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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2-1

2권 후계자

 

반발

 

정안군 방원을 중국 명나라로 가게 한 것은 강비와 정도전의 정치적 책략이었다. 나라를 개국하는 데 제일 공이 많은 방원이 꼭 왕세자 책봉을 받을 줄 알았는데, 얼토당토아니한 어린 아들 강비의 소생 방석이 세자가 되고 정안군 방원은 중국으로 사신이 되어 갔으니 문전은 냉락하고 찬바람이 돌 수밖에 없었다. 안 사랑채는 문까지 잠가버렸다. 바깥사랑에 청지기 한 명과 상노 두어 명이 주인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걸음을 빨리하여 정안군의 집으로 향했다. 먼지가 켸켸 쌓인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청지기와 상노들은 반갑게 민무구 형제와 조영무와 조영규를 맞이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집에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는 법이다.

"어서 오십쇼."

청지기와 상노들은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민무구 형제는 청지기한테 인사를 받으면서 안 중문서부터 큰소리로 외친다.

"누님, 저희들이 왔습니다. 무구와 무질이 왔습니다."

누님을 부르는 소리에 안 대청에서 분합문이 열리면서 삼십 대의 점잖은 미인이 미소를 풍기며 나타났다.

"자네들 어떻게 오나. 나는 누군가 했더니---어서들 올라와요."

눈이 어글어글했다. 마치 가을의 바닷물이 출렁이는 듯한 눈이다. 턱이 받히고 코가 희고도 아름다웠다. 희고도 윤이 도는 두 볼은 복성스레 뵈었다. 어디로 보나 맏며느리감이다.

"밖에 동행이 있습니다. 누님께 술을 달라고 왔습니다."

민무구 장군은 빙글빙글 웃으며 토주를 했다.

"동행은 누구들인가?"

정안군의 부인 민씨는 어글어글한 눈에 웃음을 넌지시 짓고 정답고 은근하게 동생들한테 물었다.

"조영규와 조영무올시다."

"조씨네들야. 한집안 같은 터로구먼. 그렇다면 어서 데리고 들어오라구."

민씨부인은 남편의 심복 장수인 조영규와 조영무를 잘 알고 있었다.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도 관계치 않습니까?"

"동생 같은데 무슨 상관이 있나. 큰사랑은 폐방을 해서 냉돌인데 들어 있으라 할 수 있나. 안으로 곧 데리고 들어오게. 그리고 바깥사랑에는 상노 아이들이 있지만, 바깥사랑에야 어찌 귀한 손님을 앉게 하겠나. 어서 나가서 함께 들어오도록 하게."

"누님, 그럼 술을 주시렵니까?"

"자형이 아니 계시기로서 내가 동생들에게 술 한잔이야 못 대접하겠나. 어서 손님들을 인도해서 데리고 들어오게."

민무구 형제는 기뻤다. 곧 밖으로 나가서 조영규와 조영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정안군 부인 민씨는 능소능대한 여인이었다. 뜰 아래 내려서서 조영규, 조영무를 맞이했다. 함박꽃 같은 환한 얼굴에 봄바람 같은 화기가 훈훈하게 돌았다.

"두 분 장군을 뵈온 지 참 오래입니다. 너무나 적조했습니다. 그래 정안군께서 아니 계시다고 그렇게 한 번도 찾지 아니하십니까?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제집까지 찾으셨습니까?"

언변이 좋은 민씨부인의 말에 조씨네들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려 했다. 그러나 대궐에서 직행하느라고 관복을 그대로 입고 왔으니 마음대로 사모 쓴 머리 뒤를 긁을 수가 없었다. 손이 머리 뒤로 갔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죄송합니다. 그저 자주 와서 문후를 드리지 못하여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안녕하시다는 말씀은 민장군을 통하여 항상 듣삽고 있습니다. 굽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조씨네들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민씨부인의 능소능대한 크나큰 힘에 남자건만 저절로 기운이 눌리는 모양이다.

"어서들 올라오시오. 그리고 자네들은 왜 이러고 섰나. 마치 손님 노릇 하듯 한단 말인가. 어서 빨리 안방으로 모시고 들어가게."

민부인은 아우들에게 손님을 인도하라고 부탁했다.

"이것, 참 죄송합니다."

조씨네들은 다시 더 한 번 민부인께 인사를 올린 후에 민씨네 형제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민부인은 아담하게 술상을 차려서 비자한테 들리고 친히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아우들이 토주를 하러 왔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정안군께서 계실 때보다 아니 계실 때 이같이 찾아주시니 계실 때 백번 오시는 것보다 아니 계실 때 한 번 와서 돌봐주시는 것이 얼마나 내 마음이 대견하겠습니까. 진정 고맙소이다. 자아, 첫 잔은 내가 따라서 한 잔씩 올릴 테니 안주 없는 술이지만 맛있게 잡수시오."

민씨부인은 말을 마치자 네 사람 앞에 차례로 술을 붓는다. 모두들 황감했다.

"잘 먹겠습니다."

일제히 치사를 했다.

"대궐에서 나오는 길인가?"

민씨부인이 묻는다.

", 그러하옵니다."

동생 민무구가 대답했다.

"오늘 전도 축하로 만조백관한테 비원에서 사찬을 내리셨다며?"

", 그랬습니다. 저희들도 부르시는 명을 받잡고 입시했다가 먼저 나오는 길이올시다."

"아직도 파하지는 아니하였군."

", 그렇습니다. 지금 정도전이 고주망태가 되어 흥겹게 놀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관입니다."

민부인은 정도전이 가관이라는 동생의 말을 듣고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정도전은 막내아기씨로 세자책봉을 주장했다가 성공을 했고, 이제 대궐터까지 자기가 정했으니, 시세를 만난 것 아닌가. 마음이 흥락하니 사찬 내리신 술도 잘 마실 테지."

"정도전은 참말로 배은망덕하는 사람이올시다. 정몽주가 집권을 했을 때 옥에 내려 가두고 당장 곧 죽이라고 할 때 정안군께서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시고 황해도로 말을 달려서 전하를 모시고 송도로 들어와 반격을 해서 옥 속에서 저를 구해내셨던 것입니다. 그때, 정안군께서 구하지 아니하셨더면 정도전은 꼭 죽는 몸이었습니다. 이같이 은혜를 입은 자가 배은을 하고 강왕후한테 붙어서 막내 왕자로 세자를 책봉시킨 것은 가통 가증한 일이올시다. 이런 자는 곧 죽여버려야 합니다."

조영무는 팔을 걷어붙이며 불평을 했다.

"죽일 놈은 정도전뿐이 아닙니다. 남은이도 죽여야 합니다. 우리 정안군께서 얼마나 남은을 신임하셨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살짝 강왕후한테로 붙어서 방석을 동궁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보자 정도전의 어금니가 되어서 갖은 아첨을 다하고 있습니다. 참말 꼴불견이올시다."

이번엔 조영규가 남은도 죽여야 한다고 우겨댔다.

"좌우간 모두 다 괘씸한 자들이지. 왕세자 책봉을 해놓고 정안군이 불평을 일으킬까 보아 세자책봉과 한양 천도의 주청사를 삼아서 슬며시 중국으로 보냈으니 뒷공론을 못 하게 하자는 얕은 꾀지. 소위가 얄밉고 괘씸하거든. 이것은 모두 다 정도전의 잔꾀란 말야. 매부가 돌아오시기만 하면, 한 번 이 자들에게 벼락 불덩이를 내려야 하네."

이번엔 대장 민무구가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정도전을 별렀다. 정안군 부인 민씨는 주전자를 들어 여러 사람들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면서 침착한 얼굴빛을 지었다.

"만사가 다 때가 있는 법일세. 분하다고 함부로 떠들어서는 아니 되네. 오늘날 정안군께서 중국으로 사신이 되어 가신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만약에 나리께서 이곳에 그대로 계셨던들 무슨 화가 미쳤을지 모르네. 나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잘되었다고 여기네. 여러분들은 공연히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때를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네."

민씨부인은 어디까지나 침착했다. 민부인의 말이 떨어지자 이번엔 민무질이 대답했다.

"누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공연히 우리가 흥분해서는 아니 됩니다. 앞으로 큰일을 하자면 태도를 숨기고 아무 생각도 없는 듯, 침착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매부가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립시다."

불평을 뿜어 기염을 토하던 정안군의 심복 장수와 민씨 형제들은 민씨부인의 의젓하고 침착한 말에 눌려서 다시는 더 떠들어대지 못했다. 민씨부인은 따뜻한 음식과 맛좋은 술을 내어 동생과 남편의 부하들을 흡족하게 대접한 후에, 불평하는 마음을 겉으로 나타내서는 아니 된다고 차근하게 당부해서 돌려보냈다. 정안군의 심복 장수와 처남 형제들은 정안군 부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모든 분한 일을 참고 정안군이 본국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났다. 정안군은 명나라에 가서 동생 방석으로 세자를 책봉한 일과, 송도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일을 명나라 황제 주원장에게 보고한 후에 여러 각료들과 교환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명나라 각료들은 정안군의 개국할 때의 공로를 알고 있었다. 더구나 호걸스런 풍채를 대해보고 정안군이 세자가 되지 아니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중국 원로대신의 한 사람은 정안군의 손을 반갑게 잡고 동정하는 얼굴빛을 지어 말했다.

"당신이 세자가 되어 일후에 왕위에 나가게 되었더라면 조신이 더 한층 강한 나라가 될 것을, 아까운 일이오."

한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방원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왕위에 나가고 아니 나가게 되는 것은 모두 다 천명입니다. 사람이 천명을 거역할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정안군은 태연히 대답했다. 정안군의 대답은 무한 의미가 깊었다. 사양하고 겸손하는 말 같았으나 말 속에는 크게 함축이 있었다. 중국의 원로대신은 정안군의 손을 덥석 잡고 탄복하는 말을 보냈다.

"그렇소. 천명을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오. 당신의 말씀은 과연 위대하오."

두 번, 세 번 정안군의 손을 긴하게 잡고 흔들었다. 중국의 원로는 벌써 정안군이 비범한 인물이란 것을 짐작한 때문이다. 정안군은 이로 인하여 더욱 자신이 가득했다. 패기만만한 마음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왔다. 정안군이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온다는 기별은 먼저 본집으로 전해졌다. 부인 민씨는 곧 친정 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에게 기별했다. 정안군의 심복 장군과 민씨네 형제들은 곧 의주로 달려가 정안군을 맞이했다. 거의 일 년 만에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했던 처남 형제와 조영규, 조영무를 만난 정안군의 기쁨은 말할 길이 없었다. 정안군은 일일이 손을 잡아 동지들에게 인사한 후에 나라 안 소식을 물었다.

"전하께서도 강녕하시고 조정에도 별다른 일이 없소?"

민무구가 먼저 대답했다.

"천도 직후라 민심은 아직도 안정이 아니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새로 궁전을 지으신 후에 한참 재미가 나시어 즐겁게 지내십니다."

정안군이 채 다음 말을 묻기 전에 조영규가 고했다.

"대감께서 중국으로 가신 후에 정도전의 의기는 더욱 양양 자득해서 가관이었습니다."

"어찌해서?"

정안군은 호걸다운 씩씩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물었다.

"대감이 가신 후에 정도전은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승이 되었습니다. 여기다가 삼군을 장악하고 지휘하는 삼군부 도총관이 되었으니, 정승에다 군사권을 잡은 총대장이 되었습니다.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친 셈이올시다.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정안군은 조영규의 고하는 말을 듣자 얼굴빛이 약간 흐렸다가 이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도전은 다재다능한 사람이니, 정승이 될 만한 사람일세."

정안군은 겉으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온 나라의 군사권까지 장악한 것은 너무나 과합니다."

이번엔 조영무가 말참례를 했다. 정안군은 또다시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세자를 보호하는 큰 책임을 맡겼으니, 그에게 일국의 군사를 통솔하는 권한을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세자의 신변을 보호하자는 목적이겠지."

정안군은 겉으로 태연한 듯하나, 비꼬아서 대답하는 말투였다.

"세자는 나라의 근본입니다. 만백성이 받들어 추대하고 만조백관이 받들어 보호해야 합니다. 세자가 정도전 한 사람의 사사로운 사유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장수는 국가 전체를 보호하는 간성이올시다. 세자 한 몸만을 보호하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모두 다 강비의 얕은 소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번엔 민무구가 분개해서 말했다.

"여러분들, 모르는 말씀이오. 정도전에게 어찌해서 우의정에다가 삼군부 도총관을 임명한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정도전에게 군사권을 맡긴 것은 우리 정안군 나리가 두려워서 그에게 군사권을 맡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대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이번엔 민무질이 팔뚝을 걷어붙이며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주장했다. 정안군은 빙그레 웃으며 심복들의 떠들어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책을 세워야지,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어. 단연코 내버려 둘 수는 없소."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철퇴를 암살했던 조영규가 입에 거품을 뿜어 떠들었다.

"자형! 이번에 형님을 세자책봉사로 중국에 보낸 까닭을 아십니까? 앞으로 자형의 행동을 막아버리자는 뜻입니다. 형님의 입으로 '방석의 세자책봉을 인정해주시오' 하고 명나라 황제한테 고했으니, 다시는 세자의 자리에 대하여 꼼짝없이 이론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놓게 한 것입니다. 도대체 수단과 방법이 너무나 교묘합니다. 형님이 주청사로 가신 것이 불찰입니다."

이번엔 민무구가 떠들어댔다. 정안군은 빙긋 웃고 대답했다.

"아니 가고 어찌하나. 신자의 도리에 왕명을 어찌 거역하나. 다 하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일세."

하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정안군의 말을 듣자 조영규는 분개함을 이기지 못했다.

"나리, 하늘 뜻은 사람이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늘 뜻을 만들지 않고 어찌 하늘이 명령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상감께서 위화도에서 회군하신 일도 하늘 뜻입니까? 나리께서 소인을 시키시오.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 위에서 철퇴로 때려죽인 일도 하늘 뜻입니까? 하늘 뜻과 시세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드는 것이올시다."

정안군은 조영규의 말을 듣자 소리 높여 껄걸 웃었다.

"허허허, 자네 참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으로 알았더니 아주 미련하기 짝이 없는 친구일세그려. 들어보게. 위화도 회군이 하늘 뜻이 아니었더라면 상감께서 어찌 혁명에 성공하셨을 수 있었겠나. 하늘 뜻이 아니었다면 역적이 되시고 마는 것일세. 만약 포은이 그때 죽지 아니했더라면 위화도에서 회군했던 일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일일세. 모두 다 하늘 뜻이었기에 일이 성공이 된 것일세. 공연히 쓸데없이 팔뚝을 걷어붙여서 분개하지 말고 하늘 뜻에 순종해야 하네."

정안군의 의미 깊게 타이르는 말에 모든 심복들은 다시 더 항변을 하지 못했다. 정안군은 의주를 거쳐 새로 천도한 한양을 향하여 들어갔다. 정안군이 세자 책봉한 주청사의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다는 기별이 조정에 들어가니 백관들은 성밖 십 리까지 나가 맞이하고 아버지 상감은 특사를 보내서 그의 노고를 위로했다. 정안군은 대궐로 들어가 곧 어전에 복명했다. 부왕 이성계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무사히 큰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으니 내 마음이 기쁘다."

부왕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다섯째 아들 정안군을 굽어보았다.

"아무 별일 없이 주청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모두 다 아바마마의 크나크신 덕이올시다."

부왕 이성계는 정안군이 화평한 얼굴로 아뢰는 것을 보자 더욱 마음이 흡족했다.

"황제께서 아무런 다른 말씀이 없이 가납하시더냐?"

"처음에 약간 의아하게 생각해서 신에게 물으셨습니다. 어찌해서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제쳐놓고 끝의 왕자로 세자를 봉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태조의 얼굴빛이 잠깐 변해졌다.

"그래서?"

태조는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정안군은 태연한 얼굴빛으로 아뢰었다.

"'모두 다 하늘 뜻이니 천기는 소신 따위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하고 아뢰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초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어서 하회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어째 세자를 봉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냐'하고 반문하셨습니다."

태조는 더욱 궁금했다.

"그래 무어라 대답했느냐?"

"'세자는 다음 대에 왕위에 나갈 사람이올시다. 일국의 왕위에 나가게 되는 일이 어찌 하늘 뜻으로 되지 않고 사람의 마음대로 정해지겠습니까.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 어른께서 원을 멸하고 황제위에 나가신 것도 다 하늘 뜻이 아니오니까. 그때 누구 명태조께서 천자가 되실 줄 꿈에나 생각했겠습니까. 조선이 비록 작은 나라라 하나, 세자는 다음 대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모두 다 하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같이 아뢰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바싹 정안군의 앞으로 무릎을 밀었다.

"황제는 다음에 무어라 하시더냐?"

"황제는 비로소 용안에 미소를 띠고 '과연 경의 말이 옳다' 하시면서 비서승을 불러서 '조선 국왕의 세자책봉 주청을 인정하라' 하셨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비로소 마음이 흐뭇했다. 정안군을 향하여 칭찬하는 말씀을 내렸다.

"잘했다! 능란하게 대답을 했구나."

정안군은 복명을 한 후에 어전에서 물러났다. 태조 이성계는 차례를 바꾸어 방석으로 세자를 봉한 일이 마음에 걸려서 명나라에서 인정을 해주지 아니하면 어찌하나 하고 항상 불안감을 가졌던 일이, 정안군의 대답 한마디로 무서 타협이 되어 정식으로 세자책봉의 인준을 받게 되었으니 마음이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곧 내시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정안군이 멀리 명나라에 가서 세자인준을 주청해서 허락을 받고 돌아왔으니 수고가 크다.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어 만조백관을 회동하여 그의 노고를 위로하라. 특히 세자도 이 자리에 참석하여 정안군에게 치사를 하게 하라."

내시는 봉명하고 물러나 곧 연회를 준비했다. 경복궁 근정전 넓은 전각 안에는 세자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갔던 정안군의 환영연이 호화찬란하게 열려졌다. 만반진수와 향기 높은 술이 가득하게 차려진 전각 안에는 궁녀와 무희들이 아름다운 화관과 눈이 부신 채색옷을 입고 벌여 섰고, 악공들의 거문고와 가야금 소리는 아련히 전각을 휩싸 안아 높고 높은 푸른 하늘로 흩어졌다. 시각이 되었다. 만조백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영의정 배극렴, 좌의정 조준, 우의정 겸 삼군도총부 도총관 정도전, 병조판서 남은 등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신으로 대제학 민제의 얼굴도 보였다. 정안군의 장인이었다. 다시 개국 공신이요 대장의 지위에 있는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얼굴도 보였다. 대제학 민제의 아들이요 정안군의 처남들이었다. 또다시 정안군의 심복인 조영규, 조영무의 얼굴이며 정안군이 마음으로 존경하는 하윤의 모습도 보였다. 이윽고 정안군이 왕자의 대례복인 자줏빛 비단 관복에 백공작 흉배를 붙이고 황금으로 장식한 서대를 가슴 아래 높직이 띠고 들어왔다. 이십대의 청년 왕자는 위풍이 늠름했다. 뒤에는 정안군의 시종들이 호위해 들어왔다. 넓죽한 이마에 눈은 부리부리해서 화경 같이 빛났다. 코는 우뚝하고, 큼직한 입은 한일자로 굳게 닫혀져 있다. 우람하고 굉걸한 근정전 큰 전각이 정안군의 위풍에 눌리는 듯했다. 정안군이 들어오자 풍악은 자지러지게 일어나고, 만조백관들은 정안군의 앞으로 나가서 반갑게 인사를 올렸다. 배극렴, 조준, 정도전이 앞으로 나가서 다투어 인사를 보냈다.

"정안군 대감, 태평히 다녀오셔서 기쁩니다."

영의정 배극렴이 백수를 흩날리며 읍을 올려 인사했다. 정안군은 배극렴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방석으로 세자를 삼으려고 상감이 물었을 때 세자는 형제의 차서대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정안군은 반가운 얼굴로 배정승의 읍에 답례한 후에 쾌활하게 대답했다.

"노래에 나랏일을 보시느라 얼마나 수고하시오."

배정승을 위로했다. 다음에 좌의정 조준이 정안군의 앞으로 나와 읍을 올렸다.

"무사히 큰 임무를 마치시고 돌아오시니 국가네 이만 다행이 없습니다."

조준은 진심으로 정안군이 파탄 없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 기쁘다. 두 번 세 번 허리를 굽혀 치하했다. 조준은 세자책봉을 의논할 때 큰아들로 세자책봉을 못할 경우에는 창업할 때 가장 공이 많은 아들로 세자책봉을 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가 강비가 병풍 뒤에서 통곡을 하는 바람에 기가 죽어서 아무 말도 못 했던 사람이다. 정안군은 조준한테 역시 호의를 가졌다.

"좌상 대감, 그동안 태평하셨소."

반갑게 말하고 미소를 던져 은근하게 정을 표했다. 우의정 정도전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정안군에게 향하여 읍을 올린 후에 치하를 올렸다.

"이번 대감의 행차로 인하여 국가는 반석 위에 올라앉아 만세일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정안군은 정도전의 교묘한 슬기와 수단 높은 행동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정도전은 정안군과 사생을 같이할 것을 맹세했던 동지였다. 정도전은 정안군의 아버지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의 우왕을 내치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부터 이씨의 편이 되었다. 정안군의 동지가 되어 창왕을 세웠다가 또다시 내쫓고, 더욱 정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공양왕을 세웠으나 포은 정몽주한테 밀려서 옥에 갇히게 되었다. 정안군은 조영규를 시켜서 포은을 암살하고, 정도전을 옥에서 구해냈다. 정도전은 이때 정안군을 재생의 은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가 왕위에 나아가고 강비가 왕후가 되어 태조의 사랑을 한몸에 지니게 되었다. 강비는 자기 소생인 방석으로 다음 대의 왕이 되게 하기 위하여 정도전으로 방석의 스승을 삼고 세자로 추대할 것을 공작했다. 지나치도록 영민한 정도전이었다. 부귀영화를 자질해보았다. 슬며시 강비편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안군은 정도전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방석으로 세자를 삼을 때 정도전은 정면으로 가타부타 말하지 아니했으나 강비가 병풍 뒤에서 울게 한 것도 세상에서는 정도전이 가르쳐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번에 정안군으로 세자책봉 주청사를 삼아서 명나라로 가게 한 것도 정안군이 앞으로 어떠한 행동을 못하도록 막아버리자는 정도전의 교묘한 수단이었다. 자기 자신의 입으로 방석의 세자책봉을 외국에까지 가서 인준을 청한 사람이 국제적 위신상 도저히 방석을 배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안군은 정도전의 수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흔연히 정도전의 손을 잡았다.

"덕분에 중국 구경을 잘하고 돌아왔소이다."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정도전의 수단과 지혜도 높지만 정안군의 단수도 높았다. 호락호락 정도전의 수단에 넘어갈 정안군이 아니었다. 정안군은 아무런 거리낌이 마음속에 없는 듯 쾌활하게 정도전을 대했다. 정도전은 다정한 표정을 얼굴에 띠고 정안군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명나라 조정에서 세자책봉에 대하여 군소리 없이 인정해준 것은 순전히 대감께서 가셨기 때문에 일이 순성된 것입니다. 이번에 대감의 공로는 과연 크십니다."

간드러지게 마릉 ㄹ붙이는 정도전을 향하여 정안군은 소리 높여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 허 허. 우상 대감, 그게 무슴 말씀요. 누가 간들 명나라에서 세자인준을 아니할 도리가 있겠소. 아무리 명나라가 우리보다 땅이 넓고 부강한 나라라 하나 남의 나라의 내정간섭을 어찌 한단 말요. 큰일을 하는 정치가들은 남의 나라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법이오. 크나큰 이권을 가지고 승강이를 하지, 그까짓 세자책봉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까닭이 있소. 공연히 작은 문제를 가지고 우상 대감은 너무 소심하게 생각해서 부들부들 떨었구려. 이제 대담은 나랏일이나 잘 다스리시오."

정안군의 기걸찬 말에 정도전은 한 손을 접히고 말았다. 머쓱하게 물러섰다. 삼정승 이하 만조백관들이 정안군을 둘러싸고 한동안 인사가 분분할 때, 근정전 뜰아래서 떠들썩 하는 소리가 들리며 세자 방석의 행차가 들어왔다. 어린 세자 방석은 아바마마의 명에 의하여 다섯째 형님 정안군의 환영연회에 참여하러 나온 것이다. 동궁 시녀와 왕후의 시녀들에게 옹위되어 세자 방석은 통천관에 진달래빛 연분홍 강사포를 입고, 춘방사령들이 어깨에 멘 견여를 타고 근정전 마당으로 들어왔다. 춘방내시가 목청을 높여 전각 위로 향하여 고했다.

"동궁 아기씨 듭시오."

삼정승 이하 만조백관들은 좌우편으로 갈라져서 뜰 아래 내려 맞이했다. 지위가 삼강의 다음 가는 세자였다. 나이 비록 어리다 하나 전각 위에서 맞이할 수 없는 때문이다. 모든 대신들이 모두 다 뜰 아래 내려서 세자 방석을 맞이했으나, 오직 정안군은 우뚝 전상에 서서 내리지 아니했다. 세자 방석은 대신들이 몸을 굽혀 맞이하는 인사를 받고,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환영연이 벌어진 근정전 대청으로 올랐다. 모든 대신들도 뒤를 따라 올랐다. 전각 위에 우뚝 서 있는 정안군은 세자 방석이 전각으로 오르는 것을 보고도 허리를 굽히지 아니하고 뻣뻣이 서 있었다. 화경 같은 커다란 눈에는 금방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세자 방석은 순진했다. 오래간만에 다섯째 형님 정안군을 대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정안군은 자기 일로 중국까지 가서 세자 책봉하는 허락을 맡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을 어린 두 볼에 가득히 머금고 두 손을 마주 잡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형님, 안녕히 다녀오셨소?"

소년 세자의 사기 없는 웃음은 귀여운 보조개를 그리며 붉은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정안군은 타는 듯한 눈으로 세자 방석을 흘깃 흘겨본 후에 옆에 서 있는 제학 하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엇따. 세자 방석은 무참하기 짝이 없었다. 주춤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만조백관들의 시선이 세자 방석과 정안군에게로 모여들었다. 강왕후의 시녀와 세자궁의 시녀를 위시하여 우의정 정도전과 병조판서 남은의 시선들은 날카롭게 정안군한테로 모여들었다. 정안군이 아무리 연장자인 형님이라 하나 방석은 임금 다음 자리에 있는 세자였다. 조체로 따진다면 정안군은 형님이라 하나 일개 왕자요, 방석은 나이 어린 아우라 하나 다음 대에 왕이 될 세자였다. 방석이 근정전으로 올라올 때, 정안군은 대신들과 함께 뜰 아래 내려가 맞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안군은 뜰 아래 내려가 맞이하지 아니했다. 세자 방석이 전각에 올라 정안군의 앞으로 나갔을 때 정안군은 먼저 세자를 향하여 몸을 굽혀서 예를 드렸어야 할 것이다. 아우에게 예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세자한테 예를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세자가 먼저 정안군에게 향하여 몸을 굽혀 절을 올렸다. 그나 그뿐인가. 어린 세자는 천진난만하게 '형님, 안녕히 다녀오셨소?' 하고 인사를 했을 때 정안군의 눈은 세자를 흘겼을 뿐, 아무런 대꾸도 아니했다. 정안군의 세자 방석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방약무인한 태도였다. 적의 가득한 태도였다. 왕후궁 시녀를 위시하여 대신 정도전은 날카로운 눈으로 정안군의태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자가 들어온 후에 음악은 다시 질탕하게 일어나고, 무희들의 춤은 자지러졌다. 백관들은 잔을 들어 정안군에게 다투어 권했다. 원래 정안군의 수고를 치하하는 환영잔치였다. 정안군이 잔치의 주인공이 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사람마다 정안군에게 찬사를 올리며 술을 권했다. 정안군은 호걸남아의 풍도였다. 욕심도 많고 기운도 좋았다. 주량도 보통이 아니었다. 사양하지 아니하고 백관들이 따라 올리는 술을 마시었다. 술만 잘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말이 또한 웅변이었다. 옆에 하윤이 술을 따라 올리며 정안군한테 물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천하의 걸출이라 합니다. 만나보시니 어떠하옵니까?"

하윤이 웃으며 물었다. 정안군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 , . 이약 하학사의 학식으로 그런 질문을 한단 말씀요. 주원장은 사람입니다. 사람 이상의 사람도 아니고, 사람 이하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만하면 사람이라 하겠습디다."

하윤도 대담했다. 주저치 않고 만좌중에 다시 묻는다.

"대감과 견주어 어떠하옵디까?"

"주원장이도 사람 이상의 사람이 아니고, 이방원이도 사람 이하의 사람이 아니지. 하하하."

정안군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근정전 대들보가 쩌렁쩌렁 울렸다. 뜻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하윤과 정안군의 대화를 듣고 혀를 훼훼둘렀다. 병조판서 남은이 정안군의 마음을 떠보려 했다. 잔에 가득 술을 부어 정안군의 앞으로 나가 술을 올리며 물었다.

"명나라 조정에서 혹시나 번거롭게 묻지나 아니했습니까?"

남은은 조심성스럽게 물었다. 정안군은 눈을 딱 부릅뜨고 거나하게 취기를 띠며 남은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무엇을 번거롭게 물었단 말인가?"

"세자책봉에 대해서 말씀이옵니다."

정안군은 남은을 향하여 호통을 쳤다.

"남판서는 자다가 쫓아왔소? 잠꼬대를 하는구려. 오늘 이 잔치가 무슨 잔치인 줄 알고 나왔소? 세자책봉을 주청한 일이 무사통과되었다고 조정에서 잔치를 해주는 연회인데 선잠 깬 소리를 하니 딱하오. 세상에 실없는 친구도 많구먼!"

정안군의 기합을 주는 말에 병조판서 남은은 얼굴이 붉어지며 머쓱해서 물러섰다. 옆에 있던 하윤은 소리를 높여 깔깔 웃었다. 환영잔치는 정안군의 호방무쌍한 기상에 휘말려 끝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무료한 사람들은 세자 방석을 중심으로 한 내시와 궁녀이며, 대신으로는 정도전과 남은 일파들이었다. 동궁 시녀와 강비의 시녀들은 세자 방석에게 물러갈 것을 종용했다.

"저하께서는 이제 인사를 치르셨으니 그만 동궁으로 행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이 어린 세자였다. 술도 마실 줄 몰랐다. 어른인 정안군과 대신들이 주고받는 말에 별로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형님 되는 정안군은 자기를 보고 탐탁히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거북하기 짝이 없다가 시녀들이 동궁으로 돌아가자 하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형님이 무서웠다. 가만히 시녀들에게 속삭였다.

"형님을 환영하는 잔치에 형님보다 먼저 갔다고 노하지나 아니하실까?"

방석은 나이 어리면서 가장 소심했다. 정안군의 괄괄한 성격을 짐작하는 때문이다.

"관계치 아니할 것입니다. 세자저하께서는 아직 연치가 어리시니 먼저 가셔도 별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정안군 나리 앞으로 나가서 인사를 고하고 돌아가사이다."

왕후궁 강비의 시녀가 세자에게 고한 후에 방석을 앞세우고 정안군의 앞으로 나아갔다.

"세자 아기씨는 나리께서 안녕히 다녀오신 인사를 여쭈었으니 이제 동궁으로 돌아가신다 합니다."

강비의 시녀는 목소리를 나직이하여 정안군에게 고했다. 정안군은 한 번 강비의 시녀를 거들떠본 후에 검다 희다 말이 없이 몸을 돌려 처남 민무구와 무슨 말인지 주고받고 있었다. 강비의 시녀는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이 화끈하고 달았다. 그러나 점잖은 좌석에서 탄할 수도 없었다. 기왕 내친걸음이었다. 다시 세자를 앞세우고 정안군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세자저하, 정안군 나리께 돌아가신다고 인사를 드리십시오."

어린 세자는 사기 없는 눈으로 정안군을 바라보며 궁녀가 시키는 대로 인사를 했다.

"형님,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안녕히 노시다 가십시오."

소년다운 귀여운 목소리로 정숙하게 고했다. 정안군은 이번에도 흘낏 세자를 돌아본 후에 아무런 대답도 보내지 아니했다. 여전히 민무구, 민무질 형제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고 싶거든 가려무나 하는 태도였다. 강비의 시녀와 동궁 시녀들은 더 다시 어찌하는 수 없었다. 세자를 옹위하여 전각 아래로 내렸다. 정도전, 남은 일파는 날카로운 눈으로 또 한 번 정안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관들은 세자의 환궁을 전송하면서 한 사람 두 사람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도전과 남은도 얼굴에 가득 불쾌한 빛을 띠고 물러났다. 정안군의 환영잔치는 고요한 속에 음산한 찬바람을 안고 막을 내렸다.

 

 

달도 차면 기우나니

 

삼십을 겨우 넘어선 젊은 왕비 강씨는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화용월태라 했다. 과연 강비의 모습은 꽃 같은 얼굴이요, 달과 같이 환했다. 어려서부터 황해도 곡산 부농의 집에 태어나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났다. 친정아버지가 지인지감이 있어서 고려 말엽에 오랑캐를 무찌르고 승전고를 울리며 송도로 돌아가는 길에 곡산 땅에 들른 이성계 장군에게 천침을 해서 이내 송도로 데리고 와서 경처를 삼았다. 함흥 시골집에 있는 정안군의 어머니 한씨는 시골에 있다 해서 향처요, 강씨는 서울 송도에 데리고 있으니 경처라는 것이다. 정안군의 어머니 한씨는 시골구석에서 도랑치마를 입고 방아질을 하고 있었으나, 강씨는 송도 서울에서 비단 치마를 끌고 손에 물을 튕기며 지냈다. 고려조의 시중 겸 대장군의 부인이니 호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비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다. 방번과 방석이요, 경순공주였다. 그나 그뿐인가.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혁명을 일으켰을 때 강비의 친정아버지는 황해도 곡산 부자였다. 군자금과 군량미를 대었다. 이 까닭으로 강비의 아름다운 코는 더한층 우뚝했다. 전실 소생들은 눌려서 고래를 들지 못했다. 이 중에 향처인 한씨는 복이 없었다.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왕비도 한 번 되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태조가 등극을 하게 되니 복 많은 강비는 시앗 싸움도 할 필요가 없이 저절로 왕후가 되어버렸다. 여룡여호한 전실 아들들이 숱하게 많았으나 강비가 왕후 되는 것을 반대할 도리가 없었다. 강비는 왕후가 된 후에 일신에 총애를 독차지했다. 강비는 영리하고 민첩했다. 먼저 정도전으로 자기 아들 방석의 스승을 삼고 장래 일을 부탁했다. 다음에 큰아들 진안대군이 창업을 반대하고 독주를 마시며 죽은 것을 기회로 하여 세자 문제를 끌어냈다. 먼저 상김인 태조의 마음을 움직여놓고, 다음 정도전을 시켜서 가만히 공작을 했다. 태조가 누구로 세자를 봉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하문했을 때, 고지식한 배극렴은 장자가 세자가 못될 경우에는 다음 아들이 왕세자가 되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조준은 창업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왕자가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때 병풍 뒤에서 홀연 여자의 처절한 곡성이 일어났다. 모두 다 깜짝 놀랐다. 강비의 울음소리였다. 태조는 기왕 장자가 세자 노릇을 못하게 될 바에야 아주 막내로 정하는 것이 어떠하냐 물었다. 대신들은 모두 '다 좋습니다'하고 아뢰었다. 이리해서 강비의 막내아들 방석은 세자가 되었다.--- 방석으로 세자를 봉한 후에 창업에 큰 공이 있는 정안군 일파는 겉으로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아니했으나, 불근불근 불평이 자자했다. 이 기미를 눈치챈 영리한 강비는 태조께 세자책봉을 명나라 황제한테 인준받는 주청사를 정안군으로 보낼 것을 건의했다.

"세자인준은 소중한 일인가 합니다. 관록 있는 사람으로 주청사를 삼아서 보내야 하겠습니다. 국가의 주석인 정안군으로 주청사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조는 기뻤다. 강비가 마음이 착해서 전실 아들을 알아주는 것이 고마웠다. 집안이 화목하게 될 징조라고 생각했다. 선뜻 허락했다.

"왕후가 정안군으로 주청사를 삼겠다 하면, 과인도 찬성하겠소."

곧 정안군을 불러서 중국에 사신으로 들어가라 했다. 이 일은 순전히 총명 영리한, 단수 높은 강비의 수단이었다. 마음속으로 세자책봉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정안군에게 이 임무를 맡겨놓는다면 국제적으로 정안군은 꼼짝 도리 없이 세자 방석을 돕게 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정안군은 강비의 수단을 짐작하면서도 태연히 명나라에 주청사가 되어 황제를 만나러 갔다. 정안군은 정안군대로 배짱이 컸던 것이다. 중국의 각료와 대신들이 물었다.

"어찌해서 왕자의 차서를 따라서 세자책봉을 하지 아니하고 끝의 왕자로 왕세자를 봉하였소?"

하고 물었을 때 정안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두 다 하늘이 시키시는 천명이외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 어른께서 원나라를 멸하고 천자가 되신 것도 모두 다 천명이 아닙니까."

중국 각료와 식자들은 코가 맥맥했다. 다시는 더 묻지 아니했다. 이 대답은 정안군대로 또한 딴생각이 있어서 큼직하게 배짱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안군 자신 이외에 배짱을 부려서 대답한 참뜻을 짐작한 사람은 조선 안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정안군이 큰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태조는 크게 기뻤다. 강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는 내가 마음을 놓겠소. 방석은 세자가 되어 나의 뒤를 계승하게 되고, 방원은 방석을 도와줄 테니 얼마나 기쁜 일이오. 내가 베개를 편안히 하여 잠을 자겠소."

"작히나 좋겠습니까."

강비도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이번 정안군의 환영잔치에 세자도 나가서 치하하는 것이 조헥ㅆ소."

"삼가 성지를 받들겠습니다."

강비는 잔치에 세자 내보낼 것을 승낙했다. 이리하여 세자 방석은 정안군 환영잔치에 참석했던 것이다. 세자 방석은 정안군의 환영 잔치에서 물러나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왕후궁인 강비의 궁전으로 들어갔다. 강비는 반갑게 어린 세자를 맞았다.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세자의 모습이 더한층 귀엽게 보였다. 세자의 몸을 얼싸안았다.

"세자 오느냐. 그래 잔치에 잘 다녀왔느냐?"

어린 세자는 사기 없는 웃음을 빙글빙글 웃으며 어마마마의 품안에 안겼다.

"그래 정안군 언니가 너를 보고 무어라 하더냐? 무척 반가워하더냐?"

어린 세자는 여전히 벙긋벙긋 웃기만 했다. 세자를 호종해서 갔다가 온 왕후궁 시녀가 옆에서 고했다.

"반가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옆에서 뵙기가 황송하고 딱했습니다."

"황송하고 딱하다니, 그래 반가워하지 않더란 말이냐?"

강비의 얼굴빛이 변해졌다.

"반가워하는 것이 무어오니까. 도대체 안하무인이올시다. 정안군 나리는 세자 아기씨를 본체만체했습니다."

"대꾸를 아니했단 말이냐?"

"대꾸가 다 무엇입니까. 세자 아기씨께서 '형님,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해도 코방귀를 뀌고 다른 대신들과 딴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비의 얼굴빛은 또 한 번 변해졌다. 옆에서 또 한 사람의 늙은 상궁이 고했다.

"도대체 정안군 나리의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백관들은 세자 아기씨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모두 다 뜰 아래까지 내려서 세자 아기씨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정안군 나리는 거만하게 전상에 서서 본체만체했습니다. 아무리 정안군이 연치로는 위라 하나, 그분은 일개 왕자이고, 세자 아기씨는 대왕마마의 다음 가시는 세자십니다. 조체로 보아서 감히 이러할 도리가 있습니까. 정안군 나리가 내내 이러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나중에 난신적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늙은 시녀의 말을 듣고 있는 강비의 화용월태는 새파랗게 질렸다. 또 한 사람의 시녀가 속삭였다.

"그나 그뿐입니까. 세자 아기씨께서 안녕히 다녀오셨느냐고 읍을 하셨는데 정안군은 답례도 아니 했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벌써 역적질할 심보를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

강비는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맥이 탁 풀렸다. 숨이 막힐 듯했다. 이번엔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품에 안고 있는 세자 방석에게 물었다.

"정안군이 너한테 정말 무례하게 굴더냐?"

"형님이 동생한테 먼저 절을 할 까닭이 있습니까. 내가 먼저 인사를 올린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말을 붙여도 대답을 아니 했을 때 좀 무안합디다. 화경 같이 큰 눈을 부릅뜰 때도 좀 무섭고---."

어린 세자를 무릎 아래 내려놓고 궁녀들에게 분부했다.

"세자를 모시고 동궁으로 가서 편안히 쉬게 하라. 고단하겠다."

시녀들은 세자를 옹위하여 왕후궁 지척에 있는 동궁으로 향했다. 강비는 괴로웠다. 정안군은 강비 한평생의 두통거리였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까지 해 놓았으나 안심이 되지 아니했다. 홑볼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언제 어느 때 어떠한 행동을 일으킬는지 불안하고 무서웠다. 그는 사실상 창업의 원훈인 공로자였다. 그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강비는 정안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기상이 늠름했다. 욕심이 대단했다. 결기와 용단성이 강했다. 어린 방석이 당해낼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도전으로 방석의 스승을 삼았고 정도전으로 삼군부 도총관을 삼아서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권을 맡게 했다. 또다시 중국인 명나라에 정안군을 세자책봉 주청사로 보냈다. 앞으로 정안군의 행동을 견제하자는 의도였다. 정안군이 명나라에 주청사로 가서 질문을 받았을 때, 막내아들로 세자책봉을 한 것은 '모두 다 천명이외다'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태조와 함께 기뻐했다. 정안군도 차차 마음을 돌려서 방석을 도와주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던 거시다. 태조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세자를 환영연에 참가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궁녀들의 말을 듣고 보니 정안군은 영영 세자를 안중에 두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강비는 세자를 돌려보낸 후에 말할 수 없는 깊은 수심에 싸여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정안군을 위시하여 여러 전실 아들들의 세력을 꺾어 버릴 수 있나 하고 번민 속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자기를 사랑하는 상감이라 하나, 자기 입으로 전실 아들들을 제거시키라고 아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환영연의 정안군의 세자에게 대한 태도는 완전히 적의 가득한 태도였다. 환영연이 지난 후부터 강비는 밥맛이 달지 아니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강비가 더욱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안군 이하 몇몇 왕자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더구나 정안군은 직접 혁명에 참가했던 왕자였다. 보통 사병이 아니라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강비는 초조했다.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다. 곰곰 생각하다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심복 내시를 불렀다.

", 우상 대감께 나가서 요사이 동궁의 공부가 어느 정도로 진전이 되었는지 알고 싶으니 내일 정사를 마치신 후에 동궁으로 들어오시라고 연통해 두어라."

심복 내관은 삼군부로 나가서 왕후의 전갈을 정도전에게 전했다. 정도전은 강비의 소명을 받자 어제 환영연에서 정안군의 세자에 대한 태도가 강비께 전해진 것을 짐작했다. 다음날 빈청과 삼군부의 공사를 대강 끝낸 후에 동궁태부의 자격으로 세자궁에 문후를 드렸다. 우의정 겸 삼군부 도총관, 동궁태부 정도전이 세자궁으로 문후했다는 기별은 지체 없이 왕후궁 강비한테로 전해졌다. 강비는 성장을 차리고 동궁으로 향했다. 시위하는 궁녀들이 동궁에 들어가 왕후의 임어를 고했다. 세자 방석을 위시하여 동궁 소속의 관원과 시녀들은 일제히 강비를 맞이했다. 봉화백 정도전도 전 아래 내려서 몸을 굽혀 강비를 맞이했다. 봉화백 정도전도 전 아래 내려서 몸을 굽혀 강비를 맞이했다. 강비는 미소를 머금어 정도전에게 답례한 후에 전 위로 올랐다. 강비는 세자궁 내전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세자와 정도전을 돌아보며 말했다.

"요사이 세자의 공부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소. 시독청으로 건너갑시다."

세자와 정도전은 왕비를 시독청으로 인도했다. 강비의 의중을 모르는 궁녀와 내시들은 강비의 뒤를 따랐다. 강비는 세자의 공부하던 책과 책상이 놓인 곳에 자리를 정하고 앉고, 세자와 정도전은 장지문밖에 꿇어앉았다. 강비는 문밖에 서 있는 궁녀와 내시들에게 분부했다.

"너희들은 멀찍이 물러가 있거라."

시녀들은 발자취를 죽여 물러갔다. 궁녀들이 물러간 후에 강비는 미소를 지어 정도전을 손짓해 불렀다.

"오늘은 세자의 선생님의 자격으로 우상 대감을 뵙자 한 것이오. 이리 가까이 들어오시오."

낭랑하게 구슬을 굴리는 듯한 음성으로 정도전을 불렀다. 봉화백은 황감하기 짝이 없었다. 화사한 왕후의 백옥 같은 흰 손이 봉화백의 눈을 아찔하도록 현란케 했다. 봉화백은 사양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소신이 어찌 감히 왕후마마 계시옵신 장지 안까지 들어가오리까. 이곳도 황감하여이다."

정도전은 세 번 네 번 허리를 굽혀 사양했다.

"멀리 얼굴을 대해서 할 말이 있고, 가까이 마주 앉아서 다정하게 부탁할 말이 따로 있지 아니하오. 어찌 그리 사양하오. 세자는 봉화백을 부축하여 가까이 장지 안으로 들어오라."

삼십대 아름다운 왕비의 젊은 목소리는 마치 옥소반에 금구슬을 굴리는 듯 청아했다. 세자는 어마마마의 명에 의하여 정도전을 부축하는 체했다. 정도전은 더욱 황공 감격했다. 세자와 함께 장지 안으로 몸을 굽혀 들어갔다. 강비의 몸에서 나는 훈훈한 훈향이 봉화백의 코에 스쳤다.

강비의 몸에서 나는 훈향에 봉화백은 또 한 번 정신이 황홀했다. 강비는 낭랑한 목소리로 정도전을 향하여 물었다.

"요사이 세자의 공부는 얼마나 진전이 되었소? 궁금해서 봉화백을 청했소이다. 국사에 바쁘신 재상을 들어오라 해서 미안하오."

강비는 초조한 생각이 가슴에 가득했으나 겉으로 기색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얼굴엔 미소를 띠고, 음성이 화창했다. 아무러한 번민도 없이 그저 세자의 공부가 얼마나 늘었느냐 하고 묻는 태도였다. 정도전은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세자께서는 총명 영오하십니다. '소학'을 뗀 후에, 지금은 '춘추'를 읽으시도록 했습니다."

강비는 아름다운 얼굴에 놀랍고도 기쁜 빛을 지었다.

"'소학'을 떼었으면 '대학'이나 '중용'을 가르칠 것이지 어찌해서 벌써 '춘추'를 읽게 하시오?"

정도전은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비전하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소학'을 뗀후에 으레 성리학의 초보로 '중용'이나 '대학'을 읽히는 것이 통례올시다마는, 동궁께서는 장차 대권을 잡아 왕위에 나가실 분입니다. 이러하므로 중국 역대 제왕의 행정을 비판한 '춘추'를 읽으시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하오. 세자는 학자가 될 사람이 아니고, 제왕이 될 사람이니 어려서부터 역대 제왕들의 정치의 득실을 머릿속에 깊이 넣오두는 것이 좋겠소. 봉화백의 주도면밀하신 지도에 감사하오."

"황감하여이다."

정도전은 강비의 칭찬을 듣자 마음이 기뻤다. 황감함을 이길 길 없었다. 몸을 굽혀 사례했다. 강비는 다시 음성을 낮추어 정도전에게 묻는다.

"어제 정안군의 환영연에 세자를 내보낸 일이 있는데, 봉화백도 참석을 하였소?"

", 소신도 참석했습니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본 일이 아니고 남의 전하는 말을 듣고 판단해서 말하기는 극히 경솔한 일인 듯하나, 정안군의 동궁한테 대한 태도가 너무나 방약무인이었다 하니 과연 그러했소?"

강비는 정도전의 얼굴을 지켜보며 물었다.

", 그러했습니다. 너무나 해괴했습니다. 소신들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세자가 들어갔을 때, 모든 조관들은 전상에서 내려서 맞이했는데, 정안군만은 본체만체하고 맞지를 아니했다 하니, 과연 그러했소?"

", 그러했습니다. 소신도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세자가 '형님 안녕히 다녀오셨소' 하고 물었을 때 정안군은 대답을 아니하고 딴 사람들과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하니, 사실이오?"

", 그랬습니다. 소신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황공부지한 노릇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손끝을 비비며 대답했다. 강비의 아름다운 버들눈썹은 노기를 띠어 솟구치고 맑은 눈에는 핏발이 발갛게 서렸다.

"동궁이 비록 아우뻘이 된다 하나, 이미 세자로 책봉한 이상 왕상 전하의 다음 가는 대접을 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정안군은 너무나 무엄하구려."

정도전은 국궁하며 아뢴다.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상께 아뢰기를, 끝의 왕자로 세자책봉을 한 것은 비록 사람이 한 일이나 하늘이 명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하옵기에 소신의 마음도 무한 기뻤습니다. 정안군의 불평 가득한 마음이 돌아선 줄 알았더니 어제 환영연에서 세자께 대한 태도를 보고 놀랍고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정안군은 지금도 의연히 자기 자신이 세자가 되지 못한 것을 불평하고 있습니다."

"일개 왕자로 동궁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역적의 행동이오."

강비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역적'이라고 외쳤다. 정도전은 고개를 숙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강비는 음성을 낮추어 정도전에게 다시 말한다.

"오늘 봉화백을 동궁 시독청으로 청한 것은, 정안군에 대한 일을 의논하려 한 것이오. 어찌하면 정안군을 제거하겠소. 만약 정안군을 그대로 둔다면 세자는 앞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만 같소. 봉화백은 좋은 방책을 생각해보시오."

강비는 목소리는 애원조로 변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조정의 만조백관이 있습니다. 모두 다 정안 군의 편이 아니올시다. 과히 염려 마시옵소서. 여기 정도전도 있습니다."

"물론 봉화백야 나와 동궁의 편이지만, 창업에 공이 많은 왕자로 세자를 삼자는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있지 아니하오. 나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 불안하기 짝이 없소. 봉화백은 좋은 방책을 생각해주시오."

정도전은 고개를 숙여 잠깐 생각하는 체하다가 얼굴에 미미하게 웃음을 띠고 강비께 아뢴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좋은 수가 있다는 정도전의 말에 강비의 귀가 번쩍했다. 반가워하는 빛이 얼굴에 선연하게 나타났다.

"무슨 좋은 수가 있소?"

"비전하께서 대왕 전하께 한 말씀만 아뢰시면 만사가 뜻같이 되십니다."

"어떤 말씀을 아뢰라 하오?"

강비의 맑은 눈에 윤기가 흘렀다.

"중국에서는 와자들을 제후로 봉해서 지방으로 분산시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본을 떠서 정안군을 위시하여 모든 왕자들을 중앙에 있게 하지 말고 지방에서 생활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일을 비전하께서 상감께 아뢰시면 만사는 해결이 됩니다."

정도전의 아뢰는 말을 듣자 강비는 고개를 기울여 생각해보았다.

"아니 되겠소. 내 어찌 내 입으로 전실 왕자들을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겠소. 전하께서 들으시면 나를 부덕하다 하실 테니 내 어찌 차마 그 말을 내겠소."

전실 왕자들을 제후로 봉하여 지방으로 분산시켜 내보내자는 말에 강비는 체면상 상감한테 아뢸 수 없다고 사양했다. 정도전은 얼굴빛을 고쳐서 정색하고 고했다.

"큰일을 하시자면 작은 일에 구애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동궁저하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전하께 아뢰고 이 일을 단행하셔야 합니다. 중국의 전례가 있지 아니합니까. 진 초 연 제 한 위 조의 제후들이 모두 다 태자를 제외해논 왕자들이올시다. 중국에서도 왕자들이 중앙에 집결해 있으면, 혹시 반란을 일으킬까 하여 이같이 지방으로 분산하는 정책을 쓴 것입니다. 중국의 전례가 있으니 조금도 주저하실 일이 아니올시다. 비전하께서는 틈을 타시어 조용히 왕상전하께 말씀을 드려보시오. 만약 전하께서 조정에 하문하신다면 소신은 모든 동료들을 움직여서 이 일을 단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강비는 역시 여자였다. 얼른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내가 비록 왕후라 하나 너무나 국정에 간섭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서 아뢰기가 어려웁소."

정도전은 안타까웠다. 왕비를 격려했다.

"비전하께서는 세자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지난번에 세자책봉에 대하여 여러 대신들에게 하문하실 때 비전하께서 병풍 뒤에서 곡성을 내어 울지 아니하셨다면 왕세자는 정안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비전하께서는 어찌해서 이러한 용기를 내지 아니하십니까. 만약 이번에 용단을 내지 못하신다면 앞으로 동궁저하의 지위는 위태롭습니다. 깊이 통촉하시어 처리하시옵소서."

정도전의 용기를 내라는 말에 강비는 힘을 얻었다.

"봉화백이 밖에서 도와주신다 하니 틈을 타서 전하께 아뢰어보기로 하겠소. 세자의 일에 대하여는 봉화백이 더욱 힘을 써주시오."

강비는 또 한 번 간곡하게 정도전에게 부탁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생명을 바쳐서 그분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다 했습니다. 도전이 비록 불초하나 위로 왕상전하의 심허하시는 은총을 입었고, 다음 비전하께서 이같이 믿어주시니 어찌 부탁과 분부를 소홀히 하겠습니까. 세자저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을 비전하 앞에 맹세합니다."

"고맙소, 봉화백!"

강비는 감격했다. 호수 같은 푸른 눈에 눈물을 머금고 간단하게 감사하다는 말을 보냈다.

"요사이 옥안이 잠깐 야위신 듯합니다. 평심서기하시어 옥체를 보중하시옵소서."

정도전은 왕후 강씨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근심스러운 듯 고했다.

"내 무슨 걱정이 있겠소마는 요사이 정안군의 방약무인한 태도로 인하여 입맛이 없고 잠을 이루지 못하오."

강비는 한숨을 지었다. 정도전은 미소를 지어 다시 강비께 고했다.

"정안군 이하 모든 왕자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시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입니다. 공연히 상심하시어 옥체를 훼손하지 마시고 곧 전하께 아뢰시어 이 일을 단행하시옵소서.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도전은 강비와 세자를 향하여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강비는 세자 방석에게 분부했다.

"전 밖까지 나가 사부를 전송하라."

어린 세자 방석은 어마마마와 스승 정도전이 무슨 의논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어제 환영연 잔치 때 딱딱하고 무서웠던 형님 정안군의 태도를 근심하는 것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이날 밤에 강비는 외전에서 침실로 들어온 태조께 조용히 고했다.

"전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태조는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있는 바므이 시각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즐거운 시각이기도 했다.

"무슨 의논할 말이 있소?"

미소를 지어 왕후를 돌아다보았다.

"여자로 앉아서 나라 정치에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한 가지 전하께 건의 드릴 일이 있습니다."

"천만의 말도 하오. 왕비는 내조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오. 왕비가 나랏일에 대하여 의견을 말하지 아니하고 누가 하겠소. 더구나, 왕후는 나와 함께 무에서 유를 이룩한 창업지주의 왕후가 아닌가. 과인을 위하여 좋은 의견을 말해주오."

태조는 말을 마치자, 용안에 가득 쾌활한 웃음을 띠었다.

"전하께서 관대하게 허락하시니 국가제도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아드님이 많으십니다. 왕자 공손이라 해서, 호의호식하면서 안일한 생활을 하게 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옵소서."

태조는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을 시키면 좋겠소?"

"전하! 보십시오. 국가에는 정부가 있고, 대신과 유사들이 있으니, 왕자공손들은 세자를 제외해놓고,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고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태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잘나서 왕자가 되었는데, 재질이 있건 재질이 없건 왕자 대우는 해야 합니다. 고대광실에 부리는 비복들은 가득하고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금의옥식에 싸여서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방탕한 생각만 나게 됩니다. 일이 있어야 항심이 있는 것인데 일이 없으니 주색잡기에 빠져서 필경에 가서는 타락되는 자식이 되고 맙니다. 모든 아들들에게 업을 주어서 일을 하도록 마련해주십시오."

강비의 도란도란 올리는 말은 임금 태조의 폐부를 찔렀다. 태조는 황연히 꿈속에서 깬 듯했다. 강비의 부드러운 손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과연 왕후의 말씀은 적절하오. 과인이 아직 생각하지 못한 점을 일깨워주니 감탄하는 마음 그지없소. 왕자들에게 어떠한 사업을 하라 하면 좋겠소?"

"중국에서 제후를 지방에 둔 것은 왕자 공소능로 나태하지 않고, 사업을 성휘해서 중앙의 왕실을 부익하고, 지방의 문물을 개발시켜서 국가를 반석처럼 안태케 하자는 것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속히 이 제도를 쓰시어 중앙의 왕위를 사해에 넓히시고 지방의 문물이 찬연하다로고 빛나게 하옵소서. 첫째로는 근왕정신을 함양시키는 일이요, 둘째는 공자 왕손들의 민첩한 재질을 살리고 허랑방탕한 길에 빠지는 폐단을 막아내는 길인가 합니다."

태조는 민첩하고 교양 높은 강비의 건의에 감탄했다.

"과연 일석이조의 좋은 방책이오. 그렇다면 팔도 감사의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왕자들로 제후를 봉해서, 그 지방을 제각기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내일이라도 곧 대신들과 의논해서 분봉하는 일을 결정하겠소."

태조는 쾌하게 허락했다. 태조 역시 혼암한 어둔 임금이 아니었다. 강비가 세자를 제외한 여러 왕자들을 제후로 봉해서 팔도로 분산시키자는 그 저의를 짐작해 알았다. 여룡여호한 나이 많은 전실 아들들이 벌떼같이 있는 중에 더욱 정안군은 억세고 줄기찼다. 그뿐이 아니었다. 창업에 가장 공이 큰 것을 자타가 함께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세자책봉의 문제가 일어났을 때 가장 물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자기가 낳은 어린 세자를 위하여 이같은 건의를 한 것을 태조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태조 역시 어린 세자의 장래 왕권을 위하여 중국의 제도와 비슷한 지방의 제후제도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저치 아니하고 조정에 부의할 것을 강비에게 허락했던 것이다. 이튿날 태조의 어전에 대신과 학사들을 명소했다. 전례대로 배극렴, 조준, 정도전, 남은, 민제, 민무구, 민무질, 조영규 등이 추창해 들어오고, 태학사에 제학을 겸한 하윤이 입시하고 있었다. 태조는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분부를 내렸다.

"오늘 경들을 부른 것은 국가제도를 약간 개혁할 점이 있어 부른 것이니, 경들은 허심탄회하게 나의 의견에 대하여 가부를 말해달라."

모든 신하들은 고개를 숙여, 임근 태조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태조는 다시 천천히 말씀을 내렸다.

"예로부터 중국에는 왕자들을 지방에 분봉시키는 일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제후의 제도다. 첫째로 국가에 대하여 근왕정신을 일으키고, 둘째로 왕자들로 하여금 무위도식하는 폐단을 막게 할 뿐 아니라, 다투어 그 맡은 바 강역을 번성케 하려고 노력하여 백성들을 잘 육성하는 기틀이 되게 하니 진실로 좋은 일이라 하겠다. 과인은 우리나라에도 이 제도를 채택해서 여러 왕자들을 지방으로 분봉하여 국가의 울타리가 되게 할 생각이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저치 말고 의견을 말해달라."

모든 대신과 학사들은 찬부를 결론지어 말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 다 대답을 주저하고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어떠한가. 내 의사가 틀리다고 생각하는가?"

태조는 대답 없는 신하들의 얼굴을 면면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우의정 겸 삼군부 도총관, 세자태부 정도전이 허리를 굽혀 아뢴다.

"왕자들을 지방에 분봉하시겠다는 하교는 지극히 명철하신 처사인가 합니다. 팔도 감사의 제도를 폐지하시고 왕자들이 지방에 살아서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국가 만년의 대계인가 합니다.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첫째로 근왕정신을 일으키고, 둘째로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 허랑방탕하기 쉬운 왕자 공손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올시다. 서울 안에 놀고 있는 왕자들은 지방으로 내보내서 책임을 맡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도전 못지않게 영민하고 똑똑한 학사 하윤은 정도전의 찬성해서 아뢰는 말을 듣자, 직감적으로 정안군을 멀리 서울 밖으로 내보내자는 뜻인 것을 알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한림학사 부제학 신 하윤 아뢰오. 전하께서 왕자들의 무위도식을 염려하시어 각기 책임을 맡겨서 지방에 분봉하시겠다는 하교는 극히 지당하신 생각이십니다. 그러하오나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전하의 의도대로 될 성싶지 아니합니다."

하윤은 깐깐한 목소리로 대담하게 아뢰었다. 하윤의 반대하는 말을 듣자 상감 태조의 얼굴빛이 변했다.

"어찌해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는가?"

"크나큰 국제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윤은 간단하게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국제문제가 일어나다니?"

태조는 큼직한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하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명나라에서 크게 간섭하고 시비를 일으킬 것입니다."

정도전이 하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명나라에서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의 내정을 간섭한단 말요?"

하윤은 어전인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을 바라보며 껄껄 웃으며 대꾸한다.

"명나라에서 내정 간섭을 아니한단 말요? 하하하, 당치 않은 말씀 마시오. 세자책봉을 하는데도 주청사를 보내서 허락을 겨우 받아 왔는데 국가의 제도를 개혁해서 왕자들을 제후로 분봉시키는 일을 명나라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성싶지 않소. 왕자분봉은 세자책봉보다 국제적으로 더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자의 나라에서만 제후를 두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시는 조선국왕이 아니시고 그 반대로 명나라가 전하께 조공을 바치는 대조선국 황제 폐하가 되셔야만 왕자를 분봉해서 제후를 두실 수 있습니다. 확실히 명나라에서는 크나큰 시비를 일으킬 것입니다. 뱃심 좋은 우의정 대감이 명나라로 가서 한 번 교섭을 해보시오. , , ."

하윤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정도전을 야유하여 공박했다. 정도전은 네가 명나라로 가서 제후분봉을 허락받아 오라는 하윤의 말을 듣자 고개가 움찔했다. 그러나 지지 않고 대답한다.

"왕자들을 왕으로 봉하자는 것이 아니라 팔도 감사를 왕자로 삼아도 좋단 말입니다. 이리한다면 명나라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고 명나라에서 간섭할 까닭도 없소. 크게 염려하지 마시오. 하학사는 너무나 조심하는구려."

하윤은 다시 펄쩍 뛰며 말했다.

"지금 우상 대감의 말씀은 전하의 말씀과 전혀 의도가 다릅니다. 왕자로 지방관을 만들자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또다시 폐단이 크게 일어납니다."

하윤은 깐깐하게 우겨댄다.

"무슨 폐단이 일어난단 말씀요?"

정도전은 허장성세하고 하윤을 똑바로 바라본다. 하윤도 지지 않고 대거리한다.

"지방에 나가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지관은 중앙정권의 지휘를 받아서 행정을 해야 하오. 만약 감사나 군수가 중앙의 명령을 받지 않고 자기 맘대로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면 체계와 계통이 서지 아니해서 정치는 난맥상을 나타낼 것입니다. 대감 말씀대로 왕자로 목민지관을 삼는다면, 중앙정권의 명령을 받으려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보시오 대감, 만약에 정안군으로 전라감사나 평안감사를 삼는다면, 우의정 정도전 대감의 명령을 받겠습니까? 대감은 중앙정권의 일품 재상이 되고, 창업에 공이 큰 왕자 정안군은 대감의 명령과 지휘에 복종해야 하는, 이품이나 삼품밖에 안되는 지방관이 되라 하면 그가 무릎을 꿇고 대감의 명령에 달게 복종하겠습니까? 곧 큰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하문하신, 왕자로 제후를 삼겠다고 하시는 말씀보다도 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윤은 정안군을 초들어서 정도전의 급소를 찔렀다. 정도전은 말문이 콱 막혔다. 무색한 표정을 얼굴에 띠고 뒤로 물러났다. 외전 옆에서는 강비가 초조하게 귀를 기울여 엿듣고 있었다. 정도전이 대답할 말이 없어 슬며시 물러서는 것을 보자 하윤은 더한층 의기가 양양했다. 허리를 굽혀 태조께 아뢰었다.

"전하께 아룁니다. 삼천리밖에 아니 되는 조그마한 땅에 왕자를 분봉하신다면 명나라에서 간섭하는 것은 둘째로 하고 제각기 왕국을 이룩하여 삼천리강산이 열 조각으로 쪼개질 테니 전하께서는 손바닥만한 한양성 한 곳만 가지시고 천자 노릇을 하실 텝니까? 또다시 봉화백의 말대로 왕자들로 팔도 감사를 만드신다면 왕자들은 제 나름대로 독립된 영토를 만들어서 중앙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막연하게 분봉설을 내시는 것은 크게 불가합니다. 또 한 가지, 말씀이 난 김에 아주 아뢰겠습니다. 왕자들이 분봉된 후에는 반드시 자기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군비를 갖출 것입니다. 혹시 불만을 품는 왕자가 있어서 중앙정권을 무찌르려 한다면 이 일을 장차 어찌 처리하실 텝니까?"

하윤의 당돌하게 아뢰는 말을 듣자 태조는 혼미한 꿈속에서 깬 듯 황연히 깨달았다. 묵묵히 고개를 숙여 생각 속에 빠졌다. 하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윤은 태조의 마음이 돌아선 눈치를 챘다. 다시 구변 좋게 아뢴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공자 왕손들은 군을 봉했을 뿐 관직을 주지 않고, 정치에 참여치 않게 했습니다. 모두 다 선철들은 깊이 생각하고 그같이 처리한 것인가 합니다."

하윤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간곡하게 아뢰었다. 대제학 민제가 고했다.

"하윤의 아뢰는 말씀이 옳습니다. 왕자를 지방으로 분산시켰다가 까딱 잘못하면 국토를 분단시키는 일이 되기 쉽습니다. 명철하신 성상께서는 밝게 생각하옵소서."

민제는 정안군의 장인이었다. 하윤의 편을 들어서 의젓하게 고했다. 좌의정 조준과 영의정 배극렴들은 정도전과 강비의 약속한 일을 알 까닭이 없었다. 두 재상은 일시에 허리를 굽혀 아뢴다.

"하제학의 주장하는 말이 옳습니다. 작은 땅에 왕국을 여러 곳 세울 수 없고 왕자들로 행정하는 관원을 삼는 일도 불가합니다. 그대로 군호를 주시어 전하의 슬하에 두게 하시는 것이 제일가는 상책이올시다."

영의정과 좌의정이 정중하게 아뢰니, 태조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강비와 약속이 있었으나 왕자들을 지방으로 내보내서 분봉한다는 일은 명나라와의 관계로 보나 집안 사정으로 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대신과 학사들을 향하여 정중하게 하교를 내렸다.

"무위도식하는 와자들에게 항심을 가져서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분봉하는 일을 의논했던 것인데 봉화백을 제외해놓고 중론이 불가하다고 하니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왕자를 분봉한다는 일은 덮어두리라."

이리하여 정도전은 하윤의 헤살로 와자들을 지방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어전회의를 파하고 대제학 민제와 하윤이 근정문 밖으로 나왔을 때 정안군은 영문도 모르고 아침 문안을 드리러 궁중으로 들어갔다. 뜰에서 장인 되는 민제와 한림학사 하윤을 만났다. 정안군은 반가웠다. 소리를 높여 불렀다.

"하학사, 오늘 웬일이시오? 장인께서도."

대제학 민제와 하윤도 뜻밖에 정안군을 만나니 반가웠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지어 웃으며 정안군을 맞이했다.

"정안군은 웬일이시오?"

"나는 아침 문안을 드리러 들어오는 길이오마는 두 분께서는?"

"급히 명소를 받아 들어왔다가 어전회의를 마치고 물러가는 길이외다."

하윤이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어전회의 소리를 듣자 정안군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무슨 중대한 일이 있기에 어전회의가 있었소?"

"나가십시다. 나가서 이야기하십시다. 이곳에는 이목이 번다하니 다른 곳으로 가서 말씀합시다."

"문안을 드리고 나오리다."

"아따, 문안은 나중에 드리고, 어서 나가십시다. 나리도 알아두셔야 하오. 매우 급한 일이오."

급한 일이라는 하윤의 말을 듣고 정안군의 눈은 더한층 둥그렇게 떠졌다.

"무슨 일이길래 급하다 하오?"

"아따, 나가서 조용히 말씀합시다."

하윤은 정안군의 손을 끌어ㅆ. 민제, 하윤, 정안군 세 사람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어 궐문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소?"

정안군은 하윤을 향하여 물었다.

"댁으로 갑시다."

하윤이 대답했다.

"역시 이목이 번다하고 내 딸도 마침 우리 집에 있으니, 내 집으로 갑시다."

정안군의 장인 민제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발론했다. 이때 마침 정안군 부인 민씨도 친정에 와서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자비를 몰아 민제의 집으로 향했다. 대제학 민제는 사위 정안군과 하윤을 안사랑으로 인도했다. 역시, 이목이 번다한 바깥사랑을 피해서 안사랑을 택한 것이다. 아늑하게 보료 장침에 포진되어있는 안사랑으로 들어갔다. 정안군은 몹시 궁금했다.

"대관절 무슨 일로 어전회의를 열었습니까?"

장인 민대제학한테 초조하게 물었다. 민대제학은 기가 찬 얼굴로 대답했다.

"허허. 참 기막힐 일이었네. 하학사의 도도한 웅변이 아니었더면 큰일 날 뻔했네. 모두 다 강비와 정도전이 정안군 자네를 제거시키자는 모략에 전하께서 넘어가서 어전회의를 여신 것일세."

"나를 제거시키려고, 어떤 방법으로?"

정안군의 얼굴엔 노기가 등등하게 일어났다.

이때, 장지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창밖에서 나직하게 젊은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약주 상을 들여왔습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정안군 부인 민씨의 목소리였다.

"오오, 이집이냐. 들어와도 좋다. 모두 다 알 만한 분들이다. 내외할 까닭이 없다. 어서 들어오너라."

민대제학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딸을 불러들였다. 민첩하고 주변 좋은 민씨였다. 마침 친정에 놀러 왔다가 아버지와 정안군과 하학사가 안사랑으로 들었다는 소식을 비자들한테 듣고 반드시 곡절이 있다고 생각했다. 친정어머니께 청해서 부랴사랴 술상을 차려가지고 나온 것이다.

"하학사, 그동안 태평하셨습니까?"

조신하게 웃음을 보내 인사하고 술상을 하윤 앞에 놓았다. 하윤은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혀 예를 한 후에,

"황감하여이다. 여기까지 오셔서 친히 술을 주시니, 너무나 폐가 많습니다."

수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친정은 제 집이 아니오니까. 오신 것만 고맙습니다. 즐겁게 노십시오."

민씨부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장지 밖으로 물러나려 했다. 능란한 수인이었다.

"너도 게 있거라."

민대제학은 나가려는 딸을 자리에 앉게 했다. 정안군도 아내 민씨가 친히 술상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미타하게 생각하지 아니했다. 아내 민씨는 능소능대한 내조자인 때문이었다.

"기왕 네가 나왔으니 술을 한 잔씩 돌려라."

아버지 대제학은 딸에게 분부했다. 민씨부인은 백자 수복병을 기울여 백자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아버지 대제학께 올렸다. 다음에는 남편을 제쳐놓고 하학사에게 잔을 보냈다. 하학사는 황공감격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노리끼한 맑은 술에서 향기가 코를 스쳤다. 하윤은 마시기 전에 향기에 취했다. 입술에 잔을 댔다. 혀 끝에 말려들도록 술은 감칠맛을 주었다.

"마마, 이 술이 무슨 술이옵니까?"

"계강주라 합니다."

"혀 끝에 알싸하도록 향기가 높습니다."

"하학사의 성정에 맞으실 것입니다. 맵고 쌀쌀하고 강직하시고. 하 하 하."

민씨부인은 하윤을 강직하다고 예찬했다. 정안군보다도 먼저 대궐에서 하윤이 도도히 수천 어의 달변을 토해서 왕자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려는 음모를 막아낸 일을 벌써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윤도 민씨부인의 슬기와 수단이 보통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민부인이 벌써 대궐 안 일을 짐작하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제가 어찌 계피나 생강같이 맵고 쌀쌀하겠습니까. 과람하신 비유올시다."

하윤은 마음속으로 기뻤다. 민씨부인의 슬기스런 판단에 감복했다.

"앞으로 계강주같이 정안군을 쌀쌀하고 맵도록 도와줍시오."

민대제학과 정안군은 까르르 웃었다. 하윤은 황송했다. 장래는 훌륭한 왕후감이라 생각했다. 다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혔다.

"황공 감격하여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민씨부인은 세 번째 술병을 들어 남편 정안군에게 술을 올렸다. 올리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

"나리께서도 하학사처럼 날카롭고 매움하신 결단성을 가지시라고 계강주를 올립니다."

정안군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내 성미가 맵고 쌀쌀한 것을 부인은 아직도 모르는구려. 하학사의 성미나 계강주의 맛쯤은 문제도 되지 아니하오. 끈덕지고 줄기찬 데다가 한 번 결기가 나면 화산이 터지는 듯하오. 하늘도 땅도 다 불살라버리고 말 성미요."

정안군은 말을 마치자, 팔을 걷어붙이고 술을 들이켰다. 만좌가 까르르 웃었다. 정안군은 하윤을 건너다보고 다시 말했다.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합시다. 나를 어떻게 제거시키자고 합디까?"

"모든 왕자를 팔도에 분봉해서 제후를 삼는 것이 어떠냐고 하문하십디다."

"그래서 모든 대신들은 무어라 대답했소?"

정안군의 얼굴빛은 다시 굳어졌다. 하윤은 자못 분개한 어조로 입에 거품을 뿜으며 대답했다.

"그래, 정도전이 요량이 없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침묵을 지켜서 말을 하고 있지 아니한데 유독 정도전만이 찬성을 했습니다."

"정도전은 정신없는 사람일세. 학식과 식견이 있는 사람으로 그럴 수가 있나. 우리나라같이 좁은 나라에 어떻게 왕자를 분봉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당치 않은 아첨일세."

정안군의 장인 민대제학이 괴탄하는 말을 했다. 하윤이 말을 계속한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불가하다고 주장했소이다. 왕자로 제후를 삼아서 지방에 분산시키는 일은 천자의 나라에서만 하는 일인데, 제후의 나라에서 어떻게 제후를 봉할 수 있느냐고 아뢰었소이다. 만약에 전하께서 왕자를 분봉하시려거든 명나라 황제한테 허락을 받아서 처리하시는데 왕자 분봉을 요청하는 주청사는 정도전으로 삼아서 명나라로 보내십시오 하고 아뢰었습니다. 하도 정도전이 밉상이기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 , ."

"그랬더니, 정도전이 무어라 합디까?"

"기막한 억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자들로 왕을 봉해서 제후를 삼는 것이 아니고, 왕자들로 팔도 감사를 대신해서 행정관을 삼는 것이니 명나라에 가서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고 주청사까지 보낼 것도 없다고 슬며시 몸을 사립디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반박을 했소이다. 하 하 하."

정안군은 비로소 입이 벌어지며 웃었다.

"어떻게 반박을 했소?"

"팔도 감사를 왕상전하의 아들로 봉해놓는다면 중앙에서 대신들이 어떻게 왕자를 꺾어서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왕자들이 팔도에서 제각기 자기 영토를 독립시켜서 정치를 한다면 전하께서는 한양성중 돌구멍 안에서만 왕 노릇을 하시렵니까? 하고 아뢰었더니 그제서야 전하께서도 수그러졌습니다."

정안군을 위시하여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크게 웃었다.

"나중에, 아주 한마디를 해서 쐐기를 질러버렸습니다."

"무어라고?"

정안군은 또 한 번 웃으며 물었다.

"감사들은 으레 병마권을 잡고 있습니다. 만약에 왕자들이 불평을 일으켜서 팔도에서 군사를 몰고 쳐들어온다면, 전하께서는 어찌하시렵니까? 하고 아뢰었더니 정도전의 얼굴빛은 노랗게 질리고, 전하의 용안에도 시름하시는 빛이 떠돌았습니다. , , . 이래서 왕자분봉설은 단박 중지가 되어버렸소이다. , , . 이만하면 나리도 하윤의 구변을 믿어주실 것입니다. , , ."

하윤은 유쾌했다. 크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하학사의 신언서판이야 당금에 제일이 아닌가. 내 어찌 존경하지 않겠소. 그러나 정도전은 어쩌자고 이러는 거요."

"모두 다 한 몸을 위한 호신책이지요. 저울질을 잘하는 친구가 아닙니까. , , . 그러나 그 저울질이 그른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 , ."

하윤은 말을 마치자 크게 웃었다. 정안군은 다시 노기 가득한 눈으로 술상 변죽을 치며 말했다.

"도대체, 별안간 왕자들을 지방으로 분산시켜서 제후를 삼겠다는 말이 누구 입에서 나왔느냐 말야?"

하윤이 다시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 , . 생각해보시오. 말씀은 전하께서 하셨지만 실상인즉 정도전의 입에서 나온 것이지 누가 그런 교묘한 꾀를 내겠습니까. 왕자가 여러분 계시지만 실상인즉 나리 한 분 때문에 왕자분봉설이 나왔습니다. 나리가 무서우니 밖으로 내쫓자는 계획입니다."

"내가 왜 무섭단 말요. 사람 잡아먹는 호랑이란 말요?"

정안군은 자기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픽 하고 웃음이 터졌다.

"호랑이보다 더 무섭지요. 고려 사백여 년 기업을 때려눕히신 정안군인데, 어찌 무섭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강비마마께서는 무서워서 병풍 뒤에서 통곡까지 아니하셨습니까. , , ."

하윤은 말을 마치자 자작으로 술을 따라 단숨에 마시었다. 민부인이 옆에서 정안군을 향해 고했다.

"몸조심을 합시오. 앞으로 큰일이 닥쳐옵니다."

"무슨 큰일이 닥쳐온단 말요. 사불범정인데 누가 나를 어찌할 테란 말요."

정안군도 하윤의 본을 떠서 자작으로 술을 따라 호협하게 들이마시며 아내 민씨를 바라본다.

"나리께서는 왕자분봉한다는 말을 오늘 처음 하학사께 들으셨습니다마는 저는 벌써 며칠 전에 왕후궁 상궁을 통해서 이 말이 나올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등불 아래가 어둡다고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소식을 모르겠기에 어제부터 이곳에 와 있었습니다. 동생들도 모두 다 대장 지위에 있고 아버님도 계시니 반드시 조정 공론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친정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이른 아침에 아버님과 동생들은 소명을 받아 입궐했습니다. 하회를 기다리고 있는 판에 하학사께서는 아버님과 함께 나리와 동행해서 안사랑으로 들어오신 것을 보고 전말을 듣기 위하여 부랴사랴 술상을 차려 나왔습니다. 이제 하학사의 현하지변으로 나리께서는 쫓겨나지 않게 되셨습니다마는 앞으로는 한양에 계시어도 몸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고말고. 몸조심을 해야지."

장인 민대제학이 따님 민씨의 말을 거들어서 의젓하게 말했다.

"몸조심을 하다니?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어찌할 테야."

정안군은 눈방울을 굴리며 또 한 번 호통을 쳤다.

"아무리 기상이 호담하시더라도 불의의 변이 있으면 큰일이올시다. 사병을 더욱 확충해서 장사들을 기르십시오. 강비와 정도전은 반드시 나리를 해치고 말 것입니다."

"정도전 제따윗것이 나를 어찌할 테란 말요."

정안군은 다시 큰 눈을 부릅떴다.

"사람을 경하게 보시어서는 아니됩니다."

민부인이 나직하게 고했다.

"옳습니다. 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윤이 부인의 말에 찬성했다. 민부인이 다시 나직한 말씨로 정안군에게 고했다.

"나리를 내쫓으려다가 실패한 강비와 정도전은 이번엔 나라를 해치고야 말 것입니다. 그 까닭을 가르쳐 드리오리까."

"무슨 까닭이 있었단 말이오. 말을 해보오."

정안군은 무뚝뚝하게 부인에게 물었다.

"나리께서는 너무나 무뚝뚝하시고 가식이 없으십니다. 무슨 까닭으로 환영연 잔치에서 세자를 좀 다정하게 대해주지 아니하셨습니까? 아무리 마음속으로는 불쾌하셔도 세자 대접은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나리께 세자가 인사를 하는데도 본체만체하시고 대답도 아니하셨다니 너무나 곧이곧대로 변통성이 없으십니다."

"마음에 없는 것을 어찌하나."

"그리고 만조백관들은 모두 다 뜰 아래까지 내려가서 세자를 맞이했는데 유독 나리 혼자서만 전상에 계시어 인사도 받지 아니하시고 딴전을 피우고 계셨다니 조체도 좀 보아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나리의 이러한 태도가 화근이 되어서 왕자들의 분봉설이 정도전과 강비 사이에 얘기가 시작되었다 합니다."

하윤이 옆에서 손뼉을 치며 웃었댔다.

", , . 그렇습니다. 저도 그날 목도해 보았습니다만 정안군께서 너무나 심하셨습니다. 세자가 '형님,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하고 인사는 했을 때 ', 잘 다녀왔소이다' 하고 이같이 한 말씀만 하셨더라면 왕자분봉설은 아니 나왔을 것입니다. , , . 그때 정도전과 남은의 나리를 바라보는 눈이 몹시 날카로웠습니다."

"정도전과 남은의 눈뿐이겠습니까. 그보다도 동궁 시녀와 왕후궁 시녀들의 눈초리가 무심했을 리 있습니까. 강비는 이 소식을 듣고 곧 정도전을 동궁 시독청으로 불러서 비밀히 의논한 끝에 왕자분봉설을 꺼내서 아바마마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부인 민씨는 하윤의 말을 받아 왕후궁중의 은밀한 소식을 전했다. 하윤이 다시 말을 꺼냈다.

"부인 말씀이 옳습니다. 앞으로는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출입하실 때마다 장사를 뽑아서 호위하시고 댁에는 사병을 확보하셔야 합니다."

하윤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사랑방 문이 활짝 열리며 호화로운 구군복으로 차린 대장 두 사람이 들어왔다. 민대제학의 아들이요, 민부인의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였다.

"무어요? 하학사, 사병을 길러야 하다니 대장의 허락도 없이 무엄하군."

민무구는 괘사를 떨어서 눈을 딱 부릅떴다.

"역적질을 하려고?"

아우 민무질이 뒤를 이어 떠들어댔다.

"정당방위를 하려면 역적질도 해야지. , , ."

하윤이 드높게 웃었다.

"자네들 자형보고 사병을 확충하시라고 내가 주장했네."

민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누님 명령이라면 할 수 없지요. , , ."

만좌는 모두 다 호탕하게 웃어댔다. 이후부터 정안군의 집에는 사병이 버쩍 늘기 시작했다. 넓고 큰 후원에는 사정을 세워서 활터를 만들었다. 활 잘 쏘는 한량들은 새로 뽑은 사병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쳤다. 사병들은 편을 갈라 활을 쏘았다. 안군은 자기 자신이 사정에 올라 활을 쏘기도 하고 한량들의 활 쏘는 구경도 했다. 일중, 이중, 삼중을 내리 맞히는 한량들과 사병들에게 상금을 후하게 주어서 기세를 북돋아 주었다. 활 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뿐이 아니었다. 창 쓰는 법, 철퇴 쓰는 법, 칼 쓰는 법, 모든 무예를 가르쳤다. 정안군은 열흘에 한 번씩 사냥을 빙자하고 사병들을 거느리고 왕십리 살곶이 다리를 넘어서 화양동으로 나갔다. 화양벌은 넓고 넓었다. 만간들이 잔디밭에서 말을 달렸다. 사병들에게 말을 달리며 활을 쏘게 하고, 말을 달리며 창을 쓰게 했다. 화양동 넓은 들에서 기운차게 달리던 여세를 몰아 산골 속으로 들어가서 노루를 잡고 토끼를 쏘았다. 큰 짐승을 잡은 사병에게는 백금상을 주고, 작은 짐승을 사냥한 군사에게는 십금 상을 주니, 용기는 백 배나 솟구쳤다. 해가 저물어 성안으로 돌아올 때는 수십 필의 노루와 토끼와 꿩들을 어깨에 메고 개가를 불러 돌아오니 정안궁 사병의 기세는 하늘도 찌를 듯 의기충천했다. 정안군의 수단은 보통이 아니었다. 사냥한 노루와 토끼를 정안궁으로 가지고 가지 아니하고, 경복궁대궐 정문인 광화문 앞에 즐비하게 벌려논 후에 대전에 문후를 청했다. 왕자 중에도 국가에 제일 공이 큰 왕자였다. 내시는 황망히 어전에 아뢰었다.

"정안군 문안 아뢰오."

강비와 함께 단란하게 앉아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하고 있던 태조는 황망히 내시한테 물었다.

"정안군이 어찌해서 미리 연통도 없이 문안을 들어오느냐?"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문후를 드린다 합니다."

아버지 태조는 아들들의 문안을 물리칠 도리가 없었다.

"들라 해라."

강비는 황황히 옆방으로 피하고 정안군은 어전에 올랐다.

"별안간 아바마마를 뵈옵고 싶어서 문후차 들어왔습니다."

태조는 웃는 낯을 지었다.

"오오, 잘했다."

이쯤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화양동으로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랬어?"

태조는 정안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루와 토끼와 꿩을 여러 마리 잡았습니다. 아바마마께 드리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바치오니 수라상에 올리도록 하옵소서."

태조는 아들의 효심을 거부할 길이 없었다. 용안에 가득히 웃음이 넘쳤다.

"노루 고기와 토끼 고기는 내가 평소에 즐기는 것, 가납하리라."

정안군은 태조가 가납한다는 말을 내리자 얼굴에 기쁜 빛을 가득히 띠고 아뢰었다.

"아바마마께서 구미에 당기신다 하오니 소자는 가끔 사냥을 나가서 노루와 토끼를 잡아 올리오리다."

"네 효심을 달게 받으리라."

태조의 용안은 더한층 화창했다. 정안군은 문안을 드리고 물러갔다. 옆방에 있던 강비도 무심하게 들었다. 아들이 아버지한테 사냥해 갖고 온 짐승을 어선에 오리라고 바치는 일은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태조는 완전히 아들 정안군의 술책에 넘어갔다. 정안군이 물러간 후에 태조는 궁녀를 불렀다.

"정안군이 사냥해온 노루 고기와 토끼 고기로 찬수를 장만하라."

궁녀는 분부를 받고 푸줏간에 영을 내려 노루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뜨게 했다. 나긋나긋하고 연한 살이 수라상으로 들어왔다. 이날 저녁 수라상에 노루 구이와 토끼 전골은 태조의 비위를 돋아주었다. 태조는 마음이 흐뭇했다. 대전 궁녀에게 다시 분부를 내렸다.

"정안군의 효심이 무던하다. 나 혼자 별미를 먹기 아깝다. 세자궁에도 노루 고기와 토끼 고기를 내리게 하라. 그리고 정안궁에도 보내서 내가 잘 먹었다고 전갈을 해라."

궁녀는 분부를 받들어 노루 고기와 토끼 고기를 세자 방석이 있는 동궁에도 보내고, 일변 정안궁에도 궁녀를 보내서 고기를 나누고 전갈을 했다.

"전하께옵서 나리께서 사냥하신 노루 고기와 토끼 고기를 달게 잡수시옵고 혼자 잡숫기 아깝다 하시와 세자궁와 정안궁에 맛을 나누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어찌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궁녀는 정안군과 민부인께 직접 전갈을 전했다. 궁녀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전하께옵서는 정안군 나리의 효심이 무던하다고 왕후마마께 말씀을 하셨습니다."

"황감하여이다."

민부인은 대답하고 정안군은 벙긋 웃었다. 이후부터 정안군은 거리낌 없이 사병을 길렀다. 슬며시 슬며시 팔도에 흩어져 있는 천하 장사들을 모아들였다. 택견 잘하는 사람, 씨름 잘하는 사람, 편쌈 잘하는 사람, 돌팔매질 잘하는 사람, 활 잘 쏘는 사람, 칼 잘 쓰는 검객들이 구름 뫼듯 모여들었다. 정안군의 집은 완연히 중국의 신릉군과 맹상군의 집 같았다. 식객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 애꾸눈이도 있고 절름발이도 있었다. 곰배팔이도 있고 체머리쟁이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다 힘찬 장사가 아니면 한 가지 재주가 있었다. 닭 울음소리 내는 자에 개 짖는 소리 내는 자까지 있었다. 정안군의 집에는 날마다 한 섬 쌀로 밥을 지었다. 정안군의 사병은 관병보다 우세했다. 사냥을 나갈 때마다 노루, 사슴을 무수하게 잡았다. 돌아와서는 반드시 부왕인 태조께 바치고 문안을 드렸다. 부왕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효심이 지극하다고만 생각했다. 넷째 왕자 방간이 있었다. 바로 정안군의 동복 형님이었다. 욕심이 많고 성정이 격했다. 지혜와 수단은 높지 못하나 시기하는 마음이 강했다. 항상 아우 정안군을 시기했다. 모든 사람들이 정안군을 창업에 큰 공이 있는 왕자라고 존경하고 숭배하는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계비 강씨의 아들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된 것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별다른 슬기와 머리도 없었다. 불평만 가득히 가슴에 품고 있었다. 정안군이 사병을 기른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갔다.

"무어, 방원이가 천하장사를 모아 사병을 기른단 말이냐? 나도 좀 사병을 두어야 하겠다."

방간은 청지기를 불러서 군사를 뽑기 시작했다. 인재를 저울질하고 다룰 줄 모르는 방간이었다. 쓸 만한 군사들은 모여들지 아니하고 무뢰배와 파락호들만 모여들었다. 방간은 정안군이 사냥을 나가서 노루와 토끼를 왕 전하께 바친 후에 효자라는 칭찬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정안군은 까닭이 있어서 바친 것이건만 방간은 자기도 효자라는 칭찬을 받고 싶었다. 날마다 무뢰배들을 몰고 사냥을 나갔다. 오합지졸과 무뢰배들이 사냥하는 기술과 방법을 알 까닭이 없었다. 뛰닫는 노루와 달리는 사슴을 바라보기만 하고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사냥할 때마다 기껏 잡았다는 것이 토끼 두 마리가 아니면 꿩 서너 마리를 잡았을 뿐이었다. 방간은 발을 동동 구르고 부아를 터뜨렸다. 사매질로 군사들을 때리고 욕했다.

그러나 사냥할 줄 모르는 오합지졸의 군사들이었다. 욕을 당하고 매를 맞아도 노루와 사슴은 잡을 길이 없었다. 방간은 더욱더 격하고 노했다. 사냥을 나갈 때 사병들을 두들겨주고 욕하고 걷어찼다. 군사들은 포악한 매질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씩 둘씩 달아났다. 그러나 방간이 정안군을 본떠서 집 안에 사병을 두고 날마다 사냥을 나간다는 소문은 궁중과 조정에 짜아하게 퍼졌다. 한편 정안군이 사냥을 나갈 때마다 노루와 사슴을 잡아다가 태조께 바치니 태조는 흐뭇하게 생각했으나 강비는 차츰차츰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정안군은 사냥을 나갈 때마다 무수한 짐승을 잡아 왔다. 날쌔고 용맹스런 군사가 있기 전에는 번번이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 정안군을 항상 경원하고 두려워하는 강비였다. 가만히 궁비들에게 정안군의 집안 형편을 살펴보라 했다. 강비의 시녀들은 명을 받들어 정안군의 사저를 찾기로 했다. 빈손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인절미를 만들어 놋밥 소라에 괴고, 약식을 쪄서 고청모란 화려한 푼주에 담았다. 천일주 한 고리와 함께 가자에 싣고 나갔다. 정안군의 지극한 효심을 가상하게 생각해서 전하와 강비께서 특별히 어사주를 내려 선온을 하고, 별미로 약식과 인절미를 보내는 것이라고 핑계를 삼자는 것이다. 왕 전하와 왕비의 명을 받들어 나가는 일급 상궁들이었다. 금은 주옥으로 꾸민 사인교를 탔다. 가자를 앞세우고 구종별배들은 벽제 소리를 치며 정안군의 집으로 나갔다. 때마침 한낮이 겨워서 점심때가 되었다. 정안군의 집에서는 장사들이 먹을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상궁들은 열두 줄 행랑 앞을 지나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사인교에서 내렸다. 넓고 넓은 마당에는 남녀노소 비복들이 한데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십여 개가 넘는 큼직한 가마솥이 즐비하게 걸려 있고 솥마다 김을 뿜어 안개같이 자욱했다. 밥 끓는 냄새, 국 끓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상궁들은 정안군의 식구가 이같이 많은가 하고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비자에게 어명을 받아 나온 뜻을 연통하고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상궁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마당에는 멍석이 쫙 깔려 있고, 멍석 위에는 장사패 수백 명이 교자상을 앞에 놓고, 밥과 국과 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떠드는 소리, 들레는 소리는 장터같이 시끄러웠다. 상궁이 선온을 받들고 나왔다는 기별을 받고 민씨 부인이 황황히 내당에서 나타났다. 침착한 민부인이었다. 강비의 시녀들한테 장사패들의 밥 먹는 것을 보게 한 것에 약간 마음이 걸렸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아니했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당 아래에 내려서, 강비의 시녀인 상궁들을 맞았다.

"아이고, 항아님들이 어떻게 이같이 나오시오."

다정스럽게 상궁들의 손을 잡고 당상으로 오르게 했다.

"대왕 전하와 왕비마마께오서 선온을 가지고 나가라 하시와 어명을 받들고 나왔습니다."

민부인의 얼굴은 더 한 번 활짝 웃었다.

"황공 감격해라. 무슨 까닭에 선온까지 내리셨소?"

"정안군 나리께서 사냥을 나가실 때마다 항상 전하와 비전하를 생각하시어 어선에 쓰시라고 사슴과 노루를 보내시니 양위분께서는 정안군 나리의 효심이 지극하신 것을 가상하게 생각하시어 특별히 오늘 저희들에게 약식과 인절미와 천일주를 받들어 선온을 하고 돌아오라 하명하셨습니다."

상궁의 말이 떨어지자, 대궐에서 나온 가마가 장사들의 물결을 헤치며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부인은 황망히 마당에 내려 손수 가자보를 끌렀다. 정안궁 시녀들이 민부인의 뒤를 따라 가자보를 끌렀다. 인절미 밥소라가 나타나고 약식 담은 푼주와 천일주 고리가 보였다. 민부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을 모아 다시 황감하다는 말을 상궁들에게 보냈다. 민부인은 시녀들에게 분부하여 떡과 약식과 술을 대청에 올리게 한후에 상궁들을 자리에 앉히고 기쁜 얼굴로 환담을 시작했다.

"왕은이 태산같이 높소이다. 모두 다 새마마께서 근념해주신 덕택이라 생각합니다. 들어가시거든, 어마마마께 잊지 말고 부디 감격하다 했다고 전갈 말씀을 아뢰어주오. 모두 다 어마마마의 자애하시는 온정이라 생각하오."

민부인은 계모 강비를 하늘 끝까지 치켜세웠다. 나이는 비슷하지만 이같이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 다 출전지효이신 정안군 나리와 부부인의 효성에 감동이 되어 별은전을 내리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들어가서 왕후마마께도 부부인의 감격해하시는 말씀을 잘 올리겠습니다."

강비가 정탐으로 보낸 상궁들은 자기네 나름으로 딴배짱이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잔뜩 의심을 품고 있으면서 이같이 능하게 대답했다. 마당에서는 여전히 한량과 장사패들이 떠들썩하면서 교자상을 둘러싸고 점심밥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비복들은 밥을 나르고 국을 퍼왔다. 동이로 떠오고 양푼으로 날랐다. 더운 김이 무럭무럭 일어났다. 뜨끈뜨끈한 밥은 백옥 같은 어백미요, 구수한 김을 뿜는 토장국은 양지머리, 옹두라지 뼈를 삶은 양골국이었다. 장사패들은 환성을 높이 지르며 사발과 반병두리로 밥과 국을 받았다. 비부쟁이는 막걸리를 장군과 동이로 퍼날랐다. 바가지로 퍼서 두 되, 서 되로 장사패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장사패들은 단숨에 사발술을 들이켜고 밥과 국이며 김치 깍두기, 콩나물을 순식간에 휩쓸었다. 그들은 껄껄거려 웃으며 후원 사정터로 나갔다. 강비의 심복 상궁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평생에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푸짐하고도 근감했다. 한편, 두렵고도 무서웠다. 조용히 민부인께 물었다.

"저 사람들이 모두 다 정안군댁 비복들이오니까?"

민부인은 상궁들이 묻는 눈치를 챘다. 잠깐 망설이다가 곧 대답했다. 기왕 들킨 일이었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비복도 있습니다마는 모두 다 사냥할 때 부리시는 몰이꾼들입니다. 전하께서 노루 고기를 좋아하신다 해서 한 달에도 몇 번씩 사냥을 나가시느라고 몰이꾼과 궁수들을 줄곧 집 안에 두고 밥과 술을 먹이십니다."

민부인은 사병을 몰이꾼이라고 능하게 대답했다.

"과연 효심이 대단하십니다."

강비의 심복 상궁은 찬탄하는 말을 보내면서 속으로는 더한층 의아하게 생각했다. 민부인은 능소능대했다. 강비의 시녀들은 관대했다. 찻집에 명하여 장국상을 올려서 다정하게 대접했다. 마음속으로는 경계하는 생각이 가득했으나 겉으로는 털끝만큼도 사색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화기 가득한 얼굴로 대했다. 궁녀들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왕후궁의 일류 가는 상궁들이었다. 대견하고 감격한 표정으로 민부인의 권하는 장국 대접을 받고 하직을 고했다.

"소인들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간곡하신 대접은 한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대궐로 들어가거든 어마마마께 왕은이 융숭하신 데 대하여 정안군 내외는 두굿김을 금치 못한다고 아뢰어주시오."

민부인은 마루 끝까지 나가서 궁녀들을 전송했다. 강비의 시녀들은 뜰에 내려 중문까지 나가자 서로들 눈짓했다. 장사패들이 밥을 먹고 들어간 후원의 모습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중에 나이 먹은 궁녀가 대담하게 앞장을 섰다. 젊은 궁녀들이 뒤를 따랐다. 전송하러 나온 정안궁의 비복들이 대궐 안 궁녀에게 말했다.

"그곳은 후원이올시다. 남자들이 있는 곳이올시다. 가보실 곳이 못 됩니다."

대궐서 나온 궁녀들은 상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냥할 때 부리시는 몰이꾼들의 씩씩한 모습을 구경하고 가려 하오."

말리는 정안궁의 비복을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후원으로 들어섰다. 궁녀들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넓고 넓은 후원에는 장사패들이 패를 지어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과녁을 세워 활을 쏘고, 한편에서는 서리 같은 칼을 빼들어 검술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말을 타고 철퇴를 흔들고, 한편에서는 택견을 하고 있었다. 강비의 시녀들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사냥할 때 부리시는 몰이꾼들의 무술이 보통이 아니로구려."

정안궁 비복에게 한마디 하고 혀를 둘러 물러났다. 대궐로 돌아간 상궁들은 바로 곧 왕후궁 강비의 처소로 향했다.

"정안궁에 선온을 받들고 다녀왔습니다."

"어떠하더냐, 동정이?"

"정안궁에는 사병 수백 명이 들끓고 있습니다. 보통 군사들이 아니오라, 일등 가는 장사패들만 뽑아서 교련을 하고 있습니다."

강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무어얏. 일등 가는 장사패들만 뽑아서 교련을 시킨단 말이냐."

"처음에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밥 짓는 가마솥이 열인지 스물인지 수없이 걸려 있고 양골국 끓이는 냄새가 비위를 흔들었습니다. 마당으로 들어가니 장정들이 들끓었습니다. 정안군 부인께 물어보니 전하께 바치기 위하여 사냥할 때 쓰는 몰이꾼이라 했습니다. 의심이 더럭 나서 장사들이 있는 후원으로 가보았습니다. 활쏘기, 말달리기, 칼 쓰기, 철퇴 다루기 등 대단한 훈련을 장사패들은 하고 있었습니다. 몰이꾼이 아니라 기막힌 장사들이었습니다."

강비는 크게 놀랐다. 정안군이 사냥을 핑계하고 사병을 기른다는 일은 큰일이었다. 정안군은 창업에 큰 공이 있는 것을 자세하고 세자를 무시하고 있다. 억세고 끈기 있고 지략이 과인한 정안군이 사병을 기른다는 일은 범이 날개를 지니고 있는 격이었다. 앞으로는 어린 세자에 대하여 크나큰 두통거리라 아니할 수 없었다. 강비는 더 한층 마음이 초조했다. 이날 저녁에 태조는 수라상을 받으러 내전으로 들어왔다. 온종일 신하들과 국정을 의논하고 비로소 틈을 타서 저녁 수라를 받기 위하여 내전으로 들었다. 태조의 가장 즐거운 시각이었다. 종일 피로한 몸을 내전에 들어 쉬면서 사랑하는 왕비와 함께 담소하며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이 시작은 가장 행복스럽고 즐거운 시각이었다. 태조는 벙긋벙긋 용안에 웃음을 가득히 띠고 내전으로 들어왔다. 강비는 수심을 감추고 조신한 태도로 왕 전하를 맞이했다.

"오늘도 정사가 많으셨습니까?"

"좀 많았소. 왜인들이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쳤고 북쪽의 오랑캐들이 폐백을 갖고 와서 신하 노릇 하기를 자원했소. 나라 안의 일로는 고려 때 권신들이 사사로이 가졌던 토지를 모두 다 몰수해서 농민들에게 주어서 균전법을 쓰게 했소. 오늘 일을 많이 했더니 매우 시장하오. 궁녀에게 빨리 수라상을 드리라 하오."

"왜인이 굴복하고 오랑캐가 충성을 자원했다 하니, 국가의 경사올시다. 더구나 농민을 위하여 고려 때 권문세가들이 백성의 땅을 뺏었던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시어 균전법을 쓰셨다 하니 이만 다행한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 농민들은 격양가를 높이 불러 농사를 잘 짓고 배부르게 먹겠습니다. 곧 수라상을 거행하도록 이르겠습니다."

젊은 왕후 강비는 푸른 빛 저고리에 자주 고름을 날리고 남치마 자락을 왼손으로 휘어잡아 어전에서 물러났다. 태조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 강비의 나가는 모습을 만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물을 박차고 깃을 벌려 날아가는 물찬 제비같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강비는 시녀들에게 수라상을 받들어 가지고 들어왔다. 나주반에는 백자 구첩 반상이 벌여 있고, 연엽반에는 은주전자와 도금을 입힌 은잔이 놓여 있었다. 강비는 친히 은잔에 가득 술을 따라 태조께 권했다.

"온종일 피로하셨으니 반주를 드시어 옥체의 피곤을 푸시옵소서."

태조는 젊은 강비가 손수 따라 올리는 반주잔을 바라보자 마음이 흐뭇했다.

"한 잔 마셔볼까."

기쁜 얼굴로 술을 마시었다.

"무슨 술인가 향기가 좋구려."

"새로 뜬 송순주올시다."

"어쩐지 송향이 좋구먼."

태조는 술을 마신 후에 반상에 놓인 안주를 집었다. 태조가 저를 들어 집은 안주는 갖은 양념을 발라 구운 저육이었다. 태조는 한 점을 집어 먹은 후 왕후 강비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고기요?"

"저육이올시다."

"산저 고긴가?"

"아니올시다. 집에서 기른 도야지 고기올시다."

"갖은 양념을 발라서 구웠기 때문에 맛이 좋소마는 일전에 정안군이 사냥해온 노루 고기와 산돼지 고기 맛만 못하구려."

태조의 말씀을 듣는 강비의 얼굴엔 새침하게 실가기 떠돌았다.

"노루 고기와 산돼지 고기 맛이 그다지도 좋으십니까. 전하께서 사냥한 고기를 너무 좋아하시면 아니되십니다."

"구미와 식성에 맞으니 좋아하는 것이지, 하하하."

태조는 껄걸 웃었다.

"정안군이 사냥해서 바친 고기를 너무나 좋아하시다가는 큰코를 다치십니다."

강비는 샐쭉한 얼굴로 톡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소리요. 큰코를 다치다니?"

"정안군의 집에는 사냥을 핑계하고 사병이 우글우글 끓습니다. 효자 노릇 하려는 사냥이 불효 노릇 하는 사냥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예 정안군이 사냥해 바치는 노루 고기와 산돼지 고기를 마음 놓고 잡숫지 마십쇼."

사병이 우글우글 끓는다는 강비의 말에, 태조의 큰 눈은 더한층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만저만한 사병이 아니올시다. 천하장사와 호걸들을 모아놓고, 식객이 삼천이올시다. 활 잘 쏘는 한량, 철퇴 잘 쓰는 모사, 칼 잘 쓰는 검객에 씨름 잘하는 역사, 심지어는 닭울음 잘 우는 건달패에, 개소리 잘 짖는 무뢰배까지 합쳐서 식객이 삼천이올시다. 겉으로는 전하께 노루, 사슴, 산돼지 고기를 바쳐서 효자 노릇을 한다 하면서, 이같이 사병을 기르고 있습니다. 크나큰 화근 덩이올시다. 인제부터는 다시는 노루 고기나 산돼지 고기를 잡숫지 마십쇼."

강비의 목소리는 전에 듣지 못했던 날카롭고 독기 어린 음성이었다. 태조는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한동안 멍하게 강비의 날카로운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전하의 아들이라 하나 정안군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정안군이 바치는 사냥한 물건은 받지 마시옵소서."

강비는 또 한 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정안군이 사병을 길러서 식객이 삼천이나 되는 것을 후마마는 어떻게 알았소?"

"전하께서는 귀가 어두우십니다. 온 조정이 다 알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노릇이올시다. 신첩은 이 소문을 듣고 궁녀를 정안군의 집으로 보내서 실지를 살펴서 돌아왔습니다. 항상 전하께 지극한 효심 가진 것을 치하하고 떡과 술을 보내서 위로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냥은 장사와 사병을 기르는 한낱 핑곗거리요, 실상인즉 딴맘이 있어 사병을 양성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왕자들이 창업지초라 약간의 사병들을 가지고 있는 줄은 짐작했지만 식객을 삼천 명씩 거느리고 있는 것은 전혀 몰랐구려."

"정안군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은 전하의 친군인 삼군부 군사보다도 더 우세합니다. 삼군부 군사는 오합지졸이올시다마는 정안군의 사병은 모두 다 활 잘 쏘고 칼 잘 쓰는 일부당천하는 장사패들이올시다. 일단 정안군이 법 없는 마음을 품고 반역하는 행동을 취한다면 삼군부 군사는 꼼짝 도리 없이 손을 들고 말 것입니다."

강비의 말을 듣자 태조는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하니 그럴 리가 있겠소. 하하하, 어서 술이나 한잔 더 따라 주오."

태조는 말을 마치자 초조해하는 강비의 등을 쓸었다. 강비는 황망히 수라상 앞에 있는 빈 잔을 들어 반주를 다시 따라 올리고 말을 계속했다.

"황공하오이다. 중대한 말씀을 오리느라고 계속해서 반주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옵소서. 그러하오나 정안군의 사병을 기르는 일에 대하여는 방심하지 마시옵소서."

태조는 강비의 두 번째 따라 올린 반주를 단숨에 마시었다.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안군이 제가 감히 어찌하겠소. 더구나 그 애는 세자책봉 주청사가 되어 자기 입으로 세자 봉하는 일을 명나라 황제한테 고하고 돌아온 사람 아닌가. 어찌 세자를 해칠 도리가 있겠소. 사람을 의심한다는 일은 한이 없는 일이오. 좀 더 동정을 보기로 합시다."

태조의 말씀을 듣자 강비는 펄쩍 뛰었다.

"아니됩니다. 내일 안으로 대신과 대장을 불러서 왕자들이 사병을 가진 것을 엄금하도록 조처하시옵소서. 만약 그대로 둔다면 국가에 큰 해가 미칠 것입니다. 어린 세자 방석이 불쌍하옵니다."

강비의 초초하게 조르는 말에 태조는 술맛이 없었다. 두 잔 술로 반주를 하고 메를 뜨는 둥 마는 둥 수라상을 물렸다. 강비는 계속해서 정안군의 사병을 제거시켜 달라고 주장했다.

"왕자들을 밖으로 내보내지도 아니하시고, 성안에서 사병을 기르게 하시는 일은 앞으로 환란을 일으키도록 조장시키는 일이올시다. 정안군은 세자를 세자로 대접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어코 왕자들의 사병은 금지하셔야 합니다."

열 번 찍어서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었다.

"내일 대신과 대장을 불러 의논하리다."

태조는 마침내 허락을 내렸다. 이날 밤에 강비는 삼군부 도총관 정도전에게 밀지를 내렸다.

'내일 전하께서는 대신과 대장들을 명소하여 왕자들의 사병 문제를 하문하실 것이오. 경은 역설해서 정안군의 사병을 없애도록 하라.'

정도전은 밀지를 받고 강비의 기지에 감탄했다. 이튿날 태조는 강비와 약속한 대로 대신과 대장들을 명소하여 사병에 대한 일을 하문했다.

"오늘 경들을 부른 것은 국사의 군사 통솔에 대하여 의논하려 하는 것이다. 여러 대신과 대장들은 허심탄회한 의견을 말해달라."

영의정 배극렴이 몸을 굽혀 대답했다.

"군사 통솔에 대한 일은 국가의 중대한 일이올시다. 어떠한 점을 하문하시는 것인지 밝게 하교를 내리옵소서."

"요사이 소문 들으니 왕자들이 사병을 두어서 기세가 대단하다니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우의정 겸 삼군부 도총관 정도전은 강비의 밀지를 받아서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으나 침묵을 지켜서 묵묵히 대답이 없다. 좌의정 조준이 아뢴다.

"왕자들이 사병을 두어 기세가 호대하다는 소문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정안군이 약간의 사병과 사냥하는 몰이꾼을 집 안에 두고 항상 사냥을 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것도 전하께서 즐기시는 노루와 산저며, 사슴을 어선에 바치기 위하여 사냥을 나간다 하옵고, 전하께서도 또한 그의 효심을 찬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병의 기세가 호대하다는 말은 처음 듣는 소리올시다."

좌의정 조준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대장 민무구가 아뢴다.

"소신은 무변 대장이올시다. 어떠한 왕자 사병을 두어서 기세가 호대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소신이 알기에는 왕자들이 사병을 가진 사람은 다만 회안군 방간과 정안군 방원이 약간의 사병을 가지고 있을 뿐이올시다. 정안군은 원래 나라를 개국할 때 고려의 잔당을 섬멸하기 위하여 약간 명의 사병이 있었던 것은 전하께서도 아시는 일이옵니다. 그 후에 나라가 승평하여 아무 일이 없으니 정든 군사와 비복들을 흐트러뜨리게 하기 애달프게 생각하여 가끔 사냥을 하고 얻은 물건을 부왕 전하께 바쳐서 효심이 지극하다는 소문이 항간에 자자합니다. 몰이꾼 등 오합지졸을 가리켜 군세가 호대하다는 말은 너무나 차이와 거리가 있는 뜬소문인가 합니다. 그리하옵고 회안군의 사병은 역시 사냥을 하기 위하여 약간의 사병을 둔 모양이올시다. 전하께서도 짐작하신다 합니다. 쓸데없는 뜬소문을 들으시어, 공연히 성심을 번회하지 마시옵소서."

대장 민무구는 대단치 아니한 것을 가지고 문젯거리를 삼지 말라고 아뢰었다. 모든 대신과 대장들은 묵묵히 민무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태조는 정도전을 바라보며 묻는다.

"봉화백은 우의정에, 삼군을 통솔하는 책임을 가졌다. 왕자들의 사병에 대하여 어떠한 의향을 가졌으며, 여기에 대하여 살펴보고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정도전은 삼군부 도총관으로서 전국의 군사권을 장악한 사람이었다. 태조가 정도전에게 묻는 말을 듣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봉화백 정도전에게 모여들었다. 정도전은 어젯밤에 이미 강비의 밀지를 받아서 오늘 전하의 어전회의가 있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침묵을 지키고 영의정과 대장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먼저 발언을 하지 아니하고 일부러 태조가 묻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태조의 묻는 말씀이 떨어지자 정도전은 정중한 자세로 부복해 아뢴다.

"원래 국가의 통수권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왕 전하께서 장악하고 계시는 법이올시다. 이러하므로 우리나라의 삼군부는 전하께서 신임하시는 신하로 하여금 통수하는 일을 대행케 하는 것입니다. 보천지하의 솔토지민이 모두 다 전하의 백성 아닌 사람이 없듯이 나라의 군사 쳐놓고 전하의 군사 아닌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는 지휘하는 장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장수는 전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장악하신 군사권 이외에 어떠한 사람이라도 군사를 기르고 장악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일이 있다면 이것은 참람된 일이올시다. 더구나 왕자로서 사병을 둘 수는 없는 일이올시다. 엄하게 금하셔야 합니다. 하늘에 두 해가 없듯이 군사권을 잡은 사람이 전하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창업의 기틀은 정해졌습니다. 모든 왕자들의 사병은 해산을 시켜서 삼군으로 편입시키시고 사병을 엄금하시는 일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정도전은 강비의 뜻을 받아 정안군의 사병을 없앨 것을 결연히 주장했다. 정도전과 항상 마음과 행동을 함께 하는 판서 남은이 아뢴다.

"소문에 의하면 지금 사병을 둔 왕자는 정안군 방원과 회안군 방간이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두 왕자에게 엄명을 내리시어 집에서 기르는 사병을 해산시켜서 삼군부로 편입시키는 조처를 취하시는 것이 합당한 줄로 아뢰오."

정도전과 남은의 주장을 듣자 대장군 민무구가 아뢴다.

"사병 문제에 대하여는 소신도 대장군의 중대한 직책을 맡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올시다. 누구보다 못지않게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안군이나 회안군이 가지고 있는 사병은 사냥하는 몰이꾼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군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안군이나 회안군이 사냥을 하는 일은 전하께서도 짐작하시는 일이올시다. 왕자로 있으면서 사냥하는 낙도 갖지 못하게 한다면 쓸데없는 딴생각을 하게 됩니다. 비복과 비슷한 가동들을 과대평가해서 사병이라 한다면 도리어 왕자들의 감정만 살 것이니 불문에 부쳐 버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장군 민무구는 정안군의 편이었다. 덮어둘 것을 주장했다. 정도전이 다시 아뢴다.

"민무구는 대장군의 직책을 맡은 사람으로 왕자의 사병을 그대로 두라 하니 고이한 일이올시다. 정안군은 식객이 삼천이라 합니다. 보통 몰이꾼이나 비복이 아니올시다. 단연코 해산령을 내리시옵소서."

정도전은 언성을 높여 우겨댔다. 이때 강비는 사병 문제의 결말을 알기 위하여 협실에서 의연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태조는 지난밤에 강비의 호소를 들었고 신임하는 신하 정도전의 우겨대는 말을 듣자, 왕자들이 사병을 두는 것이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국가에는 국법이 있다. 아무리 왕자라 하나 사병을 둘 수 없다. 고려 때 권신들이 제각기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은 이미 해산된 지 오래다. 왕자들이 사냥하기 위하여 몰이꾼을 집 안에 두었다 해도 활과 칼들, 병기를 가졌다면, 역시 사병이다. 그 수의 많고 적은 것을 묻지 말고 모조리 혁파시키라."

재토는 마침내 단을 내렸다. 협실에서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강비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고, 정도전은 코가 우뚝해서 의기가 헌앙했다. 승지는 비망기에 태조의 말씀을 기록하고 모든 대신과 대장들은 어전회의를 파하고 물러났다. 대장군 민무구와 대장 민무질은 불쾌한 마음을 품고, 자형인 정안군의 집을 찾았다. 정안군과 그의 부인 민씨는 강비의 시녀들이 선온을 받들어 나온 후에 장사패들의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을 목도해 보았으나 반드시 트집을 잡으리라 생각했다. 동정을 살피고 있을 때 친정에서 기별이 왔다. 대장군 형제들이 명소를 받아 급히 입궐했다는 것이다. 민부인은 친정에 기별에서 동생들이 어전회의를 파하고 퇴궐하는 대로 곧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씨네 형제들은 일이 중대했다. 바로 곧 자형의 집을 찾았던 것이다. 정안군 내외는 민무구 형제를 보자 반가움을 이기지 못했다. 민부인이 먼저 동생들에게 물었다.

"어전회의가 있었다며, 무슨 회의를 하였나?"

민무구는 기가 막히는 표정을 얼굴에 띠고 대답했다.

"모두 다 강비마마와 정도전이 요사스런 생각을 일으켜서 상감의 마음을 흔들어 가지고 어전회의를 열게 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회의란 말인가?"

정안군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자형의 사냥하는 몰이꾼의 문제가 되었소. 사병이라고."

정안군은 소리를 높여 껄걸 웃었다.

"하하하, 그럴 거야. 의심 많은 정도전이 강비와 함께 부동이 되어 당연히 문제를 삼았을 거야. 하하하."

허파가 터지는 듯한 웃음이었다. 민부인이 말참여를 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효심이 지극하다고 강비마마가 선온을 해서 궁녀를 내보낸 것은 진심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고 우리 집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궁녀들은 내보낸 것이 분명하오. 강비와 정도전은 우리를 잔뜩 의심해서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거든."

"좌우간 일은 점점 맹랑하게 되었소. 정도전은 자형을 지방으로 내쫓으려고 왕자분봉설을 주장했다가 일이 실패되니, 또다시 사냥도 못하게 하는구려."

이번엔 대장 민무질이 탄식조로 말했다. 정안군은 불끈했다.

"그래 정도전이 어전회의에서 어떻게 주장을 하던가?"

"통수권은 왕상전하가 갖는 것이니 왕자들은 사병을 둘 수 없다는 것이오. 좌의정 조준과 나는 사병이 아니라 부왕 전하께 효도하기 위하여 사냥할 때 쓰는 몰이꾼을 둔 것이니 관심할 거리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정도전은 몰이꾼도 무기를 가졌으면 사병이라고 우겨대서 결국 전하께서는 왕자들의 사병을 엄금하라고 승지한테 분부를 내리시고 어전회의를 파하셨소. 일이 이쯤 되었으니 하는 수 없소. 자형! 당분간 사냥을 중지하시고 몰이꾼들을 헤쳐 보내시오."

대장군 민무구는 정안군에게 어전회의 경과를 말했다. 정안군의 크게 노했다.

"선하심 후하심이냐 말야. 먼저는 무슨 맘으로 효자라고 술까지 내리고, 나중에는 사냥을 하지 못하게 하니 가소로운 일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것이 모두 다 강비마마와 정도전의 장난이란 말입니다."

이번엔 민부인이 말참여를 했다.

"전하께서 사냥을 중지하라 하시더라도 나는 중지하지 못하겠소! 사병이 아니야, 몰이꾼이란 말야!"

정안군은 버럭 화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이때 사랑에서 상노가 뛰어 들어왔다.

"나리 마마님께 여쭙니다."

정안군은 퇴창문을 열었다.

"왜 그러느냐?"

"하학사께서 오셨습니다. 급히 만나뵐 일이 있다 하십니다."

"하윤이 온 것이로군. 마침 잘되었습니다. 나가서 의논하십시다."

대장군 민무구가 발론을 했다.

"나가서 볼 것 무어 있나. 통내외를 하는 처지인데 들어오시라고 여쭈어라."

주인 정안군은 상노한테 분부하고 당 아래까지 나가서 손을 기다렸다. 이윽고 한림학사 부제학 하윤이 상노한테 인도되어 내당으로 들어왔다. 넓적한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띠고 검은 선 두른 심의를 입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정안군 나리, 날사이 태평하셨소. 관상쟁이 하윤이 또 찾아왔소이다. 하 하 하."

하윤은 호탕한 웃음을 웃으며 당 위로 올랐다. 정안군은 반가웠다. 덥석 하윤의 손을 잡았다.

"마침 잘 왔소.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정안군은 다정하게 하윤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섰다. 대장군 민무구 형제와 정안군 부인이 일제히 일어나 하제학에게 인사를 했다. 하윤은 답례를 한 후에 펄썩 자리에 앉자마자 정안군에게 농담을 붙였다.

"오늘 나리의 관상을 보니, 살기가 미우간에 가득했소이다. 그까짓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용모에 표적을 드러낸다는 것은 대장부의 일이 아니외다. 큰 인물은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성난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법이외다. 하 하 하."

하윤은 호탕하게 웃었다. 정안군은 빙긋 웃으며 하윤에게 물었다.

"그까짓 조그마한 일이라 하니 하제학의 하시는 말씀은 알아들을 수가 없구려. 무엇을 가리켜서 조그마한 일이라 하시오?"

하윤은 또 한 번 드높게 웃으며 말한다.

"하 하 하, 저를 속이시면 아니됩니다. 어전회의에서 나리가 사냥하기 위하여 댁에 두고 기르는 식객 삼천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고 그러십니까. 그까짓 몰이꾼쯤 흩어버리는 일이 무슨 큰일입니까. 하하하. 그것쯤 가지시고 안색이 누르락푸르락 하신다면 장차 큰일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하십니까. 나리는 나리답게 희로를 불형어색을 하셔야 합니다. 빨리 얼굴빛을 고치시오. 하 하 하."

정안군의 입에서는 픽 하고 웃음소리가 터지고 민부인은 새침하게 눈매와 입술가에 웃음빛이 떠돌았다. 대장군 민무구가 정안군을 대신해서 하윤에게 묻는다.

"어전회의에 사병 문제가 있었던 것을 하제학은 어찌 아셨소?"

"하 하 하, 대장군만 제일인 줄 아시오. 사람을 너무 깔보지 마시오. 어전회의에는 참례치 못했소마는 앞의 일을 환하게 내다보는 관상쟁이 하윤이오. 정안군의 몰이꾼 내쫓으라는 어전회의의 논란된 것을 모를 리가 있겠소. 육효를 떼서 점을 쳐보니, 대장군은 정도전한테 지고 말았습니다그려. 하 하 하."

"극비밀로 어전회의가 열린 일인데, 아무튼 용하오. 하제학의 기지는 따라갈 도리가 없소. 하 하 하."

민무구도 껄걸 웃었다. 하윤은 정색하고 정안군에게 고했다.

"큰일을 하는 이는 작은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곧 예궐을 하시어 전하와 강비께 알현을 청하고 사냥에 쓰는 몰이꾼을 자진해서 해산시키겠다고 아뢰시오. 그러한 후에 오늘 해 안으로 장사패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시오.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바로잡지 말고 참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라는 옛 어른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승지가 정식으로 사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들고 나온 후에 알현해도 좋으리라 생각하오."

민무구가 옆에서 말했다. 하윤은 손사래를 흔들며 말했다.

"천만에, 승지가 나와서 정식으로 명령을 내리기 전에 급히 들어가 자진해서 몰이꾼을 헤쳐버리겠다고 아뢰어야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병법에 선수를 치는 법입니다. 두말 말고 지금 곧 예궐을 하시오. 대장군과 저는 나리가 다녀 나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다."

민부인도 영리한 여인이었다.

"다녀 나오십시오."

남편에게 권했다.

 

 

강비, 세상을 떠나다

 

정안군은 하윤과 아내 민씨의 말을 듣고 곧 조복을 바꾸어 입고 대궐에 들어가 뵙기를 청했다. 승지가 정안군에게 집 안에 둔 사병을 폐하라는 전교를 정식으로 권하기 직전이었다. 이때 태조는 강비와 함께 저녁 수라를 단란하게 받고 있었다. 낮에 대신과 대장들을 불러서 왕자의 사병 둔 것을 금지하는 결정을 본 강비는 비로소 마음이 가벼웠다. 태조와 함께 수라상을 받으며 농담을 올렸다.

"오늘 수라상에도 즐기시는 노루 고기와 멧돼지 고기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이후엔 신첩이 세자와 함께 삼군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노루랑 멧돼지랑 산짐승들의 맛있는 고기를 사냥해서 전하의 수라상에 올리겠습니다. 신첩이 밀화패영에 주빛 갓을 쓰고 남철릭을 입고 말을 달리는 모습을 한 번 보시옵소서, 호호호."

강비는 아리따운 목소리로 웃어가며 아뢰었다.

"비마마가 세자와 함께 사냥을 해온 멧돼지 고기라면 얼마나 맛이 좋겠소. 더구나 비마마가 구군복을 차린다 하니 그 예쁜 자태를 한번 바라보고 싶소."

태조는 마음이 흥락해서 강비의 따라 올리는 반주를 마시고 있을 때, 창문 밖에서 내시가 아뢰었다.

"아뢰오. 정안군이 급히 뵙기를 원한다고 사후를 들어왔사옵니다. 어찌하오리까."

태조와 강비는 마음속으로 놀랐다. 아까 어전회의에서 왕자들의 사병을 폐지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연상했다. 필연코 여기 대해서 불평을 토로하러 들어온 것이라 생각했다. 태조와 강비의 마음은 어두웠다. 그러나 아들이 문안 들어온 것을 아니 만나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태조는 망단해서 언뜻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강비가 대신 대답했다.

"지금 전하께서는 수라상을 받고 계시다. 이 뜻을 정안군에게 전해라."

강비의 음성은 얼음같이 싸늘했다. 내시는 벌벌 떠는 음성으로 아뢴다.

"소인이 벌써 아뢰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수라상을 받고 계신 중이니 다음에 문후를 올리시는 일이 좋겠다고 아뢰었습니다마는 정안군께서는 꾸지람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 조석으로 모시고 있지 못한 것이 한인데 수라상을 받으신 것을 번연히 알고 어찌 감상을 아니하고 그대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호령을 하십니다."

태조는 정안군의 문안을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들라 해라."

내시에게 분부를 내렸다. 이윽고 정안군은 내시를 앞세우고 합문 안으로 들어섰다. 대전상궁이 정안군을 전상으로 인도했다. 길고 긴 복도를 지나서, 정안군은 화려하게 조각된 완자창문 앞에 섰다.

"정안군 문안드리오."

상궁은 아리따운 목소리로 거래를 드렸다. 상궁이 두 손으로 미는 완자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정안군은 어전 지척에 허리를 굽혀 문후를 올렸다. 전하가 수라상을 받고 있으니 곡배를 드리지 아니하고 국궁만 올렸다. 얼굴에 가득하게 화색을 띠고 손을 모아 조용히 서 있었다. 정안군의 불덩이 같은 성격으로는 바다 같은 아량을 보인 것이다. 태조는 아무 말 없이 수라상을 대하여 수저를 들었다. 강비도 말없이 태조의 수라상을 받는 시중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계모인 세 사람의 태도는 한 방에 있으면서 마치 노상의 사람들이었다. 한동안 후에 태조는 수라상에 저를 놓았다. 궁녀들이 분주하게 수라상을 물렸다. 태조는 비로소 정안군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렸다.

"별일 없느냐?"

", 별일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뢸 일이 있어 들어왔습니다."

태조와 강비는 마음속으로 뜨끔했다. 사병을 해산시키지 못하겠다고 항의를 하러 들어온 줄 알았다. 정안군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오늘 어전회의가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들어왔습니다."

태조와 강비는 '과연 그 일로 들어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태조는 대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대신과 대장들을 불러서 회의를 한 일이 있었다. 정원에서 승지가 나가서 전교를 전하더냐?"

"아니올시다. 아직 전교는 정식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문을 들어 알았습니다. 신은 그 소식을 듣고 오늘 해 안으로 당장 사냥할 때 부렸던 몰이꾼들을 다 고향으로 헤쳐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알현하러 들어온 길이올시다."

태조와 강비는 정안군의 말을 듣자, 생각했던 바와 전혀 달랐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원래 두려운 아들인 까닭이었다. 태조는 용안에 미소를 지었다.

"승지가 전교를 전하기 전에 사병들을 헤쳤단 말이냐. 잘 처리했다. 공연히 남의 입초수에 오르내리지 않게 되었다. 잘했다."

태조는 아버지다운 인자한 얼굴로 정안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때 정안군의 얼굴엔 갑자기 슬픈 빛이 떠돌며 울음이 복받쳤다. 목멘 소리로 부왕께 아뢰었다.

"아바마마, 자식들을 그토록 못 믿으십니까. 지난번엔 자식들을 지방으로 내치려 하시더니 이번엔 사냥하는 몰이꾼을 사병으로 몰아서 없이하라 하시니, 이토록 자식들을 못 믿고 어찌하시렵니까. 자식들의 서 있을 땅은 어디오니까. 소자는 아바마마의 전교를 받기 전에 몰이꾼을 다 헤쳐 보냈습니다. 아바마마, 이제는 안심하옵소서."

정안군은 말을 마치자 느껴 울었다. 태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정안군은 또 한 번 부왕을 향하여 푸념을 했다.

"언제는 사냥한 고기를 가납하시어 효자라고 칭찬을 하시어 선온까지 내리시고 불과 며칠이 못가서 역적이 될까 염려하시어 몰이꾼을 사병이라 해서 폐하라 하시니 아바마마께서는 간신들의 말을 너무나 믿으십니다. 아바마마! 부자간을 이간질하는 간신과 요사스런 계집의 말을 너무 믿지 마시옵소서."

정안군은 말을 마치자, 태조의 곁에 앉아 있는 강비를 말없이 흘겼다. 화경 같은 큰 눈에 불덩이가 이글이글 굴렀다. 시뻘건 불덩이는 강비의 얼굴로 살같이 달렸다. 무서운 눈결이었다. '아지끈' 소리가 나지 아니했을 뿐, 벼락 치듯 섬광을 뿜고 떨어졌다. 안광은 계모 강비의 온몸을 집어삼킬 듯했다. 강비는 너무나 무서웠다. 고개를 푹 숙였다. 전신에 소름이 쪽 끼쳤다.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강비는 너무나 무서웠다. 염통이 얼어붙는 듯했다. 발자취 소리가 났다. 강비는 정신을 수습하여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정안군의 삼승 버선을 신은 큼직한 발이 장판방 바닥으로 선뜻선뜻 옮겨졌다. 강비는 마음속으로 '인제 나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약간 풀렸다. 무서운 악몽 속에서 깨어난 듯했다. 가벼운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흘낏 눈을 들어 나가는 정안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안군은 왕방울같이 크고 무서운 눈으로 나가면서도 또 한 번 강비를 째려보았다. 여전히 불벼락이 떨어질 듯한 무서운 눈결이었다. 강비는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마침내 정안군의 발길은 장지문밖으로 옮겨졌다. 강비는 비로소 길게 한숨을 지었다. 태조는 아내 강비에게 물었다.

", 한숨을 짓소?"

"아니올시다."

"아니라니, 한숨을 쉬고도 아니라 하오. 왜 그러오. 몸이 불편하오?"

"먹은 것이 좀 눌렸나 봅니다."

"먹은 것이 눌렸어..."

태조는 놀랐다.

"어쩐지 얼굴빛이 해쓱하구려."

태조는 눈치를 챘다. 정안군이 강비를 흘기는 눈을 보았던 것이다. 정안군의 째려보는 무서운 눈으로 인해서 강비의 먹은 것이 체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곧 궁녀를 불렀다.

"빨리 내국에 기별해서 사향소합원을 가져오라 일러라."

궁녀는 급히 내시에게 명을 전했다. 내시는 종종걸음을 걸어서 전의에게 사향소합원을 얻어가지고 들어왔다.

"어서 빨리 소합원을 개어 드려라."

궁녀는 강비에게 사향소합원을 개어 올렸다. 강비는 전하가 내리는 환약을 아니 먹을 수 없었다. 좌우간 마음을 진정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궁녀가 개어 올리는 사향소합원을 받아 마시었다. 한편 정안군은 대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부인 민씨를 위시하여 처남 민무구 형제와 하윤이 대기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정안군을 보자 하윤이 먼저 물었다.

"전하께 뵈었습니까?"

정안군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두 분이 수라상을 받고 계신 중에 어거지를 쓰고 들어가 뵈었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선하심 후하심으로 효자라고 칭찬하여 선온까지 내리시더니, 몰이꾼을 사병이라 해서 헤쳐버리라 하시니 웬일이십니까' 하고 아뢰었소. 그리고 몰이꾼들을 다 헤쳐버렸으니 안심하시라고 아뢰었소."

"잘하셨습니다. 그럼 어서 빨리 장사패와 한량들을 오늘 해 안으로 해산시켜 보내십시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큰일을 하는 분은 작은 일에 구애해서는 아니 됩니다. 주저치 마시고 곧 해 안으로 헤쳐 보내십시오."

하윤의 말이 떨어지자 민부인이 옆에서 고했다.

"하부제학의 말씀이 옳습니다. 몰이꾼을 헤쳐 보내기 전에 전하께는 해산을 시켰다고 아뢰었으니 지체 말고 곧 헤쳐 보내십시오. 반드시 뒷조사를 하러 나올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민무구 형제도 찬성한다.

"하제학과 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형은 단을 내려서 칼을 뺄 때가 따고 있을 것입니다. 어서 한량패들을 헤쳐 보내십시다."

정안군은 뜻을 결단했다. 민부인을 돌아보고 일렀다.

"한량들을 헤쳐 보내는데 그대로 보낼 수가 있소. 술과 안주를 곧 마련해주오. 그리고 청지기에게 분부해서 한량들에게 나눠줄 포목을 준비하라 하시오."

민부인은 곧 명을 받아 안주와 술을 장만하고 고문을 열어 베와 낱목을 꺼냈다. 안마당에는 멍석이 깔려지고 교자상에는 도라지, 삶은 고기와 순대국이 푸짐하게 반에 다망 놓여졌다. 막걸리를 동이로 퍼 날랐다. 정안군은 후원에 있는 장사패들을 불렀다. 장사패들도 수군거리며 눈치를 챘다. 나라에서 사병을 없이 하라는 어전회의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모두들 서운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정안군은 마당에 모여든 수백 명 장사에게 말했다.

"무예는 남자의 장쾌한 기상이다. 나라 젊은이들의 씩씩한 기풍을 기르기 위하여 그대들과 함께 활을 쏘고 말을 달려 사냥하고 교련했더니 나라에서는 사병이라 해서 금하는 영을 내렸다. 아무리 왕자라 하나, 국법은 어길 수 없다. 그대들은 잠시 흩어져서 농사와 생업에 종사하라. 일후에 또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라. 작별에 임하여 술과 안주가 마련되었으니, 배불리 먹고 흩어지라."

장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정안군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국법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섭섭한 마음을 안고 술과 고기를 먹은 후에 정표로 주는 베 한 필과 명 한 필씩을 받아가지고 정안군의 집 대문 밖으로 나가서 제각기 흩어졌다. 정안군이 부왕의 명을 받들어 사병을 흩어 보냈다는 소식은 짜아하게 퍼졌다. 회안군 방간은 그대로 사병들을 눌러둘 수 없었다. 대궐에서 분부가 내리기 전에 사병을 헤쳐 보냈다. 삼군부 도총관 정도전은 어전회의가 있은 후에 가만히 기찰들을 풀어서, 정안군과 회안군의 동정을 살폈다. 정안군이 먼저 사병을 해산시키고, 회안군도 몰이꾼을 헤쳤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태조께 보고를 올렸다.

"정안군과 회안군은 분부에 순응하여 사병들을 헤쳤다 합니다. 국가의 다행이올시다."

태조도 마음이 흡족했다.

"알겠소. 앞으로 경은 삼군부의 군사를 더욱 강화하도록 하오."

태조는 정도전을 격려하는 말씀을 내렸다.

"왕후마마께도, 왕자들이 사병을 다 해산시켰다는 말씀을 전해주시옵소서. 이제는 모두 다 안심하시라고 말씀해주시옵소서."

태조는 용안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경의 충심을."

정도전은 태조가 미소를 지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자 더한층 의기가 양양했다.

"그럼, 소신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정도전은 어전에서 물러났다. 태조는 한시바삐 강비의 기뻐하는 얼굴을 대하고 싶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내전으로 들어갔다. 강비는 아직도 몸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아니했다.

"아직도 가슴이 편하지 아니하오?"

태조는 근심스런 얼굴로 강비의 머리를 짚었다.

"어제 환약을 먹은 후에 가슴 아픈 증은 약간 가라앉은 듯합니다. 그러나 기운이 없고 두통이 심합니다."

태조는 강비의 병이 난 원인이 정안군을 위시한 왕자들의 사병 문제 때문이라 생각했다. 한시바삐 강비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다. 짚었던 이마를 다시 어루만져주며 말했다.

"지금 삼군부 도총관 정도전이 입궐해서 보고를 하고 나갔소. 정안군과 회안군이 다 사병들을 해산시켜서 농촌으로 돌려보냈다 하오. 비마마는 안심하오. 그리고 정도전은 특별히 후마마께도 알려달라고 과인에게 당부하고 나갔소. 이제 왕자들의 사병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소. 마음을 편안히하여 정신을 수습하오."

강비는 자리에 누운 채 초췌한 얼굴에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왕자들이 사병을 해산시켰다 하니 국가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올시다. 모두 다 전하께옵서 깊이 통촉하시어 분부를 내리신 덕택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적이 마음이 놓입니다."

강비는 이불을 헤치고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를 두 손으로 가다듬었다. 밤사이 약간 야윈 얼굴이 태조의 눈에는 도리어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는 활짝 마음을 놓고 조섭을 잘 하게 하오."

태조는 강비의 등을 쓰고 일어났다. 태조가 외전으로 나간 후에 강비는 마음을 진정하고 몸을 일으켜 경대 앞에 앉았다. 머리를 빗고 기운을 차려보려는 것이었다. 경대 속에 초췌한 얼굴이 비쳤다. 비녀를 뽑고 쪽을 풀었다. 월소 빗을 들어 머리털을 가려 내리려 할 때, 홀연 경대 거울 속에 생각지도 아니했던 정안군의 째려보는 무서운 눈이 비쳤다. 어제 어전에서 불을 뿜어 흘겨보던 바로 그 무서운 눈이었다. 정안군의 무섭게 흘겨보는 눈이 문득 사라지며, 벼락같이 큰 정안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바마마! 부자간을 이간질하는 간신과 요사스런 계집의 말을 너무 믿지 마시옵소서!'

정안군의 목소리가 귓전을 쨍하게 울렸다. 다음엔 정안군의 무섭게 째려보는 눈이 번쩍 섬광을 뿜으며 다시 거울 속에 비쳤다. 강비는 외마디 소리를 치며 얼레빗을 내던지고 쓰러졌다. 협실에 있던 궁녀들이 강비의 외마디 소리에 놀라 급히 몰려들었다. 강비는 쓰러진 채 손발이 차디차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궁녀들은 황황망망했다. 한편으로 대전에서 기별하고 한편으로 손발을 쓰다듬었다. 태조는 급보를 듣고 시각을 지체치 않고 내전으로 들어왔다. 분부를 내려 백비탕을 끓여서 입안에 흘려 넣고, 일변 전의를 불러들여서 침으로 사관을 텄다. 산삼청심환을 흘려놓고, 우황을 개어 올렸다. 한 식경 만에 강비는 겨우 한숨을 짓고 정신이 들었다. 비로소 자기가 머리를 빗다가 거울 속에 비친 정안군의 무서운 눈을 바라보고 기절이 된 것을 알았다. 태조는 벌벌 떨며 다시 살아난 강비를 향하여 물었다.

"금방 내가 다녀 나갔는데 웬일이오. 몸이 거북한데 머리는 왜 빗었단 말요."

소생된 왕비의 뺨을 어루만지며 애틋하게 물었다. 그러나 강비는 거울 속에 정안군의 무서운 눈초리가 비쳐서 기절이 되었다고 아뢸 수는 없었다.

"몸이 몹시 약해졌나봅니다. 얼레빗으로 머리를 가리다가 별안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억지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몸이 거북한 사람이 머리를 빗다니 말이 되오. 몸조심을 하시오."

태조는 다시 사랑하는 젊은 왕비의 등을 쓸며 당부했다. 전의들은 강비의 병이 정안군의 무서운 눈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맥이 너무나 약하고 기허해서 병환이 나셨습니다. 기혈을 보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산삼대보탕에 녹용을 곁들여 써야 하겠습니다."

태조도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강비는 방석으로 세자를 삼느라고 비상한 애를 썼다. 그뿐인가. 한양으로 천도해서 새 대궐에 왕궁을 정하는 데도 크나큰 노력을 했던 것이다.

"곧 산삼과 녹용을 상품으로 택해서, 약을 지어 바치라."

전의에게 분부를 내렸다. 내국에서는 산삼과 녹용 등 보재를 달여 올렸다. 그러나 공포에 떠는 강비에게 산삼, 녹용 등 징건한 보약이 맞을 까닭이 없었다. 약은 맞지 아니했다. 마시는 대로 체하고 토했다. 강비는 눈만 감으면 정안군의 무섭게 흘겨보는 눈이 나타났다. 이내 척골이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궁녀들은 무녀를 불러 굿을 했다. 새로 옮긴 경복궁 대궐터가 드세서 왕후마마가 병이 들었다. 했다. 팔도에 영을 놓아 영하다는 장님들을 불러서 경을 읽었다. 그러나 강비의 병은 점점 더 깊어가고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무녀들은 강비를 대궐에서 떠나 피접을 내라 했다. 상궁들이 태조께 간곡하게 아뢰었다. 태조는 어떠한 짓을 해서라도 사랑하는 왕비를 살려내고 싶었다. 마침내 피접할 만한 곳을 수소문했다. 태조는 대신들을 청하여 물었다.

"왕후 강씨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 그의 마음을 전환시켜보기 위하여 궁중에서 여염으로 피접을 내보내려 하니 경들은 좋은 곳이 있으면 천거하라."

대신 중에 강비의 환후를 가장 근심하는 이는 세자 방석의 스승인 정도전이었다.

"조용하고 정결한 좋은 곳이 있습니다.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이 좋을 듯합니다."

이득분의 집이 조용하고 정결한가? 그렇다면 곧 피접을 나가게 하라."

승지는 어명을 받아 이득분의 집에 어명을 전하고 궁녀들은 강비께 고한 후에 시각을 지체치 않고 이득분의 집으로 피접을 나갔다. 강비는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이 아직도 삼십대의 젊은 시절이었다. 몸은 점점 쇠약했으나 마음만은 왕성했다. 더구나 어린 왕세자 방석을 위하여 오래오래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자기가 살아 있지 아니하면 막내아들 방석은 비록 왕세자의 존엄한 지위에 있으나 억세고 떼많은 전실 왕자들 틈에서 장래가 어찌 될지 근심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정안군의 흘겨보는 그 눈은 시시때때로 자기를 위협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하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강비는 산삼, 녹용은 불로장생하는 약이란 말을 어릴 때부터 귀에 젖도록 들었다. 속에서 받지 아니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국에서 달여 바치는 대로 억지로 먹었다. 체기가 있어 비위가 트림한 것도 불구하고 궁녀들이 권하는 대로 그대로 받아 마시었다. 때는 초가을 팔월 가위가 가까웠건만 아직도 한낮에는 늦더위가 대단했다. 강비는 공포증에다가 산삼, 녹용의 징건한 보약에 체해서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설사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댓줄기같이 뻗쳤다. 사흘 밤 사흘 낮 동안 설사를 계속한 강비는 마침내 기진맥진이 되었다. 강비가 위독하다는 보고는 마침내 태조께 아뢰게 되었다.

"왕후마마께서는 아마도 세상을 떠나실 것 같습니다."

태조는 궁녀의 아뢰는 말을 듣자 혼이 나가고 넋을 잃을 것 같았다.

"피접도 소용이 없고, 산삼 녹용도 효험이 없단 말이냐?"

"설사를 하고 토하신 지 사흘 밤 나흘 낮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소생이 되실 가망이 없습니다"

태조는 급했다. 세자 방석을 연 위에 안동해 태우고 어가를 몰아 이득분의 집으로 향했다. 태조가 강비의 침소로 들어가니 강비의 모습은 벌써 며칠 전 대궐 안에 있을 때 모습이 아니었다. 아름답던 얼굴은 해골처럼 하얗게 변하고, 윤기 흐르던 푸른 눈은 움쑥 들어가 동자는 빛을 잃었다. 태조는 강비의 앞으로 가까이 가 수척한 손을 잡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내가 왔소. 세자와 함께 내가 왔소,"

태조는 목멘 소리로 왕후를 불렀다. 강비는 혼곤한 속에서 눈을 떴다.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조의 홍안을 바라보며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다음 세자 방석의 얼굴을 본 모양이었다. 억지로 손을 들어 방석을 부르는 시늉을 했다. 세작 방석이 어마마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비는 해골 같은 찬 손으로 방석의 손을 잡았다. 목멘 소리로 태조께 당부했다.

"세자를 잘 보호해주십시오."

혀 굳은 음성이었다. 마지막 한마디를 하고 강비는 눈을 흡떴다. 이미 담이 끓어올랐다. 운명을 했다. 태조는 몸부림쳐 통곡하고 어린 세자 방석은 어마마마를 불러 구슬프게 울었다. 그러나 이미 맥이 끊어지고 숨을 거둔 강비는 태조의 몸부림쳐 통곡하고 단장의 슬픔과 어린 세자의 애끊는 곡소리를 알아들을 까닭이 없었다. 다정하고 아름답던 강비는 고이 잠이 든 듯 천만 번 불러보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태조는 사랑하는 강비가 이같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숱한 고생을 해서 혁명을 일으켰다. 민심이 거세고 사나우니 강비는 태조께 권해서 복지의 세계인 아름다운 땅으로 나라의 수도를 옮기자 했다. 충청도 계룡산에 신도를 정해서, 역사까지 시작했다. 그러나 꿈에 신이 나타났다. 이곳은 정씨가 도읍을 정할 자리지 이씨의 도읍 터가 아니라 했다. 정하면 큰 재앙이 내린다 했다. 태조는 깜짝 놀라서 역사를 중지하고 다시 무학과 정도전과 의논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했다. 모두 다 강비와 세자 방석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정도전을 시켜서 대궐 역사를 맡게 하고, 도성을 쌓아서 사대문을 이룩했다. 경복궁, 창덕궁은 웅장 화려한 근세조선의 왕궁이 되었다. 백 걸음마다, 궁궐이요, 천 걸음마다 한 누각이었다. 울긋불긋, 단청은 기둥과 도리마다 채색이 아름답고 찬란한 황금 용틀임은 천장마다 부각이 되어 눈을 현란케 했다. 여기다가 정도전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집 이름을 지었다. 근정전과 근정문, 용문루와 웅무루, 인정전, 사정전에 영춘문, 영추문, 강녕전과 탕춘대, 경무대 등 이루 다 들어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답고 복스런 이름으로 궁궐과 궁문 이름을 지었다. 태조는 이곳에서 강비와 함께 새로운 포부로 정치를 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복스런 자리를 세자 방석에서 전해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비는 뜻밖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늙음이 찾아오는 자기가 먼저 가고 젊은 강비는 방석의 뒤를 보아 주면서 오래오래 살 줄 알았는데, 이제 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보니 태조는 눈앞이 캄캄했다. 모든 꿈이 일시에 스러졌다. 무엇 때문에 자기는 혁명을 일으켜서 고래를 뒤엎고, 조선이란 새 나라를 창립했는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마음뿐이었다. 만승 천자의 자리도 소용이 없었다. 천승 임금의 자리도 사랑하는 강비가 없는 곳엔 쓸데없는 것 같기만 했다. 태조는 기운이 파하도록 느껴 울었다. 측근 시녀들은 태조의 신상을 염려했다.

"그만 슬픔을 그치시고 환궁하사이다."

열 번 스무 번 간청해서 저물게야 세자와 함께 겨우 대궐로 돌아갔다. 예조에서는 왕후의 국상을 반포했다. 열흘 동안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금하고 조정에서는 공무를 정지하고, 민간에선 사흘 동안 철시를 해서 저자를 닫았다. 태조는 슬픔을 억제하고 사랑하는 아내 강비의 만년유택인 능침을 고르기 위하여 친히 자비를 타고 한양에서 멀지 아니한 명산을 찾았다. 안망동을 둘러보고 고양 행주도 찾아가 보았다. 안암동에는 물이 나서 중지하고 행주는 지세가 마땅치 아니해서 파의해버렸다. 다시 한양 서울 안 취현방 정동에 산소 자리를 살펴보았다. 가깝고도 좋았다. 아침 저녁으로 왕래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산소 자리는 정동(현재덕수궁 뒤)으로 결정했다. 봉상시에서는 강비의 시호를 신덕왕후라고 하고 능소의 이름을 정릉이라고 지어 올렸다. 강비의 잘례는 돌아간 지 여섯 달 만인 이듬해 정축 정월 초삼일 정릉에 장사지낸 후에 백관들은 굴건제복의 거상 옷을 백의흑대의 조복으로 바꾼 후에 인안전에 반혼제를 지내어 혼전을 모시고 조석상식을 올렸다. 왕비 강씨가 모든 전실 아들을 제쳐놓고 자기 몸에서 난 막내아들 방석으로 세자를 봉한 후에 늙은 창업지주 대왕을 모시고 부귀영화를 누려 지내다가 대왕이 늙어서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들 방석이 대궐을 잡아 왕위에 오르고 자기는 왕태후가 되어 임금인 아들을 도와주는 섭정이 되어 조선 천지에 군림하면서 한 나라의 정치를 주름잡아 부귀영화를 계속하려던 꿈은 돌연 일어난 병으로 인하여 모든 일이 안개처럼 스러져버리고 말았다. 꿈만이 스러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초로같이 스러졌으니 모든 것은 공이요, 무요, 허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강비는 죽어서 생명이 없어졌고, 감각이 없어졌고, 사고력이 없어졌다.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 서울 장안 서쪽 덕수궁 뒤 북편 언덕에 한 줌 흙을 보태어 누웠으니 서러운지, 애달픈지, 한스러운지, 아무것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강비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태조 이성계 대왕뿐이었다. 젊어서 상처를 해도 슬프다 하는데 나이 육십 가까운 노경에 상배를 하고 말았다. 큰부인 한씨는 복이 박해서 시골서 농사를 지으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늘그막에 개성 부근 포천 농막으로 옮기기는 했으나 남편인 이성계가 왕이 되기 일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이성계는 사랑을 함빡 강씨한테 기울였으므로 한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다지 슬프지 아니했다. 다만 마음속으로 '고생을 많이 하다가 세상을 떠났구나' 하고 한탄할 뿐이었다.

 

 

정릉 흥천사

 

태조 이성계는 이제 젊고 혈기왕성한 야욕과 야망이 많은 옛시절의 사내가 아니었다. 공성신퇴하는 육십지년이었다. 함경도와 여진 국경 사이에서 무무하게 자라난 촌뜨기 총각으로 아버지 만호 이자춘의 발련을 얻어 송도 서울로 올라다니면서 왜적의 난을 쳐부순 것이 성공의 기틀이 되어 출장입상한 지 삼십여 년에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한 혁명을 일으켜서 이제는 일국의 제왕이 되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앞으로의 희망은 다만 국태민안하고, 사사롭게는 왕실이 무고해서 젊은 아내 강비와 함께 해로동락하면서 여년을 보내다가 왕의 자리를 세자 방석한테 내어주고 자기 한평생을 평안히 마치려 하는 희망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능동적이었던 옛시절은 지나가고 다만 나머지 일생의 끝을 평안하고 무사하게 마치기가 소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서울로 천도한 벽두에 사랑하는 강비를 잃고 보니, 하늘과 땅이 캄캄하고, 인생이 너무나 무상한 것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어떻게 늙어가는 자기 자신을 주체해야 할지, 어떻게 앞으로 생활을 전개시켜야 할지 딱하고 처량했다. 밥을 먹어도 입맛이 없고, 옷을 입는 것도 등신이 입는 것 같았다. 정사 일에도 귀가 얼른 기울여지지 아니했다. 사물을 판단하는 데도 얼이 빠진 듯했다. 눈에 띄는 것은 강비의 얼굴이요 강비의 자태요, 눈에 밟히는 것은 모두 다 강비의 평상시의 강비가 사랑하고 손질하고 쓰다듬던 물건들이었다. 날마다 빈전에 임어해서, 살아 있는 강비를 대하듯 관을 어루만지고, 혼자 생시처럼 말을 넘겨보던 대왕은 여섯 달 만에 왕비를 정릉에 장사지내 묻은 후에, 혼전에 반혼을 해 돌아오니 더욱 적적하고 호젓했다. 이제는 신체마저 없고 혼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혼인들 알 수 있으랴. 태조는 혼전에 술을 올려 일장통곡을하여 슬피 운 후에 대전으로 쓸쓸하게 돌아갔다. 삼천 궁녀들이 소복단장으로 상감의 옥체를 부축하여 걸음을 옮겼다. 모두 다 꽃보다도 곱고 달보다도 환한 잘생긴 궁녀들이었다. 그러나 대왕은 이 아름다운, 이 젊은 청춘인 여성들에게 아무러한 환희도 느끼지 아니했다. 이미 육십에 가까운 연치다. 느껴지지도 아니했다. 흥미도 없었다. 대왕은 자리에 안정한 후에 한숨을 한 번 후우 쉬었다. 눈에는 아직도 혼전에서 울던 눈물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왕의 앞에는 제조상궁이 시립해 있었다. 임금의 머리에는 안변 설봉산에서 자기가 임금이 된다고 해몽을 해 주었던 무학대사의 생각이 났다. 태조는 측근 내시에게 물었다.

"무학대사가 지금 어디 있다 하더냐?"

"양주 회암사에 있다 하옵니다."

제조상궁이 대답했다.

"허허, 내가 왕후를 잃었건만 무학은 나를 찾아보러 오지 않는구나. 급시 내관을 회암사로 보내서 무학을 입조 시키라."

제조상궁이 청명하고 아뢴다.

"무학대사를 청하는 데는 보통 내시를 보내서는 아니될 줄 아뢰옵니다. 국사 대접을 해야 할 터이온데 누구를 보내시는 것이 적당하온지 아뢰옵니다."

국사 대접이라고 하는 상궁의 말에 태조는 정신이 번쩍 났다.

"아하, 참 내가 국사 생각을 아니했구나. 아무리 국모의 조상이라 하나 국사한테는 통부를 해야 하는 것을---바쁜 중에 그에게 고부를 보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크나큰 실수를 했구나. 내관도 보통 내관을 보내서는 안 된다. 제일 품계가 높은 김사행을 보내게 해라. 네가 말할 것이 아니라 김사행을 직접 불러라."

김사행은 가자 계급이 높아 금관자까지 망건 편자에 단, 내시 중에 제일 높은 내관이다. 지사 대감의 칭호까지 받는 늙은 내시다. 제조상궁은 곧 김사행을 어명으로 불렀다. 김사행은 어전에 부복했다.

"너는 오늘로 곧 무학대사를 찾아가서 왕비마마의 고부를 전한 후에 의논할 일이 있으니 꼭 입조를 해야 한다고, 함께 데리고 들어오너라. 비록 늙고 병들었다 하더라도 기어코 데리고 들어오너라."

"봉행하겠습니다."

김사행은 총총히 어전에서 물러나려 했다. 태조는 다시 당부했다.

"내가 너희들한테도 총망중 잊어서 말을 하지 못했다. 무학대사한테 따로 전인을 해서 왕후마마의 승하하신 일을 알리지 못했으니 미안하기 짝이 없구나."

"저희들도 깜빡 잊었사옵니다. 하도 망극하와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사옵니다. 이제 명철하옵신 하교를 듣자오니 큰 실수를 한 것 같사옵니다."

"잘못했다. 무학은 나의 스승이요, 나라의 스승이다. 나라의 스승한테 고부사를 아니 보낸 것은 큰 실수다. 이번 갈 때는 정중하게 부고를 써서 받들고 가게 해라. 그리고 내가 꼭 만나보고 싶다고 말을 전해라."

내전에서 물러난 김사행은 왕비의 부고를 받들고 당일 양주로 향했다. 이때 무학은 거의 칠십지년이었다. 한양에 정도를 해준 후에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려 했다. 고려 말년의 신돈의 생각이 났던 것이다. 불교와 정치를 혼동시켜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또다시 신돈의 전철을 밟기가 십상팔구인 때문, 일체 세상과 연을 끊고 잠자코 들어앉아 수도만 하고 있었다. 강비가 세상을 떠나는 날 나랏일이 잠시 어지러워서 살육의 변이 형제지간에 일어날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큰집 아들들을 젖혀 놓고 작은아들, 작은아들 중에도 아주 막내인 방석으로 세자를 삼았으니 그 뒤끝이 좋을 리가 없을 것은 분명한 노릇이다. 강비만 세상을 떠나면 방석의 세력은 짚으로 만들어놓은 허수아비라 생각했다. 허수아비는 버틸 수 없다. 쓰러져야 하는 것이다. 한양의 도읍을 정하는 데도 무학 자기는 인왕산을 진산인 주산으로 하고, 백악과 낙산을 좌청룡으로 해서 큰집 자손이 잘되게 하고, 남산을 우백호로하여 작은집 자손과 외손들이 안온하게 살도록 도읍 터를 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러한 무학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도대체 제왕이 동면을 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법이 어디 있소. 대궐터는 어느 때나 남면을 해서 남향판으로 앉히는 법이오.' 하고 항의를 해서 마침내 왕은 정도전의 말대로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인왕을 백호로 하고 낙산을 청룡으로 해서 왕도를 정했던 것이다. 도읍이란 산세에 따라 정하는 것이다. 가장 양지가 바른 남쪽이 이를 데 없이 좋지마는 산과 물의 형세를 따라 산이 흩어지고 높고 약하고 허하다면 좋은 곳을 취해서 동편도 좋고 서편도 좋다. 산세와 수세를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남편이 좋다는 것을 이유의 하나로 해서 인왕으로 백호를 삼았다. 인왕산은 주산인 백악보다도 높고 강성할 뿐 아니라, 좌청룡인 큰아들의 집보다도 작은아들인 우백호의 기상이 강성하게 되었다. 이때 정도전은 벌써 방석을 세자로 추대할 속셈이 있는 것을 무학은 짐작하고 있었다. 큰아들인 전실 아들들은 다 젖혀놓고 강비의 소생인 작은아들로 왕세자를 봉할 야심이 있는 것을 짐작해 알았다. 그러기에 자기는 그때 하는 수 없이 혼자 탄식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얼마 가지 아니해서 큰아들들은 결딴이 나고 작은아들들이 잘되게 된다. 그러나 왕성에는 골육상쟁이 그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무악재 뒤에 있는 안산이 말안장 모양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조정에는 의논이 합해지지 아니해서,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서울에 사는 조신과 백성들도 큰집보다도 작은집 아들들이 잘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도전은 반드시 비명횡사할 것이다.' 하면서 탄식을 했던 것이다. 이제 강비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소용돌이치는 혼탁한 물결 속에 휩쓸리기가 싫었다. 고부를 받지 아니하고 있는 것을 핑계삼고 산문에 엎드려 참선을 하고 있을 때, 어명을 받든 고부사가 내려왔다. 동구가 떠들썩하면서 지사 대감 내시 김사행이 말을 몰아 산문으로 들어왔다. 구종별배들이 소리치며 고했다.

"칙사 내림이오."

"지사 대감이 고부칙사로 내려오시오."

구종별배들의 떠들썩하게 고하는 소리를 듣자, 상좌 중과 대중들이 곧 몰려나왔다. 과연 칙사가 사인교를 타고 산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곧 무학대사한테 전달되었다. 무학대사는 칙사를 아니 맞이할 수 없었다. 벽에 걸린 회색 장삼을 떼어 입고 제자들이 바치는 만수가사를 어깨에 걸치고 천천히 선방에 내려서서, 고부칙사를 맞이했다. 김사행은 무학대사에게 고부서를 바치고 강비의 승하한 슬픈 부음을 전했다. 무학은 얼굴에 가득 비창한 빛을 띠고 내관한테 말했다.

"국가의 망극한 불행이올시다. 왕후마마께서는 아직도 춘추가 높지 아니하신 터에 거연히 승하하시니 백성들이 복이 없다 하겠소이다."

무학은 먼저 합장을 올려 조의를 표한 후에 다시 대왕의 안부를 물었다.

"불로불소하신 중에 대왕마마께서 고분지탄을 당하셨으니, 기가 차실 것입니다. 어찌 지내십니까?"

다시 정중한 인사를 보냈다.

"대왕마마께서는 지금 식음을 전폐하시고 밤낮으로 왕후마마만 생각하고 계십니다. 왕사께서는 빨리 서울로 올라가시어 대왕마마를 위로해 드리옵소서. 뿐만 아니라 마마께서는 왕사께서 아직 부음을 받지 아니하신 것을 아시고 급히 소인으로 칙사를 삼으시어 입조하시도록 하라 분부하셨습니다."

무학대사는 내관의 말을 듣자 다시 합장을 올리며 말한다.

"황공무지하여이다. 하향에 묻혀 있는 불도라 전혀 대내 안 소식을 몰랐소이다. 곧 부르시는 소명에 응하겠소이다."

무학대사는 말을 마치자 곧 상좌 중을 불렀다.

"빨리 칙사의 일행을 공양해 모신 후에 나는 곧 부르시는 소명에 응하여 입조하겠다. 모든 자비를 차리게 하라."

상좌 중들은 일제히 긴 대답을 올린 후에 메를 짓고 국을 끓여 김사행의 일행을 대접한 후에 무학대사의 자비를 등대했다. 무학은 비록 산문으로 돌아와 있으나, 지위는 의연히 국사다. 교자는 황금으로 아로새긴 보연을 타고 장삼에는 황금 실로 수를 논 만수가사를 입고 손에는 산호 가지로 만든 불자를 잡았다. 칙사와 무학의 행차는 십 리에 뻗쳐서 서울로 향하고 들어갔다. 고적한 전각에 짝을 잃은 기러기같이 시름과 근심에 싸여 있는 대왕의 전각 앞에 칙사로 나갔던 김사행은 공손히 복명을 올렸다.

"무학왕사한테 고부칙사로 나갔던 김사행 아뢰오. 무학왕사 입조요."

태조는 무학왕사의 입조라고 아뢰는 김사행의 말을 듣자, 반갑기 그지없었다.

"곧 입시케 하라."

내시들은 무학왕사를 전상으로 부축해 모시었다. 임금의 스승으로 대접하는 것이었다. 태조는 아직도 강비의 복을 입었다. 백포 오모로 무학을 맞는다. 무학은 두 손을 왕 앞에 모아 합장을 올린다.

"이런 망극한 변이 없습니다. 다시 더 아뢰어 위로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태조는 무학의 위로해 아뢰는 말씀을 듣자 더욱 슬펐다.

"무학왕사, 어찌하면 한 번 간 후에 그리 무정하오."

태조는 느껴 울며 무학의 손을 탁 잡았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왕사가 내 옆에 있었더라면 강비가 세상을 떠나지 아니했을 것을---."

태조는 울음 반 말 반 하소연했다. 무학은 대왕을 위로한다.

"전하, 너무 상심 마시옵소서. 막비 운수소관이올시다. 하늘이 정하신 일이고, 부처께서 아시는 바입니다. 왕바께옵서는 진세가 싫으시어 선녀가 되시어 옥경 십이루에 오르셨습니다. 전생에 지으신 죄가 없는 때문이올시다. 지금 하계를 굽어보시며 미소해 계실 것입니다. 너무 슬퍼 마시옵소서."

무학왕사의 말을 듣는 태조의 눈에는 강비의 아리잠적한 예쁜 모습이 안개 속에서 나타나는 듯했다.

"정말, 옥경 십이루에 있으리까?"

태조는 또 한 번 무학대사의 손을 꼭 잡아본다.

"그러하옵니다. 확실히 옥경 높은 곳에서 하계를 굽어보시며 미소해 계시옵니다. 아무 염려 마시옵소서."

"보고 싶구려."

태조는 또 한 번 무학왕사의 손을 잡았다. 태조의 머릿속에는 옛적의 당나라 현종이 그의 애인 양귀비의 넋을 장생전에 부르던 옛일이 생각되었다. 할 수 있다면 당명황이나 공민왕 모양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넋과 혼을 불렀으면 했다.

"그것은 인정이올시다. 아니 보고 싶다면 사람으로의 정이 아니올시다. 그러나 정이 과해서는 아니 됩니다. 세상엔 정으로 망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정을 적당하게 두시옵소서."

"공민왕이 사랑하던 노국공주의 생각이 나는구려."

"대왕마마, 공민왕의 고려를 대왕마마의 손으로 엎어놓으시고도 그러하십니까. 고려가 망한 원인은 공민왕께서 너무나 정이 과하신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태조는 슬픔을 머금고 대답한다.

"당명황이 양귀비의 혼을 부르던 그 방법은 어떠했소."

"매일반이올시다.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지나치게 생각하다가 나라가 망한 것이나, 당명황이 양귀비를 양귀비를 도에 넘게 생각했다가 나라가 결딴날 뻔한 것이나 똑같은 일이올시다. 그러기에 사람이 정이 너무 많으면 기울어지기 쉽고, 정이 너무 없으면 삭막해서 못씁니다. 정이란 것은 없어도 아니되는 것이요, 과해도 못 쓰는 법입니다."

"어찌하면 좋겠소. 이 보고 싶은 한을..."

"정성으로써 돌아가신 혼을 위로하시어 천상에서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시옵소서."

"그것뿐이오?"

"그것만이 정도올시다. 사심을 버리시옵소서. 복록이 자손한테 내리옵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위하여 복을 빌겠소?"

"원찰을 짓게 하시옵소서."

"어느 곳에 지으면 좋으리까?"

"모신 곳이 정릉이라 하니 정릉 숲속에 단정한 집을 세워서, 대왕생하신 왕비마마의 영혼이 길이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도록 해드리옵소서. 다만 이 길만이 이 나라와 전하를 부강하게 해드릴 것입니다."

무학대사는 얼굴빛을 엄숙하게하여 진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과인은 곧 왕후의 원찰을 정릉 뒷산에 짓겠소. 왕사가 모든 일을 지휘해주시오."

태조는 간곡하게 무학한테 부탁했다.

"성은이 지극하사 빈도에게 대임을 맡기시니 감격한 말씀 이루 다 아뢸 길이 없사옵니다. 연하오나 빈도는 조성하는 데 지휘할 뿐이옵고, 전각 역사와 종을 부어 만드는 일 등은 다른 신하를 택하시어 감당케 하시옵소서. 빈도, 너무 늙사와 행보에 곤란을 느끼옵니다."

무학은 어서 양주 산골 속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정도전이 불법으로 세자책봉을 해논 것이 이제는 운이 다해서 미구에 큰 싸움이 터질 것을 미리 짐작한 때문이다. 차차 어지러워질 이씨네 집안 일을 환하게 유리 붙이듯 살폈다. 대왕은 까닭도 모르며 졸라댄다.

"원찰을 새로 짓고 부처를 조성하고, 종을 부어 만드는 모든 중대한 일을 국사가 아니 보아준다면 어찌하겠소. 아무리 노래에 괴롭다 하나 몸소 수고를 해주기 바라오."

태조의 말씀은 더한층 간곡했다.

"집을 짓는 일은 대목이 잘하고, 종을 부어 만드는 일은 주물장이가 잘합니다. 빈도는 부처를 조성하여 혼을 넣는 입혼을 맡아서 이 원찰의 큰 빛이 시방세계에 두루 비치고, 승하하여 옥경에 계신 왕비마마의 혼령이 길이길이 평안하시기를 축원하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아주 미리 아뢰옵니다. 부처의 조성은 빈도의 우거해 있는 곳 회암사에서 조성하기로 하겠습니다. 닭과 개소리가 들리는 서울에서는 조성할 수 없습니다."

무학은 부처를 조성하는 일도 서울에서 하기가 싫었다. 양주에 있는 회암사에서 조성할 것을 주장했다. 역시 내란 싸움에 휩쓸리기 싫은 때문이었다.

"왕사가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는 수 없소. 그러면 왕사는 부처 조성하는 큰일을 맡아주오. 그리고 절 이름이나 지어주기 바라오."

무학은 절 이름까지 짓는 것을 사양할 수는 없었다. 절이 오래 가지 아니하고 헐릴 것도 짐작했다. 절만이 아니다. 강비를 안장해 모신 정릉도 반드시 얼마 가지 아니해서 천묘가 될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름을 아니 짓겠다 아뢸 수도 없었다. 무학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홍천사라 하시는 것이 좋을 듯 아뢰오."

하고 절 이름을 지어 바쳤다.

"좋구려."

태조는 만족한 뜻을 표했다.

"하늘 뜻을 받들어 이룩해놓는다는 뜻이올시다."

"그러면 왕사는 빨리 부처를 조성하여 주시오."

"염려 마시옵소서. 그러면 빈도는 양주로 내려가 부처를 조성하겠소이다."

무학은 어전에서 합장재배하고 물러간다. 용하게 책임을 벗어난 것이다. 태조는 곧 내시 김사행에게 분부를 내렸다.

"홍청사 원찰을 짓는 일은 네가 맡아서 잘 이룩하게 하라."

"황송하여이다."

이리하여 궁사극치한 강비의 원찰은 정릉산 기슭에 웅장하게 지었다. 태조는 무학을 작별해 보낸 후에 죽은 왕비 강씨의 원찰 홍천사를 짓는 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 나라의 재물도 아끼지 아니했다. 백성들의 괴로워하는 것도 살필 사이가 없었다. 그저 하루바삐 이 절이 완성되어 죽은 강비의 영혼이 옥경 십이루에서 평안한 복록을 누리기 소원이었다. 내시 김사행을 데리고 태조는 날마다 홍천사 역사 터로 나가서 모든 일을 분별하고 역사를 감독했다. 일 년 만에 홍천사는 완성이 되고 양주에서 무학대사가 조성한 부처님도 대웅보전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전각에 모시었다. 조선 팔도에 제일 가는 주물장이들을 고르고 뽑아서 일심전력을 다하여 만든 홍천사 쇠북도 문루 위에 달아놓았다. 종소리는 맑고도 깨끗했다. 신라 때 봉덕사 종처럼 크고 웅장하지는 못하나 갖가지로 형태와 모양이 예술의 극치를 이루었고, 깨끗하고 맑은 음향은 장안 반허공을 울리면서 멀리 사라지는 듯 다시 메아리져 들리는 청아한 종소리에 대왕은 항상 눈물을 떨구며 울었다. 간절하게 왕비의 생각이 나는 때문이다. 부재모상이라 해서 날을 받아 지내는 소상제도 마쳤다. 소상날 밤에 늙은 태조는 곡지통을 하고 울었다. 태조는 너무나 호젓함을 느꼈다. 전실 아들이 여러 명이요, 지금 원찰을 지어 명복을 비는 강비의 소생도 세자 방석 이외에 또 하나가 있건만 오늘날 자기의 쓸쓸한 마음을 흩여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딸이 또한 적지 아니했다. 모두 다 공주를 봉해서 부마들한테 시집을 보내고 궁중 출입을 자주 하고 있지만 제각기 제 낭탁을 차리고 제 욕심을 채울 뿐 돌아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늙은 홀아버지인 자기를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딸은 한 명도 없었다. 태조는 소상을 지낸 후에 가끔가끔 병에 들었다. 두통이 나고 현기증이 일었다. 꿈에 강비가 자주 뵈었다. 꿈에 뵈는 강비는 무학이 말한 대로 아름다운 선녀의 복색을 차린 강비가 아니었다. 있는 곳도 옥경 십이루 곱고 깨끗한 백옥루가 아니었다. 옷은 왕비가 되기 훨씬 이전 부인으로 있을 때 수수한 민옷을 입었다. 옷 입은 것은 그렇다고 해두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눈물 흔적이 두 눈시울에 처근처근 괴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하소연을 하는 모양인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얼굴은 몹시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이다. 자꾸 무슨 일을 호소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러나 꿈속이고 보니 자기도 마음대로 물어보지 못했다. 대왕은 꿈을 깬 후에는 반드시 내시와 궁녀들을 불러 혼전이며 원찰 흥천사의 안부를 물었다.

"혼전이 다 태평하냐?"

"아무 일 아니 계시옵니다. 지금 막 아침상식을 올리고 돌아온 길이올시다."

지밀상궁이 대답해 아뢰었다.

"원찰도 다 무고하냐?"

"새벽마다 독경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부처께 공양을 올리옵니다. 마마의 위패도 안온하시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꿈자리는 뒤숭숭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대왕은 내시와 상궁들에게 다시 분부를 내렸다.

"혼전과 능침에 모든 거행을 일 초라도 생시보다 소홀히 거행하는 궁녀와 내관이 있다면 엄하게 치죄하여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전에 없던 엄한 분부를 내리니 온 지밀 안 궁녀와 내시들은 벌벌 떨면서 상시 이상으로 사당인 혼전과 묘소인 능침에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태조의 꿈에는 여전히 강비의 수심어린 얼굴과 눈물을 머금어 하소연하는 모습이 끊일 사이 없어 보였다. 태조는 마침내 병환이 들었다. 등에 찬바람이 일어나고 두통이 심했다. 어지럽고, 입맛이 없었다. 어느 때는 열이 높기도 하고 어느 때는 몸이 얼음장이 되어 싸늘하기도 했다. 왕세자 방석은 아침, 저녁, 밤중 삼시로 문안을 드리는 것이 상례지만 모든 왕자들도 부왕의 미령한 소식을 듣고 모두 다 대내 안으로 모여들었다.

 

 

하윤의 기지

 

둘째 왕자 방과, 셋째 왕자 방의, 넷째 왕자 방간, 다섯째 왕자 방원 등 한씨의 소생인 여룡여호한 전실 아들들도 아침, 저녁, 밤중 세 때 문안을 드렸다. 왕자들이 문안을 드리러 들어가니 왕자의 부인들도 문안을 들어갔다. 왕자와 왕자의 부인들은 궁중에서 채를 잡았다. 왕후는 돌아가서 내전에 주인이 없고, 홀아비가 된 태조는 외전에서 앓고 누웠고, 세자 방석은 동궁이라 하나 딴 처소가 정해 있는 외에 아직 나이 어리니 범 같고 용 같은 전실 형님들에게 눌려서 말로는 동궁이라 하나 행세를 제대로 못했다. 궁중 지밀은 주인이 바뀌어 객이 주인이 된 셈이다. 왕자의 부인인 며느리들도 모두 다 출중하게 잘생겼다. 방과의 아내 경주 김씨는 예빈시사를 지냈던 김천서의 딸이요, 방의의 아내 철원 최씨는 간성군사를 지낸 최지사의 딸이요, 넷째 방간의 아내는 밀양 황씨로서 황판서의 딸이요, 다섯째 호걸로 이름 높은 방원의 아내는 여흥 민씨로서 고려 때 예조판서를 지냈고 혁명이 된 후에 대제학이 된 민제의 딸이다. 모두들 남자 왕자들에게 비하여 못지않게 잘나고 잘생겼다. 더구나 둘째 왕자 방과의 아내 경주 김씨와 다섯째 왕자 방원의 아내 여흥 민씨는 남자도 못 따라갈 만큼 언변도 좋고 포부도 크고 인물도 달덩이같이 잘생겼다. 언제나 동서들 중에서 군계일학이었다. 더구나 민씨는 사내대장부도 따라가지 못할 씩씩한 기상과 시원시원한 결단성을 가졌다. 그들은 시어머니 없는 궁중 지밀을 자기들의 지밀로 만들었다. 마음속으로 '세자가 다 무어냐'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그야말로 여남은 살 된 코흘리던 막내를 우습게 볼 것은 정한 이치다. 여기다가 세자빈으로 세자가 된 후에 가례를 마치고 모셔 들인 대제학 심효생의 딸이 있으나 역시 나이 어리다. 문젯거리도 되지 아니했다.

"세자빈은 동궁 처소에서 각시 나인들하고 소꿉장난이나 하고 계시라 해라."

왕자 부인들은 이같이 동궁빈을 조롱했다. 약삭빠른 것은 인정세태다. 지밀상궁 중에 민첩하고 영리한 무리들은 벌써 자기네들의 앞으로 처신할 일을 생각하여 요량해보았다. 후실로 왕비가 되었던 강비는 돌아갔고, 그의 막내아들인 방석이 세자가 되었다 하나 아직 나이 어릴 뿐 아니라, 세자의 형님인 범강과 장달이 같은 훌륭한 인물들은 거재두량으로 호시탐탐 벌여 있다. 모두 다 나이 삼십 장년들이다. 여기다가 고려조정을 뒤엎어논 다섯째 방원은 온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태조보다도 담력이 세차고 무서운 영웅호걸이라고 떠들어댔다. 뿐만 아니다. 그의 부인 민씨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얼굴로 씻은 배추통같이 훤칠하게 잘생겼지만, 말하고 처세하는 품이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영리한 궁녀들은 민씨한테 긴하게 보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앞을 다투어 민씨한테 긴하게 보이려 했다. 지밀 안 궁중의 정보를 올리기도 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외부의 신하인 정도전이 강비의 막내아들 방석으로 세자를 만들기 위하여 밤과 낮으로 지밀 안 강비의 방에서 사찬을 받고 술을 마시던 이야기까지 했다. 민씨는 민씨대로 요량이 있었다. 넌짓넌짓 궁녀들에게 옷가지도 주고 신발 켤레도 주었다. 어떤 때는 은지환도 내리고 노리개까지 하사했다. 흠뻑 인심을 사두었다.

"정도전은 요사이 대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으니 사찬도 받지 못하고 어찌 지내나. 정도전이야말로 곤전마마께서 승하하신 일이 태산이 무너진 듯할 게다."

방원의 부인 민씨는 슬쩍 궁녀의 배알을 뽑아보기도 했다.

"정도전은 이제는 끈 떨어진 뒤웅박입니다. 곤전마마께서 생존해 계셨더라면 벌써 영의정 대감이 되었을 터인데, 여지껏 우의정으로 그대로 있습니다."

궁녀는 숨김없이 정도전의 지밀 안 출입한 것을 방원의 부인한테 폭로시켰다.

"춘방에는 출입을 하지 아니했던가?"

민씨는 또 한 번 궁녀의 배알을 뽑아보았다. 춘방이란 세자궁을 춘방이라고 부르고 동궁이라고도 불렀다.

"정정승이 춘방에만 갈 까닭이 있습니까. 동궁이 어리시니 정도전의 마음을 동궁마마께서 아실 길 없고, 아신대야 고맙게도 생각하지 않는 분이올시다. 강비마마 상사 이후에 우의정 대감은 한 번도 지밀에 들르신 일이 아니 계십니다."

"그러나 춘방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정정승을 하늘같이 우러러볼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춘방나인과 무예청들이며 별감들은 다투어 정도전 대감의 눈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구나 요새는 대왕마마의 병환이 계시니 말들은 하지 아니하나 마음속으로는 정도전 대감의 행동만 보살피고 있습니다."

궁녀들은 묻지도 않는 말까지 지껄여댔다. 민부인은 더 깊이 캐묻지 아니하고 앞으로의 동정만 살피고 있었다. 정보는 저절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루는 새로 심복이 된 지밀상궁이 민씨부인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궁녀는 민씨부인의 귀에다가 입을 대었다.

"조용히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비원으로 잠깐 나오십시오."

민씨부인은 총명 영리했다. 여러 사람이 자리에 있는 곳이라 시치미 떼고 있다가 얼마 후에 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과연 지밀상궁은 민씨부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색을 하며 민씨를 맞이했다.

"무슨 의논할 말이 있나?"

민씨부인은 나직한 어조로 침착하게 지밀나인한테 물었다.

"내통을 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말을 해보게나."

"정도전이란 재상이 있지 아니합니까. 짐작하시겠습니까?"

"우의정이요 개국 공신인 정도전을 누가 모를 사람이 있겠나. 세자마마를 두둔해 받드는 사람 중에 제일가는 사람이요, 돌아가신 강비한테는 참말로 이삼륙이었지."

"어쩌면 그렇게 소상하게 잘 아십니까?"

"명색이 왕자 부인이라 하면서 그만 일도 몰라서야 되겠나."

민씨부인은 일부러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정도전이 지금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합니다."

'음모'라는 말에 민씨부인의 귀가 번적 띄었다.

"음모라니, 어떻게 음모를 꾸민단 말인가?"

"왕자 중에 세자 한 분만 빼놓고 여러 왕자를 함빡 죽여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합니다."

"끔찍스러워라. 한두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왕자들을 처치해버린단 말인가."

민씨는 무겁고 틀진 여자건만 마음속으로 깜ㅉ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먼저 왕자님께서 거느리고 계신 사병들을 거두어 무장해제를 시킨 후에, 다음에는 대왕마마의 환후 계신 틈을 타서 왕자들에게 문안을 들어오라 해놓고, 철퇴로 때려 죽일 작정을 했다 합니다. 일이 급하니 이같이 아뢰는 것이올시다. 앞으로는 소명이 계시어 입궐하실 때는 미리 몸조심을 하시고 준비를 단단히 차리시어 비상수단을 쓰셔야 할 것입니다."

"사병은 벌써 왕명으로 폐해버렸는데, 웬 사병이 있단 말인가."

민부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지밀상궁을 바라다보았다.

"정정승은 왕자궁의 비부쟁이까지 사병으로 친다 합니다."

민부인은 껄껄 웃었다.

"고이치 아니한 말야. 좌우간 고마우이. 또다시 전해줄 일이 있거든 은근히 나를 불러 일러주게."

민씨부인은 말을 마치자 손에 끼었던 은가락지 한 쌍을 뽑아서 지밀상궁한테 주었다. 상궁은 감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몇 번 사양하다가 이내 품 안에 넣고 돌아섰다. 이날 밤에 민부인은 집으로 나가서 남편 방원에게 주의를 주었다.

"정도전은 세자의 지위를 더욱 확보하려하여 왕자들에게 대전 병환에 문안을 들어오라 한 후에 모조리 해칠 계획을 세웠다 합니다. 대궐에 출입하실 때는 몸조심을 단단히 하셔야 하겠습니다."

방원은 아내의 말을 듣자 노기가 등등했다.

"정도전이란 놈은 점점 방약무인한 행동을 취하는구려. 그놈의 손에 내가 죽기 전에 먼저 그놈을 내가 죽여야 하겠소."

방원은 아니한테 말을 듣고 흥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민씨부인은 조용히 얼굴빛을 화하게하여 남편 방원을 달랬다.

"나리께 항상 말슴을 드렸습니다. 큰일을 하시자면 흥분을 하셔서는 아니 된다고 늘 말씀했습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신 뒤에도 너무나 노골적으로 세자를 안중에 안 두신 것을 간한 일이 있습니다. 언제나 큰일을 하실 분은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시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제 채 말씀을 듣기 전에 이같이 격노하시니 앞으로 진정 큰일을 하신다면 어찌하실 텝니까."

방원은 아내의 부드럽고 총명한 말에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내 성미가 급하기도 하지만 일개 정도전이 나를 죽이려 음모를 꾸민다는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겠소. 그러나 과히 염려하지 마시오."

방원은 마침내 아내에게 굽혔다.

"백지 한 장도 서로 마주 들면 가볍다 하지 않습니까. 날이 밝거든 제 친정 동생들을 청해다가 의논해보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방원도 아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잘 생각했소. 우리 내외만이 의논하는 것보다 처남들하고 의논하는 것이 좋겠소. 아무래도 소문은 밖에서 잘 알 테니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다음날 날이 밝은 후에 민씨부인은 남편 방원한테 출입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민무구와 민무질 두 장신을 집으로 청했다. 민씨부인과 방원은 동생들과 함께 간단한 아침을 끝낸 후에 민부인이 먼저 동생들한테 물었다.

"자네들은 누구를 도우려나?"

샛별같이 빛나는 민씨부인의 눈은 두 동생의 얼굴을 쏘는 듯 바라보았다.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는 벌써 누님의 묻는 뜻을 짐작해 알았다. 그러나 일부러 멍청한 체했다.

"밑도 끝도 없이 별안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누님의 말씀은 너무나 은밀하고 깊어서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매부를 도와주겠느냐, 세자를 도와주겠느냐 하고 묻는 말일세."

민부인은 잠깐 얼굴에 웃음을 띠고 여유 있게 물었다.

"하 하 하, 누님도 망령이십니다. 그야 팔이 안으로 굽어지지 밖으로 굽어지겠습니까. 물론 매부를 도와드려야 하지요. 하하하."

민무구가 드높게 웃었다.

"자네는?"

민부인의 다른 동생한테 물었다.

"형제일신인데 아니 돕고 어찌하겠습니까?"

남매 세 사람은 까르르 웃었다. 민부인은 얼굴을 정색하고 다시 말했다.

"요사이 바깥소문이 어떠한가? 우리는 궁중에 가까이 있으면서 등하불명이 되어 전혀 바깥소문을 알 도리가 없네."

민부인은 동생들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민무구가 누님에게 대답했다.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립니다."

"무슨 소문이 어떻게?"

"정도전이 매부를 죽이려고 한답니다."

민부인은 깜짝 놀라는 체했다.

"정도전이 매부를 죽이려 하다니, 웬일인가. 아무 원수도 진 일이 없는데---."

"원수 문제가 아닙니다. 왕후 강비가 돌아간 후에 세자를 두둔해줄 사람이 없게 되고 매형의 세력이 차차 고개를 들게 되자, 자기 집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적극 세자를 두호하려고 합니다. 이러하니, 매형을 처치해놓아야만 안심이 되겠단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떤 기회를 노려서 왕자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입니다. 매형 이외의 왕자는 매형을 처치하자니까 공연히 껴들어간 것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아직껏 입을 봉하고 가만히 미소만 풍기고 있던 방원이 친히 물었다. 민무구가 대답했다.

"먼저 왕자들이 대왕 전하께 문후 들어오는 틈을 타서 숙청해버릴 계획이라 합니다."

"무슨 대책이 없겠나?"

민부인이 물었다.

"대책은 꼭 한 가지 있습니다."

"말을 좀 해주게나."

"호걸과 영웅을 많이 사귀어 심복을 만들어두시는 것입니다."

민무질이 대답했다.

"한 사람을 천거하오리까?"

민무구가 말을 꺼냈다.

"누군가?"

방원이 무릎을 바싹 내밀며 물었다.

"재사요 학식이 높은 하윤을 천거합니다."

방원과 민부인은 빙긋 웃었다.

"하윤은 장인께서 벌써 나에게 천거해주셔서 지금 막역의 사이일세."

정안군 방원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개국 공신 조준을 심복으로 만들어두십시오. 아주 건실한 재상이올시다. 조준은 본시부터 방석으로 세자 봉하는 것을 적극 반대한 사람이올시다."

"조준은 원래 나하고도 가깝네. 그러나 문관이 되어 힘이 없을 것일세."

방원이 말했다.

"그러나 인망이 높습니다. 나중에 쓸 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하윤과 연락을 취하도록 하게나."

방원이 민무질한테 부탁했다.

"하윤은 정도전이 강비한테 붙어서 불법으로 왕세자를 세우고 갖은 아첨을 떠는 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올시다. 제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친히 가보면 어떤가?"

방원이 묻는다. 민무구가 손을 들어 가로 흔들었다.

"아니됩니다. 매부는 움직여서는 아니 됩니다. 매부는 보통 우리들의 몸과 다릅니다. 몸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민무질도 반대했다.

"매부는 정도전이 주시하고 있는 초점의 인물이십니다. 하윤이 매부의 댁으로 뵈러 와도 아니 되고 매부가 하윤을 찾아도 정도전은 색안경을 쓰고 볼 것입니다. 매부와 하윤 두 사람이 다 함께 해롭습니다."

"자네 말이 옳으이. 나는 찾아가지 아니할 테니 훗일에 크게 갚겠다고 전달이나 잘하게."

방원은 신신당부했다.

"말이 모자라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표를 보내셔야 합니다."

방원은 아내 민씨에게 말했다.

"좋은 갓끈 한 벌이 있거든 내어주구려."

남편 방원의 말이 떨어지니 민부인은 의장문을 열고 화려 찬란한 화대모 갓끈 한 벌을 꺼내서 동생한테 넘겨주었다. 방원이 아끼고 아껴서 갓에 달지 아니했던 호품 대모 갓끈이었다. 천년 묵은 거북 껍질을 일등 가는 장인의 솜씨로 정성과 재주를 다하여 만든 대모 갓끈이다. 민무구는 누님한테 갓끈을 받아 직령 소매 속에 넣은 후에 누님과 매형을 작별하고 일어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하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민무구는 민무질과 함께 방원의 집을 나섰다. 형제는 다 함께 하윤과 막역의 친구였다. 형제가 같이 하윤을 찾기로 했다. 하윤은 마침 집에 있었다. 민씨 형제가 찾아왔다는 상노의 품하는 말을 듣자 하윤은 곧 안사랑으로 모시라 했다. 하윤은 반갑게 두 형제를 맞이했다.

"자네들 형제분이 한꺼번에 웬일인가? 형제발동은 매사불성이라는데. 하하하."

하윤은 농지거리를 하며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말게. 형제가 힘을 합하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느니. 뜻이 맞지 않는 형제는 매사불성이 되지만, 뜻이 맞는 형제는 천하무적일세. 자네를 항복 받으러 왔네."

"이 사람 언제 누가 싸웠던가, 항복을 하다니?"

"자네는 개국 공신이요,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나라에 싸움이 벌어진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단 말인가. 한심스럽기 짝이 없네. 그리고도 이음양 순사시를 하는 일국의 재상이라고 할 텐가. 하하하. 참마로 거저먹는 뻔뻔한 재상이로구나."

하윤은 민무구 형제가 통고도 없이 한꺼번에 온 것을 보자, 정안군 방원의 심부름으로 온 것을 짐작해 알았다. 민씨네 형제와 방원이 처남 매부 간이 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번 강비의 대상 후에 정도전은 자기의 위세와 권력이 하룻밤 사이에 뚝 떨어져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므로 이것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실 왕자인 모든 왕자들에게 어떠한 수단을 써서 모든 세력을 잘라버리려 하는 음모가 있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윤은 민무구의 말을 듣자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싸움은 정도전과 자네들이나 할 것이지 왜 내가 그 틈에 끼여서 독 틈의 탕건이 된단 말인가. 당치 않는 말 작작 하게. 하 하 하."

하윤은 소리쳐 웃었다. 민씨 형제들은 '벌써 하윤이 눈치를 채었구나'하고 생각했다. 민무구가 대답했다.

"입술이 결딴나면 이가 시린 법일세. 순망치한이란 문자가 있지 아니한가. 우리 형제들이 결딴이 난다면 자네는 성할 수 있나. 그러지 말고 손을 잡고 다 함께 살아가기로 하세. 사람은 반드시 이웃이 있어야 하고, 이웃 사람은 이웃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네."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털어놓았다.

"좋은 말일세. 이웃을 돕는 의미로 자네들 싸움에 한몫 들어보기로 함세."

하윤은 비로소 쾌하게 허락을 했다. 민씨 형제와 하윤이 주고받는 말은 깊고 깊은 의미가 섞여 있는 때문, 아무리 옆의 사람이 들었다 하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민무구는 비로소 소매 속에서 화대모 갓끈을 꺼냈다. 황귤빛보다도 더 누른 투명한 화대모 화려한 갓끈을 꺼냈다.

"자아, 이 화대모 갓끈은 매부가 자네한테 선물로 보내는 것이네. 정표로 받아두게나. 한 번도 쓰지 아니했던 깨끗한 갓끈을 자네한테 보낸 것일세."

하윤은 감격했다. 두 손으로 화대모 갓끈을 받았다.

"그러면 앞으로 서로 의논하기로 하세. 연락은 우리 형제가 직접 취하기로 하겠네. 자네가 내 매부를 찾는 것도 여러 눈이 보는 데 불편하기 짝이 없고, 우리 매부가 자네 집으로 자주 드나들어도 쓸데없는 잡담이 일어날 테니, 언제든지 연락은 우리 형제가 취하도록 하겠네."

세 사람은 작별하게 헤어졌다. 민씨 형제가 방원의 집으로 가서 방원과 민부인한테 하윤이 도와줄 것을 말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지밀나인이 은밀한 고자질을 한 지 며칠이 못 되어서, 정도전은 정승의 지위와 삼군부 도총관의 직권을 겸한 자격으로 돌연 영을 내렸다.

'정부에 있는 대관과 모든 왕자, 부마는 절대로 사병을 길러서는 아니 된다고 천도 전에 이미 반포했다. 천도한 후에 대신 이하 모든 관리들은 나라의 법을 잘 지켜서 한양에서는 일체 사병을 두지 아니했다. 그러나 왕자와 부마들은 사병을 헤쳐 보낸 체하고 아직도 그의 집에 사병을 두고 무사를 기르는 사람이 있다. 군사는 국가의 임금만이 거느릴 수 있는 것이요, 아무리 왕자라 하나 사사로이 집에 두고 기를 수 없는 것이다. 오늘부터 절대로 사병 두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만약에 명을 어기는 자는 비록 왕자라 하나 참하리라.'

정도전은 준엄한 영을 내렸다. 이것은 곧 정안군 방원에게 대한 화약 같은 선언이었다. 정안군은 지난번 강비가 생존해 있을 때 정도전과 강비의 책동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엄금하여 집에 있는 무사들을 헤쳐 보냈으나, 아직도 기걸찬 문객과 힘센 구종들이 비복의 명칭으로 왕자의 집에 출입하고 있는 때문이다. 기별지는 삽시간에 조정 관리와 왕자의 집으로 돌았다. 모든 왕자들은 분개하고 왕자의 집에 출입하는 한량들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정도전을 욕했다. 기별지가 돈 지 한 시간이 채 못되어서 어영에서는 대장들이 왕자들의 집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다. 사병들이 아닌 문객과 비고들을 점고하고 왕자들의 집에 있는 칼과 활이며 창과 철퇴를 압수했다. 왕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모두 다 대왕의 전취부인 한씨의 소생들이었다. 그들은 울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도전을 곧 씹어 삼키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이중에 더욱 분개한 사람은 정안군 방원이었다. 그러나 아내 민씨의 권고를 들어 뒤의 큰일을 하기 위하여 아직 참기로 했다. 정도전은 왕자들의 집 안을 수색하여 무기를 압수한 후에 하윤에게 충청관찰사를 제수하는 발령을 내렸다. 하윤은 정도전과 항상 마음이 맞지 아니하였다. 정도전은 앞으로 큰일을 단행하기 위하여 어느 때나 조정 안에서 자기의 주장을 반대하는 여론을 일으키는 하윤을 외직으로 임명시키는 정책을 썼다. 하윤은 정도전의 배짱을 잘 알고 있었다. 하윤뿐이 아니라, 하윤과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이번에 하윤이 외방으로 나가는 원인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하윤이 부임하여 떠나는 날 만조백관들은 하윤의 집으로 작별인사를 갔다. 하윤은 잔치를 벌이고 인사하러 온 손들에게 일일이 주안상을 내서 간곡하게 대접했다. 민무질, 민무구 형제는 방원을 찾았다.

"하윤이 충청관찰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정도전의 장난이올시다. 이 기회에 하윤을 만나보시고 틈을 타서 뒷일을 약속해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안군 방원도 절호한 기회라 생각했다. 곧 채비를 차려 하윤의 집에 당도했다. 자리에는 정도전을 제외한 만조정 백관들이 차례차례 술상을 받고 앉았다가 정안군 방원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모두 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군 방원을 맞이했다. 하윤은 연해 황송한 행차라고 떠들어대면서 방원을 상좌에 앉게 하고 술을 권하며 말했다.

"소인의 집에 한 번도 왕림하시지 않더니, 오늘은 서천에서 해가 떴나 봅니다. 금지옥엽 귀하신 몸으로 이같이 왕림하시니 참으로 소인의 집에 크나큰 광영이올시다."

정안군은 미소를 지어 의젓하게 대답했다.

"정치에 상관없는 왕자의 몸으로 재상의 집을 찾을 까닭이 있소. 다만 오늘은 멀리 방백이 되어 부임하신다 하기에 태평히 다녀오시라고 전송을 왔을 뿐이오."

정안군의 말을 듣자 하윤은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하, 하윤이 정안군 대감을 가끔 뵙자면 자주 외방으로 나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대군의 화려하신 존안을 뵙겠습니다."

하윤은 여러 사람들이 들으라고 일부러 목청을 돋우어 떠들어댔다. 하윤은 정안군 방원이 자기 집에 여태껏 한 번도 아니 찾아올 것을 여러 사람들한테 알게 하자고 일부러 떠들어댔다. 만조백관들도 맘속으로 기뻤다. 혁명을 일으켰던 주동세력으로, 더욱이 포은 선생을 순절시킨 사실상의 혁명투사로 공신의 집을 사사로이 찾지 아니한 일을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모두 다 흡족하게 생각했다. 하윤은 정안군에게 술을 권했다. 술이 서너 순배 돌았다.

"안주를 좀 잡수십쇼. 탕국물도 드십쇼."

하윤은 탕그릇을 들고 방원한테 권하다가 홀연 손을 놓아 탕그릇을 엎었다. 탕국물은 정안군의 흩벌가는 조복 자락으로 엎어졌다. 정안군은 발연히 얼굴빛이 변했다. 황망히 수건을 꺼내서 엎어진 탕국물을 닦았다.

"어이, 고이한지고."

"이를 어찌합니까, 이를 어찌합니까. 소인이 술에 취했습니다."

하윤은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자기도 수건을 꺼내서 정안군의 옷자락을 씻었다. 정안군 방원은 노기가 등등하였다. 소매를 뿌리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하는 수작이었다.

"이리 오너라."

상노가 황망히 뛰어들었다.

"자비를 놓아라. 돌아가자."

하윤은 황황망망 어찌할 줄 모르는 시늉을 했다.

"그저 용서하시고 잠깐만 앉아주십쇼. 조복을 다려서 바치겠습니다."

정안군 방원은 만류하는 하윤을 뿌리치고 노한 얼굴로 뜰에 내렸다.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문밖에 나가 자비에 올랐다. 하윤은 조신들에게 말했다.

"내가 실수를 해서 대군의 조복을 더럽혔습니다.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쫓아가서 사과를 드리고 돌아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대로 좌석에 앉으시어 약주를 마시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쇼."

"어서 가서 다녀오시오."

모두들 하윤을 향하여 다녀오라고 권했다. 하윤은 황황히 말을 달려 정안군 방원의 행차를 쫓았다. 정안군 방원의 행차는 벌써 집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아니했다. 하윤은 열두 줄 행랑 솟을대문을 거쳐서 사랑채로 들어갔다. 청지기한테 전갈을 했다.

"나는 하윤일세. 오늘 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조정의 만조백관과 여러 왕자께서 왕림하신 중에 댁의 나리께서도 왕림하셨네. 나는 하도 황송 감격해서 댁의 나리께 음식을 권하다가 잠깐 실수를 해서 음식을 조복에 엎질러버렸네. 민망하기 짝이 없네. 지금 사죄를 드리러 온 길일세."

청지기는 일국의 재상이 사죄를 드리러 왔다 하는데 거래를 아니 드릴 수 없었다. 청지기는 곧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정안군은 아직도 겉으로 노기가 등등해 있었다. 큰 소리로 아내 민씨한테 푸념을 하고 있었다.

"하윤이란 자도 고현 자로구려. 도대체 요새 재상이란 자들은 너무나 건방져서 안하무인이란 말야. 괘씸한 것들, 저희가 개국 공신이라고 득의양양해서 제일강산인 체 호강을 하지만, 그 개국은 누구 때문에 된 줄 알고 기승기승 떠들어대느냐 말야, 고이한 놈들."

정안군 방원의 목소리는 찌렁찌렁 기왓장을 울렸다. 뜰 아래에는 시녀와 상노들 수십 명이 송구스런 얼굴빛으로 주인 대군의 노한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부인 민씨가 정숙하고 요조한 태도롤 목소리를 나직이하여 물었다.

"하윤이 어찌했기에 나리께서 이같이 노하십니까? 자세히 말씀을 내려줍시오."

"그자가 이번에 충청감사로 간다기에 전송을 갔구려. 만조백관들이 가득히 모인 곳에 잔치가 벌어졌소. 하윤은 자꾸 술을 권하기에 사양할 길이 없어 자리에 앉아 술 몇 잔을 마시는데, 이자는 무례하게도 내 앞에다가 국그릇을 엎어놓았구려. 이것 보구려. 조복이 온통 결딴이 났소. 너무나 안하무인이란 말야."

"저런 변 보아. 놀라셨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마 하윤이 고의로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어쩌다가 실수를 하느라고 손이 어줍어서 국그릇을 엎었나 봅니다. 너무 진노하지 마십쇼."

이때, 청지기가 들어섰다.

"황공하오나 아룁니다."

"무엇이냐?"

"하관찰이 사죄를 드리러 오셨습니다."

"아니 만난다."

정안군은 대번에 큰 소리로 거절을 했다. 청지기는 대번에 거절하는 정안군 방원의 노한 모습을 보자 머쓱해서 물러섰다. 부인 민씨가 안상하게 사뢰었다.

"내 집에 온 사람을 어찌 아니 만나십니까. 더구나 잘못했노라고 사죄 온 사람을 아니 만나시면 그것은 나리의 마음이 좁다고 모두들 뒷공론을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의 무례하고 조심성 없는 행동이 불미했다손 치더라도 일단 사죄를 왔다 하는데 아니 보신다면 대장부의 일이 아니올시다."

민부인의 간곡한 말에 정안군 방원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민부인은 청지기에서 분부했다.

"사죄차 온 사람을 아니 만나시면 아니 된다. 안사랑으로 모시도록 해라."

민부인은 청지기한테 분부한 후에 남편 되는 정안군의 소매를 이끌어 안사랑으로 인도했다.

"잠깐 노여움을 진정하시고 안사랑에 진좌하십쇼. 그러셔야 큰어른이 되십니다. 언제나 큰사람은 아랫사람한테 져야 하는 법이올시다."

민부인의 소명하고 정숙한 태도에 모든 시비와 종자들은 감탄하는 얼굴빛을 보였다. 정안군은 못 이기는 체 아내를 따라 안사랑으로 들어갔다. 민부인은 정안군의 귀에 입을 대었다.

"하인들은 모두 다 곧이듣고 있습니다. 언제나 비밀이 탄로되는 것은 하인들 때문입니다. 안사랑 앞에는 아무도 얼씬을 못하도록 해놓을 테니 안심하시고 말씀하십쇼."

민부인은 정안군한테 귀띔을 하고 조용히 물러갔다. 안으로 들어간 민부인은 하인들에게 엄한 분부를 내렸다.

"점잖은 재상이 나리께 사죄를 드리러 오셨으니 너희들은 남녀노소를 말할 것 없이 안사랑 앞에 얼씬을 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체모 깎이는 일을 해서 예의를 잊은 아이들이 있다면 엄한 벌을 내리리라."

평상시엔 어질과 착하고 후한 부인이지만 일단 법을 지키는 데는 엄하고 쌀쌀했다. 하인들은 모두 다 고개를 숙여 명령에 복종했다. 이윽고 청지기는 하관찰을 안사랑으로 인도하고 물러났다. 청지기마저 민부인의 굼잡인하는 명에 복종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하윤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손을 짚어 정안군한테 문후를 드렸다.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꼭 만나 뵙고 떠나야 할 텐데 이목이 번다해서 그런 일을 하지 아니하면 조용히 만나뵐 기회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경솔한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니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도 하관찰의 뜻을 잘 알고 있소이다. 하관찰이 내 집을 그대로 찾아온다면 정도전이나 남은이 얼마나 우리를 의심하겠소. 그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국을 엎지른 것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런 까닭에 나 역시 괘사를 떨고 큰소리를 지르면서 소매를 뿌리쳐 나왔소이다. 그뿐 아니라 집에 돌아와서도 일부러 하인들이 들으라고 하관찰의 무례한 짓을 책망했소이다."

정안군 방원은 말을 마치고 빙그레 웃으며 하윤을 바라보았다. 하윤은 옷깃을 바로잡고 정안군에게 말했다.

"떠나가는 길이 총총해서 길게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모든 일은 민장군 형제분과 다 의논했습니다마는 지금 정도전은 왕자님들의 전객의 무기를 압후한 후에 반드시 왕자들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이 중에 다른 왕자보다도 가장 두려워하고 꺼리는 왕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곧 정안군이십니다. 신변이 몹시 위태로우십니다. 반드시 기회를 노려서 나리를 해칠 것입니다. 여기 대하여 나리께서는 준비가 계십니까?"

하윤은 목청을 낮추어 가만히 물었다.

"정도전이 나를 해치려 하는 생각을 가진 줄은 알았지만 이와 같이 급전직하로 행동을 취할 줄은 몰랐소이다. 창졸간이라 사병을 뺏기고 난 후에 아무 준비도 없소이다."

방원은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저를 정도전이 소임을 충청관찰로 내보내는 것은 혹시 안에 있어 나리를 도와드리는 일을 할까 하여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하윤의 말을 듣자 정안군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과연 그렇구려."

하윤은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리를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은 촌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소이다. 만약 이번에 혹시나 나리 신변에 위태로운 일이 있다면 기어코 도와드릴 것을 마음 속으로 정했소이다. 염려 마시고 평심서기하고 계십시오."

하윤의 평심서기하고 있으라고 말을 듣자, 방원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넘쳐 흘렀다.

"어떻게 무슨 방책이 정해졌소이까? 시원하게 좀 들려주시오."

방원의 묻는 말에, 하윤은 빙긋 웃음을 풍기며 말했다.

"이숙번이란 사람을 아십니까?"

"알구말구. 안산군수로 있는 사람이로구려."

"그렇습니다. 안산군수 이숙번입니다. 이 사람이 평상시에 항상 나리를 존경하여 숭배하고 있습니다. 소인하고는 형제보다 더 친한 사이올시다. 정도전이 대군을 해치려는 일을 걱정했더니 이숙번은 팔뚝을 걷어붙이며 정도전을 죽여야 한다고 별렀습니다. 이 사람과 큰일을 함께 의논할 만합니다."

"어떻게 하면 큰일을 함께 하겠소."

"이숙번은 지금 조정 명령을 받아가지고, 정릉 이안군을 거느리고 서울로 향해 들어옵니다. 정릉의 역사를 감독하는 군사입니다. 나리께서는 이 정릉 이안군을 이용하시어 나리를 해치려는 정도전을 잡아 죽이십시오. 그리고 소인한테 거사하는 날짜를 기별하시면 진천 군사를 거느리고 곧 서울로 쫓아 들어와 일익을 담당하겠습니다. 이숙번한테는 미리 약속을 해놓았으니, 가만히 민무질을 보내시어 계획을 알리도록 하십쇼."

정안군은 기뻤다. 덥석 하윤의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모든 일은 하관찰만 믿고 있소. 당부하오."

"염려 맙시오. 자아, 그러면 소인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너무 오래면 집에 있는 조정 백관들이 의심할 테니 이만 작별을 드립니다."

하윤은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갔다. 하윤은 정안군 방원이 어떠한 계책을 세우고 작별한 것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정도전은 하윤을 지방으로 보낸 후에 심복인 남은과 함께 비밀한 게획을 의논했다.

"왕자들이 무기를 뺏긴 후에 불평이 대단한 모양인데,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빨리 치워버리고 안심하고 지내도록 하십시다."

정도전은 남은에게 의논했다.

"다른 왕자들은 성정이 안존해서 큰 염려가 없소이다. 그러나 정안군 방원이 제일 무섭습니다. 이 사람을 속히 제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세자는 세자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공연히 날짜를 끌지 말고 얼른 처치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남은이 정도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2혁명

 

정도전은 코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그까짓거 치워버리자면 손바닥을 뒤엎기보다도 더 쉬운 노릇이오. 하하하."

정도전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대담하게 말했다.

"어떠한 방법으로?"

남은이 궁금해서 물었다.

"지금 왕상전하께서는 환후중에 계시니, 이 틈을 타서 모조리 처치하면 된단 말요."

남은은 정도전의 말을 깨닫지 못했다.

"왕상전하께서 환후 중에 계신데 어떠한 방법으로 왕자들을 모조리 처치한단 말씀요?"

"대감은 참 숙맥이구려. 하 하 하. 환후 중에 계신 것을 이용해서 환후가 위중하다고 문안을 들어오라 한 후에 합문 안에서 무사들을 시켜 모조리 처치한다면 아무 걱정과 근심이 없을 것이오. 하 하 하. 나의 계교가 어떠하오?"

정도전의 말을 듣는 남은은 손뼉을 치며 탄복했다.

"과연 신출귀몰한 계책입니다. 언제쯤 일을 차리시렵니까?"

"날짜도 이미 정해놨습니다. 삼사일 안으로 거사하려 하오. 당신은 그날 나하고 술이나 흠뻑 마시면서 장래 일을 축복합시다."

"봉화백은 과연 남양초당의 제갈공명이 부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도전은 남은의 칭찬하는 말을 듣자, 의기가 양양해서 더욱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과연 말이지 내가 조선 천지에 났으니 겨우 봉화백밖에 아니되었지, 한고조를 돕던 장양, 진평도 별사람이 아니구, 삼국 때 삼분천하를 해서 유현덕을 돕던 제갈량도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난 사람은 아니거든. 내가 그들의 윗길인 사마의나 조조쯤 되는 인물일지도 모르지. 하 하 하."

정도전의 호기는 안하무인 격으로 높았다.

"아닌 게 아니라 대감의 손바닥만한 조선 땅에 났으니까 더 재주를 펼 수가 없지,만약에 큰 나라에 났더라면 천하가 들먹거렸을 것입니다. 하 하 하. 좌우간 어서 세자 방석을 도와서 앞의 일을 하기로 합시다."

두 사람은 이같이 음모를 하고 헤어졌다. 한편 정안군 방원은 하윤이 충청관찰로 내려간 후에 하윤이 천거한 이숙번과 연락을 취했다. 정도전과 남은의 눈을 피하여 대장 민무구를 안산으로 보내서 이숙번의 의향을 더듬었다. 이때 안산군수 이숙번은 벌써 충청관찰사 하윤과 깊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민무구가 동헌으로 들어가 만나기를 청하자 이숙번은 반겨 맞아들여다. 토인까지 물리친 조용한 방이었다. 이숙번은 민무구를 보자 당장 호걸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하, 자네가 오늘쯤 올 줄 알았네."

민무구는 조심조심 이숙번을 바라보았다. 극히 비밀한 일을 의논하러 온 길인데 이숙번이 너무나 호탕한 웃음을 보내니 도리어 불안스런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에도 성격이 호방하고 활달한 사람이지만 큰일을 의논하는 자리에 너무 호협한 행동을 하니, 민무구는 더한층 자기 자신을 조심하게 되었다.

"어떻게 내가 오늘 자네를 찾을 줄 알았나. 자네가 병법을 잘 쓰는 사람인 줄은 전부터 알았지만 미미한 나 같은 사람이 자네를 찾을 줄 어찌 알았나?"

민무구는 조심조심 웃으며 물었다.

"아니 자네가 미미한 사람야? 천만에. 민무구 개인은 미미할지 모르지만 자네 머리 위에는 지금 오색구름의 찬란한 서기가 뻗었네. 그러니 내가 자네가 올 것을 미리 알 수 있지 아니한가. 하 하 하. 천하의 눈이 있는 구안자라면 자네 머리에 서기가 떠 있는 것을 다 볼 수가 있을 것일세. 그러나 모두 다 장님이 되어서 보지 못해서 그렇지. 하하하하."

이숙번은 계속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 머리에 서기가 떠 있단 말인가?"

민무구는 더욱 조심이 되어 목소리를 나직하게 하여 물었다. 이숙번은 빙긋 웃고 대답했다.

"아무렴 있구말구. 그러나 그 서기는 자네 서기가 아닐세마는 수양산 그늘이 삼백 리까지 벋친다고, 이방원의 서기가 삼백 리까지 뻗쳐서 안산 군수 이숙번을 찾아온 자네 머리까지 놀처럼 비쳐 있단 말일세."

민무구는 깜짝 놀랐다. 벌떡 자리에 일어나 안산군수 이숙번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사람아, 말조심하게."

"관계치 않아. 아무도 엿듣는 사람이 없네. 나는 자네가 오늘 온 일을 다 알고 있으니 염려 말게. 도와주지. 천명이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아니하고 누구를 돕겠나. 내일 나는 정릉 이안군을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갈 테니 그리 알고 정안군이나 정신을 차려서 대궐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일러두게나."

이숙번이 마음속의 비밀을 다 털어놓으니, 민무구는 다시 더 부탁할 것이 없었다.

"하관찰한테서 부탁이 왔던가?"

이숙번은 고개를 끄덕일 뿐, 다시 더 대답을 아니했다.

"그럼 자네만 믿고 나는 올라가네."

"모레쯤 한밤중에 갑옷 투구로 차리고 만나기로 하세."

한편 민무구를 통해서 이숙번의 쾌한 대답을 받은 이방원은 적이 마음을 놓고 대궐의 외전인 근정전 앞 근정문 밖에 거처하고 있었다. 근정문 밖은 바로 광화문 안에 있는 외전 밖이었다. 임금이나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지밀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사삿집으로 친다면 안채가 있고 사랑이 있고 사랑밖에 바깥사랑이 있고 그밖에 행랑이 있는 중문 밖 행랑채에 해당한 곳이다. 대궐을 지을 때, 왕자들은 따로 집들을 가져서 대궐 밖에서 살림을 하도록 했다. 아무리 임금의 아들이라 하나 세자 이외에는 대궐 안에 거처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왕자들은 대궐 안에 거처할 수 없었다. 정안군 방원은 아버지의 병환이 발생한 후부터 자기 집에서 자는 것이 미안하여 광화문 안 근정문 밖 행각에 방 하나를 치우게 하고 밤마다 자고 있었다. 지밀 안 병환 소식을 빨리 듣자는 것이었다. 정안군 방원이 궐내에서 숙직을 하고 있으니 둘째 아들 방과도 근정문 밖 행각에서 잠을 자며 숙직을 하고 있었다. 셋째 아들 방의도 행각에 유하고 있었다. 전실 아들인 여러 형제들은 한시라도 속히 아버지 환후 소식을 들으려 하여도 감히 지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낮과 밤으로 행각에 모여 있게 되었다. 이때 정안군 방원의 부인 민씨는 인정을 써서 매수한 지밀상궁을 통해서 정도전과 남은의 행동을 일일이 염탐했다. 말할 것도 없이 지밀상궁은 대전내시와 정도전의 심복 내시들을 통하여 소식을 얻었다. 보통 소식이 아니었다. 크나큰 충격을 일으킬 중대한 소식이었다. 지밀상궁은 지체 없이 정안군 부인께 소식을 전했다.

"정도전은 오늘 밤에 상감께서 위중하시다는 거짓말을 반포해서 왕자들을 불러들인 후에 합문밖에서 왕자들이 들어오는 대로 철퇴로 박살을 내버린다 합니다. 정안군께서는 절대로 소명에 응하시어서는 아니 됩니다. 몸조심을 단단히 하십쇼."

정보를 들은 민부인은 깜짝 놀랐다. 급히 대궐로 향해 들어가는 정안군을 안으로 청해 들였다.

"오늘은 대궐에 들어가지 마십쇼."

정안군은 마음속으로 날짜를 꼽아보았다. 바로 안산 군수 이숙번이 정릉 이안군을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온다는 날이다. 마음속으로 '그렇구나' 하면서 겉으로는 시치미를 뗐다.

"?"

"신변이 위태하십니다."

"별소리가 다 많구려. 사내대장부가 천병만마를 거느리고 적진 속으로도 왕래를 하는데, 제 나라에서 황차 아버님을 상감으로 모신 대궐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 웬말이오. 쓸데없는 걱정 너무 하지 말고 집안일이나 보살피고 계시오."

"그래도 그렇지 않습니다. 몸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상감께서 위중하시다고 뵈러 들어오시라 해도 절대로 합문 안으로 들어가시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그저 아무 말씀 마시고 집에 꼭 들어앉아 계시는 것이 제일 상책일까 합니다. 집 안에 앉으시어 모든 일을 처리하셔도 무방할까 합니다."

방원은 사랑하는 아내의 말뜻을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눈을 한 번 딱 부릅떴다.

"여자는 집안일이나 보살피고 그대로 들어앉아 있는 법야. 잔소리 작작 해요."

방원은 말을 마치자 민부인의 만류하는 소매를 뿌리치고, 경복궁 대궐로 들어갔다. 이때 정도전과 남은은 궁중 안에 어림군을 매복시켜서 세자 방석을 보호하게 한 후에 한편으로 궁문 파수를 엄하게 하고 합문 안에는 철퇴와 칼이며 창을 든 무사 수십 명을 매복시켜서 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안산 군수 이숙번은 정릉 이안군을 거느리고 전날 밤에 서울에 당도하여 정릉에 진을 친 후에 산릉 역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이숙번과 민무구는 서로 연락을 취하여 안산 군사가 서소문 안정릉에 당도한 것을 정안군 방원한테 고했다. 방원은 즉시 심복인 조영무를 하윤한테로 보냈다. 하윤은 벌써 안산 군수 이숙번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진천에서 날랜 군사 오십여 명을 뽑아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행상 행렬을 차린 후에 상여 속에는 창과 칼이며 철퇴 등 무기를 가득 싣고 서울로 향해서 떠났다. 한편 서울 안에서는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정안군의 명령으로 해산되었던 사병을 비밀한 속에 집결시켜서 남산 아래 가만히 매복해 있었다. 정도전이 왕자들을 청하는 발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세 곳 군사를 일시에 합세가 되어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한편 낮게 대궐로 들어간 방원은 근정문밖 행각에 당도하니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의 얼굴이 보였다. 방원은 동복 형제인 두 형에게 위험한 사태를 아니 일러줄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나직이 하여 고했다.

"아바마마의 환후가 위중하시지 아니한데, 정도전은 위중하시다는 핑계를 한 후에 우리들 형제를 합문 안으로 불러들여서 죽일 계획을 차렸다 하니 형님들은 조심하시오. 만약에 우리가 부르는 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목숨을 잃을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도사려서 불의의 변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오."

방의와 방간은 방원의 말을 듣고 벌벌 떨었다.

"정말인가. 만약 그 일이 사실이라면 어찌하면 좋은가?"

일제히 물었다.

"삼십육계 중에 달아나는 일이 가장 상책이라 생각하오. 그저 달아나는 수밖에 도리가 없소이다."

방원은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고 달아나는 한 가지 일만 일러주었다. 이때 밤은 점점 깊어 들었다. 정안군의 집에서는 김자근이란 종이 숨을 몰아쉬고 근정문 행각으로 뛰어들었다.

"급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아씨께서 별안간 관격이 되셔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빨리 나와보시기 바랍니다."

정안군은 화불단행이라 생각했다. 급히 말을 달려 집으로 나왔다. 안 대청에는 민무구 형제가 대기하고 있다가 방원을 반갑게 맞이했다. 방원은 급했다.

"어떻게 관격이 되었나?"

처남들한테 물으며 안방 문을 급히 열었다. 그러나 관격이 되어 죽게 되었다는 아내는 남편 방원의 음성을 듣자 반갑게 일어나 남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저 죄송 천만합니다. 하도 아니 오시니 거짓 말씀을 올렸습니다. 밤에 곧 지밀로 들어오라는 영이 내린다 합니다. 들어가지 마시고 집에서 모든 지령을 내려줍시오."

"그럴 수가 없소. 여러 형님들이 대궐 안에 있는데, 나 혼자만 살자고 집에서 지휘를 하란 말인가.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요. 그리고 저자들은 눈과 귀가 없나. 내가 대궐 안에 없으면 오히려 의심을 낼테니 이편의 비밀이 누설되면 큰 낭패란 말요. 두말 말고 전에 계획한 대로 처남들이 실행하라 하오. 딴소리 하지 말고...."

방원은 다시 처남들에게 당부한 후에 말 위에 올랐다.

"조심하십쇼."

민부인은 어찌하는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했다. 두 번 세 번 당부했다. 정안군 방원은 다시 근정문 밖 행각으로 들어갔다. 밤은 점점 깊어 한밤중이 되었다. 행각 안에 젊은 내시가 나타났다.

"상감마마의 환후가 더 침중하십니다. 피접을 나셔야 한다 합니다. 모든 대군들을 한 번씩 대면하신다 하옵니다. 입시해주시라는 어명이 내렸습니다."

내시의 말이 떨어지자 방원은 내시한테 물었다.

"세자는 어디 계시냐?"

"대전에서 사후하고 계십니다."

"곧 들어갈 테니 그리 알아라."

방원은 내시를 돌려보낸 후에 변소로 가서 거짓 뒤를 보는 체하고 사면의 정황을 살폈다. 평상시에는 대궐 마당마다 불이 환하게 켜졌던 등촉이 오늘 밤엔 한 곳도 켜있지 아니했다. 음산하고 캄캄하기 짝이 없다.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이 정안군 방원을 찾아서 변소까지 쫓아와 큰 소리로 불렀다.

"정안군, 정안군 어디 있나?"

"변소에 있나?"

"오오, 여기 있구나.

"장차 어찌하면 좋은가?"

형제들은 주책없이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왜 이리 떠들어대오."

방원은 두 형을 윽박질러 누른 후에,

"어찌할 수 없지, 별수가 있소. 죽는 수밖에 없지."

가만한 소리로 소곤거리며 두 사람의 소맷자락을 당겼다.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서편으로, 서편으로."

정안군은 외치며 뛰었다. 방의와 방간도 뛰었다. 영추문이 나타났다. 영추문 수문장은 정도전의 지령을 받았으며 방원의 심복이었다. 슬쩍 빗장을 빼주었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을 데리고 천방지축 경복궁 대궐 문을 벗어났다. 캄캄절벽 속에 우뚝 섰다.

"우리 형제는 광화문 밖에서 천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소!"

정안군은 말을 마치자 종침다리를 거쳐 공조 뒷골로 빠져서 광화문 앞에 당도했다. 모든 형제들은 뒤를 따랐다. 정안군 방원은 정도전의 쫓는 군사가 있을까 하여, 일부러 대궐 앞문을 피하여 지름길로 광화문 앞으로 나가는 길을 취한 것이다. 멀리 정동 쪽에서 일원 대장이 횃불을 들고 말을 달려 나왔다. 뒤에는 일천 군사가 말을 달렸다. 또 한 사람의 재상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먼저 횃불을 들고 나타난 장수는 이숙번이요, 뒤에 나타난 재상은 하윤이다. 대장과 재상은 정안군 방원을 발견하자 말에서 급히 내려 횃불을 군사한테 넘기고 엄숙하게 군례를 드렸다.

"정릉 이안군 대장 이숙번이오."

"충청절도사 하윤 군례로 현신이오."

방의와 방간은 영문을 몰라서 눈이 둥그레졌다. 정안군은 군례를 받은 후에 두 장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만반 태세는 다 갖추어졌는가?"

"정릉 이안군과 충청도 군사는 일사불란 명령을 대기하고 있소."

이숙번과 하윤이 일제히 대답했다.

"나와 왕자들한테 탈 것을 마련하라."

정안군은 하윤한테 명령을 내렸다. 하윤은 정안군한테 눈 갈이 흰 백마를 바치고, 방의와 방간한테 검은 말을 바쳤다. 정안군은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백마에 높이 올라 칼을 빼어 들고 모든 군사를 지휘했다. 이때 민무구, 민무질의 일대 군마가 남산 쪽에서 광화문 앞으로 들어오며 정안군 앞에 군례를 드렸다. 정안군은 정릉 이안군, 충청관찰군, 민무구 형제가 거느린 세 부대의 군대를 통솔했다.

"충청관찰의 군대는 정안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하윤이 거느려 남산으로 향하여 달렸다. 정안군은 계속해서 군령을 내렸다.

"정릉 이안군과 민장군의 부대는 철통같이 궁성을 포위한 후에 나의 명령을 받아라. 먼저 민장군은 정승인 조준과 김사형을 부르라!"

민무구는 비장을 조준과 김사형한테로 보냈다. 이때, 정승 조준은 정도전과 정안군 사이에 반드시 어떠한 큰일이 벌어질 것을 짐작했다. 점 잘 치는 술객을 청해서 정도전한테로 붙는 것이 좋을까, 정안군한테로 가는 것이 좋을까 점을 치고 있는 판이었다. 비장이 세 번 네 번 불러서, 조준이 겨우 바깥사랑으로 나왔다. 점쟁이는 정안군 편으로 가는 것이 좋다는 괘를 얻었던 것이다. 조준은 부랴부랴 정승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광화문으로 향하여 말을 달렸다. 조준이 거느린 일대 군마다 예빈시 앞에 당도했을 때, 정안군은 보부 이숙번한테 영을내렸다.

"조준 한 사람만 등대케 하라."

조준이 거느린 군사는 석다리 앞에 멈추어 있게 되고, 조준 혼자만 정안군의 앞으로 나가 군례를 드리게 했다. 정안군은 조준을 꾸짖었다.

"평소에 대감 믿기를 국가의 중진으로 알아서 크게 나랏일을 바로 잡을 줄 알았더니 요사이 대감의 태도는 의심하고 주저하여 사직을 돌보지 아니하고, 일신의 영달만 생각하니, 평소에 바라던 바가 허사가 되었소이다."

방원은 점잖게 꾸짖었다. 조준은 손을 모아 사례했다.

"몸이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책임을 다하여 국가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죄는 만사무석이옵니다."

정안군 방원은 얼굴을 정색하여 조준을 바라보았다. 정안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장차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할 터인가? 정도전을 위하여 일을 할 터인가? 나를 위하여 일을 할 터인가?"

정안군은 단도직입적으로 숨기지 아니하고 물었다.

"나리를 위하여 일을 하겠습니다. 본시부터 소인은 나리를 세자로 삼자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조준이 방원으로 세자를 삼자고 주장한 일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노릇이다. 정안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서 그런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아니했다.

"잠깐 물러가 계시오."

조준은 방원의 명을 받아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때 김사형 이하 여러 대신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신들은 정부로 들어가 앉으려 했다. 정안군 방원은 대신들을 꾸짖었다.

"우리 형제들이 말을 길에 세우고 있는데, 당신들이 어찌 정부로 들어가 앉을 수 있소. 종로에 임시로 정부를 배설한 후에 모든 중신들을 부르시오."

조준과 김사형은 정안군이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종로에 임시로 정부를 배설하고 대신들을 불렀다.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지원하던 대신들이 한 명 두 명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저 찬성 유만수가 들어왔다. 그의 아들이 뒤를 따랐다. 정안군의 심복 조영무가 고했다.

"유만수 부자는 정도전의 당이올시다. 죽이셔야 합니다."

유만수는 급했다. 말에서 내려 얼른 정안군의 손을 탁 잡았다. 무어라고 신상에 대하여 변명을 하자는 것이다. 정안군의 심복과 김자근은 칼을 들어 유만수 부자를 찔러 죽였다. 이같이 해서, 정도전의 심복으로 재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한편, 정도전의 대궐 안에 군사를 배치하여 철통같이 짜놓은 후에 합문으로 왕자들을 불러들여서 들어오는 족족 죽여버리라고 도부수들을 배치한 후에 남은과 함께 대궐에서 나왔다. 정릉 이안군과 충청감사 하윤의 군사가 정안군을 위하여 움직일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인제는 독 안에 든 쥐일세. 저희들도 별수 없지. 새벽녘이 되기만 하면 모두 다 죽을 테니까...."

정도전은 남은과 함께 속삭이며 궐문 밖으로 나왔다. 정도전은 자비를 타기 전에 남은에게 물었다.

"남판서는 어디로 가겠소?"

"대감께서 가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글세, 집으로 가면 뒷일이 궁금하고, 대궐 안에 있자니 외인 소시에 혐의를 받기 쉽단 말야.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소?"

"소인의 소실이 집으로 가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대궐서 멀지도 아니하고, 기별 듣기도 편리합니다."

남은의 말을 듣고 정도전의 입은 딱 벌어졌다.

"남판서의 소실의 집이 바로 통골 아니오? 아주 안성맞춤이구려. 우리들이 들어앉아 있는 것을 쥐도 새도 모를 테고."

남은의 소실은 계향이란 기생이었다. 남은이 개국 공신이 된 후에 송도서부터 떼어 들여서 소실을 삼아 가지고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서 통골에 치가하여 살고 있었다. 원래 가무가 절묘한 데다가 얼굴이 해반주그레했다. 송도서 명기로 이름이 높던 기생이었다. 정도전은 남은의 소실을 기생 적부터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새벽일은 떼어논 당상으로 다 된 일이고 하니 마음 놓고 미인의 손에 술이나 한잔 유쾌하게 마시고 싶었다. 단번에 천상을 했다. 두 사람은 대궐 문밖에서 자비를 탔다.

"어디로 모시오리까?"

정도전의 간단하게 지시했다. 남은의 초헌이 앞을 서고, 정도전의 평교자가 뒤를 따랐다.

"벽제 소리를 내지 말라."

정도전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평상시 정승 행차에 떠들어대던 금잡인하는 벽제 소리를 내지 말라고 분부를 내렸다. 남은이 탄 초헌에서도 정승이 벽제 소리를 내지 아니하니 따라서 벽제 소리를 내지 아니했다. 통골 남은의 소실 집에는 별안간 연통도 없이 정정승이 오는 바람에, 소실 계향은 밥을 먹다가 뛰어나와서 안방으로 귀한 손님은 모신 후에 분세수를 하고 술안주를 마련하여 손수 술상을 받들어 안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정정승한테 나는 듯이 절하여 뵙고 술상을 반듯하게 앞에 놓았다.

"대감께서두 참 딱하십니다. 암행어사 출두하시듯 별안간 연통도 없이 오시니 안주가 없어서 큰일입니다. 그저 소례를 대례로 받아줍시오."

계향은 은잔에 백일주를 가득 부어 정도전한테 바치며 방싯방싯 웃음을 보냈다.

"남판서의 소실은 음식 솜씨 좋기로 유명한데, 연통까지 하고 올 필요가 있나. 있는 그대로 차려논 그 음식을 먹어야만 진짜로 좋은 솜씨를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만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오. 산해진미가 소반에 가득하구려."

정도전은 남은의 소실이 따라 울리는 술을 단숨에 마시면서 흥이 도도했다. 정도전은 계향이 올린 술을 마신 후에 빈 잔을 남은에게 넘겼다.

"이번엔 자네 영감께 올리도록 하게. 참말이지 요새 자네 영감이 애를 많이 쓰셨네. 내일모레쯤은 자네도 정경부인이 될지 모르네. 정경부인 되거든 한턱을 단단히 내야 하겠네."

"소첩이 정경부인이 됩니까. 정경은 그만두고 그대로 부인 칭호만 받자와도 죽어서 한이 없겠습니다."

남은은 첩이 따라 올리는 술을 죽 들여 마신 후에,

"그저 오늘 밤에는 정정승 대감을 졸라대게나. 자네가 부인이 되고 아니되는 것은 정정승 대감께 달려 있네. 내일쯤은 영의정 대감으로 승차하시게 된단 말일세. 영의정 대감으로 앉아서 친구의 첩을 부인쯤으로 승차시키기야 여반장이란 말일세."

요염한 기생 출신 계향이 깜짝 놀라는 체했다.

"내일이면 영의정으로 승차를 하십니까? 미리 축하를 드립니다.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에 계실 영의정 대감께서 소녀를 부인으로 승차키시기야 마음만 잡수시면 다 되실 일입니다. 미리 부탁 올리는 절을 드리겠습니다."

계향은 나비같이 예쁜 자세로 정도전한테 절을 드렸다. 남은과 정도전은 유쾌했다. 다시 서너 잔 술을 나누었을 때 순군만호 이직이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얼른 문을 열어주지 아니하다가 이직이 바치는 마패를 보고 정도전은 비로소 문을 열어주라 했다. 순군만호 이직은 정도전의 사람으로 순군을 감독했다. 오늘 밤에 중간보고를 하기 위하여 정도전과 남은을 집으로 찾았으나 대궐서 아니 나왔다는 것이다. 정도전 첩의 집을 찾았으나 그곳에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남은의 첩의 집을 찾아온 것이 들어맞았다. 이직은 자기가 맡은 순군만호의 공을 치사하기 위하여 정도전과 남은을 찾아다닌 것이다. 정도전은 이직을 보자 반가웠다. 먼저 술병을 들어 큰 잔으로 한 잔을 먹이고 대궐 일이 궁금금했다.

"어떻게 되었나?"

"물샐틈없이 대걸 안을 철통같이 안으로 에워싸고 있습니다."

"왕자들은 어디 있는 모양인가?"

"집에 나가 있는 왕자도 있고 근정문 밖 행각에 있는 왕자도 있습니다."

"정안군 방원이는 어디 있다 하던가?"

"정안군은 방의, 방간과 함께 행각에 있습니다."

"잘되었네. 방원이 하나만 죽여버리면 그 나머지 왕자들은 아무것도 아닐세. 다 우리 천하가 되네. 자아 술이나 한잔 더 마시고 자네는 곧 대궐로 들어가 보게. 그리고 성공이 된 후에 이곳으로 와서 연통을 해주게."

"염려 마십쇼. 일만 성공이 되면 기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곧 이리로 와서 경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직은 총총히 작별인사를 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정도전은 술이 얼근한 바람에 남은의 첩 계향이 앞에서 비밀한 음모를 다 털어놓았다. 계향이는 이직이 나간 후에 몸을 일으켰다. 정도전에게 가만히 말했다.

"문을 손수 보살피고 들어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도 막거리로 밤참을 좀 먹여야 하겠습니다."

정도전은 그럴듯하게 생각했다.

"계향이는 과연 남판사의 작은집이 될 만하이. 백령백리하거든."

정도전은 남은의 첩을 칭찬하여 내보냈다. 남은도 자기 첩을 칭찬해주는 것이 싫지 아니했다.

"대감, 한 잔씩만 더 하십시다. 일은 다 된 일입니다. 참말 유쾌한 밤이올시다."

남은은 술잔을 들어 정도전에게 다시 권했다. 두 사람은 마음을 놓고 권커니 잣거니 신명이 나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한편 남은의 첩 계향은 막걸리를 거르고, 김치를 썰어 두부 전골을 부글부글 끓인 후에 행랑방으로 친히 들고 나가서 하인들에게 권했다. 구종별배들의 입은 함박만큼 열어졌다.

"세상에 우리가 열인을 많이 해봤지만 남판서댁 아나서 같은 분은 과연 드물거든. 어떻게 이렇게 한밤중에 대감을 대접하시기도 귀찮으실 텐데, 저희들까지 생각을 하시고 밤참을 내다가 주십니까."

"참말, 아나서는 인정 많고 싹삭하고 사람 대접할 줄 아시는 분이지. 개국 공신댁 아나서 중에 제일가는 인품이 아니신가."

"아씨, 잘 먹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구종별배들은 막걸리 상을 방속에 받아놓고 너무나 좋아서 코를 벌렁거리며 제각기 한 마디씩 떠들어댔다.

"술이 모자라면 더 달라구 그래요. 또 내올 테니."

계향이는 덧문을 닫고 발길을 돌렸다.

"염려 마십쇼. 다 먹고 또 줍시사고 하겠습니다."

별배들은 감격해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방문을 닫고 발길을 돌린 남은의 첩은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발길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봉상판사 민부의 집 대문 앞으로 향했다. 봉상판사 민부는 바로 정안군 방원의 부인인 민씨의 친정으로 민무구, 민무질의 당내간이다. 민부와 계향은 전부터 정분이 깊었으나 남은이 개국 공신이 되어 세력으로 계향을 치가하게 되니 민부는 한이 깊었으나 사랑하는 계향을 남은한테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정실이 아닌 첩이고 보니 민부는 남은의 작은집 옆으로 집을 옮아서 남은이 오지 않는 때는 남은의 눈을 속여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이러한 계제에, 정도전과 남은은 세자 방석을 위하여 전실 왕자들을 몰살하려는 음모를 차렸다. 남은을 통하여 눈치를 챈 계향은 이 사실을 민부한테 퉁겨주었고, 민부는 정안군 방원의 신변에 위급한 환난이 있는 것을 알자 계향한테 청을 해서 기미를 아는 대로 급히 연락을 취해달라고 천 번 만 번 당부했던 것이다. 영리하고 약삭빠른 계향이었다. 남은이나 민부를 통해서 정안군이 어떠한 인물인 것을 짐작해 알았고, 세자 방석의 어머니 강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정도전과 남은의 위치가 어떻게 될 것도 요량해보았다. 계향은 마음에 없이 권력에 눌려서 첩 노릇을 하는 것보다 마음에 맞는 민부의 평생 애인이 되는 것이 나을 것도 저울질해보았다. 계향은 마침내 정안군의 위급한 것을 알리기 위하여 민부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민부는 민부대로 긴장된 밤이었다. 오늘 밤에 정안군의 형제를 급히 대궐로 불러들여서 처치해버린다는 흉흉한 풍설이 도는 중에 남은은 뜻밖에 정도전과 함께 구종별배들을 거느리고 초저녁에 계향의 집으로 들어가서 술들을 마시고 있었고, 얼마 전에는 궁중의 군사를 감찰하는 순군만호 이직이 다녀갔다.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다고 생각했다. 계향이가 깊은 밤중에라도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민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워 있는 판이었다. 과연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 앞으로 나갔다.

"누가 왔소?"

가만한 소리로 물었다.

"납니다. 계향입니다."

민부는 소리 없이 빗장을 뽑았다. 계향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빗장을 질렀다.

"오늘 밤 안으로 무슨 일이 나는 것 같습니다."

"정도전과 남은이 왔지?"

민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 그렇습니다."

"순군만호 이직이 나중에 온 모양이던데."

"나중에 왔다가 다녀갔습니다. 서로들 말하는 것을 들으니 오늘 밤 안으로 정안군을 죽인다 했습니다. 빨리 가서 연통해 드리십시오. 만약 정안군께서 대궐 안으로 들어가시기만 하면 큰일 납니다. 그럼 나는 돌아갑니다. 저것들이 의심을 하면 큰일이올시다."

계향은 다시 빗장문을 소리 없이 빼고 집으로 돌아갔다. 민부는 급했다. 두 주먹을 불근 쥐고 정안군의 집으로 달렸다. 이때, 정안군은 광화문 앞에 말을 세우고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정릉 이안군의 일부대는 대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역적의 원흉 정도전과 남은을 잡아 죽여야 한다. 지금 대궐 안에 두 놈은 없는 모양이다. 필시 저의 집에 있는 모양이니 이숙번과 민무구는 제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정도전과 남은 집을 포위하여 두 역적을 생포하라."

이숙번과 민무구는 정안군의 명을 받아 제각기 정도전과 남은의 집을 포위하고 두 사람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종적이 묘연했다. 아무리 집안 사람들을 붙들고 문초해보았으나, 대궐로 들어가서 아니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숙번과 민무구는 하는 수 없었다. 제각기 허탕을 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정도전을 잡으려 했으나 집에 없고 종적이 묘연합니다."

이숙번이 정안군한테 아뢰었다. 뒤미처 민무구도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남은을 아무리 잡으려 했으나 행방이 묘연합니다. 어찌하는 수 없어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정안군은 화가 꼭지까지 뻗쳤다.

"역적을 토벌하는 마당에 원흉들을 잡지 못하면 어찌한단 말이냐."

정안군은 발을 동동 굴렀다. 모두 다 민망해서 어찌할지 모르고 있을 때, 봉상판사 민부는 정안군을 찾아 집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정안군은 광화문 앞에 결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부는 쉴 사이도 없이 다시 광화문 앞으로 달렸다. 진 앞에 당도해보니 모두 다 정도전과 남은의 종적을 몰라서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민부는 정안군의 앞으로 나갔다.

"정도전과 남은이 있는 곳을 소인이 아옵니다. 앞을 서서 인도하겠습니다."

"너는 누구냐?"

정안군이 묻는다. 어두컴컴해서 알아보지 못했다.

"봉상판사 민부올시다."

정안군은 횃불을 들었다. 틀림없는 민부가 분명했다. 입이 딱 벌어졌다.

"확실히 있는 곳을 아느냐?"

"군사를 내줍시오. 잡아오겠습니다."

정안군은 이숙번에게 영을 내렸다.

"곧 민부와 함께 가서 정도전과 남은을 잡아오라."

이숙번은 정릉 이안군을 거느리고 민부의 뒤를 따랐다. 이때, 남은의 첩의 집과 민부의 집은 송현동에 있었다. 이숙번은 민부가 가리켜주는 남은의 첩의 집을 철통같이 포위한 후에 활에 살을 메겨 지붕 용마루에 쏘았다. 기왓장이 '와지끈' 소리를 내며 마당으로 뚝 떨어졌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대궐 안에서 왕자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쾌한 소식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정도전은 깜짝 놀랐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남은도 깜짝 놀랐다.

"기왓장이 떨어지는 소리 아닌가?"

"고양이란 놈이 그러나 보죠."

계향은 생긋 웃고 아무 일이 없는 듯 대답했다. 뒤미처 다시 기왓장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군사들은 고함을 치며 대문을 깨뜨렸다. 정도전은 깜짝 놀랐다.

"웬일이냐?"

"군사들의 들레 소리가 아닙니까."

남은이 벌떡 놀라 일어났다.

"들리는 것이 무언가. 대문짝을 막 부수는데, 폭도들이 분명하이."

정도전은 말을 마치자, 방 안에서 갈팡질팡 어찌할지 몰라했다. 대문작이 '덕커덕' 떨어지는 음향이 났다. 정도전은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지게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빨리 피신을 하십쇼. 폭도들이 들어오기 전에 마루 밑으로 들어가셨다가 옆의 집, 민씨네 댁으로 피신을 하십쇼."

계향은 정도전의 귀에다 급히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정도전은 계향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맨상투 바람으로 얼른 청에서 뛰어내려 마루 밑으로 몸을 숨겼다. 남은도 정도전의 뒤를 따라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숙번은 시퍼런 칼을 빼어 들고 군사들과 함께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정도전은 어디로 갔느냐?"

"남은이란 놈도 없구나."

군사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정도전과 남은은 마루 밑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군사들은 대청 안과 방 속으로 몰렸을 때, 정도전은 마루 밑에서 아까 계향이가 민부의 집으로 달아나라 하던 말이 생각이 났다. 토끼 모양 마루 밑에서 뛰어나와 대문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민부의 집에는 사람이 없었다. 정도전의 눈에는 장독대가 눈에 띄었다. 정도전은 얼른 장독 트ㅁ로 몸을 숨겼다. 정도전을 찾으러 남은의 첩의 집을 들어갔던 이숙번은 칼을 빼어 들고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이때 민부는 손으로 자기 집을 가리켰다.

"배띠기 허연 놈이 우리 집으로 들어갔소. 이자가 정도전이오."

이숙번은 군사를 거느리고 민부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안방 건넌방을 뒤졌다. 정도전의 얼굴은 보이지 아니했다. 부엌을 뒤지고 광을 열어보았다. 역시 없었다.

"장독 뒤를 살펴라..."

이숙번의 호령이 떨어졌다. 군사들은 우르르 장독대로 몰렸다. 정도전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칼을 빼어 들고 뛰어나왔다. 군사들은 정도전을 에워쌌다.

"죽이지 말고 산 채로 잡아라."

이숙번의 명령이 떨어졌다. 군사들은 제각기 칼을 빼어 들고 정도전이 들고 있는 칼을 후려쳤다. 정도전은 칼을 빼어 들었으나 수많은 군사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정도전의 칼을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밧줄을 들고 섰던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정도전을 꽁꽁 묶었다.

"정안군이 계신 곳으로 끌고 가서 처분을 받게 해라."

이숙번은 다시 엄숙한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은 정도전을 꽁꽁 묶어서 광화문 진터로 끌고 나갔다. 한편 남은은 정도전의 뒤를 따라 마루 밑에서 기어 나오자 미륵원 밖으로 달아났다. 군사들은 달아나는 남은의 뒤를 쫓았다. 남은의 몸은 육중해서 빨리 달아날 수 없었다. 쫓아가는 부장의 날랜 칼을 받아 목이 떨어졌다. 부장은 남은의 목을 칼끝에 꿰어들고 정안군한테로 달렸다. 한편 이숙번은 정도전을 결박지어 가지고 광화문 대궐 앞에 진을 쳐서 말 타고 있는 정안군의 앞으로 나갔다.

"역적 정도전을 산 채로 잡아 대령하였소."

이숙번은 큰소리로 외쳤다. 정안군은 정도전이 묶여 오는 것을 보자 전신의 피가 머리 위로 끓어올랐다. 마상에서 내려 끌려온 정도전을 꾸짖었다.

"이놈 도전아, 너는 이미 왕씨를 배반한 놈으로 또다시 이씨를 저버리려 하느냐."

정안군 방원은 쇠를 높여 꾸짖었다. 정도전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구구하게 비는 것만이 살아나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도전은 번쩍 고개를 들어 정안군을 향하여 말했다.

"왕씨를 저버린 것은 나만이 아닙니다. 당신네 이씨들도 왕씨를 저버렸소이다. 나는 이씨를 도와 나라를 창업했을 뿐, 이씨를 저버리지 아니했소이다."

"이놈,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를 모조리 죽이려 했느냐?"

"그것은 세자를 위한 것뿐, 아무 다른 뜻은 없습니다. 내 임금은 하나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라의 세자도 한 분이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임금은 이씨요, 나의 세자도 이씨입니다. 나는 이씨를 위하여 일을 했을 뿐, 이씨를 저버린 일은 없습니다. 만약 정안군이 나를 살려주신다면, 이씨를 위하여 더한층 전력하겠소이다."

정도전은 깐깐하게 대답했다. 정안군은 눈에 불이 시퍼렇게 일어났다. 짚고 섰던 칼을 뽑았다. 강비만 위하여 충성을 다했던 정도전에게 대한 미움과 오늘 밤에 자기를 죽이려 했던 일에 대하여 노여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칼을 번쩍 들어 정도전의 목을 갈겼다. 정도전의 아들 유영은 아버지가 남은의 첩의 집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버지를 구하러 쫓아갔다. 이숙번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이숙번은 도전의 아들을 군사한테 넘겨서, 죽음을 주게 했다. 이리하여 일대의 재사였던 정도전은 부자가 다 함께 와석종신을 누리지 못했다. 정도전과남은을 처치한 정안군은 이숙번에게 영을 내렸다.

"경복궁을 불 지르고 방포를 하여 돌격하라."

이숙번은 정안군의 영을 받았다. 경복궁을 향하여 횃불로 화공하는 행동을 취하고, 대포를 놓았다. 경복궁 십자루에 불이 붙었다. 화강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방포하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정안군은 계속해서 전령을 내렸다.

"남산편에 있는 충청도 군사들은 일제히 홰에 불을 댕겨, 경복궁을 향하여 전원 돌격하라."

하윤이 거느린 군사들은 정안군의 명령을 받아 준비했던 홰에 일제히 불을 당겼다. 군사 한 명이 홰 두 자루씩 들었다. 광화문 앞에서부터 남산까지 뻗친 화광은 십자루에 불붙는 화염과 함께 서울 장안을 벌겋게 물들였다. 온 장안의 화광은 하늘을 사르는 듯했다. 이때 경복궁 안에서는 왕자들이 죽은 줄만 알고 궁녀와 내시며 별감, 무예청들이 제각기 방 속에 숨어서 부들부들 떨며 하회를 기다리고 있을 때 돌연 궐문밖에서 화광이 충천하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모두 다 큰 변란이 일어난 것을 짐작했다. 궁녀와 내시들은 황황망망, 어찌할지를 몰랐다. 정도전의 명을 받아 세자궁을 포위하고 있던 어영군사들은 세자 방석을 업어 모시고 광화문 문루에 올라 접전을 하려 했다. 앞을 바라보니 동십자루는 활활 타오르는데 대포 탄환은 문루를 향하여 터지기 시작하고 남산서부터 광화문까지 만산편야한 군마수는 몇천 명인지 몇만 명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군사를 지휘하는 대장들은 겁이 나서 감히 출전을 하지 못했다. 정안군은 마상에 높이 앉아 전령을 내렸다.

"대궐 안에 입직하고 있는 대장과 군사들은 모두 다 담을 넘어 나오라. 담을 넘어 나오는 자는 항복하는 사람으로 알아, 죄를 주지 아니하리라. 만약 대궐 안에 있어 저항하는 자는 정도전과 같은 당으로 몰아 능지처함한 후에 가족을 멸하리라. 역적 정도전과 남은은 이미 혁명군에 의하여 주를 당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라."

혁명군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여 대궐 안 군사한테 정안군의 분부를 전했다. 정도전의 지휘를 받아 대궐과 세자를 호위하고 있던 대장들은 세자 방석을 버리고 다투어 담을 넘었다. 장수가 담을 넘어 나가니 군사들도 담을 넘었다. 근정문 이남에 배치되어 있던 어영 군사는 한 명도 남지 아니하고 방원의 진으로 다투어 달아났다. 대궐 안은 텅 비었다. 남아 있는 사람은 궁녀와 내시뿐이었다. 세자 방석은 사고무친한 몸이 되었다. 대장이 담을 넘어 달아나고 군사가 담을 넘어 달아나니 남은 사람은 궁녀와 내시들, 칼 한 자루 들고 있지 아니한 약한 사람들뿐이었다. 방석은 세자빈과 함게 병들어 누워 있지 아니한 약한 사람들뿐이었다. 방석은 세자빈과 함께 병들어 누워 있는 아바마마 태조의 침전으로 들어가 소리를 높여 크게 울며 하소연했다.

"아바마마, 살려줍시오."

이때 태조는 병석에 누워 괴로운 꿈을 꾸고 있다가 궁성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와 대포 소리에 잠이 깨어 옆에 모시어 있는 궁녀한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밖에 변란이 일어난 듯합니다."

'변란'이란 말을 듣고 태조는 깜짝 놀랐다.

"변란이라니?"

태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조의 묻는 말에 궁녀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궁녀는 대답을 못 했다.

"빨리 알아보아라."

태조는 병석에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 이때, 세자 방석과 세자빈이 들어와 통곡을 했던 것이다. 조금 있다가 방석의 형 방번도 뛰어 들어왔다.

"아바마마, 큰일 났습니다."

방번도 부왕 앞에 나가 통곡을 했다. 방번의 아내도 뛰어들어와 통곡을 했다. 방번과 방석은 강비의 소생이었다. 이때 세자 방석의 나이는 겨우 열다섯 살이요, 방번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모두 다 입에서 젖내를 겨우 면한 소년들이다.

"웬일이냐, 도대체?"

태조는 방번에게 물었다.

"형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형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어떤 형이란 말이냐?"

"다섯째 형 방원이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정도전과 남은이 죽었습니다."

"무어야? 정도전과 남은이 죽었단 말이냐!"

태조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렇습니다. 하윤, 조준, 이숙번이 앞을 섰습니다."

"하윤, 조준, 이숙번이 앞잡이가 되었단 말이냐?"

태조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세자 방석과 세자빈은 부들부들 떨고 섰다. 동이 환하게 트기 시작했다. 화광은 약간 멈춘 듯했으나 대포 소리는 여전히 은은했다. 광화문 대궐 문이 활짝 열렸다. 정안군 방원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로 들어섰다. 뒤에는 정승 조준, 하윤, 이숙번, 민무질, 민무구, 민부가 따랐다. 이제는 전군의 세력이 방원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정승 조준은 승지를 시켜 태조께 아뢴다.

"정승 조준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전하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태조는 어찌할 수 없었다. 몸이 아픈 것도 잊었다. 곤룡포, 익선관으로 청량전에 올라 용상에 앉았다. 세자 방석의 내외와 방번의 내외가 바싹 뒤에 따라 시립했다. 조준은 백관을 대표하여 전상에 올랐다.

"정승 조준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성상전하께 아뢰오. 정도전과 남은은 역적질할 음모를 마음에 먹고 겉으로 세자를 위하는 체하면서 저희 역적질할 음모를 마음에 먹고 겉으로 세자를 위하는 체하면서 저희 역적질할 길을 만들기 위하여 어제 한밤중에 왕상께서 병환이 위중하시다고 거짓 전교를 내려서 모든 왕자들을 불렀습니다. 협문안에는 도부수를 매복해놓았다가 왕자들이 들어오는 족족 죽이려 했습니다.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왕자들은 이 기미를 알고 먼저 정도전과 남은을 토멸했습니다. 국가의 다행이요, 종묘사직의 모든 신령이 도와주신 덕택이라 생각합니다. 굽어 통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태조는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묵묵히 조준의 아뢰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청량전 앞뒤 뜰에는 무기를 든 정안군의 병마가 삼엄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엄숙한 천지를 주름잡아 일세를 흔들고 고려 정부를 전복시켜서 일국의 제왕이 된 이성계건만 노장은 무용이었다. 지금은 병졸 한 명도 지휘할 권한이 없었다. 조준은 다시 아뢰었다.

"세자 방석은 정도전과 한 당이 되어 형제의 의리를 끊어 국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윗사람을 능멸해서 나라의 화기를 잃게 했습니다. 방석을 내어주시기 바랍니다."

"세자 방석과 정도전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미 봉한 세자를 어찌한단 말인가."

"아니 됩니다. 전하께서는 창업지주이십니다. 공 있는 사람이 세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봉해놓은 세자라 하나 잘못되었으면 당연히 고치셔야 합니다."

하윤이 조준의 뒤를 이어 아뢴다.

"세자를 바꾸시고 방석을 내주십시오. 만약 방석을 아니 내주신다면 또다시 좋지 아니한 광경이 일어납니다."

혁명군들은 장차 태조의 사랑하는 아들 방석을 죽이려는 것이다. 태조는 기가 막혔다. 어이가 없었다. 입술이 뻣뻣하게 굳었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아니했다. 자기가 일찍 고려조정을 뒤엎어버리고 최영을 죽이고, 정포은을 죽이고, 왕우, 왕창을 죽였던 옛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당장 살아서 보북을 받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곧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부아가 터졌다. 가슴 속에 불길이 치밀어올랐다.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아름다웠던 강비의 얼굴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이숙번이 칼을 짚고 전상으로 올랐다.

"세자 방석을 내어주시기 아니하시면 이씨 사직이 위태롭습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쇼."

바로 위협이었다. 이태조는 칼을 빼어 곧 이숙번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아니했다.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부왕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려 곤룡포 자락에 떨어지는 것을 보자 세자 방석은 왈칵 울면서 아뢰었다.

"아바마마, 소자는 세자 노릇을 아니하겠습니다. 소자가 세자가 된 때문에 모든 일이 이같이 일어났습니다. 소자는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대궐 안에서 물러가겠습니다."

태조는 방석의 말을 듣자 더욱 비참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눈앞에는 죽은 아내 방석의 어머니 강비의 애절한 표정을 가진 얼굴이 떠올랐다. 기가 막혔다. 눈앞이 캄캄했다. '대궐 안에서 물러가겠습니다' 하는 방석의 목메인 소리를 들으니 태조는 금창이 미어지는 듯했다. 방석이 대궐 안에서 물러나기만 하면 방석은 방원의 손에서 죽고 마는 몸이다. 형제끼리 왕의 자리를 앞에다 놓고 이것을 차지하기 위하여 죽이고 죽고 하는 더러운 쌈을 벌여놓고 있다. 대궐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방석은 정도전의 운명과 같이 방원의 손에 죽고야 말 것이다. 태조는 무어랴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했다.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백만 대병을 거느리고 왜병과 호병을 물리쳤던 이성계는 이제 늙었다. 곤룡포 옆에 차고 있던 상방검 한 자루로 방원의 군사를 대항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좌우 옆에 모시어 있던 시신들은 이제는 방석의 편보다도 모두 다 방원의 심복들이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태조는 주먹으로 용상을 한 번 강하게 쳤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다. 방원도 자기의 아들이요, 방석도 자기의 아들이었다. 형제끼리 눈이 뒤집혀서 서로들 칼을 빼 들고 죽이려 하는 이 추악한 행동을, 이 저주받을 행동을 누구한테 호소할 도리도 없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깊은 후회를 느꼈다.

'왕우를 내치고 왕창을 죽이고 모든 왕씨들을 함빡 바닷속에 몰아넣어 죽인 보복이로구나! 수천 수백의 억울하게 죽은 왕씨네 원혼들이 방원과 방석의 혼에 씌워서 집안이 망하려고, 형제 싸움을 하게 되었구나! 두문동 칠십이인의 혼령들이 모여서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는구나!'

태조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등골에 소름이 쪽 끼쳤다. 하늘이 망하게 하는 것이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태조는 이같이 생각하고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이때, 전상에 칼을 짚고 올라선 이숙번은 다시 큰 소리로 아뢰었다.

"세자 방석을 내어주십쇼."

무엄하게 칼을 짚고 태조를 노려보았다. 태조는 활 생각이 났다. 활만 있으면 곧 살을 메겨 이숙번을 쏘아 죽이고 싶었다. 백발백중하는 활 잘 쏘는 솜씨로 쏘기만 하면 이숙번은 단번에 쓰러져 죽을 것이다. 그러나 손에는 활이 없다. 태조는 분함을 못 이겼다. 다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만약 방석을 아니 내어주시면 좋지 못한 광경이 일어납니다."

이숙번은 또 한 번 큰 소리로 고했다. 말이 군신지간이지 이숙번의 언동은 임금 태조를 마구 협박하는 태도였다. 개세영웅으로 자처하던 이성계도 군사가 없고 나이 늙어 버리나 아무 능력이 없는 한 사람의 범부가 되었다. 방석은 그의 아버지의 신상에 위험을 느꼈다.

"소자 방석은 물러갑니다."

큰소리로 외치며 절하며 하직을 고했다. 마지막 태조의 입에서는 한 마디가 떨어졌다.

"편할 대로 가거라!"

말을 마치자 곤룡포 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었다. 옆에 모시었던 상궁과 시녀들이 일제히 목을 놓아 따라 울었다. 세자비인 현빈은 발길을 돌려 나가는 세자 방석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못 나가시오. 어디로 나가시오. 나가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바짝 세자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통곡을 했다. 세자 방석은 세자빈의 붙잡는 옷자락을 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이 뒤를 따랐다. 이때 부마 이제는 세자 방석이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가는 것을 보자 피가 끓어올랐다. 강비의 첫딸이요, 세자 방석의 친누님인 경순공주의 남편이었다. 급히 세자 방석의 나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세자저하, 나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죽으나 사나 아바마마의 옆을 떠나지 마셔야 합니다."

이숙번은 이 모양을 보자 이제를 꾸짖었다.

"어명을 받들어 나가는, 폐세자 방석의 나가는 것을 간섭하는 자는 누구냐?"

이숙번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전각을 울렸다. 이제도 지지 아니하고 고함치며 호통을 내놓았다.

"니모, 난신적자야. 어전에서 너무도 무엄하고나. 어찌해서 너는 상감을 협박하느냐?"

"잔말 마라."

이숙번은 칼을 번쩍 들어 부마 이제의 목을 갈겼다. 부마 이제의 목은 뚝 떨어졌다. 피는 댓줄기처럼 뻗쳤다. 핏방울이 태조가 앉은 용상 앞에까지 튀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빛이 노랗게 질렸다. 임금의 사위요, 방석의 매부 이제는 바로 어전 지척에서 쓰러져 죽었다. 옆에 모시어 있던 경순공주는 목을 놓아 통곡을 했다. 임금 이성계의 노기는 절정에 올랐다. 몸이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벌떡 용상에서 일어나 이숙번을 꾸짖었다.

"이놈, 이숙번아. 너무나 무엄하고나. 네가 감히 내 앞에서 내 부마를 죽이느냐!"

태조의 호령 소리는 쩡쩡 전각을 울렸다. 그러나 이숙번의 눈에는 임금 이성계가 보이지 아니했다. 다만 그의 다섯째 아들 방원을 위할 뿐이었다. 이숙번은 껄껄 웃으며 농 치듯 대거리했다.

"하 하 하, 전하의 역적을 처치하는 소신에게 상급은 주지 못하실망정 꾸짖으시면 곤란합니다. 부마 이제는 정도전의 당이올시다. 역적 정도전의 일당을 모조리 숙청해야만, 전하께서는 이 국가를 유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리 정도전이 죽었다 하나, 조정과 나라는 정가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다시 아뢰옵니다. 부마 이제는 정도전의 당이로시다."

태조는 곤룡포 허리에 찬 상방검 자루를 잡았다. 칼이 길었다. 어깨에 메어 후려치려는 찰나였다. 이숙번은 비호처럼 어전으로 뛰어들었다. 임금이 잡은 칼은 이숙번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다.

"황공하옵니다. 아무리 성상전하의 상방검이라 하오나, 혁명을 일으켜 역적들을 토벌하는 이 밤에 소신이 잠깐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연한 화를 진정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이숙번이 유들유들 아뢰었다. 태조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운이 진했다. 펄썩 용상에 주저앉았다. 이숙번은 임금님의 상방검을 거둔 후에 펄썩 주저앉은 태조를 향하여 또 아뢴다.

"아직도 정도전의 당이 또 남아 있습니다. 방번을 내어주십시오."

강비의 첫아들로 성정이 불량하다 하여 세자를 봉하지 아니했던 방석의 바로 동복형이었다. 강비의 소생인 남자들을 모조리 처치할 계획이었다. 방번은 아내와 함께 왕의 곁에 숨어 있다가 이 봉변을 당했다. 태조는 눈을 감고 아무 대답이 없다. 합문 안마당에서 창과 칼을 든 군사들이 큰소리로 외친다.

"방번을 내주십시오. 방번을 안 내주시면, 불호한 광경이 일어납니다."

악머구리같이 떠들어댔다. 방번이 울며 나왔다.

"소자도 방석이 모양 물러가겠습니다."

태조는 방번이 울며 물러가겠다는 모습을 보자,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딱 감고 비쭉비쭉 울었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어서 방번을 내어줍시오. 그래야 끝이 납니다."

칼을 짚고 섰는 이숙번의 질자배기 깨뜨리는 듯한 목소리가 또 떨어졌다. 뜰 안에서 무기를 든 군사들이 고함을 쳤다.

"방번을 빨리 내어줍시오. 아니 내주시면, 전상으로 올라가 끌어내리겠습니다."

"아바마마, 나갑니다."

방번은 마지막 하직 절을 아버지 태조께 올리고, 눈물을 뿌리며 돌아섰다.

"잘 가서 있거라!"

목멘 태조의 목소리가 구슬프게 나왔다. 방번의 나애가 호곡하며 뒤를 쫓아 나갔다. 군사들은 방번의 아내를 밀어버렸다. 방번은 대궐서 문밖으로 군사한테 끌려나갔다. 서문밖에는 방석의 쓰러진 시체가 있었다. 이때 방석의 나이는 겨우 십오 세다. 방번은 방석의 시체를 껴안고 통곡을 했다. 군사들은 방번의 등을 밀어서 정안군이 진을 치고 있는 군막 앞으로 갔다. 정안군은 방번의 손을 잡았다. 진정으로 잡은 따듯한 손길이 아니었다.

"형님, 살려주시오."

방번은 눈물을 떨구며 애걸하는 말을 보냈다.

"네가 내 말을 아니 듣고 오늘날 이 지경을 당하는구나. 잘 가서 살아라."

정안군은 차갑게 한마디를 했다. 군사들은 방번을 이끌고 군막 밖으로 나섰다. 방번은 허청거리며 정처 없이 걸었다. 아까까지도 금지옥엽이었던 방번은 이제는 정처 없이 떠나가는 거러지 나그네의 모습이었다. 동이 환하게 텄다. 고양 땅을 향하여 터벅터벅 무거운 발길을 옮겼을 때 뒤에서 말 탄 금부 군사가 쫓았다.

"역적 방번은 게 섰거라!"

방번이 깜짝 놀라 주저앉았을 때 금부 군사의 시퍼런 칼은 서리를 뿜어 방번의 목을 잘랐다. 이때 방번의 나이는 겨우 십팔 세였다. 한편 대궐 안에서는 이숙번이 정승 조준, 하윤과 함께 용상에 앉은 태조께 고했다.

"이제는 모든 역적의 무리를 숙청했습니다. 빨리 새 세자를 정하시어 국본을 튼튼케 하셔야 합니다."

"너희들 맘대로 하라!"

태조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말 속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이미 봉한 세자를 내쫓은 이 마당에 다시 세자를 봉하겠다고 묻는 것조차 아니꼬운 체면치레의 수작이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조준, 하윤, 이숙번, 민무구 등은 다시 아뢰었다.

"그래도 그렇지 않사옵니다. 소신들이 어찌 감히 세자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까. 세자를 봉하시는 데 이렇게 하십시사고 권해드릴지언정 언감생심 막중하신 세자를 저희가 어찌 맘대로 정할 수가 있습니까. 어서 분부를 내려줍시오."

"이저 이제는 모든 짐작을 하셨을 것입니다. 국가에 가장 공이 많은 왕자로 세자를 봉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준을 위시하여 여러 신하는 일제히 한 마디씩 아뢰었다.

"다섯째 왕자 정안군 방원이 가장 공이 많은 줄 아뢰오."

태조는 이번에 세자 방석을 내쫓고 방번을 내놓으라 하고, 사위 이제를 죽인 장본인이 정안군 방원인 것을 알았다. 태조는 '될 뻔이나 한 소리냐' 하고 생각했다.

'불효 놈에게 어떻게 세자의 대명을 내린단 말이냐' 하고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기는 아무 힘이 없으나 그래도 왕이요 아비다. 왕과 아비의 권력으로 방원을 세자로 삼는 것만은 막아버리고 싶었다. 태조는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하윤이 다시 아뢰었다.

"전하, 백성들이 원하는 바이옵니다. 나라를 창업하실 때 가장 공이 많았던 왕자로 세자를 봉하옵소서."

태조는 왈칵 성이 났다.

"내가 죽은 후에는 모르겠다마는 내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이상, 방원에게는 왕세자를 봉할 수 없다."

태조는 끊어 말했다. 조준이 정승의 자격으로 다시 간했다.

"전하, 성심을 돌리시옵소서. 다섯째 왕자는 전하의 말세후에 이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리실 크나큰 포부와 힘을 가지셨습니다. 한 번 다시 통촉하시기 바랍니다."

태조는 조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경은 애당초 세자 방석을 봉할 때 무어라 했던가? 차례대로 하라고 건의했던 사람이다. 이제 다시 세자를 봉한다면 차례대로 봉하라."

태조는 맨 처음에 정도전 이외에 조준, 배극렴이 주장한 대로 왕자의 순서대로 세자를 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준, 하윤, 이숙번, 민무구들은 서로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태조의 굳은 뜻을 당장에 꺾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뿐 아니라 다섯째 왕자 정안군의 의향도 들어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잠깐 빈청에 물러가 의논을 하고 다시 아뢰겠습니다."

하윤과 이숙번의 무리는 잠깐 어전에서 물러났다. 빈청에 모인 이숙번, 하윤, 조준, 민무구들은 대책을 의논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숙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안군의 의향을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하윤이 대답했다.

"그럼, 광화문 진터로 나가서 정안군께 품을 한 후에 처리합시다."

이숙번은 하윤, 조준, 민무구와 함께 광화문밖에 있는 진터로 향했다. 모든 혁명군들은 아직도 진을 파하지 아니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방원은 군막 안에서 이숙번 이하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모든 일이 다 잘 처리되었습니다. 다만 세자 문제를 결정짓지 못했습니다."

"왜 빨리 결정을 못 짓나?"

정안군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숙번 이하 여러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희들은 나리로 세자 책봉할 것을 최후까지 주장했소이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왕자의 차례대로 세자를 봉하라고 끝까지 승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숙번이 말했다. 정안군은 눈을 감고 이숙번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입가에는 괴로운 미소가 떠돌았다.

"당연한 처분 아닌가. 차례대로 정해야지. 형님이 계신데 내가 왕세자가 된다면 이번 일은 대의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 되네. 둘째 형님 영안군으로 세자를 봉하는 것이 좋겠소. 빨리 들어가 아뢰오."

이때 정안군 방원의 배포는 바다같이 넓었다. 정안군 자신이 꼭 세자가 되겠다고 우겨댄다면, 사태는 더 한번 극렬한 싸움이 일어나야만 했다. 형제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더 한 번 고비를 넘어서, 부자간에 피를 보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조준은 마음속으로 무한히 근심했던 일이, 정안군의 한 마디 쾌활한 말로 절박한 사태는 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준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쉬어졌다.

"감축하신 분부올시다."

조준은 정안군을 은근히 칭찬했다. 이숙번이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이때, 이 기회를 놓치시면 또다시 후회하실 날이 계십니다."

이숙번은 아무 관계 없는 영안군이 왕세자가 되느니보다 같은 일을 해온 정안군 방원이 왕세자가 되고 왕이 되어야만, 자기는 일등 가는 중흥공신이 되는 때문이다. 얼른 찬성을 하지 아니했다. 정안군은 미연히 웃으며 이숙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 형님 영안군은 착하고 어질고 욕심이 없는 분이오. 아무 염려 말고 그분으로 왕세자를 봉하시라 아뢰오."

이숙번은 만족하지 못했으나, 정안군의 말을 아니 들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은 정안군의 말에 의하여 다시 대궐로 들어갔다.

"성상전하의 뜻대로, 왕세자는 왕자의 차례대로 모시는 것이 좋다고 의논이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큰애는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났으니, 둘째 왕자 영안군 방과로 세자를 봉하게 하라."

모든 신하들은 어명을 받고, 영안군의 집으로 알리러 나갔다. 이때, 영안군 방과는 아바마마인 부왕의 병환이 하루 속히 평복되기를 축원하기 위하여, 삼청동 소격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가 궁중과 대궐 앞에서 변란이 일어난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소격전 도사를 시켜서 변란의 원인을 알아보라 했다. 도사는 소격전에서 안동으로 내려와 소문을 들으니 정안군이 정도전과 남은을 죽이고 세자 방석과 방번을 대궐 안에서 끌어내어 참형을 처했다는 소문이 낭자했다. 처음엔 정도전이 왕자들을 청하여 대궐 안에 생사부를 펼쳐놓고 죽여버리려 한 것인데, 일이 뒤집혀서 정도전이 도리어 정안군의 손에 죽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이 어전에서 끌려 나왔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변란은 아직도 가라앉지 아니한 모양이다. 광화문 대궐 앞에서 남산 밑까지 군사들은 만산편야해서 횃불을 들고 있고, 포성 소리는 은은했다. 도사는 깜짝 놀랐다. 줄달음을 쳐서 소격전으로 들어갔다.

"큰일 났습니다."

도사는 영안군한테 고했다.

"무슨 큰일이?"

"정도전과 남은이 죽었다 합니다. 그리고 세자께서도 대궐에서 끌려 나오시고, 방번 나리도 해를 당했다 합니다. 지금 정안군의 혁명군은 서울 안에 만산편야해 있습니다."

영안군은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동생 정안군은 강비가 생존했을 때부터 방석으로 세자를 삼은 것을 항상 불만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피를 흘리는 골육 싸움이 벌어진 것이 확실했다. 영안군은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부왕의 환후의 평복을 위하여 그와 함께 기도드리러 왔던 부인 김씨는 급히 영안군의 소매를 잡았다.

"나으리, 이곳에 계시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잠깐 몸을 피하십시오."

"세자 자리싸움으로 이 변란이 생겼는데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

"그래도 그렇지 아니합니다. 세자가 해를 당하고 무안군이 해를 당했다 합니다. 큰나리께서 돌아가셨으니 나으리께서는 이제 장자올시다. 세상일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빨리 상노를 데리시고, 월성을 하시어 소첩의 친정 농막 뚝섬으로 피하십시오."

영안군 방과는 아내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부인을 급히 작별한 후에 소격전 뒷산으로 올라가 성을 넘어 뚝섬으로 향하여 달음질쳤다. 창황하게 남편 방과를 뚝섬으로 피하게 한 김씨부인은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영안궁으로 들어갔다. 광화문 앞과 종로 일대며, 남산 일파는 아직도 화광이 충천하면서 장안엔 살기가 등등했다. 영안군 부인은 세상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하고 초조하기 한량없었다. 일은 뻔했다. 다섯째 시아주버니 되는 방원이 그 우락부락하고 괄괄한 성정에 자기를 해치려는 정도전 일파를 역습해서 죽여버리고 배다른 동생 방석과 방번을 죽여버린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부왕 되시는 아바마마와 다섯째 아들 방원은 대립되는 형편에 놓여 있다. 궁금한 것이 이 점이다. 방워닝 부왕의 임금 자리까지 뺏느냐, 부왕이 방원의 세력에 못 이겨서 세자의 대임을 방원한테 주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김씨는 하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별안간 밖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님, 문 열어주시오."

"대궐에서 어명을 받들어 나왔소이다."

"누구요?"

"급히 문을 열어주시오. 대전 별감이오이다. 어명이오."

열두 줄 행랑방에 있던 비자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전 별감이라 하면서 어명이라 하고 문을 소란스럽게 두드립니다. 어찌하오리까. 문을 열어주오리까?"

"확실히 대전 별감이더냐?"

"문틈으로 보았습니다. 확실히 홍의를 입은 대전 별감이올시다."

김씨는 어명이라 하는데 아니 만나볼 수도 없었다.

"문을 열어주고 들라 해라."

대전 별감은 안마당에서 대왕의 분부하는 전갈을 올렸다.

"영안군 나리를 모시고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영안군 나리는 지금 집에 아니 계신데 어찌하오."

대전 별감이 김씨께 물었다.

"어디 계십니까?"

"아침에 나가셨으니 나 역시 알 수가 없소."

김씨부인은 남편을 보낸 곳을 가르쳐주지 아니했다. 대궐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장차 부군인 방과의 운명은 어찌 될지 몰랐다. 대전 별감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번엔 또다시 문을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녀들이 문을 열어보니 이번엔 대전 별감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영웅인 다섯째 왕자 방원이었다. 뒤에는 문무백관이 따랐다. 방원은 형수 김씨에게 예를 올리고 물었다.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글세, 아까 대전 별감도 나와서 하교를 전하고 찾으셨습니다마는 알 길이 없습니다."

방원은 둘째 형님 방과가 도리어 행방불명이 되었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방과가 없으면 세자 자리는 자기의 차지가 되는 때문이었다.

"아주머니께서 모를 리가 있습니까?"

"나라의 중대한 일이 발생되었는데 초저녁부터 대궐 안에는 아니 계셨으니 알고도 모를 일이올시다. 바른대로 말해주십쇼."

갑옷 투구로 차린 방원은 위협하듯 형수한테 물었다. 김씨는 지금쯤은 남편이 뚝섬으로 넉넉히 갔으려니 생각했다.

"어째 나랏일이 수상하다 하시고 초저녁에 소격전으로 기도를 드리러 가신다고 나가신 이후엔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지금 나는 역적들 정도전 일당과 세자 방석과 방번을 다 처치해 버렸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형님으로 세자책봉을 하시라는 분부가 내렸습니다. 모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형님께서 빨리 나타나셔야 하겠습니다."

김씨는 오늘날 형제골육이 피를 뿌리는 이 기막힌 꼴을 보니 자기 남편이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되는 것도 다 싫다고 생각했다. 안존하고 착하디착한 자기 남편 방과도 똑같은 생각일 것이라 마음속으로 헤아렸다.

"정 만나시려면 삼청동 소격전으로 가보십시오."

방원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곧 삼청동 소격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월성을 해서 새벽에 달아난 방과가 소격전에 있을 리 만무했다. 방원의 일행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이숙번이 하윤과 함께 의논했다.

"영안군이 없으니 바로 우리 주인 정안군으로 세자를 삼자고 다시 우겨댑시다."

하윤이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급하게 밥을 먹으면 목이 메는 법입니다. 지금 왕상전하의 노여움은 절정에 달하셨는데 영안군이 없으니 정안군으로 세자책봉을 하자고 강권한다면 전하께서 더 한 번 놀라실 것입니다. 영안군은 필연코 몸을 피하여 어느 곳에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하니 우리는 이 사유를 전하께 솔직하게 아뢰고 우리 주인을 위하는 큰일은 차차 의논하기로 합시다."

정안군 방원이 옆에 있다가 찬동했다.

"하관찰의 말씀이 옳소. 두 분은 곧 대궐로 들어가서 아바마마께 사실대로 아뢰시오."

정안군 방원은 두 사람을 다시 대궐 안으로 들여보낸 후에 자기는 장청에 앉아서 하회를 기다렸다. 방원은 아직도 일이 어찌 될지 모른다고 헤아렸다.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있었다. 이숙번과 하윤은 곧 대궐로 들어갔다. 내시를 통해서 태조께 아뢰었다.

"영안군에게 세자의 중임을 맡기려하여 아무리 찾았으나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처분을 묻습니다."

"영안이 보이지 아니한단 말이냐?"

", 그러하오이다."

"너희들이 죽이지는 아니했느냐?"

태조는 노한 눈으로 뚫어져라 하고 두 신하를 바라보았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어찌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삼청동 소격전으로 전하의 환후 평복되시기를 축원하러 갔다 하옵기 쫓아가 보았으나 종적이 묘연합니다. 영안군 부인을 친히 부르시어 물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조는 둘째 아들 영안군 방과가 자기의 병을 평복되게 하기 위하여 삼청동 소격전에서 기도를 드렸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더욱 감동이 되었다. 어떤 자식은 임금의 자리가 탐이 나서 세자로 정한 자기 아우를 내쫓고 아비를 협박하여 세자가 되려고 하는데, 어떤 자식은 아비의 병을 근심하고 한탄해서 이 어지러운 싸움판에도 끼지 아니하고 고요히 산수 좋은 도관을 찾아서 기도를 드렸다 하니 마음이 적이 위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내시를 불렀다.

"대전 별감을 내보내서 영안군 부인을 들라 해라."

내시는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상감의 분부를 대전 별감한테 전하고, 대전 별감은 영안군의 집으로 달음질쳤다.

"군부인 마마께 입조하라는 분부를 내리시었소. 빨리 행차하시기 바라오."

김씨부인은 대궐에서 반드시 어떠한 기별이 있을 줄 알고 미리 머리를 빗고, 조촐하게 의복을 바꾸어 입고 있었다. 곧 자비를 놓고 대내로 들어갔다. 침실에 화병으로 누워 신음하고 있는 전하께 문안을 올렸다.

"이런 변괴가 없습니다. 어마마마 아니 계시고 환후중에 이런 변을 당하시니 염려되옵니다. 하루바삐 심신을 진정하시와 만수무강하시면서 만백성을 다스려주시기 바랍니다."

본시부터 마음이 부드럽고 안존했던 김씨부인이었다. 진심으로 눈물을 머금고 부왕을 위로했다.

"모두 다 내 죄다. 내가 죄를 많이 지은 탓이다."

임금 태조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너희 남편은 어디 갔느냐?"

"오늘 이른 새벽부터 아바마마 환후가 어서 평복되시기를 축원하기 위하여 삼청동 소격전으로 기도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없다면 어디로 갔단 말이냐?"

태조는 답답한 듯 물었다. 영안군 부인 김씨는 아바마마가 전실 아들 중에는 자기 남편인 영안군을 제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맘 놓고 사실대로 아뢰어도 탈이 없을 것으로 짐작했다.

"성중에 별안간 변란이 나서 온 장안이 불바다로 화하였삼기 제가 월성을 해서 뚝섬 농막으로 피신을 하라 했습니다. 지금은 뚝섬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아하, 그랬더란 말이냐. 몸을 잘 피하게 해주었다. 지금 나라에는 세자가 없다. 영안군으로 세자를 봉하라고 분부를 내렸다. 승지와 내시와 무예청을 보내서 대궐로 들어오게 하라."

김씨는 한팔을 짚고 병석에 누운 아바마마를 향하여 아뢰었다.

"저희는 세자가 소원이 아니올시다. 다른 왕자께 세자 자리를 주시옵소서. 영안도 세자가 소원이 아니올시다. 만약에 그런 욕심이 있었다면 벌써 세자 노릇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저 한평생 왕자로 있어서 아바마마를 도와드리기 소원이올시다."

영안군 부인의 아뢰는 말씀을 듣는 태조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너희가 아무리 싫다 해도 세자의 대임을 맡길 아이가 없다."

태조는 길게 한숨을 지었다. 영안군 부인 김씨는 다시 간곡하게 아바마마께 아뢰었다.

"아무리 부왕마마께오서 엄하신 하교를 내리신다 하와도 영안은 절대로 세자의 중대한 직책을 맡지 아니할 것이올시다."

영안군 부인 김씨부인은 간곡하게 사퇴했다. 태조는 영안군 부인에게 다시 분부를 내렸다.

"이미 다 결정해서 승지와 삼공에게 전교를 내렸다. 잔소리 말고 사람을 뚝섬으로 보내어 맞이하라."

영안군 부인은 하는 수 없었다. 잠깐 망설이고 있다가 태조께 아뢰었다.

"호위하는 군사를 내보내줍시오."

"나의 수하엔 지금 한 사람의 군사도 없다. 정안도 사람인데 설마 자기 동복 친형을 어찌하겠느냐. 내가 상궁을 불러서 친히 분별하리라."

태조는 슬펐다. 이제는 벌써 늙어서 자기 앞에는 한 사람의 심복과 단 몇 명의 군사도 없었다. 태조는 다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태조는 한숨을 쉰 후에 다시 내시를 불렀다.

"정원의 승지를 들라 해라."

이윽고 승지가 들어왔다. 김씨부인은 내전으로 들어가고 승지는 전상으로 올랐다.

"삼공과 대장에게 말해라. 지금 뚝섬 농장에 영안군이 있다 하니 각별 조심하여 맞아들이라."

승지는 명을 받들고 나갔다. 영안군이 뚝섬에 피신해 있는 것을 밖에서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안군은 이숙번, 민무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안으로는 불끈하고 불쾌한 마음이 생기지 아니할 수 없었다. 형수 되는 김씨가 자기에게는 영안군이 뚝섬에 있는 것을 숨기고, 부왕한테만 알린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을 뇌까릴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영안군께서는 동문 밖 뚝섬에 계시다 한다. 절차에 소루함이 없도록 호위하는 군사와 대신을 보내서 맞아들이게 하라."

장중한 명령을 내렸다. 이때 군사의 실권은 모두 다 정안군한테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정승 조준과 대장 이숙번은 군사를 거느리고 뚝섬에 당도하여 김씨 부인의 친정 농막을 찾았다. 처음에 군사가 나가고 대신과 승지들이 뒤를 이어 나가니 영안군 방과는 무슨 일이 또 일어난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다시 더 숨으려 했으니 여러 사람들이 권하는 바람에 대궐에서 보낸 조복을 입고 어전으로 들어갔다. 태조는 영안을 반갑게 맞았다. 병들어 야윈 손을 들어 영안군의 손을 잡았다.

"방석은 세자의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세자는 하루라도 궐할 수 없는 자리다. 너에게 세자의 중한 책임을 맡기기로 결정했으니 그리 알라."

영안은 아바마마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바마마, 세자의 중책을 맡지 못하겠습니다."

"내 뒤를 이어 맡을 사람이 없다. 더 사양하지 말라."

영안은 부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오늘로 곧 세자책봉을 거행하라."

태조는 병상에 누워서 승지에게 명을 내렸다. 방과는 더 사양할 수 없게 되었다. 근정전 앞뜰에는 조준, 하윤, 이숙번 등이 다섯째 왕자 방원과 넷째 왕자 방간과 셋째 왕자 방의와 함께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모여 있었다. 다만 태조 이성계만은 병으로 인하여 나오지 아니하고 빈 용상만 놓여 있었다. 승지는 옥책을 영안군 방과에게 받들어 올렸다. 영의정 조준이 임금을 대신해서 세자 봉하는 옥책을 올리고 임금의 전교를 낭랑히 읽었다.

'세자 방석을 폐하고 형제의 순서에 따라 영안군 방과로 세자책봉을 한다. 만백성들은 기쁘게 생각하여 동궁을 잘 돕게 하라. 이로써 나라의 국본은 더욱 튼튼하게 되었다. 과인은 마음을 놓고 기뻐하는 바이다.'

영안군은 상감인 태조의 칙어를 받들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안군 방원은 새로 된 세자를 부액하여 전상에 올라 세자의 자리에 앉게 한 후에 군신을 대표하여 천호만세를 불렀다. 방원은 비로소 군문에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제각기 소속된 군대로 돌아가서 장군들의 지휘를 받으라. 이제부터는 평화로운 좋은 정치가 계속될 것이다."

정안군 방원은 삼군을 향하여 전령을 내렸다. 하룻밤 사이 발끈 뒤집혔던 장안 천지는 다시 질서를 회복하게 되었다. 정도전과 남은의 시체는 저자에 조리돌려 대역부도로 몰아버리고 재산을 적몰한 후에 그가 살던 집은 못을 파버렸다. 정도전이 한창 강비의 세력을 빌려 권력이 혁혁했던 때 일이다. 경복궁 대궐터를 잡아 수도 한양의 궁궐을 정한 후에 자기가 살 집터를 물색했다. 경복궁 대궐에서 왼편으로 있는 중학 부근의 집터를 보았다. 두 번 보고 세 번 보아도 백자천손을 둘 만한 좋은 양택 자리가 있었다. 태조한테 말씀을 드리고 이곳에 화려하고 광활한 집을 지었다.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린 후에 나라에서는 못을 팠다가 나중에는 말을 치고 기르는 사복을 만들었다. 사복에서는 달마다 말이 새끼를 쳐서 백자천손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정도전의 땅보는 법은 묘했으니 경솔하고 복이 없어서 자기는 백자천손을 누리지 못하고 그 땅은 마침내 말을 기르는 사복이 되어 백자천손이 생겨나는구나 하고 그의 지술에 밝은 것을 차탄했던 것이다. 더구나 오백 년 뒤 세월이 흘러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었건만 정도전의 집터는 수송초등학교로 변했다. 과연 백자천손이 들끓는 곳이다. 정도전의 지술은 이만큼 조예가 깊었다. 태조는 영안군 방과를 세자로 봉한 후에 대궐 안이 조금 조용해지니 이미 세상을 떠난 강비의 생각이며, 세자가 되었다가 불쌍하게 쫓겨난 방석의 생각이며, 방석의 형 방번의 생각과 변란통에 과부가 된 딸의 생각이며, 세자 방석한테 충성을 다하다가 목이 떨어져 죽은 사위 이제의 생각이 구름 일 듯 뭉게뭉게 일어났다. 머리를 싸매고 병석에 누워 신음하다가 지밀나인을 불렀다.

"그 뒤에 세자 방석의 소식을 들었느냐? 대궐에서 나간 후에 어찌 되었느냐?"

지밀나인은 대궐 안 합문 밖에서 철퇴로 맞아 죽은 세자의 일을 차마 바른 대로 아뢸 수 없었다. 만일에 맞아 죽었다고 바로 고한다면 상감은 환후 중에 큰 병이 나서 돌아갈지 모를 일이었다. 공연히 똑똑한 체하고 바로 댔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만약 살아 있다면 곧 입시를 시키라고 할 것이다. 그 역시 난처한 일이었다. 자기가 바보 행세를 할지언정 바로 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창황 중 그 후의 일은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럼 또 방번은 어찌 되었느냐?"

"대내 안에서 서문 밖으로 나가셨다는 말씀만 듣자옵고 그 뒤의 일은 모르옵니다."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고 너무나 태만하고나."

왕은 진노한 옥음을 내렸다. 병중이라 음성은 크지 못했으나 엄숙했다.

"이 난리 통에 세자의 거취도 모르면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으며 입에 밥풀이 들어가느냐. 지밀 안 책임이 소중하다는 것을 몰랐더냐?"

왕은 또 한 번 진노한 옥음을 내렸다.

"그저 황공무지하오이다. 크나큰 죄를 내려줍시오."

지밀나인은 임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천위가 두렵다 하나 병환이 더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경순공주를 들라 해라."

경순공주는 변란 통에 태조의 용상 앞에서 세자 방석을 끌어내는 이숙번을 불충불의한 자라고 꾸짖다가 즉석에서 목이 떨어져 죽은 이제의 아내요, 강비가 애지중지했던 큰딸이었다. 궁녀는 태조의 명을 받들어 물러갔다. 공주마저 대면을 아니 시킬 수는 없었다. 이윽고 경순공주는 깃상복을 입은 상제의 몸으로 나타났다. 치마는 깃치마요, 머리는 흐트러졌다. 쪽엔 흰 댕기에 흑각 비녀를 꽂았다. 초종상제의 깃옷을 입었다. 병석에 누워 있는 태조의 눈과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는 경순공주의 눈은 마주쳤다. 어제까지도 녹의홍상의 꽃과 같은 자태로 재잘거리던 젊은 공주는 오늘은 깃상복으로 치마를 해입고 머리털이 흐트러진 참혹한 청상의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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