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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3-2

마음씨 고운 경순공주

아버지는 방간 오빠의 난 후에 방원을 처치하겠다는 생각은 더한층 굳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 해서 밤새도록 간했던 것이다. 그 뒤에 소문을 들으니 아버지는 함흥으로 간 후에 방원의 사신이 가기만 하면 목을 베어 죽였다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돌아간 어머니 강비마마의 친척되는 조사의와 함께 혁명군을 일으켜서 안주 청천강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원은 아버지와 대결하기 위하여 호호탕탕 군사를 거느려 청천강상에서 대결전을 해서 조사의의 혁명군을 대패시켰다는 것이다.

이 소식은 북쪽에서 난리 뒤에 내려온 승려들을 통해서 자세하게 들었다. 경순공주는 기가 찼다.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 후에 아버지는 송도로 돌아와서 성비한테 장가를 들어서 정궁을 삼고, 후궁으로 또 한 명 정경궁주를 두었다는 송도 소식을 듣자, 공주는 노래의 아버지 뒷배를 보아주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저으기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공주는 승려들한테 아버지가 흥천사로 오신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암자에서 큰재로 내려와 대기하고 있었다. 대취타 소리가 요란하게 동구를 흔들고, 태상왕의 연이 반공에 높이 떠서 재문 앞으로 들어섰을 때, 뒤에는 또 하나의 연과 옥교가 찬란한 구슬발을 늘이고 태상왕의 연을 따랐다.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연과 옥교는 마치 어머니 강비가 살아 계실 때 아버지의 뒤를 따르던 그 모습과 방불했다. 공주의 눈이 환하도록 크게 떠졌다. 두 손을 모아 아버지와 후궁들의 옥교를 맞이했다. 이때 태상왕 이성계도 불쌍하게 여승이 된 경순공주의 생각뿐이었다. 어느 곳에 경순공주가 있나 하고 눈을 들어 늘어서 있는 승려들을 살펴보았다. 태상왕의 눈과 경순공주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오 공주!"

승려들 틈에서 경순공주를 찾아낸 태상왕은 소리를 높여 공주를 불렀다. 시시때때로 잊지 못하던 딸 공주였다. 함흥으로 떠난 이후 소식이 끊어졌고 여러 해 동안 대면해보지 못했던 공주다. 소리를 높여 반갑게 부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바마마!"

공주도 연 위에서 자기를 부르는 아버지를 향하여 마주 불렀다. 늙은 태상왕과 젊은 승려인 공주는 마주 바라보면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태상왕은 연 위에서 무예청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자비를 멈추어라!"

태상왕의 연이 주춤하고 멈췄다. 뒤에 따르던 후궁들의 연이 장기튀김으로 주춤하고 멈췄다. 태상왕은 좌우에 말을 타고 온 궁녀들에게 분부했다.

"빨리 내려서 공주를 부액해서 내 연에 오르게 하라. 대웅보전앞까지 함께 타고 들어가리라."

좌우에 모시었던 시녀들은 말에서 내려 머리 깎고 장삼 입은 공주의 앞으로 나갔다.

"공주마마, 위에서 연으로 모시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속히 연으로 오르시옵소서."

"무슨 소리냐. 내 어찌 감히 아바마마의 타신 연에 오를 수 있느냐. 나는 지난날의 공주가 아니다. 이미 대궐을 하직하고 산문에 들어와 불제자가 된 지 오랜 몸이다. 한미한 승려의 몸으로 어찌 태상왕 전하의 연에 오를 수 있겠느냐. 못합니다 고 이 뜻을 아뢰어라."

공주는 간곡한 말로 부액하려는 궁녀들을 물리쳤다.

"연이 뜨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빨리 오리사이다."

"아니 된다. 나라에는 국법이 있다. 나는 이미 공주가 아니다. 이개 승려다. 비록 사시로 사친이라 하나, 아바마마는 지존이시다. 어찌 지존의 어연에 오를 수 있느냐."

공주는 쌀쌀하게 물리쳤다. 새파랗게 깎은 머리에 검은 장삼을 입은 공주의 태깔은 처염하도록 예뼜다. 궁녀들은 하는 수 없었다. 무료하게 태상왕의 연 앞으로 나가 아뢰었다.

"소인들이 아무리 어명을 전했사오나 공주마마께서는 이미 산문에 처해 있는 불제자라 하시며 아바마마와 연을 함께 타실 수 없다 하십니다."

태상왕은 결곡한 공주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는 수 없다. 뒤를 따르게 하라."

궁녀들은 다시 명을 받들어 공주 앞으로 나갔다.

"정 그러하시다면 전하의 연 뒤를 따라서 걸어서 전각에 오르게 하십니다."

"행차가 지나시면 천천히 따르리라."

공주는 고개를 끄덕여 조용하게 대답했다. 태상왕의 연은 다시 뜨기 시작했다. 성비와 궁주는 공주한테 미안했다. 옥교에서 내려 공주와 함께 걸었다.

"공주마마, 저는 성비올시다."

"저는 전경궁주라 하옵니다."

그들은 공주와 함께 걸어가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오오, 성비마마. 멀리서 말씀만 듣고 이제 뵈었습니다. 빈도가 만약 승이 되지 아니했더라면 어머니라고 불렀을 것을 이미 출가한 몸이오라, 대궐에서 떠난 까닭에 이제야 존안을 우러러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경궁주도 이같이 늦게 뵈니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자, 성비와 궁주는 도리어 황송했다.

"공주마마, 너무 겸손해하지 마시옵소서."

간단하게 인사를 보냈다. 성비와 정경궁주는 흑장삼 입은 공주를 양편에 부액하여 흥천사 일주문으로 올랐다. 공주는 성비와 궁주에게 상냥스런 말소리로 아버지를 부탁했다.

"이 몸은 전생에 죄가 많아 남편을 잃은 청상의 몸으로 궁중에 머물러 있기가 죄송하여 승려의 몸이 되어 어머니의 원찰인 이곳에서 한평생을 마치려고 결심하였거니와 이제 두 분 마마는 후비 되신 지 일천하오나 노래하신 태상왕 전하를 정성껏 모시어주기 바라오. 아바마마는 이제 칠십이 넘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편안케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두 분은 의좋게 사이좋게 지내면서 노래하신 우리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신다면 빈도는 그저 결초보은하오리다."

"황공하오이다. 공주마마께오서 부탁이 아니 계시더라도 저희들, 어찌 한만하게 방심하오리까. 깊이 가슴 속에 명심하여 새겨두겠나이다."

성비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첫째로 두 분이 한 남편을 모시는 일도 하늘이 정해주신 연분이요, 전세에 닦아 놓은 덕으로 이리 된 것입니다. 다투지 말고 서로를 양보하고, 욕심을 눌러 화협하게 지낸다면 즐거운 일이 생기고 즐거운 일이 있는 곳에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편하실 것입니다. 그저 부탁합니다. 사사로운 욕심과 질투를 버리고 한맘 한뜻이 되어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옵소서. 이 길이 두 분 마마의 큰 공덕이요, 우리 아버지를 오래 사시도록 해드리는 길이오이다."

공주는 또 한 번 당부했다.

"부탁이 아니 계시니 저희 어찌 소홀하며 한만하오리까. 절대로 사사로운 욕심과 투기를 부리지 않겠나이다."

공주는 성비와 궁주와 함께 태상왕의 연을 따라가면서 이같이 아바마마의 일을 부탁하고 전각으로 향하여 올랐다. 태상왕이 주지의 인도로 법당에 오르니, 공주는 성비와 궁주와 함께 태상왕의 뒤를 따라 법당에 올랐다. 좌우에 모신 시녀들은 태상왕을 대신하여 부처 앞에 향연을 사르고 늙은 주지는 손수 북을 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태상왕은 주지가 부르는 염불 소리에 맞춰 경건하게 예불을 했다. 태상왕의 복장은 대례복으로 차렸다. 금구슬을 앞뒤로 늘인 면류관에 황금 용을 수놓은 곤룡포를 입었다. 부처에 대하여 가장 큰 경의를 표하는 예복이었다.

공주는 성비와 궁주를 인도하여 태상왕 뒷줄에서 예불을 하게 하고 스스로 목탁을 잡아서 천상천하에 거늘고 있는 부처를 청했다. 모든 승려들은 범패를 높이 불러 부처를 예찬했다. 태상왕 전하가 친히 법당에 올라 예불을 하는 의식이었다. 목청을 높여서 신명이 나도록 가락을 넘겼다. 태상왕은 부처 앞에 네 번 절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부모은중경

주지는 금강경을 읽어 인생과 부처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주지가 독경을 끝낸 후에 경순공주는 부모은중경을 읽기 시작했다. 경순공주가 경쇠를 치면서 읽어나가는 경은 알아듣기도 쉽거니와 글도 명문이었다. 구구절절 아들딸을 길러낸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덕을 찬양하여 노래했다.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맑고 아름다운 음향으로 물 흐르듯 읽어내리는 공주의 목소리는 먼저 태상왕의 눈물을 자아내고 다음엔 성비와 궁주와 나인들을 울리고야 만다.

어느 때 부처는 왕사성도위국 지수급고원에 대비구 삼만 팔천 사람과, 보살마하살중을 데리고 계실 때 세존은 대중을 거느리고 남으로 가시다가 길가에 한 무더기 백골이 쌓여 있는 것을 보셨다. 이때 여래는 옥체를 땅에 던지시고 고골을 향하여 예배를 하시었다. 아난과 대중들이 세존께 아뢰었다.

"여래는 삼계의 크나큰 스승이시고 사생의 자부로서 중생의 존경을 받으시는 터이온데 어찌해서 말라빠진 백골에 절을 하십니까?"

부처, 아난한테 말씀하신다.

"네 바로 나의 으뜸 제자로서 출가한 지 오래거늘 일을 넓게 알지 못하는구나. 저 한 무더기 백골은 전생에 나의 할아비의 것인지, 나의 할머니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하므로 나는 지금 예배를 할 것이다."

공주의 청아한 독경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굽이굽이 찔렀다.

부처는 다시 아난에 이르신다.

"너는 이 백골더미를 둘로 나누라. 남자의 뼈는 희고 무겁고, 여자의 뼈는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묻는다. 남자는 이생에 있을 때 도포 입고 띠 띠고 모자 쓰고 신 신었으니, 곧 남자인 것을 알 수 있고, 여자는 분 바르고 연지 찍고 사향과 난초를 차서 교태를 나타내니 당장에 여자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백골이 된 후에 다 같은 뼈만 남았습니다. 어떻게 남자의 뼈와 여자의 뼈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 아는 방법을 제자에게 가르쳐주십시오."

태상왕은 공주의 경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더한층 움직였다. 귀를 기울여 경건하게 듣고 있다.

부처, 아난에게 고한다.

"남자는 살아 있을 때 절에 가서 경도 읽고, 부처께 절하여 염불을 하니 뼈가 희고 무겁지만, 여자는 뜻이 방자하고 마음이 음탕한 데다가 자식을 낳으면 한 번 생산할 때 피를 서말 서 되를 흘려야 하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되면 여덟 섬 너 말이나 먹여야 하니 이 까닭에 뼈는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슬펐다. 오장이 쥐어짜지는 듯했다. 울면서 아뢴다.

"어찌하면 어머니의 은덕을 갚사오리까?"

공주는 경을 읽으며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태상왕의 눈에도 눈물이 이슬같이 맺혔다. 성비도 울고 모든 궁녀들도 눈물을 머금었다. 경순공주는 계속해서 은중경을 읽는다.

부처, 아난에게 말씀하신다.

"자세히 들으라.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어민, 열 달 동안 자식을 배고 있을 때 무한 신고를 하느니라."

독경 소리는 점점 더 가락을 맞추어 청아했다.

"어미 자식을 배어 한 달이면 뱃속에 태덩이 가냘프고 약해서 마치 풀 끝에 이슬 같아서 아침에 있다가 저물게 스러지기 쉽고 새벽에 있다가 낮에 스러지기 쉬우니라. 두 달이면 회태가 마치 차조기푸링 엉킨 것 같고, 석 달이 되면 흡사히 피가 엉킨 것 같고, 넉 달이 되면 점점 사람의 모습을 지니게 되고, 다섯 달이 되면 어미 뱃속에 오포가 생기나니, 어떤 것이 오포냐 한다면 머리가 한 포가 되어 생기고, 두 팔이 합해서 두 포가 되고, 두 다리가 합해서 또 두 포가 되니 이리해서 다섯 포가 되느니라."

태상왕과 성비와 궁주를 위시하여 젊고 늙은 나인들은 신기한 얼굴빛을 지어 공주의 은중경 읽는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여섯 달이 되면, 아기 눈과 코와 입과 귀, 혀와 뜻의 여섯, 정기가 열리나니, 무엇이 여섯 정기인가. 눈이 한 가지 정기요, 코가 두 가지 정기요, 입이 셋째 정기요, 귀가 넷째 정기요, 혀가 말을 하는 다섯째 정기요, 뜻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창이 여섯째 정기니라."

공주는 계속해서 읽는다.

"어미 뱃속에 일곱 달이 되면, 아기는 삼백육십 뼈마디가 생기고, 팔만 사천 털구멍이 열리느니라. 여덟 달이 되면, 아기의 뜻과 지혜가 생겨나고, 아홉 개 구멍이 열리느니라. 아기 아홉 달이 되면, 배 안에서 음식을 먹기 시작하나니, 복숭아와 배, 마늘도 먹지 말고, 오곡만 먹으라. 어미 뱃속에 생것은 아래로 향하고, 익은 것은 위로 향하여 뫼를 이룩하니, 이 산 이름이 셋이 있다. 수미산이라고도 부르고 업산이라고도 하고, 혈산이라고도 부른다. 이 산이 뭉그러져 한 줄기 피가 되어 아기의 입으로 흘러드느니라. 열 달이 되면 아기 나오나니, 효자 아들은 두 손을 모아 어미를 해치지 아니하며 나오고, 오역의 자식들은 어미 배를 발로 걷어차고, 어미의 심간을 손으로 끌어 잡고 어미의 환도뼈를 다리로 밟나니, 어미는 마치 천 개 칼로 뱃속을 에이는 듯, 이같은 아픔 속에서 이 몸을 낳았으니, 열 가지 은혜를 입었나니라."

모든 여인들은 감았던 눈이 개안이 되는 듯 황홀한 속에서 인생 철학을 느꼈다.

"어미 자식 낳는 날 오장육부가 다 쏟아지고 몸과 마음 기절이 될듯, 피흘러 양과 소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아기 울음소리 건실타 들으면 기쁜 마음 넘쳐서, 눈물이 나고 슬픈 마음 긴장에 사무치느니라."

태상왕을 위시하여 성비와 궁주와 모든 시녀들은 감동이 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공주는 낭랑히 경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목탁을 치며 경을 읽고 경을 읽으며 목탁을 쳤다. 어머니 강비의 생각이 간절하게 난 모양이다.

태상왕 이성계도 옛날 옛적에 어머니가 자기를 낳고 기르던 생각을 했다. 뿐만 아니었다. 공주의 머리 깎고 낭랑하게 경 읽는 가련한 모습을 바라보자, 죽은 강비의 생각도 간절했다. 성비와 궁주며, 모든 궁녀들도 제각기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공주는 계속해서 은중경을 읽는다.

"부모의 은덕은 깊고도 중하다. 사랑이 그지없구나.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자기가 자시면서 눈섭 한 번 찡그리지 아니하시네. 사랑이 지중하니 정을 참지 못하고, 은혜 깊으니 도리어 슬프다. 다만, 아기를 배부르게 하고 자기는 주려도 말을 듣지 아니하네."

공주의 경문 읽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미는 진 자리에 눕고 아기는 마른자리에 뉘네. 두 젖으로 목마르고 주린 것을 채워주고 깁소매로 바람과 추위를 가려주네. 귀여워 돌보며 잠 못 이루고, 예쁘고 아름다워 즐거움 그지없다. 다만 아기만이 평온하기 바라며 자기 자신의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한다."

듣는 사라들은 모두 다 착하고 어린 마음이 되어 솟아나는 눈물을 금할 길 없었다. 공주는 경문을 계속해서 읽었다.

"부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부모의 은덕을 갚고자 하거든, 부모 위하여 이 경을 써서 읽으며, 저지른 죄를 뉘우치라. 그리고 부모를 위하여 삼보를 공양하며, 부모를 위하여 재계를 받으며, 부모를 위하여 시주하고 복을 닦으라. 이리하면, 효자가 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지옥으로 가리라."

공주는 여기까지 읽고 경문을 덮었다. 조용히 부처 앞에 나가, 향을 사르고 절한 후에 태상왕 전하 앞에 절을 올려 합장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먹장삼 입은 공주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 이 경문을 읽고 나를 위하여 뉘우쳐 마지아니하니, 나와 네 어미는 너로 인하여 지옥을 면하겠구나!"

슬픈 얼굴빛을 지어 말했다. 경순공주는 눈을 거슴츠레 뜨고 아버지의 애무를 받으며 경쾌하게 대답했다.

"아바마마, 이제 예불은 끝났습니다. 어마마마의 능침으로 오르사이다."

"절차가 끝났느냐?"

태상왕은 공주의 말을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늙은 주지가 앞에서 태상왕을 인도하고, 공주가 뒤를 따랐다. 성비와 궁주와 모든 궁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법당 아래는 아까 모시었던 연과 옥교가 대령되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능에 오르기 위하여 연에 올랐다.

 

선의 철학

태상왕은 연 위에서 경순공주를 굽어보며 묻는다.

"너는 타지 아니하려느냐?"

"아까도 아뢰었습니다마는, 소녀는 이제 공주가 아니올시다. 수도하는 일개 비구니올시다. 어찌 감히 연에 오르오리까."

공주는 어진 눈매에 웃는 표정과 엄숙한 기상이 반반씩 어린 모습을 지어 조용히 대답했다.

"네 고집도 대단하구나. 내가 고집이 세고, 콧대가 세니, 너도 고집이 대단하구나. 나이 찬 자식의 고집을 어찌할 수 없구나! , , ."

태상왕은 소리를 내어 드높게 웃었다. 뒤에 따르는 성비와 궁주며 모든 궁녀들도 소리를 죽여 입을 가리고 웃었다.

태상왕의 연은 먼저 정릉으로 향하고 올랐다. 성비와 궁주는 자기들이 타고 온 가마에 공주를 오르라고 했다.

"공주마마, 저희들이 타고 온 가마는 어물이 아니올시다. 함께 오르사이다."

공주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사양했다.

"타려면 아까 탔지, 사양했으리까. 저는 다만 수도하는 불제자올시다. 능상쯤 오르는데 탈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내버려 두옵소서."

공주는 가마 타는 것을 또다시 거절했다. 성비와 궁주는 더 어찌할 길 없었다. 아까 절로 향했을 때와 같이 걸어서 능상으로 향했다. 공주는 불안했다. 앞에 가는 무예통장을 손짓해 불렀다.

"성비마마와 정경궁주를 빨리 자비에 올려 모시게 하라."

통장은 무예청들에게 전령을 내렸다.

성비와 궁주는 공주가 아니 타는데 자기들만이 탈 수가 없었다.

"아니옵니다. 공주마마께서 아니 타시니, 저희들이 탈 도리 없습니다. 공주를 모시고 걸어서

오르겠습니다."

"아니되십니다. 아까와 다릅니다. 태산같이 높은 구릉이올시다. 타시옵소서."

공주는 다시 타기를 권했으나, 성비와 궁주는 아니 타고 공주의 뒤를 따랐다.

공주는 완연히 불보살의 모습이었다. 검은 장삼에 석장을 짚고 청초하게 걸어가는 모양은 마치 구름을 타고 연화일지를 손에 들고 가는 관음보살의 모습이었다. 걸음도 빨랐다. 삽시간에 태상왕의 연 뒤를 따랐다. 궁녀와 내시들은 혀를 둘렀다. 홍살문이 뵈었다. 태산 같은 능침이 앞에 당도했다. 공주는 석장을 짚고 가볍게 올랐다. 그러나 성비와 궁주며 모든 궁녀들은 진땀을 빼고 숨이 터게 차서 겨우 능상으로 올랐다. 공주는 날마다 어마마마의 능상에 오른 것이 일과였다. 다리에 힘이 올랐다. 누구보다도 수월하게 올랐다.

태상왕은 강비의 푸른 능침을 바라보니 또다시 비창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혼유석과 망주석이며,문무석과 십이간지의 석물들이 별여 있는 무덤 앞에 당도하자 한숨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게 터져 나왔다. 순간 태상왕의 눈앞에는 무덤이 뻐개지며 강비의 예쁜 얼굴이 나타났다. 방싯 웃음을 풍기며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아직도 백골이 아니었던가?"

태상왕 이성계는 혼자 웅얼거리며 이같이 환상 속에 잠겼다.

"안녕하셨습니까? 오래간만입니다"

강비가 살아 있을 때 그 차분하고 고운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동안 함흥에 계셨다죠? 아깝게 조사의는 성공을 못했답지요. 가엾게 죽었습니다그려."

이렇게 묻는 소리도 들렸다. 무덤 속에서 나타난 강비의 아름다운 환상은 연옥색 자주 회장저고리에 남갑사 치마를 입었다.자주 고름을 바람에 흩날리며 태상왕의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듯했다.

"당신의 조카 조사의의 말을 듣고 그대로 허락했다가 크나큰 무안을 당했소. 당신의 조카는 역적으로 몰려 죽었소!"

태상왕은 강비의 환상을 향하여 이같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아니했다.

"만사를 잊으십시오. 모두 다 허사올시다. 방석과 방번이 억울하게 죽은 일도 모두 다 잊으십시오. 하늘이 시키는 노릇입니다. 이제 저는 아이들과 함께 편안히 극락에 있습니다. 항상 축원해주시고 재를 올려주셔서, 안혼정백이 되었습니다. 신첩이 다 함께 데리고 있으니 이제는 만시름을 잊으십시오. 그리고 나랏일은 방원한테 그대로 맡기신 후에 산수간으로 두루 노시다가 만세 후에 다시 제품 안으로 돌아오십시오. 미소하여 기다리오리다."

태상왕에게 강비의 환영이 나직나직 아뢰는 고운 음성이 옥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들려왔다. 태상왕은 능침 앞에 놓인 향합에서 향 한 줌을 집어 향로에 던졌다. 향연 한 줄기가 푸르게 고리를 그리며 허공으로 흩어진다. 스러지는 향연 사이로 강비의 아름다운 얼굴이 방긋 웃음을 풍겼다. 어질고 착한 누매가 향연 속에 또렷했다. 생시보다도 더한층 착하고 어질게 보였다. 극락세계 연화대에서 부처의 구제를 받고 있으니, 저렇듯 어질고 착하고 단정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태상왕은 강비의 무덤 앞으로 걸어가서 버썩 그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사를 다 잊으리다. 도구나, 이제는 정치에는 손을 떼고, 한 사람의 야인이 되어 한평생을 마친 후에 마마를 따르오리다."

태상왕은 강비의 환상을 향하여 이같이 웅얼거렸다. 강비의 환상이 미소를 지어 태상왕 이성계의 밀어를 듣는 듯했다. 태상왕의 귀에 또다시 강비의 옥음이 들리는 듯했다.

"끝으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배에 태워 물속에 빠뜨려 죽게 한 수많은 수중고혼 왕씨네들을 위하여 크게 수륙재를 열어, 원통한 귀신들을 천도하시고, 그들의 혼령이 의지할 사당을 지어주십쇼. 그리고 포은 정몽주 선생도 사당을 지어서 선비들로 제사를 지내게 하십쇼. 그는 왕씨의 충신이올시다. 그러나 앞으로 이 나라의 젊은 선비들이 그분의 충성을 본받아 나라의 일을 한다면 전하의 충신이 될 것입니다. 크게 표창하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그리고 두문동 칠십이인도 사당을 지어주시어 의지할 데 없는 무주고혼들을 위안시키고 그들의 장한 사적을 선비들이 본받게 하십쇼. 이리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은 크게 이씨 왕조로 돌아올 뿐 아니라 이씨 왕조를 위하여 살신성인 하는 충신 열사가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부디부디 명심하여 처결하라고 조종에 이르시옵소서."

강비의 환상은 향연 속에서 이같이 계시를 주는 듯했다. 태상왕은 고개를 숙였다.

"내 비록 정치에 간여치 않기로 했으나 비의 말씀한 이 일은 주기 전에 꼭 시행하오리다."

태상왕은 이같이 염하고 다시 능상을 바라본다. 향연이 스러지는 곳에 강비의 환상도 안개 슬 듯 스러져버리고 말았다. 태상왕 이성계는 너무나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넋을 잃고 우뚝 섰다.

이때 공주가 먹장삼에 붉은 가사를 메고, 능상에 올라 능침을 향하여 네 번 큰절을 올리고 고요히 합장하여 묵념을 드린다. 태상왕의 눈에는 이제 강비의 환상도 보이지 아니했다. 다만, 옆에서 묵묵히 배례를 드리는 공주가 보일 뿐이다. 능침 아래는 성비와 궁주와 상궁과 나인이며, 많은 관원들이 나열해서 배를 드린다. 공주는 능 앞에 허배한 후에 아바마마가 우뚝 서 있는 앞으로 나갔다.

"아바마마, 앉으시옵소서. 재실에 앉으시는 것이 더 다정하실 것입니다."

"옳다. 좋은 소리다.네 말은 버릴 것이 없구나. 이제는 내가 임금이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의 야인이다. 푸른 잔디밭에 앉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런 일이냐."

태상왕은 말을 마치자 털썩 잔디에 주저앉는다. 능침 제절 아래서 이 모양을 바라보는 늙은 상궁은 급히 무예통장에게 연통했다.

"태상왕마마께서 잔디밭에 그대로 앉으셨소. 빨리 자리를 깔아드리시오."

상궁의 말을 듣는 무감은 급히 연 앞으로 나가서 화문석 자리를 걷어 능상으로 올랐다. 무감이 화문석을 들고 태상왕께 고했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옥체에 습기가 범하옵니다. 자리에 앉으시옵소서."

태상왕은 손을 저어 대답한다.

"자리를 깔 필요가 없다. 푸른 잔디는 비단 자리보다 좋다. 염려 말고 자리를 걷어 내려가거라."

무감은 더 권할 수 없었다. 자리를 걷어 물러났다.

"아바마마, 조용히 어마마마의 능침 앞에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오오, 무슨 말이 있느냐."

태상왕은 귀여운 딸의 얼굴을 미소를 지어 바라본다.

"재실에서 아뢰어야 온당할 것을 이목이 번다하여 이곳에서 아룁니다."

"어서 말을 해라."

"아바마마, 왜 소녀하고 지난해에 약속하신 일을 실행하지 아니하시고 딴 일을 하셨습니까?"

공주의 음성은 더 한층 낮았다. 태상왕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무슨 약속을 어기었느냐? 그리고 또 내가 어떠한 딴 일을 했더냐?"

태상왕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공주와 약속한 일이 생각나지 아니했다.

"아바마마, 왜 조사의가 반역하는 군사를 일으킬 때 어찌해서 승낙을 하셨습니까? 다시 아뢰옵거니와 어마마마 능침 앞에서 말씀드립니다. 조사의의 일을 승낙하신 일은 어마마마께서 생존하셨다 해도 반대하셨을 것입니다."

태상왕은 깜짝 놀란다. 뜻밖이었다. 경순공주가 몇천 리 밖에서 이 일을 어찌 알았을까 하고 눈이 둥그렇게 크게 떠졌다.

"네 어찌 그 일을 아느냐?"

"온 나라가 소용돌이쳐 지냈는데 어찌 소녀가 그 일을 모르겠습니까. 그리하옵고 오라버니께서 친정군을 거느리시고, 안주 청천강까지 가셨는데 어찌 그 일을 모르겠습니까."

태상왕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소녀는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무엇이 부끄러울 것이 있느냐?"

"어마마마와 작은 동생 방석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아바마마께서는 조사의를 대장으로 삼아서 동북면과 서북면으로 여진군들을 거느리고 송도로 쳐들어와서 방원 오라버니를 토벌한다 하고, 오라버니는 아버지를 쳐 무찌르기 위하여 함흥으로 쳐들어간다고 소설이 대단했습니다. 정권 다툼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칼을 빼들고 서로 다툰다는 이 소식을 듣고 아바마마의 혈육을 받은 소녀로서, 비록 배는 다르다 하나 방원 오라버니와 뼈를 같이 한 소녀로서 어찌 마음이 편할 리가 있습니까. 아바마마, 생각해보옵소서."

공주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했다. 공주는 말을 다시 계속했다.

"형과 아우가 정권 다툼으로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던 그 일을 생각해보아도 몸에 소름이 쪽쪽 끼치고 얼굴이 달아서 남을 대해 볼 수 없었사온데, 이제는 또다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칼을 빼어들고 서로를 역적이라고 해놓았으니 부끄러움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태상왕은 잠자코 말이 없다. 조용히 눈을 감아 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가슴 한복판을 부드러운 솜방망이로 찌르는 듯했다. 인간다운 양심이 물결쳐 일어났다. 공주는 다시 음성을 낮추어 태상왕께 고한다.

"백성들은 모두 다 이씨왕실을 손가락질했습니다. 삼강오륜이 끊어진 집안이요, 도의와 도덕이 땅에 떨어진 이씨네라 했습니다. 등에 땀이 나지 아니하고 배겨나겠습니까. 소녀는 몇 번이나 목숨을 끊어 죽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께서 소녀에게 죽어서는 아니 된다고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살아서 악을 소멸시키고, 선을 도와주는 것이 크나큰 불제자의 임무라 하셨습니다. 소녀는 부처의 계시를 받고 비로소 약간의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이리하와 다시 살아서 아바마마의 생각하시는 것을 바로잡을 결심을 했습니다."

공주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약간 흥분된 얼굴이다. 아름다운 두 볼이며, 호수 같은 맑은 눈에 분홍빛 홍훈이 돌았다.

"이번 환도하실 때도 아바마마께서는 잘못하셨습니다. 오라버니 방원이 마중을 나왔을 때 아바마마께서는 활을 들어 오라비를 쏘셨다 합니다. 다행히 조정에 꾀 있는 재상이 있어서 맞이하는 문에 중간 기둥을 세워서, 오라비가 죽음을 면했다 합니다. 만약, 아바마마의 활 잘 쏘시는 솜씨로 기둥이 없어서 방원 오라비가 목숨을 잃었던들 이 일은 어찌 되고 말았겠습니까?"

태상왕은 몹시 무안한 모양이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이 소문을 듣고 비웃었다 합니다."

공주는 또 한 번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뿐 아니라, 소녀는 또 한 가지 일을 보고 가슴이 더 한 번 아팠습니다."

"또 무엇이란 말이냐?"

태상왕은 무아한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바마마께서는 활로 방원 오라비를 쏘아 실패하신 후에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연회를 받으시는 환영잔치에 방원 오빠가 술을 드리는데, 중간에 내관을 사이에 두고 잔을 올렸다 합니다. 그때 아바마마께서는 잔을 받으신 후에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서 앞에 내던지시면서 '하늘이 시키는 일이다, 어찌 할 수 없구나.'하고 한탄하셨다 합니다. 이 소리를 소문으로 듣고 제 마음이 어찌 아프지 아니했겠습니까. 오라버니 편에서는 좋아서 일부러 이런 소문을 내느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백성들이 바라볼 때 '아버지와 아들은 불상견의 원수로구나' 하고 고개를 흔들어 아버지의 인격과 오라버니의 욕심많은 행동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형제의 윤리가 임금 자리싸움으로 인하여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끊어졌고, 부자지간의 은정이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끊어졌으니 소녀는 무슨 낯으로 사람을 대하오리까?"

경순공주의 눈에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눈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태상왕은 공주의 눈물을 보자 마음이 구슬펐다.

"네 말을 들으니, 나는 나이 칠십이 넘었건만 아직도 철이 안 든 것 같구나."

태상왕은 추연히 한숨을 지었다. 공주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 머금은 눈으로 상긋 웃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아직도 선머슴마냥 젊으십니다. 호호호."

"백발이 눈같이 희고 흰 수염이 한 자가 넘는데, 선머슴이라 하느냐, 하하하"

"외양은 늙으셨으나, 마음은 젊으셨습니다. 그러하니, 조사의의 말씀도 들으시고 활로 아들도 쏘시고 철퇴로 아들을 죽이려 하셨습니다. 아바마마는 생각과 마음이 하늘과 바다와 같이 넓고 넓으신 창업지주로 알았더니, 아직도 소년 장군이신 그 모습이 남아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오이다. 남선북마로 왜적과 호병을 무찌르시던 아바마마가 아니시라, 이제는 임금 위에 상왕이 계시고, 상왕 위의 태상왕 자리에 앉아 계신 아바마마이십니다. 젊으셨을 때 그 마음을 잊으시고 모든 불평을 다 씻어버리신 후에 이 나라가 계계승승 잘되기를 축원하시면서 한가히 해와 달을 보시며 만수무강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태상왕은 공주의 말을 듣자, 크나큰 회오와 인생에 대한 심욕이 너무나 지나쳤던 것을 뉘우쳤다.

", 너의 말을 깊이 폐부간에 새겨두리라. 너의 말과 태도는 과연 불제자의 큰 뜻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과연 불교의 힘은 크다 하겠다."

"아바마마, 소녀가 전에 간곡하게 부탁해 아뢴 일이 있었습니다. 일이 있는 것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아뢰었습니다. 인과응보를 쫓으시라고 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용의 모습이요, 범의 기상이라 했습니다. 구름은 용을 따라 일어나고 바람은 범이 움직이는 곳에 일어난다고 아뢰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움직이시면 또 바람과 구름이 일어날 테니 모든 인과응보를 순리로 받으시라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송도나 한양에 계시고 함흥에는 가시지 말라고 아뢴 것이 아니오니까. 아바마마,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십시오. 함흥으로 가신 후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비가 왔습니다. 함흥차사라는 끔찍한 새로운 말이 생겨났고, 조사의의 난리가 나서 부자가 서로 싸운다는 향기롭지 못한 말이 세상에 가득했고, 그로 인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올시다. 그리하옵고 아바마마께서는 무면도강동격이 되셨습니다. 무슨 낯으로 오라비를 대하셨습니까. 어떻게 만조백관들을 대하셨습니까. 그래도 아바마마께서는 활을 쏘아 아들을 죽이려 하셨고, 철퇴로 잔 드리는 아들을 범하려 하셨습니다. 기막힌 일이 아니옵니까. 모두 다 소녀의 동하시지 말라는 말씀을 아니 들으신 때문입니다."

경순공주의 얼굴엔 범치 못할 기상이 드러났다. 태상왕은 경순공주의 조리 있게 아뢰는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았다.

"너는 과연 나의 스승이다. 좋은 딸을 두어 내 마음이 흡족하다. 모두 다 네가 부처의 큰 감화를 받은 때문이다. 마음으로 위대한 불력에 감사할 뿐이다."

태상왕은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진시으로 공주의 말과 태도가 이제는 훌륭한 철인의 경지에까지 나간 것을 감탄해 마지아니했다. 공주의 깎은 머리와 흑장삼은 그의 조촐한 얼굴과 함께 더욱 빛을 뿜는 듯했다. 다시 붉은 입술을 열어 태상왕께 고한다.

"아바마마, 오라비 방원을 미워하는 품은 아바마마보다 소녀가 더 합니다. 열 곱절, 백 곱절

더합니다. 오라비는 소녀의 하늘 같은 남편을 죽였습니다. 소녀와 어미를 같이한 동복형제를 둘씩이나 죽였습니다. 아마 소녀까지도 죽여 없애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것입니다. 이곳 어마마마의 능침을 아바마마께서 화려하게 꾸미시고 흥천사원찰을 웅장하게 지으신 것도 모르면 모르되 방원 오라비는 무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소녀가 청상과부의 몸이 되어 머리 깎아 중이 되어 멀리 아바마마의 곁을 떨어져 있는 것도 방원 오라비때문이올시다. 방원 오라비는 소녀를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생활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공의 세계로 던져버렸습니다. 아니올시다. 공과 무가 아니라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져버리게 했습니다. 그러하니 소녀는 방원 오라비와 함께 하늘을 같이하여 머리에 일 수 없고, 땅을 함께 해서 서 있을 수 없는 존재올시다. 그러나 소녀는 불제자가 된 후에 주름진 마음을 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원망절정에서 무한대의 푸른 하늘을 응시해보았습니다.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오라비를 용서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오라비는 아바마마의 아드님이십니다. 소녀하고는 뼈를 같이했습니다. 어찌합니까. 끊을래야 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그의 성격에 따라서 무한대한 욕심을 억제하는 사람이 있고 한없는 욕심을 그대로 발동시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방원 오라버니는 무한대한 욕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아바마마, 이 점을 생각하시어 이제는 방원 오라비의 모든 잘못을 풀어주시고 다만 이 나라 이 강토에 사는 모든 백성들, 푸르고 창창한 백성들이 시들지 않고 잘 살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바마마, 이 나라는 아바마마나 방원 오라비의 독점물이 아니옵니다. 아바마마나 방원 오라비의 사사로운 재산이 아니옵니다. 모든 창생의 나라요, 만백성들의 것입니다. 아바마마와 방원 오라비가 상극이 되어 다투시는 날 나라는 피폐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맙니다. 깊이 통촉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순공주의 아뢰는 말은 곧 성자의 경지에 들어 있는 관음보살의 계시였다. 말소리마다 향기가 돌고 선의 진리가 은은히 여운을 풍겼다. 더구나 흑장삼에 백팔염주를 늘이고 도란도란 조용하게 아뢰는 그 태도는 인간 이상의 신묘한 자세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음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너의 말은 마치 남해 관음보살의 갸륵한 말씀을 듣는 듯하고나. 마디마디 옳은 소리다. 나도 이제는 마음을 씻고, 지나간 모든 잘못을 뉘우친다. 앞으로 모든 일을 방원한테 맡기고, 한가로운 마음으로 산수간에 놀면서 하늘이 주시는 천수를 조용히 마치리라."

태상왕은 모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앞으로 깨끗하고 청정한 마음을 가져서 한가롭게 여생을 마치겠다고 따님 공조 앞에 술회했다. 경순공주는 태상왕께 다시 아뢴다.

"아바마마, 다시는 조사의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아바마마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할지라도 절대로 응하지 마시옵소서. 이런 일이 더 한층 아바마마의 판단하시는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옵니다."

공주는 더 한 번 못을 박아서 고한다.

"염려하지 마라. 너의 말을 명심하리라."

아버지의 쾌한 승낙을 받은 공주의 볼에는 불그레 화기가 떠돌았다. 안심이 된다는 듯 고요히 미소를 던졌다.

"자아, 그만 재실로 내려가자."

태상왕은 아까 처음 능상으로 오를 때와는 훨씬 다른 가벼운 심경으로 재실을 향하고 내려갔다. 아까 무덤 앞에서 보이던 강비의 환상도 이제는 보이지 아니했다. 임금인 방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마음도 풀리기 시작했다. 태상왕이 연에 오르자, 경순공주는 어마마마 능침을 향하여 향을 살라 혼령을 위로한 후에 두 번 절하고 능상에서 물러나 아바마마의 뒤를 쫓았다. 성비와 궁주는 제절 아래서 모든 궁비들고 함께 능상을 향하여 예를 올린 후에 태상왕과 공주의 뒤를 따랐다. 시종하는 관원들도 천천히 뒤를 따랐다. 이날 밤에 공주는 암자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재실에서 성비와 궁주와 함께 아바마마를 모시고 지내기로 했다.

"하도 아바마마를 못 모시었습니다. 오늘 하룻밤만 아바마마를 모시고 재실에서 드새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며칠이나 묵으시겠습니까?"

공주는 미소를 띠고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암자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나와 함께 지내려 하느냐. 내 마음이 든든하고 푸짐하다. 네가 만약 계속해서 재실에 유한다면 나는 물외한인이다. 일이 없는 사람 아니냐. 네가 묵을 때까지 있기로 하겠다."

아버지 태상왕은 새삼 다시 딸이 귀여웠다. 부드러운 말로 공주를 애무했다. 공주는 더한층 아버지의 부성애를 느꼈다. 미소를 지어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꽃같이 활짝 핀 명랑한 웃음이었다.

"아바마마, 출가한 불제자의 몸으로 하루 동안인 단 하룻밤만 사친을 위하여 효성을 다하겠습니다. 단 하루올시다. 더 이상은 모실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나와 함께 있으면 부처님께서 벌을 주시느냐? ,,."

태상왕은 허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는 웃음을 스러뜨리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다시 태상왕께 고한다.

"벌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굳센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려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정한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사람의 지조가 아니올시다. 소녀는 한평생 어마마마와 남편의 명복을 빌다가 그들의 곁으로 돌아가 편안히 잠들려 합니다. 이것이 한평생의 대원이올시다."

태상왕은 딸에게 대한 연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다시 궁으로 돌아가기로 하자꾸나. 이제는 세월이 흘렀다. 시름과 번뇌도 엷어지고......."

태상왕은 한숨을 지으며 공주에게 권했다. 공주는 고개를 살며시 가로 흔들었다. 재실에 켜놓은 옥등잔 불빛이 새파랗게 깎은 공주의 머리 위로 비쳤다. 먹장삼 어깨에 걸쳐 있는 자줏빛 가사가 불빛에 비쳐서 더한층 광을 뿜었다.

"아바마마, 다시는 그런 분부를 내리지 마시옵소서. 이 몸의 머리는 애당초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깎아주신 머리가 아니올시다. 아바마마의 어수로 깎아주신 머리올시다. 소녀의 앞길을 가엾고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삼단 같은 머리를 아바마마께서 잘라주신 머리올시다. 만약 그때 아바마마께서 저로 하여금 불제자가 되게 아니하셨던들 소녀는 벌써 사람의 구실을 못하고 실성한 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결을 해서 죽었을 것입니다."

공주는 말을 계속한다.

"오늘날 소녀의 정신과 육체를 유지하여 살아온 힘은 다만 승려가 되어 부처께 의지한 덕입니다. 이제 소녀는 부처를 배반하고 궁으로 돌아가 아바마마를 모시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저 불효막심한 자식이올시다마는 그대로 한평생을 불제자로 마치게 해주십시오."

공주는 말을 마치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불빛에 반사되는 이슬방울 같은 눈물은 새파랗게 깎은 머리와 먹장삼으로 해서 더한층 애련했다. 태상왕은 마치 선보살이 눈물을 머금어, 애처롭게 하소연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딸이 아니라, 곧 남해 관음보살이 자기 앞에 나타나서 인생의 무상과 불력의 큰 힘을 호소하는 듯 생각되었다. 태상왕의 마음은 경건한 불제자의 경지로 돌어갔다.

"좋다. 너의 굳은 결심을 억지로 꺾지 아니하련다. 다시 대궐로 돌아오지 말고 부처의 제자가

되어 창생을 널리 구제하면서, 너의 마음과 몸을 더한층 조촐케 하라. 이것이 곧 너의 어마마마의 영을 위로하는 길이요, 너의 남편이 억울하게 마친 세상을 네가 대신 빛나게 하는 길이다. 공주, 너는 하룻밤만 네 말대로 나와 함께 지내고 내일은 도로 암자로 돌아가거라."

"아바마마께서는 어마마마의 능침에 며칠이나 더 유하시렵니까?"

"너의 불법을 더 방해하지 아니하련다. 너와 함께 이 밤을 너의 엄마를 위하여 지킨 후에 내일은 양주로 떠나려 한다. 회암사에 들러서 재를 올리고, 대자연의 경치가 좋은 송산과 풍양이며 연천 소요산으로 왕래하면서 여생을 보내기로 하겠다."

"상감께서 다시 한양으로 오신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같이 된다면 아바마마께옵서 양주나 연천으로 왕래하시기가 더욱 편하실 것입니다. 더구나 한양은 소녀가 있는 곳이오니, 아바마마를 가끔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대궐로 들어가시지 아니하와도 마음에 든든하겠습니다."

경순공주는 눈물을 거두고 명랑한 웃음을 보였다. 절에서는 태상왕 전하를 위하여 깨끗한 소찬이 나왔다. 더구나 이번 행차에는 새로 태상왕의 배필이 된 성비와 정경궁주가 배행을 온 까닭에 새로운 시주가 많았다. 흥천사 주지는 처음은 성비와 궁주의 수명자수를 비는 재를 올려서 그들의 시주한 공을 갚았다.

태상왕 전하께 바친 밤참 수라가 물려진 후에 재실 협방에는 공주와 성비와 정경궁주를 대접하는 담담하고 향기 높은 소밤참이 나왔다. 소전골에 소만두, 표고탕에 더덕구이, 도라지 생채에 튀각과 다시마탕, 녹두채에 자옥채, 고비나물, 취나물에 송이구이, 숙수버섯에 꾀꼬리버섯, 갖은 정성을 들여서 맛있게 차린 소음식상이 궁중음식과 다른 순수한 소찬으로만 나와서 두 궁인의 미각을 놀래주었다. 성비는 소찬 음식을 맛있게 자시면서, 공주를 향하여 치사하는 말을 보낸다.

"난생처음으로 이같은 소찬을 대합니다. 향기가 높고 담백해서 오히려 기름진 음식보다 낫습니다. 느끼하지 아니하고 담박해서 좋습니다."

"음식은 담박해야만 많이 먹습니다. 용미봉탕이 좋다 하나 한두 끼 먹으면 싫증이 나는 법입니다."

공주가 미소를 지어 조용히 대답한다.

"고기 먹는 사람보다, 소찬을 먹는 사람이 도리어 장수한다 합니다. 그러기에 절간에 도를 닦고 계신 고승 대덕들이 모두 다 장수를 하지 아니합니까. 그것은 음식이 담박해서 기름이 지지 않는 까닭이올시다."

"사람이 오래 살려면 옥심을 누르면 수를 한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욕심으로 시작해서

옥심으로 끝을 맺어서 결국은 망해버리고 맙니다. 욕심을 피지 않는 사람은 담담한 음식을 즐기고, 욕심이 강한 사람은 기름기 많은 고기를 즐깁니다. 채소를 즐기는 사람은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니 정신이 쇄락해서, 저절로 장수하게 된다 합니다. 산중에 도를 닦고 있는 대덕 고승들이 항용 구십 세 이상씩 장수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라 합니다."

공주의 말을 듣는 모든 여인들은 모두 다 새로운 계시를 받는 듯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모두 다 헛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공주는 성비와 궁주를 바라보며 인생의 진리를 말했다. 공주는 소전골 국물을 술질해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성비와 궁주께 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성비와 궁주는 공주가 청할 말이 있다 하자, 너무나 감격했다. 두 여인은 치마를 쓸고 대답했다.

"황공하신 분부올시다. 공주마마께서 저희들한테 청할 말씀이 계시다니 말이 됩니까?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전들 어찌 두 분께 청할 일 없으리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공주는 다시 얼굴빛을 화하게 하며 대답했다.

"말씀해보십쇼. 무슨 일이오니까?"

성비가 물었다.

"이제 빈도는 공주가 아니라 절간에 있는 불제자올시다. 그러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아바마마를 잊을 수 없습니다."

공주의 목소리는 새삼 구슬펐다. 성비와 궁주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듣고 있다.

"아바마마께서 참말이지 만년에 가엾도록 쓸쓸하고 호젓하게 지내셨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진심으로 아바마마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물론 궁중엔 시녀들이 있어서 그 어른을 받들어 모시었습니다마는 아바마마마의 마음이 편안하시도록, 가려운 곳을 긁어드리도록 받들어 모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제 두 분께서 우리 아버지를 받들어 드리게 되었으니 이런 기쁜 일이 또다시 있을 수 없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자 궁주가 몸을 피하며 대답한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성비마마나 소인이 어찌 태상왕 전하의 뒷 배를 유감이 없도록 보아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지극한 정성을 다하려 합니다. 용렬하와 진선진미치 못할까 하와 두렵습니다."

"두 분께서는 나의 서모이십니다. 어머니가 돌아가 아니 계신 빈소는 어머니께 청을 하듯 두 분께 청을 합니다. 두 분께서는 한 몸 한 뜻이 돼서 우리 불쌍한 아버지를 오래 오래 사시도록 모시어주기 바랍니다."

공주의 부탁이 하도 정중하니 두 여인은 얼른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성비와 정경공주는 눔을 내리깔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한동안 후에 성비는 눈을 들어 공주를 바라보고 고한다.

"공주마마의 뜻깊은 말씀을 저희들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태상왕 전하의 만세 향수는 공주마마나 저희들이 다 함께 소원하는 바올시다. 무슨 분부인지 깨닫지 못하겠나이다."

"성비 말씀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너무나 돌연한 말씀을 꺼내서 얼른 못 알아들으셨나 봅니다. 아까 소찬을 먹으면서 욕심을 없애면 오래 장수한다는 이야기가 나서 아바마마를 위한 마음에서 돌연 이같은 생각이 났습니다. 두 분께서는 비록 두 몸이시나 한 몸이 되시어 서로 시새고 질투하지 마시고 아바마마를 받드시어 그분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십시오. 이같이 하신다면 아바마마께서는 착하신 두 분의 힘을 받아서 백세향수를 하실 것입니다. 그저, 자리 쌈을 해서 다투지 말고 화하게 지내 달라는 부탁이올시다."

성비와 정경공주는 비로소 공주의 뜻을 알았다. 정경공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야 공주마마의 청하신다는 참뜻을 알았습니다. 욕심을 부려서 질투하고 시샘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그려. , , , 저희들은 비록 젊은 나이올시다마는 투가하고 시샘하는 일은 이미 단념했습니다. 태상왕 전하의 춘추는 이미 칠순이 넘으셨고 저희들의 나이 겨우 이십밖에 아니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이미 희생이 된 것으로 각오하고 궁중에 들어왔습니다. 칠십 넘은 노인한테 무슨 희망이 있다고 성비나, 소인이 샘을 내고 질투를 하겠습니까? 이간질을 치고 베개송사를 하겠습니까? 저희들은 이미 대궐에 들어온 후에 서로를 의논했습니다. 표고죽은 마시고 소전골을 먹듯 담담하게 욕심을 내지 않고 지내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희들이 지금 태상왕 전하를 모시고 수태로 아들을 낳겠습니까, 딸을 낳겠습니까? 틀린 노릇입니다. 모든 욕심과 싸움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법인데 무엇 때문에 싸움을 하겠습니까? 공주마마, 이 점만은 안심하십시오. 하하하."

정경공주의 말하는 소리를 듣자 성비도 목청을 높여서 깔깔 웃었다. 흑장삼에 붉은 가사를 멘 경순공주도 미소를 머금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공주는 미소를 머금고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그런 심경이시라면 다시 더 말씀을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행이올시다. 그렇다면 앞으로 아바마마의 마음을 더한층 편안케 해드리기 위하여 상감이 태상왕부로 또다시 후궁을 바친다 해도 두 분께서는 태연히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실 텝니까?"

공주는 상글거려 웃으며 성비와 궁주를 바라보았다. 정경공주는 거침없이 말한다.

"성비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마는 소인은 아무 자극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샘을 낸다는 일은 공주마마께서 아까 말씀하신 대로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움직여질 대상이 없는데, 질투와 시샘이 일어날 까닭이 만무합니다. 아무리 소인보다 자태가 더 고운 후궁이 또 들어온다 하더라도 소인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성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경궁주의 목소리는 걸걸하고 쾌활했다. 안존한 성비는 배시시 웃으며 궁주의 말에 대답한다.

"나 역시 궁주와 같은 생각을 가졌소. 태상왕 전하께서 젊으신 분이라면 혹시 질투를 할런지 모르겠소마는 이제 다 늙으신 분인데 후궁을 다시 삼천 궁녀를 두신들 무슨 샘이 나겠소. 하하하."

"자아, 그렇다면 공주마마께서는 저희 두 사람한테 대해서는 턱 마음을 놓십쇼."

"고맙소이다. 그저 아바마마께서 오래오래 사시도록 마음을 편안케 해주십시오."

공주는 또 한 번 부탁했다. 그러나 성비와 정경궁주의 얼굴에는 한 줄기 쓸쓸하고 어둔 빛이 감돌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튿날 태상왕 이성계는 능침에 다시 올라 창연히 강비 무덤을 둘러 보아 작별을 한 후에 성비와 정경궁주와 함께 예정한 대로 양주로 향했다. 경순공주는 흥천사 동구 밖까지 나와서 태상왕의 행차를 전송한다.

"아바마마, 안녕히!"

공주는 한 마디 하고 태상왕을 우러러 본다. 바람에 흩날리는 태상왕의 백수가 그의 마음을 더한층 아프게 했다.

"공주야, 잘 있거라. 다녀서 오리다. 대궐에는 네가 아니 온다 하니, 내가 양주에 있는 동안 회암사나 소요산으로 가끔가끔 놀러오너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소요산과 회안사는 예로부터 도승들의 도통하던 곳이라 합니다. 틈을 타서 문안을 드리러 가겠습니다."

공주는 발길을 돌려 성비와 정경궁주의 앞으로 나갔다. 연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소. 그러나 길이 총총하니 어찌할 수 없구려. 부디 내 말씀을 저버리지 마시오. 가엾은 우리 아버지의 노래도 부탁합니다."

"염려 맙시다. 저희들은 담담여수하게 지내렵니다. 질투를 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을 놓으십시오."

성비와 정경궁주는 공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성비와 정경궁주는 공주한테 고개 숙여 다정하게 인사하고 태상왕의 뒤를 따랐다. 궁녀와 백관들도 태상왕 뒤를 따랐다. 태상왕 이성계는 경복궁은 바라보지도 아니했다. 정이 떨어진 때문이다. 그 지긋지긋한, 세자 방석이 죽은 그 궁궐을 바라보기도 싫었다. 태상왕은 동소문턱에 당도하자 영을 내렸다.

"백관과 궁인들은 송도서부터 나를 배종하느라고 많이 고단하겠다. 이제부터는 한양 신도의 동소문 밖이다. 모든 공식절차를 폐지하는 것이 좋다. 의장대들은 흩어져 돌아가게 하라. 태상왕이 이같이 분부했다고 상감한테 고하면 상감도 꾸지람을 아니하니라."

태상왕는 공식행렬을 풀었다. 백관과 궁인들은 태상왕의 분부에 따라 공식 행차를 중지하고 태상왕의 만세를 불러 송도로 돌아간다. 태상왕은 성비와 궁주와 함께 양주 회암사로 향했다. 사흘 동안 묵은 후에 강비와 방석의 외로운 혼을 위하여 재를 올린 후에 주지를 불렀다.

"이 근처에 산천이 수려하여 경치를 상줄 만한 곳이 있느나?"

"양주 땅에 경치 좋은 곳으로는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이 다 경치 좋은 곳이올시다마는 또다시 한 군데 소요산이 있습니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이곳 굴속에서 득도했다는 곳으로 폭포가

떨어져서 비류직하 삼천 척은 못 되옵니다마는 눈을 뿜는 듯 여름 한 철 더위를 잊을 만하옵고, 기암절벽을 이룬 무수한 봉우리는 마치 그 형태가 금강산 한 귀퉁이를 떼다 놓은 듯하와 세상에서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하옵니다. 여기다가 또 세단풍이 타는 듯이 고와서 마치 설악산과 내금강의 만폭동 단풍을 연상케 하옵니다. 단풍의 고운품은 내금강을 제쳐놓고는 다시 그 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양주 땅에 그런 절경이 있더란 말이냐?"

금강산을 밟아보고 설악산과 오대산을 찾아본 태상왕은 천하절승 금강산과 오대산의 모습이

눈에 아물거렸다. 나라의 정사를 내던진 후 세상만사에 뜻이 없는 태상왕은 정릉에서 공주의 말을 들은 후에는 더한층 진세인간의 세상에서 초탈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번에도 양주 회암사에서, 돌아간 강비와 방석들의 큰 재를 올려서 그들의 명복을 빈 후에 모든 속세를 작별하고 금강산이나 설악산, 오대산으로 들어가 산과 물을 벗 삼아 호연한 기상을 기르면서 남은 세월을 마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공주가 간곡하게 부탁한 것과 같이 또다시 금강산이나 오대산으로 들어간다면, 둘째, 셋째 조사의가 또 나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록 둘째, 셋째 조사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임금 방원과 그들의 신하들은 또다시 자기의 일거일동을 의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공연히 또다시 그들 집권자의 의심을 살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태상왕은 금강산과 오대산에 갈 것을 단념하고 양주 근처의 아름다운 경치를 주지한테 물었던 것이다.

"소요산이 소금강의 명칭을 가졌더란 말이냐. 과연 등하불명이로구나. 내일 이른 아침에 소요산으로 향할 테니 주지는 앞을 서서 인도하라."

"삼가 성지를 받들어 소요산으로 인도하오리다."

주지는 손을 모아 대답했다.

태상왕은 이튿날 주지를 앞세우고 성비와 정경궁주와 함께 소요산으로 향했다. 태상왕이 소요산을 바라보니 과연 주지의 말대로 금강산 한 귀퉁이를 그대로 고스란히 옮겨논 기막힌 절경이었다. 봉우리마다 푸르다 못해 남빛으로 찬란한데 시시각각 햇빛을 받아 산 얼굴이 아름답게 변해갔다. 폭포는 내리질리고 안개와 구름은 산골짜기에 일어나서 찬기운을 뿜었다. 한양의 삼각산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불암산이나 수락산 따위에 비 할 바가 아니다. 태상왕은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했다.

"한양 근교의 삼각산을 빼놓고 이같은 명산이 있는 것을 몰랐구나. 애를 써 금강산에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산다운 산을 바라볼 수 있구나."

태상왕은 말을 마치자 주지를 앞세우고 소요산 상봉으로 천천히 올랐다. 멀리 보개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구름밖에 솟아 있다. 태상왕은 손으로 보개산을 가리킨다.

"저 산이 보개산이 아니냐?"

",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소요산은 보개산맥이로구나. 보개산 산맥이 떨어져서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창공을 헤쳐가며 굼실거려 내리다가 여기 우뚝 솟아서 소요산이 되었구나. 과연 명산의 정기를 받지 아니하고 이같은 금강산의 한 귀퉁이를 배판할 수 있느냐."

", 그러하오이다. 소요산은 보개산맥이옵고, 보개산은 한때 삼한 천지를 진동하던 궁예 장군이 말을 달려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곳이옵니다."

"그렇지. 신라의 왕자로서 북원 양길한테 투신했다가 마침내 큰 뜻을 품고 후고구려를 일으켜서 왕건 태조가 고려를 건설할 때까지 큰소리로 삼국을 흔들어놓던 그 궁예로구나."

", 그러하옵니다. 궁예 역시 천하의 영웅이었습니다마는 덕을 닦지 못하고 마음이 너무나 조급해서 마침내 크나큰 대업이 왕건 태조한테로 돌아갔습니다. 왕씨네는 덕을 많이 끼친 임금들이올시다."

주지는 무심코 말을 해놓고 스스로 깜짝 놀란다.

'공연히 말을 함부로 했구나.'

얼른 혀끝을 깨물었다. 그러나 말은 벌써 입 밖으로 나갔다. 거두려야 거둘 수가 없었다. 슬며시 태상왕의 눈치를 살폈다. 왕건 태조가 건국한 고려를 엎어 놓은 태상왕 앞에서 왕건 태조와 그 자손을 예찬했으니,주지는 태상왕의 심경이 어찌 돌아갈지 마음이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상왕 이성계의 얼굴빛은 변하지 아니했다. 주지는 태상왕의 용안에 조금도 격한 빛이 없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가만히 숨을 내쉰다. 겁에 질려서 막힌 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두군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태상왕은 태연히 대답한다.

"왕건 태조는 무한 너그러웠던 분이지. 마음은 하늘과 같이 넓고 덕을 많이 쌓아놓았던 분이거든. 그래서 통일 삼한을 하는 데 신라 경순왕이 무혈양국을 하지 아니했던가. 그뿐인가, 항복한 경순왕한테는 자기 딸 낙랑공주를 하가 시켜서 부마까지 삼았거든. 과연 왕건 태조는 관후장자지."

이번엔 태상왕이 말을 마치자, 가볍게 한숨을 쉰다. 용안에는 초연한 빛이 감돌았다. 왕건 태조의 너그럽고 후하고 착한 데 비하여, 자기는 너무나 잔인하고 악착스럽고 사람을 의심했던 모든 일을 아프게 뉘우치는 일이 현연했다.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포은 선생을 철퇴로 때려죽이고, 두문동 칠십이인의 집단지인 두문동에 불을 지르고, 왕씨란 왕씨는 모조리 배에 실어다가 바닷속에 수장 해버렸다. 대부분의 일은 아들 방원과 신하들이 한 짓이지만 그 책임은 전부 자기 자신이 져야만 한다. 너무나 참혹한 짓이었다. 오늘날 이씨왕실에 골육상쟁이 되는 불쾌한 일들은 너무 지나치도록왕씨를 박해한 그 보복이 자기 당대에 이같이 정신의 고통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벼운 한숨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름으로 화해 나온 것이다. 태상왕은 모든 죄악을 씻고 싶은 생각이 더한층 간절했다.

"이 좋은 명산이 좋은 절이 없으니 한스런 일이다."

태상왕 이성계는 수려한 봉우리와 높은 언덕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절이야 있습지요. 아까도 말씀한 대로 원효대사가 도를 닦던 석굴도 있사옵고, 저편 상상봉에 오르면 조그마한 암자도 있습니다."

"암자 하나를 가지고 많은 대중을 용납할 수 있느냐. 크나큰 도량을 한 채 지을 만한 곳이다."

"절을 한 채 이룩하시는 일은 만대까지 빛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뜻이올시다."

회암사 주지는 소요산에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역시 불제자였다. 태상왕이 소요산에 절을 한 채 짓느다 하는데, 손을 모아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태상왕은 곧 늙은 내시에게 영을 내렸다.

"송도에 기별해서 빨리 대목과 석수와 미장이를 보내라 일러라. 이곳에 소요사를 지으리라. 경개가 매우 좋다. 나는 이곳을 떠날 맘이 없다. 내가 거처할 처소도 한 채 마련하라 일러라."

늙은 내시는 태상왕의 어명을 받들고 송도로 말을 달렸다. 송도에서 태종은 늙은 내시를 통하여 태상왕이 소요산에 절을 짓고 당신이 거처할 별궁을 짓겠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정승 하윤을 불러 의논했다.

"태상왕께옵서 한양 정릉과 양주 회암사를 거쳐 지금 소요산에 유하시는 중에 내시를 보내시어 소요산에 절을 짓고 별궁을 마련하겠다고 목수와 미장이를 보내라 하시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윤은 태종의 하문을 받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이제는 되었습니다. 빨리 나라 편수와 재목을 보내시어 절과 행궁을 이룩하도록 하옵시오."

하윤이 아뢰는 말을 듣자 태종은 미소를 풍기며 묻는다.

"목수와 석수며 미장이는 태상왕 전하의 분부대로 곧 보내려니와 아까 경이 말하기를 이제는 되었다 하니 대체 무슨 뜻인지 자세히 말해주오. 무엇이 되었단 말이오?"

"국가의 경사올시다.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이제는 가라앉으셨습니다. 마음이 적막하고 울적하시어 혹시 함흥이나 동북면으로 가시겠다하면 또 큰일이온데, 가까운 소요산에서 거처하시겠다 하니 이만 다행한 일이 없습니다. 시각을 지체하지 마시고 빨리 재목과 도편수를 소요산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경의 뜻은 내 뜻과 꼭 맞소. 이 어른께서 만약 또다시 함흥이나 동북면으로 가신다면, 둘째, 셋째 조사의가 나올 테니, 말은 아니했으나 마음속으로는 무한 걱정되었는데, 이제 다행히 소요산에 계시겠다 하시니 천만다행이오."

태종은 마음이 흐뭇했다. 곧 승지를 불러 모든 일을 지휘하라 분부를 내린다.

"태상왕께서 소요산에 절을 건축하시고, 행궁을 세운다 하시니 빨리 선공감에 기별하여 도편수 이하 일등 목수들을 소요산으로 보내고 모든 재목과 물역을 수송시키라."

승지는 상감의 명을 받들어 선공감에 통지하고, 선공감에서는 일등가는 도편수와 젊은 장인들을 데리고 소요산으로 향했다. 소요사와 행궁은 아드님이 되는 태종이 태상왕 전하인 아버지를 위하여 처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짓는 역사다. 목수와 석수와 기와장이는 모두 다 일등 가는 선수요, 나르는 목재와 석재는 재물과 힘을 아끼지 아니하고 일등품으로 실어 나르는 재료들이다. 소요사와 행궁 역사는 시작한 지 석달이 채 못되어 찬란한 단청이 구름밖에 아득히 솟은 전각을 이루었다. 부처는 공주를 생각해서 관음보살의 황금 소상을 모시었다. 태상왕은 소요사와 행궁이 완성된 후에 곧 늙은 내시를 한양 정릉 흥천사로 보내서 공주를 청했다. 태상왕 전하가 새로 소요산에 소요사를 이룩하고 절 아래는 또다시 당신이 거처하실 행궁을 지었다는 소식을 들은 공주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바마마께서 소요사를 지으시고, 행궁까지 마련하셨더란 말이오? 기쁘기 한량없소."

공주는 늙은 내시를 향하여 미소를 지어 물었다. 늙은 내시는 공손히 고한다.

"공주마마와 작별하시고 회암사를 거쳐 소요산으로 가신 후에 산천경개를 둘러보시고 곧 절과 행궁을 조성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두 군데 큰 역사가 이같이 빨리 된 것은 모두 다

공주마마께옵서 부처의 힘을 움직이시어 이같이 속하게 조성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늙은 내시의 말을 듣는 공주는 방긋이 미소를 풍겼다.

"가신 지 석 달이 채 못됐는데 어쩌면 역사가 그같이 완성되었더란 말이오. 과연 고마운 일이로구려."

"모두 다 하늘이 돕고 부처께서 호응하시어, 그리 빨리 된 듯합니다. 상감께서도 태상왕 전하께서 소요산에 절을 조성하시고 별궁을 건축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시고 대목과 석수며 미장이들, 일등 편수와 재목을 보내시어 이같이 불일 성지로 되었습니다. 이제는 부자분께서도 합심이 되시어 나랏일이 잘 되려나봅니다."

"그렇지. 어서 두 분께서 합심이 되시고 화해가 되셔야지. 그래야만 집안일도 되고 나랏일도

되지. 고맙고 갸륵한 일이오."

공주는 말을 마치자 눈을 감고 합장을 했다. 어질고 착한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더욱더 갈등이 없기를 축원했다.

"태상왕 마마께서 오늘 해 안으로 공주마마를 모시라는 분부십니다. 만약 늦게 모시면 소인이 벌을 당합니다. 속히 가사이다."

경순공주는 암자에서 새로 지은 장삼을 바꿔 입고 자줏빛 금란가사를 어깨에 걸친 후에 한 필 푸른 나귀를 타고 내시와 함께 소요산으로 향했다. 공주는 별란 이후에 처음 세상 구경을 했다. 대궐에서와 어머니의 원찰인 흥천사 이외에는 대해보지 못했던 광경이 번화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공주는 깊은 불력을 얻었다. 조금도 속세에 나타나는 사물에 대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했다. 아리따운 묘령의 청상과부건만 마음은 흥천사 법당에 부처와 함께 있을때나 매일반이었다. 공주는 저녁연기가 자진 안개 돌 듯 산허리에 감돌 때에서야 새로 지은 소요산 행궁에 당도했다. 경순공주의 행차가 행궁에 당도했다는 기별을 듣자 모든 시녀와 무수리들이며 내시들은 동구 밖까지 쫓아 나왔다. 푸른 송림이 윤을 뿜어 솔향기가 그윽한 속에 일좌행궁이 학의 날개를 벌린 듯 반공에 솟았는데 단청을 칠하지 아니한 흰 재목으로만 세워놓은 소박하고 깨끗한 건축은 더한층 아름답게 보였다.

"단청을 아니 칠했구려."

공주는 늙은 상궁을 향하여 말을 건넨다.

"상감께서는 대목 편수한테 화려하게 단청을 칠하라고 분부를 내리셨으나 태상왕 전하께옵서

일부러 단청을 칠하지 말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단청은 관음보살을 모신 소요사에만 칠하라 하셨습니다."

경순공주는 아바마마의 깊은 뜻을 짐작해 알 수 있었다. 검소한 뜻을 아드님 되시는 상감한테 보이자는 마음이라 생각했다. 태상왕 전하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같이 소생된 것은 결국 아드님 되는 태종을 적으로생각하는 마음이 풀린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 가라앉게 되면 왕실이 태평하게 될 것이고, 왕실이 태평하면 나라는 부강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공주는 마음이 기뻤다.

"고마우신 일이오."

공주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면서 상궁을 향하여 대답했다. 모든 업원과 원수를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공주의 일행이 행궁문 앞에 당도했을 때 궁녀들의 연통을 받은 성비와 정경궁주는 행문 밖까지 나가 공주를 맞이했다.

"공주마마!"

성비와 정경궁주는 팔을 좌우편에서 한 팔씩 붙들고 반갑게 인사를 올린다. 공주도 반가웠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두 후궁한테 치사를 보낸다.

"그래, 그동안 아바마마를 모시느라고 얼마나들 수고를 많이 하셨소. 그리고 또 관음보살을 모시는 소요사를 짓고 아바마마께옵서 거처하실 행궁을 짓느라고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소."

공주는 한 손으로 성비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정경궁주의 손을 잡아 다정하게 묻는다.

"저희들이야 아무 힘쓴 일이 없사옵니다. 이번에는 송도에서 상감께옵소 정성을 다하시어 아버님의 뜻을 받드셨습니다. 태상왕 전하께서도 아드님이 되시는 상감의 효성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아름답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러하니 아래에 있는 저희들의 마음도, 흠뻑 편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공주마마께옵서 아바마마의 마음을 불도의 힘으로 돌려드리신 덕택이올시다."

두 비빈은 공주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

"천만의 말씀이오이다. 모두 다 두 분 마마가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린 보람입니다."

공주와 두 비빈이 행궁 안으로 들어섰을 때 태상왕은 분합 안까지 나와 공주를 맞이한다. 오직 하나로 생각하는 귀한 따님이다. 검은 장삼에 자주 가사를 어깨에 메고 비빈들과 함께 들어오는 공주의 모습을 바라보자, 태상왕은 반갑고 기뻤다.

"공주 오느냐?"

태상왕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큰 소리로 공주를 맞는다. 공주는 은실 같은 수염을 늘이고 자기를 반갑게 부르는 아버지의 용안을 바라뵙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오직 이 세상에 희망을 붙인 한 분의 혈육이었다. 몸은 서울 정릉 어머니의 원찰인 흥천사에 있으나, 마음은 자나깨나 아바마마에게 있는 그 아버지다. 만나 뵌 지는 몇 달이 되지 아니했으나 뵙고 싶은 마음은 일각이 삼추 같았다. 공주는 눈을 끔뻑해서 글썽거리는 눈물을 누선 속으로 숨어들게 한 후에 달음질치듯 걸음을 빨리해서 전상으로 올랐다.

"아바마마, 그동안 옥체 안강하셨습니까?"

섬섬옥수를 들어 큰절을 올린 후에 다시 합장을 하고 무릎을 꿇어 아뢴다. 태상왕은 공주의 절을 받은 후에 다정한 눈매로 묻는다. 어린 공주 같으면 덥석 껴안아 뺨을 대고 묻고 싶었으나, 이미 장성해서 출가한 공주다. 껴안아 애무하지 못하는 체면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나는 잘 있었다마는 네 몸은 태평했느냐?"

"아바마마께옵서 염려해주신 덕택으로 소녀는 관음보살을 모시옵고 무사하게 지냈사옵니다. 아바마마, 그동안 큰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소요사를 새로 지으시고 또다시 관음보살을 조성하셨을 뿐 아니라 행궁까지 건축하시느라고 얼마나 진념하셨습니까?"

"소요사는 실상이즉 부처님보다 너를 위하여 지었다. 대궐로 돌아가자 하니 돌아가지는 아니하고,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이곳에 소요사를 지은 것이다. 너는 한평생을 불제자로 마치겠다 주장하니, 대궐은 지어도 소용이 없고, 내가 있을 행궁 옆에 소요사를 지어서 가끔 가끔 너를 청하려는 계획이다. 그리해서 부처님 중에도 네가 받드는 관음보살을 조성해서 이곳에 모시었다. 알겠느냐, 나의 뜻을?"

"아바마마, 감축하옵니다."

공주는 공손히 대답했다.

"너는 정릉 흥천사에서 죽은 어머니만 위로하지 말고 때때로 소요사에 나와서 살아 있는 아비도 위로해주어야 한다. 이제 나는 늙었다. 내가 믿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태상왕인 아버지의 말씀은 슬펐다. 공주의 검은 속눈썹에 진주 같은 구슬이 광채를 뿜어 방울방울 솟았다. 공주는 흑장삼에 소매 속에 눈빛 같은 흰 수건을 꺼내서 속눈썹에 엉킨 이슬방울을 꼭꼭 눌렀다.

"아바마마, 감축하옵니다."

공주는 눈물 어린 눈을 손수건으로 닦고 다시 한번 아버지 태상왕을 향하여 감사한 말씀을 고했다.

"자아, 일어나서 새로 지은 행궁 구경을 해라."

태상왕은 공주의 소매를 끌었다. 공주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태상왕 이성계는 친히 공주에게 행궁 구경을 시켰다. 그중 큰 방으로 향했다.

"이것이 내가 거처해야 할 방이다."

냠향 창에 서상방으로 앉힌 방이다. 세 간이 훨씬 넘었다. 사간방 뒤에 방이 둘이 붙어있었다.

"이 방은 성비의 방이고 이 방은 정경궁주의 방이다."

태상왕은 일일이 손을 들어 가리킨다.

"늙은 사람한테 젊은 여자들이 소용있느냐마는 늙고 보니 수족이 둔하고 옷을 입는 데도 입혀주는 사람이 필요하구나. 그러하니, 대궐제도 모양으로 큰전 옆에 협방을 둔 것이다."

태상왕은 웃으면서 변명하듯 말했다. 공주가 조신하게 대답한다.

"그러하옵니다. 노래하실수록 좌우에서 부축해 드리는 사람이 필요하옵니다. 소녀도 다 알고 있사옵니다. 불초녀가 아바마마께 효성을 다 바치지 못하는 것이 한이옵니다."

"네가 어찌 이루 다 내 일을 보아주겠느냐. 아무리 딸이라 해도 시킬 일이 따로 있지 아니하냐."

"그러하옵니다."

"모르는 사람은 늙은 내가 후궁을 가까이한다고 웃으리라마는 결코 딴 욕심이 있어서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아옵니다. 소녀도."

공주는 잠깐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다. 태상왕은 다시 청마루를 건너 동편으로 향했다.

"이 방은 공주 네가 쓰도록 마련해둔 것이다. 대궐로 친다면 동온돌이 되는 것이다. 내가 정궁이 있다면 당연히 이 방을 그한테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어머니가 아니 계시니 네가 쓰도록 해라."

아버지 태상왕의 다정한 말씀에 공주의 눈에는 또다시 안개가 서렸다.

"외람되옵니다. 제 어찌 동온돌을 쓰오리까. 아바마마의 향의하여 주신 뜻은 감격하옵니다마는 삼가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이곳이 대궐이라면 혹시 군말들을 할지 모르지만, 이곳은 대궐이 아니다. 임시로 내가 거처하는 행궁이다. 공연히 내 뜻을 어겨서 나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지 말라."

공주는 아버니 태상왕의 지극하신 향의에 또 한 번 감동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따가 성비와 정경궁주와 의논한 후에 다시 아뢰겠습니다."

"두말 말래두 그러는구나."

태상왕은 꾸짖듯 공주에게 하교를 내렸다. 태상왕은 공주에게 두루 이른 후에 소요사롤 발길을 옮겼다.

"아뢰옵니다, 아바마마께."

"무슨 물을 말이 있느냐?"

"행궁 말씀이올시다."

"말을 해라."

"단청을 칠하지 아니하셨으니 어찌한 일인지 궁금하여이다."

"소명한 네가 어찌 내 뜻을 모르느냐?"

"저기 보이는 소요사에는 단청을 칠하시고, 같은 때 지으신 행궁에는 단청칠을 아니하셨으니, 미련한 생각에 해득치 못하겠습니다."

"부처는 불왕이다. 그리고 절은 부처의 거처하는 정궁이다. 그뿐 아니라 부처를 위하여 절을 건축하고 부처를 조성한 것은 나의 지성으로 모신 것이다. 그러하니 단청 칠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행궁은 대궐이 아니다.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이다. 임시로 생활할 곳에 단청 칠을 한다는 것은 사치스런 일이다. 황차 나는 현재 임금이 아니고 태상왕이다. 태상왕으로 있어서 어찌 사치를 할까 보냐. 나라의 재정은 나의 개인의 재물이 아니고 백성들의 재물이다. 내가 어찌 백성들의 재물을 사용해서 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느냐."

경순공주는 태상왕께 손을 모아 합장을 올렸다.

"갸륵하신 향의시옵니다. 아바마마의 성스러우신 뜻을 백성들이 안다면 얼마나 기뻐하오리까. 또한 아바마마의 높으신 성의를 송도에 있는 상감이나 백관들이 안다면 얼마나 황공 송구해 하오리까. 앞으로 이제 이씨 왕실은 무궁무진한 복덕을 누리옵고 백성들은 격양가를 불러 성덕을 노래하오리다."

태상왕 이성계는 묵묵히 대답이 없다. 태상왕과 공주는 새로 조성이 된 소요사 법당에 올랐다. 아담스런 전각이었다. 단 위에는 황금으로 도금해 입힌 관음보살이 미소를 풍겨 다정히 앉았다. 경순공주를 보고 가만히 웃음을 보내는 듯했다. 공주는 새로 조성된 황금 관음보살상 앞에 무릎을 꿇어 향을 사른 후에 두 번 큰절을 올려 예불을 하고 손을 모아 합장을 하여 부처를 염했다. 공주는 새로 조성된 소요사 관음보살께 마음으로의 혼을 보내는 것이다. 부처의 영혼과 공주의 넋이 한 줄 보이지 아니하는 아득한 심령의 선을 이루어 경건하게 소리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처음으로 조성되신 관세음보살님께 뵈옵니다. 이 나라의 왕비였던 강후의 딸인 경순공주올시다. 굽어 통촉이 계시옵소서.'

공주는 마음으로 새로 조성된 관음보살한테 자기의 신원을 밝혔다. 공주의 마음으로 보내는 소리 없는 하소연을 듣는 관음보살은 향연이 자욱한 속의 공주를 향하여 미소를 풍기면서 대답을 내리는 듯하다.

'오오, 네가 경순공주냐. 어머니와 아버지한테는 지성스런 효녀요, 남편한테는 천하에 짝을 구하기 드문 열녀로구나. 그리고 모든 죄악이 가득 찬 사람들을 크나큰 도량으로 용서해주고 구해내서 대불의 높고 크신 뜻을 받들려 하는 네 마음 갸륵하다.'

관음보살은 향연 속에서 가만가만 입술을 열어 공주에게 계시를 내리는 듯하다. 공주는 눈물 어린 눈으로 다시 한번 관세음보살을 우러러 뵙는다. 자상하게 웃음을 풍기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바라보니 흡사 어마마마인 강비의 모습과 같았다. 마치 어머니가 생전에 자애스런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며 도란도란 말씀을 내리는 듯했다. 공주는 소요사에 새로 조성된 관음보살이 아버지의 대원을 받아서, 어머니 강비의 모습을 나타내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더욱 관음보살께 친절감을 느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큰 뜻을 본받아 소녀에게는 아무런 불편도 없습니다. 욕심도 없습니다. 그저 깨끗한 일편빙심으로 이 세상에서 선한 일만 하다가 어마마마와 남편의 뒤를 따라 부처님께서 옹호해주시는 극락으로 가기 소원이올시다.'

공주는 다시 계속해서 염한다.

'그리하옵고 , 그저 이씨왕실에 다시 화기가 돌아서 나라와 백성이 편안히 살기 소원이올시다.'

공주는 지성으로 염했다. 옆에서 태상왕도 공주가 하는 대로 배례를 드렸다. 태상왕과 공주의 뒤를 따라 전에 오른 성비와 정경궁주도 공주를 따라 다 함께 향을 살라 예불을 올렸다. 법당 아래 종루에서는 청아한 경쇠 소리와 은은한 종소리가 예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청정한 세계로 이끌어 놓는다. 모두들 무념무상의 경지로 이끌려 들어가는 듯했다. 깨끗한 수정이요 티없는 옥과 같은 말고 맑은 정서가 관음보살의 미소와 함께 전각 안에 감돌 뿐이었다.

이윽고 분향이 끝나자 공주는 먼저 가사를 바로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상왕과 두 비빈도 합장을 올리고 부처 앞에서 물러섰다. 공주는 태상왕의 귀에 입술을 옮겼다.

"아바마마, 새로 조성해 모신 관음보살은 마치 어마마마의 혼령이 보살의 몸에 엉키신 듯합니다. 미소하시는 저 높으신 자세를 보시옵소서. 마치 어마마마께옵서 생시에 인자하신 웃음을 소리 없이 던지시는 듯하옵니다."

태상왕은 공주의 소곤거리는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려 관음보살을 바라본다. 아직도 다 스러지지 아니한 그윽한 향연 속에 당정히 앉으신 관세음보살의 황금소상은 과연 강후의 젊었을 때 아름다운 그 모습 같았다. 새로 조성해 모신 후에 태상왕은 여러 차례 관음보살을 바라보고 배례를 드린 일이 한두 번이아니었다. 그러나 여태껏 사랑하던 아내 강비의 모습과 같은 것을 발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공주의 속삭이는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자세히 바라보니 영락없는 강후의 모습이었다. 태상왕은 오히려 깜짝 놀랐다.

'왕비!'

하고 한번 부르짖고 싶었다. 공주는 다시 속삭인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어머님께 향하신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 한점으로 엉키고 모여서, 성스러우신 관음보살님께옵서, 어마마마의 모습을 나타내시어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드리나 봅니다."

공주의 말을 듣고 태상왕은 그럴듯하게 생각되었다.

"과연 이상한 일이다. 새로 불상을 조성한 후에 나는 여러 차례 예불을 드렸으나, 오늘 같은 그 모습을 뵌 일이 없는데, 아마 너의 지성이 하도 갸륵해서 부처께서는 잠깐 너의 어머니 모습을 빌려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냐."

태상왕의 용안에는 감격한 표정이 넘쳐 흘렀다. 공주가 다시 고했다.

"잠깐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부터 아바마마의 안정에 비치시는 관세음보살은 언제나 어마마마의 모습으로 뵈어서 아바마마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고 편안하게 해드릴 것입니다. 어마마마의 육신은 한양성중 정르에 누워 계시지만 혼령은 필시 소요사에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공주는 말을 마치며 전각에서 물러난다. 태상왕도 전각에서 내린다. 두 비빈이 왕을 부액해 모시었다. 태상왕은 신기하다 생각했다. 법당에서 내리며 공주한테 조용히 묻는다.

"네가 염불을 올려서 관세음보살께 어마마마의 영혼을 넣어드린 것이 아니냐?"

공주는 미소하여 대답한다.

"소녀가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관음보살께 입혼을 시켜 드리오리까. 황공하옵신 분부이오이다. 다만 아바마마께서 부처를 조성하신 그 공덕을 가상하게 생각하시어 보살께서는 아바마마를 욕심이 없으신 맑은 세계로 이끄시느라고 어마마마의 어지실 때의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소요사에 오래오래 머무르시어 더한층 마음을 맑게 가시옵소서."

태상왕은 마음이 설레었다.

"그렇다면 흥천사 원찰에 모신 관음보살상은 어찌해서 너의 어마마마의 모습을 보여주지 아니하시느냐?"

태상왕은 의아해서 물었다. 아버지의 묻는 말을 듣자 공주는 흑장삼 붉은 가사에 명모를 반짝이며 볼에 가득 웃음을 지어 대답한다.

"아바마마, 그것도 모르시옵니까? 호호, 흥천사를 지으실 대 아바마마께서는 태상왕이 아니시고 한 나라를 주름잡으시며 삼천리강산을 호령하시던 제왕이셨습니다. 아바마마께옵서는 친히 흥천사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백관에게 영을 내리시고 내시를 시켜서 우람하고 큰 흥천사를 짓게 하셨습니다. 위엄하신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삼천리강산의 좋은 재목과 넓고 큰 석재는 구름 뫼듯 정릉으로 들어왔습니다. 황금대불을 조성하라고 하시는 나라의 재물을 아끼지 아니하고 장엄하고 우람하신 부처의 소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셨습니다. 또다시 한번 종을 만들라는 영을 내리시니 천하에 제일가는 영종을 흥천사에 만들어 달았습니다. 정성을 아니 드리신 것은 아니오나 흥천사 원찰은 모두 다 명령과 위력으로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는 제왕의 위력을 좋아하시지 아니합니다. 부처님은 임금 되는 태자의 자리도 헌신짝 버리시듯 하시고 설산고행을 하시어 기막힌 수도 끝에 석가모니불이 되신 겁니다. 그러하니 호화로운 제왕의 권력으로 명령을하여 지어진 흥천사보다도 모든 부처들은 아바마마께옵서 아무런 권력도 없이 힘없는 태상왕으로 정성껏 친히 건축하신 이 소요사를 더한층 마음에 들어 하실 것입니다."

공주는 말을 계속한다.

"그리하옵고, 부처의 소상도 권력과 재력으로 신하를 시키시어 조성하신 부처가 아니라 친히 감독하시어 봉안하신 부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더한층 아바마마의 정성을 마음 깊이 아름답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공주의 도란도란 아뢰는 말을 듣는 태상왕은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너의 말도 그럴듯하다."

태상왕은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권력과 위엄으로 사람을 누르고 사람을 짓밟으려 하는 것은 속된 생각이란 것을 새삼 깨달아 본다.

"아바마마, 관음보살께옵서 어머님의 미소하시는 모습을 옮겨서 나타내시는 일을 아시겠습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짐작하거든 어리석은 나의 마음을 열어다오."

"흥천사에는 석가모니불이 주불이십니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 손수 조성하신 부처는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러기에 흥천사의 법당은 대웅보전이옵고 소요사의 법당은 관음전이옵니다. 석가모니불은 남성으로 표현되신 부처이시고 관음보살은 여성으로 표현된 부처이십니다. 이러하니 관음보살은 어마마마의 미소를 아바마마께 표현시키어 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태상왕은 공주의 말을 듣고 황연히 모든 말을 깨달았다.

"네 말을 들으니 모두 다 그럴듯하구나. 그동안 불경을 많이 읽은 너의 노력을 짐작해 알겠다."

태상왕은 따님이 한없이 귀여웠다. 또 한 번 감탄했다.

"이제는 아바마마께서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잊으시고 고요히 소요산 행궁에 거처하시면서 내생의 좋은 일을 닦으시어 마음 편안히 세월을 보내시면서 만수무강하옵소서."

"내가 이곳 소요사를 건축하고 행궁을 지은 것도 실상 네 말같이 모든 속세의 인연을 다 끊어버리자는 것이다."

태상왕은 슬며시 한숨을 쉬었다. 평생을 지냈던 몇 가지 일이 주마등같이 달린다. 공주와 성비와 정경궁주는 태상왕의 뒤에 따르며 소요사에서 행궁을 향하고 내려간다. 소요사 관음전 처마끝에서 바람에 따라 일어나는 풍경소리는 유난히도 맑았다. 맑고 깨끗한 대기는 아청 물감을 만리 창공에 물들여논 듯 아름다웠다. 공주는 선으로 지향해 돌아가는 아버지를 보자 마음이 대견하고 거뜬했다. 공주 자신도 마음도 가벼웠다. 어깨와 몸이 거뜬하다. 맑은 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결에 서리찬 깊은 가을이 찾아왔던 모양이다. 소요산 온 덩어리가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누른 것은 은행잎이요, 붉은 것은 감나무 잎이 아니면 단풍잎이다. 여기다가 푸른 잣나무가 붉고 누른 잎새 속에 우뚝 서 제각기 자태를 나타낸다. 푸른 청송, 붉은 단풍, 누른 황엽이 함께 어우러져서 만첩 청산에 만간들이 비단 필을 풀어 산기슭마다 휘감아논 듯했다.

"아바마마, 저 경치를 좀 보시옵소서. 산이 소금강이라 하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올시다. 아바마마의 행궁은 천하절경이올시다."

성비와 정경공주가 공주의 말씀을 듣고 고개를 들어 소요산 전경을 바라본다. 햇빛은 때마침 석양판인데, 누르고 푸르고 붉은 잎새들의 빛깔도 좋지마는 햇빛에 반사된 푸른 봉우리는 더한층 검고 푸르고 신비스럽게 엄숙했다. 단풍 빛깔과 푸른 봉우리는 넘어가는 햇빛을 받아 산 얼굴이 시시때때로 변해진다. 태상왕은 바윗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과연 천하절경이다. 더구나 낙조에 비쳐지는 저 산 얼굴은 경치가 좋은 것보다도 무섭고 신비스럽구나."

"산 얼굴은 엄숙하고 신비스런 뿐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공주도 대자연의 조화에 탄복했다. 성비와 정경궁주도 금수강산 속에 파묻힌 대자연의 신비를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하, 저 산 얼굴! 검었다, 푸르렀다 하는 저 산봉우리 위에 흰구름장이 둥둥 떠서 갑니다. 마치 선녀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듯합니다."

태상왕은 공주와 성비와 정경궁주의 말을 듣자 다시 한번 단풍과 산 얼굴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짓고 탄식한다.

"보아라. 청솔은 마치 방원이 같고, 단풍은 흡사 나 같고나. 흰구름 자락은 너희들 같고, 시시 때때로 변해지는 산 얼굴은 신이 묏부리를 통해서 우리들 사람한테 계시를 주는 듯하고나."

태상왕의 말을 듣자 공주도 마음이 처량했다.

"그러하옵니다. 말씀 내리신 대로 솔직하게 아뢴다면 단풍은 아바마마 같사옵고, 낙랑장송 푸른 송백은 마치 상감 같사옵니다. 그리하옵고 변해지는 산 얼굴은 신이 묵시를 내리는 듯하옵니다."

"세상이란 그렇구나. 공성신퇴란 말이 옳은 말이다. 늙으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영웅호걸도 아차 하면 모두 다 가는구나."

태상왕은 새삼 인생의 무상을 느낀다. 공주는 아바마마의 허탈된 마음을 잘 짐작했다. 한 마디로 위로하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불사약을 구하고 승로반을 받들게 했던 한공무도 하는 수

없었습니다."

공주는 잠깐 태상왕의 용안을 살폈다. 아버지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한 때문이다. 태상왕의 용안은 처량한 모습이었다. 공주는 더 이상 말씀을 아니하려 했다. 태상왕은 공주에게 재촉한다.

"어서 다음을 말해 보아라."

"아바마마의 마음이 처량하실까 하와 이만 말씀을 줄이겠습니다."

"관계치 않다. 어서 말을 계속해라."

공주는 입을 다문 채 주저했다.

"어서 말을 해라. 인생은 다 그런 것을."

"그럼 다시 말씀을 계속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말을 해다오."

"역발산 기개세하던 초패왕도 운이 다하니 사랑하는 애인 우희를 불러서 술잔을 들어 비분강개하면서 '우야, 우야, 어찌할꼬'하고 이별주를 들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는 행복하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상감 같은 아드님을 두시고 그 아드님의 기상이 푸른 솔, 낙락장송같이 훤칠하니 아바마마의 사업을 더한층 빛나게 할 것입니다. 그 위 아바마마께서는 그저 단풍으로 곱게곱게 붉으십시오. 저희들은 흰구름장같이 깨끗하게 왔다가, 깨끗하게 가겠습니다."

옆에 있는 성비와 정경궁주는 태상왕과 공주 두 분이 주고받는 대화를 알 까닭이 없었다.

"날이 차옵니다. 행궁으로 어서 내려가사이다."

성비가 간곡하게 아뢴다. 공주도 비로소 처량한 마음속에서 새 정신이 들었다.

"아바마마, 청솔한테 모든 일을 맡기시고 성비와 정경궁주를 잘 보호하시면서 여생을 즐겁게 하옵소서. 소녀도 항상 아바마마의 곁에 모시면서 소요산과 정릉 사이로 왔다갔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비의 말대로 산골이 선선합니다. 행궁으로 내려가사이다."

공주는 태상왕을 재촉해 모시고 행궁으로 내려갔다.

"너는 흠뻑 나의 뒤를 돌보다가 정릉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에도 부처를 모시었으니 도를 닦아라."

"아바마마의 말씀을 삼가 받들겠습니다."

공주는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이날 밤 공주는 성비와 정경궁주와 함께 태상왕의 수라상을 장만했다. 절에서 올리는 수라상이었다. 육종을 쓰지 아니했다. 송이로 국을 끓이고 표고로 잡채를 만들었다. 두부로 적을 굽고, 자옥채를 삶아 나물을 했다. 도라지 생채에 튀각이 태상왕의 구미를 돋웠다. 때마침 가을이었다. 밤을 밥 위에 얹어 쪄서 밤밥을 수라상에 올렸다. 계절이 시월 보름이었다. 달빛이 휘영청 행궁에 가득히 비쳤다. 태상왕은 공주가 올리는 수라상을 달빛 아래 받으며 오래간만에 즐거웠다.

"달빛 아래 산채로 밥을 먹으니, 달빛이 산채에 스며들어 달로 찬을 하는 듯하구나!"

태상왕은 오래간만에 즐거웠다.

한편, 태종은 송도에서 소요사와 행궁을 짓는 목재와 석재며 대목 석수들을 소요산으로 치송한 후에 백관을 불러 하교를 내렸다.

"한양에 새 도읍터를 정해서 경복궁을 지었고, 사대문과 성을 싼 후에 다시 창덕궁까지 지어 낙성이 되었으니, 불가불 다시 천도를 아니할 수 없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신하들은 모두 다 고려에서 벼슬하던 사람이었다. 태조 때 한양에 천도한 일이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다 송도에 살림하는 근거를 두었고, 한양보다 송도에 더 정이 많이 들었다. 송도에서 떠나기 싫었다. 이조판서인 문관 한 사람이 어전에 나와 아뢴다.

"한양은 태상왕께옵서 정도하신 곳이오나, 마땅치 아니한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와 상왕께서 재위 시에 송도로 돌아오신 지 벌써 여러 해올시다. 백성들로 모두 다 한양보다 송도를 그리워합니다. 아무리 도성과 궁궐을 건축하셨다 하오나, 봄과 가을 한가 한때, 이궁으로 쓰시고, 완전히 천도하시는 것은 보류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문관의 뒤를 이어 훈련대장인 무관이 아뢴다.

"지금 아뢴 이조판서의 말은 크게 도리어 어긋납니다. 한양 서울에는 태상왕께옵서 이미 궁실을 건축하시고 종묘와 사직까지 그곳에 모시었습니다. 예로부터 나라 예법에 종묘와 사직을 받들어 모신 곳이 곧 수도올시다. 국가의 군왕되는 이가 어찌 종묘와 사직을 떨어져서 있을 수 있습니까. 불편한 일 있사오니 속히 새 도읍인 한양으로 옮기시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

조정공론은 천도하자는 사람과 송도에서 그대로 머물러 살자는 사람과, 두 갈래 의견으로 갈라졌다. 의논은 용이하게 결정이 되지 아니한다. 태종은 영의정 하윤한테 묻는다.

"영상의 뜻은 어떠하오?"

영의정 하윤이 부복해 아뢴다.

"한양에는 이미 종묘사직을 모셨을 뿐 아니라 태상왕께옵서 정도하신 곳입니다. 백성과 신하들은 고향이 그리워서 한양으로 가기를 주저하옵니다마는 나라를 새로 창건하신 오늘날 모든 희망과 생활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한양으로 가시는 것이 가합한 줄로 아뢰오. 그리하옵고 한양에는 이미 창덕궁이 낙성되었사오니 전하께서 창덕궁을 사용하신다면 마음 편안하실 것입니다."

영의정 하윤의 의견은 만 근의 무게가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곧 재결을 내린다.

"사람의 의견이란 구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을 내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이달 안으로 한양에 돌아가기로 한다. 모든 신하들은 그리 알고 백성을 지도하라."

군신들은 고개를 숙여 숙연히 태종의 명을 받들었다.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태종은 한 달 안에 천도를 끝내려던 것을 석 달이 넘어서 끝을 냈다. 이것은 태종 5년 을유의 일이었다. 태조 5년 병자에 처음으로 도읍을 한양에 옮겼다가 별안간 왕비 강씨가 경복궁에서 승하했고, 삼년상이 끝나는 해에 방석과 방번에 태종한테 화를 당하고 방과 정종이 왕위에 나가자 내란이 일어났던 경복궁에 살 마음이 없었다.

고향인 송도가 그리워서 정종은 상왕인 태조를 모시고 즉위하뎐 해 3월에 송도로 다시 내려갔고, 다음 해 경진년에는 태종과 방간의 싸움이 송도에서 벌어져서, 태종은 이내 세자가 되었다가 다음 해 왕위에 나가고 정종을 상왕으로, 태조를 태상왕으로 봉해서 무한한 파란과 곡절을 겪은 후에 이번에 다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으니, 한양 천도는 햇수로 10년 만에 완전한 도읍으로 정해진 것이다.

이때 태종 이방원의 나이는 한창 연부역강한 39세였다. 태종은 대궐을 경복궁으로 정하지 아니하고 새로 신축한 창덕궁으로 정했다. 경복궁에는 왕비 강씨가 천도 직후에 별안간 세상을 떠났을 뿐 아니라, 부마 이제를 죽였고. 방석, 방번을 죽였고, 정도전과 남은도 이 대궐 안에서 역적으로 몰려 죽은 옛 기억이 새롭고 불쾌했던 때문이다. 천도가 끝난 후에 영의정 하윤이 어전에 아뢰었다.

"영의정 신 하윤은 삼가 어전에 아뢰오, 이제 정부는 한양으로 돌아와, 완전히 천도를 마쳤고 나라는 차차 질서가 잡힙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국태민안을 이루어 천년 사직을 튼튼하게 하실 때라 생각합니다."

하윤의 아뢰는 말은 장중하고 여운이 있었다. 태종은 마음이 기뻤다. 용안에 가득 화한 기운과 웃음빛을 띠고 묻는다.

"영상의 말은 심히 아름답소. 어찌하면 국태민안한 태평세월을 이루고 천년만년 이 나라를 부강케 하겠소?"

"모든 법과 문명을 질서 있게 지키시어 백성들을 예와 의로 인도하신다면 이 나라에 화기가 가득 차오리다. 이같이 하자면 전하께옵서 먼저 솔선수범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윤의 아뢰는 말씀은 더욱 간곡하고 부드러웠다.

"내가 먼저 무엇을 백성들한테 수범시키면 되겠소?"

태종은 다시 미소를 지어 물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효로써 백성들한테 모범을 보여주셔야 하겠습니다."

하윤의 한마디 말은 태종 이방원의 가슴을 형상 없는 새파란 칼끝으로 도려내는 듯했다. 태종의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가 되었다. 효도를 다 하라는 하윤의 말에 크게 가책을 느낀 때문이다. 태종은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얼굴이 또 한 번 화끈하고 달았다. 과연 자기는 큰 죄를 지었다. 아버지한테는 줄곧 불효자의 행동을 했다. 형제들한테도 우애를 다하지 못했다. 우애만 다 하지 못할 뿐이 아니다. 형제를 죽여서 골육상잔을 했다. 부자와 형제지간이 불목했던 것뿐이 아니다. 세상의 어진이들을 너무나 많이 죽였다. 고려의 이름 높은 재상이요 충신이라 할 수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선죽교에서 철퇴로 때려죽인 것도 장본인은 자기다. 고려의 명장이요, 충신인 최영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것도 그 장본인은 자기였다. 우왕과 창왕과 공양왕을 폐위시켜버린 후에 귀양길에서 죽인 일도, 남들이 알기에는 아버지 태조가 한 짓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인즉 자기가 우겨대서 한 짓이다.

그뿐인가, 두문동에서 고려의 뜻있는 선비 칠십이 인을 불살라 죽인 것도 자기가 앞장을 서서 한 짓이다. 그뿐이 아니다. 동두문동에서 고려의 무사 사십팔 인을 없이 해버린 일도 자기가 관여한 일이다. 또다시 왕씨네가 반동을 일으킬까 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꾀어낸 후에 배에 실어서 바닷속에 몰아넣어 왕씨네를 몰살시켜버린 일도 자기의 짓이었다. 이 모든 죄악을 생각할 때 자기는 만고에 그 짝을 볼 수 없는 악의 극치요, 악의 화신이다.

태종 이방원은 다시 더 한 번 지난 일을 생각해본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고향인 함흥으로 갔을 때 계모인 강비의 친척 조사의의 말을 듣고 송도정벌을 개시했다. 이때 자기는 앉아서 죽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보낸 함흥군을 향하여 감연히 칼을 빼어 들고 일어섰다.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 안주 청천강까지 건너갔다. 만일 그때 아버지 태조가 늙었기에 망정이지 선봉대장이 되어 친히 나왔더라면, 자기는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겨누고, 아버지를 향하여 화살을 쏘았을 것이다. 아버지도 딱한 아버지였다. 하모흥에서 돌아왔을 때 성 밖 십리허에 나가서 맞이하는 아들 자기를 활을 들어 쏘아 죽이려 했다. 그뿐인가, 만조백관들이 모인 환영연 잔치 자리에서 철퇴로 자기의 머리를 갈기려 했다가 잔 올리는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철퇴를 내던지고 탄식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할 수는 없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속담과 같이 곱지 않게 한 장본인은 모두 다 자기다. 자기가 극약의 잘못을 저지른 때문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이같이 자기 자신의 죄상을 반성했을 때 얼굴이 쉴 사이 없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순간, 태종은 고요히 한숨을 짓는다. 자기가 한 짓은 옳거나, 그르거나 모두 다 나라를 잘 다스려보자는 큰 뜻으로 그같이 한 것이었다. 만약 자기가 그 일을 그같이 하지 아니했다면 나라꼴은 결딴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서 죄 없는 창생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유리하여 떠다니는 가엾은 민생이 될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이렇기에 고려 왕실을 뒤엎었고 임금 노릇 하려는 동생과 형을 배격한 것이다. 천하 일을 하는 사람은 집안일을 돌보지 아니한다.

'그렇다! 위천하는 불고가사요, 대인불구소절이다.'

태종은 이같이 생각했을 때 마음이 조금씩 안돈되는 듯했다.

하윤은 총명 영리한 재상이었다. 벌써 태종의 눈치를 챘다.

"큰 사업을 하시려면 작은 일에 구애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태 하신 일들은 큰 사업을 하시기 위하여 모든 예의를 돌보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질서가 잡히고 어느 만큼 뜻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그러하니, 전하께서는 먼저 효로써 백성을 지도하셔야 하고 효로써 지도하시려면 솔선궁행을 하셔야 합니다."

하윤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태종은 다시 묻는다.

"지금 태상왕 전하께서는 소요산 행궁에 계십니다. 먼저 친림하시어 환도하신 연유를 고하시고 아무리 태상왕이시라 할지라도, 현재 군왕의 아버지이시므로 모든 정사를 정승으로 하여금 품하여 처결하도록 하옵소서. 이리하신다면 태상왕 전하의 마음도 흠뻑 돌리시고 전하의 효도도 백성들의 모범이 되실 것입니다."

"경의 말은 나의 어둡고 캄캄했던 마음을 등불같이 밝혀주었소."

태종은 고마웠다. 하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며칠 후였다. 태종은 곧 소요산 행궁으로 아버지인 태상왕께 문안을 드리러 가는 간소한 거둥령을 내렸다. 만조백관은 따르지 아니하고 호위를 맡은 자비관들과 삼정승만 따랐다. 내시와 승지가 말을 달려 소요산 행궁으로 향했다.

"상감께옵서 태상왕 전하께 문안을 드리러 오십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깜짝 놀랐다. 아들을 용서하고 싶은 생각은 공주의 설교로 인하여 마음이 많이 돌았으나 아직도 석연치 아니한 생각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새삼, 문안이 웬일이야?"

태상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옆에 있던 경순공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아뢴다.

"정을 막지 마시옵소서. 남의 정이라도 막아서는 아니 되는데, 황차 자손의 정을 어찌 막으려 하십니까. 이제는 화한 덕으로 임하시어 이 나라를 복되게 하옵소서."

태상왕은 어진 따님의 말씀을 타박줄 수 없었다.

"오면, 만나리라."

내시와 승지는 말을 달려 한양으로 뛰었다.

"문안을 받으신다 합니다."

영의정 하윤은 곧 태종을 모시고 소요산으로 향했다. 상감의 거둥행차가 소요산 행궁에 당도했을 때, 공주는 슬며시 정릉으로 돌아갔다. 태종은 정승 하윤과 함께 행궁문 앞 하마돌 앞에서 말을 버렸다. 먼저 행궁을 살펴보았다. 단청도 아니 올렸다. 주란화각이 아닌 여염집 모양으로 검소한 백옥이 아담하게 지어졌다. 태종은 먼저 아바마마의 검소한 뜻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크나큰 감격을 느꼈다. 역시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이같이 검소하게 행궁을 지우셨구나 하고 탄복했다. 태종은 아바마마의 이 어진 마음과 착한 행공이 경순공주로 인해서 이같이 된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아바마마께서 연로해가시니 마음이 훨씬 풀려져서 당신의 마음을 넓게 가지시어 자기의 지나간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당신께서도 조용히 여생을 마치기 위하여 이같이 소요상에 행궁을 지으시고, 무한정한 물자와 인력을 대어드렸건만, 행궁을 이같이 검소하게 니으셨을 뿐 아니라 문안사를 보내는 족족 함흥차사가 되게 하여 다시는 천일을 대할 수 없게 했던 모든 일을 청산해버리시고, 흔연히 자기의 문안을 받겠다고 하교를 내리셨구나. 정승 하윤이 말한 대로 이제부터 자기는 지극한 효도를 다해야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역시 사람이었다. 사람 이상의 사람도 아니요, 사람 이하의 인물도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했다. 의심이 들었다.

"전에 올라 문안을 드릴 때 아무런 방비가 없어도 좋겠소?"

정승 하윤은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아니하셔도 좋습니다. 이번엔 기둥을 세울 필요도 없고 내시가 잔을 올리게 할 까닭도 없습니다. 태상왕 전하의 앞으로 바싹 가셔도 좋습니다. 그저 문안 절을 올리시고, 한양으로 다시 오신 일을 보고드리십시오."

태종은 반신반의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했다.

"아무 일 없겠지?"

"염려 마십쇼. 이제는 겁운이 다 지나갔습니다."

"어떻게 겁운이 지나간 것을 아오?"

태종은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아니했다.

"태상왕께서는 소요산에 행궁만 지으신 것이 아니오라 소요사라는 절을 지으시고 관음보살을

조성해 모시었습니다. 흔천사는 강후마마의 원찰이지만 소요사는 당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절이라 할 것입니다. 태상왕 전하께서는 이제 머리는 아니 깎으셨으나 불제자가 되신 듯합니다. 불제자가 되신 몸으로 불행한 일을 다시 하실 리 만무합니다. 전하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태종은 하윤의 아뢰는 말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잠자코 행궁 안으로 들어섰다. 하윤이 태종께 고한다.

"문안을 올리시고 한양으로 다시 오신 말씀을 고하신 후에 이곳에 의정부를 둔다고 말씀을 아뢰십시오."

태종의 눈이 둥그렇게 떠진다.

"의정부는 삼정승이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인데 한양에 두지 아니하고 이곳에 둔다면 정치를 어찌하잔 말요?"

태종은 의아했다. 하윤에게 물었다.

"별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효도입니다."

태종은 더욱 의아했다.

"그것이 효도라니, 의정부와 나의 효도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요?"

한양에는 진짜 의정부를 두고, 이곳 양주에는 가짜 의정부를 두면 됩니다."

"영상은 별스런 말도 다 하오. 의정부의 진짜 가짜가 어떻게 있을 수 있소?"

"한양에는 전하께서 대신들과 나랏일을 의논하시는 의정부를 두시고, 이곳 양주 땅에는 대신들이 한 달에 두세 번씩 나와서 태상왕 전하께 '나랏일을 책해 주십쇼' 하고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한 의정부는 두어서 무엇하겠소?"

하윤은 껄껄 웃었다. 그는 개국 공신일 뿐 아니라 방석을 세자의 자리에 쫓아낸 태종 이방원의 중흥 공신이요, 은인이다. 가끔 임금 앞이건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께서는 하나만 아시고 둘은 모르십니다. 글쎄, 그것이 효도라고 아뢰지 아니했습니까?"

태종은 얼굴을 붉혔다. 화가 불끈 일어났다.

"가짜 의정부를 두는 것이 어이 효도란 말이오.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니 불효자의 행동이 아

니겠소."

"전하, 세상일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효도 중에 두 가지 효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음식과 의복을 잘 드려서 맛있게 자시도록 하는 효도가 있고,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효도가 있습니다. 가짜 의정부를 양주에 두면 태상왕의 마음이 즐거우실 것입니다."

 

양주 땅에 의정부

하윤의 말을 들은 태종은 비로소 황연히 깨달았다.

"정승의 말씀을 비로소 알아듣겠소. 그러면 양주에도 의정부를 주기로 합시다."

"태상왕 전하께 문안을 드리신 후에 태상왕 전하께도 이 뜻을 아뢰어둡시오."

태종은 하윤과 말을 마친 후에 곧 행궁 전각으로 올랐다. 하윤은 행궁 아래채에 대기하고 있었다. 장차 태종의 문안이 끝나면 대신의 자격으로 문후를 올릴 작정이다. 내관과 상궁들이 전사에 오르는 태종을 태상왕의 거처하는 큰방으로 인도했다. 방에 들어서니, 늙은 상궁이 조용한 음성으로 태상왕께 아뢴다.

"상감 문안드리오."

좌우 옆에서 젊은 상궁들은 늙은 상궁의 아뢰는 말씀이 채 떨어지기 전에 태상왕 전하를 부액해 드렸다. 아무리 아들이라 하나 상감이고 보니 조체를 보아서 태상왕은 아들 방원을 맞이했다. 태상왕은 잠시 자리에 일어나서 상감 방원을 바라보고 다시 안석에 기대앉았다. 이제 태상왕의 얼굴빛을 전과 달랐다. 환영문 앞에서 활을 당겨 쏘던 때와 환영연 자리에서 철퇴를 꺼내던 그 노한 얼굴이 아니다. 표정이 없는 듯한 얼굴빛이었으나 노한 기운과 역한 기상이 없는 부드러운 안색이었다. 태종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태상왕 이성계도 잠깐 허리를 굽혀 답례를 올렸다. 태종은 절을 올린 후에 금포옥대에 두 손을 모아 잠깐 태상왕의 용안을 바라뵙고 아뢴다.

"행궁에 단청을 칠하라고 감역에 일렀사온데, 단청칠을 안 했습니다그려."

태상왕은 부드럽게 대답한다.

"대궐이 아니고 행궁인데 지나친 사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오."

이제는 태종이 왕위에 나간 것을 사랑하는 딸 경순공주의 말을 들어 그대로 인정하는 모양이다.

"아바마마의 검소하신 덕을 온 날의 벼슬아치와 백성들은 마음속 깊이 느낄 것이옵니다."

태상왕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그동안 소자는 다시 한양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환도했습니다."

태상왕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의정부를 이곳 양주 땅에 두기로 삼정승이 합의를 보았습니다."

"의정부를 이곳에 두다니?"

태상왕은 눈을 번쩍 떠서 상감을 바라보며 묻는다.

"크고 작은 국사에 대하여 아바마마의 재가를 맡아서 처리하려 하옵니다. 그리하와 행궁 가까운 양주 땅에 의정부를 두기로 했습니다.

태상왕은 상감 태종의 아뢰는 말씀을 듣고 고개를 가로 흔든다.

"의정부는 수도 한양에 있어야 하오. 어찌 삼정승의 회의처를 양주 땅에 두겠소. 불편하고 좁은 양주 땅에 의정부를 둔다는 것은 알지 못할 말이요. 번거롭고 부질없는 짓을 하지 마오. 정승들의 회의처인 의정부가 나온다면 육조아문(六曹衙門)도 나와야 할 것 아닌가."

"의정부만 나오고 육조는 아니 나오기로 했습니다."

"불편해서 어찌하려고..."

"이미 대신들이 결정했습니다."

"모를 일이로다!"

태상왕은 마땅치 않게 여겼다. 말씀이 끝난 후에 태종은 문안을 마치고 나왔다. 뒤를 이어 창 앞에서 내시가 고한다.

"영의정 하윤 문후드리오.?

태상왕은 마음이 풀렸다. 비로소 조정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들 방원을 왕으로 인정했으니 그의 신하인 영의정 하윤을 아니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 비록 하윤이 방원을 도와서 모든 험악한 일을 한 장본인이라 하나 방원을 왕으로 인정한 이상 하윤을 정승으로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역시 경순공주의 대자대비한 선의 철학이 커다란 효력을 나타냈다.

"들라 해라!"

태조는 영의정 하윤의 문안 드리는 것을 허락했다. 하윤은 내시에게 인도를 받아 전각 장지 밖으로 들어서서 공손하게 곡배(曲拜)를 드렸다. 절을 올리며 웅얼거렸다.

"신 영의정 하윤 문후드리오."

태상왕은 의젓하게 대답하며 앉은 채 허리를 굽혔다.

"영의정이 멀리 와서 찾아주니 고적했던 내 마음이 매우 기쁘오."

"신 하윤이 너무나 불민하와 태상왕 전하께 자주 문후를 드리지 못했으니 그 죄 태산보다 크옵니다. 넓게 통촉해주시기 바라옵니다."

"내가 항상 멀리 있었으니 어느 하가에 나를 찾겠소."

태상왕 이성계는 비로소 처음 미소를 지어 하윤의 말에 대답했다.

"태상왕 전하께옵서 멀리 함흥에서 돌아오시어 가까운 양주 땅에 계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부모가 가까이 계신 듯 모두 다 마음이 안정되어 국운이 융창하다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멀리 있으나 가까이 있으나 이제는 늙어 무용지물이 되었소. 국가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오."

"황공하옵신 분부올시다. 전하께옵서 직접 만 가지 일을 총말하시지 아니하시더라도 항상 뒤에 앉으시어 모든 일을 보살펴주셔야 합니다."

하윤은 은근하게 다시 아뢰었다. 태조 이성계는 하윤에게 사양하는 말을 보낸다.

"노장은 다 무용 아닌가?"

하윤이 다시 간곡하게 아뢴다.

"아니올시다. 큰일은 전하께서 살펴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넒으신 상감이 계시다 하나, 모든 경험이 어찌 성덕이 높으신 태상왕 전하를 따르오리까. 자손만대의 크나큰 업적을 위하여 큰 도움을 내려주시옵소서. 영의정 신 이하 만백성의 소원이올시다."

하윤은 능란한 말솜씨로 태상왕의 비위를 맞추었다. 누구나 칭찬하고 존경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이다.

'영의정 이하 만백성의 원' 이란 말에 태상왕 이성계의 마음은 더한층 풀어졌다. 태상왕의 눈치를 본 하윤은 다시 말을 계속해 아뢴다.

"상감께서 친히 태상왕 전하께 아뢰었을 줄 압니다. 그간, 상감께서는 송도에서 종묘사직이 계신 한양으로 완전히 천도를 하셨습니다."

"아까, 들어서 알았소."

"상감께서는 태상왕 전하의 성의를 받들어서 한양 천도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기와 정해논 도읍터니 잘했다고 생각하오. 송도는 정이 들어서 좋은 것 같지만, 기실은 지덕이 쇠해서, 왕도를 계승할 곳이 못 되오."

태상왕의 마음은 점점 더 풀어졌다. 흡연히 웃으며, 하윤을 향하여 대답했다. 하윤은 능청스럽게 태상왕 이성계의 비유를 맞추려고 한다.

"태상왕 전하께 또 한 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태상왕의 대답은 더욱 흐뭇했다.

"의정부를 이곳 양주에 두기로 했습니다."

"아까 상감한테도 들렀습니다마는 불가하다고 생각하오. 의정부는 영의정이 나랏일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중대한 곳인데 반드시 수도 한양에 두어야 하오. 편벽된 시골에 둔다는 것은 극히 불가하오. 상감의 말을 들으면 영의정이 주장했다 하니 어찌 그런 불편한 생각을 했단 말이오."

하윤운 목소리를 더욱 부드럽게 하여 다시 간곡하게 아뢴다.

"상감께옵서는 신이 주장하여 의정부를 양주 땅에 두자고 한 것같이 아뢰었사오나 기실은 상감께옵서 주장하신 것이올시다."

"글쎄, 무슨 필요로 의정부를 양주 땅에 둔단 말이오. 공연한 짓이지.'

"그것은 상감의 지극한 효성에서 생각하신 것이니 그대로 윤허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효심이라니?"

"중대한 국가 대사를 처리할 때 태상왕 전하께 품달하옵고 일을 결정하기 위하여 의정부를 양주에 두자는 것입니다. 아바마마의 명령 없이는 크나큰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겠다는 갸륵한 성지에서 나온 것이올시다. 상감께서는 이같이 항상 전하를 잊지 못하시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음속으로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르겠소. 맘대로 하라 이르오."

"그러하니 상감께서는 부왕 전하의 뜻을 받드는 진정한 효자십니다. 이런 일을 미루어볼 때 앞으로 나라의 운수는 크게 떨치리라 믿습니다."

"정 그렇다면 영상은 상감을 잘 도외서 이 나라를 태산반석과 같이 육성시켜주기 바라오."

태상왕 이성계는 이제 완전히 아들 태종과 영의정한테 모든 일을 다 함께 떠맡겨버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하오면 곧 의정부를 양주 땅에 두게 하겠습니다."

하윤은 배례를 드리고 물러갔다. 양주 땅에는 간소한 재목으로 의정부가 세워졌다. 하윤과 조준들은 태상왕의 재가를 맡기 위하여 번을 갈아 소요산에 문안을 드리고 의정부에서 간단한 회의를 했다. 오늘날까지 의정부라는 땅 이름이 양주에 있는 것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태상왕은 태종의 문안과 영의정 하윤의 문후를 소요산 행궁에서 받은 후에 의정부를 양주 땅에 설치하는 것을 묵인했다. 그러나 사실인즉 모든 정치적 일은 아들 태종에게 맡겨버렸다. 태상왕의 의욕은 이제 몸과 함께 늙었다. 인생의 거센 풍파와 흘러가는 세월은 고려 천지를 뒤흔들고 조선이란 새 나라를 창건한 한 시절의 영웅호걸 이성계를 이같이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성계는 이제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의정부로 대신들이 나와서 나랏일을 품하면 그는 언제나 '상감하고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는 말씀을 내릴 뿐이었다. 양주에 있는 의정부는 하윤의 생각대로 형식적인 의정부에 지나지 아니했다.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면, 두 달에 한 번씩 대신들이 양주 의정부로 와서 태상왕께 문후를 드리고 여러 가지 나랏일을 종합해서 아뢴 후에 '좋다' 하는 말씀을 듣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례다.

태상왕은 죽은 후의 일이 걱정이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땅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연의 사실이다. 자기가 죽으면, 아들 태종은 물론 좋은 곳을 가려서 장사를 지내줄 것은 분명하지만, 아들 태종이 하는 일이 아직도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산소를 쓰는 데는 우선 지리에 밝아야 하는 것이다. 아들은 보통 사람과 달라서 제왕의 지위에 있으니, 자기 백세 후에 장사를 지낸다면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풍수를 청해서 능을 봉할 것은 잘 알고 있으나 암만 해도 풍수에 대한 지식은 아들 태종이 자기만 같지 못할 것 같다. 그뿐 아니었다. 방금 풍수학을 공부한 지사와 승려들이 아무리 많다 하지만 고려 태조의 대궐 터를 잡아준 도선대사나 한양 정도에 참여했던 무학대사의 공부에 따라갈 만한 사람이 있지 아니했다. 도선대사는 벌써 수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청해도 올 수가 없지만 무학대사는 아직도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죽었다면 그의 제자들이 입적했다는 희소식으로 무학이 살아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생각이 불현듯 났다. 때마침 한양 정릉에 있던 경순공주가 소요산 행궁으로 문후를 드리러 왔다. 태상왕은 반갑게 따님을 맞이했다.

"그동안 아무 탈이 없었느냐?"

"부처님의 은덕으로 별 탈 없이 지내옵니다."

경순공주는 여전히 승려의 복색으로 문후를 드리러 왔다.

"너의 어머님 능침도 다 안녕하시냐?"

태상왕은 옛 아내 강비의 산소도 무고하냐고 물었다.

"부처님이 호위해주시는 불력으로 아무 별고 없이 백골이 편안하십니다."

공주는 고개를 숙여 나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러지 아니해도 너 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무학을 찾아서

공주는 고개를 숙여 나직이 대답한다.

"며칠 전부터 온다는 것이 늦었사옵니다."

공주는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아바마마를 바라뵈었다.

"너는 절에 있으니 혹시 무학대사의 소식을 들었느냐? 입적이나 되지 아니했는지 모르겠구나."

"금강산에 있다 하옵니다."

"금강산에 아직 살아 있다 하더냐?"

"흥천사에 드나드는 객승들의 말에 의하면 금강산에서 참선하고 있사온데, 기력이 전만 못하다 합니다. 무학대사를 만나보시려 하십니까? 용이치 아니하리라 생각됩니다."

"탈 것을 보내서 처해오면 되지 않겠느냐?"

"무학은 청해서 무엇하십니까?"

"글쎄, 만나보고 의논할 일이 있구나."

태상왕의 얼굴엔 쓸쓸한 웃음이 그늘을 지며 떠돌았다.

"무학대사도 꽤 늙었을 것입니다."

공주는 한마디 하고 다시 태상왕의 용안을 살핀다.

"나의 만년유택을 의논해볼까 한다."

태상왕 이성계는 말을 마치며 추연히 한숨을 지었다. 공주의 가슴이 새삼 아팠다. 무어라고 아버지 말씀에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잠깐 침묵을 지켰다.

"아무리 늙었더라도 내가 청하면 올라오겠지."

"아바마마, 소녀가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정하시는 데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소녀가 금강산으로 가서 무학대사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태상왕은 깜짝 놀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무한 기뻤다.

"네가 어찌 여자의 몸으로 금상산엘 가겠느냐?"

"소녀는 이미 출가한 몸이올시다. 중의 모으로 금강산에 들어가는 일은 당연한 노릇이올시다. 더구나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정하시는 일에 소녀가 어찌 아니 가오리까."

태상왕은 기뻤다.

"그렇다면 너의 정성을 막지 아니하리라. 나를 대신하여 무학을 청해오너라."

공주는 곧 소요사에 예불을 올린 후에 태상왕 소속의 내시와 궁녀들을 거느리고, 금강산 표훈사에 들러 무학대사의 소식을 물었다. 무학대사는 내금강 금장암에서 참선하고 있다 했다. 경순공주는 내시와 궁녀와 함께 내금강의 금장암을 찾았다. 과연 무학은 금장암에 있었다. 공주는 상좌 중에게 전달을 보냈다.

"흥천사에 있는 경순공주가 아바마마의 분부를 받자와 국사를 뵈오러 왔다 전하오."

상좌 중은 곧 이 뜻을 무학대사에게 전했다. 무학은 깜짝 놀랐다. 경순공주가 멀고 먼 금강산까지 국가에 무슨 큰일이 또 일어났구나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다. 무학은 상좌 중에게 분부를 내렸다.

"곧 방장으로 모셔 들이게 하라."

참선하고 앉았던 무학대사는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상좌한테 분부를 내렸다. 나이 일흔아홉 살, 내년이면 팔십 고령이다. 아직도 목소리는 단정하고 얼굴에는 청수한 기운이 돌았다.

공주는 무학한테 합장하여 예를 올렸다. 내시와 궁녀들도 대사한테 예를 올렸다. 무학대사는 공주한테 묻는다.

"공주마마, 웬일이시오니까? 멀고먼 이곳까지 친히 오시니 반드시 하십니까? 혹씨 국가에 무슨 일이 있지 아니합니까?"

무학대사는 궁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아바마마께서도 안녕하시고 국가에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안심하옵소서."

공주는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무학도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다시 말을 꺼냈다.

"하도 덴 가슴이라 궁금해서 아뢴 것이올시다. 국가가 태평하고 태상왕 전하께서 강녕하시다 하니, 이만 대행이 없습니다."

무학대사는 다시 합장을 올렸다.

"소승이 이곳에 온 것은 아바마마께옵서 국사님을 모시고 오라 하시어 이같이 온 길이올시다."

"빈도를 부르시옵니까?" 성은은 감격하오나, 나이 이미 팔십에 가까운지라, 행보하기가 어렵습니다."

무학은 간단하게 거절했다. 공주는 무학의 거절하는 말을 듣자, 다시 합장하여 절을 올리고 간곡하게 간청했다.

"높으신 춘추에 행차를 하시자 하와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마는 아바마마께서는 지금 양주에서 국사 오시기를 고대하시어 일각이 삼추같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상왕이 양주에 계시다는 말을 듣자, 무학대사의 눈이 둥그레진다.

"태상왕 전하께서 지금 양주에 계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그러합니다. 소풍차 행재소에 계십니다."

"공주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함흥에서 올라가신 지 오래셨는데, 지금도 상감과 의가 좋지 아니하십니까?"

무학대사는 늙은 눈에 정기를 담뿍 모아 경순공주한테 물었다.

"아니올시다. 처음엔 얼마 동안 마땅치 않게 생각하셨습니다마는 지금은 부처님의 힘으로 아바마마의 마음을 돌리시게 했습니다."

"불력으로?"

무학의 주름진 얼굴에는 경이와 환희의 빛이 서로 어울려 물결쳐 흘렀다.

", 그러하오이다."

무학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누가 불력으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리시게 했습니까?"

"부끄럽습니다마는 소승이 송도에서 정릉으로 오신 아바마마를 모시고 인생의 무상과 선의 철학을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과거를 다 뉘우치시고 또 현재의 상감과의 불화를 다 씻어버리신 후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큰 뜻을 본받으시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양주 소요산 아래 소요사를 지어서 관음보살을 모시고 그 아래는 또다시 소요산 행궁을 건축하시어 지금 거처하고 계십니다. 이제 아바마마께서도 칠십이 넘으신 고령이올시다. 마음 약해지시어 선한 길을 밟으시려고 마음을 기울이십니다."

공주의 말씀을 듣는 무학대사는 별안간 입이 벙글벙글 벌어졌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공주마마, 과연 잘하셨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가장 슬픈 하늘을 머리에 이시고, 몸 둘 곳 없는 땅을 밟으셨으면서도 능히 큰 슬픔과 큰 괴로움을 초월하시고 다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리게 하셨으니, 이씨조선은 앞으로 크게 여망이 있을 것입니다. 감축합니다. 모두 다 성현 같으신 공주께서 이씨조선의 무궁무진한 복록을 마련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무학대사는 팔십에 가까운 높은 나이건만 저럼은 경순공주를 향하여 경건하게 합장을 올렸다. 공주는 노장 스님의 합장을 받자 몸 둘 곳을 몰랐다. 얼굴을 붉혀 마주 합장하여 답례를 보내면서 불감한 뜻을 표했다.

"소승이 연천한 여자의 몸으로 어찌 감히 국사의 칭송을 받사오리까. 황공무지하여이다."

"도를 깨닫고 사람의 마음을 착한 길로 인도하는 데 늙고 젊은 한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공주마마, 과연 고맙습니다. 빈도는 왕실을 위하는 것보다 한 사람 선한 일을 하는 그분에게 감사한 말씀을 아니 보낼 수 없습니다.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그만큼 돌리셨다 하니 그런 다행이 없습니다마는 상감의 의향은 지금 어떠하시오니까?"

무학대사는 태종의 마음은 어찌 되었느냐고 공주한테 물었다.

"상감은 원래 탐권욕 한 가지로 죄악을 많이 저지르신 분입니다. 권력을 잡으려는 그것 한가지로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부자지간과 형제지간에 많은 죄악을 저지르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당신의 소원대로 모든 권력이 자신의 손아귀로 돌아갔으니 만족한 느낌을 간직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욕망대로 만족한 욕망을 채웠을 때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지고 착해지는 법이올시다. 그러하니 이제는 아바마마께 효도를 해보려고 노력하는 눈치올시다."

무학대사는 공주의 말을 듣고 소리높여 껄껄 웃는다.

"그렇지, 그렇지 공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람은 얼마쯤 자기만족을 느끼게 되면 선한 데로 돌아가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마음은 본시 착한 것인데 물건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악한 일도 감행하는 것이 아니오니까."

무학은 공주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흐뭇했다. 미소를 지어 공주를 바라본다.

"상감께서는 이번 아바마마께서 소요사를 지으시고 소요산 행궁을 건축하시는 데 크게 감동이 되시어 건공감을 부르시어 팔도에 일등 가는 편수들로 절과 행궁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몇 달이 안 가서 행궁과 소요사가 완성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무학대사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잠깐 한숨을 짓는다.

"그뿐이 아닙니다. 상감은 친히 소요산 행궁으로 납시어 아바마마께 문안을 드리고 영의정 하윤과 의논하시어 양주에다가 의정부를 두시어 나랏일을 품달하게 마련하셨습니다."

"양주에다가 의정부까지 두셨습니까? 참 갸륵한 일입니다.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려고 애를 쓰셨습니다그려."

무학은 또 한 번 감탄했다.

"그래, 양주 의정부로 대신들이 나가서 국사를 의논하고 태상왕 전하의 재가를 받습니까?"

무학대사는 얼굴에 깊은 빛을 띠고 공주한테 물었다.

"영의정 하윤 이하 좌우 정승이 의정부로 한 달에 한 번씩 나와서 국사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는 사양하시고 대신의 의견을 매양 상감한테 아뢰어 처결하라 하시는 모양이올시다. 처음에는 의정부를 둘 것 없다고 반대하셨습니다마는 이제는 형식상으로 대신만 만나보십니다."

"좋은 일이올시다. 그래야 나라가 되는 법이올시다. 아버지는 아드님 상감한테 미루시고 아드님은 아버님 되시는 태상왕께 품달하도록 하시니 두 분 사이의 서로 양보하시는 이 아름다운 덕은 넉넉히 전날 불화하셨던 잡음을 씻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정승의 꾀일 것입니다. 하하하 유쾌한 일입니다. 나라가 잘될 것입니다."

무학은 어깨를 놓치지 아니했다.

"사부님께 아룁니다. 아바마마께서 사부님을 만나보시겠다 하시는 일은 아마 살아평생, 마지막 소원이실 것입니다. 아무리 노경에 출입하시기가 어렵다 하시나, 교자를 타시고 양주로 가시어 아바마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공주의 목소리는 바로 곧 간절히 애원하는 음성이다. '마지막 소원' 이란 공주의 말에 무학대사의 마음은 서글픈 감정이 물결쳐 흘렀다.

"공주마마,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마지막이라니---."

"만년유택을 정하려 하시는 길이니, 어째 마지막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아바마마도 늙으시고, 사부께서도 노래하셨습니다. 아직까지 두 분께옵서 기력이 강건하시다 하나, 언제 어느 때, 모두 다 입적을 하실는지 모르옵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해몽을 해주시고 국도까지 정해주신 은덕이 계십니다. 마지막 원을 드려 만년유택을 정해주시기 간절하게 비옵니다. 아바마마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합니다마는 소승의 태산같이 바라는 이 마음을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공주의 초롱거리는 눈에는 눈물이 이슬처럼 맺혀 글썽거렸다. 무학대사는 잠깐 동안 무엇을 생각하다가 허락을 했다.

"공주를 모시고 가오리다."

공주는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앵도 같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곧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무학대사는 검은 장삼에 만수가사를 어깨에 메고 석장을 든 후에 팔십에 가까운 늙은 몸을 교자 위에 실어 금장암을 나섰다. 뒤에는 경순공주가 여승의 몸으로 가마를 타고 뒤따르고 그 뒤에는 상궁 두 여자와 내시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따랐다.

태상왕이 금강산에 있는 무학대사를 공주를 시켜 청해간다는 소식은 단번에 수령 방백한테 퍼졌다. 지나는 곳마다 무학대사와 공주를 대접하는 찬수 범절과 지공이 놀라웠다. 무학대사가 소요산 행궁에 당도하니, 태상왕의 마음은 한량없이 좋았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루 끝까지 나가 무학대사를 맞아들였다.

"국사, 그동안 무양 하셨소?"

태상왕은 덥석 무학의 손을 잡았다. 무학은 전에 올라 합장을 드렸다.

"전하! 그동안 강녕하셨다는 말씀을 공주마마께 듣자옵고 얼마나 기쁜지 몰랐사옵니다. 그러하옵고 이곳 소요산에 소요사를 짓고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셨다 하니 불도의 마음이 어찌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감축하여이다."

태상왕은 무학을 오래간만에 대해보니, 얼굴과 태도가 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자기 자신도 저만큼 늙었으려니 하고 생각해보니 한심스럽기도 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제는 국사도 많이 늙었구려---."

태상왕은 무학을 바라보며 탄식조로 말했다.

"산골에서 입산수도를 하는 까닭에 속세 인간의 근심 있고 시름 하는 생활보다는 마음이 편하여 덜 늙는다 하옵지만, 어찌하오리까. 하늘 이치가 사람으로 불로장생은 못 하도록 마련해놓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한무제의 승로반도 소용이 없고, 삼신산에서 캔다는 불로초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늙어지면 죽는 것이 천도입니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전하께옵서도 함흥에서 뵐 때보다 많이 노래하셨습니다."

"국사의 말이 옳소. 늙으면 가는 것이지, 하하. 모두 다 가는 것이지. 옛일을 돌아보니 한바탕 꿈이로구려!"

"전하의 말씀이 옳소이다. 인생이란 일장춘몽이올시다. 왕후장상은 이 길로 가고 마는 법이올시다."

무학은 말을 잠깐 그쳤다가 다시 계속한다.

"전하께서는 국가를 위하여 많은 사업을 하시고 공성신퇴하시니, 빈도 같은 승려보다는 그래도 많은 빛을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하하하."

무학은 호방하게 한 번 웃었다.

"천만에, 사업을 많이 했다 한들 무엇하오. 세상에 나같이 고생을 하고 마음을 썩게 하였으면서도 장차 내가 죽은 후에 욕과 비방이 빗발치듯 쏟아질 것을 생각하니, 내가 왜 왕의 자리에 나갔던지 모르겠소. 후회막급이오. 그러나 대사는 맑고 맑은 대자연 청정세계에서 한평생 몸을 깨끗이 닦아서 착하고 어진 길로 사람을 구제했으니, 사후에 연화대로 갈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늙은 뒤에는 아무런 번민이 없을 테니 그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소. 과연 부럽기 짝이 없소."

무학은 태상왕의 말씀을 듣자, 한층 더 소리를 드높여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것이 모두 다 인생입니다. 번민이 있는 사람이 있으므로 불도가 시작되었고, 욕심이 과한 까닭에 이것을 경계하는 유학의 삼강오륜도 윤리로 나타났습니다. 모두 다 하늘의 조화올시다."

이때 행궁 내주에서는 무학대사를 위하여 소찬이 들어왔다. 특히 태상왕의 명령으로 공주가 감상을 하여 태상왕 전하와 겸상반을 차려서 들여왔다. 경순공주는 궁녀를 시켜서 무학대사와 태상왕이 앉은 사이에 상을 놓았다.

"스님께서 매우 시장하실 것입니다. 아바마마의 어명을 받들어 소찬으로 겸상반을 받들어 올렸습니다. 많이 들어주십시오."

공주는 친히 무학대사의 밥주발과 소찬 뚜껑을 차례차례 열었다.

"황감하여이다. 소승이 어찌 감히 전하와 겸상반을 받자오리까. 불감하여이다."

무학은 겸상을 사양했다. 태상왕은 숟가락을 들며 무학에게 술을 들기를 권했다.

"의는 형제 같고, 가르쳐주는 말씀은 스승이로구려. 이러므로 과인은 항상 당신을 국사로 대접하오. 어찌해서 신이라고 자처해 부르오. 자아 국사, 사양치 말고 들기로 합시다."

태상왕은 무학을 타일러서 소찬을 들기 시작했다. 공주가 다수를 친히 내왔다. 식사가 끝난 후에 태상왕은 다시 무학에게 말을 건넨다.

"국사, 과인이 국사를 청한 것은 나의 해골을 묻을 만년유택을 정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욕심인지 모르겠소이다. 죄는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허허허."

"욕심은 역시 욕심이십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죄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무학은 소리를 높여 크게 웃었다. 태상왕은 빙긋 웃으며 무학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큰 죄가 아니라면, 국사는 나를 위하여 잠깐 수고를 해주시오."

"공주마마께 모든 일을 들어서 알았습니다. 빈도 같은 승려는 죽은 후의 일은 생각도 아니 합니다. 수장을 지내건, 화장을 지내건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는 국가의 원수이십니다. 자고로 풍수설이 없다면 모르되 지금까지 전해오는 이상,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만년유택을 아니 보시고 정할 수 없습니다. 처음, 소승은 아니 오려 했습니다마는 공주마마의 크나큰 효성에 감동되어 마지막으로 전하를 위하여 천년 좋은 유택을 상 보아 드릴 것을 결심했습니다. 내일 일찍 동가하실 수 있겠습니다?"

무학은 태상왕을 우러러본다.

"국사가 천 리 길에 와서 나의 해골 묻을 터를 지정해주는데 내가 어찌 따라가지 아니하겠소. 아침 아니라 새벽에라도 국사를 따라가리다."

"그러하시다면 거창한 거둥행렬은 폐지하시고 단기로 전하만 모시고 가겠습니다."

옆에 있던 공주가 아뢴다.

"다른 사람은 다 안 가도 저는 아바마마를 모시고 꼭 가야 하겠습니다. 만년유택을 정해두시는 치표를 알아두아야 하겠습니다."

"공주마마의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전하의 만세 후에 치표를 자리를 알아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태상왕 이성계의 생각에도 번잡스럽게 한양의 정부 대신들이나 태종한테 묏자리를 구하러 간다고 반포하기가 싫었다.

"공주의 뜻이 정 그렇다면 함께 가리라."

공주는 기뻤다.

"타실 것은 교자로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하옵고 내관 한 명과 찬수를 맡은 궁녀 한 명쯤 배행해서 모시고 가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국사나 나나, 모두 다 늙었구나. 말을 타는 것보다 교자 세 채를 준비시켜라. 너도 타야 할 것 아니냐. 그리고 네 말대로 행궁 내관 한 명과 궁녀 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다."

공주는 곧 아바마마의 명을 받들어 밖으로 나갔다.

태상왕은 다시 무학에게 말했다.

"묏자리를 구하러 간다면 방향을 정해야 하지 않겠소. 어느 쪽으로 가는 것이 좋겠소?"

"글세올시다."

무학대사는 잠깐 눈을 감았다.

"국사는 천하를 두루 살핀 사람이라 좋은 자리가 어디어디 있는 곳을 잠작할 것이나 방향을 정해놓고 가는 것이 좋겠소."

 

이성계와 무학의 종착역 대화

무학이 대답해 아뢴다.

"신승이 일찍이 한양에 도읍터를 찾아다닐 때, 산이란 산은 거의 빠뜨리지 아니하고 다 보았습니다. 이러하므로 지금도 한양 부근의 산과 들은 아직도 눈에 환합니다. 도성 서편보다 동편이 나을듯합니다. 양주 검암산으로 어가를 모시라 하겠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공주가 나타났다.

"만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공주가 아뢰자, 태상왕이 말했다.

"자아, 그럼 떠나기로 하자!"

공주는 태상왕께 옷을 갈아입혀 드렸다. 미복으로 차려서 갓과 창의로 갈아입은 태상왕은 무학과 함께 일어났다. 공주가 뒤에 따르고 내시 한 명과 찬수를 받든 궁녀 한 명이 공주의 뒤를 따랐다. 태상왕은 교자 위에 올라 영을 내렸다.

"검암산으로 향해 가자."

교자를 어깨에 맨 무예청들은 비로소 방향을 알았다.

"검암산이면 한양 도성 밖 이십 리허에 있습니다. 한양 편을 바라보고 들어가야 합니다."

"통장의 말이 옳소. 이곳에서 가자면 서울을 바라보고 가다가 창동에서 중랑개 다리를 지나서 동편으로 나가면 되오."

무학은 통장의 말을 받아 자세히 지세를 가르쳐주었다.

날씨는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바람도 잔잔했다. 춥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계절이었다. 간단한 태상왕 이성계의 행차는 감사와 원들도 모르게 양주 검암산으로 향하여 달렸다. 일행은 반나절 만에 양주 검암산에 당도하였다. 푸르고 윤 흐르는 일좌청산이 탁 트인 청자빛 하늘 아래 그윽한 영기를 품었다. 태상왕과 무학은 교자에서 내려서 공주와 함께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공주와 궁녀는 태상왕을 부액해 오르고 내관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무학대사를 부축했다. 일행이 검안산 상봉에 오르자, 무학은 석장을 높이 들어 산세를 설명한다.

"전하 이 산은 소승이 전하의 만년유택을 위하여 마음속에 간직했던 곳입니다."

무학의 말에 태상왕 이성계는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허허, 국사의 나를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을 나는 무엇으로 다 갚아야 한단 말요. 어느 때 보아두었소?"

태상왕은 합장하고 아뢴다.

"한양을 배판한 후에 즉시 봐두었습니다. 전하! 소승의 생각에는 지종을 한결같이 하려 했습니다. 처음 전하의 잠룡하시던 시절에 왕이 되실 것을 예언하였고, 한양 대궐터를 정하는 데 참획했던 소승으로 어찌 대왕 전하의 만년유택을 생각해보지 아니했겠습니까. 이리하여 한양 도성 백 리 이내를 두루 물색해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해서 천부금탕인 대명당을 찾아냈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자, 더한층 기뻤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내가 대사를 청해온 일은 하늘이 시킨 일이라 하겠소. 과연 고맙소."

"소승은 '비기'를 써서 아드님 되시는 상감께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소승도 이제는 나이 늙어서 여년이 얼마 남지 아니했습니다. 아마 전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글로 써서 아드님 되시는 상감께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공주마마의 지극하신 효성에 감동되어 소승이 전하 앞에 친히 이 명당자리를 설명해드리게 되니, 소승 역시 기쁨을 금할 수 없을 뿐 아나라, '복인봉길지'란 옛글과 같이 이 땅을 차지하시는 전하의 복력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전하께 드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무학은 벙싯벙싯 웃으며 자기가 일찍부터 태상왕 이성계를 위하여 이 자리를 자아둔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옆에서 무학의 말을 듣고 있던 경순공주는 합장을 하여 무학에게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의 아바마마를 위하시는 갸륵하신 그 심경은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사옵니다. 소녀는 무슨 정성으로 사부님의 은공을 갚으오리까. 이생에서 못다 갚사오면 저승에 가서라도 결초보은 하오리다."

공주의 푸른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샘솟듯 넘쳐 흘렀다. 무학은 공주의 지성 어린 눈물을 보자, 더한층 감동이 되었다.

"공주마마, 딴 말씀 마시옵소서. 소승이 어찌 은공을 받기 위하여 미리 자리를 정해두었으리까. 국가의 천년 앞길을 위하여 마음으로 정해놨던 것입니다. 아예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은 하지도 마십쇼."

태상왕이 옆에서 무학한테 말한다.

"아까 국사가 말씀하시기를 도성 백 리 안에서 명당을 찾아보았다 하는데, 하필 백 리 안에서만 산소 자리를 찾아보았소? 삼천리강산이 모두 다 우리 땅인데."

무학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지당하신 말씀이올시다. 보천지하가 막비왕토라고, 넓고 넓은 하늘 아래 땅은 모두 다 전하의 땅 아닌 곳이 없습니다."

무학은 잠깐 말을 끊었다. 무학은 말을 계속한다.

"그러나 능묘를 도성 백 리 안에 두는 것은 다 까닭이 있어 그리하는 것입니다. 한번 능을 모신 후에 그 자손 되시는 임금은 자주 능침을 찾아서 전배를 드려야 하는데 임금의 몸은 소중한고로 백 리 넘는 먼길에는 거둥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은 나라의 수도인 서울을 함부로 비우지 말라라는 까닭이올시다. 그러므로 장차 자손이신 상감의 장래 일을 생각하여 백 리 이내에서만 능자리를 살핀 것이올시다."

태상왕은 무학대사의 말을 듣자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공주도 듣지 못했던 일을 얻어들었다고 기뻐했다. 무학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므로 소승이 이 자리를 택한 것은 한양에서 겨우 이십 리밖에 아니되는 때문이올시다. 그러하오니 삼천리강산 속에 이러한 명당자리는 단지 이곳 한자리밖에 없습니다."

태상왕과 공주는 무학대사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더한층 기뻤다. '삼천리강산 속에 단 한 군데 있는 명당자리'라는 말에 마음이 흥락했다.

"함흥에 계신 나의 할아버님 능침에 비하여 어떠하오?"

"도조 전하나 환조 전하의 능침에 비할 바가 아니올시다. 도조 전하나 환조 전하의 능침은 제왕이 되실 한두 분이 나오실 명당자리올시다. 그러나 검암산 이 자리는 제왕이 되실 분이 백자천손으로 나오실 곳입니다. 두 말씀 마십쇼. 조선에 제일가는 훌륭한 명당자리올시다."

무학대사는 말을 마치자 석장을 높이 들어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검암산 이 산의 큰 조종은 장백산, 곧 백두산이올시다.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된 용줄기는 굼틀굼틀 이천여 리를 휘돌아서 철령까지 온 후에 한 줄기가 다시 꺾여서, 서편으로 향하여 수백 리를 달리다가, 우뚝 큰 영이 솟았습니다. 이 영을 백운치라 합니다. 이 산줄기는 다시 남편으로 백여 리를 달려서 양주 땅에 들어와 남으로 행해 앉았으니, 이것이 바로 검암산이올시다. 어떻습니까? 천부금탕이 아니오니까."

태상왕과 경순공주는 홀린 듯 넋을 잃고 무학대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무학은 더욱 신명이 났다.

"자아 전하, 안산을 바라보십쇼. 푸른 산이 첩첩하게 구름에 싸여서, 이편을 향하여 휩싸돌면서 조하를 하는 듯합니다. 먼 산은 담채를 풀어논 듯하고 가까운 산은 글자 그대로 푸른 묏부리 청장이올시다. 모두 다 이 산소 자리를 향하여 두 손을 마주 잡고 절을 하는 듯합니다."

무학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산 하나가 굽어들어서 절을 해도 좋다 하는데 원산 근산이 첩첩하게 이편을 향하여 절을 합니다. 여기다가 앞에는 중랑천 물이 이 산을 싸안고 감돌아 흐릅니다. 수기가 윤을 뿜어 만년불패지지올시다."

"과연 산천이 수려하고 밝고도 아름답구려."

태상왕은 먼 산과 가까운 경치를 바라보며 칭찬했다. 무학은 더욱 신이 났다.

"자아 보십쇼. 멀고 가까운 산이 첩첩하게 둘러쌌으니 지가서에 말한, 삼천분대는 견공자지혼이요, 팔백연화는 야왕손지장이라 한 것입니다.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이 공자의 넋을 끌고 팔백 명이나 되는 후궁들은 왕손의 간장을 녹인다는 뜻이올시다. 이러하니 이 자리에 능침을 정하신 후에는 이씨 왕손은 계계승승 길이 번창할 것입니다. 그러하옵고, 이편 능침을 봉할 산 자체를 본다면, 단봉서우의 형국이올시다. 좌청룡, 우백호가 분명한 중에, 앞에는 달의 형국인 산이 있고, 또다시 그 앞에는 북과 같은 산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네모진 방산이 있습니다. 이른바 서우망월이면 청삼이 출자천가요, 단봉이 함서면 자조반어제궐이란 것입니다. 물소 형국을 한 산에 달 같은 모양을 한 산을 바라보며 푸른 옷을 입은 선관이 나오는 격이요, 북과 같고 조서와 비슷한 산 형상이 단봉형인 산 앞에 나타나면 붉은 간지로 쓴 조칙이 대궐에서 내린다는 것입니다. 자아 보십쇼. 이 산 자체의 형국이 바로 서우형이올시다. 과연, 만대의 제왕이 계계승승하실 땅이올시다."

"참말 그렇구려. 이제 자세히 산세를 살펴보니, 국사의 말과 똑같구려."

태상왕 이성계는 감격했다. 너무나 좋아서 탄식하는 소리가 또 나왔다. 무학은 태상왕의 감격해하는 말씀을 듣자 단을 내려 권한다.

"자아, 두말 마시고 이곳으로 전하의 만년유택을 정하십시오."

"좋소, 국사의 말씀대로 하오리다."

태상왕은 쾌하게 승낙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제, 혈 자리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이리 내려오십쇼. 산 자체가 아무리 좋다 하나 혈을 찾아서 형국을 만들지 아니하면 헛일이올시다."

무학은 말을 마치자 석장을 짚고, 산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태상왕도 청려장을 짚고 무학의 뒤를 좇았다. 궁녀와 내시들도 따랐다. 무학은 산을 타고 휘돌아 내렸다. 한 줄기 언덕이 기운차게 내룡의 형국을 이루어 굼실굼실 꼬리를 치며 내려가다가 바닥이 평편하게 열린 곳에 당도하자 펄썩 주저앉았다.

"자아, 여기가 혈이올시다. 혈 중에도 기막힌 정혈이올시다."

태상왕은 '정혈'이란 말에 당길 심이 있었다. 무학대사의 혈 가리키는 곳을 주시했다.

"어떻습니까? 바람도 아니 불고 아늑한 곳입니다."

"참말 바람이 없구려."

"보십쇼. 산 너머와 저편 언덕에는 지금 풍세가 한창 높습니다. 저기 저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십쇼. 그러나 이곳에는 바람이 한점도 오지 아니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이른바 장풍향양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이란 것은 땅속에 몸을 감추어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장사지내는 일은 곧 감추는 것이나 매한가지올시다. 그러므로 장은 장으로 통합니다. 바람이 아니 들고 따뜻하고 다양한 곳에 신체를 묻는다면 백골이 편안하여 아무 탈이 없고, 바람이 높게 들고, 땅속에 물이 가득 차고, 추워서 겨울에 얼부풀면 백골이 얼고, 여름엔 시궁창 속에 빠져 있게 됩니다. 이러하니 그 넋이 불안할 것은 정한 일 아닙니까. 망자의 넋이 불안하면 그 집안과 그 자손이 잘될 까닭이 있습니까. 전하, 생각해 보십쇼. 이치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과연 국사의 말씀을 들으니, 이제 나도 자리를 짐작하겠소."

"자아, 그럼 바로 이 자리에 치표를 해두십시오. 그리하여 전하의 만세 후에 이곳으로 모시도록 하십쇼."

공주는 내관을 돌아보며 분별했다.

"동리에 기별해서 지체 말고 일꾼들을 올려보내게 하라."

내관은 걸음을 빨리하여 산 아래로 내려갔다. 무학은 다시 태상왕께 고한다.

"아까, 산마루에서 보시던 그때보다 멀고 가까운 데 있는 앞산들이 더한층 다정하게 휩싸주지 아니합니까?"

"참말, 그렇구려!"

"풍수의 조화란 이런 것이올시다."

옆에서 바라보던 경순공주도 미소를 띠어 감탄한다. 이윽고 동리에서 내관의 지휘를 받아 장정들이 괭이와 삽과 가래를 가지고 올라왔다. 무학은 다시 태상왕께 고한다.

"전하, 이 산 이름은 검암산이옵고, 내를 건너 우편으로 마주 바라뵈는 산은 망우리 망우산이올시다. 감암산을 껴안고 흘러가는 내 이름은 중랑개인데. 이 물은 한강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갑니다. 지금 빈도가 대왕을 모시고 정혈자리는 계좌정향입니다. 정남향은 아니올시다. 이 자리에 치표를 하시옵서서."

태상왕은 마음이 흡족해서 대답한다.

"산소 자리는 남향판이 제일이지."

"어디 산소 자리뿐입니까? 사람이 사는 집터도 남향판이 제일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이라야 남향 대청에 남향 대문을 앉히고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죽어서도 따뜻한 남향판에 묻히기를 소원합니다."

"자아, 그럼 이곳에 치표를 해서, 역사를 하게 하라."

태상왕 이성계는 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무학은 친히 석장을 짚고, 둥글게 원을 그려 치표 자리를 표시했다.

"분금은 꼭 계좌정향으로 해야 합니다."

무학은 공주한테 당부했다.

"잘 알겠습니다."

"아시기만 하셔도 아니됩니다. 적어두십시오. 태상왕 전하께서는 황송한 말씀이오나 아무리 기억해두신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소승도 내일 세상을 떠날지 모레 죽을지 늙은 사람의 일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공주마마께서 잘 적어두셨다가 일후에 상감께 전달하도록 하십시오."

무학대사는 유언하듯 공주한테 말했다.

"염려 마시옵소서. 사부님의 말씀을 명심해서 기록해두오리다."

"그리하옵고 다시 아룁니다. 분묘를 모신 남쪽 제절은 사방 이십일 척의 내토성을 만들어서 떼풀을 입혀 사성을 쌓으십쇼. 넓이만 정해주시면 산역으로 사람들이 다 잘 알 것입니다."

공주는 필낭을 열어 붓과 수묵통을 꺼내놓고 무학이 적으라는 대목을 간지에 일일이 적었다. 무학대사는 다시 말을 잇는다.

"제절을 만든 후에는 비스듬히 구릉을 이루면서 넓고 넓게 평지를 만들어서 순전이 길고 멀도록 하십시오. 순전이란 것은 사람의 얼굴로 친다면, 입술 앞이란 말이올시다. 이 순전이 길고 넓어야만 자손이 번성하고 백자천손을 둔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공주가 조용히 대답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죽은 후의 일을 환하게 보는 듯했다. 벙글벙글 웃었다. 그러나 웃는 모습은 구슬펐다. 무학대사는 또다시 말했다.

"태상왕 전하의 백세 후에 능침을 조성하시어 재궁을 모신 뒤에 능침 앞에서는 화표를 세우시고, 문관의 모습과 무관의 형태를 화강석으로 조각해서 두 쌍씩 세우고 장명등에는 대를 받쳐두십쇼. 그리고 석등에는 항상 불을 켜놓아야 합니다. 항상 광명을 보자는 것이지요. 다음엔 혼유석을 좋은 돌로 택하시어 장방향으로 큼직하게 놓아두십시오."

"혼유석이란 무엇인가?"

태상왕 이성계는 처음 듣는 소리다. 무학에게 물었다.

"혼유석이란 것은 죽은 사람의 혼이 노는 곳입니다. 흔히 민간에서 무덤 앞에 놓고 제수 음식을 차려놓는 제상으로 알기가 쉽습니다마는 이것은 상돌이 아니올시다. 제왕의 혼령이 노시는 곳이라 해서 능침에서는 혼유석이라 부릅니다."

공주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

하고 대답했다. 태상왕은 감탄했다.

"아하, 제왕가에서는 상석을 혼유석이라 부르는구먼."

"민간의 상돌이 곧 혼유석이 아니올시다. 모양이 약간 비슷할 뿐 전혀 다른 것이올시다."

무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후에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하옵고 또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장엄하고 둥그렇게 봉해진 능침이 이룩된 후에는 화강석으로 팔각 또는 십육각을 쳐서 난간을 만들어서 조화와 미를 더하게 하시면 더한층 훌륭합니다. 그리고 봉분 밑은 돌을 곱게 담어서 대를 모으십시오. 이것은 예장이라 해서 대신부터는 돌로 대를 쌓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알겠습니다."

공주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대답했다.

"다음에는 십이간지의 물형을 돌로 조각해서, 능침 난간밖에 알맞게 간격을 두어 배치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능의 방향을 알게 하자는 것입니다. , , , , , , , , , , , 해의 동물 형상을 그대로 조각해서 배열합니다. 자는 쥐의 형국을 조각한 것이요, 축은 소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요, 인은 범, 묘는 토끼, 진은 용의 형상입니다. 사는 뱀이구, 오는 말입니다. 미는 양이고, 신은 잔나비, 곧 원숭이올시다. 유는 닭이요, 술은 개요, 해는 돼지올시다. 이같이 동물들의 형국을 돌로 다듬고 조각해서 전후좌우로 배치시킵니다. 이것이 능침에 석등을 세우는 관례요 예법입니다. 그러한 후에는 곡장을 쌓고 능침을 보호합니다. 이것이 왕가에서 인산 때 취하실 일의 하나올시다."

무학대사는 주밀하게 공주한테 일러준다. 공주는 효녀였다. 일일이 붓을 들어 적었다. 공주가 적기를 다하자, 무학은 다시 공주에게 말한다.

"또 한 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능상에 모든 설치를 다 하신 후에는 정자각과 비각을 능침 아래 건조하여야 합니다."

"절차도 많소."

태상왕은 태연히 웃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무학은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절차가 참 많습니다. 이것이 인생에 대하여 마지막 가는 예요, 또 이러한 예법과 절차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 중에 가장 귀하다는 것이 아닙니까. 말하자면 찬란한 문물제도입니다."

"정자각이란 무엇입니까?"

경순공주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무학대사한테 묻는다.

"정자각이란 것은 집 형상이 고무래 정자같이 되었다고 해서 정자각이라 합니다. 말하자면, 정자 모양으로 집을 진 것이란 말이지요. 횡 일곱 간, 혹은 아홉 간 집을 짓고, 종으로 가로 지은 집 중에 연달아서 네다섯 간 집을 짓습니다. 이것이 곧 정자각이지요. 가로 지은 집에는 산상의 능침을 바라보아, 제상을 배설해놓습니다. 상감께서 능침에 나오시어 전배하고 봉심하실 때라든지, 제사를 지내실 때는 무덤 앞에서, 제를 지내시지 아니하고 정자각에서 지내시는 것입니다. 여염집으로 말한다면, 곧 제청이 되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종으로 달아서 지은 집은 상감께서 드나드는 출입구가 됩니다. 말하자면 복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제청이라기보다도 제각이로구나."

태상왕이 곁에서 말참견을 했다.

"그러하옵니다. 태상왕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면, 정자각을 지은 후에는 또 다른 비각을 지어야 합니다그려."

"그렇습니다. 비각은 비석을 세워두는 집입니다. 여기 태상왕 전하께옵서 이어해 계신데에 말씀을 올리기 황송하오나, 글 잘하는 문신을 시키시어 태상왕 전하의 한평생 지내신 크나큰 공적을 저술해서 글씨 잘 쓰는 명필로 글을 쓰게 한 후에 다시 이것을 비석에 옮겨 새겨서 천추만세, 뒷사람들한테 높은 업적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올시다. 이것을 신도비라 부릅지요. 신이 왕래하는 그 길 앞에 세웠다 해서 신도비라 합니다. 그 비각은 빗돌을 보호하기 위하여 집을 지어서, 그 안에 비를 세워두는 것입니다. 빗돌을 그대로 둔다면 풍마우세해서 비석이 상하므로 이것을 막기 위해서 비각을 짓는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경순공주는 간지에 비각 세울 것을 적는다.

"다음엔 또 한 가지, 격을 차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해주시는 끝에 다 일러주십시오."

경순공주는 붓을 잡은 채 무학대사의 말 나오기를 기다린다.

무학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다음에는 능으로 들어가는 동구밖에 홍살문을 세웁니다. 홍살문은 문에 기와를 덮지 아니하고, 순전히 나무로만 만듭니다. 두 기둥을 세우고 위에는 도리를 얹고, 그 위에는 나무로 살같이 만들어 십여 개를 세웁니다. 그리고 문에는 붉은 칠을 합니다. 그래서 홍살문이라 합니다."

경순공주는 무학을 향하여 다시 묻는다.

"홍살문은 어찌해서 세우는 것입니까?"

"그것은 잡인을 금하려 하는 까닭에 홍살문을 세우는 것입니다. 능침 수백 보밖에 홍살문을 세워서 사람들에게 이곳에 신성한 능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건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끝까지 말씀해주십쇼."

경순공주는 무학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다음에는 홍살문밖에 재실을 지으셔야 합니다."

경순공주는 붓을 들어 간지에 '재실'이라고 적었다.

"재실은 크게 살림집으로 짓는데 안채와 바깥채를 구별해 짓습니다. 안채는 능침을 지키는 능참봉의 살림집이고 바깥채는 상감께서 거둥을 하셨을 때 이곳에 임어하시어 쉬시기도 하시고 수라도 젓수시고 의대도 제복으로 갈아입으시는 곳입니다. 그러하니 말하자면 재실은 민간으로 친다면 묘지기 집이지요. 하하하. 그런 까닭에 홍살문서부터 능침 안에 있는 정자각, 비각들은 모두 다 제왕의 집이므로 붉고 푸른 단청 칠을 해서 화려하게 만들지만, 재실만은 난청 칠을 아니하고 민가처럼 흰 나무를 그대로 두어서 채색 칠을 아니합니다."

무학은 말을 마치자 가볍게 숨을 쉰다.

"또 알려주실 말씀은 없습니까?"

경순공주는 다시 무학대사를 바라본다.

"인제는 능침에 대한 모든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일깨워드릴 일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더욱 명심하실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이란 말을 듣자 공주는 다시 붓을 잡는다. 무학대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백 년 후에는 이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납니다."

무학대사의 큰 난리가 일어난다는 말에 모두 다 얼굴빛이 변해진다.

"큰 난리가 난다니, 웬 소리요?"

태상왕은 깜짝 놀란다. 마음에 불안한 생각이 물결처럼 일어난다. 경순공주의 눈도 둥그렇게 떠졌다. 곁에 태상왕을 모시어 섬기던 상궁이며 내관이며, 대전 별감들의 얼굴에도 현저한 빛이 드러났다. 무학대사는 높다는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손을 저어 말한다.

"과히 놀라지 마십쇼. 전하와 공주마마께서도 마음을 진정하시고 빈도의 말씀을 들어보십쇼. 난리가 지금 난다는 것이 아니라 이백 년 후에 나는 것이니 그다지 놀라실 것은 없습니다. 그때 가서 우리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해골까지 썩어서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아니 둘 수는 없습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큰일이니까요."

무학대사는 말을 마치자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일이 달렸다는 무학의 말에 태상왕은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용안엔 여전히 놀라운 표정을 짓고 무학에게 묻는다.

"아무리 죽어서 세상일을 모르게 되고 해골이 삭아서 재가 되는 이백 년 후의 일이라 하나, 지금은 살아서 국사의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할 수 없구려. 이것이 아마 살아 있는 이상 아니 끌릴 수는 없는 인정인가 보오. 그래 이백 년 후에 어떠한 난이 일어나겠소?"

"내란이 아니라, 외환입니다. 밖에서 적이 침범해 들어와서, 십 년 가까운 큰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국운은 확실히 오백 년 이상을 넘어가게 되니, 비록 십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전하의 후손은 계속 왕위에 나가실 터이니 큰 염려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십 년 가까운 전쟁통에 사람들은 기막힌 고생을 많이 당해야 될 것입니다."

경순공주가 묻는다.

"앞으로 이백 년 후에 일어날 이 난리로 인해서 지금 치표해두는 아바마마의 산릉은 아무 탈이 없겠습니까?"

", 공주마마. 잘 하문하셨습니다. 그때 가서 큰 난이 일어나게 되면, 잠시 삼천리강산에 적이 충만할 것입니다. 사람이 무척 죽고 서울 도성 안은 텅 비어서 적병들의 소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대왕마마의 만년유택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방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학대사의 말을 듣자 태상왕과 경순공주는 비로소 황연히 깨닫는다. 무학대사가 능을 조성하는 분별을 하다가 이백 년 후에 난리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그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경순공주는 손을 모아 무학대사한테 합장을 올린다.

"사부님께서 아바마마를 위하시어 멀리 생각하시는 높고 갸륵한 그 뜻을 비로소 짐작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렇다면 좋은 방도를 밝게 가르쳐주시옵소서."

공주는 지극한 정성이 넘쳐 흐르는 태도로 무학대사를 향하여 아바마마의 능침이 무사하도록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했다.

"공주마마, 앞으로 이백 년 후에 태상왕 전하 능침에 적병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려면, 꼭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무학은 석장을 짚고 공주를 향하여 말한다. 공주의 눈이 초롱거려 빛난다.

"적병이 능침 안에 발을 못 들여놓을 방법이 있다면, 곧 가르쳐주시옵소서. 상감과 조정에 대대로 전해서 적의 진흙 발길이 능침에 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겠소이다. 어떤 방법이오니까?"

태상왕도 관심이 컸다. 무학이 말한다.

"함경도 함흥에는 갈대가 많이 납니다. 서울 부근에도 갈대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함흥에서 나는 갈대같이 기운차고 씩씩하고 무성하지 못합니다."

무학이 말하는 갈대 소리에 태상왕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별안간 갈대 이야기는 왜 하오?"

"다 까닭이 있습니다. 들어보십쇼."

무학은 눈을 찡긋해 웃고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나 함흥 갈대는 태상왕 전하께서도 소시 때부터 보시어 잘 아시겠지만 키가 한 길이 넘

, 대가 실합니다. 꽃이 피면 그야말로 천하장관이지요. 그대로 서리가 온 듯 하얗습니다."

"함흥 갈대야말로 갈대 중의 왕이지. 한양 부근의 갈대에 견줄 것이 아니거든!"

태상왕은 무학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백 년 후의 적병의 발길이 산상 능침 안에 못 들어오도록 만들어 놓겠다면서 무학대사는 갈대 타령을 하고 있으니 싱겁기 한량없다. 공주는 까만 눈동자를 깜박이면서 무학에게 다시 묻는다.

"이백 년 후의 아바마마의 능침에, 적의 진흙 발길이 못 들어도록 하신다면서 함흥 갈대 말씀을 하시니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하하하 공주마마, 그러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빈도가 실지로 갈대의 효능을 가르쳐드릴 터이니 잠깐만 기다리십쇼."

무학은 산상에서 사면을 둘러보다가 번쩍 석장을 들어 중랑개 앞에 질펀하게 열려진 한 곳을

가리켰다. 이때 해는 석양으로 기울기 시작해서 서편 산에는 붉은 낙조가 찬란하게 비쳤다.

"자아, 저 질펀하게 탁 틘 개울 옆을 바라보십쇼. 경치가 어떻습니까?"

무학대사는 일부러 '경치'라고 말했다. 공주와 태상왕은 무학대사가 가리키는 석장 끝을 바라본다. 질펀한 갈대밭에는 눈같이 흰 갈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서 바람에 흔들거리는데 마침 서산낙일 떨어지는 낙조의 찬란한 홍광을 받아서 십만 대병의 서리 같은 창과 칼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듯했다.

"좋다!"

태상왕은 손뼉을 치면서 큰 소리를 내어 감탄했다.

"좋습지요?"

무학은 태상왕의 용안을 바라보며 벙글벙글 웃는다.

", 좋구려!"

태상왕은 또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는 아직도 까닭을 몰랐다. 다만 눈에, 눈같이 흰 갈대꽃이 일망무제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 것으로만 보였다. 더구나 무학대사는 아까 '자아, 저 질펀하게 탁 틘 개울 옆을 바라보십쇼. 경치가 어떻습니까?'하고 경치 타령을 한 때문에 공주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름답게 눈같이 흰 갈대꽃의 장관이 비쳐질 뿐이다. 공주는 어리둥절하며, 한동안 아바마마와 무학의 감탄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무학한테 묻는다.

"머리가 둔한 탓인지 갈대와 적병과의 관계가 어찌 되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는 태상왕은 껄껄 웃었다.

"그럴 것이다. 너는 규중처녀로 곱게 자라나다가 이내 시집을 갔으니 군사와 전쟁에 대한 일을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자아, 보아라. 저기 저 갈대꽃은 멀리서 보면 마치 천병만마의 군사들이 서리 같은 창검을 들고 호위하고 서 있는 것 같단 말이다. 그러하니, 무학대사는 함흥에 있는 좋은 갈대를 이곳으로 옮겨 심어서 산릉을 갈대로 덮어둔다면 이백 년 후에 설혹 적병이 침범해 들어온다고 해도 이곳에는 감히 가깝게 오지 못할 것이란 말이다. 이것은 병법에, 의심스런 의병을 두어서 적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단 방법의 하나이다."

아버지 태상왕의 설명하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공주는 비로소 황연히 깨달았다.

"이제야 비로소 사부님의 깊으신 뜻을 알았습니다. 잊지 말고 능침을 모신 후에는 꼭 함흥 갈대를 서울로 올려가다 심도록 하겠습니다."

"인력이 많이 들 거야."

태상왕이 탄식조로 말했다.

무학은 또 한 번 껄껄 웃었다.

"함흥서부터 이천 리나 되는 길에 갈풀을 운반해오자면 미소바리에 실어와야 할 테니 사람의

힘만이 아니고 말과 소도 수백 피 내지 수천 필이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방법이 있지요."

무학은 또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은 방법이라니 어떻게 인력과 마소를 과히 움직이지 아니하고 간단하게 갈대를 함흥서부터 한양까지 옮겨올 방법이 있단 말인가?"

", 그러합니다."

무학은 여전히 빙긋 웃고 대답했다. 태상왕은 힘을 과히 아니 들이고 함흥 갈대를 한양으로 운반해 올 수 있다는 무학의 말에, 마음이 바싹 당겼다.

"어떤 방법을 쓰면 인력과 우마의 힘을 과히 들이지 아니하고 함흥 갈대를 고스란히 한양까지 운반해올 수 있겠소?"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무학은 힘 안 들이고 수월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만만한 모양이다.

"어쩐 그리 대답이 너무나 간단하오. 떼 대신 갈대로만 캐온다면, 적어도 몇십만 장은 가져야 이 근처를 갈대로 덮을 텐데, 국사는 너무나 수월하게 대답하는구려."

"소승이 비록 불민하오나 어찌 계획과 자신이 없이 아뢰겠습니까. 확실히 함흥 갈대를 하룻밤 하루 낮에 번개 치는 한양으로 운반해올 자신이 있습니다."

희한한 소리다. 무학은 하룻밤 하루 낮에 함흥 갈대를 한양으로 옮겨올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하룻밤 하루 낮에 번개치듯 운반해올 자신이 있단 말요? 과연 대단한 수단이구려. 어디 한번 방법을 들어봅시다."

"어렵지 아니합니다. 함경감사와 강원감사와 경기감사한테 한 말씀만 내리시면 됩니다."

"한 말씀이라니?"

태조는 무학에게 물었다.

"삼도 감사한테, 함흥 갈대를 한양까지 옮길 터인데 소바리와 마바리에 실리지 말고, 한 간통마다 사람 한 명씩을 세워서 팔밀이로 나르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함흥서부터 사람들은 경기도까지 한 간에 한 사람씩 섰을 것이고, 이같이 해서 사람들이 삼도에 쭉 늘어선다면 하룻밤 하루 낮에 갈대는 번개치듯 이곳 산릉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는 무릎을 쳤다.

"과연 국사다운 슬기외다."

옆에서 듣고 있던 경순공주는 태상왕과 무학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자, 비로서 모든 뜻을 알아들었다. 태상왕은 공주를 향하여 말씀했다.

"적는 김에 갈대 옮기는 방법도 적바림해두어라."

경순공주는 아바마마의 명을 받아 함흥서 갈대 옮기는 방법을 적다가 홀연 생각이 났다. 태상왕을 향하여 샛별 같은 눈을 반짝이며 아뢴다.

"아바마마께 불효막심한 말씀을 한마디 아뢰겠습니다."

"네가 불효될 일을 할 리가 있느냐.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보아라!"

"지극히 황송하오나 이백 년 후의 일을 방비하기 위하여 지금 의논들을 하시는 모양인데, 이백 년까지 자손이 착하고 어질어서 부조가 내리신 유지를 잘 받드는 자손도 있고, 불행해서 그렇지 못한 자손도 있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하니 다시들 좀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태상왕의 옆에서 공주의 말씀을 듣고 섰던 무학대사는 공주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옳습니다. 공주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산릉을 자리 잡는 모든 일이며 갈대를 옮기는 방법을 오늘 소승이 아무리 소상하게 적어둔다 해도 어진 자손들은 잘 보관했다가 유지대로 봉행하겠지만, 혹시 정성이 부족하든지 뜻밖의 일이 생겨서 방법과 지시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아무리 글발로 적어둔다 해도, 헛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경순공주의 말씀도 옳습니다."

태상왕도 무학의 설명하는 말을 듣자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따님 공주를 귀엽게 바라본다.

"네 말도 옳은 말이다."

공주는 까만 눈을 반짝인다.

"아바마마와 스님께 아룁니다. 자식의 도리에 이런 말씀을 아뢰기 극히 황공하오나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꾸미는 것은 아바마마께옵서 친히 보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스님께옵서 계신 김에 분금을 놓는 치표 자리도 단김에 아주 산릉을 이루어 능침을 보해두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정자각, 비각, 문무석, 혼유석, 장명등, 십이간지 짐승들의 조각만 만세 후에 조성하기로 하고."

무학은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좋습니다. 공주마마의 말씀이 가장 지당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묻힐 땅을 내 손으로 역사를 하란 말이냐. 하하하."

태상왕은 말을 마치자 드높게 웃었다. 허파에서 터져 나오는 허무를 느끼는 가락 높은 웃음소리다. 그러나 자기의 묻힐 땅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인생의 황혼길로 쓸쓸하게 걸어가는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일도 되는 것이다. 역시 욕심이다.

"그렇다면, 아주 겉으로 무덤도 만들어놓고, 함흥에 있는 갈대도 곧 옮겨오기로 합시다. 인생은 무상한 것, 언제 또다시 국사를 만날 수 있겠소. 국사가 하산한 김에 모든 일을 아주 끝마쳐봅시다그려, 하하하."

태상왕 또 한 번 가락 높은 웃음을 껄걸 웃었다.

"그러면 지금 불러온 동네 일꾼들만 가지고는 일이 아니됩니다. 빨리 한양으로 사신을 보내서 정승 하윤을 명소하옵소서."

"스승님 말씀이 옳습니다."

경순공주도 정승 부르는 것을 찬성했다. 태상왕은 늙은 내시한테 영을 내렸다.

"너는 곧 한양으로 들어가 정승 하윤을 불러라. 나는 이곳에서 국사와 공주와 함께 불가불 며칠 더 유할 수밖에 없다."

늙은 내시는 태상왕의 영을 받들어 급히 한양으로 말을 달렸다. 태상왕과 공주와 무학대사는 내관을 한양 성중으로 들여보낸 후에 곧 검암산 아래 구리면으로 내려왔다. 동네 백성의 집들이 발끈 뒤집혔다. 태상왕 전하가 국사와 공주와 함께 민가로 왕림하셨으니 동네 백성들은 어찌 지공해야 할지 당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장은 풍헌의 집으로 달음질치고 한편 약정의 집으로 기별을 보냈다. 이장과 풍헌이 갓을 쓰고 동구로 나와서 태상왕 전하께 배알을 하고 일행을 사랑방이 있는,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유한 집으로 모신 후에 사람을 띄워 양주목사한테 기별했다. 양주목사는 경기감사한테 고하고 경기감사는 조정에 기별했다. 다시 급히 말을 달려 망우리를 지나 검암산으로 달렸다. 한산하기 짝없던 검암산 아래 있는 양주 구리면은 별안간 열뇨했다.

양주목사가 태상왕께 문안을 드리러 나오고, 한양에서는 정승 하윤이 태상왕 전하의 명소를 받고 파초선을 받아 벽제를 치면서 동구 안으로 들어섰다. 근기의 수도를 보호하고 있는 제일 가는 양주목사 한 사람만 움직여도 위의와 길호사가 대단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되는 판인데 황차 더한층 높은 경기감사가 오고 그 위에 또 영의정이 나오게 되니 온 고을과 동리는 번화하기 짝이 없었다. 구리면 한 동네는 말할 것도 없고 양주 일판이 뜨르르 했다. 양주목사와 경기감사가 어전에 나가 문후를 올린 후에 영의정의 행차가 동구 안에 당도되어 전하 앞에 부복했다.

"돌연 미복으로 행차한 때문, 기별을 받지 못하와 죄송하기 짝이 없사옵니다. 굽어 통촉이 계시기 바라오."

하윤은 정부를 대표해서 백배사죄를 드렸다. 태상왕 이성계는 용안에 웃음을 머금어 대답한다.

"거둥을 하면 번폐스러워서 알리지 않기로 했는데 어제 부득이 정승을 아니 부를 수 없어 청했더니, 양주목사와 경기감사까지 움직였으니 도리어 백성들한테 미안하기 짝이 없소."

태상왕 이성계는 진심으로 안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공하신 처분이올시다. 삼천리 조선 땅이 다 전하의 왕토올시다. 전하께서 이곳으로 오시라면 오시겠습니까. 백성들은 황공 감격하와 일대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분부는 거두시는 것이 가합한 줄 아뢰오."

정승 하윤은 부복하여 은근히 대답을 올렸다. 하윤의 말이 끝나자 태상왕 이성계는 다시 하윤을 향하여 분부를 내린다.

"내가 오늘 정승을 청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나의 백년유택을 의논해서 정하려는 것이오."

정중하게 말하는 태상왕의 용안에는 추연한 빛이 감돌았다.

", 성려를 짐작해 알겠습니다. 어디 좋은 곳을 정하셨습니까?"

정승 하윤이 방바닥에 손을 지고 대답해 아뢴다.

"무학국사를 청하여 양주 검암산 아래 좋은 묘자리를 한 곳 정하였소. 정승은 풍수에 대하여

깊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니 함께 올라가 풍수를 의논해봅시다."

"소신이 감히 무엇을 아오리까. 국사가 이미 좋다 했다면 다시 더 간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국사는 당금에 있어서 천하의 제일인자올시다."

하윤의 말을 듣는 무학대사는 노안에 웃음을 띠어 말한다.

"하정승 대감께서는 문학뿐 아니라 지가서에도 깊은 공부를 하셨습니다. 수고스럽습니다마는

한번 살펴주기 바라오."

"원래 만년유택은 추호만큼도 미흡한 점이 없도록 결정해야 됩니다. 한 번 큰 역사를 일으킨 후에 다시 변동하기는 극히 소중한 일이오니 소신이 비록 잘 알지 못하오나 치표할 자리를 한번 우러러 배관하겠습니다."

"자아, 그럼 함께 산으로 오르기로 합시다."

태상왕은 말을 마치자 친히 앞장을 서 일어났다. 하윤이 고한다.

"전하께옵서는 앉아 계시옵소서. 옥체 피곤하시옵니다."

"천만에, 나보다 나이 많은 국사를 금강산에서 청해왔는데 내 어찌 피로하다 하겠소. 더구나 나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수고하는데 내 어찌 관심치 아니하겠소."

다시 더 태상왕을 만류할 사람은 없었다. 태상왕은 연을 타고 산으로 올랐다. 경순공주가 머리 깎고 장삼 입은 여승의 복색으로 어가 앞에 나타났다. 가만한 음성으로 태상왕께 아뢴다.

"소녀는 정승이 있으니 산상에 아니 오르겠습니다. 아까 무학국사가 부르시고, 소녀가 받아 써서 적바림했던 기록을 아바마마께 바치오니 이대로 능상을 꾸미라고 분부를 내리옵소서."

공주는 말을 마치자 소매 속에 적바림한 발기를 꺼내서 태상왕께 올린다. 태상왕도 공주의 심경을 짐작해 알았다. 공주는 이간 남자인 정승 하윤을 대할 필요도 없지만, 하윤의 꾀로 남편 이제를 죽였으므로 원수 간이 된 사람이다. 하윤은 이숙번과 함께 방원을 도와서 방석, 방번, 이제를 해친 장본이었다.

"그렇게 하라."

아무리 불제자라고 하나 하윤을 대해보기 싫어하는 경순공주의 심정을 아버지 태상왕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순공주가 태상왕께 능침 꾸밀 발기를 바치고 어가 앞에서 물러난 후에, 일행은 산에 올라 무학이 잡은 치표 자리 앞에 나타났다.

"어떠하오?"

태상왕은 정승 하윤에게 묻는다. 하윤은 대답 없이 치표 자리에서 거슬러 올라가, 산을 타기 시작했다. 한 식경이 지난 후에 하윤는 다시 내룡을 타고 내렸다.

"둘이 있을 수 없는 천하의 대지올시다."

하윤의 얼굴에는 감탄하는 빛이 흘렀다. 계속해서 말한다.

"무학국사가 잡은 터이오니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태상왕의 얼굴엔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아 그럼 이곳을 나의 만년유택으로 정할 작정이오. 영의정도 찬성하니 나의 마음이 가볍소."

"찬성뿐이 아닙니다. 앞장서서 꼭 쓰시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아직 국사가 살아 있고, 영상이 나와 있는 이 기회를 타서 내일부터라도 산역을 시작할 작정이오. 내 눈으로 나의 묻힐 땅을 보자는 것이지, 하하하."

태상왕은 하윤을 향해 드높게 웃었다.

"옛 어른들은 그렇게들 하셨습니다. 내일이라도 곧 산역을 하시라고 상감께 아뢰겠습니다."

내일이라도 곧 산역을 시작하도록 상감께 아뢰겠다는 말을 듣고 태상왕은 더욱 만족했다. 태상왕은 곁에 있는 무학국사를 돌아보면서 정승 하윤에게 분부를 내린다.

"그렇다면 정승은 오늘로 곧 서울로 들어가서 모든 준비를 차리오. 나는 무학국사와 함께 이곳에 있어서 산역하는 일을 구경하겠소. 이번에 무학 국사가 산으로 들어간다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 아주 무학 국사를 모신 김에 산역을 끝낼 작정이오."

"성의를 짐작하겠습니다. 곧 봉명하와 내일부터라도 손을 대겠습니다."

하윤은 말을 마치자 태상왕과 무학국사와 함께 산에서 내려 임시로 정해논 행재소로 돌아온 후에 곧 한양으로 향하여 대궐로 들어가 상감을 뵈었다. 태종은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하윤을 입대시켰다.

"태상왕 전하께서 무슨 하명이 계시어 정승을 부르셨소?"

하윤이 태상왕의 소명을 받아 간 후에 태종은 무한 궁금했던 것이다. 하윤은 숙배를 올린 후에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아뢴다.

"태상왕 전하께서는 전하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과인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시다니 무슨 좋은 일을 하셨소?"

"양주 검암산 아래에 기가 막히도록 좋은 대지를 정해놓으셨다는데, 소신이 소명을 받자와 간심하오니 과연 참 천하대지올시다."

태종은 아버님 되시는 태상왕 전하가 만년유택을 정했다는 말을 듣고, 늙으면 산소 자리까지 정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제 아바마마는 무한 부드러운 아버지가 되었다. 자기를 죽이려 하지도 아니했다. 자기를 원망하지도 아니했다. 방석과 방번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자기를 원수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모든 옛날을 체념한 모양이다. 이것이 피와 갈과 뼈가 같은 부자간의 골육의 정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태상왕 전하께서 만년유택을 정하셨다는데 내가 어찌 편안하게 말만 듣고 앉아 있겠소. 내일이라도 곧 봉심하러 나가야 겠소."

하윤은 태종의 말씀을 듣고 감격했다. 속으로 이제는 이씨 집안도 되어가는구나 하고 흡족한 생각이 들었다.

"전하께옵서 그같이 생각하시니, 만백성은 전하의 효심을 찬양할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옵서 친림하시어 산릉 역사를 시작하신다 하오면 태상왕 전하도 기뻐하시려니와 전하의 효심은 온 나라의 백성들이 칭송할 것입니다."

하윤의 아뢰는 말씀을 듣고 태종은 만열의 느낌을 가졌다.

"내일 일찍이 거둥령을 놓아 곧 봉심학로 정승이 정원에 영을 내리오."

하윤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몸을 굽혀 국궁하고 이뢴다.

"민초들이 모두 다 감격할 것입니다. 봉심뿐이 아닙니다. 이미 정해논 천하대지이오니 친히 역사를 시작하옵소서."

"아직, 아바마마께옵서 생존해 계신데, 자식으로서 산릉 역사를 시작한다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고 미안스런 일이 아니겠소?"

하윤이 다시 아뢴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올시다. 생존해 계시는 중에 만년유택을 완성하는 일은 도리어 부모의 마음을 위안해드리는 일이옵니다. 정성스럽게 산릉을 봉하는 일을 목도해서 보시도록 하는 일이니 태상왕 전하께서는 크게 안심이 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정승과 함께 양주로 나가서 태상왕 전하께 문안도 드릴 겸 곧 산역을 개시하도록 합시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선공감에 기별하여 모든 장인들에게 대기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정승 하윤이 곡배를 드리고 어전에서 물러나려 할 때, 태종은 다시 하윤을 불렀다.

"경에게 다시 한 마디 물어볼 일이 있소. 아까 경이 말하기를, 태상왕 전하께서는 전하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셨다고 말한 일이 있소. 나는 아직껏 경의 말뜻을 터득하지 못하겠소. 태상왕 전하께옵서 친히 산릉을 정하시는 일이 과인한테 무슨 좋은 일이 된다는 말씀이오?"

태종은 간곡하게 하윤에게 물었다. 태종의 묻는 말씀을 듣자, 정승 하윤은 또 한 번 부복해 아뢴다.

"태상왕 전하께서 만년유택을 정하신 천하대지는 태상왕 전하의 백세 후의 백골을 편안케 할 뿐 아니라, 자손 백대의 국가 기업을 튼튼하게 할 명당자리올시다. 그러므로 소신은 태상왕 전하께서는 좋은 일을 하셨다고 아까 아뢴 것이올시다."

하윤의 말을 듣는 태종은 용안에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말하자면 크게 발복할 땅이란 말이로구려."

"발복할 정도가 아닙니다. 이 능을 모신 후에 전하의 자손은 오백여 년의 기업을 계승하실 땅입니다. 그리하옵고 몇 해 아니 가서 왕실에는 대 성인이 한 분 나타나실 것입니다."

태종은 하윤이 지가서에 대하여 밝은 것을 잘 안다. 더구나, 무학이 능지를 잡았다 하니 더 생각할 나위가 없었다. 왕실에 큰 성인이 나온다는 말에 태종은 입이 저절로 활짝 벌어졌다.

"큰 성인이 나온다?"

"그러하오이다."

"알겠소. 오백여 년의 기업은 튼튼하겠구려."

"그러합니다. 고려 왕실보다도 연조가 더할 것입니다."

"다른 재앙은 없겠소?"

"이백 년 후에 칠 년 국난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겁기가 스러진 후에는 다시 태평세월이 될 것입니다."

태종은 욕심이 움직였다. 무릎을 내밀어 다시 하윤에게 묻는다.

"겁기를 예방할 수는 없겠소?"

"천기운기에 정해진 것을 어찌 감히 인력으로 막겠습니까. 만약 겁기를 막는다고 딴 재주를 부리다가는 도리어 큰 해를 당할 것입니다. 하늘이 정한 수를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알아듣겠소. 내일 일찍 동가하기로 합시다."

하윤은 어전에서 물러나 빈청으로 향했다.

"선공감에 기별하여 석수와 목수와 미장이를 등대시키고 백관에게 영을 내려 양주행차에 배종할 태세를 취하라."

정원에서는 밤을 도와 거둥 준비에 바쁘고 선공감은 장인들을 밤새도록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서, 양주로 향할 길짐을 싸게 했다. 날이 밝자, 태종은 백관을 거느려 양주 검암산 태상왕의 행재소로 향하여 나갔다. 태종은 태상왕께 절하여 뵙고 문안을 드렸다. 산릉 역사를 하러 정승 하윤만 나올 줄 알았던 태상왕은 상감이 나올줄은 생각하지 아니했다.

"어찌해 나왔소?"

오래간만에 아버지가 아들 상감한테 건네는 대화였다.

"아바마마께옵서 만년유택을 정하시어, 산릉 역사를 하시겠다 하니 소자가 어찌 편안히 앉아

있으오리까. 문안 겸 봉심하러 나왔습니다."

태종은 간곡하게 아뢴다. 태상왕은 '방원이도 역시 자식은 자식이로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느꼈다. 태상왕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여 태종이 아뢰는 말씀에 대답하고 곁에 모시어 서 있는 무학대사한테 분부했다.

"상감이 나왔으니 국사는 정승과 함께 산에 올라 역사할 곳을 가르쳐주오."

무학은 태상왕 전하의 명을 받고 태종의 앞으로 나가 문후를 드린다.

"소승 무학은 삼가 전하께 알현드리오."

무학은 허리를 굽혀 합장했다.

"국사를 대한 지 과연 오래요. 금강산에 드시어 맑은 덕을 닦는다는 말씀 듣고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였소. 이번에 또다시 아바마마를 위하시어 이같이 왕림하셨으니, 과인은 무어라고 국사의 은공을 치하하리까. 감사한 마음 이루 말씀드릴 길 없소."

태종은 무학대사한테 존대하는 말을 써서 깍듯이 국사 대접을 했다.

"깊고 깊은 두 분 전하의 돌보아주시는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사오리까. 그저, 왕은에 감복할 뿐이옵니다. 지난번에 태상왕 전하께옵서 친히 공주마마를 금강산까지 보내시어 빈도를 부르시니 소승이 비록 노쇠하였으나, 어찌 왕명을 어기오리까? 만년유택을 소승의 손으로 정해드리고 나니 어깨가 사뭇 가볍습니다. 전하께옵서는 효심이 두터우사, 이같이 능침 일로 동가까지 하시니, 소승은 감읍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무학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합장을 올렸다. 전 밖에서 하윤이 내시를 통하여 상감께 아뢴다.

"무학국사를 대동하시고 친히 산상에 올라, 치표하는 것을 간심하시고 환궁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오."

태종은 내시의 아뢰는 말을 듣고 무학을 돌아본다.

"국사,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정하신 것을 간심하겠소이다. 앞서서 지시해주시기 바라오."

무학과 태종은 태상왕께 배례를 드린 후에 산상으로 올랐다. 태종은 검암산에 당도하여 무학이 지적하는 치표 자리를 바라보았다. 과연 훌륭한 명당자리다. 산은 첩첩 욱여들고, 물은 굽이굽이 다정하게 윤기를 뿜어 흘렀다. 정승 하윤을 통하여 지덕을 들었던 곳이다. 다시 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역사를 시작하오."

태종은 장중하게 한 마디 허락을 하윤에게 내렸다. 산역은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시작되었다. 광중을 파고 능침을 짜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서수가 문무석과 장명등이며 혼유석을 다듬기 시작하고, 한편에서는 목수가 정자각이며 비각 지을 재목을 깎았다. 함경감사한테는 팔밀이로 급히 갈대를 옮기라는 기별을 했다. 갈대는 함경도 이천 리 길에서 줄을 지어 옮겨졌다. 함흥서부터 한 간통에 한 사람씩 열을 지어 서 있는 사람들은 함경, 강원, 경기 삼도 백성들로서 고을마다 늘어섰다. 사람의 수는 십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조금도 힘이 들지 아니했다. 갈대풀을 받아넘기기만 하면 그만이다. 갈대는 순식간에 지체 없이 넘겨졌다.

양주 검암산 아래서 이 모양을 바라보는 태상왕은 만족한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정승 하윤과 무학 국사를 향하여 말한다.

"무학 국사의 깊고 넓은 포부는 늙는 것이 아깝소. 함흥서 갈대를 옮기겠다 하기에, 나는 마음으로 무한 걱정했더니, 오늘 이같이 수월하게 일이 될 줄은 과연 몰랐소."

태상왕은 무학 국사의 슬기로운 머리를 감탄했다. 늙는 것이 아깝다고 말한다.

"제일 좋은 것은 백성들의 원성이 없어서 좋습니다. 아무리 창업지주이신 태상왕 전하의 만년유택을 꾸미기 위하여 옮기는 갈대라 하나, 함흥서부터 마바리와 소바리에 실어온다면 사람의 힘이 얼마나 소비되며, 비용인들 오죽 나겠습니까. 기막힌 슬기올시다."

하윤도 무학 국사를 칭찬했다.

"전쟁 때, 군사들이 식량을 운반할 때라든지, 새로운 병기를 군사들한테 나누어줄 땐 이 방법을 쓴다면 사반공배가 됩니다. 병가에서도 항상 주의하면서 이 방법을 쓰시기 바랍니다."

무학이 웃으며 말한다. 태상왕은 또 한 번 무학을 칭찬한다.

"내가 젊었을 때, 바다 도적과 산골 도적을 막아 싸웠소. 그때 이 방법을 썼더라면 얼마나 일이 더 간편했겠소. 앞으로는 비변사에 말해서 이 방법을 쓰라 하겠소."

멀리 토성 밖에서 갈대풀을 옮기는 광경을 바라보는 경순공주도 미소를 띠어 감탄했다. 함흥서부터 쏜살같이 몰려드는 갈대는 저녁때가 채 못되어서 건원릉 안에 뿌듯하게 심어졌다. 낙조를 받는 저녁 언덕은 마치 천군만마의 군졸들이 서리 같은 칼과 창을 뽑아 들고 질서정연하게 능침을 호위하고 있는 듯했다. 이백 년 뒤에. 왜적들이 쳐들어 왔다가 갈대꽃을 바라보고, 능상으로 범해 오르지 못하는 그 모습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났다. 무척 안심이 되었다.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에 털끝만한 유감이 없게 된 것이 무한 기뻤다. 단지 한 분 남아 있는 아바마마, 이분의 백 년 후의 해골이 아무 장해도 받지 않고 무사하게 지나게 되기만 소원이었다. 경순공주는 어머니 강비의 능침도 아바마마의 만세 후에는 이곳으로 합장을 해 모셨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생각했다.

갈대 풀까지 옮겨지는 것을 본 태상왕은 이제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은 후에 묻혀질 땅까지 정해놨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멀리 안산을 바라본다. 무학과 함께 산소 자리를 정한 후에 열 번 스무 번 바라보던 안산이다. 산천이 명미하고 앉은 자리가 반듯해서 단정하다. 이성계는 자기가 묻힐 산소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만일 자기가 묻힐 이 산소 자리에 아무런 변동이 없다면, 자기 자신의 해골은 날마다 밤마다 그리고 또 그다음 날, 그다음 날, 십 년, 백 년까지 시시때때로 대해보고 있을 그 안산이다. 태상왕은 건너편 안산에 올라 이편을 바라보고 싶었다. 태상왕은 역사를 살피고 있는 무학과 하윤을 불렀다.

"국사, 하정승과 함께 이리 가까이 오시오."

무학은 하윤과 함께 어전으로 갔다.

"무슨 하교하실 말씀이 계시오니까?"

태상왕 이성계는 손으로 멀리 안산을 가리켰다.

"이미 산역도 시작되었고 세상에서 나의 할 일은 이제 다한 것 같소. 저기 저 안산에 올라 이 편을 바라본 후에 모든 세상 번뇌를 씻으려 하오. 국사는 수고스럽겠지만 하정승과 함께 등반해서 안산으로 올라가 봅시다."

무학은 생각했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구나'하고 탄식했다.

"안산에 오르셔서 이편 산세를 다시 한번 살피려 하십니까? 좋습니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무학은 말을 마치자, 석장을 짚고 앞으로 나섰다. 하윤도 태상왕의 뒤를 따랐다. 내관과 나인들이 태상왕의 어전에 나타났다.

"옥교를 타옵소서."

"안산까지 몇 리나 되느냐?"

"오 리도 채 못되옵고 삼 마장쯤 된다 하더이다."

"그래, 삼 마장쯤 되는 것을 타서 무얼하느냐. 젊었을 때는 몇백 리도 걸었는데 삼 마장쯤 되는 곳을 타고 갈 것이 있느냐. 걸어가기로 하자."

태상왕 이성계는 말을 마치자 무학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건원릉의 안산은 바로 지척의 눈앞에 있었다. 무학이 먼저 오르고 태상왕이 뒤따르고, 하윤이 맨 뒤에 올랐다. 이때 날은 청명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맞은편 검암산 아래 역사를 하는 건원릉 자리가 그림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산에는 서기가 뻗치고 무덤을 조성하는 분상 자리에는 양지가 발라서 양기가 모락모락 안개 일듯 일었다. 저편에서 이편 안산을 바라보니,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는데, 이편에서 저편 능침 자리를 바라보니, 더한층 아름답고 묘했다. 천하의 절경일 뿐 아니라 양기와 복기가 소복하게 쌓여서 감돌았다. 여기다가 함흥에서 팔밀이로 옮겨온 갈대꽃은 천병만마가 능침 전체를 보호하여 서리 같은 검극이 능상을 휩싸 안았다.

"좋다!"

정승 하윤이 무심코 큰 소리로 산릉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친다.

"좋은가?"

태상왕 이성계의 입이 벙글벙글 벌어지며 하윤에게 묻는다. 하윤은 비로소 태상왕의 어전인 것을 깨달았다.

"황공무지하오이다. 너무나 좋아서 어전인 것도 잊어버리고 큰소리를 질러 무릎을 쳤사오니 죄당만사올시다."

"정승은 별소리를 다 하는구려. 좋은 것은 좋다 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 하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된단 말이오. 자아, 산세가 저러하니 오백 년은 가겠지."

"오백 년이 무엇입니까? 육칠백 년은 갑니다."

"사람의 해골이 오륙백 년만 가면 다 삭아서 재같이 되렷다!"

"삼백 년만 되면 흙과 같이 됩니다. 그러하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올시다."

무학이 대답한다.

"그렇다면, 나는 몇백 년 후에도 별일 없이 해골마저 탈이 없겠구려."

"그러하옵니다. 잠깐 횡액수가 계실까 하여 함흥 갈대를 옮겼으니 이제는 앞으로 횡액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주 마음을 놓십쇼. 백팔번뇌를 잊으시란 말씀입니다."

무학이 또 대답한다.

"여보, 국사!"

태상왕은 무학의 얼굴을 바라본다.

"말씀하옵소서."

"모든 일이 잘되어서 좋은데, 한 가지 원이 있소."

태상왕 이성계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듯 애원조로 들렸다.

"무슨 원이오니까?"

무학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나의 무덤을 쌍광으로 파서 돌아간 강후와 해골이 함께 지내기로 하면 어떠하겠소?"

무학은 얼른 대답하기 어려웠다. 주저하고 있을 때, 정승 하윤이 말을 부드럽게 하여 고한다.

"좋은 일이기는 합니다마는 이 산은 단장지지올시다. 쌍광은 불가합니다."

앞일을 바라보는 하윤이었다. 금상인 상감이 태상왕과 강후를 함께 장사지내지 아니할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뿐만 아니었다. 만약 쌍광을 파서 치표한다면 당장 태종 이방원은 반대를 할 것이 분명했다. 하윤은 또다시 일이 없도록 만들기 위하여, 이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단장지지라는 판정을 내렸다. 하윤의 말을 들은 태상왕은 무학을 다시 바라본다.

"확실히 단장지지인가?"

무학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승이다. 태종과 강후 사이가 사후까지 불목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그러하오이다. 단장지지올시다."

무학은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죄가 되지 않을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태상왕은 하는 수 없었다. 강비와 함께 묻힐 것을 단념했다.

"이 동리 이름을 무엇이라 하느냐?"

"망우리라 합니다."

"망우리라니, 무슨 뜻이냐?"

"잊을 망자, 근심 우자, 근심을 잊어버리는 곳이라 해서 망우리라 합니다."

"이애, 그 이름 좋구나, 근심을 잊은 동리라, 만 가지 시름을 다 잊어버린다는 말이구나!"

태상왕은 덥석 무학의 손을 잡았다.

"어찌하면 이곳 동리 이름까지 나의 심정과 부합이 되오. 옛날 일을 아는 성인이 내가 저편에 산소 자리를 정하고 이편으로 건너와서, 근심 걱정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망우리라고 이름을 지어둔 것이 아니겠소?"

태상왕 이성계의 늙은 눈에는 경이의 빛이 가득 찼다.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길흉화복은 모두 다 하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이 전하에게 삼천리강산의 주인이 되게 하셨으니 어찌 전하의 만년유택을 마련해놓지 않으셨겠습니까. 반드시 복된 땅을 마련해놓으시어 유종의 아름다움을 두시게 한 것 같습니다. 어찌 치하하지 아니하오리까. 모두 다 천의올시다."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있는 태상왕은 대견하고 좋았다.

온 얼굴에 가득 밝은 웃음빛이 떠돌았다.

"여보 국사! 산소 자리는 국사가 잡아주었지, 언제 하느님께서 잡아주셨더란 말씀요. 공연한 괘사를 떨지 마오, 하하하."

무학이 대답한다.

"아니올시다. 미욱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소승이 석장을 짚고 산을 타 자리를 잡았으니까 소승더러 잡았다고들 할 것이올시다. 그러나 모두 다 하늘이 시키신 것이올시다. 하느님께서는 신령스런 계시로 소승도 모르는 사이에 소승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하니 망우리라는 이 동리의 이름도 벌써 몇백 년 전에, 하느님께서 슬기로운 사람의 입을 빌려서 전하께서 오늘 오실 것을 미리 짐작하고 망우리라는 이름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아마 도선대사쯤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서 이 동리의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하옵니다. 복인봉기지란 말 그대로 아무리 좋은 땅을 찾는다 해도 하늘이 주지 않는 바에야 어찌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힘만으로는 도저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승 하윤도 무학의 말씀이 옳다고 주장했다.

"전하! 이제는 만 가지 시름을 모두 다 잊으시고 안한하게 덕을 닦으시며 왕생극락을 하시도록 하십쇼. 나랏일은 아드님이 되시는 금상마마께 다 맡기시고-."

무학의 말을 듣자, 이성계는 목청을 높여 껄걸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하하, 만 가지 시름을 다 잊으란 말인가? 인생은 시름과 걱정, 근심과 생각, 괴롭고 즐거움, 그 맛으로 사는 법인데, 국사와 정승은 나에게 시름과 걱정을 거두라 하니, 그만 인세에서 아주 자리를 뜨란 말이 아니겠소. 하하하. 할 일 다 했으니, 어서 죽으란 말이지, 하하하."

"황고무지하옵니다. 그런 뜻으로 아뢴 말씀이 아니올시다. 그저, 청담한 생활을 하시면, 더욱 수를 하시어 오래오래 사실 것입니다."

무학도 태상왕을 따라 일어나면서 아뢴다. 태상왕은 여전히 웃으며 무학의 말을 받는다.

"나는 욕심을 버린 지 이미 오래요, 국사도 들어서 알았겠지만, 나는 함흥에서 돌아온 후에 대궐에 있지 아니하고 시골 촌락으로 돌아다녔소. 정치에 대한 모든 욕심을 끊고 불법을 믿으면서 절을 조성하였소, 전에는 모르지만 이 사이는 전혀 정치에 욕심이 없어서 산수간으로만 돌아다니고 있소. 이보다 어찌 더 청담한 생활을 하겠소. 과연 내 자랑이 아니라 나는 모든 욕심을 누르고 지금 맑고 맑은 촌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소. 하하하."

"전하! 전하께서 청담한 생활을 하시자면 이것 참 아뢰옵기 극히 황송하옵니다마는 감히 아룁니다. 아직도 머십니다. 우선 전하의 지금 그 웃으시는 소리가 지독하게 물욕에 얽매이신 웃음소리십니다."

웃음소리 자체가 물욕에 얽매었다는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얼굴에 지었다. 이성계는 앞을 서서 걸어가면서 무학에게 묻는다.

"웃음소리가 물욕에 얽매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웃음 가락 속에 어떻게 물욕이 섞였단 말요?"

"지금 전하께서 드높게 웃으시는 그 웃음 가락은 좋아서 웃으시는 웃음 가락이 아니올시다. 즐거워서 웃으시는 그 웃음 가락도 아니올시다. 태연히 화기를 띠어 웃으시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저주하고 허무에 반항하는, 말하자면 허파에서 터져 나오는 공허한 웃음소리십니다. 그러하니 이것은 무한대의 욕심을 무한대로 다 채울 듯하다가 되지 아니하니 반은 저주하고 반은 자학하는 웃음 가락이십니다. 이런고로 소승은 전하의 웃음 가락에 아직도 욕심이 엉켜 있는 웃음소리라고 단을 내렸습니다. 무관심한데 저주와 자학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러하니 저주와 자학은 곧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요, 전하께서는 아직도 물욕을 다 청산하시지 못하셨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고 황연히 깨달았다.

"국사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내 웃음 소에는 과연 약간의 불만과 불평이 있었소."

"그것 보십쇼. 대왕께서는 그저 덮어놓고 물욕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지 못하도록 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무학은 또 한 번 태상왕 이성계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충간한다.

"단단히 죄를 받는구려. 공연히 나는 나라를 다스려보겠다고 압록강 밖 위화도에서 회군한 죄로 이같은 정신의 단련을 받는구려. 모두 다 욕심의 과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성계는 한숨을 길게 쉬며 산을 타고 걸어간다.

"전하께 또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무학은 고고한 늙은 얼굴에 방긋 미소를 띠고 말한다.

"말씀해주오."

"전하께서는 아까 쌍광을 미리 만들어놨으면 좋겠다고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그랬지. 국사는 단광짜리밖에 못되니 쌍광을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했던 것이오."

"그랬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쌍광을 만들어서 강비마마의 백골이라도 한데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욕심이십니다. 이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래야만 모든 시름을 잊으시고 망우리 건너편 산에 묻히시는 시름 없는 몸이 되십니다."

"그것이 어디 욕심인가? 인정이지. 정과 욕심은 구별이 돼야 하지 않겠소."

"정과 욕심은 붙어 다니는 것이올시다. 정에 움직이는 것을 곧 욕심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람 쳐놓고 정이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크게 깨달은 사람은 정을 눌러서 과욕의 경지로 가는 것이올시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남자와 여자가 내외로 지내다가 죽은 후에 한구덩이로 들어가겠다는 소원이 무슨 허물이며 무슨 욕심이 되겠소. 국사의 말씀은 너무 지나친 듯하오."

태상왕은 욕심이 아니라고 반발했다. 무학은 또 한 번 웃고 대답한다.

"사람이 죽어지면 혼은 천상으로 흩어지고 남는 것은 살과 뼈뿐이올시다. 백골이 만약 정을 안다면 소승도 두 분이 쌍광중을 이루하시는 것을 말리지 않겠습니다마는, 소용없는 곳에 공연히 마음을 두시어 일부러 번뇌를 장만하시니 이것도 또한 만 가지 시름을 잊으시는 청담한 생활이 아니올시다. 삼가야 됩니다. 모든 겁연을 끊으시어 시름을 잊으시옵소서."

옆에서 무학의 말을 듣고 있던 하윤은 마음속으로 기뻤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무학이 대

변해주었다. 태종한테 돌아가 무학의 쌍광을 막는 데의 공을 칭찬해주리라 생각했다. 이때 붉게 타오르는 서산 낙조는 망우리 일판을 당홍빛으로 물들여놓아 화려하고도 장엄했다. 망우리 산 밖으로는 한강 물이 유유하게 흘러간다.

"만사를 잊으리라, 모든 시름과 원한을 다 잊으리라."

태상왕은 가만히 노래를 부르며 망우리 고개를 바라보며 산을 타고 내려간다. 고개 아래로 내려가는 태상왕 이성계의 머리에는 '삼국지' 첫머리에 실려 있는 노래가 생각났다.

굼실굼실 흘러서

동으로 가는 긴 강물,

낭화 물거품이

영웅들의 시비 성패

다 씻어갔네.

머리를 들어 돌이켜보니

어허, 모두 다 공이로다.

푸른 산은 예와 같이

의연히 있네.

몇 번이나 석양빛이

붉었다가 꺼졌더냐.

백발이 성성한

어부와 초부한이

가을달 봄바람을

언제나 바라보며

한 병 막걸리로

기쁠사 서로 만나

고금의 허다한 일

소담 속에 붙여보네.

기막히게 인생의 진리를 노래한 시다.

동편으로 흘러가는 강물은 영웅들의 잘하고 못한 일이며, 성공하고 실패한 일을 강물의 물거품처럼 다 씻어 흘러가 버린다. 자기가 했다는 제왕의 사업이란 것도 고개를 돌려 생각해보면 한 줌 물거품이 되어 스러져버리고 말 것이다. 허무하기 짝이 없다.

포은 정몽주도 공연히 죽었다. 선배였던 최영 장군도 역적으로 몰아 죽였으나, 그들의 의기는 도리어 자기 자신인 이성계보다도 천추만대에 이름을 높이 전하게 되었다. 그뿐인가. 왕씨를 바닷속에 몰아넣어 죽인 일이며 두문동 칠십이 인들의 숨어 사는 곳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인 일들, 모두 다 못난 짓만 쫓아다니면서 골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계속해서 일어난 집안싸움들. 자기 자신이 한 일이 아니요, 아들들이 한 짓이라 하나 그 근본을 따져본다면 자기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한 까닭에 집안 속에서도 천만 가지 일이 이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산을 타고 망우리 고개에서 내려오다가 펄썩 푸른 잔디밭에 주저앉는다. 한강 물이 산을 껴안고 유유히 동으로 흘러간다. 영락없는 '삼국지' 노래 속의 동으로 흘러가는 그 강물과 정경이 흡사하다. 강물이 흰 물결을 뿜어 낭화를 일으킨다. 자기의 여태껏 해온 사업을 물거품이 다 씻어가지고 흘러가는 것 같다. 강물에 배 한 척이 떠내려간다. 술병이 보인다. 두 사람이 껄걸 웃으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영락없이 '삼국지' 노래의 고금의 크고 작은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는 초부와 어부와 같다.

이성계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또 한 번 청을 높여 곤곤장강동서수의 노래를 높이 불러본다. 울적한 심정을 이 노래에 붙여 씻어버리려는 것이다. 무학과 하윤이 고개를 숙여 태상왕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굼실굼실 흘러서

동으로 가는 긴 강물,

낭화 물거품이

영웅들의 시비 성패

다 씻어갔네.'

태상왕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받아 무학이 뒤를 잇는다.

'머리를 들어 돌이켜보니

어허, 모두 다 공이로다.

푸른 산은 예와 같이

의연히 있네.

몇 번이나 석양빛이

붉었다가 꺼졌더냐.'

무학의 받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 정승 하윤도 신명이 났다.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는 모양이다. 청을 높여 다음 가락을 불러본다.

'백발이 성성한

어부와 초부한이

가을달 봄바람을

언제나 바라보며

한 병 막걸리로

기쁠사 서로 만나

고금의 허다한 일

소담 속에 붙여보네.'

임금과 국사와 신하 세 사람은 인생에 대한 감창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흠뻑 노래를 불러 평생사업의 허무를 노랫가락에 붙여본다. 눈에 비치는 모든 광경이 바로 지금 노래를 부르는 그 광경이었다. 청산은 의연히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데, 석양은 연분홍빛을 뿜어 금방 꺼지려 했다. 띠 같은 강물은 허연 물거품을 뿜어 유유하게 흘러간다. 정승도 소용없고 임금도 별수 없다. 모두 다 한 사업이 강물에 씻겨간다. 오직 무학의 팔자만이 가장 제일가는 상팔자인 듯싶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노래를 끝낸 후에 무학을 바라본다.

"우리 세 사람이 모였는데, 지나간 한평생의 사업은 세 사람이 다 각각 다르구려."

"그러합니다."

무학이 미소를 풍겨 대답한다.

"그러합니다. 하하하."

무학은 소리를 높여 껄걸 웃었다. 이성계는 껄걸 웃는 무학을 탄하지도 아니했다.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여기 정승 하윤이 있지만 정승은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에 있어, 음양을 가음하여 하늘 뜻을 좇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이 정승의 큰 책임인데, 얼마나 정승의 책임을 했는지 모르겠소."

태상왕 이성계의 말씀을 듣는 하윤은 얼굴이 붉어졌다. 무학은 옆에서 또 한 번 소리를 높여 껄걸 웃는다.

"하하하."

태상앙은 무학의 웃음 가락이 호방해 높건만, 역시 탄하지 아니하고 다음 말을 계속했다.

"다만 여기 앉아 있는 세 사람 중에 오직 헛일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무학 국사 한 사람뿐이구려."

무학의 호방하게 웃던 얼굴이 뭉그러지며 눈이 둥그레진다.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어찌 헛된 일을 아니했겠습니까. 여태까지 한 일이 저 역시 헛일이었습니다. 공연히 과찬하시는 말씀은 내리지 마시옵소서."

무학은 호탕한 웃음 가락을 거두고 경건하게 흑장삼 옷깃을 여몄다. 이성계는 말을 계속한다.

"세상만사가 모두 다 허무요 공인 것을 다 느끼고, 일찍 세상을 등지고 입산수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물욕을 버리게하고 대자대비한 생각을 머리와 마음속에 깊이 넣어주었으니 어찌 각자라 아니하겠소. 제왕의 사업이나 정승의 사업은 모두 다 한 줌 흘러가는 물거품이 되어 스러져버리는 것이지만 국사의 일평생 사업은 사람을 천 사람, 만 사람 어리석은 곳에서 건져내고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어서 깨끗한 연화대가 아니면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인도하였으니 얼마나 그 사업이 보람 있는 사업이라 하겠소. 국사의 사업은 공와 무를 일찍이 깨닫고 진과 유로 걸음을 걸어 나간 사업이니, 참으로 본받을 만한 사업입니다. 내 일찍 불가의 제자 못된 것을 오늘날 후회하오."

태상왕 이성계는 말을 마치자 한숨을 지었다. 무학은 고고하고 청수한 얼굴에 경건한 빛을 띠어 대답한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빈도의 해온 일이나 여태껏 걸어온 길도 또한 참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의 뿌리를 다 제거시키지 못하고 모든 선의 행동을 더 밝고 넓게 인도하지 못하고 미미한 헛된 이름만 남긴 채 그대로 공수로 돌아가게 되니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세상을 이별하고 육신과 뼈를 태워버린 후에 천상에 올라 석가여래를 대해 뵐 때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아뢸 길이 없습니다. 사람 몇 사람을 불도로 인도했다 해서 큰일을 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불경 몇 권을 줄줄 외웠다고 해서 각자가 되었다고 자랑해 말할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처해 있어 헛된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더구나 죄 중에 큰 죄올시다. 빈도 역시 불도의 조박만 수박 겉핥기로 핥았을 뿐, 그대로 세상을 떠나는 죄 많은 인간이올시다. 역시 물거품마냥 흘러가는 허무맹랑한 신세올시다. 하하하."

무학은 말을 마치자 또 한 번 호방하고 허탈하고, 허무한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무학의 웃음소리는 해 저문 청산에 메아리지어 귀기를 일으킨다. 서편 하늘로 꺼져 넘어가는 붉은 놀도 취한 듯 껄걸 웃는 듯했다. 하늘도 웃고 땅도 웃는 듯했다. 강물도 웃고 냇물도 웃는 듯했다. 강과 산 대자연뿐이 아니다. 산에 있는 나무도 웃고 가지에 앉은 새도 웃었다. 태상왕 이성계와 무학대사와 하윤의 등판에 가볍게 소름이 찍 끼친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향하여 다시 말을 꺼낸다.

"내 언제, 국사한테 꼭 한 번 물어보려고 벼르기만 하고 여태껏 묻지 못했소. 앞으로 국사를 어느 때 또다시 대할는지 예측하기 어렵구려. 이 기회에 나의 답답한 가슴을 풀어보고 싶소."

", 그러하오이다. 소승도 이제는 천한 나이 연륜을 더하와 노쇠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공주마마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셨다면, 제 어찌 감히 한양 출입할 생각을 꿈엔들 먹었으리까. 그저 공주마마의 지성과 태상왕 전하의 만년유택을 정하신다 하므로 마지막 정성을 위하여 이같이 온 길이올시다. 이제, 한번 상안을 우러러 뵈온 후에는 앞으로 다시 어느 때 뵈올지 기약이 묘연합니다."

무학은 얼굴에 창연한 빛을 띠어 대답한다.

"그러하오. 언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지 섭섭하기 한량없소.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지 국사가 입적을 먼저 할지, 하늘의 섭리를 어찌 우리가 알겠소. 내가 국사한테 묻고자 하는 말은, 국사가 안변 설봉산 토굴 속에서 수도하고 있고 내가 아직 젊어서 포의로 있을 때, 나는 괴상한 꿈을 꾸고 국사를 찾아서 해몽을 청한 일이 있었소. 만일 그때, 국사가 그 해몽을 아니 해주었다면 나는 공연히 오늘날 물거품과 같은 사업을 아니했을 것 아니겠소."

이성계는 잠깐 한숨을 짓고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때 나는 왕후장상이 될 욕심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서 입산수도를 했더라면 얼마나 이 세상에 밝고 좋은 일을 많이 했겠소? 대사는 다 알면서도 좋은 길로 나를 인도하지 아니하고 욕심을 일으키는 길을 나에게 깨우쳐주어서 오늘날 내 자신이 후회를 하도록 만들었으니 나의 한평생을 국사는 오평생을 하게 한 것이나 매일반이오. 어찌해서 나를 보고 왕이 된다는 해몽을 해서 쓸데없는 욕심을 부채질해주었소?"

귀를 기울여 태상왕 이성계의 술화를 듣던 무학대사는 다시 드높게 호방한 웃음을 웃는다.

"하하하. 그때 해몽해드린 그 일을 말씀이오니까? 무너진 집에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고 나오셨으니 왕자가 분명하고, 닭의 울음소리를 들으셨으니 고귀요 하는 뜻이고, 꽃이 떨어진 것을 보셨으니 열매가 열 것이 확실하고, 거울이 깨진 것을 꿈꾸셨으니 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해몽해드린 그때 말씀이오니까. 그것은 사실 그것을 그대로 말씀해드린 그것뿐입니다. 왕 천하를 하시고 아니하시는 것은 전하의 생각이시지, 소승의 알 바가 아니올시다. 하하하."

무학이 드높게 웃으며 이성계가 임금 노릇을 할 것은 자기 알 바가 아니라는 말을 듣자, 태상왕은 다시 무학한테 말을 꺼낸다.

"불가의 궁극에 가는 목적은 어질고 착한 길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원칙이라 생각하오. 그때 만일 국사가 나를 불도로 인도하셨다면 좋았을 것을 한탄하는 말씀이외다."

무학은 다시 웃는다.

"임금 노릇을 한다고 사람이 다 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 노릇을 한다고 사업이 모두 다 공이요, 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세상을 바로잡고, 탁한 세상을 맑게 하고, 도덕이 떨어져서 금수같이 되는 사람들을 예와 의로써 인도하고, 가난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입히고 잘살게 하고, 무식한 백성들을 문명한 학문으로 지도해 나간다면, 이 일이 어찌 허와 무로 돌아가는 일입니까. 이같이 큰 사업을 하는 일이 곧 정치올시다. 욕심이 붙는 것은 그 사람의 인품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허심탄회해서 다만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기르고 문명한 곳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는 그 일에만 충실한 제왕이라면 결코 그 사업은 나무꾼이나 고기잡이들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갸륵한 고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하니 성상께서는 왕이 되시는 해몽을 해드린 소승을 꾸지람하지 말아주십쇼."

무학의 얼굴빛은 엄숙하게 변해간다. 무학의 뒤를 받아 하윤이 말한다.

"그러하오이다. 국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왕 노릇을 한다고 모두 다 나쁜 것만이 아니고 정치를 한다고 다 그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러하므로 제세안민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의 근본 목적은 추악한 세상을 밝게 하고 명랑한 세상으로 만들고 어지러운 세파에 헤매는 백성들을 편안케 해주는 것이 정치의 태도이다."

하윤은 잠깐 숨을 돌렸다가 말을 계속한다.

"이러므로 포악한 걸왕을 내친 은의 탕왕과, 주왕을 내쫓은 주무왕을 어진 임금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다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기 위하여 신하로서 악한 임금을 내치고 나라를 새로 건국한 분들입니다. 이들의 크나큰 사업이 어찌 한줌 물거품이 되어 흘러가 버리고 말겠습니까. 청사에 길이 그 업적은 빛나고 있습니다. 전하, 공연히 쓸데없는 상심을 마시옵소서. 전하께서는 마치 탕왕이나 무왕 같은 큰 사업을 하셨습니다. 조금도 마음을 괴롭게 하시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는 너무나 정에 기울어지셨습니다."

"아전인수지, 하하하. 내 논 물꼬에 물대기야."

태상왕은 하윤의 말을 듣고 웃으며 탄식했다. 무학이 뒤를 받는다.

"하정승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다 부처가 되고 중이 된다면 이 세상의 정치는 누가 합니까? 말하자면 백성을 위하여 정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그 고비에 달렸습니다. 전하, 자아 이제는 만사를 잊으시옵소서."

만사를 잊으라는 무학의 말에 태상왕 이성계는 작대기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는 황혼의 어둠빛이 산과 들에 가득했다. 논둑 밭둑 사이로 산을 향하여 올라오는 내관과 궁녀의 일행이 마주쳤다. 상궁이 태상왕의 어전에 나가 아뢴다.

"공주마마께옵서 친히 수라를 만드시옵고, 진어하시기를 고대하고 계시옵니다."

"저녁밥을 먹으라 하느냐? 오늘은 소요산 행궁으로 가려 했더니, 산에 올라 이야기가 많아서그만 날이 저물었구나. 공주가 손수 수라를 차렸다 하니 하룻밤을 더 묵고 내일 떠나기로 하리라."

태상왕은 내시아 궁녀에게 분부를 내린 후에 무학과 하정승을 바라본다.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검암산 아래 동리로 가서 하룻밤을 더 지내고 가기로 합시다. 마침 공주가 무학대사를 전송해 보내는 소찬을 차렸다 하니 공주의 정성스런 뜻도 받아줄 겸."

"황감하여이다."

무학은 합장을 올려 사례하면서 태상왕의 뒤를 따랐다. 일행이 자리 잡았던 민가로 들어가니 수라상은 벌써 나오기 시작했다. 공주는 태상왕의 말씀대로 무학대사를 위하여 순수한 소찬으로 음식을 차렸다. 말은 비록 소찬이라 하나 고기보다도 맛이 좋은 진미다. 술은 단술을 쓰고 국은 표고국이요, 산채로는 자옥채, 도랏채, 느티나무침, 모기채에 송이구이까지 있고 소전골에는 밤, 대추, 은행, 실백으로 웃기를 하고 두부구이에 산중귀물을 모조리 양념으로 주물러서 밑반찬을 해놓았다. 태상왕은 일부러 독상을 차지하지 아니하고, 정승 하윤까지 합쳐서 세 겸상을 보라고 분부를 내렸던 것이다. 파격의 은전이었다. 무학대사와 정승 하윤은 황공 감격했다.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태상왕은 자리에 같이 앉게 하여 저녁 수라를 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시장한 판에 소음식을 맛있게 자신 후에 태상왕은 장지 아랫간에 눕고 무학대사와 하정승은 장지 윗가에 앉아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가건만 태상왕은 감회가 무량해서 잠이 얼른 오지 아니했다. 몇 번인지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았으나 눈은 점점 말똥거리고 잠은 오지 아니했다. 장지 윗간을 향하여 무학을 불러본다.

"국사, 주무시오?"

"아니올시다. 자지 않고 누워만 있습니다."

"하정승은?"

"아마 고단한 모양이올시다. 약간 코를 골며 잠을 잡니다."

태상왕과 무학은 장지를 격하여 말을 주고받는다.

"여보, 무학 국사. 내가 마지막 또 물어볼 말이 있소."

태상왕 이성계는 장지 윗간을 향하여 무학에게 묻는다.

"무슨 말씀이오니까?"

"앞으로 이백 년 후에 왜적이 들어와서 큰 난리가 일어난다고 국사가 아까 말을 했소이다. 그리하여 능침에도 변괴가 있을 테니 함흥서 갈대를 옮겨서 심으라 하지 아니했소? 그래서 이곳에 갈대를 옮겨 심은 것이 아니겠소?"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무런 변고도 없겠소?"

"큰 변고는 없습니다."

"내란 같은 것 말이오. 말하자면 골육지변 같은 것 말이오."

"허허, 전하! 모두 다 잊으시라 하지 아니했습니까? 이제는 시름 마시라고 이 동리 이름이 망우리라는 동리라는 말씀까지 아뢰지 아니했습니까. 이제는 그만 모두 다 잊어버리시지요."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을 어찌하오. 뒷일이 걱정이 되는구려."

"그것이 다 욕심입니다. 만사가 공인 것을 아시고도 그러하십니까. '삼국지'의 곤곤장강동서수의 시를 읊으시고도 그러하십니까.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스러진 후에는 만사가 다 물거품인데 무엇을 자꾸 그러십니까. 그저, 수류운귀올시다. 물같이 흘러가고 구름처럼 돌아갑니다."

욕심 때문, 다 그렇다는 말에 태상왕은 주름 잡힌 얼굴이 무안에 취한 듯 벌개진다. 무학은 민련의 정을 이길 수 없었다. 미소를 머금고 태상왕의 무안에 취한 얼굴을 바라본다.

"하도 뒷일을 궁금해하시니 천기를 잠깐 누설하겠습니다."

천기를 잠깐 누설하겠다는 무학의 말에, 옆에서 자던 정승 하윤의 귀가 번쩍 떠졌다. 정신을 모아, 무학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나 하고 귀를 기울이며 일어나 앉는다. 태상왕 전하도 고개를 번쩍 든다. 궁금한 마음이 더한층 간절했다. 무학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백 년 후에 왜적이 이 땅 삼천리강산을 짓밟을 때까지 이 나라는 큰일이 없겠습니다만은 약간의 골치 아픈 일이 대궐 지밀 안에서 일어날 것 같습니다. 방석 세자나, 방번 왕자에 방간 왕자 같은 참혹한 일은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올시다마는 불과 몇 해 이내에 국가에는 큰 사건이 또 한 번 일어납니다. 그것은 큰 왕자가 왕위에 나가지 않는 까닭에 풍파가 일어납니다. 그 후에는 태평성대가 계속될 것입니다."

"큰 왕자가 왕위에 나가지 못한다?"

", 그러하옵니다. 언제나 이 나라에서는 큰 왕자가 왕권을 잡지 못합니다. 나라뿐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큰집보다 둘째집이나, 셋째집이 잘될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실 때, 소승은 죽은 정도전하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인왕산은 지손이 되는 격이요, 낙산은 장손이 되는 격인데, 인왕산은 낙산보다도 몇 갑절 높고 굳셉니다. 이러하니 장손은 항상 차손한테 왕위를 뺏기고 맙니다. 아무리 백 번 천 번 장손으로 왕세자를 삼는다 해도 결국은 왕위에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장손이 왕위에 나가지 못한다는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은 입맛이 씁쓸했다.

"장손이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그렇습니다."

태상왕은 무학의 단을 내리는 말에 더한층 마음이 좋지 아니했다.

"그렇다면, 그것도 큰일이구려. 잘난 사람은 왕이 못되고, 못난 사람만 왕이 된다면 또한 큰일이 아니겠소."

무학은 고고하고 청담한 얼굴에 미소를 띠어 대답한다.

"사람이란 잘나고 못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세가 만들어주고 아랫사람이 받들어주면 됩니다. 이 세상에는 특별히 잘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못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히 염려 마십시오. 이번에 닥쳐올 왕위계승 문제는 비록 장자가 왕위에 나가지 않는다 해도, 피비린내 나는 집안싸움은 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태상왕과 정승 하윤은 귀를 기울여 무학의 말을 주의해 듣는다.

"싸움이 나지 아니한다? 듣던 중 다행한 소리로구려. 싸움이 나지 아니하고 큰아들이 다음 아우한테 왕위를 넘겨준단 말이오?"

"네 그러하옵니다. 아마 이 일은 소승이나, 태상왕 전하께옵서는 목도해 볼 수 없습니다마는 저기 앉아 있는 하정승은 앞으로 다 보고 있을 것입니다. 전하의 왕실에는 가끔 가다가 성인이 나타납니다. 다음번에 나타나실 분들은 큰 아드님이나 작은 아드님이나 모두 다 성인입니다. 이런 까닭에 서로 왕위를 양보하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없단 말씀입니다."

"성인이 두 분씩이나 나오신다니, 이런 기쁘고 감축할 데가 또다시 어디 있겠습니까? 국가를

위하여 경사스런 일이올시다."

정승 하윤이 합장을 하여 말했다.

"어진 사람들이 나와서 형제간에 서로 왕위를 양보한다면 그런 다행한 일이 어디 또 있겠소?

나의 가슴이 이제야 비로소 진정이 되는구려."

"전하, 안심하옵소서. 성인의 형제들이 나와 서로 왕위를 사양하는 때문에 국운은 앞으로 이백여 년의 승평세월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백여 년의 승평세월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연후에 잠깐 왜적의 침략이 있고 다시 삼백여 년의 대운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 다 왕실의 두 분 성인이 나타나신 음덕이올시다."

무학대사는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며 대답한다. 염주는 항상 부처를 염하는 구슬이지만, 무학은 천수까지도 헤아려보는 모양이다.

"국사!"

태상왕 이성계는 장지 아랫간에서 큰 소리로 무학을 불렀다.

"하문하옵소서."

"아까, 국사는 왕실에 가끔 성인이 난다 했으니, 아까 말한 다음 세대 이외에 우리 집안에 어느 때 또다시 성인이 나오겠소?"

이성계의 묻는 말에 무학은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전하! 아직도 그걸 모르십니까?"

무학은 태상왕에게 반문했다.

"모르니 묻는 것이 아니겠소. 다음 세대에 나타난다는 성인을 빼놓고 언제 어느 때 또 성인이 나타난다는 말씀이오?"

이성계는 진지한 얼굴빛으로 무학한테 다시 묻는다. 정승 하윤도 무학의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지나 하고 무학의 입술만을 바라본다.

"성인은 지금도 두 분씩이나 계십니다."

뜻밖이다. 무학은 지금도 성인이 두 분씩이나 있다고 말했다. 하윤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어리둥절했다.

"성인이 우리 집에 지금 두 사람이나 있단 말씀이오?"

이성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 그렇습니다."

무학은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정승 하윤은 무학의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 생각해 본다.

'저자가 첨을 올리는구나. 성인이 두 사람이나 있다 하는 것은 아마 태상왕과 상감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임금한테 아첨하기 위하여 두 사람씩이나 있다고 첨을 해 올려서 치켜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윤은 이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도 마음속으로 생각해본다.

'왕실 속에 현존한 사람으로 성인이 있다면, 듣기 좋게 말하기 위해서 나를 성인이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또 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무학의 입이 조용히 열린다.

"큰 왕자이신 진안대군 방우 어른께서 성인이십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깜짝 놀랐다.

"진안대군이 성인이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진안대군이 성인이 된다는 까닭을 말씀해보오."

태상왕 이성계는 다시 무학에게 묻는다.

"몸을 피해서 산천으로 방랑하다가 왕위에 오르기 싫어서 소주를 자시고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그분이 착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일부러 왕 노릇을 하고 싶어서 피를 뿌려서 사람을 상하고 하는데, 이분은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골육상쟁하는 참혹한 비바람을 피하여 세상 인연을 끊었으니 얼마나 그 인품이 갸륵한 분입니까?"

정승 하윤과 태상왕은 황연히 깨달았다.

"그럼 또 한 사람의 성인은 누구요?"

"상왕이십니다."

무학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아니올시다. 태상왕이 아니라 상왕이십니다. 둘째분이십니다. 이분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골육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일은 용이하게 가라앉았고 또다시 나라 꼴이 수월하게 자리잡혔습니다. 참말로 고마운 일이올시다. 남들은 피를 흘리면서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셨으니 얼마나 어진 성인이십니까."

태상왕과 정승 하윤은 무학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렇지. 성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 둘째야말로 참말 성인이지. 아비한테 효성스럽고, 동기간에 우애 깊고, 거북한 일은 절대로 아니하고, 그러면 성인이지, 하하하."

태상왕은 전부터 둘째 아들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으로 타인을 향하여 껄걸 웃으며 둘째 아들 방과의 칭찬을 했다.

"그러하옵니다. 상왕 전하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성인이십니다. 지금 상감께서도, 상왕 전하의 어진 덕에 감복하셨습니다."

하윤의 방과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 있던 무학이 뒤를 받쳐 말씀을 올린다.

"소승은 첫째분이신 진안대군보다도 상왕이신 방과 전하의 덕이 더 크시다고 생각합니다. 힘 아니 들이고 저절로 돌아올 제왕의 자리를 박차버리시고 돌아가신 첫째분의 용기와 덕행도 무던하시지만 왕실을 버리지 아니하시면서 형제간과 부자간의 의리를 지키시면서, 괴로울 때는 세자 노릇을 하시고 또다시 왕위에 나가시어 모든 일을 어루만져놓으시고 태평세월엔 동생한테 왕의 자리를 넘겨주셨으니, 이런 분이 역대 제왕 중에 몇 분이나 되십니까? 더럽고 추하다 하여 몸을 피해버린 진안대군보다 어려운 곳으로 뛰어들어서 모든 일을 무사하게 만드신 둘째분의 공적이 실로 크다고 생각됩니다."

하윤이 다시 말한다.

"국초에 일어난 모든 왕실의 불화를 막아버리고 진압시켜주신 공로는 과연 잊을 수 없습니다. 이분한테 성현의 칭호를 아니 올릴 수 없습니다."

하윤의 말이 떨어지니 태상왕 이성계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무학에게 묻는다.

"우리 집안에 어진 사람이 둘씩이나 있고, 또다시 어진 자손들이 둘씩이나 나와서 나라가 잘되겠다 하니 내 마음이 무한 기쁘오. 그러나 국사한테 물어볼 말이 있소."

", 말씀하십쇼."

"나는 성인이 못되겠소? 하하하."

태상왕은 껄걸 웃는다. 무학도 따라 웃는다. 하윤도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하하하, 전하께서는 욕심도 많으십니다. 한편으로는 창업지주가 되시고 한편으로는 성인이 되시려 하십니까. 과연 욕심이 너무 대단하십니다. 창업지주는 숱하게 사람을 많이 죽여야 창업지주가 되는 것이요, 성인은 착하고 어질고 관후하고 청렴결백해야만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칼과 철퇴와 활과 창으로 사람을 많이 죽이신 전하께서 어떻게 성인이 되시겠다고 하십니까. 부자가 되려면 어질지 못하다 했는데, 황차 혁명을 일으키신 제왕으로 성인이 되자 하십니까. 하하하, 하늘은 맘대로 두 가지 칭호를 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창업지주는 창업지주의 업무가 있고 성인은 성인으로의 천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지. 성인이 될 수 없지. 하하하."

태상왕은 허파가 터질 듯 소리를 높여 웃는다. 꿈같이 흘러간 한평생을 스스로 조롱하는 듯한 허탈된 웃음소리다.

그럭저럭 날이 밝았다. 일행은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망우리 동산을 떠났다. 망우리에서 떠나기는 같은 시각이었으나 향해 가는 방향은 제각기 다르다. 경순공주는 태상왕을 모시고 양주 소요산 행궁으로 가야 하고, 무학대사는 금강산으로 가야 하고, 정승 하윤은 한양 성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말 워낭소리와 말 울음소리는 새벽 바람을 싸늘하게 끊었다. 태상왕과 경순공주 및 무학대사의 얼굴에는 감창한 빛이 떠돌았다. 경순공주가 먼저 무학대사의 앞에 나타났다.

"국사님, 높으신 춘추에 어려운 출입을 하시어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정해주셨으니 국사님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소승이 금강산까지 모셔드려야 할 터인데 아바마마를 모시고 가므로 뜻같이 못하오니 용서해주십시오."

공주는 공손히 무학한테 합장을 올렸다. 무학대사도 답례하는 합장을 공주한테 보낸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금지옥엽의 몸으로 어찌 다시 금강산에 행차하시겠습니까. 그저 공주마마, 하루바삐 성불이 되시어, 제세안민을 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무학의 열반

공주의 작별인사가 끝나자, 무학은 태상왕 이성계의 앞으로 나갔다.

"전하! 그럼 소승은 금강산으로 물러갑니다. 이제는 다시 전하를 뵐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가까운 장래에 이 무학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전하 앞에 들릴 것이올시다. 전하께서는 그때 소승을 위하여 석왕사에 재를 올려줍시오. 그리하시면, 소승은 극락으로 갈 것입니다."

무학의 말은 구슬펐다.

"사람의 수명 장단을 누가 미리 알겠소. 내가 먼저 죽을지 국사가 먼저 입적이 될지 어찌 알겠소.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이 한 번 이별한 후에는 다시 만날 기약이 아득하니 감창한 마음을 실로 금할 수 없소."

태상왕 이성계는 창연히 무학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하윤이 무학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국사, 이번에 태상왕 전하의 명당을 잡아주신 공로는 한양에 도읍을 잡아주신 공로보다 못지 아니한 큰일을 하셨다고 생각하오. 한양에 돌아가서 국사의 큰 공을 상감께 아뢰오리다."

"상감께 알현하시거든, 오백 년 동안은 국운이 유지되어 태평할 것이라고 아뢰시오. 그리하고 너무나 욕심을 부리지 마시도록 하정승이 잘 보필하시오."

일행은 연연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제각기 길을 떠났다.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하여 태상왕 이성계를 감동시키고, 양주 망우리 건너편 검암산 아래 건원릉 자리를 잡아주고 다시 금강산 금장암으로 들어간 무학대사는 가을 구월이 되자,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상에 누운 지 열흘 되는 구월 십일 새벽, 돌연 눈을 감아 세상을 떠났다.

무학대사의 법명은 자초요, 무학은 그의 호였다. 그가 거처하던 곳을 계월헌이라 했다. 밝은 달빛과 쉴 사이 없이 흘러가는 냇물이 좋았던 것이다.

무학의 속성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는 본시 경상남도 합천 삼기 사람 박인일의 아들이었다. 열여덟 살 때, 경상북도 예천 용문산에 있는 용문사에 들어가, 혜명스님과 법장스님의 제자가 되었고 공민왕 2년에는 원으로 가서 지공과 혜근한테 불경을 물었다. 지공화상은 원나라의 명승이요, 혜근은 고려의 명승이었다. 혜근이 고려로 돌아와 왕사가 되어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송광사에 거주하게 되니 무학은 혜근의 수제자의 자격으로 그의 의발을 받았다. 혜근이 양주 회천면에 있는 회암사로 옮긴 후에 무학을 불러 수제자로 삼았으나 무학은 사양하고 받지 아니했다. 이때, 무학은 고려의 대운이 기울어질 것을 미리 짐작하고 몸을 안변 석왕사 토굴 속에 숨겼다가 이성계의 꿈을 풀어주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나가니 무학은 일약 왕사가 되었고, 계유년 정월에는 이성계와 함께 한양 도읍터를 정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왕상 무학을 대접하는 성의는 대단했다. 그에게 왕사의 칭호를 더하고 회암사를 중수하여 그를 거처케 했다. 그러나 무학은 골육의 집안싸움이 일어나는 불상사의 꼴이 보기 싫었다. 몸을 피하고 양평 용문산에 있는 용문사롤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다. 태종 이방원이 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나간 후에 이성계는 함흥으로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아니하고, 사신이 가는 족족 죽여서 함흥차사가 되어 시체로 돌아오게 되었다. 태종은 간곡하게 무학을 청하여 함흥으로 가서 태조 이성계의 마음을 돌려놓게 했다. 무학은 금강산 금장암으로 들어가 참선을 하고 있을 때, 경순공주는 그를 찾았다. 지성스런 공주의 청으로 그는 태상왕 이성계의 신위지지를 잡아주고 갈대를 함흥에서 옮겨서, 앞으로 왜적이 쳐들어올 때 무기와 같이 보여서 미리 능침을 보호하는 태세를 취하게 했다. 무학은 이같이 해서, 태조 이성계의 한평생을 보호하고 지도해주었다.

슬픈 부음이 들리니 나라에서는 후한 부의를 내리고 유골을 회암사에 안치하니, 이때 무학은 팔십 세에 한 살이 모자라는 칠십구 세였다. 당신의 만년유택까지 자리를 잡아논 태상왕 이성계는 사랑하는 딸 경순공주와 함께 양주 소요산으로 돌아갔다. 가을바람이 소슬한 어느 날 금강산에서는 상좌 중 한 사람이 경순공주께 뵙기를 청했다. 경순공주는 금강산에서 상좌가 왔다는 말을 듣고, 무학대사가 보낸 사람인 줄 알고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만나보았다.

"금장암에서 왔소?"

", 그렇습니다."

"국사는 안녕하신가?"

공주는 먼저 무학대사의 안부를 물었다. 상좌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공주께 고했다.

"국사께옵서는 지난 구월 열흘날 세상을 버리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상좌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공주는 깜짝 놀랐다. 그의 나이 팔십에 가까웠으나 이같이 속하게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

"국상께서 입적을 하셨단 말씀요? 이 나라의 큰 빛이 스러지셨구려."

공주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샘솟듯 흘렀다. 상좌는 품 안에서 간지 한 장을 꺼내서 공주에게 바쳤다.

"소승이 오늘 공주마마를 뵈오러 온 것은, 국사 스승의 열반하신 일을 알릴 겸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왔습니다."

"국사께서 유언이 계셨소?"

"아니올시다. 유언이 아니라 유지올시다. 입적하시기 직전에 이 유지를 전달해 드리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상좌는 말을 마치자 눈보다 흰 간지 봉투를 공주에게 바쳤다. 공주는 급히 간지 봉투를 뜯었다. 먹글씨로 쓴 무학대사의 필적이 나타났다.

'무자년 오월엔 늙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고 기축년 이월엔 정릉이 옮겨진다. 덕을 닦고 몸을 보존하여 크게 사랑하고 크게 슬퍼하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업원을 머릿속에 두지 마오.'

공주는 무학의 유지를 받아 읽었다. 간지를 쥔 공주의 손길이 바들바들 떨렸다. 유지라기보다는 예언이었다. 늙은 용이란 태상왕 아바마마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고, 무자년은 앞으로 삼 년밖에 남지 아니했다. 삼 년 뒤 오월달에는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분명했다. 다음 구절은 기축년 이월에 정릉이 이장된다는 뜻이다. 공주는 가만히 간지를 든 채 눈을 감았다. 기축년이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다음 해 일이다. 그럴듯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주의 친어머니 강비의 유해를 모신 능침은 바로 한양 도성 안 서소문 안과 남대문 사이 정동에 모시었다. 능침뿐만 아니다. 원찰로 모신 흥천사도 나라의 수도 도성 안에 있다. 이 정릉을 이룩하고 이 절을 건축할 때, 아버지 태상왕은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왕비이기 때문, 서울 한양으로 천도한 지 얼마 아니 되어, 이 구슬픈 아내를 이별하는 일을 당한 때문, 궁궐에서 가까운 왕비의 능과 원찰을 지어서 하루에도 아침저녁으로 몇 번씩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감인 태종은 세자 방석의 왕위계승 문제로 해서 자기 어머니 강비와 원수였다. 상감 방원이 아직껏 정릉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은 아바마마께서 생존해 계신 때문이다. 만약 아바마마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만 하면 반드시 이장 문제가 머리를 들고 일어날 것은 분명한 노릇이다. 아바마마의 소상을 지낸 후에 정릉은 반드시 천장이 되고 말 것이다.

공주는 가슴이 아팠다. 무학은 공주의 가슴 아파할 일을 먼저 짐작하고 덕을 닦고 몸을 보존해서, 대자대비하여 세상 업원을 염두에 두지 말라 했다. 공주는 마음이 흔들렸다. 어마마마의 능을 파헤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러나 또다시 한편으로 생각해본다. 아바마마께서 정해놓으신 능침을 파헤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시려는 오빠의 마음은 일국의 제왕이면서 너무나 어린아이 장난 같다고 생각했다. 평상시에 왕위 다툼으로 보기 싫었던 계모의 무덤을 도성 안에 있다는 것을 핑계로 파헤쳐서 딴 곳으로 이장한다는 것은 치졸하고 어리석은 수작이라 생각했다. 불가의 덖을 닦는 안목으로 볼 때 너무나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주는 무학 국사의 대자대비하는 큰 뜻을 환하게 깨닫게 되었다.

'못난 수작이다.'

경순공주는 마음속으로 장차 앞날에 일어날 오라버니 방원의 행동을 속으로 비웃으면서 한편

울음이 복받칠 것 같았다. 그러나 겉으로 미소를 풍겼다.

'국사께서 최후까지 소승을 돌봐주시는 마음 깊이깊이 간직하오리다.'

공주는 무학이 보낸 유지를 소매 속에 간직한 후에 태상왕께 들어가 무학대사의 열반을 아뢰었다. 공주는 태상왕이 크게 놀라실 줄 알면서도 그의 죽음을 아니 고할 수 없었다. 태상왕은 깜짝 놀랐다. 무학은 태상왕한테 있어 다만 한 사람인 지기의 벗이었다. 이제 제왕의 권리를 내놓은 태상왕 이성계는 만조백관도 다 자기 사람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아무 욕심이 없는 무학만이 진정한 친구였다.

"무학이 죽었단 말이냐!"

태상왕은 크나큰 충격을 느꼈다. 이성계는 한 마디 말을 마치고 멀거니 공주를 바라본다. 공주는 어떤 말씀을 올려서 아바마마를 위로해드려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놀란 아버지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아바마마께서 향의한 그의 덕을 생각하시어 조정에 기별하시어 국사의 예러 후하게 장사지내주옵소서."

공주는 간곡하게 아뢰었다.

"불가의 큰 스승이니 유해를 다비에 붙여서 화장으로 모시겠구나!"

"그러할 것이옵니다."

"뜨거워서 어찌하나!"

태상왕은 혼자서 탄식한다. 그는 정이 움직였다. 슬픈 중에도 공주가 대답한다.

"이미 열반이 되셨는데 뜨거운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삼혼칠백은 벌써 연화대 극락세계로 가셨고, 육신은 나무와 돌과 같아서 아무런 감각도 없을 것입니다. 공연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뜨거우니, 서늘하니 하고 추상해보는 것뿐입니다."

"그야 그렇지!"

태상왕은 허무한 한탄을 또 한 번 후에 늙은 내시를 불렀다.

"너는 금강산에서 온 상좌 중과 함께 말을 달려 한양으로 들어가 국사 무학이 열반한 일을 조정에 알려라. 후한 부의를 내리게 하고 유해를 다비에 붙인 후에는 양주 회암사에 부도를 세워서 그의 공적과 학문에 대한 일을 조각하여 천추만대에 그의 사업을 밝히게 하라. 그리고 화장한 후에는 반드시 사리가 나올 것이다. 합에 넣어 봉안케 하라."

내시는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금강산에서 온 상좌와 함께 한양으로 말을 달렸다. 태종 이방원도 무학구사의 열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무학은 태종한테도 큰 공로가 있었다. 함흥차사로 사신이 가서 돌아오지 못했을 때 태종은 무학을 보내서 태상왕의 마음을 돌리게 했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정승 하윤을 불렀다.

"아까운 사람을 한 사람 잃었소. 비록 유학과 학문의 계통이 다르다 하나 훌륭한 인격이 있는 사람을 잃었구려. 정원과 사찰에 영을 내려 국사의 예로 거룩한 장사를 지내게 하오."

영의정 하윤은 상감의 명령을 받았다. 극진하게 무학의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을 결정했다. 비록 학문의 길이 다르다 하나 태조가 왕위에 나갈 것을 예언하여 민심을 크게 북돋아 주었을 뿐 아니라, 나라가 새로 배판된 뒤에도 원만하고 둥글게 태조와 태종을 화합하게 만든 큰 공을 잊을 수 없었다. 하윤은 상감과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그의 유골을 회암사에 안치했다.

공주는 성질이 소명한 사람이었다. 몇 해 후에 정릉을 이전하게 된다는 무학의 예언을 태상왕께 영영 말씀드리지 아니했다. 공연히 아바마마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한 까닭이다.

무학의 부도탑을 양주 회암사에 세운 후에 태상왕은 따뜻한 날을 가려서 공주와 함께 무학의

부도를 보러 갔다. 그러나 공적을 가득히 새겨논 무학의 부도는 한 조각의 돌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 광채 빛나는 화경 같은 눈이며 세 치 이상 뻗쳐진 수미와 검버섯이 돋은 고다한 얼굴에 부드러운 철인의 미소를 던져서 사람을 감화시키던 그 훌륭한 모습은 다시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람이 한번 가면 철인거사나, 왕후장상이 모두 다 소용없는 노릇이로구나."

태상왕은 공주를 향하여 탄식했다.

무학이 세상을 떠나 열반에 든 후부터 태상왕 이성계는 항상 마음이 즐겁지 아니했다. 이 소식은 상감인 태종의 귀로 들어갔다.

"요사이 궁녀들편에 들으니, 태상왕 전하께서는 무학 국사가 세상을 떠난 후에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지으시고 잡수시는 것도 전만 못하시다니 자식의 도리에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소. 전하의 마음을 어떠한 방식으로 위로해드리면 좋겠소?"

태종은 이제 모든 정권을 잡아 제왕이 되고 보니, 아바마마께 효성을 다하고 싶은 생각이 울연히 일어났다. 모든 불길하고 불행했던 과거의 악몽을 청산해버리고 새로 사람다운 아들의 길을 밟고 싶었다. 하윤은 상감의 심경을 짐작했다. 공손히 대답했다.

"태상왕 전하의 춘추는 무학대사보다 여덟 해 아래인 칠십일 세십니다. 비슷한 연세의 지기하던 벗을 잃으셨으니, 쓸쓸하신 마음은 당연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소신의 생각에는 천하명창인 명기들을 뽑으시어, 전하의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태종은 하윤의 말을 듣자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경이 나의 뜻을 받들어 명기 중에 명창을 뽑아서 행궁으로 내보내도록 하오."

하윤은 곧 빈청으로 나가서 장악원 제조를 불렀다.

"태상왕 전하의 노후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기생 십여 명을 뽑으려 하니, 장악원에 이런 애들이 있겠소?"

 

무학의 열반과 태조 이성계

장악원 제조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대답한다.

"있습니다. 김해 명기에 칠점선이란 기생이 있습니다. 노래와 춤이 당세에 제일입니다. 이 애를 천거합니다. 먼저 대감께서 가무를 시험해보신 후에 태상께 바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윤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어명이신데, 내가 어찌 가무를 혼자 시험하겠소. 상감께 아뢴 후에 회보하리다."

하윤은 장악원 제조를 돌려보낸 후에 곧 어전으로 들어갔다. 태종은 하윤을 불러들였다.

"명기가 있던가?"

"장악원 제조를 불러서 물어보았습니다. 김해 명기에 칠점선이 있다 합니다. 노래와 춤이 당금에 제일이라 합니다. 소신더러 재주를 시험해보라 했으나, 전하께서 친히 한번 시험해보신 후에 태상왕 전하께 바치는 것이 좋을 듯하와 분부를 받자와 회답하겠다 했습니다."

태종은 용안에 가득 웃음빛을 띠었다.

"경의 의사가 그렇다면 한번 취재를 보는 것도 좋겠소."

영의정 하윤은 곧 빈청으로 나가 장악원 제조한테 기별을 내렸다.

"전하께옵서 친히 칠점선의 가무를 구경해보시겠다고 하명이 내리셨으니, 제조는 곧 칠점선을 대내로 입시케 하라."

"삼가 봉행하겠습니다."

장악원 제조는 복명하고 곧 장악원으로 나갔다. 칠점선은 영흥 명기 소춘풍과 함께 당대의 명기였다. 소춘풍은 이제 나이 사십이 넘어서 노기 축에 들었으나, 칠점선은 여자의 나이로 한창인 이십오 세의 좋은 나이였다. 칠점선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큰 영광이었다. 제조의 분부를 받자, 칠점선은 화관 몽두리에 기생의 예복을 입고 판교를 탄 후에 말 타고 입궐하는 장악원 제조의 뒤를 따라 대궐로 들어갔다. 어전 용상 앞에는 넓고 넓은 마루판에 화탄자를 깔아놓고 다시 그 위에는 강화 화문석을 보기 좋게 놓았다. 장고와 북이며, 해금, 퉁소, 필률, 거문고, 가야금, 양금, 당비파 등 삼현육각이 벌여져 있고, 악기 앞에는 장악원 악공들이 푸른 옷, 붉은 옷에 검은 사모를 쓰고 전하의 듭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영의정 하윤은 내시에게 인도되어 장악원 제조와 김해 명기 칠점선을 거느려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전하는 상궁과 나인들의 옹위를 받아 왕후 민씨와 함께 용상에 올랐다. 김해 명기 칠점선은 용상에 오른 전하와 왕후에게 화관 몽두리 정장으로 큰절을 올렸다. 먼저 전하의 안목에 들었다. 얼굴은 동편 하늘에 달덩어리가 떠오르는 듯 환했다. 태종은 미소를 풍기며 칠점선을 향하여 묻는다.

"네가 김해 명기 칠점선이냐?"

전하의 옥음은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칠점선은 잠깐 고개를 들어 용상을 우러러보면서 대답한다.

", 그러하옵니다. 천한 이름이 칠점선이옵니다."

"네가 가무에 능하다니 한번 보여줄 수 있느냐?"

"일생일대의 광영이올시다. 능통치 못하오나 감히 천한 재주를 시험해보겠습니다."

칠점선은 어전에서 일어섰다. 장악원 제조는 옷깃을 바로잡고 칠점선에게 명을 내린다.

"먼저 춤을 추어 취재를 보시도록 해라."

칠점선은 제조의 말이 떨어지자, 푸른 당의 소매 끝에 달린 눈같이 흰 한삼 자락을 번쩍 들었다. 장악원 악사장이 검은 사모에 푸른 관복을 입고 박을 잡아 쳤다. '!" 하는 박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삼현육각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일시에 일어났다. 칠점선의 눈같이 흰 한삼 자락이 번쩍 들려지며 왼편 어깨가 으쓱했다. 다음엔 반대편 어깨가 으쓱했다. 푸른 당의 허리에 감은 금박 대홍대가 흔들리면서 외씨 같은 흰 버선이 남치마 자락을 멋지게 차면서 몸을 으쓱 들었다. 어깻짓 몸짓 허리짓에 풍악과 함께 어우러지는 칠점선의 춤은 천의무봉의 옷자락이 벽공을 박차는 듯한 자태다. 전하는 손뼉을 치고 민비는 미소를 풍겼다. 춤은 자지러진 삼현육각 소리와 함께 온 궁중을 봄빛으로 화하게 했다.

"잘 춘다!"

전하의 찬사가 내렸다. 음악은 그쳐지고 춤은 멎었다. 칠점선은 춤가락을 멈춘 후에 용상 앞 어전으로 나가 왕 전하와 민비께 곱게 절을 올렸다.

"묘하다!"

전하의 웃음이 또 한 번 용안에 물결쳤다. 우선 춤에 합격이 된 것이다.

"어떠하옵니까?"

영의정 하윤이 금관조복을 입은 채 웃음빛을 얼굴에 머금고 용상을 향하여 아뢴다.

"제법 가락을 맞춰 출 줄 아는 춤이로구려. 다음엔 노래를 시험해보오."

하정승은 장악원 제조한테 눈짓을 했다. 장악원 제조는 어전에 배례를 마치고 뒷걸음쳐 물러나는 칠점선에게 다시 지시를 내린다.

"노래를 불러보랍시는 어명이 내리셨다. 좋은 가사를 불러보도록 해라."

칠점선은 남치마 자락을 휩싸 조용히 앉았다. 청 좋은 노랫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훈전 달 밝은 밤에 팔원팔 개다리시고 오현금 탄이성에 해오민지온혜로다. 우리도 성주 모시고 동락태평하리라.'

노랫소리와 악기 소리는 푸른 하늘을 흔드는 듯하고 한데 어우러지는 멋전 해조에 대궐 마당

잔디밭에 서 있던 한 쌍의 백학은 우줄우줄 춤을 추었다. 장고와 거문고 소리는 칠점선의 노랫소리와 함께 멈추어졌다. 전하는 크게 기뻤다. 영의정 하윤한테 분부를 내린다.

"경은 칠점선을 데리고 양주 행궁으로 가서, 태상왕 전하께 뵙게 한 후에 궁중에 거두어두시고 행락하시도록 아뢰라."

영을 내린 후 칠점선에게 비단과 피륙을 후하게 내렸다. 태종 대왕의 어전에서 물러난 하윤은 장악원 제조 이하 악공들을 거느리고 양주 소요산 아래 있는 행궁으로 향했다. 영의정 하윤은 내관을 통하여 먼저 태상왕께 뵙기를 청했다. 태상왕은 곧 하윤을 인견했다.

"국사가 다단할 텐데 경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가?"

"상감의 명을 받들어 문후를 드리러 왔습니다."

"정원에는 아무 별일이 없는가?"

"성덕이 높으시니 아무 별일이 없사옵고 백성들은 격양가를 높이 부르옵니다."

태상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내관이 달덩어리같이 환한 기생을 데리고 들어와 아뢴다.

"영의정이 데리고 온 기생이올시다. 삼가 어전에 뵙게 하옵니다."

태상왕 이성계의 늙은 눈이 둥그레졌다.

"영의정이 기생을 데리고 나오다니 무슨 말인가? 웬 기생을 데리고 왔단 말인가?"

태상왕은 영의정 하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윤이 부복해 아뢴다.

"상감께옵서 태상왕 전하의 노래를 위로하시기 위하여 천하명기 칠점선을 뽑아서 바치시는 것입니다."

태상왕은 귀로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들으면서 눈으로 칠점선을 바라본다. 어글어글한 눈에 코는 큼직했다. 이미가 약간 좁은 듯했으나, 과히 좁은 편은 아니었다. 두 볼엔 광대뼈가 약간 솟은 듯했으나, 턱은 너부룩해서 얼굴 전체를 받쳐주었다. 오사바사한 미인은 아니지만 중천에 떠오르는 달덩이모양 환한 얼굴이었다. 늙어도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공연히 설레어지고 기쁜 것이 사람들의 상정인 모양이다.

 

칠점선과 이성계

칠점선을 바라보는 칠십 노인 이성계는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늙은 나한테 젊은 기생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당치 않은 짓일세."

하윤이 공손히 아뢴다.

"상감께옵서 전하께 색을 취하시라고 바치는 것이 아니올시다. 노래에 적적하시고 심심하실 테니, 가사를 들으시고 춤을 보시어 소견하시라는 양지지효, 곧 뜻을 편안케 해드리자는 효심에서 나오신 것이올시다. 상감께옵서 이 뜻을 소신한테 하문하시옵기 소신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음식으로써 효성을 다하려는 효도보다 뜻을 편안케 하는 효도는 증자가 계실 뿐이옵니다. 살피시옵소서."

태상왕은 비로소 칠점선을 영의정 하윤이 대동하고 온 뜻을 알았다. 묵묵히 대답이 없다. 싫다는 표정은 아니다. 하윤은 뜰에 서 있는 장악관 제조한테 영을 내린다.

"태상왕 전하 어전에서 칠점선의 가사와 춤을 시험하라."

제조는 곧 악공들에게 지휘를 내렸다. 행궁은 대궐보다 전각이 좁았다. 지휘를 받은 악공들은 넓은 뜰에 멍석을 깔고 삼현육각을 아뢰기 시작했다. 칠점선은 태상왕께 절을 올린 후에 뜰 아래 내려 멍석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태상왕은 호피 교의를 타고 마루청 앞에 걸터앉아 칠점선의 춤과 노래를 굽어본다. 때마침 경순공주가 한양 정릉 흥천사에서 태상왕께 문후를 드리러 내려왔다. 행궁 내전 협문 앞에서 태상와의 후궁인 성비와 정경궁주와 함께 칠점선의 가무를 구경하고 있었다. 칠점선은 장악원 제조를 통해서 자기의 노래와 춤을 상감이 시험한 것은 태상왕 전하의 후궁을 삼기 위하여 취해진 것임을 짐작해 알았다. 젊은 계집의 몸으로 칠십이 넘은 태상왕 전하의 후궁이 되는 것은 그다지 행복스런 일은 아니지마는 일개 천한 기생의 몸으로 궁주로 발탁이 되어 후궁이 된다는 것은 보통 용이하게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육감적인 인생의 본능은 만족시킬 수 없으나 부귀영화로는 제일가는 일이라 생각했다.

칠점선은 갖은 재주를 다하여 춤을 추고 가사를 부르고 시조를 노래하고 잡가를 불렀다. 한창 가무가 자지러진 절정에 올랐을 때 행궁 대문간이 소란하여지면서 가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은 벙거지에 검은 더그레를 입은 군인들이 교군 바탕같이 만든 나무판 가자에 음식을 고배해서 가득 싣고 연락부절 들어왔다. 대전 내시와 대전 별감들이 어전에 국궁하고 아뢴다.

"한양에서 상감마마와 왕후마마의 명을 받들어 왔사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만족한 웃음을 띠고 묻는다.

"어떤 명을 받들어 왔느냐?"

"태상왕 전하께옵서 칠점선의 가무를 취재해 보시옵는 중 흥을 돋우어드리라고 소두를 받들어 나가라 하시어 가자 열 틀을 바치옵니다."

흥이 도도한 판에 음식과 술을 아들한테 받게 된 태상왕의 마음은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애들 썼다. 곧 음식을 올리게 하라."

태상왕은 아들이 올리는 수라상을 아름답게 받으면서 마음속으로, '이제는 네 마음이 돌았구나. 제법 아비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기쁘게 생각했다.

영의정 하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태상왕과 상감의 사이를 더욱 화하게 만들어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삼가 아룁니다. 진정으로 상감의 효심은 참말 지극하십니다. 양지지효에 양지지효를 겹하셨습니다. 입맛을 기르는 효성과 뜻을 순하시게 하는 효성을 다 겸하셨습니다."

정승 하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태종의 효도를 칭송했다. 한양 서울 왕궁에서 나온 갸자에 실은 음식은 곧 교자상으로 옮겨 태상왕 전하 앞에 진설되었다. 산해진미의 음식들이 두 자 석 자씩 높고 낮게 고배되어 괴어졌다. 태상왕께 수라상이 올려지니 칠점선은 노래와 춤을 그치고 어전으로 올라 술을 따랐다. 전항의 특별한 어명으로 영의정 하윤이 배석하고 앉아 있었다. 칠점선은 황금 술잔에 가득히 용안육주를 따라 태상왕 전하께 올리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수를 빌었다.

'요지에 봄이 드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삼천 년 맺은 열매 옥합에 담았으니, 진실로 이 잔 잡으시면 만수무강하오리다.'

오래 살라는 만수무강이란 축원은 누구나 다 듣기 좋아하는 소리다. 태상왕의 입이 방긋 벌어졌다. 금잔에 따라 올린 술을 단숨에 진어했다. 칠점선은 태상왕이 잔을 채 내려놓기 전에 부드러운 육회를 황금저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 태상왕은 칠점선의 영리한 태도에 더한층 귀여움을 느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칠점선이라 하옵니다."

"칠점선, 허허. 네 몸에 혹시 점이 일곱 개가 있느냐?"

칠점선은 얼굴을 붉혔다.

", 그러하옵니다. 아랫배와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일곱 개씩 있사옵니다."

"어허, 귀골이로구나."

 

세상을 버리는 태상왕 이성계

태상왕은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영의정 하윤이 아뢴다.

"전하께옵서 어떻게 칠점선의 몸에 점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까?"

태상왕은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이름이 칠점선이라 하니 부모가 그의 이름을 지을 때 반드시 까닭이 있어 지었을 것이 아닌가. 칠점선이라 하니 몸에 점 일곱 개가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아니한가. 하하하."

"과연 성상전하의 슬기 높으신 판단은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태상왕은 이날 밤에 칠점선으로 시침을 명했다. 과연 몸에는 일곱 개 점이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연분이라 생각했다. 다음날 칠점선에게는 화의공주의 칭호를 내렸다. 칠점선은 일개 천한 기생의 몸으로 일약 태상왕의 후궁이 되었다. 태상왕은 칠십이 넘은 고령이지만 아직도 젊은이를 능가했다. 소요산 아래 행궁에는 성비를 위시하여 정경궁주와 칠점선 후궁들이 봄빛을 자랑했다. 태상왕은 칠점선에게 더욱 정을 붙였다. 경순공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제일 기뻤다. 날마다 소요사 법당에서 관음보살한테 축원을 드리면서 아버지의 장수하시기를 발원했다.

태상왕은 이제는 과거의 영웅이 아니었다. 모든 권력을 아들 이방원이한테 빼앗긴 한 사람의 촌 늙은이 호호야가 되어버렸다. 칠점선의 노래를 듣고, 칠점선의 춤을 보는 것이 유일한 행락이었다. 결국 인생의 본능인 여성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태상왕은 칠점선을 밤마다 애무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칠점선과 자리를 같이하고 지냈던 이성계는 돌연 동풍이 되었다. 인사불성이 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도 뜨지 못했다. 말도 하지 못했다. 칠점선은 밤이 깊었으니 전의도 청할 수 없었다. 몸에 지녔던 산삼청심환을 급히 꺼내서 더운물에 개어 입에 흘렸다. 약간 숨을 돌린 태상왕은 눈을 한 번 떠본 후에,

"강비!"

하고 칠점선의 손을 잡앗다. 칠점선을 강비로 안 모양이다. 태상왕 이성계는 죽을 때까지 애인이요, 사랑하는 아내였던 방석의 어머니 강비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칠점선은 행궁에 있는 성비와 궁주를 깨워서 여러 사람이 병을 구원했다.

날이 밝자, 급히 내관을 달려 보냈다. 전의가 쫓아왔다. 태상왕의 환후는 위독한 중태였다. 시골구석에선 약을 살 수 없었다. 전의는 급히 서울 한양으로 달려가 상감 태종한테 알리고 곧 태상왕을 창덕궁 광연루로 옮겼다. 그러나 태상왕 이성계는 약석이 효험이 없었다. 태종 팔년 오월 이십사일에 승하하니 춘추가 칠십사 세였다. 대궐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어머니 원찰에서 곡지통하는 경순공주의 슬픈 울음소리는 귀신도 눈물을 뿌려 슬퍼할 지경이었다.

태상왕의 능침은 무학과 태상왕 자신이 정해놓은 야주 망우리 건너편 검암산 아래로 결정하고 석 달 만에 장사지냈다. 능 이름은 건원릉이라 했다. 한 세상을 주름잡던 영웅 이성계는 이제 푸른 산에 한 줌 흙을 보태주고 오늘날 오백 년까지 건원릉에 무양히 누워 있다. 임진왜란 대 왜병들은 서울 한양으로 쳐들어와 능마다 쫓아다니며 파고 헤쳤건만 건원릉에는 마치 갈대들이 검극처럼 석양에 빛을 뿜어 번쩍였다. 왜병들은 칼과 창을 가진 군사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있는 줄 착각했다. 무서워서 감히 능상에 오르지 못했다.

경순공주는 울먹이면서 아버지 인산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후에 원수 같은 전실 오라버니 태종을 만나보지 아니하고 영영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혹은 금강산 속으로 들어갔다고도 하고, 혹은 제주 한라산 속으로 피했다고 하기도 했다.

태상왕이 돌아간 다음 해에 태종은 한양 도성 안 정동에 있는 강비의 무덤을 양주 사하리로 옮겼다.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이 곧 당시의 양주 땅 사하리다. 태상왕과 경순공주는 강비의 무덤이 또 한 번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지 아니하고 한 분은 세상을 떠났고 한 사람은 종적을 감추었다. 경순공주는 태상왕이 생존해 있을 때 무학과 함께 건원릉 자리를 잡았다. 그때, 무학은 경순공주에게 태상왕 만세 후에는 강비의 정릉이 반드시 이장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었다. 그때, 공주의 온몸에는 소름이 쪽 끼쳤다. 아우 방석과 방번까지 죽인 태종이 또다시 자기 어머니의 무덤까지 파헤쳐서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자비한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는 이 잔인하고 포악한 행동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부처의 자비스런 설법으로 아버지를 달래서 부자지간의 얽혀진 마음을 얼마쯤 풀어놓아서 아버지가 방원을 향하여 활을 쏜 후에는 아무러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승하한 후에 방원이 계모인 강비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에 대해서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막을 힘이 없는 것을 잘 각오하고 있었다. 막을 힘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태종 방원은 방석의 친누이요, 이제의 아내였던 자기 자신을 죽일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 태상왕이 돌아간 후에 경순공주는 발붙일 땅이 없었다. 어머니 강비의 능에 올라 마지막 통곡을 올린 후에 변성명을 하고 구름과 물 사이로 숨어버렸다. 이후에 경순공주의 종적을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성계의 승하와 왕손들의 모습

이때 태조 이성계가 돌연 동풍이 되어 세상을 떠났을 때, 큰손자 ''15세요, 둘째 ''13세요, 셋째 ''12세였다. 이제는 모두 다 또렷이 사물을 판단할 줄 아는 소년들이 되었다. 이 중에 큰 왕자 '',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옮아와서 궁중과 정부의 모든 질서를 정돈할 때 큰아들이라는 전통을 지켜서 모후 되는 민씨와 대신들과 의논한 후에 세자로 책봉했다. 태종 이방원의 백세 후에 왕이 될 자격을 가졌다. 이때 왕자 ''는 어린 나이건만 왕세자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했다. 할아버지가 전조의 모든 충신과 의로운 선비들을 모조리 죽이고 신하로서 임금을 쳤다는 누명이 달갑지 않은 때문이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크고 깊게 작용을 했다. 삼강오륜을 강조하는 선생의 강론을 들었을 뿐 아니라 사서오경을 읽을수록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경멸하는 생각은 더욱 깊었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며 도은 이숭인의 절개 높은 행적을 들을 때마다 등에서는 찬땀이 흘렀다. 세자부인 선생들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녹을 먹는 신하이면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 굽히지 아니한 그들을 예찬하고 존경했다. 결국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롭지 못하고 착하지 못한 악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착하지 못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둔 것이 면난스럽기 짝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서 또렷하게 철이 날수록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더한층 높아가기만 했다. 의리와 지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음에는 왕실인 집안싸움이 더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을 죽였다. 다음엔 방번을 죽였다. 또 매부 이제를 죽였다. 그나 그뿐인가, 또다시 싸움은 벌어져서 바로 손위 동복형인 방간과 전쟁을 하고 조카 맹종을 죽였다. 이 일만 해도 오히려 참겠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칼을 빼어들고 부자가 전쟁을 해서 대결을 했다. 할아버지는 함흥에서 조사의를 앞장세워서 사신이 갈 때마다 함흥차사를 만들면서 아버지를 무찔러 들어오고, 아버지는 칼을 빼어 들고 군사 십만 명을 거느려서 청천강까지 올라가 할아버지의 앞잡이인 조사의와 결사적으로 다투었다. 부자싸움도 유만부동이지, 이같이 적과 적이 되어 죄 없는 백성과 군사들만 죽여버렸다. 기막힐 일이다.

그나 그뿐인가, 할아버지는 아버지한테 패해서 하는 수 없이 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환영문에서 아버지를 향하여 활을 당겼다. 살은 소리치며 날아서 아버지의 명치를 맞히려 할 순간 아버지는 몸을 급히 피해서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만약 이때 아버지의 행동이 조금만 둔했더라면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화살 한 대에 영결종천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만조백관이며, 구경하는 백성들이 삼주 오겹 늘어서 있는 곳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와 같은 추태를 저질렀다.

도대체 임금 노릇이 무엇이기길래 이같은 만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왕자 ''는 세자가 되기 이전에 동생 ''와 함께 왕손의 자격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오랜만에 천 리 함흥 길에서 돌아오는 할아버지를 맞이하러 나갔던 것이다. 이리해서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가슴에 독약을 바른 화살을 쏘는 광경을 목도해 본 순진무구한 소년 목격자였다. 깜짝 놀랐다. 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쏘는가? 가슴이 덜렁했다. 간 줄기와 염통이 뚝 떨어지는 듯했다. 정신까지 아찔했던 것이다.

모두 다 왕권을 다투는 싸움이었다. 더럽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임금의 자리에 앉고 싶어서 이복동생인 방석을 죽였다는 일은 어릴 때 말로만 들어서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직접 목격해보니 기가 막혔다.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생을 죽인 아버지도 나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아들을 쏘아 죽이려 한 할아버지도 사람이 아니다. 소년의 가슴에는 기막힌 상처를 입었다. 그들의 피를 받아서 아들이 되고 손자가 된 것이 부끄러웠다. 어색한 환영의식이 끝난 후에 왕자 ''''와 함께 풀기 없이 왕자들의 처소로 돌아왔다.

''''를 따라 할아버지를 지영하느라고 문밖으로 나갔다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쏘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두 살 아래인 ''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언니되는 ''가 고려 때부터 궁중에서 거행하던 궁녀와 함께 고려 때 충신들의 일이며 방석 방간의 난리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귀 기울여 듣기는 했으나 ''보다 두 살 아래였다. 심각하게 머릿속에 들어가지 아니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려고 활을 쏘는 것을 목격해보니 무섭고 놀라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끝이 싸늘했다. 언니''의 손을 잡고 억지로 의식을 마친 후에 언니와 함께 가마를 타고 돌아왔다. 웃옷도 풀지 아니하고 ''한테 물었다.

"언니, 아까 할아버지가 아버지한테 활을 쏘는 것을 보았소?"

"보았다."

''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 쏘았소?"

"죽이려고 쏘았지."

"아버지가 어떻게 자식을 쏘아 죽이오."

"그러기에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는 뱉듯이 대답했다.

"도대체 왜들 그러오?"

"서로 임금 자리 싸움을 하느라고 그렇단다. 너는 임금 노릇 하기를 소원하지 마라."

"언니가 있는데 내가 왜 임금이 되나?"

"나는 더러워서 임금 노릇 하지 않겠다."

''는 소리 높여 대답하고 빨간 어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같이 해서 소년 ''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불신임하기 시작하고, ''는 쉽지 않으나 어렴풋 회의를 느꼈다. 그러나 셋째인 ''''보다는 한살이 아래였다. 아직 나이 어리다. 함흥서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지영을 나가지 아니했고 따라서 아버지가 아들한테 활을 쏘는 불행한 광경을 목격해보지도 아니했다.

태조 이성계는 함흥에서 송도로 돌아왔으나 그래도 마음이 흡족하지 아니했다. 모든 것이 보기 싫어 양주 소요산으로 나가버리고 태종 이방원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만하면 집안일은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다. 왕실에 대하여 외면하고 있는 송도 땅을 떠나서 한양으로 정부를 옮겼다. 종묘와 사직에 봉고제를 지낸 후에 정부의 부서를 정돈했다. 이때 사간원 대사간 황희는 태종에게 고했다.

"전하께서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시어 정부의 질서를 정돈하시고 종묘와 사직에 봉고하는 제례를 치르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시정의 만백성이 모두 다 안도함을 얻어 맡은 바 업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소신의 생각에는 미흡한 일이 한 가지 있사옵니다."

백성들이 안도해서 업에 종사한다는 말을 듣자 임금 태종은 마음이 흡족했다. 호협하게 소리를 높여 웃으며 묻는다.

"경의 미흡하다는 일은 어떠한 일인가?"

"나라에는 국본이 튼튼하게 정해져야 합니다. 국가의 모든 질서가 다 정해졌사오나, 천추만세 뒤에 전하의 업적을 계승할 세자를 아직 정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속히 왕세자를 책봉하시옵소서."

황희는 다음 대에 왕권싸움이 또 일어날까 염려한 때문이다. 임금 이방원은 다시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과인의 나이 아직도 삼십여 세인데 벌써 무슨 뒤를 이을 세자 생각을 하란 말인다."

황희는 얼굴빛을 바로 하여 정색하고 아뢴다.

"전하께옵서 비록 춘추방성하시다 하오나 국가에는 국본이 굳게 정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만고의 철칙이요, 동서의 제국이다 그러하옵니다. 춘추의 부강하신 것만을 생각하실 것이 아니옵니다."

태종은 자기가 방석을 내쫓으려고 혁명을 일으키던 생각이 났다. 지금 자기의 아들은 상당히 많다. 왕후 민씨인 정비의 몸에만도 사형제요, 후궁의 몸에서도 칠팔 명이나 된다. 자신의 나이는 아직도 젊다. 앞으로 또다시 몇 형제를 더 둘지 모를 일이다. 자기처럼 형제싸움이 나서 또다시 골육상쟁하면 곤란한 일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세자는 일찍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머릿속에 아들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가 떠오르고 ''가 보였다. ''의 얼굴도 보였다. 서자들의 얼굴도 나타났다. 이윽고 태종은 침묵을 깨뜨리고 황희한테 묻는다.

"지금 과인은 황후의 몸에 사형제가 있고, 후궁의 몸에도 칠팔 명의 아들이 있다. 경의 생각에는 누구로 세자를 봉하는 것이 좋다 생각하는가?"

황희는 장중한 목소리로 고한다.

"전하께서는 세자책봉에 대하여 어찌 왕자 많은 것을 생각하십니까? 이러하신 생각이 국본을 어지럽게 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장본이 되옵니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당연히 장자가 태자와 세자가 되는 법이올시다."

황희는 엄숙한 태도로 말을 마치자 입술을 한일자로 힘차게 닫았다.

"좋은 말이다. 대신과 내전에 의논하여 정하리라. 그러나 생각해 본 일이 있다. 큰 왕자가 세자 재목이 못될 때는 왕자 중에서 영특한 인물을 택해서 세자를 봉하는 일이 또한 온당하지 아니한가?"

황희는 고개 가로 흔든다.

"전하의 큰 왕자는 영특하고 똑똑하십니다. 넉넉히 삼천리강산의 만백성들을 복되게 할 인물이올시다. 다시 지의하지 마시고 속히 국본을 정하옵소서."

"잘 생각해서 처리하리라."

태종은 장중하게 권하는 황희의 말을 어름어름 대답하고 용상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었다. 이때 태종은 아직 세자를 책봉할 생각이 없었다. 혁명을 함께 일으켜 사생을 같이하자고 굳게 약속한 정실 민씨 이외에 왕위에 오른 후에는 기생 가희아를 궁중에 떼어 들여서 후궁을 삼아서 아들 ''를 낳았고, 민비의 시중드는 시녀 신씨를 건드려서 아들 ''을 낳고, 또다시 그 몸에서 아들 ''을 낳고, 또다시 그 몸에서 아들 ''을 낳고, 고려 궁인 안씨의 몸에서 아들 '', 궁녀 최씨의 몸에서 아들 ''을 낳고, 다시 최씨의 몸에서 아들 ''을 낳고, 선빈 안씨의 몸에서 아들 ''를 낳으니, 왕비 민씨 소생 사형제 이외에도 서자가 팔 형제다. 이밖에 적출 소생으로 공주가 넷에 서출소생으로 옹주 열셋, 합쳐 딸이 열일곱 명, 아들 12형제에 딸 17명을 합하면 모두 29남매, 한 명이 모자라는 30명이다. 아직 사십 미만의 임금이었다. 이 식으로 따져본다면 앞으로 몇십 명을 더 낳을지 모른다.

장래의 나랏일을 걱정하는 대사간 황희는 또다시 다음 대에도 왕의 자리를 둘러싸고 골육상잔하는 참담한 비극이 일어날 것을 근심했다. 태조 이성계 때, 골육상잔이 일어난 원인은 큰아들로 세자를 삼지 아니하고 계비 소생인 방석으로 세자를 삼은 데 원인이 된 것이다. 만약에 태종이 후궁한테 고혹이 되어 장자로 세자를 삼지 않고 서자로 세자를 봉한다면 이것은 전철을 또 한 번 되풀이 하는 셈이 된다. 두 번째 왕실에 골육상잔이 일어난다면 나라는 결딴이 나고 말 것이다. 나라를 지성으로 생각하는 황희는 앞일을 생각해서 이같이 충간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진심으로 대사간 황희의 충간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그는 따로 생각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세자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아들은 큰아들 ''도 아니요, 둘째 아들 ''도 아니요, 셋째 아들 ''도 아니었다. 가장 침혹된 후궁이 있었다. 기생 출신인 가희아의 아들 ''를 마음 속에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종은 대사간 황희와 약속한 말을 이행하지 아니했다. 세자 봉하는 일을 대신과 의논하지도 아니했다. 더구나 왕비 민씨하고는 말머리도 꺼내 보지 아니했다. 이러한 때 아버지 태상왕의 상을 당했다. 대궐 안은 벅적거렸다. 슬픔과 수운 속에 싸였다는 것보다 그대로 관례적인 치상 준비에 바빴다. 태상왕 이성계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이는 상왕인 정종이 있을 뿐이었다. 뼈가 아프도록 슬퍼할 사람은 강비와 경순 공주였다. 그러나 강비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고 경순 공주는 원수인 전실 오라버니가 두려워서 대궐 안에는 발길을 들여놓지 아니했다.

상감 태종은 마음속으로 슬픈 충격을 조금도 느끼지 아니했다.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나 골육 상잔을 해서 정이 떨어진 지 오래다. 정이 없는데 슬픈 감정이 복받쳐 올 리 만무했다. 그러나 임금이었다. 체통은 지켜야 했다.

발상거애 하는 날 마음에 없는 슬픔을 우렁찬 목소리로 '애고애고'하고 통곡해 울었다. 발상거애는 초상 중에 첫번째 치르는 의식이었다. 먼저 혼을 부르는 초혼 의식은 상감을 위시하여 상왕과 왕손이며 종척과 내명부가 둘러서고 합문 밖에는 대신들이 모여 선 후에 태상왕 이성계의 용포를 흔들어 고복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때 만약 고복을 세 번 불러서 태상왕이 도로 살아나면 좋지마는 그렇지 아니하면 아주 영영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울음을 터뜨려 통곡을 하고 천아성을 불러 천하에 죽음을 반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발상거애다.

이때 큰 왕손 ''와 둘째 왕손 ''와 셋째 왕손 ''도 태상왕의 초혼을 부르는 의식에 참여했다. 세 왕자뿐이 아니다. 서손인 ''를 위시하여 소년 왕손과 손녀들 29명이 일제히 상왕 정종과 상감 태종 뒤에 시립해서 초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관이 창덕궁 광연루 용마루에 올라 용포 자락을 뒤흔들며 구슬픈 소리로 혼을 불렀다.

"해동 조선국 태상왕 이단 전하 고복"

이단은 이성계가 조선 국왕이 된 후의 이름이었다. 내관은 용포를 뒤흔들며 똑같은 소리로 고복을 세 번 불렀다. 그러나 혼은 잠잠하고 돌아오지 아니했다. 영영 죽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다. 울음소리가 악머구리 끓듯 일제히 터졌다. 큰 왕손 ''는 고개를 들고 악머구리 떼같이 울어대는 모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먼저 둘째아버지 상왕의 모습과 아버지 상감의 통곡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둘째아버지는 그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듯 호곡해 울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모든 지나간 세월 속에 흘려버렸던 옛일을 생각해서 허탈이 되어 엉엉 울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애고애고'하고 굽이를 꺾어 힘차고 청 좋게 울었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아니하건만 겉으로는 슬펐다. 가짜 울음이 분명했다.

왕자 ''는 둘째 아버지와 아버지의 울음을 비교해 보았다. 둘째아버지의 슬퍼하는 모습은 창자 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울음이요, 상감인 아버지의 울음은 허장성세를 울려서 체면만은 지키자는 울음이었다. ''는 둘째아버지인 상왕보다 아버지인 상감이 골육의 정으로 더 한층 가깝건만, 둘째 아버지의 애통하는 정경은 동정하고 싶고 아버지의 허장성세로 마디를 꺾어 우는 모습에는 혐오의 감정이 일어났다. 마음속으로 슬펐다.

'왜 순수하지 못하고 이중인격을 갖는 것일까?'

'슬프지 아니하면 아니 울어도 좋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 울음을 왜 저리 울고 있을까?'

'차라리 의젓하게 서서 고복을 부르는 초혼 의식을 마치는 것이 대인 군자의 도리가 아닐까?'

''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마당을 향하여 침을 뱉었다. 가식이 싫었다. 악머구리 끓듯 하는 울음 속에 ''는 끄덕도 아니하고 태연히 서서 모든 사람의 우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자기 동생은 어쩌는가 눈을 들어 살펴보았다. ''도 울고 ''도 울었다. ''도 울었다. 스물여덟의 왕손과 손녀들이 일제히 울었다. 아버지 상감이 우는 데로 '애고애고'하고 울었다. 눈물 한점 흘리지 아니하고 묵청을 내서 엉엉 울었다. ''는 불쾌했다. 스물여덟의 동생들 앞으로 뛰어가서 왜 가짜 울음을 우느냐고 볼치를 갈기고 싶었다. 또다시 한 곳을 바라보았다. 처절하게 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상왕의 후궁이었던 성비와 정경공주의 울음이었다. 세류 같은 가는 몸에 허리가 끊어질듯 몸부림을 치며 호곡해 운다. 진정에서 솟아나는 슬픈 통곡 소리다. ''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섬겼던 늙은 남편이 돌아갔으니 당연히 울어야만 할 진정한 슬픔이라 생각했다. ''는 여전히 눈물 한 점 흘리지 아니하고 초혼을 부르는 고복 의식을 마쳤다.

 

성복제와 인산

''는 초혼하는 의식을 마치고 자기 처소로 돌아왔다. ''''도 따라서 들어왔다. 큰형 ''는 불쾌한 얼굴로 아우들을 바라보며 뱉듯이 물었다.

"너희들은 왜 가짜 울음을 울었느냐?"

"가짜 울음이라뇨?"

''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반문했다.

"태상왕 전하의 초혼을 부를 때 가짜 울음을 왜 울었느냐 말이다."

"가짜 울음을 운 일이 없소. 남들이 울고 있으니 나도 울어야 하는 줄 알고 그대로 따라서 엉엉 울었소. 가짜 울음을 운 적이 없소."

''는 천지난만하게 대답했다.

"바보로구나! 울음은 슬퍼야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냐. 슬프지도 않은데 남이 운다고 따라서 울었으니 바보요, 얼빠진 사람이다. 사람이 안팎이 다르면 아니 된다. 양심을 속이면 아니 된다!"

''는 동생 ''를 타박 주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어찌했소?"

''가 다시 물었다.

"눈물이 아니 나오는 것을 어찌하느냐. 슬퍼야 눈물이 나오고, 눈물이 나와야 울지 않느냐. 슬프지 않은데 공연히 허탕으로 우는 것은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나는 태상왕 할아버지께 정이 들지 아니해서 한 방울 눈물도 나오지 아니했다. 슬프지 아니한데 어떻게 우느냐. 가짜로 우는 사람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짜로 '애고애고' 하고 겉으로 우는 사람들의 창자 속을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참말 가관들이더라."

이때 ''의 말을 한동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가 상긋상긋 얼굴에 웃음을 펴고 말했다.

"저는 가짜 울음을 울지 안 했습니다. 진정으로 슬퍼서 울었습니다."

총명스런 까만 눈에 광채를 뿜어 말했다.

"네가 진짜로 슬퍼서 울었단 말이냐?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던데"

"아니올시다. 고개를 숙이고 울었으니 형님께서 눈물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많이 흘리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슬퍼서 울었습니다."

''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가 진정으로 슬퍼서 울었다? 할아버지한테 한 번 안겨보지 못했던 네가 무엇이 슬퍼서 진정으로 울었단 말이냐?"

''는 큼직한 눈을 번쩍 떠서 ''의 얼굴을 쏘았다.

"안겨보지는 못했지마는 할아버지올시다. 할아버지가 영영 다시 오지 못할 길로 떠나셨는데 어째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눈물이 조금 나오고 또다시 구슬픈 생각이 나서 엉엉 울었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한 할아버지, 충신을 죽인 할아버지, 자식의 명치 끝을 향하여 화살을 겨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무엇이 슬펐단 말이냐?"

''는 화가 뻗쳤다. 웃옷을 활활 벗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니합니다. 할아버지가 아니 계시면 아버지가 어찌 생겨났겠습니까? 좋든 나쁘든 내 할아버지올시다. 더구나 나라를 건국한 할아버지올시다. 그래서 진심으로 슬퍼서 울었습니다."

핏줄이 흘러서 진정으로 슬펐다는 ''의 말을 듣자, 큰 왕자 ''는 흥분한 말투로 비꼬아 대답한다.

"너는 과연 참 효자요 효손이로구나. 진정으로 슬퍼서 울었다면 나는 타박 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슬퍼서 운 사람이 몇이나 있었느냐말이다. 가짜 울음을 꺼이꺼이 우는 사람들의 꼴이 보기 싫어서 너희들도 가짜 울음을 울었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는 말을 마치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말이 없이 형과 아우의 주고받는 수작을 듣고 있던 ''가 말을 한다.

"''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합니다. 아마 나도 남을 따라서 운 것이 아니라 핏줄이 캥겨서 슬퍼서 울었나 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주관 없이 말참견을 하는 보의 말에 ''는 화증이 벌컥 났다.

"너는 목낭청이냐? 주책 좀 작작 떨고 입을 닥쳐라."

큰 형의 위세에 눌린 ''는 자라목 오그리듯 목을 움츠렸다.

''가 영채 도는 눈을 들어 ''를 향하여 말했다.

"사람이 큰일을 하려면 칭찬도 듣고 욕도 먹는 법이올시다."

''는 말을 마치자 미소를 짓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는 야무지게 말하는 ''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아가 끓었다. 또다시 큰소리로 떠들었다.

"욕을 먹어도 유만부동이다. 쓰러지는 고려조정을 휘어잡아서 조선이란 나라를 개국한 일은 좋다. 그러나 왜 어진 사람과 착한 사람과 의리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느냔 말이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잡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 것은 사람치고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동생을 죽이고 형을 죽이고 조카를 죽이고까지 임금의 자리에 나간 이 일은 마음에 쾌한 일이 아니다. 이러기에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갔다 해도 슬픈 감정이 일어나지 아니한다. 그러니 울음이 나오지 아니했다. 더구나 부자지간에 원수같이 지내던 전하께서, 통곡을 하고 거탈로 몸부림치는 모양을 보니 세상일이 가소롭기 짝이 없다. , 사람이 옳게 살지 못하고 허례허식을 위해서 이중인격을 갖느냐 말이다. 효자 노릇을 한다면 진정으로 효자 노릇을 해야한다. 죽은 후에 이면 치레로 꺼이꺼이 울지 말고, 살아서 진심으로 그 아버지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어야 한다!"

"임금 노릇을 하자면, 의식도 필요한가 합니다."

''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대답하다.

"듣기 싫다! 물러가거라."

''는 소리쳐서 동생들을 흘겼다.

''''는 머쓱해서 물러났다.

사람이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는 성복제를 지내게 마련이다. 성복날부터는 죽은 이의 은공을 생각해서 거상 옷을 입기 시작하는 것은 왕가나 사가나 매일반이다. 거상을 입는 옷은 말할 것도 없이 죄인의 옷이라 해서 추한 베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 상례요, 죽은 사람과의 가깝고 먼 촌수를 따져서 차등이 있게 입도록 마련되었다. 아들은 삼 년을 입어야 하고 손자도 중복인이라 해서 돌을 입어야 한다. 국상이 나면 임금은 부모와 같다 해서, 대신 이하 벼슬아치는 말할 나위도 없고, 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평민까지도 백립에 베옷을 입는 것이 이 나라 왕조의 풍속이었다.

대궐 안에서는 상옷을 짓느라고 법석댔다. 상왕과 상감을 위시하여 상왕비와 왕비며, 왕자, 왕손에 비빈 등 첩들이 모두 다 복을 입어야 하니 어마어마하고 대단했다. 뿐인가, 여기다가 삼천 궁녀도 모두 다 거상을 업어야 했다. 상의원에서는 삼사쳔 명의 상궁과 침비들이 거상옷을 짓느라고 꼬박 밤을 새웠다. 상옷을 입는 데는 옷만이 아니다. 수질, 요질에, 굴건도 만들어야했다. 특별히 상왕 전하와 왕 전하와 왕손들의 상옷은 상의원의 일등 가는 상궁들이 마름질을 해서 지었다.

성복제 전날 밤이 되었다. 상의원에서는 상옷들을 백지에 싼 의대 상자에 근봉을 박아서 각전으로 봉송했다. 상의원 나인은 큰 왕자 ''가 있는 전각으로 올라서, 왕자 소속의 늙은 나인을 통해서 상옷을 올렸다. 늙은 나인은 웃는 낯으로 상의원 나인한테 애썼다고 치사하고 상옷 상자를 큰 왕자 앞에 놓았다.

"무엔가?"

"상의원에서 상복을 가져왔습니다. 내일이 성복제올시다. 입으시고 곡반에 나가셔야 합니다."

''는 검다 희다 말이 없이 발길을 옮겨서, 혼자 거처하는 침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고 생각 속에 빠졌다. 혼잣말로 웅얼댔다.

'슬프지도 아니한데 상복을 입는다......'

''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세상에는 슬프지도 아니한데 꺼이꺼이 우는 상제놈들이 많으렷다!'

'슬프기는커녕 아비 죽은 것이 좋아서 마음속으로는 무척 기쁘면서도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애고애고 하고 우는 자도 이으렷다!'

옆방에 있던 상궁이 깜짝 놀랐다. 급히 장지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는 눈을 딱 감고 입을 다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외마디 소리를 치시니 웬일이십니까?"

''는 대답 없이 몸을 뒤쳐누웠다.

''는 괴로웠다. 고민 속에 빠졌다. 슬프지도 아니한 성복제에 나가서 혓 울음을 운다는 일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자기가 나가서 헛 울음을 운다면, 양심 없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괴롭기 한량없었다. 늙은 나인은 대답 없이 얼굴을 찌푸리고 누워 있는 ''를 근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몸이 괴로운 모양이다. 손을 들어 ''의 이마에 얹었다. 마음이 괴로운 탓인지, 이마가 화끈했다.

"에구머니나, 몸이 더우시네. 감기가 드셨나, 약을 잡숴야겠습니다. 전의를 부르오리까?"

''는 늙은 나인의 손길을 뿌리쳤다.

"듣기 싫어. 왜 이리 수선을 떠나."

눈을 딱 부릅뜨고 고함쳐 꾸짖었다.

"그대로 계시면 아니됩니다. 감기가 드셨나 봅니다. 어서 약을 달여 젓수셔야 하겠습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 할 테니 나가라구!"

''는 또 한 번 되게 소리쳤다.

늙은 나인은 머쓱해서 물러났다. 장지문이 소리 없이 닫혀졌다. 혼자 누운 ''는 홀연 미소를 머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있다고 호들갑을 떠는 늙은 나인의 말에 홀연 암시를 받았다. 입가에 안심하는 미소를 머금고 잠 속에 들었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궁중은 새벽부터 벅적거렸다. 내시들은 넓고 넓은 중정을 청소하느라고 분주했다. 물을 뿌리고 황토를 했다. 전각앞에 하늘을 가려 드높게 차일을 쳤다. 빈전 앞에는 제상이 배설되고 숙수들은 생과유과를 위시하여 가지각색의 제수를 제상 위에 진설했다. 열간 들이 제상 앞에는 소연 천장이 깔려지고 곡반은 내곡반, 외곡반으로 구분되었다. 내곡반은 상감과 왕비 민씨를 위시햐여 상왕과 상왕비에 왕자 왕손들이 내명복을 해서 거상 옷을 입고 제례를 지내는 곳이요, 되곡반은 삼정승 육조판서를 위시하여 종척들이 상옷을 입고 곡을 하는 곳이다. 황사초롱과 청사초롱은 바람에 흩날리고 청동사자 큰 화로엔 향연이 향기를 뿜어 뜰 안에 가득했다.

성복제를 지낸 시각은 한낮인 오시였다. 오시에는 이 나라의 최고 집권자인 상감 이방원이 왕비 민씨와 함께 모든 왕자들을 거느리고 굴건제복을 입고 나타나서 그 아버지 빈전 앞에서 '복을 입었습니다' 하고 무축단현으로 술 산 잔을 올린 후에 애통애절한 슬픈 울음을 한바탕 울부짖는, 인생 마지막 길의 애끊이는 제사다.

사시가 되었다. 장차 성복제를 지낼 시각은 한 시각밖에 남지 아니했다. 왕자 ''의 처소로 대전에서 기별이 나왔다.

"성복제를 오늘 오시에 거행한다 하십니다. 큰왕자 이하 모든 왕자는 빠짐없이 상복을 입으시고 내곡반으로 참여하시라는 분부십니다."

대전내시는 늙은 상궁에게 전갈을 전하고 돌아갔다. 늙은 궁녀는 이 뜻을 ''한테 고했다.

"오늘이 성복야?"

''는 한마디를 남긴 후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각이 한 시각밖에 남지 아니했습니다. 차차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소세를 하시옵소서."

늙은 궁녀는 일변 세숫물을 떠올리고, 일변 상의원에서 지어 올린 상복 상자를 내려놓았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는 홀연 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왜 이리 수선이냐. 상복 상자를 저리 치워라. 나는 성복제에 참여 하지 않겠다!"

늙은 궁녀는 깜짝 놀랐다. 아기씨는 장손이었다. 장손이 성복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궁중에 여론이 일어날 것이다. 간밤에 아기씨는 외마디 소리를 질러서 몸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성복제는 상중 제례에 첫째 번 가는 복을 입는 제사다. 큰 왕자가 제사에 빠진다면 큰일이었다. ''의 기색을 살피어 다시 물었다.

"간밤에 심기가 불편하시더니 아직도 미령하십니까? 그러나 성복제에 장손이 빠지면 아니됩니다. 아무리 불편하시더라도 잠깐 참례를 하셨다가 돌아오셔야 합니다."

"시끄럽다. 웬 잔소리냐. 나는 성복제에 나가지 않는다."

늙은 궁녀는 더 말을 붙여볼 수 없었다. 머쓱해서 물러났다. 대전에서 내시가 또 나왔다.

"모시러 나왔습니다. 상복은 다 입으셨습니까?"

늙은 궁녀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몸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성복제 참례를 못 하실 듯합니다. 아까부터 말씀을 여쭈었으나 미령하셔서 못 나가실 듯하다 하십니다."

대전내시는 깜짝 놀랐다.

"미령하시다니 웬일입니까? 전하와 비전하께서는 상복을 입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째 왕자며 셋째 왕자가 다 들어와 계십니다. 뵙고 가야 하겠습니다."

늙은 궁녀는 당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잠깐 들어가 아뢰고 나오겠습니다."

궁녀는 말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갔다.

"대전내시가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모시러 나왔습니다. 미령해서 못 들어가신다 했더니 잠깐 뵙고 가겠다 합니다."

''는 화가 벌컥 났다.

"아파서 못가겠다 하는데, 왜들 이리 귀찮게 구느냐. 만나볼 것 없다. 못 참례한다고 아뢰라고 해라."

늙은 궁녀는 다시 더 권할 도리가 없었다. 대전내시한테 말을 옮겼다.

"편치 않아서 성복제에 참례치 못하시겠다 합니다. 만나볼 것 없이 그대로 들어가 대전께 아뢰라 하십니다."

대전내시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급히 발길을 돌려 대전으로 들어갔다. 이때, 태종은 굴건제복에 상장 막대를 짚고 왕비와 왕자들과 함께 큰 왕자 ''가 들어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나갔던 내시가 돌아오는 것을 보자, 성급하게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왜 혼자 들어오느냐?"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 큰왕자께서는 성복제에 참례를 못 하시게 되었습니다."

"무어야, 성복제에 참례를 못 하겠다? 웬 까닭이냐?"

태종은 화가 벌컥 났다. 옥음이 높았다.

"체후 미령하신가 합니다. 몸이 불편해서 제례에 참여치 못하시겠다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어디가 아프단 말이냐?"

태종의 안정이 화경같이 떠졌다.

왕비 민씨는 깜짝 놀랐다.

"뵙고 왔느냐?"

"궁전의 전갈만 듣고 왔습니다. 뵙고 오려 했으나 그대로 말씀만 드리라 하셔서 뵙지는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태종은 요사이 ''가 차차 나이를 먹어갈수록 행동이 이상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글공부도 하려 들지 아니했다. 해동청 보라매를 길러서 몰이꾼을 데리고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할아버지 태상왕 전하께 환후 중에도 문안을 드리지 않은 것은 예사요, 자기한테도 가끔 조석 문안을 궐하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소문을 들으면 둘째아버지 상왕 전하께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불쾌했다. ''가 철이 들수록 자기와 태상왕을 존경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었다. 태상왕과 자기가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향기롭지 못한 처사를 한 것을 ''가 어느덧 느낀 모양이다. 한편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태종은 ''가 오늘 성복제에 병탈을 하고 참여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마음에서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왈칵 화증이 일어났다.

"몸이 아파? 꾀병이 아니냐?"

태종은 상장 막대로 말루청을 두드리며 뜰 아래에서 아뢰는 대전내시에게 호통을 쳤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지난번 발상거애를 하신 후에 애통하신 충격을 느끼시어 병환이 나셨나 봅니다."

대전내시는 손을 싹싹 비비며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해서 아뢰었다.

"애통! 저 혼자만 채통했단 말이냐!"

태종은 또 한 번 진노를 보자 모든 시립했던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왕후 민씨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왕자 ''''를 돌아보았다.

"너희들이 나가서 좀 보고 돌아오너라."

''''는 왕후의 분부를 받고 걸음을 빨리하여 형의 처소로 향했다. 늙은 궁녀의 마중을 받으며 ''의 처소로 들어갔다. ''는 상복 상자를 옆에 놓아둔 채 눈을 딱 감고 누워 있었다. 무척 마음속으로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우들이 찾아온 것을 알면서도 ''는 눈도 떠보지 않고 누워 있었다. ''는 어떻게 말을 붙여보아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셋째 ''''의 옆으로 가까이 갔다.

"언니, 어디가 아프시오?"

''는 일변 말을 하고 일변 ''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는 서늘했다. ''는 눈을 번쩍 떴다.

"아프지않다.! 누가 아프다고 하더냐."

''는 소리를 꽥 질렀다. ''는 잠깐 모색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굴에 화한 빛을 띠고 부드럽게 말했다.

"대전 내시가 들어와서 편치 않다 하갈래 어마마마의 뜻을 받들어 저희들이 나왔습니다."

"내시 놈도 쓸개 빠진 놈이다. 내가 언제 아프다고 했느냐. 성복제에 참여하지 못 한다고 했지."

''는 뱉듯이 말을 마음속을 털었다. ''는 한동안 사이를 두었다. ''의 몸에 손을 얹었다.

"언니 그러지 말고 들어갑시다. 성복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아니했습니다. 어마마마께서 언니의 말씀을 들으시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초조하게 기다리십니다."

''는 자기 몸에 얹힌 ''의 손을 뿌리쳤다.

"참여하기 싫다는 왜 그다지 끄느냐. 아무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나 애통한 마음이 없는데 왜 내가 성복제에 참여해서 꺼이꺼이 우느냐.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데 가짜 울음은 도저히 울 수가 없다고 초혼제 때도 너희들한테 말하지 아니했느냐. 내가 양심상 가짜 울음을 울 수 없는 것도 한가지 원인이다마는 원수처럼 부자가 서로를 죽이려고 싸우다가 이제 와서 겉치레로 체면을 지키느라고 꺼이꺼이 까이까이 우는 꼴이 메스꺼워서 성복제에 참여치 못하겠다."

''의 몸에는 열이 올랐다. 입에는 거품을 뿜었다. ''는 상긋 웃었다. ''가 뿌리치는 손길을 다시 ''의 몸에 얹히며 달래본다.

"언니의 말씀은 진정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언니께서는 장손이시며 장자이십니다. 그리고 여염집의 장손 아니고 왕실의 장손이십니다. 비록 마음에 흡족치 못한다 하더라도 왕실의 체면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언니 살피시옵소서."

''는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그래, 왕실은 불의와 불륜과 허위의 팔박을 쓰고 지내야 한다 말이냐! 나는 이면 치레로 거상을 잇는 성복제에는 아니 나간다!"

''''는 아무리 형을 달래도 응하지 아니할 것을 알았다. 성복제의 시각은 더욱 더 가까워졌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에게 물었다.

"대전에 돌아가 전하께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으냐?"

"몸이 아파서 열이 있고 괴로와 하므로 데리고 오지 못했다고 아뢰면 그만입니다."

''는 어린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침착하고 태연했다.

"어찌 차마 전하를 속일 수 있느냐. 나중에 탄로가 되면 어찌하느냐?"

''는 불안했다.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는 얼굴빛을 고치지 아니하고 한 살 차이나는 형에게 태연히 대답했다.

"탄로 나는 일은 나중의 일이고 우선 노하시는 전하의 화증을 가라앉혀 드려야 합니다."

두 형제는 대전에 올라 상복 입은 전하의 앞으로 나갔다. ''가 공손히 아뢴다.

"형은 몸살이 난 모양이올시다. 열이 있고 몸이 부었습니다. 바람을 쐬면 촉상이 될듯합니다. 소자가 성복제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당부하고 돌아왔습니다."

''는 또렷또렷 아뢰었다.

"진정으로 아프면 하는 수 없구나. 모두들 곡반으로 나가자."

태종은 상장막대를 짚고 곡반으로 발길을 옮겼다. 큰 아들이 열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장 심려되는 이는 왕후 민씨였다. 태종의 뒤를 따라 발길을 옮기면서 조용히 ''한테 분부를 내렸다.

"너는 내의원에 분별해서 형의 약을 다려 먹이도록 해라."

자모의 아들을 사랑하는 지정이었다. ''는 머리가 민첩했다.

"염려마십쇼. 아까 형의 처소에서 대전에서 들어올 때 소자는 전의한테 당부해서 형의 약을 지어 바치라 했습니다."

''는 어머의 근심을 덜기 위해 또 한 번 거짓말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마마마나 전하께서 직접 내국에 분부를 내려서 전의가 형을 진찰한 후에 꾀병이 탄로 난다면 큰일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옆에 따라가는 ''는 아우의 두 번씩이나 하는 거짓말이 너무나 대담한다고 생각했다. 흘깃 눈을 들어 ''를 바라보며 혀끝을 입술 사이로 내밀고 고개로 움츠렸다.

내고반 성복제를 올리는 제상 앞에는 굴건제복으로 차린 상왕 전하가 가장 침통한 슬픈 표정으로 상장 막대를 짚고 상감이 임어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향은 큰 왕자 ''가 궐석을 한채 우측 반헌으로 상감이 올려 시작되었다. 상감의 울음소리는 웅장한 '에고' 소리로 내외곡반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진짜로 몸부림을 쳐서 혼절이 되도록 슬피 우는 이는 상왕 정종이 있을 뿐이었다.

왕실의 장사는 석 달 만에 지내는 것이 통례다. 성복제를 치른 후에 이성계가 무학과 함께 정한 망우리고개 넘어 검암산 아래 높다란 상판에는 삼릉 도감이 앉아서 치산을 하고 릉이름 건원릉이라고 했다. 석 달후에 빙전에서는 대행 태종의 유해가 권원릉으로 향해 나갔다. 의장은 한양성 십 리에 뻗쳤다. 한성 탄윤과 예조판서와 병조 판서가 한방, 예당, 병당이 되어 앞을 서 나가고, '지인제운 응천조통 광훈영명 성문신무 정의광덕 대행대왕'이란 시호를 금 글자로 쓴 붉은 명정이 바람에 펄럭거리며 상복을 입은 장정들의 손에 들려 나왔다. 아름답고 좋은 뜻을 가진 글자를 모조리 모아서 붙인 시호다. 방상시가 팔박을 쓰고 나가고 대로 만든 죽산마가 나갔다. 삼천 궁녀들이 너울을 쓰고 말을 탄후에 에고에고 하는 여인들 특유의 소름 끼치는 울음을 굽이를 꺾어 울면서 나갔다. 소위 곡비의 울음인것이다. 소여가 나가고 대여가 나갔다. 소여는 부거다. 허탕으로 나가는 상여요 대여는 진짜 이성계의 제궁을 모신 상여다. 운군들이 붉은 방망이를 세로 가로 우물정자를 만들어 겹겹이 메고 여사군들은 겹겹이 명으로

줄을 늘려 집부를 해서 끌었다. 소여, 대여는 금도끼, 은도끼며 금망치, 은망치, 수정궁, 용대기, 청사초롱, 황사초롱, 왕등, 백저 등으로 휩싸 나갔다. 그 밖으로는 군인들이 두 겹, 세 겹을 옹위해 나갔다. 왕이 살았을 때 거동 행차와 같은 것이다.

다음엔 상주인 태종 이방원이 굴건제복에 상장을 앞에 놓고 초연을 타고 뒤에 따르고 다음엔 상왕 이방과가 역시 소연으로 뒤를 따랐다. 아무리 상왕이요, 중경대왕이라고 하나, 현재 임금이 아닌 때문에 태종 이방원의 뒤를 따라 나가는 것이다. 다음에는 왕손들의 차례다. 그러나 의연히 큰 왕손 ''의 모습은 보이지 아니했다. ''가 소교를 타고 나가고 ''가 뒤를 따랐다. 그 뒤에는 무수한 서왕손들이 뒤를 따랐다. 다음엔 백관들이 차기에 따라서 굴건제복을 입고 말을 타고 나가기로 하고 천담복으로 행렬에 참여하기로 했다. 혼교의 뒤를 따르는 차비관은 살아서 배종하는 형식을 취하느라고 평상시의 모대를 했다. 왕자 ''의 모습은 인산 때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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