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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4-2

강계기생 가희아

원로장군 이숙번은 왕은을 감사하면서 금관조복에 단 옥패소리를 청아하게 일으켜 어전에서 물러났다. 이숙번이 어전에서 물러간 후 태종은 정운에 기별하여 거둥령을 내렸다. 만조백관이 움직이는 거둥이 아니라 약식 거둥이었다. 태종은 훗훗하게 이숙번의 집을 찾고 싶었으나 임금이 미행을 했다면 조정 신하들의 공론이 부산할 테니 미행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생각한 끝에 약식 거둥령을 내린 것이다. 날이 밝은 후에 태종은 다시 분부를 내렸다.

"오늘은 완산부원군 이숙번의 생일이라 한다. 과인을 청하므로 약식으로 거둥을 하려니와, 평소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사찬을 내리게 하라." 내관은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내수사에 기별하여 사찬을 내렸다. 갸자에 가득가득 사찬을 실었다. 어물로부터 시작해서 유과, 생과, 증과, 양지머리, 우둔, 돼지다리 등 진수성찬이 갸자에 가득가득 실려서 이숙번의 집으로 나갔다. 이숙번은 조복을 입고 사찬을 받은 후에 다시 태종이 납시는 기별을 듣고 대문까지 니가서 지영을 했다. 태종은 황금연을 탔으나, 만조백관들의 배행은 제례시키고 무예청과 별감들만의 호위를 받으며 이숙번의 집에 당도했다. 이때 신하로 주인의 부름을 받아 모인 사람들은 영의정 하윤, 전임 대신 배극렴 장군, 이무 장군, 민무구 장군, 민무질 장군, 민무희 등 태종의 처남 되는 민씨 삼형제도 끼어 있었다. 주인 이숙번은 말할 나위도 없고, 모든 장성들은 대문 밖까지 나가서 태종을 모시어 들였다. 태종은 오래간만에 거리 구경을 하니 유쾌하고 즐거웠다.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연서 내려 무예청들의 부액을 받고 청에 오르자, 부께를 맨 좌우편 난간 안에서 아련히 풍악 소리가 자지러진다. 왕의 친림을 맞이해 들이는 청아하고 맑은 아악 소리다. 전하는 마음이 더한층 싱그러웠다. 봉안을 들어 풍악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붉은 옷 푸른 옷을 입은 악공들은 좌우편으로 갈라져서 삼현육각을 앞에 놓고 제천수 곡조를 일제히 아뢰어 전하를 환영했다. '하늘과 가지런하게 오래 사십쇼'하는 송축하는 음악이었다. 태종은 또 한 번 기쁨을 느끼면서 발을 옮겼을 때, 넓은 대청 안엔 녹의홍상을 입은 시녀들이 화관 몽두리에 한삼 자락을 흩날리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어 좌우편으로 갈라진다. 제천수 아악 곡조에 맞추어 화려한 춤으로 상감 태종을 환영해 맞이하는 모양이다. 춤 가락은 봄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여인들은 푸른 소맷자락을 들어 미인문을 이룩했다. 앞에서 인도하는 이숙번이 가득 웃음을 풍기면서 여인들은 푸른 소맷자락을 들어 미인문을 이룩했다. 앞에서 인도하는 이숙번이 가득 웃음을 풍기며 태종에게 아뢴다.

"가기들이 전하의 친림하심을 황송하고 기뻐하와 미인으로 문을 만들어 환영의 뜻을 표합니다. 불가불 옥보를 미인문 안으로 옮기셔야 하겠습니다." 기발한 생각을 짜낸 환영이었다. 태종은 호협한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경의 덕에 생전 처음으로 미인문으로 걸음을 옮겨보는 구려, 하하하." 태종은 드높게 웃으며 미인문을 지나 이숙번의 거처하는 큰방으로 들었다. 모든 대신과 장성들이 상감 태종의 뒤를 따라 미인문을 거쳐서 큰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전하는 모시는 왕좌의 보료가 주석으로 포진되어 있고, 어느 틈에 산해진미의 음식상이 좌우 옆으로 질서 있게 벌여있었다. 전하가 자리를 잡은 후에 미인으로 문을 이루었던 아름다운 무희와 가희들은 연회장으로 연보를 옮겨서 한 명씩 두 명씩, 황금잔대를 받들어 술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중에 가장 아름다운 젊은 미기가 어전에 엎드려 큰절을 올린 후에 황금잔을 받들어 술을 올렸다. 태종은 절을 하고 약주를 올리는 아름다운 기생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을 하늘 모양 시원하고 맑았다. 이마는 넓지도 아니하고 좁지도 아니했다. 오뚝한 코, 엷은 입술에 두 볼은 명랑하도록 밝았다. 태종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여태 본 여인 중에 이만한 여자를 대해 본 일이 없었다. 민후는 말할 것 없고, 일전에 손을 댔다가 세자한테 창피를 당했던, 고려의 궁인보다도 열 갑절 아름다웠다. 젊어서 서방님으로 있을 때 몇몇 기녀들을 상대로 하여 기생집에도 한두 번씩 드나든 일이 있었으나 이만한 아름다운 기생을 만나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태종의 눈과 마음은 자주 기녀한테로 쏠리게 되었다. 기녀는 금잔에 술을 가득 부어 태종께 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술을 권하는 권주가다. '남훈전 달 밝은 밤에 팔월팔개 다리시고 오현금 탄일성에 해오민지온혜로다. 우리도 성주뫼옵고 동락태평하리라.' 권주가는 권주가지만 보통 권주가가 아니다. 제법 유식했다. 임금에게 술을 권하는 권주가로는 가장 적절한 노래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란다. 기생 속에도 이만큼 유식한 기생이 있구나 하고 다시 한번 기생의 얼굴을 바라본다. 기생의 손으로 넘겨주는 술을 단숨에 마시었다. 술맛도 아름다웠다. 술에는 미인의 향취가 도는 듯했다.

"네 어찌 그런 권주가를 아느냐?" 태종은 술을 마신 후에 빈 잔을 기생한테 주며 물었다.

"황공하여이다. 전하께옵서는 만백성을 거느리신 제왕이십니다. 옛적 성군이신 순의 정치를 해줍시사 하여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황송천만이옵니다." 기생은 나직나직 답했다. 임금 앞이라고 떨고 무서워하지도 아니했다. 귀염을 받으려고 교태도 부리지 아니했다. 시원하게 잘생긴 얼굴에 천연한 태로도 아뢰었다. 기생은 안주로 봉탕을 올린 후에 다시금 잔에 술을 부어 어전에 받들었다. 봉탕은 계탕이었다. 태종은 일부러 술잔을 받지 아니하고 기생을 취재해 본다.

"네 어찌 하구 많은 술안주에 나한테 봉탕을 주느냐?" 기생은 붉은 입술을 열어 상긋 웃으며 대답한다.

"전하께는 용탕을 올려야만 하옵니다. 그러하오나 반상에는 용탕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봉 대신 닭을 쓰는 격으로 봉탕을 올려서 안주를 하시게 한 것입니다." 말이 되었다. 얼른 꾸며대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전하의 마음은 더 한 번 기생한테로 쏠렸다.

"네가 다시 술을 따랐으니 술잔마다 노래를 불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내가 흥이 나서 술을 마시겠다. 좋은 노래가 있으면, 또 한 번 불러 다오." 기생은 방긋 웃고 한 손으로 술잔을 들고 한 손으로 상 변죽을 울려 장단을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금준에 가득한 술을 옥잔에 받들고서, 심중에 원하기를 만수무강하옵소서. 남산이 이 뜻을 알아 사시장청하시다.' 시원하고 실경을 읊은 즉흥 시조다. 태종은 만열된 기쁨을 느꼈다. 전하는 미인이 올리는 금술잔을 받아 단숨에 쭉 마신다. 태종은 술을 마신 후에 이번에는 무슨 안주를 집어주려나 하고 기생의 눈치를 살폈다. 기생은 무늬 화려한 청자 대접에서 생선 한 점을 집어 권한다.

"안주를 젓수시옵서서." 전하는 기생이 입에 넣어주는 생선 한 점을 씹었다. 임금은 기생에게 묻는다.

"무슨 생선이냐?"

"용이올시다." 기생이 대답했다.

"용이라니? 이런 용은 처음 보았구나. 용이 아니라 잉어로구나."

"전하께서는 언제 용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용이란 사람들이 생각으로 상상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잉어는 용이 되는 생선이라 합니다. 그러하와 등룡이라 하지 않습니까? 문자에도 '등룡문'이란 글이 있습니다. 깊이 통촉하옵소서." 기생은 안존한 말씨로 도란도란 아뢰었다. 태종은 기생의 머리가 무한 영민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속에서 아들이 나오면 제법 총명 영리한 인물이 나올 텐데-.' 하고 아끼는 생각도 일어났다. 전하는 봉탕 대신 계탕 안주를 먹고 이번에는 장차 용이 될 수 있는 잉어 안주를 자시었다. 남자한테 여자란 이같이 필요한 모양이다. 남자가 만일 계탕을 봉탕이라 하고 잉어 고기를 용의 고기라 했다면 단번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임금은 임기응변하는 기생의 솜씨를 머리가 좋다고 마음 속으로 간절하게 느꼈다. 전하는 차차 주흥이 도도했다. 이번엔 빈 잔을 들어 기생한테 청했다.

"술은 삼배주라 하는데 두 잔만 먹어 쓰겠냐. 한 잔만 더 따라라. 석 잔을 마시어보기로 하자." 기생은 전하가 먼저 술을 청하니 확실히 자기한테 호감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흐뭇했다. 황금잔에 다시 호박빛 술을 가득히 부어 올리며 상긋상긋 웃음을 머금어 아뢴다.

"약주는 삼배주의 한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마음이 상쾌하시라고 젓숫는 술이니 옥체에 해치 않도록 젓수시면 좋습니다."

"옳은 말이다. 살아서 석 잔, 죽어서 적 잔을 마신다는 말은 보통 술량이 적은 사람을 표준해서 한 말이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흥을 돋우고 운치를 일으키기 위해서 유식한 문자를 지어내서 또다시 방편을 정했느니라. 네가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핑계 삼아 만들어논 글을 짐작하느냐?"

"무식한 쇤네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들은 풍월로 얻어들은 바가 있습니다. 옮겨보오리까?" 태종은 반넘어 술잔을 기울여 마시면서 기생의 입술을 바라본다.

"일고 이단 삼품 오가 칠의라 합니다. 한 잔 술은 괴롭고, 두 잔 술을 홋홋하고, 석 잔 술을 품주요, 다섯째 잔은 가하고, 일곱 잔 술을 마땅하다는 뜻이라 하옵니다." 태종은 기생이 유식한 풀이를 하는 것을 보고 제법이라 생각했다. 손에 든 술잔을 들어 마저 마시려 할 때 기생은 맑은 목청을 뽑아서 노래를 또 한 번 불러 전하의 신명을 돋우어 준다.

'무학이 비봉에 올라 국도를 정하올제 자좌오향으로 성궐을 이뤘는데 좌청룡 우백호와 남주작 북현무 귀격으로 벌여 있고 전대하 한강수는 이여천지근원이라 태묘는 좌에 있고, 사직은 우에 있다. 삼봉이 수려하니 인걸호준하고 와우산 유덕하니 민식 풍족이라, 성계신승하여 억만년지 무강이삿다. 하늘이 주신 뜻을 받들어 만만세를 누리소서.' 청이 좋아서 노랫소리는 마치 옥소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맑고 맑았다. 임금뿐만이 아니었다. 만좌가 귀를 기울여 가사곡조를 들었다. 한양에 왕도를 배판한 후에 어떤 이름없는 시인이 노래를 지어 새왕도의 풍수를 예찬한 시였다. 임금 태종의 입이 방긋 벌어진다. 더구나 '만만세를 누리소서'하는 마지막 종장을 듣는 전하는 시흥이 도도해서 어깨가 으쓱했다.

"이제 부르는 시를 누가 지었다 하더냐?"

"모르겠습니다. 어느 유식한 선비가 왕실을 예찬해서 지었다 하옵니다. 소인의 고향에 이 노래가 자자합니다." 태종은 이름 없는 문사가 이씨 왕조를 예찬하여 지었다는 말을 듣자 더한층 마음이 흐뭇했다.

"네 고향은 어디고 네 이름은 무어라 하느냐?"

"보산 태상 가희아올시다."

"보산 태생이야? 보산이면 바로 강계로구나. 강계의 고호가 바로 보산 아니냐?"

", 그러하오이다."

"강계는 예로부터 미인이 많다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제가 무슨 미인 축에 들겠습니까? 소인보다 몇 갑절 잘생긴 여인이 거재두량이올시다."

"네가 미인이 아니면, 천상항아를 미인이랴 하랴. 겸손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사양이 너무 과하다. 강계 기생은 말을 잘 타고 춤도 잘 춘다더라. 과연 그러하냐?"

", 그러하옵니다. 보산보는 나라의 국경이 가가운 곳이오라, 기생들을 교육시킬 때 말달리는 법과 창 쓰는 기술이며, 검무 추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하니 말 달리는 법은 저절로 배워집니다."

"어째서 네 이름을 가희아라 하였느냐?" 기생은 태종의 하문을 듣자,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아뢰기 황송합니다. 자의 부모가 거적자리에 낳아놓고 가희아라 이름 지었다 합니다. 가희아라고 한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할만한 아이라고 해서 이같이 이름을 지었다 합니다."

"잘 지은 이름이다. 너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할 남자가 없겠다." 태종은 점점 마음이 강계 기생 가희아한테로 기울어진다. 도연히 술기운이 돌아 가희아의 부드러운 손을 애무했다. 홀연 군신들이 모여 있는 좌석에서 꺄르르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태종과 가희아는 서로 손을 잡은 채, 군신들이 모여 있는 좌석을 바라보았다. 재상 배정승이 희끗희끗 머리가 세아 반백이 넘은 나이면서 술기운이 높아서 기생 설중매를 희롱하고 있다.

"네 요년, 설중매야. 네가 내 사랑을 받아 줄 수 있느냐?" 설중매는 함흥기생이었다. 이름이 자자하게 서울과 시골에 퍼진 일등 기생이었다. 설중매는 방실 웃으며 대답한다.

"대감게서 소인 설중매를 진정으로 사랑해주신다면 소인이 어찌 받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약주김에 허튼 말씀을 내리시는 듯합니다. 진정으로 사랑만 해주십시오. 얼마든지 받아 모시겠습니다. 호호호." 설중매는 간드러지게 웃어대며 대답했다.

"네 요년, 너는 정조가 너무 없다더라. 동가식 서가숙 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더라. 도대체 네 서방이 몇 명이나 되느냐?" 설중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천한 기생이라 하나 너무나 사람을 모독하는 소리다. 마음이 좋지 않아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설중매는 원체 이름 높은 명기였다. 슬쩍 마음을 돌려 아스러지게 대답한다.

"왕씨도 섬기고 이씨도 섬기는 배정승 대감하고 동가식 서가숙하는 설중매하고 어울려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설중매의 대답을 듣고 자리에 가득 찬 신하들은 손뼉을 치고 깔깔 웃었다. 가희아의 손을 잡고 얼근히 취해 있는 전하의 용안이 뭉그러지면서 드높은 웃음을 껄걸 웃었다. 가희아도 소리를 죽여 방긋 웃었다. 야무지게 야유를 보낸 설중매의 높은 수단에 모두들 꺄르르 웃어댄 것이다. 임금을 바꾸어 섬긴 배정승은 마치 일부종사를 못한 기생의 팔자와 다름이 없다. 자기도 의리를 지키지 못한 위인이 어찌 기생의 동가식 서가숙하는 행동을 조롱하느냐고 매섭게 야유를 한 것이다. 배정승의 취한 기운이 일시에 깨져버렸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개국 공신 중에도 두 패가 있었다. 배정승처럼 고려 왕실을 섬기다가, 이씨 왕조로 와서 나라를 섬긴 변절 공신이 있고, 순전히 고려 대 벼슬을 아니한 선비로서 이씨의 개국을 도와준 개국 공신이 있다. 고려 대 벼슬을 아니했던 개국 공신들은 입가에 상쾌한 웃음을 띠어 배정승의 욕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배정승과 함께 고려조정에 절개를 지키지 못한 대신들을 배정승과 같이 얼굴빛이 변했다. 연회 자리는 금방 어색하게 되었다. 임금 태종도 설중매의 재치 있는 대답에 용안이 뭉그러지면서 껄걸 웃었다. 그러나 연회좌석이 쓸쓸하고 어색하게 되니, 임금의 좌지로 볼 때 일시동인의 태도를 취하고 싶었다. 얼른 수습할 방책이 머리에 떠오르지 아니했다. 자리가 점점 스산한 편으로 기울어지려 할 때 가희아가 태종한테 고한다.

"자리가 소슬해지옵니다. 소인이 노래를 불러 이 자리를 바로잡겠습니다." 태종은 영리한 가희아의 의사를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네가 그런 수단이 있겠느냐?"

"염려 마시옵소서. 노래로 노염을 풀어보겠습니다."

"빨리 노래를 불러보아라." 태종은 잡았던 가희아의 손을 풀어주며 허락을 내렸다. 가희아는 저를 들어 어상 앞에서 변죽을 울리며 청을 높여 노래를 부른다.

'동가도 대가요, 서가도 큰집이라. 조그만 설중매가 동서에 끼였으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사동사서 하리라.' 가희아의 청 좋은 노랫소리는 만좌를 놀라게 했다. 예로부터 있는 시조가 아니라, 가희아가 임기응변으로 지어서 부르는 즉흥 시조다.

'조그만 설중매가 동서에 끼였으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사동사 서하리라.' 노래 부른 가희아의 시조는 만좌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기생들의 일부종사 못 하는 신세를 변명해주었을 뿐 아니라, 변절한 배정승 일파를 흠씬 두둔하여 변호해준 노래다. 또 한 가지 태종이 노래를 좋게 들은 점은 가희아의 부른 노래는 조금도 정치성을 띠지 아니했다. 설중매가 꼬집어 말한 대로 왕씨니 이씨니 하고 여기 벼슬하고 배반한 사람들을 조금도 입초시에 올려놓지 아니하고 기생의 동가식 서가숙하는 행동만을 들어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부드럽게 넘겨버린 점을 태종은 좋게 생각했다. 임금뿐 아니었다. 왕씨를 배반한 배정승의 일당도 좋아했다. 새로 이씨만을 섬기는 공신들도 마음이 흐뭇했다. 모두들 껄걸 웃었다. 태종은 가희아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만좌를 향하여 칭찬한다.

"아까 설중매의 대답은 알싸한 호초알 같더니, 이번 가희아의 시조는 사람의 마음을 창해 바다같이 넓게 만드는 시조다. 가상하기 짝이 없다. 경들은 이 유쾌한 노래를 듣고 벙벙히 앉아 있을 수 없다. 가희아를 보내서 술을 한 잔씩 따르게 할 테니 사양 말고 대백으로 받으라." 임금의 말씀이 떨어지니 가희아는 한편 손에 황금 주전자를 들고 한편 손에 백자 큰 잔을 들어 먼저 배정승 앞에 나가 술을 따른다.

"대감, 이 술 한 잔을 젓수시고 동가식 서가숙 하는 저희들의 팔자를 불쌍하게 생각해줍시오." 가희아는 미소를 지어 웃으며 나직나직 말을 보냈다. 배정승도 노염이 풀리면서 가희아의 술잔을 받았다.

"너의 바다같이 넓은 말씨에 나는 감동되었다. 과연 너는 천하명기다." 배정승은 마음이 흐뭇했다. 가희아의 따라 올리는 큰 술잔을 단숨에 쭉 들이마셨다.

"대감, 조금도 노하지 마십쇼. 설중매의 말을 어리광을 부려서 버릇없이 한 말씀이옵니다. 아이들의 어리광은 어른이 받아주셔야 합니다." 가희아는 배정승을 떡 주무르듯 했다.

"아니다. 아마 내가 술이 좀 높아서 아니할 소리를 했느니라. 나한테서 먼저 듣기 싫은 소리가 나갔으니, 보복이 돌아온 것을 당연한 일이 아니냐. 나는 너한테 새로 큰 교훈을 받았느니라." 배정승은 가희아 앞에 자기 잘못을 사과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가희아는 배정승을 어루만진 후에 술잔을 들고 좌중으로 돌았다. 소슬했던 잔치 자리는 다시 화기가 가득한 잔치 자리로 어울려졌다. 가희아는 좌중에 골고루 술을 따른 후에 어전으로 돌아가 아뢴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주흥을 돋우기 위하여 강계에서 배운 검무춤을 한 번 추겠습니다." 검무춤을 추겠다는 가희아의 아뢰는 말을 듣자 태종은 더욱 기뻤다.

"좋다. 검무를 추어 과인의 주흥을 더욱 돋우게 하라." 가희아는 어전에서 물러나 설중매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 복색을 갈아입고 나왔다. 두 기생은 아리따운 기상의 옷을 벗고 군관의 화려한 복색을 차렸다. 밀화패영 오색이 찬란한 공작미를 꽂은 검은 전립을 쓰고 붉고 누런 동달이 단 군복에 남전복을 덧입었다. 양편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멋지게 걸어 나오는 가희아와 설중매의 맵시는 남복으로 차린 때문 더한층 아름답고 예뼜다. 가희아는 씩씩하고 헌칠한 중에 여자의 맵시가 곁들여서 시원스럽게 아름답고, 설중매는 안존하고 애잔한 여인의 맵시에 남복을 차려서 그립같이 고왔다. 두 기생은 마루에 올라 먼저 군례를 어전에 드리고, 다음엔 장군들과 재상에게 군례를 드린후에 양편으로 갈라섰다. 마치 전장에 임해 있는 장군과 장군의 대결하는 모습이었다. 자리에 앉은 장군과 재상들은 땀을 쥐어 강계 기생 가희아와 함흥기생 설중매의 검무춤을 바라본다. 두 기생은 제각기 군례를 마친 다음 제각기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들었다. 가희아가 먼저 칼을 뽑았다. 희다 못해 푸른 빛을 뽑는 긴 칼이 칼집에서 뽑아지면서 허공 위에 흰 무지개를 그렸다. 가희아의 칼 뽑는 거동을 보자, 설중매도 칼을 뽑았다. 두편 기생들은 말을 타고 뛰는 듯한 기상으로 춤을 추며, 한편 칼을 허공에 받들었다. 순간 그들은 왼편 손으로 또 하나의 긴 칼을 환도집에서 뽑았다. 서릿빛 검광이 두 개 두 개 네 줄기를 허공에 뿜어 찬란했다. 두 기생은 또 한 번 말이 뛰는 형상으로 춤을 추어 나오면서, 서로 쌍검을 들어 어르기 시작했다. 두 팔에 쌍검을 들어 어울려 추는 태깔은 마치 남복 입은 선녀가 구름 위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남전복 자락이 퍼뜩 바람에 날리면서 홍공단 치맛자락이 펄럭했다. 하얀 버선발이 앞자락을 헤치면서 아름다운 선율을 지었다. 다음 순간 또 하나의 버선 치맛자락을 박찼다. 위에서는 칼이 돌고 아래서는 발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붉은 치마는 가희아의 치마요, 푸른 치마는 설중매의 치마다. 초한 전쟁에 패공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어 싸울 때 항우가 홍문연 큰 잔치를 열고 패공을 죽이려 하니 항우의 삼촌 항적은 패공을 살리려 하여 검무를 추었다. 이것을 본 항우의 또 하나의 삼촌 항백은 패공을 죽이려 하여 또 하나의 칼춤을 추었다. 위기일발인 이 찰나에 맹장 번쾌가 뛰어들었다. 대갈일성 항백을 꾸짖어 물리치고 패공의 목숨을 구해낸, 역사 깊은 항장무를 본뜬 것이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기생의 검무는 명색만 검무였다. 칼은 장검이 아니요 단검이었다. 그것도 진짜 칼이 아니요 무딘 백은으로 칼 모양을 만들었다. 다섯 개 여섯 개의 단검 무더기는 두 팔을 벌려 춤을 출 때 댕그랑 거리는 음향을 내어 아름다웠다. 춤과 음향은 서로서로 선율을 일으키면서 아담한 기당풍류를 자아냈다. 그러나 강계 기생 가희아가 함흥 기생 설중매를 적수로 하여 춤추는 칼은 바로 전쟁에 쓰는 서리 같은 긴 칼이었다. 태종 이하 장군과 재상은 두 기생의 능숙한 솜씨에 손뼉을 치며 갈채가 대단했다. 이제는 한체 어울려, 선과 선을 그려 맴돌았다. 허공에는 흰 무지개, 원과 원을 글 둥글둥글 광을 뿜었고, 아랫도리는 전복자락과 치맛자락이 푸른 빛 붉은빛을 뿜어 금수 비단의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가희아의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고 설중매의 자태도 드러나지 아니했다. 다만 위에는 흰 무지개가 허공에 살기를 뿜어 칼 부딪는 소리가 처절하고, 아래는 다섯 가지 빛깔이 현란한 광채를 뿜어 눈을 부시게 할 뿐이었다. 무예를 넘어, 절묘한 예술의 경지로 육박해 들었다. 모든 사람은 박수갈채를 넘어서서 환호성을 질렀다. 한동안 절정에 올랐을 때 춤은 한편 쪽 검광이 기울기 시작했다 둥글게 원을 그려 쌍무지개를 뿜었던 서리 같은 빛깔은 돌연 한편 검광이 스러지면서 설중매의 얼굴이 또렷이 나타났다. 힘이 모자라고 숨이 가빴다.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마지막 칼을 내려 청에 박고 가희아한테 군례를 드렸다. 설중매가 가희아한테 완전히 져서, 항복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또 한 번 일어났다. 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장성들은 가희아의 검무 솜씨에 어린 듯 취한듯했다. 가희아는 설중매의 항복하는 군례를 받은 후에 아리따운 웃음을 머금고 전하께 예를 올렸다. 만좌의 박수갈채 소리가 또 한 번 요란했다. 전하는 가희아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게 했다.

"과연 명불허전한 명기로구나. 강계의 검무춤을 내가 비로소 보았다. 이번엔 과인이 술을 따라서 너의 무예를 칭송하리라." 전하는 친히 금배에 술을 가득 부어, 가희아에게 내렸다. 무한한 광영이었다. 가희아는 사양치 아니하고 어사주를 받들어 마시었다. 전하는 설중매를 불렀다.

"네 비록 패했다 하나, 재주가 없어서 진 것이 아니다. 천생여질에 힘이 약해서 진 것이다. 너의 재주를 가상하게 생각한다. 가희아한테 내린 같은 술을 주리라." 전하는 설중매한테도 어사주를 내렸다. 설중매는 공손히 잔을 받들었다. 군신의 갈채 소리는 또 한 번 요란했다. 전하는 내시를 불러 가희아와 설중매에게 상급으로 비단을 내리고 대궐로 돌아갔다. 이날 밤 전하는 가희아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단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전하는 조회를 파하고 만 가지 일을 재결한 후에 어제 친림한 일을 사은하러 들어온 이숙번을 어전에 불렀다.

"어제 경의 생일잔치에 과인은 오래간만에 쾌하게 심신을 펼 수 있었소. 경의 팔자는 내 팔자보다도 낫다 생각하오." 전하는 용안에 가득 미소를 띠고 이숙번을 향하여 어제 지낸 일을 치사했다. 이숙번은 황송했다. '임금의 팔자보다 낫다'고 하는 전하의 말씀은 까딱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릴 소리다.

"모두 다 망극하신 성은으로 소신은 오늘날 전하 슬하서 늦은 복을 누리옵니다. 소신이 일찍 전하를 받들어 모시지 못했던들 어지 이같은 복을 받사오리까. 어제만 해도 갸자에 가득히 사찬을 내리시와, 모든 시녀들이 즐겁게 지냈사오니, 또한 성상 전하의 은혜올시다." 이숙번은 전하의 말씀이 혹시나 불쾌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연해 성상 전하의 은혜가 망극하다고 아뢴다. 태종은 진심으로 유쾌했던 것이다. 이숙번의 두려워하는 심경을 알 까닭이 없었다.

"오늘 과인은 경의 집으로 미행하려 하니, 경은 과인을 박대하지 아니하겠소. 하하하." 전하는 미행을 하겠다고 하고 드높게 웃음을 웃었다. 미행은 임금이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변복을 하고 몰래 행동을 하는 것을 미행, 곧 가만히 하는 행동이라 부르는 것이다. 태종은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건만, 이숙번은 '미행' 소리를 듣자 깜짝 놀랐다. 무슨 일로 미행을 하시겠다는 말인지 얼른 알아듣지를 못했다.

", 미행이오니까?" 한마디를 해놓고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전하는 여전히 빙긋빙긋 미소를 보냈다. 전하의 표정으로 보아 결코 자기한테 적의를 가진 것이 아닌 것을 알았다.

"전하께옵서 어제도 친림하시고 오늘 또 미행을 하신다면 소신 일문에 넘치는 광영이올시다. 삼가 받들어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어느 때쯤 친림하시올지 아주 하교를 내려주시옵소서." 완산부원군 이숙번은 두 팔을 짚고 전하의 미행할 시간을 물었다.

"낮에는 일이 많으니 밤이 좋겠소. 술시는 너무 이르고 해시쯤이 좋겠소. 해시에 나가기로 하겠소."

"삼가 성지를 받들어 만반 준비를 차리겠습니다."

"준비라니 무슨 준비요. 다 소용없는 노릇이오. 밤참으로 간단하게 주안상이나 차려두라 하오. 경과 함께 즐기리다. 그리고 술 따를 가희는 경의 집 가희아를 대령케 하오." 이숙번은 '가희아'란 말을 듣자,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미행의 목적이 가희아한테 있는 것을 안 때문이다. 이숙번은 어전에서 물러난 다음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생각 속에 빠졌다. 전하가 가희아로 인하여 미행까지 한다니 가희아한테 고혹된 것이 틀림이 없다. 장차 이 일을 어찌 처리했으면 좋은가 하고 곰곰 생각해본다. 잘못하면 조정 대신과 백성들한테 크나큰 의심과 지탄을 받기 십상팔구다.

고려 말엽 공민왕 때 왕사 신돈은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상배한 후에 실신지경에 이른 왕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여 공주의 모습과 방불한 미녀 반야를 집에다 두고 왕을 미행시킨 일이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민왕은 한 달에 두세 차례 신돈의 집을 미행했다. 아름다운 반야를 꼭 노국공주의 혼신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결국 반야의 몸에는 아기를 뱄다. 이 아기가 바로 아명으로 모니노요, 나중에 왕우라고도 하고, 신우라고도 부르는 우왕이다. 공민왕은 아기 나이가 돌이 넘었을 때, 반야는 데려오지 아니하고 모니노만 대궐로 데려왔다. 그 후에 공민왕이 죽으니 모니노가 왕이 됐던 것이다. 뒤에 전하의 부왕인 태조와 전하는 고려의 신하로 고려의 임금을 죽였다는 누명을 벗기 위하여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 해서 모든 문헌과 역사를 신우로 바꾸어놓고 그의 아들 창왕도 신창으로 만들어놓았다. 이숙번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모든 사실이 주마등처럼 달렸다.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임금이 한 여자를 보기 위하여 자주 자기 집으로 미행을 한다면 세상 평판이 좋지 못할 것은 정한 이치다. 좋지만 않을 뿐 아니라 혹여나 가희아의 몸에 어린아이가 생긴다면 까딱 잘못하다가는 신돈과 같은 누명을 쓰기가 십상팔구라 생각했다. 이숙번은 곰곰 생각한 끝에 가희아를 사랑으로 불렀다. 가희아는 이숙번의 가기인 때문, 항상 이숙번의 집 내아에 있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가희아는 명랑한 웃음을 지어 주인 대감 사랑방 앞에 문안을 드렸다.

"가희아 등대하였소." 은방울을 흔드는 듯한 목소리로 고했다.

"들어오너라." 가희아는 분홍 저고리에 남치마 자락을 휘어잡고 주인 대감 앞에 고요히 섰다.

"가까이 앉거라. 할 말이 있다." 가희아는 대감이 별안간 무슨 분부를 내리려나 하고 대감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숙번은 일부러 엄숙한 표정을 얼굴에 지었다.

"큰일 났다." 밑도 끝도 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가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궁금증이 나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무슨 큰일이 났습니까?" 새까만 눈에 반짝 빛을 뿜어 물었다. 이숙번은 가희아의 묻는 말에 엄숙한 표정을 지어 대답했다.

"상감께서 너를 보러 내 집에 또 오신다 했다." 가희아는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또 거둥령을 내리셨습니까? 그것이 무슨 큰일입니까. 놀랐습니다."

"거둥령을 내리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미행으로 오시는 것이다."

"거둥령을 내리고 오시는 것이 큰일이지 미행으로 오시는 일이 어찌 큰일입니까." 가희아는 방글거려 웃으며 대답했다.

"일이 많아서 큰일이 아니다. 미행으로 밤에 자주 찾아오시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오시는 일이니 너한테는 무상한 광영이다마는 국가의 원로로 있는 나한테는 거북한 일이 많게 되겠다." 완선부원군 이숙번은 가만히 탄식조로 말했다.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희아는 총명 영리했다. 주인 대감 이숙번의 난처하다는 눈치를 짐작해 알았다. 죄송하기 짝이 없다는 사죄를 잊지 아니했다.

"내가 너한테 당부할 일이 있다. 너는 내가 말하는 대로 실행하겠느냐?"

'듣자온 후에 소인의 힘으로 될 만한 일이라면 분부대로 받들겠습니다." 이숙번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남녀 간에 정이 움직여서 사랑이 싹트는 일은 사람의 본능이다. 나는 너한테 정이 흐르는 상감의 심정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네가 상감게 향의하는 그 정을 끊으라 할 수도 없다. 그러니 너는 앞으로 상감을 진정으로 흠모해 모실 테냐?"

"천한 계집이 어찌 감히 하늘같이 높으신 대왕 전하를 흠모하고 사랑한다 하오리까. 하오나 만약에 상감께옵서 미천한 제 몸을 더럽다 아니하시고 거두어주신다면 결초보은하여 한평생 받들려 하옵니다." 이숙번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엄숙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오늘 너한테 당부할 말이 있다."

'삼가 받들겠습니다."

", 고려 때 신돈의 이야기를 들었느냐?"

'온 세상이 다 아는 노릇 아닙니까?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이야기는 귀에 젖도록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주 터놓고 내가 이야기를 할 테다. 너는 우리 집 가기가 아니냐. 까딱 잘못하다가는 나는 신돈의 꼴이 되고 너는 반야의 신세가 되고, 앞으로 혹시 네 몸에서 왕자가 나온다면 우왕 꼴이 될 테니, 그런 누명을 쓰게 된다면 네 신세와 내 신세는 아무 까닭 없이 아주 망해버리고 말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내 등에는 진땀이 흘렀다. 사람이란 눈앞에 보이는 일만 생각해서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먼일까지 생각해두어야 한다. 알아듣겠느냐?" 완산부원군 이숙번의 말을 듣자 가희아는 까만 눈을 깜박였다.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마는 어찌하면 좋으리까?" 이숙번은 목소리를 나직하게 해서 가희아의 묻는 말에 대답했다.

"오늘 전하께서 미행으로 내 집에 오시는 것은 너를 괴러 오시는 것이다. 그대로 놀러만 오시는 것이 아니다. 알아듣겠느냐?" 가희아는 아무리 기생 출신이라 하되, 얼른 말대답하기가 거북했다. 잠깐 얼굴을 붉혔다.

"오늘 밤엔 반드시 너한테 취침령을 내리실 것이다. 그때 가서 너는 호락호락 몸을 허락해서 노류장화의 노릇을 해서는 아니 된다. 알아듣겠느냐?" 가희아는 대답 대신 눈을 깜박였다. 다음 말을 들어보자는 눈치다.

"이 점이 네나 내나 흥하고 패하는 기로에 서 있는 두 갈래 길로 갈라지는 긴요한 대목이다. 알아듣겠느냐? 신돈이 되고 반야가 되는냐, 그렇지 아니하면 그대로 개국 공신 이숙번이가 되고 조촐한 후궁 가희아가 되느냐 하는 갈림길이란 말이다."

"알아듣겠습니다." 가희아는 총기 있는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대답했다. 이숙번이 말을 계속한다.

"절대로 내 집에서는 전하께 몸을 허락하지 말란 말이다. 아주 대궐 후궁으로 들어간 연후에 몸을 전하께 맡기란 말이다. 이리 해야만 뒤에 혹시 왕자가 네 몸에 탄생한다 해도 이러니저러니 군소리가 없을 것이다. 네가 능히 이 큰 결심을 하겠느냐?" 가희아는 주인 대감 이숙번의 깊은 뜻을 비로소 알아들었다. 자리서 일어나 절을 올린다.

"부모보다도 더 크고 넓은 은덕을 무슨 수로 다 갚으오리까. 명심해서 거행하겠습니다." 이숙번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하나, 극히 어려운 일이리라. 죽이고 살리는 생사여탈의 칼자루를 잡고 있는 제왕 앞에 단 하룻밤이라도 굽히지 않고 항거한다는 일은 네가 여간한 결심을 갖지 아니하고는 될 수 없는 법이다. 어디 오늘 밤에 네 행동을 지켜보기로 하리라. 그럼 물러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취하라." 가희아는 내아로 돌아가고 이숙번은 상감의 미행을 맞이할 준비를 차렸다. 간단한 다담상을 차리라고 숙설간에 영을 내린 후에 사랑 별실에는 안석 장침에 보료와 방석을 문방사우와 함께 벌여 화려찬란하게 포진을 해놓았다. 이날 밤 해시가 되자 이숙번의 집 솟을대문 앞에는 과연 두 사람이 문을 두드렸다. 한 사람은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손에는 호박 등을 들었고, 한 사람은 갓을 쓰고 직령을 입었다.

"누구요?" 문하인이 물었다.

"묘동 사는 이한량이 대감을 뵈러왔소." 하고 대답했다. 극비의 행동이었다.

"들어오시라고 일러라." 이숙번은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부러 문간까지 맞이를 하지 아니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문하인한테 인도되어 주인 대감이 있는 큰사랑으로 들어갔다. 갓 쓰고 직령 입은 사람은 대감의 방으로 들어가고, 머리 동이고 등불 든 사람은 손에 든 등불을 끈 후에 청지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숙번은 방 안에서 상감을 맞이했다. 전하가 듭시사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복했다.

"일부러 나가서 대가를 맞이하지 아니했습니다. 통촉히주시옵소서." 전하는 반갑게 이숙번의 손을 잡았다.

"미행을 하는데 맞이가 어디 있겠소. 맞이를 한다면 어디 미행이라 할 수 있소. 당연한 일이오." 임금이나 신하의 음성은 모두 다 작았다. 이숙번은 마음속으로 밤도 이미 깊었거니와 어서 빨리 상감을 대궐로 돌려보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숙번은 벽에 늘인 설렁줄을 흔들었다. 하인이 긴 대답을 하고 앞으로 달려왔다.

"숙설간에 기별해서 아까 마련하라 했던 다담상을 빨리 올리라 해라. 그리고 가희아가 있거든 술정을 받들고 나오라 일러라." 하인이 청령하고 물러난 후에 주인은 상감을 호화롭게 꾸민 별방으로 인도했다. 이윽고 방문 열리는 소리가 연삽하게 일어나면서 가희아는 자그마한 연엽소반에 다담상을 받들어 들어왔다. 전하의 용안에 화기가 가득했다. 가희아는 다담상을 방문 안에 놓고 먼저 전하께 향하여 한팔을 짚어 문안을 드렸다.

"어제는 너무나 과분한 굄을 받자와 황공무지하여이다." 가희아는 산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불나불 지껄였다. 전하의 눈에 비치는 가희아의 화용월태는 어제보다도 더한층 아름다워 보였다. 미소를 던져 가희아의 일동일정을 바라본다. 가희아는 전하께 문안을 올린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담상을 받들어 올렸다. 이숙번은 마음에 정한 일이 있었다. 두어 잔 약주를 어전에 올린 후에 허리를 굽혀 전하께 아뢴다.

"소신은 몸이 좀 고단하와 옆방으로 물러가겠습니다. 모든 거행은 가희아가 받듣겠사오니 안심하옵시고 하명해주시기 바랍옵니다."

"홋홋해 어찌하오." 전하는 미소를 지어 이쯤 대답하고 더 만류하지 아니했다. 불감청이언정, 소원하는 바였다. 이숙번이 물러간 후에 별방 속방은 신방같이 아늑했다. 다담상을 가운데 두고 전하와 가희아가 마주앉아 있을 뿐이었다. 술이 서너 순배 돌았을 때 전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오늘 과인이 이같이 야심한 중에 미행을 나온 것은 누구 때문인지 네가 아느냐?"

"쇤네 같은 천한 계집이 어찌 감히 존엄하옵신 상감마마의 높으신 뜻을 추측하오리까. 황공무지하오나, 아올 길이 없습니다." 가희아는 요염한 교태를 지으면서 말소리만은 또렷또렷 낭랑하게 대답했다. 전하는 자기의 미행해온 일을 모르겠다는 가희아의 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밤은 해시가 넘어 자시가 되었다. 온 천지는 적막한 강산 속에 잠들었다. 다만 한 나라의 제왕이 범나비마냥 아름다운 기녀 앞에 사랑을 구하는 장면이 이숙번의 집에서 벌어졌을 뿐이다. 전하는 가희아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그래, 네가 이 방에 내가 온 뜻을 모르겠단 말이냐. 나는 너를 사모한다. 너무나 박정하고나." 전하는 호소하는 듯, 애원하는 듯 가희아의 도독하고 재치있어 보이는 귓가에 속삭였다. 가희아는 고개를 다소곳 숙여 대답했다.

"전하께옵서 깊은 밤에 미행하시는 것은 백성들의 질고를 살피시기 위하여 납신 줄 알았더니, 소인을 사모하여 찾으신 것이라 하시니 감격한 말씀 아뢸 길 없습니다. 연하오나 소인은 이름이 천하와 노류장화의 기생의 몸이 되었습니다마는 아직도 깨끗한 처녀의 몸이올시다. 전하께옵서 진정으로 사모해주신다 하오면 절차를 밟아 사랑해주옵소서." 가희아는 명랑한 얼굴로 조금도 두려움 없이 대답했다.

"절차란 무엇이냐?"

"비록 천기라 하오나 전하께옵서 소인의 몸을 한 번 범하시는 때는 전하의 사람이올시다. 전하의 사람으로 재상의 집 가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청문이 사납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말 소인을 사랑하신다면 오늘 밤은 그대로 환궁하옵시고 밝은 날 소인을 대궐로 부르시어 궁녀의 책임을 맡기신 후에 괴어주시기 바라옵니다. 전하께서는 백성의 부모십니다. 전하의 일거일동은 곧 이나라 백성들의 교화에 크나큰 영향이 미치옵니다." 가희아는 처절한 얼굴에 싸늘한 기상을 띠어 도란도란 아뢴다. 가희아의 한마디 말은 전하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전하는 취했던 술기운이 단번에 깨는 듯했다. 슬며시 자기의 위치를 돌아보았다. 가희아가 보통 기생이 아닌 것을 알았다.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네 말이 옳다. 과인이 잠깐 주흥에 겨워서 너를 범하려 했구나. 뜻이 있으면 내일 다시 기별하리라. 상을 물리고 이부원군을 들라 해라." 가희아의 한 마디 바른말에 전하는 얼른 심기를 돌렸다. 가희아는 전하의 너그러운 태도가 존경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가희아는 다담상을 받들고 조용히 어전에서 물러났다. 이윽고 이숙번이 들어왔다.

"약주를 좀 젓수셨습니까?" 이숙번은 가희아를 통해서 일이 무사하게 된 줄 알았던 것이다. 가슴이 후련했다. 전하는 이숙번을 바라보며 호협하게 웃는다.

"오늘 밤 과인은 경의 집 가기의 높은 풍도를 비로소 알았고. 가희아로 후궁을 봉할 테니 내일 중사가 나오거든 함께 들여 보내주오."

"봉명하겠소이다." 이숙번은 은근하게 대답했다. 다음날 전하는 내관을 이숙번의 집으로 내보내서 가희아를 불렀다. 나라 법네 기생들은 말을 타지 아니하면 휘장과 뚜껑이 없는 가마 바탕을 타는 것이 원칙이다. 세상에서는 가마 바탕을 판교라고 불렀다. 널판자로 만든 교자 바탕이라 해서 판교라고 했다. 전하는 내관을 이숙번의 집으로 보낼 때 잔치도 아니하는 대궐 안에서 기생이 출입하는 것을 보면 바깥 사람들의 비평을 받을까 해서 일부러 가마를 보내서 가희아를 맞이했다. 전하는 내관을 이숙번의 집으로 보내놓고 도다시 곰곰 생각해본다. 가희아를 데려다가 후궁을 삼는다면 투기 많은 민후는 반드시 강렬한 질투의 화살을 또 보낼 것이 분명했다. 가희아뿐 아니었다. 정력이 절륜한 자기로서는 앞으로 몇 사람의 후궁이 생겨날지 모를 일이다. 전하는 혼자 가만히 궁리 속에 빠져본다. 어떠한 법을 정해서 민후의 입을 꼼짝 못하도록 봉해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전하는 급히 또 한 명의 내관을 불렀다.

"정원으로 나가서 승지를 들라 해라." 내관은 정원으로 달려가 승지를 청했다. 승지는 급히 추창해 들어왔다.

"부르셨사옵니까?"

"경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제왕이 후궁을 두는 데 무슨 법규가 있는가? 역대 제왕의 기록을 살펴서 고증해 올리라."

"특별히 일정한 법은 없습니다마는 후가 있고 비가 있고 빈이 있습니다. 그 밖에 모든 후궁들이 또 있습니다. 대개 국왕이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 어떠한 법류를 정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삼천 궁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천 궁녀를 함빡 후궁으로 삼는다 한들 누가 감히 막으리까." 승지는 임금이 별안간 후궁을 묻는데, 무슨 법이 있느냐 물으니 슬며시 눈치를 채고 임금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삼천 궁녀를 쳐들었다. '삼천 궁녀' 소리를 듣는 전하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삼천 궁녀야 크고 넓은 나라 중원에서나 둘 것이지 나라가 작은 우리나라에서야 둘 수 있겠는가. 비빈과 후궁들을 몇 사람이나 둘 수 있을까 대신과 의논해서 결정하라. 그리하고 앞으로 비빈 사이에서 나오는 왕자와 공주들의 칭호도 적당한 규범을 마련해서, 곧 상신하라." 승지는 곧 빈청으로 나가 대신들과 의논했다. 대신들은 급히 승지와 함께 내명부와 외명부의 법규와 왕자, 왕손의 호칭을 마련하여 어전에 바쳤다. 내뭉부는 궁중에서 후궁이 되어 벼슬을 받은 궁녀를 가리킨 것이요, 외명부는 벼슬하는 사람들의 아내가 받는 가자요, 왕자 왕손의 호칭은 적과 서를 구별하여 법을 정하자는 의도였다. 승지와 대신한테 한 번 명령을 내리자 모든 계급은 지체없이 정해졌다. 승지는 어전에 복명했다.

"먼저 내명부와 외명부의 법규를 정했습니다. 내명부는 대궐 안 지밀에서 왕명을 받들어 벼슬 계급을 내리는 것이옵고, 외명부는 신하들의 부인 되는 사람은 저절로 그 남편의 벼슬 계급에 따라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올시다." 전하는 기쁜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먼저 외명부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 전하는 체면을 차리느라고 면저 외명부의 설명을 들어보려 했다.

"외명부는 아까 아뢴대로 그 남편의 벼슬 계급에 따라서 품위를 정했습니다. 우선 부마의 아내, 곧 왕후의 다님은 공주의 칭호를 드리고, 후궁의 따님은 옹주라 하고, 왕비의 어머니, 곧 부원군의 아내는 정일품의 가자를 주어 부부인이라 하고, 상감의 유모는 종일품의 가자를 주어 봉보부인이라 하고, 왕세자의 따님이 시집을 갔을 때눈 군주라 호칭하새 정이품의 가자를 내리고, 왕세자의 서따님이 시집을 갔을 때는 현주라 부르면서 정삼품의 가자를 내리시는 것이 좋다고 의논했습니다."

"좋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다음에 나라의 일가인 종친들의 칭호를 아뢰겠습니다. 정일품 지위에 가는 상감의 적자인 대군의 부인은 군부인이라 해서 왕후의 어머니와 동등한 지위를 갖게 하고, 군부인이라 해서 종일품의 가지를 내리고, 나라 일가의 종손 되는 종정 경의 아내는 현부인이라 해서 종이품의 가자를 내리고, 군의 아들 도정의 아내는 정삼품 신부인의 가자를 내리고, 도정의 아들 정의 처는 신인이라 해서 정 또는 종삼품으로 하고, 정의 아들 수의 아내는 혜인이라 해 정 또는 종사품의 가자를 주기로 했습니다." 전하는 마음에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을 말하라."

"문관과 무관의 처 되는 사람들의 칭호를 가자 품위에 따라서 문무의 구별 없이 통일해 부르기로 했습니다."

"말해보라."

"정일품 영의정 및 좌. 우의정의 부인과 공신부원군의 부인과 영돈녕부사 및 무관으로 정. 종이품 어영대장, 훈련대장, 총융사의 부인은 정경부인이라 하고, 다음에 이. . . . . 공의 육조판서의 부인은 정부인이라 하고, 옥관자를 붙인 정삼품까지, 당상관의 아내는 숙부인이라 하고, . 종삼품의 아내를 숙인이라 하고, 사품의 아내를 영인, 오품의 아내를 공인, 육품의 아내를 의인, 칠품의 아내를 안인, 팔품의 아내를 단인, 구품의 아내를 유인이라 했습니다." 태종은 관자 다는 법을 묻는다.

"정일품에서 종이품까지가 금관자를 달고 정삼품이 되어야 비로소 옥관자를 다는 법이 아닌가?"

", 그러하옵니다."

'정삼품 이하의 사람은 어떤 관자를 다는가?"

"당하 삼품서부터 구품까지는 대모 관자를 답니다. 그리하고 백두서민들은 쇠뿔 관자를 답니다."

"그렇다면 외명부의 칭호를 내린 신하들에게도 관자와 같이 어떠한 표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외명부는 별로 밖으로 나가 출입할 기회가 없습니다. 대궐에도 경사 때 한꺼번에 들어가 알현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표지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대로 정부인, 숙부인 하는 호칭만 가지면 넉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내명부에 관한 일을 묻는다.

"다음엔 내명부에 대하여 칭호와 표지를 말하라."

"내명부는 임금의 후궁으로 빈과 귀인과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 여덟 계급을 두어봤습니다. 그래서 정일품을 빈이라 하고 종일품은 귀인이요, 소의가 정이품, 숙이가 종이품, 소용이 정삼품, 숙용이 종삼품, 소원이 정사품, 숙원이 종사품, 이같이 해서 여덟 계급으로 정했습니다. 이것이 후궁의 계제올시다. 이 칭호는 후궁으로 봉하기 전에는 아무리 제왕의 은총을 받은 궁녀라 하는 부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후궁의 높고 낮은 표지는 어찌하기로 했는가?"

"그것은 첩지로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삼품 이상은 황금으로 쌍봉황을 조각하여 첩지를 달고 삼품 이하는 단봉황 첩지를 달게 했습니다." 전하는 돌연 기운찬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후궁에 여덟 계급이 있다 하면 과인은 아무리 후궁을 두기 싫다 해도 여덟 명의 후궁을 둘 수 있구나, 하하하." 전하의 호방한 웃음소리는 넓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승지는 또다시 태종의 비위를 맞춘다.

"계급은 비록 여덟이라 하오나 후궁은 천백도 두실 수 있습니다. 한 계급마다 열 명의 후궁을 두시면 팔십 명이요, 백 명을 두신다면 팔백 명이 됩니다."

"경의 말대로 한 계급에 백 명씩 둔다 해도 중국의 삼천 궁녀를 따라가려면 까맣게 아득하구나." 태종은 또 한 번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가 마음 터놓고 호방하게 웃는 것을 보자, 승지는 죄었던 마음이 풀렸다.

"삼천 궁녀는 궁녀들의 총수올시다. 모두 다 제왕이 손을 대신 후궁이 아니올시다. 깊이 통촉하시옵소서." 승지는 미소를 지어 아뢴다.

"모든 칭호를 아뢴 대로 정하오리까?"

"좋다. 곧 법으로 규정하라." 전하는 만족한 표정으로 내외명부의 칭호와 규제를 정하라 했다. 전하가 승지에게 후궁의 계급을 정했을 때, 이숙번의 집으로 가희아를 데리러 나갔던 내관은 복명을 아뢰었다.

"가희아를 데려왔사옵니다." 전하는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판교를 태우지 아니하고 가마로 데려왔느냐?"

"분부대로 거행했습니다."

"어느 문으로 들어왔느냐?"

"정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창경궁을 통하여 들어왔습니다." 전하는 내관의 말을 듣자 더욱 만족했다.

"지금 어디 있느냐?"

"대전 합문 밖 가마 안에 있사옵니다."

"상궁을 보내서 맞이해 들일 테니 잠깐 더 기다리라 해라." 전하는 내관에게 이르고 일방 대전 상궁을 불렀다.

"공신 이숙번이 그의 집 가기를 바쳤다. 도로 보내자니, 공신을 대접하는 예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텐데, 너도 짐작하거니와 중전마마 성정이 대단하시니, 내전에 거두어둘 수 없다. 거처할 곳을 정할 때까지 비밀하게 거두어두게 하라." 상궁도 가희아의 일을 감감하게 몰랐던 것이다. 비로소 분부를 듣고 이숙번의 집에서 기생 하나가 들어오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일개 상궁의 몸으로 가타부타 아뢸 도리는 없는 일이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상궁은 대답을 올리고 합문 밖으로 나가서 가희아를 가마 속에서 맞이해 들였다. 대전 별당 조용한 방은 열도 넘었다. 상궁은 벌써 눈치를 챘다. 가희아를 그중 넓고 화려한 방으로 인도한 후에 복명을 했다.

"기생을 인도해두었습니다."

"어느 방으로?"

"대전 별당 그중 큰 상방으로 인도했습니다."

"먹을 것을 들여보낸 후에 목욕을 시키고 의복 일습을 내리게 하라. 모든 일을 내전에서 모르도록 일체 비밀을 지키라."

"알아들었습니다."

"만일 일후라도 내전에 있는 비자들의 입에 오르내려서 중전마마께서 아시게 되는 날은 네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알았사옵니다."

"나중에 또다시 이르리라. 아까 말한 대로 음식과 의복을 내리도록 하라." 전하의 분부를 받은 상궁은 가희아에게 음식과 의복을 보내기 위하여 어전에서 물러났다. 전하는 가희아를 대궐로 데려온 후에 온종일 정사를 살폈다. 그의 끈기 있는 참을성과 박력 있는 정치적 솜씨는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다 데려오고도 모든 일을 태연스럽게 처리했다. 밤이 깊은 후에 전하는 조용히 지밀상궁을 불렀다.

"가희아가 있는 처소에 나의 금침을 펴게 하라." 지밀상궁은 가희아의 처소에 전하의 금침을 펴고 대전으로 돌아가 고했다.

"금침을 별방에 포진하였습니다." 전하는 고려 궁인의 사건이 일어난 후에 한 달이 넘도록 공방으로 지냈다. 사나운 민비의 침소로는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다. 그런 후에 아직 다른 후궁은 없었다. 몸이 제왕의 자리에 있으니 함부로 욕심을 처리할 수도 없었다. 이제, 자색과 재주가 뛰어난 가희아가 궁중에까지 들어왔으니 어서 빨리 대하고 싶었다. 더구나 모든 이면과 체면을 차리느라고 반나절과 초저녁을 그대로 허송한 후였다. 어서 혼자 있는 빈방에서 가희아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뜨고 싶었다.

"포진이 다 되었느냐? 내가 나가리라." 전하는 상궁한테 어색한 웃음을 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늙은 상궁은 사방 등을 들고 앞을 인도했다. 길고 긴 복도를 돌아 정원으로 내렸다. 자정이 이미 넘었다. 온 대궐은 어둠 속에 조는 듯 잠겨 있었다. 다만 십여 채 전각 중에 한 채 전각만이 은은하게 불빛을 뿜고 있었다.

"이 방이냐?" 전하는 손으로 불빛이 있는 방을 가리켰다.

", 그러하옵니다." 지밀나인은 앞을 서서 별당 창문의 앞고리를 잡았다. 창문이 '덜컹'하고 소리를 내었다. 다음엔 아자 장지문이 나타났다. 상궁은 창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오르시옵소서." 전하는 부액도 받지 않고 올랐다. 모든 내시와 궁녀며 액정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늙은 제조상궁 이외엔 한 사람의 궁녀와 액정도 거느리지 않고 왔던 것이다. 전하는 사십 대의 건장한 몸이었다. 선뜻 마루 위로 올랐다. 옥등잔에 불빛이 밝았다. 다시 앞에는 기름 먹인 창호에 불빛이 은은하게 비쳤다. 늙은 상궁은 손으로 가볍게 창호를 두드린 후에 또 한 번 문을 밀었다. 향훈이 전하의 코로 스쳤다. 방에서 나오는 따뜻한 기운은 가희아의 몸 내음을 한데 실어가지고 전하의 코를 여지없이 흔들어주었다. 전하의 마음은 아름다운 사람을 대하기 전에 먼저 아름다운 사람의 향훈을 맡았다. 마음이 취하고 흔들렸다. 가희아는 고요히 자리에서 일어나 전하를 맞이했다. 화관 족두리에 기생의 예복인 몽두리를 입고 허리를 반쯤 굽혀 전하를 맞이하는 그 자태는 마치 물을 박차는 제비같이 날렵하고 예뻤다.

"황공무지하여이다." 옥소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한 가희아의 맑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늙은 상궁은 손등불을 방 한편에 놓은 후에 다시 전하를 화려한 금침 위로 인도했다.

"진좌하옵소서." 전하는 만족했다. 미소를 던지며 홍공단 이불자락에 황학 백학을 멋지게 수논 금침 위에 앉았다. 가희아는 영리했다. 늙은 상궁이 지휘하기 전에 벌써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을 알았다. 눈같이 희면서 아름다운 곡선미가 나타나는 조그마한 발길을 사뿐사뿐 디디고 어전으로 가까이 갔다. 한 간통쯤 떨어진 곳이었다. 두 팔을 소리 없이 벌렸다가 다시 모은 후에 날아갈 듯 큰절을 올렸다. 한 번이 아니다. 네 번이었다. 사배의 절차를 밟은 것이다. 늙은 상궁은 가희아의 큰절이 끝날 무렵 상감께 아뢰었다.

"소인은 물러갑니다. 내일 일찍 대령하겠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대전 침실은 네가 지키고 있으라. 모든 일은 극비에 부쳐라. 알아듣겠느냐? 나중에 후하게 상금을 내리리라."

"과히 하념하지 마시옵소서. 분부대로 명심하여 거행하겠습니다." 늙은 상궁은 눈치가 빨랐다. 자기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상금은 후히 주리라'하는 상감의 말씀에 더욱 기쁨을 느꼈다. 윗목에 놓아두었던 손등을 들고 종종걸음을 걸어 어전에서 물러 나갔다. 문은 닫혀지고 방은 더욱 탐탁하도록 오붓했다. 제왕과 기생이라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탈박을 벗겨놓으면 한 사람의 씩씩한 장년 남자요, 한 사람의 절묘한 예쁜 여자다. 전하는 도연히 흥이 일어났다.

"하루 만에 너를 대해 보니, 네 양자가 더욱 예쁘고 묘하고나." 가희아는 기생이었다.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소인도 전하께서 환궁하신 후에 잠을 못 이루고 밤을 꼬박 새면서 그리워했습니다. 뜻밖에 이제 대궐로 부리시와, 천안을 지척에 모시오니 황공 감격한 마음 아뢸 길 없사옵니다." 전하는 가희아의 손을 잡아 무릎 앞에 이끌었다.

"너는 나의 후궁이 되어야 한다." 전하는 가희아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열을 뿜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다시 바른손을 들어 가희아의 허리를 강하게 감았다. 강하게 감을 뿐이 아니었다. 뺨을 가희아의 뺨에 대어보았다. 손바닥에 달아오르는 가희아의 열기가 분내음과 함께 전하의 코로 핍박해 들어왔다. 전하의 관능은 미칠 듯 고조되었다.

"황공무지하여이다." 가희아는 '황공무지하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전하는 가희아를 번쩍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네가 정말 처녀라 하더니 과연 처녀냐?"

"어느 존전이라 소인이 감히 거짓으로 아뢰었으리까. 시험해보시면 아시오리다." 가희아는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시험해보시면 아시오리다' 한 가희아의 대답은 더한층 전하의 정을 부채질해주었다. 전하는 가슴이 설레었다.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가희아의 아름다운 볼에 입을 대었다.

"네가 비록 기녀라 하나 처녀의 몸이라 하니 내가 오늘 밤을 혼인 초야로 해서 너를 맞이하리라. 네 생각에 어떠하냐?"

"황공무지하여이다." 가희아는 감격했다. 고개를 다소곳 숙여 대답한다.

"내 비록 너를 육례를 갖추어 맞이하지 못할망정 오늘 밤 이 신방 안에서는 모든 절차를 귀밑머리 마주 풀어 혼인하는 양주같이 하리라."

"감격한 말씀 아뢸 길 없사옵니다." 가희아는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진정으로 고맙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무릎 위에 앉혔던 가희아를 슬며시 내려놓고 말한다.

"혼인하는 첫날 밤에 신랑이 신부의 옷을 풀어주지 아니하면 금실이 좋지 못하다 하더라. 그래서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옷을 풀어주는 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수천 년래 민속이다. 말하자면 속레의 하나다. 먼저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서 너를 우대하는 뜻을 표하리라." 가희아는 또 한 번 고개를 숙여 말없이 감사하다는 뜻을 표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가희아의 머리에 쓴 족두리에 손을 대었다. 황금으로 아로새긴 금나비가 바르르 떨었다. 석웅황, 금패, 밀화, 비취옥, 산호, 자마노가 진보석을 둥글둥글 갈아서 백옥 화관 위에 구슬 꿰듯 꽂아놓은 보옥꽂이가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모든 것을 조용히 상감한테 맞기고 초연히 앉아 있는 가희아의 까만 눈과 윤을 머금은 오똑한 코는 더한층 아름다웠다. 전하는 홀린 듯 가희아의 아름다운 자태에 다시 한번 취했다. 전하는 이내 손을 들어 족두리 뒤편 머릿밑에 꽂아논 조그마한 금비녀를 뽑았다. 머리 쪽에 걸려있던 화관 족두리가 벗겨졌다. 전하는 족두리를 색상자에 담았다. 가희아의 머리에는 황금 첩지와 낭자만이 남았을 뿐이다. 전하는 황금 첩지를 풀어 상자에 담고 황금 용잠에 걸어논 구슬 달린 댕기를 거두었다. 용점을 빼고 머리를 틀어 백옥 서북잠을 꽂아 주었다. 족두리와 낭자를 내린 가희아의 민얼굴은 더한층 고왔다. 전하가 머리 쪽을 틀어줬으니 임금이 관례를 해준 것이다.

"이제 너는 관례를 했다. 내 손으로 네 머리를 얹어주었으니 너는 내 아내로구나." 전하는 용안에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가희아는 '아내'라고 까지 불러주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더한층 마음에 감격을 느꼈다.

"상감마마, 과분하신 말씀을 내리십니다. 어수로 머리를 얹어주신 것도 일생에 잊지 못할 영광이온데, 소인이 어찌 아내의 칭호를 받자오리가. 하료하시는 말씀만 반자와도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아내란 반드시 정실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민가로 말한다면 첩도 아내요, 궁중으로 말한다면 후궁도 아내다. 내조해주는 사람은 다 아내라 해도 좋으니라. 자아 밤이 깊어간다. 또 한 가지 의식을 차려보기로 하자." 전하는 미소를 지어 가희아를 바라본다. 가희아는 전하가 또 한 가지 의식을 차려보자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처녀라 하나 기생이었다. 신방 치르는 이야기를 귀에 젖도록 들었다. 새삼 부끄러울 것은 없으나 아는 체해서 말대꾸할 수는 없었다. 가만히 침묵을 지켜 앉아 있었다. 전하는 말 없이 가희아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이번에 할 일도 신랑이 신부한테 첫날밤에 아니 치러서는 아니되는 행사의 하나다. 상감 같은 점잖은 분이 해괴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놀라지도 말아야 한다." 전하는 가희아를 지그시 바라본 후에 넌짓 손을 들어 여자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가희아는 전하께서 장차 무슨 짓을 할 것을 판연히 짐작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어깨를 바싹 오그리고 손으로 전하의 손을 덮었다. 고름을 풀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자세다. 노랑 화장 저고리에 자줏빛 명주고름을 잡았던 전하의 손길에 수줍은 듯 반항하는 가희아의 손이 눌려진 태도는 전하의 마음을 흥그럽게 해주었다. 고름을 풀어 저고리를 벗기는 전하의 손을 본능적으로 막아내는 여자의 태도는 확실히 처녀성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여자의 방어태세다. 가희아의 막아내는 태도는 전하의 마음을 더한층 유쾌하고 기쁘게 했다.

"손을 내려라. 이같이 해야만 한평생 해로하고 의가 좋다 하더라." 그러나 가희아는 손을 내릴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서 상감이 고름을 못 풀도록 눌러버렸다. 손을 내리면 긍정하는 표시가 된다. '옷을 벗겨주시오' 하고 희구하는 태도가 된다. 금방 반항하던 태세를 긍정이나 희구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대로 반항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가희아는 강하게 전하의 어수를 잡았다. 전하는 쾌감을 느꼈다. 한편에서 저항하면, 한편에서 쾌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오직 남녀 간에만 있을 수 있는 투쟁의 쾌감인 것이다. 전하는 힘차게 가희아의 손을 젖혔다. 가희아는 강하게 비트는 전하의 손길을 느끼며 입이 딱 벌어지도록 아팠다. 맥이 풀리면서 가희아의 손은 내려졌다. 자주 고름이 풀어지면서 가희아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옥 같은 젖봉오리는 마치 분원백자 천도역적을 쌍을 지어논 것같이 아름다웠다. 전하의 눈에 아름답게 느꼈다. 꼭지는 주사를 칠한 듯 붉고도 선명했다. 전하의 눈은 황홀한 경지를 넘어 아찔했다. 확실히 처녀가 분명했다. 전하는 가희아의 입으로 몇 번인지 처녀라고 뇌까리는 말을 들었다. 이숙번의 집에서 잔치할 때도 들었고, 대궐로 데려온 후에도 처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나 반신반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옥등잔 불빛 아래 나타난 가희아의 유방은 순수한 처녀성을 잃지 아니한 보배로운 존재였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네가 진실로 처녀로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하의 입에서는 감탄하는 소리가 떨어졌다. 가희아는 아무리 기생이라 하나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희아는 목소리를 가늘게 가다듬었다.

"상감마마, 불을 꺼주시업소서." 전하는 요포 소매를 번쩍 들어 옥등잔을 향하여 후려쳤다. 마치 아름다운 보배를 누가 곁눈질해 앗아갈 듯한 야릇한 충격을 느꼈다. 불은 꺼지고 한 쌍 아름다운 천도연적은 짙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췄다. 가만한 숨결이 칠흑의 어둠 속에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전하의 팔은 가희아의 허리를 강하게 감았다. 이제는 아무도 천도진사 연적을 앗아갈 사람은 없었다. 완전히 자기만의 것이라 생각햇다. 어둠 속에서 뜨거운 애무가 일어났다.

"첫날밤 생사가 아직도 미진하구나." 전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렀다. 치마 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가희아의 저항도 없는 듯했다. 또다시 속곳 끄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엔 칠흑 같은 밤이 조용히 때를 옮겼다. 전하는 가희아가 처녀인 것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생이면서 여태껏 처녀성을 지켜왔다는 사실은 전하로 하여금 가상하게 생각되었다. 전하는 어둠 속에서 가희아를 포옹했다.

"너는 누구를 기다리느라고 아름다운 몸을 백옥같이 보존했느냐?"

"한평생 버리지 아니하실 분을 기다렸을 뿐이었습니다." 가희아의 고운 음성이 베개 위에서 떨어졌다. 전하의 음성이 어둠 속에서 또 일어났다.

"하늘이 주시는 연분이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랴." 전하는 더 한 번 가희아를 애무했다. 다음날 전하는 가희아에게 내명부의 칭호를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생 가희아에게 내명부, 곧 후궁의 칭호를 내린다면 궁중 지밀 안의 불평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 신하들의 여론이 대단할 것 같았다. 전하는 가희아에게 후궁으로 봉하는 일을 잠깐 보류하고 대전에 가까이 두어 의대의 거행이며, 수라상을 들고나오는 것이며, 침소의 보전 등 모든 전하의 뒷배를 살피게 했다. 가희아는 원래 병령백리한 여자였다. 나비같이 잽싸고 물찬 제비같이 몸을 놀렸다. 남자 같은 민비는 말할 나위도 없고, 경험 많고 일 잘한다는 상궁과 궁녀들도 안색이 없을 정도로 그의 민첩한 행동은 따라갈 도리가 없었다. 전하는 이숙번이 바친 가희아에 의해서 다시 인생의 즐거운 쾌락을 맛보게 되었다. 가희아가 없으면 수라상을 받을 때 밥맛이 없고, 침실에서 취침할 때 잠이 오지 않도록 적막감을 느꼈다. 태종이 앉아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가희아가 돌아다녔고, 가희아가 있는 곳에는 항상 태종이 있었다. 다섯 달의 세월이 흘렀다. 전하는 깊은 밤에 가희아와 침소를 함께 했다. 전과 같이 전하의 애무가 한창 깊었을 때 가희아는 전하의 팔베개 위에서 가만히 아뢴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극히 수줍은 목소리다.

"무슨 말이 있느냐?" 가희아는 전하게 아뢴다고 해놓고 얼른 아뢰지 못한다.

"왜 말이 없느냐?"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전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말을 못 하느냐?" 전하의 옥음은 조금 커졌다.

"전하, 소인은 황공하옵게도 용종을 배었습니다." 가희아의 목소리가 떠는 듯 떨어졌다. '용종'이란 말에 전하의 귀가 번쩍 띄었다.

"네가 과인의 용종을 배었단 말이냐? 내 아들을 뱄단 말이냐?"

", 그러하오이다. 아들이 될지 딸이 될지 모릅니다마는 아기를 배었습니다."

"몇 달이 되었느냐?"

"다섯 달이 되었습니다."

"다섯 달, 다섯 달이면 아이가 놀겠구나."

", 그러하옵니다." 전하는 가희아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가희아의 배에 무엇이 굼틀굼틀 움직였다. 굽이굽이 배를 차며 굼틀거렸다. 전하는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다섯 달이라 했지?"

", 그러하옵니다." 전하는 가만히 가희아가 대궐로 들어온 달수를 짚어보았다. 다섯 달이 분명했다.

"몸조심해라." 분부를 내렸다. 다시 다섯 달이 지났다. 가희아는 옥동자 아들을 낳았다. 가희아의 기쁨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전하의 기쁨도 하늘만큼 컸다. 태종은 가희아의 몸에서 난 아들 이름을 ''라 지었다. 서자의 순위로는 첫아들이지만 정실인 왕후 민씨가 생산한 순위로 따져본다면, 가희아가 난 ''의 석차는 세자 '', 효령대군 '', 충녕대군 '', 성녕대군 ''의 바로 다음인 다섯째 아들이 된다. 태종은 ''에게 경녕군의 칭호를 내리고, 가희아는 왕자까지 낳았는데 그대로 궁중에 있는 기생으로 둘 수는 없었다. 혜선옹주의 칭호를 내렸다. 태종은 민후의 입을 막기 위하여 승지에게 명하여 내명부와 외명부의 직제를 새로 마련했건만, 아직도 새 제도를 쓰기 어려웠다. 고려 때 쓰던 후궁의 칭호를 그대로 본따서 혜선옹주라 명명한 것이다.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강계 기생 가희아는 일약 태종의 후궁이 되어 혜선옹주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를 받았고, 그의 소생인 ''는 경녕군이 되었다. 왕후 민씨는 돌연하게 일어난 이 일을 보자 정신이 아득하고 입맛이 썼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놀아나 다니던 기생년의 몸에서 난 아이에게 경녕군의 칭호가 무엇이며, 기생한테 옹주 대접이 웬일이냐!" 펄펄 뛰면서 꾸지람을 내렸다.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왕후 민씨는 가희아가 대궐로 들어온 날짜를 소급해서 조사하라 했다. 그러나 아기가 있은 것은 확실히 대궐 안으로 들어온 이후의 일이었다. 흠을 잡을 도리가 없었다. 가희아 한 몸이라면 어떠한 흠을 잡아서라도 내쫓겠지만, 왕자를 낳아놨으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왕자 ''는 무럭무럭 자랐다. 사형제를 낳아서 오붓한 왕실을 이루었던 민후의 즐거운 꿈은 여지없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왕자는 왕자라 하나, 왕자 속에는 피가 다른 왕자가 섞여 있게 되었다. 한 어머니 삼줄에 사형제가 오롱조롱 매달렸던 왕실의 계보는, 아들은 아들이기는 하지만 딴 어머니의 피로 엉클어진 왕실의 계보를 이루기 시작했다. 왕은 기뻤으나 왕후 민씨는 분노에 떨었다. 며칠을 두고 곡기를 끓였다. 민후는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큰아들인 세자 ''가 문안을 들어가고, 둘째 아들인 ''가 승후를 하고, 셋째 아들인 ''가 문안을 하고, 넷째 아들인 ''이 사후했다. 아들들은 아머니의 병환이 난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세자 ''는 지난번에 야단법석이 난 고려 궁인을 동궁에 데려다 두고, 무사타첩이 되도록 처리한 소년 세자다. 어머니도 성미가 너무 급하시지만 부왕인 아버지의 호색하는 행동이 자못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세자 ''는 어머니께 문후를 드린 후에 위로하는 말씀을 올렸다.

"어마마마, 소자는 모든 일을 짐작합니다. 모두 다 아바마마께서 지나치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욕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누르지 아니하면 하늘에 가득 차 있어도 부족하다 할 것입니다." 세자 ''는 어마마마의 병환을 위로하기 위하여 일부러 아버지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평을 했다. 이러해야만 어마마마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드려서 병환이 속히 낫도록 해드리자는 생각이었다. 자리에 누워서 음식을 전폐한 민후는 동궁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약간 시원해지는 듯했다. 역시 큰아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자를 믿음직스럽게 바라본다. 아들 중에 역시 관록이 있다고 생각했다. 민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흩어진 머리를 손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동궁의 말이 옳다. 도대체 그분이 사람이냐? 사람이면 사람답게 체면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 제왕의 체통으로 하고 많은 여자들에 기생년을 대궐로 들여다가 잠을 잔단 말이냐. 잠자는 것은 고사하고 기생을 후궁을 삼아서 옹주를 삼는 법이 어디있느냐. 그나 그뿐이냐. 아무리 세상이 망했기로서니 그래, 기생년이 난 자식을 군이 다 무어냐. 도대체 군은 왕의 다음 가는 자리다. 그래 기생년의 자식을 뻔뻔스럽게 군을 봉하다니 말이 되느냐. 이러고도 이 집안이 흥한단 말이냐." 민후는 아들 동궁을 향하여 펄펄 뛰며 하소연을 했다. 호소무처가 되어 답답했다. 화병까지 났던 민후는 믿음직하다고 생각하는 아들을 향하여 기고만장하게 울분을 풀어놓았다. 세자는 더한층 말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어마마마의 마음을 위로한다.

"아바마마의 행동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말하자면 주책이 없으십니다. 욕심으로 인해서 눈이 어두워 사물을 판단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된 일을 어찌합니까. 증이파올시다. 엎어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 깨진 시루는 성한 기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덮어두시는 것이 가장 점잖고, 좋은 상책이라 하겠습니다. 어마마마, 화가 나신 것은 당연하십니다. 그러나 진정하십쇼. 참으시어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세자 '''화를 참고 오래오래 살라'는 말에 민후의 마음은 한결 가라앉기 시작했다. 세자는 궁녀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늙은 상궁이 세자의 분부를 받고 앞에 나타났다.

"부르셨사옵니까?"

"아무리 잡숫기 싫다 하시더라도, 지성껏 잡술 것을 권해드려라. 미음은 풀내가 나니 잣죽이나 행인죽을 쑤어드려서 잃으신 입맛을 회복해드리도록 해라." 세자는 정중하게 상궁한테 분부했다. 민후는 과연 효자라고 생각했다.

"입을 봉하시고 곡기를 끓으시니 황송쩍기만 했습니다. 분부대로 곧 수어 올리겠습니다."

"울화가 뜨시면 입맛도 없으신 법이다. 잣죽과 행인죽을 잡수신 후에는 흑임자죽과 율무죽을 쑤어드리게 하라. 아무리 맛이 좋고 몸에 유익한 용미봉탕이라 해도 똑같은 음식을 번번이 드려서는 아니되는 법이야. 잣죽을 잡순 후에는 행인죽으로 바꾸고, 행인죽을 바친 후에는 흑임자죽으로 갈아드리고, 흑임자죽을 잡순 후에는 율무죽으로 고쳐드려야 한다."

", 동궁마마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나는 어마마마의 달게 잡숫는 것을 보고 나갈 테니 곧 잣죽을 수어가지고 들어오도록 하라." 세자의 분별을 듣자 민후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역시 내 알들이로구나!" 마음속으로 탄복했다.

"어마마마, 다시 누워 계시옵소서. 죽을 쑤어 올리는 동안 누워 계시는 것이 좋을까 하오." 세자는 몸을 일으켜 얼굴이 초췌하고 야위고 머리가 흐트러져 산발이 된 민왕후의 몸을 부축해서 가만히 자리에 뉘었다. 남편의 사랑을 뺏긴 민후는 아들의 지성스런 효성에 눈시울이 화끈했다. 베개에 누워 눈물이 흥건했다. 이윽고 잣죽이 들어왔다. 세자는 소누 잣죽 쟁반을 받들었다.

"동궁마마께옵서 어찌 손수 쟁반을 받드시옵니까. 소인들이 거행하올 테니 염려 마시옵소서. 전례에 없는 일이올시다."

"자식이 어머니께 음식을 받드는데 무슨 전례를 찾느냐. 아무리 세자라 하나 부모 앞에야 그까짓 인작이 무슨 굉장한 것이라고 음식도 받들지 못한단 말이야." 민왕후는 참을 수 없도록 기뻤다.

"미안하고나." 한 마디를 남기고 세자가 받드는 잣죽을 그릇이 비도록 맛있게 자시었다. 세자의 마음도 기뻤다.

"어마마마, 그저 모든 일을 참으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민후는 지성스런 세자의 효성에 감동되어 남편인 태종보다도 아들세자한테 크나큰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

 

또 하나의 후궁.

이후부터 민후는 인생에 대한 희망을 남편인 태종보다 아들 세자한테 붙이게 되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러 오는 세자의 얼굴을 대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요, 즐거움이었다. 차차 구미도 돋고 기운도 차릴 수 있었다. 민후의 마음이 약간 가라앉고 몸도 소복이 되었을 때 대전지밀에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대왕이 또 한 사람의 궁녀를 건드린 때문이다. 일개 기생으로 ''의 어머니가 된 가희아가 순산을 하고 산실에 드러누워 있기 시작할 때부터 일어난 일이다. 여자가 한 번 순산을 한 후에는 백 일이 지나야만 건강한 사람으로 환원이 되는 것이다. 가희아가 산모가 되어 산실로 들어간 후에 태종의 모든 시중은 월화 시녀가 하게 되었다. 월화는 민비의 심복 궁녀로서 성은 신씨였다. 고려 궁인과 전하 사이에 일어났던 사랑의 일을 민비한테 고해서 민비가 대전까지 쫓아나가게 했던 왕비의 가장 신임하는 시녀였다. 수라상을 받들어 시중드는 일로부터 전하의 의대를 바꾸어드리는 일, 침소에 드시는 금침을 깔아드리는 일들을 가희아를 대신해서 월화는 맡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월화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하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두 편에서 사랑이 서로 화합이 되고, 해조되어 움직여지는 행위가 아니고 한편 쪽에서만 강력하게 움직여진 행동이다. 이러한 행위는 사랑과 정이 움직여진 행동이 아니다. 한편에서 강제로 침략한 행동이니, 표현하는 어휘를 사랑이 아니라 침략이라 해도 좋다. 월화는 금침을 깔다가 돌연 전하의 침략을 당했다. 호소무처였다. 통곡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일을 당한 후에 월화는 벌벌 떨었다. 누구보다도 민비의 투기하는 성격을 잘 아는 때문이다. 고려 궁인을 두들겨 패듯, 자기를 사매질치면 어찌하나 생각해보았다. 조인광좌 중에 머리채를 끌고 나가서 욕을 뵈면 어쩌나 생각해보았다. 더구나 자기는 민비의 가장 신임을 받는 심복 궁녀다. 믿는 궁녀로 왕비의 사랑을 뺏는 행동을 했다고 오해하기가 십상팔구다. 월화 자신은 강제로 침략을 당한 일이지만, 밖에서 볼 때 누구나 넓은 생각으로 보아주는 너그러운 사람은 그리 드물 것이다. 월화는 고민 속에 들었다. 크게 가책을 받았다. 마치 죄를 범한 죄수의 몸과 같았다. 월화는 될 수 있으면 이 행동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거미줄 치듯 쳐들어오는 전하의 침략은 점점 더 월화의 몸을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묶어버렸다. 월화는 지극하게 비밀을 지켰다. 그러나 비밀마저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월화는 전하의 침략을 당한 지 석 달이 못 되어 몸에 이상스런 징후를 느꼈다. 다달이 하던 구실이 끊어지고 입에서 군침이 돌로 구역질이 났다. 석 달이 지났다. 뱃속에서는 완연히 아기가 놀았다. 월화는 더한층 놀랐다. 비밀을 지키려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민후를 두려워하는 생각은 더한층 심했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는 없었다. 월화는 가만히 동료에게 의논했다. 심복 궁녀는 두 가지 계책을 가르쳐주었다. 첫째는 아기를 배게 한 장본인 전하께 태기 있는 것을 고하고, 둘째는 왕후 민씨께 자백하라 했다. 결코 자의가 아니요, 타의로 된 일을 아기를 난 후에 왕후께 아뢰는 것보다 죽지 못해서 당한 일이라고 정성껏 아뢰는 것이 일을 수월하게 매듭짓는 일이라고 훈수를 했다. 월화는 죽이면 어찌하나 하고 더한층 떨었다.

"마마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나를 죽이시면 어찌하오?"

"말이 그렇지 사람의 목숨을 죽이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닐세. 벌을 받을 각오하고,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사실대로 아뢰어보게나.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지 아니한가. 그저 이실직고로 아뢰는 것이 상책이오." 동료 나인은 월화의 마음을 굳세게 했다. 월화는 동료 궁녀가 시키는 대로 어느 날 금침을 포진하다가 전하 앞에 나가 부복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마는 소인의 몸에 이상한 일이 있사옵니다."

"어떠한 이상한 일이 있느냐?"

"용자를 배 안에 모시었습니다." 태종은 기쁜 빛을 용안에 띠고 묻는다.

"어느 때부터 태기가 있느냐?"

"석 달이 지났습니다." 전하의 입에 웃음이 흘렀다.

"아들을 꼭 낳아라." 전하는 월화의 어깨를 쳐주었다. 월화는 이내 엎드려 울었다. 가만한 철읍성이 전하의 마음을 흔들었다.

"좋은 경사다. 왜 우느냐?"

"상감마마의 은총을 지극히 받자옵는 이 몸이오나, 왕후마마를 배반한 죄상은 태산같이 크옵니다. 앞으로 왕후마마께옵서 이 일을 아신다 하면, 소인의 목숨을 풀끝의 이슬이올시다. 한 몸숨 죽는 것은 아깝지 아니하오나, 배 안에 든 용자의 몸이 가엾습니다." 월화는 진심으로 울었다. 민왕후의 질투는 누구보다도 전하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한바탕 일이 또 일어나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체면상 월화 앞에 약하게 뵐 수는 없었다.

"왕후마마께서 설마 너한테 어찌하시겠느냐. 염려 말고 물러가거라." 전하는 의젓하게 분부를 내려 월화를 내보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장차 민후에 대하여 어찌 말하나 하고 생각이 머릿속에 떠나지 아니했다. 인생을 비관해서 음식을 전폐하고 몸수습을 아니 해서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던 민후는 세자 ''의 지성스런 효도에 감동되었다. 세자가 친히 바친 잣죽에 입맛을 붙이고 위로하는 말씀에 정신을 가라앉혀서 흐트러진 머리와 의상을 가다듬었다. 모든 궁녀들도 민후가 마음을 돌리는 것을 보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대전에 나가 금침을 포진하고 돌아온 원화는 중전의 침실로 들어갔다. 월화는 왕후가 가장 사랑하는 심복 나인이었다. 어려서부터 딸같이 길러왔다. 아직 왕후가 되기 이전부터 민후의 앞에서 시중을 들다가 태종이 왕위에 나가 대궐에 거처하게 되니 왕후는 대궐로 데려다가 시녀를 삼았던 것이다. 왕후는 대소사를 월화한테 당부했고 비밀을 지켜야 할 일은 월화를 통해서 행동했던 것이다. 이 까닭에 고려 궁인과 전하의 일을 살필 때도 대전으로 월화를 내보내서 불의 증거를 당장 잡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경과를 지낸 후부터 민후는 더한층 월화를 믿음직스럽고 귀엽게 생각했다. 월화는 곧 민후의 팔이요 다리였다. 민후는 월화를 의지해야만 든든했고 월화는 민후가 계시므로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조용히 침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월화의 모습을 바라본 민후는 미소를 지어 물었다.

"어디 갔다 왔느냐?" 슬픔과 분노와 한탄 속에서 영영 웃음을 잃었던 중전마마였다. 세자의 문후를 받아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딸자식과 같은 월화를 보고 웃는 미소다. 중전의 웃는 얼굴을 오랜만에 바라보는 월화의 마음도 반짝하고 반가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덜렁하고 쓸개가 뚝 떨어지는 듯했다. 장차 이 아름답지 못한 일을 어찌 이뢰랴 했다. 자기를 믿고 알아주고 반가워하는 왕후의 웃음을 바라보니 마음은 더한층 괴로웠다. 가슴이 두근대고 얼굴이 붉어졌다. 월화는 마음이 흔들리고 정신이 산란해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어디 갔다 왔더냐?" 역시 미소를 지어 조용히 웃는 왕후의 얼굴이었다. 월화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대전에 나가서 수라상을 거행하옵고 금침을 포진해드리고 돌아왔습니다." 월화의 목소리는 떨렸다. 민후는 월화의 마음속을 알 까닭이 없었다.

"강계 기생도 애를 낳고 들어앉아 있으니 전하께서는 마음이 달떠계시겠구나. 군 주전부리를 하고 싶어서 어찌 견디시더냐." 민왕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하에게 야유를 던졌다. 민비의 비틀어진 말씀에 월화의 간은 또 한 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기의 일을 소상히 알고 묻는 듯했다. 죄밑 같아서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자기와 전하 사이의 비밀한 일을 민비가 어느 틈에 벌써 알았나 하고 의심해보았다.

"어떠냐, 전하의 눈치가. 이새는 조금 가라앉는 눈치더냐. 또다시 어떤 년한테 손을 대는 일은 없더냐?" 왕후 민씨의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월화는 말을 듣고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민후의 말씀은 자기의 일을 알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민후가 말씀한 이일을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떤 년한테 손을 대는 일은 없더냐'하는 이 물음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가슴은 또 한 번 덜컥 떨어졌다. 전하는 어떤 년이 아니라 결국 자기한테 손을 대어서 아기까지 배게 만들어놓았다. 이 말씀을 어떻게 대답해서 아뢰나 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절호한 기회다. 자기 신상의 일을 아니 말씀드린다면 모르되 기왕 말씀을 드리기로 결심하고 온 마당에 절호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했다. 월화는 민비 앞에 엎드렸다. 왈칵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소리를 내어 느껴 울었다. 별안간 느끼는 울음소리에 민후의 눈이 둥그레졌다.

"웬일이냐? 별안간 왜 우느냐?"

"마마, 소인을 죽여줍시오. 배은망덕한 이 몹쓸 년을 죽여줍시오." 월화는 엎드린 채 울음 반 말 반 하소연을 했다.

"네가 무슨 배은망덕을 했기에 이같이 우느냐?"

"소인은 천참만율할 년이올시다. 그저 수인을 죽여줍시오."

"무슨 짓을 했기에 네가 배은망득을 했다 하느냐? 갑갑하고나. 어서 말해보아라." 민후는 엎드려 느껴 우는 월화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월화는 치마끈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누르고 아뢴다.

"바로 석 달 전 초승께 일이옵니다. 강계 기생 가희아가 순산이 되어 산실로 들어간 후에 대전에서 수라상과 의대며 금침을 받들어 거행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보아라. 아는 일이다." 민비의 얼굴빛은 금방 얼음장같이 싸늘했다. 죽을 죄를 졌다는 둥 배은망덕을 했다는 둥 느껴 우는 모든 행동이 보통 일이 아니라, 큰일을 저지른 듯했다. 큰일은 별것이 아니다. 호색하는 대왕이고 보니 고려 왕실의 궁인이나, 강계 기생 가희아한테 저지른 추잡한 일을 월화한테 또 저질렀구나 하고 얼굴에 찬바람이 동지섣달 삭풍이 불어오듯 일어났다. 워로하는 민후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가 꽉 질렸다. 입술이 빳빳했다. 혀가 굳었다. 얼른 뒷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어서 말을 해보아." 민후의 옥음은 엄숙했다. 월화는 죽음을 각오하고 말을 계속했다.

"그날 밤 수라상을 물리고 금침을 포진하는 도중에 전하께옵서 돌연 침실로 듭시와 소인을 힘으로 범하셨습니다. 소인은 무척 반항했사오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보통 어른이 아니시고 하늘을 대신하신 상감마마이시고 보니 옥체를 건드려 저항할 수는 없고 그저 소인의 몸만 피하려 노력했사옵니다. 더구나 마마께옵서 소인을 믿으시고 귀여워하시는 생각을 하오니 차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소인은 울면서 살려줍소사 하고 미친 듯 부나비 날 듯 피했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최후에 가서는 힘으로 당해내는 재주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처녀의 몸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월화는 말을 마치자 왕비 앞에 엎드려 다시 흐느꼈다.

"이년, 고얀년, 내가 너를 자식 기르듯 해서 심복으로 삼아왔는데 네 이년, 네가 먼저 꼬리를 쳐서 구미호 짓을 해가지고 전하를 고혹시켜 놓고 이제 와서 변명을 하느냐?" 왕비는 얼음같이 차가운 얼굴에 다시 질투의 불길을 뿜었다. 눈에서도 불이 일었다. 쌍심지가 되어 활활 두 눈에서 타올랐다.

"아니올시다. 소인이 어찌 감히 꼬리를 쳐서, 전하를 유혹하겠사오니까. 하늘 같은 마마의 은덕을 생각한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추호라도 먹었으리까. 그저 통촉을 내려주시기 바라오."

"그래, 그 뒤에 어찌 되었느냐?"

"석 달 후에 몸에 이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태아가 생긴 듯하오이다."

"배 안에서 노느냐?"

", 그러하오이다." 왕비의 노기는 절정에 올랐다. 벽에 걸린 불자 자루를 거꾸로 들어 사매질을 쳤다.

"고얀 년! 음분한 년!" 왕비의 본 성격이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격렬하게 일어났다. 월화는 아픈 것보다도 그때, 그 심정을 몰라주는 왕후마마가 너무나 무정하다고 생각했다.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천지개벽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몸이 으스러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불자대로 아프게 내리치는 왕후의 매를 달게 받았다. 괴상하게 우는 월화의 목소리를 듣고 궁녀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들었다. 감히 왕후마마의 침실로 들어가지는 못해 우둥우둥 밖에 모여 안의 동정을 살폈다.

"웬일이냐? 무슨 변이 또 일어났느냐?"

"월화가 들어갔어. 월화가 대전 전속이 되더니 탈이 또 난 모양이지." 궁녀들은 더한층 속삭였다.

"월화가 죽느냐, 팔자를 고치게 되느냐 하는 갈림길이로구나." 왕비의 목소리가 침전에서 새어 나왔다.

"이년, 보기 싫다. 나가거라." 왕비는 월화한테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월화는 흐트러진 의복의 매무새를 바로잡고, 왕비의 앞에서 추창해 나갔다. 월화가 침실문을 열고 전 밖으로 나가려 하니 엿듣던 궁녀들은 흩어지고 세자 ''가 늙은 상궁을 앞세우고 밤 문안을 들어오는 길이었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월화와 함께 놀았다. 아버지 태종이 아직 왕위에 나가지 아니하고 보통 왕자로 있을 때, 월화는 ''를 업고 본집과 외가로 왕래하면서 ''의 소꿉동무도 된일이 있었다. 월화의 나이 ''보다 훨씬 위가 되니 ''는 누님처럼 따르기도 했다. 아버지가 왕위에 나가고 어머니가 왕비가 된 후에 월화는 어머니를 모시어 대궐 안에 있었고 ''는 세자가 되기 전에 외가에 많이 있었으니 대궐 안에 들어간 후에는 자주 상종을 못 했으나 ''는 월화를 아직도 잊지 아니했다.

''는 밤 깊게 어마마마께 문안을 들어오다가 방문 밖에서 월화와 마주쳤다. 월화의 눈은 퉁퉁 붓고 눈물 흔적이 아직도 도화양협에 남아 있는데 윤이 흐르는 검은 머리는 흩어졌고, 웃매무새는 말이 아니었다. 월화는 세자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세자는 즉각적으로 '월화가 어마마마께 큰 꾸지람을 들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월화는 뜻밖에 세자를 뵙고 깜짝 놀랐다. 창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옴치고 뛸 수 없었다. 흐트러진 자기 자신의 머리와 산란해진 의복에 관심을 두면서 눈으로 인사를 올리고 부끄럼을 이기지 못해서 행각 밖으로 줄달음쳐 나갔다. 세자는 수상하게 생각했다. 늙은 상궁을 돌아보며 묻는다.

"월화 저 애가 왜 눈이 저리 퉁퉁 부었소?" 늙은 상궁은 궁녀들을 통해서 중전마마께 매를 맞고 꾸중을 들은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세자께 아뢰기에는 너무나 난처했다.

"모르겠습니다." 간단히 대답했다.

"모르다니, 노상궁이 모를 리가 있나. 꼴을 보니 보통 꾸지람을 들은 것이 아닌 성싶은데. 머리꼴하며 옷매무새하며 말이 아니로군. 어찌 상궁이 모른단 말요." 세자의 추궁은 급했다.

"월화가 초저녁에 자진해서 들어가서 무슨 말씀인지 아뢰다가 왕비마마의 언성이 높아지고 톡톡히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소인들은 감히 들어가 여쭈어보지 못했습니다. 황공무지하여이다. 더 이상 어뢰옵지 못하겠습니다." 세자는 지금 월화가 막 나오는 것을 보니 상궁의 대답이 꾸며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자는 조용히 모후의 침실문을 열었다. 조용했다. 아무도 없다.

"누구냐?" 날카로운 모후의 성음이 들렸다.

"''올시다. 세자올시다." 세자는 자기 이름을 밝히고 장지 안으로 들어갔다. 어마마마인 민비는 자리에 누웠다가 세자가 들어온 것을 알고 얼굴에 가득 기쁜 빛을 띠고 일어나 앉았다.

"오오, 세자냐. 밤늦게 문안을 또 들어왔구나." 감격한 어조다. 그러나 불빛 아래 비치는 모후의 옥안은 말이 아니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눈을 퀭하게 움쑥 들어갔다. 얼굴에는 고민의 흔적이 물결쳐 흘렀다. 몇 달 전부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잣죽이며 깨죽을 들어서 신색이 차츰 좋아졌던 어머니의 모습은 다시 초췌해지고 두 눈에는 이글이글 화기가 일었다. 마치 고려 궁인을 끌어낼 때 나타났던 그 모습이었다. 가희아가 기생의 몸으로 후궁이 되어 삼일신방을 치렀다는 소식을 듣고 펄펄 뛰던 그때 그 얼굴의 추한 모양과 비슷했다. 세자 ''는 마음속으로 무슨 일이 또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가 들어올 때 문 앞에서 월화의 눈이 퉁퉁 부어서 울고 나가는 모양을 보았다. 확실히 월화와의 사이에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난듯했다. 그러나 월화는 어마마마의 교전비였다. 어릴 때부터 외가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본집으로 와서 한집안 식구가 되어 딸자식같이 살아온 처녀 색시였다. 고려 궁인이나 강계 기생 가희아보다도 나이가 훨씬 아래다. 아버지께서 비록 호색을 할망정, 설마하니 어마마마의 교전비인 딸자식 같은 월화한테까지 손을 뻗쳤을 리는 만무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속에 월화가 휩쓸려 들어가서 말초사에 오른 것이 분명했다. 세자는 이쯤 해석을 내리고 어마마마께 묻는다.

"어디 옥체가 불편하오십니까? 불편하시다면 숨기지 마시고 전의를 불러 맥을 짚어보도록 하옵소서. 아까 아침 문안을 드리올 때도, 기분이 매우 좋으셨사온데 이제 뵈니, 별안간 혈색이 좋지 아니하신 듯하오이다."

"별일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머니 왕비는 아들한테 민망하다고 생각했다.

"아니올시다. 옥체를 범연히 생각하시어서는 아니되십니다. 그저 옥체와 마음을 편안케 하시어 만수무강하시옵서서." 세자의 지성으로 토로하는 '만수무강' 한마디에 민비는 왈칵 슬픔이 폭발했다.

"죽느니만 못해. 이꼴 저꼴 다 아니 보고 죽느니만 못해." 어마마마는 말을 마치자 그대로 느껴 울었다. 세자는 쓰러져 느껴 우는 어마마마를 부축해 일으키며 등을 어루어 쓸었다.

"왜 이러십니까? 그저 옥체를 보전하옵소서." 왕비는 한숨을 짓고 말씀한다.

"옥체를 보중하려 하나 알 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항상 세자의 효성을 생각해서 내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모든 일을 참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건만, 사나운 바람이 자꾸자꾸 불어와서 내 마음을 흔드는구나. 폭우가 쏟아져서 내 몸을 적시는구나. 내 몸을 안정시키고 싶건만 사나운 바람은 끊일 사이 없이 내 몸을 흔들어주는구나. 나는 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건만 사나운 비는 내 마음을 괴롭고 차갑게 만들어주는구나. 이러하니 내 어찌 배겨나겠으며 사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어마마마는 아들의 몸에 의지하여 기막힌 하소연을 한다.

"어마마마, 무슨 원통하신 일이 또 생기셨습니까?" 세자는 어마마마를 껴안았다.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도대체 궁중이 이같이 추하고 누해서 어떻게 배겨 사느냐 말이다. 상감마마란 분은 교전비를 또 건드려놓았구나. 이 꼴이 되었으니 내가 관음보살의 후신이라도 배겨나겠느냐 말이다. 기막히지 아니하냐. 자식같이 길러서 이 꼴이 무슨 꼴이란 말이냐." 세자 ''도 기가 막혔다. 설마하니 아바마마가 아무리 호색을 한다 하나 딸자식같이 길러낸 어마마마의 교전비까지 범할 줄을 몰랐다. 아까 문밖에서 월화가 눈이 퉁퉁부어서 나갈 때도, 지금 어마마마의 손을 마주 잡고 등을 어루만져 위로해드리면서도, '월화가 어떠한 일에 힙쓸려서 말초사에 들었구나' 생각했을 뿐, 이같은 일이 아버지와 월화 사이에 일어났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너무나 심하구나!" ''는 불쾌하게 생각했다. 너무나 아연했다. 어마마마를 위로할 말이 없다.

"저년, 월화년을 능지처참해서 죽여야 하겠다." 어마마마의 입에서 폭언이 떨어졌다. 입귀퉁이에서 허연 거품이 게거품 찍듯 뿜어졌다. 어마마마의 분노와 질투는 감정의 절정에 올랐다. 세자는 어머니 마음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참을 삼켰다. 세 번, 네 번 삼켰다. 눈을 감았다. 입술 사이로 가만한 한숨이 흘렀다. 짐승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러고 만백성의 예의와 염치를 어떻게 훈계하고 가르칠 것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세자! 이러고 내가 살아야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날 보고 투기를 한다고 말하겠지만 글세, 왕실꼴은 장차 어찌 되며, 나라꼴은 어떻게 된단 말이냐. 금수 아니냐. 금수로서 나라를 어찌 다스린단 말이냐. 여기다가 월화의 몸은 홑몸이 아니다. 씨를 배었다. 씨를 배어놨으니 이일을 장차 어찌한단 말이냐. 저년을 죽여 없애는 수밖에 없다." 민후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월화의 몸은 홑몸이 아니다. 씨를 배었다'하는 모후의 말을 듣자, 세자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눈을 감아 가만히 생각해본다. 일을 또 한 번 무사하게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부왕 되는 아버지의 소위를 생각한다면 구역이 나서 아무 참견도 하고 싶지 아니했다. 그대로 캐어묻지 않고 내버려 두고 싶었다. 어마마마가 월화를 죽이든 살리든 처분대로 하시라고 내맡겨두고 싶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싸우건 말건, 추태를 부리든 질투를 하든 간에 도무지 간섭하기 싫었다. 그러나 이제 어마마마께 월화의 몸은 빈 몸이 아니라 씨가 들었다는 말씀을 듣자 세자의 심경은 각도를 달리하여 변해졌다.

'월화도 살리고 어린애도 구해야 한다!' 세자 ''는 맘속으로 이같이 정했다. 질투와 분한으로 펄펄 뛰는 어마마마를 다시 위로한다.

"아바마마의 행동은 좋다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자식의 도리에 이 일까지 간할 수는 없고 실로 딱한 노릇이올시다. 어서 하루바삐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스스로 몸을 단속했으면 합니다."

"개 꼬리 삼 년 묵어도 황모 아니 된다는 말마따나 너의 아버지 버릇이 고쳐지느냐. 한 번 주전부리에 맛을 붙여보아서 참지를 모ㅅ고 저 짓을 하니 암만 해도 뜨거운 형상을 좀 보아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월화년을 죽여버려야 한다." 민비는 또 한 번 월화를 죽여야 한다고 펄펄 뛴다. 세자 ''는 좋은 낯으로 어마마마를 바라 뵙고 아뢴다.

"어마마마, 죄는 아바마마한테 있지 월화한테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소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자는 어마마마의 기색을 다시 살피며 한 마디 던져보았다.

"어째 그년한테 죄가 없단 말이냐. 계집이 꼬리를 치니까 그런 일이 나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합니다. 소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월화는 어려서부터 어마마마의 교전비로 자라난 심복이올시다. 아무리 천하의 요망스런 계집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양심이 있는 법이올시다. 월화는 어마마마의 마음이 괴로우실 것을 뻔히 알 터인데 월화 제가 먼저 아바마마를 고혹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자는 오히려 월화가 가엾다고 생각합니다."

"가여워? 그년이 가여워? 내 자리를 뺏으려 하는 년인데 그년이 가엾단 말이냐. 자식까지 낳아보아라. 네 자리는 노리지 않을 줄 아느냐. 방석이나 벙번도 처음에는 얌전한 계비 강씨의 아들이었다. 옆에서 충동질을 하고 영감이 젊은 후실이나 첩한테 미치게 되면 큰아들 제쳐놓고 태자도 봉하고 세자도 봉하는 것이다. 너무 인심이 좋아서 동정만 해서는 아니 된다." 민후는 계모 되는 강씨와 그의 소생이었던 방석, 방번의 예를 들어 세자의 자리도 위태롭다고 펄쩍 뛰었다. 세자는 부드럽게 얼굴빛을 지어 어마마마의 초췌한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위로하는 말을 사뢴다.

"어마마마, 소자의 걱정은 마시옵서서. 소자는 이미 장성해가는 몸이올시다. 아무 염려도 없습니다. 그리하옵고 방석은 애당초부터 윗분들을 제쳐놓고 세자가 되었고, 소자는 정당한 큰아들로 세자가 된 몸이니, 방석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소자의 일은 방심하옵소서. 하하하." 세자는 일부러 소리를 높여 명랑하게 웃었다.

"믿는 나무에 곰이 핀다는 말이 있다. 세상일을 누가 안다더냐.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가진 임금이 후궁한테 미쳐서 폐세자 폐태자를 한 일이 '사기'에도 오죽 많으냐. 방심할 일이 아니다." 세자는 다시 간곡하게 사뢴다.

"어마마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그까짓것 임금 노릇 아니하면 그만 아니오리까. 하하하. 임금이 무어 그리 좋은 줄 아십니까. 천하에 제일 귀찮은 것이 임금의 자리올시다. 세상 천하 만가지 일에 임금이 모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진짜로 임금 노릇을 잘하려면 밥을 먹을 틈이 없고 자고 싶으나 잘 시각이 없습니다. 크게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과 외교로부터, 작게는 비가 아니 와서 가물어도 걱정, 비가 너무 와서 홍수가 져도 근심, 백성들 자신이 못나고 게을러서 굶주려도 걱정, 일기가 고르지 못하여 역병이 돌아도 근심, 날이 밝아도 걱정, 밤이 깊어도 걱정, 한평생 근심과 걱정인 임금의 자리가 그다지 좋을 것 없습니다. 하하하. 그저 소자는 두 분 전하게옵서 법으로 세자를 봉하셨으니 세자가 되었을 뿐, 나중에 임금이 되는 것은 그다지 기뻐하지도 아니합니다. 하하하. 어마마마, 가만히 생각해보시옵소서. 저 끝없는 넓고 넓은 푸른 하늘로 암놈, 수놈이 짝을 지어 맨 데 없이 훨훨 날아가는 백학 두루미의 모습을 바라보십쇼. 얼마나 헌칠하고 자유스럽습니까. 소자는 그리 생각합니다. 임금의 자리보다도 세자의 좌처보다도, 매인 데 없는 왕자의 자리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마마마, 그렇지 아니합니까. 소자는 세자 노릇을 하지 말라면 선뜻 내놓겠습니다. 원통하게 생각할 소자는 아닙니다." 세자는 어마마마를 향하여 더한층 쾌활하고 명랑한 웃음을 웃었다. 어마마마의 울적한 마음을 풀어드릴 작정이었다.

"세자야, 네 마음은 어찌 그리 넓으냐. 너만 같으면 이 세상에 아무런 싸움과 시비도 아니 일어나겠다."

"그렇지 아니합니까. 한세상 살고 갈 것을 시비하고 싸워서 무엇합니까. 하하하." 민비의 꽁꽁 뭉쳐진 마음은 세자의 웃음 가락 속에 흩어져버렸다. 세자는 다시 어마마마께 웃는 낯으로 고한다.

"어마마마, 월화는 제 자신이 범한 죄가 아니올시다. 죽이시어서는 아니됩니다." 세자는 죽인다는 말을 일부러 강한 말투로 표현했다. 민비는 세자의 넓고 넓은, 폭이 큰 말을 들은 후에 가슴과 마음이 전보다 훨씬 풀렸다. 그러나 얼른 대답을 아니했다.

"어마마마, 월화는 심복이올시다. 어마마마의 심복이옵니다. 앞으로 후궁은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어마마마의 심복은 생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께서는 새로 심복을 만들어야 하실 판인데, 이는 심복마저 죽이신다는 말씀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월화를 죽이시면 쌍죽음이 납니다.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 죽이게 되지 아니합니까. 깊이 통촉하시어 월화가 계속 심복이 되도록 하시면서 높은 성덕으로 또 위엄을 보이시어 왕후의 성덕을 누리시기를 소자는 간절히 바랍니다." 세자는 이제 너털웃음도 웃지 아니했다.

"그리하셔야 국모의 덕이 손상되지 아니하고 나라가 바로잡힐 것이올시다." 민비는 여러 차례 간곡하게 아뢰는 세자의 말에 마음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가만한 한숨이 실그러진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세자의 부탁대로 하련다." 민비는 마침내 월화를 아니 죽인다고 허락하는 말씀을 내렸다. 세자는 기뻤다.

"감축하옵니다." 말을 마치고 넙죽 절을 올렸다. 아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민비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어렸다.

'이같이 착하고 어진 아들을 둔 그의 아버지는 어찌해서 저렇듯 욕심 많은 행동을 하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욕심만이 아니다. 정력 절륜의 야수의 행동이다. 나라의 정권을 뺏듯 여인의 색향을 뺏는 야욕이다.' 민비의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또다시 분노가 불길처럼 솟았다.

"세자의 지극한 정성과 넓은 생각을 본받아 월화한테는 더 이상 벌을 주지 아니하련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다. 너의 아바마마께 월화까지 건드린 죄는 수죄를 해야만 하겠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점점 버릇이 자라서 못된 짓을 할 것이다. 아주 싹을 잘라버려야 하겠다." 세자는 어마마마의 심정을 짐작했다. 빙긋 웃으며 아뢴다.

"부부의 싸움은 칼로 물을 베는 듯하다 하더이다. 아무리 끊으려 하시나 끊어질 수 없습니다. 한 번 톡톡히 싸움을 해보십시오."

세자는 드높게 웃음을 웃어서 어머니 마음을 위로했다. 세자가 물러간 후에 평지풍파가 일어났던 궁중은 다시 조용했다. 금방 죽임을 당할 줄 알고 눈이 퉁퉁 부어 울고 있던 월화도 그 슬픈 신세를 마음속으로 울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당장 곧 큰일이 일어나는 줄 알고 벌벌 똘고 있던 궁녀들도 세자가 물러간 후에 중전 침실에 아무 소리가 일어나지 아니하니 제각기 처소로 돌아가면서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두렵고 황송해서 감히 침실로 들어가지 못했던 제조상궁도 비로소 후의 침실문을 열고 들어가서 왕비의 동정을 살피면서 이부자리를 깔았다. 민비의 태도는 아까완 전연 딴판이었다. 얼굴빛이 부드러웠다. 말소리도 딴판이었다. 상궁과 궁녀들은 이번에도 세자의 간곡한 말씀이 이렇듯이 마마의 마음을 돌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모두 다 세자의 큰 덕을 우러러보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민비는 세수간 나인을 불렀다. 수세를 한 후에 머리를 빗었다.

"미음을 가져오너라. 기운을 좀 차리겠다." 상궁과 나인들은 기뻤고, 왕후마마께서 자진해서 조반을 청하시니, 이제는 마음이 활짝 풀려서 다시 전의 민비로 돌아가나보다 하고 마음이 모두 다 거뜬했다. 상궁과 궁녀들은 부랴사랴 녹두죽을 쑤어 바쳤다. 녹두는 서늘한 성질을 가진 곡식이라서 예로부터 화기와 독기를 제해주는 음식이었다. 민비는 상을 받고 물었다.

"녹두죽을 쑤었느냐?"

"마마께서 하도 구미가 없어 하시기에 별미로 녹두죽을 쑤었습니다." 왕비는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부드러워 좋구나."

"녹두죽은 화기를 누른다 하기로, 구미도 당기시게 할 겸 쑤어봤습니다." 상궁은 화기를 눌러뜨리기 위하여 녹두죽을 쑨 것을 은근히 표시했다.

"너희들의 지극한 정성을 잊을 수 없구나." 민비는 탄식조로 말씀을 내렸다. 한평생을 같이하려고 두렵고 무서운 혁명까지 일으켜서 죽음 속에서 다시 삶의 영광을 취했던 상감은 이제 지난날의 고생과 맹세를 잊어버리고 한평생의 배우자인 자기를 소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인 상감에 비해서 아드님 세자의 효심과 궁녀들의 지성에 인간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고맙다고 느꼈다. 상궁은 음성을 나직이 하여 다시 고한다.

"소인들의 정성은 대단할 것이 무어 있습니까마는 세자마마의 지극하신 효심이야 하늘이 내신 쇼자십니다. 어제만 해도 밤 늦도록 어마마마를 위로해드리시고 조금이라도 입맛을 붙이시도록 저희들에게 음식을 분별하시고 동궁으로 나가시는 그 모습은 소인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과연 세자께서는 옛적의 증자님 같으신 효자십니다."

"아닌 게 아니라 큰아들은 남부럽지 않게 잘 두었느니라." 왕비의 입가엔 웃음까지 돌았다. 왕비는 자리 조반을 마친 후에 상궁에게 분부를 내렸다.

"월화란 년을 불러들여라." 왕비의 목소리는 장중했다. 웃음빛이 입가에 돌았던 얼굴엔 금방 화기가 사라지고 가을 서리가 날리는 듯 차가웠다. 상궁의 가슴이 뚝 떨어졌다.

'월화를 기어코 죽이시려나보다!' 상궁은 금방 변해진 민비의 얼굴과 음성을 보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손과 발이 떨렸다.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대청으로 향해 나갔다. 밖에 있는 나인들도 월화를 대령시키라는 분부가 내렸다는 말을 상궁한테 듣고 역시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엔 월화가 요절이 나는구나!'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모두들 수군거렸다. 상궁을 통해서 들라 하는 분부를 받은 월화는 당황했다.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간밤에 중전마마께서는 역정이 높으시어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고함을 치셨다. 당장 죽이라는 영을 내리시지는 아니했지만, 마음을 놀 수는 없었다. 오늘 새벽같이 부르시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제는 꼭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당해보지 못했지만, 죽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 느꼈다. 마음이 떨렸다. 슬펐다. 여기 또 한 가지 슬픔이 월화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뱃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자라니기 시작하는 조그마한 물체다. 이 물체는 보통 사람의 정기가 아니다. 세상 인간 중에 제일 높고 거룩하다는 상감의 씨다. 몇 달만 지나면 한 사람 어린이의 생명이 될 것이다. 자기가 죽게되면 이 생명도 죽고 말 것이다. 기막힌 일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결에 모성애를 느꼈다. 어떻게 임금의 씨를 살릴 수는 없는가 생각했다. 앞으로 이 임금의 씨가 어찌하면 큰일을 할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가 죽게 되면 두 몸이 함께 죽는다. 눈물이 앞을 탁 가렸다. 슬픔이 복받쳤다. 월화는 상궁의 뒤를 따라 왕후의 침실로 향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소의 모습과 같았다. 죽음을 직면하고 가는 길이었다. 곱상그려 떨었다. 왕비 민씨는 곱상그려 들어오는 월화의 모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기가 등등했다. 눈에 다시 살기가 쨍하게 서렸다. 순간 왕비는 끙하고 큰소리를 쳤다. 타오르는 불덩어리 같은 화기를 진정해서 누르는 소리다. 간밤에 세자 ''의 월화를 죽여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생각하고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질투의 화염을 참는 소리다. 상궁은 왕비의 눈치를 살피고 월화는 두 손을 마주 잡아 고개를 숙이고 섰다. 왕비의 우렁찬 목소리가 떨어졌다.

"월화야, 이년. 너를 곧 참형에 처할 것이지만 세자저하의 간곡한 청을 들어서 목숨을 부지해주기로 한다. 알아듣겠느냐?" 꼭 죽일줄 알았던 왕후가 세자의 청을 들어 살려준다는 옥음을 내리자 월화는 반신반의했다.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월화를 살려준다는 왕비의 한마디 말씀에 살얼음판 같던 왕비의 침실엔 화기가 은은히 돌기 시작했다. 상궁의 얼굴에 활짝 웃음빛이 돌았다. 상궁은 왕후마마의 앞에 큰절을 올리고 부복했다.

"황공 감격하여이다. 월화를 살려주신다는 크나큰 말씀, 억이 사해에 가득하옵니다. 월화 당자는 말할 것도 없고 후마마의 곁에 시측해 있는 소인들 부색 명은 하해 같은 성덕에 감읍할 뿐이옵니다." 반신반의하면서 멍하게 서 있던 월화는 상궁의 치하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왕비가 자기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말씀이 정말인 것을 알았다. 고마운 감정이 왈칵 솟구쳤다. 콧부리가 찌르르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입은 돌부처처럼 굳어졌다. 너무나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아니했다. 상궁은 큰절을 올리고 월화의 몸을 끌었다.

"바다 같고 태산 같으신 중전마마의 큰 덕을 입어 재생지인이 되었으니 결초보은을 하고 간뇌도지를 해도 부족하오. 어서어서 중전마마께 절을 올려서 살려주신 은혜에 사은을 하시오." 월화는 이미 상감의 용종을 잉태한 여자다. 상궁은 존대하는 말을 써야만 했다. 상궁은 말을 마치자 월화의 몸을 이끌어 왕비 앞에 큰절을 올렸다. 월화는 상궁이 시키는 대로 왕비 민씨께 큰절을 올렸다. 이미 목숨을 살려주기로 허락을 내린 민비였다. 피하지 아니하고 절을 받았다.

"게 앉거라." 왕비는 장중하게 앉으라는 영을 내렸다. 음성이 약간 부드러웠다. 월화는 황송해서 감히 앉지를 못한다.

"앉으라면 앉아라." 왕비의 음성은 더한층 부드러웠다.

"앉으라는데 어서 분부를 받드시오." 상궁이 권했다. 월화는 몸을 굽혀 부복해 엎드렸다. 왕후는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말씀을 내린다.

"아까도 말했거니와 너를 살려주는 것은 순전히 세자저하의 간절하게 청하는 말씀을 들어서 너를 살려주는 것이다. 세자의 은혜를 한평생 잊지 말아라." 월화는 ""하고 모기 소리만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세자저하께옵서 너를 살려주라고 하신 까닭을 알겠느냐?" 왕비는 다시 엄숙한 얼굴빛을 지어 월화를 바라본다.

"소비 감히 세자의 뜻을 촌탁하오리까. 황공무지로소이다." 민비는 다시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너는 앞으로 후궁이 되더라도 나의 심복이 되어 전의 교전비로 있을 때 그 충성을 버리지 말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소비 감히 추호인들 옛마음을 버리고 교만 방자하리까. 오늘 지금이 시각까지도 마마를 우러러 뵙는 마음 태산 같사옵고,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그저 아까까지도 죽여주신다 하여도 일호 반점 원망을 품지 아니하였습니다." 월화는 소인이라 하지 아니하고 교전비로 있을 때 지칭하던 소비란 말로 제 몸을 낮추었다.

"네가 앞으로 자식을 낳아도 왕자를 낳았다 하여 세자저하께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

"세자저하는 소비를 살려주신 재생의 은인이십니다. 소비 어찌 교만하오리까. 지난날 마마를 모시던 옛 월화로만 생각해주옵소서." 월화의 지성스럽게 아뢰는 말씀에 민비의 돌같이 딱딱했던 얼굴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앞의 일이 환하다. 전하께서는 이후에도 많은 궁녀들한테 손을 대실 것 같다. 앞으로 너는 나의 시복이 되어 모든 궁녀들의 동정을 보살펴다오. 나도 또한 전과 같이 너를 대하리라."

"마마의 바다 같으신 은덕을 어찌 다 갚사오리까. 마마와 세자저하를 위하옵는 마음 추호도 변함이 없사옵니다. 분부대로 모든 후궁과 왕자들의 일을 일일이 살피오리다."

"네가 만약 명심한다면 너에게는 저절로 큰 복이 내리도록 하리라. 앞으로 네가 후궁이 되어 옹주의 칭호를 받는 것은 내가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 다른 궁녀들의 칭호와 후궁은 전혀 인정하지 아니할 것을 결심했다. 너도 내 태도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왕비마마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다만 일편단심 왕비마마와 동궁저하의 너그러운 뜻을 받들 뿐이옵니다."

"대전마마께서 첫 번 손을 대신 고려 궁인은 춘방에 있어 세자저하의 감독을 받고 있으니 너한테는 부탁할 필요가 없다. 너는 강계 기생으로 후궁 명색이 된 가희아와 그의 몸에서 난 왕자의 일동일정을 살피라. 그리고 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궁인들의 행동도 손살피듯 알아서 아뢰어라." 왕비는 세자가 권한 대로 월화를 전과 같이 심복을 삼아서 모든 지밀 안 동정을 살피라고 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물러가거라." 왕후는 월화를 내보낸 후에 상궁을 불렀다.

"나의 탈 것을 등대시켜라. 대전으로 향하리라." 왕비는 또다시 전하와 대결할 결심을 했다. 옥교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중전이 대전에 친림하는 일은 없었다. 대전 궁녀들은 황황히 중전을 맞이했다. 태종은 때마침 가희아와 함께 서온돌에 있다가 상궁한테 중전이 듭시었다는 말을 들었다. 가희아는 황망히 몸을 피하고 태종은 의복을 바로잡아 왕비를 맞이했다. 태종과 왕후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고려 궁인의 사건이 일어난 후에 처음 되는 일이었다. 서로들 서먹서먹하고 안정되지 아니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왕비는 거대한 몸집에 위풍이 늠름한 얼굴을 번쩍 들어 태종을 바라본다.

"전하를 대해 뵌 지 오래만입니다." 사나이처럼 남편 태종께 말을 건넨다. 태종은 왕비의 위엄에 눌렸다. 뿐만 아니었다. 정궁인 왕후대접을 아니할 수 없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왕비를 맞이했다.

"웬일이오? 이른 아침에 왕후가 외전까지 친림을 하니 무슨 좋은 일이 생겼소?" 태종은 왕비의 노기 서린 얼굴을 보자 가희아가 아니면 월화의 일로 온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왕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가득 웃음을 띠고 어처라고 불러본다. 민비는 전하의 능글능글 웃는 모습을 보자 더한층 화증이 났다.

"좋은 일입니까? 전하께서나 좋은 일이 많으시지 저 같은 몸에 좋은 일이 있을 턱 있습니까. 오늘 아침 일찍 나온 것은 하도 전하를 만나뵙지 못하니 뵙고 싶어 나온 길이올시다. 한창 후궁들과 재미를 보시는 중에 연통 없이 들어와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이다." 후는 여전히 비꼬아 대답했다. 태종은 일부러 왕비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같이 딱딱하고 거칠고 윤기 없는 큰 손이다. 가희아와 월화의 손만 잡아보다가 몇 해 만에 왕비의 손을 잡아보니 이건 바로 나무하는 떠꺼머리 총각의 손길보다도 딱딱했다. 그러나 전하는 내색을 할 수 없었다. 반가운 듯 거칠거칠한 손을 이끌어 보료 위에 앉게 했다.

"마마는 공연히 과인을 놀리고 의심하지 마시오. , 한창 정무다단하여 국사를 처결하고 있었는데, 어느 하가에 후궁들과 재미를 보고 있겠소. 쓸데없는 추측으로 과인을 의심하지 마시오."

"정무가 다단하시오. 하하하. 금방 저 협실로 피한 아이는 누구오니까? 승정원 입직 승지오니까? 다른 데는 영웅호걸로 자처하시면서 여자들한테는 그다지도 녹록하고 츱츱하시오." 왕비는 나인을 통하여 가희아가 협실로 피한 것을 벌써 알고 들어왔던 것이다. 태종은 이른 아침부터 대전에서 큰 소리가 나면 창피 막심하다고 생각했다. 왕비의 비위를 맞춰서 요란스런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왕후의 체통은 일월같이 밝고 크다 하오. 그까짓 궁녀들의 잔단 일에 관심을 갖지 마시오. 하하하. 어찌해서 왕림하셨소?"

"그 말씀은 전하께로 돌려보내 드립니다. 전하께서는 체통을 좀 지키시어 사시의 질서를 지키는 하늘과 같이 묵묵한 천도를 다하십시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짓입니까. 별별 오입을 다하시다가 이제는 자식 같은 나의 요전비 월화까지 빼앗아가십니까?" 왕비는 큰 눈을 딱 부릅떠서 태종을 바라보았다. 전하의 얼굴빛이 약간 붉어졌다. 두 볼이 화끈 달았다.

"월화는 지금 수태까지 된 몸입니다. 남의 자식을 이같이 만들어 버리셨으니 장차 대왕의 처신을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왕비는 날카롭게 따졌다. 태종은 다시는 입을 벌리지 못했다.

"나는 그년을 참형에 처하려 했습니다. 아무리 딸자식 같은 교전비라 하나 차마 그 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뒤에 나타나는 후궁들을 경계하려 하여 월화를 참해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동궁이 들어와서 간곡하게 빌었습니다. 월화의 몸은 홑몸이 아니라 이미 전하의 낙윤을 배었으니, 월화를 참형하면 곧 왕자를 참형에 처하는 것이나 매한가지 일이라고 밤새도록 간했습니다. 저는 세자의 지성스럽게 간하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지극한 어진 성품에 감동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형제지간 골육을 아끼는 지극한 정성과 세자의 인자한 어진 마음을 가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세자한테 지고 말았습니다. 월화를 참형에 처하려던 결심을 버리고, 월화를 살려두기로 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이 대전으로 나온 것은 이 일을 전하게 아뢰려고 온 것입니다."

전하는 왕비의 말을 듣자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처음에는 또다시 어떤 야료를 치려나 하고 경계하는 마음으로 왕비를 대했는데, 왕비의 태도로 보아 당장 급한 야료는 없을 것 같았다. 우선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한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번 월화사건에도 세자가 들어서 또 간했다 하니 창피한 노릇이라 생각했다. 나이 먹은 아들이 간했다 해도 부끄럽고 겸연쩍어서 얼굴을 들기 어려운 일인데 아직 나이 어린 세자한테 두 번씩이나 간함을 당해서 일을 무마시켜 놓았으니 수모스럽고 창피하기 한량없었다. 태종은 한편으로 무사 타첩이 된 것은 고마운 일이나, 세자가 중간에 들어 일을 가라앉힌 것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왜 세자한테 알렸소?" 돌연 태종은 왕후를 향하여 반발하는 말을 보냈다. 왕비는 태종이 욱하고 퉁명스런 말을 듣자 참으려던 부아가 다시 불끈 솟았다. 민비는 전하를 향하여 큰 소리로 말한다.

"알리다뇨, 누가 세자한테 알렸단 말씀입니까? 고려 궁인 때만 해도 세자가 문안 들러 왔다가 전하의 추한 모습을 목격한 것 아닙니까. 기생년을 데려다가 아이를 배게 하고 후궁으로 봉한 것도 온 대궐 안에서 쑥덕공론이 일어나고 조선 천지 백성들이 손가락질을 해서 웃게 되니 세자가 저절로 안 것이 아닙니까. 이번 월화의 일만 해도 세자가 문안을 들어왔다가 월화와 마주쳐서, 전하와의 일을 안 것입니다. 누가 세자한테 알렸단 말씀입니까. 남을 원망하기 전에 전하께서는 먼저 자기 몸 처신을 생각해보십쇼. 그리해서 체신을 잃지 않도록 하십쇼."

불끈했던 태종은 민비의 기승스런 반격에 다시 콧대가 숙었다.

"아직 장가 전인 세자가 공부는 아니하고 공연히 부모들이 하는 일에 참견해서 이러니저러니 생각하게 된다면 장래 일이 딱하게 될 테니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오." 태종의 옥음은 다시 부드러워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전하의 몸 처신을 잘하실 생각은 아니하시고 세자의 장래 일을 걱정하신 말씀은, 진정으로 전하께서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신다면 아무리 여자한테 욕심이 왕성하다 하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참지 못하면 금수가 되는 법입니다." 전하는 꼼짝없이 민비의 혹평을 받았다.

"아들 걱정 마시고 먼저 전하의 걱정을 하시오. 백성들한테 입으로는 삼강오륜을 실천하라고 떠들어대면서 하시는 짓은 딴판이니 백성들이 전하의 말씀을 믿겠습니까. 세자는 참 효자입니다. 전하께서 효자 노릇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보신 적이 계십니까?" 태종은 아버지 태조에게 대항했던 가지가지 무수한 일이 생각났다. 과연 불효자였다. 대답할 말이 없다. 잠자코 천장만 바라본다. 천장 위에는 황금으로 조각한 청룡 황룡이 영롱한 여의주를 희롱하면서 휘황찬란한 빛을 뿜는다. 임금을 용해 비해서 장식해논 왕의 자리 용상의 천장이다.

'저 용틀임 청룡 황룡을 차지하고 싶어서 아버지와 싸우면서 불효노릇을 했구나.' 전하는 한 귀로 민비의 꾸짖는 말을 듣고, 꿈틀거리는 용틀임 천장을 바라보면서 감회가 자못 깊다. 민비는 말없는 전하를 보자 더한층 기운이 만길이나 솟았다.

"어제 첩은 월화년을 죽이려 했소이다. 죽여서 다른 궁녀들을 경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죽이지 아니한 것은 세자가 울면서 간한 때문입니다." 태종은 민비를 향하여 어린 세자에게 남녀에 관한 일을 왜 알렸느냐고 한마디 말을 했다가 이미 꼼짝도 못 하고 왕비의 폭백만 받았다. 왕비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세자는 나이는 어리지만 과연 훌륭한 인물이 될 사람입니다. 첩이 월화를 죽인다 했더니 '배 안에 들어 있는 아바마마의 씨는 어찌합니까'하고 간했습니다. 월화는 어마마마의 교전비니 죽이든 살리든 어머니 맘대로 하시려니와, 그 배 안의 아이는 아바마마의 왕자입니다. 왕자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같이 한다면 한꺼번에 두 생명이 없어진다 했습니다." 왕비는 숨이 찬 듯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계속한다.

"그리고 세자는 인도로 보아서 차마 못 할 짓이라 했습니다. 첩은 이 말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리해서 모든 분한 것을 다 참아버리고, 월화를 죽이려 하던 일도 포기해버렸습니다." 나무와 돌이 아닌 태종이었다. 아들만 칭찬하고 자기를 사람값에 쳐주지 않는 아내를 밉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인도를 찾아 말하면서 두 죽음을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했다는 소리를 듣자 왕은 마음속으로 '아들 세자가 제법이구나' 하고 감탄하는 마음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민비는 다시 전하를 타이르다시피 한다.

"오늘 아침에 첩이 대전으로 나온 것은, 세자의 충성스럽게 간하는 말을 듣고 월화를 처치해 죽일 것을 아니 죽이겠다고 전하게 아뢰러 나왔소이다. 월화를 아니 죽이는 이유는 순전히 세자의 말을 들어 배안의 핏덩이를 불쌍히 생각한 때문이올시다. 이것은 다 세자의 덕으로 그리 된 것이라 생각하십쇼."

"잘 생각하셨소." 오래간만에 전하의 말씀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개과천선을 하십쇼. 기왕 마련하신 후궁들, 고려 궁인이나 강계 기생이나 이번에 또 장난을 치신 월화, 이 세 사람은 저도 전하의 후궁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들 세 사람의 후궁들을 거느리시고 편안하고 행복된 생활을 하십쇼."

"고맙소." 전하는 이내 왕비에게 항복하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하께서 이 세 사람의 후궁을 인정해 드린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른 궁녀나 상궁에게 손을 대신다면 그때 가서는 단연코 용서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소. 나도 사람이지." 전하와 왕비는 약간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전하는 상궁을 불렀다.

"오늘 아침 중전마마와 함께 수라를 받으리라. 그같이 준비하라."

"알겠사옵니다." 상궁은 벙긋 웃고 물러간다. 세자는 이리하여 전하와 왕비의 사이를 다시 화합시켜 놓았다. 오래간만에 태종과 민비는 엉켜진 얼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고려 궁인과 강계 기생 가희아와 월화 세 사람의 후궁을 왕비 민씨가 인정해준다는 말에 태종도 마음이 훨씬 풀어졌다. 심기가 흐뭇해서 상궁을 불러 아침 수라를 왕비와 함께 하겠다고 분부를 내렸다. 상궁은 곧 내외분 수라상을 어전에 올렸다. 전하와 왕비는 오래간만에 수라상을 받으며 화합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기왕 월화를 후궁으로 인정해준다 하니, 가희아 홍씨한태 혜선옹주의 칭호를 내리듯이 월화에게도 칭호를 내려야 할 테니 무어라 했으면 좋겠소?" 태종은 의좋게 물었다.

"전하께서 명명하실 것이지 첩이 아무리 배짱이 넓다 한들 시앗의 별명까지 지어줄 마음은 없습니다." 왕비는 마음이 속으로 약간 풀렸으나 겉으로 한 번 비꼬아 보았다.

"월화는 특별하지 아니하오? 중전의 교전비로구려. 기왕 목숨까지 살려준 터이니 이름을 지어준다면 두 번 살아난 재생의 기념도 되고 -. 꼭 중전이 지어주어야 하겠소이다. 하하하." 태종은 수라상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아 비를 바라보며 너스레를 쳐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오래간만에 지밀에서 전하와 대비 사이에 터져나오는 웃음소리다.

"가희아에게 후궁의 칭호를 내리셨으니 월화한테도 후궁의 칭호를 아니 내리실 수 없습니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준다고 두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내친걸음에 칭호를 내리기로 하겠습니다." 왕비도 오래간만에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마마의 너그러운 태도에 후궁들은 감동해서 울겠소. 하하하."

"가희아와 월화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니 월화는 가희아보다 좀 더 위가 되는 칭호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가희아는 아무리 숫처녀였다 할지라도 기생이올시다. 기생을 후궁으로 삼아서 혜선옹주라 했는데, 월화야말로 당당한 숫처녀올시다. 첩이 어려서부터 길러낸 아이고 보니 말은 교전비지만 딸이나 매일반올시다. 이 아이를 가희아와 동등하게 대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칭호를 주는 것이 좋겠소?"

"딸의 칭호는 공주입니다. 신녕공주라 하십시다."

"좋구녀. 믿음직스럽고, 평안하게 지내란 말이구려. 하하하. 중전, 과연 고맙소. 그러나 또 한 가지 청이 있소."

"무엇이오니까?"

"저것의 뱃속에 무엇이 들어다 하니, 만약 아들이 나온다면 이름을 지어야 할 텐데 아주 그 이름도 재생의 은인인 중전이 지어주어야 하겠소." 왕비는 선뜻 허락했다.

"인이라 하십시다."

"? 과연 좋구려."

"옷의 변 항렬자와 매일반 되니, 세자 이하로 모두 같고, ''은 인과관계라는 뜻입니다. 모두 다 전생의 업원으로 이리 된 듯합니다. 그러하니 인자를 내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하하. 중전의 높은 의견이 맞소이다. 나는 가희아의 아들을 비자로 지었는데 이것은 생각지도 않고 지었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아니할 짓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글자 뜻이 되는구려. 역시 이름도 마음대로 지어지는 것이 아닌가 보오. 허허허."

"그렇습니다. 모두 다 하늘이 굽어보시고, 천지신명이 지키셔셔 세상일을 판정하시는 것입니다. 이름이나 별명 한 가지라도 자기의 욕심대로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으로 훌륭하게 지었다 해도 결국은 하늘의 마음이 반영되어서 나중에는 하늘이 지시하시는 운명대로 되고 마는 것이 이 세상 이치인가 합니다." 태종은 다시 중전에게 묻는다.

"기왕 고려 궁인까지 후궁으로 두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춘방에서 어느 때쯤 대전으로 데려오는 것이 좋겠소?" 태종은 모처럼 좋아진 왕비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동궁에 있는 고려 궁인을 언제쯤 데려오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사실상 고려 궁인은 한 번 작별한 지 일 년이 넘었건만 지척이 천 리라고 만나볼 길이 망연했다. 더구나 내외 싸움을 만류하기 위하여 세자가 동궁으로 데려다 보호하고 있으니 점잖은 체통으로 동궁에 출입을 할 수도 없고, 세자보고 돌려보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단념했으면서도 항상 눈에 삼삼 어려서 사모하는 정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월화를 후궁으로 인정하는 왕비의 특별한 생각에 곁들여 제대로 운이 터져서 고려 궁인도 후궁으로 인정을 받게 되니, 태종은 마음속으로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한시바삐 대해 보고 싶은 생각이 그름처럼 피어올랐다.

"오늘 밤이라도 데려오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대전 안에는 절대로 두어서는 아니됩니다. 후궁들은 일체 누구나 막론하고 따로 처소를 정하시어 전하께서 출입을 하시도록 하셔야 합니다. 첫째로 문안 들어오는 사람들 앞에 전하의 위신이 떨어져서 제왕의 체통이 말이 아니올시다. 그리고 어린 왕자들이 보더라도 교양에 대단히 좋지 아니합니다. 아가도 보십쇼. 내가 나오는데 가희아가 협실로 뛰어 달아났습니다. 왕자들이 볼 때 이 꼴이 무슨 꼴이겠습니까. 왕자뿐입니까. 입시해 들어왔다가 신하들이 이 모양을 본다면 기가 막힐 것입니다. 단연코 별처소를 차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다시 한번 당부하고 다짐해둡니다. 아까도 말씀했지만 세 후궁 이외에 전하께서 또 다른 궁녀에게 손을 대시는 일이 있다면 그때 가서는 왕후의 직권으로 단연코 지밀을 숙청시킬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좋소, 좋소." 태종은 동곳을 뺀다. 천하의 영웅이라고 자처하는 태종도 색 앞에는 비굴했다. 다시 왕비에게 청한다.

"그럼 세자한테 중전이 말씀해서 고려 궁인을 대전으로 들여보내도록 해주시오." 왕비는 물끄러미 흘겨볼 수밖에 없었다. 기가 막혔다. 그러나 기왕 마음을 돌려서 아들의 말에 좇아 일을 너그럽게 처리하는 판이었다. 생색을 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 후궁 이외에는 다시는 다른 여인들한테 눈을 거들떠보시지 않는다는 맹세를 제 앞에서 똑똑히 하신다면 세자한테 말해서 고려 궁인도 대전으로 돌려보내오리다." 왕비의 말을 들은 태종은 입이 벙긋 벌어졌다.

"중전의 부탁이 이같이 간곡하시고 지나간 모든 일을 다 들어주시는데 과인이 나무나 돌이 아닌 바에야 어찌 감동이 되지 않겠소. 가희아와 고려 궁인과 월화 이외에는 다시는 후궁을 아니 두기로 하겠소. 과히 염려 마시오." 왕비는 마음속으로 태종의 대답이 믿을 만한 말이 아닌 줄 판연히 알면서도 일부러 격려하는 말을 보냈다.

"장부일언 중천금이라 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보통 남자가 아니라, 제왕의 몸이십니다. 식언을 하시어서는 아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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