"빌어먹는 거러지가 시를 어지 지을 수 있습니까. 망령의 말씀이십니다."

양녕은 일축했다.

"보아하니 말씀이 유식합니다. 사양하지 마시고 시를 한 수 지어보십시다."

"노장 스님이 먼저 한 수 지어보십쇼. 그러면 걸인인 나도 한 수 지어보겠습니다."

설오는 양녕을 시험하기 위하여 자기가 먼저 한 수를 읊었다. 광주와 양근 땅을 굽이쳐 감도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자기 절 수종사를 두고 지었다.

"불러보겠습니다."

설오는 말한 후에 시를 읊었다.

옛절,

위태로운 봉우리 아래

댕댕이 덩굴 그늘져,

작은 소로 갈라지고

정자집, 두 강물에 임했는데,

처마 끝엔

산 구름이

반 넘어 걸렸다.

걸인 양녕은 손으로 누마루 바닥을 치며 흥을 돋우어주었다. 설오의 시음성은 낭랑히 누마루에 가득했다. 이때 달빛은 휘영청 누마루에 가득했다. 양녕은 시흥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설오는 읊기를 다하자 양녕에게 청한다.

"시도 모르는 빈도도 시를 지었으니 선생도 시 한 수를 지어보시오."

"거러지보고 선생이란 말씀이 웬 말씀요. '당구삼년 폐풍월'이라고 촌 글방으로 빌어먹으러 다니느라고 자모음하는 구경을 좋아하고 다녔으니 글 짓는 흉내를 한 번 내보겠습니다."

양녕은 말을 마치자 낭랑히 시를 읊는다.

아침엔

청산에 둘러 있는 안개로

밥을 지어 먹고

밤에는

댕댕이덩굴에 걸려 있는

밝은 달로

등불을 삼는다.

혼자 외로운 암자에 묵으니

다만 탑 하나가 있을 뿐이다.

양녕의 시 읊는 소리는 절 앞에 서 있는 탑을 감돌아 휘영청 밝은 달빛 속으로 흘러간다. 설오는 깜짝 놀랐다. 시의 경지가 도저히 자기로서는 따를 수 없는 높고 높은 생각을 가졌다. 참선하는 고승이라는 자기로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시경이었다. 설오는 버썩 양녕의 앞으로 나가서 합장하고 절을 했다.

"과연 선생님이십니다."

"별말씀을... "

"양녕은 사양했다.

밤은 점점 깊었다. 이슬은 맑게 내리고 달빛은 더욱 밝았다.

"고단하실 텐데 누워서 말씀하십시오."

설오는 더 한층 존경하는 말을 썼다.

"달빛 속에서 이야기합시다."

설오는 양녕에게 목침을 내밀었다.

"노장께서도 법의를 벗으시고 누우십시오."

설오는 흑장삼을 벗어서 벽에 걸었다. 양녕과 설오는 목침을 베고 나란히 누웠다. 양녕이 말을 꺼낸다.

"아까는 무학을 너무나 평해 말해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생의 평이 적절하십니다. 무학이 명승은 될 수 있지만 도승은 되지 못합니다. 빈도의 스승입니다마는 선생의 평이 적절하십니다."

설오는 대답하고 더 한층 걸인을 존경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양녕은 목침을 고쳐 베고 설오를 향하여 묻는다.

"요사이 유발승 중에 도가 높은 이가 몇 분이나 있습니까?"

설오는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쳤다.

"유발승 중에 도통한 이들이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진세 속에 몸이 파묻혀서 공부를 하니 도통이 될 리가 있습니까. 그저 불도에 대하여 성의를 다하는 이가 있다면 상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에 가장 불도에 정성을 다하는 이는 누구라고 생각하오?"

설오는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효령대군이 계실 뿐입니다."

"효령대군, 상왕 전하의 둘째 아드님이고 금상전하의 형님이요그려."

", 그러합니다."

양녕은 짐짓 묻는다.

"효령대군이 어떻게 해서 불교에 대하여 성의를 다했습니까?"

"상감께 권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십니다. 불경을 간행해서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들을 깨우쳐 주시고 퇴락한 절을 중수하시어 불교를 중흥시켜주십니다. 비록 당신 스스로 도통하신 대덕은 되지 못하셨다 하나 대자대비한 어진 마음을 만 사람에게 일으키게 하시어 세상을 정화시키는 큰 공덕은 잊을 수 없는 일이올시다. 한 사람의 도승이 세상에 난 것보다 못지아니한 좋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효령대군은 참 훌륭한 분이구려."

양녕은 말을 마치자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에 양녕은 다시 말을 꺼낸다.

"노장 스님께서는 국사 대접을 받으시는 분이니 효령대군과 자주 접촉하시겠습니다."

", 그러합니다. 절을 중수하고 불경을 간행하는 일로 자주 만나뵙니다. 빈도가 대군께 찾아뵈러 가기도 하고 대군께서 빈도를 찾기도 하십니다. 아마 내일쯤은 이곳 수종사로 오실 것입니다."

양녕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설오를 만나서 얼마쯤 심지가 상통되었다. 수종사에서 한동안 묵을 생각을 했는데 효령대군이 온다 하니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효령대군이 이번에 오는 것은 역시 불경을 간행하려 하는 때문입니까?"

", 그렇습니다. '석보상절'의 주석을 의논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설오가 대답한 후에 양녕이 또 묻는다.

"서울서 오시나요?"

"지금 양주 회암사에 계십니다. 양주에서 오십니다."

"양주에서 오신다면 내일 저물게나 당도하겠습니다그려."

", 그렇습니다. 선생님도 한번 효령대군을 만나보십시오. 좋은 말씀들이 나오실 것입니다."

"글쎄올시다. 나 같은 걸인이 어찌 감히 효령대군 같은 귀인을 만나보겠습니까."

설오는 웃으며 대답한다.

"불가에는 아까도 말씀한 대로 귀천을 가리지 아니합니다. 효령대군께서도 흔연히 만나보실 것입니다."

"글쎄요"

양녕은 한마디를 하고 내일 아침엔 일찍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갈 곳이 없다. 머리에 번뜻 명보가 떠 올랐다. 명보의 집은 양근이라 하는데 양근에 가본 적이 없다. 슬며시 설오한테 묻는다.

"양근이 이곳에서 몇 리나 됩니까?"

"양근입니까? 양근 땅은 이곳에서 멀지 아니합니다. 바로 지척이올시다. 양근에서 흘러오는 강물과 광주 광나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세해서 모이는 곳이 바로 이곳 수종사가 됩니다. 양근은 강물 줄기를 따라가면 됩니다."

양녕은 마음속으로 내일 일직 명보를 찾아가기로 정했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양녕은 바리때의 밥을 얻어먹은 후에 괴나리봇짐을 들고 일어섰다. 설오는 양녕을 만류했다.

"며칠 더 묵어가십시오."

"정처 없는 거러지올시다마는 부르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습니다. 이만 폐를 끼치고 물러가 보겠습니다."

"효령대군을 한 번 만나보고 가시라니까."

"대군 같은 귀인을 거러지가 어찌 만납니까."

양녕은 웃으며 사양했다. 설오는 걸인의 행색을 확실히 알고 싶었다. 문득 글씨를 청해보리라 생각했다.

"이제 한번 손을 나누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릅니다. 어제 지으신 시를 부벽으로 한 장 써 주시면 존안을 대한 듯 항상 바라보겠습니다."

설오는 일어서는 양녕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게 하고 종이와 붓과 벼루를 내놓았다.

"빌어먹는 거러지가 글씨를 어찌 쓸 줄 알겠습니까."

"선생은 사양치 마시고, 어제 지으신 시를 써주십시오. 항상 벽에 걸어두고 보겠습니다."

설오는 두 번 세 번 졸랐다. 양녕은 마지못해서 붓을 잡았다. 간밤에 지은 '산하조작반, 나월야위등'의 시를 장지에 써 내려간다. 용사가 비등하는 듯 필력이 힘차게 꿈틀거렸다. 설오는 깜짝 놀랐다.

'이분은 확실히 보통 거지가 아니로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탄복했다. 양녕은 붓을 던진 후에 설오에게 합장을 하여 작별인사를 하고 산문 밖으로 나섰다.

 

목이 떨어지는 경기감사

양녕이 수종사 절문밖으로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나간 후에 이날 승석 때 효령대군은 설오의 말과 같이 '석보상절'의 주해를 의논하기 위하여 수종사에 당도했다. 비록 유발승으로 자처하는 효령대군이었으나 당시 상황의 둘째 아드님이요, 왕상전하의 형님인 대군의 행차였다. 평교자에 구종별배가 앞뒤에 늘어서서 떠들어대는 요란한 벽제 소리는 길가는 행인의 발길을 당황하게 했다. 수종사 절 앞 동구가 떠들썩했다. 벽제 소리를 듣자 절 안에 있던 승려들은 함빡 동구 밖으로 나가 효령대군의 행차를 맞이했다.

"대군마마 오십쇼."

"대군마마, 행차 안녕하십니까?"

젊고 늙은 승려들은 먹장삼에 가사를 메어 정장을 하고 합장을 올리며 효령대군을 맞이했다. 주지되는 노장 설오도 동구 앞 부도가 서 있는 곳까지 나가서 효령대군을 맞이했다. 양녕대군이 걸인의 행색으로 올 때와 비교해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온 절은 크나큰 경사가 난 듯 발끈 뒤집히다시피 했다. 판도방 부엌에서는 효령대군의 일행을 위해서 밥을 짓고 찬수를 만드느라고 부산했다. 설오는 먼저 효령대군을 법당으로 인도하여 향을 살라 예불을 마친 후에 방장으로 모시었다.

"대군마마께서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고 오셨습니다. 멀리 오시느라고 고단하셨겠습니다."

"'상절' 주해를 하려니 모르는 곳이 많구려. 간행이 시급하니 지연할 수가 없소이다. 법사의 지도를 받으러 왔소이다."

효령은 말을 마치고 힐끗 벽상을 바라본다. 눈이 환하다. 대자로 시를 쓴 부벽이 붙어 있었다. 방안이 환했다. 눈에 글씨가 익어 보였다. 글씨도 잘 썼지만 글이 좋았다. 선미가 도는 탈속한 시다. 효령은 읊어 본다.

"산하로 조작반하고 나월로 야위등이라. 도대체 전에 보지 못했던 글씨와 시인데 누가 쓰고 누가 지었습니까?"

"어제 어떤 걸인이 와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갔습니다."

"걸인이?"

효령은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글씨는 틀림없는 자기 형님 양녕의 필법이었다. 시도 양녕쯤이라야 이러한 시를 지을 수 있는 시의 경지였다. 효령은 고래를 기울였다.

"걸인의 나이 몇 살이나 되어 보입디까?"

"걸인은 대군마마 연세에 비해서, 말씀하기 황공하옵니다마는 한두 살쯤 위가 되어 보입디다. 그리하옵고 얼굴판이 비슷하옵디다."

설오는 짐짓 효령의 눈치를 보기 위하여 이같이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걸인의 유식한 품이라든지 모든 행동이 호방하고 걸걸해서 소문 높은 폐세자같이 생각이 든 때문이다.

"그래, 나보다 한두 살 위고 얼굴이 나와 비슷하단 말요?"

", 그러합니다."

"그래, 그 걸인은 어디로 간다고 갑디까?"

효령은 초조하게 묻는다.

"정처 없이 떠다니는 몸이지만 부르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이 많다고 하고 괴나리 보따리 한 개를 걸머지고 죽장망혜로 휘적휘적 떠났습니다."

"허허, 내가 그 걸인을 만나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

효령은 탄식하며 말했다. 설오는 더 한 번 효령의 중심을 떠보고 싶었다.

"대군마마께서 어제쯤 오셨더라면 만나실 것을 그랬습니다. 왜 맘에 켕기시는 일이 계시옵니까? 걸인을 아실 까닭은 없고."

"천만에, 내가 걸인을 알 까닭이 있소. 하도 시를 잘 짓고 글씨를 잘 썼길래 물어보는 것이지."

효령은 시침을 뚝 뗐다. 설오는 또 한 번 효령의 마음을 더듬고 싶었다. 슬며시 말꼬리를 돌린다.

"그러하온데 그 걸인은 참 고약한 걸인이옵니다. 사람이 열뇨치 않은 절간에 소승 혼자 들었으니 망정이지 서울 장안이나 사람 많은 장터에서 그따위 소리를 했다가는 목이 열댓 번 달아났을 것입니다."

"왜 무슨 말을 했기에 그러하오?"

효령은 궁금했다.

"태조마마과 상왕 전하를 미타하게 생각해서 아주 불경하옵디다. 태조대왕은 이신벌군을 했고, 상왕 전하는 골육상쟁을 했다고 마구 폄해서 말합디다. 뿐만 아니라 무학대사가 풍수쟁이나 해몽하는 사람이지 도통한 고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깎아 말하는데 소승은 진땀을 흘렸습니다."

효령은 얼굴빛이 변했다. 아무 대답도 아니했다. 확실히 양녕인 것이 분명한 때문이다. 효령은 양주서 지난번 서울로 들어갔다가 광주에 있는 형님 양녕이 행방불명이 되고 어리는 목을 매어 죽었다는 기막힌 일을 알고 있었다. 설오도 효령의 얼굴빛을 보고 걸인은 확실히 양녕인 것을 알았다. 이튿날 날이 밝자 효령은 총총하게 수종사를 떠났다. 설오가 '석보상절'의 주석은 언제 하려느냐고 물어보니 다음에 의논하자고 말하고 부랴부랴 행차를 몰아 서울로 들어갔다. 내시가 효령대군의 입대를 청하니 세종대왕은 반갑게 그의 둘째 형님을 맞아들였다. 세종대왕은 용상에서 일어나 미소를 용안에 가득 띠고 효령에게 향하여 옥음을 내린다.

"며칠 대해 뵙지 못해서 울도한 마음 간절하더니 이제 찾으시니 반갑습니다."

효령이 부복하여 대답했다.

", 무상한 몸은 항상 불도를 홍포하는 데 전심하는 고로 날마다 문후치 못하와 죄송하옵니다."

효령은 사사로이는 임금의 형님이라 하나 국가의 법통으로 본다면 임금과 신하지간이었다. 극히 존칭하는 말씀을 써서 군신의 체통을 지켰다.

"대군께서는 그동안 무슨 일을 하시어 불교를 홍포하셨습니까?"

세종은 화기애애한 음성으로 효령한테 묻는다.

"'석보상절'의 주석을 내고 있는 중이옵니다."

"좋은 일을 하십니다. 주석이 끝나는 대로 국비로 곧 간행케 합시오. 주자청에 명을 내려서 인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은이 감격하옵니다."

시신들은 형제간의 우애의 정리가 대단한 것을 바라보며 감격했다. 효령은 말꼬리를 돌렸다.

"신은 어제 수종사로 설오를 찾아서 '석보상절'의 주석에 대하여 의논하려 갔다가 급히 아뢸 일이 있어서 주석을 중지하고 알현을 청했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 계셨습니까?"

세종은 옥음을 부드럽게 내려 은근히 묻는다.

"양녕 형님이 수종사를 다녀갔습니다."

효령의 말을 듣자 세종은 깜짝 놀랐다.

"양녕 형님이 수종사에서 유하다가 갔더란 말씀입니까. 만나보셨습니까?"

"아니올시다.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자세히 사실을 아뢰겠습니다. 신이 수종사 설오의 방장으로 들어가니 전에 보지 못했던 시를 쓴 부벽이 붙어 있었습니다. 글씨가 눈에 몹시 익었기에 자세히 보니 양녕 형님의 글씨였습니다. 설오한테서 이것이 뉘 글씨냐고 물었더니 어제 한 사람의 걸인이 와서 시를 짓고 글씨를 썼는데 말과 행동이 비범할 뿐 아니라 용모가 꼭 신의 얼굴과 비슷하고 나이는 신보다 한두 살 위가 되어 보이더랍니다. 확실히 양녕의 필적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양녕이 신이 수종사로 간다는 말을 듣고 곧 몸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간 듯합니다. 양녕의 간 곳은 멀지 아니할 터이니 빨리 수탐해서 맞아들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시는 무어라 지었습니까?"

"시격이 매우 높습니다. '산하조작반, 나월야위등, 독숙고암하, 유존탑일층'이라 했습니다."

세종대왕은 듣고 깜짝 놀랐다.

"과연 선미가 도는 시올시다. 양녕 형님의 시가 분명합니다. 곧 경기감사한테 영을 내려서 수소문하겠습니다."

"도대체 경기감사는 여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너무나 태만합니다."

효령은 한마디 하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효령대군이 물러간 후에 세종대왕은 곧 옥교를 타고 수강궁 상왕전에 배알했다. 효령이 전한 말씀을 자세히 아뢰었다. 상왕도 크게 놀라고 크게 노했다.

"경기감사에게 영을 내려서 양녕의 종적을 수탐하라 한지가 이미 달포가 넘었다. 여태껏 찾아내지 못하였으니 태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곧 경기감사를 파직시키고 새로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라."

상왕은 지엄한 분부를 내렸다. 세종은 경복궁으로 환어한 후에 경기감사를 파직하고 새로 경기감사를 임명한 후에 지엄한 분부를 내렸다.

"지금 양녕대군은 걸인행세를 하고 광주와 그 부근 일대에서 방랑 생활을 하시는 모양이다. 빨리 찾아서 모시도록 하라. 만약에 또다시 한만하게 거행한다면 큰 형벌을 받으리라."

양녕을 빨리 찾아내지 못한 죄로 경기감사의 목이 달아나고 새로 경기감사가 임명되니 경기도 일판이 발끈 뒤집혔다. 새로 부임된 경기감사는 각읍 수령을 불려 훈시를 내렸다.

"전임 경기감사가 파직을 당한 것은 양녕대군의 행방을 빨리 찾아내지 못한 때문이다. 이것은 경기감사의 허물이 아니라 각읍 수령들이 너무나 한만한 탓이다. 만약 열흘 안에 양녕대군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각읍 수령들은 연대책임을 받아서 삭탈관직을 당할 것이다. 명심하고 양녕대군의 행방을 알아서 모시도록 하라. 위의 분부를 듣자오니 양녕대군께서 걸인의 행색으로 경기도 일판에 방랑생활을 하고 계시다 한다. 참고 삼아 말하는 것이니 빨리 양녕대군의 종적을 수탐하라."

각읍 수령들은 새로 부임한 경기감사의 훈시를 받은 후에 제각기 고을로 돌아갔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연대책임을 져서 벼슬이 떨어질 판이었다. 원들은 육방아전들에게 걸인 양녕을 찾아들이라 하고, 육방 아전들은 군노사령들에게 엄명을 내려서 열흘 안에 걸인 양녕을 수탐해서 모시라 했다. 경기도 일판이 발끈 뒤집혀서 걸인을 수탐했다. 고을마다 포복절도할 우스꽝스런 일이 많이 생겼다. 양주 당의 군노사령들은 신수가 원한 거지를 만났다. 공손히 절을 했다.

"대감, 안녕하십니까? 양녕대군이 아니십니까. 저희 원님이 대감을 맞아들이라 하십니다."

거지는 깜짝 놀랐다. 군노사령들은 거지를 잡아끌었다. 거지는 겁이 덜컥 났다.

"여보, 거지를 보고 양녕대군이라 하니 무슨 말씀요. 대군이 거지 노릇을 할 리가 있소. 당신들 환장을 했나보구려."

"아니올시다. 소인들이 대감님을 잘못 볼 리가 있습니까. 대감, 우리 성주께서 지금 눈이 빠지도록 기다라고 계십니다."

거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군노사령의 잡은 손길을 뿌리치고 삼십육계 줄행랑 격으로 지팡막대를 짚고 달아나버렸다. 군노사령들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원님이 청한다 해도 몸을 피해 달아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보통 거지가 아니고 양녕대군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달아나는 거지를 쫓아가 잡았다.

"대감, 그저 양녕대군, 대군이 아니시더라도 잠깐만 우리 사또한테로 가십시다."

군노사령들은 전후좌우에서 힘을 합해서 거지를 끌었다. 거지는 군노사령이 합세하여 잡아당기는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후들후들 떨며 삼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희극삼제

삼문안에는 군노사령들이 양녕대군을 모셔온다는 선성이 벌써 짜하게 퍼졌다. 군노사령들이 거지를 삼문안으로 몰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이방, 예방들은 급히 동헌으로 달음질쳤다.

"양녕대군을 모셔옵니다."

양주목사는 기급초풍을 했다.

"무어, 양녕대군이 오셔?"

큰소리를 치며 뜰 아래를 굽어보니 과연 군노사령들이 거지 한 사람을 옹위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양주목사는 맨발로 뛰어내렸다. 힐끗 거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양녕의 연세 비슷하고 코가 우뚝했다. 거지의 얼굴로는 신수가 훤한 편이었다. 양주목사는 허리를 굽혀 국궁하며 두 손을 벌려 맞이했다.

"대감, 어서 동헌으로 오르십시오."

양주목사까지 대감이라 부르고 맞아들이니 거지는 진정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올시다.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나는 빌어먹는 거지올시다."

떨리는 음성으로 손을 저어 흔들었다.

"대군께서 아무리 속이셔도 저희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대감, 어서 올라 가십시다."

양주목사는 거지를 두 손으로 부축해 올렸다. 거지는 점점 떨렸다. 눈을 허옇게 떠서 희번덕거리며 말한다.

"아니올시다. 저는 빌어먹는 거지올시다. 양녕대군이 아니올시다."

양주목사는 거지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양녕이 아니라고 변명할수록 점점 더 틀림없는 양녕대군이라고 생각했다. 양주목사는 혼자 힘으로 양녕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좌우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육방관속들에게 호령을 내렸다.

"어서 너희들도 대감을 청 안으로 끌어 모시어라."

, , , , , 공 육방아전들이 일제히 양주목사와 힘을 합하여 동헌으로 끌어올렸다. 양주목사는 너부죽 거지한테 절을 했다.

"그저 대감을 이같이 고생시켜드렸으니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거지는 기가 찼다. 양주목사가 절까지 하지 진정 미칠 것 같았다. 말문이 막혔다. 입술이 굳어졌다. 황망히 맞절을 했다. 양주목사가 거지한테 절까지 하는 것을 보니 육방관속과 군노사령들은 틀림없는 양녕대군으로 알게 되었다. 양주목사는 큰 소리로 분부를 내린다.

"빨리 세숫물 떠오고 내아에 기별해서 내가 입으려고 지어 놓은 의복 일습을 내오너라."

토인은 세숫물을 내오고 내아에서는 비자가 양주목사가 입으려고 지어두었던 새 옷 일습을 내왔다. 안주 항라 겹저고리에 한산 세모시를 곱게 다듬어 지은 겹바지가 나오고 허리띠, 대님은 옥색 숙수요, 버선은 솜을 도독하게 둔 진솔 버선이었다. 양주목사는 다시 분부를 내린다.

"바지저고리만 가져오면 어찌하느냐. 웃옷과 갓을 홑벌로 내오너라."

비자는 총총걸음을 걸어 내아로 들어갔다. 이윽고 윤이 지르르 흐르는 통영갓에 옥색 모시 도포를 내왔다.

"대군께서 신으실 신도 내와야 하지 않느냐. 어찌 그리 우둔하고 미련하냐. 한 번에 거행하지 못하고 두 번 세 번씩 드나드느냐. 신은 내가 신으려고 맞춰두었던 우단 발막신을 가져오너라."

비자는 또다시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사또가 명절 때 신으려고 비장해 두었던 우단 발막신을 내왔다. 거지는 눈이 부시었다. 휘황찬란해서 어찌할지를 몰랐다.

"자아, 세수를 하시오."

거지는 청 안에서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난생처음 당하는 호강이었다. 토인이 곱게 갈아놓은 팥비누를 곱돌합에 담아서 바치고 쇠쓸개에 소금을 넣어 구워 말린 특제 양치소금을 바쳤다. 거지가 세수를 하고 나니 토인은 수건을 들고 있다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거지는 토인이 바치는 수건을 받아서 씻어야 할지 사양해야 할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서 받아서 씻으십시오."

양주목사가 권했다. 걸인은 어색하게 수건을 받아서 얼굴을 닦았다. 양주목사는 또 큰 소리로 분부를 내린다.

"대감께서 소세를 하셨으니 인제는 발을 씻으셔야 한다. 씻을 물을 떠오너라."

토인이 급창한테 영을 내리고 급창은 사령한테 영을 전했다. 군노사령이 발 씻을 물을 오지자배기에 떠왔다.

"대감, 발을 좀 씻으십시오. 팔자에 아니신 방랑생활을 하시느라고 노독이 나셨겠습니다. 시원하게 발을 담그십시오."

거지는 중인소시에 더러운 발을 빼기 난처했다. 머뭇하고 발싸개를 끄르지 아니했다. 양주목사는 옆에서 보고 섰는 토인을 꾸짖는다.

"어서 네가 발싸개를 풀어드리고 발을 씻어드려라."

토인은 더럽건만 하는 수 없었다. 거지의 발싸개를 징그러운 송충이 잡아떼듯 엄지, 장지 두 손가락 끝으로 끝을 잡아서 풀었다. 흉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토인은 목을 외로 꼬고 거지의 발싸개를 억지로 풀었다. 거지의 발 새에서 나는 악취는 멀리 앉아 있는 양주목사의 코까지 찔렀다. 구역질이 나고 메스꺼웠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발가락에서 나는 냄새였다.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슬며시 화증이 났다. 분풀이를 토인한테 했다.

"어서 발을 담가서 씻겨드려라."

악취는 사정없이 토인의 코를 찔렀다.

'별놈의 것이 다 와서 사람을 고생시키는구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토인은 씻지 아니하려는 거지의 발을 억지로 끌어당겨 물에 담갔다. 더께더께 앉은 때가 얼른 떨어지지 아니했다. 토인은 무한 고생을 하고 거지의 발을 다 씻어주었다.

"자아,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으십시오."

양주목사가 재촉했다.

거지는 난생처음 이런 옷을 대해보았다.

거지는 빌다시피 했다.

"황공합니다. 못 입겠습니다."

"대감, 그저 변변치 아니한 옷이올시다. 대감께서 제 옷을 입어주신다면 한평생 잊지 못할 영광이올시다."

양주목사는 거지를 끌다시피 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헌 누더기옷을 벗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누더기 헌옷에서는 이가 득실득실 끓었다. 양주목사는 구토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라고 생각하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거지가 옷을 갈아입고 나니 진정 옥골선풍이었다. 양녕대군같이 보였다. 이 양주목사는 마음속을 탄복했다.

'공자왕손이라 과연 범인과는 다르구나'

양주목사는 다시 토인에게 분부를 내린다.

"대감께서 매우 시장하시겠다. 내아에 기별해서 빨리 준비해둔 진짓상을 내오너라."

거지는 양주목사의 분별을 듣고 마음속으로 싫지 아니했다.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윽고 딴 비자가 진짓상을 받들고 나왔다. 산해진미의 음식을 벌여논 진수성찬이었다. 눈이 번했다. 탕은 양지머리 삶은 국물에 완자 고명과 표고버섯을 달걀 노른자와 함께 어쓱비쓱 썰어 띄워논 국이요, 조치는 낙지 삶은 전골에 쑥갓을 얼러서 향미를 돕게 했다. 건대구어 자반에 해삼초와 홍합초를 얼러 놓았고 청포탕에 모시조개를 까 넣었다. 약산적에 볶은 고추장을 곁들였고, 나물은 도라지 생채에 더덕채를 놓고 토막반찬으로는 숭어구이에 민어적을 놓고 다시마 튀각에 김치 깍두기를 놓아서 평양 감사 도임상에 못지 아니했다.

"염반이올시다마는 잡수십시오."

양주목사는 거지한테 권했다. 거지는 상을 바라보니 입에 침이 돌았다. 사양하고 체면차릴 여지가 없었다. 덥석 수저를 들어본다. 묵직했다. 기막히지 아니한가. 은수저였다. 난생처음 잡아보는 은수저다. 수전증이 나서 벌벌 떨렸다. 양지머리 삶은 국물을 우선 펑펑 퍼먹었다. 밥주발을 열었다. 어백미 흰 쌀밥이었다. 수저를 꽉꽉 눌러서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다 먹었다. 낙지조치에 더덕채며 너비아니 고기를 고루고루 휩쓸어 입에 넣었다. 양주목사는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아무리 증경세자요, 양녕대군이라 하나 배가 고프면 별수가 없구나.'

걸인이 밥을 다 먹고 숭늉을 마신 후에 상을 물리니 내아에서 나온 비자는 거지가 먹은 상을 받들고 들어갔다. 양주목사는 기왕 양녕대군을 대접하는 길이니 흠뻑 공대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비자에게 분부를 내린다.

"양치물을 떠오고 반과를 내오너라."

내아의 비자는 양주목사의 명을 받아 광주분원에서 구원 만든 백자 양치기에 맑은 청수를 가득히 담고 연엽 소반에 청술레를 껍질 벗겨서 청재 대접에 담아 내왔다. 귀인들이 식후에 소화를 돕기 위하여 으레 먹는 반과다. 거지는 반과라는 이름조차 들은 일이 없었다. 그냥 과실로만 알았다. 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는데 또다시 과실을 주니 그저 고맙기만 했다. 사양치 아니하고 어썩어썩 씹었다.

"청술레가 되어 물이 많고 맛이 답니다."

"맛이 좋군요."

"대군께서 잡수시는 과실은 더 별미일 텐데 이곳엔 배밖에 다른 과실이 없어서 더 좋은 실과를 드리지 못하니 죄송합니다. 밤으로는 양주 밤이 유명합니다마는 아직 아람이 들지 아니해서 드리지 못합니다."

거지는 '대군' 소리만 나면 질색을 했다.

"나는 그저 빌어먹는 걸이이올시다. 대군이 아닙니다."

양주목사는 거지가 대군이 아니라고 변명할수록 진짜 대군으로만 알았다.

"이제는 그만 농담을 하십쇼. 서울서 상감께서 기다리십니다. 곧 떠나셔야겠습니다. 모든 자비가 다 등대되었습니다. 소인이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

양주목사는 어서 양녕대군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서 상감께 아뢰고 칭찬을 받고 싶었다. 동헌의 설렁줄을 되게 흔들었다. 토인이 뛰어들었다.

"대군의 행차하실 차비가 다 되었느냐?"

", 등대되었습니다."

"내가 타고 갈 자비도 마련되었느냐?"

", 대령해 있사옵니다."

양주목사는 곧 의관을 정제했다. 넌지시 토인을 향하여 귀엣말을 했다.

"찰방에게 말하고 역마를 달려서 경기감영과 서울 대궐에 기별해서 양주목사가 곧 양녕대군을 호송해서 모시고 올라간다고 연통해라. 그리고 너희들은 육방관속과 함께 대군을 쌍가마에 모시도록 해라."

토인은 ', ' 대답하고 뛰어나갔다. 한 식경이 지난 후에 토인이 들어와서 양주목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역마가 서울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양주목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점잖게 영을 내린다.

"그럼 대군을 모시어라."

걸인은 목사와 토인이 귀엣말로 주고받다가 돌연 '대군을 모시어라' 하는 소리를 듣자 눈이 둥그레졌다. 동헌 뜰 앞에는 육방관속과 군노사령들이 우적우적 모여들었다.

"대군을 부액해 모시어라."

양주목사의 명령이 또 떨어졌다. 동헌 마루 위에 있던 토인들은 걸인의 앞으로 바싹 달려가서 양편 겨드랑이를 치켜들었다. 걸인은 대경실색했다.

"이거 웬일이오?"

"자비를 타시옵소서. 쌍가마를 대령하였습니다."

토인이 대답했다.

"나를 어디로 잡아가오?"

걸인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황공한 말씀을 하십니다. 잡아가다니 모시고 갑니다. 서울 상감마마께로 모시고 갑니다."

걸인은 소스라쳐 놀랐다. 토인들이 부액한 팔을 뿌리쳤다.

"나를 왜 상감마마께로 잡아가오. 나는 아무 죄도 없소."

걸인은 펄쩍 뛰면서 마루 끝으로 향하여 달아난다. 장차 삼십육계 줄행랑으로 달아날 태세를 취했다. 양주목사는 대군이 당연히 달아날 것이라 생각했다. 뜰 아래 있는 육방관속과 군노사령을 향하여 꾸지람을 내린다.

"너희들은 무엇을 바라보고만 있느냐. 어서 빨리 토인들과 힘을 합해서 대군마마를 쌍가마로 모시어라."

육방관속과 군노사령들은 일제히 달아나려는 걸인을 막았다. 동헌 넓고 넓은 뜰에는 쌍가마와 사인교가 등대되었다. 육방관속과 군노사령들은 걸인을 옹위하여 쌍가마 위로 끌어올렸다. 걸인은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전후좌우에 군관과 군노사령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쌍가마는 앞에 뜨고 양주목사가 탄 사인교는 뒤에 따랐다.

"달려라, 풍우같이... "

양주목사는 호령을 내렸다. 쌍가마와 사인교는 서울을 향하여 풍우 같이 달려간다. 걸인은 쌍가마에서 내리뛰어 달아나려 했으나 군관과 사령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바람과 같이 나가니 꼼짝달싹할 도리가 없었다. 경기감영과 정원에서는 양주목사가 역마를 달려서 양녕대군을 모시고 올라간다는 기별을 듣자 반가움을 이길 길 없었다. 경기감사는 병마절도사를 예겸했다. 구군복해서 밀화패영에 주빛 갓을 쓰고 남철릭에 동개를 어깨에 멘 후에 은안백마에 높이 앉아 군사와 장교를 거느리고 감영에서 십 리 밖까지 나갔다. 대군을 맞아들이는 공식 의장을 갖춘 것이다. 일변 정원 승지는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어전에 나가 아뢰었다.

"양주목사가 역마를 달려서 급히 고했습니다. 양녕대군을 모시고 온다 합니다."

세종대왕은 희색이 용안에 가득했다.

"양주목사가 양녕대군을 모시고 온단 말이냐. 그래, 양녕이 양주 땅에 계셨구나."

"걸인이 되어 방랑 생활을 하셨다 합니다."

"족히 그럴 분이다. 대비전에서 들으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미령하신 환후도 이제는 차도가 계실 것이다. 빨리 맞아들일 준비를 차려라."

승지가 고한다.

"만약 입성이 되신다면 어데로 모시오리까?"

"곧 대궐로 모시어라. 내가 친히 만나뵈옵고 대비전에 대면을 시켜 드리리라."

"대신들이 반대를 하면 어찌하옵니까?"

"대신들은 부자형제지간의 의리와 정도 없단 말이냐. 지금 대비전에서는 양녕이 보고 싶으시어 피골이 상접되어 계시다. 두말 말고 대궐로 모시어라. 상왕께서도 속히 찾으라시는 지엄한 분부가 내리셨다. 효령대군께서 수종사에 가셨다가 벽에 시를 써서 붙이고 가셨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경기도 안에 있는 것을 못 찾는다고 꾸지람이 대단하셨다. 빨리 대궐로 모실 도리를 해라."

승지는 상감의 분부가 지엄하니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수문장에게 영을 내려 양녕대군의 행차가 서울로 들어오거든 영추문으로 모셔들이라 했다. 광화문은 정문이므로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으로 모실 작정을 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승지에게 분별을 마친 후에 아침 문안 때 곧 수강궁으로 향하여 상왕인 태종과 어마마마인 대비전에 아뢰었다.

"양녕을 발견했다 합니다."

무골의 기풍이 가득한 태종이건만 귀가 번쩍했다.

"어디서 찾았다 하는가?"

"양주목사가 양주 땅에서 찾았다 하옵니다."

상왕은 만족했다.

"그것 보라. 지척에 있는 것을 여지껏 발견을 못했더란 말이냐. 파직을 당한 경기감사가 태만했던 까닭이다. 이번 경기감사는 제법이다."

태종은 신임 경기감사를 칭찬까지 했다. 대비 민씨는 아드님 세종대왕에게 말씀을 내린다.

"나는 지금 경복궁으로 가리라."

세종대왕이 아뢴다.

"미령하신 터에 출입하시는 것이 불가합니다. 양녕이 만약 오거든 자전으로 데리고 들어오겠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싶어서 피골이 상접했소. 일각이 삼추 같은데 언제 찾아오기를 기다린단 말이오. 내 곧 상감을 따라서 윗 대궐로 가리다."

"그리하오."

상왕이 허락했다. 세종대왕은 아바마마의 의향을 알자 곧 용안에 미소를 짓고 모후께 고한다.

"소자의 연에 함께 모시고 가도록 하오리다."

상왕비는 야위고 파리한 얼굴에 웃음빛이 가득했다. 어린애같이 좋아했다.

'작히나 좋으리'

상감은 곧 상왕비와 연에 올라 경복궁으로 향했다. 상감이 상왕비와 함께 오래간만에 폐세자가 되어 방랑 생활을 하던 양녕대군을 경복궁에서 맞이한다 하니 궁중 지밀의 상궁을 위시하여 삼천 궁녀와 내시, 별감, 무예청 등 액정소속들은 모두 다 침을 삼키며 돌아오는 양녕대군을 기다렸다.

한편 경기감사가 감영 밖 십 리까지 나가서 양녕을 맞이했다. 기치 창검은 하늘을 가리고 장교와 군총들의 복색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현란케 했다. 경기감사가 군막을 치고 대기하고 있을 때 양주목사의 사인교와 빌어먹던 거러지가 탄 쌍가마가 벽제 소리를 치며 요란하게 들어섰다. 양주목사는 경기감사의 하관이다. 상관인 경기감사가 양녕대군을 맞이하러 나온 것을 보자 얼른 사인교에서 내려서 군막 앞에 은안백마를 타고 서 있는 경기감사한테 군례를 드렸다.

"양주목사 현신이오."

경기감사는 미소하고 손을 들어 답례한다.

"양녕대군을 모시고 온다 하니 이런 다행한 일이 없소. 수고했소."

양주목사는 군례를 드린 후에 두 손을 모아잡고 고한다.

"저기 저 쌍가마 타고 계신 어른이 바로 양녕대군이십니다."

경기감사는 양주목사의 말을 듣자 은안백마에서 퍼뜩 내렸다. 등채 짚고 쌍가마 앞으로 버썩 다가섰다. 쌍가마 위에 앉은 사람은 과연 풍채가 좋았다. 윤이 번질번질 흐르는 통영갓에 금패 갓끈을 달고 옥색 도포에 도홍띠를 가슴에 눌러 띠고 앉은 품이 과연 공자왕손 같았다. 신임 경기감사는 양주목사와 매일반으로 양녕대군을 대해본 적이 없었다. 풍채에 홀렸다.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 과연 사내답게 잘 생겼구나. 콧대하고 고집통이가 세겠는걸. 그러니까 폐세자가 되어서 유랑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같이 생각하고 쌍가마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등채를 가로 하여 두 손으로 모아잡고 군례를 드린다.

"경기감사 현신이오!"

쌍가마 위에 앉은 거지는 '경기감사 현신이오' 하는 소리를 듣자 기절초풍이 되어 놀란다. 경기감사라는 벼슬 이름은 귀에 젖도록 들었지만 그 높고 높은 양반이 자기한테 군례를 드려서 절을 하고 현신을 드린다 하니 기가 막힐 지역이었다. 거지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쌍가마 바탕에 손을 대고 허리를 굽혀 답례를 했다. 경기감사 눈에는 답례하는 행동거지도 의젓하고 점잖구나 생각했다. 한 마디 첨을 올린다.

"금지옥엽인 귀하신 몸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습니다."

거지는 말대답을 무어라 해야 좋을지 몰랐다.

"천만에, 금지옥엽이라니, 빌어먹는 거지올시다."

솔직히 대답했다. 경기감사도 양주목사의 심경과 같았다.

'저분이 확실히 신분을 감추느라고 저러는구나.'

생각했다.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상왕 전하의 큰아드님이시고 상감마마의 형님이시고 증경 세자마마이신데, 어찌 금지옥엽이 아니십니까."

거지는 기가 막혔다.

"미쳤군."

한마디를 하고 입을 딱 다물었다. 얼굴에는 노기까지 띤 듯했다. 경기감사는 과연 진짜 양녕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서 모시어라."

등채를 번쩍 들어 쌍가마 교군꾼들을 지휘했다. 쌍가마는 번쩍 들리고 양주목사의 사인교도 떴다. 경기감사는 은안백마에 올라 군졸을 지휘하여 거지가 탄 쌍가마를 앞뒤로 옹위하고 권마성과 벽제 소리를 드높게 치면서 서울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안 백성들은 '웬 행차냐' 하고 수군거렸다. 감영 군인들한테 소식을 얻어들은 한 사람이 말했다.

"양녕대군의 행차라오."

아는 듯이 대답했다. 장안에는 폐세자 양녕대군이 다시 서울로 들어온다고 삽시간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경기감사와 양주목사는 서울에 당도하자 정원에게 사유를 고했다.

"어명에 의하여 양녕대군을 모시고 들어왔소이다."

정원 승지는 곧 세종대왕께 아뢰었다.

"먼저 지휘한 대로 영추문으로 모시게 해라."

상왕비는 양녕이 온다 하니 기쁘기 짝이 없었다. 일각이 삼추 같았다. 내전에서 전하께 전달을 내보냈다.

"양녕이 온다 하니 기쁘기 한량없다. 나도 정전으로 나가서 상감과 함께 양녕을 대해보리라."

세종대왕은 어마마마의 지극한 자정을 막을 길 없었다. 전갈 나온 상궁에게 영을 내렸다.

"정전으로 모시고 나오도록 해라."

내시들은 급히 세종대왕의 옥좌 옆에 상왕비의 자리를 포진했다. 상왕비는 상궁과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세종의 영접을 받으며 오래간만에 경복궁 근정전에 임어해서 큰아들 양녕이 들어오기를 삼추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왕비와 세종이 양녕을 맞기 위하여 정전에 출어하니 온 궁중은 양녕을 환영하는 일색으로 변했다. 삼천 궁녀들이 남치마 자락을 펄럭이며 영추문으로 나가고 별감, 무예청, 내시들이 신발을 거꾸로 끌다시피 하면서 대궐 문으로 향했다.

경기감사와 양주목사는 정원 승지의 하락을 받고 사인교와 쌍가마며 은안백마를 궐문밖에 두고 걸인을 호위하여 영추문 앞으로 섰다. 거지는 놀랐다. 상감이니 대궐이니 하더니 진자 대궐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큰일이었다. 잘못하다가는 목이 달아나겠다고 생각했다. 살아야 할 판이다. 다짜고짜 주먹을 번쩍 들어 경기감사와 양주목사의 복장을 힘껏 지르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풍우같이 달렸다. 양주목사와 경기감사는 출기불의로 복장을 갈겨치는 바람에 '에쿠' 소리를 치며 제각기 쓰러졌다. 양녕대군을 맞이하기 위하여 줄을 지어 늘어섰던 상궁과 궁녀며 내시, 별감, 무예청들은 양녕대군을 채 보지 못한 채 주먹을 받고 쓰러지는 경기감사와 양주목사를 바라보았다.

"에구머니나."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별감과 내시들은 급히 달려가 쓰러진 경기감사와 자빠진 양주목사를 구해 일으켰다. 이 틈에 걸인은 주먹을 더한층 불끈 쥐고 삼십육계 줄행랑으로 달음질을 쳤다. 영추문 밖에 모여 있던 양주 땅의 군관과 경기감영 군총들은 웬일인가 바라볼 뿐 까닭을 몰라서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한참 정신없이 달음질을 치던 걸인은 뒤에서 쫓아올까 겁이 났다. 양반이 쓰고 입은 통영갓과 옥색 도포가 화근이라 생각했다. 효잣골 골안으로 들어선 거지는 옥색 도포와 통영갓을 벗어던지고 자문 밖을 지나서 해수관음 앞을 거쳐 파주, 장단 길로 도망쳐버렸다. 내시와 별감에세 구원을 받아 정신을 수습한 경기감사와 양주목사는 명치끝과 복장이 아픈 것은 둘째고 양녕을 모처럼 찾아서 서울 안 대궐까지 모시고 왔다가 놓친 것이 분했다. 경기감사와 양주목사는 급히 영추문 밖으로 뛰어나가서 양주 군관과 경기감영 장교한테 호령을 내린다.

"뻔히 양녕대군께서 달아나시는 것을 보고도 왜 잡지를 못했느냐."

"소인들은 문밖에 있으니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쓸개 빠진 놈들, 어서 빨리 달려가서 모시고 오너라."

감사와 목사는 호령이 추상같았다. 양주군관과 경기감영 군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찾아다녔으나 종적을 알 길이 없었다. 군관 한패가 효잣골로 들어섰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담 모퉁이에 통영갓과 옥색 도포가 던져져 있었다. 틀림없는 양녕대군의 의관이었다.

"양녕대군께서는 의관을 벗어버리고 행방을 감추셨습니다."

경기감사한테 고했다. 감사와 목사는 더욱 놀랐다.

"어데서 그 옷을 주웠느냐?"

"자하문 안 효잣골 쓰러져가는 초가집 담모퉁이에서 주웠습니다."

"그럼, 북한산성으로 가신 것이 분명하다. 북한 일대를 샅샅이 뒤져보아라."

군관과 군노사령들은 북한산성으로 기어올랐다. 첩첩산중 만경대, 백운대며 높고 낮은 봉우리를 감돌아 바위틈 계곡 사이를 두루 찾았으나 새소리 물소리와 솔바람 소리뿐 적적히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아니했다. 자문 밖 해수관음 앞을 지나서 홍제원을 거쳐 파주, 장단 땅으로 달아난 거지를 북한산 속에서 찾으니 있을 까닭이 없었다. 양주 땅 군노사령과 경기감영 군관들은 허탕만 치고 캄캄한 밤중에 횃불을 켜 들고 북한산에서 기어 내렸다.

한편 경복궁 대궐 안 근정전에서는 세종대왕이 어마마마인 상왕비 전하를 모시고 양녕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각이 상당히 지났는데 소식이 감감했다. 대비는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시를 향하여 묻는다.

"걸어 들어오느냐?"

", 걸어 들어오십니다."

"왜 타고 들어오라지 아니했느냐?"

내시가 국궁하고 아뢴다.

"전에는 세자이시었으나, 이제는 대군이시니 타고 들어오지 못하십니다."

"그놈의 법 때문에 탈이다."

상왕비 민씨는 수척한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세종대왕은 어마마마의 불평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내 명령이다. 타고 들어오시게 하라."

내시가 급히 어명을 전하러 전각 아래로 내려서려 할 때 대전 별감이 급히 뛰어 들어와 아뢴다.

"대군마마께서 달아나셨습니다."

"달아나시다니?"

세종대왕은 깜짝 놀랐다.

"달아나다니 무슨 소리냐? 영추문 앞까지 데리고 왔다가 놓쳐버렸단 말이냐?"

대전 별감이 아뢴다.

"대군께서 별안간 두 주먹을 들어 경기감사와 양주목사의 복장을 지르시고 그대로 영추문 밖으로 뛰어나가셨습니다."

세종대왕은 혀를 끌끌 차셨다.

"못난 것들이구나. 복장을 좀 질렀기로서니 그래 달아나시는 대군을 보고 내버려 두었더란 말이냐?"

"워낙 힘이 장사십니다. 점잖게 걸어 들어오시다가 별안간 주먹으로 경기감사의 복장을 지르시고 양주목사의 허구리를 지르시니 경기감사와 양주목사는 '' 소리를 치면서 납작 업드렸습니다. 이 틈에 대군께서는 달아나셨습니다."

"너희들은 무엇들을 하고 있었더냐?"

세종대왕이 진노해서 별감을 꾸짖었다.

"소인들은 일찌감치 궐문 안에서 맞이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경기감사와 양주목사가 모시고 들어오는 것을 저희들이 어찌 간섭합니까. 멀리서 대군의 의표만 바라뵈었을 뿐 가까이 있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와 대군의 얼굴도 뵙지 못했습니다."

"못난 것들이구나. 내시, 별감, 무예청, 상궁 나인들 수수백 명이 모여 섰으면서 달아나는 양녕대군 한 분을 못 잡았단 말이냐."

"궁중 소속의 삼천 궁녀와 내시, 별감, 액정배들은 모두 다 멀리 있어서 대군의 얼굴도 못 뵈었으니 어찌 대군께서 달아나시는 일을 알았겠습니까. 그저 들어오시려니 하고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나중에 '에쿠' 소리가 나면서 경기감사와 양주목사가 납작하게 개구리 자빠지듯 넘어지는 바람에 비로소 무슨 일이 났구나 하고 뛰어갔을 뿐입니다."

세종대왕은 더욱 화기가 높았다.

"문밖에 있던 경기감영 군관과 양주 군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더냐?"

노기 띤 옥음이 더욱 높았다.

"그대들도 문밖에 있었으니 까닭을 알지 못해서 그대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던 모양이올시다."

"에이 못난 것들. 그래 어째했단 말이냐?"

세종대왕은 발을 굴렀다. 이때 승지가 얼빠진 경기감사와 양주목사를 데리고 들어왔다. 경기감사가 양주목사와 함께 부복해 아뢴다.

"신 등의 죄 만사무석이올시다. 성안을 우러러뵈올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은 용안에 불쾌한 빛이 현연하셨다.

"못난 것들... "

혀끝을 툭툭 찼다. 세종대왕은 못마땅한 얼굴로 양미간을 찌푸리시고 경기감사와 양주목사에게 하문하셨다.

"대군이 종적을 감추신 후에 너희들은 어찌했느냐? 어떤 조처를 취했느냐 말이다."

"곧 정신을 수습해서 감영 군사와 양주 군노를 풀어서 대군의 종적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군사가 효잣골 민가앞에서 대군께서 벗어놓고 가신 의관을 찾았습니다. 그리하와 북한으로 가신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옵고 지금 북한산성 속을 샅샅이 뒤지는 중이올시다."

세종대왕은 다시 진노하셨다.

"너희들은 가만히 자빠져 있고 군사들만 보냈단 말이냐. 잘들 한다. 지체가 높아서 못 갔단 말이지."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세종대왕은 지리에 밝았다. 가만히 용상 위에 앉아 계신 듯했으나 서울지리를 환하게 알았다.

"그래, 북한산성 속만 뒤지라 했느냐?"

", 그리했습니다. 자하문 밖 길은 삼태속 같아서 북한으로 오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세종대왕의 용안은 엄숙했다.

"양주목사가 접경의 지리를 모르고 어찌 정사를 할 수 있는가. 자문 밖에서 홍제원으로 뚫린 길목이 있지 아니하냐. 이 길로 간다면 서관대로로 통하는 길이다. 빨리 그편 길로 수사해보라."

경기감사는 급히 경기감영으로 돌아가고, 양주목사는 양주, 파주, 장단 길로 들어서 걸인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행방이 묘연했다. 이때 큰 아드님 양녕을 대면하려 하여 병석에서 경복궁 대궐까지 납시었던 상왕비 민씨는 아드님 되는 양녕대군이 걸인이 되어 돌아다니다 양주목사한테 발견이 되어 경기감사와 함께 알현하러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일각이 삼추같이 기다렸다. 급기야 양녕이 옷, 갓을 벗어버리고 다시 걸인이 되어 행방을 감추었다는 말을 듣고 상심이 되는 중에 더한층 상심이 되었다.

"이럴 수가 있느냐. 대궐 문 앞까지 함께 와가지고 다시 잃어버렸다 하니 옆의 사람들은 바지저고리만 있었더냐."

크게 노했다. 세종대왕은 어마마마의 마음을 상해드리게 한 일이 죄송스럽고 미안했다.

"기어코 대군의 종적을 찾아서 어마마마께 대면케 해드리올 테니 안심하시옵소서."

자전을 위로하여 다시 수강궁으로 모시게 한 후에 경기감사와 양주목사에게 엄한 분부를 내렸다.

"힘을 다하여 양녕대군의 종적을 기어코 찾으라."

두 관원은 등에 땀이 배어 물러났다. 파주 군수는 양주목사가 양녕대군을 찾다가 실패한 소문을 들었다. 공을 세우고 싶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양녕대군의 얼굴을 확실하게 짐작하지 못하고는 막연히 걸인으로 변신한 양녕대군의 얼굴을 확실하게 찾을 길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가만히 궁리를 한 끝에 묘안을 하나 생각해냈다. 친히 화사 한 사람을 대동하고 양주 회암사에 두류하고 있는 효령대군을 찾았다. 절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있던 효령대군은 파주 군수가 찾아와서 뵙기를 원한다 하니 흔연히 허락하고 대면해 주었다. 파주 군수는 효령대군께 절하여 뵙고 고했다.

"아뢸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효령은 미소를 지어 물었다.

"나라에서 지금 양녕대군을 찾으라고 팔도에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더욱이 경기도 안에 있는 고을은 근기가 되므로 분부가 지엄하십니다. 지난번에 양주목사는 양녕대군의 용모를 말만 듣고 짐작으로 찾았습니다. 그러니 실패를 한 듯합니다. 소관은 양녕대군의 용모를 대군께 여쭈어보아서 환 잘 치는 화사에게 그려가지고 대군의 종적을 찾으려 합니다. 존의가 어떠하신지 지시해주신다면 크나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효령대군은 파주 목사의 말을 듣자 무릎을 치고 칭찬했다.

"과연 슬기 있는 생각일세. 화사를 데리고 왔는가?"

", 대동하고 왔습니다."

"데리고 들어오라. 일러주리라."

효령은 쾌하게 허락했다. 파주 목사는 방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화사를 데리고 들어갔다. 화사는 지필묵과 채색을 꺼내놓고 효령이 말하는 대로 양녕의 모습을 그렸다. 눈은 어글어글하게 크고, 코는 우뚝하고, 귀는 크고도 도톰하고, 입술은 두툼하고, 수염은 중간이라고 차례차례로 일러주었다. 화사는 효령이 시키는 대로 그렸다. 한 폭의 훌륭한 초상화가 되었다. 화사는 그리기를 마치고 효령에게 감해 보였다. 그림을 바라보는 효령의 입은 딱 벌어졌다.

"용하다. 양녕대군께서 곧 앉아 말씀을 하시는 듯하구나."

효령대군은 파주 군수를 향하여 화사의 재예를 칭찬했다. 파주 군수도 유쾌했다.

"근사합니까?"

"근사라니, 아주 방불하이. 양녕대군께서 바로 앉아 계신 듯하이. 잘 그렸네."

"그럼, 소관은 물러가겠습니다."

"상왕 전하를 위시하여 상감마마와 상왕비마마께서 극력 수탐하라고 당부하신 일이니 빨리 양녕대군을 찾아 모시고 서울로 들어가도록 하게. 자네 슬기가 제법일세."

효령대군은 파주 군수의 지혜를 칭찬해서 돌려보냈다. 파주 군수는 양녕대군의 화본을 가지고 화사와 함께 본군으로 돌아갔다. 파주 군수는 본군으로 돌아가자 화사를 시켜서 화본 네 개를 더 그리게 했다. 네 개를 더 그린 후에 사방에 화본을 높이 걸고 전군에 영을 내렸다.

'이 얼굴과 똑같은 걸인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상금 천 냥에 비단 열 필을 주리라.'

방을 써 붙였다. 오고 가는 사람들은 허욕이 부쩍 생겼다.

"저 화상이 누구의 화상인데 후한 상금을 주어서 찾으려 하나?"

"양녕대군의 화상일세. 지금 양녕대군께서 폐세자가 된 후에 걸인으로 변장하시고 방랑 생활을 하니 나라에서는 찾으라고 분부를 내리셨네. 그래서 파주 군수도 공을 세워보려고 후한 상금을 걸어서 저 화본과 같은 걸인을 찾는 모양일세."

"상금은 탐이 나데마는 용이한 일이 아닐세. 저와 똑같은 걸인이라야 하겠는데, 거지는 많지만 어디 저와 같은 신수 좋은 걸인이 있을 수 있나."

소문은 짜하게 퍼졌다. 건달패 한 사람이 있었다. 화상을 내어 걸었다는 소문을 듣고 방 앞으로 가까이 갔다. 문득 화본을 보니 어디서 본 사람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 친구 중에 삼보라는 친구의 모습과 꼭같았다. 두 번 세 번 보아도 삼보의 얼굴판 같았다. 건달패는 마음속으로 계교를 생각했다. 벙긋벙긋 웃으며 친구 삼보를 찾았다. 건달패의 웃는 모습을 보자 삼보가 묻는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겼나?"

"좋은 일이 있네. 자네하고 의논하러 온 길일세."

"무슨 일인가?"

"자네 읍네에 화상을 걸어놓고 방 붙인 것을 보았나?"

"보았네. 양녕대군을 찾는 모양이데 그려. 소문을 들으니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된 후에 걸인이 되어 방랑생활을 하는 모양이데 그려."

"잘 아네 그려. 우리 한 번 장난을 쳐 보세."

건달패의 말을 듣자 삼보는 눈을 크게 떴다.

"장난을 쳐 보다니. 무슨 장난을 쳐 본단 말인가?"

"상금 천 냥에 비단 열 필을 받아서 우리 노나 먹기로 하세."

"이 사람아, 그 화본과 똑같은 거지가 우선 나타나야 하지 않겠나. 그런 것을 어디 가 찾는가?"

건달패가 말한다.

"자네는 그 화상을 보고 느낀 바가 없나? 얼굴이 자네 비슷하지 않던가."

"글쎄. 내 얼굴과 비슷하다고 생각도 해 보았네마는 내가 양녕대군도 아니고 걸인도 아닌 바에야 관심을 가질 까닭이 있나. 그대로 보고만 넘겼네."

건달패는 삼보의 앞으로 바싹 다가 앉아 웃으며 말한다.

"우리 상금을 받아가지고 절반씩 노나 먹기로 하세."

삼보가 펄쩍 뛴다.

"글쎄, 그런 걸인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나. 사람은 없는데 상금부터 생각하니, 떡 줄 놈은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실 생각하는 일과 똑같은 자네 말일세 그려."

삼보는 껄껄 웃는다. 건달패는 삼보를 다시 보고 말한다.

"자네가 떡 줄 사람이 되란 말일세. 걸인이 되어서 가짜 양녕대군 노릇을 한번 해보란 말일세. 그럼, 나는 대금 천 냥에 비단 열 필을 받아가지고 자네하고 노나 먹는단 말일세."

삼보는 고래를 가로 흔들었다.

"그러다가 발각이 되면 어찌하나. 필연코 서울 대궐까지 데리고 갈 텐데. 나인, 별감, 춘방사령, 무예청이며 내시들이 양녕대군을 모를 리가 있나. 그나 그뿐인가. 상감과 상왕비며 상왕 전하께서 모두 다 대면을 하실 텐데. 공연히 상금 몇 푼이 탐이 나서 내 목이 달아난다면 자네 좋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나는 담이 작아서 못하겠네."

삼보는 건달패의 말을 한 말에 끊어버렸다.

"이 사람, 자네는 너무나 고지식하이. 내 말을 좀 자세히 듣게."

건달패는 말을 마치자 삼보의 귀에다가 바싹 입을 대고 한동안 수군거렸다. 펄쩍 뛰면서 머리를 흔들던 삼보는 건달패의 귀엣말을 듣고 난 후에 빙긋 웃음을 웃어 보였다.

"글쎄, 그렇게 해볼까?"

"꼭 그리해보세. 쥐도 새도 모르는 일 아니겠나. 그리한 후에 상금과 비단은 우리 둘이 오붓하게 노나 먹잔 말일세. 그리고 자네는 그동안 흠뻑 호강을 하고."

건달패는 꿀을 담아 부었다.

"자아 그럼, 내일 저녁때 만나기로 하세."

건달패는 삼보를 작별하고 돌아갔다. 이튿날 승석 때쯤 해서 건달패는 보따리 하나를 들고 다시 삼보를 찾았다.

"자아, 일을 시작해 보기로 하세."

건달패는 말을 마치자 보따리를 끌렀다. 넝마같은 거지 옷이 한 벌 나타났다.

"거지 옷은 용하게 어데서 얻어 왔네그려."

"거지한테 돈을 주고 벗겨왔네. 돈바람에 얼른 벗어주데그려. 하하하. 자아 어서 옷을 벗고 누더기옷을 걸치게."

삼보는 건달패가 시키는 대로 자기가 입었던 옷을 벗어놓고 더럽고 추한 거지옷을 입었다. 두 사람은 문밖으로 나섰다. 파주 읍내 삼문 앞에 당도하자 건달패는 삼보의 팔을 부여잡고 큰소리로 외친다.

"여기 화본과 똑같은 걸인을 잡아 왔소. 군노사령들은 빨리 나오시오. 자꾸만 달아나려 하오."

거짓 걸인이 된 삼보는 건달패의 떠드는 대로 몸을 틀어 달아나려는 모습을 뵈었다. 삼문 안에서 육방관속들은 건달패의 떠드는 소리를 듣자 급히 뛰어나왔다. 한 사람이 걸인을 붙잡고 승강이하는 모양이 보였다. 이방은 동헌으로 뛰어가 파주 군수한테 고했다.

"한 사람이 걸인을 잡아 왔는데 흡사 화본 같은 걸인입니다. 걸인은 달아나려고 승강을 치고 있습니다. 아마 진짜 양녕대군이신가봅니다."

파주 군수는 귀가 번쩍했다.

"어서 빨리 가서 모셔오너라. 달아나시면 큰일이다."

이방, 호방을 위시하여 군노사령들은 함빡 삼문밖으로 달음질쳐 나갔다. 과연 어떤 사람 하나가 풍채 좋은 거지와 승강질을 하고 있었다. 이방은 군노사령들에게 눈짓을 했다. 군노사령들은 일제히 달아나려는 걸인을 포위하고 삼문 안 동헌 앞으로 끌어들였다. 동헌 앞에 앉아 있던 파주 군수는 들어오는 거지를 보니 과연 효령대군한테 화사를 데리고 가서 그려온 화본과 비슷했다. 급히 뛰어내려가 걸인의 손을 탁 잡았다.

"대감, 고생이 심하십니다. 어서 올라가십시오."

일부러 짜고 하는 것이었다. 삼보는 파주 군수의 손을 뿌리치며 말한다.

"대감이 무슨 대감이란 말요. 공연히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나를 놓아주시오."

의젓하게 말하는 품이 제법 점잖았다. 파주 군수는 이분이야말로 진짜 양녕대군이라 생각했다.

"사양해서 피하지 마시고, 어서 올라가십시다."

파주 군수는 친히 삼보의 겨드랑이를 부액해서 당상으로 끌어올렸다. 파주 군수가 이쯤 걸인을 대우하니 이방, 호방이며 육방관속들은 진짜 양녕대군이라 생각했다. 동헌에서는 연해 설렁줄이 울렸다.

"세숫물 대령해라."

"의복 일습을 상벌로 바쳐라."

"구첩반상으로 진짓상을 바쳐라."

"반주를 따뜻하게 데어 내오너라."

연해 연방 명령이 내렸다.

이때 해는 이미 떨어지고 어둑어둑 황혼 때가 되었다. 곧 서울로 데리고 올라갈 수는 없었다. 파주 군수는 호방에게 영을 내렸다.

"조용하고 깨끗한 민가에 대감 사처를 정해드려라."

이윽고 호방은 파주 읍내에서 제일 정결한 집에 사처방을 정하고 파주 군수한테 복명했다.

"사처방을 정해 놓았습니다."

파주 군수는 삼보를 가마에 태워가지고 함께 사처방으로 나갔다. 방안에는 벌써 옥등잔 아래 홑벌로 금침이 펴지고 요강 타구까지 벌여놓았다. 파주 군수는 토인에게 영을 내린다.

"내아에 있는 숙수한테 기별해서 밤참 한 상을 잘 차려오라 일러라."

토인은 영을 받고 급히 삼문 안 내아로 달려갔다. 이때 동헌밖 아전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건달이 아직 물러가지 아니하고 있었다. 군수가 삼보를 사처로 데리고 나간 후에 건달은 아전들한테 말했다.

"양녕대군을 발견해서 모시고 오면 돈 천 냥에 비단 열 필을 상급으로 주신다 했습니다. 인제 일이 끝났으니 행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해도 저물었으니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방, 호방들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이방은 호방을 돌아보며 말한다.

"호방께서 사또께 말씀을 드려보시오."

고을 재물을 출납하는 일을 호방이 맡아서 처리하는 때문이다. 호방은 삼보와 함께 있는 사처방으로 달려갔다.

"사또께 아뢰오. 양녕대군을 모시고 온 사람이 약속하신 대로 상급을 달라고 아룁니다."

파주 군수는 양녕을 발견한 것만이 그지없이 기뻤다. 선뜻 허락했다.

"그래라. 약속은 지켜야 한다. 막중하신 양녕대군 대감을 모시고 왔는데 상급을 아니 줄 수 있느냐. 방에 써 붙여서 약속한 대로 돈 천 냥에다가 비단 열 필을 주어 보내라."

파주 군수는 쾌하게 허락했다. 더구나 양녕대군앞이라 인색한 행동을 보여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호방은 사또의 분부를 받고 물러갔다. 곧 삼문으로 들어가 이방과 의논한 후에 고문을 열고 건달을 불러서 돈 천 냥에 비단 열 필을 꺼내주었다. 건달은 마바리에 돈 천 냥과 비단 열 필을 싣고 이방과 호방한테 고맙다고 백배치사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 읍내에서 데리고 온 마부한테는 후한 삯을 주어 돌려보내고, 미리 짜 놓았던 마부를 불러서 처자 권솔을 두 필 말에 태우고 자기는 부담농에 돈과 비단을 실은 후에 밤을 도와 파주 경내를 넘어서서 솔가도주 해 버렸다.

한편 삼보를 양녕대군으로만 알고 사처방에 있는 파주 군수는 밤이 깊자 내아에 기별해서 미리 당부했던 밤참상을 내오라 했다. 양녕대군을 대접하는 밤참상이었다. 비록 시골이라 하나 서울이 가까운 경기도 땅이었다. 수륙진미가 어울린 떡 벌어진 주안상이 나왔다. 파주 군수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평소에 양녕대군은 호색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자꾸만 달아나려는 양녕이었다. 그의 마음을 붙잡자면 일등 명기로 양녕의 마음을 낚아 놓아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밤참상을 영거해 가지고 나온 토인한테 분부를 내린다.

"모처럼 대감을 사처로 모시고 밤참을 대접하는데 약주 따라드릴 사람이 없어서야 쓰겠느냐. 빨리 이방하고 의논하고 고을 안에 제일가는 명기 명창을 불러서 대감의 객회를 풀어드리도록 해라."

토인은 사또의 분부를 받자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방을 찾아서 사또의 분부를 전했다. 이방과 호방은 서로 의논한 후에 파주 고을에서 제일가는 명기 두 명을 뽑아서 사또와 가짜 양녕이 있는 사처방으로 들여보냈다. 기생 두 명이 들어왔다. 시골 관기로는 해말끔한 얼굴판들이었다. 기생들은 사또를 향하여 문안 절을 올렸다. 사또는 황망히 손을 저어 자리를 피해서 물러앉으며 기생에게 분부한다.

"나한테 먼저 문안 절을 해서는 아니 된다. 저기 앉으신 대감께 먼저 문안을 드려라. 세자마마이셨던 양녕대군 대감이시다."

기생들은 사또의 지휘를 받자 삼보를 향하여 문안 절을 올렸다. 삼보는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시침 뚝 떼고 의젓이 앉아서 절을 받았다.

"자아, 이리들 앉아라. 주안상앞으로 와서 약주를 따라드려라."

기생 한 명은 삼보의 옆으로 바싹 다가앉고 한 명은 파주 군수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먼저 대감께 약주를 따라드려라."

파주 군수의 지휘로 기생은 삼보한테 술을 따라 올렸다. 삼보는 한평생 처음으로 기생이 따라 올리는 술잔을 받았다. 그러나 서투른 티를 보여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기생을 향하여 들은 풍월로 얻어들은 수작을 한마디 한다.

"소술을 먹으라느냐. 기생 쳐놓고 술을 따르면서 어째 노래 한마디가 없느냐. 그저 마시란 말이냐?"

의젓하게 한마디 했다. 기생보다 파주 군수가 황망했다.

"어서 권주가를 해 올려라."

기생들은 술 권하는 권주가를 노래했다. 삼보는 권주가가 끝날 무렵에 의젓하게 술잔을 들어 마셨다. 역시 얻어들은 수작이었다. 제법 풍류가 있어 보였다. 파주 군수와 기생들은 마음속으로 역시 세자로 계시던 분이라 술 마시는 방식이 제법 법도가 있구나 하고 탄복했다. 파주 군수와 삼보는 밤이 으슥하도록 기생을 데리고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시었다. 삼보는 술을 마시면서 취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상아래 그릇을 내려놓고 슬며시슬며시 술을 버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취한 체 했다. 기생을 어르기도 하고 껴안기도 했다. 파주 군수는 이만하면 양녕이 미인계에 떨어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밤도 깊었다. 파주 군수는 삼보한테 인사하고 일어났다. 기생 두 명 중에 한 명이 뒤에 따라 일어섰다.

"기생 한 명을 수청들여 드립니다. 오래간만에 객회를 푸십시오. 소인은 물러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와서 뵙겠습니다."

삼보는 껄껄 웃으며 고맙다고 답례를 했다. 사또가 돌아간 후에 삼보는 일부러 취한 체하면서 기생을 어루어 오입 한 판을 치른 후에 한숨 자다가 대문 빗장을 가만히 뽑고 문밖으로 나섰다. 기생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삼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건달패와 약속한 곳으로 달아났다.

이튿날 기생은 파주 군수한테 고했다. 파주 군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다음엔 또 한 가지 희극이 일어났다. 적성 현감은 나이 육십에 겨우 수령 중에도 그중 말단인 현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과거해서 출륙을 한 후에 등댈 곳이 없어서 환갑지년에 현감 부스러기로 평생을 보내고 있으니 항상 아내와 함께 한탄을 했다.

"남들은 나이 사십에 경기감사니 평안감사니 하고 한바탕 호강들을 하고 있는데, 나는 나이 육십에 현감 쪼가리로만 돌아다니니 과연 신세가 딱하오. 앞으로 나이 더 늙고 벼슬이 떨어지게 되면 철없는 자식들과 어찌 지낼지 앞일이 캄캄하오."

적성 현감의 한탄하는 소리를 듣자 늙은 마누라가 핀잔을 준다.

"당신이 주변이 없어서 그렇지 무어요. 김판서, 이판서에 영의정 대감을 좀 찾아다니시오. 낯도 익히고 첨도 좀 개어올리면 다 되는 수가 있지 아니하오. 당신은 너무나 강직하고 첨을 몰라서 탈이오. 온 세상일이 첨과 인정으로 되는 판에 당신의 청백을 누가 알아준답디까. 보시오, 양주목사는 이조판서 집사람이고 광주유수는 병조판서와 척분이 된다 합니다. 당신도 한탄만 하지 말고 어서 좀 권문세가에 아침저녁으로 드나드시구려. 공연히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고만 있지 말고."

마누라는 영감을 나무라면서 좀 활동을 해 보라고 핀잔을 주었다. 영감은 버럭 화증을 냈다.

"젊은 놈도 아니고 머리가 허연 몸이 어떻게 새파란 판서 대감들 앞에 절을 하고 첨을 하느냐 말야. 사람이 인두겁을 쓰고는 차마 못 할 짓이거든. 보소, 이조판서는 올해 마흔일곱 살이고, 병조판서는 겨우 서른다섯 살이란 말야. 새파랗게 젊은 이 사람들 앞에 어지 환갑이 된 늙은 놈이 날마다 수청방이 객실로 나가서 댁대령을 하고 있단 말인가. 딴소리하지 말라고."

"누가 딴소리를 했소. 당신이 딴소리지. 왜 그럼 발신이 안 된다고 한탄을 했소?"

영감과 마누라는 서로들 아귀다툼을 하고 있었다. 두 양주는 한참 싸우고 있다가 적성 현감은 또 개탄조로 탄식을 했다.

"발신이 될 좋은 기회가 있건만 수가 있어야지."

마누라가 영감의 말을 듣고 또 참견을 했다.

"어떤 발신할 기회가 있단 말씀요?"

"허허. 나라에서는 전의 세자이셨던 양녕대군을 찾아들이면 수령방백들에게 한 등씩 올리시겠다는 말씀이 있다 하는데, 찾을 도리가 있어야지."

"양녕대군이 어디로 가셨기에 그러오?"

적성 현감은 마누라의 묻는 말에 대답한다.

"거지가 되어 종적을 감추고 다니시는데 이분을 찾아서 서울로 모시고 가기만 하면 원들은 한 등급씩 올린다고 새 상감께서 전교를 내리셨다 하오."

마누라는 듣고 나자 영감에게 묻는다.

"당신 세자마마를 뵌 적이 있소?"

"없지. 내가 어떻게 세자마마를 뵐 기회가 있었겠소."

"그렇다면 어찌 찾는단 말씀요?"

마누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감을 쳐다보았다.

"아마 파주 군수는 양녕대군을 뵌 일이 있나봅니다. 파주 삼문 앞에 양녕대군의 화본을 그려 붙이고 이런 분을 찾아오면 돈 천 냥에 비단 열 필을 준다고 방을 붙였더니 과연 어떤 사람 하나가 거지 노릇하는 양녕대군을 억지로 모셔와서 상금과 비단을 받아갔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렇다면 양녕대군을 찾았으니 소용이 없구려."

"아니야. 양녕대군은 파주 군수의 후대를 받은 후에 밤사이 또다시 거지가 되어 달아나셨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찾으면 공을 이룰 수 있단 말이지."

"그러면 좋은 수가 있소, 영감."

마누라는 영감 앞으로 바싹 다가앉는다.

"무슨 좋은 수가 있소?"

"우리 거지 잔치를 한 번 해 봅시다. 그리고 파주에 방을 붙인 화본을 모사해 가지고 거지들의 얼굴을 대조해 보면 되지 않겠소."

적성 현감은 마누라를 타박준다.

"피해서 달아난 양녕대군이 거지 잔치를 한다고 자기 발로 어정어정 걸어오실 리가 있나. 미련하기 곰 같은 소리만 하는구먼."

"여보, 사흘 굶어서 도둑질 않는 사람이 없다고, 아무리 양녕대군이라 하나 거지 잔치를 한다면 혹시 오실는지 누가 아오. 그때 가서 우리는 슬쩍 화본과 대조해 보면 판단이 되지 않겠소. 그리고, 우리는 삼문에 화상을 걸어놓지 말고 영감이 가지고 계시다가 들어오는 거지마다 얼굴을 대조해 보면 알 것이 아니겠소. 겉으로는 그저 거지 잔치를 한다고 소문을 놉시다."

적성 현감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잔치를 할까?"

마누라가 대답한다.

"적어도 경기도 안 거지는 모두 다 모여들도록 해야 할 테니 삼일소연에 오일대연은 해야 할까 봅니다."

적성 현감은 깜짝 놀랐다.

"삼일소연에 오일대연을 한다면 조그마한 적성 고을 재물이 다 두려빠지라고... "

"아따, 영감은 너무나 배짱이 없어서 밤낮 이꼴이란 말요. 그러니까 나이 육십에 현감 부스러기로만 돌아다닌단 말이오. 배짱을 큼직하게 가져보시란 말씀요. 아무러기로서니 양녕대군을 찾기 위하여 거지 잔치를 했다고 나라에서 벌을 주시겠소. 잘하면 목부사는 떼어놓은 당상이구 못 되어도 밑져야 본전 아니겠소. 마음을 좀 크게 잡수시오."

적성 현감은 마누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현감은 동헌으로 나가자 이방을 불렀다.

"적성 고을에 혹시 환치는 사람이 있겠느냐?"

조그만 시골구석에 환쟁이가 있을 턱 없었다.

"적성에 어디 그런 사람이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환쟁이는 별안간 무엇에 쓰시렵니까?

적성 현감은 양녕대군의 일을 일장설파하고 파주에 붙어 있는 화본을 모사할 것을 말했다. 이방은 선뜻 대답했다.

"어렵지 아니합니다. 소인이 모사해 가지고 오겠습니다."

"네가 그림 재주가 있느냐?"

적성 현감은 반색하고 물었다.

"어려서 사군자를 좀 그려보았습니다."

"사군자를 그린다고 사람의 화상을 그릴 수 있느냐?"

이방은 픽 웃었다.

"모사쯤이야 못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네가 곧 파주로 가서 양녕대군의 모습을 그려오너라."

이방은 당일 파주로 가서 양녕대군의 화상을 모사해왔다.

현감은 이방을 칭찬한 후에 호방에게 삼일소연에 오일대연으로 거지 잔치하는 반포를 하라 했다. 호방은 적성 삼문 앞과 장터마다 방을 높이 붙였다.

'며칠서부터 며칠까지는 적성서는 거지 잔치를 하기로 했다 삼일소연에 오일대연을 할 작성이다. 천하의 걸인들은 모여서 배불리 밥을 먹고 술을 마시라.'

방방곡곡에 방이 붙었다. 날짜가 되니 적성 삼문 안에는 큰 가마솥에 곰국이 끓고 어백미 같은 쌀로 밥을 지었다. 막걸리를 동이동이 준비했다. 너비아니 고기 굽는 냄새가 적성 삼문 앞에 가득했다. 고기 굽는 냄새는 거지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이라고 비위가 동할 지경이었다. 걸인들은 사면팔방에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모두 다 배불리 먹고 얼근히 취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흩어졌다. 적성 현감은 거지가 들어올 때마다 이방이 파주에서 모사해 온 양녕의 화본과 얼굴을 대조해 보았다. 그러나 한 사람도 화본과 같은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도 없었다. 사흘째도 보이지 아니했다. 팔일동안 계속하는 거지 잔치에 경기도 일판 거지는 모두 다 모여들었으나 양녕대군의 모습과 비슷한 거지는 한 명도 없었다. 적성 현감은 맥이 탁 풀렸다. 여드레 동안 거지 잔치를 한 비용은 막대했다. 호방은 사또께 아뢰었다.

"거지 잔치를 한 비용을 공금으로 떨리까? 사또의 사비로 하기하오리까?"

원래 주변 없고 청백하고 마음이 착한 현감이었다.

"양녕대군도 찾지 못하고 어찌 공금으로 떨겠느냐. 나의 요차로 하기해라."

호방은 사또의 명대로 현감의 사비로 비용을 떨었다. 어사가 돌아다니다가 적성 현감이 불쌍한 경기도 거지들을 사비를 들여서 포식시켰다는 소문을 들었다. 곧 세종대왕께 아뢰었다. 세종대왕은 선치수령이라 해서 불차탁용으로 수원부사로 승진을 시켰다. 적성 현감은 수원부사가 된 것은 마누라의 덕이라 해서 마누라한테 절을 했다.

 

잡히는 양녕

 

진짜 양녕대군은 수종사에서 설오화상에게 효령대군이 '석보상절'의 주해를 의논하러 온다는 말을 듣자 효령을 만나게 되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부랴부랴 만류하는 설오화상과 총총히 작별한 후에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대삿갓을 쓴 후에 지팡막대를 걸떠짚고 다시 방랑의 길로 들어섰다. 우선 양근 사촌의 집에 가 있겠다고 한 명보 내외를 찾아보고 싶었다. 몇 고개의 산을 넘었다. 굽이쳐 흘러가는 강물을 따라 길가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양근 땅이 어디메냐 물었다. 바로 지척이라 하는데 양근 땅은 나타나지 아니했다. 산에서 사람이 가르쳐주기를, 저기 보이는 저곳이 바로 양근 읍내라고 했다.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 양근 땅은 아니었다. 걸어보지 못하던 양녕이었다. 발은 부르트고 다리는 아팠다. 얼마쯤 가니 해가 한낮이 되었다. 산골이 탁 터지고 들판이 활짝 열려진 곳에 인가가 조밀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양녕은 비로소 한숨을 지었다. 이제는 양근 땅에 당도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산에서 내려서 강물을 끼고 돌았다.

사람들이 벅적댔다. 물어보니 양근 땅이라 했다. 양녕은 고향에 당도한 듯 기뻤다. 양녕은 대삿갓을 쓰고 장터 앞을 지났다. 장차 양근 읍내에 사는 명보의 사촌을 찾아갈 셈이다. 그러나 남대문입납이었다. 어찌하면 찾나 하고 망설였다. 묘한 생각이 궁리 끝에 들었다. 서울 대궐 안에 춘방사령으로 있던 명보의 사촌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될 성싶었다. 한 손으로 삿갓을 잠깐 들고 길가는 행인 한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려 했다.이때 홀저에 한 사람이 앞으로 쫓아왔다.

"세자마마, 이거 웬일이십니까?"

큰소리로 외치자 이내 넙죽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양녕이 자세히 보니 명보다. 반갑기 그지없었다.

"너 웬일이냐?"

"세자마마께서는 웬일이십니까?"

큰소리로 외쳤다.

"... 세자마마가 무어냐. 누가 듣는다. 떠들지 마라. 조용히 네 집으로 가자."

명보는 양녕의 거지 탈을 쓴 행색을 보자 울음보가 왈칵 터졌다. 참으려 하나 참을 수가 없었다. 엉엉 울었다. 양녕은 급히 손바닥으로 명보의 입을 막았다.

"남이 듣는다. 왜 이러느냐. 어서 네 집으로 가자."

명보는 억지로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고 주먹으로 눈물을 씻은 후에 앞에 서서 양녕을 인도했다. 장터를 돌아서 구불구불 밭도랑과 논길을 지나서 조그마한 마을 속으로 들어섰다. 십여 채 농가가 모여 있는 중에 그중 자그마한 초가로 들어갔다. 명보가 '여보' 하고 부르는 소리에 한 여자가 뛰어나왔다.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였다. 봉지련의 어미는 명보가 웬 삿갓 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세자마마께서 오시오." 하고 명보가 외치는 바람에 몸을 구부려 삿갓 밑으로 보니 과연 양녕대군이었다. 명보의 아내도 깜짝 놀랐다.

"아이고머니나, 동궁마마께서 이게 웬일이십니까?"

봉지련의 어미도 양녕의 주제꼴을 보자 기가 막혔다. 짚신은 날이 다 떨어져 나가고 버선은 진흙과 먼지로 새까맣게 덮여졌는데. 해져서 발가락이 이 구멍 저 구멍으로 튕겨져 나왔다. 봉지련의 어미는 어이가 없었다. 눈물이 두 눈에서 핑 돌았다.

"동궁마마, 어서 의관을 벗으십시오. 그리고 세수도 하시고 발도 씻으신 후에 명보의 빤 옷이라도 갈아입으십시오."

양녕은 고래를 가로 흔들고 웃으며 대답했다.

"일부러 자취해서 걸인이 된 일 아닌가.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네. 걸인이 새옷을 입어서야 말이 되는가. 세수나 좀 하고 발이나 씻겠네."

명보의 아내는 양녕대군한테 세숫물을 오지대야에 떠서 바치고 질자배기에 발 씻을 물을 대령했다. 양녕은 삿갓을 벗은 후에 세수를 하고 해진 길목버선을 벗고 발을 씻었다. 양녕이 세수를 하고 발을 씻는 동안에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는 양녕이 시장하겠다 생각하고 부랴사랴 밥을 짓고 토장을 떠서 국을 끓이고 달걀로 찌개를 해서 올렸다. 찬은 대단치 아니했으나 온 정성을 다해 장만한 밥이었다. 양녕은 오랜만에 따끈따끈한 밥과 토장국이며 달걀찌개를 달게 먹었다. 양녕이 밥상을 물린 후에 명보는 어째서 양녕이 걸인 행색을 했는가 까닭을 묻고, 양녕은 감시를 받는 모든 일이 아니꼬워서 산성 초정에서 뛰어나온 일을 일장설파했다.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는 한편으로 분하고 한편으로 양녕의 마음을 어찌하면 가라앉혀 드리나 하고 마음속으로 걱정만 하고 있었다. 양녕은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를 향하여 묻는다.

"시골 생활을 아니해보던 너의 내외들인데 시골 농촌에서 과히 고생은 되지 않느냐?" 하고 명보 내외의 신상을 염려해서 물었다.

"저희들은 사촌이 농사를 짓고 있으니 아무 염려 없습니다. 그저 농사짓는 뒷배나 보아주고 있으면 먹고 입고 사는데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명보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 후에 장사패들의 소식은 들었느냐?"

양녕은 함께 있던 장사패가 또다시 궁금했다.

"소인은 서울 출입을 못 하니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제 사촌이 나무바리를 끌고 서울 가는 편에 소식을 알아보라 했습니다. 처음에는 광주유수의 호랑 감투 씌운 죄로 금부에 갇혔다가 광주유수가 죄를 당하는 바람에 무사타첩이 되어 다들 나와 잘들 있다 합니다."

양녕은 다시 명보에게 묻는다.

"너는 아까 어디로 가던 길이냐? 어디로 가다가 도중에서 나를 만났느냐?"

명보는 대답을 할까말까 망설였다. 곧 대답을 못 하고 아내 봉지련 어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을 하면 양녕이 크나큰 충격을 받을까 두려웠던 때문이다. 봉지련의 어미는 숨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제 알아도 양녕이 알아야만 할 일이다. 명보를 향하여 눈짓을 했다.

"바른 대로 말씀 여쭙구려. 언제 아셔도 아셔야 할 일인데... "

양녕은 눈치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크데 뜨고 묻는다.

", 무슨 일이 생겼느냐? 나하고 관련된 일이냐?"

명보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세자마마, 놀라지 마십시오. 어리 아씨가 돌아가셨다 합니다."

양녕은 깜짝 놀랐다.

"무어, 어리가 죽다니 웬말야? 병도 없는 젊은 사람인데... "

"산성 뒷산에서 목을 매어 자진하셨다 합니다."

"무어야!"

양녕은 맥이 탁 풀렸다. 마루 끝으로 뛰어나갔다. 양녕의 얼굴 표정은 미친 듯했다.

"아니, 무슨 일로 목을 매어 죽었다더냐?"

명보에게 묻는다.

"세자마마께서 종적을 감추신 이후에 광주유수는 깜짝 놀라서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습니다. 곧 서울로 올라가 위에 아뢰었더니 금부에서는 산성에서 심부름하던 관비들을 잡아다가 엄하게 세자마마의 종적을 추궁했다 합니다. 그리하니 관비들은 어리 아씨밖에 알 사람은 없다고 공초를 했다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금부도사가 광주산성으로 나왔다 합니다. 어리 아씨는 이 소식을 듣자 잡혀가서 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리리 세상을 등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만 산에 올라가 자진을 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소인은 하도 기가 막혀서 산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혼자 계신 마님도 위로해 드리고 어리 아씨께서 묻히신 묘소를 찾아서 일장통곡이나 해서 무주고혼을 위로해 드릴까 했던 것입니다."

양녕은 말을 듣자 간장이 오그라들고 찢어지는 듯했다. 정신이 아뜩했다. 하도 기가 막힌 소식을 듣고 보니 눈물 한 점 나오지 아니했다. 공연한 짓을 해서 평탄하게 잘살고 있는 남의 소실을 억지로 데려다가 이 꼴을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자기를 책망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온몸이 결리고 쑤시는 듯 아팠다.

"내가 한 여자의 한평생을 망쳐놓았구나!"

양녕은 한마디 하고 한숨을 길게 지었다. 양녕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루 끝에 벗어놓았던 삿갓을 집어서 머리에 썼다.

"어디로 가시려고 삿갓을 쓰십니까?"

명보가 당황하게 묻는다. 양녕은 긴 한숨을 짓고 말한다.

"어리의 무덤을 찾아서 일장통곡이나 하고 나 때문에 죽은 고혼을 위로나 해주련다."

"아니 되십니다."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가 펄쩍 뛰며 만류했다.

"안될 것이 무어 있느냐. 세상이 아니 되는 일이 어디 있느냐?"

"잡히시면 어찌합니까?"

"잡히면 잡히는 것이지 나를 설마 역적으로 몰겠느냐. 어리가 제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을 듣고 어찌 내가 불쌍한 어리의 무덤을 아니 찾아보겠느냐. 가서 무덤 앞에 사죄를 해야 하겠다."

명보가 말한다.

"소인이 대감마님을 대신해서 무덤을 찾아가 어리 아씨의 고혼을 위로하고 오겠습니다. 대감마님께서는 여기서 편히 좀 쉬시고 노독을 푸시옵소서."

"대신 할 일이 따로 있지. 내 어찌 불쌍하게 죽은 어리를 위하여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뿌려 주지 않겠느냐."

양녕은 말을 마치자 명보가 새로 꺼내놓은 짚신을 신었다. 명보 내외는 양녕의 고집을 잘 알았다. 더 만류해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명보도 양녕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그럼, 소인이 모시고 가겠습니다."

양녕은 손을 저었다.

"너야말로 잡히면 어찌하느냐?"

"소인도 무슨 죄가 있습니까. 대감마님께서 잡히시면 소인도 잡히겠습니다."

명보는 양녕의 뒤를 바싹 따랐다. 양녕도 더 만류하지 아니했다. 두 사람은 양근서 떠나서 밤에 주막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광주 땅으로 들어서서 산성으로 올랐다. 명보가 양녕한테 묻는다.

"산성에 들러서 마님을 만나뵙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가자."

양녕은 쓸쓸하게 대답했다.

"그럼, 먼저 어리 아씨의 무덤을 찾으신 후에 산정으로 가시어 마님을 만나시겠습니까?"

"어리 무덤만 찾아보고 그대로 가련다."

"어떻게 과문불입을 하십니까? 마님도 불쌍하지 아니하십니까?"

"불쌍한 줄은 안다마는 기완 그렇게 된 일을 어찌하느냐."

"그럼, 소인이 우거하는 양근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글쎄, 우선 어리의 무덤이나 찾아보고 형편 따라서 다시 정하기로 하자."

두 사람은 또다시 뚜벅뚜벅 산성길을 걸었다. 산새 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마치 산성에 오래 함께 있던 양녕대군과 명보를 보고 반갑게 맞이하는 노랫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의 귀에는 어리의 외로운 혼이 산새가 되어 슬프게 울면서 자기를 맞이하는 듯했다. 아직도 산길 초로에는 이슬이 슬지 아니했다. 아침에 새로 떠오르는 햇볕을 받다 방울방울 영롱한 빛을 뿜었다. 마치 어리의 원통하게 죽은 눈물방울인 듯했다. 양녕은 이슬방울이 구르는 풀길을 짚신으로 밟으며 묻는다.

"어리의 묻혀 있는 곳을 네가 아느냐?"

"소인도 모릅니다."

"모르면서 넓고 넓은 산성 안에 무주고총을 어찌 찾는단 말이냐?"

"소인은 미리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더란 말이냐?"

"어리 아씨의 무덤에 가서 외로운 혼을 조상하려면 빈손으로 갈 수야 있습니까. 제주 한 병이라도 받다가지고 갈 작정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물으면 알겠기에 마음속으로 그리 작정했습니다."

"술집에서 어떻게 어리의 무덤을 알겠느냐?"

양녕은 그래도 미흡하게 생각했다.

"관가에서 상감마마의 후하게 장사 지내주라시는 명령을 받들어 지낸 장사인데 광주 일판 사람들이 다 와서 보았다 합니다. 술집에서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양녕은 비로소 세종이 영을 내려서 어리를 후하게 장사지내준 것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아우님에게 고맙다고 생각했다. 양녕과 명보는 다시 이슬에 젖은 풀길을 헤치며 말없이 걸었다. 상성 안 중턱에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술집이 보였다. 명보는 양녕을 향하여,

"다녀오겠습니다."

말하고 바침술집으로 향했다. 양녕은 길바닥에 삿갓을 우그려 쓰고 주저앉으며 명보에게 묻는다.

"제주 살 돈은 가졌느냐?"

"그것쯤이야 없겠습니까?"

명보는 슬픈 중에도 픽 웃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명보는 제주 한 병을 사 들고 술집 머슴한테 어리의 무덤을 물었다. 술집 머슴은 산성 꼭대기 거진 상상봉에 어리의 죽은 곳에 무덤을 이룩해서 관가에서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명보에게 가르쳐주었다. 명보는 오랫동안 양녕을 모시고 산성에서 지냈기 때문에 산성 안 지세를 잘 알고 있었다. 가보기 전에 술집 머슴의 말을 듣고 머릿속으로 벌써 자리를 짐작했다. 술병을 들고 양녕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양녕은 술병을 들고 오는 명보를 바라보자 마음이 급했다. 명보를 향하여 조급하게 묻는다.

"묻힌 곳을 알았느냐?"

", 알았습니다. 소인이 말씀드린 거와 같이 관가에서 사또가 나와서 장사를 지냈으니 광주 일판 사람들이 다 올라가 보았다 합니다. 어서 올라 가십시다."

명보는 술병을 들고 앞을 서고 양녕은 대삿갓을 쓰고 뒤에 따랐다. 산은 가파르고 높았다. 양녕은 숨이 가빴다.

"부축해드리겠습니다."

"그만두어라. 여자가 오른 길을 내가 못 오르겠느냐."

양녕은 걸어가면서 가엾게 죽은 어리를 생각했다. 거의 상상봉 아래 당도해서 솔밭이 푸르게 산허리를 덮었다. 인적은 없건만 솔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적막한 산속에 더한층 을씨년스럽고처량한 생각이 일어나도록 했다. 원통히 죽은 어리의 영혼이 솔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되어서 양녕을 향하여 호소하는 듯했다. 명보는 솔밭을 헤치고 들어섰다. 양녕이 뒤에 따랐다. 소나무를 갓 베어서 훤하게 터진 곳이 보였다. 명보는 성큼성큼 벌목된 곳으로 들어갔다. 한 자리에 새로 봉분한 무덤이 보였다. 나무팻말이 세워졌다. '어리지묘'라 써 있었다. 명보는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어리 아씨의 무덤이 있습니다."

양녕은 허겁지겁 뛰어갔다. 과연 어리의 무덤이 분명했다. 양녕은 무덤 앞에 몸을 굽히고 소리쳐 통곡했다. 명보가 술병을 받쳐 들었다. 잔이 없다. 양녕은 술병을 세 번 기울여 무덤 앞에 끼얹고 일장통곡을 했다. 무덤은 적막했다. 대답이 없다. 다만 양녕의 통곡 소리만 솔바람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양녕은 넋을 잃고 울었다. 인생이 너무나 허무했다. 한평생 공연한 과오를 저질러서 까닭 없이 죄 없는 아름다운 여인을 죽게 했구나 하고 가슴 아프게 뉘우치면서 통곡을 계속했다. 명보도 따라서 울고 울었다. 양녕과 명보가 어리의 무덤 앞에서 한창 통곡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고정하십쇼, 대감."

통곡하고 있던 양녕과 명보는 깜짝 놀라 등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광주유수가 분명했다.

"대감, 우셔야 소용이 없으십니다. 그만 그치시고 일어나십시오."

광주유수는 양녕을 얼싸안아 일으켰다. 양녕은 마음속으로 꼭 잡혔구나 생각했다. 광주유수는 양녕을 향하여 말한다.

"대감, 망령이십니다. 왜 이런 모습을 하고 고생을 자취하십니까? 지금 상감께서는 팔도에 영을 내리시어 대감의 종적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듣자오니 상왕비 전하께옵서 상감께 분부를 내리시어 대감을 서울로 모시라 하셨다 합니다. 대감, 어서 서울로 들어가 상왕비 전하의 지극한 자애지정에 보답하옵소서."

양녕은 숙면인 광주유수 앞에 자기가 양녕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걸인의 탈을 쓴 채 조금도 명랑한 기색이 없이 한 번 드높게 껄껄 웃는다.

"선하심 후하심인가. 먼젓번엔 나를 서울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이제 다시 서울로 들어오라 하는 일은 대관절 무슨 일요. 내가 역적모의나 하는 줄 알고 나의 수족까지 다 내쫓아버리고 광주 판관과 관비들을 보내서 나의 뒤를 밟아보다가, 내가 홧김에 종적을 감추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을 잡아들여서 나의 행방을 찾으려다가 아까운 어리만 죽게 해놓고 이제 다시 나를 서울로 모시어 간단 말은 웬말요."

양녕은 정색하고 말했다.

"대감, 그것은 대감께서 미처 생각 못 하신 말씀이올시다. 상감께서나 상왕 전하께오서는 절대로 전하를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올시다."

광주유수가 다시 간곡하게 아뢴다.

"대신들이 국법에 의해서 전고를 가지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지금 상왕비 전하께서는 대감을 만나보고 싶어서 식음을 전폐하시고 척골이 되어 계시다 합니다. 상감께서도 상왕비 전하의 마음을 평안케 해드리기 위하여 팔도에 엄한 명을 내리시어 대감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양녕은 상왕비이신 어머님이 자기를 유달리 사랑하시는 지극한 자애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 광주 유수의 간곡하게 고하는 말을 듣자 눈시울이 화끈했다. 묵묵히 대답을 아니하고 앉았다. 명보가 곁에서 고한다.

"상왕비마마께오서 저대도록 보고 싶어 하신다 하니 한번 가보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양녕은 어머니의 지극한 자정에 마음이 움직였다. 결연히 결정했다.

"가기로 하자!"

쾌하게 대답했다. 광주유수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감께서는 과연 효자십니다."

광주유수의 말이 떨어지자, 양녕은 유수한테 말한다.

"명보는 내가 촌시도 떼놓을 수 없는 사람이오. 명보는 꼭 데리고 가야 하겠소."

"염려 마십쇼."

광주유수는 선뜻 대답했다. 양녕은 어리의 무덤을 한 번 다시 돌아본 후에 추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녕이 일어서는 것을 보자 광주유수는 솔밭 사이를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른다.

"육방관속들은 앞으로 나와 대군을 모시어라."

솔밭 사이에서는 토인을 위시하여 이, , , , , 공들 육방과 군노사령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서 양녕대군을 호위했다. 양녕이 탈 사인교가 올라오고 광주유수가 탈 말이 등대되었다. 양녕은 이미 서울로 갈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사인교에 올랐다. 광주유수는 다시 육방관속들한테 분부한다.

"위선 동헌으로 모시게 하라. 식사를 하신 후에 서울로 모시고 가겠다."

육방관속들은 유수의 명에 따라 양녕을 광주읍으로 모시었다. 뒤에는 광주유수가 백말을 타고 따르고 명보는 양녕의 사인교채를 잡고 나갔다. 양녕이 광주 동헌에 당도하니 내아에서는 유수의 분부로 세숫물이 나오고 새옷 일습이 나왔다. 양녕은 유수가 하라는 대로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탕건이 나오고 일품 대관이 쓰는 통영에서 만든 윤 흐르는 은조사싸개 음양립이 바쳐졌다. 옥색 도포에 갓을 쓰고 앉은 양녕은 비로소 귀인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유수는 양녕에게 식사를 권한 후에,

"자아 이제는 상왕 전하를 뵈오러 서울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은근히 고했다.

"좋도록 합시다."

양녕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미 허락해 논 일이었다.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일가 대면

 

광주유수는 먼저 파발마를 달려서 양녕을 찾아서 모시고 간다는 일을 정원에 기별하고 양녕을 호위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원래 광주유수는 어리의 무덤을 이룩한 후에 양녕이 어느 때든지 조만간 반드시 어리의 무덤을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육방관속을 단속하여 항상 어리의 무덤이 있는 주위와 산성 안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샅샅이 살피라 했던 것이다. 광주 기찰들은 이날 마침 술집에서 술을 사서 마시는 체하고 방에 들어앉아서 술추렴을 하고 있다가 명보가 술을 사는 것을 보고 뒤를 밟아 어리의 무덤까지 가서 양녕이 온 것을 보고 광주유수한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서울 정원에서는 승지들이 광주유수의 보고를 받고 곧 대전으로 들어가 세종께 아뢰었다.

"광주유수가 양녕을 모시고 온다 합니다."

세종대왕은 세 번씩이나 경기도 관내의 원들이 헛물 켠 일을 잘 알고 계시었다.

"정말이냐?"

", 확실히 모시고 온다 했습니다. 역마를 달려서 앞질러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정말 양녕대군을 모시고 온다면 얼마나 기쁘랴."

대왕은 반신반의하며 대답했다. 승지가 물러간 지 두어 시각이 지났다. 광주유수가 양녕대군과 함께 궐문 밖에서 대명하고 있다는 소식이 정원 승지한테 보고되었다. 승지는 급히 어전에 들어가 아뢰었다.

"광주유수가 양녕대군을 모시고 궐문 밖에 대명하고 있다 합니다."

세종대왕은 양녕이 당도하면 어찌할 것을 미리 생각해 두시었다. 경복궁 정전에서 당신이 직접 접견을 하신다면 법을 찾고 전례를 따지는 신하들이 또 무어라고 떠들어대기가 십상팔구였다. 그러지 아니해도 지난번에 양주목사가 양녕대군이라 해서 데리고 왔다가 놓쳤을 때도 대신들은 뒷공론이 많았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승지와 내시에게 분부를 내렸다.

"상왕 전하와 상왕비 전하께옵서 거처하시는 수강궁 별전으로 모시게 해라. 나는 곧 상왕 전하께 문안차 수강궁으로 향하리라."

승지와 내시는 어명을 받들고 양녕의 행차를 수강궁으로 모시게 했다. 세종대왕은 될 수 있는 한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려 했다. 신하들이 또다시 떠들어대는 것이 귀찮은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승지와 내시를 시켜서 양녕대군을 수강궁 별전으로 인도케 한 후에 다시 어전 내시에게 분부를 내렸다.

"지금, 나는 상왕전에 문안을 드리러 갈 테다. 곧 자비를 놓게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대전내시는 곧 무예통장과 어영에 분부를 전했다. 상감은 아침저녁으로 상왕 전하와 상왕비 전하께 문안을 드리시는 것이 일과의 하나였다. 어영의 호위하는 군사들과 무예청에서는 날마다 약식으로 거둥차비를 차렸다. 날마다 정식 의장을 차린다면 비용과 민폐가 대단했다. 세종은 수강궁으로 가는 조석 문안 거둥은 극히 간소하게 하라 했다. 거리에 지나가는 백성들은 아침저녁으로 상감의 간소한 행차가 지나가면 모두 다 길에 엎드려 세종대왕의 지극한 효심에 감탄했다. 백성들은 이 모습을 바라보고 부모한테 향하는 효심이 더 한층 극진했던 것이다. 세종은 신하들이 말썽을 피울까하여 상왕 전하께 문안을 드리러 간다고 핑계하고 간소한 약식거둥으로 서울의 서북편인 경복궁에서 서울의 동편인 수강궁으로 납시었다. 양녕을 대기시킨 별전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먼저 상왕 전하가 계신 수강궁 정전으로 납시었다. 양녕을 대기시킨 별전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먼저 상왕 전하가 계신 수강궁 정전으로 듭시었다. 상왕은 아직도 양녕이 수강궁 별저에 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궁녀들이 상감의 행차를 뵙자,

"상감께오서 문안 듭시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상감은 전하가 평일과 같이 문안 들어온 것으로만 알았다.

"들라 해라."

상왕은 궁녀에게 명을 내렸다. 세종대왕은 상왕 전하의 시녀가,

"마마, 듭시랍니다."

아뢰는 말을 듣고 천천히 상왕 침전으로 들어가 문안 절을 올리고 두 손을 마주 잡아 시립했다.

"조정엔 별일이 없소?"

상왕은 세종에게 하문했다.

"별다른 일이 없습니다."

간단히 아뢰고 난 후에 다시 음성을 화하게 하여 아뢴다.

"오늘 문안 후에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의논할 일이 있소?"

상왕은 미소를 지어 아드님을 향하여 묻는다.

"양녕을 찾았습니다."

"양녕을 찾았어? 희한하게 찾았구려. 어디서 누가 찾았다 합디까?"

상왕 태종은 반가운 모양이었다. 용안에 기쁜 빛이 현연하게 나타났다.

"광주유수가 찾았습니다."

"용하게 찾았구먼. 어떻게 찾았어?"

태종인 상왕은 양녕이 걸인의 형색으로 맨 데 없이 방랑 생활을 한다는 말을 듣고 무한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광주유수는 슬기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한 번쯤 어리의 무덤을 찾을 줄 알고 미리 산성 안 요소요소에 사람들을 배치시켰다가 양녕의 하인 명보가 마침 술집에서 제주를 사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뒤를 밟아서 어리의 무덤 앞까지 갔다가 양녕을 찾았다 합니다."

"그래, 지금 양녕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이곳 수강궁 별전에 대기시키고 아바마마께 품해 아뢰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친히 인견하리라. 전하는 상왕비전에 품하라. 대단히 기뻐하리라."

상왕은 상왕비와 함께 만나볼 의사를 세종에게 표시했다. 세종대왕이 다시 아뢴다.

"신이 자전에 들어가 품달하여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어마마마와 함께 양녕을 만나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태종은 용안이 화려했다.

"전하의 말이 옳다. 어마마마를 모시고 함께 나오라."

세종은 상왕전에서 물러나 어마마마가 계신 자전으로 향했다. 상왕비전 시비는 나는 듯이 침실로 달려가서 전하의 듭시는 것을 고했다. 이때 상왕비는 형용이 초췌하고 피골이 상접해서 누워있었다. 더구나 지난번에 양녕을 찾아서 대궐 서문 영추문 앞까지 왔다가 놓친 후에 더한층 상심이 되었다. 전하가 문안 듭신다는 말씀을 듣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듭시라 해라."

세종대왕은 자전 앞에서 미소를 지어 문안 절을 올리고 용안에 기쁜 빛을 띠어 아뢴다.

"어마마마, 반가운 일이 생겼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반가운 일이 있겠소. 어서 죽는 것이 반가운 일인가 하오."

상왕비는 추연히 한숨을 지었다.

"양녕이 왔습니다."

세종대왕의 말씀을 듣자 상왕비는 귀가 번쩍했다.

"양녕이 왔어? 서울에 들어왔단 말인가."

", 지금 이곳 수강궁 별전에 들어와 있습니다. 대면해보시옵소서."

상왕비는 정신이 번쩍 났다.

"바로 별전에 와 있단 말인가? 곧 나가보리라."

상왕비는 손수 머리를 쓰다듬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어머니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뵙자 세종대왕도 기뻤다.

"지금 아바마마께서도 어마마마와 함께 양녕을 대면하겠다고 계십니다. 소자가 뫼시고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상왕비전 시녀들이 상왕비를 부축해 일으켰다. 상왕비는 아드님 세종대왕과 함께 상왕전으로 향했다. 상왕은 수척하고 파리한 상왕비의 얼굴을 보자 이제는 애틋한 생각이 간절했다. 일부러 얼굴에 화한 기색을 띠고 상왕비의 손을 잡았다.

"양녕이 왔다 하오. 자아, 우리 모두 만나러 갑시다."

상왕은 앞을 서고 상왕비와 세종대왕은 뒤에 따랐다. 내시가 그 앞에 서서 인도했다. 별전에 당도했다. 내시가 먼저 별전 문을 열고 양녕에게 알렸다.

"상감마마께오서 상왕 전하와 상왕비 전하를 모시고 오십니다."

내시의 말을 듣는 양녕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대로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이 없다. 이때 상왕과 상왕비와 세종대왕이 별전 안으로 들어섰다. 양녕은 우두커니 실신한 사람처럼 들어오는 세 분 전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바보의 모양을 뵈는 것이다. 내시가 참다 못해서 양녕의 앞으로 가까이 갔다.

"일어나시옵소서."

양녕을 부축해 일으켰다. 양녕은 내시가 시키는 대로 일어섰다. 상왕과 상왕비가 자리에 앉았다. 상감 세종대왕이 모시어 섰다. 상왕비 민씨는 반가운 음성으로 양녕을 향하여 말을 건넨다.

"양녕이 왔구나!"

양녕은 여전히 얼빠진 바보 모양 상왕 전하와 상왕비와 옆에 모시고 서 있는 세종대왕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어머니가 양녕이 왔느냐고 반가운 음성으로 물어도 아무 대답이 없다. 내시는 딱했다.

"절을 올리옵소서."

내시가 양녕대군의 곁을 잡았다. 양녕은 내시가 시키는 대로 상왕 전하께 절을 올렸다. 또다시 멍하니 섰다.

"상왕비 전하께 절을 올리옵소서."

내시는 또다시 양녕의 귀에다 소곤댔다. 양녕은 내시가 시키는 대로 상왕비 앞에 절을 했다.

"이제는 상감마마께 알현하옵소서."

양녕은 내시가 하라는 대로 세종대왕께 뵙는 절을 했다. 세종대왕은 황망히 답례했다. 상왕인 태종과 상왕비는 딱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같이 바보가 되었나!' 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만나보니 반갑다."

상왕비는 양녕을 향하여 한마디를 했다. 그러나 양녕은 여전히 멍하니 대답이 없다. 어마마마인 상왕비 민씨의 간장은 녹는 듯했다. 마음속으로 한탄한다.

'그렇게 억세고 줄기차고 기상이 늠름하던 사람이 어찌 저 지경이 되었나.'

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양녕이 이같이 바보인 양, 미친 사람인 양 백치 노릇을 하고 있으니 모처럼 모인 한집안의 대면하는 정경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상왕은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왕비는 양녕이 불쌍했다.

'폐세자가 된 후에 저 지경이 되었구나.' 하고 마음이 아팠다.

좌우의 시녀를 돌아보며 분부한다.

"대군께서 시장하시겠다. 속히 음식을 갖다드리도록 해라."

시녀는 명을 받고 총총히 밖으로 나갔다. 상왕은 마음이 답답했다. 더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어보를 옮겼다. 내시들이 상왕을 모시고 본전으로 돌아갔다. 별전에는 세종과 상왕비와 양녕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시녀는 양녕을 대접하기 위하여 산해진미의 밥상을 받들어 들어왔다. 세종은 시녀한테 분부를 내린다.

"과인도 대군을 모시고 형제 함께 음식을 대하리라. 나의 술과 저를 가져오라."

세종은 어마마마의 마음과 양녕의 마음을 위안시키자는 의도였다. 시녀는 황망히 전하의 수저를 은쟁반에 받들어 올렸다. 세종은 어마마마가 계신 앞에서 양녕과 함께 겸상을 받았다. 상왕비는 형제가 상을 대하고 앉은 모습을 바라보고 앉았다. 세종대왕은 어수로 친히 반주를 따라 양녕에게 권했다. 궁중에 비장되어 있는 호박빛이 도는 천일주다. 양녕이 전에 많이 마시어보던 술이다. 양녕은 검다 희다 말이 없이 두 손으로 어사주를 받들어 마시었다. 마시고는 전하한테 올리지 아니했다.

"메를 드시오."

전하는 양녕에게 권하고 당신도 술을 들어 탕을 떴다. 양녕은 의연히 대답 없이 밥을 자시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밥 한 그릇과 맛있는 찬을 다 들었다. 마치 주린 사람이 음식을 대하듯 했다. 세종대왕은 양녕의 하는 투가 거짓으로 하는 것임을 짐작했다. 그러나 상왕비 민씨는 양녕이 정말 미쳤구나 하고 가슴이 더한층 아팠다. 양녕은 밥과 찬을 다 자신 후에 세종이 술과 저를 놓기 전에 먼저 술을 놓고 저를 놓았다. 세종이 함께 상을 받고 계신 것을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는 태도였다. 양녕은 밥 한 그릇과 반찬을 휩쓸어 자신 후에 시녀들이 받들고 들어온 숭늉 한 대접을 벌컥벌컥 켜서 다 마시고 상 앞에서 물러났다. 세종대왕도 수저를 놓았다. 시녀가 상을 물렸다. 별전 벽에 비파가 걸려 있었다. 양녕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났다. 벽에 걸려 있는 비파를 내렸다. '둥둥둥' 비파를 뜯기 시작했다. 비파 소리는 제법 곡조를 이루어 처량했다. 양녕은 아무 말도 없이 비파를 계속해서 뜯고 있다. 비파 곡조는 무척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애상조였다. 가락에 맞춰서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했다. 세종대왕은 확실히 양녕이 일부러 거짓 미친 체하는 것을 알았다. 양녕을 향하여 말씀했다.

"의관을 벗으시고 편히 누워서 쉬시옵소서."

양녕은 반응이 없이 여전히 비파를 뜯고 있었다. 세종은 어마마마께 고했다.

"양녕을 며칠 동안 편안히 지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소자와 함께 본전으로 듭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왕비 민씨도 눈물이 흘러서 더 오래 양녕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세종대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녕은 전하와 상왕비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지만, 시침 딱 떼고 그대로 앉아서 비파만 뜯고 있었다. 상왕비 민씨는 한숨을 짓고 셋째 아드님 세종대왕과 함께 본전으로 돌아갔다. 세종대왕은 상왕비의 침전에 든 후에 어마마마를 위로했다.

"어마마마, 조금도 마음을 상하지 마시옵소서. 양녕이 바보짓을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소자는 그 행동이 거짓인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신하들이 또다시 떠들어댈까 해서 일부러 하는 짓이올시다. 소자는 양녕을 극력 보호하겠습니다. 염려 마시옵소서."

세종은 어마마마 민씨를 극진히 위로했다. 상왕비 민씨는 안타까웠다. 일구월심 보고 싶던 양념을 대하니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총명하고 영특하고 활달하던 양녕이 실신한 사람 같기도 하고 백치가 된 듯하기도 하니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아주 폐인이 되지 아니했겠소?"

상왕비 민씨도 여위고 수척한 늙은 얼굴에 시름이 가득해서 묻는다. 세종께서 대답해 아뢴다.

"아니올시다. 거짓 미친 체하는 것이올시다. 어마마마께서는 조금도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아까도 아뢴 바와 같이 신하들이 소자와 양녕의 형제간의 지극한 우애의 정을 모르고 국법과 사기의 기록을 들추어서 자꾸만 양녕을 박해하려 드니 양녕은 일부러 양광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옵니다. 소자는 극력 양녕을 보호하겠습니다. 어마마마, 안심하옵소서."

상왕비 민씨는 한숨을 짓고 말씀한다.

"양녕이 양광이라면 작히나 좋겠소. 모든 일은 상감이 잘 알아 하오. 불쌍하고 가여웁소."

양녕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은 지성스러웠다.

"그저 어마마마, 염려 마옵소서. 오늘날 소자가 왕위에 나간 것은 모두 다 양녕이 은근히 밀어준 덕이옵니다. 가희아의 아들 ''가 까딱하면 세자가 될 것을 양녕은 일부러 방탕해서 소자한테 세자의 지위가 돌아오도록 한 것입니다. 어마마마, 양녕과 소자는 형제 우애의 정뿐만이 아니올시다. 소자의 은인이올시다. 신하들이 아무리 떠들어대더라도 양녕의 한평생을 극력 보호하겠습니다."

마음을 털어놓고 아뢰는 세종대왕의 말씀을 듣자 상왕비 민씨는 적이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모든 일을 상감이 잘 알아 하오."

간곡하게 당부하는 말을 보낸다.

"염려 마시옵소서. 그럼, 소자는 상왕전에 뵈옵고 물러가겠습니다."

세종대왕은 어마마마를 안심시킨 후에 다시 상왕전으로 돌아갔다. 상왕은 상감을 보자 묻는다.

"여태 환궁을 아니하였소?"

"양녕과 메를 함께 하느라고 아직 경복궁으로 가지 아니했습니다."

상왕은 양녕이 난폭한 행동을 한다고 폐세자를 해놓았으나 오래간만에 실신하다시피 된 양녕을 대하고보니 역시 가슴이 아팠다.

"사람이 저다지 폐인이 될 줄은 몰랐구먼."

혼자 말하듯 탄식했다. 세종대왕은 용안에 미소를 가득하게 띠고 아뢴다.

"신의 생각에는 조금도 폐인이 아니올시다. 양광이올시다."

상왕은 탄식조로 말씀을 내린다.

"과연 양광일까?"

", 그러하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조금도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신하들이 아무리 양녕을 의심해서 인견을 못 하시게 한다 해도 불문에 부치시고 자주 인견하시옵소서."

태종도 세종대왕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약간 안심이 되었다. 세종대왕은 다시 아뢴다.

"신의 소견에는 이제부터는 양녕의 배후를 전혀 감시하지 말도록 하옵소서. 대신들이 열 번, 백 번 주장하더라도 절대로 관권으로 뒤를 밟고 염탐하는 일이 없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그의 부리던 비복이 자유스럽게 출입하게 하시고 후한 녹봉을 주시어 그의 생활과 정신이 다 함께 평안하도록 하옵소서."

태종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대왕에게 말씀을 내린다.

"모든 일을 전하가 알아서 처리하라."

 

형제의 지극한 정

 

세종대왕은 경건하게 아바마마께 아뢴다.

"감축하옵니다."

한 마디를 아뢰고 상왕전에서 물러나 경복궁으로 환어했다. 이날 저녁때 대왕은 상왕전에 저녁 문안을 드리러 간다고 영을 놓고 또다시 수강궁으로 행차했다. 잠깐 상왕전과 상왕비전에 문안을 드리고 수강궁 별전에 있는 양녕을 다시 찾았다. 양녕은 누워서 코를 골고 자다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는 대왕이 미소를 머금고 양녕을 바라보았다.

"고단하실 텐데 편히 누우시옵소서."

양녕은 아무 대답 없이 빙그레 웃고 전하를 쳐다볼 뿐이었다. 여전히 실신한 사람인 듯 백치같은 태도를 취했다. 대왕은 양녕 옆에 다정하게 앉으며 내관에게 분부를 내린다.

"형님을 모시고 저녁 수라를 함께 하리라. 내전에 기별해서 저녁 수라를 올리게 하라."

전하는 양녕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일부러 형님이라 불렀다. 내관은 황망히 어명을 받고 물러갔다. 방 안에는 다만 양녕대군과 세종대왕 형제분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세종대왕은 간곡한 옥음으로 양녕께 고한다.

"오늘 저는 임금의 몸으로 형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의 우애로 형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을 털어서 고하겠습니다."

대왕의 총명하신 안정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양녕은 아무 대답 없이 멍하니 앉았다. 아까 자세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멍하게 바라보는 양녕의 눈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세종대왕의 안정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대왕은 다시 말씀을 꺼낸다.

"오늘날 제가 왕위에 오른 것은 모두 다 형님이 배려해 주신 덕택이올시다.그렇지 아니했던들 제가 앉아 있는 이 자리에는 딴 사람이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형님께서는 선대의 불행한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고 국가를 태평하게 하시기 위하여 거짓 방탕한 생활을 해서 선과 악의 대결을 이루셨습니다. 앞으로 국가는 태평하게 될 것입니다. 이 나라를 훌륭한 나라로 만들 것을 형님 앞에 약속합니다."

세종대왕은 간곡하게 양녕에게 고했다. 양녕은 여전히 표정 없이 먼 산만 바라보고 앉았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심회를 털어놓는 간곡한 말씀은 양녕의 귀에 폭폭 배어 들어갔다.

세종대왕은 다시 고한다.

"형님을 폐세자로 만든 후에 아바마마께서는 신하들의 말씀을 들으시고 형님을 감시하라 하셨습니다. 금부도사의 버릇없는 짓과 전임 광주유수의 무례했던 행동은 모두 다 대신들의 내면의 일은 모르고 문헌의 전례만 보고 상왕께 아뢴 데 원인이 있었습니다. 형님께서 딴 맘이 계시다면 세자의 자리를 일부러 헌 짚신짝같이 버리셨을 리 있습니까?"

세종대왕의 간절한 말씀은 양녕의 폐부를 흔들어 놓았다. 양녕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이 먼 곳만 바라보고 있다. 대왕은 다시 고한다.

"아까 상왕 전하께 아뢰었습니다. 신하들이 어떠한 상소를 또 하더라도 형님은 절대로 의심하시지 마시라고 아뢰었습니다. 단연코 형님에 대한 일에 대해서는 신하의 말을 아니 듣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옵고 상왕 전하께 또 아뢰었습니다. 전에 부리시던 노비와 문객들은 아무 지장이 없이 자유스럽게 형님 앞에 출입하면서 거행하도록 하시라고 아뢰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알아들으셨습니다."

멍하게 앉아 있는 양녕의 눈시울에 눈물이 축축이 서렸다. 대왕은 재빠르게 양녕의 눈물 서린 눈을 바라보았다. 이때 궁녀가 문밖에 꿇어앉아 기침한 후 조용히 문을 열었다. 전하와 양녕의 저녁 수라상이 들어왔다. 궁녀들이 수라상 시중을 했다. 궁녀는 먼저 반주를 따라 대왕께 올렸다. 대왕은 궁녀에게 분부한다.

"이 자리는 군신의 자리가 아니다. 다만 형제가 함께 앉아 밥을 먹는 자리다. 형님께 먼저 약주를 올려라."

대왕의 말씀을 듣는 양녕의 눈에서는 비로소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서 옷깃으로 떨어졌다. 양녕은 돌과 나무가 아니었다. 대왕의 지성스럽고 지극한 우애의 정에 무한 감동되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대왕께 절을 했다.

"신 무상하온 것이 너무나 성의를 저버렸습니다. 이후부터는 성상을 모시어 태평연월에 한일월을 보내오리다."

양녕은 완연히 본연의 태도로 돌아갔다. 대왕은 기뻤다. 황망히 일어나 답례를 보내며 고한다.

"이 밤만은 형제 단둘이 앉아서 우애의 정을 펴는 밤이올시다. 신이라 부르지 마옵소서. 아우의 헌주를 받으옵소서."

전하는 궁녀가 들고 섰는 술잔을 받아서 친히 양녕한테 보냈다. 양녕은 무릎을 꿇고 돌아앉아 어사주를 마신 후에 술을 옥잔에 가득 따라 대왕께 바쳤다. 세종대왕은 기쁘고 쾌했다. 양녕의 올리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양녕이 아뢴다.

"신이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에 처음 올리는 술이올시다. 모든 신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대왕은 무엇보다도 양녕이 본 태도로 돌아간 것이 기뻤다. 쾌하게 양녕의 울리는 약주를 받아 마시었다. 형님인 양녕과 아우인 세종대왕은 웃고 이야기하면서 술을 권하고 밥을 나누었다. 양녕은 대왕과 함께 저녁을 마친 후에 안색을 화하게 하여 대왕께 고한다.

"신은 내일 광주로 내려가겠습니다."

"며칠 더 묵으시다가 내려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이 서울로 들어와 대궐 안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온 조정이 깜짝 놀라서 떠들어댈 것입니다. 공연히 쓸데없이 소란을 피우지 않으려 합니다. 이제는 다시 마음을 잡고 광주에서 보처자나 하고 있겠소이다."

양녕이 다시 마음을 잡아서 '보처자나 하고 있겠다'는 말씀을 듣자 대왕은 마음이 흡족했다.

"아까도 말씀했거니와 대신이 아무리 떠든다 해도 불문에 부치겠습니다. 다시 광주로 내려가신다 하니 아바마마께서 광주유수에게 명하여 지은 새집으로 옮기시옵소서. 그리고 아바마마께 아뢰어 다시는 관속을 배치시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가실 대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알현하시고 내려가시옵소서."

양녕은 웃으며 대답해 아뢴다.

"다음에 부르시면 뵙기로 하겠소이다. 신은 아까까지 실신한 백치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제 다시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본연의 태도로 돌아간 모습을 뵙게 하기는 너무나 황공하옵니다. 다만 전하께만 지극하옵신 우애의 정에 감동되어 신의 본상을 뵈어드렸습니다. 신하들에게도 양녕은 백치의 증상으로 폐인이 되었다고 말씀해 두옵소서. 그래야만 신하들의 마음도 가라앉아서 국태민안이 될 것입니다."

양녕의 심회를 털어놓고 아뢰는 말에 대왕도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좋은 대로 처리하시오."

대왕은 양녕의 뜻을 꺾지 아니했다. 양녕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한다.

"전하께옵서는 그럼 환행하옵소서. 내일 일찍 광주로 내려가도록 분부를 내려주옵소서."

양녕은 사은하는 절을 전하께 올려 하직을 고한다.

"그럼, 다시 뵙지 못하고 신을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태평히 지내옵소서. 형님을 극력 보호하오리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세 번 네 번 양녕을 돌아보며 발길을 옮겼다. 양녕은 궁녀들이 보는 앞에 문밖까지 나가기가 싫었다. 밖으로 납시는 세종대왕의 우애의 정이 가득 찬 용안을 한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세종대왕과 양녕의 밀어는 다만 형제 두 분만이 알 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세종대왕은 경복궁으로 환어하시자 은밀히 내관을 시켜서 광주유수를 편전으로 인견하셨다.

정중하게 분부를 내리신다.

"내일 일찍 양녕대군을 모시고 광주로 내려가라. 가시는 대로 대군의 우거하시는 곳에서 새로 지은 집으로 옮기시도록 하라. 그리고 대군께 대해서는 관가에서는 일체 간섭을 해서는 아니 된다. 대군께서 자유스럽게 비복을 부리시도록 하고 문객들의 출입하는 것도 간섭을 하지 말라. 앞으로 내수사에서 시량범절을 전부 동궁시대와 매한가지로 지공할 테니 그리 알고 공경하고 우대해서 모시도록 하라. 설혹 대신들이 딴소리로 상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과인은 절대로 허락하지 아니할 테다. 그리 알고 처사하라."

"삼가 봉행하겠습니다."

광주유수는 분부를 받고 어전에서 물러갔다.

이튿날 양녕대군은 명보와 유수와 함께 광주로 향했다. 자유스럽게 비복을 부리고 문객의 출입을 허락하라시는 어명이 계신 것을 통해 들은 장사패들과 옛날의 비복들은 앞을 다투어 양녕의 뒤를 따라 광주 새집으로 향했다. 양녕대군 부인은 고생길이었던 남한산성 집에서 광주읍내 새집으로 옮겨 남편인 대군과 만나서 오랜만에 아담한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비복들도 찾아오고 문객들도 모여들었다. 이제는 관가에서 아무런 감시도 없었다. 박해도 없었다. 금부도사도 보이지 아니하고 판관, 관비 등속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수사에서는 세종대왕의 분부를 받들어 양식과 필육을 흡족하도록 다달이 실어 보냈다. 다만 동궁 시절보다 다른 점은 양녕의 있는 곳은 서울이 아니라 광주 땅이고, 어리란 사람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산성 솔밭 속에 푸른 무덤으로 변해서 영원히 잠들어 있는 사실뿐이었다. 양녕은 상왕과 세종이 마련해 준 새집에서 만 가지 세상 시름을 잊고 거문고 타고 글씨 쓰는 것으로 소일을 삼았다. 양녕의 서도는 나날이 늘었다. 필력은 웅혼하고 꿋꿋해서 달인의 경지까지 이르렀다. 양녕이 서울 수강궁에서 광주로 떠나던 날 대신들은 세종대왕께 급히 알현을 청했다. 세종대왕은 대신들이 급히 뵙기를 청하는 일이 무슨 일인 것을 미리 짐작했다. 용안에 미소를 지으시고 대신들은 인견하셨다..

"경들이 급히 알현을 청하니 무슨 급한 일이 있소?"

영의정이 아뢴다.

"국가의 중대한 일이 있사와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대왕은 깜짝 놀라는 모습을 하시고 하문하신다.

"국가의 중대한 일이라니, 밤사이 무슨 급한 일이 생겼소?"

", 중대한 일이 생겼습니다."

영의정이 대답했다. 세종대왕은 더 한 번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무슨 큰일이 났소? 놀라웁소. 대관절 어떠한 중대한 일이오?"

"양녕대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합니다."

세종대왕은 비로소 용안에 긴장된 표정을 풀으시며 미소하여 대답하신다.

"그게 무슨 크나큰 변괴요."

"종묘와 사직에 죄를 짓고 상왕 전하의 뜻을 어기어 마침내 폐세자가 된 분을 서울로 불러들이신다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올시다. 더구나 서울에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수강궁 대궐 안에까지 불러들이셨다 하니 해괴하기 그지없는 놀라운 일이올시다. 불가합니다."

세종대왕은 껄껄 웃으셨다.

"상왕비 전하께서 아드님이 보고 싶으시어 피골이 상접되셨소. 상왕 전하의 허락을 맡아서 두 분이 다 한자리에 앉으시어 인견하신 것이니 경들은 과히 허물하지 마오."

영의정이 다시 아뢴다.

"국가는 사사로운 집이 아닙니다. 전하의 옥체는 한 분의 사사로운 옥체가 아니십니다. 억조창생을 다스리시는 공적인 몸이십니다. 대궐 안은 전하의 사사로운 집안이 아니십니다. 삼천리강산을 어거하시는 장중한 처소입니다. 어찌 한낱 인정으로 인하여 폐세자인 양녕을 지밀 안에까지 불러들이셨습니까. 신들은 단연코 앉아서 볼 수 없습니다. 이같은 질서 없는 일을 하셨다가 만약에 불우의 변이 일어난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찌하실 텝니까?"

아뢰기를 다하자 영의정의 얼굴 표정은 엄숙했다. 세종대왕은 다시 부드럽게 옥음을 내리셨다.

"경들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스런 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소. 그러나 과인도 생각이 있소."

영의정은 다시 아뢴다.

"무슨 생각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춘추대의상 한번 쫓아낸 폐세자를 대궐 안으로 불러들인다는 일은 천만고에 없는 일이올시다. 이로 인하여 백 가지 폐단이 일어납니다. 양녕과 그의 부하들이 딴 맘을 먹는 날 전하는 어찌하시려 하십니까? 그런 까닭에 동서고금을 말할 것 없이 한 번 내친 폐세자는 다시 서울 수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법이올시다."

세종은 또 한 번 미소를 지어 대신들을 바라보시며 말한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경들보다 과인이 더 염려할 일이 아닌가. 양녕이 폐세자가 된 것은 불궤한 음모를 저지르다가 폐세자가 된 것이 아니고 행동이 허랑방탕하여 폐세자가 된 것이 아닌가. 경들은 과히 염려하지 말라. 뿐만 아니라 양녕은 지금 실성을 해서 백치가 되었다. 경들의 춘추대의는 잠깐 집어치워도 좋다."

세종대왕은 말씀을 마치자 드높게 웃으셨다. 실성을 해서 백치가 되었다는 말에 모든 대신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영의정이 아뢴다.

"양녕이 실성한 백치의 행동이 가작인지 어찌 아십니까? 불가합니다."

대왕은 화한 음성으로 대답을 내린다.

"경들은 방심하라. 양녕은 어리를 잃은 후에 아까웁게도 백치가 되었다. 과인이 목도하였다. 상왕 전하와 상왕비 전하께서 수강궁 별전에 인견하시러 친히 납시었다. 그러나 양녕은 두 분 전하께 일어나 절을 올리지 아니하고 멍하니 앉아서 비파를 뜯고 있었다. 과인이 상을 같이하여 음식을 함께 했건만 양녕은 게눈 감추듯 자기 혼자 밥 한 그릇과 찬을 물로 부신 듯 다 자시었다. 조금도 이면과 체면을 차릴 줄 몰랐다. 이러한 백치가 무슨 불궤의 뜻을 품겠는가. 경들은 마음을 놓고 양녕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을 하지 말라. 과인이 비록 몽매하여 어둔 사람이나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영의정 이하 모든 대신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면면이 서로 얼굴들을 쳐다본다. 대사헌이 아뢴다.

"전하의 우애 깊으신 충정은 소인들이 감탄하는 바올시다. 그러나 국법은 어길 수 없습니다. 양녕이 비록 실성이 되어 백치가 되었다 하더라도 보통 왕자가 아니라 폐세자올시다. 앞으로 상왕 전하와 상왕비 전하께서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다시 인견하실 경우가 계시더라도 서울 수도 안에서 절대로 만나보시지 말도록 하시옵소서. 더구나 궁금 안에서는 더욱 아니 됩니다. 미리 말씀을 아뢰어드립니다. 국법을 폐할 수는 없는 까닭이올시다."

대왕은 신하들의 충성스런 마음을 더 꺾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좋은 낯빛으로 어루만져 대답하신다.

"경들의 일편충심을 과인은 다 짐작하고 있다. 상왕 전하 내외분께 아뢰어 앞으로는 절대로 서울에서는 만나지 아니하시도록 하리라."

세종대왕은 잠시 말씀을 멈추셨다가 다시 간곡하게 부탁하시는 말씀을 내리신다.

"과인이 미리 털어놓고 말하리라. 부자간의 정의와 형제간의 우애의 정의는 경들도 알아주어야 한다. 상왕 전하 내외분께서 혹시 양녕이 보고 싶으시어 분부를 내리실 경우에는 문밖에 행차하시어 만나시도록 하리라. 경들은 이것쯤은 양해해주어야 할 것이다."

간곡하게 부탁하시는 말씀을 듣자, 대신들은 반대할 수 없었다.

"전하의 지극하신 우애의 뜻을 받들어 문밖에서 만나시는 일은 반대치 아니하겠습니다."

대신들은 비로소 고개가 수그러졌다. 대왕은 다시 말씀을 내리신다.

"경들이 과인의 마음을 알아주니 그 뜻을 가납하리라. 도 한 가지 미리 말해둘 일이 있다. 양녕의 시량범절을 과인이 내고에서 대어줄 테니 알아두라."

대신들은 이의할 도리가 없었다.

"좋습니다."

대답하고 물러났다. 양녕이 세종대왕의 지극한 우애의 정을 받다 광주 새집으로 돌아가 한가로운 세월을 보낸 지 두어 달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때 상왕은 셋째 아드님 세종대왕에게 선위한 후에 왕십리 살곶이 다리 너머 동북편 언덕 아래 이궁을 신축하고 언덕 위에는 낙천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하늘이 준 은혜를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 낙천정에서는 다시 북편으로 한 마장쯤 되는 곳에 화양정이란 정자를 세웠다. 볕이 잘 들고 벌판이 넓었다. '서전'에 방목우화양이란 데서 뜻을 취한 것이다. 왕십리 뚝섬 일대와 광나루 강변 일대는 전교답청이라해서 한양팔경 중의 하나로 이름 높은 곳이지만, 살곶이 다리 일대는 한강물이 띠같이 둘러 흘러가고 들이 넓고 기름져서 봄과 여름이면 푸른 풀이 넓은 들판에 비단을 깔아놓은 듯 일망무제하게 깔려서 말과 소를 먹이고 기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나라에서는 이곳에 방목을 해서 내구의 말을 길렀다. 태종은 상왕이 된 후에 낙천정과 화양정에 가끔 나가서 노후의 몸을 휴양하고 지냈다. 때마침 상왕의 탄신이 되었다. 세종은 상왕의 탄신을 축하하는 잔치를 하려 했다. 상왕은 문안 들어온 전하에게 분부를 내렸다.

"들으니 전하는 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만조백관의 하례를 받게 하고 사찬을 내려서 크게 잔치를 할 준비를 차린다 하니 사실인가?"

세종대왕은 허리를 굽혀 대답해 아뢴다.

"때마침 시화연풍하고 우순풍조하와 백성들은 격양가를 부르는 중에 사해가 태평하오니 신하들과 함께 만수무강을 비옵는 뜻에서 소연을 베풀까 하옵니다."

 

낙천정의 화기

 

상왕은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말한다.

"전하가 즉위한 이래 밝은 정치와 어진 덕을 펴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사해가 태평하니 아비된 마음에 기쁘기 한량없소.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라 생각하오. 그러나 복은 아낄 줄 알아야 하오. 옛날 성인의 말씀에도 석복하라는 말씀이 있지 아니한가. 나는 생일 전날 낙천정으로 나가서 복을 아끼면서 조용하게 내 생일을 지내기로 하였소. 만조백관의 축하와 연회를 중지해주기 바라오."

상왕은 엄하게 축하의식을 거부했다. 세종대왕은 황공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간곡하게 아뢴다.

"수령방백에게 일체 진상을 엄하게 금하고 다만 조정백관들만이 축하의식을 봉행하는 일뿐이옵니다. 이것을 막으신다면 섭섭하여 소자의 몸둘 곳이 없사옵니다."

상왕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모든 번폐스런 의식이 다 귀치 아니하오. 떠들어댈 까닭이 없으니 낙천정으로 나가서 한 사날 쉬다가 돌아오겠소. 정 전하가 섭섭하다면 전하와 함께 생일날을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좋겠소. 효령과 성녕이나 부르고."

전하는 문득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소자가 어마마마를 모시고 나가고 효령과 성녕 외에 광주에 있는 양녕도 함께 부르겠습니다."

태종은 놀라는 빛이 얼굴에 현연하게 드러났다.

"정신없는 사람을 불러서 어찌하려 하오?"

세종은 미소를 지어 아뢴다.

"전에 인견하실 때 양녕이 실신한 듯한 행동을 취한 것은 거짓이었습니다. 신이 밥상을 함께 하면서 간곡하게 말해서 본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광주 새 집으로 옮겨 살면서 글씨 공부에 정진하고 있는 중이올시다. 허락하시면 형제 다 함께 자리를 같이하여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모시고 즐겁게 탄신을 축하하겠습니다."

상왕은 반신반의했다.

"과연 양녕이 본마음으로 돌아갔단 말요?"

"친히 대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모든 전과를 뉘우치고 안존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세종대왕은 양녕에게 비복과 문객을 자유스럽게 쓰게 한 일이며 내수사에 시량범절을 다달이 대어주게 한 일과 궁중에 불러들였다고 항의를 제출한 대신들을 무마시킨 일등을 일일이 아뢰었다. 상왕은 대왕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자 감탄하는 말씀을 내렸다.

"모두 다 전하의 지극한 우애의 소치라 하겠소. 양녕이 마음을 돌려서 예의 바른 사람이 되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소. 양녕이 지난 일을 뉘우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양녕도 함께 낙천정으로 부르게 하오."

상왕은 생신날 양녕을 부르는 일을 허락했다. 대왕은 상왕비전에도 대강 사유를 아뢰고 경복궁으로 돌아온 후에 곧 내관을 광주로 보내어 상왕 탄신날 낙천정으로 모이도록 전갈을 보냈다. 한편 상왕은 생신 전날 상왕비와 함께 수강궁에서 낙천정으로 향했다. 낙천정으로 가는 도중의 서울 거리는 질서가 정연하고 상가는 풍성거려 번화했다. 상왕 자신이 집정하고 있을 대보다 열 갑절이나 나았다. 행차가 문밖으로 나갔다. 들판에는 벼와 수수가 고개를 숙여서 논과 밭과 들에 가득하고 촌마다 두레를 지어서 김을 매면서 농기를 바람에 펄럭이며 '얼럴레 상사디야' 소리를 불러서 격양가 노래가 높았다. 태종은 마음이 흡족했다. 자기가 정사를 잡았을 때보다 아드님이 정사를 잘해서 이같이 나라가 잘된 것이 그지없이 기뻤다. 상왕은 피골이 상접되어 얼굴이 수척한 상왕비를 향하여 말한다.

"어떠하오. 거리의 상가하며 문밖 농촌 정경이 내가 집정할 때보다 열 배나 낫구려!"

상왕비는 오래간만에 상왕과 함께 연을 가지런히 하여 나갔다. 상왕을 원수같이 생각했던 마음이 양녕을 서울 수강궁으로 불러들인 후부터 약간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번에 양녕을 대했을 때 사랑하던 아들이 바보로 변한 꼴을 보자 기막히도록 가슴이 아팠다. 이것이 폐세자를 시킨 탓이라 생각하니 한이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 양녕이 본 정신으로 돌아왔다 하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상왕의 생신을 낙천정에서 함께 지내기 위해서 나간다는 것보다, 본정신을 차린 양녕을 만나보기 위해서 상왕과 함께 나가는 것이었다. 상왕비는 오래간만에 다정하게 말씀을 붙이는 상왕의 말에 대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리실 때보다 훨씬 낫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자간 싸움, 형제간 싸움, 내와간 쌈만 하셨지 언제 정치를 할 틈이 계셨습니까?"

상왕비는 수척한 얼굴에 아직도 암기가 서려 있었다. 톡 쏘아붙이며 뱉듯이 대답했다. 상왕은 노안에 웃음을 띠고 드높게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그것은 상왕비가 모르는 말씀요. 싸움을 했기에 나라를 창업했지, 싸움을 하지 아니하고 나라가 창업되겠소? 하하하. 다만 당신하고 싸운 것만은 나의 불찰이오. 모두 다 내 욕심이 과한 탓이지. 하하하."

"아들하고는 왜 싸우셨습니까?"

상왕비는 여전히 뾰로통해서 묻는다.

"그것도 모두 다 내 욕심이 과한 탓이지. 아비 말을 잘 듣고, 착한 아들, 슬기로운 아들이 되라고 싸운 것이지. 아비에게 향하여 자꾸 반항만 하니 어찌 내 속이 평안하겠소. 그러나저러나 어진 아들한테 국정을 넘겨주어서 나라 형세가 나날이 부강하고 국태민안하니 얼마나 기쁘오. 셋째한테 왕위를 넘겨준 것은 내가 한 일이지만 과연 잘했다고 생각하오."

"양녕에게 국정을 맡기셨더라도 국사가 더 잘 되었을지 누가 압니까? 공연히 분란만 일으키셨다고 생각합니다."

"천만에, 그 사람은 제왕 노릇을 아니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거든. 아니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왕위를 어찌 넘긴단 말요. 모두 다 국가의 천년대업이 잘 되려고 그리된 것이니, 과히 상심하지 마시오. 이제 양녕도 왕의 지극한 우애지정에 감동이 되어 마음을 돌렸다 하니 국가에 이런 경사가 없소. 어서 낙천정으로 가서 하루를 보냅시다."

상왕과 상왕비는 공단같이 아름답게 펼쳐진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살곶이다리를 지나 전원의 풍경이 한가로운 이궁에 들었다. 이궁에는 벌서 세종대왕이 효령대군, 성녕대군과 함께 내외분이 짝을 지어 궁녀와 내시들을 거느리고 나와 있었다. 상왕과 상왕비의 행차가 살곶이다리를 넘으셨다는 선발 군사의 보고를 받자 이궁 문밖에 지영하고 있었다. 이윽고 상왕 내외분의 행차가 도착되었다. 근엄하게 늘어서 있는 아드님들의 내외분들을 바라보자 상왕은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다들 나왔구나."

한마디를 했다. 아드님들과 며느님들도 미소를 짓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맞이했다. 시녀들이 상왕과 상왕비를 부액해서 이궁 청상으로 모시었다. 상왕은 옥좌에 앉은 후에 시립해 서 있는 왕 전하 이하 모든 아드님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린다.

"양녕도 온다 하더니 아니 왔느냐?"

"곧 도착이 될 것입니다. 거리가 멀어서 약간 지체되는 모양이올시다."

시녀들은 준비했던 다담상을 올렸다. 상왕은 손을 저어 막았다.

"양녕이 온 후에 다 함께 같이하리라."

상왕은 양녕을 겉으로 미워했으나 부자간의 지극한 정은 도한 어찌할 수 없었다. 상왕이 양녕 오기를 기다려서 다담상을 받겠다는 말씀을 하자 상왕비 민씨의 마음은 약간 풀리기 시작했다. 시녀들은 두 분 전하의 다담상을 물렸다. 이윽고 들판에서 행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아라. 인마 소리가 요란하니 혹시 양녕이 오시는지 모르겠다."

이번엔 대왕이 친히 내관한테 분부를 내렸다. 대왕이 간곡하게 내시한테 내리는 말씀을 들은 상왕비 민씨의 마음은 더 한번 풀렸다. 내시가 뛰어 들어왔다.

"틀림없습니다. 양녕대군께서 말을 타고 오십니다."

"나가서 맞이해 들여라."

대왕은 시녀와 내시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세종대왕이 주도면밀하게 작은 일에까지 머리를 쓰시는 것을 보자 상왕비의 마음은 더한층 풀어졌다. 효령과 성녕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시녀와 내시들의 뒤를 따라서 문밖까지 양녕을 맞이하러 나갔다. 다만 세종대왕만은 군신의 체통을 지키느라고 문밖으로 나가지 아니했다. 양녕은 세종대왕의 우애의 지극한 정에 감동이 되어 한평생 존경하지 아니했던 아바마마를 대면하러 온 것이다. 세종대왕의 명령으로 명보와 문객들을 자유스럽게 데리고 온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양녕은 효령과 성녕이며 모든 궁녀들의 맞이를 받고 이궁 대청으로 올랐다. 대청 위에는 세종대왕이 상왕과 상왕비 두 전하를 모시고 서 있었다. 양녕이 온다는 말씀을 듣고 세 분 전하는 긴장된 낯빛으로 들어오는 양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녕은 폐세자라 해서 조복을 입지 아니하였다. 검은 포립에 옥색도포를 입고 검은 신을 신고 들어왔다. 내관의 인도로 천천히 섬돌을 딛고 청 위로 오르자 먼저 상왕께 공손히 절을 올리고, 다음에 상왕비께 절을 올리고, 다음에 세종대왕께 절을 올렸다. 세종대왕은 두 분 전하를 모시고 시립해 섰다가 황망히 형님의 절에 답례했다. 양녕은 절을 마친 후에 세종대왕의 맞은편 자리에 손을 잡고 시립했다. 효령이 양녕을 향하여 미소를 지으며,

"형님 오래간만이올시다. 절을 받으십시오." 하고 형님을 존대하는 절을 올렸다. 양녕은 허리를 굽혀 효령의 절에 답했다. 성녕이 효령의 뒤를 이어 양녕에게 말없이 절을 올렸다. 양녕은 역시 허리를 굽혀 답례를 했다. 상왕이 위시하여 세종대왕은 양녕의 얼굴 표정과 몸가지는 모습을 주시했다. 양녕의 표정과 행동은 완전히 옛 태도로 돌아갔다. 바보의 행동도 보이지 아니했다. 백치의 모습도 없었다. 대왕을 위시하여 상왕비와 상왕의 마음이 흡족했다. 상왕은 시립해 서 있는 양녕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새 집으로 옮겼다지?"

일부러 양녕에게 말을 붙여보는 것이었다.

"왕은이 깊사와 죄인의 몸을 새집으로 옮겨 살게 하시고 비복을 자유롭게 부리라 허락하셨습니다. 신 무상한 몸은 다만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양녕의 말소리는 부드러웠다. 완전히 체모를 차렸다. 상왕과 대왕은 만족했다. 다만 상왕비만은 양녕이 죄인으로 자처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폐세자는 되었을망정, 너는 당당한 대군이다. 내 생각에는 죄인이라고 자처할 까닭이 없다. 공연히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라."

상왕비는 수척한 얼굴에 못마땅한 모습으로 양녕의 마음을 위로하여주었다.

"죄를 얻어 쫓긴 몸이니 죄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솔직히 아뢴 바이옵니다."

양녕은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제법 체모를 차리고 아뢰는 양녕의 대답을 듣자 대왕과 효령과 성녕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돌았다.

"상왕비의 말씀하신 대로 너는 대군이다. 일후부터는 검은 포립에 베띠를 띠지 말고 음양립에 도홍띠를 띠어라. 그리고 공석 대는 모대하는 것을 허락한다."

상왕의 말씀을 듣자 상왕비가 말을 받는다.

"지금이라도 음양립과 도홍띠를 구해오라 해서 의관을 바꾸어 입게 하면 좋지 아니합니까? 효령과 성녕은 음양립을 썼는데 양녕만이 포립을 쓴 것이 오늘 좋은 탄신날 어째 어울리지 아니합니다."

자애의 정이 남다른 어마마마는 의관의 차이가 나는 것이 마음 아팠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곁에서 아뢴다.

"곧 내관에게 음양립과 도홍띠를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은 말씀을 마치자 곧 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빨리 상의원에 나가서 음양립과 도홍띠를 바치라 일러라."

내관은 총총히 상의원으로 나가서 윤이 흐르는 음양립과 복사꽃빛 화려한 도홍띠를 가지고 들어왔다. 세종대왕은 친히 음양립과 도홍띠를 받아서 상왕과 상왕비가 계신 앞에서 양녕한테로 옥보를 옮겼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하교에 의해서 음양립과 도홍띠를 드립니다. 사양치 마시고 갓과 띠를 바꾸옵소서."

세종대왕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풍기시며 어수로 양녕의 포립을 벗기고 음양립을 씌웠다. 베띠를 풀고 도홍띠를 띠어주었다. 양녕은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황공무지하여이다."

한 말씀을 한 후에 대왕이 의관을 바꾸는 대로 가만히 맡겨두었다. 상왕을 위시하여 효령과 성녕이며 모든 시녀들은 형제의 지정에 넘치시는 대왕의 태도와 양녕의 정을 받는 모습을 바라보고 모두 다 미소를 지었다. 양녕이 대군의 평복으로 갈아입고 난 후에 시녀가 어전에 나가 아뢴다.

"수라상과 대군방의 진연상을 거행하려 하옵니다. 어느 곳으로 내오리까?"

"상왕께 아뢰어보아라."

세종대왕은 아바마마의 뜻을 받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시녀는 다시 상왕의 앞으로 나가 아뢴다.

"수라상을 어디로 바치오리까?"

"나의 생일밥을 주려 하느냐. 이궁보다 낙천정에서 상을 받는 것이 좋겠다. 넓은 들판에 고개를 숙인 벼 이삭들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면서 밥상을 대하는 것도 일취가 있을 것이다."

시녀는 명을 받고 물러났다. 상왕은 대왕과 모든 대군들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린다.

"자아, 모두 낙천정으로 올라가기로 하자."

상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세종대왕은 어마마마를 부축해 모시었다. 여러 대군들이 상왕과 상왕비와 세종대왕의 뒤를 따랐다. 낙천정은 살곶이다리 일대의 평원 광야를 굽어보는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이궁에서 활 한바탕쯤 되는 거리에 있었다. 상왕은 일부러 교자를 타지 아니하고 낙천정으로 올랐다. 다만 상왕비만은 폐세자 문제로 쇠약하고 병들어 교자를 타고 올랐다. 낙천정 정자는 밝고도 시원했다. 푸른 산이 멀리 구름밖에 병풍치듯 둘러 있고 평원 광야가 눈앞에 탁 열렸다. 논과 밭이 즐비하게 삼십 리에 뻗쳤는데, 화한 바람은 푸른 물결을 일으켜 만간들이 청공단 이불을 펼쳐논 듯했다. 황새는 날아들고 청송은 우거졌다. 청초 우거진 곳에는 소와 말이 풀을 뜯어 배불리 먹고, 골짜기마다 풍년을 자랑하는 농부들의 격양가 소리는 흥겹게 높았다. 정자 마루에는 열 간들이 강화 화문석이 깔려 있고 상왕과 상왕비를 위하여 장침 안석에 보료와 방석이 포진되어 있었다. 상왕은 누마루에 올라 사면을 바라본다. 청풍이 상왕의 미복 입은 소맷자락과 고름을 휘날렸다. 풍윤하고 기름진 들 풍경이 상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모두 다 상감의 복이고 상감이 나라를 잘 다스린 까닭이다. 내가 임금 노릇할 때는 밤낮 가물지 아니하면 홍수가 져서 이맛살을 펼 날이 없더니 상감이 즉위한 후부터는 우순풍조해서 시화연풍하니 상감의 홍복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 보아라. 황새는 날아들고 송아지와 망아지는 엄마를 불러 배부르게 풀을 뜯는구나. 또다시 저 소리를 들어보아라. 백성들이 즐기는 격양가 소리가 얼마나 좋으냐. 듣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보기만 해도 살이 찔 것 같구나!"

상왕은 혼자 말하며 들을 바라보았다. 세종대왕은 황감했다. 아무 대답도 없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시립해 서 있다. 양녕을 위시하여 효령, 성녕 삼형제도 흡족한 마음으로 들을 바라보며 국운의 승평을 기뻐했다. 이윽고 상왕 내외분의 생신 수라와 대왕의 수라가 올랐다. 대군 삼형제의 진연상도 올랐다. 상왕과 상왕비는 나란히 자리에 앉아 생신상을 받았다. 헌수의 차례가 되었다. 먼저 대왕이 상왕과 상왕비께 약주를 올렸다. 다음에는 양녕대군이 잔을 올려 수를 빌고, 다음에는 효령대군이 잔을 올리고, 다음에는 성녕대군이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상왕은 여룡여호한 네 아드님의 올리는 술을 유쾌하게 마시었다. 상왕비께 올리는 술은 상궁이 곁에 모시어 퇴주 그릇에 술을 부었다. 상왕비는 몸이 쇠약해서 입술에만 술을 대고 내놓는 때문이다. 오붓한 생일잔치였다. 대신과 대관들은 말할 것 없고, 후궁의 소생들까지도 오늘 생신 잔치에는 참여치 못했다. 일부러 알토란 같은 상왕비 소생인 대군만이 낙천정으로 모인 것이다. 공주와 옹주들도 나오지 아니했다. 생일잔치라기보다도 상왕비와 양녕의 마음을 안돈시키기 위해서 생신을 핑계하고 낙천정 연회를 연 것이다. 상왕은 아드님 사형제의 헌수주를 받아 마신 후에 시녀에게 영을 내렸다.

"내가 주는 술이다. 양녕에게 한 잔 권해라."

시녀는 옥잔에 가득 술을 부어 양녕한테 올렸다. 양녕은 무릎을 꿇고 어사주를 두 손으로 받은 후에 돌아앉아 술을 마시고 빈잔을 시녀에게 돌렸다. 상왕은 양녕이 술잔을 비우자 다시 시녀에게 분부를 내린다.

"이번에는 효령이 한 잔 마시어라."

시녀는 청자 술병을 들고 잔에 술을 부어 효령한테 올렸다. 효령도 양녕이 하듯 돌아앉아 술을 마시고 잔을 시녀한테 전했다. 상왕은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띠고 대왕을 향하여 말씀을 보낸다.

"국가의 왕통을 가지고 따진다면 전하는 상감이니 내가 전하한테 술을 먼저 권해야 하겠지만 오늘은 부자형제가 단란하게 모여서 나의 생일을 축복하는 모임이니 형제의 차례대로 술을 권하는 것이오. 전하는 허물치 말고 내 술을 받으오."

세종대왕은 얼굴에 화색을 가득 띠고 대답해 아뢴다.

"성의 지당하옵니다. 오늘 성수절, 이 모임에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모시고 군신의 체통을 지키는 것보다 부자와 형제간의 순서에 따라서 즐겁게 하루를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당하신 분부십니다."

상왕은 대왕의 말씀을 듣자 더욱 유쾌했다. 시녀에게 분부한다.

"전하께 내 술을 한 잔 올려라."

시녀는 대왕께 잔을 올렸다.

세종대왕도 양녕이 하듯 시녀에게 술잔을 받아 등을 지고 돌아앉아서 상왕이 내리는 술을 마시었다. 상왕은 더한층 마음이 흥락했다. 아드님 세종에게 농담의 말씀을 내린다.

"전하는 나와 동등이니 돌아앉아 마시지 말고 바로 앉아 마시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말씀을 마치자 드높게 웃었다. 세종도 미소를 지어 대답해 아뢴다.

"오늘의 모임엔 군신의 체통보다 부자형제의 순서를 따르라고 아까 하교가 분명하셨습니다. 소자가 어찌 아바마마의 엄하신 분부를 어기오리까."

상왕은 세종의 말씀을 듣자 소리 높여 유쾌한 웃음을 웃었다. 상왕은 다시 시녀에게 분부한다.

"이번에는 막내 대군 성녕한테 술을 권하라."

시녀는 잔에 술을 가득 따라서 성녕한테 올렸다. 성녕도 공손히 두 손으로 잔을 받아 형님들이 한 대로 돌아앉아 마시었다. 이번엔 양녕을 위시하여 세종과 효령과 성녕이 상왕 앞에 나가서 차례로 한 잔씩 약주를 올렸다. 상왕은 유쾌했다. 네 아드님이 올리는 술을 사양치 아니하고 마시었다. 상왕은 네 아들이 올리는 술을 차례대로 마신 후에 유쾌하게 네 분 아들을 향하여 말씀한다.

"제각기 따라 올리는 너희들의 술을 석 잔씩만 마시어도 삼사십이 열두 잔이로구나. 오늘은 내가 대취하겠다."

세종대왕이 아뢴다.

"후궁들의 소생이 아니 나와서 그렇지 그 애들마저 나왔더라면 경녕군, 함녕군, 온녕군, 근녕군, 해령군, 희령군, 후령군, 익녕군이 있으니 신과 대군과 군을 합쳐서 모두 십이 형제올시다. 십이 형제가 석 잔씩만 올리면 서른여섯 잔이 됩니다. 언제 한번 모여서 즐기겠습니다."

상왕은 소리를 높여 껄껄 웃는다.

"그렇게 따져본다면 서른여섯 잔을 마셔야겠구나. 삼십삼 천이란 말이 있것다. 삼십삼 잔에 또다시 석 잔을 더 마시게 되니 과연 그 수가 좋구나."

상왕은 무한 유쾌한 모양이었다. 상왕비 민씨는 후궁들의 아들 소리를 하니 골치가 아팠다.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양녕은 어마마마의 불쾌해하는 얼굴 모습을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발견했다. 입을 봉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아니했다. 효령은 양녕만큼 민첩하지 못했다. 어마마마의 찌푸린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한마디 하고 싶었다.

"남자만 그렇지, 여자까지 넣어서 쳐 보십쇼. 어마마마의 소생인 공주가 넷에다가 후궁들의 소생인 옹주가 열세 명, 도합 십칠 명의 여자올시다. 아들과 딸을 합하면 이십구 명이나 됩니다. 스물아홉 명이 석 잔씩 헌수를 한다면 결국 여든일곱 잔을 잡수셔야 합니다. 대취하시겠습니다."

상왕은 더한층 유쾌한 모양이었다. 소리를 높여 웃는다.

"거 이십구 명이나 되느냐. 그 수가 묘하다. 아까 남자들의 술을 석 잔씩만 마시면 삼십삼 천에 또다시 삼을 더한다 했는데 내 소생의 수가 이십구 명이면 이십팔수에 또다시 하나를 더한 수에 해당이 되는구나. 그 참 묘하구나. 내 팔자가 기가 막히게 좋구나."

상왕비 민씨는 눈을 들어 상왕을 흘겨보며 말한다.

"자식들을 낳고두 여태 몇 남매인지 수도 모르셨소. 그대로 덮어놓고 낳기만 하셨구려. 욕심도 너무 과하시오. 그것들이 나올 때마다 내 오장육부가 얼마나 썩었는지 아시오?"

상왕비는 난 자식의 수는 모르고 욕심만 부려서 후궁을 거느렸던 상왕이 아직도 밉상으로만 보였다. 화가 치밀었다. 핀잔을 준다. 양녕만 빼놓고 대왕을 위시하여 모든 아들들은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상왕은 민후의 푸념과 핀잔을 받다 약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식 낳는 것도 임의로 못하는 거야, 하하하"

드높게 웃으며 멋쩍은 자리를 휘갑쳐버렸다. 태종은 다시 화제를 돌려서 양녕에게 묻는다.

"요사이는 글씨 공부를 한다더니 계속해서 하느냐?"

", 하옵니다."

양녕이 대답했다.

"나는 무식해서 글씨를 쓸 줄 모른다마는 필가의 말을 들어보면 먼저 필력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훌륭한 글씨를 쓸 수 있다고 말하더라. 그동안 필력은 얻었느냐?"

"성상의 명철하신 정치 아래 폐인의 몸으로 하올 일이 없습니다. 이제는 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물외한인이 되어 글 읽고, 글씨 쓰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습니다. 글씨는 마음을 기르는 데 좋은 수양이 되옵니다."

"명필의 말을 들으면 글씨는 팔뚝 힘으로 써야지 회목으로 쓰면 아니 된다 하더라."

", 그러하옵니다. 낙락장송 한가지가 반공중으로 쭉 뻗어 나가듯 필력이 꿋꿋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서결에 서집여고송일지라 하옵니다."

"오늘 부자와 형제가 단란하게 한자리에 모여 있는 중에 너의 글씨를 한 번 보여줄 수 있느냐?"

상왕의 묻는 말씀에 양녕은 주저치 아니하고 대답했다.

"벼루 풍파까지 나면서 공부한 글씨올시다. 하교가 계시다면 삼가 쓰겠습니다."

양녕은 벼루 풍파로 인하여 소란했던 지난 일을 슬며시 야유하면서 글씨 쓰기를 자원했다. 효령이 옆에서 아뢴다.

"수종사에서 형이 쓴 글씨를 보고 소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왕희지 글씨를 그대로 옮겨논 듯했습니다. 상왕은 내시한테 명했다.

"종이와 붓과 먹이며 벼루를 대령해 올려라."

내시는 상왕의 명을 받아 벼루와 먹과 붓이며 종이를 올렸다. 상왕은 다시 궁녀에게 영을 내렸다.

"양녕이 글씨를 쓸 테니 먹을 갈아라."

궁녀는 벼루에 연적의 물을 따라 먹을 갈았다. '수양매월'이라고 금글씨로 쓴 향기로운 먹내가 정자 안에 가득했다. 상왕은 다시 양녕에게 명한다.

"그동안 잠심하고 글씨 공부를 했다 하니 어디 한번 필력을 시험해 보아라."

양녕은 사양할 수 없었다. 장지를 펴 놓고 붓을 잡았다. 조용히 고개를 들어 상왕께 아뢴다.

"무슨 글을 쓰오리까?"

상왕은 즉흥으로 대답했다.

"낙천정에 아직 현판이 없으니 현판 글씨를 한 번 써 보아라."

양녕은 양호 무심대필에 먹을 찍어 붓털을 가다듬은 후에 넓은 장지 위에 가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세종대왕을 위시하여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눈이 양녕이 쓰는 글씨 위로 집중되었다. 양녕은 왼팔로 오른편 소맷자락을 잡고 팔뚝에 힘을 주어 해자체로 '낙천정' 세 글자를 가로 썼다. 획마다 꿋꿋하고 기운이 찼다. 억세고 줄기차면서도 날렵하고 재치가 있었다. 양녕이 필결을 설명한 대로 획마다 낙락장송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가 반공중에 힘차게 뻗은 듯했다. 상왕과 상왕비와 세종 이하 모든 사람의 눈에 놀라는 빛이 떠돌았다.

"그동안 많은 공부를 했구나!"

양녕은 쓰기를 다하고 붓을 벼루 위에 놓았다. 상왕은 다시 양녕한테 분부한다.

"기왕 붓을 잡은 길이니 화양정 현판도 써 보아라."

양녕은 필흥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화양정' 세 글자를 순식간에 장지에 썼다. 용사비등하는 듯 필력이 호탕했다. 상왕과 상왕비며 세종대왕의 입이 화사하게 열려졌다.

"좋습니다."

세종대왕의 입에서 찬양하는 옥음이 떨어졌다. 상왕은 내시에게 분부한다.

"벼루와 종이를 거두어라. 그리고 '낙천정''화양정'이라고 쓴 글씨를 좋은 나무판에 새겨서 곧 정자에 달게 하라."

내시는 상왕의 분부를 받들어 문방제구를 거두고 양녕이 쓴 글씨를 우선 벽에 걸었다. 며칠 후의 일이다. 양녕의 글씨는 나무판에 새겨서 낙천정과 화양정에 걸렸다. 양녕이 글씨를 다 쓴 후에 상왕은 궁녀에게 명한다.

"내 평생에 오늘같이 기쁜 날은 없었다. 내외가 자리를 같이하여 해로해 있고 명철한 상감을 위시하여 대군들이 함께 자리에 앉아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술을 다시 내오너라. 한 잔씩 같이하리라."

궁녀는 대왕의 명을 받들어 다시 담박하게 주안상을 차려 내왔다. 대왕이 친히 잔을 잡고 천일주를 따라서 상왕께 올렸다. 상왕은 즐겁게 받다 마시며 대왕과 대군들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린다.

"오늘은 상감 이하 너의 대군들이 나의 탄일을 축하하여 모인 날이다. 주량껏 마시고 즐겁게 놀기로 하자. 내 앞에서 너희들은 마음을 놓고 편안히 마셔라."

상왕의 말씀이 떨어지자 세종대왕은 양녕한테 술을 권했다.

"아바마마께서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오늘은 주량껏 잔을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녕은 대답없이 공손히 전하의 술을 받았다. 세종대왕은 계속해서 둘째 형님 효령한테 술을 보내고 아우 성녕한테 잔을 주었다. 양녕이 무릎을 꿇고 세종께 술을 올렸다.

"이 잔을 드신 후에 만수무강하시어 더욱 나라의 위신을 빛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녕이 처음으로 상왕앞에서 세종을 향하여 칭송하는 소리다.

"삼가 대군 형님의 말씀을 폐부에 간직하겠습니다."

양녕은 세종대왕을 향하여 군신의 예로 술을 올리고, 세종은 양녕을 형제의 정으로 대우하여 말씀이 은근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상왕 내외분과 모든 대군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화합한 기운이 가득하게 돌았다. 세종은 다시 효령과 성녕한테 술을 권했다. 술이 한 순배 돌아 거나했을 때 상왕은 아들들을 향하여 술회한다.

"내가 오늘 기쁜 날을 맞이하여 여태껏 내 가슴에만 품고 말하지 못했던 일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리라."

여러 아드님들은 상왕이 무슨 말씀을 내리시나 하고 정숙한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내가 국가를 어거하기 위하여 포은 정몽주 선생을 죽이고, 최영 장군을 죽게 하고, 두문동 칠십이인의 소굴에 불을 지로고, 왕씨네들을 바닷속에 몰아넣고, 나의 아우 방번, 방석을 죽이고, 나의 형님 방간과 칼을 서로 겨눈 일이며, 너희들의 외가인 민씨네를 죄준 일들은 모두 다 국가의 주권을 잡기 위하여 어찌할 수 없는 부득이했던 일이었다. 마음이 괴로웠지만 창업하는 사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다. 좋지 아니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감행했다. 왜냐하면 그같이 하지 아니하면, 내가 패배를 당하고 내가 죽고 모든 창업이 수포로 돌아가는 까닭이다. 알면서도 결연히 한 것이다."

세종대왕이하 모든 아드님들이 고요히 귀를 기울여 듣는다. 상왕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위에서 말한 일들은 다 외롭지 아니한 일인 줄 알면서도 큰일을 하는 사람으로 소절에 구애될 수 없는 때문에 한 짓이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 내가 방석, 방번을 배격한 일에 크게 노하시어 함흥으로 가신 일이라든지, 문안사신이 가면 번번이 죽이신 일이며, 그 어른의 마음을 돌리게 해서 다시 돌아오셨을 때 봉영하는 문에서 나의 얼굴을 보시자 문득 노기가 발발하시어 화살로 나를 쏘신 일들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한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 괴로웠던 일은, 아바마마는 동북면 함흥에 계시고 강비의 척분이 되는 조사의가 반란군을 일으켰을 때 참말로 나는 곤란했다. 그때 나의 고충은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양녕은 약간 알겠지만 그다음의 너희들은 나이 어려서 다들 모르리라."

양녕은 잠자코 태종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있다. 태종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때 동북면에서 조사의가 난을 일으킨 것은 단순히 자기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강비의 소생 방석의 원수를 갚는다고 선언하고 아바마마를 등에 업고 나온 것이다. 곧 태조대왕이신 아버님께서 나를 치시는 군사니 아버지와 아들이 싸움을 하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때 내가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어야 하겠느냐. 조사의를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켜서 내가 동북면으로 친정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겉으로는 조사의를 토벌하는 군사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군사와 칼을 겨누는 것이다. 어찌 마음이 아프고 슬프지 아니했겠느냐. 그러나 국가의 대권을 위해서는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이때 내 마음의 아프고 괴로웠던 일은 한평생 잊어버릴 수 없는 악몽이었다."

세종대왕 이하 모든 대군들은 고개를 숙여 묵묵히 듣고 있다. 태종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때, 다행히 내가 동북면으로 친정을 해서 조사의의 일당을 섬멸시켰으니까 망정이지 내가 만일 패했던들 오늘날 너희들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상왕의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하는 한마디 말은 세종과 왕자들의 가슴에 강한 반향을 주었다.

"그나 그뿐인가, 삼천리 조선 강산은 이씨의 조선이 아니라 조씨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아버지를 등에 업고 나온 조사의는 몇 해 후에는 반드시 자기가 제왕이 되었을 것은 뻔한 노릇이 아니냐. 아바마마는 그때 벌써 늙으셨으니 아무리 영웅이라 하나 노장은 무용이다. 이씨의 천하가 되지 아니하고 조씨의 천하가 되었을 것이다."

대왕이하 모든 왕자들의 가슴에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나라는 어지러웠을 것이요, 오늘 같은 좋은 정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말을 하는 태종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상왕은 가슴속 말을 다 털어놓은 후에 시선을 양녕한테로 옮겼다.

"양녕아, 내가 너한테도 진심을 털어놓고 말하리라. 네가 나한테 대하여, 또는 너의 할아버님이신 태조 어른에 대하여 불평과 불만이 있었던 것을 나는 잘 짐작하고 있다. 그 까닭으로 인해서 네가 반항하는 태도를 나에게 취한 것도 잘 알고 있다. 네가 너의 할아버지께서 이신벌군을 했다 해서 대의에 벗어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네가 나한테 불평을 가진 것은 고려의 충신들을 죽인 것이라든지 형제가 불목해서 골육상쟁한 일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해서 너는 나에게 반항하기 위하여 일부러 술을 마시고 공부를 아니하고 황음무도한 짓을 해서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도록 한 일을 나는 대강 짐작하고 있다."

이때 고개를 숙여서 태종의 말씀을 듣고 있던 양녕의 눈에는 깜짝 놀라는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태종은 한숨을 지은 후에 말씀을 계속한다.

"내가 욕심이 크고 정력이 남달리 많아서 후궁들을 여럿 두고 왕자와 공주들을 많이 생산한 것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으로 해서 너의 어머니와도 한동안 화합하지 못했던 일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다 나의 천품이 너무나 강강한 때문이니 내 자신도 어찌하는 수 없었던 일이다. 너는 이러한 모든 일을 오해해서 나를 원망하고 못된 사람으로 인정했을 것이다. 너의 어머니도 속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가내하의 일이니 어찌하는 수 없다. 너는 나의 천품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태종은 말을 마치자 가볍게 한숨을 짓는다. 양녕을 위시하여 대왕과 대군들은 고개를 숙여 아버지 상왕의 말씀을 공경히 듣는다. 상왕비의 여윈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태종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러나 대국적으로 큰일을 보아서 판단해야 한다. 태조께서 고려의 부패했던 정치를 인계해서 맡지 아니했던들 이 나라 꼴은 어찌 되었겠는가? 이신벌군이 의 아닌 일이라 해서 황음무도했던 우왕을 그대로 두고, 그 밑에서 권세와 탐욕을 부려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게 했던 탐관오리들을 그대로 두었던들 이 나라 꼴은 어찌 되었을가. 천하대세를 살피지 못하고 망한 원을 도왔다면 이 나라 강토와 백성들은 어찌 되었을까. 반드시 새로 일어난 명한테 큰 전화를 입어서 삼천리강산은 초토가 되고 수천만 생령은 칼 아래 외로운 혼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신벌군했다는 사실만으로 태조 어른의 건국을 침 뱉아 욕할 것인가? 너희들은 다시 한번 비판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태종은 말씀을 마치자 모든 아들들을 바라본다. 눈에는 열이 띠어 핏줄이 섰다. 모든 아들들은 아무 대답이 없다. 태종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자아, 보아라. 지금 이 나라의 형세는 고려 때와 비하여 어떻게 되었나. 내가 상감에게 정치를 맡긴 후에 나라는 새로운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경연을 열어서 상감이 정치하는 여가에 친히 학문을 공부하고, 집현전을 창설하여 학자와 문인들을 모아서 학문하는 길을 더욱 개척하게 하였다. 왜인이 해변을 자주 침범하니 대마도를 정벌하여 단번에 승리를 거두어서 변방이 편안할 뿐 아니라 크게 주위를 선양시켰고, 가뭄이 계속되니 상감은 일부함원, 오월비상이라 해서 궁녀들을 대궐에서 내보내어 자유스럽게 시집을 가게 했다. 이후로부터 시화연풍하여 해마다 풍년이 드니 백성들의 격양가 소리는 지금 들에 높아 있다. 앞으로 나라는 점점 더 부강하게 될 것이고, 백성들은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마음이 기쁘지 아니하랴."

상왕의 말씀이 끝나자 세종은 옷깃을 바로잡고 자리를 피하여 아뢴다.

"불감하옵니다. 소자 무슨 덕이 있사오리까. 모두 다 아바마마께 품하고 아뢰어 지시하시는 대로 거행하는 것뿐이옵니다."

효령이 상왕께 아뢴다.

"양녕은 세자로 있을 때 소자한테 일찍이 한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세자가 될 재목은 따로 있으니 쓸데없이 얌전을 피워서 공부를 하는 체하지 말라고 야유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소자는 크게 깨닫고 불경 공부에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미루어 본다면 양녕 형의 지인지감이 무던합니다. 삼가 지난 일을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아뢰옵니다."

태종은 금시초문의 말이었다. 마음이 유쾌했다.

"이제 효령의 말을 들으니 양녕의 슬기와 덕이 대단하구나. 일부러 미친 체해서 세자의 자리를 명철한 아우에게 넘겨주도록 했으니, 양녕의 슬기로운 행동은 상감에게 못지 아니한 일이다. 오늘 나는 양녕에게 지덕의 호를 내리리라."

양녕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무릎을 꿇어 자리를 피하여 대답한다.

"황공무지하여이다."

상왕은 이내 오수로 잔을 잡아 양녕에게 권했다.

"네 마음이 그같이 어진 줄은 내가 아직 몰랐구나. 한 잔 술을 마시어라."

상왕은 폐세자 양녕에게 친히 어사주를 내렸다. 양녕이 공손히 잔을 받아 자리를 옮겨 마시었다. 상왕은 다시 효령에게 술을 부어 친히 내렸다.

"효령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양녕의 본마음을 아직도 몰랐을 것이다. 상급으로 한 잔 마시어라."

효령이 무릎을 꿇고 공손히 자리를 피하여 마시었다. 상왕은 다시 성녕에게 술을 내렸다.

"좋은 형들을 두었으니 너도 한 잔 마시어라."

성녕이 공손히 어주를 받들어 마시었다. 상왕은 다시 술을 잔에 가득 부어 세종한테 전한다.

"앞으로 이 나라를 더욱 복되고 안락한 땅으로 만들어 국조가 무궁하게 하기 바라오."

세종은 절하고 상왕이 내리는 술을 받들어 돌아앉아 마신 후에 곧 무릎을 꿇고 옥잔에 술을 가득 부어 태종께 올린다.

"만수무강하옵시어 신하와 백성들의 축복을 항상 받으시옵소서."

상왕은 크게 기뻤다. 단번에 세종대왕이 올리는 술을 마시었다. 세종은 다시 옥배에 술을 가득 부어 상왕비께 올린다.

"어마마마께서도 상왕 전하와 함께 만수무강하시어 국가의 홍복을 받으시옵소서."

상왕비 민씨는 수척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대왕이 올리는 술잔을 잠깐 입술에 대었다가 상 위에 놓는다. 상왕은 유쾌했다. 모든 아이들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이같이 좋고 좋은 날 그대로 앉아서 술만 마실 수가 있느냐. 주흥이 도도하니 춤을 추어 즐기리라."

상왕은 말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으쓱거려 춤을 추었다. 상왕이 일어나 춤을 추는 것을 보자 대왕도 일어나 으쓱으쓱 춤을 추었다. 용포 자락이 바람을 일으켰다. 용포 소매가 펄럭거렸다. 대왕의 용포 자락과 상왕의 용포 자락이 서로 엇갈려 펄럭거렸다. 태종의 면말이 번쩍 허공으로 들렸다가 마루판을 밟았다. 세종대왕의 어깨가 상왕의 어깨를 등지고 돌았다. 상왕과 대왕은 배무를 추다가 대무를 추었다. 효령과 성녕도 일어났다.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제각기 으쓱거려 춤을 추었다. 효령이 춤을 추다가 양녕 앞으로 나갔다.

"형님도 일어나서 춤을 추사이다."

양녕은 미소하며 대답한다.

"성대의 승사를 우러러 뵙는 것이 폐세자의 도린가도 하오."

양녕은 사양하며 미소를 던져 바라볼 뿐 춤을 추지 아니했다. 낙천정서 열린 왕실 일가의 단란한 모임은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다. 석양이 꺼질 무렵 세종은 궁궐을 비울 수 없었다. 서울 대궐로 돌아가고 효령과 성녕도 세종을 모시고 서울로 향했다. 태종은 상왕비와 양녕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상왕비와 양녕과 함께 하룻밤을 낙천정에서 지내게 했다. 이후로부터 태종은 가끔 양녕을 낙천정으로 불러서 그의 고적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역시 대신들이 무서웠다. 서울 대내 안으로는 불러들이지 아니했다. 양녕 역시 서울 대궐이 그립지 아니했다. 상왕 태종이 만나자고 청하면 나귀 한 필을 타고 물외한인의 한가한 몸으로 낙천정에서 상왕과 대면하는 일을 사양하지 아니했다. 양녕은 사랑하는 애첩 어리가 목매어 죽은 광주에 오래 거접하기 싫었다. 봄이 되면 소쩍새 울음소리에 간장이 녹는 듯하고, 여름이 되면 뻐꾹새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호탕한 성격이라 하나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나 맘대로 우거를 옮길 수도 없었다. 광주에 있게 된 것은 아버지 태종이 지역을 정해서 귀양살이로 지정해 준 때문이다. 만약 맘대로 집을 옮긴다면 조정 대신들은 또다시 위험인물이라 해서 역적으로 몰아댈 것이 분명했다.

하루는 낙천정에서 세종대왕을 만나 뵙고 조용히 고했다.

"신의 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종은 형님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무슨 청이오니까?"

"하도 광주에 오래 있으니 싫증이 납니다. 다른 곳으로 집을 좀 옮겼으면 합니다."

영철한 세종이었다. 벌써 양녕의 심중을 짐작했다.

"어느 곳으로 옮기시렵니까?"

"이천쯤이 좋을 듯합니다."

"곧 상왕 전하께 아뢰어 선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날 세종은 간곡하게 태종께 고했다.

"양녕이 광주에서 이천으로 우거를 옮기려 합니다. 허락해 주시옵소서."

태종은 한동안 침묵 끝에 하락을 내렸다.

"대신들이 알면 시끄러울 것이오. 조용히 이천현감에게 말해서 잘 보호케 하오."

이리해서 양녕은 광주에서 이천으로 우거를 옮겼다.

 

환희 인생

 

젊은 세종이 아버지 태종께 선위를 받들어 왕위에 오른 후에 상왕 태종은 수강궁에 아침 문안을 들어온 신왕 세종께 분부를 내렸다.

"세자빈으로 있던 경빈 심씨는 당연히 왕비가 되어야 하오. 칭호를 공비라 하는 것이 좋겠소. 원래 천성이 안상하고 얌전하고 슬기스러우니 공손할 공자를 쓰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리고 그의 친정 아버지 병조판서 심온은 청송 심씨라 하니 청천부원군의 칭호를 주게 하오."

세종은 황감했다.

"삼가 대신에게 명하여 상왕 전하의 전교를 봉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심가 일문의 광영이옵니다."

젊은 세종은 상왕인 태종께 배를 드린 후에 대전으로 돌아와 정원 승지에게 전교를 내렸다.

"상왕 전하께서 하교가 계시었소. 경빈 심씨는 왕비를 봉해서 공비의 칭호를 올리게 하고, 왕비의 생부 병조판서 심온에게는 청천 부원군을 봉하여 조야에 반포하오."

"지체치 않고 곧 봉행하겠습니다."

원래 딸이 왕비가 되면 친정아버지에게는 부원군을 봉하는 것이 나라법의 전례다. 이 까닭에 한국 속담에도 딸 덕에 부원군이 된다는 말까지 있게 되었다. 부원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에게 주는 공신 부원군이 있고, 딸을 잘 둔 덕에 부원군이 되어 척신으로 권세가 혁혁한 부원군이 있다.

심온은 이제 왕비의 친정 아버지의 자격으로 병조판서에 청천부원군을 겸하게 되었다. 왕후 심씨에게는 내전에서 내외명부가 시립해 모신 중에 옥책을 올려 정식으로 왕비가 되는 의식을 거행하고, 병조판서 심온의 집에는 청천 부원군을 봉하는 교서와 그의 아내 안씨에게 삼한국대부인의 첩지를 내렸다. 불과 한 사람 대군의 장인으로 있던 심씨의 집안은 양녕의 세자 포기로 인해서 뜻밖에 충녕이 왕위에 나가고, 딸이 왕후가 되니 일약 부원군이 되고 국대부인이 되었다. 일문의 넘치는 영광이요, 복 많은 사람이란 칭송이 조야에 자자했다.

심온은 고려왕조에 벼슬하던 사람으로 이조에 들어와 정종 때 좌의정이 되었던 심덕부의 아들이다. 태종을 도와 방석을 평정할 때 공이 있다 해서 지위가 병조판서까지 올랐던 것이다. 새로 왕후의 자리에 오른 공비 심씨는 세종대왕보다 두 살이 위인 을해생이다. 이때 세종은 정축생으로 왕위에 나갈 때 보령이 22세가 되니 왕비 심씨는 24세가 된다. 원래 대대로 내려오는 명가의 집안에 태어났다. 성정이 부드럽고 침착하며 예절에 밝고 상봉하솔하는 범절이 양녕대군의 부인 김씨보다 못하지 아니했다. 양주 시골집에서 탄생해서 열네 살 때 열두 살 된 충녕대군과 가례를 치렀다. 이대 왕후가 된 때는 벌써 5세 된 왕자 ''2세 된 왕자 ''를 두었다. 세종은 항상 심씨를 어진 아내라 칭송했다. 새로 부원군의 영광스런 칭호를 받은 병조판서 심온은 사은하는 의식을 드리기 위하여 수강궁에 나가 상왕 태종께 알현하기를 청했다. 신왕 세종이 거처하는 경복궁 안에는 정원이 있는 곳이라 당연히 도승지 이하 좌우승지와 주서, 가주서 등 정원 관리가 어명을 받들어 거행하게 되지만, 상왕인 태종이 거처하는 수강궁에도 또다시 승지들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태종이 신왕 세종에게 왕위를 전할 때, 조건을 붙여서 신왕과 군신들 앞에 선언한 바가 있었다.

'모든 일은 신왕이 잘 처리하도록 하라. 그러나 다만 군을 통솔하는 군사권에 대해서는 과인이 장악할 것이다. 그것은 신왕이 아직 군병에 대해서 경험이 없는 때문에 소홀하기 쉽다. 그러므로 당분간 과인이 관장하려 하는 것이다. 모든 대신들은 그리 알고 군국기무에 대해서 반드시 나의 재결을 맡아 처리하라.'

이런 유시가 있었던 까닭으로 수강궁에도 또 하나의 정원이 있어야만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당분간 상감님이 두 사람이 있고 정원도 두 개 - 정원이 경복궁과 수강궁에 한 개씩 다로 있게 된 셈이다. 뿐만 아니었다. 상왕인 태종이 군국대사를 처결하게 되니 대신 이하 모든 관원들은 자연히 군국대사 이외에도 태종께 품달해서 말씀을 드려야 하고, 세종 또한 지극한 효자라 작고 큰 일을 모조리 상왕께 재결을 맡아서 처리케 했다. 말하자면 세종은 아직 허수아비 제왕이었다. 그러나 모든 국사의 처리는 번잡하기 한량없었다. 일 한 가지를 처리하는 데 수강궁 상왕전에 재가를 맡아야 하고 또다시 정통인 왕 전하인 세종께 품해야만 했다. 말단 관리들은 번거로워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또 한 가지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상왕전 내시와 정원 승지들은 진짜 상감인 세종의 밑에서 거행하는 내시와 승지들보다 기승기승 위세가 당당했다. 경복궁 내시와 승지들은 아니꼽고 역하게 생각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여기 또 한 가지 웃지 못할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삼정승 이하 모든 중신과 삼사 요직들 중에는 금상전하인 상감보다도 군국기무를 장악하고 있는 상왕한테 한층 더 충성을 다하는 체 아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이것이 이대 상왕인 태종이 아드님 세종한테 왕의 지위를 물려준 직후의 수강궁과 경복궁의 미묘한 정세였다.

"병조판서 심온이 새로 부원군이 되었다 하와 사은숙배를 올리려 합니다."

"들라 하라."

상왕은 쾌하게 알현을 허락했다. 이때 상왕의 어전에는 좌의정 박은이 다른 일을 품하기 위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심온은 내관의 인도를 받아 부원군의 예복을 입고 어전으로 추창해 나가 숙배를 드린다.

"왕은이 망극하시와 한미한 소신에게 부원군의 작위를 내리시니 우악하신 성은에 소신은 몸 둘 바를 모르고 감읍할 뿐이옵니다."

상왕 태종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말씀을 내린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예로부터 왕후의 생정 아버지는 으레껏 부원군이 되는 것이 아닌가. 황차 경은 국가를 위하여 큰일을 많이 한 좌명공신이니 왕후의 생정이 아니라 해도 공신 부원군이 될 만한 사람일세. 과히 겸양하지 말게나. 하하하."

상왕은 호협하게 너털웃음을 소리 높여 웃었다. 심온은 더욱 황공했다. 다시 몸을 굽혀 국궁하여 아뢴다.

"이미 왕은이 하해같이 깊사옵고 태산보다 높으시니 이 크나큰 은덕을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인들 갚사오리까. 다만 견마의 힘을 다하여 갈충보국하올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올 뿐이옵니다."

상왕은 또 한 번 화사한 웃음을 옥안에 띠고 대답한다.

"경의 충심은 과인이 일찍이 짐작해 아는 바가 아닌가. 이제 경은 국가의 척신이 되었으니 더한층 국사에 대해서 힘을 다하라. 나와 전부터 사돈지간이로세. 하하하."

태종은 또 한 번 유쾌한 웃음을 호방하게 웃었다. 심온은 진실로 진심으로 감격했다. 두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분골쇄신이 되도록 두 분 전하를 받들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금포 소매를 들어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았다. 두 분 전하란 태종인 상왕과 금상전하인 세종을 가리킨 소리다.

"경은 또한 병조판서의 중책을 겸하고 있다. 더욱더 국방과 안보에 대하여 힘을 쓰라."

상왕인 태종의 말씀이 채 떨어지기 전에 옆에 시립해 섰던 좌의정 박은이 출반해 아뢴다.

"신 좌의정 박은은 돈수백배하옵고 감히 성상전에 아뢰옵니다. 병조판서 심온은 이제 왕후의 지친으로 부원군의 작위를 받아서 사은숙배를 올렸습니다. 국척으로 병권을 장악하는 병조판서의 임무를 맡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심온은 당연히 병조판서의 임무를 자진 사퇴해야 할 것입니다."

박은은 반남 박상충의 아들로 역시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이 된 사람이다. 성정이 강직하고 변통성이 없었다. 강강한 성격 하나로 태종의 신임을 받아서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다. 양녕을 폐세자하자고 주장한 사람도 이 사람이요, 서울로 못 들어오게 한 장본인도 이 사람이다. 박은의 아뢰는 말이 떨어지자 심온의 얼굴은 모닥불을 끼얹은 듯 화끈하고 달았다. 즉시 부복해서 아뢴다.

"소신 이미 각오한 바이옵니다. 좌의정 박은의 품달이 아니라 할지라도 병조판서의 직위는 사퇴하기로 마음속에 벌써 정한 바이옵니다. 이제 숙배를 드리고 물러갈 때 병판의 직책을 면해줍소사 아뢰려 하던 차이오이다. 부원군의 높은 칭호를 누리면서 어찌 병권을 장악하는 자리에 안연히 앉아 있사오리까. 곧 병조판서를 해임시키시와 모든 신하들의 의혹을 풀게 해 주시옵소서."

심온은 박은이 자기를 시기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슬며시 병판의 자리를 사면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아뢰려 했다고 반격을 했다. 부원군은 병판을 겸직할 수 없다고 팽팽하게 주장했던 박은은 주먹 맞은 감투격이 되었다. 얼굴에 무료한 빛을 띠고 잠자코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상왕 태종은 심온에게 도리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부원군이 비록 국척이라 하나 국방을 맞지 못할 까닭이 나변에 있단 말인가. 임금의 국구요, 왕후의 생정부친으로 국가의 안보를 맡게 된다면 더욱 튼튼하지 않겠는가. 두말 말고 병판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옆에 무료하게 서 있던 좌의정 박은은 잠자코 아무 말이 없다. 심온이 다시 부복해 아뢴다.

"황공함을 무릅쓰고 다시 성상께 아뢰옵니다. 옛날에 안분신무욕이라 했습니다. 부원군의 높은 작위를 내리신 것도 분수에 넘치는 광영이온데 어찌 또다시 군사권을 장악하는 병판을 그대로 겸임할 수 있사옵니까. 분수에 넘치는 일일 뿐 아니라 만조백관들의 의심을 사게 됩니다. 이제는 몸을 한가로이 하여 한운야학과 벗을 하면서 문밖에 나가 농사를 감하면서 성은을 기리오리다."

심온은 안상하고 명민한 사람이었다. 두 번 세 번 병조판서를 겸임할 것을 사양했다. 태종 역시 마음속으로는 박은의 말을 옳게 들었다. 신왕의 장인인 심온에게 군사권을 장악케 하기는 싫었다. 겉치레로 심온에게 병판 자리에 그대로 유임해 있으라 했으나 억지로 더 만류하기는 싫었다.

", 경의 뜻이 그러하다면 과인이 강요하지는 아니하리라. 진정 말하거니와 경을 빼놓고 병판의 자리를 맡을 만한 사람이 없다. 어찌할꼬... 그럼, 좌의정은 합당한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부원군의 청을 들어 병판의 자리는 면케 하라."

무료하게 모시어 서 있던 박은의 얼굴에는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심온은 만면의 웃음을 띠고 아뢴다.

"병판의 중임을 받자온 지 여러 해에 큰 허물이 없이 지냈습니다. 모두 다 성상의 지도하신 덕택이올시다. 이제 중임을 벗어나게 해 주시어 안한한 몸이 되니 역군은이시옵니다. 소신 마음을 놓고 물러가옵니다."

심온은 어깨가 거뜬했다. 사실 신왕의 장인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왕의 밑에서 병조판서 노릇을 하기란 여간 곤란하고 조심스런 일이 아니었다. 밉상이기는 하나 이제 박은의 주장대로 국구의 자리에 있으면서 병조의 장관을 겸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아뢴 일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기선을 눌러서 병판 자리를 벌써 내놓으려고 마음을 정했다고 어전에서 박은을 반박한 후에 상왕의 윤허를 맡아 병판 자리를 내놓게 되니 마치 바늘방석을 면한 듯 거뜬함을 느꼈다. 심온이 숙배를 올리고 어전에서 물러나려 할 때, 상왕은 좌의정 박은에게 물었다.

"조반의 좌순을 정할 때 청천 부원군의 순위를 어찌 정하는 것이 좋겠소?"

박은이 아뢴다.

"아무리 국구라 하나 삼정승보다 윗자리에 앉을 수는 없습니다. 좌찬성 성석린의 위에 앉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온은 못들은 체, 어전에서 묵묵히 물러갔다.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박은을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모로 보든지 자기는 부원군이었다. 부원군중에도 공신 부원군이 아니다. 국구인 왕후의 아버지다. 영의정은 몰라도 좌의정의 위에는 앉아야 한다. 지금 박은은 그의 자리보다도 두 자리나 아래인 찬성의 자리 옆에 앉으라 하니 괘씸하기 짝 없는 일이다. 방석의 난 때 상왕을 도와 태종이 되게 한 공로도 박은한테 못하지 아니했다. 또 나이로 따져보더라도 박은보다는 10년이나 연장이 된다. 엄연히 제자리보다 훨씬 아랫자리에 앉게 하라고 아뢰니 방자하고 괘씸하기 짝이 없다.

'요망한 자로구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쾌한 얼굴로 상왕전에서 물러났다.

하루가 지났다. 별안간 경복궁 정원에서는 승지가 전교를 받들고 나왔다. 뒤에는 빈 평교자가 나오고 파초선이 따랐다. 솟을 대문으로 빈 평교자와 파초선이 들어와 사랑 뜰에 놓였다. 온 집안이 술렁거리고 번쩍거렸다. 도승지는 주인대감에게 홍보에 싼 전교를 받들라 했다. 부원군 심온은 황망히 예복을 갈아입고 뜰에 내려 재배하고 전교를 받들었다. 도승지가 낭랑하게 전교를 읽는다.

"청천 부원군 심온으로 영의정을 삼는다."

뜻밖의 일이었다. 심온은 귀를 의심했다. 다시 재배하고 전교를 홍보에 싸서 내실로 들어갔다. 청천 부원군은 국가가 된 것도 기쁜데 또다시 영의정이다. 꿈 밖이었다. 박은은 상왕께 아뢰어 겨우 찬성 자리에 앉히라 했는데, 하루 사이에 영의정이 되어 좌의정 박은의 윗자리에 앉아서 국사를 통괄하라 하니 도대체 꿈속 같은 일이다. 온 집안은 또다시 경사 중에 큰 경사가 담불담불 쏟아져 들어왔다고, 남녀노소 일가친척들은 말할 것 없고 비복들도 세로 뛰고 가로 뛰면서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대내에서는 왕후 심씨가 국대부인 안씨에게 상궁을 내보내어 경사를 치하하는 전갈을 내리고, 내수사에서는 치제를 올리는 제물 봉과가 가자에 가득가득 실려서 부원군 대감에 영의정 대감이 된 심온의 집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염량세태는 번개보다도 빨랐다. 부원군에 또다시 영의정이 된 소문이 조보에 실리니 심온의 집은 일약 상감의 다음 가는 권문세가가 되었다. 육조판서, 육조참판, 육조참의, 삼사장관,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사간원 대사간들은 말할 것 없고 정승 중에도 우의정까지 치하를 드리러 왔다. 다만 좌의정 박은만의 얼굴이 보이지 아니했다. 심온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모든 손들을 접대했다. 치제 뒤에 주안상이 뻔질나게 사랑으로 나왔다. 심씨 일문엔 화락한 기운이 가득했다.

이번에 심온이 부원군에 다시 영의정을 겸하게 된 것은 순전히 상왕 태종의 활살자재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심온으로 부원군을 봉한 후에는 본직인 병조판서를 내놓게 했다. 척신에게 병권을 맡기기 싫은 때문이다. 그러나 조정조반의 자리를 좌의정 박은한테 의논하니 박은은 부원군의 자리를 좌의정인 자기 자리보다 다음 다음 가는 자리인 찬성의 윗자리에 앉히자 했다. 박은의 주장도 역시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왕후의 아버지인 국구라 하나 현직 정승인 좌의정과 우의정 위에 앉을 수는 없다. 태종은 하룻밤 하루낮을 두고 심온에 대한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병조판서를 체임시킨 것도 미안한데 조정 좌석을 정승 자리보다 아래에 두기는 더욱 미안했다. 마침 영의정의 자리가 공석으로 있었다. 상왕은 심온에게 영의정의 자리를 주어서 그의 마음을 활짝 풀리게 하리라 생각을 정했다. 그리하여 이튿날 아침에 경복궁에서 수강궁으로 문안 들어온 새 상감 세종에게, "부원군 심온에게 영의정의 실직을 맡겨라." 하는 하교를 내려서 심온은 당일로 영의정의 대명을 받은 것이다. 심온은 영의정이 된 후에 가장 불만을 품은 사람은 좌의정 박은이었다. 자기보다 아랫자리에 있을 심온이 일약 영의정이 되어 윗자리에 앉아 있게 된 것이 무한 불쾌했다.

"왕비의 아버지 부원군이 어찌 영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외척이 만 가지 정치를 섭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하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심온은 영의정의 대명을 받은 후에 이튿날부터 빈청에 나가 맡은 일을 살폈다. 심온은 자기의 신분이 왕비의 아버지인 것을 생각해서 항상 조심하고 겸손했다. 모든 일을 좌의정과 우의정에게 물어서 아무 잡음이 없도록 노력해서 처리했다. 그러나 박은은 항상 영의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모든 일을 자기 주장대로 고집했다. 삼정승 간에는 차차 화한 기운이 스러지고 소슬한 바람이 불었다.

뜻밖에 일이 벌어졌다. 심온이 병조판서의 현직을 내놓고 부원군과 영의정이 된 후에 박습이란 사람이 병조판서로 임명된 지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대사헌 허지는 야밤중에 좌의정 박은을 찾았다. 허지는 좌의정 박은의 심복이었다.

"밤중에 대사헌이 웬일이오?"

"급히 대감께 품할 일이 있어서 뵈오러 온 길입니다."

"무슨 일인데?"

"좌우의 시자들을 물리쳐줍시오. 조용히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좌의정 박은은 머리맡의 들창문을 열었다. 뜰 아래는 상노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잠깐 물러가거라."

시자들이 물러간 후에 박은은 들창문을 닫았다.

"난처한 일이 있어서 좌의정 대감께 아뢴 후에 일을 처리하려 합니다."

"무슨 난처한 일이 있단 말요. 빨리 말을 해 보구려."

"이 일은 심온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일어난 일인데, 병조에서는 상왕의 뜻을 어기고 불충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좌의정 박은은 대사헌 허지의 말을 듣자 얼굴빛을 변하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 병조에서 불충한 일이 있었어?"

", 망유기극한 일이올시다. 상왕 전하께서 애당초 왕위를 금상전하께 선위하실 때, 조건을 붙여서 선위하셨습니다. 모든 일은 다 신왕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하겠으나, 다만 군국대사만은 내가 직접 재결해서 처리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병조에서는 어찌 두 임금이 있느냐 하고 군기에 대한 일을 상왕 전하께 소홀하게 보고했습니다. 이 일을 사왕께 아뢰어서 바로 잡아야 할는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대로 못들은 체 내버려 두어야 할는지,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리하와 대감께 품하러 왔습니다."

"그게 무슨 해괴한 말인가. 병조판서 이하 모두 다 고현자들이로군. 시각을 지체치 말고 상왕전에 다뢰어 병조의 관원들을 모조리 탄핵하도록 하오."

좌의정 박은의 눈은 실쭉해지면서 입가에는 차디찬 냉소가 떠돌았다.

"상왕전에 아뢰는 일은 어렵지 않소이다마는 쥐를 잡다가 독을 깨뜨릴까 염려올시다. 그리되면 전임 병조판서 심온도 역적으로 몰리기 쉽고 만약 심온이 역적으로 몰린다면, 중전마마께서 괴로우신 경우에 처하게 되실 테니, 이것이 큰 두통거리올시다."

"원 천만에, 별소리가 다 많구려. 막중한 국가 대사를 바로잡아 처리하는 데 사를 두어 가지고 어찌 대사헌의 직책을 다할 수 있단 말씀요. 두말 말고 곧 상왕 전하께 병조 관원들을 탄핵하도록 하오. 만약 대사헌이 알고도 탄핵하지 아니한다면 좌의정인 내가 대사헌을 탄핵하겠소. 직무를 태만했다고... "

좌의정 박은은 소매를 떨쳐 펄쩍 뛰었다.

"그럼 곧 수강궁으로 예궐해서 상왕 전하께 품달하겠습니다."

대사헌 허지는 좌의정 박은을 작별하고 세종인 신왕께는 고하지 아니하고 곧 수강궁으로 나가 상왕께 뵙기를 청했다. 수강궁 승지를 통하여 대사헌이 아뢸 일이 있다 하니 상왕인 태종은 곧 허지를 인견했다.

"어떤 급한 일이 있는가?"

상왕은 장지 밖에 부복해 있는 허지를 향하여 물었다.

"황공무지하오나 사헌부의 직책을 맡은 소신으로 그대로 중대한 국사를 덮어둘 수 없사와 감히 아뢰옵니다. 병조의 대소 관원들은 방자하게 상왕 전하의 특명을 거역하고 군국기무를 소홀히 하여 전하께 재가를 맡지 않고 단독으로 처결해버립니다. 은휘할 길 없사와 감히 아룁니다."

허지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상왕 태종의 용안은 주톳빛으로 변하고 화등잔 같은 눈에는 번개 치듯 푸른 불길이 흘렀다.

"그게 무슨 소린가. 판연히 군국대사는 나에게 품해서 처결하라 했는데, 어떤 놈이 그따위 방자한 행동을 했단 말인가. 신임 병조판서 박습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상왕의 노한 목소리는 우렁우렁 전각을 울렸다.

"박습이 취임하기 전부터 그리했습니다. 그것은 전하께서 선위하신 직후부터 병조에는 그러한 기색이 가득히 서려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전임 병조판서 심온 때부터 그랬단 말인가?"

"그러한 줄로 아뢰오."

상왕 태종은 더한층 노했다.

"병조참판은 누구고 참의는 어떠한 자인가?"

"전임 병조판서 심온 때부터 벼슬하던 강상인이 병조참판이옵고 이각이 참의올시다."

상왕은 곧 어전 내관에게 분부를 내린다.

"좌의정을 급히 입시케 하라."

어전내관이 총총히 물러갔다. 이윽고 좌의정 박은이 정승들이 모여 있는 빈청에서 황망히 상왕전에 입대했다. 상왕은 용안에 아직도 노기가 등등했다. 박은이 문후를 드리고 채 고개를 들기 전에 상왕은 급히 하문한다.

"병조판서 이하 모든 관원들이 군국기무를 나에게 재가하기 싫어서 제멋대로 처리한다 하니 경은 그러한 소식을 들었는가?"

"대사헌 허지한테 확실한 말을 듣자옵고 전하께 품달하여 병조 관원들을 탄핵하라 했습니다. 과연 불충하기 짝이 없는 자들입니다. 행동이 방약무인합니다. 속히 국법을 밝히시어 뒷길을 보려는 자들을 엄하게 징치하시는 일이 마땅한 줄로 아뢰오."

뒷길을 보려는 자들이란 말에 상왕은 더한층 자극을 받았다.

"나는 이미 선위한 임금이니 소용이 없단 말이지. 괘씸한 놈들... 병조판서 이하 병조 관원들을 모조리 잡아서 의금부에 하옥하여 엄하게 죄상을 다스리오."

"하교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박은과 허지는 상왕전에서 물러났다. 좌의정 박은은 곧 빈청으로 나가 의금부 당상관을 청했다. 이때 심온은 영의정의 자격으로 빈청에 나와 상좌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박은은 정승의 수석인 부원군 겸 영의정 심온에게 한마디의 보고도 하지 아니했다. 좌의정 명소를 받아 상왕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 영상인 자기한테는 일언반사 의논도 없이 의기가 양양해서 금부 당상관 판의금을 청하는 것을 보자 심온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좌의정 박은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판의금을 부르시오?"

"두고 보면 아시게 되지요."

박은은 차갑게 대답했다. 너무나 수상인 자기를 무시하는 말투다. 심온은 불쾌했다. 한 마다 큰소리를 질러서 수석장관을 너무나 무시한다고 호통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았다. 자기는 금상 전하의 장인이요, 왕후의 친정아버지다. 근신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모가지까지 기어오르는 역한 기운을 꽉 누르고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판의금이 빈청으로 들어와 영상과 좌상에게 인사를 마친 후에,

"어찌하여 부르셨습니까?"

영상과 좌상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좌의정 박은이 앞질러 말을 꺼낸다.

"지금 상왕 전하께옵서 크게 진노하시어 하교가 내리셨소. 병조에서는 상왕 전하의 뜻을 받들지 않고 군국기무를 품달하지 않고 마음대로 처리했다 해서 이 일을 사실하라 하셨소. 병조판서 이하 모든 관원들을 금부에 가둔 후 일일이 국문해서 죄상을 밝히라 하셨소. 곧 나졸을 풀어서 판서 이하 좌랑에 이르기까지 깡그리 공초를 받게 하오."

옆에서 이 말을 듣는 영의정 심온의 얼굴빛은 창백하게 변했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럴 리가 없다. 반드시 무고라 생각했다. 상왕이 신왕인 세종에게 왕의 자리를 선위할 때 '신왕은 아직 군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당분간 군국기무는 과인이 처결하겠다' 한 말은 온 조정이 다 아는 일이요, 또 심온 자신이 부원군을 봉하기 전, 또는 영의정의 대배를 받기 전 병조판서로 있을 때는 군기에 대한 크고 작은 일은 한 가지도 빠짐없이 신왕인 세종께 말씀을 드리고 다시 상왕께 품해서 재가를 맡았던 것이다. 이제 병조에서 상왕 전하의 재가를 받지 않고 그대로 처결했다 하니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몸조심을 하는 심온이라도 한마디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병조에서 상왕께 품달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처리할 리 만무하오. 내가 병판으로 있을 때 아주 관례를 정해서 군사에 대한 병조의 일은 반드시 상왕 전하의 재결을 받자와 처리하였소. 그때마다 전하께서는 윤한다. 혹은 불윤한다 결재를 내리셨소. 문부상에 증거가 역력하오."

영의정 심온의 얼굴빛은 상기되어 화끈 달았다. 좌의정 박은은 영의정 심온의 말에 냉연히 대답한다.

"지금 병판으로 있는 박습 이하 강상인, 이각 등 병조 관리들을 사실하라는 것이지, 대감이 병판으로 계실 때 일을 심문하라시는 분부는 아니십니다. 대감은 그저 앉아서 구경만 하시오."

좌의정 박은은 또 한 번 영의정을 무시하는 소리를 했다. 심온은 더욱 불쾌했다. 아무리 참으려 했으나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상감과 상왕 전하께 대배의 대명을 받은 영의정이오. 비록 역량이 좌의정인 대감만 같지 못하나 하나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러한 중대한 옥사를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라 하오."

심은은 소매를 뿌리치며 노한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박은은 지지않고 대꾸한다.

"병조의 관원들을 금부에 하옥하여 국문하란 분부는 좌의정인 나에게 내리신 분부입니다. 영의정 대감께 내리신 분부는 아니십니다. 그러하니 대감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시란 말씀입니다. 어서 판의금은 시각을 지체치 말고 병조판서 이하 모든 관원들을 하옥하고 국청을 열어 국문을 시작하오. 상왕 전하의 어명이오!"

판의금은 영의정과 좌의정 틈에 끼여 난처하기 한량없었다. 그러나 상왕 전하의 분부라 하니 맹종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럼 곧 금부로 병판 이하를 나수하고 국청을 열겠습니다."

판의금은 영상과 좌상에게 목례를 보내고 물러갔다. 심온은 박은의 태도에 너무나 불쾌했다. 박은은 자기보다 십 년이나 아래가 된다. 연치로 보나 좌지로 보나 이같이 자기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영의정의 자리를 내놓고 좌의정이 되었으면 기세가 당당할 것을, 공연히 빛깔 좋은 개살구격으로 영의정의 자리에 앉아서 수모를 받는군!"

혼잣말로 한마디를 던지고 빈청 밖으로 나갔다. 심온의 폭탄같은 한마디 말은 박은의 귓전을 따갑게 울렸다. 박은의 얼굴빛은 새파랗게 질렸다. 날카로운 눈으로 말끄러미 나가는 심온을 노려보았다.

한편 금부에서는 병조판서 박습, 병조참판 강상인, 병조참의 이각, 정랑 김자온, 좌랑 채지지, 송을개 등을 의금부 옥에 가두고 금부 당상이 국문을 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정경인 병조판서 이하 참판, 참의와 정랑, 좌랑까지 전원이 별안간 역적으로 몰려서 금부에 투옥이 되어 국문을 당하게 된 일은 국가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 막중한 사실은 새로 왕이 된 세종께 품달하지 아니했다. 까닭에 세종대왕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영의정 심온은 빈청까지 나갔으면서도 좌의정 박은이 독자적으로 판의금 금부 당상에게만 상왕의 분부를 전하고 영의정 심온에게는 멸시하는 태도로 앉아서 구경만 하라 하니 기막히고 딱한 일이었다. 심온은 부원군이 된 죄로 끓어 오르는 부아통을 누르고 입을 봉한 채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좌의정 박은은 빈청에서 심온이 화를 내고 나가면서,

'나도 영의정 자리를 내놓고 좌의정이 되었으면 기세가 당당할 것을, 공연히 빛깔 좋은 개살구 격으로 영의정의 자리에 앉아서 수모를 받는군!'

한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앙앙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덮어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곧 수강궁 상왕전에 뵙기를 청했다. 상왕은 알현을 허락했다.

"좌상이 어찌해서 들어왔소?"

"아까 하명하신 병조에 대한 일은 곧 판의금을 빈청으로 불러서 성지를 전달했습니다. 국문이 시작되면 대역부도 죄인들의 죄상이 판명되리라 생각됩니다. 상왕 전하를 무시하옵고 저희 맘대로 군국대사를 처리한 방자한 죄상이 곧 판명될 것입니다."

박은은 상왕 전하를 무시했다는 말에 힘을 주어 아뢰었다.

"병판 이하 일단의 좌랑까지 모두 다 하옥했는가?"

", 그러합니다. 깡그리 하옥시켰습니다."

"망유기극한 놈들이다.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엄치하라. 만약 추호라도 사를 두어 다스린다면 금부 당상까지 큰 벌을 받을 터이다. 각별한 태도를 취하여 엄하게 정치케 하오."

상왕은 다시 노기가 등등했다.

", 분부대로 거행하라 이르겠습니다."

좌의정 박은은 대답을 올리자 다시 무릎을 꿇고 아뢴다.

"황공무지하오나, 또다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상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소신, 생각한 바 있사와 감히 어전에 아룁니다. 좌의정의 직책을 체임시켜주시옵소서. 사퇴하겠습니다."

상왕은 얼굴빛이 변하면 깜짝 놀란다.

"그게 무슨 소린가? 경이 좌의정의 중임을 사퇴한다니 말이 되는가?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은휘하지 말고 아뢰라."

박은은 머리를 조아리면 아뢴다.

"아무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다만 몸이 쇠약하와 격무를 담당하기 어렵습니다. 윤허해주신다면 향촌으로 돌아가 한운야학으로 벗을 삼으면서 몸을 수양할까 하옵니다."

상왕인 태종은 용안을 번듯 들어 박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말이 되는 소린가. 국왕이 새로 등극하여 다사한 이때인데 경 같은 국가의 주석지신이 정승의 자리를 내놓다니 당치 않은 소리이다. 과인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고 신왕 또한 윤허하지 아니하리다."

상왕 태종은 단번에 박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박은은 다시 간곡한 얼굴빛을 지어 아뢴다.

"왕은이 하해같이 깊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몸이 쇠약하와 중임을 감당키 어렵습니다. 다시 통촉하시고 윤허해주시기 바랍니다."

상왕은 어체를 일으켜 박은의 부복한 앞으로 나가 등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경은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이다. 은휘치 말고 말하라. 내 차마 어지 그대를 향리로 돌려보낼 수 있으랴. 거북한 일이 있거든 은휘치 말고 말하라."

박은은 감격했다. 눈시울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소인이 어찌 전하의 곁을 떠나고 싶어 사직을 고했사오리까마는 아뢰기 난처한 일이 있사와 물러가기를 원한 것이옵니다."

상왕은 다시 박은의 손을 잡았다.

"무엇이 난처하단 말인가. 어서 말하라."

박은의 글썽거리는 눈물을 보자 상왕의 마음은 더한층 움직였다.

"영의정이 소신을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상왕은 '영의정' 소리를 듣자 깜짝 놀란다.

"심온이 경을 마탕치 않게 생각한단 말인가? 어찌해서?"

박은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왕명이 간곡하시니 추호도 숨기지 않고 아뢰겠습니다. 아까 병조에 대한 일로 전하의 분부를 받자온 후에 빈청에 나가서 금부 당상을 청하여 전하의 분부를 전할 때 마침 영의정이 자리를 같아하고 있었습니다. 심온은 전하께서 자기한테 분부를 내리시지 아니하고 소신에게 하고하신 일에 불만을 품은 듯합니다. '나도 영의정의 자리를 내놓고 좌의정이 되었으면 기세가 당당할 것을, 공연히 빛깔 좋은 개살구 격으로 영의정의 자리에 앉아서 수모를 받는군!' 하고 자리를 차고 나갔습니다. 이러하니 소신의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실상인즉 그리하와 사직을 원한 것입니다."

상왕은 크게 노했다.

"심온이 아무리 영의정이라 하나 체통을 지켜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심온에게 병조의 일을 사실하라고 이르지 아니한 것은 다 까닭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오. 심온이 비록 영의정의 대명을 요사이 받았다 하나 일찍이 병조의 장관인 병조판서로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좌상에게 사실하라는 명을 내린 것인데, 자기 자신의 일을 반성하지 못하고 좌의정을 향하여 그러한 폭언을 했으니, 협하기 그지없는 사림이로군. 괘씸하기 짝이 없소."

박은은 고자질할 일을 다 했으니 더 아뢸 말이 없었다. 두 손으로 마루판을 짚어 부복해 있었다. 상왕은 마음속으로 심온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심온은 국구다. 임금의 장인이다. 상왕인 자기한테 모든 군사에 대한 일을 고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맘대로 군사권을 잡아서 좌지우지하려는 배짱이라고 미리 짐작했다.

"경은 좌의정을 사직한다는 말을 두 번 다시 더 하지 말라. 그리고 병조에 대한 일은 내가 친국하리라."

상왕은 추상같이 노했다. 불쾌한 기색이 용안에 가득했다. 좌의정 박은은 어깨가 으쓱했다. 묵묵히 어전에서 물러난다. 때마침 젊은 상감 세종은 수강궁으로 아침 문안을 들어왔다. 문후가 끝난 후에 상왕은 젊은 상감을 향하여 장중한 어조로 말씀을 내린다.

"상감에게 상의할 일이 있소."

세종은 상왕이 전에 없이 장중한 얼굴빛을 지어 상의할 일이 있다하니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두 손길을 마주잡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아뢴다.

"무슨 하교하실 일이 계시오이까?"

"좌의정 박은에게 분부하여 병조판서 박습 이하 대소 관원을 깡그리 금부에 잡아 가두라 하였소. 오늘 곧 나는 친국을 해야 하오."

젊은 상감은 깜짝 놀랐다. 금시초문의 일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알 길이 없다. 병조판서는 나라의 국방을 맡은 장관이다. 상왕께서 친히 국문을 한다 하니 반드시 국가에는 큰 변고가 난 것이 분명했다. 금상인 임금으로 있으면서 이같은 중대한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아버지 상왕께 대하여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젊은 상감은 황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침착하고 옹용한 태도로 아버지 상왕께 아뢴다.

"병조판서 이하 대소 관원들을 옥에 내리시고 이어 친국까지 하신다 하오니 어떠한 중대한 일이 돌발되었는지 궁거웁습니다. 아직 대신들에게 사유를 듣지 못했습니다. 소자 모르는 사이에 상왕 전하의 천청을 번거롭게 하와 황공무지하오이다."

"내가 상감에게 선위할 때 대신과 백관들에게 성명한 바가 있었소. 모든 행정은 다 젊은 상감한테 품하여 재가를 맡으려니와 다만 국방에 대한 일체 군국대사는 나의 재결을 얻은 연후에 비로소 실행하라 분부한 일이 있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조에서는 나에게 품달한 일이 없이 저희들끼리 방자하게 일을 처리한다 하니 대역부도의 일이오. 그러므로 병판 이하 모든 관원들을 국문하여 앞으로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오."

상왕의 기색은 더한층 엄숙했다. 젊은 상감은 몸둘 곳을 몰랐다. 전하가 알기에는 국방에 대한 일은 반드시 상감 자신에게 품달한 후에 재결은 상왕께 아뢰어 처결하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삼 상왕께 품달하지 아니했다 하니 의외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혹여나 병조의 관원들이 실수를 해서 빠뜨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미안쩍고 황공스럽기만 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 하면 대역부도올시다. 엄하게 국문하시어 기강을 밝혀주시옵소서. 소자 불민하와 그같은 일이 있게 했으니 죄당만사올시다."

젊은 상감은 진심으로 황공했다. 아무런 죄가 없건만 공연히 불안하고 황공했다.

"상감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가. 다만 무엄한 유사들을 징치할 뿐이니, 안심하고 환궁하오."

젊은 상감은 황공한 마음을 안고 경복궁으로 돌아갔다. 원래 병조에서는 새 상감이 선위를 받아 등극한 후에 상왕인 태종의 명을 받들어 군사에 관한 일을 일일이 새 상감께 품달한 후에 또다시 상왕인 태종께 아뢰어 크고 작은 일을 태종의 재가를 받아서 처리했다. 병조좌랑이 정랑과 함께 사건의 전모를 서류로 작성해서 참의한테 보고하고, 참의는 참판에게 보고하고, 참판은 판서한테 품한 후에 판서는 빈청에 나가 정승들에게 고하고 경복궁으로 들어가 정원 승지를 통하여 새 상감께 아뢴 후에, 또다시 수강궁 상왕전 승지를 통하여 상왕께 품달해서 비로소 재결을 맡아 처리하게 된다. 이러하니 일이 여간 번거롭지 아니했다. 뿐만 아니다. 변방에서 일어난 급한 일을 처리하자면 삼일 내지 사오 일의 긴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아직껏 크나큰 급한 일이 없으니 다행이었지 만일에 적병이 쳐들어오는 경보를 받고 군사를 동원시키게 될 경우가 된다면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늘도 도리질칠 권위를 가진 상왕태종의 명령이었다. 병조에서 시간과 날짜가 지체되고 일이 무한 까다롭고 번거롭지만, 소금섬을 물로 끌라면 끄는 시늉을 하는 격으로 상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울며 겨자먹기로 그대로 군사면의 보고를 시행했다. 그러나 미관말직인 좌랑과 정랑은 불평이 자자했다. 모든 서류를 꾸미는 데도 한 가지 일에 열 벌, 스무 벌의 문서를 꾸며야 했다. 서리들도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비파 소리가 나도록 뛰어다녔다. 심온이 채 부원군을 봉하기 전이요, 병조판서로 있을 때 일이었다. 좌랑 채지지와 정랑 김자온은 참판 강상인과 참의 이각한테 불평을 말했다.

"도대체 군무에 대한 보고와 결재를 열 군데 스무 군데씩 거쳐서 비로소 상왕 전하의 재가를 맡아서 처리하게 되니 곤란하게 짝이 없소이다. 이떻게 위에 말씀을 올려서 바로잡도록 해야겠습니다."

정랑과 좌랑의 말을 듣자 참의 이각도 동조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여태껏 보고한 일은 평법한 군무에 대한 일이니까 별탈이 없었지만 만약에 변방에서 적병이 쳐들어 왔을 때 이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밟는다면 큰 탈이오. 참판 영감께서 판서 대감한테 말씀해서 일을 간편하게 처리하도록 하시오."

"여러분들의 말이 옳소. 천무이일이란 말야. 하늘에 두 해가 없듯이, 나라에는 임금이 한 분이어야 하겠는데, 상왕까지 임금 노릇을 해서 임금이 두 분이 되고 보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겠소. 우리 심판서 대감한테 가서 병조의 고충을 말해봅시다."

참판 강상인의 말이 떨어지지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참판 영감께서 앞장을 서신다면 저희들은 사양치 아니하고 따라가겠습니다."

병조의 관원들은 참판 강상인의 뒤를 따라 병조의 최고장관인 판서 심온의 처소로 들어갔다. 이때 병조판서 심온의 처소에는 모든 대장들이 모여 있었다. 이 중에는 심온의 아우 동지총제 심정과 대장군 이종무며 장군 박습 등이 있었다. 병조의 관원들은 참판 강상인을 앞세우고 판서 심온에게 인사를 한후에 함께 배석해 있는 여러 대장들에게도 목례를 보냈다. 병조판서 심온은 참판과 참의이하 모든 부서들이 일시에 찾아온 것을 보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무슨 일이 생겼기에 참판 영감 이하 여러분들이 한꺼번에 들어왔으니 웬일이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다른 일이 아니라 국가 군사의 결재문제로 대감께 상의하러 들어왔습니다. 상왕께서 선위하실 당시에 군국대사에 관한 일은 나의 재가를 맡아서 처리하라 하시므로 그대로 시행은 하고 있습니다마는 상감께 아뢰어 의견을 듣고 또다시 상왕께 품하여 재가를 얻는다는 일은 번거로울 뿐 아니라 저희들로서는 과연 처리하기가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닙니다. 상감은 상감대로의 의견이 계시고 상왕 전하께서는 또다시 당신의 고집이 계시니 어느 말씀을 받들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행정이라면 다소 시일이 걸려서 처리한다 해도 상관이 없겠습니다마는 국가안보에 관한 중대한 일은 일초 일각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두 분 전하께 드려서 한 분의 재가를 얻어서 처리하도록 해주십시오."

강상인은 모든 막료들을 대신해서 말했다. 심온은 난처했다. 얼른 대답을 내리지 못한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야, 원칙으로 말한다면 한 분이 처결해서 재가를 내리시는 것이 당연하지. 그러나 상왕 전하께서는 상감이 아직 연소하시어 경험이 없으시다 해서 군사권은 당신이 장악하겠다고 하신 것이니, 그대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심온은 왕후의 아버지가 되는 때문에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이쯤 얼버무려 대답했다.

"번연히 일이 아니되는 것을 알면서 그대로 복종만 하고 건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자의 본 직분을 지키지 않고 어름어름 국록만 먹고 앉았는 일입니다. 상왕은 선위를 하신 이상 임금이 아닙니다. 상감께서만 군무를 결재하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병조좌랑 채지지가 얼굴을 붉히며 분명히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심온의 아우 동지총제 심정이 말참예를 한다.

"채좌랑의 말이 옳소. 임금이 군사권을 장악하게 아니하고 상왕께서 군사권을 잡는다는 일은 만고에 없는 노릇이오. 아무리 부왕 전하라 하나 일단 선위를 했으면 새 임금이 군사권을 장악하는 일은 천하의 공법이오. 그렇다면 임금의 자리를 내놓지 말 일이지, 왜 선위를 했더란 말씀요. 그것은 욕심이 과한 탓이오."

심정은 얼굴을 붉히며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그래, 심총제의 말씀이 옳아. 천무이일이지 어째 임금이 두 분이 될 수 있는가. 상왕이 그저 올려 모셔서 높일 뿐이야... "

장군 박습도 얼굴을 붉히며 불가한 것을 역설했다. 노련한 대장군 이종무만은 빙긋 웃고 아무 말도 아니했다. 참판 강상인은 이종무를 향하여 의견을 묻는다.

"이장군께서는 국가의 원로이실 뿐 아니라 상왕 전하께 신임을 받으시는 분이니 기회가 있는 대로 상왕께 말씀하시어 군사면의 재가도 상감께서 하시도록 해주십시오."

"병조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곤란한 줄은 나도 짐작하오. 그러나 차마 상왕께 군국대사에 관한 일을 참견하지 마시라고 어떻게 아뢸 수 있겠소. 세월이 가면 다 해결이 될 테니 잠깐 참아보기로 합시다. 하하하."

대장군 이종무는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병조판서 심온도 이종무의 말을 지지했다.

"이장군의 말씀이 옳소이다. 사실은 주상전하 한 분이 군사권을 장악하시는 것이 원칙이오. 그러나 세상에는 변칙도 있는 법이오. 사무에 지장이 있다 하나 잠깐 시일을 기다립시다."

병조의 모든 관원과 함께 앉았던 장군 박습과 심정은 불평이 만만했으나, 심온과 이종무의 대답이 이쯤 나가니 다시 더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무료하게 헤어졌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이 나라의 속담이 들어맞았다.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병조에서 관원들이 군사권 장악에 대하여 불평을 일으킨 일은 좌의정의 심복인 대사헌 허지의 귀로 들어갔다. 허지는 상왕께 공을 세우기 위하여 탄핵할 기회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상왕은 병조판서 심온으로 부원군을 봉한 후에 영의정을 삼고 심온의 후임으로 장군 박습에게 병조판서를 임명했다. 상왕 태종의 의도는 며느님 되는 왕비 심씨의 친정 아버지 심온에게 군사권을 장악하는 병판의 자리를 주고 싶지 아니했다. 부원군을 봉하는 것을 기회로 하여 실권 없는 영의정으로 올려앉히고 장군 박습에게 병판의 지위를 주었던 것이다. 상왕의 정치적 수단은 이만큼 높았다.

대사헌 허지는 자기와 간담이 서로 통하는 좌의정 박은에게 영의정을 임명하지 아니하고 부원군 심온에게 영의정의 대배를 시킨 것이 크나큰 불만이었다. 심온에게 치명상을 주어 영의정 자리에서 떨어지게 하고 싶었다. 허지는 좌의정 박은을 찾았다.

"병조에는 불온한 일이 많습니다. 상왕 전하께서 선위하실 때 군국대사에 관해서는 반드시 과인의 재결을 맡아서 처리하라신 데 대하여 불평이 많을 뿐 아니라 임금이 어찌 두 분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상왕께는 아뢰지도 아니하고 처결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대역부도올시다. 곧 탄핵을 하려 하는데 좌상대감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대사헌 허지의 말을 듣는 좌의정 박은은 문득 얼굴빛이 변했다.

"말이 되는가. 어떤 자들이 그랬단 말인가?"

"심온이 병판으로 있을 때 일이올시다. 참판 강상인 이하 모든 부하들이 다 함께 전하를 비방하고 군사 보고를 태만했습니다."

"대역부도로다. 곧 상왕전에 탄핵하시오."

이리해서 대사헌 허지는 이 옥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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