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한
경순공주를 바라보는 태조의 눈에는 눈물이 확 쏟아졌다. 변란 직후에 처음으로 대면하는 딸이었다. 사위 이제의 목이 태조가 앉은 용상 앞에 피를 뿌려 떨어졌던 일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났다. 태조는 몸이 괴로운 중에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머금고 경순공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젊고 젊은 청상과부가 되었다. 금창이 메어지는 듯 가슴이 아팠다. 붉은 간덩이가 창자 속으로 뚝 떨어지는 듯했다.
"이리로 가까이 오너라!"
태조는 울먹이며 경순공주를 불렀다. 경순공주로 눈물을 머금고 아바마마의 자리 앞으로 가까이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태조는 야위고 늙은 손을 이불 속에서 꺼내어 경순공주의 손을 꼭 잡았다.
"무어 상복은 그리 빨리 입었느냐?"
깃상복을 입은 사랑하는 딸의 모습은 너무나 가련했다.
"얼마나 놀랐느냐. 무엇이냐 좀 먹었느냐?"
"아바마마, 목에 음식이 넘어갑니까. 창자가 끊어질 것 같습니다. 소녀도 한때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을 그랬습니다."
경순공주는 진주와 같은 희고 맑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몹쓸 불효 소리를 하는구나. 그 말이 아비 앞에서 나올 소리냐. 너라도 남아 있어야 내가 의지가 되지 않느냐."
태조가 사랑하는 딸 중에서도 강비 소생으로 가장 귀여워하는 딸이었다. 불면 꺼질까, 쥐면 날을까, 강비와 함께 애망갈망 귀여워해서 길러온 경순공주였다.얼굴로 강비의 젊었을 때 예뻤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네가 청상과부가 되다니 웬말이냐. 세상에 이런 법도 있느냐. 사람이 병이 들어 죽어도 원통하다 하는데, 내 사위가 비명횡사를 하다니 이것이 웬말이냐."
태조는 손을 들어 경순공주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바마마의 위로하는 말씀을 듣자 경순공주는 참고 참았던 슬픔이 홍수에 봇물 터지듯 터졌다. 경순공주는 마침내 소리를 내어 느껴 울었다. 아버지 태조도 울었다. 기막한 슬픔을 당하니 일국의 제왕이란 번쩍거리는 금테두리도 다 무색하게 되었다. 공주라는 천상의 선녀 같은 아름다운 이름도 이제는 도금이 벗겨졌다. 발가벗은 사람, 알몸뚱이로 슬픔의 절벽 아래 눈물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아버지와 딸이었다. 마침내 소복을 입은 경순공주는 더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아바마마의 쌍룡 금침에 엎드려 통곡했다. 지밀나인이 조심조심 발길을 옮겨 경순공주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아바마마께옵서 미령하신 것을 살피셔야 합니다. 그만 참으시옵소서."
지밀나인의 만류하는 간곡한 말을 듣자, 경순공주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아바마마는 지금 병석에 누워 계신 몸이다. 이제 의지하고 의탁할 분은 이 세상에는 아바마마 단 한 분뿐이었다. 형제가 있다 하나 이복동기들,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이요 어머니는 벌써 세상을 떠나 아니 계시다. 친동기간인 세자도 죽고 방번도 죽었다. 아바마마라도 자기를 위하여 오래오래 사셔야 할 것이다 경순공주는 복받쳐 나오는 슬픔을 억제하고 아바마마의 자리 앞에서 일어났다. 경순공주가 눈물을 거두었을 때 태조는 공주를 향하여 다시 물었다.
"세자 방석은 자리를 떠난 후에 어찌 되었느냐?"
태조는 세자 방석의 행방을 물었다. 경순공주는 세자 방석이 합문 밖으로 나가다가 방원의 부하한테 철퇴로 맞아 세상에서 스러진 일을 고할 수 없었다.
"소녀는 궁중 안에만 있었으니 그 후 일은 모르겠습니다."
"그럼, 방번의 종적도 모르겠구나."
"그렇습니다."
태조는 지밀나인을 불렀다.
"감찰상궁 게 있느냐?"
감찰상궁은 지밀나인의 우두머리인 늙은 나인이다. 감찰상궁은 옆방에서 소리 없이 고요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르셨사옵니까."
"세자 방석과 왕자 방번이 나간 후에 어찌 되었느냐? 지금은 어디 있느냐?"
감찰상궁은 역시 바른대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미리 궁녀들에게 상감한테는 두 왕자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리지 말라고 분별까지 내린 자신이었다.
"어전 지척에서 항상 마마를 모시고 있으므로 대궐 밖 소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공주마마의 말씀과 같이 바깥 일은 모르옵니다."
감찰상궁은 슬며시 이쯤 아뢰었다. 태조는 화가 났다.
"아무리 구중궁궐 안에서 거행하는 궁녀기로서니 세자의 일을 모른다는 것은 감찰상궁의 직책을 태만하게 거행하는 것이다. 곧 공사청 내시를 불러라."
감찰상궁은 황공해서 어전에서 물러났다. 공사청 내시는 내시 중에도 제일가는 내시다. 감찰상궁은 곧 공사청 내시를 자기 처소로 불렀다. 감찰상궁은 공사청 내시에게 세자 방석의 일을 장차 어떻게 아뢰어야 할 것을 의논했다.
"위에서 자꾸 세자의 안부를 하문하시면서 있는 곳을 대라 하시니, 딱한 노릇입니다. 어떻게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역정 내시고 공사청을 부르라 하셨습니다.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공사청 내시는 감찰상궁의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 속에 빠졌다가 한숨을 길게 쉬고 대답했다.
"별수 없지요.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공사청 내시는 점잔을 빼느라고 나지도 아니한 수염을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감찰상궁은 얼굴빛을 변했다.
"동궁이 돌아가셨다고?"
"그렇습니다."
공사청 내시는 또 한 번 한숨을 짓고 대답했다.
"상감마마께서 그 참혹한 말씀을 들으시고 환후가 더치시면 어찌합니까?"
"어전에 차마 아뢰기가 황송하고 끔찍한 일이올시다마는 어느 때는 결국 아시고야 말 일이 아닙니까. 인정상 아뢰기 어려운 일은 한때 일이고, 언제나 속이고 넘어갈 일은 되지 않습니다. 설혹 놀라시더라도 바른대로 말씀을 드리십시다. 그리해야만, 군상을 기만한 죄를 면할 것입니다. 상감을 속이는 죄는 더욱 큽니다."
감찰상궁은 공사청 내시의 말을 듣고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그럼 지사 대감께서 적당하게 아뢰어주시오."
감찰상궁은 말을 마치자 공사청 내시를 태조의 어전으로 인도했다. 태조는 경순공주와 함께 공사청 내시가 들어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공사청 내시가 어전 지척에 부복하기도 전에 급히 물었다.
"세자의 소식을 들었느냐?"
"돌아가셨습니다!"
공사청의 얼굴엔 슬픈 빛으로 가득했다.
"돌아가다니, 죽었단 말이냐?"
태조는 외마디 소리를 치며 깜짝 놀라 소스라쳤다.
"네, 그러한 줄로 아뢰오. 기막히고 슬픈 일이오나 은휘할 수 없사와 사실대로 고합니다."
태조는 기가 막혔다.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아니했다.
"어디서?"
"영추문 밖으로 나가시는 중 난군들이 해친 줄로 아뢰오."
"난군들이? 방원이란 놈의 군사가?"
"황송만만한 일이올시다. 더 하문하시기 마시옵소서. 짐작으로 아실 일이올시다."
태조는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다시 묻는다.
"방번이는 어찌 되었느냐?"
"아뢰올 말씀이 없습니다. 무안대군께서도 화를 당하셨습니다."
태조는 가슴이 더한층 막혔다. 말이 나오지 아니해다. 한동안 후에 입을 열었다.
"모두 다 한 곳에서 참혹한 변을 당했단 말이냐?"
"세자마마께서는 영추문 밖으로 나가시다가 화를 당하셨고, 무안대군께서는 광화문 앞까지 나가시어 정안대군과 작별인사까지 하시고 고양 길로 향하여 나가시는 도중에 군사 놈들이 뒤를 쫓아가서 해를 당하셨다고 듣자왔습니다."
태조는 말을 듣자 병상에 옥체를 가누지 못하여 쓰러지고, 공주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호곡해 울었다. 태조는 병석에 쓰러져 소리 없이 울었다. 이 세상에는 외로운 홀몸뿐이라 생각했다. 다만 애지중지하는 청상과부 딸이 있을 뿐이라 생각했다. 태조는 베개를 벤 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하룻밤 사이 한꺼번에 아들 둘과 사위 하나를 죽여버렸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 자기들 형제의 손으로 죽였다. 아들과 사위뿐인가. 정도전, 남은 등 팔과 다리 같은 두 공신도 한칼 아래 원혼이 되어버렸다. 세상에는 인과보응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도 빨리 자기 자신의 생전에 인과보응을 받을 줄은 몰랐다. 보복을 받고도 인과를 던졌던 그 사람들한테 받는다면 오히려 한이 없겠는데 자기 자신의 혈육을 받아 왕가의 업적을 이어줄 자식들한테서 소장지변이 일어나서 죽기 전 생전에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아 이 꼴을 당하게 되니 참으로 딱하고 기막힌 일이었다. 눈이 캄캄하고 정신이 아찔했다. 땅을 쳐서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은 일이다. 밤이 깊었으나 잠이 오지 아니했다. 태조는 가장 사랑하는 딸인 경순공주와 함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날이 밝자 태조는 감찰상궁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하룻밤 사이에 두 아들과 한 사위를 잃었다. 세상에 복이 바하다 한들 이런 참척이 하늘 밑에 어디 또 있겠느냐. 제 명에 죽었다 해도 가엾고 불쌍한데 모두 다 비명횡사를 했으니 가엾은 마음 그지없다. 자식들이라 하나 상복을 입어야 하겠다. 정에서 우러나오는 이 마음을 어찌할 수 없구나. 상의원에 기별하여 곧 상복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지밀 안 감찰상궁은 어명을 받들어 상방나인에게 명을 내렸다. 아들형제와 사위 한 사람을 위한 태조의 상복은 밤을 도와 곧 지어 받쳐졌다. 성복이 되는 날 태조는 전고에 없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통곡을 하고 상복을 입었다. 임금이 상복을 입으니 대전의 나인들도 일제히 상복을 입었다. 대전 직속과 전 세자궁 궁녀들은 기막히고 슬픈 상복을 일제히 입게 되었다. 정안군 방원의 눈에는 거슬리고 부아가 날 노릇이지만 이것까지 간섭할 수는 없었다. 아침 일찌기 새로 된 세자 영안군 방과가 문안을 들어왔다. 태조는 아무 말도 없이 새로 된 세자의 문안을 받았다. 새 세자가 문안을 드리고 물러간 후에 정안군 방원이 문안드리기를 청했다. 지밀나인은 태조께 정안군 방원이 문안을 드리러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줍사 하고 청했다.
"정안군께서도 문안을 들어오시겠다 합니다."
태조는 왈칵 얼굴빛을 고쳤다.
"방원이란 놈이 문안을? 당치도 않다. 나를 죽이고 난 후에 문안을 하라 해라!"
태조는 큰 소리로 궁녀에게 대답했다. 정안군 방원은 마침내 문안을 드리지 못했다. 머쓱해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태조가 거처하고 있는 대전 안은 우울하고 서글픈 정경 속에 잠겨 있었다. 태조는 홀연 분부를 내렸다.
"울적하다. 나가보겠다. 그러나 공식 거둥하는 절차는 전부 폐지하라. 간단하게 소교 두 채만 준비하라. 만약 어기는 자가 있다면 참하리라."
태조는 엄하게 분부했다. 공사청에서는 무예청에게 전령을 내렸다. 옆에서 대왕을 모시어 있던 경순공주가 태조께 아뢰었다.
"아바마마, 어디로 행차하시렵니까?"
"홍천사로 가련다. 가서 너희 어머니 위패나 바라보고 돌아오련다."
태조는 한숨을 지어 딸에게 대답했다.
"아바마마, 소녀도 따라가겠습니다. 어마마마는 뵙지 못할망정 어마마마의 위패나 뵙고 오겠습니다."
태조는 기운 없이 한숨을 지으며 허락했다.
"자비를 등대해놓았습니다."
소교 두 채는 전각 앞 월대 위에 대령되었다. 앞채에는 대왕이 타고 뒤채에는 공주가 탔다. 시녀 두어 사람이 뒤를 따랐다. 소박하고 간단한 소교는 대궐 정문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삼청동 건춘문으로 나왔다. 궁녀 두어 사람이 뒤를 따랐다. 무예청도 상복으로 베옷을 입고, 시녀들도 상복을 입고 따랐다. 두 채의 소교는 건춘문으로 나와서 동십자각을 거쳐서 육조 앞을 지나서 서소문 길정동으로 들어섰다. 정릉 우람한 능이 푸름을 품어 반공에 솟구쳐 있는 무성한 숲 사이에는 주란화각의 홍천사가 은은히 보였다. 임금과 공주가 탄 소교 두 채는 홍천사를 향하고 들어갔다. 소탈한 행차였지만 상감이 납신다는 소식은 벌써 주지한테로 들어갔다. 주지는 승려들을 거느리고 홍천사 동구 밖까지 나가 마중을 했다. 홍천사 이웃에 있는 산릉 재실에서도 능참봉이 사모관대로 상감의 행차를 맞이했다.
"능상으로 먼저 오르자."
태조는 무예청에게 분부했다. 소교 두 채는 홍천사를 옆에 두고 정릉 능상으로 올랐다. 태조는 정자각에 들어 능상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 대궐 안에서 시원하게 울어보지 못했던 슬픔을 이곳에서 마음껏 터뜨려보자는 것이다. 태조의 통곡 소리를 듣자 공주도 울음이 터져나왔다. 어마마마의 무덤을 향하여 남편의 죽은 슬픔, 청상으로 과부가 된 한을 마음껏 통곡하여 풀어보는 것이다. 태조의 울음소리는 마치 늙은 용의 울음소리 같고, 공주의 애절한 통곡성은 요염한 청상의 애끊는 한탄이었다. 태조의 통곡 소리와 공주의 울음소리에 해도 빛을 잃고, 구름도 움직이지 아니했다. 그러나 청산은 적막할 뿐이었다. 태조의 기막힌 통곡성을 강비가 알 까닭이 없고 공주의 애끊는 울음소리를 강비는 느낄 길이 없었다. 태조와 공주는 한동안 통곡을 하다가 눈물을 거두고 소교에 몸을 던져 홍천사로 향했다. 대웅전에 올라 예불을 마친 후에 강비의 혼령을 모신 위패 앞으로 향했다. 태조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핑그르 돌아서 쉴 새 없이 흘렀다.
"방번, 방석과 사위 이제가 다 죽었소."
태조는 목 메인 소리로 위패를 향하여 말했다. 공주는 위패 앞에 사배를 드렸다. 그러나 위패는 적적히 대답이 없다. 말이 없는 위패는 말이 있는 사람보다 더 슬퍼보였다. 공주는 흐느껴 목을 놓아 통곡했다. 방번과 세자 방석 등 동생이 비명횡사한 것도 슬프지만 남편인 부마 이제가 죽은 것이 더 슬펐다. 남편인 부마 이제가 죽은 사실도 뼈 부서지는 듯 아픈 일이지만 장차 새파랗게 젊은 여자의 몸으로 한평생을 살아갈 일이 더 슬펐다. 막막하고 답답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늘과 땅이 지함이 되는 듯했다. 일찍이 하늘 밑에 제일가는 훌륭한 아버지를 두어서 금지옥엽의 공주가 되었다. 한평생을 유자생녀하면서 하늘의 별과 같이, 욕경의 선녀같이 잘 지낼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자기가 청상과부가 되어 일평생을 고생으로 지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노릇이다. 공주는 울고 울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부왕마마를 부축하여 다시 일어나 앉으니 세상은 변함이 없는데 다만 없는 것은 사랑하는 남편 이제다.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홍천사의 저녁 불공을 울리는 종소리다. 인생이 너무나 허무했다. 방번, 방석과 이제가 살아 있다면 그들도 호화스럽게 저녁 밥상을 받아서 먹을 때다. 공주는 또다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주지에게 영을 내렸다.
"네가 이 절의 주지냐?"
"네, 그러하옵니다."
"저녁때가 되었고나. 너희 절에서도 망자한테 재를 울리느냐?"
"위패를 모신 망자한테는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립니다. 뿐만 아니오라 초하루, 보름에는 삭망제도 지냅니다."
"오늘부터 세자 방석과 방번이며 내 사위 이제의 위패를 조성해서 대불 앞에 모시도록 하라."
"네, 봉행하겠습니다."
주지는 판도방으로 내려가 상좌 중에게 영을 내렸다.
"세자 방석 저하와 무안군 방번과 부마 이제의 위패를 모시고 곧 상식을 올리라."
모든 상좌들은 비단으로 세자의 위패를 위시하여 방번과 부마 이제의 위패를 조성했다. 세 개의 위패를 홍천사 대웅전으로 올라갔다. 위패 뒤에는 만불향도 승려들이 뒤를 따랐다. 중들은 범패를 부르며 위패를 받들어 대웅전 대불에게 뵙는 행사를 하고 대불이 앉으신 서편 탁자 위에 세 사람의 위패를 안치한 후에 향도들은 향을 받들어 백 번 천 번 염불을 하며 돌았다. 공주도 승려와 함께 돌았다. 원통하게 죽은 원혼이 극락세계로 잘 천도되라고 축원을 하고 축복을 하는 것이다. 다시 백 번 천 번 위패와 대불을 둘러싸고 돈 후에 주지 승려는 모든 중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읽기 시작했다. 모두 다 마음을 뉘우쳐서 약한 마음을 버리고 착한 길로 가라는 불가의 좋은 경문이다. 공주와 태조는 위패 앞에 자리 잡고 앉아 경건한 태도로 경문을 들었다. 태조의 가슴에는 만 가지 감회가 가슴 안에 떠올랐다. 모두 다 뉘우치는 일뿐이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도 뉘우쳤다.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내쫓는 일도 뉘우쳤다. 폐위뿐이 아니라, 두 임금을 죽이고 공양왕까지 죽게 해서 세 임금을 죽인 것은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아 죽은 포은 정몽주가 분노에 떠는 눈을 부릅뜨고 흘겨보았다. 대장군 최영 장군이 칼을 빼들고 호통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이놈 이성계야, 내가 네 원수를 갚기 전에는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아니해서 새빨간 적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의 자식들은 형제가 서로 다툼질을 해서 싸움질로 집안이 망하리라."
최영 장군은 이와 같이 소리를 치며 눈을 부라렸다. 바다에 빠져 죽었던 모든 왕씨네들 유명무명의 무주고혼들이 머리를 풀고 산발하고 아귀떼가 되어 물에 빠진 몸으로 태조한테로 덤벼들었다. 태조는 더 배겨날 수 없었다. 한참 경문을 읽는 주지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든 아귀와 원귀들에게 술과 밥을 흠뻑 먹이는 큰 재를 울려서 시아귀의 행사를 하라. 돈을 아끼지 말고 호화하고 장엄하게 거행하여 신과 사람이 다 함께 흡족하도록 하라. 내탕금으로 만금을 내놓으리라."
주지는 경문 읽는 것을 중지하고 어명을 받들었다.
"하교를 봉행하와 오늘부터 곧 준비하겠습니다."
태조는 다시 내시에게 영을 내렸다.
"곧 들어가서 나의 내탕금으로 만 냥을 가져다가 홍천사 주지에게 전하라."
내시는 명을 받들어 물러갔다. 태조는 온몸에 오한이 나서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궁녀들이 뒤를 따랐다. 태조가 대궐로 돌아가려 할 때 공주는 태조께 아뢰었다.
"소녀는 대궐로 들어가지 아니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공주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버지 태조는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들어가고 어찌할 테냐?"
"들어가서 무얼 합니까?"
공주는 붉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말소리가 차갑도록 모질었다.
"무엇을 하다니, 나하고 함께 있어야 하지 않느냐?"
태조의 말씀에 공주는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원래 불효한 녀석이올시다. 출가외인인 자식의 몸으로 항상 시측을 할 수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마땅하오나 또한 의지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대로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해주옵소서."
글썽거리던 공주의 눈에는 이제는 눈물이 방울을 지어 저고리 섶으로 떨어졌다. 태조는 공주가 대궐로 아니 들어가겠다는 심정을 알 수 있었다.
"네 마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대궐로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네집으로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네 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 있으면 어찌하잔 말이냐."
"한편생 어마마마의 위패와 남편의 위패를 받들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겠습니다."
"그럼 승이 되겠단 말이냐?"
"승이 되어도 좋습니다. 승이 되어 묵탁과 염불로 세월을 보내면서 어마마마와 남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태조가 생각해보니 과연 공주는 의지까지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출가한 공주는 이제 대궐 안이 저의 거처할 곳이 아니었다. 확실히 공주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공주의 집으로 돌아간대야 공주는 이미 짝을 잃었다. 한평생을 같이할 남편을 잃은 공주가 간대야 독수공방에 집만 지키고 한평생을 지낼 판이다. 차라리 절간에서 그의 남편의 명복과 어마마마의 저승으로 간 혼을 위로해주겠다는 그 말이 가장 적절하고 기특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태조가 대답을 내리려 할 때 공주는 또 한 번 아뢰었다.
"이곳에 소녀가 있다면 소녀의 남편과 어마마마의 영혼을 위로할 뿐 아니라 두 동생 방번과 방석의 한을 품고 죽은 혼령도 위로해주고 싶습니다."
태조의 눈에는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좋다. 그럼 너는 오늘부터 이곳에 있거라. 그러나 이왕 절에 있게 되면 승이 되어야 한다."
"아까도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아주 불제자가 되어 머리를 깎아 승이 되어 불경을 배우며 목탁을 쳐서 세세생생 어머니와 동생들과 남편의 불행했던 이승의 발자취를 내세에는 빛나게 헤드릴 작정이옵니다."
태조는 공주의 말에 감동되었다. 그러나 슬픈 일이다. 삼천리강산을 손아귀에 넣은 일국의 제왕의 딸로서 일개 사찰의 여승을 만들어 버린다는 일은 진실로 참을 수 없는 기막힌 일이었다. 그러나 태조는 딸의 말을 거부할 권리도 없었다. 꾸짖어 막을 위신도 갖지 못했다. 달래고 만류할 힘도 없었다.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머리는 내 손으로 깎아주기로 하마!"
태조는 공주를 승려로 만드는 데 손수 자기 손으로 머리를 깎아주고 싶었다. 한편으로 딸 하나를 부처님께 바쳐서 모든 죄과를 사죄하고 한편으로는 이왕 공주를 여승으로 만들 바에는 다른 승려의 손을 빌리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손으로 단발을 시키고 싶었다. 태조는 곧 주지에게 영을 내렸다.
"공주마마께서 불제자가 되어 불가에 귀의하고 싶다 하신다. 주지는 그리 알고 정결하게 거처할 방을 준비하라. 그리고 불제자가 되기 위하여 머리를 깎는 일은 내가 친히 가위를 잡아 머리털을 깎아 주리라."
주지 이하 승려들은 태조의 말씀을 듣고 한편으론 황공하고 한편으론 광영이라 생각했다.
"삼가 어명을 받들어 지금 곧 머리를 깎게 하시고 보살계를 받는 절차를 취하겠습니다."
주지는 곧 승려들에게 분부했다.
"지금 공주마마께서는 불가에 입도를 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머리를 대왕마마께옵서 친히 가위를 잡으시어, 단발하기로 결정하셨다. 우리 흥천사의 크나큰 광영이다. 대중들은 빨리 공주마마의 머리 깎으시는 의식을 거행케 하라."
주지의 명령이 한 번 전해지니 만발공양을 받던 대중 속에서는 수군수군 탄식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공주마마께서 불도에 귀의하산다네. 흥천사의 크나큰 영광일세."
"우리 절의 영광일 뿐 아니라 온 불도를 받는 사람들의 영광이요, 불가의 크나큰 경사일세."
"나리가 새로 개국되면서 불교의 세력이 유교의 세력한테 점점 몰리기 시작하더니 이제 공주마마께서 승이 되신다 하니 앞으로 불도는 다시 힘을 얻어 훌륭한 도를 펴보게 되니 불도를 위하여 축하할 일이세."
한편에서는 이같이 떠들어대고 한편에서는 공주를 동정하는 소리가 높았다.
"부귀영화 속에 파묻힌 임금의 딸로 태어나서 오죽 신세가 답답하면 머리를 깎아 중이 되려 하겠소. 우리들 신세를 생각하고 공주의 신세를 돌이켜보니 서글프기가 짝이 없구려.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오."
"사람 팔자 모른다더니 과연 이런 일을 두고 이른 말이로구려. 누가 오늘날 경순공주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될 줄 알았더란 말요."
역경에 처해 있는 여승들은 이같이 탄식했다. 대웅보전 황금대불이 열겹 수방석 위에 정좌한 연화대 아래는 향로에 향연이 무르녹게 피어오르고, 전라도 옥과석을 정결하게 깔아놓은 앞에는 공주가 향을 사른 후 사배를 드리고 단정히 앉았다. 옆으로 흥천사의 주지 이하 도가 높은 고승들은 범패를 부르고 경문을 외며 좌우편으로 갈라서서 장차 공주가 승려가 되어 불가에 귀의할 경건한 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조는 소복을 벗은 후에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후에 내시와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배석 앞에 나타났다. 친히 향을 대불 앞에 세 번 사르고 몸을 굽혀 국궁하여 두 번 절을 올린 후에 미리 준비해놓은 수방석 위에 단정히 앉았다. 다음에 주지가 나타났다. 승려 중에서 제일 높은 도승이었다. 만수가사를 어깨에 메고 손에는 깨끗한 백금가위를 쟁반 위에 받들어, 열 지어 섰는 대중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주지 뒤에는 상좌 중 두 명이 양편으로 갈라서서 만수향을 받들어 나왔다. 북소리가 두리둥둥 올렸다. 흥천사의 밝고 맑은 종소리가 하늘가에 푸른 빛을 뚫고, 흰 구름 자락을 흔들어 허공으로 메아리 지어 흩어졌다. 공주의 소복 입은 앞에는 기름 먹인 넓고 큰 장지 종이가 펼쳐졌다. 궁녀들이 다시 향탁 위에 향을 살랐다. 푸른 향연이 향훈을 뿜어 전각 안에 가득했다. 흑장심을 입은 승려들이 바라를 치고 춤을 추어 두어 바퀴 돌았다. 북소리가 다시 '쿵' 하고 일어났다. 종루에서는 흥천사의 독특한 맑은 종소리가 서른세 번을 울렸다. 주지는 어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쟁반에 받든 백금가위를 어전 앞에 바쳤다.
"가위를 잡으십시오."
태조는 왼손으로 곤룡포 소매를 걷어잡고 바른손으로 주지가 받들어 올리는 가위를 잡았다. 공주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궁녀의 부액을 받고 흥천사 대불을 향하여 네 번 절을 올리고, 다시 조용히 뒷걸음질을 쳐서 자기 자리에 단정히 꿇어앉았다.
"공주마마의 머리털을 베어줍시오."
주지는 조용히 태조께 고했다. 태조는 자기 딸 경순공주의 쪽을 찐 흑각비녀를 뽑았다. 단정히 쪽을 쪘던 검은 머리는 구름 흩어지듯 흩어졌다. 태조는 삼단 같은 검은 머리채를 왼손으로 잡았다. 바른 손에 쥐어진 백금가위가 '싸각' 소리를 내며 공주의 검은 머리는 임금 태조의 늙은 손이 경련을 일으키면서 바르르 떨렸다. '싸각' 하는 가위질하는 소리를 듣는 공주의 등골엔 차디찬 소름이 쭉 끼쳤다. 공주의 눈에서는 진주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가슴 속에서는 만 가지 회포가 일어났다. 대궐 안에서 칼에 맞아 죽은 남편 이제의 생각, 세자가 되었다가 비명횡사한, 열다섯 살로 일평생을 마친 방석의 생각, 열여덟 살로 세상을 떠난 동복동생 방번의 생각이 일어났다. 눈물은 또다시 방울방울 떨어졌다. 태조는 다시는 더 딸의 머리칼을 자를 기운이 없었다. 백금가위를 공주의 삼단 같은 머리채가 잘라져서 가로 떨어져 있는 장지종이 위에 내던졌다. 태조는 말한 기운도 없었다. 잠깐 동안 숨을 돌렸다. 지밀상궁에게 명을 내렸다.
"남은 머리는 네가 베어드려라!"
태조는 감개가 무량했다. 슬픔은 복받치고 기운은 떨어져 말할 기력조차 없었다. 지밀상궁이 유지 위에 놓인 백금가위를 공손히 받들었다. 공주의 뒤통수에 바싹 손을 대어 나머지 머리칼을 잘랐다. 주지는 다시 정한 쟁반에 백호치는 칼을 받들어 들여왔다.
"이제는 가위로만 아니 되십니다. 칼로 백호를 치셔야 합니다."
쟁반에 받들어 들여온 백호치는 칼은 비수같이 날카로웠다. 궁녀들은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여승이 없느냐. 백호 잘 치는 여승이 있으리라."
태조는 사랑하는 딸 경순공주의 백호 치는 것을 남자 중인 젊은 중들에게 맡기고 싶지 아니했다. 만발공양을 받들어 내왔던 젊은 여승이 손을 씻고 들어와 단정하게 꿇어앉아 공주의 백호를 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머리털 베어지는 소리가 일어났다. 공주의 일천 번뇌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잘라지는 칼소리와 함께 스러졌다. 공주는 새 기운이 도는 듯했다. 공주의 눈앞에는 새 세상이 벌어지는 듯했다. 모든 인과를 떨어비록 새로운 천지로 나가는 듯했다. 아까까지는 소름이 쫙 끼쳤는데 이제는 소름도 끼치지 아니했다. 홀연 머릿속에 돌아간 큰오라버니 진안대군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복으로 태어난 분이지만 이분이야말로 진정 사람의 길을 걸었던 분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도 일국의 제왕이 되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활 잘 쏘는 이름을 천하에 떨쳤으나, 진정한 인격 있는 분은 아니라 생각했다. 남편 이제도 큰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했다. 정도전과 싸워서 이씨네 집안에 불행을 일으킨 이복 오라버니 방원이는 여깃 욕심과 육신 덩어리인 존재로 뵈었다. 공주는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아니했다. 새파랗게 머리를 깎아졌다. 공주는 합장을 하여 대불께 절을 올렸다. 진정 무엇인지 깨달아지는 듯한 마음이 생겼다.
"아바마마, 어서 환궁하십시오."
머리를 깎고 흑장삼을 입어 대불께 배례를 올린 공주는 아버지보고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을 했다. 공주는 이제는 슬프지도 아니했다. 눈물도 나지 아니했다.
"아바마마, 그저 병환이나 나지 마시고 만수무강하십쇼."
공주는 다시 태조를 위로해서 대궐로 환어하시기를 재촉했다. 태조는 새파랗게 깎은 머리에 흑장삼을 입고 서서 초연히 말하는 공주를 보니 일촌 간장이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번연히 자기 손으로 삼단 같은 공주의 검은 머리를 베어주었건만 도시 꿈속만 같았다. 어찌 된 일인지 자기 자신도 모를 것만 같았다. 다만 공주가 가련하고 불쌍하다고만 생각이 들었다. 태조도 우뚝 서서 공주의 중이 된 자태를 눈물을 머금고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태조는 대궐로 아니 들어간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오냐, 대궐로 들어가마. 지금 자비를 놓았으니 곧 대궐로 들어갈 것이다."
태조는 이같이 말하고 차마 발길을 옮겨 대궐로 들어가지 못했다. 우두커니 서서 공주의 새파랗게 깎은 승려의 모습을 넋을 잃은 듯 바라보고 섰다.
"아바마마, 이제는 어서 대궐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원체 미령하신 터에 오랫동안 절에 계시어 몹시 피로하십니다. 어서 들어갑시오. 불초 소녀의 생각은 잊어버리시고 돌아가시옵소서."
"오냐 공주야. 염려하지 마라. 나는 아직도 기운이 씩씩하다. 다만 못 당할 일을 많이 당해서...."
"아바마마, 감기 드시옵니다. 어서 환궁하시옵소서."
"오냐, 염려 마라."
태조는 '오냐' 소리를 되풀이하면서 중이 된 딸의 모습을 또다시 들여다보았다. 자기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전실 한씨의 소생인 아들들은 자기의 아들로 생각이 들지 아니했다. 전실 한씨의 아들들은 자식이 아니라 원수와 같았다. 자식이 원수 같으니 며느리 되는 사람들은 더욱이 원수로 생각이 들었다. 환궁을 한 대야 강비가 없는 것은 이전 일이라 말할 나위가 없지마는 세자 방석도 죽어서 없다. 방번도 죽어서 없다. 사랑했던 사위 이제도 없다. 공주도 승이 되어 어머니 강비의 원찰인 흥천사 대불의 제자가 되어 절에 있게 되었으니, 누구를 의지하고 단지 한 시각이라도 지낼 것이 딱했다. 간다고 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발길은 돌부처가 된 듯 돌아서지 아니했다.
"아바마마, 감환이 또 드시면 큰일이올시다. 어서 내침으로 듭시옵소서. 불초녀는 또다시 내일이고 모레고, 거둥을 하시어 보러 나오시면 그만이 아니오니까. 어마마마의 상식 올리는 것도 보실겸."
"오오, 네 말이 옳다."
태조는 비로소 발길을 돌려 대웅보전 섬돌 아래로 내려섰다. 태조는 승이 된 귀여운 딸을 작별한 후에 궁으로 돌아왔다. 삼천 궁녀가 들끓고, 내시, 별감, 무예청들이 오락오락 전각 앞에 가득했다. 새로 된 세자빈이며 전실 한씨한테서 난 범과 같고 용과 같은 장성 한 아들과 며느리들이 법석을 하고 있는 대궐이건만 적적히 사람 없는 텅 빈 동굴 속 같았다. 쓸쓸하고 차가웠다. 태조는 대전 내침에 들어가자, 지밀나인들이 포진해놓은 용틀임으로 수를 논 금침 위에 몸을 던져버렸다. 지밀나인이 금침 자락을 곱게 덮어드렸다. 태조는 모두 다 귀치 아니했다. 다리팔이 쑤시고 뼈끝마다 쏙쏙거렸다. 눈을 감았다. 돌아간 강비의 얼굴이 나타났다.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땅바닥을 치며 통곡을 하는 모습이 뵈었다. 태조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얼른 눈을 떠보았다. 황금으로 만든 와룡촛대에 황촛불이 벌룽거렸다. 불빛이 보기 싫었다. 궁녀에게 명했다.
"불을 좀 꺼다우."
지밀나인은 나삼 소매로 황촛불을 껐다. 방안은 캄캄했다. 태조의 눈에는 열다섯 살 먹은 세자 방석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 예쁘고 총명하고 곱던 얼굴은 금시에 스러져버리고, 묵에 칼을 꽂고 피를 줄줄 흘리는 방석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버지.'
큰소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왜, 나를 세자를 만들어서, 비명횡사를 하게 했소.'
하고 피를 줄줄 흘리며 품안으로 기어들었다. 소름이 전신에 쪽 끼쳤다. 도저히 배겨날 수가 없었다.
"빨리 불을 켜다오."
태조는 어둠 속에 고요히 모시고 있는 지밀나인에게 영을 내렷다. 지밀나인은 급히 황초에 불을 다렸다. 황촛불은 다시 방 안에 환한 빛을 던졌다. 세자 방석이 머리를 풀고 피 흘리는 원귀의 모습은 금방 스러져버렸다. 태조는 한숨을 '휘...' 쉬고 베개를 고쳐 돌아누웠다. 눈을 감아 보았다. 이번엔 방번의 얼굴이 나타났다. 방석보다 세 살이 위인, 열여덟 살인 잘생긴 방번의 얼굴이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딴 모습으로 변했다. 역시 머리를 풀어 산발했다. 몸뚱이는 없고 대가리만 데굴데굴 굴러들어왔다. 그 아름답던 고운 얼굴은 원귀 중에서도 제일가는 원귀로 변했다. 눈은 흡뜨고 입술은 칼에 맞아 반이나 떨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대가리는 눈을 흘기며 태조를 바라보았다. 무섭고 끔찍스럽게 피 흘리는 대가리가 눈을 실룩거리며 말을 했다.
'딱하오, 딱해. 왜 나를 세자로 삼지 아니하고 내 아우 방석으로 세자를 삼았다가 이 꼴을 당했소. 형제의 차례를 바꾸었으니 이 꼴이 되지 않겠소. 무어, 내가 성미가 불량했다고. 어째서 내가 불량했소? 그저, 보기 싫으면 싫다 하지, 왜 나더러 불량하다는 누명을 씌웠소. 나는 아비, 어미를 못만나서 이렇게 이복형들한테 모가지가 달아났소. 방석이는 세자나 된 값으로 죽었지만 나야 무슨 까닭에 이같이 비명횡사를 해야 하오. 전실 자식과 후실 자식들 임금 자리 싸움에 나는 무슨 까닭으로 목이 달아났단 말이오. 독 틈에 낀 탕건이란 말도 있지만, 나는 무슨 까닭에 비명횡사를 해서 원귀가 되었단 말이오. 내 목을 내놓으시오. 내 목을 어서 내놓으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당신의 목을 내 목같이 만들 테요.'
방번의 피 흘리는 신체 없는 머리는 태조의 이불자락으로 피를 뿜으며 뛰어들었다. 태조의 전신은 물초가 되었다. 급히 눈을 떴다. 방번의 흉악한 환상은 스러졌다. 목이 타올랐다.
"얘야, 냉수가 있느냐. 냉수가 있거든 빨리 가져오너라."
재노는 궁녀에게 물을 달라 했다. 까닭을 모르는 궁녀는 공손히 아뢰었다.
"냉수를 젓수시면 옥체에 해로우십니다. 보리차를 서늘하게 달여 놓았습니다."
"냉수를 달라니까 그러느냐."
태조는 보챘다. 공녀느 다시 간했다.
"냉수는 옥체에 해롭습니다."
태조는 부아가 터졌다.
"해로워도 내가 해롭지 네가 해로우냐. 어서 냉수를 가져오너라."
궁녀는 냉수를 받들어 올렸다. 원체 열에 띤 태조는 냉수도 미지근했다.
"이것이 어디 냉수냐. 냉수가 아니다."
"진정으로 아룁니다. 냉수올시다."
"어제 떠온 냉수로구나."
"아니올시다. 초저녁에 대령해놓은 것입니다. 그러하오면 밖에 나가 다시 정화수를 떠오겠습니다."
지밀궁녀는 청자 대접을 받들어 들고 우물로 내려가 정화수를 떠올렸다. 역시 대왕의 입에는 미지근했다.
"가슴이 답답하다. 이 물가지고는 답답한 내 가슴을 풀 수 없다. 얼음을 가져오너라."
궁녀는 큰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 빙고로 나가서 얼음을 부숴 가지고 들어왔다. 태조는 얼음물을 마시었다. 그래서 시원치 아니했다. 얼음덩어리를 어적어적 깨 먹었다. 그래도 가슴에는 불이 일어났다. 답답했다. 태조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눈을 다시 감아 보았다. 이번에는 사위 이제의 얼굴이 나타났다. 일전 변란 때 보았던 참혹한 광경이 그대로 나타났다. 쫓겨나가는 세자 방석을 위하여 칼을 빼들고 방원의 심복대장인 이숙번을 꾸짖는 호통 소리가 울렸다. 이숙번이 번개같이 부마 이제의 칼을 뺏은 후에 이제의 목을 후려 갈기어서 이제의 목은 떨어져 전각으로 굴러가고 붉은 핏줄기는 자기가 앉아 있는 용상에까지 뻗쳤던 참혹했던 그 모양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태조는 다시 눈을 떴다. 더 배겨낼 수가 없었다. 벌떡 자리에 일어 앉는다. 밤은 점점 깊어 들었다. 지밀궁녀는 고단함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윗목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었다. 닭이 홰를 쳐 울었다. 태조는 이불로 무릎을 가리고 우두머니 혼자 앉았다. 닭이 울었다. 두 번째 우는 닭의 소리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아니했다. 눈만 감으면 참혹한 꼴이 환상으로 나타났다. 태조는 허리가 아팠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아니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눈만 감으면 헛것이 뵈어서 잠이 오지 아니했다. 닭이 또 한 번 울었다. 무신한 닭이었다. 세 번째 우는 닭 소리다. 어느덧 동이 훤하게 트기 시작했다. 태조는 꼬박 밤을 새웠다. 온몸이 피로했다. 하는 수 없이 또다시 자리에 누워보았다. 무슨 꿈인지 악몽인데 자꾸만 뒤숭숭하게 꾸어졌다. 해가 높이 떠서 일고삼장이 되었다. 내시가 들어오고 승지가 문후를 했다. 왕의 재가를 받으러 태산 같은 문서를 승지는 받들고 들어왔다. 태조는 결재를 내릴 기운조차 없었다.
돌연 선위
태조는 물끄러미 승지를 기운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분부를 내렸다.
"내 몸이 매우 아프고 괴롭다. 물러가거라."
한 마디 모기 소리만큼 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승지는 대왕의 환후를 조심해서 새로 된 세자한테 고하고 약방에 급히 기별했다. 전의가 들어오고 약을 달이느라고 지밀 안은 수선거렸다. 모든 왕자들이 입시했다. 이 중에는 태조가 가장 보기 싫은 정안군 방원도 끼어 있었다. 진정 보기 싫었다. 병이 몇 갑절 더 날 것 같았다.
"물러들 가거라. 보기 싫다!"
태조는 아들들을 나가라 했다. 병은 용이치 아니했다. 약도 얼른 효험이 없었다. 마음으로 난 병이었다. 마음이 가라앉기 전에 병은 나을 수 없었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왕씨네를 배반하고 왕씨란 왕씨를 모조리 죽이고 의리 있는 두문동 칠십여 인을 죽인 죄과가 너무나 크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을 다 버리고 산수간으로 방랑하고 싶었다. 태조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우선 모든 전비를 뉘우치고 산수간으로 방랑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사흘 뒤에 태조는 승정원 도승지를 불렀다.
"내가 전할 말이 있다. 만조백관들을 불러서, 근정전에 모이게 하라."
돌연한 분부였다. 도승지 이하 정원의 가주서까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궁중 지밀에서도 까닭을 몰랐다. 왕후도 없고 고이는 후궁도 없으니 왕의 뜻을 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정승 조준, 하윤 이하 대개는 방원의 심복들 만조백관들은 초패를 받고 근정전 앞으로 추창해 모여들었다. 이윽고 왕은 면류관, 곤룡포로 용상에 부액을 받고 올랐다. 임금의 옥음이 서서히 만조백관의 귀에 전해졌다.
"과인이 뜻밖에 경들의 초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이 나라를 다스린 지 햇수로는 칠 년이 되었다. 이제 나이가 환갑과 진갑을 지나 육십 사세나 되었다. 요사이 병이 잦고 정신이 혼몽하여 임금의 책임을 다할 수 없다. 나의 왕위를 세자에게 선위할 작정이다. 경들은 나의 뜻을 알아 앞으로 세자를 도와 충성을 다해주기 바란다."
돌연한 명령이었다. 대신 이하 모든 신하들은 어리둥절했다. 권모와 술수가 유명한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도 까맣게 왕의 뜻을 몰랐고, 그의 어금니 같은 정승, 하윤, 조준이며, 호반으로 이숙번,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가 몰랐다. 모두 다 무어라 대답할지 몰랐다. 태조는 계속해서 영을 내렸다.
"도승지는 내 뜻을 받아 빨리 동궁에 기별하여 세자로 하여금 왕위에 오를 모든 차비를 차리고 곧 전각으로 오라 일러라."
왕명이 떨어지니, 도승지는 내시와 예방승지와 가주서들을 거느리고 동궁으로 향했다. 도승지가 동궁으로 들어가 세자 방과한테 고했다.
"대왕 전하께옵서 세자께 선위를 하려 하시와, 곧 근정전으로 납시라 하십니다."
세자 방과는 성정이 어질고, 착하고, 마음이 색시같이 고운 사람이었다. 승지의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선위라니,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시고 나더러 왕이 되라는 말씀인가?"
"예, 그러하오이다."
"될 뻔이나 한 말씀인가. 내가 어찌 아바마마께서 생존해 계신데 참람하게 왕이 된단 말이오. 천부당만부당한 하교요."
세자 방과는 펄쩍 뛰었다.
"동궁마마, 지금 대왕 전하께옵서는 만조백관을 거느리시고 근정전에 앉으시어 세자저하의 나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체할 수 없사옵니다. 하오실 말씀이 계시다면, 들어가시어 말씀을 아뢰어주시기 바라옵니다."
새로 된 세자 방과는 하는 수 없었다. 급히 세자의 공복으로 갈아입고, 모든 동궁의 관원과 승지들을 거느리고 근정전으로 나가, 전각에 올라 전하께 뵈었다. 임금은 장중한 얼굴빛으로 세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만조백관에게 선포하였거니와 나는 이미 나이 늙고 정신이 혼몽하여 임금의 큰 책임을 맡을 수 없다. 오늘부터 조선국왕의 자리를 너 세자에게 선위한다. 내 뜻을 받들어 너는 왕위에 오른 후에 백성 다스리기를 너의 친자식같이 하고, 상주고 벌주는 일을 밝은 거울과 맑은 물같이 하여 천시를 가음 알아, 만기를 잘 처리하라. 이리하여 나라를 창업한 나의 본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고, 사사로이는 집안을 잘 다스려서 형제가 우애 있게 지내고, 삼강오륜에 어그러짐이 없게 하라. 이리하여 청업한 이 기틀을 자손만대에 전케하여 일후에 백 대 뒤에, 어진 임금이었다는 찬양을 받게 하고, 나라를 더욱 부강케 해서 온 나라 백성들이 태평세월에 싸여 격양가를 부르며 천년 만 년 잘살도록 하라."
태조는 장중한 분부를 세자에게 내렸다. 세자 방과는 두 번 절하며 울며 대답했다.
"하교하신 분부는 잘 받들어 들었습니다마는 불초자는 결코 아바마마의 뜻을 받자옵지 못하겠습니다."
세자는 울면서 머리를 전각 마루에 부딪쳤다. 세자 방과의 울음 소리는 처량하고 처절했다. 뜰 앞에 나열해 서 있는 만조백관들의 귀에까지 들렸다. 태조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 뜻은 이미 굳은 지 오래다. 부질없게 병이 든 아비를 괴롭게 하지 말라. 너의 착한 마음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몸을 위하여 한가로이 산수간에 여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다시 군말 말고 내 뜻을 받아라."
세자 방과는 다시 머리를 부딪치며 목멘 소리로 아뢰었다.
"아바마마께서 생존해 계시온데, 불초한 자식이 어찌 참람하게 대위에 오르리까. 천만 번 생각해도 차마 그 노릇은 못 하겠나이다."
태조는 세자를 타일렀다.
"옛 사기에도 나이 많으면 아들에게 임금의 자리를 선위하는 전례가 많다. 네가 불효자가 되지 아니하려면 나의 뜻을 받아야 한다. 다시 군말 말고 곧 용상에 올라 만조백관의 치하하는 조회를 받으라."
태조는 곧 말을 마치자 승지에게 명을 내렸다.
"내시에게 분부하여 세장게 익선관을 씌우고 곤룡포를 입게 하라. 나는 곧 내전으로 들어가리라."
태조는 말을 마치자 용상에서 일어났다. 궁녀들이 부액하여 옥교에 올랐다. 세자 방과는 뜰에 내려 내전으로 돌아가는 대왕을 전송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대왕의 욕교가 뜬 후에 승지는 세자 방과를 다시 전각으로 모셨다. 아무리 싫다 하나 도리가 없었다. 머리에는 왕이 쓰는 익선관이 얹어지고 몸에는 황룡을 수놓은 붉은 곤룡포를 입었다. 세자는 눈물을 머금고 용상에 올랐다. 근정전 뜰 앞에 서 있는 문무백관들은 새로 용상에 올라 즉위한 왕을 향하여 천세를 불렀다. 부르고 또 부르는 천세 소리가 끝나자 왕은 만조백관을 향하여 당연히 있어야 할 고유도 내리지 못했다. 원래 창졸간에 왕이 된 일이었다. 정원 승지 이하 문서의 직책을 맡은 관원들이 즉위 예식에 대한 고유문의 준비도 못했지만 새로 왕이 된 방과는 맘이 어질고 착했다. 방석, 방번, 이제 등 집안 싸움을 목격해 본 사람이었다. 차례는 비록 둘째 아들이라 하나 큰형 진안대군 방우는 그의 아버지 이성계가 고려의 신하로 임금을 죽여버리고 나라를 뺏아 임금이 된 것은 불의의 짓이라 해서 자포자기해 죽고 보니 영안대군인 방과는 자연 장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방과는 성정이 온후하고 얌전했다. 다섯째 동생 방원이 이복형제를 죽이고 야단법석을 치는 동안에도 방과는 아버지의 병환을 근심해서 삼청동 소격전에서 아버지의 병환이 어서 평복되시기만 빌다가 변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몸을 피하여 월성을 해서 뚝섬까지 달아났다가 다음날에야 왕의 부름을 받아 대궐로 들어온 후 어찌할 수 없어 세자라는 명목을 받았던 것이다. 마음에 털끝만한 욕심도 없는 방과는 열 번 백 번 사양하다가 세자의 명칭을 받았다. 그러나 항상 마음은 슬프고 불안했다. 마음속으로 형 방우는 참말 명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도 일직 큰형님의 뒤를 따라 세상을 등졌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자가 되기는 되었으나 항상 불안하고 공구한 중에 있던 방과는 오늘 별안간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임금이 되라는 대명을 받고 나니 기가 막히고 얼떨떨했다. 언제 어느 때 무슨 혹화를 당할지 몰랐다. 지금 조정의 중추세력은 모두 다 정안군 방원의 주체세력이었다. 서리같이 시퍼런 칼날 속에서 임금이 된다는 일은 스스로 자기의 몸을 망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몸만이 망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와 후궁과 자식들, 온 집안이 결딴날 것이 분명했다. 선위하는 예식은 불안과 공포와 의심과 초조 속에서 끝났다. 만조백관들은 태조한테 상왕의 칭호를 올리고 흩어졌다. 새로 임금이 된 방과는 내시가 인도하는 대로 용상에서 내려 연 위에 올랐다. 이제는 동궁이 아니라 왕이었다. 조선 천지를 다스리는 제왕이었다. 연으로 모시는 의장도 달랐다. 만조백관들의 전송을 받고, 수많은 무예청들이 연을 모시어 어깨에 메고 별운검은 밀화패영인 대장복색을 차리고 앞을 인도했다. 아무리 대궐 안이라 하나 정식으로 선위를 받아 왕이 된 첫날이었다. 약식 의장으로는 거행할 수 없었다. 내시가 다시 앞뒤에서 옹위하고 삼천 궁녀들은 뒤를 따랐다. 향하는 곳도 이제는 동궁마마가 거처하던 춘방이 아니었다. 바로 아바마마가 계시던 대전이었다. 아니 영안군 부인도 세자빈으로서 일약 강비가 거처하던 궁전으로 옮겼다. 방과가 탄 연은 동궁 편으로 가지 아니하고 대전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느냐?"
새 임금 방과는 내시에게 물었다.
"대전으로 모시옵니다."
"대전으로, 아바마마께서 계시던 곳 말이냐?"
"예, 그러하오이다."
"아바마마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냐?"
"별전에 계시옵니다. 대전을 상감마마께 쓰시라 하시고, 후원 별전으로 옮기셨습니다."
"아바마마께서 계신 곳으로 가자."
방과는 내시한테 명령을 내렸다. 내시는 곧 별운검에게 상감의 뜻을 전했다. 별운검은 곧 무예청들에게 영을 내렸다.
"상왕마마께서 계신 별전으로 향하랍신다."
무예청들은 별운검의 지휘를 받고 발을 맞추어 엄숙한 걸음으로 별전을 향하여 나갔다.
"새 상감마마 듭시오."
하는 무예청과 내시의 연통을 듣자 별전시녀들은 상왕께 아뢰었다.
"새 상감께서 듭신다 하옵니다."
왕의 자리를 아들 방과한테 전하고, 만 가지 감회가 오고 가는 속에 괴로운 몸을 포진 위에 던져 누웠던 태조는 벌떡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모든 측근 시녀들이 부액해 일으켰다.
"익선관을 가져오너라."
상왕은 벗었던 익선관을 머리에 쓰고 새 상감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위를 받았으니 인사하러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새 상감은 전상에 오르자 모든 사람의 부액을 물리치고 상왕이 계신 방문을 열었다. 새 상감은 장중한 걸음으로 상왕 앞에 나가 공손히 배를 올렸다. 사변 이후에, 파리하고 초췌하여 시름에 싸였던 상왕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즉위 예식은 다 끝마쳤는가?"
아들이라 하나, 이제는 왕의 자리에 나가 상감이 되었으니 해라를 할 수 없었다. 하오도 아니요, 해라도 아닌 중간 말로 물었다.
"네."
새 임금은 상왕이 묻는 말에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 아바마마 상왕을 바라뵈었다. 어질고 착한 눈매가 하소연하듯 상왕의 얼굴을 더듬었다.
"이제 대전으로 돌아가 중한 책임을 맡도록 하게."
상왕의 말소리도 부드러웠다. 강비의 소생 방번, 방석이 다 죽은 후에 가장 믿을 만한 아들은 이제는 전비의 소생으로는 방과뿐이었다. 마음이 어질고 착했다. 우유부단한 점은 있으니 행동이 점잖고 착한 효자다. 방원이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이는 난리 통에도 전혀 자기의 병이어서 쾌차하기만 빌고 있었던 방과가 아니었던가. 이러니 말대답 소리가 저절로 부드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은 외람히 대전으로 들어가 거처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임금이 대전에 거처하지 아니하고, 누가 대전에 거처한단 말인가."
상왕은 어진 눈매로 새 상감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깐 창졸간이라 어명을 내리신 대로 머리에 익선관을 썼습니다마는 신은 받지 못하겠습니다."
"왜?"
"아바마마께서 엄연히 생존해 계시온데, 제 어찌 감히 용상에 앉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임금의 자리를 내놓겠습니다."
"말이 되는 소린가. 만조백관한테 내가 이미 선포를 했고 그대가 또 이미 옥책을 받아 왕위에 나갔는데, 왕의 자리를 내놓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무리 지중하옵신 왕명이요, 사사로이는 아바마마의 하교라 할지라도, 소자는 불초하와 아바마마의 뜻을 거스른다 할지라도 감히 천추만대의 불효자가 되기는 싫사옵니다."
새 임금의 말을 듣자 상왕은 껄껄 웃었다.
"선위라는 것은 임금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 그 자리를 양위하는 것이다. 옛 사기를 볼지라도 요는 순에게 양위를 했고, 순은 우에게 양위하지 아니했더냐. 이것은 타성끼리 어진 분에게 임금의 자리를 사양해준 것이다. 이러므로 후세에 미덕이라 칭송해 마지않는 일이지만, 같은 혈속의 자손한테도 아버지가 늙어서 정치하기 어려우면 아들한테 살아서 전위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늙어서 너한테 양위한 것이니, 후세에 조금도 시비를 들을 까닭이 없다. 그러하니 조금도 불효자 될 것이 없다. 염려하지 말라. 허, 허, 허."
상왕은 말을 마치자 드높게 웃었다. 새 상감 방과가 아뢰었다.
"아니올시다. 못 받겠습니다."
새 상감은 무릎을 꿇고 공손히 고했다.
"허 허 허. 네가 못하겠다 해도 이제는 아니 된다. 즉위 예식까지 치르고 아니 받는단 말이 될 말이냐. 딴소리 하지 말라."
"아바마마."
새 임금 방과는 울 듯이 아바마마를 부르며 상왕을 우러러뵈었다.
"소자는 왕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올시다."
"웬 말야."
"나라를 건국하는 데 조그마한 공도 없습니다."
"누구는 별난 공로가 있었느냐?"
상왕은 벌써 눈치를 챘다. 방원이의 모양으로 정몽주를 때려죽이고 정도전을 구해냈다가 다시 죽이고 모든 일을 주장한 일이 없었다는 그의 뜻인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시치미를 떼고 '누구는 별난 공로가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방원이가 저보다 영특합니다. 이번 왕위는 방원이한테로 내려줍시오."
"무어, 방원이?"
상왕의 눈은 금방 부릅떠졌다.
"그 도둑놈한테 나의 왕위를 전한단 말이냐. 동생들을 죽이고, 어진 사람을 죽이고, 모든 횡포한 짓을 방약무인하게 하는 삼강오륜도 모르는 그 도둑놈한테 왕위를 전한단 말이냐. 그것은 내가 죽은 후라도 아니 된다. 그리고 너는 이미 왕위에 오르는 즉위 예식까지 거행했는데, 별안간 방원이는 왜 끄집어내느냐."
"아바마마께서 왕위를 소자한테 전위하시듯이 소자는 방원이한테 선위를 하면 좋지 아니합니까. 그렇게 한다면, 모든 일이 사무송이 될 것입니다."
"아니 된다, 아니되네. 내가 죽은 후에 눈에 흙이 들어가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는 절대로 아니 된다. 방원이란 놈은 자식이지만, 나의 원수다. 결코 아니 된다."
상왕의 분노는 화산처럼 터졌다. 머리털이 비쭉 일어나고 수염이 꼿꼿이 뻗쳤다. 눈이 발갛게 충혈이 되었다. 금방 눈이 찢어질 듯했다.
"잔말 말고 어서 대전으로 나가서 나라 정치를 잘 다스리도록 하라. 나는 마음을 편안히 하여 산천경개의 구경이나 하리라. 내 나이 환갑을 지나, 벌써 육십사 세다. 명산대찰을 찾아서 산천경개를 구경하며 여생을 마치리라."
상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바마마께오서 소자의 말씀을 아니 들으시면, 또다시 이씨 집안에는 큰 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이제 네가 왕이 되었으니 네가 잘 처리하라. 나의 알 바가 아니다. 처리만 잘 하면 되지 않느냐."
상왕은 말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거닐었다.
"공연히 네가 내 심경을 괴롭게 하지 말고 어서 대전으로 나가서 국사를 가음알아 만기를 처리하라. 너는 네 누이기 중이 된 것을 모르느냐."
상왕은 구슬프게 말을 보냈다. 새 임금은 더 아뢸 수 없었다. 추창해 물러나왔다. 뜰에 내려 부액을 받고 다시 연에 올랐다. 무예청들은 대전으로 연을 모시었다. 대전의 모든 내시들을 위시하여 수백 궁녀가 뜰 아래 부복하여 새 임금을 맞이했다. 새로 왕비가 된 김씨도 왕후의 대례복을 입고 뜰에 내려 왕을 맞이했다. 수백 궁녀들, 꽃과 같고 달과 같은 아름다운 여인들의 얼굴도 새 왕의 눈에는 들어가지 아니했다. 새 왕은 화려찬란한 왕후의 대례복, 꿩을 수논 적의를 입고 단정하게 미소를 지어 맞아들이는 왕후의 뒤를 따라 대전으로 올랐다. 아바마마께 문안을 들어가던 바로 그 대전이다. 아바마마께서 앉아 계시던 용상이 황금으로 아로새겨 찬란한 빛을 뿜었다. 지밀시녀들은 전하와 왕후 김씨를 황금 용상 위에 앉게 했다. 새 임금은 앉기가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이거, 이 자리에 앉기가 미안하기 짝이 없구먼."
왕비를 향해 말하고 얼른 앉지 아니했다.
"여기는 승하하옵신 대비마마께옵서 앉으시던 옥좌지?"
왕후 김씨는 궁녀에게 물었다.
"네, 그러하옵니다."
궁녀가 웃음을 지어 대답했다.
"저 역시 앉기가 황송합니다."
왕후 김씨도 얼굴을 약간 붉히며 상감께 아뢰었다. 왕후 김씨도 성격이 무한 얌전하고, 조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방원의 아내 민씨와 같이 적모란 꽃같이 화려하고, 권모술수가 많은 여인이 아니었다. 남편인 새 임금과 성격이 비슷했다. 마음이 유리같이 맑고 깨끗했다.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했다.
"별안간 아바마마께서는 황송하신 처분을 내리셨습니다. 신첩도 이 자리에 앉기가 죄송만만하옵니다."
"나도 그같이 생각해서 즉위식을 파하는 길로 곧 윗전에 들러, 아바마마께 뵙고 백 번 천 번 사양하는 말씀을 올렸으나 아무리 해도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소이다. 나중에는 역정을 내시면서 꾸지람까지 내리시니 죄송해서 더 말씀을 아뢸 길이 없었소."
감찰상궁이 엎드려 아뢰었다.
"즉위 예식을 끝마치셨으니 이제는 내명부들의 조하를 받으셔야 합니다. 두 분 마마께서는 옥좌에 진좌하옵소서."
감찰상궁은 앉기를 주저하는 새 상감과 새 왕후를 모시어 용상 위에 앉혔다. 내명부들이 일제히 들어왔다. 후궁을 위시하여 상궁의 직첩을 받은 수백 궁녀가 일제히 현신을 드리기 시작했다. 내명부들은 차례차례 재배를 드리고 뒷걸음쳐 물러났다. 다음엔 외명부들의 배례가 있었다. 첫째로 정안군 부인 민씨가 화려장중한 예복으로 의젓이 걸음을 걸어 들어와서 기쁨에 넘쳐 흐르는 얼굴로 정중한 배례를 드렸다.
"두 분 전하마마, 대위에 오르심을 축하하옵니다. 억조창생의 소원이올시다."
정안군 방원의 부인 민씨는 하사를 마치고 물러났다. 다음엔 방간의 부인, 방의의 부인들이 절을 드리고 물러났다. 방원의 부인처럼 수다를 떨지 아니하고, 조용히 절만 하고 물러났다. 새 임금 내외가 내전에서 이같이 내명부와 외명부의 하례를 받고 있을 때 즉위식을 마치고 나온 하윤, 조준,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이무, 민부들은 즉위 예식을 파하고 곧 정안군 방원의 크나큰 솟을대문 집으로 모였다. 정안군이 앉아 있는 넓고 크고 화려한 문방사우를 배치해놓은 사랑이다. 정안군이 잘생긴 풍신 좋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히 띠고 앉아서 여러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오늘, 여러분들 많이 수고했소. 즉위 예식은 곧 절차대로 잘 끝이 났소?"
"예, 끝이 났소이다."
정승 조준이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그런데, 대감 이거 웬일이오니까?"
무장 이숙번이 정안군한테 물었다.
"무엇이 웬일이란 말요?"
"글쎄 선위가 웬일입니까?"
이숙번이 다시 물었다.
"노래하시고 몸이 괴로우시니 세자께 선위하시는 것도 당연하지."
정안군이 시침을 떼고 대답했다.
"이것, 큰일났습니다."
그중에 미련한 이무가 큰 소리로 큰일이 났다고 떠들었다.
"무엇이 큰일이 났단 말인가?"
정안군은 또다시 모르는 체 반문해다.
"정안군께서 세자로 왕이 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왕위에까지 나가셨으니 다음 문제가 어렵습니다."
"무엇이 어려운가?"
정안군은 더 한 번 반문했다.
"어찌 큰일이 나지 아니하겠습니까. 또 한 번 정도전 난과 같은 난이 나겠으니 탈이올시다."
하윤이 옆에 있다가 말참례를 했다. 이무에게 물었다.
"새 상감께서 이제 세자로 계시다가 왕위에 나가셨으니 다음의 세자로 모실 분이 문제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새 상감께서는 아드님을 여러 형제 두셨습니다. 그중에서 세자를 책봉하실 테니 큰일이란 말입니다. 우리 주인 정안군 나리께서는 창업에 크나큰 공로가 계셨으면서도 영영 왕위에 나가실 기회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한슴스런 일이 아닙니까? 큰 걱정이올시다."
이무의 말을 듣자 하윤은 껄껄 웃으며 손뼉을 치면서 대답했다.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오. 도리어 일이 빨리 해결되는 일이라 생각하오."
"어떻게 빨리 해결이 된단 말씀입니까?"
이무는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얼굴에 가득 띠고 물었다. 정안군은 이무와 하윤의 대화를 듣고 빙긋 웃으며 이무에게 말했다.
"이장군은 과히 염려하지 마시오. 지금 새 상감께서 아들을 많이 두셨다 하나 모두 다 서자뿐이요, 적자는 두지 못하셨소. 내 형수 김씨는 아들을 낳지 못하셨으니 과히 염려할 것이 없소. 하제학의 말씀이 옳소."
정안군은 태연히 대답했다. 정안군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대장 이숙번이 정색하고 묻는다.
"원래, 강비마마는 후궁이 아닙니다. 상왕께서 왕위에 나가시기 전에 유처취처를 하신 분이니 당당한 제이부인입니다. 다만, 세자 방석은 차례를 바꾸었을 뿐 서자는 아닙니다. 서자가 세자가 된 전례는 없으니 안심들 하시오. 우리는 기회를 보아 정안군 나리를 세자로 모시자고 우겨대면 됩니다."
하윤의 말을 듣자 조준도 찬성했다.
"하제학의 말씀이 옳소. 지금 새 상감께서는 왕자를 여러 형제 두셨으나 모두 후궁 소생이니 적자의 자격이 없소이다.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우리들이 밀어 모시고 있는 정안군으로 세자책봉을 하시라고 우기면 상감께서도 아무 반대도 하지 아니하시리다."
조준의 말을 듣는 이숙번은 무관이었다. 역사와 전고에 밝지 못했다.
"그는 그렇다 합시다. 새 상감의 왕자들은 모두 다 서자구 정안군은 적자이시니 적자로 세자를 삼자는 논리는 당연하다 생각하오. 그러나 말이요, 새 상감은 형님이시고 정안군은 아우님인데, 왕세자는 아들이라야 세자가 될 수 있는 법인데 정안군은 아우가 되니 어찌 세자가 되겠소. 암만 해도 두 분의 말씀은 쾌하게 내 마음을 열어주지 못하오."
하윤이 껄걸 웃으며 이숙번의 말에 대답했다.
"이장군의 말씀도 일리가 있는 말요. 그러나 왕실은 사가와 달라서 동생이 황태자가 되는 일이 허다하게 많소이다. 그뿐 아니라, 중국에도 이러한 전례는 거재두량으로 많으니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소."
하윤은 안심하라고 타일렀다. 이숙번은 호반이었다. 성미가 급했다.
"그렇다면 쇠뿔은 단결에 빼라고 내일이라도 대궐에 들어가 상감게 아뢰고, 아주 정안군으로 세자를 봉하자고 우겨댑시다."
조준이 이숙번을 타일렀다.
"좋은 말씀요. 그러나 내 생각에는 우리가 너무 조급히 굴지 아니해도, 새 상감께서는 천성이 어질고 착하실 뿐 아니라, 욕심도 없으신 어른입니다. 정안군으로 세자책봉을 우리가 서두르기 전에 대왕께서 먼저 분부를 내리실 듯하니 잠깐 동정을 보아 위에 아뢴다 해도 무관하리라 생각하오."
이숙번은 그래도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단김에 쇠뿔을 빼야 하오. 세자책봉을 하자고 우겨댑시다. 세상일은 알 수 없소. 새 상감께서 아무리 어질고 착하시다 하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차차 뿌리가 박혀서 말을 아니 들으면 또 어찌 될지 모르오. 내 주장대로 내일 곧 위에 아뢰는 것이 좋다 생각하오."
조준과 하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에 거리끼는 일이 있는 까닭에 당장 세자책봉을 하자고 우겨댈 것이 아니라 차차 기회를 보아 아뢰자는 것이다. 그러나 무장 이숙번은 자꾸 내일이라도 정안군으로 세자책봉을 하자고 우겨댔다. 딱하고 곤란한 일이었다.
"이장군!"
하윤이 입을 열어 이숙번을 불렀다. 이숙번이 하윤을 바라보며,
"말씀하시오."
하고 대답했다.
"조정승이나, 내가 이장군 매일반으로 왜 하루바삐 곧 위에 아뢰어서, 정안군으로 세자책봉을 하시라고 아뢸 생각이 없겠소마는, 사세가 좀 딱한 일이 있어서 그러하오."
"무슨 또 사세가 딱한 일이 있단 말씀요?"
이숙번이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우리가 방석, 방번의 난을 치른 후에 상왕께 아뢰서, 정안군으로 왕세자를 책봉하자 했더니, 그때 상왕께서 펄쩍 뛰시고 지금의 상감으로 세자를 책봉하신 일은 이장군도 잘 기억할 것입니다. 지금 상왕께서는 정안군이 아무리 국가에 공로가 큰 분이라 하나 사랑하는 방석과 방번을 죽인 원수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까닭에 당신은 왕위까지 새 상감께 내맡기시고 장치 어디로인지 행차하실 의향을 가지고 계신 모양입니다. 이때 만약, 우리가 정안군으로 세자책봉을 합시다 하면 새 상감은 반드시 상왕께 말씀을 아뢰고 허락을 내리실 테니 바꾸어 생각하더라도, 상왕께서 정안군으로 세자를 삼으라 하시고 얼른 허락을 내리시겠소. 이러하니 우리는 시기를 잠깐 늦추어서, 적당한 기회에 일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하윤은 안상하고 치밀한 말씨로 이숙번에게도 세자요청을 못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철인 정종
하윤의 말이 끝나자 조준이 말참견을 했다.
"이장군, 하제학의 말씀을 자세 들어서 우리 뜻을 대강 짐작하셨을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권을 잡고 있습니다. 정안군과 장군은 병마권을 잡고 계시고, 나와 하제학은 정치권을 잡고 있소이다. 병마권과 정치권, 이 두 가지 권력을 잡고 있으니 아무런 근심도 없습니다. 새 상감은 상왕께서 정하신 왕세자요 왕이라 하나, 기실은 우리 정안군께서 임시로 허락해 모신 것이나 매일반이니 과히 근심할 것이 없소이다."
"모르겠소. 맘대로들 하시오. 그러나, 또 한 번 무슨 일이 나고야 말리다."
이숙번은 뱉듯이 말했다. 결국 정안군으로 세자책봉을 하자는 의논은 다음 시기를 보아 아뢰자고 결정이 되었다. 한편 새 상감은 왕위에 오른 후에 왕비와 의논했다.
"왕비도 아시다시피 내가 왕위에 오른 것은 아버님이 불쌍해서 잠깐 왕의 자리에 나간 것뿐이오. 내가 만약 왕위를 거절한다면 아버님의 쓸쓸한 생각이 어떠하시겠소. 그러므로 마지못해서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인데 정말 왕 노릇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 집안에 따로 있소."
"그렇습니다. 정안군 내외는 꼭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하니 그저 왕의 자리에 오래 계실 생각은 마시고 몸보신을 잘하시자면 정안군에게 왕위를 쉽사리 넘겨주시는 방책을 차리셔야 할 것입니다."
"어진 왕비의 말씀요. 앞으로 나는 그러한 방도를 차리겠소. 그리고 나는 왕비의 몸엔 왕자가 없고 후궁들의 몸에만 왕자들이 있소. 천만다행이라 생각하오."
왕비는 얼굴을 잠간 붉혔다.
"황송만만하여이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서 왕자를 낳지 못했으니 종묘와 사직에 죄가 큰가 하여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복이 되었소. 만약에 내가 왕이 돼 있는 현재 왕자가 있다면 반드시 입태자 문제가 일어날 테니 까딱 잘못하다가는 방석, 방번의 꼴이 되고 말 테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소. 하 하 하."
"그도 그렇습니다. 성의가 옳으신가 하오."
왕비 김씨는 옷깃을 여미고, 조촐한 얼굴에 미소를 띠어 대답했다.
"그러나..."
새 상감은 한숨을 길게 쉬며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왕비의 본궁에는 적자가 없지만 후궁의 몸에는 아들이 십여 명이나 되오. 이 아들들이 혹시나 말썽의 초점이 될지 모르겠소. 여기 대해서 나는 방책을 정하려 하오."
"어떠한 방책을 정하려 하십니까?"
왕비는 조신하게 다시 새 상감께 물었다. 새 상감은 다시 한숨을 짓고 말을 꺼냈다.
"모두 다 불제자를 만들어 절로 보내서 수도하는 중이 되게 하면 어떠할는지 먼저 왕비한테 의논해보는 것이오."
"좋으신 대책이올시다. 사람이란 생명이 소중한 것이올시다. 까닭 없이 참혹한 화를 입는 것보다 피할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취하는 것이 상책이올시다. 그러나 신첩 혼자서는 대답을 아뢸 수 없습니다. 모자의 지극한 정이란 천지간에 비유할 수 없이 은혜가 깊은 것이올시다. 각기 자기 어머니들이 있으니, 어미들한테 의논해보신 후에 처리하시는 일이 옳은 줄 아뢰오."
왕비는 안심한 얼굴빛을 지어 왕의 말씀에 대답했다.
"옳은 말씀요. 과연 왕비의 말씀이 적절하오. 오늘 밤에 후궁들을 불러 잔치를 열고, 모든 일을 의논하여 결정할 테니 왕비는 궁녀에게 명하여 여러 후궁들을 궁전으로 모이게 하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왕비는 조신하게 대답했다. 이날 밤에 새 상감의 후궁들은 함빡 중전으로 모여들었다. 상감 정종과 왕비 김씨의 명을 받들어 모여들었다. 후궁 지씨, 후궁 기씨, 후궁 이씨, 후궁 윤씨들이 어전에 문후를 올렸다. 정종은 왕비와 함께 후궁들의 문안을 받은 후에 미소를 띠어 모든 후궁들을 바라보며 분부를 내렸다.
"오늘 밤에 왕후마마께서는 그대들과 함께 저녁밥을 같이하겠다 해서 특별히 입시를 명하신 것이다. 그대들 후궁은 왕후를 모시어 쾌활하게 하룻밤을 지내라. 나는 옆에서 왕후와 그대들의 즐겁게 노는 모양을 바라보리라."
"황궁만만하여이다."
모든 후궁들은 일제히 부복해서 감사한 뜻을 아뢰었다. 왕후 김씨가 미소를 풍기며 대왕의 뒤를 받쳐 말씀을 내린다.
"대왕마마께옵서 꽃과 같고 달과 같은 그대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등불을 밝혀 하룻밤을 지내신다 하므로 나 역시 찬성하였노라. 왕위에 오르시어 즉위 예식을 거행하신 이후 처음으로 그대들을 불러 저녁 수라를 한자리에 모여 같이 하시는 것이니 그대들은 대왕마마의 넓으신 뜻을 보살펴서 화락하게 하룻밤을 지내라."
후궁들은 일제히 미소를 띠어 아뢰었다.
"감격하옵니다."
말씀을 올리고 일제히 배를 올렸다. 이윽고 궁녀들은 배반을 옮기기 시작했다. 크고 넓은 두레반이 들어오고, 산해진미가 수라간에서 날라졌다. 왕 전하와 왕비가 주석에 진좌하고 후궁들이 둥글게 모시어 앉아 전하의 수라를 받들었다. 정종대왕은 후궁 기씨가 따라 올리는 반주잔을 받았다. 이씨, 윤씨, 지씨의 따라 올리는 술을 차례로 받아 마시었다. 후궁은 모두 네 사람뿐이었다. 정종대왕은 왕후 김씨를 향하여 말씀을 내렸다.
"모든 후궁들의 술을 한 잔씩 받아 마시고 나니 술이 넉 잔이 되는구려. 넉 잔 술이야 어찌 마실 수 있소. 이번엔 왕후께서 한 잔 따라서 쌍배가 되지 않게 해주시오."
"그러하옵니다. 후궁들이 네 사람이 되니 자연 쌍배가 되었습니다. 신첩이 한 잔 따라서 다섯 잔으로 반주를 하시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왕비는 친히 옥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대왕께 올렸다. 대왕은 얼굴에 가득히 웃음을 띠고 왕후가 올리는 반주를 마시었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대왕은 여러 후궁과 왕비를 향하여 말씀을 내렸다.
"내가 비록 왕후의 몸에서 적자는 두지 못했으니 후궁의 몸에서는 상당한 수의 왕자와 공주를 탄생했으니, 앞으로 나의 복이 무던히 좋을 거요."
정종대왕은 화기가 가득한 얼굴로 왕후 김씨를 바라보았다. 왕후 김씨가 나직이 대답했다.
"신첩은 복이 없사와 불행히 자식을 두지 못했습니다마는, 모든 후궁들이 준수한 아들과 딸을 많이 두었으니, 상감마마와 신첩의 늦복은 여러 후궁들과 함께 느긋하리라 생각합니다."
"옳은 말씀이오. 어처의 몸에서 왕자를 두지 못하여 약간 섭섭하다 하나, 후궁들이 든든하고 착한 왕자, 왕녀를 많이 두었으니 모두 다 과인과 후마마의 자식이라 늙마에 가서 팔자는 더 태평하리다."
대왕은 소리를 높여 드높게 웃었다. 상감과 왕비의 말씀을 듣자 모든 후궁들도 마음이 흐뭇했다. 인자하고 부드러운 왕과 상냥하고 인정 많은 왕비 밑에 있는 후궁들은 모두 다 행복감을 느꼈다.
"하해같이 깊으신 두 분 마마의 성덕을 갚사올 길이 없사옵니다."
후궁 중에 그중 나이 든 지씨가 여러 후궁들을 대표하여 아뢰었다.
"자아, 그럭저럭 나는 후궁들의 몸에서 15남 8녀를 낳았구먼. 무던히도 아들딸을 두었다. 허 허 허."
대왕은 또 한 번 껄껄 웃었다.
"그렇습니다. 후궁 지씨의 몸에서 큰 왕자 의평군 원생을 낳고, 후궁 기씨의 몸에서 둘째 왕자 순평군 군생을 낳고, 또다시 기씨의 몸에서 셋째로 원윤 의생을 낳고, 또 지씨의 몸에서 선성군 무생을 낳고, 또다시 종의군 귀생을 낳고, 이씨의 몸에서는 진남군 종생을 낳고, 윤씨의 몸에서 수도정 덕생을 낳고, 임언정 녹생을 낳고, 석보정 복생을 낳고, 덕천군 후생을 낳고, 지씨의 몸에서 임성군 호생을 낳고 또 도평군 말생을 낳고, 윤씨는 또 장천도정 보생을 낳고, 기씨는 다시 정석도정 융생과 무림군 선생을 낳았으니, 모두 다 15 남자입니다. 호호. 참 무던히도 아드님을 많이 두셨습니다."
왕비는 깔깔 웃으며 왕의 용안을 쳐다뵈었다. 왕비 김씨의 말씀을 듣자 여러 후궁들도 깔깔 웃었다.
"모두 다 대왕마마와 왕후마마의 하늘같이 넓고 크신 홍복으로 이 여러 왕자들이 태어났사옵니다. 감축하옵니다."
후궁 기씨가 말씀을 드렸다. 정종은 여러 후궁에게 말씀했다.
"과연 내 복력이 무던하구나. 오늘 여러 비빈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즐기는 것은 과인과 과인의 배필들이 복을 이야기하고 즐겁게 놀자는 것도 목적의 하나지만, 이 좋은 복을 오래오래 지니기 위하여 그 대책을 의논하려고 모이라 한 것이다. 과인과 과인의 배필들은 다 함께 자식을 많이 둔 좋은 복을 오래오래 지니고자 일을 의논하자는 것이다. 모든 후궁들의 뜻이 어떠한가?"
정종대왕은 어진 눈매로 여러 후궁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황공하여이다. 신첩들은 그저 대왕마마와 왕비마마를 모시어 자식들을 거느리고 한평생 좋은 복록을 두 분 전하게 받들어 올리기 소원이올시다. 외람되게 신첩들이 주제넘게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 다만 대전마마와 중전마마의 지휘에 따를 뿐이올시다."
이번엔 후궁 이씨가 아뢰었다.
"그러하오이다. 신첩들이 자식을 낳았다 하오나, 다만 미천한 몸을 빌려 두 분 마마의 왕자를 점지했을 뿐, 모두 다 두 분 마마의 왕자이십니다. 높은 하교가 계시기 바랍니다."
이번엔 후궁 지씨가 고했다. 정종대왕은 얼굴빛을 바로 하여 후궁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렸다.
"복은 아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말하면 복을 함부로 누리지 말란 말이지. 복이 왔다고 한꺼번에 써버리면, 복이 다 없어져 버리는 것이거든. 알아듣겠니?"
"네, 좋으신 성의올시다."
여러 후궁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대왕의 얼굴빛은 더한층 엄숙했다.
"그대들은 왕과 왕자가 무한히 좋은 자리요,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지위라고 생각하겠지만 기막히도록 무섭고 위태로운 자리인 것을 짐작하는가?"
모든 후궁들은 어렴풋 대왕의 말씀하시는 뜻을 짐작했으나, 얼른 무어라고 대답을 올릴 길이 없다. 모두 다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대들은 세자 방석과 방번이며 경순공주의 남편 이부마의 최후의 모습을 구경하였을 것이다."
새 상감 정종의 눈에는 반작반짝 총명한 기운이 검은 눈동자에 빛을 뿜었다.
"네, 보았습니다."
후궁 지씨가 대답했다.
"왕자의 자리란 이같이 위태로운 자리다."
정종은 한숨을 짓고 말했다. 저녁밥을 먹던 후궁들은 일제히 저를 놓았다. 방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비록 정궁의 몸에서 나지 아니한 왕자라 하나 처신과 행동을 여간 조심하지 아니하면, 와석종신하기 극히 어렵단 말이다."
말을 마친 정종은 또 한 번 사랑하는 후궁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후궁들은 역시 고개를 숙여 왕의 말씀을 받들어 들었다.
"나도 이 위태로운 왕의 자리를 오래 지닐 생각이 없다. 어지러운 세상이다. 큰형님은 아버님께서 신하로 임금을 쳐서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뺏은 것이 의리가 아니라 해서 자포자기를 해서 돌아가시고, 정안군은 그와 반대로 아버님을 임금으로 추대해 모시기 위하여 고려의 왕씨와 정포은을 죽여버렸고 나라를 세운 후에는 동생인 방석과 방번을 죽였을 뿐 아니라 매부 되는 부마 이제까지 없애 버리지 아니했더냐. 지금 아바마마께서는 정안군을 대면해 보지 아니하려 하신다. 이러한 중간에 끼여, 나는 마지못해서 아버지의 뜻을 받드느라고 세자가 되고 왕이 되었다마는 용상은 내가 오래 있을 자리가 아니다. 어지러운 세상에는 보처자를 하는 것이 제일 상책이다. 나는 밤과 낮으로 지금 이 일을 생각하고 궁리하고 있다. 남들은 나의 뜻을 모르고 부귀공명을 누리는 일국의 제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지금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 다행히 왕후도 내 뜻을 잘 짐작해주어서, 내조해주는 힘이 크다마는 너희들 후궁들도 세자의 후궁을 거쳐서 대왕의 후궁이 되었다고 절대로 교만하고 방자스런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될 뿐 아니라 모든 왕자한테도 주의를 주어서 방석이나 방번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할 것이다."
세자 방석이나 방번의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듣자, 모든 후궁들을 비로소 오늘 밤에 한자리에 모인 저녁 잔치의 뜻을 깨달았다. 후궁들의 등에는 소름이 쭉 끼쳤다. 정종대왕은 다시 말씀을 계속했다.
"지금 내 등 뒤에서 내 아들들의 행동을 노리는 사람이 확실히 몇 사람 있다. 너희들은 왕자들을 위하여 이 점을 생각해두어야 할 것이다."
정종은 말씀을 마치자 입을 꽉 다물었다. 후궁들의 머릿속에는 제각기 자기 아들을 노리고 흘겨보는 무서운 사람의 환상이 떠올랐다. 노려보는 매서운 눈길은 마침내 자기와 자기 자식들을 향하여 새파란 불길을 뿜었다.
"나는 왕자들에게 모조리 머리를 깎아서 중을 만들 작정이다!"
정종대왕은 말씀을 마치자 모든 후궁들을 둘러보았다. 후궁들은 얼른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려 때 왕자들은 태자를 제해노혹 대개 불문에 출가해서 덕행이 높은 승려가 된 일을 그대들도 짐작할 것이다. 모두 다 정치에 참여해서 권력다툼을 하는 추잡한 세상을 피해서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불경을 공부하여 사상을 전파하여 나라를 태평케하고 세상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몸을 보전하려는 길도 되려니와, 더 크게 말한다면 정치를 한다는 왕이나, 대신들보다도 더 크게 제세안민하는 사업이다.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후궁들 중에 제일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지씨가 나와 대답해 아뢴다.
"자식들에 대하여 앞길을 생각하시는 성의를 짐작해 알 수 있사옵니다. 다른 후궁들의 뜻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첩은 대왕마마의 명철하신 뜻을 받들어, 자식의 머리를 깎아 중을 만들겠습니다."
지씨의 아뢰는 말을 듣는 정종대왕의 용안에는 기쁜 웃음이 물결 지어 일어났다.
"옳다, 지씨 네가 내 뜻을 잘 알았다. 사람이란 세상에 나올 때 사람 노릇을 하러 나온 것이다. 사람 노릇을 하자면, 생명을 유지해 살아야 한다. 공연히 까닭 없이 개죽음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 노릇을 한다는 것은 꼭 나라의 정권을 잡아야만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과 덕행으로 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간다는 것은 정권을 잡아서 한때 왕 노릇을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다. 말하자면, 왕보다도 더 높은 왕사가 되는 것이요, 나라를 도탄 속에서 건져내는 국민의 스승...국사가 되는 것이다."
모든 후궁들은 황연히 깨달았다.
"신첩도 자식을 중으로 만들겠습니다."
후궁 기씨가 대답을 올렸다.
"신첩도 자식으 ㄹ승려로 만들겠습니다."
이번엔 후궁 이씨가 대답을 올렸다. 후궁 지씨와 기씨, 이씨들이 찬성하는 말씀을 올리니, 후궁 윤씨도 찬성했다.
"저희 소생도 승려로 만들겠습니다."
정종대왕은 미소를 지어 모든 후궁에게 명을 내렸다.
"그렇다면 후궁들은 다 각기 왕자들을 데리고 들어오라."
모든 후궁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왕자들은 후궁과 함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의평군, 순평군 이하 십오 왕자는 어머니 후궁들한테 인솔되어 어전에 시립해 섰다. 정종대왕은 모든 왕자들을 굽어보았다. 마음속으로는 무한한 한이 서렸다. 그러나 얼굴에는 조금도 내색을 아니하고, 화한 얼굴로 왕자들에게 명을 내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너희들 어미한테 다 들어 알았을 것이다. 더 길게 이야기하지 아니한다. 너희들은 오늘이라도 네 맘에 좋은 곳을 택해서 절로 가서 머리를 깎아 진세의 연을 끊으라. 이것이 너희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길이다."
대왕의 말씀을 듣자 제일 나이 먹은 큰 왕자 의평군이 말씀을 아뢰었다.
"아바마마의 말씀을 폐부 속에 깊이 간직하와 한평생을 승려로 지내겠습니다. 소자는 회암사로 가겠습니다."
의평군의 말이 떨어지니 이번엔 순평군이 대답했다.
"소자도 아바마마의 분부대로 한평생 승려가 되겠습니다. 소자는 법주사로 가겠습니다."
두 형의 말을 이어 나머지 열세 왕자도 차례차례 대답을 올리고 절로 가겠다고 승낙을 했다. 열다섯 왕자들은 모두 다 절로 가서 승려가 되기를 소원했다. 정종대왕은 대전내관을 불러 분부했다.
"모든 왕자들이 다 절로 가기로 소원했다. 너는 곧 왕자들을 다 소원하는 곳으로 젊은 내시들을 안동해 보내서 주지한테 부탁하게 하라."
모든 왕자들은 부왕 전하게 하직을 고하고 물러났다. 정종대왕은 얼굴에는 화한 빛을 띠었으나 맘속으로는 무한히 구슬펐다. 오늘날 임금이 된 것은 자기의 소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어서 하루바삐 이 바늘방석 같은 거북한 자리를 내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현숙하고 어진 왕비 김씨는 눈물을 머금고 옥좌에서 일어나서 중이 되러 가는 15 왕자의 머리를 한 사람 한 사람 쓰다듬어주었다. 말할 수 없는 서운하고 슬픈 표정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내관들은 왕명을 받들어 왕자 한 명씩을 모시고 소원하는 대로 절간을 찾아갔다. 절마다 주지들은 황공 감격했다. 자기 절에 왕자를 모셨다는 일은 영광스런 명예였다. 주지는 왕자의 머리칼을 부처 앞에서 자르고, 다시 새파랗게 백호를 쳤다. 돌연 정종대왕의 15왕자가 절로 가서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다는 소원은 짜아하게 조정에 퍼졌다. 한두 사람의 왕자가 중이 되었다 해도 놀랄 일인데 열다섯 왕자가 일제히 중이 되었다 하니 만조정 벼슬아치들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벼슬아치들은 만나는 곳마다 수군거렸다.
"상감께서는 열다섯 왕자를 절로 보내서 중이 되게 하셨다니 참말인가?"
"사실이라네. 바로 이제들 떠났다 하네."
"웬일인가. 15 왕자가 한꺼번에 중이 되다니 기막힌 소리 아닌가?"
"상감의 처사는 갸륵하다고 생각하네. 세자 방석의 일을 보게나. 어지러운 세상에 생명을 부지케 하자는 갸륵하신 생각일세."
"아하, 참 그렇구나! 명ㅊ하신 생각이로군."
벼슬아치들의 지껄이는 소식이 정안군 방원의 귀에 아니 들어갈 리 만무했다. 궁중 지밀을 통해서 정안군 내외의 귀에 들어갔다. 정안군 부인 민씨는 조용히 정안군한테 고했다.
"상감게서 15 왕자를 절로 보내시어 중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몰랐어. 왕자들을 모두 다 중을 만들었다?"
방원의 가슴에는 만 가지 감회가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곧 얼굴에 가득 기쁜 빛을 띠고 껄껄 웃었다.
"허허허. 상감께서는 과연 명철하신 분이야. 그렇지, 정실인 왕후의 몸에 아드님이 아니 계신 터에 그까짓 후궁들의 몸에서 나온 왕자들이 수백 명 있다 한들 무엇에 쓴단 말인가. 공연히 걸리적거리다가 제 몸보신을 못하면 큰일이거든. 그러니 애당초 아주 세상을 떠나서 중이 되라 하신 것이 아니겠소. 과연 형님은 명철하신 분이거든. 하하하. 그러하니 내가 우리 형님을 왕으로 모셔 받든 것도 이 때문이거든. 하하하. 되었어, 우리 형님은 과연 된 인물야."
정안군 부인 민씨가 맞방망이를 했다.
"첩의 생각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정안군은 마음이 흡족했다.
"무서운 분이 아니야. 머리가 밝은 분이지, 하하하."
방원의 욕심 많은 오장육부에서는 거무튀튀한 웃음 가락이 절뚝배기를 깨뜨리는 소리로 터져나왔다.
"참말로 어질고 착하신 분이올시다. 조심해서 모시도록 하십쇼."
아내 민씨부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당부했다.
"이분만은 염려 없소. 아버님 같지 않단 말일세. 그러니까 내가 명철하다고 칭송하는 것이 아닌가."
정안군은 너털웃음을 또 한 번 터뜨렸다. 이때 이숙번, 하윤, 조준이 찾아왔다.
"대군께 치하를 드리러 왔소이다."
하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치하요?"
정안군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상감께서는 열다섯 왕자를 절로 보내서 중을 만드셨다 합니다. 다음의 세자 문제는 다 결정이 된 것이나 매일반입니다. 대군 나리께 치하를 드립니다."
"하 하 하. 그 일 말이오? 그까짓 세자보다도 어서어서 큰일을 많이 해야겠소.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하 하 하."
"아따, 성미도 급하십니다."
하윤이 대답했다. 모든 사람들은 가락을 높여 깔깔 웃었다. 아들 정종이 십오 왕자를 절로 보내서 중을 만들었다는 소식은 상왕 이성계의 귀에 들어갔다. 상왕궁에 모시고 있는 지밀나인은 강비 때부터 거행하던 지밀나인이었다. 밤에 상왕의 금침을 포진하다가 조용히 상왕께 아뢰었다.
"상감께서는 왕자들을 모두 중을 만들어 절로 보내셨다 합니다."
상왕 이성께는 깜짝 놀랐다.
"왕자들을 모두 다 절로 보냈다니, 무슨 말이냐? 나한테 의논도 없이 중을 만들었단 말이냐?"
지밀나인은 더 무어라고 아뢸 길이 없었다. 잠자코 대답을 못 했다.
"상감의 아들이 적자는 없다 하지만 후궁의 몸에서 난 아이가 십여 명이나 되지 않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십오 왕자이십니다."
"열다섯 명을 모두 다 중을 만들었단 말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지밀나인의 대답을 듣자 이번엔 상왕 이성계가 덤덤히 말이 없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아들 방과의 처사는 자기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되었다. 자기 자신은 욕심 많고 결기 있는 방원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강비의 말을 들어 방석으로 세자책봉을 한 것이 불행한 씨가 되었는데, 방과는 임금이 되자 열다섯 왕자를 한꺼번에 중을 만들어서 앞으로 닥쳐올 불행의 씨를 막게 했으니 명철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아랫사람인 아들이라 하나 그의 인품을 높이 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속에 유연히 일어났다.
왕궁 떠나는 태조
상왕 이성계는 정종의 처사를 명철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원인은 다섯째 아들 방원한테 있었다. 방원이를 밉게 생각하는 마음은 더한층 가슴에 불을 질렀다.
"괘씸한 놈이야, 방원이는. 모두 다 방원이란 놈 때문이지."
상왕은 혼자 개탄하는 말을 했다. 지밀나인은 황송했다.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놈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상왕은 한숨을 지어 '후'하고 내뿜었다. 이튿날이 되었다. 정종대왕이 아침 문안을 상왕께 드리러 들어왔다.
"왕에게 물어볼 일이 있네."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왕자 열다섯을 다 절로 보내서 중이 되게 했다 하니 사실인가?"
"황공무지하옵니다. 아뢰지 아니하고 그리 처분하였습니다."
정종은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상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왕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렸다.
"15 왕손은 나의 손자인데 할아버지한테 한 마디 의논도 없이 모두 다 중을 만든 것은 너무나 섭섭하네."
상왕은 쓸쓸한 미소를 던졌다. 정종대왕의 얼굴에는 황공무지한 빛이 감돌았다.
"불효막심하옵니다. 아바마마, 소자를 달초로 때려주옵소서. 만약 소자의 열다섯 자식을 중으로 만든다고 아뢰면 허락하지 아니할 것이 분명하옵고, 허락을 내리지 아니하신다면 또다시 왕가에 불행한 일이 있사올까 하와 자식들을 도 닦는 곳으로 내보낸 것이옵니다. 소자의 불효한 행동은 만 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상왕은 환한 얼굴로 대답해 아뢰는 아들 정종을 바라보았다.
"왕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오. 상감은 나보다도 처사하는 일이 윗길이오. 나도 방석을 세자로 삼지 아니하고 절로 보냈던들 오늘날 이 괴로운 심번이 없었을 것이오. 잘 처사했네. 나 역시 절로 가서 중이 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구나."
상왕은 아들 상감을 향하여 한숨을 지었다.
"아바마마, 어찌 그러한 분부를 내리시옵니까. 소자의 의지하고 믿사옵는 바는 오직 아바마마께서 소자 앞에 계신 까닭이옵니다. 소자가 세자가 되고, 다음에 왕위에 나간 것은 다만 아바마마의 마음을 잠시라도 편안케 해드릴까 하와 마음에도 없는 왕의 자리를 받았습니다. 아바마마 아니 계시오면 소자 어찌 왕위에 앉아 있사오리까. 소자 역시 왕의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아바마마의 뒤를 좇겠습니다."
정종은 손을 모두 간곡하게 아뢰었다.
"내 어찌 상감의 착하고 어진 맘씨를 모르랴. 머리를 깎아 중이 된다는 말은 쓸데없는 헛수작일세. 다만 심경이 그렇단 말일세. 내가 상감이 있는 동안 어찌 차마 그럴 수 있겠나!"
상왕 이성계는 답답한 듯 시튼 한숨을 '후우'하고 내뿜었다.
"황공하오이다. 아바마마의 소자를 생각하시는 하해 같은 은덕을 어찌 감히 촌시인들 잊으오리까."
정종은 공손하게 아뢰었다. 상왕은 한숨을 또 한 번 짓고 왕에게 분부를 내렸다.
"내 마음이 몹시 울적하다. 손자들이 중이 되었다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도대체 새 서울 한양이 보기 싫다. 경복궁이 보기 싫다. 정릉이 보기 싫다. 좋다는 새 서울 한양으로 와서, 나에게 좋은 것이 한 가지도 없다. 방석의 어머니는 별안간 병을 얻어서 이 세상을 홀홀히 떠나버렸고, 대상을 마악 치르고 나니 형제 싸움이 벌어져서 집안이 망했구나. 방석이 죽고, 방번이 죽고, 사위 이제도 죽고, 나에겐 충신이라 말할 수 있는 정도전과 남은도 죽었구나! 이 한양 서울이 진정으로 정이 떨어져 보기가 싫다. 금강산이나 구경하고 함흥까지 가서 조상의 산소에 참배나 하고 고향 풍물을 둘러보고 오겠다."
이제는 상왕이라는 존대를 받는 왕의 자리도 신산하고 싫었다. 믿는 아들 정종을 향하여 발가벗은 알몸, 한 사람의 인간으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했다. 순수한 꾸밈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였다. 왕을 대하여 하게 하던 말투를 해라고 고쳐서 말했다. 상왕의 하소연하는 말을 듣는 정종은 눈시울이 화끈하고 뜨거웠다.
"아바마마, 아바마마께서 한양 서울이 싫다 하시면, 소자는 아바마마를 모시고 송도로 돌아가겠습니다. 금강산을 거쳐서 함흥으로 가신다는 일은 중지하시옵소서. 소자는 아바마마의 곁을 떠나서 하루도 지탱해 살 수 없습니다."
젊은 임금 정종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나는 혼자 몸이라 훌훌히 송도로 갈 수 있지마는 상감이야 어찌 송도로 갈 수 있겠나. 만조백관과 수천 궁속이며 백성들이 있지 아니한가. 말이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닐세. 상감이 하도 만류하니 금강산과 함흥으로 가는 것은 잠깐 정지하고 양주 회암사로 가서 울적한 마음을 풀고 재나 올린 후에 돌아오겠네."
새 도읍 한양이 보기 싫다는 상왕의 심정이며, 금강산을 거쳐서 고향 함흥으로 가겠다는 아바마마의 울울한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정종은 양주 회암사에 가서 바람이나 쐬고 돌아오겠따는 상왕의 뜻마저 막을 도리는 없었다.
"언제쯤 떠나려 하십니까?"
"오늘이라도 곧 떠나면 좋겠네."
"오늘 어찌 떠나실 수 있습니까? 거둥 준비와 의장 범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삼일 후에 떠나시도록 하옵소서."
"의장이라니? 별말을 다 하네. 초초하게 미행으로 가겠네. 거둥행차를 벌여서 대장이 나가고 군사들이 움직인다면 또 의심할 놈이 있네. 다 제례하고 훗훗하게 단신으로 가겠네. 그리고 나는 이 나라의 왕이 아니고 상왕일세. 상왕은 명칭으로 존경하는 대우를 주는 사람이지 왕이 아닐세. 실권도 없는 사람일세. 거둥 행차와 의장 범절이 다 무엇인가. 모두 다 제례하도록 하게."
"천만의 말씀을 내리십니다. 아무리 아바마마의 심경이 그러하시다 하오나 만백성들이 바라봅니다. 분부를 거두시옵소서."
정종은 간곡하게 상왕께 아뢰었다. 상왕은 화를 불끈 냈다.
"체면? 내가 체면을 차리게 되었나. 체면을 차린다면 또 좋지 못한 큰일이 일어난단 말야. 쓸데없는 말 그만해두게. 그저 미행으로 재를 올리러 가는 거야. 회암사에는 무학대사도 있으니 무학도 만나별 겸, 자네 아들인 큰손자 아이가 그곳으로 갔다 하니, 그 애도 볼 겸 가보려고 하는 것일세. 밥이나 지어줄 궁비 한 명과 내관 두어 명을 데리고 오늘 해 안으로 단기로 떠나가겠네."
정종은 상왕의 뜻을 더 막을 길이 없었다.
"정 그러하시다면, 회암사에서 불사를 마치신 후에 곧 환궁하시옵소서. 떠나시는 거둥 행차는 곧 분별하겠습니다."
정종은 상왕께 절을 올리고 곧 정원으로 나왔다. 제2혁명이 일어난 후에, 정치적 행정력과 군사권은 완전히 정안군 방원을 중심으로하여 움직였다. 정안군을 도와 제2혁명을 일으켰던 하윤은 이때 좌의정이 되고, 조준은 영의정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안군의 장인 민제는 우의정이었다. 겉으로 본다면 정종은 상왕한테 선위를 받은 당당한 임금이지만, 군사권과 정치권은 함박 다섯째 아우 정안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종은 어전으로 아우 정안군을 불렀다.
"상왕께서 양주 회암사로 거둥을 납시어 수륙제를 올리러 가시려 하는데 대군의 의향은 어떠한가?"
정안군 방원은 상왕이 수륙재를 올리러 양주 회암사로 가시겠다는 말에 왈칵 불쾌함을 느꼈다. 상왕이 수륙재를 올리겠다는 것은 돌아간 강비와 자기 손에 죽은 방석, 방번 등의 영혼을 위하여 재를 올려주자는 것이 분명했다. 정안군은 불쾌했다.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음을 돌렸다. 이제, 방석, 방번이 죽은 후에 소소한 재 올리는 일까지 간섭한다는 것은 도리어 부왕의 감정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욕체도 불편하신데 한양도 하실 겸, 거둥을 하시게 하시지요."
정안군은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대답했다.
"거둥을 하신다면 절차에 따라 의장을 차려야 할 것 아닌가."
임금 정종은 아우 정안군에게 물었다. 아우의 뜻을 거슬러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갖추갖추 의장병을 늘어세워서 거둥 행차에 유루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우 정안군은 선선히 대답했다. 정안군은 상왕을 혼자 보내는 것보다 자기의 심복인 대장들에게 군사를 거느려 나가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슬며시 이같이 대답했다. 마음 착한 정종은 정안군이 진심으로 상왕을 위해서 의장을 허락한 것인 줄 알고 마음으로 기뻐했다.
"그러면 가시는 길을 잘 호위하도록 승지와 대장에게 분별하라."
정안군은 정종의 분부대로 상왕의 양주 행차를 반포한 후에 의장을 준비하여 궐문밖에 대령시켰다. 한편 상왕 이성계는 옥교를 타고 궐문 밖에 나왔다. 군사 수천 명이 어가를 호위하려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정종 이하 대군들이 상왕이 나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상들도 뒤를 따라 기다리고 있었다. 상왕 이성계는 옥교를 멈추게 했다. 상왕의 용안에는 갑자기 노기가 등등했다.
"상감을 불러라."
상왕의 명령을 받고 내관은 곧 추창해서 상감의 연 앞에 부복해 아뢰었다. 정종이 급히 상왕 앞에 부복했다.
"의장 일체를 제례하고 상감 이하 문무백관들의 전송과 수행을 폐지하라. 만약에 내 말에 응하지 아니한다면 상감도 불효다."
상왕은 불같이 노했다. 정종은 노한 상왕의 용안을 바라뵙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안군 방원이 군사를 거느려 수행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해서 이같은 분부를 내리는 것인 줄 직감했다. 황송하기 짝이 없었다. 정종이 채 대답을 올리기 전에 상왕 이성계는 잼처 노한 얼굴로 분부를 내렸다.
"일체 나의 행동에는 번거로운 의장을 쓰지 말라. 나는 이제 상왕이다. 이 나라 임금이 아니다. 한 사람의 자유스런 몸이 되어 마음대로 산수간에 한양할 테다. 빨리 의장을 거둬치우라."
마음이 착한 정종이었다. 조금이라도 아바마마의 뜻을 불안케 해서는 아니되겠다 생각했다.
"분부대로 모든 의장을 물리치고 간촐한 배종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정종은 상왕께 말씀을 올린 후에 곧 정안군을 불렀다.
"모든 의장병과 만조백관들의 수행을 거부하신다. 아바마마의 뜻을 거슬러서는 아니 된다. 곧 분부대로 시행하라."
정안군은 잠시 망설였다. 무해무득하다고 생각했다.
"곧 의장을 거두고 백관들의 수행을 푸지위하겠습니다."
정안군은 어전에서 물러났다. 정승 하윤과 대장 이숙번을 불렀다.
"상왕께서 단기로 가시기를 소원하시는 모양이오. 모든 의장과 배행하는 관원을 푸지위하시오."
정승 하윤과 대장 이숙번은 곧 정안군의 지휘를 받았다. 모든 의장병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서고 만조백관들은 제각기 말머리를 돌려 헤어졌다. 정종은 다시 상왕의 어가 앞에 나타났다.
"안녕히 행차하셨다가 돌아오십시오. 소자는 더 나가지 아니하겠습니다."
정종의 눈에서는 수정같이 희고 맑은 눈물방울이 점점이 용포 자락에 떨어졌다. 상왕은 방과만을 사랑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방과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지극한 순정이라고 생각했다. 상왕의 눈시울도 화끈했다. 의장을 물리친 것은 정안군 방원이 미워서 물리친 것이요, 정종 방과가 미워서 물리친 것은 아니었다. 상왕은 정종에게 부드럽게 대답하며 옥교 위에 올랐다.
"갔다 오리라."
정안군 방원은 감히 상왕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모든 의장과 임금과 대군이며 만조백관들의 수행을 물리친 상왕은 마음이 거뜬했다. 불효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정안군에 대한 마음의 항거다. 옥교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은 진정한 심복인 내시 서너 명과 궁녀 두 사람뿐이었다. 임금도 싫었다. 임금 아버지 노릇도 싫었다. 한 사람의 홑벌 평민이 그리웠다. 왜 자기가 위화도에서 욕심을 내서 회군을 하여 고려 왕실을 무찌르고 왕씨를 죽이고 충신을 죽여서, 이신벌군했다는 누명을 천추만대까지 받을 짓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기는 아들들이 제왕의 권력을 잡기 위하여 어미를 배반하고, 아비를 배반하고, 동생을 죽이고, 매부의 목을 벨 줄은 생각 못했던 것이다. 상왕 이성계는 대궐을 등지고 동소문을 지나, 장수원을 향하고 나갔다. 모든 일이 허망하고 무상했다. 어서어서 빨리 회암사로 가서 국사 무학을 만나보고 만단정회를 푼 후에 사랑하는 강비와 아들 방번, 방석과 사위 이제를 위하여 재를 올리고 싶었다.
"이곳이 어디냐?"
상왕은 교자 안에서 물었다.
"장수원이라 하는 곳이올시다."
"장수원? 회암사는 몇 리나 남았느냐?"
"아직도 멀었습니다. 승석 때나 되어야 도착될 것 같습니다."
옥교를 멘 무예청들이 대답했다.
"빨리 몰아라. 답답하구나."
무예청들은 풍우 같이 옥교를 몰았다. 어둡기 직전에 상왕의 옥교는 양주 회암사에 당도했다. 양주목사가 앞서 달려간 파발마한테 상왕이 행차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회암사 절문 앞에 주지 이하 중들을 거느리고 상왕을 맞이했다. 회암사는 법석했다. 상왕은 주지를 불렀다.
"국사 무학이 보이지 아니하니 웬일이냐?"'
"무학 국사는 양근 용문산으로 옮아가신 지 오래옵니다."
"용문산 용문사로 옮겨갔단 말이냐?"
무학은 나라가 어지러울 것을 미리 짐작하고 용문산으로 깊숙이 들어가 피한 것이다. 상왕은 대중에게 내탕금을 내리고 강비와 방석, 방번, 이제의 혼령을 위하여 재를 올리라 했다. 대중들은 밤을 새워 재를 차렸다. 일대의 영웅으로 천지를 뒤흔들어 조선국을 창업한 상왕 이성계의 명령이었다. 재는 이튿날부터 호화찬란하게 열렸다. 염불 소리, 독경 소리, 범패 소리에, 바라춤이 벌어졌다. 괘불 탱화까지 꺼내 모시어 굉장한 재를 사흘 밤, 나흘 낮을 올렸다.
백팔번뇌
그러나 이미 죽은 강비와 아들들은 다시 살아올 도리가 없었다. 상왕 이성계는 삼주아의 큰 재를 올려서 부처께 죽은 이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가슴에 맺혀진 한은 풀어질 수가 없었다. 사흘 밤을 묵은 상왕 이성계는 무학이 그리웠다.
"무학국사가 용문사로 갔다 하니 양근으로 가서 용문사를 찾으리라."
상왕의 명을 어길 사람은 없었다. 상왕은 거리낄 것도 없었다. 교자에 몸을 실어 양근 용문사로 향했다. 미복으로 나선 상왕의 용문사 행차를 맞이한 승려들은 벌벌 떨었다. 처음엔 한낱 대수롭지 아니한 관원의 한가로운 행차로만 알았던 주지는 내관과 궁녀들에게 상왕마마이신 것을 전해 듣자 주지는 죄를 청하면서 한 번하게 맞이한 죄를 백 번이나 청했다. 상왕은 무엇보다도 무학이 궁금했다.
"국사 무학이 네 절에 있다 하는데 어디 있느냐?"
주지는 합장을 올려 공손히 대답했다.
"무학 국사는 이곳에서 떠난 지 오래옵니다."
"언제 떠났단 말이냐?"
상왕은 깜짝 놀랐다.
"대엿새 전이옵니다."
"어디로 간다 하더냐?"
"오대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간다 했습니다."
상왕은 낙심했다. 무학은 방석의 난이 일어난 후에 상왕이 반드시 자기를 찾을 줄 알고 일부러 피하여 자취를 감춘 것이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방원의 손에 결딴이 날 것이 분명한 때문이다. 무학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일부러 구름처럼 물처럼 자취를 감추면서 돌아다녔다. 상왕은 무학이 오대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무학의 뒤를 쫓아가고 싶었다.
"오대산으로 가자."
상왕은 무예청들에게 명을 내렸다. 무예청은 상왕을 모시고 오대산으로 향했다. 산은 푸르고 물은 맑았다. 새소리는 인간 속세에서 들어보지 못한 아리따운 고운 소리다. 여태껏 남선북마로 한평생을 전쟁으로 지낸 까닭에 눈에는 이러한 절경이 보이지 아니했다. 상왕은 신성이 된 듯 어깨가 거뜬했다. 한 번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낙락장송을 바라보면서 오장육부 속의 모든 추하고 악한 기운을 쏟아버리고 맑고 깨끗한 대기를 마셔보았다. 멀리 오대산 월정사의 붉고 푸른 단청이 보였다. 상왕은 어서 빨리 월정사로 들어가 무학을 만나고 싶었다.
"전후좌우의 산천경개도 좋다마는 저기 구름밖에 보이는 원정사로 가보자."
무예청들은 가마채를 고쳐 메고 월정사를 향하여 치달렸다. 교자를 멘 무예청과 내시 두 명과 궁녀 두 명을 거느린 상왕은 월정사에 당도했다. 산은 으슥하게 푸르고 하늘은 비취빛으로 맑았다. 월정사 큰 법전의 우람한 자세와 한가로운 풍경 소리는 티끌 가득한 어지러운 속세가 아니라 맑고 맑은 청정세계였다. 상왕은 정신이 쇄락했다. 주지를 청했다. 호호백발인 노승이 석장을 짚고 나타났다. 오대산 속에 있는 승려는 왕이나 상왕을 알 까닭이 없다. 관복 입은 내관에게 지금 온 손님이 상감의 아버지 상왕인 것을 비로소 들어 알았다. 노승은 상왕 앞에 나가서 합장을 올리고, 공손히 아뢰었다.
"빈도는 깊은 산중에 다만 부처를 모시어 있는 불제자인지라 인세의 일을 돈연히 모르고 있사옵니다. 거룩하신 행차가 전하이신 줄 모르고 너무나 태만했사오니 꾸지람을 마시옵소서."
주지는 말을 마치자, 조용히 합장을 올렸다. 옷은 비록 해진 검은 장삼에 퇴색된 가사를 어깨에 걸쳤으나 얼굴은 희고 골격이 비범했다. 머리에 서리가 어린 듯 은실같이 세었고, 수미는 은바늘이 뻗친 듯하고, 별빛같이 반짝거리는 두 눈엔 위엄을 뿜었다. 한 번 보아 범상치 아니한 승려다. 노승은 상왕을 법전으로 인도했다. 내관과 궁녀들이 상왕을 부액해 보시려 했다. 노승은 쨍쨍한 목소리로 상왕의 부액을 금했다.
"전하께서는 아무리 진세를 다스리시는 인간의 제왕이십니다마는 이곳은 시방세계에 광명을 비추어주시는 법왕의 정전이올시다. 궁녀와 액정들의 부액을 받지 못하십니다."
그럴 듯한 말이었다. 자기는 진세의 임금이요 상왕이었다. 법계에 들어와서는 평범한 한낱 사람이었다.
"부액을 폐지하라."
상왕은 내관과 궁녀에게 분부하고 늙은 중을 따라 법전으로 올랐다. 황금대불을 모신 붉게 칠한 법단 아래는 향로에 향연이 고리를 그려 둥글게 일어나며 법전 안에 향내가 자욱했다. 노승이 상왕께 고했다.
"전하께서는 비록 진세의 지존인 제왕이시지만, 부처는 옥황상제의 스승이십니다. 아무리 높으신 전하라도 부처께는 배례를 올리셔야 합니다."
상왕은 주지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공손히 부처를 향하여 재배를 올렸다. 상왕은 두루 법전을 살펴 돌아본 후에 다시 노승의 인도로 방장에 들었다. 상좌 중이 향다를 받들어 상왕과 노승 앞에 놓았다. 상왕은 향다를 마시며 노장 중에게 물었다.
"노장의 법명은 무어라 부릅니까?"
상왕은 깎듯이 존대를 해 물었다.
"불가에서는 원래 법명조차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별하자니 명칭을 아니 가질 수 없습니다. 설오라 부릅니다."
노장은 합장을하여 대답했다. 상왕은 노장의 법명이 설오라 하는 것을 듣자, 미연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설오 ... 과연 좋은 법명이로구려. 눈 속에서 무엇을 깨닫는다는 뜻이렷다."
청수한 노승은 겸사해 대답한다.
"깨닫기는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마는, 그거 그렇게 스승이 법명을 지어준 것입니다."
상왕은 다시 노승에게 물었다.
"스승이 누구시오?"
"도선국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허암대사이십니다."
상왕은 설오가 도선의 법통을 받은 고승의 제자라는 말을 듣고 더욱 경대하고 싶은 마음이 울연히 일어났다.
"존사는 나에게 좋은 일을 많이 가르쳐주시오."
상왕은 애원하듯 설오에게 말했다. 설오는 빤짝거리는 까만 눈을 떠서 상왕을 우러러 뵙는다.
"상왕 전하께서는 번민이 계신 모양이올시다. 전하께 번민의 씨를 던져준 사람은 어리석은 중 무학이올시다."
상왕은 설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무학을 아시오?"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무학의 행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하를 병들게 만들어온 자는 무학이란 용렬한 중이올시다."
"무학이 어찌해서 과인을 병들게 했다 하십니까?"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사람에게 허욕을 금해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학은 허욕의 함정 속으로 전하를 빠지게 해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노승의 말소리는 또렷또렷 야무졌다. 상왕은 설오대사의 말을 그래도 깨닫지 못했다.
"다시 좀 자세히 말씀해주시오. 암만 해도 존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무학은 전하가 젊었을 때, 공연히 왕자의 해몽을 해서 잔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고, 깨진 거울의 해몽을 해서 마음을 설레게 했고, 닭 울음소리를 해몽해서 전하의 마음을 더한층 부채질했습니다. 전하의 오늘날의 번민 왕위에 오르신 때문입니다. 만약 왕위에 나가시지 아니했던들 오늘날 오대산을 찾으실 까닭이 없고, 무학의 해몽이 아니었던들 형이 동생을 죽이고, 계모를 푸대접하고,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하는 불효자가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포은 선생 같은 열사와 최영 장군 같은 충신을 죽이고, 두문동 칠십이인의 의로운 선비를 불태워 죽이고, 왕씨란 왕씨를 바닷속에 몰아넣어 죽이는 등, 만고에 없는 참혹한 비극이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학은 배움이 없는 무식한 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학 자신은 전하를 피하여 종적을 감추려고 애를 쓰며 떠돌아다닙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의 자세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올시다."
설오대사의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말은 상왕 이성계의 폐부를 찔렀다. 상왕 이성계는 비로소 자기 자신이 무학 때문에 번민하고 있다는 설오대사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럴듯한 말이다. 만약 자기가 왕씨의 정권을 전복시키지 아니했다면 오늘날 왕권을 다투는 피비린내 나는 형제 사움은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이 분명했다. 무학을 공격하여 휘하지 아니하고 바른말을 하는 설오대사에 대하여 상왕 이성계는 더욱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상왕 이성계는 설오대사에게 깍듯이 존경해서 말했다.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소. 앞으로 나를 많이 지도해주시오."
이윽고 저녁 밥상이 들어왔다. 아무리 산간벽지라 하나, 상왕 전하를 위하여 정결하고 담박한 진짓상이 나왔다. 정성을 다하여 장만한 음식이다. 표고로 국을 끓이고 도라지 생채로 나물을 했다. 두부를 지지고 버섯으로 고명을 해서 소전골까지 곁들였다.
"산간벽지인 산사의 음식이올시다. 마음은 가득하오나 고기 반찬을 내올 도리가 없습니다. 비록 맛없는 염반이올시다마는 정성 어린 음식이오니 꾸짖지 마시고 젓수어 주옵소서."
설오화상은 간곡하게 상왕께 권했다.
"천만에 말씀요. 염반이라니 말이 되오. 향기로운 표고국과 싱그러운 도랒 산채에, 소전골까지 곁들여주고 찬이 없다니 말이 되오. 이 음식은 모두 다 신선이 먹는 음식요. 나는 대사 덕에 불로장수하는 신선의 음식을 먹게 되었으니 이런 다행한 일이 또다시 있을 수 없소."
상왕은 수저를 들어 표고국을 마시며 대답했다.
"황공하오이다. 그같이 분부를 내리시니, 더한층 송구스럽습니다. 절간 음식이 비록 정결하다 하오나 어찌 구중궁궐의 산해진미를 따르겠습니까. 과찬을 해주시니 감격하옵니다."
설오는 합장을 올려 공손히 대답했다. 상왕은 식사를 달게 마친 후에 설오에게 부탁했다.
"대사에게 부탁할 말이 있소. 내일 일찍이 날이 밝는 대로 상좌들에게 명해서 정결하게 재를 올려주도록 하오. 내가 시주가 되리다."
"누구를 위하여 재를 올리려 하십니까?'
설오대사는 별빛 같은 눈으로 상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돌아간 왕후 강비와 원통하게 죽은 세자 방석과 왕자 방번이며, 나의 사위 이제를 위하여 극락세계로 가라고 재를 올려주시오. 이러한 정결한 곳에서 재를 올린다면 부처께서도 더욱 감동이 되시어 좋은 곳으로 천도해줄 것 같소이다."
설오는 상왕의 말씀을 들으며 염주를 굴리고 있다고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대답했다.
"전하, 전하께서는 애써 내탕금을 써가시며 재를 올리실 까닭이 없습니다. 불가에서 재를 올리는 풍습이 있는 것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착한 길로 인도하기 위한 때문이올시다. 재를 올린다고 죽은 망자들이 극락세계로 가는 것은 아니올시다. 전하께서는 모든 욕심을 버리시고 어진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시어 억조창생을 도탄 속에서 구하신다면, 망자들은 저절로 극락세계 연화대로 갈 것입니다. 황송하오나 전하의 내탕금은 전하의 사사로운 재물이 아니올시다. 전하께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십니다. 이 나라의 제왕이시고 지금은 그보다 더 높은 상왕이십니다."
설오대사의 점잖은 말에 이성계는 마음이 감동되었다. 착한 마음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모든 과거의 잘못을 씻어볼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게 일어났다. 상왕은 설오를 향하여 다시 말했다.
"내 생전에 대사같이 높은 도승은 처음 보았소. 대사의 말씀을 받들어 내 마음을 깨끗하게 맑히도록 하겠소. 그리고 나는 월정사의 갸륵하신 부처님께 예불을 하고 오대산의 풍물을 보았으니 내일은 금강산 유점사를 향하여 떠날까 하오. 설오대사가 다행히 길동무를 해준다면 고맙기 한량없겠소."
설오대사는 상왕의 말을 듣자 합장을 올려 대답한다.
"전하게서 가시자 하면 소승이 앞을 서서 인도하오리다."
설오대사는 말을 마친 후에 향다를 다시 올리고 물러갔다. 이튿날 날이 밝자, 상왕은 설오와 함께 금강산으로 향했다. 설오는 흑장삼에 석장을 짚고 앞을 서서 걸어가고, 상왕은 한양에서 데리고 온 궁녀 두 명과 내시 두 명을 거느리고 교자를 타고 뒤에 따랐다. 대마침 가을이었다. 산마다 단풍은 타는 듯 붉고 하늘은 비취빛으로 진하게 푸르렀다. 상왕은 골짜기를 지나고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폭포는 안개를 뿜어 떨어지고 맑은 대기와 아름다운 새소리는 진세에 물이 든 더러운 창자를 깨끗이 씻어주는 듯했다. 모든 잡념이 다스려졌다. 임금 노릇을 하려던 생각, 왕씨네들을 무찔러버렸던 행동, 정포은을 죽이고, 최영 장군을 죽이고, 두문동 칠십여 인을 불살라 죽인 일들을 뉘우치는 생각이 간절했다. 왜, 사람을 초개같이 죽이고 왕 노릇을 하려고 애를 썼는지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리석고 미련하기 한량없다. 자기가 임금이 되지 아니하고, 고려의 왕씨를 도와서 문신이 ㄴ포은 정몽주와 호반인 최영과 함께 나라를 위하여 노력했다면 지금쯤 이 나라는 더욱 훌륭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나 그뿐인가, 자기 집안은 부자가 원수가 되고, 형제가 살육을 하는 이 기막힌 일도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이다. 설오가 말한 대로 자기는 욕심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강비의 명복을 빌고 아들 방석 등 원통하게 죽은 원혼이 연화대로 가기를 천 번 만 번 축원한댔자 모두 다 헛된 일이라 생각했다. 일이 있는 것은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더욱이 소장지변이 나고, 골육의 피를 뿌린 일이랴. 상왕은 금강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뉘우치는 마음이 더한층 간절했다.
"여기가 단발령이올시다."
설오대사가 앞에 가다가 지팡이로 앞산을 가리켰다. 상왕은 교자에서 내렸다. 청산이 뭉그려 기어오는 듯하고 붉은 단풍, 푸른 잣나무가 수해를 이루어 눈이 황홀했다.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모든 이욕을 다 쓸어버리고 청정세계로 돌아가서 모두 다 머리를 깎아 중이 되고 싶다고 원하는 곳이올시다. 그래서 이름을 단발령이라 했습니다."
"설오, 나도 머리를 깎아 중이 되고 싶구려."
상왕 이성계는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설오대사는 소리를 높여 깔깔 웃었다.
"전하께서도 중이 되시고 싶으십니까, 하하하."
"그러하오. 속세가 싫어졌소. 중이 되고 싶구려."
상왕도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속세가 싫어지신 것은 오늘 단발령에서 비로소 싫어지신 것이 아닙니다. 전하는 벌써 한양성중에서 왕의 자리를 내놓으시고 상왕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러하니 전하의 욕심을 버리신 착한 마음은 벌써 한양에서 시작되셨습니다. 이제 새삼 단발령에서 머리를 깎아 중이 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상왕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옛글에 이런 말이 있지 아니합니까? 알인욕존천리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을 누르고 하늘의 섭리를 보존해두라는 말이올시다. 만고의 격언이라 생각합니다. 재앙과 화는 모두 다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올시다. 이제 상왕께서는 왕의 자리까지 내놓고, 욕심을 버리셨습니다. 새삼스럽게 산문으로 들어와서 승려가 되시지 않더라도 어질고 착한 마음을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단발령에서 중이 되실 생각을 아니하셔도 좋습니다."
설오대사는 상왕과 어깨를 겨누어 단발령 고래를 넘으며 인간의 진리를 이야기했다. 설오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된다고 곧 착하고 어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투를 틀고 진세에 산다고 곧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올시다. 산중에 있든 진세에 있든 마음과 뜻을 청정하게 가진다면 곧 착한 사람이 되고 마음도 편안할 것입니다."
"옳소. 대사의 말씀이 과연 옳소이다."
상왕은 설오의 말이 마디마디 옳다고 생각했다. 일행이 단발령 고개를 넘어 외딴 주막에 들었을 때 돌연 수십 기의 말 탄 관원이 단발령 고개를 넘어, 상왕께 문안을 드리러 주막으로 달려왔다. 강원감사를 앞세우고 정종이 칙사를 보내서, 상왕을 맞이하러 온 것이다. 양주 회암사로 간다던 상왕 전하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으니, 정종대왕은 깜짝 놀랐다. 칙사를 보내서 상왕의 종적을 찾았다. 칙사는 오대산을 거쳐서 금강산으로 찾아온 것이다. 칙사는 왕을 대신해서 대죄하며 간절히 빌었다.
"상감께서는 상왕 전하께옵서 양주로 가셨다가 곧 돌아오실 줄 알았사온데 오대산으로 가셨단 말씀을 듣고 침식을 전폐하시면서 회가하시기만 고대하십니다. 만약 상왕께옵서 아니 돌아오신다면 왕의 자리를 버리고 상왕 전하를 따라와 모신다 합니다."
정종이 왕의 자리를 버리고 금강산으로 따라오겠다는 말은 상왕의 마음을 찔렀다. 정종이 만약 왕의 자리를 내놓으면 다섯째 방원이 왕의 자리를 뺏을 것이 분명했다. 상왕은 죽어도 왕의 자리를 방원이한테 주기는 싫었다. 묵묵히 말이 없던 상왕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대답을 내렸다.
"내일 곧 한양으로 돌아가리라!"
이튿날, 상왕은 금강산에서 한양으로 돌아갈 차비를 차렸다. 창연히 설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대사, 그럼 태평히 계시오. 내가 한양으로 돌아가 대사를 청하리다."
설오는 합장을 올리며 대답한다.
"한미한 산문의 종적이 어찌 감히 왕도를 찾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는 마음을 너그럽게 하시어 만수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전하께서는 겁운이 잠깐 남았습니다. 마음을 넓히시어 겁운을 소멸시키시면 만수무강하실 것입니다."
설오는 상왕을 위로하면서 한양으로 돌아가는 행차를 단발령 위에서 몸을 굽혀 바라보았다. 상왕이 몇 날을 허비하여 한양성 안으로 들어가니 정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성 밖 삼십 리까지 나와서 상왕을 영접했다. 백관의 앞에는 방의와 방간과 방원이 나와서 아버지 상감께 문안을 드렸다. 상감 정종과 방의, 방간이 군막 안으로 들어 절을 올려 사후했을 때 상왕은 미소를 머금고 절을 받았다. 그러나 다섯째 방원이 들어왔을 때 상왕은 몸을 피하고 절을 받지 아니했다. 방번, 방석을 죽인 원한이 아직도 눈에 선해서 골수에까지 사무친 때문이다. 방원은 절을 하려 하다가 머쓱해서 물러갔다. 대궐로 환궁한 후에 상감 이하 모든 왕자는 사후를 올렸다. 그러나 방원은 들어가지 못했다. 들어간 대야 상왕이 외면할 테니 안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이날 밤에 상왕은 상감인 정종 이하 방의, 방간과 저녁 수라를 함께 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내가 금강산에서 돌아와보니 또다시 마음이 불편하고나. 암만해도 한양에는 정이 떨어져서 있을 수가 없다."
정종은 효자였다. 상왕의 마음을 살펴 알았다.
"한양이 싫으시면 다시 옛 도읍 송도로 가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소자도 송도에 정이 들어서 아바마마를 모시고 송도로 가고 싶습니다."
정종은 상왕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케 하려하여 송도로 가겠다고 아뢰었다.
"단신도 아니고 종묘와 백관을 한양에 둔 채 어찌 송도로 가겠는가. 가고 싶은 사람은 나이니, 나 혼자 가겠네."
상왕은 어진 정종의 마음을 알았다. 말씀을 부드럽게 하여 대답했다.
"종묘와 궁궐은 한양에 그대로 두어도 좋습니다. 제향 때는 한양으로 와서 제향을 올리면 그만이올시다. 다만 아바마마의 마음이 편하시기만 소원이올시다. 좋은 날을 택해서 곧 송도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정종은 아바마마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려고 송도로 도읍을 옮길 것을 결심하고 상왕 침전에서 물러 나왔다. 이튿날 정종은 다섯째 아무 정안군 방원에게 명패를 내려 불렀다. 정안군은 방석의 난이 일어난 후에 모든 실권을 잡고 있었다. 정치도 군사권도 모두 그의 심복들이 차지했다. 정종은 먼저 아우 정안군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정안군 듣거라. 나는 송도로 도읍을 옮기고 싶다. 송도에는 돌아가신 어마마마의 능침도 계실 뿐 아니라, 정이 든 나의 제이의 고향이다. 나는 아바마마를 모시고 송도로 가고 싶다. 대군의 뜻은 어떠한가?"
정안군은 깜짝 놀랐다.
"한양에 이미 장엄한 궁궐과 육조의 관청이 배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모시고 문부백관이 이곳에서 일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의 백성들을 풀어서 성을 쌓고 못을 파고, 사대문과 사소문을 세워서 무한 노력하여 한 양배판을 해놓았습니다. 이곳을 버리시고 어찌 송도로 떠나실 수 있습니까. 아니 되십니다."
정안군 방원은 단번에 반대하는 말씀을 올렸다.
"나의 맘뿐만 아니라, 상왕 전하의 의향이 그러하시다. 노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하는 노릇이니 과히 반대하지 말라."
방원은 정종대왕의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에 약간 고개가 수그러졌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 그러하시다면 송도로 가보십쇼마는 갖가지로 불편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방원은 이쯤 아뢰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정종은 상왕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송도 환도를 단행했다. 즉시 관상감에 명하여 택일한 후에 상왕을 모시고 송도로 향했다. 실권을 잡은 방원이 적극 협력을 하지 아니하므로 거둥행차는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상왕을 모슨 연이 뜨고, 다음에 정종을 모신 연이 나갔다. 정종 왕비의 연이 뒤에 따르고, 그 뒤엔 방간이 뒤를 따랐다. 정종의 바로 아래인 셋째 방의는 꾀가 많고 약은 사람이었다. 이번 송도 환도에 대하여 실권을 잡고 있는 방원이 찬성하지 아니하는 눈치를 채고 슬며시 몸을 피하여 포천 전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누워버렸다. 백관이 따라가지 아니하니 송도로 가는 거둥행차는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행차가 서대문 안 정릉 앞을 지날 때, 상왕 이성계는 불현듯 죽은 왕비 강씨의 생각이 났다.
"이제 내가 송도로 가면 언제 다시 한양에 와볼는지 모르겠다. 잠시 정릉에 들러서 작별인사를 하고, 흥천사에 있는 경순공주를 보고 가리라."
상왕은 아들 정종을 향하여 말했다. 정종은 아버지의 서운한 마음을 짐작했다. 곧 내관한테 분부를 내렸다.
"선왕께옵서 정릉에 다녀서 행차하실 테니 어가를 정릉으로 돌려 모시게 하라."
서대문 쪽으로 향해 가려던 행차는 정릉동으로 연을 돌려 들어갔다. 정종은 생모의 능이 아니건만 아버지의 뜻을 존중해서 상왕의 어가를 모시어 뒤를 따랐다. 상왕은 정릉에 올라 한숨을 짓고 비각과 정자각을 살펴보았다. 강비의 원찰인 흥천사에서는 상왕이 송도로 향해 가시다가 돌연 어가를 돌려 능으로 듭신다는 소식을 듣고 주지 이하 모든 승려들은 향을 피워 들고 열을 지어 어가를 맞이했다. 방석과 함께 원통하게 죽은 부마 이제의 아내 경순공주도 흑장삼에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아바마마와 둘째 오라버니 정종대왕께 뵙기 위하여 능상으로 올랐다. 상왕은 머리 깎은 경순공주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잘 있었느냐?"
화경 같이 빛나는 늙은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경순공주는 아바마마를 바라 뵙고 말없이 합장을 올렸다. 진주 같은 눈물이 먹장삼 위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공주는 장삼 소매로 눈물을 닦고 목멘 음성으로 나직나직 아뢰었다.
"아바마마께서는 그동안 금강산을 구경하고 오셨답지요. 불효녀는 몸에 승려의 복색을 입었으므로 감히 대궐에 들어가 문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상이 태산같이 높사옵니다. 이번에 또 송도로 환도하신다 하오니,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 이루 지향해 아뢸 길 없습니다."
상왕은 슬펐다. 한숨을 짓고 이내 공주의 손을 다시 잡으며 물었다.
"너도 나와 함께 송도로 가고프냐?"
상왕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금창이 미여지는 애운성을 지었다. 옆에서 듣고 섰는 정종의 눈시울도 젖었다. 경순공주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바마마를 모실 아들들은 아직 많습니다. 그러나 정릉에 외롭게 계신 어마마마의 혼령을 모실 자식은 오직 불초한 소녀 한 몸뿐이올시다. 다시 누구에게 부탁할 사람이 없습니다. 한평생 정릉 흥천사에 있어, 어마마마의 혼령을 위로해드리기 소원이올시다."
경순공주는 말을 마치자 슬픈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장삼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상왕은 측은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를 위로해줄 아들은 몇 사람 있다마는 너의 어머니 혼백을 위로해줄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그리고 네 남편 부마의 원통하게 세상을 떠난 혼령도 위로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대로 이곳에 머물로 있거라."
상왕은 말을 마치자, 강비의 무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뚝 분상 앞에 서서 산 사람을 향하여 말하듯 했다.
"처음에 당신은 이곳 한양으로 천도하기로 했소. 그래서 당신의 뜻대로 정도전을 시켜서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경복궁을 짓고 육조 배판을 하였소. 누가 당신이 그렇게 별안간 세상을 떠날 줄 꿈엔들 생각했겠소. 당신이 한 번 홀홀하게 세상을 떠난 후에 변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구려. 세자 방석을 위시하여 방번과 사위가 다 비명횡사를 해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버렸구려. 인생이 일장춘몽과 같다 하지만 어찌 이같은 참혹한 일을 내가 시퍼런 눈을 뜨고 당할 줄 꿈에나 생각했겠소. 강비! 이제 나는 홀홀한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이 되어버렸소. 누구를 바라고 한양에서 살겠소. 송도로 가볼까 하오. 그러나 송도에서는 누가 나를 반갑다고 맞이해줄 사람이 있겠소? 그저, 한양이 정말 정떨어지니 송도로 가보는 것뿐이지. 송도로 가는 길에 정릉 앞을 지나게 되니, 당신의 생각이 불현듯 나서 당신의 무덤을 찾아왔소. 내가 혹시 한양에 들르게 되면 또다시 찾아오리다. 마누라! 나는 이 세상에 죄를 많이 진 사람이오. 죌르 많이 져서 이 앙갚음을 받고 있소. 넓고 넓은 하늘과 땅 사이에 혼자서 죄를 받고 있는 이 몸을 가엾다고 생각해주오."
상왕 이성계는 푸념을 마치자 더한층 설움이 북받쳤다. 무덤을 향하여 통곡해 울었다. 경순공주도 목을 놓아 울었다. 정종도 소리를 죽여 울었다. 내관도 울고 궁녀도 울었다. 상왕은 내관과 궁녀들의 간곡한 청을 들어 울음을 그치고 산에서 내렸다. 경순공주의 손을 다시 잡았다.
"잘 있거라!"
한 마디를 남기고 자비에 올랐다. 세문을 지나 무악재를 넘었다. 임금 정종과 상왕 이성계의 홀홀한 행차는 마침내 송도에 도착되어 옛 대궐 경덕궁에 들었다.
제3혁명
상왕 이성계와 정종이 송도로 다시 간 후에 한양에 떨어져 있는 백관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결재를 맡으려면 정부 장관이 문부를 가지고 말을 달려 송도로 가서 대오앙의 재가를 맡아야 했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정안군 방원을 중심으로 한 민제, 하윤, 조준 등 정승과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 장수들은 정안군 방원에게 건의했다.
"상왕과 상감께서 송도로 가시고 이곳 한양에 관청과 군총이 있으니 이것은 마치 한 나라에 조정이 둘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또 왕 전하와 정부가 따로 떨어져 있는 틈을 타서 송도에서 어떤 뜻하지 아니한 불측한 변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대군께서도 육조와 백관들을 거느리고 송도로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방간의 행동이 수상합니다. 주의하십쇼."
정안군 방원은 모든 심복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여러분들의 의사가 그러하시다면 나도 곧 백관들을 거느리고 송도로 가겠소이다."
"가시려면 속히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암만 해도 방간의 행동이 무한 수상합니다. 송도로 간 후에 그곳에 자기 세력을 뿌리박기 위하여 사사로이 한량패와 장사를 모집해서 날마다 후원에서 말을 달리고 활을 쏘고 대장간을 만들어놓고 병기를 만들어서 창과 칼이 창고에 가득하다 합니다. 속히 가서 동정을 살핀 후에 뿌리가 박히기 전에 싹을 도려내야 합니다."
정안군은 심복들의 말을 듣고 관청의 백관들이 정치하는 데 불편한 것을 이유로하여 부랴사랴 관리들을 거늴고 송도로 향하여 떠났다. 장터를 벌여놓고 자리잡아 장사하던 백성들은 원성이 드높았다. 또 다시 장사하는 점포와 장사하던 물건을 거둬가지고 송도로 가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안군은 급했다. 백성들의 원성은 돌아볼 틈이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백성들보다 정권을 잡는 일이 더 급했다. 다만 자기의 정권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의욕만이 마음 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이때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 회안군 방간은 정종의 다음 아우 익안군 방의의 동생이요, 정안군 방원의 형이었다. 세자 방석의 난이난 후에 항상 정안군 방원을 밉게 보았다. 방원은 방석의 난이 난 후에 정권과 군사권을 한꺼번에 장악했고, 형님 정종은 마음이 착하니 이름뿐 임금이요 실권은 모두 다 정안군이 잡았다. 뿐만 아니라 이복동생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인 후에 자기가 스스로 세자가 되려 했으나 상왕이 듣지 아니하여 형님 되는 방과로 세자를 봉했다가 선위를하여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정종은 왕후 김씨의 몸에 적자가 없었다. 다만 후궁의 소생이 무려 이십삼 남매에 아들만이 십오 형제다. 그러나 세상 일에 물욕이 없는 정종은 혹시 화가 서자한테 미칠까 해서 후궁의 소생인 남자들을 모조리 머리를 깎아 중을 만들어 절로 보냈던 것이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정안군 방원을 위시하여 그들의 심복들은 다음의 세자는 당연히 정안군 방원이 되고, 세자가 된 후에는 선위를 받아서 왕의 자리에 나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공석과 사석에서 방원의 심복들은 터놓고 이야기했다.
"상감께서는 참말 착하고 어지신 요순 같으신 임금이시오. 과연 말이지, 성인의 자격이 계신 분이오. 혹여나 일후에 말썽이 일어날까 하시어 후궁 출생 십오 형제를 모두 다 중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갸륵한 분이 세상에 몇 분이나 있겠소."
"그렇고말고. 이번 세자는 꼭 우리 정안군 나리가 되실 것이 분명하오. 그러니 벌써 앞을 내다보시고 아드님을 중이 되게 하셨구려. 참으로 갸륵한 분이오."
"이제는 왕실의 자리가 잡히게 되었소."
"세상이 안정되니 백성들도 좋아할 것이오."
방원의 심복들은 이같이 지껄였다. 방원의 심복들이 마음 놓고 떠들어대는 말을 듣자 회안군 방간의 배알은 꿰질 것 같았다. 아니꼽고 구역질이 났다. 국가나 사가에는 장유유서로 차례가 있는 법이다. 정안군 방원은 자기의 바로 아우다. 방석의 난 후에 맏형님인 방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아버지는 둘째 형님 방과로 세자를 책봉했다가 선위해서 왕위에 나가게 했던 것이다. 다음에 형님 정종은 적자가 없으니 다음 왕위는 당연히 차례대로 자기의 형님인 익안군 방의로 왕세자를 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익안군 방의는 둘째 형님 정종의 성격과 비슷했다. 마음이 착했다. 몸을 사리고 피했다. 될 수 있는 한 나라 정치와 권력과 세도에서 떠나려 했다. 애당초부터 세자나 임금의 자리에는 나갈 생각이 꿈에도 없었다. 이러하니 지금 임금인 정종의 다음 왕권은 자기가 잡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먼저 세제나 세자가 되었다가 나중에 왕의 자리에 나가야 하겠다는 욕심이 가슴 안에 가득하게 벅차올랐다. 여기다가 방간의 큰아들 맹종은 나이 이십 살에 효용이 절륜했다. 그의 할아버지 태조를 닮아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방간이 상왕과 형님 정종을 모시어 송도로 돌아가니 아들 맹종도 상왕과 정종을 호종하여 송도로 달려왔다. 어느 날 밤이었다. 아들 맹종은 아버지 방간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님께 아룁니다. 다섯째 아버님의 행동은 너무나 방약무인하고 방자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불효자가 어디 있습니까. 남이 부끄럽습니다."
"왜?"
맹종의 아버지 방간은 시치밀 떼고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불효라도 이만저만한 불효자가 아니올시다."
"어째서 불효자란 말이냐? 삼촌을 향해서 함부로 그런 버릇없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된다."
방간은 일부러 아들의 뜻을 살피느라고 이같이 타일렀다. 맹종이 대답한다.
"어른은 어른다워야 하지 않습니까? 어른 구실을 못하면서 어떻게 어른 행세를 합니까?"
"무슨 어른 구실을 못했단 말이냐?"
아버지 방간은 일부러 반문했다. 아들 맹종은 격분한 말씨로 대답한다.
"골육 형제들을 죽였으니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형님이 왕이 되었건만 실권은 자기가 잡고 있으니 말이 아니됩니다. 첫째로 할아버님께 불효자요, 둘째로 상감께 불경입니다. 이러한 분을 어찌 어른이라고 존경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 방간은 아들 맹종의 분개해하는 말을 듣고도, 일부러 대답을 아니하고 태연히 침묵을 지켜서 앉아 있었다. 맹종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번 일만 해도 할아버님 상왕께서는 세자의 참혹하게 죽은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자나깨나 마음붙이지 못하시고 오대산과 금강산을 둘러보시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한양이 보기 싫고 새 궁궐이 눈에 거슬러 뵈었습니다. 홀홀히 한양을 떠나서 상감과 함께 송도로 다시 오셨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정안군은 만조백관과 함께 한양에 태연히 앉아 있으니, 그래 도대체 이 나라에는 누가 임금입니까? 참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왕실의 치욕이올시다.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아버지 방간은 아들 맹종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로 둘 수 없다면 어찌한단 말이냐?"
"백성들은 지금 왕실의 꼴을 바라보고 코웃음을 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향하여 삼강오륜을 지켜라, 성현의 길을 따르라 하고 있습니다. 이리하면서 왕가에서는 골육상쟁을 하고 있으니 어찌 슬프고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두말할 것 없이 다섯째 삼촌은 왕실에서 없이해버려야 합니다."
맹종의 눈에서는 의분에 타는 불길이 활활 일었다.
"나 역시 불쾌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친동기간이라 하나 쾌씸하구나. 그러나 어찌 하느냐. 힘이 없구나!"
방간은 한숨을 지으며 대답했다.
"힘이 없으면 힘을 기르면 됩니다. 지금 다섯째 삼촌은 아버님을 제쳐놓고 자기가 왕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맹종의 말에 방간이 다시 묻는다.
"어떻게 힘을 기르면 되느냐?"
"우리는 송도로 온 김에 군비를 정돈해서 한양으로 쳐들어가서 삼촌을 제거시키면 됩니다. 소자가 더욱 분개하는 것은 다섯째 삼촌이 손위인 아버지께서 계신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방약무인한 태도를 가지니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송도로 오신 김에 천하의 호걸들을 많이 사귀어두십시오. 소자도 힘을 쓰겠습니다."
방간은 아들 맹종의 말을 듣고 마음이 든든했다.
"네 말대로 천하의 호걸들을 사귀어두겠다. 너도 좋은 인재를 많이 대해두어라."
방간은 마침내 아들 맹종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허락했다. 맹종은 다시 방간에게 고했다.
"저는 송도 집 후원에 크게 연무장을 마련하고 사정을 세운 후에 천하의 명궁들을 모아 활쏘기를 연습하겠습니다. 그리고 천마산에 말을 달려 사냥을 하면서 무사들을 기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네 말대로 모든 준비를 차려서, 힘을 길러보아라. 군자금은 내가 대어주리라."
맹종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자 마음이 흡족했다.
"일이 성공된 후에는 아버님께서 세자가 되시어 둘째 아버님의 뒤를 이어 왕위에 나가셔야 합니다. 모든 일은 차례가 있는 법이올시다. 그래야만 나라 꼴이 됩니다."
"네 말이 옳다! 일을 차려보기로 하자."
방간은 아들의 말에 찬성했다. 곧 천하의 호걸들을 물색했다. 먼저 박포란 사람을 생각했다. 원래 박포는 정안군이 세자 방석을 처치한 제이혁명 때 정안군에 가담해서 공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안군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논공행상을 하여 벼슬을 줄 때, 박포에게는 겨우 지중추원사라는 대단치 아니한 벼슬을 주었다. 박포는 분개했다.
"도대체 정안군은 논공행상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나보다 공이 못 한 자는 그래 정승 판서의 벼슬을 주고, 나는 겨우 지중추원사라는 허수아비의 벼슬을 주었으니 이것이 될 말이냐 말야. 틀려먹었어! 이번 논공행상은 나뿐 아니라 이무도 그 꼴이거든. 이 사람도 공이 큰 사람이건만 겨우 공신 부원군이란 실권도 없는 자리를 주었으니 이름 좋은 하눌타리란 말야. 이 사람도 불평이 대단하거든. 세상 인심은 모르는 거야. 이무도 누구편이 될는지 모르지. 사실은 정안군이 너무 꺼떡대고 뻐긴단 말야. 그따위로 일을 처리하다가는 저도 헛물켜고 말 것이니 딱한 일이지!"
박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불평을 이같이 늘어놓았다. 박포가 앙앙불락해서 불평을 품은 말은 단박 정안군 방원의 귀로 들어갔다. 정안군은 이무를 불러 물었다.
"자네는 벼슬이 낮다 해서 나한테 불평을 품었다 하니 사실인가?"
이무는 깜짝 놀랐다.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소인이 불평을 품을 리가 있습니까. 공신 부원군까지 되었는데 더 무엇을 바라고 불평을 품겠습니까. 누가 그런 주둥이를 놀렸습니까?"
"박포가 그런 말을 하더라는데 그래. 자네가 벼슬이 맘에 차지 아니해서 두 마음을 먹는다는데... "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소인은 그런 불평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박포와 무릎맞춤을 시켜줍시오."
정안군은 이무의 말을 듣자 박포를 미워하는 생각이 더한층 불같이 일어났다.
"박포는 멀쩡한 사람을 안고 들어갔네그려."
정안군은 노기가 등등했다. 이무는 정안군의 비위를 맞추었다.
"참말, 괴상한 자올시다. 불평이 있다면 저나 불평을 할 일이지 왜 멀쩡한 사람까지 끌고 들어가서 남의 신세를 망치려 합니까. 고이한 자올시다. 이러한 놈은 본보기를 단단히 내야 합니다."
이무는 도리어 정안군의 분개한 마음에 불을 질렀다. 방원은 정종대왕께 아뢰는 형식을 취하고, 박포를 죽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귀양을 풀었다. 박포의 불평하는 버르장이만 고쳐주자는 작정이었다. 그러나 박포는 마음속으로 점점 더 정안군에게 대하여 앙심을 품었다. 방간은 박포의 일을 잘 알았다. 아들 맹종과 의논한 후에 박포를 생각해낸 것이다. 회안군 방간은 박포를 집으로 찾았다. 이날 마침 날씨가 좋지 아니했다. 진눈깨비와 비가 쏟아졌다. 방간이 박포의 집을 찾으니 마침 박포는 집에 있다가 회안군 방간이 찾아왔다는 상노의 기별을 듣고 부리나케 사랑으로 나가 방간을 맞이했다.
"나리, 일기 불순한데 누추한 곳을 어찌 찾으셨습니까?"
"나는 왜 박지사 대감을 못찾으라는 법이 있소. 이 앞으로 지나가는데 뜻밖에 우박과 진눈깨비가 쏟아지는구려. 과문불입할 수도 없고 눈비도 피할 겸 대감을 찾았소이다."
"고맙소이다. 소인을 잊지 아니하시고 찾아주시니 누옥에 영광이올시다."
박포는 마음으로 기뻤다. 방간이 비록 실권을 잡지 못한 왕자라 하나 태조의 아들이요, 정종의 아우요, 정안군의 형님이다. 자기 집까지 찾아온 것은 한평생의 영예였다. 안에 기별해서 급히 술상을 내오게 했다. 두 사람은 술을 서로 권하면서 막혔던 정회를 풀었다. 두 사람은 술이 대여섯 순배 돌아 거나하게 취기가 돌았다. 옆에는 장기판이 놓여 있었다. 박포는 장기판을 당기어 두기를 청했다. 두 사람은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방간은 힐끗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겨울에 우박과 비가 오니 참 괴상한 일기로군. 눈 올 때는 눈이 내려야 하고, 비 올 때는 비가 와야지, 온종일 진눈깨비가 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방간은 장기 말판을 옮기면서 탄식조로 말했다. 박포도 장기를 두면서 대거리해 대답한다.
"겨울에 비가 많이 오면 난리가 난다는데---"
"그런 말이 어디 적혀 있나?"
"병서에 적혀 있습니다."
이때 여우볕이 반짝하며 밝은 빛을 뿜었다. 하늘 한복판에 광채가 찬란했다.
"저기, 햇무리를 하지 아니했나. 광채가 지나치도록 찬란하이그려..."
"어허, 하늘에 요기가 떴습니다. 나리, 몸조심을 하십시오!"
박포는 장기를 두다가 하늘의 햇무리를 바라보고 방간에게 요사한 기운이 떴으니 몸조심을 하라고 권했다.
"어떻게 몸조심을 하면 되겠소?"
방간은 두던 장기판을 쓸며 박포에게 물었다.
"군사에 일체 관여하지 마시고 몸을 삼가시어 사람을 대하지 마십쇼. 이것이 요기를 피하는 방책이올시다."
"집 안에 푹 파묻혀 있으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문을 닫고 일체 사람과 대하지 마식도 들어앉아 계십쇼."
박포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날 보고 반병신이 되라는 말이로구려!"
"왜 반병신이 됩니까. 그렇지 아니합니다. 옛날의 지혜 있는 왕자들은 집 안에 들어앉아서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면서 한일월을 보냈습니다. 어찌 이런 지각 있는 사람들을 반병신이라 하겠습니까. 이것이 성명을 보존하는 방법이올시다. 나리께서도 그런 행동을 본뜨십시오."
박포는 일부러 방간의 마음을 더듬어보았다. 방간은 얼굴빛을 고치며 말한다.
"사내자식이 할 일이 아니오. 죽치고 방구석에만 들어앉아 있다니 말이 되는
소리요? 나는 우리 아버님의 호방한 기상을 닮아서 도저히 집 안 속에만 들어박혀 있을 수는 없소이다. 다음에 처세할 좋은 방도가 있다면 가르쳐주시오."
방간의 말을 듣자 박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다른 방책은 없습니다. 그저 보성명을 하시는 것이 제일 좋은 방도올시다."
박포는 여전히 보성명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방간의 마음을 다시 한번 떠보았다.
"나의 큰형님 진안대군모양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다가 그대로 죽으란 말씀이요. 나는 못 하겠소."
방간은 뱉듯이 대답했다. 박포는 대강 방간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리께서는 큰일을 해보고 싶은 모양이십니다. 포부를 말씀해보시오."
"세상일이 썩어빠져서 보기가 싫소. 한 번 반정을 일으키고 싶소."
방간은 대담하게 실정을 토로했다.
"지금 정안군의 군사는 제이혁명을 주도한 뒤에 군사는 막막강병이요, 범 같은 장수는 별같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리의 군사는 약하고 장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도성 안에 계시다가는 제이, 제삼의 방석의 신세가 될 것입니다. 마치 위태롭기 독 안의 쥐가 되기 십상팔구입니다."
박포의 말을 듣는 방간은 화를 벌컥 냈다.
"그러니 어찌하면 좋단 말씀요. 방책을 이야기해주시오."
"먼저 선수를 쳐서 성중에 있는 군사들을 폐배시켜야 합니다. 출기불의로 정안군의 군사를 엎어버려야 합니다."
방간은 박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오늘 그대를 찾아온 것은 이 말을 듣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오. 만약 일이 성공된다면 그대에게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의 자리를 주리다."
박포는 방간의 말을 듣자, 얼굴에 혼연한 기쁜 빛을 띠었다.
"감사하오이다."
방간은 박포의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밀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을 차려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소?"
박포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한양에 있는 정안군을 송도로 청하십시오. 상왕 전하와 왕 전하께서 계시니 문안을 와야 자손의 도리가 아니냐고 꾸지람 비슷하게 전인을 보내십시오. 그리하신다면 정안군은 아니 올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정안군이 송도로 온 후에 나리께서 사냥을 가자고 유인하십시오. 정안군은 반드시 응낙을 할 것입니다. 이때 나리께서는 자제분인 맹종을 동행하십쇼. 맹종은 할아버님 상왕 전하를 닮아서 기상이 늠름하고 힘이 셀 뿐 아니라 활 잘 쏘는 명궁이올시다. 정안군을 산속으로 유인해 들어갔다가 출기불의 정안군의 군사를 습격하면서 자제는 활을 당기어 정안군을 쏜다면, 백발백중하는 자제 맹종의 솜씨에 정안군은 세상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때 가서 나리께서는 상왕 전하게 사유를 밝혀 아뢰십시오. 상왕 전하께서도 꾸지람을 내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같이 된다면 다음번 세자는 나리가 되시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소인의 계획이? 하하하."
박포는 방간을 바라보고 소리 높여 웃었다. 자기의 계획이 묘한 것을 자랑했다. 방간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렇다면, 지사의 말씀대로 실행하겠소. 뒤에서 밀어주시오."
"화산군 장사길이란 사람도 논공행상이 불공평하게 되었다고 불평이 자자합니다. 소인은 이 사람한테도 귀띔을 해주어서 사냥하시는 날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지사 대감만 믿소."
방간은 박포의 손을 굳게 잡은 후에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정안군 방원은 방간의 태도에 의심을 품었다. 반드시 어떠한 반란을 일으키리라고 생각했다. 부랴사랴 정부요인과 삼군부 군사를 거느리고 송도로 향했다. 백성들한테는 임금이 송도에 계시어 모든 서류의 재가를 맡기에 불편하므로 하는 수 없이 송도로 천도를 한다고 표방했다. 방간은 정안군을 송도로 유치하기 전에 정안군이 제 발로 송도로 오는 것을 보자 하늘이 주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사냥을 나간다고 선포한 후에 사람을 보내서 정안군을 청했다.
"오래간만에 대면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다. 마침 사냥을 나가는 길이다. 오래간만에 형제가 사냥을 하면서 하루를 즐기기로 하자."
이같이 전갈을 했다. 정안군은 방간의 사람을 향하여 쾌하게 허락했다.
"오랫동안 적조했던 형제의 정을 풀면서 사냥하며 즐기겠습니다. 부르시는 시각에 어김없이 나가겠습니다."
정안군은 방간의 사람을 돌려보낸 후에 곰곰 생각해보았다. 마음이 불안했다. 사내답게 쾌하게 허락했으나 의심스럽기 한량없었다. 형제지간에 적조했던 회포를 풀려면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이 많이 있을 터인데 하필 사냥인가 하고, 의심이 더럭 났다. 그렇지 아니해도 방간은 바로 자기의 웃형님이다. 둘째 형님 왕 전하처럼 마음이 단아하지 아니하고 자기 비슷하게 우락부락하고 걸걸직한 성격을 가졌다. 정안군 방원은 방간이 자기한테 항상 공을 뺏겨서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싫어할 뿐이 아니었다. 공공연한 좌자석에서 자기를 비판하기가 일쑤였다.
"정포은 같은 이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숭배하는 인물이다. 아버지께서도 숭배하는 인물인데, 공연히 폭력으로 죽여서 백대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방원이란 놈은 참말 무도한 놈이다. 방석으로 세자를 책봉한 일이 다소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어찌 차마 동생을 죽인단 말인가. 더구나 방번은 아무 까닭이 없이 계모 소생이란 한 가지로 죽였으니 몰인정한 놈이다. 방원이는 권력을 잡는 데만 눈이 뒤집혀서 눈에 부모도 없고 형제도 보이지 아니하니, 이런 자가 만약 임금의 자리에 앉는다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방간은 이같이 방원을 여러 사람 앞에 비판을 내렸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번 송도로 환도한 후에도 방간은 방원을 비판했다.
"상감게서 송도로 환도하시고, 상왕 전하께서도 송도로 오시는데, 제가 무엇이기에 한양에 만조백관들을 거느리고 앉아 있느냐 말이다. 괘씸하기 짝이 없다. 이러다가는 넉넉히 아비와 임금을 쫓아내고 넉넉히 임금 노릇을 할 위인이다."
이런 소리는 나는 듯이 정안군의 귀로 들어갔다. 정안군은 마음속으로 이가 갈리도록 미워했다. 곧 없애버릴 생각이 때때로 일어났다. 그러나 동복형까지 죽였다는 말이 두려워서 감히 손을 못댔던 것이다. 이같이 미워했던 방간이 송도로 내려온 지 며칠이 못 되어서 별안간 사냥을 가자고 청하니 의심이 더럭 났다. 가겠다고 쾌하게 대답은 해놓고도 마음이 불안해서 번민하고 있을 때 밖에서 상노가 들어왔다.
"의안군께서 왕림하셨습니다."
방원은 상노의 말을 듣고, 벌떡 자리에 일어나 뜰 아래로 내려섰다. 의안군 이화가 의젓이 걸어 들어왔다.
"숙부, 어떻게 행차하셨습니까."
방원은 공손히 이화를 맞이했다.
"네가 한양에서 왔다기에 좀 만나러 왔다."
"제가 오늘쯤 가뵈오려 했더니 이같이 왕림해주시니 황공무지합니다."
"일이 좀 급해서 찾아온 길이다."
이화는 간단히 대답하고 마루 위로 올랐다. 의안군 이화는 상왕 이성계의 서동생이었다. 정안군은 의안군 이화를 따라 당에 올랐다.
"조용히 좀 할 말이 있어."
이화는 소리를 낮추었다. 정안군은 사람들을 멀리한 후에 의안군을 방으로 청했다.
"무슨 분부할 말씀이 계시오니까?"
"방간이 너를 청하지 않더냐?"
"네, 사냥을 하면서 오래 막혔던 형제의 회포를 풀자 하옵니다."
"그래서 무어라고 대답해 보냈느냐?"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허락을 하지 아니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화는 쓴 입맛을 다시었다.
"상관없습니다."
"그래두."
"왜 무슨 의심스런 일이 있습니까?"
"내가 소문을 들으니, 박포하고 부동이 되어서 사냥을 핑계하고 너를 해치려 한다는 믿을 만한 소식을 들었기에 뚱겨주는 것이다. 몸조심을 해서 아니 나가는 것이 좋겠다."
"기왕 허락했는데 아니 나갈 수는 없습니다."
"방간이가 네 무예를 당해낼 수는 없겠지. 그러나 맹종은 효용이 절륜한 데다가 활 쏘는 솜씨가 상왕 전하를 닮아서 백발백중이란 말이다. 아들 맹종이가 사냥에 참예해서 나온다 하니 더욱 걱정이 된단 말이다. 좌우간 이편에서 먼저 선손을 걸어서 박포를 잡아 가두고 출기불의로 방간을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일 줄 안다. 천하 일을 하는 사람은 소소한 집안 일을 생각하고 돌아 보아서는 아니 된다. 모두 다 큰일을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거든. 먼저 손을 대서 없이해버리는 것이 제일 상책이다."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마는, 어찌 차마 형한테 손을 대겠습니까. 그저 하늘 뜻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방석이 때와는 아주 다르구나."
"그야 그럴 것 아닙니까. 방간은 동복형이올시다."
"좌우간 조심해라."
이화는 사냥놀이를 꾸미는 것이 뜻이 있다고 귀띔해주고 돌아갔다. 의안군이 막 돌아갔을 때, 정안군의 집에는 또 두 사람의 손이 찾아왔다. 방원의 상노가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이내와 우홍부가 왔다고 여쭈어라."
상노는 곧 정안군에게 고했다. 방원은 신을 거꾸로 신고 중문까지 나가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분이 어떻게 이같이 누지에 왕림하셨습니까?"
원래 이내는 방간의 처조카요, 우홍부는 고려조 때부터 이름 높은 선비 우현보의 아들이다. 좀처럼 방원을 찾지 않던 사람이 찾아왔으니 정안군은 까닭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마당에 내려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정안군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이내와 우홍부를 향하여 말한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고명하신 두 분게서 웬일이십니까? 집에 광채가 납니다."
정안군은 차를 내어 두 사람을 관대한다.
"어찌해 오셨습니까?"
"정안군께서 한양에서 돌아오셨다기에 인사도 여쭐 겸 뵈우러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원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두 사람을 접대했다.
"잠깐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내가 말을 꺼냈다.
"예, 말씀해주십시오."
방원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일간 사냥을 하러 나가신다죠?"
이내가 또 물었다.
"예, 가형께서 그믐날 사냥을 나가자고 하십니다."
"나가지 마십쇼."
이번에 우현보의 아들 우홍부가 말했다.
"왜요?"
정안군은 일부러 얼굴빛을 정색하고 물었다.
"회안군은 저의 고모부올시다마는 좋지 아니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사냥을 핑계하고 나리를 해치려 합니다. 절대로 나가지 마십쇼."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방원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다.
"회안군이 저한테 마음을 털어놓고 말씀했을 뿐 아니라 회안군이 저의 스승이요, 여기 앉은 홍부의 아버님게서도 도와달라 했다 합니다. 그래서 우선생께서는 이 말씀을 나리께 전하라 하였으므로 함께 온 길입니다."
옆에 있던 우현보의아들 홍부가 말한다.
"사실이올시다. 집의 가친께서는 사람의 상을 잘 보십니다. 방간이 아무리 큰 뜻을 품었다 하나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면서 대신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라 해서 찾아온 길이올시다. 몸조심을 합시오."
두 사람은 이같이 밀고하고 돌아갔다. 방원은 이내와 우홍부가 돌아간 후에 급히 이숙번과 하윤을 청했다.
"의안군이 다녀가시고 방가느이 초저카 이내와 우현보 선생의 자제 홍부가 찾아왔는데 모두 다 여출일구로 방간이 사냥을 빙자하고 나를 해치려 한다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방원은 하윤과 이숙번에게 물었다.
"병을 칭탁하고 사냥을 나가지 마십시오."
하윤이 대답했다.
"천만에, 악은 단번에 제거시켜야 합니다. 먼저 이편에서 손을 대서 방간을 방석, 방번처럼 처치해버려야 합니다."
이숙번이 대답했다.
"내 차마 어찌 형님을 처치해버리겠소."
방원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우선 동정을 보기 위하여 모든 군사를 배치해논 후에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아니하는 것이 제일 상책이올시다."
정안군 방원은 이숙번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감은 삼군부 군사를 통솔하여 대기해 있게 하오!"
이숙번은 정안군의 분부를 받들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삼군부 군사를 총동원하여 송도 가랫골에 있는 정안군의 집 뒤에 매복하고 있었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때는 정원 그믐날 아침이었다. 정안군 방원은 방간하ㄴ 사람을 보냈다.
"오늘 사냥을 나가려 했더니 밤 사이 병이 나서 나가지 못하겠습니다. 다음날 기회를 정하고 나가기로 하겠습니다."
방간은 방원의 전갈을 듣고 크게 노했다.
"오래간만에 형제가 적조한 회포를 풀기 위하여 사냥을 하자 했는데, 뜻밖에 큰 병이 나서 못가겠다 하니 문병을 가야 하겠다!"
방간은 말을 마치자 아들 맹종을 불러 분부했다.
"사냥하러 나가기로 준비해논 군사들을 한 사람 빠짐 없이 거느리고 가랫골 너의 숙부 집으로 가 있으라. 병이 났다 하니 문병을 갈 작정이다."
방간의 아들 맹종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렸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효용이 절륜한 맹종이었다. 이번 사냥에 방원을 죽이기만 하면, 아버지는 왕의 자리에 오를 것이 분명하고, 아버지가 왕이 된다면 다음대의 임금은 자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용맹과 탐욕이 가슴 속에 가득한 맹종은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렸다. 갑옷 입고 투구 쓰고 장팔사모창을 손에 쥐고 마상에 높이 앉아 사병들을 지휘하여 가랫골 정안군의 집으로 향해 나갔다. 회안군 방간도 갑주투구로 몸을 뜬뜬하게 한 후에 손에 긴 칼 들고 말 위에 선뜻 올랐다. 등에는 흰 새깃을 단 화살을 전통에 꽂아 메고 허리에는 화궁을 찼다. 기상이 늠름했다. 말을 달려 아들 맹종의 뒤를 따랐다. 송도에 있는 백성들의 눈이 둥그레졌다.
"웬일인가, 병정이 쏟아져 나가니?"
"앞에 나가는 장수는 방간의 큰아들 맹종이고 뒤에 말 타고 나가는 장수는 상감의 동생 방간일세. 아마 사냥을 나가는 모양일세."
"사냥을 나간다면 천가산 같은 산으로 갈 것이지. 왜 가랫골로 간단 말인가. 가랫골에는 그의 아우 방원의 집이 있네. 수상한 일일세."
"글세, 또 형제 싸움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원래 백성들은 이씨네 왕가의 불목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다시 형제간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나 의심하고 있었다. 이때, 의안군 이화, 완산군 이천우는 방간의 일을 알고 급히 가랫골 정안군의 집을 찾았다.
"일이 급하니 방원은 빨리 갑옷투구로 무장을 하고 쳐들어오는 맹종과 방간의 예봉을 막아야 한다."
숙부 이화의 말을 듣고 정안군 방원은 별안간 목을 놓아 통곡을 한다. 대담 없이 우는 것을 보자, 이화는 답답했다. 다시 말을 계속한다.
"어서 무장을 차리고 방간의 군사를 막으라!"
정안군은 울면서 대답한다.
"형제가 또다시 칼을 겨누어 피를 흘려 싸운다면 무슨 낯짝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합니까?"
"세상 사람을 대하는 것은 나중 일이고 그대로 앉아 있으면 죽게 되는 것을 그래, 가만히 앉아서 죽는단 말인가?"
이화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나라의 종친인 완산군 이천우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우겨댄다. 이때 정안군의 아내 민씨부인이 안에서 뛰어나왔다. 손에는 갑주투구를 들었다.
"나리, 주저하실 때가 아닙니다. 넷째 나리께서는 맹종이를 데리시고, 가랫골 우리 집으로 군사를 몰아 쳐들어온다 합니다. 앉아서 돌아가시렵니까? 형제의 의리와 숙질간의 체면도 다 없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개죽음을 하시렵니까? 어서 갑옷투구를 입으십시오."
정안군은 하는 수 없었다. 아내가 입혀주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다. 아내 민씨는 정안군에게 갑옷을 입힌 후에 급히 마당 가에 있는 고문을 열었다. 곳간 안에는 무기가 가득했다.
"불우의 변을 막기 위하여 첩이 준비해두었던 무기올시다. 마음에 맞는 무기를 골라잡으십시오."
곳간 안에는 날카로운 무기가 적여구산으로 쌓여 있었다. 짧은 칼이며, 장창과 활이 가득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아하, 어느 틈에 이같이 준비가 되었소!"
정안군은 감탄하면서 마음속으로 아내의 내조에 흐뭇했다. 한 손에는 장창을 골라잡고 한 손에는 철퇴를 들었다. 정안군은 이숙번을 불렀다.
"삼군부 군사한테 고 안에 있는 무기를 모조리 나누어주시오."
이숙번은 아장에게 영을 내려 민씨가 준비해놓은 무기를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장창을 비껴들고 철퇴를 들어 마상에 높이 앉은 정안군은 큰 소리로 영을 내렸다.
"도성 안으로 군사를 거느려 나간다면 출병하는 까닭을 밝혀야 할 것이다. 상감께 이 연유를 아뢰지 아니할 수 없다. 조관중에 누가 대궐로 들어가서 나를 대신하여 출병하는 까닭을 아뢰어줄 사람은 없는가?"
뜰에 가득히 모인 사람 속에서 한 사람이 나와 고한다.
"소인이 대궐로 들어가서 나리의 출병하시는 이유를 아뢰겠습니다."
모두들 보니 예조전서 신극례란 사람이었다. 정안군은 얼굴에 기쁜 빛이 가득했다.
"그러면 신전서는 나를 대신하여 전하께 나의 출병하는 이유를 아뢰어달라."
정안군은 말을 마치자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이무 등과 함께 집 뒤에 매복했던 삼군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랫골 큰길로 나갔다. 한편 예조전서 신극례는 급히 송도 대궐로 들어가 정종대왕께 뵙기를 청했다. 정종은 정전으로 신극례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느냐?"
"급히 아뢸 일이 있사와 탑전에 고합니다."
"무슨 일이냐?"
"회안군 방간이 정안군 방원에게 사냥을 나가자 하므로 병이 있어 나가지 못하고 사유를 연통했더니, 회안군은 아들 맹종과 함께 군사를 거느려 가랫골로 쳐들어와서 정안군을 해치려 합니다. 의안군과 완산군이 급히 소식을 듣고, 정안군은 찾아와서 방간의 군사를 막으라 했으나, 정안군은 형제가 어떻게 차마 칼을 겨누겠느냐고 여러 차래 거절했다가 일이 급하니 하는 수 없어 지금 가랫골 큰길로 출병했습니다. 감히 아뢰옵니다."
정종대왕은 깜짝 놀랐다. 마음속으로 정안군 방원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놈이 또 오늘 평지풍파를 일으키는구나!'
'세자 방석은 세자인 까닭에 죽여버린 것이지만 방간은 무슨 까닭에 죽이려 하는가.'
마음이 자못 좋지 아니했다.
'방원이는 너무나 욕심이 과하단 말이다!'
정종대왕은 용안이 좋지 아니했다. 아무 대답도 없이 입맛만 쩍쩍 다시고 있을 때 어전 내시가 들어왔다.
"회안군 방간이 상장군 오용권을 보내서 일을 아뢰옵니다."
"들라 해라."
이윽고 오용권이 군복을 갖추고 어전에 엎드려 아뢴다.
"회안군을 대신하여 아뢰옵니다. 정안군은 위로 상왕과 상감을 모시고 있는 신하이면서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정권과 병권을 잡아서 천하를 농락하옵니다. 형제를 죽이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지 아니하니 진실로 난신적자올시다. 분함을 참을 수 없어 군사를 거느려 토멸하려 합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통촉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정종은 비로소 방원이 신극례를 보내서 아뢴 일이 거짓이 아닌 것을 알았다. 정종은 방간을 대신하여 아뢰는 상장군 오용권의 말을 듣자,
"물러들 가거라."
영을 내린 후에 곧 도승지 이문화를 불러서 영을 내렸다.
"너는 빨리 회안군 방간에게 나가서 나의 칙유를 전하라. 나라에는 국법이 엄연히 있다. 정안군 방원이 잘못함이 있다면 여론에 따라서 임금인 내가 처결할 것이다. 사사로이 방간이 군사를 거느려 처단할 일이 아니다. 빨리 군사를 거느려 집으로 돌아가라, 이같이 전하라."
도승지 이문화는 어명을 듣고 급히 말을 달려 회안군을 찾았다. 회안군 방간은 군사를 거느려 선죽교 앞으로 나오다가 왕의 칙사를 만났다. 말 아래 내려 고유를 받았다. 방간은 고유를 읽자 불끈 노했다.
"'이런 놈은 죽여야 합니다'고 돌아가 아뢰오."
말을 마치자 방간은 군사를 지휘하여 앞으로 나갔다. 방간은 임금인 형님 정종의 명령도 듣지 아니하고, 사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거리로 나가 진을 쳤다. 이때, 방간의 선봉대장은 그의 아들 맹종이요, 중군은 민원공과 이성기요, 후군대장은 상장군 오용권이었다. 방간은 친히 삼군을 통솔해서 의기가 자못 헌앙했다. 한편, 정안군 방원은 셋째 형님 방의한테 형제가 싸우게 된 내력을 통고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방의는 얌전한 인물이지만 만약에 방간의 편이 된다면 큰일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사람을 보내서 군사를 아니 일으킬 수 없는 사실을 연통했다. 방의는 원체 성격이 안존한 사람이었다. 누구 편을 들기 어려웠다. 대문을 닫아걸고 움직이지 아니했다. 방원은 방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이숙번, 민무구가 거느린 군사와 합세하여 내성인 동대문을 닫게 한 후에 선죽교로 돌격해 나가서 방간의 선봉인 맹종과 맞서게 되었다. 맹종은 효용이 절륜했다.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탔다. 더욱이 창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맹종은 갑옷 입고 투구 쓰고, 등에는 화살을 꽂은 전통을 메고 바른 손에는 장창을 잡고 왼손에는 활을 들었다. 위풍 늠름하게 구레나룻을 바람에 흩날리고 방원의 대장 민무구를 꾸짖는다.
"너는 민무구란 자가 아니냐. 너의 매부를 바른 사람이 되도록 충성스럽게 간하지 못할망정 어느 때나 악한 사람의 앞잡이가 되어 형제를 죽이고 부자의 정을 상하게하여 삼강오륜이 끊어지게 했으니 네 죄상은 하늘에 가득하다. 너의 목을 베어 의기가 아직 남았다는 것을 천하에 밝히고 방번 숙부와 방석 세자의 원한을 풀어주리라."
말을 마치자 맹종은 장창을 비껴들고 민무구한테로 달려들었다. 정안군의 처남인 민무구는 맹종의 호통 소리에 격분했다.
"세자 방석은 정도전과 부동하여 정안군을 해치려 하니, 정안군께서 정도전을 멸한 것이요, 왕명으로 세자를 폐한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보고 불의불충했다 하느냐."
"네 이놈, 잔말을 하지 말라. 지존 지척지지에 들어가서 칼을 휘두르고 세자를 내놓으라고 고함친 놈들은 어떤 놈들이냐, 세자의 몸을 막는 공주의 남편 부마 이제를 어전에서 목을 베어 피가 용상에까지 튀게 한 놈들은 어떤 놈이냐. 잔소리 말고 내 창을 받아라."
말을 마친 맹종은 말을 채쳐 민무구 앞으로 달려들었다. 사모창 날카로운 창끝이 햇빛에 반사되어 싸늘한 백금빛을 뿜으며 민무구의 명치를 향하여 찔렀다. 민무구는 깜짝 놀라 몸을 피했다. 맹종의 찌르는 날카로운 창끝은 민무구가 타고 있는 오추마의 허벅다리를 찔렀다. 말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민무구는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너부죽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맹종은 다시 창을 들어 번개같이 민무구를 찌르려 했다. 순간 방원의 진에서 일원 대장이 비호같이 말을 달려 뛰어나왔다. 청룡도를 번쩍 들어 민무구를 찌르는 날카로운 창끝은 민무구가 타고 있는 오추마의 허벅다리를 찔렀다. 말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민무구는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넙죽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맹종은 다시 창을 들어 번개같이 민무구를 찌르려 했다. 순간 방원의 진에서 일원 대장이 비호같이 말을 달려 뛰어나왔다. 청룡도를 번쩍 들어 민무구를 향해 찌르는 맹종의 사모창을 후려쳐 떨어뜨렸다. 방원의 군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민무구를 구원해 달아났다. 맹종의 바라보니 청룡도를 휘두르고 달려온 일원 대장은 이무란 정안군의 부하다. 맹종은 크게 노했다. 맹종은 말을 달려 사모창을 주워들고 꾸짖는다.
"이놈, 너는 이무로구나. 사람의 인두겁을 쓰고 못된 짓을 하는 불의의 인간을 도와주는 놈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이같이 불의의 인간들을 모조리 응징할 테다."
맹종은 말을 마치자 사모창을 꼬나들고 이무한테로 덤벼들었다. 이무는 아까 청룡도로 맹종의 창을 갈겨서 민무구를 구했으나, 원래 맹종의 적수는 아니었다. 교전 수십 합에 이무는 팔심이 떨어져ㅆ. 칼 쓰는 방수가 어지러워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무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난다. 맹종은 일변 말을 달려 이무를 쫓으면서, 일변 활을 꺼내서 가득히 당겼다. 화살은 허공을 끊어 날았다. 보기 좋게 이무의 어깻죽지를 맞혔다. 이무는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가로 떨어졌다. 방원의 진에서는 깜짝 놀랐다. 급히 군사들을 보내서 이무를 구해 돌아갔다. 방원의 장수들이 두 번씩이나 실패하는 것을 본 맹종의 군사들은 기고만장이 되었다. 고함을 치면서 방원의 진을 향하여 몰려들었다. 방원의 군사들은 몰려드는 방간의 군사들을 향하여 어지럽게 화살을 쏘았다. 방간의 편에서는 선봉대장 맹종을 위시하여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방원의 진으로 물밀 듯 몰려들었다. 고함치는 소리와 북소리 징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살과 돌은 비오듯 쏟아졌다. 원래 방간의 군사들은 공격하는 선수를 잡았다. 군사 수효는 적었으나 방원의 군사를 무찔러 들어갔다. 방원의 군사는 쓰러지고 자빠져서 죽고 상하는 군사가 부지기수였다. 중군에 서서 군사를 지휘하던 정안군 방원은 자기편의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자 급히 전령을 내려 조영규를 불렀다.
"정몽주를 때려 눕히던 솜씨로 맹종의 머리를 철퇴로 갈기라. 맹종만 죽어 없어지면 방간의 군사는 개미떼처럼 흩어져 달아날 것이다."
정안군은 맹종의 숙부이건만 맹종을 철퇴로 갈기라 했다. 이때 이숙번이 앞으로 급히 나왔다. 정안군에게 고한다.
"정몽주는 일개 문관이올시다.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까닭에 조영규가 철퇴로 갈겨서 단번에 목숨을 빼앗았습니다마는 맹종은 효용이 절륜한 천하장사올시다. 도저히 정면에서는 철퇴를 쓸 수 없습니다. 후면에서 속임수로 철퇴를 쓰지 아니하면 맹종을 요정짓지 못할 것입니다."
정안군은 이숙번의 말을 듣자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곧 이숙번과 조영규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이숙번 장군과 조영규는 빨리 출전하여 낭패가 없도록 맹종을 사로잡으라!"
정안군의 영이 떨어지니 이숙번은 한편 손에 장창을 비껴들고, 한편 손에 방패를 들었다. 선뜻 황다리 누른 말 위에 올라 앞으로 달렸다. 이숙번의 나가는 것을 보자 조영규는 삼십 근 쌍철퇴를 홍포 자락 속에 감추고 흑다리 검은 말을 타고 이숙번의 뒤를 쫓았다. 방원의 군사들은 일등명장 이숙번이 출전하는 모습을 보자 환성이 우뢰같이 일어났다. 사기가 와짝 솟구쳤다. 한편 군사를 거느려 적진으로 돌격해 쳐들어오던 맹종은 이숙번이 갑옷투구로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나오는 것을 보자, 노기가 충천했다. 젊은 가슴에 염통이 터질 듯했다. 우뢰 같은 큰 소리로 이숙번을 꾸짖는다.
"이놈, 역적 이숙번아. 네 어찌 감히 상왕 전하와 왕 전하를 배반하고, 형제와 골육상쟁을 일삼는 정안군을 도와서 나라를 망케 하느냐. 단번에 목을 늘여 내 창을 받고 지옥으로 떨어져, 아귀 귀신이 되어라!"
이숙번도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를 높여 대답한다.
"그대는 왕손의 몸이다. 몸을 삼가서 국가를 태평세월이 되도록 하지 아니하고 어찌해서 숙부인 정안대군을 해치려 하느냐. 정안대군이 아니었더면 어찌 이 나라가 창업이 되었겠는가? 이제 천하의 인심은 정안대군께로 완전히 돌아가고 있다. 빨리 군사를 물리치고 진머리에 항복해서 만고에 죄인이 되지 말라."
이숙번의 꾸짖는 말을 듣자 맹종은 더한층 분기가 충천했다. 장팔 사모창을 꼬나 들고 말을 달려 이숙번을 찌르려 덤벼들었다. 이숙번은 장창을 번쩍 들어 맹종의 창을 막았다. 창과 창의 부딪는 소리가 불을 뿜어 일어났다. 치고 찌르고 피하고 덤비고, 두 장수의 창 쓰는 법은 난형난제가 되어 백중을 가릴 수가 없었다. 두 편 진에서 서로들 손에 땀을 쥐어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것을 침을 삼켜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조영규는 싸우지 아니하고 슬며시슬며시 말을 달려 이숙번의 뒤로 돌았다. 눈을 날카롭게 뜨고 어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맹종이 장팔사모창을 번쩍 들어 이숙번의 허리를 찌르려 덤벼드는 찰나였다. 조영규는 홀연 말을 달려 맹종의 뒤로 돌았다. 홍포 자락 속에서 선뜻 쌍철퇴를 꺼냈다. 번쩍 들어 맹종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러나 맹종은 날쌔고 영특했다. 조영규의 철퇴가 뒤통수로 떨어지는 것을 직감했다. 흠칫 고개를 피하여 몸을 돌리자 한 손에 창을 잡아 이숙번을 막고 한 손으로 칼을 들어 철퇴를 든 조영규의 손 등을 내리쳤다.
"이놈, 조영규야. 누구를 치려 하느냐. 천하장사 맹종을 모르느냐."
큰소리로 호통을 칠 때, 별안간 시위 소리가 '왱'하고 바람을 끊어 일어나면서 화살 한 대가 맹종의 명치를 쏘아 맞혔다. 급소에 살을 맞은 맹종은 피를 쏟으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뜻밖이었다. 모든 군사들은 조영규와 이숙번이 맹종의 손에 죽는 줄 알았는데, 별안간 날아오는 화살 한 대는 맹종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와' 하고 군사들이 몰려들었다. 급히 맹종을 묶으려 할 때 맹종의 목숨은 이미 끊어지고 말았다. 화살을 맹종한테 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정안군 방원이었다. 방원은 이숙번과 조영규를 보내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했다. 친히 진머리에서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숙번과 맹종의 창 쓰는 솜씨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숙번의 창은 능란했으면서도 젊은 맹종의 창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방원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이번에 이숙번이 지기만 하면 완전히 자기편 대세는 기울어지고 마는 것이다. 큰일이었다.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 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세자의 자리도 앞으로 방간한테 뺏기고, 자기는 세자 방석을 죽이고, 방번을 죽이고, 매부 이제를 죽이고, 정도전, 남은 등을 처치한 일들이 모두 다 헛일이 되고야 만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도와서 고려 왕실을 엎어놓고 최영을 죽이고 정몽주를 철퇴로 때려죽였던 모든 일이 다 한 줌 흩어지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은 오히려 둘째다. 자기는 목숨을 끊어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대로 떠나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다. 처자가 다 몰살되고, 형제를 죽인 만고의 죄인이 되어, 죽어도 고개를 들 수 없는 강상의 죄인이 되고 만다.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곧 조카인 맹종을 죽이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가슴이 설렌다. 마음이 괴로웠다. 방석을 죽이고 방번을 죽이고 이제를 죽이듯이 맹종을 죽여야만 자기는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맹종은 친조카다. 자식과 매일반이다. 몸에는 같은 혈맥이 뛰놀고 있다. 어떻게 차마 조카를 향하여 칼을 뽑아들 수 있는가. 그러나 맹종을 아니 죽이면 자기는 죽어야 한다. 방원은 마음이 도슬러 먹었다.
'조카자식과 형님은 지금 나를 향하여 칼을 겨누며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느냐.'
방원은 자기 자신을 격려했다. 방원은 더 한 번 마음을 도슬러 먹었다.
'내가 살기 위하여 나는 조카자식과 형을 대항해야 한다. 이리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와 있지 아니한가!'
정안군은 결심을 한 후에 활을 급히 당겨 살을 메겼다. 위급한 이숙번과 조영규를 구해주어야만 했다. 살을 메기고 있는 정안군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맹종은 조영규의 철퇴를 떨어뜨렸다. 큰일이었다. 정안군 방원은 바짝 활을 당겼다. 살은 바람을 끊어 허공으로 날다가 이내 맹종의 머리를 쏘아 맞힌 것이다. 맹종이 쓰러져 죽는 것을 보자 방원의 군사들은 조수 물밀 듯 방간의 군사한테로 몰려들었다. 이숙번은 장창을 꼬나 들고 조영규는 쌍철퇴를 휘둘러 방간의 군사를 두들겼다. 함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민무구, 민무질, 이무 등이 일제히 군사를 거느려 뒤를 쫓았다. 방간의 군사는 살에 맞아 쓰러지고 철퇴에 맞아 죽고 칼에 목이 떨어지고 창에 찔려 죽은 군사가 부지기수다. 방간의 장수 오용권, 민원공, 이성기는 목숨을 구하여 달아났다. 용맹이 과인한 맹종만 믿고 나섰던 방간은 아들 맹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쳐 통곡하다가 달아난다. 방간은 쫓기고 쫓겼다. 모련북동에서 필마단기로 송도 성균관 서동으로 들어가 경원 능터에서 갑옷을 벗고 활과 살을 버린 후에 농군의 복색을 차리고 숨어버렸다. 정안군 방원의 부하 권희달은 군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방간을 추격했다. 뒤에는 정안군 방원이 이숙번, 민무구, 조영규 등을 거느리고 쫓았다. 방간은 권희달한테 잡혀서 성균관 문밖 동봉 앞으로 끌려 나왔다. 정안군 방원은 방간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형님, 이거 웬일이시오?"
방간은 눈을 딱 부릅떴다.
"이놈! 나를 죽여라. 나는 너를 원망한다."
방간은 말을 마치자 눈을 딱 감아버린다. 정안군 방원은 이숙번을 시켜서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물었다.
"나으리, 어째서 군사를 일으키셨습니까?"
"너희놈들 불의로운 놈들을 죽여서 국법을 밝히려 한 것이다."
방간은 또 한 번 눈을 부릅떴다.
"누구하고 공모하셨습니까?"
"공모라니? 내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지, 누구와 공모를 했겠느냐! 나와 내 아들이 형제를 죽이고 불의의 짓을 감행해서 임금 노릇을 하려는 방원을 죽이려 한 것이다...."
방간을 말을 마치자 또 한 번 눈을 딱 부릅떴다.
"박포하고 공모하지 아니하셨습니까?"
"그것은 왜 묻느냐? 네가 알았으며 나한테 물을 까닭이 없지 아니하냐."
방간의 태도는 의연했다. 이숙번은 다시 묻는다.
"확실히 박포가 나리를 꼬드겨낸 것이 아닙니까?"
방간은 여전히 기걸찬 자세를 가졌다.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이숙번은 또 묻는다.
"또 다른 사람하고는 공모한 일이 없습니까?"
"모르겠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나를 죽일 테면 어서 빨리 죽여라!"
방간은 또 한 번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정안군 방원은 이숙번에게 눈짓을 했다. 이숙번은 정안군의 눈치를 알아차렸다. 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묶어라!"
군사들은 정안군의 형님인 회안군 방간을 꽁꽁 밧줄로 묶었다. 정안군은 의젓이 영을 내렸다.
"왕명을 기다려 처치하라!"
이숙번은 방간을 결박지어 묶어놓은 후에 정승 하윤은 통하여 위에 아뢰었다.
"회안군 방간은 무단히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난신적자를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사형에 처하여 국법을 밝히옵소서."
정종대왕은 하윤이 아뢰는 말을 듣자 용안이 참담했다.
"국법을 밝히겠다는 정승의 말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방간은 과인의 친동기간이 아닌가. 내 어찌 친동생을 차마 죽이겠소. 뿐만 아니라 방간은 정안군 방원의 형이 아닌가? 비록 허물이 있다 하나 형을 어찌 죽이겠소. 모든 일을 참작해서 방간은 황해도 토산 땅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이 좋겠소."
하윤은 더 우겨서 아뢸 수는 없었다. 정종대왕은 곧 도승지를 불렀다.
"방간이 난을 일으켜 민심을 소동시켰으니, 죄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지정을 생각해서 토산으로 귀양을 보내라고 정승에게 분부했다. 곧 금부에 영을 내려 집형케 하라."
밖에서 이 소문을 들은 이숙번 이하 정안군의 심복들은 불평이 대단했다. 그러나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금부도사는 왕명을 받들어 성균관 뒷산에 묶어놓은 방간을 압령하여 토산으로 향해 떠났다. 한편 이숙번 이하 정안군 방원의 직계 산하들은 방간이 토산으로 떠난 후에 다시 상소를 올려서 방간을 사형에 처할 것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정종대왕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극한투쟁을 하려는 이숙번의 무리는 세 번 네 번 상소를 올렸다. 정종대왕은 마침내 비답을 내렸다.
"과인은 모든 신하들을 대해 보기 심히 부끄럽다. 그러나 방간은 역적질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사사로운 집안싸움에 불과하다. 경들이 간여할 바가 아니다. 다시 더 시끄럽게 굴어서 과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
정종대왕은 이같이 정중한 대답을 내렸다. 이숙번 이하 모든 방원의 심복들은 불평이 대단했으나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왕세자로 삼아주소
이숙번 이하 모든 신하들은 꿩 대신 닭을 잡는 격으로 박포 이하 방간의 일당을 죽이자 했다. 정종대왕은 박포까지 두둔할 수는 없었다. 박포 이하 반란에 참가했던 장병들은 모두 다 죽음을 당했다. 방간의 사건이 끝난 후에 하윤과 이숙번은 제이대책을 강구했다. 정안군 방원으로 왕세자를 책봉해서 장차 국가의 대권을 잡게 하자는 배짱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정안군 내외의 지시를 받은 것이다. 정승 하윤과 대장군 이숙번은 대궐로 들어가 어전에 상소를 올렸다.
"나라에는 국본이 든든해야 합니다. 지금 왕세자의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적자가 없으신 중에 후궁 소생들은 모두 다 출가를 해서 승려가 되게 하셨습니다. 시급히 왕세자를 책봉하셔야 할 터이온데, 정안군 방원은 국가창립에 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영웅호걸의 풍도가 있어 앞으로 크게 국가의 위엄을 사해에 떨칠 분이라 생각합니다. 속히 왕세자로 책봉하신다는 윤음을 내리시기 바라오."
정종대왕은 상소를 받자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이제는 별수가 없게 되었다. 싫어도 방원으로 왕세자를 삼는 길밖에 없게 되었다. 방원은 앞으로 왕 노릇을 하기 위하여 세자 방석을 죽였고, 방번을 죽이고 이제를 죽였고, 다시 이번엔 친형인 방간과 조카 맹종과 싸워서 집안싸움이 끊어지지 아니했다. 다음 아우 방의는 원래 성정이 안존하고 착해서 이번 싸움에도 일부러 문을 닫고 참견을 하지 아니했다. 그에게 세자책봉을 하겠다 해도 받을 사람이 아니다. 이 틈서리에 자기 자신도 임금 노릇 하기가 싫어졌다. 다만 아버지 상왕 전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잠깐 권도로 임금의 자리를 맡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종대왕 자신은 아무 욕심이 없다. 욕심이 없는 까닭에 자기 아들을 모조리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하여 정치에 관여치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제는 방원을 빼놓고는 어떠한 다른 사람으로 왕세자를 책봉할 감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방원으로 왕세자를 봉한다면 상왕 전하는 결코 응낙하지 아니할 것이 분명하다. 큰 걱정이었다. 정종대왕이 한동안 망설이고 있을 때 왕후 김씨가 대전으로 들어와 상감께 조용히 뵈었다.
"그러한 북새와 난리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남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조신하게 아뢰었다. 정종대왕은 어질고 착하고 솔직했다. 왕후 김씨의 말을 듣자, 용안이 벌겋게 물들었다. 아무리 가까운 한 몸과 같은 왕비라 하나 집안일이 부끄럽기 한량없었다.
"후마마를 대해서 볼 낯이 없소. 왕비는 어떻게 아셨소?"
"제삼혁명이 일어나서 온 세상이 술렁대는 일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한심스런 일입니다."
왕후의 말씀을 듣자, 정종대왕은 한숨을 길게 짓고 대답이 없었다. 왕후 김씨는 다시 조용히 물었다.
"하윤과 이숙번이 또 무슨 상소를 올렸습니까?"
"방원으로 세자책봉 하라고 우겨대는구려."
"무어라고 하교를 내리셨습니까?"
"아직 아무러한 비답도 내리지 아니했소."
김왕후는 얼굴에 가득 시름하는 빛을 띠고 아뢴다.
"전하의 신변이 위태로우십니다. 곧 윤허를 내리사옵소서. 지금엔 세자가 될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정종대왕은 왕후의 말을 듣고 또다시 한숨을 짓고 말씀을 내린다.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오마는 아바마마께옵서 허락을 내리지 아니하실 테니, 어찌해야 좋을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소."
"아바마마께오서 허락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하오면 신첩이 경위껏 사리를 밝혀서 아뢰겠습니다. 먼저 전하께옵서 윗전에 오르시어 말씀을 아뢰어보옵소서. 만약 아니 들으시는 경우에는 신첩이 들어가서 아뢰겠습니다."
정종대왕은 왕후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용포와 익선관을 정제하고 상왕이 계신 윗전으로 들어갔다. 정종대왕은 상왕께 문안을 드린 후에 용안을 화하게 하여 상왕께 아뢴다.
"소자 삼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상왕은 항상 정종이 마음에 들었다. 용안에 미소를 풍기며 대답했다. 원래, 상왕은 내시를 통해서 방간과 방원이 싸워서 방간이 패하고, 방간의 아들 맹종이 죽은 것을 알았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요사이 와서 상왕은 방간을 극진히 사랑했다. 더구나 손자 맹종은 상왕이 가장 믿어오던 손자다. 방간의 패한 원인이 맹종이 죽은 데 있고, 맹종을 쏘아 죽인 사람이 방원인 것을 알자, 상왕은 더한층 방원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왕은 지금 분해서 치를 떠는 중이다. '무슨 말인가?' 하고 부드럽게 묻는 상왕의 말씀을 듣자, 정종대왕은 마음이 약간 놓였다.
"세자책봉을 할까 하와 아바마마의 높으신 뜻을 묻사옵니다."
"세자책봉을?"
상왕은 벌써 눈치를 챘다. 용안에 금방 불쾌한 빛이 떠돌았다. 뒤미처 묻는다.
"누구로 세자책봉을 하려 하는가?"
"세자책봉은 꼭 해야겠사온데 사람이 없습니다. 불가불 정안군 방원으로 세자책봉을 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습니다."
"무어야, 방원이 놈으로 세자를 삼는다? 그놈으로 세자를 삼았다가 장차 조선 삼천리강산을 패륜무도한 그놈한테 맡길 테란 말인가? 아니될 말야. 못해, 못해..."
상왕은 하늘이 얕다 하고 펄펄 뛰었다. 정종대왕은 음성을 나직이하여 상왕께 아뢴다.
"세자감이 없습니다."
정종대왕의 아뢰는 말씀을 듣는 상왕은 화경 같은 노안을 번쩍이며 대왕을 바라본다.
"세자감이 없어? 그 무슨 소리냐. 왜 네 아들 중에 똑똑하고 영특한 아이를 골라서 세자를 봉하면 그만 아니냐."
상왕은 화가 났다. 임금인 정종한테 해라를 해붙였다.
"불초 소자한테는 적자가 없사옵고 모두 다 서자뿐이올시다. 그뿐 아니오라, 자식들은 모두 다 중을 만들어서 절로 보냈습니다."
상왕은 화를 내서 대답한다.
"안다, 알아! 네가 방원이란 놈이 두렵고 무서워서 일부러 자식들을 중을 만들어 절로 보낸 일을 다 알고 있다. 왜 서자로는 세자를 못 만드느냐. 관계없다. 방원이 놈으로 세자를 봉할 수는 없다. 그놈은 아비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는 놈이다. 제 동생을 모조리 죽이는 이러한 놈으로 왕세자를 삼는단 말이냐. 너도 너무 우유부단해서 큰일 났다. 그러한 난륜의 자식으로 어찌 세자를 봉해서 장차 삼천리강산의 억조창생을 다스리게 할 수 있느냐. 웬만하면 나는 너로 임금을 삼지 아니하고 그 애로 임금을 삼을 것이 아니냐.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욕심만 채우려는 놈으로 어떻게 세자를 봉한단 말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서 눈망울이 꺼지기 전에는 절대로 세자는 못 봉한다!"
상왕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하고 높았다. 정종대왕은 다시 더 아뢸 도리가 없었다. 슬며시 뒤로 물러섰다. 허리를 굽혀 윗전에서 내전으로 돌아왔다. 하회를 기다리고 있던 왕후 김씨는 묵묵히 걸어 들어오는 상감의 표정을 살폈다. 상왕 전하의 허락을 못 받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음을 나직이 하여 대왕께 아뢴다.
"허락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까?"
"어떻게 노하시는지 말씀을 붙여볼 도리가 없었소."
"아바마마의 심경은 당연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는 수 있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신첩이 한 번 윗전으로 올라가 아뢰어보겠습니다."
왕후 김씨는 말을 마치자 천천히 상왕전으로 향했다. 상궁을 통하여 문안드릴 것을 청한 후에 윗전에 알현하여 아뢰었다. 상왕은 흔연히 며느리 되는 김씨를 대했다. 효심이 지극한 왕후였다. 상왕은 어진 며느리 김씨를 바라보자 용안에 화색이 가득했다.
"그동안 왕후는 별일 없었는가. 오늘 어찌해서 나를 찾았는가?"
"아바마마께 아뢸 일이 있사와 문안을 드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지극히 아뢰옵기 황송한 말씀을 아뢰옵니다."
"왕후는 무슨 말씀을 그리하나. 황송이라니 너무 겸손한 말이지. 말을 해보오."
상왕은 왕후의 대접을 해서 부드럽게 물었다.
"아바마마, 상감의 신변을 보호해주옵소서."
왕비 김씨는 목소리를 더한층 낮추어 간곡하게 아뢰었다. 상왕은 얼굴에 깜짝 놀라는 빛을 띠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상감의 신변을 보호해달라 하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먼. 혹시 말할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아바마마께서는 잘 모르십니다마는 이 나라의 군사권은 정안대군이 함빡 장악하고 있습니다. 정안군의 세자책봉을 윤허해주시지 아니한다면 상감의 신변이 극히 위태롭습니다. 이 점을 넓게 통촉해주시옵소서. 그리하와 감히 존엄하옵신 지척지지에 아뢰옵니다. 특히 상감의 신변을 생각하시와 정안대군에게 세자책봉 하는 일을 허락해주시옵소서. 간절하게 충정을 들어 아뢰옵니다."
이 나라의 군사권이 함빡 정안군한테 있다는 말을 들은 상왕은 비로소 황연히 왕후 김씨의 아뢰는 뜻을 짐작했다. 상왕 이성계는 고개를 숙여 묵묵히 대답이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방원은 방간마저 패하게 했으니 병권을 잡은 세력은 왕군 이상의 힘을 잡았다. 더구나 방원은 고래를 탈취한 이후 국가를 창업한 공으로 막대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 밑에는 여룡여호한 맹장과 모사들이 구름 모이듯 모여 있다. 그들은 모두 다 방원으로 왕세자를 봉하자고 우겨대고 있다. 왕세자로 만든 후에는 얼마 가지 아니해서 왕으로 밀어 올릴 것이 분명하다. 상왕 이성계는 어쩌다가 이같이 자기의 힘이 부족해졌나 하고 마음이 슬펐다.
"이제는 세자의 자리에 나갈 사람이 정안군을 빼놓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 형제가 또다시 칼을 겨누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조정과 왕실이 화한 기운을 가져서 백성들이 복을 누려 안락하게 지내도록 해주옵소서. 제발 또다시 변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상왕의 눈에서는 홀연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한숨을 길게 쉬었다. 마침내 한 마디 말씀을 내렸다.
"마음대로 하구려!"
상왕은 마침내 한 마디를 떨어뜨렸다.
"황송하고 감축하옵니다."
왕후 김씨는 시아버지 상왕께 절을 올린 후에 윗전에서 물러났다. 뜰 아래 대기하고 있던 중전 나인들은 왕후 김씨를 호위하여 대전으로 돌아갔다. 정종대왕은 왕후 김씨의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대전 뜰에서 상궁과 나인들의 도란거리는 소리를 듣고 왕후가 돌아오는 것을 알았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어수로 친히 창문을 열었다.
"왕후, 돌아오시오. 문안을 끝냈소?'
정종대왕은 반갑게 왕후를 맞이하며 왕후의 기색을 살폈다. 왕후는 미소를 지어 전 안으로 올랐다. 정종대왕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어찌 되었소, 말씀을 아뢰어 보았소?"
"처음엔 크게 노하셨습니다. 삼강오륜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어찌 왕세자를 책봉할 수 있느냐, 불덩이 같은 꾸지람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허락을 내리셨습니다."
정종대왕은 왕후 김씨의 아뢰는 말을 듣자 용안에 기쁜 빛을 띠었다.
"허락을 내리셨어?"
입이 딱 벌어졌다.
"철석간장으로 세자를 삼을 수는 없다고 괘를 가로 흔드셨습니다. 세자감이 없다고 아뢰었더니 왜 너희 아들 중에서 똑똑한 아이를 골라서 세자를 삼으라 하십디다. '절로 보냈습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불러들이면 된다고 꾸지람을 하셨습니다. 신첩은 하는 수 없어서 전하의 신변을 보호해줍시사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습니다. 형제가 다시는 칼을 겨누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줍시사고 아뢰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한숨을 쉬시며 마음대로 하라고 겨우 허락을 내리셨습니다."
"왕후마마! 과연 수고하였소."
정종대왕은 말을 마치자 눈물이 눈에 글썽거렸다.
"이제는 안심하시고 정안군으로 세자책봉 한다는 윤허를 내리옵소서. 신첩은 내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왕후 김씨는 고요히 미소를 띠며 내전으로 향했다. 정종은 만족했다. 곧 내시에게 도승지를 불러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윽고 김씨는 고요히 미소를 띠며 내전으로 향했다. 정종은 만족했다. 곧 내시에게 도승지를 불러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윽고 정원에서는 도승지가 어전에 들어와 부복했다.
"정안군에게 세자책봉의 대명을 내리게 하라."
도승지는 방원의 직계가 아니라 정종의 심복 신하였다.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우가 어찌 아드님이 될 수 있습니까? 왕세자를 봉하시지 못합니다."
"하라는 대로 하라. 잔말할 것이 없느니라."
정종은 엄숙한 얼굴빛을 짓는다.
"왕세제라고 책봉할 수는 있습니다마는 왕세자라고는 책봉할 수 없습니다. 욕이 됩니다."
"그대로, 소원하는 대로 하라니까 웬 잔소리냐."
"동생으로 아들을 삼는 것이 옳다는 말씀이옵니까. 세상 사람들이 웃을 것입니다."
"아따, 잔소리가 너무 많구나. 왕가의 법은 사삿집과 다르다. 그렇게 할 수도 있느니라."
승지는 환부역조를 해도 좋으냐고 우겨대려다가 아무리 왕의 심복이라 하나, 너무나 과한 듯해서 정원으로 물러 나왔다. 한동안 승지들은 갑론을박하다간 마침내 왕의 교서를 내렸다.
"정안군 방원은 국가에 크나큰 공로를 쌓아서 오늘날 나라가 창립되었다. 정몽주, 정도전의 난을 평정했으며 이번에 또 방간의 난을 안정시킨 것은 모두 다 정안군의 공이라 할 것이다. 정승의 말을 들어 정안군 방원으로 왕세자를 책봉한다. 따라서 안팎의 모든 군사를 도독하게 한다."
왕의 교서는 내렸다. 방간의 난을 평정한 후에 방원의 일파들은 질풍신뢰와 같이 왕에게 건의해서 꼼짝달싹할 도리가 없게 왕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한 것이다. 동생으로 어찌 왕세자를 삼겠느냐고 떠들어대던 공론은 쑥 들어가고 말았다. 왕세자라 해도 보통 왕세자가 아니다. 조선 천지의 병마권을 통솔하는 도독을 겸한 왕세자다. 정안군은 이름과 실력이 왕 이상의 권력을 잡은 왕세자가 되었다.
소원 성취
왕세자 책봉 예식은 어느 때보다도 더한층 정엄하고 엄숙하게 대궐에서 거행되었다. 정종이 대궐 정전에 임어한 아래 만조백관들이 차례대로 벌여 섰고, 새로 된 왕세자를 호위하기 위하여 삼군부의 의장병이 총출동되었다. 도독 내외 제 군사의 전권을 겸임한 때문이다. 정안군은 정종대왕의 어전에 나아가 재배를 올리고 왕이 친히 내리는 왕세자의 옥책과 면관 강포를 받았다. 내시와 공녀들은 정안군의 관복을 왕세자의 면관 강포로 바꾸어 입혔다. 왕세자가 된 정안군은 다시 어전에 나아가, 왕세자가 된 공식 배례를 드렸따. 뜰에 가득한 만조백관들은 일제히 천세를 높이 불러서 새로 왕세자가 된 정안군은 축복했다. 정안군은 이제부터 소원이 성취되어 왕세자가 되었다. 정안군은 어전에서 물러 나와 의장을 거느리고 한양에 있는 종묘로 향했다. 조상들한테 왕세자가 된 일을 고축할 겸, 병마권을 잡은 위엄을 천하에 포고해서 알리자는 것이다. 삼군부 군사들이 함빡 풀려서 왕세자를 호위하여 한양으로 나가니 기치 창검은 백 리에 뻗쳐서 햇빛을 가렸고 반대하는 무리들은 쥐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 거리 거리 백성들은 왕세자의 행차를 바라보며 한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왕세자로는 너무나 노성하지."
"이씨네 집 일은 이분이 모두 만들어 논 것이 아닌가. 곧 임금이 될 거야."
"어떻든 욕심꾸러기지."
모두 다 지껄대며 탄식했다. 정안군이 왕세자가 되어 일국의 군사권과 정치를 장악하고 있으니, 실지 임금인 정종대왕은 이름뿐의 임금이요, 할 일이 없었다. 정종대왕은 본시 왕의 자리를 탐내는 이가 아니었다. 모든 정치와 군사권을 왕세자인 방원한테 맡기고보니 이제 정종은 완전히 허수아비 임금이 되었다. 어느 날 정종은 상왕인 아버지한테 문안을 드리러 갔다. 상왕은 정종한테 물었다.
"방원이란 애가 인제는 세자까지 되었으니 마음이 조금 풀렸을 것일세. 어느 손가락을 깨물어서 아프지 아니한 손이 없다는 격으로 방간이 그동안 토산으로 가서 잘 있는지 보고 싶으니 불러다가 보았으면 좋겠네. 이제는 방원이도 세자가 되었으니 원대로 다 된 셈일세. 자네가 왕의 자리를 내놓게 되면 제가 왕이 될 것 아닌가. 마음이 얼마쯤 풀렸을 테니, 설마 제 형을 황해도 구석에서 한평생 갇혀 있다가 죽게야 하겠나. 불러들이겠다고 일러두게."
"아바마마, 분부 지당하옵십니다. 곧 세자 방원한테 성지를 전달하겠습니다."
정종대왕은 아버지의 마음을 평안케 하기 위하여 이같이 상왕께 아뢰고, 내전으로 물러 나왔다. 내전에서는 왕후 김씨가 반갑게 정종대왕을 맞이했다.
"상왕전에 문안을 드리시고 오십니까?"
정종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처한 일이 있는데 말을 잘 들을는지."
얼마 후에 대왕은 혼잣말을 꺼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씨는 궁금했다. 얼굴빛을 화하게하여 조용히 물었다.
"무슨 난처한 일이 있습니까? 누가 말을 잘 들을는지 모르겠다고 하십니까?"
정종은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대답한다.
"상왕께서 방간이를 보시고 싶다고 불러들이라고 분부를 내리시므로 세자한테 말을 해보겠습니다고 아뢰기는 했소마는 원래 고집이 센 방원이가 말을 들을는지 의심스럽소."
"글쎄올시다."
왕비 김씨도 염려스러운 듯 걱정이 되었다. 왕과 왕후가 한참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내시가 목청을 길게 뽑아 내전을 향하여 아뢴다.
"왕세자마마 문안이오."
"들라 해라."
왕과 왕비는 옥교에 앉아 분부를 내렸다. 이윽고 왕세자 방원은 크나큰 몸집에 세자의 정장인 익선관 강사포를 입고, 어전에 엎드려 왕과 왕후께 문안을 드리고 일어섰다. 정종과 왕후는 미소를 지어 왕세자 방원의 문안을 받았다.
"별일 없느냐?"
뒤미처 왕은 부드러운 옥음을 내렸다.
"별 탈 없습니다."
왕세자 방원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정에도 별일이 없고?"
"없습니다."
왕세자 방원은 큼직한 눈방울을 굴려 형님 정종의 용안을 기탄없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정종은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어 될 수 있는 한 이 장면을 부드럽도록 화기를 만들려 했다.
"네가 군국의 전권을 맡아 있으니 오죽이나 잘하랴. 내 마음이 든든하다. 국가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다."
정종은 말씀을 마치자 만족한 표정을 용안에 지었다.
"왕세자는 경험도 많고 국가를 창립할 때 공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옵서 왕위에 계시면서 마음이 안한하신 것도 모두 다 세자를 잘 두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왕비 김씨는 시동생이 왕세자가 된 어색한 장면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나직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화한 기운을 조성시켰다. 정종은 정색하고 왕세자 방원에게 분부를 내렸다.
"너한테 의논할 일이 있다."
왕세자 방원은 '무슨 의논할 일이 있는가.' 하고 상감의 용안을 바라뵙는다.
"오늘 아침에 아바마마 상왕전에 문안을 드리러 갔더니 이러한 분부를 내리셨다."
왕세자 방원은 대답 없이 상감 정종의 용안을 바라보고 있다. 정종은 말씀을 계속한다.
"상왕께 분부를 내리시는데 어수를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시더라. '왕이 만약 손가락을 다쳤다 가정한다면 어느 손가락이 더 아픈가', 이같이 하문하시기에 '어떤 손가락이든 상했을 때는 똑같이 아픕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상왕께옵서는 이러한 말씀을 내리셨다. '내가 방간이가 보고 싶다. 불러들여서 늙은 아비의 마음을 상하지 말게 하라.' 이런 분부를 내리셨으니 불가불 아니 불러들일 도리가 없구나. 곧 토산으로 사람을 보내서 불러오도록 해라. 그래서 아바마마의 뜻을 승순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도 되고, 아버지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드리는 것이다. 세자의 뜻은 어떠하냐?"
왕은 여전히 성음을 부드럽게하여 아우의 마음을 더듬어보았다. 옆에 모시어 있는 왕비도 왕세자 방원의 눈치를 살핀다. 방원의 눈에서는 별안간 불길이 활활 일어났다. 독한 눈초리로 매섭게 임금을 흘겨본다.
"무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세자 방원은 불쑥 질자배기 깨지는 목소리를 내놓는다.
"하는 수 있느냐. '불러오겠습니다' 하고 아뢰었지.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느냐."
"아니 됩니다. 또 역적질을 해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면 어찌합니까. 아니 됩니다."
세자 방원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또 한 번 임금을 흘겨본다. 불길이 이는 듯한 눈초리로 두 번씩이나 왕 전하를 흘겨보는 왕세자 방원을 바라보자, 왕비 김씨의 등에는 소름이 쭉 끼쳤다. 아무리 법이 없다 하나 명색이 임금이다. 신하가 임금을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볼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막된 세상이라 하나 동생이 형을 집어삼킬 듯 흘겨볼 수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명목상으로 본다면 왕세자와 왕이다. 왕세자인 왕사가 어찌 지존이신 상감을 노려볼 수 있는가.
왕세자 방원의 무서운 눈초리
왕비 김씨는 등골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다음 순간 분하고 떨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먹이 쥐어졌다. 왕비 김씨는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목에서 곧 호령이 떨어지려 했다. 순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참는 것이 덕이 되겠다 생각한 때문이다. 정종대왕도 왕세자 방원의 흘기는 무서운 눈길을 바라보았다. 무엄하고 괘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곧 호통을 질러서 꾸지람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방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화를 누르고 아무 말씀도 아니했다. 왕세자 방원이 문안을 드리러 들어왔던 장면은 이같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아버님 상왕 전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거역해서는 아니 된다."
정종은 부풀어 오르는 화기를 꾹 참고 세자 방원한테 또 한 번 타일렀다.
"아니 됩니다. 방간 형님을 불러들이면 나라는 망하고야 맙니다."
왕세자 방원은 못하겠다고 계속해서 우겨댄다. 정종도 한도가 있었다. 아무리 얌전하고 마음씨 고운 임금이라 하나 두 번 세 번 상왕인 아버지의 뜻을 전해서 간청하다시피 하는데, 일개 세자가 듣지 아니하니 화가 불끈 치밀었다.
"네가 아무리 못한다고 막더라도 나는 아바마마의 뜻을 평안케 해드리기 위하여 방간을 토산에서 불러들여야 하겠다."
"나라 망하는 꼴을 보시려고 그리하십니까? 처분대로 하십시오."
세자 방원은 불쑥 아뢰고 소매를 떨쳐 물러난다. 눈에서는, 눈초리에는 또 한 번 불길이 일어났다. 독기가 가득했다. 왕세자 방원이 물러간 후에 정종대왕은 한숨을 길게 내뿜는다. '후...' 하는 소리가 왕비 김씨의 마음을 쓰리도록 아프게 했다. 얼굴에는 좋지 않은 빛이 떠돌았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왕비 김씨는 기막힌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한동안 와오가 왕비는 말없이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 후에 왕비 김씨는 입을 열었다.
"전하!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십시오. 흘기는 그 매서운 눈초리를 못 보십니까. 어서 빨리 왕위를 내놓으십시오. 그래야만, 보성명을 하시고 와석종신을 하실 것입니다."
"옳은 말요!"
정종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바마마께 약속을 올렸으니 방간이는 토산에서의 귀양살이를 풀어주고 왕의 자리를 내놓기로 하겠소!"
부드럽고 착하고 한량없는 정종이었다. 그러나 한 번 결심한 일은 실천을 해야 하겠다 생각했다. 유한 중에도 강한 결심을 가졌다. 정종은 곧 도승지를 불렀다.
"토산에 귀양보낸 방간은 비록 허물이 있다 하나 과인의 친동기다. 부모의 피를 함께 받은 형제지간이다. 내가 임금으로 있는 동안 어찌 차마 오랫동안 죄를 줄 수 있느냐. 금부에 기별해서 백방시킨 후에 송도 서울로 불러들이라!"
승지는 곧 어명을 금부에 전하고 금부도사는 왕명을 받들어 곧 토산으로 내려갔다. 방간을 무죄 백방 시킨다는 소문은 단통 왕세자 방원의 심복들의 귀로 들어갔다. 정승 이하 삼사는 일제히 들고 일어나 상소를 올렸다.
'역적 방간은 벌써 당연히 죽였어야 할 것을 이제 무죄 백방을 하신다니 불가합니다. 빨리 옥에 내려 처단하시옵소서.'
상소는 날마다 빗발치듯 들어갔다. 그러나 정종의 결심은 철석같았다. 일소에 부치고 답을 내리지 아니했다. 정승과 대장이며 대사헌, 대사간, 대제학들은 모두 다 왕세자 방원의 심복들이었다.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고 금부도사를 토산으로 보내서 방간을 석방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큰일이라 생각했다. 빨리 방간을 석방시킨다는 분부를 철회해 달라고 나날이 상소를 올려서 임금에게 대항했다. 백관들이 떠들어대는 이 소식은 왕후 김씨의 귀로 들어갔다. 왕후 김씨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대전으로 향하여 대왕께 뵈었다. 왕후의 눈은 흑수정 같이 반짝거렸다.
"전하! 잊으셨습니까?"
"무엇을?"
정종은 왕후를 향하여 되물었다.
"방간을 석방하신 후에는 왕의 자리를 내놓겠다 하시더니, 그 일을 잊으셨습니까?"
"잊지 아니했소. 왕후마마의 개결하고 지성스런 뜻을 내 어찌 잊어버렸겠소. 왕의 자리를 내놓으리다."
정종은 미소를 지어 왕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옥체를 보전하십시오. 오늘이라도 실천하시도록 하십시오."
"상왕께 아뢰고, 곧 왕위를 내놓겠소."
왕후 김씨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 되십니다. 상왕께 아뢴다면 펄쩍 뛰시고 못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일은 되지도 아니하고 전하의 옥체는 오히려 위태롭게 되십니다. 아무 말씀 마시고 오늘이라도 대신을 불러서 세자에게 선위하신다는 분부를 내리십시오. 그리고 선위할 때 세자에게 약속을 하십시오. 방간을 죽이지 않고, 송도로 데려오도록 하라고."
정종은 한동안 대답 없이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이리 생각해보고 저리 생각해보았다. 마침내 왕후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맑은 거울 같고 맑은 물 같은, 욕심이라고는 추호만치도 없는 왕후의 어질고 갸륵하고 착한 마음에 감동이 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분명히 왕후 김씨는 선견지명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왕후마마의 어진 마음을 받들어 오늘로 선위를 하리다!"
왕의 결연한 대답을 듣자 왕후 김씨는 미소를 지어 정종대왕을 우러러 바라보며 아뢴다.
"갸륵하신 처분을 받자오니 저의 가슴은 무한 기뻐서 쾌활하게 부풀어 오릅니다. 이제 오늘 밤부터는 신첩은 마음을 놓고 다리를 쭉 뻗고 자겠습니다."
왕후 김씨는 거뜬한 마음으로 전하께 내전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을 아뢰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유한 정정한 발자국 소리는 더한층 조용하게 옮겨졌다. 왕후 김씨가 물러간 후에 정종대왕은 내관을 불렀다.
"빈청에 연락해서 삼정승과 육조판서 삼군부 대장들을 입시케 하라. 그리고 정원에 나가서 승지를 들라 하라."
삼정승에 하윤, 성석린, 민제가 들어오고 육조판서와 삼군부 대장 이숙번, 이무, 민무구, 민무질들이 어전에 부복했다. 정종대왕은 대신과 대장들의 입시가 끝난 후에 내시에게 영을 내렸다.
"왕세자를 들라 하라."
내시는 급히 춘궁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세자 방원은 춘방 관원들과 함께 어전에 부복했다. 정종대왕은 백관과 세자를 굽어보며 천천히 옥음을 내렸다.
"과인은 본시 천성이 나약해서 무재무능한 사람이다. 외람되게 그대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던 것이다. 본시 당시부터 사양할 뜻이 있었으니 형편상 잠시 왕의 자리에 앉기로 했던 것이다. 이제 세자도 이미 정해졌고 국가에는 별일이 없다. 과인은 그동안 심신이 피곤했다. 계속해서 어려운 국정을 요리하고 만 가지 일을 총람할 수가 없다. 이제 대위를 왕세자 방원에게 넘겨서 선위한다. 경들은 왕세자를 도와서 더욱 이 나라를 부강케하여 승평세월을 이룩하고 만백성을 적자같이 사랑해서 태평연월을 이루도록 하라."
정종대왕의 옥음이 떨어지니 왕세자 방원 이하 정승 판서와 대장이며, 춘방 관원들은 모두 다 자기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감격하기를 마지아니했다. 별안간 이같은 분부가 내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때문이다. 그들은 장차 방간의 석방 문제를 계기로하여 또 한 번 파동을 일으킬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이 대왕이 선수를 쳐서 왕의 자리를 내놓을 줄은 털끝만큼도 생각지 못했다. 과연 정종대왕은 어질고 착하고 명철한 분이라고 감탄했다. 이중에 더한층 감격한 사람은 왕세자 방원이었다. 이같이 형님 방과가 속히 왕의 자리를 자기한테 내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항상 마음속으로 자기가 창업해놓은 일을 아무 공도 없는 형에게 주었다 해서 죽 쑤어서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했다고 어서어서 정종이 돌아가기만 바랐던 것이다. 항상 마음속으로 불만이 가득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분이 언제까지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용상 위에 앉아 있을 것인가? 비록 실권은 없다 하나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거치적 거려서 곤란하구나!'
이같이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형님이 왕위를 내놓아 자기한테 선위하겠다 하니 감격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엎드려 분부를 들으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왕세자 방원은 형님 정종을 향하여 '감사하오' 하고 선위한다는 옥음을 그대로 받을 도리가 없었다.
대위를 차지하는 태종 이방원
체면은 지켜야 했다.
"전하! 신은 아직 미거하옵니다. 전하의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세자 방원은 한 번 괘사를 떨어다. 목이 메는 듯 우는 시늉을 하고 몸부림을 쳤다.
"세자는 사양하지 말라. 그대는 나라를 창업하는 데 실로 공이 크고 업적이 많았다. 세자의 능동적인 수단과 능력은 과인이 미칠 바가 아니다. 과인은 그동안 난마같이 어지러운 정국과 상왕 전하의 마음을 평안케하기 위하여 잠시 등극을 했던 것이다. 이제는 정국이 약간 안정되기 시작하고 세자의 나이도 한창 기운을 펴서 움직일 때다. 공연히 사양하지 말고 나의 뜻에 순종하여 선위를 받으라."
정종은 말을 마치자, 좌우 옆에 모시어 있는 내관에게 명했다.
"대보를 받들어 왕세자에게 전하라."
내관들은 정방형 황금덩이에 전자로 조각한 '조선국 왕지보'란 휘황찬란한 인뚱이를 금전지가 달린 붉은 보에 싸서 세자 방원한테 바친다. 왕세자 방원은 자리를 피하여 세 번 사양하면서 받지 아니했다. 역시 또 한 번 괘사를 부려서 사양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정승과 장군들이 일제히 일어나 왕세자 방원을 향하여 배를 드렸다. 삼정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인 영의정 하윤이 군신을 대표로 아뢴다.
"너무 사양하시는 것도 예가 아니올시다. 왕세자께서는 상감의 성지를 받들어 대보를 받으시옵소서."
왕세자 방원은 하윤의 말을 듣자 마지 못하는 체 정종대왕의 옥좌를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내관이 받들어 올리는 어보를 받았다. 정종은 왕세자 방원을 향하여 장중하게 옥음을 내렸다.
"이제 왕세자는 왕이 되었다. 나로서 한 마디 부탁할 말이 있다. 방간은 비록 죄를 지었다 하나, 새로 된 국왕의 친형이다. 그로 하여금 저자에 참형하는 일이 없게 하라. 왕의 형님을 어찌 죽일 수 있느냐. 나는 이미 토산에 가 있는 방간의 귀양을 풀었거니와, 방간이 설혹 송도로 돌아오더라도 그러한 불상사를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그뿐 아니라 아바마마이신 상왕 전하의 마음을 또 한 번 상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대왕의 말씀은 엄숙했다. 정과 의를 지켜서 형제의 우애를 생각하라는 간곡한 분부였다.
"삼가 전하의 뜻을 받드오리다."
왕세자 방원은 어전에서 물러났다. 정종대왕이 다섯째 아우인 왕세자 방원에게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어서 선위했다는 소문은 당일로 짜아하게 퍼졌다. 송도 일관이 술렁거렸다.
"돌아가기도 전에 벌써 왕의 자리를 내놓았으니 웬일인가?"
"얌전한 상감이 욕심꾸러기 아우를 당해낼 도리가 있나."
백성들은 이같이 탄식했다. 이튿날 왕세자 방원은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었다. 평생의 소원이 이룩된 것이다. 대궐 정전에 올라 만조백관들이 시립한 속에 즉위 예식이 거행되었다. 이분이 한평생을 마친 후에는 태종대왕의 시호를 받을 이씨 조선 제3대의 제왕이었다. 태조의 직계 신하와 정종의 심복 신하들을 제외하고 제2혁명과 제2혁명을 치른 장성과 모사들이 금관조복의 홍포금대와 녹포사모에 백옥홀을 들고 뜰 아래 품계석 앞에 열을 지어 벌여 섰다. 모두들 어굴에는 자기 자신이 임금이 된 듯 기쁜 빛이 넘쳐 흘렀다. 제2혁명과 제3혁명 때 모두 다 목숨을 내놓고 방원을 도와서 왕세자가 되게 했고, 마지막으로 대위에 오르게 했던 사람들이었다. 모두 다 정난공신이 되어서, 부귀영화로 한평생을 누리게 될 것이니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임금이 된 태종 못지않게 기쁘고 즐거웠다. 모두 다 가슴을 펴고 어깨를 으쓱대며 호기를 뿜어 벌여 섰다. 새 임금이 용상에 오르자 만조백관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즉위 예식을 축하하는 만세 소리가 세 번 난 후에 새로 영의정이 된 하윤은 군신을 대표하여 하사를 올렸다.
"이제 전하께서는 억조창생의 추대를 받으시어 등극하시는 대위에 오르셨습니다. 명철한 성덕을 펴시어 덕화가 금수와 초목에까지 미치시고, 보조가 무궁하시기 바라옵니다."
하윤의 하사가 끝나니, 백관들은 또다시 만세를 세 번 불렀다. 영의정 하윤은 다시 국궁재배하고 아뢴다.
"이제 전하께서 대위에 오르셨으니 세자비로 계시던 정빈 민씨를 왕비로 책봉하시는 것이 가한 줄 아뢰오."
영의정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듣자 전하의 입가에는 미소가 흘렀다.
"경의 말이 옳다. 과인의 조강지처인 민시는 과인을 도와서 오늘날 왕위에 오르게 했으니 내조의 힘이 크다 할 것이다. 당연히 왕비로 봉하리라. 그러나 왕비로 책봉할 옥책에 기록할 칭호를 어떻게 정하는 것이 좋을지 경은 과인을 위하여 생각해주기 바란다."
하윤이 계속해서 아뢴다.
"옥책에 받들어 모실 칭호는 크나큰 공이 많으신 것을 표현해야 합니다. '창덕소열원경왕후 민씨'라 하시고 궁중에서 전하께서 호칭하실 때는 '정비'라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태종은 만족했다. 명랑한 목소리로 옥음을 내렸다.
"그의 공을 생각해서 '창덕소열원경왕후'라 하는 경의 말이 내 뜻에 합당하다. 그리고 사사로이 과인이 부를 '정비'란 명칭도 매우 좋다. 여자는 유한하고 정정해야 쓰는 법이다. 하하하."
태종은 소리를 높여 쾌활하게 웃었다. 영의정 하윤이 계속해 아뢴다.
"다시 아뢰옵니다. 선위하신 상감께는 상왕으로 존칭하시고, 상왕 전하께서는 태상왕의 경칭을 올려야 합니다. 삼가 이뜻을 아뢰오."
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내관을 불렀다.
"삼정승을 일제히 전상으로 오르게 하라."
내관은 전상에서 전하의 뜻을 전했다.
"좌의정, 우의정은 전상으로 오르라 분부하셨소."
품계석 앞줄에 섰던 좌의정 성석린과 우의정 민제가 전상으로 추창해 올랐다. 영의정 하윤이 서 있는 우편에 부복했다. 전하는 옥음을 내려 묻는다.
"지금 영의정 하윤이 아뢰는 말을 경들은 들었을 것이다. 상왕께 태상왕의 존칭을 올리고, 선위하신 상감께 상왕의 칭호를 받들자 하는데,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영의정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가한 줄로 아뢰오."
새 임금은 승지에게 분부를 내렸다.
"모두 다 비망기에 적으라."
승지는 명을 받들어 비망기에 적었다. 영의정 하윤이 다시 고한다.
"우의정 민제는 왕후마마의 사친이올시다. 우의정 현직을 그대로 두고 전례에 의하여 부원구느이 칭호를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그의 본인 여주를 따서 여흥부원군이라 함이 어떠하올지 감히 아뢰오."
이때 우의정 민제는 감격해서 어깨를 쭈그려 엎드렸고, 전하는 '좋다' 하고 허락을 내렸다. 승지는 비망기에 기록했다. 영의정이 아뢰는 말이 끝나자 새 임금 태종은 부드럽게 눈을 떠서 삼정승을 바라보며 옥음을 내린다.
"회안군 방간은 난을 일으켜 나라를 소동시켰으니 그 죄상이 크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 토산에 귀양 가 있다. 당연히 참형에 처해야 하겠으니 형제간의 지정을 생각해서 그대로 죽이지 아니하고 두었던 것이다. 이제 과인이 왕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제 차마 어찌하랴. 태상왕 전하께서도 관심이 크시고 상왕 전하께서도 항상 염려가 깊으시니 두 분의 뜻을 받들 수밖에 없다. 백방시켜서 돌아오게 하려 하니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삼정승들은 새 상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태상왕안 태조와 상왕인 정종의 의향도 잘 알고 있었다. 제3혁명이 일어난 후에 태상왕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당시 임금인 정종대왕에게 방간을 빨리 송도로 불러들이라고 문안드리러 갈 때마다 분부를 내렸고, 정종대왕은 정안군으로 세자를 봉한 후에 상왕의 뜻을 전해서 방간을 불러들이라 했다. 이때마다 세자 방원은 눈을 부릅떠 정종께 대항했던 것이다. 왕위를 선위 받을 때도 정종은 방간을 토산에서 송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조건으로 해서 선위를 받았던 것이다. 이제 정안군은 대위에 오르고 보니 이미 우익을 잘라낸 방간쯤은 송도로 데려와도 관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같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태종의 말씀이 떨어지자 영의정 하윤이 삼정승을 대표해서 아뢴다.
"전하의 바다같이 넓으신 성덕은 소신들도 감격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한 마디 아뢰겠습니다. 방간이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여 역적의 죄를 얻은 것은 공적인 사실이요, 전하의 형제지정으로 인하여 죄인을 석방하시려 하는 것은 사사로운 사정이올시다. 공적으로 국가의 죄인이 된 방간을 사정으로 인하여 송도로 데려오겠다 하시는 것은 사사로운 일로 공적인 법을 굽히려 하시는 일입니다. 절대로 불가합니다."
하윤은 불가하다고 우겼다. 좌의정 성석린이 허리를 굽혀 아뢴다.
"영상 하윤의 말이 옳습니다. 국가에는 법이 있습니다. 사사로운 인정으로 국법을 굽힐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성상께서 혹시 침식이 불안하시다면 역시 염려되는 일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종평 처리하시는 것이 좋을 줄 아뢰오."
좌의정 성석린의 말을 이어 우의정 민제가 아뢴다.
"원칙으로는 영의정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하오나 이 일로 인하여 태상왕 전하와 상왕 전하 두 분의 마음을 불편케 하시고 다시 성심이 불안하시게 된다면 또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라 하겠습니다. 좌의정의 아뢴 말씀과 같이 신들의 의사에 구애치 마시고 성의대로 재량하시어 처결하시옵소서."
"경들의 과인을 위하여 진충보국하는 의향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방간에 대한 일은 과인에게 맡기라. 내가 잘 처결하리라."
태종의 얼굴은 화평한 기운을 띠었다. 곧 승지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황해도 토산에 귀양가 있는 회안군 방간의 귀양을 풀어주고 송도에 돌아와 사는 것을 허락해주라."
승지는 어명을 받아 물러갔다.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금부 당상에게 어명을 전달했다. 금부도사는 당상의 명령을 받아 황해도 토산으로 향했다. 태종의 즉위 예식은 이같이 하여 만조백관이 만세를 부르는 환호성 속에 끝을 마쳤다. 한편, 황해도 토산에서 새로 임금이 된 아우 방원의 명에 의하여 귀양이 풀린 방간은 나귀에 몸을 실어 초초하게 송도로 돌아왔으나, 외롭게 쓸쓸하고 적막하기 한량없었다. 여룡여호하다고 온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던 맹종은 정안군의 화살에 맞아 죽어버렸고, 집안은 결딴이 나서 말이 아니었다. 나라를 창업한 태상왕 이성계의 아들이요, 마음이 착하고 어진 정종대왕의 동생이요, 자기가 칼을 뽑은 후에 세자의 칭호를 거쳐서 대위에 나간 금상전하의 형이지만 이제는 자식을 죽인 원수지간이 되었다. 송도로 돌아왔다 하나, 아버님 태상왕을 만나뵐 자유가 없고, 형님 상왕 전하도 만나뵐 기회를 주지 아니했다. 슬프고 적막했다. 그러나 일루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아직도 아버님 태상왕 전하와 형님 상왕 전하가 생존해 계신 것이다. 생의 집착은 강했다. 방간은 아버지와 형님을 바라고 송도에 있었다. 회안군 방간이 아버지와 형님을 바라고 송도에 있었다. 회안군 방간이 황해도 토산에서 송도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짜아하게 퍼졌다. 하선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의 관원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상소를 올렸다. 모두 다 새로 등극한 태종께 잘 뵈려고 충성을 다하는 선비와 관원들이다.
'방간은 나라를 전복시키려 했던 대역부도의 역적입니다. 이와 같은 역적을 즉시 참형에 처했어야 마땅할 것인데 목숨을 살려서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낸 것은 상왕 전하와 전하의 골육의 정을 생각해서 그리했던 것입니다. 방간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살려서 귀양보낸 것만 해도 크게 다행한 일인데, 이제 전하께서는 대역부도의 패륜한 자를 무죄 석방하시어 국가의 수도인 송도로 다시 들어와 살게 하시니, 이것은 만만 불가한 일입니다. 국가에서 법을 정한 것은 백성들 기강을 바로잡자는 것입니다. 방간과 같은, 하늘도 무섭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역적을 무죄 석방하신다면 장차 전하는 어떻게 이 국가와 백성들의 풍속과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십니까. 국가는 임금이신 전하 한 사람의 국가가 아니올시다. 사사로운 은정으로 국가의 공법을 굽힐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의 무리는 국가를 사랑하는 지성에서 방간이 송도로 들어온 것을 반대합니다. 곧 방간을 잡아서 옥에 가두시고 참형에 처하셔야 합니다.'
상소는 빗발치듯 쏟아져 들어갔다. 사헌부에서 대사헌을 필두로 하여 집의, 지평, 장령들이 상소를 올리고, 사간원에서는 대사간을 필두로 하여 사간, 정언들이 소장을 올리고, 홍문관에서는 대제학, 부제학을 필두로 하여 교리, 수찬들이 상소를 올렸다. 정원은 상소를 처리하기에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온 조정이 술렁거렸다. 영의정 하윤이 입궐하여 어전에 뵙기를 청하고 아뢰었다.
"삼사의 여론이 비등하옵니다. 전하께서는 태상왕 전하의 심정을 감안하시어 방간을 송도로 불러들이셨으니 조정 공론이 이렇듯 물 끓듯 하오니 성의를 돌리시어 다시 처리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태종은 하윤에게 물었다.
"조정 공론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귀양을 보내시는 길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다시 귀양을 보낸다면 북쪽이 좋을지 남쪽이 좋을지 어떤 곳이 좋겠소?"
"그것은 전하의 의사대로 하명하시옵소서. 다만 송도에 살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다면, 전라도 익산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라."
태종의 명령은 승지를 통하여 곧 의금부로 전해졌다. 의금부에서는 토산에서 귀양이 풀려 올라온 방간을 또다시 전라도 익산으로 귀양보낼 차비를 차렸다. 태종은 방간을 전라도 익산으로 다시 귀양을 보내라고 승지엑 분부한 후에 정승 하윤에게 부탁하는 옥음을 내렸다.
"백관과 군신들의 반대하는 여론을 막을 길이 없어서 방간을 다시 익산으로 귀양을 보내라고 금부에 명했으니 과인의 마음에 불안한 점이 있소. 아무리 조정 여론으로 인하여 방간을 다시 귀양보내는 일이라 하나 상왕께 이 사유를 고하지 아니할 수 없소. 그러나 과인이 어찌 상왕게 면대해서 이 일을 차마 아뢸 수 있소. 경은 과인을 대신해서 조정 공론으로 인하여 불가불 방간을 익산으로 다시 귀양보내게 되는 일을 아뢰어주오."
태종은 용단과 패기가 강한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한편으로 치밀하도록 슬기스런 머리를 가졌다. 상왕께 아뢰는 일은 하윤에게 팔밀이를 했다.
"어명대로 봉행하겠습니다."
하윤은 어전에서 물러나온 후에 곧 상왕 전하인 정종이 계신 윗대궐로 자비를 몰았다.
"정승 하윤이 상왕 전하께 뵙기를 청하오."
하윤의 녹사는 상왕전 내관을 통하여 뵙기를 청했다. 이때 정종은 왕의 자리를 아우 태종에게 물려준 후에 마음과 몸이 다 함께 한가로웠다. 이름은 상왕이라 하나 물외한인이었다. 친히 뜰에 내려 정원수 사이로 거닐면서 손수 잡풀을 뽑고 화초를 가꾸어 있었다. 이때 상왕전 내관이 들어와 고했다.
"정승 하윤이 뵙기를 청합니다."
정종은 하윤이 누구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안군 방원을 도와서 세자 방석을 내치고 방번을 죽이고 또다시 조카 맹종과 형 방간과 대결해서 오늘날 그로 하여금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정안군의 모사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난 일등공신으로 권세가 혁혁한 하윤이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난 상왕인 자기를 찾을 까닭이 없었다. 필연코 방간에 대한 일이라고 추측했다.
"들라 해라."
상왕 정종은 내시에게 명한 후에 전상으로 올랐다. 이윽고 하윤이 내시에게 인도되어 상왕 앞에 부복했다. 정종은 일부러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정승 하윤을 바라보며 묻는다.
"정승이 어떻게 물외한인인 나를 찾았는가?"
"항상 뵈옵고 싶은 마음 간절했사오나 국가가 아직 안정되지 아니한 때라 공연히 분망해서 자주 문후를 드리지 못하와 죄송만만하오이다. 오늘은 특히 중대한 일이 있사와 알현을 청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새로 상감이 전하의 선위를 받자와 즉위 예식을 거행하신 후에 특명을 소신에게 내리시어 역적 방간의 귀양을 풀고 무죄백방하여 송도로 돌아오게 하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잘했네."
정종은 미소를 지어 잘했다고 칭찬했다. 하윤은 계속해서 상왕인 정종께 고한다.
"그리하와 전하께서는 금부에 하명해서 황해도 토산에 귀양가 있는 방간을 무죄 석방시키고 송도로 데려왔습니다."
"잘했어..."
상왕은 또 한 번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러하온데 뜻밖에 조정에서는 여론이 물 끓듯 일어나서 날마다 상소가 빗발치듯 들어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과 홍문관의 삼사들이 들고 일어나서 패륜의 난신적자를 무죄 석방시킬 수 없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리하와 전하께서는 하는 수 없이 대신들에게 의논하시고 다시 전라도 익산으로 귀양보낼 것을 결정하셨습니다. 상왕 전하께서는 상감이 마지못해 하시는 일을 통촉해주시옵소서."
상왕은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듣자 불쾌하고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귀양을 풀기로 즉위 예식 때 공언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신이 아우에게 임금의 자리를 내어줄 때 방간의 귀양을 풀어주기로 조건을 붙여서 선위한 것이었다. 이제 방간의 귀양을 풀어서 송도까지 데려왔다가 조정의 여론을 빙자해서 다시 전라도로 귀양을 보낸다는 일은 너무나 사람을 우롱하는 일이었다. 성의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말이 되는 소린가. 한 번 왕명으로 결정해논 것을 삼사가 상소문을 올렸다고 다시 귀양을 보낸다는 일은 말이 아니 되는 소리다. 임금이 설혹 악한 일을 했다면 모르되 형제간의 지정을 생각해서 무죄 석방시킨 일은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을 한 것을 간하는 신하는 도리어 임금을 악한 곳으로 떨어뜨리는 무리들이니 가증하기 한량없다. 나는 모두 다 재상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경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찌해서 백료들을 잘 타이르지 못하는가?"
상왕의 옥안은 엄숙했다. 하윤은 잠깐 얼굴이 붉어졌다. 고개를 숙였다. 상왕 정종은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대신이란 사람은 국가의 만백성을 거느리고 백관을 통솔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이라는 존경하는 칭호와 명예를 주는 것이다. 항상 가만히 앉아 있는 듯해도 이음양 순사시해서 국가에 화한 기운이 돌도록 하는 것이 대신의 책임이다. 경은 어찌 태상왕 전하의 자식을 생각하시는 부자지간의 심경을 모르는가. 무슨 얼굴을 들고 백성들을 향하여 삼강오륜을 이야기하며, 형우제공을 말하겠는가? 딱한 일이다."
상왕은 준절하게 정승 하윤을 꾸짖었다. 하윤은 등에 땀이 흘렀다. 마음속으로는 상왕의 성인 같은 인격을 존경했다. 그러나 태종을 위하여 구구한 변명을 했다.
"그러기에 상감과 삼정은 방간의 귀양을 풀었건만 삼사들이 말을 듣지 아니하니 어찌합니까. 죄송만만합니다."
하윤은 퀴퀴한 대답을 했다. 정종의 명철하고 안상한 얼굴에는 범치 못할 위엄이 드러난다. 정승 하윤을 향하여 음성을 나직이 하여 말씀한다.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재상의 일을 못 한다면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공연히 국록을 먹는다면 그것은 백성들의 세금을 도둑질해 먹는 거냐 매일반이다."
하윤은 꼼짝달싹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했다. 고개가 수그러졌다. 상왕 정종은 다시 말씀을 내린다.
"국가나 사가나 화기가 가득해야만 그 국가와 집안이 잘되는 것이다. 내가 세자인 정안군한테 임금의 자리를 내준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만은 짐작할 것이다. 형제가 싸우고 다투는 것이 창피해서 임금의 자리를 창업에 공이 많은 내 아우에게 내준 것이다. 집안에 화기가 돌게 하고 국가에 화한 기운이 가득하라고 용상을 임금 노릇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내준 것이다. 이 뜻을 모르고 그대들은 또다시 방간을 익산으로 귀양보냈단 말인가!"
정종의 음성은 나지막하면서도 준엄해다. 하윤은 등에 채질을 하는 듯했다. 꼼짝없이 꾸지람을 들었다.
"경은 지각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네. 지각 있는 사람이 이러한 줄은 몰랐네!"
하윤의 이마는 땅에 닿아졌다. 망건편자에 구슬 같은 땀이 흘렀다. 정종은 다시 음성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권력과 세도가 좋다 하나 아비를 아비로 알지 아니하고, 형을 형으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아우를 살해해서 강상을 끊어 버린다면 그 권력과 세도가 오래 유지될 수 있겠는가?"
정종이 눈은 별빛처럼 초롱거렸다. 하윤은 이마를 땅에 박고 한마디 대답도 못하고 엎드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숨이 가빠서 씨근씨근하는 괴로운 소리가 입술 사이에서 일어났다. 진땀이 온몸에 흘렀다. 정종대왕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탄식조로 말씀을 내린다.
"막비운술세! 보복을 받는 국운이라 하겠네. 고려조의 양장현신들을 원통하게 죽인 죄로 이 꼴을 당하나보이! 어진 선비와 바른 사람을 삼단같이 죽인 앙갚음이라 하겠네. 보복되는 이치로 하늘이 내리시는 환난을 당연히 받아야 하지, 별수가 없네."
하윤의 등에는 이번엔 동이로 찬물을 퍼붓는 듯 소름이 쭉 끼쳤다. 정종은 다시 말씀을 내린다.
"방간은 이미 익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하니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왕명을 밤낮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없을 것일세. 방간을 죽이지 말도록 하게. 형이 동생을 죽였다는 말을 천추만대에 들을 것도 애달픈 일인데 또다시 여기다가 형을 죽였다 해서야 그 누명을 어찌할 텐가? 어서 물러가게!"
정종은 말씀을 마치자 내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윤은 쥐구멍을 찾듯 상왕전에서 물러났다. 한편 정종은 왕의 자리를 아우 방원에게 선위한 후에 아직도 아버지 상왕께 이 사실을 고하지 아니했다. 아버지 상왕의 마음을 또 한 번 상할까 두려웠던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숨겨둘 수는 없었다. 이때 태조 이성계는 방원이 임금이 되고, 방과가 상왕이 된 것을 까맣게 몰랐다. 더구나 자기가 태상왕이 된 것도 몰랐다. 정종과 왕비 김시는 태상왕 이성계를 모시고 있는 측근 내관과 궁녀들에게 엄한 명령을 내려서 선위한 일을 절대로 말씀드리지 말라고 신칙한 때문이었다. 어느 날 정종은 태상왕인 아버지께 문안을 드리러 갔다. 몇 번 망설이다가 말씀드릴 것을 결심했다.
"아바마마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태조는 용안에 미소를 지어 아들에게 물었다. 언제나 마음에 드는 임금 방과였다. 묻는 옥음은 부드럽고 화창했다.
"소자는 그동안 불효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착하고 어진 아들이 불효의 죄를 저질렀다 하니, 태조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린가, 불효의 죄를 저질렀다니?"
태조의 용안은 더욱 화려하면서 어진 눈매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소자는 마음이 약하고 의지가 굳세지 못합니다. 그런 데다가 또한 총명 영리하지도 못합니다. 그리하와 왕의 자리를 방원한테 내주었습니다."
"무어야, 방원이한테 선위를 했단 말이냐?"
커다란 태조의 눈이 더한층 둥그렇게 떠졌다. 정종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섰다.
"다시 한번 말을 똑똑히 해보아라!"
태조의 음성은 컸다.
"네, 방원이한테 선위를 해서 즉위식까지 치렀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주먹으로 서안을 쳤다.
"어째 나한테 말도 아니하고 그 불한당 같은 도둑놈한테 임금의 자리를 내주었단 말이냐!"
태조 이성계는 하늘이 얕다 하고 펄쩍 뛰었다.
"그저, 소자가 불효자의 짓을 했습니다. 종아리를 때리신 대로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사사로운 집안 문제를 떼어놓고 국가 형편을 생각할 때 방원이 아니고는 나라를 어거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와 불효의 죄를 저지르면서 하는 수 없이 방원이한테로 선위를 했습니다."
"그놈이 너를 협박한 것이 아니냐? 불량한 눈을 번쩍거리고---."
"아니올시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 재목은 천하를 다스릴 임금 재목이 아니올시다. 그리하와 능력 있는 아우에게 왕의 자리를 선위한 것이올시다."
정종은 음성을 낮추어 안상하게 아뢰었다. 태조는 또 한 번 서안을 쳤다.
"무어야, 능력 있는 아우에게 왕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동생들을 죽이고 형을 죽이고, 조카를 죽이는 놈이 능력이 있단 말이냐? 무슨 능력이 있어? 골육상쟁하는 능력이 있단 말이냐?"
태조 이성계는 또 한 번 주먹으로 서안을 쳤다. 정종은 다시 간곡하게 아룁니다.
"기왕 왕세자로 봉한 바에 어찌합니까. 결국은 왕위에 나아가야만 할 인물입니다. 아바마마, 고정하시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쇼. 그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그 죽일 놈을..."
태조 이성계는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나 부르르 떤다. 눈에는 강비의 아리따웠던 얼굴이 비쳤다. 방석, 방번의 머리 풀어 산발하고 목에 칼을 꽂은 모습이 얼씬했다. 사위 이제가 칼을 맞고 쓰러지던 모습이 보였다. 태조 이성계는 또 한 번 부르르 떤다. 소리 없이 몸만 떨더 ㄴ태조 이성계는 정종한테 다시 묻는다.
"그리고 방간의 귀양을 풀라 했더니 어찌 되었느냐?"
"방간의 귀양은 새 상감 방원이 풀어주어서 토산에서 송도로 왔사온데 삼사가 들고 일어나서 상소질을 하는 바람에 다시 익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합니다."
"그놈들이 모두 다 짜고 하는 짓이 아니냐. 인제 익산에 가두었다가 또 죽여버릴 작정이로구나."
"그렇게 하지 않도록 제가 좋이 일렀습니다."
"그놈들이 네 말을 듣는다더냐?"
태조는 말을 마치자 한숨을 길게 '후' 하고 내쉰다. 마음이 무척 괴롭고 아픈 모양이다.
"자식이 원수다. 자식이 원수야. 방원이 놈 때문에 내 집이 이같이 망하고 결딴이 날 줄 누가 꿈에나 생각했겠느냐. 아비를 아비로 아느냐, 형을 형으로 아느냐, 동생이란 동생을 모조리 죽여버리려 하고, 과연 기가 막히는구나!"
태조는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짓는다.
"이럴 줄 알았더면 내가 공연히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구나. 이신벌군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려의 충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서 천고의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이 되어버리고, 허 허 허. 참 기가 막힌다. 내가 왕의 자리만 차지하지 아니했던들 방원이 이놈이 이따위 짓은 아니 했을 것이다. 이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 가슴만 아프구나..."
태조 이성계는 자기 가슴을 친다. 정종은 고개를 숙여 묵묵히 대답이 없다. 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으나 위로할 말이 없다. 정종은 황송해서 몸 둘 곳을 모른다. 마치 동생 방원이 저지른 죄가 모두 다 자기가 죄를 범한 것같이 생각이 든다. 아버지 마음을 불안케 해드리는 것도 모두 다 자기의 허물같이 생각이 든다. 정종은 꼼짝달싹 아니하고 한 식경이나 두 손을 마주 잡고 아버지 앞에 서 있었다. 다리가 몹시 팽팽했다. 태조 이성계도 더 이상 푸념할 기운이 없었다.
"물러가거라! 하는 수 있느냐. 너와 나는 인제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한 상왕이요, 태상왕이로구나!"
태조는 또 한숨을 길게 뿜었다.
부귀여부운
정종은 가슴이 타는 듯했다. 아버지 태조의 말씀을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상왕 정종은 태상왕께 절을 올리고 소리 없이 물러났다. 태상왕 이성계는 이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한 마음이 가슴에 탱중했다. 생각 같아서는 곧 방원을 용상에서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든지 정종 방과로 다시 왕을 삼든지 하고 싶었으나, 태조한테는 한 명의 군사도 없었다. 이제, 조선 팔도는 모두 다 방원의 천지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태조는 아침 수라를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홀연 내관을 불렀다.
"내가 요사이 마음이 울적해서 가만히 들어앉아 있기가 싫다. 내일 이른 아침에 한양을 거쳐서 연천까지 가보겠다. 미행이다.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 간단히 준비를 차려라."
별안간 태상왕의 분부를 들은 내관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 사실을 상왕전에 고해야 할지, 새로 된 상감한테 아뢰어야 할지 얼른 판단이 내리지 아니했다. 아무리 미행이라 하나, 소중한 태상왕 전하의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은 당연히 상왕보다도 새로 된 상감한테 아뢰어야 하겠는데, 지금 새로 된 상감과 태상왕은 만나보지도 아니하는 불상견의 원수 같은 처지다. 태상왕전의 늙은 나인을 찾았다.
"항아님께 의논이오. 좋은 의견을 말씀해주시오."
늙은 상궁은 태상왕전 내관이 의논할 일이 있다 하니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무슨 의논할 일이 있습니까?"
"태상왕 전하께옵서 지금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내일 이른 아침에 미행으로 한양을 향하여 연천까지 가시겠다고 간단히 행리를 차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비밀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이 일을 상왕 전하께만 아뢰는 것이 좋을지, 상감마마께도 아뢰는 것이 좋을지 얼른 판단이 내리지 아니합니다."
상궁은 대번에 내관을 향하여 핀잔을 준다.
"그게 무슨 말씀요. 아무리 미행이라 하시나, 상왕 전하와 상감마마께 다 아뢰어야 합니다."
내관은 픽 웃는다.
"상감께 아뢴들 무슨 소용이 있소. 상감마마와 태상왕 전하는 불상견인데 만나보실 리가 없소. 공연히 수선만 피우는 것이지. 그러니까, 내가 망설이는 것이 아니겠소."
"공사청은 참딱하기도 하시오. 아무리 태상왕 전하께서는 아니 만나보신다 해도 상감께서는 거둥하시는 데 전송이라도 하셔야 할 것 아니겠소. 만약에 공사청이 이 말씀을 상감께 아니 드렸다가 벼락이 떨어지면 어찌할 테요? 한양으로 미행하신다는 분부를 받아서 번연히 알고도 상감께 말씀을 아니 드린다면 나중에 큰 책망을 면치 못하리다. 그러하니 빨리 상왕 전하와 상감마마께 말씀드려 두시오."
늙은 나인의 말을 듣자 내관은 황연히 깨달았다. 만약 상왕께만 고하고, 상감께 아니 고한다면 나중에 큰 꾸지람을 들을 것이 분명했다. 내관은 즉시 상왕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먼저 상왕께 고했다.
"아뢰옵니다. 태상왕 전하께옵서 내일 일찍이 미행으로 한양을 거쳐서, 연천으로 가신다 합니다. 절대 비밀을 지키라고 소인에게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정종은 아버지 태상왕의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관은 다시 대전으로 올랐다.
"상감마마께 아뢰옵니다. 태상왕 전하께옵서 은밀한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러하오나 감히 휘할 도리 없아와 어전에 아뢰옵니다."
"무슨 하교를 내리셨단 말이냐?"
"내일 아침에 미행으로 연천가지 가신다 하셨습니다. 미행으로 가시는 것이요, 절대 비밀에 부치라 하셨습니다. 그러하오나 아니 아뢸 수 없어서 감히 아뢰옵니다."
상감 태종은 태상왕전 내시의 아뢰는 말을 듣자 용안에 약간 놀라는 빛이 떠돌았다.
"무어야, 연천으로 행차를 하신단 말이냐?"
"예, 그러합니다. 한양을 거쳐서 연천으로 미행을 하신다 합니다. 미행으로 가실 테니 절대로 비밀에 부치라 하셨습니다."
상감 태종은 내시의 아뢰는 말을 듣자 마음이 괴로운 모양이었다. 더구나 절대로 비밀에 부치라고 했다는 말씀을 내렸다 하니 더욱 가책을 느꼈다. 용안이 잠깐 상기까지 되었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물러가거라. 알겠다."
한 마디를 대답할 뿐이었다. 한편 태상왕 전각에서는 나인들이 밤을 도와 태상왕 전하가 객지에서 입을 의복과 노상에서 중화 참할 마른 음식을 찬합에 담았다. 한편 태종은 내관이 물러간 후에 급히 심복 대신인 하윤을 불렀다.
"맹랑한 일이 있소."
"무슨 일이오니까?"
하윤이 물었다.
"아까 태상왕전 내시가 조용히 과인에게 귀띔을 해주었소. 태상왕 전하께서 비밀히 한양을 거쳐서 연천으로 미행을 하신다 하셨다 하오. 어찌하면 좋겠소?"
"갑갑하시어 소풍 가시는 일을 어찌할 도리가 있습니까. 가시게 하시지요."
"그는 그렇소마는 가실 때 어찌하면 좋소. 자식의 도리에 전송을 아니 할 수도 없고... 상왕께서는 필연코 전송을 하실 텐데..."
"전하께서도 전송을 하십시오. 조금도 근심하실 것이 없는 줄로 아뢰오."
하윤은 태평하게 대답했다. 하윤의 태평조로 아뢰는 말을 듣자 태종을 답답했다.
"아버님께서 행차하시는 길에 전송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 누가 모르겠소마는 나는 즉위 예식을 치른 후에 아직도 태상왕 전하께 알현을 하지 못했으니 딱한 일이 아니겠소. 정식으로 왕이 되었다고 말씀도 아니했는데 어떻게 왕의 자격으로 전송을 한단 말요?"
"좋습니다. 기회가 좋습니다. 이 기회에 만나뵈우십시오."
하윤은 태평조로 아뢰었다.
"어디까지 나가서 전송을 하면 좋겠소?"
"미행으로 납신다 하니 멀리 가실 것 없고, 대궐 문밖에 미리 대기하시고 계시다가 전송을 하십시오."
태종은 또다시 망설인다.
"만조백관들이 반드시 전송을 나올 거요. 만약 태상왕께서 반갑게 대해주신다면 모르되, 혹시 불쾌하신 말씀을 내리신다면, 신하들이 있는 중인소시에 창피를 당하게 되면 어찌하오."
하윤은 정색을 하고 태종께 고한다.
"태상왕 전하께서 설혹 불쾌하신 말씀을 내리시더라도 전하께서는 전송을 나가셔야 합니다. 아니 나가시면 천추만대에 불효자의 누명을 쓰십니다. 창피하신 것은 한때 잠깐 지나가는 일이고, 불효자의 누명은 오래오래 가셔지지 않고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불계하시고 대궐 문밖에 미리 대기하고 계셨다가 행차를 전송하십시오."
태종은 겸연쩍어 대답이 없다. 하윤이 다시 간곡하게 고한다.
"전하께서는 태상왕의 심경도 살피셔야 합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전하를 불미하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전하께서는 국가와 천하를 바로잡기 위하여 칼을 빼드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대권을 장악하셨으니 그저 지성으로 태상왕 전하를 받드시어 마음이 흐뭇하도록 섬기십시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저 효성을 다하시어 태상왕의 마음이 감동되도록 하십시오."
하윤의 말을 듣자 태종의 입에서는 가만한 한숨이 흘렀다.
"경의 말대로 대궐 문밖에서 전송을 하리다."
"옳게 생각하셨습니다."
하윤은 국궁하여 물러갔다. 이튿날이 되었다. 내관이 연통한 것과 같이, 태상왕 이성계는 갑옷 투구에 융복을 차리고 나타났다. 허리에는 긴 칼을 늘이고, 등에는 백우전 화살을 꽂은 전통을 메었다. 은안백마에 높이 앉아 궐 문밖으로 나왔다. 분부한 대로 미행이었다. 거둥하는 행차의 의장은 일체 제례되었다. 태상왕의 뒤에는 의대 상자를 실은 말이 두 필 따르고 그 뒤에는 시녀 두 명과 내관 두 명이 전하와 의대 상자를 호위해 나갔다. 극히 초솔하고 홋홋한 행차였다. 이때, 상왕 정종은 아버지 태상왕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기 위하여 일체 얼굴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태상왕 이성계의 미행으로 나가는 홋홋한 행차가 마악 대궐 문밖으로 나갔을 때 멀찍이 백 걸음밖에 군막 수십 채가 즐비하게 벌여 있었다. 군막 앞에는 휘황찬란한 금관조복을 입은 관원과 사모품대로 차린 재상들이 무수하게 벌여 서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이를 바라보자 노기가 등등했다. 위에 따르는 내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 나의 미행을 일체 비밀에 부치라 했는데 저것들이 무엇들이냐? 대장과 대신들이 군막을 치고 나와 있으니 어찌 된 셈이냐. 어떤 놈이 나의 행동을 조정에 알렸느냐?"
내관은 간특했다. 시치미를 뚝 뗐다.
"글세올시다. 소인들은 일체 입을 봉하고 있었습니다. 대신과 대장들이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왕은 노한 눈을 들어 다시 천막을 바라보았다. 한가운데 그중 드높은 천막이 보였다.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방원의 얼굴이 보였다. 태상왕 이성계의 눈에서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임금의 대례복을 입은 방원의 모습을 처음 대하는 때문이다. 태종도 태상왕이 말 타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태상왕의 앞으로 향하려 했다. 이때 돌연 하윤이 태종의 앞으로 나타났다.
"전하, 조심하셔야겠습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미행으로 가신다 하면서 갑옷 투구에 무장으로 차리시고 어깨에 화살 꽂은 전통을 메셨습니다. 출기불의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대장 이숙번을 옆에 따르게 하십시오."
옆에 있던 삼군부 대장 이숙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윤의 말이 옳습니다. 소장이 전하의 신변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태종은 점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태종은 앞을 향하여 다시 걸음을 옮기고 이숙번은 갑주투구에 방패를 허리에 차고 태종의 옆으로 바싹 붙어서 따랐다. 태상왕 이성계가 말 타고 나오는 거리와 태종이 맞이하여 걸어가는 거리는 열 걸음의 간격밖에 남지 아니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임금의 옷을 입은 방원을 바라보니 노한 기운은 하늘도 불태울 듯했다. 그의 눈에 비치는 태종은 아들 방원으로 보이지 아니했다. 임금으로도 보이지 아니했다. 도둑놈으로 보였다. 원수로 보였다. 자기 왕의 자리를 뺏은 역적으로 보였다. 왕권을 뺏기 위하여 세자 방석을 죽였다. 방석의 친형 방번을 죽였다. 방석을 보호하는 사위 이제를 죽였다. 방원의 행동이 밉상스러워서 방과에게 왕위를 선위했더니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어놓고 모든 권세와 군사권을 제 손아귀에 넣어버렸다. 이 꼴을 볼 수 없어서 친형 방간이 아들 맹종과 함께 방원을 제거시키려 했더니, 방원은 조카 맹종을 활로 쏘아 죽여버리고 스스로 세자가 되었다. 그뿐인가. 임금의 자리에 있는 정종인 방과를 위협해서 선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 그뿐 아니다. 또 괘씸한 일이 있다. 방과가 방원에게 임금의 자리를 선위했을 때 방간의 귀양을 풀어서 송도로 데려오기로 약속했건만, 방원은 두 번씩이나 귀양을 보냈다. 태조 이성계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분노는 걷잡을 사이 없이 폭발되었다. 동개에서 백우전 흰 화살을 급히 뽑았다. 화궁을 가득히 당기어 태종 이방원의 익선관을 향하여 쏘아 붙였다. 천하 명궁의 이성계다. 비록 늙었다 하나 솜씨는 여전했다. 화살은 태종 이방원의 이마를 향하여 '윙' 소리를 치며 날았다. 위태롭기 머리칼 한 오리를 격한 사이였다. 옆에 태종을 모시어 섰던 삼군부 대장 이숙번은 잽싸게 방패를 번쩍 들었다. 태종 이방원의 용안을 탁 가렸다. 천하 명궁 이성계의 화살은 '퍽' 하는 처절한 음향을 내면서 이숙번이 들고 섰는 방패의 한복판을 꿰뚫었다. 백우전 흰 깃이 푸르르 떨렸다. 이 모양을 바라보는 만조백관들의 염통은 얼음장처럼 얼어붙고 간덩이는 콩알만큼 오그라졌다. 태종 이방원이 무사한 것을 보자 비로소 한숨들을 내쉬었다. 태조 이성계는 방원이 살에 맞지 아니한 것을 보자, 노한 기운은 더한층 폭발되었다. 말 앞에 시립해 나가는 늙은 내관을 꾸짖었다.
"이놈, 내가 미행을 하니 절대로 말을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어쩌자고 발설을 해서 만조백관이 나오도록 했느냐?"
태조의 화기는 화산이 터지는 듯했다. 허리에 찬 상방검을 뽑았다. 서릿빛을 뿜는 긴 칼이 허공에 흰 무지개를 그리면서 늙은 내관의 목은 땅에 굴러떨어졌다. 만조백관들의 간담은 또 한 번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감히 누구 한 사람 입을 벌려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상방검을 칼집에 꽂은 후에 앞을 향하여 묵묵히 말을 타고 나갔다. 시녀 두 사람과 내관 한 명이 태상왕의 뒤를 따라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한양을 향했다. 군막을 권문 앞에 치고 전송을 나왔던 태종 이방원을 위시하여 만조백관들은 멀리 태상왕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 궁둥이가 아물아물 구름 밖으로 사라지자 어색하고 무료한 마음을 제각기 가슴속에 간직한 채 태종께 인사를 드리고 흩어졌다. 태종 이방원은 시립해 있는 하윤과 이숙번을 향하여 가만히 밀어를 보냈다.
"경들이 아니었던들 오늘 과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일세. 그대들은 나를 구해준 은인일세."
하윤은 고즈너기 음성을 낮추어 아뢴다.
"전하께서는 이제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앞으로는 지성으로 태상왕 전하께 효도를 다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감동이 되시도록 하셔야 합니다. 태상왕 전하의 행동을 원망하셔서는 아니 되십니다."
"알겠소. 나도 태상왕 전하의 심경을 짐작하오!"
태종 이방원은 더 말을 아니하고 무거운 걸음을 걸어 옥교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는 울분한 마음을 가슴에 가득히 품고 한양으로 말을 달렸다. 나라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였다. 그러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수행하는 사람은 내관이 한 명에 궁녀가 두 명, 그리고 심복으로 거행하던 늙은 별감이 뒤를 따를 뿐이었다. 자기 자신이 고려왕조를 찬탈해서 조선을 개국한 후에 창업지주의 초대 군왕이 되었고, 아들 정종이 상왕이요, 아들 태종이 임금이었다. 조선 천지를 뒤흔들 만한 인물이건만 행색은 기막히도록 초라했다. 임금 노릇을 하려 한 것은 자기 딴에는 세상을 평안케 하고 백성을 도탄 속에서 건져내 보자고 한 것인데 세상을 복되게 하기는커녕, 왕권의 쟁탈전으로 자식이 골육상쟁을 해서 피를 보고야 말았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다. 두 번, 세 번의 진저리가 쳐져서 이가 시릴 지경이었다. 만 가지 경영은 한줌 물거품이 되었고, 부귀영화는 한 조각 뜬 구름장이었다. 그는 방원이 용상에 앉아서 임금 노릇 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그에게 붙어서 벼슬하고 있는 만조백관이 보기 싫었다. 강비가 묻혀 있는 한양성으로 가고 싶었다. 만승제왕의 의장을 다 버리고 홋홋한 나그네의 몸이 되어 말을 달렸다. 이미 죽어서 고혼이 되었으나 사랑했던 둘째 왕비 강씨의 능침이라도 어서 빨리 대하고 싶었다. 아직도 기운은 늠름했다. 백전노장이었던 이성계였다. 거침없이 말을 채질해 달렸다. 장단을 거쳐서 파주로 달리고 고양 땅으로 들어섰다. 벽제관 앞을 지나 구파발, 박석 고개를 넘고, 연서, 불광리를 지나서 녹번리 고개를 넘고 무약재에 당도했다. 한양 산천이 눈앞에 즐비하게 보였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 산천을 바라보자, 만감이 교집했다. 죽은 강비의 격려를 받으면서, 무학대사와 정도전과 함께 한양도성을 정했던 옛일이 머리에 선하게 떠올랐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고 낙산을 좌청룡으로 했다. 경복궁을 북악 아래 짓고 창덕궁과 종묘를 건축해서 왕궁의 큰 터전을 만들고 종로와 육주비전을 설치해서, 나라의 경제를 원활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밝은 임금, 어진 임금의 존경을 받으면서 사랑하는 강비와 함게 재미나게 살려고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강비가 경복궁 새 대궐에서 별안간 죽은 후에 온 세상은 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세자 방석은 방원의 손에 죽고, 심복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기막힌 일이었다. 애당초 한양성을 마련할 때 무학의 말을 들어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산을 백호로 하고 북악을 청룡으로 삼았던들 이러한 변고가 아니 났을 것을 공연히 정도전의 말을 들었다고 생각도 해보았다. 태상왕 이성계는 빨리 강비가 묻혀 있는 정릉으로 가고 싶었다. 말을 채질해 서대문밖으로 달렸다. 바른편 구릉에 숲이 우거지고 장송이 우줄거려 벌여 서 있는 정릉 길로 들어섰다. 죽은 강비의 무덤도 찾고 싶고, 여승이 되어 출가한 경순공주도 보고 싶었다. 손수 삼단 같은 검은 머리를 베어준 공주였다. 돌아간 어머니를 한평생 모시고 있겠다고 자청해서 승이 된 경순공주를 차마 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방원으로 인하여 청상과부가 된 경순공주다.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까지 별탈 없이 살아 있다는 소식은 흥천사에 다녀오는 궁녀편에 가끔 들었으니 손수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한 후에는 한 번도 대면해서 보지 못했다. 돌아간 강비를 사모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못지 않게 경순공주를 생각했다. 태상왕은 정릉 동구 앞에 당도하자, 흥천사에도 들르지 않았다. 능을 지키는 참봉이 사는 재실에도 발을 들여놓지 아니했다. 말을 달려 그대로 능상으로 올랐다. 강비의 무덤을 찾는 마음, 일각이 감추같이 간절했던 때문이다. 말을 타고 가던 태상왕은 비각 앞에서 내렸다. 아무리 왕비라 하나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 정자각의 단청은 아직도 새로웠다. 자기가 친히 역사를 감독했던 둥글고 큰 능침은 아직도 장엄했다. 곡장도 허술한 곳이 없고, 망주와 장명등이며 혼유석도 아직은 윤이 흘렀다. 문무석과 양마석도 별 탈이 없었다. 푸른 잔디는 만간들이 청담요를 깔아논 듯한테 솔바람, 새소리는 태조의 간장을 짓이겨놓는 듯 애를 끊어주었다. 태조는 능침 앞에 우뚝 섰다. 강비의 아름다웠던 얼굴이 무덤 속에서 나타났다. 생시와 같은 방긋 미소를 지어 웃었다. 붉은 입술에 흰 이가 상긋 드러났다.
'상감마마 듭시옵니까.'
옥소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듯했던 살아 있을 때 강비의 음성이 부드럽게 귓전을 울렸다. 태조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쳤다.
"내가 왔소, 내가 왔어!"
미친 듯 혼자말을 했다. 순간 강비의 얼굴은 스러지고, 푸른 풀이 우거진 둥그런 무덤만 남아 있다. 낙락장송 솔가지들이 흔들렸다. 바람이 '쏴...' 하고 일어났다. 어디서인지 뻐꾹새 울음소리가 '뻐꾹뻐꾹' 처량하게 들렸다. 또다시 슬픔이 복받쳐 올라왔다. 무덤을 향하여 소용없는 소리를 푸념했다.
"방석과 방번은 신체마저 찾을 길 없고...."
그대로 울음보가 터졌다. 어린애처럼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송도에서 못 울었던 원통하고 기막힌 울음을 강비의 무덤 앞에서 목을 놓고 울었다. 목은 이색이 아들이 죽었다는 구슬픈 소식을 듣고 여주 산골 속에서 통곡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보복의 이치가 이같이도 밝고 밝게 찾아드는가 하고 다시 한번 통곡을 했다. 태조는 강비의 무덤 앞에 펄썩 주저앉았다. 잔디풀을 휘어잡고 목을 놓아 울었다. 나라는 이씨가 차지했지만, 집안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내관과 궁녀들이 울음을 그치시라고 만류했으니 막무가내로 통곡성은 그치지 아니했다. 어느덧 해는 기울어 인왕산 반허리에 걸려서 낙조가 타는 듯했다. 흥천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기 시작했다. 주지는 석장을 짚고 능상으로 올랐다. 대왕의 행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왕림하기를 기다렸으니 아무리 기다려도 아니 오시니, 능상으로 찾아온 것이다. 주지는 무덤을 향하여 통곡하는 태상왕을 향하여 합장을 올렸다. 태상왕은 주지가 합장배례를 올리는 것도 모르고 넋두리를하여 울었다.
"나도 어서 당신과 같이 세상을 떠나야 하겠소. 내 홀로 무슨 낙이 있어서 살겠소. 만사는 모두 다 한줌 물거품이 되었소. 죽어서 혼백이라도 당신과 함께 있기 소원이오...."
태상왕은 땅을 두드리며 울음을 계속했다. 흥천사 주지는 보기에 딱했다. 어전으로 바싹 다가섰다. 큰 소리로 아뢰었다.
"강비마마의 혼령을 모시고 있는 흥천사 주지, 문안드리오."
'강비마마의 혼령을 모시고 있는 흥천사 주지'라는 소리가 태상왕의 귓전을 울렸다. 태조는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과연 장삼에 만수가사를 어깨에 두른 노화상 흥천사 주지가 합장을 드려 문안을 올리고 있었다.
"주지, 그동안 평안했는가?"
태조는 눈물을 거두고 주지를 향하여 말씀을 내렸다.
"성상전하의 하념해주신 덕택으로 대불과 강비마마의 혼령을 모시고 무사히 지내고 있습니다. 돌연 거둥하셨단 소식을 듣고, 흥천사에 임어하시기를 기다렸사오나, 아직껏 내려오지 아니하시므로 감히 능상에 올라 문후를 드립니다."
태조는 흥천사 주지를 만나보자, 문득 경순공주의 생각이 났다. 자기가 정릉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먼저 뛰어 올라올 사람은 경순공주다. 그러나 주지까지 왔는데, 적적히 소식이 없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태상왕은 주지를 향하여 물었다.
"내 딸 경순공주도 잘 있는가?"
"네, 안녕하시옵니다. 흥천사 뒤에 조그마한 암자를 지으시고 모후마마의 명복을 비시면서 불경공부에 전심하고 계십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반드시 먼저 뛰어올 사람인데 어찌해서 보이지 않는군. 따로 떨어져 있는 암자이기 때문에 내가 왔다는 소식을 모르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몸이 혹시 불편한가?"
"아니올시다. 전하께서 행차하신 소식을 듣고 소승이 어찌 공주마마께 거둥하신 일을 연통해 드리지 아니할 리가 있습니까. 어가가 능상에 오르시는 즉시 공주마마께 알려드렸습니다. 그러나 사양하시고 아니 나오십니다."
"사양하다니 무슨 소린가? 아비 만나는 일을 사양할 리가 있나?"
태조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흥천사 주지는 합장을 하고 아뢴다.
"공주마마께서는 아바마마를 만나보고 싶으신 마음은 태산 같사오나, 일단 법복을 입으신 몸이라 맺고 끊은 듯한 결곡한 마음으로 사양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관음보살의 후신이십니다. 전하! 해도 저무록 날도 쌀쌀합니다. 강비마마의 원당이신 흥천사로 내려가시어 자세한 말씀을 들으시옵소서. 곧 강비마마의 상식을 올릴 때가 되었습니다."
이때 흥천사의 저녁 종소리는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들려왔다. 강비의 상식상을 올리는 종소리 같기도 했다. 태조의 마음은 강비의 무덤에서 홀연 혼령을 모신 위패로 옮아졌다. 눈물을 거두고 혼유석 앞에서 일어났다. 주지와 시녀를 거느리고 능침을 떠나 흥천사로 향했다. 태상왕 전하가 절로 향한다는 소식은 쏜살같이 절로 내려갔다. 백여 명 승려들이 일제히 동구 밖까지 나와 지영을 했다. 남승 틈에는 송락을 머리에 쓴 여승들도 수십 명이 나열해 있었다. 태상왕은 합장을 올리는 승려들에게 고개를 끄덕해 답례를 했다. 더구나 여승들이 늘어서 있는 곳에는 유심하게 눈을 들어 살펴보았다. 혹시 이 속에 사랑하는 딸 경순공주가 마중을 나와 서 있지 아니한가 하고 살펴본 것이다. 그러나 경순공주의 모습은 이내 보이지 아니했다. 주지는 태조를 곧 대웅보전으로 인도했다.
"지금 곧 강비마마께 저녁 상식을 올립니다. 전하께서는 오래간만에 상식 올리는 행사에 참례해 주시옵시오."
주지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법복을 입은 승려들든 황금으로 부어 모신 석가모니불 앞에 고양메를 올리고, 다음 연화꽃 속에 단정하게 모슨 조선국 왕후 강비의 위패 앞에 상식 진지를 올렸다. 태조는 주지가 하라는 대로 부처 앞에 예불하고 강비의 위패앞에 국궁을 했다. 향연은 전각 안에 가득하고 황촛불은 등심을 튀겨 벌룽거렸다. 승려들의 독경 소리가 경근하게 일어나고 범패와 바라치는 소리가 석양이 꺼지려는 황환 하늘로 흩어졌다. 태조는 죽은 강비가 저를 들어 음식을 흠향하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온자하고 아름다웠던 의젓한 모습이 촛불 앞에 향연 사이로 떠오르는 듯했다. 태조는 또 한 번 경순공주의 생각이 났다. 반드시 이 자리에 함께 와 있어야 할 공주의 모습이 보이지 아니했다.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다고도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변했나 하고 의심해보기도 했다. 얼마 후에 상식 절차는 끝이 났다. 독경 소리도 그쳐지고 고양메도 물려졌다. 태조는 주지의 인도로 선방으로 내려갔다. 상좌 중은 작설차를 바쳤다. 태조는 경순공주의 일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차를 마시면서 주지한테 물었다.
"아까, 능상에서도 물었거니와 공주가 어찌해서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도 나와보지 않는가. 능상에는 아니 오를지라도 상식을 올릴 때는 반드시 참례할 줄 알았더니 전각에도 뵈지 아니하니 내 마음이 서운함을 금할 길 없네."
주지는 미소를 지어 염주를 굴리며 아뢴다.
"전하! 조금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공주마마께서는 공부가 대각하신 경지까지 당도하셨습니다. 소승이 태상왕 전하께옵서 왕림하셨으니 지영을 합셔야 한다고 누차 아뢰었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자리를 피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미 진세의 연을 끊고 불제자가 된 몸이다. 태상왕 전하께서 비록 왕림하신다 하나 사사로운 부녀간의 혈연이 있다 해서 존엄한 어른을 맞이할 수 없다. 태상왕 전하께서 흥천사에 왕림하셨으니 필연코 모후와 방석을 극락으로 천도하기 위해서 재를 올리실 것이다. 그때, 한 사람의 여승의 자격으로 재 올리는 데 참예했다가 잠깐 뵙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급히 뵙고 싶은 마음 태산 같다마는 이미 속연을 끊은 몸이니 정을 누르고 불제자의 몸으로 천천히 뵙기로 하겠다.'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갸륵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태조는 주지의 말을 듣고 비로소 황연히 깨달았다.
"공주가 그동안 공부를 많이 했구나!"
태상왕은 혼잣말로 탄식한 후에 뜰 아래 서 있는 내관을 불렀다.
"흥천사에 이미 불량답을 주었거니와 그것으로 부족할 것이다. 별로이 내탕금을 주지에게 내려서 돌아간 강비마마와 세자의 외로운 혼을 천도하는 큰 재를 올리게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내관은 명을 받들어 물러갔다. 태조는 다시 주지에게 부탁했다.
"오늘은 해가 이미 저물었거니와, 내일 곧 큰 재를 거행할 수 있는가?"
"하루 말미를 주시옵소서. 모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모레 새벽에 큰 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태상왕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나라의 정부를 다시 송도로 옮겼다 하나 한양성에는 백성들이 의연히 자리잡고 있었다. 종묘와 사직도 한양에 있고 육주비전도 종로 네거리에 즐비하게 벌여 있었다. 한양성은 의연히 질번질번했다. 정릉과 흥천사는 한양성 안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으니 여느 절보다도 풍성풍성하고 중들의 얼굴에는 기름기가 흘렀다. 태상왕의 내탕금을 받은 흥천사 주지는 지전과 모전이며 청포전, 백목전으로 가서, 재올릴 물건을 풍요하게 사들였다. 나라를 개국한 태상왕 전하가 만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왕비와 불쌍하게 죽은 세자를 위하여 천도하는 재다. 승려들은 정성을 다하여 재 올릴 준비를 했다. 판도방 넓고 넓은 곳에서는 중들이 온종일 재 올릴 채비와 음식을 차렸다. 종이를 오리고 대를 쪼개서 오색으로 물을 들여서 연 등에 소용될 등을 만들었다. 흥천사 전각 앞에는 환한 오색 지등이 천 갠지 만 갠지 헤일 수 없이 달려 있었다. 판도방 큰 부엌에서는 여승들의 시루떡을 쪘다. 메떡을 찌고 찰떡을 쪘다. 한편에서는 중들이 괴임질을 했다. 생률을 쳐서 괴고 실백을 솔잎에 꿰어 담았다. 대추와 곶감엔 잣을 박아 괴고, 방약과, 만두과에 당속과 어물을 괸 치수는 접시 위로 둘레가 한 아름에 높이가 석 자 가웃이 넘었다. 호환란찬한 굄새다. 제물은 끊일 사이 없이 황금대불과 강비, 방석의 혼을 모신 대웅보전으로 올라갔다. 밤이 깊었다. 연등 줄불은 법당 앞에 불야성을 이루어 휘황하고 전각 안에는 와룡 놋촛대에 황촛불이 이곳 저곳에 벌룽거렸다. 하늘에는 은한이 자리를 옮겨 삼경을 넘어섰고 북두칠성은 광망이 더한층 푸르렀다. 하늘에서는 옥이슬을 촉촉히 대지 위로 부어내리고, 맑은 바람은 처마 끝에 달린 종경을 청아하게 흔들었다. 흥천사 종루에서 자정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대기를 뒤흔들어 일어났다. 주지가 선방 앞으로 들어가 태상왕을 모시고 있는 내관에게 고했다.
"자정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재를 올리겠습니다. 이 사유를 태상왕 전하께 아뢰어주시오."
주지는 내관에게 고하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관은 곧 선방 안으로 들어가 태조께 아뢰었다.
"주지가 들어와 아룁니다. 지금 곧 재를 오린다 합니다."
"모든 절차가 다 되었단 말이냐. 내가 친히 재에 참예하여 예불을 한다고 주지한테 일러라."
내관은 곧 주지한테 이 뜻을 전했다. 주지는 황감하고 기뻤다.
"잔하께서 친림하신다면 부처님께서도 크게 감동하시고 강비마마의 혼령과 세자마마의 영혼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럼 곧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늙은 주지는 신명이 났다. 석장을 끌고 걸음을 빨리하여 대중들이 모인 법당 앞으로 향해 나가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태상왕 전하께서 재올리는 데 친히 나오시겠다 하신다. 빨리 연 등을 해서 불을 밝히고 대중들은 법당 아래 나열해서 전하를 지영해 모시게 하라."
주지의 영이 떨어지니, 소임을 맡은 승려들은 천만 개나 되는 사방등, 육모등, 팔모등, 코끼리등, 연화 등에 불을 밝히고 남승, 여승은 좌우편으로 갈라서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태상왕 전하의 납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태조 이성계는 진사립 통영갓을 쓰고 창의를 입은 후에 내고나 한 명과 궁녀 한 명에게 호위되어 선방에서 나와 법당 앞에 나타났다. 줄불이 사면팔방에 휘황하게 켜진 속에 남승, 여승은 양편으로 갈라서서 범패를 부르며 합장을하여 태상왕을 맞이했다. 태상왕은 일일이 눈을 들어 답례 보내면서 유심하게 여승이 나열해 있는 곳을 살폈다. 경순공주가 일개 승려의 자격으로 재올릴 때나 나오겠다 했으니 이번엔 반드시 나왔으려니 하고, 여승의 늘어선 곳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경순공주의 모습은 아직도 보이지 아니했다. 태상왕은 또다시 주지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묵묵히 주지를 따라 대웅보전으로 올랐다. 전각 안에도 연등은 휘황찬란하고 황금부처가 앉은 연화대 앞에는 항연이 아늑하게 푸른 연기로 뿜었다. 태상왕이 전에 오르니 수백 명이나 되는 남녀 승려들은 붉은 가사에 먹 장삼을 입은 정장으로 서열을 지어 전상으로 올랐다. 법고가 두리둥둥 울리고 목어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재를 시작하는 군호다. 시방대불을 부르는 범패 소리가 남승, 여승의 입에서 엄숙하게 일어나면서, 높고 낮은 청종의 음향은 허공을 꿰뚫어 구름 밖으로 흩어졌다. 태조는 경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옷깃을 바로잡고 대불 앞에 합장을 했다. 주지는 태조께 고했다.
"합장만 하시어서는 아니됩니다. 향을 사르시고 예불을 하셔야 합니다."
태조는 주지가 하라는 대로 향로에 만수향을 사르고 네 번 절을 하여 예불을 했다. 태조가 사배를하여 예불을 하니 국왕보다도 더 높은 태상왕 전하가 부처께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었다. 승려들은 일제히 범패를 불러 예찬하는 노래를 올리고 춤을 맡아 추는 승려들은 바라춤을 추어 흥취를 돋구었다. 흥천사가 설치된 이래 일대 장관의 행사였다. 태조는 음식과 과종이 산같이 놓인 불단 앞에서 향을 살라 예불을 한 후에 다시 주지의 인도로 불단 우편 탁자에 모신 강비의 위패 앞으로 향했다. 연꽃과 연잎 속에 싸여 있는 강비의 위패 앞에는 역시 진수성찬이 벌여 있고, 향로 향합에, 황촛불이 한 쌍 촛대 위에 등심을 튀겼다. 태조는 사랑하는 강비의 위패 앞에 묵묵히 서서 위패를 바라보았다. 연화 속에 장지로 접어 모신 위패에는 '대조선국 왕후 강씨 신위'라고 씌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종잇장에 먹으로 쓴 글씨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눈에는 종이와 글자로 보이지 아니했다. 노란 저고리에 남치마를 두르고, 황금 쌍봉황 첩지를 칠흑같이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 위에 단정하게 얹고 있는 왕후 강씨의 젊은 얼굴로 뵈었다. 근엄하고 조촐했던 강비의 얼굴이 순간 연화대 속에서 방긋 웃음을 웃는 듯 보였다. 태조 이성계는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환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태조는 미칠 것 같았다.
"후마마!"
벌컥 소리를 지르고 강비의 위패 앞으로 한 발걸음을 더 옮겼다. 홀연 강비의 환상은 웃음이 스러지고 소리 없이 애절하게 우는 슬픈 얼굴로 변했다.
"자식들이 모두 다 방원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위도 죽었습니다. 나의 혈육이라고는 경순공주 하나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청상과부가 되다니 말이 됩니까? 방원이는 무슨 까닭에 내 혈육을 몰살시켰습니까? 전하, 원수를 갚아주시오!"
바로 살아서 낭랑하게 들리던, 귀에 익은 그 목소리다. 태조는 애가 끊어지는 듯했다.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으니 입이 굳어서 말이 나오지 아니했다. 순간, 다시 위패를 바라보았다. 강비의 모습은 머리 풀어 산발하고 상복을 입은 마귀의 환상으로 변했다. 노란 저고리에 남치마를 두른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때 묻은 베옷을 입고 땅바닥을 쳐 우는 귀신의 모습이었다. 태조는 깜짝 놀랐다. 얼른 눈을 손으로 가렸다. 옆에 있는 주지가 태조의 행동을 유심하게 보았다.
"전하! 향을 사프시고 국궁을 하신 후 염불을 하십시오."
태조는 하라는 대로 향을 사르고 염불을 했다. 강비의 환영은 사라지고 종이 위패만이 연꽃 속에 휩싸여 있었다. 주지는 태조 이성계를 세자 방석과 무안대군 방번과 경순공주의 남편인 부마 이제의 위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앞으로 인도했다.
"이곳은 세자마마와 무안대군과 부마의 위패를 모신 곳이올시다. 전하께서는 그저 분향만 하시고, 경을 들으시는 곳으로 임어하십시오."
태조는 위패가 즐비하게 놓인 곳으로 나가서 향을 향로에 넣었다. 푸른 연기가 위패 안으로 돌았다. 그윽한 연기 속에 은은히 형상이 비치기 시작했다. 칼을 목에 꽂고 슬피 우는 세자 방석의 모습이 보였다. 태조는 얼른 고개를 돌리려 할 때 머리 풀어 산발하고 오랏줄에 결박을 진 방번의 모습이 나타났다. 태조는 '음' 소리를 질렀다. 차마 볼 수 없는 형상인 때문이다. 또 몸을 돌려 외면하려 할 때 눈앞에 피를 흘리는 상투 달린 머리덩이가 딩구르 굴렀다. 사위 이제의 떨어진 목이다. 태조 이성계는 또다시 '음' 소리를 치고 창의 소매로 눈을 가렸다. 주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태상왕의 마음이 불안한 것을 짐작했다.
"이제 그만 옥좌에 앉으시어 경 읽는 절차를 들으시옵시오."
태조는 주지의 인도로 독경하는 곳으로 발을 옮겨 옥좌에 앉았다. 중들의 독경이 시작되었다. 막 경을 읽으려 할 때 전각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경순공주가 나타났다. 독경을 시작하려던 주지 이하 모든 중들은 책장을 덮고 일어났다. 머리 깎고 장삼을 입은 공주를 향하여 합장을 올렸다. 본전에 나열해 섰던 중들도 공주를 향하여 목례를 보내면서 합장을 오렸다. 공주도 합장하여 답례한 후에 부처 앞으로 나가 배례를 드리고 발걸음을 돌려 아바마마의 앞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우뚝 서 있는 관음보살 같은 공주의 눈에는 진주 같은 눈물이 스몄다. 그러나 공주는 이내 눈을 슴벅여서 눈물을 누선 속으로 흘려 넣고 아바마마 앞에 경건히 합장을 올려 꿇어앉았다. 공주의 청수하고 깨끗한 얼굴은 모든 속기를 벗어나 마치 연꽃 한 송이가 깨끗한 물 위에 고요히 아름답게 떠 있는 듯했다. 머리 깎고 승이 되어 들어올 때 애를 끊어 슬퍼하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아바마마,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조용히 한 말씀을 올릴 뿐이었다.
"얼마나 고적했느냐."
태상왕은 덥석 따님 경순공주의 손을 잡았다.
"부처께서 제 몸을 돌봐주시니 아무런 괴로움이 없었습니다. 아바마마, 소녀에 대해서는 추호도 염려 마시옵소서. 모두 다 관세음보살의 덕택으로 잘 지냅니다."
구슬을 굴리는 듯한 맑은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버지 태상왕은 항상 사랑하는 딸이 슬퍼하고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니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명랑하고 침착한 공주의 태도를 바라보니 얼마쯤 마음이 놓였다. 태조의 마음도 슬픔 속에서 벗어난 듯했다. 공주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 앞으로 향했다. 경궤 앞으로 나가 향을 사르고 목탁을 두드려 경문을 읽기 시작했다. 공주의 경문 읽는 소리는 낭랑히 대웅보전 안으로 퍼졌다.
"관세음보살이 석가모니불께 사뢰시되, 저의 전신이 생각 못한 복덕 인연으로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려 하와 대비심을 일으켜 일체의 계박을 끊고, 일체의 두려움을 없이하니 일체중생이 이 위신을 입사와 모두 다 괴로움에서 떠나 해탈이 되었으리다. 관음보살이 석가모니불게 다시 사뢰시되, 제 이제 괴로움을 받는 중생을 위하여 재앙을 덜며 난을 만나 수고하는 중생을 위하여 모애자재심왕지인 대다라니법을 일러 일체 수고하는 중생을 위하여 일체 아픈 병고를 덜어주며 악업 중한 죄를 소멸케 하고 일체의 모든 선지를 성취하여 능히 일체의 심원을 만족케하여 일체의 중생을 이익하고 안락케하여 번뇌를 막게 하여지이다."
공주의 독경 소리는 형산의 옥을 부수는 듯, 청산에 유수가 흘러가듯 유창하였다. 태상왕은 옷깃을 바로잡고 따님 공주의 독경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모든 남승, 여승들도 고개를 숙여 경건한 태도로 독경 소리를 듣고 있었다. 공주가 읽고 있는 불경은 '관음경'이었다. 태상왕은 티끌 세상에 묻혀서 물욕 속에 빠졌던 몸이 청정세계로 들어서는 듯했다. 백팔번뇌 속에 휩싸였던 마음이 약간 가벼워진 듯했다. 뿐만 아니었다. 경순공주가 뜻밖에 청상과부가 되어 끝없는 고뇌와 번민 속에서 헤매다가 이같이 조촐하고 색태를 벗은 성자에 가까운 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흐뭇하기도 했다. 경순공주는 경문을 계속해 읽었다.
"원하옵니다. 자비롭게 어여삐 여기시어 들어주시옵소서. 그때 석가모니불이 말씀하시되, 네 대자비를 속히 말하라. 관세음보살은 법자로부터 일어나시어 합장하여 바로 서시고 곧 다라니를 외우신다. 그때 관세음보살이 다라니를 읽으시니 시방세계는 우렁우렁 모두 다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보배꽃이 비 내리듯 어지러이 날아 이 다라니를 공양하니 그 아름다움이 박가범연화수자재심왕인이러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비밀하고 신묘한 글을 들어 한 번 귀에 지나가면 몸에 지닌 백천만 죄악이 모두 소멸되리라. 이 다라니는 능히 십악과 오역과 비방하는 자를 멸하고 법 아닌 설법을 하는 자와 스승과 부모님께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는 자와 세세로 살생을하여 명을 해롭게 하고 중생을 함부로 죽여 후회하지 않는 자는 아비규환하는 무간지옥으로 떨어진다."
태조는 공주의 경문 읽는 소리를 귀 기울여 명심해서 듣고 있다. 함부로 살생을하여 후회하지 안흔ㄴ 자는 아비규환 하는 무간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경문을 듣자 등에 한기를 오싹 느꼈다. 소름이 쪽 끼쳐졌다. 공주는 목탁을 두드리며 다시 경문을 계속해 읽었다.
"슬프다. 함부로 사람을 죽인 자여, 그대의 갈 길은 어느 곳인가. 불지옥으로 떨어져서 무진무진 고생을 하다가 하룻밤 하루 낮에 만번 죽고 만 번 살아서 팔만대겁에 길이 죄를 받고 영영 나올 기약이 없으리라. 만약 인자하고 선한 남자와 여인이 있어서 부모의 깊은 은혜를 갚으려하여 사람에게 청하여 다라니 경문을 외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도 죄를 받지 아니하고 한 백 년 살아 명이 다하여 임종할 때가 되어도 마음이 산란치 아니하고 시방성중보살에 각기 연화와 일산을 가지시고 둥글게 돌면서 서기 방 안에 가득한 속에 이 사람을 맞이하여 깨끗한 정국으로 왕생하면 모든 대보살들은 황금빛 찬란한 손으로 그의 머리 정수리를 만지며 좋다! 좋다! 선남 선녀여! 내 나라에 사랑라 하시리라."
목탁을 두드리며 '관음경'을 읽는 경순공주의 모습은 바로 관음보살이 경문을 읽는 듯했다. 경문을 읽는 소리를 점점 흥이 높았다. 만조가 된 조수물이 부풀어 오르듯 창일하도록 넘쳐 흘렀다. 태상왕은 뉘우치는 마음이 밀물 부풀어 오르듯 올랐다. 고려의 왕조를 뒤엎고 임금 삼대를 모조리 죽였던 일, 왕씨를 바닷속에 몰아넣어 죽였던 일, 고려의 충신열사를 모조리 죽였던 일, 두문동 칠십이인의 정의의 선비들을 죽였던 일, 모든 일이 눈앞에 선하게 나타났다. 공주가 읽는 경문 속에, '다라니경'을 읽으면 모든 죄과가 벗겨진다 했다. 자기도 '다라니경'을 읽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일어났다. 경순공주는 경문을 다 읽자 책장을 덮고 태상왕께 향하여 합장한 후에 불전에 나가 사배를 드리고 물러났다. 모든 대중들도 일제히 일어나 공주의 뒤를 따라 부처 앞에 절을 올려 예불을 했다. 경순공주가 태상왕께 고했다.
"아바마마께서도 일어나시어 예불을 하시옵소서. 예불의 끝난 후에는 부처님 앞에 선회를 시작합니다. 모든 대중들이 염불을 하면서 둥글게 돌 때, 아바마마께서도 염불을 하시고 백 번 천 번 도시옵소서. 소녀도 아바마마를 모시고 돌겠습니다. 어마마마와 세자와 방번과 부마를 천도하기 위하여 선회하는 것이올시다. 어마마마와 세자 방석이며, 방번과 이제는 아무 죄과를 전생에지지 아니했습니다. 반드시 극락세계 연화대로 천도될 것입니다. 아바마마, 슬퍼하지 마시고 극락으로 가는 분들의 명복을 빌어주시옵소서."
태상왕은 딸이 시키는 대로 옥좌에서 일어났다. 태상왕이 앞을 서고 공주가 다음에 서고 주지 이하 수백 승려들은 범패를 불러 불을 염하면서 부처 앞에 돌기 시작했다. 주지는 태상왕께 향불을 바치고 경순공주에게는 강비의 위패를 모시게 했다. 두 사람의 궁녀에게는 세자 방석과 방번의 위패를 받들게 하고 내관에게는 경순공주의 남편인 부마 이제의 위패를 모시게 했다. 주지는 목탁을 치며 뒤에 따르고 모든 승려들은 범패를 높이 불러 넓고 넓은 전각 안에서 둥글게 원을 그려 돌았다. 백 번을 돌았는지 천 번을 돌았는지 수없이 돌았다. 강비를 위시하여 원통하게 죽은 원혼들이 천도를 받아서 장차 극락세계 연화대로 가는 것을 상징한 불가에서 재를 올리는 마지막 절차다. 한 식경이 지났다. 우렁찬 북소리가 전각 아래 만세루에서 '쿵덕쿵'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중들의 부르는 범패 소리가 북소리를 군호로하여 뚝 끊어졌다. 둥그렇게 원을 그려 전각 안에서 돌던 선회의 행사가 끝이 난 모양이다. 호적을 부는 소리가 전 밖에서 일어났다. 호적 소리에 응해서 흑장삼을 입은 젊은 중들은 바라를 '뎅그렁' 울리며 쌍쌍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삼 소매가 펄럭거렸다. 흑장삼 자락이 휘날렸다. 허공을 향하여 팔을 들어 바라를 치는 금속성의 놋쇠 부딪치는 음향은 호적 소리와 함께 대웅보전이 떠나가는 듯했다. 이곳 저곳에 어우러져 추는 승려들의 바라춤은 마치 호랑나비가 피리 소리와 바라 소리에 맞춰서 춤을 추는 듯 사람의 마음을 호탕하게 만들었다. 부처에게 마지막 드리는 음악과 춤의 공양이다. 바라춤은 점점 더 신명나게 추었다. 삼현육각 아름다운 음악을 반주로하여 중들은 장삼 자락을 펄펄 날리면서 춤 잘 추는 승려들은 번쩍번쩍 두 다리를 들어 어깨를 으쓱거려 바라를 쳤다. 흰 고깔을 쓴 상좌 중이 젊은 여승과 함께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제금으로 장단을 맞추어서 바라춤 추는 승려와 마주 서서 신명을 올렸다. 바라춤이 거의 끝날 때가 되었다. 뜰 아래 만세루에서 맑은 종소리가 '뎅뎅' 울기 시작했다. 승려들은 일제히 춤을 그치고 뜰 아래로 내려서서 연 네 채를 대령해놓았다. 위패를 모실 영가다. 신위들은 장차 이 연을 타고 극락세계로 갈 모양이다. 먼저 대조선국 왕후 강씨의 위패가 실려지고 대조선국 왕세자 방석의 신위를 연에 모시었다. 다음에는 무안대군 방번의 위패가 살려지고 그다음에는 부마도위 이제의 위패가 실려졌다. 강비의 위패를 모신 연은 특별히 경순공주가 연채를 잡고 나갔다. 원통하게 죽은 원귀들이 극락세계로 향하는 대열이었다. 앞에서는 승려들이 호적을 불고 소고를 흔들고 제금을 치고 장고를 울렸다. 태상왕 이성계는 원통하게 죽은 아내와 아들과 사위의 영혼을 즐비하게 앞세우고 이들을 극락세계로 보내기 위하여 전송하는 승려들의 대열에 참예하여 연을 타고 뒤에 쫓았다. 승려의 대열은 기암괴석에 층층이 벌여 있고 낙락장송이 길길이 우거져 있는 넓고 넓은 반석 위에 강비와 방석 이하 원통하게 죽은 위패들을 내려놓았다. 승려들의 범패 부르는 소리와 염불 소리가 일어나면서 주지가 반석 앞으로 나왔다. 향로에 향을 사르고, 지방을 벌룽거리는 황촛불에 붙여 사르기 시작했다. 먼저 왕후 강비의 지방을 사르고, 다음 세자 방석의 위패를 살랐다. 방번의 지방이 살라지고 이제의 위패가 살라졌다. 푸른 향연 한 줄기가 타오르는 소지와 함께 구천으로 향하여 스러졌다. 원통하게 죽은 여러 원귀가 부처의 제도를 받아 극락세계 연화대로 향하는 행렬이었다. 어느덧 동이 환하게 터졌다. 승려들은 위패를 담았던 빈 연을 메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원귀들을 천도하는 행사가 끝난 것이다. 현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수래공수거 하는 공과 허가 있을 뿐이었다. 태조와 경순공주는 멍하니 허허탕탕한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지는 합장을 올렸다. 태조께 아뢰었다.
"이제 영가를 천도하는 재는 파했소이다. 법당으로 돌아가사이다."
주지는 태조와 경순공주를 인도하여 법당으로 올랐다. 주지는 태상왕과 경순공주에게 향다를 드리고 물러났다. 위패마저 바라볼 수 없게 된 태조는 차 마실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했다. 경순공주는 아버지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바라보자 음성을 낮추어 조용히 아바마마를 위로했다.
"아바마마! 멀리 행차를 하신 후에 밤을 새며 재를 올리셨으니 옥체 무한 피곤하셨겠습니다. 잠깐 누우시어 쉬시옵소서."
"관계치 아니하다. 조금도 피로하지 아니하다. 다만, 세상이 허무할 뿐이다. 그러나 너의 청정한 불제자의 모습을 대해보니 내 마음이 한결 깨끗해지는 듯하다."
"모두 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덕택인가 생각하나이다."
경순공주는 고개를 도소곳 숙여서 안존하게 대답했다.
"내 마음이 그같이 안정한 것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다."
태상왕은 딸이 귀여웠다. 어수를 들어 등을 쓸었다. 그러나 청상과부가 되어 머리 깎은 승이 된 것을 생각하니 금창이 메어지는 듯, 한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머리만 깎니 아니했다면 영락없이 강비의 젊었을 때 모습이로구나' 하고 마음 속으로 탄식하기도 했다. 홀연 공주가 묻는다.
"아바마마! 방간 오빠는 살았습니까?"
공주는 별빛 같은 눈을 반짝 떠서 아바마마께 물었다. 태상왕은 공주가 어떻게 그 일을 아나 하고 생각했다.
"너, 어떻게 이곳에서 방간 오빠의 일까지 아느냐?"
태상왕은 이 일을 서울서는 모를 줄 알았다. 더구나 절간에 있는 경순공주가 송도에서 일어난 일을 알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아니했던 것이다.
"보천지하가 막비왕토올시다. 신도인 서울에서 어찌 송도서 일어난 일을 모르겠습니까. 모두 다 조선 땅이 아니오니까. 더구나 이곳 흥천사는 어마마마의 원찰이 되고보니, 국가에 대한 큰일에 대해서는 다른 절간보다 크옵니다. 그리하와 아바마마께서 흥천사와 정릉으로 왕림하시는 일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방간의 목숨은 아직 살아 있다마는 앞으로 어찌 될지 나도 모르겠다. 방원이 때문,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나는 이 풍파는 과연 남을 대해볼 낯이 없구나!"
태상왕은 따님 공주를 향하여 탄식하는 말을 내었다.
"이제는 모든 일이 다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방원 오빠는 욕심을 다 채워서 왕위에까지 나갔으니 가고 싶은 데까지 다 갔습니다. 다시 별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바마마, 안심하시고 노후를 평안히 하시옵소서. 이것이 모두 다 인생이란 사바 세상의 인과보응이올시다."
경순공주의 말은 탄식하면서도 달관이었다. 공주의 말을 듣는 태상왕의 가슴이 뜨끔했다. '인과보응'이란 말이 가슴에 몹시 찔렸다. 자기가 악한 짓을 했으니 벌을 받는다는 말과 똑같다. 공주의 말을 반박할 기운도 없고 나무랄 수도 없다. 태상왕의 고개는 저절로 숙여졌다.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아바마마, 다시 송도로 돌아가시렵니까?"
경순공주는 새파랗게 깎은 머리에 총명한 눈동자를 굴려 다시 묻는다.
"송도로? 보기 싫은 놈들이 많아서 아니 돌아가련다."
"그럼 어디로 가시렵니까?"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내놓지 아니했느냐? 임금의 자리도 내놓고, 너의 어머니도 아니 계시고, 너도 산문으로 들어갔고, 나라의 정사도 내놓고, 군사권도 잃어버렸고, 모두 다 내놓았다. 산천경개나 구경 다니기로 하련다."
"산천경개를 구경하시려면 어느 곳으로 향하시렵니까?"
"너희 어머니와 네 동생들이며, 네 남편의 명복을 빌면서 양주, 연천, 철원, 안변 절간으로 돌다가 고향 구경이나 하겠다."
공주가 다시 눈을 깜빡였다.
"함흥까지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함흥으로, 서북면으로 옥가를 움직이지 마시옵소서. 정 울적하시거든 연천으로, 양주로 도시다가, 둘째 오빠 상왕 전하 모양 송도로 다시 가시어 평안히 여생을 보내옵소서."
태상왕은 불끈 화를 냈다.
"왜 날 보고 죽치고 들어앉아 있으란 말이냐. 나는 성질이 안존하지 아니해서 갑갑해 배겨날 수 없다. 너의 둘째 오라비처럼 그대로 누워 있지는 못하겠다."
"아바마마! 일이 있는 것은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아바마마, 인과보응을 좇으십시오. 이제는 가만히 앉아 계신 것이 좋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용의 기상이요, 범의 모습이십니다. 구름은 용을 따라 일어나고, 바람은 범이 움직이는 곳으로 반드시 일어납니다. 아바마마께서 움직이시면 또 한바탕 바람과 비가 일어날 테니 걱정이올시다. 인과보응을 순리로 받으시려면 송도나 서울 한양에 한가로이 누워 계시옵소서."
경순공주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태상왕 이성계는 공주의 말이 모두 다 진리요,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과연 용이요, 범이다. 자기가 움직이면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어난다. 경순공주의 생각이 어느덧 이같이 노성하도록 숙성하게 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기뻤다. 그러나 태상왕은 경순공주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했으나 도저히 자기로서는 실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보고 산송장이 되란 말이냐?"
태상왕은 뱉듯이 대답했다.
"아바마마, 소녀의 말씀은 모든 일이 안정이 되라고 아뢴 말씀이올시다. 안정이 아니되면 풍파가 일어납니다. 바람과 물결이 이는 곳에 탈이 납니다. 화한 기운으로 바람과 물결이 자도록 하시란 말씀이올시다."
태상왕은 괴로웠다.
"그저 심심하니 고향 구경이나 하자는 것이지 다른 별일이 있을 리 없다. 염려 말고 안심하여라."
아버지 태상왕은 도리어 따님 경순공주를 위로했다. 하룻밤을 흥천사에서 딸과 함께 지낸 태상왕은 양주로 향하여 길을 떠났다. 떠날 때 그는 경순공주한테 물었다.
"나하고 함흥에 함께 가도록 하자. 너의 아버지 고향이다. 그리고 너의 고조부와 증조부와 조부님의 능소에 참배도 할 겸."
경순경주는 새파랗게 깎은 머릿밑의 눈동자를 반짝하고 떠서 아버지 태상왕을 우러러 뵙다가 다시 이마를 다소곳이 숙이고 조용히 대답했다.
"소녀는 어마마마 원찰인 이곳에 있어, 조용히 이 세상에 아니 계신 여러 어른들의 명복을 빌고 있겠습니다."
조신하고 안존한 공주의 태도에 태상왕은 더 권할 수 없었다.
"아무리나 해라. 억지로 함께 가자고는 아니한다. 그러면 너는 어마마마의 원찰을 지키면서 능소를 모시며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잘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