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와의 만리성
중문간에 서서 재촉하던 홍만과 이법화가 이승과 어리가 나오는 것을 보자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달음질쳐 사랑으로 뛰어올랐다.
"어리가 나옵니다, 어리가."
건달패들은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어리는 조용히 이승을 따라 사랑으로 올랐다. 세자가 어리를 바라본다. 비단옷을 입지 아니했다. 수수한 삼승 명 저고리를 입었다. 눈같이 희도록 깨끗했다.여기다가 자줏빛깔로 끝동을 달았다. 고름은 깃과 동색인 자주다. 치마도 눈빛같이 희다. 마치 눈 속에 자줏빛 꽃이 핀 듯했다. 의상이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세자는 다시 눈을 옮겨 어리의 얼굴을 바라본다. 듣던 바와 같이 과연 절염이다. 머리쪽은 흑공단같이 검고도 윤이 자르르 흘렀다. 이맛전은 넓지도 아니하고 좁지도 아니해서 알맞고도 반듯했다. 살결은 만져보지 아니하고 바라만 보아도 부드럽고 따스해서 희고도 고왔다. 눈썹은 약간 숱이 많아서 그리지 아니해도 아름답고 기름한 속눈썹은 맑은 추파와 함께 사람의 정을 소리 없이 흔들어놓는다. 코는 백랍으로 빚어놓은 듯 오똑하면서 윤이 흐르고 연한 뺨에는 오목볼이 져서 더 한층 풍정을 자아낸다. 여기다가 붉은 입술과 하얀 이는 글자 그대로 단순호치다. 어깨는 날씬하고 허리는 가늘다. 마치 백학이 날아들고 세류가 한들거리는 모습이었다. 세자의 눈이 부시도록 환했다. 동궁빈은 말할 것 없고 세자가 여태껏 경험해서 지내본 여인들, 봉지련, 작은 꾀꼬리, 초궁자, 계지, 그밖에 유명 무명의 무수한 여인들에 견주어 어리는 선녀로 친다면 다른 여인들은 속녀에 불과했다. 세자는 긴장되었다. 침을 삼켰다. 멍하니 넋을 잃고 당 위로 오르는 어리를 바라본다.
"세자께 보이시오."
이승은 어리한테 이른 후에,
"보자고 원하시던 어리올시다."
세자한테 고했다.
어리는 지금은 늙은이의 소실이 되어서 시골 적성 구석에 틀어박혀 있게 되었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서울 장안에 명기 명창들만 모여 있는 장악원 기생의 출신이었다. 백설 같은 치마 앞자락으로 두 손을 곱게 내리며 사붓이 주저앉는 자세로 문안 절을 올렸다. 마치 백학이 깃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듯했다. 절을 마친 어리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왼팔로 젖가슴을 받치고 오른팔을 짚어 세자께 고한다.
"어리라 하옵니다."
세자는 취한 듯 넋을 잃고 어리를 바라보다가 강하게 마음을 결단하여 덥석 어리의 손을 잡았다. 어리는 살며시 손을 뽑았다. 세자는 이승이 있는 앞에서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밤늦게 와서 미안하이."
겨우 한마디를 했다.
어리는 세자한테 잡힌 손을 살며시 뽑았으나 마음속으로는 모든 것을 체념한 모양이다. 고개를 숙여 대답이 없다. 이때 이법화가 세자 앞으로 가까이 갔다. 세자의 귀에 입을 대고 귀엣말을 한다.
"이곳에서 말씀하시기가 난처하실 것입니다. 우선 자리를 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리를 데리고 나가십시다."
세자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함께 온 구종수, 이오방, 홍만, 명보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인제 일어나기로 하세."
말한 후에 이승을 향하여 이른다.
"어리는 내가 데리고 가겠소."
이승은 어리를 대면까지 시켜놨으니 이제는 항거할 도리가 없었다.
"세자저하의 처분대로 하십쇼."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자아, 일어들 나게."
세자가 일어나니 모두들 와짝 일어섰다. 어리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자네도 일어나게."
세자가 어리를 재촉했다. 어리는 못들은 체하고 펄럭이는 촛불만 바라보고 있다. 턱을 괴고 무엇인지 생각하는 그 모습은 가련하고도 예뻤다. 세자는 왈칵 손을 내밀어 어리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자아, 나하고 함께 가세."
어리는 반항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을 잘 알았다. 한 번 이승을 곁눈질로 바라본 후에 세자한테 몸을 의지해서 일어났다. 일행은 어리를 옹위하여 대문으로 향했다. 뜰 안엔 달빛이 가득했다. 담을 넘어 들어왔던 일행은 대문을 활짝 열고 나갔다. 이승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나가는 어리와 일행을 바라볼 따름이다. 일행의 그림자는 병 문밖으로 사라졌다. 세자가 이법화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면 좋겠나?"
이법화가 대답한다.
"소인의 집에 침구 범절을 깨끗이 준비해놓았습니다."
"자네는 나의 제갈양일세."
세자는 이법화를 칭찬했다. 이법화가 어리와 세자를 자기 집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자 모든 건달패들은 마음이 놓였다.
"그럼, 소인들은 이곳에서 흩어지겠습니다."
구종수가 말하고, 이오방은 세자를 향하여,
"많은 재미를 보십시오. 하하하."
너털웃음을 웃고 인사를 했다.
명보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뢴다.
"그럼, 소인은 내일 아침때 모시러 가겠습니다."
하고 굽실했다.
홍만도 세자한테 인사를 고했다.
"세자마마, 인제 소인은 뺨은 아니 맞게 되었습니다. 신방을 치르신 후에 술 석 잔은 사주셔야 합니다. 흐흐흐."
홍만은 어리를 만나보게 한 공을 뇌까리며 굽실했다.
"아따 이 사람, 술 석 잔뿐이겠나. 자네가 하구 싶어 하는 일은 다 들어주기로 하겠네."
세자는 소리를 높여 호탕하게 웃으며 모든 건달패들을 돌려보냈다. 달빛이 가득한 거리는 무한한 정취를 일으켰다. 세자와 어리 그리고 이법화 세 사람은 달빛을 밟아 멋지게 걸어간다.
"품이로군."
세자는 달빛 아래 어리의 손을 잡고 걸었다. 이법화가 세자의 말하는 뜻을 모르면서 덮어놓고 좋다고 첨을 올린다.
"좋습니다."
어리도 세자가 말하는 어취를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세자한테 손을 잡힌 채 가볍게 발길을 옮겼다. 어리의 장심에 땀기운이 촉촉이 서렸다. 세자의 손은 촉촉하고 따스하고 보드라운 어리의 손에 쾌감을 느꼈다. 마음이 화창했다. 이법화를 향하여 묻는다.
"자네, 아까 내가 말한 품이란 말뜻을 알아들었나?"
"좋다고 대꾸해서 아뢰었습니다."
"하 하 하. 그저 좋기만 해? 내 품자 풀이를 해볼 테니 들어보려나?"
"네, 해보십시오."
"품자는 입이 셋일세. 자네 입, 내 입, 어리의 입, 세 사람의 입이 모여서 달빛을 밟고 걸어가니 기막힌 운치가 있단 말일세. 조방구니 자네는 앞을 서고 나는 천하일색 어리의 손을 이끌고 은파 같은 달빛을 밟아 운우의 낙을 취하러 산정으로 오르니 얼마나 흥취가 도도한 일인가. 하하하."
어리와 이법화는 비로소 세자가 말하는 품자의 뜻을 알았다. 이법화가 한마디 한다.
"세자께서는 밤낮 상감께 공부를 아니한다고 꾸지람만 들으시면서 어느 틈에 그렇게 공부를 하셨습니까? 천하 명필이시구, 천하 문장이십니다."
세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진짜 공부는 떠들어대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조용히 소리 없이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남이 알게 떠들어대고 하는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니라."
세자의 뜻깊은 말에 어리도, 이법화도 감동이 되었다. 어리는 처음에 세자가 계지를 통해서 자기를 달래고, 꼬마 내시를 시켜서 수주머니를 보내서 자기 마음을 낚으려 하고, 심지어는 이승의 집까지 발을 밟아 쫓아왔다가 나중에는 담까지 뛰어넘어 들어온 것을 보고 세자를 불량패류와 같은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의 집을 나와 달빛을 밟아 걸어오면서 이법화와 주고받는 말을 듣고 보니 세자는 보통 노류장화를 탐하는 건달패가 아닌 것을 느꼈다. 마음속으로,
'존귀한 세자가 왜 이런 짓을 하나?'
하고 한편으로 의심하고 한편으로 존경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어느덧 이법화의 집 문 앞에 당도했다. 법화의 집은 북악산 청룡자락이 활개를 벌린 푸른 산줄기 아래 있었다. 흡사 초당과 같았다. 세자가 초궁장과 삼일을 치르고 게지와 하룻밤을 지냈던 유서 깊은 집이었다.
법화가 대문을 흔드니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동자치가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법화는 세자와 어리를 인도하여 안채를 거쳐서 별당으로 오르게 했다. 별당은 도배 장판이 깨끗하고, 문방사우까지 제법 벌여 놨는데 아랫목에는 쌍봉수 베개에 호화찬란한 비단 금침을 깔아놓고 옆에는 거문고 한 틀을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놓았다. 발치에는 안성 놋쇠로 만든 요강, 타구를 벌여놓고 연상 앞에는 와룡촛대에 홍촛불이 벌룽거렸다.
이법화는 어리와 세자가 앉은 앞에 무릎을 꿇고 고한다.
"오늘 밤 이 방에는 이루러 와룡촛대에 홍촛불을 켰습니다. 동방화촉에 첫 재미가 진진하시라구. 그럼, 소인은 물러갑니다. 소원성취하옵소서."
이법화는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별당 안에는 세자와 어리 단 두 남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세자는 옥등잔 불빛 아래 가만히 어리를 바라본다. 모로 보면 푸른 살쩍에, 상아빛 고운 뺨이 그림인 듯 아름답고, 앞으로 보면 지방이 아른대는 오똑한 코가 투명하도록 예뻤다. 여기다가 티끌 한 점 없는 호심 같이 푸르고 맑은 눈결이 총명을 뿜어 잔잔하다. 폭 가라앉은 미의 자세다. 보고, 또 보아도 싫지 아니한 자태다. 세자는 여태껏 이만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처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해서 늙은이의 소실이 되었던가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구름 일 듯 일어났다. 세자는 어리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밤은 더욱 깊어 한적했다. 젊은 세자와 미인 어리가 말없이 손과 손을 잡아 정파를 일으켰다. 옥등잔 심지가 무심히 불꽃을 튀겼다.
"어리."
세자는 조용히 어리를 불러본다.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어리다.
"네."
하고 고요히 대답했다.
"나하고 살겠느냐?"
"이쯤 되었으니 어찌합니까."
어리는 호수 같은 푸른 눈을 들어 맥맥히 세자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몸을 허락하겠느냐?"
세자의 정염이 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평생을 두고 버리시지 않겠다는 맹세를 주신다면....."
어리의 아름다운 눈에도 차차 정화가 움직였다.
"맹세를 하고말고. 저기 저 창밖의 푸른 산을 두고 맹세하리라. 저기 저 금잔디밭에 흐르는 달빛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 마음, 네 마음이 청산처럼 변하지 아니하고, 명월처럼 천 년까지 흐르리라."
세자는 말을 마치자 어리의 저고리 고름에 동심결을 맺어 맹세했다.
"이만하면 맹세가 족하냐?"
세자는 고개를 숙여 어리의 내리깐 눈을 바라본다.
"한평생 버리지 아니하신다 하오니 쇤네도 마마의 고름에 동심결을 맺으오리다."
어리는 남끝동 소매 밑에 아름다운 손길을 놀려서 세자의 수색 명주 저고리 고름을 휘어잡고 동심결을 맺었다. 만사는 모두 해결이 되었다. 세자는 느긋한 마음을 느꼈다.
"너도 고단하겠다. 나도 고단하다. 자리에 누워보기로 하자."
세자는 한 손으로 어리를 품 안으로 당기고 한 손으로 옥등잔의 불을 후려쳐 껐다. 회오리바람을 실은 정열의 선풍이 푸른 봄을 껴안아 난만하게 퍼졌다. 세자도 여인을 몇 번씩 지내본 솜씨요, 어리도 새침은 했으나 장악원 기생의 출신이었다. 남자의 비밀을 여러 번 겪어본 여인이었다. 처음으로 대하는 세자와 어리건만 하룻밤의 정은 만리성을 쌓았다. 격렬한 선풍이 지나간 후에 세자와 어리는 호심에 가라앉은 달빛과 같이 느긋한 유열을 느꼈다. 흥은 아직도 깨지지 아니했다. 세자는 봉황 이불 속에서 어리의 보드라운 온몸을 애무하였다. 살결이 고와서 명주 고름보다도 더 부드러웠다.
젊은 세자는 손으로 쾌감을 느꼈다. 점점 더 어리가 귀엽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세자의 손길은 어리의 가슴, 옥봉까지 기어올랐다.
"어리야."
"네."
흥분이 가라앉은 조용한 대답이었다.
"네가 왜 진작 나한테로 오지 아니하고 파파 늙은이 곽중추부사의 소실이 되었더냐?"
"세자마마께서 저를 괴이실 줄 제 어찌 알았으리까. 그런 줄 알았더라면 기다려볼 것을 그랬습니다."
"거짓말이로구나."
"진정이올시다."
"왜 장악원을 그만두었더냐?"
"숱한 범나비들이 날아드는 꼴이 보기 싫어서 그만두었습니다."
"하필 왜 늙은이의 첩이 되었더냐?"
"늙은이는 인정이 많고 무한 귀여워해주는 때문이올시다."
"내가 젊은데 앞으로 너를 박대하면 어찌할 작정이냐?"
"동심결을 맺으시어 푸른 산과 천년 변치 않는 달님을 두고 맹세까지 하셨으니 설마 버리실 리야....."
어리의 소곤대는 목소리는 잔잔한 시냇물이 흐르는 듯 고왔다.
"네 살결이 부드럽듯이 네 마음씨가 고우니 네 말소리조차 곱구나."
"이제는 저하께 맡긴 몸, 마음으로 만리성을 쌓았사옵니다. 부디 헤어지지 않기를 천지신명께 비옵니다."
"내가 처음에 보낸 수주머니는 왜 받지 아니했더냐?"
"바꾸어 생각해보시옵소서. 저하께서 본서방이 되시고 곽중추부사가 소인에게 수주머니를 보낸 것을 소인이 받았다면 저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더 물어보실 것이 없을까 하옵니다."
"네 말이 옳다."
세자는 더한층 어리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날부터 어리는 세자의 사람이 되었다. 한편 어리를 잃어버린 중추부사 곽선은 호소무처가 되었다. 적성 시골집에 있는 곽선은 양아들 이승이 급히 뛰어와서 어리를 세자한테 뺏긴 사유를 일일이 고했다. 칠십 노인 곽선은 분하기 짝이 없었으나 세자를 대항할 수 없다고 체념했다. 양아들 이승은 어리를 뺏겨놓고 분해했다.
"법소에 고발하겠습니다."
곽노인은 한숨을 길게 쉬고 대답했다.
"당치 아니한 소리 마라. 고발이 다 무에냐. 나도 국록을 먹던 사람이요, 너도 현재 국가의 녹을 받고 있는 사람인데, 비록 미관말직이라 하나 어찌 차마 세자를 걸어서 법소에 고발한단 말이냐."
법소에 고발하겠다는 이승의 말에 곽선은 조용히 타일렀다. 그러나 이승은,
"사체야 그렇습니다마는 세자보다도 세자를 충동이 쳐서 못된 길로 빠뜨리게 하는 조방구니 건달패들 놈이 괘씸합니다. 그저 이놈들을 동아줄로 비웃 두름 엮듯 엮어서 치도곤 맛을 좀 단단히 보여주어야겠습니다."
늙은이는 손사래를 저어 흔들었다.
"천만에, 떠들어대지 마라. 공연스레 큰일난다. 내가 어리를 데리고 지낸 것은 늙마에 수족이 불편하니 앞에서 심부름이나 시키려고 데려온 것이지 무슨 색을 취해서 데려왔겠느냐, 자식을 보려고 데려왔겠느냐. 결국은 좋은 서방이 있으면 갈 사람이 아니겠느냐. 공연히 떠들어대지 말고 덮어두어라. 만약에 이 일을 상감께서 아시면 세자는 세자대로 큰 꾸지람이 내리려니와 나도 늙은 놈이 공연히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릴 뿐 아니라 너도 여러 차례 불려가서 크나큰 곤욕을 받을 것이다. 두말 말고 덮어두어라."
이승은 뒤통수를 긁고 물러섰다. 이승이 서울로 회환해서 올라올 때 곽노인은 더 한 번 당부한다.
"이번 일은 절대로 비밀에 부쳐서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마라. 소문이 나면 세자도 위태롭고 너도 위태롭다. 상감은 지금 세자를 긴치않게 생각하시고 계시다더라. 만약에 이 일로 인해서 폐세자가 된다면 장차 그 원망을 어찌할 테냐.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다. 말조심해라."
곽노인은 신신당부했다. 세자가 어리를 강제로 끌어다가 이법화의 집에 두고 날마다 밤이면 법화의 집으로 가서 갖은 재미를 다 보는 일은 세상에서는 깜깜 몰랐다. 그러나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어리를 꾀어내던 이오방, 이법화, 홍만, 그리고 초궁장, 계지, 춘방사령 명보와 건달패밖에 아는 이가 없었다. 동궁빈은 요사이 세자가 밤마다 미복으로 출궁했다가 밖에서 밤을 지내고 새벽이면 돌아오는 행동을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세자는 봉지련이며 작은 꾀꼬리를 데리고 세자궁에서 자기도 하고 간혹 밖에 나가서 밤을 드새고 들어온 일도 있었으나 요사이같이 매일 밤 한 달을 내리 두고 외침한 적은 없었다.
동궁빈은 세자가 나날이 방탕하게 되는 원인이 아버지에 대한 불평과 불만으로 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세자의 마음을 평안케 하여 정상적인 태도로 돌아서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동궁빈은 세자를 은인으로 생각했다. 그의 넓은 포용력, 그의 정당한 의리를 지키는 정의심, 이러한 모든 점이 아름다운 인격을 이루어서 마침내 자기의 파혼이 될 뻔했던 것을 다시 이룩되도록 한 은인이었다. 이 모든 점은 동궁빈으로 하여금 세자를 존경하고 철석같이 믿게 했다. 봉지련과 작은 꾀꼬리 사건들이 나중에 말썽을 일으켜서 상감이 아시고 큰 파란을 일으켰을 때 동궁빈은 언제나 크게 보아서 항상 세자를 위로하고 안심하도록 했다. 세상에 보기 드문 양처요, 현모였다.
그러나 요사이 세자의 행동은 너무나 탈선이었다. 밖에 무슨 일을 차려놓고 있는지 밤마다 한 달을 두고 내리 나갔다.
동궁빈의 태도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이 일이 세상에 드러나서 만약 사암의 귀에 들어가는 날 큰 풍파가 일어날 것이고, 폐세자를 해야 한다는 풍설이 자주 도는 이때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진정으로 폐세자가 된다면 동궁에 있어서는 크나큰 파멸이 오는 것이다. 아무리 말 없는 요조숙녀라 하나 가만히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동궁빈은 춘방사령 명보의 아내가 된 봉지련의 엄를 너지시 불렀다.
"너하고 잠깐 의논할 일이 있다."
봉지련의 어미는 딸이 죽은 후에 살림이 말이 아닌 것을 세자 내외가 불러다가 명보와 작수성례를 시켜주어서 동궁 안에 둔 일은 먼젓번에 이미 독자에게 알려진 일이다. 봉지련의 어미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의논이 계시오니까?"
동궁빈은 덕성스런 용모에 미소를 지으면서 조신한 음성으로 묻는다.
"동궁마마께서 요사이 미복으로 밤마다 나가시어 외박을 하시고 돌아오신다. 아마 너도 짐작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조용히 너를 불러 묻는 것이다. 너도 내 성정을 짐작해 알겠지만, 내가 무슨 질투하는 마음이 있어서 묻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자마마께서 궁 안으로 기생들을 불러서 침소에 듭시기도 하고 미복으로 밖에 나가서 외침하신 일도 많지만 내 언제 입 밖에 말이나 내봤더냐. 그러나 이번엔 하도 날마다 나가시어 외침을 하시니 이 소문이 만약 왕상전하께 들어간다면 또 한 번 큰 풍파가 일어나고 말것이다. 사실을 알아서 동궁마마께 충간하려는 것이다. 네 혹시 알거든 자세하게 나한테 말을 해다오."
봉지련의 어미는 동궁빈의 충곡을 잘 알았다. 그러나 사실 몰랐다.
"명보가 밤늦게 세자마마를 모시고 나갔다가 돌아오고 아침에 나갔다가 낮에 돌아오기도 하니 그저 세자마마를 모시고 왔다갔다 하는 줄만 알았을 뿐 세자마마께오서 외박하신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요사이 날마다 외박을 하셨습니까?"
봉지련의 어미는 되레 묻는다. 젊은 동궁빈은 화한 기운이 얼굴에 가득했다.
"너는 나만도 못하구나, 하하하. 그럼 조용히 네 서방한테 물어보아라."
"소인이 물어본들 제 서방이 어디 올바로 대답을 해줍니까. 빈들빈들 밉상만 부리고 바른대로 대답을 아니 합니다. 지금 마침 제 방 속에 들어서 낮잠을 자고 있으니 깨워가지고 들어오겠습니다."
봉지련의 어미는 동궁빈의 허락하는 말씀도 듣지 아니하고 쏜살같이 자기 처소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봉지련의 어미는 서방 춘방사령 명보를 데리고 들어왔다. 명보는 뜰 아래서 허리를 굽실하고 두 손을 맞잡고 아뢴다.
"부르셨사옵니까?"
동궁빈의 요조하고 착한 용모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내가 부른 것이 아니다. 네 아내가 데리고 들어온 것이로구나."
명보는 악의 없는 눈으로 봉지련의 어미를 흘겨본다.
"어찌 된 셈야. 부르셨대면서?"
"하문하시거든 대답이나 똑바로 해요. 공연히 횡설수설 딴소리하지 말고."
봉지련의 어미도 매력 있는 눈으로 웃음을 머금어 명보를 흘겼다.
"이거 어찌 된 셈야."
명보는 뒤통수를 긁적긁적 긁는다. 동궁빈이 웃으며 말한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아니지만 네 처가 내가 묻는 일에 대해서 네가 자세 알 듯하다고 데려온 모양이니 내가 부른 것이나 진배없다. 너무 괘사 떨지 말고 묻는 대로 대답해라."
"동궁빈마마께서 제 처한테 무슨 일을 하문하셨습니까? 그러면 진작 그렇다고 하지 아니하고 덮어놓고 마마께서 부르셨다 하니 소인은 영문을 모르고 숨이 턱에 차서 진둥한둥 뛰어왔습니다. 무슨 일을 제 처한테 물으셨습니까?"
동궁빈은 짐짓 얼굴빛을 엄숙하게 지었다.
"내가 묻는 말에 네가 조금이라도 은휘해서는 아니 된다."
"마마, 소인이 어찌 마마계서 하문하시는데 은휘할 리가 있습니까. 충복 명보 놈을 그렇게 의심하십니까. 섭섭하옵니다."
명보는 또 한 번 머리를 긁적거리며 괘사를 떤다.
"익살 그만 떨고 정중하게 묻는 대로 대답해라. 요사이 너의 언동이 너무나 무엄하더라."
동궁빈은 정색하고 꾸짖는다. 명보는 펄썩 땅에 주저앉아서 두 손길을 싹싹 빌어 올리며 말한다.
"소인 그저 진심으로 아뢰옵니다. 어찌 추호인들 무엄한 일이 있사오리까. 그저 일편단심을 굽어살펴주옵소서."
얌전하고 조신한 동궁빈이건만 명보의 죄 없는 괘사에 미소를 풍기지 아니할 수 없었다. 동궁빈은 눈에는 미소를 머금고 음성은 노한 소리를 지어 꾸짖는다.
"벌떡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묻는 대로 대답해라."
명보는 동궁빈의 꾸짖는 말씀이 떨어지기 전에 벌떡 땅에서 일어났다.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네, 무슨 일이온지 하문하십시오."
"다른 일이 아니다. 너한테는 조금도 죄를 주지 아니할 테니 안심하고 대답해라. 만약에 일호라도 거짓말을 하거나 농지거리로 대답하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벌을 주리라."
세자빈의 당겼다 늦췄다 하는 너글너글한 태도에 명보는 감격했다.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두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번갈아 씻으며 대답한다.
"소인이 어찌 궁빈마마께 추호인들 농지거리로 아뢰며 거짓말로 대답하겠습니까. 소인이 성정이 항상 침차하지 못하고 허탈하와 농지거리같이 보시는 모양이올시다마는 일호도 소인은 사특한 맘이 없사옵니다. 그저 아까도 말씀했습니다마는 동궁마마나 동궁빈마마께 향한 한 조각 붉은 마음은 향일화 해바라기의 마음이올시다."
"잔소리 그만 해라. 너한테 묻는다. 요사이 세자마마께서 밤마다 미복으로 납시어 하루도 빠짐없이 순일이 넘도록 외박을 하시는데 누구의 집 누구한테 마음을 쏟고 다니시느냐?"
"네, 그 일 말씀이오니까? 어리한테 반하셨습니다."
"어리라니?"
"천하일색으로 소문이 높은 여자올시다."
"노는 계집이냐?"
"아니올시다. 재상의 소실이올시다."
동궁빈은 깜짝 놀란다. 봉지련의 어미도 눈이 둥그레졌다.
"재상가의 소실야! 재상가의 소실과 어떻게 접선이 되었느냐?"
"허허, 참 그거 기막힌 사단이 많습니다."
춘방사령 명보는 허두를 내놓은 후에 초궁장과 이법화의 입에서 천하일색 어리의 이야기가 나와서 세자가 어리한테 수주머니를 보냈다가 거절을 당하고 곽중추부사의 수양자 이승한테로 어리가 피신한 일이며, 이승의 집으로 담을 넘어서 세자가 어리를 보던 일과 어리를 이법화의 집에 숨겨두고 날마다 세자가 친히 가서 외침하는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둥궁빈은 깜짝 놀랐다.
"그래, 곽중추부사는 어찌 되었느냐?"
"깜깜히 모르고 시골집에 늙은 노인이 엎드려 있겠습지요."
"이승이 말을 하지 않겠느냐?"
"이승이 무슨 낯짝을 들고 곽중추부사한테 말합니까. 함구불언 할 것이 분명합니다."
"곽중추부사가 시골집에서 어리를 기다리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이승한테 물어보면 어찌하나?"
명보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정실도 아니요, 어리는 첩실이올시다. 도망갔다고 말하면 그만 아닙니까. 자기 집에 한 번 다녀갔다가 다시는 소식이 없다고 대답하면 그만입죠. 젊은 계집이 늙은이를 버리고 달아나는 일은 항다반의 일이 아닙니까."
명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머리가 명석하고 태도가 민첩한 세자빈이었다. 모든 사태를 다 짐작해 알았다.
"물러가거라. 그만하면 짐작하겠다."
명보는 발길을 돌려 물러간다.
"얘야, 이리 오너라."
동궁빈이 다시 불렀다. 명보는 발길을 돌렸다.
"너 함부로 다른 사람한테 어리에 대한 일을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 아내한테도 이야기를 아니 했습니다."
"어서 물러가거라."
명보는 터벌터벌 흑의 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바깥채로 물러갔다.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도 명보의 뒤를 따라 바깥채로 나갔다. 이때 동궁 서온돌 부엌에서는 동궁 소속 아기나인 한 명이 불을 때다가 동궁빈과 춘방사령 명보가 주고받는 세자와 어리의 정사를 흥미있게 귀담아듣고 있었다.
이날 밤 초저녁 때가 되었다. 동궁빈은 안채에서 사랑채로 발길을 옮겼다. 세자는 저녁 밥상을 물린 후에 미복으로 의복을 갈아입고 꼬마 내관을 앞세우고 세자궁에서 나가려는 찰나였다. 세자빈은 얼굴에 희색을 띠고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고한다.
"동궁마마, 잠깐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청으로 오르옵소서."
세자는 어진 아내가 청하는데 아니 응할 수 없었다. 미소를 짓고 발길을 돌렸다. 청에 오르자,
"왜?"
사랑하는 아내 동궁빈을 바라본다.
"행차하시는데 요망하게 멈추시라 하와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천만에, 별말씀을 다 하는구려."
세자는 너스레를 놓았다. 동궁빈의 맑은 눈에는 미소가 향기롭고 품 있게 피었다. 조용히 세자께 여쭙는다.
"마마, 밤마다 어디를 가서 외침을 하시옵니까?"
"아아, 천하일색이 있어서. 하하하."
세자는 너털웃음을 지어 껄걸 웃었다.
"마마, 염복이 많은 것을 축복합니다. 그러나 마마의 주위에는 보는 눈이 독한 화살 같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찌 이것을 살피지 못하십니까? 동궁을 폐위시키려 하는 음모가 검은 구름장 일 듯합니다. 동궁은 껄걸 웃는다.
"하 하 하. 내가 그것을 모르는 줄 아오. 하 하 하."
"어리라는 계집한테 반하셨답지오."
미소를 지어 웃던 동궁빈의 맑은 눈에 진주 같은 눈물이 저고리 앞자락으로 뚝뚝 떨어졌다.
"어디서 들었어?"
세자는 반문한다.
"어디서 듣다뇨. 저하께서 밤마다 외박을 하시면서 오히려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동궁 안에서 저하의 외박하시는 일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큰일이올시다."
"어리란 이름을 어찌 아느냐 말야."
"동궁저하의 말씀 한마디가 천 리까지 퍼집니다. 황차 동궁마마의 행동이겠습니까. 동궁 안의 비복들까지 다 알고 있사온데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어리는 그대로 노는 계집이 아니고 중추부사 곽선의 소실이라 하지 않습니까. 동궁마마께서 남의 집 담을 뛰어넘어서 유부녀를 겁탈하셨다 하니, 이거 말이 되는 일입니까. 제가 언제 저하의 노시는 일에 대하여 말씀드려서 간한 일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잠자코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저하! 오늘부터 외출하시는 일을 중지하시옵소서."
세자는 고개를 가로 흔든다.
"중지할 수 없어."
간단히 대답했다. 세자의 얼굴은 무표정이다. 동궁빈은 초조했다.
"제가 언제 저하께서 노는 계집을 데리고 노시는 일을 만류한 일이 있었습니까. 여태껏 한 번도 잔소리를 아뢰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아니 되십니다."
"아니 될 것 없지."
세자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태연히 대답했다.
"제가 샘을 놀거나 질투해서 아뢰는 말씀이 아니올시다."
"알아."
간단히 대답한다.
"아시면서 어찌 비례의 일을 하십니까?"
"내 언제 예를 지키는 사람인가. 사람 노릇을 안 하려고 하는 사람한테 예를 지키라는 것은 도리어 망발이지. 하하하."
세자는 드높게 야유하는 웃음을 웃는다. 동궁빈은 애가 탔다.
"이 일을 상감께서 아시면 어찌합니까?"
"아시라고 하는 일인데, 하하하."
세자의 웃음소리는 허파에서 터지는 달관한 홍소다. 동궁빈의 눈에 눈물이 또 서렸다.
"이번엔 아마 폐세자가 되실 것입니다."
"어서 폐세자를 하라고 하는 일인데. 하하하."
동궁빈은 다시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동궁빈은 현숙한 여자였다. 파탄되어가는 동궁을 그대로 방임해버릴 수는 없었다. 눈물을 거두고 부드럽게 고한다.
"저하, 어리를 동궁 안으로 데려옵시오."
세자의 귀가 번쩍 띄었다.
"동궁으로 어리를 데려오라구?"
"네, 그러합니다. 폐세자가 되실 때 되시더라도 어리를 데려다가 동궁에 두시고 마음을 안돈하십시오. 세자께서 밤마다 외박하신다는 일은 청문이 사납습니다. 아주 떼어다가 동궁 안에 두시고 동궁의 후궁을 삼으십시오."
세자빈의 마음은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세자는 덥석 동궁빈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동궁빈. 빈의 어질고 착하신 마음을 짐작하겠소."
대범하고 호협하고 활달한 세자의 큼직한 눈에는 눈물이 안개처럼 서렸다.
"그런 말씀은 마옵소서. 신첩이 저하께 받자온 은혜는 태산이 얕사옵니다.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어리를 후궁으로 삼으시옵소서. 곧 후원에 별당을 청소하라 하겠습니다. 오늘 해 안으로 어리를 데려옵소서."
세자는 더욱 감격했다.
"내가 세자의 자리를 내놓은 후에 만 가지 시름을 잊고 빈마마와 함께 맨 데 없이 흠뻑 인생을 즐겨보리다."
세자빈은 세자의 마으믈 거스르지 아니하려 했다.
"좋습니다."
간단히 대답했다. 이윽고 세자빈은 설렁줄을 흔들었다. 시녀가 들어왔다.
"명보를 불러라."
춘방에서 명보가 총총걸음을 걸어 뛰어들어왔다.
"명보 대령하였소."
소리 높이 아뢴다. 동궁빈은 쌍창을 열고 분부한다.
"너 이법화의 집에 가서 어리를 곧 데려오너라. 일이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그대로 외간에 두고 막중하신 세자마마께서 미복으로 왕래하실 수는 없다. 동궁의 후궁으로 봉할 테니 곧 오늘 해 안으로 데려오너라."
명보도 감격했다.
"예, 곧 명대로 하겠습니다."
명보는 방 안에 동궁이 빈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다시 동궁한테 다질 필요도 없었다. 걸음을 빨리하여 이법화의 집으로 향했다. 어리도 세자빈의 너그러운 덕에 감복했다. 해가 떨어지는 어스름 황혼 때 어리는 가마를 타고 동궁으로 들어왔다. 동궁빈의 어진 더근 어리를 후궁에 처하게 하고 후하게 대우해주었다. 세자는 어리와 함께 더한층 정이 깊었다. 세자는 또 한 번 광태를 부리고 싶었다.
춘방사령 명보를 불렀다.
광태
명보가 세자의 부름을 받고 급히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오냐. 날도 화창하고 꽃도 한창이다. 울적하게 들어앉아 있기가 싫다. 화전놀이를 하고 싶다. 준비를 좀 하도록 해라."
"어디로 가시렵니까?"
"양주 회암사로 가겠다."
"회암사에는 효령대군께서 불경공부를 하고 계시지 아니합니까? 방해가 되면 어찌합니까?"
"아따, 아우가 있는데 찾아가면 더욱 좋지 아니하냐. 오래간만에 만나보기도 하고...."
"어떻게 놀이 준비를 차리오리까?"
"크게 들놀이를 하겠다. 소 한 마리에 돼지 두서너 마리를 잡게 해라. 서울서 잡아가지고 가면 맛이 없다. 놀이터 현장에서 잡아서 잔치를 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내일이 바로 양주 가래비 장터 장날이올시다. 내려가서 암소 한 마리와 돼지 두 마리를 사놓겠습니다."
"왜 하필 암소냐? 수소를 사지. 그리고 막걸리와 약주도 흠뻑 마련해두어라."
"약주는 빈마마께 말씀드리면 몇 말 주실 것ㅇ, 막걸리는 가래비장터 원 집에 미리 부탁해두겠습니다."
"좋다. 소 살 돈하구 모든 비용은 춘방 서사한테 달래서 가지고 가거라."
"그리하옵고 데리고 가실 사람은 누구누구를 정하셨습니까?"
"뻔하지 아니하냐. 노래 잘 부르는 구종수, 춤 잘 추는 곱추 내관, 거문고 잘 타는 잉방, 퉁소 잘 부는 이법화, 가야금의 명수 홍만에다가 가사 잘 하는 초궁장에 선소리 잘하는 계지, 이쯤 데리고 가겠다. 그리고 음식을 장만해 달라고 네 아내 봉지련의 어미도 가도록 하겠다."
"그럼 소인은 양주로 내려가기 전에 여러 사람들한테 지휘를 해놓고 내려가겠습니다."
"좋다. 그리해라."
"언제쯤 내려오시렵니까?"
"회암사는 당일 당도할 수 있으니 모레쯤 내려가기로 하겠다."
"그리하시도록 모든 준비를 차리겠습니다."
춘방사령 명보는 나가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뢸 말씀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타실 것을 준비해야겠기에 아룁니다. 어찌 준비하오리까?"
"성 밖까지 미복으로 걸어 나갔다가 말을 타고 가겠다. 일행들도 모두 말을 타게 해라."
"어리마마는 어찌합니까?"
"명색 후궁이니 데리고 갈 수 있느냐.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예, 알겠습니다."
춘방사령 명보는 바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명보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명보한테 소식을 들은 오입쟁이 건달패 조방구니를 위시하여 기생 초궁장과 권보의 소실 계지는 세자궁으로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다. 세자는 명보와 약속한 대로 갓 쓰고 흰 도포 입고 짚신 신고 미복으로 차린 후에 여러 오입쟁이들과 기생을 거느리고 동문 밖으로 향했다. 문밖에는 명보가 미리 마고방 여각에 당부하여 나온 마부와 말들이 대령하고 있었다.
세자와 건달패며 기생들은 제각기 말을 타고 양주 큰길로 나갔다. 일행이 양주 다락원 앞에 당도했을 때 다락원 찰방은 유심히 말 타고 지나가는 일행을 살펴보았다. 일행이 타고 가는 말이 관가의 역말이 아니고 마방 말이지만 찰방이 세자와 한량패들의 모습을 보니 장사치들이 타는 마방 말을 탈 사람 같지 않고, 더구나 뒤에는 기생까지 대동해서 나가는 것을 보면 대관의 자제가 아니면 젊은 한림학사가 놀이를 하러 가는 행차가 분명했다. 대관의 젊은 자제나 한림학사가 문밖으로 놀러 나간다면 비록 공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으레껏 역마를 갈아타고 나가는 것이 전례로 되어 있는데 수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찰방은 지나가는 일행을 한동안 유심히 본 후에 본관 사또가 있는 양주목사 아문으로 말을 달렸다. 일행은 다락원 찰방의 행동을 알 까닭이 없었다. 말 타고 희희낙락 산천풍물을 바라보면서 회암사로 향했다. 먼저 갔던 명보는 아내 봉지련의 어미와 함께 가래비 장터에서 소 한 필과 돼지를 사고 약주와 막걸리며 놀이할 음식을 준비해가지고 회암사 동구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명보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뱃심 좋고 결단성 있고 너스레 잘 치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감히 소와 돼지를 끌고 법당과 대웅보전이 있는 절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내 봉지련의 어미와 의논하고 절 앞에 있는 큰길가 동구 밖에서 세자의 행차가 당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보 내외가 소몰이꾼과 푸줏간 사람이며 음식을 조리해 만들 여인들과 함께 길가 그늘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서울서 내려오는 세자의 일행이 고갯길을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명보는 달음질쳐 고갯길로 올라가며 세자를 맞이했다.
"이제야 내려오십니까."
세자의 일행들도 명보를 보자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세자도 명보를 반갑게 대했다.
"명보냐. 오래 기다렸구나."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도 뛰어나갔다.
"마마, 내려옵시오."
"오오, 지련의 어미냐. 이를 많이 쓰는구나."
세자는 흡족했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명보 내외의 수고를 위로했다. 일행이 고개에서 내려서 회암사 동구 앞 큰길에 당도하니 소와 돼지를 길가 나무에 매어놓고 일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말 타고 내려오는 세자 앞에 넙죽 엎드렸다.
"누구들이냐?"
"일꾼들이올시다."
세자의 눈에 소와 돼지도 띄었다.
"놀이터를 아직 잡지 아니했느냐?"
"아직 잡아놓지 못했습니다. 어디가 좋을지 몰라서 내려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절 안에 경치 좋은 곳이 많을 테다. 그리로 들어가지."
명보는 두 손을 모아 비비며 아뢴다.
"절 안에서 술을 마시고 노는 것은 금법이올시다. 말썽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절 밖에도 낙락장송이 제법 경치 좋게 우거져 있는 곳이 많습니다. 동구 밖에 자리를 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자는 명보를 꾸짖는다.
"당치 않은 소리 마라. 부처님도 사람이 된 것이다. 중생이 즐겁게 노는 것을 싫어할 리 만무하다. 절 안으로 들어가서 대웅보전 널찍한 뜰 앞에 자리를 잡아라."
"소와 돼지는 어디서 잡아서 국을 끓입니까?"
"음식도 법당 앞에서 차리고 국도 놀이하는 곳에서 끓여야지 멀리서 국을 끓이면 식어서 맛이 있느냐."
명보와 명보의 아내는 난감했다. 주저주저한다.
"어서 하라는 대로 해라."
세자는 명보 내외를 꾸짖었다. 명보 내외는 하는 수 없이 세자의 분부대로 따랐다. 푸주한을 시켜서 소와 돼지를 몰고 회암사 큰 절 동구 안으로 들어갔다. 푸주한의 뒤에는 명보 내외와 음식 조리할 사람과 기명이며 자리를 지게에 진 짐방이 따라가고 그 뒤에는 거문고, 장구 등 악기를 짊어진 동자가 따라가고 다음에는 세자를 필두로 하여 한량패 멋객들과 초궁장, 계지 등 기생이 남치마 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법당 안으로 들어서서 마당에 화문석이며 용등석을 화려하게 깔아놓았다.
바로 맞은편이 회암사 큰 절의 석가세존을 모신 대웅보전이었다. 절 안으로 소와 돼지를 몰고 들어가고 법당 앞에는 화문석에 용등석 등메를 깔아놓아 포진하는 것을 보자 절 안의 대중들은 깜짝 놀랐다. 흑장삼 입은 중들이 쫓아나왔다.
한 중이 나와서 탄했다.
"이곳이 어딘데 감히 소와 돼지를 몰고 들어와서 자리를 펴고 법석을 떠시오?"
세자가 앞장서서 대답한다.
"나는 서울 선빌세. 울적해서 산천 구경을 나왔다가 이곳 경치가 하도 좋아서 잠깐 다리를 쉬어가려고 들어왔네. 과히 책망하지 말고 마당을 좀 빌려주게나."
세자는 반죽 좋게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청했다.
"아니 됩니다. 이곳은 바로 대웅보전 법전 앞이올시다. 노시려면 절문 동구 밖으로 나가서 노시오. 절문 밖에도 경치 좋은 곳이 많습니다."
"아니 되겠는데..... 꼭 이 마당에서 놀아야만 쓰겠네."
세자는 일부러 얼굴을 붉혔다.
"안됩니다. 당신 맘대로 못합니다."
젊은 중도 얼굴에 핏대를 올렸다. 세자는 불호령을 내린다.
"이놈! 이곳은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창생을 제도하시는 부처께서 계신 곳이다. 창생 중의 몇 사람인 우리들이 석가세존님을 모시고 이곳에 모여서 놀려고 하는데 네 어찌 감히 막느냐."
세자는 큰 소리로 중을 꾸짖은 후에 명보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우두커니 서서 보고만 있지 말고 어서 자리를 펴서 포진을 해라."
명보는 여러 일꾼을 지휘하여 자리를 깔라 포진을 마쳤다. 세자 이하 모든 건달들은 등메 위로 올라앉았다. 거문고와 가야금 줄을 골랐다. 때아닌 풍악 소리가 아련히 법당 앞에 일어났다. 대중은 어이가 없었다. 어찌할지 몰랐다.
세자는 명보한테 영을 내린다.
"소를 잡고 돼지를 잡아서 판도방 부엌에 있는 가마솥에 국을 끓여라. 그리고 찬간을 좀 빌려달라 해서 주안상을 차려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명보는 이내 긴 대답을 하고 푸주한을 지휘하여 소와 돼지를 끌러서 도살시키라 했다. 중들은 깜짝 놀랐다. 기급초풍을 했다. 급히 방장으로 뛰어 들어가 늙은 주지한테 고했다. 한량패 건달들이 기생들을 데리고 와 법당 앞에서 소와 돼지를 잡는다는 말에 노장 주지는 깜짝 놀랐다. 급히 석장을 짚고 법당 앞으로 나갔다. 과연 상좌 중의 말과 같이 법당 앞에는 꽃같이 젊은 새 서방님과 기생들이 눈에 띄고 한량패 비슷한 십여 명은 거문고, 가야금, 장구를 벌려놓고 놀이판을 차리고 있는데 동구 앞에서는 또다시 한떼 푸주한이 소와 돼지를 잡고 있었다. 노장 주자는 대경실색했다. 법당 뜰 아래로 내려가서 한량패를 꾸짖는다.
"이곳은 청정한 도량일 뿐 아니라 바로 대웅보전 앞뜰입니다. 속인들의 가무하는 곳이 아니니 빨리 나가도록 하시오."
점잖게 꾸짖는 노장의 말을 듣자 명보를 위시하여 여러 한량패들은 입이 굳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주저주저하고 있을 때 미복으로 변장한 세자가 앞으로 나섰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한다.
"나는 유가요마는 만 권 서적을 섭렵하는 동안에 불경도 좋이 읽었소이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는 악한 일이 아니면 창생을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노장도 생각해보시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까. 노장은 부처의 다음 가는 사이신데 이것쯤은 짐작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악인이 아니라 천지각 대자연속에 거침없이 쾌활을 취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과히 허물치 마시오. 저기 저 대웅보전에 앉아 계신 부처님께서는 나의 말씀을 알아듣고 허락하시리다."
주지는 세자를 알 까닭이 없었다. 귀공자 비슷한 젊은이가 유식도 하고 언변도 좋다고 생각했다. 따져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법당 앞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질탕하게 노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점잖게 세자를 향하여 타이른다.
"보아하니 뉘 댁 공자인지 모르겠소이다만 예로부터 우리 청정한 도량 안에서는 가무와 질탕한 놀이를 금하는 법입니다. 황차 저 아래서 소와 돼지를 끌고 와서 살생을 하는 모양이니 절대로 허락할 수 없소이다."
주지는 석장을 두드리며 허락하지 아니했다. 세자는 노했다.
"이치를 모르는 주지를 상대할 것 없다. 어서 소와 돼지를 잡아서 국을 끓여라."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푸주한들은 세자의 명령이 떨어지니 잡담 제하고, 소와 돼지를 도살하기 시작했다. 소 잡는 구슬픈 비명 소리와 돼지 울음소리가 동구 안에 처절했다. 노장 주지는 역증이 화산처럼 터졌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무례하게 법 없이 침입한 무리들을 일제히 쫓아내라."
흑장삼을 입은 승려들은 석장을 둘러메고 한량패와 푸주한들을 두들겨 패주며 내몰았다. 세자도 급히 명령을 내렸다.
"일러주어도 못 알아듣는 중놈을 대항해서 패주어라."
명보와 푸주한을 위시하여 한량패들은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다. 중들이 휘두르는 석장을 모조리 뺏아 부러뜨려버렸다. 명보는 범같이 날뛰고 푸주한들은 도끼와 칼을 휘둘렀다. 주지를 위시하여 흑장삼 입은 중들은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회암사 일대는 별안간 수라장을 화해버렸다. 중들은 뿔뿔이 흩어져 머리를 싸안고 달아났다. 상좌 중 한 사람은 급히 양주 읍내로 고변을 하러 달려갔다. 이때 양주 다락원에서 일행을 수상스럽게 본 찰방은 양주목사한테 수상한 건달패들의 행동을 고했다. 목사는 기찰 오륙 명에, 포교 십여 명을 풀어서 뒤를 밟으라 했다. 길에서 기찰과 고변하러 읍내로 들어가던 상좌 중이 서로 만났다. 기찰들은 급히 뛰는 상좌 중을 보고 웬일이냐 물었다. 상좌 중은 숨이 턱에 차서 법당에서 야료치는 불법 침입한 자들을 고변했다. 기찰들은 포교들과 함께 급히 회암사로 향했다. 기찰들이 절에 당도해보니 기가 막혔다. 동구 안은 수라장이 되었는데 법당 앞에서는 갈비 굽는 냄새, 염통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기찰들은 괘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포교를 시켜서 누구누구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잡으라는 포박명령을 내렸다. 포교들은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오랏줄을 던져 일행을 깡그리 잡으려고 덤벼들었다. 세자궁의 충복이요, 숨은 장사인 춘방사령 명보는 가만히 시골 포교 놈의 결박을 받을 리 만무했다. 세자의 분부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웃통을 벗어붙이고 법당 앞에 있는 아름드리 낙락장송 한 그루를 와짝 뿌리째 뽑아서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포교들은 먼저 기에 눌리고 기운에 놀랐다. 한 자가 휘두르는 나무뿌리에 걸려 쓰러지니 모두들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났다. 세자의 일행은 호기가 가득했다. 주안상을 벌여놓고 풍악을 잡히며 고기를 굽고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세자가 기생 초궁장의 따라 올리는 술잔을 받자 마시지 아니하고 상에 놓은 후에 여러 오입쟁이들을 향해서 말한다.
"내가 이곳까지 와서 내 아우를 찾지 아니한다는 것은 일이 아니다. 명보는 주지한테 내가 이곳에서 효령을 청한다고 모시고 오라 해라."
"효령대군께서 암자에 계신지, 큰 절에 계신지 소인은 알 길이 없습니다."
명보가 주저하고 꼬리를 빼며 대답하자 세자는 명보를 꾸짖는다.
"아따, 그놈 머리가 아주 돌대가리로구나. 주지한테 효령대군께서 어디 계시냐고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
"주지가 골이 잔뜩 났는데 고분고분 가리켜줄 지 의심스럽습니다."
명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아뢴다.
"효령대군은 나와 달라서 이 절을 중수해준 큰 은인이다. 아니 가리켜줄 리 만무다. 빨리 가보아라. 술이 식는다."
명보는 달음질쳐 주지의 방장으로 향했다. 이때 주지는 별안간 뜻 아니한 무뢰배들의 야료를 당하자 큰 절 선방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있는 효령대군을 찾았다. 대군의 위력으로 무뢰배들을 쫓아내 보려는 속셈이었다.
"대군께 아뢰옵니다."
"주지, 어찌해서 이같이 나를 찾았나?"
"급한 일이 있사와 아뢰러 왔사옵니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무뢰배들이 성군작당해 가지고 청정세계인 법당 앞까지 들어와서 소를 잡고, 돼지를 도살해서 망유기극한 행동을 합니다. 쫓았더니 적반하장격으로 오히려 승려들을 구타하와 야료가 비상하옵니다."
효령은 크게 노했다.
"어떤 놈들이 무엄하게 감히 이러한 행동을 하더란 말이냐."
곧 의관을 정제하고 주지와 함께 법당을 향하여 내려오고 있을 때 춘방사령 명보가 나타났다. 효령대군이 나오는 것을 보고 넙죽 땅에 엎드렸다. 주지는 명보가 불량패류와 한 덩어리인 것을 알아냈다.
"저자도 패류의 일당이올시다."
효령한테 고했다. 효령이 대로하여 호통을 내리려 할 때 명보는 땅에 엎드려 아뢴다.
"세자마마께옵서 대군마마를 청하시옵니다."
효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어라고 하느냐?"
"세자마마께서 대군마마를 청하십니다."
주지도 의아하게 듣고 있었다.
"세자마마께서 어디 계시단 말이냐?"
"지금 저 법당 아래 계시옵니다."
"너는 누구냐?"
"춘방사령 명보올시다."
효령은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셈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주지는 아까, '저자도 패류의 일당이올시다.'했는데 세자가 패류 속의 하나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법당 아래로 내려섰다. 기막히지 아니한가. 법당 아래는 큰 잔치가 벌어졌는데 흰 도포에 갓을 쓰고 앉아 있는 젊은 사람은 분명히 자기 형님 세자였다. 너비아니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기생들의 아리따운 교성은 귀를 따갑게 했다. 주지가 말한 패류의 일행은 곧 세자의 일행이었다. 세자는 효령이 내려오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아우를 맞이한다.
"그동안 아우야 잘 있었느냐. 하하하. 나는 효령 네가 그리워서 이곳에 배반을 벌이고 너를 청했다. 어서 자리에 올라앉아라."
세자는 효령의 손을 덥석 잡아 자리에 앉게 했다. 효령은 세자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자리에 오른 후에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 세자께 배례를 아니 드릴 수 없었다.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세자마마, 이거 웬일이시오니까?"
세자는 절하는 효령을 붙들어 일으키고 껄걸 웃으며 말한다.
"효령, 자네가 보고 싶어서 내려왔다 해도 그러나. 자아, 술 한 잔을 들게. 나는 자네가 오기를 기다리느라고 술을 따라놓은 채 들지 아니했네."
세자는 잔대를 들어 효령한테 권했다. 효령은 술잔을 받은 후에 상위에 놓았다. 마시지 아니하고 잠자코 있다. 이때 너비아니 굽는 냄새, 돼지, 돼지고기를 굽는 냄새가 푸른 연기를 뿜어 더한층 코를 찔렀다. 효령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세자저하, 도대체 이것이 무슨 해거이십니까. 산문은 고승들의 수도장입니다. 마늘과 파도 이곳에서는 금법인데 황차 소를 잡고 돼지를 도살해서 불가를 소란케 하시니 너무나 광태이십니다. 저는 차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빨리 이 사람들을 데리시고 절 동구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세자는 효령의 말을 듣자 또 한 번 드높게 껄걸 웃는다.
"효령, 내 행동이 광태라고? 하하하. 내 눈에는 자네 행동이 광태라 생각하네. 부처도 애당초에는 사람일세. 고기를 먹고 색을 즐기는 것은 인가의 본능이란 말야. 이 천연의 본능을 누가 감히 억제할 수 있나? 부처는 인간이 너무 지나치도록 함부로 살생을 할까 보아서 살생유택이라 한 것일세. 전혀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닐세. 색도 마찬가지지. 이러기에 불경에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지 아니했던가. 만약 자네가 말하듯 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다 영양이 실조될 것이고 인간은 멸절이 되고 말 것일세. 생각해보게. 날 보고 광태라고 하지 말게. 자네들 바로 초인간인 체하는 불도를 믿는 사람들이 바보란 말일세. 자네가 암만 쫓아도 나는 가지 아니하네. 왜? 거짓으로 가식을 하지 아니하려는 때문일세. 자아 그러지 말고 오래간만에 형제간에 이야기나 좀 하도록 하세. 어서 이리 와 앉으라고."
세자는 효령의 손을 다시 잡는다. 효령은 발길로 상을 차고 싶었다. 그러나 일국의 세자였다. 억지로 올라오는 화기를 잠깐 억누르고 자리에 다시 주저앉는다. 이때 동구 밖이 떠들썩하며 육모방망이를 든 포교 수십 명이 쏟아져 들어왔다. 뒤에는 본관 사또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본관 사또는 불량배들이 포교를 두들겨주었다는 보고를 받자 친히 수십 명의 포교를 지휘하여 회암사에서 행패한다는 불량배들을 잡으러 나왔던 것이다. 본관 사또는 포교들을 몰고 들어오다가 앞을 바라보니 법당 아래 주안상이 벌어졌는데 세자와 효령대군이 앉아 있다. 기가 막혔다. 효령대군은 회암사에 두류하고 있는 까닭으로 한 달에 두어 번씩 문후하는 처지요, 세자는 자주 뵙지는 못했으나 봉명하고 입궐했을 때 여러 번 멀리서 뵌 적이 있었다. 깜짝 놀랐다. 포교들을 눈짓해 물리치고 세자와 효령대군 앞으로 나가 절을 올렸다.
"양주목사 현신이오."
황공해서 어찌할지 몰랐다. 세자가 껄걸 웃으며 양주목사한테 분부를 내린다.
"본관 사또가 나를 잡으러 왔나. 하하하. 불량패류의 행동을 했으니 당연히 잡아가야지. 하하하. 수고했네. 이리 와 술 한 잔 마시게."
세자는 친히 술병을 들어 잔에 따랐다. 철철 넘도록 따랐다.
"자아, 한 잔 들게."
양주목사는 벌벌 떨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가 명색이 세자니 세자의 명을 받아야지. 어서 들어."
양주목사는 죽을 각오를 하고 술잔을 받아 몸을 돌리고 쭉 마셨다.
"여보게 본관, 내가 오늘 놀다가 서울로 들어간 후에 그대는 곧장 계를 올려서 세자가 회암사 청정세계를 소란스럽게 했다고 전하께 장계를 올리게."
"아니올시다. 황공한 말씀을 내리십니다."
양주목사의 등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세자가 다시 껄걸 웃으며 말한다.
"내 팔자가 얼마나 좋은가. 대궐 안에 들어가면 임금의 아들이요, 절에 나오면 부처님의 형일세. 우리 아우 효령대군은 부처님이거든. 문벌로 따져서 하늘 밑에 나 같은 처지는 짝을 구할 수 없을 것일세. 하하하."
세자는 취하지도 아니하고 취한 체한다. 효령은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자는 이번에는 만류하지 아니했다. 일어나는 효령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본다. 효령의 눈과 세자의 눈이 마주쳤다. 세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내 뜻을 알지. 자네가 절로 나올 때 내가 한 말이 있지."
효령은 고개를 숙여 대답 없이 물러간다. 효령이 자리를 뜨니 늙은 주지도 뒤를 따랐다. 양주목사도 물러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자는 또 한 번 큰 소리로 양주목사한테 분부한다.
"잊지 말고 조정에 장계를 올리게. 세자가 회암사에서 법 없는 짓을 했다고."
"어찌 감히 그런 장계를 올리겠습니까. 황공하여이다."
양주목사는 허리를 굽실거리고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갔다. 세자는 효령과 주지며 목사가 물러간 후에 질탕한 놀이를 한바탕 벌였다. 하룻밤을 회암사에서 묵은 후에 다음 날 서울로 돌아갔다. 효령대군이나 양주목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리지 아니했으나 세자가 기생과 가객들을 데리고 회암사 절 안에서 돼지를 잡고 소를 도살해서 큰 놀이를 차렸다는 소문은 조정 안에 자자하게 퍼졌다.
대풍파
소문은 조정뿐 아니었다. 궁중 지밀 안에까지 퍼졌다. 소문은 가희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자를 헐뜯는 가희아였다. 참소하기 좋아하는 가희아였다. 시침하는 자리에서 가희아는 교태를 부리며 태종한테 고했다.
"요사이 세자는 점점 더 미치광이가 되어갑니다. 가석한 일이올시다."
항상 세자를 밉게 보는 태종이었다. 깜짝 놀랐다.
"왜, 또 무슨 일을 저질렀다던가?"
"회암사에 가서 망유기극한 행동을 했다 합니다."
"회암사라니, 양주 회암사 말인가. 효령이 있는 곳이지?"
"네, 그러하오이다."
"무슨 행동을 했기에 망유기극한 행동을 했다 하는가?"
"기생과 한량패들을 데리고 절 안으로 들어가서 소를 잡고 돼지를 삶아서 술을 마시며 질탕하게 놀았다 합니다. 그리하와 효령이 아주 골치를 앓았다 합니다."
"무어야, 절 안에 들어가서 소를 잡고 돼지를 삶았어? 불파천이로구나!"
태종은 크게 노했다. 시각을 지체치 말고 세자를 불러들이라 했다. 내관은 황망히 세자궁으로 달렸다. 이때 세자는 동궁으로 돌아온 후에 반드시 아버지 태종이 부를 줄 짐작했다. 이미 세자를 내놓기로 각오한 바다. 주저치 않고 내관을 따라 대전으로 들어갔다.
"어디 계시냐?"
세자는 내관한테 물었다.
"대전 침전에 계시옵니다."
세자는 헌앙한 태도로 대전 침전으로 들어섰다. 이때 가희아는 살며시 협문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세자는 태종께 들어가 절을 올리고 단정히 시립해 서 있었다. 태종은 부리부리한 큰 눈을 들어 세자를 흘겼다.
"너, 요사이 하라는 글공부는 아니하고 행동이 점점 불량패류로 떨어지니 가통 가석한 일이다. 하라는 공부는 아니하고 양주 회암사로 놀라갔다 하니 회암사에는 왜 갔더냐?"
"효령이 있는 곳이오라 아우를 찾아보러 갔습니다."
세자는 막힘 없이 대답했다. 얼굴에는 조금도 황겁한 빛이 없었다.
"아우를 보러 갔으면 조용히 보고 올 것이지 기생과 불량패류를 데리고 술 마시며 야료를 쳤다니 그것이 무슨 고약한 행동이냐. 뿐만 아니라 청정세계인 법당 앞에서 소를 잡고 돼지를 죽여서 법계를 더럽게 했다 하니 가통할 일이다. 너는 하늘도 무섭지 아니하고 땅도 두렵지 아니하냐?"
태종은 노기가 충천했다. 주먹을 들어 사방침을 부서져라 하고 때렸다. 세자는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었다. 명랑한 태도로 대답해 아뢴다.
"효령을 경계하느라고 일부러 절 속에서 소를 잡고 돼지를 삶았습니다."
말대답하는 세자를 보자 태종은 더한층 노했다.
"효령을 경계하다니, 효령이 너를 경계할 일이지 네가 효령을 경계한단 말이냐?"
태종은 더 한 번 화증이 났다. 이번엔 장침을 주먹으로 때렸다. 세자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아니했다.
"글에 있는 성현의 말씀을 실천해서 효령을 깨우친 것뿐입니다."
세자의 대답은 여전히 태연했다. 태종은 화증이 꼭두까지 올랐다.
"무어, 글에 있는 성현의 말씀을 실천해서 효령을 깨우치려 했다?"
태종은 열기가 고도에 올랐다. 어체를 벌벌 떨었다.
"성현의 글에 불도는 이단이라 했습니다. 지금 효령은 허무적멸한 이단 속에 고혹이 되어 부모와 처자를 다 버리고 출가승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삼강오륜을 모르는 그 일이 딱하와 일깨워주려 한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본의라면 조용히 말로 타이를 것이지 절 속까지 들어가서 소를 잡고 돼지를 삶는 해거는 무슨 고약한 짓이냐?"
"보통 말로는 듣지 아니하므로 그같은 격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이고 조카를 죽이는 짓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태종은 기가 막혔다. 자기의 죄상을 들추는 것이다. 할 말이 없었다.
"나가거라!"
고함쳐 소리쳤다. 세자는 쓴웃음을 머금고 돌아섰다. 세자는 그의 아버지 태종이 방석, 방번, 방간이며 방간의 아들과 매부 이제를 죽인 것을 정면으로 야유해서 부왕의 말문이 막히도록 한 것이다. 세자가 유유하게 동궁으로 돌아와 있을 때 뜻밖에 생각지 아니했던 일이 일어났다. 세자궁 시비에 오목이란 예쁜 무수리가 있었다. 웃는 얼굴에 오목볼이 진다 해서 그의 부모는 오목이라 이름을 지었다. 방년 십구 세에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태도가 남자의 눈을 현란케 했다. 동궁이 비록 궁궐은 아니지만 대궐 안에 다음가는 궁금이 엄했다. 외간남자가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다만 상주해 있는 남자라고는 나이 늙수그레한 춘방사령 명보 따위가 아니면 고자인 내시뿐이었다. 동궁의 궁녀들은 대궐 안에 있는 궁녀나 매일반으로 일체 외간남자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동궁의 내전은 역시 정궁의 지밀 안모양 외간남자는 출입할 수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동궁의 내전은 여국 나라였다. 이 가운데 늙은 명보와 고자를 제하곤 오직 한 사람의 남자가 내전 안까지 드나들었다. 대전 별감 김작은복이란 자였다. 나이 삼십에 얼굴이 옥골선풍으로 잘생겼다. 원바탕이 예쁘장한 데다가 별감의 복색은 눈이 부시도록 황홀 찬란했다. 붉은 홍의를 떨치고 노랑 초립을 쓰고 분미투리를 경첩하게 신고 옷고름을 멋지게 바람에 흩날리며 들어오는 작은복의 모습은 흡사 천상에서 선관이 내려오는 듯했다. 별감 김작은복이는 동궁에 시시때때로 출입을 했다. 대전 별감은 전하 앞에 심부름을 하는 존재다. 궁전 안에서만 심부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명을 받들어 항상 밖으로 나다니는 직책을 가졌다. 이런 까닭에 동궁에도 무상출입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작은복이가 동궁에 무상출입을 하게 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작은복이가 대전 별감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는 동궁빈의 친정아버지 김한로의 하인이었다. 이 때문에 작은복이는 동궁빈을 뵙느라고 자주 문안을 드리러 들어갔던 것이다. 여국 나라에 나타난 대전 별감 작은복이는 동궁 시녀들의 연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대궐 안 삼천 궁녀를 대해보는 대전 별감이었다. 동궁 시녀가 눈에 찰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별감 작은복이 눈에 번쩍 띄어지는 한 시비가 있었다. 다른 여자가 아니라 오목이였다.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여 회춘기에 접어든 오목이는 공연히 외로움을 느끼고 무엇인지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같은 동성뿐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고자 내관의 병적 모습밖에 보이지 아니했다. 까닭 없이 짜증이 나고 까닭 없이 우울한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었다. 이때 눈앞에 나타난 한 남성이 있었다. 바로 곧 대전 별감 작은복이었다. 나이 삼십에 한창 왕성할 때로 청춘을 뿜는 남성의 건강미를 풍겼다. 여기다가 작은복이는 대전 별감이라는 명호가 붙어 있었다. 대전 별감은 상감마마를 지척에 모시고 있는 상감의 직속 하인이다. 우러러보는 마음이 움직였다. 또다시 그의 입은 의복은 보통 사람이 입는 의복보다 훨씬 멋졌다. 붉은 비단으로 직령을 해 입고 누런 왕골로 초립을 해 쓴 후에 모자 옆에는 오색빛이 찬반한 공작미를 비스듬히 꽂았다. 그 풍채는 참말 신선의 옷차림으로만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작은복이는 언변이 좋았다. 세자빈을 뵈오러 와서 친정 일을 전하고 지밀 안의 동태를 사뢸 때 그 입심 좋고 구변 좋은 목소리는 마치 청산에 흐르는 물같이 그칠 줄을 몰랐다. 오목이는 은근히 대전 별감 작은복이한테 추파를 보내고, 대전 별감 작은복이는 동궁 무수리 오목이한테 정이 흘렀다. 동궁은 대궐만큼 넓지는 못하나 여염집에 댈 바가 아니다. 넓고 호젓한 후원이 있었다.
하루는 별감 작은복이가 동궁빈을 뵙고 나가는 판인데 무수리 오목이가 눈치를 채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앞질러 나갔다. 동궁에는 사랑이 여러 곳 있었다. 바깥사랑이 있고, 뒷사랑이 있고, 산정 사랑이 있고, 안사랑이 있었다. 사랑마다 우물이 있었으나 산정 사랑 우물은 산간에서 물줄이 흘러서 더욱 맑고 차가웠다. 동궁은 항상 산정 사랑 물로 숭늉을 끓여 자시었다. 오목이가 동이를 이고 앞을 서는 것을 보자 작은복이가 뒤를 따랐다. 오목이는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산정 사랑 문을 삐걱 열고 들어갔다. 별감이 뒤를 밟았다. 산정 사랑은 조용했다.
"무수리님!"
별감은 말을 건넸다. 오목이는 번연히 별감이 뒤를 따르는 줄 알았건만 비로소 목소리를 듣고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대답 대신 상긋 눈웃음을 쳤다. 대전 별감 작은복이가 오목이에게 말을 걸었다.
"물길러 가나?"
"네."
오목이는 모기 소리 만큼 예쁘게 대답했다.
"안마당에서 우물이 있고 사랑에도 우물이 있는데 왜 이리로 와서 물을 긷나?"
"동궁마마께서는 이 물이 맑고 깨끗하다 하시어 진짓상을 받으실 때는 항상 이 물로 숭늉을 하십니다."
"물맛이 좋은가? 어디 한 두레박만 떠주게나."
별감은 물을 청했다. 오목이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우물에 두레박 줄을 내려 물을 떠 올렸다. 별감은 두레박에 입을 대고 오목이는 두레박을 기울여주었다. 별감은 두어 모금 벌떡벌떡 켠 후에,
"어어, 물맛 참 좋다."
물맛을 칭찬했다.
"어디 더 한 모금만."
오목이는 다시 두레박을 기울여서 별감의 입에 대주었다. 별감은 두레박에 입을 대면서 슬며시 오목이의 두레박 쥔 손을 잡았다.
"아이고머니나, 망칙스러워라."
손을 빼내려 했다. 두레박에 담긴 물이 별감의 홍의 자락으로 왈칵 넘쳐 흘렀다.
"아이고머니, 저를 어찌하나."
오목이는 한편으론 부끄럽고 한편으로 민망했다. 부끄러운 것은 둘째가 되고 별감의 옷을 적셔놨으니 큰 탈이었다. 얼른 두레박을 내던지고 행주치마 자락으로 별감의 물에 젖은 홍의 자락을 닦아주었다. 이때 별감은 오목이를 슬쩍 껴안았다. 오목이는 당황했다.
"누가 보면 어찌하라고."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으슥한 곳에 누가 올라구."
"아니되요. 누가 또 물 길르러 오면."
"아따, 겁도 많으이. 문을 잠그면 그만 아닌가."
별감은 오목이를 품 안에서 풀어놓고 얼른 일각문 앞으로 뛰어가 빗장을 질렀다. 오목이는 동이를 우물가에 놓은 채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했다. 싫지는 아니했으나 가슴이 널을 뛰었다. 두근거렸다. 별감은 다시 오목이의 앞으로 다가섰다. 우물가에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에 앉았던 까치가 까치까치 소리를 반갑게 지르고 펄쩍 날았다.
"자아, 우리 이야기나 하자구."
별감은 오목이의 손을 끌었다. 오목이는 차마 별감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자아, 우리 산정 사랑으로 올라가자구."
"어머나, 어떻게 사랑으로...."
"이야기를 마당에서 할 수야 있나. 방으로 들어가 해야지."
"동궁마마께서 들어오시면 어찌하라구."
"동궁마마께서 무엇하러 무상시 때 산정 사랑으로 오실 리가 있나. 손님이 오시고 연회나 차려야 오시지. 자아, 올라가자구."
별감은 무수리 오목이의 손을 이끌고 산정 누마루로 올라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분벽사창에 보료방석이 포진되고 문방사우가 벌여 놓인 아늑한 방이었다.
"자아 앉으라구."
별감은 세자의 자리인 안석에 펄썩 기대앉고 무수리를 옆에 끌어 앉혔다. 오목이는 벌떡 일어났다.
"저는 못 앉겠습니다."
"상관없이 나하고 가까이 앉아서 이야기하자구."
"세자마마께서 앉으시는 자린데 어찌 감히..."
"문을 잠가서 누가 보나. 자아, 이리 와서 앉으라구."
오목이 얼굴은 진다홍빛으로 물들었다.
뿌리치고 나갈 수도 없었다. 지남철에 끌리는 바늘마냥 끌어당기는 별감의 품안으로 안겼다.
"몇 살이지?"
"열아홉 살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다 계신가?"
"아버지만 계십니다."
"왜 동궁으로 들어왔나?"
"아버지가 들여보내셨습니다."
"왜 시집을 보내지 않고 동궁으로 들여보내셨나?"
"나중에 대궐 안의 나인이 되라고."
"상감을 보시어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저는 그런 생각 없습니다."
"내가 대궐로 들여보내줄까? 기왕이면 대궐 안 궁녀 노릇을 해야 치수가 나가지 세자궁 시녀로는 행세를 할 수 없네."
무수리는 화려한 대궐 안의 나인들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잠자코 대답이 없다.
"내가 대전마마께 아뢰어서 자네를 대궐 안으로 들여 보내줄게. 어떤가, 자네 생각엔....."
"모르겠습니다. 처분대로 해주십시오."
무수리는 완전히 마음을 별감한테 쏟아버렸다. 별감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나하고 내외가 되어 살아보려나?"
별감은 긴하게 무수리를 껴안았다.
"들키면 죽는 몸이올시다."
무수리는 상기가 되었다.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별감은 더한층 무수리를 긴하게 껴안았다.
"죽으면 다 함께 죽는 몸일세. 정분이 나서 함께 죽는다는 일은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오목이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풍채 좋고 잘생긴 별감과 꿈같은 사랑 소게 빠져서 행복된 찰나와 찰나를 느끼다가 마지막 가는 길에도 길동무가 되어 함께 간다는 일은 여간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승길에도 함께 가주신다면 내외가 되어도 좋습니다."
오목이는 대담하게 대답했다.
"나이에 비해서 깜찍하구나."
별감은 더한층 무수리가 귀여웠다. 정열에 타오르는 육정의 불길은 마침내 살을 섞는 불장난을 저질렀다. 한 번 이런 일을 저질러놓은 두 남녀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별감은 옛 상전인 동궁빈께 문안을 드리러 왔다고 빙자하고 대궐에서 난번만 되면 동궁으로 갔다. 오목이는 별감 작은복이가 올 때를 손을 꼽아 기다렸다가 별감이 동궁빈께 문안을 드리는 것을 보기만 하면 슬며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산정 사랑 우물가로 물을 길르러 갔다.
눈치를 챈 별감은 천천히 오목이의 뒤를 따랐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오목이가 별감만 오면 물동이를 이고 산정 사랑으로 올라가고 오목이가 간 후엔 반드시 별감이 따라가는 것을 보자 동궁의 궁녀들은 눈치를 챘다. 쑤군대기 시작했다.
"얘, 이상한 일도 다 많다. 대전 별감이 나오기만 하면 오목이가 물동이를 이고 산정 사랑으로 올라가고 별감은 빈마마께 문안을 드린 후에는 슬며시 오목이의 뒤를 따라 산정으로 올라가니 이상하고 괴상한 일이 아니냐."
한 궁녀가 지껄였다.
"오목이가 전에 없이 요사이 모양을 바짝 내더라. 별감이 오는 날은 더한층 모양을 내더라. 두 사람이 아마 정분이 났나보더라."
한 궁녀가 뒤를 댔다.
"보지 못한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 말을 조심해라."
한 궁녀가 타일렀다.
"눈치로 보아도 알 일이지, 한두 번이 아니다. 별감도 바짝 모양을 냈더라. 올 때마다 새 옷을 입고....."
"뒷공론할 것 무어 있나. 가보면 알 노릇이지."
방정맞은 궁녀 하나가 살며시 발자취를 죽여가며 산정 사랑을 향해갔다. 얼마 아니되어 달음질해 뛰어온다.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렸다.
"왜 그러니?"
한 궁녀가 앞을 서서 묻는다.
"기막혀. 빗장을 질렀어. 산정 사랑 협문의 빗장을 질렀어."
"무어, 빗장을 질렀어?"
궁녀들은 지껄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안으로 빗장을 질렀더냐?"
"그럼, 산정으로 들어간 사람이 안에서 빗장을 지르지, 밖에서 어떻게 빗장을 지른단 말이냐?"
"야, 이거 큰일 났구나. 남녀가 장맞이를 하는 모양이로구나."
동궁 궁녀들은 칠푼은 샘과 노여움이 작용하고 삼푼은 호기심이 움직였다.
"우리 나오는 꼴을 보자."
"창피스럽게 어떻게 차마....."
"창피할 게 무어 있어. 우리가 창피할 게 무어 있니. 배가 맞은 저희들이 창피하지."
한 궁녀가 까르르 웃으며 여러 궁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여기서 옥하사담할 것이 아니라 가보기로 하자."
말을 마치자 쪼르르 산정 사랑으로 통하는 협문 옆 헛간 속으로 들어갔다. 모든 궁녀들은 뒤를 쫓았다. 숨을 죽이고 헛간 속에 엎드려 있었다. 문은 의연히 안으로 잠겨 있고 오목이와 별감은 아직도 나오지 아니했다.
"다른 데로 나간 것이 아니냐?"
"나가긴 어디로 나가? 승천입지를 한단 말인가. 둔갑법을 쓴단 말인가. 잠깐만 더 기다려보자꾸나."
궁녀들이 헛간에서 이같이 소곤대고 있을 때 협문편에서 빗장 뽑는 소리가 났다. 궁녀들은 숨을 죽이고 별감과 무수리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다. 먼저 별감이 나갔다. 얼마 있다가 오목이가 나왔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었다. 머리가 흐트러졌다. 요망을 떠는 한 궁녀가 헛간에서 왈칵 뛰어나갔다.
"재미가 좋구나."
소리쳤다. 오목이는 놀랐다. 얼굴이 빨개졌다. 당황했다. 희뚝 물동이가 중심을 잃고 넘어박혔다.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며 동이는 땅으로 떨어지고 오목이는 물벼락을 맞았다. 동이는 박살이 되었다. 모든 궁녀가 한꺼번에 뛰어나갔다. 오목이는 망지소조해서 어찌할지를 몰랐다. 이 소문은 당장 동궁 시녀의 최고 책임자인 감찰 상궁한테로 들어갔다. 감찰 상궁은 곧 동궁빈께 아뢰었다. 동궁빈은 크게 노했다. 곧 오목이를 불러 문초했다. 오목이는 매를 이기지 못했다. 하는 수 없었다. 처음에 물을 길르러 산정 사랑 우물로갔던 일이며, 대전 별감 작은복이가 유혹을 해서 몸을 허락한 일이며, 그 후부터는 이미 허락한 몸이라 앞으로 부부가 될 것을 약속하고 자주 만났던 일을 토설해 아뢰었다. 동궁빈은 오목이의 말을 듣고 보니 어린 처녀를 유인해서 몸을 버려 놓은 별감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별감은 아내까지 있는 자였다. 아내뿐만이 아니다. 젖먹이 자식까지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가를 아직 들지 아니한 자라면 소문 없이 작수성례라도 시켜서 내보내고 싶었으나 아내와 자식까지 있는 별감이니 그리할 수도 없었다. 별감은 예전에 친정집 하인이었다. 분풀이로 수죄를 해서 매를 때리고 싶었으나 이제는 상감을 모시고 있는 대전의 별감이다. 상감의 직속 하인을 매질해 때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덮어둘 수도 없었다. 별감 놈이 동궁의 시비를 껴안고 무엄하게도 세자가 쓰시는 산정 사랑에서 농탕을 쳐놓았으니 덮어둔다면 동궁 안의 풍기는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 덮어두자니 동궁의 궁녀들이 다 아는 일이요, 들추어내서 치죄를 하자니 상감의 하인을 며느리 되는 동궁빈으로는 치죄할 도리가 없었다. 동궁빈은 곰곰 생각한 끝에 아버지 김한로를 청했다. 조용히 오목이와 별감의 일을 상의했다. 동궁빈의 아버지 김한로도 동궁빈의 말씀을 듣고 크게 노했다. 곧 별감 작은복이를 잡아다가 치죄해서 물고를 내고 싶었으나 별감은 이제 상감의 직속 하인이 되었다. 자기가 천거해서 대전 별감으로 만들어놓은 일이지만 이제는 상감의 직속 하인이다. 상감의 직속 하인을 신하인 자기로서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감께 아뢰어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소이다. 내일 입궐해서 처분을 묻겠소이다."
김한로는 동궁빈께 고하고 물러갔다. 이튿날 병조판서 김한로는 대궐로 들어가 상감께 아뢰었다.
"삼가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슨 말인가?"
태종은 김한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동궁에 불미한 일이 있사와 아뢰옵니다."
동궁에 불미한 일이 있어 아뢴다는 말에 태종은 깜짝 놀랐다. '세자가 무슨 일을 또 저질렀구나' 하고 생각했다. 용안에 불쾌한 빛이 역력히 떠돌았다.
"동궁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아니올시다."
김한로는 황망히 대답했다. 태종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러면 동궁에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황송하오나 이러한 일을 감히 천청에까지 아뢰게 되오니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오나 아니 아뢸 길 없사와 감히 처분을 묻자옵니다."
"무슨 일인가? 빨리 말하라."
"동궁의 시비로 있는 나어린 계집 오목이란 애가 있었사옵니다."
"그래서?"
"용모와 의표가 조금 뛰어나서 해반주그레했습니다."
"몇 살인가?"
"십팔구 세 가량 되었습니다."
"그래, 어찌 되었단 말인가?"
"그리하옵고 대전 별감에 작은복이란 자가 있었사옵니다."
"경이 연전에 천거해서 내 앞에서 거행하는 놈이 아닌가."
"네, 그러하옵니다. 바로 그자올시다."
"그래서?"
"이자가 동궁에 출입하면서 동궁 시비와 눈이 맞아서 불미한 행동을 했사옵니다. 동궁의 시비는 동궁에서 징치하려니와 대전 별감은 전하의 액정이니 신이 감히 자의로 처단치 못하옵니다. 삼가 죄송함을 무릎쓰고 천청에 아뢰옵니다."
태종은 대로했다. 김한로의 천거로 대전 별감이 된 자가 이같은 짓을 했다 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동궁의 풍기가 이같이 문란한 것은 세자가 기생들을 데리고 놀고 김한로가 감독을 충분하게 못 한 것이라 생각했다. 말씀은 아니 내렸으나 역정이 대단했다. 곧 좌우에 모시어 섰는 내관에게 영을 내렸다.
"형방 승지를 오라 해라."
내관은 급히 정원으로 달려갔다. 형방 승지한테 소명을 전했다.
"어명이오. 곧 입시하라 하시오."
형방 승지는 별안간 궁중에 무슨 큰일이 일어났나 하고 급히 조복으로 갈아입고 연침으로 추창해 들어갔다. 전하는 어전에 부복한 형방 승지에게 엄한 분부를 내린다.
"친국청을 급히 설치하라. 그리고 즉각으로 대전 별감 작은복이를 잡아들여라. 과인이 급히 친국하리라."
전하의 언성은 추상같이 엄했다. 형방 승지는 벌벌 떨었다.
"곧 봉명하겠습니다."
아뢰고 물러갔다. 형방 승지는 금부 당상한테 기별하고 금부 당상은 금부에 명을 내려 대궐 안 정전 앞에 친국청을 열었다. 형방 승지는 금부 당상과 함께 탑전에 나가 아뢰었다.
"친국청을 열었소이다."
태종은 노기가 등등했다. 일이 세자궁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욱 노했다.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세자인 때문에 더한층 진노했다. 태종은 곧 내관과 형방 승지와 금부 당상을 앞세우고 옥교에 올라 국청에 임어했다. 국청 정면엔 병풍이 둘러져 있고 병풍 중앙에는 옥좌가 놓여 있었다. 옥좌 앞으로 동서 양편에 국청 위관인 금부 당상 이하 판의금들이 시립해 섰고 형안 앞에는 형방 승지와 주서, 가주서들이 형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부복해 있었다. 뜰 앞에는 영기와 북이며 기치 창검이 햇빛에 눈이 부시도록 휘황찬란하게 벌여져 있고 그 앞에는 형틀이 놓여 있고 형틀 좌우편에는 집장군노들이 주장 곤장을 들고 양편으로 갈라서서 영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종은 익선관 쓰고 곤룡포 입고 손에는 백옥홀을 잡고 옥좌에 앉아 좌우를 한 번 둘러보았다.
엄숙하게 명령을 내린다.
"병조판서 김한로에게 배심하는 추관을 명한다."
고변한 김한로에게 증참시키자는 전하의 의도였다. 형방 승지가 분부를 받들어 금부랑에게 어명을 전했다. 금부랑은 병조로 달려가 김한로를 입청시켰다. 김한로는 죄 없이 벌벌 떨면서 추관의 아랫자리에 시립해 있었다. 전하는 김한로가 들어온 것을 보자 이내 추상같은 엄명을 내린다.
"대전 별감 작은복이를 잡아들여라."
금부 나졸들은 범같이 뛰어나갔다. 이윽고 대전 별감 작은복이가 결박 지어져 붙들려 들어왔다.
"네 저놈을 형틀에 붙잡아 매놓고 볼기를 엄하게 쳐라."
금부 나졸들은 대전 별감한테로 덤벼들었다. 초립과 홍의를 벗긴 후에 덩그렇게 형틀 위에 잡아맸다. 별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금부 나졸들은 형틀에 매달아논 별감의 볼기를 깠다.
"때려라!"
태종의 벽력 같은 엄한 호령이 떨어졌다. 집장사령들은 양편으로 갈라서서 주장대를 높이 들었다. '철썩' 소리가 나며 넓죽한 주장은 별감의 허여멀건 볼기짝으로 떨어졌다.
"에쿠!"
소리가 별감의 입에서 나왔다.
"이놈, 네 죄를 모르겠느냐."
태종은 잼처 벼락치듯 호령을 내렸다. 별감은 볼기를 까붙인 채 벌벌 덜며 아뢴다.
"그저 무슨 죄를 소인이 졌사온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사옵니다. 소인은 아무 죄도 없사옵니다."
태종은 어수를 높이 들어 옥좌 앞에 놓여 있는 사선상을 쳤다.
"저놈이 똑바로 토설할 때까지 되게 쳐라."
집장사령들은 어명이 떨어지자마자 주장 곤장을 하늘 높이 들어 양편에서 '철썩 철썩' 사정없이 갈겼다. 형틀 위에서는 대전 별감의 '애걔걔' 부르짖는 아픈 소리가 일어났다. 뒤미처,
"살려줍쇼. 이실직고하겠습니다."
애걸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별감의 볼기에서는 살이 흩어지고 피가 흘렀다.
"매를 그쳐라."
전하의 옥음이 떨어졌다. 금부 당상이 호령을 한다.
'이실직고한다니 어서 빨리 죄상을 아뢰어라."
"소인이 아무 다른 큰 죄는 없사옵고 다만 동궁의 무수리와 정분이 나서 왕래한 죄밖에 없습니다."
별감의 입에서는 토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태종은 괘씸하게 생각했다.
"이놈, 아무 다른 큰 죄는 없어도 무수리하고 정분이 난 죄밖에 없다? 고이한 놈이로다. 어떻게 정분이 났더냐. 이놈, 네가 동궁 무수리를 유인해서 꾀어낸 것이 아니냐."
"아니올시다. 동궁 무수리가 먼저 꼬리를 쳐서 소인을 유혹했습니다."
태종은 더욱 노했다.
"이놈아, 여자가 먼저 너한테 정을 보냈을 리가 있느냐. 네가 먼저 선손을 걸어서 유혹해놓고서 여자한테 팔밀이를 하는 것이 아니냐."
"아니올시다. 언감생심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소인은 대전 별감이올시다. 대궐 안에는 동궁보다도 아름다운 무수리가 많사온데 소인이 그런 불측한 마음이 있다면 대전 무수리들과 관계를 맺지 예쁘지도 아니한 동궁 무수리에게 선손을 걸겠습니까?"
태종은 금부 당사에게 분부를 내린다.
"세자궁의 무수리를 대질시켜라."
금부 당상은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전령을 내린다.
"옥에 가둬둔 세자궁 무수리를 잡아 등대하라. 그리고 따로 형틀을 놓게 하라."
금부 나졸들의 '네의' 하는 대답 소리는 구름 밖으로 흩어지고 사령들은 형틀 한 대를 더 별감 옆에 배치했다. 이윽고 나졸들은 세자궁의 무수리 오목이를 끌어들였다. 목에 걸어놓은 칼을 벗기고 동그마니 형틀 위에 붙들어매었다. 대상에서 태종대왕의 추상 같은 호통이 내린다.
"너 저 별감 놈을 아느냐?"
오목이는 부끄럽고 무서웠다. 사지를 발발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상감의 호령은 여름철 소나기 내리듯 쏟아진다.
"아느냐, 모르느냐! 대답을 해라!"
무수리는 사지를 오그리고 말을 못한다.
"벙어리가 되었느냐. 왜 말을 못하느냐. 저년에게 물볼기를 쳐라!"
집장사령들은 오목이의 치마 위에 물을 동이로 끼얹었다. 볼기 살에 남치맛자락이 철썩 달라붙었다.
"되게 쳐라."
상감의 호령이 내렸다.
무수리는 두 손을 들어 빌면서 아뢴다.
"아옵니다."
"언제부터 아느냐?"
"오래전부터 아옵니다."
"어찌해서 대전 별감을 알았느냐!"
"대전 별감은 본시 세자빈마마의 친정댁에서 일을 보았다 합니다. 그러하와 친정댁 발천으로 대내에 들어가 별감이 되었다 합니다. 이런 까닭에 세자빈께 문안을 드리기 위하여 한 달에 대여섯 번씩 동궁에 다녀가옵니다."
탄로 나는 어리의 일
무수리가 상감께 아뢰는 말은 상감이 다 아는 일이었다. 무수리가 거짓말로 아뢰는 것이 아닌 줄 알았다. 역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듣거라. 별감이 아뢰는 바에 의하면 네가 먼저 별감한테 추파를 보내서 마지 못해서 너와 연을 맺었다 하는데 과연이냐?"
무수리는 얼굴이 더한층 붉어졌다.
"억울하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찌 감히 천위 엄하신 앞에 거짓말을 아뢰오리까. 하옵고 여자의 몸으로 먼저 남자한테 추파를 보낼 리 있사옵니까. 하늘을 두고 맹세하옵니다."
"처음에 어떻게 해서 못된 짓을 범했는냐."
"어느 날이온지 날짜는 기억치 못하옵니다. 하루는 물을 길르러 산정 사랑 뜰 앞에 있는 우물로 갔사옵니다. 산정 우물은 맑고 깨끗한 까닭에 세자마마께서 항상 숭늉으로 마시옵니다. 물을 긷고 있사온데 돌연 누가 산정 사랑 문을 안으로 잠그고 들어왔습니다. 보니 바로 별감이었습니다. 물을 달라 하기에 아니 줄 수 없어 주었습니다. 이내 손을 잡고 산정 사랑으로 올라가자 합디다. 산정 사랑은 세자마마께서 쓰시는 사랑이올시다. 소인이 어찌 감히 올라가겠습니까. 올라가면 목이 달아나 죽는다 해도 아무도 보지 아니한다 하고 강제로 끌고 올라가서 욕을 당
했습니다."
태종은 무수리의 말을 듣자 별감의 거짓말이 더한층 괘씸했다.
"저 별감 놈을 사정없이 백 도가지 쳐라."
별감은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추상같은 어명이었다. 나졸들은 감히 사를 두지 못했다. 피는 형틀에 넘쳐 흐르고 살은 찢겨졌다. 별감은 몇 번인지 까무러쳤다가 소생이 되었다.
"별감을 끌어내어 옥에 가두어라."
태종은 분부를 내렸다. 태종은 별감을 옥에 내린 후에 다시 무수리에게 묻는다.
"요사이 세자궁 안에 일어난 작고 큰일을 모조리 대어라. 만일 추호라도 속여서 은휘하는 일이 있다면 너 먼저 목을 베리라."
상감의 옥음은 더한층 추상같이 엄했다. 무수리는 발발 떨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온지 먼저 하문하옵소서. 아는 대로 아뢰겠습니다."
"세자는 지금 어디 거처하고 있느냐?"
"동궁에 거처하고 계시옵니다."
오목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모기 소리만큼 대답한다. 태종은 더욱 노했다.
"세자가 동궁에 있는 것을 누가 모르느냐. 내당에 거처하느냐, 외당에 거처하느냐 말이다."
"바깥 큰사랑에 거처하십니다."
"네가 별감과 만났다는 산정 사랑은 어느 때 열어놓고 쓰느냐?"
"대개는 가객들과 함께 연회를 차리고 노실 때 쓰십니다."
"가객들은 누구누구냐?"
"소인이 어찌 감히 출입하시는 손님의 성명을 아오리까, 모르옵니다."
"한 달에 몇 번씩이나 모여서 노느냐?"
"하루걸러 노시기도 하고 날마다 계속해서 노시기도 합니다."
"날마다 계속해서 논다?"
무수리의 말을 들은 태종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별감과 오목이의 정사를 가지고 문초하다가 역정은 슬며시 세자한테로 옮아졌다.
"놀 때는 산정 사랑에서만 노느냐?"
"큰사랑에서 노시다가 산정 사랑으로 자리를 옮기실 때도 있고 그대로 큰사랑에서 노시기도 합니다."
"하루걸러 노는데 가객의 성명을 모른단 말이냐. 저년을 엄하게 쳐라. 토설이 나올 때까지."
집장사령들은 좌우 옆에서 일제히 달려들어 곤장을 높이 들어 내리쳤다. 우편에서 곤장이 '철썩'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좌편에서 주장이 '딱'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갈겼다. 오목이는 아픔을 참을 수 없었다.
"아는 대로 아뢰오리다."
울면서 아뢴다.
"빨리 아뢰렷다."
이번엔 금부 당상이 호통을 쳐 꾸짖는다.
"한 분은 구감역이라 하옵고, 한 분은 이법화라 하옵고, 한 분은 이오방이라 하옵고, 한 분은 홍만이라 하옵디다."
"가객 이외 기생은 없느냐?"
오목이는 이미 토설해 말씀드린 끝이었다. 아는 대로 아뢰리라 결심했다.
"초궁장이란 기생이 왔습니다."
태종은 귀가 번쩍했다.
'초궁장!'
"그 외에 또 출입하는 기생이 있지 아니하냐?"
"전에 봉지련이란 기생이 출입했사옵고 다음엔 작은 꾀꼬리란 기생이 있었습니다마는 나라에 죄를 얻어 귀양 간 후엔 지금은 초궁장이 왕래할 뿐입니다."
"또 있다는데 그러느냐. 저년이 바른 대로 토설하도록 매를 더 한번 되게 쳐라."
태종은 한번 넘겨짚고 호령을 내렸다. 집장사령들이 '엑' 소리를 치며 좌우편에서 곤장을 들고 범같이 내닫는다. 오목이는 엄포에 눌렸다.
"바른 대로 아뢰오리다. 또 한 사람의 여인이 있는데 남의 첩실이라 하옵니다."
태종은 깜짝 놀랐다. 처음 듣는 말이다.
"무어, 남의 첩실야? 이름이 무어라 하더냐?"
"계지라 하옵니다."
"누구의 첩이라더냐?"
"한성소윤 권보의 첩이라 하옵디다."
태종은 또 한 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동궁인 세자가 남의 첩실을 데리고 놀았다는 일은 해괴한 일이다. 더구나 한성소윤이면 반가집 사람이 분명한데, 세자궁에 남의 첩이 드나든다는 일은 전무후무한 해괴한 일이다.
"권보 놈을 잡아들여라."
일변 금부 당상한테 영을 내리고 일변 오목이를 향하여 다시 문초한다.
"가객과 기생이며 남의 첩실은 동궁에서 자기도 했느냐?"
"가객들은 잔 일이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기생과 첩실은 잔 일이 없습니다. 전에 봉지련과 작은 꾀꼬리는 유숙한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들이 나라에 죄를 얻어 쫓긴 후에는 절대로 없습니다."
초궁장과 계지는 세자와 이법화의 집에서 연을 맺은 때문에 오목이는 초궁장과 계지의 일을 몰랐던 것이다.
"네 만약 추호라도 거짓이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태종은 상을 치며 꾸지람을 내렸다.
"요사이 가객들은 계속해서 다니느냐?"
태종은 옥음을 가다듬어 다시 묻는다.
"네, 그러하옵니다. 가객들은 계속해서 놀러다닙니다."
"가객들이 놀고, 술 마시고, 음률을 하는데 기생이나 남의 첩실이 없을 리 만무하다. 반드시 계집이 있을 것이다. 똑바른 대로 말해라."
태종은 연해 엄포를 놓으며 꾸짖으니 오목이는 요사이 동궁에 새로 일어난 일을 아니 고할 수 없게 되었다.
"기생은 아니옵니다마는 천하절염인 남의 첩실이 요사이 동궁에 유숙하고 있습니다."
오목이는 마침내 어리의 일을 토설했다. 천하절염인 남의 첩실이 동궁에 유숙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전하를 시립해 섰는 금부 당상도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동궁에 유숙한다면 세자와 동거를 한단 말이냐?"
"네, 그러합니다."
오목이가 대답했다. 태종은 기가 찼다. 몸이 떨렸다.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숨결이 높았다. 입이 뻣뻣했다.
'왕실이 결딴나는구나?'
마음속으로 개탄했다. 화산처럼 터지는 분노를 잠깐 참고 자세한 전말을 알고 싶었다.
"그래, 그 남의 첩실이란 여인의 이름은 무어라 하더냐?"
"어리라 하옵니다."
"어리...."
태종은 이름을 한 번 되새겨 불러본다.
"누구의 첩실이라 하더냐?"
"중추부사 곽대감의 소실이라 하옵니다."
태종은 또 한 번 자지러지도록 놀랐다.
"무어야, 중추부사 곽대감의 소실야?"
태종은 말을 마치자 시립해 있는 승지를 돌아본다.
"중추부사의 곽이면 곽선이 아닌가? 중추부사에는 곽씨가 한 사람밖에 없지 아니한가."
"네, 그러하옵니다."
"곽선은 팔십에 가까운 노재상이 아니냐. 양반의 집에 해괴한 일이 났구나."
태종은 길게 한숨을 지어 탄식한 후에 다시 오목이한테 묻는다.
"어리가 남의 첩실인데 어찌해서 세자와 연을 맺어 동궁 안에 있게 되었느냐. 제 발로 걸어 들어왔느냐, 세자가 데려왔느냐?"
"거기까지는 모르겠사옵니다."
"그럼, 누가 이 일을 아느냐? 동궁빈이 아느냐, 누구한테 물어보면 알겠느냐?"
"동궁빈이 어찌 아시겠습니까."
"그럼, 네 생각에는 누가 알 듯하냐?"
"항상 세자마마와 추축해서 모시는 가객들이 필연 알리라 생각됩니다."
태종은 옆에서 공초를 받아 쓰는 형방 승지에게 분부한다.
"아까 공초 받은 한량패 가객 놈들의 이름을 적었느냐?"
"네, 적었습니다."
"불러보아라."
"구종수, 이오방, 이법화, 홍만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놈들을 모조리 묶어들여라!"
금부 나졸들은 '네의' 소리를 치며 궐문 밖으로 나갔다. 병조판서요, 세자의 장인인 김한로는 벌벌 떨고 섰다. 별감과 오목이의 정사를 고발해서 별감을 치죄하려던 일이 이같이 불똥이 세자한테 튀어서 어리의 일이 탄로되어 큰 옥사가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장차 이 옥사가 어찌 될까 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한로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홀연 상감은 노기를 띠어 김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경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과인이 항상 세자의 행동을 보살피라 하지 아니했던가? 경은 세자의 장인이 아닌가. 이런 까닭에 특별히 보살피라 했는데 오늘날 동궁 안의 풍기가 이같이 난마같이 되었는데 무슨 낯짝으로 별감과 무수리의 추행을 고발했더란 말인가? 상탁하부정이 아니냐 말야-."
태종은 주먹을 들어 사선상을 쳤다. 김한로는 유구무언이었다. 등에 찬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벌벌 떨고만 섰다. 이윽고 금부 나졸들은 구종수, 이오방, 이법화, 홍만 일당을 비웃 두름 엮듯 묶어 가지고 들어왔다. 태종은 동궁 무수리 오목이를 형틀에서 내려 옥에 가두라 한 후에 새로 잡아들인 구종수와 이오방을 형틀에 매어 달았다. 태종은 건달패 조방구니들을 보자 화기가 더욱 높았다.
"어떤 놈이 구종수란 놈이냐?"
"네, 소인이 구종수올시다."
구종수는 능갈 쳤다. 형틀에 매달려 대답했다. 태종은 구종수와 이오방의 이름은 봉지련이 때부터 귀에 익히 들어왔다.
"이놈, 너는 봉지련이 때도 세자를 잘못 인도한 죄로 귀양까지 간 놈이 아니냐?"
태종은 벽력같이 꾸짖는다. 구종수는 넙죽넙죽 대답한다.
"네,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다."
"언제 귀양에서 풀렸느냐?"
"기한이 차서 풀려나왔습니다."
"나왔으면 전과를 뉘우치고 집에 들어박혀 있을 일이지 어찌해서 세자궁중에 또다시 출입해서 세자를 유혹했느냐?"
태종은 벽력같이 구종수를 꾸짖었다. 구종수는 태연히 대답한다.
"소인이 일차 귀양에서 풀린 후에 이오방과 함께 집에서 근신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감히 다시 동궁에 발길을 들여놓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세자궁에서 이오방과 함께 지재시삼 부르시니 재하자의 도리에 아니 응할 수 없어 다시 드나들었습니다."
태종은 옥음을 가다듬어 계속해서 구종수를 꾸짖는다.
"그렇다면 어리가 천하절염이란 것을 누가 세자한테 말했느냐?"
"자세한 일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장악원 악공 이오방한테 들으니 곽중추부사의 소실인 어리가 아름답다는 말은 기생 초궁장의 입에서 나왔다 합니다."
태종은 옆에 자리잡은 형틀에 달아매 놓은 이오방에게 대질신문을 한다.
"구종수의 말이 맞느냐?"
"네, 그러하옵니다."
"너도 어리의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관여한 일이 없느냐?"
"그대로 따라다닌 죄밖에 없습니다."
태종은 잠깐 문초를 그치고 초궁장을 잡아들이라 했다. 금부 나졸들은 장악원 기생 초궁장을 잡아들였다. 다른 형틀도 또 한 대 배치했다.
"너는 누구의 발천으로 세자궁에 드나들었더냐?"
"세자궁에 놀이가 있다 하와 꼭 한 번 들어가 가무를 한 일이 있삽고 자주 드나든 일은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네 입에서 어리의 아름답다는 말이 나왔다 하는데 무슨 까닭에 세자한테 어리의 일을 말했느냐?"
"세자께오서 천하절색은 없겠느냐고 하문하시기에 전에 장악원에 같이 있던 어리가 절색이란 말씀을 드렸을 뿐 다른 죄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리가 지금 곽중추부사의 첩인 것을 알고 어리를 동궁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심부름을 다닌 사람은 누구냐?"
초궁장은 더 말을 토설한다면 권보의 첩 계지와 오입쟁이 전체에 화가 미칠 일이 두려웠다. 바로 토설을 아니했다.
"더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고 대답했다.
태종은 어리의 과거 신분이 장악원 기생이란 점을 미루어볼 때 어리를 동궁으로 데려온 일에 초궁장의 관련이 없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금부 나졸과 집장사령들에게 호령을 내렸다.
"저년의 입에서 바른 대로 토설이 나올 때까지 엄하게 때려라."
양편으로 주장, 곤장을 들고 형틀 앞에 서 있던 집장사령은 초궁장의 앞으로 달려들어 사정없이 매를 갈겼다. 초궁장은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세자궁에는 한 번 갔으나 이법화집에서 세자와 연을 맺던 일이며 함께 살자는 것을 거부한 일과, 권보의 첩 계지가 중간에 들어 어리를 꾀어보다가 낭패한 일이며 세자가 이승의 집 담을 넘어 어리를 뺏어온 일을 일일이 불었다. 태종은 초궁장의 공초를 받고 나니 유출유괴하고 해괴망측한 일이라 생각했다.
태종의 노여움은 절정에 올랐다.
"이법화란 자는 어디 있느냐?"
소리를 높여 좌우의 시자를 돌아본다.
"아까 구종수, 이오방과 함께 잡아와서 저곳에 대령해 있습니다."
"그놈을 형틀에 달아매어 엄하게 수죄하라."
나졸들은 이법화를 형틀에 매어놓고 집장사령들은 이법화의 볼기를 까고 매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법화는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죄상을 자백했다. 구종수, 이오방의 발천으로 세자궁에 출입한 후에 앞날 세자가 등극하게 되면 잘 되게 될 것이라 생각해서 세자를 유인해서 자기 집에서 초궁장, 계지들을 세자와 동침시킨 일을 고백했다.
이법화의 자백은 그뿐이 아니었다. 어리의 말이 나오자 자기가 앞을 서서 동료인 홍만과 주선해서 한성소윤 권보를 찾아보고 곽중추부사와 권보는 인척관계가 되니 일을 주선해보라 했던 일이며, 권보는 세력에 눌려서 자기 첩 계지를 시켜서 어리를 달래보게 하는 일을 묵인할 일이며, 어리가 계지의 유혹을 아니 듣고 곽중추부사의 수양아들 이승의 집으로 피신한 일이며, 이승이 문을 닫아 걸고 받지 아니하니 세자는 춘방 명보를 무등을 세워서 친히 담을 넘어가 어리를 빼앗아다가 이법화 집에서 자게 했던 일이며, 동궁빈이 세자를 타일러서 어리를 세자궁으로 불러들여 동궁에 함께 거처하고 있는 일을 일일이 고백했다. 태종은 기가 막혔다.
한성소윤 권보와 곽중추부사의 수양아들 이승을 잡아들였다. 공초는 모두 다 대동소이했다. 다만 이승의 공초에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어리가 세자의 사람이 된 후에 세자는 이승한테 좋은 화궁을 한 벌 보내고 어리는 이승의 아내한테 비단 열 필을 보냈다는 것이다. 태종은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이승을 향하여 꾸짖는다.
"네 어찌 벼슬하는 사람으로 이런 해괴한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하지 아니했느냐?"
이승이 대답해 아뢴다.
"성상께 아뢰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았사오나 일이 보통 사람의 일이 아니고 세자마마의 일이오라 함부로 개구하기 어려워 고하지 못했습니다."
"저놈이 뒷길을 보려 한 놈이다. 곤장 백 도를 쳐라."
집장사령들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이승에게 백 도의 곤장을 때렸다. 이승의 볼기 살은 흩어지고 피는 흘러 형틀에 가득했다. 백 도의 곤장이 떨어진 후에 전하는 금부 당상에게 분부한다.
"이승은 기군망상한 놈이다. 벼슬을 떼어 서민을 만들어라."
이승은 몸에 가득 장상을 입고 가족한테 업혀서 집으로 돌아갔다. 전하는 다시 분부를 내린다.
"권보는 큰 허물이 없다 하나 역시 임금을 속였다. 세자궁에 이러한 불미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고변하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첩을 시켜서 남의 첩실을 꾀어내도록 했으니 비록 성공을 못했다 하나 가증 가통한 일이다. 역시 한성부 소윤의 벼슬을 떼고 서민으로 내려뜨려라."
권보는 상감이 죽이지 아니하는 것만이 고마웠다. 형틀에서 내려 눈물을 흘리며 궐문 밖으로 나갔다.
전하는 계속해서 분부한다.
"구종수, 이오방은 봉지련과 소앵이 때도 죄를 얻어 귀양까지 갔던 놈들이다. 개과천선을 하지 아니하고 귀양이 풀린 후에는 또다시 세자궁으로 출입하면서 조걸위학을 했으니 이같은 패류는 죽여버려야 마땅할 것이다."
전하의 옥음은 청청하고 높았다. 구종수, 이오방은 간이 오그라지고 담이 찢어질 듯했다. 이제는 죽는구나 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면서 형틀에 엎드려 있었다. 전하는 다음 순간 한마디를 했다.
"그러나....."
구종수와 이오방의 귀가 번쩍 띄었다. 전하의 한마디는 일루의 희망을 주는 듯했다. 전하의 옥음이 계속된다.
"곤장 백 도씩 때려서 멀리 삼수갑산으로 귀양을 보내라."
두 사람의 입에서는 가만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번개처럼 스쳤다.
그러나 순간, 뒤에 떨어지는 백 도의 매는 아프고 쓰렸다. 죽음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곤장 주장이 떨어질 때마다 '에쿠' 소리가 창자 끝에서 구슬프게 일어났다.
태종은 매질하는 속에서 계속 분부를 내린다.
"이법화와 홍만이란 놈은 구종수와 이오방의 못된 짓을 본떠서 어리의 일을 도발시켰으니 가증한 놈들이다. 이중에 이법화는 세자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서 외박까지 하게 했으니 더욱 죄가 크다 하겠다. 이법화는 태형 이백 도를 쳐서 무인절도로 유배하고 홍만은 곤장 오십을 때려서 원악도로 귀양보내라."
태종은 이법화와 홍만을 처결한 후에 다시 또 한편 구석에 발발 떨고 엎드려 있는 초궁장과 계지를 향하여 엄한 꾸지람을 내렸다.
"초궁장은 세자가 동궁에서 유숙하자는 것을 거부하고 이법화의 집에서 동침을 했고 동궁으로 시녀가 되어 들어오라는 것을 사양했으니 약간 가상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공연히 어리의 일을 세자한테 말해서 방탕한 마음을 더욱 도발시켜 놓았으니 죄 또한 크다 할 것이다. 장악원 기생의 자격을 떼어버리고 성안에 거주해 살지 못하도록 하라."
형방 승지는 전하의 제사를 받아 썼다.
태종은 또다시 분부를 내린다.
"권보의 첩실 계지는 비록 기생 출신이요, 첩이라 하나 현재 남편이 있는 여자의 몸이다. 남편이 있는 몸으로 세자와 관계를 맺었다하니 삼강오륜을 저버린 패륜의 계집이라 할 것이다. 소행이 괘씸하다. 곤장 이십 도를 때린 후에 머리를 깍아 승이 되게 하여 개과천선 하도록 하라."
태종의 분부가 지엄하니 금부 나졸들은 계지를 형틀에 매어 달고 곤장 이십 도를 때렸다. 비록 이십 도의 가벼운 형벌이라 하나 섬섬 약질인 여인의 몸에는 중한 형벌이었다. 계지의 애걸해 울부짖는 소리는 국청을 소란케 했다. 이십 도 매질이 끝난 후에 나졸들은 계지를 형틀에서 내렸다. 태종은 다시 분부를 내린다.
"아주 이 자리에서 머리를 깍여라."
나졸들은 가위를 들고 계지한테로 달려들었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 쪽에 멋있게 비스듬히 꽂은 비취옥비녀를 쑥 뽑았다. 칭칭 휘감은 붉은 댕기를 풀었다. 삼단 같은 검은 머리채가 풀어지면서 뚝 떨어졌다. 나졸들은 은빛 같은 하이얀 가위를 들어 밑동에서 머리를 싹 잘랐다. '싸각' 소리가 나며 구름 같은 머리채가 땅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아주 백호를 싹싹 깍아라!"
태종의 지엄한 명령이 또 내렸다. 금부 나졸들은 이번엔 새파란 서릿발 같은 주머니칼을 들고 계지한테로 덤벼들었다. 계지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자기 죄를 뉘우쳤다. 눈물이 아름다운 두 볼로 줄줄 흘렀다. 머리카락이 '싸각싸각' 소리를 내며 백호칼로 베어진다. 완연히 한 사람의 여승이 되었다. 태종은 머리 깍아 승이 된 계지를 보며 다시 분부를 내린다.
"승이 입는 흑장삼을 빨리 구해오너라!"
금부 나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태종은 또다시 분부를 내린다.
"내원당에 승려가 있고 승복이 있을 것이다. 빨리 가서 가져오너라."
모시어 섰던 내관이 내원당으로 줄달음질을 쳤다. 검은 흑장삼에 붉은 가사를 들고 국청으로 들어왔다. 머리 깎아 중이 된 계지한테 내관은 흑장삼을 입혔다. 계지는 눈물을 머금고 중 복색으로 바꾸었다. 내관은 다시 붉은 가사를 계지의 어깨 위에 걸치려 했다.
"가사는 입히지 말아라. 불가에서 가사를 입는 것은 공부한 연공과 도학의 깊고 얕은 것을 표준해서 입히는 것이다. 이제 개과천선하라고 중이 되게 한 탕녀에게 가사를 입히는 것은 망발이다."
내관은 가사를 거두었다.
"탕녀 계지를 탑골 승방으로 보내게 하라."
태종은 다시 분부를 내렸다. 계지는 전하가 죽이지 아니하고 여승을 만들어 목숨을 부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만이 고마웠다. 눈물을 머금고 사은숙배를 어전에 드리고 물러갔다. 태종은 모든 죄수들을 일일이 처결한 후에 국청에 시립해서 초조한 얼굴빛으로 서 있는 김한로를 힐끗 건너다보며 분부를 내린다.
"병조판서 김한로는 동궁빈의 친아버지요, 세자의 장인이다. 이러므로 과인은 그에게 동궁의 크고 작은 일을 돌보고 감독해서 세자를 좋은 길로 인도하라고 당부한 바 크다. 그러나 김한로는 세자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해서 한 마디의 충간도 하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안일하게 모든 일을 덮어두어서 마침내는 세자 궁중의 무수리와 별감의 추행까지 일어나게 했으니 가통가통한 일이다. 병조판서 김한로는 책임을 져야 당연할 것이다. 삭탈관직을 한 후에 벽지로 귀양을 보내라."
형방 승지는 어명을 받들어 썼다. 김한로는 두렵고 무서웠다. 벌벌 떨면서 어전에 엎드려 죄를 받은 후에 금부도사한테 끌려서 궐문 밖으로 나갔다. 태종은 모든 죄수를 처결한 후에 대전 별감과 오목이를 불러들이라 했다. 금부 나장은 옥에 내렸던 두 남녀를 다시 국청으로 끌고 들어왔다. 태종은 형안을 치면서 벽력같이 별감을 꾸짖는다.
"너는 나의 측근에 있는 액정의 한 사람으로서 조심하고 신칙하여 몸을 가져야 할 위인이 감히 세자궁에 드나들면서 무수리를 간음하여 궁중의 풍기를 문란케 했으니 하늘과 사람이 다 함께 노할 일이다. 단연코 용서할 수 없다."
벽력 같은 구지람이 추상같이 내렸다. 별감은 뜰 앞에 꿇어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태종은 다시 형안을 치며 세자궁의 무수리 오목이를 향하여 꾸지람을 내린다.
"너는 적어도 세자궁 소속의 시녀다. 비록 무수리라 하나 궁녀의 법도를 지켜야 할 것이어늘 계집년이 요망스럽게 고리를 쳐서 궁중 풍기를 더렵혔으니 가참할 일이다. 일벌백계하여 앞으로 이러한 일이 궁중에 아니 일어나도록 하겠다. 죽어도 원통하게 생각하지 말라."
태종의 호령이 추상같았다. 무수리는 이제는 변명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사는 길이 이같이 무섭고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뜻 아니한 불장난이 꽃다운 생의 종말을 가져왔고나 하고 참회의 체읍성을 목이 메도록 터뜨릴 뿐이었다.
태종은 두 남녀의 형벌을 선포한다.
"별감과 무수리를 서소문밖 형장에 목 베어 저자에 조리돌리라."
형방 승지는 어명을 받아 쓰고 금부도사는 나졸을 재촉해서 별감과 무수리를 형틀에서 내려 결박지어 행형장으로 나갔다. 별감도 목을 놓아 울고 무수리도 통곡을 했다. 국청 협문 밖에는 동료 별감과 궁녀들이 사형장으로 통곡하며 끌려가는 두 남녀를 바라보며 모두 다 간담이 서늘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리도 저 꼴이 되는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 태종은 친국하는 판결을 최후로 내린 후에 옥좌에서 일어나 대전으로 돌아갔다.
가희아가 뜰 아래가지 내려서서 교태를 부려 맞이한다.
"옥체 얼마나 피곤하오십니까."
전하는 대답 없이 옥계 위로 올랐다. 가희아는 궁녀들을 제쳐놓고 친히 태종의 옥체를 부액해서 전마루로 올랐다.
"서온돌로 드시오리까, 동온돌로 드시오리까?"
가희아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또다시 교태를 지어 태종께 물었다. 서온돌은 태종의 연침이요, 동온돌은 가희아의 침실이다. 가희아는 태종의 총애를 일신에 모았다. 아들을 낳은 후부터 더한층 신임과 귀여움을 받았다. 당연히 세자의 어머니 왕후 민씨가 거처해야 할 동온돌은 왕의 특명에 의하여 강계 기생 출신 가희아가 거처하고 왕후 민씨는 별전에 거처하고 있었다.
"동온돌로."
태종은 간단히 대답했다. 가희아는 태종의 곁을 받들어 동온돌로 모시었다. 붉은 방장, 밝은 창경에는 향냄새가 아늑하게 어렸다. 가희아의 몸에서 나는 바로 그 냄새였다. 보료방석에 장침 방침 안석이 모두 다 고혹적인 붉은 빛이었다.
태종은 피로했다. 펄썩 주저앉았다. 쌍희자를 수놓은 안석에 기댔다. 손을 맥없이 사방침 위에 얹었다.
"용안이 조금 피로하신 듯하옵니다."
가희아는 태종의 손등 위에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을 얹었다. 태종의 싸늘한 손이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태종의 후각으로 가희아의 몸에서 나는 훈향이 살포시 스며들었다.
가희아의 조화
태종의 피곤한 머리가 안식의 유열을 느낀다.
"피로하신 듯하옵니다. 누우십시오."
가희아는 일어나서 태종의 익선관을 머리에서 내렸다. 곤룡포를 벗겼다. 태종은 가희아가 권하는 대로 허리를 펴고 다리를 뻗고 누웠다. 태종도 이제는 정력이 전보다 훨씬 줄었다. 춘추가 오십을 넘은 때문이다. 왕년의 기백과 정력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희아는 피곤한 태종의 전신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태종의 사지가 노그라지는 듯 법열을 느꼈다. 가희아는 태종을 떡 주무르듯 했다.
"아아, 시원한지고-."
태종은 기지개를 켰다.
가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듣자오니 친국청을 여시고 친국을 하셨다 하니 무슨 일이오니까?"
가희아는 세자가 어리라는 여자를 강제로 취하여 동궁에 둔 사실로 인하여 큰 옥사가 벌어진 것을 알면서도 이같이 물었다. 태종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그랬어."
도대체 말하기가 싫은 어조다.
"무슨 일로 친국까지 하셨습니까? 크나큰 국사에 관여되는 일이오니까?"
"허허, 이만저만한 일이 아닐세."
가희아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묻는다.
"무슨 일이오니까? 역적지변이 났습니까?"
"역적지변이면 처치하면 그만이지만 이 일은 처치하기도 곤란하니 기막힌 일일세."
"그래서 용안이 좋지 아니하십니다그려. 도대체 무슨 일이오니까?"
태종은 가희아의 간곡하게 묻는 말을 듣자 버럭 음성을 높였다.
"세자 때문야."
가희아는 태종의 몸을 주무르던 손길을 잠깐 멈추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또 한 번 지었다.
"세자궁에 또다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중추부사 곽선의 첩을 뺏어다가 동궁에 두었다니 이런 망유기극한 변고가 있더란 말인가."
"저를 어찌하나. 크나큰 변고올시다. 동궁은 전하의 뒤를 이으실 분인데 큰일 났습니다. 창피해서 어찌합니까."
"창피는 둘째고 장래 일이 걱정일세."
태종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다.
"종묘사직이 위태롭습니다그려."
가희아는 부채질을 했다.
태종은 생각 속에 빠진다.
"신첩의 생각에는 세자가 일부러 그리하는 듯합니다."
"일부러 그리할 리가 있나? 성정이 허랑방탕해서 그렇지."
"아니올시다. 세자는 전하께 적의를 가지고 그리합니다."
"나한테 적의까지 가질 일이 있나. 저를 큰아들이라 해서 세자까지 봉해주었는데."
"세자는 전하보다 중전마마를 더 존경합니다. 그리하와 중전마마와 한편이 되어 전하를 원망하고 전하께 보복을 하려는 것이올시다."
"나한테 보복을, 무슨 일로!"
"전하께서도 건망증이 심하십니다. 중전마마의 친정인 민씨 일문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지 아니하셨습니까. 이 일이 항상 중전마마와 세자의 불평 불만이올시다."
"그러하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용단을 내리시옵소서."
"어떻게?"
"폐세자를 하옵소서. 만년대계올시다."
"그 수밖에 없지."
태종은 마침내 결심했다. 이튿날 태종은 세자를 대전으로 불렀다. 세자는 춘방사령 명보를 통하여 어리의 일이 탄로 나서 구종수 이하 한량패 건달들이 모조리 잡혀서 귀양을 가고 초궁장과 계지가 혼이난 일이며 장인 김한로까지 벼슬이 떨어진 일을 자세히 들었다. 세자는 모든 일을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한번 마음을 정해논 세자였다. 겁이 날 까닭이 없었다.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했다. 태연히 담소하면서 평상시와 같이 지냈다.
돌연 내시가 나와서 소명을 전했다. 세자빈은 창황한 얼굴로 세자가 상감께 알현하는 예복을 입혔다. 동궁빈 김씨는 근심스런 얼굴로 세자께 고한다.
"오목이 일로 인하여 어리의 일이 탄로나고 친국하시는 옥사까지 벌어져서 소명까지 받으시게 되었으니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동궁빈은 오목이와 별감의 일을 공연히 아버지 김한로한테 고했다고 생각했다. 이 일만 없었더라면 어리의 일도 급속도로 탄로 나지 아니할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는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세자는 동궁빈의 말하는 뜻을 알아들었다.
"공연히 나 때문에 장인의 벼슬까지 떨어졌으니 빈보다 내가 도리어 미안하오. 빈도 짐작해 왔듯이 나는 일부러 하는 짓이니 아무 염려 마오. 그저 폐세자 되기만 소원이오. 무슨 까닭에 그 괴로운 짐을 짊어지겠소."
세자는 도리어 빈을 위로하고 대전으로 들어갔다. 세자가 들어온다는 내시의 전갈을 듣자 태종을 모시고 있던 후궁 가희아는 몸을 날려 협실로 피했다. 태종은 세자가 입시한다는 말을 듣자 용안에 노기가 등등했다. 들어오는 세자를 노한 눈으로 흘겼다. 세자는 부왕께 절하여 문후를 드린 후에 조용히 시립해 서 있었다. 태종은 노한 눈으로 힐끗 세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사람이냐?"
한 마디가 떨어졌다. 세자는 묵연히 대답이 없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못 하면 금수다. 금수가 어찌 만백성을 다스리는 제왕의 후계자인 세자가 될 수 있느냐?"
호령이 추상같이 떨어졌다. 세자는 의연히 말이 없다.
"네가 인두겁을 쓰고 차마 그런 짓을 하느냐. 늙은 조신의 첩을 어찌 뺏는단 말이냐?"
세자는 그래도 대답이 없다.
"어리를 본 곳으로 돌려보내지 못하겠느냐."
태종은 뚫어지도록 세자를 바라보며 호령을 내렸다. 세자는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다.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한마디를 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돌려보낼 수 없다. 왜?"
태종의 안정에서는 불길이 활활 일었다.
"이미 저한테로 온 여자를 어찌 차마 돌려보내겠습니까. 아까 아바마마께서 남의 소실을 뺏은 것은 금수의 짓이라 하셨습니다. 한 번 금수의 짓을 저지른 죄도 태산 같사온데 어찌 두 번 또 금수의 짓을 다시 범하오리까. 못하겠습니다."
세자의 말을 듣는 태종은 더욱 노했다.
"제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찌 금수의 짓이냐?"
"한 번 제 곳으로 온 것이 금수의 짓이라면 저한테 있다가 또다시 그곳으로 가면 두 번 금수의 짓을 범하는 것이 아니오니까. 어리보고 두 번 훼절을 하라는 일이 됩니다. 감히 내놓지 못하겠습니다."
세자의 대답은 더욱 태종의 역정을 돋우었다.
"네가 어리를 아니 보내겠다면 과인이 쫓으리라!"
세자는 주저치 않고 또렷이 대답한다.
"아바마마께서 아무리 제왕의 권위와 위력을 가지셨다 하오나 소자와 어리의 사랑은 끊지 못하십니다."
태종은 불덩이같이 노했다.
"이놈!"
벽력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세자는 부왕의 불덩이 같은 호령을 한 귀로 받아들이고 한 귀로 흘렸다. 꼼짝하지 아니하고 대답 없이 잠자코 섰다.
"네 만약 어리를 버리지 않는다면 세자 노릇을 못하리라!"
세자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좋습니다."
"폐세자를 해도 좋단 말이냐?"
"원하던 바올시다."
세자는 조금도 굽히지 아니했다. 태종은 부르르 떨었다.
"이놈, 삼대의 왕업이 네 대에 와서 망하고 마는구나!"
"저는 왕업을 맡지 않겠습니다. 좋은 왕자로 아바마마의 왕업을 계승케 하옵소서."
세자의 말을 듣는 태종은 허파에 바람이 날 듯했다. 분함을 참지 못하여 이가 달그락달그락 마주친다.
"이놈, 보기 싫다. 빨리 나가거라!"
태종은 주먹을 들어 사방침을 내리쳤다. 세자는 나가라는 데 아니 나갈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걸음을 옮겨 어전에서 물러난다. 전각 월랑과 뜰 아래에 있던 궁녀와 내시들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세자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의젓하게 허리를 펴 걸어 나갔다. 세자가 나간 후에 협실에서는 가희아가 태종의 침실로 들어왔다. 태종의 노기는 아직도 식지 아니했다. 용안이 붉고 숨결이 드높다. 태종의 활화산처럼 터진 노기를 진정시켜 줄 사람은 지밀 궁중에 오직 가희아가 있을 뿐이었다. 가희아는 침실로 들어오는 길로 곧 시녀를 불렀다.
"밀수를 빨라 젓수어 오너라."
"온밀수오니까, 냉밀수오니까?"
"냉밀수다."
시녀는 꿀물에 얼음을 지르고 실백을 띄워 화채 대접에 받들어 왔다. 시녀는 물러가고 가희아는 화채 대접을 쟁반에 받들어 전하의 턱 아래 받쳐 올렸다.
"화기가 대단하십니다. 용안까지 붉으십니다. 조금 마시옵소서."
태종은 대답 없이 입술을 화채 대접 앞으로 대었다. 가희아는 한 손으로 유리 쟁반을 받들고 한 손으로 은수저를 들어 전하의 입술에 대었다.
폐세자
얼음 지른 차디찬 밀수가 전하의 입술에 대어졌다. 입술이 서늘했다. 서늘한 기운이 입안에 가득하게 돌았다. 얼음 지른 꿀물의 찬 기운과 태종의 눈에 꽃으로 보이는 가희아의 민첩한 행동은 태종의 화기를 얼마쯤 눌러주었다. 태종은 냉화채 한 대접을 다 마시었다. 화기가 훨씬 가라앉았다.
"누우십시오."
가희아는 태종의 옥체를 편안하게 자리 위에 눕게 했다. 또다시 시녀를 불렀다.
"대야에 옥류천 냉수를 떠서 올려라."
시녀는 밀수 대접을 물리고 은대야에 얼음같이 차가운 비원 안 옥류천 물을 떠서 올렸다. 가희아는 눈같이 흰 낯수건을 붉은 농장에서 꺼내서 성에 서린 옥류천 물에 담갔다. 수건을 들어 물을 짜서 누워있는 전하의 이마 위에 얹었다. 서늘한 기운이 머리로 돌았다. 태종의 용안에 떠 있던 붉은 노기가 스러졌다. 태종의 화기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마음이 느긋했다. 가희아는 태종의 노한 기운과 불같이 치솟는 화기가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용히 아뢴다.
"전하, 공연히 화기를 돋우시어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만약에 천금 같으신 옥체가 조금이라도 훼손이 되신다면 큰일이올시다. 절대로 화증을 내지 마시옵소서."
"어찌 상심이 아니되고 화증이 아니 나겠나. 그대도 좀 생각해 보게."
"고려왕조를 뒤엎으시어 삼천리강산을 차지하시고 만백성을 거느리신 영웅께서 그까짓 일을 가지고 상심하신다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올시다. 호호호."
가희아는 대담스럽게 가소롭다는 불경스런 한마디를 하고 간드러지게 웃어댄다.
"가소롭다니."
태종은 불끈했다. 가희아는 일부러 태종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극 있는 말을 보낸다.
"가소롭지 아니합니까. 불경스런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고려 태조 왕건이 사백여 년의 기업을 닦아온 고려왕조를 한 손을 들어 쓰러뜨려 버리신 전하께서 어린 왕자 세자의 불륜한 일을 처리하시지 못해서 마음을 상하고 초조 번민하시니 딱한 일이오이다. 호호호."
가희아는 또 한 번 간드러지게 웃어댔다. 태종은 처음에 가소롭다는 가희아의 말에 불끈했으나 귀엽게만 보이는 가희아였다. 가희아의 꼬집어 뜯는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찌한단 말인가. 자식의 일을."
태종은 호호야가 되어 대답한다.
"전하께서는 요사이 무능하십니다."
가희아는 또 한 번 겨자알 같이 맵고 독한 말을 썼다. 감히 상감을 면대하여 무능하다고 했다. 가희아는 태종이 자기한테 홀려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무능이란 말을 써서 태종의 마음을 날카롭게 찔렀다. 가희아는 가소로우니, 무능이니 하는 자극이 강한 말을 써야만 태종의 마음을 채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하, 정에 얽매여서 좋은 정치를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을 내리옵소서."
"어떻게?"
"폐세자를 하시면 그만 아니오니까. 예로부터 세자가 어질지 못하면 폐하는 일은 역사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사실이올시다."
호초알보다도 매운 가희아의 말에 태종은 대답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태종은 마침내 가희아의 앞에서 폐세자한다는 언질을 주었다. 가희아는 만족한 웃음을 웃었다. 이번에는 자기 아들이 세자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태종은 항상 왕자 중에 둘째 왕자 효령대군과 자기 아들 '비'가 제일이라 칭찬했던 말을 잊지 아니한 때문이다. 이제 효령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대궐을 등지고 회암사로 가서 불도를 닦는 데 전심하고 있다. 그는 불경공부만 전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하께 청을 해서 불경을 간행하고 한편으로는 사찰을 명산과 대지에 세워서 대중에게 불법을 홍포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여념이 없었다.
가희아는 마음으로 가만히 기뻐했다. 세자가 황음무도해서 태종의 눈 밖에 난다면 그의 후계자는 태종이 항상 칭찬하는 효령이 아니면 자기 아들 '비'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된다면 제일 강적은 효령이다. 효령은 적실인 민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세자의 바로 다음 아우요, 지체로 말해도 적실인 왕후의 소생이니 세자가 폐위되는 경우에, 효령이 첫 번째로 물망에 오를 것은 당연하고도 타당한 일이다. 후궁의 아들인 자기 아들 '비' 하고는 대조할 거리도 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천행으로 효령은 불도로 돌아가서 승려가 된 것이나 매일반이 되었다.
가희아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기뻤다. '되었구나!'하고 부르짖었다. 이제 태종의 마음속에 있는 착하다는 왕자 중에 세자의 후보자는 다만 한 사람 자기 아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희아는 어리 사건이 일어나자 바짝 고삐를 잡고 견마를 잡았다. 왕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요염한 붉은 입술에 겨자알보다도 더 짜릿하고 매운 자극을 뿜어서 폐세자하는 용단을 내리라고 협공을 했던 것이다. 태종은 마침내 가희아의 폐세자론에 동곳을 뽑고 말았다.
하룻밤을 가희아와 함께 침전에서 지낸 태종은 외전으로 나갔다. 태종이 외전으로 출어할 때 가희아는 연에 오르는 태종을 향하여 또 한 번 한마디 말씀을 올렸다.
"너무 번민하시와 옥체를 손상하지 마시옵소서. 깊이 생각하시와 잘 처리하시고 베개를 높이 하시옵소서."
태종은 대답 없이 장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전으로 나간 전하는 긴급한 소명을 내려 정승 황희와 대장 이숙번을 불렀다. 모두가 국가에 제일 가는 원로 중신들이다. 황희 정승은 문관의 제일인자요, 이숙번은 무관으로 개국 공신에 정국공신을 겸한 대장이다. 태종은 두 중신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존경해서 웃는 낯으로 미소를 지어 대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용안이 엄숙했다.
황정승은 어전에 부복해 아뢴다.
"무슨 하문하실 말씀이 계시오니까?"
대장 이숙번도 황정승 옆에서 고개를 숙여 부복했다.
"신 이숙번 소명에 응했소이다."
"오늘 경들을 부른 것은 국가의 지극히 중대한 일을 의논하려 하여 입궐을 청한 것이오."
국가에 지극히 중대한 일을 의논하려 한다는 태종의 말씀에 두 신하는 무슨 일인가 하고 귀를 기울였다. 태종은 잠깐 숨을 돌린 후에 두 신하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한다.
"경들은 세자가 허랑방탕하여 가끔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오."
두 신하는 안다고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잠자코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이번에 과인이 친국한 일을 들어 알았겠구려."
황정승은 모른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빈청에서 승지한테 친국하신 일을 들어 알았소이다."
태종은 이숙번을 바라본다.
"이대장은?"
"네, 소신도 영문에서 소문 들어 알았습니다."
태종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세자는 점점 방종하기 짝이 없어서 이제는 남의 유부녀까지 강탈해서 동궁에 데려다두고 후궁을 삼았으니 이런 망유기극한 변고가 어디 또 있겠소. 과연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구려."
두 신하는 묵묵히 전하의 말씀을 듣고 있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황정승이 부복해 아뢴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신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세자를 도와 바른 길로 나가시게 하지 못하였사오니 이음양 순사시하는 도리가 아니옵니다. 소신의 벼슬을 해임시켜 주시옵소서."
황정승은 벌써 태종의 뜻이 나변에 있는 것을 짐작했다. 전에는 폐후하려는 것을 극간한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폐세자한다는 말이 나올 것을 짐작한 때문이다. 황정승의 아뢰는 말을 듣자 태종은 고개를 가로 흔든다.
"천만의 말이오. 황정승은 국가 전체의 행정을 맡은 사람이지 세자를 보도하는 사람이 아니오. 당치 않은 말을 하지 마오."
태종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과인은 오늘 폐세자할 것을 결정하였소. 이리하여 정승과 대장 두 분을 불러 의논하는 것이오."
황정승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폐세자오니까?"
"그러하오."
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됩니다."
황정승은 간단명료하게 아뢴다.
"아니되다니, 국가의 종묘와 사직을 위해서 백 년 근심을 없이하는 일인데 아니되다니 말이 되오. 정승의 뜻을 모르겠소."
황정승은 목소리를 더욱 또렷하게 하여 아뢴다.
"폐세자는 못하십니다. 세자는 글자 그대로 대를 잇는 적자올시다. 더욱더 교도할지언정 폐세자는 하시지 못하십니다."
"어찌해서 폐세자를 못한단 말인가?"
태종의 언성은 높았다.
"적자는 바꾸지 못하는 법이올시다."
황정승은 태종이 가희아의 충동을 받아 세자를 폐위시키고 가희아의 아들 '비'를 세자로 삼으려는 것을 소문 들어 짐작하는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묘사직은 망하란 말인가?"
태종의 언성은 높았다.
"황공하오이다. 세자께서는 총명 인자하고 덕이 많은 분입니다. 오늘날 품행이 바르지 못한 것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여 그리하는 것이올시다. 다시 한번 교도한다면 좋은 세자가 되실 것이옵니다."
태종은 화증이 났다. 이숙번을 바라본다.
"경의 의향은 어떠한가?"
대장 이숙번을 굽어본다. 이숙번은 조심성스럽게 대답한다.
"전하께옵서 처분대로 하실 일인가 하옵니다. 소신 등이 감히 간섭할 바가 아니옵니다."
태종의 노기 띤 용안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이숙번은 전부터 가희아의 청탁을 받아 세자를 폐하고 가희아의 아들 '비'로 세자 삼을 것을 허락한 때문이다. 이숙번의 말을 듣자 정승 황희는 크게 노했다.
"아니됩니다. 전하의 마음대로 폐세자는 못 하십니다."
황희는 번쩍 고개를 들고 아뢴다.
태종은 노했다.
"어찌해서 세자를 내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한다 하는가?"
황정승은 굽히지 아니하고 아뢴다.
"세자는 전하 한 분의 세자가 아니올시다. 백관이 받드는 세자요, 만백성이 받드는 세자올시다. 경솔하게 폐하지 못하십니다."
태종은 황정승의 말을 듣자 언성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무단히 죄 없는 세자를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도 희망이 없으니 폐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전하! 천도는 추상같이 엄한 계절이 있고 춘풍같이 화한 시기가 있습니다. 인도도 매일반이올시다. 엄숙하게 꾸짖고 화한 기상으로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천도가 사람을 폐함이 없듯이 인도도 그 천칙을 폐위시키지 못하십니다. 전에 전하께서는 국모를 폐하려 하셨습니다. 그때 소신은 천위를 무릎 쓰고 간했습니다. 만약 그때 전하께서 폐후를 하셨다면 나라꼴이 어찌 되겠습니까. 백 번 참으시옵소서. 사가나 국가나 장자는 폐하지 못하는 법이올시다."
황정승의 충성스럽게 간하는 소리는 정정당당했다. 태종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다.
"전하, 소신의 아뢰는 이 점이 이음양 순사시 하는 정승의 도리올시다. 과히 진노하지 마시옵소서."
태종을 향하여 처분대로 하라던 이숙번도 황정승의 바른 말에 눌려서 다시는 더 개구를 못했다. 태종은 당장 곧 폐세자를 당일로 실천하려던 것을 잠깐 늦추기로 했다.
"폐세자는 중대한 일이다. 나도 더 생각하려니와 하루 동안 말미를 줄 테니 경들도 더 생각해보라."
태종은 하는 수 없이 하루 동안 말미를 내렸다. 황희 황정승은 유리같이 태종의 마음을 알았다. 어전에서 물러난 후에 빈청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편지 한 장을 써서 녹사에게 주었다.
"이 편지를 가져다가 동궁께 드리고 답장을 받아오너라."
황정승은 친히 세자를 찾고 싶었으나 정승으로 문제 있는 세자를 찾기가 난처한 때문이었다. 녹사는 황정승의 편지를 품고 동궁으로 향했다. 녹사는 춘방사령 명보의 인도로 세자의 사랑으로 올랐다. 세자께 바쳤다. 세자가 뜯어보니 황정승의 친필이다.
'일부러 농세상하시는 뜻을 황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폐세자가 되신 후에 누구를 세자로 봉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편지 사연은 극히 간단했다.
세자는 황정승의 편지를 받고 얼굴에 미소가 떠돌았다. 만조백관 중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황희 황정승이 있고나 하고 생각했다. 곧 연상을 당겨놓고 간지를 꺼내서 답장을 쓴다.
'충녕대군이 마땅할까 하오.'
세자의 답장 편지는 더한층 간단했다. 세자는 쓰기를 다 하지 간지를 봉한 후에 녹사한테 주었다.
"갖다가 황정승께 드리게. 소중한 서신일세."
녹사는 세자께 절하고 편지를 받들어 품 안에 넣고 물러 나갔다. 황희 황정승이 세자의 회답을 받아 보니 더한층 간결했다.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대신 봉하라는 뜻이다. 황정승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돌았다.
"물러가게."
황정승은 녹사를 내보낸 후에 세자의 서신을 화로 안에 넣어 태워버렸다. 황정승은 모든 손을 만나보지 아니하고 문을 닫고 조용히 누워버렸다.
한편 대내에서는 지밀풍파가 또 한 번 일어났다. 대전에서 태종이 정승 황희와 대장 이숙번을 불러서 폐세자할 것을 의논하니 황희 황정승은 반대하고 이대장은 전하의 뜻에 동의했다는 소문은 단통 태종비인 왕후 민씨의 귀로 들어갔다. 왕후 민씨는 크게 노했다.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왕후 자신이 친히 대전으로 올랐다. 때마침 태종은 가희아와 함께 있다가 돌연 찾아든 왕후를 만나게 되었다. 가희아는 몸을 날려 협실로 피하려다가 이내 치맛자락이 발끝에 걸려서 넘어질 뻔하면서 몸을 피하지 못했다. 민왕후는 모든 일이 가희아로 인하여 풍파가 일어나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노한 눈으로 가희아를 흘기며 꾸짖는다.
"내가 들어오는데 네 어찌 방자하게 몸을 피하느냐?"
가희아는 얼굴이 홍당무같이 붉어졌다. 가희아는 이내 민왕후의 앞으로 나가서 절을 올리고 윗목에 시립해서 있었다.
"나가지 말고 게 섰거라!"
민왕후는 가희아한테 명령을 내렸다. 가희아는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손을 마주 잡고 시립할 수밖에 없었다. 민왕후는 가희아한테 명령을 내린 후에 전하를 향하여 말씀을 보냈다.
"전하께서는 세자를 폐하려 하신답지요?"
민왕후의 얼굴에는 노기가 등등했다.
"하도 불미한 짓을 많이 하니 아니 폐할 수 없소."
전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니 됩니다."
민왕후는 결연히 큰 소리로 대거리했다.
"아니 되면 어찌하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폐세자를 단행하지 아니할 수 없소."
"전하는 나를 폐하려 하시더니 이제는 내 아들 세자를 마저 폐하려 하십니까. 너무 심하십니다. 오늘로 우리 모자를 다 폐해버리시오."
민왕후는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말씀이 촉했다. 입가엔 거품까지 끓었다. 전하는 묵연히 대답이 없다.
"전하께서 세자를 폐하신 후엔 장차 누구로 세자를 봉하시려 합니까?"
민왕후는 잼처 묻는다. 태종은 또 잠자코 말이 없다. 의중의 인물을 댈 수가 없는 때문이다. 효령은 민왕후의 둘째지만 불교의 독신자가 되어 절에 나가 있고, 다음에 마음에 먹고 있는 아들은 가희아의 소생인 '비'였다. 그러나 '비'를 세자로 정했다고 대답한다면 당장 야료가 날 것이 분명했다. 태종은 세자의 후보자가 '비'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가만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태종이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을 보자 민왕후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웠다.
"어찌해서 하교를 내리시지 못하십니까?"
민왕후는 전하께 육박했다. 태종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민왕후는 태종의 마음속을 유리 붙인 듯 들여다보았다.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는 가희아의 아들로 세자를 삼으려 하시는 것을 신첩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아니됩니다. 국법에 정궁에서 탄생된 장자를 폐해놓고 후궁 소생으로 세자를 삼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민왕후의 언성은 더한층 높았다. 쾌쾌하게 항의를 제출했다. 태종은 급소를 찔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민후는 승세를 얻었다. 이번엔 가희아를 바라보며 꾸짖는다.
"네 감히 하향 천기로서 하루아침에 궁중에 발탁되어 후궁이 되고 계속해서 왕은이 지중해서 은총이 두터우신 것을 감격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방자하게 나를 쫓아내서 왕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불충의 마음을 먹고 이 일이 잘되지 아니하니 이제는 폐세자를 해서 너의 아들로 세자삼을 생각을 하니 하늘이 무섭지 아니하냐?"
민후는 열화와 같이 가희아를 꾸짖었다. 가희아는 변명한대야 소용이 없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워낙 태종도 꺽지 못하는 무서운 성격을 가진 민왕후였다. 섣불리 대답했다가는 어떠한 무서운 행동이 나타날지 몰랐다. 가희아는 손끝을 마주 잡고 오뚝이 서서 듣고 있을 뿐이었다. 민후는 대답 없는 가희아의 태도를 바라보자 더한층 노했다.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뺏아 앉으려는 자를 역적이라고 한다. 너는 나의 신하다. 나의 자리를 노리는 것은 조정의 신하가 왕의 자리를 뺏는 것이나 매일반이다. 네 감히 역적질을 하려느냐? 네 아들 '비'는 세자의 신하다. 네 아들이 세자의 자리를 뺏아 앉으려 하는 것은 역시 왕의 자리를 뺏는 조정 신하와 매일반이다. 너의 모자가 감히 역적질을 두 번 범하려 하느냐?"
왕후의 꾸지람은 추상같았다. 왕후는 또 한 번 입에 거품을 날렸다.
"이년, 하향 천기로 대궐에 들어와 후궁이 된 것도 분에 넘치는 일인데, 네 감히 왕후의 자리를 뺏고 네 자식은 세자의 자리를 뺏으려 한단 말이냐! 고이한지고. 네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고 허리가 아니 끊어질 줄 아느냐!"
가희아는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새침하게 섰다.
"상감께서 너를 아무리 총애하시고 두호해주신다 하나 조정 공론이 허락하지 아니할 것이다. 전하께서 아무리 네 아들로 세자를 삼고 싶으시나 국법이 허락하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에 상감이 모든 공론을 물리치시고 독부가 되시어 나를 내쫓고 세자를 폐하고 너의 모자를 왕후와 세자로 만든다면 천추만대 후에 혼암한 인군이었다는 누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민후는 한편으로 가희아를 꾸짖고 한편으로 태종을 빗대서 나무랐다. 태종도 민후 앞에 감히 말대답을 못 했다. 그대로 벙벙히 앉아 있을 뿐이다. 가희아는 울며 고한다.
"신첩은 추호도 중전마마의 폐위를 바라거나 '세자 자리를 신첩의 자식에게 내리십시오' 하고 전하께 아뢴 적이 없습니다. 바라지도 아니했습니다. 만약에 추호라도 신첩이 그러한 생각을 품었다면 마마의 말씀대로 역적으로 다스려주옵소서."
워낙 민후의 태도가 강경하니 요염한 가희아도 남자 이상으로 게염스럽고 억세고 줄기찬 민후를 대항할 수는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애원해 비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과연 진심으로 말하느냐?"
민후는 또다시 불호령을 내려 묻는다.
"네, 진심으로 아뢰옵니다."
"만약 네 자식이 세자가 되는 일이 있다면 나는 이 나라 왕후의 직권으로 너의 모자의 허리를 참하여 뒷세상 사람들을 경계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치마 두른 여자다마는 이 나라를 새로 창업했을 때 개국 공신이나 정국공신 못지않은 일등공신이다. 이 나라를 망치게 하는 전하도 폐위시키고 말 것이다."
민후는 천둥같이 얼러댔다. 태종도 꼼짝을 못 했다. 민후는 전하를 흘겨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희아의 말을 전하께서도 똑똑히 들으셨을 것입니다. 만약에 폐세자가 되는 날 이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민후는 말을 마치자 중전으로 돌아갔다.
민왕후가 중전으로 돌아간 후에 가희아는 통곡을 하고 태종은 우울한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태종이 외전으로 출어하니 황희 황정승이 알현을 청했다. 황정승은 폐세자를 반대한 대신이다. 다시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답답한 전하는 곧 황정승을 불러들였다.
"일전에 하교하옵신 폐세자 건에 대하여 아뢰옵니다."
태종은 겉으로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대답한다.
"그동안 더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예,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황정승도 역시 전하의 마음을 격동시키지 아니하려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아뢰었다.
"깊이 생각한 바를 말해주오."
"지난번에 소신은 폐세자하시겠다는 일을 반대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니 어리에 대한 일이 이미 세상에 탄로 난 이상 세자께서는 크게 민망을 잃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문하신 대로 세자를 폐하옵소서."
황정승은 세자가 청을 해서 폐세자 되기를 자원했다는 말은 쑥 빼놓고 폐세자하고 싶어 하는 전하의 비위를 맞추어 아뢰었다. 태종은 희색이 만면했다.
"그렇다면 폐세자를 반대하던 경도 결국 폐세자하는 것을 찬성한다는 말인가?"
황정승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예, 그러하옵니다."
태종은 장중한 얼굴빛을 지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전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폐세자를 한 후에 누구로 세자를 봉하면 좋겠소?"
황정승은 이번에도 세자가 청한 말을 빼놓고 대답했다.
"세자는 전하의 장자였습니다. 장자가 세자의 자리에서 떠나게 되면 그다음 왕자가 세자가 되고, 그다음 왕자가 형편상 세자가 아니 될 때면 다시 그다음 왕자가 세자가 되고, 그다음 왕자가 형편상 세자가 아니될 때면 다시 그다음 아우가 세자가 되는 법이올시다. 이것은 고례의 규범일 뿐 아니오라 형제의 서열로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옵니다."
황정승은 장중하게 옛날의 규범과 형제의 서열을 들어 아뢰었다. 전하는 어렴풋이 황정승의 아뢰는 의도를 짐작해 알았다. 그러나 짐짓 한번 묻는다.
"왕자의 이름을 지명해 아뢰라."
"전하께서 서열을 모르실 리 만무합니다. 굳이 하문하시니 아뢰겠습니다. 세자의 다음 아우는 효령대군이십니다."
황정승은 효령대군을 추천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일부러 한번 해보는 수작이다.
"효령대군은 서열이 비록 세자의 다음이라 하나 불도를 독신하여 산사에 거처하며 세자에 뜻이 없는 사람이니 세자의 중대한 자리를 맡길 수 없소."
황희 황정승은 다시 아뢴다.
"성의 그러하시고 효령대군께서 세자가 되시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면 다음 분은 충녕대군이십니다. 충녕대군께서는 성정이 안상하시고 학문이 돈독하시어 장래에 큰 인물이 되실 분이올시다. 신은 쌍수를 들어 충녕대군을 세자로 추천하옵니다."
"충녕대군이 세자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전하는 가희아의 소생 '비' 의 말이 나오도록 일부러 말끝을 돌렸다.
"충녕대군 다음에는 성녕대군이 계십니다. 모두 다 왕후마마의 적자이십니다. 적자의 순위를 따라 정하실 것입니다."
황정승의 입에서는 종시 가희아의 소생 '비' 의 말은 나오지 아니했다. 전하는 한 번 더 황정승의 뜻을 더듬어 본다.
"그다음에는?"
황정승은 정색하고 대답한다.
"대신의 입은 천근같이 무겁다 합니다. 대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농이 없는 법이올시다. 이러하므로 밝은 임금을 도와서 이음양 순사시를 하는 것이올시다. 어찌 헛되이 이름만 나열해서 천거하겠습니까. 소신은 이미 효령대군 다음에 충녕대군을 천거했으니 충녕을 부르시어 영을 내리옵소서. 불행히 충녕이 굳이 사양한다면 그때 가서는 성녕대군한테 영을 내리십시오. 성녕이 하교를 봉행치 아니하는 경우에 다시 하문하시옵소서."
전하는 황정승의 뜻을 돌리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후궁 가희아의 아들 '비'로 세자를 삼는 일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입맛이 쓰다. 그러나 도리가 없다.
"경의 말을 잘 들었소. 좋이 생각해서 판단하리다. 다시 경과 의논해서 결정할 테니 물러가오."
"성려 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황희는 정중하게 국궁하고 물러갔다. 황정승이 물러간 후에 전하는 편전으로 들어가 조용히 누워서 생각한다. 왕후의 폐세자 반대를 유화시키자면 결국은 왕후의 소생인 적자 중에서 세자를 봉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었다. 태종은 가희아의 아들 '비'로 세자를 삼으려던 생각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태종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 생각 저리 생각 반복해보았다. 결국 파탄 없는 처사가 국가를 위하여서나 왕실을 위하여서나 좋은 계책이라 생각했다. 황희 황정승의 건의가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충녕대군으로 새로 세자를 삼을 것을 결심했다. 역시 명철한 생각이라할 것이다. 이튿날 전하는 사정전에 문무백관을 회동시켰다.
"오늘 백관을 회동시킨 것은 중대한 국가대사를 발표하려는 것이다. 만조백관은 내 뜻을 받들어 거행하라."
태종은 장중한 음성으로 중대발표를 할 것이 있다고 선포했다. 제일 앞줄에 서 있는 황희 황정승은 전하의 중대발표가 무엇인가를 짐작했으나 나머지 신하들은 한 사람도 이 중대발표를 알 까닭이 없었다. 심지어 전하의 칙령과 어명을 전달하는 비서승 승지까지도 중대발표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모두 다 귀를 기울여 조심성스럽게 태종의 다음 말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태종의 장중한 음성이 다시 계속된다.
"세자가 불초하여 향학하는 마음이 적고 허랑방탕하여 불효의 짓을 감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백 번 타이르고 천 번 훈계했으나 마음을 돌려 개과천선하려는 태도가 조금도 보이지 아니한다."
태종의 장중한 음성이 잠시 끊겼다가 다시 계속된다.
"장차 국가의 대임을 맡아서 밝은 정치를 하여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백성을 평안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폐세자를 선포하는바이다."
과연 중대한 발표였다. 백관들도 올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만조백관 중에 황희 황정승을 빼놓고 세자의 참뜻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소문으로 세자의 허랑방탕한 생활이 너무나 지나치는 일이라 생각했던 때문이다. 만조백관들은 다시 어느 왕자가 세자가 되나 하고 생각했다. 귀를 기울여 다음에 떨어지는 태종의 옥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는 음성을 가다듬어 다음을 선포한다.
"셋째 왕자 충녕대군은 출천의 효도를 가진 데다가 예지가 밝고 덕행이 돈독할 뿐 아니라 학문을 좋아하고 어진 이를 본받으려 한다. 가희 장래의 국사를 총람할 만한 큰 인물이다. 폐세자를 대신하여 세자로 봉하는 것을 선포한다."
만조백관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경청했다. 넓고 넓은 사정전 앞뜰엔 금관조복에 사모품대로 차린 만조백관들이 가득했으나 한 마디 기침 소리도 없다. 뜰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고 정숙했다. 세자를 폐하고 새로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정한다는 태종의 선포하는 옥음이 끝나자 정승 황희는 어전에 추창해서 아뢴다.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봉하신다는 말씀은 극히 지당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삼가 절차를 아뢰겠습니다."
"좋소."
태종의 옥음이 떨어졌다. 황정승이 다시 아뢴다.
"폐세자를 하고 새로 세자를 봉하는 일을 전하의 자의로 하실 일이 아니오라 먼저 열성조를 모신 종묘에 봉고하시는 예식을 거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경의 말이 옳소."
황정승은 다시 아뢴다.
"입세자하시는 일을 거행하기 전에 묵은 세자와 새로 세자될 분을 종묘로 부르시어 전하께서 친히 봉고 제문을 읽으시어 봉고제를 거행하옵소서."
"잘 알겠소."
"그리하옵고 또 한 말씀 아뢰옵니다. 이 사실을 왕후전하께 알리셨습니까? 듣고자 하옵니다."
"아직 연통하지 아니하였소."
황정승은 전하의말을 듣자 얼굴빛을 고쳤다.
"아직이라니 무슨 말씀이오니까. 전하께서는 일국의 제왕이시니 하늘이십니다. 왕후마마께서는 나라의 어머니, 곧 국모이시니 하늘을 짝하는 대지이십니다. 폐세자하시고 입세자하시는 일을 어찌 국모께 알리지 아니하십니까. 국가의 막중한 대사이오니 반드시 국모의 허락이 계셔야 합니다."
"경의 말대로 하리다."
태종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마침내 허락하는 대답을 내렸다.
"그리하셔야 가화만사성이 되고 가화만사성이 된 연후에야 국가가 태평하옵니다."
황정승은 전하와 왕후 사이가 좋지 못한 불협화음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하로 하여금 왕후께 세자 교체하는 일을 알리라고 권했다. 태종은 점잖고 경위 밝은 황정승의 말을 아니 들을 수 없었다. 곧 내관을 불렀다.
"내전 상궁을 들라 해라."
어전 내시에게 명했다.
어전 내시는 곧 내전 상궁을 불렀다. 내전 상궁이 어전에 추창에 나갔다.
"부르셨사옵니까?"
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에 들어가 내 말을 전해라. 세자가 허랑방탕하여 장차 국가의 막중한 대사를 맡길 수 없는 일은 이미 누누이 말씀한 바 있었거니와 중전께서 아무리 반대한다 하나 이미 정승과 군신과 의논하여 폐세자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오늘 만조백관들에게 반포했다. 그 대신 새로 세자를 봉하는 왕자는 중전마마의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으로 정했다. 중전마마께서는 과인의 뜻을 앙찰하시고 앞으로 거행될 입세자 예식에 참석하시라 아뢰어라."
내전 상궁은 허리를 굽혀 아뢴다.
"봉명하겠사옵니다."
내전 상궁이 물러간 후에 전하는 군신에게 어명을 내린다.
"황정승만 남아 있고 모든 군신들은 물러가도 좋다."
어전 내시가 어명을 전달했다.
"황정승만 남아 있고 만조백관들은 회를 파하라 합시오."
내시는 독특한 음성을 높여 외쳤다. 만조백관들은 어전 내시의 전하는 말을 듣자 물결 헤어지듯 흩어졌다. 한편 왕의 전갈을 받들어 중전에 들어간 내전 상궁은 범같이 무서운 민왕후 앞에 부복해 엎드렸다.
"아뢰옵니다."
"무슨 일이냐?"
민왕후의 안색은 불쾌한 빛이 역력하게 얼굴에 나타났다.
"네,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야?"
"대전마마의 전갈을 받들어 왔사옵니다."
"무슨 전갈이냐?"
민왕후의 음성은 높았다.
"세자께옵서 너무나 허랑방탕하시와 이번엔 단연코 폐세자하기를 결단하셨다 하옵니다. 그리하와 만조백관한테 폐세자하시는 일을 반포하셨다 합니다."
민왕후의 눈에서는 번쩍하고 불이 일었다.
"무슨 소리냐. 나한테 연통도 없이 만조백관한테 폐세자를 결정했더란 말이냐?"
민왕후의 분노는 화산처럼 터졌다. 내전 상궁은 영리했다. 측근에 모신 지 오랜 궁녀다. 태종과 민왕후와 그리고 가희아와의 사이에 미묘하게 얽히고 설킨 감정과 갈등을 잘 알고 있었다. 빨리 왕후의 노여움을 풀어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옵고 새로 봉하시는 세자는 충녕대군이라 합니다."
명료하게 아뢰었다. 충녕대군이 새로 세자가 된다는 말에 민왕후는 귀를 의심했다. 폐세자를 한 후에 가희아의 아들 '비'로 세자를 봉하는 줄 알았는데, 내전 상궁의 전갈하는 말에 자기의 셋째 아들 충녕의 군호가 나오니 의심쩍기 한량없었다. 민왕후는 아직도 역겨운 소리로 상궁한테 묻는다.
"누구로 세자를 봉해?"
"셋째 왕자이신 충녕대군이시라 합니다."
민왕후의 마음은 조금 풀어지기 시작했다. 왕후의 가장 사랑하는 미덥고 든든한 세자를 폐위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극한까지 대항하려던 마음이 슬며시 풀렸다.
"누가 진언을 했다더냐? 전하는 가희아의 아들 '비'로 세자를 삼으려고 하셨는데...."
"소인네가 어찌 국가 대사의 기밀을 알겠습니까마는 일간에 황희 황정승께서 독대를 드린 일이 계시옵니다. 필연코 황정승의 건의로 인하와 이번에 충녕대군께서 세자로 결정되신 듯합니다."
민왕후는 비로소 충녕이 세자로 된 까닭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황희 황정승은 근엄하고 침묵한 군자로서 경위가 밝고 처사가 적절해서 그의 칭송이 일국에 자자한 분이다. 마음속으로 불평을 참고 인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마디 아니할 수 없다.
"원래 장자인 세자를 폐하는 법이 아니다. 잘못하는 일이 있다고 선도할지언정 어찌 폐위를 시킨단 말이냐. 그런 까닭에 동궁에 보덕을 두어서 잘 인도하는 것이 아니냐. 책임은 동궁 보덕에 있다. 탄식할 일이다. 그러나 기왕 만조백관들을 모아서 이미 폐세자를 반포까지 했다 하는데 내가 최후까지 반대한다면 오히려 소란만 스러울 것이니 왈가왈부를 하지 아니하고 잠자코 있을 테다. 이 뜻을 대전마마께 전해라. 하는 수가 없구나."
왕후 민씨의 태도는 완전히 수그러졌다. 상궁의 어깨가 거뜬했다.
"전하께옵서는 또다시 이러한 전갈이 계셨습니다. 입태자 예식에는 꼭 왕후마마께서 참석하셔야 된다 하셨습니다."
"어느 아들이 귀하지 아니하겠느냐. 세자에 대해서는 무한 애닯고 섭섭하다마는 셋째 충녕이 대임을 맡아 왕사가 되는데 어미가 살아 있고 아니 가서 볼 수 있느냐. 입태자 예식에 참석하기로 하겠다."
"황송하옵니다."
내전 상궁은 자기 일같이 고마웠다. 절하고 물러갔다.
한편 가희아는 정전에서 태종이 만조백관을 모아놓고 어떠한 중대발표를 한다는 말을 듣자 필시 폐세자에 관한 일이라 추측했다. 만약 폐세자를 선포한다면 그 다음에는 세자를 누구로 대신 정하겠다는 일을 반포할 것이 분명했다. 세자를 대신 세운다면 전하가 평소에 항상 칭찬해서 말씀하시던 효령대군과 자기 아들 '비'가 물망에 오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효령대군은 이미 출가한 사람이나 매한가지였다. 불도에 전심해서 인간 속세에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항상 절에 나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사찰을 신축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세자의 직분을 준다 해도 효령은 받지 아니할 것이 분명했다. 이 일은 전하도 잘 알고 계신 터이다. 그렇다면 전하의 의중의 인물은 자기 아들 '비'가 분명했다. 가희아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대로 후궁에 가만히 앉아 배겨낼 수가 없었다. 시녀들한테도 알리지 아니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혜를 들고 뜰 아래로 내려섰다. 시녀들이 다투어 쫓아나왔다.
"마마, 어디로 행차하십니까?"
"울적해서 후원으로 나가 행기를 하려 한다."
가희아는 이쯤 대답했다.
"소인들이 모시오리까."
이런 때는 위해주는 것도 귀치 않았다.
"아니다. 나 혼자 조용히 좀 걸어보려 한다. 곧 돌아올 테니 후궁에 대기하고 있거라."
가희아의 심중을 모르는 궁녀들은 서로들 충성을 표현하느라고 열을 냈다.
"어떻게 후원에 혼자서 거니십니까. 소인네들이 배행하겠습니다."
"후원이 지척이라 하나 저희들 도리에 어찌 안연히 앉아 있겠습니까. 모시고 가겠습니다."
모두 다 안타깝게 첨을 올렸다.
"조금 있으면 대전마마께오서 듭실는지 모른다. 내 곧 돌아올 테니 뜰에 물을 뿌려서 깨끗이 청소하고 먼지가 일지 않도록 해라."
시녀들은 대전마마께오서 오신다는 말을 듣자 비로소 모시고 가겠다는 말을 멈췄다. 황토를 마당에 펴고 물을 뿌리고 전각을 깨끗하게 치워야만 했다.
"그럼 마마, 안녕히 다녀오십쇼."
비로소 가희아를 자유스럽게 해주었다. 가희아는 걸음을 옮기며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이런 때는 귀하게 된 몸이 오히려 얼마나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희아는 귀치않게 좇아오는 시녀들을 떼어버리고 후궁 문밖으로 나간 후에 후원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전하가 백관의 조하를 받고 계신 정전 뒤편으로 걸음을 빨리 옮겼다. 정전 뒷문이 열려 있었다. 전하가 용상에 오르기 위하여 외전에서 뒷문을 통과하여 용상에 오르느라고 열어논 문이다. 가희아는 날렵하게 뒷문으로 올랐다. 백지 창문 한 겹 사이가 바로 전하가 전좌해 계신 용상의 옥좌 자리다. 가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귀를 기울였다. 정전에서 옥음이 새어나왔다. 폐세자를 선포하는 전하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가희아의 젖가슴엔 물결이 드높게 쳐졌다. 사뭇 광풍에 파도가 이는 듯 출렁거렸다. 젖봉우리까지 들먹였다. 만조백관이 다 찬성하는 뜻을 표하는 눈치다. 다음엔 자기의 아들 경녕군 '비'의 이름이 나올 줄 알았다.
'경녕군 '비'는 어질고 착하고 공부에 독실하니 폐세자를 대신해서 세자를 봉한다.'
하는 전하의 반포하는 옥음이 들릴 줄 알았다.
가슴은 사뭇 부풀어 올랐다. 염통이 뛰었다. 염통이 강하게 뛰니 맥박마저 힘차게 울먹였다. 가희아는 바싹 창 앞에 귀를 대고 기울였다. 전하의 옥음이 떨어졌다.
"충녕대군은 성품이 어질고 착한 중 학문을 좋아하고 덕이 있어 가히 대임을 맡길 만하다. 충녕대군으로 새로 세자를 봉한다."
뜻밖이다. 전하는 꼭 자기의 아들 경녕군 '비'로 세자 삼을 것을 맹세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제 자기 아들의 소리는 한마디도 없고 민후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삼는다고 선포했다. 가희아는 모든 희망과 꿈이 일시에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배신을 당한 슬픈 감정이 전신의 신경으로 쫙 퍼졌다. 코끝이 짜릿하며 더운 눈물이 화끈하게 쏟아졌다. 목을 놓아 통곡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러나 지존이 조하를 받으며 만조백관 앞에 중대한 국사를 선포하는 순간이다. 창 하나를 격해서 통곡할 수는 없었다. 펄썩 주저앉았다. 만조백관들이 만세를 부르며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들키면 큰일이었다. 가희아는 눈물을 닦고 총총 후궁으로 돌아갔다.
한편 폐세자한다는 통고는 곧 동궁으로 전해졌다. 내관이 어명을 받들고 동궁으로 들어가니 춘방사령 명보는 영문을 몰랐다.
"웬일이십니까, 지사 대감."
태평하게 온 뜻을 묻는다.
"중대한 어명을 받들어 나왔네."
중대한 어명이란 말에 명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대한 어명이라니 어떤 어명입니까?"
"자네한테 말할 일이 아닐세. 세자께 뵙고 직접 품달해 올려야 하겠네. 어디 계신가. 사랑에 계신가?"
"세자께서는 지금 사랑에 계십니다마는 도대체 어떤 중대한 일입니까? 대강 말씀을 해주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세자를 만나뵙게 거래를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어명인데."
"어명 아니라 천명이라도 소인이 알지 않고는 세자께 연락을 취해드리지 않겠습니다."
명보는 큰 소리로 투덜대며 자기의 본성을 발휘했다. 내관은 명보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소박한 그의 행동을 밉ㅎ 않게 보았다.
"상감께서 폐세자한다는 말씀을 세자께 전하라 해서 왔네."
명보의 귀에는 청천에 벽력 같은 소리였다.
"무어요? 폐세자라니, 우리 세자마마를 폐위시킨단 말씀요?"
명보는 펄썩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이 사람아, 놀라지 말게. 동궁마마께서 들으시면 도리어 기뻐하실 것일세."
내관은 본시부터 세자의 심경을 잘 짐작하고 있었다. 명보도 역시 세자의 심정을 어렴풋 알고 있었으나 이같이 전하의 명령으로 폐세자가 될 줄은 몰랐다. 담이 떨어지고 가슴이 울먹거렸다. 별안간 슬픈 감정이 폭발되었다. 목을 놓아 통곡한다. 내관은 땅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명보를 붙들어 일으켰다.
"이 사람아, 상제보다 복재기가 더 슬퍼한다더니 자네한테 두고 한 말일세. 어서 일어나서 세자께 내가 나왔다는 말씀을 전해주게. 세자마마께서 들으시면 도리어 기뻐하실 텐데 왜 이러나."
명보는 내관한테 부축되어 일어났다. 세자께 아니 고할 수도 없었다. 목을 놓아 엉엉 울며 큰사랑을 향하여 들어갔다. 별안간 일어나는 명보의 울음소리를 듣자 동궁 안에서는 궁녀들이 깜짝 놀랐다. 안에서 우루루 몰려나왔다. 명보는 앞에서 통곡하며 세자의 사랑으로 들어가고 내관은 뒤에 따랐다. 엉엉 우는 명보의 통곡성이 세자궁을 소란케 했다. 사랑에 있던 세자는 명보의 통곡 소리에 깜짝 놀랐다. 급히 사랑방 문을 열고 뜰 앞을 내다보았다. 명보가 술에 취한 사람 모양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통곡하면서 들어오는 것이다. 뒤에는 늙은 내관이 따랐다.
"웬일이냐?"
세자는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명보를 향하여 묻는다. 명보는 세자를 바라뵙자 더한층 목을 놓아 울었다. 세자는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때 세자 내아에서는 동궁빈과 어리가 명보의 통곡성을 듣고 역시 깜짝 놀랐다. 쫓아나갔던 궁녀들이 명보의 통곡하는 내력을 동궁빈한테 고했다.
"내관이 폐세자하시는 전교를 받들고 나왔다 합니다. 그리하와 명보가 저같이 통곡을 합니다."
'폐세자' 소리를 듣자 동궁빈은 깜짝 놀라고 어리는 어리둥절했다. 동궁빈은 기가 막혔다. 세자가 밤낮 폐세자 되기를 소원한 것을 누구보다도 동궁빈은 잘 알고 있었다. 바르지 못하고 의롭지 않게 왕위를 둘러싸고 골육상잔하는 아버지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세자를 잘 알고 있었다. 왕세자의 자리를 헌신짝 던지듯 하고 황해도 수양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돌아갔던 세자의 큰아버지 진안대군을 항상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세자의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부왕을 도와서 개국 공신에 정국공신까지 된 외숙 민씨네 일문을 몰살시켜서 모후의 친정을 시도 남기지 아니한 아버지 태종의 비정을 경멸하는 세자를 잘 알고 있었다. 기생 가희아를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옹주까지 봉한 후에 모후를 폐비까지 하려다가 황희 황정승의 반대로 폐위시키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부왕의 태도를 경멸하는 세자를 잘 알고 있었다. 이렇기에 세자는 성격의 반동을 일으켜서 전하한테 반항하는 의식은 나날이 높았던 것이다. 세자의 성격이 나날이 거칠어간 원인은 모두 다 전하한테 있었다. 당신은 사냥을 하면서 세자보고는 사냥을 하지 말라고 했다. 당신은 매를 기르면서 세자보고는 매를 기르지 말라 했다. 당신은 기생을 떼어다가 후궁으로 삼아 왕자와 왕녀를 줄을 지어 낳으면서도 세자보고는 가악을 멀리하라 했다. 세자가 오입쟁이 건달들과 추축해서 봉지련을 사귄 것도 이 때문이다. 봉지련을 사귄 후에 전하는 세자를 너그럽게 대해주지 아니했다. 태종은 봉지련을 세자한테 떼어서 귀양보내 죽여버렸다. 기생 봉지련한테 첫정이 든 세자였다. 세자는 미칠 듯했다. 세자도 사람이었다. 별천지에 사는 별종이 아니다. 명칭이 임금의 아들 세자일 분 나무와 돌이 아닌 사람이었다. 나무와 돌이 아니니 정이 있을 것은 당연했다. 세자는 봉지련이 죽은 후에 식음을 전폐했다. 명보를 위시하여 오입쟁이 한량들은 기생 작은 꾀꼬리를 붙여주었다. 태종 앞에 가까이 있는 측근 내관이 이 일을 태종께 고해 바쳤다. 태종은 또다시 작은 꾀꼬리를 세자 곁에서 떼어서 평양으로 쫓아보냈다. 구금을 해버렸다. 세자는 이제 반항하는 마음이 절정에 올랐다. 초궁장을 만나고 남의 첩 계지를 손에 넣었다. 세자는 이제 호색하는 제이천성을 이루게 되었다. 천하일색을 구하다가 늙은 재상 곽중추부사의 첩 어리를 담을 뛰어넘어 뺏어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 폐세자가 되는 것이다.
동궁빈의 눈은 캄캄했다. 정신이 아뜩했다. 세자는 모든 일을 다 각오하고 있었다. 이렇기에 다음 아우 효령대군을 발길로 찼다.
'내가 폐세자가 되면 네가 세자가 될 줄 아느냐? 세자될 사람은 따로 있느니라. 가희아의 아들이니라.'
하고 똥겨주었다. 효령도 크게 깨닫고 양주 회암사로 가서 유발승이 되어 북이 깨어져라 하고 염불을 하고 불경을 읽었다는 일은 동궁빈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세자는 장차 다가오는 왕의 자리를 헌신짝 버리듯 하기 위하여 일부러 그러한 짓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항상 동궁빈 자신한테 세자 노릇을 하기 싫다고, 추잡한 골육상잔하는 왕의 자리에 나가기가 싫다고 술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세자는 왕의 자리에 나가지 아니할 인물인 것은 누구보다도 동궁빈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 내관이 왕명을 받들어 폐세자를 선포하러 나왔다 하니 놀랍고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걸음을 빨리하여 내관이 어명을 전한다는 사랑으로 향했다. 한편 어리는 어리대로 깜짝 놀랐다. 별안간 명보의 통곡성이 일어나니, 까닭을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한테 물었다. 내관이 폐세자를 선포하러 나왔다 했다. 모두 다 자기 자신 때문에 세자가 폐위를 당하는구나 하고 가슴이 뛰놀고 마음이 아팠다. 진둥한둥 동궁빈의 뒤를 따라 사랑으로 향했다. 동궁의 시녀들이 함빡 뒤를 따랐다.
"야 이 못난 놈아, 왜 이리 우느냐? 저리 물러가거라."
세자는 벌써 눈치챘다. 명보를 꾸짖어 물리친 후에 내관한테 묻는다.
"너 어찌해서 나왔느냐?"
내관은 황송하고 송구했다. 차마 폐세자한다는 전하의 어명을 얼른 전달하기 어려웠다. 주뼛주뼛 차마 입을 열어 말씀을 올리지 못했다. 세자는 내관이 차마 말을 못하고 손만 비비고 서 있는 것을 보자 폐세자하는 전갈을 받들어 나온 것을 더한층 눈치챘다. 세자는 방긋 웃으며 내관을 바라보며 말한다.
"어명을 받들어 나왔구나."
"네, 그러합니다. 황공천만하오이다."
내관은 여전히 말의 핵심을 야무지게 아뢰지 못하고 말씀을 주변으로만 돌려서 대답한다. 세자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껄걸 웃으며 말한다.
"하 하 하. 두려울 것 없다. 시원스럽게 말해보아라. 폐세자하는 전갈을 받들어 나왔느냐?"
내관은 세자의 터놓고 묻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예, 그러하옵니다."
간단하게 대답했다. 뜰 아래서 내관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동궁빈과 어리의 가슴이 천길 낭떠러지로 뚝 떨어졌다. 세자는 또다시 호방하게 껄걸 웃는다.
"하 하 하. 그 말 하기가 그다지 어렵더란 말이냐. 하하하, 못난 사람이로구나. 폐세자-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하 하 하. 이제는 자유스런 몸이 되어 홀가분해서 좋다. 하 하 하."
옆에서 이 소리를 듣는 명보는 또 한바탕 목을 놓아 통곡한다. 동궁빈의 눈에서도 눈물이 하염없이 솟았다. 어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동궁 시녀들도 세자궁이 폐쇄되는구나 하고 모두 다 눈물을 흘렸다. 다만 명보처럼 소리를 내어 울지 못할 뿐 모두 다 기막힌 슬픔 속에 잠겼다.
"왜 이러느냐."
세자는 명보를 또 한 번 꾸짖는다.
명보는 엉엉 울며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다.
세자가 재촉한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어명을 자세히 전달해라."
"'세자께서 허랑방탕하시와 앞으로 대임을 맡길 수 없으니 폐세자를 한다', 이같이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내관이 겨우 아뢰었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침착하고 의젓했다.
"새 세자는 어느 분으로 정하셨느냐?"
"충녕대군으로 정하셨다 하옵니다."
세자는 미연히 웃었다.
"잘 되었다. 이제부터는 나라꼴이 되리라."
세자는 혹여 가희아의 소생 '비'가 되면 큰일이라 생각해서 이같이 물었던 것이다. 명보의 통곡성은 또 한 번 폭발이 되었다. 세자는 다시 내관에게 묻는다.
"대신은 누가 참석했느냐?"
"황정승께서 입시하셨습니다. 그러하옵고 만조백관 앞에 폐세자와 입세자하는 일을 선포하셨습니다." 세자는 자기가 비밀하에 황희 황정승한테 편지를 보내서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대신 봉하도록 건의해 달라 한 일이 효력이 난 것을 기뻐했다.
"물러가라. 알겠다."
세자는 내관한테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내관이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올리고 막 발길을 돌이키려 할 때 세자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시 내관을 불렀다.
"중사, 잠깐 기다려라. 전할 물건이 있다."
내관은 나가려다가 발길을 멈추고 세자를 우러러본다. 세자는 명보한테 부탁한다.
"동궁빈께 좀 납시라 해라."
세자는 내관과 문답하느라고 궁녀들과 함께 뜰 앞에 동궁빈이 서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빈마마께서도 사랑에 나와 계십니다."
명보는 세자한테 아뢰고 동궁빈의 앞으로 향했다.
"세자마마께서 청하십니다."
동궁빈은 시녀들에게 옹위되어 천천히 당 위로 올랐다. 세자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동궁빈 김씨를 향하여 말한다.
"아아, 빈도 나와 계시었소. 나는 오늘 폐세자가 되는 어명을 받았소. 내가 폐세자가 되었으니 빈도 동궁빈이란 어렵고 소중한 자리를 면하게 되었소. 이제 우리는 자유스런 몸이 되었소이다. 하하하. 얼마나 목이 마르도록 바라고 원했던 자유요. 자아, 이제부터는 맘대로 거리낌없이 쾌활하게 삽시다. 이제 우리는 한 사람 서민이 되었으니 동궁과 동궁빈의 관복이 필요 없게 되었소. 세자의 관면과 빈의 명복을 대전에 봉환해야 하겠소. 시녀에게 명하여 관복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시오."
유한정정하고 마음씨 고운 동궁빈이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부드럽게 대답하고 시녀를 거느려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동궁빈의 세자의 관복을 담은 의대상자와 동궁빈의 명복을 화려한 화문보에 싸서 세자의 앞에 놓았다. 세자는 동궁빈이 앞에 놓은 관면 상자의 보를 친히 끌렀다. 상자 뚜껑을 열었다. 왕세자가 쓰는 찬란한 면류관이 나타났다. 남포옥대가 보였다. 저하는 친히 면류관을 들었다. 검은 바탕에 황금으로 수를 놓은 면류관이 보였다. 앞뒤로 드리운 구슬 줄이 햇빛의 반사를 받아 보는 사람의 눈을 휘황찬란케
했다. 세자는 면류관을 높이 들고 눈을 모아 바라보며 껄걸 웃으며 말한다.
"세자의 장복, 네가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하고 내 몸의 자유를 구속했더냐. 이제 너하고 나하고는 영영 이별이다. 하하하. 잘 가서 좋은 임자를 만나거라!"
세자는 면류관을 상자에 다시 넣은 후에 동궁비느이 장복 담은 상자를 앞으로 당겨놓았다. 연둣빛 화려한 비단에 공작을 수놓은 동궁빈의 예복이 나타났다. 세자는 장복을 번쩍 들었다. 붉은 띠에 금박으로 수복강녕을 찍은 금글자가 사람들의 눈을 현란케 했다. 세자는 장복을 들고 동궁빈을 향하여 말한다.
"자아 빈마마, 마지막 한 번 입어보시오."
"싫습니다."
동궁빈이 고개를 숙여 고요히 대답했다. 조신한 동궁빈의 얼굴엔 미고소가 떠돌았다.
"이제는 다시 동궁빈의 장복을 입어볼 기회가 없을 텐데 한번 입어보지 아니하려오!"
"마마를 따르는 한 조각 붉은 마음이 그까짓 동궁빈의 장복에 애착을 둘 까닭이 있습니까. 그저 마마를 따라서 마마의 마음이 편하시도록 해드리기 평생소원이올시다."
동궁빈의 말을 듣자 시녀와 어리를 위시하여 춘방사령 명보와 봉지련 어미며 내관의 눈시울이 화끈했다. 세자의 눈에도 맑은 눈물이 글썽글썽 어리었다.
"고맙소."
한 마디가 꾸밈없이 세자의 입에서 나왔다. 세자는 친히 면류관을 담은 상자와 동궁빈의 장복을 보에 싼 후에 목소리를 가다듬어 내관을 불렀다.
"중사, 이리 가까이 오너라."
내관이 추창해서 청 위로 올랐다.
"이것은 세자가 입는 정복이다. 다음 상자는 동궁빈의 대례복이다. 이미 폐세자가 된 오늘날 나에게는 필요가 없다. 대전께 봉환하도록 해라."
내관은 세자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세자와 세자빈의 예복을 받들어 물러갔다. 춘방사령 명보는 내관이 동궁의 장복과 동궁빈의 대례복을 받들어 물러가는 것을 보자 또다시 대성통곡을 하면서 땅에 굴러 몸부림친다. 세자는 명보를 꾸짖는다.
"왜 이리 소란을 떠느냐. 내가 자유의 몸이 되어 흔쾌하기 한량이 없는데 너는 어찌 내 뜻을 받아주지 아니하고 불길하게 통곡해서 내 마음을 흔들어놓느냐."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가 보다 못해서 명보한테로 달려갔다.
"아무리 섭섭하시더라도 곡성은 그치시오. 세자마마를 위로해드리지는 못할망정, 이같이 소란을 떠는 것은 인사가 아닙니다."
봉지련의 어미는 명보의 등을 어루만져 달랬다. 명보는 한편으로는 세자의 꾸지람을 듣고 한편으로는 아내의 타이르는 말을 듣고 보니 정에 맡겨서 통곡성을 계속해서 내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슬픈 감정을 억누르고 두 주먹을 들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좌우편으로 씻었다. 대청에서는 세자가 미소를 지어 동궁빈을 향하여 말한다.
"자아, 이제는 모든 일이 끝이 났소. 이제 당신과 나는 매인 데 없는 자유스런 평민의 몸이오. 이제부터는 나를 향하여 사냥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할 사람도 없게 되었소. 매를 기른다고 잔소리를 할 사람도 없게 되었소. 술을 먹지 말라고 타이를 사람도 없고 여색을 가까이 해서는 아니 된다고 떠들 사람도 없게 되었소. 세상 천하에 거리낄 일이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하고 복된 일이오. 이같이 좋은 날을 그대로 허송할 수 없소. 술상은 한 상 짭짤하게 차려 내보내 주시오. 그리고 당신과 어리도 한자리에 앉아서 풍류를 즐깁시다."
동궁빈 김씨는 어디까지나 양처요 현모였다. 조금이라도 세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거슬러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했다. 동궁빈은 미소를 지어 조용히 일어나며 어리를 불렀다.
"얘, 어리야. 안으로 함께 들어가 주안상을 마련해서 내오도록 하자."
동궁빈이 어리를 불러서 함께 주안상을 마련하자 한 것은 화한 태도로 세자를 위로해드리자는 지극한 사랑의 정이 움직인 것이다.
"네."
하고 어리는 대답하며 동궁빈의 뒤를 따랐다. 동궁빈과 어리가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 섰던 여러 시녀들도 안으로 들어갔다. 봉지련의 어미도 명보를 재촉해서 사랑문 밖으로 나갔다. 세자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급히 명보를 불렀다.
"얘, 명보야, 이리로 오너라."
명보는 나가다가 세자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발길을 돌려 세자가 앉아 있는 청 앞으로 나갔다.
"얘, 지금 안에 당부해서 술상을 차리라 했다. 나의 자유를 축하하기 위하여 술 한 잔을 마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야 술을 마실 재미가 있느냐. 장악원의 율객과 가객들을 불러서 가무를 보며 술을 한 잔 마시겠다."
"왜 혼자 젓숫는다 하십니까. 빈마마께서도 계시고 어리 아가씨도 있지 아니합니까. 아까 빈마마께 말씀하시기를 함께 노시자고 분부하시는 말씀을 들은 듯합니다."
"얘, 이 미친놈. 빈마마와 자리를 같이 하기로서니 그분보고 가무를 하시라고 하겠느냐. 밤낮 보아도 미련하고 우직만 하고나."
명보는 뒤통수를 긁죽긁죽 긁으면서 대답한다.
"장악원에 가보기는 하겠습니다마는 누구를 부릅니까? 구감역 구종수도 잡혀가고 이오방도 또다시 귀양을 갔고 홍만, 이법화가 모조리 먼 곳으로 유배를 당했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곰같이 미련한 놈은 미욱한 소리만 하는구나. 야 이놈아, 꿩이 없으면 닭이라도 있을 것이 아니냐."
명보는 꿩이 없으면 닭이라도 있을 것이라는 말에 비로소 깨달았다.
"꿩 대신 닭을 구해들이란 말씀입죠?"
명보는 히죽 웃으며 묻는다.
"그렇다. 꿩 대신 닭을 구해오너라."
명보는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사랑 일각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를 만났다.
"세자마마께서 꿩 대신 닭을 구해오라 하시니 누구를 데려오는 것이 좋겠나?"
"꿩 대신 닭이라니?"
봉지련의 어미는 어리둥절했다.
"약주를 잡수실 텐데 율객과 가객들을 불러오라 하시는구먼. 구종수, 이오방, 홍만, 이법화들이 어리의 일로 모조리 귀양을 가서 없다고 아뢰었더니 꿩 대신 닭이라도 불러오시라니 어찌하면 좋은가. 자네는 나보다도 오입쟁이들을 잘 아니 누가 좋을지 이름을 대어주게."
봉지련의 어미는 비로소 꿩 대신 닭의 뜻을 알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름을 대어주었다.
"구종수, 이오방만은 못하지만 거문고 잘 타기로는 김종률이요, 노래 잘 부르기로는 이선동이요, 춤 잘 추기로는 승모란이요, 가야금 잘 타기로는 설중매가 있으니 그들을 데려오시구려."
명보는 아내의 훈수를 받고 장악원으로 향했다.
양녕대군
명보가 장악원으로 가서 아내 봉지련의 어미가 지시해준 대로 거문고 잘타는 김종률, 노래 잘 부르는 이선동, 춤 잘 추는 승모란을 만났다. 명보가 인사를 청한 후에 세자궁에서 왔다는 말을 전하자 모두 다 혀를 내둘렀다.
"공연히 우리를 까닭 없이 경따발을 안기려고 그러시오. 못가겠소."
여출일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아니하오. 인제는 가도 관계치 않소. 우리 세자마마께서는 이제 폐세자가 되셨으니 한 사람 자유스런 평백성입니다. 세자가 아니라 물외한인이 되었으니 구감역이나 이오방이 당한 경우와는 천양지판으로 다르게 되었소. 자아, 함께 갑시다."
장악원의 율객들과 가객들은 한 번 세자를 모시고 놀았다는 것은 일평생에 무쌍의 광영이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 일이었다. 그러나 구종수, 이오방, 이법화, 홍만들이 귀양을 두 번, 세 번씩이나 가는 것을 보자 모두 다 떨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명보의 말을 듣고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구종수 일파가 귀양을 가고 곤장을 맞은 것은 세자라는 막중한 자리에 있는 분을 유혹했다는 명목으로 죄를 받았던 것이다. 이제 세자가 폐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 매인 데 없는 평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셨기로서니 죄될 명분이 없는 것이다. 김종률, 이선동은 솔깃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춤 잘 추는 기생 승모란을 향하여 묻는다.
"어찌하려나?"
"이제는 폐세자가 되셨다 하니 모시고 놀더라도 봉지련이나 작은 꾀꼬리 꼴은 되지 않겠죠?"
승모란은 싱끗 웃으며 명보한테 묻는다.
"내가 지금 봉지련의 어미를 데리고 사니 그 내용을 다 안단 말일세. 봉지련이나 작은 꾀꼬리는 세자마마와 살을 섞은 죄지만 그대로 노래나 부르고 춤만 추는데 죄를 줄 까닭이 있나. 그리고 그때 형편과 지금 형편은 다르지 않은가베. 그때는 세자마마시고 지금은 자유스런 몸이 아니신가. 죄 될 것이 손톱만치도 없네."
승모란은 솔깃했다.
"상급을 후히 주실래요?"
"후히 주시고말고..."
"폐세자가 되셨으니 이제는 돈도 없으시겠지."
"이 사람, 그래도 왕자가 아니신가. 금은보화가 적여구산이실세."
명보는 꿀을 담아 부었다.
"갑시다."
승모란을 허락을 했다. 명보는 승리를 얻었다. 장악원의 아류 율객들을 거느리고 세자궁으로 들어갔다. 세자는 흔연히 아류 가객과 기생 승모란을 맞이했다. 아류 가객과 기생 승모란이 세자께 처음 뵙는 인사를 올렸을 때 안에서는 세자가 동궁빈께 당부했던 주안상이 떡 벌어지게 나왔다. 세자는 시녀를 시켜서 동궁빈을 청했다. 동궁빈은 사양하고 나오지 아니했으나 세 번, 네 번 청좌를 들여보내니 아니 나올 수 없었다. 동궁빈은 조신하고 현숙한 태도로 미소를 지어 청 위에 조용히 올랐다. 가객과 율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맞이했다.
"저하의 연석에 제 어찌 감히 참예하옵니까. 전례에 없는 일이옵니다."
세자빈은 자리에 올라 또 한 번 사양했다. 세자도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오늘 이 잔치는 보통 잔치가 아니라 부자유한 세자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을 축하하는 잔치요. 동궁빈도 그동안 동궁빈의 자리를 욕되지 않게 하느라고 무한 애를 썼소이다. 이제는 동궁빈도 그 부자유한 자리를 면하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축하주를 듭시다."
세자는 말을 마치자 동궁빈의 손을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세자는 동궁빈을 자리에 앉게 한 후에 만좌를 돌아보며 분부를 내린다.
"율객들은 풍류를 아뢰고 기생과 시녀들은 술을 부어라."
기생 승모란이 세자와 세자빈의 앞으로 나가 옥잔에 가득 술을 부어 올렸다. 율객 한 사람이 세자 앞으로 나가 아뢴다.
"어떠한 가곡으로 풍악을 아뢰오리까?"
세자는 미소를 던지며 대답한다.
"가곡은 나보다도 자네들이 더 잘 알 것이 아닌가? 지금 나는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자유스런 천지에 사는 성대일민이 되었다. 만파식적을 아뢰어주게."
세자의 말씀이 떨어지니 거문고, 아쟁, 해금, 퉁소, 장구가 일제히 울리며 만파식적의 가사를 굽이굽이 마디를 꺾어 읊었다. 시끄러운 세상에 흉흉한 파도가 가라앉고 화하고 평안한 기운을 상징하는,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화평한 음률이다.
세자와 동궁빈은 미소를 지어 옥술잔에 입술을 대었다. 술이 서너 순배 돌았을 때 대문간이 소란했다. 명보가 뛰어들어왔다.
"대궐에서 또 칙사가 나옵니다."
세자는 음률을 그치게 하고 세자빈과 함께 뜰로 내려가 칙사를 맞이했다. 세자는 칙사한테 읍을 보냈다. 칙사도 세자께 읍을 올렸다.
"무슨 일로 칙사가 나왔소?"
세자는 칙사를 향하여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제 세자가 아니시니 군호가 있어야 할 것이라 하시며 대전에서 특별히 군호를 내리셨습니다."
옆에 세자를 모시어 섰던 동궁빈은 민첩하고 예의가 발랐다. 급히 궁녀한테 분별했다.
"칙사가 봉서를 받들어 나오셨다. 빨리 자리와 상을 준비해라."
시녀는 동궁빈의 명령을 받자 급히 화문석과 책상반을 칙사와 세자가 마주 서 있는 사이에 깔고 놓았다. 세자빈은 또다시 시녀에게 분부를 내린다.
"책상반 위에는 홍보를 덮어라."
시녀는 달음질쳐서 안으로 들어가 붉은 보를 가지고 나와서 상 위에 덮었다. 칙사가 품 안에서 홍보로 싼 칙지를 세자한테 넘겼다. 세자는 두 손으로 칙지를 싼 홍보를 받들어 상 위에 놓고 칙지를 폈다.
'이미 폐세자가 되었다. 명칭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군을 봉하여 양녕이라 군호를 내린다. 이제부터 모든 공식절차와 사사 칭호에 전부 양녕이라 사용케 하라. 이 뜻을 조정에 반포하였으니 그리 알라."
세자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자궁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함빡 세자의 표정만 지켰다. 세자의 얼굴에 웃는 표정이 드러나자 모두들 안심이 된 듯 안도의 숨을 쉬었다. 세자는 칙지를 받는 채 좌우를 돌아보며 말한다.
"오늘날 나의 대원이 성취되었다. 위에서는 나의 뜻을 살피시어 세자마마라고 부르는 대신 양녕대군이라는 칭호를 내리셨다. 세자의 자리를 사양해서, 또는 임금의 자리를 사양해서 편안히 지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얼마나 조촐하고 깨끗한 이름이냐. 내 한번 저하의 교지를 읽어서 너희들에게 들려주리라!"
세자의 말이 떨어지니 모든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정숙하게 귀를 기울였다. 멀리 서서 있는 명보는 두 손을 좌우 옆 귀에 대고 고개를 불쑥 내밀어 듣고 있다. 세자가 청을 높여 전하의 칙지를 낭랑히 읽었다. 귀를 기울여 듣던 사람들의 얼굴에 기쁜 웃음이 물결쳤다. 그러나 명보는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됩니다. 소인은 죽을 때까지 세자마마라고 부르겠습니다."
세자는 칙사가 있는 앞에서 명보를 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기쁜 얼굴로 칙사를 대해서 말했다.
"칙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오늘 세자의 직책을 내놓고 자유스런 몸으로 성대일민이 된 것이 기뻐서 사사로이 술 한 잔을 마시기로 했소. 칙사도 나하고 술 한 잔을 같이 하기로 합시다."
세자는 칙사의 손을 잡아 당상으로 이끌었다. 칙사는 난처했다. 폐세자와 함께 술을 마시었다는 말이 상감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어명을 받들어 나온 몸이오라 주기를 띠고 돌아갈 수 없습니다.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애걸해 빌었다. 세자는 칙사가 자기와 함께 술 마시는 것을 기피하는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칙사, 염려마오. 이제는 내가 세자가 아니라 양녕이오. 세자가 기생을 데리고 술을 마시는 일은 허물이 되겠지만 이제 자유로운 서민이 된 양녕이 술을 마시는 것은 죄가 되지 아니하오. 전하께서도 인정하시리다. 하하하."
칙사는 더 사양할 길이 없었다. 세자의 뒤를 따라 당상으로 올랐다. 세자는 승모란에게 분부를 내렸다.
"칙사한테 술을 따라 올려라."
승모란이 칙사 앞으로 나가서 옥잔에 가득 술을 부어 올렸다. 칙사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다. 술을 받아 마실 수도 없었다. 술잔을 들고 등에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양녕은 눈치를 챘다.
"칙사는 겁이 많구려. 절대로 상감께서 죄를 아니 주신다 해도 그리하는구려. 정 그렇다면 술을 마시지 말고 내 말에 대답이나 하소."
칙사는 비로소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
"죄송하옵니다."
겨우 한마디를 하고 술잔을 상에 놓았다.
"자아, 술을 아니 마시는 대신 나의 말에 곡 대답은 해야 하오."
"네, 말씀하옵소서."
칙사는 살았다고 생각했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양녕이란 군호를 누가 지었소? 전하께서 친히 지으신 것 같지 아니한데."
세자는 슬며시 배를 뽑았다.
"전하께서는 폐서인을 하라 하시는 것을 황희 황정승이 양녕이라고 군호를 내리시는 것이 좋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여 군호를 내리신 것이옵니다."
세자는 비로소 양녕이란 좋은 군호를 지어준 이가 아버지가 아니라 황정승인 것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황정승의 정승다운 태도에 감복했다.
"국조 정승에 이음양 순사시하는 재상은 역시 몇 분이 아니거든. 황희 황정승은 과연 재상의 풍모가 있는 분이야."
세자는 양녕이란 군호에 만족했다. 칙사한테 술 한 잔을 권하고 동궁빈을 바라보며 말한다.
"양녕, 과연 내 맘에 꼭 드는 명칭이오. 사양해서 평안하게 지낸다. 하하하. 이제는 마음 놓고 평생을 대자연과 짝해서 호연지기를 펴면서 자유스럽게 지내게 되었소. 자아, 빈이 친히, 아니 이제부터는 당신도 빈이 아니라 부인이구려. 부인이 친히 한 잔 축복하는 술을 따라주시오."
동궁빈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세자한테 술을 따라 올렸다. 마음으로 슬프면서도 세자의 마음을 평안케 하자는 어진 태도였다. 명보는 불만이 가득했다. 뜰 아래 서서 세자께 향하여 큰소리로 외친다.
"저하, 소인은 불만이올시다. 황희 황정승이 무슨 명재상입니까. 정승으로 있으면서 충간을 해야만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올시다. 민가에서도 장자는 폐하지 못하는 법이온데 황차 국가에서 어찌 장자를 폐합니까. 이것을 역간하지 못하는 재상이 무슨 이음양 순사시를 하는 명재상이 될 수 있습니까. 당치 않은 말씀 마십쇼. 황정승은 이리 해도 좋다 하고 저리 해도 좋다고 하는 주견이 없는 숙녹피같은 재상이올시다. 그까짓 호칭만 좋아서 무엇합니까. 이름 좋은 개살구라는 상말도 있지 아니합니까."
명보는 아직도 주인이 세자 자리를 내놓게 된 것을 통분하게 생각했다. 칙사가 있으니 감히 청상으로 오르지 못하고 마루청 아래서 고성을 질러 울분을 외친다.
"에이, 무식한 놈. 네가 무엇을 안다고 이같이 떠드느냐?"
세자는 소리쳐서 명보를 꾸짖었다. 세자는 명보를 꾸짖어 물리치고 칙사한테 다시 술 한 잔을 권하려 할 때 밖에서 또다시 떠들썩하면서 문 지키는 수문장이 뛰어들어왔다.
"아뢰옵니다. 칙사가 또 나옵니다."
모두들 눈이 둥그레졌다. 먼저 왔던 칙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놈의 칙사가 이리 많이 나오나."
명보는 불평을 또 한 번 뱉었다. 양녕은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뜰에 내려 먼저 온 칙사를 보내고 새 칙사를 맞이했다. 새 칙사가 들어왔다.
"어명을 전합니다."
"어떠한 어명이신가?"
양녕이 묻는다.
"종묘에 폐세자하옵시는 봉고제를 거행한다고 곧 종묘로 행차하라 하십니다."
양녕은 칙사를 바라보며 말한다.
"봉고제를 지낸다면 봉고제문을 지어야 할 텐데 제문을 나보고 지으라는 것인가?"
"봉고제문을 내보내셨습니다. 종묘에는 지금 차비관들이 대군이 나오시기를 대기하고 있습니다."
"봉고제문을 내리셨다 하니 어디 제문을 보여주게."
칙사는 봉고제문을 양녕대군한테 전했다. 양녕은 봉고제문을 펴서 읽었다. 모든 사람의 눈은 봉고제문으로 집중되었다.
'세자가 황음무도하여 앞으로 국가의 중책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폐하여 군으로 강봉하고 왕자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책봉하오니 열성조의 신위는 조감하옵소서.'
양녕은 스스로 읽기를 다하자 발연히 노했다. 옆에서 양녕이 봉고제문 읽는 소리를 듣고 있던 명보의 눈에서도 불이 붙었다. 양녕은 천천히 봉고제문을 칙사한테 돌려보내며 말한다.
"나는 이 제문을 받들고 종묘에 알현하지 못하겠네."
칙사는 벌벌 떨었다.
"어명이십니다. 꼭 참배하라 하십니다."
"아무리 어명이라도 받지 못하겠네."
양녕은 또렷이 대답했다. 명보는 마음속으로, '잘하신다. 과연 사나이다운 우리 세자다!'하고 어깨가 으쓱했다. 칙사는 어찌해야 좋을지 얼굴에 곤란한 빛을 띠었다. 양녕은 의젓한 태도로 칙사를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전하께서 군호를 내리신 그대로 양녕이야. 세자의 자리를 사양했단 말야. 장래 제왕의 자리를 사양해서 은근히 세자의 자리를 충녕한테 전한 것뿐일세. 내가 좋아서 황음무도한 짓을 한 것은 아니거든. 조상님한테 거짓말은 할 수가 없네. 뿐만 아니라 내가 백대에 누명을 쓸 수는 없어. 왜 내가 조상 앞에 죄인이 된단 말인가. 거짓말로 천추만대 국민 앞에 죄인이 될 수는 없단 말야. 이름과 같이 세자의 지위를 사양했다고 제문을 올린다면 봉고제를 지내지. 나는 황음무도했다는 봉고제를 지낼 수 없네."
양녕은 봉고제 지낼 것을 쾌하게 거부했다. 명보는 세자의 쾌하게 거부하는 말씀을 듣자 오뉴월 삼복 더위에 냉수를 마시는 듯 시원했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명이 났다. 너무나 상쾌해서 한 곳에 배겨 있을 수 없었다. 칙사가 서 있는 뒤로 돌아다녔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세자저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뇌까리며 돌아다녔다. 칙사는 난감했다. 어찌할 줄 몰랐다.
광주 추방
명보는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여보시오 칙사, 어서 돌아가시오. 우리 세자마마께서 언제 황음무도하셨단 말요. 스스로 귀치 않은 세자의 자리를 내놓기 위해서 일부러 술을 잡숫고 거짓 풍류를 즐기셨을 뿐입니다. 어서 돌아가시오. 황음무도가 다 무어요. 다시는 그런 누명을 씌우지 마시오."
칙사는 하는 수 없었다. 봉고제문을 품에 품고 다시 대궐로 돌아갔다. 칙사가 돌아간 후에 양녕은 청으로 올라 다시 술상을 대해 앉았다. 마음에 명보가 무한 기특했다.
"얘, 명보야, 이리 올라오너라. 내가 너한테 술 한 잔을 따라주리라."
청아래 섰던 명보는 머리를 긁죽긁죽 긁었다.
"못 올라가겠습니다. 빈마마께서 계신데 제 어찌 감히 올라가겠습니까."
양녕은 쾌활하게 큰 소리로 웃는다.
"이제는 빈마마가 아니다. 부인이라 하래도 그러느냐."
"소인은 부인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할 텝니다. 그저-죽어도 빈마마올시다."
만좌는 불안한 중에도 깔깔 웃었다. 동궁빈이 웃으며 명보를 향하여 이른다.
"관계치 않다. 세자마마께서 부르시니 올라오너라."
동궁빈도 세자마마라 불렀다. 명보는 못 이기는 체 좌석 끝으로 올라가 꿇어앉았다. 양녕은 대백에 술을 가득 부어 춘방사령 명보에게 친히 주며 말한다.
"너 같은 충복은 세상에 드물다. 특별히 주는 술이니 큰 상으로 알고 마시어라. 그리고 이제 나는 세자를 면했으니 춘방도 내 춘방이 아니다. 따라서 네 직책도 면하게 되었다. 너도 나처럼 자유스럽게 살아라."
명보는 양녕이 내리는 술잔을 받들어 꿀꺽꿀꺽 마시고 두 주먹으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는다.
"소인이 춘방사령을 면할지언정 어찌 세자마마를 아니 모시오리까.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넋으로라도 모시오리다."
명보의 말을 듣자 만좌는 모두 다 가슴을 울먹였다. 명보의 소박하고 충직한 대답에 모두 다 감동이 되어 가슴을 울먹이고 있을 때 대문간이 또 소란스러웠다. 명보가 뛰어 내려가 보니 대궐 안에서 칙사가 또 나왔다는 것이다.
"웬놈의 칙사가 이리 많이 나오는지, 또 나왔다 합니다."
명보는 투덜대며 아뢴다.
"들어오시게 해라."
양녕은 명을 내리고 뜰로 내려가 칙사를 맞이했다. 칙사는 홍보에 싸 가지고 나온 칙지를 펴서 읽는다.
'폐세자된 이유를 종묘에 고하여 봉고제를 올려야 할 것이다. 폐세자는 빨리 세자의 관면으로 정장하고 봉고제를 거행하라.'
양녕은 칙사의 읽는 소리를 듣자 불끈했다. 콱하고 분기가 가슴으로 치밀었다. 칙사는 칙지를 다 읽자 칙지를 양녕한테 전하려 했다. 양녕은 읍하고 칙지를 받지 아니했다.
"칙사, 황공하오나 군명을 받지 못하겠네. 종묘의 봉고제는 전하께서 드리실 일이지 폐세자된 내가 드릴 일이 아닐세."
양녕은 격분된 어조로 말을 계속한다.
"폐세자 당하는 사람이 어찌 '폐세자가 되오' 하고 봉고제를 드릴 수 있나. 폐세자를 하시는 전하께서 '이러이러한 죄상이 세자한테 있어서 폐세자를 합니다' 하고 열성조의 신위가 계신 종묘에 봉고제를 지내시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네. 나로서는 무슨 낯짝을 들고 봉고제를 지낸단 말인가. 돌아가 이 뜻을 전하게 아뢰어주게."
양녕은 말을 마치자 발길을 돌려 청위로 올랐다. 칙사는 난감한 얼굴빛을 짓는다. 도저히 돌아가서 전하께 양녕의 거부하는 말씀을 품달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청 앞으로 가깝게 나가 양녕한테 고한다.
"전하께서 청허해주실 리 만무합니다. 다시 한번 번의하시어 봉고제를 거행해주옵소서."
칙사는 애걸해 빌었다. 양녕은 화를 더럭 냈다.
"폐세자를 당하는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조상한테 봉고제를 지내더란 말인가. 내 죄상을 내가 밝히면서 봉고제를 지내란 말인가? 나는 아무런 죄도 없다. 다만 세자의 자리를 나보다 어진 아우에게 사양해서 넘겼을 뿐이다. 잔소리 말고 돌아가 아뢰라."
양녕은 소리를 높여 칙사를 꾸짖었다. 칙사는 하는 수 없었다. 상 위에 놓인 홍보에 칙지를 싸 가지고 돌아갔다. 먼저 양녕의 군호를 받들고 나왔던 칙사도 틈을 타서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나온 칙사의 뒤를 따라 총총히 돌아갔다. 양녕은 화가 몹시 났다. 명보를 불렀다.
"명보야, 이리 올라와서 나한테 술 한 잔을 따라라."
명보가 청위로 올라가 양녕 앞에 꿇어앉아 술병을 잡고 술을 따랐다. 양녕은 홧김에 술을 단숨에 죽 들이켰다.
"내가 무슨 죄를 조상께 졌기에 나더러 봉고제를 지내란 말이냐. 정신없는 소리다. 순순히 제왕의 자리도 싫다고 내놓는 나보고 왜 봉고제를 지내란 말이냐."
명보가 술병을 놓고 두 손을 썩썩 비비며 말한다.
"잘하셨습니다. 내놓는 세자마마께서 왜 봉고제를 지낸단 말씀입니까. '아무개가 허랑방탕해서 세자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니 하는 수 없이 세자를 폐합니다' 하고 이렇게 봉고문을 낭독할 텐데 옥같이 깨끗하신 마마께서 왜 그 누명을 조상 앞에 당하신단 말씀입니까.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종묘에 아니 나가신다고 잘 말씀하셨습니다."
양녕은 명보의 처사 잘했다는 기리는 말을 듣자 마음이 흡족했다.
"마음을 아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로구나. 옜다, 술이나 한잔 마시어라."
양녕은 대백을 들어 명보한테 넘겼다. 명보는 황송했다. 두 손으로 양녕이 내리는 술잔을 받들었다.
"이제는 세자가 주는 술이 아니다. 양녕이 주는 술이니 마음 놓고 마시어라."
양녕은 친히 술병을 잡고 가득히 잔에 붓는다. 명보는 술 한 사발을 받아 들고 한마디 한다.
"소인은 죽어도 세자마마로 생각하옵고 세자마마라 부른다고 아까도 아뢰었습니다. 폐세자가 되셨다고 마음을 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명보는 말을 마치자 한 사발 술을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켰다.
"자아, 너희들 악공과 기생들은 나를 위하여 풍악을 아뢰어라."
양녕은 세자빈을 돌아보며 말한다.
"여보 부인, 얼마나 내가 자유스럽소. 전 같으면 전하께서 하라 하시는 대로 꼭 해야만 했을 것인데, 한번 배짱을 부리고 봉고제를 아니 지내겠다고 거부했으니 내 팔자가 이제는 무던하지 아니하오. 하하하."
양녕은 거나하게 취했다. 호기가 만장이었다. 빈은 고개를 숙여 대답이 없다. 양녕은 빈의 옆에 있는 어리를 향하여 말한다.
"내 팔자가 어떠하냐?"
"좋습니다."
어리는 조신하게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이때 대문이 또 한 번 소란했다. 명보가 뛰어 내려갔다. 대문 편으로 향했다. 수문 군사가 말한다.
"칙사가 또 나오십니다."
"칙사가 또 나오셨다? 웬 칙사가 이리 잦으냐?"
명보는 한마디 하고 사랑으로 뛰어 들어갔다. 양녕께 아뢴다.
"칙사가 또 나왔다 합니다."
거나하게 취한 양녕은 옷깃을 매만지고 뜰 아래로 내려섰다. 양녕 부인과 어리가 뒤에 따랐다. 어리는 칙사를 대할 자격이 없지만 부인이 뜰로 내리니 안연히 청위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림자같이 부인의 뒤에 숨어 있었다. 양녕은 또 무슨 칙사인가 하고 사랑으로 들어오는 칙사를 맞이했다. 칙사도 양녕의 읍례에 대답하면서 자리를 깔아놓은 뜰에 서서 양녕을 향하여 교지를 폈다.
"전교를 낭독하겠습니다. 받들어 들으시옵소서."
양녕은 자세를 바로 하여 칙사의 교지 낭독을 기다렸다.
'폐세자 양녕대군을 광주로 추방한다.'
허리를 굽혀 칙사의 교지 낭독을 듣고 섰던 양녕은 거나한 술기운이 일시에 확 깼다. 다음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세자궁을 내놓고 광주로 가라는 뜻이다. 그대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쫓아 보내는 것이다. 양녕은 거나한 술기운이 확 깨며 야속하다는 생각이 났다. 자기 자신은 세자가 되고 싶지 아니했다. 일부러 세자를 내놓기 위하여 양광의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태종은 최후까지 자기의 본마음을 몰라주었다. 슬픈 감정이 온몸의 혈관으로 쫙 펴졌다. 아버지 태종은 자기가 폐세자가 되었다고 무슨 반란이나 일으킬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귀양살이하듯 광주로 쫓아보내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두 눈에 눈물이 화끈하게 솟았다. 순간 양녕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입술이 터졌다. 모세관이 터졌다. 빨갛게 피가 입술 위로 솟았다. 솟아나던 누선의 눈물이 콱 멎었다. 입술이 터지는 아픈 감각에 아찔하고 슬펐던 감정이 안개 슬 듯 스러졌다.
"나가지요. 세자궁을 내놓겠소."
비장하게 한마디를 했다. 옆에서 칙사의 교지 읽는 소리를 듣고 섰던 양녕 부인도 깜짝 놀랐다. 정신이 아뜩했다. 그대로 세자궁을 내놓으라 해도 섭섭한데 '추방'이란 두 글자를 읽는 소리는 마치 새파란 비수로 가슴 한복판을 에어내는 듯했다. 양녕 부인은 쓰러질 듯 몸을 가누지 못했다. 옆에 섰던 어리가 얼른 양녕 부인의 몸을 부축했다. 명보가 칙사 앞으로 썩 나섰다. 칙사를 향하여 큰소리로 외친다.
"아니, 여보시오 칙사님, 우리 세자마마께서 무슨 죄가 계시기에 광주 시골로 내쫓는단 말씀요?"
명보는 칙사 앞에 손을 들었다. 주먹질을 했다. 상앗대질이 나왔다.
"칙사, 대답을 좀 해보시오!"
성난 범같이 날뛰었다. 양녕이 소리쳐 꾸짖는다.
"이놈, 무엄한 놈. 언감생심 일개 춘방사령이 감히 칙사 앞에서 야료를 치느냐. 저리 물러가거라."
명보는 주인 상전의 꾸지람도 듣지 아니했다. 이번엔 목을 놓아 통곡하며 칙사 앞에 뒹굴었다. 뒹굴며 묻는다.
"도대체 광주가 어느 광주란 말요. 전라도 광주요, 경기도 광주요?"
양녕은 다시 소리쳐 꾸짖는다.
"그래도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칙사도 사람이었다. 세자의 충복 명보의 소박한 충심에 감동이 되었다.
"경기도 광주일세."
부드럽게 대답했다. 명보는 '경기도 광주'라는 말을 듣고도 흡족치 아니했다.
"무슨 죄로 우리 세자마마를 광주로 쫓아내오?"
주먹으로 하늘을 찌르는 시늉을 하고 다시 고함친다. 칙사는 난감했다.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아나, 어명이신 것을-."
이때 양녕은 청을 높에 수문 군사를 불렀다.
"명보를 아랫사랑으로 내쫓아라."
문 지키는 군사들이 명보의 등을 밀어 아랫사랑으로 끌어냈다. 명보는 몸부림을 치며 끌려나갔다. 양녕은 칙사를 향하여 웃으며 사과한다.
"칙사 앞에 내 하인이 너무나 무례한 짓을 해서 죄만스럽게 한량없소. 나는 어명을 받들어 광주로 나가리다. 들어가 상감께 이 뜻을 아뢰시오. 그리고 내 하인의 철없이 떠든 죄를 칙사는 용서해주오."
"제 어찌 대군을 허물하오리까. 춘방사령은 충직한 사람이올시다. 절대로 이 일을 어전에 품달치 않겠습니다."
"대내에 들어가거든 양녕은 승순해서 내일 광주로 나간다고 아뢰시오. 새 세자가 났으니 세자궁을 내놓는 것은 천만 번 당연한 일이라고 양녕이 아뢰더라고 어전에 품달하오."
"고맙소이다. 저하의 지덕은 온 조정의 숭앙하는 바입니다."
칙사는 웃으며 대답하고 대궐로 돌아갔다. 춘방사령 명보의 울음소리는 아랫사랑에서 그치지 아니했다. 세자의 풍악을 잡히던 연석은 흥이 깨져버리고 가객들은 흩어졌다.
이때 광주 추방 명령은, 셋째 번 칙사가 나온 후에 양녕이 폐세자 봉고제를 거부하자 태종은 크게 노하여 광주 추방 명령을 내린 것이다. 태종은 종묘에 페세자 봉고제를 지내서 조상께 폐세자하는 연유를 고한 다음 대궐 안에서 폐세자하는 예식과 새로 입세자하는 예식을 만조백관 앞에서 거행하려 했던 것이다. 폐세자하는 봉고제를 지내려면 먼저 조상의 신위 앞에 양녕의 죄상을 밝혀서 폐세자하는 이유를 천명해야 하고, 폐세자하는 의식을 대궐 안에서 거행하려면 만조백관의 앞에서 양녕의 죄상을 밝혀야만 하는 것이다. 이같이 한다면 양녕은 죄인이 되어 조상 앞에서 세자의 옷을 벗어야 하고, 만조백관 앞에서 수죄하는 것을 당한 후에 세자는 관면을 벗고 궁문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녕은 이것을 거부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세자의 자리뿐 아니라 임금의 자리까지 싫어서 세자의 지위를 은근히 충녕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첫 번째 내린 군호 그대로 부귀영화를 사양해서 편안히 지내기를 희구하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아무런 죄도 진 일이 없다. 하늘에 대하여 두려울 것이 없고 땅에 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더구나 사람에게 대해서 추호도 면난스러울 것이 없다!'
이러한 생각이 양녕의 머리에 가득했다. 이리하여 양녕은 마침내 종묘에 봉고제를 친히 지내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태종은 대로했다. 곧 정승 황희를 불러 붇는다.
"폐세자가 끝끝내 완패하여 종묘에 봉고제 지내는 것을 거부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소. 이 일을 장차 어찌 처리하면 좋겠소?"
황정승은 한동안 고개를 숙여 대답이 없다가 목소리를 나직하게 하여 아뢴다.
"전하께오서 진노하시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올시다. 그러하오나 또한 부자지간의 은정이 누구보다도 못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군호를 기왕 양녕이라 내리셨습니다. 폐세자는 전하께서 내리신 군호에 대하여 만족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봉고제는 폐세자 자신이 지내게 하지 마시고 전하께오서 대전관을 보내시어 폐세자하는 사유를 조종고에 봉고하시는 것이 좋은 방편일까 합니다."
"그렇다면 봉고제를 과인이 지내란 말인가?"
"네, 그러하오이다. 폐세자를 하시는 일은 전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폐세자를 당하는 사람이 봉고제를 아니 지내도 조상께서는 알아주실 것입니다."
황희는 모나지 않고 둥글게 말씀을 올렸다. 태종은 다시 황정승한테 묻는다.
"과인의 생각에는 폐세자가 종묘에 봉고제를 지낸 후에 대궐로 들어와서 만조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폐세자식을 하고 다음에 새 세자의 입세자 예식을 거행하려 했는데, 이제 폐세자가 종묘에 봉고제를 아니 지낸다 하면 궐내에서 거행하는 폐세자식과 입세자식에 다 함께 나오지 않는다고 거부할테니 어찌 처리하면 좋겠소. 경의 의견을 말하오."
전하의 하문하는 말씀을 듣자 황정승은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아뢴다.
"삼가 아뢰오. 성덕은 물이 흐르듯 순하게 민초 위에 흘러야 합니다. 더구나 페세자와 전하의 사이는 부자지간이십니다. 신이 생각하옵건데, 폐세자는 말할 것도 없이 허랑방탕한 일로 전하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여 오늘날 폐세자가 되었습니다마는, 그는 항상 세자의 자리를 어진 아우들에게 사양하기 위하여 일부러 방탕한 행동을 취한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이 뜻을 짐작하시와 폐세자의 마음을 물이 흐르듯 순하게 처리해주시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합니다. 세자를 페하는 일은 전하께서 일전에 이미 만조백관 앞에 천명해서 밝히셨습니다. 만조백관 앞에 다시 또 폐위된 세자를 불러내어 폐세자 예식을 거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도리어 세자한테 욕을 주는 듯한 혐의쩍은 일이올시다. 새로 세자가 되시는 대군의 입세자하는 예식만 거행하시고 폐세자하시는 의식은 제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태종은 황정승의 물 흐르듯 순하게 처리하라는 말에 얼마쯤 노기가 풀렸다.
"그렇다면 경의 말에 의하여 종묘의 봉고제는 과인이 대전관을 보내서 지내기로 하고 조정에서 거행하려던 폐세자식은 제례하기로 하리라."
황정승은 다시 태종의 노기를 풀게 하기 위하여 부드러운 말씨로 아뢴다.
"폐세자도 전하의 참뜻을 알게 되는 날 감읍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전하는 다시 황희한테 묻는다.
"앞으로는 폐세자를 동궁에 거처케 할 수는 없다. 어찌하면 좋을꼬?"
"당연한 분부십니다. 세자가 아닌 이상 폐세자가 어찌 동궁에 거처합니까. 따로 왕자의 궁실을 정해주시는 것이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좌우간 폐세자는 명분상으로 죄를 얻은 사람이다. 죄인에게 곧 궁실을 줄 수는 없다. 시골로 보내서 개과천선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황희는 더 양녕을 두둔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태종의 의사에 찬동했다. 이리하여 양녕은 광주로 추방하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광주로 추방 명령을 받은 양녕은 곧 연회를 파하고 철상을 시킨 후에 명보를 불렀다. 바깥사랑으로 나가서 몸부림을 치며 통곡하던 명보는 상전 양녕의 부름을 받고 눈물을 두 손으로 닦고 양녕 앞에 나타났다. 양녕은 껄걸 웃으며 명보를 바라본다.
"상제보다 복재기가 더 설워한다더니 너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나는 멀쩡한데 너는 어찌 그리 슬퍼하느냐."
양녕의 말을 듣자 명보는 또 한 번 목을 놓아 흐느껴 운다. 양녕이 꾸짖는다.
"이 못난 놈아, 무엇이 그리 슬프냐. 나는 좋기만 하다. 생각해보아라. 내 신세가 얼마나 자유스러우냐 말이다. 훨훨 백구처럼 거침없이 푸른 하늘 한복판으로 날아가는 듯한 자유스런 몸이 아니냐. 보아라, 흰구름장이 둥둥 떠가듯 구만리 장천으로 날아가는 몸이 아니냐. 그까짓 동궁이 다 무엇이냐. 막천석지했으니 하늘 땅이 다 내 것이요, 청풍명월은 돈 한 푼 안 주고 다 살 수 있는 내 것이다. 부귀가 다 무어냐. 뜬 구름장이로구나. 강변에 고기 낚고 산간에 나물캐서 한평생을 자족할 테니 이런 행락이 또다시 어디 있겠느냐. 자아, 울지 말고 나하고 광주로 나갈 짐을 차리기로 하자."
명보는 자꾸 울어서 대군의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이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눈물을 씻고 아뢴다.
"폐세자가 되시어 광주로 가시는 길에 이까짓 말씀을 드려야 별수 없습니다마는 동궁의 세간 집물을 모두 다 짐 싸 오리까?"
양녕이 껄걸 웃으며 대답한다.
"거추장스럽게 짐은 다 싸서 무엇하느냐. 세간 집물은 다 그대로 두어라. 내 대신 올 동궁이 써야 할 것 아니냐. 내가 가지고 갈 것은 거문고 한 채와 푸른 나귀 한 필뿐이다. 그리고 가다가 강물이 출렁출렁 흐르는 곳에 낚시를 드리울 곳이 있을 것이다. 낚싯대 하나는 실어라."
"내행은 어찌하십니까?"
"군부인과 어리는 함께 가야 한다. 군부인과 어리가 걸어갈 수야 있느냐. 군부인은 가마를 타고 가시게 하고 어리는 말을 태워서 가게 하자. 그리고 너희 내외도 함께 가자."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러하옵고 광에 있는 쌀이며 간장과 된장이 있는 장독들은 어찌합니까?"
양녕은 또 한 번 껄걸 웃는다.
"실없는 놈이로구나. 내 아무리 폐세자가 되어 광주로 간다 하늘 간이 없어 밥을 못 먹고 쌀이 없어 너희들을 굶기겠느냐. 홀가분하게 죽장망혜로 떠나자꾸나."
명보는 대군의 명령을 거역할 길 없었다. 대문밖에 나귀 한 필, 말 한 필, 가마 한 채를 대령해 놓았다. 나귀와 말에는 부담농을 좌우편에 실었다. 양녕이 탈 것은 나귀요, 어리가 탈 것은 말이요, 군부인이 탈 것은 가마다. 부담농에 담은 것은 당장 갈아입을 옷가지 몇 벌이 들어 있을 뿐이다. 부담농을 실은 나귀 등에는 다시 거문고 한 채와 낚싯대를 옆으로 꽂았다. 명보는 나귀 뒤를 쫓고 명보 아내는 군부인의 가마채를 잡고 가기로 했다. 명보는 나귀와 가며며 말을 문밖에 준비해놓고 동궁 사랑으로 들어가 대군께 고한다.
"나귀와 가마며 말을 등대해놓았소이다."
양녕은 명보에게 명한다.
"안에 가서 내 의관을 내오라 일러라."
시녀들이 양녕의 의관을 받들어 내왔다.
갓은 통영제 은조사 싸개에 윤이 번질번질 흐르는 진사립이요, 탕건은 인모다. 도포는 한산 세모시에 옥색을 들였고, 신은 발막 자줏빛 신을 내왔다. 양녕은 껄걸 혼자 웃은 후에 시녀에게 말한다.
"시골로 가는 폐세자된 몸이 인모 탕건에 진사립이 웬일이며 자주 발막신이 당키나 하냐. 안에 가서 부인께 여쭈어라. 갓은 포립으로 하고 도포는 베도포를 내놓으시라 해라. 그리고 시골서 발막신을 신을 수 없다. 미투리를 달라 해라."
시녀는 대군의 말씀을 듣고 황황히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 양녕께 아뢴다.
"동궁으로 계신 때문, 안에는 포립이 없사옵고 미투리도 없다 합니다. 다만 있는 것은 베도포뿐이라 하옵니다."
양녕은 껄걸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동궁에 포립이며 미투리가 있을 리 없다."
말한 후에 명보를 불렀다.
"너 종로에 나가서 포립 한 개와 말총으로 짠 탕건과 미투리 한 켤레를 사 가지고 들어오너라."
"미투리는 무엇에 쓰시고 포립은 누가 쓰실 것입니까?"
"내가 쓰고 내가 신겠다."
"세자마마께서 포립을 쓰시고 미투리를 신으신단 말씀이오니까. 도섭스러우십니다."
"잔소리 말고 어서 사 오너라."
"아뢰옵니다. 마마께서는 비록 세자 자리를 내놓으셨다 하나 나라의 장남이신 대군이십니다. 대군께서 어째 포립을 쓰시고 미투리를 신으신단 말씀입니까. 아니 되십니다. 남이 보면 웃습니다."
"이놈아, 남 위해서 사는 내가 아니다. 자유스런 내 몸이 자유스럽게 행동을 하는데 누가 나를 만류할 테냐. 빨리 가서 사 오너라."
명보는 하는 수 없었다.
갓전에 나가 포립과 탕건을 사고 황화방으로 가서 미투리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양녕은 소원대로 베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말총 탕건에 포립을 썼다. 미투리에 노끈을 묶고 지팡이 한 개를 들고 나섰다. 명보를 바라보며 웃는다.
"어떠냐, 내 모양이?"
"영락없는 촌서방님입니다."
"이놈아, 물외한인의 자세가 아니냐. 하하하."
"좋습니다."
세자는 사랑 중문을 거쳐서 대문으로 향했다.
세자를 전별하기 위하여 동궁 소속의 내시와 하인들이 백절치듯 모여 있었다. 양녕은 대문 밖으로 나섰다. 한 손에 채찍을 들고 상마석 위에 우뚝 섰다. 앞에는 부담농에 거문고를 매달아놓은 당나귀가 '어흥' 소리를 치고 있고, 옆에는 조그마한 제주 말이 등에 실은 부담농짝이 무거운 듯 네 발을 허우적거리고 있고, 그 옆에는 보교 한 채가 놓여 있었다. 세자의 행차로는 말할 나위도 없이 초라하지만 대군의 행차로도 쓸쓸하기 한량없었다. 양녕은 채찍을 높이 들어 명보에게 분부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마는 갈 길이 바쁘다. 부인과 어리를 나오시라 해라."
명보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때 동궁빈은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눈물을 머금고 대청 분합 툇마루 끝에 서 있었다. 그는 밖에서 양녕이 부르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시집와서 곧 옮겨온 동궁을 이별하고 광주 시골 구석으로 내려가는 신세다. 여기다가 아버지 김한로는 어리의 사건으로 인해서 벼슬이 떨어져 귀양을 가고 없었다. 세자빈은 감창한 회포를 금할 수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뒤에는 어리가 얼이 빠진 듯 얼떨떨해 서 있고 그 뒤에는 명보의 아내 봉지련 어미가 모시어 있었다. 명보가 들어왔다. 세자빈의 눈물어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찡했다. 코뿌리가 시큰하며 명보의 눈에 눈물이 화끈하고 솟았다. 그러나 세자의 분부를 아니 전할 길 없었다.
"세자마마께서 어서 떠나시자고 나오시라 하십니다."
명보는 목이 메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 세자빈은 언제나 조신했다. 눈물을 거두고 댓돌로 내려섰다. 세자빈도 양녕의 뜻을 받느라고 수단신을 신지 아니하고 왕골 짚신을 신었다. 어리도 뒤를 이어 짚신을 신고 내려섰다. 명보의 아내 봉지련의 어미가 행주치마로 흐르는 눈물을 씻고 내려섰다. 안 중문을 거쳐서 대문 밖으로 나섰다. 양녕은 일부러 드높게 껄걸 웃는다.
"내 덕에 부인께서 시골구경을 다 하게 되셨구려. 하 하 하. 남편 덕이 크외다. 자아, 부인께서는 가마를 타시오."
양녕은 부인의 손을 이끌어 가마 위로 오르게 했다.
"다음에 어리 너는 말을 타거라. 약방기생으로 있을 때 좋이 말을 타보았을 것이다."
양녕은 부인을 가마에 태운 후에 어리를 말 위로 앉게 했다. 부인과 어리를 태운 양녕은 선뜻 상마석에서 당나귀 위로 올랐다. 당나귀는 '어흥' 소리를 치고 석양 비낀 볕 위로 바람을 끊어 달린다. 명보는 당나귀의 견마잡이가 되고 봉지련의 어미는 동궁빈 김씨의 가마채를 잡고 종종걸음을 걸어 나갔다. 나귀와 가마와 말이 창덕궁 앞 파조교 다리를 지났다. 양녕은 선뜻 당나귀 등에서 내렸다.
"왜 내리십니까?"
명보가 묻는다.
"여기가 파조교 다리가 아니냐?"
"네, 그러합니다."
"내 몸이 비록 폐세자가 되어 광주로 추방을 당하여 가는 몸이지만, 어찌 차마 부모를 잊을 수 있느냐. 동관 대궐을 향하여 멀리서나마 하직하는 인사를 고하려 한다."
양녕은 말을 마치자 북편을 향했다. 자리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땅에 엎드려 돈화문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아바마마, 소자는 명대로 광주로 갑니다. 크나큰 짐을 덜어주시어 어깨가 거뜬하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노하셨는지 모릅니다마는 소자는 이제 세자의 책임을 내놓아서 소원성취했습니다. 이제 더 말씀 아뢸 것이 없습니다. 아바마마, 강녕하옵소서."
양녕은 부왕을 마주 대하듯 입안의 말로 웅얼거렸다. 세자빈은 대군이 창덕궁을 향하여 요배드린다는 말을 듣자 안연히 가마 속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봉지련 어미의 부축을 받고 가마에서 내려 대군의 뒤에 서서 대군이 절을 하는 대로 따라서 절을 올렸다. 어리도 대군이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는데 마상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급히 말에서 내려 봉지련의 어미와 함께 부인의 뒤에 서서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양녕은 다시 창덕궁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어마마마, 불효자 양녕은 지금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광주로 쫓겨 가는 길이올시다. 어머니께서는 소자를 위하여 무한 근심하시고 무한 염려해주셨습니다. 지금 떠나는 길에 의당 하직을 고하고 가야만 도리에 맞을 일이오나 소자는 쫓겨 가는 죄인의 몸이옵니다. 들어갈 길 없사와 그대로 이곳 파조교 다리에서 멀리 어마마마를 향하여 하직을 고합니다. 어머니, 지나간 일은 다 말씀드리지 아니하렵니다. 외갓집 일도 다 말씀하지 않겠습니다. 어머니를 폐비하려던 그 기막힌 사건도 다 말씀드리지 아니합니다. 새로된 세자는 가희아의 아들이 아니고 다행히 소자의 동기요, 어마마마의 친아들입니다. 일을 바로잡기 위하여 소자도 무한 애를 썼습니다마는 황희 황정승의 공이 대단히 큽니다. 어머님을 폐위하려는 일을 막아낸 것도 황희 황정승이고, 이번에 세자를 가는 데 기생 출신인 가희아의 아들이 세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 것도 황희 황정승의 공로올시다. 어마마마, 황정승의 공로를 잊지 마십시오. 어마마마, 아우 충녕은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학문을 좋아하고 인품이 너그럽고 인자합니다. 질서 없는 난마 같은 정치 위에 한 가닥 광명과 공덕을 끼칠 것입니다. 잘하면 중흥 지주가 될 것입니다. 잘 보호해주옵소서. 그러면 만수무강하옵소서."
양녕은 이번엔 어머니를 향하여 요배하면서 독백을 드렸다. 양녕의 독백을 듣고 서 있는 대군부인 김씨의 눈에 눈물이 안개 일 듯 서리기 시작했다. 명보의 눈에도 눈물이 넘쳐 흘렀다. 떨어지는 눈물을 두 주먹으로 닦았다. 양녕은 대궐을 향하여 하직을 고한 후에 뒤에 서 있는 명보를 돌아다보았다.
"가자."
간단한 한 마디를 내렸다. 그렇게 너털웃음을 항상 웃던 양녕의 얼굴빛은 근엄하고 엄숙했다. 양녕은 나귀 등으로 오르고 대군 부인과 어리는 제각기 가마와 말을 탔다. 일행은 또다시 앞을 향하여 나갔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일행이 일찍이는 일국의 왕세자요, 지금은 폐세자가 되어 광주로 추방되는 양녕대군의 일행인 줄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양녕은 포립에 베도포를 입고 미투리를 신었고, 대군 부인은 평민이 타는 보교에 무명 소복을 입고 짚신을 신었다. 구종별배도 없었다. 누가 보나 대군이나 대군 부인의 행차인 줄 알 까닭이 없었다. 어떤 싱거운 시골 작자가 대궐 궐문 밖도 아니요, 궐문 밖에서 한 마장이나 떨어져 있는 한길 한복판에서 자리도 아니 깔고 절을 하나하고 우스꽝스러운 눈으로 비웃으며 지나갔다. 일행이 파조교 다리를 지나서 동대문을 향하고 나갔을 때 왼편으로 푸른 숲이 우거진 일대가 눈앞에 보였다. 북편으로 붉은 칠을 한 삼문이 은은히 비쳤다. 양녕은 나귀에서 선뜻 내렸다. 이제는 명보도 짐작했다.
'종묘에 하직을 고하시려는 것이다.'
명보는 이같이 속으로 생각하고 얼른 당나귀 고삐를 잡고 양녕을 부축해 내렸다. 봉지련의 어미가 가마를 향하여 소곤댄다.
"대군께서 또 내리십니다."
대군 부인도 이 근처가 종묘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곳이 종묘 근처냐?"
"네, 그러합니다. 바로 종묘 앞이올시다."
"가마를 멈추어라. 나도 내려야 하겠다."
대군 부인이 봉지련 어미의 부축을 받고 가마에서 내렸다. 어리는 영문을 모르고 말에서 내렸다. 양녕은 종묘 대문을 향하여 경건한 모습으로 사배를 드렸다. 부인도 대군의 등 뒤에서 사배를 드렸다. 어리는 비로소 이곳이 이씨네 조상들의 신위를 모신 종묘인 줄 알았다. 감히 이곳에 자기로서는 절을 올릴 자격이 없는 것을 알았다. 봉지련의 어미와 함께 멀리 떨어져서 대군과 대군 부인이 요배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녕은 종묘 대문을 향하여 경건하게 사배를 마친 후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고한다. 아버지 태종이 폐세자 봉고제를 지내라고 한 그 제사를 대신해서 고하는 것이다.
'소손 제는, 감히 열성조 여러 신위께 돈수백배하옵고 고하나이다. 소손이 외람되이 큰아들 된 차서로 인하와 세자의 대명을 받든 이래 철이 들지 아니했을 때는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러하오나 점점 철이 나서 학문을 연구하고 도의와 예절을 배우고 보니 국가의 역성과 정권의 쟁탈이며 심지어는 부자상극, 골육상잔하는 길까지 가지 아니하면 왕권을 누릴 수 없는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이 전제의 위압과 방종은 마침내 건국의 내조를 가진, 공훈이 개국 공신이나 정국공신보다도 더 큰 조강지처를 내치려는 폐위론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아아, 슬프오이다. 어찌 한심치 아니하오리까. 뿐 아니라 정치의 모략과 정권쟁탈의 가열한 행동은 세자라는 소손의 주위를 둘러싸고 허위와 가선과 교활이 국제적으로까지 번져서 안팎으로 낭패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장래의 국모감으로 정했던 동궁빈을 폐리같이 버리라 강요해서 하마터면 오월비상의 쓰라린 운명을 지어낼 뻔했습니다. 뿐이오니까. 이러한 정권쟁탈의 부정, 불의의 소용돌이는 마침내 개국 공신이요 정국공신인 소손의 외가를 멸망케 만들었습니다. 이 어찌 한심치 아니하오리까. 소손의 생리와 학문을 연마한 지성으로서는 도저히 이 부패하고 멸륜된 정치의 주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항상 큰아버지 진안대군이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다가 돌아가신 그 심경을 존경하고 숭배했던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소손은 일개 왕자가 아니라 천하가 인정하고 국민이 알아주는 장래의 임금감인 세자였습니다. 왕자는 홀가분하게 고사리를 캐먹으러 수양산으로 달아나도 좋지만 왕세자는 산중으로 달아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와 소손은 스스로 자포자기하는 반칙의 행동을 취했습니다. 아니 마시던 술을 마시었습니다. 동궁에 오입쟁이 가객들과 기생들을 불러서 놀았습니다. 가지가지 풍파를 일으켰습니다.'
양녕은 아뢰는 말을 마치자 눈에 눈물이 소리 없이 쏟아졌다. 양녕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다시 하소연을 한다.
'세자의 지위를 내놓기를 소원했던 때문이올시다. 결국은 남의 소실 어리를 소실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이 일이 발단이 되어 폐세자의 선언을 받고 광주로 추방이 됩니다. 말씀드린다면 소손의 대원이 이제는 성취되었습니다. 어제부터 왕은 열성조 신위 앞에 수죄하면서 폐세자된 봉고문을 조종께 올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소손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소손은 죄인이 아니라는 관념이 머리에 가득 찬 때문이올시다. 삼가 아뢰옵니다. 소손은 이제 자유의 몸이올시다. 굽어살피시옵소서.'
양녕은 종묘 대문을 향하여 엎드려 절하며 독백을 마쳤다. 엎드려 있는 양녕의 눈에 또다시 더운 눈물이 쏟아졌다. 두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씻었다. 일행은 모두 다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곳에서도 이상한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일행이 폐세자 양녕인 것을 알아본 행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양녕은 다시 종묘를 향하여 사배를 드린 후에 명보의 끌어대는 나귀 위에 올랐다.
동대문이 보였다. 일행은 동문으로 향하여 나갔다. 동문 밖으로 나가 복차다리 앞에 당도했다. 복차다리는 왕십리로 나가는 길과 망우리로 나가는 중간 갈림길에 있는 다리다. 일행이 복차다리 앞에 당도했을 때 오륙 명의 건장한 한량패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양녕대군이 내행을 거느리고 나귀 타고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자 길 위에 너부죽이 엎드려 절을 했다. 명보가 누구들인가 하고 앞질러 나가 살펴보니 양녕이 평소에 항상 돌봐주었던 활 잘 쏘고 택견 잘하는 장사패들이었다. 명보는 반가웠다.
"자네들 웬일인가?"
"세자께서 광주로 행차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사와 전송을 나온 길이올시다."
나귀에 앉은 양녕은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너희들 수고하는구나."
미소를 지어 인사를 받았다. 장사패들이 살펴보니 아무리 폐세자라 하나 행차가 너무나 초솔했다. 양녕은 당나귀를 타고 양녕 부인은 평민이 타는 퇴색된 가마를 탔다 구종별배도 없었다. 양녕이 탄 당나귀를 끄는 마부 한 명에 명보가 뒤를 따랐을 뿌닝요, 나머지는 교군군과 어리의 말을 끄는 마부뿐이다. 세자는 그만두고 대군의 행차라 할지라도 이같이 초솔하고 쓸쓸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호위하는 군사 한 명도 없다. 장사패들은 의분을 느꼈다.
"세자는 그만두고라도 대군의 행차가 이럴 수가 있나."
"종친부 작자들은 다 무엇들을 하는 거야."
"야박한 세상이로군."
서로들 수군댔다. 한 사람이 발론한다.
"여보게, 세자마마의 행차를 뵈니 기가 막히네그려. 세상인심이 어찌 이리 박정하단 말인가. 비록 폐세자가 되셨다 하나 어엿한 대군 행차가 아니신가?"
장사패 중 또 한 사람이 말한다.
"그렇고말고. 군도 아니요 대군이신데, 대군 행차에 구종별배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아니되는 소릴세. 우리들이 애당초 나온 것은 가시는 길에 전송을 하러 나왔던 것이지만 이제 이 쓸쓸한 행차를 뵙고 그대로 작별인사만 여쭙고 되돌아갈 수는 없네. 나선 김에 아주 광주까지 모시기로 하세."
"좋은 말일세."
여러 장사패들은 여출일구로 대답했다. 명보와 양녕은 장사패들의 의향을 알 까닭이 없었다. 명보는 장사패들의 의향을 모르고 멀리 나와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용하게 소문 듣고 시각을 맞춰서 잘 나왔네. 세자마마께서도 자네들의 깊은 정을 잊지 아니하실 것일세."
명보는 어떠한 박해가 올지라도 양녕을 세자마마라 부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양녕이 나귀 등에 앉아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장사패들을 향하여 멀리 전송나온 일을 치사했다.
"옛정을 잊지 아니하고 이같이 나와서 작별을 해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나도 너희들의 정을 길이길이 폐부 속에 간직해서 한평생 잊지 아니할 것이다. 옜다, 약소하다마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막걸리나 한 사발씩 사 마시어라."
양녕은 소매 속에 서리서리 감아두었던 엽전 꾸러미를 꺼내 장사패들에게 내주었다. 장사패 한 사람이 양녕이 주는 엽전을 받지 아니하고 아뢴다.
"소인들 아룁니다. 소인들이 처음 나올 때는 세자마마께서 광주로 행차하신다는 말씀을 듣자옵고 서운한 마음 금할 길 없사와 전송차 나왔던 길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와서 가시는 행차를 뵈오니 너무나 홋홋하고 쓸쓸하신 행차십니다. 구종별배 한 명 없고 호위 군사 한 사람 없으니 어찌 한심한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저희들끼리 서로 의논해서 공론이 정해졌습니다. 광주까지 모시기로 합심이 되었습니다. 막걸리는 뫼시고 가다가 마시겠습니다. 도로 간수하시옵소서."
"좌우간 술값은 받아두어라. 받은 후에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
양녕은 엽전 꾸러미를 내준 후에 다시 말을 계속한다.
"내가 너희들한테 내 심경을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는 대자연 속에 아무 거리낄 것 없이 유유자적하게 노는 일개 야인이다. 명칭은 대군이라 하나 이것도 나의 원이 아니다. 그대로 한 사람 야인이 되어 강산풍월 속에 막천석지하고 놀 것이다. 보아라, 내 의복 차림을 포립에 포의로 차리고 미투리를 신지 아니했느냐. 이러한 평민이 구종별배가 다 무엇이며 호위 군사가 당치 않다. 거문고 한 틀, 낚싯대 한 자루가 나의 몸을 호위해주는 벗이 될 것이다. 너희들도 그리 알고 있거라. 이제 나는 갈 길이 바쁘구나. 너희들의 고마운 심정을 잘 짐작해 알겠다. 이제 작별인사를 했으니 몸조심들 하고 잘 있거라. 앞으로 연이 있다면 또다시 만나리라."
장사패들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올시다. 저희들은 이미 세자마마를 광주까지 모시고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번의할 도리가 없습니다. 장부일언 중천금인데 마음이 변할 까닭이 없습니다. 세자마마께서 비록 허락을 내리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희들은 모시고 가겠습니다."
명보가 옆에서 양녕께 고한다.
"할 수 없습니다. 저들의 정성을 막을 길 없습니다. 자유스럽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시옵소서."
양녕도 따라오는 사람들을 더 거절해 막을 도리가 없었다. 더 말하지 아니하고 당나귀를 앞으로 몰고 나갔다. 뒤에는 처음 떠날 때와 같이 양녕 부인의 가마가 따르고, 어리가 탄 제주도 조랑말이 촐랑거리며 나가고, 전송나왔다가 광주까지 호위해 나가겠다는 장사패들이 명보와 한담하면서 양녕을 모시어 나갔다. 길은 복차다리에서 동문밖으로 나가는 대로를 버리고 다리를 지나 수구 문밖으로 나가는 거리를 취했다. 왕십리를 거쳐 살곶이다리를 넘어서 광나루로 향해 나갔다. 광나루 강을 건너서 경안 역말에서 쉬고 광주로 향하려는 것이다. 일행이 복차다리에서 떠났을 때부터 활 한바탕 떠렁진 거리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뒤를 밟아 나왔다. 한 사람은 말을 탔는데 금부도사 비슷한 차림을 했고 그 뒤에는 칠팔 명의 나졸 복색한 자들이 보행으로 따랐다. 처음에 양녕의 일행은 무심하게 보고 넘겨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일행은 복차다리를 지나도 여전히 뒤를 따라오고 살곶이 다리를 건너가도 여전히 똑같은 거리에서 뒤따랐다. 광나루에서 강을 건널 때 양녕의 일행은 배를 탔는데 뒤에 따르던 금부도사는 일부러 다음 배로 강을 건넜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명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자들이 금부의 관원이 아닌가."
"앞에 말을 탄 사람은 금부도사 같고 뒤에 따르는 칠팔 명은 나졸이 분명하오."
장사패 중에 한 사람이 대답했다.
"금부도사는 죄인을 압령하고 나가는 것인데, 죄인은 뵙지 않고 도사와 나졸만 출동을 하니 이상하군."
"글세 말요. 포도 군관이라면 나갈 때나 들어갈 때나 죄인 없이도 갈 수 있지만 금부도사는 죄인을 압령해가는 것이 소임인데 빈손으로 나가는 일은 이상하다고 볼 수밖에 없소."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우리의 뒤를 같은 거리에서 따라오면서 피하는 일이 더 수상하구려. 넉넉히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만한 좌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다음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니 이것이 더 수상하단 말야. 뒤를 밟아서 따라오면서도 아니 밟는 체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점이 더 괴상한 일이거든."
"좀 더 하회를 두고 봅시다그려."
명보와 장사패들은 이같이 의심을 품고 의논이 분분했다. 어느덧 해는 떨어져 땅거미가 쳐졌다. 일행은 광주로 향하여 더 나갈 수가 없었다. 경안 역말에서 하룻밤을 드새기로 했다. 뒤따르던 금부도사인 듯한 일행도 경안 역말에서 더 나가지 아니하고 사처를 정했다. 양녕의 일행이 사처한 주막과 금부도사인 듯한 일행이 사처한 집은 바로 담을 격한 이웃이었다. 양녕은 내행과 함께 안채를 차지하고 명보와 장사패들은 한길에 문이 달린 목로방에 들어 있었다. 저녁 요기를 안채와 주막방에서 각기 마친 후에 장사패들과 명보는 심심파적으로 투전을 하다가 목이 컬컬하니 주막 주인에게 막걸리 추렴을 하여 권커니잣거니 환담하면서 마시고 있었다. 술이 거나했을 때 장사패 한 사람이 슬며시 양녕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세자께서 우리들한테 내리신 돈으로 우리는 흠뻑 막거리를 마시고 있는데 세자마마께서는 촐촐하게 앉아 계시니 미안하기 짝이 없네. 우리 총중으로 나오시라기는 황송하오니 막걸리 한 병을 받아서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나?"
"그것 참 잘 생각했네. 좋은 말일세."
"세자께서 겉으로는 무한 호협하고 활발하시나 폐세자가 되시어 광주로 가시는 길이니 마음이 좋으실 까닭이 있겠나. 막걸리를 걸러서 한 병 들여보내기로 하세."
장사패들은 주모한테 청해서 전국으로 막걸리 한 병을 걸러오라 했다. 이윽고 주막 주모는 막걸리 한 동이를 걸러왔다. 장사패들은 명보를 향하여 말한다.
"자아, 이 술은 명보가 안으로 들고 들어가서 우리의 말씀을 하고 세자께 마시도록 권하게. 말씀은 아니하시지만 얼마나 울적하시겠나. 그저 소례를 대례로 받으시라고 아뢰게."
"아니, 그런데 세자마마께서 막걸리를 잡수실까?"
한 장사가 말참견을 했다.
"세자마마께서는 청탁을 가리시지 아니하시는 분이니 여러분이 바치시는 막걸리를 반갑게 받으시리다."
명보는 장사패들의 의견을 얼른 받아들였다. 명보는 장사패들의 순정이 기뻤다. 곧 전국 막걸리를 주막 주모한테서 받아 들고 희색이 만면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명보 아룁니다."
명보는 퇴창 밖에서 양녕한테 고했다. 양녕은 안에서 세자빈과 어리와 함께 장판도 아니 깐 흙바닥에 돗자를 깔고 누워있었다. 장사패들의 말과 같이 말로는 막천석지를 부르짖고 청풍명월 불용일전매를 호탕하게 예찬하는 양녕이지만, 폐세자가 되어 광주 구석으로 쫓겨가는 그의 심경이 좋을 까닭이 없었다. 거적자리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명보의 '아립니다' 하고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양녕은 벌떡 거적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보냐. 어째 들어왔느냐?"
"막걸리를 한 병 전국으로 걸러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명보는 웃으면서 아뢴다.
"막걸리는 웬 것이냐?"
"밖에서 장사패들이 저하께서 내리신 돈으로 술추렴들을 해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가 저희들끼리만 마시기 어렵다고 주파한테 전국으로 막걸리한 병을 거르라 해서 소인보고 저하께 갖다드리라 해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양녕은 명보의 말을 듣자 얼굴에 가득 웃음이 서렸다. 양녕의 우울했던 마음이 활짝 갠 푸른 하늘같이 맑아졌다.
"밖에서 한량들이 술추렴을 하고 있었더란 말이냐? 멋진 친구들이로구나. 전국 술을 들여보내서 고맙다마는, 무슨 재미로 나 혼자 술을 마시겠느냐. 나가서 함께 마시기로 하자."
양녕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툇마루 밖으로 나갔다.
"이리 다오"
장사패들이 보낸 막걸리 병을 손수 들고 명보와 함께 목로방으로 나갔다. 목로방에서 떠들어대며 술타령을 하고 있던 장사패들은 문을 덜컥 열고 들어서는 양녕을 보자 일제히 일어섰다.
"이 사람들, 잘들 노네그려. 나를 잊지 아니하고 전국 술을 들여보내 주어서 고맙기 그지없네. 그러나 나 혼자 독불장군으로 술 마실 재미가 있단 말인가. 자네들하고 한담하면서 같이 마시기로 하세. 자네들이 보낸 술을 가지고 왔네. 자아, 명보야, 너도 들어오너라."
명보는 양녕의 명을 받들어 목로방으로 들어섰다.
"다아들 앉게나."
장사패들과 명보는 양녕을 중심으로 하여 둘러앉았다. 양녕은 개다리소반 위에 놓인 막걸리 사발을 들어 장사패들이 들여보낸 술병을 기울였다. 젖빛 같은 막걸 리가 철철 사발 위로 넘쳤다.
"고루고루 순배술로 돌리기로 하세."
양녕은 장사패 중에 가장 나이 먹은 사람한테 잔을 권했다.
"이거 황송하옵니다."
장사패는 무릎을 꿇고 돌아앉아 술을 마셨다.
"바로 앉아 마시게. 돌아앉아 마시면 내가 미안하이."
양녕은 사양하는 장사패들을 마주 앉아 마시게 했다. 순배술이 명보까지 돈 후에 양녕은 비로소 장사패들이 권하는 술을 마시며 호탕하게 말을 꺼낸다.
"술은 혼자 마시면 괴롭단 말일세. 그러기에 일고라 했네. 입구자가 하나 아닌가. 혼자 마시면 괴롭단 뜻이지. 다음엔 이단이라 했네. 둘이 마시면 홋홋하단 말일세. 입구자가 둘이 아닌가. 하하하."
"참 그렇습니다. 둘이 마시면 홋홋합니다."
장사패 한 사람이 대답했다.
"다음엔 무엇입니까?"
장사패 한 사람이 묻는다.
"다음엔 삼품일세. 술은 세 사람이 마셔야만 품이 있단 말일세. 입구자가 셋이 아닌가. 세 사람이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는 그 멋은 과연 천하일품의 운치를 가졌단 말일세. 그러니까 나는 자네들이 보낸 술을 도로 가지고 나와서 운치 있게 마시자는 것일세. 하하하. 주가문자가 묘하고 재미있지 아니한가."
"과연 참 그렇습니다. 술은 혼자 마시면 괴롭습니다. 저하께서 이같이 나오시어 저희들과 함께 앉아주시니 술맛은 백 갑절이나 나고 일대의 영광이올시다."
장사패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다시 술잔을 돌렸다. 안주라야 있을 까닭이 없었다. 개다리소반 위에는 짠지 몇 쪽과 장에 담가두었던 풋고추 장아찌가 진미의 안주였다. 서로들 권커니잣거니 마시는 술은 안주가 없으니 더한층 속이 취했다. 모두들 얼근해서 이야기가 한창 고조에 올라 있었다.
장사패 한 사람이 소피 기운이 있었다. 소피를 보려고 덧문을 와락 열고 댓돌 위의 짚신을 신으려 할 때 덧문 밖에서 방 속을 엿보고 있던 괴상한 사람 한 명이 급히 몸을 피하느라고 화다닥 발자취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뛰어 달아났다. 장사패는 어떤 놈이 엿보고 있다가 뛰어 달아나는 것을 보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소피를 보려고 빼놓았던 괴춤을 허리띠에 도로 꽂고 뛰어 달아나는 괴한을 쫓아서 덜미를 후려쳐 잡았다. 원래 기운 센 장사패였다. 무쇠 같은 주먹은 괴상한 자의 옷깃 뒤를 바싹 잡아 추켜들었다.
"이놈아, 무엇하는 놈이기에 엿보고 있었느냐?"
"살려줍쇼."
괴상한 자는 목을 잡혀 끌려가며 애걸했다. 장사의 오른편 손뼉은 나는 듯이 괴상한 자의 뺨을 후려갈겼다. 번갯불이 눈에서 번쩍 났다. 단번에 어금니가 퉁겨졌다. 엿보던 괴한은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장사패는 또 한 번 왼편 뺨을 갈겼다.
"이놈아, 다리 뼈다귀를 분질러놀 테다. 이실직고해라. 무엇을 엿보고 있었으며 너는 무엇하는 놈이냐?"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때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나머지 장사패들과 명보가 밖에서 떠들썩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모두 다 우르르 뛰어나왔다.
"무엇 하는 놈이냐, 근지를 대어라."
먼저 나왔던 장사는 괴한의 뒤꼭지를 버썩 잡은 채 계속해서 묻는다.
"금부 나졸이올시다."
"금부 나졸이 무엇을 엿보았느냐?"
"폐세자의 행동을 엿보았습니다."
"폐세자의 행동을 엿보았어?"
장사패들은 모두 다 의분을 일제히 느꼈다. 장사패들은 불끈 두 주먹을 쥐고 땅을 구르며 덤벼들었다.
"이놈아, 누구의 명령으로 폐세자의 행동을 엿보았느냐?"
장사패의 거센 손뼉은 또 한 번 괴한의 뺨 위로 날았다.
"에구구, 살려줍시오. 금부도사가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행들은 깜짝 놀랐다.
"금부도사가?"
"네, 그러합니다."
서울서부터 수상하게 뒤를 따르던 자가 금부도사의 일행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금부도사가 누구를 감시하라고 했단 말이냐?"
"광주로 가시는 양녕대군을 감시하라 했습니다."
장사패들은 더욱 의분을 느꼈다.
"이놈아, 양녕대군께서 죄인이 아니신데 어찌 감히 감시를 한단 말이냐?"
장사패 한 사람이 또 한 번 나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앞에서 등불이 높이 들려지면서 한 자가 소리치며 나오고 뒤에는 십여 명 나졸들이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어명이다. 나졸을 함부로 치지 마라."
장사패들은 주춤 물러섰다. 바라보니 금부도사다. 장사패 한 사람이 소리치며 내닫는다.
"우리 저하께서 죄인이 아니신데 금부도사의 출동이 웬일이냐?"
"그것은 우리가 알 바 없다. 폐세자를 광주로 추방하니 압령하라는 전하의 어명이 내리신 때문이다. 우리는 폐세자의 뒤를 따른 것뿐이다."
장사패들은 분노가 화산처럼 터졌다.
"우리 세자께서는 스스로 세자의 지위를 내놓으셨는데 추방이란 말이 당치 않고 압령이란 웬 소리냐. 우리 세자께서는 어질고 착하신 성인 같은 분이시다. 네 어찌 감히 압령을 한단 말이냐?"
"압령이니, 추방이나, 내가 알 까닭이 없다. 의금부에서는 다만 위의 명령을 받들 뿐이다."
금부도사의 말이 떨어지자 장사패 중에 괄한 한 사람이 범이 뛰듯이 달려나왔다. 금부도사의 높이 든 등불을 뺏어 땅바닥으로 내던졌다. 버썩 도사의 멱살을 잡았다. 손을 번쩍 들어 도사의 뺨을 후리쳤다. 갓모자가 찌그러지고 갓끈이 떨어졌다. 갓이 굴렀다. 장사패는 도사의 갓을 지끈지끈 밟았다. 직령 옷깃이 쫘르르 찢어졌다.
"이놈, 불경한 놈아. 네 어찌 세자이셨던 대군을 감히 압령한다 하느냐."
장사패는 금부도사의 딴죽을 쳐 쓰러뜨렸다. '에쿠' 하는 외마디 소리가 일어났다. 장사패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금부도사를 짓밟으려 했다. 위기일발이었다. 금부 나졸들은 도사를 구해내려 했다.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장사패들한테로 덤벼들었다. 장사패들은 맨손으로 금부 나졸들을 두들겨주며 쓰러뜨렸다. '와' 소리가 일어났다. 차고, 지르고, 자빠지고,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목로방 앞 큰길은 별안간 아수라장의 편쌈터가 되어버렸다. 돌팔매가 날고 문짝이 '우지끈' 부러졌다. 금부도사는 틈을 타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며 달아났다. 방 안에 있던 양녕과 명보가 급히 뛰어나왔다. 장사패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웬일이냐?"
"어떤 놈이 문틈으로 엿보고 있기에 잡아가지고 힐난을 했더니, 금부도사의 명으로 세자마마를 감시한다 하기에 두들겨주었더니 금부도사가 나졸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어명으로 저하를 압령한다 하므로 저희들이 의분을 참지 못하와 금부도사를 두들겨주었습니다."
"금부도사는 어디 있느냐?"
"매를 못 이겨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서 달아났습니다."
양녕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못하는 짓인데, 금부도사를 두들겨주었구나."
양녕은 급히 장사패들을 불렀다.
"얘들아, 내가 여기 나와 있다. 빨리 내 앞으로 모여라."
명보가 뛰어나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사패와 나졸들의 싸움을 뜯어말렸다. 장사패들은 양녕이 길거리에까지 나온 것을 알자 황송하고 미안해서 모두 다 싸움을 그치고 양녕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금부 나졸들도 머리 터진 자, 다리 부러진 자들이 정신을 수습하여 일어났다. 양녕은 금부 나졸들을 향하여 점잖게 분부한다.
"금부도사는 어디 갔느냐?"
"싸움 통에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아마 도망을 쳤나봅니다."
나졸 한 자가 대답했다.
"너희들은 이미 어명을 받들어 나를 압령하러 나왔다니 광주까지 나를 압송해 보내다오."
금부 나졸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도사가 없으니 소인들은 모르옵니다."
이편에서는 장사패들의 성난 숨결이 고조되어 씨근거렸다. 나졸들은 장사패들한테 기압이 되어 벌벌 떨고 섰다.
"금부도사를 찾아오너라."
양녕의 부드러운 음성이 떨어졌다. 금부 나졸들은 인제는 살았다고 생각했다. 거미새끼 퍼져 달아나듯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양녕은 점잖게 장사패들을 타일렀다.
"너희들, 과연 철이 없구나. 힘만 있으면 제일인 줄 아느냐. 금부도사는 어명을 받들어 나온 관원이다. 시비곡직은 나중 문제다. 더구나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나온 관원의 몸에 손찌검을 했으니 큰일이로구나."
양녕은 입맛을 또 한 번 쩍쩍 다셨다. 장사패들은 황송했다.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들어들 가자."
양녕은 장사패들을 이끌고 목로방으로 들어갔다. 장사패들은 양녕을 향하여 사죄하는 말씀을 드린다.
"분정지두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엿보는 졸아치 한 놈을 때렸더니 금부도사란 자가 나졸들을 거느리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어명이라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의분을 일으켜서 몇 놈을 두들겨주었습니다. 일을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지나간 일을 탄한들 소용이 있느냐. 그러나 앞으로 적지 않은 박해가 올 것이다."
양녕은 탄식했다. 어느덧 동이 트고 날이 밝았다. 목롯집 불목하니가 나와서 나귀와 말 먹일 말죽을 끓이고, 안 부엌에서는 손님들의 밥을 짓느라고 부산했다. 일행은 밥을 먹고 난 후에 행장을 차렸다. 안에서는 대군 부인과 어리가 나왔다. 장사패들은 양녕한테 인사를 했다.
"저희들은 이제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광주까지 모시고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마는 폐가 될까보아 더 나가지 아니합니다. 그럼 세자저하, 강녕하게 계시옵소서."
장사패들은 일제히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양녕이 손을 가로 저어 말리며 말한다.
"너희들 못 들어간다."
장사패들은 양녕의 말하는 뜻을 못 알아들었다. 멍하니 양녕의 안색을 살폈다. 한 사람이 나와 아뢴다.
"객지에 계신 저하께 폐가 클 것이옵기 저희들은 문안으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양녕은 껄걸 웃었다.
"철없는 것들이로구나. 너희들이 지금 문 안으로 들어간다면 당장 금부에 붙잡혀서 역적으로 몰려 죽을 것이다. 어명을 받들어 나온 금부도사를 패주었으니 너희들의 몸이 성할 수 있느냐. 아직 내게 있어서 피화가 되도록 해라."
장사패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과연 양녕의 말씀이 옳았다. 서로들 면면히 쳐다보며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한다. 명보가 옆에서 듣다가 장사패들한테 권한다.
"세자마마의 말씀이 옳은 말씀이니 자네들은 아무 염려 말고 광주로 모시고 가는 수밖에 없네."
장사패들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별도리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금부도사는 매를 맞고 죽다가 살아났으니 반드시 이 사실을 금부 당상한테 고할 것이 분명하고, 금부 당상은 반드시 위에 아뢰어 처분을 물을 것이다. 위에서 상감이 가만두실 리 만무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참형에 처하기가 십상팔구였다. 장사패들은 가슴이 뚝 떨어졌다.
"분부대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한편 양녕의 뜻을 받고 한편으로는 이같이 생각해주는 양녕을 재생의 은인으로 알았다. 양녕은 부인을 가마에 오르게 하고 어리를 말에 태운 후에 자기 자신은 당나귀를 타고 다시 광주로 향했다. 서울서 떠날 때보다 호위해 따라가는 사람은 심복 명보 외에 장사패 오륙 인이 더 늘었다. 명보는 좋은 길동무가 더 늘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이따가라도 지난번 같은 수상한 자들이 뒤를 따라오거든 한바탕 본보기를 단단히 내주게. 하하하."
명보는 껄껄거리며 나귀를 몰고 나가고, 장사패들은,
"여부가 있습니까. 어느 놈이 또다시 우리 세자마마의 뒤를 밟는 일이 있다면 다리 뼈다귀를 부러뜨려놓겠습니다."
흰소리를 치며 팔뚝을 걷어붙였다. 일행이 광주 지경에 당도했을 때 모두들 생각하기는 광주유수쯤 나와서 맞이할 줄 알았다. 그러나 감감소식이었다. 일행은 서로 말은 하지 아니했으나 불평이 가득했다. 거의 읍내에 당도했을 때 군노사령 두어 사람이 나타났다. 초조하게 나가는 양녕의 행차를 바라보고 기찰을 하는 듯 한동안 눈치를 살피다가,
"폐세자의 행차십니까?"
하고 굽실하고 물었다.
명보가 썩 나섰다.
"그렇다. 나귀 타신 분이 바로 세자마마시다."
말하고 눈을 딱 부릅떴다. 장사패들도 화경 같은 눈방울을 굴리며 군노사령들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군노사령들은 명보의 억센 기색과 장사패들의 눈방울에 기가 질렸다. 팔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너희들의 명색이 무어냐?"
장사패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물었다.
"네, 본군의 군노사령이올시다."
"군노사령이 어찌해서 나왔느냐?"
명보가 큰 소리로 묻는다.
"네, 저의 사또께서 폐세자가 나오시나 알아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인들이 나왔습니다."
명보는 성이 불근 났다.
"이놈아, 사또가 어찌 그리 태만하냐. 세자마마께서 나오시는데 사령을 보낸단 말이냐. 버르장머리없는 괘씸한 놈이로구나."
명보는 군노사령의 뺨을 날아가라는 듯이 갈겼다.
"이놈아, 상감마마의 큰아드님이신 세자마마께서 나오시고, 동궁빈께서 행차를 하시는데 군노사령놈을 내보내어 정탐을 하다니 말이 되느냐. 광주 유수는 그래 앉은뱅이가 되었더란 말이냐."
군노사령은 겁이 났다. 꽁지가 빠지도록 어마 뜨거라 하고 달아났다. 얼마 뒤에야 수십 개 영기가 전후좌우로 펄럭거리면서 한 사람의 대관을 옹위해 나왔다. 구종별매를 수십 명 거느리고 대취타를 앞세워서 호강스럽게 나왔다. 광주유수의 행차가 분명했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명보는 광주유수가 사인교를 타고 나오는 행차 앞으로 썩 나섰다.
"당신이 광주유수요?"
육방관속들이 깜짝 놀랐다. 가로막고 나섰다.
"어떤 자가 감히 유수대감의 행차를 막느냐?"
"막는 것이 아니다. 묻는 것이다. 나는 세자마마를 모시고 나온 동궁 소속의 명보라는 사람이다. 나는 동궁저하의 명을 받들어 너희들의 사또한테 묻는다."
명보는 어깨를 으쓱거려 팔을 걷고 유수의 행차 앞으로 들어섰다. 장사패들이 명보의 뒤를 받쳐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리부리 뜨고 으쓱비쓱 발걸음을 육방관속 앞으로 내딛는다. 무언의 시위다. 명보와 장사패들의 기상에 육방관속들은 기가 죽었다. 힘들도 세어 뵈지만 그들의 등 뒤에는 세자가 있었다. 비록 폐세자라 하나 상감의 큰아들이요, 양녕대군이었다. 육방관속들은 뒤로 물러서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말을 막아섰던 육방관속들이 물러서니 길이 탁 터지며 광주유수의 사인교가 나타났다. 명보는 사인교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처음에는 체통을 지켜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인교 창문 앞으로 나갔다. 몸을 굽혀 굽실했다.
"소인 아뢰오. 소인은 동궁 소속의 명보라고 하는 호위 군사요. 지금 세자마마께서 광주 경내로 들어오신 지 벌써 반나절이 넘었는데 사또께서는 이제야 나와서 지영하시니 너무나 태만하지 아니합니까?"
광주유수는 교활한 재상 퇴물의 원님이었다. 광주는 서울의 위성 고을일 뿐 아니라 남한산성의 중요한 요새지대가 되는 까닭에 중경재상을 골라서 원으로 보내고, 이름도 현감, 현령, 군수, 목사의 칭호를 쓰지 아니하고 특별히 유수라는 명칭을 붙였다. 수원유수, 강화유수도 국토의 중요한 요새지대인 때문 같은 계급의 유수를 둔 것이었다. 광주유수는 얼굴에 가득 교활한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오오, 네가 바로 동궁마마를 호위해 모시고 나온 사람이냐. 수고한다. 내가 어찌 동궁마마께서 나오시는데 태만할 리가 있느냐."
명보가 눈을 부라리며 말한다.
"그럼 태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광주유수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대답한다.
"광주서 서울이 비록 백 리 안팎의 거리다마는 경향이 낙락해서 나오신다는 통문이 더디 왔구나. 그리고 폐세자가 되시어 나오실 줄 어찌 알았겠느냐. 까마득하게 몰랐구나. 어디 세상에 이런 변이 있느냐. 내가 조정에 내직으로 있었던들 상감께 용포 자락을 잡고라도 간하는 것을--. 그러기에 기연가미연가해서 먼저 관속들을 내보내서 알아보고 황황하게 나온 길이 아니냐. 과히 허물하지 말기 바란다."
유수는 간특하기 짝이 없는 백전노장이었다. 둥글둥글 세자를 동정하는 체 말해서 명보와 장사패들의 우락부락한 노한 기분을 낮추게 했다. 명보는 곧 유수의 멱살을 잡아서 사인교에서 끌어내리려 했다가 간특하게 사정을 말하는 유수의 태도에 얼마쯤 분기가 누그러졌다. 손찌검을 하려던 손길을 내리고 큰 소리로 계속해서 떠들어댄다.
"잔소리 작작 하고 어서 사인교에서 뛰어내려서 세자마마와 동궁빈께 문안을 드리시오."
유수는 추근추근 대답했다.
"문안을 드리겠소. 마중나온 내가 어찌 맞이하는 문안을 드리지 않겠나. 세자마마는 어느 곳에 계신가?"
"사또는 눈까지 안폐하였소? 저기 당나귀를 타고 나오시는 분이 세자마마시고 가마를 타고 나오시는 분이 동궁빈이시오."
유수는 명보의 마음을 거슬러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황망히 사인교 바탕 앞에 있는 신발 궤짝에서 신발을 꺼내 신고 내렸다. 나귀 타고 나오는 양녕대군 앞으로 나가서 절을 올렸다.
"광주유수 문안이오."
백수를 흩날리며 청 좋게 한 마디를 아뢰었다. 양녕은 나귀 등에서 은근히 답례를 했다.
유수는 다음에 가마를 향하여 아뢴다.
"동궁빈마마께 광주유수 문안드리오."
휘장 닫혀진 가마를 향하여 국궁을 했다. 가마 뒤에 말 타고 앉아 있는 어리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곱게 땋아서 틀어 올렸다. 머리끝에 달아맨 자주 댕기가 서리서리 감아서 틀어 올린 머리끝으로 살며시 드러나면서 가므스름 윤기 도는 살쩍 위로 풍정 있게 떨어졌다. 희고 맑은 구란형 얼굴이 더한층 아름답게 돋보였다. 과연 천하절염이었다. 유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가 세자가 담을 넘어서 뺏었다는 곽중추부사의 첩 어리로구나!'
유수는 일부러 말썽꾼인 명보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서 묻는다.
"저분이 세자마마의 아나서이신가?"
명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소."
말투가 불공했다.
그러나 유수는 탄하지 아니했다. 광주유수는 말 타고 앉은 어리의 앞으로 가까이 갔다.
"광주유수 감히 아나서게 문안드리오. 멀리 나오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되시오."
은근하게 인사를 했다. 어리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여 대답이 없다. 백전노장의 광주유수는 이같이 간특했다. 광주유수는 양녕대군의 일행한테 일일이 사후를 마친 후에 다시 대군이 타고 있는 당나귀 앞으로 가까이 갔다.
"그러면 읍내로 행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을 서서 인도하는 체했다. 양녕은 하는 꼴을 보려고 당나귀를 몰아 앞으로 나갔다. 명보도 속으로 유수의 하는 꼴을 보리라 하고 세자의 당나귀를 따랐다. 동궁빈인 양녕 부인의 가마가 뒤따라 나가고, 어리가 말을 몰아 그 뒤를 쫓았다. 명보와 장사패는 흘깃흘깃 뒤를 돌아다보며 나갔다. 광주유수는 양녕의 일행을 앞세워 보낸 후에 나올 때와 매일반으로 청, 황, 적, 백, 흑 오색이 찬란한 영기를 앞세우고 육방관속과 군노사령이 옹위하는 속에 사인교 위에 올랐다. 법고와 종이 요란하게 울리고 대취타 길군악 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흡사 감사의 도임행차였다. 광주유수의 기구 좋은 것을 흠뻑 자랑하는 듯했다. 명보는 부아가 터졌다. 하는 꼴을 보려고 참고 참았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이 되어다. 발길을 돌렸다. 우둥우둥 광주유수가 타고 들어가는 사인교 앞으로 다가섰다.
"유수 사또께 아뢰오."
한 마디를 벽력같이 질렀다. 유수도 놀랐지만 호위해 나가던 군관과 군노사령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할말이 있나?"
광주유수는 사인교 위에서 점잖게 물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사또는 위민지장이 되어 백성들을 지도하는 분인데 이 꼴이 무슨 해괴한 꼴입니까?"
해괴하다는 말에 광주유수도 역했다.
"해괴라니?"
"해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주객이 전도라는 말이 있더니 과연 주객이 전도되고 상하귀천이 없는 무법천지올시다. 이것이 백성을 지도하시는 유수의 행동입니까?"
명보는 소리치면서 유수를 향하여 주먹을 높이 흔들었다. 장사패들이 와락 명보 뒤로 몰려들었다. 말을 아니하나 모두 다 분개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발을 굴렀다. 유수는 당황했다.
"무엇을 내가 잘못한 일이 있나?"
교활한 웃음을 짓는다. 명보는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래, 상감마마의 장자이신 세자마마는 당나귀를 타고 가시게 하고, 당신은 사인교에 삼현육각을 잡혀서 가는 것이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이며 상하가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명보는 불호령을 내렸다. 여우같이 간특한 광주유수는 얼굴빛을 변하며 깜짝 놀라는 체했다.
"사인교채를 놓아라."
명령을 내렸다. 교군꾼들은 황망히 사인교채를 놓았다. 유수는 사인교에서 황황히 내렸다. 변명도 하지 아니했다. 빨리 걸음을 옮겨 양녕의 타고 가는 나귀 앞으로 나갔다. 고삐를 잡고 양녕한테 고한다.
"대군마마, 저의 사인교를 타십시오."
양녕은 웃으며 대답한다.
"불탈주인석이라니 내가 어찌 유수의 사인교를 뺏어 타겠소. 하하하."
양녕은 껄걸 호걸 웃음을 웃었다.
"아니올시다. 이것은 사인교올시다. 주인의 자리가 아니올시다."
"여보 유수, 주인의 자리나 주인이 타는 사인교나, 앉고 타는 것이 모두 다 자리가 아닌가. 내가 광주유수라면 광주에서 광주유수의 사인교를 타겠소마는 나는 광주유수가 아니라 광주의 나그네가 아닌가. 별소리 말고 제각기 자기가 타고 왔던 것을 타기로 합시다."
양녕은 말을 마치자, 나귀를 몰아 나간다. 광주유수는 달리는 양녕의 나귀 고삐를 바짝 붙들고 매달리듯 따라가며 말한다.
"대군마마, 아니 됩니다. 나귀는 저한테 돌리시고 그저 사인교를 타십시오. 타는 것도 상하가 있습니다. 대군마마께서 당나귀를 타고 가시는데 제가 감히 어찌 사인교를 타고 가겠습니까. 사양치 마시고 사인교를 타고 가십쇼."
유수는 당나귀에 매달려 숨을 헐떡거리며 따라간다. 양녕은 더 한 번 호걸 웃음을 껄걸 웃는다.
"타는 것에 상하가 있다니 말이 되나. 별소리 다 하는군그래. 사인교를 타면 높아지고 당나귀를 타면 지위가 얕아진단 말인가. 나귀는 신선이 아니면 시인묵객이 타는 거야. 그리고 유수는 벼슬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막천석지하는 일개 야인이고 풍류랑일세. 내 취미로 내가 나귀를 타는 것을 누가 감히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겠나. 딴소리 하지 말고 어서 유수나 사인교를 타시오."
양녕은 만면에 웃음빛을 잃지 아니하면서 의연히 거절했다. 뒤에 따라오며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명보가 뛰어나왔다.
"세자마마, 유수가 권하는 대로 사인교로 바꾸어 타십시오. 백성들 소시에 창피합니다. 그래, 광주유수는 사인교를 탔는데 세자마마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광주읍내로 들어가신다면 백성들이 깜짝 놀랍니다. 놀랄 뿐 아니오라 세자마마를 업신여깁니다."
양녕은 명보를 꾸짖는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주제넘게 지껄이느냐. 내가 문안서부터 나귀를 타고 온 것은 풍류로 타고 온 것이다. 힘이 모자라서 나귀를 타고 온 줄 아느냐."
양녕이 나귀를 풍류로 타고 나왔다고 명보를 꾸짖는 바람에 명보의 고개는 움쑥 오므라졌다. 광주유수는 명보한테 책잡히고 겉치레로 양녕한테 사인교를 타라 권했던 것이다. 두 번 세 번 양녕한테 매달려서 사인교와 바꾸어 타자고 했으나 양녕이 호협하게 거절하고 보니 내심으로는 무한 좋았다. 양녕의 사양하는 말에 못이기는 체 슬며시 나귀 고삐를 놓았다.
"대군께서 정 사양하시니 하는 수 없습니다. 그럼 저는 대군 앞에 황송하오나 타고 나온 사인교를 도로 타겠습니다."
광주유수는 말을 마치자 양녕 앞에서 떠나 사인교 위로 다시 올랐다. 양녕의 초라한 행차와 광주유수의 호화찬란한 행렬은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광주읍을 향하여 나갔다. 원래 광주유수는 기별지를 통해서 세자가 폐위되어 양녕대군이 된 것을 알았고 다음 공문을 받아서 광주로 추방이 되는 것도 알았다. 추방이란 것은 그대로 광주에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거주제한을 시켜서 내쫓은 것이다. 광주 추방은 곧 광주지방 일대에만 살게 하고 광주지방 외에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죄수 대접을 하는 추방 명령인 것이다. 따라서 추방 명령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금부도사가 압송관이 되어 죄수를 압령해가지고 그곳 지방관에게 넘겨준 후에 지방 장관이 죄수를 인도했다는 도장을 받아가지고 서울로 돌아가 금부에 보고하고, 금부에서는 금부 당상이 이 사실을 위에 아뢰는 것이 통례의 법칙인 것이다. 광주유수는 기별지를 통하여 세자의 폐위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뒤미처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 것도 기별지를 통하여 알았다. 마음속으로 앞으로는 충녕대군께 긴하게 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돌연 금부에서 공문이 왔다. 어명으로 폐세자 양녕대군을 광주로 추방하니 만반 준비를 다 차려놓으라는 금부 당상의 공문이 내려왔다. 광주유수는 공문을 받고 이리저리 양녕의 거처할 곳을 물색해보았다. 양녕이 비록 죄수으 몸이 되어서 추방 명령을 받았다 하나 동네에 있는 민가에 거주시킬 수는 없었다. 더구나 수직해서 지키기가 곤란했다. 광주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버린다면 책임은 자기한테 있는 것이다. 수직하기 좋은 곳을 택하자면 유수의 관아가 제일 적합했다. 그러나 유수 자신의 내아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유수는 다시 마땅한 곳을 곰곰 생각해보았다. 유수는 생각 끝에 돌연 산성 생각이 났다. 남한산성은 사면에 문이 있고 수직하는 군관들이 있었다. 양녕이 밖으로 나간다면 수직하는 군관들이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단통 유수가 있는 동헌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안성맞춤의 좋은 장소라 생각했다. 유수는 양녕의 행차가 오면 남한산성 안 행궁 옆에 있는 정자집에 거처하게 하리라 결정하고 미리 사람을 보내서 양녕대군을 호송해오는 금부도사의 거취를 살피라 했다.
보냈던 사람이 급히 돌아와 회보했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이 났단 말이냐?"
"폐세자를 압령해서 나왔던 금부도사가 매를 맞아서 의관파열이 되어 달아나고 금부 나졸들은 대강이가 터진 놈, 다리 뼈다귀가 부러진 놈, 무수하게 매를 맞고 풍비박산이 되어 산지사방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유수는 더한층 놀랐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누구한테 매를 맞았단 말이냐?"
"폐세자를 모시고 나왔던 하인들이 뒤따라오는 금부도사의 일행을 두들겨주었다 합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금부도사가 서울서부터 호송해오지 아니하고 뒤를 따라왔던 모양이로구나."
"그렇습니다. 금부도사는 폐세자를 호송하라는 어명을 받고도 직접 앞에 나서서 세자를 호송하기 어려우니까 나졸들을 데리고 뒤에 슬슬 따라온 모양입니다. 그러하다가 나졸 한 사람이 밤에 주막을 엿보는 일이 발단이 되어서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올시다."
유수는 눈을 감고 가만히 경위를 생각해보다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폐세자 편에서는 전혀 어명으로 호송되는 것을 모르고 나온 모양이로구나."
"네, 그런가 봅니다. 폐세자 편에서는 그대로 광주로 나가서 자유스럽게 살라는 줄 알고 나온 모양이올시다. 그러기에 동궁빈 이하 내행까지 함께 거느리고 나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금부도사와 금부 나졸들이 폐세자 일행한테 행패를 당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거취할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폐세자가 자기의 관할 안으로 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추방을 당해서 나오는 죄인이라 하나 보통 죄인과는 다르다. 황차 폐세자라 하나 지위가 대군이다. 뿐만 아니라 증경세자요, 상감의 큰아드님이다.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폐세자의 하인들한테 봉욕이나 당하기 십상팔구라 생각했다. 명목은 마중이라 해놓고 폐세자를 능멸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를 차리고 사인교를 타고 나갔다가 폐세자를 호위해 나오는 장사패들의 눈치를 보고 겁이 덜컥 났다. 사인교를 폐세자인 양녕대군한테 타라고 권했던 것이다. 광주유수는 광주 경내로 들어가자, 양녕을 관아인 동헌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산성으로 인도했다. 계획적이었다. 유수는 사인교에서 내려서 나귀를 타고 앞에 가는 양녕의 옆으로 나갔다.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양녕은 흔연히 대답했다.
"관아가 있는 곳과 백성들이 살고있는 읍내는 번잡하고 누추하와 계실 곳이 못 됩니다. 그리하와 산성으로 정했습니다. 산성에는 행궁이 있사옵고 행궁 뒤에는 산성집이 있사옵니다. 산세가 평탄하고 수림이 울창한 데다가 못이 있고 물이 맑아서 저하가 소풍하시기 좋은 곳이올시다. 뿐만 아니라 한번 장대에 올라 바라보면 멀리 장안이 구름 밖에 보여서 한수 밖의 절승이올시다. 의향이 어떠하십니까?"
간휼한 유수는 남한산성의 절경을 풍을 쳐서 이야기하여 양녕의 마음을 부채질했다. 양녕은 남한산성의 경치가 좋다는 광주유수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나귀 등에 실은 거문고와 낚싯대를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한다.
"내 본시 강산풍월을 좋아하는 성미요. 그러기에 나올 때 거문고 한 틀과 낚싯대 한 개를 나귀 등에 싣고 오지 아니했는가."
호인군자인 양녕은 광주유수의 간휼한 계획을 알 까닭이 없었다.
"산정에 올라 거문고를 타고 못가에 나가 낚시를 던지는 그 행락이 얼마나 좋겠소. 그리고 장대에 올라 서편을 바라본다면 서울 장안이 눈앞에 아물거린다 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어 있겠소. 좋소, 산성으로 갑시다."
양녕은 쾌하게 산성 안에 우거할 것을 허락했다. 명보와 장사패들도 광주유수가 양녕을 거주 제한시키기 위하여 산성의 성문이 있는 산성 안으로 몰아넣는 흉계를 알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장사패들은 전에 남한산성을 구경한 일이 있었다.
"산성 안에는 활 쏘는 사정터도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장사패들은 활쏘기가 좋았다. 광주유수의 간특한 저의를 알 까닭이 없었다. 어깨를 으쓱거려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명보도 유수의 간계를 알 까닭이 없었다. 양녕도 좋다 하고, 장사패들도 사정이 있어서 좋다 하니 덩달아 마음이 흥락했다.
"세자마마께서 좋다 하시고 여러 친구들도 좋다 하니 그럼 산성으로 행재소를 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녕한테 의견을 아뢰었다. 광주유수는 일이 수월하게 되어 마음속으로 기뻤다.
"그럼, 제가 앞을 서서 길을 인도하겠습니다."
말한 후에 세자의 뒤에 가던 사인교를 앞으로 돌리고 산성으로 향했다. 유수의 호강스런 행렬은 앞을 서고 양녕이 탄 당나귀와 부인의 가마며 어리가 탄 조랑말은 초라하게 뒤에 달렸다. 산은 출창하고 깊었다. 산성 문을 지나 비탈길로 오르는데 시냇물은 산을 끼고 돌아 맑게 흐르고 푸른 숲 이끼 낀 바위는 양녕의 흥취를 돋우어주었다. 양녕은 산으로 오르다가 나귀에서 내려 바윗돌에 앉아보기도 하고 맑게 흐르는 석간수를 표주박으로 떠서 마시기도 했다. 가슴에 쌓였던 속세의 시름이 산골 속 맑은 물에 다 씻겨내리는 듯했다. 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마음은 청정하기 그지없었다. 양녕은 옷을 벗어 먼지를 털고 갓을 벗어 송지에 걸었다. 슬며시 잔디밭에 누워버린다. 일행들은 모두 다 말에서 내리고 교자에서 내렸다. 양녕은 사인교에서 내리는 유수를 돌아보며 말한다.
"자아, 인제 유수는 내려가오. 행궁 정자는 내가 찾아갈 테니. 나는 이 좋은 경치를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소. 놀다가 올라갈 테니 염려 말고 돌아가오."
"어디 그럴 수가 있습니까. 행궁 산정까지 모셔드리고 가야 합지요."
"남한산성이 이제는 내 천진데 아무 염려할 것 없소. 그리고 유수는 공무도 많은 터에 공연히 시각을 허비할 까닭이 없소."
광주유수는 마음속으로는 양녕을 남한산성 안에 가두어두었으니 이제는 더 인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죄송합니다. 저는 내려가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사인교를 탄 후에 육방관속들을 데리고 호강스럽게 행렬을 산 아래로 돌려 내려갔다. 광주유수가 산성에서 내려간 후에 양녕은 대자연의 좋은 절경에 신흥이 도도했다. 명보에게 명했다.
"나귀 등의 거문고를 내려라."
명보는 나귀 등에서 거문고를 내렸다. 양녕은 금잔디밭에 펄썩 앉아서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청초한 거문고 소리가 청산을 흔들며 푸른 하늘 흰구름 사이로 흩어진다. 장사패와 명보는 거문고 곡조를 모르면서도 청아한 거문고 소리에 신흥이 슬며시 일어났다. 장사패 한 사람이 아뢴다.
"옛말에 우화등선이란 말이 있더니, 바로 세자마마를 두고 한 말씀이올시다. 속세를 떠나시어 넓고 넓은 잔디밭에서 거문고를 타시는 모습은 흡사 신선의 자태올시다."
한 사람이 또 아뢴다.
"산 좋고 물 맑은데 더구나 청아한 거문고 소리를 듣고 보니 없던 신명이 저절로 납니다. 이같이 좋고 좋은 자유 천지에 한 가지가 없어서 탄식이 저절로 납니다."
양녕은 타던 거문고를 무릎 위에서 내려놓고 미연히 웃으며 묻는다.
"한 가지가 없다니 무엇이 없단 말인가?"
"풍류 세자이신 저하께서 그 말씀을 못 알아들으십니까?"
반문을 한 장사패도 미소를 지어 웃으며 대답한다.
"술 말인가? 하하하."
"예, 그렇습니다."
옆에 있던 명보가 술 소리를 듣자 목에 침이 꿀떡 넘어갔다.
"그럴 줄 알았더면 나귀 등에 술 한 초롱을 달고 올 것을 그랬습니다."
장사패 한 사람이 명보의 말을 받아 넘긴다.
"명보는 참 고지식도 하구나. 무겁게 백 리 길에 술 한 초롱을 달고 오다니 참말 미련한 사람일세. 자네는 말도 못 들었나. 남한산성의 석씨네 술맛이란 조선 천지에 제일간다는 것일세. 베 몇 자만 던져주면 기가 막힌 석씨네 술을 사올 수 있네."
양녕도 석가장 술이 제일이란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입가에 침이 돌았다. 가마 안에 앉아 있는 부인한테 청했다.
"모두들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모양이오. 부담농에 노수하려고 가지고 나온 베 몇 필이 있으니 그중에서 한 필만 꺼내주시오."
양녕 부인은 가마에서 내렸다. 어리와 함께 나귀 앞으로 나갔다. 명보가 뛰어가 나귀 등에서 부담농을 내리고 쌍십자로 묶은 밧줄을 끌렀다. 부인은 어리와 함께 농 뚜껑을 열고 차곡차곡 담아논 피륙 속에서 북포 한 필을 꺼내서 양녕의 앞에 놓았다. 양녕은 명보에게 북포를 내주었다.
"옜다. 석가장에 가서 술을 사 오너라."
장사패들은 양녕이 명보한테 북포 한 필을 다 내주고 술을 받아오라고 하는 분부 말씀을 듣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출일구로 말한다.
"북포 한 필어치 술을 사다가 누가 다 마십니까. 다섯 자만 끊어서 보냅시오."
"다섯 자도 과하지. 석 자만 끊어 보내도 족하지. 약주 술 두 초롱이 넘을 것입니다."
"두 초롱을 다 무엇에 씁니까?"
여러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양녕이 껄걸 웃으며 대답한다.
"하하하. 자네들 너무나 인색하이그려. 넉넉히 갖다 주었다가 술 한 초롱값이 넘는다면 맡겨두었다가 다음번에 갖다가 마시면 되지 않겠나. 다음번에 갖다 마시어도 또 남는다고 하거든 그다음에 갖다 마시면 되지 않겠다. 우리가 하루 이틀에 이곳을 떠날 것이 아닌데 무엇을 그리 잘게 생각하는가. 하하하."
"그렇습니다. 세자마마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명보는 양녕이 던져준 베 한 필을 받아가지고 어깨를 으쓱대며 일어섰다.
"누가 석씨네 바침술집을 잘 아나?"
장사패 중에서 한 사람이 나섰다.
"내가 여러 차례 남한산성에 활을 쏘러 온 까닭에 석씨네 집을 잘 아오. 남한산성에는 겅성드뭇한 게 석씨네 집이오."
명보는 석가촌을 잘 안다는 장사패와 함께 등 너머 석씨집을 찾았다. 베 한 필은 약주술 여섯 초롱 값에 해당했다. 명보는 양녕이 말씀한 대로 나머지는 나중에 또다시 찾아가겠다고 바침술집에 당부한 후에 장사패는 술초롱을 들고 명보는 안주할 짠지무와 보시기 몇 개를 빌려가지고 산성의 중턱인 금잔디밭으로 돌아왔다. 양녕은 명보가 술 받으러 간 동안에 다시 거문고를 당겨서 몇 곡을 둥둥 타다가 명보와 장사패가 술초롱을 들고 오는 것을 보자 입이 떡 벌어졌다.
"빨리 가져오너라. 어디 한 잔 마셔보자."
양녕은 아침에 주막에서 밥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길을 떠났으니 뱃속이 후출했던 모양이다. 명보가 초롱의 술을 보시기에 따랐다. 황금빛 노리끼한 약주술에 밥풀이 둥둥 떴다. 양녕은 명보가 따라 올리는 석가장 약주술을 단번에 주욱 들이켰다.
"얘, 참 명불허전이다. 술맛이 기가 막히게 좋구나."
장사패 한 사람이 짠지쪽을 썰어논 보시기를 양녕한테 받들어 올렸다. 저가 있을 리 없었다.
양녕은 엄지와 식지를 벌려서 짠지 한 쪽을 집어 입에 넣었다. 어리가 옆에서 보다가 너무나 딱하다고 생각했다. 옆에 서 있는 황백나무 가지를 꺽어서 저를 만들어 양녕한테 바쳤다. 양녕은 어리가 바치는 황백나무 저를 받으며 껄걸 웃는다.
"손으로 짠지를 집어서 안주를 하니 맛이 배나 나는 것 같구나. 하하하. 인간들은 공연히 쓸데없는 일거리를 만들어서 번잡을 떠는구나."
어리가 미소를 지어 옆에 서서 대답한다.
"세자마마께서 식지로 짠지를 집어 젓숫는 것을 보며 모두들 가슴을 아파합니다. 산중에서 황백나무로 절르 만들어 젓숫는 것도 풍류스런 일이옵니다. 약주 한 잔을 더 드시고 황백나무 저로 짠지를 집어보시옵소서."
양녕은 기뻤다. 쾌활하게 대답한다.
"어리가 황백나무 가지로 저를 만들어주고 술까지 따라주니 아니 마실 도리가 있나. 한 잔 다시 마셔보기로 하자."
양녕은 말을 마치자 어리에게서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마시고 황백나무 저를 받아 짠지 한 쪽을 입에 넣었다.
"황백나무로 안주를 집어 씹으니 맛이 더한층 묘하고 향긋하고나."
옆에서 보고 있던 양녕 부인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일국의 왕세자요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저분이 손가락으로 짠지쪽을 집어서 안주를 하고 땅바닥에 앉아서 술맛이 좋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상전벽해라 하더니 이런 변이 또 어디 있을까 하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
아졌다. 그러나 부인은 양녕이 자기의 눈물 흘리는 얼굴을 바라보고 마음이 슬플까 보아 겁이 났다. 슬며시 고개를 돌이켜 외면을 하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씻었다. 소탈한 듯한 양녕이면서 민첩한 양녕이었다. 부인의 눈치를 모를 까닭이 없었다. 돌아앉아 눈물을 닦는 부인을 슬쩍 바라보고 얼른 고개를 돌려서 웃는 낯으로 명보한테 마시던 잔을 넘겼다.
"술맛이 비상하다. 너 한 잔 마셔보아라."
양녕은 친히 초롱에서 약주술 한 잔을 듬뿍 떠서 명보한테 넘겼다.
"황공하옵니다."
명보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약주 술잔을 받았다. 톡 튀도록 맑은 호박빛깔 술에 밥풀이 둥실둥실 떠서 대백 큰 술잔에 가득했다. 명보는 단번에 식욕이 움직였다. 사양 아니하고 주욱 들이켰다.
"어떠냐? 술맛이."
양녕은 명보를 향하여 웃으며 묻는다.
"참 술맛이 묘합니다. 전국술이라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습니다."
명보는 말을 마치자 입을 헤벌리고 웃었다. 양녕은 명보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흐뭇했다. 어리가 만들어 바친 황백나무 젓가락을 짠지 그릇에 올려놓고 명보한테 권한다.
"옜다, 안주를 집어라."
명보는 저를 금잔디밭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짠지 한 쪽을 집어 씹으며 아뢴다.
"소인은 본시부터 어미 배에서 나와서 밥을 먹은 이후에 손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먹은 놈이올시다. 상놈이 풍류아취를 알 도리가 있습니까. 주제넘은 짓 하지 않고 본색을 내서 손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먹겠습니다."
만좌는 까르르 웃어댔다. 새침한 어리도 웃음을 짓고, 심사가 창연해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하던 얌전한 부인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입가에 돌았다. 양녕도 명보의 익살떠는 말이 우스웠다. 폭소가 터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하하하. 명보 너 엉뚱한 말을 하는구나. 네 말마따나 무식한 상놈이 어찌 풍류아취라는 문자를 쓸 줄 아느냐. 하하하."
명보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대답한다.
"소인이 어찌 고상한 글뜻을 알고 아뢰었겠습니까. 그저 들은 풍월입지요. 당구삼년폐풍월이란 말도 있지 아니합니까. 그저 여러 해 동안 세자마마의 하해 같으신 은총을 받고 있으니 마치 당 아래 있는 개가 풍월을 보고 짖듯 지껄인 것뿐이옵니다. 세자마마, 그저 통촉해주옵소서."
만좌는 까르르 웃어댔다. 양녕도 한 차례 드높게 웃은 후에 장사패들을 손짓해 불렀다.
"자아, 자네들도 이리들 가까이 와서 한 잔씩 요기를 하게.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요기하는 음식일세. 말만 들었던 석가장 술이 천하일밀세."
"황공무지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