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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6-1

6권 양녕대군

 

세자와 효령대군

 

걸리적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수문장은 말을 아니 할수록 변지 수령으로 속히 나가게 되는 때문이다.

명보는 하룻밤에 작은 꾀꼬리를 불러들인 후에 세자께 고한다.

"세자마마, 이제는 말굽은덩이를 아니 쓰셔도 기생과 오입쟁이들이 거침없이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세자저하의 복력이십니다."

세자는 눈치를 채서 알았다. 그러나 일부러 천치마냥 묻는다.

"어찌 관절을 쓰지 않고도 일이 되느냐?"

슬며시 묻는다.

명보는 세자 앞에 자랑을 하고 싶었다.

세자는 아직도 벽창호가 되어서 사정을 캄캄하게 모르면서 좋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명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모두 다 이놈의 공이올시다."

오른편 인지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면서 텁석부리 검은 수염 속에 주홍빛 입술이 여주 터지듯 활짝 벌어졌다.

세자는 일부러 물어본다.

"네가 무슨 수단을 용케 썼기에 수문장들의 입이 봉창이 되고 마제은 관절도 아니 쓰게 되었느냐?"

"세자마마, 지혜는 소인의 머리에서 나왔고, 일은 세자빈마마께서 꾸미시고, 처리는 세자마마의 장인이신 김판서게서 처리하셨으니, 여기 대한 일등공신은 소인이올시다. 수문장에게 내리시던 말굽은덩이는 모두 다 소인한테로 내려줍시오."

세자는 엉큼한 춘방사령 명보의 말이 밉기도 하고 구수하기도 했다.

"이놈아! 수문장에게 가던 관절을 네가 다 갖다가 무엇에 쓰려 하느냐?"

세자는 정색하고 물어본다.

"저하께서도 망령이십니다. 세상에 돈 싫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소인도 늙기 전에 돈을 좀 써보면서 행락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행락' 소리를 듣자 세자는 생각이 번개같이 일어났다.

전에 봉지련의 집으로 오입을 다닐 때 춘방사령 명보는 봉지련의 어미한테 좋아 지내던 생각이 났다.

웃음의 소리로 농담을 붙여본다.

"봉지련의 어미한테 말굽은을 갖다 주려 하느냐?"

명보는 얼굴빛을 고쳤다.

추연히 시름하는 빛이 돌았다.

"세자마마, 어떻게 소인의 마음을 유리 비치듯 들여다보십니까? 과연 봉지련의 어미를 인정상 떼어버릴 수 없습니다. 딸자식은 우리로 인해서 죽어버리고 나이는 늙어서 화류계에서는 다시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인은 그까짓 늙어빠진 봉지련의 어미한테 색에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올시다. 인정상 그대로 굶어 죽어서 솔밭 속에 던져버린 까마귀밥이 되게 하기는 사람으로 너무나 박정해서 그럽니다."

고지식한 명보도 주먹으로 눈시울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닦는다.

옆에서 듣는 오입쟁이 구종수, 이오방 이하 오입쟁이들은 모두 다 협기 있는 인물들이었다. 명보의 말을 듣고 모두 다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새로 세자의 사랑하는 애기가 된 작은 꾀꼬리의 예쁜 눈에도 진주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맑은 빛을 뿜으며 옷섶으로 떨어진다.

작은 꾀꼬리는 약간 비창한 빛을 띠고 있는 세자를 향하여 말씀을 아뢴다.

"명보 아재비는 진정 사람다운 인정을 가지신 분입니다. 봉지련 형님의 집안 사정은 소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차 봉지련의 형님이 귀양 가서 세상을 떠난 후에 다시 누가 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더구나 명보 아재비 말대로 얼굴에 주름은 잡히고 이는 빠지고 해골이 다 된 봉지련 형님의 어머니를 누가 다시 눈이나 끔쩍하고 돌아보겠습니까? 색에 취해서 봉지련의 어머니를 돌봐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리상 아니 돌봐줄 수 없다고 하는 명보 아재비의 말슴을 듣고 보니 마치 소인이 당한 일과 같아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콧마루가 시큰해집니다."

말을 마친 작은 꾀꼬리의 맑은 추파에서는 또다시 진주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세자의 마음은 젊으나 바다같이 넓었다. 작은 꾀꼬리의 손을 잡았다.

"작은 꾀꼴아, 내 너희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또 내가 봉지련의 비명횡사한 것을 슬퍼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봉지련의 어미가 제때에 밥을 못 먹어서 구복을 채울 수 없게 된 이 사실도 내가 벽창호가 되어 판단을 못 했던 바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명색이 세자로구나. 더구나 상감이신 아바마마의 슬하에서 꼼짝할 도리가 있었더냐. 오늘 명보를 위시하여 우리 귀여운 작은 꾀꼬리의 말을 듣고 나니 감창한 회포를 금할 수 없다. 자아, 말굽은 몇 덩이를 꺼내 줄테니 명보는 네 다니던 봉지련의 어미를 갖다주어서 바침술 장사라도 해서 생계를 이어가게 해라."

세자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지기도 부르고 아니했다. 스스로 자신이 벽장문을 열고 말굽은 원보 세 덩이를 꺼냈다.

세자의 비장품인 모양이었다.

"자아, 이것을 봉지련의 어미한테 갖다주고 아까 말했듯이 밑천을 삼아서 생업을 하라고 일러라. 여자의 직업으로는 술장사도 좋고, 바침술 장사도 좋으리라. 그리고 네가 때때로 돌봐주어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리가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와서 의리가 떨어졌구나."

세자는 말굽은 세 덩이를 명보한테 내어주고 가만히 한숨을 쉰다.

세자가 내리는 원보 세 덩이는 쇄은 부스러기에 댈 것이 아니다. 수천 금의 가치가 있었다.

은덩이를 받는 명보는 말할 것 없고 옆에서 명보를 도와 말하던 작은 꾀꼬리를 위시하여 오입쟁이 구종수, 이오방 등은 모두 다 오입판에 의협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봉지련의 어미를 대신하여 세자한테 백배치사를 한다.

"봉지련의 어미가 이 원보덩이를 받으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구종수가 세자께 절을 하며 말씀을 아뢴다.

"봉지련의 어미는 살았으니 말할 나위 없습니다마는 죽은 봉지련의 영혼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는데 봉지련은 세자의 사랑하였던 첫 애기가 아닙니까. 얼마나 영혼이 좋아하겠습니까."

세자는 이 말을 듣자 더욱 감회가 움직였다. 명보를 향하여 분부를 내린다.

"너는 곧 원보를 갖다가 봉지련의 어미한테 전해라. 그리고 가는 길에 내전에 들러서 주안상을 내오라 일러라."

명보가 허리를 굽혀 세자한테 고한다.

"오늘 세자께서 내리신 원보는 소인이 봉지련의 어미한테 전하는 것보다 저하께서 친히 봉지련의 어미를 불러서 내리시는 것이 좋을 성싶습니다."

"그것 참 좋은 소리올시다. 세자마마, 그렇게 하신다면 봉지련의 어미는 백골난망일 것입니다."

"명보의 주장과 작은 꾀꼬리의 말이 옳습니다. 저하, 그리 하옵소서."

구종수 이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세자는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 곧 허락을 내렸다.

"아무려나 해라."

명보는 어깻바람이 났다. 쾌자 자락을 펄럭거리며 봉지련의 어미를 찾았다.

말굽은 세 덩이가 굴러들게 된 봉지련의 어미는 황망해서 어찌할지 몰랐다.

"자아, 어서 빨리 가서 세자마마의 지극하신 덕을 받기로 하세. 세상 천하에 이런 어진 분이 어디 계신가. 이러니 세자마마께서 상감만 되시는 날에는 천하는 태평춘이 되고 농부는 격양가를 부를 것일세."

명보는 봉지련의 어미를 재촉하여 세자궁으로 향했다. 이때 사랑 외전에서는 벌써 세잔갱작하는 주안상이 벌어져서 세자는 오입쟁이들과 작은 꾀꼬리와 함께 주안상을 다해고 앉아 있었다.

명보는 뜰 아래서 봉지련의 어미에게 문후를 드리게 했다.

봉지련의 어미는 빨아 다린 깨끗한 옷을 입었으나 조각조각 기워 입었다. 그야말로 백결 선생의 옷과 같이 백공천창이 된 옷을 백 번이나 기워입었다.

춘방사령 명보는 전상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친다.

"세자마마께 아뢰오. 봉지련의 어미 현신드리오."

봉지련의 어미는 춘방사령 명보의 외치는 소리에 따라 두 팔을 번쩍 들어 하늘로 향하여 뻗쳤다가 다시 크게 팔을 벌렸다. 또 한 번 두 손길을 모아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지극한 정성을 표하는 대례다.

"세자마마, 만수무강하옵소서."

봉지련의 어미도 젊었을 때는 장안의 명기 명창 중에 한몫을 보았던 것이다.

청이 컬컬하게 쉰 듯하면서 목이 탁 풀렸다.

우렁우렁 전각을 울렸다.

모든 오입판의 가객과 한량이며 작은 괴꼬리의 눈이 현신드리는 봉지련의 어미한테로 쏠렸다.

세자는 상 앞에서 잔을 들다가 봉지련의 어미를 바라본다.

오입판에서는 비록 늙었다 하나 아직도 나이 사십대다. 백겁풍상을 겪은 몸이건만 몸이 나기 시작했다. 허리와 엉덩판에 살이 오르고 얼굴에는 기름이 흘렀다. 백공천창이 된 옷을 빨아 다려 입었으나 몸과 옷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올라오너라."

세자는 이제 완전히 오입쟁이의 풍속을 다 알고 있었다.

비록 퇴기일망정 증경기생이다. 기생은 하정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상에서 내리는 세자의 분부는 뜰 아래서 현신을 드리는 봉지련의 어미의 귀로 지체없이 들어갔다.

"예의, 이곳에서 뵈옵는 일도 황공무지하옵니다. 아까는 명보편에 원보를 내리시어 다 죽어가는 천종을 돌보아주시니 세자마마의 넓고 넓으신 큰 덕을 어찌 간직하올지 다만 황공무지하올 뿐이옵니다."

세자는 또 한 번 분부를 내린다.

"긴 말 하지 말고 자리에 오르라."

옆에 섰던 명보가 봉지련의 어미의 손을 잡아 전각으로 오르게 했다.

봉지련의 어미는 슬며시 명보를 흘기면서 잡은 손을 뿌리치고 다시 세자께 향하여 아뢴다.

"천비 비록 증경기생이로나 몸이 떨어져 관비가 되었습니다. 감히 청으로 오르지 못하겠습니다."

봉지련과 세자와의 관계가 있은 이후에 태종은 크게 노해서 봉지련은 절도로 귀양보내고 봉지련의 어미는 사헌부 관비를 만들었던 것을 말하는 소리다.

당상에 세자를 모시고 앉아 있던 오입쟁이와 한량들은 손뼉을 치면서 칭찬이 놀랍다.

"옳은 말이지. 체통을 아는 소리야."

"어떤 명기인가. 봉지련의 어머니가 아닌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명기일세그려."

"비록 세자마마께서 용서해주신다 하더라도 한 번쯤 사양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만한 소리지."

모두들 얼굴에 가득 쾌활한 빛을 띠어 봉지련의 어미를 찬양했다.

젊은 기생 작은 꾀꼬리도 봉지련의 어머니 말은 기생판 경계에 경우가 밝은 말이라 생각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세자께 고한다.

"아주머니 말이 경우 밝은 말이올시다. 기생도 천비요, 관비도 천인이올시다마는 기생은 상감 이하 공경대부를 모시고 가무를 자랑하면서 약주를 따라 올릴 수 있으나 관비는 감히 청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경우 밝은 소리올시다."

소곤소곤 지껄였다.

작은 꾀꼬리는 어느덧 벌써 세자의 애기가 되었다.

나직나직 정담을 나누고 있다.

이제는 활달대도한 세자다.

손에 잡았던 잔을 들어 죽 들이마시고 뜰 아래서 아뢰는 봉지련의 어미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껄걸 웃는다.

"하하하, 용하다. 제법 체통을 아는 소리다. 그러나 관비가 되었던 일은 이제는 과거지사다. 귀양갔던 구감역 이선달도 이제는 다 풀려서 이 자리에 한데 있지 아니하냐. 그리고 곤장 맞던 명보도 이곳에 있구, 나도 네 딸하고 좋아 지냈다구 사헌부 대사헌의 탄핵까지 받았던 세자다. 장본인들이 모두 다 이곳에 모여 있다. 체통도 좋지만 차릴 데가 따로 있느니라."

세자는 말을 마치자 소앵에게 분부를 내린다.

"너 내려가서 봉지련의 어미를 데리고 올라오너라."

작은 꾀꼬리는 세자의 분부를 받들었다.

남치마 자락을 휘어잡고 뜰에 내려 봉지련의 어미한테로 향했다.

"아주머니, 저는 작은 꾀꼬리라 합니다. 봉지련 형님은 저의 선배였습니다. 세자께서 분부가 계시니 빨리 올라가십시다."

소앵은 봉지련 어미의 손을 잡고 대청으로 올랐다.

봉지련의 어미는 소앵한테 인도되어 배반이 낭자한 전상으로 올랐다.

궁한 살림에 형용은 초췌하고 의복은 비록 백결로 꿰맸으나 일찍이 장안 명기로 손꼽던 봉지련의 어미다.

좌중에 올라 먼저 세자께 문안 절을 올리고 다시 좌중을 잠간 돌아본 후에 팔을 짚어 인사를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태평하십니까?"

세자는 봉지련의 어미가 인사를 올리고 말석에 앉으려 할 때 손짓으로 해서 가까이 불렀다.

"이리 오너라. 내 옆으로 오너라."

봉지련의 어미는 황공 감격해서 어찌할지를 모르면서 치마를 휩쓸고 세자의 옆으로 나가 쭈그리고 앉는다.

세자는 다시 뜰 아래 서 있는 춘방사령 명보를 불렀다.

"명보, 올라오너라."

명보는 밤낮 세자를 모시고 주안상 앞에서 술을 마셨던 것이다.

새삼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뒤통수를 긁적거리면서 전상으로 올랐다.

"이리 오너라. 봉지련의 어미 옆으로 와서 앉거라."

소박하고 순진한 명보였다. 마음속으로 거북함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뒤통수를 긁적거리면서 명령대로 봉지련의 어미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편히들 앉아라."

세자는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한테 일러서 말한 후에 다시 봉지련의 어미에게 묻는다.

"그래, 그동안 고생은 얼마나 많이 했느냐?"

세자의 음성은 정이 뚝뚝 흘렀다. 작은 꾀꼬리를 위시하여 모든 오입쟁이들은 세자의 인정 많은 언행에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지련의 어미는 더한층 황공 감격했다.

"소인 따위의 고생은 한평생 사주팔자에 짊어진 고생이올시다마는 세자마마께오서 아까는 명보 편에 후한 상금으로 원보를 세 덩이템이나 내리셔서 감격한 말씀을 드리려 하여 뵈러 온 천인에게 전상에까지 불러서 오르게 하시니 하늘같이 넓고 넓으신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봉지련의 어미는 진정으로 감사했다.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세자는 소앵에게 분부한다.

"봉지련의 어미한테 술 한 잔을 따라주어라."

작은 꾀꼬리는 세자의 분부를 받들어 봉지련의 어미 앞에 있는 잔에 술을 부었다.

"술은 못 먹습니다."

"장안 명기로 유명했던 네가 술을 못 마시다니 말이 되느냐. 어서 마시어라."

봉지련 어미는 세자의 말씀을 어길 수 없었다. 두어 모금 홀짝 마시고 잔을 놓았다.

세자는 홀짝 마시고 잔을 놓는 봉지련의 어미를 향하여 다시 말을 보낸다.

"나는 오늘 너한테 속죄를 해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다."

세자의 음성은 감창했다.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듯했다.

봉지련의 어미는 깜짝 놀란다.

"아이고, 세자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내가 네 딸 봉지련을 사랑하지 아니했던들 네가 오늘날 이런 고생을 할 까닭이 있느냐. 네 딸이 죽은 것도 내 탓이요, 네가 늙마에 고생을 하게 된 것도 내 탓이다. 내가 아니었던들 오늘날 네가 이 지경이 될 까닭이 있느냐. 모두 다 내 탓이다."

세자는 말을 마치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옅푸른 수색 도포 옷깃을 적신다. 진솔한 세자의 비창해하는 말에 작은 꾀꼬리를 위시하여 모든 오입쟁이도 따라 울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만좌가 처량한 빛을 띠었다. 눈물을 옷깃에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고 콧물을 들이마시며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명보는 눈물만이 아니다. 느끼는 소리를 내고, 봉지련의 어미는 두 손으로 울음 터져 나오는 얼굴을 가렸다.

"작은 꾀꼴아, 술을 한 잔 따라라."

세자의 음성은 슬픔으로 인해 음성이 갈라졌다.

소앵은 세자의 옥잔에 천일주를 가득 부어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린다.

세자는 소앵의 올리는 술을 단숨에 마신 후에 다시 술회를 한다.

"사람이 자유가 없으면 사람 구실을 못한다. 내 비록 이름은 높고 높은 세자라 하나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갖지 못했다. 천승 제왕의 아들이면서, 더구나 뒷날 왕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세자라 하면서 사람으로서의 자유를 갖지 못했다는 이 사실은 얼마나 슬픈 일이냐. 사람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사랑을 가질 수 있다. 하필 사람뿐이랴. 나는 새, 달리는 짐승, 심지어는 미미한 곤충에 이르기까지 자웅의 아름다눈 사랑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존엄하다. 법과 질서를 가지면서 정해진 도덕의 테두리 안에서 남녀의 사랑과 자신의 자유를 갖출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행복스런 일이다. 그러나 나는 세자라 해서 봉지련을 데리고 놀았다고 대사헌의 탄핵을 받았다. 아바마마께 큰 꾸지람을 들었다. 봉지련은 결국 원악도로 귀양을 가서 죽고 봉지련의 어미는 관비가 되어 저 꼴이 되었고, 여기 좌중에 지금 모여 앉아 있는 구종수, 이오방도 다 귀양을 갔다가 갖은 고생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어찌해서 이 나라에서는 나에게만 애인과의 사랑을 금단케 하느냐? 인간의 자유를 세자한테서만 뺏어버리려 하느냐?"

세자는 열이 올랐다. 음성은 힘차면서도 구슬펐다.

"아아 천지신명이시여, 어찌해서 나에게만 인간의 모든 자유를 빼느냐? 술을 따라라."

세자는 작은 꾀꼬리에게 분부를 내린다.

만좌는 엄숙하게 세자의 말씀을 듣는다.

작은 꾀꼬리는 세자가 마시고 난 옥잔에 다시 천일주를 따라 올렸다.

"재상도 애인이 있다. 나를 탄핵한 대사헌도 애첩이 있다. 돌아가신 태상왕 전하께서도 비빈이 계셨다. 전하께서도 수없이 후궁이 많아서 왕비마마의 두통거리가 되어 지밀은 지금 살벌한 속에 놓여 있다. 후궁 중에도 지금 강계 기생으로 유명했던 가희아가 당당한 왕자의 어머니가 되어 있다. 유독 나한테만 애정의 자유를 말살시키는 까닭이 무엇이냐?"

세자는 가슴 안에 서리고 맺힌 한을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술을 따라라!"

세자는 작은 꾀꼬리에게 다시 분부를 내린다.

작은 꾀꼬리는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약주를 따라 올렸다.

세자는 연거푸 석 잔 술을 마셨다.

"다들 너희들도 생각해보아라. 전하께서는 항상 나한테 사냥하지 말라고 꾸지람을 하셨다. 종아리를 때리셨다. 나는 글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다. 글씨 공부도 명필 못지않게 써보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공부하지 아니하고 매사냥이나 하는 부랑패류의 세자로 몰리고 있다. 그러나 그대들은 다 알리라. 전하께서는 강원도와 황해도서 지금 큰 사냥을 벌이고 계시다. 만조백관들을 거느리고 막대한 국비를 허비하시면서 달포 이상을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실 작정이다. 세자는 조그마한 사냥을 해도 아니 되고 전하는 온 나라의 국력을 기울여 사냥을 해야 한단 말이냐?"

세자는 주안상을 주먹으로 쳤다.

누구 한 사람 감히 옳다 그르다 말할 사람이 없다. 모두들 숙연히 고개를 숙일 뿐이다.

인간의 자유와 사람의 애정을 부르짖는 젊은 세자의 위풍은 당당했다.

세자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이 밖에 너희들한테 털어놓고 말할 것이 태산 같다. 그러나 내 집안일을 너희들한테 푸념한다는 것은 곧 내 얼굴에 침을 뱉기다. 다 그만 덮어두려 한다. 오늘 봉지련의 어미한테 속죄하려 하다가 이리 말꼬리가 길어졌구나. 과히 허물하지 마라. 하하하. 세상만사가 다 이러하니라."

세자는 드높게 웃으며 다시 봉지련의 어미를 바라본다.

봉지련의 어미를 유심히 바라보던 세자는 고개를 들어 좌중을 돌아본다.

"여러분들한테 내가 의논할 일이 있네. 내 말이 옳거든 찬성을 하고, 내 말이 그르거든 반대를 하소."

"무슨 말씀이신지 하교를 내리옵소서."

구종수가 아뢴다.

여러 사람들은 세자의 엄청나도록 엄숙한ㅇ 술회에 묵연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세자가 슬며시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자 비로소 모두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세자마마의 말씀은 모두 다 적절하신 말씀입니다. 이치에 합한 분부이신데, 찬성과 불찬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부를 내려줍시오."

구종수가 찬성한다. 뒤를 이어 이오방이 한마디 한다.

"어디 말씀을 내리십시오.'

"자아, 그럼 내가 의견을 말할 테니 여러분들은 들어보고 가부를 말해주게."

"어서 분부를 내립쇼.'

작은 꾀꼬리도 방글방글 웃으며 세자께 재촉한다.

"내가 명보의 말을 들은 후에 봉지련의 어미에게 약간의 살림에 보태라고 원보 두서너 덩이를 보냈네마는 지금 봉지련의 어미를 앞에 대하고 보니 원보 몇 덩이 가지고는 길고 긴 세월에 생활을 해나갈 수 없을 것일세. 그래서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네."

세자는 다시 얼굴에 웃음을 가득하게 띠고 좌중을 바라본다. 모두들 궁금했다.

봉지련의 어미는 세자께서 자기 신상을 걱정해주시는 말씀이라 황송해서 감히 개구를 못하고, 여태껏 잠잠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명보도 답답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어서 말씀을 내리십시오. 운만 따시고 말씀은 아니 내리시니 사람이 답답해서 배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세자는 명보의 참견해 말하는 소리를 듣자 호탕한 웃음을 또 한 번 웃는다.

"너는 말할 자격이 없다. 입을 다물고 앉았거라. 하하하."

명보는 주먹 맞은 감투가 돼서 머쓱하니 앉았다.

"여러분,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를 아주 정식 내외가 되도록 혼인을 시키는 것이 어때?"

벼르고 별러서 내놓은 세자의 말은 간단했다.

모두 다 기막히게 좋은 제의라고 생각했다.

"거 참 훌륭하신 하교십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희한한 일이올시다."

"명보도 홀아비로 지내는 터이고 봉지련의 어미도 홀어머니로 지내는 터이니 아주 오늘 밤에 작수성례를 해서 혼인 예식을 치른 후에 동궁 안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모두 다 손뼉을 쳤다.

"좋으신 처분이십니다."

일제히 찬동했다.

세자는 유쾌했다. 난생 처음으로 유쾌한 일을 해본다고 생각했다. 명보를 바라본다.

"우리가 아무리 좋다 해도 당사자들의 의사를 들어보아야 하겠다. 명보의 의향은 어떠냐?"

명보는 벙긋벙긋 웃고 대답이 없다.

"좋겠습지요.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구종수가 옆에서 부추겼다.

"좋습니다."

명보는 뒤통수를 긁적긁적 긁으면서 벙긋 웃고 대답했다.

"그러면 봉지련 어미의 생각은 어떠냐?"

세자는 봉지련의 어미를 향하여 미소를 풍기며 바라본다.

"세자마마의 분부시온데 어찌 감히 어기오리까. 더구나 동궁 안에서 저하를 모시고 한평생 거행하랍시는 분부를 내리시니 은혜를 백골 난망이옵니다."

세자는 언성을 높여서 침실에 있는 세자궁 시녀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세자의 호기로운 목소리는 쩡쩡 기왓장을 울렸다. 침실에 있던 시녀가 달음질쳐 달려왔다.

"부르셨사옵니까?"

"희한하고 좋은 일이 있다. 안에 들어가서 빈마마께 아뢰어라. 춘방사령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가 지금 이 식각에 작수성례를 할 테다. 빈마마께 아뢰어서 모든 절차를 차려줍소사 아뢰어라. 그리고 봉지련의 어미는 오늘 밤부터 명보와 함께 동궁에서 거행하고 지낼 테니 어느 곳에 배치할지 빈마마께 알아서 처리하시라고 아뢰어라."

동궁 시녀는 세자의 분부를 받자 방싯방싯 웃으며 쏜살같이 내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세자빈 김씨는 봉지련의 일과 봉지련 어미의 일을 손살피같이 살피고 있었다.

더구나 홀아비로 있던 충복 명보를 봉지련의 어미와 짝을 지어 살게 한다는 세자의 분부에 세자빈도 한량없이 좋은 처사라고 생각했다.

"적선을 하시는구나. 작수성례를 시키는데 별 주선이 있겠느냐. 동궁 내관을 불러라."

김빈은 언제 봐도 양처현모감인 세자빈이었다. 곧 세자의 분부에 따라 동궁 내관을 불렀다.

동궁 내관이 충방 공사청에 있다가 시녀한테 불려서 빈마마의 처소로 들어왔다. 김빈은 미소를 지어 내관한테 분부를 내린다.

"저하께서 홀아비 명보를 장가들이신다 한다. 신부는 늙었다마는 봉지련의 어미다. 안 대청 앞에 작수성례 할 채비를 차려라. 시각을 지체치 말고 준비케 하라. 그리고 이것은 내가 신부한테 내리는 예물이다. 네가 내 대신 전하도록 해라."

김빈은 무명지에 끼었던 묵직한 금가락지 한 쌍을 뽑아 주었다.

세자빈 김씨의 분부를 받들어 동궁 내전 넓고 넓은 뜰 안에는 춘방사령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가 정식으로 혼인을 하는 작수성례의 예식을 거행할 채비가 벌어졌다.

부두칠성이 비치는 아래 모란병풍이 둘러쳐 있고 병풍 앞에는 독좌상이 놓여 있었다. 독좌상 위에는 아무 배설도 없이 쌍촛대 불이 휘황하고 그 앞에는 맑은 정화수가 깨끗한 오지동이에 칠분쯤 담겨 있었다. 동이 앞에 멍석을 깔아놓고 멍석 위에는 동궁빈 김씨의 특명으로 궁중에서 쓰던 강화 화문석을 펴놓았다.

간단하게 작수성례 하는 혼인으로는 모란병풍하며, 강화 화문석들은 모두 다 지나친 호사였다.

동궁 내관은 작수성례 할 채비를 차려놓은 후에 곧 빈마마께 아뢴다.

"작수성례 할 채비를 다 차려놓았습니다."

"내 한번 친히 간검해보리라."

동궁빈은 충복 명보의 장가드는 것도 기쁘게 생각했지만 부군인 세자마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일부러 친히 마당까지 내려가서 간검하겠다고 영을 내렸다.

세자빈은 궁녀를 거느리고 친히 뜰에 내려 병풍과 교배석이며 독좌상을 둘러본 후에,

"등롱을 뜰 안 좌우 옆으로 여남은 쌍 세워두면 어떠냐?"

동궁 내관은 웃으며 아뢴다.

"그러하오면 청사초롱을 밝히는 것이 됩니다."

"혼인에 청사초롱을 밝히면 더욱 좋지 아니하냐."

"청사초롱을 밝히게 되면 등롱을 든 십여 명의 궁인이 필요하옵고, 십여 명의 등롱꾼이 있다면 열두 하님이 늘어서야 합니다.'

동궁빈도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동궁의 궁녀들로 열두 하님을 만들어 세우면 좋지 않겠느냐?"

"그럼, 어디 작수성례로 올리는 혼인입니까? 정말 진짜로 올리는 호화찬란한 혼인의식이 됩니다."

"세자마마께서 나오시기 십상팔구다. 명보의 혼인도 혼인이지만 어둔 밤에 실족이라도 하신다면 큰일이다. 세자마마를 위해서라도 등롱에 불을 켜고 열두 하님을 늘어세우게 하라."

"그러면 순수한 작수성례가 아니올시다."

"더욱 좋지 아니하냐. 작수성례란 것은 가난한 사람이 별안간 혼인을 하는 데 아무 준비가 없어서 동이에 물만 떠놓고 교배를 하는 것이 작수성례다. 그러나 동궁이 아무리 초솔하고 가난하다 하나 열두 하님에 등롱 몇 쌍쯤 못 세워주겠느냐. 등롱과 하님을 세운 후에 사랑에 나가서 세자마마께 아뢰어라."

동궁 내관은 웃음을 머금고 동궁빈께 아뢴다.

"청사초롱은 빈마마의 분부대로 십여 쌍 궁인을 풀어 세우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열두 하님을 세우신다면 그대로 궁녀들만 열두 명을 늘어세우는 것이 아니오라 가지고 서 있는 물건들이 있어야 합니다."

동궁빈은 무심코 대답했다.

"무슨 물건들이냐?"

"열두 하님을 늘어 세우는 것은 신부가 시집가서 쓸 물건들을 하님들이 함에 담아서 금전지와 상모 줄이 붙은 홍보에 싸 가지고 시립해서 늘어서 있는 것입니다. 우선 봉치 받은 치마 양단을 담은 함이며 신부의 의복을 넣은 함에다가 밥소래, 양동이, 청동화로며 부용향까지 받들고 서 있는 하님을 합쳐서 열두 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밤 이 밤중에 의복과 물건들을 어디서 조처합니까?"

동궁빈은 비로소 깨달았다. 여기 견주어 비할 것은 아니지만 빈은 자기 자신이 동궁으로 들어올 때 모든 화려한 조도품을 가지고 온 것을 생각했다. 판단이 빠른 동궁빈이었다.

"지체 말고 너는 곧 우리 친정으로 가서 내가 말씀한다고 우리 아버님께 여쭈어라. 열두 하님아 함을 이고 있을 물건을 준비해줍시사고 아뢰어라. 시각이 급하니 빨리 시행해줍소사 해라."

동궁 내관은 동궁빈의 명령을 받고 화갯골 김한로의 집으로 달음질쳤다.

김한로는 세자의 심경과 자기 딸의 지성스런 행동을 잘 알고 있었다.

"가 있거라. 곧 치송해 보내리라."

동궁 내관을 돌려보낸 후에 청지기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너는 곧 종로 선전과 상전으로 달려가서 혼수 흥정을 해가지고 동궁빈께 전해 올려라. 값은 내일 돋 셈해준다 일러라."

김한로의 청지기는 주인대감의 분부를 받들어 선전과 상전으로 치달렸다. 세자마마의 장인인 김한로의 명령이다. 선전과 상전에서는 여율령 시행했다.

동궁빈한테는 혼인에 소용되는 치마 양단을 위시하여 모든 혼수가 들어갔다. 동궁빈 김씨는 시녀들을 불러 함에 담게 한 후에 다시 젊고 어린 시녀 열두 명을 뽑아서 열두 하님을 만들어 열두 개 초롱과 함께 뜰 안에 늘어 세우고 세자를 청했다.

"사랑에 나가서 세자마마께 아뢰어라. 명보와 봉지련 어미의 작수성례할 준비가 다 마련되었습니다고."

동궁 상궁이 빈이 명에 의하여 사랑에 나가서 세자께 아뢰었다.

"작수성례 할 채비가 다 마련되었습니다."

세잔갱작을 하여 여러 오입쟁이들과 호기가 높던 세자는 상궁의 작수성례 할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아뢰는 말을 듣자 마음이 크게 흡족했다.

"자아, 다들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세.'

세자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사람들을 재촉했다.

구감역이 세자께 아뢴다.

"작수성례 하는 혼인 구경을 하러 내전까지 들어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비록 작수성례라 하오나 순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순서를 차려야 하겠나?"

세자가 묻는다.

"혼인에는 신랑 색시가 제일이올시다."

"그렇고말고."

"신랑 명보와 신부 봉지련의 어미가 앞을 서서 들어가고 다음에는 황송하오나 세자저하께서 후행이 되어 들어가셔야 합니다. 다음엔 소인들이 잔치 참례하는 손이 되어 따라 들어가야 합니다."

세자는 도연히 취한 술기운에 흥취가 도도했다.

"그거 좋은 말일세. 그런데 작은 꾀꼬리가 빠졌네. 나는 명보의 후행이 되고 작은 꾀꼬리는 봉지련의 어미 후행이 되고 자네들은 혼인 참례하러 온 빈객이 되는 것이 어떤가?"

"그것 참 좋은 분부십니다. 그럼 작은 꾀꼬리도 일어나거라.'

구종수는 소앵이를 재촉해 일으켰다.

"어서 일어나거라.'

세자는 명보를 재촉해 일으키고 소앵이는 봉지련의 어미를 부축해 일어나게 했다.

명보는 갈고리 같은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긁적 긁으면서 벙글벙글 웃으며 일어나고, 봉지련의 어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기면서도 한점 부끄러운 기운이 양미간에 떠돌아서 홍훈이 눈썹 아래서 불그레한 도화양협을 이루었다.

구종수의 제안대로 명보가 앞을 서고 세자가 뒤를 따랐다. 봉지련의 어미가 앞을 서고 작은 꾀꼬리가 부축했다. 뒤에는 구종수, 이오방 이하 오입쟁이와 한량패들이 따랐다.

동궁 내전으로 일행이 들어가니 뜰안은 눈이 부시도록 휘황찬란했다.

열두 쌍 청사초롱이 줄을 지어 벌여 섰고 열두 하님이 홍보에 함을 싸서 머리에 이고 있었다.

전상마루 끝에는 세자빈 김씨가 동궁 소속의 나인들, 수규, 수칙, 장찬, 장서들을 거느리고 미소를 지어 사랑에서 들어오는 세자를 맞이했다.

모든 포진이며 배설한 범절이 확실히 보통 작수성례 때 쓰는 간략하고 초솔한 조도가 아니었다.

세자는 마음속으로 착한 아내라고 생각했다.

세자는 청상에 있는 세자빈을 향하여 말한다.

"이거 어디 작수성례하는 의식요. 열두 하님에 등롱 열두 쌍까지 세워놓고 모란병풍에 독좌상까지 배설해놓았으니 명보와 봉지련 어미의 일대 영광이지만 내 마음도 흐뭇해서 좋구려. 모두 다 어진 빈마마의 주도한 배려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소."

세자의 대청을 향하여 치하하니 세자빈은 안연히 마루 끝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수혜를 가볍게 끌고 청 아래로 내려섰다.

공손히 세자께 아뢴다.

"명보는 소첩이 동궁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세자저하를 받들어 모시던 충복이옵고, 봉지련의 어미는 세자마마로 인하여 딸을 잃고 무한한 고초를 겪은 여자올시다. 두 사람을 오늘 밤에 작수성례 시킨다는 분부를 듣자옵고 소첩도 마음에 기뻐서 있는 대로 주선을 한 것뿐입니다.'

세자빈 김씨의 어질고 착하고 부드러운 마음씨에 모두 다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명보와 봉지련의 어미도 세자빈의 안상하게 아뢰는 말씀을 듣자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명보는 세자빈의 앞으로 나가고 봉지련의 어미는 땅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뜻밖에 절을 받는 세자빈은 황망했다. 받아야 할지 아니 받아야 할지 잠깐 망설이다가 황망하게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어서 혼례식을 마친 후에 절을 하도록 해라."

어진 동궁빈이었다. 어린 동생을 타이르듯 했다.

구종수는 명보의 손을 이끌어 독좌상 앞에 동향해 세우고 작은 꾀꼬리는 봉지련의 어미를 서향해서 세운 후에 마주 서서 교배를 하여 백 년을 함께 할 뜻을 굳게 맹세하고 세 번씩 세 번 아홉 번 합환주를 홀짝홀짝 마시게 했다.

이내 작수성례의 예식은 끝이 나고 간단하나마 신부는 시부모께 폐백을 드려야 할 예절이 남았다. 그러나 폐백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오입쟁이 이오방이 한 마디 하며 나선다.

"명보의 아버지와 어머미가 없으니 신부가 폐백을 드릴 곳이 없습니다.기왕 명보의 내외는 춘방에서 살라고 분부를 내리셨으니 세자마마 양위분께서 폐백을 받으십시오.'

모든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이리하여 명보 내외는 세자마마와 세자빈께 폐백을 올렸다.

이같이 하여 태종이 강원도로 사냥을 나간 동안에 춘방사령 명보는 봉지련 어미를 아내로 삼아서 춘방 열두 줄 행랑 중에 한 방을 차지하여 의좋게 살림을 차렸고, 세자는 봉지련 대신 작은 꾀꼬리를 동궁으로 드나들게 하기도 하고 세자 자신이 오입쟁이들과 함께 작은 꾀꼬리 집으로 찾아가기도 해서 욕된 세상의 번뇌와 고민을 애욕의 삼매경 속에 던졌던 것이다.

이때 효령대군 ''는 부왕 태종을 배행하여 크나큰 사냥 거둥에 따라갔다.

효령대군의 성격은 형님 되는 세자와 판이했다.

성격이 안존해서 극히 내공적이었다.

세자처럼 활발하지 못했다. 세자처럼 정정당당하게 불의에 대항하지도 못했다. 극히 얌전하면서도 극히 냉정하고 극히 이기적이었다.

그러나 또한 이해타산에는 극히 밝았다. 말하자면 내공적인 성격은 욕심이 강하면서도 협기가 없는 때문에 애당초 남의 일에 대하여는 일체 간섭을 아니했다.

이런 까닭에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비가 서로 싸우고 불화했으나 자기 자신은 일체 개입해 들지 아니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이건만 그러했다.

외가의 민무질과 민무구, 민무휼 삼형제가 다 결딴에 나고 사약까지 받아서 자진까지 했건만 효령대군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아니했다.

현인 중에도 제일 첫째 가는 세자가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사냥만 나가고 매를 잘 기른다 해서 항상 대왕 전하의 꾸지람을 듣건만 효령은 시치미떼고 세자를 찾지 아니했다.

효령은 자기 집에서 더욱 공부를 했다.

효령이 공부를 잘 한다는 소문은 궁중과 부중에 자자했다.

효령은 글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를 육예라 해서 활 쏘는 공부에도 열을 내서 활도 잘 쏘았다.

효령대군은 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활도 잘 쏜다는 소문은 역시 궁중과 부중에 자자했다.

이러한 소문은 부왕인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부왕인 태종은 심히 만족했다.

상궁과 내관이며 측근자인 승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효령은 제 형 세자보다 열 갑절이나 낫다!"

부왕의 한 마디 칭찬 말씀은 곧 효령대군의 귀로 들어갔다.

효령대군은 은근히 기뻤다.

효령의 부인은 남편을 격려했다.

"아바마마께옵서 나리를 세자보다 십 배나 낫다고 하셨다 합니다. 더한층 힘을 쓰십시오.'

효령대군 부인의 격려는 한층 효령에게 힘을 주었다.

공부하는 데만 전력을 기울이지 아니했다.

부왕께 혼정신성하는 문안도 아침과 저녁으로 궐하지 아니하고 꼬박꼬박 들어가 뵈었다.

아버지 태종은 마음으로 기뻐했다.

태종이 혹시 감환으로 미령하다거나 체수로 미령한 일이 있으며 효령대군은 내국에서 전의가 진맥한 후 지어 바친 약을 장지문 밖에서 친히 달여서 올렸다.

어떤 때는 밤을 새워가면서 시탕을 했다.

아무리 부모라 하나 여러 아들 중에 자기 명령에 잘 복종하고 자기를 위해주는 아들이 여러 형제 중에 제일 귀여운 것은 인정상 정한 이치다.

태종은 효령이 자리를 뜬 담에 후궁인 ''의 어머니를 향하여 효령대군의 칭찬을 했다.

"''는 참 효자거든. 조석문안은 세자보다도 낫고, 내가 병이 들면 밤을 새워서 제 손으로 친히 약을 달여주니 세상에 이런 효자는 민간에도 드물 거야. 더구나 대군의 지위에 있으면서."

''의 어머니는 태종의 비위를 맞추었다.

"효령대군은 과연 출천지효올시다. 대군의 군호도 효령이 아닙니까. 참말 믿으실 만한 대군이올시다."

''의 어머니는 강계 기생 출신 가희아였다.

자기를 업신여기는 세자보다도 안존하고 상냥한 효령이 좋았다. 전하의 비위를 맞추어 칭찬이 놀라웠다.

이 소문은 옆방에 있던 상궁과 궁녀들을 통하여 단통 각 궁으로 퍼졌다.

첫째로 동궁, 둘째로 효령대군 궁, 셋째로 충녕대군 궁으로 쫙 퍼졌다.

그중 기뻐하는 궁은 효령대군 궁이었다. 효령대군 부인은 밤에 조용히 효령한테 고했다.

"좋은 소문이 들립니다."

효령 부인은 싱글거려 웃으며 대군한테 고했다.

"무슨 좋은 일이?"

"아바마마께오서 나리 칭찬이 대단하셨다 합니다. 아들 중에 제일이요, 민간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효자라 하셨답니다."

효령은 마음속으로 무한히 기뻤다. 그러나 사색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후궁 ''의 어머니께서도 출천지효라 칭찬을 했다 합니다.'

효령은 마음속으로 '가희아도 훌륭한 후궁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느 날 지극히 비밀한 지밀 속 연침 속에서 일어난 비화 한 토막이 있었다.

말한 사람은 나라의 지존인 상감 태종과 그의 가장 사랑하는 후궁 강계 기생 출신 ''의 어머니와의 대화다.

"내 아들들이 어떤가, 다들 잘났지?"

"그렇습니다. 다들 영웅호걸들입니다."

가희아가 태종의 비위를 맞춰 영웅호걸이라고 불러봤다.

"영웅호걸은 딴소리야. 내가 영웅호걸이구, 우리 아버지가 영웅호걸이지. 하하하. 내 아랫대에는 나나 우리 아버지 같은 기백이 없어."

가희아가 생긋 웃으며 대답한다.

"세자마마께서 영웅호걸이 아니십니까? 소첩은 세자마마를 영웅호걸로 압니다."

가희아는 입술에 발린 거짓말을 살짝 했다. 가희아의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자였다.

"그따위가 영웅호걸이라면 정말 영웅호걸이 통곡을 할 게다. 못 써 못 써. 세자 노릇도 끝끝내 감당을 할는지 모르지."

왕은 말을 마치자 길게 한숨을 짓는다.

가희아는 대황의 뜻을 떠보려 했다. 아들 ''가 있는 때문이다.

"대군이나 궁중에 세자만한 인물이 어디 있습니까?"

"세자만한 인물이라니 말이 되나. 세자 노릇을 할 만한 아들이 많지. 우선 효령대군 '', 그리고 다음엔 네 아들 ''로다."

가희아의 아리따운 입은 함박꽃모양 빨갛게 벌어졌다.

"불감한 말씀이옵니다. 소첩의 자식이 어찌 감히 잘난 축에 들겠습니까?"

"별소리가 다 많구나. ""도 똑똑하니라."

전하는 말을 마치자 한참 농염된 가희아의 허리를 껴안았다.

여인이 아름답게 보이면 그의 소생도 귀엽게 보이는 것이다.

극히 은밀하고 극히 조용한 지밀 안 밀실의 비화는 어느 틈에 새어 나갔다.

각 궁으로 자자하게 퍼졌다.

'세자가 위태롭다' 하는 소문이 쫙 퍼졌다.

'까딱하면 효령이 세자가 된다.'

하는 소문도 쫙 퍼졌다. 동궁에서는 이 소문을 듣자 세자는 코방귀를 뀌었다.

"하하하, 고소원이다. 세자 자리를 가져가거라! 하하하, 세자는커녕 왕의 자리까지도 가져가거라. 하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글쎄올시다. 마음만 편하게 지낸다면 그만이올시다."

세자빈 김씨도 미소를 지어 호탕하게 웃는 세자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러나 이 비밀하고 정확한 소문을 들은 효령대군 궁에서는 지밀안 못지않게 부인과 효령의 정담이 농익었다.

은은한 화촉 아래 등심이 가물거렸다.

"나리.'

"왜 그래?"

"오늘 기막힌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좋은 소식을 들었소?"

"어쩌면 나리께서 세자마마가 되실 듯합니다."

"세자마마? 별소릴 다 하는구려. 형님이 지금 세자로 계신데 될 말인가."

"동궁께서는 아마 폐쇄자가 될 듯합니다."

"당치 않은 소리지. 어디서 그따위 소리를 듣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요."

"궁중 지밀에서 아바마마와 ''의 어머니 단 두 분이 침석에서 주고받으신 말씀을 지밀상궁이 엿듣고 넌지시 나와서 일러주고 갔습니다. 추호도 틀림이 없습니다. 나리가 아드님 중에 제일이라 하셨답니다. 그리고 '세자는 앞으로 그 자리를 유지할는지 모르지', 이런 말씀까지 하셨답니다."

효령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대답을 할 도리가 없었다.

"지밀상궁의 말에 의하면 동궁을 폐위시키려는 것은 시간문제고 세자 물망에 오른 분은 나리와 후궁 가희아의 소생인 ''라 합니다. 그러나 '' 왕자는 원래 지체가 얕지 아니합니까. 지금은 아무리 후궁이 되었다 하나 '' 왕자의 어머니는 강계 기생이 아닙니까? 아무리 전하께서 사랑하신다 하나 만약 ''로 세자를 봉한다면 온 조정과 종친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하니 만약 세자를 바꾸게 되는 경우에는 나리께서 첫째로 뽑히시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효령대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음속으로는 무한히 기뻤다. 그러나 소심한 인물이었다.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베개를 높게 하고 눈만 끔뻑끔뻑하고 누웠다.

부인은 능동적이고 효령은 피동적인 인물이었다.

'아아, 얼마나 좋은가, 세자빈!"

효령의 부인은 동궁의 호화롭고 아름다운 꿈을 꾸어본다.

또 한판 재잘거린다.

"동궁이 된 후엔 상감마마가 되시는구려. 그리고 소첩은 왕후마마가 되고, 황금용상, 일월병이 눈앞에 가물거립니다."

효령의 부인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원앙침 위에서 효령의 목을 바싹 껴안았다.

효령 부처의 즐거운 꿈은 황금 용틀임한 명정전 용상으로 가물거렸다.

이후로부터 효령은 더욱 얌전햇다. 더욱 글공부와 활쏘기 공부를 했다.

활쏘기 공ㄴ부는 예·····수인 육예의 하나로 선비들이 당연히 배워야 하는 여섯 가지 재주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태조인 명궁 이성계의 집안에서는 활 잘 쏘는 것이 하나의 가풍이 되었던 것이다.

태종은 강원도와 황해도로 사냥을 나갈 때 둘째 아들 효령을 불렀다.

"네가 글공부에 착실한 것은 나도 짐작한다. 그러나 활도 쏠 줄 아느냐?"

효령은 아바마마가, '공부에 착실하다' 하는 한마디 말에 감격했다. 아버지께서 나의 글공부 하는 것을 알아주시는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무한 기뻤다.

총명한 효령은 아바마마가, '활도 쏠 줄 아느냐' 하고 물었을 때 내일 사냥 나가는 동원령이 내린 것을 알았다.

꾸지람을 하려고 묻는 것이 아닌 것을 짐작했다.

"약간 활 쏘는 공부도 했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태종의 용안에는 미소가 떠돌았다.

"내일 강원도와 황해도로 사냥을 나갈 테다. 만조백관이 따르고 세자인 네 형도 갈 것이다. 너도 한번 따라가겠느냐?"

효령은 기뻤다. 자기의 활 쏘는 재주를 이번 기회에 한 번 자랑하고 싶었다. 더욱이 형님 되는 세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형님 세자는 글공부는 아니하고 밤낮 매를 기르면서 사냥을 좋아한다고 아바마마 태종께 꾸지람만 들었다. 그러나 자기는 글공부도 잘하고, 활도 잘 쏠 줄 안다. 이 기회에 글공부도 잘 하고, 활쏘기도 남에게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해 보이고 싶었다.

"아바마마께서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가신다면 소자도 어가를 배행해 모시고 가겠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내일 일찍 예궐하도록 해라."

효령은 분부를 받고 물러났다.

이튿날이 되었다. 효령은 새벽부터 대궐로 들어가 아바마마의 기침하기를 기다려 문후를 올리고 시립해 있었다. 어가가 출발할 시각이 되었다. 삼정승 이하 육조판서와 각 영문 대장들이 다 모였건만 세자의 얼굴은 보이지 아니했다. 아바마마는 진노했다. 큰 소리로 꾸짖으며 동궁으로 내관을 보냈다. 그러나 세자는 관격이 되어 못 나간다는 것이다. 아바마마는 불같이 진노했다.

"관격이라니, 하필 이때 관격이 된단 말이냐! 가기가 싫어서 꾀병을 하는 것이 아니냐. 그게 어디 세자냐. 그래가지고 장치 어찌 임금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 생각해볼 일이다!"

전하의 노기는 절정에 올랐다.

효령은 아바마마의 꾸지람을 목도해 들었다.

'그래가지고 장차 어찌 임금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 생각해볼 일이다!'

전하인 아바마마의 말씀은 효령대군의 귓속으로 폭폭 사무쳐 들어갔다. 아바마마와 세자인 형님의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은 누구보다도 효령이 잘 알고 있었다. 세자를 갈아버린다는 유언비어는 궁중과 부중에 자자하게 떠돈 지 오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친히, '생각해볼 일이다' 하는 아바마마의 말씀을 듣고 보니 마음에 깊이 걸려서 사라지지 않는다. 형제의 차서로 따져본다면 세자 다음에는 자기다. 형님인 세자가 폐위된다면 다음 차례는 반드시 자기가 된다. 효령은 더욱 몸을 단정히 가졌다.

어가의 떠날 시각이 되었다. 효령은 잠시도 아바마마의 곁을 떠나지 아니했다. 전하의 사냥 가는 행차였다. 연을 타지 아니하고 말을 탔다. 효령도 말을 타고 항상 전하의 뒤를 따라 호위해 나갔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효령을 효자라고 생각했다. 어려서도 효령의 마음은 고왔다. 이렇기 때문에 태종은 그의 군호를 봉할 때 효령대군이라 했던 것이다. 강원도까지 나가는데 효령은 잠시도 어가의 곁을 떠나지 아니했다.

평강 땅에 들어섰다. 산골 속 고원지대다. 노루 한 마리가 달렸다. 새끼노루다.

"저기 노루가 뛴다!"

누구의 입에선지 이같이 부르짖었다. 효령은 활을 당겨 살을 메겼다. 효령의 화살이 날았을 때 태종은 효령을 돌아보았다.

"네가 저 노루를 쏘겠느냐?"

"벌써 쏘았습니다."

효령의 대답이 채 떨어지기 전에 노루는 살을 맞고 쓰러졌다. 천세 소리가 진동했다.

"누가 쏘았느냐?"

군중들은 떠들며 물었다.

"효령대군이 쏘셨다."

만조백관들은 천세를 불렀다. 노루 한 마리가 또다시 뛰었다. 역시 새끼노루다. 아까 노루와 크기가 비슷했다. 만조백관들은 일제히 활에 살을 메겼다. 효령대군의 금비전이 날았다. 금비전은 '푸르르' 소리를 치며 새끼노루의 목줄을 맞혔다.

"누구의 화살이냐?"

군중들은 또다시 소리를 높이 질러 묻는다. 몰이꾼이 노루의 목에서 금비전 화살을 뽑았다. 금비전 살대에는 '효령대군'이라 새겨져 있었다.

"효령대군이오!"

큰소리로 외친다.

"이방이중이오!"

심판하는 관원이 큰소리로 외친다. 태종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돌았다. 군중들의 천세 소리가 또 한 번 산골을 울렸다.

사냥패들은 다시 재를 넘었다. 놀란 노루가 한 마리 나타났다. 이번에도 새끼노루다. 효령은 잽싸게 앞을 질러 말을 달렸다. 금비전이 또 한 번 소리치며 날았다. 화살은 새끼노루의 명치를 맞혔다. 몰이꾼은 화살을 뽑았다.

"이번에도 효령대군이오!"

'' 하고 환성이 일어났다.

"삼발삼중이오!"

하는 심판관의 큰 음성이 들렸다.

효령은 득의양양했다. 말을 채쳐 한 고개를 또 넘었다. 노루 한 마리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이번에는 새끼노루가 아니었다. 어미 노루다. 아까 효령이 쏘아 맞힌 새끼노루를 찾아 나왔다가 자식의 죽음을 보고 구슬피 울며 헤매는 모양이다. 효령은 만조백관이 활을 쏘기 전에 먼저 살을 놓았다. 정신을 잃고 자식을 찾으며 헤매던 어미노루는 효령의 화살을 피할 줄 몰랐다. 단번에 살을 맞고 쓰러졌다.

"효령대군, 사발사중이오!"

수렵 심판의 큰 소리가 들렸다. 삼발삼중도 어려운 일인데 사발사중이면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만조백관들은 비로소 효령의 활 쏘는 역량을 인정했다. 활호 소리가 산골에 진동했다. 효령이 어미노루를 쏘아 맞히고 앞을 향하여 말을 달려 나가려 할 때 큼직한 노루 한 마리가 두려움 없이 효령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눈에는 노기가 등등해서 핏발이 붉게 섰다. 수노루다. 자식을 단번에 세 마리씩이나 잃고 아내인 암노루를 뺏긴 수노루는 노기가 등등해서 효령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죽은 자식과 죽은 아내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원수를 갚으려고 뛰어든 것이다. 노루는 효령의 말 앞으로 발악을 하는 듯 뛰어들었다. 효령은 전중에서 재빨리 살을 뽑아 활에 메겼다. 이번엔 백우전이다. 흰 깃으로 살대를 장식한 백우전은 단번에 살기를 내어 쫓아드는 수노루를 쏘아 맞히었다. 수노루는 '' 하는 큰 음향과 함께 쓰러졌다.

"효령대군, 오방오중이오!"

하는 소리가 산마루를 쩡쩡 울렸다.

만조백관들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오발오중은 극히 드문 솜씨다. 모두 다 혀를 둘렀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기뻤다.

'글만 잘 읽는 줄 알았더니 활도 제법 쏘는구나.'

하고 만족했다.

태종의 사냥놀이는 계속되었다. 강원도, 황해도 일대를 두루 돌았다. 거의 달포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세자는 일부러 꾀병을 하고 배행을 하지 아니했지만 마중까지 아니 나갈 수는 없었다. 서울에 유도하고 있는 백관들과 함께 망우리까지 마중을 나갔다. 세자는 미리 나가서 군막을 치고 있다가 돌아오는 아바마마를 맞이했다. 절을 올리고 시립했다. 옆에는 효령대군이 아바마마의 앉으신 옆에 모시어 섰다.

"그동안 속병은 다 나았느냐?"

태종은 못마땅한 듯 세자를 흘겨보면서 묻는다.

세자는 태연했다. 기왕 미움을 받는 바에야 국축하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 속병은 나았습니다."

태연히 대답했다.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느냐?"

태종은 못마땅한 눈치로 세자를 바라본다.

"글을 읽었습니다."

세자는 태연히 뱃심 좋게 대답했다.

태종은 세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뻔뻔스럽다고 생각했다.

"글을 읽었어? 무슨 글을 읽었느냐?"

"'시전'을 읽었습니다."

"'시전' 속에 무슨 편을 읽었느냐?"

"정풍, 위풍을 읽었습니다."

세자는 태연히 아뢰었다.

태종은 화가 버럭 났다. 정풍, 위풍은 '시전' 중에 가장 음란한 남녀관계의 사랑을 노래한 시였다. 효령대군도 깜짝 놀랐다. 형님이 왜 저런 대답을 하나 하고 가슴을 죄었다. 아바마마께서 큰 꾸지람을 내리시리라 하고 얼굴빛까지 변하고 시립해 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바마마의 옥음은 왈칵 불길을 뿜었다.

"왜 그따위 음란한 글을 읽었느냐?"

"인정 풍속을 배우려고 읽었습니다. 나쁜 글이라면 지성선사 공자께서 '시경'을 산삭하실 때 그대로 집어넣었을 까닭이 있습니까?"

세자는 앞으로 작은 꾀꼬리를 데리고 논 일이 탄로 나더라도 방패 삼아 대답하려 하여 '시경'의 정풍, 위풍을 말한 것이다.

태종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보기 싫다. 저리 가거라!"

세자는 보기 싫다는데 서 있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도 겁내지 아니했다. 유유하게 발길을 옮겨 물러난다. 태종은 더한층 기가 막혔다. 잘못했다고 사죄를 드릴 줄 알았는데 유유하게 물러가는 데 약간 기가 눌렸다.

"네 아우 효령은 이번 사냥에 오발오중을 했다. 글공부도 잘하지만 활도 제법 쏘았다. 네 아우한테 부끄럽지 아니하냐?"

세자는 나가던 발길을 돌리고 아뢴다.

"세자를 효령에게 넘기옵소서."

또렷이 대답했다. 옆에 서 있는 효령대군의 얼굴은 주토물을 끼얹은 듯 붉어졌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바마마는 또 역정이 났다. 큰 소리로 호령을 내린다.

"불파천이로구나!"

하늘도 두렵지 않느냐고 세자를 꾸짖는 소리다. 세자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두려움이 없었다. 여유가 작작했다. 천천히 걸어 장막 밖으로 물러난다. 만조백관들은 눈이 둥그레졌다. 태종이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환도한 후에 효령대군은 더한층 공부에 열중했다. 꼭 세자의 자리는 자기한테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자기를 효자라 해서 효령대군이라고 군호까지 지어주었다. 글공부 잘하는 것을 인정해주었던 것이 이번 사냥 때 오발오중을 해서 더한층 부왕의 신임을 얻었다. 아바마마는 세자 앞에서 자기를 기막히게 칭찬해주었다. 형님 세자는 화가 나서, '세자를 효령에게 넘기시옵소서.' 하는 말씀까지 올렸다. 꼭 세자 자리는 앞으로 자기 차례가 될 것 같았다. 뿐만 아니었다. 아내한테 들은 궁중 지밀의 비화는 더한층 효령에게 입맛을 감치게 하는 이야기다. 아들 중에 잘난 아들은 효령 자기와 강계 기생으로 후궁이 된 가희아의 아들 ''라 했다. 그러나 아내의 말대로 ''는 지체가 너무 떨어진다. 보통 후궁의 태생이라 해도 조정의 여론과 종친들의 반대다 극성스러울 텐테, ''의 어머니는 기생 출신이다. 그렇다면 큰아들인 세자가 자리를 내놓게 되는 경우에는 둘째 아들인 자기가 확실히 세자의 자리에 나가기 십상팔구라 생각했다. 효령대군은 마음속으로 가만히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한편 효령이 대왕의 사냥나가는 큰 행차를 따라서 강원도와 황해도로 돌았을 때 노루 다섯 마리를 내리 맞혀서 만조백관들의 칭찬을 받은 일이 효령대군 부인의 귀로 들어가자 효령부인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조용히 효령을 침실로 청했다.

"이번 사냥에 큰 솜씨를 뽐내셨다지요?"

효령 부인은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효령은 빙긋 아내를 바라보며 일부러 반문했다.

"내가 무슨 큰 솜씨를 뽐냈나 모르겠는데?"

효령은 아내 말이 듣고 싶었다. 일부러 이같이 되물었다.

"서울 장안이 떠들썩합니다. 효령대군은 문무가 겸전한 분이라면서 노루를 다섯 마리씩이나 연달아 쏘아서 오발오중을 하셨고, 만조백관들의 찬양하는 소리가 자자하다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

효령은 기뻤다.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효령 부인은 무릎을 바싹 내밀고 효령한테 묻는다.

"아바마마께서도 칭찬을 하셨다죠?"

"아들이 오발오중을 해서 한꺼번에 노루를 다섯 마리씩이나 잡았는데 칭찬하지 아니할 부모가 어디 있겠소. 마음속으로 무한 기쁘신가 봅디다. 내가 노루를 쏘아 맞힐 때마다 빙긋이 웃으십디다."

능동적인 효령의 부인은 효령의 목을 얼싸안았다.

"됐습니다."

효령은 온몸에 쾌감이 일어났다.

"무엇이 되었어?"

효령은 또 한 번 웃으며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효령 부인은 효령의 귀에 입을 댔다. 따뜻한 입기운이 효령의 귀를 간지럽게 했다.

"세자 되시는 일이 됐단 말씀이올시다."

"어째서?"

"노루를 연달아 잡으시기 전에도 아들 중에는 효령이 제일이라 하셨는데, 어가를 모시고 가서 오발오중 하시는 훌륭한 솜씨를 보였으니 나리는 이제 꼭 아바마마의 비위에 드셨습니다. 이러하니 세자는 떼어논 당상이십니다."

"형님한테 미안해서 될 말인가."

효령은 한 번 뇌까렸다.

대군 부인의 얼굴이 금방 뽀로통 변해졌다.

"세자께거는 어전에서 세자의 자리를 나리께 가져가라고 말씀까지 하셨다는 소문이 짜합니다. 이런 분에게 미안하실 것이 무어 있습니까. 조금도 미안해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저 마음을 태평하게 가지시고 글공부나 하십시오. 때는 찾아왔습니다."

내외는 이같이 단란하게 이야기했다.

효령은 이후로부터 더 한층 몸조심을 했다. 아침저녁으로 대전에 나가서 문안을 드리는 외에는 모든 출입을 금지하고 집에 들어앉아서 글공부만 했다.

한편 효령의 부인은 상궁을 통해서 효령이 지성스럽게 글공부만 하고 들어앉아 있는 일을 전하의 귀에 들어가도록 했다. 상궁들은 효령 부인의 뜻을 받았다. 앞으로 효령이 세자가 되면 한몫을 단단히 보게 될 수 있었다. 효령이 문안을 드리고 나갈 때마다 효령의 칭찬을 했다. 직접 태종에게 아뢰는 것이 아니다.

상궁들은 장지 밖에서 저희들끼리 지껄였다.

"세상에 효령대군 같으신 효자는 참말 드물겠소이다. 추우나 더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꼭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러 들어오시지. 참말 세상에 드문 효자시지."

한 상궁이 말하자 한 상궁이 받았다.

"효자시구말구. 진정 하늘이 내신 효자시지. 그뿐인가. 글공부는 또 어떠하시구."

"어가를 배행하시어 백발백중 활을 잘 쏘시어 한꺼번에 노루를 다섯 마리씩이나 맞히신 어른이 집에 돌아오셔서는 문을 꼭 닫아거시고 글공부만 하신다니 세상에 이런 분은 참 드물거든."

상궁 나인들은 서로들 말을 주고받았다. 조용조용 전하의 귀에 들어가도록 주고받았다.

전하는 상궁들의 조심조심 지껄여대는 말을 들었다. 아들의 칭찬을 해서 듣기 싫어하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전하는 미소를 풍기면서 궁녀들의 지껄여대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전하는 가만히 쓴웃음을 웃었다. 만일 정 세자가 허랑방탕해서 세자의 체면에 손상되는 일이 많다면 폐세자를 시키고 ''로 세자를 삼을 생각이었다. 비록 지밀 궁내라 하나 궁녀들은 아직 전하의 심경을 알지 못한 때문이다. 태종이 가장 사랑하는 후궁은 ''의 어머니 가희아였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사랑했던 강씨를 그가 죽은 후에까지 원수로 생각하면서도 가희아는 꽃으로 보고 달로 대했다. 태종 자신이 세자싸움으로 인해서 강씨의 아들 방석, 방번을 죽여서 형제 상잔의 피 흘리는 혁명을 일으켰으면서도 또다시 전철을 밟는 위태로운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남자가 여자한테 고혹되는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같고, 귀하고 천한 사람의 구별이 없는 법이다. 인간 본능의 적나라한 태도다.

그러나 효령과 효령 부인을 위시하여 모든 궁녀들은 한 사람도 대왕의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궁중 지밀에서 오직 대왕의 뜻을 짐작하는 사람은 ''의 어머니 가희아와 세자의 어머니 민씨와 세자가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의 어머니 강계 기생 출신 가희아는 자기 아들로 세자를 삼기 위하여 갖은 아양과 갖은 교태로 대왕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중이요, 대종비 민씨는 가희아를 적대시하고 주목하는 까닭에 그들의 심경을 잘 투시했고, 세자는 애당초 아버지의 이신벌군한 행동과 골육상잔의 솜씨가 불쾌해서 항상 불만을 품고 주시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심적 동정을 짐작했던 것이다.

효령대군은 아내인 효령 부인의 선동으로 세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탱중했다. 떡 줄 생각은 하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것으로 효령은 사냥을 갔다 온 후에 더한층 글을 읽었다.

한편 세자는 아바마마께 꾸지람을 들은 후에 여전히 오입쟁이들과 술을 마시고 작은 꾀꼬리를 찾아가기도 하고 동궁으로 불러서 놀기도 했다. 하루는 역시 오입쟁이들과 술을 마시며 얼근하게 취했다. 오입쟁이 구종수가 술상 앞에서 세상 물정을 이야기하다가 효령대군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번에 효령대군은 전하를 모시고 사냥을 나갔다가 오발오중을 해서 노루를 한꺼번에 다섯 마리식 연달아 잡은 후에 전하와 백관들의 찬양을 크게 받았다 합니다."

장악원 악공 이오방이 구종수의 말을 받는다.

"그 후부터 효령대군은 더한층 얌전해졌다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대전께 조석 문안이 놀라웁고, 집에 꼭 들어앉아서 글공부만 한다 합디다."

이번엔 구종수가 이오방의 말을 넘겨받았다.

"그런데 효령이 얌전을 피우는 일은 딴생각이 있어서 그런답디다."

이오방이 의분을 느끼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세자는 얼근하게 취한 얼굴에 미소를 풍겨 웃고만 있다.

"딴 생각이라니, 무슨 딴생각야?"

춘방사령 명보가 둥그런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묻는다.

"자네는 등하불명 일세그려. 효령은 지금 세자 꿈을 꾸고 있다네."

구종수가 소문 들은 말을 탁 털어놓았다.

"무어요, 세자 꿈을? 우리 세자마마께서 여기 계신데 감히 어떤 자가 세자 꿈을 꾼단 말씀요, 그럼 우리 세자마마를 폐하고 효령이 세자가 된단 말씀요."

명보는 팔뚝을 걷어붙이며 부르르 떤다.

작은 꾀꼬리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효령은 사람이 아닙니다. 형제간에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임금의 자리가 탐이 나서 역적질을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세자의 자리를 역적질한다는 말은 금시초문입니다. 아주 인물이 더러운 골생원이로구려. 호호호."

만좌는 깔깔 웃었다.

세자는 껄걸 웃으며 아우 효령을 두호해 말한다.

"효령은 워낙 얌전한 사람야. 내공적이고 주변이 없지. 그저 소심하고 착하기만 한 인물일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런 맘을 먹은 게지. 내 제수가 능동적인 여자거든. 아마 내 제수의 말을 듣고 얌전을 피우는 게지, 하하하."

모두 다 세자의 말을 듣고 눈이 둥그레졌다. 세자는 호방하게 웃은 후에 말을 계속하려 한다. 작은 꾀꼬리가 묻는다.

"그것은 얌점한 것이 아니라 속이 앙큼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아니야. 미련해서 그렇지. 일전에 아바마마께서 하도 효령의 칭찬이 놀랍길래 '세자를 효령한테 넘겨줍시오' 하고 떠들어댄 일이 있지. 하하하. 그러나 전하의 본의는 절대로 효령한테 있는 것이 아닐세, 하하하."

세자는 또 한 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명보는 아직도 분기가 탱중했다.

"그러면 전하께서는 세자를 다른 왕자로 바꾸실 생각은 확실하십니다그려."

"그것은 나도 모르지. 내가 어디 전하인가? 하하하."

세자는 여전히 호탕했다. 명보는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 세자마마께서는 좀 더 전하의 비위를 맞추시지 못하시고 세상에 이런 풍설이 돌도록 하십니까?"

"하하하. 네가 나하고 근 십 년을 지내면서 내 성격을 아직도 모르는구나. 나는 세자도 싫고 임금도 싫다. 싫은 세자 노릇을 날더러 하라느냐. 언제든 세자를 내놓는 때가 나의 자유를 찾는 세월이다."

세자의 자리를 내놓는 때가 사람으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찾는 때라는 세자의 말을 듣자 모든 오입쟁이들은 고개를 숙연히 수그렸다. 기막힌 진리가 있는 때문이다. 오입쟁이들은 비록 미천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경우가 밝고 마음이 탁 터졌다. 세자의 인간다운 높은 식견에 모두 다 머리가 숙여진 것이다. 춘방사령 명보도 세자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세자의 말씀이 무한 섭섭했지만 세자의 크나큰 인간다운 태도에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오입쟁이들과 작은 꾀꼬리며 명보는 비로소 세자의 본뜻을 알았다. 여태까지의 모든 호방한 행동도 결국은 세자의 지위를 내놓기 위한 하나의 공작인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젊은 세자건만 다만 그의 높고 호매한 인격에 감동할 뿐이었다. 세자는 돌연 큰 소리로 명보한테 분부를 내린다.

"자비를 놓아라."

뜻밖에 나온 돌연한 분부다.

"어디로 행차를 하시렵니까? 아직 주기가 높으신데."

명보가 아뢰었다.

"과히 취하지 아니했다. 염려 말아라."

"어디로 행차하시렵니까?"

"효령을 좀 찾겠다."

세자는 돌연 아우 효령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명보는 세자가 혹시 실수나 있을까 염려했다.

"내일 찾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놈아, 하라는 대로 하지 무슨 잔소리냐?"

명보는 공연히 세자의 뜻을 상하게 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 소인이 다짐했습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일어섰다.

이윽고 명보가 돌아왔다.

"분부대로 자비를 놓았습니다."

세자는 오입쟁이들을 돌아본다.

"효령의 이야기를 하고 보니 불현듯 아우 생각이 간절하이그려. 술상 앞에서 끝을 내지 아니하고 일어나니 미안하기 짝이 없네. 내가 없더라도 더 들 놀고 돌아가게."

세자는 오입쟁이들한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아니했다.

"황송하신 분부이십니다. 미안이란 당치 아니하신 황감한 말씀이올시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구종수가 오입쟁이들을 대표해서 아뢴다. 작은 꾀꼬리는 세자의 의관을 정제해드렸다.

자비에 오른 세자는,

"효령궁으로 가자."

간단하게 분부를 내렸다. 세자의 사인교는 효령궁으로 향했다. 효령궁 문 앞에서는 벽제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문하인들이 쫓아나왔다. 뜻밖이었다. 세자마마의 행차다. 문하인들은 황망히 대문을 열어 맞이하고 일변 글을 읽고 있는 효령의 사랑으로 뛰어 들어갔다.

"세자마마께서 행차하십니다."

글을 읽고 있던 효령은 깜짝 놀랐다.

"무어, 세자마마께서 행차를 하셨어? 네가 잘못 안 것이 아니냐?"

"아니올시다. 소인이 어찌 세자마마의 신관을 모르겠습니까. 확실히 세자마마십니다. 뿐만 아니오라 구종별배들이 세자마마의 행차라고 드높게 외치고 들어옵니다."

이때 세자의 평교자는 사랑 대문을 지나서 뜰 안까지 들어오면서 벽제 소리가 더한층 요란하다. 효령궁의 중문 안까지 벽제 소리를 대담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것을 보니 전하가 아니면 동궁밖에는 벽제 칠 사람이 없었다. 효령은 비로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썽쟁이 세자 형님이 웬일일까.'

부리나케 의관을 정제하고 뜰 아래로 내려서려 할 때 춘방사령 명보는 효령을 밉게 생각했다. 겉으로 얌전을 피우면서 세자의 자리에 앉아보려 하는 효령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큰 소리로 외친다.

"동궁마마 행차요!"

효령대군의 하는 꼴을 일부러 보려는 것이다. 효령대군은 명보가 기운차게 외치는 동궁마마 행차 소리에 기가 질렸다. 신을 거꾸로 신고 뜰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때, 세자는 평교자 위에서 천천히 내렸다. 얼굴은 불그스름한 대춧빛이다. 술기운이 아직도 거나했다. 가득히 웃음을 띠며 평교자에서 내렸다. 춘방사령 명보와 구종별배들이 좌우 옆에서 부액을 했다. 세자는 말하기 전에 먼저 너털웃음을 껄걸 웃는다.

"하하하, ''. 그동안 잘 다녀왔느냐. 아우가 먼 곳을 다녀와서 형한테 문안을 드리기 전에 형이 먼저 아우한테 문안을 드리러 왔다. 하하하. 어때, 아우한테 형이 먼저 문안을 드리는 일이. 하하하."

세자는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혔다. 효령이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혔다.

"세자저하, 누지에 행차합시니 황공무지하여이다."

효령은 당황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 사람아, 형이지 세자가 무어야? 하하하. 나는 세자 소리가 싫다. 하하하."

세자는 효령의 손을 탁 잡았다. 세자는 겉으로 다정한 채 한 손으로 효령의 손을 으스러져라 하고 잡고 한 손으로 효령의 갓양태와 목을 강하게 얼싸 감았다. 윤이 질질 흐르는 효령의 은조사 갓양태가 부서질 지경이었다. 세자는 양취였다. 효령은 난처했다. 세자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값비싼 은조사 음양립이 찌그러지면 큰일이었다. 목을 외로 꼬며 세자의 포옹 속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무진무진 썼다. 목을 길게 빼서 피했다.

"형이 좀 껴안는 것이 그다지도 싫으냐. 아아, 너와 나는 동포 형제가 아니냐. 왜 자꾸 피하려 하느냐?"

효령은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올시다. 달아날 리가 있습니까. 갓양태가 떨어집니다."

"에이, 미련도 한 것. 그래, 형제의 정보다 갓양태가 더 소중하더란 말이냐. 들으니 효령은 이번 사냥에 강원도 평강에서 백발백중을 해서 노루를 다섯 마리씩이나 맞혔다는구나. 과연 문무겸전이다. 형으로서 치하한다."

이때 세자는 효령의 목을 더한층 바싹 꼈다. 번쩍번쩍하는 갓양태가 땅으로 뚝 떨어졌다. 효령의 얼굴빛은 노랗게 질렸다. 세자는 비틀거리며 취한 걸음으로 갓양태를 짓밟았다. 효령의 얼굴이 이번엔 새파랗게 질렸다. 세자는 또 한 번 드높게 웃는다.

"하하하. 무엇이 그리 마음에 걸려서 얼굴빛이 저다지 새파랗게 질리느냐. 어서 올라가서 사냥하던 이야기나 들려주려무나."

효령은 골을 낼 수도 없었다. 갓양태를 짓밟힌 채 맹탕건 바람으로 세자와 함께 대청에 올랐다. 청 안에는 경궤가 놓여 있고 경궤 위에는 효령이 읽던 '서전'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공부했구나!"

세자의 말투는 금방 정중했다. 금방 점잖던 세자는 금방 광부가 된다. 발길로 경궤를 탁 차 버렸다. 책상은 곤두박질을 쳐서 거꾸러지고 책은 마루판으로 가로 떨어졌다. 효령의 얼굴이 또다시 새파랗게 질렸다. 세자는 또 한 번 드높게 웃는다.

"하하하. 세자 차례가 너한테 갈 줄 너는 알지만, 아니다, 아냐. '', ''!"

세자가 떠들어대는 ''는 강계 출신으로 후궁이 된 가희아의 아들 경녕군이다. 천만뜻밖의 새 소리다. 효령의 고막 속으로 폭폭 배어 들어갔다.

"수씨한테도 일러두어라. 공연히 애를 쓰지 말라구. 그리고 너도 정신을 좀 차리고 공연히 헛물을 켜지 말아라. 하하하."

효령은 깜짝 놀랐다. 자기의 아내가 자기보고 세자가 된다고 좋아서 권고하던 일까지 세자는 잘 알고 있었다.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효령은 세자가 취한 줄 알았더니 취하지 아니한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로 세자를 바꾸고 싶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조용히 세자께 묻고 싶었다.

"형님, 여러 사람들이 보는 이곳에서 말씀하지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말씀하십시다."

세자는 여전히 호탕했다.

"하하하. 천하에 비밀이라는 것은 없느니라. 너와 내가 아무리 소곤소곤 이야기 했다 해도 다 듣고 있다. 하늘이 듣고, 땅이 듣고, 하하하, 귀신이 듣고, 소곤소곤 귀엣말로 이야기하는 것은 소인의 짓이니라. 하하하. 여기서 이야기하자."

"아니올시다. 형님, 이곳은 제집이올시다. 매사는 간주인이올시다. 잠깐만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세자는 못이기는 척했다.

"너를 보러 온 사람이 네 청을 아니 듣겠니? 자아, 그럼 들어가기로 하자."

세자가 앞을 서서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섰다. 효령은 자리를 세자께 권한 후에 상노와 청지기를 멀리했다. 세자와 효령 단 두 사람이 얼굴을 대하고 있었다. 이때 세자의 얼굴은 주기도 없고 호기도 보이지 아니했다. 효령 못지않게 얌전하고 평온한 얼굴이다.

"형님께 여쭙니다. 아까 하신 말씀은 근거가 있는 근거가 있는 말씀입니까?"

"무어? ''가 세자가 되기 쉽다는 말 말인가?"

세자는 비로소 효령에게 하게를 했다. 정중한, 또한 당연한 대우다. 아무리 세자라 하나 대군한테는 하게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 그 말씀을 여쭈어본 것입니다."

"그 말은 대군과 수씨께서도 아시는 일일세. 대전과 가희아의 비화가 내 귀에 들어왔고, 효령과 제수씨의 비화까지 동궁에 쫘하게 퍼졌으니 어찌 내가 모르겠나. 아까도 말했거니와 세상에는 비밀이 없네."

세자는 정색하고 말했다. 효령은 어이가 없었다.

"과연 세상엔 비밀이 없습니다."

탄식했다. 효령이 다시 묻는다.

"황송하오나 동궁저하께 한 말씀 아뢰어보겠습니다. 저하께서는 왜 자포자기를 하십니까?"

"하하하하."

다음 순간 세자는 얼굴에 금방 엄숙한 빛을 띠었다.

"효령이 나보고 미쳤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자포자기한다고 말하니 그래도 자네는 나를 얼마쯤 알아주는 펀이라고 하겠네. 대군의 영리한 것을 짐작하겠네.'

세자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의 얼굴빛은 더한층 장중했다.

"나는 대군의 말대로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도대체 우리 집 집안 어른들을 나는 존경할 생각이 없었네. 그러니 나는 세자도 싫고 임금도 싫어졌단 말일세. 그리해서 나는 세자의 자리를 일부러 내놓으려고 미친놈의 행세를 하는 것일세."

세자의 태도와 말씀을 듣자 효령의 아담한 얼굴은 더한층 얌전해졌다.공손히 세자한테 묻는다.

"세자는 다음 대의 군왕이 되는 자리올시다. 사람 쳐놓고 이 자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해도 얻어지지 않는 까닭에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하께서는 일부러 세자의 자리를 내놓으시려고 미친 행세를 하셨다 하니 미욱한 소견으로는 과연 높으신 뜻이 내면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어려서는 철이 나지 아니해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세자마마, 세자마마' 하고 떠받드니까 무한 좋았던 것일세. 그야말로 천하제일 아닌가. 우리 아버지 다음에는 나거든. 그리고 삼천리강산이 모두 다 내 땅이요, 억조창생이 다 내 밑에 굴복하고 있는 백성이 아닌가. 얼마나 좋았겠나. 그러나 차차 나이 먹어서 약간 철이 들게 되니 진정 말이지 나는 어서 이 자리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네."

세자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한다.

"첫째로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다 존경할 수 없다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우리 할아버지는 이신벌군을 했네. 그대로 이신벌군을 해도 큰 죄악인데 우리 할아버지는 십만 대병을 주어 명을 공격하라는 고려 왕명을 배반하고 위화도에서 회군을 해서 칼자루를 거꾸로 들고 고려조를 멸망시켰으니 의리상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일세. 생각해보게. 고려왕은 얼마나 우리 할아버지를 믿었길래 십만 대병을 주었겠나."

세자는 아우 효령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한다.

"고려왕조를 찬탈한 것은 또다시 거론하지 않겠네. 혹시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가정해두기로 하세. 다음에 정충고절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조영규를 시켜서 때려죽인 일이라든지. 할아버지를 믿고 믿었던 선비 최영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여버린 일은 또 어떠한가. 기막힌 일이 아니겠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두 번째 죄악을 범했네. 그것은 또 그렇다 하세. 왕씨란 왕씨는 배에 실어 모조리 거제도 앞바다에 수장을 해버렸으니 도저히 인도상 용서할 수 없는 일일세. 이것은 세 번째 저지른 불의의 일일세."

세자는 또 말을 계속한다.

"그것은 또 그렇다 하세. 두문동 칠십 두 사람을 불태워 죽인 일은 무어라 해명해야겠나. 그들은 그야말로 세상에 드문 충신열사일세. 신하들에게 충신열사가 되어 달라고 권장하는 그들이 한꺼번에 충신열사를 불 질러 죽여놨으니 이러한 모순이 세상 천하에 어디 있겠나. 네 번째 저지른 죄악일세."

효령은 고개를 숙여 세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고려에 대한 일은 다 그만두기로 하세. 자아, 인제는 집안 이야기를 하겠네. 아버지가 세자가 되지 못했다는 삼촌 방석, 방번을 때려 죽인 일은 어찌 변명할 텐가. 아버지는 다섯 번째 죄를 저질렀네. 또 다시 삼촌 방간하고의 싸움은 또 무슨 꼴인가. 이것은 이복동생도 아니고 손위의 형님일세. 이로 인하여 생겨난 부자지간의 싸움은 어찌하나. 함흥차사의 일 말일세. 이것은 아버지가 여섯 번째 저지른 죄악일세. 다음에 아버지는 나를 이용해서 명나라 황제의 딸과 혼인하려는 꿈을 꾸었네. 그리하다가 일이 잘 아니 되니까 세자인 나한테 선위를 한다고 괘사를 떨었네. 당치 않은 일일세. 그리고는 외삼촌들을 역적으로 몰아 몰살시켰네. 그들은 다 아버지를 도와서 왕이 되게 한 큰 공신들일세. 이렇게 살아 있는 세자의 외가와 살아 있는 왕후의 친정 동기를 몰살시켜서 외가를 멸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일곱 번째 큰 죄악을 저질렀네. 지금 아버지는 왕후를 내치려 하네. 내 어머니는 효령의 어머니도 되네. 당신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친 조강지처를 내쫓으려 하네. 기막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여덟 번째 죄악을 저질렀네."

세자는 말을 마치자 길게 한숨을 짓는다.

효령대군은 고개를 숙여 묵묵히 세자의 한숨짓는 소리를 듣고 있다.

"자네 또 내 말을 들어보게. 아버지는 지금 세자인 나를 폐하고 강계 기생 가희아의 아들 ''로 세자를 삼으려 하시네. 여기 자네가 얌전하다고 해서 손을 꼽는 데 한몫을 보지만 자네는 나의 다음 동생으로 차례가 둘째니 한번 건성으로 이름을 대어보는 것뿐일세. 실상은 ''로 세자를 삼을 생각이 간절하신 것일세. 십벌지목 없다고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는 가희아의 아들 ''로 아버지는 세자를 봉하실 생각이 꿀떡 같으신 것일세. 이것은 마치 할아버지 태조께서 적실왕후의 아들들을 젖혀놓고 강비의 소생인 방석으로 세자를 봉하신 일이나 똑같은 일일세. 형제가 상장해서 당신 자신이 피를 뿌려서 동기를 죽이고 오늘날 왕의 자리에 나간 전철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건만 아버지는 가희아의 아름다운 자색에 고혹되어 지금 전철을 또 밟으려 하시네. 이것은 아버지의 아홉 번째 죄악일세. 자네는 멋도 모르고 얌전을 피우면서 세자가 되려 하네. 그야말로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격으로 자네는 아버지가 세자 봉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데 자네 혼자 되기를 생각하네 그려. 하하하."

세자는 말을 마치자 드높게 껄걸 웃었다. 효령은 고개를 숙여 대답이 없다. 세자는 다시 정색하고 말을 계속한다.

"내가 왜 미친 척해서 세자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는 뜻을 알겠나?"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아홉 가지 큰 죄악을 저지른 것은 일언이폐지하고 욕심이 너무나 과한 때문일세. 그러나 나는 이런 추잡한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네. 바꾸어 말하면 의리를 저버려 왕의 자리를 뺏고, 형제가 상잔해서 왕의 자리를 뺏고, 공연히 허욕을 부려서 명나라 천자의 딸과 혼인하고 싶어 하고, 소첩의 말을 들어서 세자를 바꾸고 싶어 하고, 죄 없는 처남들을 의심해서 몰살시키고, 투기한다는 죄목을 만들어서 조강지처인 왕비를 내쫓으려 하는 이러한 컴컴한 욕심을 나는 갖고 싶지 아니하단 말일세. 알아듣겠나? 나는 이리해서 자꾸 탈선하는 행동을 취해서 쫓겨나는 세자가 되려 하네. ? 나는 추잡한 욕심을 부리기가 싫은 까닭일세. 나는 할아버지 태조도 존경하지 아니하네. 아버지도 존경하지 아니하네. 백부 방우 분과 둘째 숙부 상왕 전하 이 두 분만은 마음속으로 숭배하고 존경하네. 왜냐하면 백부께서는 태조대왕의 큰아드님이 되시니 당연히 세자가 되셔야 하고 태조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나가실 분일세. 그러나 그분은 이신벌군한 할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하다 하시어 해주 수양산으로 들어가시어 소주를 자시고 고사리만 캐 자시다가 이내 세상을 떠나버리셨네. 어떤가, 이분의 깨끗한 처사가? 만약 이분이 세자가 되시어 왕위에 나가셨더라면 이 나라는 얼마나 깨끗하고 질서가 있었을 것인가. 애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네."

세자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다음에 내가 상왕 숙부를 존경하는 이유는, 태조 할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강비의 소생인 세자 방석을 우리 아버지께서 죽인 것을 크게 노하시어 세자 자리를 우리 아버지한테 주지 아니하시고 이 자리에 뜻이 없는 둘째 아드님인 상왕께 주셨네. 그리하고 얼마 아니 되어 왕의 자리를 숙부한테 선위하신 후 함흥으로 가버리셨네. 이때 둘째 숙부는 아버지의 욕심 많은 눈치를 채시고 얼른 왕의 자리를 아버지한테 내주셨네. 그뿐인가? 아드님들을 모두 다 절로 보내서 중이 되게 하셨네. 이런 까닭에 그 험난한 집안싸움, 흉악한 파도 속에 둘째 숙부인 상왕 전하의 직계 식구들은 한 사람도 상한 일이 없게 되었네. 어떠한가. 둘째 숙부께서는 과연 견기이작을 하고, 명철보신을 하시는 분이라 생각하네. 이러므로 나는 우리 집안에서 이 두 분을 가장 존경하네."

효령대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자께 공손히 절을 올렸다.

"저하의 말씀을 듣고보니 비로소 어두웠던 눈이 환하게 떠지고 막혔던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합니다."

세자는 황망히 답례를 했다.

"또 한 마디 내 말을 들어보게나. 내가 세자의 자리를 내놓지 아니한다면 우리 아버지가 하시던 악착한 일이 되풀이해야만 하네. 먼저 자네를 없애야 하네. 다음엔 ''를 죽여야 하네.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못 할 짓일세. 이리해서 나는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하여 세자의 자리를 내놓으려 하네."

효령대군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알겠습니다. 형님!"

효령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세자한테 절을 올렸다. 안에서는 세자를 위하여 아담한 주안상이 나왔다. 세자는 효령한테 또 이른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체하나 거짓 마시는 술일세. 세자의 자리에서 떠나기 위해 술을 마시네. 나는 색을 좋아하는 체하나 내일은 모르겠네만 오늘까지는 거짓 색을 좋아했던 것일세. 오늘 이 자리에서는 형제가 진정을 토로했으니 많이 마시지 않고 석 잔만 마시고 가겠네. 나중에 또 자네를 만나서 양취할 때도 있으리."

효령은 세자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주안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백자병을 잡고 술을 가득 부어 형님 세자한테 올리며 말한다.

"몸이 혈육을 같이한 형제지간이건만 여태까지 까맣게 저하의 개결하고 높으신 뜻을 몰랐습니다. 이제 가슴을 털어 헤쳐주시는 말씀을 듣고 보니 어리석고 못난 아우의 마음이 활연히 열리는 듯합니다. 삼가 한 잔 술을 부어서 세자저하께 존경하는 뜻을 표하겠습니다."

"제수께서 정성을 다해서 내보낸 주안상이구, 아우가 정답게 따라 주는 술이니 기쁘게 마시겠네. 그러나 자네한테 당부할 말이 또 있네. 이제부터는 절대로 세자저하라고 불러서는 아니되네."

"저하, 비록 저하께서는 세자 소리 듣기가 싫다 하십니다. 그러하오나 세자 저하는 엄연한 세자십니다. 내일 세자 자리를 그만두신다 해도 오늘은 저하로 모시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세자는 잔을 비운 후에 효령한테 넘기며 말한다.

"내 비록 오늘까지 세자의 명칭을 가졌다 하나 세자보다 '형님'하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정답고 좋은가 생각해보게. '아우야', '형님', 이같이 부르면서 술을 마셔야 비로소 술맛이 나는 법인세. 자아 아우님, 한 잔 마시어보게. 얼마나 술맛이 더한층 나는가를 짐작할 것일세."

효령은 세자의 보내는 잔을 잡았다. 세자는 친히 술병을 들어 아우 효령에게 따랐다.

"주시는 술이니 받아 마시겠습니다."

효령은 여전히 얌전했다. 잔을 받들어 공손히 마시었다. 세자와 효령 두 형제는 권커니 잣거니 석 잔 술을 나누었다. 탁주삼배호기발이라고 세자의 호탕한 기상은 더한층 용솟음쳐 일어났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 세자 노릇을 하고 싶지?"

효령은 곤란했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아니했다. 주저주저하고 말대답을 못하고 있다. 돌연 세자의 너털웃음 소리가 드높게 일어났다.

"하하하. 세자가 되어보고 싶어 하는 것은 한번 임금이 되어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하하하."

효령은 여전히 대답을 못 하고 있다.

"왜 대답이 없나? 하하하."

세자의 태도는 더한층 호방했다.

효령은 여전히 대답을 하지 못한다.

"여보게 효령, 세자가 되면 병신이 돼야 한단 말일세. 아무런 자유도 없네. 산송장이 돼야 하고, 등산만 남은 바지저고리가 돼야 하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모두 다 상실해버려야 하고, 다만 왕 전하의 비위만 맞추고 있는 인간 아닌 인간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여보게 효령, 자네는 이 구속을 당하는 자리를 소원했더란 말인가?"

효령은 세자의 말을 들을수록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자네는 제왕이 되기를 소원하는가? 세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은 결국 제왕이 되기를 소원해서 세자 자리를 소원하는 것이지."

효령은 여전히 잠자코 대답이 없다.

"임금이 되려면 할아버지처럼 욕심이 과해야 하고, 아버지처럼 잔인무도해서 형제를 죽이고, 조카를 죽이고, 매부를 죽이고, 처남을 죽이고, 왕씨를 바닷속에 집어넣듯 해야 하고, 두문동 칠십 두 사람을 불에 태워서 죽여야 할 텐데 자네한테 그러한 비인도의 용기가 있겠나?"

효령은 한동안 고개를 숙여 듣다가 비로소 대답한다.

"없습니다. 저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죽일 용기도 없습니다."

세자는 또 한 번 소리를 높여 껄걸 웃는다.

"그렇지, 그래. 과연 내 아우다. 사람은 측은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기에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측은지심은 인지단, 측은한 마음은 어진 마음의 시초라 하지 아니했나. 자네는 어진 사람이지 결코 잔인무도한 비인도의 악한 사람이 아니거든."

효령은 세자의 말을 듣고 얼굴빛을 정중하게 고치고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한다.

"형님 말씀대로 제 마음이 악독하지는 못합니다."

"그래, 그렇지. 악독한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어진 사람이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졌지."

"형님, 과찬을 하십니다."

"그래, 그렇게 형님이라 불러주게. 세자라 부르지 말게. 과찬은 아니야. 그저 어진 사람이 될 소질을 가졌다는 말뿐이지. 악한 사람은 만고의 죄인이 될 수 있으니 어진 사람이 될 소질을 가진 사람은 비록 성현이 되지 못한다 해도 한평생 욕은 먹지 않거든. 하하하."

효령은 어진 사람이 될 소질이 있다는 세자의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 기뻤다.

술잔을 멈추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세자는 한 잔 술을 더 마신 후 효령한테 말을 한다.

"수씨를 뵌 지 오랠세. 좀 뵙고 갔으면 좋겠네. 잠깐 나오시라고 할 수 없겠나?"

돌연 세자는 효령의 부인인 제수를 만나자고 청했다. 효령은 곧 상노를 불렀다.

"안에 들어가서 아씨보고 좀 나오시라 해라. 세자마마의 분부시다."

"이 사람, 또 세자라고 부르나, 하하하. 건망증이 많은 대군이로군."

"입에 젖어서 그랬습니다."

효령은 비로소 웃었다. 이윽고 효령 부인이 정장을 차리고 나왔다. 세자께 절해서 예를 올렸다. 세자도 황망히 답례를 했다. 효령 부인이 말씀을 고한다.

"세자저하께서 누지에 왕림하시니 효령궁중이 영광이올시다."

"아우가 사냥을 갔다 왔다 하므로 보고 싶어서 찾아왔소이다. 별안간 좋은 음식을 내보내시어 잘 먹고 갑니다."

"촌스런 음식이올시다.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천만에, 잘 먹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가기 전에 한 말씀 여쭙고 가려고 잠깐 나오시라 했습니다. 계수께 여쭐 말씀은 나의 귀한 아우를 고생길로 가게 하시지 말라는 부탁입니다. 내가 폐세자가 되면 반드시 아우가 세자가 되리라 생각하시고 아우의 얌전한 마음을 선동하신 듯합니다마는 결코 아우한테 차례는 가지 아니합니다. 만약 내가 폐세자가 된다 해도 세자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계수씨께서는 필연코 짐작하실 것입니다. 성한 사람 병신 만들지 마시고 명철보신을 하도록 해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자세한 말씀은 아우한테 다 일러주었습니다. 내외분이 잘 의논해서 처리하십시오."

세자는 말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효령 부인의 얼굴은 홍당무같이 발갛게 물들었다. '세상에 비밀은 없고나' 하고 생각했다. 자리 속에서 남편 되는 효령과 이야기한, 세자는 황음방탕해서 폐세자가 되기 쉬우니 몸조심을 더해서 꼭 세자가 되라고 한 말이 어떻게 해서 세자

귀에까지 들어갔나 하고 몸 둘 곳을 몰랐다.

"아우를 위해서 한 말이니 조금도 괘념을 마시오."

세자는 한 마디를 남기로 자비에 올라 동궁으로 돌아갔다.

이날 밤에 효령대군 부처는 공론이 부산했다.

"도대체 귀신이 곡할 일 아닙니까? 세자께서 어떻게 우리 내외가 깊은 밤중에 단둘이 이불 속에서 한 말씀을 아십니까? 참말 기가 막힐 일 아닙니까?"

"폐세자 소리 말인가?"

"그렇습니다."

"궁중 지밀에서 주고받은 아바마마와 가희아의 대화까지 흘러나와서 당신의 귀에까지 들어왔는데 그 말이 동궁에 전파되지 않을 리가 있소."

"궁중 지밀 안 일은 상궁의 입을 통해서 퍼졌다 하겠지만 우리 집이야 누가 동궁에 옮겨서 퍼뜨렸겠습니까. , 기기괴괴한 일이올시다."

"그러기에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거야.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아니했소. 구중궁궐 깊은 곳의 비밀도 새어나가는데 우리 집 안방 이야기가 아니 새어나갈 수 있겠소. 상궁, 나인, 교전비가 듣고 교전비는 비부쟁이한테 전하고 비부쟁이는 비부쟁이끼리 전하고, 이렇게 해서 규중 비화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이지."

"세자께서는 아마 노하신 모양이죠. 그래서 저를 부르시어 대군 나리를 고생길에 떨어뜨리지 말라고 꾸지람을 하신 것 아닙니까? 저는 그만 얼굴 에 모닥불이 피워졌습니다."

"아니야. 세자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오해하신 것은 아냐. 확실히 당신은 세자 노릇을 하지 아니하시려고 일부러 미친 체하고 호협 방탕한 짓을 하시는 거야. 나도 비로소 오늘 말씀을 듣고 깨달았소. 참으로 갸륵한 분이라 생각하오. 부인이 나오기 전에 나한테 집안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말씀하셨소. 당신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신벌군한 의리 없는 짓을 통매하셨소. 그리고 부자싸움, 형제의 골육상잔, 아버지의 외가도륙, 어마마마의 폐출 음모 등 모든 불의의 점을 들어서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일부러 세자의 지위를 버리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기생들을 데리고 놀고, 일부러 공부를 아니하는 것을 다 털어놓고 말씀하셨소. 과연 덕이 높은 깨끗한 분이라 생각하오."

"나리께서 세자가 될까 봐서 일부러 괘사를 부려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효령 부인은 아직도 믿지 아니했다.

"천만에. 당신은 고려왕조를 불의로 빼앗았다 해서 수양산 속으로 깊이 들어가 몸을 감추신 큰아버지를 존경하고, 얼른 왕의 자리를 아바마마한테 내어주신 둘째아버지를 존경한다 하셨소. 절대로 우리들을 떠보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오."

효령은 말을 마치자 가만히 한숨을 짓는다. 효령은 부인을 향하여 다시 말을 계속한다.

"첫째로 세자마마께서 진심으로 하신 말씀의 증거는, 당신이 만약 진정으로 임금이 될 생각이 있다면 첫째로 아버지가 방석, 방번을 죽이듯이 당신이 나를 죽여야 하고, 가희아의 아들 ''를 죽여야 하고,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부자지간에 원수가 되어 싸우듯 형님과 아버지는 원수가 되어 또다시 싸워야 하니, 이러한 더러운 왕의 자리는 소원이 아니라 했소이다. 이래서 당신은 세자의 자리를 내어놓겠다고 알려준 것이오."

"진정 그러시다면 과연 갸륵한 분입니다."

효령 부인은 비로소 고개가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미심하다고 생각했다.

"진정 그러시다면……."

하고 '진정' 두 자를 붙여서 말했다.

효령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나도 처음에는 세자의 말씀을 매우 의심했었소. 그러나 할아버지 태조께서 후취왕비 강비를 사랑하시어 적자들을 제쳐두고 강비의 소생 방석으로 세자를 삼으신 때문에 부자 형제지간에 원수가 된 거와 같이 오늘날 궁중 지밀의 현상은 그때보다 더욱 심하오. 아바마마는 어마마마를 지금 폐출할 생각을 가지셨소. 이것은 강계 기생 가희아를 총애하시는 때문이오. 가희아를 귀엽게 생각하시는 아버지는 나와 ''를 칭찬하셨다고 하지만 결국은 ''한테 마음이 더 쏠린 것이 판연한 노릇이오. 이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소. 공연한 생각을 했다고 후회했소. 이제는 세자 자리를 준다 해도 나는 백 리, 천 리로 달아날 작정이오."

효령은 얼굴빛을 정색하고 부인에게 포부를 말했다. 효령 부인도 비로소 명철보신을 해서 집안이 평안한 것이 제일이란 생각이 번갯불같이 머리를 스쳤다.

"상왕 전하의 아드님을 모두 다 절로 보내신 것도 명철보신을 하기 위해서 그리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불교를 좋아하신다는 것보다 하도 골육상잔이 심하게 되니 슬며시 절로 보내서 모두 다 중을 만드신 것이지."

효령 부인은 비로소 감동하는 빛이 얼굴에 떠돌았다.

"나리께서도 제발 세자 노릇을 하지 마십쇼."

세자 노릇을 하라고 권하던 효령의 부인은 이제는 세자 노릇을 하지 말라고 권하게 되었다.

"옳소, 부인의 말이. 나도 세자 노릇은 아니 하겠소."

효령은 어깨를 으쓱하며 진저리를 쳤다.

이날 밤에 효령은 혼자 사랑에서 자면서 곰곰 자신의 앞일을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하면 이 거친 세상을 근심 걱정 없이 잘 지낼 것인가 하고 밤이 지새도록 구명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세자의 말씀을 듣고보니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많은 죄와 악을 저질렀다. 비록 일국의 제왕 자리를 차지했다 하나 인간이 가져야 할 신과 의의 세계에서 바라본다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인간 이하의 행동을 취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인간 이하의 행동을 취했던가? 결국은 욕심 때문이었다.

한 나라의 주권을 차지하려 하여 자기가 섬기던 임금을 죽이고, 그들의 일가족을 전부 죽이고, 고려 왕씨의 같은 성이면 시와 비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바닷물 속에 던져 버렸다. 입으로 충신열사를 찬양하면서 정충대절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철퇴로 선죽교 위에서 때려죽이고, 원로 장신인 최영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정권을 차지하려는 추한 욕심은 그뿐이 아니었다. 자기한테 굴복하지 않은 두문동 칠십이인을 불을 질러 태워 죽이고, 임금이 되지 아니했을 때 막역의 친구였던 목은 이색을 연자탄에서 독약 탄 술을 마시어 죽게 했다.

만약 자기가 세자의 자리에 나가기만 한다면 적은 무수하게 많을 것이다. 우선 형님 세자와 싸워야 한다. 세자의 아들하고도 원수가 돼야 한다. 그뿐인가. 강계 기생 출신인 가희아하고도 싸워야 하고 그의 아들 '비를 죽여야 한다.

뿐만 아니다. 세상 일은 알 수 없다. 어린 동생들 충녕대군 ''와 성녕대군 ''하고도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뿐인가. 아버지는 후궁의 소생이 참으로 많다. 가희아의 소생 '' 이외에도 신빈 신씨의 소생 함녕군 '', 온녕군 '', 근녕군 '', 후궁 안씨의 소생 혜령군 '', 숙의 최씨의 소생 희령군 '', 후령군 '', 선빈안씨의 소생 익녕군 '', 이 많은 후궁들의 소생인 이복형제들이 한꺼번에 칼을 빼어 들고 덤벼드는 대적이 될 수도 있다.

효령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효령은 형님 세자의 말씀이 모두 다 옳다고 생각했다. 올바른 사람, 깨끗한 사람의 취할 자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왕손 공자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생각해보았다.

첫째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것이었다. 둘째로는 어지러운 세상에 생명을 유지해야 할 것이었다. 셋째는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남기고 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른 좋은 생각이 나지 아니했다. 세자의 말씀대로 태조 할아버지의 큰아들인 방우 어른과 같이 세상꼴이 보기 싫다 해서 수양산으로 도피했다가 돌아간 백부의 행동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분의 행동은 개결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너무나 지나친 자기 한 몸만 생각하는 독선이요, 도피다. 사람으로 났다가 아무것도 아니 하고 이름 없이 쓰러져버리는 무명초의 행동이었다. 깨끗하다고 찬양할 수는 있으나 인생의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음은 둘째 숙부 상왕의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준 임금의 자리를 욕심 많은 동생한테 얼른 내어주고 마음 편안하게 앉아서 세월을 보내는 숙부의 태도가 생각났다. 자기한테 임금의 자리를 내줄 사람도 없겠지만, 이미 세자의 자리나 왕의 자리를 단념한 효령이었다. 상왕의 행동을 따를 까닭은 없다고 생각했다.

효령은 무한한 고민 속에 빠졌을 때 어느덧 동이 트기 시작했다. 은은히 맑은 종소리가 베갯가로 떨어진다. 바로 멀지 아니한 정릉동에 있는 홍천사의 종소리다. 효령은 새벽마다 같은 종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유난히도 가슴을 흔들어주었다. 대자대비한 부처는 만 사람의 마음을 청정하게 만들고 천 사람의 죄인을 사바 속에서 건져주는 훌륭한 종교였다.

효령은 은은한 종소리를 듣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옳다! 부처의 제자가 되리라."

효령은 한 마디를 부르짖고 결연히 불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효령은 이날 아침을 마친 후에 동궁으로 향하여 세자께 뵈었다. 세자는 반갑게 아우 효령을 대했다.

"어제 내가 찾았더니 회례를 왔는가?"

효령은 공손히 고했다.

"회례보다는 의논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의논할 일이 있나?"

세자는 다정하게 물었다.

"사실인즉 어제 세자저하께서 왕림하시와 아우는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이 사람, 세자라고 부르지 말라 해도 세자라고 또 부르네그려."

"그럼 어찌합니까? 현제 세자저하이시니 세자저하라고 부를 뿐입니다."

"세자 노릇은 그만할 사람일세. 그저 형님이라고 부르게. '형님'하고 부르면 얼마나 좋은가. 다시는 세자라고 호칭하지 말게나. 하하하."

세자는 여전히 호방했다.

세자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자 효령도 미소를 짓고 말한다.

"제가 오늘 형님을 뵈러 온 것은 제 처신에 대하여 여쭈어보려고 왔습니다."

"희한한 일일세. 자네 처신에 대하여 의논하려고. 무슨 의논인가?"

"아우는 중이 되겠습니다."

"! 부처님의 제자 말인가?"

세자는 깜짝 놀란다.

", 그렇습니다."

세자는 기가 찬 모양이다.

"머리를 깎고?"

"아니올시다. 재가승이 되겠습니다."

"별안간 중은 왜 되려고 하나?"

"어제 형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모두 다 옳은 말씀입니다. 실상인즉 아우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형님께서 만약 세자의 지위에서 떠나시면 저는 둘째가 되니 당연히 세자는 저의 차례라 생각하고 더욱 얌전한 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저는 황연히 깨달았습니다. 백방으로 생각해보니 저의 살아갈 길은 부처의 제자가 되어서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창생을 구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네도 잘 알고 있네. 한번 불경을 나옹이나 무학 이상으로 공부해서 천만 대중을 죄악의 길에서 구원해보는 것도 사람으로서 한번 해볼 만한 일일세."

효령은 세자의 찬성을 얻은 후에 다시 더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다.

"그럼, 아우는 절로 가겠습니다."

"아바마마께 아뢰지 않고 그대로 가려나?"

"아뢰면 말씀이 많습니다. 그대로 떠나겠습니다."

"어느 절로 가려나?"

"기왕이면 큰 절로 가겠습니다. 양주 회암사로 가겠습니다."

세자는 '회암사' 소리를 듣자 또 한 번 찬성했다.

"회암사 좋지. 그 절은 고려 때 나옹선사가 지은 큰 도량으로서 우리 할아버지의 왕사였던 무학국사가 중년에 도를 닦던 곳일세. 나라 안에서 몇째 아니 가는 손꼽는 대찰일세. 가서 공부를 할 만한 곳일세."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곳인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무학대사는 왕사가 되어 이곳에 있다가 만년에는 금강산 금장암으로 들어가 입적했다 합지요."

"자네도 잘 알고 있네. 한번 불경을 나옹이나 무학 이상으로 연마해서 천만 대중을 죄악의 길에서 구원해주는 것도 사람으로서 한번 해볼 만한 일일세."

세자의 찬성하는 말을 듣자 효령의 얼굴에는 미소가 흘렀다.

"어제 형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저지르신 죄과를 대신해서 깊이 부처님께 사과를 드리고 모든 원귀들을 연화대상으로 천도시키겠소이다."

효령의 말을 듣자 세자는 호협한 웃음을 소리 높이 내어 껄걸 웃었다.

"아우는 과연 현제일세. 자네가 대자대비한 부처가 되어 우리 집안에서 저지른 모든 죄과를 탕척해주기 바라네."

형제는 손을 잡아 굳게 약속했다.

"저는 그럼 바로 회암사로 갑니다."

세자는 누마루 앞까지 나가 효령을 전송했다.

미소를 지어 효령한테 다시 말한다.

"자네는 조상들의 욕심 많았던 업장을 풀어버리기 위하여 부처의 제자가 되고, 나는 조상의 불의에 반항하며 세자의 자리를 버리게 되니 앞으로 우리 집 운수는 다시 창대하게 될 수 있으리."

"형님, 옳습니다. 좋은 말씀 하셨습니다. 형님과 저는 세자와 임금의 자리를 내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음 후생들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세자 노릇을 아니 하고 자네가 세자 노릇을 아니 한다면 다음 차례로 셋째 ''가 왕위에 나갈 것일세. 아무리 아바마마께서 ''로 왕세자를 삼으려 하시나 종실의 여론과 조정공론은 그렇게 되지 아니할 것일세.'

효령은 고개를 숙여 제사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다.

", 그럼 형님 안녕히……."

"잘 가서 경문을 외우게."

형제는 굳게 손을 잡고 작별했다.

효령은 세자를 작별한 후에 자비를 몰아 양주 회암사로 향했다. 효령이 회암사에 당도하니 주지 이하 모든 승려들은 황황망망해서 어찌할지를 몰랐다. 처음에는 어떤 대관의 행차가 온 줄 알았더니, 구종별배의 말을 들어보니 금상 전하의 바로 둘째 아드님인 효령대군의 행차였다. 주지 이하 모든 승려들은 합장배례를 하여 방장으로 모시었다. 향다가 나오고 품과를 올린 후에 효령은 주지를 향해 물었다.

"나는 불경공부를 하기 위하여 이곳을 찾아왔네. 누추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고 한 칸 방을 빌려줄 수 있겠나?"

불경 공부를 하려고 대군이 자기 절을 찾았다는 말을 듣자 주지는 무한히 기뻤다. 이때 불교의 세력은 쇠퇴해가고 유학이 동천에 빛을 뿜어 일어나기 시작하는 때였다. 주지는 쓰러져가는 불교를 다시 일으켜볼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얼굴에 가득 기쁜 빛을 띠고 손을 모아 대답한다.

"대군께오서 불경을 연구하시기 위하여 누추한 절에 왕림하셨다니 석가여래께서 재림하신 듯합니다. 옛적에 설산수도 하시던 석가모니불도 왕자요, 태자마마였습니다. 황감하옵기 짝이 없는 광영된 일이옵니다. 어찌 공부하실 도량을 아니 드리오리까. 마음 놓고 쓰시옵소서."

주지는 열 번 스무 번 합장을 올렸다.

효령은 만족했다. 마음에 먹었던 생각을 묻는다.

"머리를 깍지 아니해도 중이 될 수 있는가?"

", 있습니다. 재가승은 모두 다 유발승이옵니다. 부르기를 처사 중이라 합니다. 대군께오서는 머리를 아니 깎으셔도 불제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효령은 주지의 말을 듣자 더욱 만족했다.

"유발승 처사로도 절에 묵으면서 예불할 수 있는가?"

주지는 합장을 다시 올리면서 대답한다.

"예불하실 수 있고말굽쇼. 고려 때부터 제왕은 보살계를 받으셨습니다. 공민왕께서도 보살계를 받으셨고 입아조해서 태조대왕께서도 보살계를 받으셨습니다. 대군께서도 예부을 하신 후에 보살계를 받으시고 불경 공부를 하시면 됩니다."

효령은 자비를 서울로 돌려보내서 자기의 행방을 집에 알린 후에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크나큰 시주를 하여 왕자의 예로 부처께 보이는 예불을 하고 다시 엄숙하게 보살계를 받았다.

효령은 이내 회암사에 묵었다. 여태껏 유교 공부에만 잠심했던 효령은 불경 공부에 의하여 새로운 천지를 발견했다. 유학이나 불교나 모두가 착한 것을 주장하고 악한 것을 배제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불학은 유학보다 삼생을 추구하여 인과보응을 주장하는 종교였다. 효령은 이 점에 마음을 쏠리고 기울어졌다.

세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불화의 야망을 반항 정신으로 일관해서 자기 자신까지 퇴폐와 자학으로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효령은 불에 의존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죄악을 소멸시키려 했다. 세자는 정면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불의와 대결하면서 세자의 지위를 버리기까지 해서 호탕한 한 개 인간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효령은 겉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불의와 싸우지 아니하고 그들의 죄과와 업장을 자기 스스로 대신 짊어지면서 부처의 자비심에 의하여 음으로 소멸시키려 했다. 불의에 대한 판단은 같으면서 제사는 양성적으로 대결하는 태도를 취했고 효령은 음성적으로 소리 없이 소멸책을 취했다.

효령은 불경을 읽으면서 경궤 옆에 있는 북을 울렸다. '관음경'을 읽고 북을 울리고, '아미타경'을 읽고 북을 울렸다. '금강경'을 읽고 북을 치고, '밀다심경'을 읽고 북을 울렸다.

읽으면 읽을수록 진리가 있는 듯했다. 효령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경문을 외우면서 북을 쳤다. 고려 최후의 임금 우왕, 창왕의 혼을 불러서 사죄하는 북을 쳤다. 선죽교에서 철퇴에 맞아 죽은 정포은 선생의 영혼을 부르고, 최영 장군의 넋을 청해서 사죄하는 북을 울렸다. 두문동 칠십이인의 넋을 부르고, 바닷물에 던져 죽인 왕씨들의 혼을 불러서 연화대로 가라고 북을 울렸다. 골육상잔으로 죽은 방석, 방번의 혼을 부르고, 고모부 이제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도전, 남은의 넋을 불러 북을 쳐서 천도했다.

모든 원통하게 죽은 귀신들을 위하여 경문을 읽고 북을 치는 효령의 태도는 나날이 진경에 들었다. 경문 책장은 장마다 부풀어 올랐다. 북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뒷날 효령대군의 북 치는 심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효령이 세자가 되지 못하게 되니 절로 뛰어 들어가 화풀이로 북을 쳤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효령의 심경을 모르고 겉으로만 추측해서 지껄여댄 소리다.

효령은 이같이 하여 불교의 독신자가 되었다. 완전히 불제자가 되었다. 이 소식이 대내로 들어갔다.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의 어머니 가희아였다. 세자가 폐해진 후에는 효령과 ''가 세자의 자리로 나갈 수 있는 처지였는데, 효령이 절로 가서 처사 중이 되었으니 다음에 세자는 ''가 유망하게 되었다.

가희아는 조용히 틈을 타서 태종께 아뢰었다.

"종실에 경사가 났습니다."

"경사가 났어? 무슨 경산가?"

"효령대군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셨다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머리를 깍고 중이 됐단 말인가?"

"머리를 깍지 아니하였사오나 유발승이 되셨다 합니다."

"그래 집에 없고 절에 있단 말이냐?"

"회암사에 계시다 합니다."

"누구한테 들었느냐?"

"효령 부인한테 들었습니다."

"괴상한 일이로군. 과인한테도 말이 없이 제맘대로 중이 되었단 말이냐. 너는 효령이 중이 된 것을 어찌 경사라 하느냐?"

"전하, 소인은 큰 경사라 생각합니다. 왕실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가희아는 아리따운 교태를 지어서 싱글싱글 웃으며 아뢴다.

"무슨 꽃이 피었단 말이냐?"

"전하, 소인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승하하신 태조대왕께서와 전하께서는 처음으로 나라를 조판하시느라고 유명 무명의 사람들을 무수하게 죽이셨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원귀가 되어 망망한 허공과 침침한 운무중에 떠돌고 있습니다. 그리해서 전하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가희아의 말이 떨어지자 태종의 등에는 소름이 쪽 끼쳤다. 멍하니 가희아를 바라본다.

"효령대군은 불제자가 되시어 이 무수한 의지할 곳 없는 무주고혼들을 연화대로 제도하십니다."

이윽고 태종의 등상에 좁쌀같이 끼얹어졌던 소름이 비로소 걷혀졌다.

"불경을 읽고 불도를 존숭하면 무주원귀를 제도할 수 있는가?"

태종의 묻는 말에 가희아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한다.

"효령대군께서는 아버님과 할아버님께서 나라를 창업하시기 위하여 함부로 죽이신 수많은 무주고혼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불도에 귀의하셨다 합니다. 불은 대자대비하신 불이옵니다. 효령대군의 정성스러운 염불과 불경 외는 대원에 감동되시어 모든 귀신들을 연화대로 제도하실 것입니다. 이리되면 국가와 종실의 모든 일이 융성하게 될 것입니다. 효령은 참으로 효자올시다. 한번 소명을 내리시어 하문하시고 권장하옵소서."

태종은 처음 효령이 중이 되엇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가 사랑하는 가희아의 말을 듣자 마음이 석연히 풀렸다. 더구나 애희 가희아의 애교를 부리며 종실의 경사요, 국가의 행복이란 말에 태종의 마음은 활짝 돌아섰다.

대전내시를 불렀다.

"효령이 양주 회암사에 있다 한다. 즉시 나가서 입대케 하라."

어전 내시는 당일 양주로 말을 달려 회암사로 향하여 효령을 만났다. 과연 효령은 유발승이 되어 불경을 읽고 있었다.

다음날 효령과 내시는 서울로 향했다. 효령은 어전에 들어가 부왕께 뵈었다. 효령은 아바마마가 큰 꾸지람을 내릴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용안이 부드러웠다.

"네가 회암사로 가서 불제자가 되었다 하니 과연이냐?"

", 그리했습니다."

효령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어찌해서 불제자가 되려 했느냐?"

세상에는 비명횡사한 무주고혼들이 많습니다. 이 원귀들을 구원하고 제도하는 일도 인간의 큰 사업이라 생각하와, 이 길로 돌아가서 한평생 선한 일을 하려 했습니다."

효령은 일부러 고려 때 원통하게 죽은 충신열사와 아버지가 골육상쟁한 형제들을 들추어 밝히지 아니했다. 태종도 더 이상 묻지 아니했다. 서로 거북한 때문이다. 태종은 가희아를 불렀다. 옆에는 효령이 의연히 시립해 있었다.

"절에 불공을 하고 시주하는 일은 남자보다도 여인들이 더 잘하는 모양이다. 효령이 기왕 불도를 닦는 불제자가 되었다 하는데 과인이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 효령이 있은 회암사에 시주를 하고 싶은데 무엇을 어떻게 시주하면 좋을지 그대에게 묻는다. 부처를 위하여 무슨 시주를 했으면 좋을까 의견을 말하라."

효령은 아바마마의 말씀을 듣자 만족했다. 미소를 지어 서 있고, 가희아는 요염한 웃음을 지어 합장을 올리며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과연 현군이십니다. 효령 나리의 충심과 효심을 위하시어 많은 시주를 내려주시기 바라옵니다. 소인의 생각에는 회암사는 고찰이올시다. 황폐한 곳도 많으리라 생각되옵니다. 천금을 내리시어 효령의 이름으로 중수케 하옵소서. 이같이 시주하신다면 소인은 베 천 필을 시주하여 승려들의 장삼과 저고리를 지어 입으라고 하겠습니다."

전하는 가희아의 말을 듣자 마음이 흡족했다. 그러나 한번 너털웃음을 웃어본다.

"하하하. 천금은 너무 과하지 아니한가."

"소인 따위가 베 천 필을 시주한다 하옵니데 전하께서 천금쯤 내리시는 것을 과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인색이오리다. 그렇다면 애당초 그만두시옵시오. 호호호."

가희아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태종은 내시를 불렀다.

"내수사 별좌를 곧 들라 해라."

내수사는 임금과 왕후와 후궁의 사사로운 전답에서 나오는 곡식과 물건을 저축해두었다가 사사로이 쓰는 것을 맡은 관청이다.

이윽고 내수사 별좌가 뜰 아래로 부복했다.

"효령이 양주 회암사에 나가 불법을 강구한다. 기특한 일이다. 효령의 이름으로 천금을 시주하여 옛절을 일신 중수케 하라."

내수사 별좌는 예의 소리를 내어 전하의 하교를 받았다.

후궁 가희아가 별좌한테 말한다.

"나도 베 천 필을 시주할 테니 전하의 천금과 함께 회암사로 보내주오."

"예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내수사 별좌는 청령하고 물러갔다.

효령은 합장을 올리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후궁 가희아는 혼자 마음속으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다음날 세자가 폐위되는 날, 효령마저 절로 갔으니 꼭 자기 아들 ''가 세자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마음속으로 무한 기뻤다. 뿐만 아니다. 효령이 무한 고마웠다. 이리하여 태종께 아뢰어 시주로 천금이 나오게 하고 자기 자신도 베 천 필을 쾌하게 시주했다.

효령은 서울로 들어온 김에 형님 세자를 찾을 생각이 났다. 춘방으로 세자를 찾아뵈었다. 유발승이었다. 머리는 깍지 아니했으나 갓모자가 둥근 승립을 쓰고 회색 장삼을 입었다.

세자는 효령을 보자 가가대소했다.

"하하하. 효령 대선사가 오셨다. 하하하."

세자는 여전히 호탕했다.

효령은 세자한테 얌전하게 절을 올린 후에 자세를 바로 하여 꿇어앉았다.

"형님이 지도하신 대로 불제자가 되었습니다."

"좋아 좋아, 잘했어. 이제 자네는 태평세월에 와석종신을 할 것일세. 축하하네."

"빈도는 몸의 안락을 누리자고 유발승이 된 것은 아니옵니다. 모든 원귀들을 제도해서 연화대상으로 천도하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좋지, 좋지. 하여튼 효령 자네가 세자 되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잡은 것만 해도 고마우이. 원귀들이 연화대상으로 가는지 아니 가는지 그것은 나도 모르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지 못했으니 말할 수 없네. 그러나 어떻게든 자네가 깨끗하게 집심을 한 것만이 고맙단 말일세. 하하하."

세자는 여전히 호탕했다.

"형님께서도 기왕 부귀영화를 헌신짝같이 버릴 생각이 계신다면 불교로 귀의하시옵소서."

"하하하. 나는 나를 믿네. 불도도 믿을 생각이 없고, 공자도 믿을 생각이 없네. 이 세상에는 나 하나뿐일세. 오직 나를 믿네. 하하하."

효령은 형님 세자를 타이른다.

"형님의 지시를 받아 저는 불교에 귀의했습니다마는 이제는 제가 형님께 권하겠습니다. 선을 하는 데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마는 불교만큼 인생의 진리를 파악한 종교도 드물 것입니다. 한번 불경을 읽어보십쇼."

효령은 간곡하게 세자께 고했다.

"이제는 자네가 내 스승이 되려 하나. 하하하. 가까운 훗날 회암사로 한번 자네를 찾겠네. 하하하."

세자는 종시 호탕한 웃음으로 효령을 대했다.

세자는 태종이 사냥을 간 후에 봉지련을 대신하여 작은 꾀꼬리를 동궁에 가두어 두고 번뇌하는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자한테는 또다시 호사다마의 일이 생겼다. 세자한테 매를 맞고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오던 내시는 봉지련과 세자의 일을 사헌부에 고하여 세자를 탄핵케 하여 마침내 봉지련을 귀양길에서 죽게 하고 그래도 흡족치 아니했다. 최후까지 세자를 방해하려 했다. 다음날 세자가 왕위에 나가는 날 자기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을 직각한 때문이다. 내시는 세자가 꾀병을 하여 사냥 참예를 아니한 후에 세자의 행동을 자세히 살폈다. 구종수, 이오방 등 모든 오입쟁이들과 함께 봉지련을 대신하여 춤 잘 추는 작은 꾀꼬리를 불러논 후에 마침내 동궁에 머물러 두고 의좋게 지내는 사실을 태종의 후궁 가희아한테 고했다. 간악한 내시는 이번엔 풍기를 바로잡는 사헌부 헌관한테 고하지 아니하고 ''의 어머니 가희아한테 고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가 크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의 어머니 가희아는 한시바삐 세자가 폐위되고 자기 아들 ''를 세자로 봉했으면 하고 간절히 생각하는 것을 내시는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내시는 틈을 타서 가희아를 찾았다.

"소인, 마마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가희아는 어전 내시의 한 사람이 아뢸 말이 있다는 데 마음이 흐뭇했다. 웃음을 머금고 대답한다.

"나 같은 사람한테 무슨 할말이 있다고 그러하오."

", 천만의 황송한 말씀을 내리십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이오니까. 당당하신 후궁마마가 아니십니까. 그런 말씀은 거두옵시오."

"그래, 무슨 할 말이?"

가희아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건 국가 장래의 큰일이기에 마마께 조용히 아룁니다."

"국가 장래의 큰일이라?"

가희아는 아름다운 푸른 눈을 크게 떴다. 깜작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자 말씀이올시다. 세자는 다음 대의 제왕이 아니십니까? 이번에 또 불미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무슨 불미한 행동을?"

가희아의 까만 눈동자가 빤짝 빛을 뿜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강원도로 사냥을 나가시지 아니하셨습니까?"

"그래, 나가셨지."

 

그 후의 소앵

 

가희아는 흐뭇해하며 내시의 말에 대답한다.

"그래, 사냥을 나가셨지."

"그때 세자는 병탈을 하고 배종을 아니 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

"그것이 참말 병이 아니라 꾀병이었습니다."

"꾀병야?"

가희아는 깜짝 놀란다.

"꾀병이올시다. 꾀병 한 가지만 해도 기군망상의 죄 범했는데 전하의 아니 계신 틈을 타서 기생을 동궁에 데려다 놓고 질탕하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기생을 작첩해서 동궁에 두고 지내십니다."

"무어, 기생을 데려다가 동궁에 작첩했단 말인가?"

가희아는 자기도 기생 출신이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을 그대로 덮어둘 수 없사와 감히 아뢰옵니다. 장래의 국사가 큰일이올시다."

가희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한동안 생각 속에 빠졌다. 돌연 내시한테 묻는다.

"사실이지?"

가희아의 눈은 또렷또렷 빛을 뿜는다.

"사실이 아니면 함부로 아뢰겠습니까. 추호라도 틀린다면 소인의 목을 벱시오. 지금 작은 꾀꼬리는 동궁에 있습니다. 곧 잡아다가 문초하시면 아실 것입니다."

가희아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알겠네. 물러가게."

"그저 마마의 왕자를 세자로 바꾸시옵소서."

간특한 내시는 한 마디를 던지고 슬며시 물러갔다.

이날 밤에 가희아는 침실에 든 태종께 고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국가와 종묘에 영향 되는 일을 은휘할 수 없사와 감히 아뢰옵니다."

태종은 국가와 종묘에 대한 큰일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용안에 긴장한 빛을 띠고 묻는다.

"국가와 종묘에 관한 큰일이라니 무슨 말인가?"

"세자마마에 대한 일이올시다."

태종의 용안은 금방 주토빛으로 변했다.

"무슨 또 불미한 일이 있었더냐. 빨리 말해보아라."

가희아는 얼른 사실을 실토해 아뢰지 아니하고 황공무지하다는 말씀만 아뢴다.

"어서 말을 해보아라. 황공 타령만 하고 말을 하지 않느냐."

"전하께옵서 지난번에 강원도와 황해도로 사냥을 나가신 일이 있지 아니하십니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 세자마마께서 급병으로 배행하지 못한 일이 있지 아니했습니까."

"그래, 그런 일이 있었더니라."

"그때, 그 병이 꾀병이라 합니다."

"꾀병?"

태종의 용안은 푸르락붉으락 노기가 등등했다.

"어떻게 꾀병인지 알았더란 말이냐?"

"전하께서 떠나신 그날 밤에 세자는 동궁에 전후 건달과 오입쟁이들을 불러놓고 질탕하게 놀음을 놀다가 기생을 불러서 가무를 본 후에 지금은 그 기생을 떼어다가 동궁에 두고 매일 가무로 세월을 보낸다 합니다."

"지금도 그래 동궁에 기생이 유숙하고 있단 말이냐?"

"그러하다 하옵니다. 아마 동궁 후궁인 양제를 삼을 작정인가 합니다."

태종은 대노했다.

"누구한테 들었느냐?"

"한 사람이나 두 사람한테 들은 일이 아니오라 대내 지밀 안의 상궁 상침을 위시하여 무수리까지 다 아는 일이옵고, 별감 무예청, 춘방사령들, 액정 소속들도 숙덕공론을 해서 소문이 자자하옵니다."

"만약에 거짓말이 섞여 있다면 네가 벌을 면치 못하렷다."

"존엄지하에 어찌 감히 허언을 아뢰오리까. 만약에 소첩이 무고로 아뢰었다면 장하에 극형을 받겠사옵니다. 굽어살피시옵소서."

가희아는 강계 출신의 기생으로 태종의 사랑을 받아 왕자 ''까지 난 애인이다. 그러나 제 출신은 생각지도 아니했다. 아들로 세자를 삼을 욕심이 탱중했다. 더구나 효령이 불도에 귀의한 후에는 더욱 자신이 가득했다. 태종은 노기가 충천했다. 곧 대전 내관을 불렀다.

"들으니, 동궁에 잡동사니 무뢰배들이 함부로 출입하여 동궁을 유혹하여 내가 사냥 가고 없는 틈에 기생을 데려다가 질탕하게 놀았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떠서 기생을 동궁에 유숙시키고 있다 하니 사실인지 알아보아라, 그리고 기생이 있거든 곧 잡아오너라. 추호라도 은폐하고 거짓 아뢰는 일이 있다면 큰 벌을 면치 못하리라."

태종은 내관한테 엄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대전 내관은 바로 전에 세자한테 꾸지람을 듣고 가희아한테 이번 작은 꾀꼬리의 일을 고해바친 내관이었다. 전하의 분부를 듣자 어깨춤이 절로 났다.

"어찌 감히 어명을 소홀히 거행하오리까. 자세히 사실해 아뢰오리다."

간특한 내관은 몇 번인지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만약 세자가 그대로 있다가 왕위에 오르는 날은 자기 자신은 새남터 행형장의 이슬이 될 것이 분명한 것을 아는 때문이다. 어서 세자가 폐위되고 가희아의 아들 ''가 임금이 되면 부귀영화를 계속할 뿐 아니라, 비록 내관의 신분이라 하나 일약 좌명공신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은 일이었다. 가희아한테 첨해서 말한 일이 금시에 효과가 났다고 기뻐했다. 곧 어명을 받들고 춘방으로 달렸다. 작은 꾀꼬리를 잡는 데는 단기로 잡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몸이 내관이라 여자만 있는 동궁 내정까지 막 들어갈 수는 있으나 동궁에도 춘방사령들과 시녀들도 많았다. 더구나 세자의 성격은 순할 때는 무한 인자하지만 한번 역정이 나면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는 성격이다.

조라치 내관 십여 명을 풀었다. 모두 다 관의 속에 밧줄을 감추고 육모방망이를 허리에 찼다. 내관 일행은 말 열 필을 타고 밤이 깊이 의기양양하게 동궁을 습격했다. 밤은 이미 깊어 자정 때가 되었다. 돌연 어전 내시 일행은 동궁 정문을 두드렸다. 말 탄 내관들은 손에 '대내'라고 먹글씨로 큼직하게 쓴 손 등불을 들었다. 동궁 수문장은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잠이 깼다. 급히 구군복으로 갈아입고 장창을 비껴들고 쫓아나갔다.

"누구냐?"

수문장은 큰소리로 외쳤다.

"누구냐가 다 무엇이냐. 어명이다! 어서 빨리 문을 열어라."

캥캥한 내시의 목소리다. 수문장은 '어명' 소리에 놀랐다. 수문장이 문틈으로 내다보니 내관들 십여 명이 말을 타고 '대내'라고 쓴 등불을 높이 들고 대문을 휩싸고 '어명'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수문장은 깜짝 놀랐다. 내심으로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급히 뒷문으로 돌아서 문 지키는 군사를 봉조판서 김한로한테로 보내서 사실을 알리고 한편으로 대문 앞에 나가서 묻는다.

"도대체 당신들은 내관이신 듯한데 아닌 밤중에 이곳에 와서 어명이라 호통을 치니 까닭을 모르겠소.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상감마마의 다음 가시는 동궁입니다."

문밖에서는 간특한 내시가 호통을 친다.

"동궁이고 춘방이고 간에 어명을 내리신 것을 어찌랄 테냐. 어서 빨리 대문을 열어라."

내관은 '대내'라고 쓴 등불을 번쩍 들어 문으로 향했다. 수문장은 하는 수 없었다. 동궁문을 활짝 열었다. 내관들은 육모방망이를 들고 동궁으로 뛰어들었다. 춘방에서는 깊은 밤중이라 깊은 잠 속에 들었다가 안팎이 잠을 깨어 발끈 뒤집혔다. 춘방사령 명보는 봉지련의 어미와 열두 간 줄행랑 속에서 뛰어나오고, 동궁 액정들은 갈팡질팡 어찌할지를 몰랐다. 등불을 든 내관들은 사랑에서 안마당으로 몰려 들어갔다. 춘방사령 명보는 의분을 느꼈다. 몽둥이를 들고 안마당으로 뛰어드는 내관 앞으로 나섰다. 명보의 뒤를 이어 모든 춘방사령들도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명보는 간특한 내관을 향하여 호통을 친다.

"이곳은 동궁 내정이오. 아무리 어명이라 하나 동궁빈이 계신 내정으로 육모방망이를 들고 뛰어드는 법이 어디 있소. 도대체 무슨 어명이오."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서는 춘방사령들을 보자 간특한 내관은 아니 꼽게 생각했다. 지체는 어전 내시가 높았다. 내관은 불구자일망정 관이란 글자가 붙었고 춘방사령은 동궁의 액정에 불과했다. 간특한 내관은 지지 않고 춘방사령 명보를 꾸짖는다.

"이놈아, 어명이면 어명이지 네까짓 액정배의 알 일이 아니다. 저리 비켜나지 못하겠느냐."

내관은 육모방망이를 번쩍 들어 춘방사령 명보를 후려갈겼다. 얻어맞을 명보가 아니었다.

"이놈 ××없는 내관 놈이 감히 어느 곳이라고 이곳에 와서 야료를 치느냐. 어명이면 어명의 유래를 밝혀라. 동궁저하를 묶어오란 말이냐, 동궁빈마마를 잡아들이란 말이냐? 경위를 밝혀서 어명을 전해라."

명보는 허리를 펴서 몽둥이를 짚고 말한다. 간특한 내관은 말이 막혔다. 어명 내린 까닭을 밝히지 아니하고 동궁빈이 계신 내전까지 육모방망이를 들고 뛰어든 것은 확실히 잘못이었다. 당연히 춘방사령 명보의 책망을 받을 만했다. 그러나 방자한 내관은 춘방사령한테 굽히기가 싫었다.

"이놈아, 사령 놈의 주제에 잔소리가 무슨 잔소리냐!"

한 마디 호통을 친 후에 육모방망이로 춘방사령 명보의 어깻죽지를 부러져라 하고 후려갈겼다. 명보는 화가 불끈 치밀었다.

"이놈아! 내관이명 제일강산이냐! 경위를 발혀서 일을 처리하란 내 말이 그래 그르단 말이냐. 왜 죄 없는 사람을 마구 두들겨 패느냐?"

말을 마치자 춘방 명보도 몽둥이를 번쩍 들어 간특한 내관의 정강이를 되게 후려쳤다. 명보의 한 번 때리는 매는 내관의 매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단통에 '에쿠' 소리를 지르고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이 모양을 본 내관들은 급히 간특한 내관을 구해 일으키고 춘방 명보한테로 달려들어 육모방망이로 뭇매질을 쳤다. 이편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젊은 춘방사령들은 떼를 지어 내관들을 욕하여 대항했다.

"이놈 내관놈들아! 옛날에도 ××없는 내관 십상시놈들이 임금께 간특을 부려서 나라를 망쳐놓았다더라. 요놈의 병신놈의 새끼들이 제멋대로 행패로구나."

명보의 부하인 젊은 춘방사령들은 일제히 내관한테로 덤벼들었다. 육모방망이와 몽둥이는 맞부딪치며 전쟁 아닌 접전이 벌어졌다. 이곳저곳에서 '에쿠' 소리가 일어나면서 내관들은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동궁 내정은 때아닌 수라장을 이루었다. 이때 동궁빈은 가장 침착했다. 모든 궁녀들에게 신칙하는 분부를 내렸다.

"너희들은 방 안에서 꼼짝 말고 조용히 있거라. 만약 소란을 떠는 애들이 있다면 큰 벌을 당하리라."

세자빈의 엄명이 떨어지니 동궁의 시녀들은 죽은 듯 방 안에 엎드려 있었다. 이때 세자의 장인 되는 병조판서 김한로는 수문장이 뒷문으로 사람을 보낸 연락을 받고 급히 일지병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사랑을 거쳐 안마당으로 들어가니 넓은 동궁의 안마당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수라장이었다. 병조판서 김한로는 등불을 밝히고 어명을 받들어 나온 내관들과 춘방사령들을 뜰 안 좌우편으로 갈라 세웠다.

이때 병조판서 김한로는 의금부 당상을 겸직하고 있었다. 금부 당상은 포도대장의 상관으로서 포도대장은 민간의 도둑과 불량배를 다스리는 대장이요, 금부 당상은 나라의 벼슬하는 조관을 국문하고 치죄하는 높은 대관이었다. 김한로는 먼저 어명을 받들고 나왔다는 내관한테 묻는다.

"중사가 어명을 받들어 나왔다 하니 무슨 어명이었던가?"

"동궁 안에 기생이 있다 하와 기생을 잡으로 나왔습니다."

김한로는 입맛이 썼다. 동궁이 요사이 기생 작은 꾀꼬리를 데리고 지내는 것은 동궁의 장인인 자기도 잘 아는 노릇이었다. 잠깐 망설이고 있다가 춘방사령 명보를 꾸짖는다.

"너는 어찌해서 어명을 받들어 나온 내관한테 행패를 했느냐?"

"소인이 행패한 것이 아니오라 저 사람들이 먼저 소인을 때리며 행패를 했습니다. 까닭 없이 두들겨 패니 대거리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존전에 말씀드리옵니다. 소인은 춘방을 호위하는 책임을 밑은 춘방사령이올시다. 내관이 비록 어명을 받들어 나왔다 하나 어떠한 어명이라고 밝힌 후에 어명을 봉행해야 옳은 일이올시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내관은 덮어놓고 '어명' 소리를 치면서 동궁빈마마께서 계신 내정까지 뛰어 들어왔으니 이러한 무법천지에 사는 괘씸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소인이 분함을 못 이겨 '동궁빈마마를 잡으러 왔느냐, 동궁빈을 모시로 왔느냐'고 법대로 물었더니 제잡담하시고 내관들은 성군 작당하여 두들겨 패니 어찌 이런 법이 있습니까."

춘방사령은 억울한 사정을 일일이 고했다. 김한로는 춘방 명보의 솔직하게 아뢰는 소리를 듣자 크게 노했다. 내관을 꾸짖는다.

"자네가 비록 어명을 받들어 나왔다 하나 어명을 빙자하고 너무나 무엄한 짓을 했네. 어찌 동궁에 기생이 있는지 없는지 동궁저하나 동궁빈께 아뢰지도 아니하고 함부로 내전 정당 앞까지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뛰어 들어왔더란 말인가. 아무리 어명을 받든 내관이라 하나 상감의 뜻을 어기고 방약무인한 행동을 취했으니 가참할 일이다."

병조판서에 금부 당상까지 겸직한 김한로는 소리를 높여 간특한 내관을 꾸짖었다. 이때 문 뒤에서는 동궁빈이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동궁빈은 문을 밀치고 나섰다. 어명을 받들어 나왔다는 내관을 추상같이 꾸짖는다.

"네가 대전에서 나온 내관이냐?"

", 그러하옵니다."

간특한 내관은 가희아의 편이었다. 전에 세자한테 꾸지람을 듣고 매를 맞은 후에 ''의 어머니 가희아한테 긴한 체를 했다. 어떻게든지 해서 세자가 상감의 눈에 나서 폐위되기만 기다리는 자다. 마음속으로는 세자빈을 대수롭지 않게 알았으나 겉으로는 가장 황송한 듯 두 손길을 마주 잡고 허리를 굽실거렸다.

"네가 어명을 받들어 나왔다 하면 무슨 어명을 받들어 나왔느냐?"

"기생 작은 꾀꼬리가 동궁에 유숙하고 있단 말씀을 듣고 작은 꾀꼬리를 잡아들이라 하시어 나왔습니다."

세자빈이 내관에게 묻는다.

"네 어찌 작은 꾀꼬리를 잡으러 나왔다는 말을 세자께와 나한테 하지 아니하고 무엄하게 궁중 내정에서 소란을 피웠느냐?"

"황공무지하오나 세자께 이실직고하면 세자저하께서 내놓으실 리가 있습니까. 그리하와 외람하옵고 황송한 짓을 감행했사오니 황공무지하여이다."

세자빈은 손을 들어 내관을 꾸짖으며 말씀을 내린다.

"네가 만약 세자궁중을 샅샅이 뒤져봐서 기생이 아니 나온다면 죄를 면치 못하리라."

내관은 어깨춤을 으쓱했다. 저절로 신명이 났다. 확실히 작은 꾀꼬리가 요사이 동궁과 함께 거처하는 것을 비밀히 정탐해서 잘 아는 때문이다.

", 빈마마의 하교대로 만약 기생을 못잡고 그대로 돌아간다면 국형에 처하여도 변명무로올시다."

"자아, 그럼 네 맘대로 동궁을 샅샅이 뒤져보아라."

동궁빈은 버들 눈썹을 찡그리고 서릿발 같은 눈매로 내관을 바라보았다. 이때 동궁빈의 아버지 김한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확실히 작은 꾀꼬리는 세자하고 함께 있기가 십상팔구다. 어찌하려고 동궁빈은 동궁을 샅샅이 뒤져보라 하나 하고 마음속으로 무한 죄었다. 똑똑하고 소명하고 양처현모인 동궁빈이었다. 처음에 내관이 어명이라고 소란을 떨고 들어올 때 동궁빈은 시녀 한 명을 거느리지 아니하고 조용히 동궁이 작은 꾀꼬리와 함께 쓰고 있는 별당으로 올랐다. 세자와 작은 꾀꼬리한테 아닌 밤중에 어명이 내린 것을 일깨워주고 급히 작은 꾀꼬리를 남복으로 변복시켜서 뒷문으로 빠져 달아나게 했던 것이다. 세자는 동궁빈의 훈수를 들은 후에 별당 높은 곳에서 금침을 혼자 펴서 태평세월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관은 옳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기생 소앵을 찾으로 동궁을 샅샅이 뒤졌다. 동궁 시녀들이 거처하는 방을 위시하여 찬간, 곳간, 헛간, 부엌 등 으슥한 곳은 모조리 뒤졌다. 심지어는 벽장과 다락 속까지 뒤지고 춘방 외전인 사랑까지 골고루 뒤졌다. 그러나 작은 꾀꼬리의 자취는 묘연했다. 이제 남은 곳은 동궁빈의 처소와 동궁이 요사이 거처하는 별당뿐이다. 간특한 내관은 다시 동궁빈의 처소로 들어갔다. 동궁빈이 노한 눈으로 내관을 내려다본다. 간특한 내관은 어명을 빙자하고 당돌하게 동궁빈 앞에 손을 비비고 아뢴다.

"어명으로 기생 작은 꾀꼬리를 동궁에서 잡아오라 하셨습니다. 황송하오나 빈마마의 처소를 보여주옵소서."

동궁빈은 무엄하고 무례한 내관에게 벼락불 같은 호령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워낙 마음이 가라앉은 동궁빈이었다.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오는 분기를 꽉 참았다.

"네가 어명을 빙자하고 감히 무례한 짓을 하느냐. 괘씸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기생을 잡아 오라는 어명이 설혹 계시다 한들 내 처소까지 뒤지라고 하교하셨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동궁에 기생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너하고 내가 상지할 처지가 아니다. , 올라와서 뒤져보아라."

내관은 방자하게 빈처소를 골고루 뒤졌다. 그러나 기생은 없었다. 내관은 무안했다. 뒤통수를 긁었다. 조라치 내관들을 데리고 동궁이 거처하는 별당으로 향했다. 이때 세자는 동궁비의 영리한 조처로 소앵을 뒷문으로 내보낸 후에 간사한 내관 놈이 반드시 별당까지 침입할 것을 짐작했다. 정자관을 단정히 쓴 후에 등촉을 밝히고 책상 위에 책을 펴놓았다. 다락에서 굵다란 청려장을 꺼내서 경궤 옆에 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일부러 별당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내관들이 일제히 등불을 높이 들고 별당으로 돌입했다. 세자는 일부러 청을 높여 글을 읽었다. 앞선 내관은 약간 떨렸다. 그러나 내친걸음이었다. 활짝 열린 방 앞으로 가까이 갔다. 세자는 더한층 청을 높여 낭랑하게 글을 읽었다. 내관들의 간담이 다시 뚝 떨어졌다. 세자는 내관들의 등불이 휘황하게 창 앞에 비치건만 못 본 체 태연히 글을 읽었다. 내관의 간담은 또 한 번 써늘했다. 간특한 내관이었다. 전하와 가희아의 위세만 믿었다. 등불을 들고 바싹 동궁의 글 읽는 창 앞으로 다가섰다. 동궁의 글 읽는 소리는 여전히 낭랑했다.

"아뢰옵니다."

내관은 창 앞으로 세자를 향하여 외쳤다. 세자는 못들은 첸 소리를 높여 글을 읽는다. 내관의 눈에 얄밉도록 살기가 떠돌았다. 지난날 매 맞은 원한이 가슴 속에 가득하게 서렸다. 내관은 한 번 더 목청을 높였다.

"아뢰옵니다."

세자는 여전히 못들은 체 글만 읽었다. 내관은 뒤에 서 있는 아랫도리 내관들을 돌아보았다. 앞에 있는 자에게 가만한 소리로 연통했다.

"나 하는 대로 일제히 '아뢰옵니다' 하고 외쳐라."

아랫도리 내관들은 앞장선 내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뢰옵니다."

앞장선 내관의 소리가 또 한 번 떨어지자 아랫도리 내관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마치 악머구리가 떠들어대는 듯했다. 세자는 그제서야 책에서 눈을 옮겨 창밖을 바라본다. 초롱초롱 정기가 떠도는 젊은 눈에는 노기가 등등했다. 세자는 점잖게 꾸짖는다.

"웬 놈들이냐?"

"대전 내관들이옵니다."

"대전 내관 놈들이 웬일이냐, 성군 작당을 해서?"

세자의 목소리는 우렁차다. 천둥같이 얼러댔다. 이미 동궁빈의 주선으로 작은 꾀꼬리는 뒷문으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큰소리를 칠 만했다.

"어명으로 나왔습니다."

"무슨 어명을 받들고 나왔느냐?"

"기생을 잡으러 나왔습니다."

"기생? 보아라, 내가 글을 읽고 있는데 기생이 있을 까닭이 있느냐."

세자의 목소리는 엄숙했다. 내관은 호락호락 옅은 자세를 취하면 되레 불리하겠다고 생각했다.

"소인들이 온 후에 다락 속으로 혹시 은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송하오나 어명이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락 속을 보여주십쇼."

내관은 내친걸음이라 담대한 소리를 했다.

"다락 속에 기생을 숨긴 듯하다? 그래, 네 말도 그럴듯한 말이다. 올라 와보아라."

세자의 대답은 부드러운 듯하면서 준엄했다. 내관 놈은 말을 해놓았으나 위엄에 눌렸다. 얼른 올라가지 못했다. 주저주저하고 선뜻 단상으로 오르지 못한다. 내관이 오르지 못하는 꼴을 보자 세자는 부드럽게 분부했다.

"어서 올라와서 다락과 벽장을 뒤져보아라."

내관은 대담하게 단상에 선뜻 올라섰다. 마루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세자가 책상을 앞에 놓고 글을 읽는 옆에는 봉황금침이 펼쳐져 있었다. 향긋한 여인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확실히 기생이 세자와 함께 동침을 하다가 다락 속으로 뛰어든 것이 분명했다. 봉황 이불 위에 있는 베개를 살펴보았다. 단침이다. 그러나 혼자 베는 베개가 아니다. 장침이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벨 수 있는 베개다. 내관은 눈 정기를 모아 불빛에 베개를 비춰보았다. 한편은 깨끗하고 한편은 거무스름하게 머리 때가 묻어 있었다. 향긋한 머릿기름 내가 코를 찔렀다. 틀림없이 기생은 자다가 일어나서 숨은 것이 분명했다. 몸을 돌려 거침없이 다락문을 열었다, 다락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내관은 계속해서 벽장문을 열었다. 벽장에는 서적들이 있을 뿐 역시 사람은 없었다. 이때다. 세자는 청려장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등 뒤에서 내관 놈을 후려갈겼다. 벽력 같은 소리로 꾸짖는다.

"이놈, 네 아무리 어명을 받들어 나왔다 하나 이같이 무엄할 수가 있느냐. 동궁빈의 처소에 올라 마음대로 진흙 발길을 들여놓고 나의 글 읽는 침실에까지 와서 벽장, 다락을 죄인의 집 뒤지듯 뒤지다니, 이놈, 너는 무법천지에 사는 놈이냐? 어서 기생을 찾아내라!"

세자는 힘을 다하여 내관을 때렸다. 내관은 급했다. 매를 피하여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세자는 청려장을 들고 뒤쫓아 내렸다. 달아나는 내관을 사매질쳤다. 조라치 내관들은 꽁지가 빠지

게 달아났다. 춘방사령 명보가 나타났다. 달아나는 간특한 내관의 멱살을 붙들었다. 엄파 같은 손으로 내관의 빰을 갈겼다.

"이놈아! 어디로 달아나느냐!"

내관은 '에쿠' 소리를 치며 고꾸라졌다. 명보는 내관의 허리에 찬 육모방망이를 빼앗았다. 앞에서는 명보가 육모방망이로 내관을 두들겨주고 뒤에서는 세자가 청려장으로 등판을 갈겼다. 세자의 장인인 병조판서 김한로가 별당 마당으로 쫓아들었다. 내관은 벌써 숨이 끊어졌다. 어명을 받고 나온 내관이 절명이 되었으니 일은 간단치 아니했다. 병조판서 김한로는 내관의 시체를 수습한 후에 어전에 나가 자세한 전말을 아뢰었다. 전하는 어명을 받은 내관을 세자가 때려죽였다는 데 크게 노했다. 그러나 내관이 작은 꾀꼬리를 현장에서 잡지 못하고 동궁을 소란케한 일은 또한 덮어둘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으로 하여 동궁을 폐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생각한 후에 승지를 불렀다.

"내관이 동궁 내정에 들어가서 소란을 떤 일은 아무리 어명을 받들어 나갔다 하나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동궁한테 타살되었다 하니 불문에 부쳐라. 그리고 작은 꾀꼬리가 비록 동궁에 있지 아니했다 하나 동궁에 출입했던 일은 은폐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은 꾀꼬리는 한양 서울에 있게 하지 말고 평양으로 쫓아 보내서 다시는 한양 천지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었다. 승지가 물러가려 하니 태종은 승지를 다시 불렀다.

"게 있거라,"

승지는 다시 부복했다.

"병조판서에 의금부 당상을 겸직한 김한로는 동궁의 장인으로서 소란한 소문을 듣고 현장에 출두했다 하면서 사건을 무마하지 못하고 어명을 받은 내관이 타살까지 당케 했으니 태만했다는 책망을 아니 들을 수 없다. 병조판서와 의금부 당상을 파면시켜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었다.

""

하고 물러갔다. 옆에 모시어 섰던 김한로는 등에 진땀이 흘렀다. 뜰에 내려 사모관대를 벗고 대죄를 청했다. 태종은 김한로에게 분부한다.

"이미 면직을 시켰으니 다시 대죄할 것이 없다. 물러가라."

차갑게 명을 내렸다.

김한로는 벌벌 떨며 대궐에서 물러났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이미 세자를 폐위시킬 생각이 굳었다. 세자의 우익을 자르기 위하여 세자의 장인 김한로를 파직시킨 것이다. 승지는 장악원에 영을 내려 작은 꾀꼬리의 집을 사실해서 찾은 후에 작은 꾀꼬리를 평양으로 추방하여 다시는 서울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간특한 내관의 일은 이것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작은 꾀꼬리를 평양으로 내쫓고 김한로를 삭탈관직시킨 태종의 조처는 더욱 세자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반항심을 가득하게 도발시켰다. 여기다가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비 사이는 점점 사이가 더 벌어졌다. 태종은 공공연하게 조정 대신들한테 왕비의 부덕한 점을 말했다. 부덕한 점을 말했을 뿐 아니었다. 왕비를 폐위시키겠다 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들이 시립한 조회 시각에 태종은 주저없이 이 뜻을 선포했다.

"왕비 민씨는 그의 친정이 역적으로 처형된 후에 이것을 함혐하여 일국의 제왕인 과인을 초개같이 볼 뿐 아니라 투기가 날로 심하여 차마 그대로 곤위에 처해둘 수 없다. 왕비를 폐위시키고 새로이 어진 배필을 간택하여 곤위의 정도를 밝히려 하니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천하절염 어리

태종은 가희아로 정궁을 삼으로 하여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전에도 이같은 말을 조정 신하에게 한 일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공공연하게 폐위시키겠다는 말을 선포했던 것이다. 영의정과 좌의정은 묵묵히 대답이 없었다. 다만 태종의 비위돠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러나 우의정 황희가 탑전에 엎드려 아뢴다.

"전하께옵서 왕위에 오르신 후에 항상 왕비 전하를 미타하게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지난번에도 전하는 왕후감을 구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은 극력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폐위라는 기막힌 말씀을 내리시니 신자의 도리되어 황공무지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같은 생각을 하십니까? 후폐하는 전하의 배위이신 왕비뿐이 아니올시다. 만백성의 어머니이신 국모올시다. 전하께서 아무리 폐비하실 생각이 계시다 하오나 어머니의 아들이 된 저희들은 만백성과 함께 전하의 행동을 원망하여 받들지 아니합니다. 왕비께서는 국가 중흥에 유공하신 분이올시다. 그리하옵고 전에도 말씀드렸거니와 전하의 조강지처이십니다. 사삿집에도 조강지처를 내쫓는다면 그 집안이 위태로운 법이온데 황차 국가의 국모오리까. 신 우의정 황희는 만조백관과 억조창생을 대신하여 저사위한하고 반대하옵니다."

우의정 황희는 대신 중에 덕망이 높은 재상이었다. 황의 황정승 하면 거리에 지나가는 아동주졸도.

"아아, 덕 높은 황희 황정승이시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촌부와 떡장수 할미까지도 황정승의 파초선이 뜬 평교자가 지나가기만 하면 이마에 손을 얹고 몸을 굽혔다.

"아아, 성인 같은 황정승님이시다."

하고 길을 엎드렸다.

황희 황정승은 이같이 조야에 덕망이 높았다. 태종은 황정승을 외경했다. 그러나 한마디 변명을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경의 장중한 말은 절절이 옳은 소리다. 조강지처를 내친다는 일은 가장 삼갈 일이다. 그러나 국가의 국모는 내조의 공이 커야 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왕비는 항상 과인을 원망하고 투기하여 왕실의 화기를 저상시키니 이같은 왕비를 어찌 그대로 둘 수 있으랴. 과인도 백번 생각하여 이같은 조처를 취하려 하는 것이니 경은 과히 과인을 허물치 마라. 예법에도 투기가 심한 여자는 쫓는다 했다. 과인이 박정한 것이 아니다."

황희 황정승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다시 간한다.

"전하! 다시 한번 돌려 생각해보옵소서.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는 비전하께서 현모양처이시었습니다. 세자를 생산하시고, 효령대군을 생산하시고, 충녕대군을 생산하시고, 성녕대군을 생산하시고, 혁명을 익찬하시어 전하의 중흥 대업을 이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내조가 좋으시던 왕비 전하께서 전하를 원망하신다는 것은 그 허물이 전하한테 있다 생각되옵니다. 전하께서는 왕비 전하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시기 전에 전하께서 한번 반성해보옵소서. 반드시 전하의 허물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하의 허물을 생각지 아니하시고 조강지처이신 왕비를 폐하려 하시니 신은 만백성을 대표하여 결코 폐비하신다는 전하의 뜻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황희 황정승의 충성되게 간하는 도도한 말은 마침내 태종을 꼼짝 못하도록 만들었다. 태종은 묵묵히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희 황정승은 다시 태종의 입에서 '폐비' 소리가 못 나오도록 못을 박아 아뢴다.

"황희 다시 전하 탑전에 아뢰옵니다. 만약 전하께오서 왕비 전하를 폐위시켜 서인을 만드시는 날 세자저하는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세자저하는 서인의 어머니를 모시어야 합니까?"

태종은 코가 맥맥했다. 마음속으로는, '세자는 폐해야 한다.' 이같은 생각을 가졌으나 차마 이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황정승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효령대군은 어찌하시렵니까? 대군으로 있으면서 평백성의 어머니를 모셔야 합니까?"

태종은 또다시 코가 맥맥했다. 황정승은 빤히 태종의 눈치를 바라보면서 또 아뢴다.

"충녕대군은 어머님 없는 대군이 되어도 좋습니까?"

황정승은 단김에 뿔을 뽑는다.

"성녕대군은 어찌하실 텝니까?"

태종은 더 배겨날 수가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정승은 전하의 일어나는 앞에 엎드렸다. 태종은 대신의 대접을 아니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신 황희는 황공하오나 다시 한 말씀만 더 아뢰겠습니다."

태종은 잠자코 앉았다.

"소신은 말이라는 것이 어떻게 나가는 것을 한번 시험해본 일이 있사옵니다."

옆에 시립해 섰는 대신들도 모두 다 귀를 기울였다.

"하루는 저의 아내한테 비밀한 체 말을 했습니다. '거 이상한 일을 오늘 아침에 당했소. 내 귀에서 홀연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갔으니 괴이한 일이오.' 이같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내한테 당부했습니다. '이것은 남이 알면 큰일이니 절대로 가까운 자식한테라도 말을 하지 마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아내는 '천만의 말씀이시지, 이 소중한 일을 누구한테 말하겠습니까' 하고 얼굴빛을 바로잡아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에서는 황희의 귀에서 파랑새 백 마리가 나와서 날아갔다고 떠들어댔습니다. 기막히지 아니합니까. 한 마리가 백 갑절이 되어 백 마리로 변했습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아내는 남에게 말을 아니 한다고 했으면서 딸한테 이야기했습니다. 한 마리가 열 마리로 늘었습니다. 물론 남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겠지요. 그러나 딸은 사위한테 말하고 사위는 가장 가까운 친구한테 스무 마리로 말했습니다. 이같이 해서 비밀이라고 당부하면서 결국 황희의 귀에서는 파랑새가 백 마리가 나와서 날아간 것이 되었습니다. 전하! 절대로 '폐비' 두 자는 옥음으로 내지 마시옵소서."

황희 황정승의 풍간은 태종의 마음을 찔렀다. 전하는 묵연히 내전으로 향했다. 다시는 '폐비'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황정승의 말대로 태종이 삼정승을 불러놓고 폐비를 해야 하겠다고 한 말은 단번에 내전과 세자궁으로 새어나갔다. 내전에서는 민비가 길길이 뛰었다.

"제 임금이 뉘 덕으로 된 임금인데. 내가 앞장서서 모든 장수들을 주선했고 내 동생들이 선봉대장이 되어서 광화문과 영추문을 포위하고 방석, 방번을 내쫓은 것 아닌가. 이리해서 임금이 되었는데 이제와서는 내 친정을 역적으로 몰아 몰살시키고 나를 마저 폐위시킨다고 대신과 의논을 했단 말이냐.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민왕후는 사내 같은 성미에 야료가 대단했다.

"어디 나를 폐위시켜보아라. 전하는 왕의 자리에 태평하게 영광을 누릴 줄 아느냐. 후궁한테 미쳐서 나중에는 별의별 궁리를 다 하고 있구나."

민왕후는 날마다 지밀에서 사간과 기명을 들부수고 소란을 떨었다. 몇 번인지 태종이 거처하는 연침으로 뛰어들려 했으나 모든 궁녀와 내시들의 간곡한 만류로 외전까지는 뛰어들지 아니했다. 태종은 무서워서 감히 내전 근처로 발을 옮기지 못했다. 폐비를 하려고 대신과 의논했던 영향은 지밀 안 왕비 처소에 풍파를 일으킨 것뿐이 아니었다. 동궁에도 불똥은 뛰었다. 세자의 귀에 어머니를 폐비시키겠다는 소식이 들어갔다. 세자는 기가 찼다. 미친 듯 고함을 쳐 껄걸 웃는다.

"술을 가져오너라. 안주를 호롸롭게 차릴 것 없다. 지체 말고 술을 가져오너라."

세자는 강술로 술잔을 기울였다.

"연전에도 내 외숙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후에 두 분이 싸우다가 어쩌니 저쩌니 하더니 이번에는 또 우리 어머니를 내쫓는단 말이냐. 잘한다 잘해. 무서울 게 무엇 있느냐. 동생한테도 칼을 빼어 들고 형님한테도 활을 겨누던 그분인데 그까짓 아내쯤 무서울 까닭이 있느냐. 맘대로 하라 해라, 하하."

세자는 자포자기의 술을 마시었다. 안존한 세자빈 김씨는 조심성스럽게 세자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술상 시중을 했다. 세자는 빈 앞에서 강술을 마시고 술기운이 얼근했다. 빈을 돌아본다.

"내가 걱정한들 무엇하고, 당신이 시름한들 소용이 있소? 당신의 아버지도 병조판서와 금부 당상이 떨어졌구려. 하하. 자아, 우리는 아무 시름도 하지 맙시다. 명보나 좀 불러주구려."

동궁빈은 미소를 지어 조용히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시녀에게 명보를 부르라 했다. 이윽고 춘방사령 명보가 들어왔다. 뜰 아래서 아뢴다.

"명보 들어왔습니다."

"오오, 명보냐."

이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사람이었다.

"너 곧 나가서 이오방과 구종수를 불러오너라. 그리고 모든 오입쟁이, 한량들을 있는 대로 다 데리고 오라 해라."

", 알겠습니다."

춘방사령의 두목 명보는 총총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세자는 도연히 취한 눈으로 세자빈을 바라본다.

"화도 나고, 술 한 잔 더 마시고 싶소. 지금 악공들을 청했으니 간단하게 주안상을 차리라고 숙설간에 일러주시오."

세자는 여태껏 술을 마시고도 술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했다. 세자빈은 어진 아내였다. 다만 세자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염려 마시옵소서.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마음을 편히 하시고 즐겁게 노시옵소서."

세자빈은 미소를 지어 일어났다. 이윽고 구종수, 이오방은 모든 악공과 명창, 명기들을 데리고 세자궁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정탐하던 내관도 죽었다. 수문장도 세자의 심복이었다. 상감한테 고자질할 사람도 없었다. 가객과 한량패와 기생들은 거침없이 세자궁으로 들어왔다. 춘방사령 명보는 내실로 들어가서 세자께 고했다.

"한량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기생도 왔느냐? 작은 꾀꼬리 대신 기생들을 또 좀 새로 사귀어야 하겠다."

"아주 일등 명창, 명기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오오, 수고했다."

세자는 거나하게 취해서 사랑으로 향했다.

구종수, 이오방 이하 모든 가객과 기생들이 아래채에서 서성거리다가 세자의 나오는 것을 보자 일제히 일어났다.

"세자마마, 문후드리옵니다."

세자는 낯익은 오입쟁이들을 보니 무한히 반가웠다. 만 가지 수심이 일시에 사라졌다.

"하하하, 자네들 왔나. 문후는 무슨 문후, 태평무사하게 잘 지내네. 자네들 문후는 어떠한가? 하하하."

", 소인들은 다 별고 없이 잘들 지냈습니다."

"하하하, 그래? 나도 별고 없이 지냈네. 하하하. 어서들 올라오게."

세자는 흔연히 손짓을 해서 일행을 사랑으로 불러들였다. 자리가 좌정되자 세자빈이 주안상을 내보냈다. 구종수, 이오방 이외에 악공 이법화, 악공 홍만, 기생 계기, 개싱 초궁장이 들어왔다. 세자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악공 이법화가 홍만과 함께 세자를 뵈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다 장악원 악공들이올시다. 이 사람은 이법화라 하옵고 저 사람은 홍만이라 부릅니다."

이오방이 두 악공을 세자한테 소개했다.

"거문고를 잘 타나?"

세자는 이법화를 향하여 묻는다.

"퉁소를 불 줄 압니다."

"퉁소? 그것 참 멋진 악기지. 계명산 추야월에 장양이가 옥퉁소 한 곡조로 막막강병인 항우의 강동자제 팔천 명을 흩어지게 했던 일도 있지 아니한가. 좋은 악길세."

"재주 없사오나 오늘 밤에 기회 있으면 저하를 모시고 한 곡조 짭짤하게 불러보겠습니다.

이법화는 능소능대하게 대답했다. 벌써 말하는 폼이 보통 오입쟁이가 아니었다. 갓을 삐딱하게 쓰고 보랏빛 직령에, 디를 동심결을 지어서 멋들어지게 뚝 떨어뜨렸다. 흥만이 세자께 다시 절하고 뵌다.

"자네가 홍만인가?"

", 소인의 성명이 홍만이올시다."

"자네는 무슨 음률을 하나?"

"가야금을 탑니다."

"가야금?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고유한 악길세그려. 가야의 우륵이가 창조한 악기가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오늘 밤 이법화의 옥통소에다가 자네 가야금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세."

이어, 세자의 눈은 두 기생한테로 쏠렸다. 한 기생은 얼굴이 아기자기하고 콧날이 오똑 섰다. 눈은 별빛 같은데 눈가에 푸른 기가 살짝 돌았다. 허리는 날씬하고 어깨는 집어다 놓은 듯했다. 일취 있는 미녀였다. 세자의 눈은 먼저 가는 허리에 어깨가 날아갈 듯 날씬한 여인한테로 향했다. 눈가의 푸른 기운이 매력 있게 보인 것이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초궁장이라 하옵니다."

"초궁장, 아름다운 이름이로구나. 초궁의 단장을 차린 예쁜 계집이란 말인가?"

초궁장의 얼굴이 발그스레 물들었다.

"너는 춤을 잘 추느냐? 노래를 잘 부르느냐?"

초궁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숙여 대답이 없다. 구종수가 대신 대답한다.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춥니다."

"그렇게 생겼다. 어깨가 날신하고 허리가 가느니 춤을 잘 추게 생겼다. 눈이 파르족족하고 입술이 얄팍하니 어찌 노래를 잘 부르지 않겠느냐."

세자는 이제 능통한 오입쟁이가 되었다. 한번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의 성격과 재주를 단번에 판단할 줄 알았다. 세자는 다시 초궁장의 옆에 앉은 여인을 가리키며 묻는다.

"저 애의 이름은 무엇이냐?"

"계지라 하옵니다."

기생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제 스스로 제 이름을 세자께 아뢴다. 초궁장보다 나이 훨신 많아 보였다. 두둑하고 풍윤하게 생긴 계집이었다.

"너도 장악원에 적을 두었느냐?"

"아니올시다."

계집은 고개를 잠깐 숙였다.

구종수가 대신 대답한다.

"남의 첩실이올시다. 저희들이 함께 놀자고 데리고 왔사옵니다."

"첩실야?"

세자는 첩실이란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 그러하옵니다."

구종수가 대답했다.

"누구의 첩이란 말이냐?"

"그것은 밝히지 아니하겠습니다. 오입판 경계에 밝히는 법이 아니옵니다. 나중에 저절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세자는 더욱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그렇겠다, 오입판 경계가. 하하하."

세자는 더 묻지 아니하고 드높게 웃었다.

"계지라면 맵겠구나."

세자는 한 마디 더 붙여본다.

"약에 드는 계피보다는 덜 맵습니다. 호호호."

계지가 상긋 웃으며 대답했다. 계지는 한성부 소윤 권보의 첩이다. 초궁장의 친구로서 본시 기생 출신인 계지는 오입쟁이 구종수, 이오방, 이법화, 홍만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다. 초궁장의 집에 놀러갔다가 세자궁에서 한량 가객들과 기생들을 청한다는 말을 듣고 칠분은 호기심이 동하고 삼분은 초궁장과 오입쟁이들의 권에 의해서 함께 놀러왔던 것이다. 세자는 구종수한테 다시 묻는다.

"누구의 첩인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화류계 풍속에 첩실 되는 사람이 그 서방의 성명 삼자를 밝히지 않는다고 아뢰지 아니했습니까. 하하하. 저하, 더 묻지 마십시오."

"그건 왜 그리들 하나?"

세자는 마음속으로 짐작하면서도 짐짓 묻는다.

"서로 피차에 거북하거든요. 이러하니 나중에 알 때 아시더라도 처음에는 숫처녀를 대하듯 서방 말씀은 묻지 마십쇼."

이때 계지의 얼굴은 또 한 번 붉어지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그래, 그도 그럴듯한 일일세. 내가 도시 화류계의 새물청어라 오입판 계계를 몰라서 큰 실수를 했네. 용서들 해주게."

세자는 먼저 계지를 바라보며 눈짓을 해서 눈맞춤을 하고 여러 오입쟁이들한테 사과하는 말을 보냈다. 술상이 나오고 순배가 돌면서 초궁장과 계지는 노래를 부르고 이법화와 홍만은 옥퉁소와 가야금으로 노래를 반주했다. 초궁장의 노래는 청이 좋고 계지의 가곡은 애운성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두 여인의 노랫소리는 마치 봉지련의 노랫소리와 작은 꾀꼬리의 가곡을 합쳐놓은 듯했다. 세자는 문득 봉지련과 작은 꾀꼬리의 생각이 머리에 스쳐 일어났다.

"초궁장과 계지의 가곡은 보통이 아니다. 과연 일류 명창 소리를 들을만하다. 그리고 이법화의 퉁소와 홍만의 가야금도 과시 명불허전이다."

세자는 먼저 초면가객 홍만과 이법화의 기악과 초궁장과 계지의 가곡을 칭찬했다.

구종수가 아뢴다.

"저희들이 세자마마께 천드리는 명창 가객들을 함부로 뽑아 오겠습니까? 다들 일류 가객에 일등 가는 명창들이옵니다."

"수고들 했네."

세자는 오입쟁이들을 칭찬한 후에,

"명보야."

하고 불렀다.

세자가 율객과 가객을 청해서 연회를 하게 되면 으레 말석에 앉게 되는 충복 명보다. 세자는 일부러 상하귀천을 다지지 아니했다. 명보는 세자의 부르는 말슴을 듣고 술상 앞에서 벌떡 일어나,

"."

하고 대답했다.

"문서방에 나가서 서사보고 고문 열쇠를 달래서 비단 이십 필만 꺼내 오너라."

"예이."

명보는 세자가 기생 행하 줄 것인 줄 짐작하고 신명이 났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총총 걸어나갔다. 이윽고 명보는 비단 한 아름을 안고 들어와서 세자 앞에 놓고 아뢴다.

"중국 비단으로 이십 필을 구색해서 가져왔습니다."

세자는 손수 한 필을 들어 활짝 펴본다. 오색 무늬의 호화찬란한 비단폭이 불빛 아래 사람의 눈을 황홀케했다.

"자아, 구감역. 이것이 모두 이십 필 비단일세. 초궁장과 계지한테 놀음차로 나눠주고 자네들도 한 필씩 가져다가 딸아이가 있거든 옷을 지어 입으라 하게."

구종수 이하 남자 오입쟁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일제히 사양한다.

"저하, 망령이십니다. 저희들은 받지 않겠습니다. 궁으로 불러주신 것만 해도 황송하온데 소인들이 행하를 받겠습니까? 저 애들이나 나눠주기로 하겠습니다."

"저하, 저하께서 소인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소인들이 비록 양반은 되지 못하고 중사람으로 율객 노릇을 장악원에서 하고 있습니다마는 마음은 까치 뱃바닥같이 흽니다. 놀음차를 받을 소인들이 아니올시다."

이오방이 못마땅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이법화가 뒤를 이어 아뢴다.

"소인이 오늘 세자저하를 뵈러 온 것은 저하의 활달대도하신 인품과 인자하신 덕망을 사모하여 뵈러 온 것이옵지 놀음차를 받으러 다니는 놈들이 아니올시다. 우대 놈들이 집에 들어가면 세발 막대 거칠 것은 없습니다마는 죄송하오나 천하 인물 보기를 개똥같이 봅니다. 그까짓 비단 한두 필에 허욕을 낼 놈들이 아니올시다."

까치 뱃바닥같이 희다는 말에 세자는 감동이 되었다. 세자는 이오방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좋은 말야. 옳은 말일세. 내가 잘못했네. 여러분 가객한테 사죄하네. 명보야, 초궁장과 계지에게 비단을 열 필씩 나눠주어라."

명보는 신명이 났다. 이오방의 까치 뱃바닥같이 희다는 말도 좋고 세자의 처사도 마음에 들었다. 세자 앞에 있는 비단 이십 필을 두 몫으로 나누어 초궁장의 앞에 열 필을 놓고 계지 앞에 열 필을 놓았다. 두 여자는 겉놀음 행하차를 이같이 후하게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난생처음이었다. 겉놀음 행하는커녕 속놀음 행하도 이같이 후할 수는 없었다.

"에구머니나, 황송해라. 이 일을 어찌하나."

초궁장은 너무나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권보의 첩 계지는 현직 기생이 아니니 받을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아따 이 사람, 받아두게. 자네가 사양하면 세자께서 불쾌하게 생각하시네. 증경기생은 기생이 아닌가. 어서 받아두게나."

권보의 첩 계지는 세자마마의 앞도 앞이려니와 너무나 과하도록 많은 놀음치를 받은 것이 미안했다. 정성을 다하여 노래와 춤을 추어 세자의 흥을 돋우었다. 가무가 끝나고 술이 방감이 되었을 때 세자는 모든 오입쟁이들을 향하여 묻는다.

"누가 혹 작은 꾀꼬리의 소식을 들었나?"

구종수가 대답한다.

"작은 꾀꼬리는 상감께서 평양으로 추방한 후에 소식을 알 길 없습니다."

"평양으로 가보기 전에는 소식을 알 길 없습니다."

이오방이 대답했다.

"평양으로 간들 맘대로 만나볼 수가 있나. 어명으로 추방하셨으니 관원들이 기생출사는 못시킬 거야."

이법화가 뇌까렸다.

"나는 처복은 후한데 첩복이 박한 모양이자. 하하하."

세자는 호방한 웃음을 한 번 드높게 웃는다. 그러나 그는 다정다감했다. 드높게 웃는 웃음 뒤에는 눈물이 글썽거려 취한 눈에 어렸다. 모두 다 속이 트인 오입쟁이들이었다. 세자의 심경을 넉넉히 살필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히 고개를 숙여 동정하는 침묵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세자는 눈물을 거두고 또 한 번 호탕하게 웃는다.

"나는 또 첩속현을 해야 할 텐데 누가 내 소실이 될 사람은 없느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두 여인을 바라본다.

"첩속현도 있습니까?"

하고 모두들 웃었다. 초궁장이 싱긋 웃으며 세자께 향하여 아뢴다.

"소인이 저하의 부실이 되겠습니다. 거두어주시렵니까?"

"기특하다. 네가 나의 부실이 되겠느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세자의 호방스런 말이 떨어지자 이법화가 아뢴다.

"저하께서 만약 초궁장이 마음에 드신다면 소인이 중매 아비가 되겠습니다."

계지는 옆에서 웃으며 한마디 한다.

"쇤네는 중매 어미가 되겠습니다."

세자는 껄걸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 파연곡을 아뢴 후에 초궁장은 물러가지 말고 궁에 남아 있거라."

초궁장이 고개를 숙여 아뢴다.

"궁중에서는 못 거행하겠습니다."

"?"

"앞으로 다시 첩속현을 하시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호호호."

뜻깊은 초공중의 말에 모두 다 미소를 지었다.

"봉지련과 작은 꾀꼬리의 꼴이 될까보아 그러느냐?"

", 그러하옵니다."

초궁장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접수화 해수혈 격으로 내가 네 집으로 가마."

"그것도 싫습니다. 작은 꾀꼬리도 집에서 잡혔습니다. 호호호."

"그러면 도무지 싫단 말이로구나."

이때 이법화가 아뢴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소인의 집에서 오늘 밤 저하와 초궁장을 위해서 동방 화촉을 꾸미겠습니다."

"그거 좋구나."

세자는 크게 웃고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렇다면 당자의 의향을 들어봐야 할 것이 아니냐."

세자가 말씀을 내린다.

"옳으신 말씀이올시다."

구종수가 첨을 올렸다.

계지가 구종수의 말을 받아 말한다.

"쇤네가 초궁장의 의향을 묻겠습니다. 남정네가 묻는 것보다 쇤네가 묻는 편이 대답하는 사람도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계지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초궁장의 귀에다가 소곤소곤 두어 마디 했다. 초궁장의 눈이 게슴치레 웃음을 띠고 고개를 까닥까닥했다. 모두 다 보니 응낙하는 의사가 분명했다.

"좋다 합니다."

계지가 웃으며 세자한테 고했다.

"자아, 그럼 오늘 밤 세자궁 술자리는 끝을 마치고 우리 집으로 향하십시다. 세자마마, 어떠하십옵니까?"

"좋도록 하게."

세자는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여러 오입쟁이와 한량패들은 일제히 찬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는 명보한테 연락을 받고 세자의 옷을 가지러 나왔다. 세자는 미복으로 차리고 거리로 향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달을 밟고 거리로 나갔다. 거리의 사람들은 세자의 행차인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이법화의 집 문 앞에 당도했을 때 구종수가 발론을 한다.

"자아, 밤도 깊고 술도 취했는데 또다시 법화네 집에 폐를 끼칠 까닭이 없으니 우리들은 제각기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고 신랑 신부와 집주인만 들어가시는 것이 어떠하오."

"그것 참 좋은 말씀일세. 동방화촉을 치르는데 우리들이 번잡을 떨 까닭이 없네. 구감역 말대로 우리는 제각기 헤어져 돌아갔다가 다음날 초궁장한테 국수나 한 그릇씩 먹여 달라 하고 여기서 작별하기로 합시다."

"거 좋은 말요."

일동은 찬동하고 헤어졌다. 남은 사람은 집주인 이법화와 세자와 초궁장뿐이었다. 이법화는 대문을 열라 해서 세자와 초궁장을 사랑방으로 인도했다. 이윽고 오붓한 놀이가 되었다. 간단한 주안상이 세자를 위하여 나오고 달 비치는 누마루 위에서는 초궁장의 청 좋은 가사와 이법화의 옥퉁소가 세자의 모든 번뇌를 시원스럽게 씻어주었다. 달빛은 그림자를 옮기고 북두칠성의 별자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소리는 적막한 동리를 울리고 귀뚜라미 소리에 사람의 마음은 한층 한스러웠다.

이법화는 옥통소를 거두고 초궁장은 노래를 그쳤다.

"밤이 깊었습니다. 소인은 내실로 물러가겠습니다. 세자께옵서는 저 애와 함께 마종수를 거두시고 무궁무진한 인생의 낙을 누리시옵소서."

세자한테 인사를 올린 후에,

"너 오늘 밤에 잘 모시옵시어라. 네 한평생 다시 올 수 없는 영광이다. 그럼, 내일 만나기로 하자."

이법화는 초궁장한테 분부한 후에 동방화촉의 등심을 촛대에 달린 전도로 따서 불을 밝히고 물러간다. 법화까지 물러가니 이제는 초궁장과 세자 단 두 사람뿐이다. 한은 많고 정은 깊었다. 촛대에 등심 튀기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초궁장은 금침장에서 금침을 내려놓았다.

"고단하실 텐데 누워서 쉬시옵소서."

"얼근하게 취하기도 하고 밥이 깊으니 누워보는 것도 좋겠다. 너도 불을 끄고 자리 안으로 들어오너라."

초궁장은 불을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끄고 소리 없이 금침 안으로 들어와 세자를 모시었다. 세자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어느덧 그를 호색한으로 만들었다. 한번 봉지련에 취하고 다음 작은 꾀꼬리한테 기울어졌던 세자는 점점 여인을 좋아하는 습성을 이루었다. 버릇과 습관이란 이같이 무서운 것이다. 세자의 반항과 반항심은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낱 탕아로 변해가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세자는 초궁장의 날씬한 몸맵시와 게슴츠레하고 푸른 기도는 눈에 마음이 흔들렸다.

"너만한 절색도 우리나라에는 많지 않겠다."

세자는 금침 안에서 초궁장을 애무하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봉지련 언니와 작은 꾀꼬리한테 대면 쇤네는 아무것도 아니올시다. 봉지련 언니와 작은 꾀꼬리는 참 잘들 생겼습니다. 봉지련 언니는 화중왕 모란꽃 같고, 작은 꾀꼬리는 조촐하고 품 높은 매화일지의 맵시올시다."

초궁장은 겸손하게 봉지련과 소앵을 칭찬했다. 세자는 초궁장의 마음 고운 말을 듣자 더한층 정이 움직였다.

"봉지련은 화려하지만 몸이 푸석해서 단단하지 못하고, 작은 꾀꼬리는 날씬하지만 몸이 약하다. 너는 몸이 단단해서 아주 절색이니라."

초궁장은 세자의 칭찬하는 말씀이 듣기 싫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자긍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없었다. 두 남녀는 부풀어 오르는 젊음을 한없이 발산시켰다. 초궁장이 속삭인다.

"저하, 계지를 한번 대해보시렵니까?"

"남의 첩실이라며 그러느냐."

"화류계에서는 첩실과 사랑을 거는 일은 항다반이올시다. 생각이 계시다면 쇤네가 한번 중매를 들겠습니다."

남의 첩실 계지를 세자께 중매들어 보겠다는 초궁장의 말을 듣자 세자는 호기심이 움직였다.

"남의 첩을 보아도 좋단 말이냐?"

초궁장은 까르르 웃었다.

"세자마마는 오입을 많이 하셨다면서 아죽도 새물청어이십니다. 오입판에서는 으레 남의 첩실과 사랑을 속삭입니다. 호호호. 아무 죄악도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네 한번 중매를 서보아라."

"어렵지 아니한 일이올시다."

초궁장은 생긋 웃었다. 세자는 점점 호기심이 움직였다.

"어느 때쯤 중매를 해주려느냐?"

초조하게 초궁장에게 묻는다. 초궁장은 방긋방긋 웃으며 세자를 바라보며 되묻는다.

"어느 때쯤 좋으시겠습니까?"

"내일 밤이라도 좋다."

초궁장은 눈에 가득 조롱하는 웃음을 띠면서 말한다.

"호호호. 나는 새가 깃을 펴야 날고 굼벵이도 기어갈 준비를 차려야 기어가지 않습니까. 더구나 노는 계집도 아니고 남의 첩실과 장맞이하는 일이 아닙니까. 저쪽 의향도 들어봐야 하고 본서방 형편도 살펴서 구애가 되지 아니해야만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물에서 숭늉 달라시겠습니다. 호호호."

"그럼 어찌하란 말이냐. 나무에 오르라 해놓고 흔들어보는 격이로구나."

"세자마마께서 정 급하시다면 열흘만 말미를 주십시오."

"너무나 멀구나, 열흘이면."

세자의 얼굴은 멍했다.

"자아, 생각해보십시오. 쇤네가 뜻밖에 세자마마를 모시게 되었으니 아무리 못생긴 초궁이라 하나 삼일 신방을 모신 후에 한 이레 말미는 가져야 합니다. 사흘 동안은 계지를 찾아다니며 졸라보고, 삼일 동안은 주인 서방이 있는 사람이니 주인의 동정을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연후에 열흘째 가서 저하께서 계지와 함께 운우지몽을 꾸시도록 성사를 시켜드릴 작정이올시다."

"하는 수 없지. 아무리 급하더라도 중매쟁이 말을 들을 수밖에 도리가 있느냐. 그렇다면 열흘 한을 줄 테니 잘 주선을 해보아라."

세자는 흐뭇했다. 초궁장을 끌어안아 애무했다. 세자의 애무를 받는다는 일은 기생 초궁장으로서는 일생일대의 영광이었다. 아찔한 유열 속에 눈시울이 가슴츠레 떠졌다가 감겨졌다 했다.

"세자마마."

"오냐."

"계지와 정분이 나시더라도 쇤네는 잊지 마셔야 합니다."

"너를 잊을 리야."

세자는 긴하게 초궁장을 껴안았다. 세자와 초궁장은 악공 이법화의 집에서 삼일을 치렀다. 그러나 세자는 대전에 소문이 들어갈까 보아 낮에는 동궁으로 돌아가고 밤에만 미복으로 나와서 초궁장과 불붙는 향략을 취했다. 초궁장은 삼일 밤을 치른 후에 세자와 약속한 대로 권보의 첩실인 계지를 찾았다. 권보는 한성부 소윤으로 지체 좋은 양반이었다. 기생 출신인 계지를 떼어 들여서 따로 치가를 해놓고 한 달에 대여섯 번씩 소실을 찾았다. 계지는 원래 기생 출신으로 놀기를 좋아했다. 한가한 틈을 타서 전에 가깝게 놀던 초궁장과 악공 이법화, 이오방들과 추축했다. 이러한 까닭에 며칠 전에도 초궁장, 이오방, 이법화들과 함께 세자궁에서 하룻밤을 질탕하게 놀았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세자와 초궁장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계지가 한가롭게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계지의 집 동자치가 문을 열어 보니 무상출입하다시피 하던 초궁장이었다. 동자치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계지를 깨웠다.

"아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계지는 동자치가 떠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가슴츠레한 매력 있는 눈을 떠서 동자치한테 묻는다.

"누가 오셨느냐?"

"초궁장 아씨가 오셨습니다."

동자치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초궁장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팔자 참 좋구나. 몸이 한가로우니 낮잠이나 자고."

"아이구, 무슨 바람이 불어서 네가 왔느냐. 어서 이리 와 앉아라."

계지는 반갑게 초궁장의 손을 이끌어 방속 위에 앉게 했다.

"그래 재미가 어떠니?"

"낮잠 자는 재미지."

"낮잠 너무 자면 학질 앓는다. 너두 나처럼 펄펄거리고 좀 돌아다녀라."

초궁장은 계지의 등을 두드리는 체했다.

"너도 이제 내 꼴보다 더 지독한 농 속의 새가 될 텐데 내 낮잠 자는 것을 흉보느냐."

"내가 왜 농 속의 새가 되더란 말이냐. 절대로 아니 된다."

"세자마마의 후궁이 한번 된다면 호강도 크겠지만 나에 비할 바가 아니리라. 그래 세자와 얼마나 재미있게 잘 지냈느냐. 너는 장차 후궁감이로구나."

"흐흥, 나는 재상의 첩실도 싫고, 세장의 별당도 싫고, 상감의 후궁도 싫다. 자유스럽게 놀 테다. 누가 남한테 매어 지낸단 말이냐.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게 놀다가 이별이 되면 그만두고 또다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이렇게 해서 거리낄 것 없이 한평생 내 맘대로 잘 놀다가 갈 데로 가기가 내 소원이다. 하하하."

초궁장은 호방하게 사내웃음을 웃었다. 계지가 가만히 한숨을 짓는다.

"네 말도 옳아. 여자로 태어나서 남의 정실이 되어서 유자생녀하고 한평생 해로하면서 사는 것이 원칙인데, 나 같은 것은 남의 소실이 되어서 큰 마누라의 눈의 가시가 되고, 남편한테는 귀염을 받는다 해도 농 속에 갇혀 있는 새의 몸이 되었으니 가련하기 짝이 없단 말이다."

"그러게 나는 남의 첩이나 후궁은 절대로 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아니했느냐. 네 남편은 한 달에 몇 번씩이나 오시느냐?"

"한 달에 많아야 다섯 번. 호호호."

계지가 해죽이 웃는다.

"그럼. 오륙삼십이로구나. 닷새 장도 못봐준단 말이냐. 하하하."

초궁장은 까르르 웃었다. 초궁장의 높이 웃는 소리에 따라 계지는 소리 없이 해죽 웃었다. 초궁장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한 달에 겨우 다섯 번이면 나머지 이십오야는 독수공방이로구나. 하하하. 첩실놀음 하기도 가련하다. 논다니 기생 내 팔자가 상팔자로구나."

"옳아, 네 말이 옳아. 이십오현탄야월에 불승청원각비래지. 하하하. 독수공방에 거문고나 뜯고 있는 격이다. 어떤 때는 도로 기생으로 나갔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에 연기 쏟아지듯 하더라."

계지는 가만히 입으로 바람을 일으켜 한숨을 내쉬었다. 초궁장이 다시 말을 꺼낸다.

"네 영감은 꽤 바쁜 모양이로구나."

"한성부 출사니까 아니 바쁠 수가 있나."

"큰마누라가 바가지를 꽤 긁겠지?"

"시앗을 좋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자리를 바꾸어보아라. 너도 바가지깨나 내던질 것이다."

"네 남편이 언제 다녀가셨느냐?"

초궁장은 실눈을 가슴츠레 뜨고 웃음을 머금어 계지를 바라본다.

"그것은 왜 물어?"

계지가 마주 웃으며 되묻는다.

"글세, 좀 알 일이 있어 묻는다."

"간밤에 다녀갔어."

"호호호. 그래서 네가 낮잠을 달게 자는구나."

"영감이 다녀가면 낮잠을 자나?"

"밤새도록 정담과 애무 속에서 지냈으니 고단할 것 아니냐. 하하하."

계지는 해죽 웃으며 초궁장의 넓적다리를 치마 위로 살짝 꼬집었다. 초궁장은 '아야' 소리를 치며 보복으로 계지의 예쁜 뺨을 살몃 꼬집었다. 계지는 초궁장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살포시 눈을 흘겼다. 초궁장은 계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거라."

"?"

"놀러 나가나. 네 서방님이 오실 날도 아직 닷새나 남았으니 마음 놓고 놀러 나가자."

"어디로 놀러 가느냐?"

"이법화 악공 집으로 놀러 가자. 오늘 멋진 오입쟁이와 가객들이 많이 모여서 놀기로 했다."

계지는 심심하던 판에 좋은 소식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머리를 좀 가려 빗고 함께 가자. 잠깐만 기다려라."

계지는 경대 앞으로 나가서 머리를 가리고 분세수를 한 후에 새 옷을 가꾸어 입고 초궁장과 함께 푸른 비단 장옷을 바람에 흩날리며 악공 이법화의 집으로 향했다. 초궁장과 계지가 악공 이법화의 집 대문 앞에 당도하니 해는 아직도 서산 마루에 기울지 아니했는데 퉁소 소리와 거문고 소리가 요요하고 애절하게 흘러나와서 사람의 마음을 사뭇 부채질하듯 흩뜨려놓는다. 더구나 초궁장과 계지는 음률의 조박이 있는 멋진 기생 출신이다. 대문으로 새어 나오는 음률 소리를 듣자 장옷 속에서 어깨춤이 저절로 났다.

"퉁소는 이법화가 불고 거문고는 이오방이 타는 모양이지?"

계지가 초궁장한테 묻는다.

"네 말이 옳다. 벌써들 모인 모양이다."

초궁장은 대답하면서 문을 지긋지긋 흔들었다. 대문 안에 달린 무쇠방울이 요란하게 흔들리면서 이법화 집 비부쟁이가 문을 넌지시 열었다. 비부는 초궁장과 계지의 낯을 익히 알고 있었다.

"판교를 아니 타시고 장옷을 쓰고 오시니 누군가 했습니다. 어서 오십쇼. 주인 나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부쟁이는 초궁장을 향하여 말하고 반갑게 두 여인을 사랑으로 인도했다. 초궁장은 며칠 전에 사랑방에서 당대의 세자를 모셨던 기생이었다. 비부쟁이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초궁장을 대했다. 사랑 대청에서 퉁소를 불던 이법화와 이오방은 비부쟁이의,

"초궁장 아씨가 권소윤 나리 별당과 함께 오십니다."

하는 말을 듣자 불던 퉁소와 타던 거문고를 자리에 내려놓고 반갑게 두 여인을 맞이했다.

"아아, 자네들 오나. 시각을 잘 맞추어주셔서 고마우이."

이법화가 말하고,

"한 쌍 미인이 찾아드니 비로소 이악공의 집에 서기가 이는 듯하구나."

이오방은 찬사를 보냈다. 초궁장은 당에 오르자 이법화와 이오방한테 반팔을 짚어서,

"날사이 문안 어떠십니까?"

하고 문안 절을 올렸다.

계지는 권소윤의 첩실이기 때문에 문안 절 대신 허리를 굽혀서,

"날사이재미들이 좋으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남자만 있던 대청은 여인이 둘씩이나 자리에 앉자 향훈이 가득하게 돌았다. 계지가 인사를 끝낸 후에 초궁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묻는다.

"손님들이 많다 하더니 어디 많으시냐?"

"장차 모이실 거야."

초궁장이 대답한다.

"무어, 손님이 적다고? 조금 있으면 별의별 손님이 다 오실 거다."

이법화가 말참견을 했다.

"손님 오실 동안에 이선달님의 옥퉁소와 이첨지 어른의 거문고나 듣게 해줍쇼."

계지가 토실토실한 얼굴에 웃음을 풍기며 청을 했다. 이때 홀연 세자가 골방에서 나타났다. 계지는 황망히 세자께 절을 올렸다. 세자가 좌정하자 안에서는 주안상이 나왔다.

"오랫동안 계지의 수단 높은 가곡을 들어보지 못했네. 자네가 가사를 불러준다면 내가 퉁소로 화음을 내서 세자저하의 주흥을 돕겠네."

이법화가 계지의 가곡을 청했다.

"제가 노래를 불러본 지 오래돼서 제대로 청이 나오지 아니할 것 같습니다."

계지는 잠깐 자리를 피하며 대답한다.

"이선달이 좋은 말씀을 했네. 계지가 권소윤의 첩실로 들어간 후에 가곡계가 적막하기 그지없네. 이태백의 시 그대로 이백기경비상천하니 적막강산한다년 격으로, 계지일귀권소실하니 적막강산한다년일세. 하하하. 자네가 한번 좋은 가사를 불러준다면 나도 거문고를 타서 흥을 돕겠네."

이오방이 한마디 했다.

"계지가 노래를 불러준다면 저도 병창을 해서 노래를 불러보겠습니다."

초궁장이 두 가객의 말을 거두어서 한마디 했다. 계지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단정히 옷매무새를 고치고 청을 가다듬어 가사를 뽑는다.

'춘면을 늦게 깨어 죽창을 반개하니 정화는 작작한데 가는 나비 머무는 듯 안류는 의희하여 성긴 내를 끼었세라. 창 앞에 덜 괸 술을 이삼 배 마신 후에 호탕하게 미친 흥을 부질없이 자아내어, 백마 금편으로 야유원을 찾아가니 화향은 습의하고 월색은 만정한데 광객인 듯 취객인 듯 흥을 겨워 머무는 츳 배회고면하여 유정히 섰노라니 취와주란 높은 집에 녹의홍상 일미인이 사창을 반개하고 옥안을 잠깐 들어 웃는 듯 반기는 듯 교태지어 맞아들여 추파를 암주하여 녹기금 빗겨 안아 춘흥을 자아내니 운우양대에 초몽이 다정하다. 사랑도 그지없고 연분도 깊을시고, 이 사랑 이 연분이 비길 데가 전혀 없다. 어화 내 일이여, 내 일도 내 몰라라.'

계지가 부르고 초궁장이 뒤를 받치는 춘면곡이 병창 소리는 해 떨어지는 석양판의 고요한 적막을 운치 있게 깨뜨려놓았다. 여기다가 이법화의 퉁소 소리는 더한층 탕자의 마음을 흔들어주었다. 노래는 멎어지고 배반이 낭자했다. 세자는 초궁장에게 술 한 잔을 따라 권한다.

"황감하여이다."

세자의 잔을 받은 초궁장은 한 마디 인사를 한 후에 사양치 아니하고 쭉 들이켰다. 다음에 세자는 계지한테 권했다. 계지는 술을 마시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집주인이 오지 아니하는 밤이라 하나 집에 돌아가서 얼굴이 붉으면 하인들 소시에 큰일이라 생각했다. 세자가 따라주는 술을 받지 아니했다.

"황공하오나 쇤네는 술을 마실 줄 모르옵니다."

계지는 방싯 웃으며 사양하고 술잔을 받지 아니했다. 세자는 초궁장과 약속한 뒷일이 있는 까닭에 일부러 초궁장한테 먼저 권하고 다음 계지한테 권한 것이다. 세자는 사양하는 계지 앞에 내민 술잔을 거두지 아니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마실 줄 아는 술이 어디 있더냐? 마실 줄 모르거든, 내가 선생이 될 테니 배워서 마셔보아라."

계지는 난처했다. 그러나 마시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과연 마실 줄 모르옵니다."

"내 손이 부끄럽구나."

세자는 기어코 계지에게 술을 권하려 했다.

"진정이올시다. 마실 줄 모르옵니다."

계지는 세잔의 명령을 막는 것이 미안해서 상긋상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오늘은 비록 남의 첩실이라 하나, 전에는 기생 출신 아니냐? 기생 쳐놓고 술을 마실 줄 모른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어서 마셔라."

세자의 말이 떨어지자 옆에서 보던 초궁장이 계지를 타이른다.

"마실 줄 모르더라도 세자마마 대접을 해서라도 조금 마시어라. 팔 아프시겠다."

이법화도 옆에서 권했다.

"자네가 술을 많이 아니하는 것은 나도 짐작하네. 그러나 세자저하의 명령을 어찌 어길 수 있나. 한 잔만 마시어두게나."

계지는 하는 수 없었다. 세자가 보내는 술잔을 두 손을 받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잔을 상 위에 놓았다. 세자는 다시 권한다.

"아니 된다. 잔을 비워라."

계지는 술 한 잔을 다 비우는 것을 보자 세자의 입에서는,

"용하다."

하는 칭찬이 내렸다.

술은 순배술로 돌았다. 다음에는 이법화가 마시고 주권을 잡아 세자한테 권하고 초궁장한테 권했다. 초궁장이 마신 후에 이법화는 계지한테 권한다. 계지는 기가 찼다.

"제가 술 잘 아니하는 것을 나리는 잘 아시면서도 저한테 술을 권하시면 어찌하십니까?"

"이 사람, 순배술인데 어짜하나. 빠질 수가 없네. 하하하."

"순배술은 군령보다는 더 무서운 법이다. 어서 마시어라."

세자는 시치미 떼고 군령을 들고 나섰다.

"얼굴이 붉지 아니한데 무엇을 그다지 염려하느냐. 어서 마시어라."

초궁장마서 세자의 편이었다. 사면초가다. 계지는 하는 수 없었다. 한 잔을 또다시 쭉 마시었다. 이미 벌이고 난 춤이었다. 순배술은 돌고 돌았다. 계지는 대여섯 잔을 연해 마시었다. 술을 마시고 난 계지는 점점 마음이 호탕했다. 농 속에 갇혔던 울적한 마음이 탁 풀어놓고 세자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어느덧 밤은 깊었다. 닭 울음소리가 한밤중의 적막을 깨뜨렸다. 계지는 정신이 퍼뜩 났다. 취한 중에도 집 생각이 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나느냐?"

초궁장이 묻는다.

"집에 좀 가보아야겠어."

"이 밤중에 집에를 어찌 가니? 닭이 홰를 치는데."

"그래도 가보아야지."

계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영감이 아니 올 텐데 가봐서 무엇해. 그리고 공연히 순라한테 잡히면 큰일이다. 조금 있으면 동이 틀 텐데. 나하고 함께 가기로 하자."

순라 소리를 듣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잡히면 귀치 않은 일이다. 계지는 망설였다.

"아니 되네. 지금이 어느 때라고. 기왕 늦었으니 좀 더 놀다가 날이 새거든 돌아가도록 하게."

이법화도 만류했다. 계지는 하는 수 없었다. 이내 주저앉아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었다. 원래 계지는 기생 출신이었다. 못 먹는 술이 아니었다. 남의 첩실이 되고보니 주인 없는 틈을 타서 초궁장과 함게 나왔으나 한 조각 양심이 남아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아니하고 몇 번 마실 줄 모른다고 사양하고 앙탈을 했던 것이다. 이제 술을 거듭해서 마음이 커지고 호탕했다. 농 속에 갇혀 있었던 평상시의 울분을 활활 털어버리고 흥취 있게 놀았다. 청하지 아니했건만 춤을 추고, 권하지 아니했건만 자진해서 술을 마시었다.

밤은 더한층 깊었다. 이법화와 초궁장은 서로들 눈짓을 했다. 처음에 이법화가 슬며시 안으로 들어가고 다음엔 초궁장이 사랑 건넌방으로 몸을 피했다. 자리에는 세자와 계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봉지련이며 작은 꾀꼬리를 위시하여 초궁장까지 다루어본 세자는 이제는 능란한 오입쟁이가 되었다. 초궁장과 이법화가 일부러 자리를 비워주는 것을 세자는 눈치채 알았다.

그는 이제 탕아로 변해버렸다. 아버지한테 대한 반항심과 할아버지한테 대한 불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침내 탈선되는 길을 취하게 되었다. 세자는 계지가 남의 소실이라는 데 크나큰 흥미를 느꼈다. 초궁장에게 자극을 받은 그는 대담하게 계지를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세자는 계지의 손을 잡았다. 계지는 세자에게 손을 잡힌 채 뿌리치지 아니했다. 첫째는 이 나라 삼천리강산을 지배할 대왕이 될 분이라는 권위의 금테두리가 계지의 마음을 굴복시켰고, 둘째는 집 속에 가두어둔 채 한 달에 겨우 네 번쯤 찾아오는 주인 영감 권보에 대한 불만이 반발의 작용을 일으켰다.

"계지야! 너 나하고 합환주를 마시어보련?"

"주인 있는 몸이옵니다. 합환주를 어찌 마시옵니까?"

계지는 취한 중에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세자한테 잡힌 손목을 뿌리지지는 아니했다. 계지의 주인 있는 몸이란 말을 듣자 세자는 호탕한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하하하. 주인 있는 몸? 정실이 아닌 다음에야 정절을 지킬 게 무어 있느냐. 화류계 풍속은 그렇지 않다더라."

이내 세자는 계지를 품 안에 안았다. 계지는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세자가 하자는 대로 몸을 맡겨버렸다. 이 밤을 계기로 해서 계지는 이법화의 집을 장맞이하는 장소로 정해놓고 세자와 함께 즐거움을 취했다. 한 달에 겨우 네댓 번 권보가 오는 날 밤만 빼놓고 계지는 이법화의 집에서 세자를 만났다. 어느 때는 초궁장과 계지가 자리를 함께 하여 세자와 재미를 보기도 했다.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세자는 날짜를 꼽아서 계지와 초궁장을 한꺼번에 이법화의 집에 장맞이를 해놓고 가무를 즐기면서 술을 마시다가 세자는 초궁장과 계지를 좌우편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초궁장이나 계지, 너희들이 모두 다 가무도 잘 하고 얼굴도 출중해서 내 마음이 흡족하다마는 이 세상에 너희들보다 더 예쁜 여인이 있겠느냐? 있거든 한 사람 천거해주려무나."

호협한 성질을 가진 기생 초궁장이 선뜻 대답한다.

"있기만 하면 왜 한 사람만 천거해드리겠습니까? 백 명이라도 천거하고 천 명이라고 간택해 바치겠습니다. 동궁마마께서는 앞으로 삼천 궁녀를 거느리실 분이십니다."

세자는 껄걸 웃으며 초궁장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우리 초궁장은 속이 탁 트여서 망망대해 바다같이 시원하구나. 삼천 궁녀는 아직 그만두고 우선 천하절색이 있다면 한 사람쯤 만나보게 해주려무나. 계지야, 너도 샘을 내지 말고 초궁장과 의논해서 천하일색을 한 사람 구해주렴."

세자는 이번엔 계지의 풍만한 가슴을 어루만졌다. 계지는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쇤네는 샘을 낼 자격이 없습니다."

"여자 쳐놓고 샘을 내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어찌해서 샘을 낼 자격이 없단 말이냐?"

"쇤네는 임자가 있는 몸이오니 어찌 감히 세자께서 구하시는 절색한테 대해서 샘을 내겠습니까?"

세자는 계지의 말을 듣자 더한층 흥이 높았다.

"하하하. 정말 너희들은 요조숙녀요, 양처현모감들이다. 백로가 잘못 날아가다가 진흙구덩이에 빠져서 눈같이 흰 깃을 더럽힌 격으로 아깝게 화류항으로 떨어졌구나. 한사 중의 한사다."

세자의 칭찬하는 말을 듣자 계지와 초궁장은 무한 기뻤다. 세자한테 칭찬을 받은 초궁장은 어깨가 으쓱했다. 어둠 속에서 계지를 향하여 말한다.

"계지야, 우리 동궁마마께 천하절염을 한 명 천거해드릴까?"

"있으면 천거해드려 보렴."

계지가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진정 천하절염이 있겠느냐?"

세자가 어둠 속에서 초궁장을 어루만지며 묻는다.

"있습니다. 꼭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늘 땅 사이에 이런 맵자한 계집은 꼭 하나지 둘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구냐?"

계지가 궁금해서 묻는다.

",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것이다."

"누굴까?"

계지가 망설이며 생각해본다.

세자는 궁금했다.

"하늘 땅 사이에 꼭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미인이라면 대단하구나. 처녀냐?"

"아니올시다. 남의 첩실이올시다."

"첩실야. 그럼 만나보기 쉽겠구나."

초궁장은 동궁의 손을 어둠 속에서 애무하며 말한다.

"첩실이라도 어려울 것입니다. 워낙 그 아이 성미가 캥캥하니까 여간해서는 말을 듣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럼 첩실에도 종류가 있지 아니하냐. 양첩이냐 기생 출신이냐?"

세자가 물었다.

"장악원에 출사하던 기생 출신이라 합니다."

"기생 출신이 그리 도도하단 말이냐?"

세자는 옆에 누워 있는 계지를 연상하고 말했다. 계지도 당당한 양반의 집 첩이건만 지금 자기한테 굴복해서 옆에 누워있지 아니한가. 큰소리를 한번 탁 쳐본다. 계지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화끈 달았다.

"계지야, 너도 보았을 텐데 그러느냐. 나는 이선달 이오방 집에 놀러 갔다가 꼭 한 번 본 일이 있다. 첩이 되어서 들어가기 전에."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갑갑하구나, 얼른 말을 좀 해다오."

계지가 재촉한다.

"곽중추부사의 첩 '어리' 말이다. 천하절염이라더라."

계지는 비로소 큰집 마누라의 외숙인 중추부사 관선의 첩을 초궁장이 말하는 것을 알았다. 천하절염 어리가 있다는 말을 듣자 세자는 부쩍 흥미를 느꼈다. 세자는 계지한테 청을 한다.

"계지야, 네가 한번 중매가 되어줄 수 있느냐?"

계지는 난처했다. 이불 속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대답한다.

"중매해드리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습니다마는 어리와 상면한 적이 없고 과갈간이 된다 아오나 큰마누라의 외숙의 첩이라 하니 손이 닿지 않을 듯합니다."

"그것도 그렇구나."

세자는 큰마누라와 첩 사이의 거북한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초궁장에게 묻는다.

"초궁장아, 좋은 꾀를 한번 내보아라. 어떻게 하면 천하일색 어리와 만나보겠느냐?"

초궁장이 선뜻 대답한다.

"결자해지로 제가 먼저 말을 내놨으니 끝을 맺겠습니다. 어리하고 이오방하고는 면분이 두터운 사이올시다. 내일이라도 이오방을 부르시어 한 번 의논해보십시오."

"좋은 방책이다."

세자는 초궁장의 말에 찬동했다. 날이 밝으니 세자는 소세를 한 후에 이법화 집에서 바치는 잣죽으로 조반을 하고 미복으로 동궁에 돌아갔다. 안에서 세자를 전송하러 나온 이법화는 세자를 전송한 후에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경대를 버티고 앉아서 당장하는 초궁장과 계지하고 수작을 했다.

"간밤에는 삼태성이 되어 잘들 지냈네그려."

반죽 좋은 초궁장이 대답한다.

"세자께서는 물찬 제비같이 우리들을 좌편 우편에 두고 자룡의 창을 쓰듯 잘도 노셨습니다. 호호호."

거침없이 말하는 초궁장의 대답에 계지와 이법화는 간간대소들을 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었나?"

이법화가 초궁장한테 또 묻는다.

"기막힌 이야깃거리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그다지 기가 막혔나?"

"세자는 욕심도 많으십니다. 천하절색을 한 사람 구해달라 하십니다. 그래서 곽중추부사의 첩 어리가 천하절색이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래서?"

"중매를 들어달라 하시니 어찌합니까. 이오방 선달을 청해서 말씀을 해보라고 아뢰었습니다."

"어리는 나도 잘 아는걸."

"그럼, 들어가서 아뢰어보십시오."

초궁장과 계지는 이법화한테 당부하고 돌아갔다. 이법화는 초궁장과 계지를 돌려보낸 후에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부리나케 동궁으로 향했다. 세자는 궁으로 돌아온 후에 몸이 약간 고단했으나 이법화가 왔다는 춘방사령 명보의 아뢰는 말을 듣고 지체 아니하고 사랑으로 불러들였다.

"어찌 왔나?"

세자는 항상 신세를 지는 이법화를 반갑게 맞이하여 묻는다.

"안녕히 환궁하셨사온지 궁금해서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별일 없이 무사하게 잘 왔네."

이법화가 벙긋벙긋 웃으로 아뢴다.

"듣자오니 저하께서는 천하일색 어리를 구하신다 하더군요."

세자도 빙긋 웃었다.

"그건 어찌 아나?"

"초궁장과 계지한테 들었습니다."

"입이 헤픈 계집들이로군. 하하하."

"이오방을 불러 의논하시기로 하셨답지요?"

"초궁장이 그렇게 해보라 하데."

"소인도 어리의 집안 일을 잘 짐작합니다. 일비지력을 바치겠습니다."

"자네도 어리를 잘 안다 하니 작히나 좋겠나."

"제 그럼 이오방을 불러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세자는 쾌하게 허락했다. 이법화의 심경은 세자께 공을 세워서 장래에 덕을 보자는 배짱이었다. 이윽고 이법화는 이오방을 데리고 왔다. 수인사가 끝난 후에 이오방이 세자께 묻는다.

"무슨 일로 소인을 급히 부르셨습니까?"

"급한 일은 아니고 자네하고 좀 의논할 일이 있어서 오라 했네."

"무슨 일이오니까?"

"천하일색 어리를 자네가 잘 안다 하니 과연 잘 아는가?"

"과연 절염인가?"

", 절염이올시다."

"이법화도 짐작한다네. 자네들이 좀 중매가 되어 내 사람을 만들어 줄 수 없겠나?"

"동궁마마의 후궁이 되게요?"

이오방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 내 후궁을 삼아보려고 그리하네."

"좀 어렵습니다."

이오방은 고개를 가로 흔든다. 세자는 고개를 가로 흔드는 이오방을 바라보며 노하지 아니하고 빙긋빙긋 웃으며 말한다.

"이 사람, 오입쟁이답지 아니한 말을 하네. 세상 천하에 아니 되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좋은 꾀를 좀 내보게그려."

"될 만한 일이라면 소인이 고개를 가로 흔들겠습니까. 짜장 못합니다."

이오방의 말을 듣고 세자는 눈을 가슴츠레 가늘게 떴다.

"이법화는 일비지력을 해보겠다는데 그러나."

"그 사람, 공연히 허풍떠는 소리올시다. 이법화 열 몸뚱이가 있어도 어렵습니다."

옆에 앉은 이법화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왜 어렵단 말인가. 어려운 까닭을 시원스럽게 말해보게."

"어리는 유부녀올시다."

"어리는 기생 출신이라며?"

"기생 출신은 서방이 없습니까? 한다 한 서방이 있습니다."

"그러면 남의 첩이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그까짓 첩실쯤야."

세자는 코웃음을 쳤다. 머릿속으로 한성소윤 권보의 첩실 계지가 자기한테 몸을 허락한 일을 연상했다. 세자가 다시 묻는다.

"도대체 누구의 첩인데 그러나?"

"중추부사 곽선의 첩이올시다."

"곽선이 나이 얼마인가?"

"한 칠십 되었습니다."

세자는 드높게 소리쳐 웃는다.

"하하하. 그러면 됐네. 자네가 힘을 아니 쓰려니까 그렇지. 그까짓 것 늙은이 첩 하나쯤 빼어오기가 그다지 어렵단 말인가. 힘들을 써보게나."

이오방은 세자의 간곡한 청을 아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단 방법이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아니한다. 고개를 숙여 한동안 생각해본다. 이법화가 곁을 채서 말한다.

"계지를 시켜서 꾀어내면 어떠하겠소?"

이오방한테 묻는다.

"계지가지고 아니되지. 계지의 손이 어리한테 닿지 못할 거야."

이오방이 또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계지는 권보의 소실이구, 곽선의 생질녀가 권보의 큰마누라가 되니 계지의 손이 어리한테 닿을 수 있지 아니한가."

"천만에. 계지가 아무리 능소능대하다 하나 큰마누라 외삼촌의 첩인 어리한테 손이 뻗칠 수가 있나."

이오방은 또다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이오방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리구 어리가 어디 이곳에 있나. 곽선 영감의 시골집 적성 땅에 있거든."

이오방의 말을 듣자 세자가 껄걸 웃는다.

"이 사람, 의주 천 리 길에서라도 데려오려면 데려오는 것이지, 그까짓 적성이 무엇이 멀다고 그러나. 적성 현감이 있는 경기 땅이 아닌가."

", 그렇습니다. 연천 적성, 바로 엎드리면 코가 닿을 만한 곳입니다."

이법화가 세자의 비위를 맞추어 말한다.

"자아, 아주 결정하게. 나는 어리를 뺏어오기로 결심했네. 두말 말고 힘들을 써주게."

이오방은 한참 궁리 끝에 대답을 올린다.

"어리를 잡으려면 먼저 곽선의 집에 무상출입하는 계지의 남편 권보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권보와 가장 친한 사람은 저의 동료인 장악원 악공 홍만이올시다. 이 사람을 움직여보겠습니다."

"아 참, 그렇지. 홍만이가 권보하고 찰떡같이 친한 사이지."

이법화가 한마디 한다. 세자가 묻는다.

"홍만이, 듣던 이름이로구먼. 이법화 집에서 내가 초궁장하고 지낼 때 놀이에 참예했던 바로 그 사람 아닌가."

", 맞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

이오방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세자께서 한번 홍만을 부르시어 친히 당부해보십시오. 뒤의 일은 저희들이 힘을 다하여 주선해보겠습니다."

세자는 곧 명보를 불렀다.

"명보야, 장악원에 나가서 악공 홍만이를 불러오너라."

명보는 세자의 가장 심복인 팔과 다리였다. 명보는 시각을 지체 아니하고 홍만을 불러왔다. 홍만이 세자궁으로 들어가 보니 동료인 이오방, 이법화가 세자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반갑기 그지없다. 먼저 세자한테 문안을 드린 후에 이오방이 이법화를 보고 묻는다.

"벌써들 오셨습니까?"

이오방이 대답한다.

"우리들이 온 지는 한참 되네. 세자께서 자네를 부르신 데 대해서 내가 대신 말하겠네. 자네 권보 권소윤과 친하지?"

"친하고말고, 막역지간입니다. 그것은 왜 묻소?"

"자네가 권보를 좀 찾아가서 부탁할 일이 있네. 성공만 되는 날에는 자네한테 세자께서 큰 상급을 내리실 것일세."

이오방이 대답했다. 홍만이 이오방의 말에 대답한다.

"세자께서 하라시는 일이면 소금섬을 물로 끌라 하셔도 군소리 아니하고 하겠소. 상급은 바라보지도 아니하오."

홍만이 희떱게 대답한다.

"다른 것이 아니라 세자께서는 천하절색인 곽선의 첩실 어리를 후궁으로 삼으실 생각이 간절하신데 권보는 곽선 영감의 생질녀의 남편이구, 계지의 남편도 되지 않나?"

이오방이 설파한다.

"그렇지."

홍만이 대답한다.

"그러하니 자네는 권보와 교분이 두터운 사이 아닌가. 한번 권보를 찾아가서 진력을 해보라고 말을 해보게. 그래서 내가 자네를 청해온 것일세."

"거 참 어려운 일인데. 생질녀의 남편이 처외숙의 첩을 빼돌리는 일인데 뚜쟁이 짓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처외삼촌의 첩을 빼돌릴 수가 있나. 말하는 나는 상관이 없겠지만 권보의 처지가 조금 어렵겠는걸."

홍만은 얼굴에 난색을 보였다.

"이 사람아, 소금섬을 물로라도 끌겠다구 말을 해놓고 지금 딴소리를 하면 어찌하나."

이오방이 면박을 준다.

"흐 흐 흐. 해보지, 해봐. 권보가 만약 말을 아니 듣는 경우엔 한 번 위협을 해보도록 해보지. 세자마마, 소금섬을 물로 끌겠습니다. 흐흐흐."

흥만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오입쟁이다. 세자를 향하여 능청을 부린다.

"좋이 생각을 해보게. 성사만 되는 날은 자네들의 힘쓰는 일을 잊지 아니할 터일세."

"황공하여이다. 그러면 소인은 곧 가보겠습니다."

홍만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리들은 세자저하를 모시고 이곳에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부간 하회를 곧 기별해주어야 하네."

이번엔 이법화가 한마디 했다.

"염려 말게. 내가 세 살 먹은 아이인 줄 아냐? 세자께서는 지금 한창 마음이 뒤숭숭하실 텐데 빨리 하회를 말씀드려야지. 일각이 여삼추한 것은 세자마마가 아니라 날세, 나야. 흐흐흐."

홍만은 오입쟁이의 독특한 너털웃음을 웃으며 소맷자락을 떨치며 나간다. 세자는 믿음직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고 나가는 홍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뚜쟁이 군상

 

이오방이 홍만을 내보내고 혼잣말을 한다.

"성공을 하고 돌아올까?"

"어리를 꾀어 오는 것은 몰라도 한성쇼윤 권보쯤은 움직일 것일세."

이법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홍만은 세자궁에서 나오는 길로 즉시 한성부 소윤 권보를 찾았다. 권보는 마침 한성부에서 사진을 끝내고 집에 있었다. 사랑방에 있다가 홍만의 찾는 음성을 듣고 반갑게 방 안으로 맞이해 들였다.

"오래간만일세. 재미가 어떤가?"

"저야 무슨 별재미가 있겠습니까? 예나 이제나 매일반이죠. 술이나 마시고 음률이나 하는 재미죠."

권보는 첩 계지로 인해서 이오방, 홍만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권보가 기생첩 계지를 둔 것은 오입쟁이 홍만과 알게 된 이후에 그들의 조방구니 노릇으로 인해서 계지를 떼어들였던 것이다.

"영감께서는 요사이 재미가 어떠하십니까?"

"나도 자네 말대로 고금동일세. 하하하. 한성판윤 밑에 있는 소윤이 별수 있겠나. 들으니 자네는 요새 세자궁에 자주 출입한다데그려. 앞으로 자네 덕을 좀 보아야 하겠네. 하하하."

"그렇지 아니해도 저는 세자궁에서 오는 길입니다. 특별히 영감께 할 말씀이 있어 온 길입니다."

"그래?"

권보의 눈이 둥그레진다.

"자라면 앞으로 영감께서는 대통운이 터지시게 됩니다."

"나한테 대통운이? 하하하."

권보의 입이 벙긋 벌어진다. 물끄러미 홍만을 바라본다.

"지금 제가 온 것은 세자의 심부름으로 온 것입니다."

"세자의 심부름으로?"

권보의 눈이 또 한 번 둥그레진다. 홍만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세자께서 영감께 청을 하십니다."

"나한테 청을?"

권보의 눈은 또 한 번 둥그렇게 떠졌다.

"세자께서는 어리가 천하절염이란 소문을 들으시고 한번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영감께서 곽중추부사의 생질서가 되시는 것을 아시고 특별히 저를 영감께 보내서 일을 주선해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길이올시다."

"어리를 보시겠다구?"

권보는 깜짝 놀란다.

얼굴에는 난처한 일이 생겼다고 걱정하는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 일을 내가 어찌 담당한단 말인가?"

권보는 사뭇 울상이 되어 말한다.

홍만은 울상을 하는 권보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한다.

"저도 권소윤 영감으 처지가 어려울 것이라고 역설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세자께서는 세상 천하에 아니되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하시고 극력 주선해보라 하시니 어찌합니까. 그래서 의논 겸 왔습니다. 만약에 이 일이 성공만 되는 날은 영감은 그까짓 한성소윤이 무업니까. 세자가 한번 왕위에 나가시는 날은 평안감사, 전라감사에 육조판서는 말도 말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홍만의 말을 듣자 권보의 비위가 바싹 동했다.

"글세 세자마마의 소원을 한번 풀어드렸으면 좋겠네마는 난처하지 아니한가. 내가 어찌 어리를 보고 그 말을 한단 말인가. 우리 마누라가 알게 되면 큰일이 날 뿐 아니라 비록 성공이 된다 해도 처외숙하고는 영영 구수지간이 될 테니 딱한 노릇일세,"

홍만은 권보의 망설이는 것을 보자 한참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치며 말한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무슨 수란 말인가?"

권보가 묻는다.

"영감의 소실을 시켜서 어리의 의향을 떠보기로 합시다."

"내 첩 계지 말인가?"

", 그렇습니다."

"내 첩은 어리를 몰라."

"만나서 이야기하면 다 알 것 아닙니까. 영감의 소실을 시켜서 어리의 의향을 물어보라 하시고 영감은 슬며시 겉으로 모르는 체하시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비록 일이 성사된 뒤에라도 영감은 조금도 처외숙한테 겸연쩍을 것도 없고 부인한테도 낯간지러울 일이 없을 것입니다."

권보는 그래도 망설인다.

"계지와 우리 마누라 사이가 좋지 아니한데 더 험악해지라고?"

"아따, 영감은 별걱정도 다 하십니다. 정실과 첩 사이가 의초로운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이런 일이 아니라도 시앗끼리는 의가 좋지 못한 법입니다. 만약에 좋은 사이라면 그것은 도리어 변칙입니다."

"글세."

권보는 기운 없이 대답한다.

"그럼, 나는 세자께 권소윤이 못하겠다고 거절하더라고 아뢰겠습니다."

홍만은 불쾌한 얼굴빛을 보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권보는 황망했다.

"아냐, 아냐. 그렇게 말씀을 여쭙지 말아요. 내가 어떻든 힘을 써보기로 함세. 어찌 세자마마의 명을 거역하겠나."

홍만은 권보의 일을 주선해보겠다는 허락을 받자 비로소 얼굴에 화기를 띠었다.

"그럼 그렇지. 권소윤 영감으로 그만 일을 못 처리하실 리가 있습니까? 잘 일을 성공해보십시오. 세자께 공송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홍만은 권보를 작별하고 세자궁으로 돌아갔다. 이날 밤에 권보는 첩 계지의 집으로 향했다. 계지는 초궁장의 꾐으로 남편 권보가 모르게 세자와 넘어서는 아니될 한 금을 넘은 후부터는 더한층 권보 영감한테 아리따운 교태를 짓고 더한층 나긋나긋하게 굴었다. 그러나 권보 영감은 까맣게 모르고 속아 넘어갔다. 계지는 권보 영감의 문을 열라는 소리를 듣자 동자치를 제쳐놓고 신짝을 거꾸로 끌고 대문을 열었다. 얼굴에는 함박꽃 같은 웃음을 화려하게 웃으며 영감을 맞이했다.

"영감 웬일이슈. 이제 철이 나셨나보구려. 어젯밤에 다녀가시고 오늘 밤에 또 오시니."

"버르장머리 없이 철이 무어냐? 남편보고 철이 났다구 하는 계집은 세상 천하에 너밖에 없겠다."

권보는 계지가 귀여웠다. 벙글거리며 손을 들어 첩의 뺨을 어루만진다.

"게다리 내던지듯 독수공방만 시키던 우리 영감이 어젯밤에도 오시고 오늘 밤에도 오시니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소. 그러니 우리 영감이 철난 것이 아니고 무어겠소. 하도 고마워서 불숙 나온다는 말이 아기한테 대하듯 하는 말을 썼구려. 호 호 호. 이따가 가로 안고 젖 좀 먹여줄까?"

계지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권보 영감을 얼싸안고 농탕을 친다.

"아서라, 동자치가 본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권보는 계지의 볼을 가볍게 꼬집는다.

계지는 '아야' 소리를 치면서 권보의 목을 얼싸안는다.

"동자치가 보면 대순가. 늙은 영감이 첩을 두고 지내는 것은 다 이 재미로 사는 것인데. 정경부인이 이런 짓을 한다면 해괴망측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계지는 첩이거든. 첩이 영감한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동자치도 알아준다우. 호 호 호. 그렇지?"

계지는 부엌을 들여다보며 부뚜막 옆 창살로 웃음을 지어 엿보고 섰는 동자치에게 눈웃음을 쳤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잔소리 말고."

권보 영감은 계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계지가 영감의 옷과 갓을 벗겨서 횃대에 건 후에 영감의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계지는 얼굴빛을 정색하고 묻는다.

"참 웬일이슈. 어젯밤에 오셨는데 오늘 밤에 또 오셨으니."

"자네하고 좀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왔네."

권보도 정색하고 대답한다.

"무슨 일입니까?"

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세자께서 사람을 보내셨어."

권보의 말을 듣자 계지의 가슴이 뚝 떨어진다.

세자가 설마 권보에게 자기를 내놓으라고 할 리는 없겠지만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혹시 세자가 자기를 데려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설레인 것이다. 계지는 초조하게 묻는다.

"?"

"내 처외숙의 소실 어리가 있지 않나."

계지는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세자와 초궁장과 자기 세 사람이 한 이불 속에서 주고받았던 어리에 대한 그 일인 것을 마음속으로 짐작했다.

"어리가 맵자하게 예쁘다는 말은 소문으로 들어 알았습니다."

"그 어리를 빼돌려 달라는 거야."

"세자가 남의 첩을 뺏겠다는 말입니까? 해괴한 일도 다 보겠네."

계지는 시치미 떼고 해괴한 일이라고 타박을 주었다.

"그러니 자네가 어리한테 가서 의향을 좀 떠보게나."

"날 보고 뚜쟁이 짓을 하란 말씀요?"

계지는 말끄러미 권보의 얼굴을 쳐다보고 톡 쏘아붙인다.

"글세 여보게, 장악원 악공 홍만이 와서 세자의 분부라고 하면서 나보고 어리를 꾀어내라 하니 내가 어떻게 겉으로 나서서 처외숙의 소실을 꾀어낸단 말인가."

권보 영감은 난처한 듯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한다.

"내가 못하겠다고 하면 화가 미칠 것이구, 꾀어내자니 아내와 처외숙을 볼 낯이 없게 되겠네그려. 그래서 생각다 못해서 자네하고 의논하니 자네가 수고를 좀 해주어야 하겠네."

"내가 어리를 알아야지. 생면부지인에 얼굴이나 알아야 뚜쟁이 짓을 하지. 호호호."

"아따 이 사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나. 어리도 자네 이름은 익히 들었을 것이구 나제가 내 소실인 것두 할 것일세. 내 말은 쏙 빼고 자네가 세자의 청을 들어서 말하는 것처럼 어리한테 수작을 붙여보게나."

영감 권보의 말을 듣는 계지는 눈을 깜박거리며 묻는다.

"영감이 해보라 하시니 시키시는 대로 어리를 한번 찾아가 보겠습니다마는 어리는 지금 서울에 있지 아니하고 시골에 있을 것 아닙니까? 내가 적성으로 내려가 보아야 하겠습니다그려."

"내 처외숙 곽중추부사 영감이 어리를 데리고 적성으로 낙향해 살기는 하지만 일전에 마누라한테 들으니 어리는 서울구경을 한다고 곽중추부사 영감의 서울집에 유하고 있다는데 그리로 한번 찾아가 보도록 하게."

"송불성은 고사하고 좌우간 한번 찾아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계지는 어리를 꾀어낼 일을 비로소 허락했다.

다음날 계지는 곽선의 서울집으로 가서 과갈간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어리를 만났다. 듣던 말과 같이 어리는 과연 천하절염의 칭호를 주어도 아깝지 아니했다. 이마는 넓지도 아니하고 좁지도 아니한데 머리숱은 많아서 칠흑같이 윤기가 돌았다. 눈썹은 그려놓은 듯 가무스름하고 눈은 호수같이 맑고 푸른데 동자는 검은 수정같이 광채가 초롱거렸다. 코는 빚어놓은 듯하고 살결은 눈같이 흰데 혈색이 좋아서 두 볼은 도화 빛으로 고왔다. 계지는 이오방과 이법화의 사람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생각하면서 초면 인사를 어리한테 걸었다.

"나는 계지라 해. 권소윤의 소실이구. 항렬로 따지면 어리가 나의 윗 항렬이지만 나이와 장악원 연조로 따진다면 어리는 나의 후배가 되지."

어리가 보조개를 지으며 귀염성스럽게 대답한다.

"말씀은 귀가 솔도록 들었습니다. 이제 뵙게 되니 반가운 말씀 이루 형언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항렬은 사돈의 팔촌 격인데 항렬 될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장악원 연조로 따져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서울 구경을 올라왔다며?"

"말은 경기 땅이지만 적성이란 곳은 서울서 가까우면서도 지독한 벽지올시다. 하도 서울 올라온 지 오래여서 한번 서울구경을 온 길입니다."

"중추부사 영감께서 얼마나 어리를 사랑하시길래 꼭 껴안고 내놓지를 아니하셨누. 아주 근력이 싱싱하시지? 호호호."

"무어, 칠십 노인이……."

어리는 고래글 숙여 웃었다.

계지는 차차 어리를 꾀어내기 시작한다.

"그래, 서울 올라온 지 며칠이나 되었나?"

"한 열흘 되었습니다."

어리가 미소를 지어 공손히 대답한다.

"그래, 서울구경을 좀 해보았나?"

계지의 말은 은근했다.

"아직 아니했습니다."

"서울 성장이니 별안간 서울이 딴천지가 된 것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구경할 것은 없겠지만 오래간만에 올라왔으니 그래도 다소간 볼만한 것이 있을 거야."

계지는 어리의 맘을 떠보기 위하여 슬며시 서울의 변한 모습을 말한다.

"많이 변했어요. 우선 시골서 올라오는 좌우편 길 연도에 기와집들이 번화하게 많이 생겼습디다."

"화류계도 자네가 장악원에 출사할 때보다 많이 달라졌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오랫동안 시골 구석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아주 촌뜨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왕자 공손들이 차차 장성하게 되니 전보다 연회잔치가 열 갑절이나 늘었네. 서로들 호강을 부려서 연회도 경쟁을 하다시피 하니 잔치에 음식 범절도 궁사극치하려니와 기생들의 의복도 전에 비하면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게 되었네. 여간한 얼굴과 재예를 가지고는 이제는 장안 명기 소리를 듣기가 어려우니 어리의 재모쯤이나 되어야만 비로소 천하절염에, 장안 명기라는 이름을 듣게 되네. 호호호."

계지는 슬며시 어리를 추어주었다.

"과분한 말씀을 하시네. 저 같은 것이 어찌 천하절염이 되겠습니까?"

"아니 천만에. 내가 왜 자네를 향하여 풍을 치고 헛소리를 하겠나."

칭찬을 듣는 어리의 두 볼은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어리는 역시 기생 출신으로 남의 첩실이 된 여자다. 서울 안에 연회가 부쩍 늘고 기생들의 의복도 전에 비해서 몇 갑절 화려하다는 계지의 말을 듣고 십분이나 흥미가 일어났다.

"연희를 자주 하는 왕자 공손들은 대개 누구누구들입니까?"

"모두 다 금상전하의 아드님들이시지. 첫째로 당금의 세자마마이시고 장차는 이 나라 삼천리강산을 맡으실 동궁저하가 계시고, 둘째는 효령대군이 계시고, 다음엔 충녕대군이 계시고, 다음엔 성녕대굼이 계시지. 적실왕자만 해도 사 형제분일세."

어리가 궁금한 듯 계지한테 묻는다.

"별안간 그분들이 왜 그렇게 많은 연회를 하십니까?"

계지가 대답한다.

"이 사람, 세월이 태평천지 아닌가. 상감이라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싸워서 불상견이 되고 형제가 자리다툼질을 해서 서로 칼을 들어 피를 흘리고, 숙질이 싸우고, 남매간에 원수가 되곤 했던 시절이 다 흘러가고 이제는 단순한 한 사람의 아버지 밑에 형제들이 오붓하게 지내게 되니 태평세월이 될 수밖에. 그러니까 공자 왕손들은 잔치와 놀이가 잦게 된 것이지."

계지의 말을 듣는 어리가 방긋 웃는다.

"형님이 모르는 말씀입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마는 태평세월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리는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한다.

"금상전하도 아드님이 좀 많으십니까. 지금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자마마 이외에 효령대군, 그 다음에 충녕대군, 그 다음에 성녕대군, 이밖에도 후궁 소생으로 경녕군, 함녕군, 근녕군, 혜령군, 회령군, 후령군, 익녕군, 이유 모두 따지면 열두 형제분들입니다. 이들이 서로 왕의 자리를 부전자전으로 다투게 된다면 기가 막힐 것입니다. 어찌 앞으로 태평세월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호 호 호."

어리는 오래간만에 웃음을 한 번 드높게 웃는다. 계지는 과연 그럴 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지는 고개를 가로 흔든다.

"그런데 말야, 열두 형제가 금상전하처럼 부전자전으로 싸운다면 큰일이겠지만 세자가 착하시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어리의 눈이 반짝했다.

"세자께서 착하십니까?"

"착하시고말고, 성인군자시지."

"얼마나 착하시길래 성인군자라 하십니까?"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얼마나 여자를 아끼고 사랑하시는지 참말로 아는 사람은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단 말일세. 지난 일이지만 지금 계신 동궁빈에 대해선 기막힌 일화가 있네. 이분을 간택까지 해놓고 외삼촌 되시는 민장군과 상감께서는 명나라 공주한테로 장가보낼 욕심이 나서 파혼까지 하려고 들었거든. 세자는 이 일을 아시고, 명나라 사신한테 면대해서 '나는 이미 약혼한 여자가 있으니 다시는 명나라와 혼인한다는 말은 말도 말라'고 해서 명나라 사신과 외삼촌이랑 금상전하는 꼼짝도 못 하고 명나라 공주와의 혼담을 파의한 후에 간택에 뽑혔던 김한로 대감의 따님을 데려다가 동궁빈을 삼았다는 거야."

"과연 세자께서는 착하신 분이로군요."

어리가 탄복한다.

"착하시다마다. 진정 여자를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지."

"세자마마의 춘추가 몇이십니까?"

"한창 좋으신 나이지. 방년 이십여 세야. 아마 어리의 낫셀 게야."

"인물도 잘생기셨겠네요."

어리가 묻는다.

계지는 손뼉을 치면서 너스레를 놓는다.

"말도 말아요. 옥골선풍이시지. 초립을 쓰시고 남중치막을 입으신 후에 도홍 붉은 띠를 떨어뜨리고 은안백마 위에 높직이 앉으신 자세는 마치 옥경 십이루에서 선관이 강림하신 듯하지. 여기다가 얼굴 빛깔은 관옥이요, 눈은 샛별같이 광채가 나는데 입술은 주홍을 따서 넌 듯 맵자하게 예쁘지. 천하에 짝을 구할 수 없는 미남자거든. 그러기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셨을 때 명나라 황후가 보고 공주로 짝을 삼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무척 애석하게 생각했다는 것 아닌가."

계지는 있는 사실 없는 사실, 있는 일 없는 일을 꾸며내서 어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계지가 입심 좋게 너스레를 쳐서 말하는 수단에 어리는 황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어리는 총기 있는 눈을 반짝 떠서 계지한테 묻는다.

"형님, 아까 말씀에 세자께서는 절대로 형제간 싸움을 아니하시어 태평세월을 이룩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형제싸움이 아니 날 것을 보장하십니까?"

계지가 서슴지 않고 선뜻 대답한다.

"세자께서는 마음이 바다 같은 어른야. 임금의 자리도 헌신짝 버리듯 하실 분이거든. 세자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불의스럽게 왕위에 나간 것을 가곡으로 마음을 위로하시면서 한세상을 평화롭게 보내려고 하신단 말일세. 참말 사내다운 넓으신 금도를 가지신 양반이지."

계지의 말을 듣는 어리의 마음은 어느덧 세자를 숭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조금만 더 젊어서 어리의 낫세라면 세자의 품안에 한 번 안겨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나네."

계지는 또 한 번 번죽을 울려서 어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어지는 자지러지게 웃어댄다.

"호 호 호. 한 번 안겨보시지."

계지가 척척 대답해 던진다.

"세자께서 나 같은 것을 받아주시나. 내가 어리의 반만큼만 예뻐도. 호 호 호."

계지는 세자와 살을 섞었던 일을 슬쩍 덮어버리고 다시 어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어리는 이번에 아무런 대꾸도 아니하고 미소를 지어 조신하게 앉았다. 계지는 별안간 목소리를 떨어뜨려 가만히 말한다.

"어때, 서울구경을 오래간만에 하러 올라온 김에 동궁구경을 한 번 해보려나?"

어리의 눈이 번쩍 떠졌다.

"동궁구경을 어떻게 합니까?"

"들어가서 하지."

"들어가다니요? 동궁 안으로 저희 같은 여염의 상것이 어찌 들어갑니까?"

"세자마마를 만나러."

계지가 웃음을 가득 띠고 말한다.

"어떻게 세자마마를 만납니까?"

어리는 깜짝 놀라서 묻는다. 계지가 까르르 웃으며 말한다.

"왜 못만나? 만날 수 있지."

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떻게 저희 같은 것이 감히 동궁마마이신 세자를 만납니까?"

어리의 대답을 듣자 계지는 흘저에 얼굴빛을 정색해 고치면서 말한다.

"실상은 내가 세자마마의 심부를므로 자네한테 온 길일세. 세자께서는 자네를 꼭 한 번 원일견지로 만나보고 싶어 하시네."

어리는 깜짝 놀라면서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세자께서 나를 어찌 알고 보고 싶다 하십니까?"

말을 마치 어리의 얼굴빛은 홍당무가 되어 빨갛게 물들었다.

"이 사람아, 천하일색인 자네 소문은 장안에 짜아하게 퍼졌는데 풍류와 가곡으로 소일을 하시는 세자께서 모르실 리가 있나. 지금 세자마마께서는 자네를 꼭 수중에 넣어서 후궁을 삼으려 하시네."

계지을 말을 듣는 어리의 얼굴빛은 붉었다 푸르렀다 두 빛깔이 번갈아가면서 예쁜 두 볼에 엇갈려 일어났다. 손끝이 싸늘해졌다. 입술이 굳어지면서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아니했다.

"어때, 이 기회에 한 번 동궁 구경도 할 겸 세자저하와 만나보는 것이?"

어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계지한테 묻는다.

"형님께서는 어떻게 세자마마를 아시고 그분의 청탁을 받으셨습니까?"

어리의 목소리는 약간 떠는 듯했다.

", 그것은 세자께서 음률을 좋아하시는 까닭에 나를 연회에 부르셔서 즐기시다가 좌중에서 자네 말이 나니 나보고 한 번 자네한테 가서 약속을 해보라 하시어 온 길일세."

어리는 비로소 세자가 자기를 만나보겠다고 한 까닭을 알았다. 얼굴빛이 제대로 돌아섰다.

"나는 비록 첩이라 하나 사내가 있는 몸이올시다. 함부로 외간남자를 만나볼 수 없습니다. 세자저하는 비록 권세가 혁혁하신 왕자 공손이올시다마는 만나볼 수 없습니다."

어리는 새처름하게 눈을 내리깔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어리의 날씬한 어깨에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계지는 빙긋 웃고 어리를 바라본다. 어리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계지가 다시 말을 꺼낸다.

"잠시 만나보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러나. 한 번 만나보게그려."

어리는 고개를 살랑 흔들었다.

"저로서는 못하겠습니다."

어리는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는 계지가 졸라대게 되었다.

"서울구경을 왔다면서 그러나. 이왕 구경을 할 바에는 생전 소원을 해도 들어가 볼 수 없는 동궁 구경도 하고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세자마마와 면대해보는 영광도 가질 수 있지 아니한가."

"글세 영광은 영광이올시다마는 싫습니다."

어리의 대답은 더욱 차가왔다. 한동안 흔들렸던 자기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모양이다. 계지가 도리어 초조했다.

"이 사람아, 왜 싫다는 것인가?"

"청문이 사나울 것입니다."

어리는 간단히 끊어 대답한다.

계지는 까르르 웃어댄다.

"하하하. 자네 열녀문을 세우려고 그러하나? 하하하. 귀밑거리 마주 푼 양주가 아니고 남의 첩실이 아닌가. 남들 다 하는 짓을 왜 못하나. 더구나 자네 남편을 호호백발 노인이 아닌가."

"호호백발 노인이기 때문에 인정상 배반을 못하겠습니다."

계지는 화가 났다.

"병신이다."

뱉듯이 쏘아붙인다.

"병신이라구 놀려대셔도 좋습니다. 첩이라도 임자가 있는 몸 아닙니까."

어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했다.

"여보게, 그러지 말고 아주 팔자를 고치기로 하세. 세자께서 자네를 한 번 보자고 하시는 것은 그저 한때 술자리에서 노시자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보신 후에는 자네를 아주 후궁으로 떼어 들이실 작정이실세."

 

수주머니

 

계지는 초조했다. 동요치 않는 어리를 갖은 수단으로 꾀어댄다.

"이봐 어리, 기왕 뺨을 맞으려면 은가락지 낀 손에 맞으랬다구, 기왕 정실이 되지 못하고 남의 첩실이 될 바에야 기운 없는 늙은이의 구질구질한 첩 노릇을 하는 것보다 세자마마의 후궁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스런 일이겠나. 그리고 세자마마가 왕위에 나가시는 날 자네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하나쯤 낳아보게. 그애가 혹시 왕세자가 될는지 누가 아나. 자아, 그러지 말고 나하고 가보세."

그러나 어리는 요지부동이다. 대담하게 까르르 웃어댄다.

"하 하 하. 시골 촌여자로 변해서 그런지 엄두가 나지 아니합니다."

어리의 말을 듣는 계지는 더한층 몸이 달았다.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다시 어리를 달래본다.

"오는 복을 털어도 분수가 있지, 정말 호박이 굴러온 것을 그대로 박차 버린단 말인가. 후궁이 왕후 되는 법이 비일비재하지 아니한가. 어리가 나중에 왕후가 될는지도 모르네. 자아, 연을 맺어보기로 하세."

어리는 여전히 상글상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 말씀은 고맙습니다마는 왕후도 싫고 왕태후도 싫습니다. 그저 시골로 도로 내려가서 밭이나 건사하고 길쌈이나 짜면서 한평생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연히 남의 손가락질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계지는 더 달래도 소용이 없을 줄 알았다. 화를 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할 수 없네. 늙은 영감 똥오줌이나 치워주면서 시골구석에서 썩어버리게, 나는 가네."

어리는 일어나는 계지를 만류하지 아니했다. 방긋방긋 미소를 지어 말한다.

"권하시는 말씀 받들어드리지 못해서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아니하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바로잡지 아니한다 합니다. 남의 의심을 받을 행동은 아니하는 것이 여자의 일인가 합니다."

계지는 어리의 말을 듣자 코웃음을 치고 댓돌로 내려섰다.

"용미봉탕도 먹을 사람이 싫다면 도리가 없는 것일세. 나는 가네."

계지는 휘적휘적 대문 밖으로 나갔다. 어리는 미안하다는 듯 계지를 문간까지 전송해 보냈다. 계지는 실패하고 돌아가 권보한테 교섭하던 전말을 일장설파했다. 권보도 어찌하는 수 없었다. 홍만에게 어리가 응하지 않는 뜻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오입쟁이 한량패들은 세자궁으로 가서 자세한 보고를 올렸다. 세자는 껄껄 웃으며 여러 건달패들을 향해 말한다.

"자네들, 소위 첫손을 꼽는 오입쟁이들이라면서 그래 어리 하나쯤을 항복 받지 못한단 말인가. 바보들일세. 하 하 하."

세자의 야유하는 말을 듣자 이오방이 다시 꾀를 낸다.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무슨 좋은 생각이 났나?"

세자는 빙긋 웃으며 이오방을 바라본다. 세자의 야유에 오입쟁이들은 꾀를 낸다. 먼저 이오방이 아뢴다.

"여자란 단번에 항복하는 법이 없습니다. 꾸준히 끈기 있게 노력해야만 내 손아귀로 들어오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실망하실 것 없습니다. 슬근슬근 톱질하듯 공작을 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오방의 말이 옳습니다."

이법화가 변죽을 올린다.

"그렇습지요, 십벌지목에 아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자꾸 도끼질을 해야만 합니다."

이번에 홍만이란 자가 한마디 했다.

"그래, 다들 좋은 말일세. 어디 자네들이 희한한 꾀를 내서 한 번 어리를 내 품 안에 안겨주게나."

세자는 너털웃음을 한 번 호걸스럽게 웃는다. 이오방이 다시 말을 꺼낸다.

"여자란 상하귀천을 말할 것 없이 정의 동물이올시다. 정을 보내는데 마음이 아니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계지가 아무리 언변이 좋다 하나 세자마마의 간절한 정을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세자마마의 간곡한 정서를 넌지시 던져서 어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도록 하십시다."

"좋은 말일세. 어떠한 수단으로 정을 던져주면 좋겠나?"

이오방이 대답한다.

"여자는 빛깔ㅇ르 좋아합니다. 더욱이 젊은 여자일수록 빛깔 고운 물건을 좋아합니다. 동상전에 기별하시어 붉은 수주머니 한 개를 사다가 세자께서 어리에게 주시는 정표로 보내십시오. 단박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좋은 꾀다."

이법화가 손뼉을 치며 소리친다. 홍만이 싱글벙글 웃으며 이법화의 뒤를 이어 찬성한다.

"좋은 꾀올시다. 세자마마께서 친히 보내시는 정표를 받고 마음이 아니 흔들릴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생 출신으로 남의 첩이 된 어리는 고사 해놓고 한다 한 정경부인이라도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수주머니를 가지고 간단 말인가?"

세자는 좌중을 둘러보며 묻는다.

"계지가 다시 가서는 아니될 것이구."

이법화가 망설인다. 이오방이 말한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동궁 소속의 꼬마 내시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거 좋은 수올시다."

모두 다 찬성했다. 세자도 고개를 끄덕여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곧 춘방사령 명보를 불렀다.

"명보야, 너 동상전에 나가서 수주머니 한 개를 상벌로 사 가지고 오너라."

명보는 벌써 눈치를 다 챘다. 그러나 일부러 한 번 괘를 떨어본다.

"수주머니가 뭐오니까?"

세자가 웃으며 말한다.

"이놈아, 수주머니도 모르느냐. 허리띠에 차는 수주머니 말이다. 붉은 비단 바탕에 사슴, 거북, 해와 달, 바위, 바다, 구름을 수놓고 낙락장송에 푸른 대와 불로초를 곁들인 수주머니 말이다."

명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며 묻는다.

"아아, 그것을 세자마마께서 차시려고 하십니까? 붉은 수주머니는 예쁜 각시들이 차는 것이니 점잖은 세자께서 어찌 차십니까."

"아따, 이놈아. 누가 차든지 간에 동상전에 나가서 사 가지고 들어오너라."

"무엇에 쓰시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동상전에서 사오는 수주머니가 어찌 제법한 수주머니 되겠습니까. 안에 들어가 빈마마께 주머니를 지어줍시사 하고 아뢰겠습니다.

명보는 슬며시 딴전을 부려서 세자의 약점을 찔렀다.

"아따 이놈, 시키는 대로 하지 안에는 왜 들어가 아뢴다고 하느냐."

세자가 껄껄 웃으며 명보를 농쳐서 달랜다.

"그럼 빈마마께는 아뢰지 말깝쇼?"

"잔소리 말고 어서 가서 사오너라."

"그럼 모르겠습니다. 장에 나가는 죽치라도 사오겠습니다."

명보는 출렁출렁 괘사 걸음을 걸어서 나갔다.

한동안 뒤에 명보는 커다란 일문보 보자기에 유리 궤짝을 싸가지고 들어왔다.

세자가 유리궤 뚜껑을 열고 보니 희한한 상벌 십장생 수주머니가 들어있는데 남궁초 중동끈까지 붉은 명주실로 십자를 징거서 주머니 뒤에 달아놓고 주머니 끈에는 금방울까지 한 쌍을 달아서 상상품으로 제법 격을 높여서 담아가지고 왔다.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중동끈에 금방울까지 달아서 가져왔구나. 참으로 상벌이다."

춘방사령 명보가 히쭉 웃으며 말한다.

"이만하면 천하절색 어리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것입니다. , , ."

"너 이놈, 어리의 일을 어찌 아냐?"

세자는 눈을 딱 부릅떴다.

", , . 명보놈은 아주 바본 줄 아십니까. 일일 성사되거든 상급이나 후히 주십쇼."

만좌는 까르르 웃었다. 세자는 수주머니를 준비한 후에 모든 오입쟁이 건달들한테 묻는다.

"아까 여러분들이 꼬마내시를 보내자고 했는데 그애가 어리의 집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하면 좋을까?"

홍만이 앞으로 나와 말한다.

"소인이 계지가 갈 때 먼 발치로 집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소인이 앞장을 서서 가르쳐주겠습니다."

홍만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이법화가 앞장을 서서 고한다.

"소인도 함께 가겠습니다. 소인도 어리가 묵고 있는 집을 압니다."

세자가 채 말하기 전에 이오방이 앞질러 말한다.

"그렇다면 두 분이 다 함께 꼬마 내시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네."

결판을 내버렸다. 세자는 뜰 아래 서 있는 명보를 손짓해 불렀다.

"꼬마 내시를 데리고 오너라."

명보는 세자의 명을 받고 춘방으로 나가서 꼬마 내시를 불러서 함께 들어왔다. 세자는 유리상자에 담은 주머니를 보자기에 싸서 내주며 이른다.

"너는 이것을 가지고 홍의장과 이선달하고 함께 가서 어리라는 여자한테 전하고 오너라. 세자가 보낸다구."

홍만과 이법화는,

"갔다 오겠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를 든 꼬마 내시와 함께 어리의 집으로 향했다.

이때 어리는 곽중추부사의 서울집에 유하고 있었다. 어리가 오래간만에 서울 구경을 가보겠다고 하니 중추부사 곽선은 시골집에 그대로 있고 어리만 가마를 태워서 서울집으로 올려보냈던 것이다. 서울집에는 집 지키는 할미쟁이가 있고, 안채에는 어리가 임시로 먼지를 쓸어내고 호젓하게 있었다. 이법화와 홍만은 곽중추부사의 서울집 앞에 당도하자 손으로 대문을 가리켰다.

"이 집이 곽중추부사의 집이다. 잡담 제하고 대문을 벼락같이 흔들어라. 그러면 파파노인 할멈이 나와서 누구냐고 할 것이다. 그때 가서 상감마마의 아드님이신 세자마마께서 심부름으로 보내셨다고 말한 후에 안으로 쏙 들어가거라. 그러면 텅 빈 집 안에는 예쁜 각시가 한 사람 있을 것이다. 세자마마께서 보내시는 것이라 한 후에 보를 끌러서 주머니를 주고 나오너라."

꼬마 내시는 나이느 어리나 영리했다.

"아니 받으면 어찌합니까?"

뒷걱정까지 했다.

"억지로 맡기고 나오너라."

이번에는 이법화가 훈수를 했다.

꼬마 내시는 홍만이가 시키는 대로 곽부사 집 대문을 뻐개져라 하고 흔들었다. 과연 파파노인 한 사람이 나왔다.

"누구요? 어디서 왔소?"

하고 묻는다.

"대궐 안에서 나왔소."

꼬마내시는 배짱 좋게 말했다. 늙은 할미는 귀가 먹어서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어디서 왔다고?"

채머리를 흔들며 되묻는다.

"상감님이 계신 대궐 안에서 나왔소."

늙은이의 귀에다 입을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할미는 비로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벌벌 떨면서 안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소리친다.

"아씨, 삼감이 계신 대궐 안에서 어린 내시가 왔소."

꼬마 내시는 할미의 뒤를 따랐다. 이때 어리는 방 안에 있다가 할미의 외치는 큰 소리를 듣고 쌍창문을 열고 나왔다.

"상감이 계신 대궐 안에서 사람이 나올 까닭이 있나."

혼잣말을 하면서 마루 끝으로 나왔다. 조그마한 내시가 할미의 뒤를 따랐다. 어리의 머리에 일전에 계지가 와서 하던 말이 번개같이 스쳤다.

'세자마마께서 자네를 한 번 보고 싶어 하시네.'

어리의 가슴을 까닭없이 두근거렸다.

"아씨께서 어리라고 하시는 분입니까?"

어린 내시가 묻는다.

", 내가 어리요."

어리는 맑은 눈결을 흘려 내시를 바라보았다.

"대궐 안에서 나왔습니다. 세자께서 이 물건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어리는 어찌할지 몰랐다. 잠깐 망설이고 있을 때 내시는 보를 끌렀다. 화려한 유리상자가 나타났다.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이 환하게 보였다. 호화찬란한 남동중끈에 십장생 수주머니가 달려 있고 주머니끈에는 황금 쌍방울이 예쁘게 달려있어서 움직이는 대로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이것을 왜?"

어리는 꼬마 내시를 바라보며 묻는다.

"세자께서 정표로 보내십니다."

꼬마 내시는 한술 더 떠서 '정표' 소리까지 했다. 어리의 얼굴이 부끄럼에 취해서 새빨갛게 물들었다.

"한 번도 뵈온 적이 없는데 어찌 정표를····."

어리는 꼬마 내시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꼬마 내시가 상긋 웃으며 어리를 향하여 말한다.

"모르겠습니다. 세자마마께서 친히 아씨를 찾아뵙고 전하라 하시니 그저 저는 전할 뿐입니다."

"뵙지도 못한 어른의 예물을 어찌 받겠소. 못받겠소이다. 도로 가지고 가시오."

어리는 유리 상자를 다시 바라본다. 수주머니의 찬란한 빛깔이 더 한충 화려했다. 밀어놓는 바람에 금방울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아름다운 화성이 일어났다.

"저는 못 가지고 가겠습니다. 가지고 갔다가는 큰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목이 달아납니다."

어리는 더욱 쌀쌀한 표정을 지어 내시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내가 생면부지 처음으로 만난 당신들의 일을 알 까닭이 있소. 목이 달아나건 다리가 부러지건 내 알 바가 아니오. 들어앉아 있는 여인이 어찌 초면부지 모르는 남자가 보내는 수주머니를 받는단 말씀요."

어리는 쌀쌀하게 뱉듯 말했다.

"모르는 남자가 아니라 세자마마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꼬마 내시는 차단지같이 달라붙는다.

"세자마마 아니라 상감마마라도 내가 뵙지 못했으니 모르는 남자가 아니겠소 두말 말고 가지고 가시오. 이따위 짓을 누구한테 함부로 한단 말씀요."

어리는 더한층 싸늘하게 거절해버렸다. 꼬마 내시는 어리가 순하게 받을 성싶지 않은 것을 짐작했다.

"모르겠소이다. 나는 심부름을 왔을 뿐입니다. 두고 갑니다."

한마디 한 후에 주머니 상자를 툇마루 끝에 놓고 걸음을 빨리 걸어 대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여보시오, 내시님."

어리는 벌떡 일어나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내시는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줄달음질을 쳐 달아난다. 귀머거리 할멈이 어리가 내시를 급히 부르는 것을 눈치로 알아차렸다. 꼬부라진 허리에 뼈만 남은 엉덩판을 뒤로 내밀로 엎어질 듯 자빠질 듯 쫓아갔으나 내시는 벌써 골목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노파는 체머리 흔들고 대문 빗장을 잠근 후에 마루 끝의 수주머니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어리를 향하여 말한다.

"누가 보냈는지 기가 막힌 좋은 수주머니인데 왜 아니 받으시고 그러시우."

어리는 주먹을 쥐어 귀머거리 할미를 때릴 듯하면서 누가 볼까 보아 얼른 주머니 상자를 거두어 다락 속에 감추었다. 어리는 세자가 보낸 수주머니를 다락 속에 감추어 두었으나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불안했다. 한편으로 기쁜 듯하고, 한편으로 뒷일이 어찌 될 것인가 하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며 이상야릇한 감정 속에 한동안 헤매고 있었다. 기쁘고도 위태로운 듯 불안한 마음은 결국 허전한 심사를 금할 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잡을 것이 있다면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잡고 싶은 심경이었다. 한동안 회의 속에 빠졌던 어리는 문득 판관 이승의 생각이 았다. 판관 이승은 어리의 늙은 영감 곽선의 수양자였다. 서울에 있는 친척 중에 가장 가까운 일가가 된다. 어리는 한편 겁도 났다. 밤중에 남자 한 사람 없는 집에 호젓이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하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어리는 부랴부랴 몸매무새를 고친 후에 장옷을 쓰고 판관 이승의 집을 찾았다.

이때 벌써 날은 저물어 황혼이었다. 어리가 이승의 집으로 들어가니 이승의 내외는 반갑게 맞이했다. 어리는 적성 시골집에서 올라온 후에 이판관의 집에서 두어 번 놀다가 간 일이 있었다.

"그래 그동안 별일 없었소?"

이승은 양서모한테 정답게 물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어리는 인사조로 대답한 후에,

"잠깐, 나리한테 의논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 허두를 꺼냈다.

"무슨 일입니까?"

이승이 물었다. 어리는 세자의 일을 숨김없이 고해바치리라 결심했다.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세자가 나를 꾀어냅니다."

"세자가?"

이승은 깜짝 놀란다. 어리는 계지가 찾아와서 세자가 한 번 만나보겠다고 하던 일부터 꼬마 내시가 와서 세자가 정표로 보낸다고 수주머니를 두고 간 일까지 일장설파했다. 이승은 한편 놀라고 한편 기가 막혔다. 어안이 벙벙해서 얼른 말을 못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저는 무서워서 배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밤은 댁에서 쉬겠습니다."

어리는 애원조로 말했다.

"저런 변이 있나. 마음 탁 놓고 내 집에서 쉬구려."

이판관의 아내가 어리를 위로하며 말한다. 이승은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성난 얼굴로 푸념을 한다.

"일국의 왕세자가 아버지 전하를 도와서 백성을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지는 못할망정 남의 유뷰녀를 뺏을 생각을 하니 가증하기 짝이 없구려. 이래 가지고 백성들이 어찌 마음을 놓고 산단 말이오. 참 기막힌 세상도 다 보겠소."

한숨을 지으며 크게 탄식했다.

"나리, 며칠 밤만 댁에서 자게 해주시오."

어리는 이번엔 이판관을 향하여 애원했다. 어리의 애원하는 말을 듣자 이판관은 쾌하게 허락한다.

"염려 말고 내 집에서 편안히 쉬시오. 우리 마누라와 함께."

 

담을 넘는 세자

 

"공연한 일로 소란을 떨어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이다."

어리는 고개를 숙여서 고마운 뜻을 표했다.

"어리가 남달리 유난스럽게 예쁜 탓이지. 호호."

이승의 마누라가 한바탕 웃어댄다.

"아닌 게 아니라 명모유죄야. 서모의 얼굴이 너무나 고와서 장안 장외에 소문이 자자하거든. 이러하니 탐화봉접이 아니 모여들 수 있나. 하하하."

이 판관은 소리쳐 껄껄 웃었다.

"제 얼굴이 무엇이 예쁩니까?"

어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한편 세자궁에서는 세자를 위시하여 오입쟁이 조방꾼들 구종수, 이오방, 이법화, 홍만, 명보, 계지, 초궁장들이 수주머니를 가지고 간 꼬마 내시의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만에 꼬마 내시가 돌아왔다. 이법화와 홍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꼬마 내시에게 묻는다.

"어떻게 되었나?"

"아이구, 혼났습니다."

"혼이 나다니?"

이번에 세자가 묻는다.

"깐깐하도록 아니 받습니다. 진땀이 났습니다."

"무어라 하면서 아니 받더냐?"

세자가 묻는다.

"생면부지 외간남자의 정표로 보낸 선물을 어찌 받느냐고 하면서 영영 아니 받습니다."

", 세자마마께서 보내시는 선물이라 하지."

홍만이 앞장서서 말한다.

"왜 아니 말했겠습니까. 대궐 안에서 세자마마께서 보내신 것이니 받아야 한다고 말했더니, 세자 아니라 금상전하께서 보내신 것이라고 유부녀의 몸으로 정표로 보내는 수주머니를 받을 도리가 없다 합니다."

"그래 어찌하였나?"

"그대로 마루 끝에 밀어놓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서 뛰어나왔습니다."

이번에 세자가 묻는다.

"그래 정말 천하일색이더냐?"

꼬마 내시가 상긋 웃으며 대답한다.

대궐 안 진풍연 잔치 때 약방기생, 상방기생, 장악원 기생들, 녹의홍상들을 무수하게 보아온 소인의 눈이올시다마는 이런 절염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과연 천하절색이 올시다.

"어떻게 예쁘더냐?"

꼬마 내시는 또 한 번 상긋 웃었다.

"붓으로 그릴 수는 없고 어찌하면 좋습니까. 물찬 제비 같고, 돋아 오르는 달덩이 같더이다."

세자의 비위는 더욱 동했다. 세자는 만좌를 돌아보며 묻는다.

"어리가 정표로 보낸 수주머니를 받지 아니한다 하니 어찌하면 좋을까?"

"제아무리 깔끔한 체하지만 십벌지목에 아니 넘어가는 나무 없는 법입니다. 꾸준히 달래보기로 하십니다."

이오방이 세자께 아뢴다.

"꾸준하게 달래보려면 먼저 어리의 동정을 살펴야 합니다. 아까 소인이 꼬마 내시와 이법화와 함께 간 후에 내시를 들여보내고 어리의 집 대문 밖에서 기다려보려 했으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상하게 생각할까 보아 바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번에 다시 이법화와 함께 가서 어리의 동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홍만이 나서서 다시 가보겠다고 자원했다. 세자가 홍만을 향하여 묻는다.

"이 사람, 한길에 지나가는 사람이 수상하게 생각할까보아 먼저 돌아왔다며 그러나. 이번에 다시 가도 마찬가지가 될 것 아닌가."

"이제 생각하니 어리의 집 건너편에 선술집이 한 집 있습니다. 슬며시 술청으로 들어가서 서너 잔 막걸리를 사 먹으면서 어리의 동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홍만이 의견을 표시했다.

"여보 홍첨지, 목젖이 뛰는구려. 나도 어리의 집 망을 보러 가겠소."

춘방사령 명보가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익살을 떤다. 세자는 문갑 서랍을 열고 엽전 한 꾸러미를 홍만이 앞으로 던지며 말한다.

"어디 좋을 대로 해보게. 이것이 약소하나 술값을 치르도록 하게."

"주시는 것이니 받겠습니다."

홍만은 사양하지 않고 얼른 집어 직령 소매 속에 넣는다.

"나하고 함께 갑시다."

춘방사령 명보가 또다기 괘사를 떨면서 일어나는 홍만의 뒤를 따르려 했다. 세자가 명보를 꾸짖는다.

"앗아라. 사람이 너무 많이 가면 일의 방해가 된다. 너는 나하고 함께 있기로 하자."

춘방사령 명보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주저앉는다. 홍만이 이법화와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 후에 세자궁을 나서서 어리의 집 맞은편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술집으로 들어가 막걸리를 사 마시면서 맞은편 어리의 집을 향하여 동정을 살피고 있을 때 어리의 집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푸른 장옷을 쓴 여인이 나오고 대문간에서는 체머리를 흔드는 할미가,

"아씨, 안녕히 다녀옵시오."

하고 전송하는 말을 했다.

"집 잘 보고 있어요."

하고 장옷 쓴 여인이 대답하며 돌아섰다. 어리가 분명했다.

이법화와 홍만은 서로 눈짓을 한 후에 술값을 빨리 치르고 술집에서 나와 슬며시슬며시 장옷 쓴 여인의 뒤를 따랐다. 여인은 광교 다리를 지나서 관잣골로 들어서자 너부죽한 평대문 집으로 들어갔다. 뒤를 따르는 홍만이 이법화의 허구리를 쿡 찌른다.

"이것 이 판관 집이 아닌가?"

"그렇구먼. 바로 한성판관 이승의 집일세그려."

"아 참, 인제 생각하닌 이승은 곽중추부사의 수양자가 아닌가?"

"참 그렇구나. 자네 말이 맞네."

홍만과 이법화는 서로들 주고받았다.

"자네 이 판관하고 면분이 있지 아니한가."

이법화과 홍만을 향하여 말한다.

"알다마다"

홍만이 대답했다.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자네 이승의 집으로 들어가서 세자께서 어리를 만나보고자 하시니 어리를 좀 만나보게 해달라고 말을 건네보게."

"아니 들으면 어찌하나?"

홍만이 이법화에게 말했다. 이법화는 홍만을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아니 들을 도리 없네, 한송소윤 권보 같은 사람도 처음엔 말을 아니 듣다가 결국은 자기 첩 계지를 시켜서 어리를 달래라 했는데, 이승이 말을 아니 들을 도리가 없네. 벼슬하는 사람들은 다들 장래길을 생각해서 세자의 말씀을 아니 듣지 못하네. 두말 말고 들어가서 한 번 이승을 달래보게."

이법화의 말을 듣는 홍만은 고개를 가로 흔들고 말한다.

"아냐. 섣불리 말을 꺼내놓았다가 어리를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키면 어찌햐냐. 내 생각에는 아주 세자를 모시고 와서 밖에 잠깐 기다리시라고 한 후에 내가 들어가서 이승한테 교섭을 하는 것이 좋겠네. 그래서 이승이 만약 어리를 만나보도록 주선을 해주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반대를 해서 거역을 한단면 별반 수단을 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

이법화는 홍만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자네 말이 옳으이. 그럼 내가 세자를 모시고 올까."

"자네는 여기서 망을 보고 있도록 하게. 내가 핑 갔다가 오기로 함세."

홍만은 말을 마치자 바짓가랑이에서 비파소리가 나도록 걸음을 빨리 해서 세자궁으로 들어갔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중문을 지나서 숨이 턱에 차서 씨근대면서 세자마마를 불렀다.

"세자마마, 세자마마, 세자마마께 아뢰오."

홍만이 떠들어대며 들어오는 소리에 세자를 위시하여 구종수, 이오방, 명보, 계지, 초궁장이 모두 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자는 숨이 턱에 차서 씨근벌떡거리며 들어오는 홍만을 보자,

'일이 잘 되었나보구나'

하고 입이 딱 벌어졌다.

"어서 어서 옷을 입으십시오. 어서 어서."

모두들 일이 꼭 된 줄만 알았다.

"내 옷, 갓을 떼어 입혀라."

계지는 세자의 몸에 도포를 입히고 초궁장은 세자의 머리에 갓을 씌웠다. 세자는 일이 꼭 된 줄 알았다. 구종수, 이오방, 명보, 계지, 초궁장도 홍만의 솜씨에 어리가 녹은 줄로만 알았다. 일행은 부리나케 홍만의 뒤를 따랐다.

"어찌 되었어?"

구종수가 걸어가며 홍만에게 물었다.

"따라만 오슈."

홍만은 신명이 났다. 앞을 서서 걸었다. 이승 집에 거의 당도했을 때 홍만은 비로소 전말을 말했다. 모두 다 홍만을 두들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경위가 그럴 듯하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계지와 초궁장은 깔깔대고 웃으며 속은 것이 분하다고 손뼉을 치면서 따라가고, 모든 오입쟁이들은 세자를 옹위하여 이법화가 망을 보고 있는 이승의 집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밤은 이슥하여 삼경이었다. 홍만은 이법화의 앞으로 다가섰다. 목소리를 낮추어 묻는다.

"별일 없었나?"

"아무 일도 없어."

이법화가 대답했다."

"잠깐들 기다리슈."

홍만은 세자 이하 여러 사람한테 한마디를 던진 후에 이승의 집 대문을 뻐개져라고 흔들었다. 안에서는 이승의 마누라와 어리가 자고 사랑에서는 이승이 자다가 깊은 밤에 문을 흔드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하도 문을 요란스럽게 흔드니 판관 이승은 친히 나가서 대문 안에서 밖을 향하여 묻는다.

"누가 왔소?"

"장악원에 시사하는 홍첨지가 왔소."

이승은 전부터 홍만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밤중에 자네가 웬일인가?"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왔소. 문을 좀 열어주오."

급히 의논할 일이 있단 말에 이승은 별반 의심하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때 세자 이하 일행들은 먼발치에 몸들을 감추고 있었다. 이승이 홍만을 향해 묻는다.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왔나? 깊은 밤중에."

"안에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합시다."

이승은 홍만을 방으로 인도했다.

"웬일야. 무슨 상의할 일이 있단 말인가?"

홍만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 이승은 다시 묻는다.

"세자마마의 심부름으로 온 길이오."

"세자마마의 심부름으로?"

이승은 눈을 뜨고 새침하게 뜨고 물었다. 어리에게 들은 말이 있는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 일로 세자가 자기에게 사람을 보낼 까닭이 없다. 의아하기 짝이 없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자께서 어리를 구하시오."

이승은 비로소 건달 홍만이 찾아온 뜻을 확실히 알았다. 기가 막혔다. 분하기 짝이 없다. 세자가 여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장안에 짜아하게 퍼졌지만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치미를 딱 뗀다.

"어리라니?"

"왜 당신의 수양 아버지 곽중추부사의 첩실에 어리가 있지 않소?"

"아 참, 그렇구먼. 그런데 어찌하란 말이오?"

"어리의 재색이 겸비하단 말씀을 세자께서 들으시고 달라시는 것이지."

"남의 집 유뷰녀를 어찌 달란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일을 왜 나한테 의논하나?"

"영감은 곽중추부사의 수양 아들이라니까, 청을 좀 해보는 것이지."

이승은 크게 노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벽상에 걸린 칼을 뽑아 들었다.

"이놈, 네 아무리 건달놈이기로서니 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어찌 빼돌린단 말이냐."

이승은 칼을 들어 홍만을 찌르려 했다. 홍만은 겁이 나서 뛰어나갔다. 이승은 쫓아나가 대문을 잠가버렸다. 대문 밖에서는 세자를 위시하여 모든 건달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홍만이 뛰어나오는 것을 보자 이법화가 급히 묻는다.

"어찌 되었나?"

"혼났네."

"?"

"자식이 어찌 아비의 첩을 빼어돌린단 말이냐 하면서 벽상에 걸린 칼을 빼서 찌르려고 했네. 혼뜨검이 났네."

이법화가 세자를 향하여 말한다.

"별수 없소이다. 담을 넘어 뛰어 들어가서 담판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수밖에 없네."

구종수와 이오방이 찬성했다. 이법화가 세자한테 고한다.

"제가 무등을 타드릴 테니 제 어깨 위로 올라서서 담을 넘으십시오."

세자는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반항에서 출발된 세자의 정신은 이제는 완전히 탕자의 행동으로 들어섰다.

"어디 그래 보기로 하세."

세자는 웃으며 쾌하게 허락했다. 이법화는 무릎을 쪼그리고 어깨를 세자의 앞으로 들이댔다.

"자아, 제 어깨에 올라서십시오. 그러한 후에 소인이 일어나서 바싹 담 앞에 대드릴 테니 두 손으로 담 위에 있는 기왓장을 짚고 담 너머로 사뿐 뛰어내리십시오."

이때 춘방사령 명보가 이법화를 밀어제치고 어깨를 세자 앞으로 들이대며 말한다.

"이선달은 다리 힘이 약해서 아니될 거요. 내가 모시리다. 자아, 소인의 어깨에 무등을 타십쇼."

샘을 논다.

"옳지 그래. 법화보다 명보가 다리 힘이 세서 튼튼할 거야. 명보가 무등을 타드리게."

구종수가 판결을 내렸다. 세자는 명보의 어깨 위에 올랐다. 담은 높지 아니했다. 세자는 두 손으로 담을 짚고 퍼뜩 뛰어내렸다. 뒤미처 이법화가 담을 넘고 명보가 담을 넘었다. 초궁장과 계지만이 담을 넘는 것을 보고 깔깔대며 웃다가 제각기 제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홍만을 꾸짖어 내보낸 후에 사랑방에 들어앉았던 이승은 별안간 ', '하는 사람 뛰어내리는 발자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등불을 들고 뛰어나왔다. 앞을 바라보니 초립을 쓴 세자를 앞세우고 한떼 건달패들일 우둥우둥 들어왔다. 이승은 망지소조해서 어찌할지를 몰랐다. 홍만이 앞으로 썩 나서서 이승한테 말했다.

"세자께서 친림하셨소. 인사를 드리시오."

이승은 황망히 젊은 세자 앞에 부복하여 절을 올렸다.

"이 시람이 집주인 이승이올시다."

홍만이 세자한테 이승을 소개했다.

"깊은 밤중에 찾아와서 미안하이."

세자가 미소를 지어 웃으며 인사조로 말햇다.

"누지에 왕림하시니 황공무지하여이다."

이승은 그만 기가 질렸다. 홍만을 쫓아내던 아까 배짱보다 풀이 푹 죽었다. 그중에 낫살 먹은 구종수가 이승을 향하여 타이른다.

"자아, 마당에서 이리할 것이 아니라 세자마마를 청 안으로 모시도록 하시오."

부복했던 이승이 벌떡 일어났다.

", 알겠습니다. 세자마마, 그리고 여러분들, 대청 위로 오르십시오."

주인 이승은 등불을 들고 앞을 서서 인도했다. 침입자 일행은 사양하지 아니하고 호기롭게 청 위로 올랐다. 이승이 모든 침입자들을 상좌에 앉힌 후에 촛대에 촛불을 돋우고 장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홍만이 먼저 말을 꺼낸다.

"세자마마께서 친림하신 뜻을 영감은 짐작하시겠지?"

홍만은 아까보다 정반대로 기세가 당당했다. 이승은 번연히 어리의 일로 세자가 담을 넘어 들어온 것을 알면서도 얼른 대답을 아니했다.

"세자께서 어리를 보러 오셨으니 어리를 빨리 내놓으시오."

홍만은 소리를 높여 얼러댄다. 이승은 난처했다. 한 번 앙탈을 더 해본다.

"어리가 어디 제집에 있습니까. 곽중추부사의 서울집에 유하고 있습니다. 밤중에 갈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승은 슬며시 잡아떼어 본다. 홍만이 청을 높여 꾸짖는다.

"무슨 말야. 어리는 확실히 영감의 집에 있소. 우리들이 다 망을 보고 온 길이오. 아까 낮에 어리가 댁으로 들어오는 것을 건너편 술집에서 다 지켜보고 온 길이오."

홍만은 낮에 비밀했던 행동을 다 털어놓았다. 이승은 얼굴이 붉어지며 어찌할 줄을 모른다.

"어서 어리를 순순히 내놓으시오. 공연스레 거짓말로 꾸며댈 일이 아니오. 뒷일을 생각해 보고 처사를 하시오."

구감역이 위협을 했다.

"노류장화에 무슨 정절이 있단 말씀요. 어시 어리를 데리고 나오시오. 이것이 반연이 되어서 장래 영감의 신운이 대통운이 될지도 모르오."

이오방도 한마디 했다.

"그렇지. 어리가 나중에 후궁이 되는 날 영감은 대통운일세, 대통운야."

이법화는 세자 앞에서 흰소리를 한다. 이승은 하는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어리는 안채에서 이승의 마누라와 함께 자리를 펴고 누워있었다. 시골 이야기, 서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창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을 때 별안간 사랑편에서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누가 와서 바깥주인과 한동안 승강이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달음질치는 소리가 나며 대문은 닫아지고 사랑이 조용했다. 안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홀연 담에서 사람 뛰어넘는 소리가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사랑이 떠들썩했다. 주인 마누라와 어리는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두 여자는 도둑이 든 줄 알고 간이 콩알만해져서 벌벌 떨고 있었다. 이때 이승이 들어왔다. 얼굴꼴이 흑빛으로 변해서 말이 아니다. 마누라는 급히 묻는다.

"웬일이오, 불한당 떼가 들어왔소?"

부들부들 떨면서 물었다.

"아니 불한당 떼는 아니지만 불한당보다도 더 무서운 건달패가 담을 넘어 들어왔소."

마누라는 더한층 놀랐다.

"불한당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무어요?" 답답하오. 어서 말씀하시오."

"세자마마께서 건달패들을 데리고 담을 넘어 뛰어 들어왔소."

"그것이 무슨 소리요. 세자마마가 웬일로?"

이때 어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승은 숨이 찼다.

"서모를 내놓으라구."

이승의 마누라는 비로소 까닭을 알았다. 마누라는 손을 싹싹 비볐다.

"어떻게 함 좋은가."

"백방으로 거절했으나 성금이 서지 않는걸. 우리 집에 온 일이 없다 했더니 아까 낮에 건너편 술집에서 서모가 들어오는 것을 봤다는 거야. 아니 내놓으면 뒷일이 좋지 못하다고 막 위협을 하는구려. 그리고 서모가 만약 후궁이 되는 날은 한 번 잘살게 될 수 있지 아니하냐구 감언이설로 달래보기도 하는구려. 이것 참, 어찌하면 좋소."

이승의 말을 듣자 어리는 얼굴을 붉히고, 이승의 마누라는 어리를 세자한테 넘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거 큰일났구려."

한마디 한 후에 어리를 바라본다.

"서모, 별수 없소. 나가보는 수밖에 없소. 당장 세자의 세력을 누가 꺾는단 말요. 아니 나가면 양편 집이 다 함께 멸분지화를 당할 테니 불계하고 나가서 세자를 만나보는 수밖에 없소."

어리는 어찌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이승도 이제는 어리가 세자를 만나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까 처음에 세자가 담을 넘어 들어오기 직전에 건달패 홍만이가 찾아와서 세자가 서모를 좀 보겠다 하기에 나는 크게 노해서 남의 집 유부녀를 어찌 보자 하느냐고 벽에 걸린 칼을 빼어 들고 엄포로 쫓아 버리고 대문을 닫았던 일이 있었소. 그랬더니 모두들 성군작당을 해서 담을 넘어 들어왔구려. 이거, 그대로 한 번 지나가는 말로 떠보는 수작이 아니라 아주 작정하고 덤벼드는 일들이니 피하려야 피할 도리가 없소. 서모 얼굴 예쁜 것이 탈이지, 수원수구해야 소용이 없소. 아버지께서는 내가 말씀을 잘 드릴 테니 서모가 나가서 세자를 만나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소. 이것은 벌써 계지가 달래고 수주머니를 보낼때부터 아주 계획을 짜놓고 하는 일들이니 별수 없소. 서모는 대궐로 들어가 살 팔잔가보오."

이승도 어리에게 나가보라고 은근히 말했다.

"팔자 도망은 못하는 법야. 아마 왕후나 귀빈이 되는 팔잔가 보지."

이승의 마누라는 맞장구를 쳤다.

"자아. 나갑시다. 별수없소. 아니 나가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고 나가면 후분이 터질 듯하오."

이승은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머리나 가리고 옷이나 매만진 후에 나가보기로 하오."

이승의 마누라가 재촉을 했다. 중문간에서,

"이리 오너라. 주인은 안에 들어가 무엇을 하고 있소. 빨리 화회를 기별해주오."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건달패들의 목소리다.

"저거 봐, 큰일났네. 어서 어서 나가봐요."

이승의 마누라는 발을 동동 굴렀다. 어리는 하는 수가 없었다. 주인 마누라의 빗접을 빌려서 머리를 가리고, 얼굴을 반해 수건으로 매만져 닦은 후에 옷매무새를 고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승이 북등을 들고 앞에 서고 어리는 불빛을 따라 이승과 함께 사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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