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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동의보감 4

7. 걸승 김민세

 

1

정지할 줄 모르고 흐르는 세월 속에서 360여 일 만에 한 번 찾아오는 시간의 마디가 유독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이날은 신분의 상하에 구애되지 않고 세상 모두가 새날이라 부르며 기리는 날임에 틀림없었다.

없는 자는 없는 대로 있는 자는 있는 대로 흘러가 버린 지난 한 해의 아쉬움을 묻어버리고 어제와 꼭 같은 해가 떠오르건만 그 해를 바라보며 저마다 새해에의 소망을 읊조리기 마련이었다.

하나 그건 새 희망을 품을 만큼 특별한 날이 아니라는 것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가난을 덜어주십사

아들을 쌍둥이로 낳게 해주십사

풍년을 들게 해주십사

과거에 붙게 해주십사 ... 신분과 처지의 층층이 간절히 빈들 세상은 세상대로 굴러갈 뿐, 연년세세 그 숱한 소망이 얼마나 허망한 세모를 맞이했는가를 사람들은 되풀이 되풀이 세월에 속아 살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절절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그 희망을 못 버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1년 계량은 고사하고 이 정초가 지나면 어김없이 호랑이 아가리처럼 버티고 있을 보릿고개를 번연히 알면서도 세상의 가난한 애비들은 세밑이 되면 공연히 부산떨며 나락섬이나 보리쌀 말이라도 들고 나가 몇푼 돈냥과 바꾸어 자식들을 설빔으로 치장하여 집 밖으로 내보낸다.

흉년이다 핑계 대어 추석에도 헌 옷으로 건너뛴 아이들도 그래서 이 설날이면 싸구려 옷감의 설빔일망정 그것을 자랑스레 떨쳐입고 마냥 즐거운 것이다.

팽이치기, 제기차기 그리고 썰매를 지치고 동네방네 집집이 처마를 후비는 참새잡이.

어린것들뿐이랴, 일 년 중 마음 놓고 쉬는 날 집에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멍석 서너 장 깔고 한 아름씩이나 되는 참나무 통윷을 굴리며 마을 대항 술상 차려내기 윷놀이에 온갖 기성을 질러대고 아낙들과 처자들은 그들대로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드는 '얘기꾼'을 마을 제일 넓은 방에 모셔 놓고 그 간드러진 입담으로 흘러나오는 삼강행실도에서 부풀려낸 효자 효녀 얘기며 슬프고 아름다운 열녀 얘기에 울고 웃으며 즐겁다.

그러나 허준의 집은.

그런 마을의 정초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채 깊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느질 솜씨뿐이 아니라 음식 솜씨도 남다른 데가 있다 하여 마을 안에 작은 잔치라도 있을라치면 으례 불려가던 허준의 아내도 삯바느질 끝에 우진사댁에서 도둑 누명을 받은 뒤로는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다.

정말 도둑이었다면 서슬 푸른 그 우진사댁에서 즉일로 풀려나왔을 리 없다며 그녀의 마음씨를 기억하는 마을의 후덕한 몇 아낙이 그녀의 무고함을 두둔해주지 않은 바 아니었으나 그 무고함을 짐작하면서도 시모를 떡장수로 내보내면서까지 자식을 서당에 보내는 그녀의 남다른 점을 더 많은 아낙들이 시샘함인지 이젠 허준 일가는 마을에서 잊혀진 집이었다.

그 외롭고 쓸쓸한 정초를 허준은 뒤꼍 자기 방에 누워 산삼을 뺏길 때 당한 타박상과 동상을 열흘째 삭이고 있었다.

아내와 어머니는 그 열흘 동안 허준의 피멍을 치료하고자 조석으로 드나들었으나 모자간도 부부간도 서로 눈길을 부딪치려 않았다.

"면천시켜 주랴?"

하던 김민세의 그 한마디가 허준의 머릿속을 뒤범벅을 만들고 있었다.

허황하다고 믿으면서도 허준은 그날 이후 단 한시도 김민세를 잊어버린 적이 없다. 그는 또 하나의 눈을 분명히 본 것이다.

면천 얘기를 할 때의 김민세의 눈빛은 너무나 형형했다.

인간이 가짜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 열홀 동안 허준은 김민세에 관한 모든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었다.

술 마시고 고기 먹고, 그건 유의태의 문도가 된 지 얼마 후 자기가 직접 목격한 김민세 그의 모습이었다.

어느 여름날 비 오는 후원 유의태의 정자 위에서 연신 유의태와 웃음을 터뜨리며 유의태가 아들의 취재 자격을 시험해 달라던 그때.

기억이 또 하나 있다.

그건 허준이 직접 본 것은 아니나 저 김민세만 나타나면 유의태의 부인 오씨가 한바탕 꼭 유의태에게 대든다는 것을 지금은 사라진 장쇠로부터 들었었다.

"까닭이 뭐요?"

하고 허준이 영문을 묻자 장쇠가 목소리 떨궈 말했었다.

"저 땡추중의 어디가 좋은지 암튼 스승님은 저 중만 나타나면 일 년치 웃음을 한꺼번에 다 웃는데 돌아갈 제는 꼭 돈 한 다래끼씩을 시주받아 가거든."

"돈을 한 다래끼씩이나 시주를?"

"그것도 올 적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그러니 저 중만 나타나면 내방 마님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 분풀이가 불원간 스승님한테 터지는 거구."

그 말에 부산포도 한마디 보탰었다.

"그 걸팡지게 먹고 마시는 것 봐라. 돈 한 다래끼가 아무리 많은 돈이라 해도 아마도 부처님 면전에 가기 전에 다 먹어 없앨기다. 저리 먹어대니 하초도 꽤 힘을 쓸끼고 반드시 먹어 없애뿌리는 것만도 아닐 끼라. 땡추중 쳐놓고 과부 한둘 안감춰논 기 있겠나."

'그러나 ...'

열홀 전 자기가 본 김민세의 눈은 친구의 돈을 뜯어다가 주색에 탐닉하는 그런 풀어진 눈은 아니었다.

그랬었다. 그건 불도에 정진하는 맑고 깊은 사색이 담긴 눈도 아니요. 아무에게 뚫려 있는 그냥 껌벅이는 눈알도 분명 아니었다.

부릅뜨면 불빛과 성깔이 한꺼번에 타오르는 고집스러운 눈이었다.

취재로 내의원에 올라 어의가 되는 것이 면천의 길임을 강조하면서 왜 그 자신은 내의원을 그만두었을까? 유의태가 아들 도지의 취재 자격의 자문을 구할 정도요 또 안광익과 그토록 격의 없는 친분을 나누는 것하며가 그 또한 결코 범상한 의술은 아닐 터이다. 한데 왜 스스로는 면천의 길을 버렸을까. 어의가 되는 길을 알면서도 내쫓겨났는가. 아니면 그도 안광익처럼 왕가에 무슨 척을 지고 뛰쳐나올 사유가 있었던가 ...

허준이 잠 못 이루는 두 눈을 카악! 천정에 꽂으며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그게 정녕 면천의 길이라면 무엇을 못 할 것인가! 나의 목숨이 열이라면 아홉 개를 던져서라도 서슴없이 면천의 길을 택함에 주저하지 않으리라!'

마주쳐도 이젠 인사조차 않는 마을 사람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떡목 판을 이고 나서는 어머니, 삯바느질 벌이가 끊긴 후 새벽마다 그 시어머니를 도와 디딜방아에 떡을 찧으며 ... 집 주위와 뒷산 비탈 그리고 앞도랑 모래톱에 이름 그대로 손바닥만한 채소밭과 몇 줄기 밭이랑이 띄엄 띄엄 생겨나는 것을 보며 허준은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도 모른 체 지내고 있었다.

아내의 설움을 덜어주는 일이요, 또 자식들로 하여금 장차 천출이라는 손가락질을 면하는 길이라면 어찌 아홉 개만 던지고 하나는 아끼랴. 남은 마지막 목숨도 아낌없이 면천이 되는 길을 향해 던질 수 있으리라.

'김민세를 만나거라! 그는 지금 유의태의 집에 있을 것이다! 혹 그동안 시주 돈 한 다래끼 받아내어 다시 어디론가 떠났다 할지라도 앉아 기다리지 않고 세상의 끝까지라도 찾아가 기어코 그를 만나 그의 입에서 나온 면천에 관한 그 얘기가 결코 한때의 농지거리가 아니란 확약을 들으리라!'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음에도 허준의 눈은 김민세를 만나리라는 집념에 핏발이 선 채 이미 그 뇌리에서는 잃어버린 산삼에 대한 미련은 아득히 사라져 있었다.

허준은 열이틀째가 되던 날 드디어 자리를 걷고 일어났다.

김민세가 말한 보름에 사흘을 앞당겨 일어날 수 있는 건 어머니가 달여내는 약의 효력만이 아니라 아내의 정성임을 허준은 알고 있었다.

허준이 가족과의 말을 끊고 누워 있던 그 열이틀간 아내는 늦은 밤 꼭 한 번씩 다녀갔다. 그리고는 잠든 남편의 곁에 말없이 앉아선 타액이 상처를 삭이고 아물게 하는 처방이라 여기고 있음인지 조용히 남편의 웃옷을 헤쳐 그 가슴이며 허리의 피멍 위에 수없이 타액을 발라주었었다.

그 아내의 눈물겨운 헌신에도 허준은 여물어가는 자기의 결심을 입밖에 내진 않았다. 확인하기 전에는.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아내에게도 희망을 심어주었다가 그 희망이 꺼질 때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뜨리는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딜 다녀오려고?"

마당에서 동생 숙영이와 눈사람을 만들고 있던 겸이가 나타난 아버지를 보고 놀라서 안방으로 달리며 "아버지가 걸어나오셨다!"고 소리쳤고 그 소리에 안방에서 어머니가, 부엌에서 군불 때던 삭정이를 꺾어든 채 아내가 달려 나왔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아들은 황급히 마당에 내려서는 어머니에게 짧게 인사를 드렸다.

"어딜?"

대답 없는 아들의 과묵한 입매에 더 캐묻지 않고 어머니가 가족을 대신해 물었다.

"걸을 수 있겠느냐?"

"다 나았습니다."

하고 허준은 삽짝도 없는 집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좇아 일가가 따라 나왔으나 더 따라가진 않았다.

어머니도 아내도 허준의 가라앉은 눈이 산삼을 되찾겠다고 날뛰던 그 눈빛과는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었기에.

저만치 유의태의 의원이 보였다.

내쫓긴 지 석 달이 되고 있었다. 그 유의태의 의원이 와락 반갑게 느껴지려는 심정을 허준은 고소했다.

'이제 와서 빌 일도 없고 빌러 가는 것도 아니다! 난 김민세를 만나러 가는 것일 뿐!'

그때였다. 문득 걸음을 세우고 말았다. 언덕배기 위 유의원의 문전에 이젠 수제자의 모습을 한 임오근하며 문도들의 배웅 속에 출타 차림의 유의태가 상화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실망이 스쳐 갔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김민세와 안광익이 이미 유의태의 집을 떠난 것을.

다음 순간 허준은 그 유의태의 길을 가로막듯이 꿇어앉았다.

유의태가 언덕배기를 내려오며 그 허준을 보았다. 아니 보려 해도 가로막고 꿇은 허준을 못 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태는 그 허준을 지나치려 했다. 순간 허준이 외쳤다.

"물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자도 뺀 그 허준을 걸음을 세운 유의태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뒷짐을 지며 허준을 내려보았다. 일체의 연민도 호기심도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2

올려다보이는 의윈 입구 그 언덕배기 위에서 내려보고 있는 임오근의 눈빛이 매서웠다.

그 곁에 늘어선 꺽새, 영달, 병문 들도 이맘때면 얻어 입는 설빔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바쁘게 눈길이 오갔다.

이미 산음을 떠났다고 보고한 허준이 다시 나타나 유의태를 가로막은 모습이 그가 다시 유의태의 문하에 애원해 들어오려고 찾아온 모습으로 비쳤는지 경계와 적의에 찬 눈빛들이었다.

그러나 산음을 떠났다고 들었던 허준의 출현에 대해 유의태는 한 가닥의 관심도 움직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물어보려는 말이란?"

전혀 모르는 자는 아니라는 듯이 유의태의 첫마디는 그렇게 짧았다.

"봄가을로 오가던 삼적대사라 불리는 그분의 소재를 알고자 합니다."

유의태의 말수는 더욱 짧았다.

"그 사람은 왜?"

"십여 일 전 안광익 그분과 함께 다녀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 집에 다녀간 것은 사실이되 난 그 사람의 거처를 일일이 물어본 적이 없다. 오면 오나부다 가면 가나부다 우린 피차 그러한 교분인즉슨."

말끝에 유의태는 허준을 비켜 몇 발 행보를 옮겼다.

그 유의태를 허준이 돌아보자 유의태 또한 걸음을 세우더니 한마디 뱉었다.

"간다고 하여 반드시 그 사람이 그곳에 있다고 기필할 수도 없다. 하되."

"...?"

"함양 북쪽 30리허에 안점산이 있느니. 혹 그 산기슭에서 초동이라도 만나거든 삼적사가 어딘갈 물으면 더러 아는 아이가 있는지도 모르지."

말끝에 유의태는 가고 있었고 종자로서 뒤따르는 상화가 그 유의태와 허준을 안타까이 번갈아 보았다.

"안점산이라 했사오니까?"

허준이 외쳤으나 유의태는 돌아보지 않고 마을 쪽으로 멀어 갔다.

'함양 북쪽 30, 안점산, 삼적사.'

알고자 한 것은 다 안 셈이었다.

그러나 허준은 멀어져가는 유의태를 잠시 보고 있었다.

가로막았으니 시선을 주었고 물어오니 대꾸를 했을 뿐이라는 듯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유의태의 뒷모습은 그가 자기를 얼마나 확실하게 버렸는가를 웅변하고 있었다.

허준의 가슴속에 한 가닥 야속함이 비껴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허준은 자신의 그 여린 감정을 거부하듯 고개를 저었다.

'끝났어!'

허준 또한 그 유의태를 외면하며 등을 돌려 집 쪽을 향했다.

비인부전 ---

일찍이 유의태가 선언한 자기의 의발을 전수받을 경합자 속에서 자기는 확실히 제외되고 아들인 도지, 15년 고참인 임오근 그리고 그 심지와 노력으로 보아 상화 세 사람으로 좁혀졌다고 어림하며 허준은 유의태의 의원으로부터 계속 멀어져갔다.

다음 날 새벽, 허준은 수삼 일 바람이나 쐬다 오겠노라며 집을 나섰다. 어머니도 아내도 허준의 가출을 궁금해 견딜 수 없는 얼굴이었으나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했을 뿐 더 이상 자기의 목적을 부연하지 않았다.

면천의 실마리를 잡으려는 일생일대의 소망이 걸린 길이었다. 김민세를 만나 단단히 그 방법과 절차를 들어보고 그 확신이 설 때 설명해도 늦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첫걸음이 내의원 취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창녕 성대감 댁으로 정경부인의 문후와 세배를 겸하여 찾아가 시임 우의정이자 내의원 도제조라는 노수신에게 보일 소개의 글월을 다시 써달라 못할 것도 없다 싶었다.

"그것이 면천의 확실한 길이라면!"

그가 날 버린 지금 새삼 유의태의 조소 따위 개의할 바 무엇이며 그보다 더한 수모를 당한들 아플 것이랴!

"나 또한 지난 7년 동안 밤잠을 안 자며 정진했고 가족의 생계조차 희생하며 배운 의술일진대 그걸 내세운다 하여 어찌 그것이 유의태에 대한 은의의 배반이라 할 것인가."

근래 찾아낸 한 가지 설익은 변명도 고개를 쳐든 허준을 부추겼다.

함양까지 30, 그 함양서 안점산까지 다시 30, 합해서 60. 짧은 겨울 해요 비록 초행길이라 해도 그건 어려운 노정이 아닐 것이었다.

허준은 산음, 함양의 중간 지점인 서주 장터의 건재약상에 들러 안점산의 위치를 대충 듣자 서주로부터 화산으로 질러가는 길을 택하여 당본을 향해 길을 잡았다.

눈 쌓인 들에 분지의 바람이 회오리치며 허준을 쫓아왔고 내와 고개가 잇따라 길을 막았으나 허준은 새삼 김민세란 인물이 지닌 수수께끼에 골몰하며 추위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면천시켜 주랴 하던 것은 그 면천의 길을 안다는 뜻일 것이요 그렇다면 그 스스로는 왜 저부터 서둘러야 할 면천의 길을 버리고 다시 중의 복색이 되어 사바의 세계를 떠도는가.

또 의원의 세계에서 사문의 세계로 전향했다면 면벽 9년의 달마대사의 참선은 흉내 내지 못할지라도 술에 고기에 또 유의태로부터 철 따라 돈을 한 다래끼씩 얻어선 무엇을 하는 것일까.

허준이 김민세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되풀이하며 당본 어간의 몇 개의 주막을 지나쳐 함양 북쪽 20리라는 취암산 아래 나루에 이르러서였다.

뜻밖에 나룻배를 젓는 건 등그랑 늙은 노파였고 미리 뱃삯부터 받아 챙긴 노파가 이 취암산 너머 십 리 끝이 곧 안점산이요 그 안점산은 옛날 신라, 백제 때 어느 쪽에선가 쌓은 돌성 터가 뚜렷이 남아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이에 허준이 삼적사라는 절 이름을 대었으나 그 산에 절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며 그제야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해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남은 길이 십 리라면 목적지에 닿아도 해가 남는 시각이라는 여유를 가지며 그제야 허준은 사공집에서 소주 한 사발을 요기 삼아 사 마신 후 취암산 산허리로 굽도는 산길로 접어 올랐다.

대보름까지는 정초라는 관념 때문인지 그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엔 오가는 행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정초 초사흗날엔가 내린 푸짐한 눈길에 겨우 5, 6명만 넘나든 발자국이 얼어붙어 있고 때로 그 눈길을 가로질러 십여 마리 노루떼의 굽자국이 가파른 골짜기로 내리닫고 있었다.

그 외로운 산길의 마지막 굽이를 돌아 능선 날망에 섰을 때 눈 쌓인 벌판 멀리 한눈에 안점산임을 알 수 있는 높지 않은 산이 곰이 웅크린 형국으로 눈을 쓰고 엎드려 있었다. 허준은 미소지었다. 지리산을 7년 동안 무시로 넘나든 허준에게 안점산의 외형은 한낱 뒷동산처럼 작은 산이었다.

그러나 속단이었다.

허준이 거창으로 뻗은 외줄기 달구지 자국이 난 길을 벗어나 길도 없는 눈밭을 헤치고 안점산의 초입에 이르러 보자 멀리에서 본 외형과는 달리 지난날의 고전장답게 그 기슭에서부터 섣불리 발을 디딜 수 없도록 지형이 험악한 데다 멀리에서는 뚜렷이 식별되던 성터 자리는 우거진 참나무와 닥나무 그리고 가시덤불과 빽빽이 어우러져 어느 쪽이 성터에 가까운 길목인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여러 차례 옷깃을 잡아 뜯기며 그 밀림을 뚫고 산속으로 들어선 허준은 다시 아연해지고 말았다.

기슭의 밀림 다음에 나타난 건 병풍처럼 둘러서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벼랑들이었고 그 사이사이 눈과 얼음을 쓴 비탈에는 수십 길짜리 아름드리 적송들이 거대한 구렁이 떼처럼 휘어지고 늘어진 채 어느 한 곳 사람이 오르내린 오솔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절이 있다면 인적이 없을 리 없다.'

들어섰던 밀림에서 걸음을 돌려 다시 내려온 허준은 백여 보를 물러나 일면 다시 산세를 살피고 산에서 가까운 마을의 위치를 찾았다.

산속으로 나는 길이라면 산세가 평탄한 지형이나 마을에서 가까운 지점으로 길이 뚫려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마을은 어느 쪽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에 덮인 탓으로 여긴 주변 들판은 논도 밭도 아닌 쑥대밭이었으며 어느 한 곳 두엄 한 지게 부려놓은 논밭의 흔적이 없었다. 그제야 허준은 취암산 비탈을 내려온 뒤 항용 산 아래 있을 법한 주막집도 산비탈에 취락하는 마을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한 산이로군."

해가 이미 서산에 걸리고 있었고 온 산이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가 안점산이요 이 산속에 삼적사가 있고 거기 김민세가 있다면 물러날 수 없었다. 오솔길 찾기를 단념한 허준은 잡목과 얼음에 뒤덮인 계곡을 발견하고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눈과 얼음 덮인 계곡은 집채만한 바위가 많아 시야가 좀체 트이지 않았다.

이만한 수목이면 뜻아니한 침입자를 향해 새떼가 날거나 오소리 새끼라도 몇 마리 바스락거릴 만하건만 온 산은 괴괴한 정적에 싸여 들리는 건 오로지 바람소리뿐이었다.

"무슨 산이 이런가 ..."

허준은 계속 계곡을 헤치고 올랐다. 길은 아무 데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허준은 얼어붙은 폭포의 빙벽을 기어올랐고 그 너머에 무너져내린 돌성의 한 모퉁이를 발견했을 때 얼음을 짚어 오느라 손가락은 얼다 못해 떨어져 나갈 듯한데 온몸은 땀을 뒤집어쓴 듯이 젖어 있었다.

허준은 수백 년 성벽을 버티다 무너져내린 이끼 긴 돌 틈을 타 넘으며 성안으로 들어섰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은 빤히 열려 있었으나 마지막 낙조가 비낀 성안엔 키가 넘는 쑥대와 잡목이 어우러지고 밤을 맞이하는 바람소리가 아우성치며 횡행할 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물의 소리가 났다.

꿩이었다.

쑥대밭에서 서너 길 솟아오른 꿩과 장끼가 금세 제 체중을 못 이기고 팔매질이나 맞은 듯 성벽 너머로 쑤셔박히는 것이 보였고 그것들이 다시 나는 소리가 났다.

하나 그런 미물의 움직임 따위와는 상관없이 성벽의 안팎에 자생한 적송의 기괴하게 뻗은 가지들이 구렁이떼의 화신처럼 고개를 흔들고 가지를 휘저으며 귀곡성 같은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야.'

허준이 올라온 빙벽으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성벽 안 바람소리 속을 나아갈 때였다.

그 거센 바람소리 속으로 문득 두둥거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

그건 분명 여느 북이 아니고 절간의 법고 소리였다.

"삼적사다!"

반은 바람에 흩어지는 그 법고 소리가 나는 곳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바로 찾아온 거야!"

그 법고 소리 쪽을 향해 허준이 쑥대밭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3

두둥 두둥 두둥둥둥둥 두두둥둥 ... 달리는 허준의 앞으로 법고 소리가 다가왔다.

쑥대밭에 가려 있던 시야가 탁 트였다. 멀리 번듯한 성의 출구도 두엇 보였다.

순간 허준은 달리던 기세에 엎어질 듯이 걸음을 세웠고 자기 눈을 의심했다.

상식으로 아는 단청이 현란한 절의 형체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고 불사마다 받들어 단 무슨 전 무슨 전 하는 현판도 명호도 없을뿐더러 오로지 성벽 안 돌벽에 기대어 줄줄이 달아 이은 크고 작은 너와집들이 일여덟 채 보이는데 그 너와집의 사이사이 디딜방아며 나무곳간이며 절구통들이 그런대로 사람 사는 흔적을 갖추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법고 소리는 너와집 건너편 돼지와 닭장이 차려진 축사 건너 성벽 위에서 나고 있었다.

세찬 산바람 때문인지 얼굴도 손도 온통 헝겊으로 감싼 15, 16세의 소년이 요철을 이룬 성가위 사이에서 매달린 법고를 두드려대고 있는 속에 그 아래 성벽 입구에선 십여 명의 남녀와 어린이 신도가 성 밖에서 들어와 마악 불빛이 새나오기 시작한 맨 끝쪽의 너와집으로 향해 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허준은 그들의 불심 깊어 보이는 경건한 모습과 소년의 법고 소리를 연관 지어 이곳이 나루터 노파도 들은 바 없다는 그 삼적사인가 보다 여기며 머리 위 소년을 향해 얼른 합장해 보이며 고개를 숙여 보였으나 멈칫 북채를 멈출 듯하던 소년은 다시 장단을 찾아 북을 두드리며 그러나 그 시선은 허준에게 떼지 않았다.

순간 돌아서려던 허준이 다시 몸을 돌려 소년을 올려보았다.

이상한 예감이 허준의 가슴을 꿰뚫었다.

조그만 몸은 아직 소년일시 분명하건만 그리고 비록 귀와 입을 싸맸으나 성벽 위 세찬 바람 속에 온몸을 드러내놓고 끊임없이 북을 두드려대는 당당한 모습에 유일하게 내놓은 그 눈이 의외로 소년답지 않은 날카로운 안광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먼저 보낸 눈인사에 깜박도 않고 그 시선을 맞받으며 지켜보는 그 눈빛은 도저히 소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섬뜩한 안광이었다. 그러나 허준은 그 소년을 오래 보지 않았다.

저만치 십여 명 신도들이 들어간 그 곁 너와집 처마 밑에서 부엌문이 열린 불빛과 함께 뜻밖에도 낯익은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야!'

허준의 내심이 외쳤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본 기억은 없으나 그건 안광익이 유의태의 집에 처음 나타날 때 데리고 온 궁녀 정씨임에 틀림없었다.

지엄한 궁금을 어기고 사랑을 위해 목숨 걸고 대궐 높은 담을 뛰어넘은 강단은 그녀의 그 화사한 미모의 어느 구석에 숨어 있던 용기였을까.

처음 그녀가 유의태 집에 나타나 안채 골방으로 잠적했을 때 두 사람의 사연은 알 길 없이, 그러나 그녀는 영달, 꺽새 들의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때로 호젓한 시각에 담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화사한 미모를 훔쳐보고자 달려갔다가 돌아온 녀석들은 같은 화제에 신물이 나지도 않은지 으레 잠자리에 누워서는 "저렇게 잘난 계집도 그 일을 치를 때는 소리를 지르느냐" "어떻게 지르느냐"는 등 "저런 여리여리하게 생긴 계집일수록 그 짓은 더 밝힌다"느니 음담패설을 늘어놓았고 그런 어느 날 스승 유의태가 집을 비운 날 저 계집이 한밤중 사랑으로 몰래 건너가는 걸 보았으며 그때 나는 직접 저 계집의 온갖 신음소리를 들었다는 등 꺾새놈이 부풀려 낸 얘기를 녀석들은 등잔 심지가 다 닳도록 해대었으나 그때 허준은 궁녀 정씨에 대한 흥미보다 자신의 부술을 시험하고자 변돌석을 회유하여 남의 묘 속에서 송장을 꺼낸 안광익에게 더욱 관심이 쏠렸었다.

그래서 허준은 어느 날 갑자기 안채에서 사라진 그녀의 행방을 놓고 또 한 번 이러쿵저러쿵 화제 삼는 영달이 들의 침 튀기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녀가 미리 사라진 걸로 보아 안광익 또한 미구에 이 집을 떠나겠구나 내심 그것만을 서운하게 여긴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건 허준 자기가 유의태의 영을 받아 창녕 성대감댁으로 떠나던 그 임시의 일이었다.

아무튼 지금 허준은 그때 유의태의 집에서 사라진 궁녀 정씨를 이 깊은 산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반가웠다. 상대가 여자이매 소리쳐 부를 수도 섣불리 아는 체할 수도 없었으나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안광익 또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안광익이 여기 있다면 김민세도 이곳에 있어!'

허준의 가슴이 뛰었다.

빙벽을 기어오르고 팅 빈 절안에서 북소리를 듣기 이전의 절망이 일시에 더 큰 환희로 바뀌었다.

그 궁녀 정씨가 상다리도 없는 판에 담아 올린 음식들을 받쳐 들고 신도들이 몰려 들어간 저쪽 처마 밑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그 방에서 목탁 소리와 여러 사람의 염불 소리가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김민세다!'

허준은 목탁을 치는 주인공이 김민세임을 확신하며 너와집 처마 밑으로 향해 갔다. 불공에 즈음하여 방문은 여느 절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허준이 소리 없이 다가가 들여다본 그 방은 아래윗방 벽을 헐어버린 꽤나 넓은 방이었고 그 속에 들어찬 20여 명 신도들의 뒷모습 너머 한 좌의 불상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뒷모습만으로도 분명 김민세 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불상 앞에서 향을 퍼우고 있던 두 사내가 궁녀 정씨가 담아온 공양 그릇을 좌우에서 받아 공양대 위에 올리고 있었다.

허준이 그 사내들의 얼굴을 바라본 건 바로 그때였다. 순간 허준의 눈이 바쁘게 깜박였고 그 눈이 다시 사내들을 바라보다 소스라치며 뒷걸음쳤고 허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공포에 가까운 비명소리였다.

김민세가 돌아보았고 뒷모습의 20여 명 신도들도 일제히 문간을 돌아보았다.

"이럴 수가!"

허준은 그 기괴한 얼굴들을 보며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뒤통수에 거대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얼굴이 모두 똑같았다.

성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자 남자 늙은이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허준을 향한 그 얼굴들은 모두가 대풍창(문둥병) 환자들이었다.

눈알 하나가 빠지고 코가 떨어지고 입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엉겨 붙은-이목구비 성한 사람은 오로지 궁녀 정씨와 김민세뿐이었다.

허준의 온몸에 거대한 몽둥이질 같은 충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뒤꿈치가 땅에 닿지도 못하고 온몸이 떨릴 뿐이었다.

김민세가 그 허준을 무시하여 다시 불단을 향해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환자들도 불단을 향하여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손들을 모아 합장했다.

'이럴 수가 ... 그릴다면 이곳은 문둥이굴이란 말인가!'

허준이 자신의 중심을 필사적으로 버티며 입속에 거푸 외치고 있었고 그 눈앞으로 궁녀 정씨가 음식을 담아간 빈 판을 들고 밖으로 나왔으나 숨을 삼키고 바라보고 있는 허준에게는 시선도 줌이 없이 바로 옆방 너와집 처마 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허준의 등 뒤로 인기척들이 다가왔다.

허준이 돌아보자 십여 명 또 한 떼의 남녀 문둥이들이 손가락도 없는 두루뭉수리 주먹으로 낯선 허준에게 합장해 보이면서 김민세가 목탁을 두드리는 방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허준은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 성벽 안이 그 수십 명 문둥이들의 살 썩는 냄새로 진동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허준을 전율케 하는 것은 후각의 환상뿐이 아니었다. 금시라도 딛고 서 있는 자기의 두 다리로부터 온 성벽 안에 충만한 대풍창의 병균들이 수천 마리씩 줄줄이 온몸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착각이었다.

또 인기척이 났다.

"처사님께선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돌아본 허준의 눈에 좀 전까지 성가퀴에 서서 법고를 치고 있던 소년이 바로 등 뒤에 서 있었다.

대답 대신 허준은 소년으로부터도 몇 발 물러났다. 이제야 소년의 손이며 얼굴에 감긴 천은 방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병을 감추기 위한 위장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소년의 두 번째 물음은 날카로웠다.

허준은 아직 입이 떨어지지 않은 채 소년을 마주 보고 있었다. 목소리부터가 소년의 음색이 아니었다. 아니 목소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빤히 지켜보는 소년의 눈은 천 길 깊고 어두운 공동에서 번쩍이는 살기조차 띤 지옥의 눈빛이었다.

대답 없는 허준에게 소년이 웃는 듯했다. 오히려 허준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무서운 델 왜 왔소!"

소년이 자기 발아래 침을 탁 뱉고 돌아서 갔다.

정신이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허준의 귀에 다시 거센 산바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히고 있었다. 성벽 위에 요철을 지은 성가퀴들이 별빛이 깔린 밤하늘에 검은 형체를 그리고 있었다.

허준의 막막한 눈길 뒤에서 또 소리가 났다.

"누가 오래서 여길 왔나?"

돌아보니 안광익이었다. 그리고 안광익의 저만치 뒤에 그에게 전갈을 했음직한 궁녀 정씨가 역시 경계의 빛을 띠고 허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답을 하기에는 허준의 입안이 바싹 메말라 있었다.

"아는 사람이오니까?"

궁녀 정씨가 안광익에게 물었고,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자요."

하고 안광익의 내뱉듯한 대꾸 끝에 그 왕방울 같은 눈이 조소를 담아 허준을 훑어보았다.

 

4

"왔군."

하고 등 뒤에서 김민세의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과연 그가 서 있었다.

너와집 쪽에서는 그가 없어도 독경을 대신하는 사람이 있는지 누군가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독경 소리와 함께 20여 명 대풍창 환자들이 한꺼번에 외쳐대는 '나무관세음보살' 소리와 목탁소리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잘 기다리기나 한 듯한 말이로군."

하고 안광익이 그 김민세를 비아냥거렸으나 허준을 보는 김민세의 눈매는 따스했다. 그리고 "오너라." 하며 앞장섰다.

김민세를 따르는 허준의 등 뒤에서 궁녀 정씨가 "미리 무슨 언약이 계셔서 찾아온 분이오니까." 하고 안광익에게 묻는 소리와 "사람이 다심하여 아무나 믿는 탓이지." 하는 뱉듯한 안광익의 대꾸가 들렸다.

"내니라."

하고 김민세가 기척을 내자 곧 문짝이 열리며 뜻밖에 혼전의 처녀인 듯 한 두 아가씨가 급히 나오며 김민세에게 합장을 했다.

"...!"

아직 비주가 무너진 중환자는 아니었으나 떨어진 눈썹과 한쪽 귀가 엉겨 붙은 것 하며 두 아가씨도 한눈에 대풍창 환자였다.

앞장서 들어간 김민세가 횃불처럼 밝힌 관솔불 아래서 문밖의 허준을 돌아보았고 허준은 자기에게도 합장해 보이며 건너 너와집 쪽으로 환자가 총총히 사라진 걸 보고야 너와집 안으로 들어서며 닥나무 가지로 촘촘히 엮은 문짝을 닫았다.

너와집 안은 훈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밖에서 본 어설픈 건물에 비해 내벽은 두텁게 흙을 싸발라 외풍이 스미지 않는 듯했고 한구석 깨진 가마솥에는 벌겋게 숯불이 담겨 있었다.

한눈에 약재 창고였다.

사방 벽에 달아맨 여러 가닥의 시렁에 매달린 수백 접 마늘 냄새! 구석구석 엮어 이은 높고 낮은 건조대에 늘어진 것들은 고삼(너삼), 개오동나무, 그밖에 천정에 매달린 자루에서는 골당초며 작약의 싸한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고 맨바닥에 멍석이며 크고 작은 바구니에 두름두름 묶어 쌓은 것들은 뿡나무 뿌리, 대풍수 가지, 그리고 단단히 마개를 하여 구석진 곳에 놓인 아름드리 큰 독에서 스며 나오는 건 비릿한 뱀탕 내음이었다.

또 하나 그 곁의 뚜껑도 없는 작은 단지에서는 대풍수의 열매씨를 갈아낸 뱀탕에 못지않은 비리고 진한 냄새가 다른 약재 냄새와 함께 훈기에 어우러져 있었다. 그런 것들을 한눈에 바라보며 허준의 목구멍 속에 맹렬한 토기가 치받아왔다.

이제야 그것들은 한낱 약재라기보담 대풍창 환자들이 뱉어 내놓은 대풍창 병균 냄새처럼 느껴진 것이다.

김민세가 미소지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의원이 되려는 자가 약재를 보고 토악질을 느끼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던가 ..."

"...?"

"와서 이미 병자들을 보았으니 굳이 긴 말은 않겠으나 세상에는 반드시 낫울 수 있는 병만 있는 게 아닐세. 하나 병이 있다면 반드시 낫울 수 있는 약도 있다 믿는 게 내 고집이로세 ... 정 속이 메슥거린다면 골짜기에 내려가 실컷 토악질을 하고 다시 오게."

"... 이제 괜치않습니다,"

"처음 온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울 만도 하지. 나갔다 오게."

"괜치 않습니다, 이젠."

"그렇거든 게 앉아 몸이나 녹이며 얘기하지."

김민세가 숯불이 이글거리는 가마솥 가의 통나무 긴 의자를 가리켰다.

걸음을 옮겨 그곳에 가 앉으려던 허준의 몸이 다시 흠칫했다.

수많은 문둥이들이 앉아 불을 쬐었을 그 통나무의자는 그 환자들의 엉덩짝에 닳고 닳아 윤이 나도록 반들거리고 있었다.

허준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대가 찾아온 용건은 내가 아네."

하고 김민세가 입을 열었다.

허준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란 사람 사지 멀쩡한 사람을 일일이 돌아보도록 호사가가 아닐세. 그렇다면 내가 그대에게 면천이 되는 길을 일러주고 힘이 되어 주는 대신 그대 또한 내게 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

"그것이 확실히 면천의 길이라 한다면 대사님이 시키는 일 마다하지 않을 각오로 찾아왔습니다."

"길게 잡진 않으리니 앞으로 1년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도웁다니요? 제가오니까?"

"그렇네, 내가 보기 자네는 적임자인즉."

허준이 눈을 문득 허공에 돌렸다. 건너 너와집 쪽에서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치는 환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환자들은 아마도 저렇게 밤을 새우는 모양이었다.

"...?"

"나를 돕는다 여기지 말고 사람 사는 고장에서 내쫓기어 저렇게 밤낮없이 부처의 자비를 애원하는 저 사람들을 돕는다 여기어 ...!"

"다행히 그대가 유의태의 문하에서 여러 해 동안 약초에 관한 적공이 있다 들었으니 같은 병을 앓는 저 사람들을 위하여 1년 기한하고 나를 도와 약초를 갈무리하는 소임을 맡아준다면 나 또한 그대가 신분의 병에서 벗어나는 면천의 길을 일러주리."

"1...?"

"결코 더 길게 잡지는 않으리니."

"이곳에서 말씀이오니까?"

김민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준의 입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저 사람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말씀이오니까?"

"그러 하이."

허준은 더 이상 입이 열리지 않았다. 1년이라는 말과 함께 오늘 산성 안에서 본 환자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앞을 지나갔다.

등줄기엔 닭살 같은 전율이 돋아나고 있었다.

"당장 대답을 하지 아니해도 되지."

"...?"

"수삼일 이곳에 있으면서 사람들의 처지를 지켜보며 천천히 작심해도 늦지 않으리."

"..."

안광익의 음성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기왕사 잡을 사람으로 지목했다면 한두 가지 더 맡아야 할 소임을 마저 일러 줘야겠지."

허준이 뒤돌아보자 안광익이 언제 들어왔는지 문간 안에 들어서 있었다.

"한두 가지 더 맡아야 할 소임이라 하시면?"

"너도 의원의 의자는 배운 터요 귀가 뚫렸으니 대풍창에 사람의 생간이나 인골류가 특효란 말은 들었을 터이다."

'인골과 생간?'

순간 김민세가 지금까지의 그답지 않은 격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건 속설일 뿐 나도 아니 믿어!"

안광익이 그 김민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맞받았다.

"아니 믿는 건 그대의 주장일세, 나는 믿는 쪽인즉!"

"그 짓을 하여 과연 효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무덤 속에서 끌어낸 이미 죽은 송장의 간이나 뼈다귀로는 효험을 기대할 수도 없지!"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로도 병은 낫지 않아!"

이번에는 안광익의 격한 소리였고 김민세가 무시했다.

"그래서 병자를 살리고자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잡겠단 말인가."

"세상엔 살아서 남에게 해만 끼치는 자도 많은즉, 못할 짓도 없지,"

"매번 말하나 그건 그대가 아직도 못 버리는 부술을 위한 공부는 될지언정 다른 아무것도 아닐세. 암튼 그 얘긴 더는 거론 않기로 했어."

"않기로 한 건 자네의 심성이지 난 맞장구친 바 없어. 자네는 자네가 믿는 바대로 나무뿌리를 달여 먹이건 가물치를 잡아 먹이건 또 약초를 뜯어 먹이건 자네 나름으로 낫워보란밖에 ... 난 내가 믿는 바대로 끝내 실험해볼 것인즉."

안광익이 허준에게 다가왔다.

"그러니 네가 이곳에 있고자 한다면 약초만 캐고 갈무리하는 일 외 두 가지가 더 있는 셈이다. 하나는 인근 저수지를 돌아다니며 가물치를 씨가 마르도록 잡아들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이사이 괭이와 삽을 싸들고 내 뒤를 쫓아다니는 일이다."

숨을 삼킨 채 대답 없는 허준에게 안광익이 기탄없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나를 따라다니노라면 싫어도 부술 하나는 제법 통달할 경지에 이를 것인즉 ..."

"아무리 면천의 길을 위해서라 해도 굴총에 살인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순간 안광익의 손가락이 허준의 면상을 향해왔다.

"가소로운 소리! 의원 쳐놓고 병자의 생목숨 한둘 안 잡은 놈이 어디 있다더냐. 네가 하늘처럼 아는 유의태 또한 병을 잘못 짚어 애매한 생목숨 한둘쯤 안 잡았을 것 같으냐. 그런 실패를 딛지 않고서야 어찌 오늘날 저만한 의원이 됐을까 보냐. 내 말 어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개구리나 토끼가 아닌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진짜 사람의 뱃속을 갈라보고 싶지 아니하냐?"

"그만두게!"

김민세가 또 한 번 노기 어린 소리를 외쳤다. 안광익이 계속했다.

"더구나 너로선 면천과 의업 정진의 두 가지 이득이 있는 일이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인즉 잘 생각해보아."

이어 안광익은 김민세에겐 눈길도 안 주고 혼자 약재 창고를 걸어나갔다.

김민세의 입에서 시름을 담은 한숨이 새나오는 걸 허준은 보았다.

너와집 쪽 환자들의 나무관세음보살 소리가 줄기차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밥을 새우는 모양이었다.

 

5

설핏 잠을 깨니 동창이 훤히 밝아 있었다.

허준은 튕겨 일어났다. 어젯밤 곁에 나란히 누웠던 김민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부자리도 말끔히 개켜져 있었다.

허준은 어젯밤을 생각했다.

관세음보살을 연호하며 울부짖어대던 환자들의 처절한 소리는 자정 북소리를 신호로 점차 가라앉았으나 약재 창고에서 자기의 방으로 데리고 온 김민세는 허준과 함께 방에 누우면서 한마디 더 회유하는 말도 채근하는 말도 없었다.

아니 딱 한 마디 김민세가 말했었다.

눕자 곧 코를 골기 시작했던 김민세가 한잠 자고 난 그 새벽 첫닭이 울던 무렵까지 그제까지도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허준의 귀에 툭하고 뇌까리던 소리 .

"천수관음의 법력을 하루만 빌릴 길이 있어도 ..."

그건 불을 끈 방안에 던져진 자기 혼자의 독백 같은 것이었고 허준이 놀라 돌아보자 다시 김민세는 코를 골기 시작했었다.

허준은 그 김민세의 잠든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곰처럼 우람한 신체에 가슴에 모은 두 손은 여자의 손처럼 작고 섬세했다. 마치 그건 기형처럼 작은 손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자위에는 사바에서 겪은 고통을 얘기하듯 칠십 늙은이 같은 굵은 주름이 잡힌 채 눈물이 괴어 있었다.

그러나 허준은 더 이상 김민세의 얼굴을 오래 보고 있지 않았다.

잠결에서조차 눈물을 흘리며 부처의 전능함을 빌러 다니는 그의 비원이 감동스럽기는 했으나 자기로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1천 개 되는 팔과 손으로 사고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천수관음의 보도자항의 행적도 자기와 무슨 상관이랴 여기며 뒤늦게 깊은 잠에 떨어진 듯했다.

귀를 기울이자 인적은 없이 요란히 가축들이 울어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산성의 아침 생활이 시작되었나보다 여겼으나 내다볼 흥은 나지 않았다.

내다보고 다시 확인한다는 것이 끔찍했다. 이 산성의 기억은 어젯밤 자기 눈으로 본 그 환자들의 썩고 죽어가는 면면만으로 족했다.

자정에 이르도록 그 처절한 울부짖음도 쉬 잊혀질 광경 같지 않았다.

'날이 새면 지체없이 떠나리라!'

악몽에 시달리다 잠을 깨곤 바람에 휘감겨 덜겅거리는 문짝을 공포에 차서 바라보고 한 건, 그건 바람의 장난이 아니라 자신의 의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살인도 불사하리라는 안광익을 선두로 생간과 인골을 탐하는 환자들이 몰려와 문고리를 잡아흔드는 듯한 착각 때문이었다.

'문둥이들과 1... 그건 함정이야!'

김민세나 안광익이나 그리고 궁녀 정씨가 어떤 처방으로 저 환자들의 병균으로부터 자기 몸을 지키며 한데 얼려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저 환자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같이 살 자신은 없었다.

김민세도 안광익도 궁녀 정씨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되 같은 환자거나 그 가족인지도 모를 일!

허준은 그렇게 생각했고 앞으로 1년 동안 여기에 붙들려 있다가는 필시 자기 또한 환자가 될 것이요, 그러고 나서야 면천의 소원은커녕 자기 또한 눈썹이 떨어지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참담한 모습이 되어 마침내는 가족과 생이별한 후 평생을 김민세 곁에 옭아 매이리란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의 의술이 결코 범상한 경지의 것이 아님도 짐작한다.

그러나 1년 동안 그들과 기거를 함께 하며 설사 저들의 의술을 전수받고 면천의 방법을 가르침 받는다고 치더라도 그땐 이미 내의원 취재에 얼굴도 못 내밀, 콧등이 내려앉고 입술이 말려 올라가고 손발조차 오그라진 대풍창 환자란달 때 의술이야 어느 경지건 내의원에 얼굴이나 내밀 수 있으랴.

면천의 길이 뛰어난 의원이 되는 길이요 어의가 되는 길임은 들은 바다.

'그렇다면 유의태의 아들조차 낙방한 내의원 취재에 입격하기 위해서는.'

"그 길뿐!"

아내의 말처럼 어머니의 말처럼 순서가 바꿔 방법이라도 좋다. 권세에 빌붙은 놈이라 조롱소리도 달가이 들으리라.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 하루빨리 창녕 성대감을 뵈어 다시 소개장을 얻어 우선 내의원에 붙고부터 볼 일이다.

'그곳에는 내외의 온갖 진귀한 의서도 구비돼 있을 것인즉 그 연후에는 독력으로라도 어의가 되는 길로 매진해가리라. 가자, 날이 새면 지체없이!'

그 결심의 날이 밝아온 것이다.

허준이 상투를 매는 손에 절로 힘이 가는데 문득 방문 밖에 인기척이 났다.

허준이 방문을 열자 그 밖엔 뜻밖에도 궁녀 정씨가 나무대야에 더운 소세물을 담아 방문 밖에 놓아주고 있었다.

허준이 인사치레로 방문 밖에 나서자 그녀는 조용히 묻지도 않는 말을 꺼냈다.

"두 분께선 새벽같이 길을 떠났습니다. 모레 아침나절에 돌아온다 하셨습니다."

환자들의 목쉰 소리와는 다른 낭랑한 음색에 가까이 본 그녀의 눈빛은 한점 안개도 없이 맑았다.

그리고 물일을 하느라 한 겹 걷어 접은 소매 끝의 손이며 분세수도 안 한 얼굴이며가 백옥처럼 눈부신 피부를 지닌 여자였다.

허준이 오히려 시선을 흘리며 물었다.

"떠나다니 어디로오니까?"

"거창 어간에 몇 사람 유랑하는 환자가 있다는 기별이 있어 데리러 갔습니다."

"이미 여기 있는 사람만이 아니고 어디에 환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일부러 데리러도 가오니까?"

"여항간에서는 어차피 섞여 살지 못할 사람들올시다. 버려두면 결국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도둑질을 하다가 맞아죽거나 가도 가도 반겨주는 이가 없으매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말거나 ..."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일부러 불러모은단 말씀이온지?"

"두 분 욕심은 그러하오나 인력도 한도가 있으니 ...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시겠지요."

하며 그녀는 화제와는 달리 잠시 밝게 미소를 머금고 나서,

"소세하시지요. 환자들과 같이 쓰는 물이 아니니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마음을 놓아도 된다니 댁에선 이 병을 어찌 알기에?"

"잘 알지 못하오나 자주 들었고 뒷바라지하며 함께 사노라니 조금은 아옵니다."

"들었다면 누구에게오니까?"

"두 분에게서."

얘기가 길어지고 있었으나 드넓은 대궐에서 세련된 탓인지 조신한 태도 속에서도 그녀는 말씨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두 분께선 이 병을 어찌 여기고 있사오니까?"

"유전은 하지 아니하는 병이라는 것과 주거를 청결하게 하고 외로워도 서로 몸을 맞대어 체온을 탐하지 아니하면 병이 옮는 것을 웬만치 막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웬만치란 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방법은 아니오이다."

"..."

"오히려 내가 알기로 댁도 병자가 아니라면 하루빨리 이곳에서 떠나야 할 줄 압니다만."

대답 대신 그녀의 맑은 눈이 기대를 가지고 허준을 향해왔다.

"말씀하시지요."

"처사님도 의업에 매진하시는 분이라지요."

"그런 꿈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 제가 온 목적은 의업 때문이 아니올시다."

"자세한 말씀까지는 모르오나 혹 이 산성에 머무실 양이면 매사 제가 길 안내를 하도록 당부를 받았습니다."

"길 안내?"

"특별히 보여 드릴 것은 없으나 약을 조제하는 방과 목간통을 여럿 갖춘 욕실이 있습니다."

"목간통?"

"보시렵니까?"

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떠날 결심인 것이다. 약재실이며 환자가 드나드는 목간통 따위 구경할 이유가 없었다.

그 허준의 침묵에 궁녀 정씨가 새삼 대담한 시선을 향해왔다.

허준이 고개부터 저었다.

"왔던 길은 허행이라 치고 곧 돌아갈 사람올시다. 보고 싶거나 구경하고픈 것이 없습니다."

순간 궁녀 정씨의 눈속에 문득 안개 같은 것이 어리는가 했더니 곧 눈물이 되어 괴기 시작했다.

허준이 당혹하여 외면하며 말했다.

"저는 어느 분들처럼 흘홀단신도 아니요 처자식과 노모도 있는 몸 올시다. 내 한 몸 함부로 던질 처지가 아니올시다. 소셀랑은 내려가다가 하겠습니다."

세숫물조차 신세지기를 거부하며 허준이 옷을 가지러 다시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문득 목멘 그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함부로라니요?"

"...?"

"두 분 다 목숨 걸고 하는 일 올시다. 어찌 그것이 함부로 하는 일로 보이오며 또 ..."

"그만두시지요!"

"애초 처자식 없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어차피 나하고 상관없는 일 올시다."

"처자식은 어찌해도 이곳 사람보담은 편안히 사옵니다. 처사님도 정녕 의술을 지닌 분이시거든 저토록 애쓰는 저 두 분을 도와주소서!"

허준이 그녀의 눈물을 외면하고 방안의 옷가지를 집어내어 꿸 때였다.

"제발 그대로 가지 마소서. 이렇게 비옵니다."

궁녀 정씨가 돌연 허준의 앞을 두 손을 모으며 가로막았다.

"이런다고 될 일이 아니오이다."

허준이 날카롭게 외치며 그녀를 비켜가려 하자 이미 눈물을 거둔 그녀의 눈빛은 싸늘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서찰이 하나 들려 있었다. 머리 위 성가퀴 위에 언제 나타났는지 어젯밤 북을 치던 소년이 여전히 북을 끼고 두 사람의 모습을 무감동하게 굽어보고 있었다.

몸은 소년이되 소년의 눈이기엔 이 세상의 신산을 다 겪은 듯한 어두운 눈빛 ...

그리고 그와 닳은 환자들이 멀리 가까이서 대치하여 마주 선 두 사람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6

"그것이 대체 무슨 서찰이오이까?"

궁녀 정씨가 내미는 서찰을 무시하고 허준이 물었을 때 돌연 머리 위의 소년이 북을 둥! 한번 울렸다.

허준은 소년을 무시하고 다시 궁녀 정씨를 대했다.

"왔던 길을 후회하며 돌아가는 사람이오. 그런 내게 누가 그것을 내주더란 말이오?"

"삼적대사께서 혹여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전해주라 당부하신 서찰이니 받아들고 가소서."

"돌아갈지 모른다 하면서도 써준 서찰?"

"이 안에 면천의 길이 적혀 있다 하더이다."

"그건 1년을 이곳에 있고 나서야 알려준다 하였소. 한데 하루 사이에 돌아가는 내게 전해주라 하더란 말이오? 면천의 길을?"

"그러셨습니다."

허준이 궁녀 정씨의 손에서 빼앗듯이 서찰을 채들었다.

서찰은 봉합하지 않고 그냥 두세 번 거푸 접은 그냥 쪽지였다.

"이곳에 면천의 길이 적혀 있다고?"

"그랬사옵니다. 하되 그건 처사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방생의 자비를 자식에게 일러주던 처사님 어머님의 지극한 불심에 대한 보답이노라고, 그 한마디는 전하라 하셨습니다."

말끝에 궁녀 정씨는 저만치 여자 환자들이 눈을 쓸고 있는 약재 창고로 향해 갔다.

'어머님의 불심에 대한 보답?'

허준은 그 서찰을 펴들었다.

선인들의 어느 필체도 본받지 않은 김민세의 분방한 필적으로 여덟 자가 써 있을 뿐 육성에 대신하는 다른 한마디도 더 보태 있지 않았다. 그건 '의지일생 묘법존심'의 여덟 글자였다.

'의원으로 나아가는 길은 따로 묘법이 없고 온갖 비방은 마음속에 있다.'고 허준은 그 여덟 자를 풀었다. 그리고 그 "마음속"이란 환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가리키는 말임도 알았다. 그러나 ... 이것이 면천의 열쇠라고?

허준은 고소했다. 허망하고 분노가 치밀어왔다. 그가 바란 것은 좀 더 확실한 손에 쥐고 뜯어볼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증거였었다.

'하나 의원이라 하여 어째 저처럼만 살 수 있으랴. 세상이 어찌 저의 입맛처럼 아름다운 것이며 의술 또한 반드시 그런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리라.'

그러나 힘주어 신들메를 고쳐 매던 허준이 다시 정지했다.

"돌아가긴 돌아가되 김민세란 인물을 더 좀 알고 가리라."

구겨버릴 수도 없는 김민세의 여덟 글자를 쥔 채 허준은 약재 창고로 향해 갔다. 깨진 솥의 예의 화로의 재를 담아내고 있던 궁녀 정씨가 나타난 허준을 무시했다.

"한 가지 김민세란 인물에 대하여 알고픈 일이 있습니다."

"...?"

"내 듣기로 그 사람이 한때 내의원에 있었다 들었는데 그건 사실이온지?"

"... 떠나는 사람에게 새삼 그것이 무슨 상관이오니까."

"이 종이쪽하며 사람이 믿기지 아니해서 하는 소리오이다."

"믿기지 않는다구요? 그럼 처사님의 눈으로는 그분이 이곳에 있는 것이 돈이나 버는 일로 보이옵니까?"

"댁의 말도 알아들을 법하오나, 그러나 그도 내의원을 지향했더라떤 애당초 높아야 신분이 중인에 그칠 터인데 그 어렵사리 들어갔을 내의원을 뛰쳐나온 사단이 무엇인지 혹 그 사연을 아시는지?"

"그분은 뛰쳐나온 적 없습니다."

"자기 발로 도로 나왔단 말씀이온지? 왜오니까?"

"궁금한 일이면 직접 물어보시지요."

"가사에 가리고는 있으나, 또 비록 아직은 얼굴에 나타나지는 아니했어도 그도 대풍창 환자가 아니온지?"

"그도 아니면 여기 있는 환자 중에 부모나 누가 있어 한이라도 맺힌 인물이던가!"

침묵 끝에 궁녀 정씨가 허준의 의문에 도전이라도 하듯 짧게 대답했다.

"아들이 있지요."

"그랬군, 역시 ..."

허준이 이제야 모든 의문의 실마리를 거머잡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련 없이 돌아설 때였다. 궁녀 정씨가 항의하듯 재빨리 부연했다.

"지금은 아들이되 피를 부어준 아들은 아니올시다. 함부로 넘겨짚지 마소서. 오히려 원수의 아들 올시다."

"원수의 아들."

"저기 온종일 밤이나 낮이나 북을 두드리고 다니는 저 아이올시다."

"원수의 아들이라고."

허준이 다시 궁녀 정씨를 보자 웬일인가 그녀의 눈엔 금시 눈물이 가득 괴고 있었다.

"...?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으리까?"

"만일 그분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신 후라면 처사님께선 저 불쌍한 우리 형부의 일을 도와준다 다짐하시오니까."

"삼적대사라는 저분이 댁의 형부가 된단 말이오?"

"다짐하시오니까."

허준은 대답 않고 약재 창고로 들어가 어젯밤의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그녀는 본명이 김민세인 삼적대사의 과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가다가 격정에 목이 메이곤 했으나 그러나 더 많이 차분하게 그녀는 얘기를 이어갔다.

내의원-그 내의원에서 김민세는 선대 명종임금 때부터 금상왕의 양대에 걸쳐 부동의 권위로 어의의 자리를 지키는 양예수의 대를 이을 어의의 재목으로 가장 촉망받는 사람 중의 선두주자였다.

22살에 내의원에 첫등으로 등제, 그 연소한 나이를 보고 시관 양예수는 재삼재사 김민세의 재능을 손수 실험해본 뒤 그를 편애에 가깝도록 감쌌다. 그리고 자기 뒤를 이을 사람은 김민세노라 공공연히 자랑했다.

그런 시기에 유의태라는 또 한 사람의 의술의 준재가 나타났으나 오히려 양예수는 김민세의 경쟁이 될 유의태를 일부러 떨구어 유명한 구침지희의 사건조차 치른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김민세는 그 나이에 그 출세에 대면 교만을 떨어 흉이 아닌데도 남들이 다투어 넘보는 세자궁이나 빈궁전의 시의를 마다하고 왕실의 시탕에 약재를 조제하는 약국의 건재약재 창고나 탕약방에 드나들며 온갖 약재의 조제와 증험을 비교하는 데 더욱 열을 올리며 오로지 재미는 그것뿐인 듯했다.

그 외가닥 성미로 인해 그는 삼십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양예수의 강권에 가까운 중매로 궁녀 정씨의 언니에게 장가를 들었다. 부부의 나이 차가 십여 년이나 벌어지는 부부였으나 현직 어의의 중매요 장래 어의의 물망에 오르내리는 신랑감이었으므로 처가도 영광으로 알아 그녀의 언니는 김민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부부의 금술이 남달리 도타웠음에도 정씨는 혼인 3년 후에야 아들을 낳았을 뿐 더는 생산이 없었다.

그러함에서 길상이라 이름 지은 외아들은 부부의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비극은 그 길상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일어났다.

친정 부모의 회갑을 맞아 큰방상궁(상궁 중 가장 높은 직위)의 처소에 나인으로 있던 그녀가 허락을 받아 친정인 관악산 아래 탑골에 이르러 행복한 언니와 조카 길상이의 귀여운 재롱을 본 것도 잠깐, 잔치가 끝나고 함께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장맛비에 불어난 한강에 물이 줄어 뱃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노들나루의 주막에 하룻밤을 묵은 새벽이었다.

길상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자매가 함께 방을 들었고 자매를 전송해온 오라버니가 윗방을 정하였기에 아침에 잠을 깬 자매는 길상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도 그 장난꾸러기가 언제 오라버니의 방에 건너가 재롱을 떠나보다 여기어 무심했었다.

그러나 한나절이나 되어 겨우 주워들은 건 더욱 불길한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어제저녁 마을 앞을 문둥이 떼가 지나가는 걸 보고 마을 젊은이들이 몽둥이질하여 내쫓았다는 ...

설마 하면서도 그 소문은 더더욱 식구들의 가슴을 방망이질 치게 했고 오라버니는 아직도 배를 띄울 수 없다는 사공에게 큰돈을 약속하고 혼자 강을 건너가 김민세에게 아이의 실종을 알렸다.

윗전의 시탕 대령을 위해 내의원에 나가느라 처자와 동행하지 못했던 김민세가 직처를 달려나와 다시 강을 건너 주막에 도착한 것은 여름날 긴 해도 이미 서산에 기운 황혼이었다. 울다 지쳐 눈도 못 뜨는 아내를 진정시킨 김민세도 이 감쪽같은 아이의 실종을 유랑하는 문둥이패의 짓으로밖에 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생각이 이에 미친 김민세는 저도 몰래 만나는 사람들에게 문둥이패를 보지 못했느냐 물어댔고 그중 한 사람의 대답이 오늘 이른 아침에 문둥이 몇 사람이 과천 쪽으로 가는 걸 봤다는 한마디였다.

과천은 일곱 살짜리가 길을 잃고 헤맬 수 있는 거리와 반경 밖이었다.

그러나 김민세는 그가 의원인지라 문둥병엔 사람의 간과 인골이 특효라는 민간에 떠도는 그 속설을 알고 있었고 더구나 유괴의 당사자가 자기의 자식임에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몇 줄기의 오솔길을 헛짚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미친 듯이 수소문해 달리기 이틀 밤 사홀 낮 그러나 가는 도중에도 그렇게 곤두박질해 도착한 일산리에는 지난날 병자들이 살던 움막은 남아 있었으나 오래 전부터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 폐허였다.

앞장섰던 지관도 마침내 맥이 풀려 주저앉았고 김민세에게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혹시나 그동안 아이를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요 우리가 너무 성급히 넘겨짚은 게 아니냐며 달래는 그 맡이 끔찍한 상상에 전율하던 김민세에게 위안이 되긴 했으나 일단 그쪽으로 의혹을 품은 김민세의 가슴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애초 구름 잡는 얘기였다며 더 이상은 흥이 나지 않는 지관을 먼저 떠나보낸 김민세는 지관이 짚어봤던 마지막 산길로 혼자 접어든 것이다.

찾고 있으나 그렇게 찾아선 아니 될 아들이었라. 그 불행한 상상이 백에 하나 맞아떨어져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민세의 운명은 그 백에 하나 맞아서는 아니 될 운명의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7

그 운명의 길 -

그 산길은 좌우의 골이 깊어 거의 한 낮이 되는 시각인데도 햇살이 들지 못한 채 장마의 물기가 배어 습한 공기만 떠돌 뿐 인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김민세가 죽음과 같은 정적에 싸인 산길을 더듬어 이윽고 산날망에 을랐을 때였다. 뜻밖에 그곳에는 비에 풍쳐 찌그러져가는 서낭당이 돌배나무와 돌무더기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 앞에 나어린 며느리를 데린 칠십 노파가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그 가파른 산길에서 만난 사람의 모습을 보자 반가운 헛기침이라도 했어야 할 김민세는 오가며 지나치는 사람마다 수백 번 물은 그 질문을 또 하고 만 것이다.

옷은 이러이러한 옷을 입고 나이는 얼마이고 모습은 이러이러한 아인데 흑 누가 데리고 가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고.

순간 대답도 기대하지 않았던 두 고부가, 문득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다물었다.

더럭 의심을 먹은 김민세가 다그쳐 묻자 자기들은 이편 골짜기에서 아들과 함께 숯을 구워 생업을 하는데 바로 어제 새벽 아들이 참나무 등걸을 굴리러 가던 중에 저쪽 산비탈에서 웬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자세히 보니 웬 노부부가 아이를 업은 것 같기도 하고 자루를 멘 모습 같기도 한데 길도 없는 그 산길을 헤쳐가더라는 소리를 듣고선 자기들도 무서워서 손주아이를 종일 방안에 가두고 아들이 지키고 있노라고 했다.

짐승 같은 신음을 틀어전 김민세는 이들이 손짓해주는 산마루를 넘다가 과연 이상한 발자국 둘을 찾았다.

상대가 길 아닌 길을 가고 있었기에 정체 모를 두 사람의 발자국은 장마에 젖은 산비탈에서 용이하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발자국은 눈 아래 마을이 보이는 지점에서는 방향을 바꾸어 다시 산속으로 숨어들어 사라지고 그 방황 속에서 김민세가 마지막 찾아낸 두 사람의 발자국은 주위에 마을이 보이지 않는 강변으로 잘려 들어간 가파른 모래 언덕이었다.

주위는 무성한 갈대와 무심한 물새 떼들이 천국을 이루어 날고 있었다.

그 낮이 가고 황혼 땅거미가 너울거리는 시각. 갈대 숲속에서 발자국을 잃은 김민세의 미쳐 헤매는 눈앞에 돌연 그 움막집이 나타났던 것이었다.

돌아보니 인적도 없이 아득한 정적과 어둠에 싸여 있는 이상한 강변은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런 시각 차마 헤매고 다닐 생각이 안 나도록 음산했다.

그런데-다가간 그 움막의 오지 굴뚝에 소리 없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온몸이 떨리도록 불안했다.

김민세는 다가갔다. 마당에는 괴괴한 정적뿐, 방안에서도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오직 굴뚝의 연기만이 유일한 생물처럼 하늘로 머리를 풀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엌 쪽만 쌓은 그 묵은 돌각담 아래에서 김민세는 보지 않았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그건 아들이 외가에 간다 하여 김민세가 대궐에 신발을 공급하는 갖바치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지어다가 제 손으로 신겨줬던 아들의 신발 한 짝이었다. 그리고 그 곁엔 아들을 돼지새끼처럼 담아 메고 왔을 커다란 마대가 던져져 있었다.

김민세는 눈을 씻고 씻으며 그 신을 보았다. 틀림없이 아들의 신이었다. 무늬가 낯익었고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발의 크기를 뼘으로 재어다가 주문해준 신인데 왜 모르랴.

눈이 뒤집힌 김민세가 아들의 이름을 절규하며 마루에 뛰어오르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 방안에서 눈으로 발견하기보다 먼저 코끝에 맡아진 건 속이 뒤집힐 듯이 진한 마늘냄새였고 방도 부엌도 한데 이어진 그 거적바닥에는 상상했던 중년의 두 환자가 이팔이 넘었을 여자아이 둘과 국솥을 싸고 둘러앉아 있었다.

아들은 방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 어디 갔나!"

김민세가 아들의 신발짝을 내보이며 외쳤다. 순간 한 눈이 빠진 환자의 정한 외눈이 김민세를 향해왔다. 뒤이어 들고 있던 여자 환자의 국사발이 무릎에 떨어졌고 딸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목쉰 소리였다.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던 김민세가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방을 뛰쳐나왔다. 이어 그 김민세가 돌각담 앞 잿간 위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 손에 들고 일어난 건 아들의 신을 집어들 때 눈에 비친 쇠스랑이었다.

김민세가 다시 방으로 뛰어들었을 때 문둥이 부부는 서로 한데 쓸어안고 그 김민세를 무저항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김민세는 그 애비의 성한 눈 속에 번쩍이는 눈물을 본 듯했다. 그러나 이미 김민세의 쇠스랑은 천정과 벽의 거적을 찢으며 내려꽂히고 있었다. 그 부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얼굴의 살갖이 엉겨붙은 두 딸도 표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건 괴기한 광경이었다.

피를 뒤집어쓰며 죽어가는 부부 어느 쪽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무저항으로 죽어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두 딸을 끌어안으려 했다. 딸들 또한 그 애비와 어미를 잡으려 무어라 외치고 있었으나 김민세는 그 무엇도 듣지 못했다. 문둥이의 피도 붉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거푸거푸 쇠스랑을 찍어대며 오히려 울음이 터지고 울부짖는 건 김민세 쪽이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미친 듯한 노호와 몸부림 속에서 김민세 또한 피바다 속에 고꾸라졌고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국솥을 받쳤던 질화로가 쇠스랑에 맞아 박살이 났고 그 불씨들이 거적과 문짝 대신 달아놓은 갈대발에 옮겨붙어 온 방안이 매캐한 연기에 싸여 있는 속에서 김민세의 멍한 눈에 천정에까지 퍼가 범벅이 된 지옥의 광경이 들어왔다. 갑자기 연기가 불길로 바뀌었다.

그 불똥들이 머리 위에 수없이 떨어지고 방바닥이 소리내어 타오를 때야 김민세는 다시 통곡을 멈추었다.

갈대밭 위에 바람이 불고 있었고 그 너머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등 뒤에선 움막이 온통 불길에 싸여 천정이 내려앉고 오지 굴뚝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불타는 소리를 등뒤로 들으며 아들의 신발 한짝을 움켜쥔 김민세는 허우적거리며 강변으로 걸어갔다.

강변 무성한 갈대밭에 흐르던 안개가 사라지고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빗소리 사이로 인기척 하나가 마주 오고 있었다.

그러나 김민세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것이다. 한 사람도 아닌 네 사람을 ...

김민세는 이 길로 관아에 나아가 자신을 고발할 결심이었다. 새삼 누구의 눈에 띈들 상관이 없었다.

빗발 속을 헤치고 나타난 건 도롱이를 쓴 소년이었다. 순간 김민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서너 칸 저쪽 앞 우뚝 마주 선 도롱이를 쓴 소년은 다름 아닌 길상이 자기 아들이었다.

그 옷, 아버지도 외가집에 함께 가자고 조르던 파란 물감을 들인 낯익은 그 옷.

김민세는 전율했다.

김민세의 온몸이 떨렸다.

"길상앗!"

외치며 뛰어들자 돌연 그 길상이가 잽싸게 물러서며 다시 거리를 만들었다.

"...!"

김민세는 눈을 부릅떴다. 흘러내리는 빗물을 쓸었다.

착각이었다. 역시 길상이가 아니었다. 길상이의 옷은 입었으되 그건 또 한 사람 7, 8세의 어린 문둥이였다. 그 어린 문둥이는 피를 뒤집어쓴 무서운 김민세의 형상하며 불타고 있는 자기 집을 보고 사태를 안 듯했다. 뒷걸음쳐 도망칠 듯하던 소년이 돌연 김민세를 향해 울음 맺힌 목소리로 고함쳤다.

"난 사람을 해치지 아니했소. 난 내 병을 고치고자 뱀하고 가물치만 잡아먹고 다니오!"

이어 내미는 그 손에 들린 지겟막대기에는 올가미에 목을 죄인 뱀 한 마리가 칭칭 감겨 아직 단말마의 몸짓을 하는 중이었고 다른 한 손에는 강변 칡으로 아가미가 케인 가물치가 두어 마리 꼬리를 퍼덕거렸다. 김민세가 다시 다가서자 소년이 또 뒷걸음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옷은 아버지가 던져주기로 입었을 뿐입니다."

말끝에 소년이 옷을 벗어 김민세에게 내던졌다. 아직 병반이 얼굴에 채 안 퍼진 소년의 가녀린 목이 김민세의 눈에 더없이 슬퍼 보였다. 김민세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어린 문둥이를 쓸어안았다. 그리고 김민세는 통곡했다. 굵어진 빗발이 소리 내어 두 사람의 모습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기어이 궁녀 정씨의 목이 잠기며 얘기가 삼켜졌다.

허준이 재촉했다.

"그래서요, 마저 들려주시지요."

냉정을 회복한 궁녀 정씨가 다시 김민세의 얘기를 계속했다.

쏟아지는 빗발 속에 강물이 온통 끓어오르듯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문둥이 소년을 한 팔에 끼고 김민세는 강물을 타고 헤엄쳤다. 김민세의 목에 두 손을 감은 채 자기 또한 죽을 곳으로 끌려가는 게 아닌가 어린 문둥이는 소리내 울어댔다. 김민세가 외치고 있는 소리는 "나를 용서해다오. 내가 너를 기어이 낫게 해주마." 였다.

그 소리를 수없이 외치며 이윽고 강을 건넨 김민세는 그 길로 밤을 도와 서울로 향하며 과천 어간 인적 뜸한 물레방앗간에 소년을 기다리게 하고 서울로 달렸다. "내가 기어이 네 병을 고쳐줄 것이니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수없이 다짐하고 다짐한 채.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원으로서 비록 천형의 환자일지언정 네 사람씩이나 살인을 했다는 사람으로서의 양심 따위가 쓰려서 소년과 약속을 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만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자기 눈앞에 나타난 저 대풍창이라는 참혹한 병에 연민을 느낀 한 의원으로서 새로 눈을 뜬 것이었다.

세상에 하늘이 있다면 저럴 수 없다 싶었다.

"네가 저 병을 못 고치면 내가 저 병을 고치리라!"

서울로 오는 동안 김민세는 구름 사이로 파랗게 드러난 그 조각난 하늘을 너라고 타매하며 수없이 주먹을 내둘렀다.

 

8

나흘 만에 나타난 남편이 내놓은 아들 길상이의 외짝 신발을 본 아내는 김민세가 보고 행한 얘기를 듣다가 컥컥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다가 기어이 혼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밤사이 미치고 만 아내는 무서운 힘으로 말리는 사람을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갔고 그 아내의 시체는 밝은 날 마을의 우물 속에서 김민세가 들고 온 아들의 외짝 신발과 함께 발견되었다.

아내를 장사지낸 다음 날 김민세는 직처인 내의원에 들어가 어의 양예수를 만나 자초지종 얘기할 만큼 냉정해져 있었다.

"그래 그 아일 그곳에 감춰뒀다면 그놈을 어쩔 셈인가?"

양예수의 말에 김민세가 대답했다.

"그 아이는 제 양자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 문둥이를?"

"그러합니다."

"내 자식을 잡아먹은 문둥이의 자식을 양자로 삼아? 자네 미쳤나!"

"소인의 마음은 이미 정했사옵고 내일 내의원을 떠나겠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뵙지 못하겠지요."

"이 사람! 정신을 차리게."

"의원이 되어 흉기를 들고 네 사람의 생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건 관아에서도 변명할 수 있어! 결코 자네의 죄가 아니야. 그 죌랑은 내가 벗겨주리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게."

"아무도 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가 다시는 그 사람들을 되살려놓지 못하듯이."

"그들 따위에 괘념치 말라지 않는가. 그들은 인간도 아닌즉슨!"

"그들의 피도 우리 피처럼 붉었습니다. 소인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문둥이라는 병자였을 뿐올시다."

이레 동안이나 잠을 못 이룬 김민세의 핏발 선 눈이 양예수에게 꽂혔고 그 무엄한 눈빛을 탓하지 않고 양예수가 다시 달랬다.

"자넨 내 뒤를 이을 사람일세. 그렇게 촉망하는 건 나 혼자만의 안목이 아닌 걸 모르는가."

"..."

"알거든 그 살변의 수습일랑 내게 맡기게. 장차 왕실의 시탕을 맡을 막중한 재목인 사람이 항차 그까짓 문둥이 몇쯤 해를 입혔기로 무엇이란 말인가. 더구나 그들은 자네의 자식을 해친 오히려 흉악범이거늘."

김민세는 더 듣지 않았다. 이미 몸을 일으켰고 카악 노여운 눈을 치뜨는 양예수에게 말했다.

"오늘날까지 공사 간에 여러 지침을 주신 은혜 잊지 않으오리다. 또 제가 살변의 정범이라 의당 스스로 관아에 자수를 해야 하나 그리 되면 저 어린것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을 것이옵고 그렇다면 저 아이 역시 종당에는 제 애비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하와 소인은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마침내 말리지 못할 결심임을 알자 양예수가 마지막으로 타일렀다.

"성한 사람이 어찌 문둥이와 함께 살 수 있나. 마음이 가라앉아서 다시 내 말이 기억나거든 다시 돌아오게. 자네는 다시 이 곳에 와야 해. 가는 곳은 지금 미리 내게 알려놓고."

"정처는 없사옵고 분명한 건 소인 또한 영영 세상 빛을 보지 아니할 결심올시다."

그 말을 끝으로 김민세는 대궐을 떠났다. 김민세가 양자 길상이를 끌고 두류산에 이르러 때에 세상을 유력하던 휴정으로부터 낙식(삭발)을 주재받아 세상으로부터의 번뇌를 끊은 후 부자는 중이 되었다.

그 길로 김민세는 다시 불탄 집터로 내려와 잿더미 속에서 자기가 죽인 자들의 뼈와 아들의 뼈를 한데 추리어 뒷산에 무덤을 써 하룻밤 그 무덤 앞에서 회오의 눈물을 뿌린 후 산음의 유의태를 찾아 그의 도움을 얻어 이곳 안점산 돌성 안에 너와집을 지어 정착했고 불경에 정진하는 일방 또 일변 세상을 유랑하는 이들을 불러모아 살아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장차의 어의로 촉망받던 그의 의술에도 불구 그 긴 세월 그가 대풍창에 관하여 알아낸 것은 이 병에는 양성과 음성이 있으며 성인이 되기 전 어린 나이에 쉬 병에 걸린다는 것과 주거를 청결하게 않고는 더욱 번진다는 것, 그밖에 시고 맵고 짠 음식이 모두 병을 도지게 하는 무거운 병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아직 상처가 깨끗이 치유되거나 사지와 얼굴을 본모습으로 낫우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빌고 속방에 의지해 살아오는 절망의 나날이었던 것이다.

"그 길상이란 아이가 성가퀴 위를 오가며 밤낮없이 법고를 두들겨대는 그 아이오니까?"

하고 허준이 긴 얘기를 마친 궁녀 정씨를 건너보며 새삼 물었다.

"그러합니다. 그 아이가 이곳에 와서 근 7년을 형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길상이올시다."

"한데."

하고 허준이 다시 말했다.

"난 어젯밤에도 아까도 그 길상이란 아이의 눈을 보았소. 내가 관상까지는 볼 줄 모르나 그 아이의 눈이 결코 소년의 눈이라기엔 심상치 않는 눈이었고 더구나 양부의 자애에 훈도된 아이의 눈 같지가 않더이다. 그 눈은 오히려 지금은 비록 김민세 그 사람을 자기의 양부로서 받들지 모르나 그 양부가 자기의 살부지수인 걸 쉬 잊지 않는 그런 눈이었소."

대답 대신 궁녀 정씨가 입술을 물었다.

"...?"

"그 점을 제 지아비되는 이도 대사님께 일깨워줬습니다."

"지아비라면 안광익 그 사람이?"

"그분은 관상에 능한 분 올시다. 그래서 길상이의 눈엔 항시 살기가 떠 있으니 그 아일 떠나보내라고 권했지요. 만일 무슨 일 저지르면 자네의 목숨 하나가 아까운 게 아니라 그대를 의지해 이 산성에 모인 수십 명 병자들을 위해서라고. 또 그대는 앞으로 모여들 병자들을 위해 오래 살아야 할 사람이라며 ..."

"그랬더니."

"그랬더니 얘기가 그것도 사람의 길이지, 그 말만 합니다."

"그것도 사람의 길?"

"제 부모를 죽인 자를 눈앞에 보면서 원수를 갚지 아니하면 어찌 그것이 사람의 자식인가 하고."

"그럼 장차 저 아이가 자기를 해칠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키우고 있단 말씀이오?"

"앙갚음을 당해도 한마디 변명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하셨지요. 남은 병자들을 위해 한 가지 구원은 길상이의 불심이 깊어져서 사바의 악연일랑 가슴속에서 지워지길 바랄 뿐이다, 그런 말씀도 ..."

순간 그 끝에 누가 시키기나 한 듯이 또 길상의 법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다보니 건너 성가퀴에 등을 기대 버티고 서서 언제부터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허준은 그 어린 문둥이를 마주 보았다.

북채도 없이 손가락이 오므라든 그 두루뭉수리 손으로 북을 두들겨대는 길상이의 썩어가는 손이 허준의 눈앞으로 가득히 다가오는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착각-고름이 썩어 흐르고 상처 진물이 풍기는 악취 또한 마치 생물의 냄새처럼 허준의 코에 자꾸만 맡아지고 있었다.

"두둥 두둥둥둥 따닥 둥둥두두둥"

묘한 북소리였다.

참고 있는 토기도 북소리를 따라 목구멍을 자꾸만 치닫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 달래도 그때 뿐올시다. 언제 어느 절에서 훔쳐 온 건지 작년 가을 며칠 성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며 저 북을 메고 왔습니다. 그리곤 밤도 낮도 시도 때도 없이 저걸 울려댑니다."

"영문을 물어보았사오니까?"

"대답도 않습니다 ... 어찌 보면 어릴 적 그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번민에 몸부림치는 모습 같기도 하고 죽어서 극락에도 지옥에도 들지 못하고 원혼이 되어 떠도는 부모형제의 넋을 불러 위로하는 몸짓 같기도 하고."

"그런 아름다운 맘씨를 가진 아이 같진 않소."

궁녀 정씨가 한숨을 들이쉬고 또 뱉었다.

'언젠가 자기를 죽일 것을 각오한 채 원수의 자식을 키우고 있는 사내-김민세.'

허준은 그 김민세를 통해 또 한 번 엄청나게 넓은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성문을 지나니 문둥이들이 닦아놓은 길이 산허리까지 깨끗이 비질자국 까지 난 채 이어져 있었고 밀림으로 접어든 오솔길도 올라올 때의 고생을 비웃기나 하듯 산아래로 편안히 뻗어 있었다.

허준에게 궁녀 정씨가 재삼 이 산속 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김민세와 안광익을 도와 남아주기를 간청했으나 허준은 "좀 더 생각해보리다." 그 말을 남기고 안점산을 뒤로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리다." 하고 칼로 끊듯 궁녀 정씨를 뿌리치기 위한 대답은 남겨놨으나 허준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자기를 알고 있었다.

김민세의 반생이 비장하여 자칫 솟구치는 협기와 함께 앞으로 1년 그들을 도우며 안점산에서 '의지힐생 묘법존심'이라는 여덟 자로 집약한 김민세의 의술과 안광익의 부술을 낱낱이 배워보리란 미련이 없는 바 아니나 1년은커녕 단 한 달도 저 참혹한 대풍창 환자들의 소굴에서 버틸 자신은 없었다.

'그 길뿐이야.'

허준은 안점산에서 십 리나 걸어온 취암산 비탈을 오르며 자신에게 말했다.

'면천도 좋지만 문둥이가 되어 처자식에게 돌아갈 순 없어. 그건 일가가 함께 문둥이가 되자는 말일 것인즉. 이 길로 창녕 성대감에게 가서 소개장을 다시 받으리라.'

허준은 취암산을 넘자 집 쪽이 아닌 합천 쪽으로 길을 잡았다. 창녕 성대감 집을 목적으로 한 이상 그 합천은 창녕으로 향하는 지름길일 터였다.

그러나 머리를 내저으며 자꾸만 떨쳐버리려는데도 귓가엔 길상이가 울려대던 법고 소리가 멀어가는 안점산의 거리와는 관계없이 자꾸만 들려왔다.

"결코 그곳에는 아니가!"

허준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다짐했다.

 

 

8. 한양으로

 

1

아침밥도 점심 요기도 거르고 있었으나 창녕 성대감 댁으로 달리는 허준의 걸음은 도망치듯이 바빴다.

의지일생 묘법존심-그 여덟 글자 속에 면천의 길이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기는 했으나 자기는 도저히 김민세의 행동을 본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아내도 자식도 자기와 헤어져 살 것을 원치 않을 것이요 허준 또한 가족과 헤어져 살 순 없었다. 더구나 안형이 부식하고 사지가 오그라든 환자들의 그 끔찍한 모습이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들의 모습 위에 잠시나마 겹치는 상상만으로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 뇌리 속으로 환자들이 삼적사 좁은 법당 안에 모여앉아 외쳐대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소리가 계속 들려왔으나 허준은 김민세와 안광익이 있는 안점산 쪽을 애써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자기의 발자국을 따라 그 문둥이떼가 산모퉁이를 돌아 떼를 지어 쫓아오는 모습이 보이는 듯해서였다.

'성대감의 소개장을 다시 받아 독력으로 내의원 취재에 응하는 길뿐!'

밤을 도와 창녕으로 달리는 허준은 이젠 오로지 그것만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 허준의 그 마지막 꿈은 창녕 못미처 물슬천나루에 이르러 깨어지고 말았다.

백리 이상 쉬임없이 달려온 그가 마침내 체력이 다한 채 나루터에 다다랐을 땐 밤 오경은 실히 넘은 새벽이었고 이미 창녕 경내에 이르렀으니 의관을 정제하리란 생각으로 사공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사공집엔 창녕 장터를 찾아드는 장돌뱅이 서넛과 중갓을 쓴 몇 사람 과객들이 한방 가득히 자리에 눕고 술도 마시는 모습으로 왁자했고 사공의 아내가 연신 어두운 강 건너에 욕을 퍼부으며 일변 손들의 술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영문을 물으니 건너 갈대숲에 낚싯줄을 건지러 건너간 사공이 배도 건너보내지 않은 채 움막 어디에 술취해 자빠져 있어 아침녘에야 건너올 낌새라는 것이었다.

이에 허준도 손들의 술 추렴하는 방에 들어 옷을 갈아입다 보니 돌아앉아 술을 마시던 사나이가 만석이라 불리는 성대감집 늙은 하인이었다.

허준이 아는 체를 하자 만석이가 벌떡 일어나 "허의원님, 허의원님." 하고 반색을 했다.

그러나 방안의 시선이 모두 돌아보는 속에서 만석이가 제 일인 양 자랑스레 꺼낸 사정은 허준의 기대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소식이었다. 성대감이 저지난달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거를 청산하고 다시 예조판서로 출사했는데 지난달 초에 동지사의 직책으로 출국했으며 정경부인 또한 한양 북촌의 가회방 서울댁에 가 계시다는 것과 지금 자기는 막내따님이 출가한 진주 사돈댁에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노라고 묻지도 않는 말까지 보태었다.

"그럼 대감마님의 귀국 예정이 언제쯤이시오?"

"사행차 가시면 빨라도 두세 달 또 더러는 대국의 구경도 하시면서 한 반년 지나서 돌아오시기도 합지요. 옛날 부사로 가실 제 저도 의주까지 수행한 적이 있어서 압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오실 날짜는 알 수 없단 말이외까."

"그거야 소인 같은 것들이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한데 허의원님께선 이 창녕엔 어인 일이십니까?"

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 마님의 차도를 전해들은 모모한 댁에서 허의원님을 소개받고자 여러 차례 산청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한양 어디로 옮기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허준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가 한양으로 옮겨갔다고 소문낸 것은 임오근과 꺽새 들의 모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자들을 원망할 흥미도 없다. 분명한 건 의지하려던 희망의 끈이 무참하게 끊겼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 정경부인 마님께선 나날이 평안하오시오?"

허준이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자기의 초라한 심정을 감추고자 묻자 그 물음에 되돌아온 대답도 의외였다.

"마님께선 그 뒤 병이 재발하셨었지요."

"재발이라니 언제쯤?"

"허의원이 돌아가시고 한 달쯤인가요. 병세가 워낙 호전하여 자칫 마음을 놓으신 것이 원인이고 또 중풍은 물로 씻은 듯이 완치는 어렵노라고 그뒤 불려온 유의태 그 양반이 말씀하더이다."

"유의태 그 사람이 다시 불려왔었단 말이오?"

"허의윈님을 부르러 갔다가 이미 산청 땅에 안 계신다 하매 대신 그분 부자가 함께 오셨지요."

"...!"

"결국 다시 유의태 그분이 병을 바로잡긴 합니다."

다시 웃어 보이려던 허준은 어색한 웃음을 짓고 만석이의 술잔을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거푸 권하는 술잔을 사양도 없이 목 안에 쏟아부었다. 천정과 벽은 얼음장 같은데 방바닥은 쩔쩔 끓는 방이었다. 만석이가 또 한 병 술을 청하는 소리를 들으며 허준은 술기운과 엄습하는 피로를 못 이기고 그렇게 방안에 쓰러져 깊은 잠속으로 떨어져 갔다.

... 한가로운 물새 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눈을 뜬 허준의 귀에 문밖 눈보라 소리가 한층 음산했다. 방안엔 새벽의 선객들도 만석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잠결에 주모가 돌아온 늙은 사공과 욕을 주고받으며 다투던 소리를 들었고 주모인지 사공인지 누군가 방에 드나들며 방문이 여닫길 적마다 얼굴에 섬뜩섬뜩 느껴지던 강변 찬바람을 기억했다.

그러나 허준은 누워 있었다. 술은 깼으나 온몸이 뭇매나 맞은 듯이 욱신거린 채 이대로 걸어나갈 기력이 없을 것 같았다. 백리길 뜀박질해 달려온 발바닥이 퉁퉁 부은 채 삽자리를 눌을 듯이 뜨거운 방바닥에서 팥죽처럼 물러 있었으나 그 살가죽은 땡땡 얼어서 남의 살처럼 감각이 없었다. 동상이었다.

그러나 허준의 의식은 그 동상에 가 있지 않았다. 이날 그의 악몽의 주인공은 유의태였다. 자기가 미처 손보지 못한 병의 뒤처리를 유의태가 끝낸 일이며 그 유의태가 아들 도지를 대동한 건 허준 자기가 미처 소홀히 한 그런 병의 뒤처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눈물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외로웠다. 머리맡 문풍지를 울리며 자꾸만 떠는 강변 설한풍만큼이나 허준의 가슴속을 불어치는 건 때아닌 외로움이었다.

고명한 아비로부터 일일이 손잡아 의술의 진수를 가르침 받는 도지의 처지가 온몸이 떨리도록 부러 웠다.

쓰러진 후 허준의 혼백이 또 한 차례 배회한 건 안점산 문둥이촌이었다. 아니 허준이 달려간 것이다. 잠결에 떠들썩하던 선객들의 소리가 궁녀 정씨의 소리로 바뀌었고 문둥이들의 떠드는 소리, 길상이의 북소리, 김민세와 안광익의 웃음소리와 고함소리로 바뀌어 두번 세번 가위가 눌리듯 허준은 버둥거리고 헛소리를 쳤었다.

문둥이 굴로 뛰어드는 길 이왼 세상천지 누구도 어디에도 자기의 내미는 손을 잡아줄 손이 없다는 것을 되씹으며 그 의지가지없는 자기라는 사내를 하늘처럼 믿고 사는 처자식과 어머니를 떠올렸다.

'불쌍한 사람들.'

겨우 자기 같은 자를 택하여 아내가 된 사람, 겨우 나 같은 자에게 자식으로 태어난 아이들, 겨우 나 같은 자를 세상에 둘도 없는 보람으로 여기고 사는 어머니 ... 뒷방문을 열어 어지러이 나부끼는 강변 눈보라를 하염없이 내다보며 허준은 이윽고 주모를 불러 술을 청하여 마시기 시작했다.

"눈길에 막혀 못 떠나셨구려."

눈보라 속에서 해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저녁 나절 함박눈을 뒤집어쓰고 사공과 함께 강을 건너온 중갖의 사내가 허준을 보자 환한 눈매로 인사를 했다.

"누구시온지?"

"새벽에 나도 이 방에 있었소이다. 그래서 성대감댁 하인의 하는 얘기로 댁이 허준이란 분인 걸 알았었소."

"저는 세상에 드러난 이름이 아니올시다만?"

"겸손한 말씀, 헛헛."

사내는 먼길을 떠나온 듯 서너 벌의 의복이 들었을 보따리와 여벌의 갓을 담은 갓집도 메고 있었고 몸의 움직임은 몸속에 두어 꾸러미의 전대를 찬 동작이었다.

"난 밀양서 의원 짓을 하는 박갑서라 하는 자올시다."

"의원이라고요?"

", 밀양서 3대째 의원을 하지요. 그리고 지난해 유의태 그 양반의 문하에 허준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성대감 댁 정경부인의 병을 일차 낫우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지요. 반갑습니다, 헛헛."

"아 예 ... 허준올시다. 우선 몸도 녹이실 겸 잔을 받으시지요."

"아니올시다. 이 눈에는 고개마다 길이 막혔을 테니 어차피 오늘은 술이나 마실 일밖에 없는데 제가 상을 차리지요. 이보게 주모!"

"아니올시다. 받아놓은 상이 있으니 개의치 마시고 먼저 받으시지요."

박갑서가 스스럼없이 잔을 받은 후 주모 대신 나타난 사공에게 새로 술상을 청하고 나서 허준을 보고 친구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성대감댁 정경부인 병을 듣고 실은 나도 사람을 보내어 내가 낫우어 보겠다 청을 넣었었는데 그만 내가 한발 늦어서 노형이 그 기횔 잡았지요. 핫핫."

"그랬었습니까."

"하긴 나야 유의태의 이름을 덮을 만한 실적은 없고 보니 나를 지목하란 법은 없고 또 내가 갔다고 해서 반드시 성과가 있었을지는 장담은 못 합니다마는 헛헛 ... 드십시다."

사내가 남은 술을 허준의 잔에 채워주고 자기 잔을 들었다.

허준은 생면부지의 자기에게 대뜸 도전장 같은 말을 던져온 사내를 건너보았다. 허준에게 사내가 넘치는 기운으로 자기 잔을 쨍그렁 부딪쳐왔다. 머슴방에서나 통할 방자한 행동이었다.

 

2

길 떠날 초입이라 노자가 든든한 건지 태어난 성정이 활달한 건지 키는 작으나 불거진 광대뼈가 완강해 보이는 박갑서는 술이 고래였다.

초면에 술잔을 주고받는 조심스러움 따위는 일찌감치 털어버린 그는 두 병째 술병이 비워나갈 때 호기 있는 소리로 사공에게 걸찍한 안주라는 걸 시켰고 날궂은 날 때아닌 큰손을 만난 사공 부부가 요란히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잉어회에 메기 매운탕이 곁들여 나오는 큰 술상으로 변했다.

그동안 그가 독판으로 떠들어댄 얘긴 자기네 집이 밀양 바닥에서 상당히 알아주는 의원이라는 것과 자기는 특히 부인병을 잘 보노라는 자랑에 지난해에도 동래까지 가마로 모셔져가 동래부사 소실의 은밀한 병을 치유해주었노라며 스물이 갓 넘은 계집의 속살이 어찌나 매끄럽고 고왔던지 그 모습이 하도 삼삼하여 며칠씩 몽정을 쏟았노라는 시답잖은 패설이었다.

과연 그의 의술의 정도를 알게 된 것은 이젠 술독이 바닥이 났다며 여섯 병째의 술병을 채워온 사공 마누라의 비명이 난 후였다.

박갑서가 새삼 자기 혼자 떠들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아직도 술이 안 취한 눈으로 허준에게 물어온 것이다.

"한데 한양 올라갔다는 노형은 어찌 다시 이 고장에서 뵙게 되오?"

유의태와의 관계를 누누이 얘기할 흥미가 없는 허준이,

"그냥 잠시 왔지요."

하고 대답하자 그가 갑자기 궁금한 얼굴로 물어왔다.

"참 이번에 내의원 취재에 응하시오?"

허준이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

"형씨는?"

"보다시피 이렇게 떠나는 길 아닙니까. 아예 일찌감치 한양에 올라가 준빌 할 양으로."

"지금 떠나는 길이다?"

"집안이 대물림으로 의원을 벌여왔지만 윗대엔 감히 내의원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던 재주들이라 가문 한번 빛내보라 하면서 조부캉 아부지가 나보다 성화라 남 먼저 상경하는 길이지요. 마침 이쪽에 처가가 있어서 인사 겸 들렀다가 막바로 떠나는 길인데 형씰 만난 거요. 형씨는 이번에 안 봅니까?"

허준이 대답 없이 자기 잔에 자작하는 걸 보다가 사내가 다시 물어왔다.

"한데 허의원은 내의원에 줄이 닿아 있는 사람이 많을끼라."

"내의원에 줄이라니?"

"시장에서 시관으로 나설 그런 떨거지들 말이오."

"없소."

"알면 나도 낍시다. 듣자니 전직 내의원에 있던 인물들이 유의원하고 교분이 두텁다는데 노형도 이래저래 모를 리가 없잖소."

허준이 갑자기 상대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맨입에 안될 건 각오하고 있고 나도 응분의 사례는 할 테니 연줄을 잡아봅시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부탁 좀 합시다."

"... 오늘 술에 안주에 정말 잘 먹었소이다."

"형씨를 만나 기대가 컸는데 영 실망이 크오."

"내게 기대를 하다니 무엇을 기대했단 말이오?"

"새벽에 노형이 허준인 걸 안 채 그냥 처가에 갔다가 눈길에 다시 허둥지둥 달려온 건 이 눈길에 노형이 오늘 하루는 이 집에 갇혀 있으리란 생각과 그렇다면 노형이 아는 연줄을 나도 같이 보려고 해선데 괜히 헛걸음친 꼴이 됐지 뭐요."

허준이 고소했다.

"대체 어떤 책들을 읽었소?"

"글쎄."

"황제내경소문이란 책을 보았소?"

"..."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서 중에서도 고전으로 친다는 책이오만 내의원 서고에 꽂힌 희귀본으로 밖으로는 나돌지 못하는 책이지만 더러 내의원의 관원들이 필사하여 꿍쳐나와 높은 값으로 내다 판다는 소문도 있소만, 본 적 있소?"

"있는 것 같소."

박갑서가 바싹 다가앉았다.

"한 질 다 보았소?"

"한 질이 다 있는 건 아니고 스무남은 장 필사한 건데 이법방의론편인가로 기억되오."

"그건 무슨 내용입디까? 온갖 비방이 그 안에 있다고 들었소만 ..."

"무슨 비방이 적힌 그런 책은 아니었소."

"그래요 ...? 나는 침구편만 보았소만."

"그럼 형씨가 본 그 안엔 침술의 비방이 써 있습디까?"

"... 아니오. 그렇진 않았소. 진맥의 법을 발견하고 시작한 원조가 편작이라고 써 있는 그런 외는. 그래 노형이 보았다는 그 편에 써있는 내용은 무업디까?"

"의술은 각 지방의 특색과 생활환경에 따라 발달했다는 그런 말이 적혀 있었던 걸로 아오."

"자세히 얘기해보오."

"의술이 재주이긴 하되 그 재주가 만인에게 다 먹혀들어 가는 재주는 아니다 하는 그런 뜻이었고,"

"더 자세히 얘길 해보오."

"의원이 병을 볼 때 병자가 어떤 기후의 지방에서 어떤 생업을 하던 사람인가를 미리 알아야 한다는 그런 얘기였소."

"답답하오. 더 자세히 얘기해보시오."

"그건 중국인이 저들의 땅과 사람을 머리에 넣고 본 것이라 맹목적으로 따를 얘긴 아니지 않소."

", 지금 우리 의술이 따로 있소. 다 중국 것을 가져다 사용하는 거지, 그래 책 내용이 뭡디까?"

"동쪽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고기잡는 것을 주업으로 삼으니 생선과 소금을 많이 먹으므로 곪고 썩는 피부병이 많아 돌칼로 살을 째고 고름을 빼고 상처를 아물리는 치료법이 발달했다."

"그리고 ..."

"서쪽은 불모의 산악지대라 사냥과 광업을 주업으로 하는데 기후가 급변하는 지역이라 두꺼운 옷과 기름진 음식을 주식으로 하여 내장질환이 많아 독한 탕약을 쓰는 치료법은 그 서쪽 지방에서 생겨났고 ..."

"북쪽은?"

"땅이 고지대인 데다 기후가 차고 인간들은 유목을 위주로 생활하며 짐승의 젖과 고기를 주식으로 하니 혈행이 원활치 못하여 뜸 뜨는 법이 거기서 발달했다 뭐 그런 얘깁디다."

"또 남쪽은 뭐요?"

"남방은 습기가 많은 평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주식 또한 곡물이 위주라서 혈행 장애와 근육에 병이 잦아 이를 풀어주는 방법으로 침술이 생겨났고 또 중원이라 칭할 지역은 산세가 평탄하고 기후가 고르나 사람들이 무리지어 사는 까닭으로 자연 정치와 장사의 중심이 되는데 그러나 이들은 노동보다 머리를 쓰며 사는 일이 위주가 되니 몸의 운동이 부족하여 빈혈과 사지의 위축을 가져와 안마나 뜨거운 탕 속에서 몸을 담그는 도인법이 발달되었다는 등 ..."

"그리고?"

"내가 안건 그 정도의 내용뿐이었소."

"가만 내가 그것들을 적어야겠소."

박갑서가 휴대용 필묵을 꺼내 다시 일일이 물으며 적기 시작했다.

말은 활달해도 공부에 힘들인 필체가 아니었다. 허준은 박갑서에게 또 한 번 실망하고 있었다.

박갑서를 만난 것은 허준의 마음속에 작은 희망의 등불이 켜진 역할을 했다.

팔도의 취재 지원자 중 과연 어느 정도의 인물들이 모여들지 짐작할 길은 없다. 그러나 듣고 본 대로 실기의 연륜은 깊었으나 의서가 유통되지 않는 세상에서 의술에 대한 그들의 이론은 빈약했다. 이론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가류대로 물려받은 얘기와 눈대중의 실기가 병을 낫우기는 커녕 오히려 병을 더 도지게 하고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허준의 머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적어도 삼대를 의원으로 가업을 삼는 자가 이토록 이론에 어둡고 철저하지 못한 것은 허준이 오늘 박갑서를 보며 느낀 의외의 사실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론과 실제를 겸한 도지는 최상급의 응시자란 생각과 도지의 의술의 정도를 아는 허준은 새 용기가 솟았다.

실기의 연륜은 짧다. 집으로 찾아온 병자를 보아주었던 일 그리고 창녕 성대감의 아내 그 정경부인을 낫운 것이 허준이 겪은 실기의 전부였다.

그러나 박갑서의 정돈되지 않은 이론을 목격하면서 허준의 가슴속에 켜진 조그만 희망의 불꽃이 급속도로 어떤 자신감으로 불어나는 것을 허준은 깨달았다.

망설이지 말고 부딪쳐보리라, 지금 내가 어느 정도인가. 누구의 도움도 거역하고 내 독력으로 부딪쳐보리라! 내의원 높은 벽이 무너지건 내 머리가 벽 아래 산산이 깨지는 좌절을 맛보건 ...

잠든 박갑서를 깨워 작별인사를 할까 했으나 그대로 행장을 챙기고 방을 나선 허준은 불 꺼진 아랫방의 주모를 깨워 자기의 밥값과 술값을 치르자 마지막 남은 짚세기를 꿰고 덧끈을 발등에 힘있게 묶어 죄었다 ... 밖은 다시 눈보라였다.

나 같은 사내를 믿고 남편으로 택한 아내, 나 같은 사내에게 태어나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는 아들과 딸, 나 같은 사내를 생애의 보람으로 사는 어머니, 그들에게 내가 누구인가를 보여줘야 하리라. 남의 신세나 의지하려 허둥거리며 이대로 주저앉아 그 무엇도 보여주지 않는다면 ...

'그건 하지하짜리 사내일 뿐!'

눈보라 속으로 나서며 허준이 자기 자신에게 힘있게 외쳤다.

"한양으로!"

무릎이 빠지는 설원 위로 눈발을 몰아 회오리바람이 불어치고 있었다.

허준의 옷자락이 깃발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집으로 향하는 허준의 온몸에는 아버지와 생이별하며 용천을 떠나던 그 날의 그 뜨거운 피가 오랜만에 다시 팽팽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3

안점산 문둥이 떼들의 얘기에 이르자 숨을 삼킨 채 숨도 못 쉬던 손씨와 허준의 아내는 이윽고 귀로에 지목하고 간 창녕 성대감을 만나지 못하고 이제야 독력으로 내의원 취재를 목표하여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감격한 손씨가 아들의 손을 쓸어 잡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고 아내 또한 울음을 삼킨 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두 달 반올시다. 올라갈 노정을 생각하면 길어야 두 달 ... 촉박한 시일임에는 틀림없으나 내 몸이 부서질 걸 각오하여 취재공부에 매달릴 겯심이오니 노자의 말을 믿어주시어 다시 한번 참고 견뎌주소."

"여부가 있느냐,"

"만일 이번 길 또한 실패하거나 내의원 취재가 소자의 능력보다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이라면 깨끗이 손을 털고 다른 길을 택하오리다."

"걱정 말아라. 에미만 견뎌준다면 나야 평생이라도 참을 것인즉 ..."

뒤꼍 자기 방으로 건너온 허준이 말했다.

"꼭 붙어보겠소. 믿어보시오. 꼭 붙어 보일 것인즉."

이젠 의원 짓 그만두리라며 이까짓 것들 불쏘시개나 하라며 부엌 바닥에 내던져버렸던 수많은 처방전이며 그동안 베껴 모았었던 의서의 비망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자기의 서탁 위에 놓여 있는 걸 보았던 때문이었다.

좀처럼 자기 자랑이나 섣부른 결심을 꺼내지 않는 허준이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했고 대답 대신 아내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창녕 그 강변에서 여기 오는 동안 내내 김민세 그 사람의 경우를 생각했소. 자식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마침내 자기의 일생을 던져 그 끔찍한 병자들과 기거와 고락을 함께 하는 그 사람의 결심을 ...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소. 나 또한 나를 믿고 사는 가족을 위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노라고."

"옷 갈아입으소서."

"그러리다."

"그리고."

"얘기하오."

"상화 그분이 어제도 다녀가고 아침에도 다녀갔습니다."

"무슨 얘길 합디까?"

"서방님께서 요즘 어찌 지내시는가 궁금하여 들렀다 하면서 아이들에게 엿뭉치와 연값이라며 잔전도 쥐어주고 갔습니다."

"고마운 사람이오. 나는 무엇 하나 힘이 되어 준 바가 없는데 ..."

"시장하실 터이니 진지상 차리겠습니다."

"점심까지 해먹을 처지는 아니지 않소. 기다렸다가 저녁이나 식구들과 함께 먹읍시다."

"따로 차리는 점심이 아니올시다. 계시나 아니 계시나 어머님이 늘 서방님의 진지를 따로 떠놓으시곤 하셨습니다."

"... 사내란 죄 많은 것들이지."

허준이 문득 자기 자신에게 탄식했다.

"미안한 노릇이나 난 집을 떠난 후 그렇게 조석으로 어머니나 당신을 오매불망하진 아니했소."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처녀적의 아리따운 그 미소였다.

허준이 집에 돌아온 엿새 후 저녁 상화가 건너왔다.

그리고 콩자루 속에 동상 걸린 두 다리를 담근 채 의서의 비망기들을 암기하고 있던 허준으로부터 그동안의 얘기와 현재의 결심을 듣자 일변 안타까워했다.

김민세와 안광익이 안점산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가를 알고 소스라친 눈이었고, 4월초에 있을 내의원 취재에 성대감의 후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깊이 탄식하며 지금 도지가 얼마나 맹렬하게 취재 준비에 골몰하고 있는가를 누누이 알려주었다.

도지 본인의 결심은 물론 유의태 또한 아들의 취재에 도움이 되라며 왕진이 있을 제는 딴때완 달리 자기 아닌 도지를 수행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얘긴 나도 들었네. 창녕 성대감댁에도 부자가 함께 갔었다는 것을."

"부자 두 분만이 아니라 임오근 그 사람까지 세 사람이 동행했습니다."

"..."

임오근-

창녕에서 자기의 성공을 시기하여 자기와 유의태와의 관계를 끊은 임오근의 노란빛 냉혹한 눈빛이 허준의 뇌리에 되살아났다.

"임오근 그 사람의 집념도 대단합니다. 스승님께서 도지 그분께 공부를 시킬 적이면 부르는 자리가 아닌데도 스스로 찾아들어 함께 듣고 배우고 합니다."

"..."

"그 열성에 스승님도 감동이 되시는지 근자에는 첫새벽 병사에 찾아드는 병자들의 초진을 두 사람에게 맡기시고 처방을 각자에게 따로 적어내게 하시어 틀렸다 옳다 매일 손잡아주시고요."

한참 침묵하던 허준이 말했다.

"아우님은 이번에 응시하지 아니하오?"

"저 같은 거야 연기도 일천하고 아직 멀고 멀었습니다. 하지만 제 꿈 또한 내의원에 있으니 딴 사람보담 형님 같은 분이 먼저 내의원에 올라가 계시기를 바라고 바랐었는데. 진작 성대감의 소개장을 활용했다면 이번 일 땅짚고 헤엄치기였을 것을 ..."

"성대감 얘긴 이젠 않기로 하지."

"도지 그 사람도 일차 떨어졌던 취재올시다. 시제들이 결코 만만하진 않을겝니다."

"그럴테지!"

"더구나 남들은 수년씩 준비하고 골몰해온 일을 겨우 두 달밖에 아니 남았다면 ..."

"무모한 줄은 알고 있네. 그러나 흘려보낸 세월 이제 와서 후회한들이지."

"꼭 보셔야 할 책이름 기억나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본다 핑계하고 수삼 일씩은 몰래 가져다 보실 수 있을 겝니다."

"..."

"생각나는 책 이름 있습니까?"

"그럴 수 있겠는가?"

"될 겝니다. 요즘 그 두 사람은 독서는 끝난지 오래고 실제의 임상체험을 쌓는 중이니 손맡의 책 몇 권 잠시 눈에 안 보인다 한들 두리번거리지 않을 겝니다."

코끝이 시큰했다. 허준이 벌겋게 젖어오는 눈으로 상화의 손을 굳게 잡고 흔들었다.

. "고맙네, 정말 정말 고마우이."

-두 달 ... 밤도 낮도 없이 60일 동안 허준은 대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상화가 몰래 내다준 십여 권의 책들 중 몇 권은 허준의 코피로 얼룩진 채 유의태의 서가로 되돌아갔다.

집안은 숨소리 하나 없이 긴장 어린 정적에 싸여 있었다.

밥을 먹으라거나 옷을 갈아입으라거나 일상의 전갈도 끊은 채 어머니도 아내도 뒤꼍 허준의 방 쪽을 드나들지 않았고 아이들 또한 마당에서 놀지 못하고 밭두렁과 냇가에서 놀라는 어머니의 엄명을 따랐다.

긴 겨울을 견딘 주변의 고목에 연두빛 봄잎이 돋고 한층 발랄한 잡새소리가 들리던 3월초 허준은, 도지는 나귀를 타고 임오근은 도보로 그리고 도지의 견마잡이가 된 상화가 한양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허준의 손맡에 있는 몇 권의 책을 회수하러 온 상화가 그 소식과 함께 그들의 느긋한 노정을 얘기했다.

"시일이 임박하여 올라가면 마음이 각박하여 취재를 그르칠지 모른다하여 일찌감치 떠난다 합니다. 그리고 이 책들은 한양에 거처를 정한 후 다시 훑어본다기예 가지러 왔습니다. 그동안 보실 만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간 애써주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내. 내 이 공을 결코 잊지 않으리."

가위질도 잊고 그동안 더부룩하게 수염이 덮인 얼굴의 허준이 치사했다. 미처 못다 본 아쉬움이 컸으나 돌려주지 않으면 아니 되는 타인의 책들이었다.

"그럼 형님께서는 언제 발정할 생각이십니까?"

"노자도 부실한 형편이라 미리 떠날 주제는 아니 되고 일단 길을 나서면 공부도 아니 될 터이니 단 한나절이라도 더 집에서 공부를 보태다가 한 열흘 앞두고 떠날 작정일세,"

"한양까지 840리올시다. 840리를 열흘 만에 간다 함은 너무 촉박한 여정이 아니올지?"

"다리도 다 나았으니 충분하네."

허준이 담담하게 웃자,

"그러나 혹 봄장마라도 들면 강물이 불어 길이 막히는 수가 전혀 없다 할 수 없으니 2, 3일은 여유를 지니고 떠나소서."

"그러겠네. 그럼 4월초 한양에서 보세."

상화를 돌려보내고 허준이 오랜만에 어머니의 방에 들르자 방안에는 구수한 찌개 냄새가 진동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나 피라미 매운탕이었다. 그건 아들의 취재를 곧 과거로 여기는 어머니와 아내가 천리길 등정에 앞서 아들에계 체력을 붙여주려는 너무도 어렵사리 마련한 정성일 것이었다.

그 민물 요리는 허준의 출발을 앞두고 여러 날 상 위에 올라왔다. 일가의 형편으로는 구할 수 없는 육류를 대신한 그 국그릇을 비우며 허준이 집을 나선 것은 취재의 날짜에 열하루를 남긴 3월 하순이었다.

"자손의 이름이 방에 오르려면 삼대 조상이 돌보고 주변 사람의 정성이 하늘에 사무쳐야 한다는데 ..."

그만 들어가라는 허준의 말을 귓결에 흘리며 근 시오리길을 따라와 현북쪽 백야현원의 작은 나루에서 건너오는 나룻배를 기다리다가 손씨가 뇌었다.

나룻배가 닿자 다섯 켤레의 미투리를 단봇짐과 함께 멘 허준이 배에 올랐다. 강심으로 떠나가는 나룻배 위의 아버지에게 겸이와 숙영이가 "아버지, 장원급제 하이소." 하고 할머니와 입버릇을 들었는지 작은 손을 입에 대어 함께 소리소리 질렀으나 떠나는 허준도 보내는 어머니와 아내도 뜨거운 시선을 서로에게 향한 채 군말을 않았다.

드디어 허준이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전기에 들어선 이날 뿌연 안개가 덮인 강변의 봄볕이 새로 돋는 능수버들가지에 더 없이 평화로웠다.

 

4

집을 떠난 지 닷새하고 한나절 거창. 무주. 영동. 보은을 꿰어 허준은 충청도 청주에 이르러 이윽고 거치른 소백산맥을 밤도 낮도 없이 답파해온 고달픈 다리를 쉴 생각이 났다.

하루에 백여 리씩-그 닷새 동안 그는 산음. 한양간 840리 중 550리를 걸어 이제 한양까지 남은 노정은 290리였다.

앞으로 엿새의 여유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보폭보다 반을 줄여 하루 50리씩만 가도 느긋이 가 닿을 거리만 남은 것이다.

아직 노독을 느끼지도 않았고 싸구려 주막에서 조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으나 스물여덟 탄탄한 육체는 새벽마다 쾌변으로 속을 비웠고 그 하루하루 낯선 주막에서 신들메를 고쳐 매고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새 희망에 차 있었다.

무주에서도 보았고 보은에서도 보았었다. 무주 주막에서 본 그들은 전라도 쪽에서 올라오는 의원들인 듯했고 어젯밤 보은 주막에서 한방에 든 인물들은 경상도와 강원도 쪽 어디에 사는 의원들인 듯했다.

모두 의원으로서의 생활이 가난은 면한 듯 안색들이 좋았다.

적어도 그 응시자의 일행 속에서 갓도 없이 패랭이를 쓰고 결이 곱고 촘촘한 왕골 미투리 한 켤레도 갖추지 못한 채 짚세기를 꿴 건 허준이 뿐일 듯하므로 ...

하나 그런 외양이 허준을 기죽게 하지는 않았다.

애초 그는 번드르르한 외양 따위에 신경을 쓰는 것과는 성격이 멀었다. 지난날 용천 땅에서 천출인 주제에 군수인 아버지의 위세를 업고 큰갓을 쓰고 다닌 객기가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으로 지금은 등에 소름이 돋도록 부끄러웠다.

속 알맹이가 제 것이 아닐 때 잘 먹고 잘 입은 외양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가를 적어도 그는 뼈저리게 체험한 인간이었다.

그런 외양보다 지금 그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나 한나절씩 아니 단 한 시각이라도 절실하게 아쉬웠다.

지금 허준이 그 아쉬운 시간을 더욱 금쪽같이 아끼는 방법은 한시바삐 한양에 닿아 내의원 근처에 조용한 거처를 빌린 후 차분하게 취재 준비의 마지막 점검을 해보는 일이요 한양에 닿기 전에는 함부로 사람 많은 방에 끼어들어 쓸데없는 객담 따위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결심이었다.

주막에 또 한패의 길손들이 들이닥쳤다. 행색으로 보아 모두 내의원 응시자임이 분명했다.

또 한판 술자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한 허준은 애초 오늘은 이 청주에서 쉬리라던 생각을 털고 그 주막을 나섰다. 30여 리 북쪽 진천까지 가서 조용한 주막을 찾아보리란 생각에서였다.

주막을 나서 십리가 채 못된 지점 공북루란 곳에 이르자 십여 명 선비들의 시회라도 열린 듯 화사한 봄풍경 속 그 누상에 아리따운 기생의 시 읊는 소리가 낭랑했다.

누외장강강상산

동풍영유송춘한

(다락 밖에는 긴 강이요 강 위에는 산인데 동풍이 버들을 날려 봄추위를 보낸다.)

천하게 태어난 자들이 자신의 일생의 운명을 걸고 천리길을 허위허위 밤을 도와 걸어가는 길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분 잘난 양반들의 그 봄맞이 놀이는 허준의 다리힘을 일시에 빼놓듯이 한가로웠다.

그러나 허준은 더 이상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세상은 그렇게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한가로운 인간과 바쁜 인간으로,

'이제 240...'

진천 서남쪽 시오리에 위치한 태령산 언덕배기의 주막에 이르러 짚세기를 꿴 발등의 덧끈을 풀어 벌겋게 달아오른 발을 주막 앞 냇물에 담가 짜릿한 아픔을 지그시 깨물며 허준이 마음속에 뇌었다.

1년만 자기 곁에 있어 달라던 김민세의 제의와 안광익의 강권을 뿌리치고 그들이 일시 몸담았던 내의원에 독력으로 도전해가는 자기의 결심이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여기면서도 아들 길상이의 죽음으로 인해 보장받은 어의에의 영화를 버리고 문둥이 굴에서 여생을 보내는 김민세의 극기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허준에게는 커다란 감동이었다.

설사 의원의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의 실수와 죄를 그토록 자기 자신에게 엄하게 양심으로 다루며 사는 김민세의 모습은 자기가 감히 넘겨다볼 수 없는 거대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김민세 그 정도의 인간이고서야 어의의 자리가 내다보인다 여겨지자 갑자기 김민세에 비해 자기의 존재가 얼마나 초라한 몰골인가를 느끼져 그 어의에의 첫 관문일 취재의 합격이 갑자기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절망감이 왔다.

'내 재주가 어느만치인지 직접 부딪쳐 스스로 확인해보리라!'는 결심은 한낱 오기일 뿐 얼마나 허황한 욕심인가도 ...

'그러나!'

허준은 황혼의 낙조 속에 반짝이고 있는 일명 길상산이라는 태령산을 바라보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듯 입밖에 뇌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고말고."

산속 주막은 해가 지자 아주 조용했다.

포기하고 있던 길손이 한 사람이라도 찾아든 것이 반가운지 심지가 무던해 보이는 중년의 주모는 국밥에 술 한잔을 청해 마시고 자리에 누운 허준에게 으레 목침이나 들여놓는 주막방인데 푹신한 배개를 들여놓아 주었고 취재차 한양에 가는 길이란 말에 등잔도 새 심지로 갈고 담뿍 기름을 채워 밤중에 글을 읽을 허준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 허준이 삭정이에서 송진이 타는 향긋힌 군불 내음을 맡으며 잠에 떨어졌을 때 였다.

비몽사몽간에 누군가 귓결에서 "허의원" "허의원"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가 귀에 익어 눈을 뜨니 뜻밖에도 그건 벌써 도지, 임오근 등과 한양에 당도해 있어야 할 상화였다.

"그대가 여기 어인 일인가?"

튕겨 일어난 허준이 정말 믿을 수 없어서 묻자 상화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허준의 손을 잡고 흔들며 연신 웃었다.

방안에는 상화뿐이 아니라 오던 길에 수없이 본 취재차 상경하는 의원들의 하인과 소년들이 7, 8명 이미 눕기도 하고 코를 골기도 하면서 만원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길 떠난 후 도지들은 일정에 여유가 있어 백여리 걸음을 돌아 소문날 단양팔경을 구경차 향했다가 그곳의 산수에 취하여 한양서 공부할 시일을 그곳에서 자리 잡아 보낸 후 마악 한양으로 떠나오는 길이노라고 했다.

"단양에서 이쪽이라면 지름길이 아니지 않나?"

허준이 산음에서의 사연이야 어떠했든 수백 리 타관의 한 주막에서 해후하게 될 도지와 임오근의 안부를 반겨서 묻자,

"지름길이 있는데 지난번 취재 때 그 길로 갔다가 낙방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이번에는 새 길만 골라서 왔습니다. 하긴 나귀 타고 가는 처지니 길 좀 돌기로 다리 아플 까닭은 없겠지요. 또 덕분에 나도 이름난 산천경개를 여러 군데 구경했구요. 하하, 건너가시렵니까?"

허준이 방문을 나서자 도지가 타고 온 나귀가 마당 구석에 매여 그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고 딴채 불이 환한 큰방에는 7, 8명의 사내들의 글 읽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면서 일행이 된 사람들올시다."

"일행?"

"단양서 만난 사람도 있고 중도에서 만난 사람들도 있고, 모두 내의원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올시다."

그러나 허준이 기척을 내고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반색해 손이라도 잡을 듯하던 허준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각자 벽에 기대기도 하고 자리에 엎드려 서첩을 뒤적이는 5, 7명은 낯선 인물들이었고 그 한쪽에 술상을 받아놓은 임오근은 허준의 웃는 낯을 향해 마치 낯선 침입자나 보듯 눈길이 날아왔다가는 들고 있던 술잔을 비워 건넛사람에게 권하며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고 도지 또한 이불뭉치를 보료삼아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보고 있다가 허준의 목례에 고개만 끄덕했을 뿐 자세를 고쳐앉으려는 태도도 없이 다시 책장에 눈길이 갔다.

허준이 오히려 무색해졌고 그런 허준에게 임오근의 술잔을 받아든 사십 나이나 됐을 사내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뉘요?"

허준이 잠시 앉지도 물러나지도 못한 채 서 있자 그 사내가 다시 말했다.

"보다시피 이 방은 꽉 찼소. 이부자리도 벼개도 모자라니 다른 방을 청해 보시오."

임오근이가 짐짓 허준을 무시하듯 그 사내에게 부인병에 관한 얘기를 계속했다.

대목이 세종조에 찬집된 향약구급방 중의 한 내용이었다.

대작하던 사내가 낮게 맞장구쳤다. 술잔은 들었으나 내용이 분명하고 자세하여 만만치 않은 실력이 엿보이는 사내였다.

그 사내가 아직 서 있는 허준에게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밤새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는 방이니 어서 나가보시오."

도지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걸 보며 허준은 그 방을 나왔다.

방 밖에 섰던 상화가 민망한 얼굴을 했으나 허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상할 것도 없다 싶었다. 산음에서 그러하듯이 타향에서 만났다고 하여 갑자기 말문이 터지고 매사 화해가 되리란 것은 착각일 것이기에.

방으로 돌아온 허준은 상화와 짧은 정담을 마치자 방자들이 요란히 코 고는 그 방에서 보따리를 풀어 자기 또한 읽을거리를 찾아들었다.

그 곁에 자리를 편 상화도 묵묵히 입을 다문 채 허준을 방해하지 않았다.

윗방에서 도지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 밤중이었다

 

5

이날은 집을 떠난 지 엿새째.

하루 백리씩 그 엿새 동안 6백 리를 달려왔건만, 그리고 오늘 하루는 마음 놓고 쉬리라 작정을 했는데도 허준은 쉬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취재를 실시한 내의원 쪽의 목적이 과연 어느 분야의 충원에 있는지 그걸 짐작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크게 나누어 출제의 분야를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로 나누어지고 그 내경 한 분야에도 신형, , , , , 오장육부 등으로 세분되며 잡병 하나에도 천지운기의 이치를 논하는 이론에서부터 심병, 진맥, 용약에서 해독, 구급까지, 다시 그 속에 부인병, 소아병으로 쪼개는 수백 줄기 중에서 과연 무엇을 물어올지는 오리무중일 뿐이다.

그건 결코 한때의 요행으로 열리는 길이 아닐 것이다.

자연 나 허준의 의술의 경지는 어디쯤에 와 있는가.

창녕 물슬천나루의 주막에서 만난 박갑서의 부박한 이론에 용기를 느낀 자기 또한 내의원 취재에 도전하기엔 아직은 설익은 재주일 것이라는 자책 어린 절망이 한발 한발 한양의 과장이 가까워짐에 따라 허준의 가슴을 무겁게 찍어누르고 있었다.

"제 재주를 과신하지도 말고 과소평가도 말 것이 설사 떨어졌다 해도 이 넓은 세상 나보다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인생의 공부인즉!"

이번 길이 아닌 지지난해 취재를 떠나는 아들 도지에게 담담하게 일러주던 유의태의 한마디가 때아닌 지금 새삼 허준의 귓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허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게는 그렇게 긴 눈으로 인생 공부를 할 여유가 없어. 오로지 붙는 길뿐 ... 혼신의 힘을 다해 이번 길에 붙는 길뿐!'

마치 밤이라도 새울 듯이 계속되던 건넌방 도지와 그 일행들의 의서 읽던 소리도 내일 새벽의 발정을 위해 잠을 청하는지, 허준의 머리맡에 어리고 있던 건넌방의 불빛도 꺼지고 허준의 얼굴도 칠흑 속에 묻혔다. 하인배들의 코 고는 소리가 한층 요란한 속에 상화도 버릇인 이를 갈기 시작했다.

안성, 용인, 수원, 과천, 삼개 ... 허준이 한양 내의원으로 뻗은 앞으로 남은 240리길의 지명을 꿰며 설핏 잠에 빠지는 그때였다.

주모의 방 쪽에서 주모의 한참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문득 여자의 울음소리가 났다.

"아 글쎄, 아래윗방 여러 의원들이 묵은 건 틀림없지만 한양에 과거치러 가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깨울 수가 있어. 더구나 너나없이 새벽길 떠난다구 곤히 잠든 양반들을."

"그 사정 알지만 그러나 사람이 죽어가는 판에 누굴 잡구 사정하우."

"내가 사례는 할 테니 제발 누구 한 사람 좀 깨워나 주시우. 사정은 내가 할 테니께요."

우는 여자를 가로막듯 중년 사내가 역시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고 여자가 또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건넌방 방문이 왈칵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경상도 사투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집구석 먼길 떠날 손들인 걸 뻔히 알면서 잠을 재울락카나 안재울락카나. 아께부터 무슨 놈의 울음소리고!"

"초상났나, 뭐꼬!"

또 한 사람 이미 깨어 있던 목소리가 외치자 울던 부부가 허준의 방앞을 가로질러 건넌방으로 내달았다.

"아이고 의원님, 잠을 깨워 죄송만만올시다만 기왕 깨신 김에 저희 사정 좀 들어주십시오."

"사정이라니?"

임오근의 목소리를 향해 주모의 소리가 났다.

"정말 죄송해유. 그란디 갑자기 병자가 위독해설랑."

"병자?"

이미 건넌방은 모두 잡을 깨버린 듯 도지가 되묻는 소리가 났고 울던 여자가 매달리듯이 말했다.

"오죽하면 한밤중에 달려왔겠슈. 장시 어느 분이든 우리 시아버님 병좀 봐주세유."

"주모, 대체 이 사람들이 누고?"

"바로 저어기 저 산 밑에 사는 사람들올시다."

"헌데 무슨 병인데 밤중에 이 야단이오."

또 한 번 도지의 목소리였다.

잠을 깬 상화가 튕겨 일어났으나 허준은 그대로 누운 채 밖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걸핏하면 두 갈비뼈 밑이 아프고 배가 땡긴다구 하시구유."

"그럼 간이 나쁜 게로군."

"? 간이 나쁘다구유?"

놀라는 여자를 향해 도지의 박식한 목소리가 났다. 주위의 수런거림과 호기심을 압도하는 자신에 찬 어조였다.

"갈비뼈 밑이 아프고 배가 땡기고 ... 그 병자 곧잘 성을 내지 않소?"

"아이고메, 고걸 어찌 안 보시구두 아신대유. 맞아유, 걸핏하면 성을 잘 내세유."

"얼굴에 푸른및이 돌고."

"아이구 의원님!"

"정말 용하세유, 제발 우리 아버님을 몸소 좀 봐주세유."

부부가 눈물 콧물로 반기는 소리를 향해 도지가 계속했다.

"간에 병이 온 게 틀림없소. 하나 우린 한시바삐 한양에 가야 할 사람들이리 처방을 써주리다. 주모, 여기 불 좀 밝히게."

"처방이라면 혹 큰돈이 드는 게 아닌지유?"

"이 사람들이 사람 죽어간다카모 남 잠 다 깨워놓고 돈걱정까지 할라카나. 아 간이란 기 웬만하모 병이 안 들지만 한번 병이 붙었다모 좀체로 고치기 어려운 법인기라. , 큰병에 걸렸으모 큰돈 쓰는 거 각오해야지 병이 절로 났소?"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핀잔 끝에 또 내뱉었다.

"본시 말이 있는기라. 몸띵이가 만 냥이모 눈이 구천 냥이라꼬. 눈은 곧 간이께로 이 양반 처방에 한 백 냥만 내놓소."

"백냥이라니유?"

"돈은 필요 없고 그냥 처방을 써줄 테니 가지고 가서 날이 밝은 녘 동리 의원한테 약을 지으소."

도지의 부드러운 말에 찾아온 사내가 울상으로 이의를 달았다.

"근디 처방이니 뭐니보다 당장 어른이 못견뎌 하시니께 잠시 가셔서 침이라도 놔주셨으면 하는디유."

"가다니 어디로 말이오."

"저희도 그동안 의원이 없어서 약을 못 지은 게 아니고 손바닥만한 논뙈기 붙여 사는 가난뱅이들이 돼서 알고도 약을 못 사먹었슈. 근디 오늘 이 어른이 하도 못견뎌 하시니께 그래서 의원댁에 달려강께 이 양반 이 집안에 무슨 잔치가 있다고 타관엘 가셔서 의원이 비었어유. 그러니 처방을 갖구 가두 약을 구해볼 도리가 없으니께."

"그래서 당신네 집으로 우릴 같이 가잔 말요?"

"죄송하지만 이 불쌍한 것들을 살려주시는 셈치시구 어느 한 양반만 ..."

울던 여자가 거들었다.

"저기 저 양반이 젤 잘 아는 듯하시니께 잠시 가서 우리 아버님께 침이라도 몇 대 놔주시면."

지목당한 도지가 침묵한 채 대답이 들리지 않는데 낯선 의원의 목소리가 비아냥거렸다.

"침은 꼭 맞을 데 놓는 게 침이지 아무데나 쑤시면 다 낫는 게 침인줄 아쇼."

"아이구 그렇지만."

"사정이 딱하긴 하오만 갈길이 멀어 새벽같이 떠날 사람들이니 어딜 오가고 할 경황은 없소이다."

도지의 거절하는 소리에 주모가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지가 이 사람들을 잘 아는데 사정이 아주 딱한 사람들올시다. 사정이 어려운 줄 알지만 잠시 도와주실 수 없으신지요."

"미안하오만 난 안 되겠소. 과것길 떠나는 사람 내 볼일 제쳐놓고 시간을 허비할 수 없으니."

도지의 물러앉는 소리가 났고,

"괜히 남의 단잠만 깨워놓고!" 하고 또 두어 사람이 방안으로 사라지며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황급하게 방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남편을 제쳐두고 여자가 방문을 열어젖힌 모양이었다.

"아이쿠, 다른 사람도 말고 저 의원께서 잠시만 가주세요."

"글쎄 과거 보러 가는 사람 잡고 왜 이러시오."

"이 여자가 어딜 남자들 방문을 함부로 열어젖히고!"

"정말 죄송해유. 죄송하지만 잠시 진맥이라도 해주시면 ..."

"진맥한다고 병이 낫는 게 아니고 내 약을 싸들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가봤자 허행일 게 뻔하잖소. 이 문고리 놓지 못하오!"

"의원님!"

"이 여자 미쳤나. 왜 이카노. 정말 못 비키나!"

"놓으시오 놔!"

실랑이 끝에 여자가 떠밀려 나자빠지며 울음이 터졌고 곧이어 방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가 악을 쓰는 소리가 났다.

"의원이 뭐여. 병 고치는 게 의원이지. 죽어가는 사람 살려달라는데 돌아도 안 보는 것이 의원이여!"

건넌방 방문이 다시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시끄러 이것들아. 누가 병들라구 했어. 길 가는 사람 잡고 웬 패악이야!"

"상대할 것 없으니 불 끄게."

", 글쎄 듣자니까 이것들이!"

", 내버려 두고 자자니까. 한잠 자야 새벽길 떠나지. 잡시다 자요."

다시 닫히는 방문을 향해 여자가 울먹였다.

"누군 패악을 부리고 싶어서 부리간유. 돈도 없이 약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이 ... 하도 안타깝구 ... ... 쌍해 ... ... 그라 ... 지유."

주모와 남편이 달래는 소리를 뿌리치며 여자는 계속 울먹였으나 건넌방도 침묵한 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눈치였다.

그 정적 속에서 허준이 주섬거리며 옷을 제어 입고 짐을 찾아들었다.

상화가 놀란 듯이 돌아보았으나 허준은 말없이 방을 나서 짚세기를 꿰었다.

"아이구우,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 하고 푸념을 늘어놓던 여자와 그 아내를 달래던 중년의 농부인 듯한 사내가 길 떠날 채비로 선 허준을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기척도 없던 방에서 나타난 허준을 건넌방 의원들의 하인쯤으로 보는 눈이었다.

"뭐여, 니놈은!"

그 눈 속에는 건넌방 의원들에게 멸시당한 분함이 서려 있었다.

허준이 말했다.

"나도 명색은 의원이고자 하는 사람이오. 또 재주가 없는 사람이나 병자에게 가봅시다."

 

6

건넌방을 향해 그토록 애걸복걸하던 부부였건만 하인배들의 방에서 나타난 허준의 행색을 보고는 금시 뜨악한 얼굴이었다.

내의원은 대궐에 있고 대궐 그 궁정에는 허드레 짚세기로 보행하는 건 금해 있다. 하여 그 궁정 과장에 입장할 때 신을 미투리 한 켤레만 유지에 싸서 신주단지처럼 매달았을 뿐 집 떠나올 때 삼아 메고 온 아홉 켤레 짚신이 백 리에 한 켤레씩 소비하여 아직도 세 켤레가 단봇짐에 매달려 있었고 더구나 남들 다 쓴 소갓도 없이 패랭이와 후줄그레한 무명 두루마기를 두르고 제대로 깎지도 않은 수염인 허준의 모습은 의원이 풍겨야 할 최소한의 위엄과도 거리가 멀어 농부 부부의 눈에 영 미덥지 않는 눈치였다.

"댁이 정말 진짜 의원이신가유?"

여자가 물었고.

"집이 어느 쪽이오. 한양 쪽으로 가는 길목이요 아니면 되돌아가는 길 쪽이오?"

하고 허준이 되물었다.

여자의 남편이 젖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다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한 십리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지름길이 있으니께 멀지 않아유."

"그렇거든 갑시다."

앞장서 나가는 허준에게 주모가 부엌 문간에 매달린 등불을 벗겨 내달며 허준에게 고마운 얼굴을 했다.

허준과 부부의 기척이 주막에서 사라지자 불 꺼진 건넌방 어둠 속에서 의원 하나가 조소하여 뇌까리는 소리가 났다.

"넋빠진 놈이구마. 돈 한푼 못 받을 걸 번연히 알면서 미쳤다고 십리씩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 쯧쯧."

"새벽길 바쁜데 어서 한숨 잡시다."

툭 대거리하여 도지가 돌아눕는 기척인데,

"그라고 보이 초저녁에 불쑥 이 방에 나타났던 그놈아 아이가, 형씨들보고 잠시 아는 체하던?"

"과거에 나하고 잠시 동문수학하던 놈이오. 지금은 내쫓겨서 들개 새끼처럼 혼자 떠돌아다니는."

임오근이 공연히 앙심을 담은 말에,

"댁들이 유의태 그 어른 문하의 사람이라면서 동문수학이라카모 눈교?"

"허준이란 놈이오."

돌아눕는 임오근의 내뱉듯한 말에,

"허준이고 하준이고 젊은 놈은 저래서 탈인기라. 쪼께 배운 재주를 우예 좀 남들 앞에 과시하고 자파서."

잠에 겨워하던 그 목소리가 그러나 곧 튕겨나듯,

"방금 뭐라캤소, 저 사람 이름. 허준이라캤소?"

"허준이면 왜."

"허준이면 창녕 성대감댁 정경부인 병 그 중풍을 사흘 만인가 닷새 만인가에 낫구었다는 그 허준이모? 낫궈놓고 한양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낫구긴 무얼 낫궈. 잠시 빤하다가 재발한 걸 씻은 듯이 낫군 건 우리 서방님이외다."

임오근이 잽싸게 일그러지는 말로 허준의 이름 위에 찬물을 끼얹었으나 대답 대신 방안에 불이 켜지고 불쑥불쑥 이 사람 저 사람이 일어나 앉았다.

"저게 허준이다!"

그러자 임오근의 목소리가 되알지게 또 내뱉었다.

"허준 허준! 그렇게 만나기 소원이거든 쫓아보지 그러시오."

"우리 같이 안 가볼랑교?"

하고 한 사람이 일동에게 발의를 하자 금세 젊은 놈 어쩌고 타매하던 중 늙은이가 제 보따리를 벗겨 들며 소리쳤다.

"가보입시더. 내 언제고 허준이 그 사람이 병자를 어찌 다루는지 꼭 볼라캤는데."

"같이 갑시더. 지난번 중풍도 난치 중의 난치병인데 이번에는 간이 상한 병잘 우예 낫구는지 이 눈으로 볼라캅니더."

금시 세 사람이 동행이 되어 황황히 방을 나서고 남은 두엇이 또 따라 나설 듯하다가 주저 앉았다.

"방금 그 허준이라카는 의원 어느 쪽으로 갔노?"

앞장선 사내가 각자의 셈을 치르자 주막의 떠꺼머리 총각에게 소리치듯이 물었다.

"허준이 누군데유?"

"이런 답답한 자슥 봤나. 좀전에 농사꾼들한테 불려간 사람 말이다."

"갑자기 또 무슨 일인데 이라유?"

"갑자기고 뭐고 의원 데불러 왔던 그 사람들 사는 마실이 어디고?"

"버드네 사는 사람들인디요."

"글씨 버드네가 어느 쪽에 있는 동넨지 안 묻나."

"근디!"

주모를 가로막고 갑자기 떠꺼머리가 눈알을 빛내며 나섰다.

"그 허준인가 하는 사람 제법 대단한 의원인가유?"

"그걸 눈으로 볼라꼬 쫓아가 볼라카는기다. 소문이 참말인지 허풍인지."

"그란께 소문은 난 의원이다 그 말인가유?"

떠꺼머리가 또 한 번 눈을 빛냈다.

세 사내가 떠꺼머리의 팔을 잡아끌어 앞장세우자 주모가 새벽 물도 긷고 어쩌고 총각에게 볼멘 소리를 질렀으나 떠꺼머리는 무엇이 신명이 나는지 주막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허준은 태령산 기슭을 두어 굽이나 오르내리며 농부 부부를 뒤쫓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민가가 아닌 공동묘지가 나타난 걸로 보아 거의 다 왔거니 했을 때였다.

애초부터 지름길을 택했는지 저 앞에 주막의 떠꺼머리를 앞세워 두 사람의 의원이 다가왔다.

의아한 허준에게 쫓아온 의원이 손이라도 잡을 듯이 반색을 했다.

"가신 뒤에야 노형이 뉘신 걸 들었습니다. 노형이 산청 유의태 그분의 문하에 계시던 고명한 허준 그 사람이라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무슨 영문이시온지?"

"이런 반가울 데가. 경황 중에 이렇게 뵙심더. 저는 봉화사는 정상구심더."

"나는 단양 사는 우공보올시다. 허준 그분이 틀림없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두 사람이 나이를 따지지 않고 조신하게 허리를 굽혔고 허준도 당황히 사람을 보며 두 손을 모으며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제가 허준이 틀림없지만 고명이니 뭐니 사람을 잘못 본 듯합니다."

"천만에 말씀. 평소 늘 우예 생긴 사람인지 꼭 만나보고 싶던 차에 좌우간 피차 바쁜 길올시다마는 한번 노형께서 병자를 낫우는 방법을 구경도 하고 곁에서 도울 일이 있으모 도와볼라고 온 거니까 달리 생각 마이소."

"뭔가 잘못된 소문을 들은 듯합니다만 ..."

"어쨌든 여기는 긴 얘기할 장손 아닌 듯하니 가면서 얘길 하십니다."

단양 사람 우공보의 말에,

"옳심더. , 가입시더. 가입시더." 하고 봉화 의원 정상구가 맞장구 쳤다. 그들의 대거리를 곁에서 보고 있던 농부 부부가 갑자기 허준을 다시 보았고 떠꺼머리가 그 부부에게 오다가 들은 얘긴지 허준이 어떤 실력의 의원이다 하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설명하고 처음 세 사람이 따라 나섰으나 길이 너무 멀자 중도에 한 사람이 아쉬워 아쉬워하며 되돌아갔다는 얘기도 했다.

버드네라는 마을에 도착하니 20여 호의 마을은 지난 가을 추수도 보잘 것이 없었는지 겨우 서너 집이 새로 지붕을 한 빈촌으로 농부의 집은 삽짝도 없이 여러 해 새로 이지 못해 썩은 지붕은 서너 군데 골이 패고 잡초조차 피어난 몰골이었다.

그 불 꺼진 방문 앞으로 달려간 며느리가 "아버님, 의원 데려왔어유, 의원요."

하고 사뭇 감격 어린 소리를 쳤을 때 방문을 열어젖히며 댓바람 허준을 맞아준 건 해골처럼 퍼골이 상접한 병자의 욕설이었다.

숨차고 목구멍 안에 퍼가래가 글글거리는 소리로 누가 의원 데려오랬느냐. 어린 새끼들 마냥 울려놓구 어딜 싸돌아댕기느냐고 악을 썼고 오히려 허준들에게 자식 부부를 타매했다.

"이놈들 말 믿지 마시우. 이것들이 미쳐도 분수가 있지. 땡전 한닢 없이 입에 풀칠도 못하는 주제에 무어라 거짓말을 지껄이고 당신들을 오랬는지 그 다 새빨간 거짓말이니 썩 돌아가란 말이여."

하고 공연히 악에 받쳐 고함치고 방문을 도로 닫았다.

"이미 난 죽을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유. 대체 어디서 온 의원인진 몰라도 약값 한 푼 못 받아갈 게 뻔한디 왜 이러시우."

"의원의 소임은 병을 고치는 것이 첫째지 돈은 둘째올시다."

해골 같은 병자가 멍해서 그 허준을 보았다.

"방금 뭐랬어유. 돈 없이도 병을 고쳐준다고요?"

"고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몰라도 일차 병이 어디까지 깊었는지 살펴나 보십시다."

"산음서 온 허 뭣이라는 분이신디, 아주 고명한 분이시니께 이 양반 말씀대로 맡겨봐유."

어느새 뒤따라 들어온 떠꺼머리가 아들 부부를 대신해 소리쳤고 정상구도 우공보도 따라 들어왔다.

"모두 한양에 의원과거 보러 가시는 고명한 의원들이시니께 지발 고맙게 알구 순순히 병세를 얘기해유."

"하루 이틀 병도 아니구 내 병세 내가 너무도 잘 알어. 소용없는 노릇이여. 이미 가망이 없어. 구석구석 금간 몸인디 무슨 수로 낫워."

말과는 달리 병자는 살고 싶어 필사적인 눈빛이 눈물에 번쩍였다.

허준이 그 병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금간 그릇도 곱게 쓰면 오래 가는 법올시다."

그제야 병자는 "아이고 의원님!" 하고 허준의 손을 더듬어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참고 참았던 한마디를 털어놓으며 마구 몸을 떨었다.

"그렇거든 제발 살려주세유. 지발 이 불쌍한 놈을 살려주세유 ..."

 

7

허준의 손에 잡힌 채 병자의 손이 자꾸 떨었다.

허준이 말했다.

"병자가 병을 낫우는 첫째 요건은 스스로 병을 떨치고 살아야겠다는 굳센 용기올시다."

"우린 정말 땡전 한닢 못 낼 가난뱅이여유 ..."

병자가 세 사람씩이나 둘러싼 낯선 의원들 앞에서 또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맥이 좀 어떻습니까?"

"손톱에 윤기가 없이 바싹 메마르고 안색이 푸르딩딩한 게 좀 어려운 경진 것 같은데 ..."

허준의 등 뒤에서 정상구와 우공보의 음성이 났으나 허준이 그 두 사람을 개의치 않고 병자에게 말했다.

"평소 무섬증을 잘 타시오니까? 뭔가 헛것이 보이기도 하고 그러한지?"

"그게 가슴 아픈 병자와 무슨 상관여유?"

"간이 탈난 병은 아침에는 그만하고 해질녘이 가장 심하고 자정엔 좀 가라앉고 그렇지 아니한지? 눈병이 그치지 않고. 내 말이 맞는 데가 있습니까?"

아들이 눈을 빛내며 한무릎 다가앉았다.

"어찌그리 잘 아시는가요? 젊을 적에는 눈 하난 밝으신 어른이셨습니다만 요즈음은 의원님 말씀대로 ..."

"모두 간이 허한 탓이온데, 하나 가망이 있습니다. 맥도 아직은 탄탄합니다."

허준은 얼음 뼈다귀처럼 차가운 병자의 앙상한 손에 힘을 가해 잡아주며 용기를 북돋우었다.

"웃옷 벗으시지요."

"옷을유?"

"이 병은 올여름 안으로 다잡아서 올겨울을 넘길 대비를 해야지 이대로 대책 없이 여름을 넘기면 회복되지 못합니다."

"올여름 안으로?"

"가지고 온 약이 없어 우선 처방부터 써 드리겠으나, 그러나 없는 살림에 비싼 약을 먹을 순 없을 것이니 일변 또 집에서 고칠 수 있는 방법에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고칠 수 있는 방법 ..."

놀라고 반기는 눈길 속에서 허준이 병자의 좌우 갈비뼈 밑을 눌러보았다. 이어 그 손이 배꼽 위쪽에 단단한 달걀 크기의 응어리에 닿자 병자가 기절할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으으으 ... 아파유 ... 거긴 아파유 ..."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지난 겨울부터지요."

허준은 내색하지 않았다. 병은 간에만 있는 게 아니고 그건 꽤나 진행된 반위의 증상이었다.

병자의 생명이 몇 달밖에 지탱하지 못할 위중한 것임을 알았다.

허준은 눈물이 그렁한 병자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을 살려야 해. 고생고생만 해온 이 병자를 살려보리라!'

비록 다시 살릴 수 없는 병자임을 알았으나 허준은 우선 자기 자신부터 용기를 북돋우었다.

"발을 보여주시지요."

"발이라 카모?"

등 뒤에서 정상구의 소리가 났고 눈앞의 병자가 면구스러운 얼굴을 했다.

"발도 안 씻었는디."

"안 씻은 것은 씻으면 됩니다. 간의 맥을 잠시 보려는 것이니 물 좀 떠오시지요."

며느리가 구를 듯이 달려나갔고 병자가 물었다.

"간은 가슴에 붙었을 틴디 간의 맥을 발로 봐유."

"시키는 대로 해유, 아버지."

아들이 대신 아비의 다리를 당겨 바지를 동동 걷어 올렸다.

대야도 없는 가난한 살림인지 며느리가 바가지째 물을 떠 왔고 아들이 머리에 두른 자기 수건을 풀어 아비의 발을 열심히 닦았다.

그 물기를 닦아낸 병자의 발목을 허준이 잡았다.

"이곳이 족음교라 하는 곳으로 간으로 올라가는 맥들이 모이는 곳올시다."

허준의 손이 다시 병자의 엄지발가락 옆을 더듬어 오르다가 지그시 누르자 그 손 밑에서 굵은 맥이 둔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어 수건을 꺼낸 허준이 손에 감고 병자의 좌우 눈을 까뒤집었다.

눈자위 밑으로는 황달기가 고름처럼 퍼져 있었다.

'가망이 없어.'

누런 황달이 퍼진 병자의 눈을 허준은 보고 보고 다시 보고 있었다.

허준이 조용히 위로했다.

"아직 크게 다치지 아니했으니 집에서 할 수 있는 정성을 들이면 상당한 효험을 보오리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정성이라면 ..."

"우선 마음으로는 무슨 일에도 조바심치지 말 것이며 조바심을 치면 간이 오그라들기 때문올시다. 또 애써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말고 진정해야 하는 것이 마음이 노하면 제일 부담을 느끼는 것이 역시 간이기 때문올시다."

"그리고?"

병자가 아닌 우공보의 반문이었고 정상구가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도 났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정성이라는 걸 말씀해주세요."

"이 간이 병든 덴 산딸기를 그냥 먹거나 말려서 갈아 먹는 것도 효험을 보고 모과를 쪄서 먹는 것도 득을 봅니다. 그러나 절기로 보아 그것들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니 우선 파를 구하여 ..."

"양념에 쓰이는 그 파 말씀인가유?"

"바로 그 파올시다. 그 파를 뿌리째 정하게 씻어 두 뼘짜리 한 뿌리에 세 종지씩의 물의 비율로 스무 뿌리씩을 솥에 안치되 반드시 괄하지 않는 불로 물이 반으로 줄어들도록 진하게 달여 하루 세 번씩 일삼아 마시면 그 물이 간의 병든 곳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합니다. 그밖에 ..."

정상구와 우공보가 부산하게 저들의 보따리 속에서 지필묵을 꺼내 갈겨쓰기 시작했다.

"밖에 또 뭔가요?"

"포공영."

"포공영이 뭔디요?"

"속칭 앉은뱅이라고도 하는 민들레올시다."

"민들레는 알지요."

"그 민들레와 회향을 달여 이 또한 물을 반으로 달여 마시면 효험이 있습니다."

"회향은 뭔지 처음 들어유."

며느리의 안타까운 말에 우공보가 붓을 멈추고,

"회향에도 대회향 소회향 두 가진데 어느 쪽이오니까?"

"대회향은 중국에서 난 것이고 우리나라에서 채취하는 게 소회향인데 조선 사람의 병이먼 조선에서 나는 약초가 더 맞는다 하겠지요."

의원끼리의 대화에 눈이 둥그레진 병자에게 허준이 다시 일러줬다.

"회향이란 미나리과에 속한 2년 초로서 6월에 노랗게 꽂을 피우는 풀올시다. 항미료로도 쓰이나 상한 위를 어루만지는 약제로 더 효과가 있는데 그 열매를 약으로 씁니다. 이름이 어려워 보이나 의원마다 그 생김새를 알고 있으터 여름이 오거든 꼭 시험해보시고 또 ..."

"!"

"강변 수양버들의 가지와 잎을 달여 그 액을 조석으로 두어 숟가락씩 먹으면 이는 또 황달에 기이한 효험이 있습니다."

"강변 수양버들?"

"그리고 고삼을 아시오니까?"

"고삼?"

"속칭 너삼, 쓴내삼이라고 하는데 독초에 속합니다."

"독초?"

"생김새는 산삼을 닮았으나 일종의 독초인데 그러나 그 속에 암질환에 특효를 지닌 부분이 있으니 까다롭긴 하나 귀담아들으시고 이를 시험해 보소서."

"암질환에 특효다?"

"이 병자가 암이오?"

"반위의 증세가 있소."

"너삼이 반위에 특효다?"

"지난날 내 스승이던 유의태란 분이 직접 투약하던 걸 보았기로 나도 확신을 가지고 있소."

"그래서 그 방법은?"

"약으로 쓰는 부분은 뿌리인데 한여름의 뜨거운 정기를 빨아들인 늦은 가을에 채취하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그 가을에 캔 걸 껍질을 벗겨 응달에 말려 생강을 썰듯 엷게 썰어 밤톨 두 알만큼의 양에 물 한 대접의 비율로 섞되 물이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달여 이를 세 번에 나누어 마십니다."

"반위에 고삼이 특효약이다."

우공보와 정상구의 상기한 얼굴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지시한 약 중에 당장 구할 수 있는 약재로 파를 구해와 허준이 제 손으로 약을 만들어낸 것은 새벽닭이 거푸 울어대는 희붐한 시각이었다.

허준이 손수 달여주는 그 파 졸인 물을 병자는 영생의 영약이나 되듯 눈물 글썽이며 마셨고 그 허준의 정성에 감동된 농부 부부가 곧 길을 떠나려는 허준을 매달려 잡아 앉히며 굳이 밥 한 끼 먹고 가길 간청했다.

이에 허준이 주저앉자 그들 부부가 꼭두새벽부터 온 동리 돌아다니며 닭 한 마리, 술 한 병, 고추장, 참기름, 깨소금 따위를 빌러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뜻밖의 닭국물에 뜨뜻이 요기를 하고 병자의 배웅까지 받으며 허준이 병자의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온 마당에 마을의 성인 남녀 십여 명이 맨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나타나는 허준에게 일제히 큰절을 했다.

이어 놀라고 의아해하는 허준에게 앞자리의 촌로가 일동을 대신해 울먹이는 것이었다.

"들으니 돈을 안 받고 병을 고쳐주시는 의원이라 하시니 저희들 불쌍한 것들의 병도 보아주십시오."

모두 땟국이 전 그리고 조식에 찌든 가난뱅이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허준은 망연히 그 자리에 못 박혀 서고 말았다.

 

8

까닭은 물어볼 것도 없었다. 한눈에 그들은 병자였다.

사람의 모습은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아 이동하고 배가 주리면 먹이를 찾아 산도 넘고 강도 건너는 동물적인 인간들과 던져진 고장에서 목마른 채로 굶주린 채로 한발도 못 움직인 채 고생고생을 팔자요 운명으로 체념하는 식물적인 인간과-그들은 후자였다. 목이 타고 뱃가죽이 말라붙어도 악에 받쳐 있는 눈도 아니었고 팔뚝에 독이 뻗쳐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백성이라 불리는 무지렁이들. 위로는 양반이라 칭하는 벼슬아치들로부터 아래로는 털끝만도 못한 권세를 코끝에 걸고 날뛰는 시골 관아의 이속들에게까지 휘두르는 대로 걷어차는 대로 뜯기고 억눌린 채로 살며 병든 자들 -

그 병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돌이켜볼 힘도 머리도 없는 무지렁이들이 그래도 길게는 살아보겠다고 돈 아니 받고 병을 보아준다는 허준의 길을 막은 것이다. 농부 부부가 이 양반들은 곧 과거 보고자 한양 갈 길이 바쁜 사람이노라 허준을 대신하여 언성을 높였으나 방에서 허준이가 병자에게 한 얘기들을 남김없이 훔쳐 들은 무지렁이들은 허준에게 시선을 박은 채 길을 비킬 눈치가 아니었다.

그중 몇은 금시 신음소리를 흘리며 더욱 허준에게 다가섰다.

이에 "나도 간이 아파요." "난 허리가 펴지지 않는 병인디 낫워주세유" "저는 눈이 침침하구 아침저녁 기침으로 애먹구 있는디요." "우리 언니는 눈이 사팔인디 봐주세유." 심지어 "귀에서 고름이 나와요." "티눈이요." 하고 저마다 허준이 앞으로 나서며 차례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참말로! 글쎄 이 의원 양반들은 한시바삐 한양 올라갈 사정이라고 안혀!"

농부가 민망해서 대신 소리쳤으나 같은 무지렁이끼리는 할말도 많다는 듯이 봄날 대추나무 가지처럼 앙상하게 생긴 사내가 콧물이 빠진 아이를 업은 채 마른 삿대질을 했다.

"야 이놈아, 돈 안 받는 의원이라메. 왜 너 혼자만 덕을 보겠다구 가루막어?"

이어 그 사내가 갑자기 허준에게 까부라지며 애원했다.

"글씨 이건 지 아들 놈인디 애초 엉덩이에 코딱지만한 부스럼이 나길래 몇 번 터쳐줬었는디 그게 잘못돼 가지구선 이젠 어찌나 크게 화농을 했는지 앉지도 눕지도 몫하구유."

핑계 삼아 사내는 재빨리 제일 앞자리로 헤쳐나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얼굴을 지으며 허준에게 거푸 고개를 숙여댔다.

애비의 비굴한 모습에 비해 얼굴에 마른버짐이 하얗게 핀 아이는 아들 겸이의 나이 또래였고 또 문득 그 얼굴은 안점산에서 북을 치던 문둥이 소년 길상이를 닮아도 보여 일순 허준의 눈에는 온 마당의 병자들이 김민세가 돌보던 문둥이 떼처럼도 보여 온몸을 떨었다.

'이 순간에 왜 하필 김민세란 말인가.'

허준이 내심 신음처럼 뇌며 맹렬히 고개를 저었으나 눈앞에는 이젠 김민세뿐이 아너고 안광익의 왕방을 같은 눈빛까지 나타나 자기를 쏘아보고 있었다.

"..."

"우옐랑교? 난 걸음발도 느리고 더 지체할 수 없심더."

정상구가 못박혀 선 허준에게 재촉하는 말을 했고 우공보도 걱정스레 허준에게 뚱겨주었다.

"아직 갈 길이 240리가 남았소. 240리가 뭐요. 20리 되돌아왔으니 260리가 남았는데 이 병자들 상대로 여기서 무얼 어쩌잔 거요?"

허준이 김민세와 안광익의 얼굴을 떨어내며 온 마당의 병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병을 앓는 모습은 애처로우나 보다시퍼 나는 한양에 갈 길이 급한 사람이오. 게다가 내 몸에 지닌 것은 오로지 이 침통 하나뿐인데 보아하니 여러분들의 병은 침으로 낫울 그런 병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가 약까지 지어달랬나요. 약 없는 건 아니께 암튼 침이라도 한 대 놔줘유."

주막에서 따라온 떠꺼머리 총각이 저만치서 여러 사람을 대변하듯 소리쳤다.

"침도 써야 할 때 침이지 아무 병에나 침이 듣는 건 아니오. 그리고 분명 약속을 하건대 한양에 다녀오는 길에 꼭 다시 이곳에 들러 여러분의 병을 보아 드리리니 지금일랑 그대로 보내주시오."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고 그 처녀를 부축해 있던 좀은 문식이 들은 듯한 촌로가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의원님 말씀이 점잖은데 우리도 마냥 떼를 쓰듯 길을 막을 순 없지만 다만 아침 한나절만이라도 병을 보아주실 수 없을지요? 아까 방안에서 하시는 말씀을 듣자니 돈 들이지 않고도 약이 되는 여러 단방약 이름을 가르쳐 주시던데 대충 그 정도라도 한 가지씩만 일러주시면 소원이 없습니다."

"제발 그래 주세요."

"우릴 살려주시는 셈치시구요. 이렇게 빕니다."

촌로의 말에 온 마당의 병자들이 각자 자기의 병명을 다투어 소리 질렀다.

어려운 병도 있었으나 쉬운 병 이름도 많았다. 한나절 자기가 돌보면 어렵지 않게 병을 낫우는 사람이 여러 사람 있다는 생각을 했다.

허준은 눈을 감았다. 아직 닷새하고도 한나절의 여유가 있었다.

아니 그것은 여유라고 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닷새와 한나절 속에서 걸어가야 할 260리를 사흘로 잡고 남은 이틀 반은 한양에 닿아 과장에 들어가기 전 수험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그 이틀 반 속에서 한나절.

허준은 이윽고 그 한나절을 이 병자들을 위해 쓰리라 결심했다.

저 처참한 문둥이 굴에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의술을 베푸는 김민세, 안광익의 모습에 대항해서가 아니었다.

갑자기 자기를 생명의 신인 양 우러러보는 남녀노소 그 가난한 병자들의 눈빛에 진실로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촌로와 한나절이라는 다짐을 주고받는 허준을 본 정상구는 이따가 셋이서 함께 떠나자는 우공보의 만류에 "사람들이 미쳤나 정신이 있나, 평생 별러 가는 취재길에 객기를 부려도 분수가 있지!" 하고 마치 모욕이나 당한 사람처럼 먼저 길을 떠나고 말았다.

우공보도 그 정상구 못지않게 초조한 모습이었으나 허준에게 더 큰 홍미를 느낀 듯 불안한 얼굴인 채 주저앉았다.

우선 허준은 촌로에게 지시하여 아래윗집 방을 하나씩 비우게 하여 남녀 병자를 분리한 후 침과 뜸으로 다스릴 환자와 약재로 다스릴 병자를 다시 나누는 일반 병자들이 돈을 들이지 않아도 효험을 볼 향약에 의한 구급단방약의 이름과 용약법 춘하추동별로 써주고 부인병은 나이가 많은 우공보에게 맡기고 자기도 남자 병자들을 맡았다.

그 허준의 곁에서 허준이 써내는 단방약 이름을 촌로가 캐물어댔다.

캐묻는다는 말이 맞았다.

의원이 약 이름을 어렵게 쓰는 건 고금동서가 마찬가지여서 진서나 존대 받는 한문에 비해 아직 '한글'이라는 빛나는 이름은커녕 표현 그대로 '쌍말 언'자 언문인 조선글은 세종조에 창제되고도 연산군 때 사용금지령이 내려진 후로는 제대로 적는 백성이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허준은 일일이 그것들을 풀이하여 기침을 달래고 해열제로 쓰는 차전자는 질경이의 씨앗으로, 위장병의 영약이라는 황백은 황벽문로, 횟배앓이와 일사병에 특효가 있는 남과는 호박으로, 이뇨약 창출은 삽주뿌리, 종기에 잘 듣는 인동은 겨우살이, 설사약에 쓰는 우자를 토란으로, 화상과 딸꾹질에 특효를 지닌 양매를 소귀 나무 등등으로 고쳐 적어주고 설명하는 동안 허준이 스스로 다짐한 한나절은 순식간에 지나고 말았고 그 한나절 동안에도 소문을 들은 이웃 마을의 여자들까지 아들의 지게를 타고 혹은 이부자리째로 달구지에 실린 오늘내일 하는 사경의 병자까지 계속 들이닥쳐 때아닌 산골 마을 버드네는 저자거리처럼 복닥거렸다.

이러면 동네 병자들을 보지 못한다고 그제야 마을 사람들이 가로막고 다투고 했으나 심지어 가마에 태운 앉은뱅이까지 찾아와 허준이 있는 방앞에 겹겹이 둘러앉아 저희끼리 순번을 정하고 법석이었다.

사태에 질린 우공보가 허준에게 소리쳤다.

"안되겠소. 내의원 취재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이러다가는 여기서 잡히고 말겠소. 뒷문으로 빠져나가 한시바삐 떠나야지."

허준이 땀투성이의 눈길을 들어 마당에 빽빽한 그 병자들을 건너보았다.

모두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정녕 손을 보지 않으면 아니될 위급한 병자들 몇이 섞여 있었다.

"대체 여기가 무어요. 애초 약속이 이렇지 않았잖소. 여기는 충청도 진천이오. 갈 길이 아직 이백육십 리가 남았소."

"먼저 가시오."

하고 허준이 말했다.

"먼저 가라니? 아니 그럼 허의원은 아니 갈 생각이오?"

"갑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을 다 보아줄 수는 없을지라도 조금은 더 손을 보아주어야 할 병자가 여럿 있습니다."

"겨우 닷새밖에 말미가 안 남은 걸 알고 하는 소리요?"

허준이 마당의 병자와 온몸 곳곳에 뜸을 태우고 있는 병자를 보고 말했다.

"260. 사흘이면 갈 수 있으니 아직 이틀 여유가 있으니 해질녘까지만 더 있다 가겠습니다."

"달려가면 과장에 곧바로 들어갈 생각이오? 그 남은 이틀 머리도 정리하고 시제도 어림해보며 금쪽같이 써야 할 시간인 줄 몰라서 하는 소리요?"

"먼저 가시지요."

허준은 조용히 다시 병자를 대해 마주 앉았다.

 

9

"어떡 허시겠소?"

하고 우공보가 또 초조한 눈으로 아직도 침통을 닫지 못하는 허준에게 물었다.

허준이 대답을 망설이는데 두 사람의 심상치 않는 낯색을 보고 주춤주춤 다가온 병자들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그중 한 늙은이가 갑자기 허준의 팔을 붙들었다.

"보다시피 워낙 후미진 골인 데다 돈 없이 사니께 설사 병이 들어두 의원이라군 모르고 사는 불쌍한 것들이지유. 기왕 오신 김에 부디 몇 사람만이라도 더 병을 봐주고 가세유."

"이렇게 사정해유."

"그 사정 알지만 우리들은 잠시도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사정이라지 않소."

허준의 침묵이 답답한지 우공보가 가로막고 나섰으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우공보를 상대하지 않고 허준을 향해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돌연 주막의 떠꺼머리도 마을 사람들을 편들어 소리쳤다. 그건 사뭇 시비조였다.

"그렇다구 누군 병 봐주구 누군 안 봐줘유? 무슨 처방 내려달라는 것도 아니잖유. 우리도 돈 안 들고 집에서 낫을 수 있는 그런 약 이름이나 가르쳐주구 가시라 그런 이야기라구요."

"글쎄 이 사람아."

우공보가 또 나서려 하자,

"댁은 나설 것 없어유. 저 허뭐시기라는 저 양반만 남아주세유."

이건 뒷자리에 오십도 넘었을 아낙의 외침이었다.

"둘러보세유. 이렇게 없이 사는 것들여유. 돈도 없는 것들이 참말 염치없는 노릇이긴 하지만요 ..."

노모를 업고 달려와 아직 숨이 찬, 입술이 째보인 사내가 두 손을 모으며 허준의 앞을 가로막고 하는 소리였다.

"댁네들 사정 딱한 줄은 알지만 우리도 지금 평생을 별러서 과거 치러 가는 사람이라지 않소. 그런 우리를 잡고 매달리면 그건 우릴 죽으라구 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요."

"어따 그 양반은 나서지 말라는데 지가 더 나서서 야단이네."

"어째, 누구요? 지금 얘기한 게!"

소리쳐도 나서 대꾸하는 사람이 없자 공보가 허준에게 오금을 박듯,

"어찌 손보면 낫울 사람이 한둘 더 있을지 모르나 못 낫을 중환자도 많소. 자칫 잡혀 있다간 한양 못 가오. 잘 생각하시오, 자알."

허준은 내심으로 '사흘 반 사흘 반.' 하고 뇌고 있었다.

고칠 수 있고 없고는 이차 문제다. 병이 들었음에도 그리고 그 병을 다스릴 수 있는 약재가 산비탈과 들판에 질펀히 널려 있는데도 그게 약인지도 몰라 생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 허준의 눈이 그 사람들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30여 명이 좋이 넘는 숫자였고 약초나 일러주는 외 일일이 매만지고 지켜봐야 할 중증에 속하는 병자가 6, 7, 그 참담한 눈망울들을 도저히 이대로 뿌리치고 갈 순 없다 싶었다.

그러나 사흘 반 앞으로 박두한 취재 날짜에 260리의 갈 길이 남아 있는 것이다.

'뿌리치고 가야 해 ...'

허준의 내심이 또 한 번 자신을 독촉했으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소리였다.

"어쩔 수 없소."

"어쩔 수 없다니?"

마을 사람들이 숨을 삼키며 허준의 다음 말을 주시했다.

허준이 천근처럼 다음 말을 뱉어냈다.

"난 남겠소. 내 미숙한 재주나마 필요하다면 이대로 뿌리치고 갈 순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안도의 환성 같은 소릴 질렀고 합장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취재는 포기요?"

"아니올시다."

하고 허준이 우공보를 보았다.

"260리길, 오늘 하루 여기서 지체한다 해도 남은 이틀 반이면 한양에 당도할 수 있겠지요."

"한나절이라고 하더니만 이젠 또 오늘 하루?"

"다행히 걸음 걷는 일엔 자신이 있습니다."

"걸음이 문제가 아니잖소. 그래 오늘 여기 남아 하루를 까먹으면 남은 이틀에 260리 길을 하루 백30리 길씩을 간단 말이오? 갈 수 있다 칩시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물건 팔러 갑니까? 30리 길씩 달린 그 지친 걸음으로 내의원에 뛰어들면 이미 숨돌릴 새도 없는 게 뻔한데 시제에 대한 답이 절로 술술 나옵니까? 아니지 않소. 미리 생각도 가다듬고 머릿속을 정리해서 ..."

마을사람들 속에 "저눔 자식이 웬 방해여! 가려면 당신이나 빨리 가란 말여!" 등 욕이 터져 나왔다.

우공보가 그 얼굴에 삿대질을 놓으며 "나도 밤새 한숨도 눈 못 붙치고 당신들 병 봐준 사람인데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하고 붉으락푸르락 목에 핏대를 세웠으나 돌아온 것은 마을 사람들의 흰 눈자위뿐이었다.

"나는 노형께 정이 쏠려 설사 고생이 되더라도 함께 가려 했소만 더 이상은 못 있겠소. 난 먼저 가리다."

우공보가 마지막 허준을 충동했으나,

"한양 가서 뵙지요."

하고 허준이 짧게 대답했다.

애초 허준을 데려온 농부 부부가 떠나는 우공보를 유독 쫓아가 배웅하고 돌아오기까지 팔을 걷어붙인 허준은 우선 촌로에게 일러 마을 사람들에게 양해와 약속을 먼저 구했다.

의원이 들여다본대서 병이 절로 낫는 것도 아니요 지닌 것은 오로지 침통 하나뿐 따로 약재를 지니지도 못했으니 오늘 하루 안에 병이 나으리라 여기지 말라는 것과 오늘 종일 성심껏 살펴는 보겠으나 저녁에 달이 뜨면 떠날 것이니 그땐 잡지 말라는 것. 그러자 감격한 촌로가 목이 멘 소리로 "여보게들, 이 고마운 말씀 들었는가. 이분의 사정을 우리도 익히 알았으니 달이 뜨는 길로 떠나실 수 있도록 모두 다짐을 허게." 했고 마을 사람들이 그것만도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며 이구동성으로 응해 오자 허준도 웃음을 띄웠다.

"그럼 우리 합심해서 힘껏 해봅시다."

곧 촌로가 지적한 몇 사람이 앞으로 나섰고 촌로와 그 몇 사람이 허준의 지시를 받아 병자의 경중과 남녀를 나누었다. 일시 철수했던 아래윗집이 다시 의원으로 바뀌어 쑥뜸 냄새로 가득차고 침 맞는 사람, 그걸 구경하고자 뒤밀리는 사람들로 복닥거렸으나 의원에서 터져 나오기 마련인 신음소리나 비명 대신 병자도 가족들도 희망과 감사에 차서 웃음소리가 넘쳤다.

그 속에서 아랫집 주인인 촌로가 몸소 잿간으로 달려가 씨암탉을 잡아들며 그 놀란 닭에게 말했다.

"이놈아, 죽는다구 서러워할 것 없어. 저런 분 몸보신하는 데 죽는 거니 복이여."

이밖에도 허준이 어젯밤도 날밤을 새웠다는 것을 안 병자와 가족들 중에는 다투어 밥상 제대로 차려 드리라며 달걀을 들고 오는 사람, 찹쌀 한 됫박을 찧어 들고 오는 사람, 심지어 마침 제사에 쓸 제주를 구해놓은 것이 있다며 시술중엔 금기인 술을 다짜고짜 권하는 노파도 있었다.

허준이 아래윗집으로 오르내리며 뜸과 침을 사용하는 동안 일변 일러 준 약이 되는 초근목피를 캐러 간 사람들이 개선장군처럼 돌아와 허준에게 약재를 확인해 줄 것을 청했고 허준은 쓸 수 있는 약재와 이미 철이 지나 약효가 제대로 우러나올 수 없는 것 등을 지적하여 가려주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소문을 전해 들은 이웃 마을 머슴 두엇이 찾아와 티눈까지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화가 난 촌로가 숱한 병자가 의원님 떠나시기 전에 병셀 짚어주십사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그깐 티눈 따위로 수고를 끼치느냐고 욕설을 뱉자 허준이 오히려 촌로를 만류하며 웃었다.

"놔두십시오. 본시 남의 골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이 병자의 심리올시다."

"하도 수고를 끼쳐서 우린 몸둘 바를 모르는 지경인디."

허준이 티눈의 총각에게 일렀다.

"티눈 낫우는 건 아주 간단하네. 대추를 가져다 씨를 뽑아버리고 그 과육만으로 티눈을 싸매두면 수일 안으로 단단한 티눈이 물렁물렁해지는데 그때 손톱으로 뽑아버리면 그걸로 낫네."

온갖 자질구레한 병자를 다 보아주면서 허준의 눈은 자주 하늘로 향했다.

오늘따라 해가 솟아오르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고 바라볼 적마다 해는 한 뼘씩 한 뼘씩 그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또 애초 30여 명이던 병자들은 이미 반수가 돌아갔다 여기는데도 어디서 다시 나타나는지 그 숫자가 좀체 줄지 않았다.

그러나 허준은 주위에서 강청하다시퍼 권하는 점심을 거른 채로도 힘들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달이 뜨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세상에서 자기를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 발견 앞에서 허준은 더욱 눈에 총기가 뻗고 몸에 새 기운이 솟고 있었다.

 

10

바쁘고 바빴던 하루 해가 지기 시작했다. 눈코 뜰 새가 없다는 표현이 맞았다. 촌로를 비롯, 자청한 몇 사람이 곁에서 도왔으나 아래윗집 누워 있는 병자들의 수가 워낙 많아 허준 혼자의 힘으로는 중과부적이었다. 이제야 허준은 지금쯤 죽산이나 안성, 아니 이미 수원 어간을 바삐 가고 있을 우공보를 아쉬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병자를 향해 허준의 눈과 손을 대신할 순 없는 일이었다.

버드네를 둘러싼 삿갓처럼 뾰족한 산날망들 그 한 봉우리 위로 발그레 달빛이 어리기 시작했고 그 달이 뜨면 허준이 떠나는 것을 아는 병자와 가족들은 한 번이라도 더 허준의 손길을 받아보고자 다투어 자기 병을 내세우며 조바심치기 시작했고 미처 아직 허준의 눈길을 거치지 않은 병자의 권속들은 동동거리며 솟아오르는 달을 끌어내리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다.

하나 일변 허준의 진찰과 처방을 받은 병자의 가족들은 촌로의 지휘 속에서 아랫집 부엌에 부산하게 드나드는 눈치더니 이윽고 음식을 익히는 냄새가 진동했고 그런 속에서, "지금 제주가 문제여. 밤길 떠나실 양반의 반주로 한잔 곁들여야 몸도 훈훈하니 가실 수 있지."

하는 촌로의 소리도 났다.

또 자기 차례까지 닿지 않을까 마음죄는 사람들이 차마 허준에게는 입을 못 열고 촌로에게 단 반 시간이라도 출발을 늦추어달라 사정했으나 촌로는 육십이 넘은 나이답지 않게 꼬장꼬장한 의리를 내세워 그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냉랭한 말로 무안을 주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어찌 자기 사정밖에 몰라. 평생을 별러서 가는 과거 길이시라는디 동행들 다 떠나보내고 여태 남아준 것만으로 은혜가 태산같다고 여겨야지. 뭔 염치루다 또 지체허시라는 말이 나와. 다믄 반 시간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밤 꼴딱 새운 저 양반 다믄 한숨이라도 주무시고 가도록 권해야 옳지! 아무리 없이 사는 것들이라도 일단 약조를 했으면 약조는 약조니께 두말 말더라고!"

"정말 그 말씀 옳아유. 참말로 저 의원 양반 연이틀을 날밤을 새웠다니께. 더는 이러고저러고 잡고 매달릴 처지가 아녀."

허준을 따라 역시 하룻밤을 새운, 처음 허준을 인도해온 농부도 가로막고 나섰다.

'한 사람만 더!'

이미 달이 뜨고 있었으나 그러나 정작 허준은 애써 그쪽을 외면한 채 자신에게 일렀다.

'한 사람만이라도 더!'

신음하는 병자들을 실제로 다루면서 자기의 노력으로 눈앞 병자들의 고통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덜어주고 나을 수 있는 처방을 일러주면서 허준은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있었다.

의원의 기쁨이란 이런 것이리라. 아팠던 사람이 나아서 돌아가는 모습, 나을 수 있다는 밝은 희망을 지닌 얼굴, 병자마다 부모요 집안의 기둥인 남편이요 사랑하는 형제자매요 자식일 때 가족들의 그 기뻐하는 얼굴들을 바라보는 기쁨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뿌듯한 보람이었다.

또 묘한 일이었다. 이 병자 저 병자 각자 호소하는 환부와 병증을 보고 들으면서 언제 어느날 스승 유의태가 시술하던 온갖 어려운 기억들이 마치 어제의 일인 듯이 되살아나 허준의 용기를 일깨우며 손을 신들린 듯이 움직이게 했다.

'한 사람만 더!'

허준은 한 뼘이나 떠오른 달을 등지고 다시 윗집 방으로 건너갔다.

그 윗집 아랫방에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닌 육십이나 된 농부가 팔십노모의 부축을 받고 와서는 뜸에 살갗을 태우며 누워 있었다. 빈대나 모기한테 물려도 그 작은 상처가 곧잘 화농하고 속발하는 특이한 피부병 환자였다.

육십은 좋이 됐을 백발의 자식이어도 팔십 노모에게는 불안하고 조심스럽기가 대여섯 살짜리 어린것 같은 심정인지 여느 병자의 가족들이 아래 윗집 오가며 허준의 시술을 구경을 하네 혹은 허준의 시선이 머물 적이면 수다와 애원을 섞어 우는 소리도 하건만 이 팔십 노파는 처음 허준이 자기 아들을 대하자 합장을 해보였고 뜸 뜬 후는 의원의 지시가 있기까지 함부로 몸을 구부리거나 움직이지 못한다는 그 말을 철석같이 지키며 아들의 어깨에 힘줄이 나무뿌리처럼 뻗은 앙상한 손을 얹은 채 앉아만 있는 것이 눈물겨웠다.

허준은 안타까웠다.

뜸을 뜸에 있어 그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떤 쑥을 재료로 했느냐를 뜸의 위치를 선정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시한다.

마을 사람들이 구해온 것은 쑥은 쑥이되 약용으로 정제된 쑥일 수가 없고 뜸에 붙이는 불 또한 금기로 하는 여덟 가지 나무를 기피할 겨를이 없었다.

촌로에게 쑥을 가지고 빻고 체에 치고 뭉치는 요령을 일러 그렇게 만들어진 뜸을 환부에 얹어 촛불로 당기는 임시변통인 것이다.

또 뜸은 약이 미치지 못하고 침이 이르지 못하는 중증일 때의 수단이요 그 뜨는 시각도 엄격히 가리어 점심 나절 이후에만 뜨는 것은 아침나절은 인체에 곡기가 아직 허하여 살갖을 파고 타들어가는 격동으로 혈행이 놀랄 것을 저어하기 때문이다.

"의는 정하면 금기를 초월한다."는 언젠가 들은 유의태의 그 한마디가 허준을 격려하고 있었다. 허준이 시술하는 손을 멈춘 것은 온 방안에 자욱한 쑥 타는 내음 속에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졸음과 과로를 느끼고서였다.

침의 위치 선정에서 표현 그대로 손톱만큼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그 침 끝이 자꾸만 뿌옇게 흐려져오는 걸 깨달으며 허준이 방에서 나서자 방 밖에는 촌로를 비롯, 버드네에서 제일 처음 시술했던 간을 상하고 암까지 앓는 농부의 아비도 함께 서서 허준이 요기하기를 간청했다.

허준은 그 회생의 가망이 없는 멀잖아 죽을 것이 확실한 암 환자의 안내를 받아 아랫집 안방으로 향했다.

그 방은 버드네라는 가난뱅이들의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게 촛불이 휘황했고 밥상은 산나물, 들나물을 무치고 볶은 것과 무우쪽과 감자를 버무린 닭도리탕이 푸짐했다. 그리고 하얀 쌀밥을 두 그릇이나 떠담아 놓았다. 아마도 온 마을이 추렴해서 이 밥상을 차렸으리라. 허준이 그 인정을 지그시 밥알과 함께 삼키는데 촌로가 손자 같은 그 허준에게 두 손을 받들어 술을 쳤다.

"달이 이미 중천이에유. 정말 너무 오래 계시게 해서 ... 은혜가 백골난망올시다."

은혜를 끼친 적도 없다. 내가 원하여 머문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낫울 수 있다는 그 자신감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다. 밥그릇을 거의 다 비워갈 때 촌로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던 중년 사내가 술이 담긴 호리병과 서너 주먹짜리 삼베 보자기를 들고 들어왔다.

"뭡니까?"

"이건 가시다 드실 요기로다 주먹밥을 담은 것이구 술은 가시다 목이나 축이십시오. 그리고 이걸랑 웃고 받아주시구요 ..."

촌로가 내민 건 실꾸러미에 꿴 땡전 10여 닢이었다.

"워낙 없이 사는 것들이다본께 더 마련은 못했습니다마는 아직 한양까지의 일정이 많으시니 하룻밤 주막에 유하실 적에 술상이라도 하나 청하시라구선 ..."

허준이 미소했다.

"제가 쓸 노자는 내가 가진 것이 있고 그리고 전 지금 안 떠납니다."

좌중이 놀라서 그 허준을 쳐다보았다.

"기일이 사흘인가밖에 아니 남으셨다면서 오늘 아니 가시다니요?"

"혹 한숨 주무시고 내일 새벽에 떠나시려면 저희 집으로 건너가시지요. 그리고 그 돈은 돈이랄 것도 없는 잔돈 몇 푼올시다마는 거두어 주시구요."

"돈 얘기는 마십시오. 한양엔 가야 합니다마는 몇 사람 병자는 두어 시각 더 차도를 지켜봐야 할 병이라서 조금만 더 머물다 가려 합니다."

숭늉을 비운 허준은 마당으로 나와 남 먼저 쫓아나온 농부에게 세숫물을 청했다.

피곤이 잠시 물러가고 잠도 달아난 듯했다.

허준은 다시 윗집 위병을 앓는 젊은이와 각기를 앓으며 다리가 불편한 소년과 침을 다시 놓아야 할 서너 명 병자들을 찾아 건너갔다. 문득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연이틀의 밤샘과 신경의 집중 그리고 잠시의 휴식도 없었던 과로가 납덩이처럼 그의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날이 새면 취재에 남은 여유는 이틀 반- 한양까지 260. 하루 130리씩 이틀 안에 달려 아직 한나절이 남았다고 허준은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마침내 허준은 돌아을 때 다시 들러 차도를 보아주마는 약속을 하고 버드네를 뒤로 했다.

촌로와 마을의 남정네와 노파들이 새벽길을 따라오며 '장원급제'를 빌어주었고 사흘 밤을 샌 허준의 눈알은 모래가 박힌 듯이 따가웠으나 다리에는 새 기운이 솟고 있었다.

'이틀이면 너끈히 가 닿을 수 있어.'

허준은 버드네의 마을이 어둠속에 묻혀지자 돌덩이 같은 두 다리를 끌며 지름길로 길 안내를 자청한 처음 주막집에서부터 쫓아온 떠꺼머리 총각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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