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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7-1

7권 대왕의 등극

 

남한산성

 

장사패들은 허출하고 목이 말랐다. 말로는 황공무지하면서 모두들 술동이 앞으로 죽 둘러앉았다.

"이 사람들아, 황공무지할 것이 조금도 없네. 시장한데도 황공무지라고 하는 것은 입에 발린 말일세. 어서들 양껏 마셔보게."

장사패 한 자가 이죽대며 아뢴다.

"세자마마, 옳게 통촉하신 말씀이올시다. 뱃속에서 '꼬르락' 소리가 나고 목구멍에 침이 넘어가는 판에 황공무지란 겉치레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기갈이 심한데 황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불고염치하고 마시겠습니다."

장사패들은 석가장 전술 한 동이를 가운데 놓고 죽 둘러앉았다. 한 사람이 두 사발, 세 사발씩 퍼마시고 나니 술 한 동이가 삽시간에 번쩍 드러났다. 양녕은 장사패들의 마시는 것을 바라보니 쾌활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장사들이다. 너희들은 나의 친구가 될 만하다.!"

큰 소리로 칭찬했다.

양녕이 호협하게 '나의 친구들이다!'라고 한 한마디 말에 장사패들은 더욱 감격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진정으로 황공무지하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장사패들은 금은보화를 주는 것보다도 더 기뻤다. 제각기 마음속으로 양녕을 위하여 한평생 몸을 바치리라 생각했다.

양녕은 장사패들한테 영을 내렸다.

"자아, 이제는 광주유수가 정해 놓았다는 행궁 뒤 정자로 올라가자. 모두 다 시장할 테니 올라가서 밥도 지어 먹어야겠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일제히 일어나 개울로 내려가서 술동이를 부시고 거문고를 나귀 등에 실었다. 부인은 다시 가마로 오르고, 어리는 말을 타고, 양녕은 나귀로 올랐다. 명보는 나귀 견마를 잡고, 봉지련의 어미는 가마채를 잡았다. 깎아지른 듯한 산성 안 행궁 터로 향하여 올랐다.

양녕은 나귀 등에 앉아 좌우편 산세를 둘러본다. 산은 마치 갓을 젖혀놓은 듯한 앙립형으로 생겼는데, 낙락장송 푸른 솔이 온산을 휩싸 덮어서 청청하고 윤택했다. 산세는 크고 웅대하나 부드럽고 온화한 토산이었다. 서울 삼각산의 북한산성과는 정반대의 산세를 이루었다. 북한산성은 깎아지른 듯 바위와 절벽으로 된 석산인 데 비하여, 남한산성은 나무가 울창한 흙산이었다.

양녕은 장사패들을 향하여 물었다.

"자네들 북한에 올라본 일이 있는가?"

장사패 한 사람이 대답했다.

"힘깨나 쓴다는 저희들이 어찌 북한에 올라보지 못하고 힘을 쓴다 하겠습니까."

"북한이면 어디까지 가보았느냐? 비봉까지 가보았나?"

장사패 한 사람이 껄껄 웃으며 아뢴다.

"그까짓 비봉쯤 가보고 어찌 북한을 가보았다. 하겠습니까. 백운대까지 올랐습니다."

"백운대까지 가보았으면 뜀바위도 뛰어봤겠네그려."

"뛰어보고 말굽쇼. 안돌이 지돌이를 돌아서 뜀바위를 뛰어봤습니다."

양녕이 빙긋이 웃었다.

"제법들일세그려."

견마잡이를 하고 가던 명보가 깔깔 웃으며 장사패에게 말한다.

"자네, 뜀바위 뛴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생각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것일세. 우리 세자께서도 백운대까지 놀러가셨다가 뜀바위를 뛰어보신 일이 있네"

여러 장사패들은 깜짝 놀랐다. 금지옥엽의 세자가 백운대까지 올랐다 하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가 다 혀를 홰홰 내둘렀다.

"상감께서 아실까보아 여태까지는 쉬해 두셨네마는 지금은 세자가 아니시니 내가 옛일을 이야기하네. 가례를 치르시기 전에 내가 모시고 간 일이 있네."

양녕이 백운대에 올라서 뜀바위까지 뛰었다는 말은 동궁빈이었던 양녕 부인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명보의 말에 의하면 가례 이전에 올라간 일이 있다 하니 자기가 알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인은 가마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마음 속으로 어려서부터 무척 호협스러웠구나 생각했다. 불의를 사갈 같이 미워하고 활달대도한 인품과 어질고, 착하고 인자한 기상을 구비한 불세출의 인물이지만 역시 씨는 속일 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효용한 기상은 역시 태조대왕의 그 점이 남편의 피 속에 맥맥하게 흘렀구나 하고 미소를 지었다.

"내가 상감 모르게 백운대에 올라본 것은 사람들이 하도 무서운 곳이라 하길래 어렸을 때 명보를 데리고 매를 날리면서 한 번 올라간 일이 있었네. 그러나 무서울 것은 없데. 다리 힘만 튼튼하고 조금 담력만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네. 좌우간 절경이데. 바로 구름 탄 신선이 된 듯하데."

양녕은 옛 기억을 일으키며 백운대 자랑을 했다.

"그렇습니다. 올라갈 때는 땀이 좀 납니다마는 산마루까지 올라가 보면 안개와 구름이 발 아래서 감돌고 있어서 오싹 추위를 느낍니다."

"그리고 산세가 중중첩첩해서 과연 일부당관에 만부막개할 요새일세. 산성을 이룩해서 둘 만한 곳일세."

"북한산성에 대면 남한산성은 아주 평지 같은 곳이올시다."

양녕이 장사패들과 말하는 동안에 어느덧 산성 꼭두에 올랐다. 연무청이 있고 연무대가 있고 그 위에 행궁이 있고 행궁 뒤에 한 채 조그마한 산정집이 있었다. 광주유수가 양녕의 거처할 곳으로 잡았다는 집이다. 양녕은 부인과 어리와 명보의 아내를 광주유수가 정해 놓았다는 산정집에 내려놓고, 명보와 장사패들과 함께 행궁 위 장대가 있는 곳으로 올랐다. 남한산성 중에 가장 높은 곳이요, 전쟁이 나면 도원수가 장대 위에 앉아서 십만 대병을 지휘하고 호령하는 곳이다. 양녕은 한 바퀴 장대 전후를 돌아본 후에 멀리 터진 서편을 바라보았다. 구름밖에 경복궁이 아물아물 햇빛 사이에 보일 듯 말 듯했다. 양녕은 멀리 대궐을 향하여 묵례를 드렸다.

잠깐 감회가 깊었다. 한 세상이 바쁘고 괴로운 왕이 될 자리를 헌신짝같이 버리고 초연히 구름 밖에서 그 자리를 바라보니 자기가 제법 옳게 생각해서 잘한 처사라고 자기 자신을 격려했다. 양녕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서 다시 산성 전후좌우를 살폈다. 산세가 너무나 외로웠다. 북한처럼 전후좌우로 호응해주는 산이 없었다.

"앞으로 유사할 때 남한산성은 산성 구실을 하기 어렵겠다."

혼자 말하고 장사패들을 데리고 우거로 정해진 산정집으로 내려갔다. 양녕이 명보와 장사패들을 데리고 산정집으로 내려가 보니 기가 막혔다. 광주 유수 본관은 말로만 양녕의 사처를 행궁 뒤 산정집으로 정했다고 해놓고 한 사람의 관속도 보내지 아니했다. 먼지는 켜켜 쌓이고 풍창파벽에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양녕 부인은 먼지를 털고, 어리는 비질을 하고,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는 걸레질을 치고 있었다. 명보는 동궁빈이 수건을 머리에 쓰고 친히 빗자루를 잡아 먼지를 터는 것을 보자 눈에 불이 일어났다.

"빈마마, 이거 웬일이십니까. 소인에게 비를 넘겨줍시오."

장사패들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어리와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쓸고 있는 빗자루와 걸레를 청했다.

"저희들한테 넘겨줍시오."

양녕 부인은 명보를 향하여,

"관계치 않다. 치개질하는 것은 여자의 임무가 아니냐.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니 염려할 것 없다."

부드럽게 말하고 어리와 봉지련의 어미는,

"상관없습니다. 염려 마시오."

하고 치개질하는 빗자루와 걸레를 내주지 아니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양녕은 껄껄 웃으며 호탕하게 말을 보낸다.

"동궁빈마마는 이제는 세자빈마마가 아니시다. 거처하실 방을 손수 치시는 일이 욕될 것 없느니라. 젊으신 터에 몸을 움직이시는 것도 건강에 해로울 것이 없느니라. 하하하."

양녕의 말씀을 듣자 부인이 조용히 웃으며 대답한다.

"나리의 말씀이 옳습니다. 공연히 세자빈마마라고 떠받치는 바람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밥도 잘 내리지 아니하고 몸이 약해졌습니다. 이같이 좀 움직이면 구미도 당기고 속도 편할 듯합니다."

남편 양녕의 마음을 상하지 아니하려고 고운 마음씨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니 되십니다. 소인한테 넘겨줍시오."

명보는 기어이 부인이 잡은 빗자루를 뺏다시피 해서 먼지와 거미줄을 털고, 장사패들은 어리와 봉지련 어미의 잡은 비와 걸레를 빼앗아서 방과 마룻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했다. 양녕은 옆에서 빙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가 어리와 봉지련의 어미한테 말한다.

"어리와 명보 아내는 어서 빨리 밥을 지어라. 아까 요기한 막걸리가 다 내리고 보니 시장하고나. 내가 헛헛증이 나니 저 사람들 장사패들의 뱃속은 무한 시장할 것이다."

어리와 봉지련의 어미는 양녕의 명령을 받들어 부엌으로 내려갔다. 봉지련의 어미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솥을 가시고, 어리는 포대에서 쌀을 꺼내 함지박에 씻어서 솥에 넣었다. 그러나 부엌에는 나무 한 단 없었다. 어리가 한탄을 했다.

"나무가 있어야 밥을 짓지 않나. 나무 한 단 없으니 어찌 밥을 짓소."

봉지련의 어미한테 은근히 말했다.

"제가 산으로 올라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오겠습니다."

말을 해놓고 막상 생각해보니 나무할 기구가 없었다. 두리번두리번 헛간을 둘러보니 헛간 구석에 갈퀴가 한 개 내던져 있었다. 봉지련의 어미는 갈퀴를 메고 산으로 올랐다. 산정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던 장사패들이 갈퀴를 메고 산으로 올라가는 봉지련의 어미를 발견했다. 장사패 한 사람이 소리치며 묻는다.

"아주머니, 어디로 가십니까?"

"밥을 지으려 하는데 나무가 있어야 밥을 짓지 아니합니까. 나무를 하러 올라갑니다."

장사패들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폐세자라 하나 광주유수라는 자가 이토록 푸대접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했다. 우거로 정한 집은 풍창파벽에 먼지가 켜켜 쌓여 있었고 부엌에는 나무 한 단 준비를 아니 해놓았다. 이래놓고 양녕보고 살라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요놈의 새끼, 광주유수 늙은 놈을 만나서 대번 다리 뼈다귀를 분질러놀 테다. 어떠신 존전이라구 감히 이대도록 푸대접을 한단 말이냐."

"늙은 작자가 너무나 간특하구나."

"아무리 염량세태라 하지만 차마 이럴 수가 있나."

장사패들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광주유수를 별렀다. 한 사람의 장사패가 산으로 올라가는 봉지련의 어미를 불렀다.

"아주머니, 내려오시오. 우리가 올라가서 나무를 해다 드리오리다."

장사패들은 이제히 나섰다. 뜰로 내려서 나무할 연장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톱과 낫이며 도끼가 있을 리 없었다. 한 사람이 앞을 서서 말한다.

"별수 없네. 그대로 올라가세."

장사패들은 일제히 산으로 올랐다. 장사패들은 '와짝' 소나무를 뿌리째 뽑았다. 맨손으로 가지를 '뚝뚝' 분질렀다. 이곳저곳에서 나무 뽑는 소리와 가지 분지르는 소리가 '우지끈 와지끈' 일어났다. 삽시간에 날장작과 솔가지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장사패들은 나무를 새끼로 꽉꽉 묶어서 한 짐씩 지고 내려왔다. 쓸쓸하던 부엌은 단번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어리는 나무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고 봉지련의 어미는 행궁 장독에서 토장을 꺼내서 토장국을 끓였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산성 안은 칠흑같이 어둡기 시작했다. 어리가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부엌에서 밥을 푸다가 한탄을 했다.

"어두워서 어찌하나."

명보가 나뭇단을 쌓다가 어리의 한탄하는 말을 들었다.

"아씨, 염려 마십쇼, 곧 불을 켜서 밝혀드리겠습니다."

명보는 장사패들이 나무해온 솔가지에서 관솔만을 추려서 마당과 부엌, 대문 앞에 쌓아놓고 부싯깃을 쳐서 불을 붙였다. 송명불이 부엌과 산정 사랑에 비쳤다. 어둠 속에 두 줄기 광명은 행궁과 산정을 환한 대낮같이 밝게 했다.

"밝아서 좋구나!"

모두들 기뻐했다. 양녕도 밝은 광명을 보니 시흥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기막힌 궁지에 빠졌으면서도 스스로 마음을 죄지 않는 좋은 성정이 발로되는 것이다.

"'솔불 혀지 말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는 시가 있더니, 어제 진달 아니 오니 솔불을 혀는구나. 진실로 대자연의 멋이 이같이 좋구나. 사람은 다 살게 마련이다. 배고프다. 어서 밥을 가져오너라."

양녕의 큰 소리로 떠드는 말을 듣자 부엌에서는 어리와 봉지련의 어미가 밥을 양푼에 푸고 국을 푼주에 담았다. 사발과 소반이 여러개 있을 리 없었다. 양녕의 부인은 아까 술집에서 얻어온 막걸리 사발에 밥과 국을 퍼서 담았다.

"죄송하옵니다. 두 분 마마께 소반도 없고 찬도 없이 메와 탕만 바치게 되오니 모든 죄가 쇤네한테 있습니다."

어리는 말씀을 아뢰자 눈물이 핑 두 눈에 돌았다.

"상관없다. 솔불 아래, 밥 한 사발, 국 한 그릇 먹는 팔자가 용이한 줄 아느냐. 사람마다 하고 싶어 해도 다 못하는 행락이다."

양녕은 호협하게 껄껄 웃었다. 부인은 가지고 나온 수저집에서 양녕의 은수저를 꺼내놓았다. 양녕은 부인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여보 부인, 벌거벗고 환도 찬다는 말과 같이 소반 없는 밥사발에 은수저가 당치 않소, 나뭇가지를 꺾어서 저를 하는 것이 좋겠소."

명보가 툭 튀어나와 아뢴다.

"그렇습니다. 소인이 저를 만들어 가지고 오겠습니다."

장사패들도 일어났다.

"소인들은 저희 먹을 저를 만들어 가지고 오겠습니다."

"좋다. 모두 다 풍류남자들이다. 속들이 환하게 터졌구나."

양녕은 큰 소리로 장사패들의 시원스런 행동을 칭찬했다. 이윽고 명보는 양녕 내외분의 나무저를 만들어 가지고 올라오고, 장사패들은 여럿이 쓸 저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양녕 내외는 마루 위에 정면하여 앉아 있고, 옆에는 어리가 모시고 있었다. 명보 내외와 장사패들은 솔불이 불꽃을 활활 튀기는 뜰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밥을 먹으려 했다.

양녕이 펄쩍 뛰며 장사패들을 불렀다.

"내가 이곳에 와서 차별을 하려고 너희들을 데리고 왔더냐. 절대로 아니 된다. 절대로 아니 된다. 이제는 내가 세자가 아니다. 다들 이리 올라와서 밥을 먹기로 하자."

장사패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한다.

"아니올시다. 마루 대청보다 밝은 솔불 아래가 좋습니다. 저희들은 이곳에서 밥을 먹겠습니다. 염려 맙시오."

또 한 사람이 대답한다.

"조선은 동방예의의 나라올시다. 아무리 처음으로 살림을 차리시는 경황 없는 때라 하오나 어찌 위아래 구별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대청에는 빈마마께서 계시옵고 아나서(작은집)께서 모시고 계신데 저희들이 어찌 감히 청으로 올라가 밥을 먹겠습니까. 마음 편하게 이곳에서 먹겠습니다."

양녕은 호협한 웃음을 다시 웃는다.

"하하하, 너희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마는 지금 내 심경이 그렇지 않다. 너희들이 동기형제같이 생각이 드는구나. 동기형제간에 밥을 따로 먹을 수가 있느냐. 아무 찬도 없는 염반이 아니냐. 오늘만이라도 함께 저녁을 대하기로 하자."

장사패들은 양녕의 동기형제 같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하고도 감격했다. 눈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양녕의 부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보낸다.

"너무들 사양 말고 다들 올라오게나. 저하께서 형제간이란 말씀까지 내리셨는데 자네들이 아니 올라온다면 도리어 도리가 아닐세. 명보야, 네가 먼저 올라오너라. 그래야 저분들이 올라오게 된다. 아까도 세자마마를 모시고 한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아니했느냐. 어서들 올라오게나."

양녕 부인의 정이 뚝뚝 흘러 떨어지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에 장사패들은 한층 더 감격했다.

"자아들, 일어나게. 김선달도 일어나고 박선달도 어서 일어나게. 세자마마께서 분부를 내리시고, 빈마마께서도 특별한 말씀을 내리셨는데 아니 일어난다면 어른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되어 도리어 불공한 일이 되네. 자아, 모두 올라가세."

명보는 모든 장사패들을 재촉해서 청 위로 올랐다. 양녕과 부인과 어리를 중심으로 하여 봉지련의 어미까지 둥글게 원을 지어 저녁밥을 먹기 시작했다. 기명과 찬수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아까 산성 아래서 술안주하고 남은 짠지 쪽을 반찬으로 해서 주먹밥을 먹다시피 했다. 그러나 밥맛은 좋았다. 새로 지은 밥이라 따끈따끈하고 고소했다.

양녕은 호탕한 목소리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한다.

"얘 참, 밥맛 좋구나. 봉지련의 어미가 지었으니 말할 나위 없다마는 바로 참기름 맛 이상으로 밥맛이 고소하구나."

양녕은 칭찬하면서 한 사발을 게눈 감추듯 자셨다.

"찌개 반찬이라서 배고플 적에 잡수시니 진지 맛이 좋으신 것입니다. 쇤네는 부엌에서 불만 땠습니다. 진지는 어리 아씨가 물을 맞추어 지으셨습니다."

봉지련의 어미는 양녕의 칭찬을 어리한테로 넘겼다. 말주변이 없는 양녕이 아니었다. 봉지련의 어미 말을 듣자 호방한 웃음을 또 한 번 껄껄 웃으며 대꾸한다.

"그렇다면 밥맛 좋은 칭찬을 두 사람한테 등분해서 나눌 수밖에 없다. 불을 대중해서 잘 땐 봉지련의 어미와 물을 대중해서 잘 맞춘 어리 두 사람한테 공을 나눌 수밖에 없다."

양녕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명보가 앞으로 나와 한마디 한다.

"칭찬 드릴 분이 또 한 분 계십니다."

"누구란 말이냐?"

"세자마마께 칭찬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까닭에?"

"세자마마께서 광주 추방을 아니 당하셨던 들 세자마마께서 어찌 이런 찌개 반찬을 젓수시고, 소인들도 이같이 따끈따끈하고 고소한 주먹밥을 얻어 먹어보겠습니까. 그러하니 세자마마께도 밥맛이 좋게 하신 공로의 한몫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웃지도 않고 익살을 떨며 말하는 명보의 말에 양녕을 위시하여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다. 모두 다 밥들을 달게 먹은 후에 명보의 아내 봉지련 어미가 한마디 한다.

"내일은 일찍 광주읍으로 들어가서 살림 제구를 사가지고 와야 하겠습니다. 그릇도 사고 수저도 사고 바가지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릇뿐 아니라 도끼와 톱도 사고 모든 살림 제구를 다 차려야 하겠습니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할래야 맨손 두 주먹밖에 없으니 힘이 갑절이나 듭니다."

"모든 일이 새판이니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내일 일찍 부담 농에 실어 가지고 나온 필목 몇 필을 꺼내가지고 읍내로 들어가서 살림에 필요한 제구를 사 가지고 올라오너라."

양녕은 명보와 봉지련 어미의 말을 허락했다.

밤이 으슥하자 여러 장사패들은 한담하다가 명보와 함께 아래채로 내려가고, 양녕과 부인은 안방에서 묵고, 어리와 명보의 아내 봉지련어미는 건넌방으로 들어가서 소쩍새 처량하게 우는 산성 속에서 광주추방의 첫 밤을 지냈다. 호협한 양녕이건만 감개한 회포가 가슴 안에 그지없이 일어나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동이 환하게 트자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는 간밤에 양녕이 분부한 대로 부담농 속에서 용으로 쓰려고 가지고 나왔던 필목 중에서 다섯 필을 꺼내 가지고 살림 제구를 차리려고 광주 읍내로 들어갔다. 우선 양녕과 부인의 반상을 사고 사발과 대접이며 보시기, 접시, 종지, 수저 등속을 사서 밥 먹을 제구를 갖추고, 소반이며 쟁반도 몇벌 사고, 함지박에 이남 박이며 바가지 등속과 돗자리에 금침까지 여러 벌 준비했다. 명보는 아내 봉지련 어미를 시켜서 부엌에서 쓸 기구를 사고 자기는 따로 밖에서 사용할, 나무할 도끼와 톱이며 낫을 사고 호미, 괭이, 가래, 고무래, 비 등 당장 사용할 아쉬운 물건들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명보 내외는 아침밥을 먹기 전에 제구를 사 가지고 오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성으로 기어올랐다.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는 읍내에서 사온 물건을 양녕과 부인 앞에 내놓고 뵈었다.

"높으신 안목에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시골 장터라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만하면 한 살림 훌륭하게 하겠다. 어제는 주먹밥도 먹었는데 도리어 과분한 셈이다."

양녕은 여전히 호탕한 말을 하고 부인은,

"아쉰 대로 지내보자꾸나."

하고 조신하게 대답했다.

장사패들은 새로 사온 도끼와 톱을 보니 눈이 번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나무를 해야 하겠다고 산으로 올라가고, 어리와 봉지련의 어미는 쌀을 씻어놓은 후에 찬 걱정을 하다가 나물을 캐러 논두렁으로 내려갔다. 뜻밖에 밭두렁에는 소루쟁이와 냉이며 달래 싹이 파르스름하게 트기 시작했다. 어리와 봉지련의 어미는 하늘이 주신 반찬이라고 서로들 기뻐하면서 냉이, 달래, 소루쟁이를 파내서 앞치마에 싸가지고 산성 정자로 올랐다. 마침 산성 안 장독대에는 간장과 토장이며 고추장과 소금이 있었다. 해마다 나라에서 준비해두는 장독이었다. 봉지련의 어미는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어리는 달래를 다듬어서 물에 씻은 후에 간장에 절여서 달래장아찌를 만들었다. 소루쟁이로 토장국을 끓이고 냉이를 끓는 물에 데쳐서 고추장에 엷게 무쳐 나물을 만들었다. 장사패들이 산에서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왔을 때 새 소반에 양녕 내외의 밥상과 어리의 상이 보아지고 두레상에는 장사패들과 명보의 찬수가 올랐다. 양녕은 아침에도 장사패들과 밥상을 함께 대했다. 양녕은 신선한 냉이 나물과 달래장아찌며 소루쟁이 국에 입맛이 당겼다.

"산중진미를 한꺼번에 맛보는구나."

하고 좋아했다.

아침밥을 먹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장사패들은 몸이 근질거려서 배겨낼 수가 없었다. 양녕한테 말씀을 드렸다.

"밥을 배불리 먹고 나니 심심해서 낮잠만 옵니다. 소인들은 사정으로 나가서 활을 쏘겠습니다."

활을 쏜다는 말을 듣자 양녕도 신명이 났다.

"너희들이 활을 가지고 왔느냐?"

양녕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한량들이 활을 아니 가지고 다닌대서야 말이 됩니까. 다들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너희들 총중에 끼여서 활을 한 번 쏘아보기로 하겠다."

양녕도 심심한데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여러 한량들을 따라 사정으로 향했다. 명보도 양녕이 장사패들과 함께 활을 쏘러 가는 것을 보자 자기도 한 몫 보고 싶었다.

"소인도 모시고 가서 한 번 활을 쏘아보겠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팔죽지가 쑤셔서 못 배겨나겠습니다."

명보도 양녕의 뒤를 따라 나갔다. 남한산성 사정 앞 백 보 밖에는 과녁을 버티어놓았다. 한량패들은 제각기 활과 전통을 꺼냈다. 모두 다 상뻘 가는 활과 살을 지녔다. 활은 벚나무로 만든 화궁이요, 살은 백우전이 아니면 금비전이었다. 장사패 한 사람이 먼저 붉은 칠을 한 화궁 한 벌과 금비전 화살 한 대를 양녕께 바쳤다.

"저하께서 먼저 개시를 하십시오."

"내가 상감께 꾸지람을 들으면서 매사냥은 많이 해보았다마는 활은 잘 쏘지 못했다. 너희들이 쏜 후에 한 번 쏘아보기로 할 테니 너희들이 먼저 쏘아보아라."

양녕은 짐짓 사양했다. 장사패들이 일제히 떠들어댄다.

"소인들이 밖에서 듣자오니, 대궐 후원에 상감께서 사랑하시는 홍시를 까마귀 떼가 찍어 먹으니 상감께서는 무관들을 부르시어 까마귀를 쏘아 떨어뜨리라고 하셨다 합니다. 이때 한 사람도 맞히는 이가 없었는데 저하께서는 금탄자를 던져 까마귀를 단번에 떨어뜨리셨다. 합니다. 이러한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 활을 못 쏜다 하시는 것은 말이 아니 됩니다."

양녕은 미소를 지으며 굳이 사양했다.

"탄자 던지는 재주와 활 쏘는 기술은 다른 것이다. 너희들의 쏘는 훌륭한 솜씨를 본 후에 나는 나중에 쏠 테니 어서 사양 말고 먼저 쏘아라."

한량패들은 하는 수 없었다. 제각기 화궁을 들고 열을 지어 늘어서서 활을 쏘기 시작했다. 활은 백 걸음밖에 서서 과녁의 가장 초점이 되는 한복판 핵심을 내리 세 번을 맞혀서 삼중이 되어야만 장원이라 했다. 핵심밖에 둥글게 원을 여러 개 그려놓았으나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점수를 얻지 못하는 법이다. 장사패들은 모두 다 활을 잘 쏜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명수들이었다. 모두 다 자신이 만만했다. 그러나 막상 과녁을 향하여 겨냥을 하고 활을 쏘아보니 어떤 사람은 이중까지 해놓고 나중에 가서 초점을 맞히지 못했고, 어떤 사람은 일중을 해놓고 두 번과 세 번을 실패했다. 삼중을 맞힌 사람은 십여 명 중에 겨우 한 사람밖에 없었다. 맨 끝으로 명보가 흰소리를 탕탕 치고 활을 잡았으나 겨우 일중을 하고 떨어져 버렸다. 한량패들은 활을 들고 양녕 앞으로 나갔다.

"이제 저희들은 다 쏘았습니다. 저하께서 맨 나중에 쏘겠다 하셨으니 한 번 쏘아보십시오."

양녕은 흔연히 웃으며 활을 받았다. 넓고 긴 소매를 당사실로 묶어서 간첩하게 한 후에 깍지를 끼고 화궁을 잡았다. 금비전 화살을 가득하게 활시위에 메겨 두 팔을 벌려 힘껏 쏘았다. 화살은 '' 소리를 치면서 허공을 가로질러 과녁의 핵심을 뚫고 푸르르 깃을 떨어 흔들며 복판에 콱 박혔다. 모두 다 손뼉을 쳐 갈채를 보냈다. 양녕은 또다시 살을 메겼다. 살은 또 한 번 울면서 허공으로 날아 먼저 꽂힌 화살을 떨어뜨리고 ''소리를 내며 과녁에 박혔다. 양녕은 다시 셋째 번 살을 놓았다. 셋째 번 화살은 둘째 번 화살을 떨어뜨리며 핵심을 향하여 콱 박혔다.

"신이 붙은 화살이다."

한량패와 명보는 소리치며 손뼉을 쳤다.

"더 한 번 쏘아보십시오."

명보는 신이 나서 양녕에게 청했다. 양녕은 사양치 아니했다. 다시 쏘는 활도 보기 좋게 적중했다.

"저하께서 이같은 명궁이신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태조대왕의 활 쏘시는 솜씨가 저하한테로 다시 내리셨습니다."

양녕은 '태조대왕' 소리를 듣자 불쾌했다.

"위화도 회군을 해서 고려조정을 엎고, 이신벌군한 따위의 불의의 화살은 아니다!"

양녕은 큰 소리로 불쾌하게 부르짖었다. 머릿속에 번뜩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이 환영문 앞에서 활을 쏘고 피하던 부자상극의 추태가 번쩍하고 비쳤다. 양녕은 전통에 남아 있는 금비전 화살을 두 손으로 잡았다. '' 분질러 꺾었다.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양녕의 화살을 꺾는 심경을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양녕은 이 뒤부터 활을 다시는 잡지 아니했다. 양녕이 화살을 꺾은 후에 다시 활을 잡지 아니한 일은 영영 수수께끼가 되고 말았다.

이튿날 양녕은 명보를 불렀다.

"내가 글씨 공부를 하고 싶다. 붓과 먹을 가지고 나왔다마는 종이와 벼루를 준비하지 못했다. 오늘 읍내로 들어가서 종이 한 덩이와 벼루를 사 가지고 오너라. 종이는 분백지와 농선지와 장지를 한 덩이씩 사고 벼루는 아주 대짜배기에 큰 벼루라야 한다. 벼루가 무거워서 가지고 오기 곤란할 것이다. 장사패 두어 사람과 함께 가서 지게에 얹어 가지고 번갈아서 짊어지고 오너라."

명보는 양녕의 분부를 듣자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저하의 글씨는 세상에서 모두들 명필이라고 칭송이 자자한데, 새삼 글씨 공부가 웬일이오니까?"

"잔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어서 사 오너라. 공부란 한량이 없는 게다. 죽어서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공부를 해도 다 못하게 된다."

양녕의 점잖게 타이르는 말에 명보는 다시 더 군소리할 수가 없었다. 장사패들한테 두 사람만 가자고 말했더니 여러 장사패들은 심심하니 장터 구경도 할 겸 모두가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명보는 십여 명 장사패들과 함께 광주읍내로 들어갔다. 때마침 장날이었다. 읍내는 장꾼들과 물건을 팔고 사러 촌에서 나온 사람들로 북새를 이루었다. 명보는 장사패들과 함께 지게를 사가지고 종이 파는 지물전을 찾아서 농선지와 분백지와 장지를 사서 지게에 얹고 벼룻돌을 사러 사방으로 찾아다녔다. 그러나 벼루의 명산지가 아닌 광주 구석에서 벼루 파는 곳이 흔할 까닭이 없었다. 한나절 동안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한 곳에 당도해보니 오죽잖은 손바닥만한 벼루가 대여섯 개 놓여 있을 뿐 양녕이 말씀한, 지게로 짊어져서 한 짐이나 될 큰 벼루는 눈에 띄지 아니했다. 벼루 파는 사람한테 물어보니 그런 벼루는 광주 바닥에서는 구하지도 말라는 대답이었다. 명보는 난감했다. 서울로 들어가서 동궁에 있는 큰 벼루를 가지고 온다면 모르되 광주 구석에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명보는 한동안이나 궁리하다가 양녕의 글씨 쓰고자 하는 마음을 꺾어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온종일 장터로 헤매고 돌아다니다 보니 시장기가 몹시 났다. 거리 노점에 솥을 걸고 술을 파는 술청에서는 술국 끓는 냄새가 구수하게 코를 찔렀다. 명보는 우선 막걸리 한 사발로 요기를 하고 장사패들과 벼루 구할 일을 의논하리라 생각했다. 장사패들과 함께 거리 목로의 술국집으로 들어섰다. 술청에는 새파란 젊은 새댁이 양푼에 술을 따라서 끓는 솥에 뎅그렁거려 술을 데우고 있고, 옆에는 술국 끓는 더운 김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무럭무럭 일어났다. 명보와 장사패들의 비위는 흠뻑 동했다. 세장궁에서는 곰국이랑, 갈비탕이랑 기름진 국을 얻어먹었으나 일차 광주산성으로 내려온 지 삼사일 동안에 짠지쪽에 소밥만 먹었으니 창자는 바짝 말랐다. 술국 끓는 냄새에 코가 벌름거려지고 입에서는 침이 흐를 지경이었다. 명보는 주파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술국을 한 그릇씩 뜨고 막걸리도 한 사발씩 부어주시오."

 

벼루 파동

 

장터의 주파는 십여 명 손님이 일시에 와싹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재수가 좋다고 생각했다. 사발로 장단을 맞춰서 탁자 위에 늘어놓고 양푼에 데워낸 막걸리를 구기로 떠논 후에 술국을 뚝배기에 담아 차례차례 돌렸다. 막걸리 한 잔에 술국 마시는 장사패들의 코는 더한층 벌름거렸다.

"애 이거, 뼈다귀까지 들었구나."

"한 잔 더 하지."

명보가 묻는다.

"아무렴 단배야 들 수 있나. 한 잔 더 해야지."

장사패 한 사람이 대답했다.

"여보 주파, 한 잔씩 더 따라주오."

주파는 구기를 들고 사발 위에 한 국자씩 더 부었다. 장사패들은 단숨에 둘째 잔을 마시었다. 명보와 장사패들의 뱃속은 조금 훗훗하고 부드러워졌다.

"기운이 난다!"

"인제 살겠네."

장사패들은 제각기 지껄여댔다.

"세자마마께 갖다드렸으면 좋겠다."

명보는 술국을 마시며 양녕을 생각했다.

"이따가 산정으로 올라갈 때 들통을 한 개 사 가지고 술국을 받아다 드렸으면 좋지 않겠나."

", 그렇게 하세. 탈속하신 분이라 잘 잡수실 거야."

"무척 좋아하실 걸세. 어떤가, 한 잔 더 할까?"

장사패들은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명보가 장사패들한테 묻는다.

"주불쌍배라니 석 잔은 먹어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아무렴, 석 잔은 마셔야지."

명보는 주파한테 술 한 잔씩 더 청했다. 주파는 신명이 났다. 세 번째 구기를 들고 술을 고루고루 사발에 부었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단숨에 따라놓은 술을 또 들이켰다. 창자에 더운 국이 들어가고 탁주 삼배를 마시고 보니 모두 다 마음이 흐뭇했다. 명보는 술청 앞에서 물러나서 장사패들한테 말한다.

"암만 해도 큰 벼루는 광주 바닥에서는 구할 수 없으니 내가 동궁으로 들어가서 가지고 나올 수밖에 없네."

장사패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게 생각했네. 그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네."

모두 다 찬성했다. 명보는 장사패들의 찬성하는 말을 듣자,

"자아, 그럼 나는 바로 이곳에서 서울로 들어가서 큰 벼루를 가지고 올 테니, 자네들은 농선지와 분백지와 장지를 가지고 산성으로 올라가서 세자마마께 드리게. 그리고 나를 찾으시거든 아무리 장터에서 큰 벼루를 구해보았으나 구할 길이 없어서 명보가 동궁에 있는 큰 벼루를 가질러 갔다고 아뢰게."

", 그리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형님이 혼자는 못 가십니다. 세자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입춘' 쓰는 대벼루를 구하시는 모양인데 그 무거운 벼루를 어찌 가지고 오시렵니까. 아무리 작다 해도 구들장보다는 무거울 것입니다."

"세자마마께서 쓰시던 동궁에 있는 큰 벼루는 남포석인데 길이가 석 자에 너비가 두 자요, 두께가 칠촌이나 되네. 까맣게 윤히 흐르는 상품 벼룰세."

장사패 한 사람이 자기 말이 옳았다는 듯이 말한다.

"그거 보슈. 그 무거운 벼룻돌을 어떻게 혼자 가지고 오신단 말씀요. 우리들 몇 사람이 따라가는 것이 좋겠소."

"그거야 걱정할 것 없네. 소바리에 싣고 오면 되지."

"아니 되오, 형님."

장사패 한 사람이 말한다.

"무엇이 아니돼?"

"형님이 혼자 가서는 아니되오. 우리들이 다 가야 하오. 종이 가지고 산성에 갈 사람만 남겨놓고 다 서울로 가야 하오."

"무어, 그리 번잡을 떨 거 있나. 홀가분하게 나 혼자 가서 벼루를 소바리에 실어오면 그만 아닌가."

"천만에 형님. 모두 다 벌써 잊어버렸구려. 금부도사를 우리들이 욕을 뵈고 나졸 놈들을 두들겨 패서 올려보냈는데 그래 형님이 문 안으로 들어간다면 나졸과 기찰들이 형님을 그대로 내버려 둘 듯싶소, 아니 되오. 공연히 붙잡히면 벼루도 못 가져오고 큰 욕을 당하게 되오."

"옳은 말일세."

장사패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보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따는 금부나 포도청에서 자기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서울 장안에 있는 기찰이나 포교치고 동궁저하를 모시고 있었던 자기 얼굴을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가슴이 출렁하고 떨리었다. 입맛이 쓰다.

"그러면 두어 사람만 종이를 가지고 산성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하고 함께 서울로 들어가서 벼루를 가지고 나오기로 하세."

"그리하는 게 좋겠소."

모두 다 응낙을 했다. 의논이 정해진 후에 명보는 장사패들과 술청 앞으로 나가서 다시 막걸리를 서너 사발씩 더 마시고 술국에 밥을 얹어 말아먹은 후에 주파에게 셈을 해주고 술청에서 나섰다. 의논이 정해진 대로 장사패 두어 사람은 백지와 장지종이를 가지고 산성으로 향하여 올라가고, 명보는 나머지 장사패들과 함께 서울길로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이때 술청에 앉아 술을 팔던 주파는 뜻밖에 명보의 일행한테 술값과 밥값을 후히 받아서 오늘은 장사가 잘되었다고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고받는 말투로 보아서 그들은 보통 장꾼이 아닌 것을 짐작했다. 세자마마니, 동궁이니, 서울 가서 동굴의 벼룻돌을 가지고 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품이 시골 구석의 아전이나 군노사령 따위가 아닌 것을 짐작했다. 적어도 서울 높은 곳에 일을 보는 구실아치 같다고 생각했다. 서울서 구실하는 사람들이 웬일로 이같이 많이 광주로 내려왔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파장 때는 아직도 멀었지만 일찌감치 술과 밥을 다 팔았으니 양푼과 구기를 씻고 술청을 거둬들이려 했다. 이때 술청을 향하여 한 사람의 군교가 들어섰다.

"벌써 술청을 닫나?"

"아이고, 아저씨 나오십니까. 술도 다 팔고 술국도 떨어졌으니 일찌감치 술청을 거두고 집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군교는 의아하다는 듯 말한다.

"벌써 술을 다 팔았단 말인가. 그래 술국도 없어? 자네네 술국 맛은 광주 읍내에서 유명하길래 한 그릇 먹으려고 왔더니 다 틀렸네그려."

주파는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아저씨, 미안합니다. 손님들 한 떼가 들어와서 술과 술국을 다 먹고 갔습니다. 생각하고 오셨는데 드리지 못해서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웬 손님들이 그리 많았나. 장꾼들인가?"

"아니올시다. 서울서 온 분들 같은데 적어도 대궐 안에 다니는 구실아치들같이 뵙디다."

서울 대궐 안에 다니는 구실아치 같다는 주파의 말에 군교는 귀가 번쩍했다.

"몇 명이나 되기에 술과 술국을 다 먹어버렸단 말인가?"

"한 십여 명 됩니다."

십여 명의 구실아치라는 말에 군교는 더한층 관심이 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십여 명이나 된다?"

"그러니까 막걸리 두 동이와 술국 한 솥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아니합니까? 호호호."

"그래, 눈치를 보니 어데 구실아치들이던가?"

"그것이야 제가 알 수 없습니까. 서로들 지껄이는 소리를 들으니, 광주 바닥에서는 벼룻돌이 없으니 서울로 가서 동궁에 있는 벼룻돌을 가져오는 것이 좋겠다구 하면서 서울로 가자고 하는 모양입니다."

군교는 비로소 주파가 말하는 벼슬아치라는 사람들이 일전에 광주 추방을 당해서 나온 양녕대군의 시자들인 것을 알았다. 추방이란 서울서 쫓아내서 추방 명령이 풀리기 전에는 서울로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 추방이다. 만약에 추방 명령을 당한 사람들이 자유스런 행동을 취해서 다른 곳으로 간다면 그 책임은 광주유수한테 있는 것이다. 군교는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군교는 이 사실을 급히 광주유수한테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 담에나 맛있는 술국을 많이 끓여놓게."

군교는 주파를 작별하고 총총히 광주유수가 있는 삼문 안으로 들어갔다. 동헌 앞에 당도하자 창 앞에서 고한다.

"소인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퇴창문이 스르르 열리며 광주유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느냐?"

"일전에 양녕대군을 모시고 나왔던 하인배들이 서울로 몰려 들어가는 모양이올시다."

"양녕대군의 하인배들이 서울로 몰려 들어간단 말이냐?"

광주유수는 깜짝 놀랐다.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양녕대군께서도 함께 들어가셨단 말이냐?"

"아니올시다. 양녕대군께서는 아니 들어가신 듯합니다."

광주유수는 크게 노했다.

"듯이라니? 확실히 보지 못하고 하는 말이로구나. 무슨 놈의 얼빠진 수작이냐!"

"이실직고하겠습니다. 소인이 시장기가 좀 나서 장터 술밥집으로 들어가서 국밥 한 그릇을 사 먹으려 했더니, 술국이며 막걸리가 다 떨어져서 없다 합디다."

광주유수는 초조했다. 군교는 다시 아뢴다.

"파장 때도 아니 되었는데 벌써 국밥을 다 팔았느냐고 주파한테 물었더니, 주파 대답이 십여 명의 장정들이 술과 밥을 다 먹고 가서 파장도 되기 전에 다 팔았다 하옵기, 십여 명의 장정들이란 말에 의심이 나서 대개 어떤 사람들이더냐고 물었더니, 장꾼들은 아니고 서울 대궐 안에 구실아치인 듯싶다 합디다. 소인은 그래서 더한층 의심이 났습니다. 어찌해서 대궐 안 구실아친 줄 알았느냐 물었더니, 그들이 술을 먹으면서 지껄이기를, 광주 바닥에는 큰 벼룻돌이 없으니 서울 안으로 들어가서 동궁에 있는 세자께서 쓰시던 벼룻돌을 가지러 가야 하겠다고 지껄대더랍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필시 일전에 양녕대군을 모시고 나왔던 하인배들이 분명합니다. 추방 명령을 당한 양녕대군의 하인배들이 사또 모르시게 월경을 한다면 상사의 꾸지람을 들으실까하여 감히 아룁옵니다. 그러하니 양녕대군께서는 이 틈에는 섞여 있지 아니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 하인배들의 수가 몇 명이라 하더냐?"

"한 십여 명 된다 합니다."

광주유수는 더욱 초조했다.

"그래, 월경을 해서 아주 가버렸단 말이냐?"

"아직 월경은 아니 한 듯합니다."

"잘못하면 말썽이 되겠다. 빨리 군노사령을 풀어가지고 뒤를 쫓아서 월경을 못 하도록 해라. 만약에 군노사령만 가지고 아니되거든 찰방한테 말해서 역졸까지라도 풀어서 하인배들을 잡아들이도록 해라."

군교는 광주유수의 명령을 받자 곧 군노사령들을 불러 모았다. 유수도 안에 예속된 군노사령들은 십여 명이나 되었다. 군교는 군노사령들을 앞에 세우고 광주유수의 명령을 전달했다.

"지금 양녕대군의 하인배들 십여 명이 월경을 해서 서울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너희들은 시각을 지체치 말고 서울로 가는 큰길로 달려가서 양녕대군의 하인배들을 서울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라. 만약 한 놈이라도 놓쳐 보낸다면 사또께서 상감께 크나큰 책망을 들으실 것이다. 각별 조심해서 가지 못하게 하고 만약 불응하는 경우에는 모조리 결박지어서 동헌 뜰에 대령케 해라."

군노사령 중에 패장이 나와서 고한다.

"나리께서는 아니 나가십니까?"

"나는 찰방을 찾아가 보고 역졸을 달라고 해서 너희들의 뒤를 받쳐서 나갈 작정이다. 사또의 분부시다. 군노사령들은 패장인 네가 지휘를 해라."

패장이란 자가 가기도 전에 겁부터 먼저 집어먹었다.

"양녕대군의 하인배라면 저번에 사또께서 마중을 나가셨을 때 대군마마를 호위해 모시고 나온 장사패들이 분명합니다. 그때 그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들 어깨가 떡 벌어지고 눈이 부리부리해서 화등잔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모두 다 기운이 역발산 기개세하는 천하장사 같던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저희들의 힘으로 서울을 못 가게 하고 결박을 지어 끌고 옵니까?"

패장이란 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고했다. 군교는 허장성세로 큰소리를 질러 패장을 꾸짖는다.

"에이 못난 놈아, 그래 십여 명 군노사령이 하인배들을 못 잡아 온단 말이야. 잔말 말고 어서 빨리 쫓아가서 붙들어오너라. 역졸들을 풀어서 데리고 갈 테니 염려 말아라."

늙은 군노 한 자가 나오면서 고한다.

"나리님, 소문을 못 들으셨습니까. 양녕대군의 하님들은 팔장사패라 합니다. 경안 역말에서 서울서 내려온 금부 나졸들을 목롯집에서 엿보았다고 두들겨 패주고 금부도사까지 주리를 틀어서 꼭두각시 놀음을 해서 쫓아보냈다 합니다. 이런 장사패들을 소인들이 어찌 당합니까. 공연히 대강이만 터지고 다리만 부러져서 쫓겨오면 큰일이 아닙니까?"

군교는 화가 벌컥 났다.

"이놈들아, 내가 역졸들을 데리고 가서 뒤를 받쳐준다고 해도 그리하느냐. 어서 빨리 가보아라. 놓치면 큰일이다. 내 모가지가 달아나는 판이다."

군교가 발을 구르고 호통치는 바람에 군노사령들은 뒤통수를 긁으며 오랏줄과 방망이를 들고 서울 가는 큰길을 향하여 치달렸다. 군교가 흰소리를 쳐서 군노사령들을 보냈으나 속셈으로는 겁이 났다. 부랴사랴 말을 타고 찰방한테로 달려갔다. 찰방한테 수인사를 한 후에 광주유수의 분부를 전하고 역졸을 꾸어 달라고 했다. 찰방은 마음에 흡족하게 생각하지 아니했으나 광주유수는 상관 중에도 상관이다. 분부를 어길 길이 없었다. 역졸 십여 명을 풀어서 광주군교에게 내주었다. 역졸들은 육모방망이를 들고 군교가 탄 말을 뒤따라 풍우 같이 서울 길로 향해 달렸다.

한편 먼저 떠난 광주 군노들은 가기도 전에 겁부터 집어먹었다. 걸음이 잘 내키지 아니했으나 아니 갈 수도 없었다. 패장의 재촉을 들으며 오 리쯤 달려가니 과연 옷갓을 차린 장사패 십여 명이 한가한 걸음걸이로 서울로 가는 큰길로 한담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패장은 장사패들을 바라보자 기운깨나 쓰는 군노사령에게 말한다.

"저 사람들이 군교 나리가 말하던 그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가 보이다."

"가지 말라고 좀 불러보게."

"패장님이 불러보십시오."

"내 목소리는 너무나 작으니 자네가 좀 불러보게."

"소인의 목소리도 작습니다. 패장 나리께서 직접 불러보시오."

"입술에 침이 말라서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네."

"지금 하시는 말씀은 말씀이 아니고 허파에서 나오는 바람입니까?"

"아따 이 사람, 농할 때가 아닐세. 저 사람들 자꾸 가네. 어서 좀 불러보게. 놓치면 큰일일세."

힘깨나 쓴다는 자가 청을 높여 장사패들을 불렀다.

"여보시오. 앞에 가는 양반들."

장사패들은 자기들을 부를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했다. 여전히 한담하고 웃으며 걸어갔다. 힘깨나 쓴다는 군노사령은 젖먹은 힘을 다해서 장사패들을 불렀다.

"여보시오. 앞에 가는 양반네들."

비로소 장사패들의 귀로 들어간 모양이다. 장사패 한 사람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복색을 차린 군노사령이다. 퍼뜩 생각이 들었다. 광주유수가 군노사령을 보내서 뒤를 밟은 것을 알았다.

"군노사령이 뒤를 밟으며 부른다."

모든 장사패들한테 이야기를 했다.

"부르는 놈이 어느 놈이냐. 다리 뼈다귀를 부러뜨려놀 테다."

명보는 분이 났다. 큰 소리로 외쳤다.

"좌우간 무어라 하나 수작을 들어보고 처치합시다."

한 사람이 말하고 응수를 했다.

"왜 그러오?"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어데로 가는 사람들요?"

"어데로 가는 것을 알아 무엇하나. 서울로 가는 길일세."

장사패 한 사람이 엇조로 대답했다.

힘깨나 쓴다는 군노사령은 엇조로 대답하는 장사패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서울로 갈 때 가더라도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으오."

장사패는 아니꼽다고 생각했다.

"이놈아, 너희들의 명색이 무엇이길래 길 가는 사람을 보고 섰어라 말아라 하느냐?"

장사패 한 사람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딱 을러댔다.

"우리는 광주유수 사또님의 분부를 받고 온 군노사령들이오. 당신네들이 말을 안 듣는다면 쫓아가서 포박을 할 테요."

명보는 화증이 벌컥 났다.

"이놈아, 광주유수의 분부를 받아가지고 나왔다? 말을 안들으면 포박을 한다구? 우리는 광주유수놈을 포박할 테다!"

명보는 두 다리를 떡 버티고 호통을 치며 꾸짖는다.

겁쟁이 패장 녀석이 한 마디 한다.

"신분을 밝혀라."

명보는 발로 땅을 굴렀다.

"이놈아, 누구보고 해라 하느냐. 검정 더그레를 입은 주제에. 우리는 상감마마의 큰 아드님이신 동궁저하의 시위다. 네가 감히 어찌할 테냐!"

기운깨나 쓴다는 군노가 앞으로 썩 나섰다.

"동궁저하는 옛 수작이고 지금은 폐세자가 되어 우리 골로 추방을 당해온 양녕대군 시위란 말이군. 허허, 추방을 당한 사람은 아무리 왕자라 하나 광주 관하에 이송이 되어 있소. 광주유수인 우리 사또의 허락이 없이는 한 걸음도 광주 밖으로 나가지 못하오. 대군과 함께 온 시위하는 사람도 매일반요. 맘대로 서울로 가지 못하오. 한 발짝도 떼놓지 못하오."

명보는 부아가 났다.

"이놈아, 무어 어쩌고 어째? 광주유수의 허락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 못한다? 이놈들 아가리를 찢어놓고 다리 뼈다귀를 부러뜨려놀 테다!"

명보는 큰 소리로 외치며 두 팔을 벌리고 맹호처럼 군노사령한테 덤벼들었다. 군노사령들은 명보의 소리치며 달려드는 위풍에 눌렸다. '' 소리를 치며 달아나다가 명보가 맨손으로 달려드는 것을 보자 한 자가 몽둥이를 들고 휘둘렀다. 군노사령들은 이 통에 기세가 올랐다. 달아나던 몸을 돌렸다. 일제히 몽둥이를 휘두르고 고함을 치며 덤벼들었다. 명보는 맨주먹을 불끈 쥐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덤벼드는 패장놈의 팔죽지를 바싹 비틀었다.

"요놈의 새끼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드는 격이로구나!"

패장놈은 몽둥이를 땅에 뚝 떨어뜨리고 '애걔걔' 소리를 질렀다. 명보는 비호처럼 딴죽을 걸었다. 패장놈은 ''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 떨어졌다. 명보는 잽싸게 땅에 떨어진 몽둥이를 집어서 패장을 두들겨 팼다. 장사패들도 일제히 군노사령을 한 놈씩 붙들어 몽둥이를 뺏어가지고 두들겨 팼다. 군노사령들은 이마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어마 뜨거라 하고 뿔뿔이 달아났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머리를 싸매고 풍비박산이 되어 달아나는 군노사령들의 모습을 바라보자 쾌하고 기뻤다. 소리쳐 웃으면서 발길을 돌리려 할 때, 홀연 앞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며 한떼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찰방한테 교섭을 해서 역졸들을 풀어가지고 오는 군교의 일행이었다. 그들은 오는 도중에 쫓겨오는 군노사령들을 만났다. 양녕대군의 시위가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다 힘깨나 쓰는 장사패인 것을 알았다. 군교는 역졸들에게 분부하여 육모방망이를 단단히 준비하라고 이르고 급히 말을 달렸다. 양녕대군의 시위하는 사람을 서울로 놓쳐버린다면 허물은 함빡 군교가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밥줄이 끊어질 뿐 아니라 곤장 수백 대를 유수한테 맞아야 할 테니 큰일이었다. 군교는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역졸 십여 명을 재촉하여 급히 말을 달렸다. 역졸들은 암행어사를 따라서 여러 곳에 출도했던 백전노장들이었다. 군노사령들이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져서 절뚝거리며 달려오면서 장사패들한테 졸경을 당한 호소를 들었다.

"병신새끼놈들, 맨손으로 가는 한량들을 못 잡고 머리가 터져 가지고 오느냐."

군노사령들을 꾸짖어 흰소리를 친 후에 말을 채쳐 쫓아들었다. 한편 장사패들은 짓쳐 오는 역졸들을 바라보자 일제히 군노사령들이 버리고 달아난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명보가 장사패들한테 말한다.

"앞에 오는 것들을 보니 역졸들이 분명하이. 군노사령 따위는 아니니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하겠네."

명보는 말을 마치자 허리띠를 바싹 졸라맸다. 장사패 한 사람이 훈수를 했다.

"저자들은 말을 타고 육모방치를 들었으니 우리는 석전으로 막아내야 하겠네. 돌을 구해보도록 하세."

장사패들이 둘러보니 고개 밑에 서낭당이 있고, 돌더미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됐네. 저기 서낭당의 돌로 저놈들을 막아내세."

장사패들은 우르르 고개 밑 서낭당으로 몰렸다. 군교는 역졸을 지휘하여 호기롭게 달려들었다. 장사패들은 서낭당 고개 밑에서 돌무더기 돌을 주워서 달려드는 역졸을 향하여 팔매질하기 시작했다. 장사패들은 모두 다 활 잘 쏘는 일등사수들이다. 활 쏘는 솜씨로 팔매질을 했다. 돌이 비 오듯 쏟아지면서 앞장서서 달리던 군교의 이마빼기를 보기 좋게 갈겼다. 군관은 '으악' 소리를 치며 말 아래로 가로 떨어졌다. 역졸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돌뭉치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쫓기는 역졸들은 이마 터진 군교를 말 위에 싣고 풍비박산이 되어 달아난다. 장사패들은 신명이 났다. 쫓겨가는 역졸들에게 돌을 던지며 '와아' 소리를 치고 풍우같이 짓쳐 나갔다. 역졸들은 읍내까지 쫓겼다. 장사패들은 호통과 고함을 치면서 뒤를 쫓았다. 읍내가 발끈 뒤집혔다. 구경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 물결이 백절치듯 했다.

"웬일들이냐?"

"난리가 났나보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사패들이 던지는 돌팔매는 소낙비 오듯 쏟아지며 역졸들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쫓겨갔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져서 달아나는 역졸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쫓아가는 장사패들의 고함치는 '' 소리와 던지는 돌팔매는 더욱 더 기승했다. 구경꾼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 더구나 이날은 장날이었다. 장꾼과 구경꾼들로 더한층 혼잡을 이루었다. 앞에는 군노사령들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달아나고 뒤에는 부상한 군교를 말에 싣고 쫓겼다.

"앞에 쫓겨가는 것은 군노사령들이고 뒤에 쫓기는 것은 역졸들이로구나. 돌팔매질을 하고 쫓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들이냐?"

구경꾼들이 주고받는 말이었다.

"복색도 안 입었다. 맨저고리 바지 바람이다. 선비들이 아니고 무엇 하는 사람들이냐?"

"선비들이 저렇게 기운이 세고 돌팔매질을 잘 할 수 있느냐. 장사패들이라 해도 이만저만한 장사들이 아니다."

"모두 다 광주 땅 본고장 사람들은 아닌 모양인데 누굴까?"

"외치는 소리와 옷 입은 의표가 확실히 서울 사람 같구나."

이때 쫓기는 역졸들과 쫓아가는 장사패들은 장터 한복판을 지났다. 술청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주파가 거리로 나섰다가 쫓기고 쫓아가는 역졸과 장사패들을 바라보았다.

"에구머니나."

소리를 쇠되게 질렀다.

"군교가 머리가 터졌네!"

구경꾼들이 주파한테로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이 군교인가?"

"저기 저 머리가 터져서 피를 흘리며 말에 실려가는 이가 본관 유수 앞에 거행하는 군교입니다. 아까도 우리 술청에 들렀었는데."

주파는 쫓아가는 일행을 바라보자 또 한 번,

"에구머니나."

소리를 쳤다.

"왜 그래?"

옆의 사람들이 물었다.

"쫓아가는 장사패들은 아까 우리 술청에서 막걸리를 사자시고 국밥을 먹던 분들입니다. 웬일일까?"

주파는 깜짝 놀라는 빛을 얼굴에 띠었다. 구경꾼들은 더욱 궁금했다. 주파를 향하여 묻는다.

"장사패들의 뒤가 여간 든든하지 아니한 모양이지. 어디 사람들입니까?"

"뒤가 든든한지 아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말하는 어조를 들으니 서울 양반들인 것이 분명합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광주서는 큰 벼룻돌을 구할 수 없으니 서울 동궁으로 들어가서 세자마마께서 쓰시던 벼룻돌을 소바리에 실어가지고 나오자고 수작들을 합디다. 이 말로 미루어보면 그 장사패들은 암만 해도 대궐 안 궁중에 관련이 있는 사람들 같습디다."

주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의관을 단정하게 쓴 한 사람이 손뼉을 치며 말한다.

"옳거니, 이 사람들은 세자궁에 소속되어 있는 장사패가 분명하오. 지금 세자마마께서 남한산성에 나와 계시거든. 그러니 세자마마의 심부름으로 서울로 벼루를 가지러 가다가 군노사령들과 충돌이 된 것이 분명하오, 허허, 좋은 구경거리군."

선비는 말을 마치자 빙그레 웃으며 편쌈을 바라본다.

"세자마마께서 광주에 내려와 계십니까?"

장꾼들은 세자의 일을 알 까닭이 없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폐세자가 되어 광주로 쫓겨 내려오셨지요."

선비는 쓸쓸한 웃음을 웃으며 다시 편쌈을 바라본다. 군노사령과 역졸들은 쫓기면서 삼문 앞으로 몰렸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계속해서 호통을 치면서 광주유수의 아문인 삼문 앞까지 쫓아 들어갔다. 문 지키던 군교가 급히 동헌으로 뛰어들어가 광주유수한테 고했다.

"아뢰옵니다. 큰일 났습니다."

문 지키는 군교의 큰일 났다는 말을 듣자 광주유수는 깜짝 놀랐다.

"무슨 큰일이 났느냐?"

황망하게 묻는다.

"저기, 저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고함치는 소리가 아니냐?"

"삼문 밖에 야단이 났습니다."

"야단이 나다니, 어떤 놈들이 야단을 친단 말이냐?"

광주유수는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양녕대군의 하인배들을 잡으로 나갔던 군교는 머리가 터져서 기절이 되어 말에 실려 돌아오고 군노사령과 역졸들은 양녕대군의 하인배에게 쫓겨서 돌아옵니다. 모두 다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져서 쫓겨옵니다."

"고함 소리는 어떤 놈들이 치는 소리냐?"

"양녕대군의 하인배들이 돌팔매질을 치면서 삼문 밖까지 육박해 들어오는 고함 소리 올시다."

유수는 불같이 노했다.

"너무나 무엄한 놈들이구나! 양녕대군의 하인은 관청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관장도 없더란 말이냐. 괘씸한 놈들이로구나!"

광주유수는 노발대발했다. 설렁줄을 끊어져라 하고 흔들었다. 통인이 뛰어나왔다.

"사또, 부르셨습니까?"

"육방관속을 등대시켜라."

통인은 급창을 부르고 급창은 사령을 불러서 육방관속을 등대시키라 했다. 사령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들이 일시에 숨을 몰고 뛰어왔다. 유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놈들아, 너희들은 귀가 먹추가 되었느냐. 저 고함 소리를 못듣느냐. 양녕대군의 하인 놈들이 작당을 해서 장난을 친다 하는데 너희놈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느냐."

이방이 대답한다.

"그러지 아니해도 지금 병방과 의논하고 쫓아드는 대군방 하인들을 제지하려 하옵니다."

광주유수는 더한층 화가 났다. 고래고래 악을 쓴다.

"이놈아, 제지가 무어냐. 모조리 포박을 해라!"

"대군방 하인들은 천하장사들이올시다. 사령 십여 명이 당해내지 못하고 역졸까지 수십 명이 나갔건만 모두 다 다리가 부러지고 허리를 다쳐서 쫓겨왔습니다. 석전의 명수들이올시다. 대항해서 싸울 수가 없습니다. 달래서 제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삼문 밖에서는 고함 소리가 더한층 격렬했다. 문 지키던 군교가 다시 뛰어들었다.

"군노와 역졸들이 삼문 안까지 쫓깁니다."

광주유수는 아전들에게 영을 내린다.

"내가 친히 나가볼 테다. 육방관속을 함빡 풀어라."

광주유수는 전쟁터에나 나가는 듯 칼 차고 구군복 입고 말에 올라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삼문밖으로 나갔다. 삼문 앞마당에는 장사패들한테 쫓겨 들어온 군노사령과 역졸들이 즐비하게 쓰

러져 있었다. 광주유수는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군노와 역졸들을 바라보자 화기가 더 한층 치밀었다.

"쯧쯧, 못난 놈들. 빈주먹으로 덤벼드는 대군방 하인 몇 놈을 당해내지 못하고 다리가 부러지고 대강이가 터졌단 말이냐!"

유수는 눈을 흘기며 말을 달려서 삼문 밖으로 나갔다. 이때 장사패들은 쫓기는 역졸을 쫓아서 삼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다. 명보가 급히 손을 저어 만류했다.

"자아, 이제는 우리의 뒤를 밟는 놈들이 없을 테니 어서 빨리 서울로 들어가서 벼룻돌을 가지고 나오기로 하세."

장사패 한 사람이 대답한다.

"여기까지 온 김에 광주유수란 자의 버릇을 한 번 톡톡히 가르쳐주고 갑시다."

장사패 한 사람이 소리치며 응한다.

"옳소, 옳은 말일세. 우리를 죄인같이 다루어서 서울로 못 들어가게 한 장본인은 군교 놈도 아니고 군노사령도 아니고 역졸도 아닐세. 광주유수 놈이니 이자의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서 다시는 이따위 짓을 못 하도록 한 후에 마음 놓고 서울로 가서 벼루를 가지고 오는 것이 좋겠네."

장사패 중 또 한 사람이 손뼉을 치며 찬성한다.

"그뿐만이 아닐세. 도대체 광주유수란 자가 간게 붙고 쓸개에 붙는 손인 놈일세. 우리 세자마마를 이같이 박대할 수가 있는가. 이놈이 우리 세자마마께서 동궁 자리를 내놓으셨다는 말을 듣고 이같이 매정하게 인색을 피니, 참으로 괘씸하기 짝없는 놈일세. 제가 누구의 녹을 먹는데, 감히 이따위 소인 놈의 짓을 하느냐 말야."

옆에 있던 장사패 한 사람이 또다시 큰 소리로 말한다.

"우리 대군께서는 동궁 자리를 내놓으셨다 해도 엄연히 높으신 이 나라 상감마마의 큰 아드님이 아니시냐 말야. 이런 분을 그래, 사처하나 똑똑히 정해주지 아니하고 짠지 쪽에 주먹밥을 자시게 한단 말인가. 이놈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가르쳐주어야 하네."

장사패들은 일제히,

"옳소!"

하고 부르짖었다. 삼문 밖에 백절치듯 모여 있던 구경꾼들은 비로소 장사패들과 군노사령 사이에 충돌된 원인을 알았다. 장사패들이 삼문밖에서 돌팔매질을 그치고 광주유수의 버릇을 가르쳐놓자는 공론을 분분하게 하고 있을 때, 광주유수는 육방관속들을 거느리고 노기가 충천해서 삼문 밖으로 나왔다. 앞을 바라보니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백절치듯 모여 있고 앞에는 십여 명의 장사패들이 하마석 앞에 쭉 둘러앉아서 무슨 공론들을 하고 있었다. 유수는 군노들을 둘러보고 묻는다.

"어떤 놈들이 대군방 하인들이냐?"

군교 한 자가 손으로 하마석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 저 하마석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자들이 대군방 하인들이올시다."

유수는 크게 노했다. 소리를 높여 장사패들을 꾸짖는다.

"이놈들, 네 어찌 감히 나의 군교와 군노사령들을 두들겨서 상처를 입게 했느냐. 무엄하기 짝 없는 놈들이다."

장사패들은 유수가 구군복하고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나오는 것을 보자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명보가 앞으로 썩 나서서 말한다.

"무엄이라니 누구 앞에 무엄이란 말을 함부로 쓰오. 우리는 상감마마의 큰 아드님 되시는 양녕대군을 모시고 있는 대군방 시위요. 뿐만인가, 중경 세자저하의 시위란 말요. 어찌해서 당신이 군노사령을 풀어서 우리를 포박하려 했소? 누구의 허락을 받아서 우리를 결박 지어 묶으려 했소? 상감의 명령을 받았단 말요? 우리 세자마마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를 잡으려 했단 말이오? 우리를 잡으려는 이유를 똑똑히 대보오."

광주유수는 부아가 터졌다.

"광주유수인 나의 명령이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사패들이 바짝 유수의 말 타고 호통치는 앞으로 다가섰다. 명보가 눈을 부릅뜨고 팔뚝을 걷어붙이며 말한다.

"광주유수의 명령야?"

눈을 딱 부릅떴다. 눈자위 흰자에 벌겋게 핏발이 섰다. 광주유수는 마상에서 명보를 굽어보며 호통을 친다.

"그렇다. 광주유수인 내가 너희들에게 포박 명령을 내렸다."

"무어? 광주유수가 대군방 시위한테 포박 명령을 내렸다? 무슨 죄로 우리들을 잡으려 했소?"

"추방 명령을 당한 폐세자의 하인은 맘대로 월경을 못하는 법이다. 무단히 서울로 작당해서 들어가지 못한다. 내가 잡으라 한 것이다."

유수의 말을 듣자 명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광주유수가 언제 그런 권한을 가졌소. 상감 이외에는 그런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소. 당신이 상감이오? 일개 광주유수가 상감의 명령을 남발한다면 역적이오."

광주유수는 '역적'이란 말에 열이 꼬두까지 뻗친다.

"이놈아, 내가 역적야? 저놈들을 모조리 잡아 묶어라."

육방관속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른손에 육모방망이를 들고 왼손으로 오랏줄을 던져서 명보와 장사패들을 잡으러 몰려들었다. 명보가 악을 쓴다.

"이놈아, 네가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우리는 세자마마의 명령을 받들어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다. 세자마마의 명령을 받들어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다. 세자마마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게 하고 상감마마께서나 내리실 명령을 네가 참람하게 함부로 내리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광주유수는 마상에서 대거리쳐 호통을 한다.

"육방관속들아, 빨리 저놈을 묶지 못하느냐."

육방관속들은 와짝 명보한테로 달려들었다. 멱살을 잡고 다리를 비틀어 끌었다. 명보는 주먹으로 잡으러 들어오는 육방관속들을 두들겨주고 발길로 딴죽을 걸어 쓰러뜨렸다. 장사패들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이놈들아, 언감생심 세자저하의 시위를 함부로 잡으려 하느냐!"

소리치며 덤벼들었다. 십여 명의 장사패들은 비호처럼 뛰었다. 맨주먹 빈손으로 육방관속들을 두들기고 쓰러뜨렸다. 육방관속들은 장사패들의 범같이 날뛰는 무서운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코가 터지고 머리가 깨졌다. 피가 흘러서 유혈이 낭자했다. 육방관속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쥐구멍을 찾아 뿔뿔이 달아난다. 광주유수는 말 위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달아나는 육방관속들을 꾸짖는다.

"에이 못난 놈들아, 저깐 놈을 붙잡지 못하고 대강이가 터져서 달아나느냐. 이놈들아! 이러고 어찌 관속 놈의 행세를 하느냐. 쯧쯧, 하우불이의 놈들이로구나."

구경꾼들은 더욱 백절치듯 모여들었다. 육방관속들이 두들겨 맞고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는 꼴을 보자, 구경하는 백성들은 쾌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모두 다 큰 소리로 웃어대며 손뼉을 쳐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광주유수와 육방관속들이 백성의 피와 땀을 짜 먹어서 뺏골 속속들이 한과 원이 서려 있는 때문이다. 장사패 한 사람이 주먹을 높이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외친다.

"광주유수의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놓아야 하겠소."

"옳소!"

하고 모두 다 대답했다. 먼저 소리친 장사패가 다시 제언을 한다.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주자면 군중 앞에서 호랑 감투를 씌워야 하겠소. 여러분, 내 말이 어떠하오."

"좋소!"

하고 장사패들은 일제히 찬성하는 대답을 보냈다. 구경하는 군중들은 호랑 감투가 무엇인가 하고 흥미진진하게 생각하면서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유수는 육방관속들이 머리가 깨지고 코가 터져서 풍비박산이 되어 달아나는 것을 보고 홀연 신변의 위급함을 느꼈다. 급히 말머리를 돌려 삼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할 때 장사패들의 호랑 감투를 씌우자는 말을 듣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급히 말을 채찍질해 삼문 안으로 달렸다. 명보가 소리치며 앞으로 달렸다. 손에는 육방관속한테서 뺏은 육모방망이를 들었다.

"어디로 달아나느냐."

호통을 치며 뒤를 쫓았다.

장사패들도 육방관속들이 내던지고 달아난 육모방망이를 주워들고 명보의 뒤를 따랐다. 명보는 비호처럼 달려가 광주유수가 타고 달아나는 적토마의 앞정강이를 힘껏 후려갈겼다. 붉은 털빛을 가진 적토마는 아픔을 참을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펄쩍 소스쳐 허공으로 뛰었다. 광주유수는 공중제비로 가로 떨어지고 적토마는 삼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장사패들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광주유수의 머리가 터지면 아니 된다!"

두 사람의 장사는 허공에서 가로 떨어지는 광주유수를 번쩍 들어 안았다. 한 사람의 장사패가 소리친다.

"자아, 이제는 호랑 감투를 씌워라!"

백절치듯 둘러서서 구경하는 군중들은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본다.

"호랑 감투가 무엇이냐?"

"호랑이한테 감투를 씌우는 거야?"

"아니다. 호랑이가 어디 이곳에 있느냐. 광주유수한테 호랑 감투를 씌우나보다."

"호랑이도 감투가 있나? 어디 장사패들의 하는 것을 구경해보자."

이곳저곳에서 쑤군댔다. 파장판이었다. 본골 사람뿐 아니었다. 오십 리, 칠십 리 밖에서 모여든 장꾼들까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하고 광주유수의 호랑 감투 씌우는 구경을 하고 있었다. 장사패 두 사람이 공중에서 가로 떨어지는 광주유수를 양편에 마주 받아 안았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윗덩이 한 개를 거뜬하게 받아 들 듯했다. 백절치듯 모여 섰던 구경꾼들의 박수 소리와 고함 소리가 일어났다.

"참말 장사들이다!"

"헛것을 받아내리듯 선뜻 받아버리는구나."

"가벼운 종잇장을 받아내리듯 하는구나!"

명보가 장사패들을 향하여 호통을 친다.

"자아, 그럼 빨리 호랑 감투를 씌워라."

광주유수는 명보의 호통치는 소리를 듣자 장사의 틈에서 달아나려고 몸을 바둥거렸다. 장사패가 광주유수를 꾸짖는다.

"어디로 달아나려고 몸을 바둥거리느냐. 꼼짝 말고 있거라!"

광주유수는 달아나려고 몸을 바둥거리다가 장사패 한 사람한테 손목을 비틀렸다.

"애끼."

소리를 구슬프게 치고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어서 호랑 감투를 씌워라!"

명보가 다시 호통을 쳤다.

 

호랑 감투

옆에 있던 장사패 또 한 사람이 광주유수를 안고 있는 장사패들의 옆으로 달려갔다. 장사패 한 사람이 소리친다.

"먼저 머리에 쓴 밀화패영 벙거지를 벗겨라!"

광주유수를 안고 섰던 장사패가 유수의 머리에 쓴 공작미 화사한 깃을 꽂은 벙거지를 홱 벗겨서 땅에 동댕이쳤다. 군중들은 깜짝 놀랐다.

'저 사람들이 저러고 무사할까?'

자기한테 관여되지 않는 일이지만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구군복을 벗겨라!"

명보가 또다시 소리친다. 장사패들이 덤벼들었다. 먼저 검은빛 겹전복에 맨 단방을 도홍띠를 풀었다. 전복 자락을 홱벗겨서 땅에 던졌다. 붉은 홍포에 누르고 붉은 동을 단 구군복을 훌떡 벗겨서 내던졌다. 광주유수는 동저고리 바람이 되었다.

"저고리를 벗겨라!"

장사패들은 저고리를 훌떡 벗겨서 내던졌다. 광주유수의 붉은 동체가 드러났다.

"대님을 끌러라!"

명보는 또 한 번 소리친다. 장사패들은 유수의 대님을 풀어 던졌다.

"바지를 벗겨서 훌떡 머리 위로 뒤집어씌워라!"

명보가 또다시 명령을 내렸다. 장사패들은 광주유수의 허리띠를 끌렀다. 바지를 뒤집었다. 훌떡 머리 위로 씌웠다. 광주유수의 아랫도리는 새빨간 알몸뚱이가 되었다.

"거꾸로 쳐들어라!"

명보는 또다시 명령을 내렸다. 장사패들은 번쩍 광주유수의 알몸을 거꾸로 들었다. 광주유수의 발가벗은 두 다리와 발이 거꾸로 허공을 향했다. 아랫도리가 환하게 보였다. 구경꾼 속에 섞여서 구경하던 젊은 여자들은,

"애걔걔."

소리를 치며 외면하고 낯을 붉혔다. 늙은 여인들은 '에구머니나' 소리를 쳤다. 구경꾼들은 손뼉을 쳐서 박장대소를 했다.

"여러분, 이것이 호랑 감투요."

명보는 군중을 향하여 청을 높여 소리쳤다.

"아아, 저렇게 하는 것이 호랑 감투로구나!"

"욕을 뵈는 것이 호랑 감투로구나!"

군중들은 깔깔거려 웃어댔다.

명보는 또다시 장사패들한테 명령을 한다.

"자아, 이제는 광주유수를 장터로 메고 나가서 유수 나리의 호랑 감투 쓴 꼴을 장꾼들에게 좀 보여주어야 한다."

명보의 지시가 떨어지니 장사패들은 광주유수의 바지 벗은 알몸을 거꾸로 어깨에 메고 장터로 향해 나갔다. 뒤에는 명보가 따르면서 소리친다.

"자들, 유수 나라의 호랑 감투 쓴 꼴을 좀 보시오. 세자마마를 무시해서 푸대접하고, 상감마마의 명령을 거짓 꾸며댄 죄요."

구경꾼들은 홍수처럼 몰렸다. 웃어대며 뒤를 따랐다.

"저런 망신이 있나. 웬일인가. 유수의 볼기짝이 다 나왔네."

"볼기짝은커녕 사타구니가 다 뵈지 않나."

남녀노소 장꾼들은 흥겹게 바라보며 깔깔거려 웃어댄다.

"하하하. 저렇게 발가벗겨서 거꾸로 세워놓고 학춤을 추게 하는 것을 호랑 감투라고 하는구나."

"토호질에 갖은 악행을 다하던 유수 나리가 톡톡히 곤욕을 당하는구나. 하하하."

"저 꼴을 당하고도 내일 다시 동헌 마루에 앉아서 이방, 호방을 호령하고 백성의 무릎을 꿇려서 토색질을 할 텐가. 하하하."

그러나 한편에서는 오히려 근심하는 빛을 띠고 수군댄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길래 저같이 광주유수를 마구 욕을 뵈나?"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등 뒤에 있는 모양이지. 도대체 누구일까?"

한 사람이 나와서 대답한다.

"세자마마를 시위하는 장사패들이란 말이 있네."

"세자마마의 시위야?"

"그렇다네."

"세자마마의 시위가 광주 바닥으로 어찌해서 내려왔나?"

"세자마마께서 폐세자가 되어서 광주로 추방을 당해 왔다네!"

"그는 그렇고, 장사패들이 왜 유수를 욕뵌단 말인가?"

"귀양 온 폐세자를 박대했다는 것이 원인인가 보네. 그리고 폐세자의 심부름으로 벼룻돌을 서울로 가지러 가는 것을 광주유수가 추방당한 세자의 시위들은 월경을 못한다고 포박령을 내린 데서 발단이 되었다하데."

사건의 발단을 설명해주는 사람은 군노사령이나 육방관속과 연결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앞으로 귀결이 어찌 될지 구경할 만한 일이로군."

구경꾼들은 점점 더 백절치듯 모여들었다. 조무래기 아이들까지 코를 줄줄 흘리며 뒤를 따라 뛰었다. 유수는 부러워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이때 홀연 산성 편에서 나귀를 탄 젊은이가 시자 두어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시자들은 백절치듯 모여 서서 구경하는 군중을 헤치고 나귀를 몰아 장사패 앞으로 나갔다.

큰소리로 외친다.

"세자마마께서 나오신다."

장사패들이 힐끗 뒤를 돌아보니 먼저 종이를 싣고 갔던 동료들이다. 뒤에는 점잖은 젊은 선비가 나귀를 타고 나타났다. 명보가 먼저 두 손길을 마주잡고 인사를 드렸다. 나귀 타고 나온 젊은이는 양녕대군이었다.

"웬일들이냐. 왜들 이리 소란을 떠느냐?"

장사패들은 호랑 감투를 쓴 광주유수를 어깨에 멘 채 몸을 굽혀 대답한다.

"유수란 자가 서울로 벼룻돌을 가지러 가는 저희들을 군노사령과 역졸들을 풀어서 포박을 하려 했습니다. 세자마마의 낯을 본들 이리할 수가 있습니까. 군노사령과 역졸 놈들을 한바탕 패주면서 읍내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랬더니 유수는 무슨 적병이나 쳐들어오는 듯 구군복을 입고 육방관속을 풀어서 저희들을 또다시 잡으려 했습니다. 세자마마의 명령을 무시하고 상감마마의 하교라고 거짓말을 해서 소인들을 잡아 가두려 하니 이따위 역적을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본보기를 내기 위하여 호랑 감투를 씌웠습니다."

장사패들은 분하고 억울한 일을 양녕한테 호소했다.

양녕대군은 장사패들의 호소하는 말을 듣자 소리를 높여 껄걸 웃는다.

"하하하. 너희들 너무나 지나치게 유수를 욕뵈는구나. 사람들이 백절치듯 모인 장터 바닥에서 너무나 과하다. 내려놓고 의관을 갖다 입혀라."

장사패들은 양녕대군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유수를 호랑 감투 씌운 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광주유수는 호랑 감투를 쓴 바지 속에 얼굴이 파묻혀 있었다. 음성으로 양녕대군이 나타난 것을 짐작했다. 부끄럽기 한량없었다. 아랫도리는 그대로 새빨간 알몸뚱이다. 양다리 사이로 밑천이 다 드러났다. 몸을 피해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장사패들은 유수를 땅에 내려논 채 뒤집어 씌운 바지 허리를 바싹 붙들고 있다. 양다리 사이로 밑천이 덜렁하고 흔들렸다. 광주유수는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고 싶었으나 양손이 호랑 감투 쓴 바지 속에 파묻혀 있으니 양다리 사이에 있는 사타구니를 가릴 도리가 없었다. 뒤집어쓴 바지 속에서 몸만 바둥거리고 있었다.

"어서 동헌으로 들어가서 유수의 의관을 가지고 오너라."

양녕대군은 명보한테 명령을 내렸다. 명보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삼문 안 동헌으로 들어갔다. 급히 내아에 기별해서 옷, 갓을 토인한테 들려가지고 나왔다. 이 동안에 구경꾼들은 더욱더 몰려들었다.

"누구냐, 저 젊은 선비가?"

"아마 폐세자인 양녕대군인가보다."

한 사람이 대답했다.

"풍채가 좋구나."

"좋고말고, 어떤 분이라고 공자왕손이 아니냐."

"공자왕손이면 이만저만한 공자왕손인가. 세자마마시다."

이같이 지껄였다.

양녕대군은 명보가 유수의 의관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자 장사패들한테 분부했다.

"호랑 감투를 벗겨라!"

장사패들은 유수의 머리 위에 거꾸로 씌운 바지를 내렸다. 시뻘겋게 드러났던 두 다리와 사타구니가 바지통으로 가려지고 광주유수의 상투를 틀어 올린 낯짝과 시뻘건 웃통이 드러났다. 유수의 눈에 양녕대군의 동탕한 얼굴이 비쳤다. 백절치듯 모여 구경하는 장꾼과 남녀노소 백성들의 웅성대는 모습이 보였다. 유수는 부끄러웠다. 얼굴이 벌겋게 무안에 취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양녕은 빙그레 웃으며 광주유수를 바라보았다. 명보에게 분부한다.

"웃통에 저고리를 입혀서 몸을 가려주어라."

명보는 양녕의 분부대로 젖통이 드러난 광주유수의 몸에 저고리를 걸쳐주었다.

"허리띠와 대님을 치게 해라."

광주유수는 부리나케 명보가 던져준 허리띠와 대님을 주워서 바지춤을 끌어올리고 요대를 띠고 대님을 맸다. 양녕은 또다시 분부한다.

"웃옷과 갓이며 행전을 가지고 왔느냐?"

", 등대했소이다."

"행전을 내주어라."

명보는 유수 앞에 행전을 내던졌다. 유수는 발을 행전 통 속으로 끼워 다리에 끈을 매었다.

"도포를 주어라."

양녕은 다시 분부를 내렸다. 명보가 도포를 띠 얼러 유수 앞에 던졌다. 광주유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 도포를 입고 도홍띠를 가슴에 눌러 띠었다.

"탕건과 갓을 내주어라."

양녕은 다시 분부했다. 명보는 탕건과 갓만은 던져주지 아니하고 유수 앞에 놓았다. 탕건과 갓은 벼슬하는 사람에게 임금이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유수는 얼른 탕건과 갓을 머리 위에 썼다. 비로소 양녕대군을 향하여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삼주 오겹 둘러서서 구경하는 장꾼과 백성들은 양녕대군께 넙죽 절을 올리는 광주유수의 모습을 보자 모두 다 킬킬거리며 웃었다. 천착한 유수의 꼴이 가소로웠던 때문이다. 양녕은 서 있는 채 잠깐 허리를 굽혀 광주유수의 절을 받았다. 광주유수는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양녕의 앞에서 뒷걸음질을 쳐서 서너 걸음 밖으로 물러섰다. 양녕은 유수한테는 말하지 아니하고 명보와 장사패들을 향하여 점잖게 꾸짖는다.

"너희들, 이것이 무슨 해거냐. 광주유수를 조인광좌 만백성 앞에 호랑 감투를 씌우다니 이것이 무슨 철없는 짓들이냐."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하여 부하들을 꾸짖었다. 백절치듯 모여서 있는 구경꾼들은 귀를 기울여 들었다. 명보가 앞에 나와 양녕께 아뢴다.

"소인들은 세자마마의 명을 받자와 큰 벼룻돌을 장에서 구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분부하신 큰 벼루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동궁에서 쓰시던 벼루를 가지고 오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옵고 서울로 향하여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리하온데 돌연 군노사령과 역졸들이 저희들을 잡으로 쫓아왔습니다. 저희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광주유수가 저희들을 잡는 것은 곧 저하마마를 우습게 보고 하대하는 일이나 매일반이올시다. 어찌 분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세자마마의 체통을 보아서라도 광주유수의 명령으로 저희들을 잡으려 하는 군노사령들한테 잡힐 수는 없었습니다. 오랏줄을 던지는 군노사령을 대항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또다시 군교는 역졸들 수십 명을 풀어 가지고 와서 다시 저희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이리하여 저희들은 역졸들을 쫓아서 읍내까지 들어갔더니 유수는 무슨 변란이나 난 듯 칼 차고 동개 메고 구군복 입고 육방관속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저희들을 포박하려 했습니다. 폭력으로 나오는 자에게는 힘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방관속들을 힘으로 물리치고 유수는 호랑 감투를 씌웠습니다."

춘방사령 명보는 분함을 못 이기는 듯 다시 계속해서 아뢴다.

"호랑 감투를 유수한테 씌운 것은 너무나 추세를 하고 잔인무도한 그를 징계하자는 일이옵고 다른 뜻은 없사옵니다. 황공하옵게도 저하께옵서 이같이 친히 임어하실 줄은 꿈 밖이었습니다. 황공만만하옵니다. 굽어 통촉하시기 바라옵니다."

양녕이 명보의 아뢰는 말을 듣자 장사패들을 향하여 타이른다.

"너희들의 말을 들으니 정상을 짐작하겠다. 그러나 한 고을을 소란케 한 죄는 면치 못하리라."

점잖게 꾸짖은 후에 양수거지하고 서 있는 광주유수를 향하여 언성을 높여 꾸짖는다.

"듣거라, 광주유수야. 내 비록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네 곳에 와서 잠시 기유하는 몸이 되었다마는 네 어찌 이다지 나를 박대하느냐. 네가 내 사람들을 포박하려 한 것은 곧 나를 포박하려 하는 것이나 매일반이다. 네 어찌 나를 포박하느냐. 그야 나라에는 국법이 엄연히 있다. 아무리 왕자라 하나 국가의 법을 어긴 자라면 포박 아니라 죽여도 좋다. 그러나 나는 국법을 어긴 일이 없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싫어서 스스로 세자의 자리를 동생한테 전하고 강산풍월을 즐기면서 한일월을 보내기 위하여 이곳으로 온 내 몸이다. 나는 평소에 글씨 쓰기를 좋아했다. 산성으로 내려온 후에 글씨를 쓰기 위하여 내 사람을 장터로 보내어서 벼룻돌을 사오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 애들의 말을 들으니 큰 벼루가 이곳에 없어서 서울로 벼루를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한다. 어찌하여 내 부하를 잡으려 했느냐?"

양녕은 준엄하게 광주유수를 꾸짖는다. 장터에 백절치듯 둘러서 있는 장꾼과 백성이며, 심지어 육방관속 군노사령까지 비로소 양녕의 풍채 좋은 모습과 씩씩한 음성을 듣고 광주 읍내가 소란했던 까닭을 알았다. 모두 다 광주유수의 각박한 행동을 멸시하고 양녕대군의 호호탕탕한 인격을 숭배하는 생각이 가슴 안에 물결쳐 일어났다. 백성들은 평소에 광주유수의 가렴주구하는 행동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광주유수를 향하여 울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광주유수는 양녕의 타이르는 꾸지람을 듣자 고개를 숙이고 우뚝 서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없다. 마음속에는 아직까지 꼬장꼬장한 준치 가시같이 빳빳한 생각이 들어 있는 때문이다.

"왜 대답이 없느냐?"

양녕은 소리를 높여 묻는다. 양녕도 차차 부아가 났다.

"어찌해 대답을 아니하느냐. 무슨 까닭으로 내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서 포박 명령을 내렸느냐? 부하에게 포박 명령을 내린 것은 곧 나를 포박하는 것이다. 내가 너한테 무슨 죄를 지었기에 포박 명령을 당해야 하느냐?"

양녕의 꾸지람 소리는 점점 격했다.

"까닭이 있습니다."

광주유수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말했다.

"까닭을 대어라!"

양녕의 음성은 더욱 높았다.

"대군께서는 지금 추방을 당해 나오셨습니다."

양녕대군의 허파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양녕의 눈썹이 노기를 띠어 높이 흔들렸다.

"추방을 당한 분은 왕명과 국법으로 거주를 제한당하고 있습니다. 맘대로 월경을 못하는 법이올시다."

"그래서 어찌했단 말이냐?"

"대군의 부하는 곧 대군과 매한가지올시다. 맘대로 월경을 못 합니다. 그리하여 대군방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가는 것을 잡으로 한 것입니다."

광주유수는 빳빳이 서서 자기의 심경을 고했다. 양녕은 불같이 일어나는 화기를 참았다.

"듣거라. 내가 비록 네 말투대로 거주를 제한당한 왕자라 하자. 내가 도망을 쳐서 월경한 것이 아니고 나는 의연히 광주 네 고을에 있지 아니하냐. 내 부하들이 설혹 월경을 했다 해도 역적모의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려는 벼루를 구해가지고 도로 이곳으로 오려고 한 일이 아니냐.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덮어놓고 포박을 하려한 것은 너무나 인정머리 없는 짓이 아니냐?"

광주유수는 그래도 빳빳한 채 굽히지 아니했다.

"국법에 죄인은 월경뿐 아니라 왕래를 못 하는 법이올시다."

양녕은 대로했다.

"이놈, 내가 죄인이냐?"

양녕의 호통에 호응해서 장사패들은 두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다. 광주유수는 가시가 센 사람이었다. 섣불리 대답했다가는 원 노릇을 못하고 쫓겨가겠다고 생각했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대담하게 대답했다.

"나리께서는 죄인이올시다."

양수거지를 한 채 빳빳이 서서 대답했다.

"이놈아, 내가 죄인야."

양녕은 호통을 쳤다.

"그렇습니다. 죄인이올시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우르르 광주유수한테로 달려들려 했다. 양녕은 명보와 장사패들을 제지하고 다시 유수한테 묻는다.

"내가 죄인인 내력을 대보아라!"

유수는 기왕 벌인 춤이었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나리께서 비록 그렇게 생각하시지 아니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나리께서는지금 폐세자가 되셨습니다. 폐세자만 되신 것이 아니라 광주 이곳으로 추방이 되셨습니다. 추방이란 곧 상감의 명령으로 쫓아낸 것이니 죄인이 분명합니다."

젊은 양녕은 부아가 터졌다. 그러나 잠깐 치밀어 올라오는 화기를 눌렀다.

"폐세자가 된 것은 내가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싶어서 내놓은 것이다. 내가 죄를 짓고 폐세자가 된 것은 아니다."

유수는 주저치 않고 대답했다.

"그것은 나리의 혼자 생각이십니다. 상감께서는 종묘와 사직에 고하시고 만천하 백성들한테 반포를 하셨습니다. 세자가 덕이 없어 폐하고 새로 세자를 두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올시다. 제가 비록 나리께서 억울하게 누명 쓰신 것을 알았다. 해도 상감의 명령을 받는 관리로서는 나리를 죄인 취급할 수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나리의 하인들을 월경 못 하도록 한 것입니다."

양녕은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러나 패기를 한 번 아니 뵐 수 없었다. 만약 광주유수한테 고개를 숙여 굽히는 날은 남한산성 구석에서도 부지를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장터의 구경꾼들은 손에 땀을 쥐고 양녕대군과 광주유수의 수작을 듣고 있었다. 양녕은 돌연 벽력 같은 소리로 호령을 내린다.

"광주의 육방관속들이 어디 있느냐?"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들이 양녕 앞으로 뛰어왔다. 양녕은 영을 내린다.

"나는 양녕대군이다. 증경세자의 자격으로 죄인을 치죄해야 하겠다. 동헌에 가서 형틀과 곤장을 가지고 나오너라."

서슬 푸른 명령을 내렸다. 육방관속들은 상감의 큰 아드님인 양녕대군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형방이 앞을 서고 여러 아전들이 뒤를 따라서 집장사령들을 동원하여 형틀과 곤장을 내왔다. 양녕은 다시 호령을 내렸다.

"광주유수를 둥그렇게 형틀에 매달아 놓아라!"

별안간 뜻밖에 내리는 호령에 육방관속들은 어찌할지 몰랐다. 상전인 광주유수를 아전인 육방관속들이 형틀 위에 매달아 놓을 수는 없었다. 모두 다 면면이 얼굴만 쳐다보며 망지소조했다. 백절치듯 한 구경꾼들은 더한층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손에 땀을 쥐고 침을 삼키며 하회가 어찌 될 것인가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광주유수를 형틀에 매달아라!"

양녕은 잼처 호령을 내렸다. 아전들은 벌벌 떨면서 광주유수의 눈치만 바라본다. 양녕은 다시 호령을 내렸다.

"만약에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관속이 있다면 먼저 벌을 당하리라."

육방관속들은 하는 수가 없었다. 광주유수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광주유수도 하는 수가 없었다. 아무런 저항을 아니하고 오뚝 서 있을 뿐이었다. 형방이 광주유수의 갓을 벗기고 이방이 웃옷을 벗겼다. 예방은 저고리를 벗기고, 병방은 호랑 감투를 썼던 바지를 벗겼다.

"둥그렇게 형틀에 매달아라."

양녕의 호통이 또 떨어졌다. 관속들은 광주유수를 형틀 위에 둥그렇게 매달아 놓았다. 양녕은 비로소 광주유수를 수죄한다.

"듣거라, 광주유수야. 너는 삼강오륜의 예법을 모르고 단지 목전의 이만 다투어 추세를 잘하는 위인이다. 너는 나를 죄인이라 했다. 네 감히 어찌 나를 죄인이라 하느냐. 나는 전하의 장자다. 아무런 패륜의 짓을 한 일이 없다. 너는 장상을 몰라보고 추세 속으로만 급급하니 네 어찌 한 고을의 관장이 되겠느냐. 곤장 삼십 도를 맞아라."

형방이 소리쳐 외친다.

"광주유수를 불경죄로 삼십 도를 쳐라."

집장사령들은 형방의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볼기 까고 엎드린 광주유수한테 곤장을 쳤다. 광주유수는 부끄럽고 아팠다. 다리를 버둥거리며 곤장을 맞았다. 삼주오겹 둘러서 있는 장꾼과 구경꾼들은 비로소 양녕대군의 위력을 알았다. 광주에서 왕 노릇을 하는 유수의 볼기를 치는 것을 보자 혀를 홰홰 내둘렀다. 삼십 도 때리는 매가 건성으로 떨어졌지만 광주유수의 곤장 맞는 광경은 장사패들한테 호랑 감투를 썼던 백 배 가는 욕이었다. 광주유수는 아픈 매보다도 군중 앞에 볼기를 까고 부하들인 육방관속과 집장사령한테 매를 맞는 것이 더 분하고 부끄러웠다. 뿐만이 아니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백성들 앞에서 매를 맞는 것이 더 분하고 부끄러웠다. 집장사령들이 광주유수 때리는 매는 건성으로 때렸다. 소리만 치고 건성으로 떨어졌다. 볼기는 때리지 아니하고 땅을 때렸다. 곤장이 몇 개인지 부러졌다. 이럴 때마다 광주유수는 '에구구' 소리를 쳤다. 양녕은 집장사령들이 매를 허청으로 때리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 시치미를 뗐다. 매가 십여 도에 이르자 양녕은 형틀 위에 있는 광주유수의 매를 그치게 하고 수죄를 다시 한다.

"광주유수 듣거라. 내가 네 고을에 내려온 후에 너한테 지공을 바란 일도 없다. 쌀도 내가 가지고 온 쌀로 밥을 지어 먹었고, 나무도 내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서 해 때었다. 내려오는 그날부터 짠지쪽 한쪽 관가에서는 보낸 일이 없다. 나는 오늘 살림제구를 사고 마음을 가다듬어 글씨공부를 하기 위하여 벼루를 사 오라고 사람을 장터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내 부하들은 벼루를 구하다가 이 바닥에서는 구할 도리가 없어서 서울로 가려 했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너는 월경을 한다고 내 부하를 포박하려 했으니 너무나 너는 인정도 없고 추세만 하는 소인 놈이다. 듣거라! 내 부하를 포박하는 것은 나를 포박하는 것이다. 내가 너한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를 포박하려 드느냐? 내가 역적모의를 했단 말이냐, 나라를 뒤엎을 반란을 일으켰느냐? 어찌해서 나를 포박하려느냐?"

양녕은 일부러 모든 사람이 들어보라고 큰 소리로 광주유수를 수죄해 꾸짖었다. 삼주오겹 둘러섰던 구경꾼들은 비로소 광주유수가 양녕대군한테 욕을 당하는 원인을 알았다.

"너무나 박했군."

"간특한 자이지."

"아무리 폐세자가 되었다 한들 상감의 장자 대접을 그렇게 할 수가 있나."

"세자빈마마도 오셨다는데 마중까지 나갔다면서 짠지쪽 한 쪽 보내지 아니하고 나무 한 단도 주선을 아니해 드렸다니 그럴 수가 있나?"

"그러기에 추세하는 소인 놈이라고 양녕대군께서 지금 말씀을 하시지 아니했나."

", 몹쓸 위인이로군."

구경하는 백성들은 이같이 주고받으며 광주유수를 욕했다. 양녕은 명보와 장사패들한테 분부를 내린다.

"너희들은 문 안으로 들어가서 내가 쓰던 큰 벼루를 가지고 나오너라. 금부 당상이나 영의정이라도 벼루를 가지러 들어간 너희들을 월경죄로 몰지는 못할 것이다!"

양녕은 명보와 장사패들한테 위엄 있는 분부를 내렸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명을 받들어 물러간다. 양녕은 다시 광주유수에게 언성을 높여 묻는다.

"벼루를 가지러 가는 것이 역적모의하러 가는 일은 아니지?"

광주유수는 풀이 죽었다.

"."

한마디 대답을 했다. 명보와 장사패들이 군중을 헤치고 벼루를 가지러 서울로 향한 후에 양녕은 육방관속에게 명령을 내린다.

"매 삼십 도를 다 때릴 것이나 특별히 낯을 보아서 용서한다. 유수를 형틀에서 내려 동헌으로 들어가게 해라."

말을 마치자 양녕대군은 나귀를 돌려 산성으로 향했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서울로 벼룻돌을 가지러 들어갔으니 양녕을 모시는 시자는 종이를 가지고 산성으로 올라갔다가 양녕과 함께 내려왔던 시자뿐이었다. 양녕이 나귀 머리를 돌려서 나오니 백절치듯 한 구경꾼들은 물결 흩어지듯 좌우 옆으로 갈라져서 양녕의 돌아가는 길을 터주었다. 유유하게 태연한 태도로 나귀 머리를 돌려서 나가는 양녕의 호걸스런 모습을 구경꾼들은 바라보자 마음속으로 탄복하고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잘생겼구나."

"일대 인걸이다."

"장래 임금이 될 세자의 자리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렸으니 기막힌 인물이 아닌가."

"그야말로 부귀영화를 뜬구름장같이 아는 사람이로구나."

제각기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왕세자였던 양녕대군의 풍채를 바라보았다. 한 곳뿐 아니었다. 십 리에 벋쳐서 웅성대던 구경꾼들은 좌우편으로 물결 헤어지듯 갈라져서 길을 비키면서 양녕의 가는 모습을 발돋움해서 바라본다. 머리에 쓴 갓은 귀인들이 쓰는 윤이 번지르르 흐르는 은조사싸개 음양립이 아니다. 베로 싸개를 하고 검은 옻칠한 포립을 썼다. 시골 사람이 장에 갈 때 쓰고 나오는 바로 그와 같은 갓이었다. 웃옷으로 입은 도포도 화사한 비단 도포가 아니다. 촌 선비나 생원님네가 입는 명도포다. 갓끈도 화려한 화대모 갓끈이나 적대모 갓끈이 아니다. 까만 수건으로 접어 꿰맨 헝겊 갓끈이었다. 그러나 풍채만은 속일 수 없는 귀인의 모습이었다. 이마는 넓고, 눈은 어글어글 맑고 컸다. 광채가 있었다. 코는 꿋꿋하고 콧방울이 큼직했다. 고집이 무척 세고 마음이 무한대로 클 것 같았다. 입술은 꽉 다물었는데 턱 아래는 성긴 수염이 아름답게 내려서 바람에 흩날렸다. 여기다가 살갗은 옥같이 희고 깨끗했다. 십 리에 뻗쳐서 구경하는 남녀노소는 한탄하는 소리를 발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일국의 제왕의 아들인데 저토록 검소할 수가 있나."

"참말 격이 높은 분이다. 저렇게 소탈하고 소박할 수가 있나."

"저린 분을 광주유수가 박대하다니 죽일 놈이지."

양녕을 찬양하는 소리는 빗발치듯 했다.

 

도망가는 광주유수

구경꾼들은 양녕대군이 남한산성으로 올라간 후에도 헤어지지 아니했다. 호랑 감투를 쓴 후에 다시 볼기까지 맞은 광주유수의 우스꽝스럽고 가련한 꼴을 계속해서 구경하려는 까닭이다. 양녕이 돌아갔건만 구경꾼들은 흩어지지 아니하고 백절치듯 모여 있었다. 광주유수는 육방관속들이 풀어주는 결박을 풀고 형틀에서 내렸다. 웅성대는 군중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창피해서 배겨날 수가 없었다. 이방, 호방이 받들어 올리는 저고리와 바지를 꿰어 입고 비로소 새빨갛게 드러난 알몸을 가렸다. 토인이 받들어 올리는 탕건과 갓을 썼다. 삼주오겹 둘러싸 있는 백성들은 여전히 떠들어대면서 킬킬거려 웃고 광주유수의 옷을 꿰어 입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주유수의 얼굴빛은 무안과 부끄러움과 분노가 뒤섞여서 붉으락푸르락, 누르락 칠면조의 빛깔같이 변했다. 육방관속들은 광주유수가 타고 갈 은안백마를 준비했다. 광주유수는 부끄러웠다. 겹겹이 싸인 구경꾼들을 헤치고 은안백마로 동헌까지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이 꼴에 길호사를 하게 됐느냐? 사인교를 대령해라."

육방관속들은 유수의 영을 어길 수가 없었다. 은안백마를 뒤로 몰리고 사인교를 대령해놓았다. 구경꾼들은 눈치를 챘다.

"부끄러워서 말을 타고 가지 못하고, 상판을 감추고 사인교를 타고 가려 하는구나."

"철면피 같은 작자도 부끄러운 양심이 있누나."

"저러고 어찌 앞으로 백성들을 지휘하는 목민지관이 될 수 있느냐."

구경꾼들은 모두 다 한 마디씩 지껄이며 광주유수를 비웃었다. 광주유수는 사인교 위에 올라앉자 휘장을 늘이고 들창 문을 닫아서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캄캄절벽을 만들어놓았다.

"어서 빨리 동헌으로 들어가자!"

부아 끓는 소리로 호통을 질렀다. 네 사람의 군노사령배들은 번쩍 사인교채를 들어서 어깨에 메었다. 사인교는 구경꾼을 헤치고 나가려 했으나 구름같이 모여든 사람 물결은 길을 막고 용이하게 흩어지지 아니했다. 양녕대군이 산성으로 나귀를 타고 돌아갈 때는 백성들이 그를 존경해서 물결 흩어지듯 좌우편으로 쫙 갈라서면서 길을 비켜주었는데, 유수가 사인교를 타고 돌아갈 때는 얕잡아보아서 길을 얼른 터주지 아니했다.

"물러가거라. 저리 비켜라."

사인교를 멘 사령들과 채를 붙잡고 호위해 나가는 군노사령들은 목청을 돋우어 길을 비키라 했으나 용이하게 비켜주지 아니했다. 사인교는 점점 뒷걸음질을 쳤다.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광주유수는 사인교 속에서 사령들을 꾸짖는다.

"왜 나가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느냐?"

"사람들이 길을 비키지 아니해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유수는 부아가 터졌다. 노기가 충천된 광주유수는 사인교 속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육모방망이는 두었다가 어느 때 쓰려 하느냐. 구경꾼놈들을 육모방망이로 두들겨 패주어라. 눈에 불이 나도록."

이방, 병방이 사령들에게 영을 내린다.

"물러가지 않는 구경꾼들을 육모방망이로 패주랍신다."

군노사령들은 광주유수의 영을 받고 구경꾼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길을 비키지 않는 놈은 육모방망이로 두들겨주랍시는 사또의 분부가 내리셨다."

군노사령의 호통 소리를 듣자 구경꾼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놈아, 누구한테 놈자를 붙이느냐."

"호랑 감투를 쓰고 볼기까지 맞은 사또가 누구를 두들겨 패준다고 하느냐."

"부끄러운 줄은 알아서 버젓하게 말을 타고 가지 못하고, 낯짝을 감추노라고 사인교를 타고 가는 주제에 누구들 두들겨주라느냐."

구경꾼들은 떠들어대면서 얼른 길을 비키지 아니했다. 철없는 군노사령이 눈을 부릅뜨고 육모방망이를 높이 들었다. 앞에서 길을 비키지 아니하고 떠들어대는 장꾼 한 사람의 어깨를 부서져라 하고 내리쳤다. 불행하게도 군노사령의 육모방망이를 얻어맞은 사람은 보부상이었다. 어깨가 으스러지도록 매를 맞았다. '에쿠' 소리를 치며 땅에 쓰러졌다. 같은 동료 보부상이 쓰러지는 보부상을 붙들어 일으켰다. 구경꾼 틈에 섞여 있던 보부상떼가 일제히 앞을 헤치고 쏟아져 나왔다.

"군노사령놈들이 죄 없는 백성을 두들겨 팬다. 이놈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주어라."

보부상들은 '' 소리를 치며 몰려들었다. 수효가 백인지 천인지 몰랐다. 벌떼같이 일어났다. 모두 다 비호처럼 날쌔고 기운이 억센 천하장사들이다.

"군노사령들의 육모방망이를 뺏어서 두들겨 패주어라."

"그까짓 군노사령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가마 속에 들어앉아 있는 유수를 잡아 내려라."

"준민고택하는 유수놈의 아가리에 똥물을 퍼서 넣어라."

"군노사령놈을 패줄 것 없이 유수 놈을 패주어라."

보부상들은 ''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다. 일제히 군노사령들의 육모방망이를 팔을 비틀고 뺏었다. 닥치는 대로 육방관속과 군노사령들을 두들겨 패주었다. 군노사령들은 대가리가 터지고 팔이 부러졌다. 어마 뜨거라 하고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난다. 보부상의 장두가 소리를 친다.

"유수가 타고 있는 가마를 뒤엎어라!"

보부상들은 와짝 사인교채를 들었다. 검불 던지듯 메쳐버렸다. 사인교 속에 휘장을 치고 들어앉았던 광주유수는 사인교가 뒤엎어지는 바람에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광주유수는 보부상패들한테 납작 엎드려 싹싹 빌었다.

"그저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광주유수는 육방관속과 군노사령을 두들겨 패주고 사인교를 들어메어친 사람들이 보부상패인 것을 비로소 알았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며 빌었다. 보부상패는 원래 태조대왕 때부터 임금이 인허해준 부상패들이다. 나라에 난이 있으면 이들을 이용했다. 그들은 단결력이 강했다. 사발통문이 한 번 돌면 팔도의 등짐장수가 접을 지어 일어나는 단체다. 국가에서는 그들의 단결력을 권장하고 이용했다. 수령방백들의 발호하는 권력과 세도도 그들의 단결된 정의의 힘 앞에는 안색이 없었다. 부상패 두목은 싹싹 빌고 있는 광주유수를 향하여 큰 소리로 꾸짖는다.

", 너무나 무례하여 양녕대군을 함부로 박대했고 그리고도 또 부족해서 무고한 백성을 두들겨 패주려 했으니 너무나 권력을 남용했다. 마땅히 천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부상패 장두는 추상같이 광주유수를 수죄했다.

구경하는 군중들이,

"옳소!"

하고 고함을 쳤다. 부상패 장두는 다시 유수를 꾸짖는다.

"아까는 양녕대군께서 때리시는 볼기를 맞았으니 이번에는 보부상의 볼기를 좀 맞아보아라."

광주유수는 창자가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그저 잘못했습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줍시오."

부상패 장두는 광주유수의 비는 꼴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넙죽 엎드려 빌고 있는 광주유수의 궁둥이를 발길로 찼다.

"더럽다! 어서 동헌으로 돌아가라."

광주유수는 살았다고 생각했다. 벌떡 일어나 구경꾼을 헤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음질을 쳐서 달아났다. 도망쳐 달아나는 광주유수의 앞에는 육방관속이며 군노사령이 남아 있을 까닭

이 없었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백절치듯 모여 서 있는 군중을 헤치고 달아나는 바람에 갓양태가 떨어지고 도포 자락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헐레벌떡 개가죽신을 거꾸로 끌면서 정신없이 달아나 삼 마장 가량이나 되는 동헌 삼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 꼴을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고함쳐 웃는 소리는 광주 읍내가 떠나갈 듯했다.

"하하하하하"

"허허허허"

이날 밤에 광주유수는 보따리를 싸가지고 서울로 향하여 솔가도주를 했다. 한편 명보와 장사패들은 서울로 들어가 동굴을 찾았다. 이때 서울서는 금부도사와 금부 나졸들이 경안 역말에서 광주로 추방되어 가는 양녕대군의 뒤를 밟았다가 주막에서 장사패들한테 봉욕을 당하고 쫓겨온 후에 금부 당상한테 변을 고했다.

 

황희의 역간

 

금부 당상은 자의로 이 일을 처단할 수 없었다. 곧 대궐로 들어가서 금부도사가 양녕의 하인들한테 봉변당한 일을 고했다.

"양녕대군을 광주로 호송하던 금부도사가 경안 역말 주막에서 양녕의 시위하는 하인들에게 욕을 당하여 의관이 파열되고 금부 나졸들은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져서 쫓겨왔습니다. 감히 탑전에 아뢰어 처분을 바라옵니다."

태종은 금부 당상의 아뢰는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

"폐세자가 되어 추방을 당한 양녕이 국법을 무시하고 호송하는 금부도사와 나졸들을 두들겨 패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했다 하니 가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즉각 대신들을 입시시켜라."

명소하는 어명이 떨어지니 빈청에서는 황희 황정승 이하 여러 대신들이 입시했다. 태종은 대신들을 향하여 하문한다.

"왕명을 받들어 호송하는 금부도사의 의관을 파열하고 금부 나졸들을 구타하여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져서 쫓겨왔다 하니 양녕의 완패한 행동은 점점 더 망유기극하다. 대군의 칭호를 박탈하고 서인으로 만들어 삼수갑산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라."

태종의 진노한 음성은 벼락불덩이가 굴러떨어지는 듯했다. 대신 황희가 아뢴다.

"금부 당상의 아뢴 말은 금부도사의 고하는 한편 송사만 듣고 아뢴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금부도사가 의관이 파열되고 금부 나졸의 머리가 터져 온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소신이 한 번 금부도사와 나졸들을 불러 물어본 후에 다시 아뢰겠습니다. 잠깐 진노하심을 그치시옵소서."

"나라에는 기강이 있는 법이다. 기강이 해이하다면 국사가 어지러운 법이다. 임금의 큰아들이라 해서 방약무인한 태도를 취한다면 나라의 질서를 어찌 유지할 것인가. 엄하게 사실하여 보고케 하라."

황정승은 모든 대신과 금부 당상과 함께 빈청으로 나갔다. 곧 금부도사를 불러서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해서 양녕대군의 하인들한테 의관파열을 당하고 돌아왔는가?"

"나졸 한 놈이 경안 역말 주막에서 폐세자의 방을 엿보다가 오줌 누러 나온 하인한테 들켜서 패싸움이 벌어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황희 황정승은 깜짝 놀랐다.

"엿보다니, 대군의 처소를 엿보았단 말인가?"

", 그러했습니다."

황희 황정승은 잠깐 눈을 감고 무엇을 한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묻는다.

"무슨 일로 대군의 처소를 엿보았느냐?"

"무엇을 하고 계신가 엿보았습니다."

"저런 변이 있나. 빈마마께서도 계신 방을 어찌해서 엿보았단 말인가?"

"정면으로는 대군의 행동을 감시할 수 없으므로 밤을 타서 나졸들이 엿본 것입니다."

"말이 되는 소린가. 금부도사와 나졸들이 양녕대군을 호종했다면 왜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호종을 아니하고 염탐꾼모양 밤에 내실을 엿보았단 말인가."

"내실을 엿본 것이 아니라 양녕대군과 하인들이 술을 자시는 주막방을 엿본 것입니다."

황정승은 비로소 양녕이 하인들과 호탕하게 술을 마신 것을 짐작했다.

"내실이나 외실이나 엿본 것은 틀림없는 노릇인데 왜 정면으로 호위를 해 모시지 아니하고 밤중에 염탐을 했단 말인가."

금부도사는 금부 당상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정면으로 배행을 하지 말고 미행을 하라는 위의 분부가 있어 그리했습니다."

황정승은 금부 당상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소?"

", 도사한테 그리 지시했습니다. 양녕대군의 성격이 너무나 격하시니 금부도사가 호송을 한다면 혹시나 불쾌하게 생각하시오 야료를 치실까하여 그리 지시하였습니다."

황희 황정승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것은 정도가 아니지. 정정당당하게 말씀을 드리고 호종했더라면 그같은 일이 생기지 아니했을 것을. 마치 무슨 역적모의나 하는 것을 정탐하듯 그분의 행동을 엿보았으니 하인배들이 노하지 아니할 리가 있나. 그것은 자취지화야. 조금도 하인을 나무라고 대군을 원망할 도리가 없소."

황희 황정승은 또렷하게 판단을 내렸다. 금부도사는 고개를 숙이고 당상은 무색하게 앉아 있었다. 황정승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금부도사, 생각해보오. 호송과 압송이 다른 거야. 양녕대군은 폐세자는 되었을망정 현직 대군이 아닌가. 광주로 보낸 것은 추방이지 죄수로 가운 것은 아니란 말요. 양녕대군께 '위에서 호위해 모시고 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똑바로 아뢰었던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을 잘못 처사했소."

영의정 황희는 점잖게 타이르고 빈청에서 일어났다. 모든 대신들도 황정승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황희 황정승은 곧 어전에 올랐다.

"진상을 사실했습니다. 이번 일은 양녕의 죄나 하인들의 허물이 아니오라, 금부에서 잘못 처사를 했습니다."

허두를 꺼낸 후에 자세한 경위를 아뢰었다. 태종의 역정은 적이 풀렸다. 그러나 아직도 양녕에 대하여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태종은 황정승한테 분부를 내린다.

"금부도사가 정면으로 호종을 아니한 것은 양녕의 성격이 너무나 완패하므로 미리 겁을 집어먹고 뒤를 밟은 것이다. 금부의 정상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양녕의 하인들은 왕자의 자리를 자세하고 관리를 욕보였으니 그것은 관명을 무시한 것이다. 양녕의 하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엄하게 다스리라."

황희 황정승은 얼굴빛을 화하게하여 다시 아뢴다.

"법은 경위를 따라서 공정하게 처리해야만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이번 금부도사의 행동은 호행해야할 것을 압송으로 잘못 생각했고, 광명정대하게 배행할 것을 마치 역적질을 모의하는 자를 잡아내듯 숨어서 행동했으니 허물은 금부에 있고 양녕의 하인한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황희 황정승은 계속하여 아뢴다.

"만약에 양녕의 하인들을 징치한다면 금부의 당상관과 금부도사를 먼저 파직시켜서 국법을 악용한 죄상을 밝혀놓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 바라옵건대 성상께오서는 잠깐 노여움을 진정하옵시고 불문에 부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한 말씀 아뢰옵니다. 지금 양녕께서는 세자의 자리를 내놓으시고 광주로 추방이 되셨습니다.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심사가 울적할 것입니다. 대군의 하인들을 잡아다가 징치하는 일은 곧 대군이나 대군 부인을 징치하는 것이나 매일반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이 점을 굽어 통촉하시어 사사로이는 부자지간의 정리에 크게 금이 가지 않도록 처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태종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정승한테 분부를 내렸다.

"그럼 경의 말을 들어서 양편을 다 함께 불문에 부치리라. 그러나 양녕의 하인들이 함부로 서울로 드나드는 일이 없도록 엄하게 금부와 포도청에 지시하고 새로 된 세자궁의 주위를 엄중 경계하여 양녕의 하인들이 왕래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하라."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황희 황정승은 어전에서 물러 나온 후에 반청에 나와 금부 당상과 포도대장을 불러서 위의 처분을 전했다. 장신들은 이 뜻을 도사한테 이르고 도사는 서울 안에 있는 나졸과 포도청에 있는 포교들을 풀어서 양녕의 하인들이 서울 안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세자궁을 더한층 호위하여 잡인을 엄하게 경계하라 했다. 이때 새로 세자의 위에 나간 충녕대군은 세자책봉의 의식을 마친 후에 형님 양녕대군이 거처했던 세자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항상 형님 되는 양녕대군의 활달한 도량과 욕심 없는 호호탕탕한 지덕을 사모하고 있었다.

하루는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이 새 세자께 뵙기를 청했다. 새 세자는 두 장신을 불러들였다.

"뜻밖에 장신들이 웬일인가?"

"문후를 드릴 겸 아뢸 말씀이 있어 뵈러 왔습니다."

약관의 젊은 세자는 미소를 머금고 묻는다.

"두 분 대장이 친히 찾아오니 반갑기 한량없소. 무슨 의논할 일이 있소?"

세자의 밝은 눈빛은 빛나면서 아름다웠다.

"전하의 분부로 오늘부터 금위영 군사와 포도청 기찰들이 세자궁을 호위하기로 되었습니다."

"태평세월에 별안간 세자궁은 왜 호위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소?"

금위대장은 금부도사가 나졸들을 데리고 양녕대군을 미행하여 호종하다가 양녕의 하인인 장사패들한테 욕을 당하고 쫓겨온 일이며, 전하가 진노하시어 양녕의 하인들을 모조리 극형에 처단하라 하신 것을 황정승이 간해서 무사타첩이 되었으나, 혹여나 양녕의 하인들이 새로 되신 동궁의 신상에 불공한 일을 일으킬까 해서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세자궁을 극진히 보호하고 양녕 하인들의 서울 출입을 엄하게 금하라는 분부가 내린 것을 자세히 고했다. 세자는 금위대장의 보고를 듣자 소명한 얼굴로 두 장신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것은 금부도사의 불찰이오그려. 어찌 대군을 미행할 수 있소. 더구나 아닌 밤중에 대군의 사처하신 방을 엿보다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요. 대군은 폐세자는 되셨을망정 나라의 장자이신 의연한 대군이 아니신가. 대군을 역적 다루듯 그분의 행동을 몰래 염탐했다는 일은 어불성설의 일이구려."

세자의 총명한 얼굴에는 개탄하는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새 세자는 다시 개탄한다.

"공연히 아무 일도 없는 일을 불집을 건드려논 것이 아닌가. 양녕께서는 세자 자리를 내놓으시려고 일부러 거칠게 행동을 취하시어 폐세자가 되신 분인데 세상에서는 어찌 그 심경을 몰라주오. 나는 양녕이 나의 형님이라 해서 두둔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오. 나는 그분의 넓고, 어질고, 호연한 기상을 존경하는 사람의 하나요."

세자는 말을 마치자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었다. 두 장신은 고개를 숙여 세자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

"위의 하교가 그러하시다 하니 내 힘으로 어찌하는 수 없소마는 금위영 군사와 포도청 기찰로 세자궁을 호위한다는 일은 공연한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양녕 그 어른이 하인을 시켜서 세자궁을 소란케 할 리가 만무하고 또 양녕의 하인이 자의로 세자궁에 와서 혼란을 일으킬 리가 만무하오, 너무나 지나친 기우라 생각하오."

"소인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마는 엄하신 분부가 계시니 상감의 뜻을 아니 받들 수 없습니다."

두 장신들은 조용히 고했다.

세자는 다시 장신들에게 분부한다.

"두 분 장신한테 부탁하오. 위로 상감의 하교를 어기기 황공하고 아래로 형제지간의 화한 기운을 손상한다는 것도 불가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두 장신은 세자궁을 호위하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말하는 대로 시행해주기 바라오."

"하교를 내려주십시오."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이 대답했다.

"태평성대에 군사를 수십 명씩 풀어서 동궁을 호위한다는 일은 백성들 보기에 불온할 뿐 아니라 승평시대의 기상이라고 할 수 없소. 수문장 정도로 금위영에서 두 사람을 보내주고 포도청에서 기찰 두 사람을 보내서 주위를 살피도록 하라 이르오. 그리하여 모든 일은 나의 처결을 받아서 거행케 한다면 일은 평온하게 될 것이고 남의 눈에 띄지도 아니할 터이니 두 분 대장은 내 청을 들어주겠소? 다만 금위영 군사 두 사람과 포도청 기찰 두 사람을 관장하는 권한은 제각기 해사 장관인 당신들한테 맡기오리다."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은 영특하고 명철한 새 세자의 말을 반대할 수 없었다. 공연히 까닭 없이 많은 군사를 움직여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는 일도 새 세자의 말씀대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세자의 말씀대로 상감의 명령을 받들기 위하여 제각기 두 사람씩 군사와 기찰을 파견시키고 또 이들의 임무를 관장하는 일은 양사 장관의 권한 안에 둔다는 새 세자의 말씀에 두 장신은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새 세자(세종대왕)의 모습

 

두 장신은 새 세자의 분부를 듣고 돌아갔다. 이튿날부터 세자궁에는 본시 있던 수문장 이외에 금위영에서 군교 두 사람이 나와 수문장과 함께 세자궁을 지키고, 포도청에서는 기찰 두 사람이 평복으로 세자궁의 주위를 살피며 밤과 낮으로 수직해서 돌고 있었다. 이때 명보와 장사패들이 광주에서 서울로 들어와서 동궁으로 향해 들어갔다. 명보는 멀리서 동궁의 솟을대문을 바라보자 감구지회를 이길 수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샘솟듯 하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장사패들도 동궁 안으로 드나들면서 그전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은고를 많이 받았던 옛 생각이 일어났다. 모두 다 시름하는 슬픈 얼굴로 세자궁 문 앞에 당도했다. 포도청 기찰이 주위를 살피다가 낯선 장사패 십여 명이 세자궁 앞에 당도하는 것을 보고 급히 뒤를 쫓았다. 기찰은 포도대장한테 양녕대군의 하인들이 혹시 세자궁에 나타나거든 빨리 알리라는 지령을 받았던 것이다. 기찰은 세자궁 앞으로 들어서는 명보와 장사패들한테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누구들인가? 거기 서서 내 말을 듣고 가오."

명보가 앞을 섰다. 눈시울에는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아니했다. 명보는 속눈썹에 성에같이 서린 눈물 흔적을 껌뻑거리면서 대답한다.

"왜 섰으라 하오. 나는 새 세자마마를 뵈오러 동궁으로 들어가는 길이오."

장사패들이 명보의 뒤로 바싹 붙어섰다. 기찰은 위험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로 어데서 왔소? 세자마마를 어찌해서 뵈오려 하오?"

명보는 주저치 않고 대답한다.

"나는 양녕대군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오. 광주에서 왔소. 세자마마께 아뢸 일이 있소."

기찰은 수문장과 금위군사한테 눈짓하고 말했다.

"빨리 다녀올 테니 대장이 오실 때까지는 못 들어가게 하오."

기찰 두 사람은 포도청으로 달렸다. 이때 포도대장은 포도청에서 공사를 결재하고 있었다. 기찰이 급히 들어가 고했다.

"양녕대군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 하면서 눈이 부리부리한 자 십여 명이 지금 동궁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광주에서 왔다 합니다."

포도대장은 깜짝 놀랐다. 일변 금위영에 기별하여 이 사실을 금위대장한테 알리고 말을 달려 동궁으로 향했다. 한편 동궁 문 앞에서는 세자궁의 직속인 수문장이 명보와 장사패들한테 묻는다.

"광주 양녕대군을 모시고 있다 하니 무슨 일로 왔소?"

"새로 되신 세자마마를 뵈러 왔소."

명보가 대답했다.

"무슨 일로 세자마마를 뵈러 왔소?"

"형님 되시는 양녕대군께서 아우님 되시는 세자마마께 전갈을 보내시오. 부탁하시는 일을 말씀드리러 왔소. 친히 뵙고 말씀을 해야 하겠소."

수문장은 명보의 얼굴을 짐작했다. 곧 안으로 들어가 세자께 고했다.

"광주에서 양녕대군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꼭 친히 뵙고 전갈 말씀을 올려야겠다 합니다."

새 세자는 흔연히 대답했다.

"형님께서 사람을 보내셨단 말이냐? 곧 불러들여라."

"한 사람이 아니라 십여 명이올시다."

"좋다. 다 불러들여라."

명보와 장사패들은 수문장의 인도로 세자궁 안으로 들어섰다. 금위영에서 나온 파수 보는 군사들이 있었으나 세자궁의 직속인 수문장이 세자의 분부를 받들어 안으로 들어가니 금위영 군사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렸다. 명보는 장사패들과 함께 세자궁 사랑으로 들어갔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 한 개까지 자기 자신이 몇십 년 동안을 가꾸고 기르고 다루고 만지던 물건들이다. 모두 다 눈에 걸리고 발에 밟혀서 상심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명보의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글썽거렸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뜰 아래서 새 세자께 문후를 올렸다.

"소인 문안드립니다."

명보는 새 세자를 바라보니 더욱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울음 반 말 반 목이 메어 아뢴다. 장사패들도 일제히 손을 모아 문안을 드렸다. 옥색 도포에 도홍띠를 가슴 위에 높직이 눌러 띠고 풍채 좋은 옥골 선풍의 젊은 세자는 미소를 머금고 명보에게 묻는다.

"네가 광주 대군방에서 왔느냐?"

", 그러하옵니다. 소인은 양녕대군의 하인이옵니다."

"어찌해서 왔느냐?"

"대군 나으리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심부름으로 왔으면 심부름 온 일을 말할 것이지 왜 울기는 하느냐? 목이 메이도록."

"새 세자마마께 아뢰옵니다. 소인의 얼굴을 짐작하실 텐데 그러십니까? 소인은 항상 폐세자마마의 심부름으로 충녕궁에 드나들던 춘방사령 명보올시다."

"오오 참, 네가 명보로구나, 어쩐지 눈에 익어 보인다고 생각했더니. 항상 형님의 심부름으로 나한테 다니던 명보로구나."

새 세자는 반가웠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명보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서 돈대 위로 올라섰다. 새 세자가 자기를 알아주는 것을 보자 명보는 더한층 옛 생각이 간절했다. 마음이 슬펐다. 비쭉비쭉 어린애처럼 소리를 죽여 울었다.

"글세 왜 우느냐? 말을 해보아라."

새 세자는 은근한 목소리로 명보를 타일렀다. 명보가 채 대답하기 전에 밖에서 수문장이 뛰어 들어와서 거래를 드린다.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이 급히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어오라고 일러라."

새 세자는 분부를 내렸다. 두 장신은 세자 앞에 읍을 올렸다. 새 세자는 장신들을 바라보며 묻는다.

"어찌해서 두 분 장신이 또 왔소? 오르시오."

새 세자는 장신들에게 앉을 자리를 가리키며 청으로 오르라 했다. 금위대장이 아뢴다.

"청 위로 오를 틈이 없습니다. 지금 저자들을 금위영과 포도청으로 데려가야 하겠습니다."

새 세자는 껄걸 웃으며 두 장신들을 바라보며 말씀한다.

"어제 내가 두 장신에게 말하지 아니했던가. 두 장신은 다만 군사와 기찰들을 관장할 뿐 세자궁을 호위하고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일에 대하여는 나의 처분을 기다려서 처리하라고 이미 상의한 노릇이 아닌가. 지금 내가 저 사람들한테 동궁에 들어와서 나를 만나려는 까닭을 묻고 있는 중이니 장신들은 잠깐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말을 마치자 새 세자는 다시 명보를 바라보며 말한다.

"네 얼굴에 비창한 빛이 있으니 무슨 까닭이냐. 그리고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느냐?"

"새 세자마마께 아뢰옵니다. 소인은 춘방에서 십유여 년 동안 양녕대군을 세자마마로 모시고 있던 몸이올시다. 지난번 광주로 모시고 갔다가 이제 다시 동궁으로 들어와 보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 한 덩이가 모두 다 소인의 손으로 가꾸고 만지고 기르던 물건이올시다. 사람이 목석이 아닌 담에야 어찌 감구지회가 없겠습니까. 궁 안에 들어오니 저절로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서 아뢸 수가 없었습니다."

명보는 말을 마치자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씻었다. 새 세자도 명보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동정하고 싶은 생각이 유연히 일어났다.

"그는 그렇고, 너희들은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느냐?"

"아뢰옵니다. 대군께서 광주로 내려가신 후에 한가한 틈을 타서 글씨로 소견을 하실 생각이 드셨습니다. 그리하와 지금 산성에 우거해 계시면서 광주 읍내로 들어가서 지필묵과 벼룻돌을 구해오라 하셨습니다. 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대군께서는 보통 쓰시는 글씨가 아니라 대자를 잘 쓰시는 명필이십니다. 다행히 종이와 먹과 붓은 구했습니다마는 벼룻돌을 구하는데 광주 바닥에 큰 글씨를 쓸 큰 벼루가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아무리 구해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와 소인들은 온종일 장터로 돌아다니다가 지필묵만 사서 먼저 산성으로 올려보내고 서로를 의논한 후에 전에 대군께서 세자로 계실 때 쓰시던 대연을 저하께 줍시사하여 소바리에 싣고 가려고 저하께 청을 올리러 온 길이올시다."

새 세자는 평소부터 그의 형님의 힘차고 꿋꿋한 필체를 항상 부러워하고 존경했던 것이다.

"대군께서 광주로 나가실 때 전에 쓰시던 벼루와 붓을 아닐 가지고 가셨느냐?"

"총총하게 나가시게 되니 어느 하가에 벼룻돌을 가지고 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대군께서 쓰시던 벼룻돌은 남포돌에 치성해서 만든 것인데 크기가 구들장만하고 두께가 다섯 치나 됩니다. 소바리에 실어도 한 바리가 잔뜩 될 것입니다. 가지고 나가실 틈이 없었습니다."

명보는 아뢰는 말을 듣자 새 세자는 혼연히 대답한다.

"그렇다면 갖다 드려야지. 빨리 가져가도록 해라."

새 세자는 곧 동궁 청지기를 불렀다.

"전에 양녕대군께서 세자로 계실 때 쓰시던 큰 벼룻돌이 동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찾아보아서 저 사람에게 내주어라. 그리고 큰 벼루뿐 아니라 양녕께서 쓰시던 크고 작은 벼루와 좋은 붓을 모조리 찾아서 발기를 뽑아서 물목 단자를 만든 후에 안동해서 보내드리도록 해라."

총명하고 치밀한 새 세자는 차근차근 청지기한테 분부를 내렸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청지기가 새 세자의 분부를 받들어 물러가려 할 즈음 금위대장이 고한다.

"동궁마마께 아룁니다. 아니 되십니다."

새 세자는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을 향하여 묻는다.

"무엇이 아니 된단 말인가?"

"양녕대군께 물건을 못 내보내십니다. 위의 처분이 계시기 전에는 함부로 보내시지 못하십니다. 지금 상감께서는 양녕의 하인들이 혹시나 세자궁으로 들어올까하여 소인들에게 군사를 풀어 동궁을 호위하랍시는 엄명을 내리셨사온데 황차 물건까지 내보내신다면 그 죄책은 소인들이 당해야 합니다. 굽어 통촉해주시옵소서. 절대로 아니 되십니다."

금위대장은 얼굴에 곤혹한 빛을 띠고 아뢴다. 새 세자는 초롱거리는 눈초리에 웃음을 가득하게 물결치며 소리를 높여 웃으며 대답한다.

"장신들은 너무나 변통성이 없는 처사를 하려 하는구려. 하하하. 장신들의 생각은 지나친 고집불통이야. 상감께서 동궁을 호위하라고 두 장신한테 명을 내리신 것은 혹시나 양녕대군의 하인이 세자궁에 와서 소란을 떨까 염려하시어 잡인을 금하라고 명을 내리신 것이지만 그것은 풍문만 들으시고 오해하신 말씀야. 양녕께서 글씨를 쓰시기 위하여 벼루를 찾으시니 이 사람들이 쓰시던 벼룻돌 생각이 나서 이곳을 찾은 것인데 그것이 무슨 허물될 까닭이 있나."

세자는 온화한 말로 장신들을 타일렀다.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은 난처했다.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다시 새 세자께 아뢴다.

"동궁마마의 인자하시고 명철하신 말씀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는 지금 크게 진노해 계십니다. 양녕의 하인배들이 금부도사를 두들겨주어서 의관이 파열되어 쫓겨온 일을 아시고 혹시나 세자께 행패를 할까 하와 금위영 군사를 풀어서 호위하고 잡인을 금하라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세자궁에서 물건을 가지고 나갔다는 말씀을 위에서 들으시면 소인들은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하와 목숨이 붙어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굽어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세자는 또 한 번 껄걸 웃으며 대답한다.

"보게나. 저 사람들이 어디 손톱만큼이나 야료를 하나, 모두 다 오해야. 금부도사가 욕을 당했다면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것이고 곡절이 있었을 것일세. 한편 송사만 들어서는 아니 되오."

명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뜰 아래서 한 걸음 청 앞으로 다가서며 새 세자께 고한다.

"명철하옵신 동궁저하께 한 말씀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세자는 미연히 웃으며 묻는다. 명보는 두 손길을 앞으로 모아 잡고 공손히 아뢴다.

"명철하옵신 동궁마마 앞에 억울한 말씀을 갖추갖추 아뢰겠습니다. 처음에 폐세자이신 양녕대군께서는 부귀영화에 뜻이 없으시어 일부러 양광인 체하시고 상감마마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많이 하시어 세자의 자리를 내놓게 되셨습니다."

동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한다.

"그 일은 나도 다 짐작하는 일이다. 다음을 말해라."

"상감께서는 양녕대군께 종묘에 나가서 폐세자가 되는 봉고제를 친히 지내라 하시니 대군께서는 폐세자되는 사람이 친히 봉고제까지 지낼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이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대군께서는 더한층 상감마마의 노여움을 사셨습니다. 그리해서 광주로 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일도 잘 알고 있다."

동궁이 대답했다.

"대군께서 나가시는데 어떻게 검소하고 조촐하고 깨끗하게 나가신 줄 아십니까. 동궁마마께서는 모르실 것입니다. 대군께서는 평민의 복색을 하셨습니다. 윤이 흐르는 음양립을 쓰지 아니하시고 벼슬하지 않는 상사람이 쓰는 포립을 쓰셨습니다. 도포를 입으시는데 한산 세모시 옥색 도포를 입지 아니하시고 베도포를 입으셨습니다. 가죽신을 신지 아니하시고 청을치 미투리를 신으셨습니다. 타시는 것도 말이나 사인교를 타지 아니하시고 자그마한 당나귀를 타셨습니다. 동궁빈이셨던 대군 부인도 사인교를 타도록 하지 아니하시고 겨우 마주잡이 보교를 타시게 했습니다. 세간이라고는 의복 가지를 담은 자그마한 부담 농짝을 나귀 등에 얹으셨을 뿐 다음에는 거문고 한 틀과 낚싯대 한 개를 나귀 안장에 달고 가셨을 뿐입니다. 이같이 욕심 없고 탈속하신 분을 소인들은 한평생 보지 못하였습니다."

동궁은 명보의 말을 듣자 새삼 형님을 존경하는 생각이 더한층 가슴 속에 물결쳐 일어났다. 명보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또 한 가지 동궁마마께서 모르시는 일을 아뢰겠습니다. 양녕대군께서는 종묘에 봉고제를 아니 지내겠다고 하시어 상감마마의 노여움을 사셨습니다마는 충심으로는 그렇지 아니하셨습니다. 파조교 다리를 지나서 종묘 앞으로 지나실 때 대군께서 종묘를 향하여 나귀에서 내리시어 부인과 함께 사배를 올리시면서 눈물을 흘려 고유하고 물러나셨습니다. 형식적인 봉고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직 인사를 조상 열성조께 드리셨습니다. 이러하신 범절 높은 우리 대군이십니다."

명보는 말하여 울었다. 명보의 나중 한 말은 모두 다 세자로선 처음 듣는 소리다. 새 세자는 얼굴에 추연한 빛이 감돌았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항상 대군의 너그러우신 덕에 감동이 되어 당시 동궁으로 드나들던 사람이올시다."

명보는 동궁께 장사패들을 소개한다.

"대군께오서 폐세자가 되시어 광주로 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동궁 밖 복차 다리에 모여서 전송하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군의 행차가 너무나 소홀하시니 그대로 광주로 가시게 할 수 없다하여 만류하는 대군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배종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명보의 소개를 받은 장사패들은 일제히 동궁께 예를 드렸다.

"이 사람들이 아니었던들 큰일 날 뻔했습니다. 대군께서 지금 산성 안에 계신 데 나무 한 단, 소반 한 개, 젓가락 한 벌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나무를 하고 솥을 걸고 살림 제구를 차려서 대군 내외분을 봉양했습니다."

새 세자인 동궁은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광주에는 유수가 있을 텐데 광주유수가 그렇게 푸대접을 해서 돌봐드리지 아니했더란 말이냐."

"그 말씀은 다시 여쭙기로 하고, 우선 광주로 내려가는 도중에 지금 말썽이 된 금부도사의 말씀을 먼저 아뢰기로 하겠습니다."

새 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침 저희들을 잡으로 오신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이 여기 계시니, 대군마마와 저희들이 당한 일장 소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서 말을 해보아라."

새 세자는 뒤를 재촉했다.

"저희들은 대군의 행차를 모시고 광주로 향하는 도중 경안 역말에 당도했습니다. 해가 저물어 더 갈 수 없으니 주막에 들게 되었습니다. 내행은 안에다가 사처를 정하시고 저희들은 바깥 목로방에 묵고 있는데 밤이 깊고 달이 밝았습니다. 원체 풍류남이신 대군께서는 성정이 소탈하고 호협하신 데다가 서울을 떠나서 시골 산촌으로 가시는 길이니 마음이 좋으실 수가 있습니까. 잠이 아니 오시니 저희들이 있는 목로방으로 나오시어 막걸리를 걸러서 마시면서 저희들이 멀리 나온 것을 위로해주셨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소피를 하려고 목로 방문을 열고 나가니 어떤 자가 문틈으로 엿보고 있다가 그만 기급초풍이 되어 달아났습니다. 친구들의 힘은 장사였습니다. 달아나는 놈을 잡고 보니 금부 나졸이 우리 대군의 행차를 미행해 따라와서 우리들의 행동을 엿본 것이었습니다."

명보의 말을 듣자 새 세자는 얼굴에 엄숙한 빛을 띠었다.

"이러하니 자연 시비가 크게 벌어졌습니다. 저희들과 금부 나졸들은 서로들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대군께서 무슨 역적모의나 하고 계신 듯 금부 나졸들이 미행을 해서 저희와 대군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으니 이러한 불법하고 무례한 행동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중에 금부도사는 저희들을 모조리 포박하라 했습니다. 소인들이 무슨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대군의 행동을 엿보는 금부 나졸의 행동이 잘못이지 소인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소인들을 결박 짓는 일은 곧 대군을 포박하겠다는 것이나 매한가지올시다. 대군께서는 죄인이 아니십니다. 금부도사가 나왔다면 그것은 배종하라시는 위의 분부를 받든 것이지 미행해서 대군의 행동을 엿보라고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리하와 분정지두에 격투가 벌어져 금부도사가 쫓겨간 것입니다."

새 세자는 명보의 말을 듣자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린다.

"대장들은 이 사실을 알았소?"

"황정승께서 자세한 말씀을 하시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분 대장들은 이 사람들을 잡을 까닭이 없지 아니한가?"

"처음에 전하께서는 크게 진노하시어 양녕대군께 크나큰 조처를 또 내리라 하시다가 황정승께서 사리를 들어 간곡하게 아뢰신 후에 대군께는 죄를 주지 아니하시고 대군의 하인배의 입성을 금하라 하셨습니다. 그러하와 동궁에 금위영 군사와 포도청 기찰로 파수를 보라고 하교를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소인들은 분부를 어길 도리가 없습니다. 연하와 이 사람들을 잡으려 한 것입니다."

새 세자는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장신을 바라본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을 가지고 공연히 혼란을 내는 것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일이오. 왜 태평성대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려 하오. 대군께서 부귀영화를 싫다 하시고 시골로 내려가시어 한일월을 보내시는 중 소견법으로 글씨 쓰시기 위하여 벼루를 구하시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소. 대군의 부하 되는 사람들이 좋으신 뜻을 받들어 시골서 벼루를 구하다가 못 구하니 옛날 쓰시던 벼룻돌 생각이 나서 동궁을 찾아왔는데 그 충직한 정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소. 두 분 대장들은 안심하고 제각기 장청으로 돌아가오."

새 세자는 총명한 눈을 번쩍이면서 두 장신한테 분부를 내렸다. 금위대장이 다시 고한다.

"세자저하의 너그러우신 심경과 하교는 소인들이 잘 짐작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동궁에 잡인 출입을 엄금하랍시는 전하의 하교를 소인들은 어길 도리가 없사옵니다."

새 세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두 장신을 타이른다.

"그것은 전하께서 대군이 글씨를 쓰시려고 벼루를 구하시는 사정을 모르신 때문이오. 도대체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전달되지 아니하고, 위에서 덮어놓고 한편 말만 들으시고 대군의 하시는 일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시는 까닭이오. 만약에 대군께서 글씨를 쓰기 위하여 벼루를 구하러 동궁으로 사람을 보냈다는 말씀을 들으신다면 전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모든 뒷일은 내가 다 당할 테니 두 장신은 그리 알고 일체 간섭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새 세자는 장신들한테 분부한 후에 동궁 청지기에게 다시 영을 내린다.

"어서 동궁 안에 대군께서 쓰시던 벼루와 좋은 붓이 있거든 일일이 물목을 적어서 물건과 함께 저 사람들에게 내주어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동궁 청지기는 영을 받들어 물러갔다. 이때 대군의 하인들을 잡으러 나왔던 금위대장과 포도대장도 새 세자의 분부를 거역할 수 없었다.

"동궁저하께서 모든 뒷일을 감당하시겠다 하니 소인들은 그대로 물러가겠습니다. 혹시나 상감께서 아시고 하문하신다면 동궁저하께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염려 말고 물러가오."

새 세자는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이때 새 세자의 나이는 이십이 세의 약관이었다. 두 대장이 뜰 아래서 몸을 굽혀 인사를 올리고 물러가려 하니 명보가 다시 고한다.

"동궁마마께 아뢰옵니다. 두 분 대장이 계신 앞에 동궁마마께 또 한 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할 말이 또 있느냐?"

"아주 장신들이 계신 앞에서 또 한 가지 일어난 일을 먼저 동궁마마께 고하겠습니다."

장신들은 나가다가 발길을 멈추었다.

"광주유수가 필연코 대군을 헐뜯어서 상감께 무고를 올릴 것이 분명합니다. 명철하신 세자께서는 미리 이 일을 아시고 잘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또 일어났느냐?"

"광주유수는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광주유수가 야반도주를 하다니?"

새 세자는 깜짝 놀란다.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명보는 다시 차근하게 고한다.

"광주유수는 너무나 영악하고 너무나 똑똑해서 추세를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대군께서는 폐세자가 되시어 광주로 내려가시니 마치 나라에 큰 죄나 짓고 쫓겨나신 줄로 알고 박대가 심했습니다. 대군께 산성 안 행궁 뒤 정자집 한 채를 내드린 후에 쌀 한 톨, 나무 한 단 대드리지 아니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 사람들이 아니었던들 밥도 지어 드리지 못하고 냉방에서 거처하시게 할 뻔했습니다. 그리하와 대군께는 막걸리 집에서 얻어온 짠지 한 쪽으로 찬을 해드렸으니 다시 더 말씀드릴 나위가 없습니다."

새 세자는 명보의 말을 듣자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광주유수가 그렇게 무례했더란 말이냐."

"무례뿐만이 아니올시다. 아까도 대강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대군께서 글씨를 쓰시고 싶으시다하여 큰 벼룻돌을 구해오라 하시므로 광주 바닥을 아무리 뒤졌으나 큰 벼루가 없었습니다. 저희들은 하는 수 없어서 의논 끝에 서울로 들어가서 동궁마마께 아뢰고 전에 쓰시던 벼루를 가지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와 서울로 향해서 가는 중인데 별안간 군노사령들이 저희들을 월경했다고 잡으로 왔습니다. 죄수의 하인은 월경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와 저희들은 군노사령과 싸움을 해서 동헌 앞문까지 들어갔습니다. 광주유수는 노발대발해서 친히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저희들을 포박하려 했습니다. 세상 천하에 어디 이따위 간특한 인간이 있겠습니까. 소인들은 분정지두에 광주유수를 욕뵈기 위하여 호랑 감투를 씌웠습니다. 이때 대군께서는 산성에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급히 내려오시어 소인들을 꾸짖으시고 광주유수를 타일러서 서울로 벼루를 가지러 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광주유수는 거주제한을 당한 대군과 대군의 하인은 서울로 들어갈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대군은 크게 노하셨습니다. 광주유수의 볼기를 때리셨습니다. 이때 광주 백성들은 백절치듯 모여들었습니다. 가렴주구하는 광주유수를 대군마마가 볼기 때리시는 것을 보고 모두들 박수 갈채를 했습니다. 이리 되니 광주유수는 부끄러워서 배겨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야반도주를 했다 합니다. 필연코 오늘 내일 간에 서울로 들어와서 상감께 무고를 아뢰기 십상팔구올시다. 소인들은 아주 여쭙니다. 미리 소인들을 벌주시려면 벌을 주시고 돌려보내려면 돌려보내 주옵소서. 처분만 기다립니다."

새 세자의 얼굴빛은 잠깐 흐려졌다. 마음속으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얼굴빛이 명랑하게 돌아섰다.

"과히 염려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말을 마치자 안으로 들어갔다. 장신들은 마음속으로 '또 큰일이 났구나'하고 물러갔다. 안으로 들어간 새 세자는 부인 되는 경빈 심씨의 처소로 들어갔다. 경빈 심씨는 심온의 따님으로 충녕대군이 새로 동궁이 되자 따라서 동궁빈이 된 숙덕 높은 분이다. 그는 앞으로 문종,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 등 팔남 이녀의 어머니가 될 숙덕 높은 여인이었다.

사랑에서 들어오는 세자의 발자취 소리가 들리자 동궁빈은 급히 밖으로 나가 동궁을 맞이했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어 동궁께 묻는다.

"듣자오니 양녕대군께서 벼룻돌을 가지러 사람을 보내셨다 하오니 과연 그러하옵니까?"

동궁도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어떻게 빈이 알았소?"

"청지기가 벼루를 찾으로 다니며 말하므로 알았습니다. 좋은 일이올시다. 집심을 하시고 글씨를 쓰려 하신다 하니 얼마나 기쁜 일이옵니까. 종실을 위하여 다행한 일이올시다."

"그러기에 청지기에게 명하여 벼루를 찾아보라 했소. 벼루뿐 아니라 형님께서 쓰시던 좋은 붓이며 종이도 사람들 편에 보내드릴 작정이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동궁빈 심씨는 안존한 말씨로 새 세자의 뜻을 받았다. 동궁은 심빈을 향하여 다시 웃음을 띠고 묻는다.

"지난번 빈이 손수 담근 송순주가 거의 익을 때가 되었는데 어찌 되었소?"

"내일쯤 떠서 반주를 해 올리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동궁은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오늘쯤 용수를 박아서 술을 거르면 어떠하겠소?"

심빈이 웃으며 대답한다.

"송순주가 그리 젓숫고 싶으십니까? 호호호, 정 젓숫고 싶으시면 지금이라도 곧 걸러서 바치겠습니다."

동궁은 호협하게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하. 내가 주탠 줄 아오. 실상은 형님께서 약주를 좋아하시니 벼루 보내는 편에 빈이 손수 담근 좋은 술을 보내서 형제의 정을 표하려 하오."

심빈은 쾌하게 대답했다.

"염려 마십쇼. 곧 걸러서 장군에 담아 보내겠습니다. 대군께서 받으시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동궁은 또 말을 잇는다.

"또 한 가지 부인한테 청할 일이 있소."

"무슨 청이오이까? 청이란 말씀이 과하지 않습니까. 내외지간에. 호호호."

동군은 심빈의 등을 어루만지며 대답한다.

"아무리 내외지간이라 해도 청할 일이 있으며 청을 해야지 않겠소. 다 각기 맡은 직책이 있지 아니하오. 나한테 백미 열 섬만 넘겨줄 수 있겠소?"

"백미 열 섬은 무엇에 쓰시렵니까?"

심빈은 만족하게 웃으며 묻는다.

"송순주와 함께 광주에 계신 형님께 보내려 하오."

심빈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대군께서 아무리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광주로 가셨다 하나 식량이 없으실 리 만무합니다. 정을 표하시려면 쌀은 그만두시고 다른 물건으로 보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동궁은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야. 광주유수란 자가 박대를 하는 모양이야."

동궁의 말씀을 듣는 심빈은 깜짝 놀랐다.

"광주유수가 박대를 하다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폐세자가 되셨다 하나 당당하신 대군이 아니십니까. 지공범절을 정성껏 해드려야 할 의무가 있지 아니합니까. 만약 광주유수가 앞으로도 태도를 고치지 않고 대군께 불공한 일을 한다면 저하께서 위에 아뢰시어 광주유수를 파면시키옵소서."

동궁은 껄걸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위에 아뢰지 않더라도 광주유수는 아마 그만두게 되나 보오. 빈은 거기까지 참견할 것은 없소. 어서 백미 열 섬만 내어주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심빈은 동궁의 분부를 받들어 고지기에게 영을 내렸다. 백미 열 섬은 사랑 뜰로 운반되었다. 송순주 한 장군이 나오고 청지기는 커다란 단계석 벼룻돌과 양녕이 쓰던 지필묵을 한 아름 껴안고 나왔다.

동궁은 명보한테 분부한다.

"대군께서 평시에 좋아하시던 송순주가 마침 익어서 향기가 제법 좋다. 형님 생각이 나서 한 장군 보낸다. 당에 묻어두고 조금씩 젓수시게 해라. 그리고 너희들이 가지러 온 단계석 큰 벼룻돌 이외에 대군께서 쓰시던 지필묵을 찾아서 보낸다. 갖다 드려서 글씨를 쓰시도록 해라. 다음에 백미 열 섬을 보낸다. 보아하니 거느리신 식구들이 많을 듯하다. 너희들 양미에 보태 쓰는 것이 좋겠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충녕대군이었던 새 동궁저하의 형님을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에 마음이 감동되었다.

"벼루만 주셔도 좋을 것을 좋은 술에 쌀까지 주시니 대군께서 들으시면 흐뭇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하의 넓으신 덕을 대군께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형제지간의 정리를 표하는 성의뿐이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쌀과 술과 벼루와 지필묵을 소바리에 가득 싣고 광주로 돌아갔다.

한편 광주유수는 광주 바닥에서 고개를 들고 원 노릇을 할 수 없었다. 밤을 도와 서울로 솔가도주를 했다. 이튿날 조복을 입고 정원에 나타났다. 승지를 만나보고 급히 어전에 아뢸 일이 있다고 고했다. 광주유수는 보통 고을의 원이 아니었다. 중경재상이 아니면 재상 줄에 가는 사람이 원 노릇을 하는 자리다. 승지는 광주유수를 어전에 인도했다. 전하는 광주유수가 친히 뵙겠다는 승지의 말을 듣자 머리에 먼저 떠오른 것이 양녕을 광주로 추방한 사실이었다. 지체없이 알현할 것을 허락했다.

광주유수는 울면서 어전에 부복했다. 느껴 우는 체읍성이 천청에 들렸다. 전하는 깜짝 놀랐다. 만조백관이 허다하게 알현을 했으나 울면서 뵙는 일은 전무후무한 노릇이었다.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양녕으로인하여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고 직감했다.

"광주유수가 직장을 떠나서 웬일이냐?"

광주유수는 느껴 울면서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

"말을 해라."

전하의 옥음은 엄숙하게 떨어졌다. 광주유수는 소매 속에서 병부와 인수를 꺼내서 울면서 어전에 바쳤다.

"소신은 광주유수의 원 노릇을 못하겠습니다. 삼가 병부와 인수를 어전에 바치옵니다."

광주유수는 울음 반 말 반으로 하소연해서 아뢰었다. 광주유수는 목민하는 책임뿐 아니라 병마권까지 가진 까닭에 병부도 가졌던 것이다. 전하는 더한층 놀랐다.

"웬일이냐, 도대체 말을 해라. 어찌해서 원 노릇을 못하겠단 말이냐?"

지엄한 꾸지람이 내렸다.

"양녕대군의 하인한테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호랑 감투를 쓰는 욕을 당했삽고 다음에는 양녕대군께 볼기까지 맞았습니다. 이리하옵고 어찌 광주 바닥에 태연히 앉아서 유수 노릇을 하겠습니까. 첫째로 위령이 서지 못하고, 둘째는 백성들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송만만하오나 삼가 병부와 인수를 바쳐서 사면하옵고 고향에 돌아가 나머지 목숨을 보전하려 합니다."

전하는 크게 노했다. 양녕이 추호도 회개하는 마음이 없고 광주 바닥까지 못된 짓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찌해서 하인배한테 호랑 감투를 썼으며, 무슨 일로 백성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양녕이 때리는 볼기를 맞았더냐?"

전하의 노기는 더욱 높았다. 광주유수는 소매로 눈물을 씻으며 간특한 목소리로 아뢴다.

"성지를 그대로 받들려 하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전하는 갑갑증이 났다.

"어떻게 내 뜻을 받들었단 말이냐?"

"양녕대군을 광주로 추방시킨 것은 거주제한을 시키신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녕대군의 거주를 제한하신 것은 외부의 출입과 교통을 금하신 것이니 여기 따라서 양녕의 하인배들도 무단히 월경을 허락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하온데 양녕의 하인들이 서울로 향해 간다는 소식을 듣고 군교와 군노사령을 풀어서 월경을 못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양녕의 하인들은 성군작당해서 군노사령들을 두들겨 패주고 동헌 삼문 앞까지 쳐들어왔습니다."

광주유수는 어깨를 움츠려 숨을 한 번 돌린 후에 계속해서 아뢴다.

"소신은 이런 불법을 방임해 둘 수 없었습니다.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장난하는 하인배들을 잡으려 했더니 하인배들은 소신을 잡아서 백절치듯 모여든 구경꾼 앞에서 호랑 감투를 씌워서 욕을 보였습니다."

"저린 무법천지의 놈들이 있단 말이냐."

전하는 서슬이 퍼렇게 진노했다. 광주유수는 전하의 노하는 눈치를 보자 불붙은 화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하오니 소신이 어찌 왕명을 받들어 목민을 하겠습니까?"

전하는 노기가 등등하여 다시 유수에게 묻는다.

"양녕한테는 어떻게 해서 볼기를 맞았더냐?"

"소신이 한창 호랑 감투 쓰는 욕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당하고 있을 때 양녕대군께서 소문을 듣고 산성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어찌해서 하인을 서울로 보내지 못하게 하느냐고 물으시기에, 성상께서 대군을 광주로 추방하신 것은 거주제한을 시키신 것이니 왕명이 있기 전에는 하인배들도 맘대로 서울 출입을 못 한다고 아뢰었더니, 내가 역적이 아닌 바에야 내 하인이 어찌해서 서울로 못 들어가느냐고 노발대발하시며 소신의 볼기를 때리셨습니다."

전하의 노기는 더욱 부풀어 올랐다.

"양녕의 하인을 서울로 들여보내려는 일은 무슨 뜻이라 하더냐?"

"동궁으로 가게 한다 하옵디다."

간특한 광주유수는 명보의 일행이 벼룻돌을 가지러 간다고 하던 말은 쑥 뽑아버렸다.

"동궁으로?"

전하는 깜짝 놀랐다.

", 그러하옵니다."

광주유수는 또렷이 대답했다.

"그래 그 후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전하는 초조하게 묻는다. 광주유수는 황공한 듯 손을 비비며 아뢴다.

"아마 지금쯤 대군의 하인들은 동궁에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전하는 소스라쳐 놀랐다.

"양녕의 하인배들이 지금쯤 동궁에 와 있단 말이냐?"

전하는 말을 마치자 옆에 시립해 서 있는 승지를 돌아보며 분부를 내린다.

"금위대장을 불러라."

승지는 어전에서 물러나 정원으로 달렸다. 이윽고 승지는 금위대장과 함께 어전으로 들어갔다. 금위대장이 곡배를 드리고 물러섰다. 전하는 급히 묻는다.

"동궁의 시위는 어찌 되었느냐?"

"이상이 없습니다. 잘되고 있습니다."

금위대장은 까닭을 몰랐다. 태연히 아뢰었다.

"외부에서 출입하는 잡인을 잘 단속하고 있느냐?"

", 분부대로 단속하고 있습니다."

금위대장은 뜨끔했다. 아까 양녕의 하인이 동궁으로 들어간 생각이 났다. 그러나 동궁의 명령으로 잡으려고 했다가 그대로 두고 돌아왔다는 말씀을 아뢸 수는 없었다. 단속을 잘하고 있다고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옆에 광주유수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보니 양녕의 하인이 동궁으로 향했다고 아뢰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짓 말씀을 아뢰어놓고 가슴이 사뭇 두근거렸다. 전하는 금위대장을 위엄기 있게 굽어보며 묻는다.

"광주유수의 말을 들으니 양녕의 하인이 광주에서 동궁으로 향했다 하는데, 아직 소식을 못 들었느냐?"

전하의 묻는 말씀에 금위대장은 또 한 번 거짓말을 올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빨리 나가서 알아본 후에 알리게 하라."

금위대장은 등에 진땀이 흘렀다.

"곧 알아보겠습니다."

금위대장은 어전에서 물러났다. 전하는 부복해 있는 광주유수에게 명을 내린다.

"병부와 인수는 승지한테 넘기고 나가서 처분을 기다려 대기하고 있으라."

광주유수는 여전히 간특한 모습을 뵈었다. 어전에 재배를 드리고 훌쩍훌쩍 울면서 전각에서 물러났다. 한편 금위대장은 급히 말을 달려 동궁으로 향했다. 이때 명보와 장사패들은 새 세자께 감사로운 치사를 올리고 쌀과 술이며 벼루와 지필묵을 가지고 동궁을 출발한 지 이미 오래였다. 금위대장은 세자를 뵙고 급하게 아뢴다.

"큰일 났습니다."

말소리까지 황망했다. 동궁도 안정에 놀란 빛이 돌았다.

"무슨 큰일이 있다 하는가?"

금위대장이 아뢴다.

"아셨습니다."

"무엇을 누가 알았단 말인가?"

금위대장은 우둘우둘 떨리는 목소리로 고한다.

"상감께서 대군의 하인들이 동궁에 들어온 것을 아셨습니다."

금위대장의 말을 듣는 동궁의 얼굴빛도 약간 놀라는 기색이 있었다.

"상감께서 어찌 아셨단 말인가?"

"광주유수가 정원을 통하여 알현한 후에 하인배들한테 호랑 감투를 씌워서 욕을 당한 일이며 대군께 볼기 맞은 일을 고하고 하인배들이 월경해서 동궁으로 향한 일을 울면서 고했습니다. 저하께서는 이 말씀을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시어 소인을 불러 하문하셨습니다. 만약에 대군방 하인이 과연 동궁에 들어왔다면 모조리 잡아들이라 하셨습니다. 소인은 동궁을 철저하게 호위하여 단속하지 못한 큰 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대군방 하인이 아직도 동궁 안에 있다면 하인배를 소인한테 넘겨주옵소서."

"대군방 하인배들은 내가 돌려보냈소. 아마 못가도 이삼십 리는 갔으리다."

동궁의 모습은 다시 침착한 태도로 돌아섰다. 금위대장은 황황하게 아뢰고 발길을 돌려 나가려 했다. 동궁은 손을 저어 나가는 금위대장을 만류했다.

"내가 어전에 들어가 품달할 테니 대장은 과히 근심하지 마오."

동궁은 이미 어떠한 뜻을 결정한 모양이었다. 얼굴빛이 점점 침착하고 태연했다.

"만약 대군방 하인들이 동궁에 나타났거든 일망타진해서 잡아들이라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이 영마저 거행치 못한다면 소인은 전하의 진노를 입사와 죽는 몸이올시다."

동궁은 껄걸 웃었다.

"전하께서 일개 하인을 잡지 아니했다. 해서 금위대장, 팔다리 같은 신하를 사형에 처하실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오. 대장의 심경이 정 불안하다면 내가 대장과 함께 어전에 뵙고 자세한 말씀을 아뢰겠소."

동궁은 말을 마치자 설렁줄을 흔들었다. 안에서 동궁의 궁녀가 뛰어나왔다.

"부르셨습니까?"

"나의 조복을 가지고 자비를 등대케 하라. 예궐하여 문후를 올리리라."

궁녀는 동궁의 분부를 받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금위대장은 여전히 불안과 초조 속에 서 있었다. 조금 후에 동궁시녀가 세자의 조복을 받들고 나왔다.

"자비를 대령하라 일렀사옵니다."

동궁은 조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청지기가 들어와 아뢴다.

"자비가 등대되었습니다."

세자는 금위대장을 돌아보며 이른다.

"자아, 나와 함께 예궐합시다."

동궁은 양녕이 쓰던 동궁을 그대로 눌러써서 대궐 밖에 있었다. 동궁이 옥교에 오른 후에 금위대장은 말을 타고 동궁을 호위하여 대궐로 향했다.

이때 전하는 크게 진노하여 금위대장을 동궁으로 내보내서 대군의 하인이 동궁에 온 것을 사실하라고 엄명을 내린 후에 곧 황희 황정승을 불렀다. 황희 황정승은 아직 광주유수를 대면해보지 아니했으나 빈청에서 승지를 통하여 광주유수가 전하께 알현하고 울면서 병부와 인수를 바친 일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괘씸하고 방자하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황정승을 향하여 하문한다.

"양녕이 아직도 완패하여 광주로 추방을 당했으면서도 개과천선하는 기색이 없고 광주유수를 욕보여서 호랑 감투를 쓰게 하고, 만백성들이 모인 앞에서 광주유수의 볼기까지 때려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였다 하니 가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래 가지고 수령방백이 어찌 목민하는 책임을 다할 수 있으며 국가의 질서를 어찌 유지할 수 있겠는가."

황희 황정승은 엄숙한 얼굴로 아뢴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일을 판단하시려면 양편 송사를 다 들어보신 후에 처단하시는 것이 옳은 줄로 아뢰오. 소신의 판단으로는 광주유수가 방자하고 무엄하기 짝이 없는 자올시다. 제 어찌 감히 어전에 울면서 병무와 인수를 바치는 방약무인한 행동을 취합니까?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황정승은 잠시 숨을 돌려 쉬고 정중한 태도로 계속해서 아뢴다.

"광주유수는 추세만 하는 간특한 소인이올시다. 소인의 참소를 곧이들으시어 부자의 정리를 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하, 이치로 미루어 생각해보옵소서. 아무 까닭이 없는데 대군의 하인이 어찌 광주유수에게 호랑 감투를 씌우며, 불쾌한 일이 없는데 대군께서 어찌 유수의 몸에 매질을 했겠습니까. 굽어 통촉이 계시기 바랍니다."

황정승의 아뢰는 말씀이 막 끝났을 때 어전 내관이 아뢴다.

"세자께서 문안을 아뢰러 들어오셨습니다. 그리하옵고 금위대장이 복명을 하려 하옵니다."

"들라 하라."

전하는 동궁과 금위대장의 알현을 허락했다. 알현을 허락받은 동궁과 금위대장은 대전내시에게 인도되어 어전에 문후를 드렸다. 동궁은 황희 황정승이 전하의 옆에 시립해 서 있는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든든하게 생각했다. 전하는 세자의 문안을 받은 후에 금위대장에게 묻는다.

"그래, 동궁에 나가보았느냐?"

전하의 용안에는 아직도 노기가 가시지 아니했다.

", 하교하심을 받들어 동궁에 나가보았습니다."

"대군의 하인들이 과연 들어왔더냐?"

옥음은 더한층 또렷하고 엄숙했다.

", 과연 대군의 하인이 동궁에 들어왔습니다."

금위대장의 대답해 아뢰는 말을 듣자 전하는 옆에 시립해 섰는 황정승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린다.

"자아, 저것 보오. 광주유수의 말과 같이 대군방 하인이 과연 동궁에 들어왔구려. 방약무인한 행동을 취하는 놈들이구려."

전하의 옥음은 더한층 격했다. 황정승은 대답이 없이 잠자코 서 있었다. 전하의 노기가 식어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동궁도 때를 기다리고 아직 입을 닫고 있었다. 전하는 다시 금위대장에게 묻는다.

"그래, 대군의 하인들은 잡아 가두었느냐?"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무어라 하느냐, 아직 잡지를 못했다? 잡지 아니했단 말이냐, 잡지를 못했단 말이냐? 똑똑히 말을 하라! 일부러 잡지 아니했단 말이냐, 힘이 모자라서 잡지를 못했단 말이냐?"

전하의 노한 옥음은 벼락치듯 떨어졌다. 이대 동궁이 얼굴에 화한 빛을 띠고 어전에 부복해 아뢴다.

"소자, 감히 아바마마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말을 해라."

전하의 옥안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모든 죄는 소자한테 있습니다."

"동궁이 무슨 죄를 지었다 하느냐?"

"금위대장과 포도대장은 분부가 내리시기 전에 동궁에 대군의 하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금위군사를 지휘하여 대군의 하인들을 모조리 포박하려 했습니다. 그리하오나 소자가 잡지 말라고 당부해서 포박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전하께 말씀을 아뢰는 새 세자는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계속해서 아뢴다.

"그 후에 어명을 받자옵고 또다시 온 것을 소자가 또다시 간곡하게 청을 해서 광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어명을 어긴 죄는 소자한테 있사옵고 금위대장에게는 있지 아니합니다. 소자가 금위대장과 함께 들어와 알현을 청한 것은 어명 어긴 일을 아뢰옵고 대죄하기 위하여 들어왔사옵니다. 소자를 꾸짖고 종아리를 쳐주시옵소서."

새 세자의 간곡하게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는 금위대장에게 하문한다.

"내가 광주유수의 직소하는 말을 듣고 경을 불러 대군방 하인을 잡아 가두라는 영을 내리기 전에, 경은 동궁에 가서 대군의 하인들을 잡으려 했더냐?"

금위대장이 황공한 태도로 아뢴다.

"지금 동궁께서 아뢰신 대로 소신은 어명이 내리시기 이전에 대군방 하인이 동궁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 군사를 풀어서 대군방 하인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전일 동궁을 수호하여 답인의 출입을 엄금하랍신 분부를 이행하려 한 때문이올시다."

"그렇다면 너는 네 책임을 다했다 할 수 있다. 너는 허물치 아니하겠다."

전하는 다시 동궁을 바라본다.

"어찌해서 내 영을 거스르고 대군의 하인들을 만나보았더냐?"

"사람이 세상에 처해 살자면 공과 사가 있습니다. 소자와 양녕은 피와 살을 같이 한 형제간 지친이올시다. 공으로 처리할 일이 있사옵고 사사로운 우애의 정으로 처결할 일이 있습니다. 동궁 수문장이 급히 보하기를 광주에서 대군방 하인이 왔다 하옵기 법을 범한 자라면 법으로 다스릴 것이지만, 사사로운 일로 왔다면 아니 만나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형제지간의 지극한 정이올시다. 소자는 하인들의 말을 들어보고 일을 처결하려 하와 금위대장이 쫓아왔건만 잡지 말라고 이른 후에 하인배들에게 자세히 정상을 들었습니다. 듣고 보니 잡을 일이 아니라 도리어 상을 줄 일이었습니다."

전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무슨 소리냐, 상을 줄 일이라니?"

", 그러하옵니다. 양녕이 광주로 나갈 때 세간집물과 문방사우를 하나도 가지고 나가지 아니하고 포립 쓰고 베옷 입고 당나귀 등에 거문고 한 틀과 낚싯대 한 자루를 겨우 싣고 내행과 함께 초초하고 검소하게 나갔다 합니다. 지금 남한산성 산골 속에 우거해 있사온데 글씨를 쓰고 싶다하여 하인들에게 장에 나가서 벼루를 구해가지고 오라 했더랍니다. 마음을 가라앉혀서 글씨 공부를 한다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이요 기쁜 소식입니까. 그리하와 하인들이 장에 나가 벼루를 구하려 하니 시골 구석에 좋은 벼루가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하인들은 생각다 못하여 양녕이 전에 쓰던 벼루를 청하러 소자한테 왔다는 것입니다. 저의 마음은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양녕의 마음을 잡고 글씨 공부를 하겠다 하는 그 소식에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리하와 금위대장에게 잡지 말라고 청을 했던 것입니다."

전하는 형제지간의 우애의 정을 먼저 말하고 다음 양녕이 글씨를 쓰기 위하여 벼룻돌을 구하다가 하인들의 의사로 전에 쓰던 벼루를 가지러 왔다는 동궁의 말에 마음이 약간 풀렸다.

"그래, 벼룻돌을 내주었느냐?"

", 내주었습니다. 양녕은 글씨 재주가 높습니다. 항상 왕희지체를 잘 썼습니다. 그리하옵고 특별히 대자를 잘 썼습니다. 아는 사람은 명필이라 칭송했습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양녕이 쓰던 벼루를 큰 대연이었습니다. 하인들이 큰 벼루를 청하옵기 대연과 붓과 먹을 보냈습니다."

전하는 세자의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양녕이 매를 길러서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탄자를 잘 던져서 새를 맞히는 장난을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글씨 재주가 비범한 것은 아버지이면서도 여태껏 알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양녕에 대하여 처음으로 기쁨을 느꼈다.

"양녕이 어느 때부터 글씨 공부를 했더냐?"

"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양녕대군께서는 명나라에 다녀오신 이후 명나라 황제께서 선물로 보낸 필첩으로 공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옆에 시립해 있던 황희 황정승이 동궁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동궁이 다시 아뢴다.

"그리하옵고 소신은 쌀 열 섬을 보냈습니다."

"쌀 열 섬을 보내다니?"

", 백미 열 섬을 보냈습니다."

동궁은 일부러 힘을 주어 또렷하게 대답했다.

", 먹을 것이 없어서?"

전하는 자기 생각만 했다. 어디를 가든지 수령방백이 진수성찬을 받들어 올렸다. 양녕을 광주로 보내면서 의식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저절로 입고 먹으려니 하고 생각도 아니했던 것이다. 동궁은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아까 소자는 공과 사를 들어서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이번에 광주유수가 호랑 감투를 쓴 원인도 이곳에 있습니다."

전하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아니한다. 광주유수가 어찌해서 호랑 감투를 썼단 말이냐? 제 말에 의하면 대군의 하인들을 월경을 못 하게 한 까닭에 이로 인해서 싸움이 되어 호랑 감투를 썼다 하는데, 쌀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것은 광주유수가 제 허물을 덮기 위하여 월경하는 조목으로만 말씀을 아뢴 것이올시다. 그 이면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사정이 개재해 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깊이 살피시고 밝은 판단을 내리시옵소서."

동궁은 명랑한 표정으로 또렷하게 아뢰었다. 전하는 조리 있게 말하는 동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하는 동궁을 향하여 묻는다.

"어떠한 미묘한 일이 개재해 있다 하느냐?"

"광주유수는 무엄하게 양녕을 박대했습니다. 그자는 추세하는 소인이올시다."

"어떻게 박대했단 말이냐?"

"지공이 전혀 없었다 합니다. 내려가던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시량범절에 대해서 쌀 한 톨, 나무 한 단 보내준 일이 없었다 합니다. 첫날 산성의 정자집을 지시해주었을 뿐 간장 한 종지, 물 한 모금을 보내준 일이 없었다 합니다."

전하는 아무 말 없이 동궁의 말을 듣고 있다. 동궁은 다시 아뢴다.

"저녁때 산성에 당도한 일행은 막걸리 집에서 얻어온 짠지 쪽으로 찬들을 했고 다음날은 형수인 양녕 부인이 산에 올라 나물을 캐서 국을 끓였다 합니다. 광주유수는 양녕을 마치 역적질하다가 귀양한 죄인과 같이 대접한 모양이올시다. 너무나 영리한 추세를 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다 호랑 감투를 쓰게 도니 원인이었습니다. 하인배들이 월경했다는 일건으로 말하더라도 양녕은 국사범인 역적이 아니올시다. 양녕이 거주제한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의 하인이 주인의 글씨 공부 하는 일을 위하여 벼루 가지러 간다는 일을 마치 역적모의하러 가는 죄인을 잡듯 포박 명령을 내려서 군노사령과 역졸들을 풀어서 잡으라 한 일은 너무나 추세하는 가혹한 행동이었습니다. 또 경위를 듣자 하니 양녕은 하인의 싸움이 벌어진 것을 겨우 소문으로 듣고 하인들을 꾸짖기 위하여 산성에서 읍내로 내려갔사온데, 광주유수는 무엄하게도 양녕을 국사범인 죄수로 대접해서 어명을 팔고 대거리를 했다 합니다. 이리하여 볼기를 때린 것이라 합니다. 그리하옵고 광주유수는 백성들을 대할 낯이 없으므로 야반에 솔가도주해서 서울로 올라온 것입니다. 일군의 수령이, 더구나 광주의 중요한 요직에 있는 유수가 직장을 버리고 도망쳐 왔다는 이 사실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올시다."

동궁은 쾌하게 사리를 밝혀 아뢰었다. 전하는 여전히 귀를 기울여 듣고 말씀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무한 괴로운 모양이다. 동궁은 계속해서 아뢴다.

"듣자하니 광주유수는 정원의 승지를 통하여 알현을 청하고 어전에 병부과 인수를 바쳐서 사직하기를 청했다 하오니 무엄하기 짝이 없사옵니다. 이런 자를 그대로 두신다면 난신적자가 될 것입니다. 밝게 살피시어 처단을 내리시옵소서."

동궁의 간곡하게 아뢰는 말씀이 끝나니, 황희 황정승이 부복하여 아뢴다.

"신 황희,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전하는 부복해서 아뢰는 황정승을 바라본다.

"아까 소신이 아뢰었습니다. 한편 말씀만 듣지 마시고 양편 송사를 들어본 후에 처리합십사고 아뢰었습니다. 동궁저하께서는 양녕대군의 하인배들을 통하여 친히 정상을 살피시고 어전에 아뢰셨습니다. 이만하면 전하께서는 누가 그르고 누가 옳은 것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양녕은 비록 폐세자는 되었을망정 역적질한 죄인은 아니올시다. 이 점을 깊이 통촉하옵소서. 먼젓번 금부도사나 지금 말썽이 된 광주유수는 양녕을 죄인으로 대접했사오니 허물은 금부도사와 광주유수한테 있고, 양녕의 하인이나 양녕한테 있지 아니합니다."

전하는 눈을 감고 조용히 황정승의 아뢰는 말을 듣고 있었다. 동궁이 전하의 생각하는 모습을 뵙고 음성을 부드럽게하여 아뢴다.

"소자 황공함을 무릅쓰고 감히 아뢰옵나이다. 양녕이 다른 것을 구한 것이라면 모르겠습니다마는 글씨 공부를 하기 위하여 벼루를 구하러 서울로 하인이 향한 것을 유수는 포박 명령을 내렸으니 일을 판단하지 못한 자이옵니다."

전하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동궁은 장중한 목소리로 다시 아뢴다.

"광주유수는 처음 내려간 대군에게 쌀 한 톨 나무 한 단을 보내지 아니했다는 사실이 가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올시다. 듣자오니, 그자는 백성을 학대하여 가렴주구하는 자라 합니다. 자기의 이익만 거두고 추세 속에는 눈이 밝아서 대군을 학대하였으니 그 죄상이 큽니다. 지나치게 아바마마의 비위를 맞추려하여 이따위 짓을 감행했으니 죄를 다스려 파직을 명하옵소서."

여간해서 국사에 대하여 말씀을 안 하던 동궁이었다. 황정승이 동궁의 말씀을 받아 아뢴다.

"뿐만 아니라 광주유수는 무엄한 자올시다. 제 어찌 백성이 부끄러워서 야반도주한 몸으로 감히 병부와 인수를 어전에 바쳐서 울면서 벼슬을 그만두겠다 합니까. 이것은 전하께서 양녕을 마땅하게 생각하시지 아니하시는 기회를 엿보아 양녕을 더욱 불쾌하게 생각하시도록 하는 간특한 모략이올시다. 광주유수를 파면시키고 원악도로 귀양보내시옵소서."

관후장자로 이름 높은 황희 황정승이 부하를 귀양보내라고 전하께 말씀드린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정승의 장중한 한 마디는 크게 전하의 마음을 움직였다. 승지에게 분부를 내렸다.

"광주유수는 자기의 직장을 지키지 아니하고 야반도주를 했으니 그 죄가 크다. 파직을 시켜서 갑산으로 귀양보내라."

승지는 명을 받들어 물러가려 했다. 전하는 다시 승지를 불렀다.

"내수사에 명하여 양녕에게 쌀 삼십 석을 내보내게 하라."

동궁과 황정승은 전하의 마음이 돌려져서 백미 삼십 섬을 내보내라고 한 말씀을 듣자 황공 감격했다. 동궁이 부복하여 아뢴다.

"양녕이 듣자오면 얼마나 감읍하겠습니까. 바다와 같이 넓으신 성덕은 잊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동궁의 아뢰는 말씀이 채 떨어지기 전에 황정승이 부복하여 아뢴다.

"이제 성지가 이같으시니 나라는 태평하고 종실은 화합하여 무궁한 목록이 왕실에 가득할 것입니다. 삼가 하례를 아룁니다."

승지는 어명을 받들어 물러났다.

이때 황정승의 전하를 찬양하는 말이 막 끝날 때 병풍 뒤에 발자취 소리가 나면서 한 사람의 여인이 나타났다. 모두 보니 왕후 민씨였다. 동궁과 황정승은 황망히 일어나 맞이했다. 왕후 민씨는 고기가 동등했다. 가장 사랑하는 큰왕자를 폐세자를 만들어 광주로 내보낸 후에 식음을 전폐하고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양녕은 민후에게 있어 가장 믿음성스럽고 가장 든든했던 아들이었다. 전하가 민왕후를 폐하고 사랑하는 후궁 가희아로 정궁을 봉하려 했을 때 감연히 아버지께 대항하여 어머니를 두둔했던 사람은 오직 양녕이 있을 뿐이었다. 고려의 궁녀를 전하가 사랑해서 후궁으로 봉하려 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큰 싸움을 막아서 고려의 후궁을 세자궁으로 옮기게 하여 싸움을 가라앉게 했던 사람도 양녕이었다. 왕후의 친정인 민부원군 집을 전하는 가차 없이 역적으로 몰아서 잔인하게도 멸문을 시켰을 때 왕자 중에 어머니를 동정해서 전하께 저항한 왕자는 오직 큰 아드님 양녕이 있었을 뿐이었다. 양녕의 성격을 방탕하게 만들고 저항심이 폭발하게 한 근본 원인은 모두 다 전하의 방약무인한 독재의 태도였던 것이다.

민왕후는 양녕을 폐세자로 만들어 광주로 내보낸 후에 마치 좌우편 수족을 잃은 듯했다. 자나깨나 폐세자의 생각뿐이었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밤마다 양녕을 생각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형용이 초췌해서 피골이 상접되었다. 민후는 궁녀의내관을 통하여 양녕에 대한 일을 탐지했다. 금부도사가 쫓겨와서 전하께 고하던 일과 광주유수가 솔가도주해서 병부와 인수를 상감께 바쳐서 양녕을 이간친 일까지 알게 되었다. 양녕의 하인이 동궁에 와서 벼루를 찾아간 일까지 알았다. 황정승이 소명을 받아 들어오고 새 동궁이 어전에 아뢰러 들어 온 일도 알았다. 민왕후는 참을 수가 없었다. 중전에서 발길을 옮겨서 대전으로 나가 병풍 뒤에 숨어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민왕후는 어전으로 나가자 곧 전하께 고한다.

"전하께서는 백미 삼십 섬으로 양녕에게 은혜를 베푸려 하시오. 그만두시고 양녕을 서울로 불러주시오. 내가 보고 싶어서 배겨날 수가 없소이다. 폐세자를 시킨다면 세자의 자리만 내놓게 하면 그만일 것을 왜 광주까지 쫓아 보내서 이같이 파란이 나도록 만드시었소. 나는 간특한 금부도사와 광주유수를 꾸짖기 전에 먼저 전하의 편벽된 처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양녕은 세자의 자리 내놓기를 자원했던 사람입니다. 어서 서울로 불러들이시오."

전하는 묵묵히 대답이 없다. 왕후는 다시 전하께 고한다.

"양녕은 역적질할 사람이 아닙니다. 역적질할 사람이라면 왜 스스로 폐세자가 될 일을 일부러 해서 자기 자신을 방탕한 곳으로 떨어뜨렸습니까? 서울로 불러들여도 역적질은 결코 아니할 것입니다. 어서 하루바삐 서울로 불러주시오. 그리하여 이 어미의 맺혀진 한을 풀어주시오."

전하는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머니 되는 아내 민후의 지극한 자애의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로 불러들이겠다고 얼른 응낙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민왕후는 옆에 시립해 서 있는 황희 황정승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전하께서 양녕한테 쌀 삼십 섬을 내린신다는 말씀을 듣고 황정승은 전하께 바다같이 넓으신 성덕이라고 찬양하는 말씀을 올렸소이다. 양녕이 쌀 삼십 섬에 만족해서 감읍할 사람입니까? 황정승, 생각해보시오. 장차 삼천리강산의 만백성을 거느릴 세자의 자리도 헌신짝 버리듯 내던진 사람이올시다. 그래 양녕이 굶어 죽을지언정 쌀 삼십 섬에 감복이 되어 흐느껴 울 사람입니까? 글씨가 쓰고 싶다 해서 벼루를 구하러 온 하인들을 도둑놈 잡듯 포박령을 내린 주제에 쌀 삼십 섬이 무엇입니까. 그래 양녕은 전하의 핏줄을 받은 자식이 아니고 어디서 얻어다 기른 아들입니까. 당당한 적자요, 큰아들입니다."

 

모후의 자정

 

황희 황정승은 아무 말 없이 시립해 서 있다. 왕후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다시 민왕후는 말씀을 계속한다.

"위에서 이같이 소원한 생각을 가져서 금부도사를 미행시켰으니 하인들의 의분이 일어나고 광주유수 같은 간특한 위인이 날뛴 것입니다. 황정승, 양녕은 절대로 역적모의를 아니 할 것입니다. 모든 신하와 의논하고 전하께 충성되게 간해서 양녕을 서울로 불러들이도록 하시오. 이리해야만 종실이 화목하고 나라가 태평할 것입니다."

황정승은 민왕후의 말이 옳았으나 어전에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듣고 서 있을 뿐이었다. 왕후 민씨는 다시 전하 옆에 시립해 서 있는 동궁을 향하여 말씀한다.

"세자는 총명 영리하고 효성과 우애가 다른 사람보다도 출중한 사람이다. 폐세자가 된 형의 경우를 잘 판단할 줄 안다. 세자의 뜻대로 처결되지 못할 줄은 짐작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어미의 아들에 대한 정의를 버리지 말라. 자손 쳐놓고 사랑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으랴. 세자도 앞으로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민왕후는 동궁을 바라보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부탁했다. 세자는 고개를 숙였다.

"."

하고 가만히 대답할 뿐, 지존의 앞이었다. 더 대답을 올릴 수 없었다. 전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지극한 자애의 정을 잘 알겠소. 앞으로 왕후의 뜻을 짐작해서 잘 처리할 테니 들어가 편히 쉬게 하오."

전하는 부드러운 말로 왕후 민씨에게 일렀다. 전하의 옥음이 전에 비하여 휠씬 부드러운 것을 느끼자 민왕후의 노한 기운은 풀기가 차차 꺾였다. 왕후의 음성도 부드러워졌다.

"양녕도 내 아들이요, 효령도 내 아들이요 충녕도 내 아들, 성녕도 내 아들입니다. 효령이나 충녕이나 성녕은 어느 때라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마는 양녕만은 불현듯 생각이 나서 보고 싶어도 만나볼 길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이 나면 불러볼 수 있도록 서울 안에 살게 해줍시오. 폐세자가 된 것은 제가 폐세자가 되려고 일부러 저항하면서 방탕한 길을 취한 것이니 절대로 딴 맘은 먹지 아니할 것입니다. 광주에 내려가서 글씨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갈 것 아닙니까. 아들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오직 어미, 어미가 있을 뿐입니다. 절대로 딴마음이 없는 것을, 이 몸이 보를 두어 다짐할 테니 양녕을 서울로 불러들여 주십시오."

민왕후는 목이 메어 호소했다. 전하는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왕후 민씨의 어깨를 잡았다.

"자아, 그만하면 왕후의 심경을 알았소이다. 고정하고 들어가시오. 신하들과 의논해서 처리하리다."

전하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에 차차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내를 꺾어 누르던 독재의 심경이 점점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강한 투기를 부리던 민왕후의 심경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뉘우치는 마음이 들었다. 부드럽게 이같이 타일렀다.

"신하들과 의논은 무슨 의논을 한다 하십니까. 바로 전교를 내리십시오."

민후는 더 한 번 당부하고 내전으로 돌아갔다. 왕후가 내전으로 돌아간 후에 전하는 황정승에게 분부를 내린다.

"왕후의 아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너무 무시할 수 없소. 천륜의 시키는 일을 인력으로 꺾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로구려. 나는 양녕을 서울로 불러서 그의 모후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소마는 국가의 중대한 일이고 보니 전교 한 장으로 처리할 도리가 없소. 경은 과인을 대신해서 대간들의 여론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오."

황정승이 부복해 아뢴다.

"성의가 나변에 계신 것을 짐작해 알겠습니다. 사사로이 중신들을 모아 의논해보겠습니다."

황희 황정승은 어전에서 물러났다. 동궁도 뒤를 이어 어전에서 나왔다. 동궁은 마음이 착하고 어질었다. 합문 밖으로 나오면서 황정승한테 당부를 했다.

"어마마마의 지극하신 정을 낙심하지 않도록 여러 대신들한테 타이르시오. 대전께서도 저같이 마음을 돌리셨으니 국가의 다행한 일인가 하오."

동궁은 황정승한테 당부하고 합문 밖에서 옥교를 타고 동궁으로 돌아갔다. 황정승은 정승이 거처하는 빈청으로 나가 앉아 녹사를 불러서 모든 중신들을 청했다. 사헌부에서 대사헌을 위시하여 지평, 장령들이 나오고, 사건원에서 대사간을 수도로하여 사건, 정언, 헌납이 나오고, 홍문관에서 대제학을 위시하여 부제학, 직제학, 교리들이 참여했다. 황정승은 얼굴에 가득히 웃음을 띠고 백관을 향하여 말한다.

"오늘 여러분을 오시라 한 것은 정승의 자격으로 국가의 공사를 처리하려고 청한 것이 아니고 황희 개인의 자격으로 여러분을 청한 것입니다. 허물치 말아 주시기 바라오."

백관들은 모두 다 황정승의 돈후한 인격을 존중했다. 일제히 대답한다.

"황정승께서 부르시는데 공사나 사사나 저희들이 어찌 참여치 아니하겠습니까. 어떠한 좋은 말씀이 계시오니까?"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폐세자 양녕대군은 광주에 우거해 계시오. 왕후마마께서 양녕대군이 보고 싶어서 식음을 전폐하시고 주소로 울고만 계시니 과연 딱한 일이오. 모후 되시는 어머님의 지극한 정을 무시할 수가 없소이다. 이 일에 대하여 현재 동궁께서도 매우 걱정하고 계시오. 상감께 아뢰어 양녕을 서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황정승의 말을 듣자 모든 백관의 얼굴은 긴장되었다. 대제학이 정색하고 먼저 말을 꺼낸다.

"대감, 망령이십니다. 한 번 폐한 세자를 어찌 다시 불러들입니까. 대의명분으로 보아 도저히 다시 불러들이지 못합니다."

황정승이 껄걸 웃으며 대답한다.

"누가 폐세자를 다시 세자로 불러들인다 하는가. 일개 왕자인 양녕대군의 자격으로 불러들여서 그의 모후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자는 것이 아니겠소."

황정승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대사헌이 말한다.

"아무리 양녕대군의 칭호를 폐세자한테 내렸다 하나 양녕대군은 종묘와 사직에 죄를 짓고 추방된 사람이올시다. 이미 폐세자가 될 때 죄를 지었기 때문에 폐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하니 양녕은 아직도 죄인의 몸이올시다. 죄인을 어찌 도성 안에 살게 합니까."

황정승은 다시 웃으며 백관들의 의향을 무마해본다.

"양녕이 허랑방탕해서 한 대 전하의 뜻을 거슬렀다 하나 다른 죄인과는 다르지 아니하오? 자신이 폐세자가 되기 위하여일부러 허랑한 행동을 취해서 전하의 뜻을 거슬렀으니 양녕을 죄인이라고 판단해서는 아니 되오. 우리는 그분의 지극한 덕을 생각해서 양녕이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방임해두는 것이 좋겠소."

황정승의 말을 듣자 대사간이 펄펄 뛴다.

"대감, 아무리 사담이라 하시나 함부로 말씀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대신의 한 마디 말씀은 천금보다도 더 중합니다. 한 나라 도성 안에 어찌 세자 노릇을 했던 폐세자와 현임 세자인 동궁이 함께 계실 수 있습니까. 공연히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서 민심을 어지럽게 하는 장본이 될 뿐입니다. 비록 웃음의 말씀이라도 그런 말씀은 절대로 내시지 마십쇼.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올시다. 근본이 어지럽게 된다면 나라가 위태합니다."

대사간은 호들갑을 떨어서 큰소리로 의견을 말했다. 조정 신하들은 모두 다 세력에 아부하여 추세하는 인물들이었다. 새로 된 동궁의 의향은 알지 못하고 동궁의 앞길에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일이 있을까 하여 양녕의 서울 들어오는 입성문제를 모두 반대했다. 대의명분을 방패로 하여 부정하는 백관들의 말을 황정승도 어찌할 수 없었다. 황정승은 백관들을 흩어보낸 후에 조용히 어전에 복명했다.

"백관들이 모두 다 양녕의 입성을 반대합니다. 천천히 시기를 보아 다시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도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뉘우치는 마음의 싹이 텄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태종은 이제 춘추가 오십이 세가 되었다. 왕위에 나간 지도 어언 십팔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다. 원래 숙성했던 태종은 왕조를 건국했을 때부터 이십 청년의 몸으로 동분서주하여 활약이 많았다. 고려조를 뒤엎어버리고 이씨 왕조를 건국한 공은 태반이 태종의 힘이었다. 왕권을 수립하고 새로운 국가를 창업하려 하여 용단성 있게 큰일을 많이 하는 반면에 차마 못 할 악한 짓도 많이 했다. 고려의 왕씨네들을 멸종시키기 위하여 바닷속에 집어넣은 장본인도 태종이었다. 고려의 충신이요, 명재상인 포은 정몽주를 조영규를 시켜서 철퇴로 타살한 장본인도 태종이었다. 고려 충신이요, 고려의 원로대장인 최영 장군을 원통하게 역적으로 몰아 죽인 사람도 태종이었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 아버지 태조의 가장 사랑하는 계비 강씨의 소생인 이복동생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때려 죽인 사람도 태종이었다. 방석의 누님 경순공주의 남편인 개국 공신 흥안군 이제를 죽인 사람도 태종이었다. 방석의 편이 되었던 천하의 재사 개국 공신 정도전과 남은을 죽인 사람도 태종이었다. 정권쟁탈의 혁명으로 인하여 태조인 아버지와 부자가 불상견이 되어 함흥차사가 생기게 한 장본인도 태종이었다.

 

선위

 

정권을 잡으려는 태종은 계속해서 험한 풍파 속에서 칼을 빼 들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또다시 친형님 되는 방간과 칼을 마주잡고 일어나서 그의 조카를 죽이고 형을 물리쳐서 골육상잔의 씨를 또 한 번 뿌렸던 것이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집안의 정권쟁탈전은 여기서만 그치지 아니했다. 아버지 태조가 함흥으로 간 후에 계모 되는 강씨편 대장 조사의는 방석과 방번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함흥에 계신 아버지 태조를 앞세우고 동북면에서 반란군을 일으켜서 개성으로 향하여 쳐들어오려 했다. 극히 싸우기 곤란하고 남부끄러운 사태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전쟁을 하는 장면이 되었다. 그러나 싸우지 아니 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태종은 모든 불명예를 돌보지 아니하고 감연히 친정군을 이끌고 조사의를 굴복시켜서 죽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자 형제간의 알력은 더한층 심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달래서 송도로 모셔야만 했다. 태조도 또한 조사의의 군사가 패하고 보니 함흥에서 송도로 아니 올 수 없게 되었다. 송도로 돌아오니 환영문은 높이 세워지고 아들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맞이하러 나왔다. 태조는 아들 태종이 미워서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급히 활에 살을 메겨서 쏘았다. 태종은 다행히 몸을 기둥에 피했고 화살은 기둥을 뚫었다.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다. 이같이 해서 권력을 겨우 차지했으나 집안 속 근심은 끊이지 아니하고 일어났다, 후궁 가희아를 사랑하고 젊은 궁녀들한테 손을 댄 것이 화근이 되어 왕후 민씨는 불같이 투기를 일으켰고 민씨의 친정 형제들은 세자의 외숙이 되는 것을 빙자해서 만년 집권의 욕심을 부렸다, 태종은 민씨네 형제를 역적으로 몰아 처남의 집을 멸문시키고 조강지처인 민왕후를 폐위까지 시키려 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세자는 사사건건 부왕을 대항했고 주색에 빠지는 황음한 지경으로 타락해버렸다. 결국에 가서는 폐세자를 시켜서 광주로 추방까지 하는 일을 단행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태종은 나이 오십이 넘고 보니 모든 정력과 기운이 다 떨어졌다. 얌전하고 똑똑한 아들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봉한 후에 태종은 만사가 다 귀치 않았다.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졌다. 더구나 양녕을 폐세자로 만들어 광주로 내려보낸 후에 지난 일에 대하여 마음의 가책이 컸다. 새로 된 세자의 나이는 이십일 세다.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어도 넉넉하겠다고 생각했다,

양녕이 폐세자가 되고충녕대군이 새로 동궁이 된 지 두 달 후인 태종 188월의 일이다. 태종은 몸이 점점 더 약해지고 괴로웠다. 마음속으로 임금의 자리를 동궁한테 선위할 것을 결심했다. 효령대군에게 소명을 내렸다. 효령대군은 불경에 잠심하여 아무런 사념이 없는 것을 태종은 짐작한 때문이다. 효령은 오래간만에 아바마마의 부름을 받아 문안을 들어갔다. 태종은 둘째 아들을 향하여 반갑게 미소를 지어 묻는다.

"요사이 불경 공부가 어떠하냐?"

"맑고 담담하옵터다."

효령대군은 이제 불가사상에 승당 지경에 들었다.

'너무 맑고 담담하다면 인생에 대한 즐거움과 흥미가 없지 아니하냐?"

"욕심이 없는 허명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니 더한층 인생이 밝게 보여서 마음이 한가롭습러다."

효량은 간단히 대답했다. 태종은 아들에게 또 묻는다.

"내 나이 이제는 오십여 세다. 지금 와서 지난 일을 돌이켜보니 뉘우치는 일이 많다. 공연히 한평생을 너무나 분주하게 지냈다. 지나고 보니 허무하구나. 이제 장차 몸을 편안하게 가지고 싶다. 네 마음에 어떻게 생각하느냐?"

효령은 태종의 말씀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어떻게 옥체를 편안케 하시렵니까?

"왕의 자리를 네 아우 동궁한테 전하고 싶다. 그리하여 여생을 편안히 지내고 싶다. 네 생각이 어떠하냐? 내 심경을 토로해서 말하고 싶으나 말할 사람이 없구나. 그리하여 너에게 묻는 것이다."

효령은 비로소 아버지의 말씀하는 뜻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욕심 많은 아버지가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 하고 놀랄 지경이었다.

'역시 늙어지면 욕심이 없어지고 사람이 선한 자세로 돌아가는구나'.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황공하오나 좋으신 생각이올시다. 동궁의 나이도 이미 이십이 넘었고,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총명 영리하니 대위를 동궁한테 넘기시고 한가로이 처해 치시면 마음이 청정하신어 백세향수를 하실 것입니다."

효령대군은 아버지의 말씀에 크게 찬성했다.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면 마음이 맑아져서 백세향수를 한다는 말에 태종은 만열했다.

"그럼 동궁에게 선위할 것을 결정하겠다."

"감축하옵니다. 이제 청정세계에 사시옵소서."

효령은 담담하게 아뢰고 물러갔다. 다음날 태종은 측근에 있는 육방 승지들을 불러 이 일을 의논했다.

"내가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이 전만 못하다. 앞으로 만기를 보살피기 극히 힘이 든다. 왕위를 세자한테 전하려 한다. 세자는 총명하고 호학하니 어진 임금이 될 것이다. 내 뜻이 정해졌으니 그리 알라."

육방 승지들은 말씀을 듣자 깜짝 놀랐다.

"전하,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만조백관과 억조창생들이 놀랄 것입니다. 전하 만세 후에 세자께서 대통을 계승하시는 일이 당연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승지들은 일제히 간했다.

"내가 너희들한테 말한 일은 일체 비밀에 부쳐라."

"다시는 그런 말씀을 내리시지 마옵소서. 소신들도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승지들은 안심하고 물러갔다. 며칠 후 일이다. 태종은 송도로 거동했다가 한땅으로 돌아와 경회루에 지신사 이명덕 등 여러 중신을 불렀다. 모든 신하들은 상감이 송도에서 돌아온 후에 군신에게 선온을 내리시나 하고 생각했다. 토두 다 조복을 입고 추창해 들어갔다. 그러나 술을 내리는 선온이 아니었다. 전하는 돌연 중대한 발표를 했다.

"세자를 들라 해라, "

내시는 세자궁으로 달렸다. 태종은 군신을 향하여 옥음을 내렸다.

"내가 재위 십팔 년이라 하나, 햇수로 따진다면 즉위한 해까지 합해서 십구 년이나 되었다. 숙흥야매해서 일을 했건만 하늘 뜻을 다 받들지 못하고 덕이 없는 탓인지 재변이 해마다 일어나 농사짓는 백성이 격양가를 부르지 못했다. 이러한 중에 나는 묵은 병이 있다. 심신이 다 함께 괴롭다. 세자는 총명 호학할 뿐만 아니라 나이 이제 이십이 넘었다. 넉넉히 제왕의 자리에 앉을 만하다. 세자한테 선위하니 경들은 그리 알라."

모든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청천에 벽력 같은 소리였다. 모두들 울면서 간한다.

"전하, 이 어인 말씀입니까. 전하께서는 병환이 계시다고 말씀하시나 소신들이 뵙기에는 건강하십니다. 절대로 그러한 말씀은 내리지 마시옵소서,"

태종은 군신들을 저지했다.

"요사스럽게 울기는 왜 우느냐. 울음을 그치고 빨리 세자를 입시케 하라."

이때 세자는 까닭을 모르고 들어갔다가 상감이 자기한테 선위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황공했다. 합문밖에 서서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태종은 어전 내시들에게 묻는다.

"세자는 어찌 되었느냐. 왜 여태껏 오지 않느냐?"

"세자께옵서는 벌써 합문밖에 대기해 계십니다. 뜻밖에 선위하신 다는 말씀을 군신한테 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황공망조하여 들어오시지 아니하십니다."

"고게 무슨 말이냐. 빨리 들어오라 일러라."

태종은 큰 소리로 분부를 내렸다. 이윽고 세자가 황공한 태도로 어전 지척에 부복했다.

"내가 이제 나이 많고 병이 있어 만기를 살퍼기 어렵다. 세자에게 선위하니 그리 알고 군신을 거느려 좋은 정치를 해서 이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라."

세자는 울면서 부왕께 아뢴다.

"신은 아직 나이 어리고 미거하옵니다. 감히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아바마마 생존해 계신데 신이 어찌 감히 대임을 맡사옵니까. 차라리 신을 세자의 자리에서 면케 해주옵소서."

세자는 느껴 울면서 부복해서 사양했다. 태종은 다시 세자를 타이른다.

"내가 비록 왕의 자리를 세자에게 선위한다 하나 뒤에 있어 어려운 일을 보아줄 것이다. 군신 또한 충성을 다하여 세자를 받들 것이다. 나의 사후에 대임을 맡는 것보다 오히려 마음 든든할 것이다, 쓸데없이 딴 말을 하지 말라,"

세자는 여전히 느껴 울며 엎드렸다. 태종은 지신사 이명덕에게 분부한다.

"상서원 상서사를 불러라. "

상서사가 들어와 부복했다.

"대보를 받들어 들어오라."

지신사 이명덕이 아뢴다.

"아니 되십니다. "

태종은 지신사를 꾸짖는다.

'너희들이 어찌 이리 무엄하냐."

이명덕은 움찔했다. 상서사는 어전에서 물러나 상서원으로 향했다. 옥으로 조각한 옥새를 홍보에 싸서 상에 받쳐들고 경회루에 올라 어전으로 향했다. 지신사 이명덕이 문을 막고 옥새를 받들어 들어오는 상서사를 막았다.

"못 들어가오."

태종은 옥음을 높여 이명덕을 꾸짖는다.

"네 어찌 임금의 명을 막느냐?

모든 신하들이 장지 문밖까지 쫓아 들어가 울면서 아뢴다.

"지신사 이명덕이 왕명을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된 도리에 어찌 임금이 퇴위하시는 것을 차마 바라보고 있겠습니까. 소신들도 다함께 명덕과 같이 대보를 받들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신 등의 머리를 베어줍시오."

여러 신하들은 상서사가 대보를 받들어 들어오는 장지문을 가로막았다. 태종은 옥음을 가다듬어 군신들을 꾸짖는다.

"임금이 명령을 내리는데 신하가 좇지 않고 항거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

신하들은 하는 수 없었다. 상서사는 대보를 받들어 어전에 놓았다. 태종은 친히 대보를 들어 세자에게 주었다. 세자는 부복하여 받지 아니했다. 태종은 어수로 세자의 소매를 잡아 일으켰다. 세자는 엎드렸다가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태종은 손수 옥새를 세자에게 넘겨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세자는 황망하게 옥새를 상 위에 올려놓고 전하의 뒤를 따라 내전으로 들어갔다. 모든 신하들도 세자의 뒤를 따랐다. 세자는 다시 어전에 들어 울면서 아뢴다.

"선위하신다는 대명을 거두어주옵소서." 대신들은 문밖에서 통곡하면서,

"명을 거두옵소서." 하고 울어댄다.

태종은 내관 최찬에게 분부를 내렸다.

"네가 나가서 군신들한테 일러라. 과인은 이미 대보를 세자한테 넘겨주었다. 나는 이제부터는 임금이 아니다. 다시는 두말을 하지 말라 일러라."

내관은 상감의 말씀을 군신한테 전했다. 군신들은 세자와 함께 물러가지 아니하고 두 번, 세 번 번의하시기를 청했다. 태종은 최한에게 다시 분부를 내린다.

"앞으로 즉위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다. 내가 받던 홍양산을 연화방 세자궁으로 옮겨라."

최한은 무예통장을 불러서 분부를 전했다. 정전 안에 놓인 홍양산은 무예청들이 받들어 세자궁으로 옮겨졌다. 즉위식 때 새로 된 왕이 흥양산을 받고 대귈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세자는 더욱 황공했다. 대보를 안으로 받들고 들어가서 다시 거두시기를 청했다, 밤이 깊도록 세자는 뜰에 엎드려 대보를 태종제 바치려 했으나 태종은 받지 않고 어수를 들어 북두칠성을 가리키며 말씀한다.

"이미 나의 뜻을 두 번 세 번 말했는데 어찌해서 분분히 떠들어대느냐. 저기 저 북두칠성한테 맹세한다. 다시는 두말을 하지 말라."

동궁은 황공했다. 옥새를 지신사 이명덕에게 받들게 하여 잠시 경복궁에 두고 동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었다. 태종은 내관 최한과 시위군사를 동궁으로 보내서 어제 보낸 흥양산을 받고 대귈로 들어와 즉위례를 거행하라 했다. 동궁은 황공했다. 제왕의 의장인 홍양산은 차마 받을 수 없었다. 세자의 의장인 청양산을 받고 오장을 의장으로 하고 대궐로 향했다. 태종은 내시들을 불렀다.

"세자가 어떠한 의장을 차리고 오나 살펴보고 오너라."

내시들은 나가 보고 바른대로 고했다.

"홍양산을 받지 아니하시고 청양산에 오장을 앞세우고 오십니다."

태종은 역정이 벌컥 났다.

"내 말에 복종하기 싫다면 오지 말라 해라."

내시들은 황공했다, 벌벌 떨면서 전하의 말씀을 전했다. 동궁은 하는 수 없었다. 홍양산의 의장으로 대궐로 들어와 다시 사양하는 전을 올렸다.

"신은 성품이 어리석고 노둔한 중에 학문이 미숙하옵니다. 더구나 정치에 대해서는 까맣게 알지 못합니다. 세자의 자리에 있는 일도 염려되고 두렵사온데, 어찌 오늘날 선위하신다는 명을 받사오리까. 송구하고, 황공하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니다. 주상전하께옵서는 춘추가 정성하시고 성덕이 융숭하신 터에 묘사의 중책을 어린 몸에 맡기려 하시니 더욱 떨리고 황공하옵니다. 조종의 영이 또한 놀라실 것입니다. 국가의 대사는 상전하는 일이 원칙이온데 별안간 이같은 조처를 취하신다면 중외신서가 다 함께 놀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신의 지극한 정리를 살피시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시와 종사의 소망을 받아주시옵소서."

태종은 동궁의 상전을 읽은 후에도 선위할 뜻을 거두지 아니했다.

"아니 된다."

간단히 선유했다. 동궁의 상전이 들어가도 전하가 불윤하는 것을 알자 군신들은 합문안까지 들어가서 목을 놓아 통곡했다. 울음소리는 충상 앞까지 처절하게 들렸다. 태종은 효령대군을 불렀다.

"보야, 네가 나가 내 뜻을 군신한테 전해라. 내가 타성에게 전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한테 전위하는 것인데 어찌해서 이리들 통곡하고 울어대느냐. 너무나 무엄하다고 일러라."

효령대군은 자포 옥대로 어명을 받들고 합문에 들어와 통곡하는 신하들에게 태종의 말씀을 전했다. 군신들은 울음을 그치고 합문밖으로 물러갔다. 효령이 들어가 복명했다.

"군신들은 통곡을 그치고 합문 밖으로 물러갔습니다."

태종은 용상에서 일어났다. 준비해두었던 익선관을 친히 들고 전상에 부복해 있는 동궁의 앞으로 나갔다.

"머리를 들라."

동궁은 머리를 아니 들 수 없었다. 옆에는 효령이 시립해 섰다. 태종은 세자의 머리에 익선관을 씌워주었다. 다시 어명을 내린다.

"국왕의 의장으로 경복궁에 가서 즉위례를 거행하라."

동궁은 하는 수 없었다. 익선관을 쓰고 외전으로 나가니 모든 신하들은 동궁이 익선관을 머리에 쓴 것을 보고 모두 다 부복했다. 동궁은 군신을 향하여 이른다.

"유충하고 노둔한 사람이 대임을 맡기 어려워 지성으로 사양했으나, 종시 불윤하시니 어찌할 수 없소"

밝은 눈을 들어 좌우 신하를 바라븐다. 태종은 다시 내관 최한을 내보내서 군신한테 분부를 내린다.

"주상이 장년이 되기 전에는 군사에 관한 일은 내가 친히 듣고 재단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국사에 대하여 처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나도 정부 육조와 함께 의논하여 가부를 결정할 터이니 경들은 과히 염려하지 말라,"

대신들이 대답한다.

"신의 무리는 전하께서 전혀 국정에 참여하지 아니하실 줄 알았더니 이제 비로소 전하의 높으신 뜻을 알았소이다. 글월을 신민들에게 내려서 전위하시는 뜻을 밝히신다면 신민들의 마음은 평안할 것입니다."

내관 최한은 대신들의 뜻을 아뢰었다. 태종은 예조판서 변계량을 시켜서 선위하는 교서를 제술케 했다.

"과인이 덕이 없는 몸으로 태조의 홍업을 계승하여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이나 조심하여 국정을 다스린 지 어느덧 십팔 년이 되었다. 그러나 은택은 온 백성에게 미치지 못했고 천재와 지변은 자주 있었다. 이러한 중에 숙환이 격심하여 정사를 처리하기 곤란하다. 세자 '' 는 천성이 영명한 중 공검하고 효제하고 관인하여 대위에 오르기 합당하다. 지난 팔월 팔일에 과인은 이미 대보를 친히 세자에게 넘겨서 국정의 기를 전단하라 했다. 다만 군국중사에 대하여는 과인이 친히 재결할 터이다. 너희들 대 소신민들은 모두 다 과인의 지극한 회포를 몸 받아 동심협보하여 유신의 경사를 맞이하라.'

 

세종 즉위

 

교서가 내리니 모든 신하들은 고개를 숙여 명을 받았다. 태종은 다시 분부를 내렸다.

"모든 신하들은 경복궁으로 나가서 진하하라."

모든 종실과 문무백관들은 금관조복으로 바꾸어 입고 경복궁 뜰에 서열을 지어 진하하기 시작하니, 태종 십팔년 무술 팔 월 십 일의 일이었다. 경복궁 넓은 뜰 안에는 문무백관이 서열을 차려 좌우편으로 갈라섰다. 문관들은 동편 품계석 앞에 서고 무관들은 서편 품계석 앞에 벌여 서 있었다. 동궁이 원유관 강사포로 동궁 소속의 관원들에게 부액되어 근정전에 오르니 궁녀들은 동궁의 머리에서 원유관을 내리고 왕이 쓰는 황금 면류관을 올렸다. 강사포를 벗기고 일월의 흥배를 수놓은 홍포를 올렸다. 좌우 시신들은 동궁을 용상 위에 모시었다. 이리하여 동궁은 대위에 올랐다. 앞으로 지치의 업적을 한국 역사상에 나타나게 할 분이다. 군신들은 만세를 불러 국궁사배하여 진하하고 성균학생, 회회노인 승도들도 함께 만세를 불러 하례를 올렸다. 대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 교서를 내렸다.

'태조께서 홍업을 초창하셨고 부왕 전하께서 큰 업을 계승하시어 경천애인하시고 효제 신명에 통하시니 안팔은 태평하고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했다. 바다 도둑이 복종하고, 무위를 숭상하여 기강을 바로하시어 북구 또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백성에게는 인자한 덕을 베푸시니 민심은 흡족하고 공덕은 사책에 가득할 것이다. 승평의 극진함이 옛적에 보지 못하던 바다. 정치하신 지 이십 년이 가까운 오늘날 숙질 계시어 정사를 살피시기 어렵다 하시어 과인에게 왕위를 이으라 하셨다. 과인은 아직 연소하고 학문이 옅을 뿐 아니라 경험이 없으므로 세 번 네 번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므로 부득이 무술 팔 월 초 십 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백관의 조하를 받고 즉위하게 된 것이다. 억조창생은 알아두기 바란다. 부왕을 높여서 상왕으로 모시고 모후는 대비로 받든다. 국가의 일체 제도는 태조와 부왕의 성헌에 좇을 것이다. 겸하여 대사는 영을 내려 국가의 역적과 살부모한 극흥 극악한 죄인을 제하고 모두 다 석방한다.'

교서가 찬 번 내리니 환호 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세종은 다시 영을 내렸다.

"동궁빈 심씨로 왕후를 봉하고, 왕후의 아버지 심온으로 청천부원군을 삼구 왕후의 어머니 안씨는 삼찬국대 부인을 봉한다."

승지가 명을 받들었다, 예조판서 변계량은 세종께 아뢴다.

"이제 전하께서는 대위에 오르셨으니 상왕께 왕위에 오르신 예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만조백관들을 거느리시고 상왕전에 나가시어 알현식을 올리신 후에 종묘에 듭시어 봉고제를 거행하셔야 합니다."

세종은 윤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세종이 상왕과 상왕비한테 알현하는 의식은 당일로 거행되었다. 만조백관들은 금관 흥포로 면류관에 대례복을 입은 왕 전하를 호위하여 수강궁(지금의 창경궁)으로 나갔다. 경복궁에서부터 수강궁까지 뻗친 넓은 길에는 젊은 새 상감의 영특한 용안을 뵘기 위하여 남녀노소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봉련 위에 높이 앉아 수강궁으로 향하는 어가를 바라보고 예찬하는 소리가 높았다.

"어찌 저같이 출중하게 잘생기셨나, 금세상의 인물이 아니라 천상에서 젊으신 옥황상제가 하강하신 듯하구나."

"과연 참 옥골선풍(포을신린 이시다."

"눈은 봉의 눈이고 코는 우뚝해서 대장부다우시다."

"귀를 좀 보아라. 밝고도 윤이 도시네. 예지가 함빡 눈과 귀에 서리셨구나."

"이제부터는 형제싸움도 없어지고 부자간의 알력도 스러져서 국태민안이 되겠다,"

"폐세자된 양녕대군과 비교해서 어떠하시냐?"

"양녕대군도 잘생기셨지. 그러나 양녕대군은 조금 헐렁헐렁해서 배포가 지나치게 크지. 그렇지만 새 상감은 폭 가라앉은, 맺고 끊은 듯한 기상이 계시지 아니한가."

"겉으로 배짱만 크면 무엇하나. 차근차근 일을 잘 해야지. 그래야 국가의 모든 형편이 안정될 것이 아닌가."

"양녕의 그릇은 큰데 조그마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한스러운 일일세."

백성들의 비판은 사가 없었다. 똑바르게 새 상감을 알아보았다. 새 상감은 수강궁으로 들어가 정전에 앉아 있는 상왕파 상왕비께 면류관 곤룡포로 두 번 절해 뵈었다. 새 상감이 면류관 곤룡포를 입고 상왕께 절을 올리니 상왕 내외분은 더한층 감회가 깊었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든든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주상(초뇌에게 모든 일을 맡기니 내 마음이 흐뭇하고 든든하오."

상왕은 새 상감한테 공대하는 말을 썼다.

"너무나 짐이 커서 어깨가 무겁습니다."

새 상감은 부복해서 아뢰었다. 이때 상왕비 민씨는 수척찬 몸으로 억지로 예복을 입고 아들의 알현례를 받았다. 눈은 뀀하게 들어가고 살이 빠져서 퍼골이 상접했다, 양녕을 폐세자시키고 광주로 추방한 후에 마음이 상해서 병이 골수에 든 것이다. 그러나 눈초리에는 위엄이 늠름했다. 새 상감을 향하여 한 말씀을 내린다.

"나는 네가 임금이 되었다 해서 하우를 하지 아니한다. 결코 거탈을 쓰고 살고 싶지 않다. 네가 임금이 되었다 해도 나는 너의 어미다."

상왕비 민씨는 몸은 수척해서 퍼골이 상접했으나 목소리만은 쨍쨍했다. 거탈을 써서 경어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모후의 말씀을 듣자 세종은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해라를 하시는 것이 더 정답고 좋습니다. 어머님의 해라를 듣지 않고 다시 누구에게 해라 하는 말씀을 듣겠습니까."

이때 상왕 태종의 등에서는 찬 땀이 흘렀다. 자기는 민후에 비해서 인간으로 너무나 가면을 썼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상왕비 민씨는 새 상감을 향하여 다시 말씀을 내린다.

"네가 임금이 되어 만기총람하는 제일인자가 되었으니 국무에 대한 모든 일은 말할 것이 없지만 먼저 몸을 닦고 집안을 바로 한 후에야 나라도 다스리고 천하도 태평하게 될 것이다. 네가 이 뜻을 알았느냐?"

어머니 민대비의 말씀은 새 상감 세종의 폐부를 찔렀다. 자모인 어마마마의 말씀이 도리어 엄부의 말씀 같았다. 상왕의 등에 또다시 땀이 흘렀다.

", 알겠습니다."

세종은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상왕비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왕실이나 사가나 매일반이다. 수신제가의 근본은 화기를 조성하는 곳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몸을 자중하게 처리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화기를 이루자면 사랑이 앞을 서야 한다,"

새 상감은, "." 하고 대답했다.

"사랑이란 애정이야.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 애정이요,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애정이란 말이다. 형이 동생을 생각하고 동생이 형을 사모하는 것이 애정이니, 곧 사랑이란 말이다. 이것을 공연히 문자를 써서 효니, 제니 하지만, 효제충신이 모두 다 사랑이요, 삼강오륜에 사랑 아닌 것이 없단 말이다. 결국 제가는 별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말이다."

"자교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제가 하는 사랑은 친척에게 미치고, 친척에게 미치는 사랑은 우정으로 발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모른다면 임금 노릇을 할 수 없지."

피골이 상접한 상왕비 민씨의 여윈 얼굴은 엄숙했다. 옆에서 듣고 있는 상왕은 헐굴이 화끈했다. 처가를 몰살시킨 상왕으로 얼굴이 뜨겁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님 상왕비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 상감 세종의 가슴 안에 폭폭 배어들어 갔다.

"삼가 의지를 짐작하겠습니다."

"짐작만 해선 아니 된다. 실천을 해야 한다."

세종의 등엔 땀이 흘렀다.

"너는 너의 아버지의 본을 받지 말아라."

상왕비의 말씀은 더욱 날카로웠다.

"형을 생각하라. 아우를 사랑해라."

자모의 말씀이 또 떨어졌다. 옆에는 상왕이 앉아 있건만 상왕비는 날카로운 소리로 주저 없이 상왕을 본뜨지 말라고 했다. 세종은 태종께 미안하다고 생각했으나 가만한 음성으로, "." 하고 대답했다.

태종의 용안은 화끈했다. 자기의 한평생을 돌아다보았다. 아내인 민대비의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나이 늙었다. 인간으로 뉘우치는 마음이 가슴에 벅차올랐다. 세종은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상왕 내외분께 인사를 드리고 어가를 돌려 경복궁으로 돌아갔다. 세종은 상왕비의 간곡한 부탁을 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첫 정사로 양녕의 일을 처리하려 했다. 수강궁 상왕전으로 향했다. 왕은 상왕께 문안을 드렸다. 상왕은 왕에게 하문한다.

"대사령을 내린 후에 첫 정사를 시작하였는가?"

"아직 시작하지 아니했숩니다. 상왕 전하께 아뢰옵고 첫 정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무엇으로 첫 정사를 하려 하는가?"

상왕은 미소를 지어 왕에게 물었다.

"나라를 부강케 하려면 먼저 상하일체가 되어 동심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동심협력하는 방책을 취하자면 첫째 인화가 제일인가 합니다. 인화의 정책을 쓰고자 합니다, "

조리 있게 차근차근 아뢰는 왕의 말씀을 듣자 상왕은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좋은 생각일세. 어떠한 방식으로 인화를 취하는 정책을 쓰려 하는가?"

"신이 일찍 글을 배울 때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 하는 글을 배웠습니다. 자기 몸을 닦지 아니하고 그 집안을 옳게 다스릴 수 없고,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없구 나라를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절실하게 이 글 뜻이 옳은 것을 느꼈습니다. 먼저 저의 몸을 다스리고 집안을 제가 하려 합니다."

상왕은 무릎을 치며 칭찬한다.

"좋아. 한 나라 인군은 먼저 자기 몸을 살펴야 하고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하는 법이지. 나는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임금일세. 국가의 정세로 인해서 하고 싶었으나 할 수가 없었네. 그러나 왕은 이제 집안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안정된 처지에 놓여 있네. 좋은 생각일세."

상왕은 한편으로 자기가 제가를 잘못했던 일을 뉘우치고 한편으로 제를 해서 인화를 취하겠다는 아,들의 말을 찬성했다.

"소자는 감히 아뢰옵니다. 인화와 제가를 하기 위하여 양녕을 서울로 데려오려 합니다."

상왕은 묵묵히 고개를 끄떡했다.

"첫째 어마마마의 아들 생각하시는 지극한 마음을 위로하고, 둘째로 인화의 표본을 나라 사람들에게 보이는 소자의 충정이올시다."

"좋은 생각일세. 그러나 대신들이 들어줄는지 모르겠네."

"의논해 보겠습니다."

전하는 상왕전에서 물러났다. 경복궁으로 돌아온 세종대왕은 대신들을 불렀다. 영의정 한상경,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영돈녕 유정현들이 부름을 받고 들어왔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새로 임명된 대신들이다. 이때 황희 황정승은 체임이 되었다. 세종이 대신들을 불러 분부를 내리는 첫 정사였다. 대신들은 무슨 분부가 내리려나 하고 귀를 기울여 부복했다. 왕은 준수하고 총명한 젊은 용안을 들어 재상들에게 말씀을 내린다.

"내가 즉위예식을 거행할 때 효령과 경녕은 나의 곁에 있었으나 양녕이 없어서 서운하고 한스러웠소. 정치는 인화와 협심에서 좋은 정치가 이룩되는 것이라 생각하오. 먼저 집안에 형제의 화기가 없이 국가의 정치를 담당할 수 있겠소. 나는 양녕을 불러서 서울에 거처케 하려 하니 경들의 뜻은 어떠하오."

전하의 말씀이 채 떨어지기 전에 좌의정 박은이 아뢴다.

"아니 됩니다. 양녕은 이미 상왕께 죄를 얻어 폐세자가 된 몸이올시다. 폐세자를 어찌 왕궁이 있는 서울로 불러들이려 하십니까. 한번 폐한 세자는 밖에 내칠 뿐, 다시 불러들이시지 못합니다."

좌의정이 반대하는 것을. 보자 우의정 이원도 반대했다.

"대의명분상 양녕은 다시 서울로 불러들이시지 못합니다."

세종은 답답했다. 영의정 한상경에게 묻는다.

"영의정의 뜻은 어떠하오?

"좌의정과 우의정의 말씀이 옳은가 합니다."

대신들은 다 함께 반대했다.

세종은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여러 대신에게 말씀을 내린다.

"양녕이 비록 상왕께 죄를 얻어 폐세자가 되었다 하나 이제 마음을 가라앉혀서 광주에서 한운야학을 짝하여 한가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내 생각에는 서울로 불러들여도 무방하리라 생각하오. 상왕께서도 간곡하게 아뢰었더니 허락하시는 뜻을 표하셨소. 경들은 다시 한번 생각하기를 바라오."

세종은 대신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했다. 좌의정 박은이 여전히 고집하여 아뢴다.

"양녕은 성정이 격하여 금부도사를 욕뵈어서 의관파열을 시켰고, 광주유수에게 호랑 감투까지 씌우고 곤장을 때려서 원 노릇을 못 하고 야반도주까지 하게 했습니다, 만약 다시 서울로 불러들이셨다가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큰일이올시다."

세종은 다시 화한 옥음을 내린다.

"금부도사를 쫓아 보내고 광주유수에게 호랑 감투를 쓰게 한 일은 하인들이 한 짓이지 어디 양녕이 한 짓인가. 나도 그 일을 짐작해서 아는 일이오."

"하인이 한 일은 곧 양녕이 한 일이나 매한가지올시다. 서울 입성은 불가한 일이올시다."

이번에는 우의정이 또 불가하다고 아뢰었다.

세종의 간곡한 당부에도 대신들은 여전히 반대한다.

"금부도사나 광주유수는 모두 다 지나친 행동을 해서 이와 같은 불상사를 저질러놓았소. 금부도사가 미행한 일이나 광주유수가 양녕을 박대한 것은 모두 자취한 화라고 생각하오. 이러한 까닭에 상왕께서도 금부도사는 파직을 시키시고 광주유수는 귀양을 보내신 것이 아닌가. 경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주기 바라오."

이때 영의정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세종은 또다시 말씀을 내린다.

"그리고 나는 사사로운 은정을 말하겠소. 대비께서는 큰 아드님 되시는 양녕이 보고 싶어서 병환이 나시어 피골이 상접되시었소. 자전의 지극한 정성을 풀어드려야 하겠소."

묵묵히 듣고만 있던 영의정 한상경이 아뢴다.

"전하께옵서 수신제가로 근본을 삼으시고 인화로 정치하시는 방책을 세우시어 폐세자인 양녕을 서울로 불러들이신다는 너그러운 뜻은 소신들도 짐작하옵니다. 좋은 일이올시다. 그러하오나 양녕은 보통 대군이 아니라 세자가 되었던 큰 아드님이올시다. 만약에 양녕이 한번 뜻을 잘못 갖는다면 국가의 크나큰 소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서울 입주는 불가합니다."

영의정 역시 최후에 불가하다고 단언을 내렸다. 모든 대신들이 반대하니 세종도 하는 수 없었다. 다음날 수강궁으로 거동하여 상왕께 문안한 후에 복명했다.

"양녕을 서울로 데려오려 하여 대신들을 불러 의논했으나 대신들은 폐세자를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할 수 없다 하여 극력 반대하옵니다. 어찌 처리해야 좋을지 소자의 마음이 실로 민망하옵니다."

태종은 길게 한숨을 지었다.

"대의명분을 따져서 말하는 대신들의 의사를 강제로 탄압할 수도 없고 실로 딱한 노릇일세."

태종은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소자의 의향에는 상왕 전하께서 대신들에게 친히 분부를 내리시어 양녕을 곧 데려오도록 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태종은 한동안 침묵을 지켜 생각했다.

"대신들의 의향도 무리한 생각은 아닐세.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한번 폐해서 쫓아낸 세자를 다시 불러들인 전례가 없네. 그것은 정치적으로 변란을 일으킬까 조심하는 때문일세. 그러하니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네."

세종대왕은 미소를 지어 상왕께 아뢴다.

"양녕은 결코 정치에 야심을 둔 인물이 아니올시다. 스스로 왕위를 버리기 위하여 양광의 짓을 한 것입니다. 상왕께서는 모르시는 일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소자와 효령만은 양녕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종은 당신의 아들이건만 아들의 마음을 몰랐다. 깜짝 놀랐다.

"양광이라니, 일부러 미친 체해서 허랑방탕한 짓을 했단 말인가?."

", 그러하옵니다."

상왕은 안정을 크게 뜨고 묻는다.

"상감은 양녕의 양광인 것을 어떻게 짐작했나?"

"효령이 잘 알고 있습니다. 효령을 명소하시어 하문하옵소서."

 

행방을 감춘 양녕

태종은 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곧 상궁을 불렀다.

"효령의 집으로 별감을 보내서 곧 입시케 하라."

상궁은 대전 별감에게 상왕의 명을 전했다. 대전 별감이 효령의 집으로 황급히 나갔다.

"상왕 전하께서 곧 입시를 명하십니다."

"혼자서 계시더냐?"

효령은 별감에게 물었다.

"상왕 전하와 왕 전하께오서 함께 계십니다."

효령은 황급히 자비를 타고 대내로 들어갔다. 효령대군은 탑전을 문후를 드렸다. 아우님 되는 세종대왕께도 신의 예로 문후를 올렸다. 효령은 두 분 전하께 문후를 드린 후에 화기 가득한 얼굴로 아뢴다.

"두 분 전하께서 한자리에 계신 것을 뵈오니 마음이 든든하고 흐뭇하옵니다. 어인 일로 소명을 내리셨습니까?"

세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이 없고 상왕이 말씀을 내린다.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상왕은 효령한테는 해라를 했다. 효령은 신하인 까닭에 해라를 하고 상감은 임금인 까닭에 하게를 해서 불렀다.

"무슨 일이시오니까?"

"양녕의 일을 묻고자 한다. 지금 상감의 말을 들으니, 양녕의 허랑방탕한 행동은 양광의 태를 뵈기 위하여 고의로 한 짓이라니 과연 그러하다고 생각하느냐?"

", 소신도 그러한 줄로 살피오."

"어찌해서 양광이라고 생각하느냐? 증거를 댈 수 있겠느냐?"

"증거가 확실합니다. 상감이 살피신 바와 같습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양녕은 거짓 미친 체를 했더란 말이냐?"

"양녕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 싫어했습니다."

효령의 아뢰는 말을 듣자 태종은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왕의 권력을 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모두 소원하는 자리인데 양녕은 어찌해서 부귀영화의 자리인 제왕이 되기를 싫어했단 말이냐?"

효령이 성음을 나직이하여 아뢴다.

"황공하오나 신은 이미 출가하여 불제자가 된 몸이오니 은휘하지 아니하고 두 분 전하 앞에 아뢰겠습니다. 양녕은 태조 할배의 창업과 상왕 전하의 행하신 일을 좋다고 생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왕의 자리를 헌신짝 대하듯 했습니다. 그는 이신벌군한 것을 불의로 생각한 때문이올시다."

이때 상왕의 용안이 잠깐 붉어졌다. 효령은 다시 계속해서 아뢴다.

"다음에 그는 상왕 전하의 형제 상쟁하신 일을 불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왕의 얼굴이 또 한 번 화끈했다. 효령은 또다시 아뢴다.

"그는 함흥차사의 일을 다 마땅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상왕은 잠자코 대답이 없다.

"그는 상왕 전하께서 조강의 아내인 어마마마를 소원하시고, 후궁들을 편애하신 일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상왕은 얼굴이 또 화끈했다. 효령대군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뢴다.

"양녕은 외가가 결딴난 것을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외숙들은 할아버님을 도운 개국 공신이요, 아바마마를 도운 중흥 공신이올시다. 현저하게 역적질한 일이 없어 역적으로 몰린 처사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후의 낯을 보시더라도 그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올시다. 이 처사는 상왕 전하께서 신하들의 권력다툼으로 인하여 나타난 참소를 들으시고 편벽되게 처사하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올시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 털어놓고 아뢰옵니다."

상왕의 얼굴에 초연한 빛이 감돌았다. 효령이 다시 아뢴다.

"소신이 양녕한테 당한 일을 아뢰겠습니다. 처음 양녕의 황음무도한 짓을 자꾸 계속하니 소신은 양녕이 반드시 폐위될 것을 짐작해 알았습니다. 양녕의 다음 아우는 소신이올시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양녕이 만약 폐세자가 되는 경우에는 세자의 지위가 소신한테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해서 더욱 몸조심을 해서 글공부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과연 옹졸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양녕은 소신의 글공부하는 곳을 찾아와서 발길로 차며 말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생각하시는 곳은 딴 데 계신 데 쓸데없는 헛짓을 말라고 야유를 했습니다. 그때 아바마마께서는 후궁 가희아의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소신은 황연히 깨닫고 세자 될 욕심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소신은 불교에 귀의하여 불경을 읽고 불교에 잠심하였습니다. 이제 상왕 전하께서 선위하시고 왕 전하께오서 즉위하셨음에 국가는 안정이 되었습니다. 감히 양녕과 소신의 지난 일을 아뢰어 양녕이 세자의 지위를 내놓기 위하여 황음무도한 짓을 일부러 한 것을 밝힙니다. 하문하시니 감히 지난 일을 들어 아뢰옵니다."

태종은 효령의 기탄없이 아뢰는 지난 일들을 듣자 용안에 자못 무색한 빛을 띠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자기는 한때 양녕을 폐하고 경년군 ''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양녕의 거짓 미친 체한 사실이 소소하게 드러났다. 세종도 이 말만은 처음 듣는 소리다. 새삼 양녕을 존경하고 싶은 생각이 더한층 간절했다. 상왕은 이제 모든 과거사를 뉘우치는 심경 속에 있었다. 홀연 호방한 웃음을 껄걸 웃는다.

"좌우간 나의 만년의 팔자가 훌륭하다. 임금의 자리가 싫다 해서 양광의 태도를 취한 아들이 있고, 부처가 된 아들이 있고, 다음에 현세에 제왕이 된 아들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냐, 하하하."

태종은 소리 높이 웃었다. 세종은 다시 상왕께 아뢴다.

"효령도 아뢴 바와 같이 양녕은 일부러 제왕의 자리를 버린 사람이니 다른 뜻이 없을까 합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조정 대신들은 그의 서울 입성을 저리 반대하니 과연 딱한 일이올시다. 어찌 처단해야 좋을지 하교를 내려줍시오."

태종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상왕인 태종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왕 전하에게 분부를 내린다.

"상왕비와 상감은 골육의 지극한 은정으로 양녕을 불러들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대신들의 반대하는 말도 일리가 있는 일이다. 예로부터 역사상에 한 번 내쫓은 세자를 다시 불러들인 전례가 없다. 양녕이 비록 딴 뜻이 없다 하나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공연히 양녕을 그른 길로 빠뜨리게 하면 곤란한 일이다. 여태껏 양녕이 탈선한 것은 그의 주위에 있는 자들이 그를 잘 인도하지 못한 때문이다. 신중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네."

"어떠한 방식으로 신중하게 처리하옵니까?"

세종은 상왕께 간곡하게 아뢰었다.

"말 들으니 양녕을 산성 안에 두었다 한다. 거처와 식량이 불편하고 부족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광주에 따로 양녕의 집을 지어 거처케 하고 후하게 양식을 대어주는 것이 좋겠네. 다음엔 주위에 있는 하인과 문객들을 헤쳐 보내게 하고 광주유수 밑에 있는 판관에게 영을 내려서 양녕을 보호하는 것이 좋겠네."

세종도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세종은 상왕전에서 물러나와 경복궁으로 환어한 후에 곧 대신들을 불렀다. 삼정승과 육조판서가 모였다. 세종은 곧 상왕의 뜻을 전했다. 한두 사람 강경파의 대신들은 폐세자의 대우가 과분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었으나 여러 대신들은 상왕과 전하의 뜻을 받들어서 광주에 양녕의 집을 새로 짓고 식량과 용도를 대어주는 일에 동의했다.

세종은 곧 승지를 불러 전교를 내렸다.

"새로 부임된 광주유수에게 영을 내려서 새로 양녕의 집을 짓고 산성에서 옮기게 한 후에 현재 양녕을 모시고 있는 문객과 하인들은 모두 다 성으로 환송케 하라. 그리고 광주 판관은 양녕 일가를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날마다 양녕의 집에 대령해 있게 하라."

승지는 곧 어명을 받아 전교를 쓴 후에 광주유수한테 유시를 보냈다. 이때 양녕은 명보와 장사패들이 서울에 가서 벼루와 문방구를 가지고 온 후에 어리를 시켜 먹을 갈게 하고 날마다 글씨 공부를 했다. 인생을 달관하면서 유유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구성궁 예천명을 임첩하고 왕우군의 진체를 썼다.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글시쓰기가 피곤하면 거문고를 타보고, 거문고가 싫증이 나면 냇가에 낚시를 던졌다. 양녕이 이같이 한일월을 보내고 있을 때 하루는 명보와 장사패들이 장터에 나갔다가 뛰어 들어왔다.

"광주유수가 새로 도임이 되었다 합니다. 전임 광주유수는 귀양을 보냈다 합니다."

양녕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임 광주유수를 귀양보낸 것은 황희 황정승과 동궁께서 상감께 힘차게 아뢰어서 직책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합니다."

"사필귀정이니라."

양녕은 간단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양녕이 명보와 한담하고 있을 때 별안간 산성이 떠들썩하며 광주 관속들이 올라왔다.

"신임 사또께서 나리를 뵈오러 올라오십니다. 만나보실는지 존의를 묻자오라 합니다."

"들라 해라."

조금 있다가 신임 광주유수가 산성으로 올랐다. 양녕께 관복인 정복을 입고 뵈었다.

"신임 광주유수올시다. 삼가 문후를 올립니다."

양녕은 예의를 잃지 아니했다. 점잖게 답례를 했다.

"내가 성주를 찾아보아야 할 텐데 성주가 나를 찾으니 미안하기 짝이 없소."

"황공한 분부를 내리십니다. 대군께서 어찌 행차를 하신단 말씀입니까. 그 같은 분부를 내리시면 소관의 등에서는 땀이 흐릅니다."

광주유수는 전임 유수가 일을 잘못 처리해서 장사패들한테 욕을 당하고 야반도주를 했다가 귀양까지 간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금지옥엽의 높으신 몸으로 이같이 궁벽한 산촌에 거처하시니 얼마나 불편하시겠습니까. 앞으로 지성을 다하여 받들겠습니다."

"고맙소."

양녕은 간단히 대답할 뿐이었다.

 

어리의 자결

영의정은 또다시 금부 당상에게 세종대왕의 뜻을 전한다.

"양녕한테는 어리라는 천하일색의 소실이 있소. 한동안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던 곽중추부사의 첩을 빼앗아 소실로 만들었던 여자요. 양녕대군의 행방을 이 여자는 반드시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어 엄한 분부를 내리신 것이오. 금부에서는 이 여자를 잡아다가 엄하게 국문해서 진상을 밝히라 하셨소."

금부 당상도 영의정의 명을 받았다.

"지시대로 봉행하겠습니다."

영의정은 형조판서한테 당부한다.

"형조에서는 사건을 면밀하게 종합해서 조사, 처리하도록 하시오."

형조판서가 물러갔다. 모든 장관들도 뒤를 따라 일어났다. 장관들은 제각기 행동을 개시했다. 이조판서는 경기감사를 위시하여 각도 감사에게 영을 내려서 양녕대군의 행방을 수탐하라 하고 한성 판윤과 포도대장은 양녕을 모시고 있었던 팔장사의 종적을 탐지해서 포도청으로 잡아들이라 했다. 한편 금부 당상은 양녕한테 가서 밥을 짓고 있었던 광주 관비와 양녕의 소실 어리를 잡아들이라 했다. 광주 바닥이 발끈 뒤집히고 조선 팔도가 술렁거렸다. 서울과 광주에는 기찰과 포교들이 새까맣게 펴졌다. 촌에서도 수군거리고 읍에서도 수선거렸다.

"기찰과 포교와 군교들이 거미알 퍼지듯 했으니 웬일인가?"

"양녕대군이 별안간 온데간데없이 종적을 감추셨다네."

"웬일일까."

"그것을 알 수 있나."

"그런데 기찰과 포교들이 곳곳마다 눈깔을 번득이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허허, 이 사람 참 영문을 모르네그려. 양녕대군은 전에 세자로 계시던 분 아닌가. 상왕의 눈에 나서 폐세자가 되었으니 앙심을 먹고 무슨 일을 할까 보아 겁이 나서 잡으려는 것일세."

"부전자전이라더니 또 형제싸움이 일어나는 모양이지."

거리의 군중들은 이같이 수군댔다. 서울 금부로 제일 먼저 잡혀 온 여자는 광주 관비였다. 금부 당상은 곧 좌기를 차리고 관비 두 사람을 국문했다.

"너희들이 광주 관비냐?"

", 그러합니다."

"양녕대군이 어디로 가셨느냐?"

"쇤네들은 광주 관비로 양녕대군께서 계신 곳에 가서 밥을 짓고 찬을 만드는 소임을 맡았을 뿐입니다. 아래서 돌고 있는 저희가 어찌 감히 대군의 행방을 알겠습니까. 전혀 모릅니다."

금부 당상은 엄포로 관비들을 호령했다.

"저년들을 형틀에 매달고 바른말이 나올 때까지 되게 쳐라."

집장사령들은 관비를 형틀에 잡아매고 볼기를 치기 시작했다. 매는 십 도를 넘었다. 관비들은 아픔을 못 이겨 목을 놓고 울었다. 금부 당상은 때리던 매를 그치게 하고 다시 엄하게 묻는다.

"이실직고해서 바른 대로 아뢰어라. 만약 거짓말로 공초한다면 또다시 매를 때리리라. 양녕이 어느 때 어디로 갔느냐?"

"굽어 통촉해 살피옵소서. 쇤네들은 아래에 있어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나가신 때도 모르고 가신 곳도 모릅니다. 다만 아는 것은 아나서이신 어리라는 여자가 밤늦도록 사랑에 모시고 있다가 자정이 넘어서 안으로 들어간 일을 알 뿐입니다. 더 이상은 모릅니다. 죽이셔도 모릅니다."

금부 당상은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관비의 공초를 듣고 보니 관비를 더 문초한 대야 양녕의 행방을 알 도리가 없을 듯 생각이 들었다.

"광주 관비들을 아직 옥에 내려 가두어라."

분부한 후에 좌기를 거두고 곧 대궐로 들어갔다. 어리는 천기 출신이라 하나 증경세자의 소실이다. 비록 폐세자가 되어 광주로 쫓긴 양녕이라 하나 엄연히 대군의 친호를 가지고 있다. 대군의 소실을 금부당상이 맘대로 잡아들일 수 없었다.

금부 당상은 어전에 나가 아뢰었다.

"금부에서 전교를 받들어 광주 관비들을 문초하였습니다마는 전혀 대군의 행방을 모릅니다. 그럴 법한 일이올시다. 그들의 공초에 의하면 양녕의 소실 어리가 있사온데 그는 밤늦도록 양녕과 함께 있다가 자정이 넘은 후에야 안으로 들어가 양녕 부인을 모시었다 합니다. 양녕의 소실 어리는 양녕의 행방을 짐작할 듯합니다. 잡아 국문하고 싶사오나 왕실의 종친인 만큼 금부 당상의 뜻만으로는 잡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삼사 품달하옵니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란 여자는 곽중추부사의 소실이었던 여자라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

", 그러하옵니다."

금부 당상이 대답했다.

"금부 당상의 권한으로 국문하기 어렵다면 과인의 명으로 잡아들여서 국문하라."

근엄한 세종은 어리가 곽중추부사의 첩으로 양녕한테 간 것을 평소에 불미하게 생각한 때문이다. 금부 당상은 어명을 받고 물러났다. 금부로 돌아가자 곧 수하의 도사를 불렀다.

"도사는 광주로 내려가서 유수한테 연통하고 양녕대군의 소실 어리라는 여자를 잡아들이오. 어명이오."

금부도사는 영을 받고 나졸 십여 명을 거느린 후에 광주로 향했다. 도사는 광주에 당도하자 대기명령을 받고 있는 광주유수를 만났다.

"양녕대군의 소실 어리를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내리셨소."

도사는 광주유수한테 금부 당상의 공문을 전달했다. 광주유수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자기가 양녕을 존경하는 까닭에 항상 산성으로 올라가서 문후를 드리는 동안 먼발치로 어리를 여러 차례 본 일이 있었다. 어리는 자색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마음도 현숙했다. 비록 곽중추부사의 소실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양녕의 소실이 되었다 하나, 그것은 일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힘 앞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운명의 작희라 할 수 있었다. 어리가 만약 서울로 잡혀가는 날이면 그는 장하에 고혼이 되기 십상팔구였다. 광주유수는 슬며시 어리에게 동정해주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사색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어명이 내리셨으니 본관은 거저 금부도사의 지휘를 받겠소이다."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면 곧 산성 안에 있는 양녕대군의 우거로 인도해주시오."

금부도사가 재촉한다.

"서울서 내려오시느라고 매우 시장하셨겠습니다. 도사께서도 점심을 자시고 나졸들에게도 음식을 먹인 후에 떠나기로 하십시다. 향도로 군노사령 서너 명을 배정해드리오리다."

유수는 내아에 기별해서 금부도사 일행의 음식을 차려서 성찬으로 대접하고 일변 심복 토인을 비밀히 산성으로 올려보내서 양녕대군의 부인과 어리한테 전갈을 했다.

"서울서 금부도사가 어명을 받들고 내려와서 대군의 아나서를 잡으려 합니다. 대군의 가신 곳을 대라는 것입니다. 잡혀가기만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미리 연통을 올리니 곧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군의 부인과 어리는 전갈을 받고 깜짝 놀랐다.

"자네가 잡혀가면 어찌하나. 죄 없이 큰 고생을 할 테니 유수의 말대로 일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네."

부인은 어리한테 조용히 일렀다. 어리는 눈물을 머금고 부인께 고했다.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몸이 앞으로 무슨 낙을 보겠다고 몸을 피하여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차라리 서울로 잡혀가서 장하에 죽는 일이 옳은가 합니다. 그동안 소인은 빈마마의 바다같이 넓으신 은택을 받자와 오늘날까지 목숨이 붙어 있었던 것은 과분한 일이었습니다. 그저 이제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 저의 행복인가 합니다."

어리의 눈에서 수정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양녕의 부인은 어리를 다시 위로한다.

"자네가 무슨 까닭에 장하에 죽어서 원통한 귀신이 된단 말인가. 가신 곳을 모르는 것을 모진 매를 맞고 죽는다면 그 아니 원통한가. 혹시 대군께서 돌아오신다 해도 가슴에 못을 박게 되실 테니 빨리 몸을 피하도록 하게."

어리는 심중에 어떤 마음을 결단한 듯 했다. 얼른 몸을 피하려 들지 아니했다. 어리의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양녕대군의 부인이 도리어 초조했다.

"시각이 박두해 오네. 별생각 말고 어서 몸을 일으켜 피하도록 하게."

양녕의 부인은 어리의 어깨를 껴안아 일으켰다.

"일이 급하이. 어서 몸을 피해서 산으로 올라가게."

어리는 대군 부인의 지극히 착한 마음을 저버리기 난처했다. 머리에 섬광이 번개처럼 스쳤다. 잠깐 눈을 감았다. 어리의 예쁜 입술에서 긍정하는 말이 떨어졌다.

"그럼, 하교대로 몸을 피하겠습니다."

어리는 몸을 일으켜 대군 부인께 절을 올려 하직을 고한다.

"그럼, 소인은 물러갑니다. 만수무강하옵소서."

절을 하며 목이 메어 말을 차마 이루지 못했다. 대군 부인도 뼈가 아프도록 슬펐다.

"자네까지 마저 가게 되니 이제 나는 사고무친, 혈혈단신의 몸이 되었네. 부디 몸조심해서 대군께서 돌아오실 때 다시 오도록 하게."

부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어리는 자기 처소로 내려갔다. 아무 행리도 가지지 아니했다. 다만 손에 명주수건 하나를 들었을 뿐이었다. 어리는 수건을 들고 산으로 올랐다. 푸르게 무성한 솔밭 쪽으로 몸을 감추며 산성 상상봉으로 올랐다. 뻐꾹새가 처량하게 울었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

어리가 발을 옮길 때마다 뻐꾹새는 처량하게 울었다. 어리의 머릿속에는 기구한 자기 한평생의 일이 휙휙 돌았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 그러나 너무나 예뻤다. 장악원의 기생으로 들어갔다. 역시 얼굴이 예쁜 탓이었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개가를 해서 부지거처가 되었다. 장악원의 첫손을 꼽는 예쁜 기생으로 재상가와 조정 연회에 쉴 틈 없이 불렸다. 그러나 몸만은 깨끗하게 가지려고 무한 애를 썼다. 중간에 곽중추부사의 소첩이 되어 적성이란 경기 땅서 농촌생활을 하고 지냈다. 면화를 심어서 솜을 만들고 누에를 쳐서 명주를 짰다. 황금 같은 보리 이삭이 물결치는 들판을 바라보고 시름을 잊었고, 가을이면 타작마당에서 벼를 털어서 노적 쌓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이때가 어리에게 있어서는 비록 늙은이의 소실이었다 하나 제일 즐거운 시절의 한 토막이었다. 늙은 영감의 허락을 받아서 오래간만에 서울집을 찾았다. 장악원패들이 양녕한테 어리의 자색이 천하일색이란 말을 해서 양녕은 어리를 보기 소원했다. 안면 있는 장악원패들이 뚜쟁이 짓을 하러 찾아왔다. 어리는 단연 물리쳤다. 겁이 나서 친척 이승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자신의 정조가 깨진 것을 말할 것도 없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양녕은 폐세자가 되어 지금 광주로 쫓겨왔던 것이다. 어리는 양녕한테 사랑의 농도가 짙었다는 것보다도 양녕과 부인한테 죄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더 깊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나지 아니했던들 양녕은 폐세자가 되어 광주 구석으로 쫓겨오지 아니했으려니 하는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광주로 쫓겨온 후에도 파란곡절은 하도 많았다. 금부도사의 미행 사건, 광주유수의 호랑 감투 사건, 하다한 풍파를 내리 겪었다. 돌연 나라에서는 장사패들을 쫓아버리고 양녕의 단 한 사람의 심복인 명보와 그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까지 양녕의 곁에서 거행을 못 하게 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광주판관으로 상직을 하게 하고 광주의 군노들로 파수를 보아서 양녕의 동정을 감시하게 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양녕은 새벽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기막힌 일이다. 나라에서는 양녕의 종적을 대라고 금부도사가 자기를 집으러 왔다는 것이다. 양녕의 간 곳을 알 도리도 없거니와 설혹 안다손 치더라도 역적으로 모는 양녕의 행방을 가르쳐준다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못할 짓이었다. 어리는 부인의 동정 깊은 애정을 받아 몸을 일으켜 피하기는 했으나 괴로운 이 세상에 더 살아보고 싶은 생각은 손톱 반만큼도 없었다. 자기는 권력에 눌려서 변절을 하여 양녕의 소실이 다시 되었으나 일찍이 세자마마의 별당이었다. 오늘 금부도사한테 잡혀서 서울로 간다는 일은 사람으로서 당하지 못할 욕이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자기는 더 세상에 부지해서 살아나갈 처지가 되지 아니했다. 욕을 보고 구명도생을 해서 더 산다 해도 양녕한테는 유익한 몸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리는 슬프고, 고적하고, 원통한 한을 가득히 가슴에 안은 채 녹음이 울창한 산꼭대기로 기어올랐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

구슬픈 뻐꾹새 소리가 다시 울렸다. 산꼭대기로 오르는 어리의 마음을 더 한층 구슬프게 했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결정한 어리였다. 슬픔 중에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까 어리가 명주 수건을 손에 들고나온 것은 죽는 방법까지 마음속으로 결정했던 까닭이다. 약을 먹고 죽을까 생각했으나 창졸간에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 칼을 가지고 자문하려 생각도 해보았으나 음식을 장만하는 무딘 식칼로는 목을 찔러도 죽지 아니할 것이다. 어리는 나올 때부터 산으로 피할 것을 생각했고, 산을 생각하니 울푸른 낙락장송을 연상했다. 낙락장송을 연상한 것은 목을 매서 죽을 것을 생각한 때문이다. 어리는 이곳저곳에 멋지게 휘어 늘어진 낙락장송을 둘러보았다. 그중 가기의 키가 닿을 만한 소나무 하나를 최후의 장소로 마음먹어 두었다. 어리는 명주수건을 가지에 걸어놓고 마지막 길을 밟으려 했다. 홀연 머리에 곽중추부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극히 자기를 사랑해주던 노인이었다. 일단 세자궁으로 들어온 후에 감감하게 음신이 막혀버렸다. 얼마나 자기를 원망하고 매정한 계집이라고 매원할 것을 생각하니 죽는 길에 마지막 유서라도 한 장 써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곽중추부사뿐만이 아니었다. 양녕대군께도 죽어서 세상을 버린다는 말을 한마디쯤 써서 남겨두고 싶었다. 어리는 막상 유서를 써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주위를 돌아다보니 붓도 없고 먹도 없다. 아쉬운 마음으로 안타까웠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꾹새가 또다시 울었다. 어서 죽음을 재촉하는 소리같이 들렸다. 뻐꾹새 울음소리는 만사를 다 버리고 죽는 마당에 유서가 다 무어냐고 조롱하는 소리같이 들리기도 했다.

'정을 버려라, 정을 버려라! 살아서 정이지, 죽어서 다 잊어버릴 이 마당에 정이 다 무어냐.'

어리는 유서 쓸 것도 단념해 버렸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꾹새는 또 울었다. 어리는 낙락장송 휘어진 가지에 걸어 놓은 명주 수건 한 가닥을 고를 내어 목을 얽었다. 두 손에 힘을 주거 한 가닥을 바싹 잡아당겼다. 목은 졸라지고 어리의 몸은 공중으로 매달렸다. 어리의 숨은 막혔다. 괴로움을 느꼈다. 이내 세상을 떠났다.

어리가 남한산성 상상봉에서 낙락장송 휘어진 가지에 목을 매어 한 많은 세상을 떠났을 때 금부도사는 어리의 죽은 것을 까맣게 모르고 광주유수의 대접을 받은 후에 금부 나졸들을 거느리고 양녕대군이 우거하는 산성집을 찾았다. 산정 마당은 어리친 강아지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아니했다.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금부도사는 산정 사랑으로 들어섰다. 역시 텅 비고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아니했다. 도사는 나졸을 거느리고 안채 중문으로 향했다. 안채도 적막했다. 양녕의 부인과 어리는 있을 터인데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금부도사는 안채로 막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인기척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리 오너라."

의젓하게 소리를 높여 불러보았다. 아무런 반향도 없다. 도사는 또 한 번 청을 높여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다. 금부도사는 나졸 한 명을 불렀다.

"너 문틈으로 좀 들여다보아라. 댓돌 위에 사람의 신발이 있는지 없는지."

나졸 한 명이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문틈을 찾아서 엿보았다.

"후락하게 빛깔이 변한 여인의 운혜신 한 켤레가 놓여 있을 뿐입니다."

확실히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금부도사는 이번에 만약 대답이 없으면 나졸을 시켜 문을 박차고 들어가리라 생각했다. 또 한 번 청을 높였다. 문을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소리를 질렀다. 비로소 안에서 대답이 나왔다.

"누가 누구를 찾느냐? 아무도 없다 해라."

의젓한 여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말에 위엄기가 있고 기품 있게 들렸다. 금부도사는 필연코 세자빈이었던 양녕 부인의 목소리라 생각했다.

"아무도 없다 하면서 대답하는 분이 있으니 괴상한 일이 아니냐고 여쭈어라. 어명을 받들고 나온 금부도사가 왔으니 시각을 지체 말고 문을 열어주시라고 여쭈어라."

안에서는 청아하면서 엄숙한 음성이 또 새어나왔다.

"어명을 받들고 나온 금부도사라 해도 무슨 어명을 받들고 나왔는지, 사유를 말해야 문을 열겠다고 여쭈어라."

금부도사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어리를 잡으러 나왔다 하면 도피할 염려가 있었다. 금부도사는 어리를 집으러 나왔다고 떠들어댈 수는 없었다.

"어명을 내리신 사유는 밝힐 수 없다고 여쭈어라. 기밀에 속한다고 여쭈어라."

안에서는 또 엄숙한 대답이 떨어졌다.

"아무리 어명을 받들고 나왔다 하나 사유를 밝히지 아니하면 문을 열 수 없다고 전하라. 남녀가 유별하다. 이곳에는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 사유를 밝혀야만 문을 열겠다고 해라."

금부도사는 말로 승강질 해서 때를 보내다가 어리를 놓치게 된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급히 나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라!"

나졸들은 일제히 힘을 합하여 일각 대문짝을 박차고 들어섰다. 금부도사는 뒤를 따라 들어섰다. 일위 미인이 청마루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품위 있는 얼굴엔 노기가 등등했다. 보통여인이 아닌 것 같았다. 대문을 부수고 들어서는 나졸과 금부도사를 향하여 추상같이 꾸짖는다.

"외간남자가 어찌 문을 부수고 내정돌입을 하느냐. 아무리 어명을 받들고 나온 사람이라 하나 이러한 무례할 법이 있느냐."

꾸짖는 소리는 맑고도 싸늘했다. 금부도사가 채 대답을 하기 전에 미인은 또다시 소리쳐 꾸짖는다.

"누가 금부도사냐. 금부도사는 법을 알 만한 자인데 어명을 빙자하고 여인만 있는 곳에 문을 박차 부수고 뛰어들었으니 내정돌입의 죄를 면치 못하리라."

품위 있는 미인의 꾸짖는 소리는 더한층 강강했다. 금부도사는 이 부인이 세자빈이었던 양녕의 부인인 것을 즉각 알 수 있었다.

"꾸지람을 내리시는 존부인께서 누구신 것을 알아야 자세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미인은 버들 눈썹을 찡그리고 계속해서 준엄한 태도로 말한다.

"먼저 그대의 신분을 밝히라. 그대의 명분을 안 후에 나의 신분을 말하리라."

금부도사는 미인의 위엄에 놀랐다. 황망하게 대답한다.

", 소인은 금부도사올시다. 어명을 받들어 양녕대군의 소실이신 어리를 집으러 나왔습니다."

미인은 계속해서 노기를 띠고 꾸짖는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진작 어리를 집으러 나왔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대문을 박차고 내정돌입을 했는가?"

미인의 노기는 여전히 풀리지 아니했다. 계속해서 도사를 꾸짖는다.

"어명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어리를 잡으라는 어명을 내리신 것이지, 대문을 부수고 대군의 집에 재정돌입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전에 세자빈이었던 양녕대군의 부인이다. 네 감히 어찌 이같이 무례하냐!"

미인은 다름 아닌 양녕의 부인 김씨였다. 비로소 신분을 밝혔다. 금부도사가 대군의 내아에 문을 부수고 내정돌입한 것은 과연 잘못이었다. 사과의 말씀을 아니 드릴 수 없었다.

"그저 죄인 어리가 도피할까 보아서 어리석고 조급한 마음에 무례한 일을 범했으니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대군 부인은 다시 도사를 꾸짖는다.

"금부도사, 말 듣거라! 네 어찌 어리를 죄인이라 방언하느냐 어명으로 잡으라 하셨다고 곧 죄인이 될 수는 없다. 불러서 문초를 한 연후에 비로소 죄가 있고 없는 것이 판결될 것이다. 금부도사 짓을 몇 해나 해 먹었는지 모르지만 감히 그따위 짓을 하느냐. 내 비록 폐세자의 빈이지만 대군의 부인이다. 내명부로는 직위가 제일품에 속한다. 그대가 대군집 대문을 부수고 내정돌입한 죄를 위에 아뢰어 치죄하리라."

금부도사는 기에 눌리고 경위에 막혔다. 등에 땀이 흘렀다. 벌벌 떨며 고한다.

"그저 미거한 죄를 통촉하시어 용서해주시고 어리를 내주시옵소서."

원래 대군 부인은 어리가 한 발자국이라도 멀리 가도록 하기 위하여 얼른 대문을 열어주지 아니하고 시각을 끌어 도사를 꾸짖고 나무라고 승강이를 했던 것이다.

"어리는 이곳에 없다. 이미 떠난 지 오래다."

부인은 차갑게 말했다. 금부도사의 가슴이 뚝 떨어졌다. 큰일이었다.

"그거 무슨 말씀이옵니까?"

"무슨 말이라니?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부인의 태도는 더욱 엄숙했다.

"어디로 갔습니까?"

"고향인 적성 땅으로 간다 하고 떠났으니 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도사는 어이가 없었다.

"간 곳을 속이시면 누가 부인께로 돌아갑니다. 사실대로 말씀해 줍시오."

"내 어찌 어명을 받들어 나온 도사를 속이겠느냐? 고향 적성으로 간다고 엊그제 떠났다."

부인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금부도사는 양녕 부인의 기품 있는 위세에 눌렸으나 어리가 고향인 적성 땅으로 갔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마음에 꼭 산정 안에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황공합니다마는 한 말씀 아룁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양녕 부인은 일부러 해라를 하며 고압적 자세를 취했다.

"미안합니다마는 산정채를 전부 뒤져보겠습니다."

부인은 더욱 노했다.

"네 어찌 내 말을 믿지 아니하고 무엄하게 내 집을 뒤져보겠다 하느냐. 더구나 혈혈단신인 여자 한 사람만 있는 곳을 네 어찌 뒤져보겠다 하느냐. 나는 증경 세자빈이다. 너무나 무엄하구나."

호령이 추상같았다.

"소인 금부도사가 집을 뒤지는 것이 아니라 어명이올시다. 상감의 몸을 대신해서 뒤지는 것입니다."

금부도사도 이제는 강강하게 덤벼들었다. 금부도사는 등채를 높이 들어 나졸들을 지휘했다.

"마루로 올라가서 안방, 건넌방을 모조리 뒤져라. 벽장도 보고 다락도 살펴라."

양녕 부인은 더 한층 언성을 높여 금부도사와 나졸들을 꾸짖는다.

"내 말을 믿지 않느냐. 과연 무례한 놈들이로구나. 맘대로 뒤져보아라. 뒤져서 만약 어리가 없다면 큰 죄를 면치 못하리라."

부인은 더 한층 위세를 보여서 엄숙하게 꾸짖는다. 나졸들은 우르르 마루 위로 올라섰다. 흙발은 낭자하게 마루와 방을 휩쓸며 밟았다. 벽장을 뒤지고 다락을 수색했다. 반침을 뒤지고 장 속까지 살폈다. 어리의 종적은 묘연했다. 금부도사는 다시 나졸들을 지휘했다.

"헛간과 부엌과 아궁이 속까지 샅샅이 보아라."

나졸들은 다시 청 아래로 내려가 헛간과 부엌이며 광을 모조리 뒤졌다. 그러나 어리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양녕 부인은 또 한 번 호령이 추상같았다.

"무엄한 놈들, 내 말을 어찌 믿지 않느냐. 빨리 어리를 찾아놓아라."

부인은 도리어 어리를 찾아놓으라고 호령이 대단했다. 금부도사는 얼이 빠졌다.

"부인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이 아니오라 어명를 띤 소인의 직책을 최후까지 이행하려는 것입니다. 그저 부인께서는 만 번 통촉하시고 용서해주시옵소서."

금부도사는 뒤통수를 긁고 물러 나갔다. 나졸들도 금부도사의 뒤를 따라 맥없이 빠져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갔다. 양녕 부인이 일부러 승강이하고 꾸짖는 바람에 시간은 상당하게 걸렸다. 금부도사는 나졸들을 모아 놓고 의논이 분분했다.

"어찌하면 좋으냐?"

나졸 한자가 대답한다.

"대군 부인의 말씀을 들으면 고향인 적성 땅으로 갔다 하니 적성으로 가서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성이라 하니 대충 알아야 찾지 않겠느냐. 남대문입납이지 적성 어느 곳에 가서 찾는단 말이냐."

다른 나졸 한 자가 나서서 대답한다.

"어리라는 여자는 본시 곽중추부사의 첩실인 것을 양녕대군께서 뺏어다가 소실로 만드신 것이니 곽중추부사를 찾아가면 종적을 알 것입니다. 곽중추부사와 어리가 살던 집이 바로 적성 땅에 있습니다. 그러니 고향이 적성이라 한 것입니다. 빨리 그것으로 가서 수소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나졸 한자가 나서서 의견을 말한다.

"적성에는 갈 때 가더라도 우선 광주 바닥을 샅샅이 뒤져본 후에 없으면 갈 것 아닙니까.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 먼저 간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광주 바닥을 뒤지는데 먼저 가까운 산성을 뒤져보기로 합시다."

금부도사는 맨 나중에 의견을 말한 나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네 말이 옳다. 우선 광주 안을 뒤지기로 하는데 먼저 산성 안을 뒤져보기로 하자."

나졸들은 일제히 산성으로 향했다. 나졸 한자가 또다시 금부도사한테 제언한다.

"한데로 몰려서 다니며 찾을 것이 아니라 두 패로 갈라서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한 자가 말한다.

"그 말이 옳습니다. 이 넓고 넓은 산성 안을 다 뒤져보려면 해가 저물 때까지 찾아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두 패 아니면 세 패로 나누어서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금부도사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세 패로 나누어서 찾아보는데 최종에 우리들이 모이는 것은 산성 꼭두 산마루로 목표를 정하자."

"좋습니다."

일동은 찬성하고 헤어져서 산성 안을 뒤졌다. 금부도사가 한패를 거느리고 산성을 뒤지기 시작하는데 눈 밝은 나졸 한 자가 별안간 소리를 높여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상하다. 저곳으로 좀 가봅시다."

"왜 그러느냐?"

금부도사가 물었다.

"저기 저 하늘을 보십쇼. 이상합니다. 까마귀 떼가 까맣게 모여들어서 둥글둥글 춤을 추고 있습니다. 필시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모두 다 바라보니 과연 낙락장송 푸른 솔이 무성한 곳에 까마귀 떼가 새까맣게 모여들어 원무를 추고 있다. 모두 다 까마귀가 춤을 추고 맴돌고 있는 곳을 목표로 하여 산성으로 올랐다. 땀들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다. 거의 산꼭두 마루턱에 당도했다. 맨 앞에 나가던 나졸 한자가 무엇을 보았는지 '' 소리를 치며 기절해 자빠졌다. 다음 나졸이 급히 뛰어가서 자빠진 나졸을 구해 일으키려다가 또다시 ''소리를 치며 기절해 자빠진다. 다음 나졸들은 겁이 나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금부도사가 마음을 다스려 먹고 바라보니 기막히도록 예쁜 미인 한 사람이 청솔 가지에 목을 매고 늘어졌는데 혀가 댓발이나 입안에서 길게 빠져 늘어졌다. 기막힌 모습이었다. 금부도사도 하마터면 기절해 자빠질 뻔했다. 도사는 정신을 수습하여 자세히 바라보았다. 목을 매어 죽은 여자는 확실히 보통 시골 농갓집 여인이 아니었다. 때가 벗긴 세련된 얼굴이었다. 입은 의상도 귀부인이 아니면 재상집 첩실이 입는 호벌옷이었다. 금부도사는 직감적으로 어리라고 생각했다. 소문에 들어본 이야기가 기억되었다. 어리는 천하절염인 때문에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곽중추부사의 작은집을 뺏어왔다는 것이다. 광주 바닥에는 이러한 미인이 있을 까닭이 없다. 확실히 어리라고 추측했다.나라에서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 오라고 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일인데 잡혀가서 욕을 당하고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목을 매어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양녕부인께는 고향으로 간다고 말한 후에 산에 올라 자결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확실한 실증을 잡지 아니하면 나라에 보고할 수가 없었다. 급히 나졸을 불러서 광주유수를 청해 검시를 해달라고 청하는 한편, 산성 아래 민가의 백성들을 불렀다. 민가에 사는 백성들은 양녕이 그동안 오래 이곳에 있었으니 어리의 얼굴을 짐작해 알리라 생각한 때문이다. 광주유수보다 동네에 사는 촌갓집 아낙네들이 먼저 올라왔다. 여인의 목매달아 죽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에구머니나, 저런 끔찍스런 일이 어디 있어. 사람 팔자 참 알 수 없네."

산성 아래 촌가의 백성들은 모두 어리인 것을 확증했다. 뒤늦게 광주유수도 이방, 호방, 형방을 거느리고 급히 금부도사와 백성들이 모여 있는 산꼭두로 올랐다. 바라보니 어리가 분명했다. 아음 속으로 공연히 금부도사가 왔다고 연통을 해주어서 비명횡사를 하게 했구나 하고 뉘우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금부도사 앞에 내색을 보일 수도 없었다. 촌부녀들을 향하여 다짐해 묻는다.

"이분이 양녕대군의 소실이 분명한가? 대군은 뵈었지만 대군의 소실은 뵌 일이 없어 묻는 말일세."

", 분명합니다."

촌부녀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광주유수는 거느리고 온 형방에게 검시를 명했다.

"동네 사람들이 양녕대군의 소실이 분명하다 하니 신원은 이미 밝혀졌다. 너희들은 타살인가, 자살인가 검시를 하라."

형방은 목을 맨 어리의 시체를 솔가지에서 끌러 내린 후에 자와 노끈 등 검시하는 기구를 가지고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얼마 뒤에 유수와 금부도사한테 고했다.

"타살이 아니라 확실히 자살이올시다."

광주유수는 금부도사를 향하여 말했다.

"어명을 받들어 나왔으나 이미 당자가 죽었으니 어찌하시려오?"

"유수, 연명해서 이 사실을 아뢰는 수밖에 도리가 없소이다."

유수는 도사에게 또 묻는다.

"시체는 그대로 버려둘 수 없으니 가매장을 한 후에 장계를 올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소이다."

"좋습니다."

금부도사가 동의했다. 유수는 사령과 나졸들을 시켜서 어리의 시체를 산비탈 아래 매장한 후에 읍내로 내려와서 연명으로 장계를 썼다.

'아뢰옵니다. 양녕의 소실 어리를 잡아들이라 하시는 어명을 받자옵고 양녕의 우거에 당도해보니 집은 적막한데 다만 양녕의 부인이 혼자 계실 뿐 어리의 행방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집을 안팎으로 샅샅이 뒤졌으나 허사였습니다. 양녕 부인께 물어보니 어리는 며칠 전에 고향인 적성으로 간다고 떠났다 합니다. 하는 수 없어 적성으로 향하려 하다가 먼저 남한산성을 뒤져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성을 뒤져보니 뜻밖에 어리는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급히 광주유수를 청하여 검시한 결과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 분명했습니다. 우선 가매장을 하옵고 자세한 사유를 광주유수와 함께 연명해서 아뢰옵니다.'

광주유수와 금부도사는 파발마를 달려 위에 장계를 올리고, 금부도사는 뒤통수를 긁으며 뒤를 따라 서울로 향했다. 세종은 장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급히 상왕께 사유를 고했다. 상황은 추연히 한숨을 쉬고 눈물을 머금었다.

"내가 너무나 지나쳤구나."

한마디를 했다. 나라에서는 양녕의 행방을 알 도리가 없었다. 상왕과 세종은 어리의 자살에 크나큰 충격을 느꼈다. 혹시나 양녕도 어리와 같은 태도를 취할까 염려가 되었다. 팔도 감사에게 영을 내렸다.

'양녕이 행방을 감춘 데 대하여 지방 장관에게 극력 수탐하라는 영을 진작 내렸거니와 종적을 수탐하는 데 함부로 죄인 다루듯 해서는 아니 된다. 양녕은 상왕 전하의 큰 아드님이시고 과인의 친 형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비록 약간 허랑하시어 폐세자가 되었다 하나 일찍이 세자의 자리에 계셨던 분이다. 함부로 실경하여 죄인을 나포하듯 해서는 아니 된다. 극히 존경하고 극진히 예우하여 지공을 후하게 하여 모시도록 하라. 그리고 어느 곳에 계시든지 계신 곳을 알거든 곧 서울로 기별하여 알리라. 안마를 갖추어 봉영하리라. 지방장관들은 각별 조심하여 과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만약 양녕의 계신 곳을 빨리 발견한 수령, 방백에게는 가자를 높이고 후한 상을 주리라.'

전하의 교유는 정원을 통하여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팔도 감사와 육십여 주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에게 내려졌다. 삼정승, 육조판서, 삼사장관들도 어리의 자결했다는 소문을 듣고 감히 반대를 하지 못했다. 세종은 다시 상왕 전하와 상왕비 전하의 명을 받들어 아래와 같은 교시를 또 내렸다.

'양녕의 행방을 감춘 일에 관련되어 서울에서 잡혔던 팔장사와 광주에서 구금된 광주 판관과 관비와 광주에서 추방했던 양녕의 하인 명보 내외는 별다른 죄상이 없으니 금부에서 석방시키고 광주유수에게 이첩하라.'

어리가 세상을 떠난 일로 해서, 양녕이 혹시 반란을 일으킬까 하여 구금되었던 모든 사람들은 무죄 석방이 되어 청천백일을 다시 우러러보게 되었다. 팔장사를 위시하여 모든 사람들은 금부에서 나온 후에 어리의 자결로 인하여 자기들의 몸이 풀려나온 것을 듣고 모두 다 눈물을 머금어 어리의 불쌍하게 죽은 것을 가엾게 생각했다. 다만 양근 고향으로 돌아간 명보와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만은 슬프고도 기쁜 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 팔도 감사와 육십여 주 수령, 방백들은 세종의 교유를 받자 양녕의 행방을 발견하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더구나 양녕의 행방을 발견하는 날은 가자를 올리고 후한 상까지 내린다는 교유을 받고보니 수령, 방백들은 더한층 전력을 다하여 양녕을 찾으려 했다. 육방관속에게 엄하게 명을 내려 기한을 정하고 상금을 붙여 양녕을 찾으려 했다. 조선 팔도가 발끈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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