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삼국지 7-1

7권 지혜로 한중을 취하다

 

노장 황충과 위연

가맹관을 물러난 유비는 부성으로 향하던 도중 사람을 시켜 부수관을 지키는 양회와 고패에게 작별을 알리게 했다.

"유황숙께서 형주로 회군하려 하십니다. 떠나기 전에 유황숙께서 두 분 장군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자 하십니다."

양회와 고패는 유비가 형주로 돌아가기 위해 군사를 거느려 온다는 말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곧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유비가 형주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는데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양회가 가만히 묻자 그런 양회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 고패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이제 유비가 죽을 차례가 온 것이네. 우리가 각기 비수를 가슴에 품고 가 유비를 전송하는 자리에서 찔러 죽이도록 하세. 그러면 우리 주공의 큰 근심거리를 없애는 것이 될 것일세."

"그것 참 좋은 묘안이네. 나도 유비를 죽여 없앨 작정이었네."

두 사람은 이렇게 의논한 뒤, 군사 2백을 거느려 관을 나가 유비를 배웅하러 갔다. 고패가 말한 대로 가슴에 비수 한 자루씩을 품은 채 나머지 군사들은 관안에 남겨 두고 굳게 지키게 했다. 그때 유비는 군사들을 이끌고 부수가에 이르고 있었다. 문득 방통이 말 위에서 유비에게 당부했다.

"양회와 고패가 오거든 주공께서는 경계심을 풀지 말고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만약 그들 둘이 오지 않거든, 그들이 의심하고 있는 것이니 곧바로 부수관을 치되 모든 일을 신속히 하여 방비할 틈을 주지 말고 급히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방통의 말에 유비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문득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더니 앞서가던 말 앞의 수자 기가 부러졌다. 유비가 그 모양을 보자 불길한 느낌이 들어 방통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징조이오?"

유비의 물음에 방통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는 주공께 경고의 뜻을 내리는 것입니다. 양회와 고패가 주공을 해할 뜻이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미리 대비를 철저히 해 두십시오."

유비는 방통의 말을 듣자 겉옷 속에 두꺼운 갑주를 받쳐 입고 허리에는 보검을 찼다.

"양회, 고패 두 장수가 전송하러 온다고 합니다."

그때 사람이 와서 알리므로 유비는 행군을 멈추고 두 장수를 기다렸다. 방통은 위연과 황충에게 군령을 내렸다.

"두 장수가 이끌고 온 군사는 마군이건 보군이건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말도록 하라.

위연과 황충은 군령을 받고 물러났다.

얼마 있지 않아 양회와 고패가 유비 앞에 이르렀다. 방통과 유비가 어떤 계책을 세웠는지 알 리 없는 양회와 고패는 유비의 군사들이 의외로 경계하는 기색이 없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우리 뜻대로 되어 가고 있구나!'

양회와 고패는 예물로 가지고 온 염소와 소, 그리고 술을 바치며 진정으로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다는 얼굴을 지었다. 두 사람은 유비와 방통이 앉아 기다리고 있는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양회가 유비를 보니 갑주도 입지 않은 채였다. 양회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유비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황숙께서 먼길을 돌아가신다기에 저희들이 보잘것없으나 술과 안주를 마련해 전송차 왔습니다."

인사말과 함께 술을 따라 유비에게 권했다. 그러자 유비가 사양했다.

"두 장군께서는 관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은 터이니 마땅히 술잔을 먼저 받아야 할 것이오."

유비가 굳이 먼저 마실 것을 권하자 양회와 고패는 그 술잔을 들이켰다. 두 사람이 술을 다 마시자 유비가 다시 청했다.

"내가 두 분 장군과 은밀히 의논할 일이 있소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보내도록 하시오."

유비는 그 말과 함께 수하에게 눈짓해 양회,고패가 데리고 온 2백의 군사를 중군장 밖으로 내보내게 했다. 양회와 고패는 그런 유비를 말릴 수도 없었다. 차라리 그들 두 사람과 유비와 방통만이 마주 앉게 된 것을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을 때였다. 유비가 별안간 호통을 쳤다.

"이 두 놈을 묶어라!"

그 소리와 함께 장막 뒤에서 유봉,관평이 도부수들을 이끌고 나와 양회, 고패가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을 꽁꽁 묶어 버렸다.

유비가 사로잡힌 그들을 보고 꾸짖었다.

"나는 너의 주인과 종친이며 형제뻘이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 두 사람이 짜고 우리 사이의 정리를 갈라놓으려 했느냐?"

그러자 방통이 좌우에게 명을 내렸다.

"저놈들의 몸을 뒤져 보라!"

좌우의 군사들이 두 사람의 몸을 뒤져 보니 과연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가 품속에서 나왔다.

"저런 죽일 놈들이 있나, 빨리 목을 베어라!"

방통이 그들 두 사람을 끌어내어 목을 베라고 했다. 유비는 차마 그들을 죽일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을 죽임으로써 스스로 유장과의 정리를 끊는다고 생각하니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방통이 그런 유비를 깨우쳤다.

"저 두 놈은 원래부터 주공을 해치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방통은 이어 다시 도부수들에게 호통을 쳐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게 했다. 이때 황충과 위연은 양회와 고패가 거느리고 온 군사 2백을 사로잡아 가두고 있었다. 두 장수의 목이 떨어지자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군사들에게 유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너희들은 놀라지 말라. 양회와 고패는 나의 형제간을 이간질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해치려고 칼까지 품고 있었으니 죽였을 뿐이다.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유비는 술과 고기를 내려 군사들의 놀란 가슴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자 방통이 군사들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우리 군사로 받아들이려고 하니, 이제 우리 군사를 인도해 관을 빼앗을 수 있도록 하라. 그러면 후한 상을 내리겠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군사들은 두 장수가 죽은 데다 목숨까지 살려 주고 술을 내려 어르니 방통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입을 모아 방통의 말을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이었다. 양회와 고패가 거느리고 왔던 2백 군사를 앞세운 유비의 대군이 부수관으로 향했다. 관문 앞에 이르자 앞선 군사 중의 하나가 외쳤다.

"양 장군과 고 장군께서 돌아오셨으니 어서 관문을 열어라!"

그 소리에 성 위에 있는 군사들이 관문 쪽을 굽어보니 모두 자기편 군사들이 틀림없으므로 즉시 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있던 유비의 군사들은 관문이 열리자 일시에 짓쳐들었다. 자기편 군사들인 줄 알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던 부수관 안의 군사들은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유비군을 맞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항복했다. 유비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관을 얻었으며, 부수관 안의 군사들까지 자기편 휘하로 거두어들인 것이다. 유비는 이날 2백 군사들을 비록한 공을 세운 장졸들에게 모두 상을 내린 후 군사를 나누어 부수관의 앞문과 뒷문을 지키게 했다. 다음 날 힘들이지 않고 서천을 빼앗기 위한 첫 관문인 부수관을 얻은 유비는 술과 고기를 내려 군사들을 위로하는 한편 공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얼근히 오른 유비가 방통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의 이 술자리가 실로 즐겁지 않소?"

평소 인의를 내세워 온 유비답지 않은 소리였다. 방통이 빈정거리는 투로 불쑥 유비에게 핀잔을 주었다.

"남의 나라를 치고도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이의 법도가 아닙니다."

유비가 그 대답에 몹시 불쾌한 듯 목소리를 높여 방통을 꾸짖었다.

"지난날 주의 무왕도 주를 쳐 빼앗은 후 풍악을 울리며 그 공을 경축했다 하는데, 그럼 그 무왕도 어진 분이 아니란 말인가? 오히려 군사의 말이 도리에 맞지 않음이 아닌가. 듣기 싫으니 썩 물러가도록 하라!"

비록 술에 취했다고는 하나 유비가 아픈 곳을 찔렸음인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큰 꾸짖음이었다. 그러나 모욕에 가까운 꾸짖음을 듣고서도 방통은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자신이 항상 유비를 일깨워 주며 했던 말을 비로소 유비의 입으로 듣게 되었음을 기뻐했는지도 모른다. 만취한 유비를 좌우 사람들이 후당으로 부축하여 가서 눕혔다. 유비는 그대로 곯아떨어져 밤중에야 겨우 눈을 떴다. 유비가 술이 깨자 좌우 사람들이 술자리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유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뉘우쳤다. 다음 날이 되자 유비는 이른 아침에 옷을 갖춰 입고 당상에 나가 방통을 불러들인 후 어제 있었던 일을 사과했다.

"어제 술에 취해 내가 말을 함부로 한 모양이오. 부디 가슴에 새겨 두지 마시오."

방통은 유비의 사과에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유비가 거듭 잘못을 빌었다.

"어제 일은 나의 실수였소이다."

"군신이 함께 실수를 했는데 어찌 주공만이 잘못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방통이 밝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유비도 그제야 소리 내어 웃었다. 한동안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이전과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한편 유비가 양회와 고패 두 장수를 죽이고 부수관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은 성도의 유장은 크게 놀랐다.

"일이 정말 이렇게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유장은 한탄하며 여러 문무관원들을 모은 후 이 일을 의논했다. 유비에 대해 처음부터 눈에 쌍심지를 돋웠던 황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사를 낙현으로 이끌어 성도로 들어오는 물줄기 같은 길을 막도록 하십시오. 유비가 아무리 날랜 군사와 사나운 장수가 있다 할지라도 그곳만 막으면 쉽게 성도로 들어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황권의 말에 유장도 이제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지체하지 않고 군령을 내렸다.

"유괴, 냉포, 장임, 등현 네 장수는 군사 5만을 거느려 밤낮없이 낙현으로 가 유비를 막아라!"

네 장수는 그날로 낙현을 향해 군사를 이끌었다. 가는 도중 유괴가 다른 장수들에게 말했다.

"내가 전에 듣기로 금병산속에 도호를 자허상인이라고 하는 한 이인이 있어 사람이 죽고 사는 것과 귀하게 되는 것, 천하게 되는 것을 손바닥 보듯이 안다고 하오. 마침 오늘 행군 도중에 금병산을 지나게 되니 한 번 그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소?"

갈 길이 급한데 유괴가 뜻밖의 말을 하자 장임이 핀잔을 주었다.

"대장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맞으러 가는 마당에 한낱 산야에 묻혀 사는 사람에게 무엇을 물어본다는 말이오?"

그래도 유괴는 정색을 하고 우겼다.

"아니오. 옛 성인께서 이르시기를 '지성으로 도를 닦으면 가히 앞날의 일도 안다'고 하였소. 그러니 고명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앞일을 물어 흉한 길은 비켜 가고 길한 것은 취해야 할 것이오."

유괴의 말을 듣고 보니 다른 장수들도 마음이 달라졌다. 이에 네 장수는 행군을 멈추고 기병 5, 60을 거느리고 금병산 아래에 이르러 나무꾼에게 길을 물었다. 나무꾼이 높은 산꼭대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네 장수가 나무꾼이 가리킨 높은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니 과연 암자가 하나 있었다. 암자 앞에 네 장수가 이르자 도인을 시중드는 아이가 나와 그들을 맞으며 이름을 물었다. 네 장수가 각각 이름을 대자 아이가 방으로 안내했다. 과연 방 안에는 자허상인이 방석 위에 꼼짝 않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네 사람은 그 도인에게 절을 올린 뒤 앞일을 물었다. 그러자 자허상인이 조용한 가운데 말했다.

"빈도(수도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낮춘 말)는 산야에 숨어 사는 한낱 늙은이에 지나지 않소이다. 어찌 길흉을 알 수 있겠소?"

자허상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유괴가 다시 절을 올리며 간청했다. 자허상인은 그제야 아이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하여 여덟 구로 된 글을 써서 유괴에게 주었다. 네 사람이 그 글을 읽어 보았다.

왼쪽의 용과 오른쪽의 봉이

서천으로 날아드니

봉추는 땅에 떨어지고

와룡은 하늘로 오르네.

하나 얻고 하나 잃음은

하늘이 정한 이치이네.

천기대로 움직여서

구천으로 들지나 말라.

자허상인이 서천의 앞일과 그들 네 장수의 앞일을 암시한 글귀를 주자 유괴가 욕심을 내어 다시 물었다.

"우리 네 사람의 앞날 운수는 어떠합니까?"

자허상인은 그 물음에 차갑게 잘라 말했다.

"정해진 수는 피할 수 없으니 굳이 물어서 무슨 소용 있겠소?"

자허상인이 그렇게 대답하고 조용히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이상 물어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인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산에서 내려오던 유괴가 입을 열었다.

"선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소. 어쩐지 마지막 두 구절이 마음이 걸리오."

그 말에 장임이 유괴에게 가소로운 듯 핀잔을 주었다.

"산야의 한낱 미치광이 늙은이의 헛소리요. 그런 말을 믿어 무슨 득이 있겠소."

네 사람은 다시 말에 올라 길을 떠났다. 낙성은 성도와 부성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낙현에 이른 넷은 각처의 험한 길목을 나누어 지키기 위해 군사를 나누었다. 유괴가 배치를 서둘렀다.

"낙성은 성도를 지켜 주는 울타리와 같은 곳이니 이곳을 잃는다면 성도를 지켜 내기 힘들 것이오. 그러니 우리 넷 중 두 사람은 성을 지키고 두 사람은 낙현 밖 산을 의지하여 진을 펼쳐야 하오. 성안과 밖에 진을 세워 서로 호응한다면 적군이 감히 이곳으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오."

유괴의 말에 냉포, 등현이 나섰다.

"우리 두 사람이 나가 성 밖에 진을 세우겠소."

유괴가 곧 두 장수에게 군사 2만을 주니 두 장수는 낙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세웠다. 유괴는 장임과 함께 나머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성안에 머물면서 적이 오면 막을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 유비는 부수관에서 방통과 더불어 낙성을 깨칠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유비가 내보낸 척후병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렸다.

"촉의 네 장수가 군사 5만을 이끌고 와 낙성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 냉포, 등현 두 장수가 군사 2만을 거느려 낙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해 영채를 세웠습니다."

유비가 곧 모든 장수들을 불러모아 의논했다.

"성도에 들기 위해선 먼저 성 밖의 진영부터 쳐야 하오. 누가 가서 냉포와 등현의 진영을 부숴 첫 공을 세우겠소?"

그러자 휘하 장수들 가운데 제일 늙수그레한 노장 황충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한 번 가 보겠습니다."

유비는 쾌히 승낙하며 격려했다.

"노장군께서 낙성으로 가셔서 냉포,등현 두 장수의 진영을 빼앗아 준다면 내가 반드시 후한 상을 내려 그 공을 기릴 것이오."

황충이 늙은 장수인 자신에게 유비가 서슴없이 허락하자 크게 기뻐하며 곧 군사를 거느려 떠나려고 그 자리를 물러날 때였다. 돌연 한 장수가 장하에서 소리치며 나섰다.

"노장군께서는 이미 나이가 있으신데 어찌 그 힘겨운 일을 맡으시겠습니까? 비록 재주는 없으나 그 일을 제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유비가 누군가 하고 본즉 그는 바로 위연이었다. 그러나 황충이 그 말을 듣고 잠자코 있을 리가 없었다. 문득 목소리를 높여 위연을 나무랐다.

"내가 이미 군사들에게 장령까지 내렸는데 어찌 자네가 나서서 감히 내 공을 뺏으려 하는가?"

위연도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장군께서는 이미 늙으신 몸이라 힘과 기력이 예전 같지 않으실 것입니다. 듣기로 냉포와 등현은 촉에서도 이름난 장수들로 한창 혈기 왕성한 굳센 장수라 하였습니다. 만약 노장군께서 실수라도 하여 그들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이는 주공의 큰일을 그르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나서겠다는 뜻이며 달리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니 노엽게 듣지 마십시오."

위연이 그렇게 말은 했으나 황충이 들을 때는 늙은이가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뜻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황충이 그 소리에 불끈하여 위연에게 호통을 쳤다.

"닥쳐라! 오히려 너와 같이 혈기만 믿고 덤벙대는 자야말로 위험하다. 네 이놈, 나를 어찌 늙었다 하느냐? 어디 나하고 한 번 무예를 겨루어 보겠느냐?"

위연이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좋소이다. 주공 앞에서 무예를 겨뤄 이긴 사람이 나가기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충이 성난 얼굴로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섬돌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불쑥 군교에게 말했다.

"어서 칼을 가져오너라! 내 위연 저놈하고 한판 싸워 보리라!"

황충이 칼 가져오기를 기다리며 위연을 노려보는 기색이 아무래도 한바탕 싸움을 벌일 기세였다. 그러자 유비가 깜짝 놀라며 소리쳐 만류했다.

"두 사람 다 물러나시오. 내가 이제 군사를 거느려 서천을 취하려 함에 있어 오로지 두 장군의 힘만을 믿고 있는 터인데, 두 호랑이가 싸우면 반드시 하나는 상해 나의 큰일을 그르치게 되오. 그러니 그대들 두 사람은 다툼을 그만하고 화해하도록 하시오!"

유비는 휘하 장수들이 그처럼 왕성한 전의를 품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뻐 좋은 말로 두 장수를 달랬다. 그러자 방통이 유비를 거들며 나섰다.

"그대들 두 사람은 헛된 다툼을 그만두도록 하시오. 지금 냉포, 등현이 각각 영채를 세우고 있다고 하니 두 장수는 각기 한 영채씩을 맡아 깨뜨리면 될 것이오. 어느 쪽 장수이든 면저 적의 영채를 빼앗는 장수에게 첫 번째 공을 돌리도록 하겠소. 황장군은 냉포의 영채를, 의연 장군은 등현의 영채를 맡도록 하시오."

방통이 그렇게 군령을 내리니 두 사람은 굳이 다툴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두 장수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맡은 영채를 치기 위해 그 자리를 물러났다. 두 장수가 물러가자 방통이 문득 유비에게 청했다.

"두 장수가 가는 도중 서로 다툴까 두려븟ㅂ니다. 주공께서는 군사를 거느려 두 장수의 뒤를 도와주도록 하십시오."

그 말에 유비도 그것이 걱정스럽던 터라 두말 않고 방통의 말에 따랐다. 유비는 방통을 부성에 머물게 하여 지키게 한 후, 자신은 유봉, 관평과 함께 군사 5천을 거느려 두 장수를 뒤따르기로 했다. 한편 황충은 자기의 진으로 돌아오자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내일 새벽 사경쯤에 밥을 지어 먹고 오경에 떠날 준비를 하라. 날이 밝을 무렵이면 출발하되 왼쪽 산골짜기로 나아가도록 하라!"

황충이 진병을 서둘렀다. 그러자 위연이 은밀히 군사를 황충의 영채로 보내 황충이 언제 출발할 것인가를 엿보게 했다. 황충의 군사를 살피러 갔던 군사가 오래지 않아 돌아와 알렸다.

"내일 사경에 밥을 지어 먹고 오경에는 떠난다 하옵니다."

위연이 그 소리를 듣고 지체하지 않고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우리 군사들은 내일 이경에 밥을 지어먹고 삼경에 떠나도록 하되 날이 밝을 무렵에는 등현의 영채 가까이에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니라!"

황충보다 한발 먼저 적의 영채를 힐 심산이었다. 영을 받은 군사들은 이경에 바바을 지어 먹고 말에서 방울을 떼어낸 후,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그런 다음 깃발은 말아서 들고 무기를 갖춘 후 삼경일 되자 영채를 떠났다. 황충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위연인지라 가는 도중에 엉뚱한 욕심이 생겼다.

'등현의 영채만을 빼앗는다면 그게 큰 자랑거리가 될 리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엔 차라리 냉포의 영채부터 빼앗고 내가 맡은 등현의 영채마저 뺏는다면 황 충을 따돌리고 공을 혼자서 독차지할 것이 아닌가.'

욕심에 눈이 어두우니 이젠 적군의 군세나 형세는 안중에도 없었다. 위연은 군사들에게 갑자기 영을 바꾸어 내렸다.

"군사들은 모두 방향을 바꾸어 왼편 산기슭으로 향하라. 먼저 냉포의 영채부터 치기로 한다."

황충보다 먼저 떠난 위연의 군사들인지라 날이 밝아 올 무렵이 되자 냉포의 영채 가까이에 이르렀다. 황충위 군사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위연은 군사들을 잠시 쉬게 하며 북과 기치, 창칼과 무기들을 벌여 세워 싸울 채비를 했다. 그런데 욕심만 내었지 적의 경계 태세를 염두에 두지 않은 위연이었다. 그들이 영채 가까이 이르자 냉포가 미리 풀어 놓은 척후병들에 의해 냉포에게 즉각 알려지고 말았다. 냉포는 적의 기습에 대비한 채비를 서둘러 마친 후 적이 급습해 오기 전에 먼저 들이치기로 하고 말 위에 올랐다. 냉포는 포향 한 소리를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삼군을 이끌어 위연의 영채로 덮쳐들었다. 당황한 건 오히려 위연이었다. 싸울 채비만을 떠벌리던 위연은 기습을 가하기도 전에 냉포가 먼저 급습해 오니 경황 중에 적군을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연이 냉포를 맞아 황급해 말을 달려나가 싸웠다. 두 장수가 말을 부딪치며 겨룬 지 30여 합이나 되었다. 그때 서천의 군사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위연의 군사를 덮치고 있었다. 위연의 군사들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길을 달려온 군사들이었다. 게다가 양쪽에서 기습을 당하는 형세가 되었다. 사람과 말 모두 함께 지친 군사들이었으니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좌충우돌, 같은 편끼리 부딪고 넘어지며 달아나기 바빴다. 위연이 뒤쪽 자기편 군사가 크게 혼란이 이는 가운데 흩어져 달아나는 걸 보고 더 싸우고 있을 수 없었다. 냉포에게 크게 칼을 한 번 휘둘러 그가 물러나는 사이 위연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천 군사들이 달아나는 위연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위연을 뒤쫓으며 형주군을 공격하니 형주군은 크게 패한 채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위연의 군사가 크게 죽고 상한 가운데 5리쯤을 달아났을 때였다. 홀연 산 뒤쪽에서 북소리가 크게 일며 등현의 군사들이 산골짜기를 휘돌아와 길을 가로막았다.

"위연은 달아나지 말고 순순히 말에서 내려 항복하도록 하라!"

그 소리에 더욱 급해진 위연이었다. 말을 박차고 힘껏 채찍질을 하며 앞으로 헤치고 달려가려는데 말도 지쳤던지 갑자기 앞굽을 꿇고 고꾸라지고 말았다. 말이 고꾸라지니 위연이 온전할 리 없었다. 저만치 말 앞쪽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등현이 그걸 보자 위연을 한 창에 찍을 기세로 말을 달려와 창을 번쩍 치켜들었다. 위연도 그 지경이 되니 별 도리없이 그 창을 맞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때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며 나는 시윗소리가 나더니 등현의 등을 꿰뚫었다. 화살에 맞은 등현이 위연을 찌르는 대신 자기가 먼저 말 위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위연 뒤를 따르던 냉포가 그 모양을 보고 말을 달려 등현을 구하러 가자, 산 위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오면서 산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

"노장 황충이 여기 있다. 냉포는 어서 내 칼을 받으라!"

그 소리에 냉포가 칼을 들어 먼저 달려드는 황충을 급히 막았다. 냉포가 황충을 맞아 싸웠으나 그가 대적해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몇 번 황충의 칼을 막고 피한 걸 다행으로 여기며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황충이 그 뒤를 쫓으며 냉포군을 찌르고 베며 휩쓸어가니 냉포군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그럴 동안 황충이 거느린 군사 중의 한 무리가 위연을 구해 곧장 적의 영채 쪽으로 향했다. 그때쯤 냉포는 황충이 자기를 바짝 뒤쫓으므로 말을 돌려 죽기 살기로 싸워 10여 합을 어우르고 있는데 문득 황충의 군사들이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냉포는 왼편 자기의 영채를 버린 채 황망히 뒤따르는 군사를 이끌고 오른편 영채로 향했다. 그런데 냉포가 오른편 등현의 영채로 말을 몰아 달려가 보니 영채에 펄럭이는 깃발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냉포가 얼굴빛이 달라지며 갑자기 말을 세웠다. 그러자 등현의 영채 안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 나오는데 보니 금빛 갑옷에다 비단 전포를 입은 유비였다. 좌우로는 유봉과 관평을 거느리고 있었다. 등현이 군사를 거느리고 위연을 치러 나간 사이 뒤따르던 유비가 텅 비다시피한 등현의 영채를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차지한 것이었다. 유비가 얼이 빠져 있는 냉포를 보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놈 냉포야, 내가 너희들 영채를 이미 다 차지했는데 네가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유비의 대갈일성에 냉포는 앞과 뒤로 길이 막혀 황망한 중에 산속 좁은 길로 급히 말을 달렸다. 냉포가 낙성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10여 리를 달려갔을 때였다. 홀연 좁은 산길에서 군사들이 양쪽에서 내달아와 갈퀴와 올가미를 날려 그를 덮어씌우더니 말 잔등에서 낚아챘다. 그들 복병은 위연의 군사들이었다. 위연이 공을 혼자 독차지하려다가 오히려 기습을 당해 목숨까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황충의 덕으로 살아났던 터였다. 이에 위연은 자기의 잘못을 생각하니 주공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어떻게 죄를 면할까를 생각하다 뒤따르는 후군을 수습하고 항복해 온 서천 군사들에게 서천군이 달아날 만한 길을 물어 그곳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도 마침 도망쳐오는 냉포를 사로잡게 된 것이었다. 냉포를 사롭잡은 위연은 그나마도 할 말을 찾게 되었다고 여기고 냉포를 묶어 유비가 있는 영채로 향했다. 그때 유비는 항복해 온 서천 군사들을 달래고 있었다. 면사기를 내세우고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서천 군사로서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우리에게 항복해 오는 자는 일체 죽이지 않도록 하라. 만일 항복하는 적을 죽이는 자가 있으면 그를 목 베리라!"

군사들에게 엄하게 이른 뒤 유비는 다시 서천 군사들을 향하여 어르고 달랬다.

"너희 서천 사람은 다 부모와 처자가 있을 터인데, 참으로 항복하는 자는 나의 군사로 받아들일 것이니라. 만약 원치 않는 자가 있더라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리라!"

서천의 군사들은 그 말을 듣자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유비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모두 성정을 굽혀 유비의 너그러움에 고마움을 나타냈다. 이때 냉포의 왼쪽 영채를 빼앗은 황충이 유비의 영채에 이르렀다. 황충은 유비에게 다가가 아뢰었다.

"위연이 이번에 공을 도맡아 세우려다 군령을 어겼습니다. 자칫 일을 그르칠뻔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령마저 어겼으니 그에게 죄를 물어 군령의 엄함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위연을 위급에서 구해 주기는 했으나 황충은 노기가 이는 듯 정색을 하고 지난날 밤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유비도 황충의 말을 듣자 성난 목소리로 급히 위연을 불러오게 했다. 때마침 위연이 냉포를 생포해서 영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유비는 위연이 냉포를 사로잡아오자 노기를 누그러뜨리며 황충에게 가만히 말했다.

"위연이 비록 죄가 크나 냉포를 사로잡은 공을 보아 그를 용서해 주어야겠소!"

유비는 황충을 달래는 한편, 위연에게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위연은 듣거라! 군령을 어긴 죄 목을 베어야 마땅하나 세운 공도 있는 데다 특히 황 장군께서 너그러이 용서하라고 하니 이번만은 특별히 그 죄를 덮어 두기로 한다. 위연은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황 장군에게 감사하되 다시는 다투지 않도록 하라!"

유비의 말에 위연은 유비에게 머리를 조아려 감사한 다음 황충에게도 잘못을 빌며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감사했다. 유비는 황충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황충도 유비가 그토록 자기를 높여 주며 위연을 뉘우치게 하자 크게 감격했다. 황충과 위연의 일을 그렇게 수습한 유비는 냉포를 장하에 이끌어 오게 했다. 냉포가 묶인 채 이끌려 오자 몸소 결박을 풀어주며 그를 청해 앉힌 뒤 술잔을 건네며 달랬다.

"그대는 내게 항복할 뜻이 있는가?"

유비가 묻자 냉포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죽은 목숨을 살려 주셨는데 어찌 항복을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저를 놓아 주신다면 유괴와 장임도 달래 항복하도록 권하겠습니다. 그 두 사람도 저와 죽고 살기를 함께하기로 했던 사람들이니 제가 가서 그들을 달래면 낙성을 바치고 항복할 것입니다."

유비가 냉포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만약 냉포의 말대로 된다면 그야말로 화살 한 개 쏘지 않고 낙성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거짓으로 냉포가 빠져나가기 위해 꾸며댄 말이라고 해도 이름 없는 촉의 장수 한 사람쯤 놓친다하여 별로 두려워할 바도 아니었다. 유비는 즉시 안장과 말을 내주고 냉포를 낙성으로 가게 했다. 그러자 위연이 나서며 유비에게 간했다.

"저 사람을 보내서는 아니 됩니다. 그놈이 이곳을 빠져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인의로써 사람을 대하면 그도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괘념치 말라."

유비는 그를 돌려보내면서도 의심은커녕 오히려 위연을 달랬다. 그러나 낙성으로 돌아간 냉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냉포는 유괴와 장임에게 유비에게 사로잡혔던 일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적군 10여 명을 단숨에 때려죽인 다음 그 말을 빼앗아 타고 달려오는 길이오."

장수로서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거짓말을 하고 빠져 나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괴가 보니 황망할 수밖에 없었다. 부하 군사들은 모두 죽거나 적에 투항하고 장수만 돌아왔으니 어쨌든 크게 패한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유괴는 사람을 성도로 보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리게 했다. 유장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며 모든 관원들을 모아 놓고 이 일을 의논했다. 그러자 큰아들 유순이 나서며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낙성을 지키겠습니다."

유장은 그런 맏아들이 대견스러웠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 아무래도 미덥지가 못했다. 여러 관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 아이가 가겠다고 하였소. 그런데 저 아이를 도와 줄 사람이 있어야겠는데 누가 나서겠소?"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유장이 소리나는 쪽을 보니 그는 사돈이 되는 오의였다. 유장의 친형인 유위는 원래 오의의 매씨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그 뒤에 죽었던 터였다. 유장은 기뻐하며 오의에게 물었다.

"사돈어른께서 가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장으로 누구를 데리고 갔으면 좋겠습니까?"

"오란과 뇌동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오의가 서슴없이 청했다. 유장은 오의의 말에 쾌히 승낙하고 그들에게 군사 2만을 주었다. 오의는 그날로 군사를 이끌어 낙성으로 향했다. 유괴와 장임은 오의와 군사 2만을 성안으로 맞아들인 뒤 오의에게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오의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이미 적이 성 아래까지 온 거나 다름없이 위급한 형세인데 공들은 어떤 계책이라도 세워 두고 있소?"

어쩌면 장수들에게 은근히 따지듯한 말투였다. 오의가 유장의 사돈인지라 그들이 내심 당황하는 가운데 냉포가 얼른 입을 열어 계책 하나를 말했다.

"이 부근에는 부강이 흐르고 있으며 물살이 빠르고 거칩니다. 적이 산 아래 영채에 있으니 그 지세가 낮습니다. 제게 군사 5천만 주신다면 삽과 곡갱이를 가지고 가서 부강의 둑을 일시에 무너뜨리겠습니다. 부강의 물이 한꺼번에 산 아래 영채에 쏟아진다면 유비의 군사는 모두 물살에 휘말려 죽고 말 것입니다."

오의가 들어 보니 참으로 훌륭한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냉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군사 5천을 주며 말했다.

"좋소이다, 그대는 곧 군사 5천을 이끌고 가 부강의 둑을 일시에 무너뜨리도록 하시오. 내가 오란과 뇌동에게 군사를 주어 그대 뒤를 받치도록 하겠소."

이에 냉포는 군사들에게 명해 둑을 무너뜨리는 데 쓸 삽과 곡갱이들을 준비하게 했다.

한편 유비는 그때 황충과 위연에게 각기 빼앗은 영채를 하나씩 맡겨 지키도록 한 다음 부성으로 돌아왔다. 유비는 방통을 청해 다음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멀리 나가 있던 세작이 돌아

와 알렸다.

"동오의 손권이 사람을 동천 장로에게 보내 화친을 맺고 앞으로 가맹관을 칠 채비를 하고 있다 합니다."

그 소리에 유비가 깜짝 놀라며 방통에게 물었다.

"가맹관을 잃으면 우리가 돌아갈 길이 끊어지는 것이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방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맹달에게 말했다.

"공은 서촉 사람이니 이곳 지리에 밝을 것이오. 공이 가서 가맹관을 지키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맹달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게 한 사람만 더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가맹관을 지키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게 누구요?"

유비가 그 말에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은 지난날 형주의 유표 밑에서 중랑장을 지낸 바 있는데, 남군 지강땅 사람으로 이름은 곽준이며 자는 중막이라 합니다."

유비가 그걸 마다할 리가 없었다. 곧 곽준을 불러 맹달과 함께 가 개맹관을 지키도록 했다. 맹달이 가맹관을 지키기 위해 떠나자 방통은 그 자리를 물러나 거처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방통이 잠시 쉴 틈도 없이 문 앞을 지키는 군사가 와서 알렸다.

"어떤 나그네가 와서 군사를 뵙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인가?"

방통이 만나기를 뒤로 미루고 싶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 군사가 그 사람의 풍채나 행색을 말하는데 방통이 들어보니 여느 사람 같지 않았다. 방통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을 맞으러 나갔다. 방통이 그 사람을 보니 키가 여덟 자에 용모가 비범하고 체구 또한 우람했다. 그러나 옷차림은 남루하여 볼품이 없는데다 머리를 짧게 끊어 목덜미를 덮을 만큼 풀어헤치고 있었다.

"선생은 뉘시오?"

방통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물음에는 대답할 생각도 않고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당위로 오르더니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원래 방통도 여기저기를 마음대로 떠돌며 생활했던 적이 있었으나 이 사람처럼 무례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어이가 없는 가운데도 다시 그가 누구인가하고 몇 번을 채근해 물었다.

"그대는 잠시 조용히 하게! 내가 그대에게 천하의 큰 일을 일러 주고자 하네."

흡사 아랫사람 대하듯한 오만불손한 태도였다. 방통이 의아스러운 가운데도 하는 말이 심상치 않아 좌우 사람을 시켜 술상을 마련하여 오도록 했다. 술상이 들어오자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더니 술과 안주를 먹어대기 시작했다. 체면치레라든가 마주 권하는 법도 없이 한동안 마실 만큼 마시고 먹을 만큼 먹더니 다시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에 방통은 가만히 법정을 불러 오게 했다. 법정은 촉의 사정이나 인물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정이 달려왔다. 방통이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맞으며 그 사람의 생김새와 행동거지를 들려준 후 물었다.

"혹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그러자 법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혹시 팽영언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법정이 직접 그를 보기 위해 가만히 당 위로 올라 누워 있는 사람을 굽어보았다.

"효직은 그간 별고 없었는가?"

문득 그 말소리와 함께 누워 있던 그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법정도 그 사람을 보자 반가운 듯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방통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채 법정에게 물었다.

"이분은 뉘시오?"

법정은 그제야 방통에게 그 사람을 소개했다.

"이분의 이름은 팽야이요, 자는 영언이라 쓰며 촉 땅의 호걸입니다. 그런데 주군인 유장에게 바른말을 너무 심하게 하다 미움을 사서 머리를 깎이고, 목에 쇠고리를 낀 채 남의 종살이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머리가 저렇게 짧아졌지요."

방통은 그에 대한 유장의 노여움이 컸음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유장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방통은 그에게 더욱 예로써 대하며 물었다.

"그럼 선생께서는 어쩐 일로 이렇게 찾아 주셨습니까?"

그러자 팽양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공들의 군사 수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특별히 왔소이다. 그러나 유 황숙을 뵙고 나서야 말씀드릴 것이오."

방통은 짐작대로 필시 그 말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에 법정은 급히 유비에게 이 일을 알렸다. 유비도 그 말을 듣고 놀라며 몸소 팽양을 찾아와 예를 나누었다.

"우리 군사 수만의 목숨을 구해 주신다 함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비가 묻자 팽양이 유비에게 되물었다.

"장군께서는 낙성 앞쪽의 영채에다 군사를 주둔케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합니까?"

그러자, 유비는 황망히 황충과 위연이 군사를 거느려 두 영채를 지키고 있다고 숨김 없이 말했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어찌하여 지리를 알지 못하십니까? 그 두 영채는 부강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적이 둑을 무너뜨리고 일시에 강물을 터놓고 군사들이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게 앞뒤를 막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군사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강물에 빠져 죽게 될 것입니다. 그 영채들은 마치 호수 바닥에 있는 것과 다름없이 위험한 곳입니다."

팽양이 유비에게 꾸짖듯 말하자 유비도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팽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강성(북두칠성)이 서쪽에 있고 태백(금성)이 이곳에 나타났으니 이는 상서롭지 못한 조짐입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는 깊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유비는 팽양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막빈으로 모시는 한편 사람을 황충과 위연에게 보내 영을 내렸다.

"아침 저녁으로 물샐틈 없이 순찰을 하되 특히 적이 부강의 둑을 터놓는 것을 엄히 살피도록 하라."

이에 황충과 위연은 서로 의논하여 하루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순찰을 돌되 만약 적군이 나타날 때는 힘을 합쳐 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밤이 되자 비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비 오기만을 기다리던 냉포는 때가 왔다고 여기고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부강으로 나가 강가의 둑을 터놓기 위해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홀연 함성이 크게 일어나며 군사들이 내달아왔다. 냉포는 크게 놀랐다. 이토록 비바람이 심한 날에 적군이 매복하고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냉포였다. 냉포는 하는 수 없이 급히 군사를 물리려 하는데 깜깜한 밤이라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적의 움직임도 군세도 알 길 없는 가운데 아군끼리 부딪고 짓밟히며 큰 혼란이 일었다. 냉포가 그 혼란 속을 헤치며 말을 달려 달아나는데 문득 앞쪽에서 한 장수가 군사를 거느린 채 앞을 가로막았다. 그 장수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바로 위연이었다. 냉포가 칼을 빼 들고 위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칼과 칼이 부딪친 지 수합이 되지 못해 냉포는 다시 위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때 냉포를 돕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오란과 뇌동이 나타났으나 급보를 받고 달려온 황충의 군사들과 마주쳤다. 황충은 군사를 휘몰아 오란과 뇌동의 군사를 덮치면서 닥치는 대로 베고 찔렀다. 오란과 뇌동은 크게 패한 채 쫓기고 말았다. 사로잡힌 냉포는 다음 날 부성으로 이끌려 가 유비 앞에 또다시 꿇어앉았다. 유비는 냉포를 굽어보며 소리쳤다.

"내가 너를 인의로 대해 주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감히 나를 거스렸느냐? 이젠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유비는 즉시 그를 성밖에 끌어 내어 목을 베게 하고, 그를 사로잡은 위연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유비는 다시 팽양을 청해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대접했다.

"실로 선생의 가르치심이 없었던들 우리 군사 수만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유비가 술잔을 권하며 팽양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때 문득 사람이 들어오더니 유비에게 알렸다.

"형주의 제갈 군사께서 마량을 보내 글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유비가 즉시 그를 불러들이도록 했다. 마량이 들어와 유비에게 절하며 형주 소식을 전했다.

"형주는 편안하니 주공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량은 이어 공명이 준 글을 유비에게 바쳤다.

유비가 급히 그 글을 읽어 보았다.

제가 밤에 태을수(하늘을 보고 점을 치는 법을 적은 책)를 보니 올해가 계해년으로 강성(북두칠성)이 서방에 있으며, 또 건상(천문)을 보니 태백성(금성)이 낙성 땅 위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대장의 몸에 길한 일은 적고 흉한 일이 많은 징조를 뜻합니다. 부디 주공께서는 모든 일은 신중히 살피시어 함부로 나서지 않도록 하십시오.

유비는 공명이 그토록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고 곁에 사람이 있는 것도 잊고 몇 번인가 그 글을 되풀이해 읽었다. 글을 읽고 난 유비는 마량을 형주로 돌려보낸 후 방통에게 말했다.

"내가 형주로 돌아가서 모든 일을 공명과 한번 의논해 보아야겠소."

형주를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는 생각이 일며 문득 공명을 만나고 싶어진 유비가 그렇게 말했으나 방통의 생각은 달랐다. 방통은 유비의 속마음을 알고 은근히 갈등이 이는 가운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공명은 내가 서천을 얻게 하여 공을 세울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 글을 보내 이 일을 방해하는 것이리라.'

방통이 잠시 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 역시 태을수를 헤아려 보아 강성이 서방에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공께서 서천 땅을 얻을 징조이지 흉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 역시 천문을 보았습니다만 태백성이 낙성 위에 있다 하나 이는 우리가 촉의 장수 냉포의 목을 베었으니 이미 그 흉조에 가름한 셈입니다. 주공께서는 부질없는 의심으로 일을 그르치시지 마시고 급히 여세를 몰아 군사를 내도록 하십시오."

방통이 유비를 부추기며 재촉하자 유비도 하는 수 없이 내친김에 서천을 떨어뜨리자는 방통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군사를 이끌어 성도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황충과 위연이 함께 나와 반갑게 유비를 영채로 모셨다.

"낙성으로 들 수 있는 길이 몇 군데나 있소?"

영채로 든 유비가 법정에게 물었다. 그러자 법정이 땅바닥에 지도를 그려가며 설명했다. 유비는 전에 장송이 준 촉의 지도를 꺼내 법정이 그려 준 것과 대조해 보니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낙산 북쪽에 큰길이 하나 있는데 그리로 가면 낙성의 동문에 이르게 됩니다. 또 산 남쪽에 작은 길이 있는데 그리로 가면 낙성 서쪽 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두 길 어느 곳으로도 군사를 내실 수 있습니다."

방통이 그 말을 듣자 얼른 유비에게 말했다.

"제가 위연을 선봉으로 삼아 남쪽의 작은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주공께서는 황충을 선봉으로 삼아 북쪽 큰길로 나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낙성에 이르면 그때는 전군이 함께 들이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방통은 좁은 길로는 아무래도 군사를 이끌기 힘드리라 여겨 유비에게 큰길로 나아가도록 권했다. 그러나 유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고 좁은 길도 많이 다녀 본 적이 있소이다. 그러니 군사는 큰길로 가서 동문을 공격하도록 하시오. 나는 곧장 남쪽 좁은 길로 가 서문을 치겠소."

그러나 방통은 유비의 말을 듣지 않고 우겼다.

"큰길에는 반드시 적이 방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곳은 주공께서 나아가 적을 치고 길을 뚫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좁은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방통이 이번에는 그럴싸한 구실을 대며 유비에게 큰길로 갈 것을 권했다. 방통이 유비를 걱정하며 편한 길을 권유하는 것을 유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유비는 험하고 좁은 산길로 방통을 보내는 것이 아무래도 미덥지 않아 다시 말했다.

"군사는 내 말을 듣도록 하시오. 어젯밤 꿈이 한 신인이 나타나 쇠몽둥이로 내 오른팔을 쳤소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오른팔이 쑤시는 듯하오. 이번에 가는 길이 아무래도 좋지 않은 둣하오. 차라리 군사께서 부성으로 돌아가 그곳을 지켜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대장부가 싸움에 나가 죽거나 다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찌 그런 꿈 따위로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방통이 서슴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유비가 이번에는 공명의 글을 핑계 대어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바는 공명의 글 때문이오. 그러니 군사는 부성으로 돌아가 그곳을 지켜 주시오."

그러나 유비가 공명의 글을 핑계 댄 것은 잘못이었다. 방통은 유비의 말에 오기가 치솟는 듯 오히려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주공께서는 지나치게 공명의 글에 정신을 빼앗기고 계십니다. 공명은 저 혼자서 큰 공을 세울까 봐 두려워하여 그런 글을 보내 주공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것입니다. 마음에 의혹이 생겨 어지러워지면 꿈속에도 그 일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러니 꿈이 불길하다고 하여 반드시 두려워할 일은 못 됩니다. 저는 주공을 위하여 간과 뇌를 쏟으며 죽는 것이 원래의 바라는 바입니다. 주공께서는 다시 여러 말씀 마시고 나아가도록 하십시오."

방통의 끝내 이렇게 우기니 유비도 더 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방통은 전군에게 영을 내렸다.

"내일 새벽 오경 무렵까지 밥을 먹고 해뜰 무렵에는 진군하도록 채비를 갖추라!"

다음 날 새벽이 되자 선봉이 된 황충과 위연이 먼저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갔다. 유비와 방통은 각기 길을 떠나기 전에 낙성에서 만날 일을 정하려는데 문득 방통이 탄 말이 발을 헛디뎌 쓰러지자 방통이 땅 위로 떨어졌다.

"군사는 어찌하여 이렇게 볼품없는 말을 타고 다니시오?"

"이 말을 타고 다닌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방통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만약 싸움터에 나가서 이런 일이 있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오. 내가 타고 있는 흰 말은 매우 길이 잘 들었으니 군사가 타더라고 결코 실수가 없을 것이오. 이 볼품없는 말은 내가 타겠소."

유비가 자신이 타던 흰 말의 고삐를 끌어다 방통에게 주었다.

"주공의 크신 은혜에 오직 감격할 따름입니다. 내 비록 만 번 죽는다 해도 어찌 주공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방통은 유비의 고마움에 눈시울을 붉히며 허리를 굽혀 사례했다. 이윽고 말을 바꾸어 탄 유비와 방통이 각기 정한 길로 떠났다. 유비는 말을 바꾸어 주자 몹시 감격스런 얼굴로 눈시울을 붉히던 방통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불안하고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하고 서둘러 큰길로 나아갔다.

 

봉추 떨어지는 낙봉파

그 무렵, 낙성에 있던 오의와 유괴는 냉포가 강둑을 무너뜨리려다 적에게 사로잡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놀랐다. 이에 여러 사람을 불러 놓고 대책을 의논했다. 장임이 먼저 나섰다.

"이곳 성 동남쪽 산속에 작은 사잇길이 하나 있는데 매우 중요한 길목이니 내가 군사 한 무리를 이끌어 그곳으로 가서 지키겠소. 그대들은 낙성을 굳게 지켜 주시오. 만약 실수하는 날에는 우리는 물론 성도까지 위험해진다는 걸 잊지마시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형주 군사가 두 갈래로 나뉘어 낙성을 치러 온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장임은 군사 3천을 거느리고 급히 산골짜기의 사잇길로 가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그때 위연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장임은 가만히 영을 내려 위연이 그곳을 지나치게 내버려 두도록 했다. 적의 선봉 부대를 맞아 싸우다가는 뒤따르는 적의 공격을 한꺼번에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군세가 약한 자신의 군사가 그들을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위연의 선봉 부대가 지나갈 동안 매복해 있던 장임은 오래지 않아 방통이 군사를 이끌어 오는 것을 보았다. 군사 중의 하나가 방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군사들 가운데 흰 말을 타고 오는 장수가 바로 유비임이 틀림없습니다."

이전의 싸움터에서 흰 말을 타고 있는 유비를 본 적이 있는 군사가 흰말을 보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장임이 숲속에서 가만히 보니 과연 흰 말을 타고 오는 장수가 있는지라 크게 기뻐하며 군사들에게 은밀히 영을 내려 채비를 갖추게 했다. 장임의 영을 받은 궁노수와 궁수들은 일제히 활에 살을 메긴 채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늦여름이었다. 방통은 이때 좁은 길로 군사를 이끌어 가는데 문득 머리를 들어보니 양쪽 산등성이가 바싹 다가들 듯 가까웠으나 그 아래 좁은 길이 한없이 뻗어 있었다. 좁은 골짜기에는 나무와 풀이 빽빽히 들어서서 서로 얽혀들고 있었는데 잎새들이 하늘을 가릴 둣이 무성했다. 방통은 어쩐지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이 망설여졌다. 무성한 잎새에 가려 산속을 살필 수 없는 것이 아무래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방통은 문득 어떤 예감이 일어 말을 세우고 군사들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군사들 중에 촉에서 투항한 군사 하나가 대답했다.

"이곳은 낙봉파라고 합니다."

그 소리에 방통은 깜짝 놀라며 얼굴색이 달라졌다.

"내 도호가 봉추인데 이곳 이름이 낙봉파라니. . . 곧 봉이 떨어지는 언덕이란 뜻이 아닌가. 필시 나에게는 이롭지 못한 곳이리라!"

방통이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급히 군사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물러나도록 하라!"

방통이 채찍을 들어 흔들며 그렇게 군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군령이 자신의 죽음을 부른 신호가 되고 말았다. 그때 포향이 숲속을 뒤흔들며 울리는 것과 함께 빗발치듯 화살이 방통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몸을 감출 틈도 없이 순식간에 3천 군사의 화살이 벼메뚜기 날아들 듯 백마 위를 덮치니 방통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아깝게도 방통은 백마와 함께 수많은 화살에 맞은 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의 겨우 서른여섯이었다. 그 당시에 동남 지방에는 이런 동요가 아이들 입으로 널리 불려지고 있었다.

(봉추) 한 마리와 용(공명) 한 마리

다투어 촉 땅으로 나아가네.

겨우 반길도 못 가서

절벽 동쪽에서 봉은 죽고

바람은 비를 부르고, 비는 바람을 몰아오네.

한 나라 일어날 때 험한 촉길 열리고

촉 땅 길 여는 일은

다만 홀로 한 마리 용이 할 뿐이네.

장임은 봉추가 백마와 함께 온몸에 화살이 꽂혀 죽자 유비를 죽인 것으로 알고 기뻐했다.

"적군의 총수 유비를 죽였다. 형주의 군사는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사로잡아라!"

장임이 호령하며 3천 군사를 앞뒤로 내몰자 방통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좁은 골짜기에서 앞과 뒤가 막한 채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군사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대장마저 죽고 없으니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마치 가마솥의 고기 꼴이 되어 화살에 맞아 죽은 군사가 태반을 넘었다. 앞서가다 다행히 적의 화살을 피한 군사 몇이 달려가 선봉인 위연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에 위연이 황급히 군사를 되돌려 본진을 구하려 했으나 마음만 급했지 길이 좁아 마음대로 달려들 수조차 없었다. 그러는 사이 위연도 위급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위연이 다시 군사를 물리려 했을 때 산 위의 촉의 매복병으로부터 화살이 우박 쏟아지듯 쏟아져 내렸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화살에 위연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투항한 촉의 군사 하나가 말했다.

"이럴 바에는 낙성 쪽으로 달려 큰길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연은 어느 길이 좋고 나쁜 길임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 군사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우선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화살부터 피하며 급히 내달았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한 길은 아니었다. 한동안 말을 달리다 보니 홀연 앞쪽에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한 떼의 군마가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그들은 촉의 장수 오란과 뇌동이 거느린 군사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뒤쪽에서는 장임이 군사를 거느려 그를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앞과 뒤에서 한꺼번에 적을 맞게 된 위연이 죽기 살기로 싸우며 길을 열려고 했으나 이미 겹겹이 에워싸인 터라 혈로를 뚫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최후까지 싸우다 죽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오란과 뇌동이 거느린 후군 쪽에서 함성이 일며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혼란이 일었다. 오란과 뇌동이 그 모양을 보자 위연을 버리고 급히 후군을 구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위연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의 뒤를 쫓으며 길을 열려고 하는데 문득 한 장수가 적병 가운데를 헤치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더니 소리쳤다.

"문장(위연의 자), 내가 그대를 구하려고 왔노라!"

그 소리에 위연이 놀라 바라보니 그는 바로 황충이었다. 황충이 달려오자 위연은 힘이 솟았다. 그때까지 혈로를 뚫기에 바빴던 위연은 이제는 적을 깨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황충과 힘을 합해 적을 치기 시작했다. 황충이 성난 기세로 오란과 뇌동군을 덮치고 위연마저 함께 힘을 합하자 이제는 싸움의 방향이 뒤바뀌었다. 황충과 위연이 오란과 뇌동군을 앞과 뒤에서 공격하자 그들은 마침내 당해 내지 못한 채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황충과 위연은 도망가는 그들을 뒤쫓아 낙성 아래까지 짓쳐들었다. 그러나 성을 지키고 있던 유괴가 성문을 열고 대군을 이끌고 나왔다. 황충이나 위연은 원래 이끌었던 군사가 적었던데다 위연의 군사는 장임에게 이미 태반 이상이 꺾여 있었다. 유괴의 대군이 쏟아져 나와 덮치니 많은 군사가 꺾인 채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는데 유비가 군사를 이끌어 왔다. 다행히 두 장수는 몸을 빼내 유비가 있는 영채를 향해 말을 달렸다. 그러나 미처 영채에 이르기도 전에 매복해 있던 장임이 군마를 이끌어 나와 길을 막았다. 뒤에서는 유괴와 오란 · 뇌동이 추격해 오고 있었다. 촉의 군사들이 드센 기세로 유비군을 몰아치자 유비는 감히 영채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비는 싸우고 물러나기를 거듭해 가며 부관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렸다.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 말과 사람이 모두 지친 가운데 가까스로 부관 가까이에 이르렀으나 장임이 바로 등 뒤에까지 바싹 뒤쫓아오고 있었다. 이미 지쳐 있는 유비의 군사들인지라 싸울 엄두를 못 내고 달아나기에만 바쁘니 장임이 더욱 급하게 군사를 이끌었다. 유비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부관을 지키고 있던 유봉과 관평이 군사 3만을 이끌고 왼편과 오른편으로 군사를 나누어 구원하러 왔다. 장임의 군사도 뒤쫓느라 어지간히 지쳐 있는 군사들이었다. 거기다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왼쪽과 오른쪽에서 유봉과 관평이 급습해 오자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혼란이 이는 가운데 많은 군사가 꺾였다. 장임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관평과 유봉이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20여 리를 쫓으며 많은 마필을 빼앗은 다음 더는 뒤쫓지 않고 부관으로 돌아왔다. 그때쯤 유비는 한숨을 돌리고 부관으로 들어가자 문득 방통부터 찾았다.

"군사는 어이하여 보이지 않는가?"

그 물음에 황충과 위연도 그제야 고개를 휘둘러보며 군사를 찾았다. 그러나 방통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낙봉파에서 살아남은 군사 하나가 유비에게 놀라운 소식을 아뢰었다.

"군사께서는 적군이 쏘는 무수한 화살에 맞아 말을 타신 채 낙봉파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유비는 낙봉파가 있는 서쪽을 보고 목을 놓아 울었다. 이윽고 유비는 울음을 거두고 제단을 쌓아 방통의 넋을 달랠 제사를 올리게 하니 모든 장수들도 통곡 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공명이 자신의 오른팔이라면 방통은 자신의 왼팔이 아닌가. 유비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오열하였다. 유비와 모든 장수들이 방통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데 황충이 뒷일이 걱정된다는 듯 눈물을 거두고 아뢰었다.

"군사께서 이번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면 장임이 분명 부관을 치러 올 것입니다. 만약 장임이 군사를 이끌고 오면 주공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형주로 사람을 보내 제갈 군사를 이곳으로 청하시어 서천을 깨칠 계책을 세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충의 말에 유비가 고개를 끄더였다. 유비도 방통이 없는 지금 공명을 청할 마음이 간절했으나 형주를 생각하고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군사 하나가 와서 알렸다. 바로 황충이 짐작한 대로였다.

"장임이 군사를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그 말에 황충과 위연이 분연히 일어나며 소리쳤다.

"제가 가서 그 자의 목을 치겠습니다.

"제가 가서 방통 군사의 원한을 풀겠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두 장수의 노기를 달랬다.

"이번 싸움에 져서 우리 군사의 기세가 많이 꺾여 있으니 굳게 이 성을 지키며 공명 군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리라."

유비가 무거운 얼굴로 그렇게 명하니 황충과 위연도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이에 부관을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유비는 공명에게 보내는 글을 써서 관평에게 주면서 일렀다.

"너는 형주로 가서 군사께 이 글을 드리고 군사를 모셔 오도록 하라."

관평은 유비의 명을 받고 즉시 형주를 향해 밤낮없이 달렸다. 공명에게 서신을 보낸 유비는 성문을 닫아걸고 부관을 굳게 지킬 뿐이었다.

그 무렵 공명은 때마침 7월 칠석을 맞았다. 공명은 주군인 유비가 없어도 매년의 예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잔치를 열어 여러 문무관원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밤이 이슥했을 때 큰 별 하나가 이상한 빛을 뿌리며 서쪽 하늘로 떨어지다가 흰 광채를 남기며 흩어졌다. 공명이 그걸 보다 깜짝 놀라 술잔을 떨어뜨리더니 얼굴을 소매에 묻고 통곡했다.

"슬프구나, 봉추여! 실로 가슴 아픈 일이로다."

여러 관원들이 공명의 돌연스러운 통곡에 어안이벙벙해 그 까닭을 물었다. 공명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지난번에 살펴보니 강성이 서쪽에 있어 군사에게 이롭지 못했소. 또한 천구성(재물을 맡은 별, 혹은 그 달의 흉신)이 우리 군을 침범하고 있는데다 태백성(금성)이 낙성 위에 머물고 있어 주공께 글을 보내 모든 일을 삼가며 조심하라고 여쭈었소. 그런데도 서쪽에 있는 별이 떨어지고 말았소. 이는 필시 방사원이 죽었음을 알리는 징조이오."

공명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목을 놓아 울며 소리쳤다.

"우리 주공께서 팔 하나를 잃으셨도다!"

여러 관원들은 공명이 아무리 천문에 능하다 하나 방통이 죽었다고 하니 얼른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한 채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공명이 그런 관원들을 보고 말했다.

"며칠 안에 흉한 소식이 있을 것이오. 그때가 되면 자연 알 수 있으리다. 아아, 슬픈 일이구나. . ."

그렇게 되니 자연 그날 밤의 잔치가 순조롭게 이어질 리 없었다. 모두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침통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관우의 양아들 관평이 서천에서 달려왔다. 공명이 수일 안에 소식이 있을 거라고 말한 그대로였다. 여러 문무관원들은 놀라움과 함께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관평은 공명에게 유비의 글을 바쳤다. 공명이 급히 그 글을 뜯어보았다.

지난 77일 방통 군사께서 낙성을 치러가다 낙봉파에서 적장 장임의 군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세상을 떠났소.

그 글을 본 공명은 다시 한번 목을 놓아 울었다. 여러 관원들도 그제야 공명의 헤아림이 옳았음을 알고 방통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이윽고 공명이 울음을 거두고 여러 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부관에서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가보지 않을 수가 없소."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관우가 물었다.

"군사께서 떠나시면 이곳은 누가 지킨다는 말씀이오? 형주는 중요한 곳이니 가볍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공명이 이미 형주의 방비를 염려하고 있었던 듯 입을 열었다.

"주공께서는 형주를 누구에게 맡기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으나 나는 주공의 뜻을 알 수 있소."

공명은 유비의 글을 여러 관원들에게 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주공께서는 형주에 대한 일은 모두 내게 맡기시고 나의 뜻대로 결정하도록 하신 것이오. 그러나 관평으로 하여금 글을 전하게 하신 뜻은 곧 관운장에게 형주를 지키는 중임을 맡기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오. 운장은 지난날 복사꽃 핀 동산에서 맺었던 형제의 의를 생각하시어 온 힘을 다해 이곳을 지켜 주시오. 이 일은 결코 가벼운 임무가 아니니 운장은 특히 이 점을 가슴에 새기도록 하오."

공명이 정색을 하고 관우에게 간곡히 말하자 관우도 사양하지 않고 공명의 말에 따랐다.

"군사께서 도원에서 맺은 형제의 의맹을 말씀하시는데 어찌 다른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관우가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명은 곧 잔치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형주의 인수를 넘겨 주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이제 형주의 모든 일은 장군의 손에 달렸소."

"대장부가 무거운 책임을 맡은 이상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관우가 결의에 찬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공명은 관우의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관우가 너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를 맡아 보는 무거운 책임을 맡은 사람이 그와 같이 죽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뒷일이 아무래도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명이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관우에게 물었다.

"만약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면 장군은 어찌하시겠소?"

"힘을 다해 막겠소."

"조조와 손권이 한꺼번에 쳐들어올 때는 어찌하겠소?"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양편 적을 동시에 치겠소."

그러자 공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관우에게 말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형주는 위태로워지고 말 것이오. 내가 이제 여덟 자의 글귀를 드릴 테니 장군은 그걸 새겨들으시기 바라오. 그 글귀에 이른 대로 하면 이 형주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오."

"여덟 글자란 무엇입니까?"

공명의 말에 관우가 급히 물었다. 공명은 관우의 물음에 천천히 여덟 자를 시를 읊듯이 말해 주었다.

"북거조조, 동화손권."

즉 북으로는 조조를 막되, 동의 손권과는 화친하라는 뜻이었다. 관우가 그 글귀의 뜻을 속으로 헤아리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군사의 말씀,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공명은 그제야 다소 마음을 놓은 듯 관우를 보좌할 사람들을 뽑았다. 문관으로는 마량, 이적, 향랑, 미축을, 장수로는 미방, 요화, 관평, 주창을 뽑아 관우를 도와 형주를 지키도록 했다. 공명은 곧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서천을 향할 채비를 하는 한편, 장비에겐 날랜 군사 1만을 뽑아 주며 명을 내렸다.

"장군은 먼저 파주를 치고 이어 낙성 서쪽으로 짓쳐들도록 하시오. 먼저 그곳에 이르는 자가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오."

장비에게 그렇게 군령을 내린 공명은 이어 조운에게 군사 한 갈래를 내어 주며 영을 내렸다.

"자룡은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 낙성에 이르도록 하라. 역시 먼저 낙성에 이르면 첫 번째 공으로 삼으리라."

두 장수에게 그렇게 영을 내린 다음 공명은 간옹, 장완과 더불어 군사 15천을 거느리고 서천을 향해 떠났다. 장완은 공명이 형주를 지키고 있을 때 공명 휘하에 든 선비였는데 영릉 상향 사람으로 자를 공염이라 불렀다. 형양 땅에서 학문이 높은 사람으로 이름나 있었는데 이때 서기일을 보고 있었다. 공명은 군사를 거느려 장비, 조운과 함께 떠나기는 했으나 가는 길은 각각 달랐다. 공명은 군사를 이끌어 가는 장비를 불러 당부했다.

"서천은 일찍이 영웅 호걸이 많으니 그들을 결코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될 것이오. 또한 서천으로 가는 도중 전군에게 엄명을 내려 백성들의 물건을 빼앗거나 괴롭히지 않도록 하시오.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달래며 민심을 모으도록 하시오. 익덕에게 내 특히 이르거니와 군사들에게 함부로 매질을 하지 않도록 하고 아껴 주도록 하시오. 부디 하루라도 빨리 낙성에서 함께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도중에 그릇됨이 없도록 해 주시오."

장비의 급한 성미를 잘 아는 공명이 노파심이 일어 간곡히 일렀다. 장비도 공명의 말귀를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를 것을 약조한 후 군사를 거느려 떠났다. 장비는 공명의 말대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보살펴 주고 위로했다. 항복해오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들을 따뜻이 맞아 주며 휘하의 군사들과 다름없이 대우해 주었다. 장비가 한천길로 나아가 파군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풀어 둔 세작이 달려와 알렸다.

"파군태수 엄안은 촉의 이름난 장수로서 나이는 비록 늙었으나 힘은 이전과 다름이 없다 합니다. 강한 활을 잘 쏠 뿐 아니라 큰 칼을 써서 능히 만 명의 적을 당적할 수 있는 용맹은 지녔다고 합니다. 그 엄안이 성을 굳게 지키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기세입니다."

장비는 세작의 말을 듣고 우선 파성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영채부터 세웠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다.

"너는 엄안에게 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하도록 하라. 빨리 나와서 항복하면 성안 백성들을 살려 둘 것이로되, 만약 그렇지 않고 거스른다면 곧 성을 허물고, 늙고 어리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라."

장비의 영을 받은 사람이 그 말을 전하러 파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엄안은 촉의 장수 중에서도 충의가 남다른 장수였다. 일찍이 유장이 법정을 보내 유비를 서천으로 불러들일 때 그 소식을 듣고, '이는 산에 있는 사람이 무섭다고 그 산속에다 호랑이를 끌어들여 자신을 지켜 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구나'하고, 크게 탄식했던 장수였다.

엄안은 그 후 짐작대로 유비가 부관을 빼앗았다는 말을 듣고 울분을 가누지 못해 군사를 이끌고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성을 비운 사이 혹시 형주 군사가 쳐들어오지 않을까 염려되어 성을 지키고 있던 중이었다. 이때 장비가 군사를 이끌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사 6천을 점고하여 싸울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자 장비의 성품을 전해 들은 바 있는 수하 한 사람이 꾀를 내었다.

"장비는 이전에 장판교에서 호통 소리 한 번으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무서운 장수입니다. 조조도 장비가 나서면 몸을 피했다고 하는 터이니 적을 가벼이 여기고 함부로 맞서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차라리 도랑을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 세워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나가지 않으면 한 달을 넘기지 못해 군량미가 바닥이 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장비는 워낙 성격이 불같아서 우리가 나가 싸우지 않으면 반드시 울화가 치솟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래가 군사들에게 매질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으니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군사들에게 닥달을 하며 매질로 울화를 풀게 되면 군사들은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자연히 군사들의 사기가 꺾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려 우리가 군사를 내몰아 간다면 단번에 장비를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엄안이 그 장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했다. 엄안도 장미의 용맹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무턱대고 그들과 부딪쳤다가는 파성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엄안은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는 대신 군사를 성 위로 올려보내 지키도록 했다. 그때 문득 적군 하나가 성문밖에 와서 외쳤다.

"성문을 여시오. 전할 말을 가지고 왔소.

엄안은 성문을 열게 하고 그를 데려오게 한 후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장 장군께서 전할 말이 있어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전할 말은 무엇인가?"

엄안이 이렇게 묻자 그 군사는 장비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엄안은 크게 노해 소리쳤다.

"장비, 그 보잘것없는 놈이 어찌 이리도 무례할 수가 있느냐! 내가 그 도적에게 항복할 사람으로 알았더냐? 너는 가서 내 뜻을 장비에게 전하도록 하라!"

엄안은 그렇게 말한 뒤 그 군사의 코와 귀를 베어 버린 후 장비에게 돌려 보냈다. 그 군사가 장비에게 돌아와 울며 말했다.

"엄안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장 장군께 온갖 욕설을 자 퍼부었습니다."

그 군사도 울분에 쌓여 장비의 화를 잔뜩 돋구기 위해 엄안을 헐뜯었다. 장비는 그 모양을 보자 이를 갈며 고리눈을 부릅뜨더니 그 즉시 말을 타고 군사 수백을 거느려 파성으로 달려가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성 위의 군사들은 장비에게 갖은 욕설만을 퍼부어댈 뿐 성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받힌 장비가 몇 차례나 성 밑 적교로 달려가 도랑을 건너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성 위에서 비 오듯 화살이 쏟아질 뿐이었다. 화살이 쏟아지니 장비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기를 해가 질 때까지 되풀이했으나 적군은 종내 성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장비는 울분을 씹으며 영채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음 날이었다. 이른 아침이 되자 장비는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어 파성으로 달려갔다. 장비가 성 위를 바라보며 싸움을 돋우고 있을 때였다. 엄안이 활에 살을 메게 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보기 좋게 장비의 투구에 꽂혔다. 장비가 이를 부드득 갈더니 성 위의 엄안을 보고 삿대질을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늙은 네놈을 잡아 그 살을 씹고야 말 것이니라!"

그러나 엄안은 그런 장비를 지켜만 볼 뿐 성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장비는 그날도 해가 저물자 잔뜩 화난 얼굴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장비는 전날과 다름없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성벽 둘레를 돌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원래 파성은 산에 세운 성이었으므로 그 주위가 온통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장비는 문득 성안의 허실을 살피고 싶어 스스로 말을 몰아 산 위로 올라갔다. 성보다 더 높은 산 위에 오르니 파성안이 들여다보였다. 성안의 군사들은 싸울 때의 복장을 갖춰 입고 대오를 정연히하여 성안의 요긴한 곳을 엄히 지키고 있었다. 성안의 백성들은 벽돌과 돌을 나르며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성밖에 나오지 않을 뿐 성안에서는 이미 싸울 채비를 다 갖추고 있었다. 장비는 한동안 성안을 굽어보더니 이윽고 산 아래로 내려와 영을 내렸다.

"기병은 말에서 내리고 보군은 땅바닥에 주저앉도록 하라! 그리하여 아무런 방비가 없이 마음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

장비가 욕설만을 퍼부어 적이 나오지 않자 적을 꾀어내기 위해 내린 영이었다. 그러나 그 꾀에도 적이 넘어가지 않았다. 장비의 화만 돋구고 군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엄안이 섣불리 군사를 성 밖에 내보낼 리가 없었다. 장비는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붓다 하릴없이 영채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무리 욕을 해대도 꿈쩍도 않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인가?'

장비가 영채 안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장비는 목소리가 큰 군사 50여 명만을 뽑아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파성으로 가 엄안에게 갖은 욕설을 다 퍼부어라. 만약 엄안이 군사를 성밖에 이끌고 오면 내가 기다렸다가 그들을 치겠다."

적은 군사만을 보내어 엄안을 꾀어내려는 장비의 생각이었다. 군사의 수가 적음을 보고 일시에 몰려나와 치려고 하면 거짓으로 도망치는 동안 장비가 달려나가 이들을 치고 성안으로 밀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장비는 그들을 파성으로 보내고 난 뒤 다른 군사들에게는 싸울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게 했다. 이윽고 파성 아래에 이르른 장비군을 갖은 욕설을 다 퍼부었다. 그러나 성안의 군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비는 엄안이 군사를 이끌고 나오기만 하면 단번에 쓸어 버릴 심산으로 손바닥을 비비며 초조히 기다렸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50여 명의 군사는 그렇게 하기를 사흘째나 계속했으나 파성의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릴 줄 몰랐다. 엄안은 성문 위에서 적의 초조해하는 모양을 보며 크게 웃을 분 장비의 꾀에 말려들지 않았다. 장비는 날이 흘러갈수록 초조한 가운데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궁리를 거듭했다. 그러다 문득 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계교가 떠오르자 장비는 군사들에게 즉시 영을 내렸다.

"전군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서 땔나무나 마초를 뜯어 오도록 하라. 그러나 그 일을 하는 동안 성으로 통하지 않고 성도로 갈 다른 산 길이 있는가를 찾아보도록 하라!"

장비의 영에 따라 군사들은 산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고 풀 뜯는 일만을 계속했다. 군사들이 모두 그 일에 매달리게 한 다음부터 장비는 군사를 파성으로 보내지 않았다. 한편 엄안은 날마다 성 아래로 와 욕설을 퍼붓던 장비의 군사들이 며칠째 얼씬도 하지 않자 문득 의심이 일었다. 그렇다고 장비가 영채를 거두어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장비의 군사가 눈에 띄지 않으니 문슨 엉뚱한 계교라도 꾸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장비군이 며칠 전부터 산속에 군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엄안은 군사 10여 명을 뽑아 장비의 군사로 변장시켜 산에 오르도록 했다.

"너희들은 낫을 가지고 뒷산에 들어가도록 하라. 다음 날 아침에 장비군이 오면 그들 틈에 끼여들어 종일 그들과 함께 일을 하다 그대로 장비군인 것처럼 하고 적의 본진으로 숨어들도록 하라. 그들이 어찌하여 나무와 말먹이 풀을 베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되거든 즉시 성으로 돌아오라."

이에 엄안의 군사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산속에 들어가 다음 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이 되자 장비의 군사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산속으로 들어와 나무를 하고 풀을 벤 후 저녁이 되자 영채로 돌아갔다. 엄안의 군사 10여 명도 그들 무리에 섞여 장비의 영채로 들어갔다. 군사들이 산속에서 영채로 들어가자 장비는 때마침 울분을 달래지 못한 듯 발을 구르며 화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하찮은 늙은 놈 엄안이 나의 속을 태워 죽이려 하는구나!"

장비의 외치는 소리가 장믹 밖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장막 주위에 있던 군사 서너 명이 장비에게 아뢰었다.

"장군께서는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요며칠 동안 산을 둘러보며 작은 샛길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그 길로 가면 싸우지 않고도 무사히 파군을 지나쳐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장비에게는 귀가 번쩍 뜨일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장비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 소리를 듣자 오히려 펄쩍 뛰며 더욱 큰 소리로 그 군사들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네놈들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런 길이 있었다면 왜 진작 내게 그걸 말해 주지 않았느냐?"

그 군사들은 샛길을 발견하고도 호되게 꾸짖음을 당했다. 그러자 장비의 그 기세가 두려웠던지 군사들이 입을 모아 변명했다.

"엊그제야 겨우 찾아냈으나 다시 한번 더 자세히 살펴보느라 그리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장비가 또 큰 소리로 외쳐댔다.

"일이란 꾸물대다가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오늘 밤 이경에 밥을 지어 먹고 삼경에 영채를 거두어 떠나야 할 것이니라! 사경에 군사들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방울을 떼내도록 하여 달빛을 따라 은밀히 그 길을 지나가도록 하라. 내가 앞장서서 길을 열어나갈 것이니 군사들은 모두 내 뒤를 따르도록 하라!"

장비는 그 군령을 전군에게 전하도록 했다. 형주 군사들 틈에 섞여 있던 엄안의 군사 10여 명은 장비가 외치는 소리는 물론 전군에게 내린 영을 들었다. 그들은 이 영을 듣자 뜻밖에도 손쉽게 장비군의 기밀을 알게 되어 공을 세우게 되었다고 여기고 가만히 영채를 빠져나와 파성으로 달려가 엄안에게 알렸다. 엄안은 이 소식을 듣게 되자 크게 기뻐했다.

"내가 이미 그놈이 더 이상 참고 배겨내지 못할 줄 알고 있었다. 그놈이 작은 샛길로 지나가려 하니 양초와 치중(수레에 싣는 짐)은 반드시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내가 그들의 뒤를 덮친다면 그놈이 어디로 달아날 수 있다는 말인가? 실로 힘만 믿고 꾀가 모자란 그놈이 이제 꼼짝없이 내 계책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엄안이 이제 장비를 사로잡은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며 곧 군사들을 모아 영을 내렸다.

"오늘 밤 이경에 밥을 지어 먹고 삼경에는 성을 나가되, 나무와 풀이 무성한 곳에 매복하도록 하라. 그런 후 장비가 샛길을 지나간 뒤 군량과 말먹이 풀과 치중을 실은 수레가 오면 군호로 북을 칠 테니 그때 일제히 달려 나와 그들을 휩쓸어 버리도록 하라!"

엄안의 영에 모든 군사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밥을 지어 먹고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이윽고 삼경이 되자 군사들은 파성을 출발하여 산속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여기저기 나무와 풀이 많은 곳에 매복한 후 북소리가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엄안도 비장 10여 명을 거느리고 숲속에 이르러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럴 동안 이미 삼경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윽고 오래지 않아 조용한 산속에 나뭇잎 헤치는 소리가 들리며 저편에서 창을 비껴든 장비가 군사를 거느리고 좁은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엄안이 바라보니 앞선 장수는 분명 장팔사모를 비껴쥔 장비임에 틀림없었다. 엄안군은 그들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장비가 그들 앞을 지나간 뒤 3, 4 마장쯤 이르렀을 때였다. 뒤이어 수레와 군사가 뒤따라왔다. 엄안은 기다리던 수레와 인마가 가까이 다가오자 영을 내렸다.

"북을 울려라!"

그러자 조용하던 숲속에 북소리가 크게 일고,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수레를 덮치려 했다. 그때였다. 홀연 징 소리가 한번 크게 울리더니 한 ㄸ의 군마가 달려와 오히려 수레를 덮치려던 엄안군을 급습했다. 뿐만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뜻하지 않게도 날벼락 같은 호통이 들려 왔다.

"늙은 도적은 달아나지 마라! 내가 너를 사로잡으려 기다린 지 이미 오래이다."

깜짝 놀란 엄안이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장수가 검은 말을 몰아오는데 표범 같은 머리에 고리눈을 부릅뜨고 범 같은 수염이 뻗친데다 손에는 장팔사모를 들고 있는데 그는 조금 전에 그곳을 지나친 장비였다. 엄안은 이미 샛길을 지나간 장비를 본 터라 불쑥 다시 나타난 장비를 보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징 소리가 그치지 않고 울려 숲속을 뒤흔들고 있는데 숲속에서 쏟아져 나온 장비의 군사들이 엄안의 군사들을 베고 찔렀다. 엄안이 이 뜻밖의 사태에 어안이벙벙해 있는데 장비가 장팔사모창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엄안은 그런 경황 중에도 역시 촉의 맹장답게 장비의 사모를 칼로 막으며 맞섰다. 두 장수가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며 싸우기를 10여 합이 되었을 때였다. 장비가 문득 몸을 비틀거리는 듯하자 엄안이 큰 칼로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몸을 비틀거린 건 장비가 짐짓 엄안의 빈틈을 노리기 위한 거짓 몸짓이었다. 장비가 엄안의 칼을 슬며시 피하자 엄안이 칼을 너무 힘껏 내리치느라 중심이 기운 그 틈을 노려 장비는 엄안의 갑옷 끈을 바싹 끌어당기자마자 그의 몸을 들어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자 장비의 군사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엄안을 덮어 누르고 꽁꽁 묶어 버렸다. 먼저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었던 장비는 실은 장비와 용모가 닮은 사람을 뽑아 거짓으로 꾸민 장비였다. 장비는 산속에서 군사들로 하여금 풀을 베게하여 엄안군을 성 밖으로 끌어낸 뒤 좁은 길로 파군을 지나가려는 것을 알린 것이었다. 또한 장비는 미리 군사를 숨겨 둔 후 엄안이 북소리를 군호로 삼을 것이라 여겨 자신은 징 소리를 군호로 삼았던 것이었다.

"엄안은 이미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항복하는 자는 그 죄를 묻지 않겠다."

엄안을 사로잡은 장비가 산이 떠나갈 듯 소리치자 엄안의 군사들은 더 망설일 틈도 없었다. 모두 창칼을 버리고 장비에게 항복했다. 장비는 여세를 몰아 파군성으로 내달았다. 파성에는 이미 거짓 장비가 거느린 군사가 얼마 남지 않은 엄안군을 쳐서 성을 빼앗은 뒤였다. 이에 장비는 우선 방문을 내걸어 백성들을 해치지 않도록 엄명을 내리는 한편 놀란 백성들을 좋은 말로 달래 위로했다. 성안이 안돈되자 군사들이 결박지은 엄안을 끌어왔다. 장비가 대청 위에 앉아 엄안을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엄안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를 보자 장비는 고리눈을 부릅뜨며 이를 갈더니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미 내가 여기에 이르렀는데 대장이란 자가 그 꼴을 하고도 감히 나를 거스르려 하는가?"

그러나 엄안은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장비를 꾸짖었다.

"너희들이 의를 저버리고 우리 주와 군을 침범하지 않았느냐? 우리 장수들 중에 목이 떨어질지언정 항복하는 장수들은 없을 것이다."

장비는 크게 노해 좌우에게 목을 베라고 외쳤다. 그러나 엄안도 지지 않고 장비에게 호령했다.

"이 역적놈아, 목을 베려거든 즉시 벨 것이지 어찌하여 화만 낸다는 말이냐?"

엄안의 목소리가 조금도 움츠러듦이 없이 굳세고 우렁찬데다 얼굴에 두려워하는 빛이 전혀 없었다. 장비는 그런 엄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문득 얼굴빛이 달라졌다. 장수의 눈은 역시 참다운 장수를 알아본 것일까. 잠시 망설이다 장비는 벌떡 몸을 일으켜 계단 아래로 내려가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잠깐 물러가 있거라!"

엄안의 좌우에 늘어서 있던 군사들을 물러나게 한 장비는 부드러운 미소로 친히 엄안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군사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장비는 새 옷을 가져오게 하여 엄안에게 입힌 뒤 손수 팔을 이끌어 대청 위의 한가운데 높은 자리에 앉히고는 넙죽 절을 했다.

"지금까지 장군을 욕되게 한 말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원래부터 노장군께서 서천의 호걸임을 알고 있었소이다."

엄안은 장비의 진정어린 간곡한 목소리를 듣고 크게 놀랐다. 장비라면 천하가 다 아는 맹장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의 충절을 가상히 여기고 절까지 하니 그의 굳어 있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장비의 은혜와 의로운 마음에 감복한 엄안도 그제야 패장으로서 겸허하게 항복했다. 뒷날 사람들은 그런 엄안을 시를 지어 찬탄했다.

백발이 될 때까지 서촉에 살아

맑은 이름 온 나라에 울려 퍼지네.

충성심은 밝은 달과 같고

큰 기상 장강을 휘감아올린 듯했네.

차라리 목 잘려 죽을지언정

어찌 무릎 꿇고 항복하랴.

파촉의 늙은 장군만한 이

천하에 그 짝 찾을 수 없으리.

또한 엄안을 사로잡아 그의 의기와 충절을 보고 그에게 몸을 굽히며 받아들인 장비의 덕을 뒷날 사람들이 시를 지어 기렸다.

엄안을 사로잡은 그 용맹 절륜했고

오직 그 의기로 군민을 복종시켰네.

지금도 그를 모신 사당이 있어

백성들이 술과 안주 바치네.

장비는 엄안을 후히 대접하고 상빈의 예로 대하여 그의 마음을 위로해 준 후 서천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엄안이 장비의 물음에 무겁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싸움에 진 장수가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개나 말의 수고로나마 그 은혜에 보답할까 하거니와, 화살 한 대 날리지 않고도 성도까지 들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하겠습니까?"

장비가 반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이곳 파성에서 낙성에 이르기까지 도중의 모든 관소는 이 늙은이가 맡고 있소이다. 군사를 이끌고 그 관소를 모두 빼앗으려면 백만 대군을 이끌어도 가벼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바라건대 이 늙은 이를 전부 선봉으로 세워 주십시오. 제가 이르는 곳마다 그들을 불러내어 달랜 후 투항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촉에서 내노라하는 장수가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장비였다. 이에 장비는 춤이라도 출 듯 기뻐하며 엄안에게 감사해 마지않았다. 엄안의 말대로 그에게 전부 선봉을 맡게 하고 자신은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엄안은 선봉이 되어 이르는 관소마다 군사를 불러내어 달래니 과연 그의 말대로 두말 없이 항복해 왔다. 그 중에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엄안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내가 이미 항복을 했는데 그대가 무엇을 더 망설일 것이 있느냐?"

그 말에 더는 주저함이 없이 모두 성문을 열어 엄안을 맞이했다. 그렇게 되니 장비는 가는 도중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모든 관소를 지날 수가 있었다.

 

낙성을 차지한 유비

다른 길로 떠났던 공명은 이미 떠나기 전에 사람을 유비에게 보내 모두 낙성에서 만나기로 했음을 알리게 했다. 유비는 사자가 전해 준 공명의 글을 받아 보고 장수들을 불러 놓고 의논했다.

"공명과 익덕, 조운이 길을 나누어 서천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낙성에 이르면 함께 성도로 향할 예정이다. 공명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물길과 뭍길로 칠월 스무 날에 떠났다고 하니 며칠 사이에 낙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도 지체하지 말고 군사를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황충이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듯 유비에게 아뢰었다.

"매일 군사를 이끌고 와 싸움을 돋우던 장임이 우리가 나가 맞지 않으니 지금쯤은 마음이 느슨해져 맥이 빠져 있을 것입니다. 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준비가 허술한 틈을 타 오늘 밤 군사를 나누어 급습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한낮에 그들을 맞아 싸우는 것보다 더욱 큰 이로움이 있을것으로 여겨집니다만. . ."

유비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황충의 말대로 영을 내렸다.

"황 장군은 군사를 거느려 왼쪽 길로, 위 장군은 오른쪽 길로 나아가라. 나는 군사를 거느려 가운데 길로 달려 적을 찌르리라!"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마침내 성문을 굳게 닫고 있던 부성의 유비 군사는 성문을 박차고 짓쳐나왔다. 그때 장임의 군사들은 유비군과의 오랜 대치에 지쳐 있었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유비군이 응해 주지 않자 모두 맥이 빠져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채 제각각 처소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비가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장임의 본진으로 짓쳐들어 닥치는 대로 불을 놓자 여기저기서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장임의 군사들은 밤중에 당한 기습에 얼이 빠져 싸울 생각도 못한 채 부성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유비는 달아나는 장임의 군사들을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뒤쫓았다. 그러나 장임의 군사 중 먼저 도망간 무리가 낙성에 이르러 장임이 쫓겨오는 걸 알렸다. 이에 낙성을 지키던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와 도망해온 군사들을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유비는 달아나던 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쫓기를 멈추고 도중에 영채를 세웠다. 날이 밝기를 기다린 유비가 군사를 휘몰아 성을 에워싼 후 공격했다. 그러나 장임은 어젯밤에 크게 패한 뒤라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유비가 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은 지 사흘이 지났으나 장임은 성안에서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유비는 공격의 방향을 바꾸어 몸소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서문으로 향하는 한편 황충과 위연은 동문을 치도록 했다. 유비가 남문과 북문을 치지 않고 비워 둔 건 그들에게 그 두 문으로 달아날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였다. 원래 남문은 험한 산이 잇닿아 있었으며, 북문 앞은 부수가 흘러 적군이 달아난다 하더라도 길이 막혀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비가 낙성을 깨치기 위해 거센 공격을 퍼붓고 있을 때 장임도 나름대로 유비를 칠 꾀를 내고 있었다. 장임은 성안에서 유비가 말을 몰아 오락가락하며 공격을 퍼붓고 있는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보고 있었다. 장임은 진시(상오 7~9)에서 미시(하오 1~3)에 이르자 유비와 군사들이 모두 지친 듯 공세가 무디어지기 시작하는 걸 보고 곧 오란과 뇌동을 불렀다.

"이젠 우리가 적을 칠 때가 왔다. 그대들은 군사를 거느려 북문으로 나가 동문을 공격하고 있는 황충과 위연을 쳐라. 나는 군사를 거느려 남문으로 나가 유비를 치겠다. 그럴 동안 성안의 모든 백성들은 성 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도록하여 우리 군사들이 성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허장성세하라."

한편 그때까지 서문을 공격하고 있던 유비는 해가 기우는 것을 보자 그날도 성을 뺏기는 어렵다고 여겼다. 하는 수 없이 영을 내려 후군부터 먼저 물러가도록 했다. 그런데 영을 받은 군사들이 영채 쪽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홀연 성 위에서 북소리와 함께 요란한 함성이 일었다. 유비의 군사들은 돌연스런 그 함성에 모두 성문 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남문 쪽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앞선 장수를 보니 장임인데 말을 달려 곧장 유비 쪽으로만 달려오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공격을 퍼부어 이미 지쳐 있는 유비의 군사들이라 때아닌 기습에 크게 혼란스러워져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다. 황충과 위연이 위급한 유비를 구하려 했으나 그들도 역시 똑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다. 오란과 뇌동이 군사를 이끌어 와 황충과 위연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장임이 곧장 자기 쪽으로 짓쳐들자 이내 이번 싸움이 이롭지 못함을 알고 급히 말머리를 돌려 산속 좁은 길을 향해 달렸다. 그런 유비를 장임이 바짝 뒤쫓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그때 유비는 군사를 거느릴 경황이 없어 홀로 말을 달리는데 장임은 수하 몇 기를 거느리고 뒤쫓고 있었다. 유비 홀로 달아나는 걸 보자 장임은 이제야 유비를 사로잡은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말을 박찼다. 유비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을 향한 채 말에 채찍을 가하는데 문득 앞쪽에 한 떼의 군사가 산길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비가 속으로 탄식해마지않았다.

', 앞에는 복병이요, 등 뒤에는 뒤쫓는 적군이니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유비가 탄식하며 다시 앞쪽에서 마주 오는 군사를 보는데 문득 앞선 장수가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유비가 내친 김에 앞으로 말을 달리며 보니 그는 꿈 속에 그리던 호랑이 수염에 고리눈이요 장팔사모를 치켜든 장비가 아닌가. 실로 위급한 순간에 때맞춰 나타난 장비를 보자 유비는 하늘에 감사했다. 장비는 그때 엄안과 함께 산길로 낙성을 향해 달려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뿌옇게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 분명 형주 군사와 서천 군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 것으로 짐작했다. 이에 장비는 엄안을 뒤따르게 하고 앞장 서 서둘러 말을 달려오다 쫓기고 있는 유비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장비는 유비를 맞은 뒤 인사말을 건넬 사이도 없이 장팔사모를 치켜든 채 장임을 향해 말을 박찼다. 유비를 사로잡을 줄 알고 기뻐했던 장임이었으나 뜻밖에 땅속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듯 호랑이 같은 장비를 맞게 되었으니 한순간에 기쁨이 절망으로 뒤바뀐 셈이었다. 그러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라 이를 악물고 장비와 맞섰다. 장임이 장비와 어우러진 지 10여 합을 버텼을 때였다. 장비의 뒤를 따르던 엄안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마침내 장임이 말을 돌려 달아났다. 장비가 그 뒤를 쫓아 성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장임이 성안에 들어가 적교를 끌어올리고 말았다. 장비는 말을 되돌려 유비에게 돌아왔다.

"군사께서는 강물을 거슬러 오기로 하셨는데 아직 이곳에 오지 못하신 것 같소. 이제 내가 먼저 이곳에 이르렀으니 첫째 공을 내게 빼앗기게 된 것 같소."

장비는 공명보다 자기가 먼저 온 것에 대해 어깨를 들썩이며 자랑했다. 유비는 장비의 자랑에 고개를 끄덕이며 환히 웃더니 물었다.

"산길이 험할 뿐만 아니라 가로막는 적군도 많았을 텐데 어떻게 아우가 이처럼 빨리 올 수 있었단 말이냐?"

장비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지금쯤 장임에게 사로잡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라 유비는 장비가 장하게만 보였다. 유비의 물음에 장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오는 도중에 관소가 마흔다섯 군데나 있었소. 그러나 엄안 장군의 덕으로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무사히 올 수 있었소."

장비는 엄안을 만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그동안의 경위를 유비에게 말하고 난 후 장비는 엄안을 불러 유비를 뵙게 했다. 유비는 엄안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치하했다.

"만약 노장군이 아니었던들 아우가 어찌 이렇게 무사히 당도할 수 있었겠소?"

유비는 그 말과 함께 입고 있던 황금빛 쇄자갑(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엄안에게 입혀주었다. 유비가 이토록 두터이 대해 주자 엄안은 몹시 감격하여 절을 올려 고마움을 표했다. 유비는 좌우에게 분부하여 잔치를 베풀도록 했다. 그러나 술자리가 베풀어지기 전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황충, 위연 두 장군이 오란, 뇌동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오의, 유괴가 군사를 이끌고 나와 두 장군을 쳤습니다. 앞과 뒤로 적을 맞게 된 두 장군께서는 크게 패해 동쪽으로 쫓겨갔다 합니다."

장비가 그 말을 듣자마자 유비를 재촉했다.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달려가 황충과 위연을 구해 내야겠소."

유비도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장비가 좌군을 이끌도록 하고 자신은 우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었다. 이때 오의와 유괴는 황충과 위연을 뒤쫓아가다가 문득 뒤에서 함성이 일어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유비와 장비가 두 갈래로 군사를 이끌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의와 유괴는 더 이상 뒤쫓다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고 황급히 성안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때까지도 오란과 뇌동은 곧장 황충과 위연만을 뒤쫓고 있었다. 그들이 유비와 장비가 이끌고 온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길이 끊긴 뒤였다. 그런데 이들을 더욱 당황하게 한 것은 황충과 위연이었다. 황충과 위연은 유비와 장비가 구원 온 것을 알자 몸에 힘이 솟아 달아나기를 멈추고 말머리를 돌려 뒤쫓던 두 장수에게 덤벼들었다. 그렇게 되니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된 오란과 뇌동이었다. 오란과 뇌동은 사태가 위급함을 알았으나 이미 형주의 범 같은 네 장수를 맞아 싸운다는 것이 무모함을 깨달았다. 거느리던 군사를 이끌고 유비 앞으로 다가와 말에서 내려 항복하고 말았다. 유비는 그들의 항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유비는 두 장수가 거느리던 군사를 거두어들인 뒤 낙성 가까이에다 영채를 세웠다. 이때 장임이 오란, 뇌동 두 장수가 유비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수심에 잠겨 있는데 오의와 유괴가 입을 모아 말했다.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으면 적을 꺾기가 어려울 것이오. 한편으로는 사람을 성도로 보내 주공께 위급함을 알리고 계책을 세워 적을 막아야 할 것이오."

두 장수는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장임도 가만히 앉아서 적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고 여겨 의견을 내었다.

"내가 내일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는 척하다 도망가며 적을 북쪽으로 유인하겠소. 그때 성안에 군사 한 무리를 내보내 그 뒤를 끊어 주시오. 그리하여 유비가 오란과 뇌동을 사로잡을 때처럼 앞뒤로 적을 치면 우리도 적을 쉽게 꺾을 수 있을 거요."

그러자 오의가 나섰다.

"그렇다면 성안의 군사는 내가 이끌겠소. 유 장군께서는 공자 유순을 도와 성을 단단히 지키도록 하시오."

세 사람은 이렇게 의논을 정하고 채비를 차렸다. 다음 날이 되었다. 장임이 군사 수만을 이끌어 성문을 열고 함성을 지르며 싸움을 돋우었다. 성안의 군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비가 말을 몰아 장임을 맞았다. 장임은 10여 합을 싸우다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장비가 기세를 올리며 장임의 뒤를 쫓았다. 그때 홀연 성문이 열리며 오의가 한 떼의 군마를 이끌어 와 장비의 뒤를 끊었다. 그와 함께 장임도 말머리를 돌리더니 장비를 에워쌌다. 어느새 적에게 감금당한 꼴이 된 장비는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겹겹이 적에게 에워싸인 장비를 향해 포위망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데 홀연 부강 강변 쪽에서 한 떼의 군사가 나타났다. 앞장 선 장수는 나는 듯이 말을 달려 오의 쪽으로 다가갔다. 오의가 그 장수를 맞아 싸우자 단 1합도 넘기지 못했다. 한칼에 오의의 칼을 쳐내더니 오의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어 사로잡고 말았다. 그 장수는 다시 말을 몰아 장비를 에워싼 군사들을 치기 시작했다. 대장 오의를 단 1합에 사로잡은 걸 본 오의의 군사들은 그가 달려오자 뿔뿔이 흩어졌다. 장비가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흩어져 달아나는 군사를 휩쓸며 길을 열어 그 장수 쪽으로 말을 달려와 보니 그는 바로 조운이었다. 조운을 보자 반가운 마음과 함께 얼른 공명이 생각났다.

"군사께서는 어디 계신가?"

조운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군사께서도 이곳에 이르셨습니다. 지금쯤은 주공을 뵙고 계실 것입니다.

장비는 조운과 함께 사로잡은 오의를 데리고 영채로 돌아갔다. 장임은 유인책이 뒤틀려 버리자 하는 수 없이 성안으로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니 낙성의 장수는 이제 장임과 유괴만 남은 셈이었다. 그들이 영채에 이르자 공명과 장완, 간옹이 있었다. 장비가 말에서 내려 공명에게 인사를 올리자 공명이 놀란 얼굴로 장비에게 물었다.

"아니, 장 장군. . . 장군이 어떻게 이곳에 먼저 왔소?"

곁에 있던 유비가 그동안의 경위를 공명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유비의 말을 듣고 나더니 공명이 유비에게 경하해 마지않았다.

"장 장군이 이제 능히 계책을 쓸 줄 아니 이 또한 주공의 크신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자 조운이 사로잡은 오의를 유비 앞에 이끌어 와 꿇어앉게 했다. 유비가 오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항복하겠느냐?"

"이왕 사로잡힌 바 되었으니 어찌 항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비가 기뻐하며 웃음 띤 얼굴로 몸소 결박을 풀어 주었다. 공명이 오의에게 성안에 대해 물었다.

"성을 지키는 장수들로는 누구 누구가 있는가?"

오의가 공명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유계옥의 아들 유순을 돕는 유괴와 장임이 있습니다. 유괴는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나 장임은 촉군 태생으로 그 용맹과 지략이 빼어납니다.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장임부터 사로잡은 후에 낙성을 빼앗으리라."

공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말을 하더니 다시 오의에게 물었다.

"내가 보니 성 동쪽에 다리가 하나 있던데 그 다리를 무슨 다리라 하는가?"

"금안교라고 합니다.

공명은 그 말을 듣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말 위에 훌쩍 올라 금안교로 갔다. 금안교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을 두루 살펴본 공명이 돌아오더니 불쑥 황충과 위연에게 영을 내렸다.

"금안교에서 남쪽으로 5, 6리 떨어진 곳에 양쪽 언덕에는 갈대와 억새풀이 우거져 있으므로 능히 군사를 매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위 장군은 창수 1천을 거느리고 가서 왼쪽에 매복했다가 적의 말탄 장수들만 창으로 찌르도록 하라. 황장군은 칼과 도끼를 든 군사 1천을 거느리고 가서 오른편에 매복했다가 적군이 타고 지나는 말 다리만을 쳐서 적을 무찌르도록 하라. 장임은 그 모양을 보고 산 동쪽의 좁은 길로 달아날 터인즉 장비는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곳에 매복해 있다가 사로잡으면 될 것이니라."

공명은 이어 조운에게도 영을 내렸다.

"금안교 북쪽에 매복해 있다가 내가 장임을 유인하여 금안교를 지나가거든, 그 즉시 다리를 끊어 버리도록 하라. 그런 다음 군사를 북쪽으로 이끌어 그곳에서 함성을 울려 장임이 남으로 달아나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세운 계책에 장임이 걸려들게 될 것이다."

이미 장임이 성안에서 나오기도 전이었으나 공명은 여러 장수들에게 그를 잡을 배치부터 끝냈다. 공명이 일러 준 대로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어가자 공명은 말 위에 오르더니 낙성 쪽으로 유유히 말을 몰았다.

한편 성도의 유장은 위급을 알려 온 사자의 급보를 받고 탁응과 장익 두 장수를 보내 낙성의 싸움을 돕게 했다. 이에 힘을 얻은 장임은 유괴와 장익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탁응과 함께 적을 맞기로 했다.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눈 장임은 스스로 전부를 맡고 탁응에게 후군을 맡겨, 서로 접응하기로 하여 성문을 열고 군사를 이끌었다. 그때 공명은 대오도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날래 보이지 않는 군사 한 무리를 이끌고 이미 금안교를 건너오고 있었다. 장임은 성 밖 멀리까지 가기도 전에 먼저 적을 맞게 되자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군사를 이끈 장수가 바로 그 유명한 공명이라고 하니 장임이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공명이 싸움터에 나온 장수답지 않게 그 행차가 한가로웠다. 사륜거를 타고 윤건 차림에 학의 날개로 만든 부채로 부채질을 하며 오는데 그 옆에 1백여 명의 군사가 호위하고 있었다. 공명이 장임을 보자 손가락질하며 꾸짖기부터 했다.

"백만 대군을 거느렸던 조조도 내 이름만을 듣고 달아났다는 걸 너는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 네가 대체 어떤 놈이기에 항복하지 않고 감히 내게 맞서려 하느냐?"

말 위에서 이 모양을 지켜 보던 장임은 공명이 대오도 어지럽힌 채 괜한 허풍이라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일찍이 제갈량의 군사 부림이 귀신 같다고 하더니 이제 보니 공연한 헛소문이 아닌가?'

그가 거느린 군사가 제대로 대오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을 치러 오는 거동이 날랜 군사로 보이지 않았다. 이에 장임은 입가에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날리더니 창을 높이 쳐들어 군호를 내렸다. 그와 함께 장임의 군사가 일제히 공명의 군사를 향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공명이 그 기세에 놀란 듯 황망히 사륜거를 내팽개치고 말 위에 오르더니 말을 달려 금안교를 건너 달아나고 있었다. 한 번 부딪쳐 보지도 않고 달아나는 적을 보고 한번쯤 의심을 할 만했으나 장임은 뒤쫓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단번에 오합지졸 같은 적을 쓸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앞만 보고 내달았다. 장임의 군사들이 금안교를 지났을 때였다. 홀연 함성이 일며 왼쪽에서는 유비가 오른쪽에서는 엄안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 나왔다.

'아뿔사, 적의 계략이었구나!'

장임이 그제서야 깨닫고 급히 군사를 물리려고 하는데 조운이 이미 금안교를 끊은 뒤였다. 장임은 산길이 있는 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말을 달리다 보니 앞쪽에는 조운이 군사를 벌여 세우고 장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임이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남쪽 개울을 끼고 달렸다. 그렇게 5, 6리쯤을 달리다 보니 좌우가 모두 우거진 갈대숲이었다. 장임은 한숨을 돌리며 말을 달리는데 홀연 한 떼의 군사들이 갈대숲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창으로 말탄 군사들을 찔렀다. 위연이 거느린 창수 부대들이었다. 장임이 깜짝 놀라 말을 박차는데 황충이 거느린 도수 부대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칼로 말다리를 보이는 대로 후렸다. 말은 고꾸라지고 말 위에서 떨어진 군사들은 꼼짝없이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마군이 그 모양으로 뭉그러지자 보군은 감히 뒤따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장임은 뒤따르는 군사를 돌볼 처지가 되지 못해 겨우 수십 기만을 거느리고 산길을 향해 내달았다. 그러나 그 산길이야말로 장비가 장임을 사로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장임이 산길로 달려오자 장비가 벼락치듯한 호통 소리를 내질렀다. 장임이 말머리를 돌리려 했으나 장비 군사들이 일시에 장임에게 덤벼드니 장임은 그 많은 군사를 당하지 못하고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장임을 따라왔던 탁응도 장임이 적의 계책에 떨어져 오도가도 못하는 걸 보자 이미 싸움은 판가름난 것으로 알았다. 더 버텨 보았자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뿐이라고 여겨 조운에게 가서 항복했다. 장임을 사로잡은 장비와 탁응의 항복을 받은 조운이 각각 군사를 이끌고 대채로 돌아왔다. 유비는 항복한 탁응을 따뜻이 맞으며 상까지 내렸다. 그때 장비가 장임을 이끌고 왔다. 유비가 장임을 달랬다.

"촉의 모든 장수들이 대체를 헤아려 한결같이 항복해 오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았느냐?"

장임은 눈알을 부라리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촉의 충신이 어찌 다른 주군을 섬기겠느냐!"

유비는 그 인물이 아까워 다시 항복을 권했다.

"그대는 천시를 알지 못하는가? 항복하면 내 그대를 높이 쓰리라."

그러나 장임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지금 항복한다 해도 내가 섬기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나를 죽이도록 하라!"

유비가 차마 장임을 죽이지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공명이 유비에게 말했다.

"그의 뜻이 저토록 굳으니 그 훌륭한 이름이나마 뒷날에 전해 주도록 하십시오."

공명은 그 말과 함께 유비를 대신해 좌우에게 명했다.

"그를 끌어 내 목을 베라!"

공명은 장임이 끝내 자기 편으로 마음을 돌리지 않을 사람임을 알고 그를 목 베게 한 것이었다. 유비는 꿋꿋한 그 절개에 감탄하여 그를 금안교 가에 장사지내 주도록 하고 충혼비를 세워 그 충절을 기리도록 했다. 장임마저 죽고 나자 이제 낙성에 남아 있는 장수는 유괴뿐이었다. 다음 날, 유비는 항복한 촉의 장수들을 앞세워 낙성으로 가서 그들을 달래게 했다.

"성문을 열고 항복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성안 백성들이 고생을 하지 않도록 하라!"

엄안이 성 위를 보며 소리지르자 유괴가 성 위에 나타나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항복한 장수들을 꾸짖었다.

"촉의 은혜를 팔아먹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어찌 나더러 항복을 하라고 하느냐? 내가 너희들부터 죽여 부끄러운 이름을 뒷날까지 전하게 하리라!"

유괴의 꾸짖음이 이어지자 엄안은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던지 화살을 뽑아 유괴를 쏘려고 했다. 그러자 성 위의 한 장수가 칼을 뽑더니 한칼에 유괴를 쳐 죽였다. 이어 성문이 활짝 열리더니 그 장수가 달려 나와 항복했다. 성문이 열리자 유비의 군사는 일제히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렇게 되니 유장의 아들 유순은 급히 서쪽 성문으로 빠져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성안에 든 유비는 방을 내걸어 백성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도록 하는 한편 유괴를 죽인 장수를 찾았다.

"유괴를 죽인 장수는 누구인가?"

유비가 물으니 군사 하나가 대답했다.

"무양 사람으로 이름은 장익, 자를 백공이라 부릅니다. 지난번 탁응과 함께 낙성을 도우러 성도에서 보낸 장수입니다."

유비는 즉시 그를 불러 후한 상을 내리는 한편, 이번 싸움에 공이 많은 다른 장수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낙성을 떨어뜨리고 시가가 다시 평온을 되찾자 공명이 뒷일을 유비에게 의논했다.

"이제는 성도를 깨뜨리는 일만 남아 있으나 너무 급히 서둘러 공든 탑을 무너뜨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

유비가 공명에게 물었다.

"낙성이 떨어졌으나 걱정스러운 것은 다른 주군입니다. 그 주군들이 힘을 합해 우리와 맞선다면 우리가 그들을 대적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사람을 보내 미리 어루만져 주고 서서히 성도로 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군사의 말씀이 과연 묘책이오."

유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에 공명은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천의 여러 고을로 진병케 했다. 장익과 오의는 조운과 더불어 외수, 정강, 건위 부근의 고을을 달래도록 하고 엄안, 탁응은 장비와 더불어 파서, 덕양을 비롯한 주변 고을로 가도록 했다. 그곳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관원들을 격려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한편, 민심을 얻은 후 성도로 들도록 했다. 장비와 조운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자 공명은 나머지 항장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낙성에서 성도까지에는 어떤 관소들이 있는가?"

항복한 장수 한 사람이 공명의 물음에 대답했다.

"면죽 땅에만 많은 군사가 지킬 뿐입니다. 그러니 면죽을 취하면 어렵지 않게 성도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른 곳은 행인을 검문하는 관문 정도라 별것이 못됩니다."

공명이 그 말에 따라 군사 낼 일을 궁리하고 있는데 법정이 유비에게 권했다.

"이미 낙성이 떨어졌으니 촉은 이제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불안케 하고 화를 입히는 것은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공께서는 원래 인의로써 백성들을 따르게 하시니 아직은 군사를 내지 마십시오. 그럴 동안 제가 유장에게 글을 써 사람을 보내 이해를 따져 설복시켜 보겠습니다. 유장도 민심이 주공께 돌아서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절로 와서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효직의 말씀이 과연 내가 바라던 바요."

유비가 크게 기뻐하며 법정의 의견에 따랐다. 공명은 그 말에 따라 곧 법정에게 글을 쓰게하여 사람을 뽑아 성도로 보내 유장에게 그 글을 전하게 했다. 그 무렵 낙성에서 쫓겨온 유순은 그의 아비 유장에게 낙성이 유비에게 떨어졌음을 알렸다. 유장이 크게 놀라 급히 관원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종사 장건이 계책을 냈다.

"지금 유비가 비록 낙성을 빼앗았다고 하나 군사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아직 촉의 선비와 백성들이 그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군량도 촉에서 나는 곡식에 의지할 뿐이며 군중에는 치중도 보잘것없습니다. 이때 파서와 재동 백성들을 모두 부수 서쪽으로 옮기고 그 창고와 들의 곡식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도록 하십시오. 유비가 군량을 조달할 수 없도록 한 다음 성 주위의 웅덩이를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 쌓아 방비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군량이 바닥이 나고 물자가 없어 백 일을 넘기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군사를 휘몰아 그들을 친다면 유비는 힘들이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건이 열띤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나 유장은 그 말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 않소. 내 일찍이 적을 막아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백성들을 쫓아 내어 적을 막는다는 말은 들은 바 없소. 공의 말을 따를 만한 계책이 아닌 듯하오."

유장이 한마디로 그 계책을 물리치니 장건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사람이 와서 유장에게 알렸다.

"법정이 글을 보내 왔습니다."

유장이 곧 사자를 불러 오게하여 그 글을 뜯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날 주공의 명을 받들어 형주와 우호를 맺었는데도, 뜻밖에도 주공은 아랫사람들의 말만 들으시어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유황숙께서는 지난날의 정과 친족간의 우의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만약 주공께서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시어 형주로 귀순하신다면 제가 보건대 결코 박대하지 않을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거듭 깊이 헤아리시어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그 글을 본 유장은 크게 노해 글을 북북 찢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법정은 주인을 팔아서 제 한 몸의 영화를 사려는 배은망덕한 놈이다. 역적이 무슨 염치로 나에게 이와 같은 글을 보냈다는 말인가!"

유장은 글을 가져왔던 사자를 호령하여 성 밖으로 쫓아낸 뒤 처남인 비관에게 군사를 주어 면죽을 지키게 했다. 이에 비관은 남양 태생이며 이름은 이엄, 자를 정방이라고 하는 한 인물을 천거하며 그와 함께 가기를 청했다. 유장이 비관의 청을 마다할 리 없었다. 비관은 이엄과 함께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면죽으로 떠났다. 이 무렵 익주 땅은 동화라는 사람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남군 지강 태생으로 자를 유재라 불렀는데 유장에게 한 통의 글을 올렸다. 그 글의 내용은 전날의 원수였던 한중 장로와 화친을 맺은 후 구원병을 청하라는 것이었다. 유장은 그 글을 보자 동화를 불러들였다.

"장로와 나와는 대를 이어오며 원수가 된 사이다. 그가 어찌 우리를 구해 주겠느냐?"

유장이 동화에게 묻자 동화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가 비록 우리와는 원수지간이나 유비가 낙성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도 위급한 형세에 처해 있습니다. 이는 곧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격입니다. 우리가 망하면 이웃나라도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들어 이해를 따져 타이르면 우리의 청을 가볍게 물리치지 못할 것입니다."

유장은 지금으로서는 달리 다른 방책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마침내 동화의 말을 받아들여 곧 글을 써서 사자를 한중으로 보냈다.

한편 이전에 조조에게 쫓겨 오랑캐인 강(티벳)족 땅으로 달아났던 마초는 2년여를 지나는 동안 마침내 강병들과 손을 잡았다. 때는 건안 18년 가을인 8월이었다. 마초는 강병들을 조련하여 농서지방의 여러 고을들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그 일대의 주군이 모두 그에게 평정되기에 이르렀는데 다만 기주만은 마초의 거센 공격을 받았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 기주성을 지키고 있던 조조 휘하의 장수이며 태수인 위강은 마초의 공격을 받자 하후연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하후연도 조조의 허락 없이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후연으로부터 구원군이 끝내 오지 않자 위강은 마초의 공격에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할 것 같아 수하들을 불러 놓고 의논했다.

"아무래도 이 적은 병력으로는 마초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소.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참군 양부가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다.

"마초가 임금을 거스른 역적인데, 어찌 그런 자에게 항복을 할 수 있다는 말이오?"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양부가 거듭 항복을 말렸으나 위강은 듣지 않고 기어코 성문을 열어 마초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초는 위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성안으로 들었다. 그런데 위강은 항복을 하면 마초가 자기를 두텁게 대해 줄 줄 알았으나 마초의 생각은 달랐다.

"싸움에 지게 되니까 항복하는 약삭빠른 자는 의에도 벗어난 자이다. 설사 항복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딴마음을 품을 자이다."

마초는 위강을 크게 꾸짖고는 위강을 비롯한 문무관원 40여 명을 목 베고 말았다. 그때 양부는 다행히도 문무관원들 틈에 끼여 있지 않았다. 이를 알고 한 사람이 마초에게 고해바쳤다.

"양부는 항복하지 못하도록 말린 자입니다. 어찌 그 자를 목베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의리를 지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죽일 수 없다."

마초는 그를 죽이지 않음은 물론, 다시 양부를 참군으로 썼다. 이에 양부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 마초의 분부에 따랐는데 얼마 있지 않아 양관과 조구를 천거했다. 마초는 양부의 천거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들을 모두 군관으로 삼았다. 어느 날 양부가 다시 마초에게 청했다.

"제 처가 고향인 임조에서 죽었습니다만 이번 난리통에 가 보지 못했습니다. 두 달간만 말미를 주시면 장사를 지내 주고 오겠습니다."

마초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선선히 응낙했다. 그러나 양부가 한 말은 거짓이었다. 두 달간의 말미를 얻은 것은 역성에 있는 고모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양부는 그 길로 기주성에서 몸을 빼내어 역성에 이르자마자 고종 형제인 무이장군 강서가 있는 고모집을 찾아갔다. 강서의 어머니이자 양부의 고모는 그때 나이 여든두 살이었다. 이 고모는 이웃 나라에서까지도 '정절을 지키는 현숙한 부인'으로 칭송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양부는 고모를 뵙고 절을 올린 후 눈물지으며 말했다.

"제가 성을 지켜내지 못해 주인이 죽었으나 저는 아직 죽지 않고 있으니 부끄러워 고모님을 뵈올 낯조차 없습니다. 마초가 임금을 거스르고 함부로 군수를 죽였기 때문에 기성 사람치고 그에게 한을 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형님은 역성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역적을 치실 생각은 않으니 이 어찌 신하된 도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양부가 그 말과 함께 더욱 섧게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은 한이 맺힌 피눈물이었다. 강서의 어머니는 그런 양부를 보자 아들을 불렀다.

"위사군이 마초 그 역적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너의 죄라 할 수 있다."

강서의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을 꾸짖은 후 양부도 준열히 나무랐다.

"너는 마초에게 항복하여 지금까지 그의 녹을 먹어 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에야 마초를 치려 하느냐?"

양부가 그 까닭을 말했다.

"제가 항복하여 역적을 섬기고 있는 것은 수치를 무릅쓰고라도 살아서 유사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강서가 입을 열었다.

"마초는 워낙에 용맹한 자이네. 경솔히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이네."

"그렇지 않습니다. 마초가 용맹은 있어도 지모가 얕으니 우리가 쉽게 이길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양관, 조구와 함께 은밀히 약조를 해 주었으니, 만일 형님께서 군사만 일으키신다면 반드시 그 두 사람이 안에서 내응할 것입니다."

양부가 강서를 부추기며 말했다. 강서의 어머니가 그 말을 듣더니 아들을 꾸짖었다.

"네가 일을 서두르지 않고 언제까지나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거냐?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다. 충의를 위해 죽는다면 그 죽음은 때를 얻은 것이다. 너는 내 걱정일랑은 하지 말라. 네가 만약 나를 염려하여 양부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내가 먼저 죽어 네 근심을 덜어 주마."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강서가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강서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통병교위 윤봉과 조앙을 불러 함께 군사 일으킬 일을 의논했다. 그런데 이때 조앙의 아들 조월은 기성이 함락된 이후 마초 수하에서 비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날 조앙은 집으로 돌아가자 아내 왕씨에게 탄식했다.

"내가 오늘 강서, 양부, 윤봉과 더불어 죽은 태수 위강의 원수를 갚기로 하였소. 그러나 아들 조월이 지금 마초를 섬기고 있으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면 마초는 나의 아들부터 죽일 것이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조앙의 아내는 그 말을 듣자 눈물을 글썽거렸으나 이내 눈물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임금과 부모가 당한 굴욕을 씻기 위해서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거늘 하물며 자식 하나 잃는 것이 문제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아들 잃는 것이 두려워 이 일에서 빠지신다면 제가 먼저 죽어 욕됨을 씻겠습니다."

"알았소. 이젠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조앙은 아내의 말을 듣고 마음을 정한 후 그렇게 말했다.

다음 날, 그들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윤봉과 조앙은 기산에 진을 치고 양부는 역성에 머물렀다. 그러자 조앙의 아내 왕씨는 모든 패물과 비단을 들고 가 남편이 있는 기산으로 가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격려하며 사기를 복돋워 주었다. 한편 기성에 있던 마초는 네 사람이 모여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노했다.

"조앙의 아들 조월의 목을 베라!"

마초는 즉시 조월을 쳐죽이게 한 후 몸소 군사를 일으켜 방덕, 마대와 더불어 역성으로 향했다. 이때 역성에 있던 강서와 양부도 마초가 친히 군사를 이끌어 오자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둥그렇게 진을 세웠다. 양쪽 군사가 둥글게 진을 치고 맞서자 양부와 강서가 모두 흰 갑옷을 입고 나와 마초를 향해 큰 소리로 꾸짖었다.

"임금을 거스른 의리없는 역적놈아! 너의 목을 잘라 죽은 주군의 한을 씻으리라!"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노한 마초가 대꾸 한 번 없이 곧바로 군사를 휘몰아갔다. 양군 사이에는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일찍이 조조도 대군을 이끌었으나 낭패를 당했던 마초의 용맹이었다. 게다가 날래고 굳센 강족의 군사들을 강서와 양봉이 어찌 당할 수 있으랴. 강서와 양봉의 군사는 크게 패해 달아나니 마초가 거친 기세로 추격했다. 이때 홀연 등 뒤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며 윤봉과 조앙이 군사를 이끌어 왔다. 마초가 말머리를 돌려 그들을 치려는데 달아나던 양부와 강서도 말머리를 돌려 마초에게 덤벼들었다. 앞과 뒤에서 협공을 받게 되자 마초는 군사를 돌볼 겨를도 없이 한동안 어지러운 싸움을 벌였다. 그렇게 되니 마초군의 형세도 싸움에 이롭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또 한 떼의 군사가 나타났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 군사는 곧장 마초가 싸우는 한가운데를 찌르고 들어왔다. 선두의 장수는 바로 하후연이었다. 하후연이 마침내 조조의 허락을 받고 군사를 이끌어 온 것이었다. 하후연의 군사들은 조조의 정예군일 뿐만 아니라 무기나 장비가 제대로 갖추어진 군사들이었다. 마초가 아무리 용맹스럽다고는 하지만 세 갈래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니 견디지 못했다. 형세가 더욱 위급해지자 감히 더 싸울 수가 없어 마침내 크게 패한 채 달아났다. 마초는 그 길로 밤을 새워 말을 달려 다음 날 날이 밝을 무렵에야 기성에 이르렀다.

"성문을 열어라!"

마초가 성 아래에서 소리쳤다. 그런데 성안에서 난데없이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이놈들아 똑똑히 보아라! 주인도 못 알아보느냐!"

군사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활을 쏜 것인 줄 알고 마초가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자 성 위에서 양관과 조구가 마초를 내려다보며 꾸짖었다.

"네 이놈! 임금을 거역한 역적놈아, 내가 너에게 천벌을 내리리라!"

그 말과 함께 마초의 아내 양씨를 끌어 내 한칼에 목을 베 성 아래로 던졌다. 또 마초의 어린 아들들을 끌어내더니 목을 베고, 일가친척 10여 명도 모두 끌어와 목을 베어 성 아래로 내던졌다.

"으음. . ."

마초는 그 광경을 보며 분노와 슬픔에 가슴이 터질 듯해 신음 소리와 함께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때 뒤를 따르던 하후연이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마초는 하후연의 군사가 많은 걸 보자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덕, 마대와 함께 한 가닥 길을 열어 달아났다. 달아나는 도중 강서, 양부와 맞닥뜨려 한바탕 죽기 살기로 싸워 길을 열어 달아날 뿐이었다. 강서, 양부를 겨우 뿌리치고 달아나는데 이번에는 또 윤봉과 조앙이 앞을 막았다. 다시 남은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싸워 길을 열었으나 그의 군사는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겨우 50여 기만 뒤따르고 있었다. 마초는 밤을 새워 말을 달려 사경쯤에 역성에 이르렀다.

"여기가 어디인가?"

"역성입니다.

마초가 물으니 방덕이 대답했다. 마초는 성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강서와 양부가 군사를 이끌어 나가 자기와 싸운 이후 아직 성안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마초는 이 성을 빼앗기로 하고 성문 앞으로 가 소리쳤다.

"성문을 열라! 강 장군께서 돌아오셨다."

성안의 군사들은 아직 어두운 밤이라 마초의 군사들을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서슴없이 강 장군이 돌아왔다는 외침에 의심하지 않고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가만히 성문 안에 들어선 마초는 그때부터 돌연 무자비한 살인귀로 변했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성 위에서 목이 떨어지던 아내와 아들들의 모습이 떠나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물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버렸다. 성안을 온통 피바다로 만들며 한바탕 휩쓴 마초는 곧장 강서의 집으로 갔다. 마초는 강서의 늙은 어머니부터 끌어 냈다. 강서의 어머니는 살기 등등한 마초를 보고도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마초는 스스로 칼을 빼어 강서의 어머니를 베어 죽이고 이어 윤봉과 조앙의 가족을 끌어내어 늙은이 어린애 할 것 없이 모조리 목을 베어 분풀이를 했다. 그러나 조앙의 아내 왕씨는 남편이 있는 기산의 군중에 가 있었으므로 죽음을 면했다.

다음 날이었다. 마초를 뒤쫓던 하후연이 역성에 들이닥쳤다. 하후연의 대군이 밀려오자 불과 50여 기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던 마초는 역성을 빼앗은 것도 하루밤의 꿈에 불과했다. 하후연의 대군과 맞설 수 없음을 알고 마초는 성을 버리고 서쪽을 향해 달아났다. 마초가 말을 달려 20여 리를 갔을 때였다. 문득 앞쪽에서 한 떼의 군사가 길을 막는데 앞선 장수를 보니 바로 양부였다. 양부를 보자 마초는 눈에 불이 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성도 빼앗기고 아내와 자식마저 잃게 된 것이 모두 자신을 배신한 양부 탓이라 여기자 마초는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을 박찼다. 양부에게 달려간 마초는 창을 번쩍 들어 그를 내려찍으려 하는데 양부의 동생 일곱이 일시에 내달아와 마초의 창을 막으며 덤벼들었다.

이때 마대와 방덕은 양부의 군사들을 맞아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럴 동안 악에 바친 마초가 양부의 일곱 동생을 차례로 목베고 말았다. 양부도 마초의 창에 다섯 군데나 찔렸지만 이를 악물고 그와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양부가 마초를 당해 낼 리가 없었다. 마초의 공격에 밀려 마침내 그의 한 창에 찔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홀연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하후연이 마초의 등 뒤를 급습해 왔다. 마초는 다시 분통을 삼키며 황망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그렇게 되니 그나마도 거느렸던 50여 기의 군사 중 하후연과 양부의 군사들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고 방덕, 마대와 예닐곱 기만이 그를 따를 뿐이었다.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며 가까스로 강족과 손을 잡고 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주어진 천운 탓인가, 다시 패전한 마초의 행렬은 그저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다시 불타는 서량

마초가 몇 기만을 이끌고 어디론가 달아나자 하후연은 뒤쫓기를 그만두고 농서 지방 고을을 순시하며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하후연은 강서와 양관, 조앙에게 각 지역을 나누어 주며 그곳을 맡아 지키게 했다. 농서 일을 매듭지은 하후연은 마초를 몰아내는데 으뜸가는 공을 세우고 크게 다친 양부를 수레에 태워 허도로 향했다. 양부가 조조를 뵙자 조조는 그의 공을 치하하며 관내후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양부는 그 벼슬을 굳이 사양했다.

"저는 난리를 막은 공도 세우지 못했으며 절개를 지켜 죽지도 못했습니다. 법에 의해 마땅히 죽었어야 할 몸인데 무슨 얼굴로 벼슬까지 받겠습니까?"

그러나 조조는 그런 양부를 더욱 가상히 여겼다.

"공의 충절을 높이지 않는다면 이 조조를 천하가 어리석다고 비웃을 것이오. 공에게 벼슬을 내림은 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충의를 북돋우는 격려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오."

조조가 그렇게 말하며 벼슬을 내리자 양부도 더는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마초는 방덕, 마대와 더불어 멀리 한중에 이르러 이 나라의 오두미교의 종문 대장군 장로에게 의지하러 갔다. 마초가 몸을 의탁하러 오자 장로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맞아들였다. 마초의 용맹을 잘 알고 있는 장로는 그를 받아들인다면 서쪽의 익주를 빼앗고 동쪽의 근심거리였던 조조도 능히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장로에게는 묘령의 딸이 있었다. 마초의 용맹을 탐낸 장로가 자기 딸을 마초에게 시집 보내 이번 기회에 아예 자기 일족으로 만들고 싶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논했다.

"마초가 효용이 절륜한 사람임은 그대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오. 그래, 이번 일을 계기로 내 딸을 마초와 짝지어 사위로 삼으려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러자 대장 양백이 고개를 저으며 간했다.

"마초의 아내와 자식들이 참혹한 죽임을 당한 것은 그가 원래 성품이 악해 남을 많이 해쳤기 때문입니다.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사람을 사위로 삼으려 하십니까?"

양백의 말을 들으니 장로도 마음이 달라졌다. 앞 뒤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그의 용맹을 탐냈던 자신을 뉘우쳤다. 그렇게 되니 혼담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일을 마초에게 일러바쳤다. 마초가 그 말을 듣자 성이 나서 펄펄 뛰었다. 장로의 사위가 된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야심을 이룰 수도 있었는데, 양백이 그걸 가로막은 것을 알자 그를 죽여 없애야겠다고 작정했다. 양백도 마초의 이런 속마음을 눈치챘다. 그를 대하는 마초의 눈길이나 행동거지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 형 양송과 의논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자가 지금은 몸을 굽혀 주인을 따르고 있으나 언젠가는 딴마음을 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함께 힘을 합해 먼저 그를 없애 버려야 되리라."

양백과 양송은 이렇게 뜻을 모으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유비를 막기 위해 유장이 사람을 보내 장로에게 구원을 청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유장과는 원수지간으로 지내던 장로라 한마디로 호통을 치며 거절하니 사자는 도망치듯 물러가고 말았다. 그러나 위급한 지경으로 내몰린 유장이었다. 이번에는 황권을 사자로 보내 다시 장로와의 화친을 빌게 했다. 한중으로 온 황권은 장로와 유장이 원수지간으로 지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무턱대고 장로를 찾아갔다가는 지난번 사자처럼 내쫓기기 십상이라 여기고 장로를 만나기 전에 양송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 서천과 동천(한중)은 한마디로 이와 입술과 같은 사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서천이 망하면 동천도 무사히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이번에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서천 스무 고을을 떼어 그 은혜에 보답할까 합니다."

황권은 장로가 오래전부터 서천을 탐내 왔던 점을 이용해 미끼를 던졌다. 양송은 황권의 말을 듣자 기뻐하며 황권을 장로에게로 데려갔다. 장로는 무엇보다 서천 스무 고을을 준다는 말에 원수지간임도 잊은 듯 생각이 달라졌다. 장로로서도 언젠가는 자신이 뺏어야 할 땅인데 유비가 먼저 서천을 뺏으려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기도 했다. 먼저 서천 스무 고을을 거두어들인 후 다시 기회를 엿보기로 작정한 장로가 황권의 말을 좇으려 했다. 그러나 이때 파서 사람 염포가 나서며 간했다.

"유장은 주공과는 대대로 원수지간인데 지금 형세가 위급해지니 거짓으로 구원을 청하기 위해 땅을 떼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속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염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계하에서 우렁찬 소리를 외치며 나선 사람이 있었다.

"제게 한 떼의 군사를 주신다면 가서 유비를 사로잡고 또한 땅도 얻어 오겠습니다."

모두 그 소리에 놀라 바라보니 그는 바로 마초였다.

"주공의 분에 넘치는 은혜에 보답코자 제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가맹관을 빼앗고 유비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그리고 유장에게서 스무 주를 주공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장로는 몹시 기뻐했다. 마초라면 능히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장로는 마초의 말에 쾌히 허락하고 황권을 먼저 샛길로 돌아서 가게 한 다음 마초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유장을 구원하게 했다. 방덕은 이때 병석에 누워 있었으므로 장로는 대신 양백을 감군(군사를 감독하는 관리)으로 삼아 함께 떠나게 했다. 장로는 마초와 양백이 서로 죽이려고 벼르고 있음을 알 리 없는지라 믿고 있는 양백에게 감군을 맡게 했던 것이었다. 마초는 아우 마대와 의논한 후 날을 정해 서천으로 떠났다. 그때 유비는 낙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법정이 유장에게 전한 글을 주어 보냈던 사자가 성도에서 돌아와 유비에게 고했다.

"제가 글을 전하자 유장이 그 글을 읽어 보더니 그 자리에서 찢어 버렸습니다. 저도 쫓겨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도란 자가 계책을 올렸는데 들에 있는 곡식과 창고를 모조리 불태우고 파서 백성들을 부수 서쪽으로 피신을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성 주위의 해자를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 쌓아 성을 지키기만 하라고 권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유비와 공명은 크게 놀랐다. 유장이 그 계교를 받아들이면 유비군으로선 성도를 깨치기는커녕 도리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일이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가 낭패를 면할 길이 없지 않은가."

"그거 큰일이구나!"

유비와 공명이 근심스런 얼굴로 걱정하고 있는데 법정이 문득 껄걸 웃으며 안심시켰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실 일이 못 됩니다. 그 계책이 비록 그럴듯하나 지나치게 마음이 약한 유장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법정의 헤아림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다음 날이 되자 정도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며칠이 지나도 파서 백성들이 부수 서쪽으로 움직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비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있는데 공명이 이런 기회를 틈타 유비에게 진병을 서둘게 했다.

"급히 군사를 내어 면죽 땅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그곳만 얻게 되면 성도를 깨뜨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로 가는데 가장 방비가 엄한 면죽부터 떨어뜨려 놓고 보자는 공명의 말에 유비는 두말 없이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곧 황충과 위연에게 군사를 주어 면죽관으로 나아가게 했다. 유비군이 면죽관으로 밀고 들어오자 유장의 장수 비관은 이엄에게 군사 3천을 주어 나가 맞게 했다. 이에 이엄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황충과 위연을 마주한 채 진을 쳤다. 양군이 각기 진을 치자 먼저 황충이 말을 달려나갔다. 그러자 이엄도 말을 마주 달려나왔다. 두 장수가 어우러져 싸우기를 4, 50여 합이 되었으나 좀처럼 이기고 지는 쪽이 없었다. 진중에서 이 싸움을 지켜 보고 있던 공명이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게 했다.

"조금만 더 싸움을 계속했으면 그놈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사께서는 왜 군사를 거두셨습니까?"

황충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이엄의 무예를 보니 힘만으로는 사로잡기 어려울 것 같소. 내일 다시 싸울 때 장군은 짐짓 패하는 척하고 달아나 그를 산골짜기로 꾀어들이도록 하시오. 그때 이엄이 생각지 못한 군사로 그를 급습케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소."

공명이 황충에게 가만히 말했다. 늙은 장수 황충이 공명의 말에 슬며시 오기가 치밀었으나 군사의 말이니 거스를 수도 없었다. 다음 날이 되자 이엄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다. 황충이 그를 맞아 호기롭게 싸운 지 10여 합이 되자 공명이 이른대로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전날에 이어 또 황충이 말머리를 돌리자 이엄은 그가 늙은 장수라 힘이 모자라 도망가는 것으로만 알았다. 말에 힘껏 채찍질하며 단번에 그를 사로잡겠다는 듯이 뒤쫓았다. 뒤쫓다 보니 어느새 깊은 골짜기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때서야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군사들에게 명했다.

"더 이상 뒤쫓지 말고 물러서라!"

이엄이 말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가려는데 앞쪽에는 이미 위연이 군사를 늘어세운 채 길을 막고 있었다. 그때 산 위에서 공명이 소리쳤다.

"공은 항복하도록 하시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양쪽에 숨겨 둔 강한 쇠뇌로 방사원(방통)의 원수를 갚을 것이오."

이엄은 이미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적의 계책에 걸려들었음을 알았다. 이에 이엄은 말에서 내려 갑옷을 벗고 항복하고 말았다. 공명은 이엄과 그를 따라 항복한 군사들을 데리고 유비에게 갔다. 유비는 항복한 적의 장수 이엄의 결박을 풀어 주며 정중하게 그를 맞았다. 이엄은 유비가 그토록 두텁게 자기를 대해 주자 감격하여 마음으로 항복하고 유비에게 의견을 내었다.

"비관이 비록 유익주(유장)의 처남되는 사람이기는 하나 저와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입니다. 제가 가서 그에게 항복을 권해 볼까 합니다."

유비가 이엄의 말에 주저없이 선뜻 허락했다. 이엄은 그 길로 면죽관으로 달려가 비관을 만났다.

"유비는 어질고 덕이 높은 사람이오. 만약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가는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오."

이엄이 간곡히 권하자 비관도 마음이 움직였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비관은 성문을 열고 이엄을 따라나와 유비에게 항복했다. 한 번 싸우지도 않고 면죽관을 얻은 유비는 성에 들자 다시 성도를 칠 의논을 했다. 그때 홀연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중의 장로가 마초, 양백, 마대를 보내 가맹관을 치게 했습니다. 지금 맹달과 곽준이 지키고 있으나 형세가 매우 위급합니다. 만약 구원이 늦어지면 가맹관은 그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아마 성도의 유장이 나라를 쪼개 장로에게 주기로 하고 구원을 청한 모양이오."

마초의 용맹을 잘 알고 있는 유비가 크게 놀라며 공명에게 말했다. 공명도 놀란 얼굴로 유비에게 아뢰었다.

"그들을 막으려면 장익덕이나 조자룡 두 사람 중 한 명을 보내야만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룡은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지금 익덕이 마침 여기 있으니 하는 수 없이 익덕을 보내야겠소."

유비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장비가 성급하기만 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우려고만 들다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비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 공명이 유비를 안심시켰다.

"주공께서는 익덕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익덕에게 경솔히 마초와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때 장비도 마초가 가맹관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씩씩거리며 급히 뛰어 들어왔다.

"형님, 내가 가겠소. 내 가서 그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겠소."

그러나 공명은 장비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유비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지금 마초가 와서 가맹관을 치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그를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어 걱정입니다. 그러니 형주에 파발마를 띄워 관운장이라도 불러와야 하겠습니다."

장비가 이 말을 듣더니 분이 치솟는 듯 볼멘소리로 벌컥 화를 냈다.

"군사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그토록 가볍게 여기시오? 내가 일찍이 조조의 백만 대군을 소리 한 번 질러서 쫓아 버린 몸이오. 그까짓 마초 한 놈이 무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때는 조조가 우리 쪽의 현실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소. 만약 그가 우리의 허실을 알았더라면 장군도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요. 마초의 용맹은 천하가 다 아는 터요. 지난번 위교의 싸움에서 조조마저도 그에게 죽을 뻔했던 고비를 맞았소. 그러니 아무나 함부로 맞섰다가는 목숨을 잃기 십상이오. 설령 관운장이 간다 하더라도 꼭 이긴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오."

공명이 정색을 한 채 잔뜩 마초를 칭송하며 장비의 호승심을 부추켰다. 잔뜩 약이 오른 장비가 분연히 말했다.

"알았소. 그래도 나는 가겠소. 만약 마초를 이기지 못하면 내 목을 자르는 군령이라도 달게 받겠소."

장비의 말에 공명은 마지못한 듯 말했다.

"장군이 군령장까지 써 두고 가겠다고 하니 하는 수 없구려. 그러면 장군이 선봉이 되어 가도록 하시오."

그제야 장비에게 가맹관으로 가도록 허락한 공명이 다시 유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익덕을 선봉으로 삼고 후군이 되어 가맹관으로 가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 면죽관에 남아서 조자룡이 돌아오면 뒷일을 의논하겠습니다."

공명은 장비를 보내되 만약을 염려하여 유비를 뒤따르게 했다. 공명의 뜻을 짐작한 유비도 쾌히 공명의 말에 좇았다.

"저도 함께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장비도 선뜻 허락하지 않는 터라 입을 닫고 있던 위연이 그제야 나서며 말했다. 공명은 그에게도 군사 5백을 주어 척후를 맡게 하여 출발하게 했다. 그 뒤로 장비, 그리고 유비가 뒤를 받치도록하여 가맹관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렇게 되니 가맹관에 가장 먼저 이른 것은 위연이었다. 위연은 장비에게 첫 번째 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장비가 가맹관에 이르기도 전에 서둘러 적장 양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양백도 마주 나와 위연과 부딪쳤다. 두 사람이 어우러져 10여 합을 싸웠을까, 양백은 위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양백이 더는 위연을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양백을 사로잡아 공을 세워 보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던 위연은 급하게 그 뒤를 쫓았다. 한동안 달리다 보니 문득 한 떼의 군사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마초의 아우 마대가 군사를 이끌고 나온 것이었다. 위연은 마초를 본 적이 없어 뒤늦게 나온 이 장수가 마초인 줄 알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마대가 위연을 맞아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10여 합을 부딪쳤을 때였다. 마대 역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대를 마초로 알고 있는 위연인지라 더욱 기세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공명이 그토록 추켜세운 마초가 자기를 당하지 못해 달아나니 그를 사로잡아 큰 공을 세울 욕심에 앞뒤를 살피지 않고 곧장 말을 박차 뒤쫓았다. 그러나 위연이 뒤쫓아오기를 바라고 달아나던 마대가 갑자기 말 위에서 몸을 비트는가 싶더니 활을 당겼다. 화살은 뒤쫓기에만 급해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위연의 왼쪽 팔꿈치에 꽂혔다. 위연은 그제야 자기를 꾀어내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한 손으로 말고삐를 움켜쥔 채 말을 되돌려 가맹관 쪽으로 달아났다. 이번에는 마대가 그런 위연을 뒤쫓아 관문 앞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벼락치듯한 호통 소리와 함께 관 위에서 말을 달려 내려오는 장수가 있었다. 장비가 그때서야 가맹관에 이르러 위연이 싸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마대에게 쫓기던 위연을 구해 가맹관 안으로 들여보낸 장비가 이번에는 마대를 보고 소리쳤다.

"대체 넌 어떤 놈이냐? 죽더라도 이름이나 밝히고 죽도록 하라!"

다른 싸움터 같았으면 곧장 말을 달려 장팔사모를 휘둘렀을 장비였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공명이 잔뜩 마초를 추켜세운 터라 장비도 함부로 내닫지를 않았다.

"서량의 마대를 몰라보고 하는 소리냐? 너야말로 웬놈이냐?"

장비가 이름을 밝히라는 말에 마대가 화가 나 소리쳤다. 속으로 은근히 경계했던 장비는 그가 마초가 아니란 말에 맥이 탁 풀렸다. 장비는 마대를 보고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마초가 아니로구나. 귀찮으니 냉큼 물러나도록 하라. 너는 내 적수가 아니다. 어서 가서 마초에게 나오라고 하되, 연인 장익덕이 여기서 기다린다고 일러라."

장비의 말에 마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네가 어찌 감히 나를 그렇게 업신여길 수가 있단 말이냐?"

마대가 그렇게 외치며 창을 치켜든 채 곧장 장비에게 짓쳐들었다. 마대가 말을 달려오니 장비가 맞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대가 10여 합을 부딪기도 전에 장비의 장팔사모를 당하지 못해 황망히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장비가 도망가는 마대를 뒤쫓으려 하는데 관에서 한 사람이 말을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아우는 그만두게. 갈 것 없네."

그 소리에 장비가 뒤돌아보니 유비가 달려오고 있었다. 유비는 장비와 함께 관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자네 성미가 급해 가볍게 싸움에 말려들까 걱정되어 달려왔다네. 이미 마대를 쫓아 버렸으니 오늘은 군마를 쉬게 하고 내일 다시 마초와 싸우도록 하게!"

다음 날이었다. 유비가 관 아래를 내려다보니 북소리와 함께 마초의 군사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 맨 앞에 창을 들고 말을 이리저리 몰며 유유히 뒤따르는 장졸들의 의기를 돋우며 달려오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마초였다. 마초는 머리에 사자 모양의 투구를 쓰고, 허리에는 짐승을 그린 띠에다 몸에는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차림새가 기품이 있어 보이면서도 날래 보이며 인물 또한 빼어났다. 유비가 그 모습을 보자 절로 감탄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마초의 헌걸찬 모습을 칭송하며 금마초(비단같은 마초라는 뜻)라고 한다더니 과연 듣던 대로구나!"

유비가 마초를 보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우자 장비는 어금니를 악물며 부르르 떨었다. 장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말 위에 오르는데 유비가 급히 말렸다.

"잠깐만 기다려라. 먼저 마초의 날카로움을 피한 후에 기회를 보도록 하라."

그런데 마초 또한 성미가 급한 장수가 아닌가. 장비가 마주 나오지 않자 참지 못하고 관 아래에서 소리쳤다.

"장비는 어디 숨었느냐? 내가 오니 지레 겁을 먹었느냐? 어서 썩 나오지 못할까?"

장비가 그 소리를 듣자 두 주먹을 움켜쥐더니 금방 말을 달려나갈 기세였다. 그럴 때마다 유비가 장비를 말렸다. 마초가 관 아래에서 욕을 퍼부으며 싸움을 돋우고 유비는 장비를 말리기를 몇 차례나 되풀이하는 사이 한나절이 흘러갔다. 유비가 그때서야 관 아래를 굽어보았다. 마초의 군사들은 관 안에서 군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표정으로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 지금이다. 아우는 서둘지 말고 5백 기만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도록 하라!"

비로소 유비가 영을 내렸다. 장비는 신이 났다.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비가 관문을 활짝 열어젖히자마자 장팔사모를 비껴잡고 바람같이 내달았다. 마초는 갑자기 장비가 뛰쳐나오자 창을 들어 휘저으며 군사들이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로 물러나도록 군호를 내렸다. 장비도 군사들을 늘여 세우더니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 자치에 멈추게 했다. 이때 관 안에 있던 군마들도 장비군을 뒤이어 내려와 뒤를 받치고 있었다. 장비는 마초의 군사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오로지 마초를 노려보며 홀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네가 연인 장익덕을 알아보겠느냐?"

마초가 그런 장비를 비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공후의 명문이다. 어찌 너따위 두메산골 무지렁이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

장비가 그 소리를 듣고 참고 있을 리가 없었다. 창을 꼬나잡더니 말을 박차 곧장 마초를 향해 내달았고, 마초도 장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을 몰았다. 이어 말과 말이 부딪칠 듯이 엇갈리며 창과 창이 부딪쳤다. 억센 두 기운이 창끝에서 부딪치니 불꽃이 일었다. 그 격렬함은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찌르고 막는가 하면 어느새 후비는 창을 막아 내며 또다시 후리니 보는 이의 눈이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흡사 성난 독수리 두 마리가 구름 사이에서 서로 부딪쳐 살을 물어뜯는 듯했다. 그렇게 싸우기 1백여 합, 그러나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으니 승패를 가릴 수가 없었다.

"실로 범 같은 장수들이구나."

유비가 감탄하며 장비가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징을 쳐 장비를 불러들였다. 장비가 자기 진으로 돌아가자 마초도 말머리를 돌려 진으로 돌아갔다. 진으로 돌아온 장비는 싸움을 중도에서 멈춘 것이 마땅치 않은 듯 잠시 말을 쉬게 하더니 투구도 쓰지 않고 머리를 수건으로 싸맨 채 또다시 적진으로 달려가 마초에게 싸움을 돋우었다. 마초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달려 나왔다. 유비는 자기가 말릴 틈도 없이 장비가 말을 달려나가자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에 자신도 투구와 갑옷을 갖춰 입고 군사를 이끌어 관 아래로 내려갔다. 장비와 마초가 다시 맞붙어 싸운 지 1백여 합, 그러나 두 장수는 여전히 지친 기색 없이 더욱 맹렬한 기세로 싸울 뿐이었다. 두 장수의 싸움이 그렇게 이어지자 유비가 다시 징을 쳐 군사를 거두게 했다. 두 장수는 승패를 판가름내지 못한 채 다시 군사를 거두어 본진으로 돌아갔다. 유비는 이미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으므로 싸움을 다음 날로 미루기로 하고 장비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싸울 때마다 징을 쳐 진으로 불러들이기만 하자 장비가 유비에게 볼멘 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마초는 용맹이 뛰어난 장수이니 너무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된다. 싸움은 내일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은 날도 저물어 가니 이만 관으로 돌아가 쉬도록 하게."

유비가 그렇게 말하며 싸움을 만류했지만 장비는 말끝마다 마초를 칭찬하는 유비의 말에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

"난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소. 조금만 더 싸우면 저놈의 목을 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쉰다는 말입니까? 지금 당장 승부를 결정짓겠소."

"하지만 해가 저물었는데 어떻게 싸운다는 말인가?"

"횃불을 밝히면 될 게 아닙니까!"

유비가 장비를 달랬으나 장비는 불 같은 성깔을 억누르지 못해 싸운다고 우겼다. 진으로 돌아간 마초 또한 장비와 같은 마음이었다.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돌아온 게 끝내 마음에 걸렸다. 마초는 다시 말을 바꿔 타고 창을 비껴들고 와 소리쳤다.

"장비야, 네 놈이 불을 밝히고 싸울 용기가 있느냐?"

그러잖아도 싸우기를 유비에게 우기고 있던 참이라 장비가 두말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랐다. 장비가 장팔사모를 치켜들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내가 너를 사로잡기 전에는 맹세코 관으로 들지 않으리라!"

"내가 할 말을 네가 하고 있구나. 나 또한 네놈을 사로잡지 못하면 결코 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으르릉거리며 맞서니 양쪽 군사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횃불을 밝혔다. 양편 군사가 각기 횃불을 밝히니 그 횃불이 1천여 개나 되었고, 그 밝기가 한낮과 다름없었다. 두 장수가 휘황한 횃불 아래서 어우러졌다.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겠다는 듯이 거센 부딪침이 있은 지 20여 합, 그런데 문득 마초가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장비가 우레같이 소리를 질렀으나 마초는 되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말을 달릴 뿐이었다. 마초는 장비가 아무리 싸워도 물러설 기색이 없는 것을 보고 꾀를 내었다. 짐짓 싸움에 진 것처럼 꾸미고 달아나 뒤쫓아오기를 기다려 다른 방법으로 공격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비도 싸움터를 누빈 맹장이었다. 뒤쫓기는 해도 갑자기 달아나는 마초가 수상쩍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장비가 한동안 뒤쫓고 있을 때였다. 마초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쇠 몽둥이를 던졌다. 장비가 얼른 말 위에 엎드려 피하자 몽둥이는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장비가 꾀를 내었다. 문득 그 몽둥이에 겁을 먹은 듯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초가 다시 장비를 뒤쫓기 시작했다. 장비는 마초가 급히 자기를 뒤쫓자 갑자기 말을 돌려 세우더니 활에 살을 메겨 마초를 겨누고 쏘았다. 마초도 장비를 무작정 뒤쫓지만은ㄴ 않고 바짝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므로 몸을 틀며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화살은 마초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서로 꾀를 내어 한 번씩 공격을 주고받았으나 그래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마초는 뒤쫓기를 그만두었다. 장비를 계속해서 뒤쫓으면 결국 장비의 진 쪽이라 더 쫓는건 이롭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장비도 마초가 말머리를 돌리자 진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유비가 진 앞으로 달려나가며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는 마초한테 큰 소리로 타일렀다.

"나는 인의로써 사람을 대할 뿐 결코 속임수를 쓰지는 않는다. 마맹기, 그대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서 편히 쉬도록 하라. 이번 싸움은 우리가 이롭지만 그 기세를 몰아서 그대의 군사를 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

마초도 그 말을 듣자 얼른 군사를 거두었다. 유비의 군세가 자신의 군세보다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혹시나 유비군이 뒤를 덮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자신이 후군을 맡아 뒤를 방비하며 군사를 물렸다. 마초가 물러나자 유비도 군사를 거두어 가맹관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장비는 다시 마초와 싸우려 들었다. 그때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아뢰었다.

"제갈 군사께서 오셨습니다."

유비가 뜻밖에 공명이 왔다는 말에 의아로우면서도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나가 맞아들였다.

"군사께서는 웬일로 이리로 오시었소?"

유비는 면죽을 지키고 있어야 할 공명이 왔으므로 반가운 가운데 그렇게 물었다.

"마초는 천하에 둘도 없는 범 같은 장수라 듣고 있습니다. 두 장수를 싸우게 둔다면 반드시 한쪽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니 조자룡과 황현승(황충)에게 면죽을 맡기고 이리로 달려온 것입니다. 제가 계책을 써서 마초를 주공께 투항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바로 유비가 바라던 바라 공명의 말에 반색을 하며 물었다.

"나 역시 마초의 빼어난 용맹을 아깝게 여기고 있던 터요. 어떻게 하면 그를 내 사람이 되게 할 수 있겠소?"

"제가 들은 바로는 동천의 장로가 스스로 한녕왕이 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하인 모사 양송은 몹시 뇌물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주공께서는 지름길로 사람을 보내 은밀히 금은보화를 주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장로에게 글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어떻게 글을 써야 되겠소?"

"주공께서는 '내가 유장과 서천을 다투는 것은 곧 그대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도 되니 그대는 결코 우리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무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하십시오. 또한 '내가 서천을 얻은 뒤에는 반드시 그대를 천자께 상주하여 한녕왕에 오르게 해 줄 것인즉 마초를 불러들이도록 하라'고 쓰십시오. 그리하여 장로가 마초를 한중으로 불러들일 때는 제가 다시 계책을 써서 그를 항복하게 하겠습니다."

공명이 양송에게 금은보화를 미리 주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놓으려는 뜻을 알게 되자 유비는 새삼 공명의 계책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유비는 공명이 이른대로 즉시 글을 쓰고 금은과 주옥을 손건에게 주어 지름길로 한중으로 가게 했다. 한중에 이르른 손건은 먼저 양송부터 찾아가 가지고 간 금은주옥을 뇌물로 바치며 온 뜻을 말했다. 양송은 뇌물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기꺼이 손건을 장로에게 데려다주었다. 손건이 장로에게 유비의 글을 바치자 장로는 단숨에 읽어 본 후 양송에게 물었다.

"현덕의 벼슬이 한낱 좌장군일 뿐이오. 어떻게 그가 나를 천거하여 한녕왕이 되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 물음에 양송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유현덕은 바로 대한의 황숙입니다. 벼슬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보다도 더 당당히 천자께 아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욱 이롭다 할 것입니다."

양송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여러 가지를 유비에게 이롭게 말해 주었다. 모든 일을 양송에게 의논하던 장로인지라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사람을 보내 마초에게 군사를 물리도록 영을 내렸다. 장로가 그렇게 영을 내려 공명의 계책대로 일이 풀려가는 것을 보고도 손건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마초가 군사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보기 위해 양송의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자 마초에게 갔던 사자가 돌아와 뜻밖의 소식을 알려왔다.

"마초는 공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장로는 자신의 영을 마초가 거스르자 크게 노하며 다시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초는 장로의 부름을 거절했다. 장로는 두 번 세 번에 걸쳐 마초를 불렀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기회를 보아 아우 양백과 함께 마초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하고 있던 양송이 이를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초는 원래부터 믿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주공께서 내리신 영을 거슬러 가며 군사를 거두지 않음은 필시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양송은 장로에게 마초를 그렇게 모해하는 한편 사람들에게 널리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마초는 원래 서천을 빼앗아 스스로 촉의 주인이 되어 아비의 원수를 갚을 야심을 지녔을 뿐, 결코 한중을 받들려는 마음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이 말이 전해지니 장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로는 곧 양송을 불러들여 이 일을 노기 띤 목소리로 물었다.

"마초 그놈이 은혜를 모르고 도리어 한중을 넘보고 있다고 하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일이 이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양송이었다. 짐짓 정색을 하고 생각해 두었던 계책을 장로에게 말했다.

"사람을 보내 마초에게 이르도록 하십시오. '네가 기어이 공을 이루겠다면 한 달의 기한을 주되 세 가지 공을 이루라'고 하십시오. 그 세 가지 공이란 '첫째는 서천을 뺏어야 할 것이며, 둘째는 유장의 목을 베어야 할 것이며, 셋째는 유비의 형주 군사를 물리치라'고 하십시오. 만약'이 세 가지 공을 이루면 상을 내릴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을 바쳐애 한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위에게 군사를 주어 모든 관을 굳게 지키게 하여 마초가 이곳으로 이르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마초가 변란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장로가 들으니 양송의 말이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곧 양송의 말을 좇아 사람을 보내 세 가지 조건을 마초에게 전하게 했다. 장로가 보낸 사자에게 그 말을 전해 들은 마초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 가지 일을 단 한 달 안으로 해내라니 그건 자기를 없애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내게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냐? 그새 마음이 변해 나를 없애려고 한다는 말인가?"

마초는 길게 탄식하며 아우 마대를 불렀다. 마대를 불러 이 일을 의논했으나 마대라고 달리 묘안이 있을 리 없었다. 마초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기로 하고 마내에게 일렀다.

"장로가 내건 세 가지 조건을 한 달 안에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느냐? 차라리 싸움을 그만두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초가 군사를 거두어 한중으로 돌아오려 한다는 보고를 받자 양송은 또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마초가 군사를 되돌려 오는 것은 곧 한중을 치기 위해서다."

장로의 귀에도 곧 이 소문이 들어갔다. 장로는 곧 장위에게 군사를 주며 한중으로 들어오는 일곱 군데의 관소를 굳게 지켜 마초를 막게 했다. 이렇게 되자 마초는 이제 한중으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군사를 이끌어 나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편 한중과 마초의 이 같은 내막을 전해 듣게 된 공명이 유비에게 말했다.

"지금 마초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제가 가서 마초를 만나 세 치 썩지 않은 혀로 그를 달래 항복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공명의 말에 유비가 깜짝 놀라면 만류했다.

"선생은 나의 고굉(팔과 다리같이 소중함)이시오. 함부로 마초를 찾아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이러시오?"

"제가 이미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헤아려 둔 바가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비의 만류에도 공명이 굳이 가겠다고 우겼다. 그러나 유비가 선뜻 허락하지 않고 있는데 수하 사람이 와서 아뢰었다.

"조자룡 장군의 추천장을 가진 사람이 서천에서 투항해 왔습니다."

유비가 서천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에 급히 그를 불러들이도록 했다. 유비가 그를 불러들이고 보니 촉의 선비 이회였다. 그는 건녕 유원 사람으로 자를 덕양이라 썼는데 그가 조운에게 항복해 온 것이었다. 이회는 이전에 유장이 유비를 서천으로 불러들이려 하자 이를 반대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유비가 뜻밖에도 그가 투항해 오자 의아로운 얼굴로 물었다.

"그대는 일찍이 유장에게 나를 서천으로 들이지 말라고 진언하였다고 알고 있소. 그런데 지금 나에게 투항하니 그 까닭이 무엇이오?"

"제가 알기로는 '어진 새는 나무를 가려서 깃들고 어진 신하는 주인을 가려서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전에 유익주에게 진언한 것은 그의 신하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말을 듣지 않으니 그가 패할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어지심과 덕을 촉 땅에 널리 베푸시니 반드시 뜻하신 바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알고도 어찌 유장의 휘하에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이회는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유비는 그의 당당한 태도에 호감이 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선생께서 이렇게 오셨으니 반드시 가르침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떤 가르침을 주시겠소?"

"제가 듣건대 지금 마초는 오도 가도 못할 고단함에 빠져 있다 합니다. 제가 전에 농서에 있을 때 그와 사귄 적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가서 그를 장군께 항복하도록 한 번 달래 볼까 합니다. 장군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이회가 유비의 물음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공명이 이 말을 듣고 이회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 대신 갈 사람을 찾고 있던 중이었소. 그런데 선생께선 마초에게 가서 어떻게 달래려고 하시오?"

이회는 지체하지 않고 공명에게 귀엣말로 무어라고 소곤대었다. 공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회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를 마초에게 가게 허락했다. 마초의 진영에 이른 이회는 문을 지키는 군사에게 우선 자기의 이름부터 마초에게 알리게 했다. 군사는 곧 마초에게 달려가 이회라는 사람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이회가 왔다는 말인가? 나는 그가 말을 잘 하는 선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온 것은 분명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리라!'

마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도부수 스무 명을 불러 명을 내렸다.

"내가 너희들더러 그를 '죽이라!'고 소리치거든 지체없이 달려 나와 난도질해버리도록 하라!"

마초는 그렇게 영을 내린 후 이회를 불러들이도록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이회가 마초의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마초는 이회가 들어오자 매서운 눈길로 바라보며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내게 왔는가?"

마초의 그 목소리는 지난날 사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마치 적을 문초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마초의 살기 띤 눈초리를 보면서도 이회는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오늘 특별히 온 것은 세객이 되어 장군을 달래려고 왔소."

이회가 막상 그렇게 나오니 마초도 일순 말문이 막혔으나 곧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 말했다.

"내 칼집에 보검을 갈아 놓았으니 어디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해보아라. 만약 그대의 말이 이치에 닿지 않을 때는 당장 내 검의 칼날을 시험하리라."

마초가 그렇게 말하며 이회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없이 껄껄 웃더니 대꾸했다.

"장군에게 화가 닥쳐오니 새로 갈아 놓았다는 그 칼을 내 목에 시험하기 전에 먼저 장군 목에 시험해 볼까 걱정이오."

"내가 화가 닥친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회가 변설에 능하다는 것을 마초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화가 미친다는 말에 그 까닭이나 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물었다. 이회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듣건대 아무리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도 월나라 서자(전국 시대의 미녀 서시)의 아름다움은 감출 수가 없었소. 또한 아무리 남의 칭찬을 잘하는 사람도 제나라 무염(전국시대의 현부인, 추녀로 유명함)의 추함을 가리지는 못한다 하였소. 해도 한낮이 지나면 기울게 마련이고 달도 차면 다시 기울게 마련인 것이 천하의 이치요. 지금 조조는 장군의 아비 죽인 원수이며, 또 농서 사람들에게도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게 하였소. 장군은 앞으로는 형주 군사를 물리쳐 유장을 구원하지도 못했으며, 뒤로는 장로를 대할 수도 없게 되었소이다. 그러니 장군은 사해에 몸을 의탁할 곳이 없는 몸이며 주인이 없는 딱한 신세가 되어 버렸소. 만약 다시 지난번 위교 싸움에서 조조에게 쫓길 때나 기성에서 쫓겨날 때와 같은 일을 당할 때는 무슨 낯으로 천하 사람들을 대하겠소?"

마치 대나무를 쪼개 내듯 마초의 가장 아픈 데를 여지없이 찌르고 들어가는 조리 있는 이회의 말이었다. 마초는 그 말을 듣자 이회에게 허세 부리는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알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의 말씀이 지당하오. 나는 지금 가려 해도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몸이오."

그러자 이회가 대뜸 마초에게 꾸짖듯이 물었다.

"공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면 어찌하여 장막 뒤에 숨겨 둔 도부수들을 그냥 두고 있소?"

이회가 도부수들을 숨겨 둔 것까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자 마초가 몹시 부끄러워하며 급히 도부수들을 꾸짖었다.

"어쩐 일로 네놈들이 장막 뒤에 숨어 있었다는 말이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 소리에 도부수들이 머리를 싸매고 달아났다. 도부수들이 물러나자 이회는 비로소 마초에게 찾아온 뜻을 밝혔다.

"유황숙께서는 어진 이들을 예를 다해 대접하고 몸을 숙이는 분이니 나는 그 뜻한 바를 이루리라고 믿소. 나는 그 때문에 유장을 버리고 유황숙께로 간 것이오. 뿐만 아니라 일찍이 공의 선친께서는 유황숙과 함께 역적을 치기로 맹세한 터였소. 만약 공이 유황숙을 이긴다 하더라도 기뻐할 사람이 누구이겠소. 그건 바로 공의 원수인 조조요. 그런데 공은 어찌하여 어둠을 벌리고 밝음을 찾으려 하지 않으시오? 공은 밝은 주인에게 의지하면 위로는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공명을 도모할 수도 있지 않겠소?"

마초는 이회의 말에 그제야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회의 말에 따를 뜻을 밝힌 후 곧 함께 온 장로의 장수 양백을 불러들여 목을 베었다. 원래 장로의 사위가 되는 걸 막았던 양백을 죽이기로 작정했던 마초였지만 이회 앞에서 양백을 죽여 이젠 장로의 장수가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마초는 양백을 목 벤 후 곧바로 군사를 거느려 가맹관으로 가 유비에게 항복했다. 처음부터 마초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유비였다. 마초가 스스로 항복해 오자 친히 나아가 귀한 손님을 맞는 예로써 맞아들였다. 유비가 그토록 두텁게 자기를 맞아들이자 마초는 감격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제 밝은 주인을 만났으니, 마치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비로소 맑은 하늘을 뵙는 듯합니다."

유비는 마초를 손수 부축해 일으켰다. 한중 땅에 유비의 사자로 가 있던 손건도 마초가 한중으로 들 수 없게 되자 가만히 몸을 빼쳐 가맹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유비 익주목이 되다

마초가 항복해 오자 유비는 가맹관을 지키는 일도 이제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곽준, 맹달 두 장수에게 가맹관을 맡겨 지키게 했다. 그리고 유비는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성도를 치기 위해 면죽땅으로 향했다. 유비가 면죽에 이르자 조운과 황충이 나와 맞아들였다. 유비가 성안에 들어 성도 칠 일을 의논하는데 수하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촉의 장수 유준과 마한이 군사를 이끌고 와 싸움을 돋우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운이 나섰다.

"제가 가서 그들을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조운은 그 말과 함께 말 위로 몸을 날리더니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 유비는 조운이 떠나자 마초를 대접하기 위해 성 위에 술상을 마련하게 했다. 그런데 아직 술상이 다 마련되기도 전에 조운이 어느새 적장 유준과 마한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 천하의 맹장 마초도 그토록 날랜 조운의 무용에 속으로 은근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마초는 자신의 무용도 떨쳐 보이고 항복해 온 장수로서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유비에게 말했다.

"이제 주공께서는 군마를 수고롭게 할 것 없이 제가 유장을 불러내어 항복하도록 달래 보겠습니다. 만약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마대와 함께 성도를 떨어뜨려 주공께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유비는 몹시 기뻐하며 그날은 밤늦도록 잔치를 열어 마초를 위로했다. 그 무렵, 싸움에 패한 서천 군사들은 익주로 돌아가 유장에게 알렸다.

"유준, 마한 두 장수는 조자룡과 싸우다 죽었으며 저희들은 패한 채 도망쳐왔습니다."

유장은 두 장수가 몇 합을 부딪지도 못한 채 목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 이후로는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나가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수문장이 달려와 알렸다.

"성 북쪽에 마초가 구원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마초가 이미 유비에게 항복한 걸 모르고 있는 군사라 유장에게 그렇게 말했다. 유장은 그러나 선뜻 성문을 열기가 두려워 우선 그들을 살펴보기 위해 성 위로 올라가 보니 과연 마초와 마대가 성 아래에 있다가 소리쳤다.

"청컨대 유계옥은 잠시 나오시오. 내가 할 말이 있소이다."

"말씀해 보시오."

유장이 성 위에서 내려다보며 외쳤다. 그러자 마초는 말 위에서 말채찍을 치켜들며 성 위를 보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나는 원래 장로의 군사를 거느리고 익주를 구하러 왔었으나 누가 알았겠소? 장로는 양송의 모략만을 듣고 도리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나는 유황숙에게 항복하고 말았소. 공께서도 항복하시어 성안 백성들의 고초를 면하게 하시오. 만약 항복하지 않고 어리석은 고집을 피운다면 내가 먼저 이 성을 칠 것이오."

유장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한중의 장로가 구원군을 보낸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 마초마저 유비와 함께 공격하려 하니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마음 약한 유장은 몹시 놀라 이내 성벽 위에 혼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모든 벼슬아치들이 또한 놀라며 쓰러진 유장을 부축해 자리에 뉘였다. 반식경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유장이 탄식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헤아림이 어리석었음을 뉘우치고 있으나 이제 때가 너무 늦었소. 성문을 열고 항복하여 백성들이나 구하도록 해야겠소."

그러자 동화가 결연한 목소리로 유장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성안에는 아직도 군사가 3만이나 남아 있으며 군량과 마초도 1년은 더 버틸 만합니다. 그런데도 어찌 항복을 하려 하십니까? 아니 됩니다."

그러나 유장은 더 이상 싸울 마음조차 없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부자가 촉을 다스린 지 20년이 되었건만 백성들에게 베푼 은덕이 없었소. 게다가 3녀여를 싸우는 동안 애꿎은 백성들의 뼈와 살만 들판에 굴렸으니 이것이 다 나의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니 어찌 내 마음인들 편안할 리가 있겠소? 차라리 항복하여 백성들의 고초나 면하게 해 주는 것이 옳을 것이오."

유장이 처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곁에 있던 모든 벼슬아치들이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벼슬아치들 중의 한 사람이 나서며 결연히 외쳤다.

"주공의 말씀이 하늘의 뜻과 같습니다."

모두들 그 사람을 보니 그는 파서군 서충국 사람으로 이름이 초주요, 자는 윤남이었는데 일찍부터 천문에 밝은 사람이었다.

"내 말이 하늘의 뜻에 맞는다니, 어찌하여 그렇다는 말이오?"

유장이 뜻밖의 말에 궁금한 듯 물었다.

"제가 밤에 별자리를 보니 뭇 별들이 촉군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큰 별 하나가 있었는데 그 광채가 마치 보름달같이 제왕의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더구나 1년 전부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는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만약 새밥을 먹으려거든, 선주(유비)께서 오실 때를 기다려 보세' 이 노래는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려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코 하늘의 뜻을 거슬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자 유비가 서천으로 들 때부터 반대하던 황권과 유파는 크게 노하여 칼을 빼 들고 초주의 목을 치려 했다. 그러나 이미 항복하기로 마음을 정한 터라 유장이 두 사람을 말렸다. 그때 한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촉군태수 허정이 성을 빠져나가 마초에게 항복했습니다."

또 한 번 유장의 기를 꺾는 소리였다. 유장은 여러 장수들이 투항하고 이제 성안의 신하마저 적에게로 가 버리자 슬픔을 가누지 못해 목을 놓아 울더니 부중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장이 자리를 뜨니 그날의 의논은 결말을 보자 못한 채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이었다. 문을 지키는 장수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유황숙의 막빈인 간옹이란 자가 와서 주공을 뵙고자 합니다."

유장은 그를 물리침은 곧 싸움을 자청하는 격이 되니 그를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성문을 열고 맞아들이도록 하라."

유장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지키는 장수가 성문을 열고 간옹을 맞아들였다. 간옹은 수레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오는데 마치 성을 함몰시킨 장수인 양 자못 거만스런 태도였다. 간옹의 그런 오만스런 태도를 보다못해 문득 한 사람이 칼을 빼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되지 못한 놈이 저희들 뜻대로 일이 되어 가는 듯하니 벌써부터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말이냐? 네가 감히 우리 촉 땅 사람들을 우습게 본단 말이냐?"

간옹이 그 소리에 놀라 보니 그는 광한군 면죽 사람으로 이름이 진복이요, 자는 자칙이었는데 간옹과는 이전에 사귄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간옹은 황망히 수레에서 내려 진복에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현형이 여기 있는 것을 몰라보았소. 부디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라오."

간옹은 진복에게 공손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자 진복도 가까스로 화를 누그러뜨렸다.

간옹은 진복과 함께 성안에 들어가 유장을 만나자 간곡한 어조로 유비의 너그러움과 넓은 도량을 말하며 항복을 권했다.

"유황숙께서는 밝으시고 너그러우시니 결코 해칠 뜻이 없으십니다.

유장도 이미 마음이 기울어진 터라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항복할 뜻을 간옹에게 말하고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다음 날이었다. 유장은 몸소 태수의 인수와 문서를 간옹에게 건네 준 다음 함께 수레를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 유장이 항복하러 온다는 전갈을 받은 유비는 친히 영채 앞에 나와 유장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어찌 인의를 저버릴 수 있으리오. 그러나 대세는 어찌할 수 없으니 이 현덕을 너무 원망하지는 말게."

유비가 눈물까지 흘리며 간곡히 말하자 유장도 그 두터운 후의에 목이 메었다. 두 사람은 함께 유비의 영채로 들어서자 유장은 인수와 문서를 유비에게 넘겨 주었다. 이에 유비는 유장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성으로 들어갔다.

유비와 유장이 성으로 들어가자 백성들은 향을 사르고 향기로운 꽃과 등촉을 내걸고 집 밖으로 나와 영접했다. 백성들의 괴로움을 면해 주기 위해 항복한 유장과 새 주인이 익주를 더욱 든든하게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두 사람을 모두 환영하는 것이었다.

유비가 공청에 이르러 당 위에 오르자 고을 안의 모든 벼슬아치들이 당 아래에 모여 절을 올렸다. 그러나 오직 황권과 유파만은 집에 들어앉아 문을 닫은 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비의 장수들이 분개하여 외쳤다.

"황권과 유파가 어찌 이리 무례할 수가 있다는 말이오? 당장 집으로 찾아가 목을 베어 버려야겠소."

장수들이 그렇게 떠들며 당장 그 두 사람의 집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러자 유비가 황급히 영을 내려 그들을 만류했다.

"그만두거라. 만약 두 사람을 해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 3족을 죽이리라!"

유비는 끝내 두 사람이 유장에게 충절을 꺾지 않은 것을 가상히 여겼다. 그리고 유비는 엄명을 내린 후에 몸소 두 사람의 집으로 찾아가 다시 이전처럼 벼슬길에 오르기를 권했다. 황권과 유파는 유비가 몸소 찾아와서 은덕을 베푸니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은 다시 유비를 섬기기로 맹세했다. 성안의 일이 평정되자 공명이 유비에게 권했다.

"이제 서천은 평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성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으니 유장을 형주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내가 촉군을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유계옥을 멀리 내보낼 수가있겠소?"

유비는 유장을 내쫓는 것 같아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러자 공명이 그런 유비의 마음에 정색을 하며 깨우쳤다.

"유장이 자신의 기업을 잃어버린 것은 그 마음이 너무 약했기 때문입니다. 주공께서도 그런 아녀자 같은 인정으로만 일을 처결하신다면 이 땅도 결코 오래 보전치 못할까 걱정됩니다."

공명이 그렇게까지 매섭게 유비를 몰아붙이니 유비도 그 말을 좇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로 크게 잔치를 열어 유장을 위로하며 전위장군의 인수를 주고 재물을 수습케하여 남군 공안으로 옮겨 살도록 했다. 그리하여 유장은 촉을 떠나 그 지위와 처소를 바꾸어 공안에서 여생을 보내는 몸이 되었다.

유장이 떠나고 없자 유비는 스스로 익주목이 된 후에 항복한 모든 촉의 벼슬아치들에게 후한 상과 벼슬을 내렸다. 엄안을 전장군으로 삼고, 법정을 촉군태수로, 동화를 장군 중랑장에, 허정은 좌장군 장사, 방의를 영중사마로, 유파를 좌장군, 황권을 우장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나머지 오의, 비관, 팽양, 탁응, 이엄, 오란, 뇌동, 이회, 장익, 초주, 진복, 여의, 곽준, 등지, 양홍, 주군, 비위, 비시, 맹달 등 항복했던 벼슬아치들에게 각기 벼슬을 내리니 유비 휘하에 든 촉의 사람들이 60여 명이나 되었다. 유비는 이어 공명을 군사로 삼고 관우를 탕구장군 한수정후에, 장비는 정원장군 신정후로 삼았다. 조운에게 진원장군, 황충은 정서장군, 위연에게는 양무장군, 마초는 평서장군으로 재수했다. 또한 손건, 간옹, 미방, 미축, 유봉, 관평, 주창, 요화, 마속, 장완, 마량, 이적 등 옛부터 거느렸던 문무백관 모두에게 벼슬을 내리고 후한 상을 내렸다. 다만, 공명만은 지난날과 다름없이 군사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

유비는 특별히 관우에게 사자를 보내 황금 5배 근, 1천 근에 돈 5천만 전과 촉 땅에서 나는 비단 천 필을 주고 다른 문무관원들에게도 공에 따라 각기 상을 내렸다. 유비는 거느리던 문무백관에 논공행상을 내린 후 다시 소와 말을 잡아 크게 잔치를 열어 군사들을 위로했다. 또한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유비가 군민 모두에게 후하게 대하며 은덕을 베풀자 유비의 덕을 칭송하며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하여 익주가 안정되어 가자 유비는 성도의 좋은 집과 전답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다.

"내가 나라를 갖게 되었으니 장수들에게도 집과 전답을 주어 그 가솔들을 편안하게 살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려면 집과 전답들을 촉 땅 사람들로부터 거두어들여야 했다. 그것은 성이나 나라를 뺏은 사람들이 당연히 행하는 권리였다. 그러나 조운이 나서서 이를 말렸다.

"지금 익주 땅 사람들은 오랜 싸움을 겪어 논밭과 집들이 텅 비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니 집과 땅을 마땅히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고 편안히 농사를 짓게하여 살도록 해야 민심이 따를 것입니다. 백성들의 집과 땅을 뺏어 관원들의 상으로 내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유비는 그동안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보답키 위해 집과 전답을 나누어 주려고 했던 것인데 조운이 그렇게 말하자 크게 기뻐했다. 곧 집과 전답 나누는 일을 중지하고 그 대신 공명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법 조례를 만들게 했다. 공명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법 조례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법이 너무나 엄했다. 법정이 그 법조문을 보고 공명에게 말했다.

"옛적에 한 고조께서 세 조문으로 간략하게 법을 정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 은덕에 감복했습니다. 군사께서도 황조와 같이 법을 간추려 백성들에게 관대히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공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려. 한 고조는 그 전의 진나라가 너무 포악한 법을 써서 모든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반대로 너그러움으로 법을 줄이어 민심을 수습했던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오, 유장은 어둡고 약해 덕을 베풀지 않았으면서도 형벌과 위엄으로 기강도 세우지 못했소. 그러니 백성도 따르지 않고 임금과 신하의 도리마저 어지러워졌던 것이오. 가까이하는 자만 벼슬을 높이고 따르는 자에게만 은혜를 베풀면 임금에게 느슨해지게 마련이니 어찌 유장이 망하지 않고 배기겠소. 내가 이제 위엄을 보이되 법으로써 행하고 법이 행해지면 참다운 은혜를 알게 될 것이오. 또한 벼슬에는 차등을 두어 벼슬이 오르면 그것이 곧 영화로움임을 알게 할 것이며 은혜와 영화를 함께 얻으면 위와 아래의 절도가 있게 마련이니 이로써 다스리는 도리가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이오."

공명이 단숨에 그렇게 말을 끝맺자 법정은 깊이 탄복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국령, 군법, 형법 등이 조령에 걸쳐 병부가 설치되었다. 각 주에 파견된 장수들이 백성들을 지키고 다스리는 한편 어려움을 위로해 주니 서촉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 법정은 촉군태수를 지내고 있었는데 다스리는 고을에서 지난날의 은혜와 원한을 가림이 지나칠 정도라 흉을 본 이가 많았다. 작은 은혜라도 잊지 않고 보답하는 대신 사사롭고 하찮은 원한도 잊지 않고 앙갚음을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보다못해 누군가가 공명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치며 덧붙여 아뢰었다.

"효직이 너무 지나치게 하찮은 원한까지 들춰내 앙갚음을 하니 군사께서 좀 꾸짖어 주십시오."

그러나 공명은 머리를 내저으며 말했다.

"지난날 주공께서 형주를 지키고 계실 때의 딱한 처지를 생각해 보시오. 북으로는 조조를 두려워했으며 동으로는 손권을 경계해야 했었소. 그 난국을 헤치고 오늘날 주공께서 날개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효직의 크나큰 보좌가 있었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이제 효직이 하고 싶은 대로 좀 하는데 그런 작은 일로 어찌 그를 나무랄 수 있겠소?"

공명이 법을 시행함에 공정하고 엄했으나 이제 갓 임지로 가 고을을 다스리는 법정을 지난날의 공훈을 생각해서라도 꾸짖고 싶지 않았다. 또한 법정이 언제까지나 그런 도량 좁은 앙갚음을 계속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과연 법정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부끄러움을 느껴 그 뒤는 남의 원성을 살 일은 삼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비가 공명과 함께 한가롭게 이야길 나누고 있는데 관우가 하사받은 금과 은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자 사자로 보낸 관평이 익주에 당도했다. 유비가 관평을 불러들이게 했다. 관평이 유비에게 절을 하고 나서 관우의 글을 올리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마초의 무예가 빼어나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이곳 서천으로 와서 한 번 겨루어 보고자 하십니다. 백부님의 허락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유비는 몹시 걱정스런 얼굴로 공명을 보며 물었다.

"만약 운장이 와서 마맹기와 무에를 겨룬다면 둘다 무사하기 어려을 것이오.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나 공명이 빙그레 웃으며 유비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운장에게 글을 써 보내겠습니다."

유비는 그 말을 듣자 공명을 재촉했다. 미처 공명의 글을 받기도 전에 관우가 성도로 달려올지도 모를 일이라 공명이 글을 쓰자마자 곧 관평에게 주어 형주로 가게 했다. 관평은 그 길로 황급히 형주로 달려가 관우에게 공명의 글을 전했다. 그러자 관우가 궁금한 듯 관평에게 물었다.

"내가 마맹기와 겨뤄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하였느냐?"

"말씀드렸더니 군사께서 글을 전하라고 주셨습니다."

그 말에 관우는 얼른 글을 뜯어 보았다.

장군이 맹기와 무예를 겨뤄 보고 싶으신 뜻은 잘 알겠소이다. 그러나 제가 생각건데 맹기의 무예와 용맹이 남달리 빼어나다 하나 옛날의 경포와 팽월(둘다 한 고조 휘하의 맹장)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익덕과 겨룬다면 앞을 다툴 것이나 미염공의 절륜함에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군께서는 형주를 지키는 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터인데 그곳을 중히 여기지 않고 서천으로 왔다가 만약 형주에 뜻하지 않은 변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바라건대 부디 밝게 헤아려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공명의 글은 관우에게 성도에 오는 걸 말리는 내용이었으나 관우의 자부심을 상하지 않게 한껏 그 무예를 추켜세운 것이었다. 공명이 무예로서는 천하에 높은 자긍심을 두둔해 주고 마초와 겨루는 것을 말리기 위한 글이었다. 과연 공명의 생각대로 관우는 그 글을 보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걸 웃고는 말했다.

"공명은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군."

관우는 그 글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려 보게 하며 서천으로 가려는 생각을 버렸다.

이 무렵, 동오의 손권은 유비가 서천을 손에 넣고 유장을 공안을호 내쫓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손권은 기다리던 때가 왔다고 여기고 곧 장소와 고옹을 불렀다.

"전에 유비가 서천을 취하는 즉시 형주는 돌려 주겠다고 했었소. 이미 그가 파촉 마흔한 고을을 취했으니 이제야말로 형주를 되돌려 받아야 할 때요. 만약 그가 약속을 어긴다면 군사를 일으켜서라도 도로 찾아야 할 것이오!"

손권이 열띤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장소가 입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모처럼 동오가 평온해진 터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합니다. 제가 계교를 써서 유비로 하여금 형주를 두 손으로 받들어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장소가 그렇게 말하자 손권이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어떤 계책을 써서 형주를 도로 뺏겠다는 말이오?"

"유비가 믿고 있는 사람은 오직 제갈량입니다. 그런데 그의 형인 제갈근이 지금 동오에 벼슬을 살고 있습니다. 그의 가솔들을 모두 감옥에 잡아두고 제갈근만 서천으로 보내시어, 아우 제갈공명으로 하여금 형주를 반환하도록 하게 하십시오. '만약 형주를 반환하지 않으면 반드시 내 가솔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제갈근이 말하면 제갈공명도 형제의 정리를 생각하여 마다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갈근은 어질고 미더운 군자이오. 내 어찌 그의 가족을 잡아 가둘 수가 있겠소?"

손권이 선뜻 승낙을 하지 못하자 장소가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갈근에게 계략임을 밝히면 그도 안심하고 다녀올 것입니다."

장소가 그렇게 말하자 손권은 그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제갈근에게 계책을 일러 준 뒤 곧 그의 가솔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다. 제갈근에게는 글 한 통을 써서 주어 서천으로 보냈다.

서천으로 떠난 제갈근은 성도에 이르자 먼저 유비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가 온 것을 알렸다. 유비는 동오에서 제갈근이 왔다는 전갈에 저으기 놀라며 공명을 불러 물었다.

"군사의 형님께서 무슨 일로 오셨겠소?"

공명도 뜻밖이라는 얼굴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형주를 도로 내놓으라는 말씀을 하러 오셨을 것입니다."

그 말에 유비는 짐작했던 터였으나 걱정스런 얼굴로 공명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겠소?"

"이렇게 하시면 되겠습니다."

공명은 목소리를 낮추어 귀엣말로 유비에게 대답할 말을 가만히 일러주었다. 공명은 그 길로 성 밖으로 나가 형을 맞아들였으나 자기 집이 아닌 빈관으로 모셨다. 빈관에 든 제갈근에게 공명이 오랜만에 형에게 절을 올리자 제갈근은 대뜸 목을 놓아 울었다. 공명이 짐짓 놀라운 표저을 지으며 물었다.

"형님께서는 어인 일로 이토록 슬피 우십니까?"

"내 집안 식구들이 이제 모두 죽게 되었구나."

제갈근이 이렇게 대답하며 가솔들이 옥에 갇힌 사실을 말하자 공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형을 안심시켰다.

"혹시 형주를 되돌려 받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닙니까? 저로 인해 형님 댁 가솔이 화를 당한대서야 되겠습니까? 형님은 너무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제가 방책을 세워 곧 형주를 동오로 되돌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무슨 걱정이겠느냐?"

제갈근은 뜻밖에도 일이 쉽게 풀려 나가자 눈물을 거두고 밝은 얼굴로 공명에게 말했다. 제갈근은 공명과 함께 곧 유비를 만나 보고 손권의 글을 전했다. 유비가 그 글을 읽고 나더니 대뜸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손권이 제 누이를 내게 시집 보내고 내가 형주에 없는 틈을 타 몰래 데려갔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정리나 도리를 아는 사람의 짓거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당장이라도 서천의 군사를 크게 일으켜 강남을 짓밟아 한을 풀려는 참인데, 뭐 이제 형주를 돌려 달라구?"

유비가 그렇게 소리치자 제갈근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자 공명이 울며 땅에 엎드리더니 빌었다.

"오후가 저의 형님 식구를 모조리 옥에 가두었다 합니다. 만일 형주를 돌려 주지 않으면 형님의 식구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무슨 낯으로 홀로 이 세상에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제 낯을 보아서라도 형주를 동오에 돌려 주시어 우리 형제간의 정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공명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간곡히 말했다. 그러나 유비는 공명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은 채 성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공명은 더욱 슬피 울며 거듭 애원했다. 그러자 유비도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군사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군사의 낯을 보아서 우선 형주의 절반을 돌려 주기로 하겠소. 장사, 계양, 영릉 세 군을 돌려주리다."

"그러시다면 그 내용을 문서로 남겨 주십시오. 운장에게 글을 써 주시어 세 군을 돌려주도록 하십시오."

유비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명이 그렇게 청했다. 유비는 이번에도 마지못한 듯 붓을 들어 관우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유비가 그 글을 제갈근에게 주며 일렀다.

"자유(제갈근)는 형주에 가거든 내 아우 운장에게 좋은 말로 청을 드리시오. 아우는 성미가 불같아 나도 함부로 말을 못하는 터이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시오."

유비가 관우에게 슬며시 이 일을 떠넘겼다. 제갈근은 형주의 반이라도 되돌려 받게 된다면 동오의 손권에게 할 말이 있게 되는 셈이었다. 이에 유비의 글을 받아들고 그날로 성도를 떠나 형주로 향했다. 제갈근이 형주에 이르자 관우는 그가 군사 공명의 형이라 중당으로 맞아들였다. 손님과 주인이 각기 예를 올린 후 제갈근은 유비의 글을 전하며 말했다.

"황숙께서는 우선 세 군을 동오로 되돌려 주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장군께서는 그 땅을 돌려주시면 돌아가서 오후를 뵙게 될 때 제 얼굴이 서겠소이다."

그러나 관우는 유비의 글을 읽더니 얼굴색부터 달리하며 소리쳤다.

"나와 형님은 도원에서 형제의 의를 결의할 때부터 쓰러져 가는 한실을 바르게 받들자고 맹세했소. 형주로 말하자면 원래부터 대한의 땅이거늘 어찌 한 치의 땅일지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남에게 내어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장수는 밖에 나와서는 임금의 명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옛말도 있소이다. 비록 형님의 글을 받아오시기는 하였으나 나는 형주를 내 줄 수가 없소이다."

그 소리를 듣자 제갈근은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오후는 나의 가솔들을 모조리 옥에 가두고 형주를 되돌려 받지 못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유비의 글을 보고도 한마디로 잘라 거절하자 제갈근은 관우에게 애원하며 매달렸다. 그러나 관우는 제갈근의 말에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 수작은 모두 손권이 꾸민 계교이오. 그런 잔꾀에 누가 속아 넘어갈 줄 아시오?"

"장군께서는 어찌 그리 경우가 없으십니까? 황숙께서 이미 허락하셨으며 제 아우의 낯을 보아서라도 어찌 그리 무정하게 물리칠 수 있소이까?"

다급한 제갈근이 관우를 원망했다. 그러자 관우는 칼에다 손을 얹으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실없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이 칼은 원래 무정할 뿐이오."

그러자 관우의 뒤에 시립해 있던 관평이 나서며 관우를 말렸다.

"이분은 군사님의 백씨이십니다. 군사의 낯을 생각하셔서라도 아버님께서는 부디 고정하십시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격으로 관우가 그렇게 나오니 제갈근은 더 이상 말도 붙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제갈근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쫓겨나듯 그 자리를 물러나 다시 서천으로 향했다. 관우에게 쫓겨나오다시피하여 동오로 돌아갈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아우 공명에게 이 일을 호소하려고 서천으로 돌아오자 공명은 이미 지방으로 순시를 나가고 없었다. 제갈근은 유비를 찾아보고 눈물을 흘리며 형주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유비는 관우가 제갈근을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짐작했던 일이라는 듯 관우를 두둔하며 듣기 좋은 말로 제갈근을 달랬다.

"원래 내 아우란 사람이 그렇게 성미가 급하니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오. 공은 잠시 동오로 돌아가 계시도록 하시오. 내가 동천의 한중 여러 고을을 얻으면 운장을 불러 그 쪽을 지키게 한 다음 그때 형주를 돌려주겠소."

제갈근이 들으니 기가 막힌 소리였다. 처음 형주를 절반이라도 돌려주겠다는 소리도 결국 그렇게 되니 빈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유비에게 더 이상 떼를 쓸 처지도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답답한 마음을 달래지도 못한 채 그 자리를 물러나 동오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동오로 돌아온 제갈근은 오주 손권에게 서천과 형주에서 있었던 일을 전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손권이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자유는 이번에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공연히 헛수고만 했구려. 그게 모두 제갈량이 꾸민 계교가 아니오?"

손권이 발을 탕탕 구르며 그렇게 외쳤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우는 유비에게 울면서 두 번 세 번 청을 들여 세 군을 돌려 받기로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운장이 끝내 고집을 부려 일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제갈근이 기겁을 하며 손권의 말을 부인했다. 제갈근이 그렇게 말하자 손권은 화를 누그러뜨리고 더 이상은 그 일을 묻지 않고 제갈근의 가솔들을 감옥에서 풀어 주게 하더니 물었다.

"이미 현덕이 세 군을 돌려 주기로 했다니 우리가 장사, 영릉, 계양 세 고을에 우리 관원을 보내 관장하는 것이 어떻겠소?"

"주공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제갈근은 손권의 말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손권은 곧 동오의 관원을 각 고을의 태수로 명해 세 군으로 보냈다. 그러나 세 군으로 갔던 관원들은 모두 다 도로 쫓겨 돌아왔다.

"관운장이 우리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도로 돌아가자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하여 급히 도망쳐오는 길입니다."

그 말을 듣자 손권은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홧김에 노숙을 불러들여 꾸짖었다.

"자경은 지난날 현덕을 위해 보증까지 서주고 형주를 빌려주었소. 그런데 이제 현덕이 서천 땅을 차지했는데도 돌려주지 않고 있소. 그런데도 보증을 선 그대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작정이시오?"

노숙도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를 리 없었다. 손권이 크게 화를 내며 책망하자 그 동안 생각해 둔 바가 있는지라 얼른 입을 열었다.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주공께 아뢰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떤 계책이오?"

손권이 한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강의 상류인 육구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잔치를 열어 관운장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관운장이 오면 좋은 말로 달래 보되 듣지 않으면 도부수들을 매복시켰다가 죽여 버리면 됩니다. 만약 관운장이 오지 않으면 그때는 즉시 군사를 내몰아 형주를 빼앗도록 하겠습니다."

손권이 들으니 한 번쯤 베풀어 볼 만한 계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비가 서천에 있는 틈을 타 군사를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만약 관우가 계책에 떨어지면 힘들이지 않고도 형주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손권은 두말 없이 노숙의 말에 따랐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뜻과도 같소. 즉시 그렇게 하시오."

손권이 노숙의 말을 좇으려 하는데 감택이 나섰다.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운장은 세상이 다 아는 범 같은 맹장입니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도리어 그에게 큰 해만 당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그러다가 형주는 언제 되돌려 받는다는 말인가?"

손권은 버럭 화부터 내며 감택의 말을 물리친 후 노숙에게 그 계책을 행하도록 재촉했다. 이에 노숙은 육구로 가서 여몽, 감녕을 불러 의논했다.

"영채 바깥 강가 임강정에 잔치를 베풀고 관운장을 청하기로 했소. 그가 올 경우를 대비하여 도부수를 매복시키도록 하시오."

노숙은 계책을 자세히 일러 둔 뒤 말 잘하는 사람을 뽑아 관우를 청하는 글을 써서 강을 건너게 했다. 노숙이 보낸 사자가 강가에 이르자 관평은 그를 붙들어 온 뜻을 묻고 곧 형주로 데려가 관우를 뵙게 했다. 사자가 관우를 보자 엎드려 절하며 잔치에 청하는 뜻을 간곡히 고한 후 노숙의 글을 올렸다. 관우가 그 글을 다 읽고 나더니 주저하는 기색 없이 사자에게 일렀다.

"자경이 잔치를 열어 청하니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내일 내가 잔치에 갈 테니 그대는 먼저 돌아가도록 하라."

관우가 선뜻 그렇게 말하며 사자를 돌려보내자 관평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지난번 제갈근과의 세 고을 문제로 동오의 군사들을 쫓아 보낸 터라 아무래도 노숙이 좋은 뜻으로 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님은 어찌하여 선뜻 가신다고 허락하셨습니까?"

관평의 물음에 관우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낸들 어찌 그들의 속을 모르겠느냐? 이번에 잔치를 열어 나를 부른 것은, 제갈근이 돌아가 세 군을 되돌려 받지 못한 것은 나 때문이라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노숙은 육구에 둔병하고 나를 불러 형주를 돌려 달라고 달래리라. 그런데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은 내가 두려워 오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나는 내일 10여 명만 데리고 칼 한 자루를 찬 채 작은 배를 타고 가서 노숙이 내게 어떻게 하나 지켜보리라."

그러자 관평은 아무래도 호랑이의 소굴로 드는 것 같아 다시 간했다.

"아버님께서는 만금같이 귀하신 몸으로 어찌하여 몸소 호랑이의 굴속 같은 곳으로 드시려 하십니까? 이러시다가는 큰아버님의 무거우신 당부를 저버리게 되실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관우는 그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은 채 여전히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수천 수만의 창칼이 물결치고 돌과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싸움터에서도 홀로 말을 달리며 무인지경 드나들 듯했다. 그런데 어찌 강동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두려워하겠는가?"

실로 태산처럼 드높은 자부심이 아닐 수 없었다. 관우의 의기가 누그러들지 않자 곁에 있던 마량이 보다못해 나섰다.

"비록 노숙이 장자(덕망이 있음)의 풍도를 지닌 사람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그도 다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딴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를 살피시어 가벼이 몸을 움직여서는 아니 됩니다."

관우는 이미 마음을 정한 터라 마량의 말도 듣지 않았다.

"옛날 전국 시대에 조나라 사람 인상여는 닭 한 마리의 목을 비틀만 한 힘도 없었으나, 민지 땅 모임에서 강국인 진의 군신 보기를 티끌 보듯 했소. 그런데 하물며 만인을 대적하는 법을 깨우쳐 온 내가 아니오? 이미 허락한 일을 저버려 믿음을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관우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마량이 뒷일을 대비토록 일깨웠다.

"그러시다면 장군께서 가시기 전에 미리 대비책을 세워 두셔야 할 것입니다."

관우가 그 말까지는 물리칠 수 없는 듯 마량에게 말했다.

"관평으로 하여금 빠른 배 10여 척에 헤엄에 능한 수군 5백을 태워 강 위에 머물고 있도록 해 주시오. 그리고 강가에서 붉은 기를 흔들거든 곧 배를 그리로 보내도록 해 주시오."

관우의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관평은 그 길로 나가 날랜 군사를 뽑으며 채비를 서둘렀다. 그때, 관우를 만나 보고 돌아간 동오의 사자는 노숙에게 가서 관우가 잔치에 참석할 것을 허락했다고 알렸다. 노숙은 여몽을 불러 의논했다.

"관운장이 내일 잔치에 오겠다고 하니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가 군마를 이끌고 온다면 저는 감녕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려 강언덕 좌우에 매복해 있다가 포 소리를 군호로 그 군사를 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군사를 거느리지 않았다면 도부수 50여 명만을 뜰 뒤에 숨겨 두었다가 기회를 보아 그를 죽여 버리면 됩니다."

노숙은 여몽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계책을 펼 채비를 하도록 했다.

다음 날이 되자 노숙은 사람을 시켜 강 언덕에서 관우가 오는 것을 지켜보게 했다. 진시(상오 7~9)가 좀 지나서 강 저쪽에 한 척의 배가 나타났는데 몇 사람의 사공만 보이고 배 한가운데는 큰 글씨로 ''이라고 쓴 붉은 기가 보였다. 관우의 배가 틀림없는지라 배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동오의 사람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살피고 있었다. 배가 가까이 오는데 보니 관우는 초록빛 전포에 푸른 머릿수건을 두르고 배 위에 앉아 있었는데 당당한 풍채가 자못 위엄이 있었다. 그 곁에는 주창이 큰 칼을 받쳐들고 있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여덟이나 아홉으로 보이는데 모두 관서의 장사들인 듯 우람한 체구에 각기 칼을 차고 있었다.

이윽고 관우가 강가에 이르자 노숙은 뜰 안으로 맞아들였다. 노숙은 뜻밖에 군사의 호위도 없이 온 그를 보며 놀라는 한편 의심이 부쩍 들었다. 군사를 거느리지도 않았으면서 전혀 이쪽을 경계하는 기색이 없자 오히려 노숙이 경계하는 마음이 일었다. 노숙과 관우가 정자에 오르자 서로 예를 주고받은 뒤 서로 잔을 권했다. 그러나 정작 잔치가 시작되자 노숙은 관우를 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자신의 계책으로 관우를 죽이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우는 태연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이윽고 술이 얼근히 오르자 노숙도 굳었던 마음이 풀려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장군께 한 마디 드릴 말씀이 있으니 들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관우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지난날 형님되시는 유황숙께서 이 사람을 중간에 넣으시어 우리 주공에게 형주를 빌려가시면서 서천을 얻으면 돌려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미 서천을 취하셨는데도 형주를 돌려 주시지 않으시니 이는 믿음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은 나랏일이니 이런 술자리에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오."

노숙이 말머리를 꺼내자 관우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며 노숙이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대로 입을 다물 노숙이 아니었다.

"우리 주공께서는 보잘것없는 강동에 계시면서도 형주 땅을 빌려 드린 것은 그 당시 황숙께서 싸움에 져서 멀리 쫓겨나시어 발붙일 땅이 없음을 딱하게 여기신 까닭이었소. 황숙께서는 이제 익주를 얻으셨으니 마땅히 형주를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오. 황숙께서는 그나마 우선 세 군만을 돌려 주시겠다고 허락하시었소. 그런데 장군께서는 그것마저 돌려 줄 수 없다 하시니 어찌 도리에 맞는 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노숙이 사리를 따져 가며 관우에게 쏘아붙였다. 관우도 문득 엄한 얼굴로 노숙에게 말했다.

"적벽 싸움 때 우리 형님께서는 몸소 비 오는 듯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조조를 쳐부쉈소. 그런데도 어찌 헛고생만 하시고 조그만 땅 한 조각도 가져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이오. 그대는 그 공은 생각지 아니하고 이제 그 땅마저 되찾으려 하시오?"

"그렇지는 않소이다. 그러나 장군께서는 황숙과 더불어 지난날 장판의 싸움에서 지자 계책은 궁한 데다 힘도 다해 멀리 달아나려 하셨소. 이에 우리 주공께서 의지할 데 없는 황숙을 딱하게 여기시어 선뜻 형주를 빌려 드린 것은 땅이 아깝지 않아서가 아니었소이다. 그 땅에 의지해 뒷일을 도모하시라는 우리 주공의 호의를 생각지 않으시고, 이미 서천을 얻으시고도 형주에 그냥 눌러앉아 계시니 이는 탐심에 타 의를 저버리는 것이니 실로 남의 비웃음을 살까 걱정이오. 장군께서는 부디 이를 살펴 주시기 바라오."

노숙이 관우의 말을 되받으며 따지고 들자 관우가 노숙의 말꼬리를 잘라 버렸다.

"그 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오.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그러나 노숙은 물러서지 않고 관우의 말꼬리를 붙들고 공세를 취했다.

"내가 듣기에 장군께서는 유황숙과 함께 도원에서 의맹을 할 때 죽고 살기를 더불어 하기로 하셨다고 하였소. 그러니 황숙의 일이 곧 장군의 일이나 다름이 없을 터인즉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관우는 원래 말재주에 능한 장수가 아닌데다 정곡을 찌르는 노숙의 말이 이어질수록 할 말이 궁해졌다.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주인의 몰리는 형세를 보다 못해 뜰 아래에서 주창이 소리쳤다.

"하늘 아래의 땅은 오로지 덕이 있는 이가 차지하고 이를 다스리게 마련이거늘 어찌 그대들 동오만이 차지해야 한다는 말인가?"

정자 안이 쩡쩡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관우는 짐짓 놀란 듯 낯색까지 변하며 벌떡 일어나 주창이 받쳐 들고 있는 큰 칼을 빼앗아 들며 소리쳐 꾸짖었다.

"나라의 중대한 일을 논하거늘 네가 어찌 감히 끼여들려 하느냐? 어서 나가도록 하라!"

관우가 눈짓을 보내며 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꾸짖자 주창도 얼른 관우의 뜻을 알아차렸다. 주창은 멋쩍은 듯이 밖으로 나가자 강 언덕으로 달려가 붉은 기를 휘둘렀다. 저쪽 편 강 위에서 붉은 기가 흔들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관평이 쏜살같이 배를 몰아 강동의 강가에 닿았다. 주창이 자기의 뜻을 알아채고 밖으로 나가자 관우는 오른손에는 주창에게서 뺏은 칼을 들고 왼손으로 노숙의 팔목을 잡으며 몹시 취한 체하며 입을 열었다.

"공은 오늘 나를 잔치 자리에 청한 것이니 다시는 형주 일을 입에 담지 않도록 합시다. 이미 내가 취했으니 혹시 술김에 목소리를 높이다 옛정을 해칠까 두렵소이다. 내가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공을 우리 형주 땅으로 청할 터인즉 그때 다시 의논하면 될 것이오."

관우가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노숙의 팔을 잡고 이끌고 가는데 그 억센 힘에 마치 어린애가 끌려가듯 강변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노숙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 관우가 이미 자신들의 계책을 알고 주창을 내보낸 후 술 취한 척하며 자신을 볼모로 잡아 강가로 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우가 오른손에 큰 칼을 움켜쥐고 있어 몸을 빼쳐 달아날 수도 없어 그 억센 힘에 넋 나간 사람처럼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여몽과 감녕이 이 모양을 보고 군사를 휘몰아 덮칠까 했으나 칼을 든 관우에게 노숙이 잡혀 있으므로 그가 다칠 것을 염려하여 감히 군사를 내몰지 못했다. 관우는 관평이 타고 온 배 가까이에 이르자 그제서야 얼른 노숙의 손을 놓고 뱃머리에 오르며 작별인사를 했다.

"자경은 잘 있으시오. 후한 대접 잊지 않으리다!"

관우는 그 말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나갔다. 노숙은 멍하니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관우가 탄 배는 벌써 바람을 타고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감녕, 여몽의 군사들이 달려 나와 활을 쏘았으나 이미 소용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 동오로 찾아온 관우를 돌려 보낸 노숙은 여몽을 불러 다시 의논했다.

"계책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우선 주공께 알리시고 군사를 일으켜 관운장과 싸워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노숙의 물음에 여몽이 대답했다. 노숙도 그 말에 따라 즉시 손권에게 사람을 보내 관우를 놓쳐 보낸 일을 알렸다. 손권이 그 보고를 받고 펄쩍 뛰며 크게 노한 채 영을 내렸다.

"이제는 군사를 일으켜 형주를 쳐야겠으니 모든 관원들을 불러들이도록 하라!"

손권이 여러 관원들을 불러들여 형주 칠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조조가 다시 30만 대군을 이끌고 강남으로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 소리에 손권은 깜짝 놀라며 급히 노숙에게 사람을 보내 영을 전하게 했다.

"형주를 그냥 두고 그 군사를 합비와 유수로 옮겨 조조를 막도록 하라!"

조조가 진병한다는 소리에 형주를 치려던 동오의 군사들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조조를 막으러 합비와 유수로 향했다.

 

조조 복 황후를 때려 죽이다

그 무렵 조조는 삼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지난번 적벽에서 당한 치욕을 씻고자 남정길에 오르려 했다. 그러자 참군 부간이 글을 올려 아뢰었다.

제가 듣건대 '무력을 쓰려 할 때에는 먼저 위엄을 보여야 하며, 문으로써 일을 시작하려면 먼저 덕을 닦아, 위엄과 덕을 아울러 행한 이후라야 왕업을 이룰 수 있다' 했습니다. 지난날 천하가 크게 어지러울 때 명공께서는 무를 쓰시어 열에 아홉은 평정하시었으나, 아직 왕명에 따르지 않는 곳으로는 오와 촉이 있습니다. 오에 거친 장강이 가로놓여 있고, 촉은 험한 산이 가로막고 있으니 위엄만으로는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먼저 문과 덕을 닦은 후에 무위를 내세우셔야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잠시간 갑옷과 투구를 걸어 두시고 무기를 눕혀 군사를 쉬게 함과 아울러 선비를 기르시다가 때를 기다려 움직여야 합니다. 지금 수십만의 대군을 일으켜 장강으로 갔다가 만약 적들이 그 험한 지세에 의지해 깊이 숨어 있어 우리 군사들이 능히 그 힘과 기계를 쓰지 못해 우리의 권위를 떨쳐 보이지 못한다면 하늘 같은 위엄만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부디 깊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조조는 그 글을 읽어 보자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마침내 남쪽을 치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남정 출진을 뒤로 미루었다. 그 대신 새로 문부 제도를 설치하여 여러 곳에 학교를 세우고 선비들을 예를 다해 맞이하여 높이 대했다. 조조가 부간의 말을 좇아 크게 문덕을 일으키자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시중 왕찬과 두습, 위개, 화흡 등은 조조를 위왕으로 받들려고 했다.

"조 승상은 위의 왕위에 오르신다 해도 조금도 과만하지 않을 분이시오."

그러나 중서령으로 있는 순유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그들을 찾아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오. 승상께서 벼슬이 위공에 이르렀으며, 그 영화는 구석을 더했으니 그 지위가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을 지경이오. 그런데 이제 다시 왕위에까지 높인다면 이는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오."

순유가 그렇게 말하며 반대하자 그들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데 아첨배들의 중상이 가미되어 이 말이 조조의 귀에 들어갔다. 앞으로 제위에 올라야겠다는 야심이 마음속 깊이 불타고 있던 조조는 순유가 반대하고 나서자 크게 노했다.

"이 사람이 순욱처럼 되고 싶다는 말인가!"

조조는 그 이후부터 순유를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는 또 한 사람의 장애물로밖에는 보지 않게 되었다. 순유도 조조가 한 말을 전해 듣자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날 순욱이 조조에게 구석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다 결국 조조의 미움을 사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는가. 순유는 조조의 엉뚱한 야심을 위해 이날까지 일해 온 자신에 대한 분노와 우울한 마음에 휩싸여 번민하다 그만 병이 나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순유는 자리에 누운 지 열흘 만에 끝내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쉰여덟이었다. 막상 순유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조조는 자뭇 애통해했다.

'아깝구나, 그도 지금까지 나를 도운 으뜸가는 공신의 한 사람이었는데. . .'

조조는 순유를 성대히 장사지내 주었다. 그리고 위왕에 오르려던 마음을 버리고 말았다. 지난날 구석을 받으려 했을 때 그로 인해 순욱이 죽고 이번에는 위왕에 오르려던 자신의 야심으로 인해 순유마저 죽게 되자 다시는 그 일을 입에 담지 못하게 했다. 이 무렵 조조의 위세는 이미 조정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자는 전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는 조조가 칼을 찬 채 대궐로 들어가니 헌제는 그때 복 황후와 함께 앉아 있다가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헌제도 놀란 얼굴로 조조를 바라보았다. 조조가 뻣뻣이 선 채로 헌제에게 말했다.

"손권과 유비가 제각기 한 고을씩을 차지한 채 조정의 명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겁에 질려 있던 헌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모든 일은 위공이 알아서 처결하시오."

그러자 조조가 문득 성난 얼굴로 천자에게 대꾸했다.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 바를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그러시니 바깥 사람들은 모두 이 조조가 폐하를 속인다고 수군거리게 됩니다."

조조는 헌제가 지나치게 주견을 내세우지 않아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어렵게 만드는 데 대한 노기가 치솟았다. 그런 조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헌제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어찌하여 위공은 그런 말씀을 하시오? 공이 나를 보좌해 준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소. 그러나 그렇지 못하겠거든 은혜를 베풀어 제발 나를 가만히 버려두시길 바랄 뿐이오."

헌제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은 조조는 무기력한 그 모습에 더욱 화가 치솟았다. 눈을 부릅떠 헌제를 노려보다니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대궐을 빠져 나갔다. 그 모양을 본 천자의 조신들이 몸을 떨며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천자와 복황후도 두려움과 불쾌감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좌우의 신하 중의 하나가 헌제에게 아뢰었다.

"근자에 듣자 하니 위공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일이 꾸민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머지않아 천자의 자리도 도적질하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말을 들은 천자와 복 황후는 다시 두려움과 분함에 휩싸여 서로 손을 잡고 목놓아 울며 탄식했다.

"실로 하늘 아래 이토록 기막힌 일이 있다는 말인가?"

이윽고 복 황후가 눈물을 거두더니 천자에게 아뢰었다.

"저의 친정아버지 복완은 항상 조조를 죽여 조정의 화를 없애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몰래 글 한 통을 써서 저의 아비에 보내 그 일을 도모할까 합니다."

복 황후가 뜻밖에도 놀라운 말을 하자 천자는 목소리를 낮추며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지난날 국구 동승이 바로 그 일을 꾸미려다가 계책이 새어나가 오히려 죽임을 당했소. 이번에 또 일이 어그러진다면 이제는 이 몸과 황후도 끝장이 나고 말 것이오."

그러나 조조에게 원한이 서린 복 황후는 천자의 말에도 결코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아침저녁을 가릴 것 없이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하니 이래 가지고서야 어찌 살아있는 목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살피건대 환관들 중에 이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으로 목순이란 충의로운 이가 있습니다. 그에게 글을 주어 저의 아비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헌제도 목순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여겨 그를 불러들이게 했다. 이윽고 목순이 오자 헌제는 좌우 사람들을 내보낸 다음 그를 병풍 뒤로 불러들여 눈물을 흘리며 당부했다.

"역적 조조란 놈은 제가 스스로 위왕이 되려고 한다 하니 머지않아 천자의 자리까지 뺏으려 할 것이다. 이 몸은 황후의 아버지 복완을 시켜 이 역적을 없애려 하나 사방이 온통 그의 심복들로 차 있으니 이 명을 믿고 전하게 할 만한 사람이 없구나. 그리하여 그대에게 황후의 밀서를 맡겨 복완에게 전하려 하니 바라건대 그대의 충의를 믿고 있는 이 몸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목순도 천자와 황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근신이었다. 천자의 명을 눈물로 받들며 답했다.

"신은 폐하의 크신 은혜를 입고 있는 몸입니다. 죽기를 마다 않고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겠사오니 제게 밀서를 맡겨주십시오."

이에 복 황후는 붓을 들어 곧 밀서를 써서 목순에게 주었다. 목순은 만약을 대비하여 궁리하던 끝에 그 밀서를 머리 속에 감추고 가만히 대궐 문을 나섰다. 목순은 그 길로 복완의 집으로 가 글을 전했다. 복완이 보니 그 글이 황후의 친필이므로 읽기를 마친 후 목순에게 말했다.

"지금으로선 조조의 심복이 조정에 깔려 있으니 급히 이 일을 도모하기는 어렵네. 앞으로 강동의 손권과 서천의 유비가 반드시 각기 군사를 일으킬 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조조도 그들을 치러 갈 것이리라. 그때를 틈타 조정에 있는 충의로운 신하들을 모아 의논한 다음 안팎에서 힘을 합해 이 일을 도모하도록 하세."

복완의 말에 목순도 생각해 둔 바를 밝혔다.

"그러시다면 황장께서는 다시 황후께 답신을 올리고 밀조를 받아내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은밀히 사람을 동오와 촉 땅으로 보내 군사를 일으키게 하시고, 안에서 내응하여 역적을 쳐 폐하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복완은 목순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곧 황후에게 보내는 글을 써 주었다. 목순은 이번에도 그 글을 상투 속에 감춘 채 대궐로 향했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 중에는 복완이 염려했듯 조조의 심복이 많았다. 그 중 목순을 살핀 자가 있어 의심쩍은 거동을 조조에게 가만히 알렸다.

"목순이 천자를 뵙고 대궐을 빠져나가 복완의 집으로 갔습니다."

지난날 동 귀비의 아비인 동승이 모반을 꾀한 이래 외척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던 조조였다. 언제나 심복에게 명해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던 조조가 그 말을 듣자 몸소 대궐 문 앞으로 가 목순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오래지 않아 목순이 대궐 문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조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 리 없는 목순이 대궐 문을 들어서다 조조와 마주쳤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인가?"

조조가 매서운 눈초리로 목순을 바라보며 묻자 목순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애써 태연한 얼굴로 둘러댔다.

"황후께서 편찮으셔서 의원을 부르러 갔었습니다.

조조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초리로 목순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럼 부르러 갔던 의원은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가?"

"아직 이곳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목순이 그렇게 둘러댔으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조조는 더는 묻지 않고 거느리고 왔던 군사들에게 명했다.

"이 사람의 몸을 뒤져 보도록 하라!"

조조의 명에 따라 군사들이 목순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옷 안은 물론 신발까지 뒤지며 살펴보았으나 이상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조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더 이상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알았네. 그만 가보게."

조조는 하는 수 없어 목순을 놓아 주었다. 목순은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난 듯 급히 옷매무새를 갖춰 입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였다. 홀연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목순이 머리에 쓰고 있던 사모가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졌다. 사모가 떨어지자 목순은 깜짝 놀라며 황망히 그걸 주웠다.

"그 사모를 이리 가져오게."

조조는 목순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사모를 가져오게 하여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모 안에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조조가 사모를 돌려주며 얼핏 목순의 머리를 보았다. 조조가 그의 머리 쪽으로 눈길을 주자 목순은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목순은 얼른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모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눌러썼다. 그러나 목순이 머리를 흐트리지 않으려고 가만히 사모를 눌러 쓴다는 것이 얼결에 그만 거꾸로 돌려쓰고 말았다. 육감이 빠른 조조였다. 목순의 당황스런 태도와 머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것을 보고 군사들에게 다시 명했다.

"저자의 머릿밑을 뒤져 보아라!"

복 황후는 물론 한실의 운명이 좌우되는 순간이었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목순의 사모를 벗기고 머리를 뒤졌다. 목순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군사들을 뿌리치려 했으나 소용 없는 일이었다. 결국 머리 속을 뒤지자 복완이 황후에게 깨알 같은 글씨로 써 준 글이 나왔다. 유비 손권과 손을 잡고 안팎에서 칠 수 있도록 밀조를 내려 달라는 글이었다. 조조는 그 글을 읽자 분노로 치를 떨었다. 조조는 목순을 밀실에 가두고 문초를 했다. 그러나 목순은 갖은 고문을 다 해 보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조조는 목순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그날 밤에 갑병 3천을 뽑아 복완의 집을 에워싼 후 영을 내렸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말고 삼족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끌어 내어 옥에 가두고 집 안을 샅샅이 뒤져라."

조조의 영에 따라 갑병들이 복씨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는 한편 집안을 샅샅이 뒤져 황후의 친필 밀서를 찾아내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조조는 어림군의 대장 극려에게 명을 내려 황후의 옥새를 거두어 오게 했다. 이때 천자는 궁밖에 있다가 극려가 3백 갑병을 거느리고 들이닥치자 크게 놀랐다.

"무슨 일인가?"

"위공의 명을 받들어 황후의 옥새를 거두러 왔습니다."

극려가 무엄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말했다. 그 소리에 천자는 얼굴색이 달라지며 비밀이 탄로난 것임을 알았다. 천자는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정신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럴 동안 극려는 후궁에 이르렀다. 복 황후가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극려는 복 황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옥새를 맡고 있는 궁녀를 불러 옥새를 빼앗은 뒤 후궁을 빠져나갔다. 복 황후는 그걸 보자 일이 탄로난 것임을 깨달았다. 복황후는 두려움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 전각 뒤의 초방 사이에 있는 좁은 이중벽 속에 숨었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상서령 화흠이 무장한 군사 5백을 거느리고 곧바로 후원으로 들어와 궁녀들에게 호통쳤다.

"복 황후는 어디 있느냐?"

궁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벌벌 떨면서도 모두 한결같이 모른다고 대답했다. 화흠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황후가 거처하는 잠긴 방문을 부수고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황후는 보이지 않았다. 전각이란 전각은 전부 다 뒤져도 황후가 보이지 않자 화흠은 벽과 벽 사이의 틈새가 있음을 아는 터라 군사들에게 명해 벽을 허물게 했다. 벽을 허물자 그 속에 복 황후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화흠은 황후를 보자 대뜸 머리채를 움켜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황후가 머리채를 잡힌 채 처참한 몰골로 질질 끌려 나오며 애원해 빌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그러나 화흠은 눈을 부라리며 황후를 꾸짖을 뿐이었다.

"스스로 위공께 가서 빌어라."

황후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머리는 풀어 흐트러진데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는데 화흠은 머리채를 고삐처럼 잡고 짐승을 끌고 가듯 복 황후를 끌고 갔다. 이를 보던 궁인들은 화흠의 무도한 행동에 치를 떨지 않는 이가 없었다. 벼슬길에 나오기 이전 원래 화흠은 빼어난 글로 일찍부터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다. 그 당시 재명을 드날리던 병원. 관녕과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사람들은 그들 세 사람을 한 마리 용이라 일컬으며 칭송했다. 그중에서도 화흠은 용의 머리요, 병원은 배, 그리고 관녕은 용의 꼬리에 비유했으니, 셋 중에서도 화흠의 재주를 더 높이 우러렀다. 그러나 세 사람의 친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 사람의 친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화흠의 그 빼어난 글솜씨와는 다른 그의 성품 탓이었다. 벼슬길에 오르기 전의 어느 날, 관녕과 화흠이 뜰에서 채소 씨앗을 심고 있었는데 호미질을 하는 중에 땅속에서 금덩이가 하나 나왔다. 관녕은 금덩이를 보았으나 재물을 탐하지 않는 선비답게 본체만체 호미질을 계속했다. 그러나 화흠은 금을 집어 들고 한참을 보다가 땅에 버렸다. 또 하루는 함께 글을 읽고 있던 중 대문밖에 귀인이 지나가지 벽제(벼슬아치의 행차 때 하인이 길을 여는 소리)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자 화흠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채 단정히 앉아 글만 읽고 있는 관녕과는 달리 그는 책을 내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가 한참동안 그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관녕은 화흠의 이런 행동을 보고 그가 재물과 벼슬욕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고 그를 비루하게 여기고 그 이후에는 더불어 지내지 않으며 친구로 사귀기를 마다했다. 그 이후 관녕은 글과 수양을 닦는 선비로서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일생을 보냈다. 관녕은 천하가 어지럽자 조조를 피해 요동 지방에 몸을 숨기고 한 누각에 기거하면서 머리에는 흰 관을 쓰고 한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했다. 뿐만 아니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조조의 나라인 위에 나가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항상 스스로가 죄인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화흠은 그 이후 벼슬을 얻기 위해 손권을 섬겼고, 다시 조조가 그 위세를 떨치자 그에게로 갔다. 벼슬에만 눈이 먼 화흠은 지난날 선비로서의 풍모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이 복 황후를 잡아내는 끔찍한 일도 서슴지 않게 된 것이었다. 뒷날 사람들은 화흠의 그와 같은 변신을 슬퍼하고 관녕의 선비로서의 절개를 우러르는 시를 지었다.

그날의 화흠 끔찍도 하구나

벽 허물고 황후 잡아가네.

악을 도와 범이 날개를 얻는 듯하니

용머리 그 재주, 천 년이 가도 욕뿐이네.

또한 화흠에 비해 관녕을 기린 시가 있다.

요동 땅에는 관녕루가 있으나

사람은 가고 빈 누각이나 이름만은 남았구나.

우습구나 부귀를 탐하던 화흠이여

흰 관 쓴 풍류에 어찌 비하리.

화흠이 황후를 끌고 외전으로 나오자 이 모양을 본 헌제가 전 아래로 내려와 황후를 안고 목을 놓아 통곡했다. 황후도 헌제를 얼싸안으며 소리높여 울부짖었다.

"이제 첩은 죽을 목숨이오니 다시는 폐하를 모시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옥체를 잘 지키시옵소서."

헌제도 목이 메었다.

"내 목숨도 언제 그렇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오. 이 몸이 원망스러울 뿐이오."

그러자 화흠이 무엄하게도 황제와 황후를 향해 소리쳤다.

"위공의 분부가 계셨으니 지체할 수가 없소."

화흠은 군사들을 재촉하여 황후를 끌어가게 했다. 황후가 이끌려 가자 헌제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소리내어 울다가 곁에 서 있는 극려를 보며 탄식했다.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천제는 분함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 탄식과 함께 목이 메인 채 쓰러졌다. 극려는 좌우에 명을 내려 급히 헌제를 부축하여 궁 안에 들게 했다. 화흠이 복 황후를 끌어 조조 앞에 데리고 가자 조조는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며 꾸짖었다.

"내 너희들을 정성스런 마음으로 대했거늘 너희들은 도리어 나를 해치려 드는구나. 너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나를 해치려 들 것이다!"

복 황후는 조조의 칼날같이 매서운 눈을 보자 온몸에 맥이 빠지며 소름이 돋는 듯했다. 조조는 황후를 향해 마치 개를 꾸짖듯 한 후에 독기서린 목소리로 간단히 영을 내렸다.

"저년을 끌어 내어 때려 죽여라!"

조조가 그렇게 엄명을 내리자 좌우에 시립해 있던 갑병들이 채찍과 몽둥이로 개잡듯 패니 황후는 아픔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다 마침내 숨져버리고 말았다. 이미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조조였다. 황후를 때려죽인 조조는 이어 궁으로 들어가 황후의 소생인 두 왕자에게 독약을 먹여 죽여버렸다. 조조는 다시 황후의 아버지 복완과 목순, 그리고 2백여 가솔들을 모두 궁아문 네거리에 끌어 내어 목을 베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건안 1911월의 일이었다.

복 황후가 죽은 뒤로 헌제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식음을 전폐하자 조조가 헌제를 찾아왔다.

"폐하께서는 근심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신은 결코 딴 뜻을 품어서가 아닙니다. 신의 여식이 이미 폐하의 귀인이 되어 폐하를 모시고 있는데 원래 어질고 효심이 두텁습니다. 폐하께서는 이제 정궁으로 받아 주신다면 신의 큰 기쁨이겠습니다."

조조가 자기 딸을 황후로 천거하니 헌제는 그 말을 물리칠 도리가 없었다. 조조는 순유가 죽은 후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던 생각을 버린 대신 이에 딸을 황후로 삼아 국구가 되고자 했다. 스스로 국구가 됨은 두 번씩이나 황후가 국구와 모반을 꾀했던 화근을 잘라 버리는 일도 되었다. 헌제는 조조의 말을 좇아 건안 20년 정월 신년을 축하하는 설날에 그 딸을 정궁 황후로 맞아들였다. 모든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아무도 이를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조조는 그의 딸이 황후가 되고 자신은 국구가 되자 그 위세는 더 높아갔다. 그러자 전부터 오와 촉을 치기 위해 군사를 내려 했던 일에 대해 문무관원들을 불러모아 의견을 물었다.

"손권과 유비를 치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모사 가후가 조조에게 권했다.

"먼저 하후돈과 조인을 불러 함께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후돈과 조인은 그때 서쪽의 변방을 지키고 있었기에 가까운 동오와 서천에 대한 소식을 들어보고 계책을 짜자는 것이 가후의 뜻이었다. 그 말에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 사람을 보내 그 둘을 불러오게 했다. 하후돈보다 조인이 먼저 허도에 이르렀다. 조인이 허도에 이르니 밤이 깊었으나 급한 마음에 조조를 보러 갔다. 이때 조조는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나 조인은 조조와의 친족이라 거침없이 부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밖에 허저가 칼을 짚고 시립해 있다가 조인을 가로막았다.

"들어가실 수 없으십니다."

조인이 벌컥 성을 내며 부릅떴다.

"나는 같은 조씨로 삼촌을 뵈러 가는데 그대가 어찌 감히 나를 가로막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허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조인을 가로막은 채 말했다.

"장군께서는 비록 친족이시나 바깥을 지키시는 외번의 관원이요, 그러나 이 사람 허저는 비록 친족은 아니나 부중을 호위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지금 취해 당 위에 누워 계시니 함부로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허저가 꿈쩍도 않은 채 가로막고 서 있자 조인도 더 떼를 쓰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조조가 깨어난 후 허저의 허락이 떨어질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뒤에 이 말을 전해 들은 조조는 허저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허저는 과연 충성스런 사람이구나! 그와 같은 자가 있으니 내가 베개를 높이 하고 잘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야 하후돈이 당도했다. 하후돈이 허도에 이르자 조조는 다시 여러 문무관원들을 불러모아 군사 낼 일을 의논했다.

"오와 촉을 갑자기 치기를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중의 장로부터 치신 뒤에 촉을 치도록 하십시오. 한중은 서촉을 드나들 수 있는 길과 다름없으니 한중을 치신다면 촉을 치는 일은 한 번의 북소리에 깨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중과 촉의 가까운 곳을 지키며 그곳의 지세를 알고 있는 하후돈의 말에 조조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바로 나의 뜻과 같네."

조조는 그 말과 함께 서쪽을 칠 군사를 일으켰다. 조조는 서쪽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세 대로 나누었다. 전부선봉은 하후연과 장합이 맡게 하고 조인과 하후돈은 후부를 맡아 군량과 마초를 대게 하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기로 했다. 조조가 군사를 일으킨 소식은 한중의 장로에게도 전해졌다. 장로는 급히 아우 장위를 불러 조조를 막을 일을 의논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고 하니 어찌하면 좋겠나?"

그러자 장위가 서슴없이 답했다.

"우리 한중에서 가장 지세가 험한 곳은 양평관입니다. 제가 좌우의 산과 숲에 잇대어 진과 책을 수십 개 세워 조조의 군사를 막아 보겠습니다. 형님께서는 한녕에 머무르시며 군량미와 마초를 대어 주십시오."

장로는 아우 장위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곧 양앙, 양임과 함께 군사를 거느려 양평관으로 떠나게 했다. 장위가 말을 달려 양평관에 이르러 영채를 세우자 조조군의 선봉인 하후연. 장합도 그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위가 먼저 그곳에 와 영채를 세우고 있었으므로 15리쯤 떨어진 곳에다 진을 쳤다.

이날 밤이 되자 하후연, 장합이 이끌고 온 군사들은 먼길을 왔으므로 모두 피곤해 밥을 지어 먹자마자 그만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밤이 깊어 가자 홀연 영채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줄기 불길이 오르더니 양앙, 장임 두 장수가 각기 두 길로 군사를 휘몰아 덮쳐 왔다. 적의 뜻하지 않은 기습에 놀란 하후연과 장합이 황망히 말 위에 올라 그들과 싸우려 했으나 이미 어지러우진 군사들이라 제대로 싸움이 되지 않았다. 몰려온 한중의 군사들은 여기저기 불을 놓으며 영채로 밀려드니 조조 군사들은 싸움 한 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채 뭉그러지고 말았다. 하후연. 장합은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려 조조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두 장수의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놀라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은 이미 한두 해째 싸움터를 누빈 장수들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기도 '군사가 먼길을 걸어 피곤할 때는 마땅히 적이 영채를 기습해 올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이를 미리 채비할 줄도 모르는 장수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 저놈들의 목을 베어야 하리라."

조조가 몹시 성이 나 앞뒤를 돌보지 않고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좌우에 있던 모든 장수들이 간곡히 말리자 목 베는 일만은 그만두었다. 첫 싸움에서 어이없이 패한 조조는 몸소 군사를 거느리기로 하고 다음 날이 되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자 조조는 지체하지 않고 선봉이 되어 군사를 이끌었다. 양평관이 가까워지자 점점 산세가 험악하고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어 군마를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적이 매복해 있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어제도 적의 기습을 당한 터라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되물려 영채로 돌아왔다.

"애당초 한중 땅이 이토록 험한 줄 알았다면 내가 군사를 일으켜 이곳에 오지 않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네."

조조가 영채로 돌아와 허저와 서황을 보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허저가 결연한 목소리로 조조에게 간했다.

"그러나 이미 이곳에 군사를 이끄셨습니다. 이제 주공께서는 수고로움을 아끼셔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조조도 여기까지 이끈 군사를 물릴 생각은 없었다.

다음 날, 조조는 허저, 서황 두 장수와 함께 장위의 영채와 책을 살피러 나갔다. 세 필의 말이 산모퉁이를 돌아나가자 멀리 장위의 영채가 보였다. 조조가 한동안 장위의 영채를 살피다 말채찍을 들어 가리켰다.

"저렇듯 진이 견고하니, 일시에 치기는 어려우리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연 등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조조가 놀라 돌아보니 한중의 장수 양앙, 양임이 두 갈래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며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조조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데 허저가 서황에게 소리쳤다.

"내가 적군을 막겠소. 서공명은 주공을 잘 보살피시오."

허저가 말을 마치고 말을 달려 양앙, 양임을 향해 달려갔다. 이에 양앙, 양임이 허저를 맞았으나 두 장수가 원래 허저의 상대가 아니었는 데다 허저가 목숨을 돌보지 않는 거친 기세로 두 장수에게 덤벼드니 끝내 당해 내지 못하고 말을 돌려 달아났다. 두 대장이 쩔쩔매며 달아나기에 급급하자 이를 본 군사들도 감히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서황은 조조를 호위하며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데 산모퉁이를 돌자 앞에 또 한 떼의 군사가 달려왔다. 놀라서 앞선 장수를 보니 다행히도 하후연과 장합이었다. 하후연과 장합은 산 위에서 크게 함성이 일자 급히 조조를 구원하러 군사를 끌고 달려온 것이었다. 하후연, 장합이 구원하러 오자 조조는 그들에게 쫓길 이유가 없었다. 서황마저 말머리를 돌려 하후연, 장합과 함께 도리어 적을 치러가니 양앙. 양임의 군사들이 어찌 조조의 범 같은 네 장수를 당할 수 있겠는가. 네 장수는 순식간에 적을 짓밟고 조조를 호위해 유유히 영채로 돌아왔다. 조조는 허저, 서황, 하후연, 장합 네 장수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장위는 처음 기습으로 기세가 오른 듯했으나 조조군의 군세가 대단하고 장수들의 용맹이 두려워 군사를 이끌어 맞서는 것을 피했다. 양평관에 들어앉아 지키기만 할 뿐 나오지를 않으니 조조군도 험한 지세를 의지해 지키고 있는 관을 먼저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양군은 서로 대치한 채 50여 일이 흘렀다.

그런 어느 날 조조가 돌연 군사를 물리라는 영을 내렸다.

"모두 돌아갈 채비를 하라. 이곳에서 물러가리라!"

그러자 가후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까닭을 물었다.

"적의 군세가 강한지 약한지 아직 알아보지도 못한 터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스스로 물러나려 하십니까?"

"지금 적은 매일 관을 지키기 위해 굳게 방비만 하고 있네. 그러니 쉽게 적을 깨뜨리기 어려울 것 같네. 이때 물러가는 것처럼 하여 소문을 퍼뜨리고 적을 안심시킨 뒤 방비를 풀게 한 다음 우리가 기마병으로 그들을 급습케 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네.

조조가 그렇게 말하자 가후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과연 승상의 귀신 같은 계교는 저희들이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조조는 곧 하후연, 장합에게 영을 내렸다.

"두 장수는 각기 경기병 3천을 이끌고 작은길로 나누어 은밀히 양평관 뒤로 돌아가도록 하라."

조조는 그렇게 영을 내린 뒤 자신은 영채를 뽑아 나머지 군사들을 거두어 물러났다. 조조군의 움직임이 곧 양앙에게도 알려졌다. 양앙은 양임을 불러 이 일을 의논했다.

"조조가 군사를 거두어 물러난다 하니 이때야말로 그들을 뒤쫓아 친다면 반드시 조조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이오. 장군의 생각은 어떻소?"

양앙의 물음에 양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조조는 원래 모계가 많은 인물이오. 그것이 속임수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그들을 뒤쫓아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러나 양앙은 양임의 말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공이 가기 싫다면 나 혼자라도 달려가 조조를 치겠소.

"급히 그들을 뒤쫓는 건 위험합니다. 조금 더 두고 보십시오."

양임이 다시 간곡히 말렸으나 양앙은 듣지 않았다. 한중의 마지막을 재촉하는 부질없는 고집이었다. 곧 다섯 진의 군사를 모조리 거느리고 조조를 뒤쫓으러 나갔다. 그런데 그날은 서로 마주 대해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개가 짙은 날이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해 양앙의 군사들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그때쯤 하후연은 군사를 거느리고 소리를 죽여 산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며 가만히 나아가고 있는데 앞쪽에서 사람의 말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후연은 틀림없이 적의 매복군일 것으로 여기고 급히 인마를 재촉해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복병을 피해 나아간 곳이 바로 양앙의 영채 앞이었다. 양앙이 군사를 뽑아 나간 터라 얼마 되지 않은 군졸들은 짙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양앙이 안개 때문에 되돌아온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진문을 열어 양앙을 맞아들이려는데 막상 들어온 건 하후연의 군사들이었다. 하후연이 안으로 들고 보니 바로 적의 영채인데 군사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하후연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안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불부터 질러댔다. 영채를 지키던 군졸들은 그제야 적군이 밀려든 것을 알고 당황하여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윽고 안개가 걷히자 양임은 영채에 붉은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을 보고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왔다. 그러나 양임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그를 맞은 것은 하후연이었다. 하후연이 칼을 빼 들어 양임을 내리쳤으나 양임이 황망히 칼끝을 피했다. 하후연과 양임이 칼과 칼을 맞대며 수합을 싸울 때였다. 양임의 등 뒤에는 장합의 군사가 밀어닥쳤다. 양임은 하후연과 대적하기도 힘든 판이라 더는 싸울 생각도 못하고 황망히 길을 열어 남정 땅을 향해 말을 달렸다.

한편 안개 속에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던 양앙은 조조를 뒤쫓기에는 너무 지체되었다고 여겨 다시 본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본진에는 뜻밖에도 다섯 군데의 진문이 모두 불에 타 버린 채 하후연과 장합이 점령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물러난 줄 알았던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뒤쫓아오고 있었다. 앞과 뒤로 적을 맞게 된 양앙은 달아날 길부터 찾았으나 쉽게 길을 열 수가 없었다. 양앙이 힘을 다해 칼을 휘두르며 길을 열려고 하는데 한 장수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 순순히 그 목을 바쳐라."

소리친 장수는 바로 장합이었다. 양앙은 장합을 맞아 죽기로 작정하고 싸웠으나 불과 수합을 버티지 못하고 장합의 한칼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대장이 죽고 나니 앞뒤로 길이 막힌 졸개들인들 무사할 리가 없었다. 모두 목이 떨어지거나 항복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몸을 빼내 도망친 졸개 몇이 양평관으로 달려가 장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소리를 듣자 장위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미 한 장수는 죽고 군사들도 잃은 데다 자기 혼자 조조군을 맞게 된 셈이니 더 이상 양평관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밤이 되자 황망히 성문을 빠져나와 한중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조조가 군사를 거느려 양평관에 쳐들어가니 성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한중의 관문과 같은 양평관을 조조는 힘들이지 않고 손안에 넣게 되었다. 한편 그때 남정에 이르른 장위는 그곳에서 양임을 만나 장로를 보러 갔다. 장위가 장로에게 도망쳐오게 된 경위를 말했다.

"양앙. 양임 두 장수가 양평관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으나 조조의 계책에 떨어져 영채를 빼앗기는 바람에 양평관을 더 이상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장로는 크게 노해 길길이 뛰며 양임을 꾸짖었다.

"싸움에 져 나라가 위급해진 마당에 무슨 얼굴로 나를 보러 왔다는 말인가? 여봐라 저자의 목을 베라."

그러자 양임은 죽고 없는 양앙을 탓했다.

"저는 양앙이 조조군을 뒤쫓는 것을 간곡히 말렸으나 그가 듣지 않다가 이런 변을 당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에게 군사를 한 번만 더 주신다면 가서 싸워 반드시 조조군을 깨뜨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그때도 져서 돌아온다면 군령에 의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양임이 당장 목이 떨어질 판이라 다시 싸우겠다고 나섰다. 다급하기는 장로도 마찬가지라 양임이 군령에 따라 처벌도 마다하지 않자 화를 누그러뜨리고 양임에게 다짐을 두었다.

"그렇다면 군령장을 써 두고 나가겠는가?"

"군사만 주신다면 군령장을 써 두고 가겠습니다."

양임이 장로의 명에 따라 군령장을 써 두자 장로는 그제야 2만의 군사를 주어 조조를 막게 했다. 양임은 그 길로 군사를 이끌어 남정으로 나아갔다. 한편, 조조는 단 한 번의 계책으로 양평관을 얻자 다시 군사를 이끌어 나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걱정은 이곳의 험한 지세였다. 이에 하후연에게 군사 5천을 주며 남정으로 가는 길목을 살피도록 했다. 조조의 명에 따라 하후연이 군사를 이끄는데 양임이 이끌고 오는 군사와 맞닥뜨렸다. 양군은 각기 그 자리에서 진을 벌이고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양임이 부장 창기를 내보내 하후연과 싸우게 했다. 양임의 명을 받들어 창기가 말을 몰아 나오기는 했지만 그는 하후연의 적수가 아니었다. 맞부딪친다고 할 것도 없이 창칼을 겨룬 지 3합도 되지 못해 하후연의 한칼에 창기가 찔려 말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자기가 내보낸 부장 창기가 그렇게 맥없이 쓰러지자 양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창을 꼬나 들고 말을 달려 하후연에게 덤벼들었다. 양임은 그래도 한중이 믿고 있는 장수라 창기와는 자못 달랐다. 하후연과 어우른 지 30여 합이 되었으나 이기고 짐이 판가름 나지 않았다. 그러자 하후연은 싸우다 힘에 부친 척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도망가다 타도계를 쓰기로 했다. 하후연이 도망가자 양임이 기세를 올리며 뒤쫓아왔다.

"네 이놈 하후연아, 어디로 달아나느냐?"

양임은 성미가 급했다. 양임이 주저하지 않고 급히 뒤쫓자 하후연은 몸을 홱 뒤틀어 바싹 등 뒤까지 따라온 양임을 한칼에 내리쳤다. 양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말 아래도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창기에 이어 믿었던 대장도 죽자 군사들은 기가 꺾였다. 하후연이 군사를 내몰며 양임의 군사를 들이치니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다. 조조는 하후연이 양임을 죽였다는 전갈을 받자 남정 땅으로 군사를 휘몰아 진을 세웠다. 이제 남정성을 보고 호령하면 그 소리가 듣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장로는 얼굴색이 달라진 채 황급히 문무관원들을 모아 놓고 그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염포가 일어나 소리쳤다.

"조조 수하의 장수를 막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그 사람을 부르십시오."

장로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염포를 바라보며 반색을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그는 바로 남안 출신으로 방덕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지난날 마초를 따라 주공께 투항했으나 마초가 서천으로 떠날 때 병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주공의 은혜를 입으며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사람을 내보내 조조를 막으려하지 않으십니까?"

장로는 그제야 잊고 있던 방덕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기뻐했다. 곧 그를 불러 후한 상을 내리고 군사 1만을 주어 조조를 막게 했다. 방덕은 장로가 군사를 주기가 바쁘게 남정성으로 달려가다 10여 리쯤 떨어진 곳에서 조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방덕은 조조군을 보자 진을 벌인 뒤 말을 달려싸움을 돋우었다.

"조조는 듣거라. 서량의 방덕이 예 있다. 어서 나와 내 칼을 받으라!"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온 장수가 방덕인 것을 알자 전에 위교에서 싸울 때의 그 빼어난 용맹이 생각났다. 조조는 문득 그 방덕을 보자 슬며시 딴마음이 일어 장수들에게 말했다.

"방덕은 서량의 용맹이 뛰어난 장수이다. 원래 마초의 사람으로 지금은 마지못해 장로에게 의탁하고 있으나 필시 그의 뜻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을 얻었으면 하는 바 그대들은 급하게 그를 치려 하지 말고 천천히 싸워 그를 지치게 한 후 사로잡도록 해 보라."

모든 장수들이 조조의 뜻을 받드는 가운데 먼저 장합이 방덕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싸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장합이 수합을 싸우다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이어 하후연이 말을 달려 방덕을 맞았다. 하후연도 이미 꾸며 놓은 계교대로 몇 합을 부딪다 힘이 부친 듯 말머리를 돌려 진으로 되돌아왔다. 이어 서황이 나가 싸우다 다시 물러나고 그 뒤를 이어 허저가 달려나갔다. 조조의 장수들이 아무리 힘을 다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미 세 장수와 겨룬 방덕이라 웬만하면 힘이 부칠 만도 하였으나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이에 허저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지치게 하리라고 싸우기를 50여 합이나 계속했다. 그러나 방덕은 연거푸 네 장수를 맞고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허저도 그만 말머리를 돌려 진으로 돌아오니 장수들은 한결같이 비록 적이지만 그의 용맹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과연 방덕은 예사 장수가 아닙니다."

조조는 장스들이 그렇게 칭찬하자 더 한층 그릴 아끼는 마음이 일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조조가 장수들을 둘러보며 묻자 가후가 입을 열었다.

"장로가 믿고 있는 모사 중에 양송이란 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탐욕이 많아 뇌물을 몹시 밝히는 자입니다. 그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금은과 비단을 보내 매수한 후 장로에게 방덕을 헐뜯게 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장로가 방덕을 의심하게 될 터인즉 그때를 기다려 일을 꾸미면 어렵지 않게 방덕을 우리 진으로 끌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정성안으로 사람을 보내야 할 텐데 어떻게 성안으로 사람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내일 방덕과 싸우다 짐짓 패한 체하고 진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덕은 틀림없이 우리의 진을 차지할 것입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우리가 다시 대군을 휘몰아 진으로 덮쳐들면 방덕도 하는 수 없이 성안으로 군사를 거둘 것입니다. 그때 말 잘하는 군사 한 사람을 적군으로 꾸며 그들 사이에 섞어 성안으로 함께 들이면 됩니다."

조조가 들으니 가후의 꾀가 그럴 듯했다. 곧 뛰어난 군관 한 사람을 뽑아 후한 상을 내림과 동시에 황금 엄심갑(오늘날의 방탄 조끼)을 입히고 그 위에 한중 군사의 복색을 입혀 영채 으슥한 곳에 숨게 했다.

다음 날이 되자 하후연, 장합에게 각기 한 떼의 군사를 거느려 멀리 가서 매복하도록 했다. 두 장수가 매복을 끝내자 서황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방덕에게 싸움을 돋우었다. 방덕이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휘몰아 서황을 맞아 싸웠다. 서황이 수 합을 부딪다 다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방덕은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곧장 서황의 뒤를 쫓았다. 서황의 영채 가까이 이르러서도 방덕이 뒤쫓기를 멈추지 않자 조조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렇게 되니 방덕은 어렵지 않게 조조의 영채 하나를 손안에 넣었다. 방덕은 영채를 얻자 뒤쫓기를 그만두고 영채를 둘러보며 몹시 기뻐했다. 영채 안에는 군량과 마초가 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초와 군량을 그대로 두고 도망함으로써 정말 황급히 물러난 듯이 보이게 하여 계책임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방덕은 군량과 마초까지 얻게 되자 그것이 미끼인 줄을 알 리 없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장로에게 알리게 하는 한편 잔치를 열어 군사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그날 삼경 무렵이 되자 갑자기 영채 주위의 삼면에서 불길이 하늘을 태울 듯 붉게 일며 군사들이 세 길에서 한꺼번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방덕이 보니 가운데 길로는 서황과 허저요, 왼쪽에서는 장합이, 오른쪽에서는 하후연이 군사를 휘몰아오고 있었다. 삼면에서 달려온 군사들은 방덕이 차지하고 있는 영채를 마구 짓밟으며 쳐들어오자 잔치까지 열며 방심하고 있던 방덕의 군사들이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덕의 군사들이 좌충우돌하며 흩어지고 달아나는데 방덕도 조조의 대군을 막을 수가 없어 황망히 말을 타고 길을 열어 남정성으로 향했다. 그러자 영채를 급습했던 조조의 군사들은 숨쉴 틈도 없이 방덕의 뒤를 쫓았다. 방덕이 성 아래에 이르자 급히 성문을 열게 하고 뒤따른 군사를 이끌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조조의 세작은 그 틈을 이용해 한중 군사들 틈에 섞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에 들어간 조조군의 세작은 군사들 틈에서 슬며시 몸을 빼내어 부중으로 가 양송을 뵙기를 청해 절을 올린 후 말했다.

"위공 조 승상께서는 오래 전부터 공의 높으신 덕을 들으신 지 오래이라 특별히 저를 보내셨습니다. 조 승상께서는 황금 엄심갑을 보내시어 믿음의 징표로 삼으려 하기니 받아 주시고, 또한 승상께서 보내신 밀서를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세작은 옷 속에 입고 있던 황금 갑옷을 벗어 밀서와 함께 양송한테 바쳤다. 양송은 황금 갑옷을 받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조조가 자기를 높이 대하는 듯하자 마음이 달라진 양송은 조조가 보낸 밀서를 읽고 나더니 세작에게 가만히 일렀다.

"내가 위공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니 안심하시라고 전하게. 내게 좋은 계책이 있으니 위공께서 이르신 대로 따르겠다고 말씀드려 주게."

양송은 세작이 물러나자 그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장로를 찾아가자 장로가 물었다.

"방덕이 조조의 영채를 빼앗았다가 다시 하루를 넘기기도 전에 패했다니 그 까닭이 무엇이오?"

방덕이 싸움에 이겼다는 전갈을 받고 크게 기뻐했던 장로였다. 그러나 그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싸움에 져 쫓겨오니 화가 나 있던 차에 양송이 들어오자 물었다. 양송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역시 마초의 일족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처럼 조조의 진을 빼앗고도 당장 그 진을 내어 준 걸 보면 필시 조조와 내통하여 뇌물을 받고 일부러 패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방덕을 못마땅히 여기던 터에 양송이 방덕을 헐뜯자 장로는 앞뒤를 살필 생각도 않고 화부터 냈다. 곧 방덕을 불러들여 갖은 욕설을 다 퍼부으며 좌우에게 명했다.

"저 자의 목을 베도록 하라!"

그러자 방덕을 천거했던 염포가 나서 목놓아 울면서 장로를 말렸다.

"방덕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의 죄가 없음이 밝혀지면 다시 싸워 싸움에 졌던 허물을 씻게 해 주십시오."

염포가 간곡히 만류하자 장로는 간신히 화를 누그러뜨리고 방덕에게 소리쳤다.

"내일 다시 나가 싸워서 이기지 못 하면 그때는 반드시 목을 베리라!"

장로가 양송의 말만 믿으니 방덕은 말 한 마디 못 하고 마음 속으로 장로를 원망하면서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