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야인
1
"끙 ..." 하고 임오근이가 또 한 번 신음소리를 틀어냈다.
동창이 이미 훤했다.
여느 날 같으면 이미 병사를 한 바퀴 돌아보며 몇 사람 남아 있는 병자들의 용태를 간심할 시각이었다. 그러나 임오근은 목침을 세웠다 뉘었다 하며 자리에 누운 채였다.
'허준 ...'
자기의 소임이 아님에도 으레 새벽같이 나타나는 그의 모습에 병자들도 이젠 자기나 도지보다 허준에게 신뢰의 정을 보이는 것을 임오근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임오근은 병자의 간밤의 병세를 묻고 그 대화 중에도 병자의 등을 쓸어주는 따위 '수작'은 않았다.
허준이 약재 창고로부터 병사의 근무를 명받고부터 시작된 그 풍경을 보고 임오근은 아차 했다.
병자에 대한 그 작은 성의는 기실 병자에 대한 인심을 얻는다기보담 유의태의 눈에 들 첩경이라는 것을 왜 몰랐단 말인가 ...
하나 그걸 깨달은 뒤에도 임오근은 허준의 흉내를 내지 않았다. 허준의 그런 행동을 임오근은 동료 선배들을 젖혀놓고 저 혼자 유의태의 눈에 들고자 일부러 꾸미는 간기처럼 보았다.
그러나 허준이 병부를 적는 솜씨며 때로 드러나는 지력이 자기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허준의 존재는 그에게 조석으로 불편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상이 어젯밤 기어이 눈앞에 나타나고 만 것이다.
자기가 허준에 비해 8년 선배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허준보다 8년을 더 보고 배워왔다는 그 자신감이 여지없이 무너진 하루였다.
그의 소망--
그의 절절한 소망--
영남 일대에 관향을 둔 내노라 하는 명문거족들로부터 보내오는 사인교를 타고 유유히 불려 다니는 유의태와 같은 도도한 명의까지는 못 되더라도 제 고향 김해 그 부내에서는 임오근이란 이름 하나로 존경받는 의원이 되리라는 오직 그 소원만으로 유의태의 문하에서 14년을 버텨온 터였다.
그리고 내심 유의태의 의발을 전수받을 사람은 스승의 아들인 도지 이외에는 자기뿐이노라 믿고 있었는데 그의 자부심과 소망은 끝장난 것이다.
도지의 방에 의원이 되려는 자가 기필코 보아야 할 그 요긴한 서책들이 쌓여 있는 건 너나없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읽고 쓰는 데 자신이 없는 영달이나 꺽새 같은 자들은 일찌감치 포기를 했고 허준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 책을 빌려보는 건 부산포와 자기뿐이었었다.
그러나 그 부산포는 유의태의 독서량이기도 한 그 도지의 방대한 책을 다 뒤적일 의지는 애초부터 없어 보였다.
그는 그까짓 것 모두 꿰어봤자 잡병 따위로 분주하기만 할 뿐이라며 돈이 벌리는 부인병과 소아병 쪽을 주로 뒤적이고 필요한 대목들만 베끼는 쪽이었다. 하나 그 부산포가 장쇠들과 작당, 병자의 가족들에게 잔돈푼을 뜯어쓰는 꼴을 보자 임오근은 일찌감치 부산포는 자기의 경쟁대열에서 제해에 놨었다.
"한데, 저 허준."
더듬거리기는 했으나 그 허준이 어젯밤 스승 유의태의 벼락치기 질문의 대목대목에 대답해간 내용들은 내가 후계자노라 여기던 임오근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깨뜨린 완벽한 대답들이었다.
'허준이 띠자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어!'
임오근은 신음 대신 어금니를 악물었다. 허준에 대한 오기로 꼬박 밤을 지샌 그 임오근의 핏발 선 눈에 파란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의안군?" 하고 아침상을 물린 뒤부터 주안상을 명해 들인 방에서 유의태가 안광익에게 물었다.
"금상 전하의 셋째아들이지. 저경궁 인빈 김씨의 소생이시고."
"한데?"
"벗님 같으면 어쩌겠소? 농액(고름)이 골수에 스미고 있는데 환부를 째지 않고 어찌해."
"그래서?"
"한데 환자의 지체가 금지옥엽인 왕자이고 보니 송학규 이자가 차일피일 미루고 감춘 게지."
"왕자의 병을 감추어?"
"왕자의 병을 떠맡는다 함이 어찌 아무에게나 좀처럼 있는 기횐가. 다행히 병을 낫우면 정하고 제 이름이 드러날 기횐데 그래서 아직 덜 곪았다 아직 덜 곪았다 하며 늦춘 게야."
"좀 알겠구먼 ... 한데 그 송학규란 뉜가?"
"양예수의 졸개지."
"졸개라? 하긴 전조 때부터 어의를 맡아 내려오는 양예수가 제 사람 곳곳에 박아놨음 직하지. 핫핫, 그래서?"
"하루 불려갔어."
"송학규란 자에게?"
"그잔 나보다 후학일세. 양예수가 부른다기에 갔어."
"양예수와는 사이가 그만하던가?"
"웬걸, 그자와 나하곤 또 얘기가 있지. 그 얘기부터 할까? 핫핫, 언젠가 정명 공주(선조의 첫째 딸)가 미령(병환이라는 뜻)할 제 저희가 받아온 처방이 내 눈에는 아니야. 그렇다고 이의를 달다가는 어의 양예수의 권위를 내리깎는 꼴이라 말없이 받아들고 와서 내 나름대로의 약재를 섞었네."
"내의원에서 의정한 이외의 약재를 쓰는 게 발각되면 목이 다섯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렇다고 나도 내 의술이 있는데 남이 지시하는 방법대로 하긴 싫었어. 그래서 내 고집대로 했어. 마침 약국(왕실 전용 약재 출납소)에 나와 친한 인물이 있어서 다른 약을 타냈네."
" ..."
"해서 공주의 병을 낫웠는데 약재를 변동한 사실이 양예수의 귀에 들어가 다리가 이 꼴로 병신이 됐었지."
"그 짓을 들키고도 다리 병신 된 것만으로 끝났다면 그건 고마운 일이로군."
"일이 밖으로 새나가 시끄러워지거나 내의원 제조(내의원을 총관리하는 명예직으로 좌의정이나 우의정 등이 겸임)의 귀에 들어가면 터져야 할 내의원 치부가 한둘인가? 그래서 쉬쉬 내의원 입들을 봉해놓고는 내 다리에다가 실컷 분풀이를 하더구만. 헛헛."
"한데 처음 얘기한 왕자의 농부는 어찌 됐고?"
"쨌네."
"터뜨리지 않고 쨌단 말인가."
"터뜨리는 구멍으로야 뼈까지 볼 수 없으니."
"그렇기로 왕실에서 왕자의 몸에 칼을 대게 할 리는 만무일 터인데?"
"잘 아는구먼. 핫핫 ..."
방안의 얘기를 들으며 방밖에 서 있는 허준의 등줄기에 또 한 번 소름이 돋아나고 있었다.
방안에서 유의태가 탄식 같기도 하고 감동 같기도 한 한숨과 함께 다시 묻는 소리가 났다.
"겨우 돌 지난 핏덩이에게 칼을 대 ..."
"난 빨리 낫는 법을 택했어. 하여 독한 고름을 다 짜내고 뼈에 침식한 사기를 긁어냈지. 한데 누구의 기별을 들었는지 양예수들이 벼락같이 닥치더구먼, 송학규 등 나부랭이 서너 명을 달고서."
"흠."
"알고 보니 내 약함을 들고 졸졸 따라다니던 부봉사(내의원 정9품직) 녀석도 나를 감시하는 양예수의 눈이고 귀였던 걸 몰랐던 거지. 해서 그 길로 오라에 묶어 금부로 넘기더구먼. 의국에서 의정하지 않은 방법인데 자의로 왕자의 몸에 칼을 댄 대역부도라는 거지."
"대역부도?"
"나도 그동안 인물이 컸던 게지. 제법 내 성명 위에 대역부도의 죄목도 써보고. 깔깔깔 ..."
허준의 입속에 침이 마르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안광익의 웃음소리가 계속 났다.
유의태의 한숨 쉬는 소리가 났다.
안광익에 대한 애정인 듯했다.
"그래, 금부에까지 끌려간 사람이 어찌 빠져나왔나?"
"금부에 가둬둔 이틀 후에 꺼내주더구만. 왕자의 환부가 씻은 듯이 나은 덕분이지. 태어나면서부터 그 태독으로 인해 내내 눕지도 앉지도 못하던 생명이 말일세."
유의태가 안광익이 비운 잔에 술을 쳤다.
"하나 내의원에 돌아온즉 송학규 그자가 기어이 내 시술을 문제 삼고 시끄럽게 구니 왕자의 보모로 있던 저 여자도 책임을 추궁받게 됐지. 밤이나 낮이나 왕자의 안부를 책임지는 것이 저 여자의 소임이었거든."
"보모라면 그렇겠지."
"그러나 저 여잔 내 시술을 믿고 눈감았던 걸세. 그 이전에 사사로이 저 여자의 생가 조모의 위급한 병을 낫게 해준 일이 있는데 그 이후론 저 여잔 내 시술을 믿는 여자가 돼 있었네."
"그래서 그 뒤?"
"그러나 대궐이란 데는 말이 많은 데거든. 병을 낫운 공은 가상하나 칼을 쓴 행동은 용서가 안 된다는 거지. 특히 저 여자는 내 의술을 믿는다 안 믿는다 판단할 자리에 있지 않고 오로지 왕자를 보호할 의무만 있는데 임의로 광인의 칼 앞에 왕자를 내놓은 죄는 벗어날 수 없다는 걸세. 결국 저 여잔 약을 먹었어. 제 목숨 끊어 죽음으로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 ..."
"하나 서로 인연이 되려는 건지 약국 한직으로 내쫓긴 내 귀에 저 여자의 소문이 들렸어. 해서 그길로 달려가 저승길 절반이나 갔던 여잘 살린 후 그 밤으로 업고 나온 걸세."
"마치 남의 말 하듯 하는군."
"팔자에 없는 대궐 안에 살면서 느낀 게 있었지. 대궐에는 사람 수에 비해서 의원이 너무 많다는 걸, 그리고 탕약이나 지시하고 침이나 놓는 술보다 부술에 뜻이 있는 나 같은 존잰 대궐 안에 있어 봤자다 싶고. 하나 나오고 보니 내 몸 의탁할 데라곤 그대밖에 없다 싶었네."
"그건 잘했네. 하나 앞으로 저 여자와는 어쩔 셈인가? 궁실에 속했던 여잘 마음 놓고 데리고 살도록 세상이 너그럽진 않을 터인데."
"여기 술이 다했는걸."
친구 유의태의 걱정을 남의 말처럼 흘려넘기고 안광익은 자기 잔에 기울이던 빈 술병을 흔들었다.
"밖에 뉜고."
유의태가 문득 드리워진 발 너머로 누구의 기척을 느낀 듯 물었다.
발 너머로 나타난 허준이 허리를 굽혔다.
2
허준이 안채에서 술을 받아 사랑으로 돌아오자 유의태와 안광익의 화제는 허준이 처음 듣는 낯선 인물들의 근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는 놀랍게도 어의 누구누구니 당상의원이니 또 내의원이니 하는 허준의 흥미를 돋우는 소리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허준이 다시 마루 끝으로 다가가 섰다.
병사 쪽에서는 밤새 몰려왔을 병자들이 유의태의 회진을 기다릴 시각이었고 허준도 나가 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하나 허준은 안광익의 화제에 막힘없이 대꾸하고 있는 유의태가 오늘따라 또 궁금했다.
안광익이 나타나면서 부쩍 내의원에 관한 화제가 오르내렸고 안광익은 그곳에 몸을 담다 온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도대체 이 벽지의 유의태는 그 내의원의 우두머리들인 어의며 당상의원들과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름 아래 존칭 하나 붙임이 없이 함부로 이름들을 내뱉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의라면 누군가.
임금의 시탕을 책임진 사람이요 내의원에서도 의술에 정통함과 그 권능에 있어 최고의 인물일 터이다.
또 내의원이란 곳은 어떤 곳인가.
위로는 임금과 그에 딸린 왕족들의 건강을 지키고 심병을 맡은 막중한 소임의 관청일뿐더러 그곳에 모여 있는 인물들 또한 뉜가.
나라 안에서 저마다 내노라 하는 의원들이 다시 수백 대 일의 경쟁을 거쳐 발탁된 응시 분야(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에서는 나라 안 최고의 솜씨를 지닌 인물들의 집단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에게조차 유의태의 말투는 싸늘했다.
방안의 두 사람의 말소리가 멀어갔고 잠시 허준의 뇌리에 도지에게 들은 내의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팔도의 젊은 의원들이 너나없이 한 번쯤 꿈을 꾸어보는 내의원 취재 시험. 그 경쟁의 수에서 그리고 치열함의 양상에서 반가의 자제들의 과거에의 등방보다 훨씬 어렵다는 건, 과거란 나라 안 양반 가문들로 하여금 출세 의욕을 북돋워 주고 국정에 참여할 새 인재를 끊임없이 발탁한다는 그런 정책적인 배려가 깔려있는 것이나 중인계급과 상것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원취재란 그런 정책적인 배려와는 거리가 멀다.
왕가의 시탕을 전담하는 게 목적인 만큼 도대체 많은 인원이 필요 없는 것이다.
내의원 전체를 지휘 감독하는 도제조, 제조, 부제조를 각 1명씩 임명하고 있으나 부제조는 승지(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소임)가 자동적으로 맡는 것이고 도제조니 제조도 대신 속에서 명예직으로 겸하는 것이요, 그 밑에 실무직인 첨정(종4품), 판관(종5품), 주부(종6품)를 1명씩 두었고 어의라 해도 대개 이 정도의 품계를 받는데, 그것도 천출들에게 오품 이상의 관직이 주어질 적마다 조정은 으레 무엄한 관직이라고 반대가 시끄럽기 마련이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의술로 뽑힌 실무자로서의 3명이고 그 아래로 직장(종7품) 3명, 봉사(종8품) 2명, 부봉사(정7품) 2명, 그리고 벼슬의 최말단직인 참봉(종9품) 1명 등 8명, 도합 11명에다 따로 혜민서(특히 가난한 백성들의 질병을 돌보는 곳으로 요즘의 국립의료원 같은 곳)에 배치하는 인원이 직장, 봉사, 의학훈도(정9품) 각 1명씩과 참봉 4명 등 7명, 모두 합해 18명에 여의라 불리우는 의녀들 22명이 궐내의 상궁, 나인 들을 대상으로 가벼운 침 정도를 놓고 혹은 간병의 소임을 맡아 적시에 배치되는 것이 내의원의 인적 구성인 것이다.
그러니 의녀들을 제한 18명의 내의원 직속 의원들은 그 자리에 버티고 끈질기기가 호두알 같고 칡뿌리 같아서 임금이나 왕족이 죽어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는 때나 나라 안에 돌림병이 크게 번져 의원들이 산지사방으로 불려다니며 동분서주할 적이 아니고서는 좀체 충원이 없다. 하나 그 하늘의 별따기처럼이나 어려운 내의원 의원에 취재 끝에 발탁이 되면 그건 곧 미천한 출신들로서는 꿈도 못 꾸어볼 입신출세의 보장이기도 했으니, 양반의 큰 갓만 보면 눈 내리깔고 허리부터 휘어야 하는 미천한 신분인 의원들에게 취재에 합격했다는 첩지만 거머쥐는 날이면 평생을 두고 팔도 어디를 가도 성궁 임금을 시탕했다는 의술의 높은 경지를 인정받아 가난한 병자 따위 상대 않고 명문거족들에게 불려 다니는 영화와 명예의 보장을 받는 것이다.
그 내의원을 우습게 보는 투의 유의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의술의 본 모습이란 결코 화려한 것은 아닌데 시속은 의업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알거나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어."
"앞뒤가 안 맞는 소리로세."
안광익의 목소리에 조소가 어렸다.
"의원의 본 모습이 그런 것이거든 그대는 왜 자식에게는 내의원에 보내는 공부를 시키고 있나?"
"그 아이가 무슨 얘기를 하던가?"
"안 봐도 알지. 어줍잖이 양반자제네 말투 흉내 내는 것하며 제 태어난 출신도 모르고 먹물깨나 먹고 나면 공연스레 한양 쪽을 향해 발돋움하는 것, 가업을 잇겠다는 그런 정성스러운 아이 같진 않네."
"잘 봤군."
유의태의 말이 남의 얘기하듯 퉁명스러웠다.
술잔을 옮기는 소리와 함께 안광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왜 자식의 고삐를 휘어잡지 않나? 혹 재주가 있다 보거든 병들어도 아픈 체 못 하고 끙끙거리는 불쌍한 것들을 보라 하게."
허준이 귀를 기울였으나 유의태의 대답은 들리지 않고 술잔 채우는 소리만 났다. 안광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난 애초 내의원 따윈 목표하지 않았네. 내가 한번 그 취재에 응한 건 시하 의술의 경지가 어느 정돈지 내 재주로 부딪쳐보고 싶었고 더 큰 소원은 혹 관의 위광을 업으면 옥사에서 죽어나가는 송장들이나 헤쳐볼 그런 특권을 누릴까 해서였어."
유의태의 침묵이 길었다.
"하나 그것도 여의치 않은 걸 안 후 진작 뛰쳐나오려고 하고 있었지. 내가 정진하고자 하는 건 부술인데 그걸 써먹지 못할 바에야 게딱지 같은 내의원의 의원이란 명예에 연연하여 허송세월하기 싫었거든. 차라리 민간에 돌아다니며 수의 노릇이나 하는 것이 백번 낫지."
"하나 그건 나이 먹은 우리들의 경지지 젊은 아이들의 안목은 아닐세."
" ..."
"아마 내 집이 의업을 가업으로 하는 건 내 대에서 끝나겠지."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자식이 제법 재주는 있네, 총기도 있고. 하나 심지가 모자라."
당당한 유의태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나는 걸 허준이 긴장을 느끼며 듣고 있었다.
그건 밤새워 아들의 공부를 손잡아주던 유의태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그건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었던 오뇌를 지닌 유의태의 진짜 모습 같았다.
"내가 바라는 그릇은 아니야. 그리고 그건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
"작은 재주거든 작은 재주대로 다듬어주는 게지. 백성들인야 작은 재주일지라도 감지덕지 의지해 마지않지만 대궐에는 손재주 많은 자들이 많아. 굳이 자네 자식까지 보내지 않아도."
"그 말도 했네. 내의원의 됨됨이에 관해서도 일러줬고. "
"양예수와의 관계도 얘기해줬던가?"
"그건 왜?"
양예수란 어의라는 직위와 함께 처음부터 화제의 중심에 오르내린 이름이었다.
"그건 나와 양예수와의 관계지 자식에까지 일러줄 이윤 없어."
"어째서."
"이미 아득한 옛날 얘길세. 20년 전 ..."
"그댄 그렇게 치부하나 몰라도 양예수는 그댈 잊지 않았어. 어떻게 잊을 수 있나. 그때도 그는 명종대왕의 어의였었네. 내의원에 취재 있을 적마다 시관을 도맡아 하는 것도 요즘과 마찬가지. 한데 그댄 그 양예수를 어쨌나? 더구나 만인 환시중에."
유의태의 대답이 없었다.
"만인 환시중은 아닐지라도 차라리 만인 환시중보다 더한 장소였지. 그의 수하 관원들 모두 보는 앞에서 닭의 몸통 속에 아홉 개 침을 박아가는 재주겨루기를 하며 양예수를 어쨌나."
"소소한 일은 잊었어."
"그댄 양예수의 입을 열게 하고자 앙다문 어의의 입을 부젓가락으로 지졌지."
"부젓가락은 있지도 않았어."
"그럼 그건 비수였나!"
"젊은 날의 객기였을 뿐."
"그때 그대는 양예수를 죽였던 걸세. 아홉 개의 침으로 닭을 죽였듯이 그가 지금 살아남아 있는 건 겉껍데기일 뿐."
허준의 목구멍에 뜨거운 침이 넘어갔다.
그가 처음 듣는 스승 유의태의 과거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3
방안에서는 유의태의 과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시 그대가 그 자리에 참여했던 터도 아니요 부젓가락이니 비수니 하는 건 부풀린 얘기로세."
"물론 나도 소문으로만 알았던 얘기지. 하나 언젠가 그대를 다시 만나면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직접 듣고 싶었거든. 당시 이미 명종임금의 어의요 내의원의 실력자이던 그를 무명의 시골 의원이 덜미를 잡아 무릎을 꿇린 얘기가 어찌 흔한 얘기리."
"젊은 날의 객기였을 뿐."
"그대에게는 객기였을지라도 그대의 그 객기 앞에 서야 했던 양예수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어. 의원에게 있어 재주 겨루기란 뭔가? 차라리 그때 그댄 아홉 개의 침을 닭의 몸뚱이에 꽂은 게 아니라 양예수의 심장에 꽂은 걸세. 그 아홉 개의 침을 심장에 꽂은 채 양예수는 지금 살아 있는 걸세. 어찌 그가 유의태를 잊을 수 있겠나! 함에도 그의 휘하에 자식을 보낼 수 있나?"
"자식이 택하는 길이라 막고 싶지 않네. 자식에게는 자식의 길이 있겠지."
"물론 난 그때 그 자리에 없었어. 그러나 경향 간에 퍼졌던 그 희한한 소문을 확인하고자 그대들이 내기 장소로 택했던 그 기생집을 찾아가 죽은 닭과 산 닭을 직접 보았지. 아홉 침을 꽂은 채 그대가 택한 닭은 반년째 성하게 살고 있었어."
"반년씩이나 소문을 쫓아다니다니. 그댄 그때서부터 꽤나 호사가였던 게군."
"내가 알고자 했던 건 유의태란 인물의 재주에 질투를 느꼈다는 게 옳은 얘기가 되겠지. 나도 누구 못지않게 생물의 몸속을 들여다본 쪽이지만 유의태는 어디서 그런 재주를 익혔는가 하고 그것이 무시로 궁금했네."
"생물에 대한 부술은 그대가 나보다 위겠지."
"공연한 칭찬은 원치 않네."
"그댄 구침으로 맹호를 잡은 솜씨가 아닌가."
"그건 기지지 의술은 아닐세."
그 안광익의 말소리가 들리자 허준은 방안을 향해 눈길을 들었다.
침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그 믿기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얘기의 주인공 또한 바로 안광익 이 사람의 소행이었단 말인가.
우선 그 얘기부터 하자면 허준이 그 장렬한 얘기를 들은 건 부산포가 유의태의 문하를 떠나기 얼마 전의 겨울밤 어느 날이었다.
그때 유의태에게 삼적대사라 불리는 그 중이 찾아왔을 때였는데 우연히 두 사람의 시중에 끼여든 부산포가 돌아와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를 마구 흥분해서 떠들었던 것이다.
넓은 세상이긴 하나 세상에는 침으로 호랑이를 잡은 굉장한 의원도 있다는 얘기를 ...
제자들을 흥분시킨 부산포가 들어온 그때의 얘긴즉 이랬다.
스승 유의태와 안면이 있다는 그 의원이 지난해 자기의 고향인 정선으로 가기 위해 영월땅 운적산 밑 외룡리라는 마을에 이르니 온마을이 줄초상이 나 있었다 한다.
영문을 물으니 근자 운적산에 황소만한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처음 이 맹수는 길가는 행인을 해치다가 이어 동구 밖 밭 가는 소들을 해치더니 이젠 밤이면 마을로 뛰어들어 잠자는 사람까지도 해친다는 것이었다.
하여 인근의 난다 하는 사냥꾼과 관에서 파송된 맹수잡이들이 곳곳에서 길목을 지켰는데 오늘 새벽 다시 마을로 뛰어들어 사냥꾼 둘을 물어 죽이고 잠자는 노파와 어린아이를 물어갔는데 벌써 마을의 여러 집이 이 호환을 당했다는 호소였다.
이에 그 의원이 하룻밤 잠자리를 청한 후 내 방법대로 호랑이를 잡아 보겠노라며 마을에 남아 있는 닭을 한 마리 구해다가 자기가 지니고 있던 침을 닭비 온몸에 찔러넣어 마을 밖 우물가에 황구 두 마리와 매어놓으니 과연 다음 날 호랑이가 나타나 새벽 울음을 우는 닭과 개들을 한입에 물어 삼킨 후 산으로 돌아갔는데 곧이어 구침을 삼킨 호랑이가 고통을 못 이겨 연사흘을 울부짖으며 산속을 뛰다가 마침내 죽었다는 얘기였다.
이에 관에서 그 호피를 벗겨 나라에 바치고 그 가상한 의원의 행적을 찾았으나 친상을 당하여 갈 길이 바쁘노라며 정선 땅으로 떠나버렸다는 얘기였다.
그때 부산포의 얘기를 들은 제자들은 그 아흡 침의 길이와 생김새를 저마다 떠들며 천하의 맹수도 뱃속에 아흡 침을 삼켜서야 살 리 없다는 등 그런 큰일을 해냈으면 상을 타도 큰 상을 탈 텐데 뒤도 안 돌아보고 더구나 호랑이 가죽이 얼마나 비싼 건데 그것도 거들떠보지 않고 가버렸다는 건 아무래도 보통 의원이 아니라 산신령이 아니냐는 등 구름 잡는 얘기로 입에 거품을 물며 떠들어댔었다.
'하나 ...'
허준의 가슴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건 산신령도 아니었고 바로 저 사람 안광익이었다.'
밖에 있는 허준의 뜨거운 관심에 상관없이 역시 구침과 관련 있는 유의태의 과거 얘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구침으로 호랑이를 잡은 건 잠시 나의 기지였을 뿐이나 세상에서 나 못지않게 침을 잘 쓰는 유의태란 인물에 대해 보통 궁금한 게 아니었지. 해서 난 그대와 양예수의 내기에 입회한 인물을 수소문했네. 하나 내의원의 권위에 온통 똥물을 뒤집어씌운 그 사건을 덮어버리고자 만나본 내의원 의원마다 서로 쉬쉬하며 입을 열지 않더군. 결국 소문의 자초지종을 들은 건 내가 내의원에 들어간 후 민세에게서지. 민세는 당시 양예수와 함께 내의원 시관이었다면서?"
"참 민세에게 사람을 보냈네, 그대도 왔으니 모처럼 셋이 만나 어디 바람이나 쐬러 갈 겸 하여."
안광익의 말투가 집요했다. 그 속엔 본인의 입에서 직접 당시의 사건을 확인하려는 강한 경쟁심도 배어 있었다.
유의태는 대꾸가 없었고 술이 두어 순배 더 돌아가는 소리가 난 후 이윽고 유의태가 직접 그 당시 사건의 전모와 자신이 침술에 기울게 된 지난 얘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대로 의업을 물려온 집안이었으나 유의태의 윗대는 비전된 유가고약을 만들어 행상을 겸해 팔며 그저 인근 고을에서나 알아줄 정도의 미미한 의원들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유의태는 5대 독자로 태어났는데 부조의 가업을 무심코 전수 받은 그런 평범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가 만든 고약이 자기의 상처도 제대로 못 낫구는 걸 알자 비전된 고약 제조의 방법을 개선코자 노력하면서 연구를 거듭, 점차 의술의 깊은 경지로 빠져들어 갔다. 이때 특히 그가 심취한 건 침술이었고 그의 나이 삼십을 넘을 때는 유가고약집 아들이라기보다 젊고 용한 침술사 유의태로 제법 그 이름이 영남 일대에 퍼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유의태는 밤낮없는 정진을 거듭하며 보다 많은 의서와 중국에서 흘러드는 새로운 의서를 구해보고자 한양 그 왕복 1천6백여 리를 매년 오가도록 열성이었다.
그런 그가 서른하나가 되던 이십 년 전 유의태는 그의 윗대에서는 감히 꿈도 못 꾸던 내의원 취재에 응시코자 한양으로 뛰쳐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유의태는 자기 이름이 빠져 있는 그 방을 눈을 씻고 보고 또 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십 가지의 각 병명 아래 각각 취해야 할 점혈의 부위를 적고 각 침의 효용에 의한 천심과 보사를 기재하는 일이었다.
유의태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그때 그의 눈앞을 지나간 건 늙은 아비의 초췌한 모습이었다.
누대 벼슬의 벼자도 모르고 살아온 아비는 감히 아들이 취재에 붙어서 관복을 입고 왕족의 시탕을 받드는 내의원 의원이 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한 일대 사건이었기에 떠나올 제 수십 리 길을 따라오며 "네가 되겠느냐. 네가 되겠느냐."며 안타까운 기대를 걸던 것이었다.
그러나 ...
그 자신만만 써넣은 해답에도 불구, 유의태는 자기가 떨어진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는 함께 낙방한 자들의 입에서, 시관 중에도 어의를 겸한 양예수가 다른 분야는 몰라도 자신의 주소임인 침술 분야에 대해서는 경쟁자가 될 만한 인물을 일부러 떨군다는 쑥덕거림이 들려왔다.
그러나 유의태는 과장에서 자기의 시험지가 시관의 실수로 어딘가 떨어뜨린 게 아닌가 생각하고 시관을 찾아갔다. 그 시관이 지금은 사문에 출가했지만 한때 혜민서 의학훈도였던 김민세였다.
김민세는 시험지가 중도에 분실되는 따위 자기들의 실수를 인정치 않았다. 그러면 자기의 시험지가 제대로 접수되었는지를 확인해달라는 유의태의 청도 거절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정답자가 많을 때 누구를 쁩고 누가 떨어지는 데 있어 재량은 판관 양예수에게 있노라고 했다. 이에 참다못한 유의태가 그러면 시장에 나도는 양예수의 더러운 소문이 사실이냐고 따지고 들었을 때였다.
그 유의태의 등 뒤에 바로 양예수의 일행이 서 있었다. 그러자 그가 또 누군지도 알 리 없는 유의태는 오히려 관원이 나타난 걸 다행으로 여기며 이번에 뽑힌 자와 자기의 시험지를 함께 내 눈앞에 보여주든가 양예수를 만나 소문의 진부를 확인하겠다고 떠들었다. 한마디로 내칠 듯하던 양예수는 그도 또한 자기를 향한 과장의 수군댐을 아는 듯했다. 양예수가 물었다.
"내가 양예수니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유의태의 눈 속에 적의가 불타올랐다.
"내 이름은 유의태요."
4
스스로 내가 양예수라 밝힌 후 그 시험지를 보여줄 이유도 또 과장에서 떠드는 낙방한 자들의 불평불만을 다 귀담아들을 까닭도 없으나 너희 같은 자들에게 내 명예가 운위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며 손가락질을 했던 것이다.
"항차 너 따위 촌구석 의원 놈이 침술의 어디까지를 알기에 감히 내의원 문전을 소란치 구는 게냐."
"내 침술이 어디까지인가는 과장에 내민 내가 쓴 내용을 보면 알 터가 아니오."
"네 정도 재주는 삼태기로 건질 만큼 많더니라."
그 양예수의 말에,
"내가 묻고 있는 건 나으리의 재주도 그 삼태기로 건질 만큼 많은 재주에 속하는지 알고 싶소."
이것이 유의태의 대거리였다.
그 무례한 말에 양예수를 수행하던 내의인 관원들이 팔을 걷어붙이는데 오히려 그들을 말린 건 양예수였다.
"유의태라 ... 암, 네가 써낸 걸 보았지."
"긴 얘기가 필요 없소. 내가 원하는 건 나으리 또한 침술의 대가라니 우리 두 사람 구침지희로 상하수를 겨루길 원하오이다."
"구침지희?"
일동의 안색에서 핏기가 가셔가고 있었다. 마주 지켜보는 유의태와 양예수의 눈 속에 살기가 감돌았다.
"내가 듣고 있던 바와는 그 대목이 틀리는군. 그럼 구침지희를 먼저 꺼낸 건 양예수가 아니고 그대가 먼저였단 말인가?"
"그랬어."
과거의 얘기여서인지 방 안 유의태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안광익이 '끄응'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서른하나에 감히 구침지희를 꺼낼 정도라니 역시 그대가 나보다 몇 년 빨랐어. 난 그 나잇살 땐 온갖 미물에서부터 목숨 붙은 가축들의 배나 째보는 따위로 세월을 보냈는데, 아무튼 마저 듣세. 계속하게."
" ..."
"내가 구침을 닭의 몸통에 무리 없이 꽂게 된 건 서른대여섯 되어서였어, 마저 얘기를 들어보자니까."
구침지희.
아홉 개의 침술이 펼치는 재주
그건 의원으로서는 목숨을 건 내기에 해당하는 무서운 재주 겨루기였다. 그 연원은 후한 시대의 명의 화타에게서 비롯되는데 화타는 조제를 알 수 없는 마불산이라는 마취제를 만들어 이를 술에 타 병자에게 먹인 후 개복과 뇌수술까지 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이 화타에게 묻어 있는 전설의 또 하나가 구침지희와 오금희로서 오금희란 화타가 오금(호, 비, 원, 태, 조)의 자세와 동작을 본떠 창안한 독특한 체조인데 이를 실행한 제자들은 나이 90세에 이르도록 청년 같은 기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 오금희와 함께 구침지희는 살아 있는 닭의 몸 안에 아흡 개의 각종 침을 침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찔러넣되 닭띠 아파하거나 죽어서는 안 되는 고도의 침술 경지를 제자들에게 시범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그건 닭의 내장과 근육 등 각 기능을 거울 들여다보듯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경지로서 다섯 침까지가 범의, 여섯 침이 교의, 일곱 침이 명의로 이 명의의 경지에 이르러야 제자들로 하여금 병자를 보게 했으며, 여덟 번째 침은 대의, 마지막 아홉 침을 다 쓸 수 있으면 이미 침 하나로 모든 병을 다 볼 수 있는 태의라 하는 것이다.
하나 화타의 제자들이 침술연마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 방법은 오히려 항간의 재주없는 자들까지도 자기의 침술을 과대선전하고자 걸핏하면 닭에게 침을 놓는 재주 겨루기로 타락했고 특히 화타보다 한 시대 앞이었던 창공(본명이 순우의로 신선계 의술의 대가)의 의술을 좇는 쪽과는 서로 의 명예를 걸어 목숨을 건 내기의 수단으로 타락한 채 남아 있는 무서운 놀이이기도 했다.
그날 양예수와 유의태는 서로의 의원으로서의 명예를 건 그 구침지희를 위해 남산골 어느 기방에 마주 앉았다.
현직이 어의요 관직이 내의원 판관인 양예수는 자신만만 내의원 관원들을 5, 6명 대동했고 유의태는 혼자였다.
그 두 사람 앞에서 입회자 겸 증인 삼아 양예수를 수행해온 관원이 들고 온 닭 두 마리가 다리가 묶인 채 요란히 날개를 퍼덕였다.
"닭을 먼저 골라잡되 내기에 지면 네가 내놓는 것은 무엇이냐?"
"내 눈 하나를 파내주리라."
"그까짓 술안주거리도 못 되는 네 눈을 뽑아서 어디다 쓰라는 게냐. 하나."
양예수가 나직이 웃었다.
"네가 걸어온 싸움이니 마다는 않으리라."
"대신!"
"말해라."
"내가 이기면 나도 원할 게 있소."
"그럴 테지."
"내 버선코에 이마를 조아리고 내 이름을 세 번 부르시오. 그리고 술 한상 차려내오."
"좋고말고."
양예수가 웃었고 수행자들도, "해변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하며 마음 놓고 웃어댔다.
"방에 불 더 밝혀라!"
양예수가 위엄 담아 일렀고 굵은 황초의 촛불이 각자의 손맡에 하나씩 놓여졌다.
그 앞에서 유의태와 양예수가 각자의 침갑을 꺼내 손맡에 놓았다.
침통의 겉포장은 서로가 달라도 내용의 침은 서로가 꼭같은 아홉 가지 침이 반짝였다.
영문을 모르는 닭들이 그 긴장된 침묵 속에서 구구거리며 퍼득였다.
"시작하거라."
양예수가 명령했고.
유의태가 사양 않고 첫 번째 참침을 집었다. 길이가 한 치 여섯 푼, 끝이 날카롭고 본디는 사람의 양기를 사하는 데 쓰는 침이었다.
촛불에 반짝이며 그 첫 침은 닭의 가슴팍에 찔러 넣어졌다.
"후에 일일이 검증해볼 것이다. 쓰다듬어보아 침 머리가 만져지면 아니 되리."
양예수의 수행자가 으름장을 놓았으나 유의태의 눈은 초로지 양예수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나으리의 차례오이다."
유의태의 재촉이 있기 전에 양예수도 역시 참침을 닭의 등줄기에 깊숙이 꽂았다.
그리고 턱으로 유의태를 가리켰다.
"두 번째!"
유의태 역시 재촉이 오기 전에 두 번째 원침을 집어 닭의 등줄기에 꽂았다.
역시 길이가 한 치 여섯 푼, 끝이 달걀형으로 뭉툭한 침이었다.
양예수도 뒤따라 원침을 닭의 다리 쪽에 찔러넣었다.
셋째 침은 시침으로 길이가 세 치 반, 끝이 좁쌀알처럼 생겨 맥기가 허한 데 쓰나 인체에는 그 끝만 사용할 뿐인 긴 침이었다.
양예수와 유의태가 다른 날개 밑을 찔러넣었다.
아직 닭들은 어느 쪽도 고통을 모르고 묶인 다리만 불편해 퍼득거렸다. 수행자들의 숨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았고 그 긴장된 방안에 기생들이 보기만도 끔찍하다는 듯이 감히 두 사람을 바로 보지 못했다.
네 번째 봉침은 한 치 여섯 푼, 날이 세모꼴로 생긴 고질을 터주는 데 쓰는 침이었다.
아직 닭들이 무사했다.
"다음 지침."
하고 유의태가 일명 파침이라고도 부르는 길이 네 치에 너비가 두 푼의 인간의 고름 상처를 쨀 때 쓰는 커다란 침을 닭의 등줄기에 내리꽂아 갔다.
양예수의 지침도 유의태와 역순으로 닭을 찔러 갔다.
"원리침!"
한 치 여섯 푼 짧고 가늘기가 털과 같은 침이 다시 두 마리의 닭의 몸통 속으로 찔려 들어갔다.
수행자의 누군가 거푸 목젖을 울렸고 기생들의 목이 자라목처럼 움츠러들고 있었다.
"어디서 배운 솜씬지 제법이로고."
양예수가 뇌까렸으나 유의태의 대꾸는 조소였다.
"이번에는 호침."
하고 유의태가 길이 세 치 여섯 푼짜리 끝이 모기 주둥이처럼 날카로운 침을 겨누어 들었다.
인체라면 경로를 고르고 통비를 달랠 때 쓰는 침이었다.
그 호침 또한 닭의 몸뚱이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유의태는 보았다.
양예수의 이마에 땀이 배어나오고 있는 것을 ...
"순차대로 서로 겨끔내기로 하리까 내 먼저 다 마치리까?"
유의태가 말했고 양예수가 호침을 든 손은 정지한 채 그 유의태를 보고 있었다. 증오에 찬 눈이었다. 그 이마에도 땀이 번쩍이도록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내 차례가 아니올시다."
" ... 뉘에게 배웠더냐."
양예수의 신음 같은 소리를 유의태가 일축했다.
"객담은 하고 싶지 않소이다. 그걸 찌르고도 아직 두 개가 남았소."
그랬다.
아직 남은 두 개는 장침과 대침으로 각각 무려 일곱 치와 네 치짜리 긴 것으로 뼛속을 긁어내는 커다란 침들이었다.
"찌르시오."
유의태가 재촉했고 수행원이 소리쳤다.
"그만들 하지."
"찌르란 말이오!"
유의태가 가차 없이 양예수를 쏘아보았다.
"왜 못 찌르시오. 설마 닭이 불쌍해서 못 찌른다는 말은 않겠지요."
"아무리 미물이기로 왜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러고서야 고슴도치지 닭입니까."
기생이 끼어들었을 때 양예수의 호침이 닭의 몸뚱이를 가로질러 내려갔다. 닭이 마구 퍼득였다.
"여덟 번째 장침이외다."
유의태가 자기의 장침을 양예수의 눈앞에 내보였고 양예수의 손은 자기의 장침을 못 집고 있었다.
5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문간의 기생들 뒤로 집안에 술상 심부름하는 중노미놈하며 부엌데기들과 이웃간에서도 몰려온 여러 얼굴들이 방문 밖에 가득히 웅성거리며 살기 어린 방안의 광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례를 바꾸올지?"
양예수의 이마의 진땀을 건너보며 유의태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호침까지의 경지의 의원이라면 나으리의 말대로 조선팔도 안에 삼태기로 건질 만큼 많을 거외다. 하나 나라 안 첫째 솜씨라면 마저 둘을 찔러야겠지요. 찔러도 닭이 아파하지 않는 곳, 이걸 몸 안에 찔린 채로 닭이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어디서 어디로 찔러야 하오니까?"
양예수의 핏기가 가셨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모르시오? 바로 여기외다."
유의태의 장침이 닭의 꼬리 쪽에서 깊숙이 몸통 속으로 박혀갔다.
순간 양예수가 "건방진!" 하며 신음 같은 원한을 뱉더니 자기의 남은 장침과 대침을 닭의 몸통에 꽂았다.
그 양예수의 닭이 퍼덕거릴 뿐 방안은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유의태가 마지막 아홉 번째 자기의 대침을 집어 닭의 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 유의태의 닭도 마구 화닥닥거렸다.
이어 유의태가 양예수의 얼굴을 향한 채 기생들에게 소리쳤다.
"비키거라, 모두!"
마루와 마당에서 얼굴과 고개를 들이밀고 숨을 삼키고 있던 구경꾼들이 화닥닥 비켜나고 물러났다.
그 허리와 다리 사이로 마당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는 이가 없는 속에서 양예수는 꼼짝도 않았고 서슬에 겁먹은 기생이 화당탕 방문을 열었다.
유의태가 자기의 닭을 집어 묶은 새끼를 풀어내고 방문 밖으로 내던졌다.
그 닭이 마루 위에 떨어졌다가 날개를 활짝 펴 퍼덕이며 마당으로 날았다가 요란히 구구거리며 도망쳐갔다.
사람들이 탄성을 내는 소리가 일제히 났다.
유의태가 양예수를 바라보았다.
"나으리도 던져보시지요."
양예수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 양예수를 수행해 있던 김민세가 대신 양예수의 닭을 마당으로 던졌다.
그러나 철썩 던져진 양예수의 닭은 눈 내리는 마당에서 두어 번 마지막 날개를 퍼덕이고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위로 어디로 사라졌던 유의태의 닭이 구구거리며 오가는 것이 보였다.
침묵을 깨고 양예수가,
"의원이 아니라 닭 백정을 하던 놈이로고." 했고,
"가시지요."
하고 수행자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튕겨 일어난 유의태가 그 방문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약속 이행하오!"
"비켜라!"
두엇 수행자가 가로막고 나섰고 유의태도 마주 소리쳤다.
"일구이언은 이부지자라 그 말뜻쯤은 아는 차림들이오만."
"무에 어째!"
그중 성급해 보이는 관원이 눈을 치떴을 때였다.
순간 양예수가 지금까지의 이 일은 모두 잠시의 장난이었던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암, 약조를 했지, 핫핫. 자네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던가?"
"그렇소. 유의태란 이름을, 유의태는 조선 제일의 명의노라고."
"하지 백 번이고 해주지, 헛헛. 유의태는 조선 제일의 명의네, 됐는가?"
"두 번 더!"
"비키거라!"
"두 번 더 하시오."
순간 농담으로 자존심을 버티려던 양예수의 얼굴이 유의태의 눈빛 앞에서 참담하게 바뀌어 갔다.
"두 번 더."
유의태가 다시 가차 없이 요구했고 수행자가 삿대질로 가로막고 나섰다.
"중갓도 간신히 쓴 주제에 언감 큰갓 쓴 종5품 관원을 욕보일 셈이냐."
"장부의 약속인데 갓의 크고 작은 것이 무슨 상관이오. 두 번 더 하시오. 어서!"
이윽고 양예수의 입이 독약을 삼키듯이 유의태의 요구를 입밖으로 밀어냈다.
"영남 산청 사는 유의태는 조선 제일의 명의외다."
"마저 한 번."
살기 어린 양예수의 눈이 유의태에게 박히더니 돌연 유의태를 밀어붙이며 방 밖으로 나섰다.
유의태가 그 뒤통수에 웃었다.
"술상 내시오. 그것도 약속이었은즉슨 ! 핫핫핫."
수행원이 기생의 발치에 한 뼘이나 될 돈꿰미를 던졌다.
"차려내거라."
이어 그 말과 함께 누군가의 주먹이 웃고 있는 유의태의 얼굴을 쳤다.
유의태가 기생들의 발치에 나뒹굴었고 몇 사람이 그 유의태를 밟고 걷어찼다. 그러나 유의태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비명이 아니고 가가대소였다. 김민세가 동패들의 폭력을 떼어놓고 씩씩거리는 그들을 데리고 사라진 후에도 유의태의 웃음소리는 계속됐다.
교만한 웃음이었다. 젊은 날 자신의 재주를 과신하고 물불을 모르는 좀은 패기도 있는.
"그래서?"
하고 안광익의 묻는 소리가 났다. 유의태의 20년 전 과거 얘기는 끝난 듯했다.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와 한양 쪽엔 발길도 않았어. 그리고 그걸 오히려 지금은 다행이다 여기네."
"출세의 꿈이 꺾였는데도 다행이다?"
"그날 밤중에 민세가 찾아와 우린 친구가 됐지. 민세와 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어."
"친구 한 명과 출세와 바꿨단 얘긴가, 핫핫."
"암튼."
"그래 암튼?"
"그 사건은 내게도 여러 가지 큰 교훈을 주었지. 내 행동이 지나쳤다는 스스로의 반성도 있었고 왜 굳이 조선 제일이어야 했는지 그런 허세에 매달린 내가 자다가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좌우간 그런 여러 가지 느낌과 깨달음이 오히려 내가 그 뒤로도 의업에 더 정진한 계기가 됐지."
" ..."
"만일 그때 내의원에 붙어 제법 궁내에서 알려지는 재주로 풀렸다면 난 그걸로 더 소원이 없는 한 교만한 내의원 의원으로 끝났을 테니까."
이때 병사 쪽에서 황급히 들어오는 도지의 모습이 보였고 그가 허준을 보자 의아해서 소리쳤다.
"아니 병사에선 그토록 찾았는데 예서 뭘 하고 있었던가."
"안 그래도 막 건너가려던 차오만."
"병사의 바쁜 일은 끝났네. 그보다 집에서 아이가 달려와 그댈 찾는 눈치던걸."
"아이라, 내 자식이 말씀이오?"
"그렇네. 보아하니 눈물 콧물 흘린 모습이던데 나가 보게."
허준이 중문을 나서는 등 뒤에서 도지가 사랑 앞에 서서 "아버님, 회진 시간올시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겸이 녀석은 달려오며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무릎팍이 깨지고 앞섶도 흙투성이였다.
영문을 물으니 할머니가 떡목판 이고 나가고 한참 지났을 때 방죽골 우진사댁 사람들이 몰려와 어머니를 잡아갔다는 얘기였다.
"잡아가다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울음 그치고 찬찬히 말을 해."
녀석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우진사집에서 엊그제 바느질품 거리를 어머니가 받아왔는데 그 집에서 내준 옷감만 들고 온 아내에게 오늘 그 집 하인 놈과 여자들이 몰려와 그 옷감 속에 함께 싸두었던 비단 한 감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었고 아내가 그런 걸 가져온 적이 없다 하니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집도 비었고 우리들 밥을 차려주고 뒤따라간다카이까 막 어머니한테 도둑년이라고 욕을 퍼부으면서 데려갔습니다."
"도둑년?"
"내 귀로 들었습니다. 그래 지가 어머니하고 같이 갔더니 그 집 안방 할무이 방 앞으로 끌려가선 몸종애가 어머니 머리카락을 잡고 ..."
허준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집으로 돌아가 있어."
그 말을 내뱉고 허준은 머리끄덩이를 꺼들려 있다는 방죽골 우진사집을 향해 달렸다.
그 입에서 참기 어려운 짐승 같은 신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6
달려온 허준이 우진사의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높다란 담 안에서 여자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렸다.
그 닦달질이 이미 한참 동안 계속된 듯 골목 안에는 마을 아낙들이 여기저기 몰려서서 숙덕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허준은 주먹이 깨어져라 거푸 대문을 쳐댔다. 곧이어 대문 안에서 인기척이 달려와 대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건 기골이 장대한 젊은 하인과 키가 큰 늙은 하인이었다.
"이 댁이 감히 뉘 댁인 줄 알고 이토록 방자하게 소란을 떠는 게냐!"
"나 유의원댁에 있는 허준이란 사람이오!"
"한데!"
집안에서 또 한 번 여자의 까무라치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졌다. 허준의 말씨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내 집사람이 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 불려와 있는지 영문을 알고자 왔소."
"영문?"
젊은 하인이 우진사의 권세를 업고 눈을 치떴고 오히려 늙은 쪽이 더 나섰다.
"누군지 알겠다. 안 그래도 우리가 너를 데리러 달려가려던 길이다. 썩 들어와, 이자야!"
허준 정도는 마음 놓고 해라를 해도 된다는 듯이 늙은 하인이 대뜸 허준의 어깻죽지를 잡아채어 대문 안으로 끌어들였고 젊은 녀석이 허준의 퇴로를 차단할 듯이 대문을 닫아걸었다.
그때 무릎팍이 깨지면서 달려온 겸이가 아버지를 거푸 불러대며 닫힌 대문을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집안은 내외도 없었다.
상대가 미천한 출신이라고 보아서인지 큰사랑 앞 수석이 배치된 마당의 광경은 대물림을 한 낡은 형틀에 나이깨나 든 여종이 두 팔을 잡아묶인 채 엎드려져 난장을 맞으며 연신 비명을 내지르는 중이었고 아내 또한 머리끄덩이를 휘둘리고 저고리 앞섶도 터져나간 참담한 몰골인 채 댓돌 아래 내꿇려 늙은 진사의 고함소리를 듣고 있었다.
허준은 눈이 뒤집혔다. 대뜸 우진사의 앞으로 뛰쳐나가 "영문을 대오!" 소리친 순간 형틀 주위에 늘어섰던 남은 하인들이 그 허준의 덜미를 잡아 나꿔 꿇렸고 반항하는 허준에게 쏟아진 것 뭇매였다. 아내가 비명을 질렀고 그 소란은 우진사의 호통소리에야 그쳤다.
허준 일가에게 씌워진 혐의는 늙은 마누라가 저고리 한 감짜리 비단의 행방이었다.
특히 그동안 허준 일가가 살림이 쪼들릴 적마다 아끼던 옷가지를 하나씩 내다 판 것이 소문으로 나 있어 천한 것들의 집안에서 그런 상질의 옷가지가 나왔다는 것까지 의심받아 아내가 삯바느질 일감을 받으러 올 때 사람 빈틈을 타 싸들고 갔다고 눈으로 본 듯이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당시의 상황 설명 따위는 귀담아듣기는커녕 기어이 아내를 앞장세우고 하인들을 딸려 집안 뒤짐을 보내는 것이 아예 아랫것들은 모두 도둑놈으로 치부하는 말투가 역연했다.
어쩌면 그건 또 소과 초장(진사의 자격)으로 끝나 벼슬길이 막힌 포한을 이럴 때 신분상 무저항일 수밖에 없는 아랫것들에게 마치 동헌 교의 위에 높다라니 앉아 진짜 죄인을 다스리는 양 권세의 쾌감을 즐기는 그런 모습이기도 했다.
허준은 아내의 말에 맞추어 집 안에서 나온 옷가지는 그동안 더러 병을 보아준 이들로부터 사례받은 것이노라 애써 강변하고 신분을 바꾸고자 이 산청 땅에까지 흘러온 과거사는 감추었으나 분하고 억울한 감정까지는 감추지 못하여 눈빛이 양반에게 무엄하다는 고함과 함께 코피가 터지고 입술도 터지고 말았다.
집 뒤짐을 하러 간 하인들이 허탕을 치고 다시 아내를 끌고 돌아온 뒤 결국 이 사건은 매질을 견디다 못한 몸종이 훔친 비단 자락을 찬광 천장에 숨겼노라 자백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한껏 매질과 수모를 당하고 중문을 나서는 허준 부부에게 우진사도 그 늙은 아내도 한 마디 사과의 말이 없었다.
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며 밤 깊은 우진사집 대문간을 나서자 골목 어귀에 숙영이를 데리고 서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며느리를 쓸어안았고 오히려 겸이 녀석이 피칠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옷자락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고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녀석은 혼자 내내 울먹였다.
그리고 비록 흑백은 가려졌으나 집뒤짐을 당한 도둑 누명이었음에서 이후 마을 사람들은 허준 일가를 경원했다. 자기의 아들딸이 허준의 자식들과 얼려 노는 걸 보면 큰일이나 날 듯이 자기 아이들을 부르고 또 그 손을 잡아 끌고 가곤 했다.
'잊고 있었어 ...'
허준은 그 마을 인심을 원망하기보다는 자기의 미천한 신분에 대한 한을 새삼 어금니로 지그시 되씹었다.
허준 일가에게 씌워진 그 누명은 의원에도 퍼졌고 옳다구나 하고 소문을 더 찧고 까분 건 영달, 꺽새였고, 임오근 또한 허준에게 닥친 이 억울한 사건에 관해 위로의 말이 없었다.
허준은 한 가지 깨달은 느낌이었다. 자기를 둘러싼 벽은 잘난 양반네 만이 아니고 같이 미천한 신세로 희로애락을 함께 해야 할 인간들도 기회만 있으면 서로 물고 뜯는 각박한 인심임을 ... 그런 밖에서의 분위기를 그녀 또한 마음에서 겪고 있는지 아내는 남편이 있는 날이면 애써 웃음을 만들고 집안 분위기를 추스르려 했으나 아내의 그런 눈물겨운 노력을 알면서도 허준은 점차 더 과묵한 인간으로 바뀌어갔다. 가슴속에 끓는 건 세상에 대한 적의뿐이었다. 아니 허준보다 더 말수가 적어진 건 아들 겸이었다.
그리고 그 겸이가 어느 날 아침 아비가 애써 써준 천자문을 아궁이 속에 태워버린 걸 알았다.
그 어린것의 어린것답지 않은 결심에 허준의 피가 또 한 번 부글거렸으나 허준은 그 얘기를 전하는 아내의 젖은 눈을 향해 살기 어린 눈을 치뜨다가 그만두었다.
울어서 해결날 일이 아니잖은가.
미천한 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양반이 주는 수모 따위 아들 겸이도 조만간 겪어야 했던 사건이요 아내 또한 자기 같은 상것과 혼인한 이상 각오하고 있던 일이 아니던가.
"내버려두오!"
사건 후 엿새 만에 허준이 아내에게 내뱉은 유일한 한마디였다.
겸이에게는 행동의 변화도 왔다.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한 녀석은 걸핏하면 의원에 나타났다. 그 의원 역시 제 말동무가 없는데도 때도 없이 병사 마당에 슬며시 나타나서는 더러 아버지의 눈길과 마주치면 맥없는 웃음을 씩 웃고 비척거렸다.
그러나 허준은 아들의 그런 변화에 애써 아는 체하거나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더러 점심상을 받을 때 좀 전에 병사 문간에 서성이던 아들이 저 밖 어디에서 혼자 자치기라도 하며 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으나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녀석도 배고픈 걸 참는 것쯤 이력이 나 있었고 의원에 와서 밥이나 얻어먹는 따위 재미를 붙여주고 싶진 않아서였다.
녀석의 외로움이나 나름대로의 마음고생 속에서 스스로 무엇을 찾아낼지 지켜보는 일뿐 잠시 입에 발린 위로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싶은 것이다.
하나 더러는 밤늦도록 병사 귀퉁이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아들의 조그만 모습을 발견하고 함께 집에 돌아올 때면 갑자기 말이 많아져서 종일 보고 들은 것들을 밑도 끝도 없이 떠드는 아들을 향해 허준은 혼자 코끝이 울 때가 있었다.
허준은 아비로서 아들에게 자신 있게 보여줄 그 무엇도 자기에게 없다는 것에 가슴이 저렸다.
그 겸이에게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겨났다. 늘 할머니와 함께 자는 것으로 알고 있던 녀석이 어느 날부턴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재빨리 제 베개를 집어들고 뒤꼍 아버지의 방으로 건너오는 것이었다.
그건 지난날 양반댁에 끌려가 매 맞고 돌아온 아버지가 아직도 동정이 가는지 근래 한껏 말이 없어진 아버지의 침묵 속에서 어린 제 고민의 어떤 일체감을 느껴서 하는 행동인지는 알 수 없되, 그 방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방이노라고 할머니가 꾸짖어도 녀석은 건너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런 밤 허준은 그 잠든 아들을 가슴에 품고 이 아들에게만은 신분에의 질곡을 벗어나게 해줄 수 없을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곤 했다.
하나 그건 아무리 간절한 염원이요 자신의 목숨하고라도 서슴없이 바꿔줄 소망이되 날이 밝으면 한 가닥 희망도 남지 않는 덧없는 꿈임을 허준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위덩이 같은 절망이었다.
'혼인만 하지 않았다면 ... 이 아비밖에 쳐다볼 줄 모르는 저 자식들만 없다면 ... 그리고 어머님만 아니 계셨던들 ...'
속에 끓는 이 한을 굳이 삭이려 애쓸 것 없이 이 시답잖은 세상 팽개치고 변돌석이가 가 있는 섬으로라도 건너가서 한세월 고기나 잡으며 보내고 싶다는 밑도 끝도 없는 탄식이 새벽 집을 떠나 의원으로 향하는 허준의 가슴속에 자꾸만 쌓이고 있었다.
그 어느 날이었다.
유의태의 방으로 불려간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방안에는 병사 쪽에서 상화의 안내를 받아 건너온 큰갓 쓴 중년의 양반 두 사람이 유의태와 수인사를 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창녕 성대감 댁이라니요?"
"그 댁 마님이 중병이라 하시니 가서 용태를 살피고 오너라."
"소인이 말씀이오니까?"
"병세를 들으니 중풍이다. 거기에 상응하는 약재를 갖추어 이분들과 함께 떠나."
"아니 유의원."
하고 두 사람 중 연장자인 사십 대의 큰갓이 안색을 바꾸며 유의태의 말을 제지했다.
"아버님께선 꼭 그대를 데려오도록 특별히 당부하시어 우리가 달려왔는데 대체 이잔 뉘란 말이오!"
"믿어볼 만한 아이외다."
7
유의태가 허준은 돌아보지도 않고 두 선비에게 말했다.
'믿어볼 만한 아이!'
허준의 목안에서 침이 말라 갔다.
"보아하니 아직 이자는 신출내기가 아니오!"
작은 선비의 따지듯한 말에,
"굳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야 마음이 놓인단 말씀이오? 우선 이 아일 보내어 구완토록 한 후 4, 5일 후엔 내 스스로 건너가리다."
"4, 5일 후에 떠날 걸 왜 지금은 못 가오."
"병사에 당장 내가 없으면 아니 되는 중한 병자가 여럿 있소이다. 가면 여러 날 걸릴 노정이니 우선 이 아이와 함께 떠나오."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지 않는가."
연장자인 선비가 다시 엄한 눈을 치떴으나 그들을 무시한 채 유의태가 허준에게 명했다.
"병증일랑 가면서 세세히 들어도 되리라. 채비 차려 속히 떠나거라."
허준이 아직도 믿기지 아니하여 다시 물었다. 자기도 모를 긴장에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소인 혼자 가도 되오니까?"
"떠나거라."
유의태의 대답은 짧은 그 말뿐이었다.
아버지의 의원으로부터 숨이 턱에 차서 집으로 달려 들어온 겸이는 사립짝 안으로 뛰어들자 거푸 '어무이'와 '할무이'를 불러댔다. 지붕 위에 박이 하얗게 익어가는 추색이 무르익은 허준의 집은 쓰르라미 소리가 함빡 어우러진 채 빨간 잠자리만 마당의 빨랫줄 위에 매달려 졸고 있었다.
안방을 열어젖히고 부엌문까지 열어젖히고 나서야 겸이는 할머니가 아직 떡장사 행상에서 돌아오지 않은 걸 깨달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에 계실 터이었다. 방죽골 우진사댁 사건 이후 어머니는 애써 출타를 삼가는 눈치셨고 제가 아침밥을 걷어 먹고 사립짝을 나설 때 의원엘랑 가서 어정거리지 말고 집에서 동생 숙영이의 소꿉동무라도 해주고 놀아라 하실 때 오늘은 마을 어디에 품앗이라도 나가실 그럴 눈친 아니셨던 것이다. 겸이는 부엌을 지나 뒤꼍으로 내달았다.
한시바삐 알려야 했다. 일곱 살 어린 그의 마음에도 이건 일대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병자들 뒤치다꺼리에 영일이 없던 아버지가 오늘따라 큰갓 쓴 양반이 인도하는 속에 더구나 척 가마까지 타시고 원행을 떠나는 모습은 아들도 생전 처음 본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뒤꼍에도 담장 대신 박힌 감나무에 땡감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을 뿐 어머니도 숙영이도 보이지 않았다.
"어무이! 어무이요!"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안타까이 외치며 겸이는 다시 앞마당으로 내달았다. 그 사립짝 안으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어머니와 그 치마꼬리를 붙잡은 여동생 숙영이가 들어서고 있었다.
허준이 유의태의 영을 받아 병자를 보러 창령으로 떠난 사실에 긴장한 건 허준의 가족만이 아니고 꺽새, 영달 들이 더했다.
스승의 회진이 끝나고 급한 병자의 처치도 끝난 터라 오늘쯤 주막거리 다홍이년네 술동이가 익었을 거라며 병사의 시답잖은 일거리를 상화와 병문이들에게 떠맡기고 주막으로 몰려갔던 영달, 꺽새가 새 술에 불콰하니 콧등이 익어서 돌아온 저녁나절 녀석들은 허준의 소식을 듣고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놀란 건 또 그들뿐이 아니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들을 겸 진주 부내에 나갔다가 연초에 내의원 취재가 있다는 고대해 마지않던 소식을 듣고 기고만장해서 돌아오던 도지와 임오근도 허준의 소식을 들은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도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고 임오근의 눈은 금세 질시로 인해 충혈되었다.
우리가 모두 의원을 비웠기 때문에 허준이 대신 간 게 아닌가 하고 영달이가 자존심 하나라도 건질 듯이 사태를 풀이했으나 임오근은 병사 큰 마루에 주저앉아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도지 또한 다른 병자도 아닌 중풍 환자를 아버지가 허준에게 맡겼다는 사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중풍처럼 무거운 병자는 오늘까지 아버지가 자기에게 허락한 적이 없었는데 왜 허준이는 쁩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제자들이 저마다 스승의 잘못된 조치를 떠드는 소리는 밤늦게야 돌아온 아들을 맞으러 나왔던 오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대뜸 그 곱지 않은 눈빛은 상화에게 다가섰다.
"네가 자초지종 아는 얼굴인데 분명히 말해라. 허준인지 그 아일 보낸 것이 스승님이 떠나기 앞서 약제나 먼저 들려 보낸 그런 것이냐 정녕 병자를 직접 보아도 좋다는 뜻으로 보낸 것이냐!"
오씨의 서슬에 어린 상화가 선뜻 대답을 못 했고 도지가 대신 내뱉었다.
"그냥 작은 심부름이라면 여직 상화 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셨지 언제 허준을 동행합디까."
"그렇다면 더더구나 그렇지, 그런 대가집 병자를 왜 너를 젖혀두고 그놈을 보내. 난 그게 궁금한 게야."
"궁금할 것 하나도 없소. 허준이 그 사람의 솜씨가 자식인 낼 솜씨보다 윗길이라고 본 탓이 아니고 뭘라고."
도지가 딴 때 없이 되알지게 내뱉고 휭 안으로 사라졌다.
오씨의 얼굴이 벌개졌고 영달이가 그 오씨를 꼬드겼다.
"스승님이 무언가 귀신이 씐 거올시다. 아무리 재주로 말하면 허준이 그놈이 서방님의 위에 설 수 있습니까. 또 서방님이 아니면 그다음 차례야 저 오근이 형님도 있는 터에."
"시끄럽다!"
오씨가 소리쳤고 곧 덧붙였다.
"안 그래도 내 허준인가 하는 그놈이 내 집서 배운 재주를 가지고 우리 몰래 병자를 보느니 어쩌니 소문날 때부터 바로 보지 않았는데."
말끝에 오씨가 급히 안으로 향했다. 도지가 사라진 안채 쪽이 아니고 큰사랑 쪽이었다.
제자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임오근 혼자 그대로 앉아서 한숨과 함께 지금쯤 가마에 흔들리며 창녕으로 가고 있을 허준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가 생애를 두고 소원으로 삼는 광경이었다.
'허준, 그자만 아니었다면 내가 가는 길이었어.'
무섭게 앙다문 임오근의 입에서 신음 같은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코 고는 안광익 곁에서 책을 보고 있던 유의태가 시선을 들었다.
중문 여는 소리가 요란하다고 느낀 순간 다가온 목소리는 아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방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섰다.
남편의 의원으로서의 재능 외에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여자였다. 이 남자와 만난 불행을 아들의 장성에만 위로를 삼는 그 아내의 모진 눈을 유의태 또한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왜 왔는지는 알고 있네. 하나 손이 있으니 잠시 후 내 건너가리다."
대답 대신 오씨가 남편 앞에 주저앉았다.
"허준인지 그 아이가 당신에게 무어요?"
"무어라니?"
"그놈을 창녕 모모한 댁으로 떠나보낸 걸 다 알고 있소."
"그게 무슨 감출 일이던가, 알고 맡고 하게.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려 들지 말고 건너가오."
"쓸데없는 일? 자식의 장래에 얽힌 일인데 쓸데없는 일이란 말이오?"
" ..."
"왜 말 못하시오. 자식도 의원 아니오. 자식이 의원이람 아비란 사람이 의당 일부러 잘 낫는 병자를 골라주어 그 집 젊은 의원 병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도록 해줘야 옳고 여기저기 대가집일랑 일부러라도 기횔 만들어 내 자식을 보내어 안면을 넓혀주고 이름이 드러나도록 해줘야 옳지."
"부인 말이 일리가 있네."
여전히 나직한 유의태의 대꾸에 참다못한 오씨가 악을 썼다.
"그놈 떠나보내고 나서 지금 와서 일리가 있다니 무슨 일이오. 나도 다 들었소. 지금 허준이가 간 집이 창녕에서는 모모한 대감댁이라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오."
" ...?"
"그런 아까운 데를 자식을 젖혀놓고 다른 것들을 보낸 사유를 말하란 말이오."
"돌아가시오."
"대답해요."
"중풍의 혈행을 다스리는 건 침이오. 그리고 그 침을 잡는 법은 도지의 분야가 아니고."
"어째요?"
"또 대가집 대가집 하나 그 대가집이란 일이 성공이 됐을 때는 사례가 후한 법이나 반면 실패했을 땐 그 추궁도 매운 법이외다."
오씨의 눈이 껌벅였다.
"아니 그럼?"
"그럼 이라니?"
"옳지 그럼, 허준이 그놈을 이 기회에 아예 죄를 씌워 내쫓을 셈으로?"
"죄를 씌운다는 건 또 무슨 소린가?"
"그놈은 애초부터 우리 집을 배반했던 놈 아니오."
유의태가 실소했다.
"죽도록 좋은 일만 골라서 해도 못다 하도록 사람의 일생이 짧은데 어찌 뻗어나는 싹을 짓밟는 악행을 하리."
오씨가 다시 그 남편을 노려보았으나 유의태는 더 이상 아내를 돌아보지 않았다.
병자가 꽤나 위독한 듯 허준의 가마가 창녕현의 서쪽 시오리에 상거한 물슬천 나루에 이르자 성대감댁 하인 서넛이 횃불을 들고 대기하고 있다가 얼른 가마채를 대신 잡아 교대했다.
동행하는 선비들도 병자의 안부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건지 이미 밤이 이슥한 시간인데도 요기 얘기를 꺼내는 이도 없이 가마는 다시 달려 허준이 현내의 성대감댁 솟을대문 앞에 당도했을 때는 밤 이경이나 된 시간인데도 노마님의 병을 고칠 의원이 온다는 기별을 받은 성대감댁 권속들이 등불을 들고 허준의 가마를 맞이했다. 한눈에 명문거족의 집임을 알 수 있었다.
8
3백여 호 자잘한 현내의 민가를 굽어보듯 동내리 높은 언덕에 자리한 아흔아홉 칸 유독 기와로 덮인 거대한 장원 같은 규모가 종루를 세운 저 아래 관아의 규모에 배는 되어 보였다.
기다란 행랑을 지나 불을 대낮같이 밝힌 중문 안에 멎자 기다리고 있던 늙은 선비가 약제함을 안고 내리는 허준에게 첫 마디로 명령했다.
"따라오게. 우선 대감께 인사 올리게."
허준은 늙은 선비를 따라 노소의 하인배들이 줄줄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중문을 통과했다.
허준이 수석이 청아하게 어우러진 정원을 지나 큰사랑 앞에 이르자 다시 문중의 노소 선비들이 십여 명 대청마루에 미리 나와 서 있는 속에 오랜 관록이 몸에 밴 혈색 좋은 오십대 후반의 남자가 얼핏 보기에도 성대감인 듯한데 거동이 침착하고 내려보는 눈빛이 서늘하도록 차가웠다.
허준이 허리를 굽히자, "원로에 수고했네. 한데 듣기보다 젊구먼." 했다.
나직하나 위엄을 지닌 음성이었다.
"이 사람은 유의태가 아니옵고 그 문도라 하옵니다."
"무어라?"
순간 잠시 부드럽던 성대감의 눈꼬리가 치켜 올랐다.
"문도?"
"예."
동행해온 아들의 대답에 겹쳐 쩌렁하고 성대감의 노성이 터졌다.
"유의태가 아니라면 그깐 의원이 어디에는 없어서 산음까지 사람이 갔더란 말이냐."
순식간에 주위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다시 가서 권하되 내 영이라 이르고 즉시 일어설 기색이 아니거든 잡아끌어서라도 대령시키라밖에!"
바라보는 허준 따위에는 더 눈길도 않고 함께 다녀온 두 아들에게 혀를 찼다.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허준을 중문에서 안내해온 백발의 선비도, 그밖에 분명 성대감보다는 연상일 문중의 늙은 선비들도 성대감의 비위를 거슬릴 용기는 없는 듯했다. 결국 고개를 떨구고 있던 허준을 동행해온 큰아들이 나서서 조신하게 아뢰었다.
"유의태의 말이 우선 이자로 하여금 잠시 어머님의 수발을 들게 하노라면 수일 내로 ..."
"병자의 용태가 조석으로 악화하거늘 수일이라니! 제 어미의 병이거늘 어찌 이리 무심한고! 즉시 밤을 도와 달려가 그잘 데려오란 말이다!"
말끝에 사랑으로 사라지는 성대감을 향해 허준이 소리쳤다.
"저를 아니 받아주신다면 물러갈 뿐이오나 저 또한 의원올시다!"
성대감이 돌아서자 중문서 안내해온 백발의 선비가 허준에게 눈을 부릅떴다.
"이자가 언감생심, 이 어른이 뉘신 줄 알고 함부로 언성을 높이느냐?".
"대감께서 어떤 분이시건 병은 의원이 고치는 것이지 벼슬 높은 위세로 고치는 것은 아니오이다."
"어째?"
"이자가 감히."
둘러선 문중의 선비들이 그제야 눈을 치떴다.
대청 위의 성대감이 몇 발 허준 쪽으로 향해왔다.
"너 지금 무어라 했느냐?"
" ... 병은 이름 드러난 의원만이 고치는 건 아니올시다."
"그 말은 네 재주가 네 스승의 의술을 능가한단 말이렷다."
허준이 심호흡했다.
"소인 또한 의원이라는 말씀을 올렸을 뿐 스승님을 욕보이는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성대감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하오면 돌아가오리다."
허리를 굽혀보인 허준이 문간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 등 뒤에 성대감의 소리가 났다.
"게 서라!"
돌아보니 조소는 사라졌으나 그 눈빛은 아직 차가웠다.
" ..."
"어서 다가서라지 않느냐. 이자가 고개를 뻣뻣이 영 예를 모르는 자로고."
안내해온 백발의 선비가 거푸 소리쳤다.
"어서 허리를 굽혀라."
"난 이 집에 병을 고치러 온 것이지 굴신하러 온 건 아니올시다."
순간 주위가 앗 하고 그 허준을 보며 숨을 삼켰다.
"다가오너라."
성대감의 한마디가 다시 떨어졌다.
허준이 그 성대감 앞으로 다가섰다.
꿰뚫듯한 성대감의 눈빛이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허준도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허준 자신도 몰랐다.
대감(종2품 이상의 문무관)이라 불리는 양반 중에서도 양반인 그 권세 어린 사람 앞에 사회적으로 하등직업인 의원 따위가 왜 굴신을 않는단 말인가.
굴신은 커녕 죽으라면 죽는 시늉인들 마다할 수 없으리라.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허준의 눈길이 발치로 꺾였다.
그 허준의 모습 위로 둘러선 큰갓 쓴 양반들의 위세 어린 눈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허준의 입속이 메말라갔다.
오면서 허준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자기에게 주어진 이번 기회의 뜻을 생각했었다. 7년 동안 갈고 배운 정성을 이 기회에 펼쳐 스승 유의태의 기대에 보답하리라는 그 기대가 한마디로 내쳐진 데 대한 비분의 한마디였는지도 몰랐다.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그 절망의 한 마디 ...
하나 다음 순간 성대감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의 명령이었다.
"병자를 보여주어라."
그 성대감을 바라보던 허준의 고개가 다시 떨어졌다.
의료함을 들고 있는 그 허준의 손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결국 허준의 반항 어린 한마디는 대감의 위엄에 도전한 한마디가 아니라 허준이 스스로의 운명에 도전한 한마디로 바뀐 것이었다. 문병 온 마님들과 아낙들이 새로 나타난 젊은 의원에 대해 숙덕거렸다.
호사스러운 치장으로 메운 방안에 성대감의 아내 정경부인 심씨가 누워 있었다. 오래 기동을 못하여 몸이 부은 듯했고 얼굴에 땀이 배어있지 않았다면 시체로 착각하리만큼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푸른 기가 돌았다.
그리고 동자조차 가까스로 굴리는 그 몸은 오른쪽이 반신불수였다. 허준은 병자를 본 순간 오면서 상상했던 상태에 비해 병세가 더 침중할 걸 깨달았다.
그 암담해진 허준을 향해 성대감 이하 가족들의 눈길이 따갑게 꽂힌 채 주시했다.
특히 어머니의 주야의 간병을 맡은 혼전의 막내딸이 남달리 수척한 모습으로 그 묵연히 앉아 움직이지 않는 허준을 향해 눈물을 떨어뜨렸다.
"전신에서 몸 반쪽을 쪼개어놓은 듯이 오른쪽은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네."
하고 산청서 함께 온 큰아들이 새삼 자기 어머니의 병세를 설명했다.
"한다 하는 의원들을 모두 끌어대 보았네만 며칠 용태를 보다가 모두 그냥 돌아가 버렸네."
성대감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허준은 의연히 눈을 감은 채였다.
병자의 성한 손의 맥을 짚은 자세로 허준의 감은 눈은 병자의 몸속에 숨은 병균을 보고자 애썼다.
그 허준의 침묵이 반 식경이나 지나 주시해 앉은 식구들의 눈이 모두 의아하고 의혹에 차 갈 때야 차츰 병자의 병든 구석구석과 마디마디들이 허준의 마음의 눈에 비치어왔다.
그리고 그 마음의 귀에도 병자의 가냘프게 투닥거리던 맥이 차츰 살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커다랗고 처절한 맥박소리로 허준의 가슴속으로 전해왔다.
"가망이 없다는 겐가?"
허준의 침묵을 참다못한 성대감이 이 무명의 젊은 의원의 옆얼굴을 쏘아보았다.
허준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꼭 심부름할 사람 외는 안채 마당에 인기척을 없애주소서."
"건 왠가?"
성대감의 그 질문은 허준의 다음 말로 묵살되었다.
"베개가 높습니다. 반의반으로 낮추어주시오."
"다음 또 뭔가?"
성대감이 아직 반신반의의 눈으로 물어왔다.
"방 안의 공기가 탁합니다. 요강을 비워주소서."
"대소변을 받아낸다 함은 병자가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터입니다. 그러니 사용할 때 외는 방안에 병자의 냄새가 아니 나도록 해주소서."
딸이 대신 일어나 요강을 찾아 들었고 그때 필사적으로 입을 실룩이던 마님이 허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
"너무 환한 불은 병자의 눈을 쓸데없이 피로하게 할 뿐올시다."
마당에서 큰아들이 문병 온 대소가 마님들을 돌려보내는 소리가 나직이 나고 있었고 요강을 들고 나갔던 처자가 젖먹이나 벨 작은 베개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만하면 되올지?" 하고 허준에게 베개의 높이를 물었다.
고개를 끄덕여준 허준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좀 전까지 보이지 않게 북적거리던 마당엔 아마도 정경부인의 몸종인 듯한 나이 든 여종이 조신하게 손을 맞잡고 서 있다가 홀로 마당 가운데로 와서는 초췌해 보이는 젊은 의원을 건너보았다.
허준은 야심한 객지의 밤공기를 거푸 폐부 깊이 들이마셨다.
다섯 번 ... 여섯 번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하수가 비친 맑은 밤하늘에는 새벽을 맞이하는 삼태성이 유난히 반짝였다.
그 차가운 야기 속에서도 허준의 얼굴에는 자꾸만 뜨거운 혈기가 확확 느껴지고 있었다.
평범한 양민의 신분, 오로지 그것만 소망하며 용천을 떠나 7년 ... . 드디어 자기의 운명에 도전하는 가장 큰 고비에 섰다는 긴장이 팽팽하게 온몸을 죄고 있었다.
9
"기다리면 뻔한 일 애걸복걸 너무 속태우지 마시오."
하고 영달이가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임오근에게 잠이 덜 깬 소리로 말했다. 코 고는 재자들 속에서 혼자 술추렴을 하고 있던 임오근이 그 영달을 돌아보았다.
"속을 태우다니?"
"형님이 잠 못 이루는 건 허준인지 그놈 때문이 아니겠소."
" ..."
임오근은 부정하지 않고 침묵한 채였다.
"세상에 풍병 앓는 병자 한둘 보았소. 허준 따위의 재주로 낫굴 리 만무요."
" ..."
"두고 보시오. 그놈이 병을 고쳐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질 테니까."
" ..."
"아까 상화 놈한테 다시 자세히 물어보니 저도 들은 말이라곤 합디다만 아예 온몸 다 비틀려 돌아가는 상 병신이라던데 뭘. 하긴 그 정도 병자니까 여기까지 의원을 찾아오지 창녕엔 의원이 없어서 사람 보내왔겠소, 그렇잖우."
" ..."
"흥, 이번에 그놈이 딱 죽을 구덩이에 빠진 거라고."
"죽을 구덩이?"
"그렇다니까."
제물에 신이 나 발딱 일어나 앉은 영달이가 계속했다.
"나도 내 나름대로 허준이란 놈을 아는데, 아 스승님 몰래 뒤로 병자를 받아보는 놈 아뉴. 그런 놈이 이번 기회를 마다하겠소? 뻔하다구. 그새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하고 넓죽 달려드어 침을 찌르네 어쩌네 날뛸 게 뻔하지. 수일 후 스승님 오시기까지 팔짱 끼고 기다리겠소."
"그래서 뻔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그러니 지 재주에 맞지도 않는 병자를 쑤셨다가 다리깽이 부러져 도망쳐올 게 내 눈엔 선하다고."
"물론 나도 허준이 풍병환자를 낫굴 그런 경지의 재주가 아닌 걸 알아. 하나 낫구고 안 낫구고 이전에 스승님한테 허준이 뽑혔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게야."
밤새 세 병째 술을 퍼마셨는데도 임오근의 머리는 술이 취하치 않고 있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이번 일 하회를 본 후 유의태가 정녕 자기의 서열을 허준의 밑에 둔다면 이 집을 청산할 생각이었다. 그 청산에 앞서 유의태와 단독면담을 할 용기를 자신에게 북돋우려 그는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수제자라는 확증을 유의태가 거부할 경우 ...'
미련 없이 유의태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미련이라는 것에 조건이 있었다. 허준이나 유의태가 잘되라고 말없이 떠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억울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갈 순 없어.'
그는 안광익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데려온 여인이 궁녀라는 사실도 ...
그런다면 안광익을 보호하고 있는 유의태는 누구의 입에서건 관에 고변 한마디면 집안은 쑥대밭이 될 게 뻔했다.
임오근의 마음속엔 허준에 대한 미움이 유의태의 파멸에까지 치닫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기다린 세월인데!'
마을 안에 낭자하게 울어대는 새벽 닭소리를 한 귀로 들으며 임오근은 반도 안 차는 마지막 소주잔을 목 안에 탁 털어 넣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새벽은 늘 허전했다. 그러나 오늘 새벽만은 허전하지 않았다.
그녀도 남편의 이번 창녕길이 남편의 운명을 거는 길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모른다. 의술의 어느 정도가 사람의 병을 맘 놓고 다루는 경지인지. 또 남편의 의술의 경지가 남편이 들려준 유의태나 안광익이 펼친 그 구침지희에 달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하나 얼마 전 본의 아니게 병자들을 받아들이고 그 병자들을 낫우었을 때 남편의 의술도 웬만치 틀이 잡힌 지식의 바탕 위에 섰다는 걸 확인했었다.
더구나 그 일로 불려간 남편이 스승 유의태에게 오히려 그 처방의 정확함을 크게 칭찬 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쩌면 지난 7년 동안 남편의 저 불철주야 각고의 정진은 가족인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적어도 유의태라는 거목이 촉망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도 짐작한 것이다.
그 증명이 이번의 단독 창녕행이 아니겠는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 그러나 그 기쁨이 큰 만큼 그만큼 큰 불안이 밤새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처음이라는 사실에 남편은 서둘지나 않을까? 더구나 가마에 모셔져 간 대가댁 병자요, 그 멀리서 찾아올 정도였다면 범상한 경지 이상의 의술을 요구하는 병자일 것이다.
행여 병자가 죽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건 남편 허준의 끝장이요 자기의 끝장이요 가족의 끝장일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망상을 떨어낼 듯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업게 해주소서. 지난 7년 동안 남편의 저 엄청난 마음고생이 이번 기회에 말끔히 씻겨지는 그런 기회가 되어주소서.'
그러자 불안한 생각은 다시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고 꿈틀거렸다.
그녀는 방을 나서 새벽 찬 공기 속에서 맑은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그 의원 어떡하고 있느냐?"
첫새벽 기척을 내고 들어온 큰아들에게 성대감이 물었다.
"만석이 놈에게 길을 물어 물을 길러 가더니 좀 전에 돌아왔습니다."
"물을 길러 가다니, 무슨 물?"
"정화수를 뜨러 갔던 모양올시다."
"그런 일이야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이어늘 병자의 머리맡을 비우고 나다닌단 말이냐."
아들이 잠시 후에 말했다.
"저도 같은 말을 했더니 어머님이 무척 허해 계시어 우선 몇 첩 약을 드신 연후에 침을 쓴다 합니다."
"약재 이름을 물어보았느냐?"
"태도가 근엄하여 차마 묻지 못했사온데 약재는 준비해온 것인 듯하옵고 약도 손수 달일 모양올시다. 불피우는 일에까지 매사 제 손으로 하며 무얼 도울 일이 없느냐 물어도 묵묵부답올시다."
"내가 약재를 보아야겠어. 유의태란 말은 들었으되 그 밑에 누가 있다는 소리는 들은 바가 없어. 유심히 살펴 일이 추호라도 서툰 듯하면 유의태를 재촉해 데려와야 하리."
"예."
방안의 기척을 안 늙은 하인이 기둥의 등불을 벗겨 들고 대령했고 대청에 성대감과 아들이 나왔다.
안채 마당에 나타난 성대감은 약탕관의 김을 요량하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인사에 대신하는 초췌한 허준에겐 시선도 줌이 없이 곧장 안방으로 사라졌다.
그 안방에 들어선 성대감은 어미의 곁에서 꼬박 밤을 지새운 모습의 딸에게 말했다.
"오라비들더러 대신 있으라 하고 넌 건너가 잠시 한숨 눈 붙이거라."
"저보담도 의원이 한숨도 눈을 못 붙였습니다."
"그런 건 개의할 바 없다. 의원이 눈을 안 붙인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닌즉 의원이라는 것들이 대가집에 오면 병은 못 고칠 바에 공연히 부지런한 걸로 공을 메우려 굴기도 하는 것들인즉."
"하나 이분은 밤새 어머님의 머리맡에서 숨소리 하나하나 귀 기울이고 그 정성이."
"정성 얘기도 할 것 없다. 정성으로 낫구는 병이면 네 어미 병은 벌써 나았어, 병을 낫구기 전에 의원을 의원으로 볼 필요 없어."
그 성대감의 등 뒤에서 허준의 소리가 났다.
"두 분께서 나가주시지요."
돌아보니 허준이었다.
"나가라니, 누구보고 하는 소린가?"
"병자는 밤새 고통에 시달리다가 좀 전에야 눈을 붙이는 중 올시다. 머리맡에서 수선스레 굴지 말아주소서."
"밖에 약을 달이는 모양인데 그 처방은 유의태의 것인가?"
"왜오니까?"
"묻는 말에만 대답하거라."
"제가 조제했습니다."
"임의로?"
"스승님도 병세를 들어 짐작할 뿐 아직 병자를 못 보고 계십니다."
"무슨 뜻인고?"
"보지 않고서는 약을 지을 수 없다는 뜻 올시다."
"네가 혼자 미리 온 것은 네 스승이 오기 전까지 간병차 온 것으로 아는데 함부로 네가 약을 지을 수 있느냐."
"제가 아는 병이므로 짓습니다."
" ..."
"네가 아는 병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만은 그건 낫굴 자신이 있다는 말이냐?"
" ..."
"그간 모모라 하는 의원들이 저마다 찾아와 모두 큰소리치며 병자에게 다투어 독한 약을 먹이는 걸 보았다. 병자가 애처로워하는 소리니라. 정녕 밖에 달이고 있는 약은 분명 병잘 낫굴 자신이 있는 약이더냐?"
"의원은 병을 두고 다짐을 하지 않습니다."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란밖에 ... 낫굴 자신 있느냐?"
"없습니다."
" ..."
" ..."
"하나 병자의 고통을 생각하면 배운 바 의술과 정성을 다하여 낫우고자 애쓰는 것이 의원의 소임일 뿐 반드시 낫운다 못 낫운다의 다짐은 아니합니다."
" ... 그래?"
"나가주시지요."
" ...!"
"나가시오!"
허준이 대감처럼 소리쳤고 성대감이 그 만만치 않은 무명의 의원을 마주 쏘아보았다.
밖으로부터 방문을 벌컥 열고 작은아들이 뛰어들었고 그 앞으로 성대감과 큰아들이 나가며 방문이 다시 닫혔다.
방안은 다시 고즈넉이 조용해졌다.
" ..."
10
읍내서 시각을 알리는 바라 소리가 들려왔다. 허준이 와서 사흘째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온 문중과 집안 식구들이 하늘처럼 높이 보며 언동을 삼가는 대감에게조차 의원으로서의 요구가 거침없는 허준의 태도로 인해 이제는 대감도 아들들도 병자가 있는 안채에의 출입을 조심하고 삼가는 분위기가 돼 있었다.
첫날은 하녀를 시켜 개다리소반에 두어 가지 반찬으로 청지기의 방으로 차려 내오던 식사와 행랑채에 마련했던 잠자리가 이틀 후부터 잠자리는 큰아들이 기거하는 작은사랑으로 바뀌었고 밥상 또한 며느리들이 중문 밖까지 지휘하여 나이 든 여종 둘이가 통영산 소반에 넘치는 음식과 곁들여 작은 번상에도 따로 만든 반찬을 올려 들여보내었다.
허준은 사흘 동안의 보약으로 병자의 체력을 웬만치 회복시켰다고 보자 시술의 시각을 동이 트는 시각으로 정했다. 특히 동이 트는 시각으로 정한 것은 밤사이 천지에 덮여 있던 음기가 개이고 일출과 함께 천지에 퍼지는 양기의 정, 그 생육의 기운을 병자에게 도입한다는 유의태의 침술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시술 시각이 묘시(새벽 5시부터 7시)임을 전해 들은 성대감과 두 아들도 의관을 정제하고 건너왔다.
성대감은 좀은 놀라고 있었다.
그 재주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젊은 의원은 도착 후 사홀 동안 거의 잠을 이루지 않고 병자와 주야의 고통을 함께 하며 병자가 먹고 마시는 음식을 일일이 스스로 간심한 점이며 약제를 달이는 숯불의 과하고 덜한 점도 일일이 자신의 손으로 조절하고 딸이 대소변을 받아내는 짬 이외엔 병자의 머리맡에서 촌시도 떠나지 않는 근직함을 보였다.
게다가 정승 반열인 자신에게조차 의원으로서의 요구를 거침없이 하는 패기가 하루하루 겪으면서 상쾌하게 느껴지던 것이다.
이윽고 목욕재계한 허준이 들어와 병자의 곁에 앉아 처음으로 그 침통을 풀었다.
딸이 곧 등잔을 들어 허준의 손 밑을 밝혔다.
이 사흘 사이 성대감의 딸은 허준의 눈길 하나만으로 그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를 알도록 마음이 통하고 있었다.
그 등잔의 불빛 속에서 허준의 손이 병자의 머리 꼭대기를 헤집기 시작했다. 성대감과 아들들의 목젖이 똑같이 마른침을 삼키며 오르내리다가 멎었다.
허준의 손에 들린 참침이 조용히 병자의 머리의 한복판을 겨누며 반짝였다.
'여기가 백회혈 정신을 맑게 하고 양기를 움직이는 곳.'
허준의 침머리가 그 병자의 정수리의 숫구멍을 찾아 박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머릿속에는 일찍이 유의태가 아들 도지에게 침술의 정수를 가르치며 한 말이 비껴가고 있었다.
"신체에 이름붙은 각 혈은 좁쌀 알갱이만하다. 그러나 그 좁쌀 알갱이만한 면적 속에서도 가장 정한 곳은 오직 한 군데 머리카락을 뽑으면 생기는 그런 작은 구멍 하나뿐이다."
그때 도지가 물었었다.
"왜 그러하오니까?"
"이치를 들으리라."
물꼬가 막혀 종당에는 커다란 수로가 온갖 잡물로 뒤덮여 거기 괸 물이 온통 썩어가는데 물꼬의 아무 곳이나 작대기로 쑤신대서 물꼬가 트이지 않는다.
안 쑤시는 것보단 변화는 줄 수 있되 전체의 물꼬를 확실히 열어주는 길은 애초 물꼬를 가로막은 한 개의 이물질을 들어내는 길이다. 그 한 개의 이물질의 위치가 곧 머리카락 뽑은 듯한 침혈이다.
그때 도지가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었다.
"살가죽에 싸인 사람의 몸통 속에 숨은 그 구멍을 그토록 정밀하게 찾을 수 있으리까?"
"어려운 것이고말고. 하나 실망할 것은 없는 것이 그 위치가 없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있다는 사실이다."
"하오면 그걸 보는 방법에 어떤 것이 있으리까?"
"육안으로 더듬되 심안으로 보는 길뿐."
그때 도지가 절망처럼 뇌었었다.
"심안 심안." 하고.
"병자의 가슴을 풀어주시지요."
성대감과 아들들이 잠시 그 말뜻을 모르다가 벌겋게 상기되었다.
"가슴이라니, 가슴 어디를 말인가?"
허준이 성대감에게 다시 말했다.
"병자는 예를 차리지 않는 것 올시다. 두 젖가슴의 그 바로 아래 상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피해 가지 못할 곳 올시다."
"풀거라."
하고 성대감이 딸에게 말했다.
그다음 허준이 요구한 곳은 음교였다. 부인병에서 특히 지나칠 수 없는 배꼽 아래 한 치에 위치한 지점이었다. 혈의 위치가 설명되자 침착했던 성대감도 안색이 변했고 죽은 듯 누웠던 병자가 무어라 외치려 들었다.
허준이 강하게 병자에게 말했다.
"숱한 부인들이 죽을병에 들었으면서도 부끄러운 곳을 보이지 않으려 목숨조차 잃는 일이 허다합니다. 하나 세상에 아직 의원 중에 여자가 없습니다. 참고 견디소서."
"그곳을 취하지 아니하면 병자가 죽는다고 말하고 있는 겐가!"
새삼 성대감이 노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허준의 소매를 쳤다.
"죽지는 않사오나, 하나 병을 낫운다는 희망은 버려야 하오리다."
"싫소."
하고 병자가 외쳤다.
"차라리 못 나아도 싫소."
하고 노마님이 다시 소리쳤고 딸이 울음을 터뜨렸다.
허준이 말없이 다른 손에 감긴 명주 수건으로 그 노마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윽고 성대감이 "너흰 나가거라." 하고 조용히 말했다. 허락이었다.
두 아들이 나가자 허준은 딸을 보았다. 촛대를 든 딸의 손은 떨릴 뿐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허준이 노마님의 치마를 젖히고 다가든 성대감이 손수 늙은 아내의 하반신을 노출시켰다. 허준은 외면한 채 노마님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허준의 시술이 끝났을 때는 날이 훤히 밝은 시각이었고 풍부(뒤통수 아래), 지기(무릎 안쪽 뼈), 중봉(다리의 복숭아뼈), 후정(뒷머리 꼭대기) 등 또 한 차례 침머리가 박혔다 뽑혀 노마님은 병고보다 울음으로 탈진하여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만 뒤였다.
잠든 노마님의 숨결을 살피다가 물러 나온 허준 또한 큰사랑에 성대감이 손수 밥상을 받아놓고 겸상하기를 기다린다는 전갈을 받았으나 소세를 마치자 그대로 방에 들어 깊은 잠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나절이나 되어서 잠을 깨자 그 머리맡에는 갈아입을 새 옷 한 벌이 조신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급한 병을 대강 마치고 곧 오리라 하던 스승 유의태는 닷새째가 되는 날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여드레째 되는 날 하오에 산청에서 달려온 건 다른 사람 아닌 임오근이었다. 그리고 그 임오근은 사랑채로 안내를 하는 청지기로부터 마님의 환후가 한결 가벼워졌다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또 그 임오근을 만난 성대감이 스승 유의태가 생사의 어간에 처한 병자를 만나 달려오지 못하고 있다는 전갈을 드렸는데도 아쉬운 빛을 보이지 않는 데서 또 놀라고 말았다.
허준이 유의태 밑에 자기와 함께 있는 문도노라 정중히 소개를 하는데도 노마님은 그저 잠시 시선이 왔을 뿐이고 어설프게 맨 매듭을 허준에게 보이며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는가?"
"힘드시거든 누워서라도 좋으니 쉬어 쉬어 하소서, 매듭을 꼭 매지 말고 풀었다 매었다 생각날 적마다 자주 손마디를 움직여 버릇하소서."
"그러리."
하고 다시 노마님이 한쪽 입가를 씰룩이며 임오근의 가슴을 도려내는 소리를 했다.
"내 평생에도 숱한 의원을 겪었지만 큰소리치고 약이나 달여주고 뒷짐 지고 차도나 기다리는 것이 다반사인데 젊은이는 대견한 데가 있네."
"스승님이 행하시는 일을 닮으려 할 뿐 소인의 재주는 아니올시다."
허준의 대답이었다. 이어 들어온 규수가 일어서는 임오근에게는 시선도 줌이 없이,
"건넌방에 진지 차려놓았습니다."
하는데 허준을 향한 눈매가 마치 일가 오라버니 보듯 다정한 것도 임오근의 가슴을 무너뜨리는 광경이었다.
허준이 성대감 댁에 와서 열흘째 되는 날 새벽이었다.
행랑방에서 잠들고 있던 임오근은 때아닌 시각에 큰사랑 쪽에서 터져 나오는 청지기의 고함소리에 튕겨 일어났다.
무어라 거푸 다급하게 소리치는 속에서 임오근이 들은 건 "큰일났사옵니다. 큰일났사옵니다. 대감마님 대감마님."
그 소리였고 자다가 뛰어나온 성대감의 영문을 묻는 노성에 "정경부인 마님께서 정경부인 만님께서 ..."하고 경황없이 안방 병자를 지칭한 외침이었다.
임오근이 뛰쳐나가자 성대감들이 안채로 달려가고 있었고 안채 쪽이 왁자했다. 그 북새통에 끼여 달려간 임오근은 그 안채 병자의 방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성대감이 열어젖힌 그 방안에는 반신불수에서 가까스로 자리에 일어나 부축받은 채 매듭이나 맺다 풀었다 하던 노마님께서 허준이 야차 같은 모습으로 "일어서시오."를 연호하고 있는 그 앞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있었다.
부축하려는 딸을 허준이 고함쳐 내치자 이윽고 노마님은 허준의 유도를 따라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대청마루로 나서고 있었다.
"손 내리지 마시오. 무릎을 드시오. 더 더 무릎을 드시오. 고개를 드시오."
허준의 고함과 자기 눈을 의심하는 그 경악에 찬 가족들의 눈길 속에서 반신불수였던 마님이 허준을 따라 육간대청을 한 바퀴 돌며 마구 눈물을 쏟고 있었다.
감격한 아들과 딸이 어머니를 외쳐댔고 성대감이 "허의원, 허의원!" 하고 체모도 잊은 채 허준을 쓸어안았다.
6. 비인부전
정경부인 심씨의 병세가 현저하게 호전됐다. 표현 그대로 신체의 오른쪽이 돌덩이처럼 반신불수이던 그녀의 몸이 확실히 성한 손처럼 되살아나 딸의 부축을 받으며 아침저녁 마당으로 걸어 내려와 몸종이 대령하는 놋대야에서 스스로 소세를 할 만큼 된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의 눈길은 수년 동안 병상에서 기동 못 하던 정경부인이 위태로운 걸음으로 마당을 거니는 그 모습 못지않게 말수 적은 모습으로 서 있는 허준이란 젊은 의원을 마치 약사여래불의 재림을 보듯 외경의 눈으로 지켜보며 떠들썩했다.
그 정경부인이 다시 딸의 부축을 물리치고 당신 스스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기 시작한 것은 허준이 성대감 집에 온 지 보름이 되던 날이었다.
병세가 호전의 증후에서 완치로 이행한 걸 확인한 그 날 이윽고 허준은 병자와 가족들 앞에서 앞으로 병자를 간병할 제 명심할 조목들을 적어 내주고 산청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다.
"더 이상 침술을 시행함이 없어도 괜치않겠는가?"
성대감의 말씨는 처음의 냉정한 하대에서 이젠 반공대로 바뀌어 있었다.
"소인의 판단은 그러합니다. 하오나 ..."
"기탄없이 무슨 말이고 다 말해주게. 그대가 하라는 말이면 내 무엇이건 하리."
"그런 뜻이 아니오라 소인의 재주는 다 했사옵고 일차 스승님이 다녀가시어 간심 하실 일이 남았다 여기옵니다. 다른 걱정은 끝났다고 여기옵니다."
"정말 고마우이."
성대감이 지극한 신뢰를 담아 그 허준을 바라보았고 곁에 있던 정경부인이 허준의 한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스승이 그 누구든 다른 사람 다 필요 없으니 허의원이 몸소 다만 며칠이라도 내 곁에 있다 가오. 내 결코 쉬이 이대로 헤어질 순 없소."
그 어머니의 말에 지난 보름 사이 함께 병자를 간병한 딸이 환히 웃으며 역시 간청했다.
오랜만에 새 옷 입고 몸단장도 한 딸은 그 지극한 효심이 아니더라도 백옥같이 눈부신 피부와 상큼상큼 드는 눈매가 딴 사람처럼 아리따웠다.
"의원님은 비단 우리 어머님의 재생의 은인이실 뿐 아니라 저희 집안의 은인이시기도 하십니다. 어머님 청대로 며칠만 더 유하고 가소서."
이어 아들들과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리는 말을 했고 이에 허준이 이곳에서의 결과를 한시바삐 스승께 알려야 할 의무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가족들의 초조해할 정경을 얘기하고 권유에 못 이겨 그럼 오늘 하루만 머물고 내일 아침에 떠날 것을 말했다.
그날 낮 허준의 점심상은 큰사랑 성대감과 겸상이 되어 차려져 있었고 그 자리에 함께 초대된 임오근이가 자기들 방에 정경부인과 아들네와 며느리들이 각각 들여놓는 피륙선물들이 거의 한 짐이나 된다고 귀띔하며 이런 사례는 일찍이 스승님도 받은 적이 없노라고 사뭇 흥분된 얼굴을 했다.
호사한 그 주안상 앞에서 성대감은 손수 허준에게 술 한잔을 따라준 후 이제야 허준의 의력에 관해 여러모로 물어왔다.
"스승님 밑에서 7년을 수업했사옵고 제 손으로는 그간 십여 명의 병자를 돌본 적이 있습니다."
"겨우 십여 명의 병자를 본 끝에 이 집에 왔단 말인가?"
저만큼 딴 상을 받고 있던 문중의 늙은 선비 서넛이 새삼 놀란 눈길을 보내왔다.
허준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 허준에게 성대감이 말을 이었다.
"유의태란 이름을 처음부터 몇 사람이 천거를 했으나 인근에도 이름깨나 내세우는 의원들이 수두룩하여 굳이 산청에까지는 사람을 보내지 아니했던 것인데 아무튼 뒤늦게나마 내가 그대를 알게 된 건 하나의 인연일세."
"황감하옵니다."
"그대의 의술의 정예함을 보니 과시 유의태의 의술도 짐작이 가. 하나 난 그대가 마음에 드네. 내가 겪은 의원들은 작은 공도 크게 부풀려 내세우는 것들뿐이었는데 그댄 젊은 나이에 갸륵한 데가 있어."
"과분한 칭찬이시옵니다."
"몇이던가, 지금 나이가?"
"스물여덟이 되옵니다."
"장가는 들었던가?"
"예 ..."
"양친은 구존해 계시고?"
"편모슬하올시다."
"자식은?"
"남매가 있사옵니다."
"다섯 식구라 ..."
성대감이 혼자 뇌며 끄덕이다가 다시 허준을 바라보았다.
"사는 집은 마련을 했던가?"
허준이 시선을 들어 그 성대감을 바라보았다.
"집이라 하오시면?"
"아직 남의 수하에 있다 하면 자네의 기량이 어떻다 할지라도 살림에 큰 여축은 없이 사는 게 아닌가 싶어서 묻네. 장만을 했던가, 집은?"
허준이 얼른 대답을 못 했다.
"내가 그대에게 꼭 무엇인가 하나 해주고 싶은데 집을 한 채 지어주면 어떻겠나?"
국을 떠 입으로 가져가던 임오근의 숟가락이 정지했고 허준은 멍해졌다.
"이미 포기했던 사람을 살려준 은혜인데 물질로 논한다 함이 되바라진 일이긴 하나 내 정이 또한 그렇지 아니하니 응낙하도록 하게."
임오근의 국숟가락이 허공에서 후들후들 떨었다. 허준이 대답했다.
"오두막이나마 식구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집에 살고 있사옵고 병자를 구했다 함은 소인의 재주가 아니라 스승님의 가르침 때문이오니 혹 치사를 주실 양이면 스승님 앞으로 보내주소서."
"허어."
하고 성대감이 탄식 같은 감탄의 소리를 냈다.
"공을 윗사람께 돌리는 건 기특한 일이네마는 그대를 지목해 보내준 유의태에게는 따로 또 내가 사의를 전할 터이고 이건 내가 그대에게 따로 내리는 사읠세."
임오근의 목젖이 오르내렸다. 허준도 침묵했다. 자기와 식구들이 몸담고 있는 집은 자기 집이 아니고 변돌석의 집이었다.
7년 동안 춘추로 옷 한 벌씩 얻어 입는 외 한 푼의 보수도 없이 7년을 버텨오는 자기가 아닌가.
추우나 더우나 떡목판을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헤매는 어머니와 삯바늘 끝에 우진사댁에서 도둑의 누명을 쓰고 머리끄덩이를 휘둘리던 아내의 고생을 생각하면, 그 어머니와 아내의 뒷바라지 속에 키운 자신의 의술에 대한 보상을 받은들 어떠랴 하는 충동이 허준의 가슴속을 서서히 가로질러갔다.
이윽고 허준의 입이 열렸다.
"듣자오니 이미 정경부인께오서 몇 가지 피륙을 싸주셨다 하시니 소인은 그것으로 고마워하옵고 분외의 사례 일랑은 퇴해주소서."
"허어."
하고 성대감이 또 탄식하며 그 허준을 바라보았으나 허준은 거절하는 까닭을 부연하지 않았다
.
그건 언제던가?
어느 날 행색이 가난한 병자를 데려온 낯선 얼굴이 예의 유의태의 말대로 들고 온 몇 푼의 돈을 다래끼에 넣었는데 흘긋 그 액수를 짚어본 도지가 발칵 화를 내며 돌아서는 병자의 팔을 잡아채며 "사람이 어찌 이리 뻔뻔해!" 하고 핀잔주어 내보냈는데 또 이런 때야말로 저들의 결백을 내세울 절호의 기회로 여긴 꺽새, 영달 들이 병사 모퉁이를 돌아나가는 병자 가족들에게 우르르 쫓아가 "야 이자야, 우린 흙 파먹고 사는 줄 알아! 손발이 닳도록 지리산 골짜기 헤매며 그 약재를 지은 거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면박과 욕을 퍼부은 사건이 있었다.
'그날이었어!'
그날 부산했던 병사가 조용해지자 유의태는 도지를 불러 앉히고 엄히 타일렀었다.
"의원의 즐거움은 병자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데 두어야지 돈을 탐내선 안 되느니."
했고 도지가 그 성깔 있는 얼굴로 맞받아,
"남정네는 침을 두 대 맞았고 그 여편네한테는 가슴앓이 약 세 첩을 싸주었는데 겨우 한 푼 내놓는 눈치올시다. 그건 의원짓 하는 우릴 숫제 깔보는 심보올시다."
하나 유의태는 "같은 병이라 할지라도 없는 이가 한 푼 내놓는 거나 가진 이가 열 냥을 내는 거나 같은 이치가 아니리! 아무튼 의술로 돈이 벌린다는 재미를 맛 들이면 큰 의원이 되지 못해." 했다.
'돈에 맛 들이면 큰 의원이 되지 못해 ...'
아들에게 내뱉던 유의태의 훈도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가슴에 언제 적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가. 성대감의 집 한 채의 제의를 간단히 거절할 수 있는 자신에게 허준은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그건 절망적이던 정경부인의 병을 고쳐낸 자신의 의술이 바로 스승 유의태에게서 왔다는 감사가 새삼스러운 탓인지도 몰랐다.
"유의태가 제법 인물이로고. 문도들에게 그런 기백과 품성도 심어준 걸 보니."
성대감이 좀은 서운한 얼굴로 집 한 채의 제의를 철회했고 오히려 임오근이 바늘방석에나 앉은 듯이 몸을 자꾸 비틀며 허준에게 어떤 눈짓을 계속 보내고 있었으나 허준은 묵묵히 오랜만에 평화로운 점심밥을 마지막까지 비웠다. 갑자기 스승 유의태가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허준의 코끝이 울고 있었다.
점심상이 물려 나가고 허준이 안채 정경부인의 차도를 살피러 건너가자 한 방 가득히 몰려와 병자와 웃음꽃을 피우고 있던 귀부인들이 다시 일일이 허준의 의술을 칭찬하며 문중에 몇 사람 병자가 있으니 보아주고 가도록 부탁을 했고 그러자 정경부인이 그동안 자기로 인해 연일 잠도 못 자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런 사소한 병자로 이 사람을 괴롭히려 말게, 하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 밝은 모습은 이미 병자가 아닌 완쾌한 모습이었다.
2
정경부인 방에서 십여 명 여인들의 체취와 진동하는 지분 냄새 속에서 허준이 가까스로 해방되어 안채 중문 밖을 나서자 허준을 기다리고 있던 청지기와 임오근이가 이번에는 성대감의 아들 형제와 그 항렬의 문중 선비들이 따로 술상을 마련해 놓았노라며 기어이 작은사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사람 저 사람 권해오는 미주 속에서 이날 허준은 대취했다. 보름 동안을 옥죄어 있던 긴장으로부터의 해방감, 그리고 형제가 솔선하여 반상을 파탈하여 스스럼없는 분위기를 만들어준 탓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자기 손으로 위중한 병자를 살려냈다는 자부심과 가슴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의원으로서의 보람 때문이었다.
해가 져서야 그 주연은 끝났고 마련된 비단 이부자리 속에 쓰러진 뒤 허준은 자꾸만 자기를 흔들어 깨우는 임오근의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귓전에 속삭이는 그 얘기는 성대감 댁의 작은댁 누군가가 노자라는 명색으로 두어 뼘이나 될 돈똬리를 가져왔는데 아무래도 동전이 아니고 은전 같다는 소리였으나 잠속으로 떨어져 가는 허준의 어렴풋한 의식에는 내일은 산청으로 달려 스승 유의태를 만난다는 기대와 어머니와 아내와 그리고 아이들을 만나리라는 기쁨뿐이었다.
허준은 꿈을 꾸었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자꾸만 믿기지 않아서 새삼 불안에 떨고 또 갑자기 기뻐 날뛰는 가족들과 함께 웃고 있는 자기의 모습들이, 또 제자들에게 냉담하기가 얼음장 같은 유의태에게선 더 이상 기대를 버리고 돈버는 길로 나서자 유혹해 마지않던 부산포의 얼굴들이 두서없이 그의 꿈속을 비껴가곤 했다.
그 비몽사몽 속에서 허준이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뜨자 그 머리맡에는 은제 쌍첩촛대가 켜지고 그 아래 뚜껑 덮인 꿀물 한 사발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자기는 지금 꿈속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을 깨어가는 허준의 머릿속은 스승 유의태가 이번에 왜 하필 자기를 이곳에 보내주었는지 새삼 그것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모시러 왔던 성대감의 아들 형제에게 병자의 위중한 증세를 들은 그 유의태는 그때 '믿어볼 만한 아이'라는 한마디로 성대감 아들 형제에게 자기를 데려가도록 이르면서 분명히 자기에게도 수삼 일 후에 뒤따라가마 했었던 것이었다.
'한데도 임오근을 보내어 하회를 알아오라며 스승님은 오지 않았어 ... 왤까?'
결과는 성공이다. 그러나 일이 실패했을 경우, 뒤따라오마 해놓고 아니 오는 유의태 또한 문책을 못 벗어날 것은 자명한 일인데 유의태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냉랭한 사내는 이번 일에 허준 자기의 침술이 성공할 것을 미리 꿰뚫어 보고 있었단 얘기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수제자'
친아들인 도지를 젖혀놓을 수야 없을 테지만 이번 일의 성공으로 허준 자기는 임오근을 젖혀놓고 수제자의 상징인 병부잡이가 될지 모른다.
그건 그냥 병부의 정리가 아니다. 유의태가 출타할 때면 도지와 함께 직접 병자들을 다루어도 되는 권한의 위임도 뜻하는 것이다.
순간 허준의 귓속에서는 과거 유의태가 한 또 한마디가 왕왕 울리기 시작했다.
"비인부전이랄밖에!"
옛날 부산포가 십여 년 허송세월을 억울해하여 이젠 자기도 나이로 보아서도 더 이상 제자 노릇을 할 수 없으니 고약이 됐든 무엇이 됐든 의원으로서 한 가지 살길이 될 확실한 재주를 전수해주십사 애걸했을 때 유의태는 이 말 한마디를 내뱉고 방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부산포도 다른 제자들도 처음 그 뜻을 몰라 쑥덕거리는데 그 부산포를 달래러 술상을 차려낸 자리에서 도지가 그 말 뜻을 설명해줬던 것이다.
'비인부전'이란 중국의 서성 왕희지가 자기의 제자들에게 했던 말로서 스승의 안목으로 사정하여 딱 합당한 인물이 아니면 함부로 예나 도를 전해줄 수 없다는 사제 간의 냉엄한 도리를 일컫는 경구임을.
'그건 곧 그 적임자이면 수업 기간의 다과에 구애됨이 없이 수제자로 발탁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눈앞에 임오근의 처절한 눈빛이 다가들었으나 그러나 허준은 스승의 허락하에 마음 놓고 병자를 볼 수 있는 수제자의 자리를 뜨겁게 갈망하는 자기를 깨달았다.
'비인부전'
허준이 다시 그 말을 뇌는데 방문 밖에 인기척이 났고 만석이라 불리는 안채 늙은 하인이 들어와 정경부인께서 안채에 저녁 진지상을 차리시고 그가 잠 깨기를 기다리고 계시노라는 전갈이었다.
식욕은 당기지 않았으나 거절할 수도 없는 허준이 소세를 마쳤을 때 아직 술이 덜 깬 임오근이가 나타나 가외로 자꾸 짐이 늘어나 짐을 새로 두 보따리로 쌌노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고 그도 허준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밀양과 고령으로 출가해 있던 이십 대 중반의 정경부인의 두 딸이 친정어머니의 쾌차 소식을 듣고 달려와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허준을 보자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예를 표했고 큰딸은 합장까지 해보이며 감사와 은혜란 얘기를 거듭하여 오히려 허준이 몸둘 바를 몰라했다.
이어 그 딸들이 스스로 움직여 들여오는 나주 호족반 위에 놓인 그릇들은 흔히 쓰지 않는 새 그릇 새 접시인 듯했고 그 맛깔스러운 찬과 안주에 술병도 하나 곁들여졌는데 정경부인이 손수 허준에게 한잔을 따랐다.
저녁상이 끝나갈 때 성대감과 작은아들이 건너와 화제가 다시 허준의 신상에 미쳤을 때였다. 정경부인은 낮에 집 한 채를 마련해주마는 대감의 제의를 받아주면 자기도 고맙게 여기겠노라며 새삼 허준에게 권했다.
허준이 다시 고사하자 정경부인은 "그럼 대체 자네의 소원이 뭔가? 웬 고집이 그리 억센가." 하고 사뭇 서운한 얼굴로 허준을 건너보았다.
"큰 소원 없사옵니다. 미천한 몸으로 태어나 의원으로 생업을 세우려 결심했사오니 작심한 10년 수업 중 아직 남은 3년을 더욱 정진하여 혹 기회가 닿는다면 내의원 취재에 응하는 것이 큰 소원이옵고."
"자넨 결코 미천한 심지가 아닐세. 나도 제법 사람 가릴 줄 알아."
하고 정경부인이 얼른 부정했을 때 술잔을 들었던 성대감의 손이 멎었다.
"내의원이라니? 궐내에 있는 내의원 말인가?"
"그러합니다."
"한데 취재란 뭔가?"
하고 생소한 말을 듣는 듯이 허준을 건너보았다.
이에 말참견할 기회를 못 갖고 어깨가 처져 있던 임오근이 자기들 의원으로 입신하려는 자들에게 내의원 취재야말로 양반가문의 자제들이 알성급제(왕이 임어한 자리에서의 과거 합격)만큼이나 바라고 바라는 출세의 길이라는 것과 내년 3월에도 내의원 취재가 있다고 도지와 함께 진주에서 들어온 소식도 부연했다.)
그러자 조용히 임오근의 설명을 듣고 있던 성대감이,
"그래 ..."
하며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럼 자네 내년에라도 그 내의원 취재에 응하는 게 어떤고." 했다.
"무슨 뜻이온지?"
"자네가 뜻만 세운다면 내가 내의원 취재에 자네가 입격이 되도록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러하이."
허준이 뻥해졌고 임오근의 눈이 화경처럼 떠졌다.
"대감께 이 사람을 도와줄 그럴 무슨 방도가 계시오니까?"
정경부인의 말이었고.
"내의원이라면 내게 낯선 곳도 아니오. 내의원을 관장하는 것은 도제조인데 소재 그 사람이 혹 맡아 있는 게 아닌가 여기는데 ..."
"소재란 뉘시오니까?"
작은아들의 물음에,
"우의정 노대감의 호니라. 지난날 그 사람이 대사헌으로 있을 제 나와 교분이 두터웠느니라."
" ...!"
허준은 숨을 삼켰다.
"나하고는 임의로운 사이일뿐더러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재주 없는 사람을 억지로 천거하는 것이 아니요 마땅히 재주 있는 사람을 천거한다함은, 어떤가 자네의 뜻은?"
허준의 입이 얼른 떨어지지 못했다. 시임 우의정이며 내의원을 총괄하는 도제조에의 소개장이라면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는 내의원 취재 합격을 이미 반이나 따놓은 것이나 같을지 모른다. 아니 반이 아니라 합격이 보장되는 것인지도 ...
이때 허준의 침묵을 답답하게 여긴 정경부인이,
"대감께선 말씀 함부로 하시는 분 아니시네. 또 평생을 환로에 계시며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분이시니 내 소견으로도 그 글월을 받아가면 큰 도움이 되리라 믿네." 했다.
임오근이가 여부가 있습니까. 도움뿐 아니라 내의원 도제조께서 밀어주시면 합격은 틀림없습니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어 성대감을 향해 입을 여는 허준의 목소리도 떨려나왔다.
"대감마님께서 감히 그러한 소개의 글을 써주시면 그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집 한 채를 주마 해도 외눈 하나 꿈쩍도 않더니 그까짓 글 몇 자 적어준다니 고개를 숙이는가."
하고 성대감이 흡족한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임오근이 무릎걸음으로 성대감에게 다가들며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 또한 그 내의원 취재에 평생의 소망을 걸고 있는 자이오니 감히 소인에게도 한 자 천거의 말씀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성대감의 시선은 그 임오근에게 가 있지 않고 허준에게 말했다.
"자리가 파하거든 건너오게."
하더니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임오근에게 말했다.
"자네의 의술은 내가 지켜본 바가 없으니 함부로 천거의 글을 써줄 수 없네."
그날 밤 허준은 큰사랑으로 건너가 성대감이 초서로 적은 석 장짜리 소개의 글을 지켜보았고 그 서찰의 말미에서 성대감의 호가 온재라는 것을 알았다.
3
다음 날 이른 새벽 허준은 성대감 댁을 하직했다.
평소 같으면 아직 기침하기 전 시각일 터인데도 성대감은 이미 방에 불을 밝히고 일어나 앉아 허준의 작별인사를 받은 다음 대청으로 따라 나와 전도에 대한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 성대감에게 허준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간 은혜가 있다면 자기야말로 그 성대감으로부터 정말 꿈에도 상상치 않던 커다란 은혜를 받은 느낌이었다.
양반들의 벼슬길에 연결된 시임 우의정이라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 우의정 노수신이 내의원 도제조라는 것이 태산처럼 미더운 것이다.
내의원 도제조에의 소개장은 장차 자신의 앞길을 열어갈 천금보다 더 값진 보물일 것이었다.
솟을대문 밖까지 나와 전별해주는 정경부인과 그 가족들에게도 허준은 정말 은인의 가족에게 대하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허준에게 성대감 댁에서 사례의 뜻으로 꾸려준 피륙과 "따로 안식구에게 전하게." 하며 싸준 짐들이 합하여 두 짐이었고 정경부인이 "너희가 나루까지 지고 가거라"하여 등불을 든 늙은 하인 만석이가 두 사람 장정을 지휘하여 창녕 서쪽 시오 리 밖 물슬천 나루에까지 따라와 짐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무거울수록 신이 날 그 묵직한 짐을 건네받은 임오근은 안녕히 가시라는 하인들의 인사에 한마디 대꾸도 없이 묵묵했다.
인적도 없이 동녘이 밝아오는 그 강변에는 간간이 물새가 앙칼진 울음을 흘리며 비껴갔고 그 희미한 강변 모래톱과 갈대밭 사이로 밤 사이의 냉기가 구름 같은 물안개가 되어 피어올라 넓은 강폭의 줄기를 따라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허준이 임오근에게 말을 던졌다.
"강폭이 넓어 소리쳐 불러야 사공의 잠을 깨울 수 있을지 모르겠소. 혹 이 근처 어디 깨진 징이라도 매달아놨음직 하오만!"
그러나 임오근은 여전히 대꾸를 않았다. 허준은 소개장을 받아들고 어젯밤 거의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서찰이 발이 달린 물건이 아닌데도 자기가 잠든 사이 어디론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어린아이 같은 조바심을 했고 자신의 앞길을 확실하게 열어줄 품속의 서찰에서 연상되는 자기의 앞날에 대한 온갖 가슴 설레는 환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자기의 곁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리 쉬며 쭈그리고 있는 임오근의 심정도 알 수 있었다.
'하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
그 소개장은 남과 나눠 가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다행히 성대감댁에서 꾸려준 사례물이 많으니 산음에 돌아가면 임오근을 비롯 다른 문도들에게도 사례물을 고루 나누어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 있소."
혼자 안개 속을 오가던 허준이 나루의 언덕 위 구부러진 노송 가지에 매달린 징을 발견하고 저만치 임오근 쪽에 소리쳤다.
임오근은 여전히 일어설 기척이 아니었다. 허준이 함께 매달려 있는 솜방망이로 그 징을 거푸 울려댔다.
그 깨진 징소리가 제법 우람하게 안개 속으로 울려 퍼졌고 그 때아닌 소리에 갈대밭 속에서 수십 마리의 물새 떼가 또 한 번 요란하게 솟아올랐다.
"과앙 ... 과앙 ... 과아앙 ..."
허준이 치는 징소리가 건너 사공의 오두막으로 울려 퍼졌을 때였다. 퍼뜩 허준은 자기의 등뒤에서 거친 숨소리를 들었고 돌아보니 임오근의 붉게 충혈된 두 눈이 다가와 있었다.
"할 말이 있네."
하고 대뜸 그 임오근이가 말했다.
"할 말이라니?"
" ..."
" ... 얘기하오."
허준이 지난밤의 침묵과 지금 핏발이 선 그 임오근의 눈을 조금 경계하며 마주 보았다.
돌연 임오근이 허준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무슨 일이오!"
놀란 허준이 일으키려는 손을 임오근이가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내 소원을 들어주오. 그 은혜 결초보은할 것인즉 ..."
"대체 왜 이러시오. 갑자기 은혜는 뭐고 결초보은은 뭐요."
"밤새 생각했소. 날 살려줄 수 있는 건 유의태도 아니고 당신뿐이오."
" ...?"
"나를 위해 이 길로 성대감에게 돌아가 내 앞으로도 소개장을 하나 얻어주오."
" ..."
"그 은혜는 평생을 두고 잊지 않을 테요."
이어 그 임오근은 허준의 다리 하나를 얼싸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우리는 ... 저 유의태 밑에서 7년 동안이나 한솥밥을 먹던 친동기 같은 사이 아니오. 그리고 난 거진 15년이나 저 사람 밑에서 종노릇하며 아직도 기를 못 펴는 불쌍한 놈이오. 그러니 제발 부탁이오. 날 도와 성대감댁에 달려가 주오. 그대의 청이라면 성대감도 끝내는 마다하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사정하오. 이렇게 비오."
임오근이 허준의 발치에 이마를 박고 오열했다.
" ..."
연극에 가깝던 그 과장된 행동은 문득 자신의 피지 않는 신세타령 속에서 진짜 설움으로 번지며 임오근의 입에서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러나 허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대감이 그런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 걸 허준은 알았다. 집을 한 채 지어주마 한 것은 인정이 아니고 불치로 여긴 아내의 병을 낫운 감사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대감이 자기에게 써준 서찰은 성대감의 지체로 보아 밥 먹듯이 쉬운 호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허준 자기에게 한한 호의이지 자기의 간청이라 한들 제3자의 소개장까지 써줄 그런 녹록한 사람은 아닌 걸 안다.
처음 자기를 거절할 때의 그 냉혹한 눈빛, 또 어제 임오근이 직접 그 청을 드렸을 때 '내 눈으로 보지 않은 너의 재주를 천거할 순 없다'고 냉연히 거절한 사람이지 않은가.
"가야 소용없소."
하고 허준이 결론부터 말하고 자기의 의견을 누누이 말했다.
그러자 이윽고 울음을 추스른 임오근의 눈은 단념이 아니고 살기였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않나 내가 이토록 애걸하는 데 가보지도 않고 이렇게 냉정히 굴긴가."
"가망도 없는 일에 추한 꼴까지 보이고 싶진 않기 때문이오."
"이런 박정한 자 같으니, 일생의 운이 트이느냐 마느냐 하는 판에 추하고 깨끗한 게 그리 문젠가."
임오근의 말꼬리가 갑자기 치켜 올랐다.
"한솥밥 먹으며 함께 고생하던 것끼린데 이제 와서 너 혼자 단꿀을 먹겠단 말인가?"
"나 혼자 단꿀이라니?"
허준의 눈도 임오근의 살기 띤 눈을 맞받자 임오근이가 튕겨일어섰다.
"단꿀이 아니구 무엇이냐 말이야. 바른말로 이번 일 너에게 기회가 주어진 건 그날 의원에 내가 자리를 비었기 때문이라고!"
"사실이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장차 이번 나 같은 기회가 있으리라 믿소만."
순간 임오근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갈지 안 갈지 그 대답만 해라. 만일 안 간다면 너 혼자 잘되라 가만 둘 성싶으냐, 그놈의 서찰을 찢어발기고 말지."
"무어라? 누구 맘대로. 흥, 뺏어봤자 다른 사람에겐 소용없는 내용이야."
허준이 소리쳤다.
안개 속에서 나룻배를 저어오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 나룻배를 향해 허준이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돌멩이를 움켜쥔 임오근의 주먹이 무어라 고함소리와 함께 허준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돌멩이는 허준의 귀를 찢으며 금세 허준의 얼굴을 피로 물들게 했다.
두 사내가 서로의 멱살을 잡은 채 언덕을 굴러 모래톱으로 처박혔다.
허준을 향한 질투와 증오가 임오근으로 하여금 황소와 같은 힘을 내게 하고 있었다.
그 난투 속으로 길손이 강도를 만났는가 여겼는지 사공이 배가 뭍에 닿기도 전에 노를 거머잡고 "네 이놈!" 고함치며 뱃전에서 뛰어 내려왔다. 늙었으나 건장한 신체를 지닌 사공이 사정도 없이 후려치는 노에 두어 대씩 얻어맞고야 두 사람의 싸움은 끝났고, 그제야 사공을 노려보고 흘겨보는 두 사람이 동행인 걸 안 듯했다.
하나 터진 상처를 씻고 찢어진 옷을 여민 두 사람은 짐과 함께 배에 오른 후에도 배의 앞머리와 뒷전에 따로 앉아 화해의 말을 않았다.
그리고 배가 건너 언덕에 닿았을 때였다. 임오근은 자기의 짐을 걸머 메더니 뒤따라 내리는 허준에게는 눈길 한번 줌이 없이 혼자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허준이 의령 경내의 자굴산 아래 주막에 이르러 미투리를 갈아 신을 때였다. 묻지도 않는데 주모가 허준의 행색과 보따리를 보고,
"좀 전에 꼭 같은 보따리를 진 사람이 지나갔는데."
하며 고갤 갸웃했다.
그건 임오근일 것이었다.
물슬천에서의 싸움에도 불구하고 품 안에 성대감의 서찰을 지닌 허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나 자기보다 곱절의 세월을 지냈으면서 아직 자기와 같은 희망도 발견 못 한 그 임오근이 어떤 처절한 심정을 깨물며 이 길을 지나갔을지 알 듯했다. 허준은 산음에 이르거든 시비야 여하간에 자기가 먼저 화해의 말을 걸어 임오근의 아픈 가슴을 위로해주리라고 마음먹었다.
4
허준이 저녁도 거른 채 산음현 남쪽 2리 장선나루를 건넌 건 창녕을 떠난 그 하루가 지나고 야경 두 점이나 된 깊은 밤중이었다.
드디어 산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1백 30리 쉬지도 않고 달려온 하룻길이었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짊어진 짐은 자기의 성공의 상징이요, 특히 오는 동안 꿈이 아닐지 수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한 내의원 도제조에 향한 서찰은 장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걸 어서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그 의미를 설명할 제 환희작약할 아이들, 고생만 해온 어머니와 아내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젠 고생이 끝났소. 작정한 10년을 채울 것도 없게 되었소. 나도 내년 3월 내의원 취재에 응하겠소. 이 서찰이면 합격은 떼어놓은 당상인 즉, 하하하.'
척지산 골짜기를 단숨에 가로질러 장선나루 갈대밭에 이르러 임자도 모를 고깃배를 저어 건너 산음 땅을 밟을 때 땀투성이 허준의 발길은 구름을 타고 가듯 가벼웠다.
산음 읍내의 불빛이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지점이었다.
'자고 있겠지, 아니 아내는 깨어 있을까?'
코앞으로 다가오는 집을 바라보면서 허준이 다시 자문자답했다.
'그리고 어제 임오근을 만나 내 성공의 얘기를 들었겠지.'
아니 임오근은 해가 질 임시까지 당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자기처럼 1백 30리 길을 서둘러 달려올 의욕도 없이 자기가 지나쳤을 중도의 어느 주막집가에 주저앉아 내일 날이 밝을녘에야 의원에 당도할지도 ...
'그렇다면 아내도 어머니도 나의 소식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땀이 밴 허준의 얼굴이 문득 웃었다.
으스름 달빛 아래 밤이슬을 흠뻑 쓴 자기 집이 보인 것이다.
그때였다.
고요한 집안에서 돌연 인기척이 달려나왔고 그건 아내였다.
"서방님이 아니시온지?"
보름 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목소리는 비명과 같은 외침이었고 허준이 "나요." 하고 마주 소리쳤을 때 그 아내가 다시 집안으로 돌아서며 외쳤다.
"어머님 어머님! 겸이 아범이 돌아왔습니다."
이어 "어디 어디!" 하는 어머니의 다급한 소리와 함께 두 여자가 오히려 뻥해져버린 허준 앞으로 내달아왔다.
엎어질 듯이 달려온 어머니가 섰다.
"애비구나, 애비야!"
"예, 저올시다."
오면서 수없이 예행연습한 감격의 상봉을 잠시 잊고 허준이 맥빠진 대답을 했을 때 다가든 어머니와 아내가 주춤 걸음을 세우더니 그 아들과 남편을 바라보았다. 길도 아닌 길을 달려온 허준의 하반신은 이슬과 풀잎에 젖어 엉망이었고 미투리 또한 흙투성이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두 여자는 말 이전에 눈대중으로 아들과 남편의 이번 길의 성공 여부를 확인하려 드는 것 같았다.
허준이 저도 몰래 만면에 웃음이 번졌다. 두 사람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 아들을 얼싸안았고 역시 한 발 더 다가든 아내가 눈물이 글썽한 채 그러나 얼굴은 활짝 웃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쓸어안는 허준의 눈에 저만치 장독 뒤에 치성을 드리던 가물거리는 촛불과 정안수 한 사발이 보였다. 놓으려던 허준은 어머니를 다시 한번 쓸어안았다.
온 방 안이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니 그건 ..."
하고 어머니가 이 꿈 같은 현실 앞에서 아들이 들고 온 성대감의 서찰을 다시 보았다. 정경부인의 병이 얼마나 위중했었으며 그러나 이젠 깨끗이 나았다는 얘기, 이에 온 문중이 자기를 축하해주고 특히 성대감이 자기의 앞길을 위해 이걸 써주었노라 허준이 세세히 설명한 끝이었다.
"이것이 과연 내게 무엇인지 어머니도 채 모르십니다. 생각해보소서. 누구 하나 아는 이 없는 한양에서 그런 대단한 사람들의 후원을 받는다함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이오니까? 이것만 있으면 저는 이미 취재에 붙은 거나 마찬가지올시다."
"애썼다, 정말 대견해."
"저두 좋은 일만 겹치어 꿈만 같습니다."
허준이 벙글거리며 마악 아내가 차려 들고 들어오는 밥상을 받으며 자랑스레 일렀다.
"당신이 오늘까지 맨날 손톱이 갈라지도록 남의 옷만 지었소만 이젠 우리 식구들을 위한 옷도 지으시오. 핫핫. 솜씨 내어 우선 어머님 옷을 지어 드리고 당신 것도 짓구려. 겸이 저 녀석 것도 새로 지어 입히고."
"아버님, 저는요."
하고 숙영이가 말했고 허준이 웃었다.
"여부가 있느냐. 암 너도 해 입어야지."
숙영이가 좋아서 할머니의 목에 매달렸고 그 손녀를 돌려 안으며 어머니가 다시 눈물이 글썽했다.
"고맙다, 잘했어 ... 그 숱한 고생 견뎌내어 참말 보람이 있었 ... 어 ..."
이날 아내의 몸은 혼인을 맺던 그날 밤처럼 뜨거웠다.
그 아내를 허준 또한 지난날 그녀의 고생을 한꺼번에 풀어줄 듯이 뜨겁게 안았다.
이미 첫닭이 여러 차례 우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 밤도 허준은 잠이 들지 않았다.
감미로운 피로가 겹겹이 허준을 감싸고 있었으나 눈은 자꾸만 멀뚱거릴 뿐이었다.
지리산 험준한 비탈과 골짜기를 약초를 찾아 들짐승처럼 후비고 헤매고 다니던 지난 7년 고생이 꿈결만 같았다.
'꿈에까지 본 한양.'
잠 안 오는 눈을 천정에 말똥거리며 허준은 아직 바라본 바도 없는 대궐 속 내의원의 정경들을 분방하게 상상하기에 바빴다.
"'상놈이다 천것이다' 하고 온갖 수모받고 살던 내가 상감이 계시는 대귈에서 활보하고 ... 기쁘지 않으오."
"서방님."
하고 허준의 품속에서 아내가 입을 열었다.
"음."
아내가 문득 일어나 앉아 손으로 머리를 간추렸다.
"일어나지 말고 더 좀 있소."
대답 대신 아내가 윗목 질화로에 꽂힌 인두로 불씨를 헤치더니 유황개비에 불을 옮겨 호롱 심지에 달았다.
그리고 새삼 자세를 바로 하여 남편을 건너보았다.
"한마디 제 소견을 꺼내도 되올지?"
"하오. 우리 사이 새삼 못할 말 무어요. 왜 그동안 집에 무슨 일 있었소?"
"집안일이 아니고 서방님 얘기올시다."
"내 얘기라니?"
"이번 창녕의 병자 서방님의 재주로 고친 것이옵지요?"
"물론이오. 사례로 받아온 짐을 보았지 않소. 더구나 이렇게 소개의 서찰까지 받아왔는데, 핫핫. 그래도 믿기지 않으오."
허준이 베개 밑에 있던 성대감의 서찰을 툭툭 쳤다.
"믿사옵니다. 하오나 그렇다면 ..."
"그렇다면이라니?"
"매사 사람에게는 시작이 중요한 것 아니온지? 그렇다면 그 시작을 자신의 재줄 미뤄놓고 왜 남을 의지해 시작하려 하시옵니까?"
"남을 의지 ... 라니?"
허준이 아내의 차가워진 눈을 보며 일어나 앉았다.
"서방님이 의원으로 입신하려 하시는 이상 서방님의 꿈도 내의원 취재에 계시는 건 당연하옵니다. 하오나 그 일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야 떳떳한 게 아니올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난 또 무슨 소리라고, 헛헛."
"그래야만 장차 매사에 자신과 용기가 생기는 것이옵지, 남의 도움으로 시작을 한다면 ..."
뻥해졌던 허준이 문득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에게 짜증이 섞였다.
"물론 난 자신이 있소. 이번 길에 난 내 재주를 확인했소. 하나 내의원 취재가 자신만으로 되는 건 아니잖소. 수백 수천 명 몰려드는 각자 내노라 하는 의원 속에서 아차 작은 실수로 떨어질지 누가 장담하오?"
"저도 그걸 생각했습니다. 하오나 ..."
"왜 이러오, 당신!"
"서방님."
"당신 말뜻은 알아. 하나 이 일만은 우선 붙어놓고 봐야겠소."
"그건 자신 없는 행동올시다."
외면해 무시하려던 허준의 눈꼬리가 치켜 올랐다.
"어째? 못할 소리가 없네. 당신이 세상일을 어찌 알기로 말을 함부로 ..."
"넓은 세상일은 다 모르오나 사람이 어찌 살아야 하는가는 아옵니다."
"건방진 소리 마오!"
"좀만 더 들어주소서!"
"닥치란 말이오! 잠이나 자오."
"기왕 나온 얘기마저 하게 해주소서."
"듣기 싫다는데! 내의원 취재가 매년 있는 줄 아오? 매년 있다가도 10년 동안 없을 수도 있고 5년 동안 안 뽑는 수도 있소. 게다가 그 모처럼의 기회 한번 삐끗하는 적엔 평생을 기횔 못 잡는 수도 있다 그 말이오! 긴말이 무슨 소용이오. 스승님의 아들 도지가 그 증거요. 그런데 이 기회를 놓치란 말이오?"
" ..."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소. 나도 신이 아닌 바에야 아차 한번 실수를 안 저지른다 누가 장담하오."
아내 이씨가 심호흡을 하더니 대답했다.
"아차 실수로 떨어진다 하면 역시 그건 아차 실수할 만큼 서방님의 기량이 아직은 ..."
"듣자듣자 하니 이젠 못할 말이 없구나! 무어 어째!"
"서방님 ..."
아내의 얼굴에 허준의 주먹이 떨며 고함쳤다.
"누군 밸이 없어서 이걸 받아온 줄 알아. 참고 듣자니 이 계집이 제 사낼 어찌 알고."
주먹이 날아갈 듯한 허준의 귀에 방문 밖에서 문득 기척이 났다.
" ... 나니라."
손씨의 음성이었다.
5
때아닌 어머니의 기척에 허준은 아내를 겨눈 주먹을 거두었다.
이어 아내가 급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언쟁인 아무래도 안채에까지 들렸던 듯 들어온 손씨는 그런 아들 내외를 의식한 채 잠시 말이 없다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미 말 다 들었다. 그리고 그건 에미 말이 옳다."
"무어라구요?"
"에민 하던 말마저 하거라. 애비가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이 하도 기뻐서 내가 잠시 넋이 나간 탓으로 미처 깊은 생각까진 못했다만 에미 말이 백번 옳고말고."
"왜들 이러시오니까? 더 이상 듣기 싫습니다."
"듣기 싫어도 들을 말 들어야 해!"
어머니의 딴 때 없이 강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고 허준이 성대감의 서찰을 집어 들고 발딱 일어섰다.
"어머님이 무어라 하시건 이 일만은 어머님 말씀대론 못 하오리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당당히 시험을 쳐서 붙으면 그야 통쾌는 하오리다. 하나 대여섯 사람 뽑는데 나라 안에서 몰려드는 의원이 자그만치 천 명도 넘을 때가 많소이다. 한데 고집대로 살잔 말이오! 난 못해요. 다시 말하오만 이 서찰은 내가 꾸민 것도 아니요 자청한 것도 아니요 성대감이 자진하여 꾸며준 게요. 상대가 누군지 아오. 시임 우의정에 현재 내의원 도제조란 말이외다. 어림도 없는 소리. 차라리 내 목숨을 나눠줄지언정 이건 못 버려!"
고함과 외침이 끝나자 허준은 자기의 관을 떼어 들고 방문을 차고 나갔다.
그러나 방안의 두 여자는 부르지도 따라 나오지도 않았다.
아니 그 방안에서 아내가 얼굴을 휩싸며 울음을 터뜨렸고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한숨 더 자거라. 자고 나면 속상한 일은 잊어버려지는 거니."
집을 뛰쳐나온 허준은 속이 뒤집히는 심정이었다.
늦가을 배추잎에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온몸에 시렸으나 아내의 뜻밖의 고집을 본 허준의 분한 숨결은 의원에 도착하는 동안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의원 앞 개울에 이르러 이윽고 허준은 소세를 하며 하늘도 보고 한숨도 쉬고 하다가 언덕 비탈을 올랐다.
불빛이 내걸린 의원 마당은 오늘도 새로운 병자와 그 가족들로 복닥거렸으나 이런 시각 아버지의 회진에 앞서 초진을 맡아보는 도지나 임오근의 모습이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임오근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나 보다 여기며 허준이 몇 사람 안면이 있는 병자 가족들과 인사를 하는데 그 마당에 비질을 하던 꺽새와 저도 고명한 의원인 양 병자의 환부를 짚어보던 영달이가 허준을 발견하고 무엇에 찔린 사람들처럼 튕겨일어났다.
허준이 선배인 영달과 꺽새에게 웃음을 보이며 인사했다.
"그동안 수고가 많소이다. 난 간밤에야 당도했소."
"흥."
하고 꺽새가 코방귀로 허준의 인사를 일축했고 돌연 두 손으로 허리를 재며 영달이가 허준의 발치까지 훑어보는 눈이 야멸찼다.
"왜 그러오."
허준이 의아했으나 침묵 속에 돌아온 건 증오와 질투에 일그러진 눈빛뿐이었다.
허준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 그들의 자기에 대한 감정을 알고 있었고 달랜다 하여 고분고분해지는 자들도 아니었기에.
그 허준의 앞으로 사랑 쪽에서 달려나온 어린 제자 상화가 처음으로 웃음을 지으며 반색했다.
"오셨군요. 이번 일 감축합니다."
"소식을 듣고 있었는가!"
허준이 묻자 상화가 다시 활짝 웃었다.
"그럼요. 어젯밤 임의원님이 당도하시어 모두 허의원님 얘기로 밤을 지샜던걸요."
"그래 스승님은 기침해 계신가?"
"예, 안 그래도 마악 허의원댁으로 부르러 가던 차올시다."
허준이 상화와 큰사랑으로 향해 가자 영달이와 꺽새가 저희끼리 눈을 맞추더니 얼른 그 허준의 뒤를 따라왔다. 큰사랑 앞에 이른 허준이 불이 환한 스승의 방문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소인 준 지난밤에 당도하여 이제 문후 올리옵니다."
유의태의 기침 소리 대신 벌컥 방문이 열렸다. 그건 임오근이었고 방안에는 유의태와 도지의 쏘는 듯한 눈빛이 허준을 향해 있었다.
그 방안의 눈빛과 자기의 등 뒤에 닥치는 영달, 꺽새 들의 조소와 이상하게 긴장된 얼굴을 발견하며 허준이 방으로 들어가자 딴 때 없이 영달과 꺽새가 그 방으로 쫓아 들어왔다.
방 한구석에는 임오근이가 나누어 지고 온 성대감댁에서 꾸려준 사례품들이 쌓여 있는 걸로 보아 유의태는 임오근으로부터 허준의 성공 소식을 들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일을 성공하고 돌아온 제자를 맞이하는 그런 따뜻한 눈빛이 아니었다.
"밤이 늦어서야 당도했사와 스승님께서 주무시리라 여기어 소인의 집에부터 들렀다가 왔습니다."
다음 순간 그 허준에게 유의태의 얼음장 같은 첫마디가 떨어졌다.
"창녕서 받아온 것 내놓아라."
" ...?"
"얘긴 이미 다 들었어!"
하고 도지도 딴 때 없이 반말지거리를 뱉었다.
지난날 서책을 빌려주며 내의원 얘기를 들려주던 다정한 얼굴은 간 곳이 없었다.
허준이 대답했다.
"성대감 댁에서 사례라 하여 몇 가지 물목들을 꾸려주었사온데 그건 집에 두고 미처 가져오지 아니했습니다. 밝는 길로 가져오겠습니다."
"누가 그따위 비단 조각이나 돈냥을 묻는 줄 아나!"
도지가 소리쳤고 유의태가 손을 내밀었다.
"어서!"
"그 서찰 말이다"
하고 임오근이 말했다.
허준이 '앗!' 하는 얼굴로 임오근의 조롱 어린 얼굴을 보고 품 안의 서찰을 꺼내 유의태 손 위에 놓았다.
"누구에게 가는 무슨 내용인지 말해보아."
하고 도지가 입을 씰룩이는데,
"내용은 알 것 없다."
유의태가 냉연히 말했고 그 서찰은 곧장 촛불에 당겨졌다. 허준이 벌떡 일어났으나 마주 보는 유의태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스스승님?"
허준이 불꽃이 되는 성대감의 서찰을 뺏으려 한 것도 잠깐, 유의태는 이미 잿더미가 된 그 서찰을 놋화로 속에 내던지며 말했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워 공과 사가 애매한 풍속이기로서니 인명을 다루는 의원은 사사로운 인정으로 자격을 얻을 수 없다."
"하 ... 하오나."
허준의 핏기 가신 얼굴이 한줌 잿더미로 변한 서찰을 향해 신음소리를 냈으나 그 서찰은 화로 속에서 마지막 불꽃이 되어 푸식거리고 있었다. 쩡! 하고 유의태의 다음 말이 잇따랐다.
"또 하나 그런 나약한 자가 내 문하에서 나왔다는 것은 나로선 참을 수 없는 수치인즉!"
"그러나 스승님!"
"돌아가되 내일부터는 내 집에 다신 얼굴을 비칠 것도 없다!"
"예?"
"네가 내게서 배운 재주로 기량을 키우려 않고 벼슬 높은 자의 서찰 따위로 네 앞날을 열려고 마음먹은 순간에 너는 이미 나를 배신한 것, 너와 나의 인연은 끝났더니라. 나가거라!"
"스승님!"
다시 몸을 일으킨 허준의 면상에 유의태의 창날 같은 손가락이 뻗어왔다.
"이잘 썩 내치거라!"
"용서를 ... 한번만 ..."
그러나 이 순간을 기다린 듯 영달이와 꺽새가 허준의 팔목을 잡아 젖혔고 튕겨 일어난 임오근이 함께 허준의 목덜미를 잡아채 방문 밖으로 끌었다.
허준이 두 발을 문지방에 버티며 또 스승님을 절규했으나 "닫아라, 문!" 하는 유의태의 고함이 터지고 도지가 방문을 닫았다.
이어 허준의 몸은 임오근 등의 완력에 이끌려 마당으로 굴러떨어졌고 몸을 다시 일으킬 사이도 없이 사랑 밖으로 질질 끌려갔다.
의원 마당으로 끌려가며 허준이 필사적으로 다시 스승님을 울부짖었으나 그 면상에 터진 건 임오근, 영달, 꺽새 들의 주먹질과 욕지거리였다.
얼굴이 피범벅이 된 허준은 의원 밖 비탈에 내굴리며 정신을 잃었다.
6
허준이 유의태의 문하에서 파문당한 지 두 달이 되었다.
세상은 선조 7년 원단을 맞이하고 있었다.
동지를 지나면서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리는 겨울이었고 허준이 사는 황량한 산음의 산과 들도 내내 눈에 쌓인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 두 달 허준은 일체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방안에 들어앉은 채였고 가장의 그 깊은 시름을 아는 어머니도 아내도 그리고 아이들도 누구 하나 큰소리 내는 이 없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는 요즘의 집안 분위기였다.
때로 허준이 집을 나설 때가 있어서 가족들은 스승 유의태에게 사죄차 가는 것이 아닌가 기대를 걸었으나 허준은 뒷산에 올라 삭정이며 썩은 나무뿌리 따위 군불거리 한 짐을 해 지고 내려와서는 다시 자기 방에 드러누우며 바깥세상을 내다보려 않았다.
그런 남편을 보며 가장 마음 아파하는 것은 아내였다.
처음 창녕서 성공해 돌아온 그 남편께 더 좀 알뜰히 조언한다는 것이 뜻밖의 말다툼이 되었고 남편이 유의태에게 떨려난 그 문제의 성대감의 서찰건은 자기가 일러바친 것이 아니요 임오근의 고자질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나 어쨌든 그날 이후 남편은 자기와도 어머니와도 일체의 말을 끊었다.
일이 터진 그 날 점심나절쯤 영달이와 꺽새가 마님의 영이라 하며 나타나 허준이 따로 성대감댁에서 사례로 지고 왔던 그 짐짝을 내놓으라고 했고 고부는 그 짐 속에 스승댁에 가는 다른 짐도 있는가 여기어 윗목에 밀쳐뒀던 짐을 순순히 쪽마루 끝으로 내놓자 이런 사례를 받은 것도 다 유의원 밑에서 배운 의술 덕분이니 출문을 당해도 사례의 짐은 유의원댁에 들여놔야 옳다고 떠들며 대뜸 멜빵에 어깨를 꿰며 일어섰던 것이다.
도착하며 허준이 식구들의 설빔이라도 하라며 내놓았던 그 옷감까지도 마저 꾸려 넣자 그제야 그들의 이상한 거동에 고부가 영문을 물었으나 짐을 진 두 사람은 그건 내 설빔할 옷감이라고 울먹해서 따라붙는 남매를 뿌리치며 도망치듯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에 심상치 않은 사태를 느낀 고부가 의원으로 달려갔으나 방금 짐을 지고 온 영달이나 꺽새는 거푸 캐묻는 고부를 거들떠보려고도 않았고 유독 상화가 다가와 안쓰러운 얼굴로 그날 새벽에 있었던 사건을 귀띔해주었던 것이다.
이에 두 여자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허준이 돌아오면 함께 유의태에게 사죄하고자 기다렸으나 정작 허준이 집에 나타난 것은 그날 한밤중이나 되어서였고 그 눈은 삼눈을 앓는 사람처럼 핏발져 있었다.
만취한 남편을 부축하여 방으로 들어서자 그때 허준이 말했었다.
"당분간 나 혼자 생각할 것이 있으니 당신일랑 어머님 방에서 함께 지내오."
그리고 두 달이었다.
누워 있지 않으면 짚세기나 삼고 있는 그를 보며 그건 아마도 행여나 스승 유의태로부터의 사면의 소식을 기다리는 괴로운 침묵이려니 여기고 아내도 어머니도 애써 그의 심경을 건드리려 않았다.
그리고 오늘 설날이었다.
내쫓긴 뒤 여러 차례 찾아가 빌었어도 만나주지 않던 유의태였으나 해가 바뀐 오늘 사죄를 떠나서 새해 문안을 드리며 얼굴을 마주 대하면 행여 목매 기다리는 사면의 분부가 계실지 모른다 기대하며 어머니도 아내도 어젯밤부터 옷을 다려놓고 초조해하건만 여전히 허준은 방에서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어쩌고 있느냐?"
하고 또 한 번 뒤꼍 남편의 기척을 살피고 돌아온 며느리의 파리한 기색을 향해 손씨가 물었다.
"소세하고 있습니다."
"어디 출타할 기색이더냐?"
"아이들을 부르고 하는 걸 보니 어머님께 세배 올릴 생각인가 봅니다."
"누가 내 세배 받자고 기다린다더냐. 유의원댁에 가는지 안 가는지 그게 궁금해 묻는 게지."
"암튼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말문이 열린 걸 보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나 봅니다. 건너오면 어머님이 물어봐주소서."
허준의 아내 얼굴에 오랜만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고집도 고집도 ... 내 그 고집 모르는 바 아니지만. 뭘 하누, 어서 너희가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오너라."
손씨가 아랫목 요때기 속에 발을 뻗고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는 남매를 돌아보았다.
"소자올시다."
하고 허준의 소리가 방 밖에서 났다.
아내가 일어나 방문을 열었고 그 방 밖에 아버지를 발견한 숙영이가 딸깍 울음을 그쳤다.
한때 무등도 태워주던 아버지가 근자 말도 않고 찾아가도 쳐다보지도 않음에서 어린 마음에도 그 아버지가 요즘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아버지 오셨어."
하고 손씨가 일깨우자 겸이도 그제야 이불 속에서 기어나와 어머니의 눈치를 받아 방 밖으로 따라나섰다.
허준이 방문 밖 쪽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그 뒤로 남매와 아내가 꿇었다.
"어머니 새해 절 받으십시오."
하고 허준이 절을 올렸고,
"건너와 주니 반갑구나."
하며 손씨가 매무새와 앉음새를 고쳤다.
뒤이어 겸인가 작년에도 했듯이 아버지 따라 절을 올렸고 다시 아내와 숙영이가 큰절을 드렸다.
이어 방에 들어와 앉는 허준에게 남매가 절을 했을 때였다. 문간에 기척이 나서 내다보니 뜻밖에 상화였다. 정작 허준은 담담한데 아내와 손씨가 튕겨나듯이 일어서며 반가운 낯색을 했다.
그리고 허준의 아내 또한 그가 다른 많은 문도들 속에서 유의태가 종자처럼 항시 데리고 다니는 유일한 제자임에서 새해 첫 아침에 찾아온 상화가 행여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온 게 아닌가 기대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식석죽도 어려운 살림에 그러나 정초의 귀밝이술 삼아 몇 종지 술을 마련했는지 아내가 조그만 술상을 차렸고 그 앞에 마주 앉은 상화의 입에서 나온 얘기들은 가족의 기대와는 하나도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손씨와 아내가 가장 궁금히 여기는 대목에 대해서도 너무도 실망의 말을 들려주었다.
허의원을 내보낸 후 스승님은 단 한 번도 허의원의 근황을 궁금해하거나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는 말과 함께 한 가지 새 소식이라고 전하는 말은 요즘 더러 창녕 성대감 댁의 소개를 받은 모모한 타처 사람들이 여러 사람 허의원을 의원으로 찾아왔으나 임오근도 도지도 또 영달, 꺽새 들도 그 허준이란 자는 창녕에서 돌아온 후 곧 한양으로 솔가해 떠나 이미 산청 땅에는 살지 않노라 따돌렸다는 말과 함께 지난 섣달 초순께 역시 허의원을 찾아온 병자 가족을 따라 도지가 대신 의령으로 가서 오래 묵은 해소병 환자를 낫우고 돌아와 그 도지의 성망이 크게 떨치고 있다는 그런 말도 했다.
"당신의 아들인데 유의태 그분이 오죽 잘 가르쳤을까요."
하고 손씨가 탄식 어린 말끝에 이어,
"아무리 세상 인심이 어떻다 하기로서니 이 사람도 우리들도 오로지 유의태 그 어른이 다시 불러주실 날만 기다리며 근신하고 있는 터에 일가 솔가해서 한양으로 떠났다니 대체 왜 그런 모진 말을 꾸며댑니까. 혹 그래서 유의원께서 이 사람이 정말 떠난 줄 알고 더 찾지 않는 게 아닐지요?"
상화가 말을 않았고 의외로 허준은 담담했다.
그 침묵을 향해 손씨가 반은 달래듯이,
"암튼 오늘은 특별한 날이지 않느냐. 잘잘못 떠나서 웃어른을 찾아뵙기 무난한 날이니 속히 건너가 보아."
" ..."
허준이 말이 없는데 상화가,
"유의원께선 지금 집에 안 계십니다. 4, 5일 전 진주에서 사람이 와 모셔갔는데 아마 여러 날 후에야 돌아오실 겁니다."
"여러 날이면 언제쯤 ..."
하고 손씨가 더 안타까이 묻자,
"글쎄요. 병자가 위중한 모양올시다. 함께 모시고 갔던 병문이가 밤을 도와 달려오더니 임오근 그 사람에게 여러 약을 꾸리게 하고 어제 아침 함께 다시 달려갔으니까."
기대도 긴장도 무너진 방안에 손씨의 한숨소리가 다시 들렸고 그러자 상화가 새삼 허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승님에 대한 기대는 버리시지요."
"저보다 허의원이 더 스승님을 겪어보셨지만 제가 보기에도 스승님은 다시 허의원을 부르진 않을 겁니다."
"알고 있네."
"아신다면 미련 두지 마십시오."
" ..."
"지난번 창녕서 있었던 일 그건 허의원의 의술의 경지가 어디에 이르렀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오니까. 그렇거든 차제에 독립을 하십시오."
"다른 사람 다 몰라도 허의원은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창녕 성대감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분을 다시 찾아갈 생각을 안 하십니까. 찾아가서 내의원 도제조에게 보내는 그 소개장이 어찌어찌 허실되었다는 얘길드리고 다시 한번 써달라면 안 써줄 리가 없습니다. 그 실력에 그 소개장을 들면 우리 의원 출신으로 내의원 취재에 첫째로 붙는 건 바로 허의원일 겁니다."
" ..."
"그래서 붙기만 하면 그 뒤에야 탄탄대로올시다. 그렇게 일단 성사를 이룬 후에 스승님을 찾아 인사를 올리면 분명 용서도 되실 터이고요."
"말인즉 고마우이."
허준이 처음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 여러모로 생각해봤어. 그리고 마음을 굳혔네."
상화도 손씨도 아내도 허준을 돌아보았다.
"그분이 나를 잊었듯이 나도 유의태란 사람을 잊었어."
7
상화가 돌아간 뒤 어머니와 아내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는 허준을 불러 앉히고 다시 마주 앉았다.
유의태가 자기를 잊었듯이 자기 또한 유의태를 잊었노란 말에 가슴이 아파서였다.
"그래도 기다려야지. 단 한 번 실순데 지성으로 기다리노라면 용서해주시마 기별이 오지 않겠어, "
"아니옵니다."
"왜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느냐. 그래도 수많은 제자 중에 더구나 당신의 자식까지 젖혀놓고 너를 창녕에 보냈을 적에는 너의 재주를 인정한다는 것 못지않게 네게 유별한 사랑이 계셔서 지목한 게 아니리."
" ..."
"아무튼 ..."
하고 아내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 올시다. 따로 깊은 인연이 없다 하더라도 웃어른들이나 평소 도와주신 분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는 것이 도리올시다."
"그래서?"
"하오니 유의원님을 찾아뵙고 ..."
"사죄하란 말이오?"
"왜 못하느냐. 잘잘못 떠나 웃분에게 사죄하는 건 아랫사람의 도리요 허물이 아니지 않느냐,"
"건너가겠습니다."
허준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앉아 보아."
" ..."
"마침 스승님이 아니 계신다 하오니 내방마님께라도 세배를 드리시면 유의원님께서 돌아오신 후 다녀갔다는 전갈은 되지 않으오리까."
"무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하고 허준이 비웃었다.
" ..."
"내가 그 집에서 쫓겨나온 날 영달이와 꺽새 시켜 내 집에 와서 가져간 짐들, 그게 누구의 행윈지 아오? 바로 그 내방 마님이 시킨 일이오."
"그까짓 피륙이나 돈냥이 문제오니까."
"나도 돈냥이나 피륙을 말하는 게 아니오. 하나 그건 분명히 성대감 댁에서 내게 따로 내려준 내 짐이란 말이오."
"그까짓 것 잊어라. 사람 헐벗는다고 부끄러운 거 아니다."
" ... 다른 건 다 좋아. 하나 베 한 조각이면 될 어린것들 옷감마저 쓸어가야 해. 그런 여자에게 내가 고맙습니다 하고 인살 하라고?"
"그도 찾아뵙는 것이 도리."
"더 이상 그 집 얘기 마소서. 앞으로 유의태의 유자도 제 앞에선 마소서."
거칠게 방문을 열고 나가는 아들을 손씨가 다시 불러세웠다.
"그럼 앞으로 대체 어찌할 셈이냐?"
" ..."
"7년 공들인 의원 생활을 정녕 걷어치울 생각이냐? 이제 와서 중도 파기할 생각이냐 그 말이다. "
"다른 길을 찾지요. 애초 의원 노릇 하고자 이 산음 땅에 찾아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 누구나 누구에겐가 고개 숙여 살기 마련이다. 하늘처럼 높은 정승도 상감 앞에선 머리를 조아려 살기 마련이고 그 임금도 천지신명껜 고개 숙여 산다지 않느냐. 왜 제 분수를 생각 않고 고개 숙여 살 줄을 모르는고 ..."
"말씀 잘하셨습니다. 앞으로는 내 분수대로 고개 숙여 살 겁니다."
"앞으로는?"
" ...?"
"한두 달 어딜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고흥 나로도라는 곳에."
"나로도라면 변돌석 그분이 가 있는 섬이 아니오니까."
"그렇소."
" ...!"
"거긴 왜오니까?"
"오히려 여기보다 자유롭고 편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일 테니 무언가 살 길이 있겠지요. 이도 저도 없으면 그 사람과 얼려 어부 노릇을 하든가 "
" ...!"
"그래도 서로 호형호제하던 사람이오. 찾아가면 박대는 않겠지요."
"넓은 세상 두고 왜 자꾸 좁은 세상으로 찾아가려 하십니까. 더 좀 생각하소서."
"더 좀 생각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고 당신이오. 우리의 신분이 뻔한 터에 내가 보내지 말라 했음에도 왜 아직도 겸이놈을 서당에 보내고 있소!"
" ..."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자식의 눈을 뜨게 해주려는 거지 영화를 기대하여 보낸 적 없습니다."
"그 얘기도 내가 누누이 한 바요. 천하게 태어난 놈이 섣불리 세상에 대해 눈을 떠서 그 눈에 쳐다보이는 게 뭐요!"
" ..."
"모르면 몰라서 지나가되 세상 됨됨일 알면 고작 할 수 있는 건 이것저것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밖에 더 있소?"
"전 그렇게 생각지 아니합니다."
"당신 말은 항상 나하고 반대요."
"서방님이 그동안 유의원님댁에서 다른 문도들보다 의술에 대해 일찍이 숙달하신 건 다른 이들보담 글을 더 많이 아셨기 때문이라 여기옵니다. 그렇다면 서방님이 의업으로 입신하시면 겸이가 그 가업을 이을 것이라 여기어 미리 서당에 보내고 있었던 것 올시다."
"나도 에미하고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겸이를 서당에 보내는 건 나와 의논도 했던 바이고 ..."
" ..."
" ..."
" ..."
"좋소. 하나 앞으론 그런 기대 버리시오. 유의태와 인연이 끊어진 지금에 와서까지 장차 의업에 기대어 살 생각 없은즉 ... 나로도에는 내일 새벽에 떠나겠소. "
"애비야?"
손씨가 튕겨 일어나 말릴 듯했으나 그 어머니를 향해서도 허준의 눈은 차가웠다.
"손바닥만한 섬이 아니라 합디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고기도 잡히는 넓은 섬이라 하니 이미 자리 잡은 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러운 세상 꼴 보지 않고 거기가 천국일지 모르지요."
"좀 더 앉으소서. 그리고 더 의논을 한 연후에 ..."
"노자는 내 나름대로 마련할 궁리가 있소. 집에 있어도 생활에 도움도 못 됐던 사람이니 기다리지 말고 한 두어 달 후면 돌아오리다."
그날 밤 아내는 애써 허준의 곁에 누웠다.
어떻게든 남편이 나로도행을 단념하길 애원하기 위해서였고 동시에 유의태가 돌아오는 날을 알아다가 그 집 문간에 거적을 깔고 부부가 몇날 며칠을 꿇어앉아서라도 스승의 가르침보다 성대감의 서찰에 의지하여 출세를 꿈꾸었던 지난날의 잘못을 함께 빌고 그리고 지난 7년 동안 쌓아온 의술 공부를 계속할 허락을 받자는 그 얘길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 상화가 들고 왔던 술병을 혼자 비운 허준은 끝내 아내를 돌아보지 않은 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새벽 집을 나설 때 허준은 가족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깊은 실망을 알고 있었고 그건 새삼 말로 달래질 것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쩌랴 ... 의원 생활을 계속하겠다면 아내도 어머니도 기뻐는 할 것이로되 부산포와 같은 얼치기로 독립한다는 것은 허준의 자존심이 움직이지 않았다.
허준은 자기의 의술의 목표를 유의태에게 두었다. 유의태 정도의 자신만만함이 없고선 내가 의원이노라 소리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출세를 위해서라면 상화의 말처럼 다시 성대감을 찾아가 소개장을 못 받아낼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태의 문하에서 떨려난 순간부터 소개장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넌 그 정도의 인간이야!'
자기가 창녕에 다시 가면 그렇게 조소할 유의태의 일굴이 떠올랐고 비록 그와 인연을 끊었어도 유의태의 그런 식의 비웃음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유의태에 대한 의리가 아니었다.
오기에 가까운 자존심이었다.
스승이라는 존경 너머로 자신이 언제부터 유의태에게 그런 경쟁심을 품고 있었는지, 허준은 유의태와 헤어지고 나서야 그걸 알았다.
그 갚음이란 자기 또한 철저히 유의태를 잊어버리는 길이라고 믿었다.
당신에게 배운 의술로는 생업은커녕 한그릇의 밥 한 잔의 술도 벌어먹지 않겠다는 그것이 요 두 달 허준이 찾아낸 자기 앞길에 대한 각오요 결심이었던 것이다.
지난날 변돌석이와의 얘기를 상기해보건대 나로도로 가는 포구는 여수였고 그 여수로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큰길 따라 남으로 진주, 사천 해안으로 뱃길을 찾아나서는 길과 남서로 뚫린 하정 창촌 거쳐 하동으로 나가 섬진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소금배를 타는 길. 남은 길은 하동서 길머릴 돌려 백운산록을 거쳐 동곡 운평 광양만으로 빠지는 길이었다.
허준은 그 백운산록으로 접어들었다.
쌓인 눈과 드문드문 노루떼의 발자국이 있는 능선을 불어치는 삭풍이 콧등을 베어갈 듯이 모질었으나 허준은 지름길도 아닌 이 험로를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7년 공무가 수포가 되고 장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은 그에겐 번거로운 주막길 따위보다 인적 먼 산속 길이 더 편했다. 그리고 7년 동안 지리산 골짜기를 들짐승처럼 헤매고 다닌 그의 하체에는 웬만치 가파른 산길 따위는 조금도 고통스러운 길이 아니었다.
그 허준이 백운산 중턱 제법 양지바른 비탈에서 잠시 걸음을 쉴 때였다.
눈발이 비껴간 바위틈에 두어 잎 시든 풀줄기가 눈에 띄었고 그 마른 가지에 보송보송 말라 있는 붉은 열매가 도대체 이런 엄동에 볼 수 있는 예사 열매가 아니었다. 7년 약초꾼으로 산판을 헤맨 그 호기심으로 허준이 다가가 그 열매의 모습이며 메마른 줄기에 매달린 잎새의 모양을 들여다보았을 때 돌연 허준은 숨을 삼켰다.
그건 산삼이었다.
"오 오 ..."
하고 허준이 자기도 모르는 신음소리를 냈고 눈을 씻고 다시 보고 다시 또 그 풀잎과 열매를 보던 허준은 다음 순간 뛰쳐 일어나며 무인공산을 향해 소리쳤다.
"심 봤다앗!"
심은 산삼의 별칭이었고 그걸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 산삼이 자기의 것임을 온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약초꾼들의 불문율이었다.
"심 봤다앗!"
"심 봤다앗!"
허준의 떨리듯 헷갈리는 소리가 백운산의 골짜기와 능선 위로 거푸거푸 퍼져나갔다.
8
산상의 세찬 바람이 벼랑 위에 선 허준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허준의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심봤다! "라는 산신령에게 고한 외침 세 마디에 금세 목도 쉬어버렸다.
"이 ... 이건 꿈이야. 이건 생시가 아니라구!"
자기에게 닥친 행운이며 당장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요 꿈에도 상상 않던 뜨거운 갈망일 터인데도 허준의 목쉰 소리가 거푸 또 부정했다.
"꿈은 아니야. 그러나 이건 믿을 수가 없어!"
산삼의 이파리 수를 세던 허준이 다시 눈을 부릅떴다. 하나는 잎이 여섯 잎으로 퍼진 심마니들의 은어로 '육구만달'이라 불리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역시 심마니들의 은어로 '칠구두루부치'라고 호칭되는 귀하디귀한 일곱 잎짜리 진품임에 틀림없었다.
'꿈에도 생각 않던 내가 소망을 보게 되다니!'
그 소망이란 말,
전업인 심마니들뿐 아니라 방방곡곡 십 년을 하루같이 산판을 헤매고 다니는 수백 수천의 약초꾼들이 자신에게도 한 뿌리 태어나길 바라고 바라는 것이 산삼이었다.
처음 유의태의 문하에 들어가 지리산의 골짜기와 산봉우리를 타고 다니던 약초꾼 시절 허준은 머리가 허옇다 못해 누렇게 변한 어인마니(채삼꾼의 우두머리)를 만나 하룻밤 바위굴에서 가을비를 퍼하며 밤을 지샌 적이 있었다.
그는 평생을 산삼 캐기에만 뜻을 둔 진짜 심마니였고 허준이 산삼에 관해 지식을 얻어들은 건 그의 입에서였다.
한 냥을 넘는 산삼 한 뿌리면 팔자를 고친다는 신비의 영약, 그 산삼이 귀한 만치나 그걸 캐기 위해선 금기도 많아서 부정한 걸 본 적이면 아예 산에 오르지도 않는다는 말에서부터 산에 오를 적이면 1, 3, 5, 7, 9로 반드시 홀수로 동무를 짠다는 수수께끼 같은 미신과 산삼을 발견하면 여느 약초 따위 발견할 때 쓰는 캔다는 말 대신 '돋운다'고 경대한다는 것이며 온갖 잡풀이 살아 숨 쉬는 여름에 캐는 건 효력이 없고 적어도 잡풀 따위는 모두 시들거나 죽어버리는 처서를 지난 늦가을부터 새로운 지력이 소생하는 이듬해 초봄까지에 돋우는 것이어야 진짜 산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산삼들은 온갖 초근목피가 시드는 엄동일수록 바위 밑에 깔린 생생한 지력을 흡수하는데, 그 열기로 인해 산삼 주변에는 어떤 폭설이 와도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들려주었었다.
그토록 존귀한 영약이고 보니 생성하는 곳 또한 그 지점을 '주무시는 곳'이라 존대하고 캐는 행위를 오히려 반대로 '돋운다'고 한다고 황발의 늙은 심마니는 탄식처럼 말했었다.
또 한 번 거센 산바람이 허준의 온몸을 휩쓸고 산삼이 솟아난 바위벽에 휘몰아쳤다.
이미 허준의 머릿속에는 집을 나설 때의 목적인 나로도행은 없었다.
그는 즉시 자기의 저고리를 산삼 앞에 깔고 주막에서 챙겨온 주먹밥과 술병을 올려 산신령에게 새삼 소망 본 인사를 올리고 나자 손톱을 세워 두 산삼을 돋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돋우는 방법 또한 여느 약초 뿌리를 캐는 것과는 달랐다.
겨우내 언 땅이었다. 허준의 손가락의 살갗이 찢기고 손톱에 피가 뻗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준은 고통도 몰랐다.
불빛은 없어도 족했다.
백운산 큰 봉우리로 깨진 해골조각 같은 하현달이 거의 기울어 새벽이구나 여겼을 때는 수많은 돌쩌귀에 찢기고 뽑아내는 바위에 찍힌 허준의 열 손가락은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이윽고 황소라도 한 마리 파묻을 만한 거대한 구덩이가 파졌을 때 허준은 그 첫 뿌리를 두 손으로 돋우며 허공에 쳐들었다.
그건 완연히 동녀를 닮은 진품이었다.
'한 냥이 넘으면 부르는 값이 없다고? 이건 두 냥은 돼!'
허준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남은 한 뿌리는 흙더미째 통째로 들어 안고 제물을 모셔놨던 저고리에 쌌다.
허준은 비탈을 들짐승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달려왔건만 지금 그가 달리는 곳은 길도 아니었다.
'집으로!'
그 일념뿐이었다. 얼어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건 산삼을 싼 저고리를 잡아맨 손이 펴지지 않았을 때 느낀 감정이었다.
그러나 발이 말을 들어주었다.
넘어지면 무릎으로 달리고 허준은 하룻길 떠나온 저 멀리 산음에 있는 집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산사의 종소리가 들렸다. 저 아득히 마을에 몇 개의 불빛이 굽어 보였고 첫닭들이 홰를 치고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갑자기 허준은 자기가 죽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번 넘어지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땀이 흐르다 멎은 그의 얼굴은 얼어붙다 못해 자주빛으로 죽어가고 있었으나 그 자신은 그걸 알지 못했고 부둥켜안은 산삼 보따리만이 머릿속에 가득 찬 일념이었다.
새벽밥을 짓는 하얀 연기가 마을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연기에 데워진 따스한 구들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허준이 그 마을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준의 걸음은 그 동구 밖에서 멎었다.
'가면 안돼!'
추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길도 없는 산길을 달려오느라 갈가리 찢긴 옷이며 얼굴, 산삼을 싼 흙투성이 저고리는 금세 의심받을 것이 아닌가 ...
허준은 마을에서 발길을 돌렸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가야 해. 집에 당도하기까지 그 누구와도 만나선 안 돼 ...'
허준은 날이 밝아옴에 따라 오히려 큰길을 피하여 샛길을 찾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리산 쪽으로!'
샛길도 알고 지름길도 아는 곳은 지리산뿐이었다. 적어도 그 산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심한 큰길보다는 안전한 길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지리산에는 겨울 한 철 사냥꾼들이 불의의 대설을 만나면 수삼 일씩 피신할 작은 움막들이 흩어져 있음을 허준은 알고 있었다.
해가 돋자 허준은 밤사이의 격정에서 깨어나 골짜기물에 소세를 하고 옷을 털고 산삼 보따리를 다시 싼 다음 등판에 매달려 쫓아온 패랭이도 상투 위로 반듯이 고쳐 썼다.
그리고 피멍이 든 두 손을 여벌인 버선을 꺼내 감쌌다.
그러나 허준은 행복했다. 한 뿌리면 집 한 채. 또 한 뿌리가 제 식구 계량할 논밭쯤 너끈히 마련하고도 남을 진품 산삼 두 뿌리가 자기의 가슴에 있지 않은가.
고생은 끝났다. 이제 20리하고 두어 마장 더 하룻밤 하루낮을 내리달려 현 서쪽 27리에 있는 독녀성의 허물어진 석축을 저만치 황혼 속에 발견하며 허준이 뇌었고 다시
"이젠 기어서라도 갈 수 있어?"
하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외쳤을 때였다.
"두 다리가 땅에 붙은 걸 보니 사람은 사람인 모양인데."
하는 낯선 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허준이 소스라치며 돌아보자 한눈에 심마니태로 알 수 있는 다섯 명의 장정들이 바로 등뒤에 서 있었다.
" ...!"
"산에서 내려오는 걸 이쪽 등성이에서 보고 있었는데 어디서 무얼 하다 내려오는 잔가?"
허준이 대답 대신 산삼 보따리를 끌어안으며 물러섰다.
"난 약초꾼일세."
"무슨 대단한 약초를 캤기에 저고리에 싸고 다니나 따라오며 아무리 봐도 그게 수상쩍어."
이어 한 사내가,
"펴봐 한번." 하며 이미 허준의 퇴로를 막듯이 등뒤로 돌았다.
허준은 그들의 손에 각각 들린 키가 넘는 다섯 개의 작대기를 보았다.
약초꾼도 그렇거니와 심마니들도 깊은 산중에서 각자 흩어져 일을 보다가 바위나 나뭇등걸을 두드려 동패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그 작대기였다. 또 그건 불의에 숲속에서 뛰쳐나오는 맹수의 골통을 부수는 무기 삼아 쓰는 '마대'라 불리는 황백나무 몽둥이였다.
허준이 몸을 날려 뛰었다. 그러나 의욕뿐이었다. 허준은 어깻죽지에 무서운 충격을 느끼며 곤두박혔다.
"안돼!"
허준이 고함치며 튕겨 일어나려 했으나 또 한 번 몸 위에 몽둥이인지 발길질인지 알 수 없는 충격이 왔다.
그러나 허준은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산삼 보따리를 끌어안고 버퉁겨 일어나려 했다.
그 불안은 허준의 팔목을 흙투성이의 짚세기가 한 번 두 번 짓밟았다. 그리고 채뜨려 가는 산삼 보따리를 보며 무어라 절규하던 허준은 이마로 땅을 찍으며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깨어가는 허준의 의식이 무슨 소리를 들은 듯했다.
"아직 숨은 붙었고 어디서 본 얼굴이야."
하는 한가한 소리에 이어 역시 같은 목소리가,
"짐승이 덮친 것 같진 않고 도둑 떼가 덮친 듯하이. 핫, 이 산속에 도둑떼라니."
"도심은 인간의 무리나 지닌 것이지 산을 핑계 대지 말게. 나무 관세음보살."
"이제 알겠군, 유의태 밑에 오가던 그 아일세, 보게."
"들쳐업게나."
"이 아이가 이런 시각에 혼자 웬일인구."
"내가 이 아이 집을 짐작을 해. 어서 업으라니까는."
"하필 왜 이쪽 길로 왔던가."
처음의 목소리가 웃음과 함께 하는 소리 끝에 허준은 자신의 몸이 완강한 힘에 쳐들리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 목소리의 임자가 안광익 바로 그 사람의 음성인 걸 깨달으며 허준의 의식은 다시 멀어졌다.
9
의식이 깨어감에 따라 허준은 등등 구름 위를 떠가는 듯한 자신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꾸만 처지는 자신의 엉덩짝을 추슬러 올리는 커다란 손바닥이 의식되었고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이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도 알았다.
'안광익!'
왕자의 병을 고치느라 자기의 부술만 믿고 왕가에서 금기로 하는 것임에도 왕자의 상처에 칼을 댄 것이 발각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장살 직전에 왕자의 상처가 나아 다리 병신만으로 용서가 된 사내. 그리고 사랑하는 궁녀 정씨를 들쳐업고 왕궁 높은 담을 뛰어넘어 도주한 사내, 또 호환에 떠는 마을에 이르러 닭의 몸에 구침을 꽂아 호랑이를 잡은 후 마을 사람들의 사례 따윈 거들떠도 안 보고 사라진 대가 큰 의원.
그러나 허준은 그대로 업혀가며 정신이 돌아온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깬 만큼이나 뭇매에 짓밟힌 온몸의 고통이 들쑤시기 시작했고 안광익의 어깻죽지를 끌어 잡은 오른손은 산삼을 안 뺏기려다 짚세기들에 짓밟힌 손목이 소가 씹어놓은 듯이 피투성이인 채 손가락도 맘대로 펴지지 않았다.
새삼 허준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자 걸음을 세우는 기척도 없이 서너 발 앞서가는 중의 복색을 한 사내가 흘리는 말이 들려왔다.
"신음소릴 내는 걸 보니 점차 살아나는 모양이로군."
허준이 고통을 이기려 또 이를 악물었다.
허준은 알 듯했다. 1년에 두어 번씩 유의태를 찾아오는 중. 곡차란 핑계로 술도 마시고 닭고기며 개고기조차 떡이란 이름으로 게걸스레 집어먹던 안광익 못지않게 기골이 장대하고 유의태가 유일하게 사귄다는 김민세인가 하는 그 중일시 분명했다.
"어디쯤인가, 이 아이 집이?"
안광익의 말이었고.
"다 왔어. 두어 마장 더 가면 돼."
하고 대신 업어줄 기색도 없는 중의 대거리였다.
허준은 내려달랄까 얘길 하려 했으나 허리의 통증하며 도저히 제힘으로 걸을 자신은 없을 것 같았다.
고통을 견디고 있는데 안광익의 소리가 다시 났다.
"아까 어디까지 얘길 했던가."
"무슨 얘길."
"사행 다녀온 남응명인가 들어왔다는 얘기, 그 명나라 의원 이름이 뭐? 이시진(1518~1773)? 책 이름은 본초강목?"
"분명 그렇게 들었네. 본초강목. 각 분야를 16개 종목으로 분류하고 동물, 식물, 광물에 관한 1890여 종의 것을 망라해서 기재했다면 한두 해에 이뤘음직한 일도 아닐 터이고."
"종류를 고루 다뤘다는 게 놀라운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전래돼 오던 종래의 여러 설을 불신하고 그 하나하날 일일이 약효를 징험해 봤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게지."
"한번 만나보고 싶군 ... 그밖에 더 들어온 얘긴 없던가?"
"종래 이것이다 하던 의서를 무시하고 제가 징험해본 바만 토대로 해서 새로 책을 쓰고 있다는 걸세."
" ... 본초강목이라 ..."
불현듯이 뇌는 안광익의 말 속에 작은 감동과 향수가 섞였다.
"기주가 어디 붙은 땅인지는 모르나 아파도 호북 어디쯤 있는 땅이름이 아닌가 싶은데 이시진이란 것도 본명이고 자를 동벽이라고도 하고 빈호라고도 한다는 것까지가 남응명이 들어온 소식의 전불세."
"흥 의원치고 제법 자까지 지니고 사는 걸 보니 땅덩어리도 넓지만 그놈의 나란 우리처럼 천하다고 의원 구박은 안 하는 모양이로군."
두 사람의 얘기가 계속 귀에 들려오고 있었으나 허준은 무심했다.
더구나 지금 그 얘기들이 이시진의 "본초강목"이란 이름으로 뒷날 허준 자신이 찬저할 "동의보감"과 어깨를 겨루는 동양의학 쌍벽의 얘긴 줄은 꿈에도 알 리 없었다.
세 사람의 옷자락이 기폭 날리는 소리를 내도록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그 바람 소리뿐인 정적 속에서 이번엔 김민세의 탄식하듯한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란 정말 오묘하고 오묘해."
"갑자기 또 뭘 설법할 생각인가?"
"부처님의 설법 가지고도 안 된다고 하면 죄가 될 소리지만 그러나 세월처럼 신기한 게 없어."
"세월이 신기하다?"
"남응명이에게 그런 남의 나라 얘길 듣기 그 훨씬 전 내가 내의원에 들어서기도 이전에 나 또한 내 나라 의서들을 새로 정릴 해야 한다고 골똘히 생각한 적이 있었지."
"이 친구 똥집이 왜 이리 무겁나."
하며 안광익이 허준을 한번 추슬러 올렸다.
독백 같은 중의 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의원이 된 후 선인들의 처방을 수없이 시험해보면서 나 역시 선인들이 남긴 문적에 대해 실망을 맛본 적이 한두 번이라 여러 수십 번만이 아닐세."
"그래서?"
"그래서 이 일은 내가 나서서 내 나라 산천을 두루 헤매며 내 나라에서 약재로 쓰는 초근목피며 그 열매들을 일일이 맛보고 실험하고픈 생각으로 몇 년을 번민했었지."
"그거야 자네뿐이 아니지."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더란 말인가?"
"당연하지 않는가. 나도 멍청이가 아닌 바에야 이 나라에 전래된 의서의 거의 반이 중국 것이지 내 나라의 것이 아니라는 것쯤 아는 사람일 세. 또 ..."
"또 ..."
"풀 한 포기 나무 열매 하나도 그 고장의 기후 따라 맛도 생김새도 각각 다른 터에 중국 의서에 적혀 있는 이름 하나만 믿고 내 나라 물건을 따라 쓴다고 그게 다 효험이 제대로일 턱이 만무지. 만무고말고."
"내 뜻과 어찌 그리 마음이 맞는 소리를 하나!"
"하나 그 고생 누가 지원해서 할 수 있나. 이 땅에 자라는 수천 가지 초근목피를 일일이 새로 맛보고 병자에게 징후를 실험하고 그래서 설사 종래의 약방문이 잘못인 걸 알았다 하세. 그건 틀렸소 하면 제 명에 못 살걸. 뻔한 일 아닌가. 안 그래도 돈이나 밝히고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사는 나라 안 의원 놈들이 가만두겠는가? 저들 게으른 건 뒷전이고 저 돌팔이 의원 놈 때려죽이라고 길길이 띌 게 눈에 선하이."
마을이 가까워졌는지 개 짖는 소리가 콩콩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령 그게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언젠간 기어이 누군가 해야 할 일이야."
중의 말이었고 안광익이 냉소했다.
"어느 놈이? 어느 어리석은 놈이 수십 년도 걸릴 그런 일을 자청한단 말인가? 잘못하다 독초라도 씹어서 혓바닥이 썩거나 벙어리가 되는 것 따윈 약과야."
" ..."
"급하면 땡전 한닢 들고 와 의원님 살려주소 어째 주소 죽는 시늉 하지만 돌아서면 피고름이나 짜고 남이 아프거나 병나길 기다리고 그걸 기화로 먹고 사는 의원놈 하고 손가락질하는 게 세상의 인심인 걸 모르나."
"저기 저 집일세."
하고 중이 저만치 불 꺼진 허준의 오두막집을 가리켰다.
안광익의 소리가 계속됐다.
"그게 아무리 세상에 필요한 것이건 진작 그 길을 단념하길 잘했지. 만일 이시진인가 하는 그 명나라 의원처럼 그 일에 미쳤다면 지금쯤 이런 한가한 얘기도 못 하고 처자식 버리고 도망다니기 바쁜 신세가 돼 있을걸."
"암튼."
"암튼이고 뭐고 없어. '본초강목'이고 이시진이고 그게 중국 땅에 태어난 놈이기에 그런 일을 해낸 게지 그놈도 이 조선 땅에 태어났어 보게, 목 좋은 곳에 의원 간판 내달고 저부터도 잘 안 처먹는 어중간한 약이나 지어주며 돈냥 챙기기 바쁘지."
"암튼."
하고 중이 고집스레 또 자기 말을 꺼냈다.
"세월이란 기묘한 것이고말고. 의원에 대한 우리 사정과 중국의 사정이야 여하간에 그런 일은 여간한 고집 센 자가 아니면 해내지 못하는 일인 것만은 분명한데, 세월은 항상 엉뚱한 인간을 한세월에 한둘씩 끼워서 태어나게 하거든."
"이 집인가?"
중이 자기 말을 계속했다.
"그게 우리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게 정말 아쉬운 일이긴 하나 ..."
"소리 좀 치게."
하고 안광익이 이제야 숨찬 소리를 냈고 그러자 한 발 나선 중이 소리치는 대신 불 꺼진 허준의 집 방문을 향해 조용한 염불과 함께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0
아닌 밤중에 갑자기 방문 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목탁소리와 염불소리에 누구 못지않게 불심 깊은 손씨도 손자 겸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이게 귀신 소리냐 사람 소리냐.!"
하고 겨우 떨리는 소리를 냈고 허준의 아내는 방문 밖의 소리가 분명히 환청이 아니란 걸 깨닫자 재빨리 떼어 입은 저고리 안섶의 은장도를 확인한 다음 그 시어머니를 가로막으며 방문 밖을 향해 물었다.
"뉘시오니까?"
대답 대신 방문 밖의 목탁 치는 소리와 염불소리가 멎으며 쪽마루 위에 쿵 하고 무거운 물체가 내려지는 소리가 난 후 사내의 고통 어린 신음소리가 터졌다.
경황 중에 그것이 남편의 소리인 걸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여러 사람의 인기척임을 확인한 허준의 아내는 곧 질화로 속에서 불씨를 찾아 유황개비로 불을 옮겨 등잔에 당기고 나서 시어머니의 떠는 손을 잡았다.
"분명 귀신의 장난이 아니고 누군가 왔나 봅니다. 하오나 설사 도둑이라 해도 무엇 하나 가져갈 것이 없는 집이요 인명이야 해치리까."
이어 한결 침착해진 소리로 방문 밖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밖에 와 계신 분들이 뉘시오니까?"
그러자 이제야 집안에 명색이나마 사내는 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겸이가 다듬이 방망이를 찾아들고 튕겨 일어났고 역시 새 정신을 차린 손씨가 그 손자와 며느리를 오히려 다시 가로막고 나서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업혀와 쓰러진 피투성이의 사나이가 타관으로 출분했던 아들이요 남편임을 안 집안은 딸 숙영이까지 깨어 울음판 난리판이 되었고 그 경황 속에서 두 여자와 힘을 합해 허준을 안방으로 들여다 눕힌 김민세로부터 백운산 자락에 묻힌 효곡리 성불사에 다녀오던 중 우연히 독녀성 어간에서 이 사람의 빈사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마침 아는 얼굴이었으므로 업어왔노란 얘기와 전신에 심한 타박이긴 하나 술과 엿을 고아 먹이며 한 보름 눕혀두고 수발을 들어주면 무사히 기동을 하리란 얘길 듣고서야 집안의 울음소리가 가라앉았다.
이에 일변 아내가 물을 데워 남편의 상처를 닦아내고 어린 아들의 조력을 받아 찢긴 의복들을 갈아 입히는 동안 손씨는 냉수부터 청해 마시는 두 사람에게 이 엄동에 두 분을 만나지 아니했으면 자식이 필시 얼어죽었을 거라며 거푸 은혜를 치사했다. 그런 손씨에게 안광익은 껄껄 호탕한 웃음과 함께 은혜니 뭐니 공치사보다 시장기나 달래주시오 하고 요구하여 그제야 손씨는 허둥거리며 두 사람을 윗방으로 모신 후 요깃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밥상은 돼지감자가 반은 섞인 조밥 두 그릇과 묵은 인절미를 구워 담은 접시며 김치도 없이 시래깃국과 마늘장아찌 한 종지였다.
그 밥상에 기가 차 있는 안광익에게 "갑자기라 아무것도 차리지 못하오니 용서하십시오." 하고 미안해하는 손씨에게 대꾸도 없던 안광익은 뒤이어 할머니 대신 숭늉을 받쳐들고 온 겸이에게 물었다.
"아니 너희 집은 조상 중에 죽은 사람도 없느냐. 어찌 설날 이튿날의 음식이 제사상에 오른 것도 없이 고작 이렇단 말이냐."
겸이가 제법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 대답을 못 했고 그러나 남 먼저 밥 서너 숟가락을 시래깃국에 말아 먹고 난 김민세가 팽이 치느라 새카맣게 터진 겸이의 작은 손을 다독거리며 미소부터 보여준 뒤,
"먹긴 잘 먹었다만 웬 인절미더냐. 구워낸 걸 보니 설날 해먹은 떡은 아닌 듯한데? 혹 할머니가 떡장사를 하시느냐."
"예, 할머니가 떡장사를 하시고 혹 못다 파시는 날은 식구들이 저녁삼아 먹곤 합니다."
하며 다시 시선을 떨구자 안광익이,
"그럼 모주나 소주라도 몇 잔 먹게 해달라 청해도 소용이 없는 소리겠군."
하자 김민세가 말했다.
"시장기 달랬으면 됐지 이 집 살림 구박하지 말게."
"노파가 미안해하는 걸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원근의 돈을 다래끼로 쓸어모으는 유의탠데 명색이 그 유의태의 제자란 아이의 집안 살림이 이토록 구차하다니 유의태가 언제부터 이렇게 돈을 밝혔나 하고 나오는 소릴세."
"그 사람 욕할 것도 없네. 그 사람은 의술이 돈이 된다는 걸 경계하고자 일부러 문도들에게 저 혼자의 의식 외는 못 본 체하는 줄 알고 있어. 그 밖의 돈일랑 그 집 안방에서 간추리는 눈치고 ..."
"그렇다면 그 집 안방구석도 곧 썩는 냄새가 나겠구먼."
"친구 부인께 거 무슨 악담인가?"
"악담은 무슨 악담, 돈이란 뭔가. 본시 그건 똥무더기와 같은 것이라서 세상에 고루 흩어주면 천하가 윤택할 거름이 되는 법이지만 혼자 끼고 앉아 쌓아두면 악취밖에 안 나는 오물일 뿐이라고. 훗훗, 자고로 돈에 미쳐서 안 썩은 놈이 있던가."
"돈타령을 별난 데다 갖다 붙이는군. 하하."
이어 웃음을 거둔 김민세가 방구석에 쌓인 것들을 가리키며 겸에게 물었다.
"한데 저것들은 무엇이냐?"
겸이가 기가 죽어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논어니 그런 어려운 책은 옛날에 아버지가 과거 공부 하실 적에 보시던 거구 동몽선습은 어머님이 구해주신 제 책올시다."
"그리구 저 가득 쌓인 것들은?"
"그건 아버님이 유의원님댁에 계실 제 틈틈이 적어오시던 약방문이랑 그 밖의 의서를 필사하신 것들인데 몇 달 전에 불쏘시개나 하라며 부엌에 내다버린 것을 어머님이 도로 들여다 놓은 것들올시다 ..."
안광익이 냉소했다.
"시건방지긴, 진짜 의원이 되려면 의서를 똥소칸에 걸어놓고까지 외우고 또 외워도 모자라는데 제놈 머리를 얼마나 믿기로 한번 읽고 쓰곤 불쏘시개로 내던진단 말인가."
두 사람은 아직 허준이 유의태의 문하에서 쫓겨난 사실을 모르는 듯했고 그래선지 겸이가 좀은 항의 어린 눈으로 그 안광익에게 말했다.
"그래서가 아니라 아버님 말씀이 우린 양반도 아니고 천한 출신들이라 아무리 공불 해도 소용이 없고 앞으론 책 따윌 뒤적거릴 필요도 없다고 내다 버리신 것 올시다."
"상것이 의원이면 됐지 과거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과거, 왓핫핫 ..."
그때였다.
돌연 아랫방에서 흥분한 허준의 외침이 들려왔고 뒤이어 애써 달래는 아내와 손씨의 안타까운 소리에 이어 허준의 고함소리가 잇따랐다.
"두 눈 멀쩡하게 뜨고 빼앗긴 터에 그럼 이대로 가만히 주저앉아 있으란 말이오!"
"그렇기로 이런 몸으로 찾아 나서긴 어디로 찾아 나선단 말씀이셔요. 사람이 살고 나서야 산삼이든 무엇이든 ..."
"어서 버선짝하고 갈아입을 옷들 내놓으시오. 난 그놈들의 얼굴을 똑똑히 보아두었다고. 그리고 그만한 산삼을 팔려면 결코 소문 없이는 못 팔아!"
"제발 앉아, 애비야!"
"한 뿌리도 아니고 두 뿌리올시다. 백 년, 이백 년은 실히 넘은 큰 놈 올시다. 그 한 뿌리만으로 배 한 척쯤 넉넉히 사고도 님을 ..."
"또 그 뱃소리 ..."
"그것만 가져왔음 이까짓 산음 땅 이 밤으로라도 떠날 수 있는 거금이란 말이오."
"난 그까짓 거금도 싫다. 왜 넌 아직도 너를 오늘만치 키워준 유의태 그분을 찾아갈 심정이 못 되느냔 말이다."
"그 얘긴 이미 끝났습니다. 애초 유의태 따위 내게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갈 데 없으니 잠시 몸담아 있었을 뿐올시다."
"그럼 한낱 뱃사공이나 어부가 되자고 수천 리 이 산음 땅에 찾아왔더란 말이냐! 그리고 잡힌 고기도 놓아주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거늘 왜 굳이 고기를 잡아 생업을 삼으려 들꼬, 왜 ..."
겸이가 어물어물 윗방으로 건너갔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그래서요? 어머니가 그토록 위하는 부처가 오늘날까지 어머님을 위해 해준 게 무엇입니까. 말끝마다 부처님 부처님 ..."
"우리 식구 무탈하게 이만치나 사는 것도 모두 부처님의 자비니라."
"암요. 제가 천하게 태어난 것도 부처님의 자비지요."
"무어라고?"
"여보 ..."
"흥, 낯선 고장에 가면 천한 놈도 기를 펴고 살 새 세상이 기다리고 있겠거니 ..."
"오냐, 그래 하고픈 말마저 해 보아라. 나도 이번 식구들에게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서버린 너를 보고 돌아오면 꼭 할 얘기가 있다고 기다렸다."
"백번 해봤자 올시다. 나는 종살이 끝에 용천 현감 허사또의 첩실이 된 천첩 소생이고!"
"당신 왜 ... 대체 이 ... 럽니 ... 까 ... 항차 그까짓 산삼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아버질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구 곤두박질 여우짓을 열 번 스무 번 해봤자 겨우 시골 관아의 아전이 되는 것쯤이 고작올시다! 그 아전이라도 될까요? 백성들 토색질하구 약한 놈 등이나 쳐먹는 아전이라도!"
"아부지이 ... 할무이 ..."
하고 다시 일어난 숙영이가 울음을 터뜨렸고 손씨도 울음이 터졌을 때,
"아직도 흘릴 눈물 남았습니까. 왜 웁니까. 왜요 왜!"
"서방님 ... 제발 뒤꼍방으로 건너가소서. 여보 ..."
순간 허준의 목도 메었다.
"의원이고 개나발이고 그따위 꿈 버렸습니다. 발버둥질 쳐봤자 올시다. 제 소망이 고작 의원이었으니까 ... 더 ... 이 ... 상 미련두어 이 세상 쳐다볼 생각 없다, 그 말올시다. 무슨 일 있어도 산삼을 찾아 배 한 척 마련하여 넓은 바다에 나가 그물이나 치구 ..."
"난 싫다."
"싫어도 난 정했습니다. 함께 살기 싫으면 아무도 따라오라 사정하지 않겠으니 그리 아소서."
"그래 그토록 의원이 싫다 하면 의원은 마다 하자. 하나 아전도 ... 아전 나름 어려운 현민들 도와주며 정직하고 근실하게 사는 아전이 되리란 결심을 왜 못할꼬."
"정직하고 근실한 게 통하는 세상인 줄 아십니까. 내 자리 차지하자고 있는 말 없는 말로 괴롭힌 놈들이 저 유의태의 집에만도 우글우글합니다. 흥 먹느냐 먹히느냐가 이 세상사올시다. 고기잡이 왜 못합니까. 항차 부친 따위가 무엇입니까 사람만 안 해치고 남의 것 도둑질만 않으면 세상천지 거리낄 게 무엇이냐, 그 말 올시다!"
"암 도둑질은 말아야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너야말로 도둑놈이니라!"
뜻밖의 소리에 식구들이 놀라 숨을 삼켰고 허준이 획 아랫방을 돌아보았다.
"도둑놈?"
"도둑놈이고말고!"
김민세의 목소리가 마당 쪽에서 났다.
11
격분한 허준이 마당으로 향한 방문을 왈카닥 열어젖혔다.
마당에 길 떠날 모습의 안광익과 김민세가 서 있었고 내다본 허준의 얼굴을 향해 김민세가 손가락을 창날처럼 뻗어왔다.
"당신 지금 무어라 했소!"
"이 집안에 도둑놈이 너말고 누가 있느냐!"
"어째?"
허준이 굴러 나왔다.
그들이 자기를 구해준 고마움은 안다. 또 그들의 의술을 우러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자기가 의술에 관심이 있었을 때의 얘기다.
그 유의태와 인연을 끊은 이제 와서조차 그들에게 매도당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 땡추중 같은 놈이!"
"애비야." "여보!" 하며 손씨와 아내가 달려 나와 말리려 했으나 허준은 두 여자를 내치며 고함쳤다.
"내 비록 오늘까지 이 모양으로 살지라도 남의 집 감나무 가지 하나 꺾은 적이 없는데 내가 도둑질하는 꼴을 네가 보았다고 말을 함부로 해."
"꼭 남의 집 담을 넘어야 도둑이더냐? 유의태의 밥을 먹으며 약초를 식별하는 수업을 쌓지 않았다면 그 산삼인지 뭔지가 그토록 값나가는 것인 줄 네놈이 어찌 알았을까 보냐고 말하고 있는 게다! 그럼에도 유의태에 대해 고마워하는 말은커녕 저 혼자 팔자 고칠 궁리에 바빴으니 그건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냐!"
" ..."
"욕심은 곧 도심인즉! 할 말이 있으면 해보아!"
"이 넓은 세상에 그저 제 한 몸이나 팔자 고칠 궁릴 하는 이깐 허접스러운 놈을 땀 뻘뻘 흘리며 업고 온 내가 오히려 한심투성일세. 가세."
안광익이 김민세의 팔을 끌자 손씨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두 분께선 혹 유의태 그분을 잘 아시는 처지시온지?"
"그게 무슨 상관이오. 저자가 이미 그 사람을 스승으로 보지 않는 터에 우리 또한 저런 망종을 아는 척하기 싫소이다."
"기실 사연은 그것이 아니오라."
"그만두오. 일일이 구차한 넋두리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한 몸들은 아니오. 아니 안 갈 셈인가?"
안광익이 허준을 지켜보는 김민세를 다시 잡아끄는데 그 손을 물린 김민세가 허준의 앞으로 다가서며 잠시 눈싸움을 하는가 했더니 뜻밖에도 방금까지의 언쟁을 의식하지 않는 나직한 한마디를 했다.
"면천시켜주랴?"
"어째?"
"제법 논어도 읽고 의서도 베껴낸 자가 면천도 몰라?"
"더불어 말하고 싶지도 않으니 어서들 가버리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무언가 한 가지 들은 바가 기억이 나서 하는 소리다. 창녕 뉘 집엔가 가서 제법 중한 병 잘 낫우었다는 얘길."
"그깐 작은 재주 따위 뭐 그리 대단한가! 그대는 다심해서 탈일세. 이잔 인두겁만 썼지 제 어미의 눈에서 피눈물도 예사로 뽑는 살모사 같은 잘세. 좀 아까 보지 못했던가!"
"무엇이야!"
뛰어들 듯한 허준을 아내가 잡았고 그 허준에게 김민세가 또 나직하게 말했다.
"면천시켜주랴?"
"흥."
"천하게 태어난 것이 억울하다면서? 그러니 면천시켜 줄까를 묻고 있는 게다."
"면천 너나 해라."
"이자가 도시 아래위도 가리지 못하고 말본새도 배운 게 없구만."
안광익이 씨근거리는 허준을 같잖은 듯이 보다가 어이없이 웃었고 허준이 아직도 자기를 지켜보는 김민세에게 삿대질을 놓았다.
"너야말로 면천의 뜻을 제대로 아느냐! 중도 여덟 가지 천한 신분의 하나 아니냐. 그렇다면 네 신세나 내 신세나 마찬가지! 면천이 되고픔 너부터나 되란밖에!"
김민세가 눈도 깜박 않고 다시 한번 나직이 말했다.
"면천시켜 주랴?"
손씨가 얼른 사이에 뛰어들었다.
"대사님께선 어느 가람에 계시는 분이시온지요."
김민세가 그 손씨를 밀어내고 여전히 허준에게 말했다.
"암, 양반으로 태어나지 못한 바에야 이 세상 살 재미 없는 세상이고 말고. 양반이 아니거든 그 양반의 수족이 되어 꺼덕거리는 중인쯤으로라도 되든가 그도 못 되거든 태어난 고장에 농사라도 마음 놓고 짓고 살 평민쯤이라도 돼야 사람 신세라 할 수 있지."
허준이 어느덧 숨을 삼킨 채 그 김민세의 눈빛에 압도당해 가는데 김민세가 어머니의 치마꼬리 잡고 훌쩍이고 있는 숙영을 가리켰다.
"이 아이가 귀여우냐?"
이어 이번에도 역시 콧물 눈물이 빠진 겸이를 가리켰다.
"이 네 자식이 귀여우냐, 그 말이다."
" ...?"
"암 귀여울 테지. 항차 지각이 없는 들짐승이라 해도 제 자식은 귀여운 법인데 넌들 어찌 제 자식 귀여운 줄 모르랴. 하나."
"그래, 하나 뭐란 말이냐."
"듣자 하니 너는 사노비의 신센데도 관가의 눈을 속이며 떠다니는 잔 듯한데."
" ...!"
"숨어다니는 네 신세가 드러나는 날 그 화는 결코 네 한몸에 미치지 아니할 게다. 어느 상전 밑에 팔려가 대대손손 종노릇 하면서, 또 처자식 또한 제법 얼굴값을 하는 생김새면 어느 놈의 장난감이 될지 짐작이나 하랴? 종년 배 위에 올라타는 건 누운 소 등에 올라타는 만치 쉬운 노릇이라는 양반이란 자들의 농지거리쯤 너도 알 터인즉슨!"
"이 중놈이! 어째!"
그 뛰어드는 허준을 안광익이 우악스런 손으로 밀쳐냈다.
"중 입에서라고 반드시 염불만 나오란 법 있느냐. 육두문자라도 들을 본새가 있거든 들어두어!"
밀려난 허준에게 김민세가 다시 다가들었다.
"암, 거기까지 알고 나서야 어찌 면천하고 싶지 않으리. 설사 제 간과 눈알을 빼주더라도 면천될 길이라면 암, 원할 놈 많지."
"홍, 그래서 솔가하여 여진 땅으로라도 도망치란 그 말이로군."
"천만에."
"어째?"
"면천하는 길도 확실히 두 길이 있으니."
"두 길이 있다고?"
"하나는 사내의 씨주머니를 부서뜨려 궁중에 뽑혀 내시가 되어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르면 종이품 상선에 이르는데 그 하는 일은 임금의 어명을 출납하며 임금의 수라상을 감독하는 일이다."
"내시 ..."
"일명 경사방대감이요 대전설리라고도 부르는 그 상선의 직책은 천한 인간으로 태어나 조선 천지에서 대감이라 불리는 하늘 아래 단 하나의 인물이다."
" ...!"
"하나 씨주머닐 잘라낸다고 반드시 궁에 뽑힌다는 보장은 없고 이미 뽑혀서 궐내에 버틴 내시의 숫자가 1백 40명, 아니 그것보다 이미 아내까지 거느린 너는 그 내시의 자격도 없다."
" ..."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 어의가 되는 길뿐."
"어의?"
"어의 ... 왕족의 건강을 돌보고 임금의 시탕을 책임지는 직책인 어의 ..."
"그 어의도 대감이다, 그런 말이오?"
"천만에, 그 길도 오르고 올라서 양반들이 독차지하는 도제조, 부제조 아래 어의로서 의명을 떨치고 떨쳐 실무인 내의원정이 되고서야 정삼품이 되는 것이 고작이다."
"하나 ..."
하고 안광익이 냉소했다.
"정삼품도 정삼품 나름, 대감이란 호칭은 옥당(임금이 있는 곳)에 오를 수 있는 문관 벼슬에 한하고 의술 따위 천직은 당하관 정삼품에 영감이 고작이지, 훗훗."
허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놀리고 있는 얘기 같았다. 될성부른 얘기들이 아니었다.
"하나 어의의 직책만 찬다면 대대손손 종살이나 제 처자식과 본의 아닌 생이별 따윈 면하고 살리라."
허준의 눈이 비웃으며 안광익을 향했다.
"내 알기 당신이야말로 그 내의원 출신인데 왜 당신은 면천의 길을 마다하고 내게 떠드는 게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밥 한 상 차려준 네 모친과 네 자식들을 위해서지. 내 말은 그뿐!"
안광익이 그 김민세의 법의자락을 끌었다.
"가세."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허준이 내뱉었다.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라지, 미친놈들!"
그 허준 따윈 더 거들떠보지도 않고 김민세가 손씨에게 합장하며
"나무관세음보살 ..."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득히 첫닭이 울고 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김민세에게 마주 합장하던 손씨가 그래도 무언가 미련이 되어, 그러나 부르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을 쫓아갔고 갑자기 얼어붙어 있는 허준에게 아내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될성부른 일이 아니올시다. 우연히 그래본 거겠지요. 들어가소서."
그 순간이었다.
허준이 갑자기 마당을 뛰쳐나갔다.
가족이 놀랄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으로 허준이 달려가고 있었다.
바람 속으로 달려 나루터 언덕 비탈을 굴러 내려온 허준은 엎어질 듯이 섰다.
마악 강심으로 쪽배 하나가 떠가고 있었고 그 위로 배를 젓는 김민세가 보였다.
허준이 외쳤다.
"대사님, 나 좀 봅시다. 대사니임--"
강바람이 그 소리의 반을 흐트러뜨렸다.
허준은 멀어 가는 배의 방향으로 모래톱을 달리며 다시 절규했다.
"시키는 대로 하리다. 면천하는 길이면 무슨 짓이든 하리다앗! 날 좀 보고 ... 가 ... 오 ... 날 ... 좀!"
피를 토하 듯한 허준의 절규를 분명 들었음직한 데도 배 위의 두 사람은 돌아보지 않은 채 배는 점점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