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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5-2

장악원 기생 봉지련

이때 세자는 춘방사령의 앙탈하는 말을 듣자 눈을 딱 부릅떴다.

"웬놈의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 내가 데려오라고 했다. 모든 일은 내가 담당할 테니 감역 나리가 하라시는 대로 너는 심부름만 하면 그만이다. 빨리 가서 기생을 데리고 오너라."

세자의 말에 명보는 더 항거할 길이 없었다.

"난처한 일인데."

춘방사령은 뒤통수를 긁적긁적 긁으며 혼자 말하고 발길을 돌이켰다. 한동안 걸어가던 춘방사령은 다시 돌아섰다. 창 앞에 나가 구종수를 불렀다.

"구감역 나리, 잠깐 나 좀 보십쇼."

춘방사령의 부르는 소리를 듣자, 구종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오방도 궁금했다. 슬며시 구종수의 뒤를 따랐다. 춘방사령은 구종수와 이오방을 보자 가만가만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암만 생각해보아도 동궁으로 기생을 데려왔다는 소문이 나서 상감마마의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불호한 광경이 생길 것이 십상팔구입니다. 봉지련을 공공연하게 판교에 태워 데려올 수는 없고 여염집 여자의 맨드리를 해서 데려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 좋지."

얌전한 악공 이오방이 대답한다.

"나도 미상불 기생 데려오는 것을 찬성하지 아니했네. 명보 말과 같이 상감께 이 소문이 들어가면 큰일이거든. 이러기에 절대로 기생을 동궁 안에 불러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네. 그러나 세자께서는 상감께서 강계 기생 가희아를 데려다가 후궁까지 봉했는데 술자리에 기생 한 명쯤 데리고 마시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하시면서 노발대발하시니 어찌할 수 있나. 그래서 우리도 생각다 못해서 데려오기로 한 것일세. 그러하니 자네가 염려하는 심정은 우리도 짐작하고도 남네. 자아 그러하니 자네 의향대로 여염집 각시가 빈마마께 문안드리는 것같이 꾸며 가지고 동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좋겠네."

"그렇다면 안대문을 거쳐서 사랑으로 나와야 할 텐데, 빈마마께서 어찌 생각하실는지?"

이오방이 또 한 가지 생각하고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염려 마십쇼. 빈마마께서는 진정 요조숙녀십니다. 현숙하시고 투기가 없는 분입니다. 그리고 항상 세자마마의 넓으신 아량을 은혜롭게 생각하십니다. 명나라 공주한테 장가를 아니 드시고 당신을 파경이 될 만한 신세 속에서 구원해주셨다 해서 세자께서 하고 싶어하시는 것이면 무슨 일이든지 간섭하지 아니하십니다."

"과연 그렇구먼."

두 사람은 감탄해 마지아니했다.

"그럼, 그대로 하리다."

춘방사령은 말을 마치자 안문으로 들어가 세자빈한테 귀띔을 해놓고, 장악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봉지련은 마침 난번이 되어 제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대전 별감과 춘방사령은 모두 다 기생들과 통하는 오입쟁이들이었다. 춘방사령은 봉지련의 집을 잘 알고 있었다. 거침없이 봉지련의 집으로 향했다. 봉지련은 춘방사령 명보를 보자 반갑게 안방으로 맞아들였다.

"오라버니, 웬일이시오. 해가 서편에서 떴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내 집까지 찾아오셨소."

봉지련은 생글생글 고운 웃음을 보냈다.

"자네 수가 났네."

"별안간 무슨 수가 났습니까?"

"좋은 서방을 만나게 되었네."

"누군데?"

"세자마마."

'세자마마' 소리를 듣자 봉지련의 까만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세자마마라니요?"

봉지련의 새까만 눈이 더한층 까맣게 빛난다.

"세자마마께서 자네를 부르시네."

"세자마마께서 저를 어찌 아시고 부르십니까?"

"구감역하고 이악공이 자네를 세자마마께 천거한 모양일세."

"구감역 나리와 이오방 악공님이 어떻게 동궁에까지 들어가서 세자마마께 제 말씀을 하셨습니까?"

"세자마마께서 약주를 젓수시다가 울적하시다고 노래하는 친구를 부르라 하시기에 내가 구감역과 이악공을 불러들였네. 그랬더니, 점입가경으로 세자마마께서는 일등 명기를 구해오라 하셨네. 그래서 우리들은 자네를 천거했네. 미주알고주알 그만 캐고 어서 옷 입고 단장 차려서 함께 가기로 하세. 잘만 하면 자네는 황금 방석에 올라앉는 판일세."

봉지련은 춘방사령의 말을 듣자 비로소 세자가 부른 까닭과 내력을 알았다. 황금 방석에 올라앉는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저 같은 기생년이 동궁으로 들어가도 관계치 않습니까?"

"아따, 그것은 춘방사령인 나한테 맡기고 어서 단장이나 하게."

봉지련은 부랴부랴 소세를 마치고, 머리에 군빗질을 한 후에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장 안에서 연둣빛 회장저고리에 남치마를 꺼냈다. 춘방사령이 곁에 있다가 똥겨준다.

"아 참, 내가 잠깐 잊었네. 옷은 그대로 입게마는 갈 때는 판교를 타지 말고 치마를 써야 하네."

봉지련이 샛별 같은 눈을 반짝 뜬다.

"치마를 쓰다니요? 소인네가 어찌 치마를 씁니까."

"동궁에 기생을 출입시켰다고 하면 우선 내가 경을 치네. 그러니 일부러 유표한 판교를 타지 말고, 치마를 쓰고 가잔 말일세. 그감역과 이악공하고도 함께 의논하고 온 길일세."

봉지련의 반짝이는 눈은 그래도 꺼지지 아니한다.

"치마는 양반의 아가씨나 부인이 쓰는 법인데 순라한테 잡히면 공연히 큰일 납니다."

"아따, 그까짓 순라꾼한테 들키는 것쯤은 아무 상관 없네. 춘방사령인 내가 순라꾼 따위를 못주무르겠나. 문제는 동궁으로 기생의 판교가 드나들었다고 상감마마의 귀에 들어갈까 보아서 빈마마를 뵈로 들어가는 양갓집 여자의 맨드리를 하고 가잔 말일세. 알아듣겠나?"

춘방사령 명보는 갈퀴 같은 넓적한 손으로 봉지련의 등을 톡톡 쳤다.

"그럼, 좋을 대로 합시다."

봉지련은 체경에 몸을 비춰서 옷을 갈아입은 후에 장 속에서 무명치마를 꺼내서 머리에 쓰고 고운 왕골 짚신을 삼중버선에 신은 후에 등불 든 춘방사령의 뒤를 따라 동궁으로 향했다. 동궁에서는 수문장이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춘방사령과 함께 들어오는 치마 쓴 여인의 모습을 보자 춘방사령한테 묻는다.

"누군가?"

춘방사령은 굽실하고 능청을 부렸다.

"빈마마의 분부로 친정 일가댁 어른을 모시고 들어오는 길이올시다."

수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빈마마의 일가댁 어른이라니 더 물어볼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나?"

"그럼 치마 쓴 양방이신데, 안으로 들어가시지 사랑으로 드렁가겠소. 하하하. 아저씨도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춘방사령은 일부러 익살을 떨었다.

"어서 들어가 보게나."

봉지련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기생이었다. 머리에 쓴 치마로 얼굴을 바싹 오그려 가리고 빠끔하게 내논 눈으로 땅을 굽어보면서 부끄러운 듯 여염집 부인의 태깔을 지었다.

"그럼, 들어갑시다."

춘방사령은 수문장한테 굽실하면서 치마 쓴 봉지련을 재촉하여 안문으로 들어섰다. 동궁빈의 시년들이 안마당에 있다가 치마 쓰고 들어오는 봉지련을 보고 이상한 눈초리를 보낸다. 춘방사령은 시녀들을 향햐여 괘사를 떤다.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 소리도 말라는 군호다. 시녀들은 의아한 생각을 가지면서 춘방사령의 어릿광대짓이 우스워서 미소를 지어 말없이 물러섰다. 춘방사령은 봉지련을 마당 한복판에 세워둔 채 돈대 위로 성큼 올라섰다. 동궁빈이 거처하는 안방은 조용했다.

"소인, 아뢰옵니다."

"누구냐?"

방 안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났다. 동궁빈의 음성이다.

"춘방사령 명보올시다."

"무슨 일이 있느냐?"

"조용히 아뢸 일이 있사와 여쭈었습니다."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면서 동궁빈의 조촐하고 해사한 모습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동궁빈의 총명하고 재빠른 눈매는 마당에 서 있는 치마 쓴 여인을 놓치지 아니했다. 춘방사령은 툇마루에 손을 짚고 아뢴다.

"가만히 아뢰겠습니다."

"말을 해라."

춘방사령은 청을 낮추어서 아뢴다.

"세자마마께오서 무슨 일이시온지 화가 꼭두까지 나시어 아까부터 약주를 젓숫고 계십니다."

"알고 있다."

"소인보고 음률하는 친구를 부르라 하시기에 소리 잘 하는 구종수와 이오방을불러서 주흥을 돋우어드렸습니다."

"알고 있다."

현숙한 동궁빈이었다. 미소를 지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기생을 또 부르라 하셨습니다."

동궁빈의 표정은 약간 변했다. 놀라는 얼굴이다.

"그래서?"

빈의 음성이 더한층 조용했다.

"저희들은 세자마마께 절대로 아니 된다고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동궁에 기생이 웬말이냐고. 그리고 대전마마께서 아시면 세자마마는 둘째고, 기생을 불러들인 소인의 목이 달아난다고 펄쩍 뛰면서 아뢰었습니다. 그랬더니 저하께서는, 아바마마께어서는 강계 기생 가희아를 대궐 안으로 떼어 들여서 후궁을 봉했을 뿐 아니라 왕자까지 나셨는데 동궁에서 세자가 나이 차서 술상 앞에 기생 한 명쯤 불러서 술을 좀 따르게 하기로서니 무슨 큰 허물이 되느냐고 불호령을 막 내리십니다그려. 하는 수 없이 기생을 한 명 불러 가지고 들어온 길이올시다. 그저, 현숙하옵신 빈마마께오서는 이 점을 깊이 통촉해주셔야 합니다."

동궁빈은 세자의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마당에 서 있는 저 사람이 바로 기생이냐?"

", 그러합니다."

"기생이 왜 치마를 썼느냐?"

"그것, 까닭이 있으옵니다."

"무슨 까닭으로 양반댁 색시들이 출입할 때 쓰는 치마를 썼느냐?"

이때 빈의 음성은 조금 높았다. 춘방사령은 큰일이 난 듯 손을 가로저었다.

"언성을 낮추어좁시오, 마마. 치마를 쓰게 했습니다. 소인의 짓이올시다. 소문나면 괜스레 큰일 납니다."

춘방사령은 목소리를 더한층 낮추어 수군댄다. 동궁빈은 말없이 미소를 지어 춘방사령을 바라본다.

"동궁에서 기생을 불렀다는 소문이 대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가뜩이나 우리 세자마마를 미워하시는 대전마마께서는 가만히 계실 리 만무합니다. 그리하여 기생을 판교에 태워 들여오지 않고 양반님댁 아가씨모양 치마를 씌워서 변장해 들여온 것입니다."

동궁빈은 비로소 기생의 치마 쓴 연유를 알았다. 인자한 얼굴에 미소를 지어 끄떡였다.

"그러지 아니해도 들어올 때 수문장한테 힐란을 당했습니다. 누구냐고 묻기에 빈마마의 친정댁 일가 어른이라고 외수전갈까지 하고 들여왔습니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빈마마께서도 이 일을 자세 아시고 세자께 누가 미치지 않도록 너그럽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어서 사랑으로 데리고 나가거라."

세자빈은 조용히 양해하는 대답을 내렸다. 춘방사령 명보의 추측대로 세자빈은 하마터면 파경의 운명을 당할 뻔했던 자기를 구해낸 세자의 은공을 가슴 안에 깊이 간직했던 것이다. 춘방사령 명보는 기뻤다. 어깨가 으쓱했다.

"사나이보다 금도가 더 넓으신 빈마마의 처사를 세자마마께오서 들으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빈마마, 그럼 소인은 기생을 데리고 사랑으로 나가겠습니다. 빈마마, 그리 아시옵소서."

명보는 허리를 굽실했다. 빈마마께 인사를 올리고 뜰 아래로 내려가서 치마 쓴 봉지련을 데리고 사랑으로 통하는 일각문으로 나갔다. 사랑에서는 거문고 울리는 소리와 구감역의 노래부르는 소리가 아직도 은은히 창밖으로 새어 나왔다. 춘방사령은 봉지련의 머리에 쓴 치마를 벗게 한 후에 손을 잡아 마루에 오르게 했다. 활짝 문을 열었다. 배반은 낭자하고 취흥은 도도했다. 가야금 소리와 노랫소리가 뚝 그쳤다.

"소인 명보 기생을 데려왔습니다."

세자의 취한 눈이 몽롱하게 방 안으로 조심성 있게 들어오는 봉지련을 바라본다. 아름다웠다. 세자는 여태까지 여인이라면 상궁이나 나인이며 물긷는 무수리를 대해 봤을 뿐이다. 궁년들 중에도 아름다운 미인이 없지 아니했으나, 너무나 규칙적이었다. 마치 만들어논 사람 같았다. 살아서 움직이는 여인의 미가 아니라 흡사 죽은 사람의 아름다움 같았다. 움직이지 아니하는 미였다. 세자는 들어오는 봉지련을 바라보자 새 정신이 도는 듯했다. 춘방사령은 방에는 들어가지 아니하고 마루에서 아뢴다.

"기생 봉지련을 들여보냅니다."

봉지련은 우선 앞에 있는 이악공과 구감역에게 목례를 보내고 주안상을 격하여 세자께 절을 올렸다. 날씬한 어깨에 부드럽게 멋진 몸맵시는 한들한들 봄바람에 흔들리는 천사만사의 양류의 맵시다. 먼저 세자의 취한 흥을 흔들어 놓고도 남음이 있었다. 세자의 입은 함박만큼 피었다.

"이리 오너라. 가깝게 내 옆에 앉아라."

세자는 비어 있는 보료방석을 손으로 가리키며 봉지련을 권했다. 봉지련은 치마 끝을 휩싸안고 세자의 옆으로 나가 공손히 앉는다. 술병을 잡았다. 먼저 세자께 약주 한 잔을 가득히 부어 올린다. 세자는 사사로운 자리에 기생과 함께 앉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무서워서 두근거리는 가슴이 아니었다. 좋은 감정이 움직여서 두근대는 가슴이다. 잔을 받고 나서 할 말이 없다.

"네가 장악원 기생이냐?"

", 그러하옵니다."

"이름을 무어라 하느냐?"

기생은 고개를 다소곳 숙이고 대답한다.

"봉지련이라 하옵니다."

"봉지련, 아름다운 이름이다. 어찌해서 봉지련이라 했느냐?"

"모르겠사옵니다. 장악원에서 지어준 것을 남이 불러주고, 남이 부르면 저는 대답했을 뿐입니다."

봉지련은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멋진 대답이로구나. 봉황은 새 중에도 고귀한 새로서 사람마다 귀하게 생각하는 새지만, 못에 피는 연꽃은 그윽한 향기와 청초한 모습으로 성현들도 그 맑은 자질을 사랑해서 애련설까지 지었느니라, 과연 조촐하고 깨끗한 이름이다. 네 얼굴처럼 흠뻑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러하옵니까. 저하께서 그같이 칭찬해주시니 황공무지하여이다."

봉지련은 고개를 갸우뚱 수그려서 감사한 뜻을 올린다. 옆에 있던 구종수가 변죽을 치며 세자한테 아뢴다.

"과연 말씀이지, 봉지련은 이름도 좋고, 인물도 잘생겼습니다."

구종수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악공 이오방이 한몫을 보아 말참견을 한다.

"그렇지. 시조에도 봉황을 두고 멋쟁이들이 지은 시조가 많것다. 이런 시조도 있지 아니한가.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랐더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오고, 밤중만 일편명월이 빈 가지에 걸렸어라."

"어떤가, 봉지련."

"좋습니다."

봉지련은 반은 부끄러운 듯 반은 기쁜 듯 맑은 눈을 내리깔고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세자저하."

이번엔 구종수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세자를 바라본다.

", 그러오."

세자도 예쁜 미인을 옆에 앉혀놓고 술상 앞에 앉아보니 마음이 흡족했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자기를 부르는 오입쟁이 구종수를 바라본다.

"황송하오이다. 세자마마의 복력은 참으로 희한하십니다."

구종수의 말에 이오방이 가로채며 나선다.

"여부 구감역, 그 무슨 말슴요. 복력이 좋으시길래 나라에 상감 다음 가시는 세자마마가 되셨지. 장래 상감이 아니신가. , ."

"천만에, 그것은 이악공이 모르고 하는 말야. 세자마마보다 하늘과 매일반이신 상감의 몸이 되셨다 해도 복력이 많은 분이 따로 있거든. 복력 중에도 염복이란 것은 또 어려운 거야. 세자마마께서는 복력보다도 염복이 더 좋으시단 말야. 자아, 보소그려. 아까 이악공이 시조를 읊었지. 벽오동을 심어도 봉황은 오지 않고, 밤중만 일편명월이 빈 가지에 걸렸다고 했는데, 오늘 봉지련은 세자마마를 위해서 씨암탉걸음으로 갸우뚱갸우뚱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이런 염복이 세상 천하에 어디 또 있겠소. 희한한 일이라 하겠소."

"하하하, 과연 참 그렇군. 옛사람들은 벽오동을 심어도 내 심은 탓인지 봉황새가 아니 오는 것을 한탄했는데, 저하께서는 구감역의 말대로 봉황새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과연 기막힌 홍복이시거든."

오입쟁이 구종수와 이오방은 입심 좋게 세자를 치켜세워 떠들어댄다.

"자아, 이제는 그만 떠들어대고 술이나 한 순배씩 돌리기로 합시다."

세자는 봉지련의 손을 잡아 옆에 앉혔다. 보드라운 봉지련의 흰 손이 세자의 손바닥에 닿아졌다. 빈 이외의 여인의 손을 처음 접촉하는 젊은 세자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봉지련의 장심에서는 따뜻하고 촉촉한 땀 기운이 향긋하게 이슬처럼 솟았다. 세자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세자빈의 손에서는 일찍 대해보지 못했던 정취다. 젊은 세자는 봉지련의 손을 곱게 잡고 차마 놓지 못한다.

"술을 따라라."

세자는 봉지련의 장심에서 일어나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촉감에 넋을 잃었다. 손길을 잡고 놓지 않은 채, 술을 따르라는 영을 내린다. 봉지련도 세자가 손바닥으로 정을 보내는 눈치를 살폈다. 향기로운 땀이 촉촉하게 밴 손바닥으로 세자의 손길을 꼭 잡아 감쌌다. 세자는 더한층 황활한 경지에 들었다. 봉지련은 세자의 손에 손을 잡힌 채 속삭였다.

"손을 놓아줍시오. 약주를 따라 올리오리다."

봉지련은 입으로 말하면서 그의 손은 더 한 번 강하게 세자의 손길을 힘차게 잡았다. 젊은 세자는 차마 봉지련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놓을 수가 없다는 것보다도 아찔한 쾌감에 도취된 세자는 그의 손을 놓을 생각조차 못 하는 것이다. 봉지련은 세자의 손을 꼭 잡고 세자는 봉지련의 손을 굳게 쥐었다. 어느덧 정은 홍수같이 남녀의 가슴 속속들이 소용돌이쳐 흘렀다. 새까만 봉지련의 흑수정 눈동자가 세자의 젊은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본다. 애원하는 듯, 하소연하는 듯 가을물 같은 추파는 담뿍 정을 실어 세자의 얼굴로 헤엄질 쳤다. 세자의 어글어글 훤한 눈결이 봉지련의 아름다운 얼굴을 향하여 정을 주어 바라본다. 손과 손은 더 한층 강하게 쥐어졌다.

"손을 풀어줍시오. 약주를 따라 올리오리다."

세자는 약주보다도 봉지련의 손길에서 우러나는 현묘한 촉감에 더 흥취가 있게 되었다.

"술을 따라라. 누가 따르지 말라 하느냐."

세자의 정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눈웃음으로 봉지련의 정을 뿜는 흑수정 같은 눈동자를 삼킬 듯 바라본다. 봉지련의 손바닥과 세자의 장심은 또 한 번 강하게 눌러졌다. 이제는 손가락의 깍지와 깍지가 서로 합쳐졌다. 여인의 장심과 남자의 장심에서는 정염의 불길이 타는 듯 일어났다.

"손을 놓으줍시오. 약주를 따라 올리오리다."

"따르려무나."

그러나 손과 손은 잡힌 채 풀어지지 않는다. 봉지련과 세자의 사랑은 장심에서부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앞에 앉은 구종수와 이오방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천하 난봉인 오입쟁이들이었다. 세자와 봉지련의 손바닥에서 일어나는 정열 파동을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제각기 마음속으로 기생을 처음 대하는 새물청어 세자의 심경을 너끈히 짐작할 수 있었다. 구종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약주는 소인이 따르오리다. 세자마마께서는 흠뻑 재미를 보십쇼."

구종수는 말을 마치자 술병을 들어 세자 앞에 놓인 잔에 약주를 철철 부었다. 이오방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오입쟁이 기질에 그대로 앉아 있기가 근지러웠던 모양이다.

"자아 세자마마, 구감역은 약주를 따라 올렸으니 소인은 거문고를 뜯어 세자마마의 주흥을 돋우오리다."

이오방은 벽에 기대논 거문고를 당기어 무릎 위에 올렸다. 청아한 거문고 소리가 '지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거문고 곡조는 우조로 줄을 달린다. 마치 장사가 말을 타고 푸른 산속으로 뛰닫는 듯하다. 봉지련은 세자한테 손을 잡힌 채 신흥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귀염받는 임한테 손목을 잡히고 신명은 도도하게 일어나는데 어찌할 길 모르겠습니다. 거문고 우조에 맞추어 세자께 노래 한 가락 올리오리다."

봉지련은 말을 마치자 세자를 향하여 상긋 웃는다. 웃는 봉지련의 해당화 같은 불긍ㄴ 입술에 옥 같은 이가 하얗게 드러났다. 마치 화심같이 곱고 예뻤다. 세자의 삼혼칠백은 또 한 번 사라질 듯했다.

"좋지."

소리가 세자의 입에서 미끄러질 듯 나왔다. 봉지련의 붉은 입술은 청아한 맑은 가락을 뿜는다.

'연 심어 실을 뽑아. 노끈 꼬아 걸었다가 사랑이 기울어질 때, 찬찬 감아두오리다. 우리들 마음으로 허락했네, 기울 줄이 있으랴.'

봉지련의 즉흥 가사는 이오방의 거문고 곡조와 어울려 높고 낮게, 맑고 아늑하게, 세자의 초정 안으로 멋지게 흘렀다. 거문고 소리는 뚝 끊어지고 여음은 봉지련의 노래 곡조와 함께 은은하게 메아리를 짓는다. 세자의 신흥은 더한층 높았다.

"좋구나!"

소리가 입안에서 저절로 흘렀다. 봉지련의 부드러운 왼편 손을 잡은 채 한 손으로 술잔을 들어 마시었다. 만 가지 번뇌가 구름 흩어지듯 했다. 어머니의 걱정, 외가의 일, 아버지에 대한 불평, 모두 다 구름이요, 안개였다. 구감역을 바라본다.

"구감역도 한 가락 불러보게나."

세자는 이제는 구감역한테 하게를 해붙였다. 마음이 탁 풀어졌다. 호협한 기상이 떠올랐다.

"그러면 제가 봉지련의 가사르 뒤대보겠습니다."

구종수의 청 좋은 목소리가 떨어진다.

'화작작 범나비 쌍쌍, 양류청청 꾀꼴새 쌍쌍, 나는 짐승기는 버러지 모두 다 쌍쌍이로다. 우리도 새임을 모셔두고 백년 쌍상하리라.'

쌍쌍을 노래하는 사설시조다. 가사가 세자의 마음에 들었다.

"좋구나. 나도 봉지련하고 쌍쌍이 되어보고, 하하하."

세자는 드높게 껄껄 웃었다. 처음 기생을 대하여 수줍어하던 세자는 이제는 제법 파탈이 되었다. 본시 너글너글한 호협한 성격이지만, 오입쟁이 구종수와 이오방과 함께 기생을 앞에 두고 앉았으니 제법 오입쟁이 풍도를 단번에 배우게 되었다.

"나도 노래 한번 불러봄세."

세자는 좌중을 돌아본다.

"좋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여출일구로 대답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세자를 바라보며 노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구종수와 이오방이며, 봉지련은 깜짝 놀란다. 세자가 노래하는 시조는 본격이 평시조다. 어느 틈에 세자가 이러한 본격 시조를 창할 줄 알았나 하고 모두 다 눈이 둥그레졌다. 이오방은 급히 거문고를 무릎에 올려놓고 세자의 노래에 줄을 맞추어 화음을 낸다. 세자의 평시조는 웅장 호쾌한 청을 지어 종장을 마쳤다. 모두 다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세자마마, 다시 뵙겠습니다."

구종수가 치하를 올린다. 봉지련이 세자의 손을 잡은 채 맑은 눈을 반짝 들어 귀여운 웃음을 보낸다.

"세자마마, 이제 뵈오니 글만 잘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조도 잘 부르십니다."

이오방이 감탄하여 아뢴다.

"허허허, 내가 글을 잘 하다니. 밤낮 아바마마께 못된 장난만 한다고 꾸지람만 듣는 나인데, 하하하."

세자는 드높게 껄껄 웃었다.

"아니올시다. 과연 참 잘 하십니다. 시조를 법 있게 부르십니다. 누구한테 배우셨습니까?"

거문고의 명수 이오방이 또 묻는다.

"배우긴 무엇을 배웠겠나. 그저 모임이 있을 때 들은 풍월일세. '당구삼년 폐풍월'이라고, 중국으로 사신이 되어 가기도 하고 외국 사신이 오면 연회에도 나가보았으니, 일부러 배우지 말라 해도 저절로 알아진 것일세."

"과연 세자께서는 하늘이 내신 자질이십니다. 글을 잘하시며 글씨를 잘 쓰시며 노래를 잘 부르셔 참말 삼절이십니다."

오입쟁이 구종수는 또 한 번 찬사를 올리나.ㄷ 세자는 봉지련을 시켜서 구종수와 이오방에게 순배를 돌리라 했다. 비로소 세자의 손과 봉지련의 손은 풀어졌다. 세자의 흥미는 술보다, 노래보다 아름답고 어린 기생 봉지련한테 있었다. 일찍이 세상에 출생한 이후 처음으로 세자빈을 맞이해서 여자를 알았다. 그러나 오늘 밤 봉지련을 대하고보니 비로소 진짜 여자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세자빈은 정숙하고 품위는 있으나 너무나 점잖다. 그의 표정은 너무 평범했다. 의젓하고 법도는 있었으나 웃는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비록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장중한 빈의 태도를 취하느라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은 양해할 수 있었으나 단둘이 누워 있는 침실안에서도 빈은 웃는 일이 없었다. 웃음만이 아니었다. 말소리조차 멋이 없었다. 더구나 간드러진 말솜씨와 나긋나긋한 여자의 교태라고는 약에 쓸래야 구할 길이 없었다. 유학하는 선비 출신의 집안에서 자라난 빈의 교양은 근엄 두 글자로 빈의 온몸을 석고상으로 조형시켜 놓았을 뿐이었다. 이같이 근엄한 빈만 보던 눈에 봉지련의 자태와 행동은 마침내 그의 눈을 황홀한 경지로 이끌었다. 눈이 황홀한 뿐 아니었다. 삼혼칠백이 그대로 봉지련의 아름다운 교태 속으로 녹아 들었다. 세자는 이제 봉지련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었다. 나이는 어렸으나 남자 다룰 줄 아는 봉지련이다. 봉지련은 상긋 웃으며 세자께 아뢴다.

"노래도 부르시고 시조도 부르셨으니 소인이 다시 세자마마의 주홍을 돕겠습니다."

마음이 어리면 모든 것이 다 어려지는 것이다. 남녀 사이에 바람을 일으키는 첫 서곡이었다. 세자의 귀에는 봉지련의 도란도란 아뢰는 소리가 마치 옥소반에 구슬을 굴리는 소리같이 들렸다. 말소리뿐이 아니었다. 말하는 아름다운 붉은 입술 사이에서는 향긋한 향훈이 입김과 함께 뿜어지는 듯했다. 세자는 교태를 지어 묻는 봉지련의 말에 입이 벙긋 벌여졌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봉지련은 거문고를 당겼다. '둥당, 디둥당', 거문고 줄을 골라본다. 시험해보는 줄 고르는 음향은 노래 곡조는 아니건만 도리어 맑은 흉을 일으켰다. 봉지련의 거문고 곡조는 본 곡조로 들어섰다. 계면조였다. 슬픈 듯 원망하는 듯 하소연하는 듯 사람의 마음을 무한한 애수 속으로 녹아 흐르게 했다. 오입쟁이 구종수는 봉지련의 수단 높은 거문고 소리를 듣자, 신명이 다시 도도하게 일어났다. 거문고 곡조에 따라 노래를 부른다.

'가다가 울지라고 오다가는 가지 마소, 밉다가 괼지라도 괴다가는 밉지 마소. 밉거나 괴거나 간에 자고나 갈까.'

노랫소리는 봉지련의 신명을 더욱 돋우어주었다. 봉지련은 어깨를 으쓱으쓱 멋드러지게 으쓱대면서 거문고 줄 위로 아름다운 흰 손을 달린다. 마치 흰 엿가락이 줄 위로 달리는 듯했다. 나중에는 두어 쌍 휜 나비가 칠현금 거문고 줄 위로 펄펄 나는 듯했다. 거문고 주조는 더한층 처량하게 하소연하는 듯했다. 동짓달 흰 눈이 퍼득퍼득 함박같이 거문고 줄 위로 쏟아지는 듯했다. 구종수의 노랫가락은 봉지련을 위해서 부른 소리다. 세자께 봉지련을 사랑해서 버리지 말아 달라는 깊은 뜻을 함축성 있게 표현한 노래다. 가다가 돌아설지라도 오다가는 가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미워하다가 귀여워해 줄지언정, 귀여워하다가 미워하지는 말라는 부탁이다. 그리하여 밉거나 귀여워하고 간에 한 번 자고가 가달라는 깊은 뜻이 있는 노래다. 이오방도 봉지련도 세자도 모두 다 구종수의 노래하는 뜻을 알았다.

"좋지, 좋지."

이오방이 은저를 들어 교자상 번죽을 친다.

"과연 명수들이로군."

세자도 한 마디했다. 구종수가 노래를 그치자 약주 한 잔을 가득 부어 세자께 올리며 묻는다.

"황송하오나 세자께 아뢰옵니다. 지금 봉지련이 거문고를 탄 곡조를 짐작하시겠습니까?"

"계면조 같구먼.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떠한가, 내가 설마 모르지나 아니했나."

구종수는 입이 딱 벌어진다.

"세자마마께서는 음률에도 정통하십니다."

"정통이라니, 말이 되나. 그저, 궁중 연회 때 들어보아서 약간 짐작할 뿐일세."

"다시 세자께 아뢰옵니다. 아까, 소인이 부른 사설을 다 들어 계시오니까?"

"정든 님 보고 버리지 말라고 하소연하는 가사가 아닌가. 시조 사연이 점잖게 되었었네. 자네가 즉흥으로 부른 시존가?"

"아니올시다. 고시조올시다. 세자마마, 봉지련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자는 나이에 비하여 숙성한 웃음을 껄걸 웃었다.

"하하하, 내가 언제 봉지련과 친했어야 말이지. 오늘 밤에 처음 보았는데, 언제 정분이 들었다고, 버리고 괴고 할 여유가 있나, 허허허."

놀이는 깨가 쏟아지는 듯 재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밤은 점점 깊어 들었다. 춘방사령은 밖에서 큰일이라 생각했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데, 일어날 생각들을 아니한다. 아무래도 기생 봉지련을 제집으로 돌려보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동궁 처소에서 기생을 자게 할 수는 없다. 자지 아니하고 간다 해도 자정이 지나기만 하면 순라한테 잡히기 십상팔구다. 어디서 놀다가 돌아가느냐고 묻는 경우에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큰 염려다. 춘방사령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사령청에서 상전 사랑으로 뛰어올랐다. 아까까지도 세자의 명령으로 파탈하고 한자리에서 술을 마시었던 춘방사령이었으나 법도는 차려야 했다. 창밖에서 툇마루 판을 두 손으로 짚고 방문편으로 향하여 아뢴다.

"소인 명보, 세자마마께 아뢰오. 이제는 철상을 좀 하셔야겠습니다. 자정이 가까웠습니다. 황송하오나 미진하신 재미는 내일 또 보시기로 하시고 오늘 밤은 그만 철상을 하옵소서."

세자는 한창 흥이 도도해서 봉지련의 손을 잡고 구종수, 이오방 두 오입쟁이들과 함께 거문고릍 타고 가사를 부르고 있을 때 돌연 창 밖에서 춘방사령의 놀이를 파하라는 권고를 듣고 보니 화증이 버썩 일어났다. 세자는 번연히 춘방사령 명보의 목소리를 짐작하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큰 소리로 묻는다.

"누구냐, 창밖에서 지껄이는 놈이."

"춘방사령 명보올시다."

"왜 그러느냐?"

화증 난 세자의 소리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밤이 이제 깊었습니다. 파연곡을 아뢰셔야겠습니다."

"나도 낮인지 밤인지, 해가 뜨고 달이 기우는 것쯤은 구별할 줄 안다. 과히 염려하지 마라."

"염려하지 아니올시다. 지금 자정 때가 되었습니다. 인경만 치고 나면 꼼짝달싹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꼼짝달싹을 할 수 없단 말이냐?"

"구감역도 그렇고 이악공도 그렇습니다. 그런 중에도 봉지련이는 더한층 탈이올시다."

"?"

"순라꾼에게 잡혀서 포청으로 잡혀가든지, 순청으로 끌려가면 큰 탈이 아니오니까. 문초 끝에 동궁에서 놀다가 간다고 했다가는 벼락이 떨어집니다. 큰일이올시다."

춘방사령 명보가 늘어놓는 말을 듣자 세자는 별안간 호협하게 껄걸 웃었다.

"하하하"

허리가 끊어지도옥 웃음 가락은 계속된다. 춘방사령 명보는 창밖에서 골이 났다.

"세자마마, 공연히 웃으실 일이 아니올시다."

세자는 더 한 번 가락 높게 웃었다. 큰 소리로 춘방사령 명보를 불렀다.

"명보야, 밖에서 떠들지 말고 이리 들어오너라."

춘방사령은 밖에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못 들어갑니다. 시각이 없습니다. 어서 철상을 합시오."

세자는 건달 구종수에게 눈짓을 한다.

"구감역, 명보를 데리고 들어오게나."

구종수는 세자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미닫이를 열고 문밖으로 나갔다.

"명보, 올라오게."

"아니 된 대도 그리하오. 지금 시각을 보오. 노닥거리고 앉아 있을 때가 못되오."

"그래도 올라와야지 어찌하나. 세자마마의 마음을 역하게 만들어서는 아니 되네."

"좀 거슬려도 좋소. 화를 면해야 하지 않겠소."

구종수는 명보의 손을 끌며 말한다.

"설마 화까지야 당하겠나. 얼른 끝을 내려면 자네가 잠시 올라와서 자리를 수습해야겠네. 세자마마께서는 나한테 눈짓을 하시고 자네를 부르라 하셨네. 아무리 해도 자네가 잠깐 올라와야 하겠네."

명보는 마음이 타는 듯 초초했다. 밖에서 공송하는 것보다 들어가 과연시키는 일이 첩경이라 생각했다. 못 이기는 체 구종수의 끌어당기는 팔뚝에 반은 매달리고 반은 다리에 힘을 주어 대청으로 올랐다. 곧 바반이 낭자한 방으로 들어섰다.

"게 좀 앉거라."

세자는 명을 내렸다. 춘방사령은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시늉을 한다. 몸뚱이 반은 발꿈치로 엉덩판을 괴고, 허리는 빳빳하게 펴서 주안상 앞에 앉은 세자를 바라본다. 얼굴엔 걱정하는 빛이 먹장 갈아 분 듯 어렸다.

"앉기는 앉았습니다마는 이러실 때는 아니올시다. 어서 파장을 하십쇼. 봉지련도 제집으로 보내시고 구감역과 이악공도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리 서두르느냐."

세자는 배포 유하게 느릿느릿 대답한다.

"서두르지 않게 되었습니까.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럽쇼. 자정이 되었습니다. 순라한테 잡히면 큰일이올시다. 기생이 동궁에서 놀다가 잡혔다는 소문만 나면 헌부가 알고 간원이 알 것입니다. 상소질을 제각기 할 테닌 상감마마의 귀에 들어가기만 해보십쇼. 명보 놈은 벼락을 맞아 생죽음을 합니다. 명보뿐이오니까. 구감역, 이악공, 봉지련이 다 생벼락을 맞게 됩니다. 그리하옵고 세자마마의 꼴은 어찌 되십니까."

"이놈아, 꼴이 뭐냐."

세자는 얼근히 취한 눈을 들어 큰소리로 한 번 호통을 친다. 그러나 얼굴에는 미소가 흘렀다.

"무심코 나왔습니다. 모양으로 고쳐 아뢰겠습니다."

"이놈아, 꼴이나 모양이나 매한가지가 아니냐., 문자를 쓰면 좋은 말이 되고 육두 말을 쓰면 나쁜 줄 아느냐."

"그럼, 체면으로 고쳐 아뢰겠습니다."

"체면도 문자다."

"그럼, 얼굴이라 하겠습니다."

"얼굴, 그렇지. 세자의 얼굴이 어찌 되겠느냐. 하하하, 내 마음에 매우 든다."

세자는 일부러 엿가래 늘이듯 파장을 하는 시각을 늦추어보는 것이다.

"세자마마, 체면이구, 얼굴이구, 꼴이구 그만 다 두시고 봉지련을 돌려보내십쇼."

"걱정하지 마라. 순라한테 아니 잡히게 할 도리가 있다."

"어떻게 하시려고 그리하십니까."

"봉지련이를 내보내지 아니하면 그만 아니냐."

"내보내지 아니하시다니, 어찌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이곳에서 놀며 밤을 밝히면 그만 아니겠느냐" 앨써 날은 찬데 나갔다가 순라한테 잡히는 것보다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 구감역도 그렇고, 이오방도 매한가지다. 공연스레 순라한테 잡힐 걱정하지 말고, 아주 밤을 도와 놀기로 하자꾸나."

춘방사령 명보는 깜짝 소스라쳐 놀란다.

"아니되옵니다."

"무엇이 아니될 것 있느냐. 그렇게 하기로 하자. 봉지련아 어떠냐, 내 말이 옳지? 공연히 초조하게 가다가 순라한테 잡혀서 이러니저러니 하고 욕을 당하는 것보다 마음 놓고 편안히 놀다가 내일 날이 밝은 후에 네 집으로 천천히 가는 것이 아마 제일가는 상책일 게다."

세자의 말을 듣자 봉지련은 대답 없이 까만 눈을 반짝였다. 세자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지 아니한가, 구감역. 구감역도 이악공도 함께 있기로 하세. 그리고 두 분은 고단하거든 아랫사랑으로 내려가서 명보하고 이야기나 하다가 눈을 붙이고 - 어때, 좋지 아니한가."

구종수와 이오방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세자의 편도 들 수 없고 춘방사령의 편도 들기 어려웠다.

"봉지련은 어떻게 하시고요?"

춘방사령 명보가 묻는다.

"나하고 단둘이 술을 더 마시다가 고단하면 술상 앞에 쓰러지지. 이것도 오입쟁이의 기막힌 멋이다. 봉지련아, 어떠하냐."

봉지련은 살짝 쓴웃음을 웃으며 대답이 없다.

"아니 됩니다. 큰일 납니다."

"왜 큰일 난단 말이냐. 순라가 동궁까지 뛰어들어 겁이 나느냐."

"순라가 어찌 동궁으로 뛰어 들어오겠습니까마는 다른 큰일 날 일이 있습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올시다."

"하하하, 시러베아들놈, 너는 큰일 날 일도 하도 많구나.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하니 말을 좀 해보아라. 어디 쫌 들어보자구나."

"첫째로 봉지련을 이곳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때 판교를 태우지 아니하고 치마를 씌워서 들여왔습니다. 그래서 수문장이 누구냐고 묻기에, 동궁빈마마의 일가 되시는 분이라고 외수전갈을 해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래 수문장이 그리 무섭더란 말이냐. 쓸개 빠진 놈이로구나."

세자는 어디까지나 유들유들 농조다. 춘방사령 명보는 지지 않고 대거리해 아뢴다.

"소인 놈이 쓸개가 빠진 것이 아니오라 세상 주위 형편이 쓸개가 빠지도록 만들어줍니다. 동궁마마께서는 동궁 수문장을 우습게 보십니다마는 소인한테는 대국 천자보다도 더 높도록 보입니다. 수문장한테 한번 걸려들면 단박 곤장이 아니면 능장대로 경을 치게 됩니다. 뿐만 아니올시다. 소인이 기생을 데려다가 동궁마마께 바쳤다고 수문장이 어영대장한테 한번 고하기만 하는 날엔 소인의 목은 비거석양풍이올시다."

"하하하, 그럴 법한 소리다. 그러하니 공연스레 봉지련을 한밤중에 내보냈다 수문장 눈에 띄게 하지 말고 잠자코 초정 안에서 밤을 지내는 것이 제일 상책이다."

"그래도 아니될 일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무슨 일이란 말이냐?"

"수문장을 속이고 봉지련을 데리고 올 때, 안팎 손뼉이 어우러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치마 쓴 봉지련을 안마당에 세워두고, 빈마마께 연통을 드렸습니다. 빈마마의 친정댁에서 오신 일가 어른이라 해놓고, 나중에 수문장이 안으로 졸아치를 들여보내서 '그런 일이 있습니까' 하고 알아볼 경우, 빈마마께서는 그런 일이 없노라고 대답하신다면 이것은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빈마마께 아주 터놓고 아뢰었습니다. 지금 세자마마께오서 구감역과 이악공을 불러놓고 약주를 젓수시며 즐겨 노시는 판인데, 기생을 불러오라 하시어 하는 수 없이 불러왔습니다마는 수문장의 눈을 피하느라고 치마를 씌워 왔습니다 하고, 진상을 아뢰었습니다."

명보의 고하는 말을 듣자 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보는 다시 말을 잇는다.

"참으로 빈마마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소인이 봉저련을 친정댁 사람이라고 외수전갈을 했단 말씀을 들으시고도 조금도 노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뿐만 아니오라 세자마마를 위하시어 모든 일을 통촉해 줍소사 하고 아뢰었더니 미소하시어 허락하시는 표정을 내리셨습니다. 얼마나 정숙하시고 다정하시고 동궁마마를 아끼시는 빈마마시오니까. 소인은 그때 빈마마의 허락하시는 그 표정을 뵙고 두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습니다.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데 시앗까지는 아니 갑니다마는 어디 아낙네들이 남편이 기생 데리고 노는 것을 좋아합니까. 참말 동궁빈마마께서는 성인이십니다. 관음보살 같으신 분이올시다."

"그런데 무엇이 아니 된단 말이냐."

"마마, 동궁마마, 그저 생각해 보십쇼. 그렇도록 마음을 써주시는 빈마마께 미안하지 아니하십니까. 기생을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밤을 지내신다면 빈마마께서 의심을 하실 것이 아닙니까. 이런 착하신 분의 어지신 마음을 보답해드리지는 못할망정 마음을 불안케 하시도록 해서야 쓰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나중에 빈마마한테 말을 잘할 테니 그 점만은 과히 걱정 말아도 좋다. 자아, 하도 지껄였으니 목도 마르겠다. 그만해 두고 술이나 한잔 마시어라."

세자는 친히 사발에 술을 부어 명보한테 권했다. 춘방사령 명보는 아닌 게 아니라 밤이 깊으니 으스스했다. 목도 컬컬했다.

"이거 황송합니다."

한마디 한 후에 사발을 들고 몸을 돌려 단숨에 꿀떡꿀떡 목청에서 소리가 나도록 죽 들이켰다.

"마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래가 바닷물을 켜듯 하는구나."

세자는 빙긋 웃으며 명보의 주량을 칭찬했다.

"흐흐흐, 한 동이 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갑니다."

명보는 막걸리 마시던 버릇으로 손바닥을 번쩍 들어 약주 마시던 입을 씻는다. 거치적거리는 수염을 닦는 것이다.

"세자마마, 또 한 가지 큰일이 있습니다."

명보는 안주도 집지 아니하고 세자를 바라보며 아뢴다.

"하하하, 네 큰일을 다 털어놓고 말해보아라."

"세자께서 동궁에 기생을 불러들여서 밤을 도와 노셨다는 소문이 대내로 들어가서 대전마마께 들리는 날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자마마께서는 장래의 상감마마이십니다. 장래를 생각하시는 대전마마께서 어찌하시겠습니까. 큰일이올시다. 생각해보십쇼."

세자는 껄껄 웃는다.

"이놈아, 명보야. 네가 단숨에 막걸리 한 초롱을 마신다기에 술보처럼 마음보도 제법 크고 넓은 줄 알았더니 아주 밴댕이 소갈머리로구나. 바싹 달라붙었다. 얘 명보야, 말 듣거라. 우리 아버지도 보통 오입쟁이가 아니시다. 기생을 데리고 놀 줄도 아시고, 기생을 데리고 침소에 들 줄도 아시고, 기생첩을 가져보실 줄도 아시고, 기생 몸에서 아기도 낳아보았다. 내가 기생을 잠간 데리고 놀았기로서니 이해하지 못할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다. 그리고 명보 또 듣거라.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지 아니하냐. 꼭두물이 흘러서 발뒤꿈치까지 적시는 법이다. 문자를 써서 말하자면 내가 기생을 데리고 노는 것도 용생룡 봉생봉 하는 인간 세상의 멋진 풍류니라. 과히 염려하지 말아라. 하하하."

세자는 얼근히 취한 눈을 들어 춘방사령을 바라보며 멋진 대답을 했다. 구종수가 변죽을 친다.

"그렇습니다. 대전마마께서도 강계 기생을 따돌려서 후궁을 삼으셨습니다. 이쯤 되시면 색계 사정도 다 짐작하실 것입니다. 세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오입쟁이 구종수는 슬며시 세자의 비위를 맞춘다. 새침하고 얌전한 체하던 이오방이 지지 않고 한마디 한다.

"자고로 영웅은 호색이라 했습니다. 영웅 쳐 놓고 색을 탐하지 아니한 이가 어디 있습니까. 음아질타에 천 사람이 놀라서 골패짝 쓰러지게 했던, 역발산기개세 했던 초패왕도 우미인 같은 아름다운 미희를 가졌습니다. 세자마마의 호색은 영웅의 기상이올시다."

악공 이오방도 슬며시 첨을 올린다. 춘방사령 명보는 기가 막혔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뉘가 더 밉다는 격으로 오입쟁이 구종수와 악공 이오방이 세자의 편을 슬쩍 들고 있으니 기가 찼다.

"이거, 왜들 이러시오. 구감역과 이악공은 한술 더 뜨시는구려. 나는 모르겠소."

구종수와 이오방은 단순하게 세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영웅 호색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자정은 이미 박두했다. 동궁에서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자정 전에 가기는 틀린 노릇이다. 가다가 순라한테 잡히기가 십상팔구다. 고지식하게 돌아가라 하는 춘방사령의 뜻도 짐작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순라한테 잡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동궁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새벽 일찍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영웅 호색론을 슬며시 이야기해본 것이다. 춘방사령 명보는 기가 차서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었지만, 세자의 비위에는 두 사람의 호색론이 바싹 당겼다.

"그렇다마다, 영웅은 자고로 호색하였으니, 왜 그런고 하니, 정력이 절륜한 사람이라야 영웅이 될 수 있거든. 또한 영웅은 정력이 절륜하니까 자연 호색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세자는 너털웃음을 웃어가며 구종수와 이오방을 바라본다. 옆에 있던 봉지련도 말은 아니 했으나 흰 이를 입술 사이로 드러내면서 생긋 웃는다. 마치 명사십리 해변가에 해당화 꽃판이 방싯 꽃술을 머금어 웃는 듯했다. 세자의 몽롱하게 취한 눈이 봉지련의 예쁜 웃음을 놓치지 아니했다.

"묘하다. 예쁜게 웃는구나. 너도 '영웅호색'이란 문자를 아느냐. 고것 묘한걸-."

세자는 봉지련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세자는 나이보다 모든 것이 숙성했다. 더구나 고국을 떠나서 중국까지 다녀온 후에 의사가 넓어지고 행동이 숙성했다. 이때 인정소리가 종로 종각으로부터 은은히 들려왔다. 자정을 알리는 소리다. 춘방사령의 주장은 다 틀려버렸다.

"하는 수 없소이다. 다들 둥궁에서 주무시오. 봉지련, 너도 자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뒷일은 나도 모르겠다."

춘방사령은 쾌자 자락을 휘날리며 껑충껑충 밖으로 뛰어나갔다.

"게 섰거라. 한 잔 더 마시고 나가거라."

세자는 손짓해 춘방사령을 불렀다. 춘방사령은 고개를 체머리 흔들 듯 가로 흔들고 달아난다.

"소인은 물러갑니다. 뒷일은 모르겠습니다."

춘방사령이 나간 후에 배반은 물려지고 구종수와 이오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인들은 물러가겠습니다."

"어디로 물러간단 말이냐?"

세자는 취안을 게슴츠레 뜨고 물어본다.

"바깥사랑으로 물러가서 눈을 좀 붙이겠습니다."

"한 잔 더 마시지 아니하려나?"

세자는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황송하오이다. 이제 주량이 꽉 차서 더 마실 수 없습니다. 세자마마, 용서해주십쇼."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간다. 이때 봉지련도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서 나가는 구종수를 불렀다.

"구감역 나리, 소인도 물러가겠습니다."

갈 맘이 없는 봉지련이건만 면을 차려 한번 해보는 수작이었다. 세자는 몽롱했던 취한 눈이 번쩍 떠졌다.

"어디로 간단 말이냐?"

"두 분 나리를 따라서 바깥사랑으로 나가겠습니다."

봉지련은 발길을 옮기는 듯 세자를 돌아보며 상긋 웃는다. 아리따운 고혹의 웃음이다. 세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봉지련의 손목을 잡았다.

"아니 된다. 어찌 바깥사랑으로 나가겠느냐. 목로방 같은 홀아비들만 모인 방이다."

이때 오입쟁이 구종수는 봉지련에게 슬며시 눈짓을 했다. 못 이기는 체 주저앉으라는 뜻이다. 이번엔 이오방이 봉지련을 향하여 한마디 한다.

"자네는 여기서 세자마마를 모시고 놀게나. 도리 없네. 바깥사랑은 춘방사령 명보를 위시하여 못 홀아비들이 들끓고 있는 곳일세. 여기다가 구감역과 내가 나가니 방이 비좁아서 아니 되겠네."

이오방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구종수도 한마디 한다.

"그렇게 하게, 도리가 없네."

봉지련은 세자한테 손목을 잡힌 채 더 나가지 아니했다. 건달패 구종수와 이오방의 신발 소리는 점점 멀리 사라졌다. 동궁 사랑방에는 홋홋하게 세자와 봉지련 두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봉지련은 나이 어리나 남자를 몇 번 겪어본 기생이었다. 제법 교태를 부릴 줄 알았다.

"고단하십죠. 세자마마, 좀 누십쇼."

봉지련은 세자를 푹신한 보료 위에 편안히 눕혔다. 옥 귀개를 머리 쪽에서 뽑았다. 한 점 불이 밝은 옥등잔의 새발 심지를 낮추었다. 불빛은 가물가물 미광으로 변했다. 은은한 불빛 아래 비쳐지는 봉지련의 얼굴은 세자의 눈에 더한층 아름답게 보였다.

"너도 고단하겠다. 좀 누워보렴."

"저는 고단하지 아니합니다."

"앉아서 밤을 새우려느냐."

"뜬눈으로 밤을 새워도 좋습니다."

봉지련은 해쭉 오목볼을 지어 소리 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세자도 이미 장가를 들어 여인의 비밀한 별천지를 짐작했다. 은은한 옥등잔 아래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봉지련의 아름다운 자태는 소박한 세자빈에 견줄 바가 아니다. 볼수록 곱다.

'뜬눈으로 밤을 새워도 좋습니다.'

계집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마치 금소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음향이었다.

"어째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도 좋으냐."

"소녀로서는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복된 기회올시다. 백 년도 못살 위인이 천 년에 한 번 있을 기회를 만났으니 어찌 차마 잠이 오겠습니까."

봉지련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속삭였다.

"천 년에 한 번 있을가 말가 한 기회라니?"

세자는 누운 채 옆에서 소곤거리는 봉지련의 따스한 손을 잡고 묻는다.

"천한 몸이 어찌 금지옥엽이신 세자마마를 지척에 모실 수 있으리까. 그러하니, 천년 세월에도 있을 둥 말 둥한 영광의 밤이 아니오니까. 세자마마, 그렇지 아니합니까?"

봉지련은 고개를 숙였다. 세자의 귀뿌리에 입을 대고 소곤소곤 아뢴다. 간지러운 향어가 세자의 귓바퀴를 따스하게 녹여준다. 세자의 감정은 혼연히 더운 열풍을 일으켰다. 일찍이 세자빈한테서 느끼고 보지 못했던 유열의 세계가 눈앞에 벌어지면서 온몸에 무한한 쾌감이 엄습했다. 황홀한 법열의 세계다. 세자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운 채 팔을 늘여 봉지련을 껴안았다. 남치맛자락에 휘싸인 봉지련의 탄력 있는 육체는 향산이 뭉그러지는 듯 세자의 당기는 팔 안으로 뭉그러져 쓰러졌다. 세자의 마음은 둥둥 하늘 위로 떴다. 강하게 봉지련을 껴안아 본다. 봉지련의 몸 내음이 강렬하게 세자의 코를 진하게 자극시켰다. 역시 세자빈한테서 얻어보지 못했던 고혹적인 몸내음이다. 봉지련의 육체에서 솟아나는 향기는 마치 칠팔월에 무르녹게 익어서 터진 여주의 간덩이 같은 붉은 정취다. 세자의 코는 봉지련의 코로 향해서 차츰차츰 다가졌다. 쌔근거리는 봉지련의 따뜻한 세자의 콧등에 간지럽고 부드러운 감촉을 주었다. 마침내 세자의 입술은 봉지련의 입술로 다가졌다. 봉지련은 받는 편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입술로 향하여 들어오는 세자의 입술을 흠빨고 감빨았다. 세자의 미각은 달고 향기 짙은 봉이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황홀한 멋이었다. 역시 세자빈한테서는 얻을 수 없었던 풍윤한 과즙이었다. 세자는 완전히 환희불의 즐거운 감정으로 휩쓸렸다. 세자는 푸른 봄이었다. 남자와 여자와의 즐거움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여태까지 세자빈 김씨와의 부부관계는 너무나 점잖았다. 반 넘어 허식이었다. 행세였다. 체면만 차리는 가면이었다. 젊은 세자는 비로소 남녀세계의 멋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별안간 남년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스스로 기뻐했다. 세자는 대견했다. 봉지련의 가는 허리에 팔을 감았다.

"너도 누워보련."

봉지련은 세자의 분부를 거절하지 아니했다. 아까 편안히 세자의 머리를 괴어드렸던 길고 긴 봉황 베개 한 모퉁이에 흑공단빛 검은 머리를 얹었다. 세자의 백설같이 흰 명주바지 위로 봉지련의 남치마 한 자락이 멋지게 걸쳐졌다. 세자는 더한층 느긋한 즐거움을 느껴본다.

"지련아."

세자는 흥에 겨웠다. 멋에 겨웠다. 봉지련의 봉자를 떼어버리고 '지련아'하고 불러보았다. 봉지련은 영리한 계집이었다. 멋에 겨워서 봉자를 떼어놓고 '지련아' 부르는 젊은 세자의 심정을 잘 알아차렸다. 지체하지 아니했다. 얼른,

"."

하고 대답했다.

"네 나이 몇 살이지?"

봉지련은 나이를 얼른 대답하고 싶지 아니했다.

"세자마마보다 어립니다."

"몇 살인 것을 물어보았지, 나이 어린 것을 물어본 것은 아니다."

"마마께서 알아맞혀 보옵소서."

"열일곱 살이냐?"

봉지련은 스무 살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자들의 나이 적은 것을 좋아하는 것을 봉지련은 깜찍하게 잘 알고 있었다.

"세자마마께서는 용하시기도 하시네. 어쩌면 그같이 귀신처럼 잘 맞히십니까."

세자는 봉지련을 열일곱 살이라고 단정했다.

", 나하고 살려느냐?"

"세자마마께서 저 같은 미천한 기생년을 거두어주시겠습니까?"

봉지련은 세자의 품 안에서 소곤댔다.

"네가 싫다고만 아니한다면."

"소인이 어찌 감히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세자마마께서 앞으로 헌신짝

버리듯 저를 버리지만 아니하신다면."

"너같이 고운 것을 버릴 리가 있느냐. 진신으로 너를 괴어주마."

"황감하여이다."

"네 어미가 있느냐?"

"어미도 있고 아비도 있습니다."

"네 몸을 장악원에서 떼어서 동궁으로 오게 하고, 네 어미와 아비의 식략은 동궁에서 대어주기로 하리라."

"세자마마, 두굿기옵니다."

세자와 봉지련의 밀어는 아늑한 동궁 사랑방 옥등잔 아래 수를 누볐다. 마침내 세자는 이날 밤에 봉지련과 연을 맺었다. 동이 환하게 터졌다. 바깥사랑에서는 구종수와 이오방이 춘방사령과 작별한 후에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고, 춘방사령은 봉지련이 동궁에서 세자와 함께 잔 일이 세상에 알려질까 하여 안절부절을 못하며 안팎으로 드나들었다. 춘방사령 명보는 먼저 안마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세자빈의 동정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세자빈이 아무리 현숙하다 하지만 봉지련을 데려올 때 다만 주흥을 돕기 위해서 사랑놀음으로 불러온 것이지, 세자하고 사랑방에서 살을 섞어서 잠자리가지 하라고 데려온 것은 아니다. 만약 세자빈이 아직까지 봉지련이 사랑방에서 세자의 품에 안겨서 자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큰 거조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세바진이 한번 떠들어댄다면 소문은 동궁 전체에 자자하게 퍼질 것이고 수문장의 구에도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수문장이 자기의 거짓말한 것을 한바탕 쉬죄할 것은 둘째 문제요, 책임상 그는 직속상관인 어영대장한테로 보고를 해야만 할 것이다. 어영대장이 세자가 기생을 데리고 잤다는 사실을 아는 날 그는 또한 상감한테 좋거나 싫거나 세자의 사실을 아뢰야만 하게 되었다. 상감까지 이 일을 알게 되는 날 그중 먼저 죄를 당할 사람은 춘방사령인 명보 자신이었다. 명보는 마치 바늘방석을 갈고 앉은 듯한 심정이었다. 누구한테 시원히 말도 할 수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좌불안석을 하면서 안팎으로 드나들었다. 명보는 안마당으로 들어가보니 예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시녀들이 하나씩 둘씩 세수도 하고 빨래도 했다. 집을 치는 궁녀에, 물을 긷는 궁녀에 제각기 맡은 일을 하기에 분주했다. 세자빈이 거처하는 대청마루와 침실은 더한층 조용했다. 마침 세자빈을 모시고 있는 우두머리 시녀가 세수를 할 양으로 대청에서 신을 신고 우물가로 내려섰다. 춘방사령 명보는 세자빈의 동정을 살펴볼 절호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여보 수규, 밤 사이 태평했소?"

명보는 동궁빈의 측근 시녀한테 아침 인사를 했다. 수규란 동궁 소속인 최고 시녀의 명칭이다. 상감과 왕비 앞에 상궁이 있어서 거행하듯 수규와 수칙 이란 직명을 가진 시녀가 세자궁에서 거행하는 가장 지위 높은 측근 시녀들이었다. 수규는 춘방사령 명보의 인사를 받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오라버니요, 안녕히 주무셨소. 일찍 일어나셨구려."

"내야 새벽부터 돌아다니는 책임을 가졌으니 일찍 일어나지 않고 어찌하겠소. 빈마마께서도 안녕히 주무셨소?"

수규는 명랑하게 대답한다.

"안녕히 주무셨습니다."

"어젯밤 늦도록 세자마마께서 풍각쟁이들을 불러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게 하시면서 약주를 젓수시었는데, 꾸지람이나 하시지 아니하십디까?"

"꾸지람이 다 무어요. 벙긋벙긋 웃으시면서, 세자마마께서 밤낮 우울해하시더니 오늘따라 저렇듯 활돨하게 노시니 내 마음도 밝고나 하시고, 어서 내오라시는 대로 약주와 안주를 내다 드려라 하셨습니다."

명보는 입이 떡 벌어진다. 한 걸음 바싹 수규 앞으로 가까이 갔다. 목소리를 낮추어 다정하게 묻는다.

"그런데, 여보 누님, 그 기생이 있지 아니하오. 수문장의 눈을 피하여 데려온 기생 말요. 그애가 청을 높여 노래할 때 빈마마의 귀에도 여창 지름소리가 들어갔을 텐데 혹시나 무어라고 꾸지람을 아니하십디까?"

"꾸지람이 무엇입니까, 앞으로는 저런 기생도 가끔 오게 해서 세자마마의 우울하신 마음을 풀어드렸으면 좋겠다 하시고 나한테 미소까지 보내셨소. 꾸지람이 무슨 꾸지람요. 좋아하셨습니다."

"참말 빈마마께서는 너무나 변태로 너그러운 분이구려."

"오라버니도 그런 무례한 말씀 하지 마시오. 변태라니 말이 되어. 우리 빈마마께서는 지성이십니다. 다만 세자마마의 마음과 몸이 안태하시기만 하루같이 축수 발원이십니다. 왜 오빠도 짐작하시지 않소. 밤마다 북두칠성과 남두칠성을 향하여 옥수를 바치시면서 세자마마의 수명장수와 일신의 안태를 빌고 축원하십니다. 가례를 치르시고 동궁으로 들어오시던 날 그 밤부터 오늘까지 빈마마께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날이 궂으나 하루도 궐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참말로 요조숙녀시죠."

"과연 본받을 만한 분이시지."

"빈마마께서는 항상 세자마마의 큰 덕을 생각하시고 그같이 마음을 쓰시나 봅디다."

명보도 짐작할 만한 소리였다. 그러나 한번 시치미 떼고 묻는다.

"무슨 덕?"

"명나라 공주와 혼인한다는 바람에 거의 파혼이 되다시피 한 혼인을 세자께서 직접 나서서 대전마마께 강경하게 아뢴 때문, 빈마마께서는 비로소 진짜 동궁빈이 되신 것 아닙니까."

", 참 알겠소. 그럴 법한 일이죠."

춘방사령 명보는 천만다행이라고 한숨을 한 번 크게 쉬면서 휘적휘적 세자가 거처하는 큰사랑으로 향했다. 마당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사랑방에는 덧문이 첩첩이 닫혀 있었다. 춘방사령 명보는 슬며시 시기하는 마음이 약간 일어났다. 그러나 그 마음보다도 소문 없이 봉지련을 다시 제집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곱게 돌려보내나 하고 괴석 앞 화단에 걸터앉아 한동안 궁리를 했다. 해는 점점 높았다. 세자방 동창 덧문 창살에 햇빛이 쨍하게 비쳤건만 세자와 봉지련은 여전히 일어나려는 기색이 없다. 명보는 세자도 세자지만 기생 봉지련을 얌체 빠진 계집이라 생각했다. 여염집도 아니고 대궐 다음 가는 동궁 처소다. 이같이 지엄한 처소에서 일고삼장이 되도록 세자를 끼고 누웠으니 참말 두려움도 없고 체면도 차리지 못하는 얌체 빠진 계집이라 생각했다. 제집 같으면 모르지만, 이런 일은 여염집에서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명보는 자기가 동티를 내서 오입쟁이 구종수와 풍각쟁이 이오방이며 심지어는 기생 봉지련까지 불러다가 세자한테 대주었으면서도 도리어 봉지련을 체신머리없는 계집이라 생각했다. 햇살은 점점 동창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해서 마루 앞퇴까지 내려왔다. 명보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더 참는 것보다 궁금증이 일어났다.

"이것 제기 웬일이냐. 복상사가 됐나!"

명보는 혼자 퉁명을 부려서 투덜대면서 벌떡 괴석 앞에서 일어났다. 휘적휘적 세자 침방으로 가서 주먹을 번쩍 들었다. 창살 문을 강하게 두드려본다.

"지련아, 봉지련아!"

되게 한 번 소리쳐 불렀다. 방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명보는 또 한 번 주먹을 들어 강하게 침방 덧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명보는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를 번쩍 들고 나왔다. 덧문 창살을 '드르륵' 긁어댔다. '와르륵, 드르렁, 드르륵, 좌르륵', 소란스런 음향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적막하던 침방에서 소리가 났다.

"거 거 누구냐?"

세자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분명했다. 명보의 입가엔 쓴웃음이 돌았다.

'복상사는 면했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 춘방사령 명보올시다."

큰 소리로 대답을 던졌다.

"왜 그러느냐?"

세자의 목소리가 또 나왔다.

"왜 그러느냐가 무업니까. 일고삼장이올시다. 어서 기침합시오. 봉지련을 데려다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련히 일어날가보아 이리 재촉질이냐."

"상감께서 아시면 소인의 목은 비거석양풍이올시다."

명보는 일부러 '소인의 목은 비거석양풍이올시다' 하는 몰소리로 한 번 크게 떠들었다.

"미친놈, 왜 이리 귀찮게 구느냐."

이불 속에서 나오는 세자의 목소리다.

"소인은 세자마마께서 너무나 좋아서 봉지련과 함께 아주 옥경십이루로 올라가시어 선관선녀가 되신 줄 알았습니다. 다행히 제 목이 아니 달아나고 세자마마께서 진세에 계십니다그려."

"그놈 꽤 이죽거리다. 영 잠을 못자게 하는구나."

"그만큼 주무셨으면 무던합죠. 무엇이 부족하다 하십니까. 이제는 일고삼장이 아니라,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덧문이 왈칵 열렸다. 덧문짝은 창 앞에 바싹 붙어 있던 명보의 이마빼기를 호되게 갈겼다. 명보는 눈에 불이 번쩍 났다.

"에쿠."

소리를 쳤다. 세자가 문을 여는 줄 알았다. 일변 손으로 아픈 이마를 비비고 일변 문 여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러나 덧문을 여는 사람은 세자가 아니었다. 봉지련이다. 아름다운 눈동자를 몽롱하게 떴다.

"에구머니나, 아저씨, 다치지나 아니하셨소."

봉지련은 생끗 웃는다. 치마도 아니 입은 채 단속곳 바람이다. 명보는 부아가 꼭두에까지 치밀었다.

", 요 구미호 같은 년아, 그만 작작 후려라."

봉지련은 또 한 번 소리 없이 상끗 웃는다.

"아저씨, 미안합니다. 다치지 아니하셨소?"

"다쳤으면 어찌할 테냐, 다치지 아니하셨소?"

"다쳤으면 어찌할 테냐, 어서 발리 세수하고 나가자."

"밀타승이라도 좀 발라드리려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뒤뜰로 내려가서 세수하고 매무새를 고친 후에 빨리 집으로 나가자. 너 이곳이 어느 곳인 줄 알고 공연히 늑장을 부리느냐. 동궁이다."

봉지련도 태평세월이었다. 세자 못지않게 유들거린다.

"내가 동궁인지, 서궁인지 압니까. 아저씨께서 데려다주시고 나만 꾸지람을 하시니 난들 어찌합니까. 세자마마께서 놓아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때 세자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글세, 왜 이리 떠드느냐, 잠도 못자게. 명보야, 이리 들어오너라."

명보는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고, 봉지련은 뒤뜰로 내려가서 우물가에서 세수를 했다. 세자는 들어오는 명보를 보자,

"거기 있거라, 의논할 일이 있다."

세자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명보한테 명한다.

"무슨 의논이십니까?"

"봉지련을 데려가지 말고 동궁에 두게 해라."

춘방사령 명보는 금방 바람기를 일으킬 듯 커다란 눈방울이 벌컥 뒤집힌다.

"세자마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어디다가 봉지련을 두신단 말씀입니까?"

춘방사령 명보는 기가 막혔다. 물끄러미 세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동궁에다 말이다."

"부러 이러십니까?"

"아니다. 진정이다. 한시라도 떨어지지 못하겠다."

세자의 얼굴에는 현연히 애원하는 빛이 드러난다.

"못하십니다."

명보의 얼굴빛은 엄숙했다.

"동궁빈의 시녀처럼 만들어서 안에 두었다가, 밤이면 사랑으로 나와서 내 시중을 들게 하면 좋지 아니하냐."

"글세, 세자마마의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올시다. 그러나, 첫째 세자빈마마께 아뢸 염치가 없고, 둘째는 싸고 싼 사향내도 나고 마는 법입니다. 어제와 오늘 밤낮 글강 외듯 아뢰지 아니했습니까. 상감께서 아시면 큰 벼락이 떨어집니다. 공연히 이곳이 어디라고 기생을 세자궁에 둔단 말씀입니까."

"별소리 다 많구나. 간밤에도 말했지만, 상감마마께서도 기생 후궁을 두셨는데 내가 기생 오입을 좀 하기로서니 무슨 큰 죄가 된다고 그리 떠드냐."

"처지가 다르십니다. 상감마마와 세자마마의 신분이 다르십니다. 그리하옵고 저하께서는 층층시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쇼. 소인이 딴소리를 합니까."

한 번 봉지련의 교태와 육체에 도취된 세자는 마치 손안에 보배로운 구슬을 얻은 듯했다. 차마 내어놓기가 싫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으냐. 지련과 한 번 맺어진 연을 차마 끊을 수는 없구나."

세자의 입술엔 침이 바싹 말랐다. 춘방사령 명보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세자를 바라뵙는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일단 봉지련은 오늘 제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세자께서는 생각이 간절하실 때 가민히 미복으로 봉지련을 가끔 찾으시는 일이 제일가는 상책인가 합니다."

세자는 잠자코 있다가 말을 꺼낸다.

"옆에다 앉혀두고 시시때때로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로구나."

"그것은 세자마마께서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두고 가끔 만나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밤낮 곁에 두고 보면 처음엔 좋지만 몇 달 후에는 염증이 나는 법이올시다. 세자마마, 그렇게 하십쇼. 우선 봉지련을 어제처럼 치마를 씌워서 제집으로 보내놓고 세자마마께서는 틈틈이 미복으로 봉지련의 집을 찾기로 하십시다."

세자는 진정으로 봉지련과 떨어지기 싫었다. 그러나 명보의 말이 옳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하는 수 없다. 오늘은 내보내기로 하자."

세자는 마침내 봉지련을 집으로 돌려보낼 것을 허락했다. 춘방사령 명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길게 한숨을짓고 바깥사랑에서 큰사랑으로 들어오는 협문을 닫아걸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높이 떠올랐다. 외인이 쑥 들어와서 기생이 사랑에 있는 것을 보면 큰일이라 생각해본 때문이다. 우물에 내려가 소세를 한 봉지련이 들어왔다. 옷매무시를 바로 만지면서 세자 옆에 앉는다. 명보는 얌체 없는 계집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드러운 말씨로 말을 꺼낸다.

"세자마마께 아뢰었다. 오늘은 네 집으로 나가야 한다."

"내가 언제 아니 간다 했소. 절에 간 색시 아닙니까? 시키는 대로 하지요."

봉지련은 상긋 웃고 대답했다.

"자아, 그럼 나갈 차비를 차려라. 내가 오늘도 너를 네 집으로 데려다주어야 하겠다."

봉지련도 집으로 가자는 춘방사령의 말이 탐탁하게 들리지 아니했다. 세자의 옆에서 더 정과 교태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가기 싫다고 드러내놓기도 난처했다.

"저 혼자 갑지요. 햇빛이 쨍한 대낮에 무엇이 무섭습니까. 염려 마십쇼, 아저씨."

"대낮에 네가 무서울까 봐서 내가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가도록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어서, 올 때처럼 치마를 쓰고 나가자."

"빈마마의 일가라고 하고요. 호호호."

봉지련은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세자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면서 일어섰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세자한테 던져진 봉지련의 추파는 기막히도록 다정했다. 첫정을 함빡 봉지련에게 쏟아논 세자의 마음은 봉지련의 유성같이 흐르는 추파에 넋이 사라지고 얼을 잃었다.

"조금 더 있다 가게 내버려 두려무나."

세자는 춘방사령 명보한테 간절한 부탁을 보낸다.

"이별이란 과연 창자가 끊어지고 염통이 쏟아지는 듯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으십시오. 세자마마, 또 만나실 때가 있습니다."

명보는 마음속으로 두 사람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또다시 밤을 지낼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횃대에 걸린, 봉지련이 쓰고 온 치마를 번쩍 떼어서 봉지련 앞에 던졌다. 봉지련은 가볍게 치마를 두 손으로 받아 한 팔에 끼고 세자한테 인사를 올린다.

"그럼 세자마마 안녕히. 소인은 물러갑니다."

봉지련은 또 한 번 세자한테 아리따운 교태를 던졌다.

"정말 가느냐."

세자는 넋을 잃고 봉지련을 바라본다. 젊은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이 알뿐이었다. 문자로 써서 말한다면 양인심사 양인지다.

"가야만 합지요. 아주 잊으시지는 마시옵소서."

봉지련은 눈에 눈물을 머금었다. 이미 발길을 돌렸다. 세자의 오장육부는 난도질을 치는 듯했다. 세자는 마루청까지 나가서 봉지련의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가만한 한숨이 입가에 흘렀다. 봉지련은 치마를 쓰고 춘방사령을 따라 나가다가 차마 잊을 수 없는 듯 고개를 돌려 세자를 바라본다. 세자는 비로소 정과 이별이 이같이 아프고 쓰리고 어려운 것을 알았다.

"잘 가거라. 쉬 또 만나기로 하자."

세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춘방사령은 세자와 봉지련 두 남녀 사이에 심정이 미흡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심정을 잘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봉지련을 몰다시피 하여 합문 밖으로 나간다. 역시 이번에도 사랑대문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치마를 씌운 채 안뜰을 거쳐서 안대문으로 나갔다. 궁녀들은 어제 사랑놀음에 데려왔던 기생이 가는구나 하고 별로 거들떠보지도 아니했다. 이제 남은 것은 수문장만 속여 넘어가면 그만이다. 대문 앞으로 가까이 갔다. 명보는 수문장한테 굽실하고 인사를 했다. 수문장은 붉은 철릭에 남전복을 입고 칼을 짚고 섰다가 명보의 굽실하는 인사를 보자 손을 들어 구레나룻을 쓸고 대답한다.

"명본가, 어디 가나?"

"빈마마의 분부를 받들어 손님을 친정댁으로 모셔다드립니다. 어제 오셨던 손님입니다."

"원래 대궐에는 아무리 빈마마나, 왕후마마의 친속이라 하나 주무시고 가시는 법이 없네. 못 주무시는 법일세. 그러나 처음이라 특별히 눈감아주는 것이니 그리 알게. 그리고 빈마마께도 아뢰어두게. 이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 그저 수문장 나리, 빈마마께 잘 말씀드려두겠습니다. 이담부터는 그런 일이 없도록."

"어서 나가게."

수문장은 큰 생색을 내면서 짚었던 환도를 번쩍 들어 손님을 데리고 나가라는 뜻을 표시했다. 춘방사령은 그대로 무사통과 되는 것만이 기뻤다. 수문장 앞으로 턱 다가서면서 손을 들었다.

"손님 마님, 어서 나갑시다."

봉지련은 치마를 쓰고 살며시 돌아섰다가 명보의 나가자는 말을 듣자 살몃살몃 발을 옮겨 동궁문 밖으로 나섰다.

"손님 마님, 어서 나갑시다."

"손님을 모셔다주고 다녀오리다."

춘방사령은 수문장한테 인사를 던지고 쾌자 자락을 펄렁거려 봉지련의 뒤를 따랐다.

"동궁 출입은 참으로 어렵군요."

봉지련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한마디 한다.

"여부가 있나. 대궐과 매한가지로 어렵지."

춘방사령이 봉지련을 제집으로 데려다주고, 돌아온 후에 세자는 궁금증이 났다. 설렁줄을 호되게 흔들었다. 요란스런 방울 소리와 함께 안에서 시녀가 뛰어나왔다.

"춘방사령 명보가 왔느냐. 왔거든 불러라."

시녀는 세자의 분부를 받자 급히 사령청으로 나가서 명보를 불렀다. 명보는 지난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으므로 봉지련을 데려다준 후에 한잠 푹 자보려고 사령청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시녀가 뛰어나와 세자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자 아니 일어날 도리가 없었다. 고단한 하품을 한 번 길게 뽑은 후에 눈을 비비고 뒷사랑으로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세자마마."

방 안에서 세자의 반색하는 목소히가 들렸다.

"명보냐?"

", 그러합니다. 소인이올시다."

"이놈아, 다녀왔으면 다녀왔다고 해야지, 도대체 너는 남의 애태는 속을 그렇게도 모른단 말이냐?"

춘방사령 명보는 짐짓 픽 웃으며 창밖에서 대답한다.

"소인이 세자마마가 아닌 바에야 어찌 세자마마의 속을 아리까."

세자는 유들대는 명보가 오늘따라 밉다고 생각했다.

"봉지련은 어떻게 했는냐?"

"데려다주었습니다."

"방으로 들어와서 이야기해라."

"오늘은 아니 들어가렵니다. 살려주십쇼. 간밤을 꼬박 새서 졸려 죽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자는 화를 버럭 냈다.

"올라오너라, 이놈아. 그래 데려다주었으면 데려다주었다고 나한테 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니야. 너무나 으쓱대는구나."

"황송하신 처분이십니다. 소인은 생전 으쓱대본 적이 없습니다. 간밤을 꼬박 샜더니 졸려서 눈을 잠깐 붙이느라고 데려다주었다고 회보를 못 드렸습니다. 만사 무석이올시다."

"잔말 말고 어서 들어오너라."

세자는 입술이 마르도록 명보를 방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춘방사령 명보는 더 승강이할 수 없었다.

"정 들어오라시면 들어가겠습니다마는 세자마마께서도 고단하실 텐데 좀 쉬십쇼."

명보는 말을 마치자 기지개를 한 번 길게 켜고 댓돌에 올라 방으로 들어섰다. 세자와 명보는 상전과 종의 관계를 가졌건만, 원체 세자의 어렸을 때부터 받들어 모신 충복사령이었다. 정이 들어서 어느덧 노주의 체통을 파탈해버렸다. 세자는 명보가 들어가자 반가움을 이길 수 없었다.

"게 앉거라. 정말 졸리냐?"

"거짓말로 졸리다 하겠습니까. 진담이올시다. 세자마마께서는 재미를 보시느라고 밤을 새웠지만 소인은 강짜로 밤을 새웠으니 아니 졸리겠습니까."

세자는 춘방사령 명보의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고 싶었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풍기고 얼러본다.

"나중에 후한 상급을 내릴 테다. 졸리더라도 좀 참고 나하고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명보는 픽 웃으며 대답한다.

"상급을 주시려면 아주 지금 주십쇼. 쇠뿔도 단김에 뺀다 했는데 마마의 마음이 달뜨신 중에 상급을 타 먹겠습니다."

"이놈, 버릇없는 놈, 달뜨다니."

세자는 짐짓 눈을 딱 부릅떠본다.

"그저 죄송만만하옵니다. 그러나 명보 놈은 목이 곧은 놈이올시다. 거짓말은 어미 뱃속에서부터 못해 보았습니다. 마마께서 봉지련한테 달뜨신 것은 사실입니다. 달뜨셨으니 졸리다는 소인을 자꾸 불러들여서 묻자옵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이실직고로 달뜨셨다고 아뢴 것뿐입니다."

"미친놈."

세자는 한마디 한 후에 문갑문을 덜컥 열었다. 손이 문갑 속으로 들어가자 쇄은 한 봉지가 나왔다. 세자는 명보 앞에 내던진다.

"옜다. 쇄은 한 냥쭝이다. 상급으로 주는 것이니 간수해두어라."

춘방사령 명보의 입이 딱 벌어진다.

"이거, 정말 상급으로 주십니까?"

"하도 졸리다고 떼를 쓰니 잠 좀 달아나라고 상급으로 주는 것이다."

"황공 감격하여이다."

춘방사령은 두 팔을 번쩍 들어 넙죽 절을 올렸다. 세자는 마음이 흡족했다. 이것이 모두 다 세상을 살아나가는 재미요, 멋이라는 것을 비로소 느꼈다.

"미친놈."

세자는 웃으며 한마디 한 후에,

"그래, 봉지련을 장악원으로 데려다주었느냐, 제집으로 데려다주었느냐?"

"제집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봉지련이 무어라 하더냐?"

"세자마마께 꼭 반한 모양이옵니다."

세자의 가슴이 출렁하고 물결 친다.

"앞으로 봉지련을 또 만나보도록 할 수 없느냐?"

춘방사령은 빙긋 웃고 대답한다.

"마마께서 맘에 드신다면 계제를 보아서 다시 만나시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국의 지존 다음 가시는 세자마마이지마는 오입판 풍속은 따르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봉지련이 심열성복할 것입니다."

"그놈 문자 제법 쓴다. 어떻게 하면 봉지련이 심열성복이 되겠느냐?"

"마마, 봉지련한테 놀음차를 후하게 주셔야 합니다."

"놀음차가 무어냐?"

"데리고 노신 값으로 생각해 주시는 것이 놀음차올시다."

"얼마나 주면 봉지련의 마음이 흡족하겠느야?"

"세자마마께서도 아직도 모르실 것입니다. 놀음차가 있는데 겉놀음차와 속놀음차가 있습니다."

춘방사령 명보는 세자를 바라보며 코를 쭝긋하고 씽긋 웃는다. 세자는 모두 다 첨 듣는 말이다. 명보를 향하여 묻는다.

"어떤 것을 겉놀음차라 하고 어떤 것을 속놀음차라 하느냐?"

춘방사령 명보는 세자를 바라보고 싱글싱글 웃으며 아뢴다.

"세자마마, 그래도 명나라에 사신까지 되시어 천하 일을 살피고 오신 우리 세자마마께옵서 아직 놀음차 말씀도 못 들으셨습니까?"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면 그런 것을 알고 오느냐. 나는 못 듣고 왔다."

"세자마마, 놀음차는 명나라쯤 아니 가시어도 우리나라 오입판에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놀음차도 모르시고 어찌 기생을 데리고 노셨습니까?"

"이놈아, 내가 오입쟁이이냐. 놀음판 경계를 어찌 알겠느냐."

"허허허, 세자마마. 참 딱하십니다. 기생을 데리고 노셨으면 오입쟁이지 별수 있습니까. 이제부터 진짜 오입쟁이가 되시려면, 놀음판 풍속을 아셔야 합니다."

"그만 잔소리 해두고 겉놀음차와 속놀음차라는 것을 가르쳐다오."

춘방살령 명보는 또 한 번 씽긋 웃는다.

"그럼 소인이 놀음차 경위를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자세히 들어봅시오."

"어서, 말을 해보아라."

세자는 아닌 게 아니라 놀음차가 무엇인가 궁금했다. 무릎을 밀어 춘방사령 앞으로 다가앉는다.

"세자마마, 잘 들어두십쇼. 아뢰겠습니다. 겉놀음차라는 것은 기생을 데리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술을 따라 올리게 하고 춤을 추어서 약주를 잡수시는 데 흥을 돋우게 한 것을 수고했다고 상급으로 내리시는 대가입니다."

"그것을 왜 겉놀음차라 하느냐?"

"하하하, 마마. 그 뜻을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겉으로 데리고 놀았다 해서 겉놀음차라 합니다."

"그렇다면 속놀음차라 하는 것은?"

"그것은 뜻이 조금 다릅니다. 겉으로만 데리고 노는 것이 아니오라 속속들이 데리고 노는 것을 속놀음차라 합니다."

"속속들이?"

",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잠자리를 함께 했단 말습입죠. 내외가 지내듯이 -하하하. 이제 아시겠습니까? 하하하."

새물청어인 세자였다. 얼굴에 잠깐 흥분이 돌았다. 명보는 세자의 붉어지는 얼굴빛을 놓치지 아니하고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얼굴에 가득 웃음이 흘렀다.

"마마, 봉지련을 데리고 어떻게 노셨습니까? 겉놀음차만 주게 노셨습니까, 속놀음차까지 주도록 노셨습니까? 말씀해보십쇼."

명보의 말을 듣는 세자는 픽 웃음이 터졌다.

"너한테 그런 일까지 고해 바쳐야 하느냐."

"죄송합니다마는 소인이 알아야만 동궁 청지기한테 거짓말해서 놀음차를 타다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보는 빙긋 웃으면서 또 한 번 세자의 얼굴을 지켜본다. 세자의 얼굴은 다시 붉어졌다. 잠자코 말이 없다. 세자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얘야, 명보야. 청지기한테는 아직 말을 하지 마라. 내가 어떻게 변통해 주마."

명보는 손을 가로젓는다.

"세자마마께서 무슨 힘이 계시다고 놀음차를 변통해 주십니까. 소인이 넌지시 동궁 청지기한테 말을 해서 변통해보라고 하겠습니다."

세자는 그래도 청지기한테 놀음차를 타오는 것이 불결하다고 생각했다.

"겉놀음차를 준다면 얼마를 주어야 하고 속놀음차를 준다면 얼마 가량이나 주어야 하느냐?"

"세자마마, 겉놀음차는 돈으로 몇 냥을 주시든지 필육으로 몇 필 주시면 됩니다. 그러나 속놀음차는 좀 많습니다. 머리를 얹으신 것 아니니 더럭 많이 주실 것은 없어도, 그래도 마마께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십니다. 모의는 한 벌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봉지련은 일평생 은총을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머리를 얹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오입판 경계를 자세히 아뢰어드리오리다. 봉지련 같은 애는 벌써 기생으로 출사한 지도 오래고 열인을 해서, 남자를 안 기생이올시다. 말하자면 처녀가 아니란 말씀입죠. 그렇지만 기생 중에는 아직 사내를 대하지 못한 동기가 있고, 비록 동기가 아니고 동기보다 약간 나이가 위일지라도 순수한 처녀 기생인 경우에는 머리를 얹어줍니다. 머리를 얹는다는 말은 땋아 내린 편발머리를 어른이 되었다고 관례를 시켜서 여염집에서 혼인 잔치 하듯 하는 것을 머리 얹는다고 합니다. 이러하니 의복고 금침과 세간이며, 모든 조도품을 신부 데려오듯 하는 것이니 웬만한 혼인 잔치 하듯 해서 물자와 비용이 막대하게 듭니다. 호화롭고 잘할수록 머리 얹어주는 사람의 면목은 번쩍 낯이 나는 것입니다."

"오입판 경계도 대단하구나."

"대단 여부가 있습니까. 협기 있고 의리 발고 활소한 것이 오입판 경계올시다. 비록 한량패와 기생들의 놀음판이 올시다마는 예법과 의리는 어느 사대부들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세자는 말을 듣자, 문갑문을 덜컥 열었다. 활소한 성격이 퍼뜩 일어났다. 아까 명보에게 꺼내주던 쇄은 봉지 옆에 있는 말굽은 한 덩어리를 번쩍 들어 명보한테 내준다.

"옜다. 이만하면 모의 한 벌쯤은 되리라. 봉지련한테 속놀음차라고 갖다주어라."

말굽은은 명모가 말만 듣고 생전 처음 보는 값진 은덩이다.

"이렇게 많이? 과합니다. 이만하면 약과문의 잘두루마기 두어 벌은 되겠습니다."

"약과문의 잘배자에 잘두루마기도 한 벌씩 해입으라고 해렴."

명보의 입은 딱 벌어졌다.

"봉지련은 아마 한평생 세자마마를 모시려 할 것입니다."

명보는 말굽은을 소매 속에 거두어 놓고 밖으로 나갔다. 세자는 명보편에 속놀음차로 말굽은 한 덩이를 보낸 후에 봉지련을 잊으려 하나 잊을 수 없었다. 왕실의 불안은 점점 더 세자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요사이 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간이 아니라 바로 원수지간으로 지냈다. 어머니의 질투도 질투지만 아버지가 외갓집을 너무나 몰인정하도록 멸망시킨 일은 어머니를 여지없이 짓밟아버린 것이다. 이제 와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폐위까지 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 세자는 이 눈치를 잘 알고 있었다. 모두 다 후궁을 편애하고 권력만을 잡고 싶어 하는 인간 추태의 극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세자는 이러한 추악 면이 싫었다. 이러한 추악상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해서 할아버지 이성계, 방석, 방번, 방간, 여러 삼촌들, 맹수와 맹수가 약육강식을 하듯 서로들 죽이고 서로들 잡아먹으려 하고, 결국은 한편이 죽음을 당해야만 끝장이 나는 형제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들, 실로 구역질이 나는 구토할 현상만이 왕실에 가득했다. 부자, 형제의 갈등은 오히려 약하다. 이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구수간이 되어 서로들 버틴다. 왕이라는 아버지와 외삼촌이란 신하는 왕과 왕비 속에서 나온 자기를 가운데로 두고 권력싸움만을 한 것이다. 외삼촌들은 왕세자라는 자기를 미끼로 해서 권세를 앞으로 더 잡아 보려 하여 명나라 황제 딸과 혼인을 시킨다는 등 왕한테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은근한 음모를 꾸며내다가 결국에 가서는 패가망신을 당해서 집안을 결딴내버렸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임금의 권력을 내놓기 싫어서 당신의 아버지와 싸우던 버릇을 왕세자 자신한테 옮겨 의심스런 눈초리로 눈독을 들여 자기를 지키고 있다. 추하고 더러운 인간상이다. 이러한 아버지가 만나기만 하면 글을 잘 읽었느냐, 공부를 잘했느냐, 사냥을 가지 말라, 매를 기르지 말라, 삼강오륜과 도덕을 잘 지켜야 한다, 별의별 잔소리를 다하고 있다. 한 가지도 진실한 맛이 없다. 모두 다 가면이다. 허식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권력을 다투고 전쟁까지 했으면서 자기한테는 효자가 되라고 강요했다. 아버지는 권세다툼으로 형제와 매부인 동기를 살육까지 했으면서 자기한테는 강계 기생 후궁의 아들 사이에 다정스런 우애를 가지라고 볼 적마다 당부했다. 도대체 세자라는 자리가 이제는 입에 신물이 나도록 염증이 든다. 세자는 아름다운 여인의 세계를 몰랐다. 멋있는, 운치 있는 생활을 해보지 못했다. 우울한 세월 속에서 홀연 구종수와 이오방의 맨 데 없는 생활을 보고 아름다운 봉지련의 육체를 애무해보았다. 이곳은 사람이 안주할 수 있는 별천지라 생각했다. 세자는 봉지련을 만나본 지 사흘이 되었다. 넌짓 춘방사령을 불렀다.

"봉지련한테 놀음차는 갖다주었느냐?"

", 그 길로 전했습니다. 무척 기뻐했습니다. 고마운 말씀을 저하께 드려 달라고 했습니다. 봉지련 뿐만이 아닙니다. 봉지련의 어미도 무한 좋아했습니다."

춘방사령 명보는 수다를 떨었다.

 

황금 탄자

 

가을이 되었다. 단풍도 다 떨어지고 불구슬빛 같은 홍시만이 앙상한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태종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정자에 올라 술을 마시며 가을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술이 거나하여 방감이 되었을 때 뜰 앞을 바라보니 가득히 감이 달린 감나무 위로 까마귀 떼가 까맣게 날아와 앉아 있었다. 꿀같이 단 연감을 주둥이로 찍고 있었다. 태종은 부아가 났다. 성미 급한 그였다. 시자를 부를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했다. 큰 소리로 까마귀 떼를 쫓는다.

"위여, ."

"위여, ."

손뼉을 치고 발을 굴러 쫓았으나 까마귀들은 임금의 옥음을 분간할 까닭이 없다. 여전히 달콤한 연시 감을 수많은 까마귀 떼가 찍고 있었다. 태종은 또 한 번 옥음을 높이 내어 까마귀 떼를 쫓았다.

"위여, ."

까마귀 떼는 잠깐 날아가는 체하다가 이내 다시 모여들어 감을 찍었다. 마치 제왕을 향하여 권위를 야유하는 듯한 태도다. 태종은 부아가 불끈 일어났다.

"무관들이 많건만 까마귀 한 마리 잡을 사람이 없단 말이냐."

탄식조로 푸념을 했다. 상감인 태종의 탄식하는 말씀을 듣자 시측해 모셔 있던 무사들은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혹은 활을 당겨 까마귀를 쏘고, 혹은 탄자를 던져서 까마귀를 맞히려 했다. 그러나 활로 쏘아도 까마귀는 맞지 아니하고 풀썩 날아 달아나고, 탄자를 던져도 까마귀는 조롱해 놀리는 듯 잠깐 몸을 피했다가 다시 날아와 앉는다. 마치 무사들을 조롱하고 놀려대는 듯했다. 이 모양을 본 태종은 더한층 역정이 불같이 일어났다.

"못들도 났다. 호반이라면서 새 한 마리를 맞히지 못한단 말이냐. 전에 선대왕께서 왜병 백만을 대차시킬 때 백발백중을 하시던 생각을 하면 과연 기가 막힐 일이다. 못난 것들. 이러고 나라꼴이 장차 어찌 되겠느냐."

태종은 또 한 번 탄식한다. 무사들은 안색이 없었다. 서로들 얼굴을 면면이 바라보면서 무료한 낯빛을 짓고 있을 뿐이다. 이때 문관측에서 한 사람이 부복해 아뢴다.

"탄자를 던져서 까마귀를 잡을 분이 꼭 한 분 계십니다. 소신이 천거하겠습니다."

모두들 바라보니 동궁태부 이내다. 태종은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

"경은 문관인데 어찌 활을 쏘고 탄자 잘 던지는 사람을 아는가?"

"소신이 날마다 모시고 있는 분이옵니다."

'날마다 모시고 있는 분' 이란 말에 태종의 귀가 번쩍 띄었다.

"누구란 말인가? 천거해보라."

"세자저하이십니다."

태종은 비로소 세자가 황금 탄자 잘 던지던 생각이 났다.

"불러들여라."

태종은 세자 부를 것을 허락했다. 이내는 내관을 시켜서 어명을 전달했다. 세자는 곧 어전에 사후했다. 태종은 감나무를 가리키며 옥음을 내린다.

"저기 저 감나무에 오작의 떼가 너무나 많이 와서 앉아 있다. 나의 애완하는 감을 모조리 찍어 먹고 있다. , 능히 까마귀 떼를 쫓아낼 재주가 있겠느냐?"

세자는 아바마마가 어수를 들어 가리키는 편을 바라보았다. 과연 감나무 가지에 가지마다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농익은 감을 찍고 있었다.

"쫓아보겠습니다."

세자는 간단하게 아뢰고 뜰 아래로 내려섰다. 내관들이 세자께 황금 탄자 한 벌을 받들어 올렸다. 세자는 황금탄자를 받아 두서너 번 공중을 향하여 공기를 놀리다가 감나무를 항햐여 탄자를 던졌다. 탄자는 나는 듯이 공중으로 솟구치다가 다시 뚝 떨어져 까마귀를 맞혔다. 까마귀는 푸득푸득 날개를 치면서 땅으로 뚝 떨어졌다. 황금 탄자가 치명상을 준 것이다. 세자는 떨어지는 까마귀를 보자 다시 탄자 한 개를 던졌다. 황금 탄자는 보기 좋게 까마귀 한 마리를 맞히고 금빛을 뿜어 세자의 손 속으로 떨어졌다. 세자는 떨어지는 까마귀를 본체만체 또다시 황금 탄자를 공중을 향해 던졌다. 황금 탄자는 또 한 마리의 까마귀를 맞혔다. 까마귀는 구슬픈 울음을 울면서 땅으로 떨어지고, 또 한 개의 황금 탄자는 세자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자의 황금 탄자를 놀리는 솜씨는 바로 입신지경에 이르렀다. 한 손으로는 팔매를 던지고 한 손으로는 탄자를 받았다. 던지고 받는 찰나마다 무수한 까마귀는 가을바람에 낙엽 떨어지듯 했다. 마치 고수가 북채를 잡고 북을 치듯, 기생이 가야금 줄을 골라 튀기듯 했다. 세자가 연해 신명이 나서 황금 탄자를 던지는 순간, 까마귀는 뜰 앞에 가득하게 떨어져 죽는다. 이 모양을 바라보는 군신들은 손뼉을 치며 찬양했다. 박수 소리는 북악산이 울명거리듯 했다. 태종의 용안에도 웃음 빛이 감돌면서 빙긋 웃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기뻐하지 아니했다. 장차 임금이 될 사람으로 세자의 위신을 생각지 아니하고 탄자를 던지는 그 행동을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태종은 연회를 파한 후에 대전으로 돌아가 승지에게 분부를 내렸다.

"동궁에 요사이도 잡것들이 많이 출입하느냐?"

태종이 말하는 잡것이란 한량패들을 위시하여 노래 잘 하는 가객과 사냥 잘하는 포수며, 매 기르는 사람, 오입쟁이, 건달들을 묻는 소리다. 승지는 그렇다고 아뢰기 난처했다.

"요사이는 살피지 아니하와 잘 모르겠사옵니다."

둥글둥글 대답해 아뢰었다.

"동궁 수문장한테 영을 내려서 주야를 가릴 것 없이 외인으로 동궁에 출입하는 자가 있다면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가릴 것 없이 동궁문 앞에 나타나는 자는 모조리 잡아서 나한테 고하라 일러라."

 

필공의 금시발복

승지는 곧 상감 태종의 분부를 받들어 동궁 수문장한테 전달했다. 수문장은 떨면서 어명을 받았다. 세자는 글씨를 잘 쓰는 까닭에 서울 장안에서 일류 가는 필공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첫 번째 걸려든 사람이 붓 잘 매기로 유명한 필공 김호생이었다. 김호생은 전과 같이 좋은 붓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동궁문 앞에 당도했다. 낯익은 수문장한테 인사하고 세자를 뵈올 생각으로 동궁 중문을 향해 들어가려 할 즈음 돌연 수문장은 칼을 뽑아 들고 벼락같이 호통을 했다.

"이놈, 누가냐? 허락 없이 어디로 들어가느냐!"

필공 김호생은 어이가 없었다. 초면도 아니고 숙면이다.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필공 김호생은 수문장이 농으로 꾸짖는 줄 알았다.

"이거 왜 이러시오. 나를 몰라보시오. 붓장수 김호생이오."

"잔소리 말고 게 섰거라."

수문장은 호통을 또 한 번 치며 졸개 병정들을 불렀다.

"저놈을 꽁꽁 묶어라."

졸개 병정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붓장수 김호생을 밧줄로 꽁꽁 결박을 지었다. 필공 김호생은 기가 막혔다. 미칠 듯했다.

"여보시오 수문장,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나를 묶으시오. 세자께서 글씨를 잘 쓰시는 까닭에 나한테 붓을 매오라고 분부를 내리신고로 특별히 붓을 매 가지고 온 길이오. 세자마마께 아뢰어주시오."

"이놈, 잔소리 마라. 어명이다!"

수문장은 또 한 번 호통을 친 후에 등을 밀어 동궁 문밖으로 몰아내서 창덕궁으로 향했다. 동궁 수문장은 대궐 수문장한테 붓장수를 넘긴 후에 어명을 이야기하고 동궁으로 돌아갔다. 필공 김호생은 영문을 몰라 벌벌 떨고 있을 때 대궐 안에서는 내관이 어명을 받들고 궐문으로 나왔다. 필공은 내관을 따라 내전으로 들어갔다. 평생 처음 구경하는 대궐 안이다. 먼저 휘황찬란한 단청 칠과 크고 장엄한 궁궐에 눈이 부시도록 현기를 느꼈다. 그러나 가슴 안엔 불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내관은 필공 김호생을 전각 앞 월대 아래 꿇리고 큰소리로 외친다.

"동궁에서 잡인을 잡아 대령하였소."

전각 위에서 쌍영창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태종 대왕의 용안이 나타났다. 뜰 아래를 굽어보며 호령을 내린다.

"너는 무엇 하는 인간이냐?"

"붓을 매는 것으로 생업 하는 필공이올시다."

붓을 매는 필공이란 대답에 위엄 있던 태종 대왕의 용안은 약간 부드러워졌다.

"붓을 매는 필공이냐?"

", 그러하옵니다."

"어찌해서 동궁에 맘대로 드나들었더냐?"

"세자마마께오서 글씨를 잘 쓰십니다. 그리하와 항상 일등 필공의 솜씨로 붓 맨 것을 구하셨습니다. 그리하와 소인은 오늘도 붓을 매 가지고 세자마마께 붓을 바치려고 들어가려 한 것뿐입니다. 추호만치라도 다른 죄는 범한 일이 없습니다."

잡인을 금해서 목을 베라던 태종은 붓 매는 필공이란 말에 마음이 감동되었다.

"네가 세자의 글씨 쓰는 것을 위하여 붓을 맸다 하니 다른 일보다는 가상한 일이다. 나를 위해서 붓을 매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황공 감격하옵니다."

김호생은 금시발복이 되었다.

"이 애의 결박을 끄르고 공조에 예속시켜라."

김호생은 일약 공조에서 붓을 매게 되었다. 세자는 감나무에 앉은 까마귀 떼를 황금 탄자를 던져 떨어뜨릴 때 처음엔 잠깐 주저하고 번민을 느꼈다. 부왕의 명령을 받들어 황금 탄자로 까마귀 떼를 쫓기는 했으나, 경회루의 글씨를 쓰던 때와는 판이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글씨는 선비와 지식인의 고상한 취미의 하나요, 사람마다 다 잘 쓰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경지에까지 들어가는 서법의 전통이 있는 서도다. 글씨가 어느 지경까지 가서 성가가 된다면 명필 또는 서성이라는 명예스런 칭호까지 듣는 훌륭한 사대부의 예도다. 그러므로 왕의 다음 가는 세자의 자격으로 글씨를 잘 쓴다는 일은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인격 위에 또 한 가지의 명예를 더하는 것으로서 당당하고 정당한 기예라 할 것이다. 그러나 탄자를 던지는 일은 글씨 쓰는 것에 비하여 휠씬 격이 떨어지는 장난이다. 옛날 신라 때 무인들이 공부하던 무예 중의 하나라 하나 고려를 지나서 세자 때 와서는 무인들의 탄자 던지는 법은 차차 없어지고 흔히들 가객과 창우들이 줄을 타고 탄자를 던져서 구경하는 손들의 흥취를 돕게 하는, 말하자면 천한 기예의 하나였다. 세자는 어려서 배운 솜씨로 탄자를 잘 던졌다. 태종이 감나무에 앉은 까마귀 떼를 쫓으려 할 때 세자의 기예를 아는 신하 한 사람은 경솔하게,

'까마귀를 맞혀 떨어뜨릴 사람은 오직 세자밖에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을 때 상감은 당연히 세자의 지위를 생각했어야만 할 것이었다. 아무리 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황금 탄자를 잘 던졌다 하나 이제 나이 약관에까지 된 세자다. 아버지 상감은 한 귀로 신하의 말을 듣고 한 귀로 세자의 황금 탄자 놀리는 장난을 흘려야만 했다. 그러나 부왕은 그대로 신하의 말을 듣고 세자인 자기한테 향하여 황금 탄자를 던져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세자는 처음엔 주저했다. 코 흘리는 세자도 아니다. 아내인 동궁빈까지 있는 세자다. 비록 황금 탄자를 잘 놀리는 재주가 있다 하나 일종의 천기를 군신의 앞에서 놀린다는 것은 자기의 세자인 체면을 손실키시는 일밖에 영광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부왕은 세자를 너무나 멸시했다. 그러므로 세자로서는 잠깐 고민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자는 나중에 빙긋 웃고 황금 탄자를 잡았다. 이미 왕위에 나가지 아니하려고 마음을 결정한 세자다. 구질구질하게 인간 이하의 탐욕을 내야 하고 부자 형제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해야만 하는 왕의 자리다.

 

작은 꾀꼬리

이미 왕의 자리에 나가지 아니할 것을 결심한 세자였다. 흔연히 천기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황금탄자를 손에 잡아 쾌재를 부르면서 까마귀 떼를 쫓았던 것이다. 할아버지 태조대왕의 대상제도 마쳤다. 신주는 부태묘를 해서 종묘로 모시었다. 세자는 거상 옷을 벗고 화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버지 태종도 오랜 세월에 궁중에만 들어 있었다. 갑갑하고 답답했다. 이제는 상옷도 벗고 했으니 사냥을 나가고 싶었다. 아들 세자의 사냥하는 놀이는 금하면서 자기 자신은 진작부터 사냥놀이 나가는 것을 좋아하던 전하다. 태종은 삼 년 동안 못했던 사냥놀이를 한번 크게 벌이고 싶었다. 군대를 총동원해서 강원도로 사냥을 나가기로 했다. 강원도는 첩첩산중에 사냥하기 좋은 곳이다. 사냥 중에서도 제일로 치는 사슴 사냥, 멧돼지 사냥, 곰사냥, 노루 사냥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사슴을 잡으면 머리에 달린 뿔은 강용이라 해서 나라에서 제일 치는 보재다. 녹용 중에도 첫손을 꼽는 영약이다. 강원도 사슴한테는 또 한 가지 좋은 선약을 구할 수 있다. 녹혈이다. 사슴의 피는 부족증이 떨어지고 아이 못 배는 여인이 수태를 한다는 명약이다. 다음에 멧돼지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산물을 제일로 친다. 힘이 세고 정력이 대단한 때문이다. 멧돼지의 피를 마시면 약한 사람이 장사가 된다는 것이요, 더구나 산저담은 피가 맺힌 어혈증에 좋고 열병에 해열제로 첫손을 꼽는 명약이다. 강원도에는 사향노루가 많다. 배꼽에서 따낸 사향은 상사향이라 해서 가슴앓이, 체증에 사향 소합원을 만들어 쓰는 기사회생의 명약이다. 강원도 곰은 함경도 곰만큼 크지를 못하지만 곰의 내장에서 떼내는 곰쓸개 웅담은 산저담보다도 효력이 몇 배나 된대 해서 인간의 영약으로 효험과 이름이 함께 높았다. 태종은 이러한 짐승들을 잡기 위하여 장쾌한 사냥놀이를 차렸다. 군대를 총동원해서 천리 길로 치달리게 되니 가고 오는 데 한달이 넘어 걸럴 예정이었다. 상감의 거둥령이 내리니 온 장안이 물끓듯 했다. 만조백관들은 말할 나위 없고 사냥 나가는 군총들만 해도 수천 명이 되니 그들의 집안 식구들의 전송하는 인파만 해도 인산인해를 이루어 서울 장안은 사람물결 속에 터지는 듯했다. 대왕의 사냥 출동은 세자궁에도 알려졌다. 대전에서는 대전 별감이 춘방에 나와 세자께 아뢰었다.

"내일 새벽에 전하께옵서는 강원도로 사냥을 납십니다. 만조백관이 수행을 하옵고 강계 포수 천여 명이 출동을 합니다. 세자마마께서도 배행을 하심이 어떠할는지 정원에서 품해 아뢰라 하옵니다. 정원사령이 나올 것이오나 특별히 대전마마께서 하명이 계시와 소인이 나와 아룁니다."

대정별감의 아뢰는 말을 듣는 세자는 마음속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대전께서 사냥을 나가시느냐, 서울 근교도 아니고 강원도에까지."

", 그러하옵니다."

"왕반이 며칠이나 걸리느냐?"

"아마 한 달 이상이 걸리실 것입니다."

세자는 기가 찼다.

"한 달 이상?"

", 그러하옵니다. 천 리 길에 사냥하면서 중중첩첩한 청산으로만 치달릴 테니, 한 달이 아니 걸리고 되겠습니까?"

"백관들도 다 따라가느냐?"

"만조백관이 다 수행을 한다 합니다."

세자는 가슴이 괴란했다. 메슥메슥 구역이 날 것 같았다. 도대체 아니꼽다.

"그러면 나라의 정치는 누가 한단 말이냐?"

"만조백관 이외에 각 부서마다 서리가 있지 아니합니까? 서리가 하겠습지요."

"옳다, 네 말이 옳다. 참 서리가 하면 되겠구나. 하 하 하."

세자는 소리 높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양거리는 웃음조다.

"이번 행차에 물자도 많이 들겠다."

"삼 년 동안이나 거상하시노라고 효도를 다하셨사온데 그동안 모았던 재물로 사냥을 하신다 합니다."

세자는 또 한 번 기가 찼다.

"옳다. 그 말도 옳다."

세자는 먼 산을 바라본다.

"그럼, 세자마마께서도 내일 새벽에 대내로 듭시어 꼭 배행을 하시도록 합시오. 그렇게 위에 아뢰겠습니다."

"어가를 모시고 가고말고. 오래간만에 나도 바람을 좀 쐬어야 하겠다. 나도 삼 년 동안이나 꼭 거상을 해서 착실한 효손 노릇 했느니라. 그리고 원래 나는 사냥을 좋아하지 않느냐. 너도 알다시피 사냥을 좋아해서 매도 기르고, 개도 기른 때문, 항상 대왕마마께 꾸지람도 많이 듣고 종아리도 많이 맞았느니라. 너희들도 다 아는 노릇 아니냐. 하 하 하."

세자는 한 번 너털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전마마께서 친히 납시어 사냥합시는 일이니 꾸지람은 절대로 아니하십니다. 특명을 내리시어 함께 가자고 소인을 보내기까지 하셨습니다. 한번 마음 놓으시고 쾌하게 노시다가 돌아옵시오."

"네 말이 올하. 아주 소원을 풀어버리고 돌아오리라. 하 하 하."

세자는 유쾌한 체 소리를 높여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내일 일찍 대내로 들어가 어가를 배행한다고 아뢰어라."

대전 별감은 굽실 절을 드리고 물러갔다. 춘방에서는 사령 명보를 위시하여 내일 새벽에 대가를 배행할 세자마마의 여장을 차리기에 분주했다. 대전 별감이 돌아간 후에 세자는 자리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본다. 아버지 태종이 못마땅했다. 아버지는 항상 자기가 매를 기르고 탄자를 던지고 한량과 무사들을 불러서 사냥 나가는 것을 꾸짖고 나무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사냥을 나갔다. 이번에도 태상왕의 삼 년 거상을 겨우 마치기 무섭게 아버지는 사냥하는 거둥명령을 내렸다. 왕도 서울서 가까운 거리 교외도 아니요, 천 리 길이나 되는 심심산천 강원도 멀고먼 산골 속으로 사냥하는 장소를 정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본격적으로 사냥하기 좋은 장소다. 그러나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근 천 명 가까운 강계 포수를 동원시키고 서울 안에 있는 수천 수백의 군총들을 모조리 풀어서 데리고 가는 이 어마어마한 거둥행차는 왕자인 자기가 홋홋하게 두서너 사람 사냥에 익숙한 한량패들을 데리고 가는 그 유가 아니다. 나라 국고의 국비를 소모하는 일만 해도 자기가 사냥을 나가는 그 일에 비하여 만 배, 십만 배나 되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큰 비율이다. 아버지 자신은 이같이 호대한 사냥행락을 하면서 아들인 왕자나 세자는 사냥을 해서는 아니 된다 하고 꾸짖고 호령을 할 뿐 아니라 사냥을 즐기는 사람은 사람 이하의 무인격자로 판정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한 논법이라 생각했다. 경서에도 말하기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남에게 해보라고 권해도 좋다. 그러나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했다. 도대체 아버지는 너무나 자기가 자기 맘대로 하는 자기 표준의 독선자다. 아버지는 당신이 사냥 가는 것은 재미나 오락이 아니요, 군인 예기를 북돋워주는 양위의 행사라고 신하들한테 강조했다. 이것은 사냥을 나가면 국가의 재물이 모손되고, 국민의 피해가 적지 않고, 사냥터가 된 농토에 크게 해를 끼쳐서 농민들에게도 큰 원망을 사게 되니 사냥을 중지하라고 간하는 문신들에게 대한 답변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논리대로 따져본다면 세자인 자기는 다음 세대에 왕의 자리에 반드시 나가야만 할 유일한 왕의 후보자다. 반드시 세자 적부터 사냥하는 길에 통해서 국방을 튼튼하게 하고 군인의 예기를 북돋워주어서 국민 전체가 문약한 데 빠지지 아니하는 정치를 하도록 하는 교양을 세자 적부터 내리 배우고 알아야만 할 것 아닌가. 세자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아버지의 강원도 사냥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못마땅하게 생각할 뿐만이 아니었다. 코방귀 같다고 생각했다. 아까 대전 별감한테 참에해서 배행하겠다고 대답은 해놓았으니 애당초 아버지의 사냥행차에 따라갈 흥미가 털끝만큼도 없었다. 세자는 밤이 깊어 자리에 들었다. 한잠을 실컷 자고 났다. 어느덧 동이 환하게 터졌다. 세자는 혼자 자리에 누워 쓴웃음을 웃었다. 설렁줄을 강하게 흔들었다. 방울 소리가 떠나갈 듯 동궁 안의 고요한 새벽을 소란스럽게 흔들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명보와 안에서 나오는 늙은 상궁은 사랑 중문에서 마주쳤다.

"웬일이십니까?"

명보가 눈이 휘둥그레서 묻는다.

"글쎄올시다. 어가를 배행하시라고 부르시는 것 아니겠소."

명보와 상궁은 세자 침실로 걸음을 빨리하여 줄달음쳤다. 방울 소리가 또 요란스럽게 일어났다. 상궁과 명보는 침실창 앞에 당도했다.

", , 대령했사옵니다. 명보 대령했사옵니다."

"내전에서 상궁도 대령해 나왔사옵니다."

소란스럽게 흔들리는 방울 소리 속에서 명보와 상궁은 침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아뢰었다. 침실 안에서는 대답 대신 격렬한 신음 소리가 일어났다.

"에쿠, 죽겠다. 사람 살려라!"

", , , 아야, 배야."

침실 안에서 새어 나왔다. 안절부절을 못하는 외마디 소리다. 춘방사령 명보와 동궁상궁은 세자마마의 허락도 받지 않고 급히 청 안으로 뛰어올랐다. 방문을 활짝 열었다. 기막히지 않은가. 세자마마는 금침을 박차고 몸을 엎쳤다 뒤쳤다 자반뒤집기를 하면서 통성을 부르짖는다.

"아이구 배야, 아이구 가슴야."

세자는 정신없이 장판 바닥으로 마구 몸을 굴렸다. 상궁과 명보는 깜짝 놀랐다.

"세자마마, 이거 웬일이십니까?"

세자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비명을 연해 질렀다.

"아이구, 배야."

"관격이 되셨구먼. 얼른 전의를 들라 하오."

"전의를 부를 것 없다. 내가 내 병을 잘 알고 있다. 별안간 관격이 되었다. 어젯밤에 밤참 먹은 것이 눌려서 속탈이 난 모양이다. 내국에 기별해서 곽향정기산을 댓 첩 지어다가 연거푸 두 첩을 달여라."

세자는 자기 병을 안다고 전의는 청하지 말고 약만 지어오라 했다. 춘방사령 명보는 황황히 내국으로 뛰어들어가고 상궁은 안으로 뛰어가 동궁빈한테 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세자마마께오서 관격이 되시어서 지금 자반뒤집기를 하십니다."

동궁빈은 동궁이 대전의 사냥 거둥 하시는 행차를 배행한다 해서 밤을 새워가며 동궁의 구군복을 새로 짓고 있었다. 동궁빈 김씨는 깜짝 놀랐다. 안두판에 받쳐서 구군복 소맷부리를 눌러 다리는 인두를 곱돌 화로에 꽂고 급히 일어나 사랑으로 향했다.

"무어, 관격이 되셨어?"

세장궁은 발끈 뒤집혔다. 나인과 궁녀들은 동궁빈의 뒤를 따랐다. 한편 춘방사령 명보는 내국으로 뛰어가 세자의 분부대로 내의는 부르지 않고 곽향정기산을 지어 가지고 뛰어 들어왔다. 백탄에 불을 피워서 약탕관에 약을 달였다. 뜰 안팎에는 곽향내가 가득히 코를 찔러 떠돌았다. 동궁빈이 세자의 앞으로 나가보니 과연 세자는 관격이 되어 말이 아니다.

"웬 일이십니까. 밤사이에?"

세자는 대답 없이 자반뒤집기를 했다. 동궁빈은 세자마마의 손을 잡고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높직이 동편 하늘에 떠올랐다. 대궐 안에서는 만반 준비가 다 되었다. 만조백관들은 어둠침침한 새벽부터 궐 안으로 들어가 전하의 납시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강계 포수와 수천 명 군사들은 지난밤 자정 때부터 궐문밖에 진을 치고 거둥행차를 호위하기 위하여 한뎃잠들을 자고 있었다. 날이 활짝 밝았다. 태종은 호화찬란한 구군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사냥을 하러 나가게 되면 임금과 신하들은 문관의 금관조복이나 사모품대를 벗어놓고 군복으로 바꾸어 입는 것이 상례다. 궁년들에게 옹위되어 군복으로 갈아입은 태종은 좌우에 모시어 서 있는 내관을 돌아본다.

"동궁은 어찌한다더냐?"

"배행해 모시고 가시기로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여태까지 아니 보이느냐?"

내관들은 황송했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중에 심복 내시가 대답해 아뢴다.

"곧 들어오실 겁니다."

"일러두지 아니했나보구나."

"아니올시다. 어제 대정별감과 소신이 나가서 직접 세자마마를 뵙고 어가가 강원도로 가시는데 배종하시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을 전했다면 어찌 아니 들어온단 말이냐? 제가 먼저 들어와서 나를 기다려야지 내가 저를 기다려야 옳단 말이냐."

전하는 크게 노했다. 전하의 진노한 용안을 바라뵙자 내시들은 황황망조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신이 곧 다녀오겠습니다."

내시는 달음질쳐 동궁으로 향했다. 내시가 동궁 큰사랑 뜰 안으로 들어서니 곽향정기산을 달이는 곽향내가 먼저 내시의 코를 콱 찔렀다. 춘방사령 명보는 청동화로 위에 약탕관을 올려놓고 부채질을 해서 달이고 있다가 급히 들어오는 내시를 보았다. 봉지련의 뒤를 밟아 세자와 자기를 모함한 내시다. 얄미운 생각이 버럭 났다.

"공사청 나오십소. 왜 나왔소."

쪼그리고 앉은 채 일어나지 아니하고 인사를 했다. 공사청 내시는 곽향정기산 달이는 냄새를 심각한 표정으로 맡았다.

"약을 달이니 웬일인가?"

"큰일 났습니다."

"?"

"세자마마께서 관격이 되셨습니다."

"관격이 되셨다.?"

내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그렇습니다. 지금 자반뒤집기를 하시면서 좌불안석을 하십니다."

"언제부터?"

"새벽부터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허허, 그거 아니되셨네그려."

"어째 나오셨습니까?"

"대전마마께서 강원도로 사냥을 납시는데 아무리 기다리셔도 세자께서 아니 들어오시니 대단 진노하셨네. 그래서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나온 것일세."

"배행, 다 틀렸소. 배행이 무슨 배행이오."

춘방사령 명보는 내시가 얄밉고 보기 싫어서 한 번 퉁명을 주었다.

"기왕 나온 길이니 어디 세자마마를 뵙고나 돌아가겠네."

"미령하시다면 미령하신 줄 알고 돌아갈 것이지 당신이 여기까지 와서 세도요."

명보는 배알이 꼴렸다.

"이 사람아, 세도고 권세고 간에 지금 내가 온 것하고 무슨 아랑곳이 있나."

내관도 배알이 꼴렸다. 내관은 또다시 큰 소리로 춘방사령 명보를 꾸짖는다.

"세자마마께서 대전마마 거둥하실 때 배행하시기로 결정을 해놓았는데 이제 떠나실 때가 되어도 아니 들어오시닌 전하께서는 크게 진노하시고 나도 궁금증이 나서 대전께 아뢰고 나온 길일세. 세도가 무슨 세도야. 사령 놈쯤 되는 위인이 어디다가 말을 함부로 하는 거냐."

"여보 공사청, 댁이 누구한테 놈자를 마구 붙이는 거냐 말야. 왜 나한테 놈자를 붙이는 거냐 말야. 병신이 지랄한다고 고자된 것도 세돈가. 참 별꼴 다 보겠군. 여기가 어느 존전이라구 감히 큰 소리로 떠들어대느냐 말야. 여기도 당당한 세자궁야. 내관한테는 목에 칼이 아니 들어갈 줄 아나."

춘방사령 명보도 지지 않고 기염을 토했다. 옛 감정이 폭발된 것이다. 대청 앞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자 조심성 많은 동궁빈이 상궁을 돌아본다.

"누가 왔기에 저리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느냐. 빨리 나가보아라."

동궁빈의 안존한 분부가 떨어졌다. 상국이 나가보니 대전내시다. 급하게 들어와 세자빈께 아뢰었다.

"대전내시가 나왔습니다."

"대전내시가? 왜 나왔다 하더냐?"

"명보와 주고받는 말을 들으니, 대전마마께오서 연을 타고 납시는데, 세자마마께서 아니듭신다 하와 진노해 계시다 하옵니다. 그리하와 어찌 된 일을 알러 대전내시가 나왔다 하옵니다."

"나왔으면 나왔지 왜 저리 떠들어대느냐?"

"아마, 명보하고 내관하고 좋지 아니한 사이인가봅니다."

"너는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아니한 것을 어찌 아느냐?"

"전에 동궁에 출입하던 봉지련인가 하는 기생이 왜 있지 아니했습니까. 그때 대사헌한테 밀고해서 세자마마와 명보를 모함시키고 봉지련을 귀양보내게 한 내시가 있었습니다. 오늘 나온 내시가 바로 그 내시올시다."

동궁빈은 깜짝 놀랐다.

"이애, 그런 사람을 덧들여서는 아니 된다. 내가 친히 나가보리라."

동궁빈은 관격이 되어 쩔쩔매는 세자의 곁에서 조용하게 일어나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갔다. 이때 세자는 밖에서 명보와 내관이 승깅이질해서 떠들어대는 소리와, 동궁빈이 나인과 주고받는 말을 다 듣고 있었다. 나인이 전하는 봉지련 때 일을 말하는 소리를 듣자 그자를 두들겨 주고 싶은 생각이 왈칵 일어났다. 그러나 순간, 세자는 꽉 참았다. 밖으로 나간 동궁빈과 내시의 주고받는 수작이 들렸다.

"동궁빈마마, 문안드리옵니다. 대전내시올시다."

내시의 목소리다.

"어찌해서 나왔소?"

동궁빈의 부드러운 소리다.

"대전마마께오서 강원도로 사냥 명령을 내리신 것은 빈마마께서도 짐작하옵실 것입니다."

"대강 짐작하오."

"대전께서 지금 떠납시는데 저하께서 아직껏 아니 들어오신다 해서 크게 진노해 계시옵니다. 그리하와 소인이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잘 말씀드리고 나온 길이올시다. 듣자오니 별안간 관격이 되셨다 하오니 놀라운 말씀 형언키 어렵습니다."

"그러하오. 저하께서는 새벽녘에 별안간 관격이 되시어 복통이 대단하신 모양 같소. 지금 약을 달이는 중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배행은 못하실 것 같소. 들어가 대전마마께 잘 말씀 아뢰어주오."

동궁빈은 사무송하기만 간절히 바랐다. 아무리 내관이라 하나 말을 부드럽게 하여 어루만지면서 대했다. 대전내시는 동궁빈이 부드럽게 대할수록 의기가 양양했다.

"이왕 나온 길이니 뵙고 들어가겠습니다."

교활한 내관은 간특한 웃음을 지으면서 세자의 병세를 살피겠다고 말했다.

"문후를 드려도 좋지. 그러나 지금 한창 복통이 격렬하신 중이니 나중에 공사청이 다녀갔다고 내가 세자마마께 말씀 사뢰오리다."

동궁빈은 또 한 번 내관한테 부드럽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하오나 미령하신 환후를 뵙고 들어왔느냐고 대전께서 하문하신다면 속여서 대다해 아뢰기 황송하옵니다. 빈마마께오서는 이 점을 굽어살피시와 세자마마 뵙는 일을 허락해주십시오."

이때 약탕관에서 부글부글 약 끓는 것을 지키고 있던 명보가 벌떡 일어났다. 내관을 꾸짖는다.

"세자빈마마께서 친히 나와 의지를 내리시는데 아니 편한 것을 편치 않다고 할까 보아 대면해 뵙겠다는 거요? 도대체 당신은 너무 심하구려."

내시는 발끈 성이 났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한다고 그랬나? 어명을 받들어 나온 길이니 문후를 드리고 가겠다는 것이지. 이리하여 전하께서 자세한 증세를 물으시면 대답해야 할 것이 아닌가."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가. 동궁마마께서 환후 계시다 하는데 밖에서 대기하고 문후단자나 두고 갈 것이지 내관보다 더한 대신이라도 못하는 환후 중의 문안을 어찌하겠다고 이와 같이 강박을 하는 거냐 말야."

명보는 마침내 부아가 터졌다. 내관을 향하여 반말을 던졌다. 내관이 또 발끈했다.

"누구한테 반말짓거리를 하는 거냐?"

"너는 왜 나한테 놈자를 붙였니."

명보와 내관의 말다툼은 또 한 번 터지기 시작했다. 동궁빈은 먼저 명보를 꾸짖는다.

"저하께서 미령하신 중에 어찌하여 음성이 이리 방약무인한 태도를 취하느냐. 약이나 짜고 물러섰거라."

명보는 굽실하고 약탕관을 들어 약을 보았다.

"자아, 그럼 공사청, 들어와 미령한 모습을 뵙고 가오."

간특한 내관은 주저치 아니하고 청으로 올라, 빈마마와 궁녀를 따라 동궁 침실로 들어섰다. 이때 세자는 내관이 들어오는 발자취 소리를 듣고 아픈 모습을 더한층 지었다.

"아이구 배야."

", , , 가슴이."

이리 뒤치고 저리 뒤쳤다.

"소인 문후드리오."

간특한 내관은 정신 모르고 몸을 트는 세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내관은 동궁빈께 묻는다.

"약 화제가 무슨 약이오니까?"

"곽향정기산이라 하옵디다."

동궁빈이 대답했다.

"전의가 화제를 냈사옵니까?"

동궁빈은 무심코 대답한다.

"세자마마의 자방이신가 하오."

간특한 내관은 세자의 자반뒤집기하는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꾀병이라 직각했다.

"이같이 환후 중하신데 약을 자방으로 쓰시다니 말씀이 됩니까. 세자마마께서 아무리 증세를 스스로 아시고 약에도 경험이 계시다 하오나 의사가 아니신 바에 어찌 함부로 약을 쓰십니까. 곧 전의를 부르시옵소서."

세자는 내관의 말을 듣자 큰일이라 생각했다. 만약 내국에서 전의가 들어와서 진맥을 하게 되면 꾀병이 탄로날 것이었다. 세자는 어서 내관을 쫓아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아픔을 참는 체 얼굴을 찌푸리고 이불 속에서 몸을 돌렸다.

"몸이 괴로운데 옆에서 왜 이리 잔소리냐."

호통을 버럭 질렀다.

", 그저, 황공하오이다. 소인 환후 뵈옵고 송구무지하와 세자빈마마께 약 쓰시는 일을 아뢴 것뿐이옵니다."

"어명을 받고 나왔으면 안부를 알고 복명할 뿐이지 네 방지하게 무엇을 안다고 자방이니 타방이니 하고 약 화제까지 참견을 하느냐. 빨리 들어가 세자는 병으로 배행 못 한다고 말씀을 아뢰어라."

세자는 억지로 몸을 굴신하는 시늉을 지어 몸을 일으키면서 위엄기있게 꾸짖는다. 아무리 교활한 내관이었으나 세자의 엄숙한 태도에 기가 콱 질렸다.

", 곧 들어가 배행 못 하신다는 말씀을 아뢰겠습니다."

내관은 황망히 자리서 일어났다.

"어서 약을 짜서 올려라."

세자는 내관이 채 문밖으로 나가기에 분부를 내렸다. 곽향정기산을 명보의 손으로 약 수건에 짜서 세자께 바쳤다. 내관은 어전으로 들어가 아뢰었다.

"세자 병환으로 인하여 어가를 배행치 못하십니다."

"무슨 병이란 말이냐?"

"체하시어 관격이 되셨다 합니다."

내관의 아뢰는 말을 들은 태종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관격이 되었어?"

", 그리되셨다 하옵니다."

간특한 내관은 대답했다.

"그래, 대단하더냐?"

"대단치는 아니하신가봅니다. 약을 자방으로 해서 곽향정기산을 달여 잡숫는다 합니다. 아마 배행하기 싫으신 모양 같습니다. 약간 꾀병 같기도 합니다."

간특한 내관은 슬며시 털어놓았다. 전에 세자한테 매 맞은 분풀이를 또 한 번 했다.

"꾀병야!"

태종은 크게 진노했다.

"하던 지랄도 멍석 깔면 아니한다는 격으로 밤낮으로 사냥만 하던 위인이 정작 사냥을 가지니까 아니 가눈구나! 쩟쩟쩟......"

태종은 혀를 차고 옥좌에서 일어났다.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정전 밖으로 나갔다. 붉은 상모술로 찬란하게 꾸민 백마 위에 올랐다. 한편 세자는 내관을 돌려보낸 후에 곽향정기산을 마시고 온종일 누워 있었다. 약을 자신 후에는 복통이 가라앉은 듯 차차 평온한 얼굴을 지었다. 세자빈 이하 모든 궁녀와 춘방사령 명보에 이르기까지 비로소 마음들을 놓았다. 모두 다 세자의 솜씨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다만 어전내관 한 자만이 세자의 꾀병을 눈치채고 태종께 꾀병 같다는 말을 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벌어진 마음을 더욱 이간시켜 놓았다. 태종이 강원도로 사냥을 떠난 다음 날이다. 세자의 관격은 운권청천이 되었다. 음식도 잘 자시었다.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세자빈의 기쁨은 말할 나위 없었다.

"저하께서는 용하십니다. 곽향정기산 한 첩으로 급한 곽란병을 돌리셨으니 의원보다도 나으십니다."

빈은 미소를 지어 명랑하게 웃었다. 동궁을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사하는 동궁빈이었다. 파혼될 것을 구원해준 은혜를 한평생 잊지 못하는 동궁빈이다.

"하하하, 미상불 나만한 의사도 세상에 드물지. 하하하, 이 다음에 혹시 빈마마가 불편할 때가 있게 된다면 내가 약방문을 내서 빨리 병을 고쳐주리다. 하하하."

세자도 명랑하게 너털웃음을 자꾸 웃었다. 동궁 시녀들도 세자와 세자빈의 의좋게 주고받는 말씀을 듣고 모두 다 미소를 지어서 두 분의 조촐한 사랑을 부러워했다. 어느덧 석양은 꺼져서 저 때가 되었다. 세자는 마침 문안 들어온 명보를 불렀다.

"명보야."

세자는 언제나 명보를 다정하게 불렀다. 비록 춘방사령에 불과한 사람 명보지만 성품이 곧고 솔직했다. 무식은 하지만 의리가 있고 협기가 있었다. 여기다가 옳은 일이라면 충성을 다하고 그른 일이라면 목이 부러져도 말을 아니 듣고 직간했다. 온 세상 사람들은 이해와 욕심으로 타산을 하는데 명보만은 허욕도 없었다. 타산도 없었다. 세자는 사령 명보를 형제보다도 낫게 생각했다. 명보는 부르는 세자 앞으로 가까이 갔다.

"이제는 기후 어떠하십니까?"

화색이 도는 세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명보는 기쁘게 묻는다.

"네가 약을 잘 달여주어서 이제는 체기가 거뜬하게 풀렸다."

"마마, 고마우십니다. 그러나 전하를 모시고 사냥을 못나가셔서 마음에 걸립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마는 공교롭게 병이 난 것을 어찌하느냐. 하는 수 없구나. 그 대신 우리는 서울서 사냥을 한번 해보자꾸나."

명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서울서 사냥을 어찌합니까?"

"서울서 할 수 있지. 서울서 한번 짭짤하게 사냥을 해보기로 하자. 전하께서는 강원도로 산돼지 사냥을 가셨다마는 우리는 서울서 사람 사냥을 해보기로 하자."

춘방사령 명보의 눈은 또 한 번 둥그렇게 떠진다.

"사람 사냥입쇼? 사람을 사냥하는 법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농답이십니다."

"사람 사냥을 모르느냐? 너는 머리가 둔한 숙맥이로구나. 모르거든 모르는 대로 심부름이나 해라."

"글쎄올시다. 소인은 난생처음 세자마마께 사람 사냥이란 말씀을 들었습니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하라시는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 내 말 하고 구감역하고 이선들을 불러오너라. 요사이는 어디 있느냐? 집에 있느냐, 관청에 나가느냐?"

"봉지련으로 인하여 졸경을 치른 후에 모두 다 구실이 떨어져서 구감역도 집에 있고 이오방도 퉁소나 불고 돌아다닙니다."

"가엾구나. 나도 그 뒤에 소식이 끊어져서 사량범절도 못 대주고."

세자의 게슴츠레한 눈에는 안개가 서리는 듯했다. 허협하고 활소한 세자는 나이 먹어 갈수록 경력을 쌓아서 다정하기도 했다. 삼사 년 전에 자기 때문에 구실이 떨어져서 관청에도 못 나가고 두 사림이 다 함께 낙백해서 집 속에 죽치고 들어앉았다는 말을 들으니 가엾은 생각이 났다. 국상 중이라 가객과 금사들을 만날 기회도 없었다.

"얘야, 가거든 이것을 두 사람한테 한 봉씩 전해주고 좀 만나자고 해라."

세자는 문갑 문을 덜컥 열고 쇄은 두 봉지를 꺼내어 춘방사령 명보의 손에 놓아주었다. 명보도 감격했다. 자기 자신이 받는 은자가 아니건만 제가 받는 듯 기쁘고 좋았다.

"황감만만하옵니다. 얼마나들 좋아하겠습니까. 그럼 곧 데리고 오겠습니다."

춘방사령 명보는 흥이 나서 쾌자자락을 펄럭이면서 풍각쟁이 구종수와 이오방을 부르러 나갔다. 세자는 춘방사령의 기뻐하는 꼴을 보니 마음이 흡족했다.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춘방사령은 먼저 구종수의 집을 찾았다. 춘방사령 명보의 목소리를 듣고 구종수는 반가웠다. 사랑으로 쓰는 건넌방으로 맞이해 들였다. 뜻밖이었다. 이오방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춘방사령은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했다. 입을 딱 벌리고 껄껄 웃었다.

"이것 아주 잘 되었군. 두 분이 다 함께 계시는군 그래. 얼마 만이오. 진정 반갑구려."

춘방사령 명보는 까만 텁석부리 수업 속에 벌건 입술이 꽃판처럼 딱 벌어졌다. 거짓 없는 소박한 웃음이다. 구종수와 이오방도 반가웠다.

"이거 명보, 웬일야. 해가 서편에서 떴나? 우리들을 찾을 때도 있던가."

세 사람은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한동안 얼싸안고 있었다.

"그래 어때, 재미가. 세자마마께서도 안녕하기구?"

"그저 그런대로 안녕하게 지내시죠. 국상 때문에 근신도 하셨구."

"봉지련은 그동안 어찌 되었누?"

구종수가 명보를 향하여 묻는다.

"오입쟁이 구감역과 이선달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소. 춘방에서 쾌자자락이나 펄럭거리고 달음질치는 놈이. 소문을 들으니 귀양을 간 후에 병을 얻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립디다."

구종수는 탄식조로 말한다.

"우리도 귀양길을 갔다가 돌아온 길이지만 여인의 몸으로 천 리 타향 무인지경에 떨어졌으니 병이 나지 않고 배겨내겠나. 더구나 놀던 계집의 활발한 성미에 무인절도로 떨어졌으니 병만 나면 난치가 될 수밖에 도리가 없지."

"죽었다면 가엾구나!"

이오방이 한숨을 쉬면서 마주 한탄을 한다.

"그래 그는 그렇고, 어째서 오늘 명보가 우리를 찾았나?"

구종수가 다시 묻는다.

"세자마마께서 두 분 안부를 묻고 오라고 분부를 내리셨어. 그래서 먼저 구감역댁으로 온 길인데 이선달도 함께 계시니 나는 다리품을 덜 팔게 된 셈이오. 이런 것을 소위 일거양득이니, 일석이조니 했것다. 하하하하."

"일석이조란 너무나 헐한 소릴세. 우리들이 새 새끼가 아닌 담에야. 하하하하."

구종수는 홍락했다. 농까지 붙여본다. 춘방사령 명보는 사령이 입은 검은 더그레 앞가슴을 헤치고 허리춤에서 전대를 풀었다. 구종수와 이오방은 명보의 끄르는 전대를 바라본다. 명보는 전대를 거꾸로 들고 털었다. 전대 속에서 백지로 싼 봉지 둘이 뚝 떨어졌다. 명보는 봉지를 집어 들었다.

"옜소. 세자마마께서 두 분께 보내시는 물건을 받으시오."

구종수와 이오방은 영문을 몰랐다.

"그게 무어요?"

"아따, 받아 보시구려."

구종수와 이오방 두 사람은 제각기 백지 봉지를 헤쳤다. 기막히지 아니한가. 희다 못해 푸른 빛을 뿜는 쇄은 열 냥씩이다.

"이것 웬 것을!"

두 사람은 일시에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춘방사령 명보는 자기가 주는 듯한 만족감을 느낀다.

"하하하. 우리 세자마마께서....."

"세자마마께서 우리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어떻게 이같이 생각하신단 말씀요, 그리고 열 냥템씩이나."

구종수는 입이 떡 벌어져서 다물 줄을 모르고 벙글거리며 명보를 바라본다. 이오방도 기뻤다. 두 손으로 묵직한 쇄은 봉지를 받아들고 무어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몰라서 웃음 가득한 입술을 말없이 들먹일 뿐이다. 명보는 이런 때 큰 생색을 아니 낼 수 없었다.

"세자마마께서 두 분 안부를 물으시며 잘 지내느냐고 하시기에, 나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두 분이 모두 다 봉지련 사건 이래 귀양을 갔다 온 후에 구실이 떨어져서 생애가 만불성양이라고 아뢰었더니, '거참 가엾구나' 하시고 문갑을 턱 여시더니 열 냥짜리 쇄은 두 봉지를 꺼내시는구려. 나도 얼마나 기뻤던지 모르오. 내가 받는 듯 춤이라도 한번 추고 싶었소. 과연 우리 세자마마께서 인정도 많고 사물에 밝으시어 구중궁궐에 계시면서도 가난한 백성들의 물정을 잘 이해해주시는 어른이구려. 참 관홍대도시지."

"과연 제세안민하실 큰 인물이시거든."

"오입판 풍속까지 환하게 아시는 분이라 속이 탁 트이셨지."

구종수와 이오방은 쇄은을 받도 나니 마음이 푸짐해서 세자 예찬이 놀랍다. 춘방 명보가 다시 말을 꺼낸다.

"그리고 세자께서는 오늘 두 분을 불러오라 하셨소이다."

"사냥을 아니 나가셨소?"

"상감께서 어제 강원도로 사냥을 나가셨는데 배행하신 줄 알았는데 아니 나가셨소?"

이오방과 구종수가 번갈아 묻는다.

"어제 새벽에 별안간 관격이 되시어 사냥 나가시는 데는 배행을 못 하셨소."

"큰일 날 뻔했구려."

두 사람은 깜짝 놀란다.

"그래, 그 후에 어떠셔."

구종수가 묻는다.

"그만하시니까 두 분 생각이 나신 것 아니겠소. 어서 빨리 갑시다."

"가고말고. 오래간만에 병환 문안도 드릴 겸 빨리 가서 문후를 드려야지."

두 사람은 제각기 돈뭉치를 주머니에 놓어 수습한 후에 소세를 하고 의관을 차렸다. 세 사람은 대문을 나서서 동궁으로 향했다. 춘방 명보는 궁금한 일을 묻고 싶었다.

"여보 구감역, 한 마디 물어볼 말이 있소."

"무슨 말을?"

구종수가 되묻는다.

"세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들었거든. 사람 사냥을 하자 하시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단 말야. 도대체 사람 사냥이 무슨 뜻이오? 두 분은 혹시나 아시겠소?"

춘방 명보의 묻는 말을 듣고 구종수와 이오방도 얼른 대답을 못했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 사냥이라니, 먼저 무슨 말씀을 하시다가 사람 사냥을 하자고 말씀을 하셨단 말씀요?"

이번엔 이오방이 묻는다.

"대전마마를 뫼시고 강원도로 사냥 나가실 것을 못 나가셨으니, 서울 안에서 사람 사냥이나 하겠다고 하신단 말야. 그래서 내가 '사람 사냥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서울 안에서 사냥을 어찌 하랴 하십니까' 하고 여쭈어보았더니, 껄껄 웃으시면서 '참말 너는 숙맥이로구나' 하고 두 분을 불러오라 하십디다."

춘방 명보의 말을 듣자, 구종수와 이오방은 비로소 터득을 했다.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어댄다.

"수사람을 사냥하시자는 것인가, 암사람을 사냥하시자는 것인가. 하 하 하."

구종수가 웃으며 손뼉을 친다. 춘방 명보는 그래도 못 알아들었는지 멍하니 뒤를 따랐다.

"수사람 사냥도 하고 암사람 사냥도 하시자는 말씀일세."

이오방이 손뼉을 치며 대답한다.

"옳거니, 참 그렇구나."

구종수가 또 한 번 손뼉을 쳤다. 춘방 명보는 두 사람의 주고받는 말을 모두 다 변을 써서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한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따 갑갑하구려. 도대체 사람 사냥이 무어요? 그라ㅣ고 당신네들은 더 한술 떠서 암사냥, 수사냥하고 떠들어대니 내가 갑갑해서 죽겠구려. 도대체 무슨 변을 써서 수작들을 하고 있소?"

이오방, 구종수는 요절을 하도록 허리를 꾸부려 읏으며 걸었다.

"하하하, 당신은 과연 세자마마께 숙맥 소리를 들어 마땅하오. 사람 사냥이란 것은 정말 사람을 활로 쏘아 사냥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사람을 불러들인단 말씀이지, 하하하."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수사람 사냥은 무슨 뜻인구, 암사람 사냥이란 무슨 변이요?"

"변은 왜 변인가. 그대로 재치 있게 말한 것을 숙맥인 당신만이 못 알아들었을 뿐이지. 수사람 사냥이란 이선달 말대로 우리 두 사람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이구, 암사람을 사냥한다는 말씀은 여인 곧 기생을 데려오란 뜻이라 생각하오. 하하하. 그 말씀을 못 알아들었소?"

춘방사령 명보는 비로소 환하게 깨달았다. 그러나 겁이 버럭 났다.

"큰일 났구먼."

"?"

구종수가 묻는다.

"매를 또 죽도록 맞고 귀양들을 가야 할 판 아냐?"

"그도 그렇지."

"걱정은 걱정일세."

이오방도 구종수도 한마디씩 했다. 얼굴에는 기쁜 빛이 약간 스러졌다.

"좌우간 하라시는 대로 해야지 별수 있나."

인정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쇄은을 받은 두 사람은 형벌을 당해도 세자의 명령에 따를 것을 결심했다. 구종수, 이오방은 춘방 명보와 함께 세자궁으로 들어갔다. 명보는 뜰 아래서 외친다. 한번 괘사를 떨어보고 싶었다.

"춘방 명보가 사람 사냥을 해가지고 왔습니다."

구종수한테서 배운 지식을 털어놓았다. 세자는 장영창을 '드르륵' 열었다. 처마 끝에 달린 사방등 밑에 구종수와 이오방이 명보와 함께 섰다가 굽실하고 국궁해서 절을 올렸다.

"소인, 구종수와 이오방이 문안드리오."

세자는 반가웠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네가 이제는 사람 사냥이란 뜻을 좋이 알았구나. 제법이다."

명보한테 일변 말하고,

"어서들 올라오게."

구종수와 이오방한테도 전각으로 오르라는 분부를 내렸다. 구종수와 이오방이 동궁의 명에 의하여 전으로 오르니 세자는 창문지방에 의지해서 명보를 바라보면서,

"너도 올라오너라."

분부를 내렸다.

"소인도 올라가도 좋습니까?"

명보는 손짓을 해서 또 한 번 괘사를 떨고 두 사람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이오방, 구종수 두 사람은 장지 밖에서 세자께 절을 올렸다. 아까 마당에서 올린 절은 국궁이요, 이번 절은 배례다. 정말 절이다.

", 본 지 오랠세. 그래, 그동안 무사했나?"

"그저 하념하신 덕택으로 죽지 않고 살아서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아까 명보편에 저희들 두 사람을 생각하시고 보내신 귀중하고 후한 물건은 황공무지할 뿐 아니오라 하해 같은 은덕을 무엇으로 갚을지 말씀드릴 길이 없습니다."

"나는 그동안 국상 중이라 문을 닫고 지낸 때문에 까맣게 자네들 소식을 몰랐었네. 오늘 명보한테 알아본 후에야 비로소 자네들의 구실 떨어진 일을 알았네. 모든 일이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미안스럽기 짝이 없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저 세자저하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앞으로라도 하라시는 대로 견마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세자는 만족했다. 빙긋 웃으며 옆에 모시어 서 있는 춘방 명보에게 분부를 내린다.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난 이같이 좋은 밤을 그대로 허송할 수 있느냐. 아까 빈마마께 말씀을 드렸다. 안에 들어가 주안상을 내오라 해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명보는 총총걸음을 옮겨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래, 자네들과 동시에 고생하던 기생 봉지련은 어찌 되었나? 만약에 서울에 있다면 오늘 밤 자네들과 함께 주석을 같이해서 한자리에 아니 부를 수 없네."

세자는 구종수와 이오방을 대해 보니 봉지련 생각이 문득 났다. 하룻밤을 지내도 만리성을 쌓는다 했다. 몇 달을 두고 정을 주고받던 봉지련이다. 생각이 아니 날 수 없었다. 구종수와 이오방은 깜짝 놀란다.

"세자마마께서는 봉지련의 일을 모르십니까?"

세자는 구종수의 말에 대답한다.

"모르지, 내가 알 수 있나. 일차 귀양을 간 후에 소식이 돈절했고 바로 그 후에는 태상왕 전하께서 승하하시어 내가 삼 년 동안 근신하고 있었으니 바깥 일을 알 도리가 있나. 그저 글씨공부를 하고 들어앉아 있었을 뿐일세. 왜 혹시 봉지련의 신상에 어떤 일이나 일어났던가?"

", 명보가 말씀을 아니 여쭈었습니다그려."

"무슨 말을?"

"혹시 세자저하께서 마음에 좋지 아니하실까 하여 아니 여쭈었나 봅니다."

"어서 까닭을 말하여주게. 명보가 무슨 말을 아니 했단 말인가?"

"봉지련은 죽었다 합니다."

"무엇! 봉지련이 죽었어?"

"귀양길에서 병이 나 죽었다 합니다. 저희들도 귀양간 곳이 다르고 보니 그의 일을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아까 명보를 만나서 봉지련의 안부를 물었더니 명보의 대답이 봉지련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놈, 그런 말을 듣고도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아니했으니 무정한 놈이로군."

세자는 봉지련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감개가 무량한 모양이다. 입맛을 쩍쩍 다신다.

"명보가 무정한 것은 아닙니다. 충복인 때문, 저하께어소 혹여나 상심이 되실까 하여 아뢰지 아니한 것인가 합니다. 세자저하, 간절히 생각하는 그의 충심을 생각하시어 과히 꾸지람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정말일까?"

세자는 봉지련의 아름다웠던 얼굴이 눈에 암암하게 비치는 모양이다.

"명보와 봉지련 어미와는 홑벌 사이가 아닙니다. 세자마마께오서 봉지련의 집에 출입하실 때 명보는 봉지련의 어미와 의초롭게 지냈습니다. 이러하니 명보가 말한 일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허허, 가엾구나."

세자는 추연히 울굴에 슬픈 빛을 띠었다. 계속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몸이 일국 제왕의 다음가는 세자로 있으면서 사랑했던 애기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지 못하는 내 신세도 딱하구나!"

구종수와 이오방은 황송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안에서는 시녀들이 주안상을 받들어 내왔다. 세자는 시녀들이 배반을 정돈한 후에,

"너희들은 들어가거라."

분부를 내리고 뜰에서 상분별을 하던 명보를 불렀다.

"너도 올라오너라."

"소인은 아니 올라가겠습니다. 남이 보면 욕합니다. 사령놈이 마마를 모시고 술자리를 같이했다고."

"미친놈, 새삼 예법을 차리느냐. 너하고 나하고 술 먹은 일이 한두 번이냐. 잔소리 말고 어서 올라오너라."

춘방 명보는 못이기는 체,

"그럼 황송합니다."

또 한 번 익살을 떨고 전각으로 올랐다. 순배를 바꾸어 마시던 술이 거나하게 돌았을 때 세자는 소매를 걷으며 추연한 얼굴빛으로 말한다.

"그동안 나는 삼 년 동안을 술을 끊고 글씨공부만 했네. 사냥도 하지 아니하고 그 좋아한다고 욕을 당하던 매도 기르지 아니했네. 우리 할아버지의 거상 상복을 입은 때문일세. 이제는 탈상도 하고 아바마마께서는 사냥도 나가시고 아니 계시니 옛 친구들과 함께 단란하게 앉아서 술 한 잔씩을 나누려고 구감역과 이선달을 찾은 것일세."

"황감하옵니다."

구종수와 이오방은 일제히 고개를 수그렸다. 세자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나 소일지탄이 있네. 삼 년 전에 이 자리에 모였던 봉지련이 보이지 아니할 뿐 아니라, 아까 들으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천국으로 돌아갔다. 하니 감창한 회포를 이길 수 없네. 인생이 항상 무상하다고 글로만 읽고 말로만 들었더니, 이제 오늘 밤에 실제로 당하고 보니 과연 허무하기 짝이 없네그려."

세자의 말을 듣자 모두 다 얼굴빛이 처량하게 변한다. 세자는 큰 잔을 들어 손수 술을 가득히 붓고 명보를 불렀다.

"이애, 명보야. 너도 대단 박정한 사람이다. 어찌하면 봉지련이 죽은 것을 알고도 나한테 연통도 한 마디 아니했더란 말이냐. 제 집에서 병이 나서 와석종신을 했다 해도 한 마디 알려줄 터인데 나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부른 죄로 해서 원악도로 귀양을 갔다가 죽었다 하는데 한 마디 통지도 아니 해준단 말이냐. 너무나 박정하고나. 옜다, 벌주로 한 잔 마시어라."

명보는 죄송했다. 박정하다는 세자의 꾸지람을 들으니 눈물이 눈에 글썽거렸다.

"어서 마셔라."

세자는 벌주를 재촉했다. 춘방사령 명보는 무릎을 꿇고 세자의 내리는 벌주를 두 손으로 받들어 마신 후에 안주는 들지 아니하고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다. 춘방사령 명보는 소박한 심경을 털어놓는다.

"그저 아뢸 말씀 없습니다. 봉지련이 죽은 것은 지련의 어미를 통하여 알았습니다. 그때 진시 세자께 아뢸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그러하오나 세자마마께서는 당시 마음이 상하시어 곡기까지 끊고 계시고 조정에는 대사헌 이하 논박이 대단할 때입니다. 그때 만약 세자께서 봉지련의 세상 떠난 일을 아신다면 무슨 병환이 또다시 나셨을지 모를 것입니다. 이리하와 입을 딱 봉하고 말씀을 아니 드린 것이올시다. 그 점을 살펴주시기 바라옵니다."

구종수와 이오방은 춘방사령 명보를 위하여 세자한테 두둔하는 말씀을 아뢴다.

"아까도 아뢰었습니다마는 명보의 충성스런 마음은 가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자께 무심해서 봉지련의 세상 떠난 것을 아뢰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다. 세자저하의 옥체에 혹시나 다른 일이 있을가, 또는 불명예스런 사건이나 또 일어나지 아니할까 해서 고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우선 그 증거로는 명보는 소인들한테도 말을 아니 했습니다. 이것은 봉지련의 죽었다는 말씀이 혹시 세자께 들어갈까 해서 이같이 조심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자께서는 명보의 소박한 그 점을 생각하시어 특별히 용서해주시기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천하에 명보같이 우직한 인물은 약에 쓰려 해도 구할 수 없습니다. 깊이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이오방이 한마디 한다.

"나도 다 명보의 마음을 짐작하네. 그러나 오늘 밤 이 자리에서 한 마디 수죄를 아니할 수 없네. 하 하 하."

세자는 연해 봉지련의 생각이 나서 처량한 모양이다.

"세자마마, 아뢰업니다. 아까는 명보한테 벌주를 내리셨으니 이제는 푸는 술로 한 잔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명보는 오늘 밤에 다리를 펴고 잘 것입니다."

세자는 명보한테 미워서 벌주를 보낸 것이 아니다. 세상만사에 허무를 느껴서 봉지련을 생각하는 말 끝에 보낸 벌주였다. 벌을 풀어주라는 구종수와 이오방의 의견을 따랐다.

"자아, 그럼 이번에는 푸는 술이다. 한 잔 쾌하게 마셔보아라."

명보는 세자가 벌을 풀어준다는 바람에 마음이 흐뭇했다.

"금방 벌을 내리시고, 금방 풀어주시니 소인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내리시는 술이니 사양치 아니하고 마시겠습니다."

명보는 큰 잔을 번쩍 들어 단숨에 켰다. 이오방과 구종수가 서로 눈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소곤소곤 귀엣말을 한다.

"여보게 이선달, 어떻게 세자의 그 슬퍼하시는 마음을 위로해드려야 하겠네."

"글세, 위로해드려야지."

"봉지련 대신으로 명기 한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어떠하겠나?"

구종수가 이오방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는 애라야 하지 않겠나?"

"아무렴, 가무가 다 일류라야 하지."

구종수가 맞장구를 쳤다.

"작은 꾀꼬리 소앵이를 부르면 어떠할까?"

구종수의 발론이다.

"좋지."

이오방이 대답했다.

"그럼, 자네가 좀 가서 데리고 오게."

"전하께서 아니 계시니 마음 놓고 데려와도 좋겠지."

이오방은 밖으로 나갔다. 구종수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 후에 세자가 묻는다.

"그동안 어디를 갔다 왔나?"

"대청에 잠깐 나갔다 왔습니다."

"이선달은 왜 아니 들어오나?"

"좋은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좋은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가다니 무슨 소린가?"

"봉 대신 학을 잡으러 나갔습니다."

구종수는 벙글벙글 웃으며 세자를 바라 뵙고 아뢴다. 세자는 봉 대신 학을 잡으러 갔다는 오입쟁이들의 변을 짐작했다. 봉지련이 대신 어떤 기생 아가씨를 데려온다는 뜻인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못알아듣는 체 시치미를 떼고 묻는다.

"봉 대신 학이라니 무슨 소린가?"

옆에서 명보가,

"봉은 봉지련을 말하는 소리구, 학은 봉지련 대신 또 하나의 다른 기생애를 구해온다는 말인가 합니다."

아뢴 후에 구감역을 향하여,

"공연히 딴짓들을 하는구먼. 나중에 또 졸경을 치르려고!"

명보는 좋지 아니한 얼굴빛을 해가지고 투덜댄다. 구종수는 얼근한 술기운을 빌려 마음이 호탕했다.

"아따 이 사람 명보, 사람이란 정이 있어야 하고 의기와 협기가 있어야 하네. 의기와 협기는 사람의 인정에서 나오는 것이거든. 세자마마께서 봉지련이 불상하게 죽은 것을 생각하시고 마음이 좋지 않아 하시는데 재하자된 도리에 어찌 한 가닥 위로해드리고 싶은 생각이 아니 나겠나. 그래서 봉 대신 학을 불러서 저하의 울적하신 회포를 풀어드리려고 한 것일세. 과히 노하지 말게. 하하하."

오입쟁이 구종수는 언변 좋게 투덜거리는 명보를 너털웃음을 쳐가며 달래본다. 명보가 말한다.

"나도 그 경위쯤야 짐작하오. 세상에 인정 없이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소. 그러나 세자마마께서는 우리와 달라서 몸조심을 하셔야 하실 형편이란 말야. 그러니까 말을 하는 것이지. 내가 봉 대신 학을 데려 오는 것을 미타하게 생각하서 하는 소리가 아니거든. 경연스레 오해를 해서는 아니되어."

춘방 명보도 주기가 높았다. 세자 앞인 것도 불구하고 언성을 높였다. 구종수도 약간 술기운이 높았다.

"아따 이 사람, 졸경 치르는 일이 그렇게 무서운가. 나는 졸경을 골백번 치르더라도 세자마마께 충성을 다하려 하네."

구종수가 세자마마께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에 춘방사령 명보는 왈칵 역심이 났다.

"충성! 그래 구종수만 충성을 다할 줄 아나. 춘방사령 명보놈은 세자마마의 비위를 거스르니까 역적이로구나. 왜 이래, 누가 세자마마를 더 모시었는데. 나는 세자마마르 업어서 모신 사람야. 봉지련이 때 고생을 많이 하시고 심부름하던 사람들이 다 죽고 졸경을 치렀기에 몸 저심을 하십사 하는 내 말이 그래 틀렸단 말인가? 어거 아주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막 뒤흔들어보네그려. 구감역은 충심이 아니라 아첨일세."

명보는 뱉듯이 뇌까렸다. 구종수도 불끈했다. 팔뚝을 걷어붙였다.

"무어, 아첨야!"

눈을 딱 부릅뜬다.

"아첨 아니면 무엇야. 아첨과 충심은 다르이."

명보가 눅진눅진 받아넘긴다. 세자는 빙긋 웃어가며 두 사람의 겯고 트는 수작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을 흔들어 무마한다.

"자아, 두 사람의 뜻을 다 알겠네. 구감역은 나의 쓸쓸해하는 심정을 따하게 생각해서 봉대신 학을 데려와서 내 마음을 위로해주려고 한 것이구, 명보는 나의 세자라는 신분을 생각해서 뒷날 또 말썽이 나지 않도록 바른 말을 한 것이니,. 두 사람의 말하는 방향과 의사는 다르다 하나 결국은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모두 다 충성스런 행동이라 하겠네. , 이젠 그만해두고 우리 화해술이나 한 잔씩 들기로 하세."

세자는 말을 마치자 대백에 술을 가득 부어 먼저 구종수한테 권하고 다음엔 명보한테 권했다.

"화해술이다. 사양 말고 마시어라."

"이거 황감하오이다."

"죄송합니다."

구종수와 춘방 명보는 한 마디씩 하고 세자가 친히 따라주는 화해술을 꿇어앉아 마시었다.

"저희들은 화해술로 마시었습니다마는 세자께서는 대인난하시는 술로 한 잔 잡수시옵소서."

구종수는 무릎을 꿇고 옥잔에 가득 술을 부어 세자께 올렸다. 세자의 젊은 얼굴은 화려했다.

"내가 누구를 기다렸기에 대인난이란 말이냐?"

구종수가 벙긋벙긋 웃으며 대답해 아뢴다.

"학이 온다 하지 아니합니까."

"학은 곧 사람과 통합니다. 학을 기다리시는 마음은 곧 대인난이올시다. 하 하 하."

세자는 봉 대신 학을 데려온다는 말에 은근히 기대가 컸다. 나중에 졸경을 치르더라도 좋았다. 세자 자리를 내놓고 싶은 세자였다.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학은 얼마만큼 예쁜 계집인가 하고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하 하 하, 그런가."

세자는 쾌하게 술을 들었다. 세자의 가락 높은 웃음소리가 흩어질 때 대청에서 큰 기침소리가 들리면서 사랑방 문이 밖에서 열렸다. 방 안에 있던 세자 이하 구감역과 명보의 눈결이 방문편으로 향했다. 이선달 오방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는 산 사람 이십 대의 예쁜 미녀가 되를 따랐다. 세자의 눈이 여인의 자테를 바라본다. 절염은 못 되지만 상의 중품은 되는 미인이었다. 여인의 모습은 십인십색이란 말이 꼭 들어맞았다. 봉지련하고는 정반대다. 지련은 살이 풍윤했다. 고운 지방이 온 형해를 포근하게 싸주어서 윤이 흘렀다. 눈은 어글어글하고 봄산같이 맑은 아미는 담담하면서 양미간이 넓었다. 가슴은 벌어졌으면서 유방이 반 이상을 차지해서 보기에 넓지도 않고 탄력이 포단 같았다. 이렇게 세자는 봉지련을 백모란 꽃에 비했던 것이다. 이오방의 뒤에 따라오는 여인은 날씬한 몸매다. 마치 수양버들 가지가 하느작하느작 바람을 이기지 못하는 듯했다. 어깨는 집어논 듯 날렵하고 허리는 쥐면 주먹 안에 들 듯 한들거리는 세요다. 세자는 이제는 여인의 멋을 감상할 줄 안다.

'일취 있는 계집이다.'

하고 바라본다. 이오방은 세자의 앞으로 가자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공손히 아뢴다.

"오늘 밤 세자마마의 주흥을 돕기 위하여 아름다운 기녀 한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의향이 어떠하실는지 가납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세자는 만족했다.

"자네들의 후한 정은 두고두고 잊지 아니하겠네."

미소를 지어 대답하면서 다시 한번 여인을 바라본다. 계집은 세자 앞에 나가 단배를 올린 후에 한 팔을 가슴에 괴어 문안 절을 올리고 두어 걸음 뒷걸음을 쳐 물러갔다. 남치마 흰 고름 아래 손을 모아 분부를 바라고 서 있다. 예쁜 자세다.

"이리 오너라. 내 옆에 앉아보아라."

세자는 손을 들어 기녀를 불러본다. 미인은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세자는 기녀의 일거일동을 몽롱한 취안으로 바라본다. 남치마 끝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같이 흰 버선코가 치맛자락 밑으로 날름날름 드러났다. 향지의 냄새가 세자의 코에 스몄다. 백과 남, 희고 푸른 빛깔이 예쁘게 색의 조화를 이루었다. 미인의 태깔이 더한층 돋아보였다. 세자는 미인을 옆에 앉혔다.

"네가 나를 위해서 술 한 잔을 따르겠느냐?"

"영광이옵니다. 천한 몸으로 세자마마를 지척에 모시어 약주를 따르게 되니 일신에 넘치는 복인가 하옵니다."

기생은 세자 앞에 꿇어앉아 금잔에 술을 가득 부어 세자께 올렸다. 술좌석에 으레 나오는 기생의 권주가 노래가 아리땁게 나오기 시작했다.

'한 잔 잡아 드시오. 이 술 한 잔 잡으시면 장래의 제왕마마 만수무강하오리다.'

기생은 술자리 첫순배에 으레 부르게 마련인 권주가를 불렀다. 가사는 평범했으나 청은 용요하게 벽공 위에서 옥이 부서져 떨어지는 듯했다. 세자는 이 기생도 보통 기생이 아닌 것을 짐작해 알았다. 가득히 부어 올린 술을 다 마신 후에 기생을 향하여 묻는다.

"네 노랫소리를 들어보니 보통 기생이 아니다. 청이 좋구나. 노래를 배웠을 때 매깨나 좋이 맞고 배웠구나. 네 고향이 어디냐?"

"서울이올시다."

"서울인 줄 짐작했다. 사투리가 없구나. 네 이름이 무어냐?"

"소앵이라 합니다."

"소앵이, 작은 꾀꼬리란 말이로구나. 예쁜 이름이로구나. 꾀꼬리는 노래를 잘 부른다 하더니 네가 사람이면서 꾀꼬리같이 노래를 잘 부르는구나."

이때 구종수가 한마디 한다.

"봉지련은 화사한 태깔이올시다. 그러나 소앵이는 겉보다도 안이 더 매끈하고 고운 여자올시다. 그의 노래와 가사는 하룻밤 흥을 돋울 뿐만이 아니라 한번 사귀시면 한평생 잊지 못할 매력을 가진 여자올시다."

이오방도 한마디 한다.

"소앵이를 앞에 놓고 말씀하는 것이 체모와 예절에 어긋납니다. 그러하오나 소앵이는 평양 기생이나 성천 기생처럼 욕심이 없는 기생이올시다. 한번 정분만 들면 자기 살을 베어 먹이려 하는 성질이올시다."

"미상불 경기 기생이나 서울 기생은 욕심이 없는 법이것다."

춘방사령도 기생을 데려왔다고 구종수를 퉁명준 후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오래간만에 한마디 했다. 역시 서울 태생 명보였다. 서울 칭찬이 놀라웠다. 구종수가 또 한마디 한다.

"소앵이는 노래도 잘 부를 뿐 아니라 춤도 잘 춥니다. 지금 춤으로는 장안 기생 축에서 독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올시다."

춤을 잘 춘다는 데 세자는 흥미가 있었다.

"봉지련의 춤에 비교하여 어떠한가?"

"봉지련의 춤은 소앵의 춤에 비교한다면 아기올시다."

이오방이 소앵의 춤을 극구 칭찬했다. 세자는 소앵의 춤이 장안 기생 중에 제일이란 이오방의 말을 듣자 춤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났다.

"자아, 그럼 소앵의 춤을 한번 보자꾸나. 대청으로 나가자."

세자의 말이 떨어지니 소앵은 눈웃음을 간드러지게 치며 세자께 아뢴다.

"춤을 추라시면 추겠습니다마는 혼자 몸이 되어서 단무밖에는 못 춥니다."

"단무란 무엇이냐?"

"혼자 추는 춤이 단무고, 둘이 추는 춤을 쌍무라 합니다. 그리고 여럿이 추는 춤을 군무라 합니다."

세자는 모두 다 처음 듣는 소리다. 춤의 총칭을 비로소 알았다.

"군무를 추려면 사람이 몇 명이나 필요하고 쌍무는 몇 명이 드느냐?"

"군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쌍무는 쌍쌍이 추는 춤이니 글자 그대로 두 사람이면 족합니다."

"오늘 밤엔 하는 수 없다. 너 혼자 있으니 단무라도 추어보기로 하자. 일당백이라면서 그러느냐. 너 혼자 추어보아라."

"세자마마를 모시고 함께 추면 쌍무가 됩니다."

소앵은 상긋 웃음을 머금어 교태를 지어 말한다. 눈웃음 속엔 말고 푸른 동자가 정취를 자아내 보인다.

"내가 춤을 출 줄 알아야지."

"생이지지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소인이 가르쳐드립지요. 호호호."

소앵의 푸른 눈과 붉은 입술은 유난히 빛깔의 대조를 이루면서 세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그래, 나도 춤을 한번 격식 있고 멋들어지게 추고 싶다. 앞으로 너한테 배울 셈 잡고 우선 너의 단무를 보기로 하자. 단무에는 무슨 춤 무슨 춤이 있느냐?"

"검무를 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워낙 쌍쌍이 추어야 하니 쌍무에 소속됩니다마는 단무로도 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승무를 출 수 있습니다."

"승무? 그것 좋구나. 남중이 추는 춤이냐, 여중이 추는 춤이냐?"

"여중이 추는 춤이올시다. 백팔번뇌를 이기지 못하다가 그대로 고깔 장삼을 활활 벗어 던지고 북을 치면서 파계 여승이 되어버리는 것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올시다. 말하자면 숫처녀로 있던 여승이 만물이 화창한 봄이 되니 회춘의 애운한 정을 이기지 못해서 천연의 욕정을 발로하는 기막힌 장면이올시다."

소앵은 말을 마치자 추파를 흘려 세자를 살몃 웃으며 바라본다. 또 한 번 세자를 뇌쇄시키는 요염한 웃음이다. 세자의 마음은 자못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아, 그럼 승무를 추어보아라. 대청으로 나가자."

세자는 소앵을 재촉해서 춤을 보자고 분부를 내린다. 옆에 있는 구종수가 말참견을 한다.

"승무를 추자면 복색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소앵한테 묻는다. 소앵이 상긋 웃으며 대답한다.

"이선달님이 벌써 다 준비해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래 제법 선견지명이 있구먼, 하하하. 이선달, 용하구려. 어떻게 세자께서 소앵이에게 춤을 추랍시는 분부가 내릴 줄 알고 미리 춤 제구를 자기고 왔나?"

"내가 용한 것이 아닐세. 소앵이가 묘한 계집일세. 선견지명은 소앵이가 있지. 세자마마께서 부르신다고 내가 초패령을 놓았더니 소앵이는 황감하다고 말하며 한동안 눈을 깜빡거리고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세자마마께 보여드릴 장기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춤 한 가지는 출 수 있으니 아저씨 의상을 가지고 갑시다해서 승무, 검무 복색에 화관, 몽두리까지 가지고 왔네. 그러니 소명하고 영리한 것은 소앵이지 내가 아닐세."

이오방은 소앵의 총명한 것을 칭찬했다.

"소앵이가 예쁘고 총명한 줄은 전부터 잘 알았지만 이같이 준비성이 철저할 줄은 과연 몰랐네."

구종수도 칭찬을 했다. 세자도 두 사람의 수작하는 것을 듣고 더한층 소앵이를 예쁘고 민첩한 계집이라 생각했다.

"자아 그럼 승무부터 구경하기로 하자. 이선달이 춤출 때 입을 복색을 가지고 왔다 하니 승복을 내놓도록 하게."

"다아 대청에 준비해놓았습니다. 그럼 세자마마, 일어나십시오."

"모두 능숙한 오입쟁이들일세. 척척 거행을 하는구나."

세자는 마음이 흡족했다. 크게 칭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앵은 잽싸게 세자를 부액해 일으킨다. 봉지련보다도 더한층 민첩한 행동이었다. 세자는 마음속으로 날렵한 계집이라 감탄했다. 청에 나가니 이오방은 벌써 승무 출 제구를 보에서 끌러놓았다. 하얀 고깔에 먹장삼이 한 벌씩, 그위에는 길고 넓은 붉은 띠가 얹혀 있었다. 춘방사령 명보는 곳간으로 내려가 장고와 북을 대청으로 올렸다. 북은 대청 한복판에 달아놓고 장고는 이오방이 장단을 치기 위하여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세자는 청 안에 교의를 내어 걸터앉아 있고, 이오방은 마루판에 방석을 깔고 장고채를 잡았다. 구종수는 소앵의 입은 옷 위에 먹장삼을 입히고 은조사 하얀 고깔을 칠흑같이 윤이 흐르는 쪽찐 검은 머리에 씌워주었다. 다시 대홍단 붉은 띠를 먹장삼 반허리에 멋있게 둘러서 앞섶으로 뚝 떨어뜨리고 어깨에는 붉은 마수가사를 걸쳐주었다. 이오방의 장단 메기는 장고 소리에 따라 소앵이 양편 손에 북채를 한 개씩 나누어 잡고 춤을 우쭐우쭐 추기 시작한다. 어깨가 으쓱거렸다. 흑장삼이 펄럭하고 움직였다. 검은 장삼 어깨 위로 붉은 마수가사가 바람에 펄펄 날렸다. 눈빛 같은 흰 버선이 흑장삼 앞자락을 가볍게 찼다. 흑과 적과 백이 좋은 색의 대조를 이루면서 또 하나의 붉은 띠는 허리에서 흔들려 아름다운 율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으쓱으쓱, 한들한들 춤을 추기 시작하던 소앵은 점점 춤에 열이 올랐다. 먹장삼 소맷자락을 허공을 향하여 치켜 올렸다. 먹장삼 소매 밖으로 진달래빛 분홍 소매가 남끝동과 함께 드러났다. 또 하나의 움직이는 색의 조화가 아름답게 세자의 눈을 고혹시켰다. 소앵은 북채를 든 채 달음질쳐 북으로 달렸다. 옥 같은 흰 손으로 채를 잡아 북을 두드렸다. '둥 둥 둥' 북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느릿느릿 치던 북은 점점 음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열이 올랐다. 북소리는 다급하고 요란했다. 북소리가 다급하고 요란할수록 소앵의 정열은 점점 고조되었다. 소앵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했다. 다만 회춘의 정열이 불을 뿜어 치솟을 뿐이다. 한 번 쳐서 울리는 북에 열은 열을 보탰다. 두 번 치는 북에 완전히 자아를 잊었다. 소앵은 벅차 오르는 회춘의 정열을 북에다 쏟아버리는 자세다. 북소리는 정열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채 음향의 간격을 바짝 줄이면서 뜨거운 정열을 일으켰다. 소앵은 마침내 북이 뚫어져라 하고 채를 두드렸다. 양편으로 울려대는 소앵의 북채는 초초마다 자지러질 듯 강렬한 음향을 내면서 정열과 북의 음악은 대결을 했다. 소앵의 멋들어지게 채를 치는 행동은 광란의 미의 세계다. 세자는 손에 땀을 쥐었다. 취한 듯 소앵의 춤을 바라본다. 소앵은 마침내 참을 수가 없는 자세를 취했다. 북을 두드려 패듯 했으나 홍수처럼 터지는 회춘의 정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북채를 내던지고 북에서 돌아섰다. 북을 던지고 활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먼저 종교의 쇠사슬로 얽어맨 먹장삼 고름을 풀었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가사를 훌떡 어깨에서 떼어서 대지 위에 내동댕이쳤다. 붉은 비단 긴 띠를 풀었다. 검은 장삼을 벗어버렸다. 은조사 하얀 고깔을 땅 위에 던져 버렸다. 여승의 갸륵하고 깨끗한 상징인 의관이었다. 소앵은 모든 허위를 다 벗어버렸다. 그대로 발가벗은 자연의 딸인 하나의 여자의 몸으로 되었다. 소앵이 먹장삼을 벗어버린 아름다운 태깔은 세자의 눈에 기막히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딸로 보였다. 춤 속에 나타나는 인생의 진리를 긍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때였다. 구종수가 팔을 벌려 춤을 추면서 으쓱으쓱 소앵의 앞으로 향해 들어갔다. 저편에서 소앵이도 팔을 벌리고 구종수를 향하여 마주 춤을 추며 나온다. 남자와 여자가 어울려서 추는 멋들어진 춤은 비로소 인간의 본연의 태세를 보여주면서 멋들어지게 우쭐우쭐 춤을 추었다. 세자는 손에 땀을 쥐고 망연히 바라보면서 큰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허위와 가식 속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모습, 더욱 종교 속에 억눌린 가련한 여인들의 생태를 넉넉히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형태는 세자 자신한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부자유, 모든 억압, 모든 허례와 허식은 이름과 처지는 다를지언정 여승의 회춘무와 똑같다고 생각되었다. 세자라는 명칭을 여승이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먹장삼 붉은 가사를 세자를 구속하는 쓸데없는 도덕으로 바꾸어본다면 자기의 처지는 회춘을 울부짖으면서 파계여승이 되는 승무춤의 풍자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세자는 손에 땀을 쥐어 하회를 바라보았다. 소앵은 고조된 춤을 그친 후에 세자 앞에 나와 절을 올린다.

"변변치 못한 춤을 보여드려서 죄송만만하옵니다."

세자는 덥석 소앵을 끌어안았다.

"애 많이 썼다."

소앵의 검은 머리를 귀엽게 쓰다듬어주었다. 세자의 무릎 위에 안긴 소앵은 행복감을 느꼈다. 아름다운 눈을 살며시 감고 해당화같이 붉은 입술 사이로 대답 없이 상글상글 웃음을 풍겼다. 비록 기생의 몸이라 하나 잠시라도 세자의 사랑을 훈훈하게 받는 이 순간이 소앵에게는 천금 같은 행복감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머리 깎지 않은 우리 여승."

세자는 귀엽다는 듯 또 한 번 소앵의 비취옥 비녀가 꽂힌 뒷머리를 쓸었다.

"네가 정말 여승이었다면 너의 정열은 승무춤을 추는 여승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세자는 가볍게 소앵의 뺨에 자기의 뺨을 대어본다. 이제는 세자도 반죽 좋은 오입쟁이가 되었다. 구종수나, 이오방이나, 춘방사령들이 있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소앵을 안고 다룰 줄 알았다. 파탈한 젊은 오입쟁이 풍도가 호탕했다. 소앵이 방싯 웃고 대답한다.

"소인이 승려가 되었다면 고깔 장삼을 둘둘 말아서 바닷물 속에 내던져서 천리만리로 띄워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구구하게 백팔번뇌를 춤으로 흩어버릴 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냐?"

"도처에 있습지요. 이곳에도 계십니다."

소앵은 아름다운 손을 들어 세자마마의 뺨을 가리킨다. 정이 소앵한테로 쏠리기 시작한 세자는 소앵의 어리광 피우는 행동이 마음에 푹 들었다.

"정을 나누기 전에 내가 어느 틈에 네 애인이 되었구나."

"정이란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눈에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벌써 세자마마의 가슴속에 출렁거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소인의 가슴 안에는 세자마마의 고우신 마음이 고요히 물결지어 흐릅니다."

세자는 완전히 소앵의 영리하고 민첩한 말솜씨에 마음이 홀리기 시작했다.

"자아, 우리 방으로 들어가서 세잔갱작을 하기로 하자."

세자는 소앵을 무릎 위에서 내린 후에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오입쟁이들도 뒤를 따랐다.

"오늘 밤에 소앵이는 내 수청을 들어라."

세자는 소앵의 손을 잡고 분부를 내렸다. 소앵의 얼굴엔 홍조가 떠돌았다. 고개를 숙였다. 소앵은 이리하여 세자의 애첩이 되었다. 태종이 사냥나간 행차는 아직도 돌아오지 아니했다. 세자는 소앵을 동궁에 묵게 하고 날마다 오입쟁이들을 불러서 거문고와 노래와 춤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다만 거리끼는 것은 수문장 한 사람이다. 원래 세자궁 수문장은 봉지련이 출입할 때부터 있던 수문장이었다. 춘방사령 명보가 중간에 들어서 관절을 좋이 쓴 후에 한결 부드러워졌으나 아지고 대궐 안 대전의 녹봉을 받는 몸이었다. 세자보다도 상감의 명령을 더 존중했다. 더구나 이번에 상감 태종은 멀리 사냥을 나갈 때 특별히 세자궁 수문장을 불러서 엄한 분부를 내렸다.

"들으니 세자궁에 잡인들이 많이 출입한다 하니 사실이냐?"

수문장은 황송했다. 바른대로 대답할 수도 없었다.

"전에 붓장수가 드나든 일은 있었습니다만 그 외는 별로 잡인들의 출입이 없었습니다."

세자궁에 붓장수가 출입한 것은 임금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붓장수 필공이 드나든 일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 외에는 아무 사람도 출입하는 일이 없었느냐?"

"요사이는 태상왕 전하의 삼년 상중이시라 세자께오서는 항상 근신하고 계시면서 글씨 공부만 하셨습니다. 이리하와 붓장수 이외는 아무도 드나든 사람이 없었사옵니다."

사실이었다. 일단 봉지련의 사건이 있은 후에 가특한 내관의 고자질로 인해서 사헌부에서 헌관이 들고 일어나서 세자를 탄핵하고 드나든 오입쟁이 이오방과 구종수와 봉지련을 귀양보낸 후에 세자는 문을 닫아 우울하게 지냈고, 다음엔 태상황 전하의 국상이 나니 세자는 3년 동안 거상중이라 근신하는 태도로 글씨 공부만 하고 들어앉아 있었다. 태종은 수문장한테 다시 분부를 내렸다.

"내가 사냥을 나가면 보름이 될지 달포가 될지 모르겠다. 이번에 세자와 동행을 하려 했더니 세자는 별안간 관격이 되어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나 없는 동안에 너는 수문장의 자격으로 세자궁의 잡인 출입을 엄중 단속하라."

전하의 친히 내리는 말씀을 듣자 수문장은 황공했다.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수문장은 이같이 해서 특별 분부를 받았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춘방사령 명보밖에 없었다. 상감께서 아니 계신 동안에 세자의 분부를 어길 수 없어서 구종수와 이오방을 다시 부르고 소앵가지 불러서 데려왔으니 뒷일이 난감했다. 세자는 연일 소앵이를 동궁 안에 머무르게 하고 내보내지 아니했다. 춘방사령 명보는 수문장을 어떻게 조처하면 세자 편으로 만들 것인가 하고 궁리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신통한 묘책이 없었다. 명보는 소앵이를 데리고 방 안에서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세자를 창밖에서 청했다.

"세자께 아뢰옵니다."

"누구냐?"

"명보올시다."

"왜 그러느냐?"

"잠깐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세자는 소앵이와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판이다.

"이따가 만나서 이야기하자꾸나."

"이따가는 늦습니다. 지금 아뢰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 그다지 급하길래 아디지 서둘러대느냐?"

"불같이 급한 일이올시다. 서두르지 아니하면 큰일이 납니다."

불같이 급한 일이요, 서두르지 아니하면 큰일이 난다는 춘방사령의 말에 방에서 소앵과 함께 유열의 재미를 보는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명보한테 지고 말았다. 영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이 녀석아, 왜 이리 귀찮게 구느냐.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호들갑을 떨어서 남의 좋은 일을 방해하느냐."

명보는 대청 밖에서 툇마루판을 두 손으로 짚고 텁석부리 검은 수염 속에서 빙긋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 세자마마, 소인이 세자마마의 좋은 일을 방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세자마마와 소앵이의 일을 한평생 잘되도록 만들어드리려고 간절히 뵙기를 청한 것입니다. 절대로 좋으신 일에 훼방을 놓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문지방 너머로 소앵의 해반지르르한 예쁜 눈매와 명보의 눈이 마주쳤다. 소앵이는 세자의 옆에 앉아 있다가 파란 눈을 반짝 떠서 명보를 향하여 상긋 웃었다. 명보는 골이 왈칵 났다.

"에이, 요 구미호 같은 것. 너 때문에 내가 고생을 한다."

명보는 주먹을 들어 때릴 듯 겨눈다. 소앵은 세자 앞이라 명보의 말에 탓하지 아니했다. 상글상글 웃기만 했다.

"네 승무춤이 내 걱정을 만들어 놓았단 말이다. 왜 이곳까지 쫓아와서 남을 못살게 구느냐?"

소앵을 데려와서 세자께 소개한 이오방이나, 구종수나, 춘방사령 명보나 모두 다 소앵과 가까운 한통속 오입쟁이들이었다. 춘방사령 명보의 말에 소앵이라 노여워할 리 만무했다. 소앵이는 세자의 귀에 입을 대었다.

"세자마마, 나가보옵소서."

세자는 어느덧 소앵이의 귓엣말까지 듣도록 정다운 사이가 되어버렸다. 소앵이가 세자한테 귀엣말을 한 것은 명보한테로 어서 나가보라고 아뢴 말이었다. 세자는 소앵의 말을 듣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미친 놈. 왜 나를 나오라는 거냐?"

"헤 헤 헤. 비밀히 아뢸 말씀이 있어서 그리하옵니다."

명보는 뜰 아래서 세자를 두 손으로 받들어 모시는 시늉을 했다.

"어떻게 하란 말이냐?"

"세자저하, 이리로 내려옵시오."

명보는 세자의 발막 운혜신을 보석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세자는 발막신을 신고 뜰 아래로 내려섰다.

"어디로 가잔 말이냐?"

"모란꽃이 우거져 핀 석가산 아래로 가사이다."

"별안간 석가산 아래는 왜?"

"조용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세자는 명보의 뒤를 따라 모란꽃이 홍, , , 황으로 우거져 흐드러지게 핀 석가산 아래에 당도했다.

"앉으십시오."

춘방사령 명보는 더그레 흑의 자락으로 바윗돌에 앉아 먼지를 턴 후에 세자를 돌 위로 모시었다.

"너도 앉으려무나."

"소인은 차차 앉겠습지요."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소앵이가 맘에 드십니까?"

"들구 아니 들구 재주 있는 계집이더라."

"앞으로 동궁의 후궁을 삼으시렵니까?"

"봉지련도 세상을 떠났으니 대신 닭으로, 인생의 향락을 취해보려 한다."

"세자마마께서도 망령이십니다. 대신 닭이라는 말씀을 소앵이가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예 그런 말씀은 다시 하교하지 마십쇼. 그는 그렇고 만약에 소앵이를 궁중에 두시거나 밖에서 자주 동궁으로 출입하게 된다면 수문장 때문에 큰일이올시다."

세자는 비로소 춘방사령 명보가 조용히 의논을 아뢸 일이 있다는 뜻을 알았다. 세자의 독특하고 호협한 기상이 일어났다.

"하하하, 미친놈. 그 일 때문에 나를 석가산까지 내려오라 했느냐. 소심한 놈이로구나. 그깐 일은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할 일이지, 나한테 일일이 의논을 한단 말이냐. 네 문자대로 전에 봉지련이 때와 같이 관절을 두둑히 주어서 잘 처리하려무나. 그까짓 일을 나한테 묻느냐. 하하하, 미친놈."

세자의 웃음 가락은 푸른 하늘가로 높고 높게 스러진다. 명보는 얼굴빛을 고치며 정색하고 아뢴다.

"아니올시다. 까닭이 있습니다."

"무슨 까닭이 있단 말이냐?"

세자는 명보한테 묻는다.

"세자마마께서는 아직 모르시옵니다마는 이번에 상감께서 사냥을 납실 때 특별히 수문장을 불러 대단하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전같이 관절쯤 쓰는 것 따위로는 일이 어림도 없게 됐습니다."

"상감께서 어떤 분부를 수문장한테 내리셨더란 말이냐?"

명보는 퉁방울 같은 큰 눈으로 흘긋흘긋 세자의 얼굴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꺼낸다.

"금잡인을 하라 하셨습니다."

세자는 껄껄 웃는다.

"금잡인이라니? 사람은 매일반이지, 잡사람이 세상에 따로 있다더냐. 그리고 언제 동궁에 잡사람이 드나들었더란 말이냐. 하 하 하."

"상감께서 말씀하시는 잡인은 한량, 건달, 가객, 씨름꾼, 장사패, 기생, 더벅머리 등속, 이런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라구 하셨단 말이냐?"

"만약에 이러한 사람들이 동궁에 드나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수문장의 목을 베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하니 수문장이 관절 따위를 받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릴 수 있겠습니까."

세자는 석가산에 기대 앉으며 높직이 푸른 하늘을 한 번 우러러보았다. 소리를 높여 껄껄 웃는다.

"하 하 하."

명보의 커다란 눈이 둥그레졌다. 별안간 목청을 놓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미친 듯 홍소를 던지는 세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명보의 얼굴은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이다.

"저하, 왜 웃으십니까?"

"하 하 하."

세자는 대답 없이 또 한 번 드높게 껄껄 웃었다. 세자의 웃음 가락은 구만리 장천을 헤치며 구름 밖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저하, 왜 허청으로 웃으십니까?"

"하 하 하."

명보는 세자의 행도이 별안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세자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세자는 바라보는 명보의 눈치를 챘다.

"이놈, 내가 실성한 줄 아느냐? 눈동자는 왜 유심히 바라보느냐?"

"황송하옵니다. 하도 웃음이 야단스러우시니 높으신 안광을 바라뵌 것 뿐이옵니다."

"네놈의 수작이 하도 졸보 같아서 웃지 아니하고는 배겨날 수가 없구나. 그래 명보야 이놈, 너도 장안 천지에서 손꼽는 오입쟁이라면서 수문장 한 놈쯤 처치를 못해서 나를 석가산 아래까지 끌고 나왔더란 마링냐......, 하 하 하, 시러베아들놈."

세자는 또 한 번 드높게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춘방사령 명보는 세자의 말 속에 어떻나 깊은 뜻이 있는 듯 생각되었다.

'이놈, 너도 장안 천지에서 손꼽는 오입쟁이라면서 수문장 한 놈쯤 처치를 못해서 나를 석가산 아래까지 끌고 나왔더란 말이냐.'

확실히 뜻이 있는 말씀이다.

'수문장 한 놈쯤 처치를 못해서.'

'수문장을 죽이란 말씀인가?'

명보는 달음질쳐 세자의 뒤를 쫓는다.

"마마, 소인이 뒤를 따라갑니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세자는 휘적휘적 걸었다.

"세자마마, 소인이 부액해 올리겠습니다."

"미친놈, 내가 다리 병신이 된 줄 아느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부액이 무슨 놈의 부액이냐."

"그럼 그대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귀찮다. 저리 가거라."

세자는 퉁명을 주어 대답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간다.

"저하, 수문장을 죽이란 말씀입니까?"

세자는 기가 막혔다. 어이가 없었다.

"그놈 참, 순 미친놈이로구나. 네놈이 그래도 배짱 큰 오입쟁이로 알았더니 사람을 죽이다니 말이 되느냐. 너희 선달들한테 알아보아라."

세자는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세자궁 별전으로 올랐다. 명보는 선달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다. 마음속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해가 기울기를 기다렸다. 석양 때가 되면 오입쟁이 구종수와 이오방이 세자궁으로 모여드는 때문이다. 선달이란 먼저 출세한 사람을 선달이라 불렀다. 명보는 세자가 말씀한 선달이란 뜻에 암시를 받았던 것이다. 승석 때가 됐다. 과연 이오방과 구종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자궁으로 들어왔다. 명보는 천리타향에서 고인을 만난 듯했다. 수문장의 일이며 세자가 선달들하고 의논해서 처리하라는 암시를 내린 것을 일장설파했다. 구종수와 이오방은 명보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후에 여출일구로 대답했다.

"일이 펼 길은 꼭 한 가지 있네. 먼데 있지 아니하고 가까운 곳에 있네."

"가까운 곳이라니?"

"세자빈께 아뢰게."

명보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명보는 세자의 처소로 들어가는 구종수와 이오방을 작별한 후에 곧 동궁 내전으로 들어갔다. 쌍창 앞에 손을 짚었다.

"빈마마께 아뢰옵니다."

"누구냐?"

안상하고 얌전한 동궁빈 김씨는 창 안에서 묻는다.

"명보올시다."

동궁빈은 반갑게 창문을 열었다.

"오오, 명보냐. 간밤에 고단했지. 세자마마를 모시고 오느라고."

", 그저 황공하옵니다."

"황공할 게 무어 있느냐. 오랫동안 울적하셨던 세자마마를 한시라도 파탈케 해드린 것이 황공할 것이 무어 있느냐. 사죄할 것 없다."

동궁빈은 미소를 지으며 명보한테 마음을 놓으라 위로했다. 명보는 동궁빈의 웃는 낯을 보고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마음속으로 과연 요조숙녀라고 탄복했다. 명보는 갈고리 같은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긁적 긁으며 텁석부리 수염 밑에 미소를 지어 아뢴다.

"아까 소인이 아뢸 말씀이 있다 하지 아니했습니까. 소인의 소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명보의 목소리는 나직나직 했다. 동궁빈도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너 같은 사람도 소원이 있단 말이냐? 내가 동궁에 들어온 지 벌써 몇 해가 되었건만 네가 청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너 같은 사람도 청이 있더란 말이냐?"

동궁빈은 춘방사령 명보의 진솔하고 고지식한 점을 귀엽게 생각해서 이같이 묻는다. 명보는 또 한 번 갈고리 같은 손으로 머리 뒤를 긁적긁적 긁으며 대답한다.

"소인도 사람이올시다. 사람이란 생긱이 있는 동물인데 어찌 청이 없겠습니까?"

명보는 동궁빈을 바라보며 히쭉 웃는다.

"말을 해보아라."

명보는 흘끔흘끔 좌우를 돌아본다. 동궁시녀들이 방 속과 방 밖에서 옥수 같은 손으로 가리고 명보를 향하여 소리 없이 웃으며 바라본다.

"조금 기밀한 일이올시다. 시비들을 물리쳐줍시오."

동궁빈은 명보의 기밀한 일이라는 말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시녀들을 돌아본다.

"너희들은 잠시 아래채로 물러가거라."

시녀들은 동궁빈의 영을 받고 서로들 킬킬 웃으며 바람같이 아래채로 흩어져 내려갔다.

"자아, 이젠 아무도 없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말해라."

"이번에 상감께서 멀리 사냥을 나가시지 아니하셨습니까?"

"나가셨지."

"세자마마를 향해서 밤낮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사냥만 한다고 꾸지람을 하시던 상감이 아니십니까?"

"그랬지."

빈은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세자저하께서는 별안간 관격이 되시어 어명에 복종하지 못하셨습니다."

"나도 안다."

동궁빈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다.

"빈마마께서는 모르시옵니다마는 상감께서 떠나실 때 특별히 동궁 수문장을 어전으로 불러놓으시고 전하께서 사냥나가신 동안 동궁에 만약 잡인이 드나드는 것을 보아넘긴다면 목을 벤다고 하셨습니다. 동궁께서는 마음이 울적하시오 지금 한량과 가객이며 기생을 불러서 회포를 푸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환궁하신 후에 수문장을 불러 하문하신다면 수문장은 목숨에 관계가 되니 이실직고하기가 십상팔구올시다. 이리 되면 또 한바탕 봉지련이 때와 같이 큰일이 벌어질 테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세자께 말씀을 드렸더니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코방귀로 대답하시니 이것 딱한 일이올시다. 도대체 수문장을 어찌 처리해야 좋겠습니까?"

세자빈은 수심 중에 미소를 던지어 명보를 바라보고 대답한다.

"그것이 어디 네가 나한테 청할 일이냐. 내가 오히려 너한테 청할 일이다. 어떻든 네 심정이 고맙다."

세자빈은 진심으로 명보의 충직한 정성을 마음으로 깊이 새겨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세자빈은 명보한테 되묻는다. 명보는 또 한 번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한다.

"글쎄, 둔한 소인의 머리로는 어찌해야 좋을지 생각이 얼른 나지 아니합니다."

"나도 얼른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세자빈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한동안 생각에 빠졌던 세자빈이 입을 열었다.

"수문장한테 후한 상금을 내리면 어떻겠느냐?"

명보는 고개를 가로 흔든다.

"아니 됩니다. 생명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전과 다릅니다. 봉지련이 때와는 천양지판이올시다. 그때야 그저 눈만 감아주면 된 것 아닙니까. 이번에는 전하께서 친히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니 은덩이 아니라 금덩이를 준다 해도 아니 들을 것입니다."

세자빈은 명보의 말을 듣고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묘한 생각이 머리 위에 떠올랐다.

"수문장은 군문에 소속된 사람이니 병조에 임명군이 있겠구나?"

", 그러합니다."

세자빈의 얼굴에는 약간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명보한테 분부를 내린다.

"너는 지금 곧 우리 집으로 가거라. 가서 대감께서 계시거든 내가 급한 일을 사뢸 일이 있다고 곧 모시고 오너라. 일이 매우 급하다."

춘방사령 명보는 동궁빈의 말씀을 듣고 곧 빈의 친정으로 달음질쳤다. 때마침 동궁빈의 아버지 병조판서 김한로는 병조에서 사진을 파하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급히 뛰어드는 명보를 보고 세자와 세자빈의 안부를 물었다.

"춘방사령 명보 아니냐?"

", 그러하옵니다."

"세자와 세자빈도 다들 안녕하시냐?"

"어째 왔느냐?"

"빈마마의 분부를 받자옵고 왔습니다."

"무슨 분부를 내리시더냐?"

"급한 일이 계시다고 곧 좀 대감께 행차를 해줍시사고 아뢰라고 하시어 왔습니다."

급한 일이란 말에 김한로는 안심이 되지 아니했다. 곧 자비를 놓아 동궁으로 향했다. 세자한테 들어가 인사할 틈도 없이 바로 곧 내전으로 들어갔다. 세자빈은 반갑게 친정아버지를 맞이했다.

"급한 일이 있다 하니 무슨 일이오니까?"

딸이건만 세자빈이었다. 친정 아버지는 존경하여 말씀을 올린다.

"조용히 아뢸 일이 있습니다."

세자빈은 나직이 아뢰고 궁녀들을 물리쳤다. 동궁빈은 시녀들을 물리친 후에 조용히 친정아버지 김한로한테 고한다.

"아버님께 청할 말씀이 있어서 왕림토록 하였으니 황공무지하옵니다."

"빈마마께서 무슨 일이 계시기에 청을 한다 말씀하시오?"

세자빈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 꼭 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청이오이까?"

"동궁을 지키는 수문장은 병조판서의 직권으로 체임을 하실 수 있지 아니합니까."

"그렇지. 수문장은 호반이니까 병조판서의 직권으로 벼슬을 올리기도 할 수 있고 떨어뜨릴 수도 있는 것이지."

김한로는 병조의 관례를 대답했다.

"아버님, 동궁 수문장을 갈아주십시오."

"?"

김한로는 깜짝 놀란다.

"그럴 일이 있습니다."

동궁빈 김씨는 먼저 말머리를 안상하게 꺼낸 후에 세자가 전에 봉지련과 놀음을 놀았을 때 수문장의 딱딱했던 행동을 말하고, 다음 이번에 전하의 사냥을 배행하지 아니하고 사랑에서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다시 오입쟁이와 기생 소앵을 데리고 울분을 푸는 말을 했다. 다음에 전하가 사냥을 떠날 때 수문장을 불러서 만약 동궁에 잡인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는 날은 참형에 처한다는 분부가 내린 것을 일장설파했다. 병조판서 김한로도 동궁빈의 말을 듣자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탈이로군."

한마디를 할 뿐 침묵 속에 잠겼다.

"수문장을 갈아줍시오. 그래야만 세자의 자리가 위태롭지 아니합니다."

김한로의 가슴에도 큰 충격을 느꼈다. 세자의 자리가 단단하게 되어야만 자기는 장래 부원군이 되는 것이다.

"갈 수야 있으나, 죄상이 없는데!"

아버지 김한로는 딸인 동궁빈의 머리만 못했다. 동궁빈은 상긋상긋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뢴다.

"가는 것이 아니라 벼슬을 승차시켜 주시면 되지 아니합니까. 수문장에서 빨리 수령으로 돌려주십시오."

김한로는 딸의 말에 손뼉을 쳤다.

"동궁빈의 머리는 아비인 한로의 머리보다 열 갑절이나 위십니다. 문을 잘 지켰다고 칭찬한 후에 안협 군수로 승차를 시키겠습니다."

명보의 가슴 앓던 일은 동궁빈의 슬기로운 지혜로 단번에 해결이 되었다. 수문장은 뜻밖에 용꿈을 꾸어서 일약 안협군수로 승진이 되었다. 수문장을 안협군수로 승진시켜 보낸 세자의 장인 병조판서 김한로의 처사는 세자궁을 무사태평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일개 수문장으로 일약 안협군수가 된 수문장은 세자와 세자의 장인인 김판서를 백골난망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수문장은 안협군수로 부임하면서 세자의 덕행을 찬양했다. 뿐만 아니었다. 세자궁에 한량, 가객, 기생 등 모든 잡인들이 출입한 일을 일체 함구하고 입 밖에 내지 아니하면서 세자를 칭찬만 했다. 모두 다 슬기와 교양 높은 덕행을 가진 세자빈 김씨의 아름다운 내조의 큰 힘이었다. 은밀한 일은 어느덧 소문이 퍼졌다. 세자궁에서 수문장 노릇만 하면 금시발복이 되어 원님으로 나간다는 소문이 군문에 퍼졌다. 군인 출신들은 쟁두하여 세자궁의 수문장이 되기를 좌청우촉하게 되었다. 세자빈은 심복인 춘방사령 명보와 의논하고 마음 착하고 말 없는 젊은 군인을 골라서 세자궁의 수문장을 삼았다. 세자궁 수문장으로 속히 입신출세하여 변지의 수령이 되어 나가려면 첫째 춘방사령 명보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다음에는 상감의 말씀보다 세자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고 기생, 건달, 오입쟁이, 풍각쟁이, 악공들이며 기생들의 출입하는 것을 사찰하고 막지 아니해야만 일등 수문장으로 지목을 받아서 조그마하나 행정, 사법, 국방의 삼권을 장악할 수 있는 수령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불문천자조요, 단문장군령이다. 세자빈 김씨는 이러한 확고부동한 관례를 전하가 환도하기 이전에 세자궁 수문장의 관례로 세웠다. 세자궁의 수문장을 세 번 네 번 승차시켜서 변지 수령을 주었다. 이후부터 세자궁의 수문장은 절대로 춘방의 수문장이요 상감의 수문장은 아니었다. 세자궁은 이후로부터 태종이 돌아올 때까지는 태평세월이었다. 날마다 가객과 한량과 기생들이 질탕하게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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