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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1-1

세종대왕

박종화

 

1권 왕조의 아침

 

임금 노릇 어려워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러한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하리라.'

이 시조는 태종 이방원이 그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조정의 명을 받들어 원을 돕고, 명을 치러 갔다 그 반대로 원을 돕지 않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서 고려조정을 무찌른 후에 스스로 왕의 자리에 나가려 하여 당시 고려조정의 중신인 포은 정몽주의 마음을 술자리에서 떠보았던 것이다. 포은 선생은 이 노래의 뜻이 고려의 왕씨를 생각하지 말고 이씨를 도와서 부귀영화를 한평생 함께 하자는 뜻인 것을 알았다. 즉석에서 노래로 화답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도저히 이씨를 도울 수 없다고 결연히 거부한 노래다. 이방원은 포은의 확고부동한 뜻을 알았다. 포은을 살려두고는 이씨가 왕권을 장악할 수 없는 것을 직감했다.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를 시켜서 자기 아버지가 거짓말에 떨어져 낙상한 것을 문병하고 돌아가는 정포은을 선죽교 아래 매복해 있다가 철퇴로 때렸다. 마침내 포은의 푸른 피를 뿌린 의기는 천추만대에 찬란한 빛을 뿜었던 것이다. 포은이 세상을 떠나자 천하의 정권은 이씨한테로 넘어갔다. 그러나 송악산 송도 천지에는 의기의 남자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의 아들 이종학은 의를 굽히지 않고 옥중에서 죽었다. 야은 길재는 벼슬을 버리고 과천 관악산에 숨어서 노래를 불렀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 선생의 노래는 송도 일판에 짜아하게 퍼졌다. 고려조정에 국록에 먹던 뜻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지조를 지켰다. 고려왕조를 섬기다가 이성계를 도와 왕이 되게 한 개국 공신 조준의 아우 조윤은 땅을 쳐 통곡하고 지리산속으로 들어가서 이름을 조견이라 고쳤다.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못하고 살았으니 개와 같다 해서 견자로 이름을 간 것이다. 이성계는 그의 형 조준이 자기를 도와 왕이 되게 한 큰 공을 생각해서 조견에게 개국이등공신을 봉하고 호조전서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다. 그뿐 아니라 친히 어필로 친서를 보내서 조정에 나와 일을 보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조견은 더욱 의지를 굽히지 아니했다. 몸을 피하여 과천 청계산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이성계는 더욱 조견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사냥을 간다고 영을 내린 후에 그의 형 조준과 함께 과천으로 향했다. 태조 이성계가 과천으로 사냥을 나간 것은 남의 이목을 가리자는 것이요, 실상인즉 조견을 친히 찾아보고 그의 마음을 돌리자는 것이다. 청계산에서 한참 사냥을 하다가 이성계는 조준한테 물었다.

"경의 아우가 지리산에 있다가, 이곳 청계산으로 옮아 산다 하는데, 경은 형제지간이라 혹시 만나본 일이 있는가?"

조준은 황공했다.

"소신도 제 아우가 이곳 청계산으로 몸을 피해 산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마는, 한가롭지 못한 몸이 오라,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공손히 대답했다. 태조 이성계는 한숨을 짓고 말한다.

"과인은 경의 아우의 높은 절개를 항상 흠앙하는 바일세, 옛 주인을 생각하고 지조를 굽히지 않는 그 마음은 과연 백옥같이 깨끗하고 백수정같이 맑은 맘일세. 한번 만나보고 싶으이, 경이 한 번 주선해주겠나."

이성계는 마치 마음에 드는 애인을 생각하듯 짝사랑을 했다. 이러한 사람을 자기의 신하로 삼는다면 얼마나 나라에 대하여 유익한 일을 많이 해줄까 하고 간절하게 생각한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의 말을 듣자, 조준은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신도 아우를 만나본 지 오래됩니다. 한 번 찾아보고 전하의 융숭하신 뜻을 전하겠습니다."

조준은 태조께 아뢰고, 산에서 내려 동리로 향했다. 감사와 군수에게 아우의 거처하고 있는 곳을 찾으라 했다. 새 나라의 임금이 과천으로 사냥을 나오고, 개국 일등공신 조준 조정승이 아우를 찾아 촌으로 내려왔다 하니 과천 백성들은 벌벌 떨었다. 경기감사가 앞을 서고, 과천군수가 조준을 인도했다. 동리의 이장을 불러서, 새로 이사 온 조서방의 집을 물었다. 이장은 초라한 오막살이 초가집을 가리켰다.

"저 집이 몇 달 전에 떠들어온 조서방네 집이올시다."

이때 조견은 농부 행세를 하고 숨어 있었다. 별안간 동리가 소란했다. 동리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새 임금이 과천 청계산으로 사냥을 나오고, 개국 일등공신 조정승이 경기감사와 과천군수와 함께 배종해 왔다는 것이다. 자기형이 온 것이 분명했다. 조견은 시끄럽고 달갑지 않다고 생각했다. 머슴을 불렀다.

"사립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게. 그리고 혹시 누가 찾더라도 없다고 하게."

단속을 하고 있었다. 별안간 동리가 떠들썩했다. 경기감사와 과천 군수의 행차가 촌으로 내려오고, 뒤에는 조정승이 말을 타고 따라온다고 야단들이다. 조견은 머슴들을 다시 단속했다.

"혹시 누가 문을 열어달라고 하더라도 일체 대답을 하지 말아라."

머슴들은 주인의 당부하는 말을 듣고, 문을 더한층 단속하고 있었다. 이윽고 권마성 소리와 벽제 소리가 문밖에서 요란했다. 사립짝문이 흔들리며 구종별배들이 소리 높여 하님을 불렀다.

"하님, 문을 열어주시오. 서울서 조정승 대감께서 내려오셨습니다. 백씨 되시는 대감이 상감을 모시고 이곳 청계산에 사냥 나오신 길에 제씨를 만나보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대문 앞에 서 계십니다."

문밖에서 하님을 부르며 떠들어대는 구종들의 말을 듣자, 머슴들은 당황했다. 조견에게 고했다.

"샌님께 고합니다. 백씨 되시는 조정승 대감께서 상감을 모시고 사냥을 나오셨다가 찾아오셨다 합니다. 어찌하오리까."

조견은 차갑게 대답했다.

"아까부터 당부한 일이 있지 아니하냐. 절대로 문을 열어서는 아니 된다.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열어달라 해도 못들은 체 내버려 두어라."

이때 정승 조준은 구종들이 문을 열라 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을 보자, 아우가 자기를 만나주지 않으려 하는 굳은 뜻을 짐작했다. 말에서 내려서 친히 대문 앞에 서서 점잖게 제수를 불렀다.

"아주머니 계시오니까. 서울서 조준이 내려왔소이다. 아우가 보고 싶어서 내려왔습니다. 문을 좀 열어주시오."

이때 조견의 아내는 맏시아주버니 되는 조준이 정승까지 된 귀한 몸으로 궁항 벽촌에 엎드려 사는 자기 남편을 찾아왔다고 친히 문밖에서 전갈을 보내는 소리를 듣자 인정상 문을 아니 열어주기 난처했다. 남편한테 나중에 꾸지람을 들을 셈 잡고 도랑치마를 매만진 후에 사립짝문을 빵긋 열었다. 정승 조준은 반갑게 제수한테 인사를 한 후에 청으로 올랐다. 집이라야 세 발 막대 거칠 것 없는 초라한 초가삼간이었다. 조견은 피하려야 피할 곳이 없었다. 조견은 급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댈 작정이었다. 제수의 인도를 받아 조준은 아우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남루하고 해진 이불이었다. 조견은 눈을 감고 누워서 형을 맞이하지 아니했다. 정승 조준은 누워 있는 아우의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손을 들어 남루한 이불 위에 얹었다.

"내가 왔다. 네 형, 내가 왔다. 어디가 아프냐?"

목소리는 다정하고 은근했다. 조견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차갑기 얼음장 같았다. 아우의 냉대하는 것을 바라보는 조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조준은 손으로 아우의 이불을 쓸며 말한다.

"부모의 혈육을 받은 우리 형제는 너와 나 단둘뿐이 아니냐. 형이 너를 보고 싶어서 멀리서 찾아왔는데, 너는 이불을 쓰고 나를 보지 아니하니 섭섭한 마음 금할 수 없구나."

아우 조견은 여전히 이불을 쓰고 대답이 없다. 조준은 다시 간곡하게 말한다.

"너를 대면해본 지가 여러 해로구나. 어서 이불을 헤치고 얼굴을 좀 보여다오. 형이 네 얼굴을 한번 보고 싶구나."

아우 조견은 이불 속에서 대답했다.

"나는 형도 없고 임금도 없소. 내 형은 벌써 죽은 지가 오래요, 죽은 지 오랜 형이 찾아왔으니 귀신이 온 것이오. 귀신을 만나볼 까닭이 없소. 나라를 망하게 한 귀신은 빨리 물러가오.

이불 속에서 꾸짖는 아우의 말을 듣는 조준의 얼굴은 화끈했다. 옛 임금을 배반하고 이성계를 섬기는 것을 꾸짖는 소리다.

그러나 조준은 노하지 아니했다. 말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아우를 달래본다.

"백성들 도탄에 빠뜨리는 임금을 버리고, 영명한 주인을 도와서, 나라를 평안하게 하자는 것이 내 주장이다. 망하는 원을 돕다가, 죄 없는 창생이 망하는데 어육이 되는 꼴을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느냐. 그러므로 나는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장군을 도와서 왕이 되게 한 것이다. 너무 형을 오해하지 말아라. 모두 다 창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형의 말을 듣는 아우는 이불 속에서 또다시 호통을 쳤다.

"장하오. 개국 일등공신, 과연 장하오. 더러운 중시조가 될 테니 장하오."

조준은 껄걸 웃었다.

"개국 공신은 나만이 개국 공신이 아니다. 전하께서는 너를 생각하시고 개국이등공신을 봉하셨다. 마음을 편협하게 갖지 말고 나와서 형과 함께 벼슬을 하자."

조견은 형의 말을 듣자 부아가 터졌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벽력 같은 소리로 형을 꾸짖는다.

"무어요? 누가 개국 공신으로 만들었단 말요, 도둑놈들. 더러 운 소리를 다시는 내 앞에서 하지 마오. 백옥 같은 내 성명 삼자 위에 어떤 놈이 감히 개국 공신의 칭호를 얹어놓았더란 말요. 나는 포은 이름을 바꾸었소. 도둑놈들하고 어깨를 같이할 내가 아니오!"

아우의 말을 듣는 조준은 무색했다.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우는 눈을 부릅떠 씩씩한 기상으로 또 한 번 떠들어댄다.

"도둑놈들이 속임수로 임금을 죽이고 충신을 죽여서 나라는 뺏었지만 내 마음과 내 몸은 뺏을 수 없소. 왜 내 이름을 공신록에 얹어놓고, 내 몸을 뺏으려 하오. 더러운 놈들!"

조견은 말을 마치자. 핏발선 눈으로 형을 흘겨보고 앙연히 자리에 누워버렸다. 조준은 아우의 마음의 철석같이 굳은 것을 보고 다시는 더 달지 못했다. 조준은 무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수한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갔다. 태조 이성계가 어막을 잡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아뢴다.

"황공하옵니다. 신의 아우의 성미가 너무나 괴팍해서 개국 공신의 칭호를 받지 아니합니다. 모두 신이 아우를 잘 인도하지 못한 탓이올시다. 전하께서 신을 책하시고 죄를 주시옵소서."

태조는 조견이 개국 공신의 칭호를 받지 않는다는 조준의 말을 듣자. 잠깐 얼굴이 붉어졌다. 자기가 섬기던 고려의 임금을 내치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을 의롭지 않게 여기는 조견의 뜻을 짐작한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는 마음속으로 조견의 높은 지조를 감탄했다. 과연 선비다 하고 생각했다.

그가 자기 앞에 절개를 굽히지 아니할수록 사모하는 마음은 더한층 간절했다.

태조 이성계의 심경은 마치 아름답고 깨끗하고 조촐한 여인한테 사랑을 구했다가 사랑을 거부당한 심경과 똑같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이내 태연한 얼굴로 돌아가 웃으며 말한다.

"경의 아우는 과연 지조가 높은 사람일세. 나한테 몸을 굽혀서 신하 노릇하기가 싫은 모양이니, 빈객의 예로 대접하겠네. 내가 친히 자네 아우를 찾아보기로 하겠네."

이성계는 말을 마치자 어막 옥좌에서 일어났다.

정승 조준은 황공했다.

"전하께서 친림하실 곳이 못되옵니다. 집이 너무나 누추하고 초라합니다. 담이 퇴락하고 이엉이 썩은 삼간두옥초가 집이올시다."

이성계는 껄껄 웃었다.

"별소리를 다 하네 그려. 경은 언제부터 고대광실에만 살았던가. 나도 본시는 함경도 구석 초가집에서 살았네."

태조 이성계는 드높게 웃으며 어막 밖으로 나갔다. 뒤에 따르는 조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태조가 말에 오르니 정승 조준은 앞에서 인도하고 백관들이 뒤에 따랐다. 조그마한 한촌인 과천 천계동에 새 나라 임금이 온다 하니 동네는 불끈 뒤집히다시피 했다. 남녀노소 백성들은 삼거리까지 나가서, 새 임금을 맞이하여 줄을 지어 엎드렸다. 조준은 새 임금 이성계를 아우의 초가집으로 인도했다. 베 도랑치마를 입은 조견의 아내는 시아주버니 조정승이 새 나라 임금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온다 하니 몸을 피하여 봉당 뒷문을 열고 굴뚝 뒤로 숨어버렸다. 조준은 안으로 들어가 이불 쓰고 누운 아우의 몸을 흔들었다.

"상감께서 오셨다. 너를 신하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손으로 대접한다고 친히 찾아오셨다. 잠시 만나 뵙도록 해라."

조견은 그제서야 젖히고 일어나, 혼자 말한다.

"신하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손으로 대접하겠다 하는데 아니 만날 도리가 있나. 나를 손으로 대접한다니 나도 저를 손으로 대접할 수밖에, 찾아오는 손을 아니 만날 수가 없지."

조견은 말을 마치자 천천히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조준은 천만다행하다고 생각했다. 아우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이때 이성계는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조준이 인도해서 마루로 올랐다. 이성계는 조준에게 눈짓을 해서 뒤로 피하라. 한 후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조견에게 말을 붙였다.

"조한림, 참 오래간만이오."

하오를 해서 존대하는 말을 썼다. 조견은 이태조의 인사하는 말을 듣고도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다. 대답도 아니했다. 태조 이성계는 다시 말을 붙였다.

"조한림, 산림에 묻혀 있는 것도 좋지마는 조정에 나와서 나를 도와주시오. 조한림이 나온다면 만백성의 복이오이다."

조견은 이태조의 말을 듣자. 뚫어지도록 이태조의 얼굴을 쏘아본다. 새까만 눈동자에 파란 불길이 일었다. 굳게 다물 어진 입이 열렸다.

"자네와 나는 고려의 왕씨를 섬긴 신하일세. 자네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일세!"

뒷짐을 지고 호령조로 말을 했다. 존대하는 말을 쓰지 아니하고 평교 간에 쓰는 하게를 탁 해 붙였다. 태조 이성계의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뒤로 물러섰던 조한림의 형 조준의 간장이 콩알만큼 오그라졌다. 조견은 다시 눈을 똑바로 뜨고 이태조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들여다보며 말한다.

"자네가 임금이라면, 나도 임금 노릇을 해야 하겠네.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나. 그렇지 아니한가, 생각해보게나."

태조 이성계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무료한 얼굴에 간신히 웃음 띠고 조한림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한림을 다시 말했다.

"자네는 아직 내 성명을 고친 것을 모를 것일세. 나는 본시 '조윤'이었던 것은 자네도 잘 알 것일세. 그러나 나는 자네가 임금이 된 후에 '조견'이라고 고쳤네. 이름을 고친 까닭을 좀 들어보려나.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었는데도 함께 죽지 못하고 아직껏 살아 있으니, 정몽주나 최영이나 이숭인이나 이종학한테 비한다면 개만도 못한 놈일세! 그래서 나는 나를 꾸짖고 나를 자학하게 ''이라고 이름을 고쳤네. 개도 옛 주인을 알아보는데 나는 개만도 못한 놈일세. 자네는 자네를 길러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으니, 나보다 훨씬 나은 영웅일세. 개만도 못한 놈이 어찌 자네 같은 영웅을 도와주겠나. 하하하. 두말 말고 돌아가게."

조견은 면대해서 태조 이성계를 야유해서 꾸짖었다. 태조 이성계는 꼼짝없이 조견한테 욕을 당했다. 노할 수도 없었다. 빙긋 웃어버리고 말았다. 더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웃으면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태조가 뜰 아래로 시신들은 태조를 호위했다. 조준도 나타났다. 시신들은 조한림의 무례한 언동에 분개했다. 모두 다 죽이자고 했다.

"아니 된다."

태조는 허락하지 아니하고 조준에게 일렀다.

"경의 아우는 과연 절개 높은 사람일세. 철석간장은 어찌하는 수가 없네."

탄식하고 말 위에 올랐다. 이태조는 조견한테 욕을 당하고도 차마 잊을 수가 없었다. 마상에서 예조판서에게 분부를 내렸다.

"정승 조준의 아우 조견은 높은 사람이다. 벼슬을 주어도 받지 아니하니, 그가 거처하는 산에 나무를 심어서 푸른 빛이 돌게 하고 돌로 석실을 지어서 거처하게 하라."

예조판서는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청계산 일대에 식목을 해서 창윤한 빛이 돌게 하고, 돌을 떠서 석실을 짓기 시작했다.

조견은 관가에서 석수를 동원시켜서 자기 집 앞의 돌을 다듬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로 내 집 앞에서 치석을 하는가?"

아전과 석수들이 대답했다.

"상감께서 높은 처사의 거처하시는 곳이니 돌로 석실을 지어 드리라 해서 돌을 다듬는 것입니다."

조견은 정색하고 아전과 석수들한테 말했다.

"당치 않은 짓들 하지 말고 물러가게. 내가 무슨 까닭에 이성계의 덕을 본단 말인가."

아전과 석수들은 조한림에게 애걸했다.

"저희들은 그저 분부를 받들 뿐입니다. 석실을 아니 짓고 돌아가면, 목이 달아납니다. 샌님, 그저 통촉해주옵시오."

조견은 안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말했다.

"갑시다. 이곳은 살 곳이 못 되오."

말을 마치자, 조한림은 아내와 함께 괴나리봇짐을 어깨에 메고, 양주 송산으로 향했다. 송산은 아내의 고향이었다. 두어 칸 초옥을 짓고 다시 숨어 살았다. 얼마 후에 조견은 사별이 들었다. 아들에게 유언을 했다.

"내가 죽은 후에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게 되거든 '고려안렴사 조견지묘'라 쓰고 절대로 이조의 벼슬 이름은 쓰지 말아라."

조견은 유언을 마치자 이내 세상을 떠났다. 장사를 치른 후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자손들은 이태조가 무서웠다. '개국이등공신 조견지묘'라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을 세운 이날 밤에 양주 송산에는 별안간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천둥 번개를 하고 폭우가 쏟아졌다. '와지끈' 소리가 나면서 벼락 불덩이는 '개국 공신'이라고 새긴 조견의 비석을 갈겼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보니 벼락은 비석을 쳐서 반 동강이 났다. '개국 공신'이란 글자는 박살이 되고 '조견지묘'라는 네 글자만 남아 있었다. 자손과 동네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했다. 조한림의 강직하고 곧은 성격은 죽은 후에도 영혼이 있어서 태조 이성계가 주는 벼슬을 받지 아니한 것이다. 자손과 동네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했다. 조한림의 강직하고 곧은 성격은 죽은 후에도 영혼이 있어서 태조 이성계가 주는 벼슬을 받지 아니한 것이다. 소문은 온 나라에 퍼졌다. 송도 선비들은 조견 선생을 존경해서 송산 선생이라 불렀다. 그의 돌아간 날을 잊지 아니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지냈다. 태조 이성계는 그의 형인 조준을 향하여 말했다.

"과인이 나라를 맡은 후에 경의 아우 한 사람을 회유하지 못했으니, 부끄럽기 한량없다. 과연 임금 노릇하기 어렵구나."하고 탄식했다.

조견의 일이 있은 후에 온 나라 선비들은 모두 다 조한림의 의로운 행동을 사모하고 태조 이성계의 새로운 건국에 협조하지 아니했다. 조견의 일이 있은 후에 또 한 사람 고려의 지사가 나타났다. 이종학은 목은 이색의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목은과 함께 청주옥에 갇혀 있었다. 하늘은 지사를 살렸다. 홍수가 크게 범람해서 옥이 떠나갔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주는 정도전은 이종학을 함창으로 또 귀양보냈다. 그러나 이종학은 끝끝내 절개를 지켜서 이성계에게 굽히지 아니했다. 정도전은 그의 심복을 함창으로 보내서 이종학을 장살시켜라는 지령을 내렸다. 정도전의 심복은 함창으로 내려가 이종학을 옥에 가두고 형리에게 죽이라고 분부했다. 때마침 함창판관으로 있는 김여지는 이종학의 제자였다. 가만히 형리들에게 당부했다.

"이종학 선생은 충신이다. 아무리 정도전이 사람을 보내서 죽이라고 지령을 내렸다 하니만 국가에는 법이 있는 것이다.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장살을 시킨다는 일은 법을 무시하는 일이다. 월권 행동으로 어진 충신을 죽여서는 아니 된다."

준엄하게 형리들을 단속했다. 이종학은 이로 인하여 죽음을 모면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기미를 알아차리고 이종학을 장사현으로 옮겨서 미리 안치시키라는 영을 내린 후에 다시 심복 손흥종이라는 자를 가만히 보내서 가는 도중에 길에서 죽여버리라는 비밀한 지령을 내렸다. 정도전의 비밀한 지령을 받은 손흥종은 함창서 장사로 옮겨가는 죄수 이종학의 뒤를 따랐다. 손흥종은 의리도 없고 학식도 없는 자였다. 그저 정도전에게 붙어서 벼슬자리를 꿈꾸는 하잘것없는 인간이었다. 이종학이 무천역말에 당도해서 날이 저물었다. 죄수를 압송하는 형리는 주막집에 사처를 청하고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정도전이 보낸 손흥종은 이종학이 사처를 잡고 있는 옆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밤이 깊어 자정 때가 넘었다. 손흥종은 아무런 방비도 없이 형리와 함께 곤하게 자는 이종학을 목매 죽였다. 고려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던 고고한 선비 이종학은 마침내 무지한 흉한의 손에 유언 한 마디 남길 틈 없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정도전은 다시 그 아우 종덕을 회유하여 벼슬을 받으라 했다. 형이 원통한 죽음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는 아우 종덕이 무릎을 꿇고 벼슬을 받을 리 없었다. 정도전은 이종덕을 옥에 가둔 후에 매질하고 고문하여 마침내 죽여버렸다. 목은 이색의 아들 형제는 이같이 의를 굽히지 아니하고 절개를 지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때 목은 이색은 아들 종학과 함께 포은 정몽주의 당으로 몰려서 청주로, 함창으로, 장단으로, 금양으로, 여주로 갖은 고생을 하며 귀양살이를 했다. 목은의 제자는 귀양살이하는 목은을 여주로 찾아갔다. 종학, 종덕 두 아들이 이성계한테 굽히지 아니하고 절개를 지키다가 참혹하게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했다.

"자제 두 분이 절개를 지키다가 한꺼번에 세상을 버렸습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세상 천하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목은은 아무 말 없이 제자의 손을 잡고 산골 속으로 들어갔다. 제자는 손목을 잡힌 채 목은을 따랐다. 산도 막바지요, 물도 메마른 산궁수진 처한 곳에 당도했다. 목은은 목을 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구슬픈 통곡 소리는 오장육부가 터져 오르는 통곡성이었다. 제자는 비로소 산속으로 들어간 까닭을 알았다.

눈물을 머금고 따라서 울었다. 목은의 통곡성은 좀처럼 그치지 아니했다. 나라가 망한 망국한, 아들을 둘씩이나 죽인 망가한, 서리고 엉킨 한이 한꺼번에 쏟아진 통곡성이었다. 한 시각 두 시각이 지났다. 목은은 목이 쉬도록 계속해서 울었다. 제자는 목은을 위로했다.

"그만 그치십시오. 스승님, 그만 진정하시오."

여러 차례 위로했으나 목은은 계속해서 통곡을 했다. 아침에 솟았던 해가 서편 산마루로 넘어갔다. 목은은 그제서야 통곡을 그치고 산속에서 내려왔다.

목은은 제자한테 말했다.

"이제야 내 가슴이 조금 시원한 듯하이."

목은의 제자는 목은의 심정을 알았다. 목은은 나라 망한 한과 아들을 둘씩이나 죽인 기막힌 한을 통곡하고 싶었으나, 울기도 어려웠다. 목은의 주위에는 태조 이성계를 섬기는 정도전과 이성계의 아들 방원이 기찰을 보내서 항상 목은의 행동을 일일이 주목하고 있는 때문이다. 목은은 제자와 함께 귀양 사는 집으로 돌아오자 벼루에 먹을 갈아 종이에 시를 썼다. 송헌이 나라를 맡더니 나는 떠다니는 몸이 되었네, 꿈속엔들 어찌 이런 일 있을 줄이야. 두정씨가 큰 의논에 참여했다 하네, 어느 때나, 집안 사람들 모두 다 모여 지내리. 송헌은 태조 이성계의 아호요, 두정씨는 그의 제가였던 정도전과 정총을 가리킨 말이다. 목은은 시를 써놓고 제자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 시는 내가 귀양살이하며 떠돌아다니면서 지은 시일세. 다시 자식들과 함께 한 집 안에 모여 살기를 바랐더니, 이제 두 자식이 다 죽었으니 영영 한 집 안에 모여 살기는 틀려버리고 말았네."

목은은 말을 마치자 늙은 얼굴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가만한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렀다. 목은은 다시 붓을 들어 종이에 시를 썼다. 사람의 정이 어찌 물건 마냥 무정하랴. 경계에 부닥칠 때마다 불평은 해마다 높아지네. 우연히 동편 울타리 바라보고 얼굴이 붉어졌네. 참 국화를 대해 보는 가짜 도연명. 목은은 시를 다 쓰고 붓을 던지 후에 제자에게 말했다.

"이 시는 지금 내가 나의 심경을 그대로 그린 시일세. 나는 포은 선생처럼 철퇴로 맞아 죽지 않고 아직도 살아 있네. 내 아들들처럼 장살이 되어 죽지 못하고 아직도 묵숨이 붙어 있네. 그러하니 나는 가짜 도연명이고, 포은 선생과 우리 아들들은 진짜 국화가 아닌가. ,, . 국화의 능상고절을 사랑한다는 내 꼴이 말이 아닐세."

목은은 말을 마치자 눈물을 또다시 주르르 흘렸다. 제자는 다시 더 위로할 말이 없었다. 얼마 후에 태조 이성계는 목은 이색의 두 아들이 죽은 것을 알았다. 존경하는 옛 친구였던 목은의 심경을 추상해서 가엾다고 생각했다.

"목은 이색이 지금 어디 있느냐?"

시신에게 물었다.

"여주에 귀양가 있습니다."

시신은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귀양을 풀어서 집에 있게 하라."

태조 이성계는 승지에게 영을 내렸다. 정도전과 정안군 방원은 마음에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태조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목은 이색은 새 나라 임금의 특명으로 여주에서 귀양이 풀려서 송도로 돌아왔다. 아들도 없는 청상과부 며느리들만 있는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문불출하고 누워 있었다. 며칠 후의 일이다. 대궐에세는 특사가 나왔다. 새 나라 새 임금이 사신을 보냈다.

"상감께서 대감을 부르십니다."

이색은 난처했다. 이성계는 자기 후배다. 그뿐 아니라 고려 왕실의 적이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다. 부르는 데 응한다면, 그에게 칭신을 해야 한다. 목은은 괴로웠다.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칙사한테 말했다.

"노부는 몸이 아파서 대궐에 들어갈 수가 없소 돌아가 아뢰시오."

간단하게 거절했다. 칙사는 그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대감, 잠시 다녀 나오십시오. 만약 소인이 그대로 들어가면 목이 달아납니다. 그저 소인의 목숨을 보존해줍시오."

칙사는 밤새도록 졸랐다. 목은은 괴로웠다. 뜬눈으로 밤을 샜다. 이튿날 칙사는 또다시 졸랐다. 목은은 난처했다. 조복을 입지 않고 평복으로 들어가리라 결심했다. 칙사에게 심경을 말했다.

"칙사의 괴로운 경위를 생각해서 잠시 다녀올 테니 내가 입는 의복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주오."

칙사는 목은이 입조하는 것만 고마웠다.

"그저 가시는 것만 고맙습니다. 어떠한 의복을 입으셔도 관계치 않습니다."

목은은 칙사의 대답을 들은 후에 신하가 입는 조복을 입지 아니하고 관 쓰고 베옷 입고 야인의 옷차림으로 칙사와 함께 경덕궁 대궐로 들어갔다. 거리에 지나가는 선비와 백성들은 나귀를 타고 대궐로 들어가는 목은을 발견했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수군댔다.

"저게 누구야? 목은 선생 아닌가?"

"목은이로구먼!"

"엊그제 귀양에서 풀렸다더니 대궐로 벼슬하러 들어가는 것 아닌가?"

"도덕과 학문이 높다는 목은이 이성계한테 절을 하고 신하 노릇을 하러 들어가다니 말이 도나. 아들들이 부끄럽지 아니한가. 노욕이 심하군."

선비들은 계속해서 수군댔다.

"목은은 아들만도 못할 뿐 아니라, 제자들만도 못한 늙은일세.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고 푸른 피를 뿌려 돌아가신 포은 정몽주 선생은 목은의 제자가 아닌가?"

"그렇다마다. 목은의 제자말고. 청출어람이라 더니 포은 선생의 정충대절을 목은이 어찌 따라간단 말인가."

선비들은 목은을 폄했다. 그러나 목은을 아껴서 두둔하는 선비도 있었다.

"더 두고 볼 일일세. 사람의 일을 너무 조급하게 일찍 판단해버려서는 아니 되네. 그래도 전통이 있는 목은 선생이 아닌가. 포은 선생이 그분을 스승으로 섬겼고, 길야은 선생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고, 돌아간 도은 이숭인 선생이 얼마나 그분을 존경하였나. 경솔하게 끊어서 비평할 일이 아닐세. 좀 더 두고 보기로 하세."

목은을 두둔하는 말을 듣자 먼저 목은을 폄하던 선비가 팔을 걷어붙이고 입에 거품을 뿜어 말한다.

"이 사람아. 두고 보기는 무엇을 두고 본단 말인가. 나는 목은의 정신이 썩어빠졌다고 생각하네. 밤낮 그분이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하지 아니했던가. 제자들과 자손들을 향하여 천 번 만 번 자기 입으로 또렷하게 말해주고 이제 와서 어슬렁어슬렁 이성계한테 절을 하러 들어가니, 도대체 더 이상 무엇을 두고 보겠단 말인가."

목은을 두둔하던 선비는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하며 대답한다.

"그렇지 아니해. 나는 보는 것이 따로 있네. 만약 이성계한테 몸을 굽혀서 신하가 되려고 대궐로 들어간다면 금관조복이나 사모품대의 조복을 입고 들어갈 텐데. 베옷에 관을 쓰고 초라한 나귀를 타고 들어간, 이것은 야인의 복색일세. 확실히 까닭이 있다고 보네. 그래서 나는 두고 보잔 말일세. 사람의 장단을 논하는 마당에, 경솔하게 한 마디로 평가를 내려서는 아니 되네."

그러나 목은을 폄하던 선비는 종시 석연치 않게 대답했다.

"글세, 자네 말도 생각해볼 말일세마는 정말 목은이 굽히고 싶지 않다면 칭병불출해도 좋지 아니한가. 늙은이가 아프다고 핑계하고 드러누웠으면 그만 아닌가. 나이 고령이것다, 더 살면 무얼 하나. 아들을 둘씩이나 죽인, 그래, 그 이성계를 찾아간단 말인가. 베옷을 입고 야인 행세를 해서 찾아간다면 누가 정충대절이라 할 텐가. 목은은 아들을 못하이."

선비들은 목은이 대궐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같이 여론이 분부했다. 거리와 사랑에서 선비들의 여론이 분부할 때 목은 이색은 칙사를 따라 경덕궁으로 들어가 전각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는 목은 이색이 입조한다는 기별을 듣자 마음속으로 무한 기뻤다. 급히 경연을 열라 하고 글 잘하는 신하 경연관을 명소하여 글을 강론하고 있었다. 이때 목은이 칙사한테 인도되어 들어왔다. 태조 용상에서 내려 목은 이색을 맞이했다. 목은 이색은 태조 이성계를 향하여 손을 마주 잡아 읍을 할 뿐 절을 하지 아니했다. 경연관들은 모두 다 개국 공신의 대신들이었다. 목은 이색의 해동을 주시해 보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도 용상 앞에서 답례하는 읍을 하고 반갑게 목은의 앞으로 나갔다.

"목은, 그동안 많은 고초를 겪으셨소이다."

위로하는 말을 보냈다. 이성계는 목은을 신하로 대하지 아니하고 빈으로 대하는 예로 맞이했다. 목은 이색은 머리를 잠시 숙여 끄덕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경연관들은 다시 자리에 앉아 경연을 열기 시작했다. 태조는 다시 용상 위에 올랐다. 경연관들이 벼슬 지위에 따라 질서 있게 앉은 윗자리가 한 곳 비어 있었다. 목은 이색이 앉으라고 비워둔 모양이다. 목은은 우뚝 서서 자리에 앉지 아니했다. 대제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은 앞으로 나가서 비워놓은 윗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저 상좌로 나가 앉으십시오."

목은은 들은 체 아니 했다. 태조 이성계가 앉아 있는 용상을 향하여 말한다.

"노부의 앉을 자리가 없소이다."

목은 이색은 태조 이성계를 향하여 말하고 천천히 전각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친구가 임금이 되어 용상에 앉았으니 내가 서 있을 땅이 없다는 뜻이다. 태조 이성계는 황망히 용상에서 일어나 목은 이색의 앞으로 갔다.

"목은, 모처럼 경연에 나와주셨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내려주시오."

태조 이성계는 목은의 손을 잡고 간청했다. 목은 이색은 고개를 들고 점잖게 대답했다.

"망국대부는 살기를 원하지 아니합니다. 어서 빨리 죽어서 해골을 고향에 묻기 소원이오이다."

목은의 말을 들은 태조 이성계의 얼굴빛은 화끈 붉어졌다. 그러나 이내 얼굴빛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이 모양을 바라보는 개국 공신인 정도전, 조준을 비롯하여 정안군 이방원의 눈에는 노기가 등등했다. 태조 이성계는 얼굴에 가득 화사한 웃음을 웃으며 목은 이색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묻는다.

"목은을 모시고 나랏일을 함께 하려 했더니 앉을 자리 없다 하시며 버리고 가시니, 섭섭한 마음 금할 길 없소이다. 지금 가시면 어디로 향하시려 합니까?"

"초야 노부는 정처가 없소이다. 집도 망하고 자식들도 죽었소. 한산 아니면 여주로, 그렇지 아니하면 오대산에, 발길이 내키는 대로 유랑생활을 할 작정입니다."

목은의 말을 듣자, 태조 이성계는 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 대답했다.

"아쉬운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어찌하지 못합니다. 노래에 마음을 평안히 하시어 산수 간에 한 일월을 보내십시오. 선생이 가시는 곳마다 불편이 없도록 해드리겠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목은은 다시 읍하고 전각에서 내려섰다. 태조 이성계는 전각 마루 끝까지 나가서 목은의 가는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경연 자리에 있던 여러 시독관이며 참찬관들은 목은과 태조의 주고받는 수작을 바라보고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이 중에 몇 사람은 목은의 행동을 날카롭게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역시 정도전, 남은, 정총과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이었다. 목은이 물러간 후에 경연도 파했다. 대궐에서 나온 정도전, 남은, 정충은 정안군 방원의 집에 모였다. 정안군 방원이 팔을 걷어붙이고 분개한 어조로 말한다.

"목은을 그대로 두어서는 국법이 서지 않겠소. 너무나 행동이 방자하오. 전하께서 빈의 예로 대접해서 저토록 말씀이 은근하시고 경연 윗자리까지 비워놓으셨는데, 목은은 앉을 자리가 없다 하고 가버리니, 그래 자기가 용상에 앉겠단 말인가. 이런 무례한 사람을 그대로 둘 수는 없소."

방원은 얼굴을 붉히며 목은의 행동을 공박했다. 정도전이 대답한다.

"목은은 나의 스승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행동은 너무나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습니다. 전하께 목은을 처단하자고 아뢰어야 하겠소이다."

남은과 정총이 일제히 찬성했다.

"목은은 아무리 여조 옛 신하라 하나, 나라가 바뀐 이상 당연히 왕상 전하의 신하가 되는 것이오, 전하 앞에 뻣뻣이 서서 앉을 자리가 없다 하고 나간, 이런 불경한 노릇이 어디 있소. 당연히 주에 처해야 합니다."

모두 다 정안군 방원과 정도전의 의견에 찬성했다. 정도전, 남은, 정충은 곧 대궐로 들어갔다. 정안군 방원은 일부러 대궐에 아니 들어갔다. 뒤에서 조종만 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여러 사람을 대신해서 아뢰었다.

"목은 이색은 비록 여조의 구신이라 하오나 이제는 나라가 바뀌었습니다. 하늘에는 두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땅에 왕토 아닌 곳이 없고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전하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나라가 이미 개혁된 이상, 목은 이색은 당연히 전하의 신하입니다. 전하를 임금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하 노릇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너무나 교만하고, 가증하고 불경합니다. 국가의 법은 추상같아야 합니다. 이색을 극형에 처해서 죽여야 합니다. 만약 옛정을 생각하시어 무군한 행동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면 앞으로 나라의 기강을 세울 수 없습니다. 깊이 통촉하시어 목은 이색을 주하십시오."

정도전은 깐깐한 음성으로 목은의 행동을 공박해서 아뢰었다. 정도전이 아뢰는 말을 듣자 태조 이성계는 정색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이 모르는 소릴세. 목은은 나의 선배일세. 국가에는 이러한 분도 있어야만 백성들의 귀감이 될 수 있네. 경은 다시 더 말하지 말라."

태조는 정도전의 목은을 죽이자는 말을 점잖게 물리쳐버렸다. 정도전은 하는 수 없었다. 정안군 방원한테 다시 나가서 태조가 고집하고 듣지 않는다는 말을 전했다. 정안군 방원은 아버지의 생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백성들의 귀감이 되는 일은 국가가 승평할 때 생각할 일이오. 지금은 초창기가 아닌가. 만약에 여조의 옛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다 포은이나 목은의 행동을 본받아서 여조를 광복시키려는 불길한 생각을 갖는다면, 이것은 결국 양호유환이 되는 일이 아니겠소. 인정을 둘 때가 아닌데 공연히 고집을 하시니 딱한 일이오."

정안군 방원은 열화 같은 한숨을 뿜었다. 정도전은 방원을 위로했다.

"당분간 전하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소이다. 기회를 타서 서서히 도모합시다."

한편 태조 이성계는 목은 이색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을 염려했다. 정안군 방원과 정도전 등의 과격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근신에게 목은을 다시 대궐로 청하라 했다.

"옛 친구인 목은 선생을 또 한 번 만나보고 싶다. 곧 들어오시도록 해라."

자기가 목은을 간절하게 생각하는 것을 공신들에게 보이자는 뜻이다. 칙사는 목은한테 나갔다.

"전하께서 또 선생을 청하십니다."

"왜 또 나를 청하느냐?"

목은은 이불을 쓰고 누웠다가 대답했다.

"옛 친구가 그리워서 청하신다 합니다. 아무 다른 뜻이 없이 빈객의 예로 청하신다 합니다."

목은은 관 쓰고 베옷 입고, 다시 대궐로 들어갔다. 거리의 선비들은 목은이 또다시 대궐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손으로 계를 보러 대궐로 들어가나.

"딱한 늙은이도 다 많으이."

먼젓번 입궐할 때 목은 이색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선비들의 말이었다.

'아니, 역시 목은 선생은 큰선비야. 대절을 지켰네. 대궐 안 그 속이 어떤 속이라고, 용상에 앉아 있는 이성계 앞에서 나의 앉을 곳이 없다고 소매를 뿌리치고 나온 그 기개는 보통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일세. 두고 보게, 목은은 호락호락 훼절을 할 분이 아닐세."

"과연 그래. 이성계가 용상에서 내려서 목은 선생을 맞이했을 때, 목은 선생은 읍만 하고 절을 아니하였다네. 이것만 보아도, 목은 선생의 기개를 알 수 있지 아니한가. 사람은 충의를 지켜서 죽는 것만이 상승이 아닐세. 살아서 당당하게 의를 지키는 일이 더욱 하기 어려운 일일세."

전부터 목은을 두둔했던 선비들은 이같이 목은의 태도를 찬양했다.

"어디 좀 더 두고 보세."

목은을 폄하던 선비들도 이제는 기운이 약간 꺾였다. 이같이 수군거리며 헤어졌다. 목은은 관 쓰고 베옷 입고 대궐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새 나라 임금 이성계를 향하여 읍만 하고 절을 아니 했다. 태조 이성계는 반갑게 맞이하여 친구를 대하듯 손을 잡고 마주 앉아서 담소했다. 이윽고, 대궐 안에서는 목은을 위하여 대접하는 주안상이 나왔다. 태조는 마주 앉아 친히 목은한테 술을 따라 권하며 묻는다.

"요사이 소문을 들으니, 선생께서는 술도 아니하시고 고기도 아니 자신다 하니, 과연 그렇습니까?"

태조 이성계는 목은을 향하여 존대하는 말을 썼다. 목은은 미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죽을 때도 가까웠소이다. 마음을 편안케 하기 위하여 불도를 믿습니다. 그래서 술을 끊고 고기도 아니합니다."

"목은께서는 이제 늙으셨습니다. 노체에 고기를 아니 잡수시면 기력을 차리실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를 섬기시는 것은 마음으로 생각하시며 족합니다. 자아, 약주와 고기와 두부를 잡수시어 기운을 기르시오."

태조 이성계는 친히 고기를 들어 목은의 입에 넣어주었다. 목은은 껄걸 웃었다.

"더 살아서 무엇하겠소. 욕만 되오."

목은은 태조를 작별하고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목은이 대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태조 이성계는 특명을 내려서 쌀과 고기를 보내고 집을 지으라고 목재와 기와를 내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산군으로 봉한다는 첩지를 보내고 과전까지 내렸다. 과전이란 벼슬 계급을 따라서 나라에서 주는 토지다. 목은은 한산군을 봉한다는 첩지와 과전을 내린 문서를 돌려보내고, 태조한테 글월을 올렸다.

'늙은 몸이 할 일이 없으니, 여주로 가서 한 일월을 보내겠소이다.'

이때, 목은의 주위를 감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은 정도전, 남은 등을 시켜서 목은 이색의 일거일동을 감시했다. 혹시나 고려왕조의 구신들을 모아서 고려를 광복할 계획을 꾸미지나 않나 하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목은을 주시했다. 더구나 목은이 한산군의 칭호를 받지 않고 과전마저 돌려보내니 더욱 그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목은도 그들의 눈치를 챘다. 몸을 피하여 여주로 가려 했다. 태조 이성계는 역시 목은의 심경을 짐작했다. 곧 칙사를 보내서 혼연히 허락하는 전갈을 보냈다.

"날씨도 매우 덥소이다. 서늘한 강바람을 쐬시면서 한여름을 여강에서 지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심신을 유쾌히 하여 돌아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목은은 태조 이성계의 허락을 맡아 곧 한 필 나귀를 몰고 임진강에 나가 배에 올랐다. 이때 대궐에서는 목은을 전송하기 위하여 태조의 특명으로 내관이 소주 한 고리를 받들고 나왔다.

"전하께오서 특별히 목은 선생께 바치시는 천일주 소주올시다. 강상의 좋은 경치를 바라보시며 잡수시라 하셨습니다."

목은은 혼연히 술을 받았다. 사례하는 인사를 했다.

"옛 친구를 생각해서 술까지 보내시니 감사로운 말씀 아뢸 길 없소이다."

목은은 술고리를 받아 뱃머리에 싣고 돛대를 높이 올려 여강을 향하고 내려갔다. 배가 중류에 떴을 때, 목은을 모시고 가던 제자 한 사람이 이태조가 보낸 소주 고리를 번쩍 들어 강물에 버리려 했다. 목은은 제자를 향하여 말했다.

"술 고리를 왜 버리려 하느냐? 그대로 두어라."

"암만 해도 이상합니다. 이 술은 버려야 합니다."

목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남의 정을 막는 것은 일이 아니다. 그대로 두어라."

"아무래도 미심스럽습니다.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계치 않다. 남을 너무 의심해서는 아니 된다."

제자는 하는 수 없었다. 술 고리를 뱃머리에 도로 놓아두었다. 임진강에서 배를 탄 목은은 교하, 통진, 김포, 행주, 강화, 삼개, 용산, 한강, 뚝섬, 송파, 광나루, 덕소, 양근을 거쳐서 여강으로 향했다. 여주는 땅이 비옥하고 산과 물이 아름다웠다. 목은은 배에 앉아 산천 풍경을 바라보면서 여주 땅 이름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고려의 정승이었던 이규보의 시가 생각났다. 기이타 한 쌍 말 물가에 나왔네. 고을 이름 이래서 황려라 했다. 고징을 좋아하는 시인의 이야기, 오가는 고기잡이 알 까닭 없네. 남한강 줄기가 감도는 여주강에서 검은 말 한 필과 누런 말 한 필이 나왔다 해서 그곳을 마암이라 부르고 고을 이름은 황려라 했다. 까닭에 여주의 옛이름이 황려요, 황려가 변해서 여주가 되었다.

목은은 전부터 여주를 사랑했다. 그의 제자였던 도은 이숭인과 함께 여주에 왔을 때 도은은 시를 지었다. 저자엔 생선이 아름답고 강성엔 나락이 살쪘구려. 목은은 제자 도은의 생각이 불현 듯 났다. 도은은 학문도 출중하지만 시도 역시 잘 지었다. 그러나 지금 도은은 없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도은은 포은 정몽주가 자기 아들 종학, 종덕과 함께 깨끗한 절제를 지켜서 죽었다. 이성계와 이방원한테 아부하지 아니했다. 그들을 이신벌군한 역적이라고 규탄한 때문에 마침내 이방원, 정도전, 황거정한테 악랄한 고문을 받고 결국 세상을 떠나 죽어버렸던 것이다. 목은은 제자 포은과 도은과 아들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직껏 죽지 못하고 구구하게 살아 있는 자기의 자세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이곳 여주로 귀양 왔을 때 아들의 부음을 듣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통곡한 후에 사처에 돌아와 지었던 그 시를 다시 읊어본다.

우연히 동편 울타리 바라보고 얼굴 붉어졌네. 참 국화를 대해 보는 가짜 도연명.

과연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포은 정몽주처럼 죽어버리지 못하고 여태껏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다. 목은은 포은한테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제자 도은한테도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제자뿐인가, 아들 둘한테도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목은은 마음이 울적했다. 눈을 들어 좌우 산천을 둘러보았다. 시심이 움직였다. 시 한 구를 얻었다.

여강 한 굽이 돌아드니 산이 그림 같구나. 반은 단청인데 반은 시로구나.

목은은 자기가 시를 짓고도 좋은 시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홀연 적적하고 슬픈 마음이 용솟음쳤다. 더 살면 무엇하나, 그만 세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배 안에 있는 소주 고리를 기울이고 술을 따라 마시려 했다.

"아니 되십니다. 그 술을 잡수시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제자는 술잔을 뺏으려 했다. 목은은 듣지 않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왜 아니 된단 말이냐. 좋은 시를 지었으니 한 잔 마셔야 하겠다."

"참으십시오. 아니 되십니다. 술에 혹시 독이 있을지 모릅니다. 잡수시어서는 아니 됩니다."

목은은 미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남을 지나치게 의심하는 일은 군자의 행동이 아니다."

목은은 만류하는 제자를 뿌리치고 한 잔 술을 마시었다. 아무렇지도 아니했다. 제자는 목은의 안색을 살폈다. 별 탈이 없는 듯했다. 배는 아름다운 산천을 끼고 푸른 강물 위로 술렁술렁 흘러갔다. 목은은 또다시 소주 고리를 기울였다.

"그만 잡수십시오."

"한 잔만 더 마셔야 하겠다."

제자는 목은의 안색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보고 약간 마음이 놓였다. 목은은 두 잔 술을 마시었다. 곤곤히 흘러가는 푸른 강물에 배는 돛을 높이 달고 술렁술렁 흘러갔다. 좌우편 강산은 더한층 아름다웠다. 목은은 또 한 번 술 고리를 기울였다.

"인제, 제발 그만 잡수십시오."

목은은 술기운이 도연했다.

"주불쌍배다. 두 잔술이 어디 있느냐, 한잔 만 더 마셔야 하겠다."

목은은 마침내 석 잔 술을 마시었다. 배는 술렁술렁 연자탄을 향하고 흘러갔다. 돌연 목은은 얼굴빛이 파랗게 질리며 격렬한 복통을 일으켰다. 외마디 소리와 함께 배 안에 쓰러졌다. 제자는 황망히 목은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목은의 손발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맥은 끊어져서 벌써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목은은 술에 독약이 들어 있는 것을 알고도 일부러 자기의 생명을 끊기 위하여 고리의 술을 마신 것이다. 제자는 곡지통을 하고 목은 선생의 시체를 모시어 송도로 돌아왔다. 목은이 연자탄에서 독주를 마시고 폭사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송도 안에 짜아하게 퍼졌다. 목은의 명성은 일세를 진동했던 큰 인물이었다. 가벌도 좋았지만 문장과 덕행이 원에까지 혁혁했던 인물이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깜짝 소스라쳐 놀랐다.

"웬일인가, 목은 선생이 연자탄에서 폭사를 했다 하니 어찌 된 일인가?"

"이성계가 배 안에서 마시라고 소주 한 고리를 보냈는데, 그 술을 마시고 돌아갔다네."

"술에다가 독약을 타서 죽였네 그려, 가엾어라."

"신하 노릇을 하라 해도 굽히지 아니하고, 빈객으로 청해도 서 있을 땅이 없다 하여 버티고 나왔으니 술에 약을 타서 죽여버린 것일세 그려."

"이성계가 주는 한산군 벼슬도 받지 아니하고 과전도 사퇴했다네. 과연 목은 선생은 지조가 있는 분일세."

"도대체 이성계는 너무나 포악하고 야박한 사람일세. 죽일 테면 목은의 아들을 죽이듯이 옥에 가두어 죽일 일이지, 속임수로 빈객의 예로 대접한다 하고 대궐로 불러들여서 술까지 대접을 해놓고 여주로 가겠다 하니까. 강에서 좋은 경치를 바라보며 마시라고 술을 내보낸 그 속에 독약을 타서 죽이다니 말이 되나. 괘씸하기 짝이 없네. 이성계의 행동은!"

송도 일판에서는 목은 폭사로 선비와 서민은 말할 것 없이 모두 다 분개했다. 처음 목은이 야인의 복색으로 대궐로 들어갔을 때 그의 행동을 마땅치 않게 비평하던 선비들도 비로소 목은의 지조를 알았다.

"역시 목은 선생은 보통 인물이 아닐세. 포은 선생이나, 도은 선생한테 못지아니한 인격자일세."

"술에 독이 들었을 듯하니 마시지 말라고 여러 차례 사자가 간했건만 목은은 사람을 너무 의심치 말라고 호협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마셨다 하데.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목은은 술에 독이 들어 있는 것을 알고도 일부러 태연하게 마신 모양일세."

"그렇지, 아들을 둘씩이나 이성계 손에 죽여놓고 더 살면 무얼 하겠나."

"역시 인물야. 신하 노릇을 아니 한다고 딱 버티는 그 인품은 고문을 당해서 죽는 그 일보다도 쉬운 일이 아닐세."

"아무렴, 어려운 일이지."

목은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욕하고 손가락질했던 선비들도 이제는 함빡 목은을 칭송했다. 상인들은 저자문을 닫아 철시를 하고 선비와 백성들은 목은 의 집으로 가서 통곡하고 조상했다. 송도 일판이 불끈 뒤집혔다. 목은이 폭사한 것을 애통해했다. 새 나라 새 임금에 대한 반항하는 마음은 더한층 고조되었다. 모두 다 주먹을 흔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격분했다. 태조 이성계는 목은이 자기가 보낸 술을 마시고 폭사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송도 일판의 선비와 서민과 상인들까지 주먹을 흔들어 분개해한다는 말을 듣고 더욱 마음이 불안했다. 그럴 리가 없다. 자기는 추호도 목은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진심으로 그의 청백한 지조와 주옥같은 문장을 숭배하고 존경했다. 더구나 정도전과 정안군 방원이 그의 아들 형제를 옥 속에서 고문해서 죽인 일을 민망하게 생각해서 살아 있는 목은만은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극진한 대우를 하리란 결정했던 것이다. 그가 서 있을 땅이 없다고 했을 때 자기는 용상에서 내려 맞이했다. 송도에 있기가 갑갑하니 여주로 바람이나 쐬러 간다고 하므로 그의 울적한 마음과 괴로움 심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강성풍경을 바라보면서 시를 읊어보라고 천일주 소주 한 고리를 내관 편에 내보냈던 것이다. 목은은 이 술을 마시고 연자탄에서 폭사를 했다 한다.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강상으로 내보냈던 내시를 불렀다. 태조는 엄숙한 얼굴로 내시에게 불렀다.

"네가 목은 선생께 술을 받들고 나갈 때 중간에서 혹시 어떤 사람을 만난 일이 없느냐?"

내시는 교활한 인물이었다. 얼굴빛을 고치지 아니했다.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도 만난 일이 없었습니다. 수라간에서 지밀 나인이 천일주를 퍼주기에, 그 자리에서 밀봉을 해서 강가로 나가서 목은 선생께 전달했습니다."

내시는 말소리와 행동에 조금도 구김살이 지지 아니했다.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목은 선생이 그 술을 자시고 폭사를 했다고 선비와 백성들이 떠들어 댄다 하는데, 혹시나 술에 짐독이 들지나 아니했더냐?"

태조의 묻는 말을 듣자, 내시는 펄쩍 뛰며 아뢴다.

"짐독이 들어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지밀에서 내리신 어사주올시다. 황송한 분부십니다."

태조는 상궁을 불렀다.

"수라간에 있는 천일주 항아리를 가져오너라."

상궁은 수라간 나인에게 천일주 항아리를 받들려서 들어왔다. 태조는 엄명을 내렸다.

"술에 고깃덩이를 담갔다가 개한테 던져주어라."

나인들은 황망히 천일주를 사발에 따라놓고 고깃덩이를 담갔다가 전각 앞에 던졌다. 누런 개와 흰 개가 고깃덩이를 보고 달려들어 뜯었다. 개들은 고깃덩이를 다 삼킨 후에 아무 일이 없었다. 태조는 돌연 내금장을 불렀다.

"이놈을 잡아내려 땅에 꿇리고 엄하게 매질을 치라."

내금장은 태조의 명을 받아 내시의 등을 밀어 뜰 아래 꿇렸다. 태조는 언성을 높여 내시를 꾸짖었다.

"네 이놈, 바른대로 고하렷다. 만약에 털끝만 티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네 목이 달아나리라."

내시는 그제서야 벌벌 떨며 고했다.

"잠시 천청을 속인 것을 용서해주옵소서. 사람의 강박에 의하여 죄를 범하였습니다."

강박에 의하다니, 무슨 소리냐. 빨리 말하라."

태조는 더욱 노했다.

"정안군 나리와 정정승이 술 가지고 나가는 소인을 불러서 술병에 독약을 넣어주었습니다. 만약 발설을 하는 날에는 소인을 죽인다 함으로 하는 수 없어서 독약 탄 술을 그대로 목은한테 전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깜짝 놀랐다. 얼굴빛이 파랗게 질렸다.

"우선, 저놈을 옥에 내려 가두어라."

내금장은 내시를 결박 지어 옥에 가두었다. 태조는 곧 정안군 방원과 정도전을 편전으로 급히 불렀다. 정안군과 정도전은 소명을 받고 어전으로 들어왔다. 태조는 좌우를 물리치고 성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번번이 자기의 의사를 꺾어버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방자하게 큰일을 저질러놓은 것이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태조는 기막힌 목소리로 나직이 두 사람을 꾸짖는다.

"왜들 이 모양이냐?"

태조 이성계의 봉의 눈이 거슬러 떠졌다. 하도 기가 막혀서 탄식이 나오는 소리다. 정도전과 정안군은 내시가 옥에 갇힌 일을 몰랐다. 정도전은 도리어 궁금했다. 온화한 음성으로 아뢴다.

"무슨 꾸지람이신지 알 길이 없습니다."

"너희들은 사사건건 내 일을 그르치는구나."

태조는 또 한 번 탄식하는 어조로 봉안을 거슬러 뜨고 두 사람을 꾸짖었다. 정안군 방원은 아버지가 사사건건 당신의 일을 그르친다는 말에 마음이 불쾌했다. 아버지의 일을 정성껏 도왔을 뿐 추호도 그르친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괄괄한 성정을 참을 수 없었다. 화경 같은 부리부리한 눈에 열기가 떠올랐다.

"신의 무리가 사사건건 전하의 일을 방해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전하의 크나큰 창업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여 힘쓸 뿐이옵니다."

방원의 목소리는 그의 커다란 눈방울같이 힘차고 굵었다. 태조는 화가 났다.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며 말한다.

"어찌해서 너희들은 내가 보내는 술에 독약을 타서 목은 이색을 죽였느냐?"

방원과 정도전은 비로소 태조가 목은에게 보내는 술에 독약을 탄 일이 발각된 것을 알았다. 정도전이 무릎을 꿇고 태조를 향하여 나직한 음성으로 조용히 묻는다.

"신의 무리가 독약을 탄 것을 전하께서는 어찌 아시었습니까?"

"내가 마시는 지밀 안 술에 독약이 들어 있을 리가 있느냐. 내시를 문초해서 알았다. 지금 옥에 내려 가두었다. 어쩌자고 이런 짓들을 저질렀느냐?"

정안군 방원이 부리부리한 큰 눈을 뜨고 부왕께 고한다.

"목은 이색은 죽여야 합니다. 전하께서 그를 그같이 융숭하게 대접하시어 빈객의 예로 대접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교만 방자하게 용상에 내려서시는 전하께 절을 아니 하고 읍만 하면서, 앉아 있을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대로 발길을 돌렸으니, 이런 무엄하고 불경한 자가 하늘 밑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색을 죽이지 아니한다면 조선 천지를 어거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참다 못하여 이색을 죽였습니다."

방원은 휘하지 아니하고 괄괄하게 대답했다. 태조는 봉의 눈을 거슬러 뜨고 엄숙한 표정으로 아들 정안군을 향하여 말한다.

"나라에는 그런 지조 있고 덕망 있는 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일을 번번이 그르치느냐. 지난번 포은의 일만 해도 그분을 죽이지 아니해도 넉넉히 처사할 수 있는 것을 공연히 선죽교에서 때려죽여서 민심을 소란케 해놓고, 목은의 아들 일만 해도 나 모르게 밀사를 보내서 죽여버렸고, 도은의 일도 그렇지 아니했느냐. 조용조용하게 처리해도 좋을 일을 왜 그리 급하고 격하게 일을 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느냐. 득민심을 해야 한다. 민심을 얻어야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실민심을 한단 말이냐. 보아라, 목은이 연자탄에서 내가 보낸 술을 마시고 폭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송도 일판이 뒤집혀진다는구나. 선비들은 통곡을 하고, 장사들은 문을 닫아 철시를 했다 한다. 왜 이렇게 때를 모르고 소란을 떨게 만드느냐 말이다. 태강즉절이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야."

태조 이성계는 말을 마치자 길게 한숨을 쉬고, 사방침을 두드렸다. 아들 방원과 정도전의 격렬한 행동이 마음에 마땅치 않은 모양이다. 정도전은 고개를 숙여 대답이 없고, 정안군 방원이 화경 같은 눈을 번득이어 대답한다.

"선죽교 위에서 포은을 죽이지 아니하였던들 저하께서는 오늘날 황금으로 용트림을 한 이 자리에 오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목은의 아들이나 도은 이숭인을 죽이지 아니했던들 역시 왕위에 오르시는 일을 수포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지금 목은을 죽였다고 통곡하고 철시하는 놈들도 모조리 죽여버려야 국가는 태평하게 될 것입니다."

방원은 열을 띠어 대답했다. 아버지는 화가 났다.

"허허, 득민심을 해야 한 대도 그러는 구나."

방원은 굽히지 않고 대답한다.

"보십쇼, 전하께서는 조준의 아우를 우대하시어 개국이등공신의 영광스런 칭호를 내리시고, 과천 청계산까지 친림을 하시어 그를 달래셨지만, 조윤은 죽어서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기 이름을 자학해서 개 같은 놈이라고 견자로 고쳐 짓고, 전하께 향하여 불경한 언사를 쓴 후에 송산으로 가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올시다. 풍성학려로 창업하는 국가의 큰일을 거역하고 반대할 뿐이다. 나라의 질서를 유지할 수 없고, 국가의 권위를 세울수 없습니다. 충신을 권장하고, 지조 높은 선비를 대우하는 일은 얼마쯤 국가의 질서가 안정된 연후에 할 일입니다. 아직은 우리 정부와 새 국가를 반대하는 무리는 어떤 부류를 막론하고 모조리 처단해 버려야 합니다. 득민심을 한다는 일은 나중에 할 일입니다."

방원은 입에 거품을 뿜으며 모든 반대당을 한칼에 무찔러 버리자고 역설했다.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의 말을 듣고 길게 한숨을 지며 말한다.

"나라의 임금이란 백성이 있어야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다. 백성이 없이 임금 노릇을 어떻게 하느냐. 보아라. 목은의 독사한 것을 통곡하는 저 선비들과 목은의 죽음을 슬퍼해서 철시까지 한 저 장사하는 백성들을 어찌 다 죽여버릴 수 있단 말이냐. 백성과 선비들을 다 죽여놓고 어떻게 임금 노릇을 하느냐. 독부밖에 되지 않는다. 독부 노릇을 하면서, 실민심을 하면서 임금 노릇을 했단 말은 고금 역사상에 없는 일이다. 우선 목은의 폭사에 대하여 원망하고 욕하고 흩어지는 이 민심을 어떻게 가라앉힌단 말이냐."

이성계는 자기 손으로 가슴을 치며 한탄했다. 정도전이 조용히 아뢴다.

"전하께서는 과히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저희들이 백성과 선비들한테 다 잘 해명을 할 테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태조 이성계는 봉의 눈을 치켜뜨고 정도전을 바라보며 묻는다.

"어떻게?"

"좋은 수가 있습니다."

"무슨 수야?"

"때마침 여름 복중입니다. 목은 이색이 여주로 가다가 연자탄에서 관격이 되어 죽었다고 하면 되지 아니합니까. 정부에서 공식으로 발표하면 됩니다. 그리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놈들은 모조리 잡아서 옥에 가두어두면 그만입니다."

"독약을 탄 사람들이 있고, 독약 탄 술을 받들고 나간 내시가 있는데, 관격이 되어 죽었다 하면 말이 되느냐. 어떤 사람이 곧이 듣겠느냐."

"일이 그쯤 된 것을 이제 와서 어찌합니까. 염려 마십시오, 저희들이 잘 처리하겠습니다."

"모르겠다!"

태조는 벌컥 화를 내며 누워버렸다. 정안군 방원과 정도전은 태조의 어전에 물러 나왔다. 전 아래 내리자 방원은 정도전한테 말했다.

"당신은 빈청으로 들어가서 목은 이색의 죽은 것을 정부에서 정식으로 반포하시오. 아까 당신이 말한 대로 관격이 되어 죽었다고 나는 할 일이 많이 있소. 여기서 헤어집시다."

정도전은 긴한 체 방원한테 귀엣말을 했다.

"정안군께 여쭈오. 소주에 독약을 탄 소문이 밖에 퍼지면 아니됩니다. 우리들의 심부름을 했던 내시놈을 처치해서 입을 봉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방원은 정도전의 말을 듣고 빙긋 소리 없는 웃음을 웃었다.

"나도 벌써 그같이 생각했소. 봉화백의 슬기도 무던하구려. 그러나 또 한 사람 처치할 자가 있소."

봉화백은 정도전이 개국 공신이 되어 봉화 땅의 백을 봉한 때문에 방원이 이같이 부른 것이다. 정도전은 또 한 사람을 처치할 자가 있다는 방원의 말을 듣자 얼른 생각이 들지 아니했다.

"또 한 사람은 누구오니까?"

방원에게 물었다.

"상감께서 내시를 문초하실 때 옆에서 거행하던 사람이 있었소. 이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내시는 처치하나마나가 되오."

정도전은 가만히 손뼉을 치며 웃었다.

"과연 그렇습니다. 정안군의 깊은 생각은 정도전의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럼 저는 빈청으로 들어가서 정부 공식 발표를 내리겠소이다."

방원은 정도전과 헤어진 후에 뚜벅뚜벅 걸어서 내금장이 있는 장청으로 향했다. 내금장이 황황히 뛰어나와 맞이했다.

"정안군 나리 듭시었습니까."

"어명이다. 내시를 가두어둔 옥문을 열어라."

내금장은 방원을 옥으로 인도했다. 옥문이 덜컥 열렸다. 옥 속에 갇혀 있는 내시는 정안군 방원의 얼굴을 보자 무척 반가웠다. 자기를 구해주러 오는 줄 알았다.

"정안군 나리, 나리의 심부름으로 독약을 술에 타서 목은 선생께 바쳤다가 이 꼴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십시오."

방원은 한마디 대답도 아니 했다. 돌연 허리에 찬 패검을 뽑았다. 서리 같은 긴 칼은 허공에 무지개를 그렸다. 내시는 자지러지게 놀랐다. 눈을 홉뜨고 목을 움츠러뜨렸다. 순간, 시퍼런 긴 칼은 내시의 목을 갈겼다. "으악" 소리 한마디에 내시의 목은 붉은 피를 댓줄기 같이 뻗치며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내금장은 진정한 어명으로 알았다. 땅에 떨어진 내시의 목을 수습하려 할 때 홀연 등 뒤에 살기가 엄습했다. 힐끗 돌아보니 정안군의 칼은 벌써 싸늘한 서리를 뿜으며 자기의 목으로 향해 들어왔다. 내금장은 "으악"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오그라뜨렸다. "사람 살리오" 구슬픈 비명을 질렀을 때, 내금장의 목도 땅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정안군 방원은 피 묻은 칼을 씻어 칼집에 꽂은 후에 다시 대전으로 향했다. 패검을 합문밖에 끌러놓고, 전상에 올라 아바마마께 뵙기를 청했다. 상궁이 거래를 올렸다.

"정안군 입시를 청하오."

"들라 해라."

태조 이성계는 무심코 아들을 불러들였다. 방원은 큰 몸집에 어글어글 한 큰 눈망울을 굴렸다. 광채가 사람을 쏘았다.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었다. 어전에 부복했다. 우렁우렁 큰 목소리로 아뢴다.

"선참후계하옵니다."

돌연, 아뢰는 아들의 소리에 태조 이성계는 얼떨떨했다. 봉안을 떠서 아들 방원을 바라보며 묻는다.

"무엇을 선참후계한다고 아뢰느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들 방원에 비하여 금도가 넓은 듯했다. 양미간이 터지고 위엄기 있는 봉의 눈에는 인자한 빛이 어딘지 서려 있었다.

"목은 이색한테 천일주를 받들고 나갔던 내시의 목을 베었습니다. 먼저 목을 베고 뒤에 아룁니다."

아들 방원의 아뢰는 말을 듣자 태조 이성계는 깜짝 놀랐다. 놀랐을 뿐이 아니라 기가 막혔다.

"내시가 무슨 죄가 있기에 목을 베어 죽였단 말인가?"

태조 이성계는 기가 차서 음성을 크게 내지 못했다.

"입을 봉하기 위해서 죽였습니다."

방원은 태연히 대답했다.

"입을 봉하기 위해서 죽이다니 말이 되느냐. 사람을 그같이 초개같이 죽여서야 쓰느냐. 독약은 네가 타라 해놓고 네 심부름을 한 심복을 죽이다니 말이 되느냐. 그래서야 어디 세상 천하에 심부름을 할 사람이 있겠느냐. 독약 탄 일의 잘잘못은 고사해놓고 너무나 박정하구나."

"한 사람을 죽여서 천만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면 죄 없는 사람이라도 죽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국가를 창업하는 이 마당에 어찌하는 수가 없사옵니다. 먼저 아뢰고 처치하는 일이 당연하오나, 허락하지 아니하실 줄 알므로 선참후계하는 것이옵니다."

방원은 조금도 미안한 빛이 없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란 태도였다.

", 너무나 박정한 일을 했다."

태조 이성계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또 한 가지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태조 이성계는 얼굴에 내키지 않는 빛으로 물었다.

"내금장의 목을 베었습니다. 역시 먼저 처치하고 나중 아뢰옵니다."

태조 이성계는 또 깜짝 놀랐다.

"내금장의 목을 베다니, 그 사람은 왜 죽였느냐?"

"전하께서 내시를 국문하실 때 신의 심부름으로 술에 독약 탄 일을 내금장이 곁에서 다 들었습니다. 말이 새어나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와 죽였습니다. 창업하는 이 시각에는 어찌하는 수가 없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어이가 없었다. 소리를 높여 아들 방원을 꾸짖었다.

"아까도 정도전과 네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마는, 득민심을 하라고 타이르지 아니했더냐. 어쩌자고 죄 없는 사람을 풀 베듯 하느냐. 그래, 창업할 때 득민심을 하면 못쓴단 말이냐."

방원은 조금도 굽히지 아니했다.

"아직은 시기상조올시다. 인심이 다 돌아선 연후에 백성을 애무해야 합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다. 너는 지나치게 성미가 괄괄해서 탈이다. 포은의 일도 그렇고, 도은의 일도 그렇고, 목은의 일도 그렇다. 오늘날 네 심부름을 했던 내시와 나의 신하인 내금장을 죽인 일도 그렇구나! 이미 죽였는 일을 어찌하느냐.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라."

방원은 아버지의 말씀이 부드러워지니 어른 대접을 아니할 수 없었다.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한 말씀을 올리고 내전에서 물러 나왔다. 방원은 빈청으로 나가서 정도전을 만났다. 정도전은 정안군을 보고 반갑게 맞았다.

"어찌 되었습니까?"

"내시와 내금장을 다 처치해서 입을 봉해버렸소."

"용단이 무더하십니다."

정도전은 빙긋 웃으며 방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참후계한다고, 전하께 아뢰었소."

"전하께서는 아마 마땅치 않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꾸지람이나 듣지 아니하셨습니까?"

"대단히 역정을 내셨소이다. 득민심을 해야 한다고 한참 설법을 하십디다."

"그래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창업할 시기에는 강력한 수단을 써야 합니다.' 하고 아뢰었소. 안정된 시기가 온 연후에 백성을 애무해도 늦지 아니하니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씀했소."

"그래 전하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십디까?"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니 앞으로는 주의해서 처리하라 하십디다."

"다음에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하고 물러나왔소. 하 하 하 하."

방원은 호탕하게 껄걸 웃었다. 정도전도 소리를 높여 웃었다.

"용하십니다." 방원에게 찬사를 보냈다. 방원이 묻는다.

"목은 이색이 더위에 곽란에 의해 연자탄에서 급히 돌아갔다고 정부에서 공식 반포를 했습니까?"

"선비와 백성들이 보라고 사대문에 방을 붙였습니다. 이제는 목은이 돌아간 것을 누설할 사람도 없고, 의심할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재강아지 눈감은 듯 일이 처리될 것입니다."

"그래도, 유언비어를 내는 자는 모조리 처단을 하시오."

"좋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졌다. 정도전이 방원한테 말한 대로 송도 사대문에는 목은 이색이 여주로 피서를 가다가 연자탄에서 곽란 토사를 일으켜서 급히 세상을 떠났다는 방이 붙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자는 수단이었다. 거리에 지나가는 백성들은 방 붙은 것을 보고 이마에 손을 대었다.

"허허, 목은 선생이 여주로 피서를 가시다가 배 안에서 곽란을 일으켜서 돌아가셨구나."

백성들은 방을 보고 탄식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선비들은 서로들 수군거렸다.

"멀쩡하던 목은이 별안간 관격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니 이상하이. 어찌 된 일인가."

선비 한 사람이 말을 꺼냈다.

"내 생각에는 암만 해도 폭사인 듯하이."

한 선비가 음성을 나직이 하여 대답했다.

"폭사라니?"

먼저 말을 꺼냈던 선비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목은이 여주로 피서를 간다 하니까, 이성계는 잘 다녀오라고 좋은 낯으로 흔연히 작별해놓고, 배가 떠날 무렵 목은에게 술 한 고리를 보내면서 강상에서 좋은 경치를 바라보면서 한 잔씩 마시라고 했다네. 그러하니, 그 술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누가 아니. 확실히 그 술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것이 분명하이."

대꾸하던 선비가 한숨을 짓고 대답했다. 먼저 말을 꺼낸 선비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목은이 그 술을 마셨는지 아니 마셨는지 자네가 보지 못한 바에 어찌 알고 확실히 독주를 마시고 폭사했다고 단정하나?"

"허허, 이 사람, 내가 경솔하게 함부로 말할 사람인가. 목은을 모시고 여주강으로 내려갔던 목은의 제자를 만났네. 그 사람의 말이 암만 해도 의심스러우니 그 술을 마시지 말라고 간해도, 목은은 껄걸 웃으면서 사람을 너무 믿지 아니해도 못쓰는 법이라 하고 연거푸 술 석 잔을 마시더니 이내 복통이 나서 자반뒤집기를 하다가 그대로 폭사를 했다 하대. 이러하니 그 술에 독이 들어 있던 것은 빤한 일이 아니겠나."

대꾸하던 선비가 격한 음성으로 뱉듯이 대답했다.

"이 사람아, 덮어놓고 격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하게 요량을 해보게. 제자가 그 술에 독이 든 것을 시험해보았다면 모르거니와 덮어놓고 술에 독약이 들었다고는 단정하기 어렵지 않은가. 때마침 삼복중이라 관격되기도 십상팔구의 일일세. 생각해보게. 새 임금 이성계는 목은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지극히 그를 대접하고 있지 아니한가. 칼자루를 잡은 이성계일세. 힘이 없겠나, 권력이 없겠나. 목은을 죽이려면 옥에 가두어 죽이지, 무엇 때문에 술에 독약을 타서 죽인단 말인다."

먼저 말을 꺼냈던 선비는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두 사람이 한창 쑥덕공론을 하고 있을 때 홀연 등뒤에서 한 선비가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쳤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역시 구면의 친한 친구였다. 어깨를 치던 선비는 빙긋 웃고 말한다.

"목은은 정도전이 술에 독약을 타서 죽인 것이 분명하이. 도은 선생과 목은의 자제들을 죽인 바로 그 솜씰세. 이 사람의 말이 옳으이."

새로 말참견을 한 친구는 독약을 먹여 죽였다고 격분해하던 선비 편을 들었다. 새로 나타난 선비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 사람들 내 말을 들어보게. 이번에 목은 폭사에 대해서는 이성계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네. 그는 목은을 무한 아끼고 존경했네. 목은은 평상시에 이성계를 장재라 해서 아끼고 사랑했거든. 여기다가 이성계의 성격은 솔직하고 너그러운 편일세. 그의 아들들이 정도전한테 죽은 것을 항상 가엾게 생각해서 칭신을 아니하고 읍을 해도 그대로 받아주었네. 앉을 자리가 없다 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간곡한 부탁을 해서 집으로 돌려보내 주지 아니했던가. 이번 일만 해도, 목은이 여주로 간다니까 그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융숭한 대접으로 술을 보내라고 했던 것일세. 그러나 정도전은 목은을 꼭 죽여야만 하겠단 말일세. 그래서, 술 가지고 가는 자에게 독약을 타게 해서 먹인 것이 분명한 일일세."

" 정도전은 목은의 제자인데 어찌해서 꼭 목은을 죽이려 했단 말인가?"

의아하게 생각하던 선비가 다시 묻는다.

"허허, 이 사람, 정도전은 심복을 시켜서 옥에 갇힌 목은의 두 아들을 죽였으니 목은하고는 사제지간이면서 원수가 아닌가. 무슨 낯으로 목은을 대해 볼 텐가 그리고 정도전은 목은에 대해서 앙심을 먹고 있었네."

"그렇지. 정도전이 목은한테 앙심을 먹고 있었지."

격해하던 선비가 맞방아를 쳤다.

"왜 또 앙심을 먹고 있었나?"

"정도전이 도은 이숭인과 함께 목은의 문하생이 되어 공부할 때 일일세. 목은은 항상 도은을 정도전보다 칭찬했는데, 그때 도은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목은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도은을 칭찬한 일이 있었네. 정도전은 시기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네. 다음에 정도전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사람이 지은 시 한 수를 베껴 가지고 와서 목은한테 뵈고 자기가 지었다고 자랑을 했네. 목은이 중국 사람의 시를 모를 리가 있나. 한 번 훑어본 후에 도전을 꾸짖었네. '점잖은 선비가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나'하고 정색을 하고 나무랐다네. 정도전은 그 후부터 목은한테 앙심을 먹었다는 것일세."

"허허, 목은은 분명 폭사로구먼. 누가 죽였든 간에 이씨네가 죽인 것이지."

선비들은 수심에 싸여 흩어졌다. 선비들이 뭐라 하는 도은 이숭인은 경산사람으로 자를 자안이라 불렀다. 그의 아버지는 이원구요. 어머니는 언양김씨였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서 예문관 제학까지 되었다. 정도전과 함께 목은한테 배웠다. 도은은 학문이 정도전보다 깊이가 있게 되니 목은은 항상 도은을 칭찬했다. 이로 인하여 정도전은 늘 도은을 시기하고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나라의 대세가 바뀌어 정도전은 이성계한테 아부하지 아니하고, 포은 정몽주와 함께 항상 고려를 위하여 충직한 행동을 취했다. 이성계 장군의 수족인 정도전, 조준, 남은의 무리를 제거시키려 했다. 그러나 시세는 이롭지 아니했다. 정안군 방원과 정도전의 일당은 조영규를 시켜서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 위에서 철퇴로 때려죽이고 도은 이숭인을 영남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도은의 마음은 철석같이 굳었다. 조금도 전도전에게 굽히지 아니했다. 정도전은 동문수학한 이숭인을 죽일 마음을 먹었다. 정도전의 심복인 황거정을 도은이 귀양 가 있는 시골의 원으로 해서 도은을 죽이려 했다. 황거정은 원으로 도임되자, 그의 첫 정사는 이숭인을 치죄하는 일이었다. 날마다 도은을 형틀에 매달아 놓고 악형을 하기 시작했다. 정몽주와 함께 어떤 음모를 꾸며서 누구누구를 죽이려 했느냐고 고문을 했다. 매질은 날마다 백 도씩이나 넘게 때렸다. 그러나 도은은 조금도 굽히지 아니했다.

"다만,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포은 선생과 함께 의논했을 뿐이오."

대답했다. 황거정은 '이숭인을 어떻게 함께 죽일까'하고 밤새도록 궁리를 했다. 이튿날 황거정은 군노사령에게 명했다.

"이숭인을 동아줄로 한 끝을 말안장에 잡아맨 후에 사정없이 달려라."

군노는 솔직한 자였다.

"죽으면 어찌합니까."

"잔말 말고 하라는 대로 해라."

황거정은 군노를 꾸짖었다. 군노는 하는 수 없이 황거정이 시키는 대로 했다. 말은 뛰닫고, 이숭인은 끌렸다. 돌부리에 채이고 땅에 갈렸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살은 뭉개졌다. 몇십 리를 달렸다. 도은 이숭인은 마침내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황거정은 이같이 잔인한 짓으로 일대의 의로운 이를 죽이고 말았다. 동문수학한 이숭인을 죽이기 위하여 황거정을 일부러 원으로 제수하여 보낸 정도전도 잔인무도한 사람이지만, 매를 때려도 죽지 아니하니 달리는 말에 줄을 매서, 의로운 사람을 죽인 황거정은 더한층 잔인한 자였다. 황거정은 도은 이숭인을 죽인 공으로 일약 내직으로 발탁이 되어 정도전의 어금니가 되었다. 도은 이숭인이 이같이 참혹하게 죽은 일은 이성계도 몰랐다. 다만, 이숭인이 옥사했다는 보고만 정도전에게 들었을 뿐이었다. 이성계가 몰랐을 뿐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가 하루바삐 대권을 잡도록 적극 노력하고 있는 방원과 정도전이 황거정을 보내서 달리는 말에 줄을 매어 죽게 한 일은 전혀 몰랐다. 그러나, 선비와 서민들은 도은 이숭인이 대의를 지키다가 참혹하게 죽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경상도에서 일어난 일은 한 입 걸르고 두 입 걸러서 순식간에 소문이 송도로 들어갔다. 황거정과 정도전을 욕하기 전에 새 임금인 이성계를 지탄했다.

", 잘한다. 충신이란 충신은 모조리 때려죽이고, 갈아 죽이고 잡아 죽이는구나!"

하늘을 우러러 탄식들을 했다.

"자기도 임금 노릇을 하자면 앞으로는 충신이 필요할 텐데, 어쩌자고 의로운 사람들을 모조리 풀 베듯 죽여버리느냐 말이다."

"의로운 사람이 앞으로 얼마나 죽어갈지 모르네. 자아 보게. 최영 장군이 죽고, 정포은 선생이 돌아가고, 이종덕이 죽고, 이종학이 죽고, 도은 이숭인이 죽고, 목은 또한 푹사를 했으니, 이 뒤에 얼마나 많은 어진 이들이 또 죽을지 모르네."

선비와 백성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팔을 걷어 분개했다. 태조 이성계는 아무리 유화정책을 쓰려 했으나 모두 다 헛일이 되어버렸다. 충신열사를 죽인 허물은 모두 다 이성계한테로 돌아갔다. 정도전과 방원이 사대문에 방을 높이 붙여서, 목은 이색이 관격이 되어 죽었다고 했으나, 백성들은 곧이듣지 아니했다.

"관격은 무슨 관격. 멀쩡하게 배를 타고 시를 읊고 가던 사람이 그 같이 쉬 죽을 리가 있나. 술에 독을 타서 죽여놓고 뻔뻔스럽게 토사 곽란이 나서 죽었다고? 하하하, 참 잘들 한다."

백성들은 믿지 아니했다. 입을 봉하기 위하여 내시의 목을 베고, 내금장을 죽인 일도 다 허사가 되었다. 새 임금 이성계는 백성들이 믿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무한한 번뇌 속에 빠졌다. 이성계는 어떻게 해서든지 목은만은 우대해서 살리고 싶었다. 그는 목은과 함께 고려에 벼슬하고 있을 때 목은은 원로대신으로 그의 장재를 극히 사랑해주었다. 그가 왜적을 무찌르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왔을 때, 목은은 시를 지어 예찬했다. 충성이 백일같이 달렸으니 하늘엔 안개가 걷히고 위엄이 청구에 진동하니 바다엔 바람이 잔잔하다. 이성계는 목은이 지어 보낸 시를 받아보고 무한히 기뻐했던 것이다. 그 후에 이성계가 다시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여진 호발도를 치러 갔을 때 목은은 또다시 시를 지어 보내면서 그의 장행을 격려했다. 송현아의 담기는 장신 중 으뜸일세, 만리장성을 한 몸에 붙였구나. 분주하게 몇 번이나 많은 옛날 보냈더냐. 돌아와서 함께 태평한 봄 즐깁시다. 지금의 대세는 종묘사직에 관한 일, 더구나 적의 선봉 귀신같다네. 소매를 연해서 두 조정을 섬겼네, 그대와 나, 정이 얕지 않구나. 다만, 시 한 수를 보내서 군사의 가는 길 축복해 보내네. 송헌은 이성계의 호다, 이성계는 이 시를 받은 후에 한평생 목은을 잊지 못했다. 대권을 잡은 후에 목은이 칭신을 아니하고 읍을 해도 너그럽게 대했다. 앉을 자리가 없다 해도 마음을 넓게 해서 돌려보냈다.

 

 

농암 선생

이성계는 목은이 여주로 피서를 간다 하니, 노래의 늙은 몸을 편안히 쉬라고 위로해 보내면서 전별주로 술 한 고리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이 술에 정도전이 독약을 타서 목은이 폭사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내시를 잡아들여서 친국을 하 후에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다. 정도전과 아들 방원을 불러서 꾸짖었으나, 그들은 나라를 창업하자면 작은 일에 구애돼서는 아니 된다고 우겼다. 그나 그뿐인가, 아들 방원은 입을 막기 위해서 내시와 내금장을 죽였노라 하고, 선참후계하는 절차를 밟았다. 역시 아들을 크게 꾸짖었으나, 종이는 파지다. 떡시루는 이미 깨지고 말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백성들의 공론이 관격으로 돌아간 줄 알고, 잔잔하기만 바랐다. 그러나 정보는 그렇지 아니했다. 선비와 백성들은 목은의 죽음을 폭사로 단정했다. 하늘에 주먹질을 하며 새 임금 자기를 욕하고, 저주한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자기의 마음을 선비와 백성들에게 해쳐 뵈고 싶었다. 자기가 한 짓이 아니고 아랫사람들이 한 짓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이 한 짓은 곧 자기의 책임이었다. 그뿐 아니다.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함께 혁명을 일으켜논 개국 공신 정도전을 죽일 수는 없었다. 적극적으로 자기의 창업을 도와주는 아들 방원을 죄 줄 수도 없었다. 선비와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자기 한테 불평이 가득했다. 새 임금 이성계는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하면 민심을 수습시킬 수 있을 까 하고 번민 속에 빠졌을 때, 또다시 마음을 설레게 하는 정보가 들어왔다. 측근 시신이 고했다.

"선산 사람 김주란 이가 있습니다. 호를 농암이라 합니다."

시신의 말을 듣자 새 임금 이성계는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공양왕 때 사신이 되어 명으로 갔던 사람이로구나."

", 그러합니다."

"그래, 농암이 어찌했단 말이냐?"

"명나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압록강 저편에서 나라가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장차 내 몸을 둘 곳이 없구나' 탄식한 후에 조복을 벗어서 영결하는 편지와 함께 부인한테 보내고 이내 종적을 감춰버렸다 합니다."

임금 이성계의 등에는 찬물을 끼얹는 듯했다. 농암 김주는 그의 형 백암 김제와 함께 고려 때 덕행이 높은 선비로 명암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성계는 역시 이 사람들과 나라를 다스릴 생각을 했던 것이다. 국경까지 와서 돌아오지 않는다 하니, 마음이 서글펐다. 새 임금 이성계는 사신한테 물었다.

"혹시 그 부인한테 보낸 편지 사연을 들었느냐?"

"선산 선비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 편지 사연이 어떻다 하더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받들지 아니한다 하오. 나는 의리상 차마 성이 바뀐 새 나라 땅에 들어갈 도리가 없소. 이제 부인과 영결을 하게 되었소, 내가 떠날 때 부인이 아기 밴 것을 알고 왔소. 그 애를 낳거든 잘 가르쳐서 기르시오. 나의 조복과 신고 있던 신을 보내니, 보존해 두었다가 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날, 내 몸 대신 조복과 신으로 합장을 해서 우리 부부의 무덤이 되게 하라고 아이들에게 일러두시오. 그리고 내가 편지를 써서 보낸 날짜를 나의 죽은 날이라 생각해서 제사를 지내시오.'하고 편지를 써 보냈다 합니다."

"허 허, 참 갸륵한 일이로구나."

이성계의 입에서는 무심코 이같이 탄식하는 소리가 나왔다. 시신이 또 아뢴다.

"다시 한 말씀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어냐?"

"농암의 형 백암 김제는 여조 때 평해원으로 있었습니다. 나라가 바뀐 후에 향교에 들어가 구슬픈 시를 써놓고 바다에 배를 띄워 종적이 묘연하다 합니다. 물에 빠져 죽은 듯합니다. 역시 선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올시다."

새 이성계는 망연히 얼을 잃었다. 눈앞에 농암과 백암의 옛 얼굴이 떠올랐다. 새로 임금이 된 자에게 굽히지 아니할 뿐 아니라 이성계가 임금 노릇 하는 그 땅엔 발도 들여놓지 아니한다는 그 결백한 성정은 보통 사람으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처자가 다 나라 안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농암은 고국강토를 버렸고, 백안은 바다에 몸을 던져버렸다. 희고 흰 백일을 꿰뚫을 만한 비수같이 싸늘한 의기다. 자기한테 굽히지 아니하였으니까 자기의 적이 분명했다. 그러나 만고의 강상이 돌 만한 싸늘한 그 의기는 자기의 적이면서 사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의리 있는 사람을 표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곧 정도전과 방원을 불렀다.

"농암과 백암의 일을 들어보니 천고에 전할 만한 아름다운 처사다 선산으로 칙사를 보내서 농암의 가족을 국가에서 보양하게 하고 ,백암의 넋을 불러서 바다에서 초혼제를 지내게 하라."

"아니됩니다. 하교대로 봉행한다면 이 나라는 전하의 나라가 아니 되고 다시 왕씨의 국가가 되고 맙니다."

정도전과 방원은 단번에 불가하다고 간했다. 이성계는 마음이 괴롭건만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강비와 정도전

태조 이성계는 마음이 괴로웠다. 한 사람의 덕망 있는 인물도 회유할 수 없는 것이 무한 슬펐다. 포은 정몽주의 마음도 굽히지 못했다. 지극히 자기를 사랑해 주었던 노장군 회영하고도 적이 되어 그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도은 이숭인, 조준의 아우 조견, 농암 김주, 백암 김제, 목은 이색의 삼부자들 모두 다 일세에 명성이 쟁쟁한 인물들을 포섭하지 못했다. 정도전과 방원한테 전교를 내려서 유화정책을 쓰라고 타일렀으나 아직은 시기가 상조하다고 하면서 품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은 모조리 처단해서 죽여버렸다.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지 아니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밤과 낮으로 의로운 선비와 명성 있는 사람을 처단만 한다면 새 나라의 안정된 정치를 이룩할 도리가 없다. 온 세상은 점점 더 자기한테 반항하고 새 나라를 저주하는 기풍만이 늘어가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점점 마음이 괴로웠다. 밥맛이 없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울한 얼굴로 나날을 보냈다. 왕후 강씨가 침전에서 조용히 물었다.

"요사이 전하께서 용안에 수운이 짙으시고, 침식이 불안하신 듯하오니 혹시 신첩의 거행이 추솔한 점이 있사온지 황공만만하여이다. 잘못이 있으면 꾸짖어 주시옵소서. 전과 같은 화사하고 명랑하옵신 용안을 대하고 싶사옵니다."

강비는 아름다운 얼굴에 근심스런 빛을 띠고 나직나직 묻는다. 태조 이성계는 우울한 생각 속에 파묻혔다가 젊은 강비의 묻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약간 가벼웠다. 아름다운 강비의 보드라운 손을 잡고 탄식조로 말한다.

"천만에. 강비의 거행이 소홀할 리가 있겠소. 내가 스스로 나를 책망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그러하오."

강비는 놀라운 듯 호수 같은 명모를 반짝 굴렸다. 단순히 열리면서 옥같은 흰 이가 맵시 있게 드러났다. 고운 목소리로 나직나직 아뢴다.

"전하께서 무슨 잘못이 계시기에 그같이 자책을 하십니까?"

"허허, 내가 만백성의 제왕이 되어 천하를 차지했으면서도 한 사람의 지조 있는 선비도 포섭하지 못했으니 어찌 내 마음이 편안하겠소. 아름다운 당신 같은 여인은 내 품 안에 안겼건만, 지조 있다는 선비들은 옛 주인만 생각하고 한 사람도 내 품 안에 아니 들어오니, 어찌 내 마음이 편안하겠소. , , ."

태조 이성계는 허파가 터지는 듯한 소리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포은 정몽주의 일 말입니까?"

강비는 선죽교에서 철퇴로 맞아 죽은 포은 선생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포은뿐인가. 최영도 그렇고, 목은도 그렇고, 그의 아들도 그렇고, 조견, 김주, 김제, 이숭인이 모두 다 나한테 굽히기를 싫어해서 최후의 길을 밟았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소."

강비는 호수같이 푸른 눈을 떠서 태조를 바라보며 아뢴다.

"전하께서는 무엇을 근심하고 걱정하십니까. 전하께서는 지금 만승의 제왕이십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그만인데, 침식이 달지 않도록 번민하십니까. 굽히지 않는 사람을 우대하시고, 의리 있는 사람을 찬양하시면 저절로 민심이 전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전하의 명을 어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강비의 말을 듣는 태조는 기가 찼다.

"내 아무리 창업한 제왕이라 하나, 내 뜻대로 된 일이 없소. 나는 서서히 왕의 자리에 오르려 한 것을 정도전과 조준이며, 방원이 급격하게 모든 일을 처단해서 오늘날 임금이 된 것이 아닌가. 포은도, 목은도 죽이지 않고도 다 일이 될 것을 이 사람들이 너무나 급하게 서둘러서 온 나라 백성들의 지탄을 받게 되니, 실로 내 마음이 괴롭소."

"괴롭다고 한탄하지 마시고 정도전과 정안군을 꾸짖으옵소서."

"말들을 아니 들어먹는 것을 어찌하나, 민심을 얻는 일은 국가가 안정된 시기가 온 연후에 한다고 우겨대니, 그것도 일리가 있기는 하오마는 내 마음은 점점 불쾌하구려."

태조 이성계는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전하! 신하들한테 너무 권력을 주어서는 아니됩니다. 더구나, 정안군 방원은 일개 왕자올시다. 장자도 아닌 왕자가 너무나 권력을 잡고 발동한다면 뒤에 좋지 아니한 일이 생깁니다."

강비는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다들 개국할 때 큰 공이 있으니 그들의 처사를 믿지 아니할 수도 없구료."

태조는 탄식 비슷하게 말했다. 강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사이 정안군 방원의 태도는 점점 방약무인한 것 같습니다. 방약무인할 뿐이 아니라, 전하를 무시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듣자오니, 일전에 정안군은 내시와 내금장을 죽이고 선참후계했다 합니다. 싸우는 전쟁터도 아닌데 막중한 왕상 전하께서 계신 대궐 안에서 전하의 신하인 내금장과 내시를 죽여놓고 선참후계란 말이 됩니까. 넉넉히 전하께 품달해 아뢸 시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하의 신하를 초개같이 죽여놓았으니, 이것은 너무나 무군한 짓이올시다. 무슨 일로 내시와 내금장을 죽이고 선참후계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앞으로 일개 왕자인 정안군의 방약무인한 분경스런 행동을 꺾지 못하신다면, 국가에 크나큰 마가 될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강비의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방원이 선참후계했다는 말은 어디서 들어 알았소?"

"온 궁중이 다 아는 일이올시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세상엔 비밀이 없구나'탄식했다. 강비는 더 한 번 태조께 고했다.

"이후부터는 개국 공신한테 권력을 너무 주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면 금나 아니오니까. 개국 공신을 빙자하고 권력을 남용한다면 앞으로 이 사람들을 어걱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어처의 말이 옳소."

태조는 아내 강비의 부드러운 손등을 쓸며 말했다.

"신첩이 정도전을 불러서 타이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안심하시고 침식을 평안히 하시옵소서."

"정도전은 슬기와 요량이 있는 사람이니, 과히 무모한 짓은 아니한단 말요. 그러나 방원은 너무나 성격이 강해서 탈이거든, 방원이 말을 들을는지 의문이오."

'정도전을 불러서 전하의 괴로워하시는 심정을 말하고 정안군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해보구려. 그러나 성검이 설지 모르겠소."

"타일러서 말을 듣지 아니한다면 천하의 위엄으로 정안군을 징치하시면 될 것 아닙니까.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해가 되는 일이라면, 비록 자손이라 하더라도 크게 꾸짖으셔야 합니다."

강비는 정안군을 그의 아버지 이상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좋도록 해보구려."

강비가 정도전을 만나는 것을 허락했다.

"내일 전하를 모시고, 정도전을 불러서 타이르겠습니다."

"내가 앉았으면 말이 자연 딱딱하게 나갈 테니, 어처가 혼자 만나구려."

이때 아직도 고려의 풍속이 남아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내외하는 법이 없었다.

"그럼, 분부에 따라 내일 정도전을 불러보겠습니다."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원래 이성계는 아내 둘이 있었다. 첫째 아내는 태조가 소시 때 영흥서 장가든 한씨요, 둘째 아내는 황해도 곡산 부호 강윤성의 딸이다. 한씨는 이성계보다 두 살이 아래요, 강씨는 이성계보다 십여 세나 아래다. 젊고 아름다웠다. 위화도에서 회군을 할 때 곡산 부호 강윤성은 군자금을 대주어서 이성계한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까닭에 강씨는 항상 이성계가 벼슬하고 있는 송도에서 함께 지냈으므로 경처라 불렀고, 한씨는 항상 시골집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향처라 했다. 한씨 몸에서는 큰아들 방우, 둘째 아들 방과, 셋째 아들 방의, 넷째 아들 방간, 다섯째 아들 방원, 여섯째 아들 방연을 낳았다. 강씨의 몸에서는 방번과 방석을 낳았과 딸 하나를 낳았다. 강비는 이성계의 중년 때 유처취처로 아내가 된 까닭에 아들의 순서로 친다면, 방번이 일곱째 아들이요, 방석은 여덟째 아들인 막내가 되는 것이다. 한씨는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55세로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왕후가 되지 못했다. 방번, 방석의 어머니 강씨는 젊고도 아름다울 뿐만이 아니라, 먼저 장가든 한씨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무런 풍파도 일으키지 않고 이성계의 등극과 함께 당연하게 왕후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한씨는 아들을 많이 낳았으나,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리 전에 죽었으니, 고생만 많이 하고 호강을 못했고, 계비 강씨는 아들을 형제밖에 낳지 아니했으나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이성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튿날 강비는 내전에서 상궁에게 분부했다.

"내시를 불러라."

젊은 강비는 상궁에게 주렴을 걷게 하고 내시한테 분부했다.

"개국 공신 정도전을 들라 해라."

내시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무리 내외하는 법이 없는 세상이지만 왕후전하가 대신을 내전으로 직접 청하는 일은 전례에 없던 일이었다. 황차 강비는 젊고도 예뻤다. 뿐만 아니었다. 개국 공신 정도전은 강비와 비슷한 사십 대의 능력 있는 미남자다. 웬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했다.

"내전에서 인견하십니까. 외전에서 인견하십니까?"

눈치 빠른 강비다. 벌써 내시의 휘둥그렇게 떠지는 눈자위를 발견했다.

"상감마마의 명령이시다. 날 보고 내전으로 불러서 일을 의논하라 하셨다. 빨리 거행하여라."

의젓하게 분부를 내렸다.

", 알았습니다."

내시는 손을 비비고 물러갔다. 빈청에서 일을 보고 있던 정도전은 내시의 전갈을 받았다.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왕후마마께서 부르시다니, 그럴 리가 있나.?"

"소인이 헛말씀을 올릴 리가 있습니까. 빨리 내전으로 듭시오."

"주상전하와 두 분이 계시던가?"

"아니올시다. 왕후마마께서 혼자 계십니다."

정도전은 아니 응할 수 없었다.

"곧 들어감세. 잠깐 기다리게."

정도전은 강비가 태조의 총애를 일신에 모으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비가 젊고도 아름다운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손을 씻고 얼굴을 매만지고 의관을 단정히 바로잡은 후에 내시와 함께 내전으로 들어갔다. 내전은 대전보다도 더욱 화려했다. 아무리 개국 일등공신 정도전이라 하나, 내전에 발길을 들여놓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뜰에는 기화요초가 아름답고, 주란 화각은 비취빛 푸른 하늘 아래 눈을 현란케 했다.

"개국 일등공신 정도전 듭시오."

내시가 뜰 아래서 외쳤다. 이윽고 구슬발이 걷어지며 꽃 같은 궁녀가 월궁의 항아인 듯 나타났다. 꾀꼬리 같은 예쁜 음성으로 정도전을 맞이했다.

"듭시라 하오."

정도전은 야열층 보석을 딛고 전상으로 올랐다. 훈훈한 향기가 전상에 가득했다. 젊은 공신 정도전은 훈향에 취하여 정신이 어찔했다. 궁녀가 남치마 자락을 사각사각 끌면서, 앞에서 인도했다.

"이리로 듭시오."

정도전은 술에 취한 듯 향훈에 취했다. 궁녀가 인도하는 대로 호박 앞마루 위로 걸었다. 송향이 그윽한 넓고 긴 마루로 발을 옮겼다. 윤이 흐르는 우물마루다. 맞은편에 완자창이 보였다. 궁녀가 창문 앞에 당도하자, 나직한 목소리로 방안을 향하여 고했다.

"개국 일등공신 봉화백 정도전 듭시오."

방에서 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또 한 사람 아름다운 젊은 궁녀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듭시라 하오."

정도전이 허리를 굽히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에 가득 온화한 기운이 몸을 엄습했다. 시녀는 장지문을 열었다. 꽃이 없건만, 장지 안에서는 꽃내음 같은 향기가 도전의 몸을 휩싸 안았다. 콧속에 흐뭇한 감각을 느꼈다. 도전이 잠깐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멀찍이 아랫간에 비단 수장이 양편으로 드리운 곳에 산수 병풍이 둘러쳐 있고, 비단 보료가 포진되어 있다. 보료 위에는 사십 대의 무르익은 미인이 품높은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칠흑같이 윤이 흐르는 검은 머리 위에는 황금 쌍봉황첩지를 얹었고 눈같이 흰 백공단 반회장저고리를 화사한 자줏빛 깃과 끝동을 달았다. 흰빛과 자줏빛은 색의 조화를 이루어 미인의 얼굴은 더한층 앳되게 보였다. 여기다가 늘씬한 하체를 휘감은 남스란 치마는 백과 주와 남의 세 빛의 조화를 이루어 현란했다. 마치 천상의 선녀가 짙은 호수 속에서 목욕을 하다가 미소를 풍기며 떠오르는 듯했다. 정도전은 왕후 강씨인 것을 직각했다. 왕후 강씨가 천하의 절염이라는 말은 귀가 젖도록 들었으나 이같이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도전은 한 번 바라보자 아찔하게 현기를 느꼈다. 강씨는 아름다운 얼굴에 미연히 웃음을 머금고 정도전의 앞으로 서너 걸음 발길을 옮겼다. 남치마 끝을 가볍게 차는, 눈같이 흰버선코가 또 한 번 도전의 눈을 고혹시켰다. 강비는 흔연히 웃으며, 도란도란 말을 보냈다.

"개국 일등공신을 듭시라 해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

목소리가 옥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했다. 정도전은 넓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신을 이같이 내전에 부르시니, 황공 감격한 마음 주체할 길 없사옵니다."

강씨는 정도전의 절에 맞절을 했다. 정도전이 절을 마치고 꿇어앉았다. 강비는 다시 미소를 지어, 말을 보냈다.

"국가의 원훈을, 내가 방자하게 청해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

정도전은 더한층 황공 감격했다.

"천만의 하교를 내리십니다. 마마께서 소신을 이같이 인견하시니, 소신 일생일대에 영광이올시다."

강비는 다시 미소를 머금고 정도전에게 말한다.

"왕후의 정복을 입지 아니하고 편복으로 대신을 인견하니 무례하다고 꾸짖지 마시오. , , ."

웃음소리는 풀이 있으면서도 간드러지게 요염했다.

"왕후마마께서는 정장을 입으신 것보다도 편복이 더 아름답고 존엄하십시다."

정도전은 왕후마마한테 아름답다는 말을 해놓고 '아차 실수를 했구나' 생각하면서 '존엄' 두 자를 더 붙여서 얼버무렸다.

"봉화백, 내가 아름답게 보이오? , , . 왕후의 정장인 적의를 입고, 어여머리를 얹으면 너무나 딱딱해 보이겠기에 탈속하게 편복을 입은 것이오. 다 늙어가는 것이 무엇이 아름답겠소."

"아니올시다. 마마께서는 삼십대로 보입니다. 과연 젊으십니다."

정도전은 왕후 강비 앞에 조금 파겁이 되었다. 강비의 얼굴에는 홀연 미소라 사라졌다. 얼굴빛을 정중하게 바로잡고 말했다.

"오늘 대감을 청한 것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잠시 들라 한 것이오."

강비의 얼굴이 정중하게 변하는 것을 보자 정도전은 다시 마음이 황고했다.

"무슨, 하문하실 말씀이 계시오니까?"

"전하께서는 요사이 나랏일로 침식이 불안하시어 음식을 잡수지 못하시고, 밤에는 단잠을 이루지 못하시오. 이러하다가는 큰 병환이 나시겠소."

"전혀 몰랐습니다. 웬일이시오이까?"

정도전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강비의 아름다운 얼굴엔 위엄이 떠올랐다.

"대감은 상감께서 신하 중에도 제일로 치시는 대신입니다. 대신으로 앉아서, 전하께서 나랏일로 심신이 불편하시어 침식이 불안하신 것을 여태껏 모르다니 말이 되오. 전하께 대해서 충성이 너무나 소홀하구려."

목소리가 장중했다. 돌연 꾸지람을 내리는 강비의 말을 듣자 정도전의 등에는 땀이 흘렸다. 약간 파겁이 되어, 마음이 풀어졌던 정도전은 급작스럽게 변하는 왕후의 태도를 보자 두렵고 무서웠다. 몸둘 곳을 몰랐다.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소신, 너무나 미욱해서 전하의 침식이 불안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어찌한 일로 침식이 불안하십니까?"

강씨의 음성은 대를 쪼개는 듯 쨍쨍하게 울렸다.

"나랏일로 전하의 심신이 불편하신 원인을 개국원훈인 대감이 모르고 도리어 안방 속에 들어앉아 있는 아녀자한테 묻소?"

강비의 강물같이 푸른 추파가 정도전의 얼굴 위로 고요히 흘렀다. 강비의 다시 꾸짖는 말을 듣는 정도전은 더한층 황공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강비는 다시 말을 꺼냈다.

"전하께서 침식이 불안하신 것은 국가의 창업이 무한 어려운 중에 보필하는 책임을 맡은 당신네들이 전하의 뜻을 받들지 않는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더욱 황공했다;. 두 손을 모아 대답한다.

"왕후마마께서 오해가 계신 듯합니다. 소신들이 어찌 감히 보필의 책임을 한만이 하겠습니까. 자나깨나 전하를 위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전하의 뜻을 거역할 리가 있습니까."

정도전은 변명했다. 강비가 차갑게 웃으며 대답한다.

"전하께서 설혹 일을 그릇 판단해서 처리하신다 해도 당신네들은 순종해야 할 터인데, 옳게 판단하시는 일을 어찌해서 막고 듣지 아니하오. 그것이 개국 공신들의 도리요?"

강비의 말은 한층 날카로웠다. 정도전은 돌연한 강비의 꾸지람을 듣자,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소신들은 전하의 뜻을 막고 거역한 일이 없습니다."

"거역한 일이 없다니? 전하께서는 민심을 얻으려고 하시는데 당신네들은 어찌해서 고집하고, 사람들을 풀 베듯 죽이시오. 전하께서는 이 때문에 침식이 불안하시고 병환까지 나실 지경이오."

정도전은 비로소 왕후가 내전으로 불러들인 까닭을 알았다. 정도전은 왕후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일이 손이라 생각했다. 교활한 생각이 들었다. 슬며시 팔밀이를 했다.

"사람을 풀 베듯 한 일은 모두 다 정안군이 우겨서 한 짓입니다. 신은 전하의 태도가 지당하시다고 생각합니다."

강비의 눈에 웃음이 떠돌았다.

"당신도 전하 앞에서 민심을 얻는 일은 시기상조라고 우겼다면서 그리하오."

"아니올시다. 그것은 정안군이 전한테 전하 앞에서 우겨야만 한다고 자꾸 간청하므로 하는 수 없어서 보조를 같이 취했습니다."

도전은 콧잔등이가 간지러웠다. 그러나 슬며시 거짓말로 꾸며댔다.

강비는 도전의 한 일을 환하게 다 알고 있었다. 목은의 아들 형제를 죽인 것과 사람을 시켜서 도은 이숭인을 죽인 일이며 목은을 연자탄에서 독약으로 폭사시킨 일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전의 대답이 이쯤 나가니,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이만하면 정도전이란 인물을 손아귀에 집어넣고, 이용해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위풍을 지켰다.

"대감은 전하보다도 정안군을 제일로 아시는구려. 정안군도 전하한테는 신하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소신이 어찌 정안군을 전하보다 더 생각하겠습니까?"

정도전은 손을 모아 싹싹 비볐다. 강비는 다시 언성을 높여 정도전을 꾸짖었다.

"이후부터는 정안군의 말보다 전하의 말씀을 더 받들도록 하시오."

", 더욱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정도전은 더 한 번 손을 싹싹 비비며 젊은 왕후의 분부를 받았다. 돌연 강비는 화창한 목소리로 궁녀를 불렀다.

"상궁, 거기 있느냐?"

장지문 밖에서 시녀가 열쇠같이 내달았다.

", 여기 있습니다."

"아까, 내가 수라간에 기별해두었다. 봉화백께서 모처럼 들어오셨는데 그대로 가시게 할 수 있느냐. 주안상을 올려라."

정도전은 얼떨떨했다.

"소신, 그대로 물러가겠습니다."

강비는 금방 딴사람이 되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손을 저어 정도전의 말을 막았다.

"그냥 나가다니 말이 되오. 잠깐 앉으시오. 내가 개국 공신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야 있소."

정도전은 하는 수 없었다. 방 한 귀퉁이에 몸을 피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아담한 주안상이 들어왔다. 강비는 다시 궁녀에게 분부를 내렸다.

"의안대군을 데리고 들어오너라."

의안대군은 강비의 막내인 방석이었다.

방석은 옆의 방에서 놀고 있었다. 궁녀는 곧 방석을 데리고 들어왔다. 열 살 남짓 되는 소년 공자가 머리를 땋아내리고 붉은 중추막을 입고 들어왔다. 시녀가 앞을 인도했다. 미목이 청수하고 얼굴이 준수하게 잘생긴 왕자다. 정도전은 앉아 있기가 미안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 공자는 벙글벙글 웃는 낯으로 들어섰다. 먼저 좌우를 한 번 살펴본 후에 강비께 절을 올렸다.

"어마마마, 부르셨소?"

맑은 눈에 웃음을 가득히 머금고 천진난만하게 어머니한테 물었다.

"오오, 의안대군이냐?"

강비는 모자의 지극한 정이 호수처럼 부풀어 올랐다. 덥석 방석을 얼싸안았다.

"어마마마, 왜 부르셨소?"

사기 없는 눈을 들어 강비의 품에 안기며 묻는다. 강비는 방석의 등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개국 공신이요, 천하 문장이신 봉화백 정도전 대감이 들어오셨다. 앞으로 네 스승을 삼을 작정이다. 일어나서 뵈어라."

"전에도 아바마마가 계신 자리에서 몇 번 뵈었소."

"어른께는 만날 때마다 절을 하는 법야."

방석은 벌떡 일어나 정도전한테 절을 했다. 정도전은 당황했다.

"전에도 막내분을 여러 차례 뵈었습니다.."

일변 말하며 황망히 방석의 절에 맞절을 했다. 강비는 다시 방석에게 분부했다.

"장차 네 스승님이 될 분이다. 앉아서 약주 한잔을 따라 올려라."

방석은 모후의 뜻을 받았다. 화려한 청자 술병을 어린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국화 상감청자 잔에 감홍로 붉은 술을 따랐다.

"황공하오이다."

정도전은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장차 제자가 될 사람이 술을 따르는데 황공할 것이 무엇 있소. 사양 말고 마시시오. 내일이라도 상감께 여쭙고 봉화백에게 방석을 지도하라 할 테니 사양하지 마시기 바라오."

정도전은 일생의 공영이라 생각했다.

"황감하여이다. 저의 박학천식으로 어찌 감히 의안대군을 지도하겠습니까마는, 분부하신다면 정성을 다하여 지도하겠습니다."

강비는 만족한 듯 미연히 웃었다.

"천하 문장이 무슨 사양의 말씀을 그다지 하시오. 봉화백의 높은 학식과 종횡무진한 문장은 멀리 중국에까지 명성이 떨쳤다 하오. 당금 세상에 봉화백을 따라갈 만한 석학이 또다시 있겠소."

하늘 꼭두까지 치켜 올리는 강비의 말에 정도전은 마음속으로 흐뭇하고 기뻤다. 아까는 전하의 말씀을 아니 듣는다고 쌀쌀하게 꾸짖던 왕비가 홀연 봄바람이 이는 듯한 화창한 얼굴로 사랑하는 아들 방석에게 술을 따르게 하면서 스승이 되어 달라 부탁하니 취한 듯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뻤다. 가득히 넘치는 감홍로 술을 단숨에 쭉 마시었다. 왕후 강비는 친히 접시를 밀어 안주를 권했다.

"어회를 자셔보시오. 예성강의 방어회와 어선에 쓰라고 진상 들어온 것을 조금 나누어 분미하시게 한 것이오."

정도전은 분홍빛 방어회를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기막힌 진미였다. 씹지 아니했건만, 혀끝에서 화가 녹는 듯했다.

"상감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먼저 먹으니 황공무지하여이다."

"방석의 스승을 대접했다 하면 상감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염려 마시고 마음을 편안히 아해 잡수시오."

강비는 다시 방석에게 분부한다.

"또 한 잔 따라 올려라."

방석은 정도전에게 술을 다시 따랐다.

"황감하여이다."

정도전은 두 잔 술을 마시었다. 강비는 다시 다른 접시를 정도전의 앞으로 밀었다.

"새것은 남해 바다에서 따서 말린 건 전복 쌈입니다. 맛을 보시오."

정도전은 왕비가 권하는 전복쌈 한 개를 입에 넣었다. 실백잣으로 소를 넣고 촉촉한 마른 전복을 얇게 저며서 조그마하게 쌈을 만들었다. 짭잘한 전복 맛과 고소한 실백 맛이 한데 어울려서 입안에서 슬슬 녹았다. 아무리 개국 일등공신이요. 봉화백이라 하나 전복 쌈은 난생처음 먹어보았다.

"천하 진미올시다."

정도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강비는 샛별 같은 눈에 방긋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전복 쌈이 어찌해서 입안에서 슬슬 녹는지 아시오?"

"모르겠습니다."

"강하고 짠 마른 전복은 유하고 부드러운 실백잣의 기름을 받아서 천하 진미의 맛을 이룬 것입니다. 딱딱한 건전복 맛으로는 맛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정치도 그러합니다. 정안군 방원과 같이 딱딱하고 강포하고 인정이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앞으로 방석을 지도하신다면, 전복 쌈 모양으로 강한 맛과 부드러운 맛이 함께 조화가 되어서 위대한 인물이 되도록 지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강비는 의미 깊은 말을 정도전한테 던졌다. 정도전은 지나치도록 총명한 사람이었다. 즉석에서 강비의 뜻깊은 말을 깨달았다. 은근히 방원을 배격하고 방석을 부탁하는 뜻인 것을 알았다.

"왕후마마의 깊으신 뜻을 짐작하겠습니다. 의안군을 잘 지도하겠습니다."

말귀를 알아듣는 정도전을 보자, 강비의 입술은 꽃판처럼 벌어졌다. 흰 이가 붉은 입술 사이로 반짝 드러났다.

"방석을 지도해줄 뿐만이 아니라 한평생 보호해주십시오."

강비는 더한층 깊은 말을 던졌다.

"마마의 말씀 명심해 듣겠습니다."

강비는 정도전의 쾌한 대답을 듣자, 마음이 흡족했다.

"방석이 두 잔 술을 따랐으니 이번엔 내가 한 잔 따르리다."

강비는 말을 마치자, 섬섬옥수로 친히 백학문 청자 술병을 잡았다. 정도전은 황공무지했다.

"마마, 취하옵니다. 이제 그만 마시겠습니다."

강비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세상에 두 잔 술이 어디 있소. 살아서 석 잔, 죽어서 석 잔이라는데, 네가 아들의 스승을 위하여 한 잔을 권하는데, 막는 법이 어디 있소."

요염한 강비의 음성은 정도전을 뇌쇄시켰다. 잔에 가득 감홍로가 부어졌다.

"황공하옵니다."

정도전은 한 마디 하고 아니 마실 수 없었다. 정도전이 물러가려 할 때, 강비는 또 한 번 부탁했다.

"방석을 한평생 보호해주오."

내전에서 물러난 정도전은 집으로 돌아갔다. 무한한 광영이었다. 왕후가 친히 술까지 따라주고 그의 아들 방석을 부탁했다. 그대로 단순히 부탁만 한 것이 아니다. 정안군은 너무나 딱딱하고 강포하다 했다. 은근히 정안군을 배격한 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정안군 방원은 강비를 계비라 해서 항상 업신여기는 눈치였다. 정도전은 지혜가 많고 판단이 빠른 인물이었다. 이러므로 위화도에서 회군해서 고려의 우왕을 내치고 칼자루를 잡은 이성계와, 그의 아들 중에 가장 능동적인 방원을 도와서 마침내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던 것이다. 정도전이 처음 이성계를 도와서 왕위에 오르게 한 후에 영리한 정도전은 마음속으로 이성계의 후계자를 생각해두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영리한 정도전은 그의 앞날에 자기의 서 있을 땅을 미리 생각해두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성계의 아들들을 물색해보았다. 큰아들 방우는 너무나 점잖고 고고했다. 그의 아버지 이성계가 고려 왕실을 뒤엎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눈치다. 벼슬을 주어도 나오지 아니했다. 둘째 아들 방과는 얌전만 하고 적극성이 없었다. 셋째 아들 방의가 있으나 역시 안존하고 진취성을 띤 인물이 아니다. 다음 넷째 아들 방간은 성정이 괄괄하고 호반의 기운을 띠었으나 지혜와 꾀가 없는 저돌적인 인물이었다. 오직 다섯째 방원만이 출중하고 적극성을 띠었다. 우왕을 죽이고, 창황을 죽이고, 공양왕을 죽이고, 포은 정몽주를 죽이고, 그리한 후에 배극렴과 자기를 시켜서 그의 아버지를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한 용단성은 모두 다 방원의 적극적인 힘으로 조선이란 새 나라가 건국이 된 것이다. 방원의 다음 아우에 방연이 있으나 역시 별수 없는 인물이다. 다음에는 계비 강씨의 몸에 방번이 있고 방석이 있다. 정도전은 생각해보지도 아니했다. 정도전은 마음속으로 이성계를 섬긴 후에는 방원을 도와서 이성계의 후계자로 받들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사이 와서 왕실의 공기는 미묘했다. 이성계는 방원의 성격이 너무나 지나치게 과단성이 있어서 고려의 구신들을 초개같이 죽인다고 면전에서 여러 차례 꾸짖었다. 득민심을 하라고 타일렀다. 방원은 점점 이성계의 눈에서 버스러지는 모양이다. 여기다가 뜻밖에 왕후 강씨는 자기를 불러서 융숭한 대접을 하고 방석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은근히 부탁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강비는 대왕이 방원이 너무나 고려의 구신들을 함부로 초개같이 죽였다 해서 병환까지 났다는 것이다. 도전은 다시 생각했다. 강비는 재삼 부탁했다. 방원을 타일러서 너무나 난폭한 행동을 취하지 말도록 하게 하라고 당부까지 했다. 강비의 이 말은 곧 자기에게 정안군과 함께 일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소리다. 뿐만 아니다. 자기한테 술대접까지 하면서 방석의 스승이 되어 달라 하고 방원을 배격한 것은 곧 방석의 장래를 간곡하게 당부한 것이다. 정도전은 마음속으로 방원과 강비와 방석을 저울질해보았다. 방원보다도 강비와 방석편이 훨씬 무게가 있었다. 강비는 젊고 아름답다. 이성계가 가장 사랑하는 현재의 왕비다. 뿐만 아니다. 강비의 아버지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래 막대한 군자금을 대어서 혁명에 성공이 되게 하고 오늘날 왕위에 오르게 한 숨은 공로자다. 강비의 아버지가 이성계를 도운 것은 모두 다 총명 영리한 강비의 힘으로 된 것이다. 강비는 젊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아들이 방석이었다. 이성계와 강비가 극진히 사랑했다. 방원은 아무리 적극성이 있고 용단성이 있어서 그의 아버지의 창업을 도왔지만 서열이 다섯째 왕자다. 큰아들이 있고 둘째가 있고 셋째가 있고 넷째가 있다. 이성계의 후계자로 왕위에 오르기는 까마득한 일이다. 여기다가 방원의 어머니는 아무리 정처라 하나 대왕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벌써 세상을 떠났다. 뿐만 아니다. 그의 어머니 한씨는 다만 조강지처로 향처의 이름이 있었을 뿐 국가를 창업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러한 공로도 없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방원의 무게는 강비와 방석에 비하여 훨씬 중량이 가볍다. 저울추가 축 처져서 내려앉는다. 정도전은 앞으로 자기의 길을 개척하려면 정안군 방원을 돕는 것보다, 강비와 방석의 편이 되어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 현명한 일이라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강비를 도울 것을 결심했다. 한편 강비는 정도전을 내보낸 후에 이성계의 침실로 들어갔다. 얼굴에 가득 화색을 띠고 아뢴다.

"전하께옵서는 이제 침식을 편안히 하옵소서. 정도전을 불러서 타일렀습니다. 정안군한테 일러서 너무나 무모하게 고려의 구신들을 죽이지 말라 했습니다. 정안군도 전하께서 침식이 불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강포한 행동을 중지할 것입니다."

"오로지, 말을 들을는지."

태조는 의연히 탄식하는 어조다.

"그리고 또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정도전에게 방석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성계의 얼굴에는 활짝 웃음이 화려했다.

"잘했소, 정도전은 글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오. 방석을 훌륭하게 지도할 것이오. 어처는 과연 사람을 볼 줄 아는구려."

사랑하는 젊은 왕후를 칭찬했다.

"그러면 전하께서 정식으로 정도전을 불러서 방석의 스승이 되라고 분부를 내려주옵소서."

"어처의 말대로 하리다."

태조 이성계는 혼연히 허락했다.

이튿날, 이성계는 정전에 나와 정도전을 명소했다. 정도전은 어전에 추창해 들어갔다. 태조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정도전에게 말씀을 내렸다.

"과인의 막내아들 방석을 경에게 부탁한다. 경은 방석의 스승이 되어 방석을 교양시켜서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라."

정도전은 황공 감격했다. 어제 강비의 부탁이 당장 효력이 난 것을 알았다. 과연 자기의 저울질을 옳게 했다고 생각했다.

"끝의 왕자의 교양을 소신에게 맡기시니 소신 일대의 광영이올시다. 다행히 끝의 왕자는 총명 영리한 자질을 가졌으니,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귀여운 어린 아들을 칭찬하는데 기뻐하지 아니할 사람을 세상에 없는 것이다. 대왕 이성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하하하, 경도 방석을 총명 영리하다고 보는가. 왕후를 닮아서 제법 똑똑하이. 경은 더욱 잘 지도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주기 바라네."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정도전은 대왕의 분부를 받들었다. 대왕 이성계는 근시를 불렀다.

"승지를 들라 하라."

이윽고 정원에서는 승지가 들어왔다. 대왕은 분부를 내렸다.

"봉화백 정도전에게 의안대군 방석의 사부를 임명하라."

"왕자의 사부로 교지를 내리겠습니다."

"좋다!"

승지는 어전에서 교지를 써서 오보를 눌렀다. 대왕은 친히 정도전에게 교지를 전했다. 정도전은 황공 가격했다. 사은숙배하고 교지를 받들었을 때, 병풍 뒤에서 사뿐사뿐 발자취 소리가 들리며, 강비는 방석을 데리고 들어왔다. 아름다운 용모에 꽃판 같은 웃음이 화려했다.

"봉화백 부탁하오."

옥소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한 음성이 더한층 다정했다.

"황공 감격하오이다."

정도전은 한 마디를 남기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정도전이 새로 강비의 소생 의안대군의 스승이 되었다는 소문은 조정과 중중에 자자하게 퍼졌다. 이 소식은 정안군 방원의 귀에도 들어갔다. 대다수의 조정 신하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정도전이 이번에 새로 왕자 방석의 스승이 된 것은 잘된 일이라 생각하오."

조정 신하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아니했다.

"정도전이 이번에 새로 왕자 방석의 스승이 되었다는구려."

"당연히 일이지, 글 잘하는 정도전이 왕자 방석의 스승이 된 것은 잘된 일이라 생각하오."

조정 신하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아니했다. 그러나 정안군 방원은 이 소식을 듣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도전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글도 잘하고 슬기도 많았다.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경세의 재주도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심이 없었다. 동지를 배반하기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이었다. 이러기에 동문수학한 이숭인을 시기해서 죽이기까지 했다. 그의 스승인 목은 이색을 자기가 죽이자는데도 선뜻 동의를 했다. 그는 언제나 자기의 발신을 위해서는 권력에 아부해서 배신 행동을 항다반으로 했다. 그러기에 선뜻 고려조정을 배반하고, 자기 아버지를 도와서 오늘의 지위까지 오르게 했던 것이다. 정안군 방원은 정도전의 이러한 재질과 성격을 짐작하면서도 건국하는 초기에 있어서 강경한 정책을 쓰는 자기를 적극적으로 협찬해주니, 뜻을 같이 하여 여태껏 일을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정도전이 새삼 계모의 아들 방석의 스승이 되었다하니 마음속으로 경계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방석은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이복 동생이었다. 더구나 자기가 뱀같이 싫어하는 강비의 소생이었다. 방원은 요연한 태도로 부왕을 현혹시키는 젊은 계모가 싫었다. 부잣집 딸을 자세하고 어머니 한씨를 괄시하던 계모가 싫었다. 어머니는 복이 없어서 시골서 고생만 하고 일찍이 돌아갔건만 강씨는 어머니가 돌아간 것 때문에 선뜻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모두 다 아니꼽고 눈에 거슬렸다. 나이도 자기와 비슷했다. 그러나 강비는 도도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강비를 어미니로 섬기라고 강요했다. 왕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나이 비슷한 강비를 어머니로 대접하기는 죽어도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한 창업의 큰 공은 태반이 자기의 풍신뢰와 같이 쾌도난마 격의용단으로 된 것인데, 강비는 자기의 친정집 부탁으로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양양 자득한 태도를 취했다. 방원은 이러한 까닭에 정도정이 방석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적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도전이 방석의 스승이 되면 강비와 접촉이 잦을 것이 분명하고 강비와 접촉이 잦게 되며 자기를 배반하고 강비의 편이 되기가 십상팔구였다. 방원은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동안 궁리 속에 빠져 있을 때, 홀연 시동이 들어와 고한다.

"봉화백 정도전 대감이 오셨습니다."

"들어 오시라 해라."

방원은 정도전을 청해 들였다. 방원은 마음속으로 정도전을 의심했으나, 단수 높은 인물이었다. 쾌할한 음성으로 반갑게 도전을 맞이했다.

"봉화백이 어떻게 내 집까지 오셨소."

도전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얼굴에 간드러지게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정도전이 정안군 대감을 찾지 아니하면 누가 찾겠습니까. 불현듯 뵙고 싶어서 찾아왔소이다."

두 사람은 너털웃음을 호협하게 웃으며 첫인사를 마치었다. 시동이 차를 내왔다. 정도전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다시 말을 꺼냈다.

"전하께서는 목은의 일에 대해서 아직도 노기가 풀리지 아니하신 듯합니다."

방원은 듣고 아무런 대답도 아니 했다.

"일간 들어가 승후하신 일이 있습니까?"

이 사이는 들어가 뵌 일이 없소."

방원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일로 인해서 전하께서는 병환이 나시어 침식이 불안하시다 합니다."

정안군 방원은 불쾌했다.

"침식이 불안하시단 소식은 누구한테 들었소?"

"온 조정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정도전은 강비를 만나서 안 일을 이야기하지 아니했다. 슬며시 조정 신하가 다 아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도전은 영리했다. 강비과 방원이 옹추인 것을 짐작하는 때문이다.

"조정 신하가 다 아는 일을, 자식이 되어서 미령하신 것을 몰랐으니, 내가 큰 불효자로구려."

방원은 코똥을 튀기며 비꼬아 대답했다.

"아주 와석해 누워 계신 것이 아니라 근심과 걱정이 되기에 수라 맛이 없고 잠자리에 온숙을 못하신다 합니다. 일간 한 번 들어가 보이십시오."

정도전의 말에 방원은 또 대답을 아니하고 침묵을 지켰다. 정도전이 또 말을 꺼냈다.

"전하의 득민심을 하라시는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의 반란분자들을 많이 처결했으니, 이제부터는 유화정책을 쓸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정안군 대감도 이 방향으로 키를 좀 돌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안군은 열이 벌컥 올랐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는 공연히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줄 아오. 나랏일을 하자니 그렇지."

 

관상 보는 하윤

정안군이 눈을 부릅떠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정도전은 자라목 들어가듯 목이 움찔했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한참 후에 정도전은 한마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그렇습니다. 대감이나 나나 그동안 강경정책을 쓴 것은 나랏일을 하자니까 그리한 것이지, 어디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입니까? 그 일로 인해서 전하께서 침식이 불안하시다 하니 그저 의논을 하러 온 것뿐입니다."

정도전은 더 다른 말을 하지 아니하고 밖으로 나갔다. 정도전은 방석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도 아니했다. 강비와 만난 일도 이야기하지 아니했다. 방원도 또한 캐서 묻지 아니했다. 방원이 한참 우울한 심사 속에 빠져 있을 때, 시동이 또 들어와 고한다.

"민대제학 대감께서 어떤 선비 한 분과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대제학 대감께서 오셨어?"

정안군 방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뜰 아래로 내려가 맞이했다.

"장인, 어떻게 오십니까?"

시동이 말한 민대제학은 정안군의 장인인 민제다

"이 사람이 하도 자네를 만나고 싶다 해서 데리고 온 길일세."

민제는 옆의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안군이 바라보니 약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고려 때 급제했다가 혁명 때 좌명공신이 된 하윤이다. 방원은 반갑게 손을 잡았다.

"하제학이 아니소오."

"그렇소이다. 하윤입니다. 정안군을 한 번 가까이 뵙기 위해서 빙장어른께 여러 번 말씀을 드리고 이제 찾아온 길입니다."

방원은 기뻤다. 두 사람을 청하여 방으로 들어갔다. 하윤은 둥근 얼굴에 수염이 성긋성긋하고, 눈에는 총기 있는 광채가 반짝거렸다. 민제가 방원을 향하여 말한다.

"이 사람이 사람의 상을 잘 보네. 항상 나를 보고 둘째 사위인 자네 상을 보자고 하므로 오늘 벼르고 별러서 찾아온 길일세."

정안군은 장인의 말을 듣자 호협하게 껄걸 웃었다.

"사람이 운을 만드는 것이지, 얼굴이 무슨 운명을 좌우하겠습니까. , , . 하공이 일부러 내 상을 보기가 소원이라면 막지는 않겠습니다. 자아, 보아주시오. , ."

방원의 웃는 얼굴은 호탕하면서도 화경 같은 눈에는 서기가 이는 듯했다. 하윤은 한동안 방원의 상을 살피다가 문득 일어나 절을 했다.

"천하에 당신 같은 상은 다시 둘이 없을 것입니다."

"상이 좋다 하니 마음이 좋구려, 하하하."

방원은 호협하게 웃었다. 안에서는 정안군 방원의 부인 민씨가 친정아버지가 어떤 손을 데리고 왔다는 말을 듣고 주안상을 간결하게 차려 내보냈다.

"장인께서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아내가 술상을 내보냈나 봅니다. 남편보다도 아버님을 더 위하는 모양이올시다. 한잔 드시옵시오."

정안군은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먼저 장인 민제한테 술을 권했다. 민제는 사위가 권하는 술잔을 받아 들고 농담으로 대거리했다.

"자네 처가 나를 위해서 술상을 내보낸 것이 아니라, 상을 잘 보는 하제학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술을 내보낸 모양이니, 아무리 해도 나를 위해 술상을 내보낸 것이 아니라 역시 자네를 위해서 내보낸 것일세. 남편의 관상을 잘 보아 달라고 내보낸 것이니 하제학한테 먼저 술을 권하게."

만좌는 껄걸 웃었다. 술을 한 순배 돌린 후에, 방원이 하윤한테 묻는다.

"그래 하제학, 내 상이 천하에 둘도 없는 상이라 하니, 장차 어떻게 되겠소?"

하윤은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그저 그렇게만 알아두십쇼. 입으로 형용해 말할 수 없습니다. 하윤은 한평생 정안군을 모시겠습니다."

하윤은 의미 깊은 말을 던지고, 한평생 정안군을 돕겠다고 맹세했다.

방원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대제학 민제도 하윤이 한평생 정안군의 심복이 되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대견했다.

"하제학이 한평생 정안군을 도와준다면, 나는 허리띠룰 풀고 자겠소. ,,."

민제가 말하니, 하윤도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염려 맙시오. 허리띠만 끄르실 것이 아닙니다. 부원군이 되십니다. , , ."

세 사람의 의기는 물샐틈없이 어울려졌다. 하윤이 술잔을 돌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정도전이 이번에 의안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합니다."

슬며시 정안군을 바라보며 변죽을 울렸다.

"정도전은 문명이 높은 사람이니 당연하지요."

정안군은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하윤이 다시 말한다.

"정도전은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재주가 너무 과해서 탈입니다. 정안군께서는 너무 믿지 마십시오."

하윤은 의미 깊은 말을 던졌다.

"나 역시 짐작하오. , , ."

정안군은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번엔 정안군이 묻는다.

"세상에서 날 보고 너무나 강포하다고 평을 하는 모양입니다. 고려의 구신들을 초개같이 죽인다고 말이 많은 모양이외다. 굴복하지 않는 사람을 어찌하겠소. 아버지를 도와서 나라를 창업하자니 이 수단을 아니 쓸 수가 없구려. 어찌하면 좋겠소?"

정안군의 열을 띠어 묻는 말에 하윤은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그저, 소신대로 하십시오. 마음이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칼을 빼도 좋고 칼을 칼집에 꽂아도 좋습니다. 종횡무진 마음이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아무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정안군은 하늘이 내신 분이올시다. 때가 오면 일이 다 됩니다. 남의 말에 구애하실 것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십쇼."

하윤은 방원을 격려했다. 방원은 하윤의 격려하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흐뭇했다. 그러나 한마디 아니할 수 없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니 말이 되오. 마치 목낭청 대답을 하듯 하는구려."

"반동하는 무리들을 죽여도 좋고 아니 죽여도 좋단 말씀요?"

방원의 큰 눈이 타는 듯 빛을 뿜으며 하윤을 바라본다.

", 그렇습니다. 그저, 생각이 드시는 대로 하시란 말씀입니다."

방원은 어이가 없었다. 잠자코 눈을 감았다. 하윤이 총기 있는 눈을 실같이 뜨고 정안군의 눈감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아마 정도전이 어제나 오늘 아침때쯤 다녀갔을 것입니다."

방원의 감았던 눈이 번쩍 떠졌다.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귀신같이 아는구나 생각했다.

"그것을 어찌 아시오."

하윤은 빙긋 웃었다.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천기를 안다고 하윤이 자처하겠습니까. ,,,"

옆에 있던 방원의 장인 민제가 궁금증이 났다. 방원에게 묻는다.

"정도전이 과연 다녀갔나?"

", 다녀갔습니다."

하윤이 소리를 높여 깔깔 웃으면 말한다.

"정도전이 의안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었스니, 어찌 아니 다녀가겠소. 나리보고 득민심을 하라고 다녀갔으리다. 도은 이숭인을 죽이고, 목은 이색을 죽인 일이 다 제가 앞장을 서서 한 일인데 이제 와서 나리보고 득민심을 하라니 말이 되오. 이것은 모두 다 강비가 나리와 정도전을 떼어 놓는 이간책입니다. , , ."

방원과 민제는 생각지도 아니했던 말이었다. 깜짝 놀랐다.

"강비의 이간책이라니?"

방원과 민제가 일제히 묻는다.

"나리와 정도전이 합심을 해나간다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모르니, 강비는 정도전을 방석의 스승을 만들어서 나리와의 행동을 갈라놓고 자기편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강비의 수단은 나리나 정도전보다 단수가 훨씬 높습니다. 하하하."

하윤의 말을 듣자 방원은 황연히 깨달았다. 도전은 아버지의 침식이 불안하다는 것을 팔고 자기한테 고려의 구신들을 회유하라고 새삼 권했다. 확실히 정도전은 강비한테 매수가 된 것이 분명했다. 방원은 화가 벌컥 치밀었다.

"여보 하제학! 그래 나는 사람을 죽이기가 좋아서 죽인단 말요. 날 보고 회유를 하라니,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어찌한단 말요. 삼천리강산의 선비란 선비들이 모조리 우리의 건국을 반대한다면 나라꼴이 어찌 되겠소. 불복을 하니까 본보기를 내는 것이 아니겠소?"

"글세, 그러하니 나리께서는 마음이 내키시는 대로 하시라고 내가 아까 말씀을 드리지 아니했습니까."

하윤이 대답했다.

"정도전은 강비의 말을 쑥 빼놓고 아버지께서 침식을 불안해하신다는 말로 방패를 삼아서 말합디다."

"글세. 그러하니 정도전은 강비한테 매수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는 정도전이 나리의 편이 아니라 강비의 편이올시다. 정도전을 믿지 마시오. 하하하......"

하윤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방원의 괄괄한 성격이 불끈 일어났다.

"죽 쒀서 개 좋은 일 하는 격이로군......."

옆에서 민제가 말한다.

"잠시 유화정책을 써보는 것도 좋겠지. 자꾸 상감의 뜻을 거스른다면 부자지간의 사이만 멀어지고."

"만부득이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까? 보시구려. 당신도 당해보고 나도 그렇지 않습니까. 소위 임금이란 분이 친히 집으로 찾아가서 개국 공신의 칭호를 주었건만, 그것을 받지 않고 송산으로 내려갔고, 목은만 해도 그같이 융숭한 대접을 했건만, 거만스럽게 앉을 자리가 없다고 물러갔으니, 이러한 선비들의 풍조가 온 나라에 가득하게 퍼진다면 나라꼴이 어찌 되며 백성들을 어떻게 어거하겠소.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단 말씀요."

방원의 말을 듣는 장인 민제는 기가 질려 대답을 못하고, 하윤이 껄걸 웃으며 대꾸한다.

"옛날 제갈양은 맹획을 잡을 때 칠종칠금까지 한 일도 있습니다. 늦췄다가 잡기도 하고, 잡았다가 놓아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가서는 항복을 받지 아니하였습니까. 외골쑤로 너무 고집하실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원은 하윤의 말을 듣고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하윤이 다시 말한다.

"앞으로 큰일을 하시자면 슬며시 못 이기시는 체 일을 늦춰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지금 정안군의 앞에는 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정도전은 적의 품 안에 안긴 인물이올시다. 뽑은 칼을 슬며시 칼집에 꽂았다가 다시 뽑으셔도 좋습니다."

하윤은 은근히 뜻깊은 말을 또 한 번 던졌다. 방원도 고지식한 편만은 아니었다.

한숨을 길게 짓고 눈을 감아 생각 속에 빠졌다.

"자아 오늘은 이만 뵙고 가겠습니다. 하윤은 나리의 상을 보고 한평생 모시기로 했습니다."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제도 일어났다. 중문간에서 딸을 잠깐 만나보고 돌아갔다.

 

세종 어머님 민씨

정안군 방원은 장인 민제와 하윤을 전송해 보낸 후에 내실로 들어갔다. 아내 민씨가 저녁 밥상을 받들고 들어왔다. 키가 크고 얼굴이 동탕했다. 아기자기하게 예쁜 얼굴은 아니다. 그러나 의젓하고 무게가 있게 보였다. 정안군의 식사가 끝난 후에 민씨는 조용히 남편에게 물었다.

"오늘은 손님이 많이 다녀갔습니다 그려."

"그렇소. 정도전도 오고 장인께서 하윤이란 사람을 데리고 오셨소."

"정도전이 왜 다녀갔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갔습니까?"

"그것은 왜 묻소?"

방원은 무뚝뚝하게 아내에게 반문했다.

"들은 말이 있어서 여쭈어봅니다."

"밖에서 하는 일을 안에서 알아서 무엇하겠소."

방원은 또다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저 요령만 간단히 말씀해주십시오. 저도 들은 말이 있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도전은 나하고 강경정책을 써서 불복하는 선비들을 모조리 처단하자고 약속한 사람인데, 이제 와서는 유화정책을 써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덮어주자고 하는구려. , , 이런 의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당신은 무슨 말을 들었단 말이요?"

"정도전이 의안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다 합니다."

"아까 장인께서 데리고 온 하윤한테도 들어서 알았소."

"나리께서는 너무나 고지식하시고, 귀가 어두십니다. 정도전은 강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강비의 사람이 되다니? 어떻게 해서 강비의 사람이 되었단 말이오?"

"강비는 엊그제, 정도전을 내전으로 불러들여서 술까지 대접하고 의안군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했다 합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왕후가 개국 공신을 내전까지 불러들여서 술까지 대접하고 , 자기의 아들을 부탁했으니 이것은 꼭 의안군으로 세자를 삼자는 공작이올시다."

방원은 깜짝 놀랐다. 하윤한테 정도전이 방석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강비가 정도전을 내전까지 불러들여서 술을 대접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그 말은 누구한테 들었소?"

"궁녀들이 다 알고 짜아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일입니다."

"서자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단 말요!"

방원은 뱉듯이 말하고 노기가 가득했다.

"정도전이 나리한테 와서 유화정책을 쓰자고 한 것은 강비가 은근히 정도전을 시킨 것이올시다. 나리와 정도전의 사이를 떼어놓기 위해서 슬며시 간책을 쓴 것입니다."

방원은 또다시 아니한가.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조선 천지가 다 반항을 할 터인데 날 보고 유화정책을 쓰라 하니 딱하지 않소. 그까짓 정도전이 나를 배반한다는 것쯤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소."

방원은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지었다. 아내 민씨는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남편 방원한테 고한다.

"나리께서 국가의 창업을 위하여 하루바삐 질서를 유지하시려고 강경책을 쓰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바마마의 뜻을 너무 거스리시는 것도 나리의 장래를 위해서 좋지 아니합니다. 강비는 벌써 바둑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의안군으로 세자를 봉하려 하여 정도전을 잡았습니다. 나리께서는 너무나 고집하지 마시고 잠시 유화정책을 쓰시옵소서."

방원은 아내의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뀐다.

"흐흥, 유화정책을 쓴다고 고려의 옛 신하들이 복종할 리가 있나. 그저, 본때를 보여서 백성들이 꼼짝을 못 하도록 해야 하오. 그렇지 아니하면 나라의 건국은 백년하청이란 말요."

아내 민씨는 다시 간곡하게 권한다.

"저도 비록 일개 여자올시다 마는 나리의 뜻을 짐작합니다. 그러나 시험해보실 셈 잡고, 지조 있다는 선비 중에서 몇 사람을 골라서 조정에 불러보십시오. 첫째로 아바마마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자는 것입니다. 세자의 자리를 방석한테 뺏겨서야 되겠습니까."

아내의 말을 듣자, 방원은 소리를 높여 껄걸 웃었다.

"내가 세자의 자리가 탐이 나 나랏일을 하는 줄 아오? ,."

방원은 괘사를 떨어 호탕하게 웃었다. 남편의 속맘을 아는 사람은 오직 아내가 있을 뿐이었다.

"나리께서 여태껏 건국에 노력하신 것은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다음 왕위를 방석한테 뺏겨서야 쓰겠습니까."

아내 민씨의 말을 듣는 정안군 방원의 큼직한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 하 하, 내 위로 형님이 넷이나 있는데. 세자의 자리가 내 차례에 올 수가 있나. 나는 다만 아버지를 위해서 나랏일을 하는 것뿐이오."

아내 민씨는 눈을 내리깔고 나직하게 고한다.

"위로 형님들이 여러 분 계십니다마는, 누가 이 나라를 휘어잡을 만한 분이 계십니까? 치꼽고 내리꼽아 보아도 이 어려운 난국을 꺾어 잡을 분은 한 분도 아니 계십니다. 다만 나리가 계실 뿐입니다. 그러하니 너무 아바마마의 뜻을 거스리지 마시고 때를 기다려보십시오."

"당치 않은 소리 말아."

방원은 짐짓 핀잔을 주었다. 마음속으로 는 기쁘면서도 일부러 한 번 아내를 눌러보는 것이다. 아내 민씨가 다시 묻는다.

", 친정아버지께서 하학사는 왜 데리고 오셨습니까?"

"하윤은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인데, 한 번 내 관상을 보고 싶다고 해서 장인이 데리고 오신 모양이오."

방원의 대답을 듣자 아내 민씨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하학사가 관상도 잘 봅니까? 그래 나리의 상을 보고 무어라 합니까?

"천하의 둘도 없는 높고 귀하게 될 상이라 합디다. 하 하 하, 그러나 주책없이 지껄이는 선비의 말을 믿을 수가 있소, 하하하 ."

방원의 웃음소리는 또 한 번 호탕했다. 아내 민씨의 붉은 입술이 화판처럼 벌어졌다.

"그것 보십쇼. 천하의 둘도 없는 귀히 될 상이라 하니, 만백성을 거느리실 제왕이 될 상이라 한 것입니다. 나리께서는 꼭 왕위에 오르십니다. 두고 보십쇼. 그러니 아바마마의 비위를 거스르지 마시는 것이 나리의 앞날을 위해서 좋은 일이올시다."

무쇳덩이같이 튼튼하고 단단했던 방원의 마음이 약간 풀리기 시작했다.

"고려의 옛 신하 쳐놓고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어디 있어야지. 서로 의논할 사람도 없고, 정도전, 남은, 정총이 있었으나. 이제는 강비의 편이 되었고."

방원은 고즈너기 탄식했다.

"나리께서는 잃어버린 정도전을 생각하지 마시고 새로 찾아온 하윤을 심복으로 삼으시면 좋지 아니합니까? 하윤과 의논해보십시오."

아내 민씨는 초롱거리는 눈을 들어 방원을 바라보며 훈수했다. 방원은 아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하윤을 청했다. 사랑에는 하윤과 방원 단 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아내 민씨는 민첩했다. 두 사람이 마실 주안상을 간단하게 차려 내갔다. 술이 두어 순 돌았다. 하윤이 방원에게 묻는다.

"무슨 의논할 일이 있어서 부르셨습니까?"

 

야은을 달래보고

정안군 방원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학사의 높은 지혜를 빌리기 위하여 청했소이다."

하윤은 성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어떠한 일을 물어보시려 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라 다스리는 근본원리는 모르고 나보고 너무나 강포한 정책을 쓴다 하는구려. 우선 우리 아버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고, 내 아내 되는 사람도 아버지의 비위를 맞춰서 유화정책을 쓰라 하는구려. 낸들 어찌 강압정책을 쓰기 좋아서 쓰겠소. 그런 것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나의 진정을 모르고, 강포하기 실로 딱한 일이오. 이제는 어디 한 번 유화정책을 써보아야 하겠소. 어떤 사람을 찾아서 달래보는 것이 좋겠소?"

정안군의 말을 듣는 하윤은 소리를 높여 깔깔 웃었다.

"하하하, 연작이 어찌 흥곡의 뜻을 알겠습니까. 한 번 해보는 체하시죠. 그러나 당분간 성사는 못 하시오리다. 인심이 아직도 안정된 때가 아닙니다. 참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할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 덕을 펴보시오. 이래야만 누가 옳게 보고, 바로 처사한 것을 짐작할 것입니다. 나리가 말씀한 대로 한 번 유화정책을 써보는 체 합시오."

정안군의 입이 벙긋 벌어진다.

"하학사가 해보라면 실패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한 번 해보겠소. 누구를 시험해보는 것이 좋겠소?"

"나리의 가장 가까웠던 죽마고우들을 한 번 청해서 시험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안군은 하윤의 말을 듣고 잠깐 눈을 감아 옛 친구들을 생각했다. 한동안 후에 정안군은 눈을 번쩍 뜨고 하윤을 향하여 묻는다.

"야은이 어떻겠소?" 야은은 나와 동문수학했던 옛 친구요."

하윤은 빙그레 웃고 대답한다.

"좋겠지요. 당세의 고사입니다. 그러나 큰 기대는 갖지 마십시오."

"다음에는 운곡을 달래보면 어떻겠소?"

"원천석 말입니까?"

", 그러하오."

"모두 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역시 난공불락일 겝니다. 그러나 유화정책을 써보는 체하고 하시는 일이니 성공이 아니되는 날은 도리어 나리의 강압정책을 썼던 일이 옳았다고 모두 다 생각할 것입니다. 밑져도 본전이니 한 번 시험해보십시오. 그리고 전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반드시 아뢴 후에 초빙해보십시오. 그러나 말을 아니 듣는다고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 , ."

정안군 방원도 드높게 웃었다.

", , ."

다음날 정안군 방원은 아침 문안을 드리러 어전으로 들어갔다. 문후를 마친 후에 왕께 고했다.

"전하께옵서 항상 소자의 성격이 너무나 강포하다 꾸짖으시므로 마음에 항상 송구스러웠습니다. 잘못된 점을 뉘우치고 지조 있다는, 비들에게 유화정책을 써서 초빙해보려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정안군의 아뢰는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 반가웠다. 용안에 흔연히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네가 그리 생각한다 하니, 내 마음이 기쁘다. 그저 득민심을 해야만 한다. 좋은 사람이 있거든 초빙해보아라."

아버지의 뇌까리는 '득민심' 소리에 정안군 방원은 역한 기운이 왈칵 가슴 안에 용솟음쳐 올랐다. '누구는 득민심을 하고 싶지 아니해서 그리합니까'하고, 역한 소리가 곧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꾹 참았다. 아내 민씨의 아버님의 비위를 맞추라는 부탁을 생각한 때문이다. 하윤의 유화정책을 써보는 체하라는 말을 생각해 본 때문이다. 목줄까지 기어오르는 벅찬 기운을 꽉 눌렀다.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부왕께 고했다.

", 전에 동문수학했던 사람이 두어 명 있습니다. 지사라는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올시다. 그들이 지도하는 제자도 많습니다. 한 사람은 길재요, 한 사람은 원천석이라 합니다."

"오오, 길재와 원천석 말이냐. 나도 귀에 젖도록 들은 이름들이다. 모두 다 고려 때 대과 급제한 사람들이로구나."

",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빨리 벼슬을 주고 불러보아라."

태조는 기뻤다. 흔연히 허락했다. 정안군은 부왕의 허락을 맡자 야은 길재의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야은의 동향 사람으로 새 나라에서 정자 벼슬을 하고 있는 전가식이 야은의 숨어 사는 곳을 알려주었다.

"야은 길재는 지금 경상도 선산땅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늙은 어머님을 봉양하면서 지내는데, 효행이 갸륵합니다."

정안군 방원은 곧 삼군부에 영을 내렸다.

"야은 길재가 경상도 선산 땅에 숨어산다 한다. 높은 선비로 대접하여 칭소하라."

칙사는 곧 왕명을 받들고 선산으로 내려갔다. 길재는 선산 금오산 아래 숨어 살고 있었다. 왕의 칙사는 은일로 대접하여 부르는 징소하는 교지를 길재한테 전했다. 길재는 병이 들었다 하고 누워서 일어나지 아니했다. 칙사도 만나지 아니했다. 왕의 교지를 받들고 내려갔던 칙사는 아무리 야은을 만나보러 했으나 만날 도리가 없었다. 사신은 선산골에 묵으면서 이 사실을 정안군과 태조께 장계로 아뢰었다. 정안군은 경상감사와 선산 군수에게 엄명을 내렸다.

"그대들은 한 도와 한 골의 장으로 있으면서 국가에서 높은 선비로 징소하는 데 힘을 쓰지 아니하니 가통한 일이다. 만약 야은 선생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엄벌에 처하리라. 칙사가 돌아오는 편에 야은이 꼭 상경하시도록 주선하라."

경상감사와 선산 군수는 정부의 엄명을 받고 벌벌 떨었다. 날마다 야은의 집을 찾았다. 사람을 시켜서 야은한테 말을 전했다.

"선생께서 서울로 올라가시지 아니하시면 감사와 군수는 조정 명령을 받들지 아니했다 하여 추고를 당하고 벼슬이 떨어집니다. 굽어 통촉하시고 마음을 돌려줍시오."

감사와 군수는 날마다 길재의 집으로 나가서 졸라댔다. 이 동안에 서울서는 재촉하는 명령이 빗발치듯 했다. 야은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서 감사와 원이 벌을 받고 면직을 당한다면 미안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우선 서울로 올라가서 감사와 원을 구해주기로 했다. 이같이 해야만 감사와 원은 책임을 면하게 되는 것이었다. 야은은 머리에 검은 복건을 쓰고 몸에 베도포를 입고 한 필 나귀에 몸을 실어 서울로 향했다. 야은 길재가 송도로 온다는 기별을 듣자, 정안군 방원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부왕께 아뢰고 은일의 높은 선배로 대접해서 봉상박사의 벼슬을 내렸다. 은일 벼슬은 당자가 과거를 보지 아니했어도 나라에서 높은 선비로 대접해서 특별히 내리는 벼슬이었다. 야은은 송도로 올라가자 대궐에 들어가 사은을 하지 아니하고, 사처에서 정안군 이방원한테 편지를 보냈다.

'옛날, 그대와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일이 눈앞에 선하오. 그대는 옛일을 생각해서 위에 아뢰고, 나에게 박사 벼슬을 준 것은 옛정을 잊지 않자는 것인 줄 짐작하오. 그러나 길재는 이미 고려조정에 과거를 보아서 벼슬까지 한 사람이외다. 나라는 이미 바뀌었소. 무능한 불초는 고향으로 돌아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을 뿐인데, 돌연 불러서 벼슬을 주니 감사하오. 그러나 받지 못하겠소. 내가 새 나라에 새 벼슬을 한다는 것은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아니하오. 그대는 일개 포의의 뜻을 뺏지 말기 바라오.'

정안군 방원은 하운과도 의논한 것과 같이 길재가 호락호락 벼슬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아니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맞추기 위하여 한 번 시험해보는 것이다. 정안군 방원은 곧 야은 길재에게 답서를 보냈다.

'야은은 당세의 높은 선비로 명성이 높소이다. 항상 흠모하는 마음 간절하여 위에 아뢰어 천거한 것인데, 이같이 사양하니 내 마음이 무한 슬프오. 그대를 천거한 사람은 나요. 그러나 그대에게 벼슬을 주어 부른 사람은 따로 있소. 국왕 전하께서 그대를 징소하신 것이니 전하께 상소를 올려주시오.'

정안군은 슬며시 부왕한테 팔밀이를 했다. 길재는 곧 태조 이성계한테 글을 보냈다. 이미 죽을 것을 각오하고 글을 썼다.

'여자는 두 남편을 받들 수 없고, 의리 있는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은 교학의 철칙입니다. 길재는 이미 여조에 벼슬하여 지위가 문하주서에 이르렀던 사람이외다. 어찌 이제 다시 새 나라의 임금을 섬기겠소. 깊이 생각해보옵소서.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늙은 어머님을 봉양하면서 남은 세월을 마치겠소이다.'

야은 길재의 글월은 정운을 통하여 태조한테 바쳐졌다. 태조는 길재의 글월은 정운을 통하여 태조한테 바쳐졌다. 태조는 길재의 신하 노릇 하기 싫다는 글을 읽고 어깨가 허전한 느낌을 가졌다. 마음이 서운하고 우울했다. 급히 정안군 방원을 불렀다.

"길재가 벼슬을 받지 않는구나!"

탄식조로 말했다.

"전하께서 항상 득민심을 하라 하시므로 동문수학한 이 사람이면 마음을 돌릴까 하여 전하께 천거했더니, 이 사람마저 절개를 지키겠다 하니, 딱한 일이올시다."

"어찌하려느냐?"

"신은 생각 같아서는 굽힐 때까지 옥에 내려 결판을 짓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 항상 유화정책을 쓰라 하시니, 제 소원대로 늙은 어미를 봉양하라고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옳다, 잘 생각했다. 길재가 당을 모아 우리를 반항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 한 몸의 지조를 깨끗이 지키려 하는 것뿐이니, 불문에 부쳐버려라."

야은은 이리하여 탈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정안군 방원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첫 번째 쓴 유화정책은 하윤이 말한 대로 크나큰 효험을 보지 못하고 야은의 지조만 더 한층 푸른 하늘에 햇빛마냥 쨍하고 빛을 뿜게 되었다. 야은은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한테 성리학을 배웠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서 우왕과 창왕을 내쫓고 요왕을 허수아비로 세운 후에 왕 이상의 대군을 잡았을 때, 야은은 가만히 앉아 볼 수 없었다. 스승 포은을 찾아갔다.

"선생께서는 국가의 중진으로 앉아 계시어 어찌 이 꼴을 보고만 계십니까?"

정면으로 포은을 격동시켰다. 포은이 이성계를 배격하는 운동을 일으켰다가 선죽교 위에 피를 뿌려 순국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야은 길재의 크나큰 힘이 작용을 한 것이었다. 포은 선생이 순국한 후에 야은은 벼슬을 버리고 선산으로 내려가 세상과 연을 끊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얼마 아니되어 우왕과 창왕이 여주에서 참혹하게 죽었다는 변보가 들렸다. 야은은 기가 막혔다. 여주 땅을 바라보아 통곡하고 발상거애한 후에 고기를 먹지 않고 소하여 3년 동안 거상을 입었다. 야은은 항상 옛 임금과 옛 나라를 생각했다. 기막힌 망국한은 그의 가슴 속에 가득했다. 하루는 꿈을 꾸었다. 먹장삼을 입은 늙은 도승이 나타났다. 야은에게 시 한수를 써서 주었다. 야은이 받아보니 세상을 비평한 시다.

절구 한 짝이었다(옛 친구, 새 친구, 모두 다 몸이 새로 변했구나.).

친구들은 다 새 나라에 벼슬을 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낯으로 변했다는 염량세태를 탄식한 시였다. 야은은 즉석에서 대구를 지어 읊었다.

(천지와 강산만은 그대로 옛 친구다.)

하고 대를 했다. 친구들은 시세와 함께 마음이 변해서 옛 임금을 배반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으나 천지와 강산만은 의연히 변하지 않고 옛모습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은근히 자기의 지조를 표현한 시였다. 그는 꿈속에서도 옛 나라를 생각해서 이같이 시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야은은 이조에서 주는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늙은 어머니를 지성껏 봉양하는 한편 젊은 후배들을 도의로 지도했다. 향기로운 꽃다운 이름이 일국에 진동했다. 당시에 경상감사로 있던 남재는 야은의 높은 절개를 보고 시를 지어 예찬했다.

고려 오백 년에 선생이 홀로 계실 뿐, 일대의 공명을 어찌 영화스럽다 하랴.

늠름한 청풍이 천지에 불어오니 조선 억만 년에 길이 예찬하는 소릴세.

선산 땅에는 야은을 사모하여 선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는 항상 유학의 도덕을 밝히고 이단의 학설을 배격했다. 당시에 불교를 숭상하던 승려들까지 야은의 학문에 탄복하여 유학으로 돌아와 진리를 탐구한 사람이 많았다. 야은이 절개를 완전히 하여 유학의 태두가 되니, 태조와 정안군은 권력과 무력으로도 마침내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의 유화정책은 마침내 고고한 한 사람 포의의 뜻을 뺏지 못하고 말았다.

 

치악산중의 청풍

아버지 태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동문수학하던 야은 길재를 포섭하려던 이방원은 완전히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이방원은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내 민씨의 권고를 듣고, 지조 있다는 선비를 몇 사람 더 시험해보기로 했다. 관상을 통하여 가깝게 된 하윤을 청했다.

"야은 길재를 포섭하려던 회유책은 완전히 실패해버렸소. , , ."

방원은 드높게 웃었다. 하윤은 둥근 얼굴에 총기 있는 눈을 반짝이면서 미소를 지어 웃으며 대답했다.

"나리, 그것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회유책을 써서 성공하신 것입니다. 조금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포섭을 못 했으니 실패한 것이지, 어찌 성공을 했다고 하겠소."

"무찔러 죽이는 일은 금방 효력이 나는 것 같지만 회유책의 효과는 마치 겻불을 때는 거와 같습니다. 은은하게 온기를 뿜어서, 오랜 세월이 지나간 연후에 비로소 효력이 생깁니다. 야은을 죽이지 않고 살려서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은 잘하신 일입니다."

방원은 화를 벌컥 냈다.

"그렇다면, 어느 때 나라를 평정한단 말요?"

하윤은 깔깔 웃는다.

"정도전이나 하윤 같은 눈치 빠르고 재간 있는 인물들은 대왕 전하나 정안군의 심복이 되며, 고려 옛 임금을 배반했소이다마는 고지식하고 미련하고 의리만 내세우는 친구들은 얼른 나리의 품 안에 안기지 아니합니다. , , . 누가 영리하고 누가 똑똑한지 모르지요. 그러니, 당장 포섭이 아니 되었다고 낙담은 하지 마십쇼. , , ."

"그래, 하제학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단 말이오?"

방원은 또다시 화를 내며 언성이 높아졌다. 하윤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대답한다.

"천운이 돌아왔는데 무엇을 걱정하고 근심하십니까. 세월이 흘러가면 다 일이 무사태평하게 천하가 정해집니다. 덮어놓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늘 운수가 활짝 열렸습니다. 염려 맙시오."

"여보, 하제학, 당신은 밤낮 운수타령만 하고 있으니 그래 두 다리를 쭉 뻗고 드러누워 있어도 저절로 국가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리게 된단 말씀요. 일이 급하지 않소. 어서어서 국가를 다스릴 만한 동량의 재목들은 조정에 와서 지도하는 사람이 돼야하겠고, 농사하는 백성은 농사를 지어야 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를 해야 하지 않소. 모두 다 지조 있다는 선비 놈들 때문에 마음이 공중에 떠서 쑥덕공론들만 하고 있으니 정치가 되오, 경제가 되오. 이래가지고야 어떻게 훌륭한 나라꼴이 되겠소."

"고정하십시오. 다 됩니다. 세월이 흘러가야 되지요. , , "

하윤은 태평으로 대답했다. 정안군은 유들유들 대답하는 하윤의 태도를 보자 화를 내도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았다. 다시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하윤에게 묻는다.

"나는 길재를 포섭하지 못한 후에 다시 일도양단하는 과감한 행동을 취하려 했는데 내 아내가 자꾸 만류하는구려. 전하의 눈 밖에 나면 큰일이니 다시 몇 사람의 지사라고 세상이 지목하는 이들을 시험해보라 하는구려. 내 맘에는 맞지 않는 말이지만 어떠하오, 하제학의 생각에는?"

하윤은 얼굴빛을 정색하고 말한다.

"부인께서는 현명하십니다. 나리보다 한 수가 높으십니다."

하윤이 별안간 근엄한 태도로 말하는 모습을 보자 방원은 기가 찼다. ''하고 두툼한 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졌다. 우뚝하게 높은 코가 더한층 우뚝하게 보였다.

"그러면 또 한 번 속아보란 말이로구려."

"큰사람 노릇을 하시려면 속아보셔도 좋습니다. 잠시 대왕 전하의 비위를 더 맞추어보십시오."

방원은 일면 하윤의 말을 듣고, 머릿속으로는 어떤 사람을 회유해볼까 생각해보았다. 일찍이 자기가 글을 배웠던 운곡 원천석의 생각이 났다.

"전에도 한 번 하제학한테 말을 했소만, 운곡을 한 번 포섭해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원주 치악산에 숨어 산다는 원천석 노인 말씀입니까?"

"그러하오, 운곡은 내 선생님이오."

"좋습니다. 나리와 사제지간이 되신다 하니 한번 나랏일을 같이 해보자고 부탁해보십시오. 그러나 말을 아니 듣는다고 강압정책을 쓰시어서는 아니 됩니다. 더구나 스승을 참하셨다가는 큰일이 납니다."

"그만쯤야 나도 생각이 없겠소. 하제학의 말씀대로 한 번 해보는 체하는 것이지."

"좋습니다. 그저 몇 사람 그렇게 해보십시오. 당분간 그저 대왕의 뜻을 어기지만 마십쇼."

하윤과 정안군은 이같이 의논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정안군은 아버지 이성계한테 문안을 드린 후에 고했다.

"야은 길재를 포섭하지 못한 일은 이미 아뢰었습니다. 또 한 사람 높은 선비한테 벼슬을 해달라고 교섭해보겠습니다."

이성계는 윤기 도는 큼직한 눈에 미소를 띠고 방원에게 묻는다.

"이번엔 누구를 포섭해보려 하느냐?"

"신이 어렸을 때 글을 배웠던 운곡 원천석을 찾아볼까 합니다."

"좋은 생각이다. 운곡은 지금 어디 있다 하더냐?"

"강원도 치악산 속에 숨어 산다 합니다."

"그렇다면 내 명을 받들어 네가 몸소 찾아보아라."

이방원은 일필 청려를 타고 강원도로 향하여 달렸다. 이방원이 찾아가는 운곡 원천석은 원래 강원도 원주 사람이었다. 시를 잘 짓고 학식이 해박했다. 그러나 그는 벼슬에 뜻이 없었다. 치악산 속에 숨어 살면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기 싫어했다. 몸소 소를 몰아 밭을 갈고 농사를 지어서 늙은 부모를 봉양하고 있었다. 고려가 망하기 전의 일이었다. 국가에서는 원천석을 한 사람 농부로 인정하고 병졸로 뽑아서 국경으로 보내려 했다. 운곡은 부모의 권고를 받고 과거를 보았다. 과거본 선비는 임관이 되는 까닭에 병역을 면제하는 제도가 있는 때문이다. 운곡은 과거에 응시하여 단번에 장원급제가 되어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운곡은 선비의 자격을 얻은 후에 다시 더 큰 벼슬을 하기 소원하기 아니했다. 진사가 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글을 읽고 밭을 갈아 농사지었다. 틈틈이 목은 이색과 상종하면서 비색해가는 나라 운수를 슬퍼하고 한탄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혁명을 일으킨 후에 고려의 원로장군이었던 도통사 최영이 옥에 갇혀서 순국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시를 지어 충신을 조상했다.

수경은 파묻혀 빛을 잃었고

기둥과 주춧돌 쓰러져버리니

사방의 백성들 모두 다 슬퍼한다.

혁연턴 빛난 공업 마침내 썩은 일 되었고나.

그러나 확실한 당신의 충성.

죽어도 재는 아니되리다.

청사에 엮어진 기록 질질이 가닥하더니 슬퍼라,

누른 무덤 벌써 흙무더기 되었네.

생각하니 아득한 황천길 아래 동문을

바라보며 분한 마음 아니 풀리리.

 

운곡은 또다시 최영 장군을 위하여 시를 지었다.

홀로 조종에 서 있으니

감히 간섭할 사람 없었고,

곧은 장수의 충성과 의기는 모든 어려움을 겪었다.

여섯 도 백성들의 바라는 마음을 좇아서

능히 삼한 사직의 평안함을 이루었네.

열을 같이한 조정의 영웅들 얼굴이 두터울 지경이고

무찌르지 못한 간사한 무리들 등골이 써늘했다.

다시 어려운 날 당하게 되면 누가 있어 계책을 세우랴.

가소롭다.

때 만난 무리들의 간악한 행동하는 꼴이여.

운곡은 최영 장군이 순국한 것을 슬퍼하여 또 한 수의 시를 지었다.

내 이제 공의 부음 듣고 슬픈 시를 써오.

공을 위하여 슬퍼하기보다 나라를 위하여 슬퍼하오.

하늘 운수의 그르고 좋은 것을 누가 능히 알 수 있겠소.

나라의 기업은 아직도 평안하고 위태로움을 판단할 수 없구려.

날카로운 칼날 이미 꺾어졌으니 슬픈 마음 주체할 길 없소.

충성스런 간담 외로워라.

한을 지탱 못하오.

혼자 산과 물 대하여 이 노래 부르니,

흰구름, 흘러가는 물 모두 다 슬프기만 하구려.

 

운곡은 목은 이색이 장단으로 귀양 갔다는 소문을 듣고, 치악산에서 탄식하는 시를 지었다.

티 없는 백옥에 누명을 썼구려.

두 팔을 베어 사람을 형벌 하네

해동풍월은 분을 머금었고 천하 영웅들 다 함께 슬퍼한다.

만백성들 새 일월 바라보나 삼한 땅은 의연히 옛 강산일세.

누가 옳고 그른 것 하늘이 알고 있소.

자나깨나 기력이 화평하기만 빌고 있소.

 

운곡은 이같이 시를 지어 목은을 생각했다. 운곡 원천석은 이성계 일파가 공민왕의 아들 우왕과 손자 창왕이 요승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왕위를 박탈하고 공양왕을 세운 데 대하여 백대의 반증이 될 만한 시를 지었다.

전왕의 부자분 제각기 떨어졌네.

동편과 서편 하늘가의 만리를 격했네.

한 몸을 서류로 만들었다 하나.

한 조각 마음이야 옮겨질 리가 있으랴.

조왕이 응당 하늘에 맹세할 것이요.

나머지 음덕은 수백 년에 전해 흐르리.

가짜와 진짜를 왜 진작 가려내지 못했던가.

창창한 저 푸른 하늘 밟고 밝게 굽어보시네.

 

운곡은 추상같은 붓끝으로 시를 지어서 이성계 일파가 조작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고 손자라고 해서, 이신벌군 했다는 비판을 면하려 한 것을 신랄하게 반박했다. 우왕과 창왕은 신우, 신창이 아니고 정정당당한 왕건 태조의 피를 받은 임금이라는 것을 통절하게 반증해놓았다. 이 시 가운데 '가짜와 진짜를 왜 진작 가려내지 못했던가'한 구절은 이성계 일파에게 매섭게 반박한 시다. 만약 왕우가 신돈의 아들이요, 왕창이 신돈의 손자라면, 이성계는 어찌해서 신돈의 아들과 손자인 그들을 도와서 충성을 다했더냐 하고 야유한 시이기도 했다. 얼마 후에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창왕을 죽였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운곡은 또다시 시를 지어 아프게 옛 임금을 조상했다.

벼슬 높은 것, 부자로 사는 것

모두 다 임금의 은혜인데

반 달 동안 수모를 당한 채 벌써 멸문이 되었구나.

이러하니 한 나라에 어찌 경사가 있겠소.

구원에 가서도 원통한 한 씻기 어렵다.

 

운곡 원천석은 이같이 고려왕이 참혹하게 죽은 것을 슬퍼하고 이성계가 배은망덕을 했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방원은 자기의 선생님이었던 운곡 원천석이 이같이 자기 아버지를 신랄하게 비평하여 시까지 지은 것은 전혀 알 까닭이 없었다. 맑은 절개와 높은 지조가 있다고 명성 있는 자기 스승을 찾아서 아버지의 신하가 되게 한다면 크나큰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정안군 이방원은 간촐하게 시자 두어 명과 함께 나귀를 몰고 강원도 치악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새 나라 임금의 아들이요, 삼군부의 군인을 통솔한 권력 있는 왕자였다. 떠들지 아니하고 나가는 행차건만, 벌써 소문은 짜아하게 퍼졌다. 강원 감사가 마중을 나오고 원주 군수가 영접을 했다. 이 소문은 단통 치악산 아래 있는 운곡의 초당으로 들어갔다. 운곡의 시동이 짚신을 삼고 있는 운곡한테 고했다.

"원주 읍내서는 길을 닦고 야단이라 합니다. 새 나라 상감님의 아들이 온다고 온통 백성들을 풀어서 부역을 시킨다 합니다."

운곡은 새 나라 상감의 아들에 대하여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새 나라 상감의 아들이 산골 속으로 왜 오느냐. 사냥을 나오는 모양이로구나."

무심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한낮이 지났다. 동네의 풍헌이 찾아왔다.

"읍내서 사령이 나왔는데 촌길을 치도하라고 원님의 분부를 받들고 나왔소. 상감님의 아들이 운곡 선생을 찾아온다고 동리 사령들을 풀어서 치도를 하라 하오. 운곡 선생도 의관을 정제하고 계시오. 아마 큰 벼슬을 주려나 보오."

운곡은 동네 풍헌의 말을 듣자 비로소 깜짝 놀랐다. 새 나라 상감의 아들이 자기를 찾아온다 하니, 필연코 이성계의 아들 방원이 분명했다. 풍헌의 말대로 벼슬을 해서 새 나라의 신하 노릇을 하라고 졸라대러 오는 것이 확실했다. 풍헌이 돌아간 후에 운곡은 괴나리봇짐 하나를 어깨에 메고 나섰다. 시동이 깜짝 놀라며 묻는다.

"어디를 가십니까?"

"산에 약을 캐러 간다."

운곡은 휘적휘적 걸었다.

"아까 풍헌 어른의 말씀을 들으니 상감님의 아드님이 오신다 하는데, 아니 만나시렵니까?"

"혹시 누가 찾아오거든 약을 캐러 갔다고 말해라."

"언제 돌아오시렵니까?"

말을 마치자 운곡은 뚜벅뚜벅 산으로 올랐다. 시동은 어이가 없었다. 멍하니 산으로 올라가는 운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네에서는 운곡이 몸을 피해서 행방을 감춘지 모르고 남녀노소들은 분주하게 길을 쓸고 황토를 뿌렸다. 석양 때가 되었다. 감사와 원이 앞을 인도하고, 새 나라 임금의 아들 이방원이 나귀를 타고 운곡이 사는 동네로 들어왔다. 동네 백성들은 울타리 뒤에 숨어서 행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새 나라 임금의 아들 정안군 이방원은 강원 감사와 원주 군수의 인도로 운곡 원천석의 초가집 문 앞에 당도했다. 원주 군수가 청을 높여 불렀다.

"운곡 선생."

안에서는 적적하게 대답이 없었다. 이방원이 나귀에서 내려 문 앞으로 가까이 갔다.

"송도에서 제자 이방원이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하고 문을 두드렸다. 시동이 나타나 문을 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이번엔 강원 감사가 앞을 서서 대답했다.

"상감님의 아드님인 선생님을 뵈러 찾아오셨다. 빨리 나오시라고 여쭈어라."

"선생님은 아니 계십니다."

정안군을 위시하여 감사와 원은 낙심이 되었다.

"아니 계시다니 말이 되느냐. 동네 사람들이 다 계시다고 했는데."

"아까, 아침까지 계셨습니다마는 약을 캐러 가신다고 나가신 지 얼마 아니 됩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안에 계신 것이 확실하다, 들어가서 정안군 대감께서 오셨다고 여쭈어라."

원주 군수는 초조해서 시동을 재촉했다. 시동은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전하, 들어와 보십시오. 제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습니까?"

정안군을 위시하여 감사와 군수는 시동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마루에는 원천석의 늙은 아내가 있을 뿐 적적히 운곡은 보이지 아니했다. 정안군 이방원은 하는 수 없었다. 노부인한테 인사를 드리고 문 밖으로 나왔다. 문 옆에는 반석이 있었다. 나귀를 나무에 메어놓고 운곡이 약을 캐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쳐질 때가 되었다. 동네에는 밥 짓는 연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감사와 원은 초조했다. 정안군을 한데 있게 하기 미안했다.

"읍내로 돌아가셨다가 내일 또다시 찾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정안군도 하는 수 없었다. 감사와 원의 권고를 듣고 발길을 돌려 원주읍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방원은 다시 운곡 선생의 집을 찾았다. 여전히 운곡은 돌아오지 아니했다. 정안군은 온종일 반석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다시 읍내로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었다. 정안군은 세 번째 운곡의 집을 찾았다. 역시 적적할 뿐, 운곡의 그림자는 보이지 아니했다. 운곡은 방원을 피하여 종적을 감춘 것이다. 이방원은 하는 수 없었다. 공부할 때 밥을 지어주던 늙은 비자를 불러보고 후한 사금을 준 후에 다시 송도로 나귀를 타고 돌아갔다. 뒷사람들은 정안군이 나귀에서 내려 운곡을 기다리고 앉았다던 반석을 태종대라 불렀다.

 

두문동

정안군은 운곡 원천석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후에 곧 아버지 태조께 알현했다. 태조는 운곡과 정안군은 사제지간이니 반드시 성공을 하고 돌아오려니 생각했다.

"어찌 되었느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물었다.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정안군이 대답했다. 태조는 자기가 과천까지 가서 만났던 조준의 아우 조견보다도 더하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단 말이냐?"

"약을 캐러 갔다고 핑계하고 몸을 피해버렸습니다."

"허허, 하는 수 없구나!"

태조는 탄식하고 한숨을 지었다. 이렇게들 협조를 아니해주나 하는 마음에 울적하기도 했다.

"당분간 유화정책을 써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방원은 한 마디 아뢰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태조는 고려의 명망 있는 옛 신하들이 이같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나 하고 밤새도록 단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태조는 정전에 나가 백관의 조하를 받은 후에 개국 공신들을 편전으로 불렀다. 조준, 배극렴, 정도전, 정총, 남은들의 얼굴이 보였다.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무수한 인재를 얻어야 한다. 경들은 과인을 도와주는 국가의 기둥이요, 주춧돌과 더할 나위 없는 큰 인물들이지만, 국가에서는 앞으로 경들 못지아니한 후계자를 가져야 한다. 이러기에 널리 고려조정에 벼슬했던 명성 높은 이들을 초안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소위 맑은 절개와 고고한 지조를 고집하고 과인 앞에 무릎을 굽혀 도와주기를 거부한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고려의 옛 신하보다 신진기예한 새 선비들을 구해서 국가에서 등용하는 것이 좋겠다. 과인이 왕위에 오른 후에 아직 과거를 보이지 아니했으니 나라에 과거령을 반포하여 새로운 인재를 뽑는 것이 어떠할지 경들에게 의논하는 방이다."

정승 조준이 아뢴다.

"과연 적절하신 생각이십니다. 완고한 구신들을 찾아다니며 구구하게 벼슬을 하라고 초빙하시는 것보다 새로운 선비들에게 과거를 보여서 발탁해 쓰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민심을 수습하시는 첫 방도라 생각합니다."

정도전이 아뢴다.

"국가 전체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불사이군이라는 절개에 얽매어 벼슬을 아니 받는 무리보다 차라리 고려조정에 벼슬하지 아니했던 선비들을 채택해 쓰신다면 명분에 구애됨이 없을 뿐 아니라 좋은 인재를 얻으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과거령을 속히 내리시옵소서."

"성교가 지당하십니다."

개국 공신들은 과거를 보게 하라고 일제히 찬성했다. 전하는 곧 정도전에게 분부했다.

"경은 개국 일등공신으로 정당문학의 명예스런 지위를 가진 사람이니 조속히 과거령을 내리고 과제를 생각해두라."

"삼가 봉행하겠습니다."

정도전은 어명을 받들었다. 정원에서는 과거 날짜를 정하고 과거 보는 장소는 추동궁으로 정했다. 이번 과장에는 특별히 새 임금이 친림해서 시관들과 함께 장원급제를 뽑기로 했다. 과거를 뵌다는 고시는 서울은 말할 것 없고 시골 장터와 읍내마다 붙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 방이 붙은 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새 나라에서 과거를 뵌다는 소문은 짜아하게 퍼졌다. 글자나 하는 선비들은 공론이 부산했다.

"새 나라에서 과거를 보인다고 방이 붙었네. 자네 한 번 볼 생각이 없나?"

"글세, 보아야 할지 아니 보는 것이 좋을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었다 하나 우리는 고려조정에 벼슬했던 사람이 아닐세. 왕씨를 섬기나 이씨를 섬기나 매한가지 아닌가. 우리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곧 우리 임금일세. 한 번 보아보세그려."

"그도 그렇지. 우리가 고려의 녹을 먹은 사람이라면 별문제지만 우리는 고려조정에 벼슬한 일이 없으니 망국대부가 아닐세. 하사비군이 아닌가. 새 나라 임금을 도운들 무슨 상관이 있겠나."

"글세, 자네 말도 일리는 있는 말일세. 그러나, 어째 과거를 보러 가는 것이 마치 궂은 말고기를 씹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게 생각이 드네그려."

"어째서 궂은 말고기를 씹는 것 같단 말인가?"

"하 이사람, 생각해보게. 정정당당하게 정도로 국가를 교체했다면 모르되 속임수로만 일을 했으니 말일세. 위화도에서 회군을 해서 최영 장군과 우왕을 내친 것은 친원만 하다가는 망한다고 해서 정부를 뒤엎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후에는 자기 손으로 추대한 창왕을 죽이고 공양왕을 추대했네. 다음엔 또다시 공양왕마저 쫓아내지 아니했던가. 모두 다 속임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뿐인가. 포은 선생을 죽이고, 도은 선생을 죽이고, 모두 다 속임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사람 밑에서 어떻게 신하 노릇을 한단 말인가. 차라리 시골 구석에 묻혀 지내면서 자식들이나 바른 길로 가르치는 일이 옳겠네."

"자네 주장도 옳다고 생각하네. 강권하는 것은 아닐세. 잘 알아서 하게나."

선비들은 이같이 주고받으며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곳에서도 비슷한 공론이 일어나고, 저곳에서도 과거를 보아야 좋을지 아니 보는 것이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덧 과거 날짜는 당도했다. 태학생 중에 세 선비가 있었다. 임선미, 조의생, 맹호성이었다. 임선미는 순창 임씨로 고려조정에 찬성사 벼슬을 한 임중연의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학문하기를 좋아했다. 당시의 이름이 있는 성석린, 박상충과 사제지간이었다. 태학에서 경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조의생은 개성윤을 지낸 조인의 아들로 역시 태학사다. 그의 집이 송도 서편에 있는 때문에 호를 서곽이라 했다. 몸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았다. 일찍 포은과 야은한테 수학한 일이 있었다. 또 한사람인 맹호성은 성명만 전할 뿐 누구의 아들인 것이 사직에 밝혀져 있지 않다, 세 사람은 학문과 마음이 서로 통했다. 마침내 지기의 벗이 되었다. 임선미가 먼저 조의생에게 물었다.

"오늘 이성계가 과거를 뵌다 하는데 자네 어찌하려나?"

조의생은 대답했다.

"미친 사람이로군. 자네는 나를 조롱하는 수작인가, 선비는 의한 가지로 생명을 삼는 것일세. 이신벌군한 이성계가 벼슬 자리를 주려고 부르는 과거를 내가 본단 말인가. 실없는 소리 작작하게."

조의생은 얼굴빛까지 변하며 성을 벌컥 냈다. 임선미는 벙긋벙긋 웃으며 옆에 있는 맹호성한테 물었다.

"조군은 성정이 급해서 남의 뜻도 채 짐작하지 못하고 성을 내네마는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선비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허락하는 법일세. 자네는 고려왕조의 녹을 먹지 아니한 사람의 자손일세. 한 번 이씨를 섬겨서 제세안민을 해서 훌륭한 재상이 되어 이름을 청사에 빛내는 것이 좋지 않겠나."

맹호성은 조의생처럼 성을 내지 아니했다. 소리를 높여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평소에 자네를 제법 사람다운 사람으로 알았더니, 오늘 보니 약간 머리가 돈 듯하이, 자네는 조학사와 나더러 과거를 보아서 입신양명을 하라지 말고, 자네나 이성계를 도와서 충신이 되면 좋지 않겠나. 속된 선비들은 자기를 써주지 않는 임금은 버리고 자기를 써주지 않는 임금은 버리고 자기를 써주는 임금한테로 간 일도 있으니, 한 번 이성계가 여는 과장에 들어가서 장원급제가 되어 입신양명을 해보게나."

맹호성을 호통하게 웃으며 임선미를 야유했다. 두 사람의 마음을 떠본 임선미는 비로소 얼굴빛을 바로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자네들한테 한 말을 농담일세. 자네들한테 진심으로 상의할 일이 있어서 먼저 자네들의 의향을 떠본 것일세."

조학사와 맹학사도 비로소 화기 있는 얼굴로 임학사를 향했다. 맹학사가 임학사에게 물었다.

"어떤 일을 하려고 우리들의 마음을 떠보았나? , , ."

조의생도 묻는다.

"무슨 의논할 일이 있나? 말을 해보게."

임선미가 대답했다.

"오늘이 과거 날이 아닌가?"

"그러이, 이성계가 추동에서 과거를 뵌다는 날이 바로 오늘일세."

"우리 세 사람은 서로 마음이 통했으니 절대로 과거를 아니 볼 것일세. 그러나 모든 선비들의 마음이 우리와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일세. 우리 한 번 대의와 명분을 밝혀서 여러 선비들의 마음을 시험해보는 것이 어떠하겠나?"

"선비들의 마음을 어떤 방법으로 시험해본단 말인가?"

조의생의 물었다.

"나는 오늘 과장에 나가서 선비들을 향하여 불의를 응징하는 말을 하겠네. 그래서 선비들의 의향이 같다면 일제히 산속으로 들어가, 대의명분을 지켜서 천추만대에 선비들의 의기가 녹록지 않다는 것을 전해주려 하네."

"아주 과거를 깨뜨려버리잔 말인가?"

"그렇지!"

임선미의 까만 눈에는 영채가 돌았다. 임선미의 말을 듣자 조의생이 손뼉을 쳤다.

"쾌한 일일세. 선비들이 어떻다는 것을 궐자들에게 한 번 보여주기로 하세."

"산으로 들어가서 과거를 아니 보겠다고 한단 말이지. 선비들의 고고한 뜻은 뺏을 수 없다고, , , . 한 번 해볼 만한 일이다. 산으로 들어간다면 어느 산으로 간단 말인가?"

"만수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네."

"만수산에는 고려 태조의 능침이 있는 곳 아닌가. 아주 적당한 곳일세."

조의생이 찬성했다.

"자아, 그럼 우리 추동 과거터로 가서 선비들을 만나보기로 하세."

"오늘 과정에는 이성계가 친림한다 하니 경호가 대단할 것일세. 우리도 과거 보는 선비 모양을 차려야 과장에 들어갈 수 있으리가 생각하네."

임선미가 주의를 주었다.

"자네 말이 옳으이."

세 사람은 의관을 정제한 후에 괴나리봇짐을 어깨에 메고, 과지를 손에 들었다. 누가 보아도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모습이었다. 세상에는 임선미, 조의생, 맹호성 같은 정의파의 선비가 있는가 하면, 영달을 위해서는 누구를 섬기든 출신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새 나라 임금이 친히 나온다 하니 과거 보는 추동 앞은 번요하고 번쩍거렸다. 임금이 나오기 전에 먼저 시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조복을 입었다. 금관홍포에 상아홀을 잡은 살마, 사모품대에 푸른 웃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임금을 호위하기 위하여 밀화패영에 찬란한 군복을 입은 장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추동궁 넓은 뜰에는 차일이 푸른 하늘을 가려서 높이 쳐지고, 선비들이 글을 지을 장소에는 장막이 이곳저곳에 즐비하게 자리잡아 있었다. 추동궁 전각 앞에는 시관들이 자리 잡고 앉았고, 전각 안에는 새 나라 임금 이성계가 친림해 앉을 옥좌가 놓여 있었다. 이윽고 글제를 내걸 시각이 가까워 왔다. 새 임금 이성계의 장엄한 거둥 행차가 경덕궁에서부터 십리에 뻗쳐서 추동궁 과장으로 향했다. 앞서서 나가는 졸아치들은 누른 초림에 누른 옷을 입고 대취타에 명금을 올리며 나오고, 말 탄 장수들은 갑옷 투구에 군사를 거느려 길을 메워 나왔다. 다음에는 용대기가 바람에 펄럭거리며 은부금월이 햇빛에 찬란한 빛을 뿜었다. 새 임금이 나오는 것이다. 황금연이 높이 떴다. 연도 한 채가 아니요, 두 채였다. 진짜로 임금이 탄 연이 있고, 사람이 타지 아니한 부연이 나갔다. 어느 연에 임금이 타고 있는 것을 모르게 하는 의장의 관례다. 임금이 타고 나가는 연 뒤에는 만조백관들이 뒤를 따랐다. 수레와 말이 홍수처럼 밀렸다. 뒤에는 또다시 기치 장검을 든 군사들 수천명이 호위했다. 선비들에게 새로 된 제왕이 그지없는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새 나라에서는 제일급의 의장을 쓴 것이다. 거동 행차가 추동궁 과거터에 닿자, 새 임금을 호위하고 나간 별운검은 호령을 내렸다.

"어가가 듭신다. 대소 인원은 모두 부복해 맞이하라!"

대기하고 있던 시관과 선비들은 일제히 장막 밖으로 나가 절을 했다. 예가 끝난 후에 시관은 큰 글씨로 과거 글제를 써서 전각 앞에 달아놓았다. 선비들의 눈이 일제히 글제로 몰렸다.

"요지일월이요, 순지건곤 "

여덟 자의 글제였다. 시관 한 사람이 일어나서 글 뜻을 해석했다.

"여러 선비들은 지금 전각 앞에 내건 글제를 자세히 보고 흠뻑 재주를 다하여 글을 지어보라. 오늘 새 나라 왕상전하께서는 그대들의 시와 글을 취재해보시기 위하여 과거령을 내리신 것이다. 지금 성상전하의 덕은 마치 요임금과 순임금의 덕과 같으시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사양하시고, 순임금이 요임금의 왕위를 계승하시듯, 우리 왕상전하께서는 성은 다르시나, 요순과 같이 공양왕의 뒤를 이어 태평성대를 이룩하셨다. 여기 대하여 선비들은 힘껏 글을 지어보라."

시관이 '요지일월이요. 순지건곤'이란 글제를 한동안 신명 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때 과장 문밖에는 유건 쓰고 베도포 입은 선비 세 사람이 나타났다. 손에는 과지를 들고 천천히 과장 문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추동궁 문지기가 보니, 선비였다.

"과거를 보러 오셨소? 늦었구려. 어서 빨리 들어가 보시오. 지금 막 글제를 내걸었소."

재촉해 들여보냈다. 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천천히 과장 안으로 들어갔다. 새 임금이 친림해 있는 전각엔 위의가 삼엄했다. 세 사람은 유생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선비들은 임선미, 조의생, 맹호성들의 얼굴을 보자 일제히 일어났다. 세 사람은 모두 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의 제자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었다. 태학생으로서 학문과 인격이 높아서 모든 선비들의 존숭을 받는 영수급의 인물인 때문이다. 여러 선비들은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임학사 나오십니까."

"조학사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맹학사 나오셨습니까."

다투어 인사를 했다. 새 학사는 선비들을 향하여 미소를 지어 답례한 후에 눈을 들어 전각 앞에 걸어논 과거 글제를 바라보았다.

'요지이월이요, 순지건곤'이라 씌어 있었다.

세 학사는 기가 막혔다.

임학사가 껄걸 웃었다.

"콧구멍이 하나였더면 큰일 날 뻔했네. 저기 걸어논 글제를 보게."

"시기상조로군, 하하하."

조학사가 대답했다.

"몇백 년 지나간 후라면 모르겠네. 그러나, 망국대부들의 눈에 아직도 흙이 들어가지 아니했는데 이따위 글제를 내걸 수 있나. 뻔뻔스럽군."

조학사가 대거리를 했다. 모든 선비들은 세 학사에게 인사를 한 후에 제각기 자리에 않아서 글을 구상하고 있다가 돌연 세 학사의 글제를 비평하는 소리를 듣고 붓을 멈추고 있었다. 그들도 글하는 사람들이었다. 글제가 너무나 지나쳐서 비위에 맞지 아니했던 것이다. 임선미가 선비들을 향하여 발론을 했다.

"여러분, 선비들이 과거를 보는 것은 당연하오. 그러나 때와 글제를 가릴 줄 알아야 하오. 글을 배운 선비들을 존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의리와 행동이 고상항 때문이오, 그러기에 공자의 말씀에도 행유여력이어든 즉이학문이라 하셨소. 이신벌군을 한 이씨네가 어찌 '요지일월 순지건곤'의 글제를 내걸고 선비들에게 글을 지으라 한단 말요. 이것은 선비를 모독하는 행동이라 생각하오. 우리는 성현의 글을 배워서 실천하려는 사람들이오. 의 아닌 글은 도저히 지을 수가 없소."

임선미의 음성은 또랑또랑 과장 안에 들렸다. 임선미의 말이 떨어지자, 과장 안에 있던 한 선비가 큰소리로 외쳤다.

"옳은 말씀이올시다."

또 한 선비가 소리쳤다.

"의 아닌 글을 지을 수 없소. 붓대 꺾고 나갑시다. 임학사의 말씀이 옳소!"

임학사의 뒤를 이어 조학사가 말했다.

"과거를 보아서 벼슬을 하려 하는 것,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을 평안하게 한 번 자기의 포부를 펴보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요, 의 아닌 조정에서 구복을 채우고, 의 아닌 입신양명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포은 선생이나 최영 장군과 같이 몸을 바쳐서 대의에 죽지는 못했을망정, 의 아닌 사람이 벼슬을 주기 위하여 과거를 뵈는 이 마당에 앉아서 녹록하게 글을 지을 수는 없소. 글제를 보시오. 얼마나 우리를 우롱했소?" 우리는 이 욕된 과거를 차마 볼 수 없소. 과장에서 물러납시다."

조의생의 음성은 쨍쨍하게 퍼졌다.

"옳소이다!"

하는 소리가 과장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해사하고, 눈에 정기가 초롱초롱한 선비 한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임학사가 다시 소리친다.

"몸을 욕되게 해서 벼슬 자리에 나가는 것보다, 차라리 행적을 감추어 한평생을 지내는 것이 옳은 사람의 도리라 생각하오. 우리는 욕된 세상을 피하여 만수산 아래 고려 태조의 능침이 있는 산속으로 들어가 바른 도와 의를 지킬 작정이오, 뜻이 있는 분들은 우리 세 사람과 행동을 같이 합시다."

"좋습니다. 세 분 학사님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뒤를 따르겠습니다."

아까 과장에서 먼저 일어섰던 해사하게 생긴 선비가 말했다. 한 선비가 또 소리치며 일어났다.

"자아 여러분,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 선비의 절개를 지킵시다. 우리는 모두 다 붓을 꺾고 세 분 선생을 따라서 만수산으로 들어갑시다!"

선비는 말을 마치자, 벌떡 일어나 도포 소매를 흔들었다. 모든 선비들은 이 모양을 보자 모두 다 흥분이 되었다.

"옳소!"

소리를 치며 일제히 붓을 꺾었다. 붓대 꺾는 소리가 '우지직 뚝딱' 일어났다. 이곳에서도 ''하는 소리가 나고 저곳에서도 붓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임선미, 조의생, 맹호성 세 사람은 과지를 찢어버리고 앞을 서서 나갔다. 모든 선비들도 일제히 과지를 찢어버리고 앞을 서서 나갔다. 과장 안에는 글씨 쓰지 아니한 하얀 과지 쪽이 눈 내리듯 펄펄 날렸다. 멀리 전각 앞에서 천막을 치고, 책상을 배설한 후에. 선비들이 글지어 바치기를 기다리고 있던 시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일인가. 선비들이 글을 짓지 아니하고 흩어지니 이상한 일이로군."

금관 조복을 입은 대제학이 물었다.

"글쎄올시다. 과거 보는 시지를 모두 다 찢어버리고 일어납니다."

사모품대로 차린 부제학이 대답했다.

"빨리 알아보도록 하오."

대제학은 대사성한테 말했다.

"사성들은 무엇을 하고 있소. 선비들이 어찌해서 시지를 찢고 나가는 가를 좀 알아보오."

사성이 소리친다.

"저거 보십쇼. 붓대를 꺾고 과지를 찢습니다. 찢어지는 과지가 눈 날리듯 합니다."

"어서 가서 동정을 살피시오."

부제학은 사성을 꾸짖는다. 사성이 뛰어나갔다. 선비들은 과지를 찢어 던지고 물밀 듯 과장 밖으로 몰려나갔다.

"웬일들이오?"

사성이 숨이 턱에 차서 물었으나, 선비들은 코대답도 아니하고 쏟아져 나갔다. 사성은 수복을 불렀다.

"선비들이 어찌한 까닭으로 과거를 보지 아니하고 물러가나 좀 알아보게."

수복이가 선비들의 틈으로 뛰어들어갔다. 대제학, 부재학, 대사성들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물밀 듯 풀려나가는 선비들 편으로 향해 갔다. 수복이가 급히 뛰어와 고한다.

"큰일 났습니다. 선비들이 과거를 보지 않는다 하고 일제히 풀려나갑니다."

"무슨 까닭에 과거를 아니 본다고 하더냐?"

대제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복이한테 물었다.

"글세, 물어보아도 대답을 아니합니다. 글제가 마땅치 아니해서 흩어지는가 봅니다."

"이놈아, 어서 다시 쫓아가서 선비들을 붙잡고 물어보아라."

부제학이 소리를 질러 수복이를 꾸짖었다. 수복이는 무정지책으로 욕을 먹는 것이 분했다.

"대감들께서 나가서 물어보아도 대답을 할 둥 말 둥 한테, 소인 따위가 물어보니 대답을 할 리가 있습니까. 열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아도 번번이 대답을 아니합니다. 소인 수복이 따위는 그들이 코방귀로 압니다."

"이거, 큰일났구나. 지금 상감께서 친림해 계신데 하문하시면 무어라 대답하느냐? 이거 큰일났구나. 여보 부제학, 오늘 우리들의 목은 달아나게 되었소. 어찌하면 좋소. 여보, 부제학 당신이 좀 친히 나가서 알아보시오. 그리고 흩어지는 선비들을 못 가도록 일러주오."

대제학은 부들부들 떨면서 부제학에게 말했다. 부제학은 겁이 났다. 나가서 선비들에게 물어보기가 싫었다. 선비들한테 욕을 당하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볼멘소리로 대제학한테 푸념했다.

"나가보다니 어떻게 나가봅니까. 공연히 매맞아 죽으면 어찌합니까. 글제가 마땅치 아니해서 선비들이 흥분해 나가는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다른 글제를 내자고 반대를 하지 아니했습니까. 대제학께서 우겨서 글제를 내놓고, 이 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쩌자고 이 판극에 요지일월이요, 순지건곤'이란 글제를 내셨습니까. 대제학께서 우겨서 글제를 내셨으니 대제학께서 나가서 무마하시오."

부제학은 대제학한테 팔밀이를 했다. 대제학은 불끈 성을 냈다.

"허허, 원 별꼴을 다 보겠군, 알아보라니까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내 핑계만 대니 딱한 일이로군, 그래, 어느 놈이 글제를 잘못 냈다고 합디까? 우리 임금께서 새로 등극을 하셨는데 그래, 요지일월이나 순지건곤이 아니란 말요? 포학한 왕씨들을 제거시키고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해냈으니, 어찌 요지일월과 순지건곤이 아니겠소. 부제학은 망언을 했소이다. 그래, 부제학은 우리 임금의 정치가 요순 때만 못하다고 생각하오?"

대제학은 목청을 높여 부제학을 몰아댔다. 부제학은 겁이 났다. 역적으로 몰리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어디 내가 요지일월이나 순지건곤이 아니라고 말씀을 했습니까. 공연히 생사람을 잡지 마시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선비들이 오해를 한단 말씀입니다."

부제학이 풀이 죽어서 변명하는 것을 보자, 대제학은 더욱 의기가 양양했다.

"선비의 뜻을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어떻게 글제를 잘못 냈다고 단정하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보고 친히 가서 선비들의 뜻을 알아보라고 한 것이 아니겠소."

대제학과 부제학의 다툼은 좀처럼 끝이 나지 아니했다.

옆에 있던 대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무마한다.

"두 분 대감, 고정하시오. 하관이 나가서 알아보고 돌아오겠소이다."

대사성은 말을 마치자 사성들을 불렀다.

"사성들은 나하고 과장으로 나가서 선비들의 뜻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사성 두어 사람이 대사성의 뒤를 따라 흩어지는 선비들의 앞으로 나갔다.

금관조복으로 차린 대사성이 선비 한 사람을 향하여 물었다.

"여보 유생들, 웬일들이오, 왜 과거를 보다가 흩어지오?"

대사성의 금관조복이 햇빛에 찬란하게 빛을 뿜었다. 선비들은 금관조복도 코방귀같이 보였다.

"과거가 보기 싫어서 그대로 나가오!"

차갑게 대답했다. 대사성의 얼굴빛을 환하게 하여 한 선비에게 물었다.

"왜 과거가 보기 싫단 말요. 과거를 보러 왔다가 그대로 나가는 법이 어디 있소?"

대사성의 묻는 말을 듣자 선비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글을 지으러 왔다가 아니 짓기도 예사고, 실력이 없어서 못 짓기도 예사가 아니겠소. 선비가 글을 짓고 아니 짓는 것도 자유가 없단 말요. 글을 짓기 싫어서 아니 짓고 돌아가는 것이니 더 묻지 마오."

선비는 소매를 떨치며 나갔다. 대사성과 사성들은 또다시 다른 선비를 향하여 물었다. 선비들의 대답은 매일반이었다. 대상성과 사성들은 선비들의 차가운 대답과 결연한 행동으로 보아 새 나라에 과거를 보아서 벼슬할 생각이 없는 것을 짐작했다. 소매를 뿌리치며 나가는 선비들을 만류할 도리가 없었다. 멍하니 흩어지는 선비들을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이 시관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대제학과 부제학에게 복명을 했다.

"나가는 선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과거를 보러 왔다가 그대로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글을 지으러 왔다가 아니 짓기도 예사고 못 짓는 것도 예사인데 무엇을 그리 이상스럽게 생각하느냐고, 도리어 핀잔을 주면서 모두 다 소매를 뿌리치고 나갑니다."

대제학은 어찌할지를 몰랐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때 전각 안에는 새 임금 태조가 찬란한 황금 면류관을 멀리에 쓰고 붉은 곤룡포를 몸에 입은 후에 얼굴에 가득 기쁜 빛을 띠고 옥좌에 단정히 앉아서 옥음을 낭랑하게 측근 신하들에게 내렸다.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한 선비는 개국 벽두에 뽑힌 사람이니 불착탁용해서 당장에 한림학사를 제수하고 팔도 암행어사를 시키라."

"성은이 융숭하십니다. 삼가 성지를 받들어 거행하와 새 나라에서 인재를 발탁해 쓰는 모범을 뵈도록 하겠습니다."

정승 조준이 대답했다. 새 나라 임금은 만족한 얼굴로 멀리 과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제가 내걸렸다. 얼마 아니되어 과장 선비들이 물결 헤지듯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새 나라 임금이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선비들이 흩어지니 웬일이냐? 벌써 글을 다 지었단 말이냐? 과연 나라에 제일 가는 수재들만 모였구나!"

측근 신하인 조준, 정도전, 이방원들이 바라보니 과연 전하의 말씀과 같았다. 선비들이 벌써 헤어지는 것이었다. 조준과 정도전도 어찌된 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임금의 말씀에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대제학이 황황히 전각으로 올라 어전에 엎드려 아뢴다.

"불초하온 신 대제학을 파면해주옵소서."

돌연 대제학의 아뢰는 말을 듣자, 임금 이하 시신들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태조는 장중한 음성으로 대제학에게 물었다.

"대제학은 별안간 무슨 말을 하는가. 파면이란 무슨 당치 않은 소린가?"

대제학은 황공했다. 사실대로 아뢰었다.

"선비들이 과거를 보지 아니하고 그대로 흩어져 갑니다. 모두 다 신의 부덕한 소치올시다. 신의 벼슬을 파면시켜 주옵소서."

"선비들이 과거를 보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아간다?"

태조는 깜짝 놀랐다. 옆에 모시고 있던 조준과 정안군과 정도전도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찌 된 까닭이요?"

정승 조준이 대제학한테 물었다.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대사성과 사성들을 시켜서 흩어지는 선비들을 만류하면서 까닭을 물었으나 그저 과거출제에 응시하기가 싫어서 간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정안군은 화가 불끈 났다.

"거 무슨 소리요, 먼저는 무슨 마음으로 과거를 보러 왔다가 무슨 마음으로 글을 짓지 아니하고 간단 말요. 그럼 왜 과거를 보러 왔더란 말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오. 어떤 자가 선동을 해서 과거를 못 보도록 만든 것이 아니겠소?"

정안군은 화경같이 번쩍이는 눈으로 대제학을 쏘아보았다. 대제학은 벌벌 떨며 대답한다.

"글세,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좌우간 저의 대제학 벼슬은 면해주시옵소서."

"과거 글제를 어떻게 냈단 말이냐?"

태조가 장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제학이 아뢴다.

"요지일월이요, 순지건곤이라 했습니다."

대제학의 아뢰는 말을 듣자 태조의 얼굴빛이 변했다.

"지나치구나, 과잉충성이로구나!"

태조는 말씀을 내리자 입을 딱 다물었다. 정안군이 아뢴다.

"과거를 보지 말자고 선동한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자를 잡아다가 엄하게 치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하오이다. 정안군의 말씀과 같이 과거를 보지 말자고 선동한 자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엄중 처벌해야 하겠습니다."

새 나라 임금인 태조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비록 선동자가 있다 하나 글제가 너무나 지나쳤다. 내 덕이 감히 요순의 덕을 따르지 못할 뿐 아니라 이제 겨우 나라를 창업하려는 이시기에 이런 글제를 낸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비록 과거를 보지 말자고 선동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불문에 부치라. 그리고 대제학은 앞으로 이러한 일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글제를 내게 하라."

태조는 신하들을 타이른 후에 무료한 쓴웃음을 얼굴에 띠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궐로 돌아갔다. 태조가 환궁한 후에 정안군, 조준 정도전은 공론이 분분했다.

"창피해서 어찌하오, 과거를 보여서 선비를 뽑으려 하다가 그대로 과장을 파해버렸으니 국가의 위신이 어찌 되겠소. 국민들의 웃음거리를 면치 못할 것이오. 다시 전하께 아뢰고 선동한 자를 잡아다가 목을 벱시다."

정안군은 분함을 참지 못했다. 큰소리로 외친다. 정도전이 대답했다.

"선비들의 주모자를 잡아서 죄를 다스린다면 세상이 더욱 소란해서 백성들한테 좋지 못한 영향 만 미치게 할 것입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더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이다."

개국 공신 정도전은 이제 완전히 태조의편을 들었다. 정승 조준도 무사주의를 주장했다.

"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말고 불문에 부치는 것이 좋겠소이다."

정안군은 외손뼉에 울기 어려웠다. 소매를 떨쳐 집으로 돌아갔다. 대제학은 과장에서 나가는 선비들을 잡지 아니하고 내버려두는 방침을 정했다. 한편 과장에서 물러나 선비들은 추동궁 동편 언덕으로 올랐다. 추동은 속명으로 가랫골이다. 고개를 넘어가면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이 있는 만수산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선비들은 과장에서 나온 후에 한 사람 두 사람씩 걸어서 가랫골 고개 위 동편 언덕으로 모여들었다. 선비들의 수는 칠십여 명이나 되었다. 태학사 임선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우리는 추하고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학문을 전심으로 연구하면서 우리들 후배에게 정의의 행동을 보여줄 때가 왔소이다. 나는 만수산 왕건 태조 능 앞에 공부하는 도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칠 작정이오. 나와 행동을 같이할 분은 손을 들어보시오."

조의생, 맹호성을 위시하여 모든 선비들은 일제히 손을 들었다. 한사람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선비들의 수를 세어보니 모두 칠십이 명이었다. 임학사는 만족한 표정을 얼굴에 띠었다. 다시 발론을 했다.

", 그럼 우리들은 확실히 고려의 선비고, 새 나라의 선비는 아닙니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이 선비의 행세를 할 까닭이 없소. 갓을 벗어서 이곳에 걸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하오?"

"그 말씀 좋소. 우리들은 세상을 등진 포인입니다. 갓이 필요치 아니하오. 임학사의 말씀대로 갓을 이곳 소나무에 걸어놓고 갑시다."

"그 말씀 좋은 말씀요. 우리들에게 과거를 보라고 강요한 새 나라 대제학더러 보라고 일흔두 개의 갓을 벗어서 걸어놓고 간다면 그들의 등에 찬 땀이 흐르리다. 하하하."

"좋소! 선비들의 의기가 이같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조의생이 일어나 소리친다.

"자아, 그럼 갓을 일제히 벗읍시다."

칠십여 명이나 되는 선비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갓은 벗어서, 이곳저곳에 서 있는 소나무 가지에 걸었다. 가랫골 동산 솔밭에는 일흔두 개의 검은 갓이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빛을 뿜었다. 선비들은 모두 다 상투 바람으로 모여 앉아서 서로들 호협한 웃음을 웃었다. 맹호성이 일어나 발론을 한다.

"우리들은 죄인이오!"

큰 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모두 다 눈이 둥그레졌다. 맹호성은 말을 계속했다.

"임금을 구하지 못했으니 임금의 죄인이고, 나라를 구하지 못했으니 나라의 죄인이고, 의 아닌 자를 멸하지 못했으니 정의의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쓰는 패랭이를 쓰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하오?"

"맹학사, 좋은 의견을 말씀하셨소. 우리 그럼 패랭이를 구해서 쓰고 가기로 합시다."

선비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저자로 내려가서 패랭이를 제각기 사서 머리에 쓰고 만수산으로 들어갔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다 선비들의 의기에 탄복했다.

"갸륵한 일이다!"

"고개 솔밭에 일흔 두 개의 갓이 걸렸구나. 아름다운 행동이다. 이 고개 이름을 쾌관현이라고 해야 하겠다."

백성들은 이 같이 선비들의 행동을 예찬했다. 임선미, 조의생, 맹호성 이하 칠십여 인은 만수산으로 들어가고 싸리를 베어 동구밖에 울타리를 쳤다. 임선미는 여러 선비들을 모아놓고 의논했다.

"우리는 이제 추하고 혼탁한 세상과 연을 끊었소. 우리의 모여 있는 도장의 이름을 지어야 하겠소, 무어라 하는 것이 좋을 지 여러분 의견을 말씀해보시오."

조의생이 대답했다.

"우리는 의 아닌 세상과 연을 끊었으니, '두문동'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맹호성 이하 모든 선비들이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 좋은 이름요, 우리의 깨끗한 이 도장 안에는 의 아닌 추잡한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없는 곳이오. 문을 막고 산다고 '두문동'이라 이름하는 것이 좋겠소."

선비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임선미는 젊은 선비를 시켜서 송판을 만들고, 친히 붓을 잡아 큰 글씨로 '두문동'이라 써서 싸리문 위에 현판을 달았다. 임선미는 두문동 현판을 달아논 후에 다시 문 어귀에 큼직한 채찍한 개를 걸어놓고 말했다.

"만약에 우리 총중에 마음이 변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성계 밑에 과거를 보러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채찍을 떼어 가지고 나가시오. 이 채찍으로 우리는 두문동의 규약을 정합시다."

맹호성이 묻는다.

"지조를 변한 대신으로 한평생 자기 양심에 채찍질을 하란 말씀입니까?"

", 그러하오, 맹학사의 해석이 옳소."

임선미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모든 선비들이 또다시 찬성했다. 선비들은 우선 거처할 곳을 마련해야 했다. 만수산 아래 양지바른 평평한 곳을 가려서 터를 잡고,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다. 낮에는 화전을 이룩하여 밭을 갈아 농사짓고 밤에는 글을 토론하며 시를 지었다. 두문동에는 한 사람의 배신자도 없었다. 다시 과거를 보러 새 나라로 사람이 없었다. 송도 안에는 두문동 칠십여 인의 소문이 짜아하게 퍼졌다. 한두 사람도 아니요, 칠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맘 한뜻으로 단결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불의에 항거하는 선비들의 의기를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절개를 변치 않은 고려의 구신들에게 유화정책을 써서 백방으로 신하 노릇하기를 권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새 나라에서는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기 위하여 과거령을 내렸다. 그러나, 선비마저 과거를 보지 아니하고 흩어져버리니 새 나라 임금 이성계는 무료하고 답답했다. 어떻게 하면 천하의 인심을 얻을 것인가 하고 대궐로 들어가, 시름 속에 잠겨 있었다. 한편 새 나라 정부에서는 새 나라의 과거를 거부하고 과장에서 흩어진 선비들의 뒤를 밟아서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라는 엄명을 내렸다. 정보를 맡은 관리들은 장사하는 등짐장수로 변장을 하고 선비들의 뒤를 밟았다. 만수산으로 들어가서 두문동 칠십여 명의 행동을 일일이 살펴본 후에 조정에 고했다.

"과거를 보지 아니하고 떼를 지어 나간 선비들의 수는 칠십여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그대로 흩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모여서 집단적인 저항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집단적인 저항을 한다는 말을 듣자 정승 조준과 정안군 방원은 깜짝 놀랐다.

"어떠한 집단적인 행동을 취했느냐?"

"선비들은 과장에서 몰려나온 후에 흩어지지 아니하고 가랫골 온천 언덕 솔밭에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회의를 한 후에 이제는 선비들이 아니니 갓을 쓸 필요가 없다 하면서 일제히 갓을 벗어서 낙락장송 소나무 가지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발론하기를 '우리는 죄인이다. 나라를 구하지 못했으니 죄인이요. 임금을 구하지 못했으니 죄인이용. 불의를 멸하지 못했으니 죄인이다. 죄인이 어찌 갓을 쓸 수 있는가. 죄인이 쓰는 패랭이를 쓰고 세상을 등져서 만수산으로 들어가자' 했습니다."

정안군과 조준은 더한층 놀랐다.

"그래, 다음에 어찌 되었느냐?"

"선비들은 일제히 찬성한 후에 제각기 저자로 내려가서 패랭이를 한 개씩 사서 머리에 쓰고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이 있는 만수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자, 조준과 정안군은 마음이 더욱 불안했다.

"그래, 그 후에는 어떠한 행동을 취했느냐?"

"기막힙니다."

"무엇이 기가 막히단 말이냐. 답답하다. 어서 말을 해라."

정안군은 화가 났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고려 태조의 왕릉이 있는 깊은 골짜기 안에는 넓고 넓은 잔디밭이 있습니다. 선비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싸리를 꺾어 울을 만들었습니다. 문 앞에는 '두문동'이라고 써서 커다란 현판을 달았습니다. 문 옆에는 채찍을 걸어놓고, 여러 선비들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마음이 변해서, 이씨네 조정에 벼슬을 하고 싶어서 두문동을 떠나는 사람은 이 채찍을 들고 가서 한평생 양심에 채찍질을 하라 했습니다."

조준은 눈을 감아 생각 속에 빠지고, 정안군은 다음 일을 재촉해 묻는다.

"그래서?"

"이쯤 되니 한 사람 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화전을 일구어 밭을 갈았습니다. 그들은 장구한 계획으로 별유천지의 세상을 꾸미고 있습니다."

별유천지의 딴 세상을 선비들이 이룩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정안군은 더한층 불안감을 느꼈다. 정승 조준을 향하여 말했다.

"이 일을 그대로 덮어둘 수는 없소. 빨리 빈청회의를 열어야 하겠소이다."

정승 조준은 정보를 맡은 관원을 돌려보낸 후에 곧 빈청회의를 소집했다. 개국 공신의 원로격인 배극렴을 위시하여 정당문학 정도전과 고거 글제를 냈던 대제학이며 시관이었던 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들이 모였다. 선비들이 갓을 벗어 가랫골 언덕에 걸고 만수산 왕건 태조의 능 앞으로 들어가 두문동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다 깜짝 놀랐다.

정당문학 정도전이 발론을 했다.

"이 일은 중대한 일입니다. 우리들의 의사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위에 아뢰어서 처결하는 것이 좋겠소."

여러 사람은 모두 다 찬성했다. 대신들은 승지를 통해서 태조께 뵙기를 청했다. 태조는 곧 대신들을 인견했다.

"무슨 일이 있는가?"

정승 조준이 아뢰었다.

"범연치 아니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태조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과거를 보지 아니하고 흩어진 선비들이 그대로 헤어져서 돌아가지 아니하고 집단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랫골 동산으로 올라서 소나무 가지에 갓을 벗어 걸어놓고, 고려 왕실을 구하지 못했으니 죄인이라 자칭하면서 패랭이들을 쓰고 만수산 고려 태조의 능으로 들어가서 두문동을 꾸미고 별유천지를 이룩하고 있다 합니다."

"별유천지를 이룩하고 있다?"

태조는 더욱 놀랐다.

", 그러합니다."

정안군이 대답했다.

"두문동을 꾸민 선비들의 수는 몇 사람이나 된다 하는가?"

"칠십이 명이나 된다 합니다."

이번엔 조준이 대답했다.

"일흔두 명이나 된단 말이냐?'

태조는 더욱 놀랐다.

", 그러하오이다."

정도전이 대답했다.

"아하, 내가 덕이 없구나!"

태조는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눈을 감고 깊은 생각 속에 빠졌다. 이윽고 태조는 눈을 뜨고 모든 신하들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렸다.

"지난번에 내가 과거령을 내려서 선비들을 뽑으려 한 것은 한편으로는 나라의 인재를 구하고, 한편으로는 민심을 크게 융화시켜서 구족해서 선비들이 응하지 아니하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당시에 몇몇 신하들은 반드시 선동한 자가 있을 터이니, 이자들을 잡아서 응징하라 하였다. 그때 내가 불응한 것은 너그럽게 일을 처결하여 그들로 하여금 반성할 기회를 주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집단행동을 취해서 두문동을 만들어놓고 나라에 무언의 반항을 한다는 일은 단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불바다

정승 배극렴 이하 모든 신하들은 고개를 숙여 임금 태조의 말씀을 들었다. 태조는 다시 말을 계속 내린다.

"나라의 선비는 국민을 지도하는 사표들이다. 한 사람도 아니고, 칠십여 명이나 되는 정수분자들이 한 곳에 단결하여, 조정을 멸시한다는 일은, 나라의 교화와 정치에 미치는 영항이 클 것이다. 정승 이하 여러 대신들은 깊이 생각하여, 유감이 없도록 잘 처리하라."

임금 이성계는 엄숙한 얼굴로 분부를 내렸다. 정승 조준이 아뢴다.

"성상의 하교는 지당하십니다. 선비는 국민의 사상을 좌우하는 정수분자올시다. 이들의 행동은 국민의 교화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큽니다. 한 사람의 행동도 정치와 국민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는데, 황차 칠십여 인의 선비들이 일치단결되어 반항하는 행동을 취한다면 국민사상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합니다. 이들의 행동을 억제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습니다."

옆에 시립해 있는 정안군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뢴다.

"전하께옵서 지난번 과거 때 주모자를 찾지 말라는 너그러운 분부를 내리시와, 그대로 방임해 두었습니다마는, 이번에는 단호한 처치를 취하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하늘에는 두 해가 없소, 나라에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조선 천지가 모두 다 전하의 땅이요 억조창생이 모두 다 전하의 백성이올시다. 저자들이 발을 딛고 있는 두문동도 역시 전하의 땅이올시다. 두문동에 또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저자들의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이자들은 곧 반도올시다. 군사를 풀어서 모조리 반도들을 무찔러버려서, 다시는 딴마음을 먹는 선비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정안군은 선비들을 모조리 처치해버리자고 주장했다. 태조는 눈을 감고 정안군의 아뢰는 말을 듣고 있다가 어글어글한 눈을 떠서 정승 조준에게 하문했다.

"군사를 풀어서 선비들을 무력으로 무찔러 죽이는 것보다 칠십여 명의 선비들이 뿔뿔이 헤어져 달아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어떠한 방법으로 칠십여 명의 선비들을 흩어지게 할지, 소신 머리가 아둔하와 얼른 생각이 나지 아니합니다."

"두문동에 불을 질러 선비들을 쫓아버리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선비들을 흩어지게 하자는 것이다. 병법에 있는 화공법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시끄럽지 아니해서 좋을 것이다."

정안군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단번에 군사를 풀어서 무찔려버리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왕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모든 대신들은 일제히 임금의 영을 받들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조준 이하 대신들은 어전에서 물러났다. 정부에서는 곧 행동을 개시했다. 삼군부에 영을 내렸다.

"삼군부 군사들을 동원하라."

삼군부에서는 천여 명의 군사들이 동원되었다. 정부에서는 삼군부 지휘사에게 영을 내렸다.

"과거를 거부한 선비들 칠십여 명이 만수산 속에 두문동이란 것을 이룩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새 나라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반항하고 있다 한다. 두문동에 불을 질러서 선비들이 흩어져 달아나게 하라."

삼군부 영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만수산으로 향했다. 만수산에는 푸른 나무가 길길이 윤기를 뿜어 우거져 있었다. 영관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먼저 솔가지를 베어 홰를 묶어라. 한 사람에 홰 한 자루씩 묶어야 한다."

천여 명 군사들은 일제히 솔가지를 베어 홰를 묶었다. 홰는 삽시간에 천여 자루가 되었다. 영관은 다시 분부를 내렸다.

"삼군부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쇠기름 통이 여러 개 있다. 홰를 쇠기름 통에 담갔다가 꺼내라."

군사들은 명령대로 쇠기름 통에 홰를 담갔다. 홰마다 흠뻑 기름을 먹였다. 영관은 다시 영을 내렸다.

"홰에다 제각기 불을 달여라!"

군사들은 일제히 홰에 불을 붙였다. 기름먹은 솔가지는 이글이글 끓으며 불이 붙었다. 천여 개 횃불은 휘황찬란 불을 뿜어 기운차게 타올랐다. 영관은 또다시 영을 내렸다.

"두문동 동구 앞에 있는 나뭇가지마다 모조리 불을 질러라!"

군사들은 횃불을 들어 두문동 어귀에 있는 나뭇가지마다 불을 질렀다. 기름 먹은 횃불은 일제히 동구 앞에 서 있는 수천수만 개의 나뭇가지로 옮겨붙었다. 동구에는 연기가 자욱하면서 화광이 충천했다. 맹렬한 불길은 바람을 받아 두문동을 휩싸 안았다. 이때, 두문동 안에서 밭을 갈고 글을 읽고 있던 선비들은 화광이 충천하면서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자 깜짝 놀랐다.

"불이 났다!"

"웬 불이냐?"

"산호가 났나보다!"

선비들은 작대기를 손에 들고 산불을 끄려고 붙은 동구 앞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산호가 아니었다. 군사들 천여 명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홰를 들고 솔가지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두문동 동구 앞은 불바다를 이루었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천 그루의 나무가 타고, 만 그루의 나무가 불길에 휩쓸렸다. 바람마저 강하게 불었다. 불길은 점점 더 맹렬하게 퍼졌다. 만수산 일대는 온통 불바다로 화할 것만 같았다. 산불이 난 줄 알고 동구 밖으로 작대기를 들고 나갔던 선비들은 크게 놀랐다. 숨이 턱에 차서 두문동 본곳으로 뛰어 들어왔다.

"산에서 절로 난 산화가 아니라 군사들 천여 명이 쏟아져 나와서 나무에 불을 지르고 있소!"

"군사들이 나무에 불을 지르다니?"

두문동 안에 있던 선비들을 깜짝 놀랐다.

"불을 지르다니 무슨 소린가. 우리들을 함빡 태워 죽일 작정인가?"

"나쁜 놈들, 사람을 생화장을 시키려 하느냐!"

선비들은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고함치며 뛰어나왔다. 멀리 동구 밖에서는 불길이 더한층 맹렬하게 퍼졌다. 천 년 묵은 나무가 화염 속에 큰 음향을 내며 이곳저곳에서 탕탕 쓰러졌다. 독하고 매운 연기가 하늘과 땅에 가득했다. 칠십이 명의 선비들은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일제히 몽둥이와 짝지를 들고나섰다. 퍼져 들어오는 불붙는 잔디와 나무를 두드려서 불을 끄려 했다. 그러나 폼새는 더욱 사납고 불길은 더한층 맹렬했다. 두드려 끌수록 더욱 치열하게 퍼졌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길이 없게 되었다. 불길은 널름거리며 마침내 칠십여 명이 살고 있는 두문동 집들을 삼켜버리기 시작했다. 묵묵히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던 두문동의 지도자 임선미는 모든 선비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이씨 왕조는 우리들의 집단생활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불을 지른 것이다. 야비한 수단이다. 분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은 귀중한 생명을 불꾸러미 속에 던져 죽어버릴 까닭은 없다. 집으로 돌아가 처자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빨리 몸을 피하여 사지에서 벗어나시오."

선비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임선미한테 묻는다.

"임학사는 어찌하실 작정이오?"

임선미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더 깊은 산속으로 불길을 피하여 들어가겠소. 불길이 아무리 사납다 하나, 고려 천지를 다 삼켜버리지는 못할 것이오. 악의 화염이 아무리 맹렬하다 하나 고국강산을 다 초토로 화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임선미는 결연히 굳은 마음을 표시했다. 임선미의 대답을 듣자, 도 한 사람의 선비가 조의생한테 묻는다.

"조선생은 어찌하시겠소?"

"나도 임학사의 뜻과 같소. 저들이 불을 질렀다 해서 마음이 꺾여질 내가 아니오. 우리들을 죽이기 위하여 삼천리강산을 다 태워버리지는 못할 것이오. 백두산 천지까지라도 가겠소!"

조의생의 기걸찬 대답을 듣자, 또 한 사람의 선비가 맹호성에게 물었다.

"맹학사는 어찌하시렵니까?"

맹호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임학사와 조학사와 행동을 함께 하겠소. 사람이 뜻을 한 번 정한 이상 죽는 것이 무서워서 뜻을 바꿀 수가 있겠소. 우리가 두문동으로 들어올 때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들어왔던 것이오. 까닭 없이 불에 타죽을 것을 없지만, 몸을 피해서 나의 굳은 지조는 변치 않고 지킬 작정이오."

세 사람의 지도자들은 불바다 속에서 마음을 고치지 아니할 것을 결연히 표시했다 벌겋게 타들어오는 화광은 세 사람 지도자의 얼굴에 비쳤다. 준수한 세 학사의 얼굴은 불빛에 반사되어 더한층 거룩하게 보였다. 선비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들도 일제히 세 분 학사와 행동을 같이하겠소! 우리라고 처음 맹세했던 굳은 뜻을 저버릴 수가 있소. 세 분을 따라가겠소!"

두문동에 자리를 잡았던 일흔두 명 선비들은 패랭이를 쓰고 짝지를 손에 든 후에 괴나리봇짐을 어깨에 메고 불길을 피하여 산마루로 기어올랐다.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칠십여 인의 두문동 선비들이 만수산 최고봉에 올라 굽어보니 전에 있던 두문동은 한 줌 재가되고 주위는 더한층 불이 퍼져서 불바다로 화했다. 타오르는 불길은 백 리에 퍼져서 이제는 산화가 되어버렸다. 산불은 닷새를 꺼지지 아니했다.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불을 지른 영관은 선비들의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두문동 칠십이인이 살고 있던 초가집들이 모조리 불더미 속에 들어서 앙상하게 재로 변했건만 칠십여 명 선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아니했다. 군사들에게 물었다.

"두문동 초옥들이 다 타버렸는데 뛰어나오는 선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아니하니 어찌 된 셈이냐? 독한 자들이다. 모두 다 타죽은 것이 아니냐?"

"글쎄올시다. 행적이 없습니다."

군사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영관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불이 꺼진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잿더미 속에서 선비들의 시체라도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아무리 잿더미 속을 헤쳐보았으나 칠십여 명이나 된다는 두문동 선비의 시체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영관은 비로소 두문동 칠십이인이 더 깊은 산속으로 몸을 피해 들어간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닷새가 지났다. 백 리에 뻗쳐서 타오르던 불길은 바위와 산벼랑에 막혀서 저절로 불이 꺼졌다. 영관은 불이 꺼진 후에 군사를 거느리고 만수산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만수산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는 커다란 굴이 있고, 굴 앞에는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있었다. 군사 한 사람이 소리쳤다.

"여기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있습니다!"

영관은 군사의 소리치는 음성을 듣고 급히 굴 앞에 당도해 보았다. 과연 사람들이 드나든 발자취가 있었다. 영관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횃불을 들고 들어가 비추어보아라. 만약 굴속에 두문동에서 나온 칠십여 명 선비들이 있거든 모조리 끌고 나오너라."

군사들은 홰에 불을 붙여 들고 한 명, 두 명 굴속으로 줄을 지어 기어 들어갔다. 이때, 두문동 칠십여 인은 만수산 꼭대기에 불을 피해 올랐다가 산마루에 커다란 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늘이 준 좋은 피신처라 생각했다. 모두 다 굴속으로 횃불을 들고 들어오는 군사들을 보자, 모두가 놀랐다. 자기들을 해치러 굴속까지 쫓아드는 것을 보자, 격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놈들, 어디로 들어오느냐!"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기어들어 오는 군사들에게 돌을 던졌다. 횃불을 들고 한 사람 두 사람 기어 들어오던 군사들은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깨어졌다. '에쿠' 소리를 치면서 굴 밖으로 쫓겨 달아났다. 군사들은 들어오는 족족 '에쿠' 소리를 지르며 머리가 터지면서 굴 밖으로 기어 달아났다. 칠십여 명의 선비들을 기운이 와짝 솟구쳤다. 제각기 손에 돌을 들고 쫓겨나가는 군사들의 뒤를 따라 굴 밖으로 쫓아나갔다. 선비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깨져 달아나는 군사들을 향하여 돌을 던졌다.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깨어진 군사들은 겁이 나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산비탈로 쫓겨 내려갔다. 선비들은 쫓겨가는 군사들을 보자 기세가 백 곱절이나 솟구쳤다. 쫓겨 다니는 군사들을 향하여 고함치며 돌을 던져 돌격했다. 돌덩이는 비 오듯 쏟아졌다. 군사들은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쓰러지고 자빠지면서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군사를 거느리고 왔던 영관은 일이 급했다. 활에 살을 메겼다. 칠십이 명의 선비들을 향하여 활을 쏘기 시작했다. 앞에 서 있던 선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살에 맞고 쓰러졌다. 칠십여 인의 영수 임선미는 쓰러지는 동지를 보자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급히 앞으로 나갔다. 영관은 고려 때 벼슬했던 낯익은 자였다. 격한 말로 영관을 꾸짖었다.

"이 역적놈아, 너도 글자나 배운 놈이 선비들을 이다지 구박하느냐. 우리 두문동 칠십여 인이 무슨 부족한 일을 너에게 했기에 두문동에 불을 지르고 여기까지 쫓아와서 절개 높은 선비들을 쏘아 죽이느냐. 너도 이놈. '충신은 불사이군'이란 글을 배운 놈으로, 이같은 가혹한 짓을 우리 선비들에게 감행하느냐. 만고에 죄인이 될 놈이다."

임학사는 추상같이 영관을 꾸짖었다. 영관은 임선미를 향하여 마상에서 외쳤다.

"선비들은 돌을 던지지 말라. 나도 활쏘기를 중지하리라."

임선미는 선비들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까는 군사들이 굴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헤치려 하므로 정당방위로 돌을 던졌지만, 이제 영관이 활을 아니 쏘겠다 하니 돌을 던지지 말고 하회를 기다리시오."

선비들은 임학사의 말을 듣고 돌 던지던 것을 일제히 중지했다. 영관은 칼을 짚고 말에서 내렸다. 임선미는 씩씩한 얼굴로 다시 영관을 꾸짖었다.

"그대들은 어찌해서 세상을 등지고 사는 우리들을 이다지 박해하느냐?"

임학사는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눈에 불이 펄펄 일었다. 영관은 부드러운 얼굴빛을 지어 말한다.

"그대들은 그만 노여움을 풀고 과거에 응해서 성군을 도와 입신양명하는 것이 어떠하오."

임선미는 영관이 말한 '성군'한 마디에 분노가 화산 터지듯 했다. 버럭 큰 소리로 영관을 꾸짖었다.

"무어야, 성군을 도와서 입신양명을 하라고? 그래, 너는 이신벌군한 자를 성군이라 하느냐. 너 같은 지조 없는 놈은 말할 자격이 없다. 더럽다, 물러가거라! 너도 일찍이 고려조정에서 녹을 먹던 놈이 아니냐."

임선미는 영관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영관은 기막힌 모욕을 당했다. 노한 감정이 불덩이같이 치솟았다. 짚었던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임학사의 목을 후려쳤다. 능상고절의 임선미의 목은 무심한 영관의 칼을 받아 흰무지개를 뿜으며 땅에 떨어졌다. 이 모양을 바라본 조의생은 분노의 피가 왈칵 온몸에 솟구쳤다. 머리털이 빳빳이 곤두섰다. 눈에 핏줄이 벌겋게 어렸다.

"이놈, 개보다도 못한 놈아, 개는 그래도 주인은 알아본다. 그러나 너는 주인을 몰라보는 더러운 놈이다. 네 어찌 깨끗한 선비를 죽이느냐."

크게 꾸짖으며 영관의 뺨을 갈겼다. 영관은 약이 바싹 올랐다. 칼을 번쩍 들어 조의생을 찔렀다. 조의생은 영관의 칼을 맞고 땅에 쓰러졌다. 조의생의 죽는 것을 보자 맹호성 이하 칠십인의 유생들은 분함을 참을 길 없었다. 맨손 빈주먹으로 영관에게 달려들었다. 목이 터지도록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더러운 놈아, 우리들을 모조리 죽여라."

선비들은 일제히 목을 내밀었다.

"이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피를 본 영관은 미친 듯 고함쳤다. 불을 지르러 나왔던 천여 명의 군사들은 일제히 선비들의 목을 풀 베듯 했다. 이같이 해서 두문동 칠십이인의 고려 때 선비들은 백옥 같은 절개를 지켜서 고려의 최후를 장식했다. 두문동 칠십이 인의 성명은 임선미, 조의생, 맹호성만 전할 뿐 남은 육십구 인의 성명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높은 지조는 만고에 푸름을 뿜어서 한국의 얼이 되었다. 삼군부 군사를 거느리고 두문동으로 나갔던 영관은 백만 대병의 적군이나 무찌른 듯, 의기양양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송도로 돌아왔다. 곧 삼군부 도통사에게 전말을 고했다. 도통사는 깜짝 놀랐다. 태조의 명령은 두문동 선비들한테 불을 질러서 쫓으라 했지. 흩어져 달아난 사람들을 죽이라 한 것은 아니다. 사실대로 아뢰기가 어려웠다. 곧 정안군과 정도전을 청하여 의논했다.

"왕상전하께서 두문동 선비들에게 불을 질러 쫓으라 하셨는데, 영관은 만수산 마루 굴속에 피신한 선비들과 편쌈을 하다가 모조리 죽였다 하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전하께서 들으시면 크게 노하시어 영관이 벌을 받기 십상팔구라 생각하오. 불문에 부치고 아직 아뢰지 않는 것이 좋겠소."

정도전이 대답했다. 옆에서 정도전의 말을 듣는 정안군은 화경 같은 눈을 번쩍이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어명을 받고 나갔다면 반드시 복명을 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요. 나는 영관의 처사를 남자답게 잘했다고 생각하오. 두문동 선비들은 고려에는 충신이지만, 우리나라에는 반역하는 분자들이오. 반역하는 분자들을 일도양단으로 처치해버린 것은 국가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오.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소. 썩은 팔은 주저치 말고 끊어버려야만 나머지 성한 몸이 유지될 수 있는 법이오. 끊을 것은 끊고, 살릴 것은 살려야만 나라꼴이 되오. 상감께서 잠시 노하시더라도 이실직고해서 아뢰는 것이 좋겠소."

"대군의 말씀은 당연하십니다. 그러나 임기응변하는 법도 있지 아니합니까. 만약에 두문동 선비들을 다 죽였다고 하면 전하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영관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잠시 은휘해서 말씀을 아니 드리는 일이 옳을까 합니다."

정도전은 목소리를 온화하게 하여 정안군의 억세고 줄기찬 마음을 돌리려 했다.

"만약에 전하께서 하문하신다면 어찌할 테요?"

"그때 가서는 아뢰어도 좋습니다."

정도전의 말을 듣는 정안군은 벌컥 화를 냈다.

"전하께 꾸지람을 백 번 듣는다 할지라도 아뢸 일은 아뢰야 하지 않소?"

"일이란 탁탁 끊어서 결말을 내야 하오. 만약 영관을 크게 꾸짖어 벌을 주신다면 우리는 역간해서 영관을 구해낼지언정 복명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찬성할 수 없소. 사내답게 일을 처리하시오."

정안군은 말을 마치자 소매를 떨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도전은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는 정안군의 옷자락을 잡았다.

"영관의 목숨이 불쌍해서 그럽니다."

"만약에 영관을 죽이신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 영관을 구해내리다!"

정안군의 억센 기상은 꺾을 수가 없었다.

"그럼 곧 영관을 데리고 전하께 복명을 하겠습니다. 두 분 대감도 함께 입시하시기를 원합니다."

도통사는 영관과 함께 어전으로 들어갔다. 도통사는 어전에 국배를 드리고 태조께 아뢰었다.

"두문동에 나갔던 영관이 복명을 드리옵니다."

태조는 봉안에 미소를 띠고 물었다.

"그래, 어찌 되었느냐? 두문동 선비들을 다 쫓았느냐?"

"황공하오이다. 다 죽였습니다."

영관은 떨면서 대답했다. 태조는 깜짝 놀랐다. 어체가 흔들렸다. 용상에서 반 넘어 나와 앉았다.

"무슨 소리냐? 다 죽였다니, 모두 몇 명이나 된단 말이냐?"

"칠십이 인이올시다."

"에이, 잔인한 놈이로구나! 어떻게 칠십이 인을 다 죽였단 말이냐. 내가 불을 놓아 쫓으라 했지. 언제 너보고 죽이라 했더냐, 어찌해서 죽였느냐?"

"처음에 불을 놓았습니다. 만수산 일대가 불바다가 되니 선비들은 모두 다 산마루로 올라가고 헤어지지 아니했습니다. 흩어질 줄 알았더니 또다시 뭉쳤습니다. 뒤를 따라 올라가 보니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알 길일 없었습니다. 한동안 찾는 중에 커다란 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와 군사들은 횃불을 들고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굴속에는 과연 선비들이 있었습니다. 돌로 군사들을 때려누이고 고함치며 내달아서 돌팔매질을 하니 상하고 죽는 군사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하는 수 없어 칼을 빼어 괴수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에 받쳐서 덤벼들었습니다. 하는 수 없어 다 죽여버렸습니다."

태조는 말을 듣자 발을 굴렀다.

"허허, 네가 나의 큰일을 저질러놓는구나!"

태조 이성계의 눈에는 노한 기운이 가득하게 서렸다. 큰 소리로 도통사에게 영을 내렸다.

"저놈을 끌어내려라. 군법을 시행해서 목을 베어라! 군령을 어긴 죄다."

어전에 시립했던 무사들이 영관의 등을 밀어 전 아래로 끌어내렸다. 도통사와 정도전 이하 모든 시신들은 벌벌 떨었다. 말없이 시립해 섰던 정안군이 어전에 부복해 아뢴다.

"전하! 소자를 주에 처하옵소서. 영관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소지가 영관을 지휘했습니다!"

도통사 이하 모든 시신들은 정안군의 씩씩한 기상에 기운이 눌렸다. 등에 찬 땀이 났다.

"네가 언제 두문동엘 나갔더냐?"

"나가지는 아니했으나 영관이 갈 때 당부했습니다. 불을 질러도 흩어지지 않거든 죽이라 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어이가 없었다. 초롱초롱한 봉의 눈을 거슬러 뜨고 아들 정안군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정안군의 큼직한 눈이 부왕 이성계의 용안을 마주 바라본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어렸다.

"소자도 사람이올시다. 한 조각 어진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하를 위하여 큰일을 하려면 작은 인정에 구애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정안군의 울음 섞인 목소리는 찌렁찌렁 전각을 울렸다. 정도전 이하 모든 시신들은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태조는 말없이 정안군을 뚫어지도록 바라본다.

"영관을 살려주옵소서. 전하의 천하가 되는 것을 반대하여 집단행동을 하는 자를 어찌합니까. 이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전하께서는 조선 천지에서 임금 노릇을 못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자는 영관을 지휘했습니다. 영관을 주하시기 전에 먼저 소자를 주하시옵소서."

정안군의 커다란 눈에는 더운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태조 이성계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기걸찬 아들 앞에 기운이 눌렸다. 정안군이 다시 아뢴다.

"전하! 일도양단으로 끓으셔야 합니다. 우유부단해서는 아니 됩니다!"

정안군은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의 얼굴을 우러러본다. 태조 이성계는 한숨을 지었다.

"하는 수 없다. 네가 잘 처리해라!"

태조는 말을 마치자 용상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두문동 칠십여 인의 선비들을 몰살시킨 영관은 정안군 이방원의 억세고 줄기차게 간한 힘을 입어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다. 영관은 정안군이 아니었다면 꼭 죽게 되는 목숨이었다. 전각 아래로 내리는 정안군을 향하여 백배치사했다.

"나리가 아니었더라면 소인은 꼭 죽었습니다. 다시 살아서 처자식을 대해 보게 되었으니, 나리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정안군은 씩씩한 기상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천만에, 나는 자네한테 은혜를 끼친 일이 없네. 사사로운 일로 자네가 잘못해서 죽게 된 것을 내가 구해주었다면 은혜라 할는지 모르겠으나 나라를 위하여 옳게 일을 했다가 억울하게 죽게 된 것을 구한 것이 무슨 은혠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 언제나 자네 직분에 충실하게 일을 하게."

영관은 더한층 감격해서 물러갔다. 정도전과 도통사는 제각기 자기 처소로 돌아가고 정안군은 궐문을 향하여, 나갈 때, 길에서 홍문관 제학 하윤을 만났다. 벌써 조정에는 이 소문이 짜아하게 퍼진 모양이다. 하윤이 벙긋벙긋 웃으며 정안군의 앞으로 가까이 왔다.

"참 잘 처리하셨습니다."

정안군은 심복으로 생각하는 하윤을 만나니 반가웠다. 하윤이 관상을 보아준 이후에 제일가는 지기지우가 되었다. 하윤의 손을 잡고 빙긋 웃으면 묻는다.

"무엇을 잘 철했단 말요?"

"두문동 선비들을 처리한 영관을 잘 구해주셨습니다. 만약 이번에 영관이 죄를 입어 죽었다면 다시는 반란분자들을 막아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죽도 밥도 안되고 새 나라의 질서는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과연 잘 처리하셨습니다."

"나도 본시 마음이 악하고 잔인한 사람이 아니건만 난마 같은 정국은 안정시켜서 새 나라를 세우자니 어찌 하는 수가 없구려. 하하하."

정안군은 호걸스런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수장

하윤은 의미 깊은 웃음을 빙긋 웃으며 정안군을 향하여 말한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새 나라가 안정되려면 앞으로 십 년은 가야 합니다. 그저, 첫 번에 마음먹은 대로 꿋꿋하게 나가십시오. 까딱 잘못하면 남의 좋은 일이 됩니다."

정안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한다.

"앞으로도 십 년이라니, 지루해서 어찌하오."

하윤은 드높게 웃었다.

"조그마한 집안을 일으키는 일도 십 년, 이십 년, 그렇지 아니하면 한평생 고생을 하고도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 법인데, 천하를 손아귀에 넣고 억조창생을 거느리는 일이 그렇게 용이하게 될 까닭이 있습니까. 그저 강하게 밀고 나가십시오. 앞으로도 두문동 이상 가는 일이 처녑 속에 쉬슬 듯 많을 것입니다. 그저 인정사정을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나라의 뜻대로 꿋꿋하고 줄기차고 용단성 있게 싸워나가십시오."

정안군은 덥석 하윤의 손을 다시 잡는다.

"또 무슨 소문이 있소?"

"당연하지 않습니까. 두문동이 저렇게 되었으니, 또다시 반발이 나타날 것은 틀림없습니다. 대의명분을 길러논 고려의 사백 년 동안 쌓논 기백이 하루아침에 간단히 소멸될 리 만무합니다. 그저 꿋꿋하게 싸워나가십시오. 나중에는 반드시 나리 앞에 승리가 돌아올 것입니다."

하윤은 벙긋벙긋 웃고 홍문관으로 향하여 들어갔다. 정안군은 언제나 하윤은 믿을 만한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의 일이다. 송도 일판에는 유언비어가 짜아하게 퍼졌다. 왕씨네가 의분을 참지 못하여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새 나라 정부에서는 깜짝 놀랐다. 곧 삼군부에 영을 내려 진상을 조사하라 했다. 삼군부에서는 팔도에 염탐꾼을 거미줄같이 펴놓고 백성들의 여론을 조사하는 한편 왕씨네들의 동정을 살폈다. 염탐꾼의 정보는 이곳저곳에서 들어왔다.

"백성들의 불평이 대단합니다. 모두 다 옛 나라 옛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런데다가 두문동 선비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소문이 퍼져서 더욱더 야단입니다. 왕씨네가 한 번 일어나서 새 정권을 내쫓고 다시 고려를 회복한다 합니다."

팔도에 퍼졌던 염탐꾼들은 똑같은 경위로 민정을 보고했다.

"왕씨 중에서 어떤 자들이 준동한다 하더냐?"

"왕씨 중에는 왕강과 왕승보와 왕승귀란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혜가 있을 뿐 아니라, 힘이 천하장사라 합니다."

삼군부에서는 왕씨네 내력을 조사해보았다. 과연 왕강과 왕승보와 왕승귀가 있었다. 모두 다 슬기와 용맹이 대단하다는 사람들이었다. 삼군부 도통사는 그대로 덮어둘 수 없었다. 곧 정안군과 대신 배극렴, 조준, 정도전을 청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처단해야지."

정안군의 입에서 결연한 대답이 떨어졌다.

"위에 아뢰고 처단할 방침을 의논합시다."

대신들이 대답했다.

"위에 아뢴다면 또다시 망설이실 테니, 선참후계를 하는 것이 좋겠소."

정안군은 말을 마치자, 입술을 한일자로 꼭 다물었다.

"그래도, 중대한 일이니 위에 아뢰어 결정하기로 합시다."

정안군은 선참후계할 것을 주장했으나, 대신들이 반대하니 하는 수 없었다. 도통사는 일단 태조께 아뢰고 처단하기로 했다. 도통사가 앞을 서고 대신들과 정안군이 뒤에 따라 어전으로 들어갔다. 도통사가 먼저 고했다.

"급히 아뢸 일이 있습니다."

태조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나'하고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있느냐?"

"왕씨네들을 처단해야 하겠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눈이 둥그레졌다.'

", 왕씨네들이 무슨 장난을 하느냐?

"반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나라 안의 인심이 극히 흉흉합니다."

"어떤 정도로 인심이 흉흉하단 말이냐?"

"왕씨네들이 단결이 되어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쫘하게 퍼졌습니다. 팔도 기찰들을 보내서 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다 옛 임금을 생각하면서 왕씨가 새 나라를 뒤엎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합니다. 그뿐 아니라, 백성들을 지금 왕씨네 중에 이름 있는 사람의 성명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속히 내려야 하겠습니다."

태조는 궁금했다.

"왕씨네 중에 유명하다는 인물들이 누구누구냐?"

"팔도 관찰사를 지낸 왕강이 있고, 힘이 천하장사라는 왕승보와 왕승귀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올시다. 무슨 일을 낼 사람들이올시다."

도통사는 숨을 몰아쉬며 다급한 음성으로 고했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는 듯했다. 태조는 왕강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강은 왕씨네 종실 중에도 그 계보가 직계에 속하는 사람이다. 공양왕보다도 촌수는 더 가까운 사람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환국한 지 얼마 되지 아니했을 것이다."

도통사가 다시 아뢴다.

"그렇습니다. 왕강은 중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동안 왕씨네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이 돌아오지를 기다린 때문이올시다."

태조는 도통사의 아뢰는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 속에 빠졌다. 우왕을 죽이고, 창왕을 죽였다. 지금 또 요왕을 원주로 귀양 보내서 내쫓았다. 그리고 자기는 왕이 되었다. 왕씨네들이 양심을 먹고 틈만 있으면 자기의 새 정권을 쓰러뜨리려 할 것은 환한 일이다. 더구나 고려의 구신들은 지조를 지킨다고 신하 노릇을 아니하고, 두문동에서는 선비들이 과거를 아니 보고 집단행동으로 반항의 태세를 취했다. 여기다가 송도 백성들은 모두 다 고려의 선비들의 지조를 높게 평가하고 옛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만약에 왕씨네가 반기를 한 번 들게 된다면 백성들은 함빡 왕씨 편이 될 것이 분명했다.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등에 소름이 끼쳤다. 마음이 불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골치 아픈 일이다. 대신들이 맡아서 잘 처리하라."

태조는 도통사에게 허락을 내렸다.

"전하께서 허락을 내리니 곧 왕강과 왕승보와 왕승귀를 잡아 가두고, 왕씨네들을 처단하겠습니다."

태조는 묵인하는 허락은 내렸으나 마음은 의연히 괴롭고 무거웠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도통사와 대신들이 왕씨를 처단하라는 허락을 받고 어전에서 물러나려 할 때 태조는 불안한 생각이 또 들었다. 나가는 도통사를 불렀다.

"지금 백성들은 한참 흥분해 있다. 왕강 이하 왕씨네들은 절대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포박을 하거나 죽여서는 아니 된다. 백성들의 마음이 거칠어지면 아니 된다. 백성들이 모르게. 수문 없이 처치하라."

"삼가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도통사는 다시 태조의 뜻을 받들고 물러났다. 삼군부로 나온 도통사는 정안군과 대신들한테 물었다.

"왕씨네들은 백성 모르게 소문 없이 처단을 한단 말요. 어전에서는 반대를 아니했소마는 백성들 앞에서 처단을 하거나, 백성들 모르게 처단을 하거나 결국 가서는 백성들이 다 알 것이오. 내 생각 같아서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왕씨네들을 처단해 버려야만 백성들은 무서워서 꿈쩍들을 못할 것이오. 무슨 일이든지 일도양단으로 처결해버려야만 하오."

정안군은 숨김 없이 처단하자고 결기 있게 대답했다.

"기왕 소문 없이 처리하라 하셨으니 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대신들이 의견을 말했다. 도통사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연상 위에 있는 붓을 들어 손바닥에 글자를 섰다. 대신과 정안군이 보니 물수자가 씌어 있었다.

"도통사의 기지가 무던하오."

대신들이 찬성했다. 도통사는 이날 밤에 수군첨사를 불렀다.

"위에서 내리시는 비밀한 지령이다. 내가 명령을 내리는 대로 실행해야 한다. 만약 비밀을 누설했다가는 군법시행을 할 테다. 네 목숨을 보전치 못할 테니 각별 조심해서 시행해야 한다."

첨사는 까닭을 몰랐다. 비밀이 탄로되면 군법에 처해서 목숨이 달아난다는 말에 더욱 겁이 났다. 더구나 도통사는 개국 공신의 한 사람이었다. 하관인 첨사로 있는 이상,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온지 비밀을 지켜서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먼저 큰 배 열 척을 벽란도 나룻가에 대기시켜 두어라."

"알겠습니다."

"다음에 너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왕강과 그의 일가 되는 왕승보와 왕승귀를 포박하여 벽란도에 대기해논 배 속에 감금하라."

첨사는 왕승보와 왕승귀는 천하장사라는 말을 귀에 젖도록 들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른 대답을 못했다.

"알아 들었느냐?"

도통사는 등채를 집고 다시 을러댔다. 첨사는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

",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다음엔 나졸들을 풀어서 왕씨란 왕씨는 모조리 잡아라. 다만 송도 백성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밤중에 잡아야 한다. 그리해서 벽란도에 준비해둔 십 척 배에 나누어 싣게 해라."

",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벽란도에 정박한 배 열 척에 왕씨란 왕씨를 모조리 실은 후에 배를 서해 바다로 띄워 남해 거제도로 향해라. 그리고 너는 총지휘관이 되라."

힘드는 일이다. 수군첨사는 뒤통수를 긁었다.

"다음엔 어찌합니까?"

"배가 망망대해 바다 한복판에 당도했을 때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서 배마다 큰 구멍을 뚫어서 배가 침몰이 되게 하라."

수군첨사는 깜짝 놀랐다.

"그럼 저와 군사들도 왕씨네와 함께 죽습니까?"

"미련한 놈이로구나. 너희들은 따로 빈 배 몇 척을 준비해두었는가, 왕씨들이 물속에 빠져 죽은 후에 헤엄을 쳐서 빈배로 오르면 될 것 아니냐."

수군 첨사의 입에서는 비로소 한숨이 나왔다.

"위에서 내리신 엄한 분부다. 극히 비밀하게 거행하라!"

도통사는 또 한 번 수군 첨사를 을러댔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영대로 봉행하겠습니다."

"이 일은 극비의 일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있다 해도 누설해서는 아니 된다. 너의 등뒤에는 네 행동을 주시해 보는 나의 부하가 수백 명이 있다. 만약 일호의 차착이 있다면 너는 죽는 사람이다."

"추호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물러가거라."

도통사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수군첨사는 곧 비밀히 행동을 개시했다. 일등 가는 사공 십여 명을 뽑았다. 큰 배 열 척을 벽란도 나룻가에 메어두고 대기해 있으라 했다. 첨사는 어둔 밤을 타서 나장과 나졸 수백 명을 풀었다. 풍우같이 달려서 왕강의 집을 둥그렇게 포위했다. 첨사는 다시 날랜 군사 십여 명을 추렸다.

"담을 넘어서 왕강의 침실로 들어가 왕강을 포박하라."

첨사의 지휘를 받은 군사들은 담을 넘어 왕강의 침실로 들어갔다. 이때, 왕강은 깊은 잠 속에 들었다. 꼼짝 못하고 결박을 당했다. 아무리 지혜가 많은 왕강이었으나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원래 왕강은 아직 고려가 망하지 아니했을 때, 중국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압록강을 건너와보니 나라는 이미 망해서 정권이 바뀌었다. 오도 가도 못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문을 닫아걸고 조심하고 있을 때, 이 봉변을 당했다. 왕강은 군사한테 포박이 되어 칼을 짚고 지휘하는 수군첨사의 앞으로 끌려갔다. 왕강은 결박을 당한 채 조용히 첨사에게 물었다.

"나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온후에 국가에 대하여 아무런 죄진 일이 없는데 어찌해서 나를 잡아가오?"

왕강은 팔도 관찰사를 지냈고 중국에 사신가지 되어 갔다 온 사람이었다. 말과 행동이 씩씩하고 의젓했다. 첨사는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상부의 명령으로 당신을 포박했을 뿐, 죄의 유무는 나도 모르겠소."

대답을 마치자,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말 위에 실어라."

군사들은 왕강을 말에 태워 묶은 후에 벽란도로 향하고 달렸다. 왕강은 하는 수 없었다. 왕씨의 나라가 망했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 없었다.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군사들은 왕간을 데리고 벽란도 나룻가에 당도했다. 벽란도 나룻가에는 십여 척의 배들이 줄을 지어 닻을 내리고 있었다. 군사들은 왕강을 말에서 끌어내려서 등을 밀어 배 속으로 들어가게 한 후에 선창문을 닫고 잠가버렸다. 이리하여 왕강은 배 안에 갇힌 몸이 되었다. 얼마 후에는 왕승보와 왕승귀가 묶여서 선창 속에 감금이 되었다. 천하장사라는 소문이 높은 왕승보와 왕승귀였으나 역시 깊은 밤중에 잠이 들어 있었었다. 역발산 기개세하는 장사라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강의 신세와 같이 배 안에 갇힌 몸이 되었다. 다음에는 송도 안에 있는 늙고, 젊고, 어린 왕씨가 모조리 잡혀서 벽란도로 끌려나왔다. 캄캄한 밤중 벽란도 푸른 강물 가에는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왕씨네를 잡아다가 죽인다는 소문은 온 나라에 펴지기 시작했다. 팔도강산에 퍼져 있는 왕씨네들은 별안간 기막힌 환란을 만나게 되었다. 밤 사이에 집과 세간을 다 버리고 어린 자식과 손자를 등에 업고 고향을 떠나서, 거지의 몸이 되어 변성명을 하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차마 본성인 왕자를 버릴 수 없었다. 전씨가 되고 전씨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 옥씨로 고친 사람도 있었다. 이리하여 겨우 죽음을 면한 이가 수없이 많았다. 벽란도로 끌려간 왕씨들은 천여 명이나 넘었다. 배 안은 수라장의 지옥 같은 처참한 풍경을 이루었다. 통곡 소리는 푸른 강물의 파도 치는 소리보다도 높았다.

"고연 놈들, 너희는 왕씨네의 후한 녹을 먹고, 입신양명을 한 놈들이 아니냐. 배은망덕을 해서 임금을 죽이고 왕씨의 정권을 뺏었는데, 도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들 일개 백성인 왕씨를 또다시 죽이려 하느냐?"

늙은이와 젊은이들의 호곡해 우는 소리는 바닷가에 놀고 있는 백구 떼를 놀라게 했다. 마침내 수군첨사의 명령은 떨어졌다.

"배를 띄워라!"

십여 척의 큰배는 일제히 닻을 올렸다. 이때, 왕씨네 중에 글 잘하는 사람이 잡혔다. 막역의 친구로 지내던 늙은 중 한 사람이 죽음의 길로 가는 왕씨를 전별하기 위하여 뒤를 따랐다. 배는 닻을 올려 떠나려 했다. 늙은 중은 기가 막혔다. 떠나가는 배를 향하여 통곡을 하면서 먹장삼 소매를 높이 들어 흔들었다. 왕씨는 눈물을 머금고 즉흥시를 지어 입으로 읊었다.

푸른 물결 밖으로 부드럽게 일어나는 노 젓는 소리. 비록 산승이 있다 하나 자네, 어찌할 텐가.

중은 노래를 부르며 떠나가는 왕씨를 보곤 통곡을 하며 돌아갔다. 배는 망망대해 넓고 넓은 바다로 열흘 동안이나 흘러갔다. 밥도 넉넉하게 주지 아니했다. 겨우 연명할 정도로 밥을 주었고, 일부러 사람들을 주리게 해서 기운을 떨어뜨리자는 것이다. 왕씨네들은 뱃멀미를 하고 맥이 풀렸다. 바닷바람에 지치고 풍랑에 정신을 잃었다. 모두 다 초죽음이 되었다. 왕씨네들은 실은 열 척 배에서는 배마다 호통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이놈들아, 죽이테면 어서 죽여다오. 어쩌자고 일부러 돛대도 아니 달고 내처 가느냐. 생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어서 빨리 만사를 잊어버리게 해다오."

"이놈들아, 우리들을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가느냐."

"이놈들아, 사람을 이같이 말려 죽일 수가 있느냐."

배마다 푸념하고 저주하고 통곡하는 소리는 악머구리 끓듯 했다. 군사들은 육모방망이를 들고 통곡하고 푸념하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놈들아, 극락세계 거제도로 데려다줄 텐데, 왜 이리 소란을 떠느냐."

어깻죽지와 엉덩이 벼를 으스러지도록 패주었다. 아픔을 참지 못하여 외마다 소리를 치는 늙고 젊은 왕씨들의 호곡성은 더한층 소란했다. 배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거센 물결을 박차고 거제도로 향했다. 멀리 구름 밖으로 거제섬이 아물아물 보였다. 이날 밤에 수군첨사는 힘차고 날랜 군사 열 명을 뽑아서 선창으로 불렀다.

"뒤에 따라오는 종선은 아무 이상이 없느냐?"

"별일 없이 순풍에 돛을 높이 달고 내려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우선 나를 종선으로 호위하여 옮기게 해라."

열 명의 날랜 군사들은 첨사의 명을 받고 종선을 큰 배 옆에 대었다. 첨사는 수군에 옹위되어 종선으로 옮았다. 열 명 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일 아침쯤 되면 배가 거제도에 당도할 것이다. 배가 거제도에 도착하기 전에 위에서 지시하신 큰 사명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은 오늘 한밤중에 열 척 배에 한 사람씩 나누어 탄 후에 배에 구멍을 뚫어서 배가 침몰되게 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몸을 돌려 헤엄을 쳐서 내가 타고 있는 종선으로 기어오르라."

열 명 군사들은 눈이 둥그레졌다.

"파선되면 왕씨네들은 다 죽습니다."

"이놈들아, 잔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해라. 상부의 명령이다. 만약 한 놈이라도 비밀을 누설하거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군법 시행을 해서 참형에 처하리라."

"하라시는 대로하겠습니다."

군사들은 벌벌 떨며 대답했다.

"너희들은 군령장에 성명을 쓰고 수결을 두어라!"

첨사는 군령장을 내놓았다. 비밀을 누설하거나 명령을 복종하지 아니하면 목을 베어도 좋다는 다짐장이다. 군사들은 성명을 쓰고 수결을 둔 후에 다시 열 척 배로 제각기 돌아갔다. 밤이 깊어 자정 때쯤 되었다. 수군첨사의 악독한 지령을 받은 열명의 날랜 군사들은 지령이 내린 제각기 배 안에서 일을 착수하기 시작했다.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헤엄치기 편리한 가벼운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배 안을 둘러보았다. 왕씨네들은 늙고 젊고 어린 사람은 말할 것 없이 모조리 기진맥진이 되어 세로 가로 쓰러져서 잠이 깊이 들었다. 풍랑에 휘둘리고 뱃멀미로 해서 손가락 한 개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군사들은 끌을 들고 배 한복판을 뚫기 시작했다. 배마다 구멍이 펑하고 뚫려졌다. 열 척 배에는 일제히 물이 쏟아져 들었다. 구멍을 뚫은 군사들은 제각기 배에서 뛰어내렸다. 헤엄을 쳐서 수군첨사가 있는 종선으로 기어올랐다. 열 척 배에 뱃멀미를 하며 세로 가로 쓰러졌던 왕씨네들은 별안간 몸에 물이 흥건하게 젖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벌떡벌떡 일어났다. 앞뒤를 살폈다. 배 한복판엔 물이 용솟음쳐 들어왔다. 깜짝 놀랐다.

"물이 들어온다. 배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큰일났다. 물을 퍼내라."

배마다 소란하게 소동이 일어났다. 열 척 배는 배마다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배 안에서는 이곳 저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캄캄한 어둔 밤 파도치는 소리보다도 높았다.

"파선이다. 배가 침몰되면 다 죽는다! 빨리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을 쳐라!"

"노인들과 어린애는 어찌하면 좋으냐?"

배마다 아우성 소리와 호곡하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열 척 배는 순식간에 검은 바다 물결 속으로 거꾸로 박히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중이었다. 시커먼 물결은 삽시간에 거꾸로 쓰러지는 배를 삼켜버리려 했다. 불빛 한 점 보이지 아니했다. 구슬픈 비명 소리만 바닷속에 일어날 뿐이었다. 이때 천하장사로 이름이 높은 왕승보와 왕승귀는 침착했다. 왕승보는 왈칵 힘을 온몸에 주었다. 결박한 밧줄이 탁 끓어졌다.

"이놈들이 우리 왕씨들을 바닷속에 수장하려고 이따위 흉계를 꾸몄구나......우선 사람을 구해야겠다."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왕승귀도 벌떡 일어났다. 용을 썼다. 결박진 동아줄이 탁 끓어졌다.

큰소리로 외쳤다.

"왕관찰은 어디 계시오?"

기울어지는 캄캄한 배 속에서 왕강이 대답했다.

"왕강이 여기 있소."

왕강도 밧줄을 끓었다.

"빨리 사람을 구합시다."

왕승보가 고함쳤다. 왕승보, 왕승귀, 왕강 세 사람은 옷을 활활 벗었다. 가라앉으려는 배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장정들은 용을 써서 결박을 끓어라! 그리고 노인과 어린이들을 한 사람씩 껴안고 헤엄을 치라. 만약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있거든 파선된 뱃조각을 붙들어라! 놓치면 죽는다."

"들리는가. 내 목소리가? 모두 다 침착하게 행동을 취하라. 서로들 자기만 살려고 떼밀고 앞을 지르면 모두 다 죽는다. 노인과 어린이들을 안고 침착한 행동을 취하라!"

황강이 큰소리로 외쳤다. 왕승귀와 왕승보는 늙은이와 어린이를 껴안고 헤엄을 쳤다. 거제도 대안으로 올렸다. 왕강도 왕승귀와 왕승보의 뒤를 이어 어린이들을 구하여 맞은편 언덕에 올려놓았다. 세 사람은 계속해서 비호같이 동족들을 구해냈다. 젊은 사람들은 세 사람의 용맹스런 행동을 보자 용기가 부쩍 일어났다. 죽음을 무릅쓰고 늙고 어린 동족들을 구해서 대안으로 옮겼다. 동이 환하게 터지기 시작했다. 왕씨를 실었던 열 척의 배는 바닷속에 침몰되어 버렸고, 수군첨사와 군사들이 탄 종선들은 돛을 높이 달고 멀리 서해 바다로 달아나버렸다. 왕승귀, 왕승보, 왕강 세 사람의 지도자들은 젊은 왕씨들과 함께 거제도로 올랐다. 사람 수를 점검해보니 늙은이, 어린이들을 합하여 오백 명이나 되었다. 나머지 오백여 명은 바닷속에 빠져서 고기밥이 된 것이 분명했다. 용감스런 세 지도자들은 반수 이상의 동족을 구해냈다.

"해가 있을 때 파선이 되었다 하더라도 좀 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냈을 것을."

왕강이 탄식했다.

"우리들을 몰살시키려고 계획적으로 한밤중에 파선을 시킨 것인데 생각한들 소용이 있소, 기왕 죽은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지만 산 사람들이나 살아갈 길을 궁리합시다."

왕승보가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했다.

"죽은 사람은 천 번 만 번 생각한들 소용이 있소.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오. 새로운 힘과 새로운 의지로 살길을 개척합시다."

왕강이 다시 발론을 했다.

"좋소이다. 우리들은 오늘부터 거제도에 새 왕궁을 건설해서 우리의 즐거운 땅을 만들어야 하겠소이다."

젊은 왕씨들은 몇 집 안 되는 원주민에게 연장을 얻어서 일제히 나무를 베어 의지간을 만들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때, 왕씨들을 바다에 수장하던 날 밤의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대궐 대전에 강비와 함께 취침하고 있었다. 홀연, 눈앞에 황금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황룡을 수논 호화찬란한 제왕의 옷을 입은 노인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장중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태조 이성계는 깜짝 놀랐다. 자기 자신이 임금인 것도 잊어버렸다. 위엄에 눌렸다. 황망히 뜰 아래로 내려가 부복했다.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노제왕은 황금 용상 위에 오르자, 은실 같은 흰 수염을 흩날리며 노기가 등등한 눈으로 태조 이성계를 바라보며 꾸짖었다.

"네 이놈, 난신적자 이성계야. 이놈 너는 하늘도 두렵지 아니하냐. 네 어찌 내 용상을 뺏었느냐?"

호령이 추상같았다. 태조 이성계는 두려웠다. 뜰에 코를 박았다.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엎드렸다. 등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폐하는 누구시오니까?"

물어보려 했으나 목구멍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아니했다. 태조 이성계는 가슴이 답답했다. 호흡을 통할 수 없었다. 등에 흐르던 진땀은 온 전신으로 퍼졌다. 숨이 가빴다. 진땀은 이마에까지 흘렀다. 면류관을 쓴 제왕은 다시 큰 소리로 태조 이성계를 꾸짖는다.

"이놈, 이성계야, 네 어찌 나의 충신 최영을 죽이고 정몽주를 철퇴로 때려 죽였느냐. 이놈, 네 목이 몇이나 되기에 이러한 하늘과 사람이 다 함께 노할 무도한 짓을 했느냐."

이태조는 부들부들 떨었다. 곤룡포를 입은 이는 고려를 창업한 제왕 왕건 태조인 것을 비로소 알았다.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코를 땅에 대고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용상에서는 또다시 호통 소리가 떨어졌다.

"너는 내 나라를 역적질해서 뺏고 무엇이 부족해서 또다시 내 자손 수천 명을 바닷속에 수장해 죽이느냐. 네 죄상은 하늘과 땅에 가득하다. 장차 나는 네 자식들이 서로 피를 뿌려 싸워서 골육상쟁이 되게 하리라."

이태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일전에 대신과 삼군부에서 왕씨네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세가 보인다고 왕씨들을 몰살시키겠다고 상소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 후에 팔도강산에 퍼진 왕씨네들을 모조리 잡아서 배에 싣고 바다로 떠난 일이 있었다. 전상에서는 또다시 호령이 떨어졌다.

"이놈, 알아두어라, 나는 너의 자손들이 서로 싸워서 추하게 죽게 할 테다."

왕건 태조는 벼락같이 호령을 지르자 길고 긴 큰 칼을 번쩍 들어 이태조의 목을 후려쳐 갈겼다. 태조 이성계는 눈에 불이 번쩍 났다. '으악' 소리 한마디를 치고 땅에 쓰러졌다. 옆에서 함께 자던 강비가 깜짝 놀랐다. 외마다 소리를 치는 이태조의 몸을 흔들었다.

"웬일이십니까? 가위눌리셨습니까? 무슨 꿈을 꾸셨기에 이같이 외마디 소리를 치십니까?"

이태조는 눈을 번쩍 떴다. 옆에서 강비가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비로소 악몽을 꾼 것을 알았다. 온몬에 진땀이 물 흐르듯 흘렀다. 이태조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악몽 속에서 벗어난 기쁨을 느꼈다.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듯했다. 손으로 아름다운 왕비 강씨의 손을 굳게 잡았다. 왕비 강씨는 남편인 이태조의 이마를 짚었다. 진땀이 구슬같이 흘렀다.

"악몽을 꾸셨나봅니다."

강비가 수건으로 남편의 이마를 부드럽게 씻어주었다. 강비의 보드랍고 연한 손길은 이태조의 등을 어루만졌다.

"아이구, 온몸이 진땀이실세."

강비는 물에 빠졌던 듯한 태조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이태조는 사랑하는 아내의 애무를 받으며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강비는 한동안 태조를 어린애 다루듯 땀을 씻어준 후에 얼굴에 가득히 미소를 띠고 조용히 물었다.

"전하, 무슨 꿈을 꾸셨기에 그다지 놀라시고, 외마디 소리를 치셨습니까?"

"어허, 아주 못된 꿈을 꾸었어."

태조는 길게 한숨을 짓고 대답했다.

"무슨 꿈인데, 한숨까지 지으십니까?"

"입으로 옮기기도 싫소."

이태조의 눈에는 꿈에 만났던 왕건 태조의 노기등등한 모습이 어른거렸다. 강비는 초조했다.

"말씀을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신첩의 가슴이 타는 듯합니다."

"왕건 태조가 현몽을 했어."

강비는 눈이 동그래졌다.

"왕건 태조가 현몽을 했어요?"

"면류관, 곤룡포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정전 용상에 올라 나를 꾸짖는데, 왜 나라를 뺏었느냐고 천둥같이 을러대는구려."

강비는 마음속으로 놀랐다.

"나라를 뺏었다고 꾸짖었습니까?"

"뿐만 아냐. 자기네 자손들을 물에 빠뜨려 죽였으니, 내 자식들도 죽인다는 거야. 아주 기막힌 악몽이야. 꿈 속에서 숨이 막혀서 죽을 뻔했소."

강비도 왕씨네들을 바다로 끌고 간 일을 짐작해 알았다.

"큰일 났습니다 그려. 어서 수륙재를 크게 올려서, 수중고혼들을 천도해야 하겠습니다."

"굿뿐인가. 사당을 지어주어야겠어."

이태조는 뉘우치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튿날 강비는 궁녀에게 내탕금을 내주고 승려와 무녀들을 시켜서 벽란도 나룻가에 수륙재를 크게 열었다. 무녀와 승려들은 사흘 낮 사흘 밤을 두고, 굿을 하고 재를 올려서 수중고혼을 위로하고,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한편 태조 이성계는 다음날 정전에 나가 대신들을 불러 물었다.

"왕씨의 자손들을 싣고 바다로 나갔던 뒷소식을 들었는가?"

도통사가 대답했다.

"배 열 척이 파선이 되어서 절반은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중에 왕승귀, 왕승보, 왕강 세 사람은 효용이 절륜해서 파선된 속에서 늙은이와 어린애들을 구하여 거제도에 상륙이 되었다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왕씨가 반넘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이미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은 구해줄 도리가 없다. 사당을 지어서 제사를 지내주게 하고, 섬 속에 있는 왕씨들은 불러서 생업에 종사하여 평민과 섞여 살도록 하라."

대신들이 우겼다.

"너그럽고 크신 성의는 잘 알겠습니다마는 아직 시기가 이른가 합니다."

"두말 말고 내 말대로 실행하라."

대신들은 태조의 뜻을 어길 수 없었다. 거제도에 있는 왕씨들을 불렀다. 그러나 겁이 나서 한 사람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몇 해후의 일이었다. 거제동에 있는 왕씨들은 살아갈 길이 막연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을 했다. 이 소식은 이태조의 귀로 들어갔다. 태조 이성계는 대신과 정안군을 불러 의논했다.

"이제는 왕씨네들이 별 탈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거제도에 있는 왕씨들을 육지로 상륙시켜서 제각기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대신들은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 이태조는 왕건 태조의 꿈을 회상했다. 섬에 있은 왕씨네들을 육지로 오르게 해서 생업에 종사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내 주장은 항상 민심을 얻는 것이 창업하는 근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매양 내 생각과 실제 일이 어긋나서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거제도에 있는 왕씨들을 기어이 상륙시켜서 원성이 없게 하라. 비록 왕씨라 하나 이제는 나의 백성이다. 경들은 나의 뜻을 거스리지 말고 실천케 하라."

이태조는 간곡하게 대신들을 타일렀다. 옆에 시립해 있던 정안군이 의견을 아뢰었다.

"전하의 일시동인하시는 뜻을 받들어 소자의 의견을 아뢰겠습니다. 거제도에 있는 왕씨네들을 일시에 상륙시키지 말고 날짜를 정해서 몇 명씩 부서를 정하여 육지로 오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상륙한 후에 한 곳에 둔취해서 살게 하지 말고 각처로 흩어져 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안군의 아뢰는 말이 떨어지니 모든 대신들이 비로소 일제히 찬성했다.

"정안군의 아뢰는 말씀이 옳습니다. 거제도에서 상륙시킨 후에 집단생활을 시키지 말고 따로따로 각처에 분산시켜서 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리해야만 앞으로 반란을 일으킬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했든 왕씨의 원망이 더욱 높아지진 않도록 해라. 우왕과 창왕은 이미 죽였지만 공양왕은 생명을 유지시키고 의식을 넉넉하게 대어 주라. 이것이 민심을 돌리게 하는 길이다."

대신들을 정안군의 의견을 따랐다. 거제도에 있는 왕씨들을 날짜를 정하여 완산, 상주, 영주로 옮겨서 흩어져 살게 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했다. 이리하여 왕강, 왕승귀, 왕승보 세 사람도 죽음을 모면했다. 이때,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켜서 죽인 후에 자기 손으로 추대하여 왕으로 받들었던 공양왕은 강원도 원주로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 대신들은 이태조의 명을 받들어 죽이지 아니하고 간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삼척으로 유배시켜서 와석종신을 했다. 이때 공양왕의 나이는 50세였다. 왕건 태조의 현몽한 덕을 입어서 다행히 비명횡사를 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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