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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4-1

4권 태종 호색

 

큰 왕자의 학력

 

태상왕 이성계의 재궁을 장사지내는 인산도 무사하게 끝났다. 함흥 갈대는 태상왕 이성계가 그의 가장 사랑하는 불쌍한 딸 경순공주를 데리고 무학과 함께 신위지지를 정한 후 능침을 꾸밀 때 이미 함흥서 옮겨 심었었다. 함흥서부터 건원릉까지 천여 리 길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옮기니 하루가 채 못가서 건원릉에는 갈대풀이 석양빛을 받아 창칼이 번쩍이는 듯했었다. 방석을 죽이는 난리통에 남편 이제를 잃어 청상과부가 된 경순공주는 태상왕의 돌아가신 부음을 양주 소요사에서 듣고 곡지통을 하면서 분상을 하여 한양 성중까지 들어왔으나, 아버지의 유해를 봉안한 빈전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전실 오라버니 되는 상감 방원이 죽일까 겁을 집어먹은 때문이다. 대궐 안에서 초혼을 불러서 발상할 때라든지 거상을 입은 성복제와 인산행렬에 당연히 참여할 만한 자격을 가진 정정당당한 친딸이건만, 감히 대궐에 들어가지 못했다. 평상시 상감의 행적으로 보아 반드시 신변에 위해를 가할 것이 분명한 때문이다. 경순공주는 백성 틈에 숨어서 대궐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재궁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머금고 염주를 굴려서 아바마마의 명복을 빌었다. 사람 물결 속에 휩쓸려 건원릉까지 나가서 먼발치로 함흥서 옮겨 심은 갈대를 바라보며 슬픈 중에도 마음을 놓기도 했다.

온종일 떠들썩하던 장사가 끝나고 상감을 위시하여 백관들이 성중으로 돌아간 후에 경순공주는 홍살문 밖에서 아버지의 능을 향하여 통곡하고 허배를 드린 후에 이내 종적을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세월은 흘러가는 물과 같았다. 재우가 지나고 삼우도 끝났다. 삼우제 때는 왕손들이 건원릉에 나가서 전배하고 돌아왔다.

성복제와 인산 때도 나가지 아니했던 ''가 삼우제에 나갈 리 없었다. 산상까지 나갔다가 돌아온 ''''는 언니 되는 ''의 생각이 났다. ''가 먼저 발론을 했다.

"이제, 대행 태상왕 전하의 삼우제도 지냈으니 허전하기 짝이 없고. 큰언니나 찾아보러 갑시다."

''''의 말에 따랐다. 형과 아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 처소에 들었다. 이제 ''는 단정히 책상 앞에 앉아서 '대학'을 읽고 있었다. 어려운 학문이다. ''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는 항상 부왕께서 큰형은 공부는 아니하고 매사냥만 한다고 타박을 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오늘 책상 앞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니 기막히지 아니한가. '대학'이다.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언니, 어려운 책을 보십니다그려!" ''의 묻는 말에 ''는 대답 없이 책을 덮었다. ''는 옆을 돌아보았다. 뚜껑을 덮어논 남포석 벼룻돌 옆에 장지를 둘둘 말아논 것이 있었다. 종이 등뒤로 먹발이 비쳤다. 큰형이 글씨 공부를 한 것이 분명했다. 펴보고 싶은 의욕을 느꼈다. 형의 급한 성미에 펴보면 꾸지람을 할 것 같아서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형의 글씨가 얼마나 늘었나 하고 보고 싶은 생각이 버썩 일어났다. 죄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마디 말을 하고 펼쳐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언니, 글씨 공부도 했구려." ''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다.

"좀 펼쳐 보아도 좋지?" ''는 상긋상긋 웃음을 머금고 둘둘 말아논 종이를 펼쳤다. 뚜렷뚜렷 글자가 나타났다. 먹이 광채를 뿜어 윤기가 종이에 가득했다. 해자다. 획마다 기운차게 살았다. 구성궁예천명의 체를 임했다. ''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공부 아니한다는 형이 글은 '대학'까지 읽고, 글씨는 구성궁체의 멋을 거의 쫓게 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는 혀를 빼고 고개를 흔들었다. 옆에서 함께 보던 ''도 눈이 둥그레졌다. 형이 이같이 글씨를 잘 쓸 줄은 몰랐다. ''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입을 딱 벌렸다. ''는 형이 무서운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공부를 아니하는 체하면서, 실속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는 섣불리 잘 썼다고 칭찬을 할 수 없었다. 말없이 행동으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조심조심 글씨 쓴 종이를 말아서 얌전하게 한구석에 세워놓았다. ''가 불쑥 말했다.

"언니, 구성궁예천명체보다 조송설체가 더 낫지 않소?" 아는 체하고 한 마디를 했다. 입이 간지러워서 그대로 앉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우 ''보다 침착하지 못했다. 큰형 ''는 둘째 아우 ''의 말을 닫지 껄걸 웃었다.

"하하하, 너도 조맹부 송설이 명필인 줄은 아는구나. 제법 눈이 떠졌다. 그러나 조송설은 지조가 없는 사람이다. 나라가 망한 뒤에 원나라에 몸을 굽혀서 사위가 되어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린 자다. 고려 이후에 이 나라 사람들이 멋도 모르고 송설체를 본뜨려 하지만 지조 없는 사람의 글씨가 아무리 명필인들 가치가 있느냐. 나는 추한 사람의 글씨를 본뜨고 싶지 않다!" 멋도 모르고 한 마디를 내논 ''의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는 그렇고 너희들한테 물어볼 말이 있다." ''는 얼굴빛을 바로 하고 ''''에게 물었다. ''는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큰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희들 인산에 참여하여 능상까지 나갔더냐?"

", 나갔다 왔습니다. 삼우제까지 지내고 왔습니다." ''가 대답했다. 큰 왕자 ''는 정색하고 아우들에게 말한다.

"나는 불효막심한 놈이다. 할아버지 성복제에도 참례치 아니했고 영결종천을 해서 나가시는 능행길에도 배종을 하지 못했으니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숭배하기 싫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거탈로 슬퍼한다는 것은 또한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일이다. 남이 흉을 보거나 탈을 잡거나, 나는 내가 생각한 바른길을 걸어가 보려 한다. 그래서 나는 구토증이 났다. 거탈울음을 우는 모든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하기 싫었다. 너희들은 나를 꾸짖지 말아라." ''의 흑요석같이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언니를 불민하다고 생각했다면 저희들이 어찌 오늘 뵈러 왔겠습니까?" ''는 돌연 한숨을 짓고 ''에게 묻는다.

"성복제와 장례 때 경순공주께서 들어오셨더냐?" ''''는 경순공주를 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방석을 죽일 때 매부 이제를 죽였고, 그의 아내 경순공주는 이미 중이 되어 정릉 흥천서와 양주 소요산으로 돌았으니 ''''는 고모인 경순공주를 말만 듣고 만나보지 못했다.

"소요산에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계셨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성복제 때도 뵙지 못했고 인산 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우의 말을 듣는 ''는 별안간 상기가 되었다. 눈에 충혈이 되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도 너무하신다! 할아버지 관 뚜껑을 부여잡고 정말 피눈물이 나도록 울 사람은 고모 경순공주가 있을 뿐이다. 어찌해서 정말 진짜로 울 사람을 아니 불러들였단 말이냐! 할아버지의 영혼이 만약 계시다면 건성으로 우는 사람 몇백 명보다 단 한 사람 경순공주의 울음을 가엾고 예쁘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다!"

''는 뱉듯이 말끝을 맺었다.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다'하고 외치는 큰형 ''의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모두 다 고개를 숙여 침묵했다. ''는 흥분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편도 없고, 오빠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이제는 아버지마저 아니 계신 혈혈단신의 고아다! 그나마 혹시 남자라면 모르겠다. 슬프고 외로워서 불제자가 된 일개 여승이 아니냐. 이 혈혈단신의 외로운 여인을 왜 아버지의 임종도 못 보게 했단 말이냐. 왜 초혼제나 성복제 때 불러들이지 안 했단 말이냐. 혈혈단신의 경순공주가 반정 혁명을 일으킬까 겁이 나서 아니 불러들였단 말이냐!"

''의 울분한 목소리는 더욱 거칠었다. ''는 큰형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잠자코 듣고 있었다.

"당신은 국가를 창업한 큰 위인이라고 자처할 것이다. 천하를 주름잡을 큰 포부를 가진 분이 어찌 그리 마음이 협하시냐? 집안의 누이동생 하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상감마마가 어떻게 나라의 큰 정치를 하겠느냐!"

''는 말을 마치자 길게 한숨을 지었다. ''''는 형의 말이 옳은 줄 알면서도 아버지를 타박할 수는 없었다.

"창황 중 아바마마께서 경순공주의 생각이 아니 나셨을 것입니다"

''는 아름 어름 이쯤 대답했다. 창황 중 경순공주의 생각이 아니 난 듯했다는 ''의 대답을 들은 큰 왕자는 더한층 흥분했다.

"무어야, 창황 중에 경순공주의 생각이 아니 났다? 말이 되느냐. 진정으로 아버지의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는 생각이 났으면 어찌 돌아가신 분이 가장 사랑했던 누이의 생각이 나지 아니했단 말이냐. 경순공주는 전하께서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서 하늘 아래 둘이 없는 아버지의 임종을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철천의 한이 되었겠느냐. 모르면 모르되 공주는 대궐 안에 들어와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통곡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으니, 필연코 백성 틈에 끼여서 아버지의 마지막 나가는 영이를 바라보고 슬피 울어 혼절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지 못하는 가련한 몸을 운무 속에 숨겨서 종적을 감추었을 것이다. 전하께서는 왜 이 생각을 못하셨느냐 말이다. 한 나라의 왕이 되어 국가를 다스리는 길은 지극히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밝게 덕을 밝혀야 한다. 이것이 왕천하하는 길이다. 덮어놓고 탐욕과 시기로 백성을 위압한다면 나라는 위태하고 민심은 흩어질 것이다. 우선 가까운 내 집안일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한 나라를 요리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는 아우들 앞에 열변을 토했다. 모두 다 옳고 바른 탁록이었다. '대학'에 있는 명명덕과 재어지선이라는, 사람이 행해야 할 길을 그대로 옮겨서 주장하는 것이었다. ''''는 마음속으로 더한층 형을 존경하는 생각이 우연히 일어났다. ''가 말했다.

"언니가 '대학' 공부를 하시더니 말씀이 더욱 향기롭습니다."

"이 녀석, 향기가 무어냐. 내가 여자냐? 향기가 나다니, 하하하."

''도 칭찬하는 아우의 말이 듣기 싫지는 아니했다. ''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여자의 향기는 속된 향기구, 언니의 향기는 글에서 나오는 향기올시다."

''보다 ''는 할 살 아래건만 ''의 말에 응구첩대로 대답했다. ''''보다도 ''가 장래성이 있고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의 등판을 어루만졌다.

"너는 요사이 무슨 글을 읽느냐?"

"'소학'을 떼고 저도 '대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는 깜짝 놀랐다.

"네가 '대학'공부를 벌써 한단 말이냐? 그럼 너 격물치지를 해석할 줄 아느냐?"

"다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약간은 짐작합니다."

"그렇다면 격물치지가 무슨 뜻이냐 풀어보아라."

''는 서슴지 아니하고 대답한다.

"아까 형님께서 경순공주를 말씀하셨죠. 구경꾼 틈에 몸을 숨겨서 태상왕 전하의 영이를 바라보고 혼절해 울다가 잡혀 죽을까 두려워서 몸을 운무 중에 숨겨 피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형님이 친히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경을 추리로 생각하셔서 보신 듯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격물치지올시다."

''는 놀랐다. ''는 장차 큰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옳다! 더욱 공부해라." ''''; 등을 또 한 번 쓸었다.

 

세자 문제

태상왕 이성계가 돌아간 후에 세자를 봉하자는 여론은 또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대사간 황희는 나라의 국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빨리 세자를 정하자고 주장했다. 황희는 강명 정직하면서도 관후장자의 풍도를 가졌다. 앞으로 대재상이 되어 이 나라를 복되게 할 사람이다. 황희는 인산을 치른 후에 대사간의 자격으로 다시 상소를 올렸다. 대사간이란 언관이었다. 임금의 잘못하는 일을 간하고 국가의 비정을 논란하는 독립된 관청의 장이었다.

'대사간 신 황희는 돈수재배하고 전하께 아뢰옵니다. 지난번에 신은 국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속히 세자를 정하시라 했습니다. 이제, 국가의 형편은 빨리 세자를 정하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여러 왕자를 두셨습니다. 전하! 지난 일을 살피옵소서. 다시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백대의 철칙인 큰왕자로써 세자를 책봉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를 지체할수록 폐단이 되옵니다. 빨리 세자를 봉하옵소서. 밝으신 용단이 계시기 바라옵니다.' 상소는 정원을 통하여 태종한테 올려졌다. 황희의 이번 상소는 첫 번째 상소보다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먼젓번 상소에는 그저 국가의 근본을 세우기 위하여 세자를 봉하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상소에는 왕자를 지목해서 큰 왕자로 세자를 삼으라 했다. 세자란 현재의 왕이 돌아간 후에는 다음 세대의 왕이 되는 것이니 실로 중대한 자리다. 세습적인 봉건시대에는 반드시 큰아들이 새 왕이 되는 것은 만고의 철칙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지금의 상감이 왕이 된 것은 정상이 아니요, 변칙이다. 또한 지난 시절에 큰아들이나 둘째 아들로 차서를 따라서 세자를 봉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계비 강씨의 소생 방석으로 세자를 봉한 것도 변칙이었다. 이로 인해서 왕실은 편안한 날이 없고, 골육상쟁하는 변이 거듭거듭 일어났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이 불상견의 사이까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대사간 황희는 이러한 지난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이같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대사간 황희의 상소를 받아본 태종은 이번에도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황희의 말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속엔 딴생각이 있었다. 사랑하는 애기 가희아의 소생 ''가 있는 때문이다. 가희아는 강계 출신의 요염한 기생이었다. 자색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궁중 잔치 때 상감인 태종의 눈에 들어 하룻밤에 연을 맺었다. 일약 후궁이 되어 옥동 같은 아들을 낳았다. 상감은 이름을 ''라 지어주었다.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가희아의 교태에 취한 임금은 그녀의 아들 ''도 총명 영리하게 뵈었다. 태종은 아버지가 서자 방석으로 세자를 봉했던 일을 씻은 듯 잊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자기가 칼을 뽑아 방석을 죽인 일도 잊었다. 색에 취한 사람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애기의 아들 ''로 왕사를 삼을 생각이 들었다. 입을 열어 말은 하지 아니했으나 태종의 심경은 여기까지 빠지게 되었다. 이 눈치를 안 사람은 누구보다도 왕후 민씨였다. 민씨는 여자면서 남자의 기상이 있는 능동적인 인물이었다. 패기가 가득했다. 개염도 많았다. 이렇기에 방석을 죽이는 난리 때 지금의 상감인 이방원에게 갑주를 입혀주고 어서어서 대궐로 쳐들어가서 일을 성공하라고 격려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자기 아버지 민제를 움직여서 하윤과 접선을 시켜서 비밀한 중에 계획을 꾸몄다. 그뿐이 아니었다. 자기의 친정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등으로 군사를 거느려 대궐로 쳐들어가서, 영추문 앞에서 쫓겨나오는 세자 방석을 죽이고, 달아나는 방번을 죽이고,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를 이성계의 용상 앞에서 목을 잘라서 혁명을 완수하게 했던 장본인이다. 왕후 민씨는 마음속으로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 대사간 황희가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대장군 민무구와 민무질을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친정 동생들은 왕후 민씨께 문후를 드린 후에 시립해 있었다.

"무슨 하문하실 일이 계시어 부르셨습니까?" 큰동생 민무구가 먼저 물었다.

"대사간 황희가 국본을 빨리 정하시라는 상소를 올렸다는데 자네들은 이 일을 아는가?"

", 알았습니다. 황희는 과연 대사간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올시다. 지난번에도 세자책봉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습니다마는 이번에는 장자로 세자를 봉하셔야 국가가 태평하다고 아주 명토를 박아서 상소를 올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대답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잠자코 계신 모양 아닌가?"

", 그러합니다."

이번엔 아우 민무질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얼른 결정을 내리시지 않는 까닭을 자네들은 알고 있는가?" 왕후 민씨는 눈을 들어 동생들을 둘러보았다.

",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기생 출신으로 후궁이 된 가희아를 매우 사랑하신다 합니다. 원인은 가희아의 소생인 ''가 있는 탓이올시다."

왕후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들도 까닭을 아네그려. 그렇다면 왜들 가만히 앉아 있나?"

"저희들은 외삼촌이 되는 까닭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민무질이 대답했다.

"못난 사람들일세. 직접 상소를 올리기가 거북하다면 이 기회를 타서 대신들을 충동해서 여론을 일으키면 될 것 아닌가. 대의명분이 뚜렷한 이 일에 응하지 아니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네들은 나서지 말고 대신들을 움직이도록 하게."

"아버님께 여쭙고 하정승을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민무구는 하윤을 생각했다.

"잘 생각했네. 전하께서는 하윤의 말이라면 꼼짝 못 하고 들으실 것일세. 더구나 하윤은 아버님과 친할 뿐 아니라 정도전을 몰아내기 위하여 전하의 잠룡 때 아버님을 통하여 전하와 손을 잡은 사람 아닌가. 꼭 하정승을 움직이도록 아버님께 여쭙게."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민무구 형제는 내전에서 물러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 부원군 민제를 뵈었다. 아버지 민제는 아들 형제들이 왕후전에 다녀온 일을 벌써 알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더냐?"

"대사간 황희가 올린 상소에 대하여 빨리 협조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아버님께서 하정승을 움직이시라 하셨습니다."

부원군 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한마디를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 부원군 민제는 평교자를 몰아 정승 하윤을 찾았다. 나라의 원로요, 금상 전하의 장인인 민부원군의 행차가 하윤의 집에 당도하니, 정승 하윤은 비록 지위가 높으나 신을 거꾸로 신고 뜰에 내려 부원군을 맞이했다.

"부원군 대감, 웬일이시오니까?"

민제의 손을 두 손으로 받들고 당 위로 올랐다. 민제는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왜 대감댁을 못 찾을 사람입니까? 너무 사람을 괄시하지 마십쇼, 하하하."

"아니올시다. 부원군 대감께서 연통도 없이 누지에 왕림하시니 너무나 황송해서 여쭌 말씀이올시다."

민제는 은실 같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또 한 번 껄걸 웃었다.

"영의정댁을 누지라 하시면, 우리 같은 사람의 집은 무어라 불러야 하겠습니까? 너무 겸손하신 말씀도 예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수작은 여유가 작작했다. 인사가 끝난 후에 민제는 얼굴빛을 고치고 손을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

"조용히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잡인을 금해주십시오."

하윤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 후에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무도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십시오."

민제는 그래도 미심했다.

"갑창이 있으면 닫아주시오."

하윤은 창 안에 있는 갑창을 닫았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하윤은 벌써 마음속으로 민제가 찾아온 뜻을 짐작했다. 민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밖에서 들릴 듯 말 듯했다.

"영상 대감, 대사간 황희가 올린 상소를 아셨습니까?"

"알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옳다고 생각합니다."

"옳다고 생각하시면 왜 영상대감의 자격으로 상주를 아니하십니까? 나는 와자들의 외주부가 되니 혐의쩍어서 말씀을 못합니다마는 대감께서는 왜 지의를 하고 계십니까? 대감께서도 정도전의 본을 뜨려 하십니까?"

민제는 하윤의 염통을 솜방망이로 콱 찔렀다. 아닌 게 아니라 하윤이 정도전이 자기 일신의 영화를 위하여 강비한테 붙어서 서자 방석을 세자로 봉하게 한 때문, 방원과 함께 정도전을 제거시킨 사람이면서도 역시 지난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앞날을 위하여 태종의 동정만을 살피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윤은 말문이 막혔다. 얼른 대답을 못 했다. 민제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난을 일으킬 때 대감을 내 사위인 금상 전하께 천거한 사람이 바로 이 민제올시다!"

민제는 은실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딱 부릅떴다. 부원군 민제는 계속해서 하윤을 위협했다.

"대감! 전하의 동정만을 살피실 것이 아니라 내 딸인 와후마마의 심정도 살피셔야 합니다!"

민제는 또 한 번 소리 없는 솜방망이로 정승 하윤의 허구리를 콱 찔렀다. 하윤은 당황했다.

"때를 기다리는 중이올시다. 전하의 마음이 흐뭇하실 때를 기다리느라고 아직 아뢰지 아니했습니다."

민제는 정색하고 다시 말한다.

"대사간까지 정론을 들어 주저 없이 아뢰었는데, 어찌해서 정승인 대감은 때를 기다린다 하십니까? 대감은 상감께서 서자로 세자책봉을 하시겠다고 하실 때를 기다리십니까?"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연부역강하시니 잘못 아뢰었다가는 오해를 하실까 하여 시기를 보아 아뢰자는 것입니다."

하윤은 손을 비비면서 초조하게 대답했다.

"대감,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세자는 일찍이 책봉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왕자가 많을수록 미리 책봉하는 법입니다. 그래야만 나라가 반석 위에 튼튼하게 놓여져서 민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춘추대법인데, 대감은 어찌 이 일을 모르십니까?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딴생각이 계시어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천만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까 말씀한 대로 그저 전하의 마음이 움직이실 때를 기다린 것뿐입니다."

영의정 하윤은 낭패했다. 좌불안석을 못하고 있었다.

"대감, 나의 아들들은 못생겼습니다마는 원자의 외삼촌이요, 모두 다 대감과 함께 상감을 도와서 혁명을 일으켰던 대장들이올시다. 대감이 간에 붙고 쓸개에 붙어서 정정당당하게 태도를 취하지 아니한다면, 우리 아들들은 결코 대감을 그대로 두지 아니하리다!"

민제는 추상같이 얼러댔다. 영의정 하윤은 납작 엎드렸다.

", 그저... 알겠습니다. 오늘은 해가 기울었습니다. 내일 곧 입조하여 전하께 원자로 세자를 봉하시라 아뢰겠습니다." 부원군 민제는 다시 수염을 쓰다듬고 말한다.

"대감만이 혼자 아뢰실 것이 아니라 삼사를 동원하여 아뢰셔야 합니다. 사간원에서는 황희가 이미 선편을 잡아 아뢰었거니와 사헌부와 홍문관의 모든 헌관과 언관들에게 교장해서 아뢰셔야 합니다."

부원군 민제의 말소리는 장중했다.

", 그리하오리다."

하윤은 민제의 위엄에 눌렸다. 부원군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부원군의 뒤에는 왕후 민씨가 있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갑니다. 당부하오."

민제는 한마디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승 하윤은 뜰 아래까지 내려 부원군을 전송했다. 영의정 하윤은 부원군 민제의 위풍에 눌렸다. 이튿날 날이 밝자, 곧 대궐로 평교자를 몰았다. 빈청에 자리를 잡고 삼사 장관을 청했다. 홍문관 대제학,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들이 영의정의 분부를 받고 모여들었다. 하윤은 원래 능란한 재상이었다. 여태껏 자기가 주저했던 태도를 버리고 점잖게 삼사 장관들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나는 백료의 장으로 있기 때문, 아직 앞을 서서 발론을 아니하였거나와 입세자하는 일은 국가의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오. 지난번에 황대사간은 두 번씩이나 세자책봉을 하시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아직 윤허하시는 말씀을 내리지 아니하셨소. 여러분의 생각에는 어떠하오?"

"당연히 세자를 세워야 합니다." 대사간 황희는 자기의 주장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황대사간은 이미 상소까지 올린 분이니,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이다."

홍문관 대제학과 대사헌은 여출일구로 대답한다.

"원자로 세자를 봉하셔야 합니다. 대사관의 주장이 옳소이다."

"그렇다면 나는 영상의 자격으로 오늘 전하께 알현하고 원자로 세자책봉을 하시라고 아뢰겠소이다. 혹시 전하께서 나의 말씀도 윤허치 아니하실지 모르니, 여러분들은 삼사가 교장을 해서 세자책봉을 주장하시오."

"좋습니다. 대감의 뒤를 받쳐서 곧 삼사가 교장을 하겠습니다." 대사간 황희를 빼놓고, 대사헌과 대제학도 민씨네 부자 형제의 권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일제히 찬성을 했다. 왕후 민씨의 세력은 만만치 아니했다. 영의정 하윤은 내관을 통하여 어전에 뵙기를 청했다. 사랑하는 후궁 가희아와 함께 있던 태종은 정승이 뵙자는데 아니 만날 수 없었다.

"들라 해라."

함께 있던 후궁 가희아는 잽싸게 몸을 날려 옆방으로 피했다. 정승 하윤은 편전으로 들어 어전에 곡배를 드렸다. 태종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하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요사이 국사에 얼마나 바쁘오? 별일은 없는가?"

"변방과 민생 일은 별일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중대한 일이 있사와 정하께 알현을 청했습니다."

'중대한 일'이란 말에 태종의 눈이 둥그레졌다.

"무슨 중대한 일이 생겼소?"

"지난번에 대사간 황희는 두 번씩이나, 세자를 정해서 국본을 튼튼히 하라 아뢰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아직껏 전하께서는 윤허를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여론이 물 끓듯 합니다. 속히 원자로 세자를 책봉하시어 민심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윤의 말을 듣자 태종은 껄걸 웃었다.

"내 나이 아직 사십이 넘지 못했는데, 뒷일을 어째 그리 걱정들을 하오.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리다."

이때 태종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내시가 들어왔다. 태종은 내시를 바라보았다.

"어찌해서 들어왔느냐?"

"승지가 뵙기를 청합니다."

태종은 하윤에게 말대답하기가 거북하던 판에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불러들여라." 이윽고 승지는 상소문 한 뭉텅이를 들어왔다.

"무엇이냐?"

"삼사가 교장을 해서 상소를 올렸습니다."

"무슨 상소냐?"

옆에서 부복해 있는 하윤은 시침을 뚝 떼고 있었다. 승지가 대답해 아뢴다.

"원자로 세자를 책봉하시라는 상소올시다."

태종은 화를 벌컥 냈다.

"세자는 내 세자지 신하들의 세자가 아니다. 내가 내 아들을 택해서 세자를 봉할 텐데 왜 이리 성화독촉들이냐!"

승지는 황송했다. 그러나 상소문을 어전에 아니 놓을 수 없었다. 벌벌 떨면서 옥좌 앞 책상 위에 놓았다.

"읽어 보아라!"

승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사헌부 헌관과 홍문관 교리며 사간원 간관들이 연명을 해서 올린 삼사교장의 상소문을 읽었다. 모두 다 한결같이 큰 왕자인 원자로 어서 빨리 세자를 책봉하라는 상소다. 태종은 왈칵 성이 났다.

"내가 내 아들을 골라서 어련히 세자를 봉할라구 이같이 성군작당들을 해서 야단들이냐. 그래 원자가 불향해도 세자를 삼으란 말이냐!"

태종은 격했다. 승지가 책상에 놓은 상소문을 방바닥에 내던졌다. 승지는 황송했다. 상소문을 주워서 소매에 껴안고 물러났다. 정승 하윤이 고개를 들고 조용히 아뢴다.

"전하! 국가는 전하 한 분의 국가가 아니올시다. 비록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오직 한 분이신 국왕이십니다. 그러나 국가는 사사로운 전하 한 분의 국가가 아니올시다. 만백성의 국가올시다. 삼가 장관은 만백성들을 대표하여 바른 말씀을 올리는 것이오니 삼사의 교장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옵소서.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서는 원자가 불량하다 하시니 어느 점을 가리켜 불량하다 하십니까?"

"원자는 글공부는 아니하고 탄자를 놀리고 매를 길러서 장난만 하고 있소. 그리고 성정이 괴팍해서 선대왕 성복제에도 참여치 아니하고, 인산 때도 나오지 아니하였소. 이런 아이로 어떻게 세자를 삼겠소?"

하윤도 이 소문은 일찍 들었다. 원자가 몸이 불편해서 나오지 아니했다고 당시 자자히게 소문이 돌았다. 하윤은 태종이 큰 왕자에게 세자 책봉할 의향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총희 가희아의 소생인 ''에게 마음이 쏠린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내각의 수반인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세자책봉에 대해서는 입을 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원군 민제의 위협을 받은 후에는 아무리 해도 왕후 민씨의 편이 되는 것이 처세하는 도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전하께 알현을 결심하고 빈청에 회의를 열어 황희의 주장이 옳다 한 후에 삼사교장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미 벌여놓은 춤이었다. 기어코 큰왕자로 세자를 삼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아뢴다.

"소신도 원자께서 성복제와 인산 때 참여치 못하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 원자께서는 병환이 있었다는 말을 전의한테 들었습니다. 몸이 불편해서 참여치 못한 것을 책망 할 수는 없습니다. 듣자오니 원자께서는 총명 영오하고 글과 글씨가 모두 다 보통이 아니올시다. 그리하옵고 매 기르기를 좋아하고 탄자를 잘 놀리는 일은 조금도 덕에 손상될 것이 없습니다. 탄자를 놀리고 매사냥을 하는 것은 고려와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유풍으로 육예에 소속되는 일이올시다. 신체의 발육을 위하여 좋은 일이온데 이것으로 허물을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윤의 말을 듣는 태종은 역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성복제와 인산은 막중한 의식인데, 몸이 좀 불편하더라도 반드시 나왔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탄자 놀리기와 매 기르는 일이 어찌 예악사어서수 육예 속에 든단 말인가?"

태종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전하, 생각해보십쇼. 탄자놀이와 매 기르는 일이 어찌 육예 속에 아니 듭니까? 탄자 놀리기는 활 잘 쏘는 기술에 통합니다. 일찍이 선태상왕 전하께서는 소시 때, 함흥에서 퉁두란과 함께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탄자 쏘기 내기를 해서 백발백중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태상왕께서 천하 명궁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매는 사냥에 쓰게 되는 것이 사와 어에 통하는 일입니다. 어찌 육예가 아니라 하십니까.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임금은 친히 사냥을 하는 법이올시다. 전하께서도 가끔 사냥을 나가시지 않습니까? 죄될 것이 없습니다."

태종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정원에서 승지가 또 들어왔다.

"백관들이 청대를 드립니다."

"백관들이 청대를? 무슨 일이냐?"

"모르겠습니다. 문무백관이 다 함께 정청을 원합니다."

만조정 신하가 다 청대를 원한다 하니 태종은 아니 만나볼 도리가 없었다. 어좌에서 일어나 정전으로 향했다. 뒤에는 하윤이 따랐다. 대제학 민제, 대장군 민무구, 대장군 민무질 삼부자는 하윤이 입대하고 삼사가 교장을 해서 원자로 세자를 책봉하라 해도 상감이 얼른 허락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내시를 통하여 들었다. 그대로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좌우의정과 육조판서며, 삼군부 대장군을 총동원시켰다. 민대제학과 민대장군들은 왕후 민씨의 친아버지와 친동생들이다. 모든 각과 백료들은 민씨네를 괄시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원자가 세자가 되었다가 상감이 되는 날에는 부귀영화의 한 깃을 잡을 수 있었다. 더구나, 원자로 세자를 봉하자는 일은 대의명분으로 볼 때 정정당당했다. 모두 다 정청하기를 쾌하게 승낙했다. 태종은 영의정 하윤이 시립한 앞에서 백료들의 정청을 받았다. 청대를 드리는 수반은 대방군 민무질이었다.

"무슨 일로 정청을 하느냐?"

태종은 벌써 눈치를 채었다. 그러나 조용히 물었다.

"오늘 문무백관이 다 함께 정청을 올리는 일은 국가의 대사를 빨리 결정하시라는 일이올시다."

"어떠한 국가의 대사인가?"

"나라에는 세자가 있어야 합니다. 빨리 세자를 책봉하시라고 청대들을 드리는 것입니다."

"경들의 의향에는 누구로 세자를 책봉하야 좋다고 생각하는가?"

"전하께서는 왕자를 많이 두셨습니다. 당연히 순서에 따라서 원자로 세자를 삼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국가에는 또다시 혼란이 일어납니다."

왕비의 친정 동생 대장군 민무구는 정난공신에 병마권을 잡은 사람이다. 목소리가 장중했다. 태종은 불쾌하기 짝없었다. 왕비의 동생이라는 세력을 믿고 이같이 백관을 휘동하여 청대를 드리는 것이 무한 불쾌했다. 그러나 체면을 아니 돌볼 수 없었다.

"과인도 생각이 있다. 쉬 결정하리라."

태종 이방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만만치 아니했다. 지기의 고집을 굽히기 싫엇다. 싸늘하게 대답했다.

"전하, 만약에 원자로 세자를 봉하지 아니하시고 다른 왕자로 세자를 봉하신다면 제이의 방석의 난이 일어납니다. 골육상쟁하는 피비린내 나는 일이 또 일어난다면 큰일이올시다. 전하! 굽어 통촉하시옵소서."

뜰에 엎드렸던 만조백관들이 일제히 읍했다.

"전하! 굽어 통촉하시옵소서."

태종은 어이가 없었다. 비로 곧 위협이었다. 속에서는 부아가 끓었다. 곧 호통을 쳐서 꾸짖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옛 생각을 하니 또한 일리가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머릿속에는 무한한 번민이 끓었다. 그러나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경들의 말을 들어 원자로 세자를 봉하리라!"

 

세자 제

태종은 밤새도록 괴로웠다. 예쁜 가희아가 낙담할 것을 생각하니 금창이 메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백관들이 정청하는 앞에서 허락을 해놓았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날이 밝자 정전에 나가 승지를 불러 원자 ''에게 세자 책봉할 것을 선포하라고 일렀다. 세자를 내정한 소식은 조야에 퍼졌다. 기생 출신 가희아는 이 소식을 듣고 아들 ''를 껴안고 밤새도록 울었고, 왕비 민씨는 입술을 비쭉거리며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었다. 한 여인은 패배자의 슬픈 마음이요, 한 여인은 네가 나를 어찌할 테냐 하는 승리의 기쁨을 띤 조소였다. 상궁은 대전과 중전의 명을 받들어 ''의 처소로 나갔다.

"상감마마와 중전마마께서 세자책봉의 분부가 내리셨습니다. 곧 택일을 하여 책봉 예식을 거행사신다 합니다. 들어가 사은을 드리셔야 합니다." ''는 세자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다. 왕 노릇은 하기 싫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적을 생각해보았다. 큰아버지 진안대군과 둘째아버지 상왕의 행적을 항상 숭배했다. 이신벌군의 누명을 쓴 그 왕의 자리에 주저앉고 싶지 아니했다. 골육상쟁을 한 그 피비린내 나는 용상에 앉아서 후계자 노릇을 하기가 싫었다.

"사은이 무슨 사은인가. 그런 허례는 차리고 싶지 아니하네."

한 마디로 차갑게 대답했다. 얼굴에는 털끝만큼도 반가운 빛이 없었다. 일개 궁녀인 상궁쯤의 머리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무슨 말씀이오니까?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고맙다고 문안을 드리셔야 합니다."

"고마워? 하하하."

''는 소리를 높여 깔깔 웃었다.

"나는 몸이 아파서 못 들어가겠네."

''는 슬며시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러지 말고 잠깐 들어갔다 나오셔야 합니다."

"왜 이래, 귀치않게."

상궁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들어갔다. 왕비 민씨께 사유를 아뢰었다. 이날 밤에 왕비 민씨는 친히 ''의 처소를 찾았다.

"고집을 부리지 말고 아바마마께 사은 문후를 드려라. 너는 장자다. 큰아들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중전은 어떤 아들보다도 특별히 큰아들 ''를 사랑했다. ''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대신, 어마마마께는 지극한 효성을 다하는 때문이다. ''는 대전에는 형식적으로 문안을 드렸지만 아마마마께는 진심으로 효도를 다해서 아침저녁으로 기후의 안태하시기를 축원하면서 문안을 드렸다. 어마마마는 이 아들의 진심을 알았다. 뿐만 아니다. 첫배의 아들이었다. 정이 깊었다. 왕자 ''는 어마마마의 말씀에 차근하게 대답했다.

"소자는 세자 되기가 소원이 아니올시다."

민비는 놀라는 모습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장자다. 장자는 당연히 세자가 되는 법이다. 사사로운 민가에도, 큰아들은 봉제사 접빈객을 하는 책임을 갖는 것이다. 세자 되기가 소원이 아니란 말이 무슨 소리냐. 두말 말고 아바마마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을 해라."

"세자책봉이 되면, 다음 세대에 왕이 되는 것입니다. 세자가 되기 싫다는 것보다 임금이 되기 싫어서 아뢰는 말씀입니다."

''는 고개를 숙여 자애스런 어머니 앞에 조용히 대답했다. 어머니 민비는 딱하다는 듯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임금 노릇을 하기 싫다니 무슨 소리냐. 천하 사람들이 다 이 자리를 원하는데, 어찌 너는 싫다 하느냐?"

''는 어머니 앞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골육상쟁한 추한 일을 뇌까리기 싫었다. 더구나 추한 그 자리를 이어받기가 거북하다고 말하기 난처했다. 다만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소자는 임금 노릇을 할 역량이 없습니다. 만백성을 다스릴 힘이 없습니다."

민비는 의젓한 목소리로 아들을 타이른다.

"임금 노릇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임금 혼자 만 가지 일을 다 통찰한단 말이냐. 국가에는 경험이 많은 원로 재상이 있고, 포부와 경륜이 있는 대신들이 있다. 모두 다 이들이 보필을 해서 백료를 거느리고 만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조금도 주저할 것이 없다. 공연히 딴소리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는 그래도 불복했다.

"비록 백관의 보필이 있다 해도, 군왕 되는 사람은 경천위지하는 큰 포부와 제세안민하는 큰 경륜을 가져야 합니다. 소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담당하지 못할 일이올시다."

큰 왕자의 말을 듣는 어머니 민비는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에 ''가 영영 세자책봉을 거부하고 자리에 아니 나간다면 다음 대의 왕위는 상감의 애첩 기생 출신인 가희아의 아들 ''로 세자 책봉을 하기 십상팔구다. 그러나 민비는 ''의 일을 지적해서 말하고 싶지는 아니했다. 다만 겉으로 변죽을 울렸다.

"만약 장자가 세자의 지위를 사양한다면, 반드시 왕실에 분란이 일어나는 법이다. 예로부터 어느 국가를 말할 것 없이 탈은 이런 데서 일어나는 법이다. 너는 내 말을 우습게 듣지 말고 아바마마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침묵을 지켜 있거라."

민비는 말을 마치자 얼굴빛을 엄숙하게 지었다. ''는 아버지보다도, 할아버지보다도 어머니를 가장 존경했다. 왕실에 분란이 일어난다는 말에 더 이상 항변할 도리가 없었다.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나는 이제 내전으로 돌아간다. 잘 생각해 보아라."

왕비는 ''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곤 궁전으로 돌아갔다. 어마마마가 돌아간 후에, ''는 한동안 마음이 괴로웠다. 세자의 책임을 지면 반드시 다음 대의 왕의 자리에 나가게 된다. 진정 말이지, 이신벌군을 했다는 그 자리, 형제와 조카들을 죽이고 주저앉아 있는 그 자리의 후계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큰아버지 진안대군의 조촐한 행식이 그지없이 그립다. ''는 눈을 감고 누워서 만 가지 생각 속에 잠겼을 때 외삼촌 민무구가 창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어서 생질이 세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외삼촌 중의 하나다. ''가 세자 되는 데 난색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누님께 듣고 부랴부랴 들어왔다.

"지금 중전마마께 들렀더니 원자께서 세자 되는 것을 소원치 아니하신다 하니 정말입니까?"

''는 원자였다. 비록 외삼촌이라 하나 깍듯이 존대하는 경어를 썼다. ''는 침묵을 지켰다. '왜 이리들 귀찮게 하나'하고 대답을 아니했다.

"원자께서 비록 세자 되기가 싫다 하셔도, 부락불 그 자리에 아니나 가시어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원자께서 세자의 자리를 거부하신다면 골육상쟁의 변란이 일어나는 것은 둘째요, 어마마마께서 폐위가 되십니다."

외삼촌의 말을 듣는 ''는 귀를 의심했다.

"폐위라니?"

",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서인이 되십니다."

''는 아직도 소박했다. 깜짝 놀랐다.

"내가 세자를 거부한다고 어찌해서 어마마마께서 폐비가 되신단 말씀이요?"

",, 원자께서는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모르십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많은 후궁들을 두신 중에 강계 기생 출신인 가희아를 장중보옥같이 귀여워하십니다. 가희아의 소생은 나이 지금 원자와 비슷합니다. 가희아는 은근히 전하께 ''로 세자를 삼으시라고 아양을 떨고 있다 합니다. 만약 ''가 세자가 되는 날, 중전마마께서는 폐위가 되시고 가희아가 왕비가 되기 십상팔구올시다. 그까짓 골육상쟁은 다음 문제올시다. 원자께서는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마마마의 정경을 생각해보옵소서."

외삼촌 민무구의 말을 듣는 ''는 흥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말이 되오? 어찌 감희 우리 어머니를 폐위시킨단 말요. 그렇다면, 나는 곧 세자가 되리라!" ''의 눈가에는 불그스런 홍훈이 돌았다.

"그러하니 원자께서는 아무 말씀 마시고 그저 하라는 대로 하십시오. 아마 일간 곧 세자책봉 예식이 있을 것입니다. 실상을 말씀합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원자께 세자 책봉하실 의향이 없으신 것을 만조백관이 들고 일어나서 겨우 윤허를 내리신 것이올시다. 깊이 통촉하옵소서." 외삼촌 민무구는 이같이 말하고 물러났다. 세자 노릇이 하기 싫어서 무한 고민하던 원자 ''는 어머니가 폐위되기 쉽다는 외삼촌 민무구의 말에 크나큰 충격을 느꼈다. 마음에 없는 자리건만 결연히 세자책봉을 받을 것을 결심했다. 이튿날, 한낮이 되었다. 세자책봉의 칙명이 내렸다. ''는 황금덩을 타고 대궐로 들어갔다. 앞에는 삼군부 어영대장 민무구가 말 탄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기치 창검을 바람에 펄럭이며 나가고, 뒤에는 정원 승지와 내관 궁녀들이 왕세자의 황금덩을 휩싸서 나갔다. 다음에는 훈련대장 민무질이 기병 천 명을 거느려 대궐로 들어갔다. 세자책봉 예식이 거행되기 직전이었다. ''는 먼저 내전으로 들어가 부왕고 모후 민씨의 처소에 문안을 올렸다. 태종은 왕후 민씨와 함께 장차 세자가 될 ''를 바라보면서 돌연 ''를 향하여 물었다.

"그동안 글을 많이 읽었느냐?"

"놀지 않고 읽었습니다."

"세자가 된 후에는 공부를 더 부지런히 해야 한다."

"."

''는 공손히 대답했다. 태종은 다시 ''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린다.

"내 나이 어느덧 벌써 사십이 되었다. 청하지 아니한 백발이 찾아와서 머리털과 살쩍이 희끗희끗 서리가 내린 듯하구나. 이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직도 주야로 책을 읽고 있다. 내가 이같이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글을 읽고 있는 그 까닭은 무슨 까닭이냐. 내가 글을 읽는 뜻을 알겠느냐? 말을 해 보아라."

''는 잠자코 대답을 아니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버지 말씀은 새빨간 거짓 말씀이었다. 아버지는 도대체 글을 읽을 틈이 없었다. 이십 이전에는 글을 많이 읽었는지 모르지만 이십 이후부터는 고려 왕실을 엎어놓느라고 동분서주했고 고려 왕실이 넘어온 후에는 형제싸움, 숙질 싸움, 부자 싸움에 정신이 없었다. 어느 하가에 글을 읽어서 연구할 틈이 없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는 어안이 벙벙했다. 거짓말도 분수가 있지, 너무나 심한 거짓이다. 요사이 정사하는 틈에 아버지는 경연이라 해서, 대신들과 경서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달에 한두 번 정사하고 난 틈에 한두 시각 이야기로 세월을 보내는 그 글공부는 진정 글공부가 아니다. ''는 잠시 눈을 감아본다. 아버지의 뻔뻔스런 가면이 마땅치 않았다. 골육상쟁을 했던 아버지가, 백발이 성성한 것을 한탄하면서, 자기를 책방하는 것이 마음에 역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실감이 나지 않는 책망이다. ''는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는 ''의 모습은 마치 아무 생각도 없는 바보의 모습이었다. 이때 대전내시는 상궁을 통하여 아뢴다.

"세자책봉의 의식을 거행하실 시각이 가까웠습니다. 만조백관들은 지금 정전 넓은 뜰에 나열해 있습니다. 속히 정전으로 납시기 바랍니다." ''는 상궁에게 인도되어 새로 치장한 동궁으로 나갔다. 동궁 내전에는 새로 배치된 동궁 소속의 상궁과 나인들이 뜰에 내려 ''를 맞이했다. 상궁과 나인들은 ''의 땋아 늘인 머리 편발을 끄르고 상투로 틀어 올렸다. ''는 아직 장가를 들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동궁빈이 아직 없다. 그러나 총각으로 머리를 땋아 늘이고 세자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할 수는 없었다. 머리를 가리고 동백 기름을 발라서 멋지게 상투를 틀었다. 상투고비에는 황금 마구리에 새빨간 산호가지를 물린 조그마한 동곳을 멋지게 꽂았다. 머리털이 흐트러지지 말라고 이마에는 인모 망건을 씌웠다. 망건 위에는 다시 인모 탕건을 씌웠다. 도홍 띠 분홍 중막을 멋기고 세자의 정복인 강사포를 입힌 후에 머리 위에는 익선관을 씌웠다. ''는 귀찮아서 몇 번인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절차라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정원 승지는 춘방사령들에게 영을 내려 세자가 탈 옥교를 받들어 나왔다. ''는 승지가 고하는 대로 옥교에 올라 창덕궁 명정전으로 향했다. 만조백관들은 정일품, 종일품, 정이품, 종이품의 글자를 새겨논 품계석 앞에 열을 지어 섰다가 동궁의 옥교가 나타나자 천세를 불러 세자를 맞이했다. 이때 태종은 정전 용상 위에 민비와 함께 출어해 있었다. 승지는 동궁을 어전으로 인도하여 배례를 시킨 후에 다시 전 밖으로 물러 나와 월대 앞에 미리 배치해놓은 교의에 앉게 했다. 뜰에는 아악을 아뢰는 악공들이 청아한 관현악을 아뢰고, 국가의 근본을 축복하는 장악원 기생들은 전모란 꽃춤을 자지러지게 추었다. 태평 기상을 아뢰는 아악과 춤이 멎어진 후에 승지는 세자 책봉하는 옥책문을 상감과 만조백관이 모인 자리에 낭랑히 받들어 읽었다. '국가에는 반드시 왕세자가 있어야 그 나라의 국본이 든든한 것이다. 이제 원자인 ''로 왕세자를 책봉한다. 모든 신료와 국민들은 다 함께 왕세자를 모시어 더욱 나랏일에 근면하여 부국강병의 나라가 되게 하라.' 승지가 책봉문을 읽고 나리 ''의 앞에 모시어 섰던 내시와 궁녀들은 익선관을 벗기고 황금 면류관을 머리에 얹었다. 왕이 쓰는 면류관의 줄수보다 줄이 성기다. 승지는 세자를 인도하여 용상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정식으로 왕세자의 의상을 입고 왕과 왕후 내외분께 예를 올리는 것이다. 세자책봉의 의식이 끝난 후에 군신들은 천호만세 했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찍 태자를 세우는 일은 국본을 존숭하고 인심을 안정케 하려는 까닭이다. 과인은 본시 덕이 없는 몸으로 선조의 누적된 덕과 태상왕 전하의 창업하신 위대한 업적을 받들어 항시 황송하고 조심하여 책임의 무거움을 느꼈다. 다행위 왕후 민씨가 정위 중궁에 있어 내조의 공을 이루었고, 원자 ''는 맏아들로 태어나 범속하지 아니한 자질을 가졌으나 아직도 예법을 잘 안다고 찬양할 수 없다. 장차 어찌 어진이를 친할 수 있으며, 옛 교훈을 받지 못했으니 또한 어찌 나라 다스리는 정치를 도와줄 수 있으랴. 이러하므로 성균관에 입학시켜서 학문을 닦게 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때마침 종친과 대보들은 감국과 무군할 세자의 자리가 아직도 정해지지 아니한 것을 염려하여 세자책봉을 건의했다. 원자는 천성이 어질고 효도할 뿐 아니라, 학문이 일취월장하니 빨리 세자로 세워서 모든 국민의 바라는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과인은 여러 사람들의 여론에 좇아서 오늘 옥책과 인수를 ''에게 주어 왕세자를 봉한다. 이러한 국가의 큰 경사를 당하여 마땅히 특별한 은전을 내린다. 오늘 새벽 이전에 모반대역과 살조부모, 부모 처첩 살부노비 죄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 모두 다 무죄백방 시키라.' 교서의 낭독이 끝나니 만조백관들은 또다시 천호만세하면서 왕과 왕세자의 큰 덕을 예찬했다. 왕의 교서는 곧 주자소로 넘기어 태종 계미자로 인출되어 조선 팔도로 퍼져나가고, 왕세자 ''는 승지의 인도로 좌상에 올라 사은하는 예를 올렸다.

 

태종 호색

''는 이제 당당한 일국의 왕세자가 되었다. 일국의 왕세자가 된 크나큰 일을 왕실의 조상을 모신 종묘에 고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왕세자 ''는 종묘에 나가 왕세자가 된 봉고제까지 지냈다. 숭배하지 아니하는 할아버지 이성계의 신주 앞에도 나가서 고유를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태종은 모든 나랏일이 차차 안정되어 가니 마음으로 기뻤다. 어거지를 써서 임금의 자리를 차지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무던히도 싸웠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고려 왕실을 뺏느라고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주고, 고려 때의 무수한 충신과 열사를 죽이고 없애느라고 애

를 썼던 일은 벌써 선천적 신화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다시 쳐들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씨네 왕국이 확고부동한 태세 위에 놓인 후에는 왕의 자리를 차지하느라고 한층 더 임이 들고 괴롭고 어려웠다. 형제를 죽이고 형제를 쫓아내고, 부자가 원수가 되는 이 모든 추하고 상서롭지 못한 일을 겪었다. 하기는 이면체면 차릴 것 없이 다 용감하게 치워버렸으나, 무한 괴롭고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러한 슬프고 부끄러운 과정을 치르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자기가 칼자루를 잡는 이 대권을 잡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태종은 이제 비로소 길게 한숨을 쉬었다. 태종은 세자까지 봉해놓고 호화로운 궁궐 용상에 편안하게 앉아보니, 이제는 근심 걱정이 태반이나 사라졌다. 그는 정신이 쇄락하고, 마음이 거뜬했다. 좋은 의복을 입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다. 한 번 부르면 천만 사람이 쥐죽은 듯 조용하게 명령에 복종했다. 임금 노릇은 한 번 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연부역강했다. 나이 아직 사십이 될까 말까 했다. 외전에서 내전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아름다운 자색을 가진 궁녀들은 갖은 교태를 지어서 자기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의 마음은 점점 안일한 데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한양으로 다시 온 후에 첫 번째 봄을 맞이했다.

초저녁이었다. 왕실의 모든 체통과 예법은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풍속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었다. 상궁과 나인들의 꼭두에는 고려 왕실에서 거행하던 나인이 많았다. 내시들도 고려 때 왕실을 섬기던 내관들이 새로운 궁녀와 내관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서 태양은 꺼지고, 어전에는 등촉방 내시가 황금 촛대에 불을 켜놓고 나갔다. 조금 있으려니 아름다운 궁녀가 나타났다. 나이는 삼십이 될까 말까 했다. 궁녀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황금 홑첩지를 얹고 물빛 저고리를 입었다. 자줏빛 고름에 남끝동이 색의 조화를 이루어 더한층 아름다웠다. 호수 빛 같은 남치마에 백설 같은 흰 버선을 신고 조용히 걸어 어전에 부복했다.

"아뢰옵니다. 수라를 내전에 준비했사옵니다." 목소리는 곱고 아늑했다. 왕은 처음 대해보는 궁녀였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나타난 상, , , 삼정은 고루 균형이 잡혔다. 이마와 관골과 지각이 삼등분으로 정제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 토실한 두 볼, 널찍하게 받친 턱에다가 눈은 맑고 초롱거렸다. 입은 붉은 꽃판이 갓 터져서 벌과 나비라도 부를 듯 예뻤다. 얼굴 판만 잘생긴 것이 아니다. 몸맵시도 제법 사부주가 들어맞았다. 어깨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아니했다. 살이 찌지 아니해서 저고리 위로 드러난 어깨판은 마치 학이 죽지를 벌린 듯 날씬했다. 팔과 다리도 알맞았다.

"수라를 내오지 아니하고 어찌해서 내전에 준비했느냐?"

"오늘은 왕후마마께서 내전에서 수라를 받들라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듭시와 젓숩기 바라옵니다." 아름다운 궁녀는 조신하게 대답했다. 말소리는 아까보다도 더한층 고왔다. 마치 가을밤에 호젓이 사랑을 불러 노래하는 초충의 음향 같았다. 은방울을 흔드는 듯했다. 궁녀지만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왕은 슬며시 말을 붙여보고 싶었다.

"오늘은 왜 내전에서 먹어야 하느냐?" 왕은 부리부리한 큰 눈을 다정하게 떴다. 눈웃음을 띠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중전마마께서 오래간만에 겸상반으로 수라를 받으시려 하십니다.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번거롭구나. 들어갔다가 나오고 나왔다가 들어가고 - 편하게 내다 먹을 수는 없느냐?"

"못하실 리가 있습니까. 상감마마께오서는 하늘 아래 한 분이십니다. 곧 천자이십니다. 어느 누가 감히 상감마마의 명령을 복종치 않겠습니까. 그러하오나, 다만 오늘만은 왕후마마를 위하시어 내전에서 의좋게 겸상반으로 젓수셔야 합니다."

궁녀는 한 팔을 짚고 한 손으로 무릎을 쓸며 아뢰었다. 왕은 마음속으로 세자의 어머니 왕후 민씨의 얼굴과 처음 대해보는 이 궁녀의 얼굴을 비교해보았다. 민씨는 쾌활한 여자다. 손도 크고 발도 크다. 말이 여자지 반은 여자요, 반은 남자다. 말하자면 여장부다. 시원할 때는 무척 시원하면서도 어떤 때는 어거지가 너무 세다. 이러한 까닭에 고려 왕실을 엎어버릴 때 내조의 공이 많았다. 고려를 전복할 때 큰 공이 많았을 뿐 아니라 세자 방석을 내쳐서 죽일 때도 민씨의 공은 컸다. 오늘날 태종이 용상에 올라앉은 것은 태종의 힘도 크지만 아내 민씨의 공도 크다. 범과 사자 같은 동생들 사오형제를 시켜서 물샐틈없이 혁명세력을 조성시켜 온 그 공로는 모두 다 민비한테로 돌려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 왕위에 나가기 전에 큰며느리가 아니므로 봉제사는 아니했다 하더라도 그 많은 동족을 다루고 주무르고, 인하족척들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그 솜씨라든지 접빈객을 하는데, 하윤, 조준, 이무, 이숙번 같은 일등 가는 모사와 범 같은 장수들을 떡 주무르듯 반죽하고 버무려서, 오늘날 그들로 일등공신이 되게 하고 자기는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어준 민비다. 혁명을 성공한 그 반분의 공로는 민비한테로 아니 돌려보낼 수 없다. 그뿐 아니다. 이씨네 집안에 대한 왕비 민씨의 공로는 또한 크다. 여자는 출가해서 잘난 딸보다도 잘난 아들을 쑥쑥 낳아야만 비로소 큰소리를 치는 법이다. 민씨는 큰아들 ''를 낳았다. 둘째 아들 ''를 낳았다. 셋째 아들 ''를 낳았다. 넷째 아들 ''을 낳았다. 그리고 딸도 아들한테 지지 않을 만큼 잘난 딸 넷을 낳았다.

첫째 딸은 정순공주다. 청평부원군 이백강한테로 하가시켰다. 둘째 딸은 경정공주다. 평양부원군 조대림한테 시집갔다. 셋째 딸은 경안공주다. 길창군 권규한테로 하가했다. 넷째 딸은 정선공주다. 의신군 남휘한테로 시집보냈다. 민씨는 밋밋한 아들 사형제에 아름다운 따 사형제를 한 삼줄에 쭉 뽑아놓았다. 사위들은 모두 다 일등공신이 아니면 모두 다 일등가는 공신의 아들들이다. 민비의 어깨는 의젓하게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번쩍 들고 모든 비빈과 궁녀들을 위압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비빈과 궁녀뿐이 아니다. 그의 앞에는 개국 공신이니, 중흥공신이니 하는 공신 따위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존재다. 왕비라는 왕 다음의 제일 높은 자리에 있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개국 공신보다, 중흥 공신보다 내조의 공이 컸다. 왕비를 떼어놓고 보다라도 당당한 정실부인으로 아들 사형제 딸 사형제의 어머니다. 그뿐 아니다. 그의 주위에는 민씨의 친정아버지와 동생들 사오형제가 모두 다 일등가는 개국 공신이요, 중흥 공신이다. 사위 네 사람도 다 일류 가는 공신부원군이다. 그러나 민비는 곱지 아니했다. 뼈가 굵었다. 나이 들었다. 지체도 높았다. 보드랍고 여낙낙한 맛은 약에 쓰려야 구해볼 도리가 없다. 여자는 아름다와야 한다. 보드라워야 한다. 여낙낙해야 한다. 고분고분해야 한다. 남자의 품 안에 조용히 포근하게 안겨 있어야 한다. 방싯방싯 웃어주여야 한다. 그러나 민비에게 이 모든 조건은 구하려야 구할 길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왕비 민씨는 왕 자신보다도 한 살이 위다. 이제 사십 고비인 왕비는 점잖고 의젓하고 틀거지가 있고 위엄성스럽지만 품 안에 안아줄 애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크고 점잖은 존재다. 뿐만이 아니다. 아내 민비는 오늘날 와서는 늙었다. 다산을 한 탓인지 좌우편 살쩍엔 벌써 청하지 아니한 흰 터럭이 네다섯 올, 서릿빛을 뿜기 시작했다. 삼십까지는 그래도 박색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이마에도 가로줄이 지기 시작했다. 뺨에도 윤기가 거칠어져서 가슬가슬하게 되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허언이 아니다.

왕은 궁녀를 바라보면서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궁녀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아름답기만 하지 아니했다. 확실히 푸르고 싱싱했다. 아름다운 모습을 아무리 갖추었다 하나 푸르고 싱싱한 매력이 없다면 여자의 아름다운 가치는 상실되고 마는 법이다. 왕은 궁녀한테 푸르고 싱싱한 매력을 강렬하게 느꼈다. 푸르고 싱싱한 매력은 이십 대 여인의 예쁘고 아름다운 매력보다 장년기에 처해 있는 남성한테 더한층 강한 감흥을 보내는 법이다. 왕은 마음속으로 민비와 궁녀를 대조해보면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사랑이 아니었다. 뜨거운 사랑의 진짜 꽃이 피려면 세월을 거쳐서 개화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왕은 사랑을 느끼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 격한 충동을 느꼈다.

"오늘 수라상의 별미는 무엇이냐?"

왕은 궁녀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궁녀는 태종의 하문을 받자 두 볼에 빨갛게 홍조가 일어났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 왕은 여인의 태도가 밉지 않다고 생각했다. 밉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이 들기 시작하는 조짐이다. 왕은 어글어글한 큰 눈에 엷은 웃음을 머금고 귀여운 듯 궁녀를 바라보았다.

"왜 말이 없느냐?" 궁녀는 여전히 고개를 다소곳 숙였다. 이마를 들지 아니했다. 왕은 팔을 들어 어수로 고개를 숙인 궁녀의 이마를 들었다. 방싯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이 없는 궁녀의푸른 눈에는 상긋상긋 소리 없는 웃음이 붉은 안개를 뿜어 일어났다. 궁녀는 푸른 눈과 붉은 입술가에 의연히 미소를 풍기면서 고요히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느냐?" 왕은 궁녀한테 어서 대답을 하라고 분부를 내린다. 궁녀는 보시시 고개를 들었다.

"두 분 마마께서 의초가 좋으시라고 콩찰떡을 올린 것입니다." 궁녀는 나직나직 대답했다. 소리는 작았으나 음향은 맑았다. 여성 특유의 내음이 어느 곳에서 일어나 왕의 강한 육체를 자극시켰다.

"콩찰떡을 먹으면 의초가 좋아지느냐?"

왕은 이미 자기 자신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에 부닥쳤다. 어수를 늘여 궁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궁녀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지존인 상감이 손을 잡았다. 뿌리칠 수도 없었다. 달아날 수도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아무리 높고 높은 상감이라 하나 이성인 남자다. 남자한테 생전 처음 손목을 잡혔다. 부끄러웠다. 나이는 삼십을 약간 넘었다 하나, 아직껏 남자의 경험을 가져보지 못한 숫처녀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방망이로 염통 한복판을 다듬이질치는 듯했다. 죄를 범한 것 같았다. 왕의 손길이 온 것이요, 자기 자신이 손을 내민 것은 아니건만, 난생 처음 크나큰 죄를 범한 듯했다.

"대답을 해보아라."

왕은 미소를 풍기며 또 한 번 재촉했다. 궁녀의 얼굴은 더 한층 화끈 달았다.

"어수를 놓아조시옵소서. 대답해 올리오리다."

궁녀는 겨우 한마디를 해서, 상감의 손이 풀어지기를 애절하게 바랐다. 삼십을 넘은 노처녀인 궁녀는 생전 처음 남자의 손길이 자기 손에 닿아졌을 때, 감촉과 마음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송구스럽고 불안만 했다. 도의적으로 내전에 계신 왕후마마께,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착잡한 감정 속에 빠졌다. 어서 상감께서 손을 풀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손만 풀어주면 답답한 마음이 가라앉고 우럭거리는 열기가 내려갈 것만 같았다. 전하는 또 한 번 미소를 풍겨 궁녀를 바라본다.

"손을 잡았기로서니 그다지 두려워하느냐. 그럼 풀어줄게 대답을 해보아라."

전하는 궁녀의 싱싱한 얼굴을 맥맥히 지키면서 손을 풀었다.

"이제는 대답을 하겠느냐?"

궁녀는 거뜬함을 느꼈다.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재강에 취한 듯 우럭거리는 얼굴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찰떡같이 떨어지지 마시라고 오늘 밤 사라상에는 찰떡을 특별히 올렸다 합니다."

칠분은 부끄러움 속에 파묻고, 삼분은 안도의 감정이 소생된 채로 궁녀의 모습은 왕의 마음을 다시 한번 부채질해주었다.

"너하고 나하고 찰떡같이 의가 좋아지면 어떻겠느냐?" 손에서 떠나던 왕의 손길은 이번엔 궁녀의 허리를 강하게 감았다. 왕의 억세고 강한 팔뚝은 궁녀의 가는 허리를 감은 채 몸을 안아 이웃방 협실로 들어갔다. 구중궁궐 지밀 안은 산중같이 조용했다. 백주건만 태고처럼 적막했다. 궁녀는 천지개벽 같은 변란을 당했다. 궁녀는 상감을 사람 이상의 신으로 숭배해왔다. 이 까닭에 신의 행동으로 생각했다. 신을 반항할 수는 없었다. 번연히 앞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기막히고 무서운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 것을 직감했으면서도 감히 반항하고 앙탈할 도리가 없었다. 상감이라는 신격과 같은 지상명령에 그대로 복종할 뿐이었다. 한편 중전에서는 수라상을 받들어놓고 왕후는 대전이 듭시기를 고대했다. 더구나 오늘 밤의 수라는 내전에서 겸상으로 모시자는 왕후 민씨의 의도였다. 상궁 이하 모든 궁녀들은 왕비의 뜻을 받들어 만반준비를 다 차려놓았다. 아늑하고 따뜻한 침실에는 화려찬란한 봉황 금침이 펼쳐졌고 중전 큰방에는 사라상 위에 신선로가 김을 뿜어 바글바글 끓었다. 민비는 대전으로 궁녀를 내보내 놓고 왕 전하가 임어하시기를 고대했다. 대전에서는 영영 동정이 없었다. 한 식경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두 식경이 되었건만 여전히 기별이 없다. 황후 민씨는 남자같이 성정이 급했다. 아까, 자기 자신이 고려 때부터 궁녀로 부리던 궁인을 대전으로 내보낸 생각도 할 새가 없었다. 민후는 혼자 수라상 앞에 앉아서 대왕 전하의 행차가 듭시기만 기다렸다. 암만 기다려도 전하의 어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웬일이냐, 상감께서는?"

"아직 아니 들어오십니다."

"너희들이 너무나 무엄하고나. 어찌 여태껏 청좌를 올리지아니했느냐?"

"궁녀가 뫼시러 나갔습니다."

"어느 때 나갔단 말이냐?"

"아까 중전마마께서 대전으로 청좌를 보내셨습니다. 바로 고려 때부터 지밀에서 거행하던 아이올시다."

왕후 민씨는 비로소 당신이 고려 때부터 거행했던 지밀나인을 대전으로 보낸 일을 생각했다.

"웬일이냐, 여태 아니 돌아오니, 함흥차사가 되었단 말이냐."

민후는 요새 새로 유행되는 말을 썼다. '함흥차사'란 말은 부왕되시는 시아버지께서 함흥으로 가신 후에 자기 남편인 상감이 사신을 보내서 문안을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오시기를 간청하면 태조는 크게 노해서 사신의 목을 잘라버렸던 것이다. 이 돌아오지 못하는 사신의 이름을 함흥차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대전마마께옵서 아직 납시지 못하신다면 자기라도 먼저 돌아올 일이지 너무나 방자합니다."

민왕후의 친정에서 대궐로 들어온 늙은 상궁은 민후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대전으로 나간 젊은 궁녀를 헐뜯었다. 왕후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누구든, 대전으로 빨리 나가서 수라를 받으시라고 아뢰어라."

"누구를 내보내오리까? 지명하여 하교를 내려주시기 바라오."

왕후의 심복인 늙은 상궁은 재촉하는 궁녀를 내보내는 데 왕후가 친히 지명할 것을 청했다. 교활한 늙은 상궁이었다. 상감의 품행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괴상한 일이 생긴 듯싶었다. 앞으로 어떠한 좋지 아니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왕후에게 지명할 것을 요청했다.

"자근비를 내보내도록 하라."

자근비는 역시 민비의 친정에서 데려온 심복 궁녀다. 자근비는 왕후의 명령을 받들고 대전으로 나갔다. 먼저 대전 내관한테 물었다.

"중전마마께서 몹시 기다리시는데 대전께서는 청좌를 여쭈어도 아니 듭시니 웬일이요?"

"아직 볼일이 계신가 봅니다."

대전내시는 뜰 앞에서 대답했다.

"먼저 나왔던 중전나인은 어찌 되었소?"

"아까 청좌를 드린다고 전각으로 올랐습니다. 아직 나오지 아니하였소."

자근비가 전각 앞 보석을 바라보니 댓돌 위에 전하의 우단신과 궁녀의 운혜신 한 켤례가 풍정 있게 놓여 있었다. 자근비의 입에서는 저절로 기묘한 소리가 떨어졌다.

"에구머니나, 도섭스러워라." 대전내시는 자근비의 기묘한 소리를 듣자 벙긋 미소를 풍겼다.

"젊은 상궁이 내전에서 나온 지 벌써 두어 시각이 넘었는데, 여태껏 아니 나오니 웬일이오?"

자근비는 다시 내관한테 물었다. 내시는 궁녀 자근비의 말에 아무 대답도 아니했다. 다만 소리 없이 웃음을 풍길 뿐이었다. 대궐 안은 물을 뿌린 듯 조용했다. 궁녀 자근비는 진퇴유곡이 되었다. 상감마마의 전각으로 올라갈 수도 없고 중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막연히 자신을 잊은 채 신발 두 켤레만 바라보고 있다.

"어찌하면 좋소?"

궁녀 자근비는 남녀의 신을 바라보며 대전내시한테 초조하게 물었다.

"무엇을 어찌하면 좋단 말씀이오?"

내관은 자근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전께 어서 수라를 젓수라고 중전마마의 전갈을 받들어 나왔는데, 문을 꼭 닫고 계시니 어찌하오. 오도 가도 못 하고,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말씀을 묻는 것입니다."

"별수 없지. 전하의 동정이 계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내관은 유들유들 대답했다. 초조한 사람은 자근비뿐이었다.

"공사청께서 중전나인이 도다시 나왔다고 거래를 드려 주실 수는 없소?"

공사청이란 내시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하하하, 누구 목이 달아나라고 그런 말씀을 하시오. 전하의 기침소리가 나기 전에는 꼼짝달싹할 도리가 없소이다."

내관의 말을 듣는 자근비는 더 한층 초조했다. 중전이 기다릴 생각을 하니 몸은 마치 바늘방석을 밟고 서 있는 듯 했다.

"공사청에서 거래를 못 드려 주신다면 나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아뢰어보리까?"

자근비는 망설였다.

"당신의 목은 아마 여남은 개 되나 보구려. 세상 살기가 구치 않거든 한번 전각 문을 열어보구려." 대전 내관은 여전히 펄짱을 끼고 유유하게 푸른 하늘만 바라본다. 자근비는 더욱 초조했다.

"중전마마께 톡톡히 꾸지람을 들어놨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소."

"꾸지람 듣는 것은 오히려 예삿일이지 뭐요. 방 속 일이 어찌 되었는지 모르고 당신이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가, 만약에 기막힌 일이 벌여졌다면, 그것을 당신이 어찌 담당하고 휘갑을 칠 테요. 뿐만 아니라 당신은 불경죄로 목이 달아나오, 달아나. 쓸데없는 생각 말고 빨리 중전으로 돌아가시오."

자근비는 하는 수 없었다. 언제 대전 덧문이 열릴지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무료하게 발길을 돌렸다. 중전에서 민왕후가 눈이 빠지도록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대전으로 나간 자근비도 감감하게 소식이 없다. 민왕후는 성이 벌컥 났다.

"자근비도 함흥차사가 됐단 말이냐. 빨리 나가서 알아보아라."

민왕후의 노염은 서릿발 같았다. 중전은 발끈 뒤집혀졌다.

"이것이 무슨 꼴이란 말이냐. 메는 냉반이 되고 탕은 냉국이 되었구나.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세상 천하에 이런 법이 있느냐. 이런 변이 있느냐."

민왕후의 거센 음성은 쩡쩡 전각 들보를 울렸다. 중전 내시들은 설설 기고 상궁 이하 무수리들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두 번째 나간 자근비란 년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아라."

중전 민비의 호령은 또 떨어졌다. 벼락은 계속해 떨어진다. 이번엔 내시를 꾸짖는다.

"내관놈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내시들은 공현히 왔다갔다 좌왕우왕하면서 바짓가랑이에 바람만 일으켰다. 왕후의 처소인 중전 안이 발끈 뒤집혀서 황황방조할 때 대전에 나갔던 심복 궁녀 자근비가 들어섰다. 늙은 상궁은 지옥에서 고국 사람을 만난 듯 반가왔다. 손짓해 자근비를 불렀다.

"에그 항아님, 어서 빨리 들어오게. 야단법석이 났네. 상감마마께서는 곧 들어오시나?"

자근비는 근심 어린 얼굴로 대답한다.

"들어오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뵙지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뵙지를 못했다니, 대전에 아니 계시단 말인가?"

"계시긴 계셨습니다마는 용안을 뵐 수 없었습니다."

"왜 어디로 나가셨나?"

"큰일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늙은 상궁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먼저 나갔던 궁녀하고 한 방에 문을 꼭 닫고 계십니다. 그러하니 어떻게 용안을 뵐 수 있습니까? 도대체 용안을 뵈워야만 수라니, 무어니 하고 아뢸 텐데, 용안은 커녕 옥체의 그림자조차 뵙지 못했으니 딱한 일이 아닙니까? 한 말씀도 올리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늙은 상궁은 깜짝 놀랐다.

"에구머니나, 저 일을 어찌하나. 먼저 나간 상궁은 고려 때부터 왕실 예법에 밝다 해서 선생 삼아 궁중에 두었는데, 저 일을 어찌하나. 내 그저, 얼굴이 불그레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더라니."

늙은 상궁은 변덕스럽게 손뼉을 치면서 펄펄 뛴다.

"중전마마께서는 상감이 아니 들어오신다고 역정이 잔뜩 나신 모양이죠?"

"역정이면 이만저만한 역정이신가? 두 번째 나간 항아님마저 아니 들어온다고 노발대발하시어 지금 항아님을 불러오라고 야단법석을 하시면서 분부를 내리셨네. 공사청과 상궁방은 말할 것 없이 지금 망지소조해서 모두 다 벌벌 떨고 있는 판일세.'

"어찌하면 좋습니까?"

"무엇을 어찌해? 이실직고 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자근비 항아님의 몸이 위태로울 테니 어서 빨리 들어가서 아뢰도록 하게."

"저 사람의 목숨이 아깝습니다."

자근비는 입맛이 썼다.

"하지만 어찌하나. 자네가 살아야지."

늙은 상궁과 자근비는 가만가만 주고받은 후에 중전 처소로 올랐다. 궁녀와 내시며 별감들은 그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늙은 상궁은 중전에 오르자 민후께 부복해 아뢴다.

"아뢰옵니다. 대전에 나갔던 자근비가 돌아왔습니다."

중전 민비의 역정은 더 한층 격렬했다.

"이제야 겨우 돌아왔단 말이냐. 대전께서는 곧 들어오신다고 분부를 내리셨다더냐?

"대전마마를 뵙지 못하고 그저 돌아왔다 합니다."

"대전마마를 뵙지 못했다고? 어디로 가셨단 말이냐?"

왕후 민씨는 더욱 노했다.

"자근비를 빨리 불러라."

늙은 상궁은 자근비를 민후 앞에 인도했다.

"네가 대전으로 나간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해서 상감을 모시고 들어오지 아니했느냐?"

자근비는 난처한 얼굴빛으로 아뢴다.

"아까 분부를 받자옵고 곧 대전으로 나갔습니다. 상감께 아뢰어 빨리 수라를 젓수시라고 아뢰려 했사오나, 전하께 아뢸 기회를 갖지 못하와 여태껏 시각을 지체했사오니 죄당만사이옵니다."

"전하께 아뢸 기회를 갖지 못했다니 무슨 말이냐? 전하께서는 대전에 아니 계시더란 말이냐?"

"아니올시다. 계시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뢰지 못하였더냐?

"전하께서는 문을 꼭 닫고 계셨습니다."

"공사청한테 부탁해서 '중전에서 왔습니다'하고 아뢰지 못했더냐?"

"공사청도 아뢸 두리가 없었습니다. 문을 굳게 닫으셨습니다. 그리고 보석 댓돌 위에는 상감마마의 우단신 한 켤레와 어느 여인인지 모르옵니다마는 여인의 예쁜 분홍 운혜신이 의좋게 놓여 있었습니다. 이쯤 되었으니 쇤네나 공사청은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마는 저희들보다 십 배 백 배 높은 사람이라도 감히 대전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근비의 말을 듣는 민황후의 눈에는 질투의 불길이 활활 일었다.

"분홍 운혜신은 누구의 것이라 하더냐?"

먼저 대전으로 나간 궁녀의 신인 줄 자근비는 번연히 알건마는 '궁녀의 신이올시다'하고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알아보려 했으나, 알 길이 없었습니다."

"먼저 나간 궁녀는 어찌 되었느냐? 지금 어디 가 있느냐?"

대전에 있습니다. 분홍 운혜신이 바로 먼저 모시러 갔던 그 궁녀의 신이올시다.’ 자근비는 이같이 아뢰고 싶었으나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어야 하갰다고 생각했다.

"총망중 아직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민비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수라상이 문제가 아니다. 음식이 식고 찬 것쯤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수라상보다도 더 큰 생활의 문제가 불을 질러 일어났다.

"자비를 놓아라."

민후의 음향은 장중했다. 남자 이상으로 묵직했다.

"지비를 놓랍신다."

늙은 상궁은 앵무새모양 큰소리로 외쳤다. 젊은 궁녀들이 일제히 내관한테 전령을 내린다.

"자비를 놓랍신다."

무예청들은 황망히 자비를 누마루 끝에 등대했다.

"가자. 앞서라."

왕후는 자근비에게 명령을 내렸다. 민왕후의 옥교는 쏜살같이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내시는 발발 떨며 왕후의 옥교를 맞아들였다. 대전 속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뜰 앞에 서 있는 울창한 나뭇가지에 새소리만 한가롭게 들릴 뿐이었다.

"대전마마 계시냐?"

민왕후는 자근비의 부축을 받고 욕교에서 내리자 대전 내시에게 물었다.

", 계시옵니다."

"혼자 계시냐?"

"아까 중전에서 나온 궁인이 아직 물러가지 아니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느냐?"

"든 일이 없사옵니다." 민왕후는 전각 만전창문 앞에 우뚝 섰다. 댓돌 디딘 보 속을 굽어보았다. 기막히지 아니한가. 전하의 검은 우단신 한 켤레와 절미한 여자의 분홍신이 의좋게 나란히 놓여 있었다. 민왕후의 눈에는 금방 불이 활활 붙었다. 대뜸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청마루 위로 올라섰다. 자근비는 부들부들 떨면서 감히 더 올라가지 못했다. 대전내시며, 옥교를 멘 무예별감들도 하회가 어찌 될 것인가 하고 팔짱만 끼고 바라보고 섰다. 민왕후는 지게문을 벼락같이 열어젖혔다. 대전 온돌방은 텅 비었다. 아무도 없다. 보료 장침에 문갑, 연상, 사방 탁자, 청자, 백자, 필통, 연적, 필세 등 문방사우들이 벌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방 안에는 사람의 살내음이 스며들었다. 남자와 여자의 냄새다. 누리한 냄새와 향긋한 분내음이 은은히 떠돌았다. 누리한 냄새는 남자의 냄새다. 전하의 살내음이 분명했다. 민왕후가 반평생 동안 상상 맡아보던 그 냄새다. 또 하나의 내음은 지분의 향취다. 젊은 여인의 내음이 분명했다. 민왕후의 눈에는 또 한 번 불이 활활 달았다. 쏜살같이 벽장 옆에 붙어 있는 협실문으로 향했다. 새로 지은 창덕궁을 구경할 때 쓸데없는 방을 겹겹이 만들었다고 뜨악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문이었다. 민후는 아무 연통도 없이 협실문을 열어젖혔다. 민후는 기가 막혔다. 눈앞에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전하의 편으로 본다면 기막히도록 좋은 향락이지만 민후의 감정으로 본다면 기막힌 불의의 추잡한 행동으로 보였다. 민후의 눈에는 세 번째 불이 붙었다. 잡담 제하고 뛰어들었다. 전하와 궁녀는 소스라쳐 놀랐다.

"수라를 젓수라 했더니 이것이 수라입니까?"

민후는 전하를 향하여 벽력같이 소리쳤다. 민후는 왕후의 막중한 자리에 있었으나, 야성이 넘치는 괄괄한 성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왕후라는 존엄한 체통을 잊은 채, 여장부의 솜씨가 그대로 폭발되었다. 전하도 폐하도 안중에 없었다.

"이따위 짓을 하시려고 임금의 자리를 뺏으셨소. 계집이란 계집을 모조리 훑어 자시려고 임금 노릇을 했단 말씀요."

민후는 눈을 딱 부릅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전하의 용안을 흘겼다. 전하는 면난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의복을 매만지고 벗어논 감투와 갓을 썼다.

"꼴 좋소!"

민후는 또 한 번 전하의 용안을 흘기며 큰소리로 외쳤다. 민후의 분노는 절정에 올랐다. 일부러 여러 사람이 들어보라고 떠들어댔다. 한바탕 화살을 전하한테로 퍼붓던 민후는 핏발이 벌겋게 돋은 눈을 궁인한테로 돌렸다. 엄파 같은 손길이 궁인의 뺨으로 떨어졌다.

"이년, 너보고 수라 청좌를 여쭈라고 보냈지, 구미호 짓을 하라고 어전에 보냈더냐?" 궁인의 눈에서는 번갯불이 번쩍 일었다. 볼이 몹시 아팠다. 자기는 아무 죄도 없건만 태산 같은 큰 죄를 졌다고 생각했다. 민후의 손뼉은 한 번 더 왼편 뺨으로 '철썩'하고 떨어졌다.

"이년아, 이년아. 왜 벙어리가 되었느냐. 왜 대답이 없느냐."

왕후마마의 떠들어대는 큰 고함 소리에 대전 궁녀들이 모여들었다. 복도와 마루청에서 기웃거릴 뿐, 감히 정전 협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민후는 궁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지르르 끌었다.

"이거, 왜 이러오. 이쳤소?"

전하는 차마 그대로 볼 수 없었다. 위엄이 있는 얼굴로 민후를 꾸짖었다. 체통 잃은 꾸지람은 더한층 체모를 잃을 뿐, 성검이 서지 못한다.

"잘 말씀하십니다. 제가 미쳤다고요? 정말 색에 미친 양반이 따로 있으면서, 뻔뻔스럽게 날 복 미쳤다고 하십니까?"

민후는 다시 전하를 흘겨본 후에 버썩 궁인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궁인의 머리채는 산발이 되어 풀어지면서 문지방 밖으로 끌려나갔다. 아무런 죄도 없는 궁인이었다. 강제로 몸을 짓밟힌 한 떨기 희생화다. 왕후는 자기 자신을 구미호라고 욕해서 꾸짖었지만 자기의 깨끗한 속마음을 버선 속 뒤집어 뵈듯 뵐 수가 없다. 그대로 슬픔이 폭발했다. 목을 놓아 울면서 끌려 나왔다. 뜰 아래는 내관과 무예청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전상을 지켜본다. 때마침 일은 공교롭고 창피하게 되었다. 복새를 떠는 통에 밤은 어둑어둑 컴컴했다. 등촉방 내시들은 소란통에 전각과 행각이며 처마 끝에 등롱을 달아 불을 켜서 돌아다녔고, 동궁은 춘방사령과 내관을 앞세우고 대전에 문안을 드리러 들어왔다. 중전에 기별해보니 다 대전에 계시다는 소식을 득고 동궁 ''는 대전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동궁 문안 듭시오."

춘방 내시는 합문 안으로 들어오자 큰소리로 외쳤다. 뒤미처 소년 동궁은 초립 쓰고 남전복을 입고 합문 안에 나타났다. 연둣빛 태사신을 신고 가볍게 발을 옮겨 들어섰다. 대전 내관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큰일이었다. 대전과 중전의 향기롭지 못한 싸움을 소년 동궁한테 보게 해서는 아니 될 텐데, 동궁이 문턱까지 들어왔으니 큰일이었다. 보통 종척이나 대신들 같으면, 사후청에서 기다리라 하겠지만, 저녁 문안 들어온 동궁을 무엄하게 사후청에 기다리라 할 수가 없었다. 대전내시는 황급했다.

"동궁 문안 듭시오."

하고 들어오는 춘방내관을 향하여 급히 손을 흔들어 저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동궁의 발길은 벌써 합문 안 정전 뜰에 들어섰다. 동궁 ''는 소명했다. 발길을 합문 안에 들여놓았을 때, 대전 안의 공기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내관과 궁녀들은 우둥우둥 뜰 아래 몰려섰는데, 얼굴빛이 모두 다 야릇하도록 흥분되었다. 딱딱하도록 긴장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황급했다. 그뿐만 아니다. 늙은 내시는 차마 말을 못하고 동궁 소속인 내관을 향하여 급히 손사래를 쳐서 들어오지 말라는 뜻을 표했다. 동궁 ''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왕이 계신 정전을 바라본다. 등촉방 내시가 금방 불을 켜 논 전각 처마 끝에는 청사초롱이 은은히 불빛을 던졌다. 동궁의 시야에 초롱불이 흔들거리며 댓돌을 비췄다. 검정 우단신 한 켤레와 분홍신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리고 따로 떨어져 있는 왼편 댓돌에는 눈익은 어마마마의 남빛 운혜신이 놓여 있었다. 분홍신은 누구의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동궁은 까닭을 모르고 두어 걸음 앞으로 옮겼을 때 별안간 대전 안에서는 비단을 찢는 듯한 강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마마마의 화난 목소리다.

"제가 미쳤다고요? 정말 색에 미친 양반이 따로 있으면서, 뻔뻔스럽게 날 보고 미쳤다고 하십니까?"

용이치 아니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동궁 ''도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주춤 걸음을 멈추고 있을 때 대전내시가 허리를 굽실하고 앞으로 나타났다.

"웬일이냐?"

동궁 ''는 나직이 물었다.

"대전마마와 중전마마께옵서 약간 불쾌하신 모양입니다. 저녁 문안은 조금 뒤에 드리는 것이 좋을까 아뢰옵니다." 이때 내관의 아뢰는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내전 장지문이 '우당탕'하는 큰 음향을 내면서 지게문이 활짝 열렸다. 중전의 엄파 같은 손은 가냘픈 궁녀의 머리채를 끌어 청마루 끝까지 나왔다. 곱고 맵자한 자태를 가진 궁녀다. 그러나 끌려 나오는 바람에 머리채는 갈기갈기 찢어져 산발이 되었다. 좌우 옆 뺨은 부풀어 올라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마루청까지 궁녀를 끌고 나온 어마마마는 큰 소리로 제조상궁을 불렀다.

"제조상궁 게 있느냐?" 별력 같은 큰소리로 외쳤다. 뜰에 섰던 제조상궁이 벌벌 떨며 댓돌 앞에 손을 모았다.

"네 이년을 잡아내려 육시청참시켜라!"

어마마마는 눈에 불이 활활 달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동궁 '' 자신이 뜰에 섰건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뒤미처 아바마마가 쫓아 나왔다. 의괸이 비뚤어졌다. 거울도 볼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창의 앞섶이 흐트러졌다. 띠도 띠지 못했다. 어마마마의 외치는 호령 소리에 이어 아바마마의 옥음이 떨어졌다. 옥음이라기에는 너무나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아니다. 질자배기가 깨지는 듯한 소리다. 임금의 음성을 '옥음'이라고 책에 씌어 있으니 ''는 그대로 옥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떻든 질자배기 깨지는 듯한 옥음이 떨어졌다.

"왕후마마의 말씀을 들어서는 아니 된다. 궁인은 아무 죄도 없다. 육시처참을 해서는 아니 된다. 살려라! 네가 잘 맡아서 궁인의 몸을 보호해두어라."

어마마마는 죽이라고 하고 아바마마는 살려두라 했다. 궁녀들은 벌벌 떨고만 섰다.

"이년, 내 말대로 해야 한다! 저년을 죽이지 아니하면 네 목도 성치 못하리라."

어마마마는 말씀을 마치자 발을 ''굴렀다.

"아니다. 죽여서는 아니 된다. 어명이다. 네가 잘 보호해두어라."

일이 급하니 상감은 자칭 어명이라 부르짖었다. 아바마마는 어마마마와 경쟁을 해서 외쳤다. 임금이 되고 왕후가 되었건만 아직도 야인의 습성이 남아 있는 왕과 왕비의 싸움은 장관이었다. 어마마마는 눈을 딱 부릅떴다. 부왕을 바라본다.

"체통을 좀 차리시오, 체통을 -. 어명이 무슨 어명이오. 색 좋아하는 어명은 어명이 될 수 없소. 빨리 처치해라! 더구나 그년은 고려왕조의 궁인이다."

어마마마는 고려왕조의 궁인이란 말을 덧붙였다. 고려의 옛 신하와 고려왕궁의 소속으로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결딴이 나는 판국이었다. 이용해 써먹을 것을 다 써먹은 후에는 그대로 처치해버리는 것이 이때의 불문율이었다. 민비는 어명을 꺾기 위하여 구려 때 궁인이라는 낙인을 찍어서 어명을 꺾어버리고 궁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머리 풀어 산발한 궁인은 애절하게 울었다.

"소인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수라를 젓수라고 중전마마의 명을 받들어 전하께 아뢴 죄밖에 없습니다. 대전마마께서 얼른 돌려 보내주지 아니하시어 이 지경이 된 조밖에 없습니다. 청천하늘이 굽어보십니다. 한평생을 깨끗이 지내온 처녀의 몸을 버린 일밖에 없습니다."

궁녀는 처량하게 목을 놓아 울었다. 구슬프게 하소연하는 젊은 궁녀의 울음소리는 듣는 사람의 간장을 녹여줄 듯했다. 내관을 위시하여 모든 궁녀들은 비로소 까닭을 짐작하게 되었다. 세자''도 비로소 까닭을 알았다. 제조상궁은 아직도 어찌할 줄 몰랐다. 궁녀의 몸에 손을 대지 못했다. 상감은 '살려주라'하고 왕후는 '처참을 하라'하니, 어느 편 명령을 들어야 할지 손을 댈 길이 막연했다.

"어서, 끌어내지 못하느냐?"

민후의 분노한 큰 목소리가 또 떨어졌다. 이때였다. 세자''는 섬돌을 딛고 청마루로 올라섰다. 분노에 떠는 왕후와 흩어진 의대가 바르지 못한 대왕의 눈에 동궁 ''의 청으로 오르는 모습이 비쳤다. ''는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조용히 아뢴다.

"소자 ''는 저녁 문안을 드리러 들어왔습니다. 온돌로 듭시어 문안을 받으시기 바라오."

두 내외는 비로소 창피하고 어색함을 느꼈다. 더구나, 소년 세자였다. 더한층 창피함을 느꼈다. 억세고 줄기차고 기운센 부왕도 창피함을 느꼈다. 콧대가 세고 남자를 능가하는 왈각달각한 성격을 가진 민후도 기가 꺾였다. 왕과 왕비는 세자가 하자는 대로 온돌로 걸음을 옮기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자의 문안을 아니 받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온돌 안으로 들어간 세자는 두 분 보모께 문안 절을 올렸다. 문안 절을 받고도 창피해서 서로들 입을 봉한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세자 ''는 조용히 말씀을 아뢴다.

"두 분 마마께옵서 오늘 매우 불쾌하신 듯하옵니다. 그러하오나 불초한 소자는 감히 아뢰옵니다. 두 분께옵서는 한 사람의 사삿사람이 아니십니다. 한 나라의 국부요, 국모십니다. 체통에 어긋됨이 있을까 염려되옵니다." 부왕과 왕비는 대답할 말이 막혔다. 보통 왕자 같으면 어린 사람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눌러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세자다. 세자의 말을 단번에 눌러서 꺾어 버릴 수는 없었다. 더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자의 말대로 너무나 임금과 왕후의 점잖은 체통을 잃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고 변명할 도리는 없었다. 그들은 창피하고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세자의 총명하고 숙성한 말에 마음속으로 제각기 감탄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탄뿐이 아니었다. 든든하고 대견한 생각까지 들었다. 상감과 왕후는 코가 맥맥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세자 ''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아뢴다.

"불초한 소자, 황송하오나 감히 두 분 마마께 아뢰옵니다. 지금 합문 안으로 들어오다가 잠깐 보니 궁녀 한 명이 어마마마께 큰 죄를 진 듯합니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는 용서하라 하시는 듯합니다. 한 분은 죽이라 하시고 한 분은 살리라 하시니, 일심동체이신 두 분 마마께서는 건도와 곤도를 어기신 듯합니다. 소자는 글도 읽었습니다마는 하늘과 땅의 협화가 없이 그 집안이 화합할 수 없습니다. 그 집안이 화합하지 못하면, 그 집안이 흥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라가 불안하다 했습니다. 더구나, 두 분 마마께서는 백성들의 부모십니다. 이 영향이 치국평천하에 미치는 것을 생각해보시옵소서."

못을 박는 세자의 똑똑한 말에, 부왕과 모후는 더한층 코가 맥맥했다. 잠자코 아무 말도 내리지 못한다. 세자는 또 아뢴다.

"지금 제조상궁은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어느 분의 하교를 받들어야 좋을지 떨고 섰습니다. 비빈 이하 상궁과 궁인을 통솔하시는 일은 어마마마의 권한이십니다. 백관을 통솔하시는 것은 아바마마의 특권이 십니다. 명령이 두 갈래로 났으니, 황송하오나 제조상궁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춥니까? 깊이 통촉하시기 바라오."

경위에 꼭꼭 닿는 세자의 말에 전하와 왕후는 또다시 말이 막혔다. 변명할 도리도 없이 아들 앞에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얼마쯤 성미들이 누그러졌다. 양심들이 유연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자 ''는 또다시 아뢴다.

"황송하오나 궁녀를 춘방으로 넘겨주시옵소서. 소자가 불초하오나 적당히 치죄하겠습니다. 그러하와야 두 분의 위신이 서시옵니다."

''의 제의에 왕과 왕후는 꼼짝할 도리가 없었다.

"좋다."

왕은 겨우 한 마디를 내렸다. '좋다' 하고 대답하는 왕의 말씀에 왕후는 반대할 수 없었다.

"어마마마도 춘방에 맡기옵소서."

"맘대로 해라."

세자는 모후의 승낙마저 받았다. 세자는 곧 대청으로 나갔다. 제조 상궁에게 분부를 내린다.

"이 궁인을 춘방으로 옮기게 하라. 춘방에서 죄를 다스릴 것이다." 상궁이 명을 받았다. 세자는 다시 춘방내시를 불렀다.

"듣거라. 제조상궁한테 죄인을 넘겨받아서 춘방에 대령해 있게 하라. 모든 일을 내가 조처하리라."

"삼가 의지를 받들겠습니다."

춘방내시는 세자의 분부를 받들었다. 제조상궁은 고려 때 궁인을 춘방내시한테 인도하고 춘방내시는 궁인을 보호하여 춘방으로 나왔다. 세자는 연소했으나 침착했다. 이날 밤에 세자는 고려 때 궁인을 춘방으로 불렀다. 춘방 소속의 나인들은 고려의 궁인을 동정했다. 찢어진 의복을 새옷으로 갈아입히고 흩어진 머리를 가다듬게 한 후에 세자의 처소로 인도했다. 세자는 좌우릴 물리치고 조용히 묻는다.

"너는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중전마마의 크나큰 노여움을 샀느냐?"

고려 궁인은 마음속으로 세자한테 감사함을 느꼈다. 더구나 세자는 순결무구한 소년이었다. 진심으로 자기를 구해준 은혜를 뼛속까지 느꼈다.

"세자 아기씨께 아뢰오. 소인의 목숨을 살려주신 은혜는 백골이 진토가 될지라도 어찌 다 갚사오리까. 그러하옵고 명철하신 세자 아기씨 앞에 쇤네가 어찌 속여 말씀하오리까. 소인은 추호도 범한 죄과가 없사옵니다." 세자는 단정한 눈으로 궁녀의 얼굴을 지켰다.

"그렇다면 어마마마께옵서 어찌 그리 노하셨더냐?"

"중전마마께서는 쇤네를 그릇 곡해하셨습니다."

"어찌 된 일이었느냐?"

세자의 음성은 엄숙했다.

"쇤네는 중전마마의 명령으로 대전에 나가 전하께 수라를 젓수시라 전갈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이 일이 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해서 죄가 되었느냐?"

"상감께서는 빨리 중전으로 듭시지 아니하시고 소인을 희롱하셨습니다."

세자는 묵묵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 고려 궁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소인은 몸을 피하려 무한 애를 썼으나, 전하께서 위력으로 억누르시는 일에 꼼짝 도리 없이 전하의 뜻에 복종할 따름이었습니다."

고려 궁인은 억울한 회포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세자는 또렷한 눈을 들어 고려 궁인의 태도와 말을 살폈다. 거짓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닌 것을 알았다. 울연히 동정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겉으로는 사색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여자는 아름답다 하나, 구미호 같아서 요망한 성격으로 남자를 고혹시킨다더라. 대전께서 희롱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대전을 고혹시킨 것이 아니냐."

세자는 또렷이 궁녀를 꾸짖어 보았다.

"제 어찌 쇤네의 몸을 살려주신 세자 아기씨 앞에 추호인들 거짓 말씀을 아뢰오리까. 쇤네는 고려 때부터 궁중 소속으로 있던 나인이올시다. 중전마마의 천은이 앙극하시와 여태껏 궁중에 몸을 기탁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몸으로 어찌 중전마마를 저버리고, 대전마마를 고혹했사오리까. 명철하신 세자께서는 깊이 통찰해주시기 바라오."

고려 궁인은 또 한 번 느껴 울었다. 고려 떼부터 궁 소속으로 있었단 말에 세자의 귀는 번쩍 띄었다. 고려의 왕족과 고려의 충신이며 고려 때 궁속들은 모조리 바다에 넣지 아니했으면 불 속에 태워 죽였다는 이야기를 귀가 젖도록 들은 세자 ''. 새삼 귀가 번쩍 띄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자의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

"네가 고려 때부터 있던 궁인이냐?"

고려 궁인은 나직이 대답하였다.

", 그러하옵니다."

솔직한 소년 세자였다. 꾸밈 없이 물었다.

", 어찌 죽지 않고 궁중에 붙어 있었더냐?"

"왕은이 감격하다 아뢰지 아니했습니까. 더구나 중전마마의 은혜가 태산같이 크십니다. 궁중의 예절과 풍속을 안다 하와 새 왕조의 나인들이 두 분 전하께 아뢰옵고 목숨을 부지해주셨나이다. 이 점으로 보아도 쇤네는 백골난망이온데, 쇤네가 어찌 중전마마를 저버리고 대전마마께 구미호의 짓을 하였사오리까? 싶이 통촉을 내려주시기 바라오."

세자는 비로소 궁녀의 모든 언행이 속여서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았다.

"진정, 네가 고려의 궁인이란 말이냐?"

", 그러하오이다. 중전마마를 위시하여 온 궁중이 다 알고 있습니다."

세자는 다시 캐어 묻는다.

"어느 때 너는 궁인으로 들어왔더냐?"

세자의 얼굴엔 위엄기가 있었다.

"태상왕 전하 때부터 새양머리한 궁녀로 목숨을 부지하와 오늘날까지 내리 있었습니다. 어느 때가 죽을 날이온지 쇤네 스스로도 죽을 때를 기약하지 못합니다마는 오늘날 대전마마를 고혹시킨 선수가 쇤네라 한다면 죽사와도 억을하여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고려 궁인은 말을 마치자 이번엔 길게 한숨을 지었다. 처량한 정경이었다. 세자는 어렴풋 모든 정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려 궁인을 향하여 다시 물었다.

"중전께서는 수라를 받으시고 대전께서 들어오시지 아니하시니 참다못하여 대전으로 납신 것이로구나." ", 그러하옵니다. 쇤네를 시키시어 빨리 대전으로 듭시라고 전갈을 하셨으나, 대전께옵서는 여러 가지로 하문이 계시고 소인을 돌려보내지 아니하시니, 궁금하시와 친히 납신 듯합니다. 그리하옵시고 향기롭지 못한 일 목도해 보신 중전마마께옵서 분노하신 건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그러하오나 쇤네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대전마마의 무서우신 권력 앞에, 한 점 티가 없던 깨끗한 처녀의 몸이 기왓장이 되어 깨어진 것뿐이옵니다. 억울하오이다."

고려 궁인은 소리를 죽여 느껴 운다. 측은한 생각이 세자의 마음을 휩싸안았다. 세자는 모든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소리 높여 동궁 궁녀를 불렀다.

"협실에 누구 있느냐?"

"-."

하는 긴 대답 소리와 함께 동궁의 늙은 상궁이 나타났다.

"중전 궁인을 네가 잠시 맡아서 보호하라. 다시 부를 때까지."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동궁 상궁은 고려 궁인을 거느려 세자 앞에서 물러났다. 이날 밤에 세자는 깊은 생각 속에 빠졌다. 단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날이 밝은 후에 세자는 중전으로 문안을 드리러 갔다. 동궁 소속의 내관들은 중전보다 대전에 문호를 드리는 것이 원칙이라 아뢰었다.

"동궁마마께 아룁니다. 대전에 먼저 문안을 드리시고 중전으로 향하시는 것이 전례올시다." "나도 알고 있다. 더 말하지 말라." 세자는 벌써 스스로 주견이 서 있었던 것이다. 동궁 내관들은 다시 더 대꾸할 길이 없었다. 세자는 중전으로 들어서자 상궁과 궁녀의 반가운 웃음을 받으며 중전실로 향했다. 중전 역시 지난밤에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직도 악몽의 장면이 눈앞에 선했다. 이때 중전 상궁은 세자의 문안 들어온 것을 아뢰었다.

"동궁마마께서 문안차 들어오셨습니다."

중전은 세자가 들어왔다는 말에 새로운 정신이 들었다.

"어서 들라 해라."

이윽고 세자는 중전 상궁한테 인도되어 중전 민씨께 뵈었다. 세자는 일부러 얼굴에 화색을 가득히 띠었다. 중전도 사랑하는 세자의 웃는 얼굴을 대하자 마음이 적이 화창했다.

"앉거라."

세자는 아직 장가 전이었다. 빈을 맞이하지 아니했다. 이런 까닭에 어마마마는 해라를 했다.

"어마마마, 침수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할 수가 있느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과 몸이 다 함께 피곤했으니, 눈도 붉었을 거야."

민후의 얼굴은 거칠었다. 머리는 흐트러졌다. 그러나 눈은 붉지 아니했다. 여장부인 민후건만 시앗을 본 그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카로운 신경이 온몸을 휩싸 안았다.

"과히 붉지 아니합니다. 그저 약건 어떤 듯합니다. 마음을 진정하시면 관계치 않을 듯합니다. 전의를 불러 문후케 하오리까?"

세자는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릴 방법을 알았다. '전의를 불러 문후케 하오리까? 하고 다정하게 묻는 한마디 말은 모후의 마음을 무한 기쁘게 했다. 한 재 약을 달여 먹는 것보다도 당장 효험이 있었다.

"화기로 난 병을 약 가지고 되겠느냐. 몸에서 우러난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 생겨난 병은 마음으로 고쳐야 한다. 전의를 부른대야 소용이 없다."

민후의 마음은 아까보다 훨씬 풀어졌다.

"어마마마의 말씀이 참말로 지당하십니다. 밖에서 침노해 들어온 병이 아니라 면 마음으로 다스리시면 됩니다. 마음은 사람의 정신을 좌우할 수 있는 추도리올시다. 어마마마, 거울을 보시옵소서. 붉으셨던 안정이 한결 맑아지셨습니다. 마음이란 과연 정신을 좌우하는 것이옵니다."

세자는 말을 마치자 곧 지밀상궁을 불렀다.

"거기 누구 있느냐? 가까이 오너라."

지밀상궁이 나타났다.

"거울을 올려라."

지밀상궁은 세자의 분부대로 경대를 받들어 들여왔다. 세자는 손수 경대를 받아 들고 모후 앞에 비췄다. 세자는 경대를 든 채 조용히 아뢴다.

"어마마마, 보시옵소서. 눈의 붉은 기운이 금방 가시었습니다. 그저 마음이 제 일이올시다. 마음을 편안케 하시옵소서. 어마마마의 몸은 천금옥체십니다. 그저 마음을 편안케 하시옵소서. 그리하시옵고 간밤에 못 주무셨으니 낮에 침수해 드시옵소서. 한결 정신이 쾌락하실 것입니다."

민후는 세자가 비춰주는 거울을 바라보니 붉다고 생각했던 눈에는 한 점 붉은 기가 없다. 민후의 마음은 더한층 명랑했다. 민후는 아까까지 눈이 붉은 줄 알았는데, 이제 아들 세자가 비춰주는 거울을 바라보니 붉었다고 생각했던 눈은 씻은 듯 운권청천이 되었다.

"세자의 말이 참으로 옳구나. 너의 효성에 내 마음이 가라앉는 듯하더니 이내 눈이 씻은 듯 맑아졌구나."

민후는 세자를 더한층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효자 아들로 세자를 삼은 것을 무한 기쁘게 생각했다. 민후는 한편으로 어제 세자가 동궁으로 데리고 나갔던 고려 궁인의 처치가 어찌 되었는지 하회가 궁금했다. 그러나 세자에게 궁녀의 일을 먼저 묻기는 면난했다. 잠깐 입을 다물고 여기 대하여 세자의 말이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세자는 고려 궁녀에 대하여 한마디 보고의 말이 없었다. 이때, 중전 뜰 앞에서 내관과 궁녀들이 수군거리는 대화소리가 들리면서 지밀나인이 들어와 세자께 고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하께서는 대전에 아직 문안을 드리지 아니하셨습니까?"

"왜 그러느냐?"

"대전에서 별감이 들어왔사옵니다. 문안을 올리실 때가 지났는데 아직도 세자 저하께옵서 듭시지 않는다고 물어보라 하시어 동궁서부터 이곳까지 들렀다 합니다."

세자는 태연히 대답했다.

"간밤에 어마마마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상하셨다. 곧 병환이 나실 듯 생각되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의당 대전마마께 문후를 먼저 올리고 중전에 문안을 드리는 것이 도리에 온당한 노릇이나 오늘만은 불편하신 중전에 먼저 들어 문후를 올린 것이다. 대전마마께는 곧 나가서 문안을 드릴 예정이다. 혹시나 하문이 계시거든 이 뜻을 전달해 아뢰어라."

조리 정연한 세자의 말에 어마마마는 더한층 크게 세자의 정을 느꼈다. '진실로 세자는 효자로구나'하는 생각이 가슴 안에 뿌듯하게 일어났다. 뿐만 아니었다. 대전보다 자기한테 문안을 먼저 들어온 일을 비로소 알았다. 궁녀가 세자의 전갈을 받들어 문밖으로 나간 후에 민후는 세자한테 미소를 던져 묻는다.

"대전에 들르지 아니하고 나한테 먼저 들렀더냐?"

민후의 음성은 더한층 은은했다.

", 그렇습니다."

"문안 전례가 있다. 대전에 먼저 들렀더면 좋았을 것을-."

민후는 그래도 대전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부부의 정은 최후에 가서는 이같이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세자는 모후의 심경을 짐작했다. 무릎을 고쳐 꿇고 차근히 아뢴다.

"제 어찌 예절을 모르리까마는, 간밤의 형세로 미루어보아 대전께옵서는 별일이 없으시고, 어마마마께서는 옥체 불편하신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하와 중전에 먼저 문안을 드린 후에 대전으로 나가려 했습니다. 병환이 납실 듯한 급한 분을 제쳐놓고 아무 탈이 없으신 분께 '침수 안녕하시냐'고 묻는 일은 일종 허례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허례가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소자는 그같은 가면을 쓴 허례는 배격하고 취하지 아니하려 합니다."

세자가 어마마마께 아뢰는 말씀은 정정당당했다. 소위 학문이 깊고 아름 높다는 사람들도 따라가지 못할 말이다. 민후는 자기 아들이건만 숙성하고 판단이 빠른 세자의 언행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듯했다. 세자는 말씀을 계속했다.

"다행히 어마마마께서는 소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른 심려 아니 계시오니 이런 좋을 데가 없습니다. 그저 아마마마께 아뢰옵니다. 어마마마께옵서는 보통 여인이 아니십니다. 만백성을 거느리시는 국모십니다. 옥체와 마음을 다 함께 푸른 하늘 모양 넓고 크게 가지시어 화한 기분과 아름다운 덕으로 이 세상을 밝혀 주시고 이 나라를 명랑하게 해주시옵소서."

", 세자는 과연 나의 스승이로구나."

어마마마는 비로소 감격한 뜻을 세자한테 털어 말했다. 세자는 어마마마의 감격한 말이 떨어지지 비로소 궁인에 대한 말을 아뢰기 시작했다.

"어제 동궁에서 소자는 무축 궁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곧 궁인을 죽여버리려 했습니다."

세자는 '죽여버린다'는 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분정지두에 죽여버리라고 말을 했지만 어찌 차마 죽여 버릴 수야 있느냐."

민후의 감정은 세자의 능소능대한 화술에 넘어가서 절정에 올랐던 감정이 슬며시 풀어지기 시작했다.

"소자는 꼭 죽이려 했습니다. '구미호 같은 년'이라고 호통까지 쳤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궁녀의 말을 들어보니 궁녀는 절대로 선손을 건 것이 아니올시다. 궁녀는 고려 때부터 궁중에 있던 여인으로 어마마마께서 죽이지 아니하시고 여태껏 길러주신 큰 은혜를 결초보은한다 합니다."

세자의 지성스럽게 아뢰는 말에 민후는 귀를 기울여 듣는다.

"궁녀는 힘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위엄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제왕의 권위 앞에 헌헌장부들도 모두 다 무릎을 꿇는 이 판국에 일개 가냘픈 망국 여인으로 새 나라 상감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마마마, 그리하와 소자는 차마 궁녀 목을 베지 못했습니다. 그러하오나 어마마마께서 지금이라도 궁녀의 목을 베라 하시면 독 목을 베도록 하겠습니다."

"그만두어라. 인명이 불쌍하다."

민후는 결국 세자한테 지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죽이시라면 죽이겠다'는 세자의 농소능대한 말에 어머니 민씨는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세자는 비로소 마음이 후련했다.

"어마마마께옵서 이같이 큰 은덕을 내리신다 하오면 궁인은 두 번 재생지은을 느껴서 기막힌 충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궁인은 춘방상궁에게 부탁하여 기르기로 하겠습니다."

"나의 면목을 보아서 세자궁에서 잠시 맡아두는 것이 좋겠다."

민후는 담담하게 허락을 내렸다.

"그러하오면, 어마마마의 너그러운 의지를 받들어 구려 궁인을 소자가 있는 춘방에 잠시 거두어 두겠습니다."

세자는 더 한 번 어마마마의 너그러운 덕이라고 칭송하며 말씀을 올렸다. 세자의 말씀을 듣는 민후는 더 한 번 화를 풀렸다. 고개를 끄덕여 믿음직스럽게 큰아들을 바라본다.

"소자는 아직 대전에 문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서 가보아라." 어마마마는 마음속으로 큰아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자 ''는 내전에서 물러나와 부왕이 계신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내시는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세자를 어전에 인도했다. 태종은 간밤 일을 생각하니 아들을 대해보기가 극히 면난했다. 처음에 화끈하고 볼이 달았다. 그러나 슬기 있고 배짱이 두둑한 태종이었다. 시치미 떼고 들어오는 세자를 엄숙히 바라본다. 세자는 아버지 앞에 공손하게 문안 절을 올렸다.

"침수 안녕하셨습니까?"

태종은 마음이 불편해서 단잠을 이루지 못했으면서도 용포 소매 속에 손을 놓고 의젓이 대답한다.

"세자도 잘 잤느냐. 과인은 별일 없이 온속을 했느니라."

태종은 일부러 의젓을 빼느라고 우리말로 '잘 잤느니라' 하고 대답해도 좋을 것을 일부러 문자를 써서 '온숙'이라고 대답했다. 세자 ''는 잠깐 눈을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처럼 의복이 흩어지고 의관이 비뚤어진 아버지는 아니었다. 익선관도 다 반듯하게 썼다. 훤하게 잘생긴 용안에 제법 위엄기도 있어 보였다. 아버지의 말씀과 행동거지는 어젯밤 궁녀 한 명을 가운데 두고 어마마마와 떠들어대고 다투던, 그 볼썽사나운 추태를 부리던 그 모습은 아니었다. 의젓하고 점잖고 위엄기 있어 보였다. 그러나 모두 다 진실성을 잃은 가면이었다. 진정한 발가벗은 사람, 참 인간인 아버지는 아니었다. 추잡한 속물, 야욕덩이 욕심의 화신인 아버지다. 그 위에 제왕이라는 무섭고 권위 있는 가짜 왕관에, 가짜 의복을 입혀논 우상이었다. 세자는 아버지의 순수하지 못한 가식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이 문제를 가지고 해결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자는 고개를 들어 아바마마께 아뢴다.

"어젯밤, 궁녀는 춘방에 잘 보호해두었습니다." 세자는 간결하게 보고를 올렸다.

", 그랬어." 태종은 보통 보고를 받은 무관심한 태도를 지었다. 그저 그랬느냐고 대답할 뿐이었다. 간밤에 임금님의 체통도 잊어버린 채 어머니와 다투면서 액정하인들 앞에서 '죽여서는 아니 된다'고 멧돝처럼 날뛰던 그때 그 태도와는 전혀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세자는 가만히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나이 어린 아들 앞에서 무어라고 대답하기가 부끄럽고 곤란하니 이같이 어름어름 대답해 두시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우선 춘방상궁에게 어명이 내리실 때까지 보호하라고 일렀습니다."

세자는 부왕의 눈치를 살피면서 또 한 번 뇌까렸다. 태종은 이번엔 대답도 아니했다. 잘했다는 말도 없었다. 못했다는 말도 없었다. 긍정도 아니요 부정도 아니었다. 궁녀에 대하여 다시는 더 말을 아니해 주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어마마마께 지금 사뢰었습니다. 죽여서는 아니 된다고 - 다행히 어마마마께서도 혼연히 승낙하시는 전지를 내리셨습니다. 살려두기로 하셨습니다."

세자는 말을 마치자, 총명한 눈을 들어 부왕을 살펴보았다. 부왕은 역시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랬어."

한 마디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도대체 판단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무책임하구나!"

세자는 생각했다 분한 마음이 슬며시 움직였다. 세자는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얼마 동안 춘방에 두었다가 섟이 삭은 후에 대전으로 봉환하겠습니다."

아바마마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아무런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아니했다. 하룻밤 사이에 아주 딴판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같이 죽이지 말라고 왕후인 어마마마와 다투던 아버지는 겨우 한밤을 지난 오늘 와서는 냉랭하기 짝이 없다. 바로 불 아니 땐 내욱들이었다.

"앞으로 어찌하오리까?"

세자는 짓궂게 아버지한테 물었다.

"내버려 두어라."

차디찬 한 마디가 떨어졌다. 세자는 더 한 번 분했다. 너무나 무책임한 대답이다.

"춘방에는 오래 두지 못합니다."

세자는 아버지의 한 마디만 듣고 싶었다. '춘방에는 오래 두지 못한다'는 세자의 말에 아버지는 약간 마음이 켕기는 모양이다.

"내전으로 데려가면 반드시 풍파가 일어날 것이고 춘방에 오래 두지 못한다면 어찌하느냐. 내전에서 너의 어머니는 아니 데려갈 테고. 이러하니 별수 있느냐.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지."

태종은 비로소 자기의 본마음을 펴 헤쳤다.

"섟 삭은 후에는 내전으로 데려가시어 내명부의 칭호를 내리게 하시어 거처케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왕실의 전범인가 합니다."

"모두 다 골치 아프다. 두었다 이야기하기로 하자."

전하는 용안을 찌푸렸다. 욕심으로 인해서 일을 저질러놓았으나 실로 두통거리였다. '골치 아프다'는 한마디 말이 비로소 태종의 입에서 떨어졌다. 진심이었다. 세자는 골치 아프다는 아버지를 더 괴롭게 해드리기가 미안했다. 우선 이쯤 해놓고 나중에 일을 처리하리라 생각했다.

"고려 궁인에 대한 일은 나중에 다시 아뢰겠습니다. 소자는 이만 물러갑니다."

세자의 물러간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비로소 시원한 생각이 들었다. 등에는 진땀이 흘렀다. 정포은 선생을 선죽교에서 때려 죽일 때도 이같이 진땀을 흘려보지는 아니했다. 서아우 방석과 방번을 죽였을 때도 이같이 진땀은 흘리지 아니했다. 아버지 이성계가 쏘는 화살이 환영문 기둥을 맞혔을 때도 이같이 진땀을 흘리지 아니했다. 세자의 물러간다는 말을 들으니 비로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세자는 물러가다가 다시 발꿈치를 돌렸다.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차근하게 아뢴다.

"아바마마! 어마마마께는 소자가 아뢰겠습니다. 가까운 시일에 고려 궁인한테는 내명부의 칭호를 내리시옵소서. 더구나 보통 궁인이 아니옵고 고려 때부터 궁인이라는 그 점을 생각하시와 은헤를 베푸시옵소서."

"물러가거라. , 무엇을 안다고 감히 이런 일에 참예하느냐."

부왕의 목소리는 금방 딴판이었다. 큰 소리롤 호령을 내렸다. 용안은 금방 엄숙했다. 아버지의 넓고 큰 경험으로 아들을 푸근하게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다. 제왕의 위력으로 아들을 억눌러버리려 했다. 세자 ''는 슬펐다. 대답 없이 머리를 숙여 대전에서 물러나간다. 고려 궁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태종은 며칠 동안 우울한 날을 보냈다. 더구나 고려 궁인을 춘방으로 보낸 후에 태종은 적막한 긴긴 밤을 침실에서 쓸쓸하게 지냈다. 그렇다고 내전에는 들어가기 싫었다. 투기가 많은 민비한테 점점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왕이 되기 전에 젊었을 때는 내외간 금실이 좋아서 아들 사형제와 딸 사형제를 두어서, 민후의 몸에서 생산된 왕자와 공주가 팔 남매나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민후의 용모가 늙기 시작했다. 장대한 몸집을 가진 여장부는 더한층 쉽게 늙는 것 같았다. 아니다. 확실히 쉽게 늙었다. 이제 민후에게는 아름다운 여성미라고는 한 곳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은 것은 고집이요, 만만치 않은 성정이요, 딱딱하고 억센 기백뿐이었다. 몸은 왕후의 귀한 존재요, 세자의 어머니요, 요룡여호한 네 왕자의 어마마마요, 네 공주의 친정 모후요, 네 사람 부마도위의 장모다. 여기다가 친정아버지는 시아버님 태조대왕을 도와서 새 나라를 이룩한 일등공신 민제요, 사형제나 되는 동생들은 범과 같고 용과 같다는 별명을 가진 사람으로 태종을 도와서 임금이 되게 한 민무질, 민무구 형제들이다. 이같이 민후의 주위에 있는 인물만이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왕후면서도 개국 공신이요, 정국공신이다. 남편인 태종을 도와서 임금이 되게 했다. 방석, 방번의 난 때는 민후 자신이 남편에게 갑옷 투구를 입혀주면서, 어서 나가서 대결하라 했다. 남편의 친형이 되는 방간과 싸울 때도 남편을 격려하고 군사들에게 술을 권해서 크나큰 승리를 거두게 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보아 민후는 이제 태종에게 있어서는 아리따운 아내라기보다 뜻을 같이한 동지였다. 민후는 이같이 해서 점점 고분고분한 여자의 티를 세월과 함께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쯤 되어도 태종을 더 그에게 바랄 것이 없는데, 민후는 그래도 남성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행동은 남성에 가까우면서도 아직도 여성이란 감정은 몸 안에 가득하게 잠겨 있었다. 남편인 태종은 한창 연부역강했다. 궁인과 무수리를 곧잘 건드렸다. 민후는 남자 같으면서도 이것이 싫었다. 역시 자기만을 사랑해주고 존경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완전히 여성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찌할 수 없는 본연의 자세였다. 이 까닭에 고려 궁인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후에 태종 이방원은 더한층 민후한테 정이 떨어졌다. 태종은 더 한층 대전에서 내전으로 발길을 옮기지 아니했다. 태종이 한창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을 때, 개국 공신에 중흥공신을 겸하여 이름이 일세를 진동하는 완산부원군 이숙번이 어전에 뵙기를 청했다. 이숙번은 고려 때 장신으로 태종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공신의 한 사람이었으나, 그보다도 태종 이방원에게 있어서는 방석, 방번, 방간의 형제들을 처치할 때 태종의 편이 되어 혁명을 일으킨 때문, 태종에 대한 공로는 영의정 하윤과 맞서는 국가의 큰 인물이었다. 이제 나라는 태평하여 밖으로 외적의 근심이 없으니 장수의 임명을 맡아 있는 이숙번은 도저히 문관 재상들보다도 몸이 한가로웠다. 아침 일찍 군문에 나가서 군무를 보살핀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임금 부럽지 아니한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넓고 넓은 궁궐 같은 저택에는 기화요초가 끊일 사이 없이 아름다운 웃음을 웃고, 울창하게 푸른 수해를 이룬 후원에는 진기한 새소리에 학두루미가 춤을 추고 세상 밖의 별건곤을 이루었다. 집은 고대 광실이어서 궁궐이 무색할 지경이요, 넓은 마당 남향판에는 못을 파서 고기와 자라를 길렀다. 여름엔 연꽃이 피어 향기롭고, 가을에는 연밥을 껴안은 연줄기가 아름다웠다. 열 걸음에 한 정자요, 백 걸음에 누각이 화려했다. 다만 왕궁이 아닌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붉고 푸르게 단청을 칠하지 아니했을 뿐 모든 구조와 배치는 대궐에 손색이 없었다. 집만 좋고, 터만 넓은 것이 아니다. 그의 집에는 삼천 궁녀는 아니지만, 삼십 가기와 삼삽 무희와 삼십 시녀가 있었다. 모두 다 양갓집 여자를 뽑아 시녀를 삼고,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기생들을 뽑아서 무희와 가희를 만들었다. 이숙번의 집에는 노래와 춤이 끊일 사이 없고 거문고, 비파, 양금, 해금, 퉁소, 가야금 등 악기를 타는 음향이 끊일 사이 없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제왕의 팔자보다도 더 낫다고 비평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임금 태종은 임금 노릇을 하기 위하여 형제간에 살육 싸움이 계속되었고, 부자간에 씻지 못할 한을 못 박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종은 왕위에 나간 후에는 슬며시 아내와 화합지 못한 우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개국 공신으로 중흥 공신까지 된 이숙번의 팔자가 도리어 임금보다 낫다고 탄식했다. 이숙번이 내관을 통하여 뵙기를 청하니 태종은 지체 없이 이숙번을 만났다. 밖으로 국가의 일이 없으니 임금과 신하는 날마다 만날 기회가 없었다. 태종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이숙번의 문안을 받았다. 점잖은 재상이요, 장군의 절이었다. 또한 연침자리다. 태종은 경의를 표하여 서서 문안을 받았다.

"오랫만이오, 완산부원군." 태종은 절하는 이숙번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숙번도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몸을 굽혀 아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용안을 우러러뵙기 소원이었소이다마는 일없이 승후하옵기 황송하와 자주 옥체를 대해 뵙지 못했습니다."

"과인 역시 경을 대해 보고 싶었고. 요사이 별고없이 무양하오?"

왕의 중신을 대하는 옥음은 은근했다.

"성상께서 항상 애호해주시는 덕택으로 별탈 없사옵고 집안도 무고하옵니다. 모두 다 지극하신 왕은 이로소이다."

태종은 이숙번이 아뢰는 '왕은'이란 말에 마음이 더 흐뭇했다.

"그래 웬일인가? 오늘은 해가 서편에서 떴던가, 이 과인을 다 찾아보러 왔으니. 하하하."

드높게 웃으며 농을 했다.

"황송하오이다. 기실은 전하께 청조울 일이 있사와 어전에 들어왔소이다."

"과인한테 청할 일이 있단 말인가, 하하하. 부원군이 과인한테 청을 하다니, 나보다도 팔자가 좋다고 세상에서 떠드는 부원군이, 청할 일이 있다 하니 뜻밖이오, 하하하. 무슨 청인가, 말해보오."

"청이 있다 해도 이만저만한 청이 아니옵니다. 황송합니다. 미신의 집으로 거둥을 해줍시사고 우러러 청을 하옵니다. 죄송무지하옵니다."

"경의 집으로 과인을 청하려 하는가? 그것 쉬운 일, 가고말고. 경의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전하께서 덕과 복이 많으시어 지금 나라는 국태민안한 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밖으로는 왜구의 침공이 없고 안에서는 백성들이 격양가를 부릅니다.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신가 합니다. 연하온 중, 때마침 미신의 귀빠진 날이 되었습니다. 혼자 이날을 무료하게 지내기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와, 감히 아뢰었습니다. 다행히 허락해 주신다면 미신 생전에 더할 수 없는 광영이올시다. 대단치 아니한 일로 성청을 번거롭게 하오니 죄당만사올시다."

"오오, 경의 생일이라, 과인 어찌 아니 가겠소. 집 구경도 할 겸 꼭 나가기로 하겠소."

태종은 이숙번을 향하여 호탕한 옥음으로 쾌하게 허락했다.

"날짜는 어느 날인가?"

"내일이올시다."

"곧 고둥령을 내리겠소."

"황감하여이다."

"만조백관들도 다 모이는가?"

"백관이야 어찌 다 부르겠습니까? 원로들만 청하겠습니다."

"경의 덕으로 유쾌한 하루를 보내리라."

"황감하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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