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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동의보감 5

9. 스승의 부름

 

1

"이틀 ... 하루 130리씩 이틀!"

그건 절대절명의 시한이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내의원 취재의 일정이 연기되리라는 것은 바랄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앞으로 남은 이틀 안에 한양에 당도하여 내의원 과장에 무슨 일이 있어도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움직일 수 없는 시한 앞에서 차라리 버드네에서 병자들을 상대하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초조와 불안이 가슴을 옥죄기 시작했다.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던가.

어느 생각의 마디에서 불길한 비유가 튀어나와서는 자신의 목과 허리를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틀이면 충분히 갈 수 있어.'

허준은 새삼 앞장서 지름길을 안내하고 있는 떠꺼머리를 잰걸음으로 따라붙으며 자기를 격려했다.

'어느 분야의 충원을 위한 취재인가?'

정말 그것만 알면 이틀 남은 노정 속에서 걸어가면서라도 그 분야를 대충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망상은 버려야 해. 난다 긴다 하는 온 나라 안의 의원을 상대로 조정이 실시하는 취재에 어찌 그런 요행이 해당될 건가.'

떠꺼머리가 헤쳐가고 있는 험궂은 산새를 바라보며 자칫 지금 자기가 내의원 과장에 앉아 있는 듯한 그 착각을 고소했다.

허준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며 걸음걸음 출제 분야의 대강을 하나씩 꿰어갔다.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그리고 내경 분야를 세분하여 신형, , , , , 오장육부, 또 잡병의 갈래로 심병, 진맥, 용약, 해독, 구급 그리고 천지운기의 이치를 논하는 이론 등.

그 골몰 속에서 허준의 눈두덩이 자꾸 무거워 오고 있었다. 연사흘 눈을 못 붙인 피로가 길을 걷는 속에서도 자꾸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잠잘 시간은 없어!'

부릅떠도 부릅떠도 떨어지지 않는 수마와 싸우며 허준은 자신에게 고함쳤다. 그때였다.

떠꺼머리가 앞장선 가파른 산길이 거의 끝나고 있었고 문득 떠꺼머리가 길도 아닌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따라 내려가던 다음 순간 허준은 아연해지며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 외길은 거의 쓰러져가는 오두막 담장도 없는 마당에서 끝나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딘가?"

여러 해 지붕도 이지 못하고 골이 패고 잡초가 새끼를 친 불빛도 인적도 없는 오두막을 보며 허준이 묻자,

"우리 집여유."

하고 떠꺼머리가 오히려 허준을 쏘아보았다.

"우리 집이라니?"

그때 불도 없는 방안에서 문득 늙은 여인의 기침소리가 났고 돌연 떠꺼머리가 허준에게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지가 거짓말을 했어유. 용한 의원인 걸 알았길래 우리 어머니 병 좀 봐달라구선. "

"뭣이야?"

"죽을병에 들었는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먹지도 못하구유 천날만날 저렇게 기침만 하고, 살려주세유."

떠꺼머리가 허준의 발치에 이마를 조아렸다.

"제발 우리 엄닐 살려주세유!"

허준이 뒷걸음쳤다. 이젠 남과 허튼 말 한마디 건네고 있을 여유도 없는 자기였다.

"이렇게 빌어유. 난 사흘씩이나 지켜봤어유. 내가 벼르고 별러서 모시구 왔다구유."

"자네가 뭐라고 하건 이젠 난 단 한시도 어물거릴 여유가 없는 사람일세."

떠꺼머리가 돌아서는 허준의 하반신을 끌어안았다.

"놓게!"

"아이구, 의원님 의원님!"

"!"

떠꺼머리가 한사코 허준의 허리를 끌어안고 질질 끌려오며 눈물 콧물을 번들거렸다.

"살려주세유, 제발 우리 엄닐 살려주구 가유웃."

허준이 자기 몸에 파고든 그 떠꺼머리와 손가락을 풀어내고 돌아선 순간 튕겨 일어난 떠꺼머리가 품에서 꺼내 든 건 버드네 뉘 집에서 훔쳐 왔을 부엌칼이었다.

"그냥 가면 죽일 터! 울 엄닐 안 살리고 가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여!"

고함과 함께 뛰어든 떠꺼머리의 칼날이 허준의 가슴 앞에서 부르르 떨었다.

"그 칼 놔!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내 말 듣게. 자네야말로 첨부터 내 사정을 지켜본 사람 아닌가. 용서하게."

"당신 사정 따윈 난 몰라. 당신이 울 엄니 병을 낫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만 지켜보고 있었던겨!"

말끝에 다시 칼날이 허준의 앞으로 다가섰다.

허준의 머리가 맑아 왔다. 떠꺼머리의 눈의 살기가 진짜였다. 이대로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허준이 낮게 말했파.

"네가 핍박을 하건 말건 난 떠나야 해."

"뭐 어째!"

"사람 살려달라며 칼을 휘둘러? 내가 그깐 칼이 무서워서 사정하는 줄 아나. 찔러보아! 칼 아니라 더한 것으로 핍박해도 날 못 막아!"

떠꺼머리가 잠시 압도되어 망설이자 허준이 돌아섰고 순간 그 등 뒤에서 떠꺼머리의 호홉이 폭발했다.

그 부릅뜬 눈과 칼날이 허준의 가슴팍에 뛰어들었다.

허준이 거머든 보따리로 그 칼날을 받았다.

칼날이 여벌의 짚세기를 뚫고 보따리 속의 벼루를 찌른 쨍그랑 소리가 났다. 동시에 허준의 발길이 숙여진 떠꺼머기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용천 파락호 시절 익힐 태껸의 솜씨로 상대의 척택(오른팔 팔굽 안쪽)을 쳤다.

그 강도로 목줄기를 치면 목이 부러지거나 반 시각은 눈알의 초점이 흩어지는 호신의 일격이었다.

칼이 허공을 날아 서너 칸 저쪽으로 떨어졌고 떠꺼머리가 어깨를 감싸며 마당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허준이 칼맞은 봇짐을 고쳐 쥐며 마악 마당을 나설 때였다.

기침소리가 나던 단칸짜리 어두운 방안에서,

"밖에 누구여? 만석이 돌아온겨?"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산발한 백발에 띠를 맨 노파가 내다보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허준이 돌아보자 노파가 희미한 눈에 마당의 정경이 좀은 비치는지 눈을 끔벅거리다가 "누구여, 누구여." 부르다가 돌연 다시 기침을 터뜨리며 각혈과 함께 문지방 너머로 굴러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떠꺼머리가 "엄니!" 하고 목이 멘 소리를 외치며 병자에게 달려들었고 거의 동시에 허준도 보따리를 던지고 노파에게로 뛰어들며 떠꺼머리를 밀쳐내고 병자를 부축했다.

병자는 시력이 온전치 않은 듯했고 토혈이 심했다.

허준이 소매 속에서 명주 수건을 꺼내 병자의 입을 거푸 닦았으나 노파는 계속 쿨럭거리며 피를 뱉어냈다.

오히려 다급한 건 허준 쪽이 되었다.

"언제부터 이 지경에 이르렀나! 피를 이렇게나 토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턴가고 묻고 있는 걸세!"

"꽤 오래됐어유. 재작년엔가 하도 못견뎌 하시길래 한번 의원한테 보였더니 ..."

"그래 보였더니!"

"죽을병이라며 그냥 맛있는 거나 자주 해드리라구선 ..."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떠꺼머리가 울음을 울었다.

"그래서 마냥 이대로 내버려 뒀단 말인가!"

"귀한 약을 써야 차도가 있을 거라는디 돈이 있간유 ... 그래서 별수 없이 숯가마 숯 굽던 일은 걷어치우고 주막에 나가 술 심부름이나 해주며 더러 고깃국을 얻어다 드리군 했는디, 요즘은 것두 제대로 못 넹기구 ... 걸핏하면 피를 토해유."

허준이 병자의 눈을 까뒤집고 들여다보았다. 이미 눈자위가 허옇게 변하고 있었다. 허준이 고함쳤다.

"손발을 주무르게!"

"남의 살이 닿기만 하면 아프다구선 ..."

"어서!"

떠꺼머리가 그 허준의 무서운 눈빛에 놀라 제 어미의 수족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허준은 병자를 봉당에 반듯이 눕히자 침통을 끌러 버선도 없는 병자의 앙상한 발바닥을 자기의 무릎에 올렸다.

그리고 호침을 뽑아 병자의 용천(발바닥의 움푹 팬 중앙)을 취했다. 신과 연결된 곳이나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는 급소요 호침은 경락 중에 심한 마비를 다스릴 때 쓰는 침이었다.

병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준은 이어서 폐에 새 숨을 불어넣기 위해 소상(왼쪽 엄지손톱 옆)과 어제(왼손 엄지 아래 살점의 가장 두툼한 곳)에도 침을 찔렀다.

이윽고 병자가 숨을 새로 몰아쉬기 시작하자 허준은 떠꺼머리에게 외쳤다.

"내 보따리 가져오게."

"이렇게 그냥 가시면 어쩌냐구유 ..."

"어서!"

떠꺼머리가 마당에 던져진 허준의 괴나리봇짐을 들고 오자 허준은 일변 보따리를 끌러 지필묵을 꺼내며 자기의 노자 속에서 약값을 꺼내 떠꺼머리에게 쥐어주었다.

그리고 병자에게 필요한 약재를 일필휘지하여 떠꺼머리에게 건넸다.

"즉시 자네가 아는 가장 가까운 의원에 가서 예 적은 약재를 사 오게. 어머니를 살리려거든 한 시각도 지체하지 말고!"

사태를 안 떠꺼머리가 어둠 속으로 구르듯이 달려나갔다.

병자의 호흡이 다시 깔딱거리고 있었다.

돌연 허준은 병자의 양볼을 움켜잡아 입을 벌리게 한 후 자신의 왼손 무명지를 깨물었다.

으드득 하고 머리 복판에 대침이 꽂히는 충격이 왔고 허준은 부서진 손가락 끝에서 두두두둑 ... 듣는 자신의 피를 병자의 목구멍 속으로 떨구기 시작했다.

 

2

단지는 약이 아니다. 그건 달리 필요한 약의 방편을 찾지 못했을 때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의 상징인 건강한 피를 병자의 몸 안에 섞어주어 살려보려는 염원의 뜻이 더 진한 것이다.

그렇기에 단지란 효자나 열부의 전설에 묻어 있는 사건이지 의원의 행위일 수 없다. 그러나 허준의 그 행동은 약효를 가늠해보기 이전의 무아의 행위요 위급한 병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의원으로서의 개안이기도 했다.

눈알이 빠지듯한 격통과 함께 자신의 이빨에 으깨진 왼손 무명지에선 아직도 피가 계속 노파의 목구멍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죽은 듯한 병자가 크게 깊은숨을 한번 몰아쉬었고 이어 병자의 앙상한 두 손이 허우적거리듯이 자신의 턱을 움켜쥔 허준의 우왁스런 손을 떼어내려 하며 신음소리를 틀어내기 시작하더니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시오니까."

"뉘시우 댁은?"

노파가 꿈을 깬 듯한 눈으로 자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낯선 허준에게 물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오이다."

"이상도 ... 하지 ..."

노파가 또 꿈결처럼 뇌었다.

"무엇이 말씀이오?"

"꿈결에 ... 신령님을 보았어유. 만석이 아부지하고 함께 나를 가로막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방으로 들어 가십시다."

허준은 봉당 맨땅에 누운 병자를 안아 들었다. 노파는 한 마리 토끼처럼 가볍고 따스한 체온이 살아나고 있었다. 지푸라기가 섞인 흙덩이가 그대로 비어져 나온 토담방은 싸아한 빈대의 피냄새가 괴어 어수선했으나 허준이 토혈질로 얼룩진 병자의 이불을 뒤집어 깔고 높은 베개를 터뜨려 높이를 조절하고 있는데 숨이 턱에 닿은 떠꺼머리가 뛰어 들어왔다.

그 손에는 서너 첩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허준이 방을 나가 약첩을 헤쳐 써 보낸 약재임을 확인한 후 물었다.

"집에 약탕관이 있는가?"

"부엌에 두 개씩이나 있지유."

"참숯은?"

"숯은 부엌 구석에 몇 포씩이나 쌓여 있구유."

"그럼 됐네. 내가 약을 달일 동안 자넨 방에 들어가 병자의 치마끈을 풀어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게."

하고 문짝 대신 드리운 싸리발을 들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간 떠꺼머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머리를 등 쪽으로 방위를 바꾸어 눕혀진 어머니에 의아해하다가 저고리 앞설의 벌건 핏자국을 보고 안타까이 외쳤다.

"이제 피를 안 토해도 될껴. 내가 마악 약을 지어온간이여!"

"이건 토한 게 아니구 저 양반이 제 손가락을 깨물은 자국이여."

"손가락을 깨물다니?"

"나도 첨엔 몰랐어. 근디 숨이 안 넘어가구 목이 칵칵 막혔는디 갑제기."

"?"

"목 안에 불덩이처럼 뜨거운 무엇이 목젖을 지져대길래 눈을 떠봉께 저 양반 손가락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더라니께."

"엄니를 위해서 저 사람이 자기 손가락을 깨물었단 말여!"

"안 본겨, ? 대체 누구여, 저 사람이."

떠꺼머리가 자리를 차고 방을 굴러나가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부엌칼로 약재를 썰고 있는 허준의 손을 잡아들었다.

"무슨 일인가?"

떠꺼머리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일변 자기의 옷깃을 잡아 뜯어 허준의 피투성이의 손가락을 감았다. 이어 허준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고마워할 것 없네. 병자가 위급하기로 달리 손쓸 수가 없어서 선인들의 정성을 따라 해봤을 뿐."

"... 우리 같은 신세 아무도 사람대접 안 해줬는디 ... 이 은혜를 어찌 갚아유 ... 어찌 갚냐구유 ..."

대답 대신 허준이 다시 약재를 썰기 시작했다.

온몸에 새벽의 냉기가 휘감기고 있었다. 날이 밝고 있다는 것은 허준에겐 남아 있는 이틀이라는 시간 속에서 다시 하룻밤이 흘러가 버린 것을 의미했다. 과장에의 입장이 소문에는 사시(상오 10시부터 11). 그리고 그 사시는 바로 내일의 사시를 의미한다.

'내일 사시까지 260.'

약재를 써는 허준의 동작이 정지했다. 말인즉 오늘과 내일하고 이틀을 꼽을 수 있되 기실 그건 내일 새벽까지와 사시까지의 한나절을 의미했다.

"그러나 ..."

'어서 떠나야 해!'

허준의 손은 아직 약재를 썰고 있었다. 위중한 병자였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떠꺼머리에게 부자라는 극약이 섞인 약을 달이게 할 순 없었다. 또 자기가 지어주고 자기가 달여준 약을 먹고 병자가 편안해하는 모습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 자기가 떠난 후에라도 산천에 자생하는 약초를 일러주어 아들의 효성으로 제 어미의 병을 낫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야!"

하고 허준의 칼질이 다시 멎었다. 과장에 입장은 내일 아침의 사시일지라도 과장에 들어가는 수속은 내일이 아니요 바로 오늘 해 안으로 내의원에서 마친 후 그 시권을 받아들어야 내일 과장에의 입장도 허용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한양에 도착해야 할 시간은 내일 사시가 아니라 내의원 시관들이 퇴청하기 전인 바로 오늘 신시(하오 3시부터 5)까지 가닿아야 하리라.

그건 절망이었다. 개처럼 달리고 새처럼 날아가지 못하는 한 오늘 해안으로 260리 길을 갈순 없다.

약재를 약탕관에 차곡차곡 재어가는 허준의 목덜미에 진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참말 이 은혜 돈 생기면 꼬옥 갚을 티니께 믿어주세유."

간이 바싹바싹 오그라드는 듯한 갈등 속에서 그러나 허준이 손수 약을 달여내어 병자를 안아 일으킨 후 첫 탕을 먹이고 나자 아들인 떠꺼머리가 괜히 울상이 되어 되풀이 되풀이 치사를 했다.

"자네 어머니 병은 소음병이라 하는 것으로 처음 심한 추위를 몸에 맞아 그로서 비롯된 것이며 처음엔 작은 약으로 조절이 가능했던 가벼운 증상이건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큰 병으로 번진 걸세."

"엄니는 본래부터 약골이셨어유. 그리구 10년쯤 전에 숯을 굽는 아버지를 따라 숯굴에서 살면서 그때부터 시름시름했었슈."

"짐작 가네."

부자의 독한 약 기운인지 조금 생기를 회복한 병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고 끼어들었다.

"지발 숨만 가쁘지 않으면 살겠어유. 하도 견디기가 어려워서 원젠가야 몰래 의원을 찾아갔더니 폐라구 하던가유, 거기가 엄청나게 병이 들었다구선 ..."

"일견 폐병 같지만 폐만 원인이 아니올시다."

"다 가난이 웬수예유. 정 아프구 할 적에는 쟈 아부지도 의원한테 가 보라구 그러셨지만 온통 숯껌댕이가 돼갖구 그 고생고생하는 남편을 보면서 조금 아프다구 의원 찾아가기가 미안해서 그냥 참구참구 했던 게."

거두절미하여 허준이 병자가 명심할 말을 골라 말했다.

"사람의 가슴이란 하루 수만 번씩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기운이 드나드는 곳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고 마시는 음식 또한 변하고 상한 것이 많아 늘 조심을 해야 하는 곳올시다. 가슴 흉자 글자 풀이를 해봐도 흉한 기운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그것들이 똥오줌으로 쏟아져 나가지 않고 밤낮으로 가슴 복판에 남아 있다 하여 가슴 흉자의 복판엔 유독 흉한 흉자가 그려져 있는 것 올시다."

"눈이 까막눈이다봉께 글자까지는 모르지만."

"암튼 내가 적어준 처방전 간직했다가 돈이 생기면 어머니의 수족에 온기가 돋아오기까진 주욱 그 약재를 사다가 내가 가르쳐준 대로 약을 달이게."

"꼭 그렇게 하겠어유."

"또 하나 토혈은 목안이 헌 게 원인이니 늘 엉겅퀴의 생즙을 짜서 먹는 것 잊지 말고."

"명심 명심할 거예유."

허준이 처방전을 쓰느라 헤쳐놓았던 자기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요기라도 하시고 가야 하는디 ..."

하고 병자가 벌겋게 젖은 눈으로 허준을 건너보았으나 짐을 움켜든 허준은 연민의 시선을 한번 주어 인사를 대신하고 땅을 나섰다.

눈알이 가시에 꿰인 듯이 따가웠다. 나흘째 잠을 못 잔 눈이었다.

잠을 안 잔 건 눈뿐이 아니었다.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손으로 신들메를 죄어 매던 허준은 그대로 고꾸라져 깊은 잠속에 떨어져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잘 있게."

하고 두 손을 맞잡고 따라나서는 떠꺼머리에게 허준이 인사를 던졌을 때였다. 갑자기 눈을 빛내며 떠꺼머리가 말했다.

"혹시 말을 탈 줄 아세유?"

"말이라니?"

"저 때문에 바쁜 길을 못 가셨으니께 말 한 필을 어찌 구해볼려구유."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다음 순간 그 떠꺼머리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럴 수가 있겠는가? 말을 빌 수가 있다면 돌아올 제 꼭 돌려주겠네. 살려주는 셈치고 꼭 좀 말을 구해보게!"

"알았슈. 저의 모자의 은인인디 그만 부탁도 못 해드려서야 말이 되갔슈. 여기서 기다리세유. 오래 걸리지 않을 티니께."

떠꺼머리가 신명이 난 얼굴로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허준의 온몸에 새 용기가 용솟음쳐 왔다. 희망에 찬 눈으로 가로막은 검은 산등성을 향해 소리쳤다.

"말만 있으면 260리쯤 오늘 해 안으로 갈 수 있고 말고, 있고 말고, 있고말고!"

허준이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3

아스라이 홰를 쳐 목청을 뽑는 닭울음 소리가 거푸 틀려오고 있었다.

떠꺼머리가 말을 끌러 간 지 거의 반 시각이 지나고 있었으나 허준이 뚫어지도록 지켜보고 있는 그 방향에는 말발굽소리는 커녕 쥐죽은 듯한 고요뿐이었다.

이미 동녘하늘의 한 자락이 붐하니 어둠을 몰아내고 별들이 유난히 더 반짝거렸다.

그러나 허준은 이젠 초조하지 않았다. 물에 빠졌다가 하늘이 내린 금줄을 타고 언덕 위로 소생한 기분이었다.

기마의 술을 배운 것은 용천시절이었다.

신분이 천출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현감이던 아버지의 위세를 업고 용천 서쪽 60리 신도진)의 해안 목마장에서 양반 자제들과 얼려 말에 미쳐 지새던 한 시절이 있었다.

과거를 생의 목표로 하는 양반 자제인 선비들에겐 기마도 육예의 하나인 필수 덕목이다.

허준은 자기는 과거를 볼 수 없다는 신분의 질곡을 알면서도 그 기마 하나에는 미쳤었다.

눈보라를 실은 거센 바닷바람 ... 서해랄지 북해랄지 그 긴 겨울의 용천, 차갑고 산더미 같은 파도더미가 끝도 없이 밀려와 지둥치듯한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신도진 바닷가에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주는 말잔등에 올라 허준은 친구들처럼 동반은커녕 서반에도 응시할 수 없는 자신의 출생을 얼마나 원망하며 울었던가.

그리고 안시성이라는 요동 땅에 남은 고성의 이름을 붙인 그 늙은 검정말이 자기의 기술 부족으로 발목이 부러져 죽어갈 때 그 애마의 갈기를 쓸어주며 동기간의 죽음이나 보듯 울었었다.

'그날이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의 추석날이었어 ...'

나흘 밤을 잠 못 잔 허준의 충혈된 눈이 아득한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미소했다.

'그 안시성의 넋이 지금의 나를 살려주러 오고 있어.'

그 선한 커다란 눈에 끔벅끔벅 눈물을 담으며 죽어가던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했던 그 말,

'260리쯤!'

떠꺼머리가 끌고 온 말이 안시성처럼만 달려준다면 오늘 해 안으로 내의원에 닿아 시천을 받아드는 것쯤 문제도 아니리라.

머릿속에 자꾸만 비쳐오던 영상. 지금쯤 새벽잠을 깨어 내일의 취재에 대비하여 의서를 뒤적이고 혹은 남 먼저 시권을 받아들고자 자리때기 말아 들고 내의원으로 달리고 있을 면면들이 떠올랐다.

도지, 임오근, 또 창녕 물슬천 나루에서 만난 이미 두 달 전부터 취재준비차 한양으로 올라간 밀양 산다는 박갑서, 그리고 이번 버드네까지 동행했던 정상구, 우공보 ...

지금 내의원 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얼굴들이 어찌 그들만일 것인가.

전국 팔도의 방방곡곡 저마다의 소망을 담아 내일의 취재를 겨냥한 사람들이 백도 되고 5백도 되리라.

지지난해 도지가 볼 때의 인원이 8백여 명이었다니 이번도 아마 그 비슷한 숫자가 내의원에 가까운 객관에서 지금쯤 모두 일어나 소세하고 촛불 밝히고 혹은 책장을 뒤적이고 아침상을 채근해 먹으며 부산하거나 ... 허준은 이미 자신 또한 마치 한양에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지금 이 시각 내의원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들을 여유만만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라보던 방향과는 엉뚱한 등 뒤에서 느닷없는 기척들이 들렸고 돌아보니 오라에 묶인 떠꺼머리를 앞세운 관졸 세 사람이 일제히 달려들며 허준의 목에 팔을 감아 쓰러뜨렸고 또 한 자가 팔을 꺾고 손을 묶기 시작했다.

"이 무슨 짓이오!"

허준이 놀라 튕겨 일어나려 했으나 그 얼굴에 날아온 건 관졸의 완강한 발길질이었다. 허준이 입술이 터지며 나뒹굴었고 그 등판에 허리에 세 관졸의 사정없는 발길질이 무차별로 쏟아졌다.

순간 떠꺼머리가 몸을 던져 허준을 가로막으려 했고 그 떠꺼머리에게도 또 한차례 관졸들의 매질이 쏟아진 후에야 허준은 멱살이 잡혀 일으켜 앉혀지고 말끝마다 주먹질이 날아오는 취조가 시작됐다.

이때 또 병자가 굴러 나와 아들과 허준을 감싸려 울부짖었으나 그녀 역시 관졸들의 팔뚝질을 맞고 나뒹굴며 버르적거렸고 떠꺼머리가 이마로 마당을 찧으며 "그 양반은 죄가 없어유. 빨리 한양에 보내줘유." 하고 울먹였다.

"네가 이자더러 말을 훔쳐오라 시킨 자렷다 ..."

키 큰 관졸의 첫마디였다.

"말을 훔쳐오라 시키다니?"

"그 양반이 시킨 게 아니라 지가 한 일여유. 나만 잡아가란 말여유. 나만유."

한사코 변명하려는 그 떠꺼머리에게 또 날아간 건 늙은 관졸의 육모방망이였다.

"시킨 일이 없다구?"

"없소."

매질보다 욕설보다 한양 취재의 길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뜻아니한 눈물이 허준의 양 볼에 자꾸만 흘러내렸다.

"잡아떼도 소용없다. 이자와는 어떤 사이인지 말해라!"

허준은 말할 기력도 없었다.

눈앞에 다가왔던 한양이 260리가 아니라 천리만리 아득히 멀어져가고 있는 절망뿐, 나흘을 밤샘하여 버틴 체력도 한계에 달하여 8년을 뼈무르며 발돋움했던 내의원 취재의 온갖 희망이 자신의 발아래서 소리 내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말 못하느냐!"

육모방망이가 허준의 등줄기를 또 한 번 사정없이 후려팼다.

그러나 아픔 이전에 허준의 눈앞을 어른거린 것은 이번 취재길 자기 못지않게 온갖 정성 온갖 기대를 담고 있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죽자 ... 이대로 죽는 게 나아.'

허준은 그렇게 땅에 길게 누우며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 허준과 떠꺼머리가 개 끌리듯이 끌려가 하옥된 곳은 진천 관아였다.

갇혀 있던 잡범들이 심한 매질과 옷이 찢겨 처박힌 허준을 마치 신세가 같은 자기들의 동류라도 보듯 빙글거리는 눈으로 건네보았고 떠거머리가 그 앞에서 자꾸만 자기 가슴을 치며 일이 이렇게 된 전말을 늘어놓았으나 허준의 머릿속은 텅 빈 채 아무 얘기도 일일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해가 한낮이 겨워 있었다. 지은 죄 없으니 풀려는 나리라. 그러나 풀려난다 한들 해가 지기 전에 2백 리 저쪽 한양에 가서 시권을 받을순 없다.

'후회하지 마라! 돈 아니 생기는 일에 미쳐 비록 이 지경에 빠졌을지언정 후회는 마라!'

비록 취재의 기회는 사라졌어도 이번 길 그는 보았던 것이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이런 병 저런 병에 시달리는 무지렁이라 불리는 저 이름없는 가난한 백성들의 모습을.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인간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인간인가를 이번 길에 깨달았은즉 ...'

그렇다. 그것 하나가 이번 길 자기의 값진 소득일 것이었다. 비록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아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얘기이긴 하되-의지일생, 그 김민세가 적어준 한마디가 뿌듯이 새로운 실감으로 허준의 가슴속을 뜨겁게 뜨겁게 채워오고 있었다.

누가 맹렬히 깨우는 기척에 허준은 잠을 깼다. 눈알은 잠들기 전보다 더욱 따가웠으나 그 시뻘건 눈으로 둘러보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인데 "허준이 나오니라!" 하고 옥졸이 거푸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고 그 옥졸 뒤에는 문식이 있어 뵈는 관원이 조용한 모습으로 허준을 굽어보고 있었다.

허준이 현감이 있는 동헌 뜰 아래 끌려 나왔을 때였다. 그 마당 한쪽에는 떠꺼머리의 노모를 필두로 버드네 마을의 낯익은 촌로와 남녀 주민 이십여 명이 일제히 반기며 일변 허준의 피멍 맺힌 얼굴과 찢긴 의복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굽어보던 현감은 그 소란이 가라앉기까지 과묵한 모습으로 지켜보다가 형방에게 허준의 오라를 풀게 한 후 데리러 온 이방에게 부액을 명하여 동헌 협실(곁방)로 허준을 안내케 했다.

저만치에서 눈물을 훔치던 촌로가 소리쳤다.

사연인즉 떠꺼머리의 노모가 그 몸으로 주막으로 달려가 일어난 일을 얘기했고 이에 주모가 버드네로 달려가 전갈하여 촌민들이 떼를 지어 달려와 허준의 결백을 직소한 것이었고 자초지종 내용을 들은 현감이 서둘러 허준을 불러낸 것이었다.

허준이 들어간 방안에는 어린 관기 하나가 그 역시 일의 전말을 들었는지 형편없는 몰골의 허준에게 날아갈 듯한 큰절을 올리고 나서 이미 준비한 의복 일습을 내놓았다.

뜻밖의 사태에 입이 얼어붙은 건 오히려 허준이었다.

"주안상이 마련된 줄 아오니 속히 의복을 갈아입으소서."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소."

"방금 밖에서 사람들이 얘기한 그대로올시다."

"그럼 나를 방환한다는 얘기요?"

"그렇지 아니하고야 어찌 현감께서 주안상을 갖추라 했사오니까. 곧 현감께서 납실 것이오니 의관을 정제하소서."

말끝에 관기가 다가와 허준의 의복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푸른 빛이 돌도록 눈이 맑은 이제 이팔이 넝었을까 한 어린 관기의 손길과 다가선 머리결에서 분냄새와 동백기름 냄새가 설핏 났다.

 

4

의복을 갈아입은 허준이 다시 관기가 쥐어주는 물축인 수건으로 얼굴과 상처를 닦고 났을 때 협실 밖에 기척이 나며 "여옥아." 하고 여자의 부르는 소리가 났고 여옥이라 불린 관기가 잽싸게 다가가 방문을 열고 늙은 관기인 듯한 여자로부터 술상과 술병을 받아들여 놓았다.

뒤이어 다른 기척이 나고 30대 초반의 젊은 현감이 나타났다.

허준이 시선을 다 들지 못하고 읍하여 경의를 표했고 관기 여옥이가 주안상을 가운데로 두 사람의 방석을 놓았다.

"놀라운 일이구먼."

하고 좌정한 현감이 조용한 첫마디를 했다.

"..."

"부민들의 얘기를 듣고 세상에 아직도 의인이 있는가 여겼는데 그게 또 이렇게 젊은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소."

허준은 대답 대신 허리를 반쯤 굽혔다.

아버지가 현감이었던 허준이다. 현감이라면 종6품직으로서 종9품에서 시작되는 관직에서 6단계의 승진을 거친 직책이다. 비록 충청도 진천이라는 벽지의 관장이긴 하되 이 사람은 이십 대 초반에 등과한 후 남보다 훨씬 빠른 출세가도를 달리는 인물일시 분명했다.

아버지가 40대 후반에 이르러 도달한 현감 자리를 30대 초반에 이룩한 사내 .

'나보다 서너 살 위.'

하고 허준은 준수한 모습에 나이답지 않게 조용하고 의젓한 청년 관리를 건너보았다.

"우선 술을 쳐라."

하고 현감이 관기에게 명했다.

여옥이가 두 사람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네가 요 며칠 내 관내에서 무슨 일을 치르었는가는 부민들로부터 소상히 들었네. 고맙다는 말을 미리 함세."

"누구에게 치하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옵니다."

"그 말도 마음에 드네."

상대가 양반이 아닌 이상 '하게''해라'는 양반의 특권이었다.

"갈 길이 바쁜 사람이란 사연도 들었으니 오래 잡진 않으리니 마음 놓게."

"그 말씀은 소인을 이 길로 풀어주신다는 말씀이시온지?"

"당연한 얘기 아닌가. 공은 있되 허물이 없는 자네를 어찌 잡아두리. 들게, ."

"공이라 자처할 일이 있사오리까만."

순간 허준은 말을 삼키고 맹렬하게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낯이 익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어디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했다. 한번은 자신의 뇌리 속에서 담아두었던 인물일시 분명했다.

그 현감이 입을 열었다.

"아닐세. 부민들의 억울한 일을 살펴주는 건 나의 소임이로되 병든 백성을 돌봐주는 건 의원이 할 일. 그걸 부내의 의원들이 외면하는 터에 외처에서 온 과객인 자네가 스스로 달려가 인술을 베풀었다니 어찌 치하할 일이 아닐손가. 이 잔 받게."

말끝에 현감이 비운 술잔을 허준에게 건넸다.

잔을 받는 순간 허준은 정지했다.

'그 사람이야.'

하고 허준이 내심으로 소리쳤다.

'아내와 정혼했었던 사내!'

8년 전 아내 다희를 데리고 용천을 떠나올 때 장번사령 놈에게 노자를 도둑맞고 그자를 찾아 한양 남대문으로 향하다가 아내가 사색이 된 채 마주쳤던 사내.

아내의 집안이 몰락하기 전 혼약을 했으며 그리고 그 다희를 찾아 유배의 땅 북청이며 의주며 용천 땅에까지 찾아왔던 아내의 옛 정혼자 김상기.

"술을 못 하는 쪽이던가?"

여옥이가 다시 친 술잔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는 허준에게 김상기가 물어왔다. 눈앞의 허준이 찾아 헤매던 여자의 남편임은 꿈에도 모르는 눈이었다.

"..."

허준이 잔을 비우자 여옥이가 그 잔을 김상기의 앞에 놓고 허준을 대신하여 술을 따랐다.

"명리가 없는 곳에도 너도나도 피해 가는 것이 세상인심인데 그 나이에 그러한 일을 해낸 자네는 정말 가상한 데가 있네. 내 자네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리. 허준, 허준이라 ..."

"과찬의 말씀 송구스럽사옵고, 소인의 혐의가 풀렸다면 이대로 떠나려 하옵니다."

"아닐세, 자네는 지금 한숨 눈을 붙여야 하리, 다믄 두어 시각이라도."

"아니올시다."

"취재의 날짜가 내일부터라는 말도 들었네. 하나 면경을 한번 들여다보게. 온통 핏발이 선 자네의 눈은 사람의 눈이 아니야. 그러니 개의치 말고 다믄 두어 시각이라도 눈을 붙인 다음 내 타던 말을 내줄 것이니 그걸 타고 가도록 하게."

"말을 내주신다고 하셨습니까?"

"범인이 말을 끌고 오기를 기다린 것은 승마의 재주가 있다는 걸로 들리는데 말을 탈 줄 모르던가?"

"아니옵니다. 하오나?"

"그럼 됐네. 내가 다스리는 부민들에게 은혜를 끼쳤으니 말 한 필쯤 아까워할 것 없지. 미리 여물을 배불리 먹여두라 일렀으니 한숨 자고 난 후 곧 타고 갈 수 있겠지."

"이 고마움을 무어라 해야 하올지?"

"덕은 외롭지 않는 법이고 친구는 곳곳에 있는 법이지."

'친구!'

"안에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는 방을 치워놨을 것이니 더 사양 말고 내 말대로 하게. 그럼 난 밀린 공사가 있어 나갈 터인즉 자고 나서 따로 인사할 건 없네. 잘 가게!"

"이 은혜 정말 잊지 않으오리다."

허리 굽힌 허준에게 미소를 남기고 김상기가 협실을 나가자 여옥이가 눈붙일 방으로 안내할 듯이 허준을 보았다. 그러나 허준은 사라진 그 김상기를 향해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김상기가 풍긴 보이지 않는 작은 위엄. 그건 뼈대 굵은 집안에서 자란 양반의 습성만이 아니었다. 그건 허세를 뛰어넘은 치열한 자기 도야를 거친 당당한 인격의 분위기였다.

남대문 앞에서 그 운명의 해후 이후 아내의 입에선 단 한 번도 김상기의 이름이 나온 적은 없으나 아내는 좋은 사내를 알았었다고 허준은 생각했다.

'그리고 ...'

그 김상기를 거절하고 자기를 택한 아내에게 결코 후회를 주어서는 아니 된다고 뜻 아니한 장소에서 뜻 아니하게 허준은 멀리 산음 오두막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바로 내일로 닥친 취재를 그리며 치성을 드릴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김상기를 만난 이 우연을 당신은 모르리라. 그리고 집에 돌아간 후라도 아마도 내 입으로 꺼내지지 아니하리라 ... 그건 그 나이에 그 직첩에 이른 그리고 앞으로도 관운의 탄탄대로를 달릴 김상기에 아득히 못 미치는 신분으로 내의원의 문을 두드리고자 선 자신과 비교가 되어서가 아니었다.

왠지 김상기와의 이 만남은 무언가 떼지 못할 운명의 고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관운의 개척이란 삼정승 육판서에의 도전일 것이요 자기 또한 면천의 열쇠는 오로지 어의가 되는 것에 있다.

그 어의도 정승도 판서도 결국은 정치의 중심인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소산일 것이다.

'김상기 -'

하고 허준은 또 한 번 그 이름을 되뇐 후 협실을 나섰다.

그리고 여옥에게 마방의 위치를 물어 자기 발로 찾아갔다.

그 허준을 여옥이가 두어 번 부르며 쫓아왔으나 허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마에 흰 점이 박히고 온몸이 황갈색인 그 말은 손질이 잘된 말이었고 단골 마부가 고삐를 건네주며 이 말이 현감이 얼마나 아끼는 애마인 것과 그 버릇들을 일러주며 돌아올 때 꼭 무사히 데려와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일체의 여유를 잃은 허준은 거푸 채찍질을 가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개처럼 끌려오던 그 진천 장터를 빠져나가자 황량한 들판에는 해는 지지 않았으나 봄날 특유의 황사현상과 바람이 세찼다.

한양에선 취재의 응시자들이 이미 시권을 나누어 받는 것도 마감할 시각일 것이다.

허준은 제발 오늘 하루만은 이대로 해가 지지 않기를 빌며 또 또 또 채찍을 가했다.

다만 5리라도 빨리 가는 지름길이 있을 터이나 인근의 지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허준이 진천 북쪽 40리 죽산면 경계에 이르자 이미 해가 떨어진 듯 사방에 땅거미가 깔려오기 시작했다.

시권 교부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혹시나 사람이 뒤밀려서 좀은 연장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 연장도 곧 끝나고 마감이 되리라 ...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 달려드는 온갖 상념을 떨어내며 허준은 어둠이 깔린 227리 저쪽 한양으로 향해 뛰는 말보다 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달아 채찍을 울려댔다.

 

5

죽산 지나 다시 50리의 양지현-

이미 밤이었다.

말은 인정사정없이 채찍질만 가하는 새 주인에게 항거하듯 여러 번 앞굽을 쳐들고 울어댔다.

그때마다 허준은 조금만 참아다오. 조금만 조금만 하고 말 못 하는 짐승을 마음속으로 달랬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토록 괴롭히던 잠이 달아났다는 사실이었다. 그 빗줄기에 생기가 돈 것은 말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행히 바람은 남풍이었다. 지나가는 소나기인 듯 천둥 번개를 수반한 동이로 내리붓듯한 그 빗줄기는 용인 땅을 한참 통과할 때야 멀어져갔다.

검은 구름 사이로 다시 달이 비쳤고 비 끝에 부는 습한 바람이 상쾌했다. 여벌의 옷을 품에 안긴 했으나 지금 말을 내려 그걸 갈아입을 마음의 여유까지는 없었다.

'쉬어도 광주를 지나서!'

허준은 다시 말고삐를 젖혀쥐었다. 잘 먹이고 훈련이 잘된 그 김상기의 말이 흙탕물이 넘치는 노면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때아닌 시각에 미친 듯이 국도를 북상하는 말과 기수의 복색에 두어 군데 역참에서 기찰포교들이 앞을 가로막고 검색했으나 진천 현감 김상기의 이름과 마부가 고삐와 함께 넘겨주던 마적부를 내보이자 긴 찍자 붙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허준은 지친 말을 쉬게 할 겸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세워서는 아니 되었다. 만일 여기서 땅바닥에 궁둥이를 붙여 주저앉았다가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광주를 지나서!'

광주서 한양은 50여 리, 동이 터오기 전에 그 광주에 닿아야 서울의 문턱에 이르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를 지나면 쉬게 해주마.'

앞발을 절뚝이기 시작하는 말을 보면서 허준은 애원과 애정을 담아 사람에게나 하듯 타일렀다.

광주는 수도 한양 남방의 가장 큰 관소로 종3품 목사가 다스리는 곳이다. 자연 주변 요소에 호령이 상세하여 심야에 말을 뛰닫게 하여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막힌 길은 돌아가는 길이 있을 터이다. 그보다 지금 허준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날이 밝으면 바로 오늘이 취재 응시자들이 과장에 입장하는 날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제 시권을 받지 못했으나 오늘 과장에 당도하여 어떤 수단을 강구하건 취재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이 온 것이다. 어제저녁 나절 진천 옥사에 처박혀 김상기를 만나기 이전의 절망에 비하면 이건 꿈에도 생각 못 한 기적이었다.

과장이 개문하는 사시까지 시각(한 시각은 현대 시간으로 2시간)은 인시 묘시 진시 세 시각이 아직 남아 있다. 게다가 이 광주 경계만 넘으면 길은 고르고 넓어 남은 50리 길은 한 시각만으로도 족하리라.

허준은 다시 말에 오르자 멀리 우편 전방의 남한산성의 검은 산 그림자를 향해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하나 밤새 2백 리를 달려온 건 허준의 집념이 아니고 말이었다.

대로를 벗어난 제방의 긴 방죽 길을 달리던 말이 돌연 앞다리를 꿇으며 허준의 몸뚱이가 허공을 날아가 방죽 아래로 굴렀다.

허준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 머리 위 방죽 위에서 드센 콧김을 뿜으며 서성이는 말이 보였으나 돌쩌귀를 잡고 일어나려는 허준은 자기의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것이 안타까웠다.

비슬거리며 일어선 것도 잠깐 그 몸은 그대로 턱을 처박으며 혼절했다.

이어 닷새째 뜨고만 있던 눈이 마침내 감기며 천길만길 깊은 잠속으로 떨어져 갔다.

-얼마를 잔 걸까- 허준은 스스로 자신의 코고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었다.

편안했다. 누워 있는 곳이 산음 집의 자기 방 같기도 했고 한양 객관의 어느 방 같기도 했다.

그때 새소리가 더 또렷이 들려왔고 해오라기가 꾸억거리는 소리도 났다.

허준은 튕겨 일어났다. 그 눈에 비친 것은 한낮이 겨운 강렬한 햇살에 빛나는 4월의 싱그러운 들판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가!"

'' 대한 기억도 되살아났다. 허준의 입에서 절망 어린 신음이 새나왔다.

기다란 방죽 저 멀리 낯익은 김상기의 말이 주억거리며 풀을 뜯는 모습이 한 가닥 구원이었다.

중천의 해가 이미 오시가 가까웠음을 말하고 있었다. 내의원 과장에 한창 취재가 진행되고 있을 시각이었다.

"안돼 안돼."

비통하게 소리 지른 허준이 풀 뜯는 말을 향해 곤두박질치듯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남한산성의 붉은 석벽이 송림 사이로 보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듯 말은 뛰어오른 허준을 태우고 가볍게 발굽을 떼놓기 시작했다.

어제의 절던 발은 다 나은 듯했다.

말은 유성처럼 달렸다.

서울은 아직 57리가 남아 있었다. 허준의 뺨에 알지 못할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고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한양 성내로 들어가는 길은 아무리 길이 바빠도 허락된 성문뿐이었다.

허준이 길을 돌아 동대문 밖 객점에 이르러 마방에 말을 맡긴 후 동대문 그 육중한 성새 밑을 통과할 땐 하루해가 뉘엿 기운 시각이었고.

"여기 내의원이 어디쯤이오니까!"

하고 미친 사람처럼 묻기 여러 차례 이윽고 중갓을 쓴 행인으로부터 "내의원은 예문관 서쪽이요." 하고 밑도 끝도 없는 대답을 듣고 그 손짓하는 방향으로 예문관을 물으며 달리기 반 시각, 드디어 관상감 남쪽 내의원 정문에 이르자 그 높다란 정청 위에 화제어약 보호성궁이란 위엄 어린 여덟 자의 현판이 찾아온 허준을 굽어보았다.

그것만으로 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는데 그 내의원을 둘러싼 담그늘의 여기저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웅성거리고 혹은 고누를두며 한가로웠다.

한눈에 행색이 서울 사람들이 아닌 걸 알아챈 허준은 혹시나 시권을 받으러 온 의원들인가, 그렇게 취재의 날짜가 하루 연기되었는가 여기며 급히 그 한 사람을 잡고 물었다.

"난 영남 산음에서 취재에 응시하고자 온 사람올시다만 혹 취재의 날짜가 늦춰졌사오니까?"

상대가 논바닥에서 굴러 자고 또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온 허준의 행색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인가 하고 뜯어보았다.

"나랏일로 공포한 일을 늦추긴 왜 늦춘단 말이오. 난 우리 집 서방님 나오시길 기다리는 사람이오."

"..."

그러고 보니 그들은 의원이 아니라 여유 있는 의원 쪽 종자들이었다.

그 종자가 허준에게 내뱉었다.

"이번 취재는 특히 출입이 엄하여서 아침 사시에 일호의 낙자도 없이 개문했고 점심밥도 밖에 나와서 먹는 건 허용치 않고 주먹밥을 싸 들고 들어갔수. 아까 곧 끝나서 다들 나올 시각이우."

"곧 끝날 시각."

그때 허준의 소매를 누가 잡았다.

"허의원 아니시우!"

돌아보니 도지의 종자로 온 상화였다.

그 상화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허준의 참담한 행색을 거푸 훑어보았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어제 시권을 마감할 시각까지 통 보이지 않아서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호패가 없으니 내가 대신 신청할 수도 없고 ... 병이나 났었던가요. 대체 어디 있다 지금사 나타납니까!"

허준이 내의원 정문으로 뛰어들어 주먹이 깨져라 두들기기 시작했다. 주변의 종자들이 우우 몰려와 그 허준을 둘러쌌다.

"열어주시오. 이 문 열어주시오!"

그 허준의 절규 서너 번 만에 육중한 문이 열리며 내의원 관원 두셋이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허준이 풀어쥔 호패를 내밀고 숨차게 말했다.

"경상도 산음에서 의원 취재에 응시코자 온 사람올시다. 중도에 피치 못할 연고가 있어 늦었사온데."

"이자가 미친 자가 아닌가?"

"지금이라도 좋습니다. 남은 시간 것은 응시코자 하오니 시권을 교부해 주시오."

그 행색부터가 불쾌한지 관원이 대뜸 삿대질을 놓으며,

"예가 동네 사랑방인 줄 아느냐. 시권 배부는 어제 끝났다."

"실성한 놈이구먼. 어서 네 집에 가거라."

관원이 억센 힙으로 허준을 내밀쳤다. 쓰러진 허준이 튕겨 일어나 닫히는 문에 매달렸다.

"열어주시오. 이 문 열어주시오 ... 열어주시오 ..."

내의원 문을 미친 듯이 두들겨대는 허준에게 울음이 물렸고 상화가 뛰어들어 쓰러지는 허준을 쓸어안았다.

이틀 후 내의원 정문에 이번 취재의 입격자들의 이름이 방에 올랐다. 928명의 응시자 중 입격자가 7, 일곱 명 중에 여섯 번째에 유도지의 이름이 있었다. 객관에 쓰러져 있는 허준은 그 소식을 상화로부터 전해 들었다.

허준의 절망은 아랑곳없이 한양은 봄볕 가득히 화창했다.

 

6

나이 스물아홉.

그 갑술년( 선조 71574)의 봄-내의원 등재를 향해 몸부림친 허준의 도전은 끝났다.

객사의 방방마다에 묵었던 각처의 낙방 의원들이 취재의 과정에서 정실이 있었느니 사술이 끼었느니 미치지 못한 자신의 재주는 제쳐놓고 하루 저녁 홧술을 퍼마시고 대궐 쪽을 향해 되알진 욕설을 퍼붓다가 그 초라한 모습들이 썰물처럼 사라져갔다.

텅 빈 그 방에 허준은 홀로 나흘째 누워 있었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번 기회는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었던가-

창녕 성대감의 소개장을 받은 일로 유의태에게 내침을 당한 자신이 그 스승과 자신의 가족에게 명예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였음도 일이 끝난 이제서야 새삼 깨닫고 있었다.

차라리 시장에 들어 떨어졌어야 할 말이 있다.

일구월심 가족들의 염원을 제쳐두고 피붙이들도 아니요 돈 한 푼 아니 생기는 가욋일에 빠져 취재의 기회를 날려버린 자기는 김상기가 표현한 의인은커녕 제 앞자락도 여밀 줄 모르는 천하의 바보요 멍텅구리인 것이 옳았다.

몸도 마음도 수백 길 수렁 속을 질척거리며 지칠 채 대로 지친 채 마음만은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허준은 갈 곳이 없었다.

방에는커녕 내의원 과장 입구에서 뒤늦게 나타나 입장시켜 줄 것을 외치다가 멱살을 휘둘리고 덜미를 잡힌 채 내동댕이쳐진 그 형편없는 몰골로 돌아와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사내. 그 행색으로 보아 노자도 떨어진 인물일시 분명하건만 타고 온 번듯한 말 한 필이 든든하여 밤낮없이 지분 냄새를 피우는 주모가 몸보신하라며 잉어죽이며 영계백숙을 조석으로 뇌고 새로 익은 술맛을 귀띔했으나 허준의 의식은 840리 남쪽 산음 땅 가족들의 절망을 떠올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840- 어떻게 달려온 길이었던가 ...

마방 쪽에서 김상기의 말이 말굽을 투덕거리는 소리가 나고 주모가 심드렁한 소리로 몇 마디 응수하는 소리가 난 후 기척이 다가와 나타난 건 상화였다.

도지가 부른다고 했다.

양반 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할 경우 유가라는 게 있다.

급제의 첩지를 앞세우고 친척들이나 선임자들을 찾아뵙는다는 구실로 수하들을 거느리고 왁자 ... 도성거리를 돌며 내가 방에 오른 누구노라 세상에 과시하는 호기 어린 풍습.

그 양반 자제의 급제는 아닐지라도 미천한 출신인 의원들에게도 나라가 허락한 그 좁은 외줄기 관로를 개척한 감격은 결코 과거에 급제한 양반 자제들의 감격에 뒤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양반 자제들에게 무시로 열린 과거가 아니요 있다가도 없기가 더 쉬운 너무나 가물에 콩 나듯한 기회이기에 그들의 기쁨은 더욱 소란하고 유별날 수밖에 없다.

"그 내의원 하급 떨거지들과는 어제로 수인사가 끝나고 오늘은 함께 등방한 인물들끼리 도성 십이경의 하나라든가 양화나루의 희우정이란 곳으로 뱃놀이를 가는데 함께 갈 의향이 있는지 묻더이다."

'뱃놀이 ...'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자신의 절망을 생각하면 지금 도지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눈감고도 안다.

"이미 떠났다 하면 그만인 초대올시다. 할 말이래야 제 자랑 이외 들을 것도 없을 것이니 내키지 아니하면 아니 가도 되오리다."

"안 그래도 형님이 과장 입구에서 소란을 피운 일이며 그간 버드네로 떠나갔던 행적을 화제삼는 이가 있어 술안주 삼아 그 뒷얘기나 듣자고 고작 그런 호기심일시 뻔합니다. 차라리 저와 예서 술이나 한 잔 하시지요."

"술은 생각 없네."

"어쩌시려고요?"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냈는가. 오라 소리 없어도 마땅히 찾아가 감축해주는 일이 옳지."

"천만에요."

"왠가?"

"이런 말 이제 와서 꺼내는 것이 형님의 가슴에 또 못을 치는 말이 됩니다만 도지 그 사람이 지금 형님을 만나보자는 저의가 결코 형님이 생각하듯 그런 심정은 아니올시다. 제가 들은 바가 있어서 하는 얘기올시다."

"들은 바라니?"

"아니 그만두지요."

"... 그러던가."

간단히 포기하는 허준을 상화가 연민을 담은 눈으로 건너보다가 다시 정정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

"한양에 올라와서 도지 그 사람이 뜬눈으로 나흘 밤낮을 버티며 취재준비를 하면서 무어라 했는지 압니까?"

"..."

"형님이 창녕 성대감댁을 다녀온 후 창녕 쪽과 그 인근에서 형님을 찾는 병자들이 줄줄이 이었습니다. 아십니까?"

"모르네."

"하나 허준이란 사람은 이미 산음을 떠났노라, 임오근을 필두로 그의 입김에 쐰 자들이 거짓 대답으로 모두 따돌렸지요. 그건 아십니까?"

"..."

"내가 하도 안타까워서 형님댁으로 몇 번 병자를 데리고 갔더니 형님은 집에 없었습니다. 금년 정초의 일 올시다."

-그땐 유의태에게 파문당한 울분과 절망을 안고 김민세를 찾아 안점산을 찾아 나섰을 때다.

"암튼 그때부터 도지 그 사람은 옛날 두 분이 친했던 때의 그 사람관 변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버티는 의원에 찾아온 병자들이 아버지 아닌 허준이란 제자의 이름을 찾을 때 그때 이미 그 사람은 형님을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 여긴 겁니다. 그건 짐작하시오니까?"

이제야 작은 의문이 하나 풀렸다. 버드네로 향하기 전날 밤 그 주막에서 우연히 상화를 만나 타관에서 동문수학한 도지를 만난 기쁨에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 임오근도 도지도 싸늘하게 외면한 채 더 돌아보지 않던 사실.

"아니 그건 경쟁자 이상의, 적어도 이번 길 꼭 형님한테 이겨야 한다는 원한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번에 붙은 겁니다. 형님은 붙지 않았고 ... 그는 이겼다고 생각하겠지요. 그 승리자의 얼굴로 형님을 한번 내려다보고자 부르고 있는 것 올시다."

"..."

"갈 거리가 못 됩니다. 가지 마십시오."

이윽고 허준이 입을 열었다.

"가겠네. 가세."

하고 허준이 나흘의 칩거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준은 갑자기 결심하고 있었다.

 

7

갈 데가 없다는 것은 이번 취재를 빌어주었던 가족들에게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나약한 애비로서의 감상일 뿐이다.

"놀이터가 서강 어간이라면 떠나는 길에서 멀지 않으니 축하인사를 하고 가겠네."

"이 길로 떠나시려고요?"

"빌린 말도 돌려보내야 하고 버드네란 곳에 두고 온 병자들이 있네."

"무어라고요? 아니 그 웬수 같은 버드네란 데를 또 찾아간단 말씀이 오니까!"

상화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길 나설 준비를 하는 허준을 건너보았다.

그렇다. 그래야 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아니 가고는 또 다른 얘기다.

자기 입으로 다시 오마 약조한 버드네의 병자들이 지금 이 시각도 일각이 여삼추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사실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건 자신이 내의원에 붙고 아니 붙고와는 상관없는 의원으로서 병을 앓고 있는 자들에 다짐했던 어김없는 약속일 터이다.

썰렁했던 허준의 가슴속에 다시 온기가 소생했다.

도지의 초대에도 응할 것 없고 오늘 하루 자기와 도성 구경이나 하며 장차의 의논이나 하자는 상화의 위로 어린 말을 오히려 허준이 달래며 두 사람이 양화나루에 이르렀을 때 희우정 언저리에 등방한 동패들과 술추렴이라도 하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여긴 허준의 추측은 빗나갔다.

희우정 언저리에 도지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갸웃대는 상화가 허준을 세워놓고 강변 어부의 집 서너 집을 뛰어다니고서야 술과 기생을 실은 도지들의 유선이 아침 나절부터 나루를 떠난 것을 알았고 이에 두 사람이 거의 반 시각이나 하류로 더듬어 내려갔을 때야 강 건너 수양버들이 숲을 이루어 휘날리는 곳에 장고소리가 왁자한 차양 친 배 한 척을 보았고 소리쳐 불러대는 상화의 목소리가 세번 네번 비껴갔건만 잇따라 장고소리만 낭자한 채 분명히 도지요 임오근으로 보이는 선객들은 돌아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상화가 발을 굴러 욕지거리까지 퍼부었으나 허준은 더 기다릴 것을 포기하고 상화에게 작별을 나누고 발길을 돌렸다.

갑자기 버드네의 병자들이 보고 싶었다.

십여 명은 잠시의 고통뿐 별탈이 없을 것이요 서너 명은 약이 꼭 필요했고 두어 사람은 그 병으로 목숨을 떨구고 말 그 얼굴들 ...

그 면면들을 떠올리며 허준은 초여름 강변길을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끌고 있던 말고삐를 잡아채어 말잔등에 뛰어올랐다.

곧 가슴이 탁 틔어왔다.

이상도 했다. 떠오르기 시작한 병자의 면면의 고통들이 들려왔고 그들에게 가까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허준은 행복했다.

 

사람들이 푸른 하늘을 본 지 오래되었다.

5월의 장마가 지루했다.

남편 허준이 내의원 과장에서 생애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건 지 꼭 한 달이 지나고 있었으나 허준의 소식은 묘연했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한 자락의 기쁜 소식을 갈망하던 허준의 어머니는 날이 새면 하루같이 유의원댁으로 달려갔다.

도보로 간 아들에 비해 아무래도 나귀를 타고 간 유의원의 아들 쪽이 먼저 한양의 소식을 전해오리란 짐작에서였다.

그 하루같이 찾아드는 허준의 생모에게 꺽새, 영달 등 유의원댁의 제자와 마당쇠들은 짐짓 알지 못하는 얼굴인 양 튕기는 얼굴이었고 더러 되바라진 언동을 보여도 손씨는 늘 웃는 얼굴로 그 꺽새나 영달을 잡고 밤사이 한양으로부터 무슨 소식이 없는가를 묻는 것이 일과였다.

"없소!"

하고 그나마 한마디 대답해주는 날은 기쁜 날이었고 그 대답도 없이 공연히 바쁜 척 들은 척도 돌아보지도 않는 날이 많았다. 자기의 답답함은 며느리의 애태우는 마음에 비해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손꼽아보던 취재의 날이 임박하면서부터 며느리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갔고 취재가 끝난 지 달포, 행여나 행여나 그리고 다시 행여나 ... 하며 날이 새면 현 북쪽 마연동산 나루의 십리길을 종종걸음쳐 달려가는 며느리의 초췌한 뒷모습을 볼 적이면 아들 허준이 취재에는 떨어져도 저 며느리의 소원만은 이루어지는 그런 앞뒤가 맞지도 않는 소원을 품다가 손씨는 갑자기 고개를 젓곤 했다.

'취재에 떨어지다니, 아니고말고. 내 아들은 돼. 겸이 애비는 붙고말고!'

처음엔 손씨도 '첫술에 배부르랴.' 하며 겸양 어린 생각을 했으나 손씨로 하여금 아들이 이번에 꼭 되리란 확신을 갖게 한 것은 오히려 주위의 떠들썩한 소문이었다.

허준 일가가 아들의 한양행을 놓고 주위의 그 소문을 안 것은 아들이 한양으로 떠난 4, 5일 후였다.

취재는 자기 일가의 사건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세상이 그렇지 않았다. 산음 사람들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넓지도 않는 지리산 기슭의 한적한 고장에 영남에 정 울리는 명의 유의태가 산다는 것이 자랑이요, 그 유의태 때문에 산음 사람은 명이 길다고 타 현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터에 그 유의태 문하에서 다시 유의태의 뒤를 이을 두 사람의 신진 기예의 의원이 나타나 나라 안 최고의 의원을 뽑는 내의원 취재에 응했다니 그 기쁨으로 잠잠하던 산음고을 안은 시끌벅적했다.

"둘이 다 될끼다!"

"그걸 말이락꼬! 하모!"

이건 한 사람은 유의태의 친아들이요 한 사람은 비록 파문은 당했으나 창녕 성대감댁에서 펼쳐 보인 허준의 기적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확신이었다.

그 확신파에 속하고 싶으면서도 세상살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곤 못 겪어본 신중한 패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건 욕심이고 ... , 나라 안서 수천 명씩 몰리는 취재라카는데 둘 다 되면 그런 경사가 어딨겠노마는 그 기대는 과분한 기고 하나는 틀림없다."

"그 하나가 눈교?"

"누구겠노. 그래도 유의원 자식인데 도지 그 사람이제. 난 도지데이."

"파문이라캐도 솜씨가 모자라 파문이 아닌 기라. 너는 소문도 못 들었나, 허준이 틀림없이 한 수 위라카더라이까."

"그럼 니는 허준이 쪽에 걸으라모! "

"걸으라니 내기하잔 말가?"

"자신 없으면 빠지그라."

"미친놈, 내가 왜 빠질 끼고. 내 여편네를 걸으라캐도 걸 게다. 난 허준이다."

"난 도지데이."

"나도 허준이다."

"관아에 이방들캉도 온통 허준이 쪽이라카더라. 나도 술 한병 허준이 한테 건다."

"미친놈아, 상수리 사람들캉 하수리캉 동네들끼리 돼지 한 마리 걸고 붙었는데 상수리 사람들은 다 도지한테 걸었다카더라."

"그쪽이 미더우면 그쪽에 걸으라모."

"자네들은 의리도 없나. 유의원댁 약 묵고 무탈하게 지내면서 타관서 흘러온 허준이가 뭐꼬. 모두 도지한테 걸어라!"

"이기 사람 내긴고 재주겨루긴데. 난 누가 뭐라캐도 허준잇시더! 하모요!"

그 떠들썩한 고을의 흥분과 기대를 반영하듯 하루는 현감이 이속들을 거느리고 유의태의 집에 나타나 과묵한 유의태를 잡고 고을의 경사를 스스로 한참 뽐내며 돌아가니 온 고을 안 도지와 허준의 내기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도지와 허준의 신화적인 얘기까지 만들어 살을 붙이며 이젠 한양으로부터 허준이나 도지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은 양가만의 것이 아니도록 소란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다가도 거창, 산음, 진주로 뻗은 관도를 달리는 파발마의 발굽이 지나갈 적이면 저도 몰래 손을 놓고 기대에 찬 눈을 했다.

그 동안 장마에 곳곳의 강물이 불어 길이 끊겨 못 오고 있거니 여겼으나 현감이 인근 역참에 영을 띄워 주막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의 소식을 파발마의 마군들에게 부탁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러나 아침저녁 뛰닫는 파발마들도 두 사람의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관용, 그것도 부사나 도의 관찰사급의 인물들에 전달되는 중대 관령을 대동해 뛰닫는 역참의 마군들에게 있어, 중인이나 천것들의 과거의 하나인 내의원 취재에 누가 붙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관내 양반 자제의 문과, 무과의 급제 소식이라면 그 문중 관찰사부터가 나서서 요란하게 생색내며 선전할 호재이긴 할 것이로되.

산음 사람들이 이젠 둘 다 떨어졌다고 쉬 기대한 것을 후회하며 내기의 열이 식어간 그런 날, 한달하고 엿새가 되던 날의 새벽 드디어 산음고을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도지가 나타난 것이다.

사비로 미리 해입은 내의원 관복에 첩지를 왕지처럼 앞세우고 임오근과 상화 그 수하와 어디서 동원한 농악대를 뒤에 딸리며 마연동산 나루 너머에 나타난 것이다.

강을 건너 있던 허준의 아내가 임오근과 상화에게 함께 보이지 않는 남편의 소식을 물었으나 임오근은 대답도 않았고 상화는 상화대로 가슴이 아파서 "저녁에 가서 따로 뵙지요." 그 말 한마디만 했다.

소식이 뛰닫고 굴러 도지가 아버지의 의원에 닿기 전에 생모 오씨와 그 아내가 엎어지며 구르며 달려 나왔고 금의환향한 도지의 행차가 구름같은 구경꾼들의 손뼉과 환호에 둘러싸여 집에 닿자 유의태가 나타나 그 병사의 마당에서 아들을 얼싸안았다.

"애썼다! 믿지 않았는데 애썼어."

아들의 어깨를 다시 잡아 흔드는 유의태의 감격을 보면서 구경꾼들 속에 따라온 손씨는 집으로 향했다. 허준의 노모는 울고 있었다.

 

8

"무엇이 어쨌어? 이실직고하라거늘 어찌 이놈이 턱만 덜덜거리고 있느냐."

벌떡 일어선 채 다시 앉지도 못한 유의태가 소리쳤다.

"도지 불러오너라!"

"서방님은 아까 감축하러 온 현감 이하 이속들과 술이 과음하여 안채에 누워 있사옵고 ..."

"오라 하라 ...!"

핏기 가신 임오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번 유의태가 고함쳤다.

임오근이 더 얼버무리지 못하고 굴러나갔다.

행려인의 행색으로 찾아와 있던 안광익과 김민세는 묵묵히 술잔을 기울일 뿐 유의태를 만류하려 들지 않았다.

병사 쪽에는 아직도 하객으로 온 인근 촌로들이 도지를 화제 삼아 떠들썩했다.

도지가 한양에서 돌아온 지 아흐레째의 해질녘이었다.

"혹 잘못된 소문인지도 모르니 고정하시고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게."

김민세가 달랬으나 또 유의태의 격노한 음성이 쌍학이 춤추는 발을 뚫고 마당으로 튀어 나갔다.

"상화놈도 불러라!"

취안이 몽롱한 채 뜻 아니한 사랑채의 고함에 찾아와 기웃거리고 있던 꺽새와 영달이 걸음아 날 살려라 내뺐다.

'결국 그랬었단 말인가 ...'

아들의 출현을 기다리며 방안을 오락거리던 유의태가 뜨거운 한숨과 함께 천정을 쏘아보았다.

이럴 수가 없다 싶었다.

안광익이 들어온 소문 한마디.

근자 한양 가도에 떠들썩하게 번져난 소문.

내의원 취재에 향하던 한 인물이 충청도 진천 일대에서 가난한 병자들을 구완해 주느라 취재의 기회도 스스로 버렸는데 그 의인의 이름이 허준이란 젊은 의원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두 붕우가 전한 얘긴 이토록 짧은 것이었으나 그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유의태는 뇌수에 일격을 당하는 충격을 느꼈다.

김민세가 세상에는 동명이인도 있을 수 있지 하고 유의태에게 말했으나 유의태의 얼굴은 모닥불을 뒤집어쓴 듯 무안했다. 마치 만인 환시중에 벌거숭이가 되어 서 있는 그 참담함이 거푸 유의태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그 아이야 ... 동명이인일 수가 없어.'

함께 떠난 것은 알고 있었고 애써 허준이의 성적을 관심 두지 않았고 또 양쪽으로 나뉜 온 고을 안의 떠들썩한 호사가들의 내기라는 것도 듣고 있었으나

"한 개의 과일도 ''가 되어야 익는 법"이라 여기며 유의태는 어느 쪽에도 기대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들 도지가 첩지를 들고 돌아온 것이다.

지금도 금상왕의 어의요 당시도 명종의 어의며 내의원 시관이던 양예수와 목벨 내기 그 구침지희 이후 출세와 영달의 길은 버렸으나 생각하면 도지가 들고 온 그 첩지는 실로 사대에 이르러 달성한 가문의 영광이었다.

일대 유술이는 명이 짧으니 절로 보내라는 늙은 중의 거짓말에 속아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안에서 입이나 하나 덜자며 중을 딸려 억지로 사문에 출가시킴으로써 유의태 집안의 의업은 시작되었다.

짧은 명이 절에 와야 장생하리라는 거짓말로 아이를 넘겨받은 운초라는 그 늙은 중은 시시때때로 불공이 모자라면 너는 죽는다는 위협으로 아홉 살짜리 유술이를 혹사했다.

물대기, 땔감 해오기, 새벽 물긷기가 모두 불공이라는 위협에 소년 술이는 밤도 낮도 없이 중의 종살이에 바빴으나 지독한 늙은 중은 술과 계집질로 늦잠이 예사였다.

10년 적공해야 70수를 하리라는 감언에 소년 술이가 말처럼 소처럼 일하기 9년 그의 나이 18세 이르렀을 때 그 호된 노동에 그 뼈마디가 장사처럼 굵어 있었고 늙은 중 운초의 악행도 꿰뚫어 보도록 어른이었다.

하여 그 술이는 어느 날 그날도 득남을 빌러 절에 올라온 계집을 올라타고 씨근덕거리는 운초의 덜미를 잡아채어 절간 부엌 바닥에 엎어뜨려 놓고 9년 동안의 새경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늙은 중이 할 수 없이 술이에게 가르친 것이 안마술인데 특히 그 안마는 풍병에 득효하고 또 병이 있어도 함부로 의원에게 몸을 보이치 못하던 여자들에게는 성의 환희에 이르게 하는 비법의 효과가 있었다.

이에 몇 사람 산속을 출입하는 계집들에게 실험을 거처 효과를 확인한 술이는 그 길로 하산하여 의원을 자처했다.

그러나 외간남자에게 온몸을 내맡기는 그 의술은 의원이 지녀야 할 구급의 효과와는 다른 것이요 병이 어떻다 해도 제 계집 제 딸자식을 외간 사내의 손끝에 놀아나게 하는 그토록 열성적인 집안은 없었다.

자연 술이는 돈 많은 늙은이의 팔다리나 주물러 겉보리 몇 되 받아드는 의원 아닌 자로 전락했고 뒤늦게 침술을 익히려 들었으나 문식이 없는 그로서는 절망이었다.

이대(유의태의 생부) 유흥삼은 전답 한 뼘 남기지 않은 아비 밑에서 그 역시 먹고 살길은 의술이다 여기고 천자문을 온 방 벽과 천정에까지 써붙여 놓고 애써 학식을 쌓으려 했으나 역시 책을 읽고 쓰는 재주까지는 갖추지 못하고 늘그막의 아비와 함께 만들어낸 것이 유가 고약이요 그 행상으로 생업을 삼았다.

그 고약은 특별했다.

지리산 1592군데 골짜기와 비탈을 춘하추동 부자가 헤매며 남들이 좋다 하는 약은 모조리 캐어내어 한솥에 끓여대는 그 방법이었다.

애비도 자식도 의서를 읽고 해석하는 힘이 없으니 그저 좋다는 약초는 무엇이고 캐어 한데 버무려서는 열흘이고 보름이고 고아댔다.

이 고약 제조에는 한 가지 일화가 따른다. 흥삼이 어느 해 가을 산에서 산삼 다섯 뿌리와 오사 두 마리를 잡았다. 어느 쪽도 금쪽과도 맞바꿀 수 있는 일생일대의 횡재였다.

달려온 술이가 아들 홍삼에게 자신의 몸보신용으로 그 산삼 한 뿌리 먹기를 청했다.

그러나 흥삼은 우리 집안이 오직 좋은 고약 만드는 그 업으로 먹고 사는데 좋은 약재를 구했다면 의당 약재로 써야지 식구가 따로 먹을 수 없다며 달려드는 아비를 밀쳐내고 산삼도 오사도 끓고 있는 고약솥에 집어넣고 휘저어버렸다.

탄식하는 아비와 제 고집을 피운 아들 간의 언쟁이 소문으로 퍼져 유가고약은 양심의 상표로 알려져, 이후 유가고약은 산삼 섞인 약이라며 화농에만 붙이는 약이 아니요 입으로도 삼키는 영약으로 불티나듯 팔려 나갔다.

흥삼은 돈을 모았다. 그러나 그 돈의 출처가 지리산 약초를 캐어다 번 것이라 여긴 흥삼은 지리산 골짜기 곳곳에 채약꾼들을 위한 산막을 짓고 산신령의 단을 지었으며 자신이 행상해 다니는 고장에도 흉년이 들 때면 번 돈을 아낌없이 던지는 덕행을 일삼았다.

그 흥삼이에게서 태어난 것이 삼대 유의태였다.

권력이 불러도 가지 않는 사내, 부자가 청을 넣어도 심병의 순차를 바꿔주지 않는 고집 -

그리고 큰 병 작은 병에도 따로 값을 매기지 않고 병사 바깥기둥에 소쿠리를 내매달아 놓은 채 혹여 병자의 가족들이 침값이나 약값을 물을라 치면 "가진 대로 넣어놓고 가든가 어쩌든가 하게." 하기 일쑤요 "병은 급하고 지닌 것은 없어 그냥 병자만 업고 달려왔습니다." 할라치면 "알았네." 할 뿐 "언제 갚겠느냐." "집이 어디냐?" "약값이 얼마요 시술 값이 얼마노라." 한 적이 없는 사내.

또 심병 후 죽을 사람은 못 고친다 미리 끊고 그밖의 병은 백발백중 낫우는 유의태고 보니 산음 사람들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유의태의 아들 사대인 도지가 타처에 비해 의료값이 너무 싸다고 투덜거리더란 소문이 나고 제자를 자칭하는 자들 중에 웃전을 뜯어 낸다는 비난도 들렸으나 그 대상은 타관서 찾아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행위지 함부로 산음 사람들에게 하는 짓거리는 못되었다.

아무튼 그 유가고약의 4대 도지가 내의원에 붙은 것이다.

어제까지 허준에게 내기의 승부를 걸었던 사람들은 이제야 그건 도지의 당연한 승리로 여겼다.

"한 개의 과일도 때가 되어야 익는다."고 본 유의태도 조부가 의업을 일으킨 이래의 이 경사에 아들을 얼싸안고 환희했었다.

20년 전 과장의 부정을 따진 끝에 의술의 상수가 누구인가 따지고 마침내 양예수를 자기의 버선코 앞에 내꿇린 그 교만 뒤에 숨은 한 .

스스로 조선 제일의 의원이 되고자 했던 야심을 아들이 이루어 온 것이다. 그 내의원 등장은 뭔가?

종실과 지존의 환후를 전담할 어의의 길이 아닌가.

궁벽진 산간의 현감에게도 허리를 못 펴고 사는 그들에게 대궐은 아득히 하늘처럼 높은 곳이요, 그곳의 임금은 함부로 입에도 못 올려보는 이 나라 억조창생의 주인이다.

'20년 전 이미 내 생애에서 출세나 영달을 버렸다 했거늘 이제 와서 내 무슨 망발이었던고!'

아들 도지를 기다리는 유의태는 스스로 자신에 침을 뱉으며 발을 굴렀다.

그 심정을 헤아렸는지 안광익도 김민세도 침묵으로 위로의 말을 대신 하고 있었다. 발 밖으로 소세를 마친 듯한 도지의 모습이 임오근과 나타났고 때아닌 벼락같은 호통이 궁금하여 부인 오씨도 며느리도 뒤쫓아오고 있었다.

유의태가 그 아들을 쏘아본 채 자리에 풀썩 앉았다.

죄지은 바 없는 상화도 영달이에게 멱살을 꺼들린 채 끌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오!"

오씨가 먼저 물었고 이미 불려오는 사연을 임오근에게 귀띔받은 듯 들어서는 도지의 눈에 유의태의 첫마디가 터졌다.

"허준이의 행적을 낱낱이 밝히거라!"

"그자의 행적을 왜 오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는 도지의 대꾸가 오히려 당당했다.

 

9

"허준의 행적을 왜 제 입에서 듣자 하시오니까."

"묻는 말부터 대답하지 못하느냐. 아느냐 모르느냐를 묻고 있는 게다.!"

"조금은 아오 ..."

쩌렁 유의태의 성난 목소리가 그 말을 덮었다.

"아는 대로 말해!"

도지의 입가에 조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네 이놈!"

"할 까닭이 없소. 난 허준 따위에겐 아무 정도 품지 않았은즉!"

"해라!"

돌연 도지가 가로막는 어머니를 밀어내고 마주 고함쳤다.

"이미 다 들은 눈친데 굳이 내 입에서 듣자는 건 무슨 심술이오니까."

유의태의 손이 탕 서탁을 쳤고 그 손에 움켜잡힌 벼루가 먹물째 아들의 면상에 날았다.

벼루의 먹물이 일어서는 도지의 가슴에서 검게 무늬지어 흐르기 시작했다. 소스라친 오씨가 아들을 가로막고 "미쳤소!" 하고 남편에게 소리쳤고 도지가 어머니를 밀치고 아비의 앞으로 나섰다.

먹물이 그 얼굴에 검은 핏방울처럼 흘러내렸다. 그 씩씩거리는 아들에게,

"못난 놈!"

하고 유의태가 내뱉었다.

"무어라고요?"

"천하에 못난 놈."

또 한 번 내뱉으며 그 아비의 손가락이 창날처럼 아들의 눈을 향해 뻗었다.

"못나고 못난 놈. 그걸 모르고 그걸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장구 치고 북 울리며 나는 등제를 했음네!"

"하나 만일 서방님이 허준이와 함께 그 버드네란 곳에 갔다면 보나마나 낙방올시다."

유의태의 손가락이 변명하고 나서는 임오근의 눈을 향했다.

"네놈도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은즉!"

"..."

"대체 허준이 허준이, 허준이가 무엇이오".

오씨가 분해서 소리쳤으나 유의태의 눈은 자식에게 박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감정을 삭인 얼음장 같은 어조로 말을 뱉기 시작했다.

"의원은 영달하는 길이 아니니라, 의원은 돈 버는 길이 아니니라. 영달을 꿈꾼다면 중국말 열심히 배워 역관이라도 될 것이요, 돈 버는 게 소원이거든 장사꾼으로 풀릴 일 ... 의원은 병자를 보살피는 게 소임이다. 그것이 첫 번째 소임이요 둘째도 셋째도 의원의 소임은 그것뿐!"

그 서탁을 움켜잡은 유의태의 손이 다시 경련했다.

"한데 한쪽에선 가던 길도 멈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병자를 보살피는데 유의태의 아들이, 바로 내 자식이 병자는 뒷전이요 오로지 한양 갈 길만 재촉해?"

"..."

"그것이 아비의 훈도에 대한 네 대답이었더냐 그 말이다!"

"..."

"그래서 따낸 첩지! 그게 그토록 자랑스럽더냐? 울고불고 소리쳐 부르는 병자들을 못본 체 외면한 의원이 첩지만 따냈대서 대단한 의원이란 말이냐!"

"대체 어느 놈이 다 지난 일에 이런 이간질을 놓는 게요?"

오씨가 안광익과 김민세를 싸잡아보며 말머리를 바꾸려 했으나 유의태는 또 한 번 도지를 향해 손가락질을 뻗어왔다.

"너는 졌더니라. 네가 비록 내의원에 적을 두게 되었다만 너는 허준에게 졌더니라. 못나고 못난 놈. 행여나 집안의 의업을 너에게 맡긴다 기대를 했거늘 태어난 품성이 이토록 다르니 너는 마침내 허준에게 미치지 못하리로다."

"무엇이 어째요? 대체 그 뜨내기 놈이 영감한테 항차 무엇이기에 말끝마다 그깟 놈에게 빗대어 자식을 비방한단 말이오! 그놈이 당신의 살붙이요 피붙이요!"

김민세와 안광익의 도전을 기다리던 오씨가 유의태에게 손짓해 달려들자 돌연 도지가 먹물이 핀 가슴에서 첩지를 꺼내 들고 일어섰다.

"아버님 말씀이 일견 옳은 듯하오나 분명히 말씀드리오나 아버님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

"이 첩지는 당신도 못 따낸 것을 내가 따낸 것이오!"

아들의 입에서 당신이란 냉혹한 말이 나왔건만 유의태는 이미 미동도 않은 채 마치 타인이나 보듯 아들을 향한 눈이 차가웠다.

"여기엔 당신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이 써 있소. 이 첩지만 있으면 평생 의원으로서의 자격이 팔도 방방곡곡 어딜 가나 인정되는 바요.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 그것으로 족해야지. 더 이상 바랐다간 제 분수에 맞지도 않는 복이니. 세상의 조롱거리로 끝날 것인즉슨."

"아니 고생 고생 그 고생 끝에 성공해온 제 자식에게 애썼다 칭찬은 커녕 악담을 하시꼬."

"악담도 귀담아들으면 약이오!"

"무엇이 어째요!"

"나가 있지 못하는가!"

"그리구 말이야 바른말로 의원은 무슨 흙 파먹고 산답디까! 침놓아 주고 대가 받는 건 응당한 보순게구 그만한 보수도 없어 뵈던 것들이오. 제 갈 길 바쁜 사람 ..."

"흙 파먹을 때 흙 파먹더라도 봐줘야 할 병자는 봐줘야 해. 그게 의원이랄밖에 ..."

"난 후회하지 않소."

씨근덕거리는 어머니를 밀치고 도지가 다시 소리쳤다.

그 아들을 유의태가 연민을 담아 건너보았다. 눈이 충혈되어 붉었다. 눈물 같았다.

"내의원, ! 그 경쟁 뚫고 들어간 곳이니 어찌 자랑스러운 곳이 아니리. 하나 과연 네가 내의원의 진짜 모습을 아느냐!"

"...?"

"천하에 내노라 하는 의원들만 모인 곳이 그곳이다. 침술의 재주도 약 짓는 재주도 조선 팔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술들만 모여서 내의원이다."

"...?"

"특히 그 내의원의 어의 양예수가 누구며 상약 이봉정, 침의 김윤헌, 그밖에 남응명, 정희생, 박춘무, 김영국."

"날 걱정하여 하시는 말론 들리지 않소!"

"너는 아직 익지 않은 감이다. 고작 그 첩지 하나로 자만하고서야 어찌 더 높이 날 수 있으랴."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내의원 높은 담을 넘지 못한 채 왜 떨어졌습니까? 하나 나는 거뜬히 넘었소, 새삼 내게 시기할 것은 없다 그 말 올시다."

더 눈을 뜨지 않는 아버지에게 도지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감춰놓은 비방을 돌려주십시오."

"비방?"

"어차피 이젠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 한양 살림을 해야 할 것이오. 새삼 가르침을 받으러 한양 산음 간을 오르내릴 수 없으니 내주시지요."

", 그건 네가 가져가야 하고 말고. 허준 허준 그 허준한테 간까지 빼줄 사람인데 네가 그걸 미리 차지해야 해."

"어서 내주시오!"

"..."

"어디다 감추었나 모르나 그것만은 기어이 가져가야겠습니다."

"감춘 적 없다. 떼어가거라"

"떼어가다니?"

"내 비방은 내 머릿속에 들었으니 내 머리를 떼어가는 수밖에!"

"무어라고요?!"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가 어찌 비방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스스로 체험하지 않고서야 무엇이 비방이 될지 어찌 미리 알더란 말이냐! 세상의 어떤 병도 고치려는 욕심이 없는 자가! 세상 누구의 병이라도 고치겠다는 맹세가 없는 자가 어찌 어디에 누구에게 쓴 비방을 알 수가 있단 말이냐!"

"네 아버지는 미친 사람이다."

하고 부인이 악을 썼다. 남편의 친구가 두 사람이나 눈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을 만큼 오씨는 남편에게 실망해 있었다. 제 속으로 난 자식보다 남의 자식을 추켜세우는 데에 분함과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뿐이었다.

"난 네가 한양에 가는 것은 반대니라."

하고 유의태가 그 또한 깊은 절망을 담아 아들을 건너보았다.

"그건 무슨 심술이시오."

"뜻이 있다면 새로 시작해도 늦지 않아."

"전 이미 내의원에 합격된 사람올시다!"

"그걸 명예로만 알고 이곳에 남아 새로이 배우고 깨치면 능히 너도 윗대가 물린 가업을 번창시킬 수 있으리라. 하나 섣불리 그 정도의 재주로 내의원에 올라가기를 조급히 굴다가는 ..."

"난 갑니다!"

"큰 나무에 가리면 작은 나무는 시드는 법."

도지가 일어섰다. 그 눈이 아비와 아비의 친구들을 한꺼번에 비웃고 있었다.

"난 갑니다. 더불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도지가 뛰쳐나가자 오씨와 도지의 아내도 달려나갔다.

임오근과 꺽새 들은 이미 도망친 뒤였고 상화 혼자 죄책감을 담아 방문 앞에 꿇어앉아 있었으나 질끈 눈을 감은 채 유의태는 아무도 더 보지 않았다. 그 감긴 눈에서 눈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10

도지가 산청을 떠나는 날 아비 유의태는 그 방문 밖도 내다보지 않았다.

담을 넘는 데는 소문처럼 빠른 것이 없다. 누구의 입을 통해선지 유의태와 도지 부자의 언쟁 내용이 산음 현민들에게 퍼져나갔고 엊그제까지 도지의 의술을 경하해주던 현민들은 허준의 낙방의 이유를 알자 이번에는 허준의 그 의로움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해 마지않았다.

"유의원 같은 사람이 있기 망정이지, 아 유의태 같은 의원이 고을마다 있는 긴가? 아니란 말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모. 병자는 앓았쌓제 돈도 없제 돈 대신 들고 나갈 것도 없어보래이.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일이 그런 경우 아이겠나, 으잉?"

"허준이 허준이 키가 뼈주욱한 기 겉으로는 벨로 볼품이 없어 뵈더만은 참말 소문이 그런다카모 그건 마 우리 산음 사람들이 비석이라도 세워줄 만한 인물인기라."

"이눔아. 이거 소문을 어찌 듣고 있노? 도지캉 같이 한양에 갔던 상화라카나 그눔아가 유의원 앞에서 애초 우예 갔으며 간 뒤 어찌 됐으며 취재라카나 그 시험이 시작된 다음 날에사 한양에 당도해 갖고 뭐 어쨌단 얘기까지 다 털어왔다카더라."

"말이 중풍이지 중풍이 쉽나? 문자 그대로 반신불수, 반은 죽었던 벵자도 침 한 방으로 일으켜세운기라. 내의원 아니라 내의원 할애비라캐도 그런 재주를 안 뽑으면 어떤 놈을 뽑을끼고? 안 그린나?"

"본시 살신성인이라카는 고사가 있지만도 그 참임자가 있는 기라. 말이 쉽지 세상 어느 놈이 허준이같이 굴끼고? 땡감 한 개라도 생기는 게 없으모 가는 길도 삐익 돌아가는 게 시상 인심이라카는 긴데."

"나는 허준이 그눔아가 지리산 골짜기에 약초망태 메고 왔다갔다 하는 걸 언제 한번 본 것뿐인데 그자슥 그거 어디서 도를 닦아갖고 인물이 그만치 컸노?"

그 웅성거리는 산음 사람들의 소문을 뚫고 산음을 떠나는 도지의 짐은 한양 땅에 임시로 옮겨가는 모습이 아니었다.

누대 살아온 고향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떠나는 냉담한 눈빛이었고 말 탄 그 도지의 뒤로 어머니 오씨와 아내의 가마도 뒤따랐는데 그간 신세진 병자의 가족들이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산음 경계를 벗어나기까지 가마 문이 한 번도 열리지 않더라는 숙덕거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처자식에게 버림받은 유의태를 향해 사람들은 동정과 또 일변 자식에게 너무 야멸차게 굴었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제 소문의 주인공은 유도지를 대신하여 허준이었다.

산음이 낳은 의인을 맞이하자며 노유들과, 소문이 나자 갑자기 안 보고는 못 배기겠다는 호사가들이 한통이 되어 마연동산의 나루목에서 아예 차양을 치고 기다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취재가 끝난 지 한 달 보름이 지났는데도 의연히 허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지의 소문이 성할 때는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던 허준의 집은 현민들의 화제가 허준에게 옮아오면서 조석으로 병자가 붐비며 그 병자들보다 더 가슴을 애태우는 생모 손씨와 아내 김씨가 허준의 귀환을 기다렸다.

취재의 날짜는 지나고 한 달이 넘으면서 그때의 그 궁금함과 목마름이야 어찌 말로 다하랴.

그리고 등방한 도지의 출현과 함께 "내일이나 와서 일러드리지요." 하던 상화가 하루 이틀 사흘 열흘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허준의 등방을 포기한 어머니와 아내였다. '다음 기회도 있으려니' 고부가 서로 그렇게 위로하며 이젠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어서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렸는데 들려온 스승댁의 소문을 통해 아들이요 남편인 허준의 행적을 알았다.

그 소문을 처음 들은 밤 어머니도 아내도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고마워서였다. 취재에는 실패했을지언정 두 여인은 아들이 남편이 자랑스러웠다. 비록 목에 첩지는 걸지 안 했을지라도 그 허준이 이미 너무도 당당한 진짜 의원이 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것이면 됐어. 세월이야 기다리면 또 오는 게 아니겠느냐. 있는 이들도 아니요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느라 그랬다니 그 모두 부처님께 덕을 쌓는 길이 아니리 ..."

손씨는 그렇게 며느리와 손자 손녀 앞에서 기쁜 눈물을 흘렸으나 아내 김씨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으로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찼다.

'내가 택한 남자!'

스스로 잘못 보지 않았다는 그런 공리적인 타산에서가 아니라 남편이 스스로 그토록 갈망했던 내의원 취재를 포기하기까지의 마음고생이 불쌍하여 자꾸만 눈물이 홀린다.

그리고 뒤늦게 하루가 늦어서 시장에 이르러 몸부림치더라는 그 절망을 듣곤 그 남편을 자기가 얼싸안아 위로해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충청도 진천 버드네 ..."

587리 저쪽에 있다는 그 버드네로 당장 달려가서 남편을 쓸어안지 못하는 것을 아내는 안타까워했다.

성대감의 소개장을 안 내놓으려 자기의 뺨까지 때리려 하던 남편이 이제 그토록 변한 것이다.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 두 달이 되든 석 달이 되든 안달하지 않으리라. 남편 허준이 그토록 분명하게 확실하게 없는 이들의 편에 서서 참된 의원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녀는 행복했다. 남편의 품속에 뛰어들어 그대로 영원히 쓸어안고 또 안겨 있고 싶도록 김씨는 행복했다.

 

"가업이 끊기다니?"

안채 몸종들도 모두 도지를 따라 한양에 올라갔고 병사 쪽 임오근도 연일 술이나 퍼마시며 사랑에 건너오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다. 유의태가 어떤 사람인가를. 뜻이 맞지 아니하면 자식과의 의도 끊는 사람이다. 이번 일로 실추된 자신의 신임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으리라.

"한마디 말리는 말도 아니했더란 말인가!"

발을 구르며 고함친 유의태의 한마디로 장차 그의 의발을 전수받으리란 꿈은 사라진 것이다.

"두 놈을 죽이리라! 이렇게 물러나진 못하리!"

허준과 유의태에 대한 미움을 그렇게 다지면서 그는 사랑 쪽은 아예 기웃거리지도 않았고 이것도 자리바꿈의 절호 기회로 여긴 꺽새와 영달이 그런 임오근 쯤 안중에 없이 새삼 유의태의 눈에 띄고자 사랑채에 드나들었다.

"가업이 끊기다니? 있다가 힘에 부치면 돌아오겠지."

김민세가 위로하는 말이었으나,

"아쉬워 않으리. 세상사 모두 명수가 있는 것인즉 어찌 한 가문의 영욕인들 없으리요."

하고 유의태는 독백처럼 한마디 내뱉었을 뿐 거푸 술잔만 기울였다.

그 실의의 친구를 지켜보며 김민세와 안광익은 안점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허준의 귀환을 연일 상화를 시켜 알아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허준을 기다리는 내심을 유의태는 캐묻지 않았다.

유의태는 두 사람의 관심을 알고 있었다. 그 관심은 바로 자기의 관심이기도 했었기에 ...

의에 대해서 제각기 조선 제일의 술과 학을 지닌 인물들.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유의태는 김민세와 안광익에게 그걸 인정한다.

그 두 인물이 자기 아들의 어느 모퉁이를 관심하고 인정해주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그러나 친구라 해도 아부하지 않는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진짜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 그들의 오만을 유의태는 사랑했다.

의술에 관한 해박한 지식에서, 특히 양생과 조제에서 김민세는 양예수가 다음 대의 어의 자리를 약속하고 잡으려 한 천하제일의 재목이었다. 또 역적의 지탄을 감수하며 왕자의 몸에 칼을 대어 왕실이 포기한 생명을 구해낸 안광익의 그 부술 또한 천하제일이었다.

침의 당대 제일을 양예수로 친다 하나 그 양예수를 구침지희로 물리친 자신 또한 침술에 관한 한 누구에게 꿀릴 바 아니로되 지금 아들 도지가 지닌 것은 그 침술뿐이었다.

침술은 양예수의 분야이기에 양예수의 가장 견제를 받는 분야이기도 했다. 양예수의 주의를 끌 또 다른 기량이 없다면 양예수 죽기 이전에는 앞길이 막혀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 그리고 ...

의는 아무 그릇에나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그릇은 심성의 맑기와 크기를 말한다.

의를 담는 그릇은 셋이다.

하나는 인품이요 둘은 천품이요 셋이 신품이다.

인품은 고을의 환자를 고치는 그릇이며 천품은 세상 사방의 환자를 고치는 그릇이요 신품은 온 세상의 만병을 바라보는 그릇이다.

그 인품의 격이란 고을마다 깔린 작은 의원을 이르며 천품의 격은 죽었다고 본 사람을 살려놓기도 하는 자기들 정도의 기량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 세 사람도 신품의 격은 서로 사양하여 자부하는 이가 없었다.

굳이 그 격을 든 것은 인간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제약의 근원을 구분한 전설 속의 신농씨와 역시 한족의 초대 군신이라는 황제 그리고 단군 고기에 등장하는 환웅이 있을 뿐.

이에 인간의 경지에서 최고로 다다를 수 있는 의원의 격을 신품과 천품 사이에 선품을 둔다.

그리고 그 선품에 꼽히는 건 아득히 중국의 편작과 창공 그리고 화타를 일컫거니와 그러면 조선의 역사에 길이 새길 선품의 격은 누구인가.

어느날 유의태, 안광익, 김민세는 그 의논으로 밤을 새웠었다.

혹은 과거의 사기에서 이름을 끌어내고 전거가 희미하다 하여 그러한 의원은 미래에 태어날 것이라 입을 모았었다.

"수천 년 중국의 역사에도 의선의 격에 이르는 인물은 불과 두셋을 꼽을 뿐이지."

"그런 인물이 수백 년마다 나타난다 해도 선자 붙이긴 아깝고 내 말은 아직 조선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네."

"엉뚱한 기대들 말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환웅 이후 수천 년간 부침은 있었되 오늘 나라 이름이 조선이 되면서부터 의가 가뜩이나 천직에 떨어진 시대가 계속되는데 우리의 당대에 그런 인물을 보리란 건 욕심일세."

서로 욕심이라 튕기면서도 특히 유의태는 아들인 도지가 의를 담을 그릇이기를 얼마나 공들여 가르쳤던가.

자기의 훈도는 물론이요 안광익, 김민세의 인정을 받아 그들의 가르침까지 받을 수 있다면, 그건 조선 천지에서 그 누구도 바랄 수 업는 행운일 것이었다.

도지가 한양의 숭례문을 호기 있게 통과하던 그 시각 이윽고 허준이 산음 자기 집 오막살이 마당에 털북숭이의 그 초췌한 모습을 나타냈다.

 

 

10. 대결

 

1

충청도 진천 버드네에서 허준이 보상 없는 의료행위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그 낙방한 가장을 맞아 요즘 허준의 집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취재는 떨어졌어도 인심이 허준의 집을 뜨겁게 감싸고 있었다. 사네 죽네 온갖 마름질에 살기 바라면서 그 고단한 세상살이에 지쳐 허기져 쓰러진 이를 두어 번 어깨나 흔들곤 지나치는 모진 인정을 발휘하면서 그래도 때로 사람들은 자기가 행할 수 없는 마음, 자기가 죄면해 온 상황에 누군가가 대신 나선 것을 알면 그제야 그게 누구인가 되돌아보는 한 가닥 썩지 않은 마음씨들을 지녔나 보았다.

그것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자괴 ... 이래서는 아니 되며 사람이면 저래야 하리라는 삶의 가치와 덕목을 너무도 익히 알면서도 또 행하지 아니한다 하여 세상이 자기만 들어 욕하는 바도 아니기에 지나쳐버린 숱한 기억 속의 부끄러움 하나를 허준이란 인간이 말없이 바로 잡았더라는 소문 하나.

없는 이웃을 도와주고 약한 자를 부축해주었다는 너무도 간단한 인정 한 자락.

그건 나도 할 수 있었으며 너도 할 수 있었으며 세상 사람 인두겁을 바로 쓴 자라면 어쩌면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를 그가 행한 것뿐인데 낯선 사람이면 그토록 가혹하고 이기적이며 모질던 인정이 어느 순간 또 세상 이웃을 향한 너무도 당연한 옳은 일 하나에 그토록 열광해 마지않는 것도 인간들의 수수께끼였다.

"저 집이 허준이의 집이데이."

곧장 가던 길도 곁으로 돌아 나와 사람들이 산비탈 보잘것없는 허준의 집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길 나가면 모두 네 인사를 하구 해서 오히려 내가 면구스러워 마치 자식 이름 팔아 떡이나 팔러 다니는 에미 꼴이 됐으니."

흉년이라 인절미에서 수수팥떡으로 채웠던 떡목판을 한나절도 안되어 떨이하고 돌아온 어머니 손씨의 말이었다.

"대체 그 허준이란 의원이 사는 산음이란 데가 추풍령 이쪽인가 저쪽인가?"

"이런 무씩한 것 봤나! 산음이 강원도 땅이지 추풍령고개는 왜 나와?"

추풍령은 넘어보았으나 더 이상의 지명은 꿸 자신이 없는 친구에게 동행한 객이 세상 잘난 인물은 다 제 고장으로 끌어들이고 싶은지 번쩍 경상도 산음 고을을 강원도 땅에 옮겨놓았다.

"우리 외가집이 거창입니더. 허준이 사는 산음캄은 바로 도랑 하나 사이라예."

이런 자랑은 산음을 비껴가는 나루나 고갯길 아래 주막에서 쉬지 않아도 될 걸음을 주막 툇마루에 앉아 공면히 술 한잔 시켜먹는, 산음과 지리가 가까운 사람들의 자랑이었다.

"와요?"

자기 동생처럼 아침부터 나타나 허준의 남매를 데리고 매미도 잡아주고 모래무지도 잡아주는 동리 아이들이 언덕 위에서 내려와 두 아이에게 다가서는 과객을 가로막고 물었다.

"무슨 소문들은 기 있어서 그렇다. 야들이 허준이 그분 자식가?"

"그렇심더. 우리캉 한마실에 삽니더."

"그래, 이리 온나."

과객이 두 아이를 불러 턱없이 정전 한 닢씩을 두 아이의 주먹에 쥐어 주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괜찮다 받아라. 나도 니 아부지를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다. 엿 사묵고 싸우지 말고 잘 놀거래이."

버드네 병자들과 아무 상관이 없을 산음 사람들이 두 아이에게 인정을 쓰며 허준이와 한고장에 살게 된 것을 즐거워했고 그 수많은 소문을 날마다 한 아름씩 듣는 김씨는 다시 그 얘기를 시어머니께 전하며 눈물이 나도록 날로 남편이 자랑스러웠다.

소문처럼 세상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일도 없다.

"허준이 집에 돌아왔다모?"

"왔다 다시 갔다카더라."

"어디로?"

"어디긴, 이제 그 사람 얼굴 보기 어려운 거 아이가. 진주, 고성, 밀양 쪽까지 급한 병도 없는 놈까지 덩달아 찾아오느라 요새 산음 어간 주막들은 허준이 찾아오는 사람들로 대목 만났다카두만."

"에이, 장돌뱅이 되지 말고 나도 의원이나 한번 돼볼 거로 ..."

"? 지금도 안 늦다. 꼭 의원 짓을 해야 허준이처럼 이름이 나나. 장돌뱅이 중에 허준이처럼 되거라."

"나도 언제 우리 어무이 해소병이나 고쳐드리러 한번 찾아가보야 할긴데 ..."

급한 사람은 달려가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벼르며 이미 허준의 이름은 유의태의 이름을 능가하고 있었다.

물론 그 능가는 유의태와 같은 의술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촌로들은 그 두 사람을 산음의 두 ''로 규정했다. 그 산음의 두 ''에서 의는 유의태요 또 하나의 의는 허준이란 뜻이었다.

이 규정에 산음 사람들은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산음 밖의 사람들은 허준을 더 위에다 놓으려 했다.

두 사람의 의술에 대한 경쟁을 본 바도 들은 바도 아직은 맞붙었다는 얘기도 없다. 그러나 태산같이 높던 유의태의 이름과 견주어진 허준이란 새 이름을 사람들은 상쾌하게 여겼다.

그가 새 사람이라는 신선함에서, 또 허준이 과거 유의태의 문하에 있다가 파문당하고 축출당했다는 흥미로운 인연에서 산음 밖 사람들은 신인 허준을 기대하고 성원했다. 그리고 멀잖아 필연적으로 벌어질 두 사람의 대결을 고대해 마지않았다.

"다시 길을 떠난 후 돌아올 기약은 없었다 하시오."

집에 병자와 환자들이 몰리고 가마가 줄을 잇자 허준은 아내 김씨에게 일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엄하게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고 어머니 손씨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세상 소문이 너무나 침소봉대로 커진 일, 또 자기로 인해 스승의 집안에 풍지박산이 난 데 대한 죄스러움. 또 있다.

지난날 성대감 댁 정경부인을 낫운 일이 새삼 신기다 어떻다 거론되며 인근에 몰려든 병자들이 유의태의 집을 지나쳐 너도나도 자기의 집으로 찾아드는데 이르러선 허준은 아연할 따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소문에 좌우되어도 허준은 알고 있었다. 스승 유의태의 의술의 경지는 자신의 재주보다 아득히 구름처럼 높다는 것을. 또 허준은 생각한다. 의술은 누구와의 경쟁도 아닐 것이요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수단은 더더구나 아닐 것이다.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가 배운 대로 자신이 믿는 대로 정성껏 대처하는 것만이 자신을 완성하는 길일진대 세상의 소문에 충동질 당하여 스승 유의태와 이기고 지는 경쟁 따위는 흥미가 없었다.

진다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요, 아니 지고 또 져서야 마침내 자기보다 우월하고 앞선 이를 따라잡을 마음의 터도 마련이 되리라,

그러나 결코 유의태 그 사람과 침통을 풀어 들고 맞서고 싶진 않았다.

허준이 이번 길에 안 것들-세상 소문이 두려움을 알았고 세상의 소문이 지닌 허황함을 또 알았다.

자칫 그 허명에 정신을 팔다가는 잠시 세상 사람들의 흥미나 충족시킬 결코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

허준은 날마다 어디서 왔소 어디서 왔네 낮선 지명을 대고 뒤밀리는 병자와 환자들을 보며 그 고통에 안쓰러워하는 아내에게로 다시 일렀다.

"병자를 보기 시작하면 병자들은 더욱 몰릴게요. 그러나 유의태 그분은 내가 싸울 상대가 아니오. 세상 사람들은 자식에게도 버림받고 유의태 그분이 악이 받치고 분해 떨고 있다 속삭이며 우리 두 사람 죽기 살기로 맞붙기를 바랄 터이지만 난 세상 그 잔인한 구경꾼들의 호기심이나 채워주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소. 내 관심은 다시 올 내의원 취재에 대비하는 일이지 그 무엇에도 한눈팔고 싶지 않은즉."

"하오나 아니 계시다 하여도 날로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아니 계시다는 한마디로 되올지."

"이 산음에 유의태란 분이 의원을 열고 있는 한 난 결코 한 사람의 병자도 받지 않을 것이오."

그날 이후 상화가 찾아와도 허준의 아내는 허준이 오랜 여정을 잡아 길을 떠났다고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

세상 소문이 가라앉고 허준의 집으로 몰려온 병자들이 다시 유의태의 의원으로 발길을 돌릴 즈음.

세상 그 변덕스러운 인심을 한 귀로 흘리며 허준이 자기 집 글방에서 다시 내의원 취재 시험 준비에 몰두하던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소문 하나가 허준의 귀에 들어왔다.

유의태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어 자기 방안에 쓰러져 있었다는 놀라운 소문에 허준은 책과 씨름하던 자기 방문을 박차고 그 길로 유의원을 향해 달렸다.

 

2

허준이 저만치 유의원의 언덕배기로 오르는 외가닥 길에 들어섰을 때 그 언덕을 급히 내려오는 사내를 보니 상화였다.

허준이 걸음을 세워 상화를 기다렸다. 경황없이 달려오던 상화도 눈앞에 서 있는 것이 허준이자 반색을 하며 내달아왔다.

"부르러 가는 길인데 어찌 알고 미리 오십니까?"

"부르러 오다니?"

"그럼 모르고 그냥 오시는 길입니까."

"도시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들리기로 달려왔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임오근이가 집을 떠났습니다. 들으셨습니까?"

"..."!

"떠나도 그냥 떠난 게 아니라 스승님께 패악을 부리다가 떠났습니다. 암튼 들어가시지요."

"나를 부르시는 일은 왠가?"

"가면서 말씀드리지요. 가십시다."

잡아끄는 상화에게 허준이 걸음을 세웠다.

"정녕 나를 지목하시어 오라 하시던가?"

"부자지간 의를 끊으신 후 우리 문도들 모두 조만간 이런 분부가 계시리라 짐작했던 바올시다. 어제 임오근의 난동도 스승님의 그 결심과 무관하지 않고요."

'유의태가 나를 부른다!'

상화의 그 말 한마디로 허준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언가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하는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허준이 물었다.

"임오근의 패악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다니 자초지종 얘기를 듣세."

상화가 비탈을 오르며 어제 있었던 사단을 빠른 말투로 말했다.

이미 십여 일 전부터 임오근의 행동이 불안정했다. 14년 동안 유의태의 문하에 있으면서 특히 창녕 성대감의 '서찰건'을 고자질하여 허준을 파문시킨 후로는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의원의 수제자로 자처했고 아들 도지와 함께 내의원 취재의 기회가 허락된 것도 그런 임오근에 대한 유의태의 애정 어린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도 임오근도 유의태를 실망시켰다.

아니 그건 유의태에게 있어 실망이란 말로 달랠 수 없는 배신이요 절망이었는지 모른다.

울부짖는 병자를 외면하고 영달의 길로 달려간 아들과 수제자.

의에 대하여 특히 남다른 완벽을 추구하는 그 소망 때문에 유의태는 그래서 더더욱 아들과 제자들에게 환멸을 느꼈는지 모른다. 치병용약의 술이나 의료제민의 이상에 앞서 의원이 의원이고자 하는 그 심지와 품성을 더욱 중히 여기는 유의태였다.

모자라는 재주는 채우면 된다.

그건 세월 속에 성심만 곁들이면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노력과 단련의 경지다.

그러나 의의 길에는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이 있다. 병자를 연민을 담아 보는 눈이 업을 출세나 치부의 욕망과 바꿀 수 없다는 무심지의의 바탕.

그래서 의의 첫 단계에서 부딪치는 심병의 술을 예로 누누이 유의태는 주장했었다.

, , , 교라 이름하는 심병의 수단에 신은 병을 짚는데 바라보기만 하여 아는 경지로서 그 바라본다 함은 병자의 오색 즉 코, , 이마, , 피부색을 보아 절로 아는 것을 말하며, 성은 듣고 아는 경지로서 오음을 듣고 숨은 병을 분별하는 재주며, 공은 일일이 병자의 용태와 괴로운 것을 물어서 아는 경지요, 교는 맥을 짚고 미심쩍은 곳을 만져보아 병을 찾아내는 경지다.

그러나 이 지식은 연륜과 훈련으로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로되 설사 그것들을 차례로 거치고 이르렀다 할지라도 정작 병자의 아픈 데를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건 흔하디 흔한 의원일 뿐이라는 것이 유의태의 결론이었다.

영달의 길이 아닌 의.

치부의 길이 아닌 의.

병들어 아파하고 앓는 이들의 땀젖은 돈으로 제 일신의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 의 ...

세상이 원하고 그 자신 절절히 소망했던 참된 의원의 자질을 유의태는 자기의 자식에게서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 도지는 아버지의 그런 선도에 가까운 의원을 꿈꾸지 않았다.

상것으로 태어나 대궐 높은 곳에 뽑혀 올라가는 영광으로 족했고 팔도에서 인정해주는 내의원 의관이라는 명예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 부자간의 이상의 차이는 부자지간 의절이라는 이별로 끝났다.

아들과도 의절한 유의태의 그 절망을 보며 임오근은 드디어 자신도 설곳을 잃은 것을 알았다.

일찍이 그가 말하던 "그 그릇이 아니면 물려주지 않는다."는 비인부전이라는 경구가 뼈아프게 가슴을 옥죄었다.

바라는 그릇이 아니다 하여 아들과도 의를 끊는 냉혹한 인간이 자신의 14년 적공쯤 눈여겨보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불을 보듯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의태가 바라는 그릇-허준이 다시 오고 자기가 그 수하에서 부림을 받는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미칠 듯한 질시가 치받쳤다.

이제는 떠나는 길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오근은 이대로 호락호락 떠나기에는 너무도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도지는 그나마 첩지나 따냈으나 자기는 뭐냐. 지리산 채약꾼으로부터 시작한 14년 동안의 간난신고가 저 원수와 같은 허준에게 밀려 물거품이 되다니 ...

'죽여야지!'

임오근의 처음 결심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죽여놓고 자기는 무사히 살아남으리라 여기도록 어리석지는 않았다.

임오근은 마지막 기대를 품고 유의태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내의원 등재의 큰 꿈은 버렸으나 고향 김해로 돌아가 소아들의 병이나 보아주며 한세월 할 수 있도록 유가고약의 비방과 장차 의원으로서의 지침을 내려주기를 간원했다.

그러나 유의태의 반응은 의원의 자질이 없는 자에게 더 일러줄 것도 가르칠 것도 없다는 차가운 한마디뿐이었다.

"하오면 그간 문도로서의 정리를 가상히 여기시어 유가고약의 제조 비방을 나누어주소서."

"문도의 정리는 내가 끊은 게 아니고 네가 끊은 것이다. 네가 14년 동안 내 밑에 있는 것을 주장하나 그 14년 동만 난 결코 매달리는 병자들을 뿌리치란 말을 한 적이 없은즉 또 네 위인 됨을 속속들이 안 지금 어찌 전래의 제약법을 일러주어 윗대의 이름을 더럽힐까 보냐."

상화가 문밖에서 들은 건 거기까지였다.

침묵 끝에 임오근이 용쓰는 소리가 나며 방안이 캄캄해졌다.

이어 그 어품 속에서 유의태의 서탁이 걷어 채인 소리가 났고 상화가 방문을 열어젖힌 순간 임오근의 손에 움켜잡힌 촛대가 그대로 유의태의 정수리에 내려박히려는 순간이었다.

"너도 사람이냐? 네가 사람이면 어찌 이토록 박대할 수 있느냐!"

임오근의 그 소리는 오히려 울음에 가까웠고 고함을 치며 상화가 임오근을 밀어뜨려 유의태를 가로막자 함께 귀 기울이던 문도들이 뛰어 들어와 성난 황소 같은 임오근을 잡아 드잡이를 했다.

그 소란 속에서도 유의태는 카악! 눈을 치뜨고 날뛰는 임오근을 쏘아 본 채 미동도 않았다.

"그래?"

"남은 문도들이 뛰어들어 치고받는 소동중에 결국 임오근이가 문갑 속 돈들을 쓸어쥐고 뛰쳐나갔소."

"유의원께선 무사하셨고?"

"오른 팔뚝이 촛대의 송곳에 찔려 피를 흘렸으나 병사 쪽 병자들까지 저놈 잡으라고 고함치며 뛰어들자 뒷문을 차고 사라졌소."

"상처는 어느 정도요?"

"당분간 그 손으로는 정교한 침을 못 놓을 거외다. 팔뚝이 근 반 뼘이나 찢기셨소."

유의태의 오른팔이 칭칭 동여진 채 상처의 부위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허준의 인사를 침묵으로 받는 유의태의 안색 속에는 아들에게 버림받아 혼자 남은 고적이나 제자의 난행에 생명을 위협받은 기색 따윈 떠 있지 않았다.

"네 요즘의 소일이 어떠한고?"

그것이 유의태의 첫마디였다.

"별로 하는 일이 없사옵니다."

"그렇거든 이 아이 데리고 병사에 나가 기다리고 있는 병자들을 회진하고 들어오너라."

"소인이 대신하여도 되는 일이온지."

"네가 미더워서가 아니다. 달리 사람이 없기로 시키는 것이다."

스승이라 부르기엔 그 눈이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허준은 큰절을 올려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유의태의 방을 나오며 마음속에 뇌었다.

'천하에 외로운 사람!'

자식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헤어짐을 당한 늙은 사내에게 느끼는 동정이 아니었다.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오연한 그 모습 속에서도 허준의 눈에는 눈앞의 유의태가 그렇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동정의 염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도 아내도 제자도 떠나보내고도 가슴 아픈 빛은커녕 눈썹도 까닥 않는 그 태연함에 대하여 알지 못할 적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스스로 불안했다.

 

3

허준이 유의태의 영을 받아 그를 대신하여 병사에 새로 찾아온 병자들에게 초진을 마치고 통원하기도 하고 병사에서 기거하기도 하는 묵은 병자들을 회진할 때였다.

뒤따라 다니며 미리미리 병자의 병력을 귀띔해야 할 상화가 갑자기 다급한 소리를 쳤다.

"무언가?"

"이 방의 병부가 없어졌소!"

그 방에는 병부가 비치되어 있었다. 병자의 성별과 나이와 이름을 적은 후 병의 발생 시기, 조제하고 시술한 약의 내용과 사용한 침의 이름과 부위, 그리고 병세의 진행을 기록한 병부가 몽땅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죽일 놈! 이를 어쩌리까!"

하고 상화가 그 병부를 기록하고 간수하는 것은 임오근의 소임이었으매 그 혐의를 임오근에게 두고 발을 굴렀다.

"아무리 스승님에 대한 포한이 있기로서니 이건 병자들에 대한 살인 행위올시다!"

"병자들이 놀라니 잠자코 있게."

흥분해 날뛰려는 상화를 달래어 허준은 급히 유의태가 있는 사랑채로 건너갔고 뒤쫓아온 상화가 내다보는 유의태에게 소리쳤다.

"임오근 그자가 전서부터 술이 들어가면 자주 그런 얘길 뇌는 소릴 들었습니다. 14년 동안 보고 들은 건 웬만치 쌓았고 저 세세한 병부들만 들고 가면 스승님의 반 정도의 의원 행세는 할 수 있다, 그런 얘기를요."

"새로 만들어라."

유의태가 허준에게 명했다.

"일일이 새로 다오니까?"

"그러리라. 매매인에게 발병의 시기를 묻고 현재의 상태를 살펴 투여할 약재의 이름을 적고 시술의 의견을 적으면 되리."

"투여한 약재와 시술의 의견을 소인의 소견대로 적으오니까?"

"그러리라."

상화가 마른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났다. 그건 신뢰인가 시험인가? 허준이 유의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의태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허준이,

"소인의 의견을 적을 순 있사오나 병사를 살펴본즉 오래된 병자가 한둘이 아니오며 자신이 없습니다."

그 허준을 향해 유의태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네가 본 바대로 병자들의 병세를 적어오라는 것이지 만병통치의 처방을 적어내라 한 적 없느니라."

"..."

"항차 네가 무엇이기에!"

그 차가운 대거리를 향해 허준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큰사랑을 나왔다.

'항차 네가 무엇이기에!'

"... 네가" 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건 "네 따위가!" 하는 타매의 억양임도 허준은 알았다.

따라 나온 상화가 허준의 팔을 잡으며 달래는 말을 했다.

"새삼 불러오라 하실 전 언제고 왜 그렇게 야멸차게 구시는지 모르겠소. 하다못해 말 한마디라도 말이오."

"어찌 생각하면 모두 제 발로 떠나긴 했으나 도지를 이 산음 땅에서 내쫓은 건 유의태가 아니고 허준이란 그 소문도 맞습니다. 허의원이 아니라면 서로 갈라질 싸움도 있을 턱 없었고 또 부자지간이야 천륜인데 결과가 그리된 이상 허의원께 마냥 좋은 감정만 있을 리 없지 않소.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말이오."

'정나미 떨어지는 인간 ...'

허준이 내심에서 내뱉었다.

허준은 큰 사랑채 쪽 보이지 않는 유의태를 쏘아보았다. 헤어진 후, 아니 헤어진 것도 아니다. 창날 같은 손가락질을 받고 덜미를 잡힌 채 의원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던 그 후의 자기의 숱한 마음고생, 그 절망의 바닥을 기며 독력으로 내의원에 도전하기까지의 처절한 마음고생에 대하여 단 한마디의 위로도 없는 사내. 온 세상이 칭송해준 진천 버드네의 사건에 대해서도 입도 벙긋 아는 체도 위로도 없는 냉혈한.

먼저 달려온 건 자기이되 의원 밖에서 만난 상화는 분명 그 유의태가 먼저 자신을 부르러 보냈다지 않았던가.

그러함에도 왜 불렀다는 말 한마디 없이 "항차 네가 무엇이냐." 되물어온 그 비웃음이 자꾸만 허준의 가슴을 부글부글 적대감으로 끓게 했다.

... 찾아온 건 잘못인 것 같았다. 자신의 뜻에 아니 맞았다 하여 자식도 가족도 버린 사내. 14년 수족처럼 부리던 제자의 단 한 번의 실수도 용서 않고 끓어버린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을 아직도 스승이었다는 지난날의 그 여린 감상으로 달려온 건 자기의 약한 몰골을 보인 것 외에 무엇이랴 싶은 것이다.

임오근의 폭력에 쓰러졌건 어찌 됐건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자칫 병사 뒤로 뛰쳐나가려던 자기를 불러온 건 허준 자신이었다.

그래도 한 가닥 미련인지도 몰랐다. 유의태란 인간에게 존경일랑은 아예 뺀 미련. 그가 자기보다 한두 수 위의 위원이라는 그 사실에 대한 미련 ... 그 허준을 상화가 또 위로했다.

"가지각색 병자가 스무남은 명인데 그걸 다시 일일히 진맥하고 처방내리고 왜 그런 헛수고를 끼치는지. 당신이 매일 대하던 병자들이니 잠시 당신이 건너와 이렇다저렇다 부르시면 그냥 받아 적으면 될 일을."

순간 허준의 뇌리 속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나를 시험하고 있어!'

그렇다. 병부를 가져간 것은 임오근이가 아니요 유의태 자신인지도 모른다. 허준은 갑자기 그런 확신이 왔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무엇을 시험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부질없는 추측이야 ...'

시험은 기대다. 그렇다면 저 오만한 유의태가 자기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허준은 자신을 고소했다. 오히려 허준은 상처 난 손으로 침을 놓을 수 없는 유의태의 부상을 생각했고 그 치료를 기다리는 병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다시 병사로 향했다.

이미 헤어졌던 사람이다. 새삼 그의 인간성에 무엇을 기대하려는 자신이 웃음거리다 싶었다.

유의태 대신 나타나 새삼 진맥하고 심병하고 처방을 적는 젊은 의원이 허준임을 알자 유의태의 의원은 다시 장터처럼 붐비기 시작했다.

딴 아이들 다 내보내고 허준이 다시 그 문하에 들어왔다는 소문은 허준이 또 하나의 의원을 차려 유의태와 대결하기를 기대하던 구경꾼들을 실망시켰으나 '고장의 두 의'와 함께 살게 된 산음 사람들은 두 사람의 화합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기대했다.

"그럼 다시 입문한 것은 아니고?"

"그 사람 입에서 한마디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고 저 또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왜 서방님부터 그분을 어찌 그 사람이라 매정하게 칭하시오니?"

병부를 다시 만들고 사흘 만에야 집에 돌아온 허준을 둘러싸고 어머니 손씨와 아내 김씨가 유의태의 부름을 받은 사실을 기뻐하면서도 풀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응어리만은 아쉬운 얼굴이었다.

허준은 더 이상 구구한 얘기를 가족들에게 하지 않았다.

허준이 이틀을 밤샘하다시피 새로 병부를 만들어 큰사랑에 들어갔을 때,

"게 놔두고 나가거라."

... 가거라가 아니고 나가거라 ...

그것이 유의태의 대답이었고 다음 날 아침 허준이 문안차 방 밖에 다시 섰을 때 들어오란 말도 없이 문밖에 허준을 세워둔 채 유의태는 허준이 궁금히 여기는 이틀 동안 자신이 투약한 조제와 시술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의견이 없었다.

허준이 참다 못하여,

"이틀 동안 소인의 조제와 시술에 혹 잘못이 없었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하고 물러나지 않을 기색으로 서 있자,

"병이 비록 독한 것이라도 세상 병든 이들이 다 죽지 아니하는 것은 목숨의 자생력과 자구력이 반인 때문이고 그중에 또 어느만치는 간병하는 이의 정성으로 버티곤 하니 굳이 누구의 공인 양 자처할 것 없다."

그 한마디 끝에 방문이 닫히고 말았다.

그러나 허준은 드디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의태의 말 속에 조롱과 멸시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유의태의 그 말들은 자기가 적어낸 병부의 처방을 그대로 병자들에게 투제할 것과 시술할 것을 반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 때문이다.

그 나흘째 되는 날 새벽 문득 길 떠날 모습으로 나타난 유의태는 내다보는 상화에게,

"여러 날 집을 비울 것이니 혹 경각에 달린 위급한 병자가 찾아오거나 한다면 안점산으로 찾아오면 되리라."

바라보는 허준에게는 일별도 업이 상화에게 그렇게 한마디 던지고 대문을 나섰다.

놀란 것은 허준이었다.

유의태가 말하는 여러 날이란 정작 며칠일지 알지 못하나 그건 자신의 부재중 의원을 허준에게 일임한다는 뜻일시 분명했다.

위급하지는 아니하여도 병사에는 조석으로 병의 진행을 감시해야 할 중한 병자가 십여 명이나 있는 터요 하루면 수십 명씩 연락부절로 찾아드는 병자들에게 대처할 사람은 자기뿐이지 않은가.

허준은 십여 걸음을 내달아 그 유의태를 향해 소리쳤다.

"의원엔 간병이나 도울 제자들뿐이온데 스승님께서 가시면 남아 있는 병자며 연일 찾아올 병자들은 어찌 대처하오니까?"

"남아 있는 자가 할 일이지 어찌 매번 내가 알아있어야 한단 말이냐!"

귀찮은 듯이 그 말 한마디 던지더니 미처 잡지 못하는 허준을 뒤로 유의태는 그대로 멀어지고 말았다.

 

4

말 한마디로 의원을 허준에게 내맡기고 사라진 유의태는 열흘이 지나도록 기별이 없었다.

상화가 유의태의 그 종적을 유일한 벗들인 김민세와 안광익이 있는 함북쪽 30리 대풍창 병자들이 득시글거러는 안점산으로 짚었으나 허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유의태 없는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유의태를 대신해 허준이 와 있데이!"

"유의태가 허준이를 양아들로 삼았다카두만."

"참말이가!"

"가보이까 묵어 있던 병자캉 새로 오는 병자캉 허준이 혼자 전부 응대하고 유의태는 내다보지도 않는데 마당쇠 그놈 아들께 물어보이까 방에서 양반은 술이나 묵고 그래 지내는갑두만."

"거름이나 져날라놓고 나도 허준이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볼가. 니도 같이 갈라나?"

병사에 나타나지 않는 유의태의 변화를 일변 쑥덕거리면서도 그러나 사람들은 유의태의 행방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권위는 유의태와 견줄 수 없으나 소문은 유의태를 능가하는 허준.

그 소문이 너무나 아름다웠음에서 사람들은 370년엔 걸쳐 이어온 해묵은 유의원의 얼굴이 바뀐 것에 대하여 신기해할 뿐 가슴 아파하는 눈치는 없었다.

또 그 허준이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유의태의 오연한 말투가 아니요 일일이 설명하고 하나하나 손잡아주는 성심 어린 언동이라서 의원의 분위기는 딴 때 없이 붐볐다.

"지 병을 허준이 그 사람이 손수 진맥했어예. 손마디가 길쭉하이 그렇데요. 그러고 사람 눈매가 우예 그리 조용하이 그렇십니까. 물어보는 말수도 적고 어찌 보이 색시 같애얘."

부쩍 불어난 여자 환자 중에서 젊은 아낙이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병자와 그 가족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허준이에게 진맥 받은 걸 자랑스러워했다.

 

"대사께서 저기 오십니다."

하고 유의태에게 술을 쳐주고 있던 늙은 문둥이가 일어서며 말했다.

유의태가 들었던 술잔을 조용히 비웠다.

찾아온 친구를 기다리며 열흘씩이나 기다린 사람 같지 않게 조용한 동작이었다.

상화의 짐작대로 안점산에 찾아온 유의태는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김민세, 안광익이는 밀양 어간에서 유랑하는 병자 십여 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데리러 가고 없었다.

그 하루하루 유의태는 궁녀 정씨에게 술과 요깃거리를 청해 싸들고는 안점산 산등성이와 계곡을 소요하며 침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은 석양이 뉘엿거리는 시각인데도 돌아오지 않는 유의태를 걱정하여 정씨가 산 식구들을 시켜 찾아보니 안점산 제일 높은 봉우리 그 바위 비탈에 걸터앉아 꺼져가는 석양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생각하면 유의태는 그동안 산 식구들의 의식의 뒷배를 책임져준 너무나 큰 은인이었기에 정씨도 산사람들도 항시 술을 담가놓고 그의 내방을 기다렸었다.

산성 가까이 이른 김민세 들의 뒤로 십여 명 병자들이 나타났고 새 식구들을 맞이하는 산성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산성 사람들과 헤어져 김민세와 안광익 그리고 앞장을 선 소년이 산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그건 길상일시 분명했다.

"여직도 저렇게 저 아이를 데리고 다니오?"

"그러합니다."

오늘따라 유의태의 술과 안주를 손수 들고 따라나섰던 궁녀 정씨가 대답했다.

물었던 유의태의 시선이 그 정씨의 눈길을 따라 향하는 곳에 양자 길상이를 앞세운 김민세와 안광익이 손을 잡기도 하고 끌기도 하며 오르고 있었다.

어느 모로 봐도 그 모습은 자기의 처자식을 죽인 원수의 아들과의 광경 같지가 않았다.

"처음엔 저도 많이 상심했습니다만 이젠 저 두 사람 뗄래야 뗄 수 없는 부자지간이옵니다. 조석 밥상도 함께 들고 잠도 한 이불에 자며 짧은 여정이라 할지라도 산을 떠날 때는 항시 동행하는 ..."

유의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적다운 보시지."

"..."

"3천 명 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의술보다 마땅히 제 손아귀로 죽여야 할 원수의 목숨을 저렇게 살려주고 지켜주는 것이 진짜 의의 모습인지도 ..."

"형부를 아직도 의원으로 보시옵는지? 제가 형부에게 보는 것은 의가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올시다."

"나는 부처를 모르는 사람이니 저 모습도 내 눈에는 의업으로밖에 보이지 않으오."

늙은 양부의 손을 잡아끌고 온 길상이가 유의태의 앞에 이르자 뒤로 물러나 예의를 지켰다.

김민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친구에 대한 반가움을 대신했다.

"어쩐 일이신가. 의원을 비워두고 한가하게 열흘씩이나 예서 묵었다니."

"담아놓은 과일주가 입에 달아 발병 핑계하고 앉아 있는 걸세."

유의태가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 유의태에게 안광익이가 물어왔다.

"허준이 그 아이가 집에 와 있다고?"

"있겠지."

"아예 떠넘기고 오는 길이신가?"

그건 김민세의 관심이었다.

그러나 유의태의 대답은 엉뚱했다.

"한번 와봐야지 하면서 잊고 있었는데 산세나 한번 둘러보러 집을 나선 길일세."

"산세는 왜?"

"묏자리나 하나 찾을까 하고."

"죽을 사람이 누군데?"

"나로세."

안광익이 웃고 김민세도 웃었다.

"때로 얘길 하지. 인간은 삼생을 거쳐서 사라진다고. 전생 현세 그리고 내세. 그러나 사람에서 사람으로 꼭 같이 태어나는 복은 많지 않다네. 소가 되는 사람, 말이 되는 사람, 물고기가 되는 사람, 두더지가 되는 사람, 심지어 벌레가 되는 사람, 그래서 다시 좋은 인연으로 태어나고자 사람들은 공덕을 쌓는 것이고."

"한데 모처럼 찾아오시어 왜 사위스런 얘기만 하시오니까."

궁녀 정씨가 끼어들자,

"사위스런 건 아니지. 사람에게 있어 생과 사는 가장 중대사인데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뿐 ..."

"새 식구들이 왔으니 저는 내려가겠습니다."

궁녀 정씨가 인사를 했으나 김민세도 안광익도 유의태의 침묵을 지켜볼 뿐이었다.

정씨와 길상이와 문둥이가 산을 내려갔다.

산상의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유의태의 옷고름이 술잔을 든 팔뚝에 휘감기며 날렸다.

"다녀온 지 얼마 아니 되는데 어찌 올라오시었나?"

"요즘 생각하는 게 있네."

"무엇에 대하여?"

하고 안광익이 다시 물었다.

"사람의 목숨에 대하여."

"사람의 목숨?"

"의를 업으로 하며 남의 목숨은 손이 닳도록 다루었으면서도 정작 내 목숨에 대해 들여다볼 여가도 없었거든."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여명을 지니고 있지. 나도 그대도. 부처와 친한 그대도. 그 남은 목숨이 다하는 날이 몇 년 몇 달 후 그리고 어느 날 어느 때냐 미리 알 바는 없되 그러나 사람은 너나없이 앞으로 무수히 닥치는 그 어느 해 몇월 몇날에 죽는다는 것은 사실이지."

"그거야 예외가 있겠나, 인간들의 숙명인걸."

"한데 왜 새삼?"

긴장하는 두 사람에게 유의태가 웃었다.

"고작 예닐곱 달 전이래야 태어날 날짜를 짐작할 뿐인 생, 그러나 죽는 날은 언제 죽노라 짚어 볼 수 없는 생, 바람이나 불어 옷자락이라도 날리지 않으면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잊고 사는 생. 어느날 그런 것을 깨닫고 나니 어차피 죽을 목숨들을 수시로 낫워주는 의업이란 것도 너무나 작은 행위로구나, 그런 허망한 생각이 났네. 기왕사 큰 의원이 되려면 몸의 부분부분 낫게 하는 작은 의원이 아닌 한목숨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러한 커다란 의원은 왜 되지 못하는가 하는 말일세."

"꿈이로군.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의 능력 밖의 꿈 ..."

유의태가 신음처럼 말했다.

"결국 죽는 목숨,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 아무리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도 그 일을 다하도록 기다려주지 않는 죽음 ... 인명유한이라는 그 사실."

"...!"

"사람의 죽음이란 세상의 질서일세. 초승달이 태어나 보름달이 되고 다시 그믐달이 되어 없어지듯이 그리고 다시 비치다가 커지다가 사라지고 그렇게 끝없이 태어나고 끝없이 죽고 ...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무언가 남기려는 것이 아닌가?"

"죽으면 끝인데 무엇을 남긴단 말인가. 제삿밥이나 찾아 먹는 고작 그런 귀신이 되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네!"

안광익이 표정을 수습하고 유의태를 똑바로 건너보았다.

"죽으면 그만인 목숨 왜 오늘따라 죽음에 대한 말이 그리도 많은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5

허준이 어렴풋이 잠을 깨었다.

좀 전 첫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가 다시 살포시 잠에 빠져 있던 차였다.

병사 쪽이 점점 소란해지며 상화와 다투는 사내의 목소리는 거의 욕설과 고함이었다.

순간 허준은 튕겨 일어났다.

날뛰는 사내를 말리는 소리 속에 어머니 손씨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고 뒤이어 중문을 두드리며 "아부지 아부지"를 외치는 건 아들 겸이의 목소리 였다.

병사에서 소란을 부리는 것은 허준이 내의원에 갈 때 말을 훔쳤다가 함께 진천 관아에 하옥 당했었던 만석이라 불리던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어쩐 일인가?"

허준이 나타나 영문을 묻자 녀석은 인사불성이 되어 날뛰었다.

"으응, 너 잘 만났다. 봐라! 당신이 지어준 약을 먹고 이 모양으로 엄니 눈이 멀었단 말이여. 엄니 눈을 고쳐내란 말이여 ..."

허준은 아닌 밤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봐라, 눈이 있으면 당신 눈으로 보란 말이여."

'아뿔싸!' 하고 허준은 내심 외쳤다.

말을 빌려오마 하고는 훔쳐 왔던 녀석이었다.

자기의 욕심뿐 사리나 경우를 따지기엔 머리가 모자란 인간이었으매 간병을 할 그에게 좀 더 약의 독성을 일러주었어야 했었다.

허준은 아들의 지게에 얹혀 580리나 달려온 병자의 반이나 풀어져 버린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신음했다.

절망적인 허준을 향한 아내 김씨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린 채였고 몰려든 병자들과 가족들을 향해 녀석이 또 한 번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상화와 꺽새, 영달들이 그 만석과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가까스로 잡아 앉힌 후 영문을 캐물었다.

"대체 어째서 이리 됐단 말이오."

"허준인지 뉜지가 지어준 부자탕을 먹고 눈이 요 모양으로 아예 멀어 버렸단 말여."

"아예 멀었어?"

꺽새가 얼른 녀석의 노모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며 확인했으나 병자는 코앞의 그 손은 못 본채 아들의 목소리를 향해 소리쳤다.

"만석이 이놈아, 손가락꺼정 깨물어가메 고맙게 해준 양반인데 행패부리지 말구 차근차근 말씀드려."

"멀쩡한 남의 두 눈 멀게 해놓고 그까짓 손가락이 고까운겨? 어여 우리 엄니 눈 낫워놔? 못 낫우면 너 눈이라도 대신 박어, 이 돌팔이 같은 놈아!"

허준이 녀석의 팔을 잡았다.

"마음 가라앉히고 자초지종 얘긴 하게. 내가 떠나온 뒤 무슨 일이 있었던가."

모자의 실랑이를 들으며 허준리풍의 등불을 벗겨 병자의 눈앞에 쳐들었다.

"이 불빛도 안 보이는지?"

"안 보여유."

"이쪽 눈은?"

"양쪽 눈 다 마찬가지구만유. 낮에 햇빛 쪽을 보면 때로 허연 지렁이 같은 게 구물거리긴 해두 그뿐이구민유 ..."

"... 이럴 수가 ..."

"그때 주머니 털어 약 지어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구 멀쩡한 생사람의 둔 눈을 멀게 했으니 그 책임을 어쩔 거유?"

"책임?"

"그람 사람 눈을 멀게 해놓구 아무 책임도 없단 말유."

"그게 왜 허의원 책임이여, 이놈아! 허의원이 우리헌티 어떻게 해준 분인디 ... 고칠 수 있으면 고치는 게구 못 고치면 ... 그것두 팔자소관이지 ..."

"그게 왜 팔자소관여! 차라리 그띠 그 상태루 해놓란 말여. 앞을 못 보고서야 그게 무슨 사람이여."

"왜 이놈이 패악을 부리구 지랄여. 닥치질 못혀."

"닥치긴 왜 닥쳐. 딴 사람 같으면 칼부림 날 일여! 고칠 수 있어유 없어유 양단간에 대답햐!"

"못난 자 같으니!"

허준이 탄식처럼 내뱉었다.

"어쩌유?"

"병자의 눈이 멀게 한 건 네가 미련했기 때문이니라."

"어따가 뒤집어씌우는 거여!"

사람들이 자꾸 몰려들고 있었고 그 속에 허준의 딸 숙영이를 데린 손씨도 나타나 아들을 향해 숨을 삼켰다.

"내가 지어준 그 부자탕 병자가 다 먹었더냐."

"먹었쥬."

"그리군?"

"그걸 먹구 행결 차도가 있길래 ..."

"그 뒤에 또 먹였어. 그것도 함부로. 그런가 안 그런가!"

"함부로라니유?"

"병자의 이 눈이 증걸세. 과연 어느만치 먹었는지를 알아야 손을 써볼 수가 있어! 사실대로 다 말하게!"

잠시 안색이 질렸던 만석이가 그러나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는 듯이 소리쳤다.

"딴 약은 입에도 댄 적 없어유. 당신이 지어준 그 부자탕인가밖에 먹질 않았다구요!"

"내가 묻고 있는 건 어느만침 먹였는가를 말하라는 걸세!"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허준의 의문이 적중했다. 녀석이 떠듬거리며 실토한 얘긴즉은 이랬다.

그날 -

녀석이 말을 훔친 내력을 들은 진천 현감 김상기는 허준을 한양으로 떠나보낸 후 녀석의 말을 훔친 까닭이 은인의 취재에 시일을 맞춰주려는 행위였음을 듣자 방환과 함께 효심에 보태 쓰라 약값을 던져준 것이다.

이에 녀석은 고두백배하여 돌아오는 길로 의원을 찾아가 약부터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돈으로 부자탕만 계속 먹었더란 말이냐?"

"그걸 먹으니까 행결 차도가 있길래 계속 먹였지유."

"꿀과 함께 썼더냐."

"제철도 아닌데 꿀 구하기가 쉽간유. 그 약이 잘 듣는 것 같으니께 한두 가지 빠져두 그 약을 계속 지어달라구 했쥬."

질끈 허준은 눈을 감아버렸다.

일명 바곳이란 불리는 다년생 풀인 쌍란국의 구근으로 만들어지는 부자는 쇠약한 병자의 몸에 양한 기운을 돋우는 강한 효험이 있기는 하나 약기운이 강열한 만치 독성도 포함돼 있어 그 상품에는 반드시 꿀을 함께 써야 했다.

아울러 부자는 극약으로도 통용되기에 용량에 세심한 주의가 따라야 했다.

그러나 일이 공교롭게 된 것이다.

병자에게 고깃국 한 그릇도 마련키 어려운 가난한 사람이었기에 애초 노자까지 털어 부자탕을 마련은 해주었으나 그의 형편에 계속 그 약을 쓸 수 없다 여겼던 허준이 부자에 대신하는 약초를 일러주었는데 뜻밖에도 현감에게 돈을 얻어 든 녀석이 오로지 비싸고 좋은 약이란 일념으로 연거푸 부자탕만 지어 노모에게 먹여댄 것이다.

가난한 그에게 잇따라 부자탕을 사 먹을 수 없다고 짐작한 것이 허준의 실수요 병든 어미에게 대한 효성을 갸륵하게 여기어 뜻밖의 약값을 녀석의 손에 쥐어준 진천 현감 김상기의 인정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었다.

그리고 돈을 내밀며 약을 지어달라는 만석에게 돈부터 챙겼지 병자를 불러 보려 않은 이름 모를 의원과 ...

"원인을 알았사오니까?"

"짐작하네."

하고 허준이 상화에게 대답하고 만석이의 우직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인을 알았으나 늦었어."

"늦었다니요!"

"부자란 과용하면 그 독한 기운이 온통 간을 공격하는 법, 어찌 눈인들 멀지 않으랴."

"그럼 못 낫운단 말여유? 우리 엄닌 참말 영영 봉사가 되는 거냐구유."

허준이 탄식했다.

"약이 과했어. 이미 늦었어."

녀석이 털썩 주저앉았고 허준이 말을 이었다.

그 허준의 팔에 매달려 병자가 울먹해서 말했다.

"전 그것으로 됐어유. 허의원님이 못 낫우면 그것도 지 팔자소관으로 돌려야지유. 어차피 그때 죽었던 목숨이었던걸유 ... 어차피 ..."

칭찬보다 질책이나 비난에 사람들은 더 쾌감을 느끼는가 보았다.

열 번 잘하다가도 한번 눈밖에 벗어난 그 실수를 사람들은 놓치지 않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소문의 실태를 바로 알려고 하기 전에 흥미 위주로 사건을 풀어갔다.

"허준이 본 병자가 눈이 멀었다!"

소문은 하룻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병을 빨리 낫우려는 공명심으로 허준은 약을 독하게 쓴다더라."

유의태와 견주는 정도의 인물로 보았기에 소문의 강도는 높았다.

만석이 모자가 병사에 드러누운 지 이틀도 못 되어 병자들의 발길이 끊이기 시작했다.

"병은 낫우었는데 병자는 죽었다카는 말이 있더니만 겁이 나서 난 허준이 약은 못 먹겠다."

"소문 요란히 나더니 그눔아 그거 유의원을 지가 차지해 앉을라고 눈이 뒤집힌기라. 내 너무 설칠 때 알아봤다."

"... 시키! 인명이라카는 걸 우찌 알고 약을 막 쓰노! 유의태는 어디 갔노?"

"어디 갔다카두만!"

"유의태 불러오라캐라!"

병자의 발길만 끊인 것이 아니라 그 담 밖으로부터 그런 불신과 질책의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허준의 실수로 인해 병자의 생눈이 멀었다는 만석이의 주장에 허준의 아내와 어머니까지 매일 의원에 나타나 가슴을 떨며 만석모의 시중을 자청했으나 허준의 밤낮없는 노력에도 병자의 눈먼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아니었다.

"유의태 불러오이라!"

이제야 병사의 병자들도 아직 자기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은 허준의 무능 탓으로 돌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유의태 불러오이라!"

 

6

차도가 없었다.

허준의 아내 김씨는 집안일은 시어머니께 맡긴 채 연일 병사에 나와 눈이 먼 만석모의 조석 요기를 떠먹이고 이부자리를 대신 깔고 대소변을 보러 가는 그녀를 부축해 동행했다. 남편의 실수에 대한 죄책감 어린 그 행동들이었으나 사람들은 동정하지 않았다.

"지가 못 낫우면 유의태를 불러야 옳제. 유의원을 부르러 갔나 안 갔나! 이 집이 허준이 니 혼자 맘대로 해도 되는 의원 아니데이. 이 집은 산음사람들이 다 믿고 지내는 의원이란 말다!"

중갓을 쓴 늙은이가 자기 집안의 명예나 걸린 사건인 듯이 매일처럼 찾아들어와 구경꾼들 앞에서 목청을 돋웠다.

"안점산에 다녀올지 ...?"

닷새째의 새벽을 맞이하자 상화가 허준에게 물었다.

"꼭 누가 와야 병자의 눈이 낫는다는 그런 뜻은 아니올시다만 ... 위급한 병자가 있으면 부르러 오라 하신 스승님 말씀도 계셨고 하니?"

오기로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수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실수로부터 외면하기 싫었고 가능하면 자신의 손으로 병자의 눈을 새로 뜨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허준의 침묵을 향해 상화가 결론지었다.

"곧 떠나겠습니다.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모시고 올 수 있을 겝니다."

 

그 시각 안점산 김민세의 약제실에 유의태가 병자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그 유의태의 풀어헤친 나신을 조심스레 촉진해가는 김민세의 눈이 긴장에 떨다가 외쳤다.

"이럴수가! 대체 언제부터 이랬단 말인가!"

"그대가 보는 병명부터 말하게."

"그대가 보는 바로도 반위인가?"

"이럴 수가 ..."

"죽을 사람은 날세. 왜 그대가 놀라는가."

"자넨 죽어서는 아니 될 사람인 걸 모르던가!"

"정은 고마우나 세상 죽지 아니하는 사람 없지. 헛헛!"

웃음 끝에 일어나려는 유의태를 김민세의 손이 강하게 제지했다.

"한번 다시 천천히 보세."

그 손을 물리친 유의태가 풀어헤친 옷깃을 여미고 옷고름을 매기 시작했다.

"일영!"

하고 김민세가 유의태의 아호를 부지중 불렀다.

유의태가 문득 웃음을 띄웠다.

"가는 길을 피하려는 미련이 아니라 여명이 과연 얼마쯤일지 벗님의 입으로 듣고 싶네."

"다시 한번 누우라지 않는가!"

"부질없는 일."

"대체 그 지경이면서 왜 독주는 그토록 퍼마시던가!"

"세상 구경을 얼마나 더 할 수 있겠는가?"

"오진일 수도 있어."

"그대가 오진이라, 핫핫핫."

"... 냉정한 사람!"

"... 여러 해 됐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차츰 병증이 손끝에 만져즉면서 곧 알았지. 이놈이 나를 저승으로 데불고 가는 사자로구나. 하고 ... 훗훗!"

"광익에게 한번 보이시게."

"구차한 짓 싫네."

"일영! 광익의 부술을 한번 믿어보아."

"후회 없이 살았지. 오십 평생 살면서 남에게 못할 짓 한 바 없고 좁쌀 한 톨 빚진 바도 없으며 잠시 태어난 흔적으로 족히 수천 명의 병고를 살펴줬고 ... 언제 가도 떳떳한 일생일세."

"... 하늘의 이치가 참으로 오묘하게 냉정한 것이 ... 자식 하나 영특한 게 태어나길 그토록 소원했는데 그 복은 나에게 없었어. 그것 하나 아쉬웠을 뿐 ..."

"허준이 얘긴가?"

"... 태난 자식은 하나뿐이오! 그토록 아껴 키우며 타일렀건만 내가 바라는 그릇은 아니었어."

"누구하고 비교하고 있는 겐가, 허준이 그 아인가?"

유의태가 대답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김민세가 아프게 눈을 감았고 곧 유의태가 그 김민세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묻세. 내 몸에 반위가 생겨난 걸 어찌 짐작했는가?"

"그대의 입에서 비파잎새 삶아 먹은 냄새가 났네. 지금도 나고 있고 ..."

"의약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그대가 비파즙을 마시고 있을 제야 다른 병일 리 없지 않는가."

유의태가 미소하자,

"오늘 안으로 길을 떠나세."

하고 결론처럼 말했다.

"남쪽 끝 바닷가 거기서 구하지 못하면 제주도까지 ..."

"무얼 구하려는가?"

"내 알길 반위의 토예증상을 다스리는 영약 중에 비파만한 것이 없고 그 비파잎은 땅과 기후가 따뜻한 남쪽에서만 제대로 자란 것을 구할 수 있네."

"싫네."

"싫다니!"

"나한테 온 병 내가 대처하리. 그게 죽음이거든 그 또한 겪어보는 것이 내 바람인즉!"

궁녀 정씨가 기척을 내고 나타나 산음서 상화가 급행해왔노라고 기별하면서 두 사람의 언쟁은 끝났다.

김민세의 슬픈 눈빛에 비해 유의태의 입가에는 웃음조차 떠 있었다.

산음에 돌아오는 유의태를 김민세가 한사코 동행했다.

그러나 약제실에 있었던 두 사람의 얘기는 산음에 이르는 동안 어느 쪽에서도 서로 한마디도 더 비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밤을 도와 산음에 이른 것은 다음 날 새벽 첫닭이 어지러이 우는 시각이었고 한발 앞서 달려 기별을 한 상화를 따라 허준이 나와서 고개를 숙였으나 그 유의태의 걸음을 세우게 한 건 허준의 인사가 아니라 의원 내에 피어나고 있는 약 냄새였다.

"병자의 눈이 멀었다더니 어찌 '본사방양간원'을 달이고 있느냐?"

허준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는데 김민세가 허준에게 미소를 보이며 대신 대답해주었다.

"부자의 독한 기운은 다 뽑은 모양이로군."

"지난 밤사이 독은 풀어진 듯하오나 대신 눈썹 자위에 좁쌀 같은 것이 돋아나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눈동자가 아파 못 견뎌하와 ..."

"많이 낫우었구만."

"나을 증좌오니까?"

"좀은 나은 셈이지."

"하오면 이 병자 눈을 다시 뜰 수 있사오니까?"

유의태가 대답 없이 병사로 올랐다. 허준이 황급히 뒤따라 올라 황초에 불을 당겨 잠든 병자를 비친다.

병자는 흐르는 눈물을 막고자 무명수건을 눈에 맨 채 쉬임 없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불빛을 물려라."

허준이 불빛을 물렸다.

"눈동자가 움직였더냐?"

"고통이 우심하여 눈을 맨 후 아직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약은 언제 먹었느냐?"

"반 시각이 지났사옵니다."

"맨 것을 풀어라."

허준이 맨 것을 풀기 시작했다.

자고 있던 만석이가 튕겨 일어나 때아닌 시각에 나타난 초면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유의태가 그 병자의 눈을 까뒤집었다. 병자가 찢기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을 세 겹으로 가려라."

허준이 무명천을 꺼내 시키는 대로 환자의 눈을 겹겹이 매는데 병자의 고통엔 아랑곳없이 유의태가 뇌까렸다.

"독을 푸는 일이 조금만 늦었어도 다신 눈을 못 뜨고 말았으리."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하오면 소인의 처치가 득효했사오니까?"

"내세울 것 없다. 애초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선 상의라 할 수 없은즉."

허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왔다. 지난 닷새 동안 병세를 이 정도나마 돌려놓은 건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수단에 대하여 너무나 막막하던 차였다.

"간의 구멍이 눈이다. 이는 내경에 있는 말이다."

"... 거기까지는 기억하옵니다. 하오나 눈에 대하여 더 좀 자세히 알기를 원하옵니다."

"오장육부의 맑은 기운이 눈으로 올라가 그 정기가 모여 눈이 되는 것이다. 하나 그 눈도 다시 세분하여야 하니 뼈의 정기가 동자가 되며 근력의 정기가 검은 눈자위가 되고 피의 정기가 흰자위가 되는 것이다. 침 준비하여라."

"벗님의 손이 아직 침의 정교함을 다룰 수 있겠소?"

임오근의 폭력에서 미처 낫지 못한 상처를 김민세가 걱정했다.

"상화가 불 밝히고 준이가 침을 들어라."

허준은 중지했다.

준이라는 말-그건 유의태가 '' '네가' 하는 호칭 대신 처음으로 쓴 따뜻한 말이었다.

"안정통에 취할 곳이 어디 어디인지를 말해라."

"풍부, 풍지, 통리, 합곡, 신맥이옵니다."

"또 있다."

"... 조해이옵니다."

"."

대답하지 못하는 허준에게 김민세가 첨가했다.

"대돈."

"그러하옵니다!"

고개 숙이는 허준에게 유의태가 물어왔다.

"취하는 곳은?"

"규음과 지음올시다."

"취하거라."

유의태가 물러앉았고 상화가 불빛을 높이 들었다.

남아 있는 병자들이 모두 깨어 그 사제지간의 협조를 지켜보았다. 숨소리도 죽인 긴장이 방안에 감돌았다.

 

7

유의태의 자신에 찬 지시와 일호의 오차도 저지르지 않으려는 허준의 정교한 침술에도 불구, 만석모의 시력은 사흘 나흘 지나도록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저지른 실수이매 허준의 어머니 손씨 또한 연일 의원에 나와 아예 붙박이로 병사에 지켜서서 만석모의 간병을 맡은 며느리와 같이 애를 태웠다.

의원 밖엔 구경꾼들만이 날로 불어나 떠들썩했다.

"사제지간이 다 달라붙어 앉아갖고 고칠라캐도 이미 동자가 굳어삐릿다카이 용빼는 재주 없지러."

"그리 되모 책임문제는 우예 되노?"

사람들의 흥미는 그쪽에 쏠려 있는 듯했다.

지고 이기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때없이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원인행위 이전에 누구는 꼭 이기고 누구는 꼭 져야 한다는 단순 논리에 취하길 잘한다.

실명이 결정적인 병자의 그 불행은 화제의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침은 유의태가 직접 안 들었다카더라."

"?"

"전에 있던 그눔아 그거 누구고, 임오근이라카나 ... 지가 유의태의 수제자라고 모가지 뻣뻣이 하고 돌아다니던 눈알이 당나귀멩쿠로 노오란 놈, 그눔아한테 칼침 맞은 그 손이 안적도 유의태가 침을 잡을 만큼 안 낫은기라."

"그라모?"

"허준이 저지른 일이고 하이까 유의태가 일부러 침을 안 잡는 거 아이가? 찾아온 병자가 봉사가 되모 뒤늦게 유의태도 책임을 같이 져야 하이까네."

"설마 ..."

"그럴 수 있데이 ... 생각하모 허준이는 유의태한테는 원수 같은 놈 아이가."

"하모, 자식캉 그 모양으로 헤진기 다 허준이 그눔아 때문인기라. 글고 유의태도 사람인데 찬솥에 밥 먹이던 놈이 지 자식보다 재주가 뛰어난 거로 조석으로 보다 보면 속에 천불이 날 만도 한기라."

사람들은 유의태와 허준 두 사제가 이번 병자를 놓고 이빨을 드러내고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을 기대하며 연일 의원 안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병사는 팅 비어 있었다. 소문의 속성은 과장이다. 아니 그 과장이 아니더라도 공명심에 눈이 먼 허준이가 약을 독하게 써 두 눈을 실명케 한 산 증인이 병사에 앉아 있음으로써 병사를 채웠던 그 병자들이 너도나도 의원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 휑뎅그렁하니 비어버린 병사에는 만석모와 간병하는 허준의 아내 김씨 외 마당에는 허준의 어머니 손씨가 서성댔고 그 한구석 평상 위에는 술 취한 만석이가 밤낮으로 앉아 허준의 아내와 노모를 마치 비녀나 부리듯 밥 가져와라 술 가져와라 속이 복받칠 적마다 고함치고 욕질하는 소리만 낭자했다.

그 고함소리가 터질 적마다 상화를 비롯한 제자들은 녀석을 주막으로 데리고 나가 술을 먹이고 달래건만 그렇게 술 취해 돌아온 녀석은 또 한바탕 대문 밖 구경꾼들애게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되풀이 떠들어대고 쫓아와 용서를 비는 손씨에게 종주먹질을 했다.

"삼경이 너무 허하이."

하고 김민세가 유의태 대신 병자의 맥을 짚고 있다가 말했다.

"그러니 제독이 늦을 수밖에 ..."

유의태가 내뱉었다.

"오늘 밤이 고비겠지."

설사 그것이 오늘 밤이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 오늘 밤이 고비라도 유의태의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병자의 숨결을 받아 백회(머리꼭대기 한복판)와 천주(목 뒤 양귀 중간)을 호침으로 한 번씩 더 취하거라."

허준의 눈빛을 받아 상화가 세 가닥의 황초불을 병자의 머리 꼭대기로 옮겨 밝혔다.

호침은 경락 속의 통비를 다스리는 길이 세 치 여섯 푼 끝이 모기 주둥이처럼 생긴, 허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침이었다.

그 가늘기가 머리카락만하다 하여 호침이었다.

지난날 창녕 성대감댁 정경부인의 중풍을 고칠 때 썼던 침, 자기에게 침의 신비함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던 침.

병자의 머릿결을 헤친 허준이 병자의 배 위에 손바닥만한 종이를 조용히 올려놓았다.

그 가벼운 종이는 병자의 신체의 숨결을 가장 민감하게 전해 받고 바스락거리며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병자의 숨결에 네 호흡도 맞추어라."

병자의 배 위에 오르내리는 종이의 움직임을 보며 허준도 숨결을 고르기 시작했다.

눈에 이르는 혈은 삼경이라 이르는 족궐음과 간경의 좌우에 26혈 족태양 방층경 좌우에 126혈 수소음 심경의 좌우 18혈 등 도합 170혈이 퍼져 있다.

그중 천만이라고 불리는 백회는 양기를 다스리는 주혈이며 천주는 눈의 이상을 다스리는 주혈이다.

허준의 침을 쓰는 모습을 김민세가 불붙듯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허준의 손에서 침끝이 다시 뽑혀 나오자 뜨겁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애썼네."

김민세가 만강의 칭찬을 담아 그 한마디를 했고 그러나 유의태는 다시 지시했다.

"병자의 눈을 가려라."

허준이 일어서려는데 상화가 먼저 움직였다.

그러나 허준이 움직였다.

"홑겹이 아니고 세 겹쯤."

"세 겹이오니까?"

"확 매지는 않아도 되리. 갑자기 불빛이 들어가는 걸 막자는 것인즉."

모두 정지했다.

허준이 외쳤다.

"나았사오니까!"

"마음 놓지 못하리다. 하나 네가 정녕 취해야 할 곳에 일호의 낙자도 없이 찔렀다면 ..."

"... 일호의 낙자도 없이?"

일호란 무언가. 머리카락이 빠진 그 구멍을 이른다. 스스로 찔렀으되 어김없이 그 호에 해당하는 정혈을 찔렀다. 장담할 수 없다.

"아직 두 가지 증상이 더 나타나야 하리라."

"두 가지 증상이라 하오면?"

"부자의 독이 완전히 가시면 뒷골이 패고 거의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무겁다 할 것이다. 그 통증은 팔미산으로 흩어내야 하리."

'팔미산!'

"하나 팔미산에는 부작용이 따르니 두통은 멎되 위가 잡아 찢기듯이 아픈 증이 온다."

"."

"그러나 두통에 비하면 덜한 고통인즉 그렇게 증세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증세를 줄여나간다 ...?"

"위경은 어디더냐?"

"족양명 올시다."

순간 허준의 눈이 빛났다.

"삼리두혈(무릎 밑 세치)을 취하오니까?"

"대장 소장이 모두 위맥이므로 ... 삼리의 정혈은 알렷다?"

"엄지로 질양맥을 눌러서 움직이지 않는 곳이 삼리의 정혈올시다. 하오면 삼리를 취하고 나면 병자가 눈을 뜨옵는지?"

"그건 위의 고통만 나을 뿐이다. 위는 낫되 이번엔 그 고통이 양어깨 뒤 대추로 옮겨질 것이다. 이 대추의 혈이야말로 모든 눈병과 직접 관계가 있는 곳이다."

"하오면 그다음 대추에 온 고통은 무얼로 떨어내오리까?"

"뜸이다. 그 뜸이 세이레만 계속되면 더 고통은 없으리라."

유의태가 거침없이 말했고 허준과 김민세가 '' 하는 얼굴로 그 태연한 유의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의문에 찬 두 사람을 유의태는 돌아보려고도 않았다.

침과 뜸은 같이 행하지 못하는 것인데 유의태가 뜸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정 넘어 유의태가 예언한 증상이 병자에게 나타났다.

아들 만석과는 달리 허준에 대한 송구스러움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말수가 적던 병자가 갑자기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머리 뒤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준비했던 팔미산을 재탕해 마신 새벽녘에 이르자 이번에는 위통을 호소하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 고통을 지켜보던 김민세가 아까의 의문은 간 곳 없는 얼굴로 말했다.

"복이 많은 병자로고. 천하를 호령하고도 남을 두 의원을 곁에 두고 병을 앓고 있으니."

병자의 고통은 허준이 삼리를 취하고 반 시각이나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런 잡사는 지켜볼 것도 없다는 듯이 유의태는 병자를 허준에게 내맡긴 채 자기 방으로 돌아 가버린 뒤였고 끝내 허준을 흥미로워하여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건 김민세뿐이었다.

아침이 오자 유의태의 예언은 또 한 번 맞았다.

과연 병자는 두 어깨 뒤가 결린다고 호소했다.

좌중이 모두 놀라워하며 상화가 뜸 뜰 준비를 하자 허준이 그 상화를 막은 뒤 김민세에게 의문을 제기했다.

"침과 뜸을 함께 행하지 아니한다 하는 것은 의가의 상식인데 대추에 뜸을 놓아도 되오니까?"

"놓지 말아야지."

"하오면?"

"저 사람이 비록 일일이 지시는 했되 일일이 정혈을 찔러 병자의 고통을 눈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배로 배에서 어깨까지 유도해낸 건 그대의 공이지 더 무얼 거리낄 것이 있는가. 핫핫."

"하오나."

아직도 의문을 꺼내려는 허준을 한 눈으로 보며 김민세가 일어났다.

"저 사람은 나머지 일은 그대에게 맡겼네. 그렇거든 아는 대로 행하게. 핫핫 ... 그럼 이만 나도 한숨 눈 좀 붙여야겠어."

호탕한 본래의 웃음소리로 바뀐 김민세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안채로 건너가고 말았다.

상화가 말했다.

"스승님의 영이니 뜸 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으오?"

"모든 게 유의원이 얘기한 대로 되었지 않으냐. 이제 와서 다른 사단 일으키지 말아라."

병사로 들어온 손씨도 애원하듯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허준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침과 뜸을 함께 쓴다는 건 본 바도 들은 바도 없는 해기올시다. 난 그렇게 할 수 없소."

 

8

첫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거푸 났다.

유의태의 방, 그 동녘으로 난 사창에 붐한 새벽이 어리고 있었으나 방안은 아직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김민세의 음성이 났다.

"왜 그러셨던가?"

잡든 듯 한참 대답이 없던 유의태가 조용히 되물었다.

"왜라니?"

"침구는 함께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가의 영인데 침과 뜸을 함께 쓴다 처방하고 들어와 버렸으니 저 아이가 당혹한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당혹하던가?"

"...?"

"그 정도로 당혹한다면 내가 사람 잘못 본 거겠지."

"무슨 얘길하는 건가. 의가의 영에 반하는 얘길 꺼낸 건 그대가 먼저가 아닌가?"

"내 뜻은 나는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요, 저 아이는 앞으로 뻗어나야 할 생이니 뒷마무리를 저에게 맡긴 거지 딴 뜻은 아닐세. 또 병자의 병은 이미 나았은즉."

"그럼 왜 하필 그런 말을?"

"그 정도 침이면 뜸 뜰 자리 침으로도 풀 수 있지. 어느 쪽을 선택하건 저에게 맡긴 것뿐."

"...!"

"큰 의문 갖지 마시게. 이젠 난 명예가 필요 없는 사람. 하나 저 아이는 제가 저지른 일 제 손으로 그 오명을 씻어야 않겠는가."

"고마운 말이로세, 정말 고마운 말이고말고."

"당황하지 않을 게야. 곧 방법을 찾아내겠지. 유의태란 존재에 얽매이지 않는 방법으로."

김민세가 어둠 속의 유의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의태는 천정을 향해 카악 강한 눈길을 박은 채였다.

"저 아이의 호침 쓰는 솜씨는 놀라웠어. 열에 셋만 맞추어도 효력을 내는데 그 아이는 모두 적중시켰어. 병자의 회복되는 증상이 그 증거지. 입신의 경지야."

"젊은 아이에게 과찬은 도리어 해롭네."

"벗님은 저 아이의 솜씨를 어찌 보셨던가?"

"침술만 뛰어났을 뿐 ..."

"다른 점은?"

"그대도 알다시피 침술은 의원이 갖추어야 할 수단 중 작은 한 가지일 뿐 적어도 ..."

"말씀하시게."

"내가 저 아이에게 스승이 됐고 선인이 됐던 내가 바라보는 바는 ..."

"...?"

"선배란 뭔가? 그건 후학으로서 점령하고 뛰어넘을 목표여야 하리. 그게 첫째일세. 나를 뛰어넘을 후학이 아니고서야 무슨 재미로 눈여겨볼 재미가 있겠는가."

"그럼 허준이 그대의 영에 반발하고 대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이젠 제힘으로 우뚝 서야 해. 나 같은 건 잊고 ... 나도 오늘 보았어. 저 아이의 침술을 ... 능히 그 침술만으로 세상 입초시에 오르내릴 정도는 되네. 지난날 창녕 성대감 집에서 이룬 일도 결코 우연이 아니란 것도 확인했지, 그러나 ..."

"제 뜻이 내의원에 있다면 재주 승한 것만으로는 앞길을 열 순 없어."

"... 누구 얘기를 하시는 건가?"

"전대로부터 금상왕에 이르는 양대 37년을 어의 자리를 틀고 앉은 양예수를 상대로 제 앞길을 헤쳐나가려면 어떤 권위에도 할 얘기하는 패기가 아니고선 영영 양예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어."

"양예수를 아직 미워하시는가?"

"미워하건 아니하건 그자를 뛰어넘지 아니하고는 영원히 어의의 길은 막혀 있다는 그 말을 하는 게지."

어느덧 김민세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양예수라면 그도 잘 안다. 자기를 어의의 후계자로 꼽아주었던 사람이며 궁녀 정씨의 집안과 혼인을 맺게 했던 자기에게는 대부와 같은 은인이다.

하나 그가 또 이 유의태에게는 구침지희라는 의원의 명예와 목숨을 건 피나는 경쟁자였음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행여 허준으로 하여금 벗님이 양예수와 못다 싸운 그 싸움의 뒷마무리까지 떠맡길 그런 생각까지는 마시게."

유의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유의태의 늙은 눈이 깊숙이 어두운 불꽃을 태우며 타고 있는 것을 김민세는 보았다.

"양예수는 특히 그대에게 있어선 벌써 30년 전 옛 인연일세. 이젠 그 사람을 잊을 때도 됐지 않은가."

침묵하던 유의태가 입을 열었다.

"그와 나와의 사사로운 인연을 떠나 한 가지 묻세."

"하시게."

"명종조 이후 근 37년 동안 나라 안에 큰 의원이 태어나지 않는 까닭을 어디다 보는가?"

"양예수의 책략으로 보네."

"성급한 단정일세."

"허준이 새로운 재목이다 여기면서 난 그 생각을 해."

"양예수는 자기를 위협할 재주는 결코 뽑지 않네. 30년을 두고 어의라는 위세와 과장의 감시관으로 있으면서 물질에 얽힌 부정은 저지르지 않되 장차 자기의 지위를 위협할 재목은 철저히 가려 낙방시켰어. 이건 내 확신일세."

"벗님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였어. 내가 아는 양예수는 왕실의 시탕에 공도 많은 인물일세."

"어려운 병일랑 타인에게 맡기고 쉽고 생색이 날 변자만 도맡으니 공적 또한 쌓이겠지."

"누구에게 들은 소린가. 마치 그대의 눈으로 보기라도 한 듯이."

"안광익."

"..."

"아무튼 장차 허준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을 걸세. 그 아이가 내의원에 아니 올라간다면 모르되 올라간다면 ..."

"... 너무 상심 말게. 작은 고을의 작은 의원으로 마치려면 모르거니와 큰 의원으로 크려면 내의원은 기어이 한번 가야 할 곳이지. 이 나라에서 희귀 의서를 마음 놓고 접해볼 곳은 내의원밖에 없은즉 ..."

유의태가 말이 없었다.

잠을 청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불쌍한 사람 ...'

마치 남의 말처럼 여명 여명하고 예사로 내뱉고 있으나 김민세의 눈으로도 유의태의 여명은 오랠 것 같지 않았다.

- 반위.

오장이 마르고 마르다가 마침내 물도 넘기지 못하고 토하기만 하다가 숨쉬기를 멈추는 불가사의한 병 ...

'오늘 해 안으로 광익에게 기별하여 저 사람의 병을 회생시킬 방책을 논의해 보리라.'

창밖에 날아온 새소리를 들으며 김민세도 눈을 감고 한숨 잠을 청했다.

대추의 고통을 호소하는 만석모에게 허준은 손톱을 강하게 세운 지압을 계속했다.

허준의 하는 양을 보고서는 그 말 많고 떠들썩하던 꺽새, 영달 들은 벙어리가 되다가 방구석에 뒹굴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화만은 유의태의 영이 있었음에서 허준의 독단이 불안한 모습으로 큰사랑 쪽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유의태가 깨길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허준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엔 병자의 두 눈에서 꽤 많은 양의 눈물이 배나오고 있는 것도 눈이 되살아난 증거였다.

허준은 자신이 붙었다.

희망에 찬 아내와 어머니가 병자의 요기를 차려왔고 밥 냄새를 맡은 병자가 식욕이 동하는 눈으로 그쪽을 두리번거렸으나 허준은 병자의 음식을 거절했다.

"침과 음식은 밀접한 거올시다. 한 순차 침이 끝나기까지 음식은 참으소서."

"하지만 배가 너무 고프구만유."

허준이 그 가련한 병자에게 설명했다. 침은 환부만 자극하여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환부가 확실한 자극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의원은 반드시 병자의 여러 모습을 모두 지켜보아서 비로소 침을 살갖에 꽂는 법이라는 것을.

그건 예로부터 주장되는 엄격한 규범으로 이 규범과 원칙을 무시하거나 벗어난 의원은 결코 상의라 할 수 없는 뜨내기 돌팔이들의 행위였다.

음식을 새로 먹은 뒤에는 찌르지 못한다.

술에 취한 신체에는 찌르지 않는다.

성난 뒤에 찌르지 않으며 이미 찔렀으면 노기를 풀어야 한다.

힘든 일을 한 후에는 찌르지 않으며 배고픈 상태에선 찌르지 않는다.

목마를 때는 찌르지 않으며 수레를 탔거나 걸음을 달리고 난 뒤는 반시각을 누워 안정한 뒤에 찌른다.

이보다 더 의원이 중시해야 하는 것이 있으니 침자는 천시와 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사람의 피 그 혈행이 하늘에 뜬 달의 크기에 밀접한 고로 예민한 반응를 일으킨다는 사실에서 모든 침술은 이 천시의 운행에 기준한 침술을 절대적으로 써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초승달이 날 때는 사람의 혈기 또한 가장 정하고 맑아지는 시기로 몸안의 기운이 찰 때이며 달이 보름이 되어갈수록 혈기가 실하고 살갗이 탄탄해지는 것과 달이 이지러지면 살갗이 시들고 경감이 허하여지는 때임을 알아야 하고 그러므로 날이 한랭하면 찌르는 것은 삼가고 달이 날 때엔 사하지 말고 달이 찰 때엔 보하지 말고 달이 치지러질 때는 큰 병을 침으로 낫우려 말라는 것이니 달이 찰 시기에 외상을 입으면 특히 피를 더 많이 흘리게 되고 보름 전후의 출산은 딴 때보다 하혈이 심하다는 것 등이 모두 침을 지닌 의원이 명심해야 할 경구들인 것이다.

'오늘이 초사흘 ...'

허준은 침술에 절호의 이 시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9

유의태가 오늘 밤이 고비라던 날이 밝았다.

허준의 아내도 어머니도 허준과 함께 밤을 밝히는 제자들도 모두 밤을 꼴딱 새우고 있었다.

유의태가 말한 '오늘 밤이 고비'라는 그 고비는 그가 지시한 뜸을 뜰 것을 전제로 한 예측일 것이나 허준은 유의태가 장담한 뜸을 무시한 채 그 손에는 계속 침만이 들려 있었다.

제자들도, 소문을 듣고 꾸역꾸역 나타난 구경꾼들도 그래서 날이 새어 유의태가 나타나 한바탕 사제 간의 갑론을박과 소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수군거렸다.

침과 뜸을 함께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의가의 좌우명일지라도 그렇게 지시한 것은 유의태다.

비록 허준의 침술이 어느 만치 완성된 경지라 할지언정 스승의 지시를 면전에서 거부해서 될 말인가 싶은 것이다.

물론 제자들도 수삼 일 동안 곁에서 보아온 터이다.

병자의 부위는 어디를 어떻게 시행하라 낱낱이 지시한 것은 유의태로되 그 지시를 따라 취한 기와 술은 허준의 재질인 것을.

그러나 그렇게 유의태가 시키는 대로 하여 득효했다면 마지막 지시 또한 그대로 따라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허준이 스승의 영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모두 괘씸하게 여겼다.

스승의 '해라!'는 신성불가침의 절대절명의 영일 터인데도 마치 대결이나 하듯 자신의 시술을 내세우는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그냥 한가로이 오가는 문답이 아니요 당장 눈앞에 살아 있는 환자를 놓고서의 대결임에서 모두 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곁에서 말리기엔 그 동안 허준의 존재가 너무 뚜렷했다.

새삼 그의 행동을 가로막을 위엄은 좌중의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 병자의 이변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느 날 같으면 벌써 모습을 나타내어 병자의 차도를 간심할 유의태는 아직 큰사랑에서 기침 소리 하나 없었고 그 유의태 대신 꼭두새벽에 상화를 불러들여 어디론가 길을 떠나게 한 김민세 또한 다시 깊은 잠에 빠졌는지 더 동정이 없었다.

"유의원이 하라는 대로 하면 떠질 눈이 애비의 고집으로 인해 아직 떠지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한여름의 붉은 첫 햇살이 퍼져나가고 초복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 시각에 오늘도 집에서 달려온 손씨가 만석모 곁에서 병자 못지않게 진땀을 흘리고 있는 며느리를 불러내어 긴장된 소리로 물었다.

"천으로 겹겹이 눈을 가리고 있으니 나아가는지 어쩐지 들여다볼 길이 없습니다."

"어디 고통스럽다 호소하지는 않고?"

"고통은 일차 가신 모양올시다."

"그것이 애비의 침의 효력인지 궁금하구나. 병자가 자식하고는 달라 애비한테 내내 미안해하고 참을성이 맡은 사람이라 일부러 아픈 내색을 감추고 있는 듯도 하고!"

구경꾼들이 하나둘 불어나 고부를 앞질러 병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병사의 방문에 가리운 낡은 갈대발 너머로 허준과 만석과 영달 꺽새들, 병자들이 거의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

상화의 솜씨로 방문 위에 매단 여치집에서 때로 여치가 시원하게 울어댈 뿐 어디서 거름 썩는 냄새가 후덥지근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기다린다. 가서 요기 좀 하고 한숨 눈 붙이고 오너라."

손씨가 일렀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어야 한다더냐?"

"모르겠습니다. 온정신을 모으고 있으니 섣불리 곁에서 입을 열 수도 없고요."

"유의원은 그 길로 더 내다보지 않고 내내 애비 혼자 저러고 있느냐?"

"."

"이미 누군가 애비 혼자 무얼 어찌한다 일러주었겠지."

"사람들 눈빛이 하나도 애비를 편드는 것 같지가 않아."

"애비도 한숨도 눈 안 붙인 채냐?"

"."

세상 사람이 믿지 않아도 그러나 지금 허준의 아내는 남편을 믿고 있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성질이 아니라 여겼다.

어디를 어떻게 취하라 낱낱이 일러준 유의태의 만병에 밝은 눈도 경탄할 지식이되 그 정혈을 하나하나 낙자 없이 취한 남편의 기와 술 또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유의태와 대립한 의견을 낸 남편의 판단이 승리하여 병자의 눈이 떠지기를 그녀는 믿었다. 믿지 않아서는 아니 되었다.

그녀는 밤새 그 사실을 곱씹어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이 일은 남편 허준의 의원으로서의 긍지와 기략을 스스로 확인하는 기회인 것을.

실패는 남편이 유의태에게 패한다는 그 체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지식의 붕괴일 것이다.

남이 일러주고 남이 손잡아주어 병을 낫우었을 때 그도 기쁨은 되리라.

그러나 자기가 믿는 바대로 스스로 행하여 병을 낫운 기쁨에 비길 수는 없다.

자신 있는 행동.

남편 허준의 자신 있는 행동.

허준의 아내 김씨는 남편의 자신 있는 행동에 자기의 운명도 걸고 있었다. 지난밤 유의태를 따르지 않는 남편에게 주위와 함께 우려한 자기 자신이 지금은 부끄러웠다.

그리고 남편을 일시나마 불안하게 여긴 자기가 죄스러웠다.

비록 말없이 병자를 간병하는 모습이나 그건 필사적인 행동인 것을 그녀는 열 번 스무 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식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행동, 그녀는 그런 남편의 고집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남이 하라는 대로만 한대서야 언제 자기가 믿는 자신의 세계를 가질 것인가. 실패하면 어째서 실패했는가를 알고 성공하면 이러이러해서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있음으로써 사람은 보다 높은 곳으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매미소리가 귀 따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뭇잎새의 아침 이슬이 말라가는 그 시각에 이미 등줄기에 후줄근하게 땀이 느껴지는 무더위가 오늘도 계속될 모양이었다.

"어서 이젠 풀어봐유. 그 양반 허의원 선생이란 사람도 어젯밤이 고비라구 그랬잖네비유. 그리고 이젠 해가 하늘 똥구멍꺼정 올라왔는디 왜 마냥 내려다만 보구 있느냐구요."

"아직 침이 박혀 있어."

조바심치는 만석이를 돌아도 안 보고 허준이 뇌까렸다.

"뽑아요. 그럼 침!"

"어쨌든 고비라는 어젯밤이 지나구 한나절이나 지나갔잖유. 한나절씩이나!"

"가서 그 좋아하는 밥이나 찾아 먹게."

", 지금 내가 밥이 넘어가게 됐슈?"

만석이가 눈을 하얗게 떴으나 허준은 더 이상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려 않았다. 그러나 김씨와 손씨는 동시에 안도의 숨으로 바뀌었다.

그 좋아하는 밥이나 찾아 먹으라는 그 말 속에 한 가닥 여유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두 시각은 더 있어야 하리. 그리고 다시 또 마지막 취할 곳도 남았고."

둘러싸고 앉은 여타의 제자들을 의식해선지 한참 후에 허준이 병자의 맥을 짚고 있던 손을 떼며 혼자 그 한마디를 했다.

새벽 내의 침묵에 비해 그 어조 또한 딴 때 없이 자신에 찬 소리였다.

침의 명수를 일컬어 상공, 중공, 하공으로 친다.

물론 그 상공외 첫 조건은 정혈을 찾아내는 특이하고도 신묘한 재질에 있다.

그러나 진짜 상공의 명순란 어디가 무슨 혈이라는 그 부위의 선정에서 막 그 정혈을 찌르는 재능 못지않게 찌르면 얼마나 찌르며 찌를 시각은 어떻게 선택하며 찌른 후에는 어느만치 꽂아두는가를 두루 통달해야만 그 경지에 이르렀다 일컫는다.

첫째로 그 깊고 엷게 찌르는 기를 중시하는 것은 혈락에 가까이 이어진 병은 그것이 살가죽에서 가까이 있으니 엷게 찌르는 것이요 다음 차례로 깊은 곳인 육부는 더 깊게 그리고 오장은 더 깊이 있으니 그에 속한 병은 더욱 깊이 찌르게 된다.

또 사는 취할 부위가 전채의 기운에 비해 탄탄하다 여기면 그 실한 것을 흩어내어 관련 부위와 균형을 맞추어 전체의 평정을 맞추는 것으로 병자가 숨을 들이킬 때에 침을 넣어 침신을 굴려 병자의 숨결이 내쉬는 것과 함께 침을 뽑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모든 침의 운용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자의 몸속의 음양을 조화하는 오장육부의 움직임을 평하게 하는 병자 전체의 건강을 지켜보는 눈이 상공의 경지다.

"그래서 허준의 경지가 그 상공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고 병사 쪽의 긴장은 아랑곳없이 유의태가 느긋이 자리에 누워 있는 김민세에게 말했다.

"그대 또한 그런 믿음이 없다면 침을 고집하는 소리를 들었으면서 아직 자리 속에 누워 있진 못하리 ... 아니 그러한가?"

유의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원마다 침통이야 지니고 있지. 그러나 과연 상공의 경지에 부끄럽지 않은 솜씨를 지니기란 백에 하나쯤이겠지."

툭 유의태가 독백했다.

"후하구먼, 세상에 많은 의원이 하공이요 그중 스물에 하나가 중공이요 상공은 천에 하나 아니 만에 하나라도 많네."

"만에 하나라 ... 그건 아예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대답 대신 유의태가 웃었다.

 

10

"상공이라 ..."

하고 김민세가 다음 말을 더 기대하듯 유의태를 건너보았다.

"굳이 순차를 매기자면 허준이 중공과 상공의 중치쯤에 이르렀는지 모르지. 제 고집대로 시술한 저 병자가 온전히 눈을 떴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

"뜬다고 했지 않은가. 그대의 입으로. 분명 어젯밤이 고비라 한 말이나 또 병자의 차도가 미심쩍다면 그대가 이렇게 마냥 태평하게 앉아 있을 리도 없을 터이고, 아닌가?"

김민세의 그 말에 유의태가 다른 말로 대답했다.

"아마도 허준이 상공의 경지에 이르려면 사람의 몸속을 적어도 열 명은 헤쳐보아야 하리."

"사람의 몸속을 헤쳐보다니?"

"사람마다 병이 있기 그 가짓수를 세자면 가히 만 가지 병이라 할 것이로세. 그렇다면 만병을 통치하려는 상 중의 상의를 지향하려는 자거든 마땅히 사람의 몸속을 열어보고 헤쳐보는 기회를 가져야 하겠지."

"어려운 얘기로군."

"수만 사람의 병을 다루어야 할 의원이 고작 필설로나 형용한 오장육부를 상대로 한대서야 더 이상의 정진은 기대하기 어려워."

"말은 옳으나 지난한 일 아닌가. 도대체 사람의 몸속을 누가 들여다볼 수 있는가? 광익이처럼 부술에 미친 사람이 아니고선, 더더구나."

"그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거든 해내야지. 길이야 어떤 길이 되었건."

김민세가 숨을 삼키며 유의태를 건너보았다.

"해내다니? 살인을 말인가?"

"살인일지 활인일지 아무튼 고작 개나 고양이 뱃속을 째보는 것과는 달라야 하지. 사람이 개 고양이의 속과는 다를 터이고 안광익의 부술도 허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그가 비록 남의 무덤 속을 몰래 파내어 여러 송장을 헤쳐본 것은 짐작이 가는 터이나 그 송장이란 뭔가? 3일장, 5일장으로 장례가 끝나 파묻힌 사체들이니 이미 정지한 오장은 오그라들고 혈행은 멎은 지 오래인 썩어가는 송장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본들 그것으로 살아 있는 병자를 가늠한다는 것은 차이가 많아."

김민세의 침묵이 길었다.

민세는 안다.

의원의 가장 큰 욕망은 생체의 인간을 헤쳐보는 일이다. 그리고 때로 급살한 송장이나 사죄가 결정된 인간을 헤쳐보려는 탄원이 내의원의 신진 기예의 의원들 속에서 어의나 내의원을 관장한 도제조에게 품신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체의 해부는커녕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 자체가 사죄로 치부되는 절대의 윤리이기에 인체 해부의 허락은 어느 곳에서도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승에서의 죽음이 저승에로의 떠남을 의미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재활을 꿈꾸는 사생관을 지닌 인간들에게 이승에서의 죽음 위에 다시 타인의 칼끝으로 몸을 갈가리 찢기어 개돼지가 백정의 칼끝에 해체되듯 그 끔찍한 두 번 죽음을 원하는 이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때로 정치적 역모에 연루되거나 절대권력의 노기 어린 명령에 부관참시라는 것은 있을지언정. 그것 또한 이미 백골이 된 고루를 동강 내는 법의 관행일 뿐.

이때 돌연 두 사람의 침묵을 깨는 소리가 병사 쪽에서 났다.

"눈을 뜬 모양이로군."

하고 유의태가 마치 먼 고장의 소동이나 말하듯 뇌까렸다.

"나가보지 않으시려나?"

김민세의 음성도 병자의 눈뜸은 기정사실인 양 나직하고 침착했다.

유의태가 툭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나갈 것 없겠지. 구경꾼들이 제법 몰려와 있는 모양인데 저 공일랑 저 아이가 지녀야겠지. 새삼 병자 하나 더 낫운 공을 내 이름 밑에 달고 싶지 않으이."

김민세가 끄덕였다.

"아름다운 정이로세."

"세상 사람들은 그대와 허준이와의 대결에서 누군가 한 사람 세상 입초시에 난도질이 나길 바랐을 터이지만 그대는 그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저 아이에게 양보를 했어."

"..."

"임오근이한테 당한 그 상처 따위로 그대가 침을 못 잡을 리 없건만 저 사람에게 직접 침을 잡게 한 것부터 세상의 공치사를 저 사람에게 넘겨주려는 그대의 지극한 정이고말고."

유의태가 나직이 또 한 번 독백처럼 뇌었다.

"내가 준 건 정이 아니라 기회일 뿐."

"...!"

"어차피 이젠 이 세상 더 많이 살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저 사람일 터이므로 ..."

김민세의 코끝에 시큰 작은 감동이 지나갔다.

유의태의 입에서 허준을 일러 '저 사람'이라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미 유의태가 허준을 자신의 의술의 경지에서 멀리 떨어진 후학으로 보지 않고 한 사람 독립된 의원으로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한마디이기도 했다.

이때 영달과 꺽새가 달려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기척도 생략하고 마루로 뛰어오른 영달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병사 쪽을 가리켰다.

"병자가 눈을 떴습니다. 눈을 떴다구요."

"허준이 병자의 눈을 고쳤소!"

뒤따라온 꺽새도 악을 썼다.

김민세와 유의태가 몸을 일으켜 큰사랑을 나왔다.

마당은 온통 난리였다. 손씨와 아내가 허준을 붙들고 울고 있었고 찾아온 아들 겸이와 딸 숙영을 마을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끌어안듯 하고 반가워하며 동동거렸다. 그리고 해장술이 아직 덜 깬 만석이가 햇살이 눈부시다는 듯이 눈을 가린 제 어미를 들쳐업고 온 마당을 뒹굴고 돌며 병자의 눈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마다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 허의원이 병을 고쳤다고 울고 웃으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인심이란 애초 그 정도 엷은 것인지 모른다. 허준이 눈먼 병자의 눈을 다시 뜨게 했다는 소문이 돌자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유의태의 의원은 다시 찾아드는 병자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이 세상에 의원이란 허준이밖에 없다는 듯이 찾는 이름도 모두 허준이었다.

배탈 난 병자도 머리가 아픈 환자도 발병이 난 사람도 병을 그 허준이가 보아주기를 열망했다.

만석 모자가 허준과 그 가족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또 조아려 감사하며 산음을 떠난 후 의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로 바뀌었다.

이젠 병사가 허준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영달과 꺽새도 허준이 앞에서 시선도 다 못 들도록 순종하며 허준이 그들의 연치를 존대하여 황초잡이와 수건쟁반 들고 시종하는 것을 맡기자 마당쇠의 신세에서 병사로 올라선 그 승격에 감격하여 이제야 숙원을 이룬 듯이 허준의 거동 때마다 허리가 휘었다.

어제까지 유의태를 존대했듯이 허준의 신발을 툇돌 위에 바로 놓기를 다투었다. 유의태의 시대는 가고 허준의 그늘 속에서 자리를 잡아야 살길이 열린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린 눈빛들이었다.

하나 주위가 '허의원' '허의원' 하고 떠받들어도 허준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의 성공은 결코 자신의 재주만이 아니요 유의태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침과 뜸을 병행하라는 그 황당한 말을 들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이미 일어선 사람을 부축하는 정도의 간단한 마무리로 자신에게 공을 돌려준 유의태의 뜨거운 정을 이제야 허준은 절절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더 배우리라! 열 번 쫓으면 열한 번 다시 찾아와서라도 기어이 이분의 의술의 경지와 혜안을 반드시 내 몸으로 익히리라.'

바로 그날 밤이었다.

평소와 같지 않은 유의태의 참담한 병증을 발견한 것은 ...

이날 새벽부터 뒤밀리는 병자들을 맞아 솜처럼 피곤해진 몸으로 그날의 처방전들을 모아들고 허준이 유의태가 있는 큰사랑으로 찾아들었을 때 언제 찾아왔는지 그 방에는 안점산의 안광익이 나타나 있었고 그 김민세와 안광익 앞에 웃옷을 벗은 유의태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안광익이 무서운 눈빛으로 유의태에게 소리쳤다.

"반위일세! 이미 초기가 아니라 말기에 가까워."

들어선 허준이 그 자리에 못 박혀 서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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