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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1

9권 다시 올리는 출사표

 

공명은 사로잡은 맹획을 놓아 주었지만. . .

세 갈래의 모반군이 모두 평정되자 이들에게 에워 싸워 있던 영창태수 왕항은 몹시 기뻐하며 성문을 열고 공명을 맞아들였다. 공명이 성안으로 들자마자 왕항에게 물었다.

"누가 공과 함께 이 성을 지켜 위태로움을 벗어나게 하였고?"

"제가 이 성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불위현 사람 여개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자는 계평이라고 합니다."

왕항이 그렇게 대답하자 공명은 곧 그를 불러들이게 했다. 여개가 공명 앞으로 불러 나와 절을 올리자 공명이 가만히 물었다.

"오래전부터 이곳 영창군에 식견이 높은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소. 알고 보니 이곳 영창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다 공의 생각은 어떠하오?"

여개는 공명의 물음에 문득 품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제가 이 고을에서 벼슬을 지내면서 남방 오랑캐들이 모반을 일으키려는 것을 안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그 땅에 사람들 들여보내 군사를 머물게 할 만한 곳이나 싸우기 좋은 땅을 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도 한 장을 만들었는데 바로 '평만지장도'가 그것입니다. 이제 감히 승상께 이 지도를 바치려 합니다. 한 번 살펴보시면 남만을 평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명은 남만 정벌에 꼭 필요한 지도를 얻게 되자 크게 기뻐했다. 여개에게 행군교수의 벼슬을 내리고 향도관으로 삼아 길을 안내하게 한 후 군사를 내어 남만 땅 깊숙이 들어갔다. 공명이 대군을 이끌어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문득 후주가 사람을 보내 왔다는 전갈이 왔다. 곧 그를 중군으로 불러들이니 상복 차림을 한 마속이었다. 마속은 형 마량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상복을 입고 있었다. 마속이 공명을 보자 절한 후 말했다.

"주상께서 군사들의 노고를 생각하시어 내리신 술과 비단을 가지고 왔습니다."

공명은 후주가 내린 술과 비단을 군사들에게 골고루 나눠 준 뒤 마속을 불러 앉히며 물었다.

"내가 천자의 명을 받들어 남쪽 오랑캐들을 평정하러 가는 길이나 아직은 좋은 방책이 서질 않네. 듣자 하니 유상(마 속의 자)이 식견이 높으며 남만의 풍속을 잘 안다 하였으니 부디 가르침을 베풀어주게."

마속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말문을 열었다.

"어리석은 생각이나마 승상께서 물으시니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원래 남만은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산이 험해 그것만 믿고 우리는 따르지 않은 자가 오래입니다. 승상께서 이번에 대군을 이끌고 가시면 반드시 평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힘으로 평정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배반할 것입니다. 승상께서 군사를 이끌고 그곳에 가시면 그들은 거스르지 않고 복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군사를 되돌려 북쪽에 있는 조비를 치러 간다면 오랑캐들은 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부림에 있어 적의 마음을 치는 것이 상책이요, 적의 성을 치는 것은 하책이라 했습니다. 또한 마음으로 우러러 따르게 하는 것이 군사로 싸우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남쪽 오랑캐들이 마음으로부터 다시는 들고일어나지 않도록 복종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래야만 오래도록 따르게 될 것입니다."

"과연 유성이야말로 내 마음을 훤히 아는구려."

공명이 그렇게 감탄하며 마속을 참군으로 삼아 함께 갔다. 마속의 재질은 일찍이 공명도 인정하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젊은이에게서 지혜를 빌리러 했던 점만 보아도 공명이 얼마나 남만 정벌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나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50만이라는 대군을 몸소 이끌어 온 것만 보아도 그랬다. 남만은 여느 싸움터와는 달리 풍토와 기후가 고약할 뿐 아니라 치중을 이끌기에 힘든 산과 수풀이 우거진 지대가 많았다. 만약 이번 싸움에 진다면 위와 오는 이 틈을 노려 둑을 무너뜨린 홍수처럼 촉으로 밀려들 판이었다. 후주는 아직 나이도 어린 데다 대군이 빠져나온 터라 도성을 지키기에는 군세도 약했다. 싸움에 져 50만의 대군이 꺾여 버린다면 성도는 틀림없이 쌓아 놓은 달걀처럼 위태로움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공명은 원정길에 나선 이후 단 하룻밤도 평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만을 평정하지 않으면 촉은 위나 오와 더불어 줄곧 등 뒤에 근심거리를 지고 있는 꼴이 될 것이었다.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근심거리를 도려낼 때라고 여긴 공명이었다. 공명은 수레에 몸을 실은 채 백우선을 들고 낯선 남만 땅을 향해 대군을 이끌어 굽이굽이 진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남만왕 맹획도 공명이 계책을 써서 옹개를 쳐 없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시 대군을 이끌어 남만으로 진군해 온다는 말을 듣고 거느리고 있는 3(부족)의 원수들을 불러들였다. 첫째 동의 원수는 금환삼결이요, 둘째 동의 원수는 동도나였으며, 셋째 동의 원수는 아회남이었다. 맹획은 세 동의 원수를 모아 놓고 말했다.

"지금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어 우리의 경계로 밀려들고 있으니 힘을 합해 그들과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 세 원수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세 길로 나아가 제갈량을 쳐라. 이기는 자를 동주로 삼을 것이다."

세 원수는 맹획의 명에 따라 그날로 각기 길을 나누어 나아갔다. 금환삼결이 가운뎃길로, 동도나는 왼쪽 길로, 아회님은 오른쪽 길로 나아갔는데 각기 오랑캐 군사 5만 명을 거느린 채였다. 그때 공명은 영채에서 장수들과 함께 만병을 칠 일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적정을 살피러 갔던 군사가 달려와 알렸다.

"지금 세 동의 원수들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세 길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공명은 그 말을 듣자 곧 왕평과 마충에게 영을 내렸다.

"지금 만병이 세 길로 밀려들고 있다 한다. 조자룡과 문장(위연의 자)을 보내 그들을 치게 하고 싶으나, 이 두 장수는 이곳의 지세에 어두워 쓸 수가 없다. 이에 내가 그대들을 보내려 하니 왕평은 왼쪽 길로 나가 적을 맞도록 하라. 또한 마충은 오른쪽 길로 가도록 하라. 뒤이어 자룡과 문장을 보내 그대들의 뒤를 돌보게 하겠다. 군마를 정돈하여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떠나도록 하라."

두 장수는 공명의 영을 받고 물러났다. 공명은 이어 장의 장익에게 영을 내렸다.

"그대들 두 사람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가운뎃길로 나아가 적을 맞도록 하라. 오늘 군마를 정돈한 후에 내일 왕평. 마충과 함께 군사를 내도록 하라. 조자룡과 문장을 선봉으로 삼고 싶으나, 두 사람 다 이곳 지리에 밝지 못하니 쓸 수가 없구나."

두 장수가 영을 받들어 물러났다. 조운과 위연은 공명이 거듭 지리에 밝지 못함을 핑계대며 쓰지 않자 화가 나 얼굴이 붉어졌다. 공명이 그제야 그들 두 장수를 돌아보며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장군들을 쓰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오. 다만 그 나이에 험한 곳에 들었다가 오랑캐들의 계략에라도 말려들까 걱정이 되어 그러는 것이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 군의 날카로운 기세만 꺾이게 될 것이요."

조운이 참다못해 더욱 붉어진 얼굴로 공명에게 물었다.

"만약 우리가 이곳 지리를 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대들은 조심하고 가볍게 나서지 않도록 하시오."

공명이 무거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공명이 끝내 출진을 막자 조운과 위연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그러고는 조운이 위연을 자기 진영으로 불러들여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선봉인데도 지리를 모른다 하여 쓰이지 못하고, 아랫 장수들을 내보냈소.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그러자 위연도 불끈하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에라도 말을 달려가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곳 토인(토박이) 하나를 붙잡아 길잡이로 쓰고 군사를 이끌어 나아간다면 만병을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좋겠소. 곧 군사를 냅시다."

조운도 위연의 말에 마다할 리 없었다. 조운은 즉시 말 위에 올라 위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가운뎃길로 나아갔다. 두 사람이 말을 달려 몇 리쯤을 갔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고 있었다. 조운과 위연이 급히 산 위로 올라가 살펴보니 오랑캐 군사 수십 기가 급한 기세로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조운과 위연이 길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오랑캐 군이 가까이 이르자 갑자기 길 양쪽에서 내달아 그들을 덮쳤다. 오랑캐 군사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두 장수를 보자 깜짝 놀라 달아났다. 두 장수가 달아나는 그들을 뒤쫓아 손쉽게 몇 사람씩 붙잡았다. 사로잡은 오랑캐들을 영채로 데리고 온 두 사람은 그들에게 술과 밥을 배불리 먹여 주니 그중의 하나가 물음에 답했다.

"맞은편으로 가면 바로 산기슭에 금환삼결 원수의 대채가 있습니다. 그 대채에서 동. 서로 뻗은 두 길이 있는데 모두 오계동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동도나와 아회남의 영채 뒤로 통합니다."

그 말을 들은 조운과 위연은 곧 군사 5천을 일으켜 사로잡은 오랑캐를 길잡이로 앞세우고 영채로 떠났다. 그때가 밤 이경 무렵이었는데 하늘이 맑아 밝은 달과 별빛이 보석을 뿌린 듯 반짝이고 있었다. 조운과 위연이 금환삼결의 대채에 이르렀을 때는 어느새 사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랑캐 군사들이 벌써 일어나 밥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날이 밝기도 전에 촉군을 치러 나갈 작정인 듯했다. 조운과 위연이 군사를 휘몰고 양쪽 길에서 짓쳐나와 영채로 밀고 들어갔다. 뜻밖에 당한 기습에 오랑캐 군의 영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제대로 무기도 잡지 못한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촉군의 창칼 아래 죽거나 상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때 조운은 긴 창을 비껴든 채 곧장 중군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걸 본 금환삼결이 고함을 지르며 기세 좋게 조운을 맞았으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창칼을 부딪기 시작한 지 불과 1합 만에 조운의 창끝이 그의 목을 꿰어 들었다. 이 광경을 본 오랑캐 군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에 바빴다. 금환삼결의 영채가 쑥밭이 되자 위연은 군사 절반을 이끌어 동쪽 길로 접어들어 동도나의 영채로 밀고 들어갔다. 조운도 나머지 군사 반을 휘몰아 서쪽 길로 들어가 아회남의 영채로 짓쳐드는데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위연이 만병들의 영채로 쳐들어가자 동도나는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맞았다. 그때 홀연 뒤쪽에서 만병들의 함성이 크게 일며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공명의 영을 받아 군사를 이끌어 나온 왕평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앞뒤에서 촉병의 공격을 받은 만병들이 갈팡질팡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미 패한 싸움임을 눈치챈 동도나가 길을 열어 달아났다. 위연은 아무래도 이곳 지리에 어두운지라 혹 낭패라도 당할까 봐 달아나는 동도나를 뒤쫓지는 않았다. 이때 조운도 아회남의 영채 뒤를 급습하고 마충 또한 영채 앞쪽을 들이치고 있는 중이었다. 아회남 역시 앞뒤로 촉병을 맞아 거느린 군사들이 뭉그러지자 급히 영채를 빠져나가 달아났다. 만병들을 크게 깨뜨린 촉의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채로 돌아가자 공명이 물었다.

"세 동의 만병들은 깨뜨렸으나, 두 동의 우두머리는 달아났다. 그렇다면 금환삼결의 목은 어디 있는가?"

공명의 물음에 조운이 가지고 온 금환삼결의 목을 바치자 다른 장수들이 알렸다.

"동도나와 아회남은 말을 버리고 산마루도 달아나서 뒤쫓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공명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염려하지 말라. 그 둘은 내가 이미 사로잡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장수들은 얼른 공명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공명을 바라보고 있는데 장의와 장익이 적의 장수 둘을 데려왔다. 그들은 동도나와 아회남이었다. 장수들이 놀란 얼굴로 다시 공명을 바라보자 공명이 적장을 사로잡게 된 까닭을 밝혔다.

"나는 여개가 그려 놓은 지도를 보고 그들이 영채를 세울 곳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짐짓 자룡과 문장을 격동시켜 적진 깊숙이 들어가게 하여 먼저 금환삼결을 깨뜨리려 한 것이다. 두 장수는 다시 길을 나누어 좌우 영채로 치러 갈 것을 알고 왕평과 마충을 보내 호응하게 했다. 실은 진작부터 자룡과 문장이 아니면 이 일을 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또한 앞뒤로 적을 맞으면 동도나와 아회남이 틀림없이 산길로 달아나리라고 여겨 장의와 장익을 보내 그곳에 매복케 했다. 관삭에게도 군사를 주어 가서 돕게 하였으니 어찌 저 오랑캐가 잡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 말을 듣자 모든 장수들은 공명에게 절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승상과 신과 같은 헤아림은 실로 귀신도 짐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명은 장수들의 감탄에도 귀도 기울이지 않고 동도나와 아회남의 결박을 풀어 주게 했다. 군사들이 그들을 풀어 주자 공명은 술과 음식을 내려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좋은 옷을 내리며 달랬다.

"너희들은 이제 각기 너의 동으로 돌아가되 다시는 악한 일을 거들지 않도록 하라."

동도나와 아회남은 사로잡은 적장을 죽이기는커녕 후히 대접하며 풀어주자 공명의 너그러움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절을 올렸다. 공명 앞을 물러난 둘은 샛길로 돌아갔다. 공명은 다시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모은 후 말했다.

"내일은 틀림없이 맹획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올 것이다. 그가 오기를 기다려 사로잡으리라."

그렇게 말한 공명은 먼저 조운과 위연에게 계책을 일러 주고 군사 5천을 주어 떠나가게 했다. 이어 왕평과 관삭에게도 계책을 일러 주며 군사를 이끌어 나아가게 했다. 한편 맹획은 세 갈래로 군사를 보낸 후 장막 안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살피러 갔던 군사가 와서 알렸다.

"세 동의 원수는 모두 제갈공명에게 붙들려 가고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맹획은 낯빛이 변한 채 크게 노했다. 곧 거느리고 있던 만병을 이끌어 나아가다가 마주 오는 왕평의 군사와 맞닥뜨렸다. 양군은 서로 둥글게 진을 벌여 세웠다. 왕평이 칼을 비껴들고 천천히 말을 내몰며 맹획의 진을 살펴보았다. 문득 저쪽 문기가 열리며 수백의 말탄 장수들이 좌우로 갈라서는데, 그 한가운데에 맹획이 말 위에 앉아있었다. 머리에는 보석을 박은 자줏빛 금관을 썼으며, 몸에는 구슬 달린 붉은 비단 전포를 입었고, 허이레는 사자를 새긴 옥대에다 발에는 독수리 주둥이 모양의 녹색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그가 탄 말은 털이 곱슬곱슬한 적토마였으며 솔잎 무늬를 아로새긴 보검 두 자루를 찬 채 앞으로 나서니 그 위세가 자못 당당해 보였다. 맹획이 고개를 쳐들어 적진을 살피다가 좌우의 장수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제갈량의 용병이 뛰어나다 하더니 지금 적진을 보니 그 말이 의심스럽구나. 깃발들은 너저분히 뒤섞여 있고, 대오는 뒤죽박죽이며 창칼 또한 우리 것보다 나은 것이 없지 않은가? 비로소 전에 들었던 말이 거짓임을 알겠구나. 진작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가 좀 더 일찍 군사를 일으켜 그를 칠 것을. . . . . "

맹획이 오만스런 얼굴로 그렇게 한탄하더니 여러 장수들에게 물었다.

"누가 가서 촉의 장수를 사로잡아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떨쳐 보이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맹획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 장수가 소리치며 나섰다. 모두 그 장수를 보니 망아장이란 장수였다. 망아장은 끝이 뭉툭한 큰 칼을 들고 황표를 몰아 왕평을 향해 달려들었다. 왕평 또한 말을 몰아나가 두 사람이 어우러졌으나 몇 합을 부딪지 못하고 왕평이 말을 돌려 달아났다. 왕평이 달아나는 걸 보자 그렇지 않아도 촉군을 얕보고 있던 매획이 군사를 휘몰아 급한 기세로 뒤쫓았다. 관삭이 다시 나와 뒤쫓는 맹획군과 맞섰으나 몇 합을 부딪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맹획이 더욱 신이 나 뒤쫓는데 20여 리쯤을 달렸을 때였다. 홀연 함성이 크게 일며 왼쪽에서 장의가, 오른쪽에서는 장익이 거느린 두 갈래 군마가 쏟아져 나와 맹획의 뒷길을 끊었다. 그와 함께 달아나던 왕평과 관삭이 갑자기 홱 말을 돌려 맹획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제야 맹획도 계책에 말려든 줄 알았으나 이미 어쩔 수 없었다. 앞뒤로 촉군이 짓쳐드니 쑤셔 놓은 벌집처럼 크게 혼란을 일으킨 만병들은 죽고 상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당황한 맹획이 수하 장수들과 함께 이를 악물고 싸워, 가까스로 길을 열어 금대산을 바라보며 달아났다. 이번에는 촉병이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맹획의 뒤를 쫓았다. 맹획이 뒤돌아볼 틈도 없이 정신 없이 말을 달리는데 홀연 앞쪽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앞선 장수는 바로 상산의 조자룡이 아닌가. 맹획은 끓는 물에 손이라도 집어넣은 듯이 크게 놀라며 황망히 금대산의 샛길로 달아났다. 조운은 쫓기는 만병들을 닥치는 대로 짓밟으며 쳐 죽이니 또 한 번 크게 꺽인 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 온 군사가 많았다. 조운은 쫓기는 만병들을 닥치는 대로 짓밟으며 쳐 죽이니 또 한 번 크게 꺾인 채 무기는 버리고 항복해 온 군사가 많았다. 맹획은 겨우 그를 뒤쫓아 온 수십 기병만을 거느리고 산골짜기 속으로 말을 몰았다. 뒤에서는 여전히 함성을 울리며 촉병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길이 점점 좁아지니 더 이상 말을 타고 달릴 수도 없었다. 맹획은 하는 수 없이 말을 버리고 산등성이를 기다시피 하며 넘어갔다. 산 위의 고갯길을 넘자 이젠 촉병에게서 벗어난 것으로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홀연 산골짜기에서 북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며 한 떼의 촉군이 내달아왔다. 공명의 영을 받아 미리 이곳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위연이 거느린 5백의 군사였다. 말을 타지 않은 채 가까스로 고개를 넘어온 맹획은 더 달아날 힘도 없었다. 위연이 맹획을 후리쳐 넘어뜨린 후 팔로 낚아채 맹획을 사로잡으니 그를 따르던 만병들도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위연은 맹획을 묶어 공명에게 데려갔다. 공명은 그때 맹획이 사로잡혀 올 줄 미리 알고 소와 말을 잡아 영채 안에 잔칫상을 차리게 한 후 장막 안의 휘장을 걷어 올리고 무사들을 일곱 겹으로 둘러 세웠다. 손에는 모두 칼날이 마치 서리와 눈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공명은 천자께서 내린 황금 부월을 든데다 자루가 굽은 푸른 일산을 받치게 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날개 모양의 장식을 단 북과 소리. 피리 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가운데 좌우에 어림군을 늘여 세우고 있으니 엄숙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으며, 공명의 우용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이윽고 사로잡혀 온 만병들이 공명 앞에 이끌려 나왔다. 공명은 그들의 결박을 풀어주게 한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하며 타일렀다.

"너희들은 모두가 선량한 백성들인데 맹획의 부름을 거스르지 못해 이끌려 나와 오늘 이처럼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구나. 내가 생각하건대 너희들의 부모형제와 아내와 자식들을 문설주에 기대어 서서 너희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만약 이번 싸움에 너희들이 크게 졌다는 것을 알면 창자가 뒤틀리는 슬픔으로 피눈물을 쏟을 것이다. 내가 이제 너희들을 모두 풀어 줄 터이니 빨리 집으로 달려가 가솔들을 안심시켜라."

그 말과 함께 모두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이고 곡식까지 내려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미 죽은 목숨으로 알고 있던 만병들을 공명의 너그러움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돌아갔다. 만병들을 돌려 보낸 공명은 맹획을 장막 안으로 끌어오게 했다. 무사들이 맹획을 끌어와 장막 아래 굻어 앉히자 공명이 엄한 얼굴로 꾸짖었다.

"선제께서 너를 박하게 대하지 않으셨는데 너는 어찌하여 감히 모반했느냐."

그러자 맹획은 눈을 부릅뜨고 공명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원래 양천(동천. 서천)은 다른 사람의 땅이었건만 너의 주인이 힘만 믿고 그 땅을 빼앗은 후 스스로 천자가 되지 않았느냐? 나는 대대로 이 땅에서 살아 왔다. 너희들이 무례하게도 이 땅을 침범했으면서 어찌 모반했다 하는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소리 높여 대꾸하는 맹획을 본 공명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물었다.

"이제 너는 나에게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그런데도 마음으로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말이냐?"

"산이 험한 데다 길이 좁아 내 힘껏 싸울 수 없어 사로잡혔을 뿐인데 어찌 마음으로까지 너에게 항복할 수 있겠는가?"

맹획이 조금도 누그러지는 기색 없이 그렇게 말했다. 공명이 그를 다시 노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니 너를 놓아 보낼 수밖에 없겠구나. 그러면 너는 어찌하겠느냐?"

"그렇다면 다시 군마를 수습하여 너와 싸워 승부를 가리리라. 그러나 만약 다시 나를 사로잡는다면 그때는 너에게 진정으로 복종하리라."

맹획이 분연히 말했다. 공명이 그 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 무사들에게 영을 내려 그의 결박을 풀어 주게 했다. 공명은 새 옷을 내려 입히게 한 후 술과 음식으로 대접했을 뿐만 아니라 말에다 안장까지 얹어주며 큰길까지 바래다주도록 했다. 사로잡은 맹획을 후하게 대한 후 돌려보내자 장수들은 공명에게 따지듯 물었다.

"맹획은 남만의 으뜸가는 우두머리입니다. 다행히 힘을 다해서 그를 사로잡고 남만을 평정했는데 무슨 까닭으로 다시 그를 돌려보내십니까?"

공명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다시 그를 사로잡는 일은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그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진심으로 굴복했을 때 비로소 이 땅이 평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수들은 얼른 그 말 뜻을 헤아리지 못해 의아로운 얼굴로 공명을 쳐다볼 뿐이었다.

한편 맹획은 공명에게서 풀려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달렸다. 맹획이 노수가에 이르자 싸움에 져 쫓겨가던 만병들이 그곳에 몰려있다가 놀란 얼굴로 맹획을 맞았다. 맹획이 사로잡혀 갔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던 만병들이 절을 올린 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물었다.

"대왕께서 이렇게 이처럼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까?"

맹획은 그들을 이끌어 다시 공명과 싸우려는 판에 공명이 놓아 주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맹획은 엉뚱하게 꾸며대며 큰소리를 쳤다.

"촉군이 나를 장막 안에 가두었으나 기회를 노려 10여 명을 해치우고 어둠을 틈타 빠져나왔다. 오는 도중 촉병을 만났으나 그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오는 길이다."

만병들은 맹획의 용맹에 크게 감탄하며 노수를 건너 영채부터 세웠다. 맹획은 다시 영채를 엮자 각 동의 우두머리들을 불러오게 했다. 한편으로는 공명이 놓아 보낸 만병들까지 다시 불러들이게 하여 합치니 군사들의 수가 10만이나 되었다. 그때 맹획과 함께 싸우러 나갔다가 풀려난 동도나와 아회남도 각기 자기 동에 머무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맹획의 부름을 받자 하는 수 없이 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맹획에게로 갔다. 따르던 무리들이 다 모이자 맹획은 그들에게 영을 내렸다.

"내가 이번에 제갈량의 계책을 다 알아 왔다. 그와 정면으로 맞서다가는 모조리 그의 계약에 말려들고 말 것이다. 촉의 군사는 멀리서 여기까지 왔으므로 매우 지치고 피곤한 형편이다. 거기다가 요즈음 날씨까지 찌는 듯이 무더우니 무슨 수로 오래 버틸 수가 있겠느냐? 또한 우리는 노수의 공명이 무슨 계책을 내는지 보아가며 대책을 세우자."

모여 있던 우두머리들이 들어보니 맹획의 말에 빈틈이 없었다. 이에 그의 말을 따라 배와 뗏목을 남쪽 언덕으로 옮기고 토성을 쌓았다. 산기슭이나 절벽 위마다 높은 성루를 세우고 그 위에는 활과 쇠뇌와 돌을 날리는 포를 올려다 놓았다. 군량이나 마초는 각 동에서 대기로 하니 모든 것이 갖춰져 얼마든지 오래도록 적을 기다리며 맞을 수 있게 되었다. 맹획은 아무런 걱정도 없이 느긋해져 공명이 군사 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공명은 군사를 이끌어 진군하는데 노수에 먼저 이르른 전군으로부터 험난함에 의지하고 있다. 배와 뗏목을 모두 남쪽 언덕에 끌어나 놓은 다음, 토성을 높이 쌓고 도랑을 깊이 판 후 그 안에서부터 전갈이 전해졌다.

"노수에는 아직 배 한 척, 뗏목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물살이 매우 급한 데다 건너편 강 언덕에는 토성을 쌓아 올리고 만병이 지키고 있습니다."

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인 5월이었다. 군사들이 진군해 간 남쪽은 더욱 무더워 갑옷을 입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공명은 몸소 노수 가에서 적의 영채를 살펴본 후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지금 맹획이 노수 남쪽에 군사를 머물게 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성을 높이 쌓아 우리 군사에 대비하고 있다. 함부로 군사를 내어 적을 칠 수는 없으나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어찌 물러날 수 있으랴! 그대들은 각기 군사를 움직여 험한 산을 의지하여 숲이 무성한 곳에다 영채를 엮고 인마를 쉬게 하라."

그 말과 함께 여개에게 영을 내려 노수에서 1백여 리 떨어진 곳의 나무가 우거진 서늘한 곳에 네 개의 영채를 세우도록 했다. 이어 왕평. 장익. 장의. 관삭으로 하여금 각기 영채 하나씩을 지키게 했다. 영채 밖의 나무가 많은 시원한 곳에다 풀로 얽어 만든 막사를 짓게 하여 장졸들과 말도 그곳에서 더위를 피하게 했다. 그런데 참군 장완이 영채를 둘러보고 공명에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여개가 세워 둔 영채는 좋지 않은 듯합니다. 전에 선제께서 오와 싸워 졌을 때의 포진과 비슷합니다. 만약 오랑캐들이 노수를 건너와 화공이라도 베푼다면 막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장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묻자 공명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공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내게 생각이 있다."

공명의 말을 듣고서도 장완이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얼른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촉에서 마대가 폐하의 영을 받들어 해서약(더위 먹은데 치료하는 약)과 군량을 실어 왔습니다."

공명은 마대를 장막 안으로 불러들이게 하고 약과 군량을 각 영채에다 나눠준 뒤 물었다.

"이끌어 온 군마가 얼마나 되는가?"

"3천입니다."

"내가 이끈 군사들은 지금 여러 차례 싸워서 지쳐 있다. 그대의 군사를 썼으면 하는데 싸우러 나갈 수 있겠는가?"

"제가 이끈 군사들은 지금 여러 차례 싸워서 지쳤 있다. 그대의 군사를 썼으면 하는데 싸우러 나갈 수 있겠는가?"

"제가 이끌고 온 군마는 모두 나라의 군마입니다. 어찌 이쪽저쪽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승상께서 필요하다면 목숨을 돌보지 않고 기꺼이 나아가겠습니다."

공명의 물음에 마대가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맹획이 노수를 이용해 우리 군사가 건너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함부로 건널 수가 없으니 나는 저들의 군량을 대는 길을 끊어 맹획의 군사들을 어려움에 빠뜨리려 한다. 그러나 날랜 장수와 군사가 없어 걱정하고 있었다."

공명이 마대에게 그렇게 말하자, 마대가 공명의 말뜻을 알아듣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 길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공명이 마대에게 계책을 내렸다.

"여기서 150여 리쯤을 가면 노수 아래쪽에 사구란 곳이 있다. 그것은 물살이 느려 뗏목으로도 물을 거널 수가 있다. 그대가 이끌어 온 군마를 거느려 물을 건너면 바로 오랑캐들의 고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고을로 들어가서 먼저 양곡을 나르는 길을 끊어라. 이어 동도나와 아회남 두 동주와 만나 안에서 호응하게 한다면 결코 일이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다."

공명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마대는 그 길로 군사를 이끌고 사구로 나아갔다. 과연 물이 깊지 않아 배나 뗏목도 소용없을 정도여서 옷을 벗고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사들이 가슴께도 못 미치는 물을 반쯤 건너갔을 때 모두들 까닭 없이 물속에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마대가 그들을 강가로 끌어내게 했으나 모두 입과 코로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다. 깜짝 놀란 마대가 영문을 알 수 없어 급히 그 일을 공명에게 알렸다. 공명도 까닭을 알 수 없어 길잡이로 데려왔던 토인에게 물으니 토인이 일러 주었다.

"요즈음 날씨가 몹시 더워 노수에 고여 있던 독기가 쨍쨍한 햇빛에 끓어 오른 때문입니다. 이럴 때 물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물의 독기가 온몸에 배게 되고 그 물을 마시면 죽게 됩니다. 강을 건너시려면 밤이 되어 물이 차가워지고 독기가 가라앉을 때를 기다렸다가, 밥을 배불리 먹고 건너시면 별 탈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공명은 마대에게 일러 토인을 길잡이로 삼게 해 힘센 군사 5, 6백명을 뽑아 주며 밤이 되기를 기다려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너게 했다. 마대가 공명이 이른 대로 따르니 과연 아무런 탈 없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마대는 그 길로 군마를 이끌어 토인의 안내를 받아 모든 양도의 통로 입구인 협산곡을 차지해 버렸다. 협산의 양편은 깎아지른 듯한 산이었으며 그 사이로 길이 하나 있었는데 간신히 사람 하나, 말 한 필이 지나갈 만한 좁은 길이었다. 마대는 협산의 골짜기를 차지하자 곳곳에 군사를 나누어 영채를 세우게 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만병들은 그날 양곡을 실어나르다 앞뒤로 길이 끊겨 마대에게 1백여 대의 수레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만병들이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맹획에게로 달려갔다. 그때 맹획은 하루종일 영채 안에서 술만 마시고 군무는 돌보지 않았다. 노수 가에다 촉병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세워 두었다고 안심하고 있던 맹획은 추장들에게 껄걸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만약 군사를 내어 제갈량과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그의 간사한 계략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노수의 물을 의지하여 도랑을 깊게 파고 성을 높이 쌓아 지키기만 한다면 촉병은 이 무더위를 견뎌내지 못하고 반드시 물러나고 말 것이다. 그때를 노려 그대들과 힘을 합쳐 뒤쫓아 덮친다면 제갈량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맹획의 큰소리에 추장들 중의 한 사람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사구는 물이 얕아 만약 촉병이 그리로 건넌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마땅히 그곳으로 군사를 보내어 방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획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전히 껄걸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너는 이 고장의 토박이이면서도 어찌하여 그렇게 어두운가? 나는 촉병이 그곳으로 건너오기를 오히려 바라고 있다. 그들이 그곳을 건너오다 가는 모두 물속에 빠져 죽고 말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만약 이곳 토인들 중에서 밤중에 강을 건너는 것을 가르쳐준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늙은 추장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맹획에게 말했다. 그러나 맹획은 태평스런 소리만 했다.

"그대는 부질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 우리 땅에 사는 사람이 어찌 적을 도울 수 있겠는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밖에서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촉병이 노수를 건너 협산의 양도를 끊었습니다. 앞선 깃발에는 '평북장군 마대'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맹획은 공명이 직접 군사를 이끌지 않자 놀라지도 않은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까짓 얼마 되지 않는 졸개들을 걱정할 게 무엇인가?"

맹획은 그 말과 함께 부장 망아장에게 3천의 군마를 주어 협산곡으로 나아가게 했다. 망아장은 맹획의 명을 받자 기세 좋게 군사를 이끌며 협산곡으로 달려갔다. 그때 마대는 만병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거느린 2천 군사를 산 아래에 늘려 세웠다. 만병이 산 아래에 이르러 그들도 촉병을 마주 보며 진을 벌여 세운 후 망아장이 말을 달려나왔다. 마대도 말을 박차 망아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망아장이 어깻바람을 일으키며 호기롭게 내달아 마대와 부딪쳤으나 마대와 맞설 무예가 되지 못했다. 겨우 한 번을 부딪자 마대가 휘두른 칼에 맞아 말 아래로 나뒹굴고 말았다. 마대가 단 한칼에 적장을 거꾸러뜨리자 촉병은 기세가 올라 마주 오는 만병을 향해 함성을 울리며 밀어붙였다. 대장을 잃은 만병들은 크게 혼란이 일며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다 촉병을 당해 내지 못하고 달아났다. 도망쳐 돌아간 만병들이 맹획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맹획은 그제야 밤낮으로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던 술잔을 내던지고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나가서 마대와 겨루어 보겠는가?"

"제가 가 보겠습니다."

맹획의 물음에 동도나가 선뜻 나섰다. 맹획은 동도나의 기개를 믿음직스럽게 여기며 군사 3천을 주어 협산곡으로 떠나게 했다. 한편으로는 그 틈을 타 촉군이 노수를 건널 것을 대비해 아회남에게도 군사 3천을 주어 사구를 방비케 했다. 동도나가 만병을 이끌어 다시 협산곡을 진을 내리자 마대도 맞은편에 군사를 이끌어 와 진을 내렸다. 마대가 말을 달려나가 치려 하는데 동도나를 본 적이 있는 촉병 하나가 마대에게 그가 동도나임을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듣자 마대가 말을 달려나가 큰 소리로 동도나를 꾸짖었다.

"이 의리 없고 은혜도 저버린 자야! 우리 승상께서 너를 살려 주었건만 이제 또 배신을 하려 드느냐? 그러고도 네가 부끄러움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

마대의 꾸짖음에 동도나가 차마 대꾸를 못했다. 공명의 너그러운 덕에 감격한 적이 있던 동도나는 문득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며 말머리를 돌려 물러나고 말았다. 마대가 그들을 뒤쫓으며 한바탕 만병들을 꺾은 후에 협산곡으로 되돌아왔다. 마대에게 쫓겨 돌아간 동도나가 맹획 앞에 이르러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대가 워낙 용맹스러워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맹획이 대뜸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전에 제갈량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번에 싸우지도 않고 물러났음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것이 바로 적군에게 진을 팔아먹는 심보가 아니고 무엇이냐?"

맹획이 동도나를 그렇게 몰아낸 후 좌우를 보고 호령했다.

"당장 저놈을 끌어 내 목을 베도록 하라."

그 소리에 놀란 추방들의 만류를 뿌리치지 못해 그를 목베는 대신 큰 몽둥이로 1백 대의 매룰 때려 내쫓도록 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동도나가 자기 진영으로 돌아와 누워 있는데 여러 추장들이 찾아와 말했다.

"우리들이 비록 남만 땅에 살지만 감히 위. . 촉을 침범해본 적이 없으며, 그들 또한 우리를 까닭 없이 침범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맹획이 다그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모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명의 신과 같은 지모는 조조와 손권도 두려워하였는데 하물며 우리가 어떻게 맞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우리는 공명이 목숨을 살려 준 은혜를 입고 있는 터입니다. 어찌 그 은혜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서서 맹획을 없애고 공명에게 투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여 아울러 곤경에 처해 있는 동의 백성들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도나는 그 말에 얼른 대답하지 않은 채 잠시 의심스런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대들의 속마음이 어떤지를 이 몸이 알 수 없소."

모인 추장들은 모두 공명에게 사로잡혔다가 풀려난 터라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원수님과 함께하겠습니다."

동도나는 그제야 마음을 정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칼을 빼든 채 그 자리에 모였던 1백여 명과 함께 맹획의 대채로 달려갔다. 이때 맹획은 장막 안에서 몹시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동도나가 장막이 이르자 맹획을 지키고 있는 장수들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너희들 역시 제갈 승상의 은혜를 입고 살아난 자들이다. 마땅히 그 은혜를 갚아야 하리라."

만약 거스르면 그 장스들을 벨 태세로 동도나가 그렇게 말하자 맹획을 지키던 두 장수가 분연히 말했다.

"그 일이라면 우리들도 생각하고 있던 일입니다. 굳이 장군께서 손쓰실 것 없이 저희들이 맹획을 사로잡아 승상께 갖다 바치겠습니다."

두 장수는 그 말과 함께 장막 안으로 뛰어들어가 잠든 맹획을 밧줄로 꽁꽁 묶었다. 동도나는 맹획을 노수 가로 이끌고 가 곧장 배에 싣고 북쪽 언덕으로 향하는 한편 먼저 공명에게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때 공명은 이미 세작들로부터 이 일을 미리 전해 듣고 있었다. 이에 공명은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모든 군사들이 대오를 갖추도록 하고 창검과 깃발을 세워 위엄을 드높이게 한 후 근신에게 일렀다.

"추장들 중에서도 우두머리 되는 자에게 명하여 맹획을 이끌어 오도록 하라. 다른 추장들은 본채로 돌아가 기다리게 하라."

그리하여 동도나만이 먼저 중군으로 들어와 공명을 만나 보고 맹획을 사로잡은 일을 소상히 아뢰었다. 공명은 그 공을 치하하여 후한 상을 내려 위로한 다음 함께 투항해 온 추장들과 함께 자기 영채로 되돌아가게 했다. 동도나가 돌아가자 공명은 사로잡은 맹획을 이끌어 오게 했다. 맹획이 도부수들에게 이끌려 와 무릎을 꿇자 공명이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전에 말하기를 '다시 사로잡히면 그때는 항복하겠다'고 하였다. 그래 이제는 진정 마음으로 항복하겠는가?"

그러자 맹획이 성난 목소리로 공명의 말을 받았다.

"지금 이렇게 사로잡히게 된 건 승상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오. 내 아래 장졸들이 모반을 일으킨 탓이니 어찌 마음으로 항복할 수 있겠소?"

공명이 그런 맹획을 보고도 얼굴색 하나 달라지는 기색 없이 물었다.

"그렇다면 다시 너를 놓아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비록 남만 사람이나 병법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소. 만약 승상이 돌려보내 준다면 마땅히 다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승패를 가릴 것이오. 그러고도 다시 사로잡힌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항복하며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오."

맹획이 전과는 달리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사로잡힌다면 그때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공명이 정색을 하며 그렇게 말한 후 좌우에게 명해 맹획의 결박을 풀어 주게 했다. 이에 공명은 다시 전처럼 술과 음식을 내려 맹획을 대접하며 물었다.

"내가 초려에서 나온 이후 지금까지 싸워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고 쳐서 빼앗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 남만 사람만이 항복하지 않는가?"

공명의 물음에 맹획은 입을 다물고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술자리가 끝나자 공명은 맹획과 함께 말 위에 올라 대채를 나와 모든 영채를 둘러보았다. 군량과 마초. 병기가 쌓여 있는 영채를 두루 살펴보게 한 후 공명이 맹획에게 말했다.

"네가 항복을 하지 않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내게 이토록 많은 날쌘 군사들과 용맹스런 장수, 거기다가 양곡과 마초와 병기가 그득한데 어찌 나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빨리 항복한다면 천자께 아뢰어 그대의 왕위를 그대로 보존하게 할 것이요, 자자손손 길이 이 땅을 다스리게 해 주겠다. 그대의 뜻은 어떤가?"

그제야 맹획도 마음이 달라진 듯 공손한 목소리로 공명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듯 말했다.

"제가 비록 항복한다 하더라도 동중의 사람들이 어찌 마음으로 항복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승상께서 놓아 주신다면 동중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모아 타일러 모두 한마음이 된 뒤에 승상께 항복하도록 하겠습니다."

공명은 흐뭇한 얼굴로 다시 맹획을 대채로 청해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자 공명은 몸소 노수 가에 까지 따라나와 맹획을 배에 태워 보냈다.

 

독이 든 샘물과 해독의 묘

본채로 돌아간 맹획은 공명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싸울 준비를 서둘렀다. 싸우러 떠나기 전 맹획은 이미 공명에게 마음이 기운 동도나와 아회남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공명에게서 사자가 왔다고 속여 대채로 불러들이도록 했다. 두 사람이 거짓말에 속아 장막 안에 이르자 맹획은 장막 안에 숨겨 둔 도부수들에게 명해 그들을 죽이게 하고 그 시체를 냇물에 던져 버렸다. 동도나와 아회남을 죽인 맹획은 곧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 그 둘이 지키던 곳을 대신 지키게 했다. 맹획은 두 길목의 방비를 엄중히 해 둔 다음 몸소 군사를 이끌어 먼저 마대부터 쳐없애기 위해 협산곡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협산곡에 이르러 보니 촉병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맹획이 의아스런 맘이 들어 그곳 백성들에게 물었다.

"촉병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난 밤에 양곡과 마초를 싣고 노수를 건너갔습니다."

백성들이 본 대로 맹획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맹획은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되돌려 동중으로 돌아갔다. 맹획은 아우 맹우를 불러 일렀다.

"나는 제갈량의 허실을 다 알고 왔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

맹획이 아우 맹우에게 계책을 일러 주자 맹우는 오랑캐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떠났다. 맹우는 군사와 함께 황금과 아름다운 구슬, 그리고 보배롭고 귀중한 상아와 조개껍질 등을 싣고 공명의 대채로 향했다. 맹우가 노수를 건너 막 뭍에 오르려 할 때였다. 홀연 맞은편에서 북소리, 징 소리가 일며 한 떼의 군마를 앞을 가로막았다. 앞선 장수를 보니 협산곡에서 물러났다는 마대였다. 맹우가 깜짝 놀라자 마대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섰거라. 너는 누구이며 무슨 까닭에 이곳으로 왔느냐?"

"저는 맹획의 아우 맹우로, 승상께 예물을 전하러 왔습니다."

맹우가 땅에 엎드린 채 두려움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마대는 그런 맹우를 영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먼저 공명에게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이때 공명은 장막 안에서 마속. 장완. 여개. 비위 등과 더불어 남만을 평정할 일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대가 보낸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맹획이 그 아우 맹우를 보내 갖가지 보물을 보내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맹획이 문득 마속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대는 맹획이 맹우를 보낸 뜻을 알겠는가?"

마속이 가만히 대답했다.

"감히 떠들며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종이를 써서 승상께 드리겠으나 승상께서 짐작하신 바와 같은지 보아 주십시오."

공명이 허락하지 마속이 종이에 글씨를 써서 공명에게 바쳤다. 그 글을 본 공명이 껄걸 웃더니 말했다.

"맹획을 사로잡을 계획을 내가 이미 세워 두었는데, 그대의 헤아림이 바로 내 뜻과 같구나."

공명은 곧 조운을 가까이 불러 귀엣말로 무엇인가를 일러서 내보냈다. 이어 위연. 왕평. 마충. 관색을 불러들여 분부를 내렸다. 공명의 영을 받은 장수들은 각기 정해 준 곳으로 떠났다. 공명은 그제야 맹우를 불러들이게 했다. 맹우는 공명의 장막 앞에 이르자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형님 맹획은 승상께서 살려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있으나, 마땅히 바칠만한 것이 없어 약간의 황금과 구슬, 보석들을 올리라 하였습니다. 승상께서는 많지 않으나 거두어들이셨다가 장졸들에게 상을 내리실 때 써 주십시오. 천자께 올릴 예물은 따로 준비할 것입니다."

공며은 맹우가 바친 예물을 좌우에게 명하여 거두어들이게 한 뒤에 물었다.

"그대의 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승상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은갱 산속으로 보물을 거두러 갔으니,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입니다.

"그대가 데리고 온 사람은 몇인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1백여 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모두 짐을 메고 온 사람들입니다."

맹우가 그렇게 말하자 공명이 그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을 보니, 모두 푸른 눈에 얼굴은 검고 머리는 노란데다 수염음 붉었다. 귀에는 금귀고리를 달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맨발이었는데 모두들 키가 크고 힘이 세어 보이는 건장한 체구였다. 공명은 그들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한 후 여러 장수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게 했다. 장수들은 공명이 술을 권하자 자뭇 가까운 마음으로 술을 받아 마셨다. 그때 맹획은 공명에게로 간 아우 맹우로부터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아우를 따라갔던 두 사람이 돌아왔다는 전갈이 오자 맹획이 그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그간의 일을 물러 보았다.

"제갈량이 예물을 받고 크게 기뻐하며 따라간 사람들을 모두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소와 말을 잡아 크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작은 대왕께서 저희들에게 오늘 밤 이경쯤 밀고 들어오는 게 좋겠다고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때 안과 밖에서 적을 치면 반드시 큰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맹획은 이제야 공명을 쳐없앨 수 있다고 여기고 몹시 기뻐했다. 즉시 3만의 오랑캐 군사를 일으켜 세 대로 나눈 후 각 동의 추장에게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는 각기 불이 잘 붙은 유황과 염초 등을 지니고 오늘 밤 촉의 영채로 가서 불을 질러 군호를 올리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중군을 덮쳐 제갈량을 사로잡으리라."

맹획이 이번에야말로 공명을 사로잡겠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여러 장수들은 맹획의 영에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밤이 되기를 기다려 노수를 건넜다. 맹획은 믿을 수 있는 장수 1백여 명만을 거느리고 공명의 대채로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채로 나아가는 도중은 물론, 영채 앞에 이르러서도 가로막는 군사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맹획이 중군으로 뛰어들었을 때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영채 안은 텅빈 채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 등불만이 대낮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맹획은 곧장 공명의 장막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장막 안에는 공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맹우와 만병들만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실은 공명이 마속과 여개에게 맹우와 그 졸개들을 대접하면서 악인들의 잡극(연극 또는 각본)을 보여 주게 했다. 재미난 잡극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만인들이 마시는 술에다 잠드는 약을 타서 권해 그 술을 마신 맹우와 만병들이 깊은 잠에 빠지도록 했던 것이다. 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만병들은 마치 술에 취해 이미 숨을 거두고 늘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다급해진 맹획이 그들을 흔들어 깨웠다. 졸개들 중의 하나가 가까스로 눈을 떴으나 말은 하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제야 맹획은 장졸들이 약을 먹었다는 걸 알고 자기를 영채 안으로 끌어들인 것도 공명의 계책이었음을 알아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맹획이 황망히 맹우를 비롯한 졸개들을 구해 돌아가려 할 때였다. 홀연 앞쪽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활활 불길이 일었다. 꼼짝없이 적의 기습에 걸려들었다고 여긴 만병들은 싸워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러자 한 떼의 촉군이 밀어닥치는 데 앞장선 장수는 왕평이었다. 맹획은 다급한 대로 황황히 왼쪽 길로 달아나려 하자 또 불길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사가 앞을 막았다. 맹획이 다시 오른쪽 길로 달아나려는데 그곳도 달아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시뻘건 불길이 일어나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졌던 것이다. 앞선 장수는 바로 조운이었다. 세 방향에서 맹획을 둘러싸고 촉병들이 짓쳐오자 달아날 길이 없었다. 맹획은 거느린 장졸들을 돌볼 사이도 없이 말 한 필에 몸을 실은 채 제 한 목숨만을 구해 달아나기에 바빴다. 맹획이 가까스로 노수 가에 이르자 때마침 만병들이 작은 배 한 척을 저어 오고 있었다.

"빨리 이곳으로 배를 저오 오라!"

다급한 맹획이 만병들을 보고 소리쳤다. 배가 맹획이 있는 언덕에 이르렀다. 맹획이 단숨에 배에 뛰어올랐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맹획이 배 위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호령이 일더니 그때까지 자기의 졸개들인 줄로만 알았던 배 안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맹획은 손을 써 볼 틈도 없이 그들에게 온몸이 묶이고 말았다. 맹획을 사로잡은 장수는 마대였다. 공명의 계책을 받아 군사들을 만병으로 꾸민 뒤 이곳에 배를 띄우고 기다리고 있다가 사로잡은 것이었다. 마대가 맹획을 사로잡고 있을 때 공명은 이미 사로잡은 만병들에게 좋은 말로 항복을 권하고 있었다. 만병들은 이미 사로잡힌 몸이라 대부분 순순히 항복했다. 공명은 그들을 따뜻이 위로해 주고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또한 군사들을 시켜 아직도 영채 곳곳에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불을 끄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대가 사로잡은 맹획을 이끌어 왔으며 조운이 맹우를 묶어 왔다. 또한 위연. 왕평. 마충. 관삭이 각각 사로잡은 동의 추장을 이끌어 왔다. 공명이 맹획을 보자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너는 아우를 시켜 예물을 바치며 거짓 항복하게 했지만 어떻게 나를 속일 수 있겠는가? 이번에 또 내게 사로잡혔으니 이제는 진실로 항복을 하겠는가?"

그러나 맹획은 여전히 뻗대기만 했다.

"이번에는 내 아우가 먹는 것에 너무 욕심을 내다 독을 탄 술까지 마셔 일을 그르치고 말았소. 만약 내가 군사를 이끌어 오고 내 아우가 군사를 이끌어 안과 밖에서 쳤더라면 반드시 이겼을 것이오. 이는 바로 하늘이 패하게 만든 것이지 내가 싸울 줄을 몰라 진 것이 아닌데 어찌 항복할 수 있겠소?"

"지금까지 너는 내게 세 번이나 사로잡혔었다. 그런데도 끝내 항복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맹획도 그 말에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공명이 그런 맹획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다시 놓아 주랴?"

"승상께서 우리 형제를 다시 놓아 주신다면 나는 온 집안 장정들까지 이끌어 와서 다시 한바탕 싸워 보겠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사로잡히면 그때는 맹세코 진심으로 항복하겠습니다."

맹획이 목소리를 높여 맹세했다. 공명이 그제야 엄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다시 사로잡히면 그때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병서를 부지런히 읽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수습하여 좋은 계책을 써서 싸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공명이 그렇게 이른 뒤 무사들에게 맹획과 그 아우, 그리고 사로잡힌 각 동 추장들의 결박을 풀어 주게 했다. 이에 맹획과 그의 아우, 각 동의 추장들은 엎드려 절을 올려 감사함을 표하고 돌아갔다. 이때 촉병은 이미 노수를 건너간 뒤였다. 맹획이 풀려난 무리를 이끌고 노수를 건너 보니 언덕마다 촉병이 가득 늘어서 있는 가운데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마대는 맹획이 자기들의 영채 앞에 이르자 높은 곳에 앉아 있다가 칼로 맹획을 가리키며 꾸짖었다.

"이번에 다시 사로잡히면 결코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맹획이 아무 대꾸도 못하고 급히 자기의 대채로 향했다. 그러나 대채에는 조운이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가운데 촉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조운이 큰 깃발 아래에 앉아있다가 맹획을 보자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상께서 살려 주신 큰 은혜를 결코 잊지 않도록 하라! 만약 내 말을 그르칠 때는 내가 그대의 목을 베리라."

조운의 우렁찬 호령에 간담이 서늘해진 맹획은 제대로 대답도 못한 채 몸을 굽신거리며 조운 앞을 지나갔다. 조운 앞을 벗어난 맹획이 황급히 남만의 경계 어귀에 있는 산 언덕을 넘으려 할 때였다. 위연이 날랜 군사 1천여 명을 언덕 위에 늘여 세우고 있다가 맹획을 보자 목소리를 높여 엄포를 놓았다.

"내가 이미 너의 소굴 깊이 들어와 험하고 요긴한 길목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어리석게 우리 대군에 대들려 하느냐? 내가 만약 다시 너를 잡으면 그때는 네 온몸을 1만 조각으로 토막내어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 버리리라."

그 소리에 간이 콩알만해진 맹획은 위연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한 채 머리를 감싸지며 자기의 동으로 내빼고 말았다. 그 무렵 공명은 노수를 건너와 영채를 세우고 삼군에게 크게 상을 내린 다음 장수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맹획을 세 번째로 사로잡게 된 경위를 들려 주었다.

"내가 두 번째 맹획을 사로잡았을 때 그에게 각 영채의 허실을 넌지시 보여준 것은 그를 우리 영채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나는 맹획이 병법을 제법 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짐짓 우리의 병마와 양초며 무기를 자랑하는 체하며 일부러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맹획이 우리 영채를 낱낱이 알게 함으로써 빈틈을 보여주고 불로 공격하기 좋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과연 헤아린 바대로 그는 아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여 우리를 안심시킨 다음 화공을 베풀고 안에서는 아우를 시켜 내응하려 했다. 그러나 내가 맹획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찌 제 뜻대로 되겠는가? 내가 이번에 맹획을 세 번째 사로잡고도 그를 죽이지 않음은 딴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으로 복종시키기 위함이었을 뿐 죄 없는 만병들을 죽여 없애려는 뜻이 아니었다. 이제 그대들에게도 분명히 말해 두거니와, 부디 수고롭더라도 나의 뜻을 헤아려 힘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토록 하라."

모든 장수들은 공명에게 감복하여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승상께서는 지. . 용을 아울러 갖추고 계시니 비록 옛 자아나 장량이 다시 나온다 할지라도 승상께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든 공을 장수들에게 돌렸다.

"내가 어찌 감히 옛 사람에게 견줄 수 있으리오. 모두 그대들의 힘에 의지한 것이며 더불어 큰 일을 이루려고 한 것을 뿐이다."

공명의 말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맹획은 세 번씩이나 붙잡혔다가 풀려났으나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은갱동으로 돌아간 즉시 욕된 한을 씻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채비를 서둘렀다.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 금은과 재물을 팔번(지명:지금의 기주 정번현), 구십삼전(지명)과 남만의 여러 고을에 전하게 하고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그러자 방패와 칼을 쓰는 군사를 비롯하여 여러 고을에서 장정들이 몰려드니 그 수가 금세 수십만에 이르렀다. 모여든 인마를 정돈하니 마치 구름이 모이고 안개가 휩싸이듯 맹획의 주위로 몰려들어 명을 받들었다. 이 사실은 곧 풀어 놓은 세작들에 의해 공명에게 전해졌다. 공명은 그 말을 듣고도 염려하는 기색 없이 껄걸 웃으며 말했다.

"만병들이 모두 모이는 것은 내가 바라던 바다. 그들에게 우리의 용맹을 보여주리라."

그렇게 말한 공명은 곧 작은 수레에 올라 겨우 수백여 기만을 거느리고 맹획의 군사를 살피러 나갔다. 한동안 수레로 달려가다 보니 바로 앞쪽에 강물이 흘러가고 있는데 그 강은 서이하였다. 물살이 빠르지 않았으나 한 척의 배도 보이지 않았다. 공명이 뗏목을 엮게 하여 강을 건너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된 까닭인지 뗏목을 강물에 띄우자마자 가라앉아 버렸다. 공명이 의아히 여겨 여개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이게 어찌 된 까닭인가?"

"제가 일찍이 듣기로 서이하 상류에 산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특히 대나무가 많다 하였습니다. 굵은 것은 두어 아름이나 되는 것도 있다 하니 그 대나무를 베어 오게 하십시오. 그 대나무로 강 위에 다리를 놓으면 군마가 얼마든지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개가 까닭을 밝히는 대신 방책을 말했다. 공명은 곧 여개의 말을 좇아 군사 3만에게 영을 내려 대나무를 베어 오게 하고 다리를 놓게 했다. 군사들이 대나무 수십만 주를 베어 물살을 따라 실어 보냈다. 공명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우람한 대나무를 건져 강폭이 좁은 곳에 다리를 놓으니 너비가 10여 길이나 되었다. 공명은 강을 건넌 군사들을 강 북쪽 언덕에 머물게 하고 길게 한 줄로 영채를 세우도록 했다. 강을 해자로 삼고 대나무 다리를 진문으로 삼아 흙으로 성벽을 쌓아올렸다. 이어 다리 건너 남쪽 언덕에도 영채 셋을 나란히 세워 대나무 다리와 통하게 했다. 그때 맹획은 수십만 만병을 거느리고 세 번이나 사로잡혔던 분함과 한을 씻기 위해 서이하로 쳐들어왔다. 칼과 방패를 든 군사 1만을 전부 선봉으로 내세운 맹획은 몸소 그들을 휘몰라 공명의 영채로 밀고 들어갔다. 맹획이 군사를 이끌어 오자 공명은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영채 밖으로 나가 살펴보았다. 머리에는 윤건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를 입었으며 손에는 새의 깃털로 만든 흰 부채를 들었는데 수레 주위를 촉의 장수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맹획의 의장도 자못 위풍이 넘쳤다. 몸에는 물소 가죽으로 만든 갑옷에다 머리에는 붉은 투구요,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붉은 털의 남만 물소 등에 앉은 맹획은 촉군을 향해 갖은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뒤따르는 칼과 방패를 든 군사 1만도 거친 기세로 말을 몰아 밀려드는데 단숨에 촉군을 휩쓸 듯한 기세였다. 그러자 공명은 그들과 맞서지 않고 군사들에게 급히 본채로 물러나게 하며 영을 내렸다.

"전군은 각 영채의 문을 굳게 닫은 뒤 지키기만 하고 싸움에 응하지 말라."

촉군이 문을 굳게 닫은 채 싸움에 응하지 않자 만병들은 모두 벌거벗은 알몸으로 영채 앞에 다가와 거친 욕설을 마구 퍼부어대며 화를 돋우었다. 오랑캐들에게 온갖 욕설을 다 듣고 있던 촉의 장수들이 참다못해 공명에게 몰려와 말했다.

"저희들을 내보내 주십시오. 있는 힘을 다해 싸워 한바탕 두들겨서 요절을 내겠습니다."

그러나 공명은 허락하지 않았다. 장수들이 두세 번을 조르자 공명이 손을 저으며 조용히 타일렀다.

"만방 사람들은 왕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라 저렇듯 미쳐 날뛰니 지금은 저들과 맞서서는 아니 된다. 다만 굳게 지키며 저들의 미친 듯한 기세가 한풀 꺾이기를 며칠 동안만 기다리도록 하라. 내 그때는 묘한 계책을 써서 저들을 깨뜨릴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은 더 이상 조르지 않고 물러나 지키기만 했다. 며칠 뒤였다. 공명이 높은 언덕에 올라가 만병들을 살펴보았다. 며칠 동안 수지 않고 욕설을 퍼붓던 만병들의 기세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공명이 곧 장수들을 불러 모은 뒤 물었다.

", 나가서 한 번 싸워 보겠는가?"

"영을 내리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당장에라도 나가 싸우겠습니다."

장수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공명은 먼저 조운과 위연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가만히 계책을 일러준 후 그들을 어디론가로 떠나게 했다. 이어 왕평과 마충에게도 계책을 일러 주고 떠나게 한 후 마대를 불러들여 영을 내렸다.

"나는 이제 이곳의 세 영채를 버리고 강 북쪽으로 물러날 것이다. 내가 물러나면 그대는 급히 대나무 부교를 끊어 하류로 옮기도록 하라. 거기서 조운과 위연을 건너게 한 다음 강을 건너와 호응토록 하라."

마대가 영을 받고 물러나자 공명은 장익을 불러 일렀다.

"내가 군사를 물린 뒤에도 그대는 영채 안에다 횃불을 밝히고 등불을 켜 두도록 하라. 또 군사를 물린 것 맹획이 알고 우리를 뒤쫓거든 그때는 그 뒤를 끊도록 하라."

장익이 물러가자 공명은 그날 밤, 관삭에게 수레를 호위하게 하며 군사를 물렸다. 공명이 군사를 이끌어 갔으나 영채에 등불을 휘황하게 밝혀 놓으니 만병들은 바라보기만 할 뿐 감히 밀고 들어가지를 못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맹획이 군사를 이끌어 촉군에게 싸움을 돋우러 나갔다가 영채 셋이 텅 비어 있음을 알았다. 넓은 영채 안에는 사람은 커녕 말 한 마리 없고 군량과 마초를 실은 수레 수백 대만이 버려져 있었다. 그걸 본 맹우가 문득 의심스런 얼굴로 맹획에게 물었다.

"제갈량이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만 무슨 계교라도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내 생각에는 제갈량이 치중까지 버리고 간 것으로 보아 필시 자기 나라가 무슨 변고가 생긴 것 같다. 오나라나 위나라가 쳐들어온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 때문에 등불을 밝혀 군사가 머물러 있는 것처럼 속이고 수레만 버리고 달아난 것이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빨리 뒤쫓아가 그들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 맹획의 마음은 급했다. 급히 말을 몰아 촉군을 뒤쫓았다. 맹획이 서이하 강변에 이르러보니 건너편 북쪽 언덕 위의 촉군의 영채에는 깃발이 가지런히 꽃혀 있어 마치 비단 구름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부근의 강변에도 마치 성처럼 비단을 둘러 두었는데 만병들은 그것을 보고 선뜻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강 언덕을 바라보고 있던 맹획이 맹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갈량은 우리가 뒤쫓아올 것을 두려워해 강 건너 북쪽 언덕에 짐짓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틀 안에 반드시 물러날 것이다."

그렇게 말한 맹획은 마침내 만병들을 강변에 머무르게 한 다음 사람들을 산 위로 보내 대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 대나무로 뗏목을 만들게 하여 강을 건널 채비를 하는 한편 날랜 군사를 뽑아 영채 앞으로 모이게 했다. 그러나 맹획은 강을 건너 싸울 채비를 갖추는 동안 촉군이 자기들의 땅으로 가만히 밀려들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이날 홀연 미친 듯한 바람이 크게 일어나며 사방에서 불길이 오르더니 북소리와 함께 촉군이 밀려들었다. 난데없는 촉군의 기습에 만병들은 얼이 빠진 듯 저희끼리 짓밟고 부딪치며 수라장을 이루었다. 놀란 것은 맹획도 마찬가지였다. 급히 일가붙이와 거느렸던 장정들을 이끌고 길을 열어 자기 본채로 달아났다. 그러나 본채로 돌아온 맹획은 한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본채에서 문득 한 떼의 군사가 쏟아져 나오는데 앞선 장수를 보니 봉황눈을 부릅뜬 조운이 아닌가. 맹획이 깜짝 놀라 황망히 서이하로 말머리를 돌려 산속 후미진 곳으로 달렸다. 맹획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동안 달려가는데 홀연 맞은편으로 다시 한 장수가 한 떼의 군사를 이끌어 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달려오는 장수를 보니 바로 마대였다. 맹획은 황급히 다른 쪽 길로 접어들었으나 뒤따르던 만병들이 마대에게 꺾여 겨우 졸개 수십 명만이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길도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맹획이 달리다 사방을 살펴보니 남쪽. 북쪽. 서쪽 세 방향에서 자욱한 티끌과 함께 불길이 일었다. 맹획이 감히 그곳으로 가지 못하고 불길이 일지 않는 동쪽 길을 열어 달렸다. 한동안 정신없이 달려 산굽이를 돌아나가자 맞은편에 큰 숲이 나타났다. 그 숲 앞에서 수십 명의 군사가 작은 수레 하나를 밀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맹획이 수레 위에 단정히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그만 크게 놀라고 말았다. 수레 위에 앉은 사람은 바로 공명이 아닌가. 공명이 맹획을 보고 껄걸 웃으며 말했다.

"만왕 맹획이 싸움에 크게 져 이리로 올 줄 알고 기다린 지 오래다."

공명을 보자 맹획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공명의 주위를 호위하는 군사들의 수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자 좌우를 돌아보며 외쳤다.

"내가 저 자의 속임수에 빠져 이미 세 차례나 욕을 보았다. 이제 다행히 저 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힘을 다해 사람과 말과 수레를 가릴 것 없이 짓이기도록 하라."

맹획의 말을 들은 말 탄 만병 몇이 함성을 지르며 단숨에 수레를 덮칠 기세로 달려갔다. 맹획도 말을 박차 앞장 서서 숲 쪽으로 달려갔다. 공명의 수레가 바로 지척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땅이 꺼지고 하늘이 뒤집어지는가 했더니 사람과 말이 깊은 구덩이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뒤따르던 군사들도 모두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숲속에서 위연이 수백 군사를 이끌고 나와 그들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려 꽁꽁 묶고 말았다. 공명은 맹획이 구덩이에 빠지자 영채로 돌아가 사로잡혀 온 만병과 동의 추장들과 장정들을 좋은 말로 달랬다. 그러자 공명의 너그러움에 감복한 그들 중 태반이 고향으로 돌아갔고, 다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만병들도 모두 공명에게 항복했다. 공명이 그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대접한 다음 좋은 말로 달래어 모두 놓아 주자 만병들은 감격해 마지 안았다. 만병들을 돌려 보낸 후 장익이 사로잡은 맹우를 끌어왔다. 공명이 엄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네 형은 참으로 어리석고 아둔한 사람이다. 너라도 네 형을 말렸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이제 나에게 네 번이나 사로잡혔으니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대하겠느냐?"

맹우도 그 말에는 할 말이 없는 듯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가득 띠며 땅에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내가 오늘은 너를 죽이지 않고 목숨을 보존케 할 터이니 돌아가 형을 달래 다시는 앞일을 글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공명은 무사들에게 명해 맹우의 결박을 풀어 주게 했다. 두 번째로 목숨을 구한 맹우는 공명의 너그러움에 감격하여 울며 큰절을 올려 감사를 표하고 돌아갔다. 맹우가 돌아가고 나자 위연이 맹획을 이끌어 왔다. 공명이 성난 목소리로 맹획을 꾸짖었다.

"너는 이번에 또 나에게 사로잡혔다. 그러고도 또 할 말이 있는가?"

맹획은 여전히 수그러듦이 없이 뻣뻣이 대답했다.

"내가 이번에도 당신의 속임수에 빠졌으니 참으로 한스러워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소이다."

그러자 공명이 무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저놈을 당장 끌어내어 목을 베도록 하라."

그러자 맹획은 공명의 영에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 없이 고개를 쳐들어 공명을 바로 보며 한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만약 나를 다시 한 번만 놓아 준다면 반드시 네 번이나 사로잡힌 욕을 씻고 말 것이오."

맹획의 변함없는 호기를 보자 공명이 문득 껄걸 웃으며 말했다.

"그를 풀어주고 장 위에 오르게 하라."

무사들이 맹획의 결박을 풀어 주자 공명이 술을 내려 놀란 가슴을 가라앉게 하고 자리를 내어 주어 앉힌 뒤 물었다.

"나는 이제까지 너를 네 번이나 사로잡았으나 예를 대접해 왔다. 그런데도 아직 항복하지 않으니 어찌 된 까닭인가?"

"나는 비록 왕화가 미치지 않는 변방에 사는 사람이나 승상처럼 속임수는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속임수에 항복할 수 있겠소?"

맹획이 결연히 말하자 공명이 다시 물었다.

"내가 다시 너를 돌려보낸다면 또 한 번 나와 겨루겠느냐?"

"만약 승상께서 나를 다시 사로잡는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항복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동에 있는 재물과 땅을 바치고 다시는 모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맹획이 그렇게 대답하자 공명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시 너를 돌려 보내겠다. 다음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맹획이 공명에게 절하여 사례하고 홀연히 물러나 다시 군사를 수습하러 자신의 동으로 향했다. 맹획은 그 길로 여러 동의 장정 수천을 모아 남쪽으로 향했다. 그때 맞은편에 자욱한 티끌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왔다. 아우 맹우가 뿔뿔이 흩어졌던 만병들을 수습하여 형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던 중이었다. 뜻밖에 살아서 만나게 된 두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며 원한을 달랬다. 한동안 울고 난 맹우가 맹획에게 말했다.

"우리 군사는 여러 번 싸움에서 지고 촉병은 싸울 때마다 이기니 이대로 맞서기 어렵습니다. 우선 깊은 산속 시원한 곳에 머물면서 싸우지 않고 좀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촉병은 이 무더위를 이기지 못해 지친 나머지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피하는 게 좋겠느냐?"

맹획도 당장은 촉병과 맞설 수 없는 터라 맹우에게 물었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가면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름을 독룡동이라 합니다. 그곳 동주 타사 대왕은 저와는 정분이 두터운 사이이니 그리로 가서 의지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맹우가 미리 생각해 둔 듯 그렇게 대답했다. 맹우는 맹획이 자신의 말에 따르기로 하자 먼저 타사 대왕을 만나 보기로 했다. 맹우가 독룡동으로 온다는 전갈을 받자 타사 대왕은 황급히 군사를 이끌고 나와 맹획 형제를 맞아들였다. 독룡동으로 든 맹획은 타사 대왕과 예를 주고받은 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타사 대왕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왕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촉군이 이곳에 오기만 하면 군사 한 사람, 말 한 마리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제갈량과 함께 모두 이 땅에서 죽게 만들 것입니다."

촉병의 위세 앞에서 타사 대왕이 조금도 두려움 없는 씩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맹획은 크게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촉군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듯하여 의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계책으로 촉군을 물리치겠소?"

타사 대왕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 동으로 들어오는 데는 다만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입니다. 대왕께서 오신 길이 바로 동북쪽의 길이며 지세가 평탄한데다 땅이 굳고 물이 많아 사람과 말이 다니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어귈르 돌이나 나무, 흙 따위로 막아 버린다면 비록 1백만 대군이 이른다 해도 동네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길은 서북쪽으로 나 있는데 산이 험하고 고개가 높은데다 길이 매우 좁습니다. 그 외에 다른 좁은 길이 있으나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릴 뿐만 아니라 안개와 같은 장기가 가득 서려 있습니다. 그 장기가 걷히는 미. . (하오 1~7시 사이)시에만 사람이 드나들 수 있으며 그곳의 물은 마실 수가 없으니 어떻게 사람과 말이 다닐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그곳의 물의 마실 수가 없다는 말이오?"

맹획이 불쑥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물었다.

"그곳에는 독이 들어 있는 네 개의 샘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천이라는 샘인데 물이 맑고 깨끗하나 그 물을 마시면 말을 하지 못하고 열흘을 넘기지 못한 채 죽고 맙니다. 둘째는 멸천으로 이 물은 뜨거워서 사람이 몸을 담그면 문드러져 뼈를 드러내고 죽게 됩니다. 셋째는 흑천으로 물은 맑으나 물이 사람의 몸에 닿기만 하면 손발이 검게 변해 죽고 맙니다. 넷째는 유천으로 그 물은 얼음같이 찬데 사람이 마시기만 하면 목구멍으로부터 더운 기운이 없어지고 온몸이 솜처럼 흐물흐물해져 죽고 맙니다. 때문에 그곳에는 벌레나 새 한 마리 없습니다. 다만 옛 한의 복파 장군(본명 마원. 마등. 마초 부자의 선조)이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을 뿐, 이후에는 아무도 다녀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동북쪽으로 난 큰길을 돌과 흙을 쌓아 끊어 버리고 대왕께서는 편안히 우리 동천에 머무르십시오. 동북쪽 길이 끊어지면 촉군은 서북쪽 길로 접어들 것이며 도중에 물이 없으니 독이든 그 샘물을 보면 반드시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1백만 대군일지라도 어찌 살아서 돌아갈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구태여 그들을 치기 위해 군사를 낼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난 맹획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이마를 치며 기뻐했다.

"이제야 내 몸 둘 곳을 얻게 되었구려."

맹획은 다시 손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공명을 저주했다.

"제갈량, 네가 아무리 재주가 귀신 같다고 하나 이번에는 별수 없으리라. 이제 그 네 개의 샘물로 네 번이나 싸움에 졌던 한을 씻을 수 있을 것 같구나."

맹획은 그동안 가슴이 쌓였던 울분이 얼마만큼은 걷히는 듯했다. 공명이 대군을 이끌어 와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야 말로 촉군을 쳐 없앨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에 타사 대왕이 날마다 잔치를 열어 대접하자 맹획과 맹우는 거리낌 없이 술만 마셨다. 그 무렵, 공명은 맹획이 군사를 이끌어 오기를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자 마침내 전군에 영을 내렸다.

"서이하를 건너 남으로 나아가라."

공명은 맹획이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그를 찾아서라도 끝내 굴복시켜 만족을 마음으로 따르게 할 심산이었다. 때는 무더위가 한창인 6월이었다. 불같은 햇볕이 하늘에서 쏟아지니 산은 타고 못은 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더위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뒷날 사람들이 시를 읊었다.

산과 물 타는 듯 마르고

불기둥이 하늘을 덮었네.

알 수 없어라, 하늘과 땅 밖의

더위가 어떠한지.

공명이 대군을 이끌고 남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홀연 초병이 달려와 알렸다.

"맹획은 독룡동으로 들어간 이후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동으로 드는 길은 나무와 돌을 쌓아 막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은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른 길은 험악한 산과 높은 재로 막혀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공명은 여개를 불러 물었다.

"독룡동으로 드는 길이 마땅치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나?"

"제가 전에 독룡동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여개가 머리를 내저으며 말하자 장완이 공명에게 말했다.

"맹획이 이미 네 번씩이나 사로잡혔으니 마음 속으로 크게 두려움이 일었을 것입니다. 어찌 선뜻 다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지금 날씨는 불같이 뜨거워 사람과 말이 모두 더위에 허덕이고 있으니 그들을 친다 해도 별 이로움이 없을 듯합니다. 차라리 군사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가느니만 못할 것 같습니다."

공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이 바로 맹획의 계책에 떨어지는 것이 되오. 우리가 물러나기만 하면 맹획은 이긴 기세로 뒤쫓을 것이오. 이제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소?"

그렇게 말한 공명은 왕평에게 군사 수백을 주고 항복해 온 만병을 길잡이로 삼아 서북쪽의 좁은 길을 찾아 들어가 보게 했다. 이에 왕평이 좁은 길을 따라 독룡동으로 들어가다 보니 문득 한 군데 샘물이 보였다. 사람과 말 모두 목이 타들어 가던 판이라 샘물을 본 군사들은 앞다투어 물을 마셔댔다. 왕평은 길을 찾고 샘물까지 찾게 되자 군사들을 보내 공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런데 군사들이 공명이 있는 대채에 이르자 말은 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입만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공명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공명은 군사들이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독이 있는 물을 마신 때문임을 알았다. 곧 작은 수레에 올라 수십 기를 거느리고 샘물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과연 물이 맑으나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바닥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못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물기운이 차고 섬뜩해 보여 감히 들어가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명은 수레에서 내려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 보았다. 사방에는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솟아 있는데 이상하게도 짐승 한 마리 보이지 않고 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공명이 의아로운 마음으로 다시 사방을 둘러보는데 문득 멀리 산언덕 위에 낡은 사당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공명이 등나무를 붙들고 칡덩굴에 매달리듯 하며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다. 돌로 만든 사당 안에는 돌로 빚은 한 장군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 곁에는 비석이 있어 공명이 읽어 보니, 그 장군은 바로 복파 장군 마원이었다. 지난날 마원이 만방을 평정하자 이곳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명은 그 사당에 두 번 절하고 꿇어 엎드려 가만히 빌었다.

"양은 선제의 무거운 이르심을 받은 데다 이제는 또 후주의 어진 뜻을 받들어 만방을 평정한 뒤에 장차 위를 치고 오를 삼켜 한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군사들이 지리를 잘 알지 못하여 독이 있는 물을 마시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존신께서는 우리 한조의 은의를 생각하시고, 저의 청을 보살피사 신령한 힘을 내리시어 부디 우리 삼군을 지켜주옵소서."

공명이 그렇게 빌기를 마치고 사당에서 나와 가까운 곳에 사는 토박이를 찾아보았다. 그들로부터 군사들이 마신 독을 풀어낼 방법을 알아볼 참이었다. 그러나 토박이를 만나기 전에 건너편 산에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한 노인과 마주쳤다. 몸에서 은은히 풍기는 기품이 범상치 않아 공명이 그 늙은이를 사당 안으로 모셔 들어 돌 위에 청해 앉힌 뒤 물었다.

"어르신의 높으신 이름은 무엇이옵니까?"

"이 늙은이는 전부터 대국 승상의 높으신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뵙게 되니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만방 사람들은 승상께 사로잡힌 바 있으나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에 한결같이 감격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늙은이는 이름을 밝히는 대신 공명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공명은 노인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게 되자 문득 의아스러운 마음이 일었으나 우선 군사들을 구하는 일이 급했다.

"군사들이 샘물을 마시고 말을 하지 못하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공명의 물음에 노인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군사들이 마신 샘물은 아천입니다. 마시면 말을 하지 못하다가 며칠 안에 죽게 됩니다. 이곳에는 그 샘 말고도 또 다른 샘이 세 개나 더 있습니다. 동남쪽에 있는 샘은 얼음같이 찬데, 그 물을 마시게 되면 목안에 더운 기운이 사라지고 몸이 물솜 같이 물러져 죽게 됩니다. 그 샘물이 유천입니다. 남쪽에 있는 샘은 물이 몸에 닿게 되면 손발이 모두 시커멓게 되어 죽는지라 흑천이라 하지요. 또 서남쪽에 있는 샘물은 항상 뜨겁게 끓어오릅니다. 사람이 그 물을 뒤집어쓰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 죽게 되는데 멸천이라고 합니다. 이 네 곳의 샘은 독기가 모여 생긴 것으로 그 독이 몸에 퍼지면 고칠 약이 없습니다. 게다가 장기까지 서려 있어 미시. 신시. 유시 세 때가 되어야만 장기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 나머지 시간에는 장기가 가득 서려 있어 사람이 거기에 쐬기만 하여도 곧 죽고 맙니다."

공명이 그 말을 듣자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그렇다면 남방을 평정하기는 어렵겠구나! 남방을 평정하지 못한다면 어찌 위와 오를 아울러 쳐 다시 한실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선제께서 당부하신 바를 저버릴 바에야 내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라!"

공명의 탄식을 듣더니 노인이 가만히 말했다.

"승상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어려움을 푸실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공명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어르신께 어떤 가르침이 계십니까?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공명이 공손한 목소리로 청하자 노인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몇 리를 가면 골짜기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골짜기 안으로 20여 리를 들어가면 만안계란 개울이 있습니다. 그 개울 위쪽에 덕이 크신 한 선비가 살고 있는데 호를 만안은자라고 합니다. 그 선비는 벌써 수십 년째 그 계곡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묵고 있는 암자 뒤엔 안락천이란 샘이 있는데 그 샘물을 마시면 어떤 독에 중독된 사람도 곧 낫게 됩니다. 또 옴이나 버짐이 생겼을 때나 장기에 쏘인 사람도 그 물에 몸을 씻으면 바로 낫습니다. 또 그 암자 뒤에는 해엽운향이라는 풀이 있는데 그 잎을 따서 입에 물고 있으면 장기를 막아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승상께서는 곧 그리고 가보도록 하십시오."

실로 어둠 속을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공명은 그 노인의 말에 엎드려 절하며 물었다.

"어르신께 이렇게 목숨을 구하는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실로 큰 고마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높으신 이름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이곳의 산신이오. 복파 장군의 명을 받들어 특별히 이렇게 와서 알려 드리는 것이외다."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는 사당 뒤의 돌문을 열고 홀연히 사라졌다. 공명이 놀랍고 신기한 가운데도 그 노인이 사라진 사당에 두 번 절을 올려 은혜를 사례한 뒤 영채로 돌아갔다.

 

맹획의 아내 축융 부인

다음 날, 공명은 향과 예물 갖가지를 마련한 후, 왕평으로 하여금 벙어리가 된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산신이 가르쳐 준 만안계로 찾아갔다. 산골짜기 오솔길을 따라 20여 리쯤을 가니 소나무, 잣나무가 우거지고 대나무와 진기한 꽃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에 서너 칸짜리 띠집이 보였다. 띠집 주위에는 향긋한 꽃향기가 은은히 풍기고 있었는데 공명이 다가가 문을 두드리자 한 동자가 나왔다. 공명이 자기의 이름과 찾아온 뜻을 밝히려 할 때였다. 대나무로 짠 관에 짚신을 신고, 흰 도포에 검은 띠를 두른 나이 든 선비 하나가 나왔다. 푸른 눈에다 수염이 누런 그 선비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홀연히 나와 공명을 맞으며 물었다.

"거기 서 계신 분은 한 승상이 아니십니까?"

선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다 공명도 조용히 웃으며 되물었다.

"높으신 선비께서는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습니까?"

"승상께서는 대군을 일으키시어 남정길에 오르셨음을 들은 지 오래인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나이 든 선비를 공명을 초당으로 맞아들였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손님과 주인의 자리를 정해 앉자 공명이 가만히 찾아온 뜻을 밝혔다.

"이 양은 소열 황제의 무거운 당부와 또한 이번에 폐하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온 뜻은 만방을 평정하여 왕화를 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맹획은 독룡동으로 숨어들고 그를 찾아가던 우리 군사들이 잘 알지 못하여 아천의 물을 마셨습니다. 그 때문에 군사들이 어려움에 놓이게 되었던 터에 어제 복파 장군께서 나타나시어 높으신 선비의 약천을 일러 주셨습니다. 그 샘물을 마시면 독이 퍼진 군사들도 곧 낫는다고 하셨습니다. 부디 그 물을 나누어 주시어 군사들을 구할 수 있게 헤 주십시오."

그 나이 든 선비는 공명의 말을 듣더니 흔쾌히 응락했다.

"이 늙은이는 그저 산야에 묻혀 지내는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이 하찮은 몸은 승상께서 몸소 수고로이 찾아올 말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찾으시는 샘은 암자 뒤에 있으니 어서 길어다 먹으라고 이르십시오."

그 말에 공명은 기뻐하며 곧 왕평과 거느리고 온 벙어리 군사들에게 동자의 안내를 받아 샘물을 마시게 했다. 군사들이 샘물을 마시자 곧 나쁜 침과 가래를 토하고는 금방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동자는 다시 군사들을 인도하여 만안계로 가 몸을 씻게 하여 몸에서 장기를 씻어 내게 했다. 그러자 군사들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며 몸이 씻은 듯이 나으니 그 신통함에 놀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는 웃음소리가 골짜기를 메웠다. 그럴 동안 나이 든 선비는 잣차와 송화채(소나무 꽃가루가 섞인 차)를 내어 공명을 대접하며 말했다.

"이곳 독룡동에는 독사와 전갈 등이 우글거립니다. 특히 버들잎이 떨어져 썩은 냇물이나 샘물은 독기가 강하니 그냥 마셔서는 아니 됩니다. 땅을 깊이 파서 샘을 만들어 거기서 나는 물을 마시도록 하십시오."

공명이 고마움을 표하며 다시 해엽운향도 나누어 달라고 청했다.

"한 사람이 한 잎씩만 입에 물고 있으며 장기가 몸에 침범하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해엽운항까지 얻게 된 공명이 절을 올리며 그 이름을 물었다. 그가 조용히 웃으며 이름을 밝혔다.

"바로 맹획의 형 맹절이란 사람이외다."

공명을 그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승상께서는 놀라움을 거두시고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저희 부모님은 세 아들을 두셨는데 제가 맏이고, 둘째가 맹획이고, 셋째가 맹우입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제 아우들은 원래 성격이 거칠어 한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왕화에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몸이 여러 차례 달래고 타일렀으나 소귀에 경읽기였습니다. 그 이후 저는 아우들과 떨어져 이름을 바꾼 채 이곳에 숨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우들이 모반하여 승상으로 하여금 수고롭게 이 거친 땅까지 군사를 이끌어 오게 하였으니 이 맹절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이에 이 몸이 먼저 승상께 죄를 청하는 바입니다."

맹절이 간곡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지 공명은 크게 감탄해 마지않으며 말했다.

"도척과 유하혜에게 있었던 일이 지금 세상에도 있음을 알겠구려."

도척과 유하혜는 둘 다 춘추시대의 사람으로 형제간이었다. 유하혜는 어진 성품을 지닌 현인이었으나 도척은 이름난 도적이었다. 그러나 유하혜는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구세대에 속했으나 아우 도척은 노예제도를 없애는데 앞장 선 혁명가라 할 수 있었다. 맹절과 맹획도 한나라에 복속시키려는 왕화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보이며 유하혜와 도척 형제의 경우와 유사한 사정을 안고 있었다. 공명이 맹획과 다른 어진 맹절의 성품에 감복하며 말했다.

"제가 천자께 말씀을 드려 공을 이곳의 왕으로 받들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러나 맹절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공명이 싫어 이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어찌 다시 부귀를 탐하겠습니까?"

공명이 거듭해서 권했으나 끝내 마다하자 다시 금과 비단을 내려 사례하니 그것마저도 받지 않았다. 공명은 맹획에게 하직 인사를 고한 뒤 대채로 돌아갔다. 공명은 대채로 돌아오자 맹절에게 들은 대로 군사들에게 새로운 샘을 파게 했다. 그러나 20여 길이나 땅 속을 파 내려가도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공명이 다시 장소를 옮겨 여남은 군데를 더 파게 했으나 헛일이었다. 군사들은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데다 끝내 물이 나오지 않자 두려움에 차 있었다. 공명은 그날 밤이 되자 향을 피워 놓고 하늘에 간곡히 빌었다.

"신 양은 재주 없는 몸으로 대한의 복록을 입고 대명을 받들어 만방을 평정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도중에 전군과 말이 마실 물이 없어 목마름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대한의 기수를 끊으려 아니 하시려거든 이 샘에 물을 내려 주십시오. 만약 대한의 기수가 다했다면 이 양을 비롯한 모든 군사들에게 죽음을 내리십시오."

그렇게 빌기를 마친 공명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이 되어 군사들이 우물을 들여다보니 우물마다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승상의 간곡한 정성이 하늘과 통했다'고 외치며 군사들이 감탄했다. 군마가 마실 물이 넉넉해지자 공명은 군사를 이끌어 지름길로 들어서 독룡동천 앞으로 나아가 영채를 세웠다. 공명이 독룡동천에 이르러 영채를 세우자 만병이 황급히 맹획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큰일 났습니다. 촉병들은 장기에도, 독 있는 샘물에도 중독되지 않은 듯 멀쩡히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네 개의 독이 든 샘도 촉병에게는 듣지 않는 듯합니다."

그 말을 들은 타사 대왕은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스스로 맹획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촉병을 살펴보았다. 과연 독룡동천 어귀에는 촉병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데 중독된 군사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촉병은 큰 통, 작은 통에 물을 길어다 말을 먹이고 밥을 짓고 있었다. 촉병이 이곳에 이를 리 없다고 마음 놓고 있던 타사 대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굴빛이 달라진 채 맹획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것들이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내린 군사들이외다."

그러자 맹획이 타사 대왕의 겁에 질린 마음을 추스르듯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형제가 나가 한바탕 촉병과 맞서 보겠소. 죽기를 작정하고 싸우다 죽을지언정 어찌 두 손을 내밀어 저들에게 묶이겠소?"

타사 대왕도 맹획의 결연한 어조에 두려움으로 떨었던 자신이 부끄러운 듯 분연히 말했다.

"만약 대왕께서 이번 싸움에서 패하면 나도 무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와 말을 잡아 장정들에게 실컷 먹인 뒤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우게 하겠습니다. 죽기로 작정하고 촉병의 영채를 몰아친다면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타사 대왕은 곧 장정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기세를 북돋으며 싸울 채비를 하고 있는데 만병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동 뒤의 서쪽 은야동 스물한 번째 동주 양봉이 3만의 군사를 이끌어 왔습니다."

공명이 군사를 거느려 독룡동천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양봉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우러 나온 것이었다. 맹획이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이웃 군사들까지 나를 도우러 왔으니 이번 싸움은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구나!"

맹획은 타사 대왕과 함께 동구 밖까지 나가 양봉을 맞아들였다. 맹획이 양봉을 반갑게 맞자 양봉이 힘주어 말했다.

"제가 거느리고 온 군사는 가려 뽑은 날랜 군사 3만입니다. 모두 철갑을 입고도 험한 산봉우리를 나는 듯 오르내릴 수 있으니 촉병 1백만은 능히 당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게 아들이 다섯인데 이 녀석들도 모두 장사들입니다. 이제 대왕을 도우러 함께 왔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고는 다섯 아들을 불러 내어 맹획에게 절하게 했다. 맹획이 보니 모두 맹수와 같은 몸놀림에다 호랑이처럼 위풍이 넘치는 체구였다. 맹획이 몸시 기뻐하며 크게 잔치를 열어 양봉 부자를 대접했다. 이윽고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문득 양봉이 청했다.

"싸움터에는 즐거움이 많을 수 없다 했습니다만 도무지 자리가 냉랭해서 아니 되겠습니다. 제가 칼춤을 잘 추는 여자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에게 춤을 추게 하여 이 자리의 흥을 돋울까 합니다."

양봉의 응원군이 이르러 그렇지 않아도 흐뭇하던 맹획은 양봉의 청을 쾌히 승낙했다. 잠시 후 만족 여자들 수십 명이 장막 안으로 춤을 추면서 들어왔다. 모두 풀어헤친 머리에 꽃을 꽂고 허리엔느 단검을 차고 발에는 신발을 신지 않은 채였다. 만녀들이 원을 만들었다가 원을 풀고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자 모든 만병들이 손뼉을 치고 장단을 맞추니 한층 흥겨운 자리로 변했다. 한참 흥이 무르익어 가는데 양봉이 아들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저 두 분에게 술을 올려라."

양봉의 말에 두 아들이 술잔을 술을 가득 따라 맹획. 맹우 형제에게 올렸다. 맹획과 맹우가 무심코 술잔을 받아 입에 댔을 때였다.

"저놈들을 꽁꽁 묶어라!"

양봉이 벼락치듯한 목소리로 소려쳤다. 그 소리와 함께 두 아들이 방금 올린 술잔을 ''치기가 무섭게 그대로 맹획과 맹우를 덮쳐 누르며 묶어 버리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타사 대왕이 그걸 보고 황망히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양봉이 달려들어 그를 묶었다. 그때까지 흥겹게 춤을 추던 여자들이 돌연 우르르 몰려들어 맹획. 맹우 그리고 타사 대왕을 에워쌌다. 잔치 자리에 있던 만병들이 구하려 했으나 춤추던 여자들이 험악한 기세로 에워싸고 있자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맹획이 그때서야 모든 것이 양봉의 계교였음을 알고 소리쳐 꾸짖었다.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고 했다. 이는 '같은 무리를 상하게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같은 무리가 상하면 그 무리가 다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다 같은 족속의 동주로서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찌하여 나를 해치려 하느냐?"

그러자 양봉도 지지 않고 맹획을 소리쳐 꾸짖었다.

"우리들은 모두 죽을 목숨이었으나 제갈 승상께서 크신 은혜로 살려주셨다. 내가 비록 그 은혜에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다시 네가 제갈 승상을 거스르려 하니 어찌 보고만 있겠느냐?"

양봉이 그렇게 소리치자 그 자리에 있던 만병들은 양봉의 말 또한 옳게 여겨 입을 다문 채 하릴없이 하나 둘 각자의 동으로 돌아가고 말했다. 양봉은 묶은 세 사람을 데리고 촉군의 영채로 달려갔다. 뜻밖에도 양봉이 맹획 형제와 타사 대왕을 묶어 왔다는 전갈을 전해 듣자 공명은 그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이게 했다. 양봉이 공명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저희들은 모두 승상의 크신 은혜를 입고도 보답을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은혜의 만분의 하나라도 갚기 위해 저놈들을 사로잡아 왔습니다."

공명은 양봉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싸우지도 않고 맹획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만방에 머물면서 그곳의 민심을 거두어들이려 했던 뜻이 이제야 결실을 보는 것 같아 더욱 흐뭇했다. 공명은 양봉 부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그 공을 사례한 뒤 맹획을 불러들이게 했다.

"이번에는 너도 진정으로 항복하겠느냐?"

공명이 맹획을 내려다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그러나 맹획이 분한 듯이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이번에도 당신의 힘으로 내가 사로잡힌 게 아니오. 바로 우리 동족끼리 서로 다퉈 이 지경이 된 것이오. 죽이려면 어서 죽이시오. 당신과 맞서 싸워서 진 것도 아닌데 어찌 마음으로 항복하겠소?"

"너는 나를 마실 물이 없는 곳으로 끌어들여 아천. 멸천. 흑천. 유천의 독물샘으로 우리 군마를 없애려 했다. 그러나 네가 보듯 우리 군마는 조금도 상하지 않고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너는 어찌하여 깨닫은 바 없이 그토록 억지 고집을 부리고 있느냐?"

공명이 맹획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맹획은 여전히 공명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겼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은갱산에서 살아왔소. 그곳은 물길이 거센 세 강이 있고 쳐들어오기 힘든 관이 많소이다. 만약 당신이 나를 다시 풀어주고 그곳에서 나를 사로잡는다면 그때는 자자손손까지 진정으로 항복하여 섬기게 하겠소."

맹획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공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너를 돌려 보내겠다. 가서 군마를 수습하여 다시 한번 더 나와 승부를 결정짓도록 하라. 그러나 이번에 사로잡히고도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구족까지 목을 벨 것이다."

그렇게 말한 공명이 좌우에게 맹획의 결박을 풀어주게 했다. 다섯 번째로 풀려난 맹획은 공명에게 절을 올리며 물러났다. 공명은 타사 대왕과 맹우도 풀어주게 하고 술과 고기를 내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게 했다. 두 사람은 공명의 너그러움에 송구스러운 맘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공명은 말에 안장까지 얹어주며 떠나가게 했다. 공명은 맹획과 그의 무리들을 돌려 보낸 후 양봉 부자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동천 군사들에게도 많은 상을 주어 돌려 보냈다. 맹획은 공명으로부터 풀려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은갱동으로 돌아갔다. 이곳이 원래 맹획의 본국으로서 만도는 운남(곤명)보다 훨씬 서남쪽에 있었다. 이 만도의 땅 이름을 은갱동이라 했는데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이곳을 세 줄기 강물이 에워싸듯 흐르고 있었다. 노수. 감남수. 서성수가 그 세 강인데 세 줄기 강물이 한 곳으로 합쳐지는 까닭에 삼강이라 했다. 은갱동 북쪽에 넓고 기름진 들판이 2백여 리에 걸쳐 이어졌는데 물산이 풍족했다. 또 서쪽 2백여 리를 가면 노수와 감남수에 이르고 정남으로 3백여 리 떨어진 곳에 양도동이 있었다. 양도동은 은이 많이 나는 산으로 에워싸여 있었는데 그 산 이름이 은갱산이었다. 그 산속에는 만왕이 거처하는 궁궐과 누각이 있었고, 그 궁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가귀라 했다. 이 사당에서는 사철 소와 말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복귀라 했으며 그곳의 촉 땅 사람을 비롯하여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제사를 지냈다. 그곳 사람들은 병이 나도 결코 약을 쓸 줄 몰랐으며 대신에 약귀라 불리는 무당에게 푸닥거리를 하게 하였다. 또한 이곳에는 형법이 없어 죄지은 자는 그저 목을 벨 뿐이었다. 혼인을 하는데도 별 다른 격식이 없었다. 딸이 자라면 개울가에 가서 목욕을 하게 했다. 그때 남녀가 구별없이 함께 목욕을 하게 하는데 거기서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저희들끼리 짝을 정해 살게 할 뿐 부모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 혼인 풍습을 학예라고 했다. 또한 주식을 위해 매년 농사를 짓지 않고 그해의 날씨에 따라 농사를 지었다. 비가 많이 내려 농사가 잘 되는 해는 곡식을 심었으나, 흉년이 들면 뱀을 잡아 죽을 쑤고, 코끼리를 구워 먹었다. 각 부락마다 우두머리가 되는 이를 동주, 그 아래를 추장이라 불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삼강성 안에 장이 서 물건을 사고 팔거니 서로 바꾸기도 했다. 맹획의 본고장 남만의 풍속이 대개 그러했다. 지금의 지도로 살펴본다면 이곳을 남방대륙의 하류로 미루어 보아 베트남. 미얀마. 운남성의 경계선 근처에 해당되는 곳으로 볼 수 있다. 맹획은 자기의 근거지인 은갱산을 떠나 공명을 맞아 싸우던 중 사로잡힌 몸이 되었던 것이었다. 맹획은 은갱산의 험한 산과 삼강을 의지하여 그가 바라던 곳에서 싸우게 되지 피붙이와 휘하의 무리 1천 여명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여러 차례 촉병에게 사로잡혀 욕을 당했소. 맹세코 그 원수를 갚아 한을 씻고자 하는데 그대들에게 좋은 계교가 없소?"

맹획이 그렇게 묻자 한 사람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제가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그를 쓰신다면 제갈령을 깨뜨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그를 보니, 그는 맹획의 처남으로서 팔번부장인 대래동주였다. 맹획이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여기서 서남쪽으로 가면 팔납동이 있는데 그 동주는 목록 대왕입니다. 법술(도술)에 통달해 있으며, 나다닐 때는 코끼리를 타고 비와 바람을 마음대로 부립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호랑이와 표범, 승냥이와 이리. 독사, 전갈 등을 데리고 다닙니다. 게다가 용맹스럽고 날랜 3만의 신병을 이끌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한 통의 글과 예물을 갖춰 주시면 제가 가서 도움을 청해 보겠습니다. 만약 목록 대왕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그깟 촉병쯤은 두려워하실 것이 없습니다."

맹획도 만약 그가 도와 준다면 이번에야말로 촉병을 깨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곧 처남에게 글과 예물을 주어 팔납동으로 가게 했다. 한편으로는 타사 대왕을 삼강성으로 보내 그곳을 방비케 하면서 촉병을 경계하도록 했다. 그 무렵 촉의 대군은 삼강에 이르러 있었다. 공명이 찬찬히 삼강성의 지세를 살펴보니 삼강성의 세 면은 강으로 둘러 있고 한 면만 뭍으로 이어져 있었다. 공명이 위연과 조운을 불러 명을 내렸다.

"그대들 둘은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뭍길로 나아가 성을 취하라."

조운과 위연이 곧 군마를 이끌어 성 아래에 이르자 만병들은 성 위에서 활과 쇠뇌를 비 오듯 쏘아댔다. 원래 만인들은 어릴 때부터 활과 쇠뇌를 익혀 온 터여서 그 솜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쇠뇌도 여느 것과는 달랐다. 쇠뇌 한 틀에서 한 번에 열 대씩의 화살이 날아가는데 살촉마다 독한 약을 바른 화살이었다. 때문에 그 화살에 맞은 사람은 술기운이 퍼지듯 순식간에 온몸이 썩어들어 갔다. 쇠뇌를 한 번 쏘면 한꺼번에 열 사람이나 살가죽이 문드러지며 창자를 드러내고 죽으니 아무리 명창이라지만 조운과 위연도 마침내 견디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 공명에게 말했다.

"만병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성 위에서 활과 쇠뇌를 날리는데 그 화살에 맹독이 묻어 있어 군사들만 잃게 되니 잠시 물러났습니다."

공명은 그 말을 듣고 몸소 수레에 롤라 성 아래로 가서 적의 허실을 살핀 후 장수들에게 군령을 내렸다.

"영채를 10리쯤 뒤로 물리도록 하라."

촉병들은 공명의 영에 따라 영채를 물렸다. 이를 본 만병들은 신바람이 났다. 모두들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웃으며 서로 치하했다.

"촉병들도 별 것 아니다. 우리의 쇠뇌에 겁을 먹고 도망간 것이다. 공명, 공명하지만 그도 역시 별 것 아니군."

촉병이 자기들을 당해 내지 못해 물러간 줄로만 알고 있는 만병들은 밤에도 지키는 군사 하나 세우지 않고 다리를 쭉 뻗고 잠들었다. 한편 영채를 물린 공명은 문을 굳게 닫고 출진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닷새째가 되었다. 그날 저녁 때였다. 홀연 가벼운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공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초경때까지 여벌로 옷 한 벌씩을 더 마련하라. 만약 점고하여 어긴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

군사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공명의 엄명이라 장수로부터 보졸에 이르기까지 따로 옷 한 벌 씩을 마련했다. 초경 때가 되자 모든 장졸들이 마련한 옷을 들고 점고를 받은 후 공명이 다시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그 옷에 가득히 흙을 싸서 삼강성 아래로 모이도록 하라. 먼저 이르는 자에게는 상을 내릴 것이다."

장졸들은 공명의 영이 떨어지자 가지고 있던 여벌 옷에 흙을 가득 채우고 나는 듯이 상감성 아래로 달려갔다. 그러자 공명이 다시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가지고 온 흙을 성벽 아래에 쌓아올리고 그 위를 밟아서 성 위로 오르라. 먼저 성 위에 이르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리라."

군사들은 그제야 공명의 속셈을 알고 급히 옷에 싼 흙을 성벽 아래에 쌓기 시작했다. 촉병 10만에다 항복한 군사 1만여 명이 일제히 흙을 성앞에 쏟아 놓으니 금세 흙산이 되더니 이윽고 성과 같은 높이가 되었다. 만병들이 안심하고 잠에 취해 있다가 깜짝 놀라 성 위로 올라가 쇠뇌를 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쯤 촉병은 이미 성 위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활과 쇠뇌를 쏘기도 전에 우왕좌왕하다 촉병에게 사로잡히거나 달아나기에 바빴다. 맹획과 함께 왔던 타사 대왕도 난군 중에 촉병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가 했던 호언장담과는 너무나 딴판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만 셈이었다. 삼강성이 완전히 공명의 손안에 떨어지자 성안에 있는 금은보화를 거두어 삼군에게 상으로 내려 사기를 드높였다. 한편 맹획은 은갱산으로 달려온 패잔병들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타사 대왕께서도 돌아가시고 삼강성도 빼앗겼습니다."

맹획은 그 소리를 듣자 깜짝 놀라며 얼굴색이 달라졌다.

"뭐 삼강성을 빼앗겼다고?"

맹획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다시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촉병들이 벌써 강을 건너 우리 동앞에 영채를 세웠습니다."

그 소리에 맹획은 더욱 놀라 손발이 떨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때였다. 홀연 병풍 뒤에서 한 여자가 깔깔 웃으며 나와 말했다.

"명색이 사내 대장부가 되어 어찌 그리도 마음을 좁게 쓰십니까? 제가 비록 한낱 여자의 몸이나 당신과 함께 나가 싸워 보겠습니다."

맹획이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그는 바로 아내 축융 부인이었다. 그의 아내는 대대로 남만에서 살아온 여인으로서 축융씨(화신)의 후예였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특히 비도를 잘 써, 그녀가 던지는 비도는 1백 번을 날려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솜씨를 지녔다. 맹획도 아내의 그런 솜씨를 알고 있는 터라 그녀가 나서자 마음을 가다듬고 싸울 준비를 서둘렀다. 축융 부인은 일족 수백과 만병 5만여 명을 거느리고 말 위에 올라 은갱의 궁궐을 나왔다. 축융 부인이 동의 입구 쪽으로 나아갈 때 한 떼의 촉병이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다. 앞선 장수는 장의였다. 촉병을 보자 만병들은 즉시 두 갈래로 벌여 서며 싸울 태세를 갖추었고 축융 부인이 가운데로 나섰다. 등에는 다섯 자루의 비도를 꽂고 손에는 한 길 여덟 자나 되는 긴 표창을 들었으며 곱슬털의 적토마를 타고 있었다. 비록 여자였으나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장의는 속으로 은근히 찬탄해마지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적의 장수로 맞서니 장의는 말을 달려 그녀를 맞으러 나갔다. 축융 부인도 장의가 말을 달려오자 마주 달려나갔다. 칼과 창이 힘차게 어우러진 지 몇 합 되지 않을 때였다. 문득 축융 부인이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래도 상대가 여자라 가볍게 여긴 장의는 달아나는 축융 부인을 급하게 뒤쫓았다. 그러자 달아나던 축융 부인이 홀연 말 위에서 몸을 홱 뒤트는 순간 한 자루의 비도가 번쩍하며 날아들었다. 장의가 깜짝 놀라 얼른 몸을 피하며 손으로 막으려 할 때 날아온 비도가 왼쪽 팔에 꽂혔다. 장의는 아픔을 이기지 못한 채 크게 비명을 지르며 말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만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밧줄을 던져 장의를 묶어 버렸다. 그러자 촉장 마충이 그 소식을 듣고 장의를 구하러 말을 달려나왔다. 만병들이 마충을 보자 일제히 달려 나와 앞길을 막았다. 마충이 보니 축융 부인이 긴 창을 들고 말 위에 꼿꼿이 앉아있었다. 그걸 보자 벌컥 화가 솟구친 마충이 축융 부인을 한칼에 내리칠 기세로 급하게 말을 몰았다. 그런데 만병들이 던진 밧줄에 말다리가 얽혀 말이 뒤집히는 것과 동시에 마충도 말과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이 를 본 만병들이 때를 놓칠세라 우르르 달려들어 마충마저 밧줄로 꽁꽁 묶어 버리고 말았다. 축융 부인이 촉방 둘을 사로잡은 채 은갱동으로 돌아가자 맹획은 크게 기뻐했다. 곧 잔치를 베풀어 그의 아내와 군사들의 공을 치하했다. 축융 부인이 기세가 등등한 가운데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도부수들은 사로잡은 두 촉장을 끌어 내 목을 베어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이후부터 감히 우리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라."

축융 부인의 영에 따라 도부수들이 장의와 마충을 끌어 내려 하자 맹획이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제갈량은 나를 다섯 번이나 사로잡았다가 놓아 주었소. 그런데 내가 적장을 사로잡자마자 목을 벤다면 도량이 좁은 자라고 비웃음을 살 것이오. 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제갈량마저 사로잡은 후에 함께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오."

축융 부인은 남편의 말에 입을 다문 채 응락했다. 이에 두 장수를 죽이는 일은 뒤로 미루고 모두들 즐겁게 떠드는 가운데 잔치가 이어졌다. 그때쯤 축융 부인에게 패해 달아난 촉병들이 영채에 이르러 급히 공명에게 아뢰었다.

"장의와 마충 두 장수가 사로잡혔습니다. 맹획의 부인 축융 부인의 무예가 놀라울 만큼 뛰어났습니다."

졸개들의 말에 공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마대와 위연 그리고 조운을 불러들였다. 공명은 그들에게 무엇인가 계책을 일러 준 다음 각각 군사를 주어 떠나보냈다. 다음 날, 만병 하나가 은갱동으로 달려와 맹획과 축융 부인에게 알렸다.

"적장 조자룡이 싸움을 걸어 오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축융 부인이 곧장 말 위에 올라 군사를 거느려 조운을 맞으러 나갔다. 양군이 진을 벌여 세우고 조운과 축융 부인의 싸움이 한바탕 어우러졌다. 그러나 불과 수합이 엇갈리기도 전에 조운이 말을 재우쳐 달아났다. 축융 부인도 조운의 맹획을 이미 듣고 있었던 터라 그가 몇 합 부딪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것은 틀림없이 매복군이 있으리라 여겨 뒤쫓지 않고 군사를 거두었다. 다음 날이었다. 이번에는 위연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싸움을 돋우었다. 축융 부인이 달려나가 위연을 맞았으나 싸움은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처음에는 창칼이 불꽃을 튕기며 몇 합 어우러졌으나 얼마 싸우지 않아 위연이 말을 재우쳐 달아났다. 축융 부인이 이번에도 위연을 뒤쫓지 않았다. 촉의 이름난 장수들이 열 합도 싸우지 못해 달아나니 필시 자기를 꾀어내려는 수작으로만 여겼다. 다음 날이 되었다. 이번에는 또 조운이 와서 축융 부인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축융 부인은 망설임 없이 말을 달려나가 조운을 맞았다. 그러나 싸움은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몇 합을 부딪더니 조운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자 축융 부인도 전날과 다름없이 조운을 뒤쫓는 대신 징을 쳐 군사를 거두었다. 축융 부인이 군사를 이끌고 은갱동으로 막 돌아가려 할 때였다. 홀연 위연이 달려 나와 갖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원래 성미 급한 축융 부인이 그 욕설을 듣고는 참지 못했다. 위연의 상스런 욕설을 견디다 못해 얼굴이 붉어지더니 위연에게 표창을 겨누며 달려들었다. 위연이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화가 치민 축융 부인은 앞 뒤 가릴 새 없이 말을 박차며 급한 기세로 위연을 뒤쫓았다. 위연이 산속의 샛길로 접어들자 축융 부인도 샛길로 말을 재우쳐 급히 위연을 뒤쫓았다. 한동안 쫓고 쫓기며 산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홀연 위연의 등 뒤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었다. 위연이 놀라 뒤돌아보니 축융 부인이 안장을 가슴에 안은 채 말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마대가 매복해 있었는데 축융 부인이 말을 달려오자 밧줄을 던져 말다리를 얽어 쓰러뜨린 것이었다. 말에서 굴러떨어진 축융 부인은 마대의 군사들에 의해 꽁꽁 묶이는 몸이 되고 말았다. 축융 부인이 사로잡혀 가는 걸 본 만장과 졸개들이 급히 달려가 구하려 했으나 기다리고 있던 조운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덮쳤다. 만병들은 조운에게 크게 꺾인 채 돌아갔다. 마대가 축융 부인을 묶어 대채로 돌아가니 공명이 장막 안 높은 곳에 단정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마대가 축융 부인을 이끌어 가자 공명이 영을 내렸다.

"묶은 밧줄을 풀어 주도록 하고 다른 방으로 청해 술과 음식을 대접하도록 하라."

장수들이 공명의 영에 따라 축융 부인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게 했다. 공명은 한편으로 맹획에게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너는 가서 맹획에게 그의 부인을 사로잡았음을 알리고 장의와 마충을 그 부인과 바꾸자고 전하라."

공명의 사신이 은갱동으로 이르러 맹획에게 그 말을 전했다. 맹획이 그 제안을 마다할 리 없었다. 두말없이 두 장수를 돌려보냈다. 두 장수가 돌아오자 공명도 곧 축융 부인을 은갱동으로 돌려보냈다. 맹획은 아내가 돌아오자 크게 기뻐했으나 한편으로는 더욱 근심스러웠다. 아내의 용맹에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던 맹획이었으나 공명의 계교에는 별도리가 없음을 깨닫자 가슴은 더욱 무거워지기만 했다. 맹획이 그 아내마저 공명에게 사로잡히자 이제는 다른 방책이 떠오르지 않아 근심스런 얼굴로 앉아있는데 졸개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팔납동주께서 이르셨습니다."

맹획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맹획은 동구 밖까지 달려나가 팔납동주를 맞았다. 팔납동주인 목록 대왕은 흰 코끼리를 타고 왔는데, 목에는 금과 영롱한 보석으로 꿴 목고리를 두르고, 허리에는 두 자루의 큰 칼을 차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 뒤에 거느린 군사들은 처남인 대래동주의 말처럼 호랑이와 표범, 늑대 같은 짐승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울음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맹획은 목록 대왕을 궁궈로 맞아들인 후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고 구원해 주기를 청했다.

"염려 마시오. 내가 대왕의 원수를 갚아주겠소."

목록 대왕이 맹획의 말을 듣더니 흔쾌히 응낙했다. 맹획이 이 말에 크게 기뻐하며 성대히 잔치를 열어 목록 대왕을 대접했다. 잔치는 밤늦도록 이어져 화톳불이 밝혀지고 풍악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사나운 짐승들은 밤새도록 하늘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싸움에 나가기 전에는 일체 먹이를 주지 않고 맹수들을 허기지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목록 대왕은 거느리고 온 군사들과 맹수들을 이끌어 촉군을 맞으러 나갔다. 위연과 조운은 만병들이 온다는 말을 듣자 곧 군마를 이끌어 그들을 맞을 진을 벌여 세운 후 멀머리를 나란히 하여 만병들이 오는 것을 살펴보았다. 얼마 있지 않아 만병들이 맞은편에 이르렀는데 여태까지 보아 온 만병들이 아니었다. 기치와 병기들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인데다 거의 다 옷을 입지 않은 알몸들이었다. 게다가 몸은 붉고 얼굴을 추하고 더럽기 짝이 없어 차마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또한 북도 울리지 않고 사금이란 악기를 써서 군호로 삼았으며 손에는 모두 네 자루의 끝이 뾰족한 칼이 들려 있었다. 목록 대왕은 큰 기 아래로 흰 코끼리를 타고 앉아 있는데 허리에는 두 자루 보검을 차고 손에는 자루 달린 작은 종을 들고 있었다. 목록 대왕을 본 조운이 위연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가 싸움터에서 평생을 지내 왔으나 저토록 흉악한 인물을 보기는 실로 처음이오."

"과연 그렇소이다."

위연도 목록 대왕의 험상궂은 위용에 놀라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목록 대왕이 문득 입으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더니 들고 있던 종을 흔들어댔다. 그러자 홀연 회오리바람이 일며 모래와 자갈이 날아서 촉병을 향해 소나기 뿌리듯 쏟아졌다. 이어 한 차례 화각(취주악기의 일종)이 울리더니 호랑이, 표범, 늑대 등의 맹수와 독사가 어금니를 드러낸 채 바람을 일으키며 촉병 쪽으로 몰려왔다. 촉병은 이 뜻밖의 맹수의 기습에 기겁을 해 달아났다. 조운과 위연이 아무리 호통을 쳐도 소용없었다. 촉병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삼강의 경계에까지 썰물처럼 밀려나고 말았다. 목록 대왕은 달아나는 촉병을 덮쳐 많은 군사가 죽거나 상했다. 조운과 위연은 하는 수 없이 패잔병을 이끌고 대채로 돌아가 공명에게 싸움에 진 죄를 청하며 일어났던 일을 말했다. 공명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조용히 웃으며 두 장수를 위로했다.

"이번 싸움에 진 것은 두 사람의 허물이 아니다. 나는 지난날 초려에서 나오기 전부터 남만에는 호랑이와 표범을 부리는 술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촉에서 떠나올 때 그런 술법을 깨뜨릴 물건을 지고 왔다. 군사들 뒤에 따르는 수레들 중에 따로 봉해진 스무 대가 있는데 이번에는 그중 열 대를 쓰면 될 것이다. 나머지 열 대는 뒤에 따로 쓰리라."

그렇게 말한 공명은 좌우의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군사들은 뒤따르는 수레에 가면 붉은 칠을 한 상자가 실린 수레가 열 대 있을 것이니 그 수레를 끌어오도록 하라. 또 검은 칠을 한 상자를 실은 수레 열 대가 있는데 그 수레는 그대로 남겨두도록 하라."

장수들과 군사들은 공명의 말을 괴이쩍게 여겼으나 곧 영에 따라 붉은 칠을 한 수레 열 대를 끌어왔다. 공명은 곧 붉은 칠을 한 상자를 열게 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모두 나무를 깎아서 만들어 칠을 한 큰 짐승들이었다. 그 짐승들에게 가죽을 입히고 다섯 가지 색의 실을 털처럼 붙여놓았는데 마치 큰 짐승의 몸에 털이 난 것처럼 보였다. 거기다가 강철로 만든 어금니와 발톱도 붙여 한층 더 사납게 보였는데 짐승 하나에 열 사람이 탈 만한 크기였다. 공명은 짐승의 배와 입안에 불이 잘 붙을 물건들을 넣게 한 후 힘센 군사 1천여 명을 뽑아 그 짐승들을 이끌게 했다. 다음 날이 되자 공명은 군사를 거느려 은갱동 앞쪽으로 나아가 진을 벌여 세웠다. 만병들이 그걸 보고 맹획에게 달려가 알렸다. 맹획은 전날 싸워서 이긴 터라 기세가 등등했으며, 거기다 목록 대왕은 껄껄 웃으며 촉병을 비웃었다.

"그깟 놈들 조금도 염려할 것 없다. 나를 당할 자가 없는 터에 제갈량인들 무엇을 염려하겠느냐."

목록 대왕은 그렇게 큰소리친 후 맹획과 함께 만병들을 거느리고 기세 좋게 나아갔다. 그때 공명은 머리에 윤건을 쓰고 깃털 부채에 검은 도복 차림으로 수레 위에 단정히 앉아있었다. 맹획이 공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록 대왕에게 말했다.

"저기 수레 위에 앉아있는 자가 바로 제갈량이오. 만약 저 사람을 사로잡는다면 촉병 모두를 사로잡은 거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목록 대왕은 맹획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고 있던 종을 흔들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세 거센 돌풍이 일며 수백 마리의 맹수들이 으르렁거리며 내달았다. 그 맹수들을 보자 촉병들은 얼굴빛이 달라지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공명이 가지고 있던 부채를 쳐들어 한 번 흔들었다. 그러자 촉의 진중으로 불어오던 돌풍이 돌연 방향을 바꾸어 거꾸로 만병들에게 모래를 뿜고 돌을 날렸다. 그와 함께 촉진에서 나무로 만든 거짓 짐승들을 몰고 나가게 했다. 엄청나게 큰 짐승이 코와 입으로는 연기와 불을 뿜으며 내달아오자 이번에는 만병들이 기겁을 하며 달아났다. 놀란 것은 만병뿐이 아니었다. 목록 대왕이 거느렸던 맹수들도 촉진으로 달려오는 거짓 짐승들을 보자 꼬리를 사렸다. 입과 코로 불과 연기를 내뿜고 목에 방울을 흔들며 강철 이빨과 발톱으로 할퀼 듯이 덤벼들자 꼬리를 사리던 맹수들이 만병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만병들은 맹수들이 자기들 쪽으로 덮쳐들자 크게 혼란이 일었다. 저희들끼리 부딪치고 넘어지는 가운데 맹수들마저 덮쳐들고 물어뜯으며 짓밟으니 죽는 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목록 대왕이 아무리 종을 흔들며 주문을 외웠으나 소용이 없었다. 공명이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북소리, 징 소리에 함성을 울리며 대군을 휘몰아 만병들을 쳤다. 미친듯한 바람에 휩쓸리고 맹수에 이어 촉병까지 덮쳐드니 만병들은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쓰러지니 시체로 인해 동구가 가로막힐 지경이었다. 싸울 적수가 없다고 큰소리치던 목록 대왕은 난전을 치르며 촉병의 무수한 칼날질 속에서 끝내 말 아래로 끌어 내려져 목이 잘리고 말았다. 그때 맹획은 만병들 틈에 뒤섞여 은갱동으로 달아났으나 밀물처럼 밀고 들어오는 촉병들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마침내 궁궐을 버리고 황망히 산을 타고 고개를 넘어 달아나자 공명은 텅 비다시피한 은갱동의 궁궐을 손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궁궐을 차지한 공명은 맹획이 달아난 걸 알고 다음 날 날이 밝자 영을 내렸다.

"맹획이 달아났으니 장수들은 군사를 몇 갈래로 나누어 그를 사로잡도록 하라."

공명이 그렇게 영을 내리고 있는데 홀연 전갈이 왔다.

"맹획의 처남인 대래동주가 맹획에게 항복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맹획이 끝내 듣지 않자 맹획과 축융 부인 그리고 피붙이 수백 명을 사로잡아 승상께 바치겠다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공명은 어쩐 일인지 대래동주가 맹획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얼른 장의와 마충을 불러서 계교를 내려 내보냈다. 장의와 마충은 그 길로 날랜 군사 2천을 거느리고 나가 공명의 장막으로 오는 길 양편에 매복했다. 공명은 진문을 지키는 군사를 불러 일렀다.

"대래동주가 맹획을 이끌고 오거든 그냥 들어보내도록 하라."

얼마 지나지 않아 대래동주가 수백의 도부수들과 함께 맹획과 그 피붙이들을 이끌어 왔다. 공명의 맹획의 무리를 보자 대뜸 큰 소리로 호령했다.

"이놈들이 또 사로잡히러 왔구나. 어서 사로잡도록 하라."

공명의 호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의와 마충의 복병들이 쏟아져 나와 모조리 묶어 버렸다. 맹획이 밧줄에 묶인 뒤에야 공명이 껄걸 웃더니 꾸짖었다.

"어찌 너희들이 하찮은 잔꾀로 나를 속이려 하느냐? 여섯 번 사로잡힌 중에 두 번째로 사로잡혔을 때 너희 동 사람들과 짜고 거짓 투항해 온 바 있다. 그때 내가 놓아 주었거니와, 이번에 또 거짓 항복하여 이 동중에서 나를 죽이려 함이 아니냐? 내가 그 꾀어 넘어갈 줄 알았느냐?"

공명은 즉시 무사들을 시켜 그들의 몸을 뒤지게 했다. 몸을 뒤지니 과연 모두 날카로운 칼을 감추고 있었다. 맹획이 공명을 없애려는 고집이 그토록 끈질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맹획이 죽기로 작정하고 거짓으로 항복한 체 기회를 보아 거느리고 온 도부수들과 함께 공명을 죽이려 했던 꾀는 그렇게 수포로 돌아가고만 셈이었다. 공명이 맹획에게 물었다.

"네가 전에 말하기를 내가 네 집 은갱동에서 사로잡히면 마음으로 복종하겠다고 말했다. 이제 사로잡혔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맹획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스스로 걸어들어 온 것이오. 당신이 힘으로 나를 사로잡은 것이 아닌데 어찌 마음으로 항복할 수 있겠소?"

공명이 다시 맹획에게 따지듯 물었다

"네가 여섯 번이나 사로잡혔는데 아직도 마음으로 항복하지 않는다면 대체 언제 항복하겠다는 말이냐?"

그러자 맹획이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당신이 나를 일곱 번째로 사로잡는다면 그때 가서는 마음으로 항복하고 다시는 거스르지 않겠소."

공명이 맹획의 말을 듣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너희 은갱동의 둥지와 소굴리 모두 무너졌는데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염려하겠느냐?"

공명이 그렇게 말한 후 무사들에게 명해 몸에 묶은 밧줄을 풀어주게 했다.

"이번에도 놓아준다. 그러나 만약 다시 사로잡혀서 또 딴말을 하면 그때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공명이 맹획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맹획도 공명의 그 말에는 입을 다문 채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가득 띠우고는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맨 채 황망히 공명 앞을 물러났다.

 

일곱 번째 맹획을 사로잡고 공명은 노수에 제사 지내다

맹획이 풀려나긴 했으나 거느렸던 만병 1만여 명 중에서 남은 군사는 고작해야 1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상처를 입은 채 달아나다가 공명에게 풀려나 허겁지겁 뒤따라온 맹획과 만난 군사들이었다. 맹획은 패잔병들을 만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맹획은 그들에게 다시 싸울 것을 권하니 그들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촉의 대군에 비해 이미 적수가 되지 못함을 하고 있었으나 만병은 그래도 맹획의 말에 따랐다. 맹획이 패잔병들을 거두었으나 이제는 왕궁도 빼앗긴 터라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맹획은 처남인 대래 동주에게 탄식하듯 말했다.

"이제 은갱동마저 빼앗겼으니 어디다 발을 붙이고 다시 뒷일을 도모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대래 동주가 생각해 둔 바가 있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제가 아는 나라 가운데 촉병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면 다시 촉병과 맞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맹획이 귀가 번쩍 띄어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게 어느 나라인가?"

"오과국입니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7백 리쯤 떨어져 있는데 올돌골이란 임금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올돌골은 키가 두 길이나 되는데 곡식을 먹지 않고 뱀이나 짐승의 날고기를 먹고 삽니다. 그래서인지 몸에 비늘이 돋아나 갑옷처럼 칼과 화살이 살을 꿰뚫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느린 군사들은 모두 등나무로 짠 갑옷을 입고 있는데 그 등나무가 예사 등나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사 등나무가 아니라니, 그럼 어떤 등나무라는 말인가?"

맹획의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대래 동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군사들이 입고 있는 등나무는 깊은 산속의 절벽에서 자란 것인데, 그걸 베어다 반년 동안 기름에 담갔다가 꺼내어 말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름에 담갔다가 말리기를 열 번 쯤 한 뒤에 그것을 엮어서 갑옷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갑옷을 입은 채 강물에 뛰어들어도 가라앉지 않고, 물에 젖지도 않으며 칼과 화살도 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등나무 갑옷을 입은 이 군사들을 두려워하며 모두 '등갑군'이라 부릅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청에 응해주기만 한다면 제갈량을 사로잡는 일은 칼로 대를 쪼개는 것보다도 쉬운 일일 것입니다."

대래 동주가 힘주어 말하자 맹획은 몹시 기뻐했다. 즉시 군마를 몰아 오과국으로 향했다. 맹획이 오과국에 이르러 보니 집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모구 토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맹획이 오과국의 임금 올돌골을 만난 절을 올린 다음 그때까지 있었던 일을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자세히 말한 후 구원을 청했다. 올돌골은 맹획의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쾌히 응낙했다.

"좋소. 내가 군사를 일으켜 대왕의 원수를 갚아 드리겠소."

맹획은 올돌골이 기꺼이 돕겠다고 하자 다시 한번 엎드려 감사의 절을 올렸다. 올돌골은 즉시 그 나라 장수(부장) 두 사람을 불렀다. 한 사람은 토안이요, 한 사람은 해니였는데 등갑군 3만을 이끌어 함께 떠날 것을 명했다. 그리하여 맹획과 올돌골은 토안과 해니가 이끄는 등갑군을 거느리고 오과국을 떠나 동북쪽으로 향했다. 등갑군을 거느리고 가던 맹획은 한동안 행군해 가다 도화수라는 강에 다다랐다. 강 양쪽 기슭에는 복숭아나무가 무성한데 그 나뭇잎이 해마다 물에 떨어져 강물에는 강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이 물을 딴 지방 사람들이 마시면 죽지만 오과국 사람들이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솟았다. 오과국의 등갑군은 도화수 나루터에 진을 치고 촉병이 밀고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촉병이 그 강물을 마시도록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공명은 항복해 온 만인을 시켜 맹획의 동정을 살펴보게 했다. 오래지 않아 살피러 갔던 만인이 돌아와 전했다.

"맹획이 오과국의 임금에게 도움을 빌어 등갑군 3만을 이끌어 도화강 나루터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또한 각 지방의 만병들을 모아 그들과 힘을 합해 우리와 맞서려 하고 있습니다."

공명은 그 말을 듣고도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곧장 군사를 이끌어 도화수로 향했다. 도화수에 이르러 강 건너 오과국의 군사를 보니 모두가 더럽게 흉측하여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으니 목록 대왕이 거느렸던 군사보다 더했다. 거기다가 도화수에 복숭아 잎이 떨어져 있는 물이 심상치 않았다. 이에 공명은 그곳 토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이 물이 어쩐지 이상하다. 이 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가?"

"지금은 복숭아 잎이 떨어져 있어 다른 지방 사람들이 마시면 죽습니다. 이 물을 마셔서는 아니 됩니다."

공명은 물음에 토인이 그렇게 일러 주었다. 공명은 그 말을 듣자 전군에게 영을 내렸다.

"이곳 도화수로부터 5리쯤을 물러나 진을 세우도록 하라."

공명의 영에 따라 5리를 물려 영채를 세우자 공명은 위연에게 그 영채를 지키게 했다. 다음 날이 되어도 촉병이 싸움을 걸어 오지 않자 올돌골은 몸소 등갑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왔다. 북소리와 징 소리를 크게 울리며 강을 건너오는 오과국의 군사를 보자 위연도 군사를 이끌어 나아가니 만병들이 땅을 울리며 촉병들 앞으로 밀려들었다. 촉병들이 밀려드는 만병들을 향해 활과 쇠뇌에 살을 메겨 쏘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화살은 만병들의 몸에 맞아도 갑옷을 뚫지 못하고 모두 튕겨져 나와 땅에 떨어졌다. 화살뿐만이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온 만병들을 칼로 찍고 창으로 찔렀으나 역시 갑옷을 뚫지 못했다. 활과 쇠뇌도 소용 없고 칼과 창으로 싸워도 적을 죽일 수 없으니 촉병들은 싸울 도리가 없었다. 촉병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만병들이 날카로운 칼과 작살로 촉병들을 베고 찔렀다. 위연도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올돌골은 달아나는 촉병을 한바탕 무찌르고 나자 뿔피리를 불어 군사를 거둔 후 유유히 강을 건너 자기의 진으로 돌아갔다. 만병들은 달아나는 촉병들을 뒤쫓지 않았다. 위연은 그들이 뒤쫓지 않자 말을 돌려 도화수를 건너는 만병들을 살펴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만병들은 돌아가며 강을 건너는데 갑옷을 입은 채 물뱀 떼가 헤엄치듯 가볍게 몸을 띄워 강을 건넜다. 그중에는 칼과 화살도 뚫지 못했던 갑옷을 벗어 그 위에 올라앉아 강을 건너는 사람도 있었다. 그토록 단단하던 갑옷이 마치 나뭇잎처럼 물 위에 떠가자 위연은 놀랍다 못해 신기할 뿐이었다. 위연은 즉시 대채로 말을 달려가 공명에게 본 그대로를 자세히 전했다. 공명이 곧 여개와 그곳의 토박이들을 불러 그 일을 물었다.

"어째서 화살과 창으로도 갑옷을 뚫을 수 없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그 갑옷이 어찌 물 위에 뜰 수가 있는가?"

여개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제가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오과국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나라는 사람의 인륜과 도리로 다스릴 수 없는 야만스런 나라라고 합니다. 그들은 등갑이란 갑옷을 입는데 어떠한 병기로도 상처를 입힐 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그 나라에 있는 복숭아 잎이 떠 있는 도화수도 괴이스런 물이라 들었습니다. 그 나라 사람이 마시면 정신이 갑절이나 더 맑아지지만 다른 지방 사람들이 마시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오랑캐 땅을 얻기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운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승상께서는 이쯤에서 그만 군사를 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개가 걱정스런 얼굴로 공명에게 권했다. 그러나 공명은 머리를 가로젓고 껄걸 웃으며 말했다.

"내가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이대로 군사를 돌릴 수 있겠는가? 내가 내일은 만병들을 한 번 살펴보겠다. 만병을 쳐부술 계책이 이미 세워 놓았다."

공명이 그렇게 말해 여개를 물린 다음 곧 조운을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는 위연을 도와 영채를 보낸 공명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이 되자, 공명은 수레에 올라 도화 나루터 북쪽 언덕의 험한 산속으로 들어가 그 일대의 지세를 살폈다. 산마루가 너무 험해 수레를 끌 수 없게 되자 공명은 걸어서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산꼭대기에 이르러 보니 그 아래쪽에 골짜기가 보이는데 마치 긴 뱀처럼 꾸불꿀불 이어져 있었다. 그 양쪽으로는 바위를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있었고, 가운데에 한 줄기 길이 나 있을 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공명이 길잡이로 데리고 온 토박이에게 물었다.

"이 골짜기 이름을 뭐라고 하는가?"

"반사곡이라고 합니다. 여기를 빠져 나가면 삼강성으로 곧장 이어집니다. 골짜기 앞은 탑랑전이라는 부락입니다."

토박이가 그렇게 대답하자 공명이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큰 소리로 웃으며 기뻐했다.

"저 골짜기야말로 하늘이 내게 공을 이루게 해주시려는 곳이다."

공명은 이윽고 왔던 길로 내려가 대채로 돌아가기가 바쁘게 마대를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에게 검게 기름칠한 수레 열 대를 줄 테니, 따로 대나무 장대 1천개를 마련토록 하라. 그래서 그 궤 안에 든 것과 대나무 장대를 가지고 내가 이르는 대로 하라."

공명이 그렇게 말한 후 귓속말로 계책을 이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는 반사곡으로 가서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과 나가는 길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여 막도록 하라. 이 일은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해야 한다. 보름 동안의 기한을 줄테니 그 안에 모든 채비를 갖추도록 하라. 만약 비밀이 새어 나가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군율에 따라 다스릴 것이다."

마대가 영을 받고 물러나자 공명은 이어 조운을 불러 영을 내렸다.

"공은 반사곡 뒤에 가서 삼강성으로 가는 큰길 어귀에 진을 치도록 하라. 또한 소용되는 물건은 오늘 안으로 모두 갖추도록 하라."

공명은 다시 위연을 불렀다.

"그대는 도화수 나루터에 진을 치고 만병을 기다리도록 하라. 만병들이 강물을 건너 밀고 들어오면 절대 싸우지 말고 진을 버리고 달아나되 반드시 흰 깃발이 꽂혀 있는 곳으로 가라. 적이 다시 몰려오면 또 싸우는 체하다 물러나라. 그렇게 보름 동안에 열다섯 번을 싸워 모두 져 주고 일곱 군데의 진을 적에게 넘겨 주도록 하라. 열네 번재 싸움에 졌을 때까지도 절대로 나를 찾지 않도록 하라."

공명의 영을 들은 위연이 문득 볼멘소리로 물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열다섯 번이나 싸움에 지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이른 대로 하라."

위연이 자못 못마땅한 얼굴로 물러나자 공명은 장익을 불렀다.

"그대는 한 떼의 군마를 거느리고 내가 이른 곳으로 나아가 영채와 책을 세우도록 하라."

이어 장의와 마충을 불렀다.

"그대들은 은갱동에서 항복한 만군 수천 명을 이끌고 내 말을 따르도록 하라."

여러 장수들이 모두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각기 영을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갔다. 그 무렵, 남만왕 맹획과 오과국왕 올돌골은 촉병을 두들겨 물리쳐 기세를 올리기는 했으나 함부로 군사를 내지 않았다. 공명을 잘 알고 있는 맹획이 올돌골에게 가만히 일렀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계교가 많은 사람입니다. 반드시 복병을 쓸 것이니 싸울 때는 숲이 무성한 곳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올돌골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맹획의 말에 따랐다.

"대왕의 말씀이 옳소ㅇ. 나도 중국 사람들이 속임수가 많은 것은 잘 알고 있소. 대왕의 말씀에 따르겠소. 앞으로는 내가 앞장서서 싸울 테니 대왕은 뒤에서 갈 곳을 일러 주기만 하시오."

그다음 날 살피러 갔던 군사가 돌아와 알렸다.

"촉병들이 도화수 나루터 북쪽 기슭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올돌골은 즉시 함께 온 두 장수들을 불러 일렀다.

"너희들은 강을 건너 촉병들을 쳐라."

두 장수는 영을 받자 곧 등갑군을 이끌어 도화수를 건넜다. 만병이 곧 촉병을 향해 밀고 들어가자 위연이 나와 맞아 싸웠다. 그러나 몇 합을 부딪지도 않고 달아났다. 만병들은 달아나는 촉병을 뒤쫓지는 않았다. 혹시 매복군이 있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달아나던 위연이 다시 영채를 세웠다. 위연이 영채를 세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만병들은 다시 도화수를 건너 위연의 영채로 밀고 들어갔다. 위연이 그들을 맞아 싸우는 척하다 공명이 이른 대로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만병들은 이번에는 10여 리쯤을 뒤쫓아 보았다. 그러나 매복군이 있음직한 낌새는 없고 촉병이 세운 영채 하나 있었다. 만병들은 달아나는 촉병을 무찌르며 그 영채를 빼앗아 버렸다. 다음 날이 되자 만병의 두 장수는 올돌골에게 그동안의 싸움을 자세히 아뢰었다.

"적장이 오늘도 패해 달아나길래 10여 리나 뒤쫓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매복은커녕 개미 새끼 하나 없고 적의 텅 빈 영채만이 있었습니다."

촉병이 싸움에 져서 달아나는데도 복병이 없었다는 말을 듣자 올돌골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위연을 뒤쫓아 보았다. 위연이 뒤쫓는 올돌골을 맞아 싸우다 또 군사를 거두어 달아났다. 위연이 한동안 말을 달리다 보니 앞쪽에 흰 깃발이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공명이 말한 그대로였다. 위연이 말을 달려 흰 깃발 있는 곳에 가보니 그곳에는 언제 세웠는지 영채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위연이 그곳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자 오래지 않아 올돌골이 만병들을 이끌고 당도했다. 위연이 다시 힘을 다해 싸우는 척하다 말머리를 돌리자 촉병들도 병기와 투구를 내던지고 앞다투어 달아났다. 위연이 달아나다 보니 또 앞쪽에 흰 깃발이 꽂혀 있고 그곳에도 영채가 세워져 있었다. 위연이 다시 그곳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자 올돌골이 급한 기세로 뒤쫓아왔다. 그 급한 기세로 보아 이제는 매복군 따위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올돌골이 이르자 위연은 다시 싸웠으나 당해 내지 못하겠다는 듯 달아날 뿐이었다. 그렇게 되니 올돌골은 싸울수록 기세가 살아났다. 처음 한두 번 싸워 이겼을 때는 경계의 마음을 늦추지 않았으나 싸움이 거듭될수록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올돌골은 위연이 달아날수록 기세를 올리며 만병들을 휘몰라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뒤쫓았다. 이렇게하여 위연이 달아나기를 무려 열다섯 번이나 했고 만병들에게 내어 준 영채만도 일곱이나 되었다. 적을 꾀어 뒤쫓게 하기 위해 위연은 가끔 달아나다가도 뒤돌아와서 올돌골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걸기도 했다. 마침내 보름 동안에 열다섯 번을 싸워 열다섯 번을 패한 촉병이었다. 그러니 자연 만병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올돌골도 촉병을 얕보게 되어 코끼리 위에 앉아 큰소리쳤다.

"이젠 제갈량도 혼쭐이 났을 것이다. 촉병들이 모두 달아났으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올돌골이 껄걸 웃으며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문득 앞쪽에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산이 나타났다. 올돌골은 그걸 보자 문득 의심이 들어 만병에게 그곳을 살피게 했다. 살피러 간 만병이 숲속 여기저기에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고 알리자 그 말을 들은 올돌골이 웃으며 맹획에게 말했다.

"과연 대왕의 짐작대로구려."

맹획도 껄걸 웃으며 올돌골을 치켜세웠다.

"제갈량의 계교도 이번에는 소용 없게 되었소이다. 우리가 미리 그 꾀를 헤아리고 있으니 그가 어찌 우리들을 당해 내겠소. 게다가 대왕은 열다섯 번을 싸워 이기고 일곱 개의 영채를 빼앗았소. 촉병이 바람에 날려가듯 달아나니 제갈량도 이제는 그 계교가 다한 것 같소이다. 이제는 한 번 밀고 들어가 끝장을 내어야겠습니다."

맹획의 말을 들은 올돌골은 자신의 무공에 우쭐해지며 더욱 촉병을 가볍게 여겼다. 열여섯 번째가 되는 날이었다. 위연이 군사를 이끌어 만병들에게 덤벼들었다. 촉병들에게 연거푸 이긴 만병들이 기세를 올리며 촉병들을 맞아 싸웠다. 이날 올돌골은 코끼리를 타고 등갑군의 선두에 서서 싸웠다. 머리에는 해와 달 모양을 수놓아 장식한 낭수모를 썼고, 목에는 금은 구슬로 꿴 목걸이를 걸었다. 양 겨드랑이 밑으로는 제 몸에서 난 비늘이 번쩍이며 드러났으며 두 눈에는 불꽃이 번쩍이는 듯했다. 올돌골은 위연을 보자 당장이라도 쳐죽일 듯이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꾸짖으며 달려왔다. 등갑군이 그 뒤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위연이 그 위세가 겁이 난 듯 말머리를 돌려 반사곡 쪽으로 달아나는데 그 앞쪽에도 흰 기가 꽂혀 있었다. 촉병들을 엿보고 있는 올돌골이 거칠 것 없다는 기세로 뒤쫓았다. 게다가 산에 잡풀과 나무가 별로 없자 매복군이 있을 리 없다고 여겨 더욱 급하게 만병들을 휘몰았다. 촉병이 반사곡 안으로 달아나자 올돌골도 곧장 그 뒤로 쫓았다. 그런데 문득 반사곡 입구 쪽에 검게 칠한 수레 수십

대가 여기저기에 벌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 무엇인가?"

올돌골이 이상하게 여겨 그 자리에 코끼리를 멈추고 만병들에게 물었다. 만병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이곳은 바로 촉병이 군량을 운반하는 길입니다. 대왕께서 오시니 촉병들이 기겁을 하여 수레를 버리고 달아난 듯합니다."

올돌골은 그 말을 듣자 아주 기뻐했다. 싸워서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한 촉병들이니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올돌골이 단번에 도망치는 촉병들을 덮칠 작정으로 다시 급하게 등갑군을 휘몰았다. 한동안 촉병들을 뒤쫓다 보니 반사곡을 빠져나가는 내리막길이 보였다. 그러나 도망치던 촉병은 간 데 없고 홀연 통나무와 바윗덩이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더니 골짜기의 앞과 뒤를 막아버렸다.

"저 통나무와 바위를 치워 길을 열어 앞으로 나아가라."

올돌골이 만병들에게 영을 내려 길 열기를 재촉하자, 만병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나무와 바위를 치우고 있을 때였다. 문득 앞쪽에서 크고 작은 검은 수레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마른풀과 통나무들이 쌓여 있는데 화력 좋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올돌골이 그제야 적의 계교임을 알아채고 외쳤다.

"모두 물러나라!"

그때 후진에서도 어지러운 고함 소리가 일며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아뢰었다.

"뒷골짜기에도 통나무와 바위가 쌓여 길이 끊겼습니다. 그런데 촉병이 버리고 간 검은 수레에 실려 있던 화약이 터지면서 크게 불길이 일고 있습니다."

올돌골이 코끼리를 몰아 후진 쪽으로 가보았다. 촉병이 버리고 간 수레는 군량을 실은 수레가 아니었다. 수레마다 화약이 터지며 불길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올돌골은 산에 나무와 풀이 별로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만병들에게 소리쳤다.

"산에 나무와 풀이 별로 없으니 불이 옮겨붙을 곳이 별로 없다. 빨리 길을 열어 물러나도록 하라."

올돌골이 만병들을 재촉하며 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홀연 양쪽 산마루에서 횃불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횃불이 땅에 떨어지자 땅 위에 있던 기름칠한 화약선에 불길이 닿았다. 그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화약 선을 따라 번지며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속에 묻혀 있던 철포를 터뜨렸다. 여기저기서 쾅쾅 터지는 철포 소리에 하늘이 뒤흔들리고 땅이 갈라지며 독한 화약 냄새와 함께 거센 불길이 골짜기를 메웠다. 연이어 발밑에서 터지는 철포와 불길은 순식간에 기름 냄비에 불이 떨어진 듯한 지옥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었다. 불길이 등갑군에 닿자마자 등갑을 벗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원래 몇 번이나 기름칠해 말리고 말린 나무껍질로 만든 갑옷이니 불이 붙기만 하면 순식간에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등갑군은 갑옷을 벗을 틈도 없이 저희들끼리 부딪치며 부에 타죽거나 철포에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그 난전 속에서 만왕 올돌골과 그가 거느렸던 3만 등갑군은 서로 뒤엉킨 채 고스란히 불에 타고 있었다. 만병들이 타죽으며 내지르는 비명소리로 골짜기가 떠나갈 듯했다. 공명은 그때 산 위에서 골짜기를 굽어보고 있었다. 만병들은 모두 불에 타 손발이 오그라져 죽거나 포탄에 맞아 목이나 팔, 다리가 끊어진 채 죽었는데 그 참혹한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공명이 그 광경을 내려다보다 줄줄 눈물을 흘리며 탄식해 마지않았다.

"내가 비록 나라에는 공을 세웠을지 모르나 내 수명은 반드시 줄어들겠구나. 아무리 부득이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이다지도 끔찍하게 사람을 죽였으니. . . . . ."

곁에 있던 장수들 모두 그 말을 들었지만 공명의 괴로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편 뒤처져 있던 맹획은 올돌골로부터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만병 1천여 명이 달려와 웃는 얼굴로 절하며 말했다.

"우리 오과국 군사들이 촉병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지금 제갈량을 반사곡 안으로 몰아넣어 에워싸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도 나아가시어 돕도록 하십시오. 저희들은 원래 이곳 사람들인데 부득이 제갈량에게 항복했었으나 대왕께서 이곡에 이르신 것을 알고 특별히 돕고자 왔습니다."

올돌골이 공명은 반사곡에 가둔 데다가 만병이 자기를 도우러 왔다는 말에 맹획은 몹시 기뻐했다. 즉시 자기의 피붙이들과 따르고 있는 만인들을 수습하여 말을 몰았다. 맹획을 도우러 온 만병들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이윽고 맹획이 반사곡에 이르러보니 불길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고 있는데 흉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맹획은 그제서야 올돌골의 군사들이 공명의 계교의 말려든 것임을 알았다. 급히 군사를 물리려 하는데, 홀연 함성이 일며 산길 양쪽에서 두 갈래 군마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왼편에서는 장의가, 오른편에서는 마충이 이끄는 촉병의 군마였다. 맹획은 그 두 갈래 군마를 맞아 죽기 살기로 싸우려고 작정했다. 그런데 자기를 도우려 왔던 만병들이 갑자기 촉병과 한 편이 되어 자기의 피붙이들과 졸개들을 덮쳐 사로잡아 버렸다. 맹획이 또 한 번 공명의 계교에 속았음을 깨닫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렇게 되니 제대로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사로잡힐 판이라 황망히 말을 재우쳐 달아났다. 맹획이 다시 공명에게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홀로 말을 달려 산길로 달아나는데 문득 산속 후미진 곳에서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맹획이 놀라서 보니 그 인마는 작은 수레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수레 위에는 한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윤건을 쓰고 도포를 입고 손에는 흰 깃털 부채를 든 공명이었다. 공명이 맹획을 보며 호통을 쳤다.

"반적 맹획은 들어라. 이번에 또 사로잡혔는데 대체 어쩔 셈이냐?"

맹획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했으나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다. 당황한 가운데도 급히 말머리를 돌려 오던 길을 향해 말을 박찼다. 맹획이 급하게 말을 달리는데 길옆 쪽에서 한 장수가 내달아와 길을 막았다. 맹획이 보니 마대였다.

"이놈 맹획아.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그 한 소리 호통과 함께 맹획이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마대의 창이 말을 찔렀다. 말이 놀라 울부짖으며 앞발을 치켜들자 맹획은 그만 말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마대가 말 아래로 떨어진 맹획을 단숨에 꽁꽁 묶었다. 그때쯤 왕평과 장익도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만병의 영채로 달려 축융 부인과 나머지 일가붙이들을 사로잡아 본채로 돌아왔다. 마대가 맹획을 사로잡자 공명은 본채로 돌아왔다. 그날 밤, 공명은 장대에 높이 앉아 여러 장수들에게 등갑군을 쳐부순 일에 대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내가 하는 수 없이 계교를 쓰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그토록 많은 군사들을 죽였으니 나의 음덕을 크게 잃었으리라. 적은 우리 군사가 숲이 있는 곳에 매복해 있으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내가 그걸 알고 숲속에 깃발을 꽂아 두었으나 실은 군사를 매복시켜 두지 않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적이 자기들이 짐작한 대로라고 여기도록 했다. 또 위 문장에서 열다섯 번이나 싸움에 지게 하며 영채를 내어 주게 했다. 그것은 적에게 그토록 많이 지게 함으로써 내가 계교를 쓰는 것이 아님을 믿게 하여 점차 우리를 가볍게 여기도록 한 것이다. 내가 반사곡을 보니 한 가닥 길만 나 있고 양옆으로는 돌로 깎아 세운듯한 절벽에 나무나 풀도 별로 없는데다 바닥은 모래밭이었다. 적은 양쪽에 나무나 풀이 많지 않아 매복군이 있을 만한 곳도 없는데다 열다섯 번이나 싸워 이겨 기세가 올라 곧장 우리들을 뒤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이 안심하도록 한 뒤, 나는 마대를 시켜 검은 기름칠을 한 수레를 반사곡 안에다 늘어놓게 했다. 그런데 수레 안에 있는 것은 모두가 화포, 곧 지뢰라는 것으로 내가 미리 만들어 온 것이었다. 포 하나에 아홉 개의 포환을 넣어 두었는데, 그 포환을 서른 발자국 정도에 하나씩 모래 땅속에 묻게 했다. , 그 지뢰와 지뢰 사이에는 화약을 가득 넣은 대나무 대롱으로 연결하게 하여 하나가 터지면 다시 연결된 포환이 터지게 했다. 그러니 바위가 쪼개지고 산이 무너지는 듯했던 것이다. 나는 또 조자룡에게 일러 마른풀과 나무를 실은 수레를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길에 버려두게 했다. 또한 산 위에는 통나무와 바위를 모아 두게 하여 위 문장이 그 길을 지나간 뒤에 그 통나무와 바위를 굴려 길을 끊게 했다. 조자룡이 길을 끊을 때쯤 골짜기 입구의 수레에 불을 지르게 하여 등갑군을 반사곡에 가둔 뒤 산 위에서 횃불을 던져 화공을 베풀 수 있게 하였다. 내가 듣건대 '물에 이로운 것은 불에는 이롭제 못하다' 했다. 즉 등갑군의 갑옷이 화실과 칼로 뚫지 못하고 물에 뜨는 것은 거기다 기름을 많이 먹여 말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불에 잘 탈 것인가는 어린아이도 헤아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등갑을 입은 만병들에게 불로 공격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한스러운 것은 오과국 사람들의 씨를 남기지 않고 죽였으니 내 죄가 너무나 크구나."

공명의 말을 들은 장수들은 모두 숙연한 마음으로 엎드려 절을 올리며 아뢰었다.

"승상의 하늘 같은 깊은 헤아림은 귀신도 짐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명이 등갑군을 모조리 쳐부순 경위를 들려준 다음 무사에게 영을 내렸다.

"맹획을 끌어오라."

무사들이 공명의 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로잡혀 온 맹획을 이끌어 왔다. 공명이 꽁꽁 묶여 있는 맹획을 내려다보며 다시 영을 내렸다.

"결박을 풀어주고 다른 장막으로 데려가 술과 밥을 주어 놀란 가슴을 달래도록 하라."

공명의 영에 따라 맹획이 다른 장막으로 이끌려 갔다. 공명은 그에게 술과 밥을 줄 관원을 불러 가만히 무슨 말을 일렀다. 관원이 공명의 분부를 받아 물러났다. 맹획이 다른 장막으로 이끌려 가지 그곳에는 축융 부인과 아우 맹우를 비롯한 피붙이들이 모여 있었다. 맹획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뒷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관원 한 사람이 들어와 맹획에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이번 싸움으로 너무 괴로워하시며 공과는 얼굴을 대할 수가 없다고 하셨소. 그리하여 나를 보내 공을 풀어 주라 하시었소. 공은 이대로 돌아가 인마를 수습하여 다시 한번 승부를 가리도록 하라 이르셨소이다. 그러니 빨리 돌아가도록 하시오."

맹획이 그 말을 듣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사로잡히는 날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죄 없는 군사들을 죽인 일을 괴로워하고 있는 공명의 너그러움에 문득 감탄하는 마음이 일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일곱 번을 사로잡아 일곱 번을 놓아 준(칠금칠종) 일은 예로부터 없던 일입니다. 제가 비록 왕화를 입지 못한 변방 사람이나 그래도 예와 의는 짐작합니다. 어찌 또 부끄러움도 없이 승상께 거스르는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맹획은 그 말과 함께 형제와 처자, 그리고 그 밖에 다른 피붙이들을 이끌어 공명의 장막 안으로 가 웃옷을 벗고(사죄할 때의 중국 예법의 하나) 꿇어앉아 빌었다.

"승상의 하늘 같은 위엄 앞에 아룁니다. 남인 맹획은 다시는 승상을 거스르지 않고 진정으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공명도 정색을 하며 물었다.

"공은 이번에는 진심으로 항복하겠는가?"

"저의 자자손손이 모두 승상께서 살려 주신 은혜를 입고 감복할 것입니다. 어찌 항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맹획은 그 말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 이루지 못한 뜻에 대한 한스러움을 스스로 씻어 내며 마음으로 공명에게 항복하는 눈물이기도 했다. 공명은 맹획이 진정으로 항복하자 그를 당 위에 오르게 하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 주고 그를 이전처럼 동주로 삼아 남만을 다스리게 했다. 맹획의 일가붙이를 비롯한 수천 만병들은 모두 공명의 너그러운 인품에 머리 숙여 감탄을 표하고 기뻐 춤을 추며 돌아갔다. 공명은 맹획과 남만이 마음으로 왕화에 복속되게 하기 위해 은혜와 덕을 베풀어 그들을 감복시킨 뒤에야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그러자 장사 비위가 공명에게 물었다.

"이번에 승상께서 몸소 사졸들을 이끌고 멀리 이 험안한 땅으로 들어와 남만을 평정하였습니다. 이제 왕까지 진정으로 항복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에 관리를 두어 맹획과 함게 다스리게 하지 않으십니까?"

비위의 물음에 공명이 웃으며 말했다.

"관원을 남겨두어 함께 지키게 하는 것은 이로운 점도 있으나 세 가지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어려움이란 무엇입니까?

비위가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나라 밖에 관원을 남겨두고 가려면 마땅히 군사도 남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군량도 남겨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움의 하나요, 만인이 이번 싸움에 져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그 부모 형제가 죽었다. 그런데 관원을 넘겨 두고 군사를 두지 않는다면 반드시 변고가 생길 것이나 그것이 또한 어려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인은 원래 서로 죽이거나 빼앗는 일을 되풀이해 와 그들 스스로 남을 미워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이 많다. 그런데 우리 관원을 남겨두면 반드시 서로 믿지 못해 화가 생길 것이니 그것이 세 번째 어려움이다. 이제 내가 관원과 군사를 남겨두지 않는 것은 이곳으로 양식을 나르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서로 간섭하지 않고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지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듣자 비로소 황망히 깨달으며 공명의 깊은 생각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편 자기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된 남만 사람들은 모두 공명의 은덕에 감동하며 공명이 살아있음에도 사당을 지어 사계절마다 제사를 지내기로 하고 공명을 '자부'라 불렀다. 뿐만 아니라 금은과 진주, 단칠과 약재, 농사짓는 소와 싸움 말 등을 바치며 다시는 배반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그렇게 하여 남만은 공명이 바라던 대로 평정되었다. 공명이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 준 옛 기록으로는 '한진춘추'가 있다. 옛 지명이 많아 달라져 다만 옛 싸움터로만 전해지는 곳이 운남성 주변 여러 곳에 있으니, 그때부터 여러 뜻에 제갈언이라는 둑이 만들어졌으며, '제갈채'라는 채소가 그 일대에서 재배되기도 했다. 때는 촉의 건흥 3년 가을인 9. 공명은 잔치를 크게 열어 군사들을 위로한 후에 군마를 점고하여 회군하기로 하고 위연을 선봉으로 세웠다. 이에 위연은 공명의 명을 받고 군사를 이끌어 가다 노수에 이르렀다. 위연은 본부 군마가 노수 강변에 다다랐을 때였다. 문득 사방에서 검은 구름이 모여들며 강 위에는 미친 듯한 바람이 일어나더니 모래가 날고 돌이 굴러 군사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위연이 괴이쩍게 여겨 군사를 물린 후 공명에게 그 일을 알렸다. 공명도 얼른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그곳 사람인 맹획을 불러 물었다. 맹획은 그때 마침 크고 작은 동의 동주와 추장들을 이끌고 촉으로 돌아가는 공명을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이오?"

공명이 맹획에게 묻자 맹획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 물에는 원래 미친 귀신이 있어 화를 일으킵니다. 물을 건너려면 그 창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무엇으로 제물을 삼아야 하겠소?"

"예전에는 창신이 화를 일으키면 마흔아홉의 사람 머리와 검은 소, 흰 양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지낸다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절로 바람이 자고 물결이 가라앉으며 해마다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맹획이 그렇게 대답하자 공명이 머리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미 남방을 평정했는데, 어찌 또 한 사람인들 함부로 죽일 수 있겠는가?"

사람 머리를 마흔아홉이나 바쳐야 한다는 말에 공명은 몸소 노구 가로 나가 형세를 살펴보았다. 위연이 말한 대로 습기찬 바람이 몰아치며 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어 인마가 모두 겁을 먹고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공명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 그곳 토박이를 불러 물어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었는가?"

토박이가 공명의 물음에 대답했다.

"승상께서 이곳을 지나가신 뒤로 밤마다 강가에서 귀신들이 울부짖는 소리까지 들리는데, 해질녁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검은 안개와 같은 것이 자욱한 가운데 많은 귀신들의 한이 서려 있는 듯하여 감히 강을 건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공명이 무득 생각나는 바가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해 마지 않았다.

"그게 모두 나의 죄 때문이다. 지난번 마대가 이 강을 건널 때 거느렸던 촉병 1천여 명이 모두 이 물속에 빠져 죽었다. 또 우리가 죽인 만병들도 모두 이 물속에 버리지 않았느냐. 그 원통한 귀신과 혼이 한을 풀지 못해 이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 밤에 내가 제사를 지내 그들의 한을 씻어 주리라."

"제사를 지내시려면 반드시 지난 예처럼 마흔아홉의 사람 머리를 놓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통한 귀신이 한을 풀 것입니다."

공명의 말을 듣고 토박이가 말했다. 그러나 공명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원래 사람이 죽어 원귀가 되었는데 어찌 또 산 사람을 죽인다는 말인가? 내가 따로 생각이 있으나 걱정하지 말라."

그렇게 말한 공명은 행주(군중의 요리사)를 불러 명했다.

"너는 소와 말을 잡아서 그 고기와 국수를 반죽하여 사람의 머리처럼 만들어라. 그 속은 소와 양의 고기로 가득 채워 삶도록 하라. 이것을 만두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만두는 노수에서 제물로 바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을 처음으로 만들게 한 사람이 공명이었다. 그날 밤 공명은 노수 강변에도 향을 피워 마련해 놓은 제물을 늘어놓았다. 이어 마흔아홉 개의 등불과 기를 세워 혼을 부른 뒤 만들어 놓은 만두를 벌여 차렸다. 밤 삼경이 되자 공명은 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흰 학창의를 입은 후에 몸소 제사를 지냈다. 공명이 먼저 동궐에게 제문을 읽게 했다. 동궐이 낭랑한 목소리로 제문을 읽어 나갔다.

대한 건흥 3년 가을 91, 무향후 영익주목 승상 제갈량은 삼가 제물을 갖추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촉의 장졸 및 남방 사람들의 원혼 앞에 고하노라. 우리 대한 황제의 위엄은 옛 오패(춘추시대의 다섯 패자)보다 더하시며 그 밝음은 이름난 삼왕을 이으셨다. 그런데도 지난번 풍습이 다른 이곳 군사가 먼 곳에서부터 국경을 침범해 와 전갈이 꼬리를 휘두르듯 요망스러움을 부리고 이리와 같은 마음으로 함부로 대한의 땅을 짓밟으려 난을 일으켰다. 나는 왕명을 받들어 그 죄를 묻고자 이곳으로 와 비휴(맹수의 일종. 길들여 싸움터에도 데려갔던 짐승)가 개미떼를 휩쓸 듯 구름같이 몰려든 용맹스런 우리 군사 앞에 미친 도적들은 얼음 녹듯 사라졌다. 들리기를 적이 무너지는 소리는 마치 대나무가 갈라지는 소리 같았고 얼굴을 들어보니, 원숭이가 바람에 날려 나무에서 떨어지듯 뿔뿔이 흩어지는 격이었다. 우리 군사와 장정들은 모두가 구주의 호걸이요,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관원과 장교가 모두 사해의 영웅이었다. 무예를 익혀 싸움터에 나아가 밝은 주인을 섬기며, 영을 받들어 나와 더불어 적의 왕을 일곱 번 사로잡기도 했다. 그대들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흔들림이 없었고 임금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그대들은 뜻밖에 싸움터에서 기회를 잃기도 하고 적의 간사한 꾀에 빠지기도 하여, 더러는 화살을 맞아 넋이 구천으로 돌아가고 더러는 칼에 상해 그 혼백이 영원한 어둠 속으로 가 버렸다. 그러나 그대들은 살아서는 그 용맹을 떨쳤으며 이제 죽어서는 길이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오늘 승리의 노래를 드높이 부르며 돌아가려 하나, 어찌 차마 그대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돌아가기에 앞서 사로잡은 자의 목을 바쳐 그대들을 위로하고 길이 기리려 하노니 그대들의 혼령이 있다면 나의 비는 소리를 반드시 들으리라. 이제 바라건대 그대들은 우리 깃발을 따르며 우리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모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 일가친척들과 집안의 제사를 받도록 하라. 나는 돌아가 천자께 그 공훈을 아뢰어 그대들 집안에 나라의 은혜를 미치게 할 것이다. 집집마다 의복과 곡식을 내리게 하고 다달이 녹봉을 내려 그대들의 큰 공에 보답하여 그대들의 넋을 위로하려 한다.

동궐의 제문 소리가 애절하여 촉병은 물론 그곳에 나와 있던 만병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궐이 읽는 제문은 다시 싸우다 죽은 남만의 군사들을 위한 기도로 이어졌다.

또한 이 땅의 귀신과 남방 사람으로서 죽은 영혼들에게 이르노라. 그대들은 이미 죽었으나 나라가 넘어지지 않고 온전히 지켜졌으니 혈식(귀신이 제물을 받음)이 그치지 않아 언제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며 편안히 쉴 곳도 있으리라. 살아있는 이는 이미 천자의 위엄을 받들었거니와 죽은 자 또한 왕화 아래로 돌아왔다. 그대들은 원한을 거두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울부짖지 않도록 하라. 이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리노라. 아아 슬프도다. 엎드려 비나니 모든 영령들이여 흠향하라.

동궐이 제문을 다 읽고 나자 공명은 목을 놓아 울었다. 공명의 흐느끼는 슬픈 울음소리가 너무자 지극해 삼군의 마음을 뒤흔들어 다시 한번 군사들과 맹획을 비롯한 남만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모든 사람들이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할 때였다. 문득 무겁게 깔렸던 어두운 구름과 원한이 서린 듯한 안개 속에 은은히 모습을 드러내던 수천의 귀신들이 바람을 따라 소리없이 흩어졌다. 공명은 장졸들에게 명해 마련한 제물을 모두 노수 강물속으로 던져 넣게 하여 원통한 혼령들이 거두도록 했다. 다음 날, 공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노수 남쪽 언덕으로 갔다. 어느새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바람도 잔잔해져 촉병들은 힘들이지 않고도 안전하게 노수를 건널 수 있었다. 노수를 건넌 촉병은 개선가를 드높이 부르고, 북소리를 울리며 말발굽 소리도 당당히 성도로 향했다. 촉병이 영창 땅에 이르자 공명은 왕항과 여개에게 사군을 맡아 다스리게 했다. 또한 그곳까지 공명을 배웅하러 따라온 맹획을 돌려보내며 당부했다.

"나라를 다스림에 게으르지 말 것이며 아랫것들을 잘 부리고 백성들을 사랑하라. 또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농사짓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라."

공명의 간곡한 당부에 맹획과 그 무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절하며 돌아갔다.

 

제갈공명 출사표를 올리다.

남만 정벌을 끝낸 공명이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성도로 돌아오자 후주는 난가(황제가 타는 수래)를 타고 궁문 30리 밖까지 마중 나왔다. 그리고 수레서 내려 길가에 서서 공명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공명이 성도 가까이에 이르러 후주 유선이 마중 나온 걸 보자 깜짝 놀라 수레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절하며 아뢰었다.

"신이 신속히 남방을 평정하지 못하고 주상께 근심을 끼쳤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후주는 땅에 엎드린 공명을 일으켜 세운 후 수레를 나란히 하여 궁전으로 돌아왔다. 공명이 궁전에 들자 후주는 태평연회를 크게 열어 공이 많은 장졸들을 위로한 후 삼군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공명이 남만을 평정하게 돌아온 후 촉국은 날로 그 위세를 널리 떨치니 조공을 비쳐오는 곳만 해도 무려 2백여 군데나 되었다. 공명은 노수에서 죽은 넋들에게 다짐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후주께 아뢰어 싸우다 죽은 장졸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위로하고 그 가족들이 넉넉히 살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감사해하며 기뻐했고, 나라는 평온하여 태평세월을 누리게 되었다.

이때 위주 조비는 제위에 오른 지 7년째가 되었으며 곧 촉한의 건흥 4년째 되는 해였다. 조비는 처음 견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바로 원소의 둘 때 아들 원희의 아내였다. 조비가 지난 날 업성을 무너뜨렸을 때 얻은 부인이었다. 그 견씨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은 예요, 자는 원중으로 예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조비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자랐다. 조비는 뒤에 안평 광주 사람이 곽영의 딸을 귀비로 삼았는데 용모가 빼어나게 예뻤다. 곽영은 항상 그의 딸을 두고 '내 딸은 여중지왕이다'라고 말해 이것이 별명이 되어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얼굴처럼 곱지 않았다. 조비가 그녀를 귀비로 맞자 견 부인은 이전처럼 조비의 총애를 받을 수가 없었다. 반대로 곽 귀비는 조비의 총애를 한몸에 받자 황후가 되고픈 욕심이 생겼다. 곧 견 부인을 없애기 위해 조비의 신임을 받는 신하 장도란 자와 의논했다. 장도는 곧 꾀를 내어 견 부인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때 조비는 병으로 누워 있을 때였다. 장도는 거짓으로 말을 꾸며대어 퍼뜨렸다.

"견 부인이 거처하는 궁중에서 오동나무로 깎아 만든 우인(인형)이 하나 나왔는데 거기에 천자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이는 필시 전자를 해하려는 뜻임에 틀림없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조비는 앞뒤를 가리지도 않고 화부터 냈다. 대뜸 견부인에게 사약을 내리고 곽 귀비를 황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곽 귀비는 아이를 낳지 못해 견 부인이 낳은 아들 조예를 아들삼아 길렀다. 조예를 끔찍이 사랑하는 곽 귀비였으나 결코 태자로 세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조예의 나이 열다섯이 되자 그는 무예를 익혀 활쏘기와 말타기에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그해 봄 2, 조비가 조예를 데리고 사냥을 나가 산골짜기를 헤치며 말을 달려가는데 불쑥 사슴 두 마리가 튀어 나왔다. 크고 작은 사슴 두 마리는 어미와 새끼인 듯 작은 사슴이 큰 사슴을 따르고 있었다. 조비가 얼른 활에 살을 메겨 어미 사슴을 쏘았다. 놀란 새끼사슴이 조예쪽으로 달려가고 있어 조비가 조예에게 말했다.

"예야, 어서 새끼사슴을 쏘아라."

그러나 조예는 활은 쏘지 않고 말 위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미 그 어미를 쏘아 죽이셨는데 어찌 차마 그 새끼마저 죽일 수 있겠습니까?"

조비가 그 뜻밖의 말을 듣고는 문득 활을 내던지며 감탄했다.

"내 아들이 참으로 어질고 덕이 있구나."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조비는 조예를 평원왕으로 봉했다. 그해 5월이 되자 조비는 한질(오한)에 걸려 용한 의원이 백 가지 약을 다 썼으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조비도 마침내 병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조비는 중군대장군 조진, 진군대장군 진군, 무군대장군 사마의를 침궁으로 불러들였다. 조비는 다시 조예를 불러 세운 후 세 사람에게 조예를 가리키며 당부했다.

"이제 짐의 병이 무거워 다시 일어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 아이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경들이 도와 짐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그러자 세 사람이 입을 모아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들은 힘을 다해 폐하를 섬기면서 천추만세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 말에 조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올해 들어 허창의 성문이 까닭 없이 저절로 무너졌으니,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 짐은 그걸 보고 내가 죽을 줄 알고 있었다."

조비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근시가 들어와 정동대장군 조휴가 문안을 드리러 왔음을 알렸다. 조비가 그를 불러들이게 하고 다시 네 사람에게 당부했다.

"경들은 이 나라의 기둥과 같은 신하들이니 힘을 합쳐 내 아들을 보살펴 준다면 짐은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조비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조비의 나이 아직 마흔이요, 천자의 자리에 오른 지 7년 만이었다. 조비가 죽자 조진. 진군. 사마의. 조휴 등은 장례를 치르는 한편 조예를 대위황제로 세웠다. 황제의 위에 오른 조예는 아버지 조비에게 문황제, 어머니 견씨에게는 문소황후란 시호를 바쳤다. 또한 조정의 가까운 신하들과 일가붙이들의 벼슬도 높여 주었다. 그렇게 신하들의 사기를 드높여 줌으로써 힘을 다해 자기를 받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종요를 태부로, 조진을 대장군으로, 조휴는 대사마로 삼았다. 화흠은 태위로, 왕랑은 사도로, 진군은 사공으로, 사마의를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 다른 문무관원들에게도 각각 벼슬을 높여 준 후에 천하에 크게 사면령을 내려 모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이때 마침 옹주와 양주 두 고을을 지킬 관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저에게 서량의 수비를 맞겨 주십시오."

표기대장군 사마의가 표문을 올려 서량을 지키겠다고 나섰다. 조비가 죽고 조예가 황제의 위에 오른 뒤에야 사마의는 비로소 표기대장군의 벼슬에 오른 터였다. 과연 그의 재주에 걸맞는 벼슬자리였다. 위주 조예는 사마의의 청을 받아들여 사마의를 옹. 양의 제독으로 삼아 두 주를 지키게 했다. 사마의는 곧 조서를 받들어 서량으로 떠났다. 서량은 북쪽 오랭캐의 경계에 가까운 먼 변방이었다. 일찍이 마등과 마초의 근거지로 반란이 잦아 다스리기 힘든 지방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마의가 서량으로 떠나자 허창에 있던 세작에 의해 위의 그 같은 움직임은 급히 촉으로 알려졌다. 그 소식을 들은 공명이 저으기 놀라 말했다.

"조비가 죽자 그의 어린 아들이 뒤를 이은 것이나 그 신하들은 아무 염려할 것이 없다. 그러나 사마의가 옹. 양 두 주를 지키게 된 것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지모와 계략이 뛰어난 사마의가 두 주의 병마를 조련시키는 날에는 우리 촉에 큰 화를 끼치게 될 곳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치는 것이 나으리라."

공명의 말을 듣고 있던 참군 마속이 입을 열었다.

"승상께서는 남방을 평정하시고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습니다. 군마가 함께 지쳐 있어 그들을 쉬게 해야 할 때인데 어찌 다시 싸움터로 이끄실 수가 있겠습니까? 제게 조예의 손에 사마의를 죽게 할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승상께서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계책인가?"

공명이 마속에게 묻자 마속이 미리 생각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서슴없이 계책을 말했다.

"사마의가 비록 위나라의 대신이기는 하나 조예는 평소에 사마의를 의심하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은밀히 사람을 낙양과 업군 등지로 보내 사마의가 모반하려 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하십시오. 한편으로는 그의 이름으로 천하에 알리는 격문을 써서 여러 곳에 붙여 두면 조예는 그 거짓 소문을 믿게 되어 반드시 사마의를 죽여 없앨 것입니다. "

마속의 계책을 듣자 공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에 이르기까지 3대를 섬겨 온 재략이 뛰어난 공신이었으나 오랫동안 귀하게 쓰이지 못한 것은 그를 의심하여 꺼려한 탓이었다. 마속이 낸 계책은 조조 때부터 있어 온 사마의에 대한 불신을 이용한 것이었다. 공명의 곧 마 속의 계책을 받아들여 사람을 보내 몰래 그 계책을 펴게 했다. 그날로 이른바 적국인 위에서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계책은 은밀히 진행되어 갔다. 더러는 여행자를 이용하기도 하고 또는 세작을 풀기도 하여 사마의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촉에서 몰래 보낸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던 어느 날, 업성의 성문에 방문 한 장이 나붙었다. 성문을 지키던 장수가 그걸 읽어 보고 놀란 얼굴로 그 방문을 떼어 조예에게 바쳤다. 조예가 방문을 읽어 보았다.

표기대장군 총령 옹. 양 등처 병마사 사마의가 삼가 신의로써 널리 만천하에 알리노라. 지난날 태조 무황제(조조)께서 이 나라를 일으키실 때 진사왕 자건(조조의 둘째 아들 조식)을 세워 이날의 주인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헐뜯고 죄를 꾸며 고해바치니 이로 인해 오랜 세월을 물속에 잠긴 용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 황제의 위에 오른 황손 조예는 원래 내세울 만한 덕행도 없으면서 분수도 모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니 이는 곧 태조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이에 나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이 바라는 바에 따르고자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이 방문을 보거든 그날로 모두 새 임금으로 받든 진사왕의 명에 따르도록 하라. 만약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구족을 멸하리라. 이에 미리 알려 깨우치노니 모두 그 뜻을 살펴 행하라.

조예가 다 읽고 나자 대번에 얼굴색이 달라졌다. 실로 놀라운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조예는 급히 여러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조예가 떨리는 목소리로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태위 화흠이 나서서 말했다.

"사마의가 표문을 올려 옹주와 양주를 지키겠다고 한 것은 바로 모반할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태조께서도 '사마의는 그 눈초리가 매와 같고 이리처럼 머리만을 뒤로 돌려서 볼 수 있으니 곧 모반할 상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속마음을 드러냈으니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사도 왕랑도 나서서 화흠의 말을 거들었다.

"사마의는 육도삼략(병법)에 매우 밝고 군사를 부림에 능하며 마음속으로는 항상 큰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서둘로 없애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조예의 마음이 급했다. 급히 군사를 일으켜 몸소 사마의를 치러가려 했다. 그러나 문득 대장군 조진이 나와 말렸다.

"아니 됩니다. 문황제(조비)께서 사마의를 포함한 저희들 몇 사람들에게 의로운 폐하를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사마중달이 딴마음을 품고 있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참인지, 거짓으로 꾸며진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군사를 일으키시면 오히려 반란을 일으키도록 그를 몰아붙이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혹시 서촉이나 동오의 세작이 베푼 간교한 반간계로, 임금과 신하들 사이가 어지러워지기를 기다려 그 틈을 타 우리를 치려는 수작인지도 모릅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깊이 헤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사마의가 정말로 모반하려 한다면 어찌하겠소?"

조예가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조진에게 물었다. 그러자 조진이 계책을 내었다.

"염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의심이 풀리지 않으시면 옛 한 고조가 운몽에 놀이 나간 척하여 한신을 사로잡은 계책을 써 보십시오. 어가를 안읍에 이르게 하시면 사마의가 반드시 나와 맞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동정을 살쳐 그에게 모반의 기미가 보이면 사로잡도록 하십시오."

조예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좋은 꾀가 아닐 수 없었다. 곧 조진의 말을 좇아 몸소 어림군 10만을 거느리고 안읍으로 나아갔다. 허도는 조진에게 맡겨 자기가 없는 동안 나랏일을 돌보게 했다. 사마의는 천자인 조예가 불현듯 군사를 이끌고 오자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그러자 천자에게 자신이 자신이 거느린 군사들이 군율이 엄정함을 보이려고 갑옷 입은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조예를 맞으러 왔다. 사마의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가까이 모시는 신하는 조예에게 아뢰었다.

"과연 사마의는 군사 10여 만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그가 모반할 마음을 가졌음이 확실합니다."

조예가 그 말을 듣자 크게 놀라며 급히 조휴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맞서게 했다. 조휴가 군사를 이끌고 사마의를 맞으러 가자 천자의 어가도 함께 온 것으로 짐작한 사마의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 길바닥에 엎드렸다. 조휴가 말을 몰아 나오며 큰 소리로 사마의를 꾸짖었다.

"중달은 선제의 무거운 당부를 받은 몸으로 어찌하여 반역하려 했는가?"

사마의는 조휴의 꾸짖음을 듣자 얼굴빛이 달라졌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조휴에게 물었다.

"내가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소?"

조휴는 길바닥에 엎드린 사마의가 그렇게 묻자 그가 결코 반역을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조휴는 사마의가 엉뚱한 누명을 쓰게 된 경위를 자세히 일러 주었다. 조휴의 말을 들은 사마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것은 오나 촉에서 우리의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쓴 계책이오. 우리의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심하게 하여 조정이 어지러운 틈을 타 쳐들어오기 위해 꾸민 계책이오. 그러니 내가 천자를 뵙고 사리를 가려 말씀드리겠소."

그렇게 말한 사마의는 급히 거느리고 온 군사를 물리고 홀로 조예를 찾아갔다. 조예가 탄 수레 앞에 이르른 사마의는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

"신은 이미 선제로부터 중한 당부를 받은 몸으로서 어찌 감히 딴마음을 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틀림없이 오나 촉의 간사한 계책일 것입니다. 청컨대 한 떼의 군사를 내려 주신다면, 신은 먼저 촉을 치겠습니다. 뒤이어 오를 무찔러 선제와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고 더불어 신의 참된 마음을 밝히겠습니다."

그러나 사마의의 간곡한 말을 듣고서도 조예는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얼른 결정을 짓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화흠이 조예를 부추겼다.

"사마의에게 병권을 맞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의 벼슬을 빼앗고 고향으로 가 있도록 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사마의를 의심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조예는 화흠의 말을 따랐다. 사마의의 벼슬을 빼앗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한 후 조휴로 하여금 사마의가 지키던 옹주. 양주의 두 주를 대신 맡아 지키게 했다. 사마의가 벼슬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쫓겨갔다는 사실은 곧 세작에 의해 성도로 전해졌다. 공명은 그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위를 치기로 작정한 지 오래였으나 사마의가 옹주와 양주 두 병마를 거느리고 있어 가볍게 군사를 내리 못했다. 그런데 이제 사마의가 우리 계책에 말려 벼슬에서 물러났다니 내가 무엇을 더 근심하며 기다리겠는가?"

공명은 기뻐하며 곧 거처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었다. 후주가 이른 아침에 여러 문무관원들의 조회를 받고 있는데 공명이 후주 앞에 나아가 두 번 절한 후에 소매 속에서 표문을 꺼내어 올렸다. 바로 뒷날 '고문진보'에도 실려져 널리 읽혀질 뿐만 아니라 공명의 충성심이 잘 나타나 있는 주옥 같은 명문인 두 차례의 출사표 중 전출사표(군사를 내는 뜻을 적어 임금에게 올리는 글)였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선제께서는 창업하신 뜻을 바도 못 이루신 채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익주()는 전쟁에 시달려 피폐해 있으니 실로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위급한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게을리하지 않고 충성스러운 무사가 밖에서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까닭은 선제의 수우(특별한 우대)를 가슴에 새겨 보답코저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마땅히 폐하의 성청(총명한 귀)을 넓게 여시어 선제께서 끼친 덕을 더욱 빛나게 하시며, 뜻 있는 선비들의 의기를 더욱 넓히고 키우심이 옳으실 것입니다. 행여나 스스로 덕이 얕다고 가볍게 여기셔서 옳지 않은 비유로 대의를 잃어 충간의 길을 막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공명은 첫머리에 진정으로 주인을 섬기는 마음으로 어린 천자에게 충고했다. 이어 정사의 근본을 밝히고 나의 인재를 열거했다. 폐하께서 머무르시는 궁중과 나랏일을 돌보는 부중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벼슬을 올리는 일과 벌을 내림에 선악을 가려 상주고 벌하시되 궁중과 부중이 각각 다르게 행하는 바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간악한 죄를 범한 자와 충성되고 선한 일을 한 자는 마땅히 그 일을 맡은 바 부서에 맡겨 상벌을 밝히게 함으로써 치우침이 없는 밝은 다스림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하십시오. 사사로이 한쪽으로 치우쳐 안(궁중)과 밖(부중)의 법이 서로 어긋나게 하지 마십시오. 시중. 시랑 벼슬에 있는 곽유지. 비위. 동윤은 모두 어질고 진실되며 살핌이 깊고 충성스럽고 순수합니다. 그리하여 선제께서는 그들을 가려 뽑아 폐하께 남겨 주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일을 그들에게 물어 따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들은 그릇되는 일이 없이 폐하를 받들어 널리 이롭게 할 것입니다. 또한 장군 향총은 성품과 행동이 어질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를 부림에 능합니다. 지난날 선제께서도 써 보시고 그를 '능숙하다'하셨기에 여럿이 의논하여 도독으로 삼은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군사에 관한 일이면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에게 물어 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하신다면 반드시 진중의 군사들이 화목할 것이며, 뛰어나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려 각기 알맞은 자리에 있게 할 것입니다. 지난날 어질고 밝은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였기에 전한은 융성했고, 어진 신하를 멀리한 후한은 기울어 무너졌습니다. 선제께서 살아 계셨을 때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다 보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운정사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중상서 진진과 장사 장예와 참군 장완은 모두 마음이 바르고 곧아 절의를 받들어 죽을 만한 신하들입니다. 폐하께서 가까이 하시어 믿고 쓰시면 한실이 다시 융성해질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명은 이어 자기와 선제 유현덕을 기리는 애틋한 정과 선제의 무거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자신의 결의를 밝혔다. 신은 본디 가난한 선비로서 몸소 남양에서 밭을 갈며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숨이나마 보존할 뿐, 제후를 섬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는 신을 보잘 것 없다 아니 하시고 스스로 몸을 굽혀 세 번이나 오두막집을 찾으시어 세상에서 행할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감격한 신이 말이나 수레를 모는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힘을 다해 받들기로 했습니다. 그 후 선제께서 당양, 장판 싸움에 져 형세가 뒤집혔을 때 신은 위태로운 지경에서 어려움을 헤치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어느새 스물한 해가 흘렀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신중하여 함부로 행하지 않음을 알아주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나라의 큰 일을 당부하셨습니다. 신이 명을 받은 이래, 자나깨나 근심하며 두려워한 것은 혹시라도 선제의 당부를 제대로 받들지 못해 그 밝으심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건흥 35월 노수를 건너 거친 오랑캐 땅으로 깊이 군사를 이끌었습니다. 이제 남방이 평정되었고 갑옷 입은 군사와 무기가 넉넉하니 마땅히 삼군을 거느려 북으로 나아가 중원을 평정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고 미련하나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쳐없애고 한실을 다시 일으켜 옛 도읍(장안)으로 돌아가시게 하겠습니다. 이 일은 신이 선제께 보답하는 길이며, 폐하께 충성키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신이 없는 동안 이로움과 해로움을 헤아려 폐하께 충성스런 말씀을 올리는 일은 곽유지와 비위. 동윤이 맡을 것입니다.

공명은 살아 돌아오기를 기약할 수 없는 원정이라고 여긴 듯하다. 그리하여 이 대목에서 나라가 나아갈 길과 아울러 선제의 믿음과 두터운 은혜에 보답키 위해 그 일을 이루는 것이 신하인 자신의 생애의 임무라고 밝혔다. 이어 신하들은 힘을 다해 폐하를 받들고 폐하도 황제로서의 덕을 쌓도록, 마치 어버이와 같은 큰 사랑과 신하로서의 충절로 맡은 바의 도리를 밝히고 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역적을 쳐서 한실을 되살리는 일을 맡겨 주십시오. 만약 신이 공을 이루지 못하면 그 죄를 다스리시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아울러 신이 없더라도 신하들이 한실을 다시 일으키려는 충언이 없거든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허물을 물으시고 그 게으름을 드러내시옵소서. 폐하, 또한 선한 길을 자주 물으시고 옳은 말을 살펴 들으시어 받아들이시며, 선제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좇으십시오. 신은 폐하의 많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 멀리 떠나기에 앞서 표문을 올려 이를 고하려 하거니와 눈물이 흘러 더 말씀드릴 바를 잇지 못하겠습니다.

표문은 거기서 끝났다. 표문을 다 읽은 후주는 표문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가만히 공명을 보고 말했다.

"상부께서는 멀리 남쪽을 정벌하시느라 온갖 어렵고 험한 일을 겪으시며 이제 돌아오셨습니다. 아직 편안히 자리에 앉아 보시기도 전에 또 북쪽을 정벌하시겠다니 몸과 마음이 너무 고단하실까 두렵습니다."

"신은 선제께서 남기신 무거운 명을 받들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제 남방이 이미 평정되어 안으로는 돌아다볼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이때 역적을 쳐서 중원을 되찾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후주의 근심 어린 말에 공명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태사 초주가 나서며 후주에게 아뢰었다.

"신이 밤에 천상을 보니 북방의 왕성한 기운이 변함없고, 별들의 밝기가 전보다 갑절이나 더했습니다. 아직은 도모하실 때가 아니라 생각되옵니다."

후주에게 그렇게 아뢴 초주가 다시 공명을 돌아보고 물었다.

"승상께서는 천문에 매우 밝으시면서도 어찌하여 억지로 밀어붙이려 하십니까?"

그러나 공명은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천도란 그 변화가 무상한 것인데 어찌 천문에만 묶여 있겠소? 내가 나아가더라도 한중에 머물면서 먼저 위의 허실을 살펴 가며 움직일 것이오."

공명은 초주의 말을 물리친 뒤 곽유지와 비위. 동윤 등을 시중으로 삼아 궁궐 안의 모든 일을 돌보게 했다. 또한 장군 향총을 대장으로 세워 어림군을 거느리게 하고, 진진은 시중으로, 장완은 참군으로, 장예는 장사로 삼아 승상부의 일을 맡아 보게 했다. 또 두경은 간의대부, 두미. 향홍은 상서로, 맹광과 내민을 제주로, 초주는 태사로 삼았다. 윤묵과 이선을 박사로, 극정과 비시는 비서로 삼아 그들 1백여 문무관원에게 촉의 일을 맡아 다스리게 했다. 나라 안의 일을 정한 공명은 기어이 북쪽 정벌을 위해 후주의 조서를 받아 낸 후 승상부로 돌아가 거느릴 장수들의 부서를 정했다. 전독부는 진북장군, 영승상사마, 양주자사 도정후 위연이 맡게 하고, 전군도독 은영부풍태수 장익, 아문장비장군은 왕평이 맡게 했다. 후군은 영병사 안한장군 영건녕태수 이회로 삼고, 정원장군 영한중태수 여의로 하여금 그 부장이 되게 했다. 군량을 나르는 일과 좌군영병사를 겸해서 맡게 한 것은 평북장군 진창후 마대였고, 비위장군 요화를 그 부장으로 삼게 했다. 우군영병사는 분위장군 박양정후 마충과 진무장군 관내후 장의가 되었다. 행중군사는 거기대장군 도향후 유염이 맡게 하고 중감군은 양묵장군 등지, 증참군은 안원장군 마속이 각각 책임지게 했다. 전장군은 도정후 원림이, 좌장군은 고향후 오의가, 우장군은 현도후 고상, 후장군은 안락후 오반에게 맡겼다. 영장사는 유군장군 양의요, 전장군은 정남장군 유파, 전호군은 편장군 한성정후 허윤이요, 좌호군은 독신중랑장 정함, 우호군은 편장군 유민, 후호군은 전군중랑장 관용에게 맡겼다. 행참군에는 소무중랑장 호제와 간의장군 염안 및 편장군 찬습, 비장군 두의, 마략중랑장 두기, 유군도위 성돈을 각각 임명했다. 종사는 무략중랑장 번기요, 전군서기는 번건, 승상영사는 동궐이었다. 장전좌호위사는 용양장군 관흥에게 맡겼고, 우호위사는 호익장군 장포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그 모든 관원들은 평북대도독 승상 무향후 영익주목 지내외사인 제갈량을 따르게 했다. 모든 장수들에게 부서를 정한 뒤에 공명은 다시 이엄을 비롯해 천구를 지키는 장수들에게 들을 내려 동오의 침범에 엄중히 대비토록 일렀다. 이윽고 좋은 날을 정해 삼군이 군사를 내니 때는 건흥 5년 봄 3, 병인일이었다. 그런데 촉의 장수 가운데는 빠져서는 안 될 장수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바로 유현덕 때부터 공신이며 이제는 백발을 휘날리며 나이 일흔이 된 상산의 조자룡이었다. 공명이 대군을 이끌어 나아가려 하는데 홀연 장하에서 한 늙은 장수가 나서며 소리쳤다.

"내가 비록 늙었다 하나 아직 염파(전국시대의 명장)의 용맹과 마원(한 무제 때의 명장)의 기개가 있소이다. 그 두 장수도 늙어서 큰 공을 세웠는데 어찌하여 이번에 나를 써 주지 아니하시오?"

모두 놀라며 그를 보니 바로 조운이었다. 공명이 이번 싸움에 그를 쓰지 않은 까닭을 조용히 말했다.

"내가 남만을 평정하고 돌아와 보니, 오호대장이었던 마맹기(마초)가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고 했소. 그때 그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이란 마치 한팔을 잃은 듯이 애석했소이다. 이제 장군께서 나이 너무 많으신 터라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실까 두렵소이다. 일세를 뒤흔들던 영명에 흠이 가고 또한 우리 촉군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게 될까 걱정되어 쉬시게 한 것이오."

그러나 물러설 조운이 아니었다. 더욱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는 한평생을 선제 폐하를 모시고 싸움터를 따라다녔소이다. 싸움터에서 물러난 적이 없고 적을 만나면 항상 앞장을 섰소. 대장부가 태어나 싸움터에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한 다행이 또 어디 있겠소? 바라건대 전부 선봉이 되게 해 주시오."

그래도 공명이 거듭해서 말리자 조운이 잘라 말했다.

"만약 나를 선봉으로 써 주지 않으시면 이 주춧돌에 머리를 짓찧어 목숨을 끊어 버리겠소."

조운이 그렇게 말하니 공명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조운의 출진을 허락하며 말했다.

"장군께서 기어이 선봉이 되고자 하신다면 부장 한 사람을 데리고 가시오."

공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사람이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노장군을 모시고 앞서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적을 깨뜨려 보겠습니다."

공명이 그를 보니 바로 등지였다. 공명은 등지가 나서자 기뻐하며 날랜 군사 5천과 부장 몇 명을 뽑아 조운을 따르게 했다. 마침내 공명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자 이 같은 대군이 나라 밖으로 떠난 일은 성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백성들은 일손을 놓고 환송했다. 후주도 백관을 거느리고 북문 밖 10리까지 나와 공명을 전송했다. 이윽고 후주와 하직한 공명이 한중을 향해 나아가니 그 깃발은 들판을 덮쳤고, 창칼은 숲을 이루었다. 공명이 대군을 이끌어 물밀 듯이 나아가자 위의 세작이 그 소식을 낙양으로 전했다. 위주 조예는 그날 백관들을 모아놓고 조회를 하고 있는데 신하 하나가 나서서 아뢰었다.

"변방에 있는 관원이 알려 왔습니다. 제갈량이 30만이 넘는 대병을 이끌고 나와 한중에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봉인 조운과 등지가 이미 국경을 침범해 왔다고 합니다."

그 말에 조예는 크게 놀랐다. 얼굴색이 달라지며 여러 신하들을 둘러 보며 물었다.

"누가 대장이 되어 촉병을 물리치겠소?"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며 외쳤다.

"신의 아비가 한중에서 황충에게 죽어 이를 갈며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아직 한을 씻지 못했습니다. 이제 촉병이 국경을 침범했으나 신이 거느렸던 맹장들과 폐하의 관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쳐부수겠습니다. 그리하면 위로는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고 아래로는 아비의 원수를 갚는 일이 되니 신은 만 번을 죽어도 한이 될 게 없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보니, 그는 바로 하후연의 아들 하후무였다. 그의 자는 자휴로 성품이 매우 급하고 인색했다. 어려서 하후돈의 양자가 되었는데 뒤에 그의 아비 하후연이 황충에게 죽자 가엾게 여긴 조조가 딸 청하 공주를 시집 보내 부마로 삼았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 우러름을 받았으며 병권까지 맡고 있었으나 그때까지 싸움터에 나가 싸워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조예는 그 기상과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는 간곡한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곧 하후무를 대도독으로 삼아 관서의 모든 군마를 이끌게 하여 촉병을 치게 했다. 그러자 사도 왕랑이 나서서 말렸다.

"아니 됩니다. 하후 부마는 아직 싸움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토록 무거운 일을 맡기시니 감당해 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갈량은 지혜와 꾀가 많으며 병법에도 능통합니다. 가벼이 맞서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후무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얼굴을 붉히며 성난 목서리로 말했다.

"사도는 제갈량과 손을 잡고 안에서 호응이나 하려는 것이 아니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를 따르며 육도삼략을 배웠고 병법도 알고 있소. 그대가 내 나이가 어리다고 업신여기지만 만약 이번에 가서 제갈량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맹세코 다시 돌아와 천자를 뵙지 않겠소이다."

하후무가 대뜸 왕랑을 꾸짖자 왕랑도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에 하후무는 위주에게 작별을 고하고 밤낮없이 장안으로 달려갔다. 장안에 이르른 하후무는 관서의 군마 20여 만 명을 수습해 공명과 맞서려 나갔다.

 

조자룡 일흔에 다섯 장수를 베다

그 무렵 공명은 대군을 거느리고 면양 땅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마초의 무덤이 있다. 지금 우리 촉군의 북벌을 보고 저승에 있는 마초의 혼령도 스스로를 한탄하고 있으리라. 제사를 지내 그의 넋을 달래 주리라."

공명은 마초의 아우 마대로 하여금 상복을 입게 하고 함께 무덤 앞에 나가 제사를 드리며 그 동안 군사를 쉬게 했다. 공명이 제사를 마치고 영채로 돌아와 여러 장수들과 위를 칠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척후를 나갔던 군사가 돌아와 알렸다.

"위주 조예가 부마 하후무를 보내 관서의 각 군마를 모아 위와 싸우라고 했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위연이 나서며 계책을 내었다.

"하후무는 원래가 부귀한 집에서 자라나 심약하고 겁이 많습니다. 제게 날랜 군사 5천만 주십시오. 포중으로부터 진령 동쪽으로 돌아 자오곡으로 나아가 북쪽으로 향하면 열흘이 못 되어 장안에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후무는 제가 불쑥 군사를 이끌어 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성을 버리고 저각(저택, 여기서는 창고)이 있는 횡문 쪽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제가 그를 동쪽에서 뒤쫓을 테니 승상께서는 대군을 몰아 야곡으로 나아가십니다. 그렇게 되면 함양 서쪽은 한 번의 싸움으로 우리 손안에 떨어질 것입니다. "

공명이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계책은 모든 걸 두루 살핀 완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공은 중원에 지모 있는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으나 만약 누가 계책을 써서 산속의 험한 골짜기에 군사를 매복시켜 길을 끊는다면 어찌할 셈인가? 5천 군사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예기가 꺽일 것이다. 결코 그 계책을 써서는 아니 될 것이다."

"승상께서는 대군을 몰아 큰길로 나아가신다면 하후무는 반드시 관중의 군사를 모조리 이끌어 도중에 맞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싸움이 길어져 헛되이 날짜만 보낼 것이니 언제 중원을 평정할 수 있겠습니까?"

위연이 물러나지 않고 다시 공명에게 적이 예상치 않은 길을 택해 급습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공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먼저 농우를 빼앗은 다음 평탄한 큰길을 이용해 병법대로 나아간다면 어찌 이기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공명이 그렇게 말하며 끝내 위연의 계책을 물리쳤다. 위연은 자기의 계책이 쓰이지 않자 마음이 편치 않아 못마땅한 얼굴로 물러났다. 공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조운에게 영을 내려 진병하게 했다. 농우의 큰길로 나아가는 정공법을 택한 것이었다. 위로서는 예상밖의 진병이었다. 공명이 지략이 많은 데다 군세에서도 위와는 3,4배의 차이가 있으니 그가 틀림없이 기도를 쓰리라 믿었다. 따라서 큰길보다는 샛길이나 산길에 병력을 보내 촉병의 기습에 대비케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촉병은 당당히 큰길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그때 하후무는 장안에서 관서의 군마를 불러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량대장군 한덕이 하우무를 도우려고 서강 군사 8만을 이끌고 찾아왔다. 한덕에게는 아들 4형제가 있었다. 모두 무예가 뛰어났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맏이는 한영, 둘째는 한요, 셋째는 한경, 막내는 한기였다. 하후무는 크게 기뻐하며 큰 상을 내리고 한덕으로 하여금 선봉을 맡게했다. 한덕은 네 아들과 함께 서강병 8만을 이끌고 나아가다 봉명산에서 촉병과 마주쳤다. 양군이 마주 보며 진을 치자 한덕이 네 아들을 좌우에 늘여 세우며 말을 타고 나서더니 촉병을 보고 호령했다.

"나라를 거스른 역적놈들아, 어찌 감히 우리 국경을 침범하느나?"

촉병의 선봉 대장인 조운은 그 소리를 듣자 벌컥 화가 났다. 대꾸도 하지 않고 창부터 치켜들고 곧장 한덕에게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의 맏아들 한영이 말을 달려 나와 늙은 장수 조운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한영이 조운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한영과 조운이 어우러진 지 불과 3합을 넘기지 못하고 한영은 조운의 창에 찔려 말 아래로 굴러 덜어지고 말았다. 그걸 본 둘째 아들 한요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조운이 비록 늙어 백발을 휘날리고 있었으나 옛날의 범 같은 힘과 기세는 조금도 잃지 않고 있었다. 조운이 힘을 내어 한요에게 덮쳐드니 몇 합을 부딪지 않아 한요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걸 본 셋째 아들 한경이 방천극을 치켜들고 형을 도우러 말을 달려나왔다. 두 형제가 왼쪽과 오른쪽에서 조운을 들이쳤다. 그러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휘두르는 조운의 창 쓰는 법은 젊은 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막내아들 한기가 자기의 두 형이 조운의 창날 끝에 쩔쩔매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두 자루 일월도를 휘두르며 말을 몰아 조운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조운은 세 형제에게 에워싸이고 말았다. 조운은 세 형제의 공격에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방천극과 일월도가 춤을 추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조운의 장창이 한 번 번뜩이기가 무섭게 한기가 말 아래로 나뒹굴었다. 한덕의 진중에서 편장 하나가 달려 나와 급히 그를 말 위에 싣고 돌아갔다. 형제들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 꼴이 되자 한덕이 한 장수와 군사들을 내보냈다. 그러자 조운은 창을 끌며 말을 재우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운이 달아나자 셋째 아들 한경이 얼른 방천극을 말안장에 꽂고 활을 꺼내 쏘았다. 연거푸 세 대를 쏘았으나 조운은 모두 창으로 화살을 쳐서 땅에 떨어뜨렸다. 한경은 더욱 성이 났다. 다시 방천극을 치켜들고 조운을 뒤쫓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운이 얼른 활을 꺼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뒤쫓는 한경의 얼굴에 꽂히자 한경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말 위에서 굴러떨어져 죽고 말았다. 아우가 조운이 쏜 화살에 맞아 죽는 걸 본 둘째 아들 한요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보검을 치켜들고 조운을 내려쳤다. 그러나 조운은 창을 내던지는 것과 함께 칼날을 피하며 왼손을 쑥 내밀어 한요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한요를 옆구리에 끼고 자기의 진중으로 돌아간 조운은 한요를 내동댕이치고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다시 말을 달려나갔다. 조운은 땅에 버렸던 창을 다시 집어 들기가 무섭게 한덕에게로 말을 몰아갔다. 한덕은 네 아들이 모두 조운에게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자 화가 치솟는 대신 간담이 서늘해졌다. 조운에게 감히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아 말머리를 돌려 진중으로 달아났다. 한덕이 거느리고 온 오랑캐 군사들은 일찍부터 조운의 용맹스러운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비록 늙었다고는 하나 이전과 다름없는 용맹스러움에 누구 하나 감히 앞으로 나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조운이 말을 달려가는 곳마다 적군들은 물러나거나 흩어지며 뭉그러졌다. 조운은 말 한 마리, 창 한 자루로 적진을 휩쓸고 다니는데 마치 아무도 없는 들판을 달리고 있는 듯 했다. 뒷날 사람들이 늙은 장수 조운의 용맹을 시로 지어 기렸다.

지난날의 상산 조자룡을 돌이키노라.

나이 일흔에도 기이한 공을 세웠네.

홀로 네 장수 베고 적진을 누비니

옛날 당양에서 주인 구할 때 그 영웅이네.

한편 진중에 있던 등지는 조운이 싸움에서 크게 이기는 것을 보자 군사를 휘몰아 적을 쳤다. 이미 조운에게 찢기고 있던 서량 군사들은 촉병이 짓쳐들자 더는 견뎌 내지 못하고 크게 무너진 채 달아나기에 바빴다. 네 아들을 잃은 한덕 역시 조운에게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갑옷을 벗어 버리고 졸개들에 뒤섞여 황망히 쫓겨갈 뿐이었다. 조운과 등지는 한바탕 서강병을 짓밟은 후에도 군사를 거두어 진으로 돌아왔다. 등지는 오늘 싸움에서 이긴 걸 기뻐하며 조운에게 감탄의 말을 했다.

"장군께서는 나이 칠십이건만 영용하심이 이전과 다름없었습니다. 오늘 적진 앞에서 네 장수를 한꺼번에 베신 일은 세상에서 과히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 말에 조운이 쑥스런 얼굴로 껄걸 웃으며 말했다.

"승상께서 내 나이가 많다고 쓰지 아니하기에 내 힘을 다해 보여 드렸을 뿐이네."

등지는 사람을 시켜 사로잡은 한요와 이날 싸움에서 이긴 경위를 글로 적어 함께 공명에게 바치도록 했다. 첫 싸움부터 승리의 개가를 올리니 촉병의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위군은 그 기세가 크게 움츠러들었다. 패장이 된 한덕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하후무에게 슬피 울면서 네 아들을 잃고 싸움에 진 사실을 알렸다. 씁쓰레한 얼굴로 그 말을 듣고 있던 하후무는 곧 몸소 군사를 이끌어 장안을 떠나 조운과 싸우러 봉명산으로 나아갔다.

"하후무가 군사를 이끌고 왔습니다."

척후가 나는 듯이 말을 달려 이 사실을 조운에게 알렸다. 조운은 그 말을 듣자 곧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봉명산 앞으로 하후무를 맞으러 나갔다. 조운이 산 아래에 진세를 벌여 세우니 하후무의 대군이 몰려왔다. 선두의 하후무는 찬란한 황금 투구에 은빛 갑옷을 입고 대장기 밑에 큰 칼을 맨 채 아름다운 흰 말을 타고 있었다. 위제의 부마로서의 위세를 한껏 드러낸 모습이었다. 하후무가 촉진을 바라보니 조운이 장창을 끼고 말을 몰라 이리저리 내달으며 군사들을 지휘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늙은 것이 조운이구나. 내가 나가 저 자의 솜씨를 한 번 보리라."

하후무가 그렇게 말하며 말을 박차려는데 한덕이 나서며 가로막았다.

"저 자는 제 자식을 죽인 원수입니다. 그 한을 씻기 위해서라도 제가 나가겠습니다."

한덕이 이를 갈며 그렇게 말하더니 단번에 조운의 목을 칠 기세로 큰 도끼를 휘두르며 말을 몰았다. 한덕이 말을 달려오자 조운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말을 달려나가 그를 맞았다. 그러나 한덕 역시 그 아들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불과 3합을 부딪치자 조운의 창이 번쩍하더니 한덕이 말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군사 8만을 이끌고 기세도 드높게 하후물르 도우러 왔으나 첫 싸움에서 다섯 부자가 모두 조운에게 죽고 만 셈이었다. 하후무는 그 꼴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한덕을 베고 곧장 자기 진으로 달려오느 조운을 보자 황명히 말을 돌려 진으로 피해 들어갔다. 등지가 그 틈을 타 촉병을 휘몰ㅇ라 위군의 진으로 밀고 들어가니 군사들만 크게 ㅉ긴 채 10여 리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군사를 물려 진용을 가다듬은 하후무가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밤을 세워 대책을 의논했다.

"그 용맹은 들은 바 있으나 오늘 직접 보니 이미 늙긴 했어도 옛날의 영용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소. 지난날 당양의 장판파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소. 이 자를 당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정욱의 아들인 참군 정무가 나서서 말했다.

"제가 알기로, 조운은 용맹스럽기는 하나 꾀가 없다 하였습니다. 너무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내일 도독께서 다시 군사를 내어 나가시되, 먼저 좌우에 날랜 군사를 숨기도록 하십시오, 그런 후 싸우시다가 짐짓 패한 체하며 군사를 매복시켜 둔 곳까지 꾀어 들이도록 하십시오. 그 다음에 도독께서는 산 위로 올라가셔서 사면의 군사를 내몰아 물샐틈없이 에워싸면 조운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 의견이 그럴 듯하다."

하후무는 그의 말을 쫓기로 하고, 동희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왼쪽에 숨이 있게 하고, 설칙에게도 3만 길르 주어 오른쪽에 숨어 있게 했다. 다음 날, 하후무는 징이며, 북이미 기치 등을 정돈하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어제 패한 군사답지 않게 기세를 드높여 출진하였다. 조운과 등지도 군사를 거느려 하후무를 맞았다. 그런데 말 위에서 멀리 적진을 바라보던 등지가 조운에게 말하였다.

"어젯밤에 크게 져 달아난 위군이 오늘 다시 기세를 올리며 출병한 것은 필시 무슨 계책이 있는 것 같으니 경계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난 단번에 적을 쳐부수고 싶은 조운은 등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저런 젓비린내나는 어린 것이 어찌 적수가 될 수 있겠소? 오늘은 꼭 사로잡고 말 것이오."

조운은 말을 채찍질하며 달려나갔다. 위군 쪽에서는 반수라는 장수가 나와 싸웠으나 서너 합을 버티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조운이 그 뒤를 쫓자 이번에는 위군의 진중에서 여덟 명의 장수가 일제히 내달아 조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여덟 장수들은 먼저 하후무를 달아나게 하더니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 채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게 섰거라 이놈들!"

조운이 승세를 타서 뒤쫓으니 등지도 수하의 군사들과 함께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 조운이 가는 곳에는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의 장창과 말굽 아래에서 위군의 군사들은 바람 앞의 풀잎처럼 흩어졌다. 이렇게 적진 깊숙이 들어간 조운이 한숨을 돌리면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사방에서 요란한 함성과 징 소리, 북소리가 들려 왔다. 왼편에서는 동희가, 오른편에서는 설칙이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 조운은 그제야 적군의 계략에 빠진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퇴뢰는 끊기고 자신은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싸인 채였다. 등지가 그걸 보고 조운을 구하려 했으나 군사가 적에 비해 너무 적어 적진을 뚫을 수가 없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적군들의 함성은 땅과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조운은 좌충우돌, 죽기 살기로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에워싼 적은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그때 조운이 거느린 군사는 겨우 1천여 명이었다. 조운이 적에게 밀리며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 문득 산 위를 올려다보니 하후무가 산 위에 버티고 서 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깃발을 든 기병이 보였다. 기병은 조운이 서쪽으로 달리면 서쪽으로 기를 흔들고, 남쪽으로 달아나면 남쪽으로 기를 흔들어 군호를 보내고 있었다. 조운은 적진을 뚫을 수 없음을 알고 군사를 거느려 산 위로 오르려 했다. 그러나 산중턱에서 큰 돌과 통나무를 굴리고 던지는 바람에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조운은 진시부터 유시까지(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힘껏 싸웠으나 끝내 적진을 뚫지 못했다. 조운이 그의 주위에 적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말에서 내렸다. 잠시 쉬고 있다가 달이 뜨면 다시 싸우려고 생각한 것이었다. 피에 얼룩진 갑옷을 벗고 돌 위에 걸터앉자 이윽고 동녘에 달이 솟아 올랐다. 그러나 휴식을 취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돌연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함성과 함께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왔다.

"조자룡은 빨리 항복하라."

위병이 크게 함성을 울리면서 밀려들었다. 조운은 벗었던 갑옷을 얼른 입고 말 등에 올랐다. 그러나 사방에서 적군이 조여오는데다 화살이 빗발쳐 인마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조운도 이제 적을 헤칠 수 없음을 알았던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내가 결코 늙었다고 생각지 않았으나 이곳에서 이렇듯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구나!"

그때였다. 홀연 동북쪽 산모퉁이에서 함성이 크게 울려 퍼지더니 가까이 다가오던 위군이 낙엽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한 무리의 군사가 바람같이 몰려오는데, 새하얀 전포에 은빛 갑옷을 입은 장수가 앞장서 달려오고 있었다. 키가 여덟 자나 되어 보였고 손에는 큰 창을 들고 있었다. 조운의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조운이 반가움을 이기지 못해 소리쳤다.

"거기 오는 장수는 장포가 아닌가?"

", 장군께서 거기 계셨군요."

장포가 말 위에서 절하며 외쳤다.

"헌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

"승상께서 전날, 등지로부터 싸워 이겼다는 글을 받아보시고 노장군께서 혹시 실수가 있으실까 염려하시어 저로 하여금 5천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구원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안장에 매단 목은 대체 누구의 목이냐?"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노장군께서 포위를 당하신 것 보고 진을 뚫고 싸우다가 위장 설칙이 가로막기에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장포가 달빛 아래 그 목을 치켜들고 활짝 웃었다. 조운은 장포를 만나자 힘이 부쩍 솟았다. 장포와 함께 북서쪽으로 길을 뚫으며 나아가는데 이번에는 반대 방향에서 한 무리의 군사가 질풍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조운이 바라보니 앞선 장수는 한 손에 청룡언월도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사람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그는 관흥이었다. 관흥은 말에서 내려와 조운에게 절을 하고 말했다.

"승상의 명을 받들고, 혹시나 노장군께서 실수가 있으실까 급히 오는 도중에 앞을 가로막는 위군을 물리치고 그 대장 동희란 자의 목을 베어 왔습니다."

장포가 관흥을 보고 말했다.

"자네도 목을 베어 왔군."

", 자네도 그랬는가?"

두 젊은 장수는 서로 목을 들어 보이고 껄껄거리며 크게 웃었다. 조운도 관공과 장비의 두 아들이 자기를 구하고 적장의 목을 벤 것을 보니 몹시 기뻤다. 얼굴 가득히 웃음 띠고 말했다.

"자네들이 이미 큰 공을 세웠는데 이 여세를 몰아 어서 하후무를 사로잡아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게."

조운이 그렇게 말하자 장포와 관흥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장군을 구했으니 하후무를 사로잡으러 가겠습니다."

장포와 관흥은 말을 채찍질해 위군을 뒤쫓았다. 조운은 좌우를 돌아보며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두 사람은 내게는 조카뻘이 된다. 나라의 상장이며 조정의 옛 신하로서 저 아이들에게 뒤질 수야 없지 않은가. 내 마땅히 이 늙은 몸을 내던져 선제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이날 밤, 관흥. 장포. 조운의 세 갈래 군마는 서로 호응하며 위진으로 짓쳐들어 위병을 몰아세웠다. 등지도 군사를 이끌고 와 뒤를 받치며 접응하니 죽은 위병의 시체는 들을 덮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었다. 목숨을 구한 위병은 새벽녘부터 이튿날까지 멈출 줄 모르고 줄기차게 달아났다. 처참한 패전이었다. 하후무는 원래 지모가 부족한데다 나이도 어려 아직 싸워 본 적이 없었다. 대세가 한번 기울면 그것을 되돌릴 만한 재간도 없어 가까이 거느린 장수 1백여 명과 함께 남안군으로 달아났다. 그의 아비 하후연과는 너무나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남안성에 들어가 각처에서 모여드는 패잔병들을 거두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킬 뿐이었다. 남안성은 견고하기로 이름난 성이었다. 촉군의 조운. 관흥. 장포. 등지가 이 성을 에워싸고 힘을 다해 공격하였으나 10여 일이 지나도 성벽의 돌 하나도 흔들 수가 없었다. 그때 공명이 후군을 면양에, 좌군을 석성에 머무르게 하고 몸소 중군을 거느리고 당도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운. 등지. 관흥. 장포 네 장수는 공명을 찾아가 매일 성을 공격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남안은 서쪽으로 천수군에 이어지고, 북쪽으로 안정군과 통하고 있는 험준한 지세를 의지해 있었다. 다음 날, 공명은 수레를 타고 몸소 성의 둘레를 돌아보았다. 공명이 본진에 돌아와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이 성은 해자가 깊고 성벽도 높아 쉽사리 깨뜨리지 못할 것 같다. 원래 나의 목적은 이 성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대들이 이 성에만 매달려 있는 사이에 하후무가 군사를 나누어 한중을 공략하면 오히려 우리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등지가 공명의 말을 받았다.

"하후무는 위제의 부마입니다. 만약 그를 사로잡는다면 적의 장수 1백 명을 베는 것보다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하후무는 지금 저 안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는데 어찌 그냥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생각이 있으나 너무 서둘지 말라. 그런데 이곳 서쪽은 천수군에 이어져 있고, 북쪽은 안정군인데 두 군의 태수는 누구인가?"

공명이 등지를 안심시킨 후 장수들에게 물었다.

"천수태수는 마준이고, 안정군의 태수는 최량입니다."

척후를 맡고 있는 장수가 대답하자 공명은 웬일인자 얼굴 가득히 기쁜 빛을 띠었다. 공명은 위연과 관흥. 장포를 장막으로 불러 무엇인가 계책을 일렀다. 또한 경험이 많고 임기응변에 능한 자를 뽑아 이 사람에게도 무엇인가 계책을 귀띔하여 어디론가 보냈다. 장수들을 내보낸 공명은 곧 남안성을 떨어뜨리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군사들에게 명하여 성벽에 마른 나무며 마른풀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게 하더니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남안성을 화공으로 공격하겠다고 떠들도록 하라."

군사들은 공명이 이른대로 따랐다. 곧 마른풀과 나무들을 쌓아 놓은 곳에 금방이라도 불을 지를 듯이 떠들었다. 물론 이 소리는 성안의 군사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공명, 공명하면서 모두들 겁을 내고 있더니 알고 보니 공명도 별 것 아니구나!"

하후무도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비웃으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때 남안의 북쪽에 인접해 있는 안정성에는 최량이라는 장수가 지키고 있었다. 최량은 이 지방의 태수로 있었다. 그는 촉군이 남안을 포위하였다는 말을 듣자 덜컥 겁이 나서 부랴부랴 4천여 군사를 일으켜 촉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한 사람이 남쪽에서 왔다며 성문 앞에 이르러 태수께 은밀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노라고 말했다.

"그대는 누구이며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가?"

최량이 그를 불러들이고 급히 물었다.

"저는 하후 도독의 심복 장수인 배서라고 합니다. 이번에 도독의 명을 받자옵고 천수. 안정 두 군에 특별히 구원을 청하러 왔습니다. 남안은 촉군의 거센 공격을 받아 매우 위급한 형세에 빠져 있습니다. 매일같이 성 위에 불을 놓아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군호를 보내어 천수. 안정 두 군의 구원병이 이르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도무지 오는 기미가 없어서, 제가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이렇게 여기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배서라는 장수가 그렇게 말하자 최량이 의심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인가?"

"태수께서는 즉시 군사를 내어 촉군의 배후를 치십시오. 도독께서는 두 고을의 군사가 오기만 하면 지체없이 성문을 열고 군사를 이끌고 나와 호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하후 도독의 친서라도 가지고 왔는가?"

", 있습니다."

배서는 품속에서 땀에 젖어 후줄근해진 글 한 통을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이제부터 저는 이 글을 가지고 다시 천수로 달려가서 구원병을 청해야 합니다."

최량이 그 글을 보니 먼길을 급히 달려온 몸에서 난 땀에 젖어 있어서 제대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배서라는 장수는 길이 급한 듯 급히 졸개를 시켜 말을 바꾸어 타더니 성을 빠져 나가 천수군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 글을 거두어 품속에 넣은 뒤 최량은 군사를 모아 구원하러 떠날 채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의심이 일어 얼른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틀 후에 또다시 한 사자가 성문 앞에 나타나 큰소리로 외쳤다.

"천수태수 마준께서는 이미 군사를 휘몰아 촉군의 뒤를 끊으며 들이치고 있었다. 안정군도 어서 구원병을 보내 주십시오. 하후 부마의 명령을 업신여기는 겁니까?"

최량도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최량은 관원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자 여러 관원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가서 구하지 않았다가 남안이 적에게 떨어지고 하후 부마에게 변고라도 생긴다면 이는 모두 우리 두 고을의 허물이 될 것입니다. 그때 죄를 물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최량은 즉시 문관만을 성안에 남겨 둔채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섰다. 남안으로 통하는 큰길을 말을 달리다 보니 멀리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있는 것이 보였다. 최량이 군사를 재촉해서 밤을 틈타 달리던 중 남안까지 50여 리 남은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앞쪽과 뒤쪽에서 크게 함성이 울리는데 척후가 달려와 알렸다.

"앞에는 관흥의 군사가 길을 막고 있으며, 등 뒤에는 장포의 군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최량의 군사들은 싸울 생각도 않은 채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달아나 버렸다. 크게 놀란 최량은 뒤따르는 1백여 기와 함께 죽을힘을 다해 싸워 큰길을 벗어나 사잇길로 빙 돌아서 가까스로 안정성에 이르렀다. 그런데 막 해가 지자 가까이 이르러보니 성벽 위에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최량이 깜짝 놀라며 성 위를 바라다보았다. 성문 위에서 촉군의 장수 위연이 나서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 성은 내가 빼앗았다. 최량은 빨리 항복하라."

위연이 공명의 계책에 따라 군사들의 안정성의 군사로 분장시켜 깊은 밤에 성문을 열게 하고 성안으로 들어가 빼앗았던 것이었다. 최량은 그 뜻밖의 사태에 얼이 빠진 듯했다. 한동안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해하다가 하는 수없이 거느렸던 군사와 더불어 천수군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그러나 한 마장도 채 못가서 앞쪽에 한 무리의 군마가 북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길 앞에 쫙 벌여 섰는데, 큰 깃발 아래 한 사람이 윤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깃털 부채를 든 채 수레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바로 공명이었다. 최량은 눈앞이 캄캄한 가운데도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관흥과 장포가 그런 최량을 뒤따르며 외쳤다.

"최량은 어서 빨리 항복하라!"

최량이 보니 사방이 모두 촉ㅂ뿐이라 달아날 길도 없었다. 최량은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에서 떨어지 듯 내려와서 땅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공명은 최량의 항복을 받아들여 함께 진으로 돌아왔다. 공명은 최량을 막사로 불러 빈객의 예로서 맞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남안에는 하후무가 들어가 있는데 전부터 태수와 그대와는 교분이 두텁지 아니한가? 어떤가?"

"이웃 고을이기도 해서 매우 친밀합니다."

"그는 어떤 인물인가?"

"양부의 조카뻘 되는 사람으로 이름은 양릉이라 하며, 저와는 형제처럼 다정한 사이입니다."

이미 공명에게 항복한 몸이라 최량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 . . . . . ."

공명이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를 성안으로 들여보내 태수 양릉을 달래 하후무를 사로잡도록 하고 싶소. 수고롭지만 그대가 그 일을 해 주겠소? 그것은 그대뿐 아니라 친구를 위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오. 어떻소?"

"가겠습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군마를 물려 제가 자유롭게 성안에 들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가서 한번 달래 보겠습니다."

최량이 그렇게 말하자 공명은 즉시 전군을 20리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최량은 남안성에 이르러 자신이 안정태수임을 밝히자 곧 성문이 열렸다. 최량은 태수 양릉과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눈 후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다. 최량이 양릉을 달래기도 전에 겪은 일부터 털어놓자 양릉은 얼굴빛이 달라지며 말했다.

"우리가 위주의 큰 은혜를 입은 터에 어찌 배반하여 촉군에 항복한단 말이오? 차라리 공이 그러한 밀명을 받고 온 것을 기화로 계책을 역이용하여 공명을 속이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그렇게 말한 양릉은 최량을 데리고 곧바로 하후무에게로 갔다. 하후무의 처소에서 최량은 그 동안의 일을 고해 바쳤다. 하후무는 최량의 말을 듣고 나서 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계책을 쓰면 좋겠소."

그러자 양릉이 생각해 둔 계책을 말했다.

"제가 항복하는 척하며 성문을 열어 촉병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사로잡으면 될 것입니다."

별다른 계책이 없는 하후무가 쾌히 그 말에 찬동했다.

"그야말로 적의 계책을 거꾸로 이용하는 계책이구려."

그렇게 계책을 정하자 최량은 성을 나섰다. 그리고 공명에게로 돌아가 말했다.

"양릉이 항복하기로 하고 성문을 열어 촉군을 맞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먼저 군사를 성안으로 들여보내시어 하후무를 사로잡도록 하십시오. 양릉이 하후무를 사로잡으려 해도 거느린 군사가 많지 않아 마음대로 손을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공명은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최량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잘 할겠소. 그럼 앞서 공과 함께 우리 촉군에게 항복한 1백여 명의 군사들이 있으니, 그 속에 촉장을 안정 군사로 꾸며 속여서 성안으로 데려가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하후무가 있는 부근에 몸을 숨기게 한 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양릉과 약속하여 성문을 열도록 하시오. 그때 우리가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면 일이 정해질 것이오."

그 말에 최량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그러나 마다하면 공명이 의심할 것이 아닌가. 최량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선 촉장을 성안으로 데려간 다음 그들을 죽이도록 하자. 그런 다음 횃불을 들어 공명에게 군호를 보내 성안으로 끌어들이도록 하자.'

"내가 믿는 장수 관흥과 장포에게 그대를 따라가게 하겠소. 하후무에게는 안정에서 구원 온 군사들이라고 말하여 안심시키시오. 그리고 불을 올려 군호를 보내면 나도 그때 성안으로 들어가 하후무를 사로잡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승상께서도 성문에서 군호가 있으면 지체 없이 열려있는 문으로 들도록 하십시오."

공명과 그렇게 일을 정한 최량은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공명은 관흥과 장포를 따로 불러 가만히 계책을 일렀다. 관흥과 장포는 밀계를 받들고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병기를 손에 쥔 채 안정군 속에 섞여 있었다. 이윽고 해가 넘어간 뒤 최량과 1백여 명의 군사들은 남안성의 성문 앞에 이르렀다. 최량이 성문 앞에 이르자, 양릉은 성 위에 널빤지를 세워 가슴을 가린 채 아래를 굽어보며 외쳤다.

"거기 오는 군사는 웬 군사인가?"

"안정에서 구원하러 온 군사들이외다."

최량이 그렇게 대답하고 먼저 성문 위로 글을 적은 쪽지를 매단 군호용 화살을 쏘아 올렸다. 화살에 잡아 맨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공명은 조심스러워서 관흥. 장포 두 장수를 먼저 보내어 성안에 매복시켜 놓고 안팎에서 호응하려 하니 놀라지 않도록 하오. 우리의 계책을 눈치챌까 두려우니 성문을 어서 열어주시오. 부중에서 그 둘을 죽이는 일은 어렵지 않아 일이니 우리의 계책을 그다음에 행할 것이오.

양릉이 하후무에게 그 글을 보이자 하후무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이제 공명이 우리의 계책에 말려들었구나. 도부수 1백여 명을 부중에 숨겨 두고 관흥. 장포가 최량을 따라 들어모면 성문을 닫고 베어 죽이시오. 그다음에 군호를 올려 공명을 불러들여 매복한 군사로 하여금 사로잡도록 하시오."

양릉이 모든 채비를 마치자 성문 위에 올라 소리쳤다.

"안정에서 온 구원병이라면 들어와도 좋소."

양릉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성문을 열게 했다. 관흥은 최량과 함께 앞에서 들어가고 장포는 맨 뒤에 처져서 들어갔다. 그때 양릉이 성 위에서 내려와 성문 옆에서 촉병을 맞아들였다. 그때였다. 관흥이 갑자기 칼을 뽑는가 싶더니 칼날이 번뜩였다. 그와 함께 양릉의 몸이 말 아래로 굴렀다. 양릉이 미처 제 계책을 써 보기도 전에 먼저 목이 떨어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최량이 깜짝 놀라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적교 가까이 달려갔을 때 기다리고 있던 장포가 덮쳐들며 외쳤다.

"역적놈아, 어디로 달아나려느냐 네놈들이 얕은 꾀로 어찌 감히 우리 승상을 속이려 하느냐?"

그 호통과 함께 내지른 장창에 찔려 최량 또한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때 위병들을 찌르며 성문 위 망루로 뛰어 올라간 관흥이 신호로 불길을 올리자 기다리고 있던 촉군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공명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사로잡을 생각으로 기뻐하고 있던 하후무는 일이 한순간에 어긋나자 얼이 빠졌다. 하후무는 아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황망히 남문을 열고 나가 현로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한 떼의 군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선두에 선 장수는 왕평이었다. 왕평은 단 1합으로 하후무의 칼을 떨어뜨리고 그를 말 위에서 사로잡았다. 하후무를 따르던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왕평이 거느린 촉군에 의해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남안성을 떨어뜨린 공명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군사와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일체의 약탈을 금하였다. 그럴 동안 공명의 계책을 받들어 나갔던 여러 장수가 돌아와 각자의 공로를 보고했다. 공명은 왕평이 사로잡은 하후무를 함거에 가두게 하엿다. 이렇게 하여 성안을 수습한 공명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큰 상을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했다. 그 자리에서 등지가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승상께서는 어떻게 최량의 말이 거짓임을 아셨습니까?"

공명이 조용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나는 첫눈에 그가 진정으로 항복한 것이 아님을 알았으므로 오히려 그것을 기화로 계책을 세웠을 뿐이다."

"저희들도 최량의 거동을 수상쩍게 보았던 터라 승상께서 그를 남안성으로 보냈을 때에는 은근히 걱정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결과가 드러나자 다들 승상의 깊은 마음을 헤아린 것입니다."

등지가 공명의 말에 짐작이 간 듯 그렇게 말하자 공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무릇 적이 나를 속이려 할 때는 나의 계략을 행하기 쉽다. 열에서 여덟, 아홉은 걸려들게 마련이다. 최량의 항복이 거짓임을 알았으므로 그를 거짓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최량은 반드시 내 했던 말을 일러바쳤을 것이고, 그 말을 들은 하후무는 거꾸로 내 계책을 이용하리라 짐작했다. 짐작대로 돌아온 그를 보니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관흥과 장포를 보내겠다고 하여 내가 그를 의심하고 있지 않음을 보였다. 그는 그때 관흥. 장포와 함께 가는 것을 꺼렸으나 내가 의심할까 봐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성안에서 관흥과 장포를 죽이기로 작정했을 것이고 다음에 군호를 올려 나를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관흥. 장포 두 장수에게 비밀히 일러 그를 성문 안에서 죽여 버리게 한 것이다. 이는 '적이 짐작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계책으로 양릉과 최량을 죽이고 하후무를 사로잡게 한 것이다."

모든 장수들이 공명의 빈틈없는 계책에 경탄하며 엎드려 절을 올렸다. 이렇게 계책을 설명한 공명은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 안정에 웅크리고 있는 최량을 속여 끌어낸 것는 위장으로 꾸민 배서였다. 다만 이번의 계책에서 나의 생각대로 되지 않은 곳이 있다. 그것은 천수성의 태수 마준이다. 그에게도 같은 계략을 썼으나 그는 아직도 성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즉시 천수로 향하여 성을 점령하고 세 고을의 공략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야만 한다."

그렇게 말한 공명은 오의로 하여금 남안을 지키게 하고 안정에는 유염을 보내어 위연을 대신하여 지키게 한 뒤 위연의 군마를 이끌어 천수성을 빼앗으러 떠났다.

 

오리 새끼 버리고 봉을 얻다

한편 천수군 태수 마준은 남안성이 촉군에게 에워싸인 채 하후무가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자 문무관원을 모아 놓고 의논했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공조인 양서, 주부 윤상, 주기 양건이 나서서 말했다.

"하후 부마는 궁궐의 금지옥엽이십니다. 만약에 잘못되면 바로 이웃에 있으면서 남안의 위급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후일 반드시 문제삼을 것입니다. 태수께서는 급히 군사를 내시어 구원해 주시도록 하십시오."

마준은 그 말을 듣고도 촉군의 형세가 강한데다 성을 비우고 떠날 수 도 없어 얼른 군사를 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 하후 부마에게서 심복 장수 배서를 보내 왔다는 전갈이 왔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사람은 수일 전에 안정태수 최량을 방문하였던 거짓 사자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마준은 때가 때인지라 즉시 그를 불러들였다. 배서는 땀에 젖은 공문을 꺼내며 말했다.

"하후 부마께서 천수와 안정에서 밤을 이용해 급해 구원군을 보내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배서는 안정성에서 최량을 재촉할 때와 같은 말을 남기고는 급히 돌아가 버렸다. 배서가 가고 난 다음 날이었다.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안정 군사들은 벌써 하후 부마를 돕기 위해 떠났습니다. 태수께서도 급히 군사를 내시어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사자가 그렇게 말하자 마준도 더 이상은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즉시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러 가겠노라고 그 사자에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그와 같이 전하겠습니다. 태수께서도 늦지 않게 출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곧 출진 준비를 한 후 마준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서려 했다. 그때였다. 여러 장수들 가운데에서 살결이 백옥같이 흰 한 젊은 장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외쳤다.

"출진하시면 아니 됩니다. 생각을 돌이키십시오."

마준이 놀라며 말을 세우고 그 젊은 장수를 바라보았다.

"이 성에서 나간다면 태수께서는 살아 돌아오시지 못할 것입니다. 태수께서는 공명의 계책에 빠지셨습니다."

나이는 스물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홍안의 소년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느 고을 출신인지를 알지 못해 여러 장수들이 물었다.

"누구인가, 저 젊은이는?"

그러자 한 사람이 대답했다.

"저 사람은 여기 천수군 기성 사람으로 성은 강, 이름은 유, 자는 백약이라 하지요.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경인데 전에 천수군의 공조를 지내다가 강인이 난을 일으켰을 때 맞서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후 홀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서 인근 고을에서도 효자라는 평이 자자하지요. 그 어머니 또한 대단한 분이어서, 밤이 이슥하도록 삯바느질을 하면서 강유의 공부를 지켜보며 격려하였다 합니다. 강유는 어릴 적부터 글공부에 열심이었으며, 병법과 무예에도 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합니다. 나이 15, 6세에 이르러서는 고을의 학자들도 그의 학식에 혀를 내둘렀다 합니다. 지금은 벼슬이 중랑장에 올라 참본부군사로 태수를 섬기고 있지요."

그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이 다시 한번 강유를 바라보는데 태수 마준이 의아스런 얼굴로 강유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내가 제갈량의 계책에 빠졌다 하는가?"

강유가 그 까닭을 밝혔다.

"요사이 들으니, 제갈량이 하후 도독을 크게 깨뜨리고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이 성을 에워싸고 있다는데 어떻게 위의 사자가 겹겹이 둘러싼 포위를 뚫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또 배서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으며,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어찌 이름도 없는 장수가 촉병의 포위를 헤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안정에서 온 파발마는 공문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하후 도독께서 보내셨다면 어찌 공문도 없이 보내겠습니까? 그로 미루어볼 때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촉군이 분명합니다. 태수를 속여 성으로 나가시게 하고, 성안이 빌 때 허를 찔러 숨겨 둔 군사들로 하여금 천수성을 빼앗으려는 계책일 것입니다."

강유는 마준과 여러 장수들 앞에서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공명의 계략을 낱낱이 설명했다. 그제야 불현듯 깨닫게 된 마준은 강유의 빈틈없는 살핌에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만약 백약이 일러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공명이 파 놓은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 말에 강유는 괘활하게 웃더니 다시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저에게 한 계책이 있습니다. 반드시 제갈량을 사로잡고 남안성에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마준은 몹시 기뻐하며 강유에게 물었다.

"어떤 계책인지 백약은 빨리 말하라."

"우리 성 뒤쪽에 제갈랴이 반드시 날랜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성에서 나가면 그 허를 찌르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에게 정병 3천만 주시면 적이 올 만한 길목에 매복해 있겠습니다. 태수께서는 저를 뒤따라 군사를 일으켜 성을 나가시되 멀리까지 가지 마십시오. 30리쯤 가시다가 군호로 올린 불길이나 연기가 보이면 즉시 군사를 돌려 촉병을 치십시오. 우리가 앞뒤에서 들이친다면 반드시 크게 이길 것입니다. 그때 만약 제갈량이 몸소 군사를 이끌어 온다면 반드시 제 손으로 사로잡고 말겠습니다."

마준이 강유의 말을 듣고 보니 군사를 이끌어 가되 공명의 계책에도 빈틈없이 대비한 비책이 아닌가. 곧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먼저 강유에게 군사 3천을 주어 떠나보냈다. 천수성에는 양서와 윤상만을 남겨 놓고 자신은 양건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섰다. 한편 공명의 명을 받고 천수성의 뒷산에 깃발을 누인 채 숨어 있던 조운과 그의 5천 군사는 마진이 출진한 것으로 알았다.

"태수 마준이 군사를 일으켜 나갔습니다. 성에는 문관들만 남았습니다."

세작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들은 조운은 일이 공명의 계책대로 되어가는 것 같아 크게 기뻐했다. 곧 마준이 성을 나서면 길을 끊기 위해 숨겨 두었던 장익과 고상에게 전갈을 보내 알렸다.

"마준이 군사를 내었으니 길을 끊고 쳐부수라."

그렇게 영을 전한 뒤 스스로는 군사를 이끌고 천수성으로 짓쳐들었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 너희들이 우리 계책에 떨어졌으니 어서 성문을 열고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하도록 하라."

성문 앞에 이른 조운이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양서가 성문 위 망루에 서서 껄걸 웃으며 대꾸했다.

"너희들이야말로 도리어 우리 강 백약의 계책에 떨어졌음을 아직도 모르고 있느냐?"

조운은 양서가 공연한 허풍이라도 떠는 줄 알고 벌컥 화를 냈다.

"성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군사가 남아 있는 것 같다. 힘을 다해 성을 들이치도록 하라!"

양서가 큰소리치는 걸로 보아 성안에도 군사가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긴 조운이 소리치며 막 성을 치려 할 때 홀연 사방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사면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한 무리의 군사들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데, 그 선두에는 한 젊은 장수가 장창을 치켜들고 말을 달려오면서 외치는 것이었다.

"너는 천수의 강백약을 알아보겠느냐?"

조운은 어린 장수가 내달아오자 한 창에 꿰어 버릴 기세로 창을 고쳐 잡고 강유와 맞서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유의 창을 쓰는 재간이 기가 막혔다. 몇 합을 싸웠으나 강유의 창날 끝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조운은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누가 이곳에 이런 인물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으리오.'

노장과 청년 장군의 두 장창은 찌르고 후리고 하여 40여 합을 싸웠으나 그때까지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을 나간 마준과 양건이 군사를 되돌려 와 조운을 덮쳤다. 그리하여 조운의 군사는 각기 앞뒤로 나누어 적을 맞으니 싸움의 형세는 이롭지가 못했다. 점점 좁혀 오는 적의 공세에 조운은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강유가 달아나는 조운을 뒤쫓았다. 다행히 촉의 유격군인 고상과 장익이 두 갈래 길로 달려와서 가까스로 혈로를 열어 조운을 어려움 속에서 구해 냈다.

"적은 우리의 계책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거기다가 싸움에서도 지고 말았습니다."

공명을 보자 조운은 솔직하게 싸움에 졌음을 알리고 있었던 일을 자세히 전했다. 공명은 크게 놀라며 물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나의 깊은 계책을 꿰뚫어보더란 말인가?"

강유라는 이름의 젊은 장수라는 말을 듣자 공명은 더욱 놀라며, 그가 대체 누구냐고 좌우에게 물었다. 마침 강유와 같은 고을 사람이 있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강유이고, 자는 백약이라 하며 천수군 기성 사람인데, 홀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문무를 두루 갖춘데다 지용을 아울러 지녀 향리에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영걸입니다."

그 사람의 말에 조운도 감탄하며 말을 받았다.

"제가 칠십 평생을 살도록 그와 같이 창을 잘 쓰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창 쓰는 법이 자못 달랐습니다."

조운이 강유의 창 솜씨에 크게 감탄하자 공명은 더욱 놀라워했다.

"천수성이 나의 손바닥 안에 있는 줄 알았더니 그와 같은 영걸이 있을 줄은 몰랐다."

공명은 스스로 전군을 이끌어 천수로 나아갔다. 그때 천수성으로 들어가 있던 강유가 마준에게 말했다.

"조운이 쫓겨갔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공명이 올 것입니다. 공명은 우리 군사가 모두 성안에 있을 줄 알고 있으니 성안의 군사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 동쪽에 매복해 있다가 적의 군사가 이르면 길을 끊겠습니다. 태수께서는 양건. 윤상과 각각의 한 떼의 인마를 이끌어 성 밖에 매복하십시오. 성은 양서로 하여금 지키게 하면 될 것입니다."

마준은 두말없이 강유의 계책에 따랐다. 한편 공명은 몸소 천수성에 이르러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무릇 성을 공략하는 데는 처음으로 공격하는 날이 가장 중요하다. 첫날 기세를 올려 공격하여 깨뜨리지 못하고, 다음 날 공격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날이 거듭될수록 어려워진다. 적군은 갈수록 자신감이 생기는 반면에, 공격진은 사기가 떨어질 뿐 아니라 피로가 겹치기 때문이다. 상대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성이다. 전군을 격려하여 크게 북소리를 울리고 함성을 드높이며 단숨에 치도록 하라."

선봉, 중군 등 각부의 장수들에게 공명은 힘을 다해 성을 칠 것을 명하니 모든 장졸들이 이에 따랐다. 해자를 건너고 성벽을 기어오르며 선봉군은 거세게 공격했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이미 한 무리의 촉군은 성벽의 높은 곳까지 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땅을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사방의 성루와 성벽 위에서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졌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촉군이 그 불시의 공격에 풀썩 무너졌으며 해자 언저리에 있는 군사들의 머리 위에도 큰 나무와 큰 돌이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그 바람에 촉군은 많은 군사가 죽거나 상했다. 촉군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자 사방의 숲과 백성들의 집에서 모두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타올랐다. 어디서 온 군사들인지 알 수 없으나 함성과 북소리는 옆에서, 뒤에서, 성안에서 솟아올라 사면은 불길과 북소리와 징. 꽹과리 소리에 묻힌 듯했다. 촉병은 크게 놀라 싸울 생각도 못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공명이 문득 머리를 돌려보니 성 동쪽에서 한 떼의 군마가 달려오는데 불빛이 주변을 밝히는 가운데 그 형세가 마치 긴 뱀이 밀려오는 듯했다. 공명이 군사를 보내 누가 이끄는 군마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그 군사는 강유가 이끄는 군마입니다."

그 말을 듣고 공명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군사란 많다고 좋은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대장 재목이다."

마침내 공명은 군사를 거두어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도 급히 수레를 몰았다. 관흥과 장포가 공명을 호위해서 에워싼 적을 뚫었다. 영채로 돌아온 공명은 안정군 출신의 사람을 불러서 물었다.

"강유는 지극한 효자라고 하는데 그 어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지금도 기현에 살고 있습니다. "

"알았다. 물러가라."

공명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 가만히 위연을 불러 한 무리의 군사를 주어 기현으로 급히 가게 하며 일렀다.

"그대는 한 떼의 인마를 거느리고 가 짐짓 기성을 빼앗으려는 척 기세를 올려라. 그러다 강유가 이르거든 마지못한 듯 성안으로 들게 하라."

공명은 다시 조운을 불러 영을 내렸다.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상규를 빼앗도록 하시오."

공명은 두 장수와 군사를 내보낸 뒤 천수성 30리 밖에다 영채를 세우도록 했다. 이러한 촉군의 움직임은 곧 천수성에도 전해졌다.

"촉병이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었습니다. 한 갈래는 천수성으로, 다른 한 갈래는 상규로 갔으며, 나머지 군사는 기성을 치려 합니다."

강유는 그 말을 듣자 근심스런 얼굴로 마준에게 청했다.

"저의 어머니는 지금 기성에 계십니다. 만일 적군이 기성을 범한다면 아들된 도리에 어긋납니다. 기성도 지키고 아울러 어머니도 지키고 싶습니다. 부디 저에게 3천 기를 주시고 잠시 이 성을 떠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마준도 이번 싸움에 큰 공을 세운 그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강유에게 3천 군마를 주어 기성을 지키게 하고, 양건에게도 3천 군마를 주어 상규를 지키게 했다. 강유가 기성에 이르자 앞쪽에 한 떼의 군마가 달려 나오는데 보니 바로 촉장 위연이 거느린 군사였다. 어머니와 성을 지키겠다는 생각에 강유가 위연에게 거세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위연은 서너 번 창칼을 맞대다 당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달아났다. 강유는 위연을 뒤쫓지 않고 얼른 현성에 들어가 어머니를 뵙고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위연은 강유가 성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성을 에워쌌다. 한편 상규로 떠난 조운은 천수에서 양건이 한 무리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들자 이들과 맞붙어 싸웠다. 그러나 역시 짐짓 패한 척하며 그들을 상규성 안으로 들어가게 한 후 성을 에워쌌다. 모두가 공명의 계책에 따른 것이었다. 위연과 조운이 자기의 계책에 따라 성을 에워싸고 있자 공명은 남안으로 사람을 보내 앞서 사로잡은 하후무를 데려오게 했다. 하후무가 이끌려 와 무릎을 꿇자 공명이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

"그대는 죽음이 두려운가?"

공명이 묻자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귀하게 자란 하후무는 눈물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아버지 하후연의 기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연약한 아들이었다.

"승상께서 만일 둘도 없는 이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공명이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기성에 있는 강유가 나에게 글을 보내 왔는데 하후 부마를 넘겨준다면 자신도 촉군에 투항하겠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너를 놓아주려 하니 너는 기성에 가거든 강유에게 항복하도록 달래겠느냐?"

"저를 놓아주신다면 기꺼이 다녀오겠습니다."

촉병에게 풀려난다는 생각에 하후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선뜻 응낙했다. 너무 선선히 공명의 말을 따르겠다고 하니 한 번쯤 의심해 볼 만 했으나 공명은 짐짓 따져 묻지 않았다. 공명은 그에게 의복과 말을 준 다음 사람을 딸려 보내지 않고 혼자 가게 내버려 두었다. 하후무는 새장 속의 새가 창공으로 날아오르듯 신바람이 나서 홀로 말을 달렸다. 그러나 하후무는 정작 기성으로 가는 길이 나오리라 생각하며 무턱대고 나아갔다. 그러던 도중에 허둥지둥 길을 달려가는 몇 사람을 만났다. 말을 세우고 그중의 한 사람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서 오는 백성들이냐?"

"기성에서 옵니다."

"어디를 허둥거리며 가고 있느냐?"

하후무가 그들의 거동이 심상치 않아 묻자 그중의 하나가 대답했다.

"우리들은 기현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기성을 지키던 강유가 촉군에게 투항을 하자 서촉 장군 위연이 불을 놓고 노략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을 버리고 상규로 가는 길입니다."

하후무가 놀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지금 천수군은 누가 지키고 있는가?"

"마준 태수께서 지키고 계십니다."

백성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처음부터 강유를 달랠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하후무가 그 말을 듣자 생각이 달라졌다.

'강유는 벌써 서촉에 투항하고 말았구나. 그렇다면 기성에 가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는 갑자기 길을 바꾸어 천수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도 또 피난민인 듯싶은 백성들을 만났다. 젊은이는 늙은이의 손을 잡고, 여자는 어린 애를 품에 안고 쫓기듯 오는데 하후무가 그들에게 물어본 즉 그들도 또한 조금 전의 사람이 대답했던 말과 한결같았다. 강유가 항복한 뒤 촉군이 횡포와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이제 강유의 배반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이윽고 하후무가 천수성 아래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나는 부마 하후무이다. 빨리 문을 열라."

성 위의 군사들이 하후무를 알아보고 급히 성문을 열고 맞아들였다. 태수 마준도 깜짝 놀라면서 그를 맞아들이고 절을 올린 후 물었다.

"도독께서는 어찌하여 이곳에 오시게 되었습니까?"

하후무는 강유의 일과 피난 가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마준이 탄식하며 말했다.

"강유가 촉병에게 항복하다니,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자 양서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강유가 적에게 투항한 것은 하후 부마를 구하기 위해 빈말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자 촉병을 피해 달아나던 백성들을 두 번이나 만난 하후무가 양서에게 꾸짖듯 말했다.

"강유가 항복한 것이 사실인데 빈말은 무슨 빈말이란 말인가?"

그런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날이 저물어 초경이 되었다.

"촉병이 또 성을 치러 옵니다."

군사 하나가 달려와 다급한 목소리로 알렸다. 마준과 하후무가 그 소리에 놀라 망루 위에서 내려다보다 그만 깜짝 놀랐다. 앞장서 공격을 하러 온 장수의 갑옷과 모습이 틀림없는 강유였다.

"거기 망루에 계시는 분은 하후 부마가 아니 십니까? 부마께서 나에게 서촉에 투항하라, 서촉에 투항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몇 번씩 서한을 보냈기 때문에 이 강유는 촉군에 투항한 것이오. 그런데 부마는 어찌하여 앞서 한 말을 저버렸소?"

강유는 하후무를 바라보며 칼을 들어 한껏 위엄을 떨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하후무는 어이가 없었다.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쳐 꾸짖었다.

"이놈, 강유. 네가 위나라의 은혜를 입고도 촉군에 투항하다니 될 법이나 한 일이냐? 그리고 내가 너에게 무슨 약속을 하였단 말이냐?"

그러나 강유도 지지 않고 맞서서 말했다.

"도독은 내게 글을 보내 촉에게 항복하라고 해놓고 이제와서 어찌하여 딴소리를 하시오? 이제 보니 도독이 자신의 몸을 빼치기 위해 나를 대신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이었구려. 내가 이미 촉에 항복하여 상장이 되었는데 어찌 위로 돌아갈 수 있겠소."

말을 마친 강유는 군사를 휘몰아서 성을 공격하더니 새벽녘에야 군사를 거두어 갔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강유가 아니었다. 나이와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을 뽑아 공명이 강유처럼 꾸며낸 거짓 강유였다. 하지만 밤중에 해자를 사이에 두고 불길 속에 있는 강유를 보았으니 마준과 하후무가 거짓 강유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그때 강유는 여전히 공명의 군사에게 에워싸인 채 기성안에 있었다. 성안에 머무르고 있던 강유에게 가장 큰 고초는 역시 군량이었다. 사세기 위급하여 상 안으로 군량미를 실어 올 겨를이 없었다. 군사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싸울 수가 없었다. 그런 어느 날, 강유가 망루 위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니 많은 수레가 군량을 가득 싣고 어디론지 가고 있었다.

'저 군량을 빼앗아야겠다'

다급해진 강유는 앞뒤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바삐 군사 3천 기를 거느리고 성을 나섰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공명의 계략이었음을 알 리 없었다. 강유가 군사를 이끌고 촉병을 덮쳐들자 촉병은 싸울 생각도 않고 달아나기부터 했다. 급한 마음으로 강유가 양초 실은 수레를 성안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데 홀연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앞선 장수는 장익이었다. 강유가 장익을 맞아 싸우는데 이번에는 촉장 왕평이 군사를 이끌어 왔다. 촉병이 앞뒤에서 몰아치니 강유도 하는 수 없이 수레를 팽개친 채 성으로 말을 달렸다. 그런데 성 위에는 뜻밖에도 촉병의 기가 가지런히 펄럭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명의 영을 받고 강유가 군량을 빼앗으러 나간 사이에 위연이 성을 빼앗아 버린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강유는 촉의 군사를 헤치며 천수성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이미 촉병에게 찢기고 그나마 뒤따르던 수십 기도 기다리고 있던 장포의 군사들과 싸우다가 모두 죽게 말았다. 이제 강유는 필마단기로 뒤돌아볼 사이도 없이 달려 천수성 아래에 이르러 소리쳤다.

"문을 열라, 어서 성문을 열어라."

성벽 위에 있던 군사들은 그가 강유임을 알아보고 황망히 마준에게 알렸다.

"강유가 와서 성문을 열라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마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강유가 우리를 속여 성문을 열게 하여 성을 빼앗으려는 수작이다. 성문을 열어서는 아니 된다."

마준이 성벽 위에 나타나 강유를 보고 큰 소리를 꾸짖었다.

"닥쳐라. 너의 뒤에는 멀리 촉군이 보이지 않느냐? 우리를 속이고 성문을 열게 하여 촉군을 끌어들일 속셈이 아니겠느냐? 나를 배반한 놈,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또 왔느냐?"

깜짝 놀란 건 강유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으나 무슨 말을 하려해도 할 수가 없었다. 성 위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데다 뒤에는 촉병이 뒤쫓기 때문이었다. 강유는 이번에는 상규로 달렸다. 그러나 그곳도 천수성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수성 장졸들과 마찬가지로 강유가 촉에 항복한 걸로 아는 양건이 나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어젯밤에는 이곳에 와서 활을 쏘며 우리를 공격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간사한 혓바닥으로 또 나를 속이려 드는구나? 네가 촉에 투항했음을 우리가 다 알고 있다. 뭣들 하고 있느냐, 저놈을 쏘라!"

성 위의 군사들이 화살부터 날리니 강유는 말을 붙일 길이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면서 장탄식했다. 그는 난전 속에 말머리를 돌려 뒤쫓는 촉병을 피해 장안을 향하여 달려갔다. 이젠 거느린 군사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었다. 마치 둥지를 잃은 새와 같은 신세가 된 강유였다. 홀로 장안을 향하여 수십 리를 달리는데, 문득 앞쪽에 수천 명의 군사가 진을 치고 길을 가로막았다. 촉의 대장 관흥이 이끄는 군대였다.

'아아, 여기에도 적군이 가로막고 있구나.'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나른하고 지쳐 있는 데다 필마단창의 강유가 어찌 저 많은 군사를 헤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로 사로잡힐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부리나케 말머리를 돌려 다른 길로 달려갔다. 그러자 앞쪽의 숲속에서 한 무리의 군사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쏟아지더니 그를 에워쌌다. 강유가 놀라 보니, 무수한 깃발 사이로 작은 수레 하나가 나타나더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레 위에 탄 사람은 머리에 윤건을 쓰고 몸에 학창의를 입었으며 손에 깃털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바로 공명이었다. 지금까지 강유는 공명이 펼쳐놓은 그물 안을 뱅뱅 맴돈 셈이었다. 공명이 깃털 부채를 든 채 강유에게 조용히 말했다.

"강백약, 왜 시원스럽게 항복하지 않는가? 그만큼 위에 성의를 보였으니 이제는 투항하여도 수치가 아니다."

강유는 우뚝 선 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앞에는 공명이 있고 뒤에는 관흥이 버티고 있어서 더 나아갈 길이 없었다. 그뿐인가.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이젠 자기 편에게도 쫓기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되니 강유는 말에서 내려 항복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강유는 말에서 내려 조용히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공명은 수레에서 급히 내려 강유의 손을 굳게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지난날 오두막에서 나온 이래 오랫동안 널리 어진 인재를 구해서 내가 평생 배운 것을 전하려 했소. 그런데 아직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한 것이 한이었는데 이제 백약을 만났으니 소원을 풀었소."

이 말은 들은 강유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뜻밖에도 자기를 그토록 높이 대해 주니 크게 감격하여 땅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공명이 강유를 얻게 되어 더없이 흡족한 얼굴이었다. 공명은 강유를 데리고 본영으로 돌아와 후하게 대접한 다음 물었다.

"천수와 상규의 두 성을 취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좋겠는가?"

강유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화살 하나를 쏘기만 하면 됩니다. 천수성안에는 윤상과 양서가 있는데 저와 무척 가깝게 지내던 사이입니다. 제가 밀서 두 통을 써서 성안으로 날려 보내 안에서 난리가 일어나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성은 어렵게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명은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었다. 이내 옆에 있던 화살을 들어 강유에게 주었다. 강유는 지필묵을 청하여 윤상과 양서에게 보내는 두 통의 글을 썼다. 강유는 그것을 화살에 잡아 매고 천수성으로 말을 달려 성안으로 쏘았다. 천수성의 군사가 그것을 주워 보고 깜짝 놀라 마준에게 보였다. 글을 읽은 마준도 놀랐다. 윤상과 양서가 강유와 내응하고 있는 증거라도 잡은 듯이 황망히 그것을 하후무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와 같이 성안의 윤상과 양서도 강유와 내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후무가 잘라 말했다.

"이 두 놈이 일이 꾸미기 전에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오. 두 놈을 불러서 죽여야겠소."

자기네들끼리 싸우게 만들기 위한 강유의 계교가 보기 좋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마준은 곧 사람을 보내어 먼저 윤상을 불렀다. 그런데 윤상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 먼저 강유가 보낸 밀서가 마준의 손에 넘어간 일을 귀뜀해 주었다. 하후무는 부름을 받자,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임을 짐작한 윤상은 즉시 양서를 찾아가서 말했다.

"개죽음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성문을 열고 촉군을 불러들여서 우리의 앞길을 트도록 하세."

"그게 좋겠다."

양서도 윤상의 말뜻을 재빨리 알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후무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할 말이 있다며 양서. 윤상 두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힌 두 사람은 그날 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망에 올라 각기 병기를 갖추었다. 그리고 하후무에게 가는 대신 자기의 수하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고 촉군을 끌어들였다. 화살을 날려 보낸 후 성을 살펴보고 있던 공명은 성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정예병을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게 했다. 일이 그렇게 되니 하후무와 마준은 크게 놀랐다.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며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작 1백여 기만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나가 오랑캐 땅인 강성을 향해 달아났다. 양서와 윤상이 공명을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공명은 백성들을 어루만져 달래며 안심시켰다. 천수성을 얻게 된 공명은 다시 상규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장수들에게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양서가 나서 말했다.

"상규성은 제 아우 양건이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가서 항복하도록 달래 보겠습니다."

공명이 크게 기뻐하며 그날로 양서를 사규로 가게 했다. 상규로 달려간 양서가 아우 양건을 달래자 양건을 성으로 나와 항복했다. 공명은 각 군의 장졸들에게 후한 상을 내린 다음 양서를 천수태수에, 윤상을 기성태수에, 양건을 상규태수에 임명하였다. 세 군을 빼앗은 공명은 다시 군사를 수습하여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장수들이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어찌하여 하후무를 잡으러 강성으로 가시지 않으십니까?"

"하후무는 한 마리의 오리 새끼의 지나지 않으며 백약을 얻은 것은 봉을 얻은 것과 같다. 천 명의 군사는 얻기 쉬워도 한 사람의 장수는 얻기 어렵다. 그런데 어찌 오리따위를 뒤쫓겠는가?"

공명은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천수. 상규. 기의 세 성을 우려 빼자 촉군의 무위는 크게 천하에 떨쳐졌다. 공명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그 위세를 떨치게 되자 그 소문을 듣고 두려움을 느낀 위의 주군들을 바람에 쏠리듯 먼저 항복해 왔다. 때는 촉의 건흥 5년 겨울이었다. 공명이 전군을 이끌어 기산으로 나와 위수 서쪽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은 세작에 의해 곧 낙양에도 전해졌다. 이때 위는 조예의 태화 원년이었다.

"하후 부마는 세 곳을 잃고 강중으로 달아났습니다. 촉병은 이미 기산에 나타났는데 그 선봉은 위수 상류에까지 와 있습니다. 지체없이 군사를 내시도록 하옵소서."

조예는 크게 놀라 신하들을 돌아보고 물었다.

"짐을 촉병을 물리칠 장수는 없는가?"

사도 왕랑이 앞으로 나와서 아뢰었다.

"신이 보건대 선제께서는 늘 대장군 조진을 뽑아 쓰셨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반드시 싸워 이겼음을 보아 왔습니다. 폐하께옵서는 조진을 대도독에 명하시어 촉군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조예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 조진을 불러 말했다.

"선제께서는 경에게 짐을 맡기시고 붕어하시었소. 지금 촉병이 중원에까지 쳐들어오고 있는데 어찌 경은 앉아서 구경만 하시오?"

그러자 조진이 아뢰었다.

"신은 재주가 없고 또한 나이가 많아 도저히 그런 무거운 일을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조진이 완곡하게 거절하자 왕랑이 옆에서 말했다.

"장군은 사직의 중신입니다. 사양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장군께서 가신다면 이 늙은 몸도 둔하고 재주 없음을 무릅쓰고 함께 가서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울 것입니다. 장군은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왕랑의 말에 조진도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신이 나라의 큰 은혜를 입은 몸으로 어찌 사양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한 사람의 부장을 딸려 주시기 바랍니다."

"경의 뜻대로 뽑아 쓰시오."

조진이 부도독으로 곽회를 정하자 조예가 선뜻 응락했다. 곽회는 태원 양곡 사람으로 자는 백제이다. 벼슬은 사정후. 옹주자사였다. 조예는 조진에게 대도독의 전권을 주고, 왕랑을 군사로 삼았다. 이때 왕랑의 나이 일흔여섯이었다. 조예는 동경과 서경 군사 20만을 뽑아 조진에게 주었다. 선봉인 선무장군 조준은 조진의 아우였고, 구 부선봉의 장수는 탕구장군 주찬이었다. 위주 조예는 조진을 서문 밖까지 나가 전송했다. 조진이 이끄는 위군 20만 대군은 장안을 거쳐 이윽고 위수의 서쪽 기슭에 영채를 세우고 왕랑, 곽회와 함께 촉병 칠 일을 의논했다. 왕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대독께서는 대오를 엄정하게 하고 정기를 두루 벌여 세운 다음에 이 늙은이가 무엇을 하나 지켜보십시오."

"군사로 무엇을 하시려는 거요. 좋은 계책이라도 있습니까?"

왕랑의 말에 조진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아무 계책도 없소이다. 다만 이 혓바닥 하나로 공명을 설파하여 그가 싸우지 않고 물러나도록 만들겠소이다."

공명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려는지 알 수 없으나 왕랑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조진은 노장 왕랑이 원래 식견이 높으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내일 사경 때 밥을 지어 먹고 해가 뜨는 대로 대오를 갖추게 하되 인마와 기치를 모두 위엄 있게 정돈하여 기산으로 나아가라."

이어 전군은 그 채비를 차리는 한편 싸우자는 글을 촉진에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위군과 촉군은 각기 기산 앞에 진을 쳤다. 산과 들에는 아직 봄기운이 찾아들지 않았으나 밝은 햇살 아래 양군의 깃발이며 병마들이 늘어섰다. 촉병이 보니 위병이 대오를 갖춰 정기를 늘여 세웠는데 그 군세가 위용이 넘쳐 하후무가 거느렸던 군사와는 자못 달라 보였다. 삼군이 북을 치고 피리 불기를 마치자 사도 왕랑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그 왼쪽에는 도독 조진이, 오른쪽에는 부도독 곽회가 있었는데 두 선봉은 진 앞쪽에 나와 말을 세웠다. 그러고는 위 진영의 탐라가 나와 소리쳤다.

"청컨대 주장은 나와 묻는 말씀에 대답해 주시오."

그 소리와 함께 촉진의 문기가 열리며 관흥. 장포가 양쪽에서 말을 달려 나와 진 앞에 말을 세웠다. 뒤를 이어 여러 장수들이 줄을 지어 벌여 서는데 그 가운데에 한 대의 사륜거가 굴러 나왔다. 수레 위에는 공명이 윤건을 쓰고 흰옷에 검은 띠에다 깃털 부채를 들고 표연히 앉아 있었다. 공명이 가만히 위진을 바라보니 진 앞에 일산 세 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흰 수염을 날리며 늙은 군사가 앉아 있었다. 공명이 펄럭이고 있는 기에 씌어진 이름을 보니 사도 왕랑이었다. 공명은 왕랑이 나서는 걸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왕랑은 반드시 나에게 말로써 수작을 걸 것이다. 내가 그 형편에 따라 대응해 주리라.'

공명은 수레를 진 밖으로 몰아나가며 위병 쪽에 알리게 했다.

"한 승상께서 사도와 말씀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공명은 왕랑을 보자 수레 위에 앉은 채 두 손을 맞들고 인사를 보냈고, 왕랑도 말 위에서 몸을 굽혀 답례를 했다. 왕랑은 학문이 넓고 식견이 풍부한 선비로 다스림과 병법에도 밝아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지금 왕랑은 싸움을 시작하기 앞서 스스로가 자부하는 뛰어난 말솜씨로 공명을 꺾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왕랑이 먼저 공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의 위대한 이름은 벌써부터 들어왔소만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천명을 알고 시무(급한 일)를 아는 공이 어찌하여 이렇게 명분도 없는 군사를 일으키셨소?"

그러자 공명이 되물었다.

"나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역적을 치러 왔는데 어찌하여 명분이 없다는 말을 하시오?"

공명이 그렇게 대꾸하자 왕랑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명의 말꼬리를 잡고 길게 변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늘이 정한 운수는 변하게 마련이며 제위도 바꾸기 쉬워 덕있는 이에게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오. 옛적을 돌이켜 보건대 환제,영제 이래로 황건적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럽게 서로 다투었소. 그리하여 초평 건안 대에 이르러 동탁이 무반하고, 이어 이각과 곽사가 다시 포악한 짓을 서슴지 않았소. 또 원술을 수춘에서 스스로 천자임을 내세웠고, 원소는 업상에서 천하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었소. 유표는 형주를 점거하고 있었고 여포는 서주를 범처럼 삼켰었소. 도적은 벌떼처럼 일어났으며 간사한 무리들이 매떼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니 나라는 알을 쌓아 둔 듯 위태로웠고 백성들의 목숨은 거꾸로 매달린 듯이 위급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소. 이에 우리 태조 무황제(조조)께서는 사방을 비로 쓸 듯 평정하시고 변방까지 맑게 바로잡으시어 천하가 그 덕을 우러르게 되었소. 그리하여 제위로 나서시니 이는 권세로써 빼앗은 것이 아니라 실로 천명이 그분께로 돌아간 것이었다 할 수 있소. 세조 문제 조비께서는 문무에 깊이 통달하시어 그 대통을 이어받아 하늘의 듯에 응하고 백성들의 마음에 화합하여 순 임금이 요 임금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듯 한을 이어받으셨소. 그리하여 중국에 계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니 이는 곧 하늘의 뜻이며 백성들의 바람이기도 했소. 공은 큰 재주와 높은 뜻을 지니어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신다 하였소. 그러면서 어찌 그 같은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억지를 써서 거스르려 하시오? '하늘의 뜻에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는 말씀도 듣지 못하셨소? 지금 우리 대위는 무장한 군사가 1백만이요, 용맹스런 장수가 1천 명이나 어찌 시든 풀숲의 반딧불이 하늘의 밝은 달과 그 빛을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공은 창을 거꾸로 잡고 갑옷을 벗어 던지고 항복하도록 하시오. 그렇게 하면 봉후의 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오. 그것이 곧 나라를 편안케 하고 백성들을 즐겁게 할 것이니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소!"

왕랑의 언변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위를 세운 태조 조조의 위업을 설파하며 공명에게 혓바닥의 칼날을 들이대었다. 양군은 쥐죽은 듯이 조용한 가운데 시선은 왕랑이 던진 말에 대꾸할 공명의 입으로 쏠려 있었다. 그러자 공명이 껄걸 웃으며 왕랑의 말을 받았다.

"그래도 공이 한조의 오래된 신하라 반드시 무슨 귀한 말씀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어찌 그리 더럽고 천한 말만 하시오? 이제 내가 할 말이 있으니 조용히 들어 보시오."

공명은 잠시 말을 끊고 적진을 둘러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옛날 환제, 영제 시절에 한통이 약하고 힘이 없어 환관의 무리가 환을 빚어내니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흉년이 이어져 천하가 소란스러웠소. 황건의 난리가 있은 뒤로 동탁. 이각. 곽사 등이 줄줄이 일어나서 천자를 억압하며 백성들을 못 살게 하였소. 조정에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사람이 없는 것과 같고, 썩은 나무 같은 자들이 벼슬을 지내며 궁전에는 짐승이나 벌레 같은 것들이 나라의 녹을 먹고 있었소. 또한 마음은 이리 같고 행실이 개 같은 무리가 조정을 채웠고, 아첨이나 일삼는 자들이 조정에서 정사를 휘둘러 사직은 폐허가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졌소."

여기서 공명은 깃털 부채를 들어 왕랑을 가리키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왕 사도, 나는 그대가 한 짓을 잘 알고 있소. 대대로 동해의 바닷가에 살다가 처음에 효렴에 뽑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는가. 그러하니 도리상 마땅히 천자를 보좌하여 나라를 바로잡으며 한실을 편안히 하여 유씨를 받들어 세웠어야 옳은 일이거늘 도리어 역적을 도와서 함께 제위를 훔쳐서야 되겠소? 그 죄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하리니 천하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대의 살을 씹고자 벼르고 있소. 지금 다행히 하늘의 뜻이 한실을 버리려 하지 않으시니 소열황제(유비)께서 서천에서 대통을 이으셨고, 그 뒤를 이으신 천자의 조칙을 받들어 내 이제 대군을 일으켜 역적을 토벌코자 여기에 온 것이오. 그대와 같은 아첨배는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서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챙길 궁리나 하고 있어야 어울리건만 감히 함부로 진 앞에 나와 하늘의 운세가 어떻고 하며 지껄이니 가소롭다 못하여 역겨움을 느끼오. 이 머리 허연 하찮은 것아, 흰 수염의 늙은 도적이여! 이 들판에다 늙은 주검을 누인다 한들 무슨 낯으로 한의 스물네 황제를 뵙겠는가. 늙은 도적은 썩 물러가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역적이나 불러내 나와 승부를 가리게 하라."

공명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 호통이 되었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화살과 같이 왕랑의 폐부를 꿰뚫은 듯이 보였다. 결론적으로는 한조를 대신하여 일어선 촉의 조정과 위의 조정 중 어느 조정이 정통인가를 따지는 것이 되었지만, 이 정통은 위에는 위의 주장이 있고, 촉에는 촉의 논거가 있어서 장군하면 멍군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명은 이념의 싸움을 피하고 뭇 사람 정서에 호소한 것이었다. 공명이 말을 마치자 촉의 군사들은 '와아' 소리를 지르며 그의 변론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와는 반대로 위의 진영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또한 당사자인 왕랑은 공명의 통렬한 일격에 가슴에는 기가 가득 차고 피는 뜨겁게 치솟는 듯했다. 왕랑이 얼굴을 붉 물들이며 가슴에 치솟는 부끄러움을 억누르지 못하다''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말 아래로 거꾸로 떨어져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뒷날 사람들이 이때의 일을 시로 지어 노래했다.

수많은 군사 서진으로 이끌어 빼어난 지모로 만인과 맞섰네.

세 치 혀 거침없이 휘둘러 한 소리 꾸짖어 늙은 간신 죽였네.

공명은 왕랑이 죽는 걸 지켜보다가 부채를 들어 위의 도독 조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가 너마저 핍박하지는 않겠다. 어서 돌아가 군마를 정돈한 후 내일 나와서 승패를 가리자."

공명은 그 말을 마치자 수레를 되돌렸다. 왕랑에게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조진은 그의 어이없는 죽음을 보자 기가 꺾이고 말았다. 조진은 군사를 거두어 물러간 후 왕랑의 시신을 거두어 관에 넣은 다음 장안으로 보냈다. 부도독 곽회가 조진을 격려할 겸 계책을 내었다.

"제갈량이 오늘 밤 왕랑의 장례를 치를 것으로 알고 반드시 야습해 올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걸 노려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두 갈래는 험한 산길로 가 촉군의 영채를 들이치고 두 갈래는 본채 밖에 매복시켰다가 야습해 오는 적을 덮치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 계책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바와 어긋남이 없소."

조진이 기뻐하며 곽회의 계책을 선뜻 받아들인 후 조준. 주찬 두 선봉 장수를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들은 각각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샛길로 빠져 기산 뒤로 나가라. 촉병이 우리 영채를 향해 떠나거든, 그 틈을 타 촉의 영채를 빼앗도록 하라. 그러나 만약 촉병이 움직이지 않거든 곧 군사를 거두어 돌아오라. 결코 함부로 나아가서는 아니 된다."

두 사람이 영을 받들고 나가자 조진이 확회에게 다시 말했다.

"우리 두 사람도 각기 한 갈래의 군사를 이끌고 진채 밖에 매복하도록 합시다. 진채 안에는 짚더미를 쌓아 두었다가 촉병이 밀려오면 불을 질러 신호로 삼으로 될 것이오."

위로서는 빈틈없는 계책이요. 완벽한 채비였다. 그 무렵, 공명도 조운과 위연을 장막에 불러들이고 말했다.

"두 장군은 각각 본부군을 거느리고 위군의 진지를 야습하라."

그러자 위연은 공명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조진도 병법에는 매우 밝은 사람입니다. 자기들이 장례를 치르는 때 타서 우리가 야습하리라는 것쯤은 다 알아차리고 방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

그 말에 공명은 가볍게 웃으며 속마음을 밝혔다.

"조진이 우리의 야습을 미리 짐작하고 있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그는 기산의 뒤편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우리의 군사가 야습하러 떠난 뒤에 허를 찔러 우리 영채를 빼앗으러 올 것이다. 때문에 그대들을 그가 바라는 바대로 보내는 것이다. 도중에 만일 변이 있으면 즉시 이렇게 하라."

공명은 두 사람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계책을 일러 주었다. 이어 관흥. 장포 두사람에게 각기 군사를 주어 기산의 험준한 곳으로 나가 매복해 있다가 위병들이 그 앞을 지나가면 그들을 뒤따라 위의 영채를 치게 했다. 다시 마대. 왕평. 장위 세 사람에게도 영채 밖에 숨어 있다가 위병이 오면 달려 나와 들이치게 했다. 공명은 여러 장수들을 내보낸 뒤 영채 안에 마른 섶을 쌓아 놓도록 하여 불을 질러 군호를 올리게 했다. 이어 스스로는 장수들을 거느리고 영채 뒤에 숨어 위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위의 선봉대장 조준과 주찬은 저녁 무렵이 되자 군사를 이끌어 촉의 영채로 나아가 살폈다. 밤 이경이 되자 왼편 산 아래쪽에 어렴풋이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조준은 뜻대로 일이 진전된다고 기뻐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곽 도독은 실로 귀신과 같은 헤아림을 가졌구나."

조준은 급히 군사를 내몰았다. 촉군의 본영에 이르렀을 때는 밤 삼경에 가까웠다. 조준이 먼저 함성을 지르며 영채로 짓쳐들었으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촉군 본영의 네 문에는 깃발만이 외로이 서 있을 뿐 군사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각처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나뭇더미가 모두 불길을 내며 타기 시작했다.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 촉의 본영은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조준이 그때서야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소리쳤다.

"적군에게도 무언가 계책이 있는 것 같다. 빨리 물러나라!"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위군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불길 속으로 떠밀려 들어오기만 하였다. 때마침 주찬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위병들은 어둠 속에서 밀어닥친 군사가 자기 편임을 알지 못했다. 서로 칼을 빼들고 싸우니 혼란에 빠진 가운데 저희끼리 베고 찔렀다. 한동안 싸운 조준과 주찬이 서로 맞닥뜨린 뒤에야 비로소 저희끼리 싸운 줄을 알고 황급히 군사들을 수습했다. 그때 홀연 함성이 크게 일며 정말 촉병이 밀어닥쳤다. 촉군의 마대. 왕평뿐 아니라 야습하러 갔던 장위와 장익 등도 급히 되돌아와서 위군의 퇴로를 끊고 가로막아 위군 전체를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조준과 주찬의 군사는 전군이 꺾이는 타격을 받았다. 불길에 휩싸여 타죽는 자, 저희들끼리 밟고 밟혀서 죽는 자, 서로 찌르고 찔려서 죽는 자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조준. 주찬 두 장수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만 가까이 따르는 수백 기만을 거느리고 길을 뚫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조준과 주찬에게 닥친 위태로움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한동안 말을 달리고 있는데 홀연 북 소리, 피리 소리가 일며 한 떼의 군사가 달려와 길을 막았다. 앞선 장수는 바로 조운이었다.

"적장은 달아나지 말고 내 칼을 받으라!"

조준과 주찬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길을 열어 달리는데 위연이 또 한 떼의 군사를 이끌어 내달아 왔다. 조준과 주찬이 남은 힘을 다해 길을 헤치며 달아나 가까스로 위의 본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에서도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조준과 주찬이 본채로 달려가자 그곳에 남아 있던 위병들은 저마다 야습하러 오는 촉병이 진으로 밀려드는 줄 알고 황망히 불을 질러 군호를 올렸다. 그러자 왼편에서 조진이. 오른편에서 곽회가 달려 나와 마주 오는 군사들을 들이치니 또 한 번 저희끼리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의 등 뒤에서 진짜 촉병이 세 갈래로 짓쳐 들어왔다. 가운데는 위연, 왼편에는 관흥, 오른쪽은 장포가 이끄는 군사였다. 세 갈래 군마가 덮쳐들자 그제야 위병은 자기들끼리 어처구니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군마를 수습해 촉병에게 맞서기는 이미 늦은 때였다. 전군이 촉군에게 크게 짓밟힌 채 10여 리나 물러났다. 공명은 적을 깨뜨리자 군사를 거두어 본채로 돌아갔다. 조진과 곽회는 싸움에 크게 지고 쫓겨나자 나머지 군사를 수습했다.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채 뒷일을 의논했다.

"지금 우리 군사의 형세가 고단한데 촉병은 사기가 드높아 있다. 어떻게 해야 저들을 칠 수 있겠는가?"

조진이 무거운 얼굴로 그렇게 묻자 곽회가 대답했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매양 있는 일이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촉군으로 하여금 머리와 꼬리를 서로 돌보지 못하게 하면 절로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어떤 계책인가?"

조진이 반가운 얼굴로 얼른 되물었다.

"서강은 태조(조조) 때부터 우리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문황제(조비)께서도 또한 은혜를 베푸신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험한 곳에 의지해 굳게 지키며 사람을 뽑아 강중으로 보내 구원을 청하게 하되 아울러 화친을 맺고자 하면 서강에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촉군의 등을 칠 것입니다. 그때를 틈타 우리가 대군을 휘몰아 저들의 앞쪽을 치면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조진으로서는 싸움에 지자 마음이 다급했다. 그러나 패한 군사들을 이끌어 다시 촉병과 싸울 엄두를 못내고 있는 터라 곽회의 계책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조진은 곽회의 말을 좇기로 하고 곧 사람을 뽑아 글을 써 주어 서강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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