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세종대왕 5-1

5권 태풍 불다

 

소 천 마리에 대한 결연한 세자 태도

 

민무질은 감격했다.

"전하께도 윤허를 받았으니 저는 곧 태평관으로 가서 황엄을 만나 보고 전하와 저하의 쾌하게 하교하신 뜻을 전하겠습니다."

민무질은 세자 앞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소 천 필을 달라는 황엄의 말은 세자 앞에서도 아니 했다. 세자는 민무질을 보낸 후에 다시 별당으로 들어갔다.

"어떠한 처분을 내리셨습니까?"

김한로가 묻는다.

"명나라 황제를 만나러 가기로 허락하였소."

김한로의 얼굴에는 약간 불안한 표정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세자는 천천히 말을 꺼낸다.

"나는 아주 명나라 황제를 만나본 후에 혹시 혼사에 대한 말이 나온다면 나한테는 약혼한 처녀가 있다 하겠소. 직접 황제와 만나서 공주와의 혼담을 아주 깨뜨려버릴 작정이오."

김한로는 감격했다. 벌떡 일어나 세자 앞에 절을 올린다.

"세자저하의 바다 같으신 넓은 심정은 저희 따위 범속한 무리로서는 헤아릴 길 없사옵니다. 그저 결초보은할 뿐이옵니다."

"댁으로 돌아가시거든 따님께 나의 심경을 일러두시오. 그리고 세자빈으로 맞아들이는 대례는 명나라에 갔다 온 후에 곧 거행한다고 내가 말하더라고 일러두시오."

"감격하온 말씀 다시 더 뇌까리지 않겠습니다. 저하께서 지금 내리신 분부는 일일이 딸아이한테 전하여 안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명나라 황제를 만나러 간다면 나라 안에서는 쓸데없는 유언비어가 맹랑하게 돌아 퍼지리라 생각하오. 비록 어떠한 헛소문이 떠돈다 하더라도 영애는 흔들리지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있으라 하오."

"알아듣도록 분부를 전하겠습니다."

김한로는 오래 세자 앞에 앉아 있기가 미안했다. 뿐만 아니다. 이 기쁜 세자의 말씀을 어서 딸한테 전해주고 싶었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팔을 짚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간다.

"앞으로 접반사의 자격으로 태평관에는 계속 나가실 테니 모든 정보를 전달해주기 바라오."

"분부 아니 계시다 해도 어찌 소홀하겠습니까. 그리고 소 천 필을 달라는 황엄의 요구는 민장군이 말씀드렸습니까?"

세자는 미소를 던지며 고개를 가로 흔든다. 아니 들었다는 뜻이다.

"소 천 마리를 명나라에서 거두어 간다면 우리나라 삼천리강산의 농민들은 농사 때 밭갈이 논갈이를 못해서 큰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김한로는 걱정이 분분하다.

"농사뿐인가, 늙은이는 고기를 못먹고 쇠가죽을 이용해 만든 모든 물건은 절종이 될 테니 큰 탈이오."

", 이 중대한 일을 민장군 형제는 아뢰지 아니했을까요?"

김한로는 의심 가득 찬 눈으로 세자를 바라본다.

"소 천 필을 달라는 말을 꺼낸다면 내가 명나라 황제를 아니 만나러 간다 할 테니 아직 말을 꺼내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오."

김한로는 세자의 총명한 판단에 또 한 번 감탄하며 물러간다.

이튿날 세자는 대전의 소명을 받았다.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세자는 어전으로 추창해 들어갔다. 태종은 세자가 명나라 황제를 만나러 가는 일을 반대할 줄 미리 짐작했다. 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용안엔 전에 없이 부드러운 기운이 넘쳐 흘렀다.

"요사이 글공부는 어떠한가?"

언제나 태종은 세자만 만나보면 으레껏 물어보는 상투의 인사다.

"계속해서 항상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전하는 만면의 웃음을 띠고 '그래야지' 한 마디로 글 읽는 문제에 대하여 전에 없이 칭찬하는 말씀을 내렸다. 전 같으면 무슨 책을 읽었느냐, 요새는 사냥을 아니하느냐, 별별 잔소리가 많았을 텐데 오늘은 용안에 끊임없이 미소를 깃들어 자애가 넘치는 듯한 어조로 묻는다. 세자는 도리어 아버지의 이러한 태도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느꼈다. 마음속으로 명나라 황제를 만나러 가라는 그 일 때문에 부왕의 모습이 이같이 돌변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자는 잠깐 섭섭하고 슬픈 감정을 느껴본다. 진정한 부자지간의 순진한 애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부왕인 전하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이다. 외면치레요, 거탈이었다. 세자는 이 점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치지도외로 생각한 아버지다. 자기의 불평은 변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두 손을 마주잡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태종은 다시 용안에 웃음을 띠고 세자를 바라보며 말씀을 내린다.

"명나라 황제께서 세자인 너를 한 번 만나보면 좋겠다고 말씀했다 한다. 천사 황엄이 간곡하게 청하니 가볼 생각이 있느냐?"

세자도 얼굴에 웃음빛을 띠고 대답한다.

"아바마마께옵서 가보라 하시면 가보겠습니다."

세자는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생각했다. 중국의 문물도 구경할 겸 한 번 다녀오너라."

전하는 흠뻑 기쁜 모양이다. 곧 정원 승지를 불렀다.

"세지가 이번에 명나라 황제를 뵈러 간다. 황제폐하께서 천사한테 부탁하신 것이다. 정원에서는 모든 아문에 세자행차를 반포한 후에 만반준비를 차리게 하라. 곧 천사 황엄과 함께 길을 떠날 테다."

전하는 공식으로 세자의 명나라 가는 행차를 공포했다. 정부에서는 세자를 치송하기에 바빴다. 세자의 명나라 가는 일이 결정되자 태평관에 있는 황엄은 인사 들어간 민무질을 향하여 묻는다.

"세자의 황제 뵈러 가는 일이 결정되었다 하니 감축하오."

"모두 다 천사의 덕택이올시다."

"그러나 한 가지 물어볼 일이 있소. 소 천 필에 대한 일은 어찌 되었소?"

"곧 전하께 아뢰어 윤허를 받을 작정이올시다."

민무질은 어리빙빙하게 대답한다. 황엄은 금방 얼굴빛이 달라졌다. 부드럽던 얼굴에 사나운 기운이 산골에 안개 일 듯 일었다. 황엄은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떠 큰 소리로 말했다.

"여태껏 윤허를 맡지 아니했단 말인가?"

"세자저하의 출국하시는 일에 대하여 윤허를 맡기 극난하므로 아직 뒤로 미루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아직 뒤로 밀다니 괘씸하구나, 어명으로 내리신 소 천 필을 가지고 돌아가지 못한다면 세자도 입조를 못하게 되오. 황제의 특명을 어기는 세자가 어찌 감치 황제폐하께 알현할 수 있겠소. 나는 중간에서 마무하겠지만 다른 각로와 대신들이 말을 아니 들어줄 거요."

황엄은 큰 소리로 민무질을 위협한다. 그는 민무질의 배짱을 잘 알고 있었다. 명나라 공주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이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세자보다도 세자의 외숙인 민씨네 형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그다음으로 공주를 데려오고 싶어 하는 이는 세자의 아버지 금상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황엄은 이런 까닭에 사리사복을 채우기 위하여 황제의 칙사가 되어 나올 때마다 언제나 황제를 팔고 조선의 보물 값진 물건을 참빗질하듯 훑어갔던 것이다. 지난번 전국적으로 사리탑을 헐어서 사리 팔백 개를 거둬간 것도 황제한테는 겨우 두서너 알만 바치고 나머지 칠백여 개는 자신이 낭탁을 했고, 이번에 청구하는 소 천 필만해도 황제는 까맣게 모르는 일을 이같이 황제를 팔아서 외수 전갈로 민씨들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민무질은 황엄의 위협하는 말을 듣고 당황했다.

"조선이 아무리 가난한 나라라 하나 황제폐하께서 청하시는 소 천 필이야 마련하지 못하겠습니까. 아무 염려 마십쇼. 곧 대궐로 들어가 아뢰겠습니다."

민무질은 분주하게 일어난다.

"빨리 윤허를 받도록 하시오. 만약 소 천 필이 아니되는 경우 세자의 입조하는 문제는 푸지위될는지 모르오."

황엄은 질뚝배기 깨지는 목소리로 다시 민무질을 을러댄다. 민무질은 민무질대로 엉큼한 속배짱을 따로 가졌다. 전하나 세자한테 소 천 필을 요구한다는 말을 먼저 꺼낸다면 세자의 명나라 가는 일이 허락되지 아니 할까 지레 겁을 내서 말을 꺼내지 아니 했던 것이다. 일이 거의 반죽이 된 후에 슬며시 상감을 달래서 소 천 필을 거두어 명나라로 보낼 작정이었다. 민무질은 황엄의 엄포를 듣고 당황했다.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대궐로 들어갔다. 민무질은 대전으로 들어가 전하께 뵙기를 청했다. 속히 뵙기 위하여 명나라 사신에 대하여 아뢸 일이 있다고 덧붙여 내관한테 말했다. 전하는 민무질을 곧 편전으로 불러들였다.

"명나라 사신에 관한 일이라 하니 어떤 일인가?"

태종은 궁금했다. 민무질한테 묻는다.

"명나라 사신 황엄은 황제의 분부라 하면서 소 천 필을 가지고 가겠다 합니다."

태종은 깜짝 놀란다.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무어라 했소?"

"소 천 필을 달라 합니다."

"소를 천 필템이나? 우리나라의 소를 모두 쓸어 모아도 천 필이 될까 말까 하지 않겠소."

"그야 우리나라 소가 천 필만 되겠소이까마는 상당한 수올시다. 황제의 특명이시라 합니다."

"황제의 특명이야? 황제는 무엇에 쓰려고 소를 천 필템이나 달라 하는가?"

"황제는 우리나라 쇠고기가 맛이 있고 연하니, 천 마리만 가져다가 씨를 받아서 어주에 식용으로 쓰게 하고, 한편으로는 농가에 주어서 농사도 짓고 씨도 받게 할 작정이라 합니다."

"갈수록 토색질이 태산 같구려."

태종은 가만히 탄식한다.

"꼭 주어야 하겠소?"

"황제의 말씀을 어찌 거역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이번에는 아니 줄 수 없습니다. 사신 황엄은 소 천 필을 보내주지 아니하면, 우리 세자를 황제께 대면시켜 주지 못하겠다 합니다. 황제의 명을 듣지 않는 세자를 어찌 감히 알현시키겠느냐 합니다."

태종은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럴듯한 말이다. 명나라 공주로 며느리를 삼고 싶은 욕심이 앞을 서서 일어났다. 소를 천 필이라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는 수 없지. 천 필을 몰아올 수가 있다면 순하게 넘겨주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구려. 빨리 팔도에 명을 놓아서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넘겨주도록 하오."

민무질은 속이 후련했다.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다.

"그럼 곧 소 천 필을 구해서 황엄한테 넘기겠습니다."

민무질은 전하의 허락을 받은 후에 곧 팔도 감사한테 파발을 띄워 소 천 필을 서울로 끌어들였다. 서울에는 조선 팔도에서 소 천 필이 꾸역꾸역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문은 장안에 자자하게 퍼졌다. 소를 뺏긴 농부들의 원망하는 소리는 촌락마다 가득했다. 이 소문은 춘방사령을 통해서 세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자는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태평관으로 황엄을 찾았다. 돌연 세자의 방문을 받은 황엄은 정중하게 맞이했다. 황엄은 세자가 환약을 먹지 아니하고 돌려보낸 후부터 더한층 존경하고 정중하게 대했다. 마음속으로는 그리 유쾌하지 아니했으나, 범상치 아니한 세자의 태도에 기가 질렸던 것이다. 황엄은 통역을 통하여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묻는다.

"저하께서 돌연 왕림하시니 나그네의 큰 영광이올시다. 어떻게 어려운 행차를 하셨습니까."

"사신께서 이번 귀국으로 가시는 행차에 나와 함께 동행하는 영광을 갖게 하셨다 하니 기쁨을 금할 수 없어, 잠시 치사하러 왔소이다."

세자는 천사라고 부르기 아니꼬워서, 일부러 사신이라고 불렀다.

"황제와 황후폐하께서 저하를 만나보기 소원하셨습니다. 역사에 드문 영광된 일입니다. 나는 극력 찬송하고 이번 길에 세자와 동행할 것을 민장군한테 말했더니, 민장군은 지체치 아니하고 대왕 전하께 아뢰어 재가를 받은 모양이올시다. 세자저하의 전도를 위하여 감축합니다."

세자의 마음을 모르는 황엄은 공치사가 대단했다.

"감사하외다."

세자는 미소를 지어 대답한 후에 돌연 태도를 변한다.

"사신께 말씀드리고, 나는 이번에 귀국 황제를 만나러 가지 않겠소이다."

별안간 나오는 세자의 말에 황엄의 눈이 둥그레진다.

"웬 말씀이오니까?"

통역을 통해서 급히 묻는다.

"귀국 황제가 소 천 필을 우리나라에 청구하셨다 하니 정말입니까?"

황엄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 그런 일이 있습니다. 조선 소는 고기가 연하고 맛이 좋을 뿐 아니라, 성질이 순하고 힘이 세어서 농사짓는 데도 천하에 제일이올시다. 황제폐하께서 이 점을 아시고 내가 사신으로 조선에 올 때 긴하게 부탁을 내리셨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명나라 황제를 만나러 가는 것을 중지하겠습니다."

세자는 말을 마치자 입술을 한일자로 꽉 닫았다.

"웬 말씀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벌써 허락을 내리셨습니다."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르는 황제께 내가 간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

세자의 대답은 대담하고 당돌했다.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르다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엄이 눈이 부리부리하게 떠졌다.

"천자는 만백성의 부모입니다. 조선이 황제를 존경하는 것은 부모 노릇을 잘해달라고 받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된 황제가 백성한테 토호질을 부리니 내가 무슨 까닭에 토호질치는 황제를 만나러 가겠습니까."

세자가 겁을 내지 아니하고 말했다. 황엄의 얼굴 은 누르락푸르락 변했다. 그러나 원체 경우 밝은 세자의 말이었다. 얼른 반박을 하지 못한다. 세자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황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세자는 황엄이 얼른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고 그의 허를 찔렀다.

"이것이 진정 황제폐하의 분부십니까?"

"분부가 아니시면 내 어찌 말씀을 전하겠소."

"그렇다면 귀국에는 충성된 신하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못 간한다 할지라도 어찌해서 당신 같은 충신이 간해보지 못하고 유유하게 뜻을 받들어 황제의 위신을 손상케 하신단 말씀이오."

세자의 얼굴빛은 엄숙하고 단정했다. 황엄은 약간 고개가 숙어진다. 세자는 장중하게 말을 계속했다.

"자아 말씀 들어보오.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고, 농우는 농사짓는 백성들의 유일한 재산입니다. 천하에 천자로 앉아 있는, 다시 말하자면 천하 백성들의 부모가 된 분으로, 백성들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백성의 피와 기름을 강압적으로 뺏어다가 고기 맛이 좋다 해서 어주에 쓰겠다는 말은 백만 번 생각해보아도 이야기가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세자의 말에 황엄은 말문이 꽉 막혔다. 이내 대답을 못 한다.

"지금 우리나라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엔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까지 솟구쳤습니다. 천사는 이 일을 모르시오. 명나라 황제가 황태감을 시켜서 백성들의 피와 기름을 짜서 소 천 마리를 뺏어간다고."

황엄은 여전히 말문이 막혔다.

"우리나라 농촌의 실정은 한 부락에 소가 두어 필 있을까 말까 할 정도입니다. 농우 두 필을 가지고 한 부락이 농사를 짓고 사는 정도입니다. 농촌 한 부락에는 적어도 삼사백 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한 부락에 소가 두 필 정도라면 소 천 마리가 없어지는 날 조선의 농촌 오맥 부락은 농사를 못 짓고 폐농이 되는 상태에 빠집니다. 오백 부락이 폐농된다면 십오륙만 명의 생명이 굶어 죽게 됩니다. 황태감은 이 실정을 모르실 것입니다. 조선에 여러 차례 와보신 당신이 이 실정을 모르시는데 더구나 황제폐하가 어찌 조선 사정을 아시겠습니까. 지금 조선 천지에는 원성이 자자합니다."

꼬박꼬박 조리를 찾아 말하는 세자의 태도는 노성한 사람도 따를 수 없었다. 아무리 엉큼한 고자 황엄이었으나, 마음속으로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귀국 농촌의 실정이 그러한 줄은 과연 몰랐소이다."

황엄은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비로소 풀어지기 시작했다. 세자는 풀어지는 황엄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꺼낸다.

"황태감한테 당부하오. 소 천 필을 백 필로 줄여주시오. 백 필만 가져간다 해도 우리 농가는 영향이 지극히 크오마는 황제께서 자시겠다는데 안 보내는 것도 예가 아니니 오십 필은 가져다가 어주에 쓰시고 오십 필은 씨를 받아서 귀국의 농우로 쓰시오. 이같이 한다면 황제를 뵈러 가리다."

황엄이 이번 조선에 사신으로 올 때 황제를 연침에서 뵙고 사사로운 말로 조선 쇠고기가 맛이 있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조선의 소를 가져오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황엄은 일변 황제한테 몇 필을 바쳐서 생색을 내고 수백 필 소는 사복을 채우기 위하여 천 필 소를 조선 정부에 요구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무상으로 거저 뺏어가는 것이다. 세자의 항의를 듣자 황엄은 마음속으로 더럭 겁이 났다. 공주를 세자빈으로 하가시킨다는 데 대하여 황제나 황후한테 한 마디도 아뢴 일이 없지만, 조선 세자가 똑똑하고 영악하니 한번 입조하여 알현시키겠다고 연침에서 여러 번 변죽을 올려 아뢴 일이 있었다. 그는 이쯤 해두어서 앞으로 조선 물자를 참빗질하듯 긁어가는 데 미끼로 삼자는 음침스런 계획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세자가 나타나서 천자는 백성들의 부모라고 육박해 들이대는 바람에 꼼짝 두수없이 지게 되었다. 더구나 세자가 황제한테 알현할 때 천 필 소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백성들의 피와 땀을 긁어간다고 항의를 하는 날, 자기 자신은 망꼴이 되고 창피하기 한량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세자를 아니 데리고 갈 수도 없다. 이미 조선 왕실과의 교섭은 끝나버렸다. 세자의 쇳소리가 나는 항의를 듣자 황엄은 껄걸 웃는다.

"허허허, 세자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황제폐하께서 조선 농촌의 사정이 이같이 딱한 줄 어찌 아시겠소. 항상 국경으로 넘나드는 나도 농촌 실정을 까맣게 몰랐는데---과연 세자께서는 앞으로 명철한 군주가 되시겠소. 그러나 중간에 끼어 있는 나의 처지로서는 실로 곤란하기 짝이 없소이다. 황제폐하의 분부를 어길 수도 없고 세자저하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도 없소이다. 천 필 소를 오백 필로 감해 드리오리다. 세자저하, 그리 아시고 오백 필만 보내주시오."

세자는 가만히 생각해본다. 한 필 소라도 뺏기지 않는 것이 제일가는 수다. 그러나 천 필을 요구했던 자가 반을 깎아서 오백 필을 요구하게 된 것도 큰 효과라 생각했다. 잗달게 백 필 이백 필을 가지고 장꾼들이 마치 장터에서 장사하듯 깎고 붙이고 에누리를 해서 흥정하듯 하기도 싫었다.

"황태감 배짱이 크지 못하구려. 기왕 생각이 있다면 아주 그만 두고 푸지위를 할 것이지, 하하하. 모르겠소. 그럼 오백 필만 보내오리다."

세자는 껄걸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엄은 세자의 등을 어루만지며 태평관 대문 앞까지 나가서 공손하게 세자를 전송했다. 세자는 지체 없이 대내로 들어가서 부왕께 뵈었다.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태종은 돌연 세자가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동정을 살폈다.

"명나라 사신한테 가서 소 천 필 달라는 것을 오백 필만 준다고 깎았습니다."

태종의 입은 활짝 열렸다.

"어떻게 소 천 필 달라는 것을 오백 필로 깎았단 말이냐?"

태종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우리나라 농촌의 실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소 천 필을 가져가면 농촌 오백 부락은 농사를 못짓고 폐농이 되어 십오륙만 명의 목숨이 굶어 죽게 된다는 것을 증명해 말했습니다. 만약 소 천 필을 기어이 달란다면 황제께 가서 직소를 하겠다 했습니다. 태종은 세자의 말을 듣자 유쾌했다. 웃음을 높여 껄걸 웃는다.

"허허허. 세자가 이번에 그러한 수단을 쓸 줄 몰랐구나."

세자가 다시 아뢴다.

"그리해서 대접상으로 백 마리만 가져가라 했습니다. 오십 마리는 황제께 바쳐서 어주에 쓰게 하고 오십 마리는 씨를 받아서 농우를 만들라 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백 필이 어찌 오백 필이 되었던가?"

"황엄이란 자는 과연 추한 자올시다. 마치 장사치가 물건 흥정하듯 수작을 부려서 오백 필을 달라 하옵기 선뜻 허락했습니다. 모두 다 황엄이 사복을 채우자는 능갈친 수작입니다."

"원래 저자들은 무한 탐심을 가진 자들이거든. 과연 이번 네 처사는 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모두 다 글 읽은 공이다. 곧 승지한테 영을 내려 명나라 사신한테 소 오백 마리만 보내라 하리라."

"그럼 신은 물러가옵니다. 자전에 들어가 문안을 올린 후에 제 처소로 가겠습니다."

세자는 배례를 드리고 어전에서 물러나 어마마마가 계신 자전으로 향했다. 왕비 민씨는 반갑게 세자를 맞이했다.

"명나라로 쉬 떠나게 된다더니 어찌 되었느냐?"

왕비 민씨는 절을 올려 문안드리는 사랑하는 세자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묻는다.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된 모양이올시다. 얼마 아니 되어서 명나라 사신과 함께 떠날 작정입니다."

세자도 다정하게 대답했다.

"너의 첫째 외숙은 명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온 사람이다. 이번에 배행해 갔으면 좋겠다. 너의 큰외숙이 따라간다면 나는 안심이 되겠다."

세자는 외숙들의 허욕 부리는 마음씨가 마땅치 아니했다. 시종하는 배행관으로 데리고 가고 싶지 아니했다. 그러나 어마마마의 마음을 평안케 해드리고 싶었다.

"조정에서 결정하기에 달렸습니다. 외숙들이 가면 더욱 좋지요."

세자는 어련무던하게 이같이 대답했다. 어마마마는 또다시 혼인에 대하여 관심이 컸다.

"명나라 황제가 공주를 보낸다면 어찌할 테냐?"

"장가를 들었다고 하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오오, 착하다. 복을 받으리라."

어마마마는 세자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한편 민씨네 형제들은 세자의 명나라 가는 일이 확정되니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명나라 공주와 혼인이 되어 곧 조선에 세자빈으로 오는 것으로 판정을 내려버렸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랑이 분분했다.

"명나라 공주가 세자빈이 되어 우리나라로 온다면 나라의 지체는 몇 갑절 높아지게 되었소. 첫째로 명나라 천자와 우리 대왕께서는 사돈 간이 되니 이제는 조선 사람도 어디를 가든 어깨가 떡 벌어지게 되었소."

민무질은 이같이 자랑했다. 사람들은 민무질과 민무구의 비위를 맞춰줘야 할 것을 잘 알았다.

"그도 그렇습니다마는 장군의 지체는 더한층 높아지셨습니다. 세자의 외숙이 되시니 명나라 공주의 시외숙이 되십니다. 황제와 사돈 간이 되는 것은 상감뿐아니라 장군께서도 명나라 황제와 사돈지간이 되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민무질에게 아첨을 올렸다.

"하하하, 그렇지. 우리 민씨 집안도 명나라 황제하고 사돈이 되는 셈이지."

아첨을 듣는 민무질은 유쾌했다. 소리를 높여 호방하게 웃는다.

"이번에 세자를 모시고 명나라로 가신다면 저쪽에서 환영이 대단할 것입니다."

"세자의 외숙이라 해서 각료와 대신들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번 나를 볼 테지, 하하하."

민무질은 연방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전에는 장군의 위명이 조선 천지에서만 진동하던 것이, 세자께서 명나라 공주로 세자빈을 맞이하신다면 장군의 위세는 동천에 솟아오르는 태양과 같이 찬란한 빛을 뿜을 것입니다. 미리 축하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미상불 천자와 곁사돈이 되는 판이니 명나라에서도 나를 괄시하지는 못할 테지. 하하하."

민씨네 형제들은 방약무인하게 떠들어댔다. 뿐만이 아니었다. 민씨네 사위와 낭당들도 이번 세자가 명나라에 갔다가 오기만 하면 자기네들은 큰 수가 터지는 줄 알았다. 모두들 우쭐대며 자랑했다. 태조를 도와서 개국 공신이 된 사람과 태종을 도와서 정국공신이 된 사람들은 민씨네 형제들의 꺼떡대는 행동에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 이 중에서도 태종을 도와서 방석과 방번을 처치하고 정도전, 남인을 죽여서 삼천리강산을 태종의 세력 밑에 두게 했던 제일급의 정국공신 이숙번은 민씨네 형제들을 경계하는 마음이 더한층 강했다. 정국공신의 크나큰 권세를 민씨네한테 뺏기면 큰일이었다. 뿐만 아니다. 민씨네들은 세자빈을 뽑을 때 자기의 수양딸을 배격해버리고 김한로의 딸을 간택했다. 명나라 사신 황엄과 공주의 혼담이 나오기 전에 민무질이 이숙번의 딸을 간택에서 떨어뜨리고 김한로의 딸로 간택한 것은 범 같은 대장 이숙번의 겨드랑에 날개를 돋칠까 겁이 나서 민왕후한테 아뢰어 김한로의 딸로 낙점이 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이숙번은 이를 갈았다. 기회를 보아 민씨들은 세자의 외숙이요, 왕후의 동생이었다. 여간해서 세력을 꺾기가 어려웠다. 이숙번은 항상 기회만 노리고 있을 때 또다시 큰 사건이 일어났다. 김한로의 딸을 제쳐놓고 명나라 공주와의 혼담이 일어났다. 큰일이었다. 명나라 공주가 세자빈이 되는 날, 민씨네의 권력은 명나라와 조선 두 나라 사이에 당해낼 사람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숙번은 불안과 공포에 빠졌다. 명나라 사신이 두 번째 나온 후에 세자는 명나라 황제를 만나러 가기로 결정되었고, 민씨네 형제들의 호강을 떠는 행동은 빗발치듯 귀에 들렸다. 이숙번은 더한층 불안했다. 며칠을 두고 문을 닫고 궁리 속에 빠져 있었다.

 

이숙번의 훼방

우선 세자가 명나라로 가는 데 민씨들이 배행을 못 하게 하는 일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급히 정원을 통하여 상감께 뵙기를 청했다. 정국공신 이숙번이 입대를 원한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곧 허락을 내렸다. 이숙번은 어전에 추창해 절을 올렸다. 원래 나이 많은 일등공신이었다. 조회에도 자주 나오지 아니했던 사람이다. 전하는 반갑게 맞이했다.

"장군을 대해 본 지 과연 오래구려. 그동안 몸은 태평하오?"

태종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묻는다.

"천한 노구를 이끌어 오늘 성상전하의 화려하신 용안을 뵈오니 기쁜 마음이 간절합니다."

"모두 다 노장군이 국가를 항상 생각해주고 나라를 돌봐준 덕으로 국태민안하니 감사하오. 오늘 무슨 좋은 바람이 불어 나를 찾았소?"

태종은 의연히 미소를 지어 늙은 장군을 바라보며 묻는다. 이숙번은 손을 짚고 얼굴빛을 고쳐서 아뢴다.

"국가 대사에 대하여 긴급히 아뢸 일이 있습니다."

'국가 대사'라는 말에 전하의 용안이 긴장되었다.

"국가 대사라 하니 무슨 큰일이 있소?"

전하의 눈이 크게 떠진다.

", 이만저만한 큰일이 아니옵니다."

이숙번이 아뢰는 말을 듣자 전하의 용안은 더 한 번 변해진다.

"빨리 말해주오. 무슨 큰일이 있소?"

"명나라의 공주와 세자의 사이에 혼담이 계시다 하니 정말입니까?"

말을 마친 이숙번은 전하의 용안을 지켜본다. 전하도 이숙번의 안색을 살피며 대답한다.

"그러한 일이 있었소."

"그래, 허락을 내리셨습니까?"

전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허허, 큰일이올시다. 나라가 장차 어지럽겠습니다."

이숙번은 말을 마치자 땅이 꺼지도록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라가 어지럽겠다'는 말에 태종은 깜짝 놀란다.

"어찌해서 나라가 어지럽단 말이오?"

"전하께서는 역사를 모르십니까. 고려 말엽 공민왕 때 일입니다. 우리나라 행주에서 기씨의 딸이 원의 왕후가 된 일이 있습니다. 기씨네 친정붙이 오라비와 조카들은 기와후의 세도를 믿고 임금인 공민왕을 임금으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기씨네 자신들은 원나라 대신들과 결탁해서 안중에 고려 임금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해서 이러한 전철을 다시 되풀이하여 재앙을 받으려 하십니까."

이숙번의 말을 듣는 전하는 반대되는 판단을 내린다.

"고려 공민왕 때 일은 지금 일과 반대되는 일이라 생각하오. 고려 때는 이곳에서 왕후가 되어갔고, 이번 일은 저편에서 공주가 오는 일이니 저편에서 기씨가 행패하던 일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오."

이숙번은 전하의 말씀을 듣자 얼굴빛이 좋지 아니했다. 잠깐 침묵을 지켰다. 한동안 뒤에 이숙번이 다시 아뢴다.

"매한가지올시다. 명나라 공주가 세자빈이 되는 날 세자빈의 권력은 전하를 능가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명나라 황제의 딸인 공주의 행패를 무슨 힘으로 막아내실 텝니까? 아니할 말로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라 하면 배겨내실 젓입니까?"

딴은 그럴듯한 말이다. 명나라 공주가 명나라 황제의 위력을 빌려서 조선왕의 자리를 내놓으라 하면 내놓았지 별수가 없다. 태종의 등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이미 허락을 해놓았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전하는 이숙번의 손을 잡는다.

"일을 이같이 만들어논 불충한 자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전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전하께 아뢰어서 권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민씨네 형제들이올시다. 이자들은 안중에 전하가 없습니다. 세자의 외숙이라는 인연을 차지하고 또 명나라 공주의 힘을 빌려서 중국과 조선으로 왕래하면서 강포한 권력을 맘대로 펴보려 하는 음모에서 시작된 일이올시다."

전하는 온몸에 또다시 소름이 끼쳤다.

"이자들이 중국과 우리나라 두 나라 사이로 말을 달려 장난을 치는 날 이씨 왕조는 민씨 왕조로 변할는지 모릅니다."

이숙번의 말은 꼭 옳은 말로 들렸다.

"어찌하면 좋겠소?"

전하는 또 한 번 묻는다.

"세자께서 명나라로 가실 때, 이자들은 반드시 배행하려 할 것입니다. 우선 이자들의 배행을 못하도록 하옵소서."

태종은 이숙번의 말을 옳게 여겼다. 아닌 게 아니라 민씨네 형제들과는 사사로이는 처남 매부의 관계가 있고 공으로는 자기를 도와서 정국공신이 된 사람들이지만 요사이 민씨 형제들은 왕후와 함께 자기를 원망하고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 후궁들을 맞이해 들이고 후궁들의 몸에서 왕자들이 하나씩 둘씩 출생된 이후부터 더욱 심했다. 족히 명나라의 세력을 빌려서 자기의 자리를 위태롭게 할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태종은 이숙번을 바라보며 묻는다.

"민씨네들을 명나라로 보내지 않는 일은 쉬운 일이오마는 만약에 명나라 황제가 세자에게 공주를 허락한다면 어찌하겠소?"

이숙번은 웃으며 대답한다.

"전하께서 세자한테 한 마디 말씀만 내리시면 됩니다. 다시 생각해 보시니 공주를 데려온다면 국가에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겠기에 공주와의 혼인을 중지하라고 비밀히 분부하시옵소서."

전하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아니했다.

"세자가 아직 연소하니 황제 앞에서 대답을 잘못한다면 어찌하오?"

말은 꺼냈으나 이숙번 역시 불안한 일이라 생각했다. 한동안 생각 속에 잠겼던 숙번은 고개를 들어 아뢴다.

"전하께옵서 단을 내리실 용기가 계시오니까?"

"어떻게 어떠한 단을?"

이숙번이 아뢴다.

"세자께서 명나라로 떠나시기 전에 급히 특명을 내리시어 세자빈으로 정하신 김한로의 딸과 가례를 치른 후에 떠나시게 한다면 아무런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의 용안에는 웃음이 돌았다. 가만히 손뼉을 친다.

"좋은 말씀을 들었소."

이숙번의 얼굴에도 명랑한 웃음이 물결쳐진다.

"불시로 지체 마시고 시행하시옵소서."

전하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이숙번은 배례를 드리고 물러간다. 전하와 이숙번의 대화는 지극한 비밀 속에 진행된 일이다. 궁녀 한 사람, 내시 한 사람도 이 비밀한 대화를 짐작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이었다. 전하는 정원을 통하여 돌연 왕세자의 가례령을 반포했다.

"왕세자빈은 이미 김한로의 영애로 간택되었거니와 세자의 명나라 행차 이전 내일 모레로 가례의식을 곧 시행하라."

돌연한 명령이었다. 중지상태에 있던 가례도감에서도 혼인 준비를 급히 차리고 김한로의 집에서는 기쁜 웃음이 가락 높게 일어났다. 정원에서 가례령이 반포되면서 세자는 전하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 나갔다. 세자는 전하의 부름을 받자, 돌연 무슨 까닭인가 하고 어전에 나가 문후를 올렸다.

"명소하시는 전교를 받자와 서둘러 왔사옵니다. 무슨 하교가 계시오니까?"

세자는 말씀을 마치자 부왕의 용안을 살폈다. 부왕은 전에 없이 화기로운 웃음을 용안에 가득 띠고 세자를 굽어보며 말씀을 내린다.

"세자에게 이를 말이 있다. 명나라에 가기 전에 김한로의 딸과 아주 가례를 치르고 가는 것이 좋겠다. 수륙 만리 멀고먼 길에 무사하게 다녀오겠지만 이곳에서 기다리는 처자의 마음은 간절할 것이다. 먼저 그의 맺힌 한을 풀어주고 마음 편하게 천천히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 오늘 가례도감에 기별했으니 택일이 되는 대로 곧 가례를 치르고 떠나도록 하라."

돌연 내리시는 부왕의 분부를 받은 세자는 정신이 얼떨떨했다. 도대체 자신의 귀를 스스로 의심할 지경이다. 부왕은 김한로의 딸과의 혼인을 중지하고 명나라 공주와 혼인할 것을 적극 찬성했다. 직접 중국 사신 황엄과 의논을 아니했으나 외숙 민씨들의 말을 들어서 명나라 공주로 세자빈 삼는 것을 크게 찬성했던 것이다. 이번에 자기를 명나라에 보내는 것도 실상인즉 명나라 황제가 자기의 선을 보게 하기 위하여 민씨네 말을 듣고 보내게 된 것이다. 어제까지도 김한로의 딸과 정혼한 일을 헌신짝 버리듯 던져놓고 생각조차 아니했던 아바마마가 아니었던가? 오늘 돌연 김한로의 딸을 동정하는 듯 명 공주와의 혼인을 포기해버리고 가례를 거행하고 가라 하니 부왕의 참뜻을 알 수 없다. 세자는 마치 도깨비한테 홀린 듯했다.

"가례를 치르고 가랍시는 분부시오니까?"

", 그렇지."

"김한로의 딸을 확실히 세자빈으로 맞이하라고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는 가을 하늘같이 변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 생각했다.

 

깨어진 민씨네 꿈

그러나 세자의 마음은 거뜬했다. 어떻든 기뻤다. 세자는 꾸밈없이 아뢴다.

"좌우간 일부함원에 오월비상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넓은신 덕화는 만민이 다시 우러러보오리다."

세자는 더 아뢸 말이 없었다. 공손히 찬성하는 뜻을 표하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가례도감에서는 불일로 택일을 하여 혼인 날짜를 정했다. 깜짝 놀란 사람은 민씨네 형제들이었다. 어둔 밤에 불쑥 내민 홍두깨 식으로 일을 당한 듯했다. 머리가 얼떨떨했다. 선을 보이러 명나라 황제한테로 가는 이 찰나에 혼인을 하고 가라하니 큰일이었다. 더구나 황엄한테는 무엇이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하고 마음이 초조했다. 곧 대궐로 들어가 어전에 뵙기를 청했다. 태종은 주저치 아니하고 곧 민씨네 형제를 불러들였다. 민무질은 급했다. 모든 예절에 대한 치레 말씀을 생략했다. 단번에 아뢴다.

"웬일이시오니까?"

"무엇이 웬일이란 말인가?"

태종의 대답은 냉담했다.

"내일 곧 세자는 명나라로 출발하기로 했사온데, 별안간 김한로의 딸과의 가례령을 반포하시니 어찌 된 셈이오니까?"

"아아, 그 일 말인가. 생각해보니 일부함원을 하면 오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하지 아니했는가. 한로의 딸의 정경이 과연 가엾다고 생각했네. 그리해서 세자가 명나라로 떠나기 전에 성례를 하고 가라고 그랬네. 그리고 명나라 공주와의 혼인은 세자도 원치 않는 바이구."

태종은 용상에 앉아 먼산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그렇다면 명나라 황제께는 큰 죄를 얻었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습니까?"

"? 무슨 죄를?"

태종은 먼산을 바라보던 눈을 옮겨 민무질을 눈이 뚫어지도록 쏘아본다.

"막중 천자의 딸하고 혼인을 하자고 해놓고 이제 선을 보러 가는 길에 김한로의 딸과 가례를 치르면 어찌합니까?"

뾰로통해 아뢰는 민무질의 말을 듣자 태종은 호걸스럽게 웃음 가락을 높였다.

"하하하, 누가 명나라 황제의 딸하고 혼인을 하자고 청했더란 말인가. 과인이 황제의 딸과 혼인을 하자고 청혼한들 황제가 만만하게 내청을 들어주겠나. 경과 황엄이 서로 이야기를 한 데 불과한 것이 아닌가. 명나라 황제는 영문도 모르고 있을 걸세."

민씨네 형제들은 더욱 초조했다. 이번엔 민무구가 아뢴다.

"명나라 황제가 알지도 못하면 어찌해서 세자의 선을 보겠다 하겠습니까?"

"경들은 너무 황엄의 말을 믿어서 탈일세. 소 천 필 달라는 것을 오백 필로 깎아버린 세자의 이야기를 못 들었는가. 황제가 세자의 선을 보겠단 말도 실상인즉, 내시 황엄이 지어낸 장난일세. 이래야란 소 천 필을 긁어들이겠단 말이거든. 이제는 나도 많이 속았네. 자네들도 좀 정신을 차리도록 하게."

돌연 변해진 전하의 태도에 민씨네 형제들은 입맛이 썼다. 여태까지 바라고 바랐던 명나라 공주를 세자빈으로 삼자던 꿈은 단번에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민무질 형제는 마치 한 팔 힘이 뚝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생질인 세자를 미끼로 하여 조선 천지와 명나라 요로에 혼천동지하는 큰 세력을 잡아보자던 꿈은 한 줄기 힘없는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원통하오이다."

민무질은 큰 소리로 외치고 동생 무구와 함께 휘적휘적 어전에서 물러났다. 태종은 무례한 놈이라 생각했다. 물러가는 형제들을 쏘아본다. 민무질과 민무구는 세자의 가례를 엎어비릴 생각이 들었다. 대궐 합문 밖으로 나가면서 형제들은 공모했다.

"어찌하면 좋은가?"

민무질은 동생 무구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까짓 것, 볼 것 있소. 아주 혼인을 못하도록 훼방을 쳐버립시다."

"어떻게?"

"이 길로 황엄을 찾아가서 황엄의 위력으로 대왕한테 항의를 제출해서 파혼이 되도록 합시다."

"황엄이 말을 들을는지 모르겠네."

"말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겠소. 혼인 이야기는 자기가 먼저 꺼내논 것을."

형제는 대궐 밖에서 말을 타고 급히 태평관으로 향했다. 태평관에서는 명나라에서 온 사신의 일행들이 짐을 묶는라고 부산했다. 상사인 황엄의 큰 짐은 말할 것 없고 부사, 서장관, 참사, 서기들의 짐짝도 태산같이 쌓였다. 모두 다 인삼, 녹용, 금은보화들을 가득가득 실어가는 호강스런 짐짝들이다. 태평관에 있는 황엄의 차인은 민씨 형제와 친숙했다. 차인은 짐 묶는 것을 독려하다가 민씨 형제를 보고 반갑게 맞았다.

"내일 떠날 텐데 영감도 짐을 다 묶으셨소?"

차인은 민씨네 형제들이 으레 세자를 모시고 명나라로 갈 것이라 추측하고 이와 같이 묻는 것이다.

"떠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생겼소이다. 급히 천사께 고할 일이 있으니 제백사하고 만나게 해주시오."

차인은 민씨네한테 후한 뇌물을 여러 차례 받은 위인이었다.

"염려 마시오. 곧 만나도록 해드리오리다."

차인은 황엄의 처소로 들어간 지 얼마가 아니되어 곧 민씨네 형제를 황엄의 방으로 인도했다. 황엄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민무질 형제를 맞아들였다.

"밤 사이 무고하시오. 영감도 떠날 준비는 다 하셨소?"

황엄은 민무질을 향하여 묻는다.

"떠날 준비고 무어고 큰일났소이다."

황엄은 눈이 둥그레졌다.

"왕 전하께서 세자의 가례령을 반포하셨습니다. 장가를 든 후에 명제께 뵈우러 가라고 세자께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민무질의 말을 듣는 황엄은 깜짝 놀라는 체했다.

"누구의 딸과 혼인을 한단 말씀요?"

"접반사 노릇을 하던 김한로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김한로의 딸!"

황엄은 얼굴빛이 급작스레 변했다.

"김한로의 딸과는 언제 혼인을 정했더란 말요?"

계속해서 묻는다. 민씨네 형제는 숨길 수 없었다. 민무질이 황엄한테 대답한다.

"작년에 간택을 하여 혼인을 정했던 것입니다."

"작년에? 작년 어느 때?"

황엄이 묻는다.

"천사께서 이곳에 오시기 전이올시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나를 속였소. 나한테는 세자께서 아직 장가를 들지 아니했고 정혼한 곳도 없다고 말하지 아니했소. 무슨 까닭에 당신들은 거짓말을 했소."

황엄은 불량찬 눈을 딱 부릅떴다. 민무질은 고개를 푹 숙였다. 변명할 말이 없다. 황엄은 더한층 노발대발 민무질 형제를 몰아댄다.

"당신네 말을 듣고 천자께 조선 왕세자가 매우 똑똑하니 공주님을 하가시키는 데 유념해두시라고 아뢴 것 아닌가. 그러해서 폐하께서는 한 번 조선왕의 세자를 보셨으면 하시고 나한테 은근히 분부를 내리신 것인데, 이 일을 장차 어찌한단 말요. 나는 임금을 속인 기군망상한 죄인이 되었으니, 이런 기막힌 일이 세상 천하에 어디 또 있단 말요."

황엄은 얼굴을 붉히며 주먹으로 탁자를 친다. 황엄은 내심으로 어깨가 거뜬했다. 첫 번 사신으로 나왔을 때 세자의 풍채를 칭찬하면서 자기 나라 공주와 혼인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마디 한 말을 민씨측에서는 바싹 비위가 동해서 백방으로 청을 하고 뇌물을 바치면서 일이 성사되기만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력이 있는 태감 황엄이라 하나, 명나라 황제한테 조선 세자와 공주와의 혼인을 하자고 아뢸 수는 없었다. 둘째번에 올 때는 핑계할 거리가 없었다. 황제폐하께서 한 번 세자를 만나보았으면 한다고 외수를 부렸던 것이다. 이래야만 조선서는 뇌물을 아끼지 않고 바치는 때문, 욕심이 동한 것이다. 이제 세자가 본국 색시와 혼인을 한다 하니 속으로는 태산 같은 큰 짐을 벗어논 듯했다. 그러나 속마음을 그대로 민씨들한테 보일 수는 없었다. 큰 소리로 도리어 민씨네들의 무신을 책망했다. 민무질은 손을 모아 빌었다.

"그저, 죽을 때가 되어 거짓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명나라 공주와 혼인이 된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겠습니까. 백 번이라도 이쪽 혼인를 퇴하고 명나라 공주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일 욕심으로 정혼한 일이 없다고 여쭌 것입니다. 그저 세자의 외숙이 되는 때문, 그러한 욕심이 눈을 가려서 이같이 고한 것입죠. 천만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민씨네 형제들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면서 천 번 만 번 빌었다. 빌 뿐만 아니었다. 뒷구멍으로 황엄한테는 민씨가 바치는 금은보화의 뇌물이 산더미같이 들어갔다. 황엄은 못이기는 체하고 세자를 단순하게 문안사 사신으로 가례가 끝난 후에 함께 갈 것을 허락했다. 세자가 문안사의 자격으로 명나라로 간다 해도 배행원으로 가서 명나라 대관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지려 했다. 세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큰일이 앞에 있었다. 가까운 날짜로 급히 택일을 하여 부랴사랴 김한로의 딸과 가례를 치렀다. 세자빈이 되어 동궁으로 들어간 김빈의 즐거움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그의 아버지의 기쁜 마음은 입술가에까지 가득했다. 이제는 민씨네들을 제쳐놓고 김한로의 희망이 바다같이 양양했다. 세자가 서울을 떠나는 전날 태종은 문안사인 세자를 따라갈 배행할 사람을 반포했다. 민무질 형제는 대궐로 들어가 배행원이 반포되기를 기다렸다. 말할 것도 없이 수석 배행원은 민무질이 아니면 민무구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민씨네뿐이 아니었다.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이 생각했다. 형제가 다함께 정국공신이요, 왕후의 첫 동생이요, 세자의 외숙이요, 명나라에도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다녀와서 명나라 통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세자가 정사가 된다면 민씨네 형제는 둘 중에 한 사람은 부사가 되어 갈 것이라 생각했다. 정원에서는 어명을 받들어 배행원을 발표했다. 뜻밖이었다. 민씨네 형제는 그림자도 비치지 아니하고 명단에서 빠졌다. 세자는 진표정사가 되고 완산군 이천우는 부사요, 우정승 이무는 진정사요, 계림군 이내는 부진정사요, 시종관에는 이현, 맹사성이라 반포되었다. 민무질, 민무구 형제는 정원 승지가 반포한 벽보를 보자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했다.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대궐문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민씨네 형제들은 머리를 마주대고 의논이 분분했다.

"웬일인가?"

민무질이 먼저 아우 무구한테 묻는다.

"글쎄 무슨 간언이 들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뉘 짓일까?"

무질은 무구한테 묻는다. 이때 문밖에서 기침 소리가 나면서 방문이 '드르르' 열렸다.

"누구냐?"

민무구가 물었을 때 사람은 벌써 문지방 너머로 들어섰다. 모두 얼굴을 들고 바라보니 끝의 무휼이다.

"너 마침 잘 왔다. 들어오너라."

민무질은 반갑게 무휼에게 자리를 주었다.

"무슨 의논들을 하시우?"

무휼은 두 형을 바라본다.

"의논이 무슨 의논이냐, 대궐 안에 들어갔다가 작은형과 만나서 함께 온 길이다."

"그런데, 형님은 웬일요?"

"무엇이?"

맏형 무질이 대답한다.

"이번에 세자를 모시고 가는데 형님들의 명단이 빠졌으니 어찌 된 셈이오? 그래서 궁금해서 배길 수 있습니까. 부리나케 쫓아온 길이오."

무휼은 의아해서 물었다. 형 무질이 대답한다.

"마침 너 참 잘 왔다. 그러지 아니해도 작은형과 그 일에 대해서 의논하는 중이다. 필시 우리 민씨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위에 아뢰서 이런 짓을 해서 세자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만든 모양이다. 그래서 작은형과 나는 지금 그 장본인을 생각해보는 중이다. 너는 바깥으로 뻔질나게 돌아 다니는 사람이니 우리보다 소문을 들어 알았을 것이다. 혹시 누구의 짓인 것을 알았느냐?"

민무휼은 눈을 크게 뜨고 형들을 바라본다.

"뻔하지 아니하오."

"누구겠느냐?"

"우리 집안하고 지금 세력다틈을 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뿐이냐. 모두 다 개국 공신이 아니면 정국공신으로, 서로들 겉으로는 좋은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짓밟아 뭉개면서 서로들 딛고 일어서려 하지 않느냐."

"그중에도 제일 억센 사람이 있지 않소. 더구나 형님은 그 사람과 지금 척지고 있소. 누님께 말씀해서 그 사람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아 주지 아니한 일이 있지 아니하오. 이 사람은 지금 형들을 절치부심하고 있소."

"오오, 참 그렇구나. 바로 이숙번의 짓이로구나."

"내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숙번은 일전에 독대를 드린 일이 있답니다. 형님은 이런 소식도 못들었소?"

민무질이 대답한다.

"공연히 요새는 명나라 사신 때문, 정신이 없었다. 아주 등하불명이 되었다."

"형님도 제발 헛물켜지 마시고 앞뒤를 보살펴서 차근하게 하시오. 공연히 명나라 고자놈한테 속지 말고 정신을 좀 차리시오. 그래 명나라 황제가 공주를 세자빈으로 내줄 성싶소?"

민무질은 동생 무휼의 말을 듣고 잠깐 고개를 숙여 무엇을 생각했다.

"형님, 공연히 명나라로 가서 헛물만 켜고 돌아오는 것보다 서울을 떠나지 말고 있다가 이 기회에 아주 우리의 대적인 이숙번 일파를 숙청시키고 우리들이 마음놓고 살아갈 땅을 확보해야 하겠소. 이번 명나라에 가지 않게 된 것이 나는 도리어 다행이라 생각하오."

민무구는 고개를 들어 끝에 아우 무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세자를 모시고 내가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네. 세자의 역량과 기백도 명나라 대신들한테 좀 알려주고."

"혼인도 이곳에서 다 치렀는데 명나라에 따라간들 형님한테 무슨 소득이 있소. 아까 말한 것 같이 우리와 경쟁을 하려 하는 이숙번을 아주 때려 뉘기로 합시다. 그리고 또 한 마디 형님한테 이야기해둘 것이 있소."

"무슨 말인가?"

"지금 누님은 까딱하면 폐위가 되기 싶소."

"폐위라니?"

이번에는 큰형 민무질의 눈이 둥그레진다.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세자가 없는 틈을 타서 왕후의 폐위를 단행한다는 말이 자자하게 떠돌고 있소."

"감히 조강지처를 그럴 수가 있나."

이번엔 무구가 깜짝 놀라며 무휼을 바라본다.

"누님이 투기가 좀 과하시기는 하죠. 고려 궁인 때도 야단을 쳤고, 누님의 시녀를 전하가 건드렸을 때도 소란을 피웠고, 기생 가희아를 떼어서 궁중에 들여놓았을 때도 기막힌 분란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이럴 때마다 세자는 중간에 들어서 누님을 달랬던 것입니다. 전하와 누님의 의초는 이제 말할 수 없이 벌어졌습니다. 왕 전하와 왕후 내외분이 아니라, 바로 곧 노상의 타인입니다. 그리고 전하는 지금 강계 기생 출신인 가희아한테 말할 수 없이 침혹이 되셨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세자까지 폐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누구들의 장난인지 아시오. 정국공신 이숙번이 전하의 마음이 돌아앉은 것을 이용해서 가희아의 아들 ''로 세자를 바꾸게 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민씨네 형제를 결딴내고 자기가 세력을 독차지해서 조정의 권세를 함빡 전단해보자는 의도일 것입니다."

" 정말인가?"

민무구는 주먹을 쥐어 부르르 떤다.

"형님, 나는 들은 대로 이야기를 옮길 뿐이지 진가는 모르겠소이다마는, 지금 세상에서는 이와 같은 소문이 짜아하게 퍼지고 있소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하면 좋겠나?"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지요."

민무구와 민무질이 일제히 대답한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면?"

"세자가 없는 동안에라도 전에 전하가 방석을 죽이듯 왕자 몇을 죽여야 합니다."

민무질은 눈을 똑바로 뜨고 대답한다.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하지 않나."

이번엔 무구가 무휼한테 묻는다.

"소문에는 전하가 황희한테 폐비할 것을 물어보니, 황희는 정색하며 '무슨 까닭이오니까' 하고 물었더랍니다. 전하는 칠거지악을 들면서 투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을뿐더러 왕후의 체통이 말이 아니라고 대답하니, 황정승은 '남을 원망하고 꾸짖기 전에 전하께서 먼저 자신의 일을 반성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께서는 후궁이 너무나 많으십니다, 그리고 민왕후마마는 다른 왕후와 달라서 전하와 함께 사생을 함께 하면서 나라를 중흥시킨 왕후올시다, 가볍게 폐위를 논의하시는 일은 불가피합니다' 하고 끊어 아뢰었다 합니다. 전하는 다시 정승 하윤한테 물어보았다 합니다. 하윤이야말로 이숙번보다도 먼저 전하를 도와서 우리와 함께 중흥혁명을 일으킨 재상이 아닙니까? 하윤은 펄펄 뛰면서, '전하께서는 약주에 취하셨습니까, 방석을 칠 때 벌벌 떠시는 전하한테 갑옷을 입혀드린 분이 누구오니까, 배은망덕을 하시어도 분수가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씀했다 합니다. 도대체 형님들은 이런 일을 모르고, 덮어놓고 명나라 공주만 데려오려고 하시오. 과연 딱하기 그지없소."

"그렇다면 황희와 하정승을 찾아보고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나?"

무질은 다시 끝동생한테 묻는다.

"당치 않은 말씀 마시오. 황희나 하윤은 전하의 신하지 형님의 신하는 아닙니다. 이와 같은 비밀한 말은 형님한테 털어놓고 말할 줄 아시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후의 친동생인 형님들이 묻는데,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들을 할 리가 있소. 말도 꺼내지 마시오."

"그렇다면 어떤 방책을 취하는 것이 좋겠나?"

"먼저 군사를 일으켜 이숙번의 집을 포위하고 다음엔 궁성을 포위한 후에 전하의 서자들을 모조리 처치해버려야 합니다. 이리한다면 이숙번에 대해서 설분하는 일도 되고, 나라의 국권은 길고 길게 우리들의 손으로 자자손손 잡을 수 있습니다."

"시기는 어느 때 거사하는 것이 좋겠나?"

"세자가 떠난 후에 곧 단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군사는?"

"우리들 사병이외에 사위, 조카사위, 사돈들의 사병을 모조리 총동원해서 두들겨 부숴야 합니다. 이숙번의 사병도 막막강병입니다. 이라하여 두 길로 나누어 한 부대는 이숙번의 집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한 부대는 궁성을 포위한 후에 궁중으로 들어가서 무력으로 모든 서자들을 잡아내서 전에 전하가 그 서제들을 처치하듯 해야 합니다."

무질은 무구를 바라본다.

"무휼의 말이 어떠한가?"

"일이 그쯤 되었다면 칼을 뽑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지요. 나도 사병을 거느리고 형님과 함께 행동을 취하겠습니다."

"자아, 그렇다면 세자께서 떠난 후에 곧 단행하기로 하세."

"좋소이다."

형제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방 안은 잠잠했다. 무질과 무휼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미닫이문을 열었을 때 창 밖에서 엿듣고 있던 사람 하나는 급히 부엌 속으로 몸을 피했다. 한편 세자는 명나라 사신 황엄과 함께 같은 날 명나라로 향하게 되었다. 길은 같은 길이나 황엄의 일행은 명나라 사신의 자격으로 먼저 떠나고 세자는 명나라에 가는 문안사의 자격으로 황엄의 뒤를 이어 떠났다. 세자가 가는 일이 문안사의 자격이지만 세자의 몸으로 사신이 되어 가는 것은 개국 이래 처음되는 일이다. 거리에 나가는 행차가 세자인 때문, 왕 전하의 거둥에 다음 가는 호화스런 행차였다. 여기다가 특별히 왕 전하는 황엄을 전송하고 또다시 세자를 떠나보내게 되니 사신의 행차와 세자의 행차가 서로 어울려서 더한층 화려했다. 때는 태종 칠년 구월 이십오일 을해였다. 전하는 세자를 전송하기 위하여 창의문으로 나와 연서 역말 동편에 군막을 치고 자리잡아 있었다. 세자가 하직하는 배례를 올리니 전하는 세자한테 장중하게 전별하는 말씀을 내린다.

"가는 길이 험하고 길다. 자중자애해서 갔다 오라. 세자의 임무는 중하다. 오늘 세자가 가는 것은 종사와 생민을 위하여 가는 것이다. 잘 다녀오라."

이미 세자빈이 가례를 치르고 들어왔으니 혼인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전하의 말씀이 끝나니 세자는 아무 말 없이 절을 올리고 눈물을 머금었다. 만 가지 감회가 뒤섞여 일어났다. 전하도 약간 눈물을 머금는 듯했다. 좌우의 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역시 비감한 눈물을 흘렸다. 전하는 곧 환궁하고 세자는 말을 타고 고양, 파주를 거쳐 의주가도로 나간다. 부사와 수행원들은 정원에서 반포한 명단 그대로였다. 세자의 뒤를 따라 서북으로 서북으로 향해 나간다. 의안대군 이화는 종반 이씨네 종친들을 거느리고 임진강까지 나가 전송하고, 청평군 이백강과 참지의정부사 박신과 첨내시부사 김관은 세자의 행차를 옹위하여 요동까지 전송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날 민무질, 민무구, 민무휼들, 세자의 외숙이 되는 민씨네들은 한 사람도 얼굴을 보이지 아니했다. 전송하는 전하도 민씨네들의 얼굴이 보이지 아니하는 데 대해서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세자 역시 가깝다는 외숙들이 먼길을 떠나는데 얼굴도 내놓지 아니한 데 대해서 서운하게 생각했다. 조선국 왕세자가 문안사가 되어 명국을 찾는 일은 전고에 없던 일이었다. 명나라에서는 세자의 행차를 영접하는 데 특별한 배려를 가졌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의 사신으로 왔던 태감 황엄의 주선이 컸던 것이다. 황엄은 명나라 황제한테 공주를 조선으로 보내서 세자빈으로 봉하자고 아뢴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공주와의 혼인을 미끼로 하여 세자의 외숙인 민씨네를 농락해서 사복을 채운 것뿐이었다. 그 대신 황엄은 세자한테 명나라 구경을 시키고 세자를 우대하기로 했던 것이다.

 

세자와 명제와의 대화

세자가 요동을 거쳐 북경 성 밖에 당도하니 명나라 황제는 금의위지휘천호에 영을 내려 천여 명 기병들을 보내서 세자를 맞이하여 강동역관으로 인도했다. 명제는 다시 예부상서 정사와 내관 황엄을 보내서 세자가 먼 길 온 것을 위로한 후에 경사로 들어가 회동관에 사처를 정하게 하고, 예부상서는 다시 황제의 어명을 받들어 만 리 길에 고단하지 아니하냐 하고 위로하는 안부를 물었다. 황제는 세자가 도착되는 당일 서각문에 진좌하여 세자를 만났다. 세자는 황제를 향하여 절하니, 황제는 세자에게 전위로 오르라는 분부를 내렸다. 황제는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세자의 나이를 물어본 후에 채사의 다섯 벌과 한삼 한 벌, 속옷 한 벌, 신 한 켤레를 내렸다. 황제는 세자를 인견한 후에 내전으로 들어가니, 세자는 명나라 태자와 그의 아우 한왕한테 전갈을 보내서 만나기를 청했다. 태자와 한왕은 제례하기를 원했다. 세자는 비로소 역관으로 돌아와 편하게 쉬었다. 저녁때가 되었다. 황제는 또다시 황엄과 이부상서 건의를 시켜서 야자실과 저녁밥을 보냈다. 다음날 황제는 서각문에 앉아 다시 세자를 만났다. 세자가 사은을 청한 때문이다. 황제는 세자에게 전 위로 오르게 하고 친히 수작을 했다.

"너희 나라에서 이곳까지 올 때 몇 달이 걸렸던가?"

"석 달이 걸렸습니다."

"글을 읽는가?"

"읽습니다."

황제는 간단하게 묻고 돌아갔다. 세자가 역관으로 돌아온 후에 이날에는 호부상서 하원길이 위로하러 나왔다. 육부상서가 차례차례 나와서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었다. 황제는 또다시 세자를 청했다.

"얼굴 모습은 너희 아버지 같은데 키가 좀 다르구나."

하고 친숙하게 말을 보냈다. 태종은 얼굴을 그림으로 본 모양이다. 황제는 세자한테 책을 보내면서 은근하게 말씀했다.

"이것은 이곳 인효황후가 저술하신 권학하는 책이다. 너희 나라에 전하라."

세자는 정중하게 책을 받았다. 황제는 다시 세자에게 묻는다.

"종일 사관에 있기가 적적하지 아니하냐. 조천궁, 영곡사와 천희사며 능인사를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특별한 분부를 내렸다. 세자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인도해주는 재상들과 함께 중국의 명소를 두루 살폈다. 다음날은 황제가 봉천전에서 천지신명한테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만조백관이 참례하는 이 제천의식에 조선국 세자도 참례하라는 명이 내렸다. 세자는 황제의 초청을 받자 곧 부하 사신들을 거느리고 봉천전으로 향했다. 이날 명나라 황제는 면류관 쓰고, 황룡포 입고 백옥홀을 잡아 전 아래로 내려서서 제단을 향하여 천지신명한테 배례를 드렸다. 황제가 제례를 드리는 뒤에는 명나라 정승인 각로를 위시하여 국가의 원훈들이 찬란한 조복으로 위엄을 떨쳐 시립해 섰고, 각로의 뒤에는 이·····공 육부상서가 섰고, 다음에는 품위에 따라 구품관까지 좌우편으로 나열해 있었다. 이때 세자는 국선 사신들을 거느리고 봉천전 앞에 당도하자 인도하는 예부 관원에게 서 있을 곳을 물었다.

"조선국 왕세자저하십니다. 어느 곳에 서 계셔야 하겠소?"

통사가 물었다.

"황제폐하의 참례하라는 어명이 계시었소?"

관원은 황제의 어명이 있느냐 물었다. 통사는 지체없이 황제가 내린 어명 교서를 내어 뵈었다. 예부 관원은 교서를 받아 보자 한동안 말없이 망설이다가 세자와 사신들을 인도하여 서반 구품관들이 서 있는 뒷자리에 세우게 했다. 세자는 전후좌우를 둘러보았다. 만조백관은 모두 다 예복을 입었는데 자기만 예복을 입지 아니했다. 뿐만 아니었다. 자기가 서 있는 곳은 미관말직인 구품관의 자리보다도 더 아래인 뒷줄에 서 있게 되었다. 세자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자기 단 한 사람의 개인의 문제라면 모르되, 조선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대표한 사신으로, 더구나 왕세자의 몸으로 중국 구품관 뒤에 서 있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떨구는 것이라 생각했다. 세자는 조용히 부사와 서장관을 손짓해 불렀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어떠한 지위에 소속되어 있는 자린가?"

부사가 대답해 고한다.

"서반 구품의 뒷자리올시다."

"구품이면 가장 끝가는 미관말직의 자리가 아닌가?"

"그러하오이다."

부사가 대답한다. 세자는 부사 이하 모든 사람을 둘러보며 말한다.

"우리가 이 나라에 온 것은 개인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고 국가의 대표인 사신 자격으로 온 것이다. 한 나라의 대표가 구품관의 뒤에 서 있다는 것은 말이 아니되는 소리다. 전에 혹시 이같은 의식에 참례한 전례는 없었는가?"

부사는 아무것도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옆에 있던 서장관이 대답한다.

"아조 때 왕세자께서 사신으로 친히 오신 일은 이번이 처음이올시다. 그러하오니 전례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기록을 보면 고려 때 세자 정성군이 송나라에 갔을 때 육부상서의 다음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세자는 고개를 끄떡였다. 곧 수행하는 재상 이무를 지명해 불렀다.

"그대는 반열에 나가서 조선국 왕세자가 급히 황제폐하께 아뢸 일이 있다 하고 크게 외치라. 다음엔 내가 나가 담당하리라."

이무는 문관 출신이 아니라 무관이었다. 지난번 방석, 방번과 정도전을 무찔러서 태종으로 세자가 되게 한 정국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이무는 배짱이 좋았다. 이런 까닭에 세자는 이무를 불렀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무는 세자께 대답을 올리고 곧 반열 밖에서 반열 안으로 사람을 헤치고 들어갔다. 잡인을 금하는 어전군사가 급히 반열로 향해 나가는 이무를 막았다. 이무는 큰소리로 군사를 꾸짖었다.

"나는 조선국 사신이다. 아뢸 일이 있어 들어간다. 일개 군졸이 어찌 사신을 막느냐."

호통을 치며 들어갔다. 외국 사신이라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누구 한 사람 감히 막는 사람이 없었다. 반열 속으로 들어가자 이무는 황제가 앉은 용상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음성을 화하게 하여 아뢴다.

"소신은 조선국 부사 이무올시다. 조선국 왕세자는 폐하께 급히 아뢸 말씀이 있다 하옵니다. 극히 무례한 줄 아오나 의식에 관하여 아뢸 일이 있사오니 설혹 무례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너그럽게 살피시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대신과 대장들은 이무의 등을 밀어내라는 분부를 내리려 하다가 조선국 왕세자가 급히 의식에 대하여 아뢸 일이 있다는 말을 듣자 잠깐 주춤하고 폐하의 대답이 어떻게 떨어지나 하고 살폈다. 용상 위에서는 명나라 황제의 부드러운 음성이 이내 떨어졌다.

"네가 세자를 위하여 말할 길을 터놓으러 나왔느냐. 의식에 대하여 급한 일이라 하니 세자 본인이 나와서 말하도록 하라."

황제는 뜻밖에 부드러운 말씀을 내렸다. 황제의 분부가 이쯤 떨어지니 조정신하들은 감히 말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무는 두 번 절한 후에,

"황감하여이다."

한 마디를 남기고 반열에서 물러났다. 천지신명께 올리는 제천의식은 이로 인하여 잠시 중지되었다. 이무는 반열 밖으로 나가고 뒤를 이어 세자가 장중하게 걸음을 걸어 반열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세자의 입은 옷은 조복이 아니라 평상복이었다. 그러나 세자는 조금도 국축하는 기색이 없었다. 만조백관들의 휘황찬란한 조복들이 전각 안팎에 가득해서 눈이 현란하도록 서기를 뿜는 속에 소년 세자는 태연히 걸어 섬돌 위에 우뚝 섰다. 호호백발 칠십 세가 된 각로 대신으로부터 신언서판이 훤칠하게 잘생긴 문무백관들이 천인지 만인지 나열해 늘어 섰는 속에 소년 세자가 조복도 아닌 평상복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는 모습은 천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명나라 황제는 섬돌 위에 서 있는 세자를 굽어보자 좌우 시신한테 분부했다. 이미 몇 차례 대해본 세자다. 얼굴을 알았다.

"전 위로 오르게 하라."

시신들은 어명을 받아 세자의 서 있는 곳으로 내려가 전 위로 인도했다. 세자는 전 위에 오르자 비로소 황제께 향하여 두 번 절을 올렸다. 황제는 소년 세자의 절을 미소해 받아들였다. 세자는 우뚝 서서 명나라 황제의 말씀을 기다렸다.

"세자는 짐에게 무슨 할말이 있는가?"

세자는 황제를 향하여 다시 한번 읍을 올린 후에 입을 열었다.

"조선국 왕세자는 감히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신은 오늘 이곳에 서 있을 땅이 없습니다."

목소리가 또렷또렷 맑았다. 멀리 서 있는 만조백관들의 귀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대담한 말이었다. 모두 다 서로들 얼굴을 돌아본다.

"서 있을 땅이 없다니?"

세자는 주저치 아니했다.

", 그러하오이다."

"지금까지 경은 어디 서 있었던가?"

"구품의 끝 야인과 달자 틈에 끼여 있었습니다. 명나라 태조께서는 개국초에 조선국왕한테 일품의 관복을 내리셨습니다. 국왕이 일품이라면 세자는 이품입니다.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신은 공복도 없이 구품 밖에 서 있으니 신은 서 있을 곳이 없습니다."

세자의 말은 구김살이 없었다. 소년 세자의 태도가 이같이 출중할 줄은 몰랐다. 중국의 만조백관들은 모두 다 혀를 돌렸다. 황제는 예부상서 정사를 불러 묻는다.

"짐이 조선국 왕세자의 대우는 이품관에 해당케 하라 했는데, 어찌해서 구품관 밖에 세웠던가. 그렇다면 과연 서 있을 땅이 없다 하겠다. 어찌 된 노릇인가?"

명나라 예부상서 정사는 창황중 얼른 대답해 아뢸 말이 없었다.

"조복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구품관 반열 밖에 서 있게 했습니다."

황제는 얼굴빛을 고쳤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곧 이품관의 서열에 서 있게 하라."

예부상서 정사란 자는 그래도 오만했다. 조선은 속국이란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이번에는 조복이 없으니 다음번에나 이품관의 서열에 서 있도록 하겠습니다."

"상의원에 만들어둔 조복이 있을 법도 하다. 곧 기별해서 세자에게 조복을 주어서 이번 의식에 참여케 하라."

황제는 얼굴빛을 고쳐 엄숙하게 명령을 내렸다. 예부상서는 더 앙탈할 수가 없었다. 세자와 함께 어전에서 물러나 상의원 조복을 별실에서 입게 한 후에 각로 대신의 아랫자리인 육부상서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서 있게 했다. 여기 따라서 부사들은 오품관의 서열에 서 있게 되고 서장관과 통사들은 육품관과 어깨를 겨누어 서게 되었다. 소년 세자의 항의는 마침내 명나라 황제 이하 예부상서를 굽히게 했을 뿐 아니라, 엄숙한 제천의식의 시각을 한 시각이나 늦추게 했다. 원체 경우에 밀리게 되니 명나라 측은 꼼짝없이 세자한테 지고 말았다. 조선국 세자의 영특하고 똑똑하다는 소문은 자자하게 중국에 퍼졌다. 황제는 여러 차례 세자를 불러서 인견한 후에 시를 내리고 붓과 종이를 주었다. 세자의 영악하고 똑똑한 것을 사랑한 때문이다. 그러나 일체 공주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황엄은 무슨 까닭인지 황제가 세자를 부르기만 하면 황엄은 조선 사정에 가장 밝은 체하고 세자를 제쳐놓고 대답을 올렸다. 세자는 황엄의 뱃속을 유리 붙인 듯 들여다보았다. 혹여나 자기 입에서 공주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황엄의 처지는 무한 곤란하게 되니 항상 자기 옆을 떠나지 않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황엄은 외숙들의 마음을 낚시질하기 위하여 명나라 공주와 혼인하자는 말을 꺼내놓고 사리와 황소와 금은보화를 흠뻑 긁어갔던 것이다. 세자는 황엄의 버릇을 고쳐놓고 싶었다. 며칠 후에 황제는 남교서 천제를 지내면서 조선 세자에게 배사를 명했다. 배사란 천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지극히 세자를 우대하는 예절이다. 이때 황제는 전번에 천지신명한테 제사할 때 세자에게 조복을 빌려 입게 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특별히 새로 조복을 지어 하사했다. 이날 남교의 의식을 파한 후에 세자는 황제가 조복을 새로 지어 내린 일을 사은하기 위하여 봉천전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흔연히 세자의 숙배를 받고 이내 사찬을 했다. 이날도 내시 황엄은 그림자같이 세자의 뒤를 따랐다. 세자는 마음속으로 괘씸하기 짝 없게 생각했으나, 황엄은 황제의 신용을 얻은 십상시와 같은 내관일 뿐 아니라, 소위 조선통이라 해서 황제는 세자를 접대하라고 접반사의 책임을 맡겨놨으니 그를 떼어버릴 수도 없고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아니하고 황엄을 그대로 둔다면 앞으로 조선에 와서 행악이 더욱 심할 것이라 생각했다. 세자는 가만히 생각했다. 황엄의 몸이 다치지 아니하는 정도로 혼띔을 내서 톡톡히 버릇을 고쳐놓으리라 했다. 세자는 황제가 내린 사찬을 마치고 이번에도 황제가 보낸 시를 받았다. 황제는 세자를 만날 때마다 자기가 지은 시를 세자한테 보내서 조선에 돌아가 전파시켜 달라 했다. 세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후에 미소를 지어 황제한테 아뢴다.

"소신이 삼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 통사는 조선 사람이 아니었다. 명나라 어전통사였다. 세자가 아뢸 일이 있다는 말을 듣자 옆에 있던 황엄의 얼굴은 별안간 변색이 되었다. 혹시나 공주 이야기와 사리 이야기에 황소 천 필에 관한 소리가 나온다면 큰일이었다. 목이 달아날 판이다. 황엄은 자꾸 세자를 향하여 눈짓을 한다. 이야기를 말아 달라는 군호다. 세자는 눈치를 챘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은 딴 편을 바라보며 황엄의 눈짓을 보지 아니했다. 통사가 세자의 말씀을 황제께 아뢰니 황제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세자를 바라보며 묻는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주저 말고 말하라."

통사는 말을 옮겼다. 세자는 천진난만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대답한다.

"폐하께서 소신한테 항상 이같은 성은을 내리시니 감격한 말씀 아뢸 길 없습니다. 듣자하니 공주마마 두 분이 계시다 하온데 소신한테 한 분을 하가시키실 뜻은 없으십니까?"

돌연 공주를 초들어 물었다. 어전통사는 그대로 황제께 통역을 했다. 옆에 있던 황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세자의 말 한마디에 자기 목숨은 살고 죽는 기로에 서 있게 되었다. 황엄은 초상집 개의 얼굴이 되어 자주 자주 세자를 바라본다. 황제는 돌연 세자의 묻는 말에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공주는 짐의 사랑하는 딸이요, 세자는 비록 외국 사람이라 하나 가상하게 생각하는 세자다. 그대가 내 딸을 맞이할 의향이 있는가?"

황제는 얼굴에 더한층 화색을 띠어 세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통사가 통역을 했다. 옆에 있는 황엄의 얼굴이 파랗다 못해 노랗게 질렸다.

"황은이 감격하여이다. 말씀만 들어도 소신은 결초보은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조정에서는 소신을 위하여 말씀을 드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황실의 귀하신 공주를 외방에 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반대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황은의 홍대하신 뜻을 항상 마음속에 지녀서 한평생 잊지 아니하겠습니다."

통사는 세자의 아뢰는 말씀을 계속해서 옮겼다. 황제는 유쾌한 모양이었다. 손을 들어 흔들며 대답한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짐에게 공주를 조선에 보내서 세자빈을 삼게 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도 없었고, 조정에 이러한 공론이 일어난 일도 없었으니 못한다고 간한 사람도 없었다. 경은 짐의 여식을 데려다가 세자빈으로 삼을 생각이 있는가?"

황엄의 거짓말이 완연히 드러났다. 이때 황엄의 얼굴은 다시 하얗게 질렸다. 세자의 입에서 무슨 말이 또 나올지 추측하기 어려운 때문이다. 세자는 어리광 비슷하게 방글방글 웃으며 아뢴다.

"소신은 벌써 장가를 들어서 세자빈을 맞이했습니다. 지금 아내가 있는 몸이올시다."

세자는 잘라 말했다. 황엄은 비로소 긴 한숨을 짓는다. 금방 죽는 사람의 얼굴빛이 되었던 황엄은 차차 생기가 돌았다. 황제의 얼굴빛이 조금 달라진다.

"그렇다면 네 어찌 짐에게 공주를 하가시킬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느냐?"

황제의 얼굴빛은 묻고 나서 더한층 엄숙했다.

"신하는 주인이 믿어주는 마음에 의해서 충성하는 정이 더욱 깊은 것이올시다. 황공 만만하오나 폐하께오서 소신을 사랑하시는 깊이가 얼마나 하신지 알기 위하여 감히 아뢴 것이올시다. 이제 소신을 생각하시는 폐하의 정이 공주까지 소신에게 주실 의향이 계시다 하니 소신, 다시 더 무슨 원이 있사오리까. 비록 공주를 모시지 못할망정 폐하의 지극하신 마음을 깊이 깊이 폐부 속에 간직하와 일평생 간뇌도지하오리다."

황제는 세자의 말을 듣자 만면에 웃음 가득히 띠었다. 어수를 늘이어 세자의 등을 어루만진다.

"네가 만약 춘추전국시대에 났던들 맹상군이 아니면 신릉군이 되었으리라."

이때 황엄의 얼굴빛은 완전히 산사람의 얼굴로 다시 소생되었다. 세자는 황제의 칭찬을 받은 후에 한층 용기를 얻었다. 황제 앞에서 황엄의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놓고 싶었다.

"소신이 이번 돌아가면 다시 어느 때 폐하께 뵙는 영광을 가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어전 지척에 천은을 입사온 길에 저희 나라에 대한 일을 두서너 가지 아뢰겠습니다."

"좋다, 말을 하라."

황제는 통역을 통하여 쾌하게 허락을 내린다.

"어린 것이 폐하 앞에 감히 참람한 말씀을 올려도 허물하지 아니하고 너그럽게 받아주시겠습니까?"

너무나 똑똑하고 영민한 말이었다. 소년 세자의 입에서 이만한 말이 거침없이 나온다는 것은 조선 세자의 교양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황제는 느꼈다.

"듣고 싶다. 말을 해보라."

"폐하께서는 '맹자'를 읽어보셨습니까?"

돌연 세자의 묻는 말은 너무나 당돌했다. 이미 허락해놓은 일이었다. 황제는 웃으며 대답한다.

"천독까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따져본다면 백여 번은 읽었을 게다."

황제는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맹자' 속에 실려 있는 왕천하하는 법을 이야기한 맹자의 말씀을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묻는 말은 더한층 당돌했다.

"짐이 태자로 있을 때, 태사와 태부들한테 여러 번 왕도정치에 대한 말을 들었느니라."

황제는 여전히 미소를 지어 말씀을 내린다.

"왕도정치를 하는 데 근본 목적은 백성을 잘살게 하고, 백성들을 굶주리지 않게 하고 헐벗지 않게 해서 나라에 안주토록 하는 것이 왕도정치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

"'맹자' 첫머리에 맹자께서 양혜왕을 찾아보시니 왕이 말씀하시기를, '어르신네께서 천 리 길을 멀다 아니하시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그런 일이 있었지."

황제는 신통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미소를 띠어 세자를 바라본다. 모든 시신들도 황제와 세자의 주고받는 말을 재미나게 듣고 섰다. 시신 중에는 황엄도 끼어 있었다. 세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맹자를 쳐들어내나 하고 다른 시신보다 더 한층 정신을 모아 듣는다.

"그때 맹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왕께서는 어찌 이익만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과 의라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왕께서 우리나라를 어찌하면 이롭게 하겠나 하고 말씀하신다면 다음에 대부들은 어찌하면 우리 집안을 이롭게 하겠나 말하고, 백성들은 어찌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하고 말해서 위와 아래가 서로 이익만 찾는다면, 그 나라는 위태롭다고 말씀했습니다."

명나라 황제는 무릎을 치며 대답한다.

"그렇지, 맹자의 말씀이 옳지. 윗사람이 이익만 찾는다면 아랫사람도 따라서 이익만 찾을 수밖에. 그리고 나라가 아니 망할 수 없겠지. 결국에 가서는 백성들만 결딴이 나게 되거든. 백성이 망하면 나라가 아니 망할 수가 있나. 맹자의 말씀이 꼭 옳은 말씀이지."

명나라 황제는 자기 자신이 바로 왕천하하는 왕도정치를 잘 실천하는 임금인 듯 얼굴에 가득 화기를 띠어 대답한다. 태감 황엄은 황제와 세자의 대화를 듣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세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맹자의 왕도정치 사상과 양혜왕의 이익 타령을 끌어내나 하고 자못 불안해하는 표정을 갖는다.

"그러면 폐하께 아룁니다. 조선도 폐하의 비호를 받는 나라올시다. '보천지하 막비왕토'가 아니옵니까."

세자의 '보천지하 막비왕토'라는 말을 듣자 황제의 입이 벌룽 벌어진다.

"세자도 아는구나. 제법이다. 과연 교양이 높구나. 그렇지, 천하가 모두 다 내가 거느리고 있는 왕토지."

"그렇다면 중국의 사서인뿐 아니라 조선의 사서인도 폐하의 백성이올시다."

명나라 황제의 심경은 더한층 좋았다.

", 제법 세자답다. 조선이 너로 인하여 빛나리라. 그렇지, 조선백성도 내 백성이지."

명나라 황제는 흐뭇했다. 세자의 칭찬이 놀랍다.

"폐하, 그렇다하면 조선 백성도 중국 백성과 똑같이 사랑해주시옵소서."

"사랑하다뿐이겠나. 일시동인을 해주고 있다."

황제는 점점 더 흐뭇해한다.

"그러하오나 폐하께서 일시동인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익만 찾으셨습니다."

"내가 조선에 대해서 이익만 찾았단 말인가?"

황제의 얼굴빛은 금방 변해진다. 웃음은 사라지고 긴장된 표정이다.

"그러하오이다. 폐하께서는 조선에 대하여 이만 취하셨습니다."

옆에 모시어 서 있는 태감 황엄의 얼굴이 노랗게 질렸다. 조선에 갈 때마다 금은보화와 국보 사리와 소 천 필을 긁어 들인 일이 세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게 되면 큰일이었다. 목이 달아날 판이다. 황엄은 간줄기가 오그라들었다. 세자의 입을 틀어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자의 앞으로 나간다.

"황제께서 피로하십니다. 오늘은 이만 말씀하시고 물러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자는 황엄의 뱃속을 유리 비치듯 들여다보았다.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었다.

"가만두어라.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 짐은 피로하지 않다. 더 이야기를 하리라. 세자는 어서 말을 계속하라. 짐이 조선에 대하여 무슨 이익을 취했더냐?"

황제가 친히 피로하지 않다 하니 황엄은 무색했다. 머쓱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럼 계속해서 아뢰겠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사리를 좋아하십니까?"

황엄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황제가 대답한다.

"사리를 좋아하지. 나는 부처를 존졍하는 때문에 사리를 항상 보옥같이 애무하고 있다. 그래서 각국의 사리를 수집한 일이 있다."

세자는 고개를 들어 명나라 황제한테 묻는다.

"그래서 저희 나라에도 사신이 오는 편에 사리를 구하셨습니다그려."

"그렇다. 조선에서도 사리를 가져온 일이 있다. 조선 고승들의 사리는 다른 나라 고승들의 사리보다 훨씬 광채가 나더라."

사리 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오니 태감 황엄은 어찌할 줄 모른다. 만약 세자의 입에서 사리를 팔백 개템이나 황엄이 가져왔다 한다면 자기의 죄상은 탄로가 날 것이 분명했다. 안절부절을 못했다. 세자는 미연히 웃음을 띠고 황제한테 고한다.

"조선에서 보낸 사리는 몇 개나 애무하시옵니까?"

"모두 받은 것이 열 개다. 개개마다 광채가 찬란하고 빛나서 과연 국보더라."

옆에 서 있는 내관 황엄의 얼굴빛은 노랗게 질렸다. 사리 팔백 개를 조선에서 가져와서 열 개만 황제한테 바치고 나머지 칠백아흔 개는 함빡 제 낭탁을 했으니 만약 세자의 입에서 팔백 개 소리가 나온다면 꼼짝없이 자기는 탐관오리로 몰릴 뿐 아니라 제 임금을 속여서 배은망덕을 한 행동이 탄로 나게 되는 판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담이 오그라들었다. 세자의 대답이 어찌 나오나 하고 귀를 기울여 듣는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폐하께서는 조선의 쇠고기를 잡수어보신 일이 계시오니까?"

세자는 화제를 소한테로 돌렸다.

"전에 조선에서 진상해온 쇠고기를 말린 포를 먹어보니 맛이 비상하게 좋고 살이 매우 연하더라. 과연 조선 소는 천하일품이었다."

세자의 입에서 소 이야기가 나오니 태감 황엄은 또다시 간담이 오그라졌다. 만약 명나라 황제를 팔아서 소 천 필을 요구했다는 말이 나오기만 한다면 자기는 또다시 탐관오리로 몰리게 되는 때문이다. 다음에 세자의 말이 어떻게 나오나 하고 황엄은 손톱 밑을 썰고 있다.

"이번에 사신 황엄한테 황제폐하께서 조선 소를 질기신단 말씀을 듣고 황엄과 함께 오면서 소 오백 필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황엄이 청구했던 천 필 소리는 쑥 빼놓고 실지로 황엄이 가져온 오 백 필 소리만 했다. 황엄은 비로소 살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짓는다. 소 오백 필에서 백 필쯤 황제한테 바치고 나머지는 제 사복을 채우려던 황엄이 이제 세자의 아뢴 말로 인하여 사복을 채울 수는 없게 되었으나, 황제한테 사복만 채우는 악한 놈이란 지목은 면하게 되었다. 황엄은 비로소 소년 세자의 바다같이 사람을 포용하는 넓은 도량에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황제와 사리 조건을 이야기했을 때도 조선서 가져온 팔백 개의 수량을 밝히지 아니했고, 소에 대해서도 자기가 청구한 천 필에 대한 말은 쑥 빼놓고 세자가 깎아서 보낸 오백 필에 대한 말만 아뢴 것도 실상 자기한테 죄가 돌아가지 않도록 한 것이 분명했다. 황엄은 다시 한번 세자의 인격을 우러러보았다. 황엄이 길게 안심하는 숨을 짓고 있을 때 세자는 다시 황제께 아뢴다.

"소신이 폐하께 양혜왕과 맹자 사이의 말씀한 이익에 대한 일을 아뢰다가 사리와 소에 대하여 여쭈어본 것은 까닭이 있어 아뢴 것이올시다. 폐하께서 과히 피로하지 아니하시면 마저 소회를 아뢰겠습니다."

"짐은 피로치 아니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

황제는 귀엽다는 듯 세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사리는 한 나라의 종교와 문화를 말해주는 역사의 재산이요, 민족정신의 양식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사리를 애무하시는 것도 이런 뜻에서 사랑하시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오니까."

"그렇다. 영리하다. 사리는 그 나라의 문화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 것을 말해주는 척도가 되고, 문화재가 되고, 사람이 살아 내려 온 역사의 찬란한 자취를 고증할 수 있는 정신의 산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폐하, 그러면 소는 어떠한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세자는 슬며시 소에 대해서 말을 돌렸다.

"소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가축동물 중에 가장 중요한 짐승이 아닌가. 잔치와 제향 때 쇠고기를 가져야 잔치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고, 늙은이는 쇠고기를 먹어야만 견딜 수 있고, 농사짓는 농가에서는 소가 아니면 농사를 짓기 힘드니, 소는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있어야 할 동물이라 생각한다."

황제는 소에 대한 자기의 지식을 다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소신은 폐하께 대하여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폐하의 말씀 한마디와 걸음 한 번 옮기시는 일은 마치 태양이 푸른 하늘 위에 높이 솟아 있어 만 사람의 추앙을 받듯 만백성이 존경해서 바라뵙고 있습니다. 폐하의 한마디 말씀은 곧 만방에 비쳐서 만백성에게 영향을 주고, 폐하의 한 손을 들고 한 발을 옮기시는 행동은 곧 천하에 영향을 주어 그 영향이 곧 억조창생에게 폐와 이가 되는 것이올시다."

세자의 말을 듣는 황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는 말을 계속한다.

"폐하께서는 양혜황처럼 이만 취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왕도정치를 하시옵소서."

세자의 말을 듣자 황제는 놀라는 표정을 얼굴에 짓는다.

"짐이 무슨 이만 취하고 왕도정치를 아니했는가?"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세자를 바라본다.

"황제께서 사리를 좋아해서 애무하시니 폐하 옆에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시신들은 천하의 사리를 구해다가 다투어 바치고 있습니다. 바친 그 사리는 폐하한테는 이가 되지만 사리를 잃어버린 그 나라와 그 백성은 폐하께서 말씀하신 찬란한 역사를 잃어버린 것이나 매한가지올시다."

세자의 말은 그럴 듯한 소리다. 황제는 잠깐 고개를 숙여 묵묵히 듣는다. 세자의 영특하고 똑똑한 말이 조금도 조리를 잃지 않고 논리가 정연해서 꼼짝달싹할 수 없어 황제의 가슴을 찔러 반박하는 때문이다. 세자는 말을 계속했다.

"다시 아뢰옵니다. 소는 민생에 있어 더욱 중요합니다. 폐하께서 고기를 즐기시니, 폐하의 좌우에 있는 시신들은 다루어 폐하께 고기를 바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조선 쇠고기가 맛이 있다 하시니 폐하의 좌우에 있는 시신들은 다투어 조선 소의 고기를 뺏어다가 폐하께 바치려 합니다. 이러하니 폐하의 일거일동은 곧 천하에 영향이 미치게 됩니다. 조선에서 바치는 오백 필 소는 저와 저의 아비의 정성으로 바치는 물건이올시다마는, 실상 따져본다면 일천 부락 농사짓는 백성들한테 원망하는 소리를 듣고 황제께 바친 것이옵니다. 들으면 병이요, 아니 들으면 약이라는 상말과 같이 폐하께옵서 조선 쇠고기를 즐기신다는 말씀을 듣고 아니 바칠 도리가 있습니까. 사리 또한 매한가지올시다. 그러하니 폐하께서는 이익만 취하는 일을 하지 마시고 좀 더 만백성을 사랑하는 왕도정치를 실천하시옵소서. 조선 백성이 폐하를 원망하는 일은 곧 명나라 백성들이 폐하를 원망하는 일이나 매일반이올시다. 아까 말씀한 대로 솔토지민이 막비왕신인 때문입니다."

세자의 말은 마치 긴 강물이 흐르듯 유창했다. 명나라 황제는 웃으며 세자한테 말을 보낸다.

"사리는 언제 내가 달라 했던가. 너희 나라에서 열 개를 바친 것이고, 소도 언제 내가 청했던가. 세자가 자진해서 오백 필을 가져왔다고 말하지 아니했더냐. 너희들이 스스로 좋아서 보내놓고 내가 이를 탐내서 백성들을 못살게 한 것같이 말하니 실상 내 마음이 괴롭구나."

황엄의 중간 농락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황제는 괴롭게 탄식했다.

"그러기에 폐하께서는 함부로 말씀을 하지 마시고 함부로 행동을 하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선 쇠고기 맛이 좋다, 조선 사리가 세상에 짝이 없이 찬란하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지 말라는 어리석은 의견이올시다."

황제는 세자의 영민한 말에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너는 장가를 들었느냐?"

", 장가를 들었습니다."

세자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나리."

황제는 서운한 듯 말했다.

"천은이 망극하옵니다."

세자는 간곡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좌우 시신들을 돌아본다.

"이제부터는 조선에서 보내는 모든 공물을 면제하라."

세자는 두 번 절하고 물러났다. 황엄은 황엄대로 세자를 고맙게 생각했다. 세자를 압록강까지 호위하여 작별하는 인사를 했다. 왕세자의 영특하다는 소문은 명나라에 자자했다. 세자가 명나라에 있는 동안 조선 안에서는 별안간 크나큰 돌발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돌발사건은 왕실과 조정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수백만 민중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아니한 사건이었다. 수많은 민중, 곧 백성들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요, 흥미진진한 굿놀이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우습고도 기막히고 가련한 느낌을 함께하는, 그리고 구역질 나는 광경이었다.

 

야욕의 말로

백성들은 그들 왕실에 대하여 아무런 발언권도 없었다. 그들 정부에 대하여 아무런 참여할 권한을 갖지 못했다. 갖지 아니했다는 것보다도 주지 아니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바라보고 난 후에는 반드시 비판이 생기는 것은 지성을 가진 사람들의 당연한 행위다. 그러나 그들 백성들에게는 비판할 능력은 있으나 어떠한 효력이 생기는 언권을 주지 아니했다. 그들은 다만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바라보고만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다음엔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돌발사건은 이같이 해서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또 하나 이씨 왕조의 씻지 못할 오점을 남겨놓은 것이다. 소위 삼강과 오륜을 백성들에게 강조시킨 이조 초기의 문화정책을 보기 좋게 이율배반으로 타락시켜 놓은 왕실과 양반들, 특권계급의 추잡한 야욕의 악순환을 되풀이한 것뿐, 백성들에게는 추호 만한 영향도 미치지 아니하는 비루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끼리만 사는 왕실과 조정으로 볼 때, 이 돌발사건은 왕조 전체, 이조 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했다. 소위 지도자라는 당시의 인간들의 추하고 더럽고 인정 없고 의리 없는 갖가지 추악한 면을 그대로 새빨갛게 폭로시킨 한 막의 연극이기도 했다. 세자가 마악 명나라로 향해 떠나자 민무질, 민무구 형제는 불평이 가슴 안에 가득했다. 그들은 어떠한 사건을 구상하고 있을 때 왕실과 조정 안에는 돌발사건이 전격적으로 일어났다. 세자가 떠날 때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해서, 민씨네 삼형제는 마치 태종이 태조의 제이왕후 강씨의 소생인 세자 방석과 왕자 방번을 제거하듯, 모든 후궁들의 아들을 없애버리자는 음모는 사랑 부엌에서 엿들은 한 사람의 입을 통하여 민씨네의 대적인 이숙번의 귀로 들어갔다. 민씨네 사랑 부엌에서 민무질, 민무구, 민무휼 삼형제의 음모하는 말을 엿들은 사람은 민씨네 하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때 대갓집의 살림을 맡아보는 하인들은 대개 장교 출신들이었다. 이숙번도 태종을 도와 방석, 방번을 쫓아낸 호반이요, 민씨 형제들도 누님의 남편인 태종을 도와서 방석, 방번을 죽인 대장이 되었다. 싸움이 그치고 태종이 왕위에 나가니 공신들의 집안 살림은 대개 그의 부하였던 장교들이 맡아보게 되었다. 민씨네 장교와 이씨네 장교들은 모두 다 상전인 장군들을 섬기면서 옛날 공동행동을 취했던 장군 집으로 넘나들었다. 명절 때면 문안을 가고, 생일 때엔 축하를 갔다. 그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하인이 된 장교끼리 서로 찾아서 석양배를 나누고 술추렴을 하게 되었다. 이숙번은 민씨네 형제들의 행동을 살피기 위하여 가만히 계교를 정했다. 자기 집 장교와 의논한 후에 민씨네 집 하인 중에서 매수될 만한 자를 물색했다. 때마침 부원군 민씨네 집에서 추수한 벼 오백 석을 포흠한 자가 있었다. 민씨는 이자를 엄하게 볼기친 후에 석 달 안에 판상해놓을 것을 서약받아 놓았다. 이 사실은 포흠낸 민씨네 차인의 말을 통해서 이씨네 차인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민씨네 차인은 석 달 기한은 박두했는데 오백 석 포흠낸 벼를 판상할 도리가 없었다. 자나 깨나 걱정과 근심으로 날짜를 흘려보냈다. 이 눈치를 안 이숙번의 차인은 상전 이숙번한테 이 사실은 고했다. 이숙번은 절호한 기회라 생각했다. 은근히 민씨네 차인을 불렀다. 이숙번과 민씨네 차인은 계급은 다르다 하나, 혁명을 일으켰던 동지였다. 이숙번은 절하고 뵙는 민씨네 차인을 웃는 낯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본 지 오랠세그려."

"찾아뵙고 싶은 마음은 항시 간절하지만 높으신 좌지시라 밖으로만 다녀가고 감히 자주 문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이숙번의 기세는 상감인 태종 못지않게 위세가 등등했다.

"그래 요사이 재미가 어떠한가."

"재미라니 무슨 재미가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그저 마지못해 살지요."

차인의 얼굴은 수척하고 쓸쓸했다.

"요사이 자네 댁 대감 형제분들은 다들 무고하시지."

", 안녕들 하십니다. 그동안 명나라 사신이 와서 한동안 바쁘시더니 요사이는 좀 한가하신가 봅니다."

"자네 얼굴이 전보다 좀 상한 듯하이. 무슨 근심이 있나?"

이숙번은 시치미를 떼고 차인의 마음속을 흔들어보았다. 차인은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할듯 할듯 하다가 입을 열지 못했다.

", 무슨 걱정이 있나? 나한테 말을 하게나. 옛날 나하고 자네하고는 나라를 위하여 혁명을 일으켰던 동지가 아닌가. 근심 걱정이 있거든 숨김없이 이야기하게. 옛일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겠네. 무슨 근심이 있나?"

민씨네 하인은 도와준다는 이숙번 대감의 말에 귀가 번쩍했다. 포흠낸 이야기를 해도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이 들었다.

"황송한 말씀이올시다마는 소인은 주인 대감께 죄를 얻었습니다."

차인은 말을 마치자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숙번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얼굴에 짓는다.

"자네같이 얌전한 친구가 주인한테 죄를 지었다니 말이 되나. 무슨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이숙번은 낮은 목소리로 상냥하게 묻는다.

"대감님께 여쭙기 황송하옵니다마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저 없는 죄올시다."

"시원하게 말해보게. 혹시 무슨 포흠을 냈나?"

이숙번의 음성은 더 한층 친절했다.

"처자식들하고 먹고 사느라고 추수 벼 오백 석을 포흠냈습니다. 여러 해 쌓이고 쌓인 빚이 모여서 그 빚을 갚느라고 손을 댔습니다. 물론 갚아줄 작정을 한 것입지요. 그랬더니 맘보 고약한 마름놈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와서 저는 대감께 미움을 받고 지독한 매를 맞은 후에 석 달 기한을 정하고 갚아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없는 놈이 어디 일이 그렇게 순하게 됩니까. 기한은 박두했는데 갚을 길이 묘연합니다. 그러니 저절로 얼굴이 상했습니다."

이숙번은 탄식조로 말한다.

"허허, 그런 줄은 몰랐네그려. 없으면 하는 수 없느니. 그러나 자네 댁 대감도 너무 심하이그려. 함께 혁명 때 고생하던 옛일을 생각하더라도 벼 오백 석쯤 포흠냈기로서니 곤장이 웬말인가. 또 기한을 정해서 갚으라 하고, 너무나 박정하이그려."

"죄송합니다. 소인이 잘못한 줄은 소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곤장을 오십 도템이나 맞았습니다. 아직도 볼기살은 흩어졌고, 금창이 터져서 아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픈 것은 고사하고 기한은 다 되어서 내일모레가 판상할 날이온데, 가망이 없으니 어찌합니까."

차인은 이숙번이 친절히 대하는 눈치를 보자 바싹 다가들었다.

"그게 말이 되나, 자네 댁 대감이 환장을 했네그려. 설혹 자네가 벼 오백 석을 포흠냈다 한들 옛정을 보아서라도 어찌 매질을 함부로 한단 말인가. 또 옛정은 그만둔다 하더라도 지금 자네는 민씨네 그 큰집 살림을 모두 도맡아 한다며. 그러나 그래, 일 년에 자네가 벌어주는 것이 오백 석만 되겠나. 너무나 박정하이. 그 사람 참 환장을 했네그려."

이숙번은 일부러 목청을 높여 펄펄 뛴다. 차인은 신명이 났다. 주인의 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감께서 말씀하시니 말이지, 요사이 저희 댁 대감 형제분들은 아마 참 환장을 하셨나봅니다. 밤낮 형제분들이 쑥덕공론들만 하고 태평관으로 대궐로 드나드시는데, 정신 차릴 수 없습니다. 한동안 명나라 천자의 딸이 자기들의 조카며느리가 된다고 호기를 떠시더니, 요사이는 호기가 쑥 들어가고 역정만 잔뜩 내십니다. 이번 세자께서 중국에 행차하시는 데 배행을 한다고 한동안 부산하시더니 별안간 세자저하께서 가례를 치르시고 주인 대감들 형제분은 한 분도 하신으로 못가게 되신 후부터는 더 한층 살람들만 들볶아대시고 형제분들이 수군수군 쑥덕공론만 하십니다."

"도대체, 무슨 공론이란 말인가?"

이숙번은 바싹 무릎을 내밀었다.

"상감마마께 대한 불평입지요. 상감마마께서 너무나 색을 좋아하신다는 둥, 고려 때 궁녀도 집어삼키시고, 중전시녀들도 가만두는 일이 없다는 둥, 심지어는 기생까지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후궁을 봉한 후에 왕자들을 산더미같이 낳아놓으니 까딱하면 방번, 방석의 꼴이 된다는 둥, 상감께서는 배은망덕을 하시고 조강지처인 중전마마를 폐위시키려는 눈치가 보인다는 둥, 허다한 불평이 많으십니다."

이숙번은 바싹 차인이 옮기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감께서 정말 중전마마를 폐위시킨다는 말씀이 계셨던가?"

이숙번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눈치를 보기 위하여 목청을 낮추어 가만히 물었다.

"그것을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들은 대로 말씀을 옮길 뿐이올시다. 상감께서 중전마마의 질투가 너무 심하시다 하여 폐위를 하겠노라 황희 대감한테 말씀하셨더니 황희 대감은 '그렇게 못합니다' 하고 아뢰었다고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주 헛말은 아닌 듯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습니까."

이숙번은 마음속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 자네 빚을 다 갚아줌세. 그리고 자네 집 생계는 얼마가 되든지 다달이 내가 대어주기로 함세. 앞으로 내 집에 와서 일을 좀 보아주려나."

차인의 입은 딱 벌여졌다.

"저 같은 사람을 대감께서 거두어주신다면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더구나 오백 석 빚을 갚아주신다 하니 한평생 이 은택을 잊을 도리가 없겠습니다."

차인은 벌떡 일어나 절을 했다. 이숙번은 호기롭게 설렁줄을 흔들었다. 요란한 방울 소리를 듣고 숙번의 집 차인이 바깥사랑에서 뛰어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이 사람에게 벼 오백 석을 찾아 쓰도록 출급표를 내주어라. 출급표의 주인은 우리 집으로 하지 말고 시전 주인의 이름으로 해라. 그리고 이 사람은 앞으로 내가 거두어 쓸 작정이다. 이 사람 집안의 시량범절을 다달이 대어주어라."

이숙번은 활소하게 분부를 내렸다. 민무질의 차인은 감격했다. 눈물을 머금었다. 또 한 번 이숙번을 향하여 절을 했다.

"아직 민씨댁으로 가서 있도록 하게. 그리고 민장군 형제들의 동정을 나한테 자주 알려주게."

"염려 마십쇼. 크고 작은 일은 모두 다 알아서 대감께 아뢰겠습니다."

차인은 이같이 해서 민씨네를 저버리고 이숙번의 사람이 되었다. 차인이 훔쳐낸 벼 오백 석은 완전히 민씨네한테 갚아줬다. 민무질 형제는 무심하게 전과 같이 차인을 대했다. 바로 세자가 떠날 무렵 형제들은 세자를 배종하지 못해서 대궐에서 돌아와 셋째 아우 무휼이와 함께 태종이 방석, 방번을 제거시키던 그 수단을 쓰자고 비밀하게 말하던 때다. 이때 차인은 뒤창 밖에서 모든 소리를 귀담아듣다가, 형제들이 문을 열고 나오자, 몸을 피하여 부엌으로 들어가 숨었던 것이다. 민씨네 형제들은 캄캄히 모르고 있었다. 이날 밤에 차인은 이숙번을 찾았다.

"급히 뵙고 아뢸 일이 있습니다."

이숙번은 곧 민씨네 차인을 불러들였다.

"이 밤중에 웬일이냐?"

이숙번은 마음속으로 일이 제대로 진행되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겉으로는 얼굴에 장중한 표정을 지어 묻는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이냐?"

"민씨네 형제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대감댁과 대궐을 포위한 후 방번, 방석 때와 똑같은 혁명을 일으키려 합니다."

"혁명을?"

이숙번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번엔 진짜로 놀랐다.

"내 집을 무슨 까닭에 포위한단 말이냐."

이숙번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번에 명나라 천자의 딸과 세자와의 사이에 혼인을 못 하도록 만들어논 것도 대감의 탓이고, 부랴부랴 김한로의 딸과 가례를 치르도록 상감께 아뢴 것도 대감이시고, 정국공신의 큰 공을 자세해서 같은 공신인 민씨네들의 집권을 방해하는 것도 대감이시니, 아주 이 김에 대감까지 없이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차인의 말을 듣자 이숙번은 발연히 성이 났다.

"민씨네들이 나를 죽이려 한단 말이냐? 때는 어느 때를 택했단 말이냐?"

차인이 고한다.

"날짜는 정하지 아니한 모양이올시다. 조만간 다시 의논해서 결정을 하려나 봅니다."

이숙번은 안팎으로 통하는 설렁줄을 급히 흔들었다. 안에서는 시녀가 달음질쳐서 나오고 밖에서는 차인과 상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복을 갖추어놓아라."

이숙번은 시녀한테 영을 내리고,

"자비를 놓아라. 입궐하리라."

차인한테 영을 내렸다.

"자네는 아직 내 집에 있도록 하게."

다시 민씨네 차인한테 분부를 내렸다. 밤은 이미 늦어 자정 때다. 정국공신 이숙번은 수문장을 불렀다. 급히 전하께 아뢸 일이 있다고 말한 후에 대신이 일을 보는 빈청으로 들어갔다. 빈청 옆에 있는 정원에서는 입직 승지가 잠을 자다가 뛰어나왔다. 대전 안 공사청에 있는 내관은 급하다는 기별을 듣고 턱을 까불며 빈청으로 쫓아 나왔다. 빈청과 정원에는 별안간 등촉이 휘황했다. 정국공신 이숙번은 입직 승지와 내관한테 대신과 대장의 자격으로 명령을 내렸다.

"아닌 밤중에 황송하기 짝이 없소마는 위에 급히 아뢰어주오. 큰 변이 났소이다."

"무슨 변이오니까?"

입직 승지가 벌벌 떨며 물었다.

"상감께 비밀히 아뢸 일을 승지가 먼저 알겠다 하오? 빨리 상감께 이숙번이 입대를 청한다고 아뢰시오."

"상감께서는 지금 침수에 깊이 드셨습니다."

내관이 고했다. 이숙번은 주먹을 번쩍 들어 책상을 쳤다.

"무식한 소리 말라. 아닌 밤중에 대신이 급한 일이 있어 아뢰러 들어왔는데 침수에 듭시었다고 아뢰기를 거부하는 내시가 있단 말이냐. 빨리 침수에서 납시라고 아뢰어라."

이숙번은 벽력같이 호령을 내렸다. 승지와 내관은 벌벌 떨면서 대전으로 들어갔다. 태종은 가희아 강계 기생하고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내관은 숙직 상궁한테 전하를 깨워 달라고 청했다. 당직 상궁은 제조상궁한테 사유를 고하고 어전 지척에서 문을 두드렸다.

"옹주마마, 옹주마마."

고려와 이조 초기엔 후궁도 옹주라고 불렀다. 이조 중엽 이후부터 왕후의 소생은 공주라 하고 후궁의 딸은 옹주라 불렀던 것이다. 시녀들의 부르는 소리에 가희아가 먼저 잠을 깼다.

"누구냐?"

가희아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상궁들이올시다. 급한 변이 있다고 이숙번 장군이 상감마마께 뵙기를 청합니다."

급한 변이란 말에 가희아도 깜짝 놀랐다. 소스라쳐 일어나 초에 불을 켰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가희아는 가만히 옥체를 흔들었다. 태종은 고단한 잠 속에서 눈을 떴다.

"왜 그러느냐?"

"상궁들이 전하옵니다. 급한 변이 있다고 이숙번이 빈청에 들어와 뵙기를 청한다 합니다."

태종은 깜짝 놀랐다. 커다란 봉의 눈이 촛불 아래 동그래졌다. 급히 의대를 갖추었다. 대청으로 나갔다. 궁비와 내관들이 뜰 아래 시립했다.

"빈청에는 이숙번이 혼자 들어왔느냐?"

", 그러합니다."

내관과 승지가 아뢰었다.

"외전에 불을 켜라. 그리고 어영군사로 궁성을 호위하고 내금장과 별운검이 시립한 속에 이숙번을 인견하리라."

전쟁과 혁명에 단련된 태종이었다. 아무리 이숙번이라 하나 깊은 밤중에 함부로 만나지 아니했다. 태종은 이만큼 앞뒤를 쟀다. 내전과 외전에는 상감의 명령으로 불이 휘황찬란하게 밝았다. 어영군사가 별안간 어명을 받들어 궁성을 호위하고 대궐 안에 있던 내금장과 별운검은 상감을 호위했다. 태종은 외전 전각으로 나가 비로소 승지와 주서들이 모신 곳에 이숙번을 불러들였다.

"무슨 급한 일이 있소?"

"큰 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변이 일어나게 되었단 말인가?"

"민무질, 민무구 형제들이 역적모의를 했습니다. 이것이 탄로되었습니다. 급히 어명으로 정국공신들을 부르시어 대책을 의논하옵시오."

태종은 미리 이숙번과 뜻이 통해서 민무질, 민무구 형제를 제거시킬 것을 이미 결심했던 것이다.

"일이 그쯤 되었다면 민무질, 민무구는 왕후지친이요 세자의 외숙들이라 하나, 죄를 저질렀다면 어찌할 수 없소. 승지는 곧 정국공신들을 명소하여 대사를 의논케 하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어 공신들의 집으로 선전관을 보냈다. 선전관들은 각처로 말을 달렸다. 정국공신 영의정 이화, 좌명공신 이서, 참찬 김희선, 도총제 김남수 등이 급히 자비를 몰고 대궐로 들어왔다. 다만 좌정승 하윤의 얼굴만이 보이지 아니했다. 하윤은 역시 정국공신의 한 사람으로 방석, 방번의 혁명 때 태종을 도와서 방석, 방번을 무찌르게 한 유일한 문관 모사였다. 그리고 민씨네 형제들과 가까울 뿐 아니라 이숙번하고는 권력을 경쟁하는 사람 중의 가장 첫손을 꼽을 인물이었다. 하윤은 하윤대로 짚이는 바가 있어 병을 청탁하고 일부러 어전회의에 참석치 않았던 것이다. 영의정 이화 이하 모든 정국공신들은 한 사람 두 사람씩 어전으로 모여들었다. 모든 공신들이 다 모여들었을 때 전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과인이 덕이 없어 과인의 공신이요, 과인의 처남인 민무질, 민무구 두 형제가 궁성을 포위하고 왕자를 모조리 헤쳐서 세자를 끼고 자기의 터전을 마련하려 한다 하니, 실로 대역부도의 일이거니와 과인으로서는 한심하고 슬프기 짝없다. 이 일을 장차 어찌 처리하면 좋을꼬."

모든 공신에게 묻는다. 태조의 하교를 듣자 영의정 이화 이하 모든 공신들의 얼굴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벌써부터 마음속으로 이러한 괴변이 일어날 것을 짐작했다. 영의정 이화가 아뢴다.

"신의 몸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미리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죄 크옵니다. 먼저 소신을 주하시어 영의정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책망해주시옵소서."

이화가 간곡하게 아뢴다.

"민가네들이 역적질 음모하는 것을 영의정이 어찌 알겠소. 영상은 지나친 말을 하지 말고 어서 급히 민가네들의 쳐들어오는 것을 막게 하오."

태종은 흥분했다. 민무질 형제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빨리 막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영의정 이화는 승지에게 묻는다.

"궁성의 호위는 어찌 되었소?"

"철통같이 호위되었습니다."

이화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태종께 아뢴다.

"아직 저편에서는 행동을 취하지 아니한 모양이오니 이편에서 먼저 군사를 풀어서 민씨네 형제를 잡아들이는 것이 가한 줄 아뢰오."

이화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숙번이 아뢴다.

"영의정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영군과 공신들의 사병들이 합세해서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곧 잡아들이는 것이 좋은 줄로 아뢰오."

"영의정과 이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시각을 지체하면 언제 어느 때 변이 생길지 모릅니다. 즉각 착래토록 하시옵소서."

태종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잠깐 망설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신하들한테 묻는다.

"결박 지어 잡아 오는 것은 좀 과하지 아니한가. 그대로 잡아오라 하면 어떠할꼬."

"아니됩니다. 역적질하는 자를 그대로 잡아 오다니 말이 됩니까."

이숙번이 큰 소리로 우겨댄다. 여러 공신들도 일제히 반대한다. 이숙번이 자주 눈짓을 해서 반대하라는 의사를 전했던 것이다.

"어영대장을 부르라."

전하는 마침내 승지에게 분부를 내렸다. 어영대장이 어전에 군례를 드렸다.

"어영군졸 삼만여 명을 거느리고 민무질, 민무구의 집을 포위한 후에 형제를 모조리 결박 지어 국처에 대령하라."

어영대장이 청명하고 급히 나간다. 이숙번이 어전에 아뢴다.

"민무질 형제를 잡아오기 전에 먼저 형벌줄 것을 정해야 하겠습니다. 이미 역적질을 하여 궁성을 포위하고 왕자들을 학살한다는 음모를 꾸민 것은 확실합니다. 이제 역적으로 판단되었으니 곧 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민씨네 형제를 참형에 처할 것을 주장합니다. 대궐로 들어오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행형장에서 목을 베게 하옵소서."

모든 신하들이 이숙번의 말에 일제히 찬성한다.

"옳습니다. 이숙번의 말이 옳습니다. 역적에게 천국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 돌연 병풍 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민왕후의 기막히도록 일어나는 처절한 울음소리다.

"내가 보기 싫다면 나를 죽일 것이지, 왜 내 동생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오."

이숙번 이하 모든 공신들의 얼굴들이 파랗게 질렸다. 태종의 용안도 누르락푸르락 변해진다. 병풍 뒤에서는 또다시 곡성이 낭자하게 일어나면서 구슬픈 푸념이 들려왔다.

"이숙번 장군은 우리 민씨네하고 무슨 원수가 졌기에 우리 형제들을 두 사람씩이나 죽이려 하오. 평생에 존경했던 이장군이 웬 짓이오."

민비의 목소리는 또 한 번 처렴하게 떨어졌다. 병풍 뒤에서 이숙번 성명 삼자를 불러 구슬프게 통곡하는 민왕후의 푸념을 듣는 이숙번의 얼굴은 노랗다 못해 푸른 빛으로 질렸다. 그러나 이숙번의 얼굴은 금방 엄숙해졌다. 퉁방울 같은 큰 눈에 핏줄이 일어섰다.

"전하, 해괴하옵니다. 대신과 대장들이 막중한 국사를 결정짓는 이 마당에 병풍 뒤에 요사스런 여자의 곡성이 웬일이오니까. 먼저 궁중의 기강을 바로 잡은 연후에 국사를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이숙번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지금 병풍 뒤에서 통곡을 하고 있는 여인이 민왕후인 것을 알면서도 빨리 쫓아내라고 우겨댄다. 영의정 이화 이하 모든 신하들은 침묵을 지켰다. 전하는 어전 내시를 불렀다.

"협실에 웬 곡성이 이같이 요란하냐. 대신들과 중대한 국사를 의논하는 마당에 요망스럽기 짝이 없구나. 장본인이 누군 것을 알아들이고 빨리 제거시켜라."

내시는 황망히 내전으로 향하여 달음질친다. 안에서 또 한 번 북새질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시를 향하여 꾸지람을 내리는 민왕후의 음성과 궁녀들의 애를 태우며 달래는 목소리가 한동안 파도치듯 일어나다가 얼마 후에 진정이 된 듯 조용했다. 이때 이숙번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또 한 번 아뢴다.

"빈계사신을 하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올시다. 더구나 국가를 다스리는 왕실에 암탉이 울고서 그 나라가 성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깊이 통촉하시옵소서. 오늘날 민씨네 형제가 망유기극한 역적질하는 행동을 하려는 것도 암탉이 너무 잘나서 암탉의 세력으로 이같은 불궤의 뜻을 품은 것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이번 기회에 모든 악의 뿌리를 단연코 뽑아버리시옵소서."

이숙번은 산전수전을 겪어온 맹장이다. 목숨을 걸고 덤벼들었다. 영의정 이화 이하 모든 공신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여 말이 없다. 이숙번은 또 아뢴다.

"민무질, 민무구 형제는 대궐에 들어오기 전에 형장에서 곧 처형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나라는 외척의 발호로 인하여 망하고야 맙니다."

이숙번은 호기가 대단했다. 태종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지난번, 전하께서 방석을 숙청하실 때, 혁명을 주관하신 분이 바로 전하였기 망정, 오늘날 이씨 왕조가 엄연히 서 있게 됐습니다. 만약 그때 방석을 제거한 장본인이 이씨가 아니고 타성이었던들 이씨의 종묘사직은 어찌 되었겠습니까?

전하, 한 번 생각해보시옵소서."

태종의 귀에는 이숙번이 아뢰는 말보다 아까 병풍 뒤에서 일어났던 민왕후의 곡성이 아직도 사라지지 아니하고 은은히 들려오는 듯했다.

"민씨 형제가 아무리 역적모의를 했다 해도 역시 개국정사좌명공신이니 당장 참형에 처하기는 곤란하지 아니한가."

태종은 이숙번 이하 만좌한 공신들을 둘러본다. 이숙번이 또 아뢴다.

"전하께 방자한게 아룁니다. 개국정사좌명공신은 민무구 형제뿐만이 아닙니다. 소신도 똑같이 전하의 혁명을 도와드린 개국정사좌명공신이올시다. 이숙번이 만약 민씨 형제와 같은 불궤의 뜻을 품었다면 전하는 소신을 용서해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왕후의 친정이라 하여 이와 같이 부드러운 조처를 취하신다면 앞으로는 신하들을 어거하시지 못하오리다."

태종은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영의정 이화를 바라본다. 이화는 태조 이성계의 서동생으로 태종에게는 서숙이 된다.

"오늘 좌의정이 자리에 없으니 좌의정한테 당장 참형을 하는 것이 좋을지 한번 물어본 후에 결정짓는 것이 좋겠소. 영의정의 의향은 어떠하시오?"

영의정 이화는 부드럽게 아뢴다. 이숙번은 역했다. 또다시 큰 소리로 아린다.

"하윤은 민무구와 한통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명나라 공주와의 혼담도 민무구의 편을 들어 좋다고 찬성한 사람입니다. 참형에 처하는 것을 반대할 것은 정한 이치올시다."

태종은 다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이숙번을 타이른다.

"역적을 처벌하는 것은 역시 국가의 대사라 하겠소. 나라의 최고 재상으로 삼정승이 있는데 좌의정의 중직에 있는 하정승의 의견을 들어보지 아니하고 개국좌명공신을 처참하는 일은 불가하다 생각하오. 좌의정 하윤한테 이 사실을 밝히고 처형방법을 묻는 것이 좋겠소."

이숙번은 불만했으나 모든 공신들은 찬성했다.

"좋은 분부오이다."

공신들은 일제히 대답한다. 태종은 이숙번의 불만한 마음을 약간 눅이고 싶었다.

"이숙번 장군이 좌의정 하윤을 찾아보고 의향을 묻고 오는 것이 좋겠소."

태종은 일부러 이숙번에게 명을 내렸다. 이숙번은 다른 사람이 가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하윤을 만나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으로는 불쾌했으나 얼른 결판을 내고 싶었다.

"전하의 성지가 그러하시다면 소신이 곧 하정승을 찾겠습니다."

이숙번은 어전에서 물러나 궐문밖에서 자비를 타고 좌의정 하윤의 집으로 향했다. 이때 좌의정 하윤은 반드시 이 일이 이숙번으로 인해서 일어날 줄 짐작했다. 모두 다 민씨네와 이숙번 사이에 일어나는 권력 싸움이었다. 도대체 양편 중에 어느 편에도 가담하기 싫었다. 그렇지 아니해도 세상에서는 자기를 민무구의 편이라고 지목했다. 병을 청탁하고 나가지 아니했던 것이다. 도대체 모두 다 귀찮다고 생각했다. 오늘 새벽 대궐에서는 급한 변이 생겼다고 소명이 내렸다. 그러나 하윤은 자리에 누워 움직이지 아니했던 것이다. 좌의정 하윤의 집은 대궐에서 멀지 아니했다. 이숙번의 자비가 하윤의 집 열두 줄 행랑 앞에 당도하여 하님한테 거래를 했다.

"이숙번 대감의 행차요."

큰소리로 외쳤다. 하윤의 하님들은 곧 큰사랑에 사유를 전했다.

"이숙번 대감께서 오셨다 합니다."

이때 날은 아직 새지 아니했다. 어둔 빛이 장안 안을 휩싸고 있었다. 하윤은 아까 소명을 받은 뒤였다. 반드시 대궐 안에서 누가 왕명을 받들어 나올 줄 짐작했다. 그러나 이숙번이 나올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민씨네 형제의 목숨만은 구해주어야겠는데 이숙번은 너무나 강적이었다. 그러나 말로써 이숙번을 굽혀보리라 생각했다. 하윤은 늙었으나 재사였다. 글을 잘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일찍이 정도전과 함께 한양의 도읍 터를 정했고 경복궁 터를 마련했던 사람이다. 방석, 방번을 쫓아낼 때도 하윤이 외방의 원으로 나가 있는 이숙번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올 것을 약속한 때문에 태종도 비로소 안심하고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오늘날 이숙번과 권력다툼으로 인해서 전처럼 화합하지는 못하나 호반인 이숙번을 굽히게 할 슬기로운 꾀를 넉넉히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온 것보다 오히려 이숙번이 찾아온 것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듭시라 해라."

하윤은 하님한테 분부한 후에 일부러 등잔불을 낮추고 이불을 쓰고 누워 있었다. 조금 있노라니 이숙번이 하윤의 청지기한테 인도되어 방으로 들어왔다. 하윤은 신음하는 소리를 지었다.

"대감, 이숙번 장군께서 왕림하셨습니다."

"장군이 웬일이시냐."

하윤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다가 쓰러지면서 희미한 등불 아래 가늘게 눈을 뜨고 이숙번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병중이라 하나, 점잖은 사람이 왔으니 억지로라도 일어나 맞아야 하는 것이 예법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하윤은 일부러 일어나다가 쓰러지면서 누워서 인사를 했다.

"와병에 인사절이라더니 나를 두고 말한 소린가 봅니다. 대감이 오셨는데, 병이 들어 맞이하지 못하니 죄송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나는 수일 전부터 병이 고경에 들어서 기동하기 어렵소이다. 허물치 마시고 용서해주시오."

이숙번은 처음에 하윤이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크게 노했다.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곧 대궐로 돌아가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나온 특사를 모독했다고 아뢴 후에 귀양을 보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병상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하윤을 보자 이숙번의 마음은 동정하는 심리로 변했다. 하윤은 병을 칭탁하고 이숙번의 예기를 꺾었다. 이숙번은 병문안을 아니할 수 없었다.

"어디가 그다지 편치 아니하시오. 생각던 바보다 대단하오이다."

"나는 차차 늙어가니 몸이 자꾸 괴롭습니다. 나이에는 영웅호걸도 소용이 없나 봅니다. 그런데 어찌 이 새벽에 누지에 왕림하셨습니까?"

하윤은 여전히 기운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명을 받들어 나왔소이다."

"어명이라니, 어떠한 어명이오니까?"

하정승은 깜짝 놀라는 체했다.

"민무질과 민무구 형제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역적모의를 했소이다. 사병을 거느리고 궁성을 포위한 후에 왕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끔찍한 일을 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탄로되어 지금 전하께서는 민씨네 형제를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숙번의 말을 듣는 하윤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죽일놈들 보아."

큰소리로 외쳤다. 이숙번은 의외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지금 어전회의에서는 처형문제가 논란되는 중인데 전하께서는 친국을 하신 후에 정상을 짐작하시어 처형하시는 것이 좋다고 분부를 내리시고, 나는 증거가 확실한 역적놈이니 국문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소이다. 전하께서도 참형에 처하실 생각이 계셨는데, 이때 병풍 뒤에서 돌연 곡성이 나고 전하와 나를 푸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는 사람은 민무구의 누님 되시는 민왕후마마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소리를 들으신 후에 마음이 움직여서 친국을 하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나와 전하의 의사가 대립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좌의정한테 의견을 묻는 데 이 사람을 친히 가라 하시어 특명을 받고 나왔소이다."

이숙번은 하윤의 대답이 어찌 나오나 하고 하윤의 눈치를 보았다. 뜻밖이었다. 하윤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시각을 지체치 말고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역적을 처벌하는데 사가 어디 있습니까. 부자 형제지간에도 역적에 대해서는 사정이 없는 법입니다. 민씨네가 아무리 과거의 동지라 하나 지금은 역적입니다. 참형에 처하는 것을 적극 주장합니다."

하윤은 병중이건만 주먹을 쥐어 부르르 떨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이숙번은 또 한 번 의외라 생각했다. 가슴 속에는 만 가지 생각이 어우러진다.

"그럼 대내로 들어가 곧 좌의정의 주장을 아뢰겠습니다."

"병이 들어, 어전에 나가 직접 아뢰지 못하니 죄송하기 짝이 없다고 아뢰시오."

이숙번은 가만히 생각했다. 하윤의 주장을 바른 대로 아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숙번의 적은 민씨 다음에는 하윤이었다. 앞으로 역적을 두둔했다 해야만 하윤을 몰기가 좋았다. 하윤의 대답을 뒤집어서 아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숙번은 하윤을 작별한 후에 바로 대궐로 들어갔다. 전하는 이숙번을 보자 급히 묻는다.

"좌의정의 의견은 어떠합디까?"

이숙번은 하윤의 말을 뒤집어 아뢰었다.

"될 수 있으면 경하게 죄를 주시는 것이 옳다고 대답했습니다."

태종은 하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경하게 다스리라고?"

한마디를 하고 다시 생각해본다. 민씨네 형제들은 세자 이하 자기 누님의 소생을 제외해놓고 후궁의 소생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다. 천참만육할 놈들이다. 그러나 한편 태종의 가슴은 민무구의 형제를 당장 형장으로 내몰아 죽이는 것은 너무나 몰인정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까 병풍뒤에서 통곡하던 왕후의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왕비는 요사이 와서 투기가 너무나 심했다. 사사건건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왕비였다. 그러나 일찍이 그는 내조의 공이 컸던 조강지처다. 혁명을 일으킬 때도 내조의 공이 많았다. 모든 혁명장군과 병졸들을 먹이고 입혔다. 주저하고 얼른 움직이지 않는 자기한테 갑옷과 투구를 씌워주고 큰 칼을 뽑아주기까지 했다. 지금 후궁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칼을 뽑은 민씨 형제는 모두 다 혁명을 일으키는데 참획했던 일등공신들이다. 더구나 왕후의 친동생들이요, 세자의 외숙들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또 한가기 걸리는 일이 있다. 처남인 민무구 형제들에 대하여 태종 자신은 그들에게 죄악을 가르쳐주었다. 민무구 형제들과 함께 방석, 방번을 죽인 사실은 곧 오늘날 강계 기생으로 후궁이 된 가희아의 아들 ''를 죽이려는 그 사실과 꼭 같았다.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태종이 잠깐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이숙번은 또다시 아뢴다.

"이제는 좌의정에게까지 하문하셨습니다. 다시 더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민무구 형제를 곧 행형장에서 참하여 앞으로 천, 백 사람에게 경계를 내리도록 하시옵소서."

태종의 귓전에는 또다시 중전 민씨의 통곡성이 들렸다. 영의정 이화를 위시하여 명수를 받아 들어온 여러 공신들의 이숙번의 뜻을 받아 또다시 아뢴다.

"민무구 형제를 즉각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이숙번 장군의 아뢰는 말씀이 옳습니다. 곧 형장에 붙이시어 처단해버리시기 바랍니다."

모두 다 이숙번의 일파였다. 단번에 죽이라고 주장했다. 태종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모든 신하에게 대답했다.

"민무구 형제들의 죄상은 천참만육할 만하다. 그러나 죄인의 공초는 아니 받고 죄를 준다는 것은 죄를 다스리는 법이 아니다. 일단 문초한 후에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하오."

태종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뜰 아래서 선전관이 큰 소리로 아뢴다.

"죄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잡아 대령하였소."

이숙번의 우겨대는 행형장에서 즉시 처형하자는 주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전하는 내관에게 영을 내린다.

"내가 친국을 할 것이로되 사사로이 따지면 처남 매부간이 된다. 뿐만 아니라 왕후의 낯을 보더라도 친국하기 극난하다. 공평된 판결을 내리기 극히 어렵다. 영의정 이화, 좌명공신 이서, 참찬 김희선, 도총제 김남수는 추관이 되어 죄인을 국문하라."

태종은 추관에 이숙번을 임명하지 아니하고 제삼자인 영의정 이하 세 사람에게 추관을 임명했다. 이숙번은 고변자인 때문, 그가 추관이 되면 불공평하다는 말이 생길까보아 그를 추관으로 만들지 아니했던 것이다. 추관을 임명하는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이숙번은 얼굴빛이 좋지 아니했다. 전하는 이숙번의 눈치를 챘다. 다시 부드러운 말로 분부를 내린다.

"정국일등공신 이숙번으로 추관을 임명할 의향이 있었으나 고변자인 까닭에 법에 의해서 일부러 피혐을 시킨 것이다. 추관들은 나의 뜻을 짐작해서 극히 공평정대하게 옥사를 다스리라."

태종은 한편으로 이숙번의 마음을 달래고 한편으로 이숙번의 지나친 예기도 눌러보자는 생각이다. 영의정 이화 이하 새로 임명된 추관들은 뜰 아래 미리 준비해논 국청에 나가서 질서정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무구 형제들은 자다가 잡혔다. 오랏줄을 메고 결박되어 나왔다. 호화찬란한 금관조복이 아니면 서대 옥대 일품 재상의 사모품대로 대궐 안을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민씨네 형제들이었다. 당당한 왕비 민씨의 동생들이요, 세자마마의 외숙들이다. 여기다가 나라의 제일등의 지위에 있는 정국공신이었다. 대궐 안 수문장쯤이야 눈으로 거들떠보지도 아니했던 것이다. 어전 내시와 상궁, 상침한테도 얘야 쟤야 하대를 하고 지밀로 드나들던 민씨네 형제는 자다가 상투 바람으로 결박 지어 붙들려 나왔다. 상전벽해란 이런 일을 말한 것이다. 더구나 누님 되시는 왕비 민씨는 아직도 꿋꿋하게 살아 있다. 그의 아버지인 개국 공신 민제도 늙었으나, 의연히 살아 있었다. 민부원군 집과 대궐 안은 별안간 천지가 뒤집혀서 태풍이 일어나고 해일이 되는 듯했다. 캄캄한 하늘 아래 뇌성벽력이 번쩍이면서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듯 했다. 이곳에서 수군대고 저곳에서 수군댔다. 민씨네 집과 궁중은 불안 속에 떨었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오랏줄을 지어 상투 바람으로 잡혀와서 국청에 끌려왔단 말을 듣자 지밀 안에 왕후는 몸부림을 치며 통곡했다. 세자의 어머니 민왕후는 울음 반 말 반 푸념을 했다.

"이런 법이 세상 천하에 어디 또 있단 말이냐. 내 눈이 아직도 시퍼런데, 그래 내 동생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단 말이냐. 왕후의 동생이요, 세자의 외삼촌이요, 개국 공신의 아들이요, 자기 자신들이 다 나라를 바로잡은 정국공신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모의를 했더란 말이냐. 너무나 모해를 잡는구나, 너무나 원통한 일이로구나. 한길에 가는 세 살 먹은 어린애한테 물어보더라도 그 처지, 그 신분에 역적질을 할 까닭이 없다고 할 것이다. 어떤 놈이나 어떤 년이 이같은 모해를 했단 말이냐. 세상천지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이냐."

민왕후는 주먹으로 대청 바닥을 치면서 고함쳐 울부짖었다.

"세자가 명나라로 간 것이 불찰이다. 그래도 세자가 있었더라면 감히 이런 일을 꾸며대지 못했을 것이다."

왕후는 계속해서 몸부림을 치며 푸념했다. 궁녀와 내관들은 모두 다 왕비를 동정했다.

"중전마마의 정상이 과연 딱하구려."

"이런 때 공교롭게 세자마마께서 명나라로 가셨으니 돌봐줄 분이 있나, 참말 딱한 일이로군."

궁녀들이 한탄하여 속삭였다.

"글세, 생각해보구려. 중전마마의 말씀대로 민부원군댁 형제분이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모의를 하셨겠소. 모두 다 세력다툼으로 이 일을 꾸며낸 것이라 생각하오."

"누구의 짓일까?"

"권세 좋은 사람끼리 하는 짓이겠지."

"이숙번 대감이 아닌가?"

"그럴 듯도 한 일이야. 권세를 독차지하고 싶거든."

내관끼리 지껄였다.

"아니야. 후궁 소생의 왕자들은 모조리 죽이겠다고 했다니까, 필시 후궁의 누가 재상을 끼고 하는 짓이 아닐까?"

"그런 일이 있다면 후궁이 직접 상감께 아뢸 일이지 이숙번 장군을 끼고 상감께 고변할 리가 있소. 하여튼 민부원군댁 형제분들이 너무나 철없이 우자를 피웠거든."

"이숙번 장군은 새벽부터 자꾸만 민부원군댁 아드님 형제분을 당장 목을 베자고 주장하다면서?"

"저를 어찌하나. 만약 그리 된다면 팔십 노인인 저 민부원군의 꼴은 어찌하노."

궁녀와 내관들은 또다시 이같이 공론이 분분했다. 정전 밖 국청에서는 국문이 개시되었다. 국청에는 상감을 대신해서 영의정 이화, 좌명공신 이서 등이 추관의 자격으로 위엄을 차려 앉아 있고, 뜰 아래 좌우편에는 어영군사들이 대장의 지휘를 받아 금부은월과 기치창검을 들고 서릿발 같은 살기를 띠고 질서 있게 늘어섰다. 다시 앞에는 형장과 형틀이 놓이고, 의금부, 집장사령들은 산수털 벙거지에 날랠용자를 붙이고 눈방울을 두리두리 굴려 불량하게 부릅뜨고 있었다. 형틀 옆에는 거적을 깔고 거적 위에는 머리를 풀어 산발한 민무구 형제가 엎드려 있었다. 어제까지도 일등공신으로 들고 나며 천하를 호령하던 민비 형제인 그들은 오늘 아침엔 홀연 역적모의한 죄인이 되어 국청 아래 심문을 받고 있다. 추관의 주심이 된 이화는 목청을 가다듬어 국문을 시작했다.

"너희들은 왕후마마의 친동기요, 세자마마의 외숙이요, 민부원군의 아들이요, 벼슬 지위가 정국일등공신 높은 자리에 있어 부귀영화가 극진한 터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모의를 했더냐?"

민무구가 고개를 번쩍 들어 이화를 바라보고 대답했다.

"억울하오. 역적모의를 한 일이 없소."

"없다니 말이 되느냐. 평소 너희들의 언행으로 보아 역적질할 마음이 있는 것이 확실할 뿐 아니라, 뚜렷한 증인이 있는 데 없다 하니 말이 되는냐."

"내가 평소에 어떤 행동을 했기에 역적질할 마음이 있었다 하오. 추관한테 반문하고 싶소."

민무구의 대답을 듣자, 이화는 주먹으로 사선상을 치며 꾸짖는다.

"너는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엉큼하게도 명나라 황제의 따님과 세자와의 혼인을 주장했다. 다행히 명철하신 상감께서 산택에 뽑혀서 정혼한 김한로의 따님으로 가례를 치러 세자빈을 맞이하셨으므로 국가의 일은 반석 위에 놓여 있게 되었거니와, 이런 생각을 가진 것부터 네가 참람하고 불온한 마음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모르는 말씀이오. 명나라 공주와 세자와 혼인을 하자는 것은 이편에서 말을 꺼낸 것이 아니라 명나라 사신 황엄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고, 당시 전하께 이 일을 아뢰어서 전하께서도 쾌하게 허락을 하신 일입니다. 억지 송사도 분수가 있지, 전하께 품하여 허락까지 하신 일을 오늘날 우리 형제한테 책임을 민다는 것은 생떼 같은 수작이오. 말대꾸할 거리도 되지 아니하오."

민무질의 대답은 쾌쾌했다. 추관 이화의 말은 잠시 막혔다. 전하의 승낙을 받아서 일을 추진시켰다는 데 말이 막힌 것이다. 그러나 이화는 곧 말을 계속한다.

"상감께 감언이설로 아뢰어서 승낙을 맡았다지만, 실상인즉 그 속에 음모가 있는 일이다. 너는 어찌해서 정혼까지 한 세자를 정혼한 곳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더냐. 여기 벌써 너희들의 역적질할 마음이 환하게 드러나 있지 아니하냐."

이번엔 민무구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그때 생각에 명나라 공주와 우리 세자께서 혼인을 하신다면 우리 전하는 명나라 황제와 대등한 사돈간이 되니 얼마나 기쁘고 상쾌한 일이겠소. 그래서 좋아서 상감께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어찌 역적질이 되오? 역적이란 당치 않은 말씀요."

추관 이화는 계속해서 묻는다.

"듣거라. 여기 너희들의 야심이 있지 아니하냐. 너희들은 정국공신으로 부원군의 아들이요, 겸해서 세자의 외숙이다. 권력이 일국에 진동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명나라 황실의 큰 세력을 끌어들여 조선과 중국에 더한층 세도를 펴보려는 야망을 가졌구나. 이러고도 상감께 승낙을 받았다고 앙탈을 하면서 죄를 면하려 하느냐."

이화의 문초하는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민무질은 또 한 번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말을 억지로 끌어대어서 아니되는 말이 없소. 내가 세력을 더 잡기 위해서 명나라 공주와 혼담을 했다는 말씀은 그럴 듯한 말씀요. 그러나 세력을 더 잡아보겠다는 야망이 어째 역적질이 됩니까. 생각해보시오. 역적질이란 것은 신하가 임금을 없애버리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아서 불충불의의 짓을 하는 것이 역적이고 역적질이지, 욕심이 많다 해서 역적질이 될 수 있소? 공연히 혼자 세력을 잡기 위해서 생사람 잡지 마시오."

민무구 형제는 조금도 겁을 내지 아니했다. 이때 지밀에서는 왕후 민씨의 명을 받을어 나인과 내시들이 행각에서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추관 이화는 심문하는 각도를 달리해서 묻는다.

"너희들은 명나라 공주를 데려오려고 애를 부둥부둥 썼으나 이 일이 잘되지 아니하니 딴짓을 하려 했다. 네 죄상을 네가 모르겠느냐?"

"모르겠소."

민무구가 뻣뻣하게 대답했다.

"너희들은 왕자를 모조리 죽여버릴 계획을 차린 일이 있지 아니하냐. 무슨 까닭에 이러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계획을 차렸더냐?"

"그런 일이 없소."

이번엔 민무질이 펄쩍 뛰며 잡아뗀다.

"너희들이 세자를 모시고 명나라에 가지 못한 것을 앙심 먹고 대궐서 돌아오는 즉시 왕자들을 모조리 죽일 것을 삼형제가 의논한 일을 위에서 벌써 다 알고 계시다. 모르다니 웬말이냐."

민씨네 형제들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란다. 별당에서 자기네 삼형제만이 의논한 것이다. 바깥 사람이 알 까닭이 없다. 어찌해서 이화가 이 일을 아나 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이 없소."

형제는 펄쩍 뛰었다.

"그런 일이 없어?"

이화는 민무질 형제를 노려보았다.

", 그런 일이 없소."

민씨네들은 딱 잡아떼었다. 자기네들 삼형제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대궐과 이숙번의 집을 포위한 후에 후궁의 소생인 왕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자고 의논한 이 일을 아는 사람들은 삼형제밖에 없다. 이화가 묻는 것은 덮어놓고 등을 쳐보는 수작이라 생각했다. 끝내 그런 일이 없다고 펄쩍 뛴다. 이화는 손으로 사선상을 세 번 쳤다. 장 밖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화는 나타난 사람을 손으로 가리키며 민무구 형제를 향하여 묻는다.

"네가 이 사람을 알겠느냐?"

민씨네 형제가 바라보니 바로 틀림없는 자기 집 차인이었다. 한가지 사건이 머리 위에 번갯불같이 스치며 지나갔다. 포흠을 낸 차인한테 곤장을 때리고 석달 기한을 주어 빚을 받아들였던 기억이 났다. 간담이 뚝 떨어졌다.

'이놈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구나!'

생각이 희끈 스쳤다.

'어떻게 들었을까?'

민무구는 고개를 기울여 생각해본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말도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 버티어보지 않을 수 없다. 민무구는 억지로 얼굴빛을 태연하게 가졌다.

"알고 말고가 어디 있소. 내 집 차인이오."

의젓이 대답했다.

"네가 안다면 복죄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사람은 너희들 형제들이 역적모의한 일을 고변한 사람이다. 증거가 있고 증인이 있는데 그래도 역적모의를 아니했다고 잡아뗄 테냐."

이화의 목청은 드높았다. 호통을 쳤다. 민무구는 막다른 길이라 생각했다.

"내 차인이 무어라고 나를 모함했고 고변을 했는지 알려주시오. 그자는 나의 재산을 포흠내서 나한테 죄를 짓고 매를 맞았던 자요, 없는 사실을 모함해서 말했을 것이 분명하오. 들려주시오."

민무구는 아직도 기운이 죽지 아니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공초를 읽어서 들려줄 테니 귀를 기울여 들어보아라."

추관 이화는 말을 마치자 형방 승지한테 눈짓을 한다.

"형방 승지는 고변한 글을 크게 읽어서 죄인한테 들려주시오."

고변서는 이숙번이 차인의 말을 듣고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형방 승지는 청을 높여 낭랑하게 읽는다.

'형님, 공연히 명나라로 가서 헛물만 켜고 돌아오는 것보다 서울을 떠나지 말고 있다가 이 기회에 아주 우리의 적인 이숙번 일파를 숙청하고 우리들의 안주의 땅을 확보해야 하겠소. 이번 명나라에 가지 않게 된 것이 나는 도리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오.'

'그래도 세자를 모시고 내가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네. 세자의 역량과 기백도 명나라 대신들한테 좀 알려주고.'

'혼인도 이곳에서 다 치렀는데 명나라에 따라간들 형님한테 무슨 소득이 있소. 아까 말한 것 같이 우리와 경쟁을 하려 하는 이숙번을 아주 때려 눕게 합시다. 그리고 또 형님한테 한마디 할 말이 있소.'

형방 승지는 여기까지 읽었다. 민무질 형제는 귀를 기울여 듣는다. 용하게 자기 형제들의 한 말을 그대로 옮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 심술을 부려보고 싶었다. 큰소리로 외친다.

"여보 추관, 지금 내 말을 옮겼다는 그 말이 가사 내 말 그대로라고 합시다. 그 말이 무슨 역적모의가 된단 말씀요."

"가만있거라. 다음에 읽는 것을 듣고 아니라면 말을 하라. 형방 승지는 어서 그다음을 계속하오."

형방 승지는 다시 고변서의 증거로 들어온 글을 읽는다.

'무슨 말인가?'

'지금 누님은 까딱하면 폐위가 되기 쉽소.'

'폐위라니?'

'세자가 없는 틈을 타서 왕후의 폐위를 단행한다는 말이 자자하게 떠돌고 있소.'

'감히 그럴 수가 있나. 조강지처를.'

여기까지 읽자 형방 승지는 잠깐 침을 삼켰다. 형방 승지는 읽기를 계속한다.

'누님의 시기는 좀 과하시기는 하죠. 고려 궁인 때도 야단을 쳤고, 누님의 시녀를 전하가 건드렸을 때도 소란을 피웠고, 기생 가희아를 떼어서 궁중에 들여놨을 때도 기막힌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럴 때마다 세자는 중간에 들어서 누님을 달랬던 것입니다. 전하와 누님의 의초는 이제 말할 수 없이 벌어졌습니다. 왕 전하와 왕후 내외분이 아니라 바로 곧 노상의 타인입니다. 그리고 전하는 지금 강계 기생 출신인 가희아한테 말할 수 없이 고혹되셨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세자까지 폐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누구들의 장난인지 아시오. 정국공신 이숙번이 전하의 마음이 돌아앉은 것을 이용해서 가희아의 아들로 세자를 바꾼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민씨네 우리 형제를 결딴내고 자기 세력을 독차지해서 조정권세를 함빡 전단해보자는 의도일 것입니다.'

'정말인가?'

'형님, 나는 들은 대로 이야기를 옮겼을 뿐이지 진가는 모르겠소이다마는, 지금 세상에서는 이와 같은 소문이 짜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하면 좋겠나?'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지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면?'

'세자가 없는 동안에라도 전에 전하가 방석, 방번을 죽이듯 왕자 몇 명을 죽여야 합니다.'

형방 승지가 여기까지 증거의 대화를 읽었을 때 추관 이화는 손을 들어 형방 승지한테 증거되는 글 읽는 것을 중지하라 명했다. 형방 승지는 읽던 것을 중지했다. 추관 이화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호통을 친다.

"이래도 역적모의를 아니했다고 말할 테냐?"

민무구는 딱 버틴다.

"역적이란 임금을 죽여야 역적이지 궁중을 바로잡기 위해서 서자인 왕자쯤 죽인다는 것이 어찌 역적이 되오. 그렇다면 상감인 전하도 역적 노릇을 했단 말이 되오. 방석, 방번을 죽였으니 나보다 역적 선배가 될 것이요, 더구나 당시의 방석은 세자였소. 세자를 죽였다는 그 사실은 서자인 보통 왕자를 죽여야 한다는 내 사실보다 더 큰 일이요, 왕 전하가 될 세자를 죽였으니 전하는 정말 역적이 되오."

민무구는 악에 받쳤는지 두려울 것이 없었다. 태종은 세자인 방석을 죽였으니 큰 역적이라고 떠들어댔다. 이화는 기가 찼다. 주먹으로 사선상을 내리치며 꾸짖는다.

"너희들은 너무나 무엄하고나. 네 어찌 상감을 역적이라 하느냐."

"나를 역적으로 몬다면 상감도 역적이 된단 말이오. 나는 당시에 상감을 도와서 오늘날 왕 전하가 되도록 한 사람이지만, 나를 역적이라고 한다면 상감 자신은 나보다 더한 역적이란 말씀요. 상감은 서제인 친동생을 죽였소. 역적도 이만저만한 역적이 아니오. 형제를 죽였으니 불륜한 역적이오."

민무구는 될대로 되라는 듯 떠들어댄다.

"네 마저 너희들의 공모한 말을 들어보아라."

추관 이화는 형방 승지에게 또다시 손짓을 했다. 형방 승지는 추관 이화가 영을 내리는 대로 다음 증거되는 글을 읽는다.

'그렇다면 어떤 방책을 취하는 것이 좋겠나?'

형방 승지는 잠시 숨을 짓고 글을 계속해서 읽는다.

'먼저 군사를 일으켜 이숙번의 집을 포위하고 다음엔 궁성을 포위한 후에 전하의 서자들을 모조리 처치해버려야 합니다. 이리한다면 이숙번에 대해서 설분하는 일도 되고, 나라의 국권은 길고 길게 우리들의 손으로 자자손손 잡을 수 있습니다.'

'시기는 어느 때쯤 거사하는 것이 좋겠나?'

'세자가 떠난 후에 곧 단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군사는?'

'우리들의 사병 이외에 사위, 조카사위, 사돈들의 사병을 모조리 총동원해서 두들겨 부숴야 합니다. 이숙번의 사병도 막막강병입니다. 이리하여 두 길로 나누어 한 부대는 이숙번의 집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한 부대는 궁성을 포위한 후에, 궁중으로 들어가서 모든 서자를 잡아낸 후에, 전에 전하가 서제를 처치하듯 모조리 없애버려야 합니다.'

'자아, 그렇다면 세자께서 떠난 후에 곧 단행하기로 하세.'

'좋소이다.'

"그만."

추관 이화는 형방 승지한테 그만 읽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방 승지의 읽는 소리가 끝나자 이화는 민무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묻는다.

"이래도 역적이 아니란 말이냐?"

이번엔 민무질이 대답한다.

"아까 대답한 말을 왜 또 묻소? 임금을 죽이려고 해야 역적이지 어찌 역적이란 말요."

"사병을 거느리고 궁성을 포위한다는 것이 어째 역적이 아니란 말이냐."

"절대로 역적질할 생각이 없었소. 궁성을 포위하라고 한 것은 다만 세자의 서제와 딴 맘을 먹고 권세를 전천하려는 이숙번을 없애자는 것뿐이오. 그리고 또 이숙번을 죽인다는 것이 어찌 역적이 되오."

민무구 형제는 여전히 버틴다. 이화를 위시하여 추관들은 민무구 형제들이 여간해서 복죄하지 아니할 것을 짐작해 알았다. 서로들 의논하고 여태껏 국문해 문초 받은 일을 전하께 일일이 아뢰어 처분을 바라기로 했다. 태종은 추관한테 보고를 받자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가 용기를 내어 재단을 내렸다.

"민무질, 민무구 형제는 제주도로 귀양보내고 역적질하는 모의에 찬동했던 그의 조카사의 등 모든 사람들은 벼슬을 떼어 삭탈관작한 후에 경기와 충청도로 귀양을 보내어라."

이숙번을 위시하여 모든 공신들은 우겨댄다.

"민무구 형제 등 불충한 역적을 목숨을 살려서 귀양보낸다는 일은 불가합니다. 이들을 살려둔 후에 나중에 일어나는 일을 어찌 휘갑치시려 합니까. 첫째로 모든 왕자와 민씨네 일당은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극한의 좋지 못한 상태는 마침내 세자와 왕자 사이까지 불호한 광경이 생길 것입니다. 이쯤 된다면 국가는 점점 어려워져서 마침내 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깊이 통촉하시어 사형에 처하시옵소서."

공신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민무구 형제를 죽이자 했다. 태종은 끝내 말을 듣지 아니했다. 국청을 파하고 추관 이화는 어명을 받들어 민씨네 형제에게 제주 귀양을 선포했다. 민무구 형제는 기가 막혔다. 미친 듯 껄껄 웃으며 어명을 받는다.

"하하하, 더럽다. 너희들 같은 사람 아닌 자들과 함께 여태껏 세상을 함께 한 것이 부끄럽다. 그까짓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니다. 삼강오륜도 모르는 너희들의 독한 세상에 산다는 것이 도리어 욕이 된다. 이미 묶여서 잡힌 몸이다. 죽이든 귀양을 보내든 맘대로 하라. 하하하, 너희들한테 좋은 일이 많으리라."

민무구 형제는 곧 금부의 압령을 받았다. 금부도사는 나졸을 시켜 두 형제를 꼭꼭 묶어 결박지었다. 발길로 걷어차며 대궐 문밖으로 끌어낸다. 민무질이 국청 단상을 향하여 부르짖는다.

"마지막 청이 한가지 있다. 세자는 아니 계시지만 나의 누님을 한 번 만나뵙게 해다오."

당시, 제주도로 귀양을 보낸다는 것은 도리어 죽이는 것보다도 더 슬픈 일이었다. 일엽편주로 파도 높은 남해 바다를 건너 뱀과 구렁이가 들끓어대는 제주도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한 번 귀양을 간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민씨네 형제는 통곡하면서 끌려나간다. 지밀 안에서 초조하게 국청의 하회를 기다리고 있던 왕후 민씨는 아우들이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눈에 불이 일어났다. 미닫이를 박차고 외전으로 향하여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궁녀들이 쫓아나가 만류했으나 뿌리치는 민왕후의 미칠 듯 일어나는 큰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민왕후는 살같이 달렸다. 외전으로 뛰어 태종이 있는 용상으로 올랐다.

"내 아우를 죽여버릴 것이지, 어찌해서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버렸소. 나를 먼저 죽이고 내 아우들을 귀양보내시오. 이래가지고 내가 이 나라의 왕후 노릇을 어찌하오. 내 얼굴에 똥칠을 해주어도 유만부동이지 어째서 내 아우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생지옥인 제주도로 보내오."

민왕후는 눈에 불이 펄펄 붙었다. 입가에는 거품이 부글거려 끓었다. 태종은 몸을 일어 피하려 했다. 후궁들이 쫓아나왔다. 태종의 신변이 위태로움을 느꼈다. 모두들 둘러서서 왕후를 태종한테서 떼어놓으려 했다.

"마마, 고정합시오. 참으십시오. 체통을 차리십시오."

민후의 눈에서는 파란 불길이 일어났다. 불붙는 눈으로 젊은 후궁들을 노렸다. 강계 기생 출신이요 ''의 어머니인 가희아도 섞여 있었다.

"이년들, 이 구미호 같은 년들, 대신들과 내통해서 내 동생을 역적으로 몬 년들-."

민왕후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엄파 같은 손길이 연하디연한 가희아의 뺨을 갈겼다. 절정에 오른 분노와 시기와 질투심이 와싹 솟구쳤다. 가희아의 이는 단번에 부러지고 입술은 터져서 피가 좔좔 흘렀다.

 

어머니의 철천지한

 

전하는 얼른 가희아를 구해야만 했다. 민왕후의 앞을 가로막았다. 민왕후는 전하를 밀치려 했다.

"나를 먼저 죽이고 그다음 내 늙은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내 동생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시오."

두 번 세 번 큰 소리로 전하를 향하여 푸념을 했다. 왕후는 전하의 용포 자락을 휘어잡았다. 상궁들이 몰려들었다. 미친 듯 악을 쓰는 무서운 힘을 당해낼 도리가 없어 내시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왕후와 전하를 떼어놓았다. 내시는 급했다. 전하를 업어 모시고 별방으로 피했다. 궁중 지밀은 날이 새도록 소란스러웠다. 민무구 형제의 집에서는 부원군 민제가 팔십 가까운 나이에 아들 둘이 역적으로 몰려서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극한 놀라움은 팔십 노인한테 풍증을 일으켰다. 이 소식은 저녁때 왕궁으로 들어갔다. 왕비는 엎친 데 덮친 데 큰 놀라움을 겹겹이 지녀야 했다. 급히 친정으로 덩을 몰았다. 민부원군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민왕후의 한은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민왕후의 철천지한의 굽이굽이 가슴 속으로 파도를 치며 흘렀다. 개국 공신의 한 사람이요, 다시 정국공신의 아버지요, 또다시 왕후의 친아버지요, 세자의 외조부로 일세에 추앙을 받는, 글 잘 하기로 이름 높았던 부원군 민제는 아들들이 역적으로 몰리는 꼴을 보고 기가 막혀서 바람증을 일으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민왕후는 큰아들과 둘째 아들 상주가 없는 초종을 작은 동생 둘과 함께 한을 안고 치렀다. 나라에서는 왕비의 아버지 장례라 해서, 형식적으로 칙사가 나와서 조상하고 부의 돈을 보내고 궁녀들이 왔다갔다했을 뿐이었다. 민무구 형제는 천 리 길 멀고 먼 바다를 건너 귀양을 갔으니 아버지의 죽음을 조금도 몰랐다. 민부원군의 장사를 치른 지 열흘이 채 못 되었다. 이숙번 이하 정국공신들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다시 민무구 형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때마침 민무구의 아내되는 사람은 태종이 황해도로 사냥 나간 틈을 타서 궁중 지밀에 밤늦게 들어가 민왕후와 한데 자고 새벽녘에 나간 일이 있었다. 이때 태종은 민씨네 족속이 아무리 왕후의 친정이라 하나 민무질, 민무구 등 역적이 난 이상 그들의 붙이가 궁중 지밀에 출입하는 일은 불미하다고 생각했다. 일체 민비의 친정붙이한테는 궁중 출입을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렸다. 그러나 막상 민무구의 아내가 지밀로 들어와 왕후를 뵙겠다고 간곡하게 부탁하니 내관과 궁녀며 수문장들은 왕비께 이 사실을 아뢰지 아니할 수 없었다. 민왕후는 나인에게 명하여 친정 올케인 민무구의 아내를 불러들이라 했다. 하룻밤을 함께 지내면서 집안이 결딴난 만단 사연을 밤이 새도록 이야기했던 것이다. 소문은 이숙번과 공신들의 귀로 들어갔다. 공신들이 가장 꺼리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민왕후였다. 더구나 민무구 형제를 죽이자고 주장한 이후부터는 더욱 더했다. 그들은 이것을 기화로 하여 민씨네를 뿌리째 쓰러뜨리려 했다. 공신과 대감들은 일제히 상소를 올렸다.

'듣자오니 전하께서 일전에 황해도로 사냥을 나가셨을 때 궁중 지밀에는 금족령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틈을 타서 역적의 아내 되는 사람이 지밀 안으로 방자하게 들어와 왕후전하와 함께 침소를 같이하고 남의 눈을 피하여 새벽녘에 궁중에서 나갔다 하니, 해괴하기 짝이 없습니다. 빨리 이 사건을 사실하시어 궁중의 기강을 바로잡으시옵소서. 그리하옵고 민무구 형제는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전하는 신하들의 상소를 받고 깜짝 놀랐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자기가 내린 금족령을 무시하고 친정 식구를 불러들여서 하룻밤을 같이했다는 왕후 민씨가 밉기가 한량없었다. 곧 신하들의 상소문을 들고 내전으로 들어가 왕후를 꾸짖었다. 전하의 눈시울은 열을 띤 채 올라붙었다.

"도대체 왕후는 하늘도 무섭지 않고 땅도 두렵지 아니하오?"

전하는 공신들의 상소문을 한 손에 든 채 부르르 떨며 묻는다. 전하의 얼굴빛이 푸르락누르락 좋지 못하면서 다짜고짜로 언성을 높여 꾸짖는 것을 당하자, 민왕후도 마음이 좋지 아니했다.

"별안간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하늘도 무섭지 않고 땅도 두렵지 않으냐고 하십니까."

"왜 바깥사람을 나 없는 새 불러들여서, 함께 자면서 무슨 공론을 했소?"

민왕후는 비로소 전하가 불쾌하게 꾸짖는 뜻을 알았다. 역증이 벌컥 일어났다.

"말씀을 삼가시오. 저는 바깥사람이라 하시기에 외간남자가 뛰어들어 함께 지냈다는 줄로 알아들었습니다. 친정에서 올케가 들어와서 아버님 상사 후에 처리할 일을 의논 좀 했기로서니 그것이 어찌 하늘도 무섭지 않고 땅도 두렵지 않은 일이 됩니까? 망하는 년은 형제도 없고 친정도 없습니까?"

민왕후의 눈초리는 새파랗게 날이 섰다.

"금족령을 내리지 아니했소?"

전하는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금족령은 도대체 무슨 놈의 금족령이란 말씀요. 전하의 조강지처인 왕후, 나를 못 믿어서 금족령을 내렸더란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전하의 아내인 나 역시 역적으로 대접하십니까. 조강지처인 나를 역적으로 대접한다는 말씀입니까?"

왕후는 분함을 못 이겨 목소리가 자못 떨렸다. 왕후는 계속해서 푸념을 한다.

"생각해보시오. 세자 이하 당신의 자식을 넷씩이나 생산한 이년이 당신을 해치려고 역적질을 하겠소? 금족령이란 다 무엇에 쓰는 쓸개 빠진 영이오. 너무하시오. 심하십니다. 후궁한테 미쳐서 이같이도 왕후를 박대하신단 말씀요. 그리고 여자들이 어떻게 역적질을 하겠소. 남편을 죽이고 역적질을 한단 말이오. 전하, 좀 생각해보시오."

전하는 코가 맥맥했다. 그러나 위신을 아니 세울 수 없었다. 발길을 돌려 외전으로 나갔다. 내관을 불러 엄한 영을 내렸다.

"당일 왕후의 친정에서 민무구의 아내가 들어왔을 때 지밀문을 열어주고 새벽녘에 나가게 했던 궁녀, 내시, 수문장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참형에 처하라."

불같이 떨어지는 맹독한 명령이었다. 감히 누구 한 사람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민무구의 아내가 대궐로 출입할 때 문을 개폐하고 왕후한테 거래를 드렸던 수문장, 내시, 궁녀들 십여 명은 금족령을 위반했다는 죄로 서소문밖으로 끌려나가 원통하게 죽임을 당했다. 온 세상은 민왕후가 장차 어찌 되나 하고 염려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궁녀와 내시와 수문장을 목벤 후에 공신들은 또다시 상소를 올렸다.

'민무구 형제를 제주도에 살려둘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일당들이 지하에서 준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민씨 형제를 다시 살려내기 위하여 역적질할 것을 또다시 모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민무구 형제가 부원군의 아들이요, 왕후전하의 동생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국가에서도 건드리지 못하는 두 분이 계신 것을 잘 알고 있는 때문, 이같은 짓을 감행했습니다. 이들의 역적질하는 근본을 뽑아버리려면 제주도에 귀양보낸 민무구 형제를 죽여버려야 합니다.'

공신들의 상소에 이어서 헌부와 간원에서도 제각기 맹렬하게 공격하는 상소가 들어갔다.

'전하께서는 민무구 형제를 처당이라 해서 살려두시려 하시나, 만약 이 사람 형제를 그대로 두신다면 나중에 뉘우칠 날이 크게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루속히 죽음을 내리시어 화근을 뽑아버리시기 간절히 바라옵니다.'

상소는 빗발치듯 들어갔다. 모두 다 이숙번의 놀음이었다. 태종은 민무구 형제들의 부하가 서울에서 지하로 들어가 다시 준동한다는 상소를 받자,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민씨의 잔당을 녹여버리는 길은 민씨네 형제를 먼저 죽여버리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왕후를 보나 세자를 보나 차마 죽여버릴 수는 없었다. 이튿날 태종은 이숙번, 이화 등 공신들을 불렀다.

"헌부와 간원이며 모든 공신들은 당연한 주장을 했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아무리 공법을 쓴다 해도 약간의 사정을 돌보지 아니할 수 없소. 죽이는 길은 매한가지요. 칼을 들어 죽이는 것이나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나 죽는 길은 매일반이니 자진해서 죽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태종은 공신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숙번과 이화는 일제히 대답해 아뢴다.

"죄상을 밝혀주시고 자진해 죽게 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올시다. 사신이 전교를 받들고 제주까지 가서 자진해 죽게 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목을 베어 죽게 하는 것이나 자진해 죽게 하는 것이나 매한가지 일이었다. 공신들은 상감인 태종의 하문에 그대로 좋다고 대답했다. 공신들이 물러간 후에 태종은 곧 승지를 불렀다.

"금부도사를 제주도로 건너보내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자진케 하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어 금부에 기별했다. 금부도사는 일엽편주를 바다에 띄우고 제주도로 향했다. 민무구 형제는 반항해도 소용이 없을 것을 깨달았다. 목을 매어 자진했다. 민무구 형제를 자진시킨 일은 왕후 민씨가 모르도록 극비한 속에 추진된 일이다. 그러나 싸고 싼 사향내도 드러나는 법이요, 발이 없건만 소문은 천 리까지 퍼지는 것이다. 제주에 금부도사가 내려가서 왕명을 전하고 자진케 한 이 사실은 천 리 서울까지 자자하게 퍼졌다. 서울에 퍼진 소문은 단통에 민부원군 집으로 들어갔고, 이 비참한 소식은 민씨 집 비자들의 입을 통해서 민왕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하루아침에 두 동생을 잃은 민왕후의 슬픔은 절정에 올랐다. 식음을 전폐하고 날마다 통곡으로 세월을 보냈다. 주먹으로 복장을 치고 발로 땅을 굴렀다.

"상감은 나의 원수다!"

울음을 울며 큰소리로 외쳤다. 둘째 아들 효령대군 ''가 어마마마를 위로했다. 셋째 아들 충녕대군 ''가 어마마마를 위로했다. 셋째 아들 충녕대군 ''는 장차 세종대왕이 될 분이다. 넷째 아들 성녕대군 ''이 어마마마를 위로했다. 그러나 친정집이 하루아침에 망하고 없어진 한을 풀어줄 아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아아, 세자가 어서 돌아와야 할 텐데."

민왕후는 세자가 명나라에서 돌아오기를 일각이 삼추같이 기다렸다. 태종과 민왕후는 사실로 원수같이 되어버렸다. 외전과 내전의 거리는 지척이면서도 천 리같이 떨었다.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죽인 후에 마음에 미안한 가책을 느꼈다. 하루는 왕후 민씨는 생각해서 옥교를 내전으로 향했다. 상감이 내전으로 들어오자 민왕후는 다락으로 몸을 피하고 보지 아니했다. 태종은 무료하게 몇 시각을 내전에 앉았다가 외전으로 나갔다. 왕과 왕후가 이같이 사이가 벌어진 것은 왕실의 불행이었다. 태종은 후궁으로만 돌았다. 강계 기생이었던 ''의 어머니 가희아의 방과 왕후 민씨의 시녀로 있다가 태종의 손길에 말려든 후궁이며, 고려의 궁녀로 미인이었던 후궁의 방으로만 돌았다. 수라상도 중궁 정전에서는 받드는 일도 없고 거행하는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금침은 깔 생각도 아니 했다. 이같이 되니 태종과 조강의 아내인 민왕후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다. 왕후는 세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했다. 손을 꼽아 돌아올 날짜를 기다렸다. 한편, 조정의 세도와 권리는 함빡 이숙번에게로 돌아갔다. 이숙번은 민씨네 형제들이 잡고 있던 병마대도독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이때, 세자는 사신의 자격으로 사명을 완수한 후에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기가 막혔다. 외삼촌들은 둘씩이나 제주도로 귀양가서 자진해 죽고 궁중 지밀 안은 쑥대밭이 되어 말이 아니다. 세자는 압록강을 건널 때부터 백성과 각읍 수령들의 크나큰 환영을 받았다. 서울에 들어섰을 때는 영조문에서 왕궁까지 이르는 도중 사람들의 물결은 백절치듯 했다. 조정에서는 이 나라의 최고의 인물인 아바마마 태종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고 영의정 이하 삼정승과 이조판서 이하 육조판서며, 행정부 이외에 언론을 맡은 사간원, 기강을 맡은 사헌부, 사필을 맡은 춘추관, 홍문관, 학문의 최고학부인 성균관 등의 관원들이 총동원되어 일 년 만에 돌아오는 세자를 맞이했다. 세자의 장인 되는 김빈의 아버지 김한로의 얼굴도 보였다. 세자는 영조문 앞에 드높게 쳐진 군막 안에서 아바마마인 태종께 절을 올렸다.

"그동안 국사에 대해서 많은 애를 쓰고 돌아왔구나. 명나라 황제께서 너를 대해 보시고 칭찬이 대단했다는 말은 먼저 돌아온 신하들한테 자세하게 들어서 마음에 흡족했다."

태종은 미소를 지어 세자의 절을 받으며, 이같이 세자의 노고를 위로했다.

"신의 무슨 칭찬을 받을 만한 아름다운 덕이 있사오리까. 모두 다 아바마마의 덕화가 외국에까지 미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자는 겸손하게 말씀을 올렸다.

"들으니, 이번에 여러 외국 사신보다도 특별한 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세자가 서 있는 좌석도 저편 조정의 정승인 각로와 어깨를 같이했다 하니 기쁘기 한량없다. 세자가 나라의 위엄을 이번에 훌륭하게 높여주었다 할 것이다."

 

세자 돌아오다

전하는 용안이 화려했다. 세자도 아바마마의 용안이 화려한 것을 느끼자 마음이 가벼웠다.

"신이 저곳에 가서 제일 기쁜 일은 황제가 친히 시를 많이 지어주셨습니다. 일생에 잊지 못할 기념이올시다."

"영광스런 일이다. 시를 베껴서 사관으로 보내서 오래오래 기록에 남도록 하리라."

"그러지 아니해도 저곳에서 황제와 시를 지어 화답했던 글을 모조리 베꼈습니다. 춘추관에 보내서 모조리 실록에 실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일이다."

태종은 더 한 번 미소를 지어 세자의 뜻을 찬양하면서 천천히 군막 밖으로 발길을 옮겨 연에 올랐다. 세자의 마중을 끝내고 먼저 대궐로 향하여 돌아가는 것이다. 세자 이하 만조백관들은 환궁하는 태종을 전송한 후에 군신들은 다시 차례를 지어 세자저하께 무사하게 돌아온 것을 치하하는 예를 올렸다. 모든 의식이 끝난 후에 세자도 덩 위에 올랐다. 거리 거리 세자의 귀국을 환영하는 사람 물결은 갈수록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세자는 인사하는 만백성들에게 일일이 손을 들어 답례하는 읍을 보냈다. 그러나 세자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상감인 아바마마 이하 모든 사람들이 다 맞이를 나왔는데, 꼭 자기를 반갑게 맞이해줄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아니했다. 마음속으로 무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중을 나온 다른 사람한테 묻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세자의 덩은 바로 대궐로 들어가자 중궁으로 향했다. 아바마마는 이미 뵈었으니 어마마마를 뵈우러 가는 길이다. 세자의 자비는 궁중 뜰 안에까지 들어가 안마당에 놓았다. 시녀들이 반갑게 뜰 아래 늘어서서 꽃 같은 얼굴에 웃음을 지어 세자를 맞이했다. 세자빈 김한로의 따님도 월대에서 천천히 내려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저하를 맞이했다. 어마마마의 얼굴이 나타났다. 세자빈의 부축을 받고 뜰아래로 내려섰다. 어마마마의 눈에서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오오, 세자!"

어마마마는 세자의 어깨와 허리를 껴안았다.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는 자애의 물결이 높이 파도를 쳤다. 세자도 어마마마를 끌어안았다.

"어마마마!"

아들 중에도 가장 어머니를 알아주고 위해주는 세자요, 특별히 효성이 지극한 세자였다. 어머니와 아들의 지극한 사랑은 머리칼 한 올 사이 틈 없이 순수하게 엉클어졌다.

"잘 다녀와서 내 마음 기쁘기 한량없네."

어마마마는 아들을 껴안아 정열의 회오리바람이 한풀 지난 후에 다시 아들 세자를 끌어안고 한마디를 했다.

"어마마마,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세자도 어마마마의 애무 속에 파묻힌 채 또 한 번 어마마마의 등을 어루만지며 묻는다. 모든 궁녀들은 모자의 순정을 바라보며 눈물을 머금었다. 너무나 순 된 사랑은 바라보는 사람의 눈물을 자아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아, 그만 올라가세."

어마마마는 세자의 손을 이끌었다. 마루 위로 올라 복도를 거쳐서 온돌로 들어갔다. 부르기 전에는 시녀라도 맘대로 드나들지 못하는 지밀이다. 어마마마와 세자는 단둘이 대면해 앉았다. 세자가 정신을 가다듬어 모후의 모습을 바라보니 기막히도록 늙었다. 일 년밖에 아니된 사이에 이같이 달라질 수가 없었다. 머리는 반백이 넘어 가을 서리가 내린 듯하고, 볼은 여위고 눈은 움폭했다. 이는 빠지고 눈에는 눈물이 질척질척 마르지 아니했다.

'몹시 늙으셨구나.'

세자는 불안하게 생각했다. 세자는 어마마마께 그동안 몸이 괴로우셨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얼른 입을 벌릴 수 없었다.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 하나, 좋지 아니한 일을 먼저 입을 벌려 말하기 난처했다.

"그래, 그동안 만리타국에 가서 얼마나 고생을 했나?"

어마마마는 잃었던 보옥을 다시 찾은 듯 느긋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대견한 마음으로 다시 세자에게 묻는다.

"고생이 무슨 고생이오니까. 대우를 잘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마마마께서는 그동안 혹시 환후가 계셨습니까?"

"아니, 환후는 무슨 환후. 별 병은 없이 지냈지."

"그런데 황공하오나 옥안이 초췌한 듯하오이다."

머리에서 피가 내린 듯 백발이 되고, 이가 빠지고, 볼이 오목하게 들어가고, 눈이 꺼지고, 주름살이 이마에 가득히 잡힌, 이 모든 노쇠한 증상을 일일이 들어 말하기는 미안했다. 그대로 옥안이 초췌한 듯하다는 말로 모후의 의향을 떠보았다. 민왕후는 세자의 말을 듣자 별안간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는 세자가 돌아오기를 삼추같이 기다렸네."

눈물을 흘리는 왕후는 청을 놓아 흐느꼈다. 마침내 말이 터져나왔다.

"세자의 외가는 다 결딴이 나서 망해버렸네."

세자는 깜짝 놀랐다.

"망하다니요?"

"자네, 큰외숙과 둘째 외숙은 역적질을 했다 해서 제주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자진해 죽으라는 어명을 보내서, 비명횡사를 해서 제주도 귀신이 되어버렸네."

"어떻게 역적질을 하다가 그랬습니까?"

세자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왕후는 한숨을 지며 말했다.

"역적질이 무슨 역적질인가, 몰렸지. 공신들이 들고 일어나서 역적으로 몰았다네. 이숙번과 이화가 앞장을 서서 내 친정을 망하게 한 것일세. 말하자면 민씨네 형제를 이 세상에 없이해 놓아야만 자기네들의 권력을 맘대로 펴볼 테니 내 동생들을 모조리 역적으로 몬 것일세. 신하들이 이쯤 하면 임금은 모든 일을 요량해서 적당히 처리해야 할 터인데, 상감은 내가 미우니까 한편 송사만 듣고 내 동기들을 다 죽여버린 것일세."

왕후는 말을 마치자 또 한 번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세자는 마음이 아팠다. 외숙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하니 가슴이 아프지 아니할 수 없었다. 원래 외숙들은 너무나 덤벙거렸다. 외숙 역시 자기의 권력을 독점하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던 것이다. 자기를 명나라 공주와 혼인을 시켜보려고 명나라 사신 황엄의 꾀에 넘어가서 금은보화와 소를 주어 환심을 사려 했던 그 사실도 덤벙대는 꼴의 하나였다. 모든 이러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동료 공신한테 시기를 받아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이 분명했다. 인생이 무상하다더니, 과연 무상한 일이었다. 사람의 욕심과 손으로 만들어진 인생의 무상이었다.

"도대체 역적으로 몰린 죄명은 무엇이오니까?"

"대궐을 포위하고 이숙번의 집을 습격한 후에 후궁의 소생인 왕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데 군사들은 사병을 써서 총공격을 하자고 무질과 무구 형제가 의논했다는 것으로 구실을 잡아서 몰아 죽였네. 말하자면 전에 상감이 방석과 방번을 처치하듯 그런 수단으로 후궁의 소생인 왕자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려고 역적질을 모의했다는 것일세. 그러하니 내 꼴이 이같이 쇠약해졌을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나. 머리털은 하룻밤에 백발이 되고 주름살은 이마에 가득했네. 이는 빠지고 눈은 들어가고, 오죽해서 죽어버릴 생각만 나고 살 생각은 없었네. 세자 있으니 내가 참아서 살고 있는 것이지. 그러나 세자 없다면 나는 벌써 이 세상을 버리기 위하여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어 자진했을 것일세."

민왕후는 눈물이 뎅겅뎅겅 떨어졌다. 어마마마의 말씀은 듣는 세자의 마음은 어둡고 답답했다. 모두 다 욕심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외숙들이 망한 것은 욕심 때문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원수가 되고, 비록 이복동생이라 하나 세자 방석을 죽여서 쫓아낸 후에 오늘날 왕의 자리를 차지한 것도 더러운 욕심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만백성을 거느린 지도자라 하나,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백성들을 향해서는 삼강을 지켜라, 오륜을 실천해라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아우를 죽이고 형을 죽이려 하고 군사를 거느려 칼과 창으로 아버지와 대결했다. 무슨 낯을 들어 삼강오륜을 백성들한테 말할 자격이 있는가. 모든 이 사건들은 지나간 일이라 해서 덮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번에 또 일어난 모든 사태는 또다시 아버지의 과거의 행장을 되풀이하는 일이다. 아버지는 공신의 말을 듣고 민무질, 민무구 두 형제를 귀양보냈다가 그래도 미심해서 죽여버렸다. 하지만 외숙들이 역적질을 했다는 의심이 나도록 만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아바마마 자신이었다. 아바마마는 무수한 후궁을 두었다. 심지어는 기생 출신까지 옹주로 봉해서 제일급의 후궁이 되게 했다. 그나 그뿐이 아니다. 기생 출신인 가희아는 왕자 ''를 낳았다. 아바마마는 콧대 센 어마마마를 배척하고 중전에 들어와서 수라도 아니하고, 침소도 아니했다. 가희아를 편애하고 ''를 사랑하고, 침소도 대부분은 가희아의 처소요 수라상도 가희아의 처소에서 받았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철없는 외숙들은 이 점을 근심하고 의심했다. 수군거리고 지껄여댔을 것은 정한 이치다. 아버지는 어머님 말씀대로 이 점을 깊이 생각해서 잘 처리하지 못하고 왕후의 형제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다. 장차 백성들에게 무슨 낯짝을 들고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임금과 신하는 충의를 다하라고 부탁하며, 부부는 존경하고 친구들은 신의 있으라고 가르칠 수 있는가. 세자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 아바마마는 제왕이라는 위치에 서 있으면서 도리어 백성들을 지도할 수 없는 일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래가지고 나라 꼴이 도저히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은 세자인 자기한테도 미칠 것이라 생각하니 더한층 마음이 좋지 아니했다. 불쾌했다. 앞으로 백성들은 임금의 말과 행동을 믿어주지 아니할 것이 분명했다. 임금과 백성이 이탈된다면 나라 꼴은 말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세자인 자기가, 아바마마의 후계자가 되어 왕위에 나갔을 때까지 크나큰 영향이 미칠 것이라 생각했다. 세자는 가만히 한숨을 짓는다. 어지러운 집안이다. 혼자 말을 해본다.

'더러운 욕심들', 이같이 뇌까려보기도 했다.

"말세로다."

마침내 세자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말세' 소리를 듣자 어마마마는 마음에 꼭 들어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옳은 말이다. 세자의 말이 옳아. 말세면 이만저만한 말센가. 기막히네. 왕후되는 나의 수족을 모조리 끊어서 다 죽여놨네. 이제는 나를 폐위까지 시켜서 쫓아낼 것일세.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자인 자네도 폐위시키고, 다음엔 가희아를 왕후로 봉하고 그의 몸에서 난 ''를 세자로 삼겠다고 할는지도 모르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마마마의 수족은 어느 때 또 끊어놨습니까?"

어머니 민왕후는 세자의 묻는 말을 듣고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지난번 상감이 황해도로 사냥을 가셨을 때 마침 자네 작은 외숙모가 비자를 들여보내서 문후를 들어오겠다 했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영감은 역적으로 몰려서 자진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고 집안은 다 망하게 되었으니, 내가 등신이라도 살아 있는 이상 어찌 아니 만날 수 있나. 들어오라 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지난 일들을 이야기했네."

민왕후는 말을 잠깐 그쳤다가 다시 계속한다.

"그럭저럭 밤이 깊으니 자네 외숙모는 나갈 수가 없게 되었네. 나하고 함께 뜬눈으로 밤을 지내다가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네. 이 일이 나중에 상감의 귀로 들어가서 역적모의나 한 듯이 자네 외숙모를 인도했던 수문장이며 시녀와 내관들을 모조리 묶어다가 서소문밖에서 목을 베어 죽였네. 이런 기막힌 일이 있나. 이것은 차라리 나를 죽이는 일이 낫지 세상 천하에 이같은 일이 어디 있을 수 있나. 내 얼굴을 보아서라도 어쩌면 그리한단 말인가. 내 형편은 지금 이쯤 되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네. 조금 더 있으면 나를 폐위시키려 쫓아내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죽인다고 할 것일세."

말을 마치자 왕후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다. 어마마마의 말씀을 듣자 세자는 깜짝 놀란다. 아니 놀랄 수 없었다. 일국의 왕후를 죄인 다루듯 한 것이다. 왕후한테는 직접 손을 대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왕후의 명을 받들어 민무구 아내의 문안을 허락하고 궁중출입을 하게 한 수문장과 시녀며 내관들을 죽인 것은 곧 왕후에게 벌을 준 것이나 매한가지 일이다. 세자는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어떤 것들이 고자질을 했습니까?"

세자는 격분했다. 두 주먹을 쥐어 부르르 떨었다.

"그야, 아무리 궁중 지밀이라 하나 모두 다 내 사람뿐이겠나. 소위 공신일파들이 대궐 안 지밀을 탐지하기 위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들여보낸 내시도 있고 나인들도 있을테니 누구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는지 알 수 있나. 사실해서 추궁을 한다면 모를 바도 아니지만 공연히 떠들어대면 소란만 더하겠기에 고자질해서 발설한 자들은 아직 묻지 아니했네. 그야, 고자질을 일백 번 했다 하더라도 최후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요량껏 잘 처리했다면 사무송할 일이 아닌가. 형제끼리 좀 만났기로서니 문지기 이하 궁녀들을 모조리 죽이는 법이 세상 천하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세자는 다시 더 어마마마를 위로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까 한 마디 어마마마께 들은 말을 그대로 넘겨버릴 수는 없었다. 어마마마의 옷 빛깔을 바라보았다. 흰 저고리에 흰 치마를 둘렀다. 아까 처음 문후하러 들어왔을 때는 하도 반가워서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이다.

"어마마마, 아까 외조부께서 하세하셨다는 망극하신 말씀이 계셨습니다. 웬 변고오니까?"

"예로부터 화불찬행이란 말이 있더니 내 친정집을 두고 이른 말일세. 아들들이 별안간 역적으로 몰려서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고 보니 어찌 아니 놀라셨겠나. 세자의 외조부는 그만 놀란 가슴에 다시 화가 떠서 마침내 세상을 떠나버리셨네."

세자는 추연히 한숨을 짓고 말한다.

"부원군 할아버지께서는 아마 팔십이 넘으셨죠?"

왕후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는 어마마마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이 불쌍하다고 생각되었다. 또 한 번 한숨을 짓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예법은 차려야 하겠습니다. 상제님 되신 위문을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세자의 절을 받은 민왕후는 더한층 마음이 산란했다. 슬픈 울음이 폭발해 터져버린 채, 세자의 절을 받고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어마마마, 그저 마음을 바다같이 넓게 하소서. 옥체를 보중하소서."

세자는 위로하는 말씀을 올린 후 천천히 왕후궁에서 물러났다. 세자가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에 왕후 민씨의 태도는 백만 대병의 구원병을 얻은 듯했다. 상감이 자기의 친정인 민씨네 집을 역적으로 몰아서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그래도 유위부족해서 또다시 목숨을 끊어 자진까지 시킨 일은 인정상으로 보나 도의상으로 보나 너무나 지독한 일이었다. 설혹 민씨네들 자기 스스로가 불궤의 마음을 먹고 왕의 자리를 탐내서 역적질을 했다 하더라도 이같은 처참한 죽음을 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세자의 뒷일을 위하여 후궁의 왕자 몇 사람을 없애버리자는 음모를 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취한 행동도 아니다. 장차 하려고 형제끼리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한 것이 아니다. 미수다. 현행범으로 한 것도 아니요 장차 하려고 마음을 먹고 형제가 의논만 했다는 혐의로 자진해서 죽게 한 일은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더구나 왕실에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세자의 외숙이요, 정궁의 친동기간이다. 상감이 후궁들한테 고혹이 되어 조강지처인 왕후를 소박하고 후궁을 사랑하고 후궁의 소생들을 세자나 정궁의 소생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는 이 현실을 민씨네 형제들은 그대로 불만하게 생각하고 두렵게 생각했던 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피가 통하고 이해가 붙어있는 까닭에 그같은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한편에서 정치적으로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숙번 일파의 공신들의 말만 듣고 역적으로 몰아붙이고, 또다시 자진까지해서 죽게 한 일은 순전히 왕후 자신을 거세하려고 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왕후는 이튿날 상감이 계신 대전으로 자비를 몰았다. 한바탕 상감과 대결해보자는 것이다. 중전에 그림자도 비추지 아니하는 상감은 대전 동온돌에서 기생 출신인 가희아와 기거를 함께 하고 있었다. 왕자 ''의 어머니다. 민왕후의 눈에는 새로운 질투의 불길이 파랗게 불붙었다. 질투보다도 친정집을 망하게 한 원수다. 지금 원수는 말이 후궁이지 사실상의 왕후다. 정말 왕후는 벼랑에 던져진 헌빈 꼴이 되고 청마루 밑에 버린 헌신짝의 신세였다. 이 틈을 타서 공신 이숙번은 나라의 권리를 독점하려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동생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였다. 또다시 제주도에서 서울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상감의 마음을 공동시켜서 자진까지 해서 죽게 했던 것이다. 민후의 분노는 절정에 올랐다. 민후는 대전으로 들어가 의좋게 앉아 있는 상감과 후궁 가희아를 보자 노기가 회오리바람같이 일어났다. 민후는 황망히 일어나 후면 협실로 피하는 가희아에게 호통을 쳤다.

"이년, 어디로 피해 달아나느냐."

발을 굴렀다. 가희아는 문을 박차고 달아났다.

"왜 피하느냐. 거기 있거라."

상감의 음성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야 할 텐데, 가희아를 두둔해서 상감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 했다. 민후의 불붙듯 하는 행동에 상감도 반발을 일으킨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민후의 칼날같은 눈은 상감을 향하여 불을 뿜었다. 상감의 커다란 눈도 마주 불을 뿜는다.

"가만 앉아 있으란 말이 무엇이 잘못인가?"

상감은 코방귀를 탁 퉁겼다.

"용상에 가만 앉아 계시란 말이지."

민후는 악을 썼다. 상감은 한 수를 진 셈이다. 말문이 콱 막혔다.

"이제는 내 몸 하나만 남았으니, 왕후 민씨도 역적으로 좀 몰아보시지."

민후의 음성은 비단을 찢는 듯했다. 상감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궁녀들이 문밖에서 불안한 얼굴로 우둥우둥 모여드는 눈치다. 상감은 창피함을 느꼈다. 몸을 피하여 외전으로 나가려 했다.

"모두들 피해 달아날 짓들을 왜 했느냐 말야. 왕후의 집안을 덮어놓고 멸문지화를 해놓고 어디로들 달아나려 하느냐 말야."

민후는 팔을 벌려 상감의 나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이제 이 세상에는 나 혼자뿐이다. 두려울 것이 없소. 자아, 나를 죽여주오."

민후는 바싹 상감 앞으로 대들었다. 상감은 열이 벌컥 올랐다. 왕후를 증오하는 마음이 절정에 올랐다. 흰 거품을 날려 푸념하는 입술까지 보기 싫었다. 살기 가득 찬 눈자위에 혐오의 정을 느꼈다. 상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길을 들었다. 민후의 앞정강이를 탁 걷어차 버렸다. 민후는 밀화를 깔아논 듯한 미끄러운 장판 위에 가로 떨어졌다.

"아이쿠!"

하는 민후의 호통 소리가 일어나면서,

"사람 살려라!"

하는 소리가 강하게 일어났다. 민후는 이내 활개를 벌리고 장판방에 반듯이 드러누웠다. 궁녀들은 밖에 있다가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우르르 미닫이문을 열고 몰려들었다. 난장판이었다. 해거였다. 궁녀들은 왕비를 부축해 일으켰다. 상감을 부축해서 외전으로 피하게 했다. 민후는 발버둥을 치면서 호통 소리가 끊이지 아니했다.

"나를 죽이오. 나를 죽여주오. 우리 아버지도 죽이고 내 동생들도 죽여놨으니 나를 마저 죽여주오!"

"이년, 가희아야, 어디 갔느냐. 너는 나하고 불공대천지 원수다. 네가 내 자리를 뺏어 용상에 앉아보려고. 이년, 이 더러운 기생년아!"

민후의 음성은 대들보를 찌렁찌렁 울렸다. 이날 밤에 상감 태종은 고민 속에 빠졌다.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다. 아무리 지밀 안 일이라 하나 궁녀들이 보는 중에 언제나 이 꼴을 당해야만 하니 기가 찰 일이다. 그렇다고 곧 왕후를 폐해서 쫓아낼 수도 없었다. 간단치 아니한 문제다. 보통 왕비가 아니다. 중신 황희가 말한 대로 조강지처다. 왕위에 나가기 전에 자기를 도와 내조와 용기를 주어 힘이 일어나도록 북돋워준 왕비다. 그때는 참 어질고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 여인을 차마 내칠 수는 없다. 더구나 그는 지금 세자의 어머니다. 세자의 어머니를 어찌 내쫓을 수가 있는가. 지금 그의 골수에 박힌 병은 질투다. 자기가 왕위에 나간 후에 후궁들을 두어 사랑하니 어질고 착했던 왕후는 마침내 질투의 화신으로 변해버렸다. 허물은 전부 자기 자신이 져야만 한다. 그러나 역대 제왕들 쳐놓고 동서고금을 말할 것 없이 후궁을 아니 둔 제왕은 없다. 민후는 너무나 제왕의 체통을 몰라준다고 생각했다. 여기다가 공교롭게 민후의 형제는 자기들의 한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쓸데없는 음모가 잦았다. 이번에 이숙번 이하 공신들이 들고일어나서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게 하고 또다시 자진해서 죽게 한 원인도 사실은 욕심이 너무 과한 때문이다. 도대체 남자고 여자고 간에 민씨네들은 너무나 욕심이 과했다. 남자들인 오라비 형제는 정권을 독차지하려고 지나친 욕심을 내서 명나라 황제의 딸과 세자의 혼인을 해보겠다고 하다가 실패를 했고 나중에는 왕자들을 죽인다는 음모를 꾸며서 공신들이 우겨대는 바람에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뉘우쳐서 조심하지 아니하고 서울 사람들과 연락을 취했다는 혐의를 받아서 공신들은 민씨 형제를 죽이라고 들고 일어났다. 실로 자기 자신은 괴로웠던 것이다. 자기 자신은 임금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고립할 수 없다. 민씨네 형제를 귀양보낸 후에 공신들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임금 노릇 하기 어려웠다. 역시 임금의 자리는 제일가는 자리라 하나,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자리다. 공신들의 요구를 아니 들을 수도 없었다. 그는 곰곰 생각한 끝에 마침내 사약을 내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진해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필경엔 민씨네 아버지 민부원군도 팔십지년이라 하나, 죽음을 재촉하여 세상을 청산했고, 이제 왕후는 거친 성격에 점점 더 불을 붙이게 되었다. 타일러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달래도 효력이 나지 않게 되었다. 다시 그의 마음을 돌리는 길은 모든 후궁을 다 버리는 길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왕자가 수두룩한 후궁들을 버릴 도리가 없다. 뿐만 아니다. 후궁을 두는 것은 예로부터 왕실 제도에도 있는 것이다. 상감 태종은 밤새도록 고민했다. 번뜩 번개치듯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운수다!' 하고 자기 자신 손뼉을 쳤다. 만사가 귀찮았다. 편안히 누워 정양하고 싶었다. 왕이 되려고 아버지와 구수간이 되면서 왕권을 빼앗었던 지난 일을 뉘우치기도 했다. 임금의 자리가 싫다 해서 일부러 세자가 되지 않고 세상을 떠났던 맏형님의 팔자가 제일이라 생각했다. 임금 노릇을 한대야 인생으로서 더 좋을 것도 없다. 한 끼니에 밥을 열 그릇 먹는 것도 아니다. 공연한 인생의 허세와 허화다. 일생의 영웅호걸로 추앙을 받고 떠받들렸던 아버지 태상왕 이성계도 늙어서 병들어 누워버리니 그만이 아니었던가. 인생은 적막하다. 살아서 평생 마음이나 편하게 가지고 지내다가 떠나는 것이 제일가는 상책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장차 왕위를 어찌할 것이냐. 세자가 있지만 그동안 자기 자신은 세자를 폐위시키고 가희아의 아들인 ''로 세자를 봉할 생각을 여러 차례 가져본 일도 있었다. 그것은 민무질과 민무구 또는 왕후의 추측대로 열에 여덟은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자기뿐이 아니다. 지금도 공신들은 말은 아니했으나 마음속으로 이런 주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날 세자의 외숙들을 역적이라 해서 죽였고, 세자의 외조부를 화병이 나서 촉수가 되도록 했고, 지금 그의 모후가 저렇듯 원통해하는 것을 세자가 보고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은 세자가 명나라에서 갓 돌아와서 시하 처지라 아무 말도 아니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자기의 외숙을 역적으로 몰아낸 공신들을 가만둘 리 만무했다. 어느 때고 세자가 왕위에 나가는 날은 반드시 공신들을 등용해 쓰기 아니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하니 공신들은 후궁의 소생이 왕위에 나가는 것을 마음속으로 찬성하고 희망할 것은 확실한 이치다. 그러나 아직 그것은 차마 할 수가 없다. 최후에 생각한 것이 선위다. 선위란 왕의 자리를 생존해서 세자한테 넘겨주는 것이다. 자기는 상왕이 되어 남은 세월을 유유하게 한적하게 지내보자는 것이다. 아름다운 후궁들을 데리고 마음 편하게 산천경개를 구경하면서 심신을 썩이지 아니하고 여생을 보내자는 것이다. 이튿날이 되었다. 날이 밝았다. 상감 태종은 정원 승지를 불렀다. 내관의 전갈을 받고 도승지가 가주서를 데리고 들어왔다.

"부르셨사옵니까?"

"가주서를 데리고 들어왔느냐?"

가주서는 임금의 명을 받는 승지의 뒤에 서서 상감이 내리는 말씀을 기록하는 관리다.

 

선위파동

 

태종은 용안에 엄숙한 표정에 지었다.

"과인은 오늘 중대한 발표를 내린다. 나의 고유를 받아서 정원에 반포하라."

도승지는 별안간 중대한 일을 반포한다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마음속으로 놀랐다. 무슨 전교를 내리시기에 중대한 발포라 하시나 하고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물어볼 수도 없다. 다른 말이 떨어지기만 기다린다. 가주서는 연상에 먹을 갈아놓은 후에 장지를 펼쳐놓고 붓을 들었다. 전하의 말씀이 내리는 대로 받아 쓰려는 태세를 취했다.

"과인은 이제 몸도 차차 쇠약해지고 종기가 나서 괴롭다. 온천에 유하면서 조금 한양하지 아니하면 심신의 괴로움을 주체할 길 없을 것이다. 왕의 자리를 내놓고 왕세자한테 선위한다. 영의정 이하 만조백관이며 만백성들은 과인의 뜻을 알아서 잘 세자를 보호하여 밝고 어진 군왕이 되게 하라."

승지는 깜짝 놀란다. 꿈 밖의 일이다. 아직도 상감은 춘추가 강성한 사십 대 군왕이다. 늙고 병들지도 아니했다. 정력이 절륜했다. 이러한 상감이 선위를 하겠다는 일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승지의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그대로 명을 받들 수는 없는 일이다. 승지는 전하를 우러러뵙는다.

"지금 성상께서 내리신 말씀은 소신 승지로서는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왕명을 승지가 받들지 못한다면 누가 받든단 말이냐. 가주서는 붓을 잡았느냐. 아까 내가 한 말을 적어놓았느냐?"

가주서도 붓을 잡은 채 벌벌 떨면서 아뢴다.

"신하의 도리로 감히 이 전교는 속히 받들어 쓸 수 없습니다. 그리하와 아직 기록하지 아니했습니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기뻐서 세자한테 왕의 자리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공신과 왕후 두 틈에 끼여서 어찌하는 수가 없어 선위를 생각한 것이다. 승지는 차마 자기의 명을 받지 못하겠다고 아뢰고, 가주서는 신자의 도리로 차마 이 전교는 받아 쓸 수 없다는 말씀을 올렸다. 태종의 마음은 기뻤다.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곧 승지에게 말을 내린다.

"그럼 어찌하란 말이냐, 승지가 내 말을 받지 아니한다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냐."

"선위는 중대한 일일 뿐 아니라, 전례에 극히 드문 일이올시다. 일개 승지나 가주서를 통해서 반포하실 일이 아니올시다. 대신들 이하 만조백관들을 모아놓고 하교를 내리시옵소서."

"과인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과인의 심경은 뭇 신하들을 대하기 싫은 까닭이다. 이리하여 정원만을 통해서 반포하려 한 것이다."

가주서가 아뢴다.

"이번 하교는 국가의 대사일 뿐 아니라 백대의 뒤 사기에 소소하게 기재될 큰 사건이올시다. 소신 등 단 두 사람 승지와 주서만을 명소하시어 반포하라 하실 성질이 아니옵니다. 삼가 분부를 거두시고 즉시 대신들을 명소하시어 하문하신 후에 결정하시옵소서. 신 등은 감히 분부를 거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태종은 두 신하가 다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곧 내관을 불렀다.

"영의정 이하 좌·우의정과 육조판서며 각 아문 장관들을 지급히 명소하라."

", 봉행하겠습니다."

어전 내시는 걸음을 빨리 추창해 나가면서 곧 부하 내시들을 불러서 조정 백관들을 명소했다. 내관들은 대전 별감들을 각처로 보내서 지급히 입시하라는 어명을 전했다. 장관과 백료들은 각처에서 황급하게 모여들었다. 상감 태종은 아까 승지한테 내린 말을 되풀이했다. 삼정승 이하 백관들은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만조백관 중에 더한층 놀란 사람은 정국공신 이숙번 이하 혁명공신의 계통이었다. 이숙번이 장중한 태도로 전하를 우러러보며 아뢴다.

"정국공신 이숙번 아뢰오. 선위 말씀이 이 웬 말씀이오니까. 만약 이 말씀 한마디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백성들은 마음이 흔들려 어찌할 바를 모를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니다. 다시는 이 말씀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영의정 이화가 출반하여 아뢴다.

"이 어찌 된 일이오니까. 어제까지도 백성들의 질고를 근심하시던 전하께서 돌연 선위하시겠다 하니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는 듯합니다. 영의정뿐 아니라 종실의 한 사람으로 반대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화의 말을 듣고 있던 또 한 사람이 나와서 아뢴다.

"불가합니다."

모두 다 바라보니 개국 공신 성석린이다.

"전하, 선위란 뜻밖의 분부십니다. 태상왕 전하를 도와서 국가를 창설한 개국 공신의 한 사람으로 소리를 높여 반대합니다. 선위란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어야만 부득이 선위를 하는 것이올시다. 상감의 춘추가 노래하시어 정신은 희미하고 국사는 다난하니 어찌할 수 없어서 아드님인 왕세자한테 왕위를 넘기는 것이 선위올시다. 그렇지 아니하면, 환후가 골수에까지 침노하여 부지할 기력이 없을 때 하는 수 없이 상감의 후계자한테 선위를 내리는 것이 둘째올시다. 또 그렇지 않다면 국가의 형편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자의로 정치를 집행하지 못하고 의세의 지배를 받았을 때 외세는 그 나라의 임금을 폐위시키고 강제로 선위하게 하는 예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역사적으로 모두 다 선위하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국가의 형편으로 볼 때 전하께서는 선위하실 하등의 조건이 없으십니다. 위로 상왕 전하께서옵서 아직 생존해 계시고 전하께오서 연부역강하신 오늘날 또다시 상왕이 되실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절대로 선위 명령을 받들 수 없을 뿐 아니라 만백성이 전하의 선위하신다는 말씀을 듣는다면 깜짝 놀라서 의자할 바를 모를 것이올시다. 신 등은 전하께서 천위를 빌려 강압해서 선위하신다 해도 절대로 그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당장 즉석에서 분부를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개국 공신의 자격으로 간곡하게 말씀을 올리는 성석린의 계주는 보통 신하들의 계주보다 천 근의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전하는 체면상 당장 선위하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대로 버티어본다.

"그대들이 간곡하게 만류하는 충성스런 뜻을 과인은 아름답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선위한다는 일은 깊이깊이 생각하고 반포하는 것이다. 경들은 나의 이미 결정한 뜻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말하지 아니한다. 그대들은 물러가 이 뜻을 조정 백관한테 전하고 만백성에게 반포하라."

전하는 말을 마치자 옥좌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뜻밖에 일어난 전하의 선위 문제는 크나큰 파문을 조정에 던졌다. 재상들은 빈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두들 황망한 얼굴로 의논이 분분했다. 빈청으로 재상들이 모이자, 개국공신 성석린이 먼저 장로의 자격으로 입을 열었다.

"대감들은 시임 대신이요, 대장들이니 대강 상감의 뜻을 짐작하리라 생각하오. 도대체 상감께서 선위하신다는 말씀이 어찌해서 나왔소.?"

영의정 이화와 대장군 이숙번을 향해 묻는다. 영의정 이화는 태종의 서삼촌이다. 사람된 성격이 극히 안온했다. 이렇기 때문, 그 어지러운 집안싸움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하면서 아무런 풍파도 없이 지내왔고, 지금은 태종의 눈에 들어서 영의정이란 큰 임무를 맡았다.

"그저 상감의 심경에 잠간 변화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면 별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 조신들이 일치단결이 되어 선위를 못하시도록 만류한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화는 안상하게 대답했다. 성석린은 영의정의 대답이 너무나 모호하다고 느꼈다.

"영상대감 말씀은 너무나 설명이 부족합니다. 어찌한 까닭으로 상감께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셨습니까? 이 점을 소상하게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대장군 이숙번이 영의정을 대신해서 은실 같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컬컬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성대감께서도 짐작하실 텐데, 하필 우리들한테만 묻습니까? 전하의 심경이 선위까지 하시려 한 것은 역적인 민가네들의 탓입니다."

이숙번은 무식한 말씨로 언성을 높여서 대답한다.

"민씨네들은 이미 처형까지 당해서 자진된 사람들인데 죽은 송장들이 살아나서 상감의 선위를 강요할 까닭이 없고, 상감께서도 좀 지나친 생각이 아니겠소?"

성석린은 조신한 말로 캐물으면서 조정과 지밀에 떠도는 기미를 살피려 했다.

"허허, 대감! 죽은 송장들이 풍파를 일으키는 것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지금 중전께서는 상감께 대해서 원망이 자심하십니다. 날마다 내 형제를 왜 죽였느냐고 상감께 대들면서 공갈이 대단하신 모양이올시다. 요사이 세자께서 중국에 행차하셨다가 환국하신 후에는 중전마마의 기세가 한층 더 하신 모양이올시다."

성석린이 묻는다.

"중전마마께서 무슨 기세를 부리신단 말씀요?"

이숙번이 손사래를 지어 흔들며 대답한다.

"말하자면 친정을 위하여 야단을 치시는 것이겠죠. 그러나 국법은 엄한 것이고 형제 정은 사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형제의 사정으로 인하여 역적질을 한 형제를 두남둘 수는 없는 일이올시다. 그러나 왕후마마께서는 형제를 죽였다 하시어 나날이 상감을 원망하시고 협박하시니 상감의 심경은 만사가 다 귀치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래서 선위하시겠다는 결심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대장군 이숙번은 민씨네 형제를 역적으로 몬 장본인이다. 슬며시 왕후 민씨의 행동을 잘못한다고 귀결지어버린다. 이숙번의 설명을 듣는 개국 공신 성석린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성석린도 조정과 왕실의 내막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좌석의 공론을 바로잡기 위하여 차근차근 질서를 잡아 묻기 시작한 것이다. 성석린은 다시 좌중은 살펴본다.

"자아, 그럼 우리들은 상감의 심경을 받들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소. 일치단결해서 선위하신다는 마음을 돌려놓아야 하겠소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상감의 심경을 돌려놓게 하겠소?"

좌중을 향하여 묻는다. 이숙번이 대답한다.

"아까 어전에서 영의정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들 군신 일동은 대전 앞에 짚자리를 깔고 석고대죄를 드려서 상감의 마음을 돌리기로 합시다."

영의정 이화가 이숙번의 뒤를 이어 다시 대안을 말한다.

"물론 조신들도 석고대죄를 드려서 전하의 심경을 돌려보려니와 내 생각에는 또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소이다."

영의정의 좋은 방법이 있다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들어 이화를 바라본다.

"무슨 방법이 또 있습니까?"

성석린이 이화한테 묻는다.

"세자저하께서 친히 대전에 납시어 석고대죄를 드린다면 일은 더한층 잘되리라 생각하오. 세자의 도리에도 맞고 모든 일은 순성될 듯하오."

졍의정 이화의 발론을 듣자 개국 공신 성석린의 입이 딱 벌어진다.

"참으로 좋으신 의견입니다. 그쯤 되면 전하의 심경은 크나큰 변화를 일으키시리라 생각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누가 세자께 가서 서고대죄를 드리시라고 말씀을 올려야 할 것 아닙니까> 누가 가야 하겠습니까?"

성석린은 다시 좌중을 향해 묻는다. 영의정 이화가 대답한다.

"내 생각에는 내가 영의정이니 세자궁으로 가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고 석고대죄를 하시라고 전했으면 좋겠소이다만, 왕실의 계보로 따져서 너무나 촌수가 가깝습니다. 이 점을 살피시어 개국 공신께서 앞을 서시고 다음엔 이숙번 대장군께서 따르시어 세자를 움직이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영의정의 말을 듣자 대장군 이숙번은 손을 저으며 펄쩍 뛴다.

"아니됩니다. 내가 가면 될 것도 아니되오."

성석린이 이숙번을 향하여 묻는다.

"어찌해서 대감은 부정을 하시오. 왜 아니됩니까?"

"지금 중전마마와 왕세자께서는 민씨를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사람이 곧 이숙번이라 해서 나를 씹어 자시려 하는 판인데, 내가 갔다가는 될 일도 아니됩니다. 개국 공신께서 혼자 가셔도 성공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수고스러우시지만 성대감께서 한번 행차를 하십시오."

성석린은 이숙번의 말을 약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웃는 낯으로 받아들였다.

"여러분의 의향이 정 그러시다면 내가 동궁으로 가서 세자저하를 모시고 오리다."

성석린은 말을 마치자 세자궁으로 향했다. 이때 세자는 동궁에서 태종이 선위한다는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개국 공신 성석린이 명자를 들여보내자 세자는 흔연히 맞아들였다. 그의 개국 공신인 점을 생각하여 세자는 친히 뜰 아래까지 맞이했다.

"개국 공신께서 누지에 왕림하시니 웬일이시오니까?"

원래 동궁에는 정치하는 관리들이 출입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조신 중에도 다만 글을 강론하는 문신들이 시강 때 스승의 자격으로 드나들 뿐, 행정을 맡은 관리들의 출입은 절대로 없었다. 만약 이같은 사람들이 동궁에 출입하게 되면 크나큰 의혹을 받는 때문에 동궁인 세자도 근신하는 의미에서 정치하는 재상들과 일부러 만나는 것을 피하지만, 재상 자신들도 공연한 쓸데없는 유언비어가 나돌면 신상에 좋지 아니하므로 일체 동궁 출입을 스스로 엄금하는 것이다. 뜻밖에 개국 공신 성석린의 찾아온 통지를 받은 세자는 한편으로 반가웠고 한편으로 의아했다. 성석린이 당에 올라 세자께 향하여 문후를 드리니, 세자는 답례한 후에 화려한 웃음을 띠어 묻는다.

"재상으로 세자를 찾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의 좋은 풍속이올시다. 그러나 오늘 이같이 찾아주시니 감사하온 말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무슨 좋은 바람이 불어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하께서 멀리 명나라의 사신의 직책을 띠고 많은 일을 하고 돌아오셨는데 한 번도 문후를 못드려서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문후를 드릴 겸 뵈러 왔습니다."

성석린은 붉은 얼굴 흰 수염에 화려한 미소를 띠고 세자께 사뢴다. 동궁 시녀들은 특별히 개국 공신 성석린을 위하여 차를 받들어 내왔다. 성석린은 두어 모금 마신 후에 명나라 황제를 만나본 세자께 중국 소식을 물었다. 세자는 본 대로 느낀 대로 명나라 황제 만난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다시 더운 차가 나왔다. 성석린은 한동안 후에 태종의 양위 문제를 비로소 꺼냈다.

"저하께 아뢰옵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대전에서 일어난 일을 아시옵니까?"

돌연 묻는 개국 공신의 이 말에 세자는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세자는 고개를 들어 묻는다.

"대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세자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모르십니까?"

"말씀해주시오."

"대전께서는 선위를 하시겠다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세자는 비로소 깜짝 놀란다.

"선위라니, 왕의 자리를 내놓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구한테 선위를 한다 하십니까?"

세자의 까만 눈은 반짝반짝 빛나며 성석린을 바라본다. 성석린이 세자한테 수심을 띠고 대답한다.

"두 말씀 아뢸 것이 없이 세자저하께 선위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자는 잠깐 눈을 감는다. 어머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외삼촌 민무질, 민무구의 얼굴이 보인다. 제주도에서 어명을 받아 목을 매어 자진해 죽는 꼴이 보였다. 한라산 밑 낙락장송 위에 뻗은 솔가지에 외삼촌 형제가 장탄식을 하면서 베 수건에 목을 매어 죽는 꼴이 보였다. 혓바닥을 길게 늘이고 눈을 부릅뜬 채, 솔가지에 축 늘어져 매달려 있는 외숙들의 흉악한 모습들이 보였다. 끔직스런 최후의 종막이다. 왕후의 동생이요, 세자의 외숙이요, 부원군의 아들의 종말이 이같이 불행하게 될 줄은 꿈에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황차 그들은 부왕을 도와서 왕위에 나가도록 방석, 방번을 제거시킨 공신 중에 가장 공이 큰 원훈의 한 사람이다. 모두 다 자기 자신의 욕심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때문이다. 끝없는 욕심, 한없는 야망으로 인하여 외숙들은 비명횡사를 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김한로의 딸과 약혼까지 시켜 놓고 또다시 딴 뜻을 품어 자기를 명나라 황제의 사위가 되도록 애를 쓰고 노력했다. 이 사건도 기실은 자기를 위해서 한 일보다도 그들의 무한대한 욕심을 그대로 펼쳐놓은 때문이다. 세자인 자기를 끔찍하도록 위해서 명나라 황제의 딸로 세자빈을 삼으려 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세력와 권세를 명나라와 조선 천지에 활짝 더 펼쳐서 정권을 독점해보자는 야욕에서 그같은 엉뚱한 수작을 했던 것이다. 결국 욕심은 이 비참한 사건을 일으켜서 역적으로 몰려 비명횡사를 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바마마의 선위 문제는 외숙들의 사건과 직결이 된다. 동생들을 비명으로 잃어버린 어마마마는 동생들을 자진시킨 아바마마께 불덩이같이 대항했을 것이 분명하고, 아바마마는 후궁의 아들을 죽일 계획을 꾸몄다는 민씨 형제에 대해서 분노가 컸을 것이 확실했다. 어마마마의 남자 같은 성격으로 보아 낮과 밤으로 아바마마를 핍박했을 것은 환한 이치요, 아바마마는 세상만사가 귀치 아니하니 임금의 자리를 내놓아 자기한테 왕의 자리를 선위하자는 것이 아닌가. 세자는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고개를 가만히 가로 흔들었다. 아바마마의 성격으로 보아 어마마마한테 밀려서 임금의 자리를 내놓겠다고 할 놀록한 분이 아니다. 아바마마는 외숙의 열 갑절, 스무 갑절 욕심이 더 강한 분이다. 그는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여 할아버지의 적이 되었다. 동생을 둘씩이나 죽였다. 매부 이제를 죽였다. 이런 분이 임금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일은 그의 성격상으로 보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일부러 한번 해보는 수작이라 생각했다. 세자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후에 모든 일이 눈앞에 환하게 비쳤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성석린을 바라본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부왕 전하께옵서 왕의 자리를 내놓겠다 하신다고 아드님의 도리에 선뜻 받으실 도리는 없습니다."

성석린은 세자의 눈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렇소이다. 자식의 도리에 어찌 선위하시는 것을 즐겁게 받겠습니까?"

세자는 이같이 대답했다.

"세자저하께서도 동감하시니 실로 신자의 마음이 기쁩니다. 감축하외다."

세자도 성석린의 마음을 다시 더듬어본다.

"그럼 나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면 좋겠소?"

세자는 일부러 부드러운 얼굴빛을 지어 성석린한테 묻는다.

"선위하신다는 분부를 거두시라고 대궐에 들어가시어 석고대죄를 드리셔야 합니다."

"석고대죄라뇨?"

세자는 샛별 같은 눈을 반짝 떴다. 성석린이 허리를 굽혀 아뢴다.

", 석고대죄를 드리셔야 합니다."

"석고대죄라는 것은 죄인이 '잘못했습니다' 하고 거적자리를 깔고 머리를 풀고 맨발로 엎드려서 죄를 청하는 것을 석고대죄하고 아니합니까?"

", 그렇습니다. 세자저하께서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바마마께 죄를 진 일은 없는데 왜 석고대죄를 합니까?"

세자의 눈은 날카롭게 성석린의 얼굴을 쏘아본다.

"선위를 하시겠다는 황송한 처분을 내리셨으니 차마 못 받으시겠다고 석고대죄를 하시는 것입니다. 꼭 죄를 진 죄인이 되시어 석고대죄를 드리는 것이 아니올시다."

"선위는 아바마마께서 하신다 했지 내가 임금의 자리를 내줍시사하고 말한 일은 없는데, 그게 웬 말씀입니까?"

성석린은 한 번 미소를 풍겼다.

"그것이 예법이올시다. 아들이 되신 도리입지요."

세자는 역했다.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의논도 없이 자기 맘대로 혼자서 선위를 한다고 말을 내어놓고, 아들은 까닭도 없이 죄인 행세를 해서 석고대죄를 드려야 한다는 일은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죄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선위하시는 것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엎드려 사양하는 일은 천만 번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석고대죄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치에 합당치 아니합니다."

"대체대로 말씀한다면 세자저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일이 중대하니만큼 아바마마의 마음을 돌리시게 하기 위하여 그러한 방편을 써보는 것입니다. 말씀드리자면 효자의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온 행동입지요. 세자저하, 굽어살피옵소서."

세자는 그래도 역겨웠다. 아무리 부자지간에 하는 행동이라 하나 일은 광명정대해야 하는 것이다. 죄인이 아닌 아들이 죄인 노릇을 한다는 것은 불쾌하기 짝없는 것이다. 세자의 마음은 불쾌했다. 곧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싶었다. 머리에 쓴 세자의 관을 홱 벗어서 방석 위에 내어던졌다. 성석린은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황송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올려야 할지를 몰랐다. 세자는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세자는 아버지의 하는 일이 모두 다 거짓이라고 판정을 내렸다. 이번에 임금의 자리를 내놓겠다고 떠들어대는 것도 일종의 성실하지 못한 거짓 행동이라 생각했다. 할아버지, 곧 돌아간 태상왕 전하와 아버지는 부자지간에 원수가 되었다. 이것은 결국 임금의 자리 때문이다. 이 필생의 힘을 다 들인, 삼강오륜까지 무찔러버린 그 소중한 왕의 자리를 까닭 없이 헌신짝 버리듯 자기한테 내줄 아버지가 아니다. 반드시 이면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외삼촌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논 후에 어마마마인 아내의 뼛골 속까지 사무친 한을 낮추어주기 위해서 한번 선위 문제를 탁 던져본 것이 분명했다. 가식이다. 아버지의 진솔하지 못한 가식적인 이 태도에 휩쓸려서, 어릿광대짓을 해야만 한다는 일은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성석린은 이 짓을 효자의 짓이라 해석했다. 성석린도 쓸개빠진 사람이로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세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성석린을 바라본다.

"석고대죄를 드리고 사양하는 일이 곧 효자의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합니다."

성석린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한다.

"효자도 거짓말을 합니까?"

세자는 못마땅한 듯 다시 묻는다.

"어떠하신 하문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의 자리를 내가 내놓으시라고 한 일도 없고, 선위를 하시겠다 해도 받을 뜻이 없는 내가 거짓 죄인 노릇을 해서 석고대죄를 드린다는 일은 역시 가식입니다. 이러한 거짓 행동을 하는 일이 효자의 짓이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성석린은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세자께서 선위를 받으실 생각이 없으시더라도 한번 석고대죄를 드려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짓은 아닙니다. 미안하고 황송쩍다고 드리시는 것입니다. 그저 사양하는 예법이죠."

세자는 성석린의 말을 콧방귀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아바마마의 행동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홀연히 일어났다. 이번에 아버지 행동을 한번 시험해본 후에 자기 자신의 한평생 일을 결정해보리라 하는 어떠한 중대한 생각이 일어났다.

"좋소이다. 석고대죄를 드리겠습니다."

세자는 말을 마치자 입술을 꽉 다물었다. 결연히 무슨 행동을 결정한 표정이 얼굴에 뚜렷이 나타났다.

"황공 감격하옵니다."

성석린은 세자 앞에 절하고 물러난다. 세자궁에서 세자의 석고대죄 드릴 준비를 차렸다. 세자빈이 상궁과 함께 세자의 예복을 받들어 나왔다. 세자는 예복을 발길로 걷어찼다.

"죄인이 무슨 놈의 예복을-."

"석고대죄를 드리시는데 정복인 세자의 예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상궁이 부드러운 말로 조심성 있게 아뢴다.

"석고대죄란 죄인이 드리는 일이다. 죄인의 몸에 세자의 정복이 웬 말이냐."

"전례에 석고대죄를 드리시게 되면 정복인 예복을 입으셨습니다."

"전례고 후례고 다 그만 집어치워라. 나는 내 법대로 하겠다."

세자는 소리치면서 상투 끝에 손을 얹었다. 붉은빛이 나는 산호 동곳을 뽑아 던졌다. 상투를 풀어 던졌다. 머리가 흩어져 산발이 된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다. 대님을 끌렀다. 버선을 벗었다. 바지통을 벗고 맨발로 일어섰다.

"나가자!"

큰소리로 외친다. 궁녀와 동궁빈 김씨가 뒤를 따랐다. 뜰 앞에는 춘방사령들이 세자의 석고대죄 드릴 거적을 들고 서 있다. 세자는 춘방사령한테 영을 내린다.

"대전 마당으로 가자!"

거적을 든 춘방사령들이 앞에 서고, 세자는 머리 풀어 산발하고 발 벗고 뒤에 따랐다. 세자빈과 상궁이 또 그 뒤를 따랐다. 대내 안은 큰일이 난 듯 수군거렸다. 대전에 직속되어있는 몇 사람의 지밀상궁들은 돌연 일어난 선위 문제를 짐작하지만, 나머지 대다수의 궁녀들은 이 극비의 일을 알 까닭이 없었다. 머리 풀어 산발하고 맨발로 걸어가는 세자의 모습을 바라보자 깜짝들 소스라쳐 놀란다.

"웬일이시냐. 세자마마께서 맨발로 땅을 밟으시고 머리까지 풀어 산발하셨으니 웬 변고냐."

"글세 말이다."

모두 다 눈들을 휘둥그렇게 떴다.

"상제처럼 머리는 왜 푸셨나. 무슨 불길한 일이 그동안 생겼나?"

"괴상한 일이다."

모두들 한 마디씩 지껄였다. 그중에 기미를 아는 궁녀 한 사람이 소곤댔다.

"지밀상궁한테 잠깐 들으니, 상감께서는 왕 자리를 내놓겠다 하셨대. 그래서 세자께서는 왕의 자리를 아니 받으시겠다고 석고대죄를 드리러 가시는 모양이지."

"석고대죄를 드리는데 왜 머리를 풀어 산발하시고 버선까지 벗으셨나?"

"석고대죄는 죄인으로 자처해서 드리시는 것이니 머리를 풀고 발을 벗으신 것이지."

"전에 궁녀들이 석고대죄를 드리는 것을 보니 그대로 민옷으로 대죄를 드리던데."

"세자는 효자시거든. 그러니까 아버님의 마음을 더욱 감동시켜 드리느라고 머리를 풀고 발을 벗어서 지극하신 뜻을 표하시는 것이지. 참으로 세자는 효자시다."

대궐 안 궁녀들은 비로소 대전마마가 임금의 자리를 내놓겠다 하고, 세자는 아니 받겠다 하는 선위 풍파를 알게 되었다. '세자는 효자다' 하는 소리가 대궐 안에 자자했다. 세자는 대전 앞에 당도하자 뜰 아래 거적자리를 깔고 머리를 풀어 산발한 채 엎드렸다. 동궁빈과 궁녀들이 뜰 아래 가득히 시립했다. 대전내시가 큰소리로 외친다.

"상감마마께 아뢰오. 세자께옵서 석고대죄를 드리오."

어전에 모시고 있는 상궁이 나와서 세자의 석고대죄 드리는 모습을 살피고 대전 안으로 사라졌다.

"세자저하께서 석고대죄를 드리옵니다."

"?"

태종은 시치미를 딱 떼고 묻는다.

"선위하신다는 하교를 소문 들어 아시고 불안하고 황송하와 석고대죄를 드리신다 합니다. 선위하신다는 분부를 거두어주십소사 하옵니다."

태종은 다 알고 있건만 검다 희다 말이 없다. 지밀상궁이 또 아뢴다.

"세자저하의 효성은 참으로 지극하시옵니다. 머리를 풀어 산발하시고 맨발로 땅을 밟아 걸어오셨습니다. 그리하옵고 그대로 대죄를 드리십니다."

태종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발을 벗었어?"

", 그러하십니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기뻤다. 그러나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뜰 앞에서 어전 내시의 쨍쨍한 목소리가 또 들린다.

"세자궁, 석고대죄요."

메아리 소리가 떨어지자, 지밀상궁이 또 아뢴다.

"처분을 내리셔야 합니다."

"내 뜻은 이미 결정한 것이니 그대로 물러가라고 일러라."

지밀나인은 밖으로 나갔다. 뜰 아래 내려 석고대죄한 세자의 앞으로 가까이 갔다.

"대전마마 분부십니다. 내 뜻은 이미 결정한 것이니 그대로 물러가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세자는 엎드린 채 잠자코 말이 없다. 동궁 소속 상궁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동궁 소속 상궁이 속삭인다.

"세자마마께 아뢰오. 대전마마께오서는 환궁하시라는 분부가 계시오나, 마마께오서는 그대로 더 계셔야 합니다."

세자는 마음속으로 쑥스럽다고 생각했다. 화가 불끈 일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참뜻을 알아보려고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한 바 있었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불덩이를 꽉 참고 엎드려 있었다. 정원에서는 이숙번, 성석린, 이화 등의 공신들이 세자의 석고대죄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승지를 통하여 상소를 올렸다. 도승지 이하 좌승지, 우승지, 동부승지들이 백관들의 상소를 받들고 들어왔다. 합문 내시는 쨍쨍한 목소리로 거래를 드린다.

"승정원 승지들이 백관의 상소를 받들어 들어왔소."

어전 내시는 전 밖으로 나와 승지한테 상소문을 받아가지고 들어갔다.

'세자께서 석고대죄까지 드리시니 전하의 선위하신다는 말씀은 만만 부당합니다.'

하는 상소다. 전하는 내시가 받들어 들여오는 상소문을 친히 읽었다. 모든 신하들이 세자의 석고대죄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선위한다는 전하의 분부를 거두어 달라는 간곡한 당부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또 한 번 기뻤다. 그러나 당장 선위한다는 말을 거둘 수는 없었다. 체면도 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얼굴빛을 바로잡고 어전 내시한테 엄숙하게 분부를 내린다.

"승정원에 나가서 승지를 들라 해라."

어전 내시는 급히 승정원으로 나가서 승지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태종은 승지한테 말씀을 내린다.

"지금 백관들이 올린 상소문은 가상하게 읽었다. 너희들 백관들의 지극한 충성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태종은 잠깐 말씀을 끊고 침을 삼켰다. 태종은 말씀을 다시 계속한다.

"그러나 과인의 마음은 이미 결정한 바가 있다. 백관들은 앞으로 세자를 도와서 좋은 임금이 되게 하고 훌륭한 정치를 하게 하라. 과인은 종기가 생겨서 몸이 몹시 괴롭다. 뿐만 아니다. 이제 몸이 매우 피곤하다. 이 뜻으로 비답을 써서 만조백관에게 전하라."

승지는 어전에서 비답을 썼다. 태종의 수결을 맡은 후에 물러갔다. 한편 세자는 여전히 석고대죄를 드리고 있었다. 아바마마께서 선위하겠다는 말씀을 거두시기까지 물러나지 않고 석고대죄를 드리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자는 속에서 부아가 불끈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꾹 참았다. 아바마마의 진심이 끝끝내 어찌 되는가 하고 하회를 기다려보자는 생각이었다. 해는 어느덧 석양이 되어 꺼지기 시작했다. 세자는 이제 진력이 날 지경이었다. 동궁 소속의 상궁이 대전 상궁한테 전갈을 또 전한다.

"세자마마께서 진종일 석고대죄요. 선위하신다는 분부를 빨리 거두어주시기 바라오."

대전상궁은 동궁상궁의 전갈을 지밀로 들어가 태종께 고했다. 태종은 상궁을 통하여 하교를 내렸다.

"내 마음은 이미 결정한 지 오래다. 세자는 내 뜻을 받들어 왕위에 나간 후에 좋은 정치를 하여 백성들의 추앙을 받으면서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는 어진 임금이 되라."

세자는 대전상궁이 전하는 부왕의 전교를 들었다. 그러나 아바마마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말씀이 아니라고 또다시 생각이 들었다. 동궁 소속 상궁은 세자의 석고대죄가 너무나 오랫동안 지체되는 것이 민망하다고 생각되었다.

"세자마마, 아무리 괴로우시지만 잠깐만 더 참으십시오. 밤 안으로 어떻게 결말이 나겠습지요."

소곤소곤 속삭였다. 세자는 아버지의 본심을 살피기 위하여 염통속에서 끓어오르는 화기를 누르고 다시 더 하회를 기다려본다. 한편 빈청과 정원의 회동해있는 재상과 공신들은 종기가 있어 몸이 몹시 괴롭다는 태종의 비답을 받자 곧 백관들을 소집해서 어전으로 들어가 뵙기를 청했다. 상소문만 가지고 될 수 없다 해서 공신 이하 시·원임 대신들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과, 삼사 관원까지 합해서 뵙기를 청한 것이다. 이때 밤은 점점 깊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각 앞에는 황사초롱, 청사초롱이 열을 지어 휘황찬란한 불빛을 뿜어 불야성을 이루었고 만조백관이 들어와 부복한 옆에는 세자의 석고대죄하는 모습이 보였다. 영의정 이화와 대장군 이숙번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내관을 통해 아뢴다.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서 선위하시는 일이 부당한 것을 밝혔사온데, 그래도 불구하시고 전하께서는 따로 생각한 바가 있다 하시면서 신들의 큰 소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시니, 실로 신들의 마음이 황공하옵고 민망합니다."

태종은 계속해서 다음 말을 들으신다.

"전하께서는 세자의 지극한 효성도 받아들이지 아니하시고 소신 등 만조백관의 뜻을 거부하시고 또한 억조창생인 백성의 뜻도 아랑곳없는 듯 무시하시니 천지신명이 놀라시리라 생각합니다. 전하께서는 아직 연부역강하십니다. 비록 작은 종기가 나셨다 하나, 이것쯤으로 나라를 버리시고 백성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곧 선위하신다는 말씀을 속히 거두어주소서. 그렇지 않다면 소신들은 세자와 함께 한데서, 전하께서 마음을 돌리실 때까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밤을 새우겠습니다."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또 한 번 아뢰는 이화의 말은 내관을 통하여 전하한테 들어갔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또 한 번 기뻤다. 그러나 내시한테 엄한 표정을 짓고 분부를 내린다.

"백관들이 들어왔다 하니 몇 명이나 되느냐?"

"대전 뜰 앞에 가득히 모였습니다. 삼사 관원까지 합쳐서 수백 명 되리라 생각됩니다."

"상소만이 아니라 백관들이 알현을 청하는데, 아니 대해볼 수 없다. 교의를 내놓으라. 내가 친히 나가보리라."

전하의 분부가 떨어지니 내관들은 황망히 용탑을 대전 월대로 옮겼다. 전하는 내시의 부액을 받고 용탑에 앉았다. 군신들은 선위한다는 왕을 바라보자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 없는 모양이다. 만세를 불렀다. 영의정 이화는 군신의 앞에서 다시 아뢴다.

"전하, 만백성의 뜻이옵니다. 선위하신다는 말씀을 거두어줍시오."

태종은 비로소 점두해 고개를 끄덕였다. 옥음을 낭랑히 내린다.

"경들의 지극한 정성과 세자의 효신을 생각해서 선위한다는 말을 거두리라."

비로소 태종의 선위 않겠다는 선언이 떨어졌다. 만조백관들은 환성을 질러 또 한 번 만세를 불렀다. 태종은 다시 옥음을 내린다.

"세자를 부축해 일으키라."

상궁이 머리 풀어 산발한 세자를 일으켰다.

"석고대죄를 그만두게 하라. 세자의 지극한 효심이 나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 더구나 머리 풀고 발을 벗어 지극한 마음을 표현한 일은 내 마음을 더한층 흔들어놨다. 가상하다. 과인은 세자의 효심에 감동되어 선위한다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겠다."

군신은 또 한 번 만세를 부른다. 세자는 머리 풀어 산발한 채 두 손을 모아들고 아바마마 앞에 고개를 숙여 서 있을 뿐이었다. 세자는 마음속으로 싱겁기 한량없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태산명동 서일필 격이었다. 임금 노릇을 그만두겠다고 그다지도 강경하게 버티던 아바마마는 군신들의 간곡한 청과 아들인 세자의 효심에 감동이 되어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겠다는 것이다. 세자는 자신이 예측한 것과 일호의 틀림이 없이 꼭 들어맞았다. 전각 월대 앞에 서 있는 승지는 큰 소리로 외친다.

"아뢸 일이 있으면 아뢰고, 아뢸 일이 없으면 조회를 파하라."

정승 이하 만조백관들은 다시 더 아뢸 일이 없다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월대에서는 또다시 큰 소리가 떨어진다.

"국궁 배하망"

소리가 구절을 맞추어 가락을 지어 일어난다. 만조백관들은 부르는 소리에 따라 몸을 굽히고 절을 하고 용상을 향하여 주목했다. 또다시 만세 소리가 일어났다. 전하는 내시의 부액을 받고 내전으로 몸을 돌리고, 정승 이화와 원로 성석린은 세자 앞으로 나왔다.

"지극하신 효성으로 인하여 상감께오서 굳은 뜻을 돌리셨으니 이런 기쁠 데가 없습니다. 이제는 어서 동궁으로 듭시옵소서."

세자는 기가 찼다. 자기는 어떠한 효심도 가져본 일이 없다. 공연히 사람을 끌고 나와서 한바탕 어릿광대짓을 하게 만들어놓고, 이제는 효자 감투를 씌워서 하늘 꼭대기까지 올려놓는 것이다. 아버지도 자기를 이용한 것이요, 소위 공신인 정승, 판서란 자들도 자기를 이용한 것뿐이다. 세자는 허탈된 너털웃음을 한 번 껄껄 웃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바마마도 이미 대전 내실로 들어갔다. 개콧구멍 같은 정승, 판서를 상대로 하여 너털웃음을 웃기는 웃음 값이 너무나 싸다고 생각했다. 어미에 번개같이 어머님 생각이 번쩍 났다. 한 번 어머님한테 외면치레로 그의 격분된 마음을 낮추어보자는 놀음밖에 아니 된다. 세자는 문득 어마마마를 만나 뵙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이때, 옆에 모시어 있던 세자빈이 상궁을 시켜서, 경대소입과 의대 상자를 바치게 했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었다. 산발한 머리털을 끌어올려 다시 상투를 틀고 의복을 단정하게 입으라는 뜻이다. 세자는 엄숙하게 명령을 내린다.

"집어치워라. 그대로 걸으리라."

세자의 얼굴엔 장중한 빛이 떠돌았다. 휘적휘적 걸었다. 세자빈과 상궁은 경대소입과 의대함을 받들고 세자의 뒤를 따랐다. 합문밖을 나가니 무예청들이 세자가 탈 자비를 등대하고 있다가 얼른 세자의 앞으로 나갔다.

"옥교에 오르시옵소서."

이제는 석고대죄하는 죄인이 아니니 옥교에 올라 동궁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상투도 아니 튼 채 울분한 마음을 가슴에 가득 품고 맨발로 걸어가는 세자가 옥교에 오를 리가 만무했다.

"머리 풀어 산발하고 맨발로 걸어가는 주제에 옥교를 탈 수 있느냐. 벌거벗고 환도 차라는 말과 똑같구나. 하하하."

세자는 드높게 홍소를 멋지게 던졌다. 별안간 어릿광대된 것을 스스로 조롱하는 웃음이다. 무예청들은 무슨 까닭에 세자가 이같이 드높게 허탈진 웃음을 웃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그대로 묵묵히 옥교를 메고 뒤를 따를 뿐이었다. 동궁 소속의 내관을 위시하여 세자빈과 상궁과 무예청들은 줄을 지어, 발 벗고 머리 풀고 가는 세자의 뒤를 따랐다. 금잔디 밭에 길이 두 갈래진 곳에 당도했다. 세자의 발길은 동궁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지 아니하고 왕후 민씨가 거처하는 내전 가는 길로 향했다. 동궁 내시가 아뢴다.

"어느 곳으로 행차하십니까?"

세자는 죄 없는 내시의 정중하게 묻는 말에 가볍게 웃음을 던지며 대답한다.

"?"

"동궁으로 가는 길이 아니옵니다."

세자는 한번 농담을 하고 싶었다.

"세 살 먹은 아인 줄 아느냐. 길을 잃어버릴까 해서.?"

"아니올시다. 황공하여이다. 동궁으로 환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동궁이 아니라 내전으로 들어가 왕후마마께 뵈오련다."

이때 세자빈이 상궁이 뒤에 소곤댄다.

"내전으로 듭시어 왕후마마께 뵈시려는 모양인데 저 모양을 하시고 어찌 뵙는단 말이냐. 빨리 앞으로 나가서 의대를 고치시라 아뢰어라."

동궁빈의 걱정은 당연한 걱정이었다. 머리 풀어 산발하고 왕후께 세자가 문안을 드릴 수는 없다. 상궁은 세자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동궁으로 행차 아니하시고 왕후마마께로 가신다 하오면 의관을 정제하셔야 합니다."

"잔소리 작작 그만해라. 웬 참견들이 이리 많으냐."

세자는 돌연 심기가 불평했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세자의 호통 소리에 내시와 상궁이며 무예청들의 목은 자라목 움츠러지듯 움쑥 들어갔다. 왕후전 합문이 눈에 뵈었다.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세자는 내시와 무예청한테 영을 내린다. 감히 누구 한 사람 거역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내시만은 책임이 있었다.

"환궁하실 때 옥교를 타셔야 합니다. 무예청들만은 떨어져 있게 해두겠습니다."

"잔소리 말라니까 또 그러는구나. 발 벗고 머리 푼 죄인이 무슨 놈의 옥교를 탄단 말이냐. 무예청들도 돌려보내라."

세자는 말을 마치자 휘적휘적 걸어서 합문 안으로 들어섰다. 동궁빈도 하는 수 없었다. 더구나 세자의 고집과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동궁빈 김씨였다. 더 다시 뇌까린대야 아무 소용이 없이 세자의 불평한 마음을 더 부채질하는 길밖에 되지 아니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춘방으로 다들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거라."

빈은 한 마디를 던지고 세자께 목례를 드린 후 시녀와 함께 동궁편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편 세자가 내전 합문으로 발을 들여놓자, 왕후궁 시녀들은 깜짝 놀랐다. 대궐 안 지밀에 웬 죄수가 뛰어드나 생각했다. 죄수가 아니면 머리 풀어 산발한 미치광이 거지의 모습이다. 뜰에 서 있던 두어 사람의 젊은 궁녀가 외마디 소리를 치며 자지러지게 놀란다.

"에구머니나!"

궁녀들은 후림불에 꼭 거지나 죄수로 알았다.

"놀라지 마라. 세자다. 하하하."

세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세자인 것을 말하고 한 번 드높게 홍소를 터뜨렸다. 또 한 번 자조의 웃음을 웃어보는 것이다. 궁녀들은 비로소 머리 풀어 산발한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다. 말을 듣고 보니 세자가 분명했다. 땅에 부복했다.

"세자마마 듭시오."

태산 같은 죄를 진 듯, 미안스런 태도로 조잘댄다.

"일어들 나거라. 마마 계시냐?"

", 계시옵니다."

"세자가 문후드리러 왔다고 아뢰어라."

"세자마마 듭시오."

뜰 아래 서 있던 나인의 거래를 받자, 상궁 이하 무수한 시녀들이 뛰어나왔다. 늙은 상궁이 세자의 불성모양이 된 민망스런 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자의 어수를 버썩 붙들었다.

"세자마마, 이 웬일이시오니까? 발까지 벗으시고-."

"하하하. 석고대죄를 드리고 오는 길일세."

"석고대죄라뇨?"

"선위 문제를 거두시라고 대전께 석고대죄를 드렸단 말일세. 그래서 대전께오서는 나의 효심에 감동되시어 선위하신다는 분부를 거두시고 다시 왕위에 나가셨네. 하하하. 그래서 왕후마마께 뵈우러 왔어-."

세자는 '효심'이란 말에 더 힘을 주었다. 늙은 상궁은 바로 곧 왕후마마께로 들어갔다.

"세자마마께서 문안드리러 오셨습니다. 발 벗고 머리 풀고-."

"무어야, 발을 벗고 머리를 풀고 왔어?"

왕후 민씨는 깜짝 놀란다.

"곧 모시고 들어오너라."

늙은 상궁은 전각에 오르는 세자를 내전으로 인도했다.

"온수를 바쳐라."

늙은 상궁은 젊은 상궁들에게 영을 내렸다. 서답방 나인이 은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올렸다. 늙은 상궁은 세자의 발을 은대야에 담은 더운 물로 씻은 후에 중전 침실로 인도했다. 왕후 민씨는 머리 풀어 산발하고 발 벗은 세자를 대해보자 왈칵 눈물이 나왔다.

"석고대죄 드린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았다마는, 머리 풀어 산발이 웬일이냐? 발까지 벗은 채-. 이런 석고대죄는 금시초문이로구나."

"소자가 자진해서 머리 풀어 산발하고 발 벗었습니다. 기왕 죄인으로 자처하여 대죄를 드리려면 짭짤한 죄인 노릇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예복 입으라는 것을 집어치우고 이 모습으로 대죄를 드렸습니다."

"그래, 선위 문제는 어찌 되었느냐?"

세자는 어마마마를 향하여 벙긋벙긋 웃는다.

"아직 모르셨습니까?"

왕비는 세자의 손을 잡고 묻는다.

"세자가 석고대죄 드린다는 말까지는 듣고 그 후의 하회는 아직 듣지 못했다. 어찌 되었느냐?"

"세자의 효심과 만조백관들의 지극한 간엄에 의해서 선위는 그만두기로 한다 하셨습니다. 그리하와 소자는 이제 조선 안에서 첫째가는 효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하하하."

세자의 허청에서 나오는 웃음 가락은 왕후 침실의 문풍지를 울린다.

"그럴 줄 알았다. 세자나, 나나 모두 다 광대 노릇을 한 셈이다."

말을 마친 왕후 민씨는 세자를 바라보면서 맥맥히 눈물을 흘린다.

"그렇습니다. 소자는 한동안 어릿광대짓을 했습니다."

"알고 했느냐, 모르고 했느냐?"

어마마마의 입가에 웃음이 떠돌았다.

"알고 했습니다. 알고 했기에 예복을 입으라고 하는 궁녀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일부러 머리 풀어 산발하고 발 벗고 나갔던 것입니다. 기왕 죄인 노릇을 할 바에야, 짭짤하도록 죄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집 친정을 송두리째 멸문시킨 것이 그래도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한 번 어릿광대짓을 해본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이제 임금 노릇을 아니하고 세자한테 선위한다고, 말하자면 나한테 대한 이면치레지."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소자는 무슨 까닭에 이 고생을 합니까. 상말에, '독 틈에 탕건'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소자의 오늘 같은 경우를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하하."

세자의 허청에서 나오는, 허파가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는 또 한 번 호탕하게 가락을 지었다.

"외수를 꾸민 것이 확실하다. 어떤 욕심쟁이라고 공연히 왕의 자리를 내놀 성싶으냐. 세자의 본 바가 옳다. 너와 나는 어릿광대가 된 셈이다."

왕후 민씨는 말을 마치자 한숨을 짓는다. 세자는 머리 풀어 산발한 채 어마마마 민씨를 향하여 다시금 하소연한다.

"어마마마, 이제 소자는 아바마마의 성격과 행동을 다 알았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어떠하신 분인 것을 이제 다 알았습니다."

왕후 민씨는 아무 대답이 없다.

"어마마마, 소자는 이제 세자 노릇을 그만하겠습니다."

왕후는 깜짝 놀란다.

"그게 무슨 말이냐. 별소리가 다 많구나."

"아니올시다. 세자 노릇 하기가 이제는 입에서 신물이 나도록 싫어졌습니다."

"웬 소리냐. 도대체 너의 어버지께서 선위한다고 하셨다가 도로 왕의 자리에 나갔다고 세자 노릇을 아니하겠단 말이냐?"

"아니올시다. 그것은 너무나 어마마마답지 아니하신 분부십니다. 세자 노릇을 하기 싫다는 것은 곧 다음의 왕이 되기 싫다는 말입니다. 소자는 도저히 왕 노릇 하기가 싫습니다."

"?"

민왕후의 얼굴빛은 심각했다.

"소자는 아바마마처럼 욕심이 없습니다. 불의까지 가는 행동을 해서라도 왕이 되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다. 불인에까지 가는 행동을 해서 왕 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리고 자식과 아내를 이용해서까지 해야만 되는 그 왕 노릇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자의 눈에는 열이 올랐다. 거품을 뿜어 말을 계속했다.

"큰아버지의 높으신 인격과 조촐한 처세에 감동될 때가 많습니다. 어마마마, 소자도 큰아버님의 맑은 덕을 본받아서 세자의 자리를 박차고 방랑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원수가 돼야 하는 이 자리, 아내와 남편이 원수가 돼야 하는 이 자리, 아들을 속이고 백성을 속여서 자기의 이용물이 되게 하는 이 자리, 과연 소자는 감당치 못할 자리올시다. 오늘 소자가 석고대죄를 드린 후에 이 모양을 해가지고 어마마마께 뵈러 들어온 것은 한편으로는 어마마마의 고독하신 것을 위로해 드릴 겸, 한편으로는 소자의 심경을 어마마마께 아뢰러 온 것입니다."

어마마마 민씨는 또 한 번 한숨을 짓고 대답한다.

"세자가 동궁의 자리를 내놓는다면 나는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살겠나. 아예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꺼내서는 아니 되네."

어마마마는 세자를 다시 한번 높이 생각했다. 이제는 이만큼 성인이 되어 큰 사람의 생각을 하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말투까지 저절로 하게조로 변했다. 무심코 나오는 존경사다.

"두고 보십쇼. 소자는 왕 노릇을 못 할 것입니다."

세자는 예언 비슷한 말을 던졌다. 민왕후는 잠깐 생각 속에 빠진다.

"어마마마, 어마마마께서도 이제는 몸조심을 하십시오. 어마마마께서도 아바마마에 못지아니하신 강한 성격과 대단한 욕심이 계시옵니다. 외숙들은 욕심이 많아서 결국 역적으로 몰려 자진하는 기막힌 운명을 당했습니다. 결국 욕심이 사람을 망쳤습니다."

세자의 말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어머니 민씨의 얼굴은 금방 주토 물을 끼얹은 듯 붉어졌다.

"내가 무슨 욕심이 과했나?"

민후는 벌컥 성을 낸다. 세자는 미소를 머금어 어마마마를 바라본다.

"어마마마, 어마마마의 강하신 성격을 말씀하오리까. 욕심 많으신 것을 대드리오리까."

"말을 해보게나."

어마마마도 이제는 미소를 지었다.

"첫째로 아바마마께서 어떤 후궁을 택하셔도 내버려 두셔야 합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관심을 너무 가지십니다. 어마마마, 이것이 어디서 나오신 관심입니까. 어마마마께서는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점하려 하십니다. 이것이 욕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왕후 민씨는 아무 대답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아바마마를 독점하려 드는 어마마마를 아바마마는 강제로 눌러서 억압해버리려 합니다. 파탄은 이곳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마마마께서는 열에 여섯쯤은 지는 체하셔야 할 텐데 어마마마께서는 열이면 열 번, 다 이기려 하시니 파탄은 여기서 또 생겨납니다. 이것은 어마마마의 성격이나 아바마마의 성격이 두 분 다 똑같이 강한 때문이올시다. 병은 여기서 또 나타났습니다. 강한 욕심은 결국 강한 성격을 낳는 데서 날이 가면 갈수록 불협화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마마마, 조심하십시오."

왕후의 얼굴은 또다시 꼭두서니 물감을 끼얹은 듯했다. 이번엔 왕후의 늙어가는 눈초리가 축 처졌다. 눈에는 쌀쌀한 기운이 살며시 떠돌았다.

"쫓아내기밖에 더 하겠느냐. 이제는 혈혈단신 내 몸 하나뿐이다. 친정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오라비들도 다 역적으로 몰려 죽고-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느냐?"

민왕후의 눈에서 눈물이 뎅겅뎅겅 떨어진다.

"어마마마, 고정하십쇼. 소자가 공연한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저 어마마마를 아끼는 자식의 마음에서 '몸조심을 하십쇼' 하고 한마디 말씀을 드리려 한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듣자, 민왕후도 더 역정을 내지 아니했다. 흠뻑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세자의 석고대죄한 일을 위로하지 못하고 긴말로 설왕설래하여 도리어 불안하기 짝이 없네."

말을 마치자 민왕후는 창을 향하여 시녀를 불렀다. 늙은 상궁이 추창해 들어왔다.

"세자께 경대 서랍을 바쳐서 상투를 트시게 하고 의관을 바로 하시게 하라."

늙은 상궁은 경대 서랍과 의대 일습을 올렸다. 세자는 조용히 머리를 빗어 상투를 틀고 의대를 바꾸어 입었다. 벗은 발에 면말을 신고 대님을 맸다. 훤칠하고 아름다운 젊은 세자가 다시 되었다. 세자는 더 어마마마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 아니했다. 어마마마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려 하지 아니했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어마마마께 아뢴다.

"소자는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왕후 민씨도 이심전심 세자의 마음을 더 흐리게 하기 싫었다.

"피곤하겠네. 동궁으로 돌아가 편안히 쉬도록 하게. 감기 아니 들도록 몸조심하기 바라네."

왕후의 주름지기 시작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세자는 어마마마께 배례를 드리고 이제는 옥교에 올라 동궁으로 돌아갔다. 세자는 처소로 돌아가자 마음이 울적했다. 어마마마한테 말씀한 대로 세자 노릇을 하기 싫었다. 추하고 더러운 이 세상이 싫었다. 큰아버지의 깨끗한 생활이 부럽구나 하고 탄식했다. 그러나 큰아버지의 독주를 마시고 세상을 떠난 반항도 상승의 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 죽는단 말인가. 현실에서 도피하지 아니하고 솔직하게 거짓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늘은 왜 사람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가? 가면을 쓰고 한세상을 지내라고 조물주가 사람을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도 세상에서는 창업지주라 하고, 일세의 영웅이라 하지만, 역시 엄밀하게 따져본다면 가면을 쓰고 한평생을 지낸 사람이다. 고려 임금을 섬겨서 무한한 신용을 얻은 후에 상장군에 문하시중에, 정승까지 올랐으면서 그래도 부족해서 결국은 창을 거꾸로 들고 고려를 뺏은 후에 스스로 왕이 되어버렸다. 모두 다 가면이요, 거짓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임금 노릇이 하고 싶어서, 부귀와 권세를 장악하고 싶어서, 서동생인 세자 방석과 그 형 방번이며 매부 이제를 죽인 이 때문으로 할아버지하고는 영영 불공대천의 원수가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다. 겉으로는 아무 욕심도 없는 체 둘째 형님을 왕으로 잠시 모시었다가 이내 선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 기막힌 간웅이었다. 오늘 자기한테 선위한다고 떠들었다가 백관이 만류하고 자기가 석고대죄를 드린 후에 비로소 마지못해 하는 체 다시 왕의 자리에 나간 이 행동도 순전한 어마마마의 격한 마음을 가라앉혀 보게 하자는 가짜 행동이었다. 온 세상이 이 꼴이다. 세자는 한심했다. 마음이 울적했다. 동궁으로 돌아와 내전에도 들르지 아니하고 외전에 누웠다. 동궁 시녀가 나왔다.

"시장하실 텐데 진짓상을 내오리까?"

"시장치는 않다마는 내오너라. 반주를 곁들여 가져오너라."

"알겠사옵니다."

시녀는 내전으로 들어가 마침 준비했던 진짓상에 반주를 곁들여 내왔다. 세자가 반주를 찾은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동궁빈 김씨는 비장해 두었던 천일주를 따끈하게 데워서 보냈다. 세자는 아니 마시던 반주를 서너 잔 마시고 나서 돌연히 취했다. 뜰 앞을 내려다보니 춘방사령이 지나갔다. 어렸을 때 업혀 지내고 흉허물없이 대했던 오랜 사람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세자가 글을 아니 읽는다고 종주먹대던 계림군 이내를 세자편이 되어 놀려주었던 바로 그 춘방사령이었다.

"얘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내전으로 들어가던 사령은 세자의 부름을 받자 월대로 올라섰다.

", 나하고 술 한 잔 마시련."

"황송하옵니다. 세자저하, 어찌 저하를 감히 모시고 술을 마시오리까."

"관계치 않다. 이리 올라오너라."

"천만, 도섭스럽습니다. 분부를 거두시옵소서."

세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루 끝까지 나갔다. 춘방사령의 갈퀴 같은 손을 덥석 쥐었다.

"공식 자리가 아니다. 올라오너라. 관계치 않다."

세자는 춘방사령의 손을 이끌었다. 춘방사령은 황공 감격했다. 세자를 따라 진짓상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가 한 잔 따라줄 테니 마셔보아라."

세자는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춘방사령에게 권했다. 춘방사령은 돌아앉아서 술을 마셨다.

"이제는 네가 나한테 한 잔 권해야 한다."

춘방사령은 고청백자 술병을 잡고 천일주를 옥잔에 가득 부어 세자께 바쳤다. 세자의 술잔은 자그마한 옥잔이요, 춘방사령의 술잔은 큼직한 사발이었다.

 

자학 풍류

세자는 후래삼배라 하면서 사령한테 석 잔 술을 더 권했다. 술은 몇 잔씩 더 오고 갔다. 세자는 울적한 심회를 술로 헤치고 싶었다. 그러나 술을 더하면 더할수록 시름과 한은 더한층 가슴 안에 드높게 물결쳤다.

"얘야."

"."

"내가 마음이 울적해서 배겨날 도리가 없다. 너하고 단둘이 술을 마시면 울적한 마음이 스러질 줄 알았더니 도리어 한과 시름은 한층 더하고나. 네 친구 중에 풍류남자답게 잘 노는 사람이 있느냐?"

"친구라기보다도 무관한 사람이 두엇 있습니다. 모두 다 명창들이올시다."

"누구누구냐?"

"한 사람은 선공감역 구종수요, 또 한 사람은 장악원 악공 이오방이올시다."

"곧 불러올 수 없겠느냐?"

"저하의 분부시라면 누가 감히 거역하오리까. 곧 데려오겠습니다."

"빨리 갔다 오너라."

문밖까지 나갔던 춘방사령이 되돌아왔다. 얼큰히 취한 얼굴로 세자께 고한다.

"저하께 아뢰오. 선공감역 구종수는 명창이옵고 악공 이오방은 거문고와 가야금을 잘 탑니다. 노래만 가지고는 멋이 없으니 가야금을 가지고 오라 하오리까?"

"가야금을 잘 타느냐? 좋고말고."

세자의 찬성하는 말을 듣자, 춘방사령은 어깨를 으쓱거려 물러갔다. 이윽고 춘방사령은 구종수와 이오방을 데리고 왔다. 선공감역 구종수와 장악원 악공 이오방은 청에 올라 세자께 문안을 드렸다. 춘방사령은 가야금을 들고 뒤에 따랐다. 세자께 두 사람을 소개한다.

"이분이 선공감역 구종수올시다. 이 사람이 장악원 악공 이오방이올시다."

세자는 반갑게 두 사람을 대했다.

"바쁜 사람들을 오라고 청해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

구종수가 세자께 절한 후에 말씀을 올린다.

"소인 선공감역 구종수 감히 세자저하를 지척에 모시는 광영을 갖자오니 한평생 잊지 못할 영광이올시다. 소인 무슨 복력으로 이같은 은총을 얻사옵니까. 황공무지하여이다."

세자는 미소를 머금고 구종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구감역의 풍류가 훌륭하단 말을 듣고 청했더니 바쁜 몸에서 이같이 찾아주니 기쁜 마음 금할 수 없소."

옆에 있던 이오방도 절해 뵙고 아뢴다.

"장악원 악공 이오방이옵니다. 하늘의 별같이 높으신 세자마마의 부르심을 받자오니 천한 몸, 일생일대의 명예올시다. 꿈같은 이 기쁨을 어디다 견주어 비하오리까. 형언해 아뢸 길 없습니다."

세자는 이오방의 인사를 받자 호기심이 가슴에 벅차 올랐다.

"장악원은 기생을 고양시키는 교방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기생들의 수는 몇 명이나 되는가?"

"한 삼백 명가량 됩니다."

"모두 다 잘생긴 미인인가?"

"절대 가인들이옵니다."

세자는 또 한 번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악공 이오방을 향하여 묻는다.

"그대의 거문고와 가야금 수단이 입신 지경에 들었다는 소리를 우리 춘방사령한테 들은 지 오래요. 한 번 은 수단을 아끼지 말고 나의 울적한 심회를 풀어주기 바라오."

"공연한 헛소문이 자자하게 퍼져서 세자저하의 총명하신 귀에까지 미쳤사오니 황공하기 짝이 없습니다. 실상은 아무 재주도 없는 몸으로 공연히 헛소문이 난 것뿐이옵니다."

이오방은 손을 비비며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세자는 가야금을 들고 와서 보를 헤치고 있는 춘방사령에게 분부를 내린다.

"안에 들어가 시녀들보고 건교자상을 한 틀 내오라 해라."

춘방사령은 가야금을 보에서 꺼내 벽에 기대놓고 세자의 분부를 받들어 분주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논 가야금에서 '스르렁' 줄이 울리면서 맑은 운치가 방안에 가득했다.

"가야금도 신흥이 나서 저 혼자 우는구나."

세자는 멋진 말을 한 번 던지고 드높게 껄껄 웃는다. 이윽고 시녀들은 산해진미를 벌여논 건교자상을 받들고 들어왔다. 세자는 흡족했다.

", 다들 상 앞으로 가까이 나와 앉게나."

구종수와 이오방을 상 앞으로 나와 앉게 했다.

"너도 이리 와서 앉아라."

세자는 교자상을 받들어놓고 물러가려는 춘방사령을 불렀다.

"인제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

세자는 눈을 바로 떠서 춘방사령을 바라본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 좌석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왜 못 앉는단 말이냐."

"천한 액정별배가 어찌 감히 세자마마의 받드시는 건교자상 옆에 앉을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을 내리십니다. 남이 보면 소인을 욕합니다."

"별소리가 다 많구나. 음식 먹는 데 상하귀천이 어디 있단 말이냐. 함께 앉아서 먹기로 하자."

구종수와 이오방도 춘방사령을 감히 옆에 앉으라고 권하기가 어려웠다. 입을 봉한 채 웃으면서 하회만 기다렸다. 춘방사령은 세자의 지재지삼 앉으라는 분부도 듣지 아니하고 총총 걸어 청 아래로 내려갔다. 가난이 원수라고 부조 적부터 여투어둔 재산이 없고 누대 영락해서 비록 상놈의 구실인 춘방사령을 지낼망정 견식과 범절은 오랫동안 대궐에 출입한 만큼 웬만한 시골 양반 부스러기들이 따를 수 없도록 높았다. 세자는 청 아래로 내려가는 춘방사령을 마루 끝까지 쫓아가 손을 잡았다.

"너무 사양하는 일도 예가 아니다. 내 대접을 해서라도 네가 앉아야 한다."

"황송하와 앉을 도리가 없습니다."

세자는 껄걸 웃으며 말한다.

"여봐라. 사람은 다 매일반이다. 사람 위에 사람이 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아래 사람이 또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이 사람을 점지하실 때 똑같이 이목구비를 마련해주었느니라."

구종수, 이오방, 춘방사령 세 사람은 고개를 숙여 세자의 말씀을 경건하게 듣는다.

"세상에서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것은 다 개콧구멍 같은 수작이다. 나도 우리 할아버지 덕에 조선왕국의 세자가 되어 주지육림 속에서 호강스런 생활을 한다마는 옷을 벗겨놓고 알몸뚱이로 있다면 네나, 내나 다 일반이다. 상하귀천이 어디 따로 있겠느냐?"

"아니올시다. 못 앉습니다. 남이 보면 욕합니다. 저하의 체면도 아니되었고, 소인도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아까는 그럼 왜 앉았더냐?"

"그때는 임기응변이올시다. 마마와 소인 단둘이 아니오니까. 마마께오서 하도 울적하시니, 소인이 딱하게 생각해서 임시로 모신 것뿐이옵니다."

춘방사령의 말을 듣자 세자는 껄걸 웃었다.

"임기응변이야? 하하하. 그럼 이번에도 임기응변으로 좀 앉아보려무나. 자아, 내 말을 들어라. 말을 너무 거역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하하하."

세자는 춘방사령의 손을 다시 잡아 악공 이오방의 옆자리에 앉힌다. 호협하고 인자한 천성이 자리에 넘쳐 흘렀다.

"이거, 일이 아니올시다마는 세자마마의 지극하신 분부이시니 아니 봉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앉겠습니다."

춘방사령은 또 한 번 뇌까리며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무례강이다. 상하귀천을 일부러 깨뜨려보자는 것이다.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대로 적나라한 거짓 없는 사람끼리 가식없이 한번 쾌활하게 놀아보자꾸나."

사양하는 춘방사령을 한자리에 앉혀논 세자는 유쾌했다. 신흥이 도도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선공감역 구종수가 천일주 호박빛 술을 금술잔에 가득 부어 세자께 먼저 올린다.

"저하, 이 술 한 잔을 잡수시고 만대에 명성이 빛날 성군이 되시옵소서."

세자는 미연히 웃으며 구종수의 올리는 술을 받고 마시지 아니한다.

"오늘 구감역은 초면이오마는, 내가 청한 것은 명창이란 말을 듣고 청한 것이외다. 말로만 축원하는 그 솜씨 가지고는 나는 입에 술을 댈 수 없소. 노래를 한 곡조 불러야 이 잔을 들겠소."

"세자께오서 노래 때문에 부르셨다 하니 감역의 자격이 아니라 명창의 실력으로 한번 저하의 마음을 위로해드리겠습니다."

구종수는 말을 마치자 두어 번 기침을 해서 청을 가다듬어 고른 후에 노래를 부를 자세를 취했다. 춘방사령도 멋객이었다. 노는 가락을 짐작해 알았다. 아까 벽에 기대놓았던 가야금을 번쩍 안아다가 악공 이오방 앞에 갖다 놓는다. 이오방은 사양하지 아니했다. 묵묵히 가야금 줄을 두서너 번 골라서 음향을 시험한 후에 구종수의 노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야금은 노랫가락을 쫓아 '둥둥, 두둥둥' 멋들어진 음향을 내면서 노랫소리와 가야금을 울리는 소리는 슬며시슬며시 한데 어울려 요요하게 반공으로 흩어진다. 어떤 것이 가야금 소린지 어떤 것이 구종수의 청인지 청과 줄소리를 구별할 길이 없다.

'금준에 가득한 술을 옥잔에 받들고서 심주에 원하기를 만수무강하옵소서. 남산이 이 뜻을 알아 사시상청이삿다.'

세자는 세상에 나서 비로소 멋을 알게 되었다. 어디서 일어나는지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신명이 일어났다. 어깨가 으쓱거려진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한 손에 술잔을 들고 한 손엔 저르 들어 높고 낮게 소반 변죽을 울리며 장단을 맞춘다.

"좋다!"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떨어졌다. 노래와 현악의 아름다운 협화음은 무아의 경지로 사람의 넋을 아롱아롱 흔들어 놓다가 이내 종장에 들어가자 모든 정열을 탁 풀어놓고 요요한 여운만 방 안에 가득했다. 세자는 또 구종수한테 술을 따라 보낸다.

"말만 듣고 명창이라 했더니 명창이 어떤 것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소. 과연 천하에 짝을 구할 수 없는 명창이구려. 조선은 그만두고 명나라에도 감역 같은 명창은 보지 못했소이다."

구종수는 세자의 내리는 술을 받들고 고개를 숙여 사례한 후에 몸을 돌려 술을 마신다. 세자는 다시 이오방에게 잔을 보냈다.

"구감역의 창도 창이지만, 이악공의 가야금이 아니었던들 이 자리가 무색할 뻔했소. 과연 명수라 하겠소."

이오방도 세자의 내리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들면서,

"황감하여이다."

인사를 올리고 뒤로 돌아앉아 술을 마신다. 세자의 호혐한 기상은 점점 더 높아졌다.

"술이란 서로 바라보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면서 주고받아서 수작을 해야 술맛이 나는 법이지, 외면만 하고 돌아앉아 술을 마신다면 무슨 놈의 술맛이 있소. 돌아앉아 술을 마신다는 것은 허례고 가식이라 생각하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허례고, 가장 미워하는 것이 가식이오. 두 분은 나의 싫어하는 가식을 범했으니 벌주로 삼배주를 더 마셔야 하오."

말을 마치자 세자는 이오방과 구종수한테 석 잔 술을 더 권했다. 세자의 잡은 술병은 춘방사령 앞에 놓인 사발로 향했다. 백자 사발에 호박빛 천일주를 철철 넘치도록 따랐다. 춘방사령은 꿇어앉아 세자의 친히 따른 하사주를 받았다.

"너도 가식을 차리고 돌아앉아서 마시려느냐."

"아니올시다. 소인은 순국이올시다. 순짜니까 여태까지 세자마마께 쫓겨나지 아니했삽지, 허식을 찾는 잡탕이었던들 벌써 마마께 쫓겨났을 것입니다. 맞추 술 사발을 들었다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꾸지람을 마시옵소서."

촌방사령은 이내 익살도 떨면서 사발을 가득한 술을 물켜듯 했다. 춘방사령이 사발을 비워놓자 세자는 또 한 번 사발에 술을 가득 부었다.

"이번엔 상급으로 내리는 술이다. 구감역과 이악공 같은 풍류인사를 내 앞에 천거해준 상급이다."

춘방사령의 입은 함박만큼 벌어졌다. 사양 않고 다시 사발의 술을 죽 들이켠다. 세자의 입에서는,

"장하다!"

소리가 나왔다. 온 방 안에는 화한 기운이 넘쳤다. 세자는 다시 이오방에게 가야금을 청했다. 이오방은 이번엔 산조를 타기 시작했다. 구종수가 가야금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기경선자 간 연후 공추월지 단단 자라등 저 반달 실어라, 우리 고향을 함께 가.'

구종수의 산조 소리가 폭포수가 떨어지듯, 돌은 부서지고 물은 소용돌이치는 듯, 어느 구절엔 찬바람이 이는 듯하고 어떤 가락엔 천병만마가 뛰닫는 듯 장쾌하고 씩씩했다. 여기 맞추어 이오방의 가야금 소리는 한데 어울려 기운차고 구성지고 아름답고 해조되었다. 노랫소린지 가야금 소린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세자는 입신지경에 든 구종수의 창과 이오방의 가야금을 들어보니 여태껏 알지 못했던 기막힌 딴세계가 있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모든 근심이 스러지고 모든 번뇌가 흩어졌다. 다만 유열과 환락의 멋진 풍류가 안개 일 듯 피어올랐다.

"과연 명창과 명고수로구려."

노랫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그치자, 세자는 탄식하여 두 사람을 칭찬한 후에 다시 술을 따라 권했다.

"자아, 한 잔씩."

구종수와 이오방도 세자께 술을 조금씩 권했다. 두 사람은 세자가 아직 술을 마시는 데 새물청어인 줄 알고 서로 눈짓을 해가며 조금씩 권했다. 그러나 세자는 어려서부터 궁녀들이 철없이 약주를 조금씩 권하는 것을 받아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맛도 모르고 배운 술이 이제는 상당한 주량을 갖게 되었다. 늙은 궁녀들이 따라 올리는 술을 아무 흥취와 멋이 없이 마셔 왔던 세자는 가야금 소리에 어울려 부르는 명창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술을 마시니 비로소 술 마시는 맛이 열 갑절이나 더한 듯했다. 공연히 마음이 유쾌하고 흥락했다. 구종수와 이오방이 조심성스럽게 올리는 술을 보자, 세자는 껄껄 웃는다.

"내 주량이 매우 약한 줄 알고 조금씩 따라주네그려."

"황송하옵니다. 소인들이 어찌 감히 세자마마의 주량을 짐작하오리까. 하정에 염려되어 조금씩 올린 것이올시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구종수라 능청맞게 세자의 마음을 더듬는다.

"염려 말게. 어려서부터 궁녀들이 권하는 술을 받아 마신 것이 버릇이 되어, 자네들 주량은 넉넉히 따라갈 것일세, 하하하."

세자는 곯린 잔에술을 더 따르라고 잔을 내민다. 구종수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으며 꿇어앉아 세자가 들고 있는 곯린 잔에 술을 붓는다.

"소인 그런 줄은 모르고 잔을 곯렸사오니 죄당만사올시다."

세자는 구종수가 다시 가득히 부은 술잔을 입에 대고 단숨에 쭉 마신 다음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내 주량을 몰라서 술을 조금 따랐기로 죄당만사야 될 것이 있나. 하하하. 과공이 비례일세. 하하하."

가야금의 명수 이오방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소인도 곯린 잔에 약주를 따라 올리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소인도 죄당만사올시다."

뇌까리면서 세자한테 약주를 따라 올린다. 세자는 약주도 자시지 아니한 채 이오방의 술을 받았다. 호방한 웃음이 또 나왔다.

"자네도 죄당만산가. 그렇다면 두 사람의 죄당만사를 합친다면 죄당 이만사가 되겠네그려. 모르고 술 좀 곯렸다고 죄다 이만사는 너무나 과하이. 어때, 벌주로 죄당 이십 배씩 하기로 하세. 하하하."

세자는 무척 유쾌했다. 아버지의 걱정, 어머니의 걱정, 외삼촌 집의 걱정이 모두 다 바람에 흩어지는 안개 자락과 구름장이었다. 그대로 쾌활하기만 했다. 세자는 두 사람의 술을 받아 마신 후에 다시 술을 권했다. 술이 몇 순배 다시 돌았을 때, 세자의 취흥이 도도한 심경에는 무엇인지 부족한 것을 느꼈다. 궁중에 연회가 열렸을 때 아버지 태종은 아름다운 일등 명기들을 병풍 치듯 둘러놓고 재상들과 함께 흥겹게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어느 때는 기생들의 노래와 춤을 보면서 밤새도록 질탕하게 연회를 벌였다. 어느 때는 천하절색인 아름다운 기생을 무릎 위에 올려 앉히고 뺨을 대고 귀엣말을 소곤소곤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지금 후궁으로 왕자까지 난 ''의 어머니 가희아도 역시 평안도 강계 태생의 명기였던 것이다. ''의 어머니인 가희아가 기생으로 있을 때 궁중에 연회가 열리면 반드시 대내 안으로 불려 들어와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능숙한 춤을 추다가 마침내는 아버지 태종의 무릎 위에 안겨서 갖은 아양을 부리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후리던 그 모습이 눈에 환하게 떠올랐다. 세자의 취흥이 도도한 머리에 무엇 한 가지 부족한 것으로 생각된 것은 여자라는 것을 짐작했다. 여자 중에도 아무런 풍류가 없는 빈이나, 양제 따위가 아니다. 갖은 멋과 아양을 떠는 기생의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세자는 거나한 홍안에 미소를 지어 구종수와 이오방을 향하여 말한다.

"오늘 두 분의 노래와 가야금 소리를 듣고 보니 신선의 세계, 별유천지에서 노는 듯하이. 그러나 무엇인지 한 가지 내 마음에 부족한 것이 있는 듯한데, 무엇인지 두 분이 알아맞히겠나?"

"부족하신 듯한 일이 계십니까?"

능소능대한 구종수는 빙긋이 웃으며 세자를 바라뵙는다.

"그래, 무엇인지 부족한 마음이 어찌 드는 듯하단 말야. 그러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도 모르겠단 말이거든. 그대들은 모두 다 세상 경위와 물정에 많이 통달한 사람들이니 나의 부족해하는 이 마음을 알아맞히는 말일세."

"하하하, 소인네가 어찌 저하의 높으신 마음을 알아맞힐 수 있습니까. 얼른 알아맞히기 어렵습니다. 글쎄, 무엇이 부족하실까요? 하하하."

구종수는 오입쟁이였다. 벌써 세자의 마음을 짐작했다. 그러나 능갈치게 이쯤 대답해둔다. 악공 이오방은 같은 풍류계에 노는 사람이지만 성질이 캥캥하고 급했다. 가야금은 잘 타지만 융통성이 구종수만큼 너그럽지 못했다.

"거 구감역도 그것쯤 알아맞히지 못한단 말요. 술과 풍류에는 여자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여자가 없으면 쓸쓸하단 말씀이지 무어요. 구감역도 그만 일을 짐작하니 못하니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 오입쟁이로구려."

이오방은 캥캥한 목소리로 담담하다는 듯 구종수를 핀잔준다. 젊은 세자는 빙긋 웃으며 말이 없다. 구종수는 더한층 능청을 부린다.

"여자도 여자 나름이지 저하께서 여자를 대해 보지 못하시어 그런 말씀을 내리셨을 리가 있나. 이선달, 들어보게나. 저하께서는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하셨으니 삼천 궁녀는 못 두셨을망정 황송한 말씀이지만 세자빈 이하로 양제마마와 상궁 나인들, 꽃 같고 달 같은 천하 미인들이 동궁에 가득하게 모였는데, 새삼 여인에 굶주리시어 부족하신 생각을 가지셨을 까닭이 있나. 당치 않은 말 작작하게나. 하하하."

"저렇게 머리가 둔해서 어찌한단 말인가. 여인은 다 같은 여인이지만, 술과 풍류가 낀 곳에는 역시 논다니 여인이 제격이란 말일세. 양전하고 체면 차리는 여인은 술좌석엔 아무 소용도 없단 말일세. 세자마마, 그렇지 않습니까? 술좌석에는 요조숙녀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세자께서 무어 한 가지 빠졌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바로 기생이 아닙니까?"

이오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자를 바라뵙는다. 세자는 이오방의 말을 듣자 흐뭇했다.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하하하, 이선달은 가야금만 잘 타는 줄 알았더니 남의 속도 시원하게 잘 알아맞히는군. 하하하. 그래, 그것이 이 자리에 좀 있었으면 하네. 이같이 좋은 밤에 남자끼리만 지내기가 너무나 적막하이그려."

세자의 호협한 말을 듣는 구종수는 일부러 검은 눈을 껌벅거리면서 세자를 향하여 아뢴다.

"그것, 쉬운 일이올시다. 그러나 또 어려운 일이올시다."

"어째서 쉽고 또 어려운 일인가. 쉬우면 쉽고, 어려우면 어려운 것이지, 어째서 쉽고 다시 어렵단 말인가."

세자는 정색하고 구종수를 바라본다.

"쉽고도 어려운 일입죠. 저하께서 기생을 부르신다면 어느 기생이 감히 아니 오겠습니까. 더구나 세자마마께서는 한창 젊으신 미소년이십니다. 어느 기생이 감히 세자의 부르심을 받지 않겠습니까. 한 번 부르시기만 하면 아니 올 기생이 없습니다. 그러하니 쉬운 것이 아닙니까?"

"또 어려운 것은?"

세자는 미소를 지어 묻는다. 구종수도 웃는다.

"모르시겠습니까?"

"말을 해보게나."

"우선 빈마마께서 싫어하실 것입니다. 하하하. 사람의 상정이 아니오니까. 하하하. 그리고 또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대전마마께서와 중전마마께서 계십니다. 이분들이 저하께서 기생을 데리고 놀았다는 말씀을 들으시면 소인들은 조방구니노릇을 했다 해서 명재경각이 될 것입니다."

"빈이야 내가 기생을 데리고 놀았다고 시샘을 할 사람이 아닐세. 그리고 우리 어마마마께서도 대단한 꾸지람을 아니하실 것일세. 아무 염려 말게. 다만 아바마마께서 들으시면 꾸지람을 하실지 모르지만, 궁이 떨어져 있으니 아무 상관이 없네."

오입쟁이 구종수는 체머리 내젓듯 고개를 가로 흔든다.

"빈마마와 중전마마께서는 설혹 양해를 하신다 해도 대전마마께서는 한바탕 꾸지람이 대단하실 것입니다. 만약 탄로가 난다면 저하보다도 소인들이 다 죽습니다. 그러하니 쉽고 또 어려운 일이 아니오니까?"

세자는 껄껄 웃는다.

"구선달의 말도 그럴듯한 말일세. 그러나 설혹 탄로가 난다 하더라도 자네들은 입길수에 오르지 않게 할 테니 염려 말고 묘한 기생을 한 명 불러오게나."

구종수는 손을 모아 싹싹 비빈다.

"동궁 안에서는 아니 됩니다."

"관계치 않대도 그러네그려."

세자는 태연히 배짱을 부렸다. 구종수는 다시 세자를 뵙고 간청하듯 아뢴다.

"그래도 아니 됩니다."

세자는 답답했다. 목이 타는 듯했다.

"관계치 않다 해도 그리하네그려."

"어찌해서 관계치 않습니까. 대전마마께서 소문 들으시고 꾸지람을 내리셔도 관계치 않은 까닭을 말씀해줍시오."

"허허, 이 사람, 자네들 오입쟁이가 아닐세그려. 우리 아버지도 기생첩을 두셨네. 자네들 모르나? 강계 기생 가희아가 아버지 후궁이 아닌가. 왕자까지 나셨네, 하하하. 아바마마는 기생까지 후궁으로 두셨네. 후궁뿐인가, 버젓하게 왕자까지 생산하셨는데, 기생을 잠깐 데리고 놀기로 큰 죄가 될 것이 무어 있나."

구종수와 이오방은 태종의 후궁인 강계 기생 가희아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세자의 말을 듣고 보니 비로소 생각이 났다. 그럴듯한 소리다. 두 사람은 빙긋 웃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 기생을 데려오겠다고 찬성할 수는 없었다.

"저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하오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상감마마의 처지와 세자마마의 처지가 다르십니다. 상감마마께서는 연치가 높으실 뿐 아니라, 일국의 제왕이십니다. 그러하니 후궁을 두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세자마마께서는 아직 장년이 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뿐만 아니오라 층층시하에 계신 분이올시다. 세자마마, 이 점을 통촉해 보시옵소서."

구종수는 웃는 얼굴로 세자를 달래본다. 세자는 불끈 노했다.

"그런 말투가 어디 있나. 아버지는 기생첩을 두어도 좋고, 아들은 기생을 데리고 술 한 잔도 마실 수 없다는 논리가 어디 있나. 늙은이는 기생을 데리고 놀 수 있으나 젊은 사람은 기생 앞에 앉을 수도 없다는 그따위 논법이 어디 있단 말이가. 자네들이 혹시 우리 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들을까 해서 일부러 피하는 것이 아닌가. 다 그만두게 자네들은 나의 흥을 돋우려는 것이 아니라 파흥을 하러 왔네그려."

세자의 언성은 불쾌하게 떨어졌다. 이오방이 눈짓을 한다. 어떻게 적당한 수단을 써서 세자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라는 눈치다. 구종수는 슬며시 세자의 눈치를 다시 살피고 목소리를 연상하게 해서 아뢴다.

"저하게서 정 기생을 불러오라 하시면 불러오겠습니다. 그러하오나, 궁중에 유숙을 시키시면 아니 됩니다. 이 점을 허락해주시면 기생을 데려오겠습니다."

기생을 데려오겠다는 구종수의 말을 듣자 세자는 별안간 딴사람이 된 듯 입이 벙긋 벌어졌다.

"그런 것은 나중에 할 말이고, 어서 데려오기나 하소. 하하하."

세자는 다시 쾌활했다. 구종수는 이오방에게 묻는다.

"누구를 불러올까?"

이오방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구종수한테 귀엣말을 했다.

"가사를 잘하는 아이들은 용모가 좀 떨어지고 얼굴 예쁜 애는 화초기생이라 노래를 못 부른단 말야. 중간을 타서 봉지련을 부르는 것이 어떻겠나?"

귀엣말로 속삭이는 이오방의 말을 듣고 구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묘한 애를 한 명 불러오겠습니다."

구종수는 세자께 말한 후에 창문을 열고 춘방사령을 불렀다.

"여보게 명보, 잠깐 이리 좀 오게나."

춘방사령의 이름은 명보였다. 충직한 춘방사령은 세자가 주석으로 올라오라 하는 파탈한 분부를 지재지삼 내리자 마지못해 주석에 앉아 몇 사발 마신 후에 밖에 나가 있다가 구종수의 부르는 소리를 듣자, 급히 창 앞으로 뛰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자네 수고 좀 해야겠네."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무슨 분부를 내리시렵니까?"

"장악원에 가서 기생 봉지련을 좀 데리고 오게. 만약 장악원에 없거든 제집으로 가서 세자마마께서 부르신다고 빨리 데리고 오게."

춘방사령 명보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진다.

"? 기생을 데려오다뇨. 구감역 나리도 망령이십니다. 동궁에 어떻게 기생을 데려옵니까? 망령이십니다."

"세자마마의 특별한 분부시니 염려 말게. 어서 가서 빨리 데려오게나."

"목은 뉘 목이 달아날 텐데 그런 말씀을 하십죠. 공연히 생사람 결딴내려고 그리 하시오. 상감께서 들으시면 단박 데려온 놈을 잡아들이라 하실 텐데, 이 명보 놈이 먼저 걸려들어서 경을 치게 됩니다."

"아따 이 사람, 여러 잔소리 말고 데려오게. 책임은 세자마마와 우리 둘이 질 테니 염려 말고 데려오게."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