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세종대왕 3-1

3권 춤추는 권좌

 

함흥

 

아버지 태상왕은 공주의 깎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또다시 기막히고 애운한, 아버지와 딸 사이의 이별을 나눈다.

태상왕의 행차가 떠날 때 경순공주는 절문밖 동구 앞까지 나가서 아바마마를 작별하여 전송했다.

"아바마마,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함흥 가옵시면 몇 달이 되시올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만은 소녀가 아까 아뢴 말씀을 잊지 마시옵소서. 용은 구름을 일으키고 범은 바람을 부른다는 그 말씀이올시다. 삼가 다시 아뢰옵니다."

경순공주의 신신당부하는 말뜻을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으나, 태상왕 이성계만은 잘 알아들었다.

"허 허 허, 노성해진 네 말을 잘 알아듣겠다. 과히 염려하지 마라"

태상왕은 연에 올라 세 번 네 번 공주와 작별하기를 아쉬워했다.

태상왕의 행차는 조촐하기 한량없었다.

절대로 거둥행차처럼 화려하게 차리지 말라고 송도서부터 엄명을 내린 때문에 그의 행차는 감사와 원의 행차만도 못했다.

별감 두어 사람, 나인 두어 명, 그리고 내시 서너 사람과 연을 메고 나가는 무예청들뿐이었다.

태상왕의 행차는 양주로 가서 회암사에서 강비와 방석과 방번, 이제의 명복을 또 한 번 비는 재를 올리고 다음 날은 연천 소요산에서 하루를 지낸 후에 안변석 왕사에 들렀다가 함흥으로 돌아갔다.

함흥 옛 집터에는 이성계가 임금이 되어 즉위한 이후 함흥 본궁을 화려 장엄하게 지어서 자기의 고향을 빛나게 했던 것이다.

태상왕 이성계는 함흥 본궁으로 들어가 행장을 풀었다. 함경감사 이하 각읍 수령들이 마중을 나오고 관북일대의 선비들의 환영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함흥 본궁의 전각 이름은 경흥전이라 이름했다. 이 집은 태상왕 이성계가 살던 옛 집터다. 정종 방과와 태종 방원이 다 이 집에서 났던 것이다. 나라를 차지하여 경사가 일어났다 해서 전각 이름을 경흥전이라 했다. 함경감사가 있는 외에 함흥부윤이 있고 판관교수가 정치를 했다. 이전에는 여진이 살고 있는 곳이다. 고려 예종 2년에 범 같은 장수 윤관은 여진족속을 추방한 후에 함주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크게 성을 쌓았다. 다음 해에는 고려에서 나약한 정책을 써서 여진한테 도로 되돌려 주어버렸다. 그 뒤에 원의 땅이 되어 영흥에 예속되었던 것을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조정에 드나들면서 쌍성을 회복하고 고을 이름을 함주라 했던 것이다.

태상왕 이성계가 소년 때부터 고려조정에 벼슬하게 된 동기는 그의 아버지가 쌍성을 회수하는 계획을 공민왕한테 건의한 연줄로 인해서 차차 고려조정에 벼슬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남정북벌, 치먁자와 싸울 때마다 이기는 명장이 되었고, 명성이 혁혁했던 그는 마침내 고려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친 명정책을 쓴 후에 창을 거꾸로 들고 고려조정을 붕괴시킨 후에 혁명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던 것이다.

함흥 북현에 성관산이 있으니, 이 산이 함흥의 주산이다. 다시 그 북편 90리쯤 가서 기린산이란 명산이 있다.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방자한 소리를 내어 떠들면 홀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면서 앞뒤를 분별할 수 없어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까닭에 사람들은 이 산에 오르기만 하면 무한 조심하고 공경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함흥부 동북편으로 45리쯤 가면 덕산이 있고, 다시 동편을 바라보면 20리쯤 되는 곳에 운주산이 있다. 다시 그 동편 40리허에 우두산이 있고, 북편 40리허에는 오봉산이 있다. 동편에는 70리를 가면 저 이름 높은 함관령이 하늘을 찔러 솟아 있고, 동북편으로 73리쯤 가면 차유령이란 큰 재가 있는데, 차유령과 함관령과의 거리는 겨우 20리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북쪽으로 140리를 가면 저 유명한 부전고원의 부전령이 있다. 함흥 서편으로 25리쯤 가면 중봉산이 있고, 다시 45리를 가면 송동령이 있고. 서북으로 90리를 가면 천불산이 있고, 북으로 110리를 가면 저 유명한 황초령이된다. 기막한 첩첩산중 산악지대다.

함흥부에는 남으로 30리쯤 가면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에 맞닿은 창해 바다가 사람의 마음을 흥그럽게 한다. 이 넓고 푸른 바다로 흘러내리는 강물은 다섯 개가 있다. 함흥부에서 서편으로 2리쯤 가면 성천강이 유유히 흘러서 동해 바다로 들어간다. 이 성천강의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한 줄기는 갑산 땅 화기령에서 흘러들어오고, 한 줄기는 평안도 회천 땅에서 흘러내려서 흡란동이란 곳에서 합류가 되어 도련포를 거쳐서 바다로 들어간다. 도련포란 포구는 옛적에는 도린포라고 불렀다. 함흥부 35리허에 있다.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이전 서북편 대장으로 여진족 납흡을 정벌할 때 이 포구를 출발해서 출전했던 것이다.

함흥부 동편에서 8리쯤 가면 호련천이 있고 남쪽으로 30리쯤 가면 미진포가 있다. 다시 서편으로 18리를 가면 가을한내가 있었다. 강과 바다, 푸른 물줄기가 감도는 곳에 섬이 둘 있는데, 하나는 꽃섬이라 부르고, 하나는 솔섬이라 부른다. 꽃섬은 함흥읍에서 4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대나무가 울창하고, 솔섬은 함흥부 동편 85리허에 있는데 토지가 평평하고 넓어서 주위가 30리나 된다. 해초를 무진장으로 딸 수 있는 무인도이다.

중중첩첩한 산악지대만 바다가 있고 강이 흐르니, 산해진미가 풍부하다. 여기에 평야 넓은 들이 한 곳 있으니 함흥평야다. 이곳은 이성계가 납흡과 싸워서 적장 세 사람을 일시에 관목 꽤듯하여 크게 성공한 전쟁터이기도 하다.

토산품으로는 실, , , 그리고 화피와 인삼, 복령, 오미자, 송이, 황어, 전복, 조개, 홍합, 고등어, 해삼, 은어, 비웃, 광어, 수어, 홍어, 방어, 삼치, , 먹기 좋은 생선을 갖추갖추 맛볼 수 있다. 다시 짐승의 털을 이용해서 쓸 수 있는 잘과 청서, 수달피가 흔해서 겨우살이 털옷으로 이용하기 좋다.

산바다 산성이 있으니, 모두 다 여진족속들이 쳐들어오면 막아내던 전쟁터다. 백운산성은 함흥읍에서 서편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고, 덕산고성은 함흥 동북편 48리허에 있고, 퇴조 고성은 동편으로 60리허에 있고 중봉고성은 함흥부 서편 27리밖에 있고, 한당고성은 함흥 서편 40리허에 있고, 오로촌 고성은 함흥읍 북편 35리쯤 되는 곳에 있다. 이쯤 하면 함흥의 지세를 짐작할 수 있다.

태상왕은 함흥에 들어가 감사와 군수들의 지영을 받으며 본궁인 경흥전에 올라 하룻밤을 지냈다.

선조의 산을 찾기로 했다. 할아버지 선래가 묻혀 계신 의릉과 할머니 박씨의 무덤인 순릉에 올라 절을 올렸다. 임금이 된 후에 처음으로 할아버지 무덤에 절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개가 무량했다. 지금 자기는 임금이 아니라 태상왕이 되었다. 실권은 아들 방원이한테 뺏기고 뒷방차지다. 마음이 서글프지 아니할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침은 한 산판 안에 있으나 합장을 아니하고 봉분을 따로 했으므로 아버지의 능침은 정릉이라 하고 어머니의 능침은 화릉이라 했다.

태상왕은 아버지의 능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나니 기쁘고도 슬프고, 좋고도 한심한 생각이 어울어져 일어나서 슬프고 기쁜 이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서 말할 수 없었다. 이성계의 가슴에는 감구지회가 가득 찼다.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전라감영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애기를 산성별감이란 자가 뺏어갔다. 이로 인해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고조할아버지 이안사는 산성별감을 찾아서 욕을 한바탕 퍼부었다. 산성별감은 불같이 노해서, 군사를 풀어서 고조할아버지를 잡으려 했다. 고조할아버지는 밤에 출가 도주를 하여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났다. 삼척 원으로 새로 부임된 사람은 전주서 싸웠던 바로 그 산성별감이었다. 큰일이었다. 고조할아버지는 다시 바다에 배를 띄우고 솔가도주를 해서 덕원으로 피했다. 이때 덕원군은 원나라의 영토였다. 몽고 사람들과 사귀어 다시 경흥에서 살다가 오천호의 장이 되는 원나라의 달로화지의 소임을 받았던 것이다. 이같이 하여 증조할아버지 행리의 대까지 원나라의 천호의 직책을 맡고 살아왔다.

그러나 두만강 밖에서 또 하나 들어온 족속으로 천호 노릇을 하는 여진족들은 증조할아버지 행리를 죽이려 했다. 행리는 할 수 없이 아내 최씨와 함께 말을 달려 바닷가로 와서 경흥에서 남으로 40리 되는 적도로 피하여 도혈에 살았던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생겼다. 증조 행리는 다시 덕원으로 돌아가 살았다. 행리는 덕원에서 또다시 함흥으로 이사를 했다. 행리와 아내 최씨는 양양 낙산 관음사에서 기도를 올린 후에 할아버지 선래를 낳았다. 나중에 자라서 장가를 박씨한테 들었다. 할아버지 춘과 박씨 사이에는 아버지 자춘을 낳았다. 자춘은 영흥 최씨에게 장가들었다. 처가가 있는 영흥에서 살다가 공민왕 때 쌍성을 탈환할 때 꾀를 내서 고려에 바친 후에 그 공로로 고려조정에 벼슬을 하여 아들이 발신하는 터전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태상왕 이성계는 아버지 자춘의 무덤인 정릉과 어머니 최씨 무덤인 화릉에 올라 허배하고 나니 감창한 생각이 구름일 듯 일어났다. 눈물이 방울방울 옷자락을 적시었다. 이성계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어디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을 꿈에나 생각했던가. 대대로 쫓기면서, 고국을 등지다시피 하여 윤락된 신세로 구명도생해서 삼척으로, 덕원으로, 경흥에서 다시 경원으로, 함흥에서 또 영흥으로, 이같이 사대오대를 헤매던 망명의 신세가 끝으로 조선국 삼천리강산을 다스리는 제왕이 되었으니 기가 막힌 광영이다.

무궁무진한 감창한 생각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롭고 기쁘고 자랑스런 꿈도 이제는 벌써 일장춘몽이 되어 버렸다. 임금이 되었다는 즐거운 꿈도 채 깨기도 전에 자기는 환과고독 홀아비의 신세가 되었고, 아들들은 임금의 자리를 겨누고 서로 싸워서 형이 아우를 죽이고 동생이 형을 죽이려 했다. 한 번쯤이라도 불행한 일인데 방원은 방번, 방석, 이제를 죽였고, 방간은 방원과 동복형제지만 서로들 칼을 빼어들고 덤벼들었다. 조카를 죽이고, 형을 귀양보냈다. 자기는 임금의 자리를 뺏은 방원에게 상왕 방과를 통하여 방간을 놓아주라 했으나 방원의 신하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방간을 다시 전라도로 귀양보냈다. 아비의 말도 코웃음을 쳐 돌려보냈다. 이제는 삼천리강산을 호령하던 자기의 위엄도 성금이 서지 아니했다. 아프다 할까, 분하다 할까 기가 막히도록 슬픈 일이다. 아버지 이자춘의 혼령이 무덤 속에서 꾸지람을 내리는 듯하다.

'어떻게 집안을 다스렸기에 그따위로 다스려서 형제간에 윤기가 끊어지도록 만들었냐? 자식을 버릇없이 가르쳐서 교만 방자한 마음을 있는 대로 다 부리게 만들어놓았구나.'

'아비의 말을 아니 듣는 불효자식은 없이 해버려도 좋다.'

아버지 무덤에서는 이같은 꾸지람이 떨어지는 듯했다.

'모두 다 불초자의 욕심이 과한 탓이올시다. 하늘을 거슬렀습니다. 임금이 아니 될 것을 공연히 임금 노릇을 했습니다. 아무리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하나, 고려 왕실을 계속해서 도와줄 것을, 쓸데없이 욕심을 내서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왕씨네를 너무나 많이 죽였습니다. 소자는 왕씨들을 너무 많이 죽이고, 정몽주며 두문동 칠십이인을 너무나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이 죄를 불초자는 오늘날 혹독하게 받고 있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 무덤 앞에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거짓 없는 참회를 드렸다.

늙은 태상왕은 슬프고 적적한 한을 안고 아버지 이자춘의 능에서 내려 옥교를 타고 경흥전 본궁으로 돌아오려 할 때, 한때 군마를 거느린 군사가 능침 아래 홍살문밖에 지영하고 있다가 한 사람의 갑옷 투구한 대장이 어전에 나와 절하고 뵙는다.

"신 안변부사 조사의 삼가 전하를 지영하오."

 

 

안변부사 조사의

 

'안변부사 조사의'라고 아뢰는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의 용안에는 반가운 빛이 현연하게 나타났다.

"오오, 안변부사 조사의냐? 오랫동안 대해보지 못했구나. 이리 가까이 오너라."

태상왕은 반가운 정을 이길 수 없었다. 조사의를 손짓해 불렀다.

조사의는 옥교 앞으로 추창해 나갔다. 국궁재배하고 아뢴다.

"전하! 뵈온지 오래옵니다. 그러나 거둥행차가 어찌 이리 초초하십니가? 그리고 나라의 군왕은 수도를 떠나서 백 리 밖으로 거둥을 아니하는 법이올시다. 무슨 까닭으로 이곳까지 행차를 하셨습니까? 이거, 변고올시다."

조사의는 아뢰는 말을 마치자, 이내 목이 메어 '흑흑' 느껴 울었다.

"모두 다 내 운수가 불길한 탓이로구나!"

태상왕은 옥교 위에서 흰 수염을 바람에 흩날리며 길게 한숨을 지었다.

"망극하오이다."

조사의는 한마디 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태상왕은 조사의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감창한 회포를 더 한 번 느꼈다. 잠시 후에 다시 묻는다.

"그래 너희들 집안 식구들은 다들 무고하게 지내고 있느냐?"

조사의는 목멘 목소리로 대답한다.

", 황공 감격하옵니다. 성상께옵서 두호해주시어 안변부사 자리에 제수해주신 이래 동북면 일대의 지원을 받자와 모두 다 무사하게 지내옵니다. 수양산 그늘이 백 리까지 뻗쳤다는 격으로 모두 다 성상의 그늘로 태평하게 지내옵니다."

안변부사 조사의와 태상왕의 주고 받는 대화로 미루어 볼 때, 태상왕과 조사의 사이는 임금과 신하라는 지위와 간격을 넘어서 더한층 친숙한 면이 있는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사의가 다시 아뢴다.

"전하, 소신이 전하를 호위하여 함흥 본궁까지 모시겠습니다."

"내 마음이 든든하다."

태상왕은 미소를 지어 간단히 대답했다.

무예청들이 어깨에 메어 모신 옥교가 홍살문밖으로 나가자 조사의는 홍살 문밖에 나열해 있는 군사들에게 군령을 내렸다.

"태상왕 전하의 옥교를 향하여 군례를 드리라!"

군총들은 일제히 창과 칼을 내려 두 손으로 마주 잡고 태상왕의 옥교를 향하여 국궁배례를 드렸다.

"모두 다 안변부사 신이 거느린 군사올시다."

조사의가 아뢰었다. 태상왕은 고개를 끄덕여서 군례를 받았다. 태상왕이 군례를 받고 옥교가 움직이니, 조사의의 거느린 수천 군사들은 태상왕 옥교를 앞뒤로 호위하여 엄숙하게 대오를 지어 함흥 본궁으로 향했다. 태상왕은 오래간만에 군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태상왕은 송도서부터 모든 호위를 일부러 물리치고 거둥이 아니라 미행이라고 고집하면서 한양, 양주, 연천, 철원을 거쳐서 이곳 함흥까지 왔던 것이다. 일부러 호위하는 의장을 물리친 것은 다섯째 아들 방원이 보기 싫고, 방원의 심복들인 벼슬아치와 재상들의 감시를 받기 싫은 때문이었다. 그러나 함흥까지 금의환향을 하는 길이 막상 이같이 초초하고 쓸슬하게 되니 마음엔 한심하고 고적한 생각이 들어 슬픔이 가득했다. 뜻밖에 안변부사 조사의가 군사를 거느려 호위해주니 마음이 든든함을 느꼈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태상왕의 젊은 왕비였던 강후의 조카가 된다. 방간의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방간은 방석의 원수를 갚아준다 하고 박포와 조사의를 움직여 함께 방원을 공격했던 것이다. 방간이 쫓긴 후에 박포는 죽이고 조사의는 귀양을 보냈다가 태상왕의 간곡한 당부로 정종이 태종한테 명해서 안변부사로 내보냈던 것이다. 이제 정종도 임금의 자리를 태종한테 내주어 뒷방차지가 되어 상왕으로 앉았고, 태상왕 이성계는 나라를 창업한 제일대 임금이건만 실권을 모두 다 아들 방원한테 뺏긴 후에 초초한 행차로 고향인 함흥으로 찾아오는 것을 보니 조사의는 분함을 못이겨 가슴이 아프고 손이 떨렸다. 특별히 군사를 거느려 이모부뻘 되는 태상왕을 보호하러 온 것이다. 이날 태상왕이 함흥 본궁에 들자 안변부사 조사의는 삼군을 호령하여 함흥 본궁을 호위하고 태상왕을 모시는 일을 총지휘했다. 감사 이하 수령 방백들은 벌벌 떨면서 지공하는 데 실수가 있을 까 주밀하도록 공괘를 하니 함흥 천지는 새로 왕도가 된 듯 저자와 거리가 풍성했다. 이날 저녁 조사의는 태상왕이 수라를 물리친 후에 조용히 침전으로 들어갔다. 지밀시녀도 멀리했다.

어전에 엎드렸다.

"신 조사의 조용히 전하께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태조는 웃는 낯으로 대했다.

"말을 하라."

"원수를 갚아야 하겠습니다."

조사의는 단도직입적으로 울화가 터지는 듯 목소리를 떨면서 아뢴다. 방안은 조용했다.

촛대꽂이엔 등심이 타는 듯 목소리를 떨면서 아뢴다. 방안은 조용했다.

"무슨 원수를 갚는단 말이냐?"

"방원이를 임금의 자리에서 내쳐야 하겠습니다."

조사의의 불을 뿜는 듯한 음성이 또 떨어졌다.

방원을 임금의 자리에서 내 쳐야 하겠다는 조사의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는 홀연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은빛 수염이 실 날리듯 푸르르 날렸다.

"내 자식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없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이제는 너무나 방약무인하다. 그러나 어찌하느냐. 이제는 내가 늙어서 아무런 힘도 없다. 도대체 내 명령이 서지를 않는 구나!"

태상왕의 음성은 애수가 어렸다.

조사의가 아뢴다.

"전하, 너무나 심약하신 말씀을 하시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뜻과 마음을 굳세게 지니시옵소서."

"아무리 굳게 마음을 지니려 하나 일이 되어 먹지 않는 것을 어찌하느냐. 모두 다 손발이 맞지 않는구나."

"손발이 맞도록 명령을 내리시면 됩니다. 후회하지 마십쇼."

"옛날의 내 심복들은 모두 다 방원의 심복이 되어버렸다. 정승도 그렇고, 대감도 그렇고, 나한테는 지금 군사 한 명도 없다. 모두 다 방원의 세력으로 돌아갔다. 파리는 냄새를 맡고 날아드는 법이다. 내가 세력이 없는 것을 알자 장성과 대신들은 모두 다 방원의 신하가 되어버렸다. 움치고 뛸 수가 없구나."

태상왕은 또다시 가만히 한숨을 짓는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소신이 전하의 허락만 받는다면 곧 동북면의 군대를 모두 다 동원시키고 여기다가 여진의 군사를 합세하여 불륜한 방원을 한칼에 무찌 르겠습니다. 허락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을 딱 감고 있다.

경순공주의 생각이 났다. 모든 일이 다 업원으로 된 일이니 번민하고 한탄하지 말고 송도로 돌아가시어 마음을 태평히 가지시고 여생을 마치라는 불제자 경순공주의 구슬을 굴리는 듯한 말이 귓가에 쨍하며 들렸다.

"아아, 나한테는 인제는 기백이 없고나."

태상왕 이성계는 고요히 혼자 말하듯 탄식했다.

"전하! 전하께옵서는 아직도 늙지 아니하셨습니다. 칠십도 되지 아니하셨습니다. 보령이 이제 겨우 욱십칠 세시십니다. 왜 군왕의 자리를 내놓으십니까. 다시 왕위에 나가시어 천하를 호령하시고 창생을 구하십시오. 전하의 한평생 사업은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가고 난신적자가 나라를 차지해야만 합니까?"

조사의의 눈에서는 불이 붙는다.

"어미를 어미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친동생을 죽이고 친형제를 죽이고 형님인 왕을 협박하여 왕의 자리를 내놓게 하고 뭇 어진 신하들을 죽이는 방원이한테 전하께서는 만세 후에 제사도 받지 못하실 것입니다."

조사의는 또 한 번 펄펄 뛰며 아뢴다. 조사의가 아뢰는 '만세 후에 제사도 받아 자시지 못한다'는 말에 태상왕 이성계의 늙은 눈에는 타는 듯 불길이 일어났다.

"신이 앞잡이가 되어서 태상왕 전하를 모시고 송도로 쳐들어가서 난신적자를 내치고 세상을 바로잡아놓겠습니다. 상왕께옵서 탄생하신 함흥으로 금의환향을 하셨는데, 문안하는 신하 한 명 보내지 않는 괘씸한 자가 어찌 만백성을 거느리는 임금의 자격을 갖겠습니까?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올시다."

안변부사 조사의의 아뢰는 말은 태상왕 이성계의 마음을 더한층 격하게 만들었다. 태상왕은 생각 속에 잠겼다. 과연 말이지 방원이는 불효자이다. 설혹, 자기가 둘째 아들 상왕 정종을 통해서 미행으로 가는 길이니 절대로 의장을 차리거나 번요하게 떠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더라도, 임금인 방원은 아들의 도리와 체면을 보아서라도 거둥할 때 쓰는 의장을 배치했어야만 도리가 서는 일이요, 다시 한 걸음을 양보해서 거둥 행차에 의장은 그만두더라도 양주와 연천에 문안하는 사람쯤은 보냈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만 아들이 아버지를 봉양하는 도리다. 그러나 연천, 양주는 그만두고 지금 수천 리 길 함흥에까지 도착이 되었건만, 방원은 한 사람의 조관을 보내서 문안한 일이 없다. 실로 괘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하! 이미 방원과는 부자의 연을 끊어지셨습니다. 다시 더 아들이라고 생각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쾌하게 승낙하시옵소서, 만약 전하께서 허락만 하신다 하오면 방석, 방번, 이제 방간의 모든 한과 원을 씻기 위해 송도로 쳐들어가서, 방원을 내치고 왕위를 다시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음이 괴로웠다. 자식한테 대하여 창부리를 겨눈다는 일은 비록 불효자식이라 하나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다.

밉고 분한 마음이 가득 찼건만 얼른 허락을 내리지 못했다. 잠깐 고개를 숙여 대답이 없다. 조사의는 태상왕의 심리를 잘 알아차렸다.

"신은 절대로 태상왕 전하께옵서 친정을 하시라는 것이 아니올시다. 전하께오서는 가만히 이곳에 앉아만 계시면, 소신이 군사를 거느려 아닌 자를 소탕하겠습니다."

조사의는 결연히 자기의 굳은 뜻을 표명했다. 태상왕은 아직도 결단하는 태도를 정하지 못했다. 의연히 고개를 숙여 생각 속에 파묻혀 대답이 없다.

다만 눈에는 무서운 불길만이 일어난다.

"전하께오서 밤이나 낮이나 승하하신 왕후와 세자 방석을 생각하시어 천 번 만 번 재를 올리시어 연화대로 천도하려 하시나 그분들의 원통한 한은 하늘에까지 뻗쳐 있습니다. 재올리는 것만으로 천도가 되지 아니합니다. 방원을 내쳐서 원수를 갚아야만 그분들은 비로소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거리로 헤매는 원귀한 신세를 면할 것입니다."

조사의의 말을 듣는 태상왕의 눈에는 머리 풀어 산발하고 거지의 모습이 되어 맨발로 거리를 헤매는 아귀로 변한 강비와 방석, 방번, 이제는 가엾고 불쌍한 모습이 떠올랐다.

소름이 전신에 쪽 끼쳤다.

"모르겠다. 모든 일을 너에게 맡긴다!"

태상왕 이성계의 입에서는 마침내 한 마디 허락이 내렸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태상왕의 입에서 '모르겠다. 모든 일을 너에게 맡긴다!' 하는 말이 떨어지자 기쁜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장중하게 일어나 태상왕께 향하여 군례를 드린다.

"그러하오면 신 안변부사 조사의는 하늘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땅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세기에 교만한 아이 방원을 북을 올려 죄주겠습니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어전에서 물러 나온 안변부사 조사의는 아들 조홍과 강비의 친조카인 강현을 불렀다.

"국가에 대하여 중대한 일을 결정할 일이 있다. 나는 태상왕 전하의 분부를 받아서 열읍 수령과 진장들을 소집한다. 즉각 함흥으로 집결시켜라."

조사의의 아들 조홍과 강비의 조카 강현은 모두 다 청년 무사다. 아버지와 아저씨를 따라다니는 젊은 비장들이다. 두 장수는 나는 듯이 말을 달려 영흥부를 위시하여 동북면의 군수와 영장들을 소집했다. 모든 군관들은 황사란, 손효종, 홍순, 김자량, 박양, 이자분, 김승, 임서균, 문중첨, 한정, 금온, 배상충, 박부금 등 제제다사가 모여들었다. 모두 다 함흥과 동북면에서 제각기 엄지손가락이 되어 고갯짓을 하는 머드러기 친구들이다.

조사의는 함흥부에 군막을 높이 치고 모든 소임들을 맞이했다. 모두 다 붉은 갓 남철릭에 화려한 군복을 입고, 천리준총을 타고 달려왔다. 조사의는 모든 장수들을 맞이하여 군막 안에 자리 잡고 앉은 후에 여러 사람을 향하여 묻는다.

"그대들은 나라의 국록을 먹는 사람들이오. 더구나 변방을 맡아 다스리는 한다 하는 명장들이오. 나라의 국방을 지키는 중대한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하흥과 영흥과 그리고 또 동북면의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이오, 그대들은 이 나라의 창업지주이신 태상왕 전하께서 금의환향을 하시어 탄생하신 이곳에 어가를 멈추셨는데 문안을 드려서 배알한 일이 있소?"

안변부사 조사의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호반들은 일제히 대답한다.

"태상왕 전하께서 금의환향을 하시어 함흥으로 오셨다는 말씀을 소문으로는 들어 알았소이다마는 중앙에서는 연락과 기별도 없고 감사한테서도 공식으로 연통이 없으니 변지에 있는 일개 무관들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어전에 나가 뵈오리까. 예법을 몰라 문후를 못 드렸소이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여러 변지 장수들의 말을 듣자 얼굴빛을 엄숙히 하여 말했다.

"옳은 말씀이요. 나는 여러분을 나무라지 아니하오. 일개 변지 장수들이 중앙의 지령이나 감사의 지시가 없이 어찌 감히 어전에 뵈겠다 하겠소."

안변부사 조사의는 청을 높여 다시 말을 계속한다.

"태상왕 전하를 경솔하게 모시게 한 죄는 중앙정부와 감사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오. 일일이 개인으로 어전에 배알은 못하더라도 거둥하시는 행차에 지영이라도 하라고 통문을 돌렸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다 지난 일입니다. 이제 와서 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소. 오늘 나는 여러분을 어전에 인도하여 배알하는 영광을 갖게 하겠소이다. 여러분들은 다들 일어나 나를 따라오시오."

"황송한 광영입니다."

영장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조사의가 승하한 강후의 친정편 가까운 일가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개 변지 무고나들이 상감, 상감 중에도 창업지주로 태상왕인 천하명장이었던 이성계 어른을 지척지지에서 뵙는다는 일은 여간한 광영이 아니었다.

일행은 조사의를 앞에 세우고 함흥 본궁으로 말을 달렸다. 일행이 함흥 본궁 대문 앞 하마비 앞에서 말을 달려 대기하고 있을 때 조사의는 바로 본궁 전각으로 들어가 내시한테 거래를 했다.

"함흥, 영흥을 위시하여 부사, 영장, 진관들이 전하 행차하신 이후 공식통지를 받지 못하와 지영을 못 드려 죽을죄를 지었다 합니다. 이제 안변부사 조사의의 인솔로 전하께 문후를 드리오니 특히 배알하는 광열을 주시옵소서."

내시는 곧 태상왕한테 안변부사의 아뢰는 말씀을 전했다. 적적하고 쓸쓸한 심경 속에 빠져 있던 태상왕은 영장들을데리고 온 조사의의 행동을 가상타고 생각했다.

"들라 해라."

허락은 단번에 내렸다. 조사의는 수십 명 영장들을 거느리고 본궁 뜰 안에 나열해 엎드렸다.

"동북면 영장고 각읍 수령 현신이오."

내시가 큰 소리로 아뢰었다. 태상왕은 대청에 놓인 호피교의 위에 나타나 모든 장령들의 군례를 받았다. 여러 군관들은 내관의 지휘에 따라 국궁하고, 절하고, 다시 일어나 두 손길로 등채를 잡고 군례를 드렸다. 모두 다 엄숙한 얼굴에 씩씩한 기상들이었다. 한바탕 말을 달려 하룻길에 천 리라도 행군을 할 날랜 모습들이다. 태상왕은 이들 호반의 얼굴을 보자 믿음직하고 든든한 생각이 났다.

"나라를 위하여 훌륭한 일을 많이 하라."

태상왕은 격려하는 말을 보냈다. 무관들의 만세 부르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군례를 드리고 만세를 높이 부르는 반열 속에는 강후의 친조카 강현과 조사의의 아들 조홍도 섞여 있었다. 조사의는 강현을 반열에서 나오라 하여 어전에 인도했다.

"이 사람은 승하하옵신 강후마마의 조카 강현이올시다."

 

 

정남대장군

 

강현은 전상에 올라 태상왕께 절하여 뵈었다. 강비의 조카라는 말을 듣는 태상왕은 왕후 생각이 불현듯 났다.

"네가 현이냐? 어렸을 때 보고 이제 보는구나. 이리 가까이 오너라."

태상왕은 어수로 강현의 손을 잡아 어루만진다. 감개가 무량했다.

"내가 너희들을 잘살게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네 아주머니가 죽더니 모두 다 풍비박산이 되었구나."

방석, 방번, 이제가 방원한테 죽은 후에 강씨네 일족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태상왕의 가슴이 또 한 번 애운했다. 늙은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옆에 섰던 조사의가 아뢴다.

"이제 장령들을 데리고 물러가겠습니다."

태상왕은 강현의 손을 놓고 고개를 끄떡였다.

방원을 제거하기 위하여 송도로 쳐들어가라는 무언의 승낙이다.

조사의는 강현과 함께 어전에서 물러나 장령들을 거느리고 진중으로 돌아왔다.

드높게 쳐진 군막 안에는 군관들을 대접하는 산해진미를 벌여놓은 교자상이 폭을 연해 대어졌다.

"자아 여러분, 마시면서 이야기합시다. 지금 여러분들이 받으시는 음식은 태상왕 전하께서 특별히 내리신 음식이고, 여러분 앞에 벌여놓은 술잔은 전하께서 내리신 선온입니다. 귀한 어사주와 음식을 많이 드시기 바라오."

모든 사람들은 감격해서 술을 마시었다.

순배가 돌아 모두 거나했을 때 자사의는 자리에 일어나 모든 사람을 향하야 말한다.

"나는 태상왕 전하의 분부를 받아 참람되게 왕위에 오른 이방원을 토벌하기로 했소이다. 이방원은 아우 세자를 죽이고, 아우 방번을 죽이고, 매부 이제를 죽이고, 아버지 왕의 자리를 빼앗아 정종께 선위를 시키고, 다시 또 정종대왕께 강요하여 스스로 세자가 되고, 그래도 부족하여 친형 방간과 싸워서 조카 맹종을 죽이고 동생을 내치고, 그래도 또 부족해서 상왕을 협박해서 강제로 왕위를 내놓게 한 후에 자기가 스스로 왕이 되었소이다. 그의 눈에는 형도 없고, 아우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다만 있는 것은 욕심 한 가지뿐, 왕권을 차지하려는 추한 맘뿐입니다. 지금 태상왕 전하께서 함흥으로 오신 것도 모든 일이 불쾌하여 멀리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방원은 문안사 한 사람 아니 보냈소이다. 참으로 가증 가악하오. 나는 감연히 일어나 태상왕 전하를 모시고 방원을 무찔러 들어가려 하오. 여러분, 나의 뜻이 옳다 하거든 내 뒤를 따르시오."

강비의 조카 강현이 소리치며 일어나 말한다.

"삼가 장군의 정의스런 뜻을 받들어 난신적자를 토발하겠소이다. 그리하여 태상왕 전하를 다시 복위시켜 천하에 대의명분을 밝히겠소이다."

강현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영흥소윤 김권이 소리치며 일어났다.

"소장은 영흥, 함흥의 군대를 총동원하겠소이다."

김권의 말이 떨어지니 또 한 장수가 소리치며 나온다.

"소장은 정주, 선천, 철산, 용강 땅의 용맹스런 군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장군의 명령은 곧 태상왕 전하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령 일하에 전군을 휘동하겠습니다."

모두들 누군가 하고 바라보니 정주목사 박관이다. 조사의는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칼 집고 자리에 일어나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한다.

"이제 여러 장군들의 마음이 천심에 감동되어 태상왕 전하를 복위하여 천하의 대의를 밝히려 하니 아직도 이 땅에 의기가 남아 있다 하겠소이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불의를 응징하여 토벌하려니와 우리의 정의를 존경해서 행동을 함께 하고자 원하는 이민족의 군대가 있소이다. 이 족속들은 비록 피는 다르다 할지라도 전에 태상왕 전하를 도와서 왜구를 몰아냈던 여진족입니다. 전에 태상왕 전하를 도와드리던 퉁두란 장군의 후배들인 오드리와 오랑카이의 군사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같이 해서 막막 강병을 가졌으니 안주 청천강을 건너서 평양성을 무찌르고 송도로 달려서 불의의 원흉을 쳐부수는 손바닥을 뒤집기보다도 더 용이한 일입니다."

모든 장수들은 일제히,

"좋소이다."

하고 소리쳤다.

안변부사 조소의는 다시 자리에 앉은 후에 또 한 번 발론한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전군을 총지휘할 총대장을 뽑아야 하겠소이다. 우리는 누구로 전군을 지휘하는 대장의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을지 여러분은 생각해보십시오."

조사의는 만좌한 영장들의 얼굴을 면면이 살펴본다. 강비의 조카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한다.

"우리들 모두는 태상왕 전하의 늙마에 불우하신 것을 보고 항상 마음속으로 가엾은 생각을 금할 수 없었으나, 이 어려운 일, 불의를 응징하려는 이 큰일을 실천에 옮길 생각을 갖지 못했던 것이오. 다행히 하늘이 무심하지 아니하여 안변부사는 태상왕께 이 일을 아뢰고 윤허를 맡은 후에 정의의 깃발을 천 리에 높이 날리게 되었으니 모두 다 조부사의 용단이라 생각하오. 조부사를 총대장으로 추대하는 것이 옳겠소이다."

안변부사 조사의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자는 강현의 말이 떨어지자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론한다.

"좋습니다. 우리 안변부사 조사의 장군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자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오. 조부사는 각읍 수령이 태상왕 전하의 금의환향하신 것을 번연히 알고도 무슨 까닭에 무엇이 무서워서 공문을 받지 아니했다 하여 한 사람도 마중을 하지 아니한 이 판국에 군사를 거느리고, 태상왕 전하를 호위하여 동북면 일대 용렬한 신하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다음엔 함흥 본궁에까지 배종하여 전하의 신변을 호위하였으니 과연 신하의 도리를 극진히 다했다 할 수 있소이다."

모든 사람들은,

"옳소."

하고 고함을 질렀다.

소리쳐 말하던 장수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뿐만 아니라 조부사는 다시 세상에 불충 불효부제한 난륜을 제거할 것을 품달하여 이제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실로 원통한 죽음을 한 충신열사들은 지하에서 웃으면서 춤을 출 것이요, 밝은 정의는 해와 달과 함께 천상천하에 빛을 다투리라고 생각하오. 이러하니 우리는 당연히 큰일을 애당초부터 주선해서 일으킨 조부사를 우리의 총대장으로 추대하는 데 조그마한 이론이 있을 까닭이 없소. 그러나 이 불의를 토멸하고 응징하는 우리 군대는 사사로운 군대가 아닙니다. 물론 의기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일어난 우리들입니다만은 이 군대는 태상왕 전하의 군대입니다. 그리고 태상왕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불순과 불의를 토멸하는 장쾌하고 거룩한 군사행동입니다. 그러하니 대장을 추대하는 일은 우리가 할것이 아니라 태상왕 전하께서 친히 군문에 납시어 금부은월의 절월과 대장군의 인수를 조부사에게 내리시어 만군이 차탄하는 모습을 목도하시고 전체 군인을 격려하시는 일이 지극히 합당할 줄로 아오."

모두들 바라보니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란 사람이다. 백수를 흩날리며 청산의 유수같이 말하는 정용수의 태도는 마치 야읜 백학이 단구에서 청청한 울음을 뽑는 듯했다.

정용수는 태상왕을 호위하여 송도서부터 한양, 양주, 연천을 거쳐서 내관과 궁녀와 함께 이곳까지 온 늙은 재상이었다. 원래 태상왕의 지극한 총행을 받던 재상이었으나 방원이 왕이 된 후에 그에게 조정의 실권 있는 벼슬을 주지 아니하고 태상왕부 승녕부의 당상관 자리를 주어 권력 없는 신하가 되어버린 사람이다. 여러 장성들은 대장을 추대할 것이 아니라 태상왕 전하께서 친림해 계시니 전하께서 직접 대장의 절월과 인수를 내리어야 한다는 정용수의 말에 모두 다 고개를 숙여 옳다고 생각했다. 태상왕이 친히 대장의 절월을 주셔야 한다는 말에 안변부사 조사의는 더욱 어깨가 으쓱했다. 또 한 사람의 늙은 재상이 찬동한다.

"정당상관의 말씀이 옳습니다. 불의를 토멸하는 군사는 의병이 아닙니다. 당당한 창업지주이신 태상왕 전하의 군대가 되어야 언정이순합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친히 대장군의 칭호와 절월을 내리셔야 합니다."

모두들 바라보니 역시 내시와 궁녀와 함께 송도서부터 태상왕을 모시고 내려온, 같은 벼슬을 한 승녕부 당상관 신효창이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두 재상의 말을 듣자, 천천히 여러 사관들을 둘러본다.

"두 분 재상의 말씀은 이치에 합당한 말씀일 뿐 아니라 우리 군대가 사병이 되어서는 아니되겠소. 정정당당한 왕사로서 불의를 응징하는 군사가 되어야 하겠소이다."

조사의는 말을 마치고 한 번 좌중을 둘러본다. 모든 사람들은 조사의의 씩씩한 얼굴을 바라보며 존경하는 얼굴빛을 지었다. 조사의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 여러분은 위에 아뢰어 대장의 직책을 누구한테든 임명하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내가 자수삭발 격으로 대장이 되겠다고 할 수는 없소이다. 누가 나를 대신하여 위에 아뢰어줄 분이 계십니까?"

조사의의 말이 떨어지자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는 백수를 쓰다듬으며 정중한 말투로 말한다.

"늙은 이 몸이 시위소찬으로 국록만 먹고 있었소이다. 이번 중대한 일을 단행하기 위하여 삼가 태상왕 전하께 아뢰어 안변부사 조사의로 대장군을 봉하시라고 아뢰오리다."

정용수의 말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승녕부 당상관 신효창이 말한다.

"나도 어전에 들어가 잔하께 군문에 친림하시기를 건의하오리다."

모든 장성들은 든든하고 미덥게 생각했다. 두 재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함흥 본궁으로 들어가 어전에 엎드렸다.

"아뢰오. 충신 조사의는 전하를 위하여, 또는 돌아가신 왕후마마와 세자의 억울한 혼령을 위하여 난류를 응징하는 정의의 군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이 군사가 사사로운 사병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만약 사병이 된다면 동북면에서부터 송도까지 쳐들어가는 도중 각 고을을 지날 때마다 크나큰 장애가 많을 것이니, 전하께오서는 이 점을 굽어살피시어 정정당당한 왕사가 되게 하시고 총지휘하는 대장을 임명하시는 것이 좋을 줄 아뢰오."

태상왕 이성계는 귀를 기울여 한동안 정용수의 말을 듣고 있을 때 같은 당상관 신효창이 어전에 들어와 또 아뢰었다.

"정용수의 아뢰는 말씀은 당연하오니 사기를 더욱 북돋워주시기 위하여 전하께오서 군문에 친림하시어 조사의에게 대장군의 절월을 내려주시옵소서."

태상왕 이성계는 무엇인지 한동안 생각 속에 빠졌다. 한 식경이 지났다. 무한 고민을 한 모양이다.

"그리하리라."

태상왕은 마침내 친히 대장군의 절월을 조사의에게 내리기로 결정했다. 태상왕은 함흥 본궁에서 함흥부 관아로 친림했다.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 어가의 뒤를 따르고 내시와 궁녀들이 호위해 나갔다. 함흥부 앞에는 크게 진을 치고, 군사들이 어가를 맞이했다. 태상왕은 이날 군문에 거둥하는 의식에 따라 주립에 공작미를 꽂아 호수를 표시하고, 갓꼭지에 쌍옥로를 달고 누른 바탕에 붉은 소매를 단 비단 군복을 입은 후에 동여매고 활 차고 칼 집어 장중하게 누상에 올랐다. 조사의는 모든 대장과 수천 군사를 거느려 큰 소리로 영을 내려 태상왕께 군례를 드린다. 태상왕 이성계는 미소를 용안에 띠고 장병들의 군례를 받는다. 미리 준비했던 대장의 절월과 인수를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 좌우 옆에 서서 바친다. 태상왕은 어느덧 백발이었다. 흰 수염을 흩날리며 낭랑히 옥음을 내린다.

"안변부사 조사의로 정남대장군을 봉하여 군사를 거느려 불충 불효, 부제한 무리를 토벌케 한다. 특별히 조사의에게 절월과 인수를 내리나니, 명을 어기는 자는 군법에 처하여 참하라!"

조사의는 대전을 향해 두 번 절하고 금부은월과 옥절을 받은 후에 다시 인수를 받아 허리에 찼다. 만세 소리가 군중에 자지러지게 일어났다. 조사의는 어전에 나가 아뢴다.

"삼가 어명을 받들어 모든 불의를 토벌하고 전하를 모시어 태평성대를 이루오리다."

조사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장병들은 또 한 번 만세를 불러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는 함흥을 중심으로 한 동북면은 송도 이남 남부에 대하여 완전히 적대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신하인 안변부사 조사의가 조선왕 이방원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태상왕 이성계가 불의의 아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으키는 정정당당한 군대가 되었다. 태상왕은 절월을 준 후에 함흥 분궁으로 환궁하고 조사의는 곧 남으로 내려가는 군대 행동을 취했다. 여진군이 초모되고 마적의 떼도 합세되었다. 군사의 수는 나날이 불었다. 총수가 5만에 가까웠다. 조사의는 출동명령을 내렸다. 군기에 제를 지내고 북을 올려 행군하려 할 때 탐마가 급히 말을 달려 보한다.

"송도서 차사가 말을 달려 왔소이다."

"송도서 무슨 차사가 왔단 말이오?"

"왕명을 받들어 태상왕 전하께 문안을 드리려 왔다 합니다."

조사의는 당장 곧 송도에서 온 사신의 목을 베고 싶었다. 그러나 태상왕께 아니 알리고 처단할 수 없었다. 곧 함흥 본궁으로 달려갔다.

"송도에서 문안사신이 왔다 합니다."

문안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자 태상왕은 불같이 노했다. 한양, 양주, 연천을 거쳐서 함흥까지 오도록 여태껏 문안사를 한 사람도 보내지 아니한 방원이 이제 뒤늦게 사신을 보내서 문안을 한다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불러들여라."

조사의는 군중에 영을 내려 송도에서 온 사신을 어전에 인도했다.

사신은 함흥에 당도하여 뜰 아래 엎드렸다.

 

 

함흥차사

 

태상왕 이성계는 노한 눈으로 차사를 굽어보며 묻는다.

"네가 누구냐?"

차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상감의 차사올시다. 왕 전하께옵서는 삼가 태상왕 전하의 안간하옵시기를 축원하시면서, 하루바삐 돌아오시기를 비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치 방원을 직접 대해 보는 듯했다. 미웠다. 늙었으나 원래 명궁이었다. 옆에 있는 활을 번쩍 들어 백우전을 메겼다. 화살은 부복해 있는 함흥차사의 머리를 쏘아 맞히었다. 사신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버렸다.

원래 태종 방원은 태상왕이 한양, 양주, 연천으로 미행을 나간다 하므로 곧 환궁할 줄 알고 문안사를 보내지 아니했던 것이다. 태상왕이 함흥으로 올라가서 돌아올 뜻이 없다는 보고를 받자, 태종은 깜짝 놀랐다. 태상왕의 동정을 살필 겸 승지를 보내서 문후를 올렸던 것이다. 함흥차사는 영영 돌아오지 아니했다. 태종은 또 다시 승지 한 사람을 뽑아 보냈다. 여전히 태상왕은 함흥차사가 오는 족족 전과 같이 활을 쏘아 죽여버렸다. 함흥차사는 다섯 사람째 갔건만 영영 돌아오지 아니했다. 송도에서는 불길한 예감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 죽여서 아니 돌아오는 것이 분명했다. 태종은 근심스러웠다. 만조백관들을 모아 의논했다.

"함흥으로 문안사를 보내기만 하면 영영 소식이 없고 돌아오지 아니하니, 이 어이한 까닭인지 과인의 마임이 시히 불안하다. 어찌하면 좋을꼬?"

영의정 하윤이 아뢴다.

"태상왕께서 노하시어 차사가 가는 족족 죽이시나봅니다."

"누가 과인을 위하여 함흥으로 가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려줄 사람은 없겠는가?"

태종의 옥음은 애원하는 목소리다. 백관들은 고개를 숙여 묵묵히 대답이 없다. 가기만 하면 죽어서 시체도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자원할 사람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태종은 답답했다. 부왕 되는 태상왕이 노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자신이 왕권을 잡기 위하여 여태껏 극한투쟁을 해온 그 모든 사실은 아버지가 당연히 노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가 왕이 되었으니 아버지도 역시 자식인 자기한테 모든 과거사를 묻지 말고 풀어주었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래야만 집안 꼴도 되고 나라 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용이하게 자기를 용서해주지 아니한다. 크나큰 가정의 불화일 뿐 아니라, 백성들을 대해 보기가 진실로 부끄러웠다. 태종의 마음은 어두워졌다.

"그래 누가 가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돌아서시도록 할 사람이 없단 말인가?"

태종은 또 한 번 애원하는 말을 했다. 반열 속에서 한 사람의 늙은 재상이 부복해 아뢴다.

"소신이 비록 불민하오나 함흥올 말을 달려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려서 송도로 환어하시게 하겠습니다."

모두 바라보니 판부사 박순이란 사람이다. 조정의 노재상으로 고려 때 태상왕과 함께 압록강까지 행군하여 오랑캐를 굴복시킨 일도 있었다. 박순은 태상왕과 두터운 교분을 가진 옛 신하 중 한 사람이다. 태종은 박순의 자원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한 기뻤으나, 이 훌륭한 노재상을 사지로 보내기가 아까웠다.

"경의 충심은 고맙소마는 늙어서 갈 수 있겠소?"

태종은 주저하고 허락을 내리지 아니했다. 박순은 다시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죽는 것은 신자의 도리올시다. 어려울 때 모면하려는 그 마음은 실로 야비한 생각이라 할 것입니다. 신의 몸이 함흥으로 가서 다행히 죽지 아니한다면, 더욱 전하를 위하여 보답하겠습니다."

간곡하게 아뢰는 박순의 태도를 보자 태종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정 그러하다면 나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라."

박순은 조회를 파하고 어전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아들을 불러 말한다.

"내 평생에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맹세했더니 이제 그곳을 얻었다."

추연히 말을 마친 박순은 행리를 정돈한 후에 다시 궁궐로 들어가 태종께 하직을 고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태종은 가슴이 뻐근했다.

"나한테 할 말이 없는가?"

유언이라도 있으면 말하고 가라는 뜻이다.

"아무것도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명을 받들어 가는 일이 잘 순성되기만 바랄 뿐입니다."

"경의 처자가 넉넉지 못하게 사는 줄 과인은 다 알고 있소, 굶게 하지는 아니하리다."

태종은 집 한 채와 쌀 백 석을 박순의 처자한테 내렸다. 박순은 관복을 벗어놓고, 일부러 갈건야복으로, 함흥으로 향하여 본궁 앞에 당도했다.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어미 소 한 필과 새끼 소 한 필을 친히 끌고 가다가, 본궁 앞 개울가에서 송아지를 매어놓고, 박순은 어미 소만 타고 본궁 대문으로 가서 하마비 앞에서 소에서 내렸다. 본궁 정문을 지키고 있던 조사의의 보초는 박순을 향하여 누구인 것을 물었다.

"누구냐?"

갈건야복으로 선비 복색을 차린 박순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태상왕 전하의 옛 친구 박순이란 사람이외다."

보초는 눈을 부라리며 무뚝뚝하게 다시 물었다.

"옛 친구가 어찌해서 왔단 말요?"

"태상왕 전하께서 이곳에 계시단 말씀을 듣고 팔도강산의 산천 구경을 다니다가 불현듯 뵙고 싶어서 왔소이다."

보초하던 군사는 나는 듯이 윗사람인 장교한테 연락하고 장교는 문밖에서 나와서 박순의 행동을 한번 살핀 후에 대장 조사의한테 품했다.

"태상왕 전하의 옛 친구라 하면서 한 사람이 뵈우러 왔습니다. 어찌하오리까? 성명은 박순이라 합니다."

"박순이? 박순이는 처사가 아니다. 현재, 방원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다. 이 자도 똑같은 함흥차사가 되어 죽어갈 것이다. 잠깐 기다려라. 위에 아뢴 후에 처결하리라."

조사의는 곧 태상왕전으로 올랐다.

"아뢰옵니다. 송도서 차사가 한 명 또 왔습니다. 자기 자신은 차사라 하지 아니합니다마는 암만 해도 수상합니다. 관복을 아니 입고 벼슬하지 않은 사람처럼 갈건야복으로 차렸다 합니다. 산림처사라고 자칭하면서 예전에 전하의 심허하시는 친구라고 합니다. 성명을 물으니 박순이라 하옵는 바 박순은 현재 송도 조정에서 판부사 벼슬을 하고 있는 자올시다. 어찌하오리까? 군문에서 목을 베오리까?"

태상왕 이성계는 박순이란 말을 듣자 옛 생각이 일어났다. 나이도 비슷했다. 함께 늙어가는 옛 친구다. 태상왕은 문득 옛 친구 박순을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박순이라면 한번 만나봐도 좋겠다. 아직 목은 베지 말고 나한테로 인도하라."

조사의는 더 우길 수 없었다. 친히 국문 밖으로 나가서 박순을 어전으로 인도했다. 박순은 어전에 올라 태상왕께 절을 올렸다. 태상왕은 박순의 손을 어수로 친히 잡아 일으켰다.

"순이 아닌가? 어떻게 멀리 함흥까지 왔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더니 반갑기 그지없네."

"신도 오랫동안 전하를 뵙지 못하여 감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오서 대궐을 떠나시어 이곳 함흥까지 오셨다는 소문을 듣잡고, 불현듯 뵙고 싶어 천리강산을 멀다 아니하고 알현하러 온 길이외다."

"경은 어디로 해서 오는가?"

"팔도강산을 유람하옵다가 전하께오서 이곳에 홀로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사와 이같이 뵈우러 왔소이다."

태상왕은 방원의 사신으로 오지 아니하고 팔도강산을 유람하다가 뵈우러 왔다는 옛 친구 박순의 말을 듣자 마음이 기뻤다.

"술상을 빨리 차려오너라. 군신의 의보다 옛 친구의 정리로 술잔을 쾌하게 들리라."

태상왕은 궁녀에게 명했다. 이윽고 술상이 나왔다. 태상왕은 소매를 걷고 친히 차어수로 술병을 잡아 옥잔에 술을 가득 부어 박순에게 권했다.

"자아 한 잔 들게나. 오늘은 군신의 예로 술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옛 친구를 대하는 정으로 술을 권하는 것이니 사양 말고 취토록 마셔보세."

"황감하여이다. 신이 먼저 전하께 한 잔을 올려야 할 터이온데, 전하께오서 먼저 선온을 내리시니 왕은이 음숭하심을 갚을 길이 없소이다."

박순은 어사주를 두 손으로 받들어 돌아앉아 마신 후에 다시 무릎을 꿇고 옥병의 술을 따라 어전에 올렸다.

"전하께오서도 이 술을 젓수시고 만수무강하옵소서."

태상왕은 박순이 올리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오래간만에 경과 한자리를 했는데, 과인이 어찌 술을 사양하랴. 오늘은 특별히 경과 함께 취토록 마시리라."

태상왕은 말씀을 마치자 단번에 주욱 술잔을 비웠다. 술이 서너 순배 도니 정은 더한층 움직이고 태상왕의 심경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태상왕 이성계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강비의 생각, 방석의 생각, 방번의 생각, 방간의 생각, 공주의 생각이 났다. 그리고 송도에 있는 원수 같은 아들 방원의 생각도 났다. 함흥으로 쓸쓸하게 도망치듯 온 생각도 났다. 자식을 향하여 칼을 들이대라고 조사의한테 허락을 내려서 방금 출동 준비를 하고 있는 이 불행하고 비참한 사실도 회상이 되었다. 감창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자아, 이번에는 경이 한 잔 더 마셔야 하네."

태상왕은 거나하게 취기를 느끼면서 다시 또 한 잔 술을 따라 박순한테 권했다. 홀연, 바람결에 처량하게 구슬픈 소리가 들려왔다. 태상왕은 귀를 기울였다.

"어매애, 어매."

"우우음, 우메."

"어매애, 어매."

"우우음, 우매"

바람결에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는 몹시 태상왕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것이 무슨 소린가? 몹시 처량하이그려."

태상왕은 박순을 향하여 물었다. 박순은 일부러 입을 다물고 대답을 아니했다. 또다시 바람결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매애, 어매애."

"우우음, 우매애."

바람이 높으니 송아지 울음소리는 더한층 처량하다. 태상왕은 박순에게 묻는다.

"저 소리가 무슨 소린가?"

박순은 비로소 대답한다.

"신이 타고 온 소올시다. 천리강산을 돌다가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아직 젖이 떨어지지 아니하와 어미 소와 함께 데리고 다닙니다. 송아지를 개울 건너편에 매고 어미 소만 타고 왔더니 송아지가 어미를 부르는 소리가 저렇듯 간절하고 어미 소가 새끼를 생각하면서 저렇게 화답해 대답합니다. 비록 짐승이라 하오나 어미와 자식 사이의 지극한 정리가 저렇듯 대단합니다. 모두 다 하늘 이치올시다. 하늘 이치를 어찌 거역하오리까."

태상왕은 박순의 말을 듣자 눈을 들어 전각 밖을 내려본다. 탁 터진 벌판에 내가 흘러 있고 개울을 한가운데 두고 어미와 새끼는 떨어져서 서로 바라보면서 구슬피 정을 울음으로 하소연하고 있다. 태상왕은 한동안 이 모양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화끈했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순은 다시 더 말을 하지 아니했다. 밖에서는 송아지가 또다시 울었다. 한동안 청에서 거닐던 태상왕은 박순에게 분부를 내렸다.

"송아지를 끌어다가 경이 타고 온 어미 소 옆에 두라 이르게."

"황송하옵신 분부올시다. 신이 미거하와 대궐의 존엄한 생각만 하고 어미 소만 데리고 왔습니다. 곧 마부한테 일러서 송아지를 데리고 오라 하겠습니다."

박순은 태상왕의 마음이 비로소 움직여진 것을 짐작했다. 곧 본궁 문 앞으로 나가서 시자한테 송아지를 끌어다가 어미 곁에 두라 했다. 이때, 대장 조사의는 박순의 행동을 주시해보았다. 방원을 위하여 태상왕의 마음을 풍간하러 온 것임을 깨달았다. 만약 태상왕의 마음이 변해서 송도로 쳐들아가는 군사를 못 가게 한다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곧 어전으로 들어갔다.

"박순의 목을 베어야 하겠습니다. 확실히 방원이 보낸 차사올시다. 일부러 송아지와 소를 데리고 와서 성상의 마음을 어지러게 한 것입니다. 곧 목을 베어야 하겠습니다."

태상왕은 빙긋 웃었다.

"옛 친구다.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심심한데 말벗이나 하겠다."

박순이 다시 돌아온 후에 태상왕은

"오래간만이니 경과 장기나 한판 두세그려."

태상왕은 친히 장기판을 꺼냈다.

"황송하오이다. 모시고 두겠습니다."

박순은 태상왕의 비위를 맞추어 장기를 두었다. 해가 설핏했다.

"소신은 돌아가겠습니다."

박순은 장기판을 쓸었다.

"돌아간다니 어디로 간단 말인가?"

"사관으로 갔다가 내일 일찍 떠나야겠습니다."

"사관? 이 사람아, 나를 버리고 사관으로 간단 말인가. 나하고 함께 있도록 하세."

박순은 태상왕의 간곡하게 만류하는 것을 보자 못이기는 체, 슬며시 주저앉았다. 마음속으로 '일이 차차 되어 간다' 하고 은근히 기뻐했다. 태상왕은 다시 장기판을 벌였다. 박순은 밤늦도록 장기를 둔 후에 태상왕을 모시고 잤다. 그러나 박순은 상감인 방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비치지 아니했다. 이튿날이 되었다. 태상왕은 아침 수리를 든 후에 심심했다. 다시 박순을 불렀다.

"어제 장기는 경이 나한테 두 판이나 졌었네. 오늘도 심심하니 장기나 한판 두어보세."

"그랬습니다. 어제는 일부러 신이 전하께 두 판을 져드렸습니다. 오늘은 전하께서 신한테 지셔야 합니다."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이. 일부러 어떻게 진단 말인가. 좌우간 장기를 두어보기로 하세."

태상왕과 옛 벗 박순은 껄껄 웃으며 다시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임금과 신하는 한참 신명이 나서 '장군야', '멍군야' 소리를 치며 장기를 두고 있을 때 홀연 들보 위에서 '찍찍'하는 소리가 일어나면서 새까만 물건이 뚝 떨어졌다. 태상왕과 박순의 시선은 일제히 물건이 떨어지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바라보니 생쥐 새끼 한마리가 죽어서 떨어졌다. 뒤미처 다시 찍찍거리는 소리가 일어나면서 커다란 어미 쥐 한 마리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떨어져 죽은 새끼 쥐 앞으로 달려들었다. 어미 쥐는 죽은 새끼 앞으로 바싹 덤벼들어서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아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애절하게 울어 찍찍거렸다.

"찍찍, 찍찍찍-."

마치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여 처량하게 울어대는 사람들의 정 같았다.

"쥐도 미물이건만, 자식의 죽음을 슬퍼할 줄 아는구려-."

태상왕 이성계의 입에서는 무심코 한 마디가 떨어졌다. 박순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그러합니다. 미물도 그러하거든 황차 사람이겠습니까."

박순의 한마디 말은 태상왕 이성계의 마음을 찔렀다. 태상왕의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이때 박순은 장기판을 거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태상왕께 두 번 절을 올린 후에 울면서 고한다.

"신의 목을 베어줍시오. 신은 전하를 속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무엇을 속였단 말인가?"

태상왕은 눈치를 챘다. 그러나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기실, 소신은 금상전하의 명을 받들어 전하를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어제 보신 바와 같이 송아지는 어미의 곁을 떨어지기 싫다 하여 그같이 처량스럽게 울었고, 지금 어미 쥐는 새끼 쥐의 죽음을 보고 저렇듯 애처롭게 몸부림치며 울고 있습니다. 황차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 태어나서 천륜을 지키지 못하고 인정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구실을 못 한다고 할 것입니다."

박순은 말을 마치자 목이 메어 느껴 울었다. 어제, 송아지가 어미소를 불러 구슬피 울던 일과 오늘 어미 쥐가 새끼 생쥐의 죽음을 부고 애절해하는 꼴을 예들어 말하는 박순의 말을 듣자 태상왕의 마음은 더한층 흔들렸다.

'방원이도 내 자식이다!'

태상왕은 마음속으로 이같이 부르짖었다.

"태상왕 전하, 세자 방석도 태상왕 전하의 아드님이시고, 금상전하도 태상왕 전하의 아드님이십니다. 지나간 불행한 일은 다 잊으십시오. 불길했던 과거사를 다시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손가락을 깨물어서 아니 아픈 손가락이 없습니다. 듣자오니, 전하께서는 조사의를 대장으로 삼아서 아드님이 되시는 금상전하를 토벌하라 하셨다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말이 되지 아니하는 일이올시다. 어미를 찾는 송아지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전하께서는 이 불쌍하고 가엾은 송아지를 향해 칼을 뽑아 무찌르려 하십니까. 새끼 쥐의 임종을 호곡해 우는 저 어미 쥐의 심경을 모르시겠습니까. 조사의가 군사를 거느려 금상전하를 토멸한 후에 전하께서 일평생 싸우시어 창업해놓으신 이씨 왕국은 의연히 이씨 왕국으로 계속이 될 줄 아십니까? 기막힙니다. 전하께서는 춘추가 높으십니다. 이씨 왕국은 마침내 조씨 왕국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미워도 자손이올시다. 금상전하를 토멸하시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박순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목이 메어 간했다. 태상왕은 귀를 기울여 들었다. 과연 옳은 말이다. 자기는 이미 늙었다. 조사의의 말을 들어 방원에게 칼을 뽑으라 했으나 방원이 대신 조사의가 집권하는 날 당장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차츰차츰 그의 세력이 커질 때 이씨 왕국이 조씨네 왕국으로 변해지기가 십상팔구다. 박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박순은 태상왕이 생각 속에 빠져있는 것을 눈치채었다. 박순은 다시 아뢴다.

"아내 얼굴이 추해서 보기 싫다 해도, 역시 아내올시다. 공방보다는 낫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패륜아라 하더라도 그래도 내 피를 받은 혈속이올시다. 황차 금상전하께서는 기상이 전하 이상이십니다. 수성의 임금이 아니라, 창업의 임금이올시다. 다른 생각을 하지 마시고 곧 송도로 환가하시옵소서."

태상왕은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방안은 고요했다.

"전하! 송아지와 어미 소의 지극한 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옵소서. 가사이다, 송도로."

태상왕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한숨이 ''하고 입가에서 일어났다. 은빛 흰 수염이 가만히 흔들렸다.

"경의 말을 들어 곧 송도로 돌아가리라. 경은 먼저 떠나도록 하라."

"황공하오이다."

박순의 눈에선 감격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러하오면 전하께서는 꼭 환가하옵소서. 신은 송도로 돌아가 만 조정 신하한테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박순은 기뼜다. 태상왕 전하께 하직을 고하고 소를 타고 송아지를 몰아 송도로 향하여 떠났다. 함흥차사가 살아서 송도로 돌아간다는 일은 희귀하기 짝없는 노릇이었다. 함흥, 영흥, 북청 사람들은 모두 다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허, 참 별일 아닌가. 이번 차사는 죽이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려보내니. 참말 희한한 일일세."

"판부사 박순은 태상왕 전하의 옛 친구라 하더니 정분을 보아서 죽이지 아니하고 그대로 살려 보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친구란 과연 좋은 것이거든, 더구나 왕위에 나가기 전부터 가까운 친구라 하니 인정상 차마 죽일 수는 없겠지."

서북면 백성과 군사들은 모두 다 이같이 공론하고 있을 때 조사의는 돌연 태상왕의 침전으로 들어섰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 조사의 급히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조사의의 얼굴빛은 긴장되어 있었다.

"무슨 의논할 말이 있느냐?"

태상왕은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조사의는 정색하고 아뢴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박순을 그대로 돌려보내십니까?"

태상왕은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나의 옛 친구다. 어찌 차마 손을 대겠느냐."

조사의가 다시 아뢴다.

"전하께서는 박순의 간특한 꾀에 넘어가셨습니다. 박순은 전하의 굳은 결심을 흔들어 놓기 위하여 일부러 소를 타고 송아지를 끌고 와서 어미 찾는 모습을 보여서 성상의 철석 같으신 마음을 흔들어놓았고, 쥐새끼의 죽은 모양을 뵈어서 늙으신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방원의 계획으로 모략을 꾸며서 시킨 노릇이올시다. 이 소식을 군사들이 듣자, 그들은 마음이 풀려서 이제는 송도로 쳐들어가는 군사행동을 중지한다는 풍설까지 자자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방원과 박순의 속임수에 넘어 가버리고 마셨습니다. 앞으로 전하의 노래하신 후의 일이 딱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악한 무리들의 화를 입으실 것입니다. 주의하시옵소서. 그리하옵고 박순은 단연코 군법 처치를 해야 합니다. 만약 전하께옵서 박순을 그대로 살려 보내신다 해도 이 조사의는 결단코 박순을 그대로 돌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난신적자의 신하인 박순의 목을 참형에 처하겠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박순을 죽이겠다고 우겨대는 조사의의 말에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강후의 친척인 조사의와 약속하고, 방원을 쳐부수려 하던 강경했던 태상왕의 마음은 아닌게 아니라 박순이 데리고 온 송아지의 울음소리로 인하여 얼마쯤 풀어지기 시작했고, 두 번째 장기를 두다가 죽어가는 새끼 쥐를 바라보고 슬픈 표정으로 자식의 임종을 오열하는 어미 쥐의 태도를 보자 더 한층 마음이 좋지 아니해서 박순에게 앞으로 환가할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이제, 조사의의 말을 들으니 자기 자신은 창황중에 그대로 박순에게 넘어간 것이 분명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이리도 못 하고 저리도 할 수 없었다.

"박순한테 내가 넘어갈 리가 있느냐. 옛 친구의 우정을 막을 길 없어 그대로 살려 보낸 것뿐이다."

태상왕은 군색하게 대답했다.

"그러하오면 박순에게는 곧 포박 명령을 내려서 군법 시행을 하겠습니다."

조사의는 마지막으로 단을 내려 아뢴다. 태상왕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박순을 어서 송도로 가라고 해놓고 다시 군법시행을 한다는 것은 일에 대하여 잘잘못은 고사해놓고라도, 너무나 사람을 대접하지 않은 처사라 생각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박순을 살려낼 도리는 없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박순이 하직을 고하고 떠난 시각은 이미 한나절이 지났다. 태상왕은 조사의에게 영을 내렸다.

"선전관을 불러라."

조사의는 군막에 영을 내려 선전관을 어전으로 불러들였다. 태상왕은 허리에 차고 있던 상방검을 끌렀다.

"이 칼로 박순을 쫓아가 죽여라. 만약 용홍강을 넘어갔거든 내버려 두고 돌아오너라."

조사의는 더 이상 항의할 수 없었다. 선전관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상방검을 차고 박순의 뒤를 쫓았다. 이때 박순은 태상왕께 하직을 고하고 용흥강을 향하여 가다가 길에서 관격이 되었다. 환약을 먹고 약을 달여 마시느라고 예정보다 휠씬 지체가 되었다. 선전관은 급히 말을 달려 용흥강 가에까지 당도했다. 이때 박순은 막 배를 타려는 찰나였다. 한 발은 배에 올려놓고 한 발은 땅에 붙이고 있었다. 선전관은 태상왕의 상방검을 번쩍 들어 박순의 허리를 쳤다. 박순의 몸은 두 동강이가 되어 반은 배 안으로 굴러떨어지고 반은 땅에 떨어졌다. 태상왕 이성계의 마음을 갖은 방법으로 돌려서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했던 박순도 마침내 다시 돌아가지 못할 길을 걸었다.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함흥차사는 이같이 하여 점점 더 그 수가 늘었다. 송도서 태상왕을 달래기 위하여 송아지를 끌고 간 박순의 허리가 끊어져 죽었다는 소문은 동북면과 송도 서울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조사의는 박순의 허리를 짤라 군문에 훈시한 후에 의기가 자못 양양했다.

"자아, 동북면 모든 고을에 일어난 의병과 여진군으로 합세한 연합군은 송도로 향하여 진격을 개시한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은 군율을 엄숙하게 지켜서 정정당당하게 싸우라."

조사의는 갑옷투구에 장창을 비껴들고 진문에 나가 훈령을 내린 후에 남으로 향하여 진군을 했다. 아장에는 조홍, 김권이요, 부장에는 이자분, 한정이요, 좌편 별장에 정주 목사 박관이요, 우편 별장에 경력 허형이요, 모사에 정용수, 신효창이었다. 별로이 여진마적 임파라실리는 여진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조사 군사의 뒤를 따랐다. 북소리, 징솔, 명금 취타의 요란한 음향은 백 리에 연했고, 기치 창검은 하늘을 가려서 햇빛이 무색했다. 열 읍의 수령 방백들은 다투어 항복하면서 벌벌 떨면서 지공이 대단했다. 조사의의 대군은 고맹주로 향하여 위풍이 당당하게 나갔다. 아직 조사의한테 항복하지 아니한 원들은 봉수대에 봉화를 들어 송도 서울에 급한 변을 고했다. 봉화는 산마다 일시에 들려졌다. 마치 산봉우리마다 줄불을 켠 듯 천 리에 뻗쳐 송도 송악산 상상봉에까지 켜 들어왔다. 송도 조정에서는 급한 난리가 난 것을 알리는 봉화를 보자 정승 판서 이하 만조백관들은 깜짝 놀랐다.

 

 

함흥군과 송도의 대결

 

봉홧불이 켜져 들어온 방향을 보아 변이 난 곳은 함흥의 동북면이 분명했다.

함흥의 동북면이면, 지금 태상왕이 계신곳이 확실하다.

문안사신이 가는 족족 목을 잘라 죽여서 '함흥차사'라는 새 명사가 생겨나게까지 한 태상왕 전하가 있는 곳이다.

태상왕 전하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세자 방석과 방번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쳐들어오는 것이 분명했다.

봉홧불을 바라보는 송도 백성들은 소설이 대단했다.

"난리가 나서 쳐들어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보통 난리가 아닐세. 부자간에 싸우는 난릴세. 우리한테는 상관이 없네."

"어찌해서 상관이 없단 말인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전쟁통에 백성들이 결딴이 나니 큰일 아닌가."

"여진군까지 합세하여 쳐들어온다 하니 싸움이 어찌 될지 모르겠네."

촌 늙은이와 농부들은 봉홧불을 바라보며 걱정이 분분했다.

장사꾼과 여각에서도 쓴 입맛을 다시며 걱정했다.

임금 태종은 승지의 보고를 받자, 곧 문무백관을 전상으로 모아 급히 회의를 열었다.

"봉홧불이 함흥에서부터 들려졌으니, 필연코 강비의 친척으로 함흥에 있는 자가 난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삼군부 군사는 급히 출동 준비를 하라."

태종은 엄숙한 명령을 내렸다.

삼군부는 급히 출동준비를 하라는 왕명이 내리니 영의정 하윤이 아뢴다.

"아직 반란군이 일어난 정체를 자세히 모를 뿐 아니오라, 변지에 일어난 작은 도적을 대항하기 위하여 삼군부의 병력을 기울여 싸운다는 일은 불가한가 아뢰오. 전하께서 적당한 장수를 뽑아서 우선 들어오는 적의 예봉을 꺾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성미 급한 태종은 곧 삼군부의 군사를 총동원시키라 했으나 영의정 하윤의 말을 들으니 그럴듯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마음을 돌려서 분부를 내렸다.

"영의정의 말이 그럴듯하오. 그러하다면 아직 삼군부 군사가 움직일 것은 없고, 박만으로 도순문사를 삼고, 박문숭으로 도진무사를 삼고, 허형으로 경력을 삼고, 황길지로 의주부지사를 삼아서 오천 병마를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나가서 반란군을 소탕하게 하라."

태종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승지는 분부를 받들어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에서는 새로 임명된 박만 이하 모든 장성들을 급히 불렀다.

빈청으로 물러나온 영의정 하윤과 도통사 이숙번은 동북면으로 출동하는 박만 이하 여러 대장들을 어전에 인도하여 임금의 칙명을 받게 했다.

태종은 곤룡포 익선관으로 황금 용상에 높이 앉아 출전하는 장수에게 분부를 내렸다.

"박만 듣거라. 지금 동북면에서 좀도독의 무리가 난동하여 봉화가 연달아 일어난 것은 과인보다 국가의 간성의 책임을 맡은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필연코 벼슬이 떨어져 불평을 품은자들의 행동인 것이 분명하다. 그대들에게 장군의 책임을 맡겨서 만오천의 병사를 주어 송도로 쳐들어오는 반란군을 막게 한다. 그대들은 충성을 다하여 좋은 방략으로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물리치라. 만약에 패한다면 군법에 처할 것이요, 승리를 거두어 국위를 빛나게 한다면 크나큰 상을 주어 그대들의 큰 공을 찬양하리라."

동북면 도순문사로 임명된 박만이 어전에 나가 아뢰었다.

"미신들에게 반란을 막는 총책을 내리시니 호아공 감읍하온 마음 깊이 폐부에 새겨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장수된 자 다시 무슨 생각이 있으리까. 다만 적이 소탕하여 한 번 죽어 나라에 갚을 뿐입니다."

동북면 도순문사 박만은 모든 장수를 대표하여 아뢴다.

태종은 황금 용상 위에서 친히 병부와 금부은월과 상방검과 옥절이며 인수를 내렸다.

박만은 두 손으로 왕이 친히 내리는 모든 물건을 받고 옥좌를 향하여 사은 숙배를 드렸다.

박문숭, 허형 이하 아장들이 일제히 숙배를 드렸다.

어전에서 친히 금부은월과 병부며 옥절과 인수를 받는 박만은 사은숙배를 마치고 물러나자 곧 궐무 밖으로 나와 장대에 올라서 만오천 병마의 사열을 받고 행동을 개시했다.

장수와 군사들의 의기는 양양했다. 북소리, 징소리, 소라 부는 소리는 천 리에 연했고, 기치 창검은 하늘을 가리어 동북으로 향하여 치달렸다.

강원도로 들어서서 철령 높은 재를 넘고 다시 함흥으로 향하여 깃발을 날렸다.

이때, 반란군 조사의의 대병은 여진의 군사와 마적의 떼와 합세하여 호호탕탕하게 함흥 교외로 짓쳐 나왔다.

조사의의 반란군과 송도서 떠난 박만의 군사는 함흥평야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송도에서 만오천 명의 군사를 거느려 의기양양하게 짓쳐 나온 박만은 군사를 정돈하여 진을 치고 '관군대장 동북면 도순문사 박만'이라 금글자로 크게 쓴 붉은 대장기를 진 문 앞에 늘인 후에, 까만 오추마 타고, 갑옷투구에 장창을 비껴들고, 반란군 대장을 꾸짖었다.

"네 어찌 무례하여 여진 오랑캐와 마적떼를 거느리고 감히 반란을 일으켰느냐, 부질없이 왕명을 받들어 나온 나의 군사를 대항하지 말고, 곧 항복하라."

태상왕 이성계의 승낙을 맡고 송도로 쳐들어가던 정남대장군 조사의는 송도에서 올라온 태종의 대장 박만의꾸짖는 소리를 듣자 용대기를 앞세우고 천천히 진 앞에 나타났다. 용대기는 태상왕 이성계를 상징한 태상왕 전하의 기였다. 조사의는 황금 투구에 황금 갑옷을 입고 은안 백마에 높이 앉아 언월도를 빼어 들고 박만을 꾸짖는다.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관데 감히 태상왕 전하의 친군의 출정하는 길을 막느냐?"

조사의는 화경 같은 눈을 부릅떠 박만을 꾸짖었다.

박만이 조금도 겁나지 아니하고 조사의를 향하여 다시 꾸짖는다.

"나는 금상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쥐새끼 같은 너희들 도둑의 무리를 진압하러 나온 도순문사 박만이다. 다행히 내 명에 복종하여 항복한다면 너의 목숨을 살려주리라."

조사의는 박만의 꾸짖는 말을 듣자, 급히 언월도를 뽑아들고 말을 달려 나오는 박만을 꾸짖는다.

"요망한 고양이 같은 앙큼한 도둑놈이 감히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고 우리 군사를 가리켜 반란군이라 하느냐? 나는 태상왕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삼강오륜을 모르고 오직 탐욕만 일삼는 불륜 불의 불효의 인물인 방원을 토벌하기로 한 것이다. 네가 어찌 방원의 부하로서 감히 관군이라 자칭하느냐. 관군 대장은 네가 아니고, 내가 곧 관군 대장이다. 너는 아버지 태상왕 전하를 내쫓고, 형님의 왕위를 협박하여 뺏고, 세자인 방석을 죽여서 스스로 세자가 되었고, 돌아간 어머니 왕후 강씨를 어머니로 대접하지 않은, 죄와 악이 하늘에 가득 찬 반역아 방원의 사사로운 군사다. 네 어찌 나라를 창업하신 태상왕의 군사인 우리를 반란군이라 하느냐."

조사의는 박만을 호되게 꾸짖자, 말을 달리며 박만의 목을 취하려 했다.

박만은 비로소 조사의 군대가 홑벌 반란군이 아니라 태상왕의 명령으로 금상 전하를 토벌하러 내려오는 군대인 것을 알았다.

태상왕은 지금은 상왕이지만 왕위에 오르기 이전, 고려의 대장으로 있을 때부터 자기를 사랑하고 돌보아주었던 분이었다. 더구나 왕위에 오른 후에는 개국 공신의 한 사람으로 후하게 대우해주는 은고를 입었던 것이다.

태상왕의 명령을 받들어 불륜 불효한 금상전하를 토벌하러 간다는 조사의의 설명을 듣자, 마음 한 귀퉁이가 뭉그러지는 듯한 마음을 느꼈다.

부풀어 올랐던 패기가 슬며시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지금 조사의가 말한 대로 금상 전하는 패기가 너무 벅차고 욕심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다.

아닌 게 아니라 왕권을 잡기 위하여 그는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황소처럼 날뛰었다.

그에게는 임금도 없고, 오륜도 안중에 없었다.

방원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선죽교에서 철퇴로 갈겨서 죽게 한 사람이었다.

고려의 맹장이요, 원로대신인 최영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장본인도 바로 이성계가 아니라 이방원이었다.

목은 이색이 한강에서 배를 타고 여주강으로 내려갈 때 연자탄 여울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죽은 그 원인도 이성계가 아니라 이방원한테 있었다.

사람을 시켜서 소주에 독약을 넣어 죽게 했던 것이다.

모든 왕씨를 바다에 몰아넣어 죽여버린 일도 이성계보다 이방원이 중간에 들어서 한 짓이다.

두문동 칠십이인을 불 질러 죽게 한 사람도 이성계가 아니라 이방원이었다.

이같이 해서 방원은 자기 집안으로 왕권이 돌아오게 했고, 한번 왕권이 자기 집안으로 돌아온 후에는 동생인 세자 방석을 죽였고, 아우 방번을 죽였고, 매부 이제를 죽였다.

다음엔 형님 정종의 세자가 되기를 강요했다. 다시 친형인 방간과 싸움을 해서 방간을 귀양보내고 조카 맹종을 죽였다.

다음엔 정종인 형님을 위협해서 선위를 하게 한 후에 지금은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지금 박만은 방원의 신하가 되었지만, 본시는 태상왕 이성계의 신하다.

아들들의 불목으로 인하여 우울한 마음을 안고 함흥 고향으로 쓸쓸하게 돌아간 태상왕한테 동정이 가지 아니할 수 없는 심경이었다.

언월도를 비껴들고 쫓아드는 조사의를 대항하려던 힘이 슬며시 풀어져버렸다.

박만은 달려드는 조사의에게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칼을 거두고 잠깐 나의 묻는 말에 대답하라."

"무슨 말이냐?"

"네가 진정으로 태상왕 전하의 말씀을 받들어 송도로 토벌하러 가는 조사의냐?"

"내 어찌 헛소리를 하랴. 나의 대장기를 바라보아라!"

"깃발만 가지고 어찌 인정할 수 있느냐. 나에게 실지로 증거를 보여달라."

"그대가 진정 태상왕 전하의 군대라면 깨끗이 항복하리라. 나도 왕은을 많이 입은 사람이다."

박만의 말을 듣는 조사의는 무한 기뻤다.

비껴든 언월도를 칼집에 꽂은 후에 아장을 돌아보며 분부했다.

"승녕부 당상이신 정용수와 신효창 두 분을 진문 앞으로 나오시게 하라."

조사의의 영이 떨어지니 아장은 급히 아문 안으로 말을 달렸다.

이윽고 태상왕을 모시고 함흥까지 따라갔던 두 사람의 원로대신이 나타났다.

박만이 바라보니 틀림없는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었다.

조사의는 두 사람의 원로를 향하여 읍한 후에 청해온 내력을 말했다.

"박이 비록 방원의 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려 이곳까지 왔으나 우리 군사가 태상왕 전하의 군사인 것을 증명해달라 하므로 잠깐 두 분을 나오시라고 한 것입니다."

정용수가 조사의의 말을 듣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박만의 앞으로 나가 손을 탁 잡았다.

"박장군, 이거 얼마 만이오. 그동안 태평하셨소. 우리는 함흥까지 태상왕 전하를 모시고 왔지만, 장군은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

노련한 재상 정용수는 넌짓 박만의 마음을 더듬어보았다.

"상감의 명을 받들어 반란군인 조사의의 군대를 토멸하러 왔소이다."

박만은 일부러 얼굴에 굳은 표정을 띠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원로재상 신효창은 백수를 바람에 흩날리며 간드러지게 웃어댔다.

"아하하. 고이치 아니한 일이오. 안변부사 조사의가 군사를 거느려 송도로 쳐들어간다 하니, 송도서는 까닭도 모르고 조부사가 반란을 일으킨 줄 알기가 십상팔구요. 그러나 반란이란 그리 쉽사리 일으킬 수가 없고, 함부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오. 조부사는 태상왕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불의무도한 방원을 토멸하러 내려가는 당당한 왕사인 것을 당신은 아셔야 하오. 오늘 당신은 방원의 대장이 되었고, 조사의는 태상왕 전하의 대장이 되었소이다. 그러나 자식이 어찌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들겠소. 방원이는 넉넉이 아버지 아니라. 어머니한테라도 칼을 들 사람입니다. 그러나 박장군은 조장군을 향하여 칼을 들지 못하리다. 왜냐하면 박장군은 불학무도한 불파천 불외지하는 방원의 장수가아니라, 일찍이는 태상왕 전하의 구신이었던 개국 공신 박만이란 점을 잊어서는 아니되오. 어찌 차마 당신이 태상왕 전하를 향하여 칼을 들겠소. 만약에 칼을 든다면 만고의 죄인이지."

"암 그렇고말고, 신하가 어찌 칼을 들어 태상왕 전하의 군사와 겨눌 수 있겠소."

옆에 있던 정용수가 한 마디 했다.

박만은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생각 속에 빠졌다.

"두 분께서는 박장군을 함흥 본궁으로 어전으로 인도해주십쇼."

조사의가 말했다.

"자아 그럼 박장군, 우리 태상왕 전하께 뵈우러 들어갑시다.

신효창은 박만의 손을 잡고 함흥 본궁으로 향했다.

본궁 안 태상왕이 행재소에는 벌써 내시와 궁녀를 통하여 태종 방원의 명을 받아 토벌하러 온 박만을 어전에 인도한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태상왕은 익선관에 관룡포를 입고, 용상 위에 높이 앉아서 들어오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뜰 아래서 내시의 못소리가 들렸다.

"승녕부 당상 정용수, 신효창과 정남대장군 조사의는 송도서 온 박만과 함께 알현이요."

박만은 내시가 외치는 목소리 중에 함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직함을 불렀으나 자기 한 사람만은 '송도서 온 박만'이라고 불러주는 말에 어쩐지 어깨가 좁아지는 듯 생각이 들었다.

태상왕한테는 일찍이 충성을 다했던 자기다. 지금 자기는 태상왕을 저버린 것이 아니다. 송도 조정에 남아서 벼슬하고 있게 되니 자연 금상의 신하가 되고 그의 명령을 받들어 조사의를 토벌하러 온 것이다. 그러나 막상 와서 모든일을 살펴보니 조사의는 반란군이 아니라 태상왕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군대다. 이제 태상왕을 뵈러 들어가니 죄송하고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짝이 없다는 것보다 몸둘 곳을 몰랐다.

태상왕은 용상에 걸터앉아 들어온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늙은 신하 승녕부 당상관 둘과 정남대장군 조사의가 사은을 올린 뒤에 박만이 네 번 절을 하여 예를 올렸다.

승녕부 당상 정용수가 아뢴다.

"개국 공신이었던 박만이 알현이오."

태상왕 이성계는 날카로운 눈을 들어 박만을 굽어본다.

박만은 떨렸다.

"오랫동안 천안을 우러러 뵙지 못하여 하정에 민망하옵더니 이제 지척지지에서 옥체를 뫼시오니 기쁜 마음 그지없사옵니다."

태상왕은 위엄기 있는 얼굴로 묻는다.

"네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박만은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조사의를 치기 위하여 상감의 명을 받들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왔다고 아뢸 수도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아뢰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고만 엎드렸다.

"함흥에 오는 차사가 되어 왔느냐?"

태상왕의 옥음은 더한층 엄숙했다.

'차사'소리만 나오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다. 박순도 허리가 끊어졌다 한다.

"아니올시다."

한마디를 겨우 하고 또다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어찌해서 왔느냐?"

태상왕의 옥음은 또 한 번 강하게 떨어졌다.

박만은 여전히 대답을 못했다.

승녕부 당상관들과 조사의는 일부러 거들어주지 아니했다. 톡톡히 혼 좀 나보라는 의도다.

"차사로 온 것도 아니고 공사로 온 것도 아니라면 네가 내 생각이 간절해서 보고 싶어서 찾아왔느냐?"

이번엔 태상왕의 목소리가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이럴수록 박만의 가슴은 쥐어짜지는 듯 괴로웠다.

박만의 마음은 무척 아팠다. 온몸에 진땀이 쭉 흘렀다.

승녕부 당상들과 조사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옆에서 거들어주지 아니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태상왕의 재촉이 떨어졌다. 대답을 해야 할 시각은 자꾸만 지나갔다.

박만의 가슴은 질식이 될 듯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무척 괴로웠다. 그러나 옆의 사람들은 여전히 한마디 말도 거들어주지 아니한다.

차라리 다 털어놓고 숨김없이 아뢰는 일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 정부의 명을 받들어 조사의의 군대를 토벌하러 왔사옵니다."

"정부의 명을 받들어서 조사의의 군대를 토벌하러 왔다? 조사의의 군대는 내 군대다. 네 이놈, 나를 치러 왔단 말이냐?"

태상왕은 큰 소리로 천둥같이 얼러댔다.

"송도서는 조사의의 군대가 반라늘 일으킨 줄 알고 있습니다. 제 어찌 그런 줄 알았으면, 태상왕 전하의 군대를 공격할 마음을 두었으리까.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죽여주십시오. 살피지 못했습니다. 목을 베어주십시오."

박만은 목이 메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며 하소연했다.

이때, 조사의는 박만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너는 군대를 거느려 태사왕 전하를 공격하러 온 불충 불의한 망유기극한 놈이다. 당연히 네 목을 베어 천하에 조리돌릴 것이나 모르고 왔다 하니 특별히 생각한다. 네가 만약 부하를 거느려 항복한다면 태상왕 전하께 아뢰어 특별히 네 목숨을 살려주리라."

조사의의 말을 들은 박만은 지옥에서 부처의 말을 듣는 듯했다.

"항복이라니, 여부가 있습니까. 아까도 생각이 있어 태상왕 전하의 군대라는 증거를 보여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소인은 그저 태상왕 전하의 품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소인이 거느린 모든 군대를 장군한테 넘깁니다. 그리하옵고 소인은 선봉이 되어 송도로 말을 달리겠습니다."

조사의는 만족한 표정을 얼굴에 띠었다. 곧 태상왕께 아뢴다.

"박만으로 아장을 삼겠습니다. 특별히 윤허해주시옵소서."

태상왕은 고개를 끄떡였다.

조사의는 이같이 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송도서 온 큰 군사를 항복 받았다.

이같이 하여 반란군을 치러 갔던 박만은 완전히 태상왕 이성계의 편이 되어버렸다.

 

물밀듯 쳐들어가는 함흥군

조사의는 박만의 군대를 항복 받은 후에 대군을 휘동하여 남으로 내려갔다.

도순문사 박만이 태상왕의 편인 조사의한테 항복했다는 소식은 나는 듯이 송도에 알려졌다.

호군 김옥겸이 태종의 비밀한 영을 받들어 함흥으로 태상왕의 동정을 살피러 갔다가 구사일생이 되어 겨우 목숨을 보전해 돌아와서 동북면 상태를 아뢰었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강비의 친척이온데 태사왕 전하의 마음을 움직여서 안변부사 군사와 영흥부의 군사를 합동시켜가지고 호호탕탕 남으로 내려옵니다. 조사의의 군사가 날래고 용맹스러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뒤에는 또다시 여진의 군사 마적떼가 있습니다."

태종은 노기가 등등했다.

"조사의란 놈이 기어코 반란을 일으켰고나. 천참만육할 놈이로구나."

태종은 주먹을 쥐어 부르르 떨었다.

"여기다가 태상왕 전하의 허락하시는 말씀을 얻었으니, 함흥 영흥 동북면 일대의 인심은 함빡 조사의한테로 돌아갔습니다."

"아바마마께서 허락을 내려셨다? 무슨 허락을?"

"전하를 토벌하라 하셨습니다."

태종의 눈은 벌겋게 상기가 되었다.

"나를 치라고?"

", 그러하오이다. 송도에 계신 전하를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태종 방원은 아찔한 현기를 느꼈다.

"그리하와 안변 이북은 함빡 태상왕 전하의 명령에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조사의의 군대는 곧 태상왕 전하의 군대올시다. 수령 방백들은 모두 다 그편이 되었습니다. 감사와 원들이 일제히 항복했습니다. 순문사로 어명을 받들어 나갔더니 박만도 항복해버렸습니다. 처음에 조사의와 싸우다가 나중에 태상왕 전하를 뵙고 넙죽 엎드려 항복해버렸다고 합니다."

"기막힌 일이로구나!"

태종 방원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잠깐 고개를 숙여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태종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너는 어떻게 잡히지 아니하고 살아왔느냐?"

"처음에 안변으로 가서 조사의를 보니 그자는 무례하게 신을 욕했습니다. 전하의 신하라고-그리고 무사를 시켜서 칼과 마패를 뺐었습니다. 신은 몰래 도망을 쳐서 함경도 문천으로 가보니 문천군수 박양은 소신을 흘겨보고 말도 아니했습니다. 벌써 모두 다 통문이 돌았습니다."

김옥겸은 숨이 차서 말을 잠깐 끊었다.

태종 방원은 갑갑했다. 어서 하회를 듣고 싶었다.

"어서 다음 말을 해라."

옥겸이 다시 아뢴다.

"그리하와 영풍으로 갔더니 부사 한방이란 자는 육방관속을 시켜서 소신의 등을 밀어 옥 속에 가두어버렸습니다. 한 달 만에 옥을 뚫고 도망해 나왔습니다. 거지행세를 하면서 함흥으로 나와서, 도순문사 박만은 도진무사 박문숭, 경력 허형, 의주부지사 황길지 등과 함께 조사의한테 항복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물러가거라."

태종은 김옥겸을 내보낸 후에 급히 영의정 하윤에게 입시령을 내렸다.

하윤은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어전으로 들어왔다.

"조사의란 놈이 아바마마의 마음을 소란하게 움직여서, 송도로 대군을 몰아 온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송도까지 내려오기 전에 막아 치우셔야 합니다."

"조사의는 반란군의 칭호를 은폐하기 위하여 아바마마의 명령으로 나를 친다 하니 딱하지 아니하오. 만약 내가 응전을 한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칼을 빼어들고 싸우는 것이 되니 과연 창피하구려."

"부자지간에 서로 칼을 빼어 들었다는 후세의 조롱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셔야 합니다."

"차마 어찌 부자지간에 칼을 빼어들고 겨누겠소."

태종 이방원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만약 조사의의 군대가 송도를 함락하고 전하를 폐위한다 해도, 전하께서는 가만히 앉아 계시겠습니까?"

"하는 수 없지, 어찌하오. 부자지간에 어찌 차마 칼을 빼어 겨누겠소."

하윤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쓸데없는 체면을 생각하신다면 임금 노릇도 다 그만두시고 수양산으로 들어가시어 백이 숙제모양으로 고사리나 캐어 잡수십시오. 그 뿐 아니라 전하께서 여태껏 반평생을 두고 싸우셨던 모든 일이 다 수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통촉하십쇼."

하윤의 말을 듣는 태종은 결연히 마음을 결정했다.

내시를 불렀다.

"승정원으로 나가서 급히 도승지를 들라 하라."

내시는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도승지가 어전으로 추창해 들어왔다.

"안변, 함흥, 영흥에서 역적 조사의가 반란군을 일으켜서 송도로 쳐들어 온다 한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엇바. 비변사에 영을 내려 삼군을 조직하게 하라."

"삼가 봉행하겠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도승지에게 다시 영을 내렸다.

"정승 하윤으로 판중추부사를 겸임케 하고, 조영무로 동북면과 강원, 충청, 전라, 경상 5도 도통사를 삼고, 이빈으로 서북면 도절제사를 삼고, 이천우로 안주도 도절제사를 삼고, 김영렬로 동북면 강원도 도순무사를 삼고, 유양으로 황해도 도절제사를 삼아 조사의를 대항케 하라."

비변사에서는 왕명에 의하여 곧 삼군을 출동시켰다.

새로 임명된 도통사 조영무는 안주도 도절제사 이천우, 도순무사 김영렬과 함께 삼군을 거느리고 서북 천리 길로 향했다.

형과 아우 사이의 치열한 정권 싸움은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의 정권싸움으로 변해서 장차 무수한 생명을 잃게 하는 피비린내 나는 인생의 비극이 또 한 번 전개되는 것이다. 호호탕탕하게 올라가는 송도의 군사는 함경도 함흥에서 송도로 향하여 내려오는 조사의의 군대와 평안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태사왕 이성계의 명령으로 정남대장군이 되어 소옫로 쳐들어오는 조사의의 군대는 덕천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한편 태종 이벙원의 명을 받아 서북면으로 쳐들어가는 도절제사 이천우의 군대는 자산에 진을 쳤고, 서북면 도절제사 이빈의 군대는 강동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천우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덕천에 있느 조사의의 군대를 단숨에 토벌시킬 수 있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삼천 병사를 몰아 고맹주로 향했다. 조사의의 정탐병은 이천우의 군대 행동을 나는 듯이 조사의한테 고했다. 송도서 쳐 올라온 이천우의 군대는 삼천 병마를 이끌고 고맹주로 향했습니다. 정탐병이 말하는 고맹주라는 땅은 덕천으로 향하는 산협 지대다. 조사의는 정탐병의 보고를 받자 마음속으로 크게 기뻤다.

"다시 나가서, 적의 행동을 유루 엇이 살펴서 신속하게 정찰하라."

조사의는 갑옷 입고 투구 쓰고 삼천 병마를 점검했다. 선봉대장은 조사의 자신이 되고 중군은 항복한 대장 박만이요, 후군은 영흥부사김권을 임명시켰다. 군사들의 행동은 바람보다 신속했다. 이천우의 군대가 고맹주에 당도하기 이전에 미리 전쟁터를 정할 계획이다. 정남대장군 조사의는 친히 장대에 올라 군사들을 격려했다.

"전쟁은 신속해야 한다. 우리 군대는 적병이 고맹주에 당도하기 이전, 먼저 가서 길을 끊어야 할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하여 신속한 행동을 취하라. 승전하는날 태상왕께 아뢰어 후한 상을 주리라."

모든 군사들은 태상왕께 아뢰어 후한 상을 준다는 말에 용기가 백배나 솟구쳤다. 한낮이 겨워서 조사의의 군대는 벌써 고맹주에 당도했다. 고맹주는 첩첩산중에 깊은 오솔길이다. 조사의는 산악지대의 전후좌우를 살핀 후에 김권의 거느린 일천 병먀를 고맹주 좌편 산골에 매복시키고, 일천 병마는 우편 산골에 매복시켜서 항복한 장수 박만이 지휘하게 하고, 일천 병마는 조사의 자신이 거느려 앞으로 나가며 전군에 영을 내렸다.

"만약에 내가 적병을 유인해서 패하는 체 돌아오거든 좌우 양익의 복병은 일시에 내달아 적을 포위하고 적장들을 척결하라. 추호라도 영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 시행을 하리라."

조사의의 영이 떨어지니 군대들은 일제히 움직여 좌우 산골 속으로 들어갔다. 큰길에 남은 군대는 조사의의 거느린 선봉뿐이었다. 조사의는 천천히 군사를 거느려 산골 어귀에 진을 치고 송도군이 오기만 기다렸다.

안주도 도절제사 이천우는 급히 군사를 몰아 고맹주 산골 어귀에 당도했다. 앞으로 벌써 조사의가 정남대장군의 큰 깃발을 바람에 펄펄 날리며 은안백마에 높이 앉아 있었다. 이천우는 한번 급히 결전해볼 생각이 들었다.

"네 이놈 조사의야, 국가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어찌 감히 반란군을 일으켜 인심을 어지러게 하느냐. 나는 안주도 도절제사 이천우다. 네 만약 싸우기 전에 항복한다면 특별히 위에 아뢰어 네 목숨을 사려 줄 것이다. 빨리 정남대장군의 기를 내리고 왕수 앞에 항복하라."

이천우의 호령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조사의는 장팔사모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이천우의 앞으로 뛰어들며 준절하게 꾸짖는다.

"우리는 반란군이 아니다. 임금을 참칭하는 불의무도한 방워을 응징하기 위하여 태상왕 전하의 조칙을 만들어 방워을 토멸하러 나가는 정남대장군의 군사다. 형을 쫒고, 아비를 좆고, 동생을 죽이고, 조카를 죽인, 삼강오륜을 끊어버린 방원을 주륙하려는 군사다. 네 어찌 감히 태상왕 전하의 군사를 향하여 칼을 들려 하느냐. 과연 난신적자로구나!"

조사의는 말을 마치자, 창을 번쩍 들어 이천우를 찌르려 했다. 이천우와 조사의는 서로 어울려 싸운 지 십여 합에 승부가 나지 아니했다. 홀연 조사의는 힘이 모자라는 체 창을 거꾸로 들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조사의의 말 탄 군사들은 조사의가 달아나는 것을 보자 정남대장군의 깃발을 걷어들고 뒤를 따랐다. 이 모양을 본 성급한 이천우는 장검을 휘두르며 달아나는 조사의의 뒤를 쫒는다.

"이놈 조사의! 네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승천입지를 할 테냐.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호통을 치면서 뒤를 쫒는다. 군사들은 대장 이천우의 뒤를 따라 고함치면서 물밀듯 산골 속으로 몰려들었다. 안주도 도절제사의 군사들이 거의 산골 속으로 반수 이상 들어섰을 때 별안간 등 뒤에서 일성포향이 천지를 진동하면서 좌편에서 복병이 쏟아져 나오고 우편에서 복병이 쏟아져 나왔다. 길은 끊어지고 갈 곳이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하여 피를 뿌리는 백병전이 일어났다. 출기불의로 나온 조사의의 복병들은 좌우의 양익을 벌려 이천우의 군사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때 앞서 달아나던 조사의는 말머리를 급히 돌려 달아나는 군사를 휘동하여 바람처럼 돌격했다. 이천우의 군대는 함빡 포위망 속에 빠져서 죽는 자가 부지기수다. 조사의는 때를 놓치지 아니했다. 좌우 양익의 복병대장과 함께 이천우를 산 채로 잡았다. 꽁꽁 결박지어 군문 앞에 묶어놓았다. 조사의는 목청을 가다듬어 이천우를 꾸짖는다.

"네가 이제도 항복하지 않겠느냐?"

이천우는 속수무책이었다.

"항복하겠습니다."

"너의 항복은 태상왕 전하께서 받으셔야 한다. 함흥 본궁으로 들어가 어전에 항복을 아뢰어라."

조사의는 자기 군사의 위엄을 더한층 높이기 위하여 태상왕한테 직접 항복을 드리도록 했다. 조사의는 군사들에게 명하여 승전고를 올리고 이천우를 함거에 실어 태상왕 전하의 거접하는 함흥 본궁으로 들어갔다. 태상왕 이성계는 승전고를 올리며 돌아오는 조사의의 군사를 바라보자 아들 방원의 군사와 싸웠다는 구슬픈 사실도 잊어버리고 마음이 거뜬하게 가벼웠다. "이겼구나!" 하는 기쁜 감정이 등골 속으로 찌르르 스며들었다.

 

마침내 칼을 뽑는 태종

승전고 북소리와 군사들의 환호성이 뜸하게 되자 조사의는 송도군 대장 이천우를 섬돌 아래 결박 지어 꿇리고 함흥 본궁으로 들어가 태상왕께 아뢰었다.

"역적 방원의 대장 이천우를 산 채로 잡아 바치옵니다. 전하, 목을 베오리까? 어찌하오리까?"

함흥에 오는 차사들도 목을 베었는데, 과인에게 칼을 들이댄 이천우를 살려줄 도리가 없다.

"정남대장군은 과인의 명을 받들어 곧 참형에 처하라."

태상왕의 준엄한 분부에 의하여 이천우는 함흥 본궁 밖 형장으로 끌려나가 붉은 옷 입은 망나니한테 목이 잘려졌다. 조사의의 군대는 용기가 백 배나 더 솟구쳤다. 도순문사 박만이 도진무사 박분숭, 경력 허형의 무리와 함께 항복한 지 며칠이 못되어 대군을 거느리고 함흥올 쳐들어온 송도군이 태반이나 죽은 후에 대장이 생금되어 목을 잘리게 되니 조사의의 군사는 어깨가 더한층 으쓱해졌다. 이때 이천우와 좌우 양익이 되어 함흥으로 쳐올라가던 이빈이 거느린 군사는 강동에 있었다. 조사의는 다시 군사를 점고한 후에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태상왕 전하의 조칙을 받든 우리 군대는 천하무적이다. 대를 쪼개는 듯한, 승승장구하는 기상으로 강동에 있는 이빈의 군대를 격파하라."

조사의의 군사는 평양 강동에 있는 이빈의 군사들마저 항복시키려고, 안주 청천강으로 향하여 호호탕탕 내려갔다. 아직 항복하지 아니했던 평안군과 호아해도의 수령 방백들은 급히 파발마를 송도로 달려 전투태세를 보고했다.

"태상왕 전하의 명령으로 움직인 조사의의 군사는 고맹주에서 큰 싸움을 하여 이천우의 군사는 함몰되고, 이천우는 산 채로 잡혀 참형을 당했습니다. 지금, 조사의의 대병은 안주 청천강을 건나 평양으로 내려오는 중, 강동에 있는 이빈의 군사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일이 급하옵기 장계로 고합니다."

각 읍 수령들의 똑같은 장계는 요란한 파발마 방울 소리와 함께 송도로 치달리고, 산마다 급한 것을 보하는 봉홧불은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연달아 연기와 불꽃을 뿜었다.

임금 이방원은 선발대로 보낸 이천우의 군사가 함몰되고 이천우는 생금이 되어 참형을 당했다는 급한 보고를 받자 결연히 뜻을 결정했다. 크나큰 위기였다. 비록 아버지 태상왕과 칼을 겨누어 승부를 결한다 할지라도 감연히 싸워서 이겨야 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결정했다. 비록 후세에 자식이 아비를 향하여 칼을 겨누고 일어섰다는 추한 누명을 듣는다 할지라도 자기는 싸워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체면과 도의만을 찾아 지킨다면, 태종 자신이 여태껏 쌓아 올린 업적은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갈 뿐 아니라 자기는 아버지의 군사한테 참형을 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왕위에서 쫓겨나서 방간의 신세와 같이 멀고 먼 원악도로 산 송장이 되어 귀양을 가지 아니하면 아니될 비참한 운명 속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태종은 분명히 만조백관을 어전으로 불렀다. 영의정 이하 육조판서와 삼군부 장성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반란군 조사의는 맹랑하게도 고맹주에서 이천우의 군사를 함몰시키고 이천우를 사로잡은 후에 목 베어 죽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태상왕 전하의 명령으로 과인을 정복한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민심을 혼란시키면서 안주 청천강을 넘어 평양으로 내려와 강동에 진 치고 있는 이빈을 공격하는 듯하다. 과인은 그대로 앉아서 바라볼 수 없다. 한 걸음 잘못하면 왕조창업의 근본 대업이 뭉그러지고 말 것이다. 나는 차마 이씨의 국가가 조씨의 국가로 변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나는 결연히 친정하기로 결정했다. 영의정 이하 모든 대신과 삼군부 장성들은 과연의 결연한 뜻을 받들어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게 하라."

영의정 이하 모든 신하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영의정 하윤이 군신을 대표하여 어전에 나가 아뢴다.

"지당하신 분부올시다."

태종 이방원은 화경 같은 큰 눈을 떠서 다시 군신들을 바라본다.

"지금 반란을 일으킨 조사의는 방석, 방번의 모후 되는 돌아간 강비의 족속들이다. 이자는 내가 후하게 대접했건만 불쾌하게 마음을 먹고, 노망하시어 함흥까지 가신 태상왕 전하의 심약하신 마음을 흔들어 반란군을 친히 지휘하시는 것처럼 가장해 만들었다. 그러나 결코 이것은 태상왕 전하의 본뜻이 아니실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자식이 아비에게 칼을 뽑았다고 비판하리라. 그러나 나는 조사의의 군사를 치는 것이지, 결코 태상왕의 군사를 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신하들은 경위를 알기 바란다."

태종 이방원은 엄숙히 선언했다. 화경 같은 큰 눈에 불을 뿜에 엄숙하게 선언하는 태종 이방원의 결연한 말을 듣자, 영의정 하윤은 또다시 어전 가깝게 나가 태종의 뜻을 받들어 아뢴다.

"반란군은 자기 위치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그같은 야비한 방책을 써서 백성들의 마음을 선동시키려 한 것입니다. 빨리 정병을 일으키시어 난신적자를 토멸하시옵소서."

영의정 하윤의 아뢰는 말이 떨어지자 태종은 곧 대장군을 임명시켰다.

"승지는 가까이 와서 비망기를 받으라."

승정원 승지들은 왕의 좌우 옆으로 나가 시립했다.

"붓을 들라."

승지들은 어전에 부복하여 붓을 들었다.

"과인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나가게 되니 송도를 지킬 대신이 필요하다. 여흥부원군 민제로 수성도통사를 삼고 권화로 도진무를 삼으라."

승지들은 어명을 받아 기록했다. 수성도통사 민제는 태종비 민씨의 아버지다.

"다음엔 친정하는 장수들을 임명할 테다. 이거이로 좌도도통사를 삼고 이숙번으로 도진무를 삼고, 민무질로 도병마사를 삼고, 이지, 곽충보, 이행, 한규로 조전절제사를 삼으라."

승지는 명을 받들어 성명을 기록했다. 이 중에 도병마사 민무질은 태종의 처남이다. 태종 이방원은 처가편이 본가편보다도 가장 미더운 모양이다. 송도를 지키는 수성대장의 중대한 책임은 장인한테 맡기고, 군사와 말을 조달하는 긴한 책임은 처남한테 맡겼다.

"나의 친정은 시각을 지체할수 없다. 내일 이른 아침 때 대군을 휘동하여 출발하기로 한다. 모든 장수들의 임명하는 의식을 당장 실행하라."

승지는 즉석에서 첩지를 쓰고 상서원에서는 대장들의 절월과 인수며 금부은월을 받들어 나갔다. 태종은 수성도통사 민제 이하 여러 장수에게 금도끼 은도끼에 옥절과 인뚱이를 친히 내렸다.

이튿날이 밝자 태종은 황금 투구에 황금 갑옷을 입고 금안장으로 꾸민 백마 위에 높이 앉아 산호 채찍을 들어 대장과 군사를 지휘하여 행군을 개시하게 했다. 송도에서 떠나는 태종의 친정군은 십만 대병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의 꼴이 보기 싫어서 달아난 함흥으로 장차 대군을 몰아 친히 활시위를 당기려 했다.

 

울어 간하는 소년 왕자

태종 이방원이 금안백마에 높이 앉아 삼군부 장성들에게 호위되어 송도의 왕궁인 경덕궁 궐문밖으로 나가려 할 때, 홀연 전반 같은 머리채를 늘이고 붉은 강사포를 입은 소년 왕자 한 사람이 전하가 탄 백마 앞에 나타났다. 미목이 청수하고 걸음걸이가 의젓했다. 나이는 아홉 살이 아니면 열 살쯤 되어 보였다. 키가 휠씬 크고, 어깨판이 떡 벌어졌다. 삼군부 장성들과 기치 창검을 든 어림 군사들은 소년 왕자를 바라보자 목례를 드리며 몸을 굽혀 길을 터주었다. 비록 나이는 십 대 소년이지만 상당히 지체가 높은 공자 왕손인 듯했다. 소년 왕자는 의젓하게 걸음을 옮겨서 태종이 타고 있는 어승마 앞에 당도하자 땅에 엎드려 전하께 배를 드렸다. 삼군부 장성 이하 군졸들은 전하가 친정을 하러 멀리 함흥까지 나가게 되니, 왕자가 전송을 하러 나온 줄 알았다. 마상에 높이 앉아 있는 태종의 눈에도, 문후를 드려서 배를 하는 왕자의 모습이 비쳤다. 전하 역시 왕자가 전송을 나온 것으로 알았다.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절하고 일어서는 왕자를 향하여 용안에 가득 미소를 띠고 분부를 내렸다.

"오오, 제 가 나왔느냐!"

""

소년 왕자는 두 손길을 마주 잡고 대답했다. 전하는 다시 미소를 풍기며 귀엽다는 표정으로 왕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겠다. 여러 날 될 것 같다. 나 없는 동안에 부지런하게 공부를 잘 해라. 그리고 네 동생들의 공부도 돌보아주고-."

태종은 차마 어린 아들에게 향하여 아버지가 일으킨 반란군에게 칼을 뽑아 소탕하러 나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냥을 나간다고 핑계를 댔다. 소년 왕자는 아버지가 사냥을 하러 나간다는 말이 거짓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궁녀들에게 이번 아버지의 거둥행차가 함흥에서 내려오는 할아버지의 군사를 쳐부수러 나가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어머니 모후한테서도 들어 알았다. 새벽에 외조부 민제와 외숙인 민무질 장군한테도 아버지의 거둥하는 경위를 들어 알고 있었다. 사산에 봉홧불이 켜지고 삼군부의 십만 대병이 움직이는 것을 생기 있는 푸른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사냥을 나가는 데 십만 대병이 움직일 까닭이 없고, 난리가 날 때 켜지는 봉화가 산봉우리마다 푸른 연기를 뿜어 불길이 일어날 리가 없다. 소년 왕자는 아버지가 사냥을 나간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 그리고 자기에게는 글공부를 잘하라고 당부했을 때 마음이 무척 슬펐다. 소년 왕자의 총명하고 맑은 눈에는 이슬 같은 눈물이 새까만 눈동자 사이로 글썽글썽 어렸다.

"아바마마,소자를 속이지 마십쇼."

소년 왕자는 가만히 목멘 소리로 부왕의 용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앵도알을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이 슬픔을 머금어 비쭉했다. 태종 이방원은 어이가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속이다니."

소년 왕자는 눈물 어린 눈으로 다시 부왕의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무척 마음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잠시 땅을 굽어보다가 다시 아바마마의 용안을 바라보았다. 파란 눈에 동자가 반짝이고 빛을 뿜었다. 이내 뱉듯이 고했다.

"소자는 아직 어립니다. 그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소년의 목소리는 쨍했다. 태종 이방원은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다 알다니, 무엇을 다 안단 말이냐?"

"함흥서, 할아버님께서 군사를 보내서 아바마마를 토벌하라고 하신 일을 다 알고 있습니다."

"너 어디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었느냐?"

소년 왕자는 새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아바마마를 똑바로 쳐다 보며 고했다.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올시다.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아바마마께서는 지금 태상왕 전하의 군사를 치러 함흥으로 행차하십니다. 소자를 속이지 마십쇼. 다 알고 있습니다."

소년 왕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느냐? 잘못 안 소리다. 사냥을 가는 길이다."

아무리 패기 강한 태종이라 하나 아들 앞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불행하고 명예스럽지 못한 일을 알리고 싶지 아니했다. 딱 잡아떼었다.

"누구한테 들은 것이 아니올시다. 봉홧불이 산마다 켜졌습니다. 동북면, 태상왕 전하께서 계신 곳에서는 날마다 파발말이 방울을 소란스럽게 흔들고 뛰어들었습니다. 아바마마의 문안사들은 가는 족족 죄없이 죽어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지금 십만 대병을 거느려 친정을 하시러 나서셨습니다. 사냥하시러 가는 길에 십만 대병을 움직이실 까닭이 없습니다. 이 모든 점을 미루어보아 아바마마께서는 할아버지 태상왕의 군사를 치러 가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바마마, 친정을 중지하옵소서."

소년 왕자는 목이 메어 간했다. 그는 누구한테 들었다고, 어떤 사람을 지적해서 말하지 아니했다. 슬기스럽게 봉홧불을 들어 말하고, 십만 대병을 동원하여 사냥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지적했다. 아버지의 성격을 잘 아는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을 지적했다간 그 사람의 목이 달아나게 될 것을 짐작하는 때문이다. 태종은 더 이상 어린 아들을 숨길 수 없었다. 용안이 잠시 붉어졌다. 이내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소년 왕자를 굽어보며 말했다.

"사냥을 나간다고 말한 것은 어린 네가 놀랄까 봐 그리 말한 것이다. 기실, 동북면에서는 반란군이 일어났다. 강비마마의 조카 조사의란 자가 함흥에 계신 태상왕 전하를 팔고 반란군을 일으켜서, 지금 송도로 쳐들어오고 있다. 그러하니 내가 친히 나서서, 역적놈을 잡으러 나가는 것이다. 너는 조금도 근심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 공부나 해라."

태종은 비로소 어린 왕자에게 출병하는 까닭을 말했다. 소년 왕자는 귀 기울여 듣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공손히 다시 고했다.

"아바마마께서 친히 나가시는 일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제왕의 몸은 태산교악 같이 장중하십니다. 함부로 왕도를 떠나실 수 없습니다. 대장을 대신 보내십시오."

어린 왕자는 너무나 숙성했다. 말소리가 장중했다. 아버지 태종은 미소를 짓지 아니할 수 없었다.

"기특하다. 네 말이 옳다. 제왕이 함부로 왕도를 비워놓고 출정하지 않는 일을 나도 짐작한다. 그러나 이천우라는 대장에게 삼만 군사를 주어 보냈더니 용렬하게 고맹주에서 함몰이 되어버렸다. 그대로 앉아서 바라볼 수 없다. 대신과 의논한 후에 친정하기로 결연히 결심한 것이다. 그리 알고 너는 돌아가 안심하고 공부하라."

소년 왕자는 다시 말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부왕께 고했다.

"일군이 패했으면 이군을 보내시고, 이군이 패했으면 삼군을 보내실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친정하시는 일은 결코 불가합니다."

태종은 다시 용안에 화색을 띠어 말씀을 내렸다.

"왕도가 공허한 것을 걱정해서 그리하느냐. 아무 염려 없다. 너의 외조부 민대제학으로 수성대신을 삼았다. 안심하고 글공부를 하라."

소년 왕자의 얼굴은 어둡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기의 진정한 뜻을 몰라주는 것이 답답했다. 다시 간곡하게 아뢴다.

"아바마마, 소자는 왕도가 비게 되는 것을 근심해서 아뢰는 말씀이 아니올시다. 만약, 아바마마께서 이번에 친히 군사를 거느려 나가신다면 아바마마께서는 백대의 죄인이 되십니다."

소년 왕자의 아뢰는 말은 너무나 대담했다. 좌우에 모시어 섰는 영의정 하윤 이하 모든 대신과 대장들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태종 이방원의 용안에도 노기가 부풀어 올랐다.

"백대의 죄인이라니?"

옥음이 거칠었다. 부리부리한 큰 눈에 화경같이 열기를 뿜으며 둥그렇게 떠졌다.

", 그렇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오늘 친정을 하신다면 아바마마께서는 백대의 불효자가 되십니다. 달리 대장을 보내시고 아바마마께서는 친정을 중지하십시오!"

소년 왕자의 아뢰는 소리는 더한층 야무지고 또렸했다. 태종은 열화 같은 목소리로 뱉듯이 말씀했다.

"불효자가 된다. 어찌해서 불효자가 되느냐? 반란군을 일으켜 쳐들어오는 조사의 놈을 치러 나가는데, 어찌해서 불효자가 된다 하느냐? 입을 닥쳐라. 함부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방자하고 무엄하고나!"

태종은 어린 왕자의 말하는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자기는 이 일로 인해서 무한 번뇌를 느꼈던 것이다. 영의정 하윤과도 여러 차례 의논하고 의논해서 이같이 친정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들한테 굽히기 싫었다. 한번 자기의 위신을 떨쳐보는 것이다. 태종은 노기가 등등했다. 소년 왕자에게 무엄하고나 하고 호통을 쳐서 꾸짖은 후에 이내 말을 채질해 앞으로 나갔다. 만조백관과 대장들이 뒤를 따랐다. 소년 왕자는 어승마의 고삐를 휘어잡고 울며 간했다.

"조사의의 반란군을 진압하시지 말라 한 것이 아니올시다. 아바마마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시라 할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친정을 하신다면 태상왕께 칼을 빼어드는 일이 됩니다. 천추만세 후에 아바마마께서는 무부 무군의 누명을 면치 못하십니다."

왕자는 몸부림치며 말고삐에 매달렸다. 목이 메어 말을 이루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은 말머리에 매달려 몸부림치는 왕자를 꾸짖는다.

"요망한 어린것이 무엇을 안다고 감히 출정하는 길을 어지럽게 하느냐. 빨리 물러가라. 아니 물러가면 참형에 처하리라. 과인은 무부무군하다는 누명을 써도 좋다! 과인이 만약 친정을 하지 아니한다면 과인이 창업한 이 나라 삼천리강산은 이씨의 기업이 되지 아니하고 조가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빨리 길을 틔우라. 계속해서 어리광을 핀다면 군법시행을 하리라."

아바마마인 태종의 호통소리는 벼락불이 떨어지는 듯했다. 참형에 처해서 군법시행을 한다는 말에 옆에 있던 늙은 내시는 황겁했다. 급히 내전으로 뛰어들었다. 직접 중전께 고했다.

"중전마마께 아뢰오. 큰일 났습니다. 큰 왕자를 참형에 처한다 하십니다."

중전 민씨는 깜짝 놀랐다.

"웬일이냐?"

"출정해 나가시는 길을 큰 왕자께서 울면서 막으십니다. 그러하와 전하께서는 군법시행을 하신다 합니다."

민비는 급히 옥교에 올랐다. 남편 되는 태종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아들의 성정도 잘 알았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군법시행에 처할지도 몰랐다. 만조백관들이 모인 것을 알면서도 체면 불고하고 옥교를 몰았다. 멀리 바라보니 왕자는 어승마의 말고삐를 붙들고 늘어졌다. 왕후는 급했다.

"빨리 몰아라."

무예청들은 풍우 같이 몰았다. 어승마 지척지지에 옥교가 닿아졌다. 왕후 민씨는 급히 옥교에서 내렸다. 오아자 앞으로 가까이 갔다. 말고삐를 붙들고 목메어 우는 왕자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제 야, 너무나 무엄하고나. 아바마마께 간해서 아니 들으시면 울며 물러가는 법이다. 불경스럽게 어승마의 고삐를 잡는 법은 없느니라."

왕비는 소년 왕자의 말고삐를 잡은 손을 풀었다.

"황공무지하옵니다. 어미, 대신하여 죄를 받겠습니다. 어서 어가를 움직이옵소서."

태종의 출정하는 금안백마는 비로소 앞으로 나갔다.

 

왕실의 어린 세 별

태조의 승낙을 받아 송도로 쳐들어오는 함흥군을 친히 공격하러 나가는 태종을 울어 간한 소년 왕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곧 태종의 장자인 제다. 태종 이방원과 왕후 민씨 사이에는 태종이 아직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아들 사형제를 두었다. 큰아들은 제요, 둘째 아들은 보 요, 셋째 아들은 도요, 네째 아들은 종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큰아들 제는 태조가 고려 왕실을 뺏아 임금이 된 지 3년째 되는 갑술년에 났으니, 태종이 조사의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함흥으로 출병했을 때는 나이 아홉 살이었다. 둘째 아들 보는 태조 5년 병자에 났으니, 큰아들 제보다 두 살이 아래다. 이때 도의 나이는 여섯 살이 되었다. 네째 아들 종은 나이 너무 어리니 강보에 싸인 아기였다. 철을 몰랐다.

이때 태종은 왕위에 오른 지 일천하고 나랏일이 어수선해서 정신을 못 차리던 때이므로 왕자들에게 아직 군호를 내리지 못했다. 큰아들 제는 태조가 한양에 천도하기 이전에 송도에서 났으니 송도 태생이요, 둘째 아들 보와 셋째 아들 도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해와 이듬해에 났으니 한양 태생이었다. 큰아들 제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에 아버지가 정안군으로 있을 때 왕세자인 삼촌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끔찍끔찍한 집안싸움을 목도해 보았다. 이때 제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다섯 살에 입학을 해서 이때는 제법 글자를 쓸 줄 알고 글 뜻을 어렴풋이 알아들을 때다.

할아버지는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금강산으로 달아나고, 둘째아버지가 왕이 되었다 했다. 뒤숭숭한 일이었다. 소년의 순진한 마음에 불안스런 생각을 갖게 됐다. 웬일인지 둘째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천년만년 살려고 정해 논 한양 서울을 버리고 실인심을 한 송도로 다시 돌아갔다. 진정 어수선 산란한 일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구슬픈 피비린내 나는 일이 집안에 일어났다. 한양에 머물러 있던 아버지는 별안간 군사를 거느리고 송도로 올라가더니, 셋째 숙부 방간과 큰 전쟁을 일으켜서 사촌 형 맹종을 쏘아 죽였다 한다. 소년 제의 가슴에는 씻지 못할 상처로 멍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아버지는 한양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송도로 불렀다. 아버지는 왕세자가 됐다고 했다. 아버지의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호걸 웃음이 연해 터졌다. 용마루가 찌렁찌렁 울렸다. 소년 제는 기쁠 것도 없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왕세자가 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때 아버지는 선위를 받아서 왕이 되었다. 이때 궁중 안에서는 궁녀들 사이에 수군수군 뒷공론이 부산했다. 아버지를 추대하려고 대신들이 둘째아버지한테 왕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우겨댔다는 둥, 아버지는 둘째아버지한테 문안을 들어갈 때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둘째아버지를 흘겨봤다는 둥, 그래서 왕비인 둘째어머니 김씨는 어서 임금의 자리를 아버지한테 내주라고 졸랐다는 둥 별의별 소리가 다 많았다. 이때 둘째아버지는 아들들을 함빡 승려로 만들어 절로 보냈다. 방석, 방번이나 맹종 형처럼 비명횡사를 할까 봐 호신책을 쓴 것이다.

제는 중이 되어 간 사촌 형들을 보고 싶었다. 한편으로 아버지의 처사를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미 왕세자다. 둘째아버지 백 세후에는 으레 왕위에 나갈 터인데, 무엇이 그리 조급해서 대신들을 시켜서 형님한테 왕위를 내놓으라고 하고 문안을 들어갈 때마다 눈을 흘려서 둘째아버지를 불안스럽게 만들었는가 하고 아버지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둘째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임금의 자리를 내줄 때 할아버지 태상왕께도 고하지 아니하고 왕위를 내주었다 한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또 한 번 크나큰 벼락 불덩이가 떨어질 것이 무섭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임금의 자리에 나갔다는 말을 듣고 역정이 크게 나서 함흥올 달아나버렸다. 제는 어린 마음에도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떡해 먹을 집안이라고 한탄했다. 아니나 다를까. 함흥차사란 소리가 떠돌았다. 아버지의 문안 사신이 가기만 하면 할아버지는 목을 자라 보낸다고 온 궁중이 소란하게 떠들어댔다. 박순이란 재상은 말을 잘해서 살아서 돌아오다가 또다시 죽이라는 영이 내려 허리 반 동강이 잘라져서 뱃전을 걸치고 죽었다 한다. 소름이 쪽 끼치는 소리였다. 아홉 살 된 왕자 제 는 궁녀들한테 이 비참한 소리를 듣고 밤에 잠이 오지 아니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죽여 울었다. 하루는 난리가 났다고 온 궁중이 소란했다. 할아버지가 조가라는 대장을 앞세우고 여진군사까지 동원해서 아버지를 치러 들어온다고 야단이 났다. 이가라는 대장을 내보내서 막아낸다 하더니 불길한 소식이 들어왔다. 파발말은 요란하게 방울을 흔들어 뛰어들고 산마다 봉홧불은 푸른 연기를 뿜어 불길이 치솟았다. 송도 안이 발끈 뒤집혔다. 제는 아우 보와 도 와 함께 스승인 보덕한테 글공부를 하다가 궁금증이 나서 물었다.

"봉홧불이 송악산에까지 켜지고 파발마 뛰닫는 소리가 요란하니 웬일입니까?"

보덕은 간단하게 대답하고 입을 닫았다.

"난리가 났는데도 글만 읽고 있으란 말요? 글도 중요하지만, 세상 형편도 알아야 할 것 아니겠소."

아홉 살 된 제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보덕에게 추궁해 물었다. 옆에 있던 보는 일곱 살이었다. 난리가 나면 사람이 산더미같이 죽는 것을 알았다. 눈을 깜박거리며 언니와 보덕의 주고받는 말을 지켜 듣고 있었다. 도는 여섯 살이었다. 그저 무섭기만 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보덕은 너무나 영리하고 똑똑한 제의 질문에 기가 죽었다. 그러나 함부로 말했다가는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그저, 소인은 모릅니다. 알 도리가 없습니다. 밤낮 책만 읽고 있으니, 바깥소문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보덕은 손을 모아 싹싹 문지르고 있었다. 제는 보덕의 태도가 너무나 야비하다고 생각했다. 썩은 선비의 나약한 태도가 분명했다.

"보덕은 난리가 나서 죽게 되어도 손만 싹싹 비비고 있을 테요."

큰소리로 외치고, 발길로 책을 박차고 일어섰다. 보도 제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도는 언니들이 일어나니 덩달아서 일어났다. 보는 화가 치밀어 나오는 제한테 속삭였다.

"언니, 상방 궁녀한테 물어봅시다."

제는 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네 말이 옳다. 상방 궁녀한테로 가자."

제와 보와 도는 왕자들의 뒷배를 거두는 상방 궁녀한테로 들어갔다. 상방 궁녀는 고려 왕실에서 거행하고 있는 늙은 궁녀였다. 새로 왕국을 건설한 이성계는 궁중의 의식을 알 길이 없었다. 고려 왕실에서 거행하던 젊고 늙은 궁녀들 중에서 소원하는 궁녀들은 그대로 궁중에 두어서 모든 의식을 맡게 했던 것이다.

세 왕자는 저녁밥을 먹은 후에 늙은 상궁을 청했다. 제가 먼저 물었다.

"노상궁한테 물어볼 말이 있소."

해사하게 늙은 상궁을 둘러싸고 둥글게 원을 지어 앉았다. 큰 왕자 제가 수심에 싸인 얼굴로 싸인 얼굴로 늙은 상궁에게 물었다.

"상궁! 난리가 났다고 파발말이 뛰어다니고, 산봉우리마다 봉홧불이 들려지는데, 나라가 소란하오. 무슨 소문을 들었소?"

늙은 상궁은 큰 왕자가 영민하고 똑똑한 것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귀엽다고 생각했다. 제가 항상 상궁, 상궁 하고 따르니 정도 들었다.

"아기씨, 구중궁궐 깊숙한 지밀 속에 파묻혀 있는 소인네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늙은 상궁은 여전히 주름진 눈시울에 싱글싱글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상궁, 그러지 말고 어서 대답해주오."

제는 얼굴빛을 정색하고 졸랐다.

"어서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해주오."

둘째 왕자 보도 졸랐다. 늙은 상궁은 하는 수 없다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함흥차사 이야기는 전에 말씀해서 까닭을 아셨지요?"

제와 보는 고개를 그덕였다. 셋째 왕자도 는 아직 판단을 내릴 나이가 아니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상궁과 언니들의 주고받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늙은 상궁은 말을 계속했다.

"일은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나기 이전에 강비마마의 소생이신 세자 방석을 상감께서 처치하신 데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분이 부상견이 되었습니다. 이 까닭에 이번에도 난리가 난 것입니다."

늙은 상궁의 말을 듣자 큰 왕자 제의 얼굴에 어둔 그림자가 짙게 돌았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치러 군사를 거느리고 함흥서 송도로 내려오는 모양이로구려."

큰 왕자 제는 말을 마치자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죠."

이번엔 늙은 상궁의 얼굴빛도 침울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죽이려고 전쟁을 하는 판일세!"

이번엔 둘째 보가 말했다. 일곱 살 먹은 보도 형만큼 영리하고 똑똑했다. 여섯 살 먹은 셋째 도는 무섭기만 했다. 언니 제의 손을 바싹 잡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늙은 상궁이 다시 해명을 한다.

"태상왕 전하께서 친히 오시는 것이 아니고, 돌아간 강바마마의 친정 편으로 조카뻘 되는 안변부사 조사의란 이가 대장이 되어서 송도로 쳐들어온다 하오. 그래서 정부에서는 조사의를 치라고 이천우를 보냈는데 단번에 패군이 되어 죽었다 하오. 그래서 이번에는 상감마마께서 친정을 하러 나가신다 하오."

큰 왕자 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수정같이 맑은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혼자 탄식조로 말했다.

"아버지가 친정을 하시다니 말이 되오. 아들이 어찌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빼어들 수 있소?"

고려 궁중에서 거행하던 늙은 상궁은 큰 왕자 제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다.

"상감께서 친정하시는 일은 태상왕께 칼을 빼시는 것이 아닙니다. 조사의를 토벌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큰 왕자 제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되는 말요. 조사의가 혼자서 반란을 일으켰다면 전하께서 친정을 하셔도 좋쇼. 그러나 조사의는 일단 태상왕 전하의 명령을 받아서 송도로 내려오는 것인, 전하께서 친정을 하신 다면 곧 전하의 아버지 태상왕 전하께 칼을 뽑아 드는 격이 되오. 부자간의 도리로, 아바마마께서는 결코 친정을 해서는 아니되오!"

"그렇다면 조사의가 송도로 쳐들어와서 전하의 용상에 앉아도 좋단 말씀입니까?"

상궁은 해사하게 늙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반문했다. 마음속으로 기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한 번 큰 왕자의 마음을 떠보느라고 이같이 말했다.

큰 왕자 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아따, 늙은이 말이 참 답답하오. 조사의가 바보 숙맥이 아닌 담에 어찌 자기 자신이 용상에 올라 있겠소. 슬쩍 태상왕 전하를 다시 왕으로 모실 계획이 분명하오. 그러하니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칼을 뽑는 불륜 불효가 되고 마오. 몇 번 을 패하더라도 다른 대장을 보내서 조사의를 토멸해야 하오."

일곱 살 먹은 둘째 왕자 보와 여섯 살 먹은 셋째 왕자 도도 어렴풋 난리의 형편을 알아들었다. 언니 제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늙은 상궁은 제의 총명 영리한 말에 또 한 번 마음속으로 놀랐다.

"큰 아기씨의 말씀이 옳소. 전하께서 친정을 하신다면 과연 아버님한테 아드님이 칼을 뽑는 격이 되겠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늙은 상궁은 왕자 제 의 마음을 또 한 번 떠보았다. 늙은 상궁은 항상 고려의 옛 임금을 사모했다. 어수선 산란한 이씨 왕실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총명 영리하고 때 묻지 아니한 왕자 제의 태도를 바라보니 떡갈나무는 싹틀 때부터 알아본다고 장래 사람다운 사람이 될 듯했다. 귀염스런 생각이 나서 이같이 마음을 떠보고 있었다. 큰 왕자 제는 상궁의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말을 듣자, 고개를 숙여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동안 후에 제는 고개를 들었다. 소년다운 사기 없는 순진한 얼굴을 들어 물었다.

"요사이 아바마마께서 총애한다는 젊은 상궁이 있다는구려. 필시 상궁하고도 가까운 사이일 듯하오. 고려 왕실에 함께 있었다 하오. 상궁이 한번 이 사람한테 말해서 아바마마께서 친히 가시지 못하도록 하면 어떠하겠소?"

제의 말을 듣자 늙은 상궁은 놀랐다. 이씨 왕실에서는 처음으로 왕궁을 창설하고 보니 왕실 전반에 걸쳐서 의식과 예절을 차릴 줄 몰랐다. 무식하고 무무하다는 조롱을 면하려고 고려 왕실에서 거행하던 궁녀들을 원하는 사람이면 죽이지 아니하고 포섭해 썼다. 고려 왕실의 궁녀는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나라가 망할 때, 두문동 칠십여 인들의 본을 떠서 자결해 죽은 여자가 많았다. 그러나 살려는 것은 생물의 본능이었다. 차마 자기 손으로 자기의 목숨을 끊기가 어려웠다. 살아서 이씨 왕실에 시중을 드는 궁녀도 있고, 젊은 예쁜 나인도 있었다. 이들 궁녀는 태조와 왕비 강씨의 시중을 들었고, 다음에는 정종과 왕비 김씨를 모시었다.

제의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이 세자로 있다가 왕위에 나가 용상에 앉게 되니 고려에서 넘어온 궁녀들은 저절로 새 상감 이방원과 새 왕비 민씨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이 중에 젊고 아름다운, 자색이 뛰어난 궁녀가 한 사람 있었다. 이름을 앵도라 했다. 위인이 민첩하고 영리했다. 왕비 민씨는 지밀 침전에 두고 손발같이 부렸다. 태종 이방원은 앵도의 자색을 탐했다. 마침내 제왕의 위세를 빌려 앵도의 정조를 유린한 후에 후궁으로 삼았다. 이 일을 알게 된 왕비 민씨는 질투하는 감정이 불을 뿜었다.

민왕후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방원이 세자 방석을 처치하러 대궐로 들어갈 때, 남편 이방원에게 어서 빨리 마음을 결단하라고 격려한 후에 갑옷을 입혀주고 투구를 씌워주어서 혁명을 일으키게 했던 장본인의 한 사람이었다. 정안군 이방원이 오늘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결단성이 강한 여장부의 별명을 듣는 민비의 내조의 힘이 컸던 것이다. 태종이 자색 있는 고려 왕실의 젊은 궁녀를 후궁으로 삼게 되니 왕실 지밀엔 가끔 풍파가 일기 시작했다. 왕궁 지밀에서는 상감 태종과 왕비 민씨가 가끔가끔 소리를 높여 다투었다.

"국가가 아직도 안정이 되지 아니하고 백성들은 갈팡질팡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이때, 상감은 궁녀들의 궁둥이만 따라다니면서 정신없이 세월을 보내고 계시니 장차 어찌하잔 작정입니까?"

여성 답지 아니한 민왕후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울렸다. 민왕후는 역시 함경도 함흥 태생이었다.

"내가 언제 궁녀들의 궁둥이를 따라다녔소? 왕후도 별소리를 다 하는구려."

태종 이방원은 벙긋벙긋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라니, 무슨 말씀요. 내가 부리던 앵도를 슬며시 뺏어다가 후궁을 삼아 놓고 시치미를 뗀단 말씀요. 이것이 군왕의 체통입니까. 보시오, 나라 꼴이 어찌 되어가나? 아바마마께서는 함흥으로 가신 후에 문안사가 가기만 하면 목을 베어 죽여서 함흥차사라는 새로운 말이 세상에 생겨나게 된 이때, 상감께서는 호색을 해서 정신을 잃고 계시니 장차 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소. 계집질을 하기 위해서 전하는 혁명을 일으키셨단 말씀요. 좀 생각해 보시오."

기세 좋게 떠들어대는 왕비 앞에 태종은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궁녀 앵도를 가까이 한 것은 사실이었다. 목소리를 나직하게 해서 대답했다.

"남자가 첩실 하나쯤 두는 일은 예사인데, 더구나 임금이라는 지존의 자리에 있으면서 후궁 한 명쯤 둔 것을 가지고 무엇이 그리 큰일 났다고 이같이 떠들어대오. 여자란 질투를 해서는 못쓰오. 예로부터 질투하는 여자는 칠거지악에 든다 했소. 왕후는 체통을 지키시오. 보통 사람과 다르오."

태종 이방원은 점잖게 의젓을 뺐다. 태종비 민씨는 불끈했다. 남자 같은 성격이었다.

"누구를 타이르시오. 나도 그것쯤은 알고 있소. 그러나 앵도는 고려 왕실에 충성을 다했던 궁녀올시다. 고려 왕실이 전하의 손에 망한 것을 보고 비수 같은 새파란 칼날을 마음속에 품었을 것입니다. 공연히 가까이하시다가 침실 안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오. 어서 앵도와 정을 끊으시오!"

민왕후는 살기 가득 찬 눈으로 상감 태종을 흘겼다.

"생각해보리다."

상감 태종은 숙녹피가 되어 대답했다. 왕과 왕비는 언성을 높여서 이같이 다투고 있을 때 큰 왕자 제와 둘째 왕자 보와 셋째 왕자도 는 저녁 문안을 들어왔다. 삼형제는 장지문을 열고 문안을 들어가려 하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성을 높여 다투는 소리를 듣고 큰 왕자는 아우들에게 손을 저어 발길을 멈추게 했다. 큰 왕자는 아우들에게 발길을 멈추라고 제지한 후에 장지 밖에서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무척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라를 안정시켜서 백성들을 편안케 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궁녀 앵도를 사랑해서 후궁을 삼았다고 아버지를 논박하는 소리다. 순진한 마음에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혁명을 일으켜서 창업을 한다고 한 것이 겨우 계집질을 하는 것이 막상 가는 일이냐고 푸념했다. 역시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첩으로 삼은 후궁 앵도는 고려 왕실을 섬기던 여자로서 항상 옛 임금을 생각해서 비수 같은 날카로운 마음을 품었을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과연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질투를 한다고 꾸짖는 아버지가 불쾌했다. 질투를 하는 여자는 칠거지악에 든다고 아버지는 위협했다. 떠들어대면 내쫒는다는 말이다. 어머니를 동정하고 싶은 생각이 구름 일듯 일어났다.

큰 왕자의 마음과 같이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다만 셋째 왕자 도는 아직 나이 여섯 살밖에 아니되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투고 소란을 떠는 싸움이 슬프기만 했다. 제는 차마 더 서서 엿들을 수 없었다. 아우들에게 손짓을 해서 문안을 중지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리하여 큰 왕자 제와 둘째 왕자 보는 아버지의 추잡한 정사를 알았다. 셋째 왕자 도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전에 없이 어찌해서 저다지 홤고하지 못하고 싸우나 하고 눈물을 머금었다.

큰 왕자 제와 둘째 왕자 보는 슬펐다. 귀여워해 주는 늙은 상궁에게로 갔다. 큰 왕자는 조용히 늙은 상궁에게 물었다.

"고려 왕실에서 일하던 나인 중에 앵도라는 궁녀가 있소?"

늙은 상궁은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후궁을 삼았다 하니 과연 그렇소?"

"상감마마께서 총애하십니다. 후궁을 봉하셨습니다."

늙은 상궁은 계속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큰왕자는 앵도가 아버지의 사랑하는 후궁이 된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싸우러 나가는 것을 앵도를 시켜서 막으라고 늙은 상궁에게 부탁해본 것이다. 늙은 상궁은 큰왕자가 고려 궁녀 앵도를 시켜서 아버지의 함흥 친정을 막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됩니다. 앵도는 아직 그러한 중대한 일에 입을 놀릴 자격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후마마께서도 앵도가 대왕마마께 총행을 받는 일을 극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앵도가 입을 열어서 전하의 친정을 간했다 하는 이 사실을 왕후마마께서 아신다면 궁중에는 새삼 큰 풍파가 일어날 것입니다."

왕자 제는 늙은 상궁의 말을 듣고보니 그럴 듯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군사를 향하여 직접 칼을 뽑아 피를 흘리고 활을 당겨 죽게 하는 일을 피하게 해야 할 텐데 간해서 만류할 사람이 없었다. 조정대신들은 모두 아버지의 불의를 돕고 있다.

제는 고개를 숙여 한동안 생각속에 빠져 있다. 홀연 머리를 들어 총기 있는 눈으로 늙은 상궁에게 물었다.

"조사의가 아무리 대장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송도로 쳐들어온다 해도 태상왕의 명령을 받들어 내려오는 군사가 되니 말하자면 태사왕 전하의 군대지 조사의의 군사라고는 할 수 없지 않소?"

"그렇습니다. 명분상 그렇습니다."

늙은 상궁의 얼굴빛도 근엄했다. 큰 왕자는 다시 물었다.

"태상왕의 군사를 반란군대라고는 할 수 없지 않소?"

"그렇습니다. 태상왕은 임금 중에도 최고의 왕이 되시니, 그분의 명령으로 움직인 군대를 반란군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만 아드님을 치러 내려오는 토벌군이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수는 있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는 일은 천만고에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도의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늙은 상궁의 말을 듣자 큰 왕자의 어린 가슴은 쥐어짜지는 듯 괴로웠다. 둘째 왕자 보도 옆에서 형과 상궁의 주고받는 말을 듣고, 아버지의 행동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셋째 왕자 도는 명료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어찌하면 좋소? 치러 나가는 군사는 막지 못하더라도 아버지가 친히 나가시는 일은 막아야 할 텐데, 누구를 통해서 또 한단 말요. 앵도를 생각해보았는데 앵도는 아직 입을 열 자격이 없다 하니 과연 딱한 일이로구려. 만약 아버지가 친정을 하신다면 아버지는 천추만대의 죄인이 되고 마는구려. 상궁, 어떠한 묘한 방법이 없겠소?"

왕자 제는 입술에 침이 말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지가 몇백 년, 몇천 년 뒤에 죄인이 아니되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죄인이 된다면 자기도 죄인의 자식이 된다. 큰 왕자는 죄인의 자식이 된다는 것은 천추만대 뒤에 자기가 또다시 더럽고 추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때가 묻지 아니한 순결무구한 소년왕자는 아버지가 저지르는 의롭지 못한 일을 어서 빨리 막아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늙은 상궁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시켜서 아버지가 친히 싸우러 나가시는 일을 간하게 하는 것이 좋겠소? 조정대신들은 모두 다 아버지의 친정을 찬성하는 사람들뿐이고, 어찌하면 좋겠소?"

늙은 상궁은 얼굴빛을 화하게 해서 대답했다.

"소인의 생각에는 어마마마께 아기씨가 간곡하게 말씀을 사뢰시어 친정하시는 일을 막게 하시는 일이 제일가는 상책이라 생각하오."

큰 왕자는 총명한 눈을 굴려 늙은 상궁을 바라보며 말한다.

"요사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사이는 전보다 못한가봅니다. 자꾸 다투고 싸우시는 모양인데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주실지 의심스럽소."

늙은 상궁은 소년 왕자의 총명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전하께서 궁인 앵도를 후궁으로 삼으신 일로 인해서 두 분께서 가끔 다투시는 일은 소인도 짐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왕비마마께서는 지존의 정배시고, 앵도는 일개 노리개감인 첩실입니다. 비록 소소한 일로 트적티적하신다 하시나 국가와 왕실의 중대한 일에 왕비 전하의 바른 말씀을 어찌 귀담아듣지 아니하시겠습니까. 두 말씀 마시고 왕비마마께 아뢰시어 상감께서 친히 전쟁터에 나가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큰 왕자 제는 그럴듯하게 들었다.

둘째 왕자 보도 늙은 상궁의 말이 옳다고 어린 마음이건만 판단을 내렸다. 다만 셋째 왕자 도만 아직 어리다. 무슨 일인지 판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 그럼 어마마마를 뵈러 가자!"

큰 왕자는 아우 보 와 도 를 데리고 늙은 상궁을 작별한 후에 중전인 어마마마의 처소로 향했다. 중전 궁녀를 위시하여 어마마마 민씨는 반갑게 삼태성과 같은 귀여운 어린 아들들을 맞이했다.

"너희들이 한꺼번에 웬일이냐?"

어머니는 팔을 벌려 세 아들을 껴안았다.

제는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아우들과 함께 문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큰 왕자는 말을 마치자 어머니인 왕비 민씨께 넙죽 절을 드렸다. 둘째 왕자 보와 셋째 왕자 도도 언니 제가 하는 대로 넙죽넙죽 절을 했다.

어머니의 마음은 대견하고 기여웠다. 세 왕자를 껴안아 무릎 위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 애무했다.

큰 왕자 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 저희들 삼형제가 오늘 어마마마를 뵈우러 온 것은 문안도 드릴 겸 소회 있어 아뢰러 왔습니다."

왕비 민씨는 아들들이 벌써 철이 들기 시작해서 소회 있다는 말을 듣게 되니 미덥고 든든하고 귀여웠다.

"오오, 너희들이 소회 있다 하니 이제는 제법들 자랐구나. 그래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큰 왕자가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에게 할아버지를 친히 공격하러 나가시는 일을 못 하시도록 어마마마께서 간해주십시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아우들과 함께 어마마마를 뵈우러 왔습니다."

왕비 민씨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아직도 어리다고 생각했던 제 가 이같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 숙성한 말을 꺼낼 줄 몰랐다. 왕비 자신도 이번 친정하는 일이 명예스럽지 못한 일인 줄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태상왕 전하의 위력을 빌려가지고 여진군사와 합세하여 쳐들어오는 막막강병인 조사의의 군사를 쳐부수자면 남편인 상감히 친히 나가 군사를 지휘하지 아니한다면 도저히 이겨낼 도리가 없다. 상감이 나가서 친히 군사를 움직인다는 것과 대장만이 나가서 군사를 지휘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저편은 태상왕의 관록과 위엄을 빌려 나오는 것이니 우선 이 크나큰 위세와 명분에 군사들은 기가 죽어서 활기를 다하여 싸우지 못하고 있다. 이 까닭에 먼저 막으러 나갔던 대장들은 일패도지가 되고 말았다. 태상왕 이성계의 위력을 대항할 사람은 오직 현재의 왕인 남편 이방원의 위력만이 있을 뿐이다. 만 근들이 포탄이 떨어질 때는 만 근의 쇠방패로 막아내야만 한다. 천 근이나 이천 근짜리 방패로는 막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왕비 민씨는 남편이 서아우인 세자 방석을 처치하는 혁명군을 일으켰을 때 어서 행동을 개시하라고 격려하는 말을 보내고 친히 갑옷 투구를 남편에게 입혀주었던 여장부이기에 아버지를 치러 나간다는 불명예그러운 일을 알면서도 일부러 만류하지 아니했다. 국가를 차지하고 권력을 잡으려면 작은 일에 구애돼서는 아니 된다는 신념을 굳게 가졌다. 그러기에 형제지간인 세자 방석을 집어치우라고 남편에게 갑주와 투구를 입혀주었다. 친형인 방간과 친조카인 맹종과 송도에서 싸울 때, 어서어서 싸움에 이기라고 군사들에게 술을 담가 마시게 하고, 더운 밥을 지어주어서 뒷바라지를 해주었던 민씨였다.

이 사이 와서, 남편 되는 상감이 약간 미워졌다. 지분지분하게 고려 왕실에서 거행했던 젊은 궁녀 앵도의 궁둥이를 따라다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추잡한 본능을 쏟아서 말도 아니하고 슬며시 후궁을 만들어놓았다. 자기를 도와서 임금이 되게 한 공을 잊어버리고, 배신하는 행위를 취해서 딴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이 사실은 불쾌하기 짝없는 노릇이다.

어려서부터 귀밑머리를 마주 푼 내외로서 일편단심 자기를 도와주어서 부자와 형제가 상극이 되어 피를 뿌리는 이 기막힌 고난을 겪고, 겨우 지금 왕의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아직도 모든 질서가 잡히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은 이때, 남편은 자기를 사랑하던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 정욕의 제물이 되고 있다. 그것도 제범한 반가의 딸이나 순결한 처녀가 아니었다. 고려 왕실에서 거행하던 일개 궁녀다. 더럽고 추잡하다고 생각했다. 상감의 손길이나 몸이 자기 몸에 닿는 것도 추하고 징그러웠다. 이 까닭에 왕비 자신은 가끔가끔 상감과 다투고 싸웠다. 분하기 짝이 없다. 아직도 상감과 궁녀의 사이를 떼어놓지 못하고 있다. 이같이 속으로 왕실 지밀의 불화가 싹이 트기 시작했을 때 돌연 태상왕 전하는 함흥에서 조사의를 대장으로 하여 방석, 방번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남편 되는 왕을 치러 내려온다 했다.

송도에서는 대장을 보내서 조사의의 군사를 막으라 했다. 그러나 송도 군사는 단번에 패해버렸다. 남편인 상감은 친정을 하러 나간다 했다. 팔은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는 법은 없다. 아무리 고려의 궁녀 앵도 조건으로 인해서 남편이 밉기는 미웠으나 송도군이 앞으로도 다시 전멸이 된다면, 자기네들은 망하고 마는 것이다. 남편이 망하면, 왕비 자신도 존재가 없게 된다. 후궁 앵도 문제로 남편과 싸우는 일은 현실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일이요, 조사의에게 패하게 된다면 시샘도 사랑싸움도 다 없어지는 죽음과 무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는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뽑는 남편을 도와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친정하는 군복을 마련해 짓고, 싸우러 나가는 남편의 승리를 위하여 밤마다 북두칠성을 향하여 정화수를 떠놓아 무운이 길하라고 빌고 있었다.

이러한 판에 어린 아들 삼형제는 어머니를 찾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당장 옳은 말을 하는 순진한 아들들에게 부자가 칼을 겨누어 싸워야 하는 부조리한 이 말을 옮기기 싫었다. 어름어름 말문을 버무려서 이 대답하기 어려운 장면을 넘기려 했다.

"밖에서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 수 있느냐. 나랏일은 아바마마께서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니고, 대신이며 대장들과 함께 의논해서 처리하시는 일이니 일개 아녀자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은 아직 나이 어리다. 어른들이 하시는 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거라. 그분들도 다 생각이 있을 것이다."

왕비 민씨는 큰 왕자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일렀다. 큰 왕자는 어머니의 쓰다듬어주는 애무의 손길을 물리쳤다. 또렷하게 눈동자를 반짝여서 어마마마를 바라보며 아뢴다.

"아무리 밖에서 하시는 일이라 할지라도 잘못 처리하시는 일이 있다면 어마마마께서 간하셔야 합니다. 그래,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빼야 옳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저를 향하여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와 조상께 효도를 극진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글을 배우는 중에도 부자유친이라 했습니다. 그래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빼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께서는 밖에서 하는 일이니, 말씀을 하실 수 없다고만 하십니까?"

아홉 살 먹은 큰 왕자의 질문에 어머니 민씨는 말문이 막혔다. 일곱 살 먹은 보가 말했다.

"어마마마, 형의 말이 옳소.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뽑는 법은 없소. 어마마마가 아버지한테 일러주시오."

둘째 왕자 보도 벌써 입학을 해서, 아들은 아버지한테 효도를 해서 잘 받들어야 한다는 말을 글강 외우면서 귀에 젖도록 들었다. 사기 없는 순진한 어린 왕자들이었다. 늙은 상궁과 형이 주고받던 대화를 들었다. 자기도 한마디 해서 형의 말에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뜻을 표하지 못했던 셋째 왕자 도가 어머니를 향하여 말했다.

"어마마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싸우면 두렵고 무섭소. 싸우지 말도록 해주오."

비로소 도는 말문을 처음 열었다. 큰형이 간곡하게 주장하는 말을 이제서야 어렴풋 깨달은 모양이다. 어마마마의 품 안에 안겨서 젖꼭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머니는 젖꼭지를 어루만지며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세째 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어 말했다.

"네 동생은 네 살이건만 젖을 아니 먹는데 여섯 살이나 된 도가 어미의 젖을 어루만지느냐. 아우 때문에 젖을 일찍 뺏겨서 어미의 젖이 그리운가보구나! 하하하."

왕비 민씨는 젖꼭지를 어루만지는 도가 무한 귀여웠다. 어떻게 어린 입에서 이같은 말이 나오나 하고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었다.

"셋째 왕자 도는 네 동생은 네 살이건만 젖을 아니 먹는데 여섯 살이나 된 도가 어미의 젖을 어루만지느냐. 아우 때문에 젖을 일찍 뺏겨서 어미의 젖이 그리운가 보구나! 하는 어마마마의 말씀을 듣고 얼굴이 이내 꼭두서니 진당홍 물감을 끼얹은 듯 무안에 취해서 빨갛게 물들었다. 어색한 듯 슬며시 어머니 무릎에서 내려앉았다.

왕후가 말한 넷째 왕자는 나중에 성녕대군이 될 종을 두고 한 말이다.

왕비 민씨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들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큰 왕자 제를 향하여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말했다.

"너희들은 아바마마께서 친히 나가서 싸우시는 것이 할아버님과 칼을 겨누어 교봉하는 줄 알았나 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안변부사 조사의란 자가 태상왕 전하를 팔고 반란을 일으켜서 송도로 쳐내려온다는 것이다. 아바마마께서 친정하러 나가시는 것은 조사의를 치러 나가시는 것이지 결코 할아버님과 대결을 하러 나가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하니 너희들은 안심하고 공부들이나 잘하고 있거라."

제는 어마마마의 말씀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조사의가 할아버지를 팔고서 반란군을 일으켰거나, 할아버지의 명을 받들어서 아바마마를 치러 오거나, 할아버지께서 중간에 끼어드신 것은 사실입니다. 이편에서는 정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쳐들어오는 군사를 막기는 막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체면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리는 일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친히 나가시지 말고 달리 사람을 보내서 막아내게 하십시오. 어머니께서 만류해서 간해주십시오.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올시다. 천륜을 깨뜨리는 일이올시다."

아홉 살 된 큰 왕자의 얼굴빛은 제법 엄숙했다.

민씨 부인은 난처했다. 자기도 천륜이 깨지는 일인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인 상감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나가는 것과 대장을 보내서 토벌한다는 것은 천양의 차가 있는 것이다. 군사들은 태상왕의 군사라는 위력에 눌려 있었다. 먼젓번의 패한 원인도 여기 있는 것이다. 태상왕의 위력을 대항할 마한 위력은 삼천리강산 조선 천지에는 오직 한 사람 남편 되는 상감이 있을 뿐이다. 다른 장수들을 보낸댔자 열 번이면 열 번, 백 번이면 백번 패할 것이 분명했다. 우선 태상왕이란 금테를 두른 존칭에 눌리고 태상왕의 영웅적인 기상에 눌리고 만다.

방석을 쳐부숴 없앨 때도 남편 정안군이 뒤에 꿋꿋하게 서 있어서 장수들을 지휘한 때문, 그 크나크고 끔찍스런 혁명에 성공을 했던 것이다. 만약 그 당시, 정안군이 집 속에만 들어앉아 있고 이숙번 장군이나 민무구나 하윤만을 앞세웠다면 세자의 자리를 뺏는 그 혁명은 성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자신은 남편의 소매를 끌어서, 갑옷을 입히고 투구를 씌워서 어서어서 말을 타고 앞을 서라고, 고무하고 격려하지 아니했던가.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다. 왕실의 천륜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다. 이제 태상왕의 영을 받들어 송도로 쳐들어오는 조사의의 군사를 상감이 친히 막아내지 않는다 해도 골육이 서로 다투었다는 상서롭지 못한 누명은 씻을 길이 없다. 차라리 적극적인 태도를 최후까지 취해서 임금의 자리를 굳게 차지해서 패업을 이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의의 군사를 상감이 친히 나가 치지 않는 날은 다만 멸망이 있을 뿐이다. 상감이 임금의 자리를 뺏기는 날은 민왕후 자신의 왕후 자리도 허와 무로 돌아가고 만다. 민왕후가 앵도의 일로 상감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다투는 일은 내외싸움에 불과한 것이요, 상감이 친히 나가 싸우는 일은 국가의 왕권이 좌우되는 일이었다. 왕비 민씨는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의 바른 말이라 하나 왕권이 전복되는 이 일에 찬성할 수는 없었다. 결연히 큰 왕자에게 말했다.

"네 말도 일리는 있는 말이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 친정을 하시지 아니한다면, 아바마마께서는 왕의 자리에서 무러나야 한다. 물러나는 것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죽임을 당하고 집안은 망하고야 만다. 내 입으로 아버지가 참형을 당하고 집안이 망하는 이 일을 권고해서 막을 수는 없다!"

민왕후는 결연히 입을 다물었다.

왕자 제 는 어머니의 공명을 받아서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군사를 치러 가는 불의의 일을 막아보려한 일이 완전히 깨어진 것을 알았다. 더 어머니한테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큰 왕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소자가 직접 아바마마께 간하겠습니다."

둘째, 셋째도 형의 뒤를 따랐다.

이같이 해서 큰 왕자는 아우들을 공부하는 처소로 돌려보내고, 친정하러 나가는 아버지의 말고삐를 잡고서 울며 간했던 것이다.

 

함흥군을 친정하는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은 대의명분을 들어 간하는 왕자 제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산호 채찍으로 금안백마의 말 궁둥이를 갈겨 앞으로 나갔다. 왕자 제는 울면서 처소로 돌아갔다.

송도에서 함흥군을 치러 떠나는 군사는 십만 대병이었다.

아들은 장치 송도 꼴이 보기 싫어서 함흥으로 향했던 태상왕의 이름을 빌려 자가의 왕의 자리를 뺏으려는 조사의의 군사를 공격하기 위하여 대군을 움직인 것이다.

행군하는 북소리와 종소리는 백 리에 연했고 기치 창검은 햇빛을 가려서 싸늘하게 서리를 뿜었다.

아들 이방원의 북정군은 송도로 쳐내려오는 아버지 이성계의 남정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북으로 향했다.

이방원의 북정군은 송도를 떠나서 황해도 금천 고을 금교역 말 북편에 노숙을 한 후에 다음날 우봉 고을 원중포에 친정하는 대본영을 정했다.

이때, 태상왕 이성계의 명을 받들어 아들 이방원을 치러 내려오는 정남대장군 조사의의 군사는 아직 안주 청천강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북으로 올라가는 태종 이방원의 군사는 두 갈래로 길을 취했다.

함경도 함흥으로 쳐올라가는 군사는 조영무, 김영렬, 신극레가 거느려 철령을 넘어가고, 평안도 서북면으로 향하는 군사는 이숙번, 민무질이 거느려 안주로 향하여 떠났다.

태종 이방원은 군사들이 금천에서 떠나기 전에 장수들에게 훈령을 내렸다.

동북면으로 향해서 출발하는 조영무는 함흥성과 영흥성 안으로는 군사를 들여보내지 말라. 함흥에서 태사왕께서 계시니, 뒷날 태상왕을 공격했다는 누명을 듣지 않도록 해라. 다만 함흥성 밖에 있어서 함흥군의 뒤꼭지를 누르게 하라.

평안도로 쳐올라가는 이숙번의 군사는 청천강을 넘지 말고 다만 강 이편에서 함흥군에 대하여 싸움만 돋우라. 절대로 강을 거넌가서는 아니 된다. 때마침 겨울이다. 모든 장수들은 겨울 기후를 이용하여 잘 싸워서 크나큰 승리를 거두어 돌아오라.

이숙번과 조영무는 금천 대본영에서 호령을 내리는 태종의 명을 받들어 제각기 군례를 드린 후에 동북면과 서북면으로 길을 나누어 함흥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제각기 마병과 보병을 거느려 풍우같이 달렸다.

이때, 동짓달이건만 날씨는 따듯했다. 함경도로 올라간 도통사 조영무의 군사는 함흥성 밖 50리에 진을 쳐서 함흥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함흥성 밖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서북면 평안도로 향한 이숙번의 군사는 태종 이방원의 계책을 듣지 아니했다.

동짓달이건만 날씨는 너무나 따듯해서 봄날과 같았다.

청천강을 대하여 적진의 진용을 바라보니, 활은 울고 팔뚝엔 피가 끊어 배겨날 수가 없었다.

이숙번은 20여 척의 배를 강상에 띄우고 밤을 타서 조사의의 군사를 공격하러 들어갔다.

조사의는 벌써 청천강변에 앉아서 태종 이방원의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아장 김건에게 1천 군마를 주어 명령을 내렸다.

"겨울날이 따듯해서 청천강 물은 아직도 얼지 아니했다. 이방원의 군대는 배를 띄워 우리 앞에 상륙할 것이다. 밤을 타서 강변에 1천 군말르 매복해놨다가 방원의 군사가 다 건너오거든 불시에 납함하여, 배를 빼앗아 돌아가는 길을 끊게 하라. 앞에서는 내가 친히 대군을 거느려 시살하리라."

"분부대로 거행하오리다."

김건은 조사의가 주는 1천 군마를 거느리고 캄캄한 어둔 밤을 타서 강두리, 길고 긴 둑 안에 매복하고 있었다.

밤은 점점 깊어 들었다.

이숙번의 군사를 가득 실은 20여 척의 배는 청천강상에 떠 흘렀다. 달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희고 흰 밤중의 백광을 타고 배들은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를 내면서 적막한 강심으로 흘렀다.

얼마 동안의 시각을 허비했다.

이숙번의 배들은 건너편 대안에 당도하게 되었다.

이숙번은 뱃머리에 서서 조용히 군사들에게 군령을 내렸다.

우리 군사는 적전상륙을 감행한 후에 시각을 지체치 말고 곧 야습을 개시할 것이다. 배를 내려 상륙할 때 극히 조용하고 질서있게 내리도록 하라. 만약, 적이 먼저 우리 동정을 안다면 큰일이다. 명령을 어겨서 떠들어대는 자가 있다면 참하리라.

모든 군사들은 대장 이숙번의 명을 받아 엄숙하고 조용하게 뱃머리에서 내렸다.

이숙번의 군사들은 질서 있게 어둠 속에서 행동을 취했다.

온 군대가 배를 버리고 앞으로 앞으로 나갔을 때 별안간 강 언덕에서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면서 조사의의 아장 김건의 군사는 긴 창과 단검을 들고 뒤에서 덤벼들었다.

이숙번의 군사는 깜짝 놀랐다. 일제히 칼을 들어 등뒤에서 몰려드는 복병을 물리치려 할 때 홀연 방포 일성이 어둔 밤하늘을 뒤흔들면서 논틀 밭틀에서 함흥군은 홍수 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이숙번의 군사는 완전히 함흥군에게 포위를 당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으나 옴치고 뛸 수 없었다.

죽고 상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숙번은 크게 낭패했다.

단기로 적전을 뜷고 청천강변의 둑을 타고 말을 달려 달아났다.

이숙번의 군사는 대패했다. 이숙번의 뒤를 따라 달려오는 군사는 겨우 십여 명밖에 되지 아니했다.

장수를 잃은 나머지 군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었다. 죽어 쓰러진 군사를 제하고 모조리 조사의의 함흥군한테 항복했다.

어느덧 밤이 드새고 동이 환하게 트기 시작했다. 이숙번이 강변을 둘러보니 20척의 배까지 모조리 적군의 손에 불살라졌고, 멀리 동떨어진 곳에 조그만 거룻배 두 척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숙번은 간담이 서늘했다. 하늘이 자기의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생각했다. 십여 명의 패잔병을 거느리고 거룻배에 몸을 던져 강 건너편으로 달려왔다.

이숙번의 대패한 소식은 우봉 원중포에 있는 이방원의 대본영에 보고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크게 놀랐다. 이숙번은 자기를 도와서 왕이 되게 했던, 첫손을 꼽을 만한 지략이 겸비된 제일급의 대장이었다.

이숙번이 패한 것을 보니 조사의의 용병하는 수단은 보통이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연히 대본영을 청천강변으로 옮겨서 친히 조사의와 대결할 것을 결심했다.

곧 비변사 당상들을 불러 어전회의를 열었다.

대본영을 주재하는 태종 이방원은 비변사 당상들을 둘러보며 분부를 내렸다.

"이숙번은 나라에 제일 가는 최고급의 장수다. 첫손을 꼽는 대장으로서 일개 반장인 조사의한테 패했으니 놀랍고 딱한 일이다. 과인이 이미 친정을 결단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몸소 일선인 안주까지 나가서 반란군을 쳐부숴 진압하리라. 비변사 당상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친정하는 대본영에 따라온 영의정 하윤이 아뢰다.

"원래 친정을 결심하시어 송도를 수성대장에게 맡기시고, 이곳까지 오셔서 대본영을 설치하셨습니다. 전쟁에는 전방이 있고, 후방이 따로 있는 법이옵니다마는 대본영이 너무 후방에 있는 것도 불편합니다. 적은 아직도 청천강을 넘지 아니했습니다. 평양이나 안주로 대본영을 옮기시는 일이 좋을 줄 아뢰요."

하윤은 대본영을 옮길 것을 찬성했다.

하윤의 말이 떨어지기, 정승 조준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뢴다.

"대본영은 전하께서 전군을 통솔하시고,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최고의 기관이올시다. 이번, 이숙번이 패한 원인과 대본영과 일선의 거리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출전하는 장수가 대본영의 지휘를 받지 못한 데서 일어난 일이라 생각됩니다. 대본영을 전선 가깝게 옮기시는 일이 옳은 줄로 아뢰오."

조준도 대본영을 전방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

조준의 뒤를 이어 좌의정 성석린이 아뢴다.

"지금 대본영이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장수들은 군략의 통일을 취하지 못하고 제각기 행동을 취해서 오늘 같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전하께서는 곧 북행하시도록 하시옵소서."

변계량이 아뢴다.

"송도에는 유도대장에 민제를 맡기셨으니, 후환이 없습니다. 병법에 군사행동은 신속해야 한다 했습니다. 빨리 대본영을 일선으로 옮기시어 군사행동이 빠르고 신속하도록 명령 계통을 세우십시오."

모든 비변사 당상들은 일제히 대본영을 일선으로 옮기는 일에 찬동했다.

태종 이방원은 곧 대군을 인솔하고 평양을 거쳐 안주에 당도했다.

십만 대병은 호호탕탕한 기세로 안주성 밖으로 홍수 밀듯 몰려들었다.

청천강을 가운데로 두고 태종 이방원의 송도군과 태상왕 이성계의 명을 받은 조사의의 함흥군은 강을 격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여태껏 봄날같이 따듯했던 날씨는 별안간 서북풍이 강하게 불면서 얼음이 꽝꽝 얼고 혹한으로 일기가 변했다.

삭풍은 나뭇가지를 울리고 강추위는 옥동같아서 사람의 살을 에일 지경이었다.

푸른 빛을 뿜어 유유하게 흘러가던 청천강 물은 하룻밤 사이에 희고 흰 얼음판이 되어 땡땡하게 얼부풀었다. 태종 이방원은 갑작스럽게 일기가 변해진 것을 바라보고 가만히 손뼉을 치며 미소를 지어 기뻐했다.

한동안 후에 패해 돌아온 대장 이숙번을 불렀다.

"일기가 갑자기 변해서 밤사이에 청천강 물이 얼어붙었다. 경은 여기 대해서 용병할 계책을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이숙번은 세자 방석을 쫒아낸 제이혁명 때, 자기를 도와준 일등공신이었다. 이번에 패한 일을 불문에 부치고 이같이 은밀하게 물었다.

 

청천강상의 대접전

이숙번은 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천천히 대답을 올린다.

"별안간 졸한이 되어 청천강 물이 얼어붙었습니다마는, 겉만 얼고 속은 배어 얼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적을 유인한다면 크나큰 전과를 거두리라 생각됩니다."

태종 이방원은 자기의 의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손을 들어 무릎을 쳤다.

"옳다! 옳아!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생각한 계책을 말해보라."

이숙번이 채 말씀을 올리기 전에 하윤이 아뢴다.

"장계취계로 적군을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 있습니다."

반적들을 단번에 몰살시킬 수 있다는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듣자, 태종 이방원의 입은 함박만큼 벌어졌다.

"좋은 방책이 있다면 영상은 빨리 말해보오."

영의정 하윤은 옷깃을 바로잡고 대답한다.

"조사의란 자가 성미가 불같이 급한 자올시다. 우리는 하늘의 기후와 사람의 성정을 이용해서 싸우는 전략을 세운다면, 백전백승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성품과 천연의 기후를 빌려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윤의 대답을 듣자, 태종 이하 모든 신하들은 귀를 기울여 하윤의 말을 기대했다.

"어서, 다음을 말해주오."

태종은 무릎을 밀었다.

"이숙번 장군의 말대로 지금 강물은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찾아든 혹한으로 인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자 이하의 깊은 강심은 얼지 아니했습니다. 강물이 출렁출렁 흘러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얕은 여울목 천탄잉로시다. 강물 강물이라도 여울목은 수심이 얕은 곳이니,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용하면 됩니다. 얕은 여울목으로 군사를 보내서 싸움을 돋우어보는 것입니다. 적장 조사의는 성미가 급한 자올시다. 불같이 노해서, 앞뒤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대강의 강심으로 물밀듯 몰아 나올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의연히 얕은 물목에서 싸움을 돋운다면 적은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뛰어 달릴 것입니다. 이때 얼음은 수천만의 사람의 중량을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음은 꺼지고 적병들은 강심에 수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떠합니까, 이 계교가? 이숙번 장군은 한번 이 계책을 써보십시오."

이숙번이 찬성하는 말을 보낸다.

"영상 대감의 계교는 신출귀몰합니다. 소인 역시 이 생각이 있어서, 배어 얼지 아니한 청천강 물을 이용하여 적병을 격파하는 일이 좋겠다고 상감께 아뢰었습니다."

태종은 하윤, 이숙번 두 신하를 바라보며 마음이 흡족하다는 듯 웃음을 보였다.

"묘한 계교다. 곧 실천해보기로 하라."

이날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승석 때가 되었다. 태종 이방원의 친정군 십만 대병은 기치 창검을 벌여 세우고 북을 치며 위풍당당하게 청천강 하류를 향해 나갔다. 일부러 낮을 피하고 어두컴컴한 밤을 타서 행군을 시작한 것이다.

좁은 안주 바닥에 십만 대병이 움직이니 기치 창검은 하늘 반 자락을 가렸고, 행군하는 소리와 북소리와 징소리는 얼부풀어오른 청천강 속의 고기떼를 놀라게 했다.

태종의 십만 대병은 청천강 하류의 얕은 물목으로 얼음을 타고 띠같이 나갔다.

큰 북소리가 두리둥둥 울리며 용대기가 펄펄 날리는 곳에 태종 이방원은 황금갑옷에 황금 투구 쓰고, 금안백마에 높이 앉아 산호편을 번쩍 들어 반란군을 꾸짖는다.

"역적 조사의야, 이놈, 너는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은 수령 방백으로서 무엇이 부족하여 반란군을 일으켜서 나라를 소란케 하느냐. 너는 하늘이 무섭지도 아니하냐. 목이 늘여서 천주를 받으라!"

삼십을 겨우 넘어선 태종 이방원의 씩씩한 모습과 우렁찬 목소리는 얼부푼 강상을 쨍쨍 울렸다. 태종의 꾸짖는 호통 소리가 떨어지자 조사의도 대안에 말을 달려 태종을 꾸짖는다. 이미 태종 이방원에게 향하여 칼을 빼어든 조사의였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형제를 무력으로 죽이고, 부왕의 자리를 뺏어 참람되게 왕이 된 불효 부제한 난신적자야, 무슨 낯짝을 들고 고향인 함흥을 향해 쳐들어오느냐? 듣거라. 너는 몇 가지 큰 죄악을 범했다. 자식으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효성으로 받들지 못하고 한을 품어 함흥까지 오시게 했으니 너의 불효막심한 죄악의 하나요, 네 동생 이방석은 부왕꼐서 국법에 의하여 정하신 세자인데도 불구하고 부왕 전하의 어전에서 죽였으니 네 죄가 둘이요, 그래도 부족해서 네 동생인 방번과 네 매부인 부마 이제를 부왕 앞에서 죽여서 피가 용상에까지 튀게 했으니 네 죄가 셋이요, 형님되시는 대왕을 협박하여 왕의 자리를 내놓게 했으니 네 죄가 넷이요, 부왕의 명령도 없이 네가 스스로 세자가 되었으니 네 죄가 다섯이요, 강제로 선위를 받아서 스스로 왕의 자리에 나갔으니 네 죄가 여섯이요, 네 형 방간을 귀양보내고 네 조카 맹종을 죽였으니 네 죄가 일곱이요, 부왕 전하께서는 방간의 귀양을 풀어주라고 명령을 내리셨건만 너는 응하지 아니했으니 네 죄가 여덟이요, 부왕이 화가 나서 함흥에 오신 지 여러 달 만에 면치레로 겨우 차사를 보냈으니 네 죄가 아홉이요, 부왕 전하께 칼을 빼어들고 십만 대병을 몰고 왔으니 네 죄가 열이다."

조사의는 태종의 열 가지 죄악을 들어 고래고래 꾸짖었다. 조사의는 태종을 성토해서 꾸짖는 소리도 태종 못지않게 우렁찼다. 강과 산이 쩡쩡 울렸다. 조사의는 태종 이방원을 임금으로 대접하지 아니했다. 그의 아버지 이성계만을 군왕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무법천지로 꾸짖는 조사의의 말을 듣자 태종 이방원은 불같이 노했다. 그러나 태종은 순간 노기를 눌렀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려는 것이다. 태종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다시 조사의를 꾸짖는다.

"요망스런 반적야, 네가 만약 용기가 있다면 강을 타고 건너오너라! 한번 쾌하게 승부를 가려보기로 하자."

태종 이방원의 꾸짖는 말을 군호로 하여 이숙번은 화궁에 살을 메겨 가득히 활줄을 당겼다.

화살은 소리치며 허공을 끊어 조사의의 은투구를 보기 좋게 맞췄다. 원래 이숙번은 태조 이성계에 못지아니한 명궁이었다. 조사의는 당황했다. 급히 왼손으로 투구에 꽂힌 화살을 뽑아 던졌다. 분기가 탱중했다. 자기편 군사들에게 위엄을 보이고 싶었다. 급히 말을 달려 강심으로 뛰어들었다.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조사의는 평지같이 말을 달렸다. 이숙번은 조사의의 분을 돋워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활에 살을 메겼다. 흐르는 별같이 허공을 끊고 날으는 화살은 조사의의 가슴 한복판을 향하여 위 소리를 치며 날았다. 조사의의 눈은 화경같이 빛났다. 잽싸게 날아드는 화살을 발견했다. 장창을 번쩍 들었다. 날아 들어오는 화살을 후려쳐 갈겼다. 살은 얼음판으로 떨어지고, 조사의의 분노는 상투 끝까지 솟구쳤다. 조사의는 활을 쏘는 이숙번을 죽이고 싶었다.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이숙번을 취하려 했다.

대안에 있던 조사의의 아장들은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박만, 김관, 허형, 박관, 황길지, 조홍 등은 군사를 휘동하여 강심으로 몰려들었다. 함흥군의 대장 조사의를 응원하려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과 이숙번은 얕은 여울목에 십만 대병을 거느린 채 활과 쇠뇌를 어지럽게 쏠 뿐, 강심으로는 들어가지 아니했다. 다만 적을 유인하여 공격할 뿐 강심으로는 뛰어들지 아니했다. 함흥군 대장 조사의는 마침내 이숙번이 서 있는 여울목으로 뛰어들었다. 장창을 번쩍 들어 이숙번을 찌르려 했다. 이숙번은 활을 내리고 급히 장창을 꼬나 들고 쳐들어오는 조사의의 창을 막아냈다. 이숙번과 조사의 두 장수의 무예는 난형난제다. 백중을 가리기 어려웠다. 찌르면 막고, 막으면 찔렀다. 양편 진에서는 박수갈채가 일어나면서 북소리, 징소리, 고함치는 환호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조사의와 이숙번은 백여 합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아니했다. 말은 어흥 소리를 질러 허공으로 뛰닫고 창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귓전을 쨍쨍 울렸다. 두 사람의 무예는 절정에 올랐다. 조사의가 탄 검은 오추마와 이숙번이 탄 흰 백설마는 공중에 높이 솟아 어우러져 싸웠다. 마치 흰 무지개와 검은 무지개가 하늘 한복판에 솟아나서 스러졌다가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스러지는 듯했다.

양편 진에서는 장수와 군사들이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았다. 태종 이방원도 두 장수의 백중을 가릴 수 없는 무예를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가만히 칭찬했다. 양편 진의 박수갈채와 환호하는 소리는 더한층 자지러졌다. 조사의의 군사들은 자기편 대장의 기막히도록 잘 싸우는 무예를 바라보고 강심인 얼음 한복판 위에서 펄펄 뛰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나 좋아서 춤을 추고 소리를 질러 즐거운 비명을 올렸다.

이때, 돌연 강심에서 찡 하는 큰 음향과 함께 넓고 넓은 얼음장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뒤미쳐 얼음장이 쫙 갈라지면서 군사들은 우르르 강물로 빠지기 시작했다. 안주 청천강 강심 한복판은 태종 이방원이 미리 짐작한대로 얼음장이 두려빠졌다.

조사의의 수만 군사가 요량 없이 한꺼번에 치달렸으니 배어 얼지 아니한 얼음판은 체중을 못이겨 꺼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얼음장이 꺼지고 사람들은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돌연한 사태였다. 조사의의 군사들은 구원을 청하여 소리소리 지르면서 서로들 몸을 껴안고 허우적거리며 강물 속으로 빠졌다. 울부짖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통곡하는 소리는 청천강상의 어룡들을 놀라게 했다. 아비규환하는 생지옥의 모습이 처참하게 벌어졌다.

조사의의 군사는 일세에 함몰이 되었다. 조사의는 뜻밖의 일을 당했다. 기가 막혔다.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조사의 뿐이 아니다. 그의 아장들도 눈이 뒤집혔다. 천지개벽을 당하는 듯했다. 조사의와 아장들은 급히 말을 달려 군사들을 구하려 하였으나,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만 명, 이만 명의 군사를 일시에 구해낼 도리는 도저히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뛰어들려 했으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웠다. 조사의와 아장들은 창과 칼을 두 손으로 불안은 채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군사들의 가여운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때를 놓치지 아니했다. 군중에 전령이 내렸다.

"적장들을 모조리 산 채로 잡아서 결박지어라."

명령이 한 번 떨어지기 송도 군사들은 사면 팔방에서 말을 달려 짓쳐 나왔다. 이숙번은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조사의를 취했다. 조사의는 달아나려 하나 갈 길이 없었다. 앞에는 군사들이 빠져 죽은 얼음 꺼진 강심이요, 뒤에는 송도군이 철옹성을 이루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조사의는 진퇴유곡이 되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갈 수도 없었다. 조사의의 눈은 캄캄했다. 만 가지 계획이 헛일이 되고 말았다. 조사의의 정신이 아찔했다. 이때, 이숙번은 조사의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자 급히 말고삐에 걸어놓은 오랏줄을 풀었다. 줄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조사의의 갑주투구한 목을 얽었다. 조사의는 마상에서 가로 떨어지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하늘은 착한 사람을 돌보지 아니하고 악한 자를 도와주는구나! 불효 불륜한 이방원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지 못하고 내가 도리어 먼저 죽는구나!"

조사의는 말을 마치자 입을 토했다. 조사의의 아장들도 차례차례 묶였다. 함흥군과 송도군의 싸움은 결판이 나고 말았다. 얼어붙은 청천강 얼음판이 꺼진 것은 하늘이 태종 이방원을 도와준 것이요, 얼음판을 이용한 태종의 슬기가 또한 이 싸움을 유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종은 조사의 이하 항복한 반장 박만, 김권, 박관, 황길지, 허형, 박문숭과 조사의의 아들 조홍을 묶어서 진 앞에 세우고 개가를 높이 불러, 송도로 돌아갈 준비를 차렸다. 태종 이방원은 함흥으로 올라가서 아버지께 뵙고 싶었으나 만나면 서로들 겸연쩍게 되겠으므로 그만두고 바로 송도로 갈 생각을 했다.

태종은 조용히 영의정 하윤을 불렀다.

"이제 반란군도 평정을 했으니 함흥으로 올라가 태상왕께 뵙고 싶으나 노염을 살까 두렵소. 어찌하면 좋겠소?"

"평상시 같으면 여기까지 오셨으니 당연히 함흥으로 가시어 뵙는 일이 온당한 줄로 아뢰오. 그러나 지금 곧 반란군을 평정하시고 태상왕 전하를 찾아뵙기는 과연 어색한 일인가 하오. 피차간 서먹서먹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일단 환도하신 후에 따로 사람을 보내시어 모셔오도록 하시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

태종은 잠시 머리를 숙여 생각했다. 친정을 하지 마라고 울어서 간하던 왕자 제의 생각이 났다. 백세 후에 누명을 쓰게 된다는 어린 왕자의 말이 귀에 쟁했다. 하윤을 향하여 다시 묻는다.

"후세에, 비평이 있으면 어찌하오?"

"천하를 경륜하시는 전하로서는 현재를 생각하실 뿐, 백 년 후의 뒷공론을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윤은 결연한 태도로 아뢰었다.

"만약에 사람을 보냈다가 또다시 박순의 꼴이 되어, 함흥차사가 된다면 어찌하오?"

"그때와 지금은 형편이 다릅니다. 박순이 갔을 때는 조사의가 반군을 거느려서 지휘하고 있을 때올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시는 조사의 같은 반군이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태상왕께서도 노래에 외로우실 것입니다. 조사의가 패한 소식을 들으시면, 마음이 약해져서 더한층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시고 처량만 하실 것입니다. 결국 돌아오실 것이니 아무런 염려도 마시옵소서."

"앞으로 송도에서 사람을 보낸다면 어떤 사람을 보내야 성공이 되겠소?"

하윤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고한다.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일 만한 사람을 보내셔야 성공이 됩니다. 절대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을 보내시면 아니됩니다. 또다시 함흥차사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보내셔야 합니다."

 

태종의 사자 무학

태종은 무릎을 밀고 하윤에게 묻는다.

"벼슬하지 않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을 구하면 되겠소?"

"극히 어렵습니다. 구하기 극난합니다."

태종은 한동안 침묵을 지켜 생각하다가 이어 하윤에게 다시 묻는다.

"무학이 지금 어디 있다 합디까? 무학을 청해서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소?"

"무학대사는 한동안 양주 회암사에 있다가 지금은 용문산속에 들어가 있다 합니다. 아마 꽤 늙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후한 폐백을 보내시어, 특별히 부르신다면 사양하지 않고 오리라 생각합니다."

하윤의 말을 듣자, 태종의 우울하고 답답하던 마음은 차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태종은 군사를 돌려 송도로 돌아왔다.

조사의의 일당을 순위부에 넘겨 문죄한 후에 조사의와 박만은 목을 베어 효수하고, 반란군에 부동하여 태상왕을 복위시키려 했던 승녕부 당상 정용수와 신효창은 멀고 먼 원악도로 귀양을 보냈다. 조사의와 행동을 같이했던 여진 마적 임팔라실리는 요동부에 호송해서 명나라 관원에게 넘겨서 죄를 다스리게 했다. 이 난리통에 반란군에 가담했다 해서 역적으로 몰린 사람의 수효는 수천 명이 넘었다.

태종은 반란군을 평정한 후에 정승 하윤의 말을 쫒아 무학을 찾아서 함흥으로 보내기로 했다. 먼저 하윤에게 후한 폐백을 받들어 용문산 용문사에 숨어 있다는 무학대사를 찾게 했다.

무학은 정도전이 자기의 주장을 배제하고 경복궁을 북악 아래 지은 후에 모든 일이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장차 나라에 골육 싸움이 벌어질 것을 예측했다. 조정과 연을 끊고 양주 회암사에 몸을 피해 있다가 세자 방석의 난이 난 후에 다시 회암사에서 양근 용문사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었다.

정승 하윤은 왕명을 받들어 무학을 용문산에서 찾았다. 정승이 왕명을 받들어 폐백을 가지고 친히 절간에 나와서 승려를 찾는 일은 전무후무한 영광이었다. 무학대사는 오래간만에 정승 하윤을 대면했다. 하윤은 태종이 보내는 예물을 무학에게 전달한 후에 태종의 명소하는 뜻을 전했다.

"상감께서 왕사를 만난 지 오래다 하시며 나를 보내서 잠시 소옫로 행차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노래에 출입이 어려우시겠지만, 상감께서 이같이 간청하시니 잠깐 왕림하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이때 무학은 비록 산중에 있었으나, 방석의 난이 난 후에 또다시 방간의 난이 일어나고, 태상왕이 화가 나서 금강산을 거쳐 함흥으로 가고, 이것을 기화로 하여 강비의 친척 되는 안변부사 조사의가 반군을 일으킨 것과 태종이 친정을 하여 안주 청천강까지 군사를 몰고 나간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무학은 눈을 감고 대답 없이 한동안 앞일과 뒷일을 생각해보았다. 얼마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상 대감께서 왕명을 받들어 친히 오시고, 성상께옵서 빈도를 부르시는데, 빈도 비록 늙었다 하오나, 어찌 감히 사양하오리까. 곧 대감을 모시고 송경으로 가오리다."

하윤은 기뻤다.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무학대사와 함께 사인교를 몰아 송도로 향했다. 하윤은 송도로 들어가 무학을 대궐로 인도했다. 태종은 무학의 알현을 받자 용상에서 일어나 어수를 들어 무학의 손을 잡았다.

"항상 국사를 사모하는 마음 간절했더니, 이제 먼길에 나를 찾아주니 내 마음 사뭇 기쁘오.

무학은 정중하게 무릎을 꿇어 합장하고 아뢰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일을 진시 하례하러 궐하에 나왔어야 할 터이온데 늙은 병든 사문의 천한 몸이라 감히 주변을 내지 못했습니다. 뜻밖에 대신을 보내시어 후한 폐백을 내려 하문하시니, 천한 몸을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태종은 무학의 말을 듣자 기쁜 빛이 용안에 넘쳤다.

"대사는 나라의 국사일 뿐 아니라, 이 나라의 창건을 예언했던 대덕입니다. 그뿐 아니라 태상왕 전하의 스승입니다. 내 어찌 소홀하게 대접하리까."

태종을 말을 마치자 무학의 손을 이끌어 편안히 앉게 했다.

"불감하여이다."

무학은 세 번 네 번 사양하고 편안히 앉지 아니했다. 태종은 내시에게 명을 내려 향다를 올리게 했다. 술 대신 차를 내어 고승을 대접했다. 차가 나온 후에 태종은 정승 하윤만 남아 있게 하고 좌우를 물리쳤다.

"국사한테 청할 일이 있소. 국사는 과인의 청을 들어주겠소?"

무학은 상감의 청이 무슨 청인 것을 벌써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전하께서 빈도 같은 위인에게 무슨 청이 계시겠습니까. 너무나 겸허하신 처분이올시다. 하교계시기를 바라옵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지금 함흥에 계신 이은 국사도 아마 짐작하리다."

무학은 이 일을 모르는 듯 얼굴빛을 고치며 깜쩍 놀라는 표정을 했다.

"어느 때 떠나셨습니까?"

태종은 어색한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벌써 가신 지 일 년이 넘었소. 과연 국사는 모르리라. 양주에 있다가 용문사로 갔으니 알 수가 없으리다."

"빈도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안변부사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킨 일도 몰랐으리다."

무학은 또 한 번 놀라는 얼굴빛을 지었다.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습니까? 놀랄 일이올시다. 세속을 피하여 부처를 모시고 깊은 산중에 있으니, 세상일을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태종은 다시 말을 꺼냈다.

"조사의란 자가 돌아간 강비의 친정 족속인데 태상왕 전하께서 함흥에 계신 것을 기화로 하여 태상왕 전하의 어명이라 칭탁하고 반역하는 무리를 모아 군사를 거느리고 송도로 쳐들어오려 했소. 과인은 가만히 앉아 볼 수 없어 안주까지 올라가서 역도들을 무찔렀소."

"놀라운 일이올시다."

무학은 놀라는 얼굴로 염주를 굴리며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과인은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항상 태상왕 전하께 문안사를 보냈소이다. 그러나 보내는 족족 죽여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함흥차사라는 새로운 말이 생겨나기까지 했소."

태종은 말을 마치자 길게 한숨을 지었다. 무학은 또다시 염주를 굴리며 이번엔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그리해서 박순 이외에 여러 사람이 죽었소!"

"놀라운 일이올시다. 차사가 가는 족족 죽이시다니 끔찍스런 일이올시다. 아마 노염이 크셨나봅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놀랍고 두렵습니다."

무학은 이마에 염주 든 손을 얹었다.

"과인이 대사를 오늘 청한 것은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청한 것이오."

태종은 말을 마치자, 또다시 한숨을 짓는다. 무학은 정중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고 아뢴다.

"어떻게 빈도가 감히 이 일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국사는 태상왕 전하를 도와서 건국할 것을 예언한 분입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천만 사람의 말은 아니 들으셔도 국사의 말씀만은 들으실 것입니다. 늙으신 몸에 멀리 함흥까지 가시라고 하기 극히 미안쩍소만은 과인을 위하여, 또는 나라를 위하여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리시도록 해주기 바라오."

태종의 옥음은 애원하는 듯 간곡했다. 무학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얼른 대답을 아니했다. 방 안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태종은 다시 무학에게 간곡한 옥음을 보냈다.

"국사가 아니면 이 일을 풀어줄 사람이 없소, 국사! 한번 내 청을 들어주시오."

무학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아뢴다.

"전하께서 아바마마이신 태사왕 전하를 사모하시어 환도하시도록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신 일은 지극한 효심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태상왕 전하께 효성을 다하시지 못하셨습니다."

무학은 두려움 없이 또렷또렷 어전에 아뢰었다. 태종은 무색한 얼굴빛으로 대답한다.

"과인은 아바마마께 대하여 지성으로 받들려는 마음 간절하건만 아바마마께서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아니하시니 미안쩍기 한량없소. 문안을 드리기 위하여 끊일 사이 없이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으나 가는 족족 죽이시고 문안을 받지 아니하시니 과연 기막힌 일이오. 오늘 국사를 청한 것은 국사의 언변과 힘을 빌려서 아바마마의 환궁을 바라는 마음에서 국사를 청한 것이외다. 내 정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태종의 수로히를 듣자 무학은 눈을 번적 떴다. 화경같이 빛났다.

"빈도가 전하께 효성이 부족하다고 말씀드린 것은 전하께서 친히 함흥으로 가서 문안을 드리지 아니하신 것을 지적해서 아뢴 것입니다. 아바마마께 문안을 드리는데, 비록 천 리 밖이라 하나 친히 가셔야 합니다. 사신을 보내시는 일은 불경입니다."

태종은 무안한 얼굴빛을 지어 변명하는 말을 보낸다.

"예로부터 군왕은 도성 백 리 밖을 오가지 않는다 하오. 혹시 나라에 변이 있을까 하여 도성을 떠나지 않는 때문이오. 이러므로 과인이 친히 나가지 못했소이다."

태종의 변명하는 말을 듣자 무학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한낱 변명하시는 말씀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전하께서는 안주 청천강까지 친히 나가셨으면서, 왜 함흥에 가서 태상왕 전하를 뵙지 아니하고 돌아오셨습니까? 반도를 도멸하신 후에는 당연히 함흥까지 올라가서 아바마마의 무릎에 엎드려 통곡하여 우시면서 마음을 돌려 모시고 왔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셨습니다. 전하! 효성이 부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바마마의 명을 받들어 반란 행동을 개시한 함흥군을 섬멸한 직후에 태상왕 전하를 뵙기가 미안쩍어서 그대로 돌아왔소이다."

태종은 말을 마치자 가만히 한숨을 짓는다. 무료한 기운이 한동안 방 안에 고요히 흘렀다. 옆에 모시어 있던 영의정 하윤이 자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국사 무학한테 말을 건넨다.

"국사께 말씀드리오. 이제 지난 일을 가지고 가타부타 아뢴대야 소용이 없소이다. 국사께서는 이제, 성상전하의 지극한 효성을 생각하시어 한 번 함흥으로 올라가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려주시기 바라오."

하윤은 왕을 대신하여 두 손을 모아 무학 앞에 짚고 간곡하게 청했다. 태종은 하윤의 말이 끝나자 다시 무학에게 부탁한다.

"영상의 말대로 지난 일을 말한 대야 별도리가 없을까 하오. 수고스럽지만 국사는 나의 지성스런 뜻을 받아주기 바라오."

무학은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빈도는 아무런 말재주도 없습니다마는, 성상전하의 효심이 지극하시고, 영상의 부탁이 간절하시니, 곧 함흥으로 향하여 길을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일이 성공되고 아니 되었다는 것은 다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젖먹던 힘을 다하여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돌려지도록 해보겠습니다."

태종의 용안에는 기쁜 빛이 넘쳐 흘렀다.

"과인이 지은 죄도 많소마는 이것은 모두 다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제왕의 부득이한 일입니다. 대자대비한 불제자이신 국사는 과인의 충정을 알아주시기 바라오."

무학은 그제서야 합장을 지어 미소를 띠고 대답한다.

"왕 천하는 임금의 태도와 억조창생의 허물을 제도하는 부처의 자세는 근본으로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선과 악을 이 자리에서는 논란할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좌우간 건국을 도왔던 빈도는 마지막으로 나라를 위하여 힘을 쓰겠습니다. 전하와 태상왕 전하를 위해 다시 화합이 되도록 꾀해보겠습니다. 그러면 빈도는 곧 어전에서 물러나 함흥으로 가겠습니다."

무학은 말을 마치자 다시 합장을 올리고, 탑전에서 물러난다. 영의정 하윤이 뒤따라 일어나고, 태종도 친히 옥좌에서 일어나 전각문 앞까지 나갔다. 태종은 가만히 무학한테 묻는다.

"앞으로 국조는 어떠하리까?"

"오백 년은 무난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당시 대궐터를 정할 때 빈도는 정도전의 주장을 반대하여 아뢰었습니다. 적자인 장자보다 차자인 자손들이 국조를 번영케 할 것이올시다. 왜냐하면 경복궁의 우백호인 인왕산이 좌청룡인 낙산보다 높고 튼튼한 때문이올시다."

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꼭 태상왕 전하께서 환궁을 하시도록 해주시오."

태종은 또 한 번 당부한 후에 국사 무학의 손을 굳게 잡았다. 무학이 궐문 밖에 나가니 행차를 기다리고 있는 자비와 의장이 대단했다. 영의정 하윤은 궐문밖으로 나가 무학을 전송했다.

"그럼 국사는 노래에 괴로우시지만 함흥까지 행차하시어 태상왕 전하께서 곧 환경하시도록 일을 성공해주십시오."

무학은 합장하고 대답한다.

"되도록 성상 전하와 영상 대감의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하윤은 무학에게 평교자에 오르기를 청했다. 대신의 행차와 꼭같은 의장이었다. 평교자의 구종별배가 앞뒤로 늘어서고 좌우편에는 일산까지 받든 시자가 대령하고 있었다. 무학은 의장을 사퇴했다.

"빈도는 일필 청려만 있으면 족합니다. 호화찬란한 행차는 빈도의 분수에 넘치는 일일 뿐 아니라 태상왕 전하의 의심을 산다면 도리어 일이 성사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비와 의장은 상감께서 친히 의빈부에 분부를 내리시어 거행하신 것입니다. 성상의 지극하신 뜻을 받아들여, 강원 감영까지 행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만에, 빈도는 중의 본색을 지켜야 합니다."

무학은 굳이 사양하고 한 필 나귀 등에 몸을 실어 함흥으로 향해 떠났다. 무학은 먹장삼에 한 필 나귀를 탔으나 가는 곳마다 수령 방백들이 공손하게 맞아들이는 의례를 받았다. 태종은 고을마다 특명을 내려서 무학왕사의 가는 기릉ㄹ 평안하게 거행하라는 분부를 내린 때문이다.

무학은 십여 일 만에 함흥에 당도하여 본궁으로 가서 내시한테 태상왕을 뵙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때, 태상왕 이성계는 조사의의 혁명군이 태종의 친정으로 인해 안주 청천강에서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한 감정과 고독한 심사 속에 빠져 있었다. 불안한 감정은 태상왕 자신이 반란군 조사의한테 송도로 진격할 것을 허락한 때문에 앞으로의 일이 어찌 전개될까 하는 데서 일어난 감정이요, 고독한 마음은 안주까지 친정을 했다는 태종 방원이 자기를 찾아오지 아니한 것은 역시 아비를 아비로 대접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한 때문이다. 이같이 착잡한 심경 속에서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홀연 내시가 어전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국사 무학이 뵙기를 청합니다."

"무학이 왔단 말이냐?"

", 그러하오이다."

태상왕은 한편으로 무한 반갑고 한편으로 의심스러웠다. 또다시 태종의 명을 받들어 온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동행이 있더냐?"

"아니올시다. 혼자 나귀 한 필만 타고 왔습니다."

"들어 오라 해라"

태상왕은 무학을 만나보기를 허락했다. 무학은 내시에게 인도되어 태상왕의 거처하는 침실로 들어왔다. 어전에 엎드려 절하고 다시 합장을 드린 후에 처량한 목소리로 고했다.

"전하!"

"아아, 무학왕사!"

태상왕도 감개무량했다. 무학왕사 라고 부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무학도 많이 늙었다. 깎은 머리는 은빛을 뿜어 하얗게 되고 이마엔 주름이 잡혔다. 뿐만 아니라 이가 빠져서 볼이 오그라졌다.

무학이 바라보는 태사왕 이성께의 용안도 무척 늙었다. 그 좋고 환하던 젊은 때 얼굴은 형국만 남아 있을 뿐, 머리에는 서리가 내린 듯하고, 빛나던 봉의 눈은 주름진 이마와 불그러진 관골 속에 싸여 정기를 잃었다.

"왕사도 인제 많이 늙었구려."

"그러하오이다. 사람은 한 번 왔다가 가는 법, 세월은 자꾸만 가라고 재촉해서 용모까지 변해갑니다. 공도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전에 뵐 때보다 많이 노래하셨습니다."

"나 역시 가야지 별수가 있나. 결국은 가야 할 길을 공연히 살아 있어서 마음만 상하네그려. 이것이 아마 인생인가 하네. 그러나 왕사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태상왕의 반가워하던 얼굴빛은 금방 여름 하늘의 구름장 변하듯 했다. 얼굴에는 준엄한 기색이 떠돌았다. 양근 용문산에 칩복해 있다가 오대산 월정사로 참선을 하러 왔더니, 전하께옵서 함흥에 주필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문안을 드린 지하도 오래옵기 한 필 나귀에 늙은 몸을 실어 이곳까지 왔사옵니다."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의 얼굴엔 아직도 엄한 빛이 풀리지 아니했다.

"방원의 청을 들어 나를 달래러 온 것이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연전에 잠깐 뵈온 후에, 산에 숨어 있는 승려의 몸으로 조정 출입을 하는 일이 불길하다 생각하와, 일부러 용문산에 숨어 있어,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만약에 전하께옵서 이곳에 계신 줄 알았다면 벌써 와서 문안을 드렸지, 한만하게 여직까지 있으리 있겠습니까?"

"진정인가?"

"진정 아니면 빈도가 어찌 전하를 속이오리까. 빈도가 언제 전하를 속인 일이 있습니까?"

무학은 정색하고 태상왕을 바라뵈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비로소 엄한 얼굴이 풀리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옛 친구를 만나니 내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네. 자아, 우리 적조했던 회포를 풀기 위하여 곡차를 한 잔씩 마시는 것이 어떠한가?"

"전하께서 내리시는 곡차라면 사양치 않겠습니다."

무학은 쾌하게 대답했다. 태상왕은 내시에게 분부를 내렸다.

"오랜만에 왕사를 만났다. 내 마음이 유쾌하구나. 궁녀에게 분부하여 빨리 곡차를 올리라."

내시는 명을 받고 본궁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담박한 주안상이 궁녀의 손에 들려 나왔다. 궁녀는 물러가고 태상왕과 무학 단 두 사람이 주안상을 대해 앉았다. 무학이 무릎을 꿇고 황금빛 백일주를 금잔에 가득 부어 태상왕께 올렸다.

"이 잔을 드시옵고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만수무강! 하하, 왕사가 나를 욕하는 소릴세그려. 칠십도 못되어도 속이 무궁무진 상한 이 사람이 만 년을 산다면 해골도 남지 아니할 걸세. 괴로우니 어서어서 강비를 쫓아 극락으로 가야 하겠네."

태상왕은 한탄하는 말을 마치자, 금잔에 가득 부은, 무학이 따라 올린 술을 단숨에 쭉 마신다. 태상왕은 한 점 안주를 집은 후에 어수를 늘여 옥병을 잡고 무학 앞에 놓인 금잔에 술을 따랐다.

"자아, 왕사도 곡차를 한 잔."

"전하께서 주시는 선온이니 사양치 않고 마시겠습니다."

무학은 잔을 들어 술을 쭉 들이켰다. 서너 순배 술잔이 돌았다. 태상왕과 무학은 거나했다. 무학이 슬며시 새 화제를 꺼냈다.

"그동안 소승은 길이 막혀서 혼이 났습니다."

"길이 막히다니 무슨 길이 막혔나?"

"양근 용문산에서 오대산으로 참선하러 갈 때 서울서 강원도로 군사가 쏟아져 올라오고 평안도 쪽으로도 군사가 나가는데 한편 소문에는 하흥과 안주에서 반란군이 일어나서 평양과 송도로 쳐 올라간다고 소설이 대단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왠일들이오니까?"

태상왕 이성계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잠깐 침묵을 지켰다.

"소문에는 조사의란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니 참말이오니까?"

무학은 화경같이 빛나는 눈으로 태상왕을 지켜보았다. 반란군이란 말에 태상왕의 비위가 역겨웠다.

"반란은 왜 반란이야. 불의를 토멸하는 군사지."

뱉듯이 대답했다. 무학은 깜짝 놀라는 체했다.

"불의를 치다니요? 송도 조정을 치러 올라가는 군사가 어찌 불의를 치러 가는 군사입니까? 그렇다면 조정이 불의의 조정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불의의 조정이 되는 것이지."

얼근히 취한 태상왕은 용안에 자못 분개한 빛을 드러냈다. 무학은 태상왕의 격분해하는 모습을 보자, 금잔에 가득 술을 부어 올리며 말소리를 낮추어 고한다.

"전하께서 송도조정을 불의라 하신다면 스스로 용안에 침을 뱉으시는 것입니다."

태상왕은 무학의 말을 듣고 잠자코 대답을 아니했다. 태상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또 듣자오니, 조사의는 군사를 일으킬 때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송도를 치려 했다 하니 과연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이 있사옵니까?"

"불의의 자식을 치라고 허락한 일이 있네."

태상왕 이성계의 용안에 다시 분기가 가득했다.

"전하! 전하께서는 속으셨습니다."

무학은 대답했다. 태상왕 이성계를 향하여 속았다고 말했다.

"속다니 말이 되나. 내가 왜 속았단 말인가?"

태상왕은 눈을 크게 떠서 무학을 바라본다.

"하마터면 이씨의 천하는 조씨의 천하가 될 뻔했습니다."

무학은 바른말을 거침없이 했다. 태상왕은 말문이 막혔다. 대답이 없었다.

"낙백한 조사의는 전하를 이용한 것입니다. 전하의 불평하시는 심정을 이용해서 송도 조정을 공격하여 정부를 전복시킨 다음 말막음으로 대권을 잠깐 전하께 돌린 후에 진짜 실권을 잡아 왕위를 찬탈할 흉심을 먹고 한 말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조사의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셨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태상왕은 고개를 가로 흔들어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고 하시는 말씀은 아직도 조사의를 믿으시는 말씀올시다마는 빈도의 말씀을 들어보시옵소서. 전하께서 춘추가 높으신 후에, 만약 지금의 상감이 거세를 당해서, 이 세상에 아니 계신다면, 누가 대위에 나갈 자격을 가진 인물이 왕자 중에 있습니까? 결국 이씨의 창업하신 대업은 물거품같이 쓰러져버리고 조씨의 국가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빈도가 공연히 말씀을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천우신조해서, 조사의는 상감의 군사한테 멸망을 당했습니다마는, 이 일을 생각해볼 때,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칩니다."

태상왕은 무학의 두려움 없이 터놓고 아뢰는 말을 듣자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잠자코 무학의 말을 듣고 있다.

"나라의 정치는 임금 노릇을 잘 할 만한 사람이 정치를 잡아야 합니다. 정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정에 얽매이셨습니다. 돌아간 세자의 생각이 극진하시어 이씨 창업의 큰일을 잊어버리셨습니다. 강비마마를 너무 생각하시어 제세안민하는 나랏일을 잊어버리셨습니다. 전하! 한 집안의 조그마한 일도 너무 정에 기울어지면 바로잡기 어려운 법인데, 항차 한 나라를 다스리는 큰일이겠습니까?"

태상왕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무학이 다시 고한다.

"빈도는 옛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잠룡으로 계실 때, 빈도는 거울이 깨어지는 꿈을 풀어드렸고, 꽃이 떨어진 꿈을 해석해 드렸고, 닭이 우는 소리를 풀어드린 예언자올시다. 이러므로 감히 천위를 무릅쓰고 바른 말씀을 아룁니다. 빈도도 역시 함흥차사라고 생각하신다면, 박순이나 다른 차사처럼 목을 베어줍시다."

무학은 더욱 대담하게 고했다.

"왕사가 방원이가 보낸 차사라고 생각하지 않네."

이성계의 마음은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팔이 안으로 굽어지지 밖으로 굽어지지 않는 일은 전하께서도 짐작하실 것입니다. 빈도는 창업하실 것을 예언한 사람이니 전하의 편이지, 결코 금상의 편이 아니로시다. 그러나 전하의 의도를 생각해볼 때 금상이 왕위에 나가신 일은 하늘이 도우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아, 생각해보십쇼. 이제, 이 나라에 인물이 타성을 빼놓고 누가 있습니까? 빈도는 결코 누구의 청을 받들고 전하를 뵈오러 온 자가 아니올시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여 두게. 모두 다 알아들었네."

태상왕은 가만히 한숨을 쉬고 마시던 술잔을 내었다.

"언제 떠나려 하나?"

"내일이라도 떠나려 합니다."

"그렇게 속히."

"오대산에서 그동안 여러 날을 참선을 했습니다. 다시 종적 없이 명산대찰로 떠돌아다니겠습니다."

"왕사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는가?"

태상왕은 별안간 고독을 느꼈다.

"외로우십니까? 전하께서는 한양이나 송도로 돌아가십쇼. 그곳에는 정릉이 계시고 미워도 아드님이 계십니다. 공연히 이곳 함흥에서 마음과 넋을 괴롭게 하지 마시고, 남으로 내려가시오소서. 지난 일은 다 잊으십시오. 이것도 모두 다 팔자요 업원이올시다. 원수같이 생각하셔도 결코 아드님이십니다. 이 아드님을 지팡이로 해서 노후를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왕사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무학은 밤이 새도록 태상왕의 마음을 돌려놓고 이튿날 날이 밝자 작별을 고했다.

"빈도는 물러가겠습니다."

"어디로 향하여 가려 하오?"

"정처가 없습니다. 가는 곳이 곧 빈도의 도량이올시다. 우리나라는 가는 곳마다 하늘이 높고 푸릅니다. 이러한 대자연 속에 대자대비하신 부처의 심오하신 뜻을 더 공부하겠습니다."

무학의 거리낌 없는 유유한 태도에 태상왕은 부러운 생각이 유연히 일어났다. 태상왕은 무학의 손을 덥석 잡고 한숨을 지으며 말한다.

"나도, 애당초부터 불제자가 되어 거리낌 없는 생활을 했더면 좋았을 것을, 공연히 한평생을 전쟁 싸움으로 보냈고, 또다시 왕위에 올라서 구접을 떨면서 마음을 무한한 번뇌 속에 보내게 되었으니 후회막급이오. 왕사의 자유자재한 행동이 부럽기 짝이 없소."

태상왕의 탄식을 듣자 무학은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전하께서는 모든 일을 체념하시옵소서. 공부할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하고 나라를 다스릴 사람은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의 제자가 된다 해도, 이 세상은 되어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저 대왕께서는 창업지주가 되셨을 뿐, 다시 더 바라실 것이 없습니다. 모두 다 하늘의 섭리십니다. 앞으로 말씀을 너그럽게 하시어 천하 일을 달관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만수무강하셨다가 천명을 선종하시옵소서."

태상왕 이성계는 다시 가볍게 한숨을 짓는다.

"어떻게 하면 세상일을 달관하겠소?"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선물로 한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달관이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쁜 일과 슬픈 일과 노여운 일과 즐거운 일로 인해서 일어나는 극한감정을 억제하는 일입니다. 전하! 이 억제하는 공부를 하십쇼. 이리하신다면 마음은 평안해지고 성수는 무강하실 것입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을 향하여 껄껄 웃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희로애락을 억제할 수 있겠소. 바로 산송장이 되었다면 모르겠소마는 ... , , ,"

"희로애락의 감정은 다른 곳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말하자면 모두 다 사람의 욕심에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기쁜 것도 욕심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슬픈 것도 자기를 표준해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성나는 것도 그렇고, 즐겁다는 감정도 욕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린다면, 극한되는 감정으로 마음을 상할 까닭이 없습니다. 담담하고 청정하게 한평생을 지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태도와 생활을 취하십시오."

무학은 태상왕을 향하여 부탁하는 말씀을 올린 후에 손을 모아 경건하게 합장을 올렸다. 태상왕은 무학을 더 만류할 수 없었다. 전 밖까지 나가 전송했다. 무학은 섬돌 아래 내려, 또 한 번 합장을 올렸다.

"전하! 꼭 송도로 돌아가시옵소서. 그리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버리십시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아뢰옵니다."

태상왕은 창연히 떠나가는 무학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무학을 떠나보낸 후에 태상왕 이성계는 곧 마음을 정했다. 아들 방원이 임금 노릇을 하고 있는 송도로 가기를 결심했다. 조사의의 군사도 이제는 결딴이 나버리고 말았다. 데리고 왔던 늙은 재상 승녕부 당상 정용수는 안주 땅에서 방원이한테 잡혀서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함흥과 영흥에서 돌봐주던 감사와 목사들도 모조리 조사의와 행동을 같이했다 하여 아들 방원이 차례차례 잡아다가 군목에서 목을 베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송도 서울로 끌고 가서 능지처참을 해 죽였다.

새로 부임된 감사와 원들은 태상왕인 자기를, 이 나라를 배판해놓은 창업지주인 자기를 경이원지했다. 감사가 새로 부인이 되어 왔건만 태상왕인 자기한테 알현도 하지 아니했다. 경이원지 라는 말은 너무나 점잖은 어휘다. 솔잎을 먹는 송충이 보듯 떼어버리고 만다. 감사가 이러하니 그 아래 목사와 부사와 군수는 더구나 말할 나위도 없었다. 더한층 그 아래로 아전의 무리들, 이방, 호방, 예방, 형방, 병방, 공방들은 염량세태를 바라보는 무리들이었다.

본궁 대문 앞에 그림자도 비치지 아니했다. 함흥과 영흥이 아무리 고향이라 하나 사고무친한 남의 고장보다 이제는 더 쓸쓸했다. 무학의 말이 아니라도 이 고장에서 살아갈 도리가 없게 되었다. 아직 명색이 태상왕이라 해서 내시도 몇 사람 있고 궁녀도 몇 사람 있었다. 그러나 먹이고, 입히고, 체면을 유지시켜야 할 텐데 감사와 원이 돌봐주지 아니하니 장차는 의식주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여기다가 이성계 자신은 이제 늙었다.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서 송도로 쳐들어가던 그 패기와 함은 약에 쓰려야 구해볼 도리가 없다. 백발백중 버들잎을 꿰어 맞히던 그 활 솜씨도 줄어버렸다. 예전 같으면 동북면으로 치달려서 여진과 합세하여 백만 대병을 마련하여 송도로 쳐들어가기는 여반장의 일이다.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아니했다. 이성계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노장은 무용이로구나! 이성계는 큰 소리로 탄식하고 몸을 뒤쳐누웠다.

날이 밝았다. 태조는 내시와 궁녀를 불렀다.

"너희들도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오늘 송도로 갈 테니 함흥 본관과 함경감사에게 기별해서 차비를 차리게 하라."

함경감사와 함흥 본관은 태상왕이 송도로 환어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태상왕이 이 고장에서 떠나는 것은 마치 앓던 이가 빠지는 듯한 기쁜 소식이었다. 거추장스럽고 모시기 거북한 모든 어려운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감사와 본관은 곧 사인교를 등대하고 궁녀와 내시들이 호행할 말을 준비해서 본궁에 대령시킨 후에 태상왕께 문후를 드렸다. 감사와 본관은 뜰 아래에서 아뢰었다.

"송도로 환궁하신다는 분부를 듣잡고 옥교를 대령했사옵니다. 특히 호위하는 군사를 배치하여 모시기를 하였으니 굽어 통촉하시기 바라오."

태상왕은 고개를 끄덕해 점두한 후에 함경감사에게 물었다.

"송도에 나의 환궁한다는 기별을 보냈느냐?"

"아직 보내지 못했습니다."

"곧 파발마를 띄우라. 저편에서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어가가 동하시기 전에 먼저 파발마를 띄우겠습니다."

감사는 곧 비장한테 영을 내렸다.

"감영으로 달려가 태상왕 전하께옵서 환궁하신다는 일을 위에 아뢰게 하라."

비장은 곧 본궁 대문 앞에서 말을 달려 뛰고, 태상왕은 내시와 궁녀들의 부액을 받고 사인교 위에 올랐다. 궁녀와 내시들이 말을 타고 뒤를 쫓아 감사와 본관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어가를 호송했다. 자기들의 관하까지 배종하려는 것이다. 앞에는 전도하는 취타와 용대기가 나가고 군사들은 어가를 앞뒤로 옹위했다. 그러나 말이 임금의 아버지 태상왕의 거둥행차지 시골구석이라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함경도 백성들은 조사의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송도로 쳐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라가 또 한 번 뒤집혀지는 줄 알았더니 조사의의 군사가 임금 이방원한테 대패하고 태상왕은 주먹 맞은 감투가 되어 초초하게 아들한테로 돌아가는 것을 보자, 모두 다 탄식했다.

"한동안은 서슬이 시퍼래서 사신이 오는 족족 함흥차사가 되어 죽어가더니 이제는 할 수 없이 아들한테 돌아가는구나."

"무학대사가 성공을 한 셈이지."

모두 다 이같이 탄식했다.

함흥에서 감사가 보낸 파발말은 송도를 향하여 요란하게 방울을 흔들어 비변사로 달렸다.

"태상왕 전하께옵서 환궁을 하십니다."

비변사에 있던 대신들은 곧 대궐로 들어가 태종에게 고했다.

"태상왕 전하께서 환궁하신다 합니다. 지금 함흥서 떠나셨다 합니다."

태종은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환궁을 하시기로 했단 말이냐, 무학의 힘이 컸구나!"

태종은 우선 불효라는 낙인을 면하게 되어 기뻤다.

"오시는 연도에는 감사와 수령한테 빨리 기별해서 지공에 유루가 없도록 하고, 곧 문안사를 보내라."

태종은 이같은 분부를 내릴 때 정원에서 승지가 급히 들어와 아뢴다.

"무학왕사가 돌아왔습니다."

"곧 들어오게 하라."

태종은 여러 차레 함흥차사를 보냈으나 가는 족족 죽어서 한 사람도 성공을 하고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무학만은 태상왕의 마음을 돌려서 환궁하게 마련하고 돌아왔으니, 무학을 신뢰하는 마음은 더한층 컸다. 이윽고 무학이 어전에 들어와 복명했다.

"소승 무학이 다녀왔습니다. 태상왕께서는 근력이 강건하시옵고 곧 환궁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돌아오신다는 기별이 왔을 것입니다."

합장배례하고 아뢰는 무학을 바라보자 태종은 용상에서 일어나 무학을 맞이했다.

"먼길에 수고가 많았소. 그러지 아니해도 지금 막 감사한테 환궁하신다는 기별이 왔소. 왕사의 수고가 과연 크오."

태종은 용안에 가득 미소를 띠고 무학을 위로했다.

"소승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전하의 지극한 효심이 결국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리게 한 것뿐이옵니다. 이제는 소원하시는 모든 일이 성취되었으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더욱더 효심을 다하시어 태상왕 전하의 나머지 세월을 안락하게 모시옵소서. 이제 태상왕 전하처럼 외롭고 쓸쓸한 분이 이 세상에 드물 것입니다. 깊이 통촉하시어 이점을 살피시옵소서. 아무리 효자가 백 명이 있다 해도 한 사람 못난 아내만 못합니다. 옛글에 박박주도 승다탕이요, 추처악첩이 승공방이라 했습니다. 전하! 부디 소승의 말씀을 우습게 알지 마십시오. 지금 태상왕 전하께서는 두 분 마마 다 아니 계시니, 무한 외로우십니다. 이러므로 노하시기 잘하시고 역정도 잘 내십니다. 환궁하시는 즉시, 어전 후궁을 가리시어 늙으신 태상왕 전하의 외롭고 불편하신 점을 잘 살피시옵소서."

태종 이방원은 무학의 말을 듣자 황연히 깨달았다. 태종은 미연히 웃음을 용안에 띠고 무학을 바라보았다.

"왕사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여 태상왕 전하께서 적막하지 않도록 하오리다."

무학은 일어나 합장하고 재배하여 태종의 말씀을 찬양하는 뜻을 표했다. 태종은 은근히 무학에게 묻는다.

"왕사, 어디로 가시려 하오? 가까이 경산에 있어 나의 혼미한 점을 가끔 깨우쳐주시오."

"태상왕 전하께도 소승의 가는 곳을 말씀드리지 아니했습니다. 불가의 행색은 정처가 없사옵니다. 그러하므로 예로부터 운수종적이라 했습니다. 다시 더 저의 가는 곳을 하문하지 마십쇼."

"과인이 만류해도 아니 듣겠소?"

"황공하옵니다마는 아니됩니다. 태상왕께서는 소승이 전하의 명을 받들어 함흥으로 간 것을 전혀 모르십니다. 만약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함흥으로 찾아간 것을 아셨다면 소승 역시 함흥차사의 운명을 당했을 것입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환궁하시기 전에 소승은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태종은 무학의 말을 들으니 그럴듯한 말이라 생각했다. 용안에 서운한 빛을 띠고 말씀을 내린다.

"억지로 고집해서 만류하지는 못하오마는 섭섭해 어찌하오. 나의 한 팔, 한 다리가 없어지는 듯하구려."

"화공무지하오이다. 기회 있으면 다시 용안을 우러러 뵙겠습니다."

"떠나기 전에 나에게 두어 말씀 가르쳐주오. 이제는 왕실에 변고가 없으리까?"

무학은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아무 일 없이 왕업이 태평하실 것입니다. 원래 연고가 있었던 것은 전하께옵서 풍운을 끼신 용이신 때문,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신 것이지 밖에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전하께옵서 대업을 맡으셨으니 모든 일은 안정되어 아무 풍파도 없을 것이올시다."

무학의 말을 듣는 태종도 용안에 미소가 떠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왕실이 그동안 불안했던 것은 자기가 임금의 대권을 잡기 위하여 바람과 욕심을 일으켰던 것이다. 방석의 난도, 방간의 난도 그러했다. 자기가 내버려 두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쯤 방석은 삼천리강산을 다스리는 자기 자신이 앉은 용상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무학의 말이 확실히 옳다고 생각했다.

"다시 왕사에게 물어볼 말이 있소. 왕도를 한양에 정해놓고도 상왕께서 송도로 다시 오신 때문, 마지못해서 이곳으로 왔는데, 어찌하면 좋으리까?"

"수도는 한양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이곳 송악은 이미 운수가 지났습니다."

무학은 태종은 향하여 수도를 처음 계획대로 한양으로 옮기라 주장했다. 무학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하오나 정도전이 고집을 세워서 지은 경복궁에는 들지 마시고 따로 이궁을 지어 드십시오."

경복궁에는 들지 말고 다시 이궁을 마련하여 들라는 말을 듣자 태종 이방원은 그럴듯하게 생각되었다. 경복궁 대궐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계모 강비가 급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뿐 아니다. 자기 자신은 방석, 방번과 이제를 죽여서 선지피가 아버지가 앉아 있는 용상에까지 뿌려졌다. 경복궁은 이러한 대궐터다.

자기는 그 후에 현재 상왕인 형님의 뒤를 따라서 송도로 온 후에(지금은 왕이 되었다) 아직 한양으로 다시 천도를 아니한 것도 이러한 지나간 일이 항상 머릿속에 떠올라서 아직 한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태종은 다시 무학에게 묻는다.

"이궁을 마련한다면 어느 곳이 적당하겠소? 왕사는 한양에 수도를 정할 때 수고를 많이 해서 한양 지세에 밝으니 좋은 곳을 말씀해주시오."

무학은 다시 합장하고 대답한다.

"북악이 동편으로 향하여 활개를 활짝 벌린 곳에 우편은 종묘가 되고 그 뒤는 고려 때 이궁이었습니다. 고려의 이궁엔 좌편에 좋은 명당 자리가 있습니다. 이곳에 대궐을 지으시어 거처하시옵소서. 터전이 폭 싸여서 아늑하고 남향판으로 전각을 앉힌다면 한양성의 중심이 되어 국조가 무궁할 것입니다. 임금은 덕이 있어야 합니다. 창덕궁이라 하십시오. 경복궁의 대구도 됩니다."

무학의 말을 듣는 태종의 입은 활짝 열렸다.

"과연 그 이름 좋구려. 곧 이궁을 건축하고 창덕궁이라 하겠소. 그리고 고려 때의 이궁을 중수할 계획인데 그 이름은 무어라 하면 좋겠소?"

"수강궁이라 하시어 상왕 전하와 태상왕 전하께서 거처하시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종은 마음이 흡족했다. 무릎을 치며 무학을 칭찬한다.

"왕사는 진정 나의 스승이오. 높은 가르침을 받아 잊지 않고 실행하리다."

"그럼 소승은 인제 물러가겠습니다."

무학은 다시 합장을 올려 두 번 절한 후에 어전에서 물러났다. 태종은 무학의 은공을 갚으려 했다. 내시에게 명하여 폐백으로 비단 백 필을 전하라 했다. 그러나 무학은 사양하고 받지 아니했다. 태종은 의장을 갖추어 돌아가는 길을 빛나게 하라 했다. 무학은 역시 사퇴하고 죽장망혜로 표연히 금강산을 향해 떠났다. 태종은 더한층 무학의 높은 인격을 사모했다. 팔도 사찰에 영을 내려 무학대사가 나타나는 곳마다 국사로 대접을 하여 융숭하게 받들라 했다.

 

화살로 아들을 겨누는 아버지

한편,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을 만나 만단정회를 푼 후에 아들 태종에 대한 모든 불만을 풀어버리고 환궁할 것을 결심했다.

자비를 몰아 평양에까지 당도했다. 이때 태상왕이 행차하는 연변에는 함경감사와 평안감사를 위시하여 각읍 수령들이 송도에 있는 상감 태종의 칙령을 받들어 성심성의를 다하여 지공이 대단했다. 그러나 정작 송도에서는 아들 태종도 오지 아니하고 문안사 한 명도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버지 태조는 크게 노했다.

"내가 함흥서 평양까지 왔는데 송도에서는 문안사 한 명도 아니 보낸단 말이냐!"

태상왕은 역정이 하늘 끝까지 뻗쳤다. 무학의 간곡하게 아뢰는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렸던 태상왕은 또다시 아들 방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태상왕의 노기등등한 말씀을 듣자, 모시고 있던 내시들은 황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길이 멀어서, 문안사가 아직 도착이 되지 못했나 봅니다."

시종자들은 태상왕의 노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이같이 아뢰었다.

"정성이 없어서 그렇다. 정성이 없는 사람이 문안사를 보낼 생각이나 했겠느냐."

이성계는 더 한 번 호통을 질렀다. 울분한 마음을 호통으로 흩어버렸다. 왕의 문안사는 평양을 지난 후에야 겨우 당도했다. 태상왕은 늦게 온 문안사를 대하자, 다시 분을 터졌다. 문안을 받지 아니했다.

"나는 문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문안을 받지 아니하고 문안사를 내쫓았다. 송도서, 왕의 명을 받들고 온 문안사는 주먹 맞은 감투가 되었다. 몇 번 다시, 내시를 통하여 왕의 문안을 받으라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도리가 없었다. 큰일이었다. 문안사는 급히 말을 달려 송도로 되돌아갔다.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바로 대궐로 들어갔다.

"평양으로 갔던 문안사가 아뢰옵니다."

상감 이방원은 혼자 돌아오는 문안사를 보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너 어떻게 벌써 돌아왔느냐?"

"문안도 못 드리고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상감 이방원은 깜짝 놀랐다.

"문안을 못 드렸다니 웬 말이냐, 문안을 받지 아니하시더란 말이냐?"

"함흥서 평양까지 내려오시도록 상감께서도 마중을 나오시지 아니하고, 문안사도 겨우 평양까지 왔다고 크게 노하시어 영영 문안을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목이 달아나는 줄 알았습니다."

상감 이방원도 열이 벌컥 났다.

"송도서 평양이 사백 리 길이나 된다고 왜 말씀을 못 드렸느냐!"

문안사를 꾸짖었다. 문안사는 벌벌 떨었다.

"말씀이 무어오니까. 덜미를 짚어 내쫓으셨습니다. 그저 소신의 목을 베어줍시오."

상감 방원은 열이 치받쳤으나 한편으로 걱정스러웠다. 무학의 보고를 듣고 마음이 풀려서 환가하시는 줄 알았는데 문안사가 늦게 왔다고 아니 만나보셨다 하니 또다시 탈이라고 생각했다.

"태상왕 전하의 행차는 확실히 송도를 향해서 오시는 모양이더냐?"

내시들의 말을 들으니 행차는 틀림없이 송도로 향하여 오시는 모양이옵니다.

"좀 더 동정을 살피고 올 것을 그랬구나."

문안사의 목은 자라목처럼 옴쓱 들어갔다. 떨면서 아뢴다.

"함흥차사처럼 목을 베라고 하실까보아 어마 뜨거라 하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상감 이방원은 애꿎은 문안사만 꾸짖을 수 없었다.

"물러가거라."

문안사는 진땀을 흘리고 한숨을 쉰 후에 살았구나 하고 물러갔다. 문안사가 물러간 후에 상감 방원은 정승 하윤에게 입시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윤은 부름을 받고 어전에 들어온 후에 상감에 말씀을 내리기 전에 먼저 아뢴다.

"듣자오니 평양까지 갔던 문안사가 그대로 허행을 하고 돌아왔다 합니다. 성심이 미편하시겠습니다."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듣자 상감은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경의 말과 같이 과인의 마음이 심히 괴로웁소. 과인의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길이 멀어서 늦은 것을 이해해주지 아니하시니 민망하기 짝이 없소! 오늘 정승을 청한 것은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 의논하자는 것이오."

"성상께옵서는 과히 염려 마시옵소서. 문안사의 목을 베지 아니한 것만 보아도 태상왕 전하의 심경은 많이 풀리셨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합니다. 전하께서도 또다시 문안사를 계속해서 보내시옵소서. 이제는 조사의의 반란군도 평정이 되었으니 아무 다른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정승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듣는 상감의 용안엔 아직도 수심이 스러지지 아니했다.

"계속해서 문안사를 보낸다 해도 만나보시지 않는다면 딱한 일이 아니겠소."

"꼭 만나보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드님 되시는 상감께서, 지성껏 문안사를 보내셨다는 것을 아시기만 하면 그만이올시다. 그저 오시는 도중에 계속해서 문안사를 보내십시오."

"경의 말이 옳소. 계속해서 문안사를 보내기로 합시다."

상감 방원은 승지를 불러, 문안사를 계속해서 보내라고 분부했다. 하윤은 다시 상감께 고한다.

"태상왕 전하께서 성안에 듭시기 이전에 미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요, 말을 해주오."

"전하께서는 송도성 밖 삼십 리허에 환영문을 크게 세우신 후에 만조백관을 거느리시고 친히 납시어, 맞이를 하셔야 합니다."

상감 방원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아무렴, 맞이를 해야지."

하윤이 다시 아뢴다.

"환영하는 문을 세우실 때 아름드리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어 삼문을 세우십시오. 이리하면 기둥이 넷이나 됩니다. 기둥마다 붉은 천을 감아서 찬란하게 만드십시오."

한 번 쓰고 말 환영문을 궁궐문 세우듯 삼문을 만든다는 것은 너무 사치스런 일이 아니겠소."

"사치스러워도 좋습니다. 아바마마의 환궁을 경축하는 뜻에서 좀 사치스러우면 어떳습니까. 두 말씀 마시고 굵은 나무로 기둥을 해서 삼문을 세우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반드시 쓸 곳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때 가서 다시 아뢰겠습니다."

상감 방원은 하윤의 슬기를 깊이 믿는 터이었다.

"좌우간 경의 말대로 삼문을 세우라고 하리다."

상감 방원은 정원에 분부했다.

"태상왕 전하께서 환궁을 하신다 하니 과인의 마음 기쁘기 한량없다. 송도성 밖 삼십 리허에 크게 환영문을 세우게 하라. 문은 웅장하게 삼문을 세우고 기둥은 아름드리 유주목을 쓰도록 하라."

정원 신하들은 너무나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태상왕을 맞이하는 환영문이었다. 감히 반대하는 신하가 없었다. 상감의 분부를 따라 송도 동편 삼십 리허에 크게 환영문을 세웠다.

한편, 태상왕 이성계의 행차는 송도성 밖 오십 리허에 당도했다. 파발은 급히 말을 달려 정원에 고했다.

"태상왕 전하의 행차가 지금 오십 리 밖에 당도했습니다."

정원 승지는 빈청에 있는 정승 하윤에게 이 뜻을 고하고 어전으로 들어가 상감께 아뢰었다.

"태상왕 전하의 행차가 지금 성 밖 오십 리허에 당도하셨다 합니다."

"알겠다. 문무백관에게 알리고 곧 거둥준비를 차려라."

승지는 정원으로 나가 문무백관을 소집하고, 상감의 거둥차비를 차렸다. 이때, 정승 하윤이 급히 어전에 들어가 아뢴다.

"시자를 물리쳐주시기 바라오,"

하윤의 말을 듣자 태종은 전번에 하윤이 환영문을 세우라고 건의할 때, 나중에 다시 아뢸 일이 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되었다. 곧 좌우를 물리쳤다.

하윤이 조용히 고한다.

"태상왕께오서 지금 송도 오십 리허에 당도하셨다 하니 전하께서는 곧 거둥을 하셔야 합니다."

정원에 기별하여 만반준비를 차리라 하였소.

"그렇다면, 지체 말고 곧 떠나셔야 합니다. 그리하옵고 일전에 따로 아뢰겠다던 말씀을 아뢰겠습니다."

"어서, 말해주오."

"태상왕 전하께서는 천하 명궁이십니다. 전하와 딱 마주쳐서 대면이 되신다면, 혹시 분기가 탱중하시어 전하께 화살을 겨누실는지 모릅니다. 이때, 전하께서는 맞이하시는 체하시다가 얼른 기둥 뒤로 피하십시오."

태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태종은 거둥령을 내렸다. 만조백관들이 궐문밖에 모여서 태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종은 지밀에서 익선관 곤룡포를 입어 왕복의 정장을 차리고 있었다. 이때, 왕자 제가 보와 도 두 아우를 거느리고 붉은 강사포를 입고 어전에 나타났다. 태종은 시녀에게 옥대를 띠게 하고 있다가, 왕자들을 바라보며 묻는다.

"너희들, 웬일이냐?"

큰 왕자 제는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아뢴다.

"할배마마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잡고, 아우 둘과 함께 지영을 나가려고 왔습니다."

"너희들은으 아직 어리니, 궁중에 있다가 문후를 올려도 좋다. 그대로 물러가 있거라."

왕자 제는 흑수정 같은 눈을 깜박이며 또렷하게 아뢴다.

"할배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오래간만에 오시는데, 소자들이 비록 나이 아직 어리다 하나, 어찌 감히 궁중에 앉아서 뵈오리까. 도리 아닌가 합니다. 아바마마를 모시고 성 밖까지 나가서 뵈오려 합니다."

태종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큰왕자 제는 자기가 조사의의 함흥군을 치러 나갔을 때 친정을 하지 말라고 간하던 왕자였다. 어린 아우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오래간만에 돌아오시는 할배 태상왕을 지영하겠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영악하다고 생각했다.

"너희들이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거둥행렬에 참여하여 교외까지 나가라."

태종은 비로소 허락을 내렸다.

내시들은 어명을 받들어 왕자들의 행렬을 문무백관들의 앞에 세워서 상감이 타고 가는 옥교 뒤에 배종케 했다. 만조백관들은 왕과 왕자의 뒤를 따라 송도성 밖으로 향했다. 백관들은 태종을 호위하여 송도성 삼십 리 밖으로 향했다. 거둥행차는 삼십 리에 뻗쳤다. 며칠 전부터 시작했던 환영문은 크고 장엄하게 거리에 솟아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의 행차는 아직 도착이 되지 아니했다. 태종은 황금 면류관에 붉은 곤룡포를 입고 손에는 백옥홀을 들어 환영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왕자 제와 보와 도, 삼형제도 아버지 태종의 뒤에서 시립해서 태상왕의 행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들의 좌우편에는 정승 하윤을 위시하여 백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발이 급히 말을 달려왔다.

"태상왕 전하의 환경하시는 행차가 지금 당도하십니다."

태종 이하 왕자와 만조백관들은 긴장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대취타 명금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태상왕의 행차는 환영문 앞에 당도했다.

태상왕 이성계의 모습이 나타났다. 태종은 환영문 밖에 나타난 태상왕을 향하여 절을 올리려 했을 때 과연 태상왕의 용안에는 불같이 노한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돌연 태상왕은 화궁을 잡아다렸다. 살을 시위에 매겼다. 백우전 화살은 푸르르 울면서 태종을 향하여 날았다. 태종과 왕자들은 깜짝 놀랐다. 만조백관들의 간담이 콩알만큼 오그라졌다. 어린 왕자들의 등에는 진땀이 쪽 흘렀다. 순간 태종은 얼른 몸을 피하여 환영문 기둥 뒤로 숨었다. 살은 소리쳐 울면서 태종이 피해 있는 기둥을 꽉 맞히었다. 백우전 흰 화살은 기둥에 푹 박혀 푸르르 떨었다. 왕자와 백관들의 간담은 또 한 번 싸늘하게 식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우르르 태종 앞으로 모여들었다. 정승 하윤은 상감 앞으로 모여드는 군신들에게 의젓하게 영을 내린다.

"소란을 떨지 말고 제자리로 물러가라. 성상께서는 무사하시다. 만약, 무엄한 행동을 취하는 자는 참하리라!"

정승의 명령이 떨어지니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신하의 질서를 회복한 하윤은 다시 영을 내렸다.

"백관들은 나와 행동을 같이하여 태상왕께 알현하라."

하윤은 말을 마치자 태상왕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정원 서리가 검은 복두에 푸른 옷을 입고, 박을 치며 국궁배례의 구호를 불렀다. 왕자와 백관들은 일제히 구호에 따라 절을 올렸다. 이중에 소년 왕자 제는 눈물을 머금고 배를 올렸다. 왕손과 백관들의 절을 받은 태상왕의 구겨진 마음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때 영의정 하윤은 태상왕의 어전으로 들어가 다시 절을 올리고 아뢰었다.

"이제 태상왕 전하께서는 대내로 환어하시옵소서. 백관들은 전하의 환궁하심을 축하하기 위하여 환영연을 열기로 하였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계는 다시 돌아왔으니 별도리가 없었다. 거둥행차는 다시 왕의를 갖추어 송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앞에는 용대기가 나가고 뒤를 이어 청룡, 황룡을 그린 기가 바람에 펄펄 날렸다. 용기 뒤에는 태상왕이 연을 타고 들어가고 그 뒤에는 태종의 연이 호위병들에게 옹위되어 뒤를 따랐다. 다음에는 왕자 삼형제가 교자를 타고 들어가고 다음에는 영의정 하윤과 대장 이숙번을 선두로 하여 백관들의 행렬이 뒤를 이었다.

송도성 안에는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신이 가는 족족 함흥차사가 되어서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니 이제는 태상왕 전하가 마음을 돌려서 돌아오는 모양일세그려."

"마음을 돌렸다? 허허, 죽은 사람들만 불쌍하이그려. 사신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번에도 아니 돌아오려 한 것을 무학대사가 여러 가지로 달래서 돌아오게 된 모양일세."

"아버지가 져야지 별수가 있나. 그렇지 아니하면, 나라는 망하는 것을!"

"앞날 일을 아직도 판단할 수 없네. 아까 문밖에서는 태상왕이 상감을 활로 쏘았다네. 기막힐 일 아닌가."

모두들 눈이 동그래졌다. 깜짝 놀라는 얼굴빛이었다.

"태상왕이 상감을 쏘다니! 그래 어찌 되었단 말요?"

"상감은 미리 환영문을 세워서 준비하고 있다가 태상왕이 활을 들어 쏘는 것을 보고 얼른 몸을 기둥 뒤로 피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하오. 하하하."

소문을 들은 백성은 조롱하는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송도 백성들은 이같이 주고받으며 돌아오는 이성계의 행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송도 경덕궁 큰 정전에는 크나큰 잔치가 벌어졌다. 아들 태종이 친히 아버지 태상왕 전하를 맞이하여 그의 만수무강을 축하하는 잔치였다. 두 자 가웃이나 넘도록 으리으리하게 유과와 생과며 당속과 어물들이 큰 상에 가득히 벌여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남면으로 향하여 큰 상을 받고 앉았고, 임금 이방원은 동면해서 상을 받았다. 소년 왕손들은 북면해서 상을 받았다. 영의정 이하 만조백관들은 전각 앞에 드높게 차일을 치고 화려한 화문석 위에서 사찬상을 받았다. 풍악 소리는 자지러지고 기생들의 춤은 갖은 묘기를 올려서 될 수 있는 대로 태상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노력했다.

잔치가 시작되면 상감 방원은 태상왕인 아버지한테 오래 살라고, 수를 빌어 올리는 헌작례가 있는 것이 오늘 잔치의 뜻깊은 행사의 하나였다. 잔치의 순서가 헌작례로 들어갈 때, 영의정 하윤은 전상에 올라 상감 방원의 앞으로 가까이 갔다.

"이따가 잔을 올리실 때 직접 올리시지 마시고 내관을 시켜서 중간에서 잔을 올리도록 하십쇼."

하윤은 소근소근 아뢰었다.

"꾸지람을 하시면 어찌하오?"

상감 방원이 가만이 물었다.

"천만에, 꾸지람은 못하십니다. 종묘에 자사를 올릴 때도 제왕은 절만 하고 약주는 반드시 집사가 거행하는 법이올시다. 조금도 예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올시다. 그저 전하께서는 배만 하시고, 잠깐 잔대를 잡았다가 내관에게 전하십시오. 신은 내관들에게 미리 지휘해두겠습니다."

"과인이 친히 잔을 올리면, 더 정답지 아니하겠소?"

"그저 이따가 그렇게만 하십쇼."

하윤은 더 말을 아니하고 어전에서 물러나 우두머리 내관을 불렀다.

"조금 있다가 상감께서는 헌작레를 올리실 테니 공사청은 집사가 되어 잔 올리는 시중을 하오."

내관은 예법에 능통했다.

"종묘에서 지내는 제례와 같이 헌작을 하라 하십니까?"

"아무렴 그렇지, 생사가 일반 아닌가. 상감께서는 막중하신 일국의 제왕이신, 당연히 시중드는 집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 그렇습니다. 그리고 종묘대제뿐 아니라 사사로운 민가에서도 잔을 올릴 때는 반드시 집사가 올리는 법입니다."

"옳지, 제사뿐인가. 민가에서 신부가 시부모께 폐백을 올리고 잔을 드릴 때도 반드시 수모나 중매가 신부한테서 잔을 받아서 약주를 올리는 것이 예법이거든."

하윤은 이같이 내관한테 주의를 주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헌작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상감 병원은 황금 왕관에 붉은 곤룡포를 입고 동향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태상왕의 큰 상 앞으로 나갔다. 영의정 하윤은 지휘를 받은 내관들이 일제히 좌우편으로 갈라졌다. 상감 방원의 잔을 올리는 배석이 깔린 곳은 태상왕이 앉은 곳에서 반간통이나 떨어져 있었다. 상감 방원은 백옥홀을 잡고 배석 위에 당도하여 두 번 절하고 잔을 올린다. 좌우편으로 서 있는 내관들은 상감이 올리는 술잔을 받들어 태상왕께 드렸다.

 

비단결같이 고운 마음들

태상왕 이성계는 내관이 받들어 올리는 술잔을 아니 받을 수 없었다. 중간에서 내관이 받들어 올리는 술잔을 탄해서 꾸짖을 수 없었다. 예법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태상왕은 잔을 받아 상에 놓고 한숨을 한 번 길게 쉰다.

"하늘이 도와주는 일이로구나!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

크게 탄식한 후에 용포 속에서 철퇴를 꺼내서 내던진다. 상감 방원이 친히 술잔을 받들어 올렸더라면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철퇴로 갈겨서 방석, 방번의 원수를 갚았을 것이다. 태상왕 이성계가 내던지는 철퇴를 바라보자 상감 방원 이하, 만조백관들은 등에 소름이 쪽 끼쳤다. 태상왕은 철퇴를 내던지자 이내 조선 국왕의 어보인 황금인을 꺼내서 앞으로 내던졌다.

"네가 탐내는 것은 이것이로구나! 가져가거라."

자리에 가득한 군신의 시선이 태상왕이 내던진 찬란한 황금인으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영의정 하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욕심의 화신인 상감 방원이지만 차마 아버지가 내던진 인뚱이를 얼른 잡지 못한다. 하윤은 태상왕의 어전에 나가 산호만세를 부르고 아뢴다.

"천지신명이 굽어보시는 아래 태상왕 전하께서는 상감에게 전국지보인 옥새를 내리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지극한 효심으로 거룩한 옥새를 받들어, 천년만년 국조의 무궁을 빌면서 계계승승 자손한테 내리시어 이 백성과 이 국토를 번영케 하실 것입니다."

하윤은 하례하는 말씀을 태상왕께 아뢴 후에 황금인을 상감한테 전했다. 영의정 하윤을 통하여 황금 인뚱이를 받은 상감은 얼굴에 황공한 표정을 지으며 찬란한 황금인을 받았다. 담이 크고, 심술궂고, 욕심 많은 상감 방원이건만, 인뚱이를 받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감 방원이 자리로 돌아오자, 백관들은 다시 산호만세를 부르고 큰 잔치를 파했다.

태상왕은 전에 거처하던 왕궁으로 들어갔다. 궁녀와 내시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어 모시었으나, 그에게는 쓸쓸하고 외로운 궁전이었다. 모든 것을 바라볼수록 강비의 생각이 더한층 간절하게 부풀어 올랐다. 만 가지 감회가 소용돌이쳐 머리 안에 떠오를 때, 내시가 조용히 침실문을 열고 아뢴다.

"상왕 내외분이 뵈우러 들어오십니다."

상왕은 둘째 아들 정종을 가리킨 것이다. 그는 동생한테 왕위를 전한 후에 두문불출하고 궁문 밖을 나가지 아니했다. 아버지가 함흥까지 가시어, 여러 해 동안 돌아오지 아니하셨건만 함흥으로 가서 뵙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아우인 상감 일파에서 쓸데없는 잡음을 일으킬까 염려된 때문이다. 더구나 조사의의 반란군이 일어나는 그 판국에 부왕을 뵈러 간다는 것은 기름 위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상왕은 모든 일을 꽉 참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버지 태상왕이 환궁하신다 하니 자식된 도리에 당연히 멀리 나가서 마중을 해야 할 것이지만 역시 상감인 아우 일파들이 또 무슨 말거리를 만들어낼까 하여 공식 좌석에 참여하지 아니했다. 상왕 자신이 참여하기를 원하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저편인 상감 일파에서도 상왕의 자격으로 마중을 나오라고 전갈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상왕은 모든 공식행사가 끝난 후에 조용히 상왕비 김씨와 함께 오래간만에 태상왕 전하께 맞이 인사를 하러 왔던 것이다.

"상왕 내외분이 뵈러 들어오십니다."

하는 전갈을 받은 태상왕은 피곤한 몸을 자리에 뉘었다가 늙은 궁비의 부촉을 받으며 일어났다. 얌전하고 마음 착한 방과가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태상왕은 반가웠다.

"어서 들어오라 일러라."

이윽고 상왕은 비와 함께 고요히 전상에 올라 태상왕의 침실로 향했다. 상왕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지 아니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다. 비도 큰머리를 하지 아니하고 민머리에 검소한 차림으로 옥색 토주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었다. 공식 좌석에서 뵙는 예가 아니므로 평시에 입는 연복으로 뵙는 것이다.

이때 태상왕은 연치가 이미 칠십이 넘었다. 둘째 아들 상왕은 사십구 세요, 사왕비는 오십이 넘었다. 그 잘생기고 화려했던 태상왕의 용안은 이마에 이미 주름이 짙었는데, 머리와 살쩍은 눈 같은 백발이었다. 상왕 역시 오십줄에 들어 있고, 상왕비는 상왕보다 두 살 위인 망륙의 연세다.

"아바마마!"

상왕은 태상왕께 향하여 곡배를 드렸다 이내 반가운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목에 메어 큰 소리로 아바마마를 부른다.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 상왕인가!"

태상왕도 허파에서 터져 나오는 반가운 음성을 내었다. 다음엔 상왕비가 늙은 나이지만 시아버님 되시는 태상왕께 날아갈 듯 절을 올렸다. 유한정정한 부드러운 행동이 한 굽이 봄바람을 소슬한 궁전에 일으켰다.

"잘 있었던가?"

부왕인 태상왕은 미소를 풍기며 허리를 굽혀 상왕비 김씨의 절을 받았다. 많고 많은 자식과 며느리 중에 가장 총명하고 안사하고 마음이 곱고 착한 아들과 며느리다. 이 두 내외는 법이 없이 살아도 아무 탈이 없을 내외였다. 조신하고 얌전한 상왕비의 눈매에도 이슬방울이 구슬같이 맺혔다. 상왕비는 남편인 상왕한테 아우 방원의 날카로운 눈길을 보고, 어서어서 왕위를 동생한테 내주라고 안상하게 권했던, 비단같이 마음이 고운 여자다. 조신하게 절을 올린 상왕비는 아바마마의 잘 있었던가? 하시는 부드러운 음성에 나직이 대답한다.

"저희들은 잘 있었습니다마는 아바마마께옵서는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습니까?"

말을 마친 사왕비는 다시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야 팔자에 타고난 고생이다마는 너희들은 갇힌 몸같이 얼마나 울적했느냐?"

태상왕도 그들의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아바마마, 불초자의 죄를 용서해주십쇼. 한 번도 함흥에 올라가 문안도 드리지 못하고 오늘 또 환가하시는 기쁜 날에 공식으로 환영연에 참여치 못하온 죄를 용서해주십쇼."

아들 방과는 또 한 번 느껴 울었다.

"나도 다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느냐. 나는 활을 들어 방원이를 쏘았다. 그러나 방원이는 몸을 피하여 미리 준비한 환영문 기둥으로 몸을 숨겼다. 또다시 환영잔치 때 요정을 내려 하여 철퇴를 소매 속에 준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관이 중간에서 헌작을 거행했으니 도리가 있느냐. 하늘이 시키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이 철퇴를 내던져버리고 황금 인뚱이를 내주었다."

상왕은 조용히 대답했다.

"잘하셨습니다. 아바마마, 이제 또다시 무엇을 바라오리까. 다만 천추만대에 집안에 더 어지러운 꼴이 전해지지 아니하고 아바마마의 심혈을 기울여 이룩하신 국가대업이 천년만년 유지되어 이 땅의 백성들이 복되게 살기를 바랄 뿐이올시다."

간곡하게 아뢰는 상왕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는 추연히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너와 너의 형 방우를 볼 낯이 없다. 나는 공연히 일을 만들어서 천추만대에 이신벌군한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독주만 마시고 죽은 너의 형은 앞으로 천추만대에 꽃다운 이름을 전할 것이다. 사람이란 공연한 욕심에 얽매여,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마는구나! 이제 나는 나이도 칠십이 되고 보니, 한 사람 인간으로 뉘우치는 바가 많구나."

태상왕 이성계는 뜻맞는 아들 앞에서, 이같이 자기의 심경을 헤쳐 놓았다.

"이제 지나간 일을 말씀하신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까 말씀 아뢴대로 상감이 용렬한 사람이 아니오니, 나라와 백성을 잘 어거해서 다스릴 것올시다. 아바마마께서는 과히 염려 마시고 일을 다 맡겨 보십쇼. 그리고 만수무강하시어 이 나라가 잘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십쇼."

상왕은 조리 있게 태상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안돈시켰다.

"나 역시 이제부터는 정치에는 간여하지 아니하려네. 먼저 간 사람들의 명복을 빌면서, 산과 물을 벗하여 지내려 하네."

태상왕은 적막한 심정을 쓸쓸한 웃음으로 흩어버렸다. 이날 저녁 수라는 상왕궁에서 갸자에 실어 태상왕궁으로 날랐다. 무수한 궁녀들이 많건만 상왕비는 친히 수라상을 분별해 올리고, 따뜻하게 약주 석 잔을 따라 올렸다.

"오랜만에 집안 식구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는구나!"

술을 달게 받아 마시며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했다. 이때 내시가 늙은 상궁한테 거래를 올린다.

"상감마마께오서 태상왕마마의 수라를 받들기 위하여 후궁 두 사람을 바쳤습니다. 아뢰어주시기 바라오."

늙은 상궁은 곧 어전으로 들어갔다. 태상왕이 마악 상왕비의 따라 올리는 약주를 자시고 안주를 집는 순간이었다. 늙은 상궁이 아뢴다.

"상감께서 태상왕마마의 수라와 침소를 받들라 하와 후궁 두 사람을 간택하여 바친다 하옵니다. 불러들이오리까?"

태상왕은 자기를 생각하여 후궁을 간택해 보냈다는 말을 듣자, 한편으론 기뻤으나, 한편으로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방긋 웃으며 비꼬아 말했다.

"이제 새삼 효자 노릇을 하려 하는구나. 진작 효자 노릇을 하지."

밖에서는 후궁 두 여자가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상궁은 민망했다.

"어찌하오리까, 들어오라 이르리까?"

그만두어라. 다 늦게 상감의 효도를 받겠느냐."

태상왕은 강비를 싫어하는 상감 방원의 행동이 눈에 환하게 떠올랐다. 후궁을 들여보낸 것을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 옆에서 반주를 따라 올리던 상왕비 김씨는 딱하기 그지없이 생각했다.

"아바마마, 아까 상왕과 하시던 말씀 다 잊으셨습니까. 천명이라 하는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집안을 화평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상왕이 아뢰었습니다. 상감은 아바마마께옵서 환궁하신 후에 적막하고 쓸쓸해하실 것을 생각하여 특별히 후궁을 간택하여 두었다가 이제 환궁하시는 저녁에 시봉을 하게 한 것이온데 아바마마께옵서 역정을 내시고 받지 아니하신다면 모처럼 효심을 기울였던 상감의 마음이 또다시 불안을 느낄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옵서 깊이 통촉하시어 불러들이옵소서."

상냥하고 어질고 착한 상왕비 김씨는 성음을 나직이 하여 아바마마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애를 썼다. 태상왕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다만 저를 들어 안주를 자실 뿐이었다. 상왕이 감상을 하여 시립해 섰다가 아내인 김씨의 말씀이 끝나자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아뢴다.

"이제는 왕실에 권력다툼을 할 사람도 없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춘추가 고래회에 한 해를 더하셨습니다. 소자도 이제는 오십이올시다. 상감은 지금 한창 장년인 삼십구 세올시다. 그로 하여금 나랏일이나 잘 보도록 맡겨두어서 집안일로 불안이 없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바마마, 자식의 향의하는 정을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자식이란 본시 효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올시다."

태상왕은 상왕비와 상왕의 간곡하게 아뢰는 말에 감동이 되었다.

"내 마음이 본시 좁은 사람은 아닌데, 공연히 격하게 나왔구나."

태상왕은 이제는 나이 늙은 탓인지 노하기도 하고 잘하고 풀어지기도 잘했다. 상왕비 김씨는 놓치지 아니했다. 되도록 왕실의 싸움과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자는 심정에서였다.

"아바마마, 후궁들로 간택되어 들어온 사람들은 사대부 집 딸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남의 집 규수를 청상으로 만드는 일도 딱한 일이 아니옵까. 일부함원에 오월비상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불러보시옵고 원망이 없도록 하시옵소서."

상왕비 김씨는 미소를 지어 아뢰었다. 태상왕은 마음에 드는 아들과 며느리의 극진한 효성에 감동되었다.

"너희들 상왕 내외의 말을 들어 내 마음이 돌아섰다. 후궁으로 간택했다는 여인들을 들어오라 해라."

태상왕은 마침내 늙은 상궁에게 영을 내렸다. 이윽고 상궁은 두 사람의 여인을 인도해 들어왔다. 태상왕이 바라보니 모두 다 나이 십팔 세 가량 된 처녀들이었다. 칠흑같이 윤이 나는 머리를 치렁치렁 땋아 늘어뜨렸다. 자줏빛 제비부리 댕기가 남스란 치맛자락 위로 풍정 있게 흔들렸다. 한 여인은 해당화 한 송이가 이슬방울을 머금고 있는 듯했고, 한 여인은 백모란 꽃이 핀 듯 화려하면서도 청초했다. 상왕비는 무한 엽렵했다. 늙은 상궁에게 인도되어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고 섰는 두 여인을 향하여 나직이 말을 건넨다.

"어전에 뵈어라."

두 여인은 상왕비의 명에 의하여 일시에 큰절을 태상왕께 드렸다. 상왕비는 두 여인을 이끌어 태상왕의 좌우편으로 갈라 앉혔다.

"마침 수라 젓숫는 데 잘 들어왔구나. 약주를 한 잔씩 따라 올리도록 해라."

상왕비는 해당화꽃 같은 여인에게 황금 술병을 넘겨주었다. 여인은 어전에 놓인 황금 술잔을 들고 금병의 술을 기울여 남실나실 따랐다.

"네 성이 무엇이며 누구의 딸이냐?"

상왕비는 잔을 든 해당화 같은 처녀에게 물었다.

"아비는 태학사 원상이옵니다."

"아아, 글 잘하는 태학사 원상이 너의 아버지냐?"

상왕비는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태상왕께 고했다.

"글 잘하는 선비 태학사 원상의 딸이라 하옵니다."

태상왕도 늙은 눈을 들어 해당화 같은 아름다운 처녀를 바라보았다. 풍정있게 잘생긴 아름다운 미인이 싫지 아니했다. 아까 상궁한테 노발대발하며 아니 받겠다고 하던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허, 원상의 딸이란 말이냐. 해당화같이 곱게 생겼구나."

한마디 하고 원처녀의 술을 받아 마시었다. 상왕은 옆에서 늙은 아버지의 호색하는 풍경을 미소하며 바라본다. 상왕비는 이번엔 오른편에 태상왕을 모시어 앉은 백모란꽃 같은 처녀한테 술병을 넘겼다.

"네 성은 무엇이지?"

"유가올시다."

"무슨 유자냐?"

"버들 유자올시다."

"아버지의 이름은?"

"유학 유준이올시다."

"벼슬은 아니했지만 선비 집안의 딸이로구나. 벌써 겉으로 보아도 외양들이 다 얌전하다."

상왕비는 한바탕 칭찬을 했다. 상왕비는 두 처녀를 칭찬한 후에 조용히 미소를 지어 다시 태상왕께 고한다.

"유학 유준의 딸이라 합니다. 백모란같이 잘생겼습니다."

태상왕은 미소를 지어 백모란같이 잘생긴 유처녀를 바라본다. 처녀 유씨는 상왕비가 넘겨준 황금 술병을 앞에 놓고 해당화같이 고운 처녀가 따라 올리고 난 빈 잔을 두 손으로 받들어 행주로 정하게 씻은 후에 술병을 들어 조심성스럽게 따랐다. 황금 술병에서 풍풍 소리가 운치 있게 일어났다. 태상왕은 유처녀가 술잔을 바치기 전에 먼저 어수를 내밀어 잔을 받았다. 마음이 흥그러웠다.

"오늘 며느리 덕에 두 미인한테 장가를 드는구나."

늙어도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욕심이었다. 태상왕의 마음은 흠뻑 풀리기 시작했다. 태상왕은 활 잘 쏘는 신궁일 뿐 아니라 천하를 뒤흔들어 고려를 엎어 놓은 맹장이다. 나이 칠십이 넘어 칠십일 세이건만 아직도 정력은 강했다.

강비의 뜻밖의 죽음과 방석, 방번의 비명횡사 등 모든 일로 인하여 근심 걱정에 파묻혀 칠팔 년 동안을 두고 만사에 뜻이 없어 홀아비 생애로 우울하게 지냈던 그의 눈에 아름다운 두 처녀가 나타나고 보니 환하도록 새로운 봄뜻이 움직였다.좌우 옆에서 권하는 대로 석잔씩 반주를 마시고 수라를 들었다. 상왕과 상왕비 김씨는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풀린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소리 없이 미소를 지어 감상을 하고 섰다가 수라상이 물려진 후에 문안을 올리고 돌아갔다.

이날 밤에 태상왕은 늙은 궁녀한테 영을 내렸다.

"기왕 후궁으로 들여보낸 아이들이니 거두어두게 하라."

늙은 상궁은 태상왕의 영을 받은 후에 두 여인을 별처소로 인도했다. 밤이 깊은 후에 늙은 상궁은 다시 태상왕께 고했다.

"오늘 밤 침전에는 누구로 받들어 모시게 하오리까?"

"태학사 원상의 딸로 입시시키라."

늙은 상궁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어침인 침소에 해당화같이 아름다운 원상의 딸을 들여보냈다. 칠팔 년의 세월과 울음과 한으로 보냈던 태상왕 이성계에게는 재봉촌의 봄빛이 찾아들었다. 사흘 신방을 치른 후에 늙은 상궁은 조용히 태상왕께 아뢴다.

"오늘은 누구로 시침을 하오리까?"

"유학 유준의 딸로 입시케 하라."

이날 밤에 늙은 상궁은 백모란과 같은 유준의 딸로 모시게 했다. 푸른 꿈을 껴안은 아름다운 여인들은 제각기 일태가 있었다. 유준의 딸이 사흘 신방을 모신 후에 정승 하윤은 일부러 문안을 드리러 갔다. 임금 방원 자신이 문안을 드리러 가고 싶은 생각이었으나, 다시 태상왕의 노여움을 살까 하여 하윤을 대신 들여보내서 태상왕의 뜻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정승 하윤이 태상왕궁으로 들어갈 때, 임금 방원은 상왕의 전갈을 받아 태상왕이 자기의 보낸 후궁을 처음엔 거부했다가 나중엔 상왕 내외분의 권고를 들어 못 이기는 체 받아들인 일을 짐작한 때문이다.

합문 밖에서 정승은 녹사를 시켜서 내시에게 거래를 드렸다.

"영의정 하윤이 문후를 아뢴다 하오."

늙은 내시는 곧 녹사의 전갈을 받아 어전에 아뢴다.

"영의정 하윤이 문후를 드린다 하오. 어찌하오리까?"

"들라 해라."

영의정 하윤은 태종의 심복 부하다. 전 같으면 태상왕은 코 대답을 하고 단통 만나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이 약간 풀린 모양이다.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윤은 내시한테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자,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영웅호걸도 아름다운 미인 앞에서 별수가 없구나! 하고 탄식했다. 함흥차사를 보낼 때 공연히 박순 등 남자를 보냈다고 후회했다.

하윤은 전상에 올라 태상왕께 곡배를 드렸다.

"신 영의정 하윤 문후드리오."

태상왕은 전에 없이 미소를 지어 영의정 하윤을 바라보았다. 방석이 죽은 후에 태상왕의 앞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던 하윤이었다. 태상왕의 용안에 미소가 흐르는 것을 본 하윤은 더한층 마음이 안도되었다.

"환궁하신 이후 자주 문후를 드리지 못하와 황공무지하오이다.."

태상왕은 하윤의 문후를 받자 화창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나라의 만 가지 일을 보살피는 영상이 무슨 틈이 있겠소. 오늘 나 같은 물외한인을 찾아주니 내 마음이 기쁘오."

태상왕은 은빛 수염을 쓰다듬으며 화기를 띠어 대답했다.

"자주 문후 올리지 못한 일을 주저치 아니하시고 이같이 분부를 내리시니 너그러운 성은에 감읍할 뿐이옵니다."

하윤은 능란한 말솜씨로 바둑을 놓기 시작했다.

"시임대신이 상왕과 태상왕을 자주 찾는다면 쓸데없는 뒷공론이 떠도는 법이오. 시임대신은 정체에 상관이 없는 태상왕을 자주 찾을 필요가 없소."

태상왕 이성계는 다소 미소를 지어 하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의 본능

태상왕의 부드럽게 내리는 말을 듣자, 하윤은 더한층 마음이 놓였다. 속으로 태상왕의 금도가 넓다고 생각했다. 하윤은 태상왕께 공손히 고했다. 또 한 번 태조의 뜻을 떠보려는 것이다.

"상왕께서는 참으로 효자십니다. 항상 아버님 되시는 태상왕 전하의 강녕하시기를 축수 발원하십니다. 그러한 중에 또한 우애도 대단하십니다. 아우님 되시는 상감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하윤은 바둑 한 점을 다시 두어서 태상왕의 의향을 더듬었다. 태상왕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하윤의 두는 바둑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태상왕궁의 두 분 후궁을 바친 일도 형제분께서 아버님 전하의 고적하신 것을 염려하시와, 형제분이 의논하시고 들여보내신 것이올시다. 참말 전하께서는 훌륭하신 효자들을 두셨습니다."

임금 방원만을 효자라고 했다면 태상왕은 단통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윤은 상왕인 정종을 메고 나와서 태종과 의논하고 후궁을 들여보낸 것이라 했다. 태상왕은 마음이 역하지 아니했다. 마음속으로 상왕 내외가 까닭이 있어서 내가 싫다고 한 후궁을 자꾸 받아들이라고 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케 되었다. 태상왕은 형제들이 의논하고 후궁을 바쳤다는 하윤의 말을 듣자 체면에 잘했다고 대답하기 난처했다. 다만 미소를 지어 침묵할 뿐이었다. 하윤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삼가 전하께 아뢰옵니다. 이번에 들이신 후궁은 모두다 반가의 귀여운 규수들이올시다. 국법에 의하여 비빈의 칭호를 내리시고, 그들의 아버지에게도 영화로운 벼슬을 주시는 일이 옳은가 합니다. 굽어 통촉이 계시기 바라옵니다."

하윤은 세 번째 바둑을 두었다. 칠팔 년 동안이나 늙은 홀아비 생활을 하다가 아름다운 두 여인을 만나 마음이 풀리기 시작한 태상왕에게 한 번 더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낚시를 던져본 것이다. 태상왕은 하윤의 말을 듣자 입이 저절로 벙긋하고 벌어졌다.

"과인은 뒷방차지가 된 사람이 아닌가. 왕도 아닌 과인이 비록 오래간만에 후궁을 두었다 한들 어찌 귀인의 칭호를 봉할 수 있는가."

태상왕의 겸손해하는 말씀이 떨어지자, 하윤은 더한층 몸을 굽혀 어깨를 쭈그리고 고한다.

"황공하옵신 분부십니다. 임금 위에 상왕이 계시고, 상왕 위에 태상왕께서 계십니다. 가장 높고 높으신 태상왕 전하의 비번에 대하여 어찌 궁호를 아니 봉할 수 있습니까. 중국 역대 제왕의 전례를 보더라도 상왕이나, 태상왕이 후궁을 두는 경우에는 반드시 칭호를 내리시는 것이 법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하윤의 말을 내심으로는 무한히 만족하게 생각했다.

"어떤 칭호를 내리면 좋겠소?"

"전하께서는 이제 정궁이 아니 계십니다. 그러하오니, 두 분 중에 한 분은 정궁으로 모시어 비를 봉하시고 한 분은 후궁으로 삼으시어 궁주의 칭호를 내리시는 것이 예법에 합당한 줄로 아뢰오."

"꼭 비와 빈에 봉해야 하는가?"

"꼭 봉하셔야 합니다. 어찌 평민도 아니신 일국의 태상왕 전하께서 속현을 아니하실 수 있습니까. 만약 아니 봉하신다면 크게 체모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올시다. 뿐만 아니라 상왕 전하와 금상 전하의 간곡하신 효심을 무시하시는 일이 됩니다."

"경들의 의향이 정 그러하다면 원상의 딸로 정궁을 삼아 성비의 칭호를 내리고, 유준의 딸로 후궁을 삼아, 정경궁주의 칭호를 내리라."

태상왕의 허락을 받은 하윤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가득했다.

"정원에 기별하여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친정 부모들에게 내리실 작품도 하교를 내려주시옵소서."

"원상에게는 공조참의를 제수하고 유준에게는 내수사별좌를 주게 하라."

하윤이 태상왕의 마음을 흥그럽게 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둔 바둑은 마침내 훌륭한 성과를 내었다.

재봉춘이란 말이 있다. 두 번째 다시 봄을 만난다는 뜻이다. 늙고 우울하고 절망적이던 태상왕 이성계는 젊은 여인 두 사람을 궁중에 들인 후에 마음이 봄날같이 화창했다. 이런 중에 정승 하윤이 다시 비와 빈을 봉하자고 건의하니 마음과 뜻은 활짝 부풀어 올랐다. 공연히 좋고 즐거웠다. 칠십이 넘은 나이다. 강비도 죽고, 사랑하던 막내 방석도 죽었다. 권력도 자식에게 빼앗겼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 생각했다. 슬픈 마음이 절벽 가에 서는 듯했는데 이제 다시 꽃 같은 젊은 원상의 딸과 유준의 딸을 비빈으로 삼고 보니 비록 머리에는 백설이 가득 내린 듯했으나 마음속에는 봄바람이 훈훈하게 일어났다.

"그럼 소신은 빈청으로 물러가 모든 일을 지휘하겠습니다."

하윤이 배를 드리고 물러나니 태상왕은 또 하교를 내렸다.

"영상의 건의에 따라 과인은 사궁 속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홀아비를 면하게 되었소."

"황공무지하옵고 다시 감축하옵니다."

하윤은 한 마디를 더하고 어전에 물러나, 왕 전하 방원의 본궁으로 들어갔다. 태종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영상 하윤을 인견했다. 하윤은 상감한테 문후를 드린 후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어 아뢰었다.

"지금 태상왕 전하께 문후를 드리고 나오는 길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미소를 지어 묻는다.

"그래 역정이 좀 풀리셨던가?"

"태상왕 전하께서는 마음이 매우 풀리셨습니다. 전하와 상왕 전하께옵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고적하실 것을 염려하시어 원상의 딸과 유준의 딸을 들여보내셨으니, 세상 천하에 그러한 효자분이 또다시 어디 계시겠느냐고 아뢰었더니, 태상왕 전하께서는 용안에 웃음을 가득히 띠시었습니다. 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효자라고 해도 가만히 계시더란 말인가?"

효자 소리에 태종의 입도 벙긋 벌어졌다.

"가만히만 계신 것이 아니오라 용안에는 웃음빛이 가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하옵고 더욱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두 분 비빈께 칭호를 봉하시라 했더니 처음에는 사양을 하시다가 마침내 허락을 내리셨습니다. 원상의 딸로 성비를 봉하고, 유준의 딸로 정경궁주를 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상에게는 공조참의의 벼슬을 주고, 유준에게는 내수사별좌를 제수하라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태상왕 전하의 흥락해 하시는 이 틈을 타시어 더욱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효자의 도리올시다."

태종도 태상왕의 마음이 안개 걷힌 듯 개운하게 갰다는 말을 듣자 입가에 미소가 떠돌았다.

"영상이 많이 수고하였소."

영의정 하윤을 찬양한 후에, 승지를 불러 원상의 딸은 성비를 봉하고 유준의 딸도 정경궁주의 첩지를 내리라 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칠십지년에 젊은 후비를 둘씩이나 맞이한 후에 아들과 함께 같은 궁중에 있기가 거북했다. 아직 정력은 강했다. 젊은 여인들을 둘씩이나 어거할 수 있는 몸으로 우두커니 대궐 뒤꼍에서 세월을 흘려보내기는 싫었다. 나라 정사를 다스릴 정력도 넉넉했다. 그러나 이미 조사의의 죽음을 본 이후, 정치에 대한 일은 단념한 지 오래다. 나랏일은 그대로 태종한테 맡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무학의 말대로 집안도 태평하게 하고 나라도 평안케 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태상왕은 늙은 내시에게 영을 내렸다.

"송도에만 있기가 갑갑하다. 서울을 거쳐서 양주 근처의 수석을 찾아 놀겠다. 성비와 정경궁주를 데리고 갈 테니 간소한 차비를 차리게 하라."

태상왕부의 늙은 내시는 곧 상감께 태상왕의 뜻을 아뢰었다.

"태상왕 마마께오서 성비와 정경궁주를 거느리시고 한양을 거쳐 양주로 가시어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시겠다 하십니다."

태종은 늙은 내시의 전갈을 받자 마음 속으로 요량해보았다.

전에 함흥을 갈 때는 연통도 없이 떠났다. 그러나 이제 비빈을 정한 후에는 방향까지 정하여 알려주니 다행하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즉시 하윤을 청해 물었다.

"태상왕께서 성비와 궁주 등 비빈과 함께 한양을 거쳐서 양주로 가시겠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윤이 조용히 대답한다.

"가시겠다 하거든 만류하지 마시고 가시도록 하시옵소서. 태상왕 전하께서는 춘추에 비하여 기력이 강건하십니다. 아무 하시는 일이 없이 송도에만 계시는 것이 무한 갑갑하실 것입니다. 간소하게 차비를 차려 드리시고 자유스럽게 가시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종은 하윤의 말을 옳다고 생각했다. 곧 사복에 분부하여 태상왕의 거둥행차를 마련하라 했다.

며칠 후에 태상왕의 행차는 한양으로 향했다. 방석의 난이 일어난 후 태종이 정종의 뒤를 쫓아 송도로 가서 한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한양은 아직도 한산했다. 한산한 한양성중에 태상왕의 행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더구나 성비와 태상왕의 연이 송기덕빛 군복을 입은 무예청들의 어깨에 매어 나오고 연옥색 저고리에 남치마 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는 아름다운 궁녀들의 모습이 화려하니 쓸쓸했던 한양성은 불시에 꽃밭을 이룬듯했다.

태상왕의 행차는 이번에도 먼저 강비의 능과 원찰이 있는 정동으로 향했다. 그는 사랑했던 옛날 왕비의 무덤을 아니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불쌍하게 홀과수가 된 경순공주를 아니 만날 수 없었다.

그는 한양성에 천만 년 동안 왕업을 누리기 위하여 정도전과 무학을 데리고 우람하게 지은 경복궁에 들르기 전에 먼저 정동을 찾았다. 흥천사 뒤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에서 태상왕 전하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반가워하는 것이 방석의 난에 비참하게 죽은 이제의 아내 경순공주였다. 아바마마가 함흥으로 가기 전 한양에 행차했을 때 만나뵈었으니, 벌써 삼 년 전의 일이었다.

이 세상에 다만 한 사람 피가 섞여 있는 갸륵하고도 고마운 아버지다. 그뿐이랴. 이 아버지는 보통 아버지가 아니다. 천하의 패권을 주름잡던 아버지였다. 고려 천지를 엎어뜨리고 조선이란 새 나라를 창업해논 아버지다. 그러나 창업을 한 지 몇 해가 되지 못해서 다섯째 오라버니인 방원의 야수적인 욕심은 세자 방석을 죽이고 방석을 두둔했던 자기 남편까지 죽였다. 이리하여 아버지를 무궁무진한 회한 속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중이 되려 하여 나오는 자기를 위로하면서 친히 가위를 들어 삼단 같은 검은 머리를 잘라주었다. 흥천사로 나온 후에 아버지는 몸소 찾아와서 밤이 지새도록 자기와 함께 슬픈 운명을 울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울면서 방석의 원수를 갚겠다 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