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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1-2

벼슬도 싫다. 우리는 농사꾼

두문동 칠십이인을 불살라 죽이고 왕씨네들을 바닷속에 수장했다는 소문은 민간에 짜아하게 퍼졌다. 선비와 백성들의 새 나라를 비판하고 비방하는 소리는 매섭도록 신랄했다.

"두문동 칠십이인의 지조 높은 선비들을 불살라 죽였다니, 세상 천하에 이같이 잔인하고 무도한 짓이 있는가. 하늘과 사람이 다 함께 노할 짓이다. 이래가지고 저희들이 국가를 창업할수 있나. 괘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송도 사람들은 의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만나는 족족 손을 잡고 분개했다.

"허허, 두문동 선비 칠십이인을 불태워 죽인 것뿐인가. 왕씨네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수장을 지냈다네. 그것도 왕씨네들일 반란을 일으켰다면 모르되,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 해서 생사람들을 천 여 명씩이나 잡아다가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꾀어놓고 바닷속에서 파선을 시켜서 죽여놨으니 이런 끔찍끔찍한 인도에 어그러진 일이 있나. 이러다가는 송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테니 큰 걱정일세."

송도에서는 사랑방을 위시하여 거리마다 숙덕거리고, 병문마다 두문동 이야기와 왕씨네 수장으로 분개하는 기염이 불일 듯 했다. 그중에 조정 소식을 짐작하는 한 사람이 경위를 밝혀서 이야기했다.

"그래도 임금 이성계는 약간 인정이 있는 모양이데. 두문동 칠십이인도 불을 질러 쫓으라 한 것인데, 개국 공신인가 대신인가 하는 자들이 영을 내려서 만수산 굴속으로 피해 들어간 칠십여 명을 군사를 풀어서 석전을 하다가 칼로 목을 베어 죽였다는 것일세. 그리고 왕씨네들도 이성계는 그저 거제도로 보내서 농사를 짓고 살게 하라고 한 것을 밑의 놈들이 파선을 시켜서 죽였다는 것일세. 죄는 아랫놈들한테 있네."

선비와 백성들은 고함을 치면서 경위를 밝힌 사람을 꾸짖었다.

"자네는 이성계한테 벼슬조각이나 얻어 하려고 그따위 변명을 하나. 겨 묻은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이성계의 자선심이 몇 푼어치나 된단 말인가. 다 그만 내버려두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낸 일이지 무엇인가. 두문동 칠십여 인은 고사하고 칠백여 명이 집단생활을 하기로서니 폭동만 일으키지 않는 한 내버려두면 그만 아닌가. 왜 불을 질러서 쫓으라 했더란 말인가. 왕씨네들이 실지로 반역을 한 증거가 없는데 왜 섬 속에다가 몰아넣어라 했단 말인가. 모두 다 개 콧구멍 같은 수작일세. 그래놓고 나중엔 안 되었다고 상륙을 시켜서 이곳 저곳에 분산해서 거주제한을 시켜놨으니 대자대비한 자선심도 나무아미타불일세."

이성계를 위하여 변명하던 사람은 얼굴이 붉어졌다. 한마디 변명도 못 했다.

"그리고 공양왕을 죽이지 말라고 생색을 냈다지, 공양왕은 위화도회군 이후에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자기 손으로 추대해서 받들어 모신 임금이 아닌가. 왜 제가 받들어 모신 임금을 잘 도와서 밝은 임금이 되게 하지 못하고 자기가 슬쩍 임금이 되었더란 말인가? 그래, 죽이지 아니한 것이 큰 생색이 될 수 있나. 하하하. 다 그만두라 하게. 이씨네 인심을 그만하면 알조가 아닌가." 송도 백성들과 지식층의 선비들은 신랄하게 신흥정부를 규탄했다. 이 소식은 단번에 정부와 태조 이성계의 귀로 들어갔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는가 하고, 항상 관심을 갖고 있는 태조 이성계는 수심이 가득했다. 자기는 항상 회유책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건만, 선비와 백성들은 자기의 근본 뜻을 몰라주었다. 선비와 백성들뿐이 아니었다. 자기의 측근세력인 개국 공신과 아들 정안군도 자기의 근본 뜻과는 반대로만 행동을 한다. 자기는 공양왕을 폐위시키라고 생각하지는 아니했다. 더구나 왕이 되려고도 생각하지 아니했다. 그저 공양왕을 도와서 좋은 정치를 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과 아들 정안군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자기를 왕 자리에 나가게 했다. 그렇게 아니하면 고려의 옛 신하들의 세력에 밀려서 자기들 혁명을 일으킨 일당들은 전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이리해서 정몽주를 죽였고 최영을 죽였다. 이숭인을 죽였고 목은의 아들을 죽였다. 마침내는 살려주려고 애를 썼던 이색까지 죽였다. 자기의 본의는 아니지만 허물은 자기가 함빡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항상 정안군을 꾸짖기도 했다. 이 까닭에 야은 길재의 목숨이 부지되었고, 치악산 밑에 사는 원천석과 송산으로 피해 간 조견의 목숨이 부지되었다. 그러나 뜻밖에 두문동 사건이 일어나고 거제도 앞바다에 생수장 사건이 생겼다. 백성들의 마음은 점점 더 돌아섰다. 태조 이성계는 침식이 달지 아니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의 마음을 돌릴까 생각했다. 태조 이성계는 백성들의 민심을 돌리는 데는 정신적인 중추세력을 이룩하고 있는 지식층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했다. 왕의 자리에 나간 후에 첫 번째 과거령을 내려서 선비를 포섭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 두문동 사건을 일으켰을 뿐, 아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크게 민심을 반발시키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태조 이성계는 깊은 고민 속에 빠졌다. 국가를 어거해서 다스릴 백년대계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개국 공신 몇 사람만으로는 국가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의 중추세력을 이룩하고 있는 선비들을 보호하고 육성하지 못한다면 목민을 할 길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국가의 중추세력인 지식청년들을 다시 포용할 수 있을까 하고 항상 번민하고 있었다. 두문동 칠십이인은 포은의 제자요, 도은의 제자요, 목은의 제자들이다. 그들에게 훈도를 받은 칠십이 인은 당연히 과거를 거부할 만한 성분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나 일찍 과거령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얼마 동안 석이 가신 후에 다시 지식층을 껴안아보리라 생각했다. 일 년의 세월이 지났다. 건망증 많은 백성들은 거의 두문동 사건을 잊어버린 듯했다. 이제는 칠십이 인의 일을 사랑방과 거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모든 정보를 수집해 들은 후에 대신과 정당문학이며 대제학, 부제학들을 불렀다.

"선비들은 국민의 중추세력이다. 앞으로 국가의 정치를 계속해서 영위하자면 이들 지식계급의 지도하는 힘을 빌리지 아니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없다. 경들 개국 공신과 원로대신들이 있다 하나 백 년, 천 년의 앞일을 생각할 때 좋은 인재를 육성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다시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과거령을 반포하는 것이 어떠한가?"

정당문학이 아뢰었다.

"또다시 과거령을 내렸다가 선비들이 두문동 사건과 같이 과거를 거부하고 피해 달아난다면 신흥국가의 체면과 권위만 떨어뜨릴 뿐입니다. 몇십 년 후에 과거를 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재를 구하는 일은 초미의 급한 일이다. 이제 항간의 소문을 들으니, 두문동 일은 거의 잊어버린 듯 말하는 사람이 없다 한다. 벌써 해가 바뀌어 일 년이 지났을 뿐 아니라, 지식층의 사람이란 벼슬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농사도 질 수 없고, 장사도 할 줄 모른다. 배가 고프면 굴복을 아니치 못할 것이다. 다시 한번 과거를 보여서 국가에서 지식인을 우대하는 뜻을 보이라."

대신 이하 정당문학이며 대제학들은 더 반대할 수 없었다.

"삼가 성사의 뜻을 받들어 과거를 다시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어전에서 물러들 났다. 정부에서는 곧 과거령을 내려서 사대문에 방을 높이 붙였다. 두문동 사건이 난 후에 일 년 만에 다시 과거를 본다는 방이었다. 백성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방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선비들이 어찌할 텐가?"

"고려가 망한 지도 벌써 삼 년째나 되네. 포은 선생이나 최영 장군은 모두 다 옛사람이 되었고, 두문동 칠십이인의 개결했던 의기도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네. 선비들이 글을 배운 목적은 입신양명을 해서 자기들의 가족을 영화롭게 하고 연마했던 학문을 실지에 이용해서 제세안민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 고려의 옛 신하와 두문동 칠십이인은 모두 다 고려 왕조의 은택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다음 세대의 젊은 사람이야 어떤 임금을 섬긴들 무슨 상관이 있겠나. 이번엔 필연코 과거에 응하는 선비들이 상당히 많을 것일세."

"자네 말이 옳으이. 선비들일 글을 읽어서 공을 쌓은 것은 결국 벼슬을 해서 자기의 포부를 펼 뿐 아니라,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집안을 다스리고, 자식을 가르쳐서 그들의 가문을 유지하자는 것이 아닌가. 자기네들이 과거를 아니 보고 어떻게 생활을 해나가겠나. 이번엔 선비들이 반드시 과거를 볼 것일세. 두고 보게. 내 생각에는 그러하이."

"자네 말이 옳으이. 선비도 먹어야 사네. 처자식도 먹여야 하고, 의식이 족해야 자손도 교육을 시킬 것 아닌가.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를 해서 이문을 가지고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선비가 과거를 보아서 벼슬을 하지 않고 무엇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까치 뱃바닥마냥 흰소리만 하고 어찌 살 수가 있겠나. 내 생각에도 이번 과거에는 보는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하네. 자네 말이 옳으이."

시장에 장사하는 백성과 송도에서 농사짓는 농부들은 사대문에 방이 붙은 것을 보고 이같이 예언했다. 두문동 칠십이인이 과거를 거부하고 만수산에 몸을 피했다가 의를 지켜 죽은 후에 과거와 아무러한 관련이 없는 장사하는 사람과 농사짓는 농부들도 과거령에 대하여 이같이 관심이 컸다. 한편 고려 때 명문거족의 이름이 높은 집안은 차씨, 백씨, 마씨, 임씨, 장씨네 들이었다. 그들은 선비의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상인과 농부들이 말한 대로 선비의 계급이었다. 대대로 학문을 전공했다. 학문을 전공한 때문 선비의 계급이 되었고, 선비가 된 때문 과거를 보아서 벼슬을 했다. 벼슬을 해서 국록을 먹고지식층이 되어 국민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까닭에 그들은 송도의 중견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리하여 대대로 명문거족의 명예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과거를 본다는 방이 붙은 소문은 마씨, 임씨, 차씨, 장씨, 백씨네 들의 구로 들어갔다. 그들은 일부러 사대문을 돌아서 과거 본다는 방문을 살피고 돌아왔다. 마씨들이 먼저 종회를 열었다. 오십여 명의 일가들이 모였다. 문장 되는 선비가 발론을 했다.

"지금 새 나라에서는 과겨령을 내려서 선비들에게 과거를 보라는 방을 붙였다. 두문동 사건이 난후에 처음 되는 일이다. 여기 대해서 우리들 마씨네 종문은 거취를 정해야 할 것이다. 과거를 보아야 좋을지, 두문동 칠십이인의 본은 떠서 과거를 거부하고 아니 보는 것이 좋을지 여러 종친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종회를 연 것이다. 모든 동족들은 기탄없이 의견을 말하는 것이 좋겠다."

마씨의 문장 되는 사람은 종회를 연 까닭을 선포했다. 젊은 사람들은 한동안 고개를 숙여 생각하고 있다가 미목이 수려한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과거를 볼 수 없습니다."

미목이 청수한 젊은 사람은 간단히 말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떠돌았다. 문장 되는 노인이 물었다.

"두문동 칠십이 인들은 모두 다 고려 때 명망이 높았던 중신들의 직계제자들이니, 의리상 과거를 거부한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니, 의리상 과거를 거부한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야 새 나라에 과거를 보아서 백성을 지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노인은 미소를 지어 젊은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목이 수려한 젊은이가 또렷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성현의 글을 배워서 선비가 된 것은 바른 일을 하고, 바른말을 해서 스스로 자기의 말과 행실을 바르게 실천할 뿐 아니라, 나라에 벼슬해서 국가는 국민을 바른길로 이끌어 나가자는 것이 선비들의 목적입니다. 이제 정의가 떨어진 이 땅에 벼슬을 해서 어떻게 바른길로 국민을 인도합니까. 우리가 글을 읽고 글을 배운 근본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데, 과거를 보아서 벼슬을 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붓을 꺾고 책을 덮은 일이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 한 사람의 젊은이가 찬성했다.

"옳습니다.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는 의리 없는 사람 밑에 벼슬을 할 수 없습니다. 선비는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노인은 다시 미소를 얼굴에 띠고 두 번째 젊은이에게 물었다.

"나라를 창업하자면 난관이 많은 거야. 부패한 정권을 뒤엎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지기 위해서 새로운 정치를 하자면 낡아빠진 구세력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일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이 까닭에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을 불의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 , . 내 생각에는 불의라고 하고 싶지 않다. 용단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들 한 번 돌려서 생각해보라."

노인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연해 너털웃음을 웃으며 묻는다. 일부러 젊은이들의 의향을 떠보자는 눈치다. 첫 번째 대답했던 미목이 청수한 청년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어째 불의가 아닙니까.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켜서 죽인 것은 부패한 임금이라고 가정해두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네들 손으로 떠받들어서 임금으로 추대했던 공양왕은 왜 폐위를 시켜서 쫓아냈습니까? 우왕과 창왕이 말을 아니 듣고 황음무도해서 쫓아내고 새로 사람을 골라서 임금으로 추대했다면, 그들은 정치하는 정권을 전횡해서 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자기네들이 훌륭한 임금이 되도록 지도하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추대한 임금마저 쫓아냈습니까? 이것은 자기가 임금 노릇을 하고 싶은 사사로운 욕심에서 이런 짓을 감행한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의로운 바른 일이라 하겠습니까. 이러한 사람 밑에 몸을 굽혀서 벼슬을 할 수는 없습니다."

미목이 청수한 청년은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새 나라 임금의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규정지었다. 둘째 번 말하던 젊은 청년이 뒤를 받아 입을 열었다.

"새 나라 임금만이 의롭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다. 소위 개국 공신이란 자들이 모두 다 의리 없는 인물이올시다. 그들은 모두 다 고려 왕조의 국록을 먹던 중신들이올시다. 정부가 부패한 것을 어떻게 임금한테만 돌릴수 있습니까? 그들이 옳게 임금을 돕지 못해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위인들이 헌신짝 버리듯 임금을 쫓아내고 마치 창부와 같이 새사람을 맞이해서 임금으로 받들고 있으니 그들 추한 사람 밑에 어떻게 과거를 보겠습니까? 만약에 개국 공신이란 자들이 고려조정에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백두의 서생이라면 쌍수를 들어 찬성하겠습니다마는 이따위 대신들 앞에 졸아치 노릇은 하고 싶지 아니합니다. 둘째번에 발론을 했던 젊은 청년은 의분을 참지 못하는 듯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또 한 사람이 청년이 말했다.

"모든 것은 다 그만두더라도 박하고 잔인하고 무도한 이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싶지는 아니합니다. 선비들을 불로 태워서 죽이고 세력 없고 죄 없는 죄 없는 미천한 왕씨들을 생수장을 해서 죽인 이 독하고 무도한 사람들 앞에 과거가 무슨 과거입니까? 다 그만두기로 합시다."

셋째번 청년이 소리를 높여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마씨네 젊은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과거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문장 되는 노인은 젊은이들의 뜻을 다 알았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가상한 뜻은 다 짐작하겠다. 그러나 뒤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흥분만 아니 된다. 만약 과거에 응하지 아니했다가 두문동 칠십여 인처럼 박해를 당하면 어찌하겠느냐?"

첫째 번 대답했던 미목이 청수한 청년이 대답했다.

"아무 염려하실 것이 없습니다. 두문동 칠십여 인은 과거 보는 과장에서 흩어지지 아니하고 만수산 속으로 들어가서 집단생활을 한 때문이올시다. 우리들은 책을 덮고 붓을 꺾어서 과거를 보지 아니하고 제각기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있으면 그만입니다. 과거를 아니 본다고 명목 없이 잡아다가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노인은 젊은이의 말을 듣고 한동안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다시 묻는다.

"모든 일은 앞과 뒤를 길게 생각해야 한다. 너희들이 책을 덮고 붓을 꺾는다면, 영영 선비라는 길에서 연을 끊는 것이 된다. 선비란 벼슬을 해서 녹을 먹으면서 집안을 다스리고 자손을 교육시켜서 대대로 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책을 덮어 학문을 폐지하고, 붓을 꺾어서 글쓰는 일을 중지한다면, 앞으로 가족들은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며, 자식들은 어떻게 교육을 시키겠는가. 먼저 생활할 방도를 정해야 할 것이다."

노인은 인자한 눈을 들어 여러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묻는다. 둘째 번 발론했던 청년이 씩씩한 얼굴로 말한다.

"살자면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연의 태도올시다. 글을 배워서 나랏일을 하는 까닭으로 녹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추잡한 사람 앞에 몸을 굽힐 수 없으니 과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중한 생명을 끊을 수 없습니다. 살아야 합니다. 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살자면 먹어야 합니다. 깨끗하게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지어 먹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저자에 나가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살면 됩니다."

젊은이의 말이 떨어지니 모든 사람들은 손뼉을 쳐서 찬성했다.

"좋습니다. 그까짓 벼슬 다 그만둡시다.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합시다. 상놈도 좋소, 더럽고 추한 양반이 되는 것보다 깨끗한 상놈이 좋습니다."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농사는 땅이 있어야 짓지 않는가? 땅은 모두 다 권문세가인 개국 공신들이 차지했으니 너희들의 농사지을 땅이 있느냐, 농사를 지으려면 개국 공신들의 소작밖에는 되지 않는다. 개국 공신 앞에 무릎을 꿇어 벼슬하기를 거부하는 너희들이 개국 공신들의 소작인이 되어 그들에게 압박을 받고 착취를 당할 수 있겠느냐. 생각해볼 일이다."

노인은 침착하게 젊은이들을 향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장사를 합시다."

둘째번 발론했던 젊은이가 말했다. 노인은 또다시 미소를 풍기며 묻는다.

"장사는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첫째로 물건을 무역해 사들일 돈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조직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경험이 있어야 한다. 대대로 글만 읽던 너희들이 경험이 없이 장사를 할 수 있겠느냐? 장사를 천하게 치지마는 아무나 장사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노인의 침착하게 말하는 소리를 듣자, 미목이 청수한 청년이 한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한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대부께서는 장사를 한다 하더라도 돈과 조직이 필요하다 하시었습니다. 지금 과거에 응할 수 있는 지식층인 선비의 계급은 두문동 칠십여 인 이후에 우리들 마씨와 임씨와 장씨와 차씨와 백씨들 오대성의 젊은이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 마씨가 단독으로 과거를 거부하는 것보다 다섯 성의 씨족들이 일제히 행동을 취한다면, 의로운 일이 더한층 뚜렷할 뿐 아니라, 조직적인 큰 힘을 가져서 장사할 자본도 구하고 단결하는 힘도 든든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께서는 한 번 임씨와 차씨와 백씨와 장씨들을 찾아보시고 의향을 물어보신 후에 우리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을 결정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미목이 청수한 청년의 말을 듣자, 여러 젊은이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좋습니다. 형의 말이 옳습니다."

노인은 비로소 벙긋벙긋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뭉치면 힘이 생기는 것이고 흩어지면 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국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장사꾼으로 전락할지라도, 스스로 살 수 있는 힘과 조직을 가져야 한다. 그럼 우리는 사대성의 영수들을 찾아보고 의향을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좋습니다. 대부께 일임합니다."

젊은이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마씨 노인은 미목이 청수한 청년을 데리고 차씨네 문장을 찾았다. 때마침 차씨네 문장은 마씨 노인을 찾으려 했다.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그러지 아니해도 새 나라에서 과거령이 내린 것을 보고 우리들 문중에서도 젊은이들이 모여서 과거를 거부하고 장사꾼이 되어 구명도생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번 노인을 찾아 뵙고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습니다. 임씨와 장씨와 백씨 문중에서도 같은 결의를 하고 천민이 되기를 결의했다 합니다."

마씨 노인은 마음속으로 무한 기뻐했다.

"귀문에서도 과거를 거부하고 장사꾼이 되기를 결의하셨다 하니 그야말로 시인의사동이올시다. , , ."

"추하고 더럽게 사는 것보다 상놈으로 떨어진들 어떻습니까. 깨끗하고 올바르게 살자는 것입니다. , ."

차씨네 영수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너그러운 얼굴에 담박한 표정을 띠고 호협하게 웃었다. 마씨네 노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

"백씨와 임씨와 장씨네들도 과거 보기를 거부하고 장사꾼이 되기를 결의했다 하니 장사를 하는 데도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한 번 모여서 의논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좋습니다. 내가 연락을 취하기로 하겠습니다."

차씨 영수는 쾌히 허락했다. 차씨, 장씨, 임씨, 백씨의 영수들은 연락을 받고 마씨 노인의 집으로 모였다. 마씨 노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불의와 무도에 대한 무언의 전하을 우리는 감연히 취하기로 했소이다. 사백여 년 내려오던 삼한갑족이 장사꾼으로 전락되는 것을 비장하게 결정한 것은 앞으로 청사에 빛날 뚜렷한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불의와 부정과 비인도적 행위를 징계하는 백수항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행동은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합니다. 만약 실패를 하게 된다면 천고에 웃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수백 년 선비 노릇만 하던 집안의 백면서생들이 장사를 하기란 용이치 아니한 일이로이다. 여기 대해서 우리는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소이다."

마씨 노인의 말이 끝나자 차씨 문장이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글만 읽던 사람이 장사를 한다는 것은 말은 쉬우나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장사 밑천만 까먹고 결딴이 나기 쉽습니다. 어떠한 방법을 세워서 기어코 성공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성계 일파의 코웃음을 사고 말 것입니다."

백씨 문장이 대답한다.

"장사를 하자면 첫째 돈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서로 돕고, 서로 구해주는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경험 없는 서생들이 장사를 한다면, 반드시 열에 아홉은 실패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사를 잘못해서 판이 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뒤에서 자본을 대서 꼬나주고 뒷받침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설혹 여덟 번 판이 났다 해도 아홉 번째 가서는 다시 일어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뒤를 꼬나주는 조직이 있다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백씨 문장의 말을 듣는 여러 문장들은 모두 다 입을 벌려 웃으며 손뼉을 쳤다.

"과연 좋은 의견입니다."

마씨 노인의 의견을 말한다.

"자아 그럼 우리들 다섯 문중에서는 과거 보는 것을 거부하고, 여러 자손들에게 장사를 하게 합시다. 다섯 문중에서 연합체를 만들어서 고금을 낸 후에 이 자본을 가지고 자손들이 원하는 대로 상점을 열게 합시다. 만약 실패를 하는 경우에는 다시 자본을 대주어서 기어코 성공이 되도록 뒷배를 보아주기로 합시다. 이렇게 한다면 송도 일판의 상권은 모두 다 우리가 잡을 뿐 아니라, 삼천리 강사의 경제권도 우리들 손으로 쥐었다 폈다 할 수 있으리다. 그까짓 더러운 벼슬을 해서 이성계한테 무릎을 꿇는 것보다 삼천리강산의 경제권을 잡읍시다!"

마씨 노인은 장사하는 방법을 말했다.

"묘한 방법입니다. 우리들은 자손들에게 과거를 거부하게 하고, 이 방법을 써서 장사를 시작하기로 합시다."

삼한 갑족의 오대성은 이같이 결론을 내렸다.

한편 새 나라 정부에서는 과거 보는 날짜가 되자, 두문동 칠십이인 때처럼 송도 가랫골 성균관 넓은 마당에 차일을 드높게 치고 과장을 설치했다. 한낮이 되자 시관들은 금관조복 찬란한 예복을 입고 시관석에 나가서 선비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가랫골 과장은 쓸쓸하고 적막했다. 한 사람의 선비도 나타나지 아니했다. 시관들은 초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두문동 사건도 지나간 지 이미 일 년이 넘었다. 선비들도 먹여야 살 것이다. 이번에는 벼슬을 하기 위해서 꼭 과거를 볼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선비들이 나타나지 아니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시관들은 모두 다 개국 공신들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선비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는다면 임금 이성계를 대해볼 낯이 없었다. 대제학은 성균관 대상성에게 영을 내렸다.

"이번에도 선비들이 과거에 응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들은 저하를 뵐 면목이 없소. 빨리 사성한테 분부해서 선비들의 집을 호별방문해서, 기어코 과거를 보게 하시오."

대사성은 곧 사성에게 대제학의 뜻을 전했다. 사성은 수복이 들을 시켜서, 선비들의 집을 샅샅이 찾아다니라 했다. 소복이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선비들을 찾았으나 선비들은 문을 닫아걸고 만나주지 아니했다. 밖에 나가서 없다기도 하고, 몸이 아파서 과거를 볼 수 없다고도 했다. 수복이들은 온종일 돌아다니면서 과거를 보라고 권했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선비들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아니했다. 차씨,마씨,장씨, 백씨, 임씨네 집안의 선비들뿐이아니었다. 성이 다른 타성 선비들도 중추세력을 가진 다섯 가문의 선비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다 몸을 피해버렸다. 해는 어느덧 기울기 시작했다. 진종일 선비집을 찾아서 돌아다녔던 수복이들은 뒤통수를 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송도 일판의 선비들을 호구적간하다시피 찾아다녔으나 모두 다 핑계를 하고 만나주지도 아니합니다. 이번에도 완전히 실패올시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다. 대제학도 하는 수 없었다.

"과장을 걷어치우고 들어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대제학은 탄식조로 말한 후에 시관들과 함께 대궐로 돌아갔다. 태조 이성계는 관심이 컸다. 몇 번인지 내관을 보내서 과장 소식을 물었다. 대제학이 들어가 고했다.

"황공무지하옵니다. 이번에도 실패를 했습니다. 선비들은 한 사람도 과거에 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호구적간을 하다시피 과거를 보라고 권했으나, 한 사람의 선비 그림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다 뿔뿔이 흩어져서 몸을 피한 모양이올시다."

태조 이성계는 크게 노했다. 대신과 대제학에게 영을 내렸다.

"송도 선비들에게는 백 년 동안 과거를 정지시키라!"

득민심을 하라고 여태껏 주장해왔던 태조 이성계는 이제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두 번씩이나 과거령을 내려도 응하지 아니하니, 간화가 치밀었다. 송도 선비에 국한해서, 백 년 동안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해버리라고 엄명을 내렸다. 개국 공신들은 한 사람도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부에서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사대문에 방을 붙였다.

'과거를 보라 해도 응하지 않는 선비에게 과거를 보게 할 필요가 없다. 송도 선비들에게는 백 년 동안 과거 보는 것을 정지시킨다.'

방은 사대문에 드높게 붙었다. 송도 선비들은 방을 보자 코웃음을 쳤다.

"백 년 아니라 오백 년이라도 과거를 보지 아니해도 좋다. 겁이 나서 슬슬 기어들 줄 아는구나!"

"하하하, 송도 선비들에게 만 백 년 동안 과거를 뵈지 않는단 말이지, 하하하, 좋아 좋아, 우리들은 백 년 아니라 천 년이라도 과거를 보지 아니해도 좋다. 우리들은 벌써 다 대책을 정해놓았다!"

"함경도 사람은 무서워서 과거를 뵈지 못하고, 송도 사람은 미워서 과거를 뵈지 않고, 잘했다. 이래 가지고 나라의 인재를 어떻게 구할 텐가. 참으로 행정을 잘하는구나. , , ."

"아따 이 사람, 우리가 더러워서 과거를 보지 아니했는데. 아니 보고 뇌까려 말할 까닭이 없네. 우리들은 인제 우리 일이나 하세."

송도 안 선비들은 장사판을 차리기 시작했다. 마씨네 노인은 임씨, 차씨, 장씨, 백씨들 네 집의 문장을 청했다.

"자아, 오늘 부터 우리는 선비가 아니고,장사꾼이오, 갓과 도포가 필요 없게 되었소. 제각기 가묘에 고하고, 양반이 입던 의관을 벗어버립시다."

"옳은 말씀입니다. 장사치가 갓과 도포를 거추장스럽게 어찌 입습니까. 동저고리 바람에 삿갓을 쓰면 그만입니다."

"우리 다섯 종문이 성은 비록 각성이라 하나, 이제는 일심동체가 되었소이다. 흥하면 같이 흥하고 망하면 같이 망합니다. 일치단결이 되어 유무상통하고 상부상조해야 합니다. 피를 찍어 맹세하기로 합시다."

"좋습니다."

네 집 문장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마씨 노인이 다시 주장했다.

"우리는 제각기 가문에 가서 상놈이 된 것을 조상께 고하기 전에 옛적 유관장 삼인의 도원경의를 본떠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피를 찍어 맹세해서 우리들의 마음이 철석같이 변하지 않게 합시다."

"좋습니다."

여러 종문의 대표들은 또다시 찬성했다. 이날 마씨네 집에서는 돝을 잡고 술을 걸렸다. 다섯 성의 문장들은 후원 동산에 올라 반 위에 돌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에 피를 찍어 맹세했다.

"마씨, 임씨, 차씨, 장씨, 백씨, 오대성의 문중은 오늘 결의형제를 하여 의로운 상인이 되기를 하늘에 맹세합니다. 창천은 굽어살피시어 저희들의 마음과 행동을 더한층 굳게 해주시옵소서."

다섯 성의 문장들은 하늘에 맹세하는 제천의식을 끝낸 후에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 자손들을 거느리고 가묘에 고했다.

"사백여 년 내려오던 삼한 갑족들은 이제 바른 길을 밟기 위해서 장사꾼으로 업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옳고 바르게 살려는 자손들의 깨끗한 행위를 조상께서는 미소하시어 굽어보실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크나큰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문장은 축을 마치자 사당 앞에서 갓을 벗어놓고 도포 띠를 풀었다. 수백 명 자손들도 일제히 갓을 벗고 도포를 벗었다. 모두 다 맨 상투에 동저고리 바람이 되었다. 문장이 선언했다.

"오늘부터 우리들은 장사꾼이 되었다. 삿갓을 쓰고 장터로 나가야한다. 모두 다 삿갓을 써라!"

자손들은 준비해두었던 삿갓을 일제히 썼다. 모두들 한바탕 껄껄거려 쾌활하게 웃었다. 문장은 삿갓 쓴 선비들을 한 명씩 차례차례 불렀다.

"너는 무슨 장사를 하겠느냐?'

"선전을 차려보겠습니다."

"비단 장사가 소원이로구나."

노인은 미소를 짓고 어음 한 장을 유지 지갑에서 꺼내서 주며 말했다.

"옜다, 천 냥짜리 어음이다. 그럼 비단을 무역해서 선전을 차려라. 꾸어주는 천 냥 돈은 일 년이 한이다. 그리고 이자는 한 달에 한 푼 변을 내야 한다. 이 돈은 공금이다. 임씨, 차씨, 백씨, 장씨, 마씨네 문중에서 추렴을 내서 고금으로 장만한 돈이니 극히 소중한 돈이다. 조심해서 장사를 해야 한다. 장사는 신용이 제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장사꾼이 아니다. 의리를 더욱 지켜야 한다. 알아듣겠느냐?"

", 명심하겠습니다."

선전을 차린다는 선비가 천 냥 어음을 받고 물러간 후에 다음 선비가 들어왔다.

"너는 무슨 장사를 하겠느냐?"

"지전을 차려보겠습니다."

"지전, 종이 장사를 해본단 말이지, 좋다, 얼마나 밑천을 대어 주랴?"

"오백 냥만 대어 줍시오."

문장 노인은 기름 먹인 지갑에서 선뜻 오백 냥짜리 어음을 내주었다.

"기한은 아까 선전을 차린다는 애와 같이 일 년이다. 섣달 그믐날 셈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자는 역시 한 푼 변이다."

지전을 차린다는 선비가 물러갔다. 다음 선비가 문장 앞으로 들어왔다.

"너는 무슨 장사를 하려느냐?"

"백목전시정이 되겠습니다."

"면 장사를 해보려느냐. 좋다. 칠백 냥만 가지고 해보아라."

문장은 칠백 냥짜리 어음을 내주었다. 다음 선비가 들어왔다.

"너는 무슨 장사를 해보려느냐?"

청포전을 차린다는 선비가 어음을 받고 물러났다. 다음 선비가 들어왔다.

"너는?"

"상전을 차려보겠습니다."

"삼백 냥만 가지고 해보아라."

다음 선비가 계속해서 들어왔다. 신전을 차려보겠다 했다. 어물전을 벌여보겠다는 사람에 도자전을 차려보겠다는 사람, 황화방을 꾸며보겠다는 선비에 유기전을 차린다는 사람, 모물전을 벌인다는 사람, 모전 가게를 열겠다는 선비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문장 노인은 물건을 사들이기에 알맞도록 어음을 내주었다. 모든 선비들에게 장사 밑천을 다 내준 후에 문장 노인은 다시 젊은이들에게 장사하는 묘득을 일러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장사를 천하게 보고, 간휼한 모리배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그것은 장사하는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인격을 떨어뜨려서, 일시에 벼락부자가 되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 때문이다. 사람을 속여서 물건을 팔고 있으니 신용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모리배라고 낙인을 찍어서 장사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다. 장사를 하더라도 정당하게 하라. 물건의 질이 좋은 것만을 사서 팔고, 박리다매로 주의를 정하라. 손님한테는 친절하게 하고, 돈을 꾼 사람한테는 신을 지켜서 갚겠다는 날짜에 꼭 갚게 하라. 그리고 치부하는 장부를 명료하게 하라."

모든 사람들은 문장 노인의 말을 귀기울여 들었다.

"자아, 그럼 너희들은 일 년 후에 셈을 할 셈 잡고 제각기 시정으로 나가서 장사를 치리라."

여러 선비들은 문장 노인한테 차례로 절하고 물러났다. 마씨, 차씨, 임씨, 백씨, 장씨 등 다섯 집 문장들이 이같이 똑같은 방법을 취했다. 수백 명 선비들은 삿갓을 쓰고 장터로 나가서 가게를 열었다. 본바닥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은 선비들이 삿갓을 쓰고 장터로 나와서 장사를 하는 것을 보고 텃세를 하고 비웃었다.

"글만 일고 앉았던 백면서생이 장사가 무슨 장산가. 장사는 그리 쉬운 줄 아나."

비웃고 깔보았다. 선비들이 갓과 도포를 벗어버리고 삿갓을 쓰고 장터로 나가 장사를 한다는 소문은 송도 일판에 짜아하게 퍼졌다. 정부의 대신들은 깔깔 웃었다.

"글자나 배운 덕으로 지조를 지킨답시고 보라고 과거는 아니 보고 장사를 한다고 하지만 며칠이나 장사를 하겠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오. 삼한갑족이라고 꺼덕대던 조상들이 별안간 통곡을 할 것이오. 하하하."

"조상이 남겨준 집칸과 밭뙈기를 다 까불려 먹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소? 저희들이 좋아서 하는 일을 내버려두지 어찌하겠소. 이제, 과거를 보게 해달라고 쫓아다니면서 애걸을 할 날이 올 것이오."

새 나라 정부의 요로대관들은 냉담하게 비웃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선비들의 장사는 의외로 잘 되었다. 선전, 백목전, 명주전, 베전, 청포전, 지전을 위시하여 모물전, 모전, 어물전, 도자전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불티가 나도록 잘 팔렸다. 첫째로 물건이 좋고 값이 쌌다. 차씨, 백씨, 마씨, 장씨, 임씨네 다섯 종중에서는 물건을 공동으로 사들였다. 어물전은 다섯 문중의 어물 가게가 도매금으로 마른 생선을 사서 다섯 종문의 어물상이 일시에 나눠 팔고, 선전에서는 압록강을 넘어서 의주로 오는 중국 비단을 직접 중국으로 가서 사들였다. 물건이 좋고 원가가 적게 먹혔다. 여기다가 문장 노인이 지시한 대로 이문은 적게 먹고 물건을 파니 손들이 많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값은 정확하고 주인은 친절했다. 선비 장수들은 어떤 상점을 말할 것 없이 다 같은 방법으로 장사를 했다. 손님들은 물밑듯 선비들의 가게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가게는 불일 듯 일어났다. 본토박이 장수들은 조직을 가지고 경영하는 선비 장수들은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선비 장수들은 학식이 있었다. 머리가 좋은 데다가 단결력이 강했다. 쌀과 보리가 귀한 듯하며 쌀과 보리와 잡곡을 한꺼번에 사들여서 선비 장수끼리만 나눠서 팔았다. 비단이 귀하게 되면 비단을 한꺼번에 사들였다. 선비 장수끼리만 나눠서 팔았다. 손들은 물건을 구비한 선비 장수한테로 가서 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본토박이 장수들은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빛을 내서 장사하던 본토박이들은 턱턱 쓰러졌다. 판이 나서 가게 문을 달았다. 송도의 상권은 완전히 선비들 장사꾼의 손으로 넘어갔다. 새 나라 정부의 요로대관들은 깜짝 놀랐다. 석 달을 못 가서 판이 날 줄 알았던 선비 장사꾼들은 장사가 잘되어서 붙일 듯 일어난다 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장사하는 선비들을 박해할 수는 없었다.

"별일도 다 많다. 송도선비들은 글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장사도 잘하는구나!"

하고 탄식을 할 뿐이었다.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일 년 동안 장사를 한 젊은 사람들은 제각기 문장을 찾았다. 마씨네 자질들은 마씨의 문장을 찾고, 차씨네 자손들은 차씨의 영수를 찾았다. 오대성의 자질들은 제각기 자본을 대준 집안 어른을 찾았다. 섣달 그믐날 대회일의 제석 문안을 마치고 셈을 했다. 서사들이 장부와 주판을 들고 원금과 이자를 따져서 셈을 했다. 이자는 변이라 했다. 이자는 정한 대로 한 푼의 가감이 없었다. 원금을 갚고 이자를 제하고도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밑천이 떨어졌다. 장사가 잘된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장사가 잘못된 사람도 있었다. 영수한테 묵은 세배를 한 후에 얼굴을 붉히고 고했다.

"장사가 잘못되어서 본밑을 잘렸습니다."

속임 없이 말했다. 문장은 조금도 노하지 아니했다. 장사하는 묘득을 순순히 타이른 후에.

"장사도 정신으로 해야 한다. 의욕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일곱 번 쓰러지고 여덟 번 자빠져도, 패기를 잃지 아니하면 아홉 번이나 열 번째 가서는 반드시 성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나 한두번 실패를 했다고 의기가 저상된다면 영영 낙오자가 되고 마는 법이다. 장사 밑천을 또 대줄 테니, 마음을 굳게 해서 새해부터 새 출발을 하라."

문장은 꾸짖지 아니하고 격려했다. 음식과 술을 내서 대접한 후에 장사 밑천을 다시 대주었다. 장사에 실패한 사람은 감읍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다시 장사할 밑천을 받아가지고 새해부터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장사를 했다. 작년에 실패했던 사람은 이를 악물고 새로 장사를 시작했다. 둘째 번부터는 장사하는 경험과 묘리를 짐작했다. 일 년 동안 장사해서 크나큰 이윤을 얻었다. 섣달 그믐날, 다시 문장을 찾았다. 묵은 빚을 다 갚고도 장사할 밑천이 남았다. 문장은 술을 주어 마시게 하고 쾌활하게 웃었다.

"장사하는 법도 선비가 글공부하는 방식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느니라. 바른 길을 밟아 속이지 말고, 인과 의와 예와 지와 신을 목표로 하여 장사를 한다면 성공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꿈꾸어서 사람을 속이는 것이 장사하는 길이라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한 번 속은 사람은 두 번 속지 않는 법이다. 장사를 계속할 수 없는 것이요, 불의로 장사를 해서 되는 법이 없고, 무례한 장사를 찾아오지 아니하는 법이다. 그리고 슬기가 없이 우둔하면 장사할 수가 없고, 신용이 없는 장사꾼이 거상이 될 수 없다. 장사도 인격이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학문과 인격을 존중하는 선비의 길이나 장사하는 길이 매한가지니라."

장사꾼이 된 자제들은 문장의 말에 감동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문장들의 훈계는 젊은이들의 머릿속에 포근하게 배여들었다. 돈을 남기는 것도 장사의 목적이지만, 돈을 모으면서도 의리를 지켰다. 한 사람이 운이 나빠서 판이 나면, 열 사람, 스무 사람들이 서로 도와서 장사를 다시 하도록 대주었다. 열 번 판이 나도, 그들은 서로 도와서 붙들어주고 격려해주었다. 결국에 가서는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오대성의 결지는 분자법을 취했다. 큰형은 아우에게 장사 밑천을 대주어서 새판으로 장사를 벌였다. 형제와 자질뿐이 아니었다. 부리던 서사와 차인에게도 얼마 동안 공을 쌓은 사람이면 반드시 자본을 대주어서 장사를 하게 했다. 송도 일판의 상권은 완전히 선비한테로 돌아갔다. 송도 일판의 상권만이 아니었다. 온 나라의 경제권을 장악했다. 그들의 슬기로운 장사하는 방법은 먼저 장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치부책은 정확하고 명료했다. 장부를 기록하는 방식에 경험을 쌓아서 극치로 발달되었다. 단식부기법에서 복식부기법을 취했다. 이것을 그들은 송도의 사개다리치부법이라 했다. 그들의 단결력은 철옹성처럼 튼튼하고 굳었다. 외방의 장사하는 사람들이 송도로 들어오기만 하면 괴립이 되어 장사를 경영할 수가 없었다. 오대성의 존속과 서사와 사환 이외에는 모두 다 손을 들고 망해 나가게 되었다. 정부가 개국 공신들도 좋은 물건을 사려면 선비들이 경영하는 점방을 찾아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들은 흩벌 장사만 하지 아니했다. 송도의 가장 명물인 인삼밭을 경영했다. 인삼은 새 나라 왕실과 개국 공신들이 정력을 돋우는 불로장생의 강장제라 해서 즐겨서 쓸 뿐 아니라, 중국의 황실과 귀인들이 천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다투어 사가는 고려의 보물이었다. 그들은 인삼을 중국으로 수출해서 수만금의 거부들이 되었다. 나라에서도 큰 돈을 쓰게 되면,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돈을 취해야만 한다. 그들은 장터로 가는 고개 이름을 새로 지었다.

'부조현' 이라 이름했다. 벼슬을 거부하고 새 나라 새 임금한테 조회하지 아니하는 고개란 뜻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 공신들한테 물었다.

"연전에 송도 선비들이 과거를 거부한 까닭에 백 년 동안 과거를 정지시킨 일이 있다. 지금 그들은 무엇을 먹고 사느냐?"

"모두 다 갓을 벗어붙이고 장사꾼이 되어 삿갓을 썼습니다. 장사를 해서 나라의 거부들이 되었습니다. 나라에서도 돈이 없으면 그들에게 꾸어 쓰게끔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길게 탄식했다.

"무섭구나. 송도 선비들의 뜻은 뺏을 수가 없구나!"

 

자학하는 진안대군

태조 이성계의 아들 방우는 둘째 아들 방과, 셋째 아들 방의, 넷째 아들 방간, 다섯째 아들 방연과 함께 이성계의 초취부인 한씨의 소생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가문을 이을 적자요 장남으로 사가로 보나 왕실로 보나 정통적 존재였다.

어려서부터 어질고 착하고 총명하고 영민했다.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고, 아우들을 사랑해서 우애가 극진했다.

그의 할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을 회수한 공으로 공민왕 때 고려조정에 드나들기 시작해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아버지 이성계는 출입입상하며 벼슬이 우시중에 이르렀고, 방우 역시 함흥서 송도로 내려와서 문과에 급제한 후에 벼슬이 누진되어 의례판서라는 정경의 자리까지 올랐던 것이다.

그의 아내 역시 규범이 높아서 동서들을 잘 거느렸고, 아들 복근을 두었다.

방우는 학문과 도덕이 높은 포은 정몽주를 숭배해서 스승으로 섬겼고, 문장으로 일세를 진동한 목은 이색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목은의 아들 종덕과 종학은 그의 심허했던 친구요, 도은 이숭인과 야은 길재와는 모두 다 동문의 사이였다.

그의 아버지 이성계가 돌연 위화도에서 회군을 해서 우왕을 내쫓고 그의 아들 창왕을 세웠을 때, 아버지 이성계께 뵈었다.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키신 일은 좋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이신별군 하셨다는 말을 천추만대에 들으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 이성계는 정직하고 점잖은 아들의 말을 듣자 등에 땀이 흘렀다.

"어디 내가 이신별군 했느냐. 우왕이 하도 무모할 뿐 아니라 국제정세를 모르고 망해가는 원을 돕고, 신흥하는 명을 치라 하니 말이 되느냐. 만약에 명나라 주원장이 크게 노해서 고려를 친다면 만백성은 어육이 될 것이요, 삼천리 고려 땅은 초토가 되고 말 것이다. 부득이해서 우왕과 최영을 무찌른 것이다. 그것이 어찌 이신별군이냐. 안심하고 있거라."

이성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들에게 변명했다.

"저는 고려조정의 정경이올시다. 자식의 정리보다 조정의 자격으로 아버님께 충고합니다. 신하는 항상 어리석은 임금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 신하의 본분이올시다. 폐위를 시켜서 쫓아내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올시다."

방우는 얼굴빛을 정색하고 말했다.

"맞다, 네 말이. 그러나 말을 들어 먹지 아니하는 것을 어찌하겠느냐. 만부득해서 한 것이다. 창왕을 세웠으니, 앞으로는 좋은 정치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같이 대답했다.

아버지 이성계는 큰아들 방우의 태도가 이같이 정정당당하니, 방우를 점점 기피하기 시작했다. 배극렴, 정도전, 정총, 남은과 다섯째 아들 방원하고만 정치에 대한 일을 의논하고 방우에게는 속말을 털어놓지 아니했다.

방우는 아직도 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려조정의 의례판서의 직책을 계속해서 맡고 있었다.

이성계는 우의 아들 창을 왕으로 봉했으나, 정치적 전권을 독점할 수 없었다. 창왕을 마저 내쫓고 왕씨네 먼 일가인 요로 왕을 봉했다. 고려의 공양왕이었다.

의례판서 이방우는 아버지 우시중 이성계를 찾아뵈었다.

"아버님의 손으로 세워 논 창왕을 어찌하여 또 폐하셨습니까?"

이성계는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말을 아니 들어 먹으니 어찌하느냐. 낸들 그런 일을 좋아서 하느냐. 포은 정몽주도 찬성을 했고, 목은 이색도 찬동했다. 창왕도 황음무도하단 말이다."

방우는 아버지의 저의를 짐작해 알았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임금 이상의 정치적 전권을 가지셨습니다. 황음무도한 인군을 왜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시고, 황음무도하다고 폄만해서 내쫓으십니까? 포은 정몽주나 목은 이색이 찬성을 했다는 것은 아버님의 정치적 압력에 눌려서 가짜로 찬동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님, 아버님은 정신 차리십시오. 백대에 누명을 받는 죄인이 되지 마시고, 천대의 존경을 받는 큰 인물이 되십시오!"

아버지 이성계는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한편으로는 아들의 의로운 말에 대답이 궁했다.

"허허, 너도 고려조정의 재상 반열에 오른 정경이 아니냐. 어디 고려조정을 나 혼자 쥐었다 폈다 하느냐. 제제다사의 많은 대신들이 있구나. 보아라.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배극렴, 남은, 정총, 무수한 대신과 대관들이 의논하고 있는 일이지, 어찌 나 혼자 전권을 했다 하느냐. 너도 대관의 한 사람이 아니냐. 창왕을 페하는 것이 불가하다면, 네가 조정에서 정정당당하게 반대를 할 것이지 사사로이 내 집안 물건을 처리하듯 나한테 말을 하느냐. 내 마음도 실로 괴롭구나."

아버지 이성계는 이제는 짜증을 냈다.

"제가 조정에서 떠들어 댄다면, 곧 아버님을 만 사람 앞에 욕하고 침을 뱉는 격이 됩니다. 아버님의 잘못을 만 사람에 드러내놓지 못하는 이 불초한 자식의 충정을 살펴주시오."

방우는 말을 아치자 목을 놓아 통곡을 했다. 아버지를 아끼는, 뼈끝에서 우러나 오는 진정한 울음이었다.

흐느껴 우는 통곡소리는 내당까지 들어갔다. 안으로 통하는 협문이 방긋 열리며 꽃같이 아름다운 강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씨는 눈같이 흰 버선발로 남순린 치맛자락을 가볍게 차며 사랑으로 들어섰다. 앞을 바라보니 아버지와 아들 단 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멍청하게 앉아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느껴가며 통곡하고 있었다.

강씨는 전부터 큰아들 방우가 우왕을 내쫓은 일에 찬성을 하지 않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남편이 창왕을 내쫓은 일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통곡을 해서 간하는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짐작했다.

강씨는 남편의 본처의 몸에서 난 장자 방우가 왕조파가 된 것을 은근히 기쁘게 생각했다. 앞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나가는 날 장자인 방우가 의연히 왕조파가 된다면, 대통을 이을 세자의 자리에서 실격이 되기 때문이다. 나라 풍속에 왕통을 계승하는 것은 적장자의 특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적자가 실격하게 되면, 둘째나 셋째나 다섯째나 여섯째라도 차서 없이 아버지의 마음대로 왕의 자리를 계승시킬 수가 있었다. 강씨는 후취인 때문에 자기 아들의 차서는 마지막 끝으로 들어 있었다. 똑똑하고 영민한 강씨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이전에 벌써 이런 일까지 계산 속에 넣고 있었다.

강씨는 아름다운 눈썹을 치켜뜨고 조용히 방 속으로 들어섰다. 남편 이성계한테 놀라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감, 웬일이오니까?"

이성계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여전히 멍청하게 표정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강씨는 엎드려 느껴 우는 의례판서인 적자 방우의 앞으로 가까이 갔다.

"판서 대감, 어이하신 일이오니까. 느껴 우시는 음성이 내당까지 들려서 깜짝 놀라 나왔습니다. 어이하신 일이오니까."

아들뻘이지만, 초취부인의 적자요, 벼슬이 정경의 지위에 있었다. 그뿐 아니다. 방우의 나이는 강씨보다도 한두 살이 연상이었다. 강씨는 존경하는 말을 쓰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하여, 아버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지성스럽게 간하다가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길 없어 통곡하던 방우는 가볍게 끄는 긴치마 소리와 함께 요염스런 강씨의 음성이 들리자 울음을 그치고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방우는 서모 강씨가 위화도 회군 때부터 자기 아버지에게 친정 돈으로 혁명에 쓸 군사자금까지 대준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은근히 정도전들과 함께 자기 아버지를 왕이 되게 하려고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강씨가 나온 것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서모의 알 일이 아니오."

방우는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하고 자리를 떠서 일어났다.

방우가 물러간 후에 강씨는 남편 이성계 앞에 조용히 앉아 물었다.

"판서가 무슨 일로 통곡을 하고 소란을 떱니까?'

강씨는 방우가 아버지 앞에서 불평을 하며 통곡하는 까닭을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짐짓 남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새침하게 묻는 것이었다.

"방우는 내가 역적질을 할까 두려워서 항상 나를 경계하는 모양이야. 하 하 하, 어디 고려조정이 내 맘대로 좌우되는가. 여러 대신들이 다 함께 주장하는 일을 나 혼자 독재하는 줄 아는구려. 하 하 하."

이성계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얼버무려 대답했다.

"도대체 판서는 이상도 합니다.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내뻗는 법이 없는데, 판서는 아버지를 위하지 아니하고, 덮어놓고 왕씨네만 제일로 생각하니 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허 허 허, 방우는 글자를 지나치게 배운 덕일세. 의리와 지조를 지킨다는 것 아닌가. 깊이 따져본다면 역시 아비를 위해서 바른말을 하는 일이라 하겠지."

강씨는 발끈했다.

"의리가 무슨 의리입니까. 천하를 위해서 만백성을 도탄에서 건지려는 판국에 의리만 가지고 어찌 일이 됩니까. 국가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안정되어 있을 때, 임금의 자리가 욕심이 나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역적이지, 도탄에 든 백성들을 건지고 국가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 어찌 역적입니까? 슬기로운 사람은 시세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부레 풀칠을 해 붙인 듯 외뚜리 송사로 썩고 부패한 왕실을 그대로 받들려고 한느 짓은 고집불통의 일입니다. 판서는 글을 배웠지만, 외곬으로 읽기만 했지, 융통성이 없게 참뜻을 모르고 읽었습니다. 대감께서는 판서의 통곡소리를 듣고 마음이 흔들려서는 아니 되십니다. 정도전이나 배극렴의 태도가 참으로 옳습니다. 글을 읽어서 이용할 줄 아는 것이 훌륭한 선비의 처사올시다. 도능독으로 읽기만 하고 슬기롭게 이용할 줄 모르는 것은 썩은 선비밖에 아니 됩니다."

강씨는 남편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구변을 다해서 격려했다.

"방우는 그저 착하고 얌전하기만 했지, 크나큰 인물이 될 그릇은 못되오."

이성계는 가만히 한숨을 짓고 탄식조로 말했다.

강씨는 기회를 잃지 않았다.

"앞으로 대감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날, 세자책봉을 하셔야 할 텐네, 장자인 판서가 저토록 아버님을 반대하니 크나큰 근심거리올시다."

강씨는 근심이 가득찬 얼굴로 남편에게 물었다.

이성계는 호방하게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왕위에 오른다는 말은 하지도 마오. 꿈도 꾸지 않는 일을.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지, 세자 걱정은 왜 하오, 하 하 하, 큰아들이 세자 노릇을 못 하면 내 뜻을 잘 받드는 아이가 세자 노릇을 할 테지. 하 하 하."

남편 이성계의 말을 듣자 후취 아내 강씨는 요염한 웃음을 화사하게 웃었다.

"딴은 참 그렇습니다. 장자가 아니라도, 아버님의 뜻을 잘 받들어 나갈 수 있는 총명 영리한 아들로 후계자를 정하면 되겠습니다. 공연히 옛 풍습만 생각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장자가 가계나 왕통을 계승하는 것이 원칙이지. 그러나 장자가 마땅치 아니할 때는 중자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가려서 후사로 삼는 것은 옛적에도 있는 일이니, 그런 일을 걱정할 까닭이 없소."

"판서가 하도 통곡을 하고 아버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니, 공연히 걱정이 되어서 말씀을 사뢰어본 것이올시다. 이제 대감의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강씨는 방긋 웃고 내당으로 들어갔다.

총명하고 영리한 강씨는 마음속에 딴생각이 있어서 미리 복선을 쳐두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아들이 많았다. 모두 다 한씨의 소생이요, 강씨의 소생은 방번과 방석이 있을 뿐이었다. 미리 처사복사법을 써서 남편의 마음을 더듬어본 것이다.

한편 방우는 아버지 이성계 앞에서 통곡하고 나간 후에 울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전에 스승으로 섬겼던 포은 정몽주를 찾았다. 포은은 이성계의 큰아들이 어찌해서 찾아왔나 하고 마음속으로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방우는 포은 선생께 절을 드려 문후한 후에 천천히 말을 꺼냈다.

"선생님께서는 목은 선생과 함께 삼조를 내리 섬기신 고려의 원로 대사이올시다. 우왕이 폐위되고, 지금 또다시 창왕이 쫓겨가는 것을 보시고 안연히 앉아 계시니 어찌 되신 일이오니까. 이것이 평소에 선생께서 후배들을 지도하시던 갈충보국하시는 일이오니까?"

방우는 정색하고 물었다.

포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인 방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했던 일이다. 며칠 전에 야은 길재가 찾아와서 자기에게 항의를 제출하던 말과 똑같았다. 마음속으로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었구나' 생각했다. 포은 정몽주는 짐짓 대답했다.

"황음무도한 임금을 폐위하는 일은 고사에도 있는 일일세."

간단히 대답했다. 방우는 분함을 참지 못했다.

"평소에 저희들 제자가 선생님을 숭배하던 일이 아깝습니다. 선생께서는 왜 임금이 황음무도하도록 내버려두시고 옳은 길로 보필을 못 하셨습니까? 임금이 황음무도한 것은 재상들이 보필을 못한 까닭이올시다. 선생은 여기 대해서 책임을 느끼지 아니하십니까?"

포은은 옷깃을 바로잡고 대답했다.

"대답할 말이 없네. 야은 길재도 나를 찾아와서 항의를 한 일이 있제.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에 정한 바가 있네."

포은 정몽주는 깊이 한숨을 지어 탄식했다.

이방우는 정색하고 묻는다.

"나라는 이미 기울어졌는데 언제 무슨 마음을 정하셨다 합니까?"

"역부족이야, 힘이 모자랐어."

포은의 얼굴빛은 비장했다.

"왜 선생께서는 최영장군같이 되지 못하셨습니까?"

"아직도 대의명분이 서 있네. 새로 추대해 모신 임금도 의연히 왕씨 일문일세."

방우의 얼굴에는 씩씩한 빛이 드러났다.

"이번에 추대된 왕씨가 또다시 왕의 자리를 유지 못 할 경우에 선생은 어찌하실 텝니까?"

"나라를 위해서 죽을 뿐일세."

포은은 간단히 대답하고 얼굴 표정을 지었다.

"선생께서는 일사보국으로 모든 일이 다 펴질 줄 아십니까? 선생이 돌아가신다고 나라가 바로잡힌다면, 과연 나라를 위하여 죽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선생 한 몸이 죽는다고 나라는 결코 바로잡히지 아니합니다. 선생은 헛죽음을 하실 뿐입니다. 어찌해서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에 악한 무리를 배격하여 나라를 바로 잡지 못하십니까?"

말이 떨어지자 포은은 덥석 이방우의 손을 잡았다.

"자네 입에서 이런 좋은 말이 나올 줄은 꿈 밖일세. 야은 길재의 말과 똑같으이. 잠깐만 기다리면 하회를 알 것일세."

"더 말씀 올리지 아니합니다. 사람은 죽기 전에 일을 해야 합니다. 죽은 후에는 아무 일도 아니 됩니다. 긴 말씀 더 올리지 않습니다."

이방우는 포은 앞에 절하고 물러났다. 이방우가 포은을 향하여 죽는 것으로 충성을 삼지 말고 죽기 전에 악한 무리를 제거하라는 말은 정도전, 남은의 일당들이 옹호하고 있는 자기 아버지를 제거하라는 말이었다.

이방우의 고민은 컸다. 불의의 길로 왕의 자리를 뺏으려는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칼을 뽑아 들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은애의 천륜을 무찔러버릴 수는 없었다. 포은 정몽주를 찾아서 망하는 나라를 바라보고, 통곡하고 죽을 것이 아니라 죽어도 보람 있게 일을 하고 죽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포은 정몽주는 야은 길재와 이방우의 격려하는 말을 듣고, 크나큰 충동을 받았다. 결연히 뜻을 결단했다. 대간들을 움직여 이성계의 방약무인한 행동을 탄핵하고, 이성계 이하 정도전의 일당을 포박하기 위하여 급히 임시령을 내렸다. 기민한 정도전은 벌써 포은 정몽주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이방원에게 연락한 후에 몸을 피했다.

이방원은 아버지한테 변을 보했다. 이성계는 말을 타고 대궐로 향하는 체하다가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거짓 병을 칭탁하고 숨어버렸다. 포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행동을 살피기 의해 친히 문병을 갔다. 이때 이방우의 아우 방원은 선죽교 아래 조영규 등 무사를 매복시켰다가 문병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철퇴로 갈겨서 만고정충의 인물이 되게 했던 것이다.

포은이 돌아간 후에 지사들은 모두 다 몰려 죽고 공양왕 왕요는 폐위가 되어 내쫓긴 후에 이성계는 정식으로 배극렴, 정도전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씨의 고려는 영원히 망하고 있의 조선이 새로 창업되었다. 이성계의 큰아들 방우는 목을 놓아 통곡한 후에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에 개국 공신들에게 벼슬을 주고 아들들에게 군호를 봉했다. 큰아들 방우에게는 진안대군의 호를 내리고, 둘째 아들 방과에게는 영안군의 호를 봉하고, 셋째 아들 방의한테는 익안군의 호를 주고, 넷째 아들 방간에게는 회안군의 호를 주고, 다섯째 아들 방원에게는 정안군의 호를 내리고, 여섯째 아들 방연에게는 덕안군의 호를 주고, 강씨의 소생인 방번에게는 무안군의 호를 봉하고, 방석한테는 의안군의 호를 내렸다.

모든 아들들이 다 대궐로 들어가서 아버지한테 사은숙배하고 군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큰아들 방우만은 집에서 문을 닫아걸고 술만 마셨다. 대궐에서는 내시가 칙명을 받들고 나왔다.

"지금 전하께서 군호를 내리십니다. 모든 왕자께서는 다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큰 아드님이신 대감께서 아니 들어오신 모두 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우는 커다란 사발에 술을 따라 마시면서 껄걸 웃고 대답했다.

"대군의 칭호를 받는 것보다 혼자 술을 마시는 내 술맛이 좋다. 나는 대군이 될 자격이 없다. 고려의 의례판서이다. 아니 받는다고 여쭈어라."

방우는 대군 벼슬을 아니 받는다고 말한 후에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켰다. 내시는 두 번 세 번 졸랐다.

"황고하옵니다마는 다시 아룁니다. 대감께서는 장자이십니다. 대감께서 아니 들어가시면 어찌하십니까. 왕명을 받들어 나온 소인의 목이 달아납니다. 어서 약주를 그만 드시고 들어가사이다."

"이놈아, 내 목이 달아나지 왜 네 목이 달아나느냐. 방우는 대군될 뜻이 없다고 가서 아뢰어라."

내시는 하는 수 없이 돌아갔다. 다음에는 대궐에서 상궁이 나왔다. 방우의 부인을 달래서 방우가 대궐에 들어오도록 하려는 것이다. 궁녀는 내당으로 들어가 지씨에게 청했다.

"상감께서 부인께 대군을 권해서 꼭 들어오게 하라 하셨습니다. 부인께서 좀 권해 봅시오."

부인 지씨는 조용히 발길을 외당으로 옮겼다. 방우는 여전히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안주래야 풋고추조림 한 그릇뿐이었다. 부인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달랬다.

"인제 그만 약주를 드십시오. 취하십니다."

"취하라고 하는 술인데, 취하는 것을 당신은 걱정하고 있소? 막걸리만 마시니 배만 부르고 취하지 않는 구려. 소주를 가져오시오."

"취하신 듯한데 그만 잡수십시오. 여기다가 또 소주를 마시시면 어찌합니까."

"가져오라면 가지고 올 것이지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소."

방우는 소리를 꽥 질렀다.

지씨는 유한정정한 아내였다. 남편의 뜻을 평소부터 잘 알고 있었다.

행여나 남편의 마음을 상할까 봐 안으로 들어가서 소주 한 병에 밀전병 한 접시를 들고 나왔다. 아버지는 새로 등극한 임금이요 동생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서 부귀영화가 극진하게 지내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방우는 일체 아버지가 보내는 쌀과 요차를 받지 아니했다. 불에 씻은 듯한 새빨간 가난뱅이였다.

방우는 막걸리를 집어치우고 소주를 사발로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밀전병이 다 있던가."

방우는 빙그레 웃으며 밀전병으로 안주했다.

아재가 근심스러운 듯 말했다.

"작은 잔은 여기에 있습니다. 막걸리 사발로 소주를 잡수시면 어찌합니까. 너무 취하시면 큰 탈입니다."

방우는 껄걸 웃었다.

"취하라고 마시는 술인데 마시지 말라 하면 어찌하오. 여보, 그래 내가 술을 아니 마시고 배겨나겠소. 이성계의 아들이 된 것이 기가 맥힌 한이고, 슬픔이오. 세상에 얼굴을 반듯이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되었구려. 스승을 죽이고, 동지를 죽이고, 이신별군을 한 사림의 자식이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겠소. 이 시름, 이 천고의 한을 잊어버리려 하여 술을 취하도록 마시는데, 당신은 자꾸 취할 것을 걱정하니 너무나 태평세월이로구려."

아재 지씨는 남편의 마음을 더치지 않으리라 했다.

"취하는 것은 좋습니다마는 취한다고 일이 펴집니까? 공연히 몸만 상하십니다."

", , , 당신은 내 몸이 상하는 것을 걱정하오? 나는 어서 어서 세상을 떠나서 무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소. 죽음의 길을 밟고 싶소."

아내는 한동안 남편의 술 마시는 모양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대궐에서 또다시 궁녀를 내보내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나는 이성계의 아들이 아니야. 고려국 의례판서 이방우야. 들어갈 필요가 없지. 이렇게 소주나 마시다가 세상을 떠나는 거야."

말을 마치자, 이방우는 방성통곡을 했다. 아내는 다시 더 권할 도리가 없었다. 술이 취해서 못 들어간다고 상궁에게 말했다.

대궐에서 나온 궁녀는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돌아갔다.

내시를 내보내도 아니 들어오고 궁녀를 보내도 아니 들어오고 임금 이성계는 노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내시와 궁녀에게 불었다.

"어찌하여 아니 들어온다더냐?"

"약주가 과해서 취한 모양이올시다."

이성계는 방우의 뜻을 짐작했다. 더 묻지 아니하고 방우를 제외한 모든 아들에게 군을 봉하는 예식을 끝냈다.

아버지 이성계는 방우에게 내리는 진안대군의 첩지를 내시에게 명해서 방우의 집으로 내다 주라 했다. 내시는 부인 지씨에게 전하고 대궐로 돌아갔다.

부인 지씨는 진안대군의 첩지를 방우한테 전하지 아니했다. 의장 속에 깊이 넣어두었다. 남편의 뜻을 잘 아는 때문이다.

큰아들 방우가 대궐에 들어와 군호를 받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기뻐하는 남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방석의 어머니 강씨요, 한 사람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이었다.

강씨는 장자가 왕사가 되지 아니할 때는 서자들 속에서 누구나 왕사가 될 자격을 갖는 것이 통과이니 가만히 미소를 지어서 희망을 품었고, 방원은 장자가 왕사를 사양하는 경우에는 국가창업에 가장 공이 큰아들이 왕사가 될 자격이 있으니 자기는 왕통을 이을 수 있다도 생각했다.

군을 봉하는 예식이 끝난 후에 정안군 방원은 큰형 방우를 찾았다.

이때 방우는 아직도 풋고추 조림 한 접시를 안주로 하여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정안군 방원은 공자왕손의 찬란한 금관조복을 입고 명적삼에 상투바람으로 안주 없이 소주를 마시는 형님에게 절을 하고 앉았다. 좋은 대조였다.

방우는 몽롱하게 취한 눈으로 다섯째 아우 방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옷이 휘황찬란하구나. 군호를 받았다는구나. 무슨 군이냐?"

"정안군이올시다."

방원은 화경같은 큰 눈을 끔벅이며 형님에게 대답했다.

"너는 의로운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군호를 서너 개쯤 받아야 할 것 아니냐. 욕심 많은 너한테는 좀 부족할 것이다. 내가 아니 받은 군호까지 네가 받아두는 것이 어떠하냐. , , ."

큰형 방우는 허탈한 웃음을 호탕하게 웃었다.

정안군 방원의 얼굴이 화끈하고 붉어졌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내 술 한잔 먹어보려느냐. 안주 없는 술이지만 한 잔 마셔보아라."

방우는 소주병을 들어 사발에 철철 넘게 따랐다.

정안군 방원은 사양할 길이 없었다.

무릎을 꿇고 형님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었다.

"안주도 들어라. 풋고추 조림밖에 없다. 너희 집은 주지육림에 산해진미가 다 있겠지만 망국대부인 고려의 의례판서 이방우의 집에는 고추 조림밖에 없다"

정안군 방원의 얼굴이 또 한 번 화끈 달았다.

정안군 방원은 형님이 권하는 술을 아니 마실 수 없었다. 소주 한 사발을 들이키고, 조림 고추한 개로 안주를 했다.

"네 집 고기 맛만 못하리라."

방우는 또 한 번 아우를 야유했다.

"향취가 있고 간이 맞아서 좋습니다."

방원의 대답을 듣고 방우는 소리를 높여 또 한 번 웃었다.

", , , 네가 기름기 있는 누릿한 고기 맛이나 알지, 풋고추 조림의 짭짤하고 매음한 맛을 알겠느냐. , , , 헛소리하지 마라. 어서 너의 집으로 가서 누릿한 인만둣국이나 마시어라."

정안군 방원은 형님이 말하는 '인만둣국' 소리를 얼른 알아듣지 못했아.

"형님, 인만둣국이 어떤 국이오니까? 저희 집엔 인만둣국은 없습니다."

"이놈아, 사람의 머리를 삼단같이 베어 죽이는 네놈이 인만둣국을 모른단 말이냐. 사람고기로 만두를 만들어 먹는 국이 인만둣국이다."

형님 방우의 말을 듣자, 정안근의 굴은 붉어졌다.

"제가 어디,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였습니까? 굴복하지 아니하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았으니 굴복하지 않는 것이 정한 이치 아니냐. 세상에는 정의가 뚜렷하게 서 있는 법이다."

방우는 소주를 사발로 마셨건만 조금도 취기가 없었다. 엄숙한 얼굴로 아우를 꾸짖었다.

"천하를 위하는 일을 하자면 작은 일에 구애할 수 없습니다. 일도양단으로 난마 같은 시국을 처리해야 합니다."

정안군은 큰 눈을 번뜩이며 형님의 말에 대답했다.

정안군의 말을 듣고 방우는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천하를 위하여 큰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와 너는 천추만대에 욕먹을 짓을 감행하고 있다. 정말 큰일을 하고 싶거든 올바르게 큰일을 해야 한다. 너희들 손으로 추대해 모신 임금을 죽이고 쫓아내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이따위 못된 짓을 하면서 뻔뻔스럽게 천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 하느냐."

형님 방우의 꾸짖는 음성은 더한층 날카로웠다.

정안군은 아무리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소주병을 들어 형님 방우의 앞에 놓인 술잔에 따랐다.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오늘 전하께서는 형님 들어오시기를 무척 기다렸습니다. 칙사와 상궁을 보내도 아니 들어오시니 전하께서는 무한 섭섭하신 눈치였습니다."

"나는 고려의 망국대부다. 너희들이 마련한 대군의 칭호를 받을 까닭이 없다."

방우는 뱉듯이 대답하고 앞에 놓인 소주를 단숨에 마셨다.

"형님, 노기를 참으시고 마음을 돌리십시오. 형님은 전하의 장자십니다. 곧 세자책봉을 받으셔야 합니다. 아버님의 만세 후에는 형님이 용상에 오르셔야 합니다."

방우는 역정이 벌컥 났다. 마시던 소주 사발을 정안군의 앞에 던졌다. 정안군의 찬란한 조복은 술벼락을 맞았다.

"이놈 방원아, 뉘 앞에서 이따위 소리를 하느냐. 날 보고 역적질해서 뺏은 뒷자리를 차지하라느냐. - 더러운지고."

방우는 말을 마치자,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부인 지씨가 급히 뛰어나왔다.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오시오. 더러운 소리를 들었소. 귀를 씻어야 하겠소."

부인 지씨는 엄한 남편의 영을 거스를 수 없었다.

급히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왔다.

방우는 술상을 밀어놓고 아우가 보는 앞에서 귀를 활활 씻었다.

귀 씻은 물을 들고 나가는 아내에게 또 일렀다.

"이 물은 더러운 물이니 마당에 뿌리지 말고 똥통 속에 버리시오."

정안군은 무안했다.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방우의 앞에서 물러났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방우는 돌연 괴나리봇짐 하나를 어깨에 메고, 삿갓을 쓴 후에 사랑방에서 나왔다.

부인 지씨는 깜짝 놀라 물었다.

"의관도 아니 하시고 어디로 가십니까?"

"정처 없이 나가겠소."

"정처 없이 나가시다니 웬 말씀이오니까. 의관도 아니하시고."

"망국대부가 의관이 다 무어요. 어지럽고 더러운 세상에 내가 살 도리가 없구려. 수양산으로 들어가서 고사리나 캐 먹고 지내겠소."

부인 지씨는 깜짝 놀랐다.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 먹는단 말은 옛적 고죽군의 아들 백이, 숙제의 본을 떠서 산속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깨끗하게 굶어 죽겠다는 말이었다.

아내 지씨는 방우의 소매를 잡았다.

"잠깐만 기다리십쇼.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당신이 험한 산길을 어찌 걸어가겠다 하오."

"여필종부라 합니다. 당신 아니 계신 이 땅에 누구룰 바라고 살겠습니까. 막지 마십시오."

아내 지씨는 도랑치마에 은붙이를 추려가지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아들 복근이 가만히 있지 아니했다.

"아버지와 어머님이 아니 계신 데 제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습니까.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울면서 뒤를 쫓는다.

방우는 당초에 홀몸으로 산속에 들어가려 했으나 따라나서는 아내와 단 하나인 어린 아들 복근을 뿌리치고 나갈 수 없었다.

방우의 세 식구는 죽장 짚고 짚신 신고 정처 없이 나섰다.

방우의 비복들은 어이가 없어 했다.

그러나 감히 만류하지 못했다.

방우의 세 식구는 먼저 황해도 땅으로 들어섰다.

장수산을 거쳐서 구월산으로 들어갔다.

호화자제로 벼슬이 판서의 지위까지 올랐던 방우와 지씨의 나그네 길은 아프고 쓰린 고생의 행로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을 굽히지 아니했다.

장수산, 구월산에서 한여름 동안 고사리를 캐 먹고 연명을 했다.

가을이 되었다. 그들은 강원도 철원 땅으로 넘어갔다. 금강산을 구경했다.

겨울이 되었다. 개골산이 된 금강산에 도저히 부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세 식구가 한꺼번에 비로봉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을 수는 없었다.

아내 지씨는 아들 복근을 안고 울면서 호소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세상을 등진 사람이니, 죽어도 좋소이다. 그러나 복근이 가엾소이다. 함흥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짓고 사는 것이 좋겠소이다."

방우는 아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고성 삼일포와 양양 낙산사를 돌아본 후에 함흥 고향으로 들어갔다. 변성명을 하고 농촌에 묻혀버렸다.

태조 이성계는 큰아들 방우가 고려의 옛 신하와 지조 있는 선비들과 행동을 같이해서 자기의 왕위에 나간 것을 반대하고 자기가 내린 진안대군의 칭호까지 받지 아니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륜의 정과 자기를 반성하는 한 조각 가책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아들들의 군호를 봉한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태조는 측근 시녀에게 물었다.

"진안대군 방우는 요사이 어찌 지낸다 하더냐. 문안도 들어오지 아니하니 괘씸하기 짝없다마는 이 사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들어오너라."

궁녀는 대왕의 명을 받고 급히 자비를 몰아 진안대군 방우의 집으로 향했다.

궁녀가 들어가 보니 주인은 한 사람도 있지 않고 비복들만 있었다.

궁녀는 비복들에게 물었다.

"상감께서 대군이 태평히 계신가 알아보고 오라 하시어 나왔는데 모두 다 아니 계시니 어찌된 셈인가?"

"세 분은 죽장망혜로 정처 없이 나가신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궁녀는 깜짝 놀랐다.

"어디로 가셨는지 전혀 행방을 모른단 말인가?"

"소인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대군께서는 원체 엄하시니 감히 여쭈어볼 길이 없었습니다. 매일 독한 소주만 잡수시다가 말씀 없이 나가셨습니다."

궁녀는 하는 수 없었다. 대궐로 돌아가 사실대로 고했다.

"대군댁엔 비복들만 남아 있고 주인은 한 분도 아니 계십니다."

태조 이성계는 깜짝 놀랐다.

"세 식구가 다 없더란 말이냐?"

", 그러하오이다. 내외분과 아드님 복근 도령까지 아니 계십니다."

"어디로 갔다 하더냐?"

"죽장망혜로 대삿갓을 쓰시고 정처 없이 나가셨다 합니다."

태조는 기가 막혔다. 큰아들과 큰손자가 없어졌으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큰아들과 큰손자는 조상차지라 했다. 봉제사 접빈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전통 있는 풍속이었다. 민가도 그렇고 왕실도 그러했다.

장차 사대봉사를 누구한테 떠맡기나 하고 마음속으로 크나큰 번뇌를 느꼈다.

"물러가거라."

태조는 궁녀를 내보낸 후에 온종일 문을 닫고 누워 있었다.

계비 강씨는 궁녀를 통해서 태조가 우울하게 문을 닫고 누워 있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저녁 수라를 들 때가 되어도 태조는 내전으로 들지 아니했다.

강비는 저녁 화장을 곱게 다스린 후에 복도를 걸어 외전으로 나갔다.

손을 들어 가볍게 완자창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또 한 번 가볍게 창문을 두드렸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또 한 번 두드렸다.

"누구냐?"

비로소 대왕의 음성이 떨어졌다.

강비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대답했다.

"저올시다. 비올시다."

애교나 넘쳐 흐르는 싱그러운 음향이 완자창문 백지 한 장을 격하여 태조의 고막을 울렸다.

답답한 우울에 잠겨서 오뇌와 번민 속을 헤매고 있던 태조는 아리따운 강비의 음성을 듣자 정신이 번쩍 났다. 마치 어둔 밤 흙탕길 속에서 아름다운 선녀의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들어오구려."

태조의 목쉰 음성이 창 밖으로 새어나왔다.

완자창문이 가볍게 열리며, 강비의 달덩이같이 환한 얼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울했던 기운이 안개 슬 듯 스러졌다.

누웠던 태조는 벌떡 일어났다. 까닭 없이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어처가 나왔구려."

"웬일이시오니까. 온종일 누워 계시니. 어디라 미령하시오니까?"

"아니."

태조는 강비의 달덩이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또 한 번 까닭 없이 벙긋 웃었다. 시름 걱정이 운무같이 쌓였다가도 젊은 아내 강씨만 보면 즐거워하는 늙은 남편이었다. 벙긋벙긋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젊은 강비는 환갑이 가까워오는 태조의 앞으로 가까이 앉았다. 훈훈한 향훈이 환갑 노인의 코로 스쳤다.

태조의 후각은 느긋한 유열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온종일 우울 속에 잠겼던 심사가 맑은 푸른 하늘로 둥둥 떠서 오르는 듯했다.

"온종일 누우시면 옥체에 해롭습니다. 차차 노래올시다. 마음을 즐겁게 가지옵소서."

"누가 어쨌소. 몸이 좀 고단해서 누웠을 뿐이지."

태조는 또 한 번 강비를 바라보며 벙긋 웃었다.

"전하, 신첩을 속이시면 아니 됩니다. 마음에 불쾌한 일이 계신 듯합니다."

태조는 진안대군 때문에 마음이 우울했다고 강비한테 말하고 싶지 아니했다.

"아니, 아무런 불쾌한 일도 없었어. 그저 좀 몸이 노곤했을 뿐이야."

"전하, 전하께서는 신첩을 속이시려 하십니다. 그러나 신첩은 전하의 마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진안대군의 일 때문에 우울해하시는 것이 아니오니까? 진안대군이 솔가도피를 했다지요."

"어떻게 후마마가 알았소?"

"전하의 시름은 곧 신첩의 시름이옵고 신첩의 기쁨은 곧 전하의 기쁨이올시다. 방우가 비록 신첩의 배에서 나온 자식이 아니라 하오나 집안의 장자요, 왕실의 사자올시다. 제 어찌 걱정이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항상 염려가 컸던 것이올시다."

태조는 비로소 웃음빛을 거두고 길게 한숨을 짓고 말했다.

"그렇소. 그 자식 때문에 오늘 심기가 불편했소. 솔가도피했다는 소식을 오늘 궁녀를 통해서 들었소."

강비는 근엄한 얼굴빛을 짓고 태조에게 고했다.

"그러나 전하, 방우는 자식이 아니올시다. 잊으시옵소서. 부자지간의 천륜을 끊기는 과연 난감한 일이올시다. 그러나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식을 자식으로 생각해서 연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도 그같이 생각한 지 이미 오래였소."

태조는 젊은 아내 강비 앞에 숙녹피가 되어 기운 없이 대답했다.

강비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하듯 태조의 마음을 더한층 흔들어놓았다.

"윤기로 따져서 아버지가 더 가깝습니까, 임금이 더 가깝습니까? 아버지가 있은 연후에 임금도 있고, 스승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우는 아버지보다도 임금을 더 생각하니 이것은 확실히 주객을 뒤바꾸어 생각하는 괴팍한 짓이올시다. 나라를 망쳐놓은 악한 임금이 그래 큰 뜻을 품고 창업하는 아버지보다 더 소중하더란 말씀입니까."

"나도 어처의 생각과 같이 방우의 일을 미타하게 생각했소."

강비는 더한층 기승기승 방우를 규탄했다.

"방우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실 때부터 아버지를 그르게 생각한 사람이올시다. 아버지가 등극한 후에도 한 번도 문안을 들어온 일이 없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전하 앞에서, 반대당을 죽였다고 통곡을 하지 아니했습니까. 벌써 부자의 연은 끊어졌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어찌해서 진안대군의 군호를 내리셨습니까. 공연한 짓을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가사 임금이 아니라 하십니다. 큰아들인 장자로서 늙은 아버지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씀입니까. 이런 사람은 자식이 아닙니다. 아예 이 일로 인하여 노심초사를 하시지 마시옵소서. 차차 노래에 옥체에 해롭습니다. 배반하고 가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올시다. 다시는 생각지도 마시옵소서."

톡톡 쏘아붙이는 젊은 아내 앞에 늙은 태조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자식이 아니야. 어처의 말이 옳소."

태조는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강비는 또다시 말을 계속했다.

"지금 전하 앞에는 범 같은 아들이 방우를 빼놓고도 일곱이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맘에 드시는 아들을 골라서 세자책봉을 하시면 그만 아닙니까. 왜 쓸데없이 상심을 하시어 천금 옥체를 스스로 괴롭히십니까?"

"아냐. 솔가도피를 했다 하니 마음에 좋을 리가 있나. 그저 잠시 불쾌했을 뿐이지, 별로 번뇌한 적은 없어."

태조는 젊은 아내를 향하여 바보처럼 흐흐 웃었다.

"자아, 내전으로 들어가사이다. 공연히 쓸데없는 생각 마시고 저녁 수라나 드시옵소서."

육십 평생에 상승장군으로 남정북벌을 하여 천하의 용맹스런 이름을 떨쳐온 이성계이언만, 아리따운 젊은 아내 강비의 앞에서는 유순하고 부드럽기 백양과 같이 순했다.

강비를 따라 내전으로 들어간 태조는 저녁 수라상을 받았다.

궁녀들은 만반진수로 받들어 들어오고, 강비는 반주를 따랐다.

태조는 강비가 친히 따라 올리는 반주 한 잔을 마시고, 천도 금봉을 박은 은수저를 들었다.

메 옆에 탕이 놓였다. 금봉박이 은수저로 탕을 떴다. 여태껏 먹어 보지 못했던 탕이었다.

담담한 맑은 장국에 희고 부드러운 물질이 떠 있었다. 백숙해서 끓인 골국도 아니었다. 순두부도 아니었다.

태조는 무심하게 은수저로 부드러운 물체를 떠서 입에 넣었다.

씹지 아니했건만 입안에서 슬슬 녹았다.

"초장을 부어 잡수시면 맛이 있습니다."

강비는 손수 태조의 수저를 받아서 보시기에 탕을 옮기고 초장을 부었다. 은수저를 태조의 입에 넣어주었다. 부드럽게 조화된 맛이 태조의 혀끝을 산뜻하게 했다.

"도대체 이 탕이 무슨 탕인가? 골탕으로 알았더니 골탕도 아니고, 순두붓국으로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 맛이 담담하고도 희한하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국인가?"

강비는 교태를 지어 방긋 웃었다.

"무슨 탕인가 알아맞혀 보십시오."

"암만 해도 모르겠는데."

"잡수시면 몸보신을 한다 합니다. 비위에 맞으시거든 많이 잡수어둡시오. 호호호."

강비는 상긋상긋 웃으면서 금봉박이 은수저로 두부같이 부드러운 물건을 떠서 태조의 입에 또 한 번 넣어주었다.

태조는 넙죽 받아 자시고 또 한 번 물었다.

"몸보신을 한다 하니 도대체 무슨 탕인가? 이름이나 알고 먹어야지."

"중국 천자가 즐겨서 자시는 탕이올시다. 연소탕이라 합니다."

태조는 깜짝 놀랐다.

"중국 천자가 즐겨 자시는 탕이라니, 어떻게 구했단 말이오?"

강비는 또 한 번 생긋 웃었다.

"북경으로 가는 사신 편에 당부했습니다. 전하께서 노쇠에 잡수실 만한 좋은 음식 재료가 있거든 구해오라 했더니 이것을 구해왔습니다. 연소탕은 바다에 떠도는 해연의 둥지를 따서 말려두었다가 국을 끓인 것이올시다. 이 국을 잡수시면, 노인의 정력이 갑절이나 왕성해서 장생불사한다 합니다. 이래서 중국 천자 이하 대신들이 이 연소탕을 좋아한다 합니다."

태조는 강비의 말을 듣자 마음이 흐뭇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극진하게 위해 주는 사람은 다만 왕비 강씨가 있을 뿐이라 생각했다.

태조는 저녁 수라를 마치고 화제를 돌려 환담하다가 밤이 이슥해서 강비의 침전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거쳐서 침전으로 들어가는 옆방엔 강비의 소생인 막내아들 방석의 방이 있었다.

태조는 문득 막내아들 방석을 대해보고 싶었다.

"요사이 방석을 잘 놀고 있소?"

강비를 향하여 물었다.

"놀기도 잘하고 공부도 잘합니다. 정도전도 말하기를, 총명 영리해서 앞으로 큰 사람의 구실을 하겠다고 칭찬이 대단합니다."

"좀 들여다보고 갈까?"

"아마 밤이 이슥하도록 공부를 하다가 지금 막 잠이 들었나 봅니다. 전하, 자는 얼굴이라도 좀 들여다보시렵니까?"

"보고 싶구먼. 들러서 갑시다."

강비는 앞에 서서 방석의 방문을 열었다.

방석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잠이 곤하게 들어 있었다. 등심을 낮춘 옥등잔 유경 옆에는 방석이 공부하던 책이 놓여 있었다.

태조는 귀여운 막내아들 방석의 자는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유경 옆에 있는 책을 집어 보았다. '소학'이었다.

"방석이 벌써 '소학'을 읽는구먼"

태조의 입이 흐뭇하게 벌어졌다.

"정도전의 칭찬이 대단합니다. 여덟 살에 '소학'을 읽는 아이는 우리 방석이밖에 없다 합니다. 문리까지 났다 합니다. 아버님을 닮아서 영특한가 합니다."

"내가 여덟 살 때는 기가 맥힌 개구쟁이였지. 웬 글을 읽었나. 밤낮 코를 줄줄 흘리고 제기나 차고 탄자놀이나 했지. 사실인즉 그래서 나중에 명궁이 된 거야, 하하하. 방석은 아마 어처를 닮아서 얼굴도 예쁘지만 총명 영리한 거야. 인제는 우리 집안에도 글 잘하는 아들이 필요해."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무력으로 나라를 창업하셨으니 앞으로는 문치로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글을 잘 하는 아들이 필요합니다."

태조는 왕후 강씨의 말에 향기가 돈다고 생각했다.

"옳은 말야, 허허허, 그렇고말고. 내가 군사혁명을 일으켜서 무력으로 건국을 했으니 다음 대의 국가를 통솔할 사람은 문화로 정치를 해서 백성들을 지도하고 육성시켜주어야 하겠지."

태조는 곤하게 잠이 든 방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걷어찬 이불을 바로 엎어준 후에 조용히 문을 닫고 강비와 함께 침전으로 향했다.

시녀들은 이날 전하가 내침하는 것을 짐작했다.

와룡촛대에 등심을 낮추고 홍공단 봉화이불에 원앙침 잣베개를 금침 위에 나란히 놓고 물러갔다.

 

막내 방석은 세자가 되고

태조에게 있어서는 흐뭇하고 즐거운 밤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하고 세상 선비들의 비평을 듣고 있으나 삼천리강산을 지배하는 일국의 제왕이었다.

옆에는 젊고 아름다운 후취 아내가 입에 혀같이 내조를 하고 있었다.

큰아들 방우가 자기의 고려 왕실을 뒤엎은 일을 불만하게 생각해서 아들 노릇도 아니하고 군호를 주어도 받지 않고 종적을 감추었다 했으나 다음에도 여룡여호한 아들이 한씨의 소생과 강씨의 소생을 합해서 딸을 빼놓고도 칠형제나 있었다.

그까짓 아들 하나쯤 없어졌다 해서 큰 걱정이 될 것은 없었다.

총명하고 예쁘고 지성스런 후취 아내 강씨가 중국 황제가 자신다는 연소탕을 손수 끓여준 구미는 아직까지도 입가에서 훈훈한 향기가 스러지지 아니했다. 연소탕의 정기가 용솟음쳐 일어나는 듯했다.

송도 경덕궁 안의 고요한 밤이었다. 낮에 일어났던 모든 시끄러운 일이 이성계의 머릿속에서 봄 눈 슬 듯 스러졌다.

태조는 심지를 낮춰놓은 옥등잔 희미한 불빛 아래 강비를 애무하고 있었다.

"앞으로 왕비는 아들을 또 하나 낳아야 하겠소."

농담을 던졌다.

"대왕께서도 망령이십니다. 아들을 팔형제나 두시고 또 아들을 낳으라고 하십니까."

왕비는 방긋방긋 웃으며 애운성 있는 예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연소탕을 먹여놨으니 아들을 또 하나 점지해야지. , , . 마마의 아들은 실상 둘뿐이 아닌가."

"인제 저는 단산을 할 작정이올시다. 방석의 나이 여덟 살입니다. 방번과 방석이나 잘 기르겠습니다."

"아들딸 낳는 일을 맘대로 할 수 있나."

태조는 소리 높여 웃었다.

강비는 홀연 정색하고 태조에게 물었다.

"방우가 큰아들 노릇도 아니하고 대군의 칭호도 받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춰버렸으니 장차 세자 문제를 어찌 처리하시겠습니까?"

"큰아들 방우가 나를 배반하고 갔으니 세자책봉을 하기는 틀린 일이오. 장자를 못 세우는 경우네는 다음 아들 차자를 세자로 봉하는 수밖에 없소. 다행히 둘째 방과는 마음이 착하고 어진 사람이니 동생들을 잘 거느릴 것이오. 이 아이로 세자를 봉하는 수밖에 없소."

태조는 무심코 대답했다.

태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비는 몸을 돌려 태조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봉황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목을 놓고 울었다.

태조는 깜짝 놀랐다.

"웬일이오, 별안간."

강비를 껴안고 어루만져주었다. 강비의 울음소리는 더욱더 처절했다.

"웬일요. 말을 좀 하오. 어디가 괴롭소. 말을 좀 하오. 내 속이 답답하구려."

강비의 애절한 울음은 좀처럼 그쳐지지 아니했다.

태조는 당황했다. 강비의 두 손을 바싹 잡고 흔들었다.

"왜 우오. 말을 시원하게 좀 하오. 내 안이 타는 듯하구려."

강비는 울음을 겨우 그치고 대답했다.

"전하의 속이 왜 타십니까. 제 속이 타는 듯합니다."

"무슨 답답한 일이 있기에 속이 탄다 하오."

태조는 젊은 후취 앞에 숙녹피가 되어 부드러웠다.

"아내의 속이 타는 줄 모르시는 분이 어찌 일국의 제일인자인 임금 노릇을 하십니까. 제 신세는 물 위에 뜬 기름이고, 바다에 떠 흐르는 부평초의 신세올시다."

"그것이 무슨 소리요? 어찌해서 일국의 왕비인 당신의 신세가 물 위의 기름이요, 바다에 떠 다니는 부평초의 신세가 된단 말요?"

태조의 말을 듣는 강비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전하께서 이같은 제 심정을 못알아주시니 장차 저는 누구를 의지하고 삽니까?"

태조는 민망했다.

"답답하다고 하지 말고 시원스럽게 말을 해주오.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리다."

태조는 도리어 강비한테 애원했다.

"전하께서는 차차 연로하시고 신첩은 아직도 젊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첩의 소생은 일곱째 방번과 여덟째 방석이 있을 뿐, 첫째서부터 여섯째까지는 모두 다 한씨의 소생이올시다. 전하 만세 후에 전실 아들이 왕위에 나가는 날 신첩의 몸은 개밥의 도토리요, 물 위에 뜬 기름이 아니겠습니까. 한평생 전하를 도와서 모시고 애썼던 일이 한 줌 물거품이 되어 스러질 테니 어찌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저는 전하 앞에서 죽는 것이 옳겠습니

."

강비는 돌연 머리맡에 놓인 경대 서랍을 열었다.

푸른 술끈이 달린 상아장도를 꺼냈다.

강비는 번개치듯 장도칼을 뽑았다. 새파란 칼날을 목을 향해 겨누었다. 태조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강비의 칼 잡은 손목을 잡았다.

"이게 무슨 경솔한 짓이오. 비의 일생이 평안하도록 해주리다."

강비는 태조의 잡은 손목을 뿌리쳤다.

"아니올시다. 전하 앞에서 미소하면서 행복하게 일생을 마치겠습니다."

흰 손에 잡은 날카로운 장도 칼끝은 다시 미끈한 목으로 향했다.

태조는 당황했다. 급히 강비의 손을 뿌리쳤다.

노리끼한 상아장도는 '댕그랑' 소리를 내면서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방번이나 방석으로 세자를 삼으리다. 현비는 마음을 놓으시오."

태조는 강비의 등을 쓸며 말했다.

'방번이나 방석으로 세자를 삼으리다' 말한 태조 이성계의 음성은 확실히 강비의 젊은 고막을 울렸다.

그러나 강비는 반신반의했다.

"무어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까?"

처절하도록 예쁜 얼굴엔 아직도 살기가 스러지지 아니했다. 푸른 눈결에 까만 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뿜어 태조의 얼굴을 쏘았다.

"어처의 소생인 방번이나 방석으로 세자를 삼겠다고 말했소."

태조는 빙긋 웃고 강비의 보드라운 흰 손을 잡았다.

강비의 흑수정 같이 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태조 이성계의 눈을 쏘아보고 있었다.

"진정의 말씀이십니까?"

"진정이지, 내가 어처한테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내가 죽은 후에라도 어처의 일생을 편안케 해주기 위해서 방번이나 방석으로 세자 책봉할 것을 결심했소. 임자네 집 덕택으로 군사혁명도 성공이 되었고, 임자가 내조를 잘해준 까닭에 내가 오늘날 조선 국왕이 되었는데, 나 죽은 후에 임자가 고생을 한다면 말이 되오. 이제부터는 말음을 턱 놓고 지내시오."

강비의 눈에서는 비로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살기 가득했던 처렴한 얼굴엔 굳었던 얼굴이 풀리고, 다사로운 화기가 돌기 시작했다.

늙은 임금과 젊은 왕비는 다시 자리에 베개를 함께 하고 누었다.

강비는 너무나 기뻤다. 잠이 오지 아니했다. 눈이 보송보송, 말똥말똥하게 떠졌다. 도란도란 태조한테 물었다.

"대신과 왕자들이 반대를 하면 어찌하실 텝니까?"

"절비 한씨는 왕후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방번과 방석은 당당한 왕비 소생이니, 두 아이 중에서 세자를 봉하겠노라 하면 되지 않겠소?"

강비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어거지 말씀이십니다. 지금 왕자들은 모두 다 세자가 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차서를 따지거나, 전취 후취의 소생을 가지고 말씀하신다면 도리어 분란이 클 것입니다. 제 소생으로는 방번이 첫째가 됩니다. 그러나 막내 아이 방석으로 세자를 삼겠다고 전교를 내려줍시오. 이같이 하시면 둘째니, 셋째니 하고 자리다툼이 나지 아니합니다. 가운데 아이들은 쑥 빼놓고 막내로 정해줍시오."

태조 이성계는 강비의 말이 묘안이라고 생각했다.

"어처의 말이 옳소. 큰아들이 세자를 사양하니 아주 막내로 세자를 봉합시다. 이같이 하면 형제간에 싸움도 나지 않고 좋겠소."

태조 이성계는 강비의 건의를 찬성했다.

"언제쯤 발론을 하시렵니까?"

"이삼일 후에 곧 의논하려 하오."

강비는 기뻤다. 마음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태조는 강비의 처소에서 아침 수라를 마치고 느직하게 외전으로 나갔다.

강비는 방석과 함께 전하를 전송한 후에 성균관으로 나가는 방석에게 넌짓 일렀다.

"오늘, 삼봉 선생이 너의 강독을 보러 나오시느냐?"

", 오늘도 나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부를 마치고 들어오는 길에 삼봉 선생을 모시고 들어오너라."

"분부대로 말씀하겠습니다."

소년 방석은 자애의 눈길이 아지랑이마냥 서려 있는 어머니 강씨에게 사기 없는 웃음을 던지고 공부하는 성균관으로 나갔다.

이날 방석의 말과 같이 정도전은 강관이 되어 성균관으로 나왔다. 방석은 아직 세자가 아니기 때문에 춘방에서 공부를 하지 아니하고, 성균관에 입학을 하여 공부하고 있었다.

방석은 공부를 마친 후에 정도전에게 어마마마의 말씀을 전했다.

"모후께서 공부가 끝나는 대로 선생님을 모시고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왕후마마께서 나를 들어오라 하셨습니까?"

정도전은 방석의 나이 아직 어리건만 왕자를 대접하는 예로 공대하는 말을 썼다.

"그렇습니다. 모시고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정도전은 잠깐 생각해보았다. 강비는 방석의 공부를 시켜달라고 부탁할 때 한번 자기를 칭찬한 일이 있었다. 이제 아무 까닭 없이 왕후가 자기를 청할 리는 없다. 필연코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민첩하고 슬기 많은 정도전이었다. 큰 왕자 진안대군 방우가 군호를 아니 받고 강원도 산골 속으로 들어갔다는 일이 머리에 퍼뜩 떠올랐다. '세자 문제가 있구나' 하고 즉각으로 느꼈다.

"모시고 들어가오리다."

삼봉 정도전은 쾌하게 대답했다.

성균관의 강독이 파한 후에 정도전은 방석과 함께 경덕궁 내전으로 추창해 들어갔다.

시녀들은 막내 왕자 방석과 정도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목례를 드린 후에 급히 전각으로 올라 왕후 강씨께 고했다.

"끝의 아기씨와 삼봉 선생이 들어오십니다."

강비는 백모란 같은 화려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일어섰다.

윤흐르는 검은 머리엔 황금 쌍봉황 첩지를 얹고 국사문 친 겹저고리엔 자주깃을 달았다. 남끝동을 물린 날씬한 어깨와 팔은 순린치마를 입은 늘씬한 아랫도리와 함께 색과 미의 조화를 이루어 환한 얼굴이 더한층 화사했다.

강비는 전각 마루 끝까지 나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정도전을 맞이했다.

"삼봉 선생 들어오시오."

아리따운 목소리는 예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낭랑했다.

"어서 오르시오."

봉화백 정도전은 황공 감격했다. 관디 자락 앞섶을 여미고 전각으로 추창해 올랐다.

도전의 뒤에는 방석이 따라 올랐다.

전각 안엔 향훈이 돌고 바람에 흔들리는 주렴엔 제비가 쌍쌍이 날아들었다.

"삼봉 선생을 이리 모시어라."

강비는 화려한 웃음을 풍기며 아들 방석에게 명했다.

강비는 옥과석 침석에 남빛 비단으로 선을 두른 보료방석을 손으로 가리켰다. 전각의 상좌였다. 방석은 스승 정도전에게 자리를 권했다.

정도전은 황공 감사했다. 감히 방석 위에 앉지 못하고 붉은 융전에 몸을 굽혀 꿇어앉았다.

강비는 자리에 앉은 후에 방석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너도 게 앉거라."

강비는 외간남자를 대하게 되니, 남의 의심을 살까 보아 일부러 방석을 곁에 앉힌 것이다.

시녀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향다를 받들고 들어왔다.

"봉화백 댁에도 좋은 차가 많이 있으리다마는 지리산에서 첫눈을 따서 말린 차라 하오. 향기가 높소이다."

강비는 또 한 번 구슬을 굴리는 듯한 낭랑한 목소리를 내었다.

정도전은 무릎을 꿇고 찻종을 받들어 한 모금 마신 후에 고했다.

"과연 향기가 높습니다. 소신의 집에 있는 차는 늦게 딴 것이오라 이같이 향기가 돌지 않습니다."

정도전은 이례적으로 강비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동안 방석을 지도해주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하셨소."

"끝의 왕자께서는 원체 총명하시어 문일지십하시니, 조금도 힘이 들지 아니합니다. 매우 촉망이 됩니다."

"그러하오? 어미된 마음에 못났다는 것보다 기쁘오. 모두 다 삼봉 선생의 덕분이오."

"황감하여이다."

정도전은 찻잔을 놓고 고개를 숙였다.

강비는 옷깃을 여미고 화제를 돌렸다.

"오늘, 삼봉 선생을 청한 것은 특별한 부탁이 있어서 청했소이다."

"소신에게 무슨 부탁이 계시오니까. 힘자라는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왕상전하께서는 세자 문제에 대해서 크게 근심을 하고 계시오. 아시는 바와 같이 큰 왕자 방우가 군호까지 사양하고 종적을 감추었으니 이 사람으로 세자를 책봉하기는 어렵게 되었소. 왕자는 칠팔 명이나 되는데 장자가 세자 노릇을 아니하게 되니, 모두 다 제각기 잘났다고 떠들어대서 크나큰 분란이 일어나기 십상팔구요. 그래서 전하께서는 이 일을 크게 걱정하시오."

정도전이 맞방망이질을 쳤다.

"과연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여룡여호한 아드님을 팔형제나 두셨습니다. 크나큰 걱정이 되실 것입니다. 보통 일이 아니올시다."

"어찌하면 좋겠소?"

강비는 맑은 눈을 흘려 정도전을 바라보았다.

정도전은 벌써 강비가 청해서 묻는 뜻을 짐작했다. 그러나 얼른 결론을 내리지 아니했다. 멀리 말머리를 돌렸다.

"장자가 세자가 아니되는 경우에는 차자가 세자가 되는 것이 정례올시다마는 차자인 영안군 방과는 너무나 얌전하십니다. 다음 아우들이 형제싸움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더구나 정안군 방원은 차서가 다섯 째올시다마는 위화도 회군 이후에 전하를 도와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안군은 불덩이 같은 성격을 가졌습니다. 투지가 만만합니다. 반드시 세자가 되려고 크나큰 야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시라고 상감께 아뢰십시오."

강비는 정도전을 향하여 조용히 물었다.

"세자 자리 다툼이 나서 형제가 서로 싸우게 된다면 천하의 웃음을 살 뿐 아니라, 가뜩이나 민심이 안정되지 아니한 이때 창피하기 한량 없는 일이니, 무슨 좋은 묘한 방법이 없겠소이까?"

강비는 슬며시 정도전의 뜻을 더듬어보았다.

"장자를 제해논 후에 차서를 따져서 세자감을 고른다면 오롱이조롱이, 고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울퉁불퉁 싸움이 나기 십상팔구올시다. 차라리 가운데 있는 여러 형제분을 다아 제쳐놓고 그중 나이 어린 막내분으로 세자를 봉해 놓는다면 누가 시야비야 뒷공론을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정도전의 헌의는 강비의 마음 속에 먹은 생각 그대로 그림 그리듯 그려놓았다. 강비는 정도전의 지혜는 당세에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강비의 입이 방긋 벌어졌다. 얼굴에 가득 웃음이 소리 없이 물결쳤다.

"삼봉 선생의 식견은 과연 높으십니다. 사실인즉 전하께서도 그러한 의향이 계십니다마는 대신들이 반대할까보아 얼른 단을 내리시지 못하십니다."

아직 나이 어린 방석은 어마마마와 스승 정도전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들어도 재미가 없었다. 슬며시 장지 윗간으로 내려가서 색종이로 배 접는 장난을 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강비의 말에 대답했다.

"상감께서는 먼저 정승 배극렴을 불러 하문하실 것입니다."

"배정승뿐이겠습니까. 삼봉 선생도 청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삼봉 선생께서 힘써 밀어주셔야겠습니다."

"저야 분부가 아니 계시더라도 역설하겠습니다마는 배정승이 문제올시다. 정안군이 필연코 배정승한테 부탁을 할 것입니다."

강비의 얼굴빛이 금방 변해졌다.

"삼봉 선생이 한 번 배정승을 만나보시고, 방석을 밀어보라고 부탁하십시오."

"말씀 아니라도 일러두겠습니다. 언제쯤 하문하신다 합니까?"

"일간 대신들을 청하시리다."

"명심하겠습니다."

정도전은 몸을 굽혀 물러났다.

방석이 합문밖까지 스승을 전송했다.

며칠 후의 일이었다. 태조는 돌연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대신들에게 입시하라는 소명을 내렸다.

대신들은 입시하라는 소명을 받고 한 사람 두 사람 우선 빈청으로 모여들었다.

개국 공신인 배극렴, 조준, 정도전, 정총, 남은 등의 면면이 보였다.

정승 배극렴이 먼저 정도전을 향하여 말했다.

"웬일이실까? 오늘 돌연 입시령이 내리시니----."

"글세, 무슨 일인지, 나 역시 잘 모르겠소이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부르시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을 부르시는 것을 보니, 필시 무슨 중대한 일을 의논하려 하시나 보오."

정도전은 시침 뚝 떼고 대답했다.

남은은 정도전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강비가 정도전한테 방석을 세자로 밀어달라고 부탁한 일을 정도전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슬쩍 화제를 꺼내기 위하여 왕자들의 이야기를 했다.

"전하의 장자의 진안대군이 군의 칭호도 받지 않고, 몸을 피해버렸다 하니 필시 여기 대해서 의논을 하실는지 모르오. 국사에는 임금 다음에 세자인데, 세자감이 행방을 감추었으니, 전하도 큰 걱정이실 거요."

정총이 대답했다.

", 그렇구려. 필시 세자 문제를 하문하실는지 모르겠소."

정승 배극렴은 몸을 가로 흔들며 여러 공신들을 바라보고 묻는다.

"세자 문제를 가지고 하문하신다면 우리들은 의견을 모아서 일치하게 대답해야 하겠소. 어느 왕자를 추대하는 것이 좋겠소?"

조준이 대답했다.

"장자가 없는 경우에는 차자가 사자가 되는 것은 사가나 국가나 매일반이니, 차자가 세자가 되어 입승대통하는 일이 당연하오."

조준은 점잖게 자기 의견을 발표했다.

정승 배극렴도 자기 의사를 발표했다.

"창업할 때 세자를 정하는 문제는 평시와 다르다 생각하오. 장자가 만약 세자의 자리에 나가지 않는 경우에는, 창업할 때 가장 공이 많은 왕자로 세자책봉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오."

배극렴은 은근히 정안군 방원을 세자로 추대할 생각이 강했다.

정도전은 마음속으로 큰일이라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세자 문제를 가지고 의논한대야 소용이 없소. 지금 상감의 의중에는 강비의 소생인 막내 왕자 방석으로 세자를 삼으실 의향이 계신 듯하요. 왜냐하면 장자를 제해놓고는 모두 다 세자가 되고 싶어 하니 까딱 잘못하다가는 골육상쟁이 될 우려가 있는 때문이오. 우리는 상감께서 하문하시거든 그저 상감의 의향대로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일임하는 것이 좋겠소. 우리들이 아무리 대신이라하나 어찌 상감 내외분의 의향을 꺾을 수야 있겠소."

배극렴을 제해놓고 여러 대신들은 정도전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했다.

진안대군 이하 여섯째 아들 방연까지는 왕비 노릇을 못 하고 돌아간 한씨의 소생이요, 일곱째 방석은 지금 상감이 가장 사랑하는 왕후의 소생이었다. 상감과 왕비가 전실 소생인 여러 왕자의 싸움을 막기 위하여 위에 있는 형제들을 다 제쳐놓고 막내 왕자로 세자를 봉할 의향이 있다는 말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강비는 상감의 가장 총애하는 왕후다. 권력과 세도는 어느 누가 감히 당해낼 수 없는 존재였다.

여러 공신들은 마음속으로 '결국 방석이 세자가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전 내시가 빈청으로 나왔다.

"여러 공신들이 다 모이셨으면 곧 입시하라는 분부가 계십니다."

배극렴, 조준, 정도전 이하 모든 공신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내시를 따라 편전으로 들어갔다.

모든 대신들은 옥좌에 미소를 풍기고 앉아 있는 태조를 향하여 장지 밖에서 일제히 곡배를 드렸다.

태조는 모든 공신들에게 다정하게 말씀을 내렸다.

"이리들 가까이 장지 안으로 들어오라."

모든 대신들은 몸을 굽혀 편전 장지 안으로 들어갔다.

태조는 다시 미소를 풍기며 대신들을 향하여 말했다.

"오늘 경들을 청한 것은 국사의 중대한 일을 의논하려 하여 입시를 명한 것이오.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말해주기 바라오."

정승 배극렴이 백수를 흩날리며 아뢰었다.

"어떤 하문하실 일이 계시오니까?"

"경들도 알다시피 나라에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세자를 정하는 것은 천하 만방이 다 공통으로 하는 일이다. 첫째 민심을 안정시키고 둘째는 국본을 든든케 하자는 때문이다. 이러하므로 세자는 당연히 장자가 되는 것이 전례이다. 그러나 과인의 큰아들 방우는 세상일이 귀찮다 해서 산간벽지로 숨어버렸다. 아무리 세자책봉을 하려 해도 받지 아니할 테니, 과연 딱한 일이다. 누구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좋겠는지, 경들의 의향을 물어보는 것이다."

정승 배극렴은 고지식하고 멍청했다. 빈청에서 정도전이 까딱 잘못하다가는 형제간에 싸움이 난다는 말을 하면서 지금 태조와 강비는 머리들을 다 제쳐놓고 막내 방석으로 세자를 봉할 의향이 있다고 은근히 눈치를 보였건만 배극렴은 정도전의 의미 깊은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대범하게 대답했다.

"장가가 없는 경우에는 차자가 왕사가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태조는 이때 둘째는 의중의 인물이 아니었다.

"차자도 좋기는 좋으나 너무나 어질고 착하기만 해서 과단성이 없구려."

태조는 탄식조로 대답했다.

늙은 정승 배극렴은 고지식했다.

태조가 둘째는 너무나 착하고 어질기만 하고 과단성이 없다고 탄식하는 말씀을 듣자 선뜻 대답했다.

"그렇다면 국가를 창업하는 데 가장 공이 큰 왕자로 세자를 책봉하시는 일이 가한 줄로 아뢰오."

배극렴이 말씀을 올린 국가창업에 가장 공이 큰 왕자라 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전실 한씨의 소생인 다섯째 왕자 정안군 방원을 가리킨 말이다.

태조의 대답이 채 떨어지기 전에 돌연 편전 옆방에서 여자의 곡성이 일어났다. 처절한 울음소리와 함께 넋두리가 섞여 나왔다.

"아이구 하느님 맙소사. 장차 내 신세를 어쩌하나------ 아이고 아이고, 내 신세야!"

귀청이 쨍하도록 울음소리는 처절했다.

정승 배극렴 이하 모든 중신들은 깜짝 놀라ㅆ. 소름이 쪽 끼쳤다.

"도대체 신하들이 세자책봉에 어찌해서 주제넘게 입부리를 놀리는 거냐."

쇳조각을 끊는 듯한 목소리가 쨍하게 또 흘러나왔다.

"세자는 상감께서 정하실 일이지 왜 신하들을 불러서 묻습니까?"

또다시 울음소리와 함께 넋두리가 새어 나왔다.

왕후 강비의 음성이 분명했다.

배극렴, 조준 등 정승은 후들후들 떨었다.

배극렴이 맥 풀린 소리로 태조께 물었다.

"전하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태조도 당황했다.

"장자가 세자가 될 수 없으니, 중간 사람들은 제쳐놓고 끝의 아이로 정하는 것이 좋겠소."

이때 옆방에서는 곡성이 그치고 조용했다.

정도전이 아뢰었다.

"끝의 왕자는 총명 영리할 뿐 아니라 큰 그릇이 될 기상이 있습니다. 전하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배극렴은 겁이 덜컥 났다.

"전하의 명철하신 처분은 신의 무리가 감히 따를 수 없습니다. 막내 왕자로 세자를 봉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승 조준도 대답했다.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모든 고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태조는 천천히 분부를 내렸다.

"어전 내시 게 있느냐?"

장지 밖에서 내시가 추창해 들어왔다.

"정원에 기별해서 빨리 승지를 들라 해라."

내시는 걸음을 빨리하여 정원에 나가 승지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태조는 정식으로 승지에게 전교를 내렸다.

"모든 대신과 의논하여 끝의 왕자 방석으로 세자를 책봉하기로 결정했다. 곧 정원에 발표하고 관상감에 택일을 명하여 세자책봉하는 의식을 거행케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승지는 명을 받들어 물러가고 모든 신하들도 흩어졌다.

 

영안군과 정안군의 집

막내 왕자 방석으로 세자책봉을 결정한 일은 극비한 속에서 진행되었다.

관상감에서는 좋은 날짜를 가려서 택일단자를 올리고 정원에서는 세자 책봉하는 날짜를 발표했다.

모든 왕자들은 깜짝 놀랐다.

"막내를 세자로 봉하다니?"

제각기 한마디를 했다.

왕자뿐만이 아니었다. 성년이 된 왕자들은 모두 다 부인이 있었다.

부인들도 모두 다 입술을 비죽거렸다.

"기가 막힌 왕자 대군들이 많이 계신데 하필 막내 아기씨가 세자가 되다니 말씀이 되오."

뒷공론들을 했다.

종실과 궁중은 말할 것 없고 여염과 거리의 백성들도 웃었다.

"큰아들이 없으면 다음 아들이 세자가 되고 다음 아들이 마땅치 않으면 잘난 아들 중에서 세자를 봉하는 것이 원칙인데 끝의 아기로 세자를 봉한다 하니 어찌 된 켯속인지 모르겠소."

"그야 장성한 아들들은 모두 전실 소생이고, 끝의 아기는 후취 강왕후의 소생이니 뻔한 일이 아니겠소.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겠소."

"강비 소생으로는 또 하나가 있지 않소?"

"방석 위에 방번이 있지만, 방번으로 세자를 봉한다면 너무나 한씨와 강씨 소생을 칼로 쪽 갈라놓는 것 같으니 아주 뚝 떨어뜨려서 막내로 정한 것이 분명하오. 이러해야만 말이 없을 것 아니겠소."

"그렇지만 어째, 오리가 홰를 탄 것 같아서 휘득휘뜩하구려."

왕실과 관계가 없는 거리의 서민들도 이같이 공론이 분분했다.

그러나 모든 왕자 중에서 다만 영안군 방과의 집에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영안군 방과는 바로 진안군 방우의 둘째 아우였다. 장자가 왕세자가 아니되는 경우에는 당연히 다음 아우인 차자가 왕자가 되어 세자가 되는 것은 나라의 관례이다. 대신의 한사람인 배극렴도 조준과 함께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안군은 아버지 태조의 말대로 너무나 어질고 착하고 과단성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마음을 천연하게 해드리는 것이 자기의 의무요 책임이라 생각했다. 그도 역시 삼십에 가까운 나이로 고려에 벼슬하여 지위가 장상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형님 진안군 모양 아버지를 원망하지 아니했다. 아버지와 동생 정안군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고 자기가 고려왕조를 찬탈하는데 협조하지는 아니했다.

이러한 때문에 그이 아버지는 대신들에게 방과는 어질고 착하기는 하나 과단성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영안군은 막내 방석이 세자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 김씨에게 말했다.

" 잘 되었소. 그저 집안과 국가가 무사태평하기만을 바랄 뿐이오."

하고 긍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영안군 방과의 아내 김씨도 남편의 뜻을 잘 받드는 현숙하고 조촐한 성격을 가진 여인이었다.

"위화도 회군 이래에 강비마마의 공은 과연 크십니다. 혁명을 일으킨 군자금이 모두 다 강비마마의 친정댁에서 대어준 것이 아닙니까. 당신의 소생으로 다음 세대의 임금이 되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올시다. 잘 되었습니다. 임금의 자리란 과연 귀찮은 자리올시다."

부인 김씨도 남편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고려의 뒤를 이어 새 나라를 창업하는 데 기막히는 난관이 태산같이 가로막혀 있는 것을 총명 영리한 부인은 잘 아는 때문이다.

부인은 창업의 힘드는 일과 임금 노릇하기 어려운 것을 일일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역시 고려조정에 벼슬하여 지위가 높았던 장상의 부인이었던 때문이다.

고려의 옛신하들이 새 나라의 건국을 반대하여 절개를 지켜서 목숨을 버린 일이며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도피하는 선비들의 일을 똑똑히 보았다. 두문동 사건도 보고 왕씨네를 바다에서 죽이는 이야기도 들었다. 선비들이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고 장사치가 되어, 송도 일판의 경제권을 잡은 이야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 판국에 어질고 착한 자기 남편이 왕세자로 나간다는 것을 희망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영안군 방과는 아내 김씨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대신 배극렴이 장자가 세자가 못되는 경우에는 차자가 세자가 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배정승의 말대로 나에게 세자가 되라고 분부가 내리신들, 형님이 아니 받드신 세자자리를 내가 어찌 받겠소. 나에게 세자 자리가 와도 나는 받지 아니했을 것이오. 내 심경은 아버지도 버릴 수 없고, 형님도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괴로운 땅에 서 있소."

부인 김씨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들이 되어 어찌 아버지를 끊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고고하신 행동을 취하신 형님을 어찌 또한 나무랄 수 있습니까. 그대로 한평생 조신하게 지내시는 일이 현명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영안군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도 역시 형님과 같이 고려에 벼슬했던 대관의 한 사람이오. 형님처럼 아버지를 버리고 절개를 지키고 싶은 생각도 있었소. 그러나 그럴수록 내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나 매한가지 일이 아니겠소. 자식의 도리에 어찌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가 있단 말이오. 그대로 묵묵히 한평생을 보내면서 자식들이나 가르치는 일이 상책이라 생각했소. 부귀영화가 다 나의 소원이 아니오 부인도 항상 내 뜻을 받아 주시오. 이번에 세자책봉이 아니된 일은 하늘이 나를 도와주신 일이라 생각해서 만 번 다행한 일이오."

영안군 방과는 조용히 아내한테 회포를 풀어 심경을 말했다.

"복 받으실 말씀을 잘 들어 알았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복된 길로 항상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영안군 내외는 이같이 세자책봉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담담한 심경을 가졌다.

막내아들 방석으로 세자 책봉이 결정된 소식을 듣고 영안군의 집에서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별로 관심을 갖지 아니했다.

그러나 다섯째 왕자 정안군의 집에서는 불쾌하고 우울한 기운이 집안에 가득했다.

정안군의 부인 민씨는 궁중에 있는 나인을 통하여 정보를 먼저 들었다.

살에 있는 정안군을 청했다. 이때 정안군은 아버지가 공신들을 명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인가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깊이 관심을 갖지 아니했다.

아내가 비자를 사랑으로 보내어서 청하니 역시 별다른 생각을 갖지 아니하고 천천히 내당으로 들어갔다.

"왜 들어오라 했소?"

부인 민씨의 기색이 좋지 아니했다. 들어오는 남편을 향하여 하소연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매우 분개한 어조였다.

"왜 무슨 일이 있었소?"

소식을 모르는 정안군은 아내를 향해서 물었다.

"나리께서는 그것도 여태 모르고 계십니까?"

남편 정안군을 원망하는 말투였다.

"그것도 모르다니 밑도 끝도 없이 무엇을 모른단 말이오?"

"막내 아기씨로 세자책봉을 결정했다 합니다. 기막힐 일이 아닙니까?"

정안군도 비로소 깜짝 놀랐다. 뜻밖이었다.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소?"

"지밀에서, 상궁이 나와서 연통을 해주었습니다."

정안군은 반신반의했다.

"확실히 그같이 결정이 되었다 합디까?"

"결정되지 아니한 일을 상궁이 공연히 헛소리하러 나왔겠습니까. 나리께서는 왜 좀 공신들한테 부탁을 하지 아니하셨습니까?"

민씨는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남편에게 푸념했다.

정안군도 왈칵 역정을 냈다.

"그래, 날 보고 세자가 되게 해 달라고 공신한테 청을 하러 다니란 말요."

정안군은 눈을 부릅뜨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아내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 나라를 창업하신 이는 누구십니까? 나리께서 하셨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모든 구설을 혼자 도맡아 뒤집어쓰면서 일을 하셨습니다. 일도 양단으로 난마 같은 어지러운 정국을 혼자 수습하셨습니다. 이 나라는 나리의 나라올시다. 나리께서 당연히 다음 대의 국정을 맡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변고가 어디 있습니까? 속담에 죽 쑤어 개 좋은 일 한다는 말이 있더니 꼭 두고 맞혔습니다. 토 흘리는 어린이가 왕세자가 되다니 말이 됩니까. 도대체 공신이란 자들은 무엇들을 하고 있습니까. 모두 다 간신과 소인들이올시다. 나리께서도 부탁을 하셨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부탁을 하다니 세자책봉을 누구한테 부탁한단 말요. 나라를 창업한 것은 내 손으로 한 것인데 그까짓 공신들한테 왕세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란 말요. 하여튼 괘씸한 자들이오!"

정안군의 정기 있는 큰 눈은 반짝반짝 열을 뿜었다.

정안군 부인은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도대체 나리께서는 수단이 강비마마만 못하십니다."

"강비가 어떻게 했다는 거야?"

정안군은 계모 강비 소리만 들으면 눈살을 찌푸렸다.

"울었답니다."

"울다니, 어디서 울었단 말요?"

"아바마마와 대신들이 의논하고 계신 옆방에서 별안간 강비마마의 곡성이 낭자하게 일어나니, 대신들이 깜짝 놀라서 방석 아기씨로 세자책봉을 하겠다는 말씀을 허락했다 합니다."

"구미호같이 통곡전술을 썼구려. 하하하."

정안군은 기가 막혔다. 허탈한 웃음소리가 허파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래도 늙은 정승 배극렴이 그중 낫더랍니다. 장자가 세자가 아니되는 경우에는 차자가 세자 노릇을 해야 하고 차자가 세자 노릇을 아니하는 경우에는 국가를 창업한 데 제일 큰 공을 세운 왕자가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우겼더랍니다. 이때 돌연 협실에서 강비마마의 곡성이 일어났다 합니다. 그래서 배극렴도 당황해서, '막내 왕자로 세자책봉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합니다."

"낫기는 무엇이 낫소. 똑같은 위인들이지."

정안군은 뱉듯이 대답했다.

"장차 이 아니꼬운 꼴을 어찌 보고 지냅니까?"

정안군은 대답 없이 멀리 푸른 하늘가에 뭉게뭉게 떠 흘러가는 흰 구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 하인이 사랑에서 들어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가 오셨느냐?"

"민대제학 어른과 하학사가 오셨습니다."

민대제학은 장인 민제요, 하학사는 하윤이었다.

정안군은 반가웠다. 자기를 위로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술상을 한 상 차려 내보내오."

부인한테 이르고 사랑으로 나갔다.

정안군은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띠고, 장인과 하윤에게 물었다.

"어떻게들 오셨습니까?"

"자네가 보고 싶어서 왔네."

장인은 빙긋 웃고 대답하고, 하윤은.

"섭섭해하실까 보아서 빙장어른을 모시고 왔습니다."

빙긋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안군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시침을 뚝 뗐다.

큰 눈을 번쩍 뜨고 물었다.

"섭섭하다니 내가 섭섭할 까닭이 있소.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

하윤이 까르르 웃었다.

"... 하윤이 비록 눈이 무딥니다만은 관형찰색을 잘합니다. 나리가 겉으로는 웃지마는 지금 가슴속에는 열이 올라서 안광에 홍기가 돌고 계십니다. 하윤은 속이지 마십시오. ,,"

이때 안에서는 술상이 나오고 내실로 통한 침방에는 부인 민씨가 사랑에서 말하는 수작을 엿듣고 있었다.

정안군은 술상을 받아놓고 손수 술을 따라 장인과 하윤에게 권했다. 하윤이 황망히 술병을 뺏아서 정안군에게 술을 따르며 권했다.

"하윤이 먼저 나리께 권할 것을 나리께서 먼저 주시니 황감합니다. 자아 나리, 먼저 한 잔 잡수시고 천천히 이야기나 하십시다."

세 사람은 일제히 잔을 들어 술을 마시었다.

정안군의 장인 민제가 말을 꺼냈다.

"나도 막내 왕자로 세자책봉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좀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판인데 하학사가 찾아와서 같이 가자고 해서 함께 온 길일세."

"장인께서도 개국 공신인데 왜 이번 세자책봉을 의논하는 자리에 어찌 입시 하라는 명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정안군은 약간 빈정대는 어조로 장인에게 말했다.

"민대제학은 아무리 개국 공신이라 하나 정안군의 장인이 아닙니까. 나리도 참 딱하십니다. 정안군으로 세자책봉을 하는 자리가 아니고 막내 방석으로 결정하는 자리에 민대제학을 청할 리가 있습니까. 공연히 반대 의사나 표시하면 큰일이 아닙니까. 나리는 그것도 모르십니까. 하하하."

하윤의 말을 듣자 정안군도 빙긋 웃었다.

"그도 참 그렇구려."

하윤이 웃으며 말을 계속한다.

"제가 나리를 처음 뵈러 왔을 때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저 나리께서는 하고 싶으신 대로 행하시기만 하면 다 일이 된다고 하지 아니 했습니까. 하윤을 보통 돌팔이 관상쟁이로 대하시어서는 아니됩니다. 하하하. 다 때가 있습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꾹 참고 계십쇼."

구변 좋게 너스레를 치는 하윤의 말을 들은 정안군은 울적한 마음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했소. 꾹 참고 있으라니 별소리를 다 하는구려. 하학사도 무척 실없는 사람이구려. 하하하."

하윤은 또한 바탕 호탕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하 하 하. 하윤은 결코 실없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이래봬도 국가를 생각하고 천하를 근심하는 사람이올시다. 일이 없어서 나리를 찾아다니는 줄 아십니까? 천만에, 그렇게 생각하셔서는 아니됩니다. 하 하 하."

하윤은 말을 마치자 앞에 있는 술을 들어 쭈욱 들이마셨다. 정안군은 하윤을 믿음성스럽게 생각했다. 빙긋 웃으며 하윤의 얼굴을 지켰다.

하윤이 다시 발했다.

"막내 왕자 방석으로 세자책봉을 결정한 일은 오늘이올시다 마는 사실인즉 벌써 여러 달 전부터 바둑을 두기 시작한 일입니다. 강비마마께서 정도전에게 방석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을 때 이미 내정이 된 것입니다. 그때 제가 나리한테 말씀을 하지 아니했습니까. 조금도 놀라지 맙시오."

옆에서 하윤의 말을 듣고 있던 민제가 말했다.

"그래도 배극렴은 장자가 세자가 아니되는 경우에는 차자가 세자 노릇을 해야 하고 차자가 세자가 아니되는 경우에는 국가에 제일 공훈이 큰 왕자가 왕세자가 된다고 우겼답니다. 그런데 강비가 옆방에서 우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방석으로 정했다 합니다."

"배정승은 멍텅구리입니다. 벌써 다 짜고 하는 일인데 될 뻔이나 하는 소리입니까. 그저 당분간 입을 봉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막내 왕자의 운명은 길지 못합니다."

하윤은 의미 깊은 말을 한마디 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정안군은 듣고서 눈만 끔벅이고 앉았고, 민제가 묻는다.

"운명이 길지 못하다니?"

의아스런 얼굴로 하윤의 얼굴을 바라본다. 하윤이 음성을 낮추어 대답한다.

'강비의 얼굴은 기막히도록 아름답습니다. 연화부수형이올시다.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이란 말씀이올시다."

"연꽃이 물에 뜨면 얼마나 아름답고 좋겠소. 그런데 무엇이 어떻단 말요?"

인제는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물었다.

"기가 막히도록 아름답지요. 그러나 부귀영화가 자기 당대에 그치고 맙니다. 물에 뜬 연꽃은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아침에 아름답게 피었다가 저녁에는 벌써 시들어버립니다."

정안군은 여전히 듣고만 있다. 민제가 또 묻는다.

"그러면 강비의 수가 짧다는 말이구려. 그런데 세자 방석하고 강비의 수가 짧은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소?"

"허허, 일연탁생 아닙니까. 연꽃과 연꼭지는 연달아 있습니다. 천기를 더 묻지 마시오."

하윤은 얼굴빛을 정색하고 대답했다.

정안군은 입술을 꽉 다물고 여전히 듣고만 있다.

민제는 하윤의 '천기를 더 묻지 말라'는 말에 기가 질렸다. 더 묻지 못했다.

"자아, 하제학, 술이나 한잔 더 드시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하윤의 말만 듣고 있던 정안군은 술을 따라 하윤에게 권했다. 하윤의 말을 듣고 마음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하윤은 사양치 아니하고 술을 마시었다. 안주를 집은 후에 손바닥으로 수염을 씻으며 말했다.

"인제, 몇 해 아니 가서 왕도를 옮긴다는 천도설이 생길 것입니다. 천도를 한 후에는 수중연화는 가엾게 화판이 떨어지고 맙니다."

민제가 깜짝 놀라 묻는다.

"천도가 된단 말요?"

"그렇죠. 철통같이 단결된 송도 민심 속에서 대감들이 배겨나겠습니까? 자아, 인제 그만 하윤은 물러갑니다. 다음에 만납시다. 그저 입을 봉하고 가만히 계시오."

말을 마치자 하윤은 휘적휘적 밖으로 나갔다.

 

대왕의 백부 마침내 죽다

하윤이 돌아간 후에 정안군과 부인 민씨의 우울하고 불쾌한 마음이 한결 풀리기 시작했다.

대재학 민제도 딸과 사위를 위로한 후에 하윤이 말한 대로 침묵을 지켜서 몸조심을 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돌아갔다.

대궐 안에서는 막내 왕자 방석으로 세자를 책봉하는 의식이 아무런 지장 없이 순조롭게 거행되었다.

어린 왕자 방석은 붉은 강사포에 통천관을 쓰고 세자 책봉하는 옥책을 받았다.

부왕과 모후가 임허하고 대신들이 시립한 가운데 장차 다음 대의 왕이 될 광영스런 칭호와 책임을 어리고 약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방석 자신은 기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 몰랐다. 그러나 가장 만족하고 기뻐하는 이는 태조 이성계와 모후 강비였다.

강비는 한평생의 숙원이 막내아들 방석으로 세자책봉을 하는 이날에 완전히 성취되었다. 임금의 아내요 왕세자의 어머니였다.

기쁜 마음은 마치 푸른 하늘을 펼쳐 놓은 듯 가이없었다.

대신과 백관에게는 사찬을 내리고, 정도전에게는 정식으로 왕세자를 보육하는 동궁태부의 칭호를 주었다.

새 나라에는 처음으로 동궁이 생기고 동궁의 직제가 반포되었다.

한동안 궁중은 축복과 환희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기쁜 중에도 태조 이성계의 마름 한편 구석엔 큰아들 방우의 종적을 감춘 일에 대해선 마음이 괴롭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천륜은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동궁이 설치된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태조는 승지를 불렀다.

"그동안 진안대군 방우의 종적을 알아보았느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명색 과인의 장자요 진안대군인데 승지된 사람들이 아직껏 종적을 알아보지 아니했다하니 말이 되느냐. 그래 내가 알아보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서 알아보는 것이 옳단 말이냐."

"황공무지하옵니다. 그동안 세자 책봉하는 예식으로 인하와 분망 중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승지는 황공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팔도 감사와 수령에게 영을 내려서 방우의 종적을 알아보도록 하라."

승지는 봉명하고 물러갔다.

상감의 특명이었다. 승지는 팔도 감사와 수령에게 파발마로 달려서 진안대군의 종적을 찾았다.

그러나 변성명을 하고 삿갓 쓰고 나간 진안대군의 종적은 아득히 알 길이 없었다.

정원에서는 진안대군의 모습을 환치는 화공에게 그리게 하여 팔도를 돌렸다.

황해도 구월산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 강원도 철원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후의 종적은 모른다는 것이다.

진안대군이 남쪽으로 가지 아니하고 동북쪽에서 방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원에서는 동북쪽으로 주력을 써서 찾기로 했다.

조정에서 진안대군의 행방을 수소문한 지 거의 반년이 지났다.

함흥 귀줏골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선비 한 사람이 함경관찰을 찾았다.

"나라에서 찾고 있는 상감의 큰아들 진안대군이 고향으로 돌아와 있는데 감사는 그것도 모르시오."

관찰사에게 알려주었다. 이때 함경 감연은 함흥에 있었다.

진안대군이 함흥에 내려와 있는데, 함경관찰이 몰랐다는 것이 커다란 실수였다. 함경관찰은 깜짝 놀랐다.

"어느 때 대군이 함흥으로 내려오셨단 말씀요."

"벌써 여러 달 전이외다."

선비는 웃으며 대답했다.

함경관찰은 또 한 번 놀랐다.

"어떻게 우리들 관변이나 민간에서 몰랐던 말씀요. 황송하기 짝이 없구려."

"변성명을 하고 세 식구가 내려와서 귀줏골 농촌에 파묻혀 있으니 알 까닭이 있소. 열 살이 채 못되어서 아버지를 따라서 송도로 올라갔으니 알 사람이 있소. 나는 어렸을 때 이 방우하고 서당에서 천자문을 같이 배운 일이 있소. 그래서 얼굴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해서 차츰차츰 옛이야기를 하다가 비로소 이 삶이 변성명을 하고 지내는 이방우인 것을 알았소."

함경관찰은 조정에서 진안대군의 종적을 수소문하라는 공문과 용모파기를 나타낸 화본을 받았으나, 설마 진안대군이 상감의 발상지인 고향으로 패해 오리라고 염두에도 두지 아니했다. 다만 인사조로 진안대군의 행방을 찾은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준다고 반포하고 화본 그림은 돌리지 아니했던 것이다.

감사는 벽장문을 열고 서울서 보낸 진안대군의 화본을 선비에게 보였다.

"어떻소. 이 화본과 틀림이 없소?"

"영락없소이다. 의복이 다를 뿐이지, 바로 그 사람이오."

선비는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식구는 세 식구가 확실합디까?"

"틀림없소. 귀줏골 산밑 외딴집에서 지내는데 형편이 불성모양요. 그런 중에 방우는 술타령만 하고 지낸다 하오."

함경관찰은 자기가 곧 가서 진안대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섣불리 갔다가 피해가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호방을 시켜서 선비와 함께 귀줏골로 가서 집을 알아두라 하고 곧 송도로 파발마를 달려 이 사실을 고했다.

정원에서는 함경감사의 장계를 태조께 올렸다.

"고향으로 돌아갔구나."

태조는 한마디 하고 만 가지 회포가 가슴속에 구름일 듯 일었다.

어전 내시를 불렀다.

"진안대군이 함흥 귀줏골에 변성명을 하고 산다 한다. 네가 직접 내려가 보아라. 틀림없거든 함경관찰에게 명해서 내 소유로 있던 함흥 일판에 있는 전답을 방우에게 주어 제사를 받들고 생계를 유지하도록 해주어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나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지극한 정리였다.

내시는 명을 받들고 곧 함흥으로 내려갔다.

함흥관찰을 만나보곤 태조의 명을 전했다. 함흥관찰은 칙사와 함께 집을 알아두었던 호방을 앞세우고 귀줏골에 숨어 사는 진안대군을 찾았다.

귀줏골 중에도 그중 깊숙한 산골 속이었다. 빈농들만 살고 있는 한촌에 별안간 칙사와 관찰사의 행차가 들어가니 몇 집 아니되는 촌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서 관원들의 행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호방은 함경관찰에게 진안대군 방우의 피해 사는 집을 가리켰다.

"바로 저기 보이는 산밑의 오두막 초가올시다."

관찰사와 칙사가 바라보니 다 쓰러져가는 일가 초가에 삽작문이 달린 형편없는 집이었다.

관찰사와 칙사는 벽제 소리를 그치게 하고 자비에서 내렸다. 천천히 삽짝문 앞에 당도했다.

안에서는 적적히 인기척이 없었다.

관찰사는 호방을 시켜서 삽짝문을 두드리게 했다.

얼마를 두드리고 나니 떠꺼머리 총각이 나타났다.

상감인 태조의 장손이요 진안대군의 단 하나인 아들인 복근이었다.

관원들의 행차를 보자 복근의 눈은 둥그렇게 떠졌다.

"뉘 집을 찾소?"

물었다.

서울서 내려간 칙사는 복근의 얼굴을 잘 알았다.

급히 총각 앞으로 가까이 갔다.

"아기씨,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상감마마의 명을 받들어 내려왔습니다."

복근은 아버지의 피해 사는 뜻을 알았으나 칙사인 내관한테 들켰으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발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한테 고했다.

"서울서 칙사가 내려오고, 읍에서 관찰사가 나왔습니다."

진안대군 내외는 깜짝 놀랐다 .

"서울서 어떻게 내가 이곳에 숨어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칙사인 내관과 관찰사는 삽짝문 안으로 들어섰다. 진안대군이 만나지 아니하고 몸을 피할까보아 들어오라는 기별이 있기 전에 결례를 무릅쓰고 안마당으로 들어선 것이다.

대군 부인은 도랑치마를 입고 급히 북창 밖으로 몸을 피하고, 진안대군은 상투 바람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뜰 아래서 칙사와 관찰사가 허리를 굽히고 문안을 했다.

"상감마마의 칙명을 받들어 내려왔습니다."

관찰사도 문안을 드렸다.

"대군께서 소인의 관하에 계신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태만한 죄가 크옵니다."

진안대군은 이미 발각이 된 이상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오르시오."

칙사와 관찰사를 마루 위로 청했다.

칙사와 관찰사는 마루에 올라 다시 예를 마친 후에 칙사는 품안에서 태조가 내린 전교를 꺼냈다.

"전하께서 대군께 교지를 전하라 하였습니다. 함흥에 있는 모든 논과 밭을 모두 다 대군께 드려서 생계를 하게 하시고 봉제사 접빈객을 하라 하셨습니다."

진안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간 두옥에 내 생활이 족한데, 크나큰 전장이 나한테 소용이 없소. 더구나 봉제사 접빈객은 종묘가 있는데, 내가 따로 거행할 까닭이 없소. 나는 이미 세상을 등지고 나온 사람이니 과히 근심하지 말라 아뢰오."

진안은 담담히 대답했다.

"대군께서 나오신 후에 전하께서는 매우 걱정하셨습니다. 하는 수 없어 막내 아기씨에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시고도 항상 대군을 생각하시었습니다. 그리하여 팔도에 영을 놓아 대군이 계신 곳을 수소문하였습니다. 다행히 함경 감영에서 장계가 올라와서 대군이 계신 곳을 알았습니다. 함흥 고기에 게신단 말씀을 듣고 이같이 별은전을 내리셨습니다. 전하의 뜻을 순하게 받아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안대군은 칙사의 말을 듣자 얼굴빛이 더울 좋지 못했다.

"방석이 세자가 되었구려!"

한마디를 할 뿐 다시는 더 말이 없었다.

칙사가 전교를 진안에게 전하려 하니. 진안은 받지 아니했다.

"내 생계는 전하께서 걱정하지 말라 아뢰시오. 그리고 나는 진안대군이 아니니 나한테 대군이란 칭호로 부르지 마오. 나는 고려에 벼슬했던 망국대부요."

진안은 말을 마치자 다시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칙사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세자의 직위까지 버리고 몸을 피해 나온 진안에게 함흥에 있는 수천 수만 섬의 추수하는 전장을 받으라고 해도 받을 리가 없을 것을 알았다. 더 앉아서 권해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칙사는 관찰사에게 눈짓을 하고 전교를 거두어 품안에 넌 후에 진안에게 물러가는 인사를 고했다.

"이제 계신 곳을 알았으니 위에서 안심이 되시겠습니다. 다시 또 문후를 아뢰겠습니다."

관찰사와 함께 진안의 짐에서 나왔다.

칙사는 감영으로 돌아온 후에 관찰사와 상의했다.

"송도로 올라가서 진안이 전교를 아니 받았다 전하면 전하께서 크게 노하실 것이 분명하오. 나는 올라가서 교지를 잘 전했다고 아뢸 테니 관찰사는 함흥에 있는 전답 일체를 잘 관리해서 진안대군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해 주시오."

총총히 부탁하고 송도로 올라갔다. 진안은 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칙사한테 들은 후에 날마다 안주 없는 소주를 마시었다.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했고나!"

푸념을 하면서 소주를 마시었다.

방석이 세자가 된 지 일 년이 채 못 되어서 태조의 장자 방우는 독한 소주를 마신 것이 빌미가 되어 이내 함흥에서 세상을 버렸다.

진안대군이 죽었다는 부음이 함흥에서 송도로 전해왔다.

진심으로 슬퍼하는 이는 오직 아버지 태조가 있을 뿐이었다.

"사흘 동안 조정의 공무를 보지 말고 칙사를 함흥으로 보내서 후하게 장사지내 주어라."

태조는 큰아들이 자학해서 죽은 심경을 잘 알았다. 바른길을 밟아서 영원히 타계로 떠나간 아들을 밉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역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자애의 정이 움직였던 것이다.

칙사는 함흥에서 장사를 치르고 돌아왔다.

태조는 칙사에게 물었다.

"복근이는 어찌 지내더냐?"

"군부인과 함께 함흥에 있습니다."

"아비도 없는 어린것이 과부와 함께 어찌 지내겠느냐. 다시 가서 서울로 데려오너라."

태조는 큰손자 복근을 함흥 구석에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칙사는 다시 함흥으로 내려가 복근과 그의 어머니 지씨를 송도로 데리고 올라왔다.

복근은 아버지의 상복을 입고 대궐로 들어가 울면서 조부께 뵈었다.

태조는 측은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승지를 불러 분부했다.

"복근에게 진안군의 군호를 주어 습작하게 하고 한 달에 백미 열 섬씩을 주어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라."

정원에서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호를 습작하고 다달이 쌀 열 섬씩을 보냈다.

얼마 후에 복근은 함흥에 있는 아버지의 풍덕으로 이장했다. 함흥은 너무나 거리가 멀고 풍덕에는 태조의 전취 한씨의 능이 있는 때문이다.

이리하여 태조의 큰아들은 건국에 협조하지 않고 죽었다.

 

천도

태조 이성계는 새 나라를 차지하여 조선 천지를 호령하는 제왕의 자리에 앉았으나, 항상 마음은 쾌활하지 못했다.

더욱이 큰아들 방우가 군호를 받지 아니하고 몸을 피하여 방랑생활을 하다가 이내 독한 술로 세월을 보내며 자학해 죽은 후부터 마음은 더한층 괴로웠다.

고려의 신하와 선비들이 자기를 의 아닌 사람으로 대접하여 벼슬을 받지 아니한 모든 일도 가슴이 아픈 일인데, 집안의 큰아들까지 자기를 옳지 않게 생각하고 자학해서 죽는 꼴을 당하고보니 마음은 더한층 괴로웠다.

마음이 괴로우니 신기가 좋지 못했다. 심신이 불안하니 밤마다 악한 꿈만 꾸어서 잠자리가 사나웠다.

경덕궁 대궐은 공민왕이 쓰던 대궐이요, 그의 아들 우왕이 쓰던 대궐이요, 그의 아들 창왕이 쓰던 대궐이요, 자기가 추대했다가 내쫓은 공양왕이 쓰던 대궐이었다.

자기가 바로 이 대궐에서 신하가 되어서 모든 임금께 날마다 조회해서 나랏일을 품하던 곳이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자리가 거북했다. 등 뒤에서 죽은 귀신들이 잡아 내리는 듯했다. 소름이 쭉 끼쳤다. 자기가 죽인 창왕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느 날 태조는 밤에 꿈을 꾸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왕씨네 귀신들이 온몸에 물을 쪽 흘리고 바다서속에서 뛰어나왔다. 수백 수천의 왕씨들이었다.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총각아이도 있었다.

모두 다 머리를 흐트려뜨려 산발하고 태조한테로 덤벼들었다.

"내 목숨을 내놓아라!"

"죄 없는 우리들을 왜 죽였느냐? 네 자식들을 잡아갈 테다!"

소리치며 멱살을 잡았다.

이성계의 온몸에는 진땀이 쭉 흘렀다.

홀연 운무가 자욱한 속에 화광이 충천하게 일어났다.

불길이 활활 붙는 속에 '두문동' 세 글자가 뚜렷하게 보였다. 태조는 깜짝 놀랐다. 몸을 피하려 할 때 칠십이 인의 두문동 선비들이 아귀 형상을 하고 몽둥이와 삽을 들고 달려들었다.

"이놈 이성계야, 잘 만났다. 너를 초열지옥 속으로 끌고 가야 하겠다."

칠십이 인은 한꺼번에 고함을 치며 내달았다. 태조 이성계는 '---' 소리를 치고 몸을 뒤틀었다.

옆에서 자리를 같이하고 있던 왕후 강씨는 태조의 외마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었다.

옆자리를 돌아다보니, 상감이 가위를 눌린 모양이었다.

태조가 눈을 떠보니 옆에 강비가 있었다.

태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웬일이십니까? 무슨 꿈을 꾸셨기에 그다지 놀라셨습니까?"

"말두 말어, 말두 말어. 아주 무서운 꿈을 꾸었소."

밤은 이미 자정이 넘었다. 민첩한 강비는 급히 문갑서랍을 열고, 청심환을 물에 개어 태조의 입에 흘려 넣었다.

태조의 온몸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한동안 후에 태조는 황홀한 심신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무슨 꿈을 꾸셨기에 그다지 놀라셨습니까?"

강비는 조용히 물었다.

태조가 비로소 꿈 이야기를 했다. 강비의 등에서도 소름이 쭉 끼쳤다.

"암만해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비는 태조의 등을 쓸며, 서울을 옮기자고 주장했다.

태조도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 옛 왕도와는 연이 다했을 뿐 아니라 이탈된 민심을 도저히 수습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신이 불안해서 마음의 안정을 가질 길이 없었다.

태조는 이튿날 백관의 조희를 받은 후에 대신들을 편전에 불렀다.

"과인이 경들의 협찬을 얻어서 왕위에 나간 지 이미 이태가 지났다. 송도가 비록 좋다하나 이미 고려 왕실이 사백 년의 기업을 닦아서 국운이 쇠퇴해진 곳이다. 새 나라의 새로운 기풍을 지속시키고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자면 수도 서울을 딴 곳으로 옮기는 일이 가할 듯하다.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봉화백 정도전이 아뢴다.

"전하의 성의가 극히 옳으십니다. 모든 국정을 새롭게 하고 새로이 국가를 창업하시는 이때 구태의연하게 옛 수도를 지키는 것보다 민심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조는 정도전의 찬성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흡족했다.

"그렇다면 어느 곳이 좋을꼬?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이요, 경주는 신라의 구기요, 부여는 백제의 옛 도읍이었다. 좀 더 북으로 나가서 고구려의 옛 도읍 요동벌이 있으나 이제는 여진과 야인들의 영토가 되었다. 수도로 종하기 요원한 일이다. 어느 곳을 택하는 것이 좋을꼬?"

정도전이 대답한다.

"송도의 기수가 다하여 도성을 옮기는 이 마당에 하필 신라와 고구려나, 백제의 옛도읍을 회상할 까닭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이 새 터전을 물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성백 심덕부가 아뢴다. 청성백은 약간 풍수에 조예가 있었다.

"충청도 계룡산 아래 신도를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계룡산은 공주 부근이 아닌가?"

태조는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심덕부에게 물었다.

", 그러합니다. 계룡산은 옛 도읍 공주의 동남편 사십 리밖에 있는 명산입니다. 전라도 마이산맥이 줄다름쳐 오다가 불끈 솟아서 이룩된 영산입니다. 금강이 띠같이 흘러가고 그 남편에 산 한 줄기가 서편으로 달리다가 잠깐 끊어지는 듯 다시 솟아, 판치 고개가 되어 월서산이 되고, 금강이 동에서부터 북으로 흐르다가 다시 남편으로 꺾여서 부여 백마강과 합류하여 강경이 된 후에도 한 번 서편으로 흘러서 바다로 흘러갑니다. 계령산 등뒤에 고개를 넘어 유성 평야가 되어 곧 계룡산의 간방이올시다. 계룡산 남편에 넓은 들이 있고 평야 서편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은 진산의 옥계와 합류되어 북으로 금강으로 들어가니, 이 내 이름을 갑천이라 합니다. 동에는 회덕이요, 서에는 진잡이 있습니다. 동편, 서편 두 산줄기가 남북으로 둘러싸안아 서산이 되어 넓은 들을 껴안았고, 구봉산과 보문산이 남편에 솟아 마치 신하가 임금께 조회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심덕부의 계룡산 칭찬에 입이 벙긋벙긋 벌어졌다.

심덕부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게룡산 아래 쌓여 있는 맑고 온화하고 밝은 기상은 천하일품의 대지올시다. 새로 나라의 수도를 정하기 가장 적당한 곳이올시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십시오."

천하일품의 땅이요, 억천만 대까지 영광과 복록이 유지될 수 있다는 심덕부의 말을 듣자 이성계의 마음은 흐뭇했다.

"과인이 한 번 친히 가서 보고 결정하리라."

태조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한 사람이 반열에서 나와 아뢴다.

모두 보니 재상 육관이었다.

"신의 생각에는 계룡산보다 한양이 수도 서울로 가장 적당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도선비기에 고려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를 사람은 이씨인데 도읍을 한양에 정하리라 했습니다. 이 까닭에 여조에서는 오얏나무를 많이 심고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후에는 도끼로 찍어서 기운을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동네 이름을 벌리라고 했답니다. 과연 도선의 비기는 맞았습니다. 전하께서 오얏리자 이씨입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시는 일이 마땅합니다."

태조는 유관이 말하는 도선 비기의 이야기를 듣자, 한양으로도 마음이 솔깃하게 쏠렸다.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계룡산 도읍을 주장했던 심덕부가 한양 천도를 반대했다.

"한양은 본시 고구려 북한산군이올시다. 나중에 백제 온조왕이 이 땅을 차지하여 성을 쌓았고 그 후에 근초고왕이 남한산에서 이것으로 옮기었습니다. 백오 년 동안 백제의 서울이 되었다가 분즈 왕 때에 공주로 옮겼던 것입니다. 다음에 신라 진흥왕은 북한산에 친히 거둥하여 순수비를 세워서 국경을 확장시켰고 경덕왕 때는 한양군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고려에 와서 양주로 이름을 바꾸었고 문종 때에는 이 땅을 중요하다고 하여 남경유수를 두었습니다. 충숭왕 때는 오선대사의 비기에 의하여 남산에 토성을 쌓고 충숭왕은 친히 한양에 가서 지세를 살핀 후에 이궁을 지었고 충렬왕때는 한양부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말하자면 한양은 고구려, 백제, 고려 때부터 도읍이 되었던 곳이죠, 계룡산 아래와 같이 새로운 기운이 발랄하게 나는 처녀지가 아니올시다. 만약 새로 서울을 정하신다면 계룡산과 같이 새로운 기운이 가득한 곳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한양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은 천도하는 이유가 되지 아니합니다. 전하께서는 삼천리강산에 군림하신 제왕이십니다. 어느 것이 전하의 땅이 아니겠습니까. 삼천리강산에 오얏나무가 고루 고루 무성해야 할 것입니다. 한양 땅에만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은 되지 않는 소리올시다."

태조 이성계는 심덕부의 한양 땅을 반대하는 말을 듣자, 새로운 기운이 가득하다는 계룡산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계룡산

태조는 모든 신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계룡산을 둘러본 후에 결정하리라."

태조는 곧 거둥령을 내렸다.

"민폐를 끼쳐서는 아니 된다. 약식으로 행동을 취할테아. 모든 절차를 생략하라."

태조는 다시 승지에게 분부했다.

승지는 명을 받들어 계룡산 거둥 준비에 분주했다.

환갑을 바라보는 육십 가까운 태조 이성계는 아직도 강장했다. 남정북벌로 한 평생이 전쟁에서 단련된 몸이었다. 계룡산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자고 주장한 청성백 심덕부와 시종 서너 사람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계룡산으로 향했다. 임진강을 건너고 한양을 지나서 삼람길로 들어서서 한밭을 거쳐서 계룡산에 당도했다.

금강은 띠를 둘러존 듯 평야를 둘러 흐르고 계룡산은 아침빛을 뿜어 푸른 반공에 솟아있었다. 멀리 바라보니 푸른 산은 영기를 뿜는 듯하고 가까이 보니 구름과 안개속에 푸른 산은 영기를 뿜는 듯하고 가까이서 보니 봉우리마다 장엄한 기상을 띠어 부드러으면서도 웅장하고, 씩씩하면서도 화환 기운이 가득했다. 태조는 바라보면서 찬탄했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계룡산 천도설을 주장했던 심덕부의 어깨가 으쓱했다.

"보십쇼, 어떻습니까. 계룡산을 진산으로 하고 남면을 향하여 대궐을 앉힌다면 앞에는 평원광야가 백 리에 뻗어 있고 그 밖으로 금강이 띠같이 둘러 흐릅니다. 배들이 왕래하여 수도로 물화를 운반하기 좋고 산세가 병풍같이 둘러싸여 방풍향양의 천명하구올시다. 과연 제일강산입니다. 아래는 논뫼와 강경평야가 있고 다시 호남의 곡창지대를 껴안았으니 더할 나위 없는 수선의 땅이올시다."

태조는 곧 계룡산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한번 원근을 살핀 후에 송도로 돌아와 영을 내렸다.

"계룡산 아래 신도를 정하리라. 선공감에 영을 내려 왕궁을 창설하고 정부의 관아를 세울 역사를 시작하게 하라."

선공감에서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관원들이 계룡산으로 향했다.

나라 안에 제일가는 목수와 석공들을 뽑았다. 석재를 다듬고 목재를 다루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의 수도를 건설하는 게 큰일이었다. 천년만년이 가도록 튼튼하고 장엄한 궁성과 도읍을 건축하여야만 했다.

다시 거둥령을 내렸다.

"국도를 정하는 일은 중대한 일이다. 과인이 친히 가서 감역하리라."

태조는 모든 정사를 대신들에게 맡긴 후 다시 심덕부와 시종들을 거느리고 계룡산으로 향했다.

송도에 있는 조야의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수도가 계룡산 아래 확정되는 줄 알았다.

계룡산 신도 터 안에는 크나큰 역사가 벌어졌다.

산을 뭉개고, 언덕을 깍아내렸다.

남향판으로 향하여 넓고 넓은 대궐 터를 닦았다. 심덕부는 풍수에 통달한 지사들을 불러서 쇠를 띄워놓고 방위를 정했다.

목수들은 천년 묵은 유주목을 베어 궁궐을 건축할 들보와 도리며 서까래 감을 치목하고 석수들은 산에 올라 돌을 떠서 주춧돌 감을 마련했다.

충청도, 전라도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밥은 먹여주나 나라를 위한 부역이었다.

고을마다 장정을 뽑아서 번차례로 부역을 하게 했다.

목도꾼들의 '어야' 소리는 메아리를 지어 끊어질 사이가 없었고 나무를 베는 도끼질 소리와 재목을 다루는 연장 소리에 노루와 토끼들은 놀라 뛰었다.

태조 이성계는 임시로 행궁을 정하고 날마다 역사를 살피고 있었다.

나라를 창업하여 새로 도읍을 정하고 새로 궁궐을 지음은 기쁜 일이었다. 마음이 흡족했다.

고단한 줄도 모르고 날마다 간역을 했다.

집을 짓는 데는 정초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대궐 전각의 기둥이 설 곳마다 구덩이를 깊게 파고 지정을 다지기 시작했다.

부역 나온 충청, 전라도의 인부들은 '얼럴레 상사디야' 소리를 높이 부르면서 이 대궐을 지은 후에 천년만년 요지일월에 순지건곤이 되어 국태민안하라고 노랫가락을 부르며 흥겹게 지정을 다졌다.

태조 이성계는 백성들의 덕담 속에 흥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구덩이 한 곳을 다질 때마다 상급으로 무명과 베를 수십 필씩 던져 주었다.

임금이 친히 간역을 하면서 상급을 내리니 부역하는 인부들은 더한층 신명이 높았다. 노랫가락으로 덕담을 높이 부르며 지정을 다지고 주춧돌을 높이 쌓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주춧돌을 놓기 시작했다.

정전 주춧돌을 십여개 놓고 난 한밤중의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연일 역사를 친심한 끝에 몸이 고단했다. 임시로 정한 행궁 안에서 전날 밤과 같이 잠을 자고 있었다.

홀연 한 노인이 계룡산 푸른 산줄기를 타고 내려와 태조의 앞에 나타났다.

눈같이 흰 호호백발의 머리와 자가 넘는 긴 수염을 늘였다. 청려장을 천천히 끌고 오다가 태조의 앞에 읍했다.

태조는 신인과 같은 백발노인의 풍채를 보자 공경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황망히 노인을 향하여 답하는 읍을 보냈다.

백발노인은 미소를 풍기며 태조에게 말을 보냈다.

"전하께서 새로운 도성 터를 잡기 위해 계룡산까지 친림하시니 계룡 일대의 광영이올시다."

태조도 미소를 풍기며 백발노인한테 대답했다.

"과인이 나라를 창업한 후에 민심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팔도강산 중 좋은 곳을 택하다가 계룡산 이곳이 국도가 될 만하기에 신도를 정하기로 했소. 노인은 좋은 지시를 주기 바라오."

백발노인은 자가 넘는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전하께서 영용무비한 신무의 기상을 가지시어 새로 국가를 창업하시니 경하하는 마음 비길 길 없소이다. 이제 앞으로 전하의 자손은 반천 년의 기업을 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계룡산은 전하께서 도읍하실 곳이 아니올시다."

태조는 깜짝 놀랐다. 노인한테 물었다.

"과인이 정할 국도가 아니라니 무슨 말씀요? 조선 천지가 다 과인의 관장에 속했는데, 계룡산이 과인의 국도를 정할 땅이 아니라 하니 무슨 말씀요?"

노인은 소리를 높여 껄걸 웃었다.

"전하께서 한 번 제왕이 되신 후에는 보천지하가 막비왕토올시다. 계룡산도 말할 것 없이 물론 전하께서 관장하시는 땅이올시다. 그러나 지덕과 인덕이 서로 회합해야만 오랜 기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전주 이씨가 도읍을 정하실 땅이 아닙니다. 억지로 도읍을 정하시는 날은 만사불성이올시다."

태조는 만사가 이룩되지 않는단 말에 더한층 놀랐다.

"푼수와 지리에 밝은 사람들이 모두 다 좋다 할 뿐 아니라 평야가 광활하고 강물이 띠같이 둘러 있어 나라의 수도가 될 만한데 노인은 어찌하여 도읍 터가 아니라 하오?"

노인은 또 한 번 웃었다.

"도읍 터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곳도 훌륭한 도읍 터올시다. 그러나 전하와는 인연이 없습니다. 지덕은 좋으나 인덕이 맞지 아니합니다, 신라는 서라벌에 도읍하여 천유여 년의 기업을 닦았고 고려는 송악에 도읍하여 사백여 년의 왕통을 유지했습니다. 땅과 사람의 인연이 맞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신다면 이씨의 왕조가 장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더 한층 놀랐다.

다시 노인을 향하여 물어보려 할 때 백발노인은 소매를 흩날리며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깜짝 놀라 깨니, 행궁 어두컴컴한 방 안에 옥등잔 불빛만 깜박거렸다.

꿈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등에 땀이 흘렀다. 꿈은 꿈이지만 보통 꿈이 아니다. 확실히 계룡산 산신령이 계시를 내린 것이 분명했다.

이씨네와는 연이 없고 왕실의 복이 길지 못하다는 말에 마음이 걸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꿈에 나타났던 노인의 이야기는 아직도 귓가에 쟁했다. 생시와 같이 역력했다. 태조 이성계는 한밤중에 꿈을 꾼후에 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고스란히 밤을 밝혔다.

태조는 이튿날 계룡산 아래 신도 터를 총지휘하는 청성백 심덕부를 어전에 불렀다.

"과인은 오늘 송도로 돌아가겠소."

심덕부는 무심하게 생각했다. 여러날 동안 친히 역사를 감독하던 전하가 국정을 살피기 위하여 송도로 돌아가는 일은 조금도 괴이쩍은 일이 아니었다.

"여러 날 동안 정사를 살피지 아니하셨으니 환가하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신이 이곳에 있어 면밀하게 일을 보살피겠으니 전하께서는 안심하시고 다녀오시옵소서."

"청성백도 역사를 중지하고 곧 송도로 돌아오라. 국도를 다른 곳으로 선택하리라."

심덕부는 깜짝 놀랐다.

"웬 하교십니까? 역사를 중지하시다니?"

태조는 꿈 이야기를 하지 아니했다. 신인의 계시를 함부로 말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구려."

간단히 대답했다.

심덕부는 기가 막혔다. 어제까지도 전하는 마음이 흥락해서 주추 구덩이에 지정을 다질 때마다 부역하는 백성들에게 베와 명을 수십 필씩 상급했던 것이다. 별안간 영문을 알 도리가 없었다.

"전하의 대지올시다. 이 좋은 곳을 버리시고 어디 다른 곳을 구하려 하십니까. 터가 아깝습니다. 그리고 부역 나온 백성들을 바라볼 낯이 없습니다."

"백성들한테 미안하기 짝이 없소. 그러나 어찌하겠소. 과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부역 나온 백성들에게는 후하게 노자를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오."

심덕부는 기가 막혔다. 맥이 탁 풀렸다. 그러나 왕명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도성 터가 아깝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마음에 들지 아니하신다 하오니 어찌합니까. 하교대로 역사를 중지하고 부역 나온 백성들을 돌려보내겠습니다."

심덕부는 왕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이날 태조는 측근 시종을 거느리고 계룡산을 떠나 송도로 돌아갔다.

태조가 환가한 후에 심덕부는 신도 역사를 중지한다는 명을 내렸다.

중지 명령을 듣고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전라, 충청 두 도에서 부역으로 나온 백성들이었다. 몇 달이 될지 몇 해가 될지 모르는 신도 역사에 마지못해서 끌려왔으나 고향산천과 부모 처자가 그리웠다. 모두 다 춤을 추면서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룡산 아래 대궐터를 건축하려던 역사는 주춧돌만 논 채 중지되었다. 나라 사람들은 이곳을 '신도안'이라고 불렀다. 오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룡산 아래 신도안에는 주춧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청성백 심덕부는 신도 역사를 중지한 후에 무료한 얼굴로 송도로 돌아왔다.

 

고승 무학

조정에서는 대신 이하 백관들은 새 나라의 새 도읍이 계룡산 아래로 정해지는 줄 알았다.

전하가 친림해서 역사를 간검하여 대궐 터를 정하고 주추까지 놓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송도의 왕도가 충청도 계룡산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알았다.

조정뿐 아니었다. 왕실과 모든 왕자들도 서울이 충청도로 가는 줄 알았다.

왕후 강씨도 크게 관심을 가졌다.

세자 방석을 데리고 새로 대궐 터를 닦는 계룡산 구경을 가리라 생각했다.

대왕의 행차가 돌아오자 왕후 강비는 반갑게 대왕을 맞이했다.

"대궐 역사를 친감하시느라고 용안이 그을으셨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하셨습니까."

"고생이 될 것 있소. 유쾌했소. 백성들이 괴로운 줄도 모르고 힘을 다하여 부역해주는 모습을 보니 송도의 인심과 달라서 마음이 기뻤소."

"충청도 사람들은 대단히 부드럽다 합니다. 앞날을 위하여 기쁜 일이올씨다."

강비는 벅찬 희망에 마음이 흥락했다. 화사한 웃음을 얼굴에 띠고 말했다.

"그러나 아까운 일이오마는 역사를 중지하고 올라왔소."

강비는 놀랐다.

"웬일이십니까? 도읍 터도 좋고 백성들의 인심도 좋다시면서 왜 역사를 중지하고 올라오셨습니까?"

강비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대왕께 물었다.

"이씨가 도읍을 정할 터가 아니라는구려. 우리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대궐을 짓는다면 왕조가 길치 못하다 하니 하는 수가 없어 가석한 일이지만, 그래서 역사를 중지시키고 돌아온 길이오."

강비는 눈이 둥그레졌다.

"누가 그런 말씀을 아뢰었습니까?"

"꿈에 선인이 나타나서 계시를 주었소."

태조는 강비에게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계시를 주던 이야기를 일장 설파했다.

강비도 등에 소름이 끼쳤다. 왕조가 길치 못하다는 곳에 도읍을 정하라고 우기는 수는 없었다.

"길하지 못하다는 곳에 도읍을 정하실 까닭은 없습니다. 천천히 길한 땅을 가려서 다시 터를 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편 태조를 위로했다.

조정에서도 며칠 뒤 심덕부가 돌아온 후에 비로소 계룡산 역사를 중지한 것을 알았다.

신하들은 또다시 한양이 좋다는 둥, 평양이 좋다는 둥, 장단 적벽이 좋다는 둥 공론이 부산했다.

태조는 계룡산을 포기한 후에 마음이 답답했다. 백 가지로 생각해보아도 송도를 떠나야 할 텐데 도읍 터를 결정하지 못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음식도 맛이 없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강비는 총명 영리했다. 홀연, 번뇌에 싸인 태조한테 아뢰었다.

"전하께서 소시 때 왕이 되실 것을 해몽했던 무학이란 중이 있지 아니합니까. 왕이 되실 것을 몇십 년 전에 예언했으니 기막힌 고승이올시다. 막중한 국도를 정하는 일에 어찌해서 이런 고승을 찾아서 문의하지 아나하셨습니까?"

태조는 강비의 말을 듣고 황연히 깨달았다.

"아 참, 잊었구려. 까맣게 무학을 잊었구려."

태조는 기쁜 빛이 용안에 넘쳐흘렀다.

"전하께서도 인정이 너무나 없으십니다. 즉위하신 직후에 무학을 초빙해서 왕자나 국사를 봉하실 일이지 너무나 박정하셨습니다."

강비는 미소를 머금고 전하를 야유했다.

"과인이 어찌 무학의 공을 잊겠소만은 나라를 창업하느라고 내우외환에 사단이 많으니 까맣게 무학대사의 일을 잊었구려."

"전하, 내일이라도 조정에 분부를 내리시어 무학대사의 있는 곳을 찾아보시고 후하게 해몽한 은혜를 갚으신 후에 도읍 정할 땅을 물어보시옵소서."

태조는 흡족하게 생각했다.

"후마마의 말씀대로 내일 조회를 마친 후에 모든 신하에게 무학의 종적을 물어 폐백을 갖추어 초빙하리다."

원래 무학은 고려 말엽의 도승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젊었을 때 꿈을 꾸었다. 다 무너진 폐가 속으로 들어갔다가 서까래 게개를 등에지고 나온 꿈을 꾸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또다시 꿈을 꾸었다. 거울이 깨지는 꿈을 꾸었다.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또 꿈을 꾸었다. 화려하게 피었던 만발한 꽃이 일시에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역시 좋은 꿈같지 아니했다.

연거푸 세 번을 꾼 꿈이 모두 다 마음에 걸렸다.

이성계는 알 만한 사람에게 해몽해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이때 안변에 사는 늙은 할미가 한 사람 있었다. 점을 잘 치고 해몽을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이성계는 소문을 듣고 할미를 찾았다. 꿈이야기를 하고 풀이해주기를 청했다.

"이러한 꿈을 계집사람이 어찌 풀겠습니까. 저기 보이는 설봉산 아래 도학이 높은 고승이 있습니다. 그곳을 찾아 물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성계는 하는 수가 없었다. 할미를 작별한 후에 안변 설봉산을 찾았다.

반나절이나 설봉산을 헤매다가 한 곳 토굴 속을 살펴보니 기괴하게 생긴 중 한 사람이 눈을 감은 채 참선을 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기침을 하고 인기척을 냈다. 그러나 도승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했다. 또다시 한 식경이 지났다. 굴속은 더한층 어둡기 시작했다.

한동안 후에 도승은 눈을 떴다. 이성계는 도승 앞에 합장하여 절을 올렸다.

도승은 고개를 숙여 손을 모아 답례했다. 고고한 목소리로 물었다.

"빈도가 손이 온 것을 모르고 참선만 하고 있었으니 미안하기 짝이 없소. 어찌해서 누추한 토굴을 찾았소?"

도승은 청년 이성계에게 물었다. 굴속이 어둔 탓인지 도승의 안광은 처절하도록 빛났다. 푸른 인이 반짝거렸다. 청년 이성계의 얼굴을 쏘았다.

청년 이성계는 공손히 대답했다.

"스님의 높으신 지감을 빌리려 하여 외람히 찾았으니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무학은 옥잔 등의 불을 돋우며 물었다.

"무슨 일을 의논한 것이 있소?"

청년 이성계는 무릎을 꿇고 물었다.

"제가 꿈을 꾸었는데 하도 이상해서 스님을 찾았습니다. 해몽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도승은 반짝거리는 눈을 들어 다시 청년 이성계의 얼굴을 살폈다.

"말씀해보오."

한동안 후에 허락이 내렸다.

"사흘 밤을 내리 계속해서 꿈을 꾸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스님을 찾았습니다."

"어떤 꿈을 꾸었소?"

"한 번은 허물어진 폐옥 속으로 들어갔다가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도승은 인을 뿜는 듯한 새파란 눈이 화경 같이 빛났다.

"다음엔 무슨 꿈을 꾸었소?"

"'제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거울을 깨뜨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도승의 눈은 또 한 번 빛났다.

"다음엔?"

"가지마다 찬란하게 피었던 꽃이 일시에 떨어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도승은 홀연 장삼깃을 여미고 청년 이성계를 향하여 합장배례하며 말했다.

"무너진 폐옥 속에서 서까래 셋을 등에 지고 나왔으니 왕자가 분명하고, 거울이 깨졌으니 요란한 소리가 날 것입니다. 다음에 꽃이 피었다가 일시에 떨어졌으니 이것은 결실이 되어 열매가 열 조짐입니다. 당신은 혁명을 일으켜서 성공이 되고, 고려가 망한 후에 제왕의 지위에 나가실 분입니다. 절대로 꿈 이야기를 비밀에 부치시고 당신의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옵소서."

청년 이성계는 마음속에 기쁨과 희망이 가득했다.

도승에게 감사하다고 치하를 한 후에 도승의 법호를 물었다.

"스승의 존성대명을 알고자 합니다."

도승은 빙그레 웃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법호를 무학이라 했습니다."

이리하여 이성계는 무학을 알았고, 마침내 혁명을 일으켜 무학의 해몽대로 일국의 제왕이 되었던 것이다.

태조는 다음날 대신과 백관들의 조회를 파한 후에 모든 신하에게 물었다.

"과인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소시 때 안변 설봉산 아랴 토굴 속에서 도승 무학을 만나본 일이 있다. 혹시 무학의 종적을 아는 사람이 있거든 알려달라."

모든 신하들은 면면히 서로들 얼굴만 쳐다보았다.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정승 조준이 아뢴다.

"무학이 어떠한 고승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조정 신하 중에서 아는 이가 없사옵니다."

태조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조준에게 말했다.

"무학은 과인이 왕이 될 것을 수십 년 전에 예언한 고승이다. 이제 국도를 옮기는 큰일에 이러한 고승과 한번 의논하고 싶다. 팔도 감사와 수령에게 기별하여 무학이 있는 곳을 알게 하라."

정승 조준은 태조의 분부를 받들고 정원을 통하여 팔도 감사와 수령에게 무학대사의 종적을 찾았다.

팔도 감사와 수령들은 조정의 명을 받고 명산대찰의 모든 절을 두루 찾았으나 무학의 종적은 알 길이 없었다.

태조는 날마다 조회를 파한 후에 경연이 열리기만 하면 항상 정승과 승지들에게 무학의 종적을 물었다.

"그동안 무학의 종적을 찾았느냐?"

"팔도 감사와 수령들의 복명이 왔습니다마는 아직 무학이 어느 곳에 있는지 종적을 모른다 하옵니다."

태조는 크게 노했다.

"명색이 감사로 있는 자들이 한 사람을 찾지 못한단 말이냐. 너무나 태만하고나!"

대신과 승지들은 황공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다시 팔도 감사와 수령들에게 대왕이 진노했다는 말을 전하고 빨리 무학대사를 찾으라 했다.

팔도 감영의 아전과 관속들의 무학을 찾는 말방울 소리는 방방곡곡을 소란케 했다. 그러나 역시 무학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이때 경기감사와 황해감사와 평안감사는 태조가 안변 설봉산에서 무학대사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 세 감사가 힘을 합해서 무학을 찾기로 약속했다.

삼도 감사는 육방 관속들을 거느리고 경기도를 샅샅이 뒤졌다. 암자와 굴속까지 뒤졌다. 그러나 고승의 그림자는 감감히 보이지 아니했다.

삼도 감사는 하는 수 없어 황해도를 뒤지기 시작했다.

곡산 땅으로 들어섰다. 고달산은 곡산의 명산이었다.

삼도의 육방관속은 감시를 모시고 고달산 속으로 들어갔다.

여승들이 있는 암자가 나타났다.

관속들은 늙은 여승을 향하여 물었다.

"고달산 속에 도승이 계시다 하는데 어느 곳에 계신지 알으켜 주시오."

넘겨짚고 물었다.

늙은 여승은 고개를 기울여 한동안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도승의 법호가 무어라 합디까?"

관속들이 대답했다.

"무학대사라 합니까"

늙은 여승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무학대사란 고승은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오. 고달산 상상봉에 오리면, 조그마한 삼간 두 옥의 암자가 있소, 그곳에 참선하고 계신 높은 도승이 한 분 있소마는 무학대사란 분은 없소."

관속들은 높은 도승이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분의 이름은 무어라 합니까?"

"자초 스님이라 합니다. 외딴 암자에 상좌 중 한 아이를 데리고 참선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삼도 감사의 육방 관속들은 낙망이 되었다.

여승을 작별하고 감사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고달산 상상봉에 암자를 짓고 참선 공부를 하는 도승이 한 사람 있다 합니다.

그러나 상감께서 찾으시는 도승의 이름과는 다릅니다."

삼도 감사들이 물었다.

"고달산에 있는 도승의 이름은 무어라 부른다 하더냐?"

"자초화상이라 한다 합니다."

삼도 감사들이 고승이 있다는 말에 일루의 희망을 가졌다가 무학이 아니라 자초라는 말을 듣고, 모두 다 낙담이 되었다.

한동안 덤덤하게 말없이 앉았다가 황해감사가 발론을 했다.

"비록 무학이 아니라 자초라 하더라도 도승이고 보면 서로들 연락이 있을 법하니, 낙심하지 말고 한번 고달산 암자로 자초라는 도승을 찾아봅시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경기감사와 평안감사는 곧 찬성을 했다.

"옳은 말씀요, 우리 세 사람이 곧 찾아보기로 합시다."

삼도 감사는 즉시 육방 관속들을 거느리고 높고 높은 고달산 상상봉으로 올랐다.

양장구곡의 험준한 산길이었다. 몇 번이지 개울을 건너고, 고개를 넘었다. 여승들이 거처하는 암자도 두서너 곳 지났다.

깎아지를 둣한 푸른 연봉이 병풍같이 둘러싸 있는 고달산 산마루에 올랐을 때 청산을 뒤로 두고 앞에는 맑은 계곡이 흘렀다.

수정 같은 물은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고 신기한 새소리가 청청한 솔가지 위에 청아하게 들렸다.

감사들이 바라보니 깎아지른 듯한 바위 사이에 삼간 초옥이 있고 초옥문 앞에서는 동자 중 하나가 약을 달이는지 차를 끓이는지 화로에 불을 피우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진정 그림 같은 선경이요, 속된 세상의 풍경이 아니었다.

감사와 관속들은 바위틈에 자라난 댕댕이덩굴을 휘어잡고 암자를 향하여 올랐다. 일진청풍이 산골 속에서 불어와 사람들의 옷자락을 날렸다. 마치 신선이 사는 곳으로 오른 듯했다.

삼도 감사는 초옥 앞에 당도하자 동자 중에게 물었다.

"이곳이 자초화상이 계신 곳이냐?"

동자 중은 화로에 부채질을 하면서 대답했다.

", 그러합니다."

"우리들은 스님을 뵙기 위하여 멀리 찾아온 사람들이다. 들어가서 손님이 왔다고 말씀해라."

동자 중은 화로 앞에 부채를 놓고 초암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스님께서는 지금 참선 중에 계십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쇼."

성미 급한 아전 한 사람이 동자 중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어느 행차라고 그리하느냐. 삼도 감영의 감사님들이시다. 빨리 참선을 중지하고 맞이하라 일러라."

동자승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삼도 감사 아니라 팔도 감사가 오셨다 해도 우리 스님께서는 참선 중에는 일체 사람을 대하지 아니하십니다."

"좀 더 기다려보자. 떠들지 말아라."

심도 감사들은 성미 급한 아전을 타일렀다.

감사와 육방 관속들은 새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서 동자승을 부르는 도승의 목소리가 났다.

"밖에 누구들이 오셨느냐? 속인의 말소리가 들리니 어찌 된 일이냐?"

동자승은 또다시 차 달이던 부채를 바윗돌에 던지고 초암으로 들어갔다.

"손들이 여러분 오셨습니다. 참선 중이시기에 말씀을 아니 올렸습니다."

동자승과 도승의 주고받는 말소리가 밖에 환하게 들렸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동자승은 밖으로 나와 도승의 말을 전했다.

삼도 감사는 관속들을 밖에 있게 하고 초암문을 밀고 들어섰다.

한 칸은 부엌이요 한 칸은 마루요 한 칸은 방이었다.

마루 위에 노승이 소박한 소나무로 만든 경궤를 놓고 백팔 염주를 굴리고 있었다.

움쑥 들어간 눈에는 총명한 기운이 밝은 구슬빛 같이 광채를 뿜고, 쑥 나온 이마와 얇은 코끝엔 고고한 기상이 감돌았다.

어디로 보나 범속한 중이 아니었다.

삼도 감사가 뜰 아래로 들어가자, 노승은 흑장삼 옷깃을 바로잡고 백팔 염주를 손목에 건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삼도 감사를 맞이했다.

"오르시옵소서."

삼도 감사는 암자로 올랐다.

"귀한 손님이 멀리 산협 속까지 찾아오시니 빈도의 영광이올시다."

도승은 은근한 인사를 보냈다.

황해감사가 말을 꺼냈다.

"도승께서 자초화상이십니까?"

", 그러하오이다. 빈도의 법명을 어느 곳에서 들으셨습니까?"

도승의 태도는 더욱 은근했다.

경기감사가 황해감사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저 아래 여승들이 있는 암자에서 도승의 법호를 알았소이다."

도승은 웃으며 대답했다.

"황감하오이다."

황해감사가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는 학식이 높은 고승이십니다. 도학이 높으신 분들끼리는 서로들 아실 듯합니다. 혹시 안변 설봉산 아래 토굴 속에서 참선하고 계셨던 무학대사의 거취를 짐작하시겠습니까?"

노승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빈도가 바로 무학이올시다."

삼도 감사들은 깜짝 놀랐다. 모두 다 눈이 둥그레졌다.

평안감사가 묻는다.

"그렇다면, 아까 말씀한 자초는?"

노승은 또 한 번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무학은 빈도의 본명이고 자초는 빈도의 법명이올시다."

삼도 감사들은 비로소 자초와 무학이 한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일제히 노승을 향하여 절을 했다. 노승은 황망히 답례를 한 후에 삼도 감사를 향하여 묻는다.

"세 분 대감께서는 평안감사와 황해감사와 경기감사가 아니십니까?"

삼도 감사는 또다시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과연 명불허전의 도승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사께서 어떻게 저희들이 삼도 감사인 것을 아셨습니까?"

무학은 경궤 옆에 놓인 불자를 번쩍 들어 맞은편에 보이는 안산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 저 맞은편에 보이는 산이 있습니다. 바로 이 암자의 안산이올시다. 저 산의 봉우리를 삼인봉이라 합니다. 푸른 산봉우리가 우줄우줄 삼타 연봉으로 되었습니다. 마치 둥글둥글 인뚱이같이 생겼습니다. 이리하여 삼인봉이라 합니다. 감사는 일도의 방백이십니다. 왕명을 받아 인수를 차신 분들입니다. 저기 저 삼인봉에 응해서 세 분 감사께서 오늘 빈도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까닭에 빈도는 어느 때든 세 분 감사가 반드시 찾아오실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무학은 껄껄 웃었다.

삼도 감사는 무학의 비범한 견식에 마음속으로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삼도 감사는 비로소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찾는 말을 전했다.

"대사께서는 나라가 바뀐 것을 아십니까?"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 장군이 조선국왕이 된 것을 짐작합니다. 설봉산 굴속에서 소년 시절인 이장군을 만나서, '화락기무실 경파응유성'이라고 예언한 일이 있습니다. 이장군은 꿈에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고 나온 그대로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장군께서는 지금 왕이 되셨습니다. 대서가 해몽해주신 옛 생각을 하시고, 지금 팔도에 영을 내려 대사를 찾는 중이올시다."

무학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산중에 있는 빈도가 창업하시는 큰일에 무슨 경력이 있다고 빈도를 찾으신단 말씀입니까?"

황해감사가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요사이 국도를 옮기실 의향이 계신 듯합니다. 계룡산에 신도를 정했다가 역사를 중지하셨습니다."

무학은 계룡산에 국도를 정한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경기감사가 말한다.

"계룡산 역사를 중지하신 후에 별안간 팔도에 영을 내려 대사의 계신 곳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삼도 감사는 서로 공론한 끝에 제각기 도 안에서만 찾지 말고 삼도의 힘을 합해서 대사를 찾기로 했습니다. 오늘 대사를 만나 뵙고 삼인봉 말씀을 들으니 모든 것이 숙연인가 합니다. 대사께서는 속히 행장을 차리시고 부르시는 어명에 응하셔야 하겠습니다."

무학은 웃으며 사양했다.

"빈도는 불경을 공부하는 불가일 뿐,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째 국도를 정하시는 막중한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삼인봉까지 말씀하신 대사께서 부르시는 어명을 저버릴 수 있습니까. 전하께서 다른 분부가 계실지 모릅니다. 함께 송도로 향하사이다."

삼도 감사들은 간곡하게 졸랐다.

무학은 하는 수 없었다.

"대감들의 간곡한 뜻을 저버릴 수 없소이다. 곧 행리를 정돈하여 대감들을 모시겠소이다."

삼도 감사들은 크게 기뻤다.

곧 육방 관속에게 영을 내렸다.

"이곳에 계신 분이 곧 무학대사시다. 빨리 파발마를 달려서 송도에 기별하여 무학대사를 모시고 올라간다는 뜻을 정원에 아뢰어라."

삼도 감영의 아전과 관속들도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몇 달을 두고 고생들을 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삼도 감영의 파발마는 송도로 달리고 감사들은 무학과 함께 고달산에서 황해 감영으로 내려왔다.

삼도 감영의 파발마들이 송도에 들어가 무학대사를 찾아서 송도로 올라온다는 말을 전하니 정원 승지는 곧 태조께 고했다.

"무학대사를 찾았다 합니다."

"어디서 찾았다 하더냐?"

"경기, 황해, 평안 삼도 감사가 힘을 합해서 세 도를 두루 찾다가 황해도 곡산 고달산 암자에서 무학대사를 찾았다 합니다. 그러하와 지금 송도로 올라오는 길이라 합니다."

태조의 용안에는 기쁜 빛이 넘쳐 흘렀다.

"그렇다면 지금 곧 중사는 재상이 타는 평교자를 황해 감영으로 보내서 무학대사를 국사의 예로 맞아들이게 하라."

어명이었다. 정원에서는 곧 어전 내시와 재상이 타는 평교자를 황해도로 보내서 무학대사를 맞이했다.

삼도 감사와 무학은 송도로 올라오는 도중에 칙사와 평교자를 만났다. 무학대사는 평교자까지 보낸 왕은에 감동이 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무학대사는 삼도 감사와 함께 송도 남문으로 들어서서 경덕궁 대궐로 향했다, 일도 감사의 행차도 근감스러운 것인데, 삼도 감사의 구종별배가 일제히 권마성을 부르면서 육방 관속들이 줄을 지어 들어가니 거리에는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더구나 삼도 감사의 행렬 앞에는 고괴하게 생긴 늙은 중이 흑장삼을 입고, 평교자를 타고 들어가니 더한층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감사의 행차가 지나가는 앞에는 중이 정승이 타는 평교자를 탔으니 웬일이냐?"

"중도 개국 공신 중의 한 사람인가보다."

"중이 어떻게 개국 공신이 될 수 있느냐?"

"감사들은 말을 탔는데 중은 평교자를 탔으니 감사보다 높은 것이 분명하고, 평교자는 정승이 타는 것인데 중이 탔으니 지위가 정승과 맞서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개국 공신이 아니고 저런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

구경하는 사람들은 이같이 공론이 부산했다.

무학과 태조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부산하게 지껄여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늙은 중은 필시 무학이란 도승일 것일세. 이성계가 소시 때, 서까래 세 개를 허물어진 집 속에서 지고 나오는 꿈을 꾸고 괴상하다고 생각해서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도 해몽해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안변 설봉산 아래 토굴 속에 있는 중이 천하에 제일 가는 대몽을 꾸었다고 치하하면서 당신은 장래 왕이 될 사람이라고 예언을 했다는 것일세. 과연 이성계는 오늘 왕이 되었네. 예언이 꼭 들어맞았네. 얼마나 용한 중인가. 지금 이성계는 송도에 진절머리가 나서 새로 도성을 옮길 계획을 하고 있는 중일세. 그래서 팔도에 영을 놓아서 무학을 찾아들이라 했다네. 지금 어느 도의 감사들이 무학을 찾아서 이성계가 있는 대궐로 들어가는 모양일세."

구경하는 사람들은 비로소 중이 무학인 것을 알았다.

"과연 참 영절스럽게 해몽을 잘했구려. 해몽 잘한 덕으로 무학이 왕건 태조 때 도선처럼 국사가 되기가 십상팔구로구려. 그러니까 평교자로 모시는 것이로구려."

"인제 무학이 새로 도읍 터를 잡겠군."

"도선대사가 고려 태조의 대궐 터인 금돼지 터 만월대를 잡듯이 무학이 이성계를 위하여 어디다가 새 도읍 터를 정하겠군."

"그럼 결국 이성계는 송도에서 나가는 판이 아닌가?"

"자기가 아무리 영웅호걸이라 하나 송도 사람을 당해낼 도리가 있나. 부지할 수가 없을 것일세. 선비란 선비는 모두 다 일치단결이 되어 도포를 벗어붙이고 장사군이 되지 않았나. 선비들이 과거를 보지않고 붓을 꺾어 상인이 된 이 땅에서 어떻게 정사를 다스리겠나. 송도레서는 왕 노릇을 할 수 없으니 쫓겨나가는 것이지, , , ."

"원래 착하고 어진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죽여서 실인심을 했으니."

구경꾼들은 무학대사가 정승이 타는 평교자를 타고 감사들과 대궐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같이 시정 공론이 부산했다.

무학은 경덕궁으로 들어가 승지에게 인도되어 태조의 어전에 알현했다. 태조는 반갑고 기뻤다. 합장 배례하는 무학을 어수로 일으키며 옥음을 낭랑히 내렸다.

"대서를 한 번 작별한 후에 국사가 다난해서 한 번도 찾지 못한 죄를 용서하오."

무학은 고고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국가를 창건하시고 만백성을 다스리시는 천승옥체가 어느 겨를 빈도를 찾으실 겨를이 계시겠습니까. 오늘 이같이 부르시어 고귀하게 되신 용안을 우러러 뵈오니 빈도의 광영이올시다. 먼저 보위에 등극하신 일 감축하옵니다."

무학은 다시 합장배례를 올렸다.

테조는 무학을 상좌에 앉히고 묻는다.

"과인은 대사가 해몽해준 대로 오늘날 왕위에 올랐거니와 대사는 그동안 한 번도 과인을 찾지 아니하니 과인의 마음이 궁금하고 섭섭하였소이다. 팔도 감사에게 영을 내려 찾게 한지 여러 달 만에 대사를 이제 만나게 되니 내 마음이 비로소 흐뭇하오."

무학은 다시 합장을 올렸다.

"평수종적인 산인이올시다. 일정한 법주가 없었사옵니다. 여조의 운이 다하고 전하께서 등극하신 일을 알았사오나, 빈도 어찌 감히 알현을 청할 수 있사오리까. 산간에 숨어 있어 마음속으로 기뻤을 뿐이올시다."

태조는 미소를 지어 다시 무학에게 물었다.

"대사가 나의 꿈을 해몽해주었던 안변 석굴이 지금도 남아있소?"

"빈도가 수도하던 옛터는 의연히 남아 있습니다."

태조는 미연히 웃으며 다시 무학에게 물었다.

"과인이 오늘날 와위에 오른 것은 모두 다 부처와 대서의 은덕이라 생각하오.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안변 석굴앞에 사찰을 창설하고 싶소, 대사의 의향이 어떠하오?"

"황감하여이다."

"영원히 대사의 덕을 만대에 간직하기 위하여 이름을 석왕사라 하면 어떠하겠소?"

무학은 감격했다. 다시 합장배례를 드리며 대답했다.

"왕은 지중하십니다."

태조는 곧 승지에게 명했다.

"일국의 제일가는 목공과 석공들을 불러서 안변 설봉산 아래 화려 굉걸한 불우를 짓게 하라. 무학대사가 과인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해준 곳이다. 과인의 내탕금으로 정성을 다하여 지으라. 준공이 되는 날 과인이 대사와 함께 친히 가보리라."

승지는 허리를 굽혀 봉명했다.

"비망기에 기록하여 곧 선공감에 기별하겠습니다."

태조는 다시 승지에게 명을 내렸다.

"무학대사는 나의 스승이다. 오늘부터 국사의 예로 대접하겠다. 교서를 쓰고 법복 일습을 상의원에 명하여 곧 올리게 하라."

승지는 곧 정원으로 나가 무학을 국사로 봉하는 전교를 쓰고 상의원에 국사에게 내리는 봅복을 드리라 했다.

전하는 다시 정원에 영을 내렸다.

"무학대사에게 국사를 봉하는 의식을 정전에서 거행히리라. 대신이하 백관들을 정전으로 소집하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어 내각의 각료와 백관들을 정전에 회동시켰다.

전하는 무학과 함께 만조백관이 시립한 속에 정전으로 옥보를 옮겼다.

이윽고 승지는 교서를 받들고 배시는 무학이 입을 법복을 안아 반 위에 놓았다.

태조는 시립해 서 있는 백관을 향하여 옥음을 내렸다.

"무학대사는 과인이 왕위에 오를 것을 수십 년 전에 미리 예언해서 나에게 크나큰 용기와 희망을 갖게 했다. 뿐만 아니라 대사는 학식과 덕행이 출중하여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사문이다. 오늘 대신이하 백관들이 회동한 자리에서 국사의 칭호를 봉하니 백관들은 지실하라."

만조백관들은 고개를 숙여 전하의 옥음을 귀 기울여 들었다.

태조는 다시 승지에게 명했다.

"의식을 거행하라."

무학은 태조를 향하여 합장배례한 후에 만조백관에게 읍을 보냈다.

승지는 무학을 향하여 교지를 읽었다.

"무학대사는 덕이 높고 학문에 심수한 불가의 장로다. 일찍이 과인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한 바 있다. 이제, 국사로 봉하여 칭호를 내리나니, 대사는 사양하지 말라."

승지의 전보를 읽는 소리가 끝나니 무학은 합장배례를 다시 전하께 올리고 교지를 받았다.

내시가 무학이 입은 흑장삼위에 상의원에서 바친 흑공단 법복을 입히고, 어깨에는 자주 비단에 호화찬란하게 수를 논 만수가사를 걸어주었다.

고고한 노승이 화려한 국사의 법의를 입으니 루학의 얼굴은 더한층 붐위가 있어 보였다.

무학은 장중한 태도로 또 한 번 전하께 사은(謝恩)하는 합장배례를 올린 후에 만조백관에게 읍을 보냈다.

백관들은 모두 다 무학의 일신에 넘치는 영광을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하는 다시 승지에게 분부를 내렸다.

"무학국사를 황해도 곡산 산골까지 찾아가서 오늘 과인이 면대할 기회를 갖게 한 황해감사와 경기감사와 평안감사에게 상급으로 비단 백 필씩을 내려서 그들의 노고를 치사하라."

삼도 감사는 어전에 나와 사은을 올렸다.

전하는 다시 백관을 향하여 말씀을 내렸다.

"처음에 과인이 무학대사를 만났던 안변 설봉산 아래 석왕사(釋王寺)를 짓기로 했다. 만조배관즐도 과인의 보은하는 뜻을 알아두라."

무학의 광영은 일신에 넘쳤다. 만조백관들의 조회를 파하고 의식이 끝난 후에 태조는 사은하고 물러가려 하는 무학의 손을 잡았다.

"국사와 상의할 일이 있소. 침전으로 드시오."

무학은 사양할 수 없었다. 태조의 뒤를 따라 침전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내전에서는 국사 무학을 위하여 소찬의 음식이 나왔다. 고기와 생선이 없는 담백한 음식이었다.

소 전골에 튀각이 있고, 표고탕에 향기 좋은 가지각색의 버섯 무침이 있었다. 도라지 생체에 무생채를 곁들였고, 더덕구이에 목이채, 석이채가 별미였다. 만두는 강비가 친히 수라간에 임어하여 궁녀들의 조미를 친감해서 마련한 일품 가는 소찬이었다.

태조는 국사 무학을 대접하기 위하여 함께 수라상을 받았다.

무학 일생일대의 광영이었다.

무학은 황공 감격했다.

"칡뿌리와 고사리로 충복하뎐 소승이 전하를 모시고 어백미를 들게 되니 가이 없는 황은을 갚사올 길이 없소이다. 간뇌도지하와 왕은을 갚겠소이다."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고 미소하여 대답했다.

"국사는 한평생 나를 버리지 말고 모든 일을 지도해주기 바라오."

"소승이 감히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힘을 다하여 전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태조는 가만히 한숨을 짓고 말했다.

"도대체 선비란 놈들은 한 놈도 쓸 놈이 없소. 더구나 송도 안에 있는 선비란 놈들은 모조리 나를 배반하고 저항하고 있소. 이곳에 나는 싫증이 났소, 과인은 국도를 옮기기로 결심하였소, 국사의 뜻은 어떠하오. 서울을 옮기는 일이 좋을지 그대로 부지하는 일이 좋을지 좋은 지시를 바라오."

무학은 눈을 끔벅이며 대답한다.

"옮기시옵소서."

무학의 간단한 대답 소리는 장중했다.

"꼭 옮겨야 하겠소?"

"전하, 송악산과 전하는 아무런 연이 없소이다. 도선대사가 왕건 태조를 위하여 전해논 금돼지 토는 사백여 년 동안 왕위가 계승되었던 곳이라, 이제는 운수가 쇠잔했습니다. 신흥하시는 대왕께서 복록을 누리실 터전이 아니올시다. 새로 좋은 명당의 터를 발견하시어 국도를 정하시옵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는 결코 선비들의 반항을 꾸짖고 욕하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가르치신 유학 정신은 정과 의를 지키고 행하는 일입니다. 선비들에게 정과 의를 가르치시고, 정과 의를 위하여 붓을 꺾는 그들을 꾸짖지 마시옵소서. 도읍을 옮기시고 세월이 흘러가면 그들은 다시 다 전하의 품 안으로 안길 것입니다."

무학은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송도와 과인에 연이 없다 하면 어느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소?"

태조는 간곡하게 물었다.

무학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태조의 용안을 우러러 뵙고 묻는다.

"빈도를 부르시기 전에 필연코 몇 군데 좋은 땅을 택해 보셨을 줄 압니다. 먼저 보신 곳을 하교해주시옵소서."

태조는 마음속으로 무학을 더한층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다.

"과인이 한평생 출장입상해서 많은 경험을 가졌다 하나 풍수와 지리에는 무식하기 짝이 없소. 과인의 신하들이 좋은 곳이라고 주장하기에 천도를 하려고 결정까지 했다가 피의한 곳이 몇 군데 있소."

"어느 곳이오니까?"

"처음에 계룡산을 가보았소."

무학은 단정하게 꿇어앉아 태조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계룡산은 전하께서 도읍을 정하실 곳이 아니올시다. 무슨 증험이 있었을 줄 압니다. 혹시 꿈이라도 꾸신 일이 없습니까?"

무학은 총기 있는 노안을 반짝이며 물었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놀랐다. 무학이 어떻게 자기의 꿈꾼 일까지 아나 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과인이 자세히 이야기하라다. 나의 신하에 청성백 심덕부가 있소. 계룡산 아래는 생기가 발랄한 곳이라 해서 가장 좋은 도읍 터라 하기에 과인이 가보니 과연 훌륭한 명당자리였소. 이곳엔 삼한이 창건된 후에 한 번도 왕도로 정하지 아니했던, 말하자면 숫처녀 같은 땅일 뿐 아니라, 앞에는 금강이 띠같이 둘러있어 수운의 교통이 편하며 넓고 넓은 호남의 곡창지대를 껴안았으니 산자수명하고 물화가 집중될 만한 곳이었소. 과인의 마음은 흠벅 흐뭇했소. 곧 역사를 경영하기 시작했소. 고러나 하룻밤 꿈에 백의를 입은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과인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대왕의 도읍할 터가 아니니 다른 곳으로 정하시오, 만약 굳이 이곳에 대왕이 도읍을 정한다면 왕조가 길지 못하리다'하고 스러져버렸소. 한밤중의 일이었소. 깜짝 놀라 깨니 꿈이었소. 과인은 주춧돌까지 놓았다가 역사를 중지한 일이 있었소."

무학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잘하셨습니다. 만약 역사를 계속하셨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곳은 이씨가 도읍을 정하실 곳이 아닙니다. 정씨가 도읍을 정할 곳이올시다. 백발노인은 필연코 계룡산 산신이 현몽을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태조는 정씨가 도읍을 정할 터전이라는 무학의 말을 듣자 깜짝 놀라 묻는다.

"정씨가 도읍을 정한다니, 어느 때 도읍을 정한단 말요?"

"아직 까마득한 일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안심하시고, 다른 곳으로 국도를 정하시옵소서."

"도대체 국사는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할 것을 어찌 아시오?"

"비기에 소상하게 있습니다."

비기에 적혀 있단,ㄴ 무학의 아뢰는 말을 듣자, 태조는 옥체를 바싹 무학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비기라니, 어떤 비기에 그런 말이 씌어 있소?"

"'정감록이란 비기에 씌어 있습니다."

무학은 간단히 대답했다.

태조는 더욱 궁금했다.

"'정감록'이란 비기는 누가 지어낸 책이오?"

"누가 지은 것인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필시 도선대사가 예언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기의 내용은 이씨의 조상과 정씨의 조상 두 사람이 산천을 두루 구경하다가 계룡산에 올라서 산세를 바라보며 서로 문답한 이야기 채로 쓴 것입니다. 이씨의 조상이 계룡산 아래 도읍 터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정씨의 조상이 하는 말이 '불가하다, 계룡산은 나의 자손이 도읍을 정할 곳이니, 너의 자손은 한양에다가 도읍을 정하라' 하고 서로들 문답을 한 비기입니다."

태조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봉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과인의 선주께서 정씨네 조상하고 도읍 터를 의논하셨다는 말은 어른께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허무맹랑한 말이구려."

태조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도선대사가 비기를 쓸 때 직접 자기가 말하는 것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이씨의 조상과 정씨의 조상이 서로들 이야기한 것처럼 문답체로 쓴 것입니다. 그러하니 왕상 전하의 선조께서 아실 리가 없습니다."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자 황연히 깨달았다.

"과연 그럴듯한 말씀요."

태조는 무학의 말에 탄복하고 무릎을 쳤다.

"계룡산 역사는 잘 중지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비기에 있는 대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십시오."

무학이 한양 도읍을 주장했다.

"계룡산에 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신하들 중에 한양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소. 그러나 그때 청성백 심덕부가 주장하기를 한양이 백제의 옛 도읍 터일 뿐 아니라 고려 때 이궁까지 있었던 곳이라 생기가 없다 해서 계룡산을 택했던 것이오."

태조의 말씀을 듣고 무학은 껄껄 웃었다.

"백제의 도읍 터는 광주 땅이고 한양이 아닙니다. 한양이 가까울 뿐 한양이 아닙니다. 그리하옵고, 고려 때 이궁이 있었다 하나 조그마한 집 한 채 지었을 뿐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왕성인 도읍 터는 아닙니다. 북으로 삼각산이 푸른 기운을 아청 하늘 반공중에 뿜고, 한수가 띠같이 둘러있는 한양이 아니올시다. 신라 진흥왕 때 순수비를 북한산에 세워서 지금까지 전해옵니다마는 이것은 신라의 경계를 표시했던 비석이요. 국도를 정한 것은 아닙니다. 한양은 역시 처녀지올시다. 전하께서는 두말 마시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시옵소서."

태조의 마음은 솔깃하게 한양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태조는 무학에게 다시 묻는다.

"'정감록'이란 비기를 한 번 구해볼 수 없으리까?"

무학은 고고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옛적 성현의 말씀에, 슬기로운 사람은 재앙만 묻고, 복은 묻지 아니했다 합니다. 더구나 일국을 통치하시는 제왕께서 일일이 비기에 현혹되시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다만 계룡산에 도읍하실 것을 피하시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신다면 반천 년의 장구한 기업이 반석같이 평안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안심하시고 한양으로 천도하실 계획을 정하시옵소서."

태조는 무학의 아뢰는 말을 그럴듯하게 들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면 오백 년의 국조는 확실하겠소?"

"자손들이 계계승승해서 어진 덕과 착한 교화로 국가와 백성을 다스린다면, 다시 천복을 받아서 오백 년이 천년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수가 오백 년이라 하나, 자손들이 불초하다면 손복이 되어 국조가 짧아질 것입니다. 복록은 자기 자신이 이룩하는 것이요, 하늘이 주는 운수만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러하니 전하께서는 먼저 덕을 덖으시고 자손을 잘 지도하옵소서."

무학의 말은 과연 국사다웠다. 태조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태조는 두 손을 모아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대답한다.

"과연 국사의 말씀이 옳소. 다시는 비기를 뵈어달라고 아니하리다. 내 마음을 바로잡아 어진 임금이 되도록 노력하리다."

무학은 국궁하고 합장을 올렸다.

"소승의 말씀을 그르다 아니 하시니 황공 감격하여이다."

태조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 일은 어느 때 하면 좋으리까?"

"소승이 비록 한양 천도를 주장했사오나, 실지로 한 번 산형과 수세를 답사하지 않고는 확실한 말씀을 아뢸 수 없습니다. 일국의 수도를 정하는 막중한 큰일이올시다. 먼저 궁터를 정하고, 다음 관아를 배치하고 또다시 상가가 놓일 곳을 생각하고, 만호 장안이 들어 있을 서울 도성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소승이 한 번 실지로 한양에 갔다 온 후에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태조는 무학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용안에 가득히 웃음을 띠고 무학을 칭찬했다.

"옳은 말씀요. 잘 생각했소. 내 마음이 흡족하오."

태조와 무학은 이같이 담소하면서 음식을 마쳤다.

궁녀들이 상을 물린 후에 무학은 사은하고 물러났다. 태조는 내시에게 명했다.

"국사가 드나드실 때는 반드시 대신과 동등되는 의장으로 거행케 하라."

무학의 영광은 일신에 넘쳤다.

정식으로 평교자를 타고 사처로 돌아갔다.

 

한양 운수

이튿날 무학은 태조께 뵙기를 청했다.

태조는 곧 허락했다. 무학은 일품가는 국사의 법복을 입고, 어전에 들어가 전하께 알현했다.

태조는 만면의 웃음을 용안에 띠고 무학대사에게 물었다.

"밤사이 법체 평안하였소? 어제는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서 과인의 마음이 무한 기뻤소."

무학도 정중하게 합장을 울리며 대답했다.

"소승도 오랜만에 등극하옵신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 뵈오니 황공하고 영광스런 마음을 이루 다 입으로 아뢸 길 없었습니다. 가이 없는 넓고 넓은 왕은을 갚사올 길이 없습니다."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고 만족했다.

"국사가 황해도 고달산에서 멀리 오느라고 법체가 피곤했을 텐데, 편히 쉬지 않고 연일 과인을 찾았으니 무슨 좋은 일이 있소?"

무학이 합장하고 아뢴다.

"소승이 어제 한양에 도읍을 정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넓고 넓은 왕은의 만분의 일을 보답하기 위하여 실지로 한양 풍수를 답사하려 하옵니다. 전에 한 번 지난 일이 있사오나 다만 면밀하게 살피려 합니다."

태조는 기뻤다. 어수를 어루만지며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국사가 높은 안목으로 한양 산세를 살펴준다면 과인의 마음이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겠소. 수고를 해주기 바라오. 그렇다면 어느 때쯤 떠나겠소?"

"오늘 곧 떠나가겠습니다."

전하는 만족했다. 측근에 있는 어전 내시를 불렀다.

"정원에 나가서 승지를 들라 해라."

입직 승지가 어전에 대명했다.

"국사가 한양의 지세를 살피기 위하여 오늘 등정하기로 되었다. 만반 의장을 갖추어 유루가 없게 하고, 각읍 수령헤게 영을 놓아 지공 범절에 소루함이 없게 하라."

"본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승지가 명을 받들어 물러가려 할 때, 무학대사는 정중하게 합장을 울리며 아뢰었다.

"각읍 수령에게 어명을 내리시어 의장과 지공을 내리시는 천은은 감격 무지하오이다마는 산천의 지세를 살피는 길에 호화로운 의장과 지공이 당치 않사옵니다. 탁발승의 행각으로 산을 타고 물을 건너야 합니다. 매인 데 없는 자유스런 몸으로 구름과 물을 건너도록 해주옵소서."

무학의 아뢰는 말을 들은 태조는 더한층 믿음직하게 생각했다.

"국사의 말씀이 옳소마는 노구에 어찌 타지 않고 반천리 길을 발섭 하겠소."

"소승의 나이 약간 세월을 쌓았으나 아직도 다리는 무쇠같이 튼튼하옵니다. 과히 하념 마시옵소서."

무학은 웃으며 아뢰었다.

무학은 아뢰기를 다하자 손을 모아 숙배를 드리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태조는 전 밖까지 옥보를 옮겨 무학을 전별했다.

"잘 살피고 돌아오시오."

"천년 기업의 왕조를 살피는 길이올시다.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안심하옵소서."

무학은 다시 합장을 올리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무학은 사처로 돌아온 후에 모든 종자를 물리치고, 국사의 법복을 벗고 회색 장삼을 입고 대삿갓 쓰고 염주를 목에 걸었다. 바른 손에는 석장을 짚고, 왼편 손에는 바리때를 들었다. 동냥을 하는 탁발승 모습이 되었다.

무학은 송도에서 출발하여 남으로 한양을 향하여 내려가지 아니하고 동북으로 강원도 향하고 걸음을 이었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을 둘러본 후에, 철원 궁예의 옛 도읍 터를 살피고, 산백을 밟아 한양 산세를 답사하자는 심산이었다.

무학은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구름바다, 나무 바다, 속에서 일만이천 봉의 기이한 봉우리를 바라본 후에 금화, 회양을 거쳐서 철원을 지나서 연천까지 내려왔다.

일좌 청산이 푸른 하늘 반허공에 장엄하게 솟았는데 제법 영기가 백 리에 뻗어 서린 듯했다.

범속한 산이 아니었다. 모든 산의 조종같이 보였다. 무학은 다시 좌우편을 살폈다. 또 하나의 기이한 푸른 산이 큰 산줄기에서 찢어 내렸다. 아청빛 봉우리가 어깨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치 금강산을 옮겨다가 놓은 듯했다. 기막힌 명산들이다. 그러나 무학은 산이름을 알 수 없었다.

무학은 산을 타고 평지로 내렸다. 다리를 쉬기 위하여 길가 언덕에 앉았다.

언덕 아래서 농부들은 봄갈이를 시작하느라고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

늙은 농부는 눈같이 흰 백수를 흩날리며 가래 자루를 잡고, 젊은 농부들은 줄을 잡아 흙을 헤쳤다.

'얼럴럴 상사디야'를 부르는 농부가 노랫소리가 구성지게 일어났다.

무학은 한동안 가래질하는 농부들의 노랫소리를 듣다가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합장을 하고 농부들에게 물었다.

"잠깐 여쭈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농부들은 흙을 헤치던 가래질을 멈추었다.

"무슨 할말이 있소?"

가래질하는 장붓자루를 잡고 선소리를 외치던 백발노인이 무학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기 저 반공중에 하늘 찌를 듯 솟아 있는 큰 산을 무슨 산이라 부릅니까?"

노인은 한동안 무학의 행색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보아하니 낫살이나 먹은 운수행각인데, 저러한 명산 이름도 모르다니 말이 되나. 저 산 이름은 천보산이란 굴지의 명산일세."

무학은 비로소 천보산의 이름을 알았다.

무학은 노인을 향하여 다시 물었다.

"감사하외다. 그렇다면 천보산 옆으로 멀리 구름 밖에 금강산을 옮겨다 놓은 듯한 저 산은 무슨 산이오니까?"

노인은 다시 대답했다.

"그 산 이름은 소요산이라 하는 산일세. 천하명승 금강산 보다 규모가 약간 작다 해서 별명을 소금강이라 부르네. 대사는 어찌 소요산도 모르나? 신라 때 원효대사가 공부하던 석굴까지 그곳에 있네."

무학은 등에 찬 땀이 흘렀다. 원효대사가 소요산에서 공부했다는 전설을 들었으나, 소요산이 바로 이곳에 있는 줄은 몰랐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았다. 나이 먹어서 해몽을 잘한 때문 오늘날 영광스런 국사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아직도 공부가 입실 지경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무학은 천보산의 웅장한 산용을 보자, 한양의 산천을 형성한 주맥이 천보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잘못 생각했다. 다시 노인을 향하여 물었다.

"한양 산천을 이룩한 산의 조종은 어느 산입니까?"

노인은 어이가 없었다. 드높게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대사, 자네가 부러 농담으로 묻나?"

"아니올시다. 소승이 어찌 감히 노인장께 농지거리로, 허튼수작으로 묻겠습니까. 천보산이 하도 웅장하니 한양 산천의 조종으로 알고 여쭈어본 것입니다."

", 이 사람, 산지 조종은 백두산이지. , , . 그것도 모르며 중노릇을 하나. 어서 가서 공부를 더 하게나."

백발노인은 다시 더 상대해 말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듯,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가랫장부를 잡았다. 다시 청 좋은 목청으로 '얼럴럴상사디야' 농부가를 먹이기 시작했다.

여러 젊은 사람들도 줄을 잡고 가래질을 해서 흙은 헤쳤다.

무학은 무참했다.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노인장을 향하여 합장하고 발길을 돌렸다.

무학의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자 젊은 농부들은 소리쳐 웃었다.

"산지 조종인 백두산도 모르면서 대사 행세를 하나."

"보아하니 얼굴은 고괴하게 고승같이 생겼는데 아직도 공부가 모자라는 모양일세."

작은 농부들은 박장대소들을 했다.

농부들의 비웃는 웃음소리는 신작로 앞길까지 나간 무학의 귀에 들렸다. 무학은 아직도 자기의 공부가 모자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무학은 산지 조종은 백두산이라는 노인의 말에 크나큰 암시를 받았다.

연천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발길을 다시 돌려서 함경도로 들어섰다. 무인지경 칠백 리를 걸었다. 백두산 천지까지 올랐다.

하늘 반만큼 차지한 듯 웅혼 장대한 성자에 비로소 커다랗게 개안이 되었다.

연천 천보산 아래서 가랫장부를 잡고 '얼럴럴 상사디야' 하는 농부가 먹이던 백발노인이 보통 농부가 아니고 신인인 것을 깨달았다.

무학은 백두산에서 산줄기를 타고 내리기 시작했다.

산맥은 북에서 남으로 천 리를 달렸다.

평원 광야를 이루고 심산궁곡을 배판하면서 남북으로 뻗은 큰 줄기다.

한 곳을 당도해 보니 구름도 쉬어 넘을 높고 높은 태산 같은 영이 하늘을 찔러 솟아있다.

백두산 줄기가 남으로 뻗은 대산맥이 영특한 기운을 뿜어서 천 리를 달리다가 함경도 함흥의 황초령을 이루어놓고, 아래로 내려와서 덕원 마식령이 되고, 안변에 와서 복쳔령 고개가 되고, 다시 한 가닥 지맥은 회양으로 뻗어 내려서 천하 절승 만이천봉의 금강산을 배판한 후에 오대산, 설악산이 되어 관동팔경이 되고, 다시 한 가닥이 철령이 되어 남으로 떨어지면서 굼실굼실 달려서 연천 보개산맥이 되어 천보산과 소요산이 이룩한 것이 분명했다.

소요산에서 다시 내룡을 밟아 내려왔다.

양주 땅이 되었다. 수락산이 보이는 불암산이 병풍 친 듯 둘러섰다.

맞은편을 바라보니, 도봉 망월에 붓끝 같은 문필봉이 천하 절경을 벌여놓으면서 잇따라 삼각 연봉이 우람하게 남성적인 장쾌한 멋을 뽐내어 푸른 하늘을 찔러 있고, 쇠귀 앞에는 넓고 넓은 광야가 훤칠하게 벌어져 있다.

무학은 주춤 산마루에 앉아본다. 씩씩하고 넓고 넓어 남성적인 기상이 보였으나 산의 형상이 모두 다 등을 지고 달아나는 형국이다.

무학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대도회가 될 만큼 땅은 넓건만 산세가 모두 다 배반해 달아나는 형국이나 난신적자가 많이 날 것이다!'

무학은 탄식하며 일어섰다.

무학은 다시 걸었다.

쇠귀의 넓은 벌판을 가로 건넜다. 광나루가 나타났다. 훨씬 땅이 열려져 있었고 아차산이 하늘을 겨누어 솟아 있다. 바로 백제의 옛 도읍 터다.

강물이 굽어져 흘러가고 산이 수려했다. 벌판이 무한대로 넓었다.

수도의 자리가 될 만했다. 그러나 백제시대의 이미 큰 도읍이다.

눈앞에는 바람들이 토성의 자취까지 보였다.

백제의 옛 도읍 터를 조금 피하기 위하여 살곶이 다리까지 들어왔다.

살곶이 다리 앞에도 넓은 평야가 있었다. 그뿐 아니다. 강물이 있어서 배가 왕래하며 물건을 싣고 오고 가기도 좋았다.

"대지로다!"

무학은 치마바위에 올라앉아 멀리 평야와 강물을 바라본다.

무학은 다시 보아도 좋았다. 마음에 들었다. 손뼉을 쳤다. 기쁜 빛을 얼굴에 가득히 띠고 치마바위에서 내려왔다.

들 앞에 벌여져 있는 옥야 천 평에는 농부들이 논에 가래질을 하고 한편에서는 밭을 갈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치마바위에서 내려오면서 밭둑을 향해 걸었다.

소 궁둥이에 쟁기를 달고 밭을 갈고 있던 농부는 홀연 채찍을 들어 큰 소리로 소를 꾸짖는다.

이때 소는 딴 곳으로 가려 하고 있었다.

"미련하기 꼭 무학과 같구나."

뜻밖에 자기 이름을 부르며 소를 꾸짖는 소리를 듣자, 무학대사는 깜짝 놀랐다. 이 농부가 보통 농부가 아닌 것을 알았다.

무학은 밭 가는 농부 앞에 나가 합장하고 넙죽 절을 했다.

"스승을 얼른 몰라뵈었으니 눈이 너무나 무디옵니다."

농부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소를 때리는 채찍을 번쩍 들어서 한양 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십 리쯤 가서 자세히 살펴보게나."

무학은 더 묻지 못했다. 자기보고 십 리를 더 가라는 것이 분명했다. 황망히 일어나 농부가 가리켜주는 방향을 향하여 십 리를 갔다.

기막히지 않은가. 벌은 넓고 한강 물은 띠같이 들러 있는데 삼각산의 위용이 백악을 앞세우고 영기를 뿜어 떡 버티고 있다.

도봉 망월 편에서 밖으로 거슬러 역하게 달아나던 삼각산은 한양 편에서 보니 수려한 봉우리가 병풍치듯 둘러 있는데 원산 근산이 모두 다 유정하게 휩싸 안아서 나라의 수도 진신이 될 만했다.

무학은 다시 삼각산으로 올라 용세를 밟아 내려왔다.

백악 앞에 당도해 보니 한강은 띠같이 둘러 흐르는데 강 밖에는 과천 관악산이 구름 밖에 솟아 있고, 한강 안으로 남산이 아담하게 푸른 빛을 뿜는다.

무학은 백악에 내려 대궐터를 정하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입이 벙글벙글 벌어졌다.

"두말할 것 없는 천하의 대지로다."

손뼉을 치면서 감탄하고 있을 때 홀연 한 노인이 흰 소를 타고 가다가 소를 꾸짖는다.

"한편만 보고 한편은 못 보는구나. 어리석다. 무학이 같고나."

노인은 본체만체 소를 꾸짖으며 지나갔다.

무학은 왕십리서 보던 농부가 형태를 변해서 다시 나타난 것을 알았다.

무학은 흰 소를 탄 노인 앞으로 나가 공손히 합장하고 예를 올렸다. 조심스럽게 말을 보냈다.

"소자의 공부는 아직도 어립니다. 스승께서는 좋은 말씀을 내려줍시오."

흰 소 탄 노인은 채찍으로 인왕산 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삼각산으로 주산을 삼는다면 일후에 후환이 있을 것이다. 잘 살펴서 생각하라."

소 탄 노인은 말을 마치자 두어 걸음 앞으로 향하고 나가다가 홀연 자치를 감추어 스러지고 온데간데가 없었다.

무학은 눈을 씻고 인왕산을 살펴보았다. 검푸른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무학은 인왕산에 올라 좌청룡 우백호를 살폈다.

인왕산을 진산으로 만들고 백악을 청룡으로 삼고 남산을 백호를 삼는다면 비록 남향이 못되고 동향이 될망정 천부금탕의 기막힌 땅이다. 노인이 암시를 준 대로 남향보다 동향이 더 좋았다.

무학은 마음속으로 인왕산으로 진산을 삼으려 결정했다.

무학은 한양보다 더 좋은 대지가 없다고 결정한 후에 곧 송도로 돌아가 왕께 아뢰었다.

"옛 스승 도선 비기에도 말한 바와 같이 '이왕정도한양'이란 문구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수도를 한양에 정하신다면 자손이 계계승승하시어, 수백 년의 왕업을 누리실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크게 기뻤다.

"과인도 친히 한양으로 가서 산세를 살피고 대궐터를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만대에 전하실 보조입니다. 전하께서 친히 임어하시어 살피시는 일이 더욱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 중에 학식이 많고 풍수에 밝은 신하를 택하시어 배행에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곧 한양으로 행차할 약식 거둥령을 내렸다.

배행하는 신하는 개국 공신 정도전과 풍수에 밝은 하윤과 일관 이양달 등이 따르고 무학이 앞을 서서 인도했다.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 방원은 자원해서 따라갔다.

하윤은 한양에 당도하자 무악재 고개 남편 금화산 아래 넓은 곳에 대궐터를 정하자고 주장했다.(이곳은 지금 연세대학과 이화대학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하윤과 태조께 고했다.

"도선 비기에 한강 물이 명당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곳에 대궐을 정하시고 도시를 건설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학은 하윤이 태조께 아뢰는 말을 듣자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하윤과 무학은 풍수와 지리를 판단하는 주장이 달랐다.

태조는 무학을 향하여 물었다.

"하제학의 말을 듣고, 국사는 고개를 가로 흔드니 주장이 다르다면 말해주기 바라오."

무학이 아뢴다.

"도선 비기에 한강 물이 명당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은 강물이 바로 직충해서 명당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아니올시다. 한강 물이 멀리 명당으로 비친다는 뜻입니다. 망약 한강 물이 바로 도성안으로 들어온다면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어찌 생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하니 도선대사가 비기에 예언한, 한강 물이 명당으로 들어온다는 말은 하학사가 주장하는 금화산 줄기에서 퍼진 넓은 벌이 아니올시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땅이 얕고 습해서 대궐터 될 만한 곳이 아니올시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이궁쯤은 지어도 좋겠지만 정궁과 행성을 짓고 시정을 벌여서 나라의 수도로 정하기에 평지가 좁을 뿐 아니라 넓은 곳은 지형이 낮아서 수해를 받기 쉽소. 다른 곳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태조 이성계는 발길을 돌렸다. 일관 이양달이 아뢴다.

"도선 비기에 확실히 하제학의 말과 같이 명당에 한강 물이 들어와야 좋다고 했습니다. 이 좋은 땅을 버리기 아깝습니다."

일관 이양달은 서강을 버리기 아깝다고 하윤의 말을 더 한번 생각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왕을 모시고 왔던 방원은 서강 편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제학의 주장도 일리가 있으나, 무학국사의 말이 옳은가 하오. 한강 물이 명당으로 들어온다는 말은 강물이 남편에 비친다는 뜻이니, 하제학과 일관은 너무 고집하지 마시오. 그리고 실제로 지세를 보아서 도읍을 정할 것이지, 너무 비기니 참서에만 침혹되어서 믿을 것이 아니오."

이방원은 역시 배짱이 컸다.

"자아, 다음엔 어디를 보면 좋겠소?"

태조 이성계는 무학을 향하여 물었다.

"백악과 인왕산을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행은 백악을 바라보며 인왕산 앞에 당도했다.

무학은 아뢰었다.

"인왕산으로 진산을 삼으시고 백악산 줄기로 청룡을 삼고 남산 줄기로 백호를 삼으셔서, 동향해서 궁궐을 앉히고, 좌우편에 관청의 행성을 벌이고 다음에 거리와 저자를 둔다면 천 년을 누릴 도읍 터가 될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의 말에 따라 좌우편을 돌아보았다. 과연 마음에 들었다.

무학을 향하여 말했다.

"비록 동향판이라 하나 훌륭한 대지라 하겠소. 인왕산의 억세고 줄기차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산세는 과연 제도의 진산이 될 만하오."

태조는 두 번 세 번 인왕산을 우러러보았다.

태조 이성계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자 무학은 다시 아뢰었다.

"만약 백악을 진산으로 하고 인왕산으로 백호를 삼고, 백악줄기가 흘렀다가 다시 일어나 평평하게 퍼져 나간 타락산으로 좌청룡을 삼아서, 남향해서 궁궐을 앉힌다 해도 훌륭한 대지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인왕산 우백호가 주산인 백악보다 너무나 드세고 거셉니다. 풍수책에 말하기를 좌편 쪽인 청룡은 장손을 말하는 것이요, 우편 쪽인 백호는 자손을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남향이 되면 인왕산이 우백호가 되고 타락산이 좌청룡이 됩니다. 타락산은 인왕산에 눌려서 기가 약하게 됩니다. 이러하니 장손은 잘되지 아니하고 지손이 잘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드높게 웃으며 대답한다.

"터전만 좋다면 그만 아니겠소, 장자나 차자나 매한가지가 이니겠소."

이때 이성계의 큰아들인 진안군 방우는 술을 너무 마신 데다가 화병이 나서 죽었고, 사랑하는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극히 사랑해서 세자로 봉했던 것이다.

무학이 합장하고 공손히 아뢴다.

"만약 빈도의 말씀을 아니 들으신다면 차자가 주권을 잡을 것입니다."

정도전은 너무나 지나치도록 똑똑하고 영리한 재사였다.

태조는 벌써 방석으로 세자를 삼고, 자기에게 세자를 지도하는 스승의 책임을 맡겼던 것이다.

혹시 태조의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웠다. 장자와 차자의 말을 쑥 빼버리고 다른 말로 무학을 공박했다.

"무학대사의 말씀이 그로오. 자고로 제왕은 모두 다 남명을 하고 천하를 다스렸소이다. 도성을 동향해서 정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외다. 남향을 해서 대궐을 앉히는 일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오. 그러하니, 백악을 진산으로 하고, 인왕산을 백호로 하고, 낙산을 청룡으로 하고, 관악을 인산으로 하고, 목멱을 남산으로 삼는 것이 좋겠소."

태조가 말했다.

"자아, 그럼 옛법에 의지하여 도시를 남향해 앉히기로 합시다."

돌아간 전실 한씨의 소생인 정안군 방원도 이에 반대하지 아니했다. 정안군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 되는 때문이다.

나라의 수도를 정하는 데도 제각기 마음속으로는 딴배짱이 있었다.

태조는 막내아들 방석이 잘되기를 바랐고, 정도전도 자기가 보호하는 세자 방석이 잘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정안군 방원은 따로 딴 배짱이 있었던 것이다.

하윤도 백악을 진산으로 하여 남향으로 대궐터를 정하는 것을 반대하지 아니했다. 처음에 금화산 줄기가 뻗어 내려간 서강에 대궐을 짓기를 주장했으나, 하윤은 정안군 방원을 돕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인왕산을 백호로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아니했다.

대궐기지를 정하는 일이 끝나니 무학을 송도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이내 고별인사를 태조께 아뢰었다.

"소승도 이제 큰일을 정했으니 절로 돌아가겠습니다."

태조는 깜짝 놀랐다.

"나하고 함께 송도로 돌아가 모든 일을 도와주시오."

무학이 아뢴다.

"소승은 정치에는 상관하지 아니합니다. 산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겠습니다."

태조는 서운했다.

"어느 산으로 가려 하오? 안변 석왕사로 가려 하오?"

"아니오이다. 천하의 절이 모두 다 공부할 곳입니다. 우선 양주 회암사로 가겠습니다."

태조는 무학의 고고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섭섭해 어찌하오."

왕의 옥음은 은근했다.

무학은 감격하여 아뢴다.

"하문하실 일이 계시오면 사신을 회암으로 보내주시옵소서. 그러면 전하께서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무학은 왕에게 하직을 고하고, 정안군 방원한테 은근한 인사를 올린 후에, 모든 대신들과 작별하고 양주를 향하여 길을 떠난다.

임금 태조는 왕사를 대접하는 예로 승지에게 명했다.

"무학국사의 가시는 길에 의장을 갖추게 하라."

무학은 사퇴했다.

"산문으로 돌아가는 몸에 의장이 필요치 아니합니다. 본부를 거두어주십시오."

무학은 모든 의장을 사퇴하고 검은 장삼에 석장을 짚고 양주로 향햐여 길을 떠났다.

회암사에 당도한 무학은 혼자 탄식했다.

"송도는 산골이 너무나 둘러싸여 포장해 있는 까닭에 주위에 권신과 무장들이 임금보다 강성하여 고려가 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양 국도를 정할 때 인왕산으로 백호를 삼는다면 장손은 결딴이 나고 자손들이 잘될 뿐 아니라, 명공거경들도 모두 다 자손이 잘될 것이다."

무학의 탄식하는 말을 듣고 상좌가 묻는다.

"그럼 이번 왕조에는 장자가 세자가 되지 못하겠습니다그려."

무학이 눈을 감고 대답한다.

"장자는 벌써 세상을 떠나 죽었느니라."

무학은 말을 마치자 눈을 다시 감고 길게 탄식했다.

상좌가 무학대사을 향하여 다시 묻는다.

"어찌해서 벌써 돌아갔습니까?"

"상감께서는 자제분을 팔형제를 두셨는데, 큰아들은 진안대군 방우요, 둘째 아들은 영안대군 방과요, 셋째는 익안대눈 방의요, 넷째는 회안대군 방간이요, 다섯째는 정안대군 방원이요, 여섯째는 덕안대군 방연인데, 이분들은 모두 다 전실 부인 한씨의 소생이고, 일곱째 아들에 무안대군 방번이 있고, 여덟째 아들에 의안대군 방석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은 계비 강씨의 소생으로 도합 팔 형제이다. 이 중에서 여섯째 아들 방연이는 장가들기 전에 어려서 죽었으니 말할 것 없고, 큰아드님 진안대군 방우는 그야말로 참 대단한 분이다. 갸륵하고 아까운 분이 돌아갔느니라."

무학대사는 먹장삼 옷김을 바로잡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좌는 궁금했다.

"진안대군의 갸륵한 일을 말씀해줍시오."

"세상에서는 고려 충신을 최영 장군과 포은 정몽주 선생이며, 두문동 칠십이인을 손꼽아 친다마는, 그들에게 못지아니한 고려 충신은 지금 상감의 큰아들인 이방우니라."

무학은 말을 마치자 눈을 스스로 감는다.

상좌가 묻는다.

"어찌해서 상감의 큰아드님이 최영 장군이나 포은 선생과 같은 고려의 충신입니까?"

"지금 상감의 아드님 중에 상감을 도와서 억세고 줄기찬 패기와 욕심으로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아버지가 왕권을 잡게 하기 위하여 최영 장군을 죽이고, 포은 선생을 암살해서 마침내 사백칠십오 년이나 되는 고려의 큰 기업을 쓰러뜨린 정안대군 이방원이 있지마는, 그와 반대로 불의와 악을 배척하고 깨끗하게 한평생을 마친 사람은 새 상감의 큰아들이다. 장자이면서 그 아버지의 의롭지 않은 일이며 동생의 불법을 꾸짖기란 과연 어려운 일이다. 참말로 사람다운 훌륭한 분이었다."

무학대사는 또 한 번 진안대군을 찬양했다.

"새 상감의 장자라면, 상감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반드시 왕위에 나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와 아우가 고려조정을 뒤엎어 뺏는 일을 반대했단 말씀입니까?"

"그러기에 진안대군의 행동이 더욱 거룩한단 말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시치미 떼고 가만히 앉았다가 편안히 힘 안들이고 장자라는 권한을 가지고 한몫을 단단히 보아서 왕위에 나가려고 할 텐데 진안대군은 그의 아버지의 패업을 의롭지 않다 하고 그의 아우를 꾸짖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냐."

"과연 아까운 어진 분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그려."

상좌는 탄식했다.

무학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진안대군은 그의 아버지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까지도 반대를 하지 아니하고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내칠 때까지도 적극성을 띠어 반대하지는 아니했다. 국가를 위해서 어진 임금을 바꾸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급기야 공양왕을 내쫓고 왕위에 나가게 되는 이것을 역적질이요, 불충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항상 그의 아버지를 간하고 그의 동생을 타일렀다. 절대로 왕씨를 받들어야지 왕씨 이외에 어느 사람이 왕 노릇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성계 장군과 이방원은 걸리적거리는 이방우 옆에 두었다가는 일에 바애가 될까 두려워 중국 사신으로 임명시켜서 명나라로 보냈단 말이다.' 방우는 나라의 공무를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와 보니 벌써 세상은 바뀌어 왕씨는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 버렸고, 자기 아버지 이성계 장군은 새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이신벌군을 하지 말라고 만날 때마다 간청했던 자기의 충고도 다 수포로 돌아 가버렸다. 이방우는 새로 새 나라의 임금이 된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알리지도 아니하고 아내와 아들, 자기 식구만 거느린 후에 황해도 해주로 내려갔다가 다시 함경도 함흥인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간 초옥을 짓고 세상과 등을 지면서 밤낮 마시는 것이 독한 소주뿐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만대의 비평을 받을 것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화병과 술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러하니 장자가 새 나라의 세자가 되기는 벌써 틀린 일이다."

무학대사는 가볍게 한숨을 지어 탄식했다.

상좌 중은 총명스런 밝은 눈을 뜨고 다시 무학대사한테 묻는다.

"그렇다면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벌써 큰집 자손은 왕 노릇하기 틀렸습니다. 사가의 예법으로 친다면 장자가 일찍 돌아가면 자손이 승중을 사서 가법을 계승하는 일이 옳은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마다. 사갓집뿐 아니라 왕가에서도 큰왕자가 조졸하면 그 아들이 왕위에 나가는 일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씨댁 형편을 보니 그렇게 되기는 벌써 틀렸다. 전실 부인 소생에 혁명을 일으킨 주체세력인 다섯째 아들 정안군 방원이 있고, 후실 소생에 임금이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가 되었으니 함흥 구석에서 세상을 등지고 지조를 지켜서 죽은 큰아들의 아들을 장손이라 해서 세자나 세손으로 삼을 리는 만무하다. 이러하니 운명적으로 벌써 이씨의 왕가는 첫 대부터 장손이 잘되기는 틀린 일이다."

무학대사는 말을 마치자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 속에 잠겼다.

상좌가 다시 고한다.

"한 가지 더 여쭈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무학이 대답했다.

상좌가 묻는다.

"이방우는 함흥까지 피해 나갔으면서 어찌해서 진안대군의 칭호를 받았습니까?"

무학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이방우는 진안대군의 칭호를 절대로 받은 일이 없다. 그는 고려 때 벼슬 밀직부사와 정의판서의 직함을 가졌을 뿐, 자기 아버지가 주는 진안대군의 칭호는 받지 아니하였다. 이성계 장군이 새로 왕위에 나간 이후에 모든 공신들을 봉하고 팔 형제인 여덟 아들에게 대군 칭호를 봉하는 예식이 있었을 때, 대궐에서 칙사가 나가서 여러 차례 방우를 불렀건만, 그는 칙사를 꾸짖고 독한 술만 마시면서 군의 칭호를 받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방우는 그 길로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죽장망혜로 해주를 거쳐서 강산을 유람하다가 이내 함흥으로 가서 몇 달 지내다가 화병으로 죽어버렸느니라."

"참으로 갸륵한 분입니다."

상좌는 감탄했다.

"그의 아버지 되는 새 나라 상감은 말은 아니했으나, 그가 죽은 후에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서, 방우는 백이, 숙제의 풍도가 있다고 칭찬한 후에 지청사라는 사당을 지어서 사시절사를 지내주라고 분부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주 수양산에는 백이 숙제의 백세청풍을 찬양하는 사당이 서 있어서 더한층 그의 절개가 아름답게 빛을 뿜게 되었다. 방우가 해주를 찾아간 것은 해주 수양산의 백이 숙제의 절개를 흠모해서 그곳을 찾아갔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이 숙제는 은나라 때 사람이 아니오니까?"

상좌가 또 물었다.

"그렇다. 은나라 고죽국의 아들들이었다. 큰 사람이 백이요, 숙제는 둘째인데, 고죽국이 죽을 때 유언하기를, 아우 숙제로 왕위를 계승시키라 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숙제는 왕위에 나가지 아니하고 형한테 사양하니 형은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받지 아니하고 도망해버렸다. 아우 숙제는 의가 아니라 하고 왕위에 나가지 아니한 후에 백이를 따라갔던 것이다. 뒤에 주 무왕이 은의 신하로서 걸왕을 치니, 백이 숙제는 걸이 비록 악한 임금이라 하나, 신하로 임금을 치는 일은 불법이라고 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주 무왕은 마침내 은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그의 아버지 문왕으로 천자를 삼은 후에, 다시 무왕 자신이 천자가 되니, 백이 숙제는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캐어 먹다가 절개를 지켜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백이 숙제는 우리나라 황해도 수양산으로 도망해 와서 산속에 파묻혀 살다가 죽었습니까?"

상좌 중은 총명한 눈동자를 깜박이며 의아스럽다는 듯 스승 무학에게 물었다.

무학이 대답했다.

"정사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모든 야사에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죽었다 했고, 수양산은 중국 산서성 뇌수산이라 하기도 하고, '환우기'란 책에는 수양산과 뇌수산은 본시 한 산인데, 뇌수산이라고도 부르고 수산이라고도 하고 수양산이라고도 하는데 산 남쪽이 해가 잘 비치므로 수양산이라고 적혀 있고, '설문'이란 책에는 수양산은 요서에 있다고 했으니, 말은 비록 여러 갈래로 나갔으나 백이 숙제가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겟다 해서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해주 수양산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백이 숙제가 우리나라로 와서 해주 수양산에 살았다고 아름답게 선전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기자가 평양 와서 살았다고 말이나 똑같은 사대주의자들의 말들이니라."

"어떻든 이방우는 우리나라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입니다. 해주 수양산에 백이 숙제가 왔건 말건, 이방우 그분 한 분으로 해서 해주의 지청사는 이 나라의 빛이올시다. 앞으로도 이씨 왕조는 대대로 장손이 왕이 아니되겠습니까?"

상좌는 궁금한 듯 화제를 돌렸다.

"아니다. 내 말대로만 한다면 장손이 잘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장손이 잘됩니까?"

상좌 중은 무릎을 바싹 걸고 물었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에서부터 낙산까지 둘러싼 길고 아름다운 산맥을 청룡으로 삼고, 남편에 그림같이 아담한 남산을 백호로 삼는다면 장손이 계계승승하여 오백여 년의 대업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내 말을 아니 들으니 탈이다. 앞으로 다섯 대가 못가서 역적이 일어나고, 이백 년을 채 못가서 큰 난리가 나서 내 말은 생각하리라."

무학대사는 말은 마치자 조용히 하품을 하고 한숨을 지었다.

"그렇다면 왜 상감께 말씀을 올리지 아니하셨습니까?"

상좌는 조바심이 되는 듯 물었다.

"허허, 개국 공신 정도전이 우겨대는구나. 동향으로 대궐을 앉히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나의 주장을 반대했다. 그러나 향이란 산 형세를 따라서 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주자께서 산세를 논하시는데 이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정도전은 딴 배짱이 있어서 내 말은 반대했느니라."

무학은 말을 마치자 또 한 번 탄식하는 한숨을 쉬었다.

개국 공신 정도전이 딴배짱이 있어서 무학대사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정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말을 듣자 상좌는 궁금했다. 무학한테 물었다.

"정도전은 무슨 딴 배짱이 있습니까?"

"정도전은 왕후 강비의 소생인 막내아들 방석의 스승이란 말이다. 강비와 정도전이 방석을 세자로 만들도록 공작을 할 것이다. 그러하니 장자보다 막내신 세자 방석이 잘되도록 대궐터를 잡아야 할 것이 아니냐. 이 까닭에 나의 주장을 반대한 것이 분명하다."

상좌는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아니했다.

"그럼 상감께서 스님을 국사까지 봉하시어 존경하시는 터인데 어찌해서 정도전의 주장을 채택하시고 스님의 주장을 듣지 아니하셨습니까?"

"상감께서도 마음속으로는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하셨겠지. 그러나 장자는 자기의 왕위에 나가는 것을 반대한 진안대군 아니냐. 장자가 죽었는데 그의 아들인 장손을 생각할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사랑하는 강비의 소생 막내아들로 이미 세자를 봉했으니 세자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정한 이치 아니냐. 그리고 영웅호걸의 기상이 있는 정안군 이방원도 자기가 다섯째가 되고 보니 슬며시 시치미를 떼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느니라. 좌우간 지손을 받드는 인왕산이 너무나 드센 데다가 인왕산 밖에 안산이 있는데 말안장같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조정은 밤낮 두 갈래 세 갈래 싸움으로 나라가 시끄러울 것이다."

무학대사는 이같이 한탄하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상좌 중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건만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여 무학대사의 마음과 같이 우울했다.

과연 무학대사의 뜻과는 반대로 인왕산을 백호로 하고 백악으로 주산을 정하여 임좌병향으로 대궐터를 차린 후에 다섯 대가 되어서는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세조가 되어 사육신의 참혹한 큰 사건이 일어났고, 이백 년을 채 못가서 나라가 판탕되는 임진왜란의 난리가 일어난 것은 뒤의 일이다. 세상의 식자들은 무학대사의 말이 맞았다고 떠들어댔다.

임진왜란 때 글 잘하는 문장으로 유명했던 차오산도, 그의 저서 '오산설림'에 같은 말을 써서 지금까지 전해온다.

뿐만 아니었다. 대궐 터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안산이 관악산이 된 때문에, 경복궁에는 화재가 자주 일어났다. 관악산의 형상이 불길에 일어나는 화산의 형국인 때문이라 했다.

그리하여 남문밖에는 못을 파서 남지를 만들고 대궐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물짐승 해태를 조각해서 앉힌 것은 모두 다 뒤의 일이었다.

 

 

전도연

 

임금 이성계는 다시 정도전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그럼 서울 수도의 사대문 이름은 다 지었소. 다시 네 군데 작은 문이 있는데, 이 문들의 이름도 지어야 하겠소."

정도전이 아뢴다.

"동북문은 홍화문이라 하고, 동남문은 광희문이라 하고, 서남문은 소덕문이라 하고, 서북문은 창의문이라 하고, 다시 수구문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동소문은 홍화문이라 하고, 남소문은 광희문이라 하고, 서소문은 소덕문이라 하고, 북소문은 창의문이라 합시다. 그리고 따로 물이 흘러나가는 문을 수구문이라 합시다. 다음엔 도성 안에 구역을 정해야 하겠소."

"서울을 동서남북, 중부의 다섯 부로 나눈 후에 다시 사십구방)으로 나누어서 민가와 시정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동리 이름은 따로 지어서 바치기로 하겠습니다."

임금 이성계는 만족했다. 곧 내시를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오늘은 새 대궐 전각 이름과 도성의 성문 이름을 지은 좋은 날이다. 모든 공신을 불러서 술을 나누려 한다. 지체 말고 연회를 베풀고, 모든 공신들을 청하라."

내시는 청령하고 물러가, 곧 수라산에 기별하여 전각에 연석을 베풀고, 모든 공신들을 청했다.

임금의 부름을 받은 공신들은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모여들었다.

배극렴, 조준, 정총, 성석린, 윤소종, 남은 등 여러 개국 공신들이 일제히 금관조복 화려한 대례복을 입고, 어전으로 추창해 모여들었다.

임금 이성계는 정도전이 지은 대궐 이름과 문 이름 지은 것을 공신들한테 선포했다.

공신들은 모두 다 '좋습니다.' 하고 찬성했다.

풍악소리는 질탕하게 일어나고, 술잔은 끊일 사이 없이 돌았다.

술이 얼큰하여 취하려 할 때 임금 이성계는 정도전 이하 모든 개국 공신들을 돌아보며 분부를 내린다.

"과인이 오늘 나라를 얻어 새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도성을 이룩한 일은 모두 다 경들의 힘이다. 서로들 경대하고 믿어서 자자손손 만대까지 도와주고 의지하기 바라노라."

정도전이 대답했다.

"제환공이 왕위에 나간 후 포숙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을 물으니, 포숙이 대답하기를 왕위에 나가기 전에 고생하던 일을 잊지 말라 했습니다."

임금 이성게는 손을 비비며 감탄했다.

'그렇지' 소리를 연발했다.

정도전이 다시 아뢴다.

"전하께서는 황해도에서 산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큰일날 뻔하셨던 그때 일을 생각하시고, 소신은 정주몽한테 몰려서 항쇄족쇄로 자유를 잃고 옥에 갇혔던 일을 잊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이러하면 자연 만대까지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정도전은 옛날 일을 회상하며 회포를 펴서 아뢰었다.

태조도 옛생각이 났다. 감개가 무량했다.

"경의 말이 옳다...."

태조 이성계는 감개가 무량하면서도 임금이 된 오늘의 일을 생각하니 무한 기뻤다.

용상에서 일어났다. 팔을 벌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정도전이 마주 일어났다. 태조를 향하여 춤을 추었다.

임금 이성계와 신하 정도전은 밤 깊도록 술을 마시며 즐겼다.

뒤의 일이다. 성종 때 창경궁의 정문을 홍화문이라 지으니, 동소문의 별명 홍화문을 혜화문이라 고치고, 서소문의 별명 소덕문을 소의문이라 고쳤다.

한양의 궁궐과 도성이 완성되니 송도에서는 강비를 위시하여 산천 궁녀가 한양 새 대궐로 호화찬란한 행렬을 지어 옮기었고, 세자 방석을 위시하여 강비의 전실 소생 영안군 방과, 정안군 방원 등 여러 대군도 뒤를 따라 한양으로 거처를 정했다.

대왕과 종실이 함빡 한양으로 옮기게 되니 정부의 만조백관들도 부서를 한양으로 옮겼다.

경복궁에는 태조 이성계와 왕후 강비와 왕세자 방석이 거처하고, 여러 왕자와 공주들은 한양성 안 산수가 명미한 곳에 제각기 저택을 지어 거처케 했다.

경복궁 대궐 광화문 좌우편에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육조가 자리를 잡아 앉았고, 운종가에는 종루를 달고, 시정에 배치되어 육주비전의 장사들이 물화를 교역하고 있었다.

고려의 서울이었던 송도 개성을 버리고 한양에 천도하는 일이 끊나니, 태조는 마음이 흡족했다. 경복궁 안에 군신들을 불러서 크게 잔치를 열었다.

만조백관들의 사찬상 앞에는 아름다운 화관 몽두리에 능라주단, 채색옷을 입은 예쁜 기생들이 만조백관의 수대로 움직였다.

생글거려 웃음을 풍겼다. 계집마다 손에 청자주병을 들고 만조백관 앞에 술을 따랐다.

전도하는 화려한 잔치에 제일 마음이 흥락해하는 재상은 봉화백 개국 공신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이제 만년이 가도록 부귀영화를 독점할 수 있는 지위에 있게 되었다.

대왕 이성계를 도와서 왕씨를 멸하고 개국 공신이 되었으니, 대왕이 살아 계시는 동안 정도전의 태산반석이다. 여기다가 정도전은 오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전도 축하연을 열었고, 세자 방석의 사부가 되었으니 다음 대 방석이 왕위에 오르는 알, 정도전의 지위는 또한 여천지무궁이 될 것이다.

정도전은 마음이 호화로웠다. 옆에 있는 영의정 배극렴과 좌의정 조준에게 약방기생을 시켜서 술을 따라 권했다.

"자아 영의정 대감, 오늘 얼마나 좋은 날입니까. 우리 한 번 취도록 흠뻑 마셔봅시다. 위로 성상이 계시고, 아래로 세자가 계시니 이제는 우리들 개국 공신의 마음이 한결 든든하오. 더구나 한양에 새로 도읍을 정해서 만년기업을 굳히게 되었으니 이같이 좋은 날이 또 어디 있겠소."

정도전은 약방기생을 시켜 배정승과 조정승한테 술을 한 잔씩 권한 후에,

"나도 한 잔 따라다오. 취도록 마시리라."

잔을 들어 술을 청했다.

약방기생은 개국 공신 정도전이 잡은 옥잔에 호박빛 아름다운 술을 남실남실 따랐다.

"모두 다 우의정 정대감의 주밀하고 주도한 판단으로 세자책봉과 오늘날 새 도읍을 정하게 되었으니 국가와 사직을 위하여 만행이오."

늙은 영의정 배극렴은 영문도 모르고 큰아들로 세자를 삼아야 한다고 한 마디 했다가 강비의 울음소리가 병풍 뒤에서 터지는 바람에 혼비백산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저 정도전의 비위를 맞추기에만 급급했다.

정도전이 단숨에 술잔을 드는 것을 보자, 좌의정 조준은 약방기생한테 영을 내렸다.

"이번에는 내 술 한잔을 정대감에게 따라 올려라. 과연 큰일을 치렀소. 종묘사직을 위하여 다행이오."

조준은 왕씨를 멸하고 나라를 창업하는 데 제일 공이 많은 다섯째 아들 방원으로 세자를 삼자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이제 강비한테는 점박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세자를 정하고 천도까지 한 이 마당에 다시 더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둥글게 정도전의 비위를 어루만지면서 자기 몸에 큰 화가 돌아오지 아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도전이 한창 의기가 양양해서 사찬상을 받고 있을 때 , 저편 무관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대장군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위시하여 조영무, 조영규 등 일급 가는 장성들이 주립 쓰고 호수를 쓰고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조영무, 조영규는 포은 선생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저격해서 왕씨의 정권을 이씨의 정권으로 바꾸게 한 이방원의 심복이요,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방원의 아내인 민씨의 동생들이다. 모두 다 방원의 직계 장성들이요, 범같이 무서운 대장들이다.

민무구가 큰사발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 어디 약방기생이 따라주는 도토리 껍질 같은 술잔으론 갑갑증이 나서 마실 수가 있나. 잔째 마셔도 시원치 않구려. 우리 사발로 돌립시다."

민무구는 술을 사발로 철철 넘치도록 따라서 입에 대고 쭈욱 들이켰다. 목으로 넘어가는 켜는 소리가 모든 사람의 귀에까지 들렸다.

모든 장수들은 민무구의 쾌활하게 술 마시는 소리가 무한 시원하게 들렸다.

모두 다 벙글벙글 웃으면서 민무구를 칭찬했다.

"진작 그럴 일이지. 나도 한잔 큰 사발로 마십시다. 민장군이 마시는 것을 보니 입이 울멍거리고 어깨가 근지러워서 도대체 배겨날 수가 없소."

조영규도 동감이었다. 민무구가 술사발을 비우자 얼른 받아서 술을 따라 꿀떡꿀떡 들이켰다.

"약방기생들은 이 모양을 보고 대굴대굴 구르며 웃어댔다.

"요년들, 왜 이리 웃어대느냐. 우리들은 꾀만 부리는 문관 따위가 아니다. 얼마나 통쾌하고 시원하냐. 그까짓것, 술을 마시면 한 번 먹은 듯이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른 볼일을 보아야 하지, 밤낮 참새알 같은 잔으로 홀짝홀짝 마시면서 너 같은 기생년들의 엉덩이나 뚜드려주면서 세월 가는 줄 모르니 그것이 어디 술 마시는 것이냐, 계집을 마시는 것이지. 하하하."

조영규는 큰소리를 치며 사발 술을 들이켰다.

"옳은 말일세. 그러니 문관이란 자들은 마음이 좁고 의리가 없는 것들이란 말일세. 바로 성격 그대로거든. 살살 눈치를 보아서 간에도 붙었다가 쓸개에도 붙고, 염통에도 붙었다가 곱창 속을 간지리지 않는가. 그러니 문관 놈들을 믿을 수가 있나."

기생들은 마구 뚫은 창구멍으로 대담하게 말하는 무관들의 상말 섞어서 떠들어대는 말에 웃음이 나와 허리들을 펴지 못했다.

"그 자식들이 사람인가. 그따위가 개국 공신이 되었느니, 앞으로 새 나라 일도 큰일일세. 요리 붙고 조리 붙고 하는 품은 동가식 서가숙하는 이 애들 기생보다도 더 지조가 해괴망측일세. 똥을 먹으면서 똥누는 사람한테 꼬리를 치는 똥개만도 못한 놈일세."

장군들은 까르르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기생이 일부러 눈을 샐쭉하게 뜨고 조영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생년이라고 다 동가식 서가숙을 합니까. 정절부인보다도 기막히게 일부종사하는 기생도 많습니다."

기생의 비꼬는 소리를 들은 무관들은 모두 다 솔직한 사람들이었다. 기생을 타박하지 아니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기생 중에도 협기 있고 의리를 지키는 의기는 한 번 만나 임을 한평생 언약을 지켜서 낭군의 마음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절기도 좀 많으냐. 동가식 서가숙 한다는 기생마다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이 너무 과했다."

조영규는 솔직하게 기생에게 사과했다.

이때 정도전은 거나하게 취해서 술좌석에서 일어났다. 옥병에 가득 담겨있는 천일주를 들고 어전으로 나아가서 술을 따라 대왕 이성계한테 올렸다.

"이제 전하께옵서는 아무 근심이 없으십니다. 나라를 얻으신 후에 충신은 만조 정하고 국본은 반석까지 잡혀서 세자마마를 정하시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셨으니 또다시 무슨 걱정이 계시옵니까. 오늘 소신의 술을 한 잔 드시어 만수무강하옵소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으스대며 아뢰었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까지 닭의 알같이 보이고, 며느리가 고와 뵈면 천하에 드문 효부로 보이는 법이다. 개국 공신 정도전은 대왕의 눈에는 천하에 드문 충신으로 보였다.

"경이 나에게 친히 술을 부어주려 하는가. 경이 주는 술을 내 어찌 사양하리. 더구나 국태민안하고 삼천리강산이 안온한 이 때 국본을 정하고 새로이 도읍을 정했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사양치 아니하고 마시리라. 가득 술을 부으라."

정도전은 임금의 잔에 천일주를 가득 부은 연후에 다시 발을 옮겨 비척비척 왕비 강씨와 왕세자가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강비의 눈에는 정도전이 꽃으로 보였다. 비틀거리며 주정하는 것도 아름답게 보이고, 거나하게 취하여 수다를 떠는 것도 사내답게 보였다. 자기의 뜻을 잘 받들어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새로 도읍을 옮겨 한양 궁성을 이룩해 놓았으니 이래도 꽃으로 보이고 저래도 꽃으로 보였다.

정도전은 왕비 앞에 당도하자 수라상에 놓인 황금잔을 들어 술을 따르며 축하하는 알을 올렸다.

"왕후마마께서는 인제 모든 시름과 걱정을 잊으옵소서. 왕세자께서 옆에 계시고 새로이 궁궐에 드시니 얼마나 기쁘시옵니까. 옆에는 대왕마마를 모시고 앞에는 왕세자마마를 거느리셨으니 얼마나 든든하시옵니까. 그저 만수무강하시면서 무궁하신 복록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은 신의 술 한잔을 받으시어 취하십시오."

왕후 강비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풍기며 대답한다.

"대감이 보내는 축하주를 내 어찌 사양하겠소."

강비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었다. 저편에서 바라보던 조영규, 조영무, 민무구, 민무질 형제들은 일제히 탄식했다.

"저 꼴 좀 보게. ! 추하다."

민무구 장군이 가만히 부르짖었다.

"구토증이 나서 못보겠네."

아우 장군 민무질이 한 마디 한다.

"자아 일어나세. 매스꺼워서 배겨날 수가 없네."

조영무가 벌떡 자리예서 일어났다.

정안군 이방원의 심복 무관들은 슬며시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원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려나?"

민무구가 조영규에게 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지."

"우리 누님댁으로 가서 짭짤하게 술 한잔 마시기로 하세."

방원의 처남 민무질이 조영규, 조영무에게 자기 누님 집으로 함께 가자고 말을 꺼냈다.

"정안군도 중국에 가시고 아니 계신데, 미안하지 않은가."

"정안군이 아니 계시기로서니, 우리들이 술 한 잔 달라는데 아니 주실 우리 누님이 아닐세. 좌우간 우리 가보기로 하세."

일행들은 정안군 이방원의 집을 찾았다.

정안군 방원의 집은 소조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정안군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정안군이 외국으로 나가 있게 되었으니, 문전은 냉락하고 찬바람이 불었다. 염랑세태는 기막히도록 예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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