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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8-1

8권 슬프도다 회자필멸

 

관을 메고 싸움터에 나선 방덕

동오로 돌아간 제갈근은 손권을 보자 감히 둘러대지 못하고 관우가 한 말을 사실대로 전했다. 관우가 동오의 군주인 자신을 감히 개라고 지칭했다는 말에 손권은 분을 이기지 못해 길길이 날뛰었다.

"그놈이 어찌 그렇게 무례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그렇게 소리친 손권은 그 즉시 장소를 비롯한 문무의 벼슬아치들을 불러모아 형주를 칠 일에 대해 의논했다. 손권이 화에 치받혀 성급히 군사를 내려 하자 보질이 조조의 속셈을 알려 주었다.

"조조가 오래전부터 한을 없애고 천자가 될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유비가 두려워 함부로 군사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우리에게 사자를 보내 촉을 치게 함은 바로 동오에 모든 화근을 덮어씌우려는 뜻입니다. 그런 뒤에 촉과 동오를 함께 취하려는 뜻입니다."

그러나 손권은 여전히 분을 누르지 못한 채 보질에게 말했다.

"그렇지만은 않소. 나 역시 오래 전부터 형주를 되찾을 궁리를 하지 않았소?"

손권이 성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보질은 생각해 둔 바가 있는 듯 손권을 달래며 의견을 내었다.

"섣불리 형주를 공격함은 위의 계략에 빠지는 일입니다. 그것보다는 위나라의 군마를 오를 위해 쓰도록 하십시오."

"그렇다면 무슨 계책이라도 있소?"

보질이 그렇게 말하자 손권은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지금 조인은 양양과 번성에 둔병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처럼 장강의 험한 강물이 가로막지 않아 뭍으로 직접 형주를 치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스스로 치지 않고 주공께서 군사를 일으키라 했겠습니까?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조조의 속셈이 어떤 것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사람을 하도로 보내시어 조조에게 조인으로 하여금 먼저 군사를 뭍으로 가서 형주를 치게 하십시오. 그러면 운장은 반드시 형주 군사를 내어 번성을 치려 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장수를 보내 형주를 공격한다면 어렵지 않게 빼앗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손권이 보질의 말을 들으니 그럴듯했다.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곧 글을 써 사람을 시켜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는 손권이 군사를 낼 준비를 한다는 사자의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조조는 동오와 촉이 손을 잡을까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있던 터에 동오와 촉의 화친을 미리 막고 촉을 고립시킨 것만도 다행이라 여겨 두말 않고 손권의 말에 따랐다. 조조는 손권의 사자를 후히 대접해 돌려보낸 후 만총을 번성으로 보내면서 말했다.

"그대는 번성으로 가서조인의 참모관이 되어 형주를 치는 일을 돕도록 하라."

만총을 떠나보낸 조조는 다시 동오로 격문을 보내 조인이 뭍으로 공격할 테니 물길로 군사를 거느려 조인과 호응토록 했다. 그 무렵, 한중왕(유비)은 동천을 위연에게 맡겨 지키게 하고, 자신은 문무관원을 거느리고 성도로 돌아갔다. 유비는 왕위에 오른 터이므로 대궐과 관아를 다시 넓혀 짓게 하고 역관도 마련케 했다. 성도에서 백수(사천성, 광원현 서북, 촉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 관사와 우정(여행하는 관원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역참)4백여 곳이나 세웠다. 또한 군량과 마초를 비축하고 병기를 만들게 하여 중원으로 밀고 들어가기 위한 채비를 했다. 유비가 나라 안의 일에 겨를이 없는 어느 날 급보가 날아들었다.

"조조가 동오와 손을 잡고 형주를 치려 합니다."

유비는 그 말에 깜짝 놀라 급히 공명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그러나 공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는 이미 조조가 이런 꾀를 낼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오의 모사들은 재주가 가볍지 않아, 반드시 조조로 하여금 조인을 시켜 먼저 군사를 내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소?"

"사람을 형주의 관운장에게 보내시어 먼저 번성을 치도록 이르십시오. 그러면 적군은 두려워 저절로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공명이 그렇게 말해 유비를 안심시켰다. 이에 유비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전부마사 비시에게 관고(벼슬의 사령)를 주어 형주로 보냈다. 비시가 형주에 이르자 관우는 성 밖까지 나와 그를 맞아들였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자 관우가 궁금한 듯 물었다.

"한중왕께서 내게 어떤 벼슬을 내리셨소?"

"장군은 오호대장의 으뜸이십니다. "

"오호대장이라니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오?"

관우가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장군과 장익덕, 조자룡, 마초, 그리고 황충입니다."

비시가 다섯 장군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관우가 불끈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익덕은 나의 아우이니 그렇다 치고, 마초도 여러 대에 걸친 명문 출신이요, 자룡은 형님을 모신지 오래이고 내 아우나 다름이 없으니 나와 같이 나란히 해도 괜찮소. 그러나 황충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나하고 감히 나란히 한다는 말이오? 대장부로서 늙은 졸개와는 같은 줄에 설 수 없소이다."

관우는 자존심이 몹시 상한 듯 한중왕이 내린 인수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비시가 관우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다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 반드시 그렇게만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 옛날 한 고조의 공신인 소하와 조참은 천자와 함께 대업을 이루어 가장 친근한 사이였고, 한신은 초에서 투항해 온 장수였습니다. 그런데도 고조는 소하와 조참보다는 한신의 벼슬을 더 높게 하셨소. 그러나 소하와 조참이 그것을 원망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이다. 이번에 한중왕께서 장군을 오호대장으로 삼으셨으나 장군과는 형제지간이라 자기 한 몸처럼 여기신 것입니다. 장군이 바로 한중왕이시며 한중왕이 바로 장군이니 어찌 다른 사람과 같게 여기시겠습니까? 장군은 이미 한중왕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기쁨과 슬픔, 화와 복을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남처럼 벼슬이 높고 낮음을 가리려 하십니까? 장군께서는 다시 한번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비시가 관우의 드높은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조리 있게 설명을 해 주자 관우는 크게 깨달은 바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시에게 두 번 절하며 공손히 말했다.

"내 판단이 밝지 못했소이다. 공의 가르침이 아니었더라면 큰일을 그르칠 뻔했소이다."

관우는 즉시 무릎을 꿇고 인수를 받았다. 비시는 인수를 관우에게 건넨 후 한중왕의 영을 전했다.

"한중왕께서 군사를 일으켜 번성을 치라는 영을 내리셨습니다."

관우는 영을 받자 곧 부사인과 미방 두 사람을 선봉으로 삼아 군사를 형주성 밖에 둔병케 하고, 성안에 잔치를 열어 비시를 대접했다. 관우가 비시와 서로 술잔을 권하며 즐겁게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어 이경 무렵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수하 한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성 밖 영채에 불이 났습니다."

그 소리에 놀란 관우는 급히 갑옷을 꿰입고 말 위에 올라 성 밖으로 달려갔다. 부사인과 미방이 장막 뒤에서 술을 마시다 실수하여 장막 뒤에 불이 붙어 불길이 화포에까지 옮겨 일어난 것이었다. 화포에 불이 붙자 벼락 치는 듯한 폭발음이 나며 영채를 뒤흔드는 가운데 병장기와 군량, 거기다 마초에까지 불길이 번져 모두 태워 버리고 말았다. 관우가 군사들을 재촉하여 불을 끄는데 사경 무렵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불길을 잡을 수가 있었다. 관우는 불을 끈 후 성안으로 부사인과 미방을 불러들여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내가 너희 둘을 믿고 선봉으로 세웠는데 군사를 움직이기도 전에 함부로 술을 마셔 병장기와 군량을 태우고 화포가 터져 군마까지 상하게 했다. 이처럼 일을 크게 그르치게 한 너희들을 믿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관우는 그들을 향해 호통을 친 뒤 좌우를 돌아보며 그들의 목을 베라는 영을 내렸다. 그 자리에 있던 비시가 그런 관우를 간곡히 말렸다.

"군사를 움직여 싸움터에 나가는 마당에 장수를 둘씩이나 목 베는 일은 이롭지가 못합니다. 잠시 그 죄를 덮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우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으나 비시가 나서 말리자 그들을 목 베는 일 만은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사마 비시의 낯을 보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너희 둘의 목을 베었으리라."

관우는 그들에게 곤장 사십 대를 맞게 하고 선봉의 인수를 빼앗은 다음 미방은 남군에, 부사인은 공안으로 쫓아 보내 그곳을 지키게 했다. 미방과 부사인은 스스로도 잘못이 크다는 것을 알고 아무런 말도 없이 절하고 관우의 명을 받들었다. 관우는 떠나는 그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앞으로 이와 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른다면 그때는 두 가지 죄를 함께 물어 선 자리에서 목벨 것이니 그리 알라!"

부사인과 미방은 관우의 엄명에 부끄러운 낯빛이 되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물러갔다. 관우는 그들을 보낸 후 곧 요화를 선봉으로 삼고, 양아들 관평을 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은 중군을 거느렸다. 또한 마량과 이적을 참군으로 삼아 함께 번성으로 향했다. 관우가 군사를 내자 비시는 서천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그는 형주성에 머물고 있던 호화의 아들 호반을 데리고 갔다. 호반은 관우가 지난날 자기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는 호화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 데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를 한중왕에게 천거하기 위해 비시에게 딸려 보낸 것이었다. 한편 관우는 수자가 수놓여진 큰 기치에 제사를 올린 후 장막 안에서 잠시 졸고 있었는데 예사롭지 않은 꿈을 꾸었다. 홀연 소만한 시커먼 멧돼지 한 마리가 장막 안으로 뛰어들더니 관우의 발을 꽉 물었다. 그러자 관우가 화가 치밀어 칼을 빼들어 돼지를 베어 버렸다. 돼지가 벼락 치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관우가 깨어 보니 꿈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돼지에게 물린 발이 욱신욱신 쑤시고 아파오는 것이었다. 관우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조짐으로 여겨 관평을 불러 꿈 이야기를 했다. 관평이 꿈 이야기를 듣더니 아버지를 안심시키려는 듯 좋은 해몽을 해 주며 위로했다.

"돼지를 저룡이라 했듯이, 돼지는 용의 기상이 있는 동물입니다. 용이 발에 와서 붙은 것은 곧 높이 오르실 징조이니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관우는 그 말을 듣고도 개운치 않아 여러 관원들을 불러보아 놓고 꿈 이야기를 들려준 후 물었다. 그러나 제각각 길한 꿈이니 나쁜 꿈이니 하며 떠들어댔다. 관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내가 대장부로 태어나 나이 이미 예순에 가까우니 이젠 죽은들 무슨 한이 남겠는가? 그대들은 더 이상 꿈 얘기를 하지 말라."

관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촉으로부터 사신이 도착해 한중왕 유비의 영을 전했다.

"장군을 전장군으로 제수하시고 절과 월을 내리시어 형주와 양양 아홉 군을 도독하시라 하셨습니다."

관우가 절을 올리며 왕의 영을 받들자 모든 관원들은 일제히 경하해 마지않으며 말했다.

"꿈에 돼지를 보신 이후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났으니 그 꿈의 좋은 징조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관우도 그 말을 듣자 곧 꿈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군사를 거느리고 양양으로 향하는 큰길로 나가 말을 몰았다. 이때 조인은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며 나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성안에 틀어박혀 지키기만 했다. 그런 조인을 보자 부장 적원이 권했다.

"위왕께서 장군께 사람을 보내 동오 군사와 함께 형주를 치도록 명하셨습니다. 거기다가 관운장이 제 발로 걸어 오니 스스로 죽기를 청하는 것인데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나가 싸우지 않으십니까?"

적원이 관우를 지나치게 가벼이 여기고 있는 듯하자 이번에는 만총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서며 조인을 말렸다.

"제가 알기로는 관운장은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지모 또한 대단하다고 하니 경솔히 맞서서는 아니 됩니다. 성을 지키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만총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제법 사납고 날랜 장수로 알려진 하후존이 나서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건 한낱 글이나 읽는 선비들이 하는 말입니다. '물이 밀어닥치면 흙으로 막고 적의 장수가 이르거든 군사를 내어 싸우라'고 했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우리 군사는 편안히 앉아, 예까지 달려오느라 지친 적을 맞는 것인데 무엇이 두려울 게 있겠소이까? 나아가 적을 치면 어렵지 않게 이길 것입니다."

조인 역시 싸움터를 누빈 장수인지라 두 장수가 나서 싸우기를 청하자 마음이 달라졌다. 만총에게 번성을 지키게 한 다음 말 위에 뛰어올라 관우를 맞으러 나갔다. 조인이 기세를 드높이며 군사를 이끌어 온다는 말을 듣자 관우는 관평. 요화에게 계책을 주어 먼저 나아가 그들을 맞게 했다. 관평과 요화는 군사를 이끌어 마주 오는 조인과 맞닥뜨리게 되자 둥그렇게 진을 벌여 세웠다. 조인도 둥글게 진을 벌인 가운데 먼저 요화가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가자 조인의 진에서는 적원이 마주 달려 나왔다. 두 장수가 맞부딪쳐 어우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요화가 짐짓 대적할 수 없다는 듯 말을 돌려 달아났다. 적원이 기세를 올리며 달아나는 요화를 뒤쫓자 형주군은 멀리 20여 리나 군사를 물렸다. 다음 날이 되자 전날 쫓겨 달아났던 형주 군사가 다시 조인의 군사를 맞으러 나왔다. 그러자 적원과 함께 하후존이 한꺼번에 군사를 이끌었다. 단번에 형주군을 휩쓸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형주군이 그 기세에 눌린 듯 쫓겨나니 이를 본 조인이 신이 나 급한 기세로 뒤쫓았다. 조인이 형주군을 뒤쫓아 한 20여 리 왔을까? 문득 등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북소리와 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조인은 그제서야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전군은 물러가라. 적의 계교다!"

조인은 급히 소리쳤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등 뒤에서 달려오는 것은 자기편 군사가 아니라 쫓기고 있던 관우의 장수 요화와 관평이었다. 조인의 군마는 앞만 보고 달려가다 이 뜻밖의 기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미 계교에 빠졌음을 안 조인은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양양으로 말을 달렸다. 한동안 뒤돌아볼 사이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양양이 불과 몇 리 남지 않은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홀연 앞쪽에서 수놓은 깃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달려온 한 떼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기가 바람에 젖혀지면서 얼굴을 드러낸 장수는 청룡도를 비껴든 다름 아닌 관우였다. 조인은 관우를 보자 손발이 떨려 감히 나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황급히 말을 재우쳐 옆길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조인이 옆길로 달아나자 관우는 굳이 뒤쫓지 않고 그 자리에 말을 세운 채 서 있었다. 오래지 않아 하후존이 이끄는 군사가 관우가 막고 서 있는 길에 이르렀다. 하후존은 길을 막고 서 있는 관우를 보자 대뜸 크게 화부터 내더니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관우를 너무 모르고 덤빈 무모한 도전이었다. 관우가 하후존을 맞아 청룡도를 번쩍이는 순간 그는 1합 만에 그를 두 동강 내고 말았다. 뒤따르던 적원이 그 모양을 보자 얼굴색이 달라지더니 관우를 피해 달아나려다가 뒤따라오던 관평의 칼에 맞아 그 역시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관우가 여세를 몰아 뒤쫓으며 휩쓸자 달아나던 조인의 군사들 중 태반이 앞에 가로놓인 양양의 강물에 빠져 죽었다.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인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황급히 양양을 버리고 번성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관우는 조인을 쫓아내고 양양성을 빼앗자 군사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곳의 백성들을 안무했다. 양양성이 안정되자 수군사마 왕보가 관우를 일깨웠다.

"장군께서는 북소리 한 번 울려 양양의 큰 고을을 차지하고 조조 군사를 떨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동오의 여몽은 육구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여 형주를 엿보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기회를 보아 형주로 밀고 들어간다면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왕보의 말에 관우도 그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실은 나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네. 그대가 그 일을 맡아 주게. 강언덕에 2, 30리 간격으로 봉화대를 쌓고 군사 50여 명을 두어 지키게 하되 밤에는 불로 군호를 하고, 낮이면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하도록 하게. 내가 봉화대를 살피고 있다가 불이나 연기가 오르면 즉시 달려가 동오 군사들을 들이치겠네."

"미방과 부사인이 남군과 공안의 두 험한 길목을 지키고 있으나 힘을 다해 지킬지가 걱정입니다. 그쪽에도 장수 한 사람을 보내 형주를 도맡아 지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왕보가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다시 관우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그곳으로 치중 벼슬에 있는 반준을 보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걸세."

그러나 왕보는 고개를 저으며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반준이란 사람은 평소 시기심이 많고 자기의 이득만을 밝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겨서는 아니 됩니다. 차라리 군전도독 양료관(양곡관리) 조루로 하여금 그 일을 맡도록 하십시오. 그 사람은 충성스럽고 청렴할 뿐만 아니라 성정이 굳세니, 어떤 무거운 책임을 맡겨도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관우는 그 말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도 원래 반준을 알고 있으나 이미 결정해서 보낸 터이니 다시 딴 사람으로 바꿀 필요는 없네. 조루도 지금 군량과 마초를 맡아 보고 있고 그 일 또한 중요한 일이니 그대로 맡아 하도록 함세. 그대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서 봉화대나 쌓도록 하게."

왕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뒷날 자신에게 얼마만큼 엄청난 해를 끼칠 수 있었는지 관우는 그때 알지 못했다. 관우가 자기의 말을 물리치자 왕보는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절하며 나왔다. 왕보가 형주로 돌아가자 관우는 관평을 불러 번성을 치는 일을 서두르게 했다.

"많은 배를 모으도록 하라. 강을 건너 번성을 치리라."

관평은 그날부터 되도록 많은 배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 조인은 거느렸던 두 장수 하후존과 적원을 잃고 많은 군사마저 꺾인 채 번성으로 들어가 만총에게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공의 말을 듣지 않다가 두 장수와 군사를 잃고 양양마저 빼앗기고 돌아왔소. 이제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관운장은 범 같은 장수인 데다 지모까지 갖춘 장수이니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됩니다. 그저 굳게 지키도록 하십시오."

만총이 좋은 말로 조인에게 말했다. 조인과 만총은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관운장이 양강을 건너 번성을 치러 온다고 합니다."

그 소리에 조인은 얼굴색이 달라지며 만총에게 물었다.

"어찌했으면 좋겠소?"

"나가 싸우지 말고 굳게 지키기만 하십시오."

만총이 다시 한번 조인에게 알렸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여상이 분연히 나서며 말했다.

"저에게 군사를 몇 천만 주십시오. 적이 양강을 건너기 전에 물리치겠습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오."

만총이 여상의 말을 막았다. 그러자 여상이 벌컥 화를 내며 대들었다.

"도대체 그대들 문관들은 그저 지키라고만 하니 언제 적을 물리치겠다는 말이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치라'하였소. 지금 관운장이 양강을 건너고 있는 중인데 어찌하여 그들을 보고만 있으라 하시오? 적군이 성 아래에 파 놓은 구덩이까지 밀고 들어오면 그때야말로 당해 낼 수가 없을 것이오."

여상의 말을 듣고 조인의 마음도 달라졌다. 관우가 성 아래까지 쳐들어온다면 가만히 앉아 성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어 여상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곧 여상에게 군사 2천을 주어 번성 밖으로 나아가 관우를 맞게 했다. 여상이 군마를 이끌어 양강에 이르자 이미 강가에는 수놓은 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 깃발 아래 관우가 수염을 날리며 청룡도를 비껴들고 말 위에 앉아 달려오는 여상의 군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상이 칼을 빼 들고 관우를 향해 달려가려는 데 뒤따르던 군사들이 주춤거렸다. 관우의 위풍당당한 범 같은 자태를 보자 미리 겁을 집어먹은 졸개들은 여상이 말을 몰아가는데도 싸울 마음을 잃은 채 뿔뿔이 흩어질 뿐이었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앞으로 나아가 적을 쳐라!"

여상이 소리쳤으나 졸개들의 대오는 이미 뭉그러져 어지러워진 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싸우기도 전에 적군의 혼란을 본 관우는 먼저 군사를 내몰았다. 관우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덮쳐들자 여상의 군사들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관우의 군사들이 달아나는 적을 베고 찌르며 들이치니 여상의 군사는 마군. 보군을 가릴 것 없이 태반이 꺾인 채 번성으로 몰려들고 말았다. 여상이 이끈 군사가 반이나 줄어든 채 번성으로 도망쳐 오자 조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급히 구원병을 청하는 길밖에 없었다. 조인은 사람을 뽑아 장안의 조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조인의 사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안으로 달려 조조에게 조인의 글을 전하며 아뢰었다.

"관운장이 양양을 빼앗고 다시 번성을 빼앗으려 에워싸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급히 용맹스런 장수를 보내시어 구원해 주십시오."

조인의 글을 읽고 난 조조는 성난 눈으로 좌우를 살피더니 문득 한 장수를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대가 가서 번성의 포위를 헤쳐 보겠는가?"

"알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조조가 손으로 가리킨 장수는 바로 우금이었다. 우금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더니 조조에게 청했다.

"제게 선봉장 한 사람을 붙여 주십시오."

우금의 청에 조조는 다시 여러 장수들을 휘둘러 보며 물었다.

"누가 선봉이 되어 나가겠느냐?"

"제가 가겠습니다. 힘을 다해 관운장을 사로잡아 대왕 앞에 무릎을 꿇게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장수가 있었다. 여러 장수가 그를 보니 지난날 마초의 상장으로 용맹을 떨치다 투항해 온 방덕이었다. 방덕의 용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조조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운장은 위세를 화하(전국토)에 떨치고 있는 자요. 아직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했는데 이제 강하고 억센 영명(방덕의 자)을 만나게 되었구려."

조조는 한껏 방덕의 의기를 추기며 그를 정서도선봉으로 삼는 한편 우금을 정남장군으로 높여 일곱 갈래로 나눠 군사를 이끌게 했다. 그 칠로군의 군사들은 모두 북방의 날랜 군사들로 가려 뽑았는데 평소 그 군사들을 거느리던 영군장교로 동형과 동초가 있었다. 우금이 군사 낼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문득 그 장교 중의 하나인 동형이 찾아와 말했다.

"이제 장군께서 날래기로 이름난 칠로군의 군사를 거느려 번성의 위급한 형세를 풀어주려 하심은 곧 반드시 이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방덕을 선봉으로 삼았으니 일을 그르칠까 두렵습니다."

그 소리에 우금이 놀란 얼굴로 동형에게 물었다.

"출진을 앞두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금의 급한 물음에 동형이 열띤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방덕은 마초 밑에서 부장으로 있었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마지못해 투항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전 주인이었던 마초는 지금 촉에서 오호대장 중의 한 사람으로 있습니다. 뿐입니까? 그의 친형 방유도 촉에서 낮지 않은 벼슬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방덕의 마음이 다른 싸움과 같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동요가 일터인즉 그를 선봉으로 삼는 일은 곧 타오르는 불을 기름으로 끄려는 것과 다름없는데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이 사실을 위왕께 아뢰지 않으십니까? 장군께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우금도 그 말을 듣고 보니 방덕이 마음에 걸렸다. 우금은 출정 채비로 바빴으나 창황히 부중의 조조를 찾아가 동형의 말을 전했다. 조조도 그 말을 듣더니 방덕을 선봉으로 삼은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곧 방덕을 불러들여 선봉의 인수를 거두었다. 뜻밖에 선봉의 인수를 내놓게 된 방덕이 놀란 얼굴로 조조에게 물었다.

"제가 이제 대왕을 위해 힘을 다해 싸우려는데 무슨 까닭으로 저를 쓰지 않으시고 인수를 거두십니까?"

조조가 짐짓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내가 굳이 그대를 의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대의 옛 주인 마초가 유비의 오호대장이 되었고, 그대의 친형 또한 촉에서 벼슬을 지내고 있다 하여 말이 많으니 어찌 그들의 입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방덕은 조조의 말을 듣자 관을 벗어 던지고 머리를 땅바닥에 짖찧어 얼굴에 붉은 피를 흘리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제가 한중에 항복한 이후 대왕께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에 비록 간과 뇌를 땅바닥에 쏟는다 해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여기고 있는 터에 대왕께서는 어찌 저를 의심하십니까? 지난날 제가 고향에 있을 때 형과 한집에 살았는데 형수가 매우 어질지 못해 제가 술 취한 김에 형수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형은 제게 대한 원한이 뼛속까지 맺혀 다시는 저를 보지 않으려 하니 이미 형제의 정리는 끊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옛 주인 마초는 용맹은 빼어나나 지모가 없어 싸움에 진 이후 지닌 땅을 모두 잃게 되자 외로운 몸을 서천에 의지했습니다. 이제 섬기는 주인도 다르니 옛날의 의리도 벌써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이 방덕이 대왕의 두터운 은혜에 감복하고 있는 터에 어찌 눈꼽만큼이라도 딴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변함없는 이 마음을 살펴 주십시오."

방덕의 깨진 머리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방덕을 지켜보고 있던 조조는 그의 말이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 조조는 몸소 방덕을 부축해 일으킨 후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나는 평소에 공의 충성스런 마음을 잘 알고 있는 터이나, 조금 전에 한 말은 다만 여러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함이었소. 공은 이번에 가서 힘을 다해 공을 세우도록 하시오. 공이 나를 저버리지 않는 한 나 또한 공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방덕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한 뒤 물러났다. 집으로 돌아온 방덕은 관 하나를 짜게 했다. 다음 날이 되자 방덕은 출진하기 전에 가까운 벗들을 청해 잔치를 열었다. 방덕의 집을 찾은 손님들은 술을 마시다 대청 위에 놓여 있는 관을 보고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장군이 군사를 거느려 떠나는 터에, 어째서 저같이 상서롭지 못한 물건을 만들어 두었소?"

그러자 방덕이 술잔을 치켜들며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위왕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목숨을 바쳐 보답하기로 했소. 이제 번성으로 가서 관운장을 맞아 싸울 터인데 내가 그를 죽이지 못하면 그가 나를 죽일 것이 틀림없소. 설령 내가 그를 죽이지 못하고 나 또한 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지라도 내 반드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므로 관을 짜 두게 한 것이오. 즉 관우가 죽든 내가 죽든 결코 빈손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인즉 그런 까닭으로 관을 메고 싸우러 나가는 것이오."

방덕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찬탄해 마지않았다. 방덕은 떠나기 전 아내 이씨와 아들 방회를 불러 말했다.

"내가 이제 선봉대장이 되어 마땅히 죽기로 작정하고 싸우러 나가니 만약 내가 죽거든 당신은 아이를 잘 길러 주시오. 우리 아이의 상이 범상치 않으니 뒷날 자라면 반드시 내 원한을 풀어 줄 것이오."

방덕의 말에 그 아내와 아들이 목놓아 울며 배웅했다. 방덕은 군사들에게 관을 메고 따라오게 하고 여러 부장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관운장과 싸우다 죽거든 그대들은 나의 시신을 이 관 속에 넣어 거두라. 만약 내가 관우를 죽인다면 그의 머리를 이 관 속에 담아 위왕께 바치리라."

방덕의 부장 5백여 명이 그 말을 듣고 일제히 입을 모아 외쳤다.

"장군께서 그토록 충성과 용맹을 바치시니 저희들이 감히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기로 작정하고 싸우겠습니다."

방덕은 수하 장수들이 그렇게 대답하자 흡족한 얼굴로 군사를 이끌어 떠나갔다. 이를 본 한 사람이 조조에게 나아가 방덕이 떠나면서 한 말을 전했다.

"방덕의 충성과 용기가 그러한데 내가 무엇을 걱정하리오."

조조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던 가후는 조조와는 달리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방덕이 지나치게 자신의 혈기만 믿고 관운장과 결판을 내려 하니 그 점이 걱정스럽습니다."

조조도 은근히 그 점을 염려하고 있던 터라 가후의 말을 듣고 급히 사람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게 했다.

"관운장은 용맹과 지모를 함께 갖춘 자니 결코 경솔히 맞서지 말라. 취할 만하면 취하되 그렇지 않거든 맞서지 말고 지키기만 하라."

그러나 조조의 뜻을 전한 것은 방덕의 혈기를 더 부추긴 셈이 되고 말았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관운장을 그토록 높이기만 하시는가? 내가 이번에 가서 기필코 그를 꺾어 30년이나 떨쳐 온 그의 이름이 헛된 것임을 보여 주리라."

방덕은 여러 장수들에게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방덕이 오히려 격동하자 우금이 타일렀다.

"그렇지 않네. 위왕의 말씀에는 큰 뜻이 있으니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될 것일세."

그러나 방덕은 그럴수록 더욱 분기가 치솟았다. 군사들을 호령하여 북과 징을 크게 울리게 하며 의기를 돋우었다. 이때 관우는 장막 안에 앉아 번성 깨칠 방책을 생각하고 있는데 홀연 탐마가 달려와 급보를 전했다.

"조조가 우금을 대장으로 삼아 칠로군의 날랜 군사를 이곳 번성으로 보냈다 합니다. 그런데 전부 선봉 방덕은 괴이하게도 관 하나를 앞세우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장군과 결판을 내겠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지금 번성 앞 30리쯤에 이르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우의 얼굴색이 달라지더니 아름다운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천하의 영웅들도 내 이름을 들으면 두려워 떨지 않는 자가 없거늘 방덕이란 더벅머리 애송이가 어찌 감히 나를 우습게 본다는 말이냐?"

관우는 이어 관평을 불러 영을 내렸다.

"너는 번성을 들이치도록 하라. 내가 몸소 가서 그 버릇없는 놈의 목을 베어 분을 풀리라."

그러자 관평이 관우에게 간곡히 청했다.

"아버님께서는 태산처럼 소중한 몸으로 어찌 한낱 돌멩이처럼 무지한 자와 다투려 하십니까? 제가 나가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방덕과 싸우겠습니다."

관평이 양아버지 관우의 드높은 자부심이 크게 상한 것을 진정시키며 말하자 관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가 먼저 나가 싸워보도록 하라. 내가 곧 뒤따라가 너를 도우리라."

관우가 선선히 허락하자 관평은 장막 밖으로 나와 갑옷을 입고 군사를 거느려 방덕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관평이 말을 달려 위군의 진영에 이르러 보니 문득 검은 기가 높이 세워져 있는데, 그 기에는 '안남 방덕'이란 네 글자가 흰 글씨로 크게 씌어 있었다. 검은 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데 방덕이 푸른 전포, 은투구에 긴 칼을 빼 들고 진문 앞으로 나섰다. 그 뒤에는 5백여 군사가 바싹 뒤따르는데 보졸 몇이 어깨에 관을 메고 서 있었다. 방덕이 진 앞에 나서자 관평이 소리쳐 꾸짖었다.

"주인을 버린 도적아, 네 주인이 있는 곳에다 창칼을 맞대려 하느냐?"

그러자 관평을 알지 못하는 방덕이 가까이에 있는 군사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관운장의 양아들인 관평입니다."

관평을 알고 있는 군사가 대답했다. 방덕은 그 말을 듣자 대뜸 관평에게 소리쳤다.

"나는 위왕의 영을 받들어 네 아비의 목을 베러 왔다. 너는 아직 머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아이이니 물러나고, 어서 네 애비더러 이리 나오도록 일러라."

방덕의 오만불손한 말에 관평은 화가 치솟아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렸다. 방덕도 말을 박차 관평을 맞으니 한바탕 싸움이 어우러졌다. 칼을 맞대 찌르고 막으며 싸운 지 30여 합이 되었으나 승패가 나지 않자 두 장수는 잠시 싸움을 중지하고 제각기 진으로 돌아와 숨을 돌렸다. 관평의 싸움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관우의 귀에 그 소식이 전해졌다. 방덕이 관평에게 했던 말을 전해 듣자 관우는 크게 노했다. 요화로 하여금 번성을 치라 이른 뒤 청룡도를 비껴들고 적토마를 몰아 방덕의 진을 향해 나서며 소리쳤다.

"관운장이 여기 왔다. 방덕은 어서 나와 목을 바쳐라!"

그러자 위군 진영에서 북소리가 크게 일더니 방덕이 말을 달려 나와 대꾸했다.

"나는 위왕의 뜻을 받들어 특별히 네 목을 베러왔다. 네가 믿을 수 없겠거든 여기 있는 이 관을 보라. 만약 죽기가 두렵다면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도록 하라."

관우가 눈을 부릅뜨며 벽력같이 소리쳤다.

"너 따위 하찮은 놈이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말이냐? 쥐새끼 같은 네놈을 베려니 이 청룡도가 아까울 뿐이다."

관우가 그말과 함께 말을 박차 방덕에게 달려가자 방덕도 칼을 휘두르며 관우를 맞았다. 두 장수가 억센 기운으로 창칼을 부딪치니 불꽃을 뿜는 가운데 한바탕 눈부신 싸움이 어우러졌다. 방덕의 칼과 관우의 언월도가 번쩍이며 불꽃을 튀길 때마다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두 장수가 내뿜는 기합 소리와 말과 말이 서로 싸우듯 울며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칼을 부딪기를 무려 1백여 합이나 하였으나, 두 장수는 싸울수록 더욱 힘이 솟구치는 듯했다. 양쪽 진영에서는 마치 용과 호랑이가 다투는 듯한 눈부신 한판 싸움을 모두 취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싸움이 언제 끝날지 모른 채 계속되고 있을 때 문득 위군 쪽에서 크게 징 소리가 울렸다. 방덕이 관우와 싸우다 끝내는 변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불러들이는 징 소리였다. 그러자 관평 또한 늙은 아버지가 걱정되어 징을 울려 불러들이니 두 장수는 동시에 칼을 거두고 각기 진으로 물러났다. 관우와 처음으로 싸운 방덕이 진으로 돌아오자 여러 사람이 그를 맞아들이며 감탄하여 말했다.

"사람들이 관운장을 영웅이라 하더니 오늘 보니 과연 헛된 이름이 아니었구나."

그때 총대장 우금이 말을 달려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우금이 물었다.

"내가 들으니 장군이 관운장과 1백여 합을 싸웠다 하나 아무런 이득도 없었다 했소. 그렇다면 잠시 군사를 물리는 게 어떻겠소?"

그 소리를 듣자 방덕은 분연히 우금에게 말했다.

"위왕께서 장군을 대장으로 삼으셨는데 어찌 그리 유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내일은 관운장과 죽기 살기로 싸워 기어코 결판을 내고야 말겠습니다.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방덕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우금도 더 이상은 입을 열지 못하고 물러가고 말았다. 관우도 그때 진영으로 돌아가 방덕에 대해 마음속으로 감탄했던 것을 관평에게 가만히 말했다.

"방덕의 칼 쓰는 법이 실로 능하더구나. 나의 적수가 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관평은 아버지 관우가 염려되어 방덕과의 싸움을 말리려 했다.

"아버님, 속담에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버님께서 그의 목을 벤다 하시더라도 그는 한낱 서쪽 오랑케의 졸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어코 그를 죽이려다 실수라도 하시면 이는 서천에 계신 큰아버님의 무거운 당부를 저버리시는 게 됩니다. 방덕과의 지나친 다툼을 거두십시오."

"내가 그자를 죽이지 않고 어떻게 분을 풀 수 있겠느냐? 내가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너는 여러 말 하지 말도록 하라."

관우는 관평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관우로서는 관까지 떠메고 와 자신과 겨루려는 방덕을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다음 날, 관우가 군사를 거느려 나아가자 방덕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 양군은 서로 마주 보며 둥그렇게 진을 벌여 세웠다. 진을 세우자 두 장수는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박차 칼을 부딪쳤다. 전날의 싸움의 연속인지라 두 장수는 군말을 주고받음도 없이 불꽃을 튀기며 어우러졌다. 그렇게 싸우기를 50여 합쯤이 되었을 때였다. 방덕이 문득 힘이 다한 듯 말머리를 돌려 달라나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방덕을 보자 관우는 속임수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뒤쫓기 시작했다. 관평도 방덕이 달아나는 것을 미심쩍게 여기며 관우가 염려되어 뒤따르기 시작했다. 관우가 방덕을 뒤쫓으며 소리쳐 꾸짖었다.

"방덕 이 좀도둑놈아, 네가 타도계(도망가다 급히 되돌아 공격하는 계략)를 쓰려 한다마는 내 어찌 네놈을 두려워하겠느냐!"

관우가 그렇게 외치며 더욱 말을 박차고 있을 때였다. 방덕은 관우가 자신의 타도계에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자 타도계를 쓰는 척하다 급히 칼을 안장에 끼우고 활을 내려 살을 메겼다. 뒤따르던 관평도 방덕의 속임수를 경계하던 터라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활에 살을 메기는 걸 보고 소리쳤다.

"방덕은 비겁하게 활을 쏘지 말라!"

관우가 그 소리에 눈을 부릅 떠 방덕을 바라보는데 시윗소리와 함께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관우가 급히 몸을 제치며 피했으나 화살은 왼쪽 팔에 꽂히고 말았다. 뒤따르던 관평이 아버지를 부축하여 진영으로 말을 몰았다. 방덕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말을 돌려 한칼에 치려고 관우와 관평을 뒤쫓는데 문득 자신의 진영에서 요란스럽게 징 소리가 울렸다. 그 징 소리를 듣자 방덕은 뒤쫓다 말고 말을 돌렸다. 거의 사로잡은 거나 다름없는 관우를 그대로 놓치게 되어 한스러웠으나 급하게 울리는 징 소리로 보아 후군에 무슨 변이라도 생겼는지 염려되었다. 방덕은 급히 말을 몰아 진영으로 돌아갔다. 징을 울려 방덕을 불러들이게 한 장수는 우금이었다. 방덕이 활을 쏘아 관우를 맞히자, 그가 큰 공을 세울까 봐 은근히 심술이 났던 우금은, 방덕이 총대장인 자신을 젖히고 관우를 죽이게 되면 자신의 위신이 떨어지리라 여긴 것이었다. 그러나 우금의 이런 심술이 끝내 자신에게 화를 부르리라는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방덕은 진영으로 헐레벌떡 달려와 우금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어찌하여 징을 울려 군사를 불러들였소?"

우금이 궁색한 말로 둘러댔다.

"위왕께서 항상 경계하라는 말씀을 내리시지 않았소? 관운장은 지모와 용맹을 함께 갖춘 사람이오. 비록 화살에 맞았다고는 하나 어떤 간계를 쓸지 알 수 없어 군사를 거두게 한 것이오."

방덕에게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방덕은 분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우금을 탓했다.

"장군은 공연한 짓을 했소이다. 만약 장군께서 군사를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의 목을 베었을 것이오."

"무슨 일이든 급히 서두르면 실수하기 쉬운 법이니 천천히 도모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우금이 다시 그렇게 둘러대자 그의 속마음을 알 까닭이 없는 방덕은 분한 마음을 달래며 한탄만 할 뿐이었다. 한편 관우는 영채로 돌아와 살에 박힌 화살촉을 뽑았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아 금창약을 붙인 다음 여러 장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가 나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맹세코 이 화살에 맞은 욕을 풀고야 말겠다."

관우가 분에 이기지 못하여 이를 갈자 여러 장수들이 달랬다.

"장군께서는 며칠 만이라도 편안히 쉬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방덕과 싸워도 늦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관우가 화살에 맞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방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 날이 되기가 바쁘게 군사를 휘몰아와 싸움을 돋우었다. 관우는 달려나와 방덕과 싸우려 했으나 장수들이 간곡히 만류했다.

"상처가 아물거든 출전토록 하십시오."

관우가 장수들의 만류로 마지못해 영채에 머무르는 동안 방덕은 관우의 분을 돋우기 위해 온갖 욕설을 퍼부어댔다.

"아버지께서 바깥 일을 허락없이 말씀드리지 않도록 하시오."

관평은 관우의 귀에 욕설이 들어가지 않도록 여러 장수들에게 일렀다. 방덕이 관우의 영채로 와 싸움을 돋운 지 열흘이나 되었으나 관우는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방덕이 참다못해 우금에게 권했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관우의 상처가 깊어 움직일 수 없는 모양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칠로군을 모두 휘몰아 영채를 휩쓸어 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번성의 위태로움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금은 여전히 방덕이 큰 공을 세우는 것에만 경계하고 있었다. 조조의 훈계를 핑계괴며 군사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관운장은 결코 우리가 쉽사리 영채를 휩쓸도록 허술히 방비하고 있을 리가 없소이다. 위왕께서 가볍게 맞서지 말라고 훈계하였으니 우선은 천천히 기회를 엿보도록 하십시다."

마음이 급한 방덕은 우금에게 거듭 청했으나 우금은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사를 뒤로 물렸다. 우금은 칠로군을 번성 북쪽 10리쯤 떨어진 산 아래의 골짜기로 물려 둔병케 했다. 우금은 군사를 거느려 큰길을 막는 대신 방덕을 산 뒤쪽에 둔병시켜 그가 마음대로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일렀다.

"방덕 장군은 산 뒤쪽을 맡아 지키되 군사를 움직이지 말고 지키기만 하시오."

방덕으로 보면 우금이 자신과 관우가 맞붙지 못하도록 막아 버린 셈이었다. 방덕은 마음 속으로 분을 억누를 길이 없었으나 총대장의 명령이니 거스를 수도 없었다.

 

신의 화타 관운장의 뼈를 긁어 독을 빼다

한편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동안 관우의 상처가 아물어 가자 관평의 기쁨은 컸다. 관평은 즉시 위군이 지쳐 있는 틈을 기다려 군사를 내기로 하고 여러 장수들과 의논했다. 그때 위군을 살피러 갔던 군사가 소식을 전했다.

"우금이 칠로군을 모두 움직여 번성 북쪽 10여 리쯤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관평이 우금의 뜻을 헤아릴 수 없어 관우에게 이 일을 알렸다. 관우도 우금의 속마음을 알 수 없기는 관평과 다를 바 없었다. 이에 수십 기를 거느리고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 살펴보았다. 먼저 번성 안을 보니 성곽 위의 기치가 어지럽게 세워져 있는 데다 군마들의 움직임에도 질서가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보아 아직 원군과는 연락이 닿지 않은 것 같았다. 다시 성 북쪽 10여 리쯤 되는 곳을 보니 산골짜기에 군마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진 가까이에 물살이 거센 양강이 흐르고 있었다. 관우가 문득 양강을 바라보다가 향도관(길잡이)을 불러 물었다.

"번성 북쪽 1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저 골짜기의 이름이 무엇인가?"

"증구천이라 합니다."

그러자 관우가 몹시 기뻐하며 외쳤다.

"이제 우금은 내게 사로잡힐 것이다."

옆에 있던 장수들이 관우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장군께서 어떻게 우금을 사로잡을 것이라 하십니까?"

"우금이 고기 잡는 그물 주둥아리인 증구로 들었으니 어찌 잡히지 않고 견디겠느냐?"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관우의 말을 믿지 않았다. 계절은 음력 8월인 가을이었다. 때마침 가을이면 한두 차례 있게 마련인 장마가 시작돼 며칠 동안 비가 쏟아져 내리자 관우는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배와 뗏목을 만들고 물에서 필요한 물건들도 갖추도록 하라."

관평이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아버지 관우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는 뭍에서 싸우고 있으며 비마저 쏟아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배와 뗏목을 준비하라 하십니까?"

관우가 그 까닭을 말해 주었다.

"너는 아직 모르고 있구나. 우금은 지금 넓은 들판이 아니라 증구천의 험한 산골짜기에 둔병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장마철이라 매일 비가 와 양강의 물이 나날이 불어나고 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내가 군사들을 시켜 여러 곳에다 둑을 쌓게 하여 물길을 막아 놓게 했다. 비가 더 쏟아져 강물이 넘쳐날 때 우리가 배를 타고 둑을 무너뜨린다면 우금의 군사들은 모두 물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관평은 그 말을 듣자 관우의 깊은 지모에 감복해 마지않았다. 그 무렵 증구천에 있던 우금의 진에는 매일 비가 쏟아져 점차 물이 들기 시작했다. 이에 독장 성하가 걱정스런 얼굴로 우금을 찾아가 권했다.

"우리 군사들이 강가에 머물고 있는데 지세가 매우 낮습니다. 비록 토산이 있다 하나 우리 영채와는 너무 멀어 급히 오를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날마다 가을비가 쏟아져 군사들의 괴로움이 몹시 큽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형주군은 높은 곳으로 진을 옮겼으며 한수 입구에다 배와 뗏목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미리 강물이 넘치는 것에 대비한 것입니다. 우리도 강물이 넘치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우금은 성하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한낱 독장의 주제에 전군의 우두머리인 자신에게 감히 대책을 묻는다고 여기자 비위가 거슬렸다.

"하찮은 놈이 무엇을 안다고 멋대로 지껄이고 있느냐? 헛된 소리로 군심을 어지럽히려 들다니, 다시 그런 소리를 하면 목을 베리라!"

우금의 호통에 성하는 입을 다문 채 얼굴을 붉히며 쫓기듯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성하는 안심이 되지 않아 방덕을 찾아가 우금에게 했던 말을 다시 들려주었다. 방덕은 성하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성 독장의 말이 옳다. 만약 우 장군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일 나의 군사들만이라도 빼내야겠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변고는 그날 밤에 일어났다. 밤이 되자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방덕이 불안한 마음으로 장막 안에 앉아 있는데 수만 마리의 말이 내닫는 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북소리가 울리며 산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흔들렸다. 방덕이 놀라 장막 밖으로 뛰쳐나와 말 위에 올라 보니 이게 웬일인가. 사면 팔방에서 산더미 같은 흙탕물이 굽이치며 쏟아져 들어와 이미 본진을 물바다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칠로군은 아우성을 치며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가운데 흙탕물속에 휩쓸려 빠져 죽거나 물길에 떠내려가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물은 점점 불어 평지도 한 길이 넘었다. 방덕은 물론 우금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그대로 있다가는 물속에 잠길 판이라 황급히 조그마한 산 위로 올라가 물을 피했다. 관우의 명을 따라 관평이 여러 개의 둑을 무너뜨려 가두었던 물을 일시에 내보냈던 것이었다. 그러하니 증구천에 있던 위군은 거의 물에 빠져 죽고 군마의 태반은 떠내려갔다. 이윽고 날이 밝아 오자, 관우와 휘하 장수들은 기치를 흔들어대고 우렁차게 북소리를 울리며 배를 저어 왔다. 관우의 배가 다가오자 우금은 사방을 둘러보며 달아날 길을 찾았다. 그러나 사방은 망망한 흙탕물 바다로 변해 있어 어디로도 달아날 길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느리고 있는 군사도 5, 60에 지나지 않았다. 싸울 수도 달아날 수도 없음을 안 우금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에 우금은 다가오는 관우의 배를 향해 소리쳤다.

"장군께 항복하겠소.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조조의 이름난 장수로 관우를 치러 원정 나온 총대장으로서는 너무나 비참한 몰골이 아닐 수 없었다. 목숨을 애걸하는 우금을 보자 관우는 그의 갑옷을 벗긴 다음 결박 지어 배에 실은 뒤 다시 방덕을 사로잡기 위해 배를 몰았다. 그때 방덕은 동형, 동초, 성하 그리고 졸개 5백여 명과 함께 갑옷도 입지 못한 채 제방 위에 모여 있었다. 관우가 배를 몰아오는 것 보면서도 달아날 길이 없고 병장기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해 싸울 수도 없었다. 그러나 방덕은 우금과는 달리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관우를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걸 본 관우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배로 적을 에워싸고 화살을 날리도록 하라."

관우의 영에 따라 배를 사방으로 몰고 가 방덕을 에워싸고 군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니 위군의 태반이 화살에 맞아 죽거나 화살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형세가 위급하게 되자 동형과 동초가 방덕에게 권했다.

"군사의 태반이 죽거나 상했으며 이젠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항복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나 방덕은 노한 얼굴로 그들을 꾸짖었다.

"내가 위왕의 태산 같은 은혜를 받은 몸으로 어찌 적에게 무릎 꿇고 항복하겠느냐!"

그 소리와 함께 방덕은 동초와 동형의 목을 벤 다음 외쳤다.

"누구든지 다시 항복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두 사람 꼴이 되리라.

방덕이 두 장수의 목을 베자 다른 군사들은 죽기를 작정하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니 싸움은 한낮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방덕은 지치기는커녕 싸울수록 더욱 힘이 솟는 듯했다.

"몇 안 되는 적을 가지고 왜 이토록 싸움을 끈다는 말인가?"

관우가 방덕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는 배들을 향해 소리치자 화살과 돌이 빗발치듯 날아갔다. 방덕은 이에 군사들에게 군령을 내려 단검만을 가지고 위군과 백병전을 벌이도록 한 후 성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듣건대 용맹스런 장수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죽음을 피하려 하지 않으며, 식견이 높은 선비는 절개를 더럽혀 가며 목숨을 구하지 않는다 하였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네. 그대도 죽기를 작정하고 싸워 주기를 바라네."

성하는 방덕의 말을 듣고 관우군을 향해 내달았다. 그러나 관우가 쏜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성하마저 죽자 졸개들은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는 듯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다만 홀로 남은 방덕만이 이리저리 내달으며 관우군과 싸우고 있었다. 이때 형주 군사 수십 명이 작은 배를 몰아 제방 가까이로 다가갔다. 방덕이 그걸 보자 칼을 움켜잡더니 몸을 솟구쳐 작은 배 위로 뛰어내렸다. 배 위의 군사들이 놀라 방덕을 바라보았으나, 그 사이 방덕이 순식간에 10여 명을 베어 버리자 나머지 군사들은 기겁을 하며 물속으로 뛰어들어 달아나기에 바빴다. 방덕은 배 위에 혼자 남자 한 손에 칼을 잡고 한 손으로 노를 저으며 번성 쪽으로 향했다. 방덕이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젓고 있는데 홀연 상류에서 한 장수가 뗏목을 타고 내려오다 방덕이 타고 있는 작은 배를 세차게 들이받았다. 작은 배가 여지없이 뒤집히니 방덕도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방덕이 물에 빠지자 뗏목 위의 장수는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얼마 있지 않아 방덕을 사로잡아 배 위로 끌어 올렸다. 형주군이 그 장수를 보니 그는 다름 아닌 주창이었다. 주창은 원래 물질이 익숙하였는데, 그동안 형주에 머물면서 더욱 솜씨를 닦은 데다 힘까지 세어 어렵지 않게 방덕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방덕마저 사로잡히자 우금이 거느리고 왔던 칠로군의 대군은 거의 다 물귀신이 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은 자도 모두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살아서 조조에게 돌아간 군사는 단 한 사람도 없는 꼴이 되고만, 처참한 패전이었다. 뒷날 사람들이 시를 지어 관우의 공을 기렸다.

한밤의 북소리 하늘에 울려 퍼지니

양양, 번성의 평지가 깊은 못이 되었네.

관 공의 귀신 같은 계교 누가 당하랴

중원에 드높은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네.

조조의 대군을 깨뜨린 관우는 높은 언덕 위에 장막을 치고 앉아 사로잡은 적장들을 끌어오게 했다. 먼저 관우 앞에 꿇어앉은 사람은 우금이었다. 우금은 땅에 엎드려 관우에게 절을 올리며 목숨을 빌었다.

"장군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목숨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관우가 봉의 눈을 부릅떠 우금을 보며 물었다.

"네 어찌 감히 나와 맞서려고 했는가?"

"윗사람이 시킨 명이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군후께서 가엾게 여기셔서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맹세코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관우가 그런 우금을 내려다보며 아름다운 수염을 쓰다듬다가 껄걸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죽인다면 그것은 개나 돼지를 잡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공연히 내 칼과 도끼만을 더럽힐 뿐이다."

관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장수에게 영을 내렸다.

"우금을 묶어 형주로 보내 옥에 가두고 내가 돌아가 다시 처결할 때를 기디리도록 하라."

우금이 끌려나가자 곧이어 방덕이 끌려 나왔다. 방덕은 도부수들에게 이끌려 나온 후에도 눈썹을 치켜세운 채 눈을 부릅떠 관우를 노려보며 무릎을 꿇지 않았다. 관우가 그런 방덕을 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형은 지금 한중에서 벼슬을 지내고 있고, 너의 옛 주인 마초가 촉의 대장으로 있다. 그런데 너는 어찌 항복하지 않느냐?"

그러나 방덕은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큰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비록 칼에 맞아 죽을지언정 어찌 너에게 항복을 하겠느냐!"

방덕은 그 말에 이어 관우에게 갖은 욕설을 다 퍼부었다. 관우도 그 용맹과 의기를 가상히 여겨 그를 달래보려 했으나 험한 욕설에 그만 화가 치밀었다.

"도부수들은 방덕을 끌어내어 목을 베라!"

관우가 화가 나 소리치자 도부수들이 방덕을 끌어냈다. 방덕은 두말않고 목을 늘어뜨려 도부수들의 칼을 받았다. 관우는 그의 헛된 의기를 가엾게 여겨 그 시체를 거두어 후하게 장사 지내 주었다. 관우는 사로잡은 장수들을 처결한 뒤 다시 물이 빠지기 전에 번성마저 깨치기 위해 장수와 군사를 거느려 배에 올랐다. 이미 비는 그쳤으나 물은 줄어들지 않았다. 번성 주위로 흰 물살이 하늘에 닿을 듯 거세지니 축대가 무너지고 성벽도 침수될 지경에 이르렀다. 성안에서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흙과 돌을 날라 무너져 내리는 성과 담을 메우느라 법석이었다. 모든 장수들이 이 위급한 형세에 당황해하며 조인에게 달려가 말했다.

"지금의 위급한 사태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적군이 밀어닥치기 전에 성을 버리고 달아난다면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인도 달리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여겨 배를 내어 달아날 채비를 서두르는데 만총이 만류했다.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원래 산골물이란 오래 고여 있지 아니합니다. 불과 열흘이면 밀려든 물은 저절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거기다 관우도 지금 별장을 섬하 땅에 보내놓고 있을 뿐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망설이고 있는 것은 허도에서 군사가 와 뒤를 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성을 버리고 달아난다면 황하 남쪽의 땅은 모두 버리는 것이 됩니다. 장군께서는 이 성을 굳게 지켜 그 땅을 지키는 방패가 되셔야 합니다."

만총의 말을 듣자 조인도 자신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만약 백녕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일을 크게 그르쳤을 것이오."

조인은 두 손을 모아 잡고 만총에게 사례한 후 말을 달려 성 위로 올라가 여러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나는 위왕의 명을 받들어 이 성을 지키고 있겠다. 만약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부터 목을 베리라!"

조인이 그렇게 외치자 여러 장수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다짐했다.

"저희들도 목숨을 바쳐 이 성을 지키겠습니다."

장수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성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조인도 크게 기뻤다. 조인은 즉시 성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배치했다. 궁노수 수백을 성 위에 늘어세워 적의 공격에 대비케 하는 한편, 성안의 백성들에게는 노인들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흙과 돌을 져날라 무너진 성벽을 메우게 했다. 성곽이 이전처럼 바로 세워지는 가운데 정말로 열흘이 되지 않아 성안의 물은 점점 줄어들었다. 한편 위의 장수 우금과 방덕을 사로잡은 데다 조조 군사들을 모두 물로 휩쓴 관우는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은 모두 놀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무렵 둘째 아들인 관흥이 형주에서 아버지를 뵈러 왔다. 관우가 관흥에게 일렀다.

"때마침 잘 왔다. 이번 싸움에서 공이 많은 관리와 장수들의 이름과 그 공을 적은 글을 줄 터이니 너는 성도의 한중왕께 바치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 사람들에게 그 공에 따르는 상을 내리시도록 아뢰어라."

관흥은 아버지 관우의 명을 받들어 그날로 성도를 향해 말을 달렸다. 관흥을 성도로 보낸 광 공은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하나는 똑바로 겹하로 보내 조조 군사가 올 경우를 대비케 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번성으로 가 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서둘렀다. 관공은 번성의 북문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채찍을 들어 성위를 가리키며 소리쳐 꾸짖었다.

"쥐새끼 같은 무리들아, 어서 나와 항복하지 않고 무얼 그렇게 꾸물대고 있느냐?"

이때 조인은 성루에서 관 공을 살펴보고 있었다. 관 공이 가슴을 가리는 갑옷에다 푸른 전포만을 걸친 것을 보자 급히 숨겨 놓은 궁노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관우를 향해 모두 활을 쏘아라!"

5백 궁노수들이 그 소리에 일제히 활고 쇠뇌를 쏘았다. 갑자기 화살과 쇠뇌가 날아오자 관 고이 급히 말머리를 돌려세우는데, 오른팔에 화살 한 대가 날아와 박혔다. 관 공은 몸을 뒤집으며 말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조인은 관공이 화살에 맞아 말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자 힘이 나 급히 군사를 이끌어 성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성 밖에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관평이 조인을 맞아 치니 조인은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성안으로 쫓겨갔다. 관평이 그 큼에 관 공을 구해 영채로 돌아왔다. 영채로 돌아온 관평은 급히 팔에 박힌 화살부터 뽑게 했다. 그러나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이미 뼛속까지 스며들어 오른팔이 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오른팔이 몹시 부어오르자 관 공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관평이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걱정스런 얼굴로 여러 장수들을 청해 의논했다.

"아버님께서 팔을 다쳐 움직일 수가 없게 되시었소. 이제 나가 싸울 수가 없으니 잠시 형주로 돌아가시어 상처를 돌보도록 해야겠소."

여러 장수들도 관평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여겨 관 공의 장막으로 들어갔다.

"그대들은 무슨 일로 왔는가?"

관 공이 다친 팔을 동여매고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장수들이 관 공에게 말했다.

"군후께서 오른팔에 상처를 입어 걱정이 되어 온 것입니다. 만약 다시 싸우시다 상처가 덧날까 두렵습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잠시 형주로 군사를 되돌리시어 상처를 돌보신 후에 다시 번성을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수들의 말에 관 공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제 번성을 무너뜨리는 일이 눈앞에 다가왔다. 나는 번성을 빼앗은 후 군사를 이끌어 허도로 가 역적 조조를 쓸어 버린 후 한실을 평안케 해드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조그만 상처 때문에 큰일을 그르칠 수가 있겠는가? 너희 장수들이 우리 군사들의 사기를 꺾을 작정이란 말인가?"

관 공의 외침에 장수들은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장수들은 관 공에게 형주로 물러날 뜻이 없음을 알았으나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상처라도 빨리 낫게 하기 위해 여러 곳에 사람을 보내 이름난 의원을 찾아보도록 했다. 그런 어느 날, 한 사람이 강동에서 조각배를 타고 영채에 이르렀다. 자신을 의원이라고만 밝히자 영채 밖을 지키던 군사가 그를 관평에게 데리고 갔다. 관평이 그 사람을 보니 머리에는 방건을 쓰고 몸에 비해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팔에는 푸른 주머니를 매고 있었다.

"뉘시기에 이곳을 찾으셨소?"

관평의 물음에 그 사람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패국 초군 땅 사람으로 이름은 화타라고 아며, 자는 원화라고 합니다. 제가 듣기로 천하의 영웅이신 관장군께서 이번에 독화살을 맞아 고생한다고 하니 그 생처를 고쳐드리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관평이 그 말에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며 물었다.

"그러시다면 지난달 동오에서 주태의 병을 고쳐 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소이다."

관평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여러 장수들과 함께 화타를 이끌어 관 공의 장막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때 관 공은 마량을 상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관 공은 높은 열 때문에 입안이 바싹 말라 가시를 문 듯했고 상처는 욱신거려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군사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아픔을 억누르며 태연히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관 공은 이름난 의원이 왔다는 말을 듣자 그를 장막 안으로 맞아들였다. 화타가 들어오자 인사를 마친 다음 차를 대접했다. 그러자 화타가 상처 보기를 재촉했다.

"다친 팔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 말에 관 공이 옷을 걷어 팔을 내밀었다. 옆에 서 있던 근신들도 그 상처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처는 마치 잘 익은 모과 열매처럼 벌겋게 부어 있었다. 화타가 그 상처를 살피더니 말했다.

"이 상처는 활촉에 오두의 뿌리나 잎에 있는 독을 발랐기 때문에 난 것이며 그 독이 이미 뼛속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영영 이 팔을 쓰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관 공도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치료하면 좋겠소?"

"고칠 방도가 있습니다만, 다만 군후께서 두려워하실까 걱정됩니다."

화타가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관 공은 저으기 안도하며 소리내어 웃더니 말했다.

"내가 죽는대도 나는 마땅히 갈 곳으로 간다고 여기는 터이오. 그런데 또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말이오?"

관우는 화타의 염려가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으나 화타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치료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우선 조용한 곳에다 큰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큰 쇠고리를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박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군후의 팔을 그 쇠고리에 끼우고 온몸을 밧줄로 단단히 묶은 다음, 군후의 눈을 헝겊으로 가려 보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관우가 그 말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화타에게 물었다.

"쇠고리에다 기둥은 무엇이며 어찌하여 눈을 가리려고 하시오?"

"군후의 팔을 고리에 끼워 뾰족한 칼로 살을 가르고 뼈를 드러내어 뼛속에 스민 독을 긁어내야 합니다. 그다음 약을 바르고 벗겨 낸 살을 실로 꿰매야만 상처가 낫게 됩니다. 그런데도 군후께서는 두렵지 않으시다 하시겠습니까?"

가까이에서 그 끔찍한 말을 듣고 있던 근신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러나 관공은 껄걸 웃으며 말했다.

"그처럼 쉬운 일이라면 기둥과 고리 따위는 필요가 없소. 그대로 긁어내도록 하시오."

관 공은 그렇게 말하더니 술상을 차려 오게 했다. 술상이 마련되자 관 공은 화타에게 잔을 권하며 술을 대접했다. 술을 몇 잔 마신 관 공은 오른팔을 내밀어 화타에게 내맡기고 다시 바둑판을 가져오게 하여 마량과 바둑두기를 계속하였다. 화타는 날카로운 칼을 손에 들고 곁에 있는 군사에게 큰 대접을 받쳐 들어 흘러내릴 피를 받게 했다.

"이제 칼을 댈 테니 놀라지 마십시오."

"내 어찌 세상의 속된 무리들처럼 아픈 걸 무서워하겠소. 걱정말고 어서 시작하시오."

화타는 칼로 관 공의 팔을 찔러 뼈가 드러나게 속살을 헤쳤다. 독이 스며든 뼈는 이미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관 공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타는 칼로 뼈를 긁기 시작했다. 갈그락거리며 오금을 저리게 하는 뼈를 깎는 소리가 장막 안에 울려 퍼지자 관평을 비롯한 시신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중에는 그 자리에 더 머물 수 없어 장막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관 공을 보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살갗이 도려지고 뼈를 깎이는 가운데도 관 공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두는데 조금도 아픈 기색이 없어 보였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화타가 뼈를 깎는 동안 흘러내린 피가 큰 대접을 가득 채웠다. 화타는 독을 말끔히 긁어낸 후 약을 바르고 살을 여민 후 실로 꿰맸다. 치료를 끝낸 화타의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관 공은 치료가 끝나자 껄껄 웃었다. 치료를 마친 다음 날이었다. 화타가 관우를 찾아와 물었다.

"군후께서 간밤에는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관 공이 팔을 휘저어 보이며 껄껄 웃더니 말했다.

"덕분에 잘 잤소. 이 팔은 이렇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며 조금도 아프지가 않소. 선생이야말로 참으로 신의요."

관 공이 화타에게 감탄하며 치하하자 화타도 고개를 저으며 감탄했다.

"저는 일생동안 많은 사람을 치료해 왔습니다만 장군 같은 환자는 처음입니다. 장군이야말로 신장이십니다."

뒷날 사람들이 이때 일을 두고 시를 지었다.

병을 치료하는데 내과. 외과가 있으나

세상을 놀라게 할 재주는 귀하네.

그러나 천하의 용장은 관운장이고

천하의 신의는 화타이네.

관 공은 크게 잔치를 열어 자기의 팔을 낫게 해준 화타에게 극진히 대접했다. 관 공이 화타에게 고마움을 나타내자 화타는 고개를 저으며 당부했다.

"이제 화살 맞은 자리는 나았으나 부디 그 팔을 함부로 쓰지 않도록 하십시오. 결코 노하여 상처를 덧나게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앞으로 1백일이 지난 뒤에야 완쾌될 것입니다."

"잘 알겠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가 있겠소?"

관 공은 황금 1백 냥을 내놓으며 사례하려 했으나 화타는 끝내 받지 않았다.

"큰 의원은 나라를 고치고 작은 의원은 사람을 고친다고 했습니다. 제게는 나라를 치료할 만한 의술이 없기 때문에 천하의 영웅이신 장군의 몸이나마 치료해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어찌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화타는 그렇게 말하더니 상처에 바를 약 한 첩을 두고는 다시 표연히 조각배를 타고 가버렸다.

 

서황과 관운장 면수에서 부딪다

그 무렵, 관 공이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베었다는 소식은 멀리 허도에까지 전해졌다. 관 공의 위엄이 온 천하에 떨쳐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관 공을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 소문을 듣고 누구보다 놀란 건 조조였다. 조조는 황급히 문무의 벼슬아치들을 불러모아 놓고 의논을 했다.

"내가 일찍부터 관운장의 용맹과 지모가 뛰어남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가 형주와 양양에 걸쳐 그 세력을 굳혔으니 이는 범에게 날개가 돋친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죽인 기세로 허도로 밀고 들어온다면 어찌하겠는가? 나는 도읍을 옮겨 그의 예기를 피할까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러자 사마의가 일어나 조조에게 말했다.

"천도란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우금과 방덕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에 휩쓸렸기 때문에 패한 것입니다. 설령 두 장수를 잃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국가 대계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손권과 유비의 사이가 좋지 못한 터에 운장이 저렇듯 싸워 이겼으니 손권이 그걸 달갑게 여길 리가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사자를 동오로 보내셔서 이익됨과 해가 됨을 따져 손권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관운장의 뒤를 치게 하고 그 뒤에 강남땅을 그의 땅으로 인정하겠다고 하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번성의 위태로움은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사마의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주부 장제가 맞장구를 쳤다.

"중달(사마의)의 말이 옳습니다. 사자를 동오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도읍을 옮긴다면 공연히 민심만 흔들릴 뿐입니다."

조조도 두 사람의 말을 듣자 마음을 가라앉혔다. 곧 도읍 옮길 마음을 바꾸어 사마의의 말을 좇기로 했다. 그러나 조조는 우금이 관우에게 항복한 것만을 끝내 한탄스러워했다.

"우금이 나를 섬긴 지 30년이었건만 위급하니 항복하고 말았구나! 나를 따른 지 얼마 되지 않는 방덕만도 못하지 않는가."

조조가 그렇게 탄식하며 곧 사람을 뽑아 동오로 보내는 한편 관 공의 예기를 꺾기 위해 장수들에게 물었다.

"누가 번성의 위급함을 구하고 위나라의 위엄을 떨치기 위해 관운장과 맞서 싸우겠는가?"

조조의 말이 떨어지자 계하에서 한 장수가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조조가 그를 보니 바로 서황이었다. 서황이 결연히 나서자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날랜 군사 5만을 주고 여건을 부장으로 삼게 했다. 서황은 그날로 5만 군사를 이끌어 양릉파에 이르러 군사를 머물게 했다. 그곳에 둔병하고 있다가 동오에서 호응할 것을 기다려 관 공을 칠 작정이었다. 한편 조조가 보낸 사자가 동오에 이르자 손권은 조조의 글을 보고 두말없이 그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응낙하는 글을 써 사자에게 주어 보냈다. 손권은 이어 문무 벼슬아치들을 불러 관 공을 칠 일을 의논했다. 장소가 먼저 조조의 속마음을 헤아리며 말했다.

"근래에 듣자니 운장이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죽여 그 위세를 온 화하(중국을 높여 부른 말)에 떨치고 있다 합니다. 조조는 그 기세를 피하기 위해 도읍을 옮기려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지금 번성이 위급하니 사자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청하고 있지만, 일이 끝난 다음에는 딴 말을 할까 염려됩니다."

손권이 장소의 말을 듣고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육구의 여몽 장군께서 급히 배를 타고 오시어 주공을 뵙자고 하십니다."

손권은 그를 불러들이게 하고 물었다.

"무슨 일로 급히 왔는가?"

"지금 관운장이 번서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 틈을 타 비어 있는 형주를 손에 넣어야 합니다."

손권은 여몽의 말에 귀가 솔깃했으나 슬며시 말을 돌려 서주에 대한 여몽의 생각을 알고자 했다.

"그보다는 나는 북쪽으로 가서 서주를 얻고자 하는데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오?"

"조조는 멀리 하북에 있으므로 동쪽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서주는 군사의 수도 얼마 되지 않으므로 공격만 하시면 빼앗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지형은 뭍에서 싸우기 좋을 뿐 수전은 불리하니 설령 빼앗는다 하더라도 지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보다는 먼저 형주를 쳐서 장강 일대를 모두 차지하신 뒤에 서주를 거두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본심을 털어 놓았다.

"서주 일은 장군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소. 실은 나도 형주를 빼앗을 생각이었소. 장군에게 모든 걸 맡길 테니 곧 형주를 빼앗도록 하시오. 이 몸도 곧 뒤따라 군사를 일으킬 것이오."

손권이 그렇게 뜻을 정하자 여몽은 그날로 육구로 돌아가 군사들을 풀어 형주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 이윽고 형주를 살피러 갔던 군사가 돌아와 알렸다.

"장강의 강줄기를 따라 2,30리 거리의 높은 언덕마다 봉화대가 늘어서 있었습니다. 동오와 경계에 변이 일어나면 형주 본성에 알리기 위해서 세운 것인 듯합니다. 또한 형주의 군마가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어 적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는 듯합니다."

뜻밖에도 형주군의 치밀한 방비에 여몽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급하게 뜻을 이루기는 어렵겠구나. 그걸 모르고 오후께 형주를 빼앗으라고 권했으니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손권에게 형주를 단번에 빼앗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왔던 여몽은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좋은 방책이 서지 않았다. 여몽은 생각다 못해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문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형주를 치러 간 여몽이 뜻밖에도 병이 나 드러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손권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손권이 초조한 얼굴로 생각에 잠기고 있는데 육손이 말했다.

"그렇다면 백언(육손의 자)이 가서 무슨 까닭인지 알아보도록 하시오."

손권의 명을 받은 육손이 밤을 틈타 육구로 가 여몽을 만나 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여몽은 몸져누워 있는 병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후의 분부를 받들어 자명의 병환을 보러 왔소."

여몽이 면구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천한 몸이 병이 좀 났기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실 것까지 뭐 있겠소?"

육손이 그런 여몽에게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오후께서는 공에게 무거운 책임을 맡기셨소. 공은 이 좋은 기회에 움직이지 않으시고 헛되이 시름에만 잠겨 계시니 어찌된 일이오?"

육손의 물음에 여몽은 물끄러미 육손을 바라다볼 뿐 말이 없었다. 육손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실은 내가 병환에 잘 듣는 처방을 가지고 왔는데, 어떻습니까? 한번 써 보시겠소?"

육손의 은근한 말투에 여몽도 그 뜻을 알아차렸다. 여몽은 곧 좌우에 있는 사람을 물러가게 한 뒤 육손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백언께선 좋은 처방이 있으시거든 어서 가르쳐 주시오."

"장군의 병환은 형주의 군마가 방비를 굳게 해 두고 있는 데다 봉화대 연기도 볼도 못 올리게 하여 형주군들을 꼼짝 못 하게 하면 될 것이오. 어떻소? 그렇게 하면 나을 병이 아니오?"

육손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여몽은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물었다.

"어찌 그리 내 마음을 들여다보신 것처럼 잘 아시오? 그런데 그 계책이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여몽이 육손의 팔소매라도 붙들 듯 다가가며 청했다.

"관운장은 스스로 자신을 천하의 영웅이라 칭하며 감히 자기에게 맞설 사람은 없다고 여기고 있소. 그러나 실은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장군을 꺼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장군께서 병이 났다고 했으니 군무를 담당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다른 사람에게 육구를 맡기십시오. 그리고 새로 육구를 맡은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말로 관운장을 치켜세우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관운장은 교만해져서 이쪽을 얕보고 형주의 군사들을 모두 번성으로 거두어들일 것이오. 그래서 형주의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깜짝 놀랄 계책을 써 들이친다면 형주도 어렵지 않게 우리 손안에 떨어지게 될 것이오."

육손의 말에 여몽이 감탄해 마지않으며 무릎을 쳤다.

"실로 묘한 계책이오.

여몽은 그날로 자리에 누워 점점 병이 심해졌다는 말을 퍼뜨리며 손권에게 글을 올려 병을 핑계대고 사직을 청했다. 육손은 손권에게 돌아가 여몽에게 얘기했던 계책을 들려주었다. 이에 손권도 육손의 계책에 따라 여몽이 정말 병이 난 것처럼 영을 내렸다.

"여 자명의 병이 깊다 하니 건업으로 돌아와 병을 돌보게 하라."

영을 받들어 여몽이 건업으로 돌아오자 손권이 물었다.

"일찍이 육구를 지키던 주공근이 자경에게 자리를 물려 주고 뒤에 자경은 또 경을 천거했소. 그러니 경 또한 경을 대신할 재주와 덕망을 갖춘 인물을 천거해 보시오."

그러자 여몽이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만약 그 자리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을 쓰면 관운장은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육손은 생각이 깊으나 그 이름이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니 관운장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그를 육구로 보낸다면 관운장도 별로 경계하지 않을 테니 반드시 이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손권도 여몽의 말을 옳게 여겼다. 육손은 여몽보다 10여 살이나 아래였으며 외방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재주가 얕지 않음은 오후도 잘 알고 있었다. 손권은 즉시 육손을 편장군 우도독을 삼아 여몽을 대신해 육구를 지키게 했다. 처음 육손이 그 일을 알고 놀라며 손권을 찾아와 극구 사양했다.

"제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이 없어 그토록 무거운 일을 감당해 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미 자명이 경을 천거했으니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낼 것이오. 경은 사양하지 마시오."

손권이 다시 말하니 육손도 더 이상은 사양하지 못했다. 마침내 손권에게 절하며 인수를 받아 그날로 육구를 향해 떠났다. 육구에 이른 육손은 마군. 보군. 수군을 거둔 후 계책을 펴기 위해 먼저 관운장에게 자기가 육구를 맡아 다스리게 되었다는 인사장을 닦았다. 관 공을 한껏 치켜세우고 자기를 낮추어 글을 닦은 후 좋은 말과 진귀한 비단에 술과 안주를 갖추어 사자로 하여금 번성의 관공에게 받치게 했다. 관 공은 그때 화살에 맞은 상처를 치료하느라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문득 전갈이 왔다.

"강동의 육구를 지키던 장수 여몽은 병이 위중하여 손권이 그를 불러들이고 대신 육손이라는 사람을 도독으로 부임시켰다 합니다. 그 육손의 사자가 글과 예물을 들고 와 장군을 뵙고자 합니다."

관 공은 육구와 같은 요긴처를 육손 같은 이름도 없는 젊은 사람으로 하여 맡아 지키게 한 손권이 어리석게만 보였다. 사자를 불러들인 관 공은 육손의 글을 읽어 보았다. 자기를 한껏 치켜세운 글을 본 관 공이 껄걸 웃으며 말했다.

"손중모가 식견이 짧고 얕아 그런 아이를 장수로 삼았구나!"

그러자 사자가 예물을 바치며 엎드려 절하고 말했다.

"육 장군께서는 글과 예물을 받들어 올려 군후의 승리를 축하드리는 한편 두 집안의 화친을 구하셨습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글과 예물이 육손의 계책임을 알 리 없는 관 공은 예물을 거두어들인 뒤 사자를 돌려보냈다. 육구로 돌아온 사자는 육손에게 말했다.

"관운장은 매우 흡족해하였습니다. 장군을 얕잡아보며 강동의 일은 전혀 염려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어 가자 육손은 기뻐하며 사람을 시켜 형주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며칠 후, 형주를 살피러 갔던 군사로부터 관 공이 형주에 있는 군사 태반을 뽑아 상처가 낫기만 하면 번성을 치려고 준비한다는 전갈이 왔다. 육손은 곧 손권에게 사람을 보내 이 소식을 알렸다. 손권은 즉시 여몽을 불러 물었다.

"지금 운장이 과연 형주 군사를 움직여 번성을 치려고 한다고 하오. 이 틈을 타 형주를 빼앗아야겠소. 경이 내 아우 교를 데리고 대군을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소?"

손권의 아우 손교는 손권의 숙부 손정의 둘째 아들로 자를 숙명이라 했다. 여몽이 그 말을 듣더니 금세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주공께서는 이 여몽이 합당하다 하시면 여몽을 쓰시고 숙명이 합당하다 여기시면 그를 쓰십시오. 지난날 주유와 정보를 좌. 우 도독으로 삼았을 때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그때 모든 결정권을 주유에게 주었으나 정보는 나이 많은 장수로서 젊은 장수 밑에서 명을 받들게 되어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으나 후에 주유의 뛰어난 재주를 보고서야 그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군사를 이끌어 큰일을 이루려는 마당에 만약 장수끼리 조금이라도 틈이 생긴다면 이는 곧 동오에 큰 해를 끼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거기다 이 여몽의 재주가 주유에 미치지 못하고, 숙명은 주공과 가깝기가 정보보다 더 합니다. 이로 인해 일을 그르칠까 걱정됩니다."

손권도 여몽의 말을 듣자 깨달은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여몽을 대도독으로 삼아 강동의 모든 군사를 거느리게 했고 손교에게는 군량과 마초를 대는 일만 맡도록 했다. 여몽은 절하며 인수를 받고 군사 3만과 빠른 배 80여 척을 수습했다. 선봉으로 내세운 배에는 헤엄 잘 치는 군사들에게 흰옷을 입혀 장사치로 꾸민 후 노를 젓게 했다. 또한 가려 뽑은 날랜 군사들을 배 안에 숨어있게 하여 형주군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그 뒤를 따르는 배에는 한당. 장흠. 주연. 반장. 주태. 서성. 정봉의 일곱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했다. 손권은 나머지 장수들을 거느리고 그 뒤를 따르기로 하는 한편 조조에게 이 일을 알리고 군사를 내어 관 공의 뒤를 치라는 글을 보냈다. 또한 육손에게도 군사를 일으킨 일을 알려 호응할 채비를 갖추게 했다. 모든 준비가 다 갖추어지자 여몽은 영을 내려 모든 배를 형주로 나아가게 했다. 여몽의 영이 떨어지자 군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를 저어 심양강을 거쳐 관 공의 봉화대가 있는 북쪽 언덕에 닿았다.

"어디서 오는 배인가?"

배가 닿자 관 공의 봉화지기들이 소리쳤다. 그러자 흰옷을 입고 장사꾼으로 꾸민 동오 군사들이 거짓으로 둘러댔다.

"저희들은 모두 장사를 하는 나그네들입니다. 장강에서 풍랑을 만나 이곳까지 떠내려왔습니다. 잠시 바람을 피했다가 날이 새면 물러가겠습니다."

흰옷을 입은 군사들은 그 말과 함께 봉화지기에게 재물뿐 아니라 술과 안주를 바쳤다. 재물을 건네받은 군사들은 입이 벌어져서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배를 강변에 대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이경쯤 되자 돌연 배 안에 숨어있던 군사들이 뛰쳐나와 봉화대 위에 있는 봉화대 위에 있는 군사들을 덮쳤다. 동오의 군사들이 형주군을 생선 두름 엮듯 묶은 후 군호를 내지르니 기다리고 있던 80여 척의 큰 배들은 강변에 닻을 내린 후 배 안에 있던 날랜 군사들을 쏟아냈다. 동오군들은 봉화대 근처의 길목을 지키던 형주군의 진을 덮쳐 모조리 사로잡아 타고 온 배 안에 가두었다. 봉화대에서 군호를 보낼 군사들을 모두 사로잡자 동오군의 모든 배는 유유히 형주를 향해 짓쳐나갔다. 강변 근처의 사람들은 동오군의 배가 무리 지어 형주로 향하였지만 아무도 수상쩍게 여기지 않았다. 배가 형주 가까이 이르자 여몽은 사로잡은 군사들을 달랬다.

"너희들은 이제 사로잡힌 몸이니 만약 살아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죄값을 받으리라. 차라리 우리를 도와 공을 세우면 목숨은 물론 후한 상까지 받게 될 것이다. 어떠냐, 우리 일을 돕겠느냐 아니면 돌아가 죽음을 택하겠느냐?"

형주군으로서는 거역하면 당장 목이 떨어질 판이므로 여몽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키는 대로 따르겠으니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여몽은 형주군이 모두 입을 모아 대답하자 군사들에게 성문에 군호로 불이 오르거든 일제히 공격하도록 이른 뒤 형주군을 앞세워 성문 앞으로 나아갔다.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려 성문 앞에 이르른 형주 군사들이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 주시오. 봉화지기 군사들이오."

성 위에서 군관이 내려다보니 틀림없이 형주군인지라 아무런 의심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성문이 활짝 열리자 여몽을 뒤따르던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불을 질러 군호를 보냈다. 형주 군사들은 마음 놓고 문을 열어 주다 일시에 밀려든 동옥군의 위세에 제대로 싸워볼 생각도 못 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군호를 보고 들이닥친 동오의 대군이 성안을 휩쓸자 마침내 형주성은 동오 군사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다. 형주성을 빼앗은 여몽은 난리를 만나 어찌할 줄 모르고 헤매고 있는 백성들을 보며 군사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만약 함부로 백성를 죽이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에 따라 벌을 내리리라!"

여몽은 그렇게 영을 내려 백성들을 안돈시킨 뒤 형주성 안에 있던 관리들에게도 모두 이전처럼 자기가 맡은 일을 보게 했다. 뿐만 아니라 관공의 가족들에게 따로 집을 주어 옮겨 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영을 내렸다. 그런 한편 형주성을 빼앗은 일을 손권에게 알렸다. 형주성을 빼앗은 여몽은 군법을 엄히 시행하여 군사들이 이를 어기지 않도록 했다. 그런 어느 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성문을 돌아보고 있던 여몽은 군사 하나가 백성의 삿갓을 빼앗아 투구 위에 쓰고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저놈을 붙들어 오라!"

따르던 군사들이 달려가 그 군사를 잡아 왔다. 여몽이 그를 보니 바로 자기와 한 고향 사람이었다. 여몽이 군사를 꾸짖었다.

"네가 비록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나 내가 내린 군령을 어겼으니 너에게도 마땅히 군법을 시행하리라."

그러자 그 군사는 엎드려 죄를 빌었다.

"저는 관에서 주신 투구가 비에 젖을까 봐 잠시 갖다 쓴 것입니다. 결코 사사로운 욕심으로 빼앗은 것이 아니나, 장군께서는 부디 같은 고향 사람의 정을 보아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몽은 엄한 목소리로 그 군사에게 말했다.

"나도 네가 관에서 준 투구를 덮느라고 한 것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백성의 물건을 빼앗지 말라는 영을 어겨 군령을 어지렵혔으니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여몽은 좌우에 영을 내려 그 군사의 목을 베게 했다. 여몽은 그 목을 거리에 내다가 높이 매달게 한 후 그 시체를 거두어 슬피 울며 장사지내 주었다. 이후부터 삼군은 더욱 삼가 백성들의 물건은 길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았다. 이때 여몽의 기별을 받은 손권은 대군을 이끌고 형주에 이르렀다. 여몽이 성 밖으로 나가 손권을 맞아들인 후 관아로 안내했다. 손권은 여몽의 공을 치하한 후 반준을 치중으로 삼아, 형주를 다스리게 하고 우금을 옥에서 불러내 목의 칼을 풀어주고 조조에게 보냈다. 또한 이번 싸움에 공이 많은 장졸들에게 상을 내리고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킨 가운데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손권은 유표가 죽은 후 그토록 바라던 오랜 소망을 이제야 이룬 것이었다. 손권은 물론 여러 문무 벼슬아치들의 기쁨은 컸다.

이날 흥겨운 잔치 자리가 무르익어 가는데 손권이 여몽에게 물었다.

"이제 형주는 우리 손에 들어왔으나 아직 공안을 지키는 부사인과 남군의 미방이 있으니 이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여몽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세 치 혀만을 놀려 부사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항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돌아보니 회계의 여조 땅 출신인 우번이란 사람이었다.

"그대는 어떤 계책이 있기에 부사인을 항복시키겠다 히시오?"

손권이 반가운 얼굴로 우번에게 물었다.

"저와 부사인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였습니다. 득과 실을 따져 그를 달랜다면 그는 반드시 항복해 올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군사 5백을 주어 우번으로 하여 공안으로 가게 했다. 한편 공안을 지키던 부사인은 형주가 손권에게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지켰다. 우번이 공안에 이르러보니 성문이 굳게 닫혀 있으므로 글을 써서 화살대에 매어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성안에 있던 군사가 그 글을 주워 부사인에게 전했다. 부사인이 글을 받아 보니 어릴 적 친구였던 우번이 항복을 권유하는 글이었다. 글을 읽고 나니 부사인은 전에 관 공이 술을 마시다 군량과 마초를 태웠다고 매질하여 이곳으로 내쫓았던 일을 돌이켰다. 그 일로 한을 품고 있는 데다 형주마저 동오의 손에 떨어졌으니 일찍 항복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성문을 활짝 열어라."

부사인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성문을 열고 우번을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마친 후에 옛정을 나눴다. 우번은 오후가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어진 이를 두텁게 대한다는 것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늘어놓으며 항복을 권유했다. 부사인은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던 터라 두말 않고 우번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그 길로 인수를 가지고 형주로 가 손권에게 항복했다. 우번의 말대로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부사인이 제 발로 걸어와 항복하자 손권도 기뻐해 마지않았다. 이에 부사인을 다시 공안 땅으로 돌려보내 그로 하여금 그곳을 맡아 다스리게 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여몽이 가만히 손권에게 귀띔했다.

"아직 관운장을 사로잡지 못한 터에 부사인을 다시 공안으로 보낸다면 뒤에 무슨 변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를 공안으로 보내지 말고 남군에 있는 미방에게로 보내어 항복하도록 달래보라 하십시오."

손권이 들으니 그 또한 좋은 계책이라 곧 부사인을 불러들여 청했다.

"경이 미방과 교분이 두터우니 남군으로 가 경이 나에게로 왔음을 알리고 항복을 권해 보시오. 만약 미방이 나에게 온다면 경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소."

"알겠습니다. 제가 달래보겠습니다."

부사인은 쾌히 승낙하고 곧 10여 기를 거느리고 남군으로 달려갔다. 그 무렵 미방도 형주가 동오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지키는 군사 하나가 들어와 공안을 지키는 장수 부사인이 왔다는 말을 전하자 반가운 마음에 급히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어쩐 일로 오셨소?"

인사를 마치자 미방이 부사인에게 물었다. 부사인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말했다.

"나라고 해서 충성심이 부족했겠소? 순식간에 형주가 동오에게 넘어가니 형세가 위태로운 데다가 외로워 버틸래야 버틸 수가 없었소이다. 남군 또한 나와 다름없는 처지이니 장군도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가 이미 한중왕의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그 은혜를 저버릴 수가 있겠소?"

미방은 부사인의 권유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부사인이 다시 미방을 부추겼다.

"관운장이 지난번에 우리 두 사람을 꾸짖으며 잔뜩 벼르고 갔으니 이번에 이기고 돌아간다 하더라도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공은 부디 깊이 헤아려 처신해야 할 것이오."

그러나 미방은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나는 형님 미축과 함께 오랫동안 한중왕을 섬겨 왔소이다. 어찌 하루아침에 저버릴 수가 있겠소?"

미방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관 공으로부터 사자가 이르렀다는 전갈이 왔다. 미방은 그 소리를 듣자 부사인과의 얘기를 뒤로 미룬 채 사자부터 맞아들였다. 사자가 관 공의 명을 전했다.

"관 공께서는 진중에 군량이 떨어졌으므로 이곳 남군과 공안 두 곳에서 쌀 10만 석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만약 늦어지면 두 분을 목 베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미방과 부사인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군량 10만 석을 급히 마련하는 것도 어렵지만 형주가 동오의 손에 떨어진 지금 군량을 싣고 가는 일은 더 큰 일이었다.

"군량을 싣고 간다면 형주 땅을 거쳐 가야 하거늘, 어떻게 그곳을 지나갈 수가 있겠소?"

미방은 얼굴색이 달라지면서 탄식했다. 그러자 부사인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 외쳤다.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소!"

부사인은 칼을 뽑아 사자의 목을 베었다. 미방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관운장은 이 일을 빙자하여 우리를 죽이겠다는 뜻이오. 그런데도 어찌 우리가 두 손을 묶고 앉아 죽기만을 기다릴 수가 있다는 말이오. 공이 빨리 동오에 항복하지 않는다면 뒷날 반드시 그의 손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부사인이 미방을 재촉하고 있는데 군사가 급히 달려오더니 알렸다.

"동오의 대도독 여몽이 대군을 이끌고 급히 성 아래로 밀려 오고 있고 합니다."

미방은 그 소리를 듣자 얼굴색이 달라졌다. 이미 형세가 기울었음을 안 미방은 마침내 부사인과 함께 성을 나가 항복을 하고 말았다. 여몽도 미방이 항복하자 기뻐하며 손권에게 데리고 갔다. 손권은 남군마저 절로 손안에 굴러들어오자 크게 기뻐하며 부사인과 미방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백성들을 안심시킨 후 잔치를 베풀어 삼군을 위로했다. 한편 조조는 허도에서 여러 모사들과 함께 형주와 번성의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동오에서 사자가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조는 사자를 들게 하고 가지고 온 손권의 글을 읽어 보았다. 내용인 즉, 강동에서 형주를 칠 테니 관운장의 뒤를 공격해 달라는 말과 함께 관운장이 알아채고 방비하지 않도록 비밀을 지켜 달라는 것이었다. 조조는 사신을 돌려보낸 후 다시 모사들과 의논을 하는데 주부인 동소가 의견을 내었다.

"번성에서는 지금 위급한 지경이라 목을 빼어 들고 구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시켜 화살을 글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보내도록 하십시오. 먼저 지쳐 있는 군심을 달래고 안심시키는 한편 동오가 형주를 칠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그 소문을 관운장이 듣게 되면 관운장은 형주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번성에 있는 군사를 형주로 돌릴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서황으로 하여금 운장을 덮치게 하면 틀림없이 우리가 그들을 크게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가 동소의 말을 들어 보니 그럴 둣한 계책이 아닐 수 없었다. 곧 사람을 양릉파로 보내 서황으로 하여금 군사를 움직이게 하고 자신도 조인을 구하기 위해 몸소 대군을 이끌어 낙양 남쪽의 양릉파로 향했다. 한편 서황은 장막 안에 앉아 있다가 위왕 조조가 보낸 사자가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나가 그를 맞았다.

"위왕께서는 이미 친히 대군을 거느려 낙양을 거쳐 오시는 중입니다. 장군께서는 급히 관운장을 쳐 번성의 어려움을 풀어 주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사자가 조조의 영을 그렇게 전하고 있는데 탐마가 달려와 알렸다.

"지금 관평이 군사를 언성에 머물게 하고, 요화는 사총에 진을 세웠는데 앞뒤로 열두 개의 진과 책이 서로 잇대어 있습니다."

탐마의 말을 듣자 서황도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었다. 먼저 서상과 여건 두 부장에게 자신의 거짓 깃발을 주고 언성을 달려가 관평를 치도록 했다. 이어 자신은 날랜 군사 5백을 뽑아 면수를 돌아 샛길로 가 관평의 뒤를 치기로 했다. 한편 관평은 서황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전갈을 받자 군사를 이끌어 진을 벌여 세우고 적을 맞았다. 위군이 맞은편에 진을 세우자 관평은 말을 박차 앞으로 내달았다. 위군 쪽에서도 한 장수가 달려 나오는데 겨우 3합이 되지 못해 서상이 당해내지 못하겠다는 듯 슬며시 말머리를 돌렸다. 서상이 물러나자 여건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그러나 여건 역시 싸운 지 5, 6합도 못 되어 달아나고 관평은 그 여세를 몰아 여건의 뒤를 쫓았다. 서상과 여건은 관평이 뒤쫓자 20여 리나 달아났다. 관평이 그들을 뒤쫓고 있는데 뒤따르던 군사들이 문득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군님, 성안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습니다."

관평이 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성에서 벌겋게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제야 적의 계교에 빠진 것을 알고 말을 돌려 언성으로 내달았다. 관평이 한동안 달려가는데 한 떼의 군마가 함성을 울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군마를 보니, 문기 아래 말을 세우고 있는 장수가 있었는데 바로 서황이었다. 서황은 관평을 보자 큰 소리로 외쳤다.

"애송이 관평아! 아직도 죽음이 네 코앞에 닥친 것을 모르느냐? 형주는 이미 동오의 군사들이 치지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여기서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냐?"

관평은 서황의 빈정대는 소리를 듣자 벌컥 화가 치솟아 대꾸도 하지 않고 말을 달려 서황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3,4합을 부딪기도 전에 군사들의 고함 소리가 어지럽게 터져 나왔다.

"언성의 불길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관평이 보니 과연 시커먼 연기와 함께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걸 본 관평은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적군을 헤지고 길을 열어 사총의 영채를 향해 말을 달렸다. 관평이 사총의 영채로 달려가자 요화가 달려 나와 맞아들였다. 관평을 맞아들인 요화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형주를 이미 여몽에게 빼앗겼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네. 이로 인해 군사들의 마음이 뒤숭숭해져 있으니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그 엄청난 소리에 관평은 고개를 저으며 잘라 말했다.

"그건 필시 누가 거짓으로 퍼뜨린 말일 걸세. 만일 군사들 중에 함부로 그따위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도록 하게."

그때 탐마가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북쪽에 있는 첫 번째 영채를 서황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 영채를 빼앗기고 나면 다른 영채도 지켜내지 못할 것일세. 이곳은 앞에 면수를 끼고 있는 데다 뒤편으로는 계곡이 있어 적이 쉽게 여기까지 이르지 못할 것일세. 그러니 함께 가서 첫 번째 영채부터 구해야겠네."

관평의 말에 요화는 부장을 불러 뒷일을 당부했다.

"너희들은 영채를 굳게 지키도록 하라. 만약 적병이 오거든 즉시 불을 올려 군호를 보내도록 하라."

그러자 부장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총의 영채는 녹각(장애물)이 열 겹이나 둘러쳐져 있어 나는 새도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찌 적병이 침범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관평과 요화는 부장의 말을 믿음직스럽게 여기며 날랜 군사들을 뽑아 첫 번째 영채로 달려갔다. 첫 번째 영채에 이르른 관평은 맞은편 얕은 산기슭에 진을 치고 있는 위군을 살펴보다 요화에게 말했다.

"지금 서황은 지세가 이롭지 못한 곳에 군사를 머무르게 했으니 오늘 밤 기습하여 진을 빼앗아야겠네."

요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군은 군사 반을 거느리고 가게. 내가 이곳을 지키며 조응하겠네."

언성을 잃은 관평은 적병의 진을 빼앗아 그 분을 풀겠다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날 밤이 되기를 기다려 군사를 이끌고 위군의 진으로 짓쳐들어갔다. 그러나 위군의 진에는 군사는커녕 개미 새끼 한 얼씬하지 않았다.

"어서 물러나라!"

관평은 그제야 적의 계교에 빠졌음을 알았다. 급히 말을 돌려 물러나는데 왼편과 오른편에서 서상과 여건이 군사를 이끌어 왔다. 관평은 양쪽에서 밀어닥치는 적병을 당할 수가 없어 크게 패한 채 달아났다. 달아나는 관평을 뒤쫓는 위군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관평은 가까스로 영채에 돌아왔으나 이미 그곳도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뒤쫓아온 위군이 영채를 겹겹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관평과 요화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적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황망히 첫 번째 진을 버리고 사총의 영채를 향해 말을 몰았다. 그러나 가까이 이르러 본 즉 사총의 진에도 시뻘건 불길이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총의 영채만은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관평은 영채 안의 여기저기에 위군의 기치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평과 요화는 황급히 번성으로 통하는 큰길을 택해 뒤돌아볼 틈도 없이 말을 모는데 문득 앞에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앞선 장수는 바로 서황이었다. 관평과 요화는 죽기 살기로 서황과 싸워 가까스로 길을 열어 달아났다. 겨우 서화을 따돌리고 보니 남은 군사라고는 몇백에 지나지 않았다. 관평과 요화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관 공의 대채에 이르러 그동안의 일을 말했다.

"지금 서황이 언성과 다른 영채들을 빼앗고 있으며, 조조도 몸소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번성으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주가 이미 여몽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그건 적이 우리 군사들의 마음을 흩어 놓으려고 거짓으로 퍼뜨린 소문이다. 동오의 여몽이 병이 중해 어린 육손으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하게 했는데 무슨 걱정이냐?"

형주가 이미 동오 군사들에게 떨어진 걸 모르고 있는 관 공이 관평에게 꾸짖듯 말했다. 그때 홀연 탐마가 달려와 알렸다.

"서황이 대군을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관 공이 그 말을 듣더니 좌우를 보며 호령했다.

"내 말에 안장을 얹도록 하라."

관 공이 말 위에 올라 서황을 맞으려 하는데 관평이 걱정스런 얼굴로 만류했다.

"아버님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가 싸우셔서는 아니 됩니다."

"서황과 지난날 가까이 지낸 적이 있어 그의 용맹을 잘 안다. 만약 그가 물러나지 않으면 내가 그를 목 베어 다른 장수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줄 것이다."

관 공은 관평의 말을 물리치며 청룡언월도를 잡고 분연히 말을 박찼다. 관 공이 긴 수염을 휘날리며 말을 달려나가자 조조군은 깜짝 놀랐다. 무거운 상처를 입어 누워 있다는 관 공이 뜻밖에도 무장을 갖추고 나는 듯이 달려오자 모두들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관 공은 적진 앞쪽에 이르자 말을 세우며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서 공명은 어디 계시오?"

그러자 위군의 문기가 열리며 서황이 말을 달려 나오더니 몸을 숙여 예를 올리며 말했다.

"군후와 헤어진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뵙지 못했더니 어느새 수염과 머리가 희끗희끗 백발이 되셨습니다그려. 지난날 많은 가르침으로 이 몸을 깨우쳐 주시던 때를 돌이키니 실로 고마움과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제 군후의 영걸스런 위풍이 온 화하에 떨치시어 부러움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뵈옵게 되니 가슴의 회포가 저으기 풀리는 듯합니다."

서황의 정중한 인사말을 듣고 난 관 공이 부드러은 얼굴로 물었다.

"나와 서 공명의 교분이 두터운 것은 다른 이와 견줄 바가 아니오. 그런데 어찌하여 이번에 내 이를 몇 차례나 어려움에 빠뜨렸소?"

그러나 서황은 관 공의 물음에 대답 대신 갑자기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소리 높이 외쳤다.

"어느 누구든 관운장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는 천금의 상을 내리리라!"

그 외침에 관 공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서 공명은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오?"

"오늘 나는 나라일을 하러 왔소. 사사로운 일에 나라 일을 저버릴 수는 없소이다."

서황은 그 말과 함께 대뜸 도끼를 휘두르며 관 공을 향해 말을 박찼다. 관 공도 그제야 크게 노해 청룡도를 휘두르며 서황을 맞았다. 한바탕 불꽃 튀는 싸움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80여 합이나 부딪쳤으나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거기다 관 공이 비록 뛰어난 무예를 지녔다 하나 화살을 맞은 오른팔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 전과 같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싸움을 말렸던 관평은 혹시 관 공에게 실수라도 있을까 두려워 징을 쳐 말을 돌리게 했다. 관 공이 징 소리를 듣고 말을 돌려 진으로 달려갈 때였다. 홀연 사방에서 크게 함성이 일었다. 번성에 갇혀 있던 조인 이 구원병이 왔음을 알고 성 밖으로 군사를 이끌어 나온 것이었다. 조인이 서황과 함께 왼쪽과 오른쪽에서 들이치니 형주 군사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관 공은 하는 수 없이 장졸들을 이끌어 양강 상류 쪽으로 달아나는데 위군이 급한 기세로 뒤쫓았다. 관 공이 한동안 말을 달렸을 때였다. 홀연 맞은편에서 군사 하나가 달려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형주는 이미 여몽에게 빼앗기고, 장군의 가족들도 사로잡혔습니다."

관 공은 그 말을 듣자 크게 놀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떠돌던 소문이 사실임을 알자 하늘을 우러르며 비통해했다. 관 공은 형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자 감히 양양으로 갈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공안으로 향하는데 얼마 가지 않아 또 탐마가 달려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공안을 지키던 부사인이 동오에 투항했습니다."

관 공은 그 소리를 듣자 이를 갈았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소식도 관 공의 화를 머리 끝까지 뻗치게 했다. 공안의 부사인에게 군량미를 재촉하러 갔던 군사 가운데 하나가 달려와 남군 소식을 전했다.

"부사인이 군량미를 청하러 간 사자를 죽이고 미방까지 꾀어 함께 동오에게 항복하게 했습니다."

이미 형주도 잃고, 거기다 부사인 뿐만 아니라 혈육처럼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왔던 미방마저 배신했다는 소리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관 공의 눈이 찢길 듯 위로 치켜지고 어금니를 가는데 그만 화살에 맞았던 상처가 터지며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장수들이 깜짝 놀라 황황히 관 공을 장막 안으로 떠메고 가 자리에 눕힌 후 상처를 돌보았다. 얼마 후에 정신이 든 관 공이 문득 왕보를 돌아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내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오늘 이꼴을 당하는구려."

그런 가운데도 관 공은 까닭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탐마에게 물었다.

"강변에 늘여 세웠던 봉화대에서는 어째서 불을 피워 알리지도 않았다는 말이냐?"

"여몽이 장사치로 꾸민 군사들을 배에 싣고 강을 건넜습니다. 흰옷 입은 장사꾼 차림에 속아 마음 놓고 있는 군사들을 동오의 날랜 군사들이 배 안에 숨어있다 갑자기 봉화대로 뛰어올라 봉화지기들을 덮쳤습니다. 봉화지기들이 모두 사로잡힌 터라 불을 피울 수 없었습니다."

탐마가 그렇게 대답하자 관 공은 그제야 여몽과 육손의 계교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관 공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주먹을 부르르 떨어 한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간사한 도적들의 계략에 빠졌구나. 내 무슨 낯으로 형님을 뵈올 수가 있단 말이냐?"

관 공의 애끓는 한탄을 듣고 있던 관량도독 조루가 관 공에게 권했다.

"이제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사람을 성도로 보내 구원을 청하는 한편, 급히 뭍으로 나아가 형주를 되찾도록 하십시오."

관 공도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 조루의 말을 좇아 마량과 이적에게 글을 주어 성도의 한중왕에게 달려가 구원병을 청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어 형주로 향했다. 관 공 자신이 선봉이 되었으며, 관평과 요화에게 뒤를 맡겨 뒤쫓는 적을 막게 했다. 한편 관 공이 물러나고 번성이 포위에서 풀려나자 조인은 조조를 찾아가 절한 후 울면서 죄를 빌었다.

"모두 하늘이 정한 운수로 너희들 탓이 아니니 죄를 청하지 말라."

조조는 너그럽게 조인을 위로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삼군에게 후한 상까지 내렸다. 조조는 몸소 사총 땅의 영채를 둘러보고 여러 장수들을 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형주 군사들은 원래 날랜데다 이토록 녹각을 여러 겹 둘러쳤는데도 서 공명은 용케도 적진 깊숙이 밀고 들어와 큰 공을 세웠구나. 나도 군사를 부린 지 30여 년이나 되었으나 아직도 이처럼 적진 깊숙이 뚫고 들어가 보지 못했다. 서 공명이야말로 식견이 넓고 담이 큰 빼어난 장수라 아니 할 수 없구나."

조조는 천하의 맹장으로 위엄을 떨치고 있는 관 공을 쫓은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리하여 조조가 관 공을 쫓은 서황에 감탄해 마지않으니 여러 장수들도 모두 서황의 용맹에 탄복했다. 조조는 사총의 영채를 돌아본 후 군사를 마파 땅으로 돌려 그곳에 영채를 세웠다. 조조가 마파에 이르자 서황도 군사들을 이끌고 조조를 보러 왔다. 조조는 서황의 군사가 이르자 몸소 영채 밖까지 나가 맞아 들였다. 서황의 군사들이 다가오는데 보니 모두 대오가 흐트러짐 없이 정연할 뿐 아니라 그 기상이 늠름했다. 조조는 다시 서황에게 감탄하며 치하했다.

"과연 서 장군께서는 주아부(서한의 명장)의 풍도가 있구나."

조조는 서황의 손을 잡아 영채로 이끈 후에 평남장군에 봉하고 하후상과 함께 양양을 지키며 관 공의 군사들을 막도록 했다. 조조는 그때까지 형주의 일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우선 마파에 진을 세우고 형주의 일을 살피게 했다.

 

슬프도다 관 공의 마지막 길

한편 관 공은 형주로 군사를 이끌기는 했으나 가는 도중에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고 말았다. 앞에는 동오의 군사가 있는 데다 위의 대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 공은 답답한 나머지 관량도독 조루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앞에는 오군이, 뒤에는 위병이 있는데 구원병은 오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조루라고 별다른 묘안이 있을 리 없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 궁한 대로나마 의견을 내었다.

"지난날 여몽이 육구에 있을 곧잘 군후께 글을 올리기를 '우리 양쪽이 우호를 맺어 함께 역적 조조를 치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여몽이 도리어 조조와 손잡고 우리를 쳤으니 이는 그 맹세를 거스른 것입니다. 군후께서는 군사를 잠시 이곳에 머물게 하시고 그에게 글 보내 꾸짖어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본 후에 움직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루의 말이 신통한 계책은 아니었으나 관 공에게 별다르게 떠오르는 계책이 없는 터라 그의 말을 쫓기로 했다. 관 공은 글을 닦아 사자를 뽑아 형주로 보냈다. 이때 여몽은 형주 백성들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형주 여러 고을에 영을 내려 관 공을 따라 싸우러 나간 장수나 졸개의 집일지라도 함부로 동오 군사들이 뛰어들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달마다 대어 주던 양식도 이전과 다름없이 대어 주게 하고 병자가 있는 가족에게는 의원을 보내 돌보도록 했다. 여몽이 그토록 극진히 대해 주니 관 공을 따랐던 장졸들의 가솔들을 모두 하나같이 여몽의 두터운 보살핌에 감격했다.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여몽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을 무렵 관 공이 보낸 사자가 형주에 이르렀다. 관 공의 사자가 온다는 전갈을 받자 여몽은 몸소 성 밖까지 나가 귀한 손님을 대하는 예로 맞아들였다. 사자를 성안에 맞아들이자 사자는 절을 올리며 관 공의 글을 올렸다. 여몽이 그 글을 읽어 본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자에게 말했다.

"지난날 내가 관 장군과 우호를 맺은 것은 내 사사로운 마음에서였소. 그러나 지금은 우리 주공의 명을 받든 몸이니 어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돌아가거든 이 사람의 뜻을 관 장군께 좋은 말로 말씀드려주시오."

여몽은 그렇게 말하며 잔치를 열어 사자를 대접한 뒤 역관으로 보내 편히 쉬도록 했다. 관 공의 사자는 여몽이 자신을 후하게 대접하자 매우 고마워했다. 그러나 여몽이 형주 군사의 가솔들을 극진히 돌보는 일이나 사자에게 후히 대접하는 것 또한 마음 속에 품은 계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 공의 사자가 역관에 머물고 있음을 안 형주 군사들의 가솔들이 역관으로 몰려와 사자에게 관 공을 따라간 남편이나 형제, 아들의 소식을 묻는가 하면 글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도 있었다. 그중에는 말로 안부를 전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이 전하는 안부의 내용이 한결같았다. 여몽 장군은 너그러운 다스림으로 곡식은 물론, 아픈 사람에게는 약을 주시고 재난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시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 바로 여몽이 노린 바대로 된 것이었다. 사자로 하여금 형주에 있는 가솔들의 소식을 전하게 하되 형주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있음을 알려 형주 군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자는 계책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사자는 여몽에게 작별의 예를 올리고 형주성을 물러 나왔다. 여몽은 몸소 성 밖까지 따라 나와 그를 배웅했다. 여몽의 원대한 계책을 알지 못한 사자는 돌아와 관 공에게 여몽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또한 관 공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모든 장졸들의 가솔들도 아무 탈 없으며, 여몽이 양식과 입을 것 등을 도자람 없이 주며 후히 대접하고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관 공이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모두가 다 여몽의 간사한 계교다. 내가 살아서 그놈을 죽이지 못하면 죽은 뒤에라도 반드시 그놈을 죽여 한을 씻으리라!"

관 공은 사자를 소리쳐 꾸짖으며 물러나게 했다. 사자가 관 공의 장막을 물러 나오자 여러 장수들이 몰려와 궁금한 가솔들의 안부를 물었다. 사자는 장졸들의 가솔들이 편안하다고 본 대로 말하고 여몽이 후히 잘 돌보아 주고 있다는 말과 함께 가지고 온 글과 안부의 말도 전해 주었다. 사자를 통해 가족들이 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군사들은 가솔들에 대한 그리움의 정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나 여몽과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사자의 말을 듣고 더욱 화가 치솟은 관 공은 군사를 이끌어 형주로 향했다. 그러나 사자를 통해 가솔들의 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장수들 중에는 슬며시 대오를 빠져나와 형주로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가족들을 살려두어 형주군의 군심을 흩어 놓으려던 여몽의 계책이 보기 좋게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장수들이 하나 둘 달아나자 관 공은 더욱 화가 났다. 형주로 군사를 재촉하고 있는데 홀연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앞선 장수는 동오의 장흠이었다. 장흠이 창을 추켜들고 말 위에 앉아 소리쳤다.

"관운장은 빨리 항복하라."

관 공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나는 한나라 장수다. 어찌 역적놈들에게 항복하겠느냐?"

꾸짖음과 함께 관 공은 말을 몰아 장흠을 향해 짖쳐들었다. 장흠이 관 공과 부딪친 지 삼 합이 되자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다. 관 공이 장흠을 뒤쫓아 20여 리쯤 달렸을 때였다. 홀연 왼편 산골짜기에서 고함 소리가 크게 일며 한당이 군사를 이끌어 왔다. 관 공이 한당을 맞아 한바탕 싸움을 벌이려는데 오른편 골짜기에서 주태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 나왔다. 관 공이 한당과 주태를 맞아 싸우는데 달아나던 장흠이 군사를 되돌려 관 공을 향해 덮쳐 왔다. 수가 많지 않았던 관 공의 군사는 세 갈래로 몰려오는 적병을 당해 낼 길이 없었다. 거기다 형주성 안의 가족 소식을 듣고 마음이 흐트러져 있는 군사들이라 힘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 관 공은 급히 군사를 되돌려 오던 길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관공이 길을 되돌려 몇 리쯤을 달려가는데 남산 언덕 위에 연기가 자욱했다. 관공이 놀라 보니 언덕 위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화톳불을 피우고 있는데 한쪽에는 흰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 깃발에 글씨가 씌어 있었는데 그 글씨가 이상했다.

'형주토인(형주 본토 사람)'

형주토인이란 글씨를 보자 관 공이 거느린 군사들은 걸음을 멈추고 언덕 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군사들의 대부분은 형주 토박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군사들을 보고 소리쳤다.

"형주에 사는 토박이 여러분들을 어서 항복하시오."

군사들이 그 소리를 듣자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얼굴에 역력해졌다. 관 공은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는 걸 보고 말을 달려 언덕 위로 달려가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양쪽 산골짜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왼편은 정봉이 거느린 군사요, 오른편은 서성이 거느린 군사였다. 거기다 언덕 위에서도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내려오는데, 앞선 장수는 장흠이었다. 세 갈래 길로 달려온 군마는 고함 소리, 북소리, 징 소리와 함께 하늘을 뒤흔드는 가운데 순식간에 관 공을 에워싸고 말았다. 관 공은 다가오는 적병을 닥치는 대로 쳐죽였으나 이미 싸울 마음이 없던 장졸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거나 항복하는 자가 점차로 늘어났다. 그럴 동안 어느새 으스름 황혼이 되었다. 관 공이 달려드는 적병을 찌르고 베는 가운데 문득 사방의 산을 바라보니 산꼭대기마다 형주 사람들이 올라가 있는데 애절한 목소리로 가족을 부르고 있었다. 부모는 자식을 부르고 형제는 형이나 아우를, 혹은 여인이 남편을 부르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고 있었다.

"아버지!"

"형님!"

"어서 가족들에게 돌아오시오."

"이 고장 사람들은 어서 항복하십시오."

그 소리를 들은 군사들은 너도나도 마음이 산란해 산꼭대기를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관 공은 청룡도를 추켜들고 달아나는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서지 못하겠느냐? 달아나는 자는 목을 베리라!"

그러나 이미 싸울 마음을 버린 군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달아나니 다시 부른다 하여 돌아올 리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형주 토박이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남은 군사는 겨우 3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관 공은 3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린 채 겹겹이 에워싼 적병을 쳐 죽였다. 밤 삼경쯤 되었을 무렵, 문득 동쪽에서 고함 소리가 크게 일며 두 갈래 길로 군마가 달려왔다. 그 군마는 조조 군사를 헤치며 관 공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바로 관평과 요화가 관 공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겨우 관 공을 구한 관평이 함께 길을 열어 달아나면서 말했다.

"군심이 매우 어지러우니 어디든 성을 얻어 잠시 머무르며 기회를 엿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까운 맥성이 작기는 해도 우선 잠시 머무를 만합니다."

달리 길이 없는 관 공은 관평의 말에 따랐다. 군사를 재촉하여 맥성에 이르른 관 공은 성문을 굳게 지키게 한 후 장수들과 앞일을 의논했다. 조루가 의견을 냈다.

"여기서 상용 땅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곳에 유봉이 맹달과 함께 있으니 급히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한편 한중왕께도 사람을 보내 구원병을 청하신다면 군사들의 마음도 안정될 것입니다."

관 공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고개를 끄덕이는데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오병이 뒤쫓아와 성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관 공이 급히 여러 사람에게 물었다.

"누가 상용으로 가서 구원을 청하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요화가 나서며 대답했다.

"내가 장군을 호위하여 무사히 포위를 뚫고 나갈 수 있게 해보겠소."

관평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관 공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글을 닦아 주었다. 요화는 그 글을 옷 속에 넣어 꿰매고 간단히 요기를 한 후 관평과 함께 성문 밖으로 나갔다. 요화가 성문 밖으로 나오자 동오의 장수 정봉이 길을 막았다. 관평이 정봉을 맞아 힘을 다해 밀어붙이니 정봉이 당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요화가 그 틈을 타 상용을 향해 달려가자 관평은 다시 성안으로 돌아와 굳게 문을 닫고 지키기만 했다. 유봉과 맹달이 상용 땅에 머무르게 된 것은 이전에 두 사람이 이곳을 빼앗고 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았을 때였다. 한중왕은 그들의 공을 치하하여 유봉을 부장군으로 봉하고 맹달과 함께 상용 땅을 다스리게 했다. 그때 유봉과 맹달도 관 공이 싸움에 졌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에 어찌해야 할지를 의논하고 있는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관 공이 보낸 요화가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은 급히 요화를 불러들여 물었다.

"어찌 된 일이요?"

"관 공은 싸움에 져 맥성에 계시는데 지금 적병이 에워싸고 있어 위급한 형세입니다. 그러나 촉땅과는 너무 멀어 급히 구원병이 올 수 없는 까닭에 특별히 나를 보내 두 장군께 구원을 청하게 하셨습니다. 바라건대 두 장군께서는 급히 상용 군사를 일으키시어 관 공의 어려움을 풀어주십시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다가는 관 공께서 목숨을 잃으실까 두렵습니다."

요화가 간곡한 어조로 말하자 듣고 난 유봉이 말했다.

"장군은 잠시 편히 쉬도록 하오. 우리가 의논을 해보겠소."

이에 다급한 요화는 그들이 빨리 군사 내기만을 기다렸다. 유봉은 요화가 역관으로 간 후 맹달에게 말했다.

"작은 아버님께서 곤경에 빠졌다는데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유비의 양아들인 유봉은 관 공의 위급한 처지를 전해 듣고도 한가롭게 맹달에게 의논하듯 물었다. 그런데 맹달은 미리 겁부터 먹고 있었다.

"동오군은 날래고 굳셀 뿐만 아니라 장수들 또한 용맹스러워 이미 형주 아홉 군을 빼앗았는데 이제 별 쓸모없는 맥성만이 남았소. 거기다 내가 들은 바로는 조조가 몸소 4, 5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마파 땅에 머무르고 있다 하오. 우리가 거느리고 있는 산성의 보잘것없는 군사로 어찌 손권과 조조의 군사를 대적할 수 있겠소? 함부로 군사를 내어 그들과 맞설 수 없는 일이오."

맹달이 군사 내는 일을 마다하자 유봉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건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관 공은 내 작은 아버님이신데 어찌 차마 이대로 앉아 보고만 있겠소?"

맹달이 유봉의 말에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장군은 관 공을 작은아버님으로 생각하는지 몰라도 관 공이 장군을 조카로 여기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맹달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유봉이 낯빛을 달리하며 물었다. 맹달이 열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한중왕께서 장군을 처음 아드님으로 정하셨을 때 관 공은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합니다. 이후 한중왕이 왕위에 오르신 후 후사를 세우려고 공명에게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명이 그건 집안일이니 관운장과 장비, 두 분에게 물으라고 해서 한중왕께서는 형주로 사람을 보내 관 공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때 관 공은 장군이 양아들이니 후사로 세우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중왕께 권하기를 장군을 멀리 상용 산성으로 보내고 후환을 없애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장군이 상용에 머물게 된 것도 실은 관 공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장군만 모르고 계십니까? 이제 이토록 위험한 판국에 어찌 작은아버님이라는 허울 좋은 의리에 얽매이려 하시오?"

평소 관 공을 마땅치 않게 여겼던 유봉도 맹달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군사를 내자는 말은 하지 않고 핑계 댈 궁리부터 했다.

"그대의 말이 옳으나 무슨 말로 요화의 청을 거절하면 좋겠소?"

"그건 어렵지가 않지요. 이 산성을 다스린 지가 이제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민심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하십시오. 섣불리 군사를 일으켰다가는 무슨 변고가 일어날지 알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이곳마저 지키기 어렵게 된다고 하십시오."

맹달이 핑계 댈 구실까지 만들어주자 유봉은 마침내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요화를 불러들였다. 요화가 역관에서 급히 달려가자 유봉이 말했다.

"이 산성은 빼앗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소. 군사를 일으켰다가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아무래도 맥성으로 군사를 내기가 어려울 것 같소이다."

요화는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이마를 땅바닥에 짓찧고 울며 말했다.

"군사를 내지 않으시면 관 공께서는 돌아가시고 말 것입니다. 부디 도와 주시오."

그러자 맹달이 나서며 잘라 말했다.

"우리가 간다 해도 달라질 건 없소이다. 어찌 한 잔 물로 한 수레 마른 나무의 불을 끌 수 있겠소? 장군은 어서 돌아가 촉에서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오."

요화가 목을 놓아 울며 애걸했으나 유봉과 맹달은 소매를 떨치며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요화는 그들에게 구원군을 청하는 것이 더 이상 소용없는 일인 줄 알게 되었다. 그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라 요화는 한중왕에게 구원을 청하기로 작정하고 말 위에 올랐다. 말 위에 오른 요화는 유봉과 맹달이 괘씸해 한바탕 크게 꾸짖어 욕한 후 성도로 말을 몰았다. 한편 맥성에 있는 관 공은 상용에서 구원군이 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을 기다려도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이제 남은 군사는 5, 6백에 지나지 않는데 그나마도 태반이 성한 군사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식량마저 바닥나고 보니 그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관 공이 초조하게 있는데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성 아래에 한 사람이 활을 쏘지 말라고 외치며 군후께 들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관 공이 그를 불러들이게 하여 보니 그는 바로 제갈근이었다. 서로 예를 마치자 관 공이 차를 대접했다. 차를 마신 제갈근이 찾아온 연유를 말했다.

"오늘, 오후의 분부를 받들어 특별히 장군께 권할 말씀이 있어 왔소이다. 일찍이 시무를 아는 이가 바로 뛰어난 영걸이라 했습니다. 이제 장군께서 다스리던 한상 아홉 군이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고 남은 것은 이 외로운 성 하나뿐입니다. 그나마 안으로는 양식마저 떨어지고 밖으로는 구원 오는 군사가 없으니 위태롭기 아침저녁을 기약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오후께 귀순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오후께 귀순하면 다시 형주. 양양의 아홉 고을을 이전처럼 다스릴 수 있으며 가족과 함께 안락을 누릴 수 있으니 부디 깊이 헤아리도록 하시오."

그 말을 듣자 관 공은 정색을 하며 제갈근을 꾸짖었다.

"나는 원래 한낱 해량 땅의 무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우리 주공께서 손발처럼 나를 아끼셨으며 형제의 의까지 맺은 몸이다. 내 어찌 그 의를 저버리고 적국에 항복할 것인가? 성이 떨어지면 오로지 죽을 따름이다. 옥은 부서질지언정 그 흰빛을 잃지 않으며 대나무는 불에 타도 그 곧음을 잃지 않는다. 내 몸은 비록 죽을지언정 이름은 죽백(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대는 여러 소리 말고 빨리 성을 물러나도록 하라. 나는 죽기로 작정하고 손권과 결판을 낼 것이다."

관 공이 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제갈근이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말했다.

"오후께서는 군후와 더불어 옛날 진과 진처럼 우호를 맺고 힘을 합해 조조를 쳐 한실을 세우려 하실 뿐입니다. 그 외의 딴 뜻은 없는데 군후께서는 어째서 이토록 오후의 뜻을 몰라 주십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곁에 있던 관평은 참지 못하고 칼을 빼들어 제갈근을 베려 했다. 관 공이 관평을 급히 타일렀다.

"칼을 거두어라. 저 사람의 아우 공명이 촉에서 너의 큰아버님을 돕고 있다. 지금 저 사람을 죽인다면 그들 형제의 정을 해치는 것이 된다."

관 공은 관평에게 그렇게 말한 후 좌우를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저 사람을 밖으로 끌어내라!"

관 공이 그렇게 말하니 제갈근도 더 이상 버티고 머물러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고 말 위에 올라 성을 빠져나갔다. 손권에게 돌아간 제갈근이 손권에게 말했다.

"관운장의 마음이 마치 쇠처럼 굳으니 말로는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손권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탄식하듯 말했다.

"과연 충신이로구나.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하겠는가?"

그러자 옆에 있던 여범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점을 쳐 그 운수를 헤아려 보겠습니다."

여범이 원래 점을 잘 치는 모사라 손권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범은 산통을 흔들어 점괘를 뽑기 시작했다. 점괘에 나타나는 상을 보니 바로 지수사괘(주역의 한 괘, 출군을 뜻함)에 현무(북쪽)의 호응이 있으니 풀이하면 '으뜸가는 적이 멀리 달아난다'는 점괘였다.

"으뜸가는 적이 멀리 달아난다는 괘가 나왔는데 으뜸가는 적이라면 관운장이니 어떻게 그를 사로잡겠소?"

점괘 풀이를 본 손권이 여몽에게 물었다. 여몽이 그 물음에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타난 점괘가 제가 꾸민 계책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관운장이 설령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달린 몸이라 해도 제가 파 놓은 그물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여몽은 그렇게 말하며 흡족한 얼굴로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여몽이 관 공을 사로잡겠다고 호기롭게 웃으니, 관 공은 마치 바다의 용이 개울에 잘못 떨어져 가재에게 희롱당하고 봉황새가 새장 속에 잘못 들었다가 참새에게 조롱을 받는 격이 되고 말았다. 여몽이 웃으며 관 공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말하자 손권이 얼른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떤 계책으로 관운장을 사로잡겠소?"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관운장의 군사가 불과 5, 6백 명에 지나지 않으니 큰길로 달아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맥성 바로 북쪽에 험한 오솔길이 있으니 반드시 그 길로 달아나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연에게 날랜 군사 5천을 주어 맥성 북쪽 20여 리 되는 곳에 매복케 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이르거든 맞서 싸우지 말고 그들을 보낸 뒤 뒤를 치게 하십시오."

"왜 그들을 치지 않고 보내라 하는가?"

손권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여몽에게 물었다. 여몽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의 뒤를 치면 적은 군세가 적으니 싸움을 피해 반드시 임저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니 날랜 군사 5백을 번장에게 주어 임저의 산속 길에 매복케 했다가 쫓겨오는 관운장을 사로잡는다면 그도 도리 없이 산 채로 묶이고 말 것입니다. 이제 장수들을 보내 맥성을 치되 주공께서는 북쪽 문을 비워 그들이 그 문으로 달아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손권이 들어보니 관운장이 아무리 영용하다 하나 빠져나갈 길이 없는 계책이었다. 머리를 끄덕이며 여몽의 말을 듣고 난 손권은 다시 여범을 불러 관운장이 정말 사로잡힐 것인가를 점쳐 보게 했다. 여범이 점괘를 뽑아 본 후 손권에게 말했다.

"적의 우두머리가 서북편으로 달아나다가 오늘 밤 해시(10시경)에 사로잡힐 점괘입니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주연과 반장에게 각기 군사를 주어 여몽이 말한 곳으로 가서 매복케 했다. 한편 맥성의 관 공은 마군과 보군을 점고해 보니 겨우 3백 명에 지나지 않았고 군량과 마초도 이미 바닥이 나 있었다. 그날 밤이 되자 성밖에는 오병들이 몰려와 형주 군사의 이름까지 불러대며 항복을 권했다. 형주 군사들의 마음은 그 소리를 듣자 더욱 산란해졌다.

"헛되이 목숨을 버리지 말고 성을 뛰어넘어라!"

오병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참지 못하고 성벽을 넘어 도망가는 군사들도 있었다. 위태롭기가 내일 아침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인데도 기다리는 구원병은 끝내 오지 않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관 공도 달리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왕보에게 한탄하며 물었다.

"지난날 내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소. 앞으로 어찌하면 좋겠소?"

왕보도 이젠 달리 길이 없다고 여겼다. 관 공의 물음에 눈물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의 위급은 비록 자아(강태공)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조루가 권했다.

"상용서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은 유봉과 맹달이 군사를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군후께서는 차라리 이 외로운 성을 버리고 서천으로 가십시오. 서천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빼앗겼던 땅을 도로 찾도록 하십시오."

관 공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네. 이 성에서 빠져나가도록 해야겠네."

관 공은 그렇게 말하고 성 위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성 밖은 동오군으로 뒤덮여 있는 듯한데 그 중 북문만은 군사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 듯했다. 관공은 그곳 지리를 잘 아는 맥성의 백성을 불러오게 하여 물었다.

"저기 북쪽으로 가면 지세가 어떠한가?"

"북쪽은 모두 좁은 산길인데 서천으로 통합니다."

관 공이 마음을 정한 듯 왕보에게 말했다.

"오늘 밤 북문을 뚫고 나가야겠네."

그러자 왕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관 공에게 말렸다.

"산길에는 반드시 적병이 매복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큰길로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왕보가 그렇게 말했으나 관 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찌 그까짓 매복을 두려워하겠는가?"

이미 마음을 정한 관 공은 그 말과 함께 마. 보군에게 군령을 내렸다.

"군사들을 병장기를 갖추고 성을 나갈 채비를 하도록 하라."

왕보는 관 공을 말릴 수 없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군후께서는 가시는 도중 부디 조심하시어 옥체를 보중하십시오. 저는 보졸 1백여 명과 함께 죽기를 작정하고 이 성을 지키겠습니다. 만약 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더라도 결코 항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군후께서는 빨리 돌아오시어 구해 주십시오."

관 공도 왕보의 간곡한 말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말 위에 올랐다. 그날 밤, 관 공은 떠나기 전에 주창에게 영을 내렸다.

"왕보가 이 맥성을 지키겠다 하니 주창 그대도 함께 남아 이 성을 지키도록 하라."

관 공은 관평. 조루와 함께 2백여 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북문으로 달려나가 산길로 접어들었다. 청룡도를 비껴든 관 공이 많지 않은 적을 좌우로 휩쓸며 20여 리쯤 달렸을 때였다. 문득 맞은 편 골짜기에서 갑자기 징 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히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내달아왔다. 앞선 장수를 보니 주연이었다.

"운장은 달아나지 말고 빨리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라!"

주연이 창을 쳐들며 길을 막고 소리쳤다. 관 공은 주연 같은 하찮은 장수가 호통을 치자 화가 치멸어 청룡도를 휘두르며 곧장 말을 박차며 달려갔다. 주연은 관 공이 내려친 칼날로부터 급히 몸을 피했다. 관 공이 다시 청룡도를 치켜들자 주연은 싸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달아났다. 관 공이 그 기세를 몰아 주연의 뒤를 쫓았다. 관 공이 말을 박차며 주연과의 거리를 점점 좁히고 있을 때 홀연 북소리가 크게 일더니 사방에서 복병이 쏟아져 나왔다. 관 공은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복병을 보자 더는 싸울 마음이 없었다. 적과 싸우기 위해 나선 길이 아니므로 임저 땅으로 뻗은 샛길을 향해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주연이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는 관 공을 쫓으며 뒤따르는 군사들을 덮치니 그나마도 적은 군사가 점점 줄어들었다. 임저의 산길을 원래가 험한 데다가 밤길이라 더욱 헤쳐나가기가 어려웠다. 관 공이 뒤따르는 적을 막으며 한편으로는 길을 헤쳐 4, 5리쯤 갔을 때였다. 홀연 앞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불길이 하늘을 사를 듯이 일었다. 미리 이곳에 매복해 있던 반장이 지른 불이었다. 반장은 관 공을 보자 칼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관 공이 보니 그 역시 한낱 이름 없는 장수라 봉의 눈을 부릅뜨며 한칼에 베어 버릴 기세로 청룡도를 후렸다. 반장은 불과 서너 차례밖에 부딪지 않았으나 힘이 부친 듯 달아났다. 관 공은 이번에는 달아나는 반장을 뒤쫓지 않았다. 매복이 있을까 경계한 데다 한시 바삐 서천으로 가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관 공이 가던 길을 재촉해 말을 달리는데 관평이 급히 뒤쫓아와 소식을 알렸다.

"조루가 적군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관 공은 그 소리를 듣자 경황없이 말을 달리던 중에도 한줄기 눈물이 눈가에 돌았다.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끝까지 자기를 따랐던 장수였다. 그러나 우선은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했다. 관 공은 슬픔을 억누르고 관평에게 일렀다.

"너는 뒤쫓는 적을 막아라. 내가 앞장서서 길을 열겠다."

관 공이 앞장서 산길을 헤치고 나가는데 어느새 뒤따르는 군사는 겨우 10여 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한동안 말을 달려 이른 곳이 결석이었다. 양쪽이 모두 높은 산인데 산 아래쪽은 가시나무와 덩굴이 뒤엉키고 갈대와 억새가 뻗어 있어 길을 헤치고 가기가 몹시 어려웠다. 험한 길을 힘을 다해 헤쳐 나아가는 동안 어느덧 오경(새벽 4)이 되었다. 날이 밝기 전에 험한 길을 벗어날 작정으로 무성한 잡풀을 헤칠 때였다. 갑자기 산이 떠나갈 듯 함성이 크게 일더니 땅에서 솟은 듯 복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긴 창과 장대에 매단 갈고리와 밧줄을 든 군사들이 어둠 속에서 달려들었다. 관 공이 에워싸고 있는 적병을 뚫기 위해 말을 박차는데 적병이 먼저 관 공이 타고 있는 적토마의 다리를 갈고리로 걸어 쓰러뜨렸다. 밧줄에 다리가 걸려 말이 쓰러지자 관 공도 말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반장의 수하인 마충이 갈고리를 뻗어 관 공의 허벅다리를 끌어당기자 때를 놓치지 않고 오병이 달려들어 관 공의 팔을 비틀어 눌렀다. 그리고는 관 공이 허리의 칼을 뽑아들기도 전에 오병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관 공을 꽁꽁 묶고 말았다. 온 화하에 그 위세를 떨쳐 울리던 장수로서는 너무나 한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관평은 아버지 관 공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달려가 구하려 했으나 그 역시 오병에게 에워싸인 몸이 되었다. 어느새 반장과 주연이 군사를 몰아와 몇 겹으로 에워싼 채 관평을 덮쳤다. 관평은 이를 악물고 홀로 다가오는 적들을 찍고 베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럴 동안 이미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관 공 부자를 사로잡았다는 소식은 곧 손권에게 전해졌다. 손권은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문무관원들을 장막으로 불러들였다. 손권이 관 공을 끌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충이 사로잡힌 관 공을 끌고 왔다. 손권은 관 공이 거미줄에 얽매이듯 묶인 채 앞에 나타나자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장군의 높은 덕을 사모하여 옛날 진과 진나라처럼 서로 의를 맺고자 했는데 어찌하여 거절하였소? 장군은 스스로 천하에 맞설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 들었는데 오늘은 이 몸에게 사로잡히셨구려. 어떻소? 이제라도 이 손권에게 투항하시겠소?"

이전에 자기를 괴롭혔던 관 공이었으나 그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는 손권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평생을 드높은 자존심으로 살아온 관 공에게는 적에게 사로잡힌 것부터가 이미 죽음보다 더한 수모로 여겨졌다.

"이 눈알 푸르고 수염 붉은 쥐새끼 같은 어린놈아! 나는 유황숙 어른과 복사꽃 핀 동산에서 형제의 의를 맺고 한실을 다시 일으키고자 맹세했던 몸이다. 어찌 너 같은 역적과 손을 잡고 함께 하겠느냐? 내가 이번에 너희들의 간사한 꾀에 잘못 빠져들었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 밖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관 공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쳐 손권을 꾸짖었다. 그러나 손권은 그 꾸짖음에도 선뜻 관 공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문득 여러 관원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관운장은 천하의 호걸이라 내가 깊이 존경해 왔던 터이다. 두터운 예로 대접해 항복을 권해 보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떤가?"

그 물음에 주부 좌함이 일어나 대답했다.

"아니 됩니다. 지난날 조조가 그를 얻었을 때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후에 봉하고 사흘 동안 작은 잔치, 닷새 동안 큰 잔치를 열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말을 탈 때마다 금을 걸어 주고, 말에서 내리면 은을 걸어 주며 온갖 은혜를 베풀어 그의 마음을 거두려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관운장은 다섯 관을 지나며 조조의 여섯 장수들을 죽이고 유비에게로 떠났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지난번엔 조조의 칠로군을 모두 죽이자 조조는 그의 용맹이 두려워 도읍을 옮겨서라도 관 공의 공격을 피하려 했을 정도입니다. 이제 주공께서는 그를 사로잡으셨으니 그를 죽여 없애 뒷날의 걱정거리를 남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가는 뒷날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될 터인즉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듣자 손권도 좌함의 말이 어긋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기던 손권은 마침내 무거운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그대의 말이 옳다. 관운장 부자를 끌어내 목을 베라."

관 공과 관평 부자는 손권의 영에 의해 목숨을 잃으니 때는 건안 2410월이었다. 관 공의 나이 쉰여덟이었다. 이날 늦가을의 구름은 나직이 들판을 덮었고, 비도 안개도 아닌 축축하고 습한 바람이 차갑게 대지에 감돌았다. 한 시대를 뒤흔들던 맹장 관 공의 죽음을 슬퍼하며 뒷사람이 시를 지어 기렸다.

한말의 인재들 중 대적할 자 없어

다만 운장 홀로 뛰어났구나.

신 같은 위엄, 무로 떨쳤고

선비의 고고함으로 글도 알았다.

하늘의 해 같은 마음 거울처럼 맑고

춘추의 높은 의기 구름을 헤쳤네.

밝은 그 이름 만고에 드리우니

삼분 천하의 때만의 것이 아니네.

관 공을 기린 또 다른 시도 있다.

인걸은 다만 옛 해량 땅에만 났으니

사람들은 한나라 운장에게 절하네.

도원에서 형제의 맺어

이제는 천자와 왕으로 사당에 모이었네.

기상은 바람과 우레 같아 당할 이 없고

뜻은 해와 달처럼 드높아

지금도 모시는 사당 간 곳마다 있네.

고목의 갈가마귀 지는 해에 비끼기 몇 해이더냐.

관 공이 세상을 떠나자 명마 적토는 마충에게 이끌려 와 손권에게 바쳐졌다.

"은상으로 관운장이 타던 말을 내리겠다."

손권은 마충에게 적토마를 도로 내주었다. 마충은 명마를 받고 몹시 기뻐했으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적토마는 관 공이 죽은 그날부터 풀을 뜯지 않았다. 아무리 향기로운 사료를 주어도, 물가에 몰고 나가 입을 대주어도 고개를 돌릴 뿐 끝내 먹지 않더니 마침내 주인에게 충절을 지키려는 듯 굶어 죽고 말았다. 한편 관 공이 죽던 날 맥성에 있던 왕보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살이 떨렸다. 게다가 전날 밤 꿈자리마저 어수선하기 그지없어 주창에게 말했다.

"어젯밤 꿈에 군후께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나시었소. 까닭을 물으려다가 그만 놀라 잠이 깨었는데 그 꿈이 좋은 조짐인지 나쁜 조짐인지 알 수가 없소."

왕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군사 하나가 급히 뛰어와 얼굴색이 변한 채 알렸다.

"동오군이 성 아래에 이르러 관 공 부자의 목을 걸어 놓고 항복을 권하고 있습니다."

왕보와 주창은 크게 놀라며 성벽 위로 달려가 보았다. 성 밖에 오병이 두 개의 머리를 들고 있는데 틀림없는 관 공 부자의 목이었다. 그걸 본 왕보는 치솟는 노기와 한스러움을 억누르지 못한 채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성 아래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주창도 왕보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왕보와 주창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얼마 남지 않은 군사들은 제각기 목숨을 구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맥성도 동오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편 관우의 그 무덕과 충절을 우러르며 그 죽음을 애석히 여겨 한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가 죽은 후에 일어난 갖가지 불가사의 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관 공이 죽은 후에도 한이 서린 영혼은 흩어지지 않고 허공을 떠돌다 한 곳에 이르른 그곳은 바로 형문주 당양현이었다. 그곳에는 경치가 빼어난 옥천이란 산이 있었는데 그 산에 보정이란 늙은 스님이 살고 있었다. 이전에 사수관 진국사의 장로였는데 다섯 관을 지나던 관공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관 공을 구해 준 바로 그 스님이었다. 관 공을 구해준 이후 몸을 피해 구름처럼 떠돌다 이 산의 높고 물 맑은 것을 보고 암자를 지어 좌선하며 도를 닦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어린 상좌 중 하나가 있어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그날 밤엔 달이 유난히 밝고 바람이 시원하여 삼경이 지나도록 참선을 하고 있는데 홀연 허공에서 사람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내 목을 내놓아라!"

보정이 놀라 허공을 바라보니 한 장수가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비껴들고 서 있었다. 그의 왼쪽에는 젊은 장수(관평)가 서 있었고 오른쪽에는 메기수염을 단 무장(주창)이 따르고 있었는데 모두 구름을 밟고 산 위쪽으로 오고 있었다. 보정은 한눈에 그가 관 공임을 알아보고 먼지떨이로 문을 열어 청해 들였다.

"관 공은 어디 계시오?"

관 공의 혼령도 보정 스님의 부름을 알아듣고 말에서 내려 바람을 타고 암자 앞에 이르렀다. 관 공은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물었다.

"스님은 누구이십니까? 바라건대 법호를 알려 주십시오."

관 공은 이전에 자기를 구해 준 보정을 알아보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보정이 관 공에게 되물었다.

"보정이라는 화상이외다. 지난날 사수관 진국사에서 군후와 뵌 적이 있는데 군후께서는 저를 잊으셨습니까?"

관 공도 그제야 보정을 알아보았다.

"전에 나를 구해 주신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나는 화를 입어 죽은 몸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떠돌고 있는 이 몸에게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보정은 관 공이 한을 품고 있음을 알고 혼령을 향해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지나간 일과 오늘날의 일을 일체 말하지 마십시오. 결과는 이미 그 까닭이 있기에 일어났음이니 서로 가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여몽에게 해를 당하시고 머리를 돌려 달라고 하시나, 그렇다면 지난날 장군에게 해를 당한 안량과 문추, 그리고 오관의 여섯 장수는 누구한테 머리를 돌려 달라고 소리쳐야 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관 공의 혼령은 그제야 문득 모든 것이 환히 깨달아지는 듯했다. 마침내 머리를 땅에 대고 불법을 받들어 부처님을 따를 뜻을 표한 후 거느린 두 장수와 함께 홀연 사라졌다. 그러나 관 공은 옥천산 보정 스님을 잊지 못한 듯 그 이후에도 가끔 나타나 백성들을 돌보아 주었다. 가물면 비가 오게 하고 홍수가 나면 해가 뜨게 했다. 고을 사람들은 관 공의 은혜로운 덕에 고마워하여 산꼭대기에 사당을 지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사를 올렸다. 뒷날 사람들이 그 사당에 관 공을 기리는 글을 써붙였다.

붉은 얼굴 붉은 마음으로

적토마를 타고 바람을 쫓을니

달릴 때도 적제(유비) 잊은 적 없고

푸른 등불 아래 사기를 읽고

청룡언월도를 드니

어디에도 푸른 하늘 우러러

부끄러울 것이 없네.

 

혼절하여 쓰러진 한중왕

관 공의 목을 벤 손권은 유비의 보복이 두려워 관 공의 목을 나무상자에 담아 조조에게 보내나 조조는 대신의 예로서 후히 장사지낸다. 이 소식을 들은 유비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혼절하고 만다.

한편, 손권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 이루어지자 매우 기뻐했다. 관 공을 죽이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해볼 수가 있었겠는가. 거기다가 형주와 양양을 되찾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삼군에게 상을 내리고 술과 고기를 내려 위로했다. 손권은 잔치를 열어 여러 장수들의 공을 사례하며 누구보다 으뜸가는 공을 세운 여몽을 높은 자리에 앉힌 뒤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형주를 얻지 못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근심하다 이제야 단번에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얻었으니, 이는 다 여 장군의 덕이오."

"제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여러 장수와 군졸들, 그리고 주공의 높으신 복일 뿐입니다."

여몽이 공을 사양하며 고개를 저었다. 손권이 그런 여몽을 보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날 주량(주유)은 계략이 빼어나 적벽에서 조조를 깨뜨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자경(노숙)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했다. 그 자경 또한 식견이 뛰어나 큰 공을 세웠다. 나에게 제왕이 되는 길을 일러 주었으니 그것이 첫째요. 또 조조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범해 왔을 때 모든 사람이 항복을 권했다. 그러나 그만은 주유로 하여금 조조와 싸우게 해야 한다고 고집한 것이 둘째이다. 그러나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도록 권한 것만은 실수였다. 그런데 지금 자명은 계책을 세워 형주를 되찾게 했으니 그 공은 주량과 자경보다 더 낫다 아니할 수 없구나."

손권은 말을 마치고 친히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부어 여몽에게 권했다. 여몽이 무릎을 꿇어 술잔을 받았다. 그런데 술잔을 받아 마시려던 여몽이 갑자기 술잔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손권의 멱살을 잡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 눈알 푸른 어린놈아, 붉은 수염 난 쥐새끼야, 네가 나를 알아보겠느냐?"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은 관 공이 죽기 전 손권에게 한 소리였다. 모든 장수들이 깜짝 놀랐다. 급히 달려가 여몽을 말리려는 데 어느 틈에 손권을 쓰러뜨리고는 성큼성큼 손권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눈을 부릅떠 호통을 쳤다.

"나는 황건적을 쳐부순 이래 30여 년 동안 천하를 거칠 것 없이 종횡했다. 이번에 너의 간사한 꾀에 빠져 오늘날 내가 해를 입었으니 살아서 너의 고기를 씹지 못한 것이 한이다. 이제 죽어서라도 마땅히 너와 여몽의 넋을 뒤쫓으리라. 나는 한수정후 관운장이다!"

그 호통에 놀란 손권은 황망히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계하에 내려가 관 공의 혼령을 뒤집어쓴 여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러자 여몽은 홀연 피를 쏟으며 죽었다. 모든 장수들은 그 참혹한 광경에 몸을 떨었다. 이것도 당시 사람들의 입에서 떠돌던 얘기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실제로 여몽은 형주를 차지한 뒤 얼마 못 가 이전부터 앓던 병이 도져 죽고 말았다. 그 죽음을 사람들이 관 공의 혼령에 의한 것이라 꾸몄으며 관 공을 죽인 자에 대한 미움이 이런 얘기를 만들어 내게 했으리라. 오후는 여몽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 주었다. 이어 여몽에게 남군태수에 잔릉후로 봉하고 그의 아들 여패로 하여금 아비의 벼슬을 잇게 했다. 손권은 여몽이 죽던 날 이후로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관 공의 혼령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 혼자서 까닭 없이 놀라거나 의심을 할 때가 많아졌다. 그런 어느 날 건업에서 장소가 왔다는 전갈이 와 급히 불러들이게 했다. 손권은 장소에게 관 공의 혼령이 여몽을 죽인 일과 그로 인한 자신의 두려움을 들려주었다. 듣고 난 장소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공께서 이번에 관 공 부자를 죽인 것은 잘못 생각하신 일입니다. 그로 인해 머지않아 강동에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관 공은 유비와 함께 도원에서 형제의 의를 맺을 때 살고 죽기를 함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유비는 동천과 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데다 제갈량의 지모와 장비. 황충. 조운. 마초 등의 용맹한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유비가 관 공 부자의 죽음을 안다면 반드시 전군을 일으켜 힘을 다해 원수를 갚으러 올 것입니다. 우리 동오가 그들과 맞서 싸울 수가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손권은 그 말을 듣자 얼굴색이 달라졌다. 만약 장소의 말대로 유비가 모든 군사를 일으켜 죽기로 작정하고 짓쳐든다면 동오도 온전히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손권이 발을 구르며 후회했다.

"내가 일을 크게 그르쳤구나.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주공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게 한 계책이 있으니 서촉의 군사로 하여금 동오로 밀고 들어오지 않도록 하고 형주도 바위 위에 있는 것처럼 든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장소가 이미 생각해 둔 계책이 있는 듯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손권의 얼굴이 밝아지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어떤 계책이오?"

"지금 조조는 1백만 대군을 거느린 채 온 화하를 차지하기 위해 마치 범이 먹이를 노리듯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비가 단숨에 원수를 갚으려면 반드시 조조와 손을 잡으려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동오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급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사람을 보내 관 공의 목을 조조에게 바치고 유비에게는 이번 일을 조조가 꾸며서 한 것처럼 알리십시오. 그러면 유비는 반드시 조조에게 원한을 품고 위나라를 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싸움의 형세를 보아 가며 가운데서 이로움을 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손권은 장소의 말에 크게 감탄하며 곧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사람을 뽑아 관 공의 머리를 나무상자 안에 담아 조조에게 보냈다. 한편 조조는 그때 마파에서 낙양으로 군사를 돌렸는데 동오의 사자가 관 공의 머리를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관운장이 죽었다 하니 이제부터 나는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잘 수 있게 되었구나."

조조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말하는데 문득 계단 아래에서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기뻐하신 나머지 동오가 보낸 화근까지 함께 받으시면 아니 됩니다. 이는 동오가 우리에게 화를 떠넘기려는 수작입니다."

조조가 보니, 그는 주부 사마의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지난날 유비. 관운장. 장비 세 사람은 도원에서 형제의 의를 맺을 때 죽고 살기를 함께 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동오에서 관운장을 죽여 놓고 그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관운장의 머리를 대왕께 바친 것입니다. 유비의 한을 대왕께 돌려 동오를 치는 대신 우리 위를 치게 하려는 것이지요. 그들은 가운데서 구경하며 형세를 보다가 이득을 취하려는 속셈입니다."

조조가 사마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중달의 말이 옳구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계책을 베풀어야 하겠는가?"

"그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대왕께서는 관운장의 목에 좋은 향나무로 몸을 깎아 붙인 뒤에 대신에 대한 예로서 후히 장사지내 주도록 하십시오. 유비가 그걸 알면 반드시 손권을 몹시 원망하며 죽을 힘을 다해 동오를 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싸움을 지켜 보다 촉이 이기면 오를 치고, 오가 이기면 촉을 치면 됩니다. 두 나라 중 한 나라만 빼앗게 되면 나머지 한 나라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조조는 사마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곧 동오에서 온 사자를 불러들이게 했다. 이윽고 동오의 사자가 들어와 나무상자를 바치자 조조는 그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관 공의 얼굴은 놀랍게도 살아 있을 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조가 슬며시 웃으며 관 공에게 우스갯소리로 말을 건넸다.

"운장 공은 그 동안 별고 없으셨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관 공의 목은 살아 있는 얼굴인 듯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며 수염을 올올이 뻗쳤다. 그 모양을 본 조조는 그만 기겁을 하여 까무러치고 말았다. 모든 벼슬아치들도 놀란 가운데 급히 조조를 구하여 자리에 눕혔다. 조조는 한참 뒤에야 겨우 깨어나서 주위를 돌아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관운장은 참으로 천신이로구나."

그러자 동오에서 온 사자가 그간에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관운장의 혼령이 여 장군의 몸으로 옮겨 붙어 우리 주공을 소리쳐 꾸짖었습니다. 또한 여 장군은 그 자리에서 피를 쏟고 죽었습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이쩍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조조는 관 공을 후히 장사지내 주기로 하고 침향목 좋은 향나무를 구해 관 공의 몸을 조각해 다듬도록 했다. 관 공의 몸이 만들어지자 목과 함께 이어 관에 넣은 다음 소와 돼지를 잡고 날을 잡아 왕후의 예로 낙양성 남문 밖에 장사지냈다. 이날 조조는 여러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영구를 배웅하게 하고 몸소 절하며 제사를 맡아 했다. 관 공에게 형왕의 칭호를 더하고 관리를 두어 그 묘소를 지키게 한 다음 동오에서 온 사자를 돌려 보냈다.

한편 그 무렵, 한중왕 유비는 한중을 평정하고 동천에서 성도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법정이 유비를 찾아와 권했다.

"주상의 선부인은 돌아가시고, 손 부인도 강동으로 가셨습니다. 비록 제왕이라고는 하더라도 인륜의 도를 폐하실 수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새로 왕비를 맞으시어 내정을 보살피게 하십시오."

한중왕도 법정의 말을 물리치지 않았다.

"오의란 사람에게 누이가 있는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성품이 어질다고 들었습니다. 언젠가 상을 보는 이가 그 여인의 상을 보고 장차 반드시 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합니다. 일찍이 유언의 아들 유모에게 시집 갔으나 유모가 일찍 죽어 지금까지 홀몸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그녀를 맞으시어 왕비로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유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유모는 나와 성이 같은 유씨가 아니오? 도리에 어긋나외다."

법정은 단념하지 않고 다시 유비에게 권했다.

"같은 성이라 하나 촌수도 따질 수 없는 먼 일가입니다. 가깝고 멀고를 밝히려 든다면 진문공이 회영을 아내로 삼은 것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법정이 춘추시대 진문공의 조카 며느리 뻘인 진나라 희영을 아내로 삼은 일까지 말하며 권하자 마침내 한중왕도 윤허하고 오씨를 왕비로 맞이했다. 오비는 뒤에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가 유영이고 자는 공수였으며, 둘째가 유리요, 자는 봉효였다. 한중왕이 왕비를 맞아들인 후 동. 서 양천의 백성들은 편안하고 나라가 넉넉한데다 풍년이 계속되니 그야말로 태평성대가 이어지는 듯했다. 그런 어느 날 형주에서 사자가 와서 소식을 전했다.

"이번에 동오의 손권이 관 공께 구혼을 했으나 관 공께서는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러자 한중왕 곁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공명이 말했다.

"구혼을 거절했으니 형주가 위태롭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어 형주를 지키게 하고 관 공을 불러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 공에게 청혼하여 만약 마다할 경우에는 반드시 동오가 군사를 내어 형주를 치리라고 여긴 공명이었다. 유비도 공명의 말을 받아들여 관 공 대신 누구를 보낼까 의논하고 있는데 다시 형주에서 사람이 와서 알렸다.

"관 공께서 조조와 싸워 크게 이기셨습니다."

그 소식이 있은지 하루가 지나지 않아 관흥이 와서 또 기쁜 소식을 알렸다.

"아버님께서 조조의 칠로군을 강물로 휩쓸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방덕을 목 베고 우금을 사로잡았습니다."

형주를 걱정하면서 관 공을 불러들이려 했던 유비는 그 말에 크게 놀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형주에서 또 소식이 날아들었다.

"관 공께서 장강의 강변에다 잇대어 봉화대를 쌓게 하여 동오의 침입에 대비하고 계십니다. 형주는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도록 경계하고 있습니다."

들리는 소식은 모두 유비와 공명의 염려를 전부 부질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이에 유비는 크게 기뻐하고 비로소 마음을 놓고 지냈다. 그러던 며칠 후 어느 날이었다. 유비는 까닭 없이 온몸이 저려오고 살이 떨리는 가운데 불안했다. 앉으나 서나 몸과 마음이 진정되지 않더니 밤이 되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가 어느새 정신이 혼미해져 책상에 엎드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방 안에 서늘한 바람이 일어 등불이 꺼질 듯 흔들리다가 다시 밝아졌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어 유비가 고개를 들어보니 등불 아래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인가? 누구인데 이 깊은 밤중에 남의 방으로 들어왔느냐?"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유비가 괴이하게 여겨 벌떡 몸을 일으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촛불 그늘로 몸을 숨기는데 보니 바로 관공이었다. 유비가 반가운 가운데도 의아히 여기며 물었다.

"아우 아닌가? 그래 그 동안 별고 없었는가? 이 밤중에 나를 찾아온 걸 보니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자네와 나는 형제 사이인데 어찌 하여 나를 피한다는 말인가?"

유비는 관 공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더욱 의아스러웠다. 관 공은 유비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형님! 어서 군사를 일으켜 이 아우의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유비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또 한 가닥 서늘한 바람이 일며 관 공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유비가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유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니 밤도 깊어 어느새 삼경이었다. 유비는 그 꿈이 기이하고 불길하여 그 길로 달려나가 공명을 불러오게 했다. 공명이 자다 말고 달려오자 유비는 꿈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고 그 뜻을 물었다. 꿈 이야기를 듣고 난 공명은 좋은 말로 유비를 안심시켰다.

"대왕께서는 지나치게 관 공을 걱정하시다 보니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고단하셨기에 꾸게 되신 꿈이니 그렇게 염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소. 낮에도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살이 떨렸소.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꿈이오."

유비는 공명의 위로하는 말을 듣고도 의심과 걱정을 누르지 못했다. 공명이 다시 좋은 말로 유비를 안심시키고 물러나 중문에 이르자 태부 허정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기밀을 말씀드릴 것이 있어 군사의 부중에 갔더니 군사께서 입궁하셨다는 말들 듣고 뒤따라왔습니다."

"기밀이라니? 무슨 기밀이오?"

깊은 밤중에 급히 자기를 찾은 허정을 보자 공명은 심상치 않은 일임을 깨닫고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들으니 동오의 여몽이 형주를 빼앗고 관 공께서는 이미 해를 입으셨다 합니다. 먼저 군사께 말씀드리고자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허정의 말을 들은 공명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탄하듯 말했다.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소. 지난밤에 내가 천상을 보니 장성 하나가 형. 초 땅으로 떨어지길래 관 공이 이미 해를 입은 줄 알았소. 그러나 대왕께서 너무 놀라실까 두려워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오."

두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의논하고 있을 때였다. 불쑥 전각 안에서 한 사람이 급히 오더니 공명의 옷소매를 잡고 물었다.

"그런 끔찍한 일을 알고도 공은 어찌하여 내게 말하지 않았소?"

공명과 허정이 깜짝 놀라며 보니 그는 바로 유비였다. 유비는 끝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전각 안을 거닐고 있다가 문득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게 된 듯했다. 공명과 허정이 당황하며 함께 말했다.

"아직은 소문을 전해 들은 것이라 믿을 것이 못됩니다. 대왕께서는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시고 진정하십시오."

그러나 유비는 고개를 저으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일찍이 운장과 더불어 삶과 죽음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사이요. 만약 운장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어찌 혼자 살 수 있겠소?"

공명과 허정은 다시 온갖 말로 유비를 안심시키고 있는데, 신하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마량과 이적이 왔습니다."

유비가 급히 그들을 불러들여 물었다.

"형주는 어떻게 되었는가? 어서 말하라."

두 사람은 형주가 여몽에게 함락되었음을 말하고 관 공이 싸움에 져 구원을 청한다고 전한 후 관 공이 써 준 글을 바쳤다. 유비가 그 글을 읽고 있는데 또 가까운 신하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지금 요화가 이르러 대왕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유비가 급히 요화를 들게 했다. 요화는 들어서자마자 울음부터 터뜨렸다.

"어서 아우의 소식부터 말하라!"

유비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요화를 재촉했다. 요화가 눈물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관 공께서는 지금 맥성에 갇혀 계십니다. 제가 관 공의 명을 받들어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지금쯤 관 공께서 어찌되셨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유비가 그 말을 듣더니 얼굴빛이 달라지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내 아우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자 공명이 유비를 달래듯 말했다.

"유봉과 맹달이 그랬다면 죽이는 것만으로는 모자랄 것입니다. 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형주와 양양의 위급을 구하고 그 둘을 잡아 오겠습니다."

그러자 유비가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만약 운장이 죽었다면 나는 결코 혼자 살아남지 않을 것이오! 내일 내가 한 떼의 군사를 이끌어 가서 운장을 구할 것이오!"

그렇게 말한 유비는 낭중에 있는 장비에게 사람을 보내 관 공의 위태로운 소식을 알리게 하고 한편으로는 군사를 일으킬 채비를 했다. 그런데 날이 밝기가 무섭게 신하가 들어와 형주에서 사람이 왔음을 알렸다. 곧 군사 하나가 쓰러질 듯 들어오는데 먼 길을 급히 달려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한 채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관 공 부자께서는 한밤중 맥성을 빠져 나와 임저로 가시다가 오의 장수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손권이 항복을 권했습니다만 관 공께서는 끝내 절개를 꺾지 않고 아드님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유비는 그 소리을 듣더니 외마디 비명을 크게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유비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문무의 여러 관원들이 유비를 부축해 안으로 들인 뒤 구호를 했다. 유비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내전으로 들자 공명이 유비를 위로했다.

"대왕께서는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옛부터 죽고 사는 것은 다 명에 달린 것이라 하였습니다. 관 공의 성품이 굳세고 굽힐 줄을 몰랐던 까닭에 이런 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옥체를 보양하신 후에 천천히 원수 갚을 대책을 세우도록 하십시오."

"나와 관우. 장비 셋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어 비록 같은 날에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죽기를 함께 하기로 했다. 이제 운장이 이 세상에 없는데 어찌 나 홀로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유비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관 공의 작은 아들 관흥이 소리 높여 울면서 들어왔다. 유비는 관흥을 보자 또다시 비통함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외마디 비명을 크게 지르더니 혼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졌다. 문무관원들이 부축해 돌보자 정신을 되찾았으나 슬픔이 가시지 않는 듯 깨어나서는 또 울며 기절하기를 하루에 네댓 번이나 하였다. 사흘이 되어도 물 한 모금, 죽 한 숟갈 먹지 않고 목을 놓아 울더니 마침내 눈에서 피눈물이 떨어져 옷자락에 아롱졌다. 공명이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문무백관들과 함께 슬픔을 진정하라고 간곡히 위로했다. 공명의 간곡한 권유에 유비가 한맺힌 다짐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맹세코 동오의 손권하고는 같은 하늘에서 숨을 쉬지 않으리라!"

공명은 유비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낙양에 소문을 알려 주었다.

"동오가 관 공의 목을 조조에게 바쳤는데 조조는 왕후의 예로 친히 장사지내고 형왕의 칭호를 내렸다 합니다."

유비도 그 말에는 뜻밖이라는 듯 공명에게 물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까닭이 무엇이오?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오"

"동오는 화가 두려워 그 화를 조조에게 떠넘기려 했습니다만 조조가 손권의 속셈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주상의 분노를 동오로 돌리기 위해 관 공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 준 것입니다."

공명이 조조의 속마음을 그렇게 헤아리자 유비가 목소리를 한껏 높여 말했다.

"이젠 지체할 수가 없소. 지금 군사를 일으켜 손권에게 그 죄를 묻고 하늘에 맺힌 이 한을 씻을 작정이오."

유비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공명이 유비를 만류했다.

"지금은 아니 됩니다. 동오는 우리로 하여금 위를 치게 할 작정이며 위는 우리가 동오를 치지만을 바라며 갖은 계책을 다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상께서는 군사를 움직이지 마시고 관 공의 장례부터 치르도록 하십시오. 그러다가 위와 동오가 다투기를 기다려 군사를 내신다면 우리는 그들의 계책을 거꾸로 이용하여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문무백관들도 모두 공명의 말에 따를 것을 거듭 권했다. 유비도 마침내 군사 내는 일을 뒤로 미루고 먼저 관 공의 장례부터 치르기로 작정했다. 동천과 서천의 모든 장수들에게 상복을 입도록 영을 내리고 좋은 날을 잡았다. 장례일이 되자 유비는 친히 남문 밖에 나가 초혼제를 지내 관 공의 넋을 위로하며 하루 종일 목놓아 울었다. 남문에 세워진 관 공의 사당에는 그 이후 차가운 겨울 바람에도 관 공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기가 내려지지 않았다. 그무렵 낙양에 있던 조조는 관 공의 장례를 치른 이후 괴이쩍게도 눈만 감으면 관 공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무래도 관운장의 넋이 씌운 게 아닌가?'

조조는 은근히 놀랍고도 두려운 마음이 일어 여러 관원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밤마다 눈만 감으면 관운장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관원 하나가 권했다.

"낙양 행궁의 전각들은 오래 되어 이전부터 괴이한 일이 많았습니다. 새로 전각을 지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조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는 그전부터 건시전이라 이름 지어 큰 궁을 지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새로 궁을 하나 짓고 싶으나 좋은 목수가 없어 걱정이구나."

그러자 모사 가후가 말했다.

"낙양의 소월이란 목수가 있는데 그가 집을 가장 잘 짓는다고 합니다."

조조는 곧 소월을 불러들여 새로 지을 전각의 그림부터 그리게 했다. 소월은 오래지 않아 아흔 칸 큰 전각에 앞뒤로 낭하와 누각을 배치한 그림을 그려 바쳤다. 그걸 본 조조가 소월에게 말했다.

"너의 그림을 보니 내 마음에 든다면 기둥과 대들보로 쓸 만한 재목이 있을 것 같지가 않구나."

그러자 소월이 입을 열었다.

"낙양성 밖 30여리쯤 가면 약룡담이라는 큰 못 하나가 있습니다. 그 못가에 약룡사란 사당이 있고 그 옆에 큰 배나무가 하나 있는데 높이가 10여 길이나 됩니다. 그 나무는 능히 대들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곧 영을 내려 그 배나무를 베어다 대들보감으로 쓰게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자 나무를 베러 갔던 사람들로부터 조조는 뜻밖의 말을 전해 들었다.

"그 나무는 어찌나 단단한지 톱으로 썰어도 톱날이 들어가지 않으며, 도끼로 찍어도 찍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나무를 벨 수가 없습니다."

조조가 그 말을 듣고 이상히 여겨 몸소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악룡사 사당 앞으로 가 그 배나무를 쳐다 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굽은 데 없이 밋밋하게 뻗어 있는 그 나무는 많은 가지에 잎이 무성했는데 마치 비단 일산처럼 퍼져 있었다.

"어디 내가 보는 데서 한 번 베어 보아라."

조조가 새로 지을 전각의 대들보감으로 더없이 안성맞춤이라 여기며 함께 따라 온 군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곳의 토박이 노인 몇 사람이 조조 앞에 나서며 말했다.

"이 나무는 여느 나무와 다릅니다. 수백 년이 된 나무로 신인이 살고 있다고 하니 함부로 베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노인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나서자 조조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천하를 종횡한 지 40여 년,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나를 두려워했다. 어떤 요사스런 귀신이 나의 뜻을 거스른다는 말이냐?"

조조가 소리쳐 그 노인들을 꾸짖으며 허리에 찬 보검을 뽑아 힘껏 나무를 찍었다. 그러나 '쨍그렁' 소리와 함께 홀연 나무에선 검붉은 선지피가 뻗쳐 나와 조조의 온몸을 물들였다. 조조는 깜짝 놀라며 얼른 칼을 던져 버리고 말을 타고 궁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상서롭지 못한 조짐으로 여겨져 말에서 내린 조조의 얼굴색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조조는 배나무에서 피가 튀어나온 낮의 일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어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을 달래려 책상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런데 홀연 조조 앞으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칼을 집고 다가온 그 사람이 조조에게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조조 이놈! 나는 제가 칼로 베려 했던 배나무의 귀신이다. 건시전을 짓겠다니 역적질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오늘 네가 신목을 베려했다만 나는 너의 목숨이 다한 걸 알고 있다. 내가 오늘 네놈의 숨을 끊어 주리라."

조조는 깜짝 놀랐다.

"여봐라! 무사들은 어디 있느냐? 어서 나를 구하라!"

조조가 급히 소리쳐 무사들을 불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배나무 귀신이 칼을 뽑더니 조조를 향해 내리쳤다. 조조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소리에 스스로 놀라 눈을 뜨니 꿈이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온몸엔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는 마치 도끼로 찍은 듯이 쑤시고 아팠다. 날이 밝자 조조는 영을 내려 널리 용한 의원을 구해 데려오게 했다. 여러 의원들이 여기저기서 불려와 조조를 치료했다. 그러나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그 증세에는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조조의 병이 낫지 않아 근심하고 있는데 화음이 들어와 말했다.

"대왕께서는 신의 화타를 아십니까?"

"강동의 주태를 치료했다는 사람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름을 들은 적이 있으나 그 의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조조가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화홈이 자세히 화타에 대해 일러 주었다.

"화타의 자는 원화이며, 원래 패국 초군 땅 사람입니다. 그의 의술의 신묘함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환자들을 약이나 침으로 고치기도 하고 뜸을 놓아 고치기도 하는데, 그의 손이 닿는 데치고 그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약 오장육부에 병이 있어 약으로 낫게 할 수 없을 때는 마폐탕을 다려 마시게 하여 병자를 마취시킨다 합니다. 그런 다음 조그마한 칼로 그 배를 가르고 내장을 약물로 씻는데 병자는 추후도 아픈 줄을 모르며, 씻은 뒤에는 바늘로 배를 꿰맨다고 합니다. 그 상처에 다시 약을 바른 다음 스무날이나 한 달이 지나면 아픈 곳이 씻은 듯이 낫는다 하니 그 의술의 신통함은 실로 신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화타가 길을 가다가 문득 어떤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듣자 대뜸 '저것은 먹는 게 내려가지 않아 앓는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화타의 말이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화타가 그 사람에게 마늘즙을 석 되나 먹였더니 곧 길이가 두어 자나 되는 뱀 한 마리를 토해내고 곧 음식이 내려가 씻은 듯이 나았다 합니다. 또 화룡태수 진등은 항상 가슴이 답답한 데다 얼굴이 붉어져 음식을 잘 먹지 못하던 중에 화타에게 약을 지어 먹었습니다. 화타가 지어 준 약을 먹은 후 진등은 붉은 머리를 한 살아 꼬물거리는 벌레를 서너 되나 토해냈다고 합니다. 진등이 의아히 여겨 '이 벌레가 내 뱃속에 생긴 까닭이 무엇이오?'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타가 '그것은 비린 생선을 날것으로 많이 잡수셨기 때문에 생긴 독입니다. 이제 병이 낫기는 했으나 3년 후에는 다시 재발할 터인즉 그때는 낫게 할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과연 3년 후에 진등에게는 그런 증세가 나타나 죽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마에 혹이 생겼는데 몹시 가려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화타에게 그 혹을 보이고 까닭을 물었습니다. '혹 안에 날짐승이 있소'하고 화타가 혹을 보고 그렇게 말했으나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화타가 그 혹을 째자 노란 참새 한 마리가 나와 날아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개에게 발가락을 물렸는데 그 상처에 새살이 두 군데로 솟아 올랐는데, 한 군데는 몹시 가렵고 한 군데는 아팠습니다. 화타에게 그 상처를 보이자 '아픈 곳에는 바늘 열 개가, 가려운 데는 희고 검은 바둑돌 두 개가 들어 있소'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살을 째고 보니 과연 화타가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야말로 옛날 편작이나 창공과 비할 만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여기서 멀지 않은 금성에 살고 있다 합니다. 대왕께서는 그를 불러 병을 돌보게 하십시오."

화흠의 말을 듣고 나자 조조도 망설이지 않았다. 곧 그를 불러오게 했다. 화타는 한동안 조조의 맥을 짚어 병을 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

"대왕의 머리가 몹시 아프신 까닭은 머릿속에 바람이 일어 생긴 병입니다. 이미 병의 뿌리가 골에까지 괴었습니다. 이 바람을 걷어 내려면 약으로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대왕께서 허락하실지 걱정입니다."

조조는 병을 낫게 할 방법이 있다는 말에 얼굴이 밝아지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말해 보라."

"먼저 마페탕을 달여 잡수신 후에 제가 날카로운 도끼로 두개골을 열어 골에 괸 바람기를 씻어내면 병의 뿌리를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병이 거뜬히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도끼로 머리를 쪼갠다는 말에 몸을 떨더니 대뜸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나를 죽이려 하느냐?"

조조는 지난날 길평이 약탕기에다 독을 넣어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일을 떠올렸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없애려는 모의를 몇 차례 겪었던 조조라 대번에 의심부터 들었다. 그런데 화타가 또 조조의 그런 마음을 뒤집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대왕께서는 전에 관 공이 오른팔에 독화살을 맞았을 때 제가 그 뼈를 긁어 독을 걷어 내어 상처를 치료한 일을 알지 못하십니까? 그때 관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어찌 저를 의심만 하십니까?"

하필 예로 든 사람이 관 공이었다. 조조는 자신과 견주의 관 공을 은근히 높이는 듯하자 더욱 화가 뻗쳐 꾸짖었다.

"닥쳐라! 팔과 뇌가 어찌 같다는 말이냐? 팔이 아프면 뼈를 긁어낼 수는 있지만 어찌 두 개고를 쪼갤 수가 있다는 말이냐? 네놈이 관운장과 가까운 터라 내 병을 기회로 원수를 갚으려는 수작이구나."

조조는 그 말과 함께 좌우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봐라, 이 놈을 옥에 가두고 그 속마음을 밝힐 때까지 고문하여라."

그러자 가후가 나서며 만류했다.

"화타와 같은 명의는 세상에서 다시 또 구할 수 없습니다. 결코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화타가 자기를 죽이러 온 것으로 믿고 있는 조조는 가후에게도 벌컥 소리를 질러 꾸짖었다.

"저놈이 의원임을 내세워 이 기회에 나를 죽이려 하는 수작이 바로 길평과 다르지 않다. 어서 문초하여 실정을 밝히도록 하라!"

조조가 길길이 뛰며 소리치자 좌우의 무사들은 화타를 끌어내려 옥에 가두었다.

 

화타의 <청낭서> 조조 또한 한줌 흙으로

감옥에 갇힌 화타는 날마다 엄한 문초를 받았다. 그런데 감옥을 지키는 졸개 중에 오압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소 화타의 의술과 인품을 우러르고 있었는데 죄 없이 고초를 당하고 있는 화타가 딱하게 여겨져 몰래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화타도 매우 고맙게 생각하던 중 어느 날 오압옥을 불러 말했다.

"나는 이제 곧 죽게 될 몸이오. 죽는 것은 한스럽지 않으나 다만 의술의 비결인 <청낭서>를 세상이 전하지 못함이 한이오. 나는 그대에게 각별한 은혜를 입었으나 갚을 길이 없어 마음이 무거웠소. 이제 내가 글 한 통을 써 줄 테니 그대는 내 집으로 가서 <청낭서>를 가져오시오. 그대로 하여금 책을 읽어 내 의술을 잇게 하겠소".

오압옥은 화타의 말에 몹시 기뻐하며 다짐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만약 그 책을 얻는다면 당장 옥사쟁이 노릇을 그만두고 의원이 되어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주며 선생의 덕을 천하에 전하겠습니다."

화타는 그 즉시 글을 써서 오압옥에게 주었다. 때마침 조조의 병이 위중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궁문 안팎과 각 청의 경계가 엄해졌다. 오압옥은 화타로부터 받은 글을 품에 간직한 채 틈을 내지 못해 10여 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칼을 든 무사 몇 사람이 위왕의 명을 받든다며 우르르 감옥으로 달려와 옥문을 열게 했다. 옥문을 열자 무사들이 안으로 달려오고 얼마 있지 않아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오압옥이 달려가 보니 칼을 든 무사들이 돌아가며 말했다.

"대왕님의 명령으로 방금 화타를 죽였다."

오압옥은 관을 사서 화타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낸 뒤 그날로 옥사쟁이를 그만두고 금성으로 갔다. 화타의 집으로 찾아간 오압옥은 글을 보여주고 <청낭서>를 받아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옥리를 그만두고 의원이 되겠소. 천하의 명의가 되어 병든 사람을 구할 것이오."

그의 아내는 남편의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오압옥이 무심코 뜰을 내다보니 아내가 낙엽을 쓸어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오압옥이 보니 그 낙엽과 함께 <청낭서>가 불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오압옥이 달려가 급히 발로 불을 껐으나 이미 책은 다 타버리고 끝에 한두 장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압옥은 벌컥 화를 내며 아내를 꾸짖었으나, 아내는 펄펄 뛰는 남편에게 눈물을 머금으며 말했다.

"설령 당신이 이 책을 읽어 화타처럼 유명한 의원이 된다 하더라고 만약 그 의술 때문에 당신이 옥에 갇혀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 화근이 될 책을 태워 버린 것입니다."

오압옥은 어리석은 아내가 자기의 앞날을 걱정하여 그 <청낭서>를 태워버렸다는 말에 꾸짖어도 소용없음을 알고 길게 탄식만 할 뿐이었다. 이로 인해 화타의 <청낭서>는 세상에 전해지지 못했다. 다만 닭이나 돼지를 거세하여 살찌게 하는 등의 하찮은 것만 전해졌는데 타다 남은 끝의 한두 장에서 전해진 내용이었다. 뒷날 사람들이 화타의 죽음을 시로 지어 탄식했다.

화타의 선술, 장상군과 견줄 만하고

담 안 들여다보듯 오장육부 훤휘 아내.

슬프다 사람 죽고 글마저 끊어지니

뒷날 사람들 청낭서 다시 못 보네.

조조는 화타가 죽은 후로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거기다가 오와 촉에 대한 일을 어떻게 결정지어야 할지 근심하고 있는데 근신들이 들어와 알렸다.

"동오에서 사자가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조는 사자를 불러들이고 글을 읽어 보았다.

신 손권은 이미 오래전부터 천명이 주상께로 돌아갔음을 알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하루라도 빨리 대위에 오르시고 장수를 보내시어 유비를 쳐 없애 양천을 평정하옵소서. 양천이 떨어지면 신은 곧 따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항복하겠습니다.

뜻밖에도 손권이 자신을 한껏 높이며 스스로 항복해 오자 조조는 껄껄 웃더니 문무관원들에게 글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아이가 나를 화롯불에 올려 앉히려는 수작이로구나."

참으로 묘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한 나라는 화덕으로 일으킨 나라이니 한 황실을 뜻한 것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손권이 자신을 대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위험한 지경에 빠뜨리려는 것을 화로에 견주어 한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자 시중 진군등이 입을 모아 말했다.

"한실은 이미 기운이 다해 기울어진 지 오래입니다. 전하의 공덕은 날로 높아가니 천하의 백성들이 우러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손권도 스스로 신하 되기를 청하며 항복하니 이는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임을 뜻합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하늘의 뜻을 받드시고 백성들의 소원을 따르시어 하루빨리 대위에 오르시도록 하옵소서."

조조는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그 말을 받았다.

"내가 한조를 섬긴 지 오래다. 비록 공덕이 백성들에게 미쳤다고 하나 이제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름과 벼슬은 이미 오를대로 오른 것이다. 어찌 딴 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느냐? 만약 천명이 내게 이르렀다면 나는 다만 주의 문왕과 같으면 족하리라."

조조가 그렇게 잘라 말했다. 주의 문왕은 그 아들 주 무왕대에 이르러서야 천자가 되었으며 자신은 끝내 은나라를 섬겼다. 곧 스스로는 천자가 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으나 다음 대에 대한 양망을 암시한 말이기도 했다. 조조가 그렇게 말하니 여러 신하들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있는데 사마의가 나서 손권의 일을 꺼냈다.

"지금 손권이 스스로 신하라고 일컬으며 따르니, 대왕께서는 그에게 벼슬을 내리시고 유비를 막도록 하십시오."

조조도 그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오와 촉을 싸우게 할 구실이 생겼으니 실로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조조는 곧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손권을 표기장군 남창후에 형주목으로 삼고 사자를 동오로 보내 조칙을 전하게 했다. 천자의 조칙을 손권에게 전하게 한 조조는 이제 발을 뻗고 잘 수 있었으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밤 조조는 꿈을 꾸었는데 세 필의 말이 한 구유에 머리를 박고 여물을 다투어 먹는 꿈이었다. 아침이 되어서도 그 꿈이 잊혀지지 않아 문안차 온 가후에게 물었다.

"나는 오래전에 말 세 마리가 한 구유통에서 여물을 먹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때는 마등 삼부자가 화근이 되리라 여겨 그들을 죽였으나 어젯밤에 또 그와 똑같은 꿈을 꾸었다. 이 꿈의 길흉이 어떠한가?"

가후가 조조를 안심시키려는 듯 길흉을 헤아려 주었다.

"대왕께서는 길한 꿈을 꾸셨습니다. 녹마는 길조이며 그 말이 조로 모인 것인데 대왕께서는 걱정하실 게 무엇입니까?"

조는 구유토을 뜻하는 조자와 조조의 조자가 같으니 말들이 밖에서 돌아와 구유의 여물을 먹는다는 뜻으로 둘러댄 말이었다. 그러나 세 마리의 말이 암시하는 실제의 뜻은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의 세 부자였다. 마침내 조가를 대신하여 사마씨의 새로운 시대가 열림을 뜻하는 꿈이었으나 조조는 가후가 한 말을 좋은 뜻으로 넘겨 듣고 말았다. 그날 밤이었다. 조조가 침실에 누워 있는데 삼경 무렵이 되자 머리가 몹시 어지럽고 눈앞이 흐려 왔다. 잠을 이룰 수 없어 가까스로 일어나 탁자에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비단을 찢는 듯한 소리가 났다. 조조가 깜짝 놀라 소리 나는 곳을 보니 홀연 눈앞에 복황후와 동귀인, 두 황자와 복완. 동승 등이 나타났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스무여 명은 모두 그에게 끔찍한 죽음을 당한 사람이었는데 음습한 구름 속에서 소리쳤다.

"조조 네 이놈! 네 목숨을 내놓아라!"

조조는 그들을 보자 몸을 떨며 급히 칼을 뽑아 허공을 향해 후렸다. 그러나 그 칼이 서남쪽 전각 한 모서리를 베니 전각 한구석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조조는 그 소리에 놀라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들이 그제야 달려와 조조를 부축해 일으켜 별궁에다 옮기고 보살폈다. 다음 날이 되자 또 괴이스런 일이 일어났다. 전각 밖에서 남자와 여자들의 구슬픈 곡소리가 울려 왔다. 그 소리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조조는 날이 새기가 무섭게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을 타고 싸움터를 누볐으나 요사스런 일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일어나는 이 괴이한 일들은 대체 무엇인가?"

"대왕께서는 도사들을 불러 초제를 베풀어 악귀들을 물리치도록 하십시오."

신하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권했다. 그러나 조조는 고개를 젓더니 한숨 지으며 탄식했다.

"성인께서 이르시기를'하늘에 죄를 지은 자는 빌 곳이 없다'고 했다. 이제 나의 천명이 다 된 듯싶으니 하늘에 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조는 신하들의 권고를 물리치고 말았다. 다음 날이 되자 조조의 병세는 더욱 나빠져 눈앞도 잘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조조도 스스로 그 명이 다했음을 알고 뒷일을 의논하기 위해 하후돈을 불러오라 했다. 하후돈이 조조의 부름을 받고 급히 전문으로 드는데 문득 음습한 구름 속에 복황후, 동귀인과 두 황자 및 복완, 동승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하후돈은 놀라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좌우 사람들이 하후돈을 부축해 나가 보살폈으나 그 이후에는 일어나지 못하고 병들어 눕고 말았다. 조조는 다시 조홍과 진군, 가후, 사마의 등을 불러오게 했다. 그들이 조조의 병상 앞에 이르자 조조가 뒷일을 부탁하려는데 조홍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옥체를 보중하시옵소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조홍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채 이미 다가오는 죽음을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뒷일을 당부했다.

"내가 천하를 종횡한 지 30여 년에 모든 영웅들을 평정했으나 다만 강동의 손권과 서촉의 유비만 남았다. 그러나 이제 내 병이 위중하니 그대들과 다시 의논할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다. 특히 그대들에게 집안일을 부탁하려 하니 부디 잘 돌봐 주기 바란다. 나의 맏아들 앙은 유씨의 소생이나 불행히도 지난날 완성 싸움에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는 그대들도 잘 알다시피 변씨 소생의 비와 창, 식과 웅, 이렇게 내 아들이 있다. 내가 평생 사랑한 자식은 셋째 식이었으나 겉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성실함이 부족하며 술을 좋아하고 태도가 단정치 않아 세자로 세우지 않았다. 둘째 창은 용맹스럽기는 하나 지혜가 모자라고, 넷째 웅은 몸이 약해 앓기를 자주 하니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다. 거기에 비해 맏이 비의 사람됨은 인정이 두텁고 공손한 데다 치밀하니 내 뒤를 이을 만하다. 경들은 내가 죽고 없더라도 그를 도와 내 뜻을 이루게 하라."

조조가 후사를 정해 부탁하니, 그 자리에 있던 조홍 등은 그 말이 조조가 남긴 마지막 말이라 여기고 눈물을 흘리며 그 말을 받들었다. 조조는 근시를 시켜 평소 간직해 오던 좋은 향과 옥기들을 가져 오게 하여 자기를 섬기던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은 부지련히 여공을 배우도록 하라. 길쌈을 하고 그 실로 신이라도 만들어 팔면 너희들이 쓸 돈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조조는 다시 첩들을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동작대에 모여 살며 매일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상식을 올릴 때마다 기생들에게 춤을 추고 노래하게 하라."

또한 조조는 뒷사람들이 자기의 시체를 파헤칠까 봐 염려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당부했다.

"창덕부 강무성 밖에 거짓 무덤 일흔 개를 만들어 나의 무덤이 어느 것인가를 알지 못하게 하라."

조조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끝내며 긴 탄식과 함께 눈물을 주르르 쏟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나이 예순여섯이요, 건안 25년 봄인 정월이었다. 일세의 영웅이며 무장으로서나 치자로서나 당대의 으뜸가는 인물이었던 조조의 마지막 길은 천하의 패자답지 않은 조용하고 담담한 것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한 편의 시를 지어 조조의 일생을 노래했다.

업군 업성에 물은 장수이니

이 땅에서 나야 할 이인이 일어났네.

계략과 빼어난 일, 글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임금과 신하가 형제와 부자같이 지냈다.

어찌 영웅을 속된 마음으로 알랴.

들고 나는 일 또한 여느 사람 모르네.

큰 공 큰 죄 두 사람이 아니고

악행과 선행이 모두 한 몸이었네.

 

글 빼어나고 패기 드높아

어찌 속된 무리와 함께 될 수 있으리.

창을 놓고 대를 쌓아 태행산과 맞서니

기운과 운세 따라 쳐들기도 굽히기도 했네.

이런 사람이 어찌 역적질인들 못할까.

작게는 패자요, 크게는 왕이네.

패왕되어 아녀자도 울리니

불평해본들 어찌할 수 없구나.

 

목숨 비는 일 빌어야 소용없음 알았고

여인들에게 향 나누니 무정하다 못하리라.

오호라!

옛사람 일 크고 작음 가리지 않으나

적막하든 호화롭든 모두 뜻이 있네.

서생들아, 무덤 속 사람 가벼이 말하지 말라.

오히려 무덤 속 그 사람이 서생 행태 비웃겠네.

조조가 죽자 모든 문무백관들이 모여 소리 높여 통곡하며 발상을 하는 한편 아들인 세자 조비, 언릉후 조창, 임치후 조식, 소회후 조웅에게 부음을 보냈다. 그런 다음 조조를 염하여 금관에 들인 뒤 은으로 만든 곽을 둘러 밤을 도와 업군으로 갔다. 조비는 여러 관원들을 거느려 성 밖 10여 리까지 나아가 통곡하며 엎드려 곡을 하는데 곡소리가 언제 끝날지 몰랐다. 그때 문든 한 사람이 일어나 조비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세자께서는 잠시 슬픔을 누르시고 대사를 의논하십시오."

모두 그를 보니 그는 다름 아닌 중서자 사마부였다. 사마부는 여러 관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위왕께서 돌아가셨으니 천하가 들썩일 것입니다. 급히 세자를 받들어 왕위를 이어 천하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십시오. 지금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사마부의 나무라는 듯한 말투에 여러 신하들이 조비를 대신하여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세자께서 마땅히 왕위를 이으셔야 하나 아직 천자의 조칙을 받들지 못했소이다. 어찌 함부로 즉위식을 행할 수가 있겠소?"

그러자 병부상서 진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왕께서 밖에서 돌아가셨다 해서 사랑받았던 아들들이 제각기 왕위를 잇겠다고 나서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골육간에 변고가 일어나게 되어 사직이 위태로워지고 말 것이오."

진교는 그 말과 함께 칼을 뽑아 소매를 후려쳐 잘라 보이며 외쳤다.

"오늘 세자께서는 왕위를 이으셔야 합니다. 만약 딴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소맷자락 자르듯 베어 버릴 것이오."

진교의 험악한 기세에 눌려 여러 관원들은 두려운 얼굴로 입도 열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이 와서 알렸다.

"허창의 화흠께서 이르렀습니다."

조조의 팔다리와 다름없는 화흠이 급히 말을 달려오자 여러 신하들은 그가 온 까닭을 알 수 없어 놀라며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화흠이 들어오자 백관들이 물었다.

"무슨 일로 급히 오시었소?"

화흠이 백관들을 둘러보며 나무라듯 대답했다.

"지금 위왕께서 돌아가시어 천하의 인심이 어지러운데 경들은 어찌하여 세자를 왕위로 받들지 않고 있소?"

"그렇지 않아도 왕후 변씨의 뜻을 받들어 세자를 왕으로 모시려는 참이오. 다만 천자의 조칙을 받들지 못해 의논하던 중이었소."

백관들이 그렇게 대답하자 화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이미 천자의 조칙을 받아 왔소."

화흠은 원래가 한실을 받들기보다 조조를 따르던 사람이었다. 조조가 죽자 바로 조서를 만들어 헌제에게 강요했다. 헌제는 하는 수 없이 조비를 위왕으로 삼고 승상에 기주목을 겸하게 하는 조칙을 내린 것이었다. 천자의 조칙까지 얻자 조비는 지체하지 않고 그날로 왕위에 올랐다. 조비는 여러 문무관원들의 하례를 받고,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크게 경하의 잔치를 열었다. 잔치 기운이 무르익어 갈 즈음 문득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언릉후 조창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조비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제 중 용맹이 뛰어나 창이 군사를 이끌어 온다는 소리에 조비가 낯빛을 달리하며 신하들에게 물었다.

"수염 노란 아우는 원래 성정이 거칠고 무예에도 능하오. 지금 군사를 이끌어 온다 하니 반드시 나와 왕위를 다투려는 뜻일 것이오.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계하에서 한 사람이 나서며 소리쳤다.

"바라건대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언릉후를 만나 말 한마디로 그를 물리치겠습니다."

조비가 바라보니 그는 간의대부 가규였다. 그 자리에 있던 관원들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대부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맡아 하겠소?"

조비도 기뻐하며 대부로 하여금 성 밖으로 나아가 조창을 맞게 했다. 가규가 성 밖으로 나가 조창이 머물고 있는 곳에 이르자 창이 대뜸 먼저 물었다.

"아버님의 옥새와 인뒤웅이는 어디 있는가?"

그 물음에 가규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집안에는 맏이가 있고 나라에는 세자가 있는 법입니다. 둘째 왕자이신 군후께서는 물어볼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가규의 엄한 목소리에 조창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가규가 성안으로 조창을 인도하자 말없이 뒤따랐다. 창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궁문 앞에 이르자 가규가 문초라도 하듯 조창에게 물었다.

"군후께서 이곳에 오신 뜻은 분상하려 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왕위를 다투러 오신 것입니까?"

"나는 분상하러 왔을 뿐 딴 뜻은 없소이다."

조창이 얼른 머리를 내저으며 그렇게 대답하자 가규가 다시 나무라듯 되물었다.

"군후께서 다른 뜻이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장수와 군마를 거느리고 오셨습니까?"

조창도 그 말에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른 따르던 군사들을 물렸다. 조창이 군사들을 물러가게 하고 홀로 궁 안으로 들어오자 조비도 마음을 놓고 반가운 마음으로 맞았다. 두 사람은 아버지를 여윈 슬픔에 서로 끌어안고 목을 놓아 울었다. 분상을 마친 조창은 자기가 이끌고 온 군마를 모두 조비에게 바쳤다. 자신이 군마를 이끌어 온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님을 밝혀 두고자 함이었다. 조비는 아우에게 군마를 다시 돌려주며 언릉 땅으로 돌아가 그곳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조창이 언릉 땅으로 돌아가고 업성이 안돈되자 조비는 건안 25년의 연호를 연강 원년으로 고쳤다. 이어 문무백관들의 벼슬을 높이고 상을 내려 사기를 드높였다. 가후를 태위로 삼고, 화흠은 상국으로, 왕릉은 어사대부로 삼았다. 그리고 다른 문무백관들에게도 상을 내려 위로했다. 조비는 또 아버지 조조의 시호를 무왕이라 내리고 업군 고릉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우금으로 하여금 그 무덤을 지키게 하여 고릉으로 떠나게 했다. 우금이 조비의 영을 받들어 그곳에 가보니 무덤 안의 흰 벽에는 군사들이 싸우는 그림 한 편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관운장이 물로 칠로군을 무찔렀을 때의 광경이었다. 관운장이 윗자리에 위풍당당히 앉아 있는데 방덕이 굴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우금 자신은 땅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조비가 그리게 한 것이었다. 전에 우금이 관 공과 싸워 패해 사로잡혔을 때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투항했다가 동오가 살려 주어 되돌아온 것을 보게 된 이후로 조비는 우금을 비루하게 여겼다. 이에 미리 사람을 시켜 무덤 벽에 그 그림을 그려 놓게 하고 우금을 그리고 보낸 것이었다. 그 그림을 보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욕스런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한 것이었다. 우금은 그림 속에 그려진 자신의 꼴을 보자 부끄러움과 괴로움으로 견딜 수 없어 울화로 마음속을 끓이다 마침내 병을 얻어 자리에 눕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조창이 언릉 땅으로 돌아간 이후 어느 날 상국 화흠이 넌지시 조비에게 말했다.

"언릉후는 군마를 대왕께 바치고 자기 땅으로 돌아갔습니다만 두 아우이신 임히후 식과 소회후 웅은 끝내 분상도 오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그 죄를 물어 기강을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조비도 화흠의 말을 옳게 여겼다. 조창이 다녀간 뒤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넷째보다 셋째인 식이었다. 식은 한때 아버지 조조가 세자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려 했을 만큼 재주있는 아우인 데다 아직도 그를 세자로 받들려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에 조비는 화흠의 말에 따라 사신을 보내 장례에도 오지 않은 죄를 물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지 않아 소회후에게 갔던 사자가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알렸다.

"죄를 묻는 영지를 받으시자 병약한 마음에 두려움이 일었던 듯 그만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넷째 아우 웅은 항상 병이 들어 앓는 몸인 데다가 마음까지 약해 죄를 묻자 그만 겁이 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조비가 그제서야 그에게 죄를 물은 것을 뉘우쳤다. 조비는 조웅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게 하고 벼슬을 올려 소회후에게 소회왕으로 봉했다. 다음 날이 되자 임치로 갔던 사자가 돌아와 임치후 조식을 만난 일을 알렸다.

"임치후는 날마다 그의 신하 정의, 정이 형제와 함께 술을 마시며 지내는데 그 태도가 오만스럽고 무례했습니다. 신이 들어가 왕명을 전하려 하는데도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정의만이 신을 보고 개 꾸지지듯 험한 말로 꾸짖었습니다. '지난날 선왕께서는 우리 주인을 세자로 삼으시려 했는데 간신들이 가로막아 금상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형제지간에 어찌 죄부터 묻는다는 말인가? 친형제에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정이도 덩달아 나서며 저를 나무랐습니다. '우리 주공께서는 그 재주를 천하에 떨치시는 분으로 마땅히 왕위를 이어받으셔야 할 분이시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셨으니 너희들 조정의 신하들은 어찌 이리도 인재를 몰라 보느냐?' 정이가 그렇게 신을 꾸짖자 임치후도 벌컥 성을 내며 좌우 사람을 시켜 신을 몽둥이 찜질하여 내쫓았습니다."

조비는 그 말을 듣자 격분했다. 곧 허저에게 소리쳐 영을 내렸다.

"그대는 호위군 3천을 이끌고 임치로 가서 조식의 무리를 잡아 대령하라!"

허저는 그 길로 군사 3천을 거느리고 바람처럼 임치로 내달았다. 임치성에 이르자 성을 지키는 장수가 허저를 가로막았다. 허저는 여러 소리 할 것도 없이 한칼에 그 장수의 목을 베고 말았다. 허저가 그길로 바로 성안으로 뛰어 들어가니 그 기세에 겁을 먹어 감히 덤벼드는 자가 없었다. 허저가 부중 당에 이르러보니, 임치후 조식은 정의, 정이 형제와 함께 술에 취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허저는 그들을 꽁꽁 묶어 수레에 싣고 조식을 따르는 무리들을 사로잡아 업군으로 돌아왔다. 조비는 성난 눈으로 정의, 정이 형제를 노려보더니 영을 내렸다.

"우선 그 두 놈부터 목을 베어라!"

조비의 영이 떨어지자 그들 형제는 이끌려 나가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조식을 따르는 문사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정의의 자는 정례요, 정이의 자는 경례로 패군 사람이었다. 일찍이 글재주가 뛰어나 이름을 떨쳤으나 조식을 따르다 덧없이 죽으니 그들을 아깝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조비의 어머니 변씨는 막내아들 조웅이 목을 매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식마저 사로잡혀 오고 그의 신하 정의 형제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라 내전으로 달려 나왔다. 변씨가 황급히 조비를 청해 부르며 전에 이르자 조비는 황망히 어머니를 맞아 절하며 뵈었다. 변씨가 눈물을 흘리며 조비에게 말했다.

"네 아우 식이 평소 술을 좋아하며 몸가짐에 거리낌에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자기의 재주를 믿고 제 마음대로 구는 것일 뿐이다. 네가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간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그의 목숨만은 살려 주도록 하거라. 그리하면 내가 죽어서라도 편히 눈을 감을 있을 것이다."

조비는 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저 역시 그 아이의 재주를 아끼는 터입니다. 어찌 그 애를 죽이겠습니까? 다만 그 버르장머리 없는 성정을 고쳐 주려 했을 뿐입니다."

조비가 그렇게 말하며 안심시키자 변씨는 눈물을 씻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조비는 편전으로 나가 조식을 불러들이라고 분부를 내렸다. 그때 화흠이 다가오더니 가만히 물었다.

"조금 전에 태후께서 나오셨는데 혹시 전하께 자건을 죽이지 말라고 청하러 오신 것이 아니십니까?"

"그러하오."

조비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자 화흠은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자건은 재주가 있고 지혜가 있으니 끝내 못 속에서만 있을 인물이 아닙니다. 빨리 없애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말씀을 어길 수는 없지 않소."

조비가 퉁명스런 어투로 대답했다. 화흠은 생각에 잠기다 조비의 귀 가까이 입을 대고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건은 입을 열기만 하면 바로 문장을 이룬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는 말입니다. 주상께서는 그를 불러 재주를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만약 그 말대로 글을 잘 짓는다면 살려 주시어 귀양을 보내시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천하 문사들도 뒷공론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실로 묘책이 아닐 수 없소."

조비가 머리를 끄덕이며 화흠의 말에 찬동했다. 화흠의 말대로만 하면 천하 선비들의 원성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조식을 불러들이게 했다. 조식은 조비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죄를 빌었다.

"술에 취해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형님께서는 너그럽게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조비는 조식을 굽어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으로 말한다면 너와 나는 형제이나 예로 보면 임금과 신하이다. 그런데도 너는 어찌 감히 네 재주만을 믿고 예를 우습게 여겼느냐? 이제 임금과 신하의 예로 너에게 명을 내릴 것이니 너는 내 말을 잘 듣도록 하라. 아버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너는 항상 글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뽐냈으나 나는 그 글이 정말 네가 지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니 이제 내가 너의 글솜씨를 한 번 시험해 볼 것인즉 너에게 일곱 걸음을 걷는 틈을 줄 테지 그 사이에 시 한 수를 짓도록 하라. 만약 시를 잘 짓는다면 살려 둘 것이오, 만약 잘 짓지 못한다면 방자하게 군 죄까지 더해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그러자 조식이 얼굴을 쳐들며 흔연히 대답했다.

"바라건대 시제를 주십시오."

그 말에 조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에는 마침 수묵화 한 폭이 걸려 있었다. 두 마리의 소가 흙담 옆에서 싸우다 한 마리가 상대에게 밀려 우물에 떨어져 죽는 그림이었다. 조비가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그림을 제목으로 삼으라. 그러나 시 속에 '두 마리 소가 흙담 옆에서 싸우다 한 마리는 우물에 떨어져 죽었다'는 말이 한마디도 들어가서는 아니 된다."

그 자리에 있던 문무백관들은 조비의 가혹한 명에 깜짝 놀라며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조식은 담담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하여 일곱 걸음을 옮긴 후에 낭랑하게 시를 읊기 시작했다.

두 고깃덩이가 함께 길을 가는데

머리 위에 오목한 흰 뼈가 달렸다.

서로 볼고한 산 밑에서 만나니

홀연 머리 맞부딪쳐 서로 받았네.

두 적수가 다 함께 굳세지 못해

한 고깃덩이는 토굴 속에 스러졌네.

힘이 없어 쓰러진 것이 아니라

넘치는 기운 한꺼번에 내쏟지 못함일세.

조식이 시를 다 읊자 그 자리에 있던 문무백관들은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말은 한마디도 넣지 않고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그 그림을 읊는 훌륭한 시 한 편을 지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비는 거기서 조식을 용서해 주지 않았다. 다시 조식에게 말했다.

"일곱 걸음 만에 시를 지었으나 너의 요란스런 이름에 비해 그건 시간을 너무 많이 준 것 같다. 정말 재주가 있다면 말이 떨어지는 즉시 시를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조비의 물음에 조식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짓겠습니다. 제목을 주십시오."

조비가 조식을 굽어보며 새로운 시 제목을 말했다.

"너와 나는 형제간이다. '형제'란 말을 시제로 삼되 ''이니 '아우'니 하는 말이 들어가서는 아니 된다."

조식은 그 말을 듣자 생각에 잠기는 기색도 없이 그 자리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시 한 수를 읊었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볶으니

콩이 솥 안에서 울고 있네.

본디 한 뿌리에서 났는데도

어찌 이다지도 급히 볶아대는가.

조비는 조식이 콩과 콩깍지로 자기 형제의 일을 비유한 시를 읊는 소리를 듣자 그제야 뉘우치는 마음이 일었다. 문득 눈물을 흘리며 새삼 형제의 정을 되살리고 있는데 어머니 변씨가 편전 뒤에서 달려 나오며 나무랐다.

"형이 되어 어찌 그리 아우를 괴롭힌다는 말이냐?"

어머니 변씨의 말에 조비는 급히 용상에서 내려오며 대답했다.

"나라에 법이 있으니 어찌 그 법을 어길 수가 있겠습니까?"

조비는 법을 핑계 대어 그렇게 대답한 후 조식의 벼슬을 안향후로 낮추고 임지로 가게 했다. 조식은 절하며 하직한 후 형이 있는 위왕궁에서 쫓겨나듯 물러났다. 그런데 봉건 중국에서 드문 예가 조씨 형제의 경우이다. 유교 도덕에 의해 지배당하던 그 당시에 부모 자식의 단절이나 형제간의 불화는 다른 나라에 비해 드물었다. 그러나 조비의 동생 색은 물론 창에 대한 비정함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조비가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가혹한 처사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란 높은 지위에 오르면 누구나 자기를 앞지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권력자는 자기보다 명성이 높거나 인기가 있는 사람을 몹시 싫어한다. 설사 그 사람이 육친 간이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비는 이후에도 식에게 근거를 마련할 땅도 주지 않고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게 했으며 끝내 궁에 드는 것조차 막았다. 조식은 건안 시대의 대표적인 문사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그의 문집으로는 조자건집이 있다. 일곱 걸음의 시는 그의 문집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다른 서적에 실려 전해진다. 중국 시인 사이에 우상화되기도 했던 조식은 형 조비와의 불화로 인해 한과 울분으로 세월을 보내다 병이 들어 마흔한 살에 죽고 말았다.

조비는 왕위에 오른 뒤로 법령을 고치고 자신의 위세를 드높였는데 한제를 핍박함은 아버지인 조조 때보다 더 심했다. 이 일은 세작에 의해 곧 성도에 알려졌다.

 

조비 위황제에 오르다

한편 한중왕 유비는 조조가 죽고 그 아들 조비가 뒤를 이었는데 천자를 가혹하게 핍박하고 있다는 세작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한중왕 유비는 문무백관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조조가 죽고 그 아들 조비가 왕위를 이었다는데 천자를 핍박함이 오히려 그 아비보다 더하다고 하오. 그런데도 동오의 손권은 스스로 조조의 신하임을 자청하고 있으니 어찌 한탄할 일이 아니오? 이제 내가 먼저 동오를 쳐서 운장의 원수를 갚고 그다음에 중원으로 밀고 들어가 그 역적놈을 없애겠소."

그러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화가 엎드려 목놓아 울며 말했다.

"관 공 부자께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실은 유봉과 맹달 때문이었습니다. 바라건대 그 두 놈부터 죄를 물어 죽인 다음 동오로 나가십시오."

유봉과 맹달로부터 매정하게 원군을 거절당한 요화가 그 한을 풀고자 유비에게 청한 말이었다.

"그 두 놈을 잡아오라!"

유비도 그들 둘이 이가 갈리도록 괘씸한 것은 요화와 다름없었다. 즉시 영을 내려 그 두 사람을 잡아 오게 하자 공명이 나서며 말렸다.

"아니 됩니다. 그 일은 서서히 손을 써야지 너무 급히 서둘다 보면 변고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 둘을 군수로 높인 다음 따로 떼어 놓은 뒤에 사로잡는 것이 좋습니다."

한중왕은 공명의 말을 듣자 얼른 그 뜻을 헤아렸다. 그들을 사로잡아 오게 하려다 다툼이 일거나 혹은 그 둘을 위나라에 투항하게 만드는 결과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한중왕은 공명의 말을 좇아 사람을 보내 유봉의 벼슬을 올리고 면죽 땅을 지키도록 했다. 맹달은 상용태수로 높여 그대로 머물게 하여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그런데 그날 모였던 신하 중에 팽양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맹달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팽양은 집으로 가서 그 사실을 글로 쓰고 심복에게 그 글을 주어 맹달에게 전하게 했다. 그런데 그 심복이 성도 남문을 빠져나가다 순시를 돌던 마초의 군사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마초가 그 사자를 문초하던 중 그 글을 찾아내어 읽어 보고는 크게 놀랐다. 마초는 먼저 팽양의 속마음을 엿보기 위해 몸소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마초가 찾아온 까닭을 알 리 없는 팽양은 마초를 반갑게 맞아들이며 술상을 차려 대접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마초가 넌지시 팽양의 마음을 떠보았다.

"지난날 한중왕께서는 공을 끔찍이 높이시었으나 요즈음은 그렇지 않소이다."

서슴없이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 늙은 자가 이미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나를 업신여기고 있소. 내가 반드시 그 앙갚음을 하고야 말겠소."

마초도 그 말을 듣자 맞장구를 쳤다.

"실은 나 역시도 원한을 품은 지 오래요. 그러나 지금은 어찌할 수 없어 한을 달래고 있을 뿐이오."

그러자 팽양이 놀라운 소리를 했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이 없소. 공께서 거느린 군마를 일으키시고 맹달과 짜고 쳐들어가면 나는 서천의 군사를 거느려 호응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대사는 능히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마초는 팽양이 그렇게 말하자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의 말씀이 어긋남이 없소이다. 내일 다시 와서 이 일을 의논하도록 합시다."

팽양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렇게 말한 뒤 팽앙의 집을 나섰다. 마초는 그 길로 팽양의 글을 가지고 한중왕에게 가서 팽양이 꾸민 일을 자세히 고했다. 한중왕은 크게 노하여 당장 팽양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문초하게 했다. 팽양은 그제야 자신이 경솔했음을 뉘우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중왕 유비가 공명에게 물었다.

"팽양이 나를 거스릴 뜻을 품었으니 어찌했으면 좋겠소?"

공명이 서슴없이 자르듯 말했다.

"팽양이 비록 미치광이 같은 선비라 하나 살려두면 뒷날 또 변고를 일으킬 것입니다. 뒷날의 화근을 없애도록 하십시오."

공명이 그렇게 말하자 한중왕도 지체하지 않고 그를 목베게 했다. 팽양이 옥에 갇힌 채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상용 땅의 맹달에게도 전해졌다. 맹달은 그 소식을 듣자 불길한 예감이라도 드는 듯 놀라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문득 성도로부터 사자가 와서 유봉에게 한중왕의 영을 전했다.

"면죽태수로 봉하니 즉시 임지로 떠나라는 분부이십니다."

유봉은 한중왕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로 맹달과 헤어져 상용을 떠나 면죽으로 갔다. 유봉이 떠나가자 맹달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지 못했다. 관우에게 구원병을 보내지 않아 끝내 죽게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리는 데다 유봉을 불쑥 면죽으로 보내는 것도 이상했다. 맹달은 급히 상용 방릉의 도위인 신탐과 신의 형제를 불러들이고 의논했다.

"나는 원래 법효직과 함께 한중왕이 서천을 얻을 때 콘 공을 세웠다. 그런데 효직은 이미 죽어 없는 데다 한중왕은 지난날의 공을 모두 잊고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그러자 신탐은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는 듯 맹달에게 말했다.

"그 일이라면 제게 한 계책이 있습니다. 이 계책에 따르신다면 한중왕은 공의 손가락 하나 해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게 어떤 계책인가? 어서 말해 보라."

맹달이 반색을 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우리 형제는 원래부터 위에 몸을 위탁하려 한 지 오래였습니다. 공께서는 글을 써서 한중왕에게 알리고 벼슬을 내놓은 다음 위왕에게로 가십시오. 그러면 위왕 조비는 반드시 공을 무겁게 쓰실 것입니다. 우리 형제도 곧 공을 따라 위로 가겠습니다."

신탐이 맹달에게 위에 투항할 것을 권했다. 굳이 계책이랄 것도 없었으나 맹달은 몹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위급함을 깨닫고 있는 터라 더 머뭇거릴 까닭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벼슬을 내놓겠다는 뜻을 밝힌 글을 써서 사자로 하여금 한중왕에게 전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40여 기만을 거느리고 위로 달려가 항복해 버렸다. 맹달이 보낸 사자는 한중왕에게 맹달이 써 준 글을 바쳤다. 한중왕은 맹달의 글을 뜯어보았다.

신 맹달은 엎드려 아룁니다. 신은 지난날 앞으로 이윤, 여상이 나라를 일으킨 공업을 이루고자, 제환공과 진문공처럼 패후의 대업을 이루시려는 전하를 받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오, 초에서 그 발판을 삼으실 때 천하에서 빼어난 인재들이 전하의 덕망을 우러러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신이 전하께 몸을 의탁한 이래 그 잘못이 산같이 많음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 대왕을 노엽게 해드린 적이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지금 전하의 조정에는 빼어난 인재들이 모여 있어, 신은 안으로는 전하를 받들 만한 그릇도 못 되고 밖으로는 장수의 재질도 지니지 못했으니 공신으로 자처하기가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듣기로 범여는 구천을 받들어 오를 멸해 상장군이 되었으나 뒤에 오호에 배를 띄워 은둔했습니다. 또한 구범도 진문공을 도와 패업을 이루었으나 문공이 자기의 죄만 따져 황하에서 사죄하고 강을 따라 떠났다고 했습니다. 또한 구범도 진문공을 도와 패업을 이루었으나 문공이 자기의 죄만 따져 황하에서 사죄하고 강을 따라 떠났다고 했습니다. 공을 이루었을 때 물러나는 것은, 나아가고 물러섬을 분명히 하려는 뜻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신은 원래 재주가 없고 세운 공도 없이 지금까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진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앞으로 다가올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 신생은 지극한 효자였으나 도리어 부모의 미움을 샀고, 자서는 오와 부차를 잘 받들고도 임금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몽념은 북방의 흉노를 막아냈으나 조고의 음해를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악의는 제나라를 쳐 70여 성을 빼앗았으나 참소를 당했습니다. 신은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비통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눈물을 흘렸습니다만 이제 스스로가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더욱 슬퍼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거기다가 지난번 형주가 적의 손에 넘어간 일은 어찌 신의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신은 스스로 상용 땅을 돌려드리고 떠나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려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신은 하찮은 소인이라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이 듣건대 '사귀기를 끊으며 나쁜 말이 나지 않게 하고, 떠나가는 신하는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이 삼가 군자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니 전하께서는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면 더 이상 고마움이 없겠습니다.

한중왕은 그 글을 다 읽자 글을 찢으며 크게 노했다.

"되지 못한 놈이 나를 거스르며 어찌 감히 글로 나를 놀리려 든단 말이냐? 내가 이놈부터 사로잡고 말리라!"

곧 군사를 일으킬 기세로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공명이 나서며 한중왕을 만류했다.

"그러실 것까지 없습니다. 유봉을 시켜 맹달을 사로잡게 하여 두 호랑이가 서로 물어뜯도록 하십시오. 유봉은 맹달을 죽이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간에 반드시 성도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에 맹달을 이끌어 오면 곧 두 사람에게 죄를 묻고 유봉만이 돌아오더라도 그때 처결하면 됩니다. 이대로 군사를 이끌었다간 자칫 일을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유비가 그 말을 듣자 치솟는 화를 억눌렀다. 그러고는 공명의 말에 따라 사자를 면죽으로 보내 유봉에게 맹달을 사로잡으라는 영을 전하게 했다. 유봉은 한중왕의 영을 받들어 곧 군사를 이끌어 맹달을 사로잡으러 성을 나갔다. 한편 50여 기를 거느리고 위나라로 향한 맹달은 밤을 도와 달려가 허창에 이르렀다. 조비는 그때 문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앞일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문득 촉의 장수 맹달이 투항해 왔다는 말을 듣자, 얼른 그를 불러들이게 한 뒤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여기 온 것은 거짓으로 항복하려 함이 아닌가?"

조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묻자 맹달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전에 관운장이 위급했을 때 신이 구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중왕은 신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워 이곳으로 왔을 뿐 결코 다른 뜻이 없으니 부디 너그러이 거두어 주십시오."

조비는 그래도 선뜻 믿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유봉이 군사 5만을 이끌고 양양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싸움을 돋우며 하는 말이 다만 맹달 한 사람만 죽이고 물러나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조비는 맹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조비가 좋은 기회라 여기고 맹달에게 말했다.

"네가 과연 진심으로 항복했다면 가서 유봉의 목을 베어 오라. 그러면 네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러자 맹달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가서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져 유봉을 달래겠습니다. 그리하여 유봉도 대왕께 투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조비는 크게 기뻐하며 맹달에게 양양, 번성을 지키게 하고 산기상시, 건무장군, 평양정후에 신성태수의 벼슬을 내렸다. 그때 양양은 하후상과 서황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이 기회를 보아 상용의 여러 고을을 빼앗으려 하고 있을 때 맹달이 이르른 것이었다. 맹달은 양양에 이르러 두 장수와 예를 나눈 후 유봉이 있는 곳을 물었다.

"성에서 50여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소."

맹달은 그 말을 듣고 곧 글 한 통을 쓴 후 사람을 시켜 유봉에게 전하게 했다. 한중왕이 전에 관 공을 구원하지 않은 죌르 물을 것인즉 자기처럼 위에 투항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봉은 맹달과는 달랐다. 그 글을 읽더니 글을 북북 찢으며 외쳤다.

"이 도적은 전에 나에게 숙질간의 의를 저버리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부자간의 의마저 끊게 하여 나를 불충불효한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구나."

유봉은 그 자리에서 맹달의 글을 가지고 온 사자의 목을 베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기가 바쁘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움을 걸었다. 맹달도 유봉이 사자를 목 베고 군사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알자 화를 발끈 냈다. 곧 군사를 이끌어 유봉의 군사와 마주한 채 등굴게 진을 벌여 세웠다. 유봉이 먼저 문기 아래로 나서더니 칼을 번쩍 들어 맹달을 가리키며 소리쳐 꾸짖었다.

"나라를 거스른 역적놈아, 네 어찌 감히 어지러운 글로 나를 불충불효한 사람으로 만들려 하느냐?"

맹달도 서슴없이 유봉의 꾸짖음을 맞받았다.

"네 놈은 어리석기가 짝이 없구나. 죽음이 바로 네 머리 위에 닥쳐 왔거늘, 아직 그걸 살피지 못하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느냐?"

맹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봉이 말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맹달도 마주 달려 나와 칼을 맞부딪쳤다. 두 사람이 어우른 지 서너 합이 되자 유봉의 거센 기세를 당해 내지 못하겠다는 듯이 맹달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봉이 승세를 몰아 맹달을 20여 리나 뒤쫓았다. 그러자 홀연 좌우에서 크게 고함 소리가 일며 하후상과 서황이 군사를 거느리고 짓쳐나왔다. 달아나던 맹달도 돌연 말머리를 돌려 유봉을 향해 달려들었다. 맹달의 유인책에 빠진 것이었다. 세 갈래의 군사가 유봉을 에워싸고 달려드니 유봉도 마침내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거느렸던 군사들을 크게 찢긴 채 밤을 도와 상용으로 달아나려 할 뿐이었다. 뒤에는 맹달이 거느린 군사들이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유봉이 가까스로 성문 앞에 이르러 소리쳤다.

"문을 열라. 내가 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성문은 열리지 않고 성 위에서 어지럽게 화살이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유봉이 놀라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문루에 신탐이 서서 소리쳤다.

"나는 이미 위에 항복했으니 이 성은 그대의 성이 아니다."

신탐이 배신한 것을 알게 된 유봉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활을 땅겨 그를쏘려 했다. 그러나 뒤쫓던 적병이 바로 등 뒤에 다가오고 있었다. 머뭇거릴 겨를이 없었다. 유봉은 하는 수 없이 방릉을 바라보고 급히 말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방릉에 이르렀으나 그곳에도 이미 위의 깃발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성 위에서 신탐의 아우 신의가 기를 한 번 흔들자 성 뒤에서 한 떼의 군사가 쏟아져 나왔다. 유봉이 보니 그들이 앞세운 기에는 '우장군 서황'이라는 글이 크게 씌어 있었다. 유봉은 그 기를 보자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이미 방릉성도 위군에게 떨어진 데다 범 같은 장수 서황이 달려오니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아 서천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봉이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나는데 서황의 칼 아래 많은 군사가 찢겨져 나가고 뒤따르는 군사는 겨우 1백여 기에 지나지 않았다. 유봉이 간신히 성도에 이르러 한중왕을 뵙고 엎드려 울며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한중왕은 유봉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은 채 큰 소리로 꾸짖었다.

"욕된 자식이 무슨 낯으로 나를 보러 왔느냐?"

"숙부를 구원하지 못한 것은 맹달이 가로막고 나서 말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봉이 눈물을 흘리며 때늦은 변명을 했다. 그러나 한중왕은 그 말에 더욱 노하여 소리쳤다.

"너도 사람이 먹는 밥을 먹고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있는 놈이 아니냐? 네가 흙으로 빚어 만든 사람이 아니고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가 아닌 담에야 어찌 역적놈의 말을 들을 수가 있다는 말이냐!"

한중왕은 이미 유봉이 관 공을 구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를 살려둘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비록 아버지와 아들의 의를 맺은 사이이나 관 공의 죽음 앞에는 그 어떤 정리도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중왕 유비는 좌우에게 엄한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사람 같지도 않은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라!"

영에 따라 좌우의 무사들이 유봉을 끌어 내어 목을 벴다. 유봉의 목을 베고 난 며칠 후에야, 유봉이 관 공을 돕지 않은 일을 뉘우쳤으며 맹달로부터 받은 항복을 권하는 글을 찢어 버리고 그 사자의 목을 베었다는 애기를 듣게 된 유비는 마음이 아팠다. 한중왕은 양아들 유봉을 죽인 일이 마음 아픈 데다 관 공을 잃은 슬픔이 겹쳐 그만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거기다가 한중왕 유비도 이제 예순 살의 노령이 되었다. 유비가 몸져눕게 되니 군사도 그대로 묶이고 말았다.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일 것 같았던 천하가 한중왕의 병으로 인해 고요히 가라앉고 말았다. 그 무렵, 위왕 조비는 왕위에 오른 뒤 모든 문무의 벼슬아치들의 벼슬을 올려 주고 상을 내려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정이 안정되자 조비는 무장을 갖춘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향인 남쪽 패국을 찾았다. 조비의 고향인 초현에서는 백성들이 길을 쓸고 의장을 갖춰 입은 후 술과 떡을 바치며 조비를 환영했다.

"한 고조가 고향에 돌아오셨던 예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는 성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들은 조비를 맞으며 기뻐했다. 조비는 조상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고향을 순시하며 노인들을 후히 대접했다. 고향의 노인들도 길을 메울 듯 거리로 나와 술잔을 바쳤다. 마치 옛날 한 고조가 자기 고향인 패땅에 들렀을 때와 다름 없었으니 조비가 바로 그 한 고조를 본뜬 것이었다. 조비가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대접을 받고 있는데 홀연 사자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하후돈 대장군께서 병환이 위급합니다."

조비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고향에 머물 수 없어 즉시 업군으로 돌아갔다. 조비가 업군에 이르니 하후돈은 이미 죽은 후였다. 조비는 스스로 상복을 입고 선왕때부터의 공신인 하후돈의 죽음을 슬퍼한 뒤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다. 아버지 조조의 죽음에 뒤이어 아우 웅이 죽었고 다시 하후돈이 죽으니 이해는 정월 이래 반년 동안 장례가 이어졌다. 조정의 관원들도 마음이 자연히 뒤숭숭해 있었다. 그런데 8월이 되자 이상하게도 상서로운 일만 일어났다. 석읍현에는 봉황새가 내려와서 춤을 추었고 임치성에서는 기린이 나타났고 업군에서는 황룡이 나타났다. 이런 상서로운 조짐이 일어나자 이상하게도 그 일은 엉뚱한 일에 연관지어졌다. 조조 때부터의 중신이었던 중랑장 이복과 태사승 허지는 어느날 서로 만나 의논했다.

"요즈음 갖가지 상서로운 조짐이 일어나니 이는 바로 위가 한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려야 함을 뜻하는 듯하오. 즉시 수선의 예를 베풀도록 하고 한의 천자로 하여금 천하를 위왕에게 양도하시도록 해야겠소."

두 사람은 뜻을 함께 하자 화흠, 왕랑, 신비, 가후, 유이, 유엽, 진교, 진군, 환해 등 문무관원 40여 명에게도 그 뜻을 알렸다. 조조가 죽고 나자 제위를 빼앗을 음모를 드러내 놓고 논의하게 된 것이었다. 문무관원들은 뜻이 모아지자 바로 내궁으로 들어가 헌제를 보고 아뢰었다.

"엎드려 살피건대 위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래 덕은 사해에 떨치셨고 어진 일이 만물에 미쳐 옛날과 지금을 뛰어넘습니다. 비록 당우의 시대라 해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하들이 모여 의논하였으되 이제 한나라는 그 기운이 이미 다한 듯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옛 요순의 도를 본받으시어 강산과 사직을 위왕 전하께 넘기시도록 하십시오. 이는 위로는 하늘의 뜻에 따르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뜻에 맞추는 것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폐하께서도 깨끗하고도 편안한 복을 누리시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는 곧 조종과 만인에게 실로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논을 정한 후에 특별히 폐하께 주청하는 바입니다."

헌제는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한동안 얼이 빠진 듯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윽고 눈물을 흘리며 백관들에게 말했다.

"짐이 돌이켜 보건대 우리 고조께서 석 자 칼로 흰 뱀을 베시고 의병을 일으키시어, 진을 평정하시고 초를 없앤 뒤 기업을 이루어 대대로 전하여 온 지가 4백 년이오. 짐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허물이 없는데 어찌 물려받은 조종의 대업을 함부로 버릴 수가 있다는 말이오? 그대들 백관들은 다시 한번 공론에 부쳐 의논해 보시오."

헌제가 말을 마치자 화흠이 대뜸 이복과 허지를 데리고 헌제 앞으로 성큼 나서더니 말했다.

"폐하께서 신들의 말씀을 믿지 않으시겠다면 이 두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어찌하여 한의 운수가 다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자 헌제가 묻기도 전에 이복이 먼저 나서 아뢰었다.

"위왕께서 위에 오르신 후에 봉황이 춤을 추며 나타났으니 기린이 나타났고 또한 황룡이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화가 무성하고 감로가 내렸으니 이는 곧 하늘이 위로 하여금 한을 대신케 하라고 상서로운 조짐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복의 말이 끝나자 헌제가 입을 열려 하는데 이번에는 또 허지가 나섰다.

"저희들은 원래 천문을 보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밤에 건상을 보니, 타오르던 한의 기수는 이미 다했고 폐하의 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의 건상은 하늘에서부터 땅에 이르기까지 가득해 그 찬란한 빛이 말로 다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참에 나와 있는 글자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참서에 적혀있는 글은 이러합니다. , 이 글을 보면 '귀자 옆에 위자가 연이어 있으니 한을 대신할 것은 말할 것도 없구나. 언은 동쪽이오, 오는 서쪽이라, 두 해가 서로 빛나며 위와 아래로 옮긴다'라고 했습니다. 즉 이 글을 풀이하면 귀변에 위가 연해 있으니 이는 바로 위자며 언은 동쪽에, 오는 서쪽에 있다 했으니 이를 합치면 허자가 됩니다. , 두 개의 해가 서로 빛나며 위아래에 있다 했으니 두 자를 합치면 창이 됩니다. 그러니 곧 위가 허창에서 한나라 천하를 이어받는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이와 같은 하늘과 사람의 뜻을 아울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허지의 말을 듣고 나서도 헌제는 쉽게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정색을 하며 그들의 말을 물리쳤다.

"상서로운 징조니, 도참이라 하는 것은 원래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어찌 그런 허황한 일로 조종 대업을 내놓으라고 하는가?"

그러나 몰려온 문무관원들도 헌제의 거절에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왕랑이 나서 말했다.

"예로부터 흥하면 반드시 무너짐이 있고 성하면 쇠가 있다 했습니다. 어찌 망하지 않는 나라가 있겠으며, 기울지 않는 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실은 4백 년을 이어 오다 폐하의 대에 이르러 이제 그 운세가 다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마땅히 물러나셔야 하며 부질없이 머뭇거려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지체하시다가는 어떠한 변고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부디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진심으로 한조를 받들려는 신하들은 없었다. 그런 신하들은 대부분 조조의 칼 아래 목이 떨어졌거나 산과 들에 파묻혀 있을 뿐이었다. 헌제 앞에 몰려온 백관들은 공손히 청하는 대신 거리낌없이 드러내 놓고 핍박했다. 헌제로서는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을 말로써 물리칠 수 없음을 알고 통분함을 억누르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후전으로 들어가자 백관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흩어졌다. 다음 날이었다. 문무백관들이 대전에 모여 환관을 시켜 헌제를 불러오게 했다. 백관들이 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고 있는 헌제로서는 시름과 두려움으로 감히 대전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황후 조씨가 물었다.

"백관들이 모여 폐하 나오시기만을 기다린다 하였는데 어찌하여 나가지 않으십니까?"

조 황후는 지난날 조조가 복 황후를 죽인 후 자기 딸을 헌제에게 시집을 보내 황후로 삼게 했던 조비의 누이였다.

"그대의 오라버니가 제위를 빼앗으려고 백관을 시켜 나를 핍박하니 내가 차마 나가지 못하고 있소."

헌제가 눈물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조 황후가 펄쩍 뛰며 물었다.

"나의 오라버니가 어찌 그 같은 역적질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때였다. 조홍과 조휴가 칼을 들고 어전으로 들어와서 헌제에게 대전으로 나갈 것을 재촉했다.

"백관들이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어서 나가십시다."

조 황후가 그들을 소리쳐 꾸짖었다.

"바로 너희들이 부귀에 눈이 멀어 서로 짜고 역적질을 도모하고 있구나. 나의 아버님께서는 그 공이 세상을 뒤덮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으나 감히 나라의 신기만은 넘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오라버니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나라의 천자 자리까지 빼앗으려 한다는 말이냐? 하늘이 너희들에게 벌을 내리리라!"

조 황후가 원통함을 못 이긴 채 그렇게 소리치더니 통곡하며 내궁으로 들어가자 조 황후를 따르는 자 가운데 흐느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 황후가 내궁으로 들어가 버리자 조홍과 조휴는 다시 헌제를 재촉했다. 헌제는 더는 버티고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옷을 갈아입고 대전으로 나갔다. 헌제가 대전으로 나가자 화흠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엄포를 놓았다.

"폐하께서는 어제 저희들이 의논한 바를 따르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큰 화를 입지 않으실 것입니다."

"경들은 모두 한의 녹을 먹은 지 오래 된 신하들이며 이 중에는 공신의 자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차마 신하로서는 해서 아니 될 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인가?"

백관들은 상대로 외롭고 쓸쓸한 몸이 된 헌제가 남은 기력을 가다듬으며 꾸짖었다. 그러자 화흠이 목소리를 높이며 윽박질렀다.

"폐하께서 끝내 저희들의 뜻을 좇지 아니하시다가 궁전 안에서 변고라도 당하게 되면 그때는 폐하께서도 신을 불충하다 하지 마십시오."

그 소리에 헌제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누가 감히 이 몸을 죽이려 한단 말이냐?"

헌제의 노한 외침을 듣고도 화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마치 신하에게 꾸짖듯 소리쳤다.

"폐하께서 임금으로서 복이 없기 때문에 천하가 이처럼 어지럽다는 것을 만백성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 위왕께서 조정에 계시지 않았다면 폐하를 죽이겠다는 사람이 어찌 한둘 뿐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그 은혜를 덕으로 갚지 아니하시니, 그렇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폐하를 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씀입니까?"

자신이 내쫓지 않더라도 어차피 천자의 자리는 물론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처지라는 말이었다. 헌제도 그 낌새에 크게 놀랐다. 우선 그 자리를 피할 생각으로 소매를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왕랑이 화흠에게 눈짓을 보내 헌제를 붙들게 했다. 이 자리에서 헌제의 대답을 받아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화흠이 그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성큼성큼 헌제 앞으로 다가간 화흠이 융포 자락을 움켜잡고 윽박지르듯 말했다.

"허락하겠소, 아니 하겠소? 어서 대답만 하시오."

그들 백관들에게 헌제는 이미 천자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거리의 불한당에 지나지 않았다. 헌제는 그 지경이 되자 몸을 떨며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조홍과 조휴가 칼을 빼들며 소리쳤다.

"부보랑은 어디 있느냐? 어서 썩 나서지 못할까?"

조홍은 천하의 옥새지기를 소리쳐 불렀다.

"부보랑은 여기 있소이다."

부보랑 조필이 큰 소리로 대답하며 나섰다.

"부보랑은 어서 옥새를 내놓아라"

조홍이 조필을 보자 얼굴을 붉히며 호통쳤다. 그러나 조필은 그런 조홍을 오히려 꾸짖었다.

"옥새는 천자의 보물이다. 어찌 함부로 그걸 내놓으라 하느냐!"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정색을 하고 꾸짖자 조홍은 지체하지 않고 무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저 자를 끌어 내 목을 베라!"

조필은 무사들에게는 끌려가 목이 떨어질 때가지도 눈을 부릅떠 꾸짖기를 멈추지 않았다. 헌제는 조필이 끌려가 목이 떨어지는 걸 보자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고개를 돌려 바깥을 보니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위군 수백 명이 늘어서 있었다. 헌제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바라는 대로 천하를 위왕에게 내 주겠소. 바라건대 남은 목숨이나 보존토록 하여 내 명이 다할 때 눈을 감게 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오."

언제 어느 때 칼끝이 날아들자 모를 일이라 헌제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가후가 나서며 헌제를 위로했다.

"위왕께서는 결코 폐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폐하께서는 급히 조서를 내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헌제는 진군에게 나라를 넘겨 준다는 조서를 짓게 했다. 조서가 다 되자 화흠은 옥새와 함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위 왕궁으로 가 조비에게 바쳤다. 조비는 조서와 옥새를 받고는 몹시 기뻐하며 조서를 근신에게 읽게 하였다.

짐이 천자의 위에 있은 지 서른다섯 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 뒤집힐 뻔했으나 다행히 조종의 영령이 도와 위태로움을 면하고 다시 위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건대 한나라의 기수는 이미 끝나고 모든 운수는 조씨에게로 돌아가는 듯하다. 이는 전왕의 신무한 공적에다 금왕의 밝은 덕을 떨치어 때를 맞춰 응한 것이니 역수가 뚜렷하고 밝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무릇 대도를 행함에는 천하의 공론을 따라야 할 것인즉 당요는 아들에게 사사로이 천하를 넘기지 않아 그 이름이 대대로 전하게 되었다. 짐은 그 일을 우러러 사모하다 이제 요 임금을 본받아 승상인 위왕에게 나라를 넘겨주려 한다. 왕은 이를 사양치 말지어다.

조서를 다 읽자 조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서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자 가까이에 있던 사마의가 말렸다.

"아니 됩니다. 비록 조서와 옥새를 받았다 하여도 전하께서는 표문을 올려 사양함으로써 천하 사람들의 비난을 사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조비도 사마의의 말을 옳다고 여겼다. 머리를 끄떡이며 곧 왕랑에게 표문을 짓게 했다. 왕랑은 조비를 대신해 자신은 덕이 없으나 따로 어진 이를 뽑아 천자의 위를 물려 주기 원한다는 글을 지었다. 조비가 울린 표문을 보자 천자는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웠다. 조비가 천하 사람들의 나무람을 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사양한 것임을 헌제가 모르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위왕이 겸양하여 조서를 받지 않으려 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화흠이 선뜻 나서 그 뜻을 밝혔다.

"지난날 위 무왕께서 왕호를 받으실 때 세 번 사양하신 후에야 받으셨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다시 한번 조서를 내리시도록 하십시오. 그때는 위왕께서도 받으실 것입니다."

헌제는 마지못해 환해로 하여 다시 다시 위왕에게 제위를 권하는 조서를 짓게 했다. 그리고 고묘사 장음에게 절을 갖추고 옥새와 조서를 주어 위 왕궁에 전하게 했다. 조비가 두 번째 조서를 받아 읽어 보니 거기에 쓰인 내용은 이러했다.

그대 위왕이여, 글을 올려 사양하나 짐은 이미 한의 운수가 쇠한 지 오래임을 알고 있노라. 다행스럽게 무왕 조조는 높은 천운에 부응하고 신무를 크게 떨쳐 흉악한 무리들을 쳐 없애 이 땅이 깨끗해지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또한 금왕 비는 그 선왕의 위업을 이어 지극한 덕을 밝게 비추니 그 가르침은 사해를 덮고 어진 이들을 천하에 일으키니 하늘의 운수가 마땅히 그대에게 있도다. 옛 순은 스무 가지 큰 공이 있어 방훈이 그에게 천하를 물려 주었으며 대우에게는 산과 물을 다스린 공적이 있어 중화가 제위를 그에게 물려 주었다. 한은 옛 요의 운을 이었으니 다시 그 거룩한 뜻을 전해야 할 의가 있다 할 것이다. 신령스런 혼령의 뜻에 따르고 하늘의 밝은 명을 받들어 어사대부 장읍으로 하여금 절을 갖추어 황제의 옥새를 받들게 하니 왕은 사양치 말고 받들지어다.

조비가 다시 그 조서를 읽어 보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사마의에게 들은 말이 생각나 가후에게 물었다.

"비록 두 차례나 조서를 내렸으나 천하와 후세 사람들로부터 내가 천자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렵소. 어떻게 하면 그 나무람을 면할 수 있겠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장음에게 옥새를 가지고 가게 하시어 두 번 사양하십시오. 그리고 화흠에게 일러 천자께서 대를 쌓게 하시고 그 이름을 수선대로 부르라 하십시오. 좋은 날을 골라 문무백관들을 수선대 앞에 불러모은 후 천자가 친히 옥새를 내려 나라를 위왕께 넘겨주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의심도 풀릴 것이며 사람들의 비난도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조비는 그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곧 장음에게 옥새를 도로 가져가게 하고 다시 사양하는 글을 헌제에게 올렸다. 헌제는 두 번째 조소도 다시 돌아오자 다시 군신들에게 그 뜻을 물었다.

"위왕이 또다시 사양하니 그 뜻이 무엇이오?"

그러자 그 물음을 기다리고 있던 화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대 하나를 쌓아 수선대라 이름하십시오. 대가 쌓아지면 문무백관들을 모아 놓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제위를 물려 준다는 뜻을 밝히십시오. 그리하신다면 폐하께서는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위나라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으나 헌제는 화흠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곧 태상원의 관원을 보내 번양에 터를 잡게 하여 삼층으로 높은 대를 쌓게 했다. 그리고 따로 날을 잡아 시월 경오날 인시에 선양의 의식을 치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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