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밀양 천황산
1
유의태의 눈길이 안광익을 무시한 채 허준에게 날아왔다. 허준이 숨을 삼켰다.
"이 아이더러 어쩌란 말인가!"
"이미 아이가 아닐세."
"내가 말하는 아이란 것은 이런 괴병을 다스리기엔 신출내기란 뜻일세. 다시 한번 내가 확인해보세."
"준이는 다가앉아라."
"소인이오니까?"
"너 또한 처음 대하는 병일지 모르나 내가 이 증상을 보이고자 하는 것은 너뿐이다."
"이 아이에 대한 신뢰도 좋으나 침술 따위로 다를 병증이 아니라지 않은가."
"다가앉아라."
유의태의 눈길이 다시 허준에게 멎었다. 허준이 무릎걸음으로 유의태에게 다가앉았다.
"네 손으로 내 맥을 짚어라."
"하오나."
"의원은 스스로 자신의 맥을 짚을 수 없다. 또 네 촉진을 신뢰하여서라기보담 세상에는 이러한 괴병도 있다는 것, 그러한 병자를 촉진한다함은 그 또한 장차에 대비하여 흔치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생사가 달린 경각에 자신의 장래 운운하는 그 말에 왈칵 허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먼 만석모를 두고 대결이란 당치도 않은 착각이었다.
지금 그의 눈빛을 보며 허준은 유의태가 자기를 얼마나 뜨겁게 촉망하는지 알 것 같았다.
"소인이 어찌 감히 스승님을."
"내가 원하는 일인즉슨!"
스스로 옷소매를 걷은 유의태의 야윈 손목이 허준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허준은 눈을 감았다.
'장차에 대비한 흔치 않은 경험.'
물론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의서 속에서 본 반위라는 병명을 기억하되 아직 그 병자를 허준은 대한 적이 없다.
허준은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병자의 맥을 짚자면 의원 자신의 호흡부터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의가에서 말하는 호흡은 호와 흡을 세밀하게 구분하니 내쉬는 것을 말하는 그 일호에 맥이 세 치를 운행하며 일호에 또한 맥이 세 치를 운행, 호흡에는 곧 여섯 치를 운행하는데 성한 신체는 일주야에 일만삼천오백 회를 숨쉬며 일호에 맥이 재동하고 일홉에 다시 재동하는 것을 기준삼아 일식이라 부르며, 그 한 호흡에 사동하면 무탈하며, 삼동은 지하다 하여 이상으로 보며, 이동은 패, 육수, 칠극하면 열이 많으며, 팔동은 탈하고, 구는 죽으며, 이식에 일동해도 또한 죽는 것으로 친다.
아울러 병의 유무와 생사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술이 곧 진맥인데 먼저 중지로 안찰하여 촌 관 척의 삼부를 짚되 그 각 부마다에 부 중 침의 진법으로 도합 아홉 가지 증후를 가리는데 상중하 혹은 천인지로 부르는 이 삼부의 상부는 가슴으로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의 질병을 주관하고 중부는 가슴 밑으로부터 배꼽 이상의 질병을 그리고 하부는 배꼽 이하 발끝에 이르기까지의 질병을 주관한다.
그 삼부를 또 세분하여 아홉 가지 증후로 나누는 것은 호흡 즉 맥이 특히 작거나 큰 것 빠른것 더딘 것 열한 것 한한 것 그리고 가라앉은 것은 모두 병이 있는 증거며 그 호흡의 뛰는 양과 수치로 병의 경중 그리고 생사의 전망도 가늠하기 때문이다.
허준의 손이 유의태의 촌, 관, 척 삼부를 짚으며 그 맥치 박동을 전해 듣기 시작했다.
순간 그 허준의 눈이 번쩍 뜨이며 유의태의 눈 감은 얼굴을 보았다.
허준의 입술이 메말라갔다.
"대체 언제부터 이러시오니까?"
"놀랄 일은 없다. 세상에 처음 있는 병도 아니요, 어찌 이 병이 내게만 닥친 병이리."
"일견 큰 맥은 크게 이상이 없사오나 ..."
"공연한 소리로 나를 달래려 할 것 없다. 증상은 맥 뛰는 소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닌즉."
"하면 달리 또 무슨 증상이 있단 말인가!"
안광익이 물었으나 유의태의 눈은 여전히 허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가슴을 만져보아라. 명치 부위도."
유의태가 다시 자기 손으로 옷자락을 헤쳤다.
"...!"
"망설일 것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장차에 대비하여 흔치 않은 경험일 것이다."
유의태가 자리에 자신의 몸을 눕혔다.
허준의 손이 유의태의 가슴을 더듬어갔다.
이상이 없었다. 아니 일견 이상이 없어 보이는 그 살가죽 밑에서 곶감덩이 같은 미심쩍은 어혈 뭉치 같은 것이 만져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호흡을 골라 가는 허준의 손바닥 안에 점점 더 뚜렷이 감지되었다.
"대체 ... 대체 이것들은 무엇들이오니까?"
"죽은 살점이겠지."
"죽은 살점?"
"저 혼자 죽은 살점이 아니요, 저와 붙어 있는 여타 살점이며 장기들과 함께 죽어가는 살덩이. "
"...?"
"저 혼자 죽었으면 그것만 도려내면 될 것이로되 저 혼자는 죽지 않는, 아마 내 몸통 속에 지금 가장 왕성하게 살고 있는 것은 그 살점뿐이리라. 마치 인간사의 작은 재주 따위 비웃기나 하듯이."
유의태가 웃고 있었다.
"...!"
"물러나게, 내가 다시 한번 만져보리."
안광익이 허준의 곁으로 다가앉자 유의태가 그 안광익을 거부하듯이 일어나 앉으며 옷을 여미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들여다보세."
대답 대신 이미 유의태는 옷고름을 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옷고름을 매는 손끝도 말씨도 그 태연함이 이미 오랜 사생관에서 우러나온 의연함이 있었다.
"내 몸속에 자라기 시작한 이놈의 정체를 기어코 또 내 손으로 밝혀보려 한 적도 있었으나 그건 내 욕심일 뿐. 그 소임을 맡을 자는 아마도 너희들이려니."
"잠시 더 누워보소서. 소인이 다시 한번 확인하려 하옵니다."
"내가 지난 일 년 동안 자나 깨나 연구해도 도시 종잡을 수 없는 병, 뱃속을 갈라보기 전에 도시 알 수 없는 병."
그 눈빛에 좌중이 숨을 삼켰다.
"그러나 멀잖아 누군가 이 병의 원인과 약을 찾아내리로다. 끝내 못낫을 병이거든 하늘도 이런 병을 한가로이 만들어내지 아니했을 터인즉. 핫핫 ..."
패배자의 웃음이 아니었다.
침통해 있는 일동의 면전에서 유의태의 그 웃음소리는 이 세상 그 무엇도 겁내지 않는 오연함이 묻어 있었다.
그날 밤 김민세와 안광익의 고함 같은 노호와 질책이 있었으나 끝내 상화를 시켜 술상을 대령케 한 것은 유의태 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달가워하지 않는 두 벗에게 손수 술을 쳐주고 내내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허준에게도 손수 술 한잔을 쳐주는 여유를 유의태는 보였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의 침묵 속에서 유의태가 꺼낸 화제는 의원이 지녀야 할 부술에 관해서였다.
"사람의 몸속을 갈라보았느냐니요?"
"그런 욕망 없느냐. 도대체 사람의 몸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구석구석 뜯어보고 싶은 욕망이 없는가 그 말이다."
"왜 없사오리까만 의원의 소망일 뿐 누가 죽어선들 다시 갈가리 찢기기를 원하오리까."
"필요하면 해야지."
유의태가 술을 반 잔쯤 비우고 허준과 안광익을 보며 낮게 웃었다.
그러나 정작 안광익은 두 사제의 화제에 끼어들려 않았다. 허준이 재차 말했다.
"소인이 잘못 들었나 모르오나 더러 죄짓고 죽은 이의 몸을 관에서 허락받아 장부를 헤쳐보는 그런 일도 있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사옵니다만."
"풍문이 어찌 내 지식이 될 수 있으리."
"...!"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바로 그런 일이 아니리. 더구나 의원으로서 사람의 소장과 육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욕망이기 전에 당연히 거쳐봐야 할 공부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을 주업으로 삼으면서 사람의 속이 어찌 생겼는가를 모른다면 짚신 신은 채 발바닥을 긁어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오나 그건 아무리 소망하여도 만금을 주고서도 쉬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올시다."
"그대도 그 말은 더 계속할 것 없네."
하고 김민세가 말했으나 허준이 계속했다.
"게다가 인체의 해부란 국법으로 엄히 금하는 바이옵고 이미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 상주가 가족의 시신을 해치는 것을 허락하려 하오리까."
"상주 없는 송장이 더러 있지."
"엉뚱한 소리 말게."
허준이 다시 물었다.
"어디에오니까?"
"내가 아는 어느 장소에."
"대체 왜들 이러시는가! 농담도 심하이."
"농담이 아닐세."
"하오면 그 장소가 어디오이까? 소인도 가볼 수 있는 곳이온지?"
"너도 갈 수 있느니."
"하오면 소인도 일차 그곳에 데려다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지."
의외로 유의태의 대답이 선선했고 김민세의 혀 차는 소리에 오금이나 박듯 한마디 더 보탰다.
"길이 좀 멀긴 하나 일간 내 꼭 기별하여 네 소원을 풀어주리로다."
말끝에 유의태가 다시 밝은 웃음소리를 냈다.
다음다음 날 산음에서 사라진 유의태의 모습이 상화를 데리고 멀리 밀양 천황산 북쪽 골짜기 속칭 시례빙곡에 나타났다.
2
사람의 내부가 어찌 생겼는가를 알고자 하는 의원의 열망.
어떤 뛰어난 구변으로도 그 내용이 어찌 생겼는가를 형용할 수 없는 것이기에 허준의 기대는 더더구나 컸다.
"임자 없는 시체를 보여주마."
임자 없는 시체가 어디 있으며 세상 연고 없는 무덤이 어디 있으랴 여기면서도 그러나 '일간 기별하여 네 소원을 이루게 해주리로다.'라는 그 유의태의 말에 허준은 잠조차 설치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발설한 상대가 유의태가 아니면 애초 기대는 아니 할 얘기였다.
죽어선 가족이나 친지의 곁에 놓이는 것이 인간의 죽음이요 그 사체는 며칠 몇 달의 호곡으로 전송받아 수의를 입고 잔 속에 들어가 못질을 받고 다시 밧줄에 매여 땅속 깊이 묻히는 것이 운명이다. 그런데 -
"무덤에서 꺼낸 시체야 이미 혈행이 멎어 장기가 변형되거나 부패했으니 어찌 온전한 공부거리가 되리.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직 땅속에 묻힌 적이 없는 생생한 사람의 내부일세."
-아직 땅속에 묻힌 적이 없는 생생한 인간의 내부.
유의태는 또 말했었다.
"사람의 만병을 다루는 자가 사람의 속이 어찌 생겼는가를 모르고서 병을 운운한다면 그거야말로 짚신 신은 채 발바닥을 긁는 터수와 무엇이 다르리요."
"살가죽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내부, 그 혈행이며 장기며 골격의 모양새!"
허준의 입술이 또 메말라왔다. 뜨거운 기대 때문이었다.
허준이 접한 의서 속에도 장기며 골격의 모습을 적은 부분은 많다.
중국의 고전인 황제내경 영추의 골도편에 처음으로 해부라는 표현이 보이고 또 한서 왕망전에 그가 왕실의 의술을 주관하는 직에 있을 때 가축 도살의 명인을 동원, 사죄가 확정된 인간을 옥중에서 해부하여 그 내장 별로 떼어내어 무게를 달아보고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대쪽을 주요 혈관 속에 집어넣어 그 주행을 살피는 등 노력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지식에 의거 동양 의학사상 최초로 구리로 표준 인체모형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일명 동인으로 불리는 이 중국 특유의 인체 표준모형은 그 뒤인 송조에 이르러 의학교육의 주요한 교재로 채택되고 다시 당대인 대중 2년에 여의 견소녀가 저술한 오장육부도가 등장하나 그 문자로 형용된 오장과 육부가 결코 필요한 이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만큼 정밀한 것은 아니었다.
의원이 궁금해하는 피의 흐름과 역할, 내장의 생김과 역할 그리고 뼈의 정밀한 모습 중 가장 확실한 것은 풍장의 습속에 의하여 들에 던져진 시체들이 살이 썩어 떨어져서 남는 그 백골에 의한 골격일 뿐이었다.
'골격은 나도 알아. 하나 내가 정녕 꼭 보고 싶은 것은 아직도 인간의 숨이 남아 있는 인간의 내장이야.'
날이 밝아오는 닭울음 소리를 들으며 허준은 다시 한번 유의태가 장담한 일간이라 이름 대어 말한 그 날이 어느 날일지 애태웠다.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니 조바심칠 것 없네. 부조의 산소나 한번 돌아보고 온댔으니 오늘낼 돌아올 때도 됐어."
병산에서의 피곤한 하루해를 끝내고 돌아오자 안광익과 느긋이 반주를 즐기던 김민세가 껄껄 웃었다. 자나깨나 이젠 솔선해 의업에 정진하는 허준의 모습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궁금해하는 유의태의 소식이 온 건 다음 날 해질녘이었다.
유의태가 데리고 떠난 상화가 혼자 돌아왔고 그 상화는 궁금히 여기는 김민세와 안광익에게 인사를 마친 후 금시 유의태가 전하는 것이라 하여 서찰 하나를 허준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허준 전이란 간단한 그 석 자의 됫장에 자신의 이름도 적지 않은 그 봉함은 그러나 예견했던 서찰이 아니라 한 장의 커다란 그리고 꽤 상세한 지도로 '천황산 시례빙곡'이란 일곱 자만 지도 위에 간단히 적힌 것이었다.
"천황산이 어디며 이 시례빙곡이란 또 어딘가?"
허준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그제야 상화가 갑자기 세상에 그런 신기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며 엊그제 보고 온 그 천황산 시례빙곡의 모습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늘어놓기 시작했다.
허준은 의아해졌다. 그건 도시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말복을 며칠 앞둔 이 절기에도 그 산속은 온통 얼음이 정정 얼고 있는 믿지 못할 비경이라며 상화가 사뭇 흥분하는 투였다.
"이 복더위 속에 얼음이 정정 얼고 있는 얼음골이라니. 핫핫 ... 네가 꿈이라도 꾸고 온 게 아닌가?"
곁에서 듣고 있던 안광익이 반농담으로 물었으나 제 눈으로 직접 보고 그 얼음 조각을 입안에 깨물어보기도 했다며 상화가 우겼다.
여름에 얼음이 어는 계곡-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안광익과 허준과 김민세를 향해 극구 우기는 상화의 얘기도 점차 사실 같았다.
밀양 경내라 하나 유의태와 주파한 노정은 가지산 따라 석남재 골짜기를 택해서였는데 주변 경개가 기괴하고 수려한 것은 그렇다 치고 그 계곡을 따라 다다른 천황산 중턱 위엔 눈부신 백색 바위가 병풍처럼 이어졌으며 그 골짜기 속은 마치 귀기 같은 냉기가 불어오는데 비 오듯이 흐르던 땀이 금시 말라붙었으며 골짜기 속 널브러진 바위 틈새마다 서너 뼘 아래 얼음이 뒤덮여 있으며 내려올 때 들어본 석남사 여승의 말로는 그 얼음들이 오히려 겨울과 봄철에는 없다가 일기가 더워지면서 얼음 골짜기로 바뀌는데 다시 그 얼음들은 처서가 와야만 녹기 시작하는 도통 세상 절기와는 거꾸로 가는 희한한 골짜기라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구먼!"
안광익이 다시 중얼거렸고 김민세가 물었다.
"그래 그 천황산 골짜기에 유의원은 왜 찾아갔던가. 예선 부조의 산소나 한 바퀴 돌아보고 온다며 떠났던 사람이."
"소인이야 그냥 챙겨주시는 짐만 지고 갔었습니다."
"무슨 짐을?"
"하도 꽁꽁 묶어서 내용까지는 알 수 없고 단단하고 무거운 푼수로는 쇠붙이며 여러 가지 연장들 같았습니다."
"여러 가지 연장? 그 산속에 연장은 무엇에 쓰고자?"
"소인 짐작이 연장 같았다는 얘기고 속은 풀어보지 않았습니다. 암튼 허의원더러 3, 4일 일용할 식량을 싸 들고 그곳으로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그 얼음 골짜기로?"
"예, 병사 일이 바빠도 반드시 오라 하시면서 도착하는 날로 내일 모레 글피 보름날을 넘기지 말라 다짐을 두십디다."
"예서 밀양이 길이 꽤 되잖는가. 사흘 말미라면 내일 당장 길을 떠나오라는 말 같으이."
"왜 부르신다든가. 그런 말씀은 아니 계셨던가?"
"그랬소. 가시는 동안에도 일체 아무 말씀도 아니 계셨으니."
"갑자기 멀리 밀양 땅에 불러내다니."
"하긴 길 나서면 늘 엉뚱한 일이 많던 사람이지. 한여름에 얼음이 언다니 쉬 볼 수 없는 구경이고 하니 갑자기 구경시켜 줄 생각이 난 겐가?"
"병사에 병자들이 뒤밀려 있는데 그런 작은일로 불러내는 호사가는 아니지."
하고 김민세가 허준을 돌아보았다.
"어쩌겠는가?"
"떠나겠습니다. 제 요량으로는 ..."
"뭐 짐작 가는 게 있나?"
"일간 무엇을 보여주시마 하셨사온데 아마도 그 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죽은 사람을 헤쳐보자는 얘기?"
"예."
"그곳에 그대에게 보여주마던 그 죽은 사람이라도 누워 있다 그런 얘긴가?"
얼른 상화가 끼어들었다.
"산속이 온통 섬뜩한 냉기가 떠도는 곳올시다. 죽은 송장도 있을 법하지요.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고 수백 원귀들이 몰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병사의 급한 병자들을 대충 본 후에 내일이라도 떠나겠습니다."
"쉬 구경할 수 없는 곳인데 나도 동행을 하리."
"나도 가보고 싶구먼!"
하고 김민세가 말하며 유의태가 그려 보낸 지관들의 묘혈도 같은 그 지도를 다시 집어 들었다.
허준 일행이 산음을 떠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날이 가물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을 유의태의 몫까지 합친 네 사람의 나흘치 식량을 둘로 나누어 허준과 안광익이 나누어졌는데 그건 무거운 짐이 아니었으나 10리도 지나지 않아 등줄기는 땀이 비 오듯 했다.
그 숨 막힐 듯한 더위 속에서 그러나 허준은 이 한여름에 얼음이 꽝꽝 얼어 있다는 그 천황산 비경보다 유의태가 부른 이유가 틀림없이 자신이 소망하던 인간을 해부해보는 갈망해 마지않던 기회라 믿으며 긴장과 기대에 가슴이 벅차도록 들뜨는 걸 어쩔 수 없었다.
3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본다!'
어찌 꿈엔들 기대했으랴. 의원으로서 절실하게 열망했던 인체 해부의 기회가 이토록 가까운 시일 안에 자신에게 닥쳐오리라는 것을 ...
여자일지 남자일지 소년일지 늙은이일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유의태는 호언했었다.
무덤에 묻히어 이미 여러 날이 경과한 부취나고 오장육부가 졸아든 그런 사체야 어찌 배움에 도움이 되리요 하고.
혈행이 아직 생생하게 관류하는 인간의 몸.
살인이라는 범법이 아니고서는 방금 목숨을 거둔 그런 사체를 과연 어디에서 만나볼 수 있으랴 의문을 지니면서도 그 장담하는 이가 유의태였음에서 허준은 유의태의 장담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을 천금을 주고 살 수는 있되 그 산목숨을 해부한다는 행위만은 만금을 주고도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을 주선하는 이가 유의태인 것이다.
생사경계를 오락가락하는 무수한 중병자들을 조석으로 다루는 유의태가 의약으로는 도저히 구치할 수 없는 막다른 생명 하나를 뒤에 남는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아주리라며 죽어가는 목숨 하나를 만금을 주고 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월 모시에 죽을 것을 약속한 생명을 이 세상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손가 ... 추측은 허준의 머릿속에서만 맴돈게 아니었다.
허준을 불러들이는 장소가 한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특이한 장소이기에 동행해오는 김민세도 안광익도 유의태의 초대를 반드시 인체 해부와 연결 짓는 눈치였다.
"이 복중에 단지 자연의 신비한 현상이나 구경하라고 먼길을 불러들이도록 유의태는 호사가가 아니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김민세가 재차 물었을 때,
"사람은 부술을 잠시 하루 한나절 헤쳐본대서 그 몸속의 구석구석을 다 들여다볼 순 없어. 첫째 목숨이 떨어진 몸뚱이가 이 염천에선 하루도 못 가 썩네. 그걸 감안하여 그 사람은 이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시례빙곡을 찾아낸 게 틀림없어. 아마도 병자는 이 여름을 못 넘길 중한 병자일 터이고!"
'... 오는 보름날 밤.' 하고 유의태는 분명 시한을 두었었다.
그렇다면 유의태에게 죽음을 약속한 그 생명은 이미 목숨을 떨구었는지도 모른다.
자살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목을 매는 방법도 있을 것이며 치사량이 넘는 음독의 방법 또 촌철로 급소를 자해하는 방법 등 ...
그러나 지금 허준의 머릿속에 비치고 있는 영상은 너무도 섬뜩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목숨을 향해 구원의 손을 뻗치기는커녕 빈사의 생명이 죽음의 고비를 맞아 마지막 몸부림치는 그 단말마적인 광경을 냉엄하게 지켜보는 유의태의 모습이 연상되어 허준의 등줄기엔 자꾸만 식은땀이 흘렀다.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바라는 품성이 아니기에 자식과도 조강지처와도 인연을 끊은 유의태가 아니던가?
지리를 물어물어 점차 천황산이 다가올수록 허준의 뇌리에는 유의태의 얼음장 같은 눈빛이 다가와서 떨어지지 않았다.
4
밀양 부내로부터 60리. 밀양과 울주의 군계를 이룬 천황산의 수려한 능선을 발견한 것은 일행이 산음을 떠나온 다음 날 밤중이었다.
그러나 시각도 시각이려니와 길이 초행인 일행은 쉬 빙곡을 찾지 못한채 오히려 지름길을 찾는다는 것이 가지산 줄기를 가로질려 석남재를 방황하다가 표충사로 찾아들고서야 밤중에 깨어나온 사미승으로부터 얼음골의 정확한 위치를 전해 듣고 사자평 고원을 타 넘었다.
얼음골에 이른 시각이 별자리로 어림잡아 오경. 마치 백골의 더미인 양 유난히도 흰 바위가 널브러진 골짜기는 과연 들어서면서부터 섬뜩한 냉기가 끼쳐왔고 그것은 산속 새벽의 한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미 서천 높이 뜬 달빛이 가파른 계곡의 동쪽 비탈을 파랗게 비추고 맞은편 달그림자 속에선 부엉이 소리가 마치 버려진 아이의 피를 토하듯 한 울음소리로 심산의 정적을 강조하고 있었다.
"오기는 제대로 온 듯하오만 집도 절도 보이지 않으니 이 사람이 어디쯤에서 기다리는지 짐작할 길이 없구먼."
발밑으로 오싹오싹 기어오르는 냉기에 자꾸만 옷깃을 여미던 김민세가 입을 열었다.
"일기는 말짱한데 저건 안개인가 구름인가?"
하고 안광익이 골짜기 위쪽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과연 골짜기를 타고 어디서부터 피어나는지 자욱한 안개가 감돌며 다가오고 있었다.
"입구가 여긴 듯하니 좀 더 올라보시지요."
터져나간 신들메를 다시 죄어 묶으며 허준이 말했다.
다가온 안개가 세 사람을 감싸고 흐르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속 같다가 문득 눈앞이 다시 트이고 그 자욱한 안개의 물방울들이 허준의 이마와 목덜미에 생물처럼 휘감겼다.
"정말 기이한 장소군."
안개 속에서 김민세의 소리가 났을 때였다.
"저기 불빛이 있습니다."
허준이 가리키는 골짜기 안에 횃불 하나가 마치 귀화처럼 소리 없이 타고 있었다.
"지세로 보아 암벽 사이에 암자라도 하나 있는 게로군."
안광익의 대꾸였다.
그러나 횃불을 앞세워 세 사람이 널브러진 바위틈을 비집으며 머리 위의 횃불을 찾아 올랐을 때 그곳은 두어 채 초가집이라도 들어앉을 듯한 거대한 바위굴 입구였고 암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눈길을 끈 횃불은 굴 입구에 타고 있었고 또 다른 횃불 두 개가 굴벽에 꽂혀 물기가 번들거리는 암벽을 비추고 그 아래 한 사내가 느긋이 왕골자리를 깔고 그 위에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누워 있네."
"스승님올시다."
안광익의 말에 허준이 대답했다.
"사람이 장난이 우심하구먼!"
그것이 한눈에 유의태임을 알아챈 김민세가 웃음을 물며 앞장서 다가가다 흠칫 섰다.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피 냄새였다.
허준도 안광익도 그 냄새를 맡고 걸음을 세웠다.
누워 있는 것은 분명 유의태였다.
그리고 그 모습, 마치 술 취한 자가 제집 안방에 드러눕듯 두 팔 벌려 큰 대자로 누운 그 왼손이 대야에 담겼는데 그 손목이 담긴 대야가 온통 피였다.
김민세가 유의태를 부둥켜 일으키며 소리쳤다.
"이보시게! 이보시게!"
"스승님!"
허준도 뛰어들며 외쳤고 안광익이 물통 속에 담긴 유의태의 피투성이의 손을 잡아챘다.
예리한 칼날이 손목의 동맥을 잘라낸 모진 상처 자국이 보였고 피는 아직도 배어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자진했어!"
김민세가 숨이 떨어진 그러나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유의태의 시체에 눈을 부릅떴다.
식지 않은 건 체온뿐이 아니었다. 체내의 피를 쉬 뽑아내기 위하여 대야에 담은 물 또한 아직 다 식지 않은 채 따뜻했다.
"미쳤어!"
안광익이 일변 유의태의 허리춤에 손을 넣었으나 멎어 있는 심장에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허준이 절규하며 유의태의 가슴 위에 무너졌다.
자결한 유의태의 의도는 곧 알게 됐다. 유의태의 머리맡에는 그가 미리 준비해온 물건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겉에 먹 점 하나도 찍지 않은 두툼한 서찰은 유서였고 상화에게 지어오게 했다는 상자 속에는 유의태가 직접 챙겨온 부술에 사용할 허준이 오늘날까지 듣도 보도 못한 작고 가느다란 톱 그리고 십여 가지가 넘는 여러 형태의 칼들이 어린아이의 기저귀와 같은 헝겊에 일일이 싸져 있었다. 그밖에 치험록이라 적은 네 권의 두터운 책 그리고 장부도와 12경락과 침혈을 그린 신체도 외에 팔뚝만한 황초가 십여 개가 들어 있었다.
"이미 늦었어. 아마도 우리가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는 걸 보고서야 일을 저지른 듯하이."
죽음의 고통을 이기려는 의지였을지 아직도 허공을 카악 지켜보고 있는 유의태의 눈꺼풀을 조용히 쓸어주며 안광익이 탄식했다.
김민세가 유의태가 남긴 봉서의 알맹이를 꺼내 읽다 말고 소스라치듯 허준을 돌아보았다.
"읽게. 그대에게 보내는 것이네."
허준이 떨리는 손으로 유의태의 서찰을 받아들었다.
낯익은 글자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날 병사에서 병자들의 처방을 휘갈겨쓴 그 글자들과는 다른 한 자 한 자 혼과 기백이 담긴 힘이 어린 행서체의 정자들이었다.
"허준은 보아라. 내 죽음을 누구보다 서러워할 사람이 너임을 알고 유의태는 허준에게 이 글을 쓰노라!"
허준의 눈이 붉어 왔다. 눈을 부릅뜨며 허준은 계속 읽어갔다.
"나는 내게 닥쳐오는 죽음을 보았고 기꺼이 그 죽음을 맞이하려 했을 뿐 ... 그건 모든 생명의 예정된 길이라 어찌 서러운 일만이리."
57년 전에 태어난 갓난아이가 바로 이 유의태의 모습이요 57년이 지난 오늘 죽어가는 자가 또한 이 늙고 병든 유의태라는 생사윤회의 법칙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겪어야 할 죽음은 곧 태어나던 때 이미 결정된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 아니리.
운다 하여 어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운명일 것이리요. 그 운명이라는 것.
소리 없이 서서히 어김없이 닥치는 그 죽음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더니라.
60평생을 살다 가는 나 같은 자에게야 더 이상 무슨 여한이 있을까마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로부터 이 세상에 유용한 젊은이, 평생 타인을 위해 덕을 쌓은 귀한 인물, 평생 호강을 모르고 고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측은한 인생까지 마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만병의 정체를 캐고 밝혀서 남을 해치고 악업을 일삼는 자가 아니거든 그들로 하여금 천수가 다하는 날까지 무병하게 오래오래 생명을 지켜줄 방법은 없을까 하고.
이는 의원이 된 자의 본분이요 열 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소망이 아니리. 하나 나 또한 내 몸속에 불치의 병을 지니게 되었으니 병과 죽음의 정체를 캐낼 여력이 이미 없다. 이에 내 생전의 소망을 너에게 의탁하여 나의 문도 허준이가 세상의 어떤 병고도 마침내 구원할 만병통치의 의원이 되기를 빌며 병든 몸이나마 너 허준에게 주노라.
이에 너 허준은 명심하라. 염천 속에서 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곧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어 사람의 오장과 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똑똑히 보고 확인하고 사람의 몸속에 퍼진 삼백예순다섯 마디의 뼈가 얽히는 이치와 머리와 손끝과 발끝까지 퍼진 열두 경락과 요소를 살피어 그로써 네 정진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노라.
읽기를 마친 허준은 복받치는 감동과 비통함이 다시 유의태에게 엎드려 울부짖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사오리까. 버려진 시체가 있다 하기 기대한 것이옵지 어찌 그것이 스승님인 줄 알았으 ... 리 ... 까."
무너진 허준의 손에서 안광익이 유의태의 유서를 뽑아 들고 읽기 시작했다. 허준은 가슴이 터질 듯했다.
'유의태! 유의태!'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스승의 손목을 움켜쥐고 허준은 숨이 막힐 듯했다.
지난날 그가 아들 도지에게 말했던 비인부전이라는 말이 이제야 새삼 허준의 가슴 복판에 마치 불덩이처럼 되살아나 뜨겁게 뜨겁게 담금질하고 있었다. 배워서 흉내 내는 재주도 아니며 한 권 책 속에 담긴 지식도 아니다. 스승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죽여 자기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5
골짜기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다.
굴 밖 건너 가파른 비탈에 돌출한 낙락장송의 늘어진 가지들이 생물의 머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날이 새는 바람일세. 마냥 이러고 있을 수 없어."
안광익이 동맥이 잘려나간 유의태의 손목에 지혈의 묶음질을 마치며 말했다.
허준은 보고 있었다.
유의태의 사체에서 체온이 사라지고 사후 경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고인의 뜻이 확연하거늘 더 이상 망설이지 말게."
유의태의 머리맡에 죽은 이가 손수 마련해놓은 해부에 소용되는 연장들을 벌여놓던 김민세가 또 한 번 채근했다.
"이 사람이 굳이 이곳에 와서 숨을 거둔 의기를 헛되이 하려는 건가!"
"하오나 ..."
"작은 인정에 얽매인 운운 말게!"
안광익의 눈도 다그치듯 허준을 향해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비록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보기를 열망하오나 그렇기로 제 손으로 어찌 스승님의 몸을 갈가리 칼질을 하오리까. 난 못하오."
"해야 하리!"
"이 사람이 지금 그대가 느끼는 그런 작은 인정으로 죽었던가? 이 사람은 그대에게 마지막 자기 몸으로 그대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려 한 걸세. 그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을 외면할 셈인가!"
"그것은 아옵니다. 그러나 소인은 ..."
"지금 이 자린 그대가 소인이라 스스로 낮추어 부를 사람도 없으며 자네는 유의태와의 인연에만 얽힌 단순한 문도가 아니네. 그대가 이곳에 불려온 것은 유의태가 그대를 가장 촉망하는 의원으로 선택한 때문일세. 모르시겠는가?"
"그 말도 아옵니다. 하오나 ..."
김민세의 다음 말이 허준의 말허리를 끊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대는 특별히 초대받은 사람일세. 자기 자식과도 비교하여 특별히 선택된 사람."
김민세의 손이 허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난 죽은 이가 생전에 즐겨 뇌던 한마디를 기억하네. 비인부전이란 그 말, 비기자부전이란 그 말, 분명 그대도 들어본 말일 터."
"기억은 하옵니다. 하오나 ..."
"유의태 이 사람은 자신의 소신대로 자기가 지닌 마지막 가진 것을 특히 그대를 골라 물려준 걸세. 자기의 목숨, 자기의 몸뚱이를."
"그것은 그대의 의원으로서 자질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일세."
"소인도 이제야 그 뜨거운 기대를 절절히 느끼옵니다. 하나 ..."
"안다면 남은 뒷얘길랑 일을 마친 뒤에 하여도 늦지 않으리."
허준은 딴 때 없이 강한 김민세의 그 눈빛을 보았다.
안광익이 유의태가 준비한 장부도를 그린 족자를 굴 벽에 나뭇가지를 꽂아 걸고 그 눈빛도 허준에게 향해왔다.
"죽은 이의 뜻을 저버리지 말게. 어찌 이것이 소소한 인정에서 비롯된 일이리요. 보다 큰 뜻이 아니어든 어찌 이런 흉낸들 내리. 이 사람의 죽음은 작게는 그대에게, 크게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베푸는 은혜일세."
"그대의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갈라 의원으로서의 그대의 오랜 숙계를 풀고 그로써 그대의 의술이 더욱 정통하고 그대의 손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병자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면 이 사람의 바람은 그것이었으리. 그걸 안다면 스승의 배를 가르고 몸 안을 헤쳐보는 고대의 행동이 어찌 잔인한 행동이라고만 하리요."
허준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넘치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날이 새기 시작했어."
해부 연장을 하나하나 점검하던 안광익이 허준에게 또 한 번 소리쳤다.
이윽고 허준의 입이 열렸다.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
"그렇고말고."
김민세가 허준에게 강하게 끄덕였다.
"그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대가 사모하던 스승 유의태의 몸을 가르는 것이 아니요, 이 사람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이의 몸속을 들여다본다 여겨야 하리."
허준의 눈에서 눈물이 메말라갔다. 눈앞에 유의태의 백랍처럼 창백한 사체가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말을 걸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 모든 병든 이들을 대신한 죽음 ...'
"칼을 잡게."
허준이 마침내 시선을 들었다.
"그렇게 하오리다."
"그리고 마음을 먹게."
"... 마음을?"
"칼을 드는 것은 사람의 몸속 생김새를 알고 그 속에 찾아드는 어떤 작은 병도 낫우리라는 결심이노라."
"명심하오리다."
"그렇게 하여야만 이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요. 유의태는 영원히 사는 것이노라."
"... 명심하오리다."
잠길 듯하던 허준의 말꼬리가 굳게 악물어졌다.
이윽고 그 허준의 어깨에서 손아귀를 푼 김민세가 유의태에게 합장했다.
"극락왕생하시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안광익도 문득 젖은 눈을 들었다. 그러고 지그시 유의태를 바라보는 것으로 친구와의 이승에서의 작별을 마친 후 유의태의 피가 담긴 물통을 들고 굴 밖으로 나갔다.
허준이 유의태의 시신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지혈이 된 스승의 손을 공손히 잡아 염원했다.
'이 세상 병고에 시달리는 모든 이의 가슴에 스승님이 영원히 살길.'
안광익이 물통에 새 물을 담아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김민세도 허준의 곁에 무릎 굽혀 앉으며 자신의 승복을 벗어 친구의 얼굴을 덮은 다음 연장을 담은 함을 새워 그 속으로 촛불 두 개를 옮겼다.
바람에 일렁이던 촛불들이 불꽃을 곧추세우면 그 환한 빛을 유의태의 시신 위에 비췄다.
안광익이 허준의 곁에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대 또한 작은 미물이나 가축의 속은 갈라보았을 것이네만 난 일차 수의를 입었던 송장들 몇은 갈라본 적이 있네. 혹 손이 막히면 나도 곁에서 도우리."
'스승님이 영원히 사는 길.'
바람소리가 일고 있었다.
첫햇살을 보고 울어대는지 뻐꾸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허준의 손이 마침내 스승 유의태의 옷자락의 매듭을 하나둘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예도를 쥔 허준의 손끝은 이미 떨리지 않았다.
얼음골에서의 사흘이 지나갔다.
그 첫날은 함께 밤을 새운 뒤 김민세는 굴 안에 두 사람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그날 밤 관재를 지고 나타나 관을 만들어 굴 안에 넣어준 뒤 굴 밖에 나가 끝도 없는 송불을 허공에 보내며 목탁을 두드려댔다.
이틀째 밤.
허준의 곁을 떠난 안광익이 저 아래 계곡에 요기를 차려놨노라, 잠시 쉬어 계속할 것을 권했으나 허준은 굴 밖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고 그 허준에게 김민세도 안광익도 굳이 요기를 할 것을 채근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황혼녘 허준이 혼자 유의태의 시신을 수습할 제에야 두 사람이 굴속으로 들어왔다.
허준은 웃옷을 모두 벗고 있었다.
자기 옷을 벗어 유의태의 시신을 덮어 드린 것이다.
안광익이 자기의 옷을 벗어 그 허준을 감쌌고 보고 있던 김민세가 조용하게 물었다.
"다 마쳤소?"
"..."
"..."
"마쳤사옵니다."
김민세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보았소?"
"... 사람을 보았습니다."
"..."
"겉으로만 보던 사람이 아닌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람이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 애썼느니."
김민세가 허준을 쓸어안았다. 순간 허준이 유의태의 관 앞에 꿇어앉으며 하늘을 우러렀다.
"천지신명과 스승님은 제 맹세를 들어주소서. 만일 이 허준이 베풀어 주신 스승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배반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
"..."
"또 이 허준이 의원이 되는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들을 구하는 데 게을리하거나 약과 침을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저 ... 를 벌 ... 하소 ... 서. 이 고마 ... 움 ... 맹세 ... 코 ... 영원히 잊지 않으 ... 오리 ... 다."
말을 마친 허준이 이제야 유의태의 관을 잡고 몸부림쳐 통곡했다.
12. 내의원
1
"애비 아적 안 일어났느냐?"
허준이 밀양 천황산에서 스승 유의태의 유언을 실천하고 돌아온 지 나흘째.
해가 기울었건만 오늘도 자기 방에서 한마디 기척도 없는 아들의 심기가 궁금하여 손씨가 며느리에게 물었다.
아직도 젊디젊은 부부다.
사나흘씩 헤어져 있고 보면 없던 정분도 냄직하건마는 돌아온 후 '혼자 있게 해주오.' 한 아들의 당부를 좇아 자기 방으로 건너와 있는 며느리가 손씨는 안타까웠다.
"아직 너무도 혼곤히 자고 있습니다."
며느리의 눈가에 웃음이 잡혀 있자 손씨는 혀 차는 소리를 낼 뻔했다. 아무리 서로가 믿어 의심치 않는 부부간이기로 수삼 일 집 비우고 돌아온 남편에게 궁금증조차 없느냐 싶어서였다.
"대체 밀양까지 가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돌아와서는 사흘씩 나흘씩 잠만 잔단 말이냐."
"오늘은 일어나 나오겠지요."
"사람이 드나드는 기척도 모르고 자기만 해?"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워 있고 싶어서 누워 있을 것이다. 게으른 남자가 아닌 걸 안다. 그래서 작은 기척 한 번 더 내보다가 말없이 돌아 나왔을 뿐이다.
"어디 몸이나 탈 난 눈치는 아니더냐?"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삼복더위 속에 밥 한 끼 청하지 않고 잠을 자누. 내 잠시 들어갔다 오마. 뭐 가지고 들어갈 게 없느냐?"
"... 없습니다."
손씨가 부엌으로 나섰다.
"애비야 애비야."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났을 때 허준은 깨어 있었다.
"원 방문조차 첩첩이 닫고."
하며 들어온 손씨는 뜻밖에 아들이 깨어 있는 눈을 보자 오히려 당황했다.
"아니 깨 있었더냐?"
"예."
하고 아들이 대답했다.
그 방문 밖에 자지러질 듯이 장난 웃음을 문 남매가 닥쳤고 뒤따라 아내의 얼굴이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아부지 깼다! 와아, 아부지 수염 봐라."
하고 숙영이가 문지방에 매달리며 허준에게 웃었다.
허준은 어머니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 많이 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걱정이야 에미가 더 했지. 혹 갔던 일에 몹쓸 일이라도 있었던 것 아니냐?"
"몹쓸 일이라니요?"
"너는 제 얼굴도 볼 수 없어 모르는 모양이다만 바짝 야위었어. 눈빛부터가 전과 같지 않구."
-눈빛이 다르다? 다를지도 모른다.
지금 자기의 이 손은 무엇을 한 손인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세상 그 누구도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을 한 손이다.
그 피! 온몸에 달라붙던 그 스승의 피!
떠들썩한 남매를 말리며 방에 들어온 김씨도 딴 때 없이 무거운 눈빛의 남편을 건너보았다.
순간 허준의 입에선 변명 아닌 예상치 않은 말이 독백처럼 나왔다.
"사람이란 정말 대단한 것 올시다. 상상도 할 수 없도록 사람은 위대한 존재올시다."
"무슨 일이 있었사오니까?"
"무슨 소린지 난 ..."
허준의 대답은 또 엉뚱했다.
"세상에 사람처럼 크나큰 존재가 없습니다."
"대체 누구를 만났기에?"
허준의 퀭한 눈이 잠시 허공을 쏘아보았다.
"... 좁쌀처럼 잔망스런 인간도 많을 것이요 평생 뜻을 품지도 세우지도 못하는 인간도 있을 것이오. 일차 뜻을 세운 인간은 ..."
"누구 얘기를 하고 계시오니까?"
"우리가 알아서는 아니 되는 일이냐?"
허준이 잠시 어머니와 아내를 건너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무어라고! 설마 ...?"
"사실 올시다."
"언제오니까!"
"그분이 왜!"
"자진했사옵니다."
고부가 허준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자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씀이오니까?"
"나를 위하여 ..."
"예?"
"이 허준을 위하여. 내 의술이 더욱 정통해질 기회를 주고자 ... 짐을 졌사옵니다. 너무나 커다란 짐을, 뜻이 나약한 저에게는 너무도 무거운 짐을."
"소상히 말씀해주소서. 너무도 궁금하옵니다."
"유의원의 정정한 모습을 뵌 것이 불과 바로 며칠 전이어늘 ..."
"꿈결 같은 일이옵니다. 제가 보고 겪은 일 소자의 입으로는 차마 말하지 못하옵니다. 오로지 한마디 그분이 아니라면 영원히 꿈꾸지 못했을 너무도 귀한 체험을 했다는 그 말 한마디 외 지금일랑 더는 묻지 말아주소서."
"...?"
"그 은혜 ... 열 번 다시 태어나도 또 의원이 되리라는 그 높은 뜻 저 또한 이어받아 명심하고 명심할 뿐. 언젠가 이번 길에 제게 있었던 일 조용히 말씀드릴 날이 있사오리다."
"그렇거든 네가 입을 열기까지 더 묻지 않으마. 하나 유의원의 장사는?"
"제 손으로 치렀습니다, 밀양 천황산 양지바른 곳에."
문득 허준의 목이 잠겼다. 나흘 전 천황산을 떠나올 때 허준은 한사코 유의태의 관을 산음으로 모시고 오려 했었다.
하나 김민세가 말렸다. 안광익도 반대한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
얼마 전 안점산에 찾아와 스스로 자신의 묏자리를 보러 다닌다 얘기하며 유의태가 지정한 무덤 자리는 그런 소박한 장소였음도 두 사람에게 들었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부는 양지바른 언덕, 생전의 그의 바람이 그러했다 하매 고제야 허준은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천황산 그 이름 없는 언덕이 굳이 부조가 묻힌 산음 땅보단 유의태에게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여겼고 언젠가 도지가 찾고자 하면 쉬 찾을 수 있도록 스승이 묻힌 지형을 뇌리에 새기고 돌아왔었다.
생전에 그가 세상에 베푼 인술에 비하면 그 무덤은 너무나 적적한지 모르나 생전의 유의태를 아는 그로서는 온산 가득 만장과 조객이 뒤덮인 호사스러운 장례보다 천황산의 조용한 장례가 고인이 바라는 바라고 느꼈다.
일차 안점산으로 돌아갔던 김민세가 산음 허준의 집으로 다시 나타난 것은 약속대로 열흘 후였다.
유의태를 묻고 산음으로 돌아오는 귀로에서 김민세가 허준에게 강경하게 권했던 것이다.
"의업에 바탕이 될 세상 구경이라니요?"
처음 허준이 그 말뜻을 못 알아듣고 반문하자 안광익도 기다렸다는 듯이 허준에게 권했다.
"춘하추동 계절을 따라 각도의 특산 약재가 무엇이며 향약이라 일컫는 각 지방 전래의 처방도 알아보고."
"그보다 중요한 까닭이 또 있네. 그것은 넓지도 않은 내 땅, 내가 죽도록 살아야 할 이 땅에, 조선팔도 안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 구경을 해 두라는 것일세."
"이 땅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
"그밖에 소득이 또 있으리. 동서의 지형에 따라 물맛이 다르고 남북의 기후가 다르니 그 산줄기와 강변과 곳곳에 사는 내 나라 사람들의 인심 풍속은 어떠한지, 그 민생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겪으며 세상의 견문을 넓히는 일 또한 장차 세상을 넓게 살아야 할 사람의 빠뜨릴 수 없는 공부로세."
"진실로 소인도 원하는 바올시다마는."
"마음만 정해지면 앞장일랑 내가 서리. 한 일 년 식구들과 헤어져 살 수 있겠는가?"
"일 년이오니까?"
절간을 찾아 잠을 자고 인근 마을에 내려가 의술을 베풀어 의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덧붙자 허준은 가족과의 상의도 없이 결심을 하였다.
그렇게 길을 떠난 허준이 멀리 함경도 경원 땅에서 내의원 취재 소식을 들은 것은 일 년 작정한 그의 여정에 아홉 달을 넘긴 이듬해 봄이었다.
허준은 그 길로 한양으로 남하, 취재에 응했다.
그 허준의 태도는 딴 때 없이 조용했다.
김민세와의 9개월의 동고동락의 여행에서 세상 물정에 대한 끊임없는 토구가 그가 아는 의술에 관한 지식 외 인간사에 관한 두텁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시켜 주었던 것이다.
허준은 등방했다. 성적은 수석이었다.
그때 허준의 나이 스물아홉, 선조 8년 4월의 일이었다.
2
내의원이란 태조 초년에 설치한 전의감을 개칭한 것으로 임금이 복용하는 어약화제를 관장하여 궐내에서도 가장 조용한 예문관 서쪽에 위치한다.
직책들이 임금과 왕실의 건강을 살피고 지키는 막중한 것이매 일명 내국이라고도 부르는 이 내의원의 진용 또한 삼엄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시임 의정이나 전임 의정 중의 정 1품 한 사람이 맡으며 그 아래에 종1품 또는 정2품의 제조 한 사람이 있고 다시 그 아래 정 3품의 당상으로 부제조를 삼는데 이 제조는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가 겸임한다.
이 세 정식 문관을 정점으로 실무의 서열과 분담에 따라 내의원정(정3품), 첨정(종4품), 판관(종5품), 주부(종6품) 등이 1명씩이며 그 밑에 직장(종7품) 3명, 봉사(정8품) 2명, 부봉사(정9품) 2명, 참봉(종9품) 1명과 차비대령 할 의녀 10명과 종약서원과 도약사령이 각각 2명씩 소속한다.
이 진용이 매일 번을 맡되 도제조는 5일마다 의관들을 인솔하고 계사로 임금을 비롯 각궁에 문안을 아뢴다.
의원으로서 취재에 뽑힌 자는 이 내의원 외에 일반 서민 백성들의 의약과 치료를 전담하는 궐외의 혜민서가 있으나 갓 취재에 뽑힌 허준은 확정된 부서를 지시받지 못하고 일차 내의원에 속했다.
그러나 그가 취재의 수석합격자임에서 18품계 제일 꼴찌인 종9품에서 두 품계를 올라 뛴 종8품 봉사직에 제수받았고 구임원으로 지정되었다.
구임원이란 특정한 기술이나 경험 또는 자격을 인정받은 인물에게 함부로 그 보직의 이동을 금하고 그 임기에 관계 없이 재직을 보장하는 취재나 과거의 최고 득점자에게만 해당되는 특혜인 것이다.
그리고 춘하추동 4절기로 나누어 지급하는 종8품 허준의 춘기의 녹은 쌀과 보리 수수가 넉 섬, 콩 두 섬, 포 한 필, 저화 두 장이었다.
그 저화는 조선조의 지폐로서 때의 가치가 저화 한 장에 쌀 닷 되를 바꾸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나 어의의 길을 별러 8년 만에 도달한 길이요 그 첫 녹봉이라는 데서 허준 일가의 감격은 컸다.
밀양 천황산에서의 유의태의 자결 이후의 지난 1년, 그 허준을 데리고 함께 전국을 유력하던 김민세가 허준의 등방을 축하하며 아들 길상이와 함께 멀리 산음으로부터의 이삿짐을 나누어지고 상경했고 여축이 없는 허준 일가가 도성 밖 애고개와 만리재 중간의 황량한 언덕배기에 삼개 선군들이 살다 버린 움막집을 내 집으로 정하자 그들 부자도 굳이 함께 남아 허준과 함께 강변 갈대를 꺾어지고 와 일변 돌과 흙을 발라 벽을 두르고 내려앉은 구들장을 세우고 토담을 쌓아 올리는 등 마치 친자식의 분가나 돕듯이 도왔던 것이다.
그 여름 한 철 지리한 장마가 잇따랐고 빗발이 굵어질 적마다 애고개 쪽에서 황황 흘러내리는 흙탕물들이 허준의 집 토담을 허물고 마당 한 귀퉁이도 쓸어나갔으나 그 여름이 지나자 그런대로 허준의 집도 사람 사는 훈기가 감돌았다.
노모와 아내가 날이면 날마다 돌을 고르고 언덕을 다져 손뼘만한 밭뙈기들이 개울 주변으로 생겨났고 하절의 녹봉의 반으로 삼개 조선소에서 쓰다 남은 목재를 사서 손을 본 것이 드디어 아래윗간 버젓한 방 모양이 둘이 나왔고 잿간 곁으로도 겸이의 공부방을 하나 달아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초가을.
봄철 내 산비탈에서 옮겨온 돌배나무며 감나무 대추나무 등이 집 주위에 생생하게 살아올라 해질녘 밥 짓는 연기라도 나무 사이로 피어오를라치면 멀리 길 가는 행인들이 건너보기에 제법 그 허준의 집은 누대를 살아온 집인 양 정감스럽게 비쳤다.
"대궐이 저기다! 대궐 봐라."
상경 반년이나 되어서 새 옷은 못 해 입고 추석빔으로 새 댕기 하나씩을 머리에 묶고 아버지를 따라나선 겸이와 숙영이가 웅장한 남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기가 죽어 있다가 육조 앞 널은 길로 들어서자 전개된 광화문과 그 뒤로 휘황한 대궐 전각을 발견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저쪽에도 대궐 있다!"
내닫는 오라비를 뒤쫓아가던 딸 숙영이도 딴 쪽을 가리키며 뛰었다. 애고개 밤나무숲에 밤도 따러 가고 그 골짜기 바위 밑창에서 가재도 잡는 두 남매에게 유일한 놀이터인 애고개에서 도성은 바로 눈앞이었다.
그 줄줄이 이어간 도성의 성벽과 경고소리를 아침저녁으로 들으면서 '서울구경 서울구경' 하고 아이들이 보챘으나 정작 구경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남대문 칠패(장터)에서 다시 감주와 떡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고 아내는 아이들을 건사하고 일변 소채라도 한 다발 더 일궈 먹을 밭뙈기를 늘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준이 타오는 녹봉은 일가가 근근이 계량이나 하는 게 고작이니 아직은 겸이에게 한철에 쌀보리 서말짜리 서당에 보낼 처지도 못 되었다.
그토록 그리던 내의원.
취재에 오르기만 하면 당장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대는 산음에서나 바라보던 허황스런 꿈이었다.
상감과 왕실의 고귀한 이들의 병을 맡아 그 명예가 하루아침에 달성될 듯이 여긴 것도 착각이었다.
나라 안 저마다 내노라 하는 수재와 준재들이 기라성처럼 모여 저마다 와신상담 자기의 재주를 갈고 벼르며 의원 최고의 영예인 어의의 자리를 넘보는 보이지 않는 암투의 격전장이 내의원이었다.
"저자가 허준일세!"
돌아보지 않아도 하얗게 눈 흘기는 그 질시의 수군거림이 허준의 등뒤에서 늘 들려왔다.
"역대 수석자 중에 동인경 말고 구급방과 부인대전까지 배강했다는 건 저자가 처음이라네."
"... 음 ..."
듣고 있던 상대가 신음했다.
내의원 취재의 과목에서 동인경의 배강(책을 펴놓되 돌아앉아 외우는 것)은 필수과목이다. 그러나 다른 고사서인 창진집 직지방, 구급방, 부인대전, 득효방, 태산집요는 임문이라 하여 외우지 못하면 그 일부를 보고 읽는 것을 허용한다.
"한데 저 허준이란 자가 모두 배강으로 꿰뚫었단 말인가?"
"시관으로 임석해 있던 이공기의 말이니 거짓일 리 없지, 그리고 이건 정예남 그분한테서 나온 얘긴데 지난해 봄 한양 연도에 퍼졌던 소문, 충청도 진천 땅에서 웬 시골 의원이 빈민들의 병을 그냥 돌봐주었단 얘기 ..."
"그 얘긴 나도 알지. 그자의 이름도 허 무엇이었는데!"
"허 무엇이가 아니라 바로 저 허준이 그때의 그자였다네."
"그래!"
"순 미친놈 한 놈이 내의원에 나타난 걸세. 게다가 수석 특혜를 받아 우리보다 3, 4년이나 늦게 들어온 놈이 품계는 맞먹게 8품을 받았으니 앞으로 우리 앞길에 좨나 걸리적거릴 놈이 틀림없어."
"글 잘 읽는 놈이거든 사역원 취재나 보고 역관으로나 풀릴 것이지 어쩌다 저런 놈이 내의원에 들어온 건지."
말끝에 사내가 잇새로 침을 찍 갈겼다.
"저기가 혜민서요."
하고 허준이 우측으로 종로로 꺾이는 길목에서 서소문 쪽으로 선 건물을 가리켰다.
허준의 아내가 남편이 손짓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건물에는 혜민서란 커다란 현판 외에 또 하나 작은 현판에 뛰어난 달필의 글씨로 의약동참이라는 넉 자가 보였다.
"전에는 오가며 지리를 알았는데 한양도 하도 오랜만이라서 ..."
김씨가 행인이 멀어지자 남편에게 말했다.
한양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생각하면 모두 낯익은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은 다시는 못 오리라 여긴 한양거리에 관복 입은 남편과 나란히 서 있다는 감격에 또 다른 감개가 담겨 있었다.
"이편 작은 현판의 글씨가 개국하고 이 나라 최초로 의원 취재의 고시관이던 정도전의 필체요."
"저는 잘 모르는 성함올시다."
"태조를 도와 개국의 일등공신이던 사람이오. 이 도성과 궁궐의 이름들도 그 사람이 짓고 명명했다 하오. 하나 그뒤 그 사람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태종이 역적의 흔적을 모두 없애려 했으나 용케 남아 있는 몇 개의 현판 중의 하나라 하오."
넓은 길을 뛰닫고 있던 두 아이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직처까지 가보려오?"
"그러고 싶습니다."
"가야 대궐 담에 가리어 지붕밖에 보이지 않소만!"
김씨가 두 아이를 손짓해 불렀으나 마침 요란한 벽제소리와 함께 고관의 행차가 길을 가로지르자 남매는 다시 넋을 빼고 그 행차를 구경하다가 행차가 지나자 달려왔다.
허준이 앞장서고 4, 5보 뒤에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가 조용히 따랐다.
오랜만에 일가의 행복한 나들이였다.
3
선조 8년 10월.
허준이 내의원의 일원이 된 지 어언 반년, 궐내는 추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가을빛이 아름답게 물든 조정은 평화롭지 못했다. 전년 7월 당쟁 발생의 씨앗의 한 사람인 김효원이 전랑 자리에 앉음으로써 그를 반대하는 심의겸과의 대립이 1년여에 이르러 마침내 조정을 동서로 붕당케 하는 사건이 표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사태의 심각함과 당쟁의 폐해를 우려한 조정 원로들인 우의정 노수신과 부제학 이이 등이 양파에 대한 조정책으로 양파의 핵심인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심의겸을 개성유수의 외직으로 내보내 사태 수습을 꾀했으나 서로 떠난 지역이 누구는 멀고 누구는 더 가깜다 하여 조정 안의 분위기는 아직도 소란했다.
그러나 조정 안의 그 '대사건'도 출신 신분이 어엿한 잘난 문관들의 세계다.
내의원에 소속하여 6개월. 아직 확실한 보직을 받지 못한 허준은 허구헌날 내의원 안팎 청소와 수목 가꾸기 그리고 궐내 지리, 궐내 법도, 궁중 법도, 그밖에 상감 이하 각궁의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과 종친부에 속한 분들을 대할 때의 예의범절과 궁중에서만 사용되는 용어 익히기에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궁중의 용어에 있어선 허준이 처음 접하는 어렵고 난감한 말들이 많았다.
상감을 비롯 왕비, 세자 그 붙이들에게는 으레 마마가 붙어 '상감마마' '중전마마' '세자마마'였다. 그 마마란 중국에서 건너온 왕족의 남녀에게 붙는 최대 최고의 존칭임도 허준은 알았고 그 '웃전마마'들에게 얽힌 모든 난삽한 표현 또한 새로 배워야 했다.
귀는 이부, 눈은 안정, 눈썹은 안정썹, 눈물은 옥루로-
이마는 액상, 손은 어수 또는 옥수, 손가락은 수지, 발은 족장, 콧물은 비수, 머리는 마리, 여성의 월경은 환경, 방귀는 통기 ...
또 그 육신에 걸치는 물건들 또한 어렵기 그지없는 말들로 옷은 의대, 옷감은 의대차, 바지는 봉지, 옷고름은 대조, 버선은 족건, 이불은 기수, 이불잇은 기수잇, 왕의 신은 치, 땀은 한우. 피는 피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혈로 부르며 오줌은 지, 똥은 매우, 왕과 왕비의 식사는 수라인데 아침은 아침수라, 점심은 점심수라 혹은 낮것이라 부르고 김치는 젖국지, 숟가락은 시저, 젓가락은 저, 약은 탕제.
그밖에 수없이 어려운 표현은 계속되어 '약을 드시다'는 '탕제를 진어하시다', '양치질하오시다'는 '수부수하오시다'이고 '세수듭시다'가 '세수하신다'이며 '기노하시어'는 '화가 나시어'이며 '왕이 편찮으시다'를 '상후가 미령하시다' 또는 '문안이 계오시다', 임금의 표정이나 기색을 일러 사색, 화난 표정을 엄색 등 말 한마디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비록 엄숙한 왕실이라 하나 그 어려운 말과 표현은 내의원 취재 때의 성적보다 더욱 중시하여 의술은 인정이 되었어도 처음 6개월 동안의 유예기간 중에 이 궐내 생활의 규범과 언동을 익히지 못하거나 이수하지 못한 자들은 가차 없이 등방이 취소되며 궐 밖으로 축방되었다.
그 유예기간의 6개월을 허준은 하루같이 여느 관원들과 꼭같이 묘시(상오 5시부터 7시)에 출근하고 유시(하오 5~7시)에 퇴근했고 등방자 8명 중 3명이 쫓겨나는 속에 끼지 않고 무사히 유예기간을 통과하여 정식 내의원 관원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 6개월 동안 허준은 지난해 내의원에 들어온 스승 유의태의 일점혈육인 도지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그가 임해군의 처소에 배치되어 있음을 알았으나 서로 오갈 길이 없어 만나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같은 내의원 소속이요 제법 근년에 없이 과장이 떠들썩했던 자신의 등방이었으므로 그가 자기의 상경을 못 들었을 리 없으련만 도지 쪽에서 찾아와 주지 않고서는 자신이 함부로 도지를 만날 수 없음을 알았다.
임해군의 처소 중 그가 상주하다시피 하는 별궁이 궐 밖 수진방에 위치해 있음을 들었으나 같은 내의원이라 해도 자기 같은 신출내기 의원이 사사로운 일로 찾아가봤자 함부로 문을 통과할 수 없도록 왕자궁의 경비가 지엄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좋은 얼굴로 헤어진 사람도 아니요 그가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당장은 만날 길은 없을 것이로되 그러나 허준은 그가 허락한다면 도지와의 교분을 두터이 하고 싶었다. 그 부자가 헤어진 연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부자지간에 생사는 알아야 하지 않는가 싶어 지난해 김민세와 나라 안 유력을 떠날 제 한양을 지나치면서 허준이 방자를 사서 아버지의 타계를 전해준 바 있으나 도지가 그 서찰을 받았다는 반신은 아직 받아보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인 자기보다 허준에게 있음을 알았을 때의 친자로서의 도지의 절망이 어떠했을까를 왜 짐작하지 못하리요마는 그러나 아버지의 유고를 마냥 모른 체하도록 독할 수 없는 것이 부자의 인연이 아닐는지.
그가 자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허준은 도지에게 알려야 할 것과 전할 것이 있다.
첫째는 밀양 천황산에 묻힌 스승의 무덤 자리요 또 하나는 그 유의태의 몸으로 이루어진 해시지를 나누어주고 싶은 것이다.
죽은 유의태의 몸을 소재로 이루어진 그 해시지. 도지로서는 죽은 아버지의 그 구석구석을 학문으로 읽고 새겨갈 심정일 수는 없을지 몰라도 허준은 그 귀한 기록만은 설령 그것이 죽은 이의 뜻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스승의 아들에게 한 부 필사하여 보내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그토록 온몸을 던져 의술의 눈을 더 높이 뜨게 한 스승의 아들과 하나의 정의로서도 친분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
자신의 유예기간인 지난 6개월간 도지를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새로 들어온 의원들의 유예기간이 끝나고 새 보직을 내릴 때면 이를 기회로 지난 1년 동안 정체되어 있던 내의원의 정례 인사이동이 실시되기 때문이다. 일단 정식 임명된 관원들의 기본 근속기간은 최소 45개월로 묶은 것이 국법이다.
본인의 실수나 사사로운 사정에 의하여 그 45개월 전에 직위를 떠날 경우 그 직위의 경력은 인정되지 않으니 내의원 의원이었노라 혹은 대궐에 드나든다 하여 자랑도 섞어 자칭 궁의라고도 뻐기는 그 경력을 자타 공히 인정받기 위해선 싫어도 45개월 근속의 실적이 있고서야 가능한 것이다.
그 기본 45개월만 지나면 보다 높은 어의에의 출세를 단념한 인물들 중엔 부모의 상을 당했느니 자신의 건강이 어떠하니 하여 내의원을 떠나는 자들이 속출한다.
더 이상의 출세를 포기하고 환향하여 궁의였노라는 자랑과 명예로 돈방석에 올라설 수가 있기 때문에 ...
그러나 그 45개월을 채우기 전의 내의원 생활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려 있으니 어전에 드나드는 명예는 결코 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병하고 대우 좋은 왕자궁이나 공주궁에 배치되리란 행운도 흔한 것이 아니다.
그 내의원 의원들이 지옥으로 표현하고 기피하는 혜민서 근무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고 말 많은 병자들, 왕자궁 공주궁에서 수시로 내려주는 귀한 음식에 온갖 별식은커녕 계란 한 개 따로 들고 오지 않는 백성이라 불리는 무지렁이 온갖 병자들이 찾아와 낮이나 밤이나 득시글거리고 매달리며 울부짖는 소란한 혜민서를 맡아보는 것도 내의원 의원들이고 보면 1년마다 실시되는 이 인사이동은 내의원 의원들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는 가장 긴장된 날이었다.
자연 그날을 앞두고 누가 어디로 가며 누가 어디로 오고 그리곤 누구 누구는 혜민서로 떨어진다고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에 가슴이 철렁거리고 기대에 부풀어보는 날이기도 했다.
"그럼 그날은 내의원에 소속된 의원들은 모두 이 자리에 모이오니까?"
"물론이지. 양대감의 방침으로 삼의사라 일컫는 전의감, 내의원, 혜민서의 모든 6품 이하의 의원들이 그날은 모두 모여 누가 누구다 얼굴을 익히는 날이자 새 보직을 받아 천당과 지옥으로 갈려가는 이별의 날이기도 하지."
웃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아직도 열흘 후의 일인데도 너나없이 긴장된 얼굴들이었다.
4
삼의사가 한데 모이는 날이 왔다.
이날 주거가 사대문 밖에 있는 삼의사의 6품 이하의 관원들은 너나없이 꼭두새벽에 집을 나섰고 허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천당이냐 지옥이냐 오늘 변경되는 보직에 따라 앞으로 1년 동안의 직처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 생살여탈의 이동권을 쥔 사람은 도제조 노수신과 어의 양예수다.
아니 도제조는 명목상의 총괄자고, 삼의사에 배속된 각 의원들을 일일이 평점해 아는 이는 양예수이니 그가 내정한 인물을 도제조는 동의할 뿐이다.
북한산에는 호랑이가 많고 내의원엔 양예수가 산다고 할 만큼 삼의사에 있어서 양예수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다.
10월도 하순, 초겨울의 절기를 연상케 하는 새벽 기온은 발을 동동거리도록 시렸다.
그러나 아직도 어두운 남대문 성벽 밖에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인물 속에서 허준과 눈이 마주친 같은 내의원의 몇 의원은 허준의 눈인사를 못본 체했다. 이 첫새벽에 등원하는 까닭은 관례대로 이날은 삼의사의 의원들이 모여 양대감(그는 정3품 당상관으로 통정대부다)이 직접 주관하는 회집에 앞서 내의원 안팎을 청소하는 일이나 날이 날이요 상대가 상대인만큼 저마다 남보다 일찍 등원한다는 그 긴장감으로 해서 어느덧 해마다 이날은 삼의사의 의원들이 꼭두새벽부터 대궐로 달려가는 이상한 날로 바뀐 것이다.
인사하지 않는 사람의 심정도 허준은 알고 있었다.
연치로 따지면 그 정명보는 자기보다 2년 먼저 내의원에 들어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해 취재에서 네째의 순위를 받은 사람으로 관원의 첫품계에서 한 품계 올라선 정 7품 부봉사요 허준은 비록 올해 새로 들어온 신출내기이긴 해도 수석의 특전으로 두 품계를 뛰어 2년 전에 들어온 그보다 오히려 한 품계 높은 종8품 봉사인 것이다.
그런 후배이되 품계가 상관인 허준을 공연히 무시하듯 못 본 체하는 자는 비단 정명보뿐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한 감정을 떠나 허준에게 동료로서의 우정을 보인 것은 지난 6개월 동안 지금 허준과 품계가 같되 햇수로는 3년 선배인 이명원과 1년 선배이되 벼슬의 품계 따위 개의치 않고 "잘난 체할 것 없다. 의원으로 풀린 놈은 너나없이 태생이 상것 아니냐"며 소탈한 이공기가 있을 뿐이다.
이윽고 기다리던 쇠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밤사이 도성내의 통금이 풀리는 오경삼점 파루소리였다.
삼의사의 의원들이 다투어 달려가는 곳은 내의원 정청 뜰이었다.
그 내의원 정청 뜰이 삼의사 중 가장 넓고 조용한 때문이다.
그 정청에 이르는 제 1문 위에는 입심억석이라는 의원들에 대한 명구가 쓰인 현판이 걸려 있고 50여 보 안쪽 정청 높은 큰 현판에는 화제어약 보호성궁이라는 내의원의 존재 이유를 강조한 여덟 자가 압도하듯이 내의원 뜰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제 희붐한 새벽이 시작되는 시각인데 그 내의원 제 1문에서 정청 뜰까지가 왁자지껄했다.
삼의사의 6품 이하의 의원들과 각사에 속한 종약서원, 도약사령들 그리고 각사에 차비대령하는 의녀 20여 명까지 남녀 60여 명이 끼리끼리 곳곳에서 불을 밝혀 걸레질을 하고 비질을 하고 오랜만에 만난 회포와 보다 편하고 나은 곳으로 배치되어갈 오늘의 운세에 기대하며 수런거리는 모습이었다. 한 차례 비질이 끝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정청의 곳곳과 촘촘한 문살에까지 걸레질이 남았을 뿐이지만 비질이 끝난 마당에는 잇따라 낙엽이 날리곤 하여 묘시에 시작될 회집까지 삼삼오오 모여 서서 잡담하는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허준은 정명보와 맡은 정청 양대감이 좌정할 자리에 일차 걸레질을 마친 후 미처 손도 씻기 전에 도지의 모습을 찾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도지는 제1문의 현판에 걸레질을 하다 말고 다가서는 허준을 발견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주변 동료들과 농지거리를 할 만큼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으나 상대가 허준인 걸 알고도 별로 반가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방에 붙었단 소문은 나도 들었네."
거두절미한 그 말이 허준에 대한 도지의 첫말이었다.
허준이 말했다.
"임해군 처소에 있다는 소식은 알았소만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라기 만나 뵙지 못했소. 댁내 다 무탈하시온지?"
"그냥 그렇게 지내오."
그 말뿐 도지 족에선 허준의 가내에 대한 안부는 물어오지 않았다. 더불어 길게 얘기하고픈 흥미도 없는 얼굴이었다. 허준이 다시 물었다.
"... 지난해 스승님의 유고 소식을 인편에 보냈었는데 받아보셨는지?"
"... 보았소."
도지의 대답은 짧았다. 그리고 허준이 다음 말을 기다리건만 더 부연할 기색이 아니었다.
허준이 도지에게 말했다.
"저번 솔가해 상경하기 전 나 혼자 산소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만 언제 말미 내어 함께 내려가야지 않겠습니까."
"그게 쉬운가, 나도 그대도 이미 내의원에 매인 사람인데 서로가 똑같이 말미를 얻어내기가."
"그것도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제 직처가 정해지면 윗분께 아뢰어 사모님과 두 분을 모시고 내려갈 결심으로 있습니다. 말로 이르거나 글로 적어서는 산소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므로."
"그토록 찾기기 어려운가?"
"스승님이 원하시던 곳에 산소를 썼습니다."
"그래도 산이면 산 이름이 있고 웬만치 일러주는 산 형세로 찾으면 산소가 있는 골짜기를 찾을 수 있다 여기네만 ..."
"그렇긴 합니다만 저 또한 이미 한철이 지났으니 한 번 더 찾아뵐 때가 됐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다행히 당신이 좋아하던 제자가 임종을 지켰다니 그분으로서도 큰 여한은 없겠지?"
"..."
"가보게. 그리고 오늘 서로의 직처가 정해지면 그때 조용히 의논하세."
"그렇게 하오리다. 사모님께 문안 대신 아뢰어주십시오."
도지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이 정청 쪽에 올라오자 팔짱 낀 이공기가 뒷짐 진 이명원에게 이기죽거리는 눈으로 무슨 얘기를 하며 서 있었다.
허준이 그 곁에 서자 이공기가 동의나 구하듯이 허준도 돌아보며 말을 계속했다.
"대궐 대궐 말로만 듣던 대궐, 하나 난 내의원에 소속한 지 2년 동안 상감마마의 용안이 어찌 생겼는지 먼빛으로도 못 봤어. 바로 코앞이 상감마마께서 계시는 대전인데도. 그 까닭은 난 오늘사 이 사람 저 사람 속닥거리는 소리를 주워듣고 깨달았어."
"오늘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주워들은 얘기란 뭔가?"
"까닭이 있다는군. 양대감이 자기가 택한 사람이 아님 누구 하나 대전의 부름에 끼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자기가 택한 사람이 아니면 끼어주지 않다니!"
"어리숙한 건 자네도 마찬가지였군. 우리 세 사람만 귀가 먹은 벽창호였다 그 말일세."
"들은 얘기란 걸 자세히 하게."
"저도 듣고 싶습니다만."
하고 허준이 끼어들자 이공기가 내뱉었다.
"그댈 수석으로 뽑힌 구임원 아닌가. 그대야 누구 눈에도 띄는 사람이니 족히 걱정할 거리가 아니나 나나 이 사람은 이놈의 곳이 온갖 낮도깨비가 우글대고 눈치나 뒷손질 잘하는 놈만 살아날 수 있는 복마전일 걸 오늘사 알았다 그 말일세."
"복마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네. 생각해봐. 대전 출입은 못 바랄값에 누구는 내내 몸 편하고 기깨나 쓰는 왕자궁이나 공주궁에서 마흔다섯 달 세월아 네월아 보내는데 어느 놈은 처음부터 혜민서로 떨어져 떡 하나 생기지 않는 무지렁이 백성들 피고름이나 짜주고 그 세월을 견뎌야 하니 그게 미운털 박힌 놈 안 박힌 놈 구별 당하는 게 아니고 뭔가."
"대체 누구 입에서 나온 얘기니까?"
허준이 물었을 때 갑자기 제1문 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고 곧 "양대감이 오오." "어의께서 납시오!" 하는 다급한 소리들이 전해왔다.
일동이 서둘러 제1문과 정청에 이르는 길 좌우로 달려가 도열했다.
그러나 숨을 죽이고 기다려도 아직 허준의 위치에서는 양대감의 모습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나가셨어."
하고 갑자기 제1문 첫머리에 섰던 그중 품계가 높은 정 6품의 손두석이가 맥빠지는 소리를 내며 읍해 섰던 양손을 풀었다. 좌중이 다시 떠들썩하니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5
그날 내의원 인사는 연기되었다.
이른 아침 내의원 정청 앞을 통과한 양예수는 한낮이 지겹도록 다시 오지 않았고 그 어의를 주야로 수행하는 유의(양반 신분으로 의원을 자원한 자) 정작이 해가 뉘였거리는 시각에야 나타나 오늘 갑자기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에게 급환이 생겨 어의가 그곳으로 달려갔으므로 공빈의 병세가 회복되기까지 내의원 인사는 연기되리란 통보를 했다.
인사를 기다리며 새벽부터 몰려들었던 궁의들이 갑자기 와글거리며 흩어졌다.
그 와글거리는 소리와 한숨 묻은 소리들을 허준은 듣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건 허준에게는 실망 어린 말들이었다.
대궐이라 하여, 내의원 의원들이라 하여 그들의 존재를 높이 우러러 존경의 염으로 보려 한 건 성급한 판단 같았다.
그곳이 남대문 칠패의 장시 바닥이 줬건 구중궁궐 깊은 대궐 안이 됐건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생각하는 갈래는 별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감히 왕실의 누구가 아프기를 바랄 수야 있으랴만 그러나 의원으로서 자신의 재주를 펼쳐 보이는 유일한 길은 그 재주를 시험할 대상이 있어야 할 것이요 내의원 의원인 그들의 대상은 오로지 왕실과 그에 딸린 종친부의 누군가 앓아눕는 기회를 잡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고귀한 이들의 병을 맡을 기회는 어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동의 이구동성이고 보면 내의원의 정체된 인사가 뚫리기 위해서는 양예수의 그 절대권력이 무너지거나 온갖 수단으로 그의 눈에 들어 기회를 할당받는 길뿐이었다. 또 그 기회란 것도 다행히 자신의 전공 분야의 병을 앓는 이가 있어야 한다는 요행을 바라야 하고 또 다른 기회를 감히 넘본다면 시탕을 지정받은 선배가 병세를 빨리 회복시키지 못하거나 실패할 때라야 호명의 기회가 돌아올 뿐이다.
차라리 모르니만 못한 그 숨막힐 듯한 내의원 사정을 한 귀로 흘리며 직처로 돌아가는 허준에 말없이 다가선 것은 뜻밖에도 도지였다.
"인사가 연기됐다는데 왜 아니 돌아가고 있었소?"
"나하고 얘기 좀 하세."
주변의 이목을 신경 쓰며 도지의 안색이 긴장돼 있었다.
그 도지가 허준의 소매를 끌며 정청 넓은 뜰, 한여름이면 내의원 마당에 가득 그늘을 지우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세웠다.
"무슨 얘기요?"
"함부로 믿을 인간이 없어 나 혼자 속을 앓고 있는 일인데 ..."
"말하오."
"이번 인사에 난 십중팔구 혜민서에 떨어진다 여기어 단념을 하고 있었지만 인사가 잠시 연기되었다는 건 천만다행으로 여기네."
허준은 의아했다. 첫새벽부터 달려와 기다리던 인사가 연기된 사실이 천만다행이란 무슨 뜻이란 말인가.
"나하고 편을 짜세."
하고 도지가 말했다.
"편이라니?"
"그대도 귀가 달린 사람이니 이미 이 내의원의 속사정을 아니 들었을 리 없지 않나. 그러니 이놈 저놈 눈이 맞는 자들끼리 편을 짜고 도는 판에 우리도 대책을 세우잔 의논일세."
"난 아직 말귀를 못 알아듣겠소만."
"그대가 제일 가고 싶은 직처가 어딘가?"
"그거야 우리 임의로 선택할 순 없지 않소."
"그걸 알면 됐네. 내 말을 귀담아듣고 즉답하게."
"...?"
"우리처럼 경험이 일천한 의원들이 언감생심 아직은 대전 출입이야 꿈도 꿀 처지가 아니네만 그러나 혜민서에 떨어지는 수모만은 무슨 수를 써도 면해야 하지 않겠나."
"혜민서에 떨어지는 것이 수모란 말이오?"
"사람 잡는 곳이 혜민설세. 제 푼수로 변변히 의원 하나 못 부르는 장안의 온갖 가난뱅이들만 몰려드는 곳이니 그 참상이야 말해 뭘 해. 그곳은 상시 야간직숙의 번이 있어 근무의 반은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온갖 병치다꺼리에 밤샘을 밥먹듯 하는 곳이 그 혜민서랄밖에."
"오가는 얘기 몇 마디 주워들었소만 ..."
"들은 얘기가 아니라 난 나하고 함께 내의원에 들어온 인물과 말동무가 됐기에 그 사람이 배치받은 그 혜민서엘 수차 찾아가 내 눈으로 봤어. 그리고 그 사람은 반년을 못 채우고 혜민서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고. 도대체 그 혜민서에 찾아오는 것들이란 먹을 걸 제대로 먹는 것들인가 입을 걸 철따라 갈아입는 것들인가 그저 떠드느니 약을 달란 아귀다툼에 더구나 초기 증세 때 오는 자는 거의 없고 너나없이 깊은 병에 이르고서야 찾아오는 자들이라 죽네 사네 울고불고 온종일 악머구리 들끓듯 소란한 곳이 그곳이야."
"..."
"하나 혜민서 이외에는 모두가 왕족들의 사저나 별궁이라 어딜 가도 호강이 넘치지. 생각해보게. 평소 보약을 지천으로 대먹던 분들이니 쉬 병드는 분들도 안 계실뿐더러 사철 한 번씩 능 행차에 따라가는 게 고작이요 공주궁이나 윗전마마들의 처소에 배치되면 봄가을에 온정(온천) 요양에 쫓아가는 게 달세. 그밖에 할 일이란 한장 반씩 내의원서 지정하는 의서나 읽고 한 달에 한 번 그 쌓은 학문을 점검받는 것 왼 누워서 떡먹기야."
"그래서?"
"그러니 내 말은 인사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보면 사정이 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집에 돈냥이나 모은 게 얼마나 있던가?"
"...!"
"세상 굿거리를 왜 하나! 귀신도 얻어먹고 나면 길을 비킨다 해서 굿판을 벌이는 게 아닌가. 사람도 마찬가지."
허준이 문득 웃었다.
"가진 돈도 없거니와 있다 한들 내키지 않소. 그리고 ..."
"그리고!"
"갓 들어온 신출내기로서 혜민서도 일차 겪어야 할 곳이면 피해 갈 생각 없고."
이번에는 도지가 웃었다.
"난 이미 임해군 사저에서 1년을 지냈으니 이번 인사에 반드시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게 뻔하고 미리 손을 안 쓰고서는 혜민서에 떨어질 게 뻔 해. 또 나뿐 아니라 그대도 위험한 것이 비록 취재의 성적이 출중했다하나 그대가 유의태의 문도임이 소문난 이상 양대감이 결코 그대를 잘 볼 리 만무네."
"스승님과 어의와의 과거의 인연은 김민세 그분으로부터 들은 바 있으나 어의께서 여태 그런 티를 내오?"
"그렇네."
"이십수 년 전에 있었다는 그 일을 아직도 말이오?"
"나는 나를 처음 보던 그 사람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
"그 눈빛은 나도 보았소만."
"신참 의원들에게 의술에 관한 몇 마디 대구를 놓아 의술의 정도를 떠보고 그 가계에 대해 직접 확인하는 건 누구에게나 하는 일인데 산음이면 유의태란 성명을 아느냐는 말에 그분이 내 가친이노라 대답하자 그대로 입을 다물더니 그 뒤로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건너보기만 할 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어."
"양예수 그 사람이 내의원에 버티고 있는 한 내의원에서의 내 출세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네."
"하나 그 눈빛이 정녕 스승님과 연관 지어 미워하는 것이었다면 어찌 애초 유의원을 혜민서에 보내지 않고 오히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임해군 사저에 보내주었으리까?"
"천만에!"
도지가 완강히 부인했고 고개까지 저었다.
'어의 양예수!'
양예수의 얼굴이 허준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기억난다. 파장에서 답안이 완성된 표시는 고시지를 접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면 되었다.
그렇게 일어서 있으면 취재자들 사이를 간시하며 오락거리는 시관이 와서 그 답안지를 봉투에 넣고 봉한 후 취재자가 보는 앞에서 시권에 적힌 취재자의 관향과 성명을 적어 회수해가면 칠재자는 퇴장하는 순서다.
그날 과장에서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 허준이었고 그 허준에게 과장의 눈길이 일제히 쏠려온 걸 허준은 기억한다. 그리고 가까이 서 있던 수염이 유난히 아름다운 50대의 인물이 그 허준의 답안지를 받아든 후 시권에 적힌 출신지를 유심히 보던 끝에 묻던 말을 ...
"산음이라 ...?"
"그러하옵니다."
"의업은 몇 대인고?"
"소인이 처음이옵니다."
"누구에게 배웠느냐?"
"스승님의 존함이 유의태이옵니다."
일순 묻고 있던 사내가 정지한 듯한 짧은 침묵을 허준은 기억한다.
허준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수염이 아름다운 시관은 이미 돌아선 후였다.
그리고 그가 어의 양예수임을 안 것은 주일의 수군거림에서였다.
6
양예수란 성명 앞에서 두 사람의 침묵이 한참 길었다.
"그래서 내 제의네만 만일 가진 돈냥이 없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으니 함께 찾아가 보지 않겠나."
"가서?"
"고개를 숙이고 지난날 아버지의 지나친 점을 사과하고."
"사과라니?"
"내가 유의태의 자식으로 태어난 건 악연이었어. 죽은 뒤까지 내 앞길을 가로막아."
허준이 차갑게 도지를 봤다.
"그 집을 내가 알고 있네. 간다 해도 직접은 만나지 못할 터이나 안방 쪽으로 줄을 대어 소상히 사정을 얘기하면 ... 왠가?"
의녀들의 비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의녀들의 머리 위로 은행나무의 황금빛 낙엽이 내리고 있었다.
허준이 고개를 저었다.
"갈 생각 없소. 혜민서가 그토록 많은 병자가 찾아드는 곳이면 나는 일차 가보고 싶을 뿐. 그곳이라면 배우는 바도 있을 터이고 ..."
"미쳤군!"
도지가 외쳤고 허준은 더 그 도지를 보지 않고 그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악연이라니 생부와의 인연이 악연이라니!'
허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했다.
"배우다니 더 무엇을!"
"..."
"우리에겐 이미 의원의 지식과 자격을 구비했음을 조정에서 보장한 터인데 무엇을 더 이상 배운단 말인가!"
"유의원!"
허준이 달래듯한 눈을 향하자
"그대의 고집은 나도 익히 알아. 그러나 그런 고집 여기선 통하지 않네. 누가 눈이나 끔쩍할 줄 아는가? 여긴 시골구석관 달라. 누가 앞으로 나아가느냐 누가 먼저 대전 시탕을 받드는 기회를 잡느냐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하는 곳이네. 그대가 생각하듯 그런 정직만으로 꾸며진 곳이 아니란 말일세!"
"그 얘긴 누누이 들었소. 하지만 ..."
도지가 다시 허준의 말을 막았다.
"난 이 내의원에 들어온 지난 2년 동안 상감마마의 용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먼빛으로도 뵌 적이 없어. 바로 코앞이 상감께서 갭시는 대전인 데두. 왠지 아나? 양대감이 자신이 택한 사람이 아니면 누구 하나 대전의 부름에 끼여주지 않기 때문일세."
"... 언젠가 갈 날이 있겠지."
"꿈꾸는 소리 말게. 정 싫은가?"
"의원이 되는 길에 술수는 부리지 않겠소. 설사 그 길이 어떤 험난한 길일지라도."
도지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돌아서 가기 시작했다.
허준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거기 가을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파랬다.
공빈의 처소를 떠나 도제조의 방으로 돌아오는 양예수의 표정이 온화했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었다. 공빈의 환후는 가벼운 체증이었다.
건강하던 공빈마마가 안색이 질리며 드러눕자 처소의 안팎 상궁과 나인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전전긍긍하다가 어의가 침 한 대로 체증을 내리자 '역시 어의의 솜씨'노라 입을 모아 칭찬하는 소리가 처소를 떠나오는 양대감의 귓전을 간질었다. 좋은 일 궂은일에 고자질이 심한 우상이란 이름의 내시 놈이 처소 밖까지 따라 나와 만강의 감사를 담아 허리를 또 한 번 굽혀 보인 것도 평소 잘 하지 않던 아첨이었다.
녀석의 행실로 보아 오늘의 이 공은 필시 광해군 쪽을 감싸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장차 정통 왕자가 태어나시지 않는 한 대통을 이어받으실 분은 광해군 일지도 몰라.'
그건 양예수의 짐작만이 아니었다. 선조의 비 의인왕후는 14제에 왕후로 간택되어 24세에 이른 지난 17년 동안 후사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했고 왕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아들을 낳은 것은 공빈이었다.
정통 왕비의 몸에서 태어나지는 아니했어도 공빈이 연년생으로 낳은 진과 훈 두 왕자의 존재는 비록 세 살, 두 살로 어린 나이요 또 선조의 보령이 창창하다 해도 만일의 경우 24세의 꽂답고 혈기왕성한 나이에 10년째 태기가 없는 왕비의 이상 신체가 끝내 후사를 잇지 못할 경우 장차의 보위가 어디의 누구에게 물려질 것인가는 조정의 가장 민감한 관심사일 터이다.
그리고 두 왕자 중 선조의 애정이 유난히 둘째 광해군에게 쏠려 있기에 광해군의 병을 살피는 일은 양예수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사항이었다.
'기억할 만한 공을 하나 세웠어.'
임금의 가장 큰 총애를 받는 이가 두 왕자를 낳은 공빈이요 그 공빈의 환후를 간단히 고친 것이다. 어사주 몇 병이 내의원으로 내려질 게 틀림없었다.
양예수 그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20여 년 전 시골 촌구석 유의태란 의원과 구침지희로 술내기에 져 '산음 사는 누구가 조선 제일의 의원이다'고 버선코에 머리를 조아리며 세 번을 외쳐야 했던 수모를 겪은 후로는 그 분함을 삭이지 못하고 술을 끊어버렸다.
술잔만 들면 내기에 이기고 가가대소하던 유의태의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그 27여 년 동안 그는 그 유의태를 잊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술은 끊어졌어도 유의태의 모습은 무시로 그의 뇌리에 떠오르고 꿈자리에 나타나 양예수의 치를 떨게 했다.
그런 그가 유의태의 아들이 내의원에 들어온 것을 알고 나선 잊혀져가던 유의태가 다시 나타난 듯이 긴장했다. 그러나 그 긴장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유도지의 의술의 정도가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마치 자신의 오랜 복수가 성취나 된 듯한 웃음을 웃었다.
유도지에게서 유의태가 지녔던 그 불같은 기백도 야심의 한 조각도 보이지 않음으로써 자식을 뜻대로 키우지 못한 유의태의 고민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였다.
복수는 끝났다. 양예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의원의 노른자위로 여기는 임해군의 처소로 도지를 보낸 것은 자식을 그 정도의 의원으로밖에 키우지 못한 유의태에 대한 조롱이요 야유였다.
그런데 그렇게 잊어버리기로 한 유의태의 모습이 허준이란 인물에게서 다시 되살아날 줄이야 ... 유의태의 제자임을 확인한 그 허준의 취재 성적은 발군의 것이었다.
'그자가 허준을 키웠어.'
양예수는 자기도 모르는 신음소리를 냈고 특히 그 허준의 장소가 침술임을 알자 장차 그는 자신과 조선 제일을 겨루는 경쟁자임도 직감했다.
'어느 정도인지를 지켜보리라!'
공빈 처소에서 느긋했던 심정이 허준의 존재로 인해 눈살이 찌푸려지며 걸음발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유의태가 연전에 작고했다고?"
빈청(대신들의 휴게소)에 나간 도제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양예수에게 유의 정작이 뜻밖의 유의태의 소식을 전하자 양예수가 눈을 치떴다.
정작은 유의태와 자기가 구침지희의 내기를 할 제 김민세 등과 함께 입회하여 자기의 처참한 패배를 지켜본 몇 사람 안 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랬답니다."
"어디서 들었던가?"
양예수가 애써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허준에게 들었습니다. 그 아이와 친분이 생겨난 이명원이가 허준과 침술을 토론하다가 나온 얘기랍니다."
"유의태가 죽었다 ... 그래 ..."
"지난해 여름이랍니다."
양예수가 나직하게 웃었다.
"교자는 단명이라, 일 년 전에 죽었다면 꽤나 오래 살았군."
양예수의 입가에 조롱이 어리다가 꺼졌다.
7
세상에 입처럼 싼 것은 없다.
허준이 유의태의 문도였다는 소문이 갑자기 내의원 안팎에 화제가 되었다.
발설자는 주부(종6품) 김응택이었다.
그 김응택은 어의 양예수가 장차 자신의 의발을 이어받을 수제자로 지목하는 인물이고 적어도 양예수가 어의로 군림한 명종조에서 선조 8년에 이른 현재까지는 취재의 성적이 가장 훌륭했던 준재로 자타가 공인하는 터였다.
그러나 그 김응택의 자랑스러운 성적은 허준의 출현으로 깨졌고 비록 그 허준이 자기보다 다섯 품계나 낮은 신출내기이긴 해도 김응택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허준의 전공이 자기와 같은 침구라면 품계는 고사하고 앞으로 언제 어느 대목에서 서로가 부딪칠지 알 수 없는 경쟁자일 것이었다.
침술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는 김응택이다.
어의 양예수의 침술이 나라 안 제일이라 소문났고 그 침술로 어의의 자리를 양대에 걸쳐 반석처럼 지키고 있다. 하나 자기의 침술 또한 결코 어의의 기술에 못지않다고 내심 자부한다.
그러나 장차 자기의 앞길을 열어주고 밀어줄 양예수임을 믿기에 때로 양예수의 침술에 입이 간지럽도록 이의를 달고 싶다가도 입을 다무는 것은 세월만 가면 절로 굴러들 그 영광의 자리를 공연히 잠시의 혈기를 내세워 어의의 비위를 건드리진 말자는 계산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도양양한 자신의 앞길에 허준이란 존재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그건 김응택에겐 악운이었다. 김응택은 알고 있다.
그 허준이 당시 과장에서 답안을 제일 먼저 제출하여 주위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면 그 허준의 답안지는 양예수나 자신의 손아귀 속에 구겨져 없어졌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800여 명의 응시자가 엎드려 있던 과장에서 제일 먼저 제출된 답안이기에 그날 시관파 간시역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고 특히 남 먼저 허준의 답안을 받아든 양예수가 그의 출신을 묻는 몇 마디 속에서 그가 유의태의 제자라는 것을 엿들은 정작이 있었기에 그의 답안지가 고과의 책상 위에 놓여졌던 것이다. 정작은 자기의 그 탄탄대로에 돌팔매질을 한 방해자였다.
'그 정작과 허준을 가깝게 해선 안돼!'
정작은 유의태와 양예수가 구침지희를 할 때 김민세와 함께 입회했던 사람이었기에 유의태의 인상을 너무도 강렬하게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뒤 유의태는 다시는 과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양예수가 내의원의 1인자로서 양대에 걸쳐 군림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유의태의 제자란 허준이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내의원에 들어온 것이다.
이건 자기에게 무슨 징조인가를 김응택은 곰곰 생각했다.
불길한 징조는 한두 가지 나타나 있다.
첫째 내의원에 떠도는 은밀한 소문이 그것이다.
그 비밀스러운 소문이란 양예수 치하에서 유의태와 같은 억울하게 암장된 실력 있는 탈락자도 있었다고 의심하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그 발설의 주인공은 정작이라고 김응택은 확신한다.
... 허준이 출현하던 그날 밤 사관들의 방에서 허준의 답안지가 양예수의 손에서 책상 위로 옳겨진 순간 정작이 남 먼저 집어보았고 즉시 그는 도제조를 비롯, 삼의사의 시판들이 지켜보는 그 만인 환시중에 허준의 답안을 감동한 목소리로 크게 떠들어댔다.
이에 허준의 시험지는 이 사람 저 사람이 돌려가며 열람했고 그건 허준의 답안지가 공개적인 생명을 얻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연히 정작의 그 언동은 양예수에게 소외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하품직 의원들의 지지를 받은 반면 그들은 양예수를 업고 다음 대의 어의를 노리는 자기의 적임도 명백해진 것이다.
"허준이 유의태의 문도렸다."
이에 김응택이 정작을 따르려는 의원들에게 겁을 준 것이다.
유의태의 죽음을 들어 교자단명이노라 차갑게 내뱉은 양예수의 뿌리 깊은 원한을 들어 함부로 허준에게 편드는 자들에게 경거망동 말 것을 ... 공갈이 먹혀들었다.
갑자기 사람들은 허준이 이번 인사에서 혜민서로 떨어질 걸 예감했고 허준이 곁에 서 있다가 함께 혜민서로 떨어지는 것을 겁낸 것이다.
"국사가 분주하와 늦으시는 듯하니 어의의 요령대로 인사를 확정하시지요"
하고 내의원 육품 이하의 의원들의 성명 위에 배치장소를 놓고 방점을 찍기도 하고 성명을 지우기도 하는 양예수에게 김응택이 말했다.
도제조가 일일이 간접은 하되 내의원 인사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은 어의 양예수요 도제조와 제조가 한번 돌아가며 훑어보는 정도에서 그 인사는 확정된다.
그러나 확정된 거나 진배없는 인사일지언정 시행하기 전에 그 복안을 도제조와 제조의 눈에 거치게 하는 점도 관례다. 그걸 번연히 알면서 도제조나 제조가 국사에 분망한 이유를 들어 혼자 확정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의에 대한 김응택의 아첨이다.
"곧 올 때가 됐지 않은가."
기다리기 지루하면서도 양예수가 말하자,
"유도지를 혜민서에서 제외하오니까?"
하고 김응택이 고개를 빼어 양예수의 인사 구상의 지편을 넘겨보며 낮게 물었다. 양예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문밖에 기척이 난 것이다.
김응택이 얼른 일어나 조신한 태도로 방문을 열었으나 나타난 건 부르러 갔던 정작 혼자였다.
"국사가 지체되는 듯하와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무슨 하문이 계시던가?"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심기가 뒤틀리는 정작에게 그러나 양예수는 한껏 화기 어린 투로 물었다.
정작이 침묵했다. 어의의 권위에 대한 그다운 반항이었다. 양예수가 다시 부드러운 어조를 냈다.
"도제조께서 혹 지목해온 인물은?"
"도제조께선 이공기를 들어 인빈마마를 배행할 의원으로 천거하더이다."
김응택이 긴장하며 시선을 정작에게 박았다. 양예수는 눈길을 들었다.
"도제조가 이공기란 이름을 어찌 기억하고 있지?"
"뜻밖에 많은 이의 성명을 알고 있더이다."
양예수가 정작의 그 비아냥 담은 말을 건너보며 그러나 그 입가에 자신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 그리고?"
"그 밖에 새로 들어온 인물 중에 촉망받는 이가 누군가 묻더이다."
"누구누구를 들었던가?"
"새로 들어온 중에 촉망받는 자라면 이번에 첫등으로 뽑힌 허준이 아니올지?"
"취재란 잠시 잘 볼 수도 있고 잘못 볼 수도 있는 것일세."
"...?"
"그래 허준이란 이름을 도제조께 아룄던가?"
"저더러 꼽아보시라기 허준을 꼽았습니다."
"허준이는 혜민서로 보내기로 내정했으니 거론할 것 없네."
"취재에 첫등으로 들어온 인물을 처음부터 혜민서로 보내는 인사는 제가 아직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
"뭔가?"
"재주 있는 아일수록 하루빨리 대전에 출입케 하여 귀한 이들의 신체 발부를 눈여겨보게 하는 것이 오늘까지의 통상 관례였음을 아옵고 ..."
"대전 출입이 반드시 취재의 성적에 좌우된다는 것은 언젠가 깨어야 할 구습일세."
"하오나 ..."
그 정작의 말을 양예수의 말이 조용히 덮었다.
"인물이 우선이지 의술은 둘째지. 더구나 젊은것들은 모처럼의 기회에 제 이름을 드러내고자 급급하는 무리들인즉슨!"
김응택이 동조하여 고개를 끄덕였고 양예수는 더는 정작에게 눈길을 줌이 없이 자리를 일어섰다. 아름다운 수염 속에서 어의의 위엄이 가득히 풍기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수일 후 조섭수양위선약석차지라는 어필 앞에서 내의원 인사가 발표되었다.
유의태의 아들 도지가 내의원의 노른자위로 여기는 인빈 김씨의 처소에 배치됐고 허준과 이공기가 나란히 혜민서에 배치되었다.
허준과 함께 유도지가 혜민서에 배치될 것임에 틀림없다 속삭이던 내의원 관원들은 양예수가 가장 미워해야 할 유의태의 아들을 인빈마마의 처소에 배치케 한 것을 보고 소문과는 달리 공정한 인사라고 입을 모았다.
8
삼의사의 의월들이 모두 기피하는 혜민서라 한들 가족들은 그 실체를 알 턱이 없었고 오로지 남편이요 아들인 허준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직처가 정하여진 것만이 반갑고 기쁜 얼굴이었다.
그 첫 출근의 시각에 대어 새벽밥을 지어 들여온 아내를 따라 생모 손씨도 여느 날이면 아직 잠을 깨울 시각이 아닌데 겸이와 숙영이 남매를 깨워 세수를 시키고 머리를 빗기고 새 옷을 갈아입히며 아비의 첫 출근을 배웅해야 한다고 수선을 떨었다.
묘시 등원 시간까지 한 시각이나 여유가 있었다.
집에서 애고개까지는 고함치면 들리는 거리요 그 고개 위서 밋밋한 내리막길을 우로 끼고 굽돌면 저만치 높다란 성벽을 거느린 남대문의 우람한 모습이 보인다. 혜민서는 그 남대문에서 광화문을 향해 서소문과 종로로 갈리는 육조 앞 넓은 길모퉁이에 위치한다. 아직 날이 밝기 이전인 새벽 어두운 길이라 할지라도 집으로부터 천천히 걸어 반 시각이면 족한 가까운 거리였다.
"기억납니다. 아이들과 함께 도성에 첫나들이 가던 길에 길 건너에서 가리켜주시던 바로 그 관아가 아니오니까?"
아내 김씨가 그날 의약동참 혜민제수라는 커다란 간판을 본 기억을 되살리며 물었다.
"그렇소, 우측 건너편에 전옥서가 있는 좌측 모퉁이오."
"전옥서라면 사람 가두어놓는 곳 아니냐."
"그러합니다. 죄를 진 사람들을 문초도 하고 가두어놓기도 하고 하나 제가 있을 혜민서는 도성 안에서 병자로 칭하는 사람은 누구나 드나드는 곳이니 도성 관아 중에서는 그중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혜민서에 묻어 있는 어두운 소문을 감추고 허준이 애써 밝은 얼굴로 손수 숭튱을 들어 주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러나 ..."
하고 손씨가 문득 뜨악한 얼굴을 했다.
"왜오니까?"
"그래도 에민 한 가지 자랑거릴 잃었어. 인근 마을 사람들이 대체 관복을 입고 오가는 이가 누구냐고 물을 적마다 애비가 나랏님이 겝시는 대궐에 의원이 되어 오간다 얘길 했었는데 모두 거짓말이 되었으니."
허준이 웃었다.
"내의원과 혜민서가 모두 영이 한군데에서 나오는 곳이매 잠시 혜민서를 거친 후 대궐로 들어갈 날이 있겠지요."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아쉬움을 달래며 남편의 의젓한 관복 모습을 자랑 담아서 건너보았다.
그 온 가족의 축복 속에 허준이 혜민서에 등원한 날, 그러나 묘시에 석점을 갓 넘은 꼭두새벽이어선지 혜민서의 두꺼운 대문은 아직 닫힌 채였다.
허준은 혜민서 앞을 오락거리며 아직 잠을 안 깬 어두운 도성의 정적을 돌아보았다.
이제야 새벽닭들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울어대고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나타난 기찰군관과 나졸들이 두런두런 육조 넓은 뜰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서너 점 더 기다려야 하나보군.'
허준이 지루한 생각을 하며 어제 이공기와 헤어질 때 그와 주고받은 말들을 문득 떠올렸다.
"혜민서, 혜민서. 차라리 닥치고 나니 배짱이 정해져 마음이 편하이."
혜민서로 확정된 후 남촌 술집에 들러 함께 몇 잔 술을 나누자 이공기가 그 서늘한 눈매로 말문을 열었었다.
"마음이 편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오니까?"
"아무 뜻이랄 건 없네. 그저 나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이 대궐까지 왔으니 가급적 귀한 이들의 병을 보는 쪽을 소원했으나 그러나 내심 내가 의원인 이상 반드시 존귀한 신분의 병자만 보려 한다는 것은 부박한 생각이다, 스스로 질책도 없지 않았거든."
그 말이 반가워 허준이 술잔을 건네자 이공기가 처음으로 허준에게 친밀한 눈매를 보이며 또 말했었다.
"혜민서가 사람 몸을 고단하게 쓸 곳임은 틀림없으나 대신 보고 배울만한 것은 많다는 자위도 있네."
"보고 배울 만한 것에 어떤 것이 있사오니까?"
"한강에 물 뜨러 가는 것을 내 눈으로 한번 보기 원했었어. 궐 밖 혜민서 근무라면 더러 그런 행차에 동행할 수도 있을 게 아닌가."
"한강에 물을 뜨러 간다니 누가 말입니까?"
"모르셨던가? 궐내에서 사용하는 물은 모두 한강 강심에서 떠오네."
"대궐에서 쓰는 물을 한강수를 쓴단 말이오니까?"
"그렇네. 한강 상류인 뒴개 근처라 하나 아직 난 쫓아가 보지 못했네."
"일찍이 스승님으로부터 세상의 수질이 서른세 가지요 그중 상질의 물이 생수란 가르침은 받았으나 찬강수를 생수로 사용하는 것은 금시초문 올시다."
"옛시인이 한강수를 두고 읊었다더군. 그 맑고 깨끗함이 금간옥수라 둼개 상류에 주변 경치가 이름 그대로 비단을 둘러친 듯하고 그 하얀 백사장과 계곡 사이로 옥수가 흐르는 듯하다는 그런 곳이 있다는군. 언제 말미 내어 함께 가보세. 첫새벽 강심에 궁녀들이 배를 띄워 놓곤 물을 담는 모습이 상상만 해도 한 폭 그림 같지 아니한가. 하하하."
"그런 기회 있으면 꼭 저도 대동해주소서. 대궐에서 쓰는 물이 어떠한 수질인지 저 또한 곡 보고 싶습니다."
"궐내 근무가 아닌 바에야 그런 말미야 암만이고 있지 않겠는가. 꼭 함께 가리."
그때였다.
육중한 빗장이 뽑히는 소리와 함께 혜민서 문이 열렸고 등불과 빗자루를 든 7, 8명의 의녀들이 몰려나와 비질을 시작했다. 내의원 정청에서 낙엽을 쓸던 의녀들은 자세히 뜯어보지 않았으나 장차 고락을 함께 할 존재들임에서 허준은 새로운 감회로 그들을 건너보았다.
모두 13, 4세의 소녀에서부터 20세가 채 못 된 처자들인데 흩어진 등불에 비친 그 차림들이 아리땁고 독특했다.
너나없이 차림이 똑같았다.
옥색 삼회장저고리에 남치마를 받쳐 입고 매매인이 그 가슴에 노리개처럼 어여쁜 수실로 감싼 침낭을 달고 있었다.
의녀의 역사는 오래다.
태종 6년(1406년) 3월 검교한성부 지제생원사 허수의 건의로 제생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부인들이 병이 있어도 남의에게 진찰받기를 부끄러워하여 그 변을 보이기를 싫어하고 더러는 죽기도 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궁사 소속비와 동녀 수십 인을 뽑아 맥경 및 침구의 법을 가르쳐 부인들의 병을 진치케 했다.
그러나 의술을 지니기까지 의서를 읽을 두뇌 명석한 아이가 흔한 게 아니어서 그 재질을 엄선하고자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의녀의 수를 수십 명으로 늘이고 취재를 실시하니 천자문, 효경 정속편과 산서를 읽게 하여 질을 높여갔고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예문관의 문신 두 사람을 교수로 임명하여 직지맥, 동인경, 가감십삼방, 화제부인문, 산서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그 성적을 3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궐내의 왕비 처소에까지 배치하는 내의로 삼고 2등급은 간병의로 3등급은 초학의라 불러 그 성적을 수시로 점검, 재주가 향상되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본래의 직처로 돌려보내 꾸준히 재주 있는 아이를 골라내기에 힘썼다.
이래서 세종조 때 왕비 소헌왕후의 전문의로 뽑힐 만큼 특출한 소비라는 의녀가 나타났었으나 이러한 대우도 연산군 때에 무너지니 연산군이 아리따운 의녀들을 잔칫상 머리에 기생처럼 끌어내어 앉히기 시작한 후부터 의녀의 존재는 창기처럼 천시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초의 목적을 떠나 남녀 상종의 추문이 발생해도 의녀로서의 존재는 어느 시대에나 필요로 했기에 시속에 따라 천대도 받고 우대도 받으면서 오늘날에 이어져 현재 혜민서에서는 2등급인 간병의와 3등급인 초학의 십여 명 배속되어 1등급인 내의가 되는 훈련과 공부를 쌓고 있는 것이다.
허준이 자기 가까이 있는 의녀에게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다가든 낮선 사내에게 잠시 놀란 듯이 상큼 들린 소녀의 눈빛이 별처럼 맑았다.
"뉘시온지요?"
상대가 관원임에서 소녀는 내외하지 않고 물어왔다.
"난 오늘자로 혜민서로 배속되온 허준이란 사람이네."
"허준!"
하고 문득 소녀가 깔았던 시선을 들었고 수작을 건너보던 여타 의녀들의 눈길도 일제히 그 허준을 향해왔다.
9
의녀 한 아이가 허준이란 이름을 문득 기억해낸 듯했다. 별사람도 아니요 혜민서 근무도 감격이라고 꼭두새벽에 찾아든 시골티 나는 허준에게 금시 흥미를 잃고 흩어지는 의녀들 속에서 그중 나이 어린 그 의녀가 또랑한 소리로 물어왔다.
"외람되오나 허의원이라 하시면 저번 과차 때 이상을 받으셨던 그분이시온지요?"
이번에는 허준이 놀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삼회장저고리에 남치마를 받쳐 입고 앙증스런 침통을 저고리의 고름깃에 단 전통적인 의녀의 복식이되 나이 13, 4세의 앳된 소녀인데 말끝에 상큼상큼 들리는 눈빛이 총명해 보였다. 그리고 궁 생활이 오랜지 취재의 성적을 이르는 '과차'라는 어려운 말을 선뜻 쓰는 것도 나이보다 훨씬 숙성한 인상이었다.
과차란 아홉 등으로 우열을 매기는 취재의 성적을 이른다. 그 분류는 위로부터 이상, 이중, 이하, 다음이 삼상, 삼중, 삼하, 마지막 7, 8, 9등을 차상, 차중, 차하로 평점한다. 그 어려운 과장의 용어를 쓰는 소녀를 허준이 빙그레 웃으며 건너보았다.
"나를 알던가?"
허준이 묻자 소녀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두 손을 모았다.
"뵙기는 처음 뵈오나 성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어디서?"
"제 자란 곳이 충청도 진천이오라 허의원께서 그곳 버드네에서 베푸신 여러 은혜를 익히 듣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허준이 미소했다. 이미 지난 일인데 그런 일로 자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미상불 반가웠다.
"소녀의 이름은 미사라 부르옵니다. 태생이 미천하와 성은 지니지 못하였사옵고요."
"그래 ..."
미천하다 말하고 있으나 어느 한 곳 미천한 그늘이 없는 소녀였다.
훤히 밝은 시각이요 이미 이 구석 저 구석 인기척이 들린 시각인데도 쥐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에 의아해지는데 미사가 나직하게 혜민서의 공기를 일러줬다.
그 말인즉 이번 내의원 인사 중 특히 혜민서의 의원들이 심한 반발을 품고 있다는 것과 그래서 인사가 확정된 어제 2년째 혜민서에 근무하며 이번 인사에야말로 타처로 전근되기를 고대하던 직장(종7품) 한 사람과 부봉사(정7품) 한 사람, 참봉(종9품) 한 사람 그 세 사람이 사표를 던지고 밤사이 고향으로 떠났다는 것과 그래서 남은 몇 사람들이 어의 양예수 대감에게 달려갔으나 그중에도 한두 사람은 저희가 억울하게 생각하는 인사가 정정되지 않으면 그도 내의원을 떠나리라는 그런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직소를 하면 더러 시정이 되던가?"
"일차 영이 떨어지고야 시정되지는 않는다는 소문이옵니다. 하지만!"
"하지만?"
미사가 정색하여 허준을 올려보았다.
"스스로 의원이고자 하는 분들이 꼭 몸 편한 곳만 찾는 그런 걸 보면 우리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더구나 혜민서란 돈 없이 가난한 백성들의 병자만 찾아드는 곳이온데 의원이 되어 꼭 지체 높고 귀한 신분의 병자만 보려고 안달하는 걸 보면 왠지 그 의원들이 미운 생각도 나고요."
"이 혜민서가 그토록 힘 드는 곳인가?"
"궐내에 배치받는 데 비하면 힘들고 빛이 안 나는 곳이긴 합지요. 하지만 과차가 삼하 이상인 분들은 잘 배치되지 않는 곳인데 첫등에 올라 구임인 허의원 같은 분이 오시게 됐다니 혜민설 찾아오는 병자들한테 복이 떨어진 셈올시다."
미사의 나이보다 재치있는 말에 허준이 웃었다.
허준은 느긋했다. 땅을 파고 흙을 져 나르는 일도 아니요 자신이 지닌 의술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라면 설사 신체의 고단함쯤이야 익히 돌파할 수 있는 직이라 생각했다.
허준은 미사에게 청하여 혜민서의 각방을 둘러보기로 했다.
혜민서의 건물 구조는 내경, 외형, 탕액, 침구, 잡병 다섯 건물로 나누어져 그 잡병 속에 부인병과 소아병이 또 세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각 건물마다 널따란 통로인 칸막이로 남녀의 병상과 진찰방이 따로 붙어 있는데 소아들일지라도 엄격히 일곱 살이면 남녀 각각의 병동을 사용토록 했고 그 각 과 각 병동을 의원과 의녀들만 무시로 출입하였다.
각 병사마다 붙박이로 오래 치료할 이와 나날이 오가며 치료받는 병자, 격리해야 할 병자와 한 방에 잠자도 되는 병자들의 병동이 온돌방과 목상 10여 개씩을 배치한 방들로 나뉘어 혜민서 전체의 규모는 꽤나 컸으나 그러나 중부를 비롯, 동서남북 합해 그 다섯 부 마흔아홉 방의 한양성 내외의 병자들이 몰려드는 유일한 국립무료의료원인 혜민서는 진시 개문 후 유시 폐문까지 도성 안의 온갖 병자가 밀어닥쳐 서울에서 가장 소란하고 복닥거리는 관청이었다.
미사를 따라 각 방의 구조를 둘러보며 허준은 병사 앞에 내걸린 의명들이 흥미로웠다. 내의원 도제조나 혜민서 제조로 직책을 받은 이들이 썼다는 그 각 방의 현판글을 보고 있으면 병일랑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내용이었다.
박람군서 정통도예는 서리들의 직숙방에 붙은 현판이고 절충고금 명지운기는 내경의 병동, 대증투제는 외형병동, 인병제방 약판온량은 탕액, 기사회생 맥분표리는 침구 병동에 그리고 잡병 병동의 부인과 소아의 병사에는 통효음양 병심허실 치용보사 등 각각의 의명이 굽어보고 있었다.
허준이 서리의 방 앞으로 돌아오자 그사이 등청해온 이공기가 뜻밖에도 그 서리들의 방에서 나와 허준을 끌고 한쪽으로 갔다.
이공기가 그 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귀띔했다.
어의에게 3년째 혜민서에 떨어진 억울함을 직소하러 간 황오복이라는 주부가 기어이 양예수로부터 내국(대궐 내 약방) 근무로 이동이 되었으며 그 황오복과 행동을 함께 한 박모라는 부봉사도 전의감으로 새로 발령이 났고 여타 인물들에게도 내년의 인사에는 반영되리라는 언질을 받아왔다는 그런 얘기였다.
"혜민서에 온 걸 후회하지 않겠다 하더니 왜 새삼 미련이 남소?"
하고 허준이 묻자 이공기가 수염을 쓸며 겸연쩍게 말했다.
"우리야 어차피 첫 배치요 억울하네 어쩌네 떼를 쓸 거리도 없지. 하지만 ..."
"..."
"양대감이 일차 결정한 인사를 다시 바꾸어준 걸 보면 자신의 인사에 각사의 불만이 쌓인 것을 인정한 듯도 하여 내년쯤엔 우리도 살길이 열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 핫핫. 그리고 모두 그대가 온 걸 궁금히 여기고 있네. 가 인사하세."
신참 두 사람이 고참 의원들과 새삼 통성명하여 인사를 나누었을 때 갑자기 혜민서 안이 악머구리 끓듯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몰려든 병자와 그 가족들이 진찰 순번을 정해주는 진료패를 저마다 먼저 받아쥐려는, 매일 아침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허준은 자신이 배치된 침구의 병동에서 그 밀려드는 병자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종을 전담하다가 혜민서 발령에 사표 던지고 사라진 또 한 사람의 몫을 떠맡았다.
"어의께서 곧 결원을 보충할 의원을 배치해 줄 것이니 그때까지 가외로 수고를 좀 하시게."
어의에게 직소한 덕분에 드디어 혜민서를 벗어나 대궐 안 내국 배치를 받은 감격이 겨운지 황오복이가 들뜬 얼굴로 허준에게 이르며 옮겨갈 자기의 짐을 챙기기에 바빴다.
허준의 혜민서 첫날 일과는 그렇게 침을 놓고 종기를 째고 약을 발라 주는 일로 시작됐다.
병자가 끝도 없었다. 더구나 실무의원 세 사람이 빠져나간 혜민서는 옆 돌아볼 새 없이 바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허준은 오랜만에 자기 손으로 다루는 수많은 병자들을 대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의원으로서의 새로운 용기가 솟았다.
'내 고단함은 병자의 고통에 비하면 열 배도 백 배도 가벼운 것이다!'
점심상을 물리고 미사가 떠주는 숭늉은 이미 병사로 향해 걸으면서 마시며 허준은 뇌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떠오르는 남다른 의욕-그것은 수많은 병자를 무시로 대하면서 자신의 경험이 더더욱 쌓이리라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결의에 찬 불같은 희망이었다.
'나야말로 가장 와야 할 곳,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곳에 배치된지도 몰라.'
허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10
바빴다.
혜민서의 바쁜 나날이 허준을 싸고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허준은 그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하여 감사히 여기는 것은 의원에 서 있고서야 절실하게 실감한다.
혜민서를 나서면 오가는 건장한 사람들을 보며 병자는 자신의 직업의 대상으로서만 느낄 뿐이다.
그러나 한 발 혜민서에 발을 들여놓을라치면 온통 세상은 병자들로만 가득찬 것을 깨닫는다.
그 혜민서 오과에 넘치는 가지가지 병을 앓는 이들을 보고 대하면서 허준은 새삼 자신의 건강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곤 하는 것이다.
나아서 돌아가는 병자가 수없이 많다 할 것이로되 새로운 병자들이 끝도 없이 또 밀려들어온다.
오는 대로 병자들을 다 받는 것은 아니다. 혜민서의 수용시설이 장안의 모든 병자들을 받아들일 시설일 수 없고 찾아오는 수의 10분의 1이나 그날 그날 대처할 뿐이다.
찾아드는 탕자 쪽에서도 병이 났다 하여 무시로 찾아들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제 사는 마을에서 어디 사는 누가 무슨 병으로 가노라는 증빙을 가지고 찾아와 그 혜민서의 접수관원에게 그 증빙서와 호패를 내보이고 모월 모시에 찾아올 것을 허락받는 차례표를 받는데 물론 위급한 병자일 경우는 이 절차를 생략하는 특전을 받는다.
그러나 병자들마다 마음들이 급하고 보니 또 바쁜 생업에 두번 세번 찾아오는 번잡함을 덜고자 달걀 꾸러미니 암탉 한 마리 따위를 혜민서 접수구의 서리에게 넌지시 밀어넣어주니 그 접수구 안 커다란 대다래끼 안에는 으레 암탉이 구구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정도의 선심도 쓸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병자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그 없고 가난한 죄로다가 번번이 차례가 뒤로 밀려나는 것을 보다 못한 다혈질의 병자나 그 가족이 대궐 문전에 있는 관아에서 이따위 호작질이 웬말이냐고 분통을 터뜨리는 일도 더러 일어나지만 도대체가 혜민서 근무 따윈 불만투성이인지라 몇 놈 따지고 드는 백성의 엄포 따윈 눈알을 도끼질 삼아 아래위로 훑어보는 위협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이 혜민서의 분위기였다.
"내가 몇십 년 의원 공부를 한 것이 너 따위들의 병이나 돌보고 고름이나 짜주기 위해선 줄 아느냐?"
내미는 증빙서류를 손톱으로 튀기며 건너보는 의원이나 서리의 눈자위엔 그건 말없는 공갈과 거만함이 내비치는 것이고 성깔이 나서 따져는 들었되 싫어도 그 의원의 도움으로 제 병을 낫워야 한다는 약한 처지의 병자들은 그런 승강이도 결국은 그저 저 하나 제대로 차례를 받으면 슬그머니 입 다물고 마는 것이었다.
또 혜민서 직원들에게는 똑똑한 체 따져 드는 자들을 한마디로 일축하는 비방이 있었다. 애초 병자들에게 차례를 지정하고 입진할 날짜를 혜민서 오과에서 배정하는데 사용하는 약재의 물량에는 매달의 소비량이 한정돼 있기에 따지는 자의 병에 해당하는 과목에서 직원들은 이렇게 말을 잘라버린다.
"당신이 타갈 약의 오늘치는 다 사용했으니 내일 일찍 오게."
그 한마디에 더 따지고 들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약재를 그날 쓰고 안 쓰고는 그날의 사용량을 알고 있는 서리의 특권이요 저희끼리 눈짓으로 오가며 한번 없다고 우기면 그걸 따지고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혜민서의 비리를 깨부순 건 허준과 항께 혜민서에 떨어진 이공기였다.
침구과에 배속된 허준으로서는 용량을 재량하는 약재는 없었기에 병자들이 병동에 들어오기까지의 비리를 알 까닭이 없었고 찾아드는 병자들을 처치하는 일만으로 바쁠 뿐이었다.
게다가 결원이 난 종기 환자들까지 떠맡고 나서는, 더더구나 혜민서 문간의 관행을 알 까닭이 없었다.
"아니 혜민서 근무도 억울한데 더구나 내가 내놓으라고 청한 것도 아니요 저희가 제 손으로 내미는 달걀 몇 개 받아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서리 놈을 제쳐놓고 잡병과 소아병을 맡고 있는 살짝 얼굴이 얽은 고참 의원이 이공기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하는 소리였다.
"더구나 그것들은 어느 한 놈의 입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기고 퇴청할적에 우리 혜민서 동관끼리 주막에 나가 술 한잔 나눠 마시는 밑천이데이."
마치 좋은 일이나 하고 있다는 듯이 큰소리치는 그 고참 얼굴에 날아간 건 말대꾸가 아니고 이공기의 주먹질이었다.
"이놈이 선배 친데이!"
살짝곰보가 동관의 밥상을 안고 나자빠졌다가 벌떡 일어나 고함쳤으나 이공기도 마주 소리쳤다.
"혜민서 혜민서 할 것 없다. 당신네가 혜민서 근무를 그따위로 하니 내의원에서 아예 혜민서 근무자들을 발가락에 때처럼 보는 게다. 만일 앞으로 또 한 번 혜민서 욕을 먹이는 자가 드러나면 선배고 나발이고 간에 내 주먹맛부터 볼 것이니 그리 알아라!"
마악 점심상을 받으러 들어오던 허준이 직숙방에서 벌어진 그 광경을 보았으나 싸움을 말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허준은 선배를 쳤다고 흥분해 나서는 또 다른 고참의 앞을 딱 가로막고 이공기와 뜻을 같이한다는 것을 말없이 시위해 보인 것이다.
싸움은 그걸로 끝났으나 이 일로 이공기와 허준은 그나마 혜민서의 외톨이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공기는 집요했다. 죽일 놈 살릴 놈 선배를 치는 주먹잡이라는 등, 등 뒤에서 욕질과 손가락질을 하던 그들이 다음 날 이공기가 아예 병자를 제쳐놓고 혜민서의 기강부터 바로잡는다고 접수구에 버티고 서서 서리의 농간 여부를 지키고 서자 결국 화해를 걸어온 건 고참들이었고 이공기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고 그 이공기의 고집을 지원하여 허준은 이공기가 맡아야 할 병자들을 자청하여 맡았다.
그 두 사람의 의협심을 의녀들이 화제 삼았고 그 화제는 궁에 출입하는 선배 의녀들의 입을 통하여 내의원과 전의감 쪽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문을 접하고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이 도제조를 보좌하는 유의 정작이었다.
'이공기 ...'
정작이 자기의 기억 속에 뚜렷이 박혀 있는 허준이란 이름 외 마음속에 이공기란 성명을 또 하나 치부했다.
혜민서 문전이 깨끗해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공기도 허준도 더 이상 접수구 곁에 서 있지 않고 등청하는 길로 각자의 병동으로 돌아가 순차대로 찾아 들어온 병자들을 치료하는 나날이 다시 흘러갔다.
그러나 혜민서 근무에 절망하고 환고향한 의원과 양예수에게 직소하여 혜민서를 빠져나간 황오복이로 인해 뚫린 결원은 곧 충원되리라는 소식만 날 뿐 그 가을이 다 가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세상 됨됨이라곤 ..."
마지막 환자를 내보내고 퇴청 준비를 하던 이공기가 피고름이 밴 옷을 갈아입으며 아직 남아 있는 환자의 침 뽑을 시각을 기다리며 잠시 건너와 있는 허준에게 뇌까렸다.
"왠가?"
"새삼 의문을 가지려는 게 아니라 생각해보게. 궐내에서야 누구의 환후가 어떻다 병 하나 나면 어의를 비롯 오과 의원을 다 동원해 달려가 입진하기 바쁘면서 이곳에 오는 병자들은 다 무지렁이들이라는 건지 우리에게만 떠맡긴 채 빠져나간 결원을 충원도 안 해주니 몸뚱이가 무쇠가 아닌 터에야 이 생활을 언제까지나 버틸 것 같은가."
"우리가 이놈의 데서 매일 수백 명씩 다루며 죽어나는 적에 궐내 각궁에 배치된 것들은 그 시각 뭘하고 있는지 알던가?"
"침 뽑고 돌아오겠네."
입구에 미사가 부르러 온 모습을 보며 허준이 이공기의 화제를 끊자 이공기가 내뱉었다.
"윗전들의 방에서 물려 나온 술상 기다리는 놈, 궐밖에 밤 나들이 나가려 옷이나 다리는 놈, 또 제가 보약에 관해서는 대가인 양 환절기니 보약은 자셔야 합니다, 이러이러한 보약을 청하소서, 그걸 꼭 잡수셔야 내내 무병하옵니다, 아첨 떠는 놈."
"돌아가다 술 한 잔 하세."
허준이 그 이공기를 달래듯 웃으며 미사와 함께 자기의 병동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