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歌)
가까이 와
가난을 모시고
가만히 깊어 가는 것들
가면론
가여운 설레임
가을
가을볕
가을비
가을의 빛
가을 저녁의 말
가책받은 얼굴로
감
감꽃
감나무 곁에 살면서
감나무 속으로 들어간 전깃줄 – 이라크 생가
감잎 쓸면서
감자를 먹는 노인
갓난 송아지가 젖 먹을 때 다른 젖으로 바꿔 물며 들이받는 힘
강(江)
강변 살고
개두릅나물
개밥바라기가 옹관 같은 눈동자로
거리(距離)
건어물들
걸음은 자꾸 넘어지자고
겨울꽃 봄꽃
겨울날
겨울 동구(洞口)
겨울 시금치밭
겨울 연못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겨울 저녁에
겨울 호숫가에서
격렬비열도
경주 황룡사 터 생각
계단 옮기기
고대(古代)
고양이가 다니는 길
고양이풀에 물 주다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
공터
광화문(光化門)
구두 수선을 노래함
구름의 아홉 번째 지나감
구름이 어떤 그리움에 젖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듯
국화꽃 그늘을 빌려
군불을 지피며
궁금한 일
귀순하는 저녁
그 라일락 밑에는
그리운 시냇가
그믐
근황
글씨를 말리고
기러기 간다
기압골의 집
기억하지 말아야 할
기차에서의 술
긴 의자
길
길눈
길모퉁이에서
깊은 밤
꽃
꽃밭을 바라보는 일
꽃 본 지 오래인 듯
꽃의 사다리
꽃이 꽃을 지나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
꽃이 졌다는 편지
꽃집에서
꽃차례
나는 뜰을 안고
나무 속의 방
나비를 타고
나아가는 맛
나에게 온통 젖어버리는
나의 사치
나의 유산은
나의 장례식
낙법(落法) - 법정 스님 가시다
낙엽 쓰는 노파여
낮 꿈
낮은 목소리
낯선 방에서
내가 그믐이니
내가 듣는 내 숨소리
내가 듣는 에릭 사티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내면으로
내 발자국의 표정
내 살던 옛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내 안에서 태어난 들개가 산 너머에서 울다
내일
내일도 마당을 깨겠다 – 저문 날의 삽화
너무 늦지
노을
녹슨 솥 곁에서
높새바람같이는
높새의 저녁
눈 그치고 별 나오니
눈길
눈 녹아
눈보라
눈사람의 스러짐
눈이 오는 건 그녀가 내게 오기 때문이다
다게레오타이프 – 경기도 정릉군 권대리에서
다 늦은 가을 노래 – 쳇 베이커
다랑이길
다방을 차리다
다시 가을볕
다시 오동꽃
다시, 오래된 정원
달과 수숫대 – 빈(貧)
달의 길
달의 방
담장
답도 싸리재 어떤 목련 나무 아래서
당나귀에 관한 추억
닿지 않네
대문
대숲 아침 해
대장간을 지나며
더덕을 노래함
덕적도(德積島) 시(詩)
도원(桃源)에서
독강에서
돌멩이들
돌의 새
돌의 얼굴
돌층계
동백꽃
동백의 일
동지(冬至)
동화
두리번 선(禪)
들판에서
들판이 나를 불러
라일락 밑
라일락의 집
마당에 배를 매다
마술 극장
마음이 중얼중얼 떠올라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말린 고사리
맑은 밥
망명
매화꽃을 기다리며
매화를 걸고
맨발로 걷기
먹는 것에 대하여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명년 봄
몇 개의 바위와 샘이 있는 정원
모과나무 아래
모란의 누설
모란이 피어 봄은 명치가 아픕니다
목도장
목돈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묘지
무꽃
무성영화
무쇠솥
무인도(無人島)를 지나며
무지개의 집
묵집에서
문 열고 나가는 꽃을 보아라
문을 내려놓다
물맛
물미역 씻던 손
물방울 방
미명(未明)에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민가(民家)
민들레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바람과 대와 빛과 그릇
바람 자듯
바위 그늘 나와서 석류꽃 기다리듯
반달 간다
발을 털며
밝은 방
밤 강물 – 가양대교 아래서
밤 기차
밤길
밤바다에서 – 목 너머에서
밤비
밤 술
밤의 창변(窓邊)
밥 때를 기다리며
밥을 먹으며
방
방을 깨고 마주친 비참
방을 깨다
배를 매며
배를 밀며
배호
뱃고동 곁에서
버스 정류장 옆 송월전파사
번짐
벌판
법의 자서전
벚꽃 개화 예상도
벽에 걸린 연못
별의 감옥
복면을 하고
봄밤
봄비
봄빛 근처
봄 산(山)
봄 손님
봄은 손이 다섯
봄 저녁
봉숭아를 심고
봉원사 입구
봉평의 어느 시냇물을 건너며
부뚜막
부뚜막 방
부엌
분꽃이 피었다
분장실에서
불 꺼진 집
불 꺼진 하얀 네 손바닥
불멸
불빛을 흔들어서
불을 끄면
붉은 구름
비 가득 머금은 먹구름 떼 바라보는 할머니 눈매
비단 유감(有感)
비 맞는 잠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죠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빈방
빗물이고 잠이고 축대인
빗소리
빗소리 곁에
뺨에 서쪽을 빛내다
뺨의 도둑
뻐꾸기 소리
뻘밭에서
사과 궤짝
산골
산기슭에서
산길에서 – 시인 이솝의 결혼
산길이 산을 내려와
산에 사는 작은 새여
산역(山驛)에서
산책(散策)
살구꽃
살구나무 여인숙 –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
살구를 따고
살얼음이 반짝인다
상강(霜降)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맹 가리
새 떼들에게로의 망명
새로 생긴 저녁
새 방에 들어 풍경을 매다니
새벽길
새벽달과 신발장
새벽에
새의 자취
생강나무 아래
생선구이 백반
서울, 2023 봄
석류나무 곁을 지날 때는
석류 익는 시간
성(城)에 불이 들어오면서
성(城)이 내게 되비쳐주는 저녁 빛은
세월의 집
세탁기
세한(歲寒)
소나기
소나기 오는 날
소래라는 곳
소리 속의 그네
소묘(素描)
소일(消日) - 1998년 봄
소풍
속삭임
솔밭길
송내가 없다
송학동
수락산 근처
수레
수로(水路)에서
수묵(水墨) 정원
수월(水月) 스님
수집가
숟가락
술래
숨의 사랑
숨은 꽃
시를 다 지우다
시법(詩法) - 샘물이며 갈증인
시월(十月)
시월 보름
시인은
시 읽던 바위
실내악(室內樂)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
아버지를 기억함
아주 조그만 평화를 위하여
아코디언
악기나 하나 들고
악기점 자리
안부
어느 겨울날 오후에 내 발은
어느 다방의 약사(略史)
어느 해 낙산사 새벽종 치는 일을 권해 받았으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함
어둠이 귀에 익어
어떤 가을날
어스름
어지러운 발자취 – 해변에서
어찌하여 민들레 노란 꽃은 이리 많은가
얼굴을 닫고
얼룩에 대하여
얼음의 일
엉겅퀴의 풍경
여름 산
여름 숲
여름의 끝
여정(旅程)
여행의 메모
연꽃 심을 때
연못
연못을 파서
연못이 있던 자리
연잎 같은 발자국
열쇠
옛 노트에서
옛 친구들
오동(梧桐)꽃
오래된, 오래되었다는 고백
오래된 정원
오막살이 집 한 채
오솔길을 염려함
옥수수밭의 살림
와운산방(臥雲山房)
외딴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痛症)
요를 편다
우리 집에 내려오는 양은 쟁반 하나
우산(雨傘)들
울음의 순서 – 어느 겨울 여행에서
유곽 앞에 서 있던 오동나무처럼
의미심장(意味深長)
이름 부르는 일
이명(耳鳴)을 따라서
이슬비 속으로
익살꾼 소나무
인연
일모(日暮)
입맞춤
입춘
입춘 부근
잎
자전거 주차장에서
자화상(自畵像)
작약
장마
장마 끝물
장미밭
저녁 강(江)에서
저녁 산보
저녁의 우울
저녁 해가 지다 말고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 – 섬진강에서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저문 날 24
저물녘 – 모과의 일
절벽
절터
정자
젖은 달이 떴어
조율사
종일 손가락을 깨물다
주춧돌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며
중년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진흙별에서
창에 넘치는 달
창(窓)을 내면 적(敵)이 나타난다
처서
첫겨울
첫눈을 기다림
첫서리
초생달에서
초승달이 딸린 방
초저녁 ‘밥별’이라는 별
추억에서의 헤매임
춤꾼 이야기
측은(惻隱)을 대하고
치졸당기(稚拙黨記)
카메라를 팔고
쾌청
탑(塔)
탱자 향기
파도 소리
파란 돛
팔당을 지나며
팥죽
편자 신은 연애
평심
폭설
폭포
푸른 이마
풍적(風笛)
하문(下問)
한겨울 목련 나무
한결같이
한 소식
한진여
항아리 – 김포에 갔을 때
해남 들에 노을 들어 노을 본다
해도 너무 한 일
해바라기
해변 – 서른 살의 불편함
해변의 자화상
해변의 묘지
해 질 녘
햇빛이 날 사랑하사
햇소금
행주
호수
흰 꽃
3월이 오고
5월
11월
가(歌)
장석남
1
기타를 치면 간혹
줄이 나간 기타
겨드랑이 아래에서
고스란히 자기 곡으로 빠진다
노래는 배가 뚫려
물이 새고
물이 새는 노래를 끝까지 해도
마땅한 삶이 쉬 보이지 않는다
다시 기타를 치면 자꾸
먼 세상이 울린다
2
잔설 밟고
죽은 아이들이
붉은 발로
어머니 찾아오는 것
보인다
자지 말라고
밤새 눕지 않는
마음속 소 한 마리
방울 울리는 소리
열 발가락을 적시더니
3
왜 이 강물 소리를 들을 수 없나
어느 날 꿈이
이 강 흐름을 퍼다
해몽할 것인가
이렇게 좀슬고 귀떨어진
얼굴을 쓰고 깨끗한 눈에 맞듯
고개를 숙이고
망국(亡國)을 가면
어느 날 노을은 세상을 저 멀리
빠뜨렸다 마음은
적을 잃고 헤맸다
가까이 와
장석남
초여름 이슬비는
이쯤 가까이 와
감꽃 떨어지는 감나무 그림자도
이쯤 가까이 와
가끔씩 어깨 부딪치며 천천히 걷는 연인들
바라보면 서로가 간절히
가까이 와
손 붙잡지 못해도
손이 손 뒤에 다가가다 멈추긴 해도
그 사이가
안 보이는 꽃이니, 드넓은 바다이니
휘어진 해변의 파도 소리
파도 소리
뉘우칠 일 있을 때 있더라도
새 연애는
꽃 진 자리에 초록이 밀리듯이 서로
가까이 좀 와
아무도 모르게
초여름 늦게 오는 저녁도
저녁 어둠이 훤하긴 하더라도
그 속에서 서로
이쯤 가까이 와
가난을 모시고
장석남
오늘 나는 가난해야겠다
그러나 가난이 어디 있기는 한가
그저 황혼의 전봇대 그림자가 길고 길 뿐
사납던 이웃집 개도 오늘 하루는 얌전했을 뿐
우연히 생겨난 담 밑 아주까리가
성년이 되니 열매를 맺었다
실하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어디 또 그런 데 가서 그 아들 손주가 되겠다
거짓마저도 용서할
맑고 호젓한 가계(家系)
오늘도 드물고 드문 가난을 모신,
때 까만 메밀껍질 베개의
서걱임
수(壽)와 복(福)의
서걱임
가만히 깊어 가는 것들
장석남
가을이 와서 어느덧 깊어 가고 있습니다.
깊어 가다니요.
어디로 깊어 간단 말일까요.
가을 나무들은 길었던 푸른 세월을 마침내 붉은빛으로 익혀서는 내면으로 들입니다.
그리고는 긴 동안거(冬安居)에 임합니다.
마침내는 중심을 열어 청정한 나이테 하나를 얻습니다.
나무들은 그렇게 깊어지는데 우리들 인연의 여러 얽힘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깊어지는 걸까요.
벌레들은 밤새워 고요 속에다가 갖가지 수를 놓는 듯싶습니다.
처음엔 몇 필(匹) 될 듯싶더니 지금은 그저 손수건 한 장쯤에 짜는
모양입니다. 그만큼 밤도 깊습니다.
밤이 깊으면 병인 듯 이런저런 먼 곳의 일들이 궁금해지곤 합니다.
먼 곳의 빛과 소리들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밤이므로 길을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저 창 앞을 서성이며 그렇게 그리워할 뿐입니다.
어쩌면 그곳은 내 발길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사이에 놓여 있는 그리움만이 갈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당신을 만나고 온 지 벌써 오래입니다.
당신 곁을 흐르던 강물은 여전하겠지요.
강물 속의 까만 돌들도 나란히들 누워 가을빛을 받아 어른거리고 있겠군요.
지난여름 장마의 무섭던 물너울들을 넘기고는 한껏
깨끗한 정신으로 그렇게들 누워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흙과 나무와 돌들로 지어진 당신의 집은 어떻습니까.
세월의 한쪽 기슭에서, 호젓하게 세상살이의 여러 비밀들에
대해 근심하며 어떤 따뜻한 상징처럼 낮게 앉아 있을 당신의 집.
내가 종내는 당신과 함께 살다가 죽고 싶은 그집.
당신은 그렇게 거기 있고 나는 이 번잡한 구획의 한 모퉁이에서
쉬 떠날 수 없어 돌을 들여다보듯 내 그리움의 속살들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무엇인가를 삭히듯 돌 하나를 꺼내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할 무늬 같은 것들을 새겨넣어 보기도 합니다.
새벽녘 하늘엔 말굽만 한 하현달이 걸려 있습니다.
당신도 혹 보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당신의 시선 위에 내 것이 겹쳐진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울렁입니다.
그 울렁임의 무늬로 혹 이 가을이 깊어지는 것인지......
당신은 너무 멀리 있으므로 나는 그저 저 달에게
그리움의 수레를 매 놓고서는 마음만 뒤척일 뿐입니다.
꽤나 오랜 서성임입니다. 가을이 깊습니다.
가만히, 내 마음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속으로 깊어 가는 것이 또한 있습니다.
달은 내 그러한 관념의 마을을 넘어서 마침내 당신에게 가 닿을 것입니다.
가면론 – 미당 풍으로
장석남
가면을 벗고
섬이 되어서
잔물결이나 몇 폭 데리고
떠돌고 싶더니
역병이 돌아
kf94 마스크를 두 귀에 걸어 쓰고
가면을 가리니
숨은 좀 가쁜 반절의 자유
두 눈마저 가려서
따깍따깍, 숨어버린 세상을 찾는 술래가 되어 돌다가
어느 떠돌이 술래 동지를 만나면
반가운 나머지 그만
그 자리에 꽃이 되어 피어서
그 자리에 돌이 되어 앉아서
비로소 술래를 파하고
가면을 벗으리
광장의 화단 모퉁이 꽃과 돌이
올려다보며 내려다보며
가면을 논하네
가여운 설레임
장석남
내가 가진 돌멩이 하나는 까만 것
돌 가웃 된 아기의 주먹만 한 것
말은 더듬고 나이는 사마천보다도 많다
내 곁에 있는 지 오래여서 둥근 모서리에
눈(目)이 생겼다
나지막한 노래가 지나가면 어룽댄다
그 속에 연못이 하나 잔잔하다
뜰에는 바람들 가지런히 모여서 자고
벚꽃 길이 언덕을 넘어갔다
하얀 꽃 융단이 되어 내려온다
어떤 설레임으로 깨워야 다 일어나 내게 오나
내게 가르쳐준 이 없고 나는 다만
여러 가지 설레임을 바꾸어가며 가슴에 앉혀보는 것이다
오, 가여운 설레임들
가을
장석남
오래 살았다
성(城)벽 담쟁이 넝쿨 색(色)이 변했다
오랜 면벽(面壁)으로 이제 색(色)을 알았다는 걸까?
기사식당 골목을 올라오며
가난한 사람이 등꽃을 가꾸는 걸 보았다
그게 전등(傳燈)이리라
내 가꾸는 공작 단풍 사이로 오는
포레의 파반느
가을볕
장석남
우리가 가진 것 없으므로
무릎쯤 올라오는 가을풀이 있는 데로 들어가
그 풀들의 향기와 더불어 엎드려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별로 서러울 것도 없다
별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이 가을볕으로다
그저 아득히만 가는 길의
노자로 삼을 만큼 간절히
사랑은 저절로 마른 가슴에
밀물 드는 것이니
그 밀물의 바닥에도
숨죽여 가라앉아 있는
자갈돌들의 그 앉음새를
유심히 유심히 생각해볼 뿐이다
그 반가사유를 담담히 익혀서
여러 천년의 즐거운 긴장으로
전신에 골고루 안배해둘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없으므로
가을 마른 풀들을
우리 등짝 하나만큼씩만
눕혀서 별로
서러울 것 없다
가을비
장석남
가을비를 맞으리
가을비를 맞으리
문예회관 앞에서 갑자기 바람에
발목이 삐는
가을비에 얼굴 젖으리
누군가 빨간 모닥불을 회고하리라.
다 왔다,
다 왔다고 뒤로
허리를 펴는
가을비
초저녁 처마 밑에 켜진 불빛이
가을비의 표정에 번지고 있다.
가을의 빛
장석남
누군가 울먹이며 지나갔는가
일개(一個) 소대(小隊)의 코스모스들이 허리마다 올올이 바람을 감고 서서
이제 더 오래 못 서 있을 빛을 내내
빛내고 있었으니
이 빛깔들은 이후 어느 길목을 돌아
어디로 종종이며 흐를 것인가
그것이 눈물겨운 것은
날마다 내 꿈이 허드레로만 생각되어져서가 아니라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밥을 끓이고 있는
추억의 이마가 너무 푸르러서만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종내는 혼자가 저렇게 허리에 바람을 감는 길이라는
이 가을 속 조용한 손님의 말씀이 있었으니
누군가 엉엉 울고 갈 이가 있어서
또 그가 손목을 만지작이며 걸리는
작은 새끼들의 울음도 있어서
낮에 나온 달이 저렇듯 오랫동안 창백하게
이 근처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두커니 오동나무도 한 주 서 있는 것은 아닌가
가을 저녁의 말
장석남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윽박 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 자루들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러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가책받은 얼굴로
장석남
빗방울 떨어지며 후두둑 나를 읽는다
지운 문장(文章)처럼 나는
가책받은 얼굴로 빗속에 서 있다
대추나무의
약한 열매들이 빨리 미련을 버리고
비에게 자리를 내준다
나와 자리를 바꾸자는,
잡풀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
가책받은 목소리로 나는 이 순간 경(經)을 읽는 것이다
빗물이 시커먼 눈을 뜨고 또랑으로 들어간다
감
장석남
파르스름한 접시에 연시를 한 세 개만 담아 오세요
창밖에 눈이 오도록만 바라보고 앉았다가
감 속에 까맣게 서 있는 씨앗들 보이도록만 앉았다가 일어서겠어요
감을 주세요
연애는 그토록 슬픈 거니까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듯 슬픈 거니까
감꽃
장석남
감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엔
이 세상에 와서 울음 없이 하루를 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감꽃이 저렇게 무명빛인 것을 보면
지나가는 누구나
울음을 청하여올 것만 같다
감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는 마당에
무명 차양을 늘인 셈이다
햇빛은 문밖에서 끝까지
숨죽이다 갈 뿐이다
햇빛이 오고
햇빛이 또 가고
그 오고 가는 여정이
다는 아니어도 감꽃 아래서는
얼핏 보이는 때가 있다
일체가 다 설움을 건너가는 길이다
감나무 곁에 살면서
장석남
도대체 몇 해나 된 줄 모를 감나무 한 주가 내 생활의 남(南)쪽 방위(方位)를 지키고 있다
올려다보면 폭포와도 같이 절벽도 쏟아지고 여름도 쏟아진다
새는 번갈아 왔다 간다 간혹 오는 낯선 새는 무슨 소식인가? 쉬 알 수 없는 소식인데 새소리에 풀리는 하늘은 가에도 솔기 하나 없이 어떤 執念이라도 안스러이 받아주려는 듯 둥근 그늘로 깔린다
밤이 더 깊어지지 않을 땐 차례로 풋감들 떨어진다
어떤 것은 또 굴러서 이승에 온 밤하늘의 발자취를 이룬다 놀라 귀가 솟는 나는 물려 받기도 하고 덧보태기도 한 罪를 생각하기도 한다
아무 소리 나지 않아 나가보면 감나무는 어둠을 모시고서 또 고요를 모시고서 아주 놓아버리고 싶은 것도 참으면서 견디는 절벽이다
감나무 속으로 들어간 전깃줄 - 이라크 생각
장석남
늦봄
늦볕
잽싸게
가로질러
내 방 앞 감나무로 들어가는 전깃줄
어쩔 줄 모르고 후다닥
여관방으로 들어가는 불륜처럼
늦봄
늦볕
금 간,
도처에
웅 -
울음소리들
배달하는
감잎 쓸면서
장석남
오늘 아침으로
감잎들 다 쏟아져
그쪽 유리창에 새소리 유난했구나
빗자루 세우고
말이 더디다던 이웃의 아이에게
이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하였네
헌데
감잎 쓸고 나니 마당은
하늘로 다 가고 말았네
나는 그제야 말문도 귀도 트여
발등에 이파리들
다 떨어뜨리네
감자를 먹는 노인
장석남
1
감자를 먹는 노인을 본다
빈 접시처럼 열린 눈 속에
길게 걸어들어가는 사막
시내 거리에서 차들이 바람에 날렸다
2
감자를 먹는 노인 속에
감자를 먹지 않는 노인
죽음이 허전하지 않도록
흔들리는 팔과 다리에도 감자를 먹이고
감자를 먹지 않는 노인
빈 접시처럼 열린 눈 속에
낯설게 떴다 달이 진다
감자를 먹던 노인을 데리고
달이 지는구나
갓난 송아지가 젖 먹을 때 다른 젖으로 바꿔 물며 들이받는 힘
장석남
갓난 송아지가 젖 먹을 때 다른 젖으로 바꿔 물며 들이받는 힘에
조금씩 밀리며 지긋이 눈감고
여전히 되새김질하는 어미 소의 표정 속에
잠시 싸락눈 후딱 지나가듯
바로 조기다 싶다
우리 가야 할 곳
우리 나온 곳
다들 그 곳에 모이시라
혁명도 뭐도 또
싸락눈도
나는 둘인가?
왜 저 안에도 나는 있지?
사랑의 식객(食客)이 되어서
잠시 세상 바꾸어놓는
어미 젖 들이받는 힘
강(江)
장석남
1 - 흘러감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이고
무엇이 저렇듯 오래 젊어서 더더욱 찬란할 것인고
강을 건너는 것이 어디 나뭇잎들이나
새들뿐이던가 봄이나 안개들뿐이던가
저 자세/ 저 --- 밑바닥에서 지금 무엇이 가라앉은 채 또한 강을 건너고 있는지
때로 강의 투명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일
이 세상에 나온 가장 오랜 지혜를 보여주려는 일
가장 낮은 자가 가장 깊이 삶을 건너는,
가장 가벼운 자가 가장 높이 이승을 건너는,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인고
2 - 고요함
오늘은 고요하군
바람 한점 없고
수면은 안개에 밀려가는 길처럼 순하군
순하디순하군
아이라도 하나 낳아 기르는가? 기르면서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라고 가르치는가?
진리란 것도 그래서 어디쯤에서는 부딪는 데 있어서
아프단 것도 가르치는가?
반쯤은 도로 삼켜지는,
반쯤의 노랫소리로만 들려주는가?
고요하고 고요하여 강 안의
철썩임 순하군
모든 것 손놓고
깊이 깊이
아이라도 다독여
재우는가
3 - 진눈깨비
강에 비가 오는군
저녁이 되자
수면 위에서 비는
휜다
자꾸 휘는 걸 보면
점점 가파르게 휘는 걸 보면
비는 비로서만 내리는 것은 아니야
가만, 비는 희끗희끗
진눈깨비로군
강물 속이 궁금하다는,
이 세상엔 아무 미련 없는 자세로 뛰어드는군
강은 죽음 쪽으로도
깊어지는가?
진눈깨비는
어느 좌익의 이름자 하나 빠진 수필문처럼
저무는 강에라도 적(籍)을 두려
저렇게
저렇게도 삶을
수식하는군
강변 살고
장석남
사람들은 모두 강에 가 흘렀다
오래 묵은 상식과 집과 골목을 버리고
가장 깊은 하루를 흘렀다
강변엔 낮달이 걸리고
산 너머 소인이 찍힌 바람이
속속 도착하였다 뿌리가
순결한 나무들이 강심으로 허리를 던지고
자궁을 연 산 그림자 사이로
사람들은 굽이굽이 물소리를 풀었다 간혹
피 묻은 뉴스들이 자갈처럼 가라앉고
물방울들이 중얼거리며 떠올랐다
모래언덕이 쌀쌀한 햇빛 아래
물은 흘러서 어디에 닿는지 의심치 않고
물소리가 가끔 강 밖으로 나가면 풀잎들은
마른 귀를 적셨다
강변 사는 날 저녁은 귀에
삘기꽃이 자욱했다
개두릅나물
장석남
개두릅나물을 데쳐서
활짝 뛰쳐나온 연둣빛을
서너해 묵은 된장에 적셔 먹노라니
새장가를 들어서
새 먹기와집 바깥채를
세 내어 얻어 들어가
삐걱이는 문소리나 조심하며
사는 듯하여라
앞산 모아 숨쉬며
사는 듯하여라
개밥바라기가 옹관 같은 눈동자로
장석남
초저녁 개밥바라기가 옹관 같은 눈동자로
우리들을 내려다본다
세상은 오래된 웅덩이처럼 컴컴해지고
무덤들은 침착하고 참한 표정으로 둥그러져 있다
처녀들은 치마를 걷고 자기 웅덩이를 바라본다
우리는 웅덩이에 낯을 씻고
씻은 낯을 개밥바라기에게 비춘다
'얼굴이 모두 같군
솎아낸 시금치야'
뒷짐을 지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개밥바라기
조상(祖上)들은 우릴 솎아서 내버린 걸까
거리(距離)
장석남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요 꽃밭이지
꽃밭이 크군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고 향기지
멀면 멀수록
너와 나 사이가
큰 꽃이요
큰 향기지
거리가 거리를 들고 도망하고
거리가 거리를 몰아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거리가 거리를 향하고
거리가 거리를 파묻고
진실히
진실히
꽃밭은 너무나도 커서 차라리
푸른 멍의 가을 하늘이라고나 해야 하겠다
그 하늘하고도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저녁 종소리하고나 해야 하겠다
건어물들
장석남
경기도 안산시 사리 포구
피난 온 햇빛들
따악 - 입 다물지 못하는 건어물들
입 속에 햇빛들은 취기로 가물가물
통통배 타고 무인도나 갈까? 가서
미라가 되자고 꼬신다
때마침 들려오는 통통 소리
햇빛의 즐거운 殮襲이여
다만 아프디아픈
정변같이
걸음은 자꾸 넘어지자고
장석남
그날 살아 있다고 안심하라고 철없이
아픈 마음이
광교 근처를 지날 적에 칸나꽃을 만나더니
꽃 밝은 잠을 자고 싶어하네
빈집들 속에 빈집으로 걸어들어가
쪼그려 잠들면
만발하는 고통아 잎 넓은 한 그루의 애인아
잠이 너무 밝다
묠려가는 사람들 틈에서
늙은 산의 울음 소리 들리고
걸음은 자꾸 넘어지자고 조르고
산 울음에
종로쯤 떠밀릴 때 나사렛 사람처럼
고통이 내게 묻네 "가는 곳이 어디지?"
휑하니 비어 대답하는 길바닥
걸음은 자꾸 넘어지자고 조르고
겨울꽃 봄꽃
장석남
겨울꽃은 감옥
꽃 속에서
마른침 넘기는 소리
걸어나와
목이 짧고 눈이 별 같은
굴뚝새의 (아 낮은 하늘 아프게 하는
까만 불이여) 울음 자국처럼
흐리고 침침하게 흩어지며
피는 한 얼굴
얼굴, 창백한 햇살에 번지는 얼굴
나 그 얼굴 열고 들어설 수 없네
신발 벗어들고 그곳에 걸어들 수 없어,
봄꽃 앞에 손만 비비네
겨울날
장석남
1
살구나무에 잎이 다 졌으니 그 잎에 소리 내어 울던 빗발들 어쩌나 그래서 눈이 되어 오나?
진눈깨비 되어 오나?
살구나무 빈 가지의 촘촘한 고독 사이를 눈은 빠져 내려서
지난 한 해의 빗소리 같은 것도
덮고 있는데
잊고 지낸 젯날같이
설운
하루 한낮
2
풍경 소리가 나와 친해지더니 이제는
새벽녘만 되면 아예 장단을 친다.
그것은 제 혼자 치는 게 아니고
제 동무들까지 불러다가
새벽별에선지 城에선지
불러다가 장단을 친다
당신 영혼의 샅의 따스함을 내 어디에 꼭꼭 지니려 함을
알고나 있었는지
3
애인의 눈동자 깊이
구덩이를 파고 자기 심장의 종소리들을 묻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겨울 동구(洞口)
장석남
잎 가지지 못한 삶이 서 있고
사람 없는 집들이 즐비한 길 위로
밭이 있고 포도나무가 있다
포도나무는 밭을 포도밭으로 만들고 있지만
길들이 모두 집에 와 닿는 저녁이 와도
빈 집들은 이 마을을
빈 마을 이외로는 만들지 못한다
잎 가진 삶이 다 유배당한
겨울 동구(洞口)
겨울 시금치밭
장석남
이 시금치들아
이 시금치들아
돌팔매로 들어온 돌이 간혹은 구르고 있어도
끼니는 좀 걸렀어도
이 시금치들아
무슨 새를 기다리나
무슨 새 소리를 기다리나
새파랗기를......
적막(寂寞)도 소슬함도
달디 단 동급생(同級生_
개똥도 개발자국도
아껴서 얼려둔
이 웃음 이 웃음
울 것 같은 이 웃음
시금치들아
시금치들아
얼다 녹고 다시 어는
2월 중순 밭머리에
칼칼한 여정(餘情)을 이총이총 꾸며놓은
시금치 밭 밭머리에 한참을 섰어라
가마를 기다리는 옛 신부의 심정을
그림자를 포개 나누고 섰어라
겨울 연못
장석남
얼어붙은 연못을 걷는다
이쯤은 수련이 있었다
이 아래는 메기가 숨던 까막돌이 있었다
어떤 데는 쩍쩍 짜개지는 소리
사랑이 깊어가듯
창포가 허리를 다 꺾었다
여름내 이 돌에 앉아 비춰보던 내
어깨 무릎 팔, 모두 창포와 같이 얼었다
그도 이 앞에서 뭔가를 비춰보던데 흔적 없다
열나흘 달이 다니러 와도 냉랭히
모두 말이 없다
연못에 꿍꿍 발 굴러가며
어찌하면 나에게도 이렇게
누군가 들어와 서성이려나
"이쯤은 내가 있던 자리"
"이쯤은 그 별이 오던 자리"
하며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장석남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새벽길에 나서서 서리 앉은 한길에
앉어보았지
갈비뼈가 가지런하듯
겨울은 길어 차분하게 정이 들고
긴 겨울 동안 매일의 새벽은
이러한 고요를 가지고 왔던가
매 새벽마다 이걸 가져가라 함이었던가
왜 그걸 몰랐을까
겨울은 가면서
매 새벽마다
이 깨끗한 절망을
가져가라 했던가
꽃씨처럼
꽃씨처럼
겨울 저녁에
장석남
어느 하느님이 온다는 것인가
무슨 젊음을 이제는 저토록 높고 소슬히 이겨냈다는 것인가
저 빈 겨울 감나무
아이들의 입으로도, 늙은이의 잇몸으로도 들어가고 남는 허공들에
그동안은 못 보던 하늘, 못 듣던 바람 소리 두루 맑게 가추는, 그 아래에 나도
저녁을 부르며 섰다
이렇게 나무에 한쪽 등을 기대고 있으면 등 뒤가 바로 하나님이란 생각이 불현듯 저녁처럼 오는 것 아닌가
그러면 나는 저편 산마루 위 하늘, 하늘 속의 멍울져 있는 구름도 좀 보아가며 이 감나무보다도 더 의젓하게,
저녁은 여럿이 오지 말고 딱 하나만 오라
내가 다 가지고 싶어라
그러나 이 어스름을 나는 다 가질 수 없어서
남는 흐느낌을 다정스레 데리고
이 나무처럼 다시 서고 싶은데
어깨를 들썩이는 이 하느님이 온다는 뜻인가
이 많기도 한 하느님을 다 가지라는 뜻인가
이 모퉁이 이 저녁에
나는 갑자기 너무 큰 부자가 되어서
겨울 호숫가에서
장석남
언 호수에 눈 내려 흰 광장인데
누군가 가로질러 걸어간 발자국 있습니다
나는 덜컹 내려앉는 가슴으로 바라봅니다
멀어질수록 수심(水深)은 깊겠고
저 발자국 주인도 두려웠을 겁니다
깊어지는 두려움
깊어지는 두려움
혹 가다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
새는 제 발자국 거둬 날아오르지만
제 발걸음 속으로 꺼져 들어가지는 않았겠지
깨우침이 아니라면
깨우침이 아니라면
무사히 건너편에 닿았을까?
돌아온 자국은 없습니다
왜 저 두려움 위를 걸어갔을까?
위안처럼 발자국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두려움 위를 걸어가 본 심정을
나는 한 두어 뼘쯤 알기에
펄럭이듯 바람 속을
얼마쯤 더 걷습니다
호수 건너편 쪽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또다시 눈이 옵니다
발자국은 곧 깊이깊이 가라앉을 겁니다
발자국끼리만 다정히 가라앉을 겁니다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할 겁니다
심연으로 심연으로 걸어갈 겁니다
격렬비열도
장석남
드뷔시의
기상 개황 시간
나는 툇마루 끝에 앉아서
파고 이 내지 삼 미터에
귀를 씻고 있다
만경창파
노을에
말을 삼킨
발자국이 나 있다
술 마시러 갔을까
너 어디 갔니
로케트 건전지 위에 결박 지은
금성 라디오
한 번 때려 끄고
허리를 돌려
등뼈를 푼다
가고 싶은
격렬비열도
(요즘 라라 크래커는 왜 안 나오지?)
경주 황룡사 터 생각
장석남
지난봄 경주 황룡사 터엘 꼭 가보고 싶어 거길 갔었습니다
종달샌지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가라앉고
주춧돌들 나란히 나란히 무릎 꼭 오그리고 제자리 앉았는 자리마다
하늘도 그 주춧돌의 하늘로서 하나씩 서 있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마다 앉아서 한 시간쯤씩
아니 하루쯤씩 앉아 있어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허공을 오르락거리는 새들은
한평생씩 앉았다 가라는 것 같았지만
그만 내 가진 목숨이란 게 그걸 못하게 하고는 재촉하는 바람에 그냥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어느 생에서는 꼭 그 주춧돌 위에
자정 넘긴 하루씩은 세워보고 싶은데
어디에 무슨 숨으로 기원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이승은 다 갈 것 같습니다
귀에 맴도는 종달새들 소리만 몇 남겨서
저승까지 굴려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계단 옮기기
장석남
1
계단을 부수어
하늘로도 가던 길이
저녁으로부터도 내려오고 길이 사라진 것이었다
독락(獨樂)의 어느 누각이었다면
안개 짙은 어느 아침녘이
계단도 되었겠지만
우유도 신문도 올라오고 묵은 김장 김치 웃모가지를
파 껍질과 함께 담은 쓰레기봉투도 내려가는,
난간이 요긴한 계단이었으므로
세상의 길은 잠시 사라진 것이었다
계단을 부수고 가설도 안 되어 잠시 길이 없는 동안
오, 나는 꽃처럼 피어났으니
그 열락(悅樂)을 모시는 법을
세상의 모든 꽃이 고립(孤立)임을
처음으로 배운 것이었다
2
계단이 있던 자리를 마당에 보태고
시멘트 가루를 내어 버리고 철근을 자르고
허공을 업어다 옮긴다
계단은 살구나무 아래서 시작된다
하늘을 깎아서 칸을 만들고
우(右)로 꺾어 현관에 닿는다
허공을 걸어나가 좌(左)로 꺾어 지상에 닿는다
나는 갑자기 정객이 된 기분이다
3
옮긴 계단에 서면 나는 가뿐하다
모든 무게를 버린 듯
회고도 미래도 버린 듯, 춤도 버린 듯 가뿐하다
죽음도 숨고
봄도 숨고
이별도 숨고
하룻강아지도 숨는 계단
살구나무 아래로
계단을 옮기고 나는
꿈보다 정치를
시보다는 산문을
더 잘 할 듯이 가벼웁다
4
계단,
집의 우화(羽化)
날 수 있다는 듯이
나의 정신까지도 바꾸려 든다
살구꽃 피어나면
다시 열락(悅樂)을 모실 수 있겠지
고립(孤立)을 모실 수 있겠지
고대(古代)
장석남
밥을 해 먹기 시작하는 방이 있다
잠만 자던 방에서
기명들이 하나씩 모이고
솥에 마침내 쌀을 안쳐
밥을 끓인다
건건이를 벌려놓고 밥을 뜬다
숟가락 소리가 난다
젓가락 소리가 난다
고대(古代)처럼
밥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방이 있다
잠만 자던 방에서
통곡이 시작되는 방으로
가을이 온다
고양이가 다니는 길
장석남
조용하여라
다정하여라
위태로워라
어긋나지 않고
침잠의 때에만 가만히 열리는
고양이가 다니는 길
말을 들어보니
사랑이 그러하네
먼 허공에만 빛 띄운 어둠의 길
가랑비와 함께 다니는 길
절벽과 노니는 길
격렬한 고요의 길
어긋나지 않고
따스하게 숨은
고양이가 다니는 길
고양이 풀에 물 주다
장석남
직장의 창가 화분 하나에 고양이풀이 돋아나서 겨울을 난다. 겨울에도 발그스레하게 물만 주면 깔깔댄다. 저년이! 하면 또 깔깔댄다. 물 준지 오래면 다 죽은 듯 풀어헤쳐져서 늘어지지만 물 주면 두어 시간이 가지 않아 다시 일어선다. 불굴의 애교다. 곁의 화분으로도 옮겨가는 것 본다. 받침 접시 넘치게 물 주어 걸레로 닦으며 많이 준 것 참 드물게 후회 없다.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
장석남
국화 허리가 물들어서
정강이는 시들어서
거기 절을 짓고 굴을 파고
향기처럼 소멸을 빌다 보니
동백이 오고 있다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
법고 소리,
둥구둥구둥둥둥둥둥 딱 둥둥 둥구 둥둥둥 따기따기 둥둥
국화 정강이 슬퍼서 절을 짓고 빌다보니
동백이 오고 있다
동백 속에 또 절을 짓고 빌어서
국화를 부르리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
꽃밭 두드리는
법고 소리,
공터
장석남
비가 오고
공터가 한아름 안고 있는 이복(異腹) 하늘은
비로 붐비고
공터는 조그만 길들을 불러다 비를 맞히고
붉은 우산을 지나가게 하고
우산끼리 입도 맞추게 하고
공터에 안겼던 하늘은
싫증 난 여자처럼 공터를 버리고
자기를 지워 달아난다
여전히 비는 쑤시듯 남아
할 수 없이 공터는
비의 공염불만 밤새 듣다가
비가 가고
공터를 머금는 햇빛 몇 평
또록또록한 머위눈과
가슴을 뜯어 내리는
자목련의 긴 그림자와
그래도 멀리 달아나지 않는
조그만 길들과
머위눈 하나로도 꽉 차 그렁대며
조용히 살을 말리는
공터의 공(空)한 내력과
광화문(光化門)
장석남
이제는 무슨
설움을 아는 자세이다
새파란 귀를 바싹 세우고
인왕의 그림자를 무릎에 앉혀둔
저녁이다
광화문 검은 기왓장 위의
저 급한 각도의 밤 빛들을
때로는 진저리 치는 그 빛들을
돌려세우는 정적은
저 사루비아 꽃빛인가 보아
누군가 과다히 뿌리고 간 꽃빛들
정적은 어느 부근에서 그치나
이쪽을 저쪽과 연결하며 훌쩍 날아가는 몇 덩이 새들
그 허공의 선(線) 위에
벗어놓은 눈과 코와 입을 다시 달고서 북악은
이제야 제법 설움을 아는 표정이다
구두 수선을 노래함
장석남
구두 수선집 석유풍로를
노래했던 것은
초겨울 어느 날의 진눈깨비가 아니었던가
까만 반짝임들과
훌쩍임들의 노래는
얼마나 먼 길을 가던가
양철 지붕에 칠한 진홍의 페인트
들끓는 시심
낮은 지붕 아래 오그리고 앉아
종아리를 드러낸 처녀여
양철을 막 뚫고 피어나는 꽃을, 향기를
수선공의 눈빛은 흐리게 중얼대는데
굽을 가는 까만 씨못과
작은 망치의 노래는
조그만 입구를 다만 꽃다발로 부풀린다
구름의 아홉 번째 지나감 – 팔십년대(八十年代), 혹(惑)은
장석남
마음 흐린 날
학림다방 창문가에 앉아
구름 지나가는 것을 센다
아홉 번째 구름의 지나감
엄엄한 가장행렬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했던,
불 끈 유랑 악단
발목이 시겠다
거기거기쯤에선 발목도 벗고 싶겠다
손톱이 꾹꾹 탁자의 나뭇결 따라 새기는
구름의 아홉 번째 지나감
잠시 햇빛 나다 다시 흐리면
소리 막 그친 듯
눈시울 스치는
불 끈 유랑 악단
구름이 어떤 그리움에 젖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듯
장석남
희게 부푼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배공나무에 눈을 주어 바라본다
구름 속에 언뜻 치자꽃 빛이 비치는 것도 나는
남은 눈으로 보고 왜 그런 빛이 비쳤는지
구름이 어떤 그리움에 젖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듯
보고 있다
저렇게 배공나무에 바람들이 와서
종일 아픈 표정으로 놀며 칭얼대며 떠나지 않는 것은
바람 남편이 지금
어디 가서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거야
그래 그곳을 배공나무 속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비로소 흥얼대며 새 움이 나면
바람 남편의 바람기는 자명해지는 거지
내 마음에 지금 어떤 그리움이
흥건해져 눈 돌릴 틈 없이
배공나무만 보이니
그 속의 어떤 움이 지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다
희게 부푼 구름이 지금 우리집 문 앞에 와
내 거기를 보고 있는 거다
인가(人家)에 내려온 매이 눈처럼
내 어떤 움을 쏘아보고 있는 거다
국화꽃 그늘을 빌려
장석남
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 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군불을 지피며
장석남
1
군불을 지핀다
숨 쉬는 집
굴뚝 위로 집의 영혼이 날아간다
가출(家出)하여, 적막을 어루만지는 연기들
적막도 연기도 그러나
쉬 집을 떠나진 않는 것
나는 깜빡 내
들숨소리를 지피기도 한다
2
집 부서진 것들을 주워다 지폈는데
아궁이에서 재를 끄집어내니
한 됫박은 되게 못이 나왔다
어느 집 가계(家系)였을까
다시 불을 넣는다
마음에서 두꺼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잉걸로 깊어지는 동안
차갑게 일어서는 속의 못끝들
감히 살아온 생애를 다 넣을 수는 없고 나는
뜨거워진 정강이를 가슴으로 쓸어안는다
불이 휜다
3
부지깽이로 불길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
불 위로 걸어와 내 얼굴 뒤로
한 남루한 옷차림이 지나갔다
불길, 불의 길 위로,
장작을 넣지 않고 있으면 불은 나를
자기 품 더 가까이 불렀다 그러면 나는
네 가슴속으로 파고들기도 했었다
때로 장작에
차가움을 섞어 넣기도 했건만
궁금한 일-박수근의 그림에서
장석남
인쇄한 박수근 화백 그림을 하나 사다가 걸어 놓고는 물끄러미 그걸 치어다보면서 나는 그 그림의 제목도 여러 가지로 바꾸어 보곤 하는데 원래 제목인 「강변」도 좋지만은 「할머니」라든가 「손주」라는 제목을 붙여보아도 가슴이 알알한 것이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가 술을 드시러 저녁 무렵 외출할 때는 마당에 널린 빨래를 걷어다 개어 놓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 빨래를 개는 손이 참 커다랐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장엄하기까지 한 것이어서 聖者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멋쟁이이긴 멋쟁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또한 참으로 궁금한 것은 그 커다란 손등 위에서 같이 꼼지락거렸을 햇빛들이며는 그가 죽은 후에 그를 쫓아갔는가 아니면 이승에 아직 남아서 어느 그러한, 장엄한 손길 위에 다시 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른빨래를 개며 들었을지 모르는 뻐꾹새 소리 같은 것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궁금한 일들은 그러한 궁금한 일들입니다. 그가 가지고 갔을 가난이며 그리움 같은 것들은 다 무엇이 되어 오는지...... 저녁이 되어 오는지 ....... 가을이 되어 오는지....... 궁금한 일들은 다 슬픈 일들입니다.
귀순하는 저녁
장석남
어느덧 내 어깨에 조용히 얼굴을 묻는 노을
풍향계가 침묵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곳에서
저녁은 오고 별은 떠서 글썽인다
자전거를 타고 출렁이는 아이들
다 돌아간 뒤
빈 그네에 제 무게를 얹은 몇 가닥의
바람을 본다
말뚝처럼 서서 나는
어떤 욕망에 내 무게를 얹어 볼 것인지
눈감아 우물처럼
내 안으로 내려간다
온 세상이 으깨진 불빛으로 가득하다
꿈도 발등이 찍혀 있다 바람에
싸늘히 손바닥 뒤집는 잎들, 지붕들
나는 둘러친 國境을 넘어
흔들리는 작은 불빛마다 발자국을 찍는다
멀리 바람으로 귀순하는,
귀순하는 저녁
그 라일락 밑에는
장석남
그 라일락 밑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산다
한해살이풀들과 깨진 벽돌 조각,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린 밤과 밀담과 욕지거리들이
부모 없는 아이들처럼 서로 다른 원색의 남루를 입고서
라일락이 주는 그늘로만 집도 하고
먹이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때로 개 오줌을 맞으며
산다
내 자주 가보는
그 라일락 밑에는 돌멩이들이,
숨이 차서 간 때는 밭은기침들이 되어서 살고
고단해서 가는 때는 스님이 되어서 살고
연인이 되어보자고 가는 때는 꽃 계곡처럼 산다
목이 쉬어서
헌데 이상하기도 하지
이상하기도 하지
그 향기
이상하기도 하지?
한결같이
한결같이
그리운 시냇가
장석남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한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
그믐
장석남
나를 만나면 자주
젖은 눈이 되곤 하던
네 새벽녘 댓돌 앞에
밤새 마당을 굴리고 있는
가랑잎 소리로써
머물러보다가
말갛게 사라지는
그믐달
처럼
근황
장석남
12월 가고 신년이 되니 새로 이사온 우리집 뜰 앞에 알 수 없는 꽃들이 피었습니다 벌써 진 몇몇 꽃 끝에서는 풋열매가 열렸고 그 속에 새소리 들립니다
그 나무의 꿈길이 이승으로 오고 있습니다
깨끗한 바람이 묵은 거미줄을 흔들고 새 상표처럼 뜬 낮달은 깊은 시선으로 빈 나뭇가지 사이를 흐릅니다 나 그사이에 서 있습니다
내 눈에 신 열매가 익고 있습니다
글씨를 말리고 - 고산(古山) 서실(書室)에서
장석남
붓을 잡아보고 일자(一字)를 배우고
붓끝을 세워서 잠두(蠶頭)를 마치고
또 수로(垂露)*를 마치고 창으로 들어온 뉘엿한 햇빛에
떨리고 서툰 획들을 말린 일이 있습지요
내 손에서 쏟아져나온 것인지
어깨에서 쏟아져나온 것인지
하여튼 붓으로 먹을 찍어 종이를 적셔나가다 보니 글쎄 어느 틈엔
몸에선지 맘에선지 글자들이 빠져나간다는 생각이 들었죠
고산(古山)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그 획들을 말리는 사이에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콩이 여물고 겨울이
완당(阮堂)과도 같이 칼칼한 획들을 사위에 두르면
툇마루께에서 글자와 햇빛과 바람과 더불어 나는
뼈를 말리고 있을 테니
글씨를 말려보는 일은
젖은 마음을 미리 내어 말려보는
참 해 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습죠
아주아주 떨리는 일이었습죠
* 서예에서 가로。새로 획의 마무리.
기러기 간다
장석남
기러기 간다 깊은 달밤을 떼메고
기러기는 간다 기러기 날아간 내 눈에
갑자기 울창해지는 기러기 울음
그날 모래밥을 먹고 나는
내 발길을 따라갔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를 밖으로 밀었다
종일토록 이무 곳에도 닿지 못하는
봄 물맛은 희망보다 쓰고
내 눈빛 안에서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끝내 물오르지 않는 그날 하루
누가 나를 바라다보는지 내 걸음도 자꾸 깎여
부단히 낮아질 때
잠보다 먼저 꿈이 왔다
가끔 흉한 꿈에 찔리는 잠이 아팠다
사람이 삶보다 급히 경사지는 잠을 뚫고
기러기 간다 더 깊어질 곳 없는 겨울 한철 떼메고
기럭기럭 그리움만
울창히 서 있는 검은 산 넘어
간다 기러기 간 구멍으로 봄은 올까 기러기는 간다
(끝에 '나도 기러기 가자'고 썼다가 지우는 마음이 자갈밭 같다)
기압골의 집
장석남
삼천 리 금수강산 모두에 비 내리지 못하고
서해 일부 해상에만 뿌리던 빗속에서
우리 집은 지붕 아래에 습관처럼 토방과
마루 그리고 밥과 감자를 삶는 부엌을
간직했다 밭과 논에 널려 있던 어둠들이 비를 피해
집으로 몰렸고 그림자가 젖은
바람도 울타리를 흔들었다 일광에 살찐
눈물들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가끔
목이 멜 때는 추녀 끝이나 살구나무 늑골 아래에
고이기도 하였다 비가 올 때는 앞바다가
더욱 가까이 다가와 숨죽였다 저물어도
환한 바다의 복판으로 눈먼 고기떼들이
몰려와 콩깻묵 같은 마을의 불빛과 낯설게
놀다간 돌아갔다 옹기종기 물살에
떠는 앞바다 섬들은 우리집 눅눅한 가족사처럼
뿌리가 후들거리고 뿌리에 뿌리를
다시 박으며 자라나는
서해 일부 해상의 여름 어느 날
내린 비는 흘러서 바다로 갔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진 않았다
기억하지 말아야 할
장석남
그대 설움 옥수수밭.
기억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한치 더 자라 쑥덕이는.
강물 너무 쉽게 넘어오는 저녁 오랑캐.
식은 죽처럼 웃는 물의 밤.
젖은 옷을 입고 옥수수밭에 뒤척이러 들어가는 그대.
들이쉬는 숨 끝 물먹은 별.
나와 반씩 나누는 빛.
손바닥 펴 가슴 문질러 지워버릴 터이니 그대.
옥수수밭에서 나와 옥수수밭 다독여 재우고.
기억의 등 뒤로 못 박아줘.
턱 빠진 기억
기억 뒤의 대못.
기차에서의 술
장석남
기차에서 마시는 술은 발밑에 구름을 만드는 일과 같아서 또 가슴께에 파도를 불러 모으는 것 같아서 나는 목적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차 또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올 차가 아니고 그 모든 나선의 여정 속에서 술맛 좀 아는 사투리들과 첨작으로 치닫는 술은 차창에 어린 이국 외투의 어둠이나 못 알아들을 새벽, 발음 새는 가을 나무들, 그런 것들과 함께 하는 술은 참 커다랗기도 한 벼슬길의 술이어라
긴 의자
장석남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오전엔 새가 한 마리 모퉁이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대다간
새가 혼자 앉기에는 너무 큰 긴 의자
종일 햇빛만 앉아 있는
긴 의자
새가 그 맑은 눈으로 곰곰 궁금해했던 것이
이별에 대해서였다는 것을 나는
밤이 다 늦어서야 알고
다시 내다보는
긴 의자
오세요
앉았다 가세요
가끔은 누웠다가 가세요
얼룩무늬 그늘도 가지고 와서 같이 있다 가세요
오세요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길
장석남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길눈
장석남
밤이 점점 길어지므로
길눈 어두워 흘러오는 별자리들만이 내 몫이다
그 어떤 애무도 없는 사랑들 이루어
여전히 세상을 기르고 있는
겨울 골짜기
바위 뒤의 바위 뒤의 바위 뒤로
나의 입맞춤의 주소를 옮기고
멸망이라고 불러 보랴?
밤은 길어져 어느 하루는 모두 밤이리
길눈 어두운 내 눈에 흘러든 별자리들이
탄탄한 발짝 소리를 내며 메고 가리
길모퉁이에서
장석남
언제는 저렇게
오래된 나무 속에
그 푸른빛이 들었다가
오늘 이렇게
어머니 생각을
하게 할 줄이야
언제는 이
몸뚱이에도
긴 그림자가 들어 있어서
여기서, 여기서
그림자 지워지도록
앉아 있을 줄이야
깊은 밤
장석남
나는 지금
빈 백사장이 자꾸 눈에 보여
무슨 까닭인지 백사장이 자꾸만 눈에 보여
바람이 불고 있다 웅성거리는 웅성임들
지붕이 바람을 업고 모래꿈을 꾸고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자기 육신을 치는 소리
풍경이 자기 육신을 쳐서
소리로라도 가려고 하는 곳
그곳을 나는 지금 보고 있다
백사장 위로 하현(下弦)이 하나 우두커니
걸어가고 있다
꽃
장석남
사랑하는 나와
사랑하는 외투와
사랑하는 욕망과
사랑하는 헛기침과
빈방과
칙칙대는 라디오와
가물대는 그리움과
나란히 눕는다
어디선가 기웃이
소만한 꽃이
나를 들여다본다
어디서 기울어진 꽃인가
가만히 보니 꽃 뒤로
내 발바닥이 닿아 있다
꽃밭을 바라보는 일
장석남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 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면.
꽃 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었으면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 도망 온 별 몇을
꼭 나처럼만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 같네
꽃 본 지 오래인 듯
장석남
가을꽃을 봅니다
몇 포기 바람과 함께하는 살림
바람과 나누는 말들에
귀 기울여
굳은 혀를 풀고요
그 철늦은 흔들림에 소리 나는
아이 울음 듣고요
우리가 스무 살이 넘도록 배우지 못한
우리를 맞는 갖은 설움
그런 것들에 손바닥 비비다보면요
얘야 가자 길이 멀다
서산(西山)이 내려와 어깨를 밉니다
그때 우리는 당나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타박타박 길도 없이
가는 곳이 길이거니
꽃 본 지 오래인 듯 떠납니다
가을은 가구요
꽃의 사다리
장석남
하늘에 오를 수 있는 사다리는 없다.
하늘에 오르고 싶은 자
하늘에 오르는 길은
꽃을 사랑하는 일,
나무를 사랑하는 일,
그 빛과 그늘들을 사랑하는 일,
눈물을 사랑하는 일.
또 가난까지도 사랑하는 일.
꽃들 다 하늘로 솟고
누군가 꽃의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간 듯
담장을 넘어간 넝쿨들 고요한 아침.
이런 날은 맨발로 하루를 다 살고 싶다
꽃이 꽃을 지나
장석남
사루비아 활짝 피어 스스로 사루비아가 되어갈 때 달래주어야만 해
전부가 영영 사루비아가 되지 않도록 쓰다듬고 다독여주어야만 해
피골이 상접한 저녁노을이 아주 오기 전에
모든 꽃은 사막으로 가지만
쇠락하라 쇠락하라 가을볕
호흡마다 가쁜 색을 뱉지만
거기 보탤 내 하나의 죽음은 아직 미숙하니
피어나는 모든 꽃 앞에 지날 때마다
갈증의 문답을 한다네
꽃이 꽃을 지나 사막으로 가는구나
꽃이 꽃을 지나 풀벌레에게로 가는구나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
장석남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첫 꽃 핀 꽃사과여
그 꽃의 중량을 가늠해 보니
처음 업어보는 처녀의 무게만 하겠네
처음 배에 올려보는 女子의 희고 미끄러운 허벅지 무게만 하겠네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꽃 떨구고 하늘로 솟을라나?
혼이 난 김에 아주 솟아갈라나?
숭굴숭굴한 자주 잎들의 무게여
나의 몸살도 저를 닮아서
문고리를 채우네
꽃이 졌다는 편지
장석남
1
이 세상에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가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윈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 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 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다
꽃집에서
장석남
나는 꽃이 되어서 꽃집으로 들어가 꽃들 속에 섞여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고 오가는 사람들로 시들어, 시들어
나는 빚이 되어서 어둠으로 들어가 어둠속에 숨어서 오가는 숨결들을 비추고 오가는 숨결들로 시들어, 시들어
나는 노래가 되어서 빛나는 입술로 들어가 가슴에 잠겨서 피어나는 꿈들을 적시다가 오가는 꿈들로 시들어, 시들어
꽃집이여
꽃집이여
혀와 입술을 파는 집이여
마른 혀와 마른 입술을 파는 집이여
나의 육체를 사다오
나의 육체를 팔아다오
꽃차례
장성남
조팝꽃이 피면 기침이 오지
오래된 내 몸뚱이의 관습
그맘때 한 이별이 있었지
허리를 쥐며느리처럼이나 굽히고
쇤 기침을 쏟고 나면 이른 노을이 잔칫집 같았지
조팝꽃이 지나가면 모란이 오지
자줏빛 옛이야기 같은 모란이 오지
이마 뜨거운 이 있을 거야
혼이라도 가슴 싸늘한 이 있을거야
모란을 보면서 미워한 이가 있었거든
허나 모란은 일찍 지는 꽃
어느 아침 나는 서운히 서서
모란이 있던 허공 언저리를 더듬어보지
점잖은 호수와도 같이
후회는 맑고
꽃이 피고 지는 사이
모든 후회는 맑아
다시 한 차례 살아오르는
꽃 소식
나는 뜰을 안고
장석남
꽃 피고 지는 뜰을 안고
시간 뒤에 숨어 나는
뜰의 눈인 꽃과
꽃의 육체인 말 뒤의
향기를 베고 눕기도 하지만
내가 뜰을 안으면 그러나
안기는 것은 뛰는 심장 하나
피가 너무 따뜻해 와 그 춤을, 그 없는 안팎을
견딜 수가 없어 나는 가끔
영혼에도 한 줌씩
던져주지만
나무 속의 방
장석남
나무는 너의 방
내가 놀러 가고 싶은 너의 방
너를 안고 싶어한 너의 방
나무는 너의 방
가자고 하지 않아도 가고 싶은 방
나무는 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문이 있는 방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들어가는 방
그리고도 다시 들어가 바라보는 문
너의 방
나무는 너의 방
너는 방 속에 있는가
너는 많은 잎 속에 있는가
지금은 없는 잎,
이마에 해와 달이 지나가고 있는가
나무는 너의 방
나는 나무에 매여 있는 그늘
나무 그늘
웃음 뒤의 웃음
제 몸을 진저리 치다가 다시 서는 나무
꿈을 잠시 떨어뜨려 놓고 있는 나무
울음 뒤의 울음
나무의 낮은 데를 가보고 싶어
소 발자국 같은 걸 그늘 속에 그려서 문으로 삼을까
너에게 가는 문으로 삼아야 할까
먼 데를 보는 소의 표정으로
그래야 들어갈 수 있을까
너에게 바치는 춤을 추어야 할까
나무는 너의 방
너를 안고 싶은 방
해마다 한 칸씩 더 나를 가두고
해마다 한 칸씩 더 나를 밀어내는
아득한 방
나란히 누워 있고 싶은 방
이렇게 맑은 날은
나 아주 조금만 존재해야 하리
존재하려면 아주 조금만 조금만
존재해야 하리
차라리
너의 속이 되어서 너의 속이 되어서
아주 속이 되어서 없고 싶구나
나비를 타고
장석남
해가 바뀌고 첫 나비를 본다
심전도 검사 눈금 모양
절뚝절뚝 날개를 저어간다
난 그 그늘이 지나간 곳을 밟는다
어디로 가는가
내 등과 머리를 열고
철근의 나비들의 날아올라 허공을
노랗게 절뚝인다
절뚝절뚝 종각에서
시청 쪽으로 꺾어진다
봄이 뚝! 하고 꺾어져
나비 날개 속으로 들어가듯 나는
시청 지하철로 들어간다
그때 누군가 나를 가로막는다
나비는 흔적도 없고
내 등과 머리는 좀체 아물지 않는다
나아가는 맛
장석남
노무현이 된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때, 현실을 좀 아는 사람치고
김대중이 된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때도 자주 국밥집에 앉아 있곤 했다
노태우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도, 김영삼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도 그랬다
국밥에 코를 박고 허연 기름 국물에 머리카락을 적시며
좀 나아가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친구는 말한다 나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로 미끄러진 비갯덩이를 얼른 입에 집어넣고 손가락을 빨고 설컹설컹 씹으며
그래 나아가는 맛, 국밥의 나아가는 맛,
나아가는 맛, 정치적 용어로는 진보, 나아가는 맛, 기껏
콜라나 피자로밖에 할 수 없는 이 진보, 다른 말로는, 나아가는 맛,
한없이 나아가도 한없이 모자랄 것 같은
이 나아가는 맛,
삼선시장 순댓국밥집의 길거리로 낸
주방의 진보,
쓰레기통의 악취를 덮어놓는
신문지의 진보,
돼지 대가리의 코를 베고 귀때기를 베고 혀를 잘라서 국밥에 넣듯이
나아가는 맛,
시치고는 참으로 진부한
이 나아가는 맛,
버들가지가 지난 겨울의 구태를 벗고 서서 시원하게 휜다
저렇게 나아가는 맛
나에게 온통 젖어버리는
장석남
썰물에서 눈을 만났다
눈을 만나 어깨가 다 젖었다
눈에 어깨를 잃고, 마음은 썰물을 따라가고
바람이 불었다
눈보라 나를 싸안고 썰물 위로 걸었다
비명을 참으며 몸 뒤채는 파도들
곁에
오래 있기 아팠으나
......오래도록
나를 데리러 오는 길은 없다
나에게 온통 젖어버리는 눈보라
나의 사치(奢侈)
장석남
거문고라는 짐승을 하나 입수하여
왼쪽 벗은 발목 위에 걸쳐놓고서
나의 사치는 완성되려 하고 있다
당- 하고 한 번 때리고
덩- 하고 받는다
문밖 뜰에선 사철나무들이 자라 오른다
당- 하고 또 딩- 하는 사이
완고한 성벽 위로 2월 윤달이 뜬다
작위(作爲)라고는 없는 달이
작위(作爲)와 작위(作爲) 위로 가볍고 가볍다
상부(上部)가 조금 이지러져서
제 사치를 완성한, 열 이레 달
사치에도 최고엔 겸손이 있다는 눈치를
나는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의 사치는 감추고 감추어도
치졸하고 치졸하다
치졸은 가끔 연애에 닿는 문법이지만
극에 달하지 못하여
사랑에 닿지 못하고
열이레 달이 되지 못한다
새로 난 다리(橋)를 건너다니듯
깨달음이 없고
갈구가 없고
종말이 없다
사랑은 얼마만큼 먼가?
강 건너 저 불빛만큼 먼가?
저토록이나 먼가?
줄을 내리쳐서 소리들을 털어버리고 나면 또다시
정지(停止)가 오고
맥박이 오고 또 정지가 온다
지금, 감격은 겨우겨우 완성하는 停止
사치에도 정지가 있다는 눈치를
나는 울면서 울면서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의 유산은
장석남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 같은 것으로 하고 싶어
장마 큰물이 덮었다가 이내 지쳐서는 다시 내보여주는,
은근히 세운 무릎 상부같이 드러나는
검은 징검돌 같은 걸로 하고 싶어
지금은,
불어난 물길을 먹먹히 바라보듯
섭섭함의 시간이지만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 같은 것으로 하고 싶어
꽃처럼 옮겨가는 목숨들의
발밑의 묵묵한 목숨
과도한 성냄이나 기쁨이 마셨더라도
이내 일고여덟 형제들 새까만 정수리처럼 솟아나와
모두들 건네주고 건네주는
징검돌의 은은한 부동(不動)
나의 유산은
나의 장례식
장석남
병원보다는 집에서
항암제보다는 진통제를
눈물보다는 침묵을
혼침보다는 명상을
남은 각막은 필요한 이에게
누울 곳은 하늘이 보이는 탁 트인 잔디밭
드레스 코드는 하얀색
배경 음악은 천 개의 바람이 되어
꽃보다는 종이 나비 한 마리씩
벽에는 사진들을
답례로는 자서전을
동영상으로 남기는 마지막 작별인사
고별사는 모든 이가
해탈주와 장례미사를
모든 이에게 식사 한 끼 대접하면서
한지로 된 수의와 종이관으로
매장보다는 한 줌의 재,
납골당보다는 나무뿌리로
남은 것은 필요한 이들에게
나무 밑 묘비명은
일생동안 죽음을 궁금해하다가
이제 만나보러 갑니다.
낙법(落法)
장석남
곤하여 침 흘리며 졸았지
달콤했지
지푸라기를 문 새의 표정
근중(斤重)한 동굴
가려운 겨드랑이 긁고
등허리는 손 닿지 않아 안타깝네
산수유꽃 아래로 가
둥치에 등 비비네
꽃 몇 떨어지네
어디서
새 우네
새 우네
쌀뜨물 같은 햇볕
발등 적시네
꽃가지 하나 꺾어다 병에 꽃고
내내 낙법 익히네
낙엽 쓰는 노파여
장석남
11월의 아침을 쓰는 노파여
저녁을 쓰는 노파여
바람까지도 쓰는 노파여
낙엽을 이기려는가?
낙엽 쓰는 이 없는 그 어느 날을 내게 주시려는가?
고요의 그 어느 날을 어쩌시려는가?
나뭇가지 사이 젖어가는 하늘이나 한꺼번에 보이시려는가?
어머니여,
비질 소리가 노래로다
서럽게 서럽게 멀어지는 노래로다
낮 꿈
장석남
낮달에 반지를 끼워주는 저 거지와
공터에서 기러기 울음을 우는 비닐 봉지들과
낙태한 아기를 이름짓고 아버지와
담쟁이덩굴이 올라가는 그의 눈동자와
나란히, 봉사처럼, 서로 뒤를 잡고,
무슨 길이라도 되는 듯이
낮은 목소리
장석남
더 작은 목소리로
더 낮은 목소리로, 안 들려
더 작은 목소리로, 안 들려, 들리질 않아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해줘
라일락 같은 목소리로
모래 같은 소리로
풀잎으로 풀잎으로
모래로 모래로
바가지로 바가지로
숟가락으로 말해줘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해줘
내 사랑, 더 낮은 소리로 말해줘
나의 귀는 좁고
나의 감정은 좁고
나의 꿈은 옹색해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너의 목소린 너무 크고 크다
더더 낮고 작은 목소리로 들려줘
저 폭포와 같은 소리로,
천둥으로,
그 소리로
낯선 방에서
장석남
초 저녁에
빗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깊은 밤에까지 빗소리
평생 옥수수 농사만 짓는 사람의 발길처럼
오르락내리락 이어진다
새벽에, 빗소리
없다 빗소리 없고
파래진 창 모퉁이에
말간 손톱달이
갸글갸글한 숨결에 씻기고 있다
온몸이 그리운 숨결이다
온몸으로 그리운 숨격이다
내가 그믐이니
장석남
그믐이었다
사철나무 잎사귀에 맺히는 별빛으로 영혼을 축였다
눈동자에 벼랑이 들어와 서 있기도 했다
인적이 뜸한 길목과 허공들은 나 때문에 배가 불렀을 것이다
붕대를 풀지 못하는 마음이 아마 열반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믐이니 만월이여...... 먼 곳이여!
내 가슴과 사타구니에 손목 쓱 집어넣어다오
이마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내가 섰던 자리엔 가랑잎만 한 장 달빛을 먹고 있을 것이다
물소리가 조바심으로 가슴을 데리러 오면
참으로 난해한 만월이 가슴에서 빛났다
내가 듣는 내 숨소리
장석남
내가 쉬는 내 숨 속에
길이 하나 보이다 지워졌다
길, 혀 꼬부라진 말
움켜쥐고 깊어진 덕적도(德積島) 산골짜기에서
내가 듣는 내 숨소리
길에 시달리지 않는 곳,
뒤에 길 따라오지 못하고 햇빛과 바람
뜨거운 포옹으로 반죽이 된 곳에
말뚝 처박고 매어두고 싶은 소리
열(熱)띤 꽃 한 송이 속에 오솔길 스미고 있을 동안
내 숨에 사슬 끌리고 文書 없이 말뚝 박히고 너와 너 사이 이어진 국경(國境)이 정수리를 넘어가고 북어처럼 바짝 목마른
세월의 맥박들
길 스민 꽃 한 송이 늙은 햇빛 속에 타오르고 있을 동안
내가 듣던 내 숨 열에 겨웁다
그러나 여기 내 숨 타오르래도 타오르래도
헐떡이며 나를 따라와 하산(下山)길에 몰리며
내가 듣는 내 숨소리
파도 심해도 고요함 많은 물 속 같다면
슬픔에라도 말뚝 처박고
매어두고 싶은 소리
나 혼자 길 아닌 곳으로 나서고 싶은 소리
내가 듣는 에릭 사티
장석남
부서진 선풍기
닳아진 흑판 지우개
벽장 속의 가죽 벨트
울타리에 걸린 비가
아침 풀밭의 거미줄
빛나는 이슬방울
"오늘은 쉬는 날"
바람이 흔드는 팻말
내가 사랑한 거짓말
장석남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
나는 어느 날 사타구니가 뭉개졌고 해골바가지가 깨졌고
어깨가 쪼개졌고 누군가에게는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
거짓말, 사실적인……
그러나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그렇게 내가 사랑한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민다
나는 하나의 정원
한창 보라색 거짓말이 피어 있고
곧 붉은 거짓말이 피어날 차례로 봉오리를 맺고 있다
거짓말을 옮기고 물을 준다
새와 구름이 거짓말을 더듬어 오가고
저녁이 하늘에 수수만 년 빛을 모아 노래한다
어느 날 거짓말을 들추고 들어가면
나는 끝이다
거짓말
내가 사랑할 거짓말
거짓이 빛나는 치장을 하고 거리를 누빈다
내면(內面)으로
장석남
요즘은 무슨 출판 모임 같은 델 가도 엄숙하다
떠드는 사람 하나 없고 콧노래 하나가 없다
밤 지새는, 뭐 그렇게라도 치열해 보자는 이 없다
전부 뭔가 내면으로 주판알을 굴리듯이
예술을 하듯이
신(神)을 보듯이 멀뚱거리다가
총총히들 내면(內面)으로
내면(內面)으로 사라져 간다
약한 정권 탓인가 명상책이 잘 팔리고
다음 정권에 대비하고
어색스런 웃음을 웃다간 또
웃음 속으로 사라진다
나도 그 웃음 속에
몇 겹의 웃음을 섞고
가장 나중 샘솟는 새 웃음을 데리고 자리를 뜬다
어두운 고궁 모퉁이 꺾인 돌담이라도 같이 하다 보면
쓴물이 올라오듯 오래된 질문 하나가 다시 내달려 오는 것인데
남에게 보이기 아까운 연애가 진리라는 선배들의 호탕을
의심해보는 것이다
담 안의 어둠 속 일들이 궁금하고 궁금한 것이다
둥글게 둥글게 살자는 명상도 옳긴 하지만 내 시를 보고
너무 이른 나이에 둥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옳아서
밤새도록 이 꺾인 고궁의 돌담 아래 앉아 있어 보는 것이다
내면(內面)은 다시 조그만 풍경을 하나 피워 올린다
돌담 모퉁이를 돌아 길의 얼굴 하나
내 발바닥 밑으로 발걸음을 데리러 온다
영원히 새로운 풍경이 날 자유케 할 터이니,
내 발자국의 표정
장석남
진흙 위에 찍힌 내
발자국의 표정을
알 수는 없으리
한없이 뒤로 걷는
내 발자국에
나비 한 마리 피어오르는 것
아무도 보지 못하리
내 발자국을 데리고 가는 나비의 눈이
말(言)이 데리고 가는 삶보다
더 뜨거우리
발자국은
날 흐린 사랑의 여정이었으니
사랑은 늘 길 밖에 찍히고
길 밖은 죽음마저 따뜻해
찬비가 뿌려도
죽음까지 적시진 못하리
내 발자국은
길 없이,
차고 맑은 산(山)꽃 찾아가는
나비에게서나 읽어야 하리
내 살던 옛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장석남
나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노래할 수 있을까
불임으로 엉킨 햇빛의 무게를
견디는,
때로는 고요 속에 눈과 코를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내서는 서러운 허공중들도
감싸안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클레멘타인을 부르던 시간들을 아 코디언처럼
고스란히 들이마셨다가
계절이 지칠 때
꽃피는 육신으로 다시 허밍하는
그 집 지붕의 단란한 처마들
나는 걸음에 젖어서
그 갸륵함에 대해서
내 안에서 태어난 들개가 산 너머에서 울다*
장석남
계곡 위로
까마귀 떼 검다.
일순,
하늘 어둡고
그림자 떼 내리는
땅 위,
나는 내 안의
원망(願望)이다.
남을 먹는 것은
비루한 짓,
나는 어슬렁거리는 비열함이다.
도마뱀 이후다.
송장을 뜯어먹는
무명충(無名蟲)이다.
번뇌의
오합지졸이다.
약초의 싹을 뜯는 나비가
아니다, 나는
저 험한 준령을 홀로 넘는
가벼운 넋이다.
희디흰 뼈를 핥으며
면벽(面壁) 10년,
웃는 해골과는 이별이다.
잠 못 드는
수천 마리 개들 으르렁 으르렁
내 안에서
물어뜯고 물어뜯기며
울부짖는
저
아귀들!
* 이 시의 제목은 후지와라 신야가 쓴 『티베트 방랑』의 한 소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내일
장석남
걸어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다는 날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었습니다
꿈으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내일이 있었습니다.
내일도 마당을 깨겠다 -저문 날의 삽화
장석남
어두워졌다
덧창 닫기 전
창변의 매화 분, 난 나란히 어두워진 것
보았다 하나는 잎 몇 남았고
하나는 여전히 온몸이 시퍼런 잎들이다
나에게도 온몸 시퍼런 사랑이 있고
잎 다 버린 환한 죽음이 있고
후회가 있고
여전히 싸움이 있고
콘크리트 마당을 깨다가
지쳐 올라와
뻐근한 손으로 책장 몇 넘기다
끝내 잠이 든 사이였다 잠결에 아이처럼
새로 사 온 신발을 꺼내 신어보고
깨어났다
꿈이 아니었다
저문 것이다
닫던 창 걸기 전에
줄에 엉켜 소리나지 않던
처마 끝 풍경
맨발인 채 가위 들고 올라가
풀어주었다
바깥소식 간혹 들린다
"새신 신고 여기
안으로
와,"
내일 다시 나가 마당을 깨겠다
너무 늦지
장석남
인류(人類)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美大陸)에서 석유石油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都市)의 피로(疲勞)에서 배울 거다
- 김수영(金洙暎)
전문학교를 나와도 영어 두어 마딜 할 줄 몰라 일종 컴플렉스가 되어도 영어 공불 안 하고 대신 한문자나 좀 익혀보려고 하는 것은 중국이 먼저 내 유전자 속의 대국이었기 때문인지 모르지. 전철 칸에서 영어 회화가 유난히 크게 들려 돌아보니 양놈 앞에서 그보다 몇 배 더 크게 떠드는 쓸개 빠진 한국놈이 여간 자랑스럽지만은 않았던 것도 아마 내 유전자 속의 그것때문이었는지 모르지.
이제 막 젖 뗀 아이들에게 혀가 굳기 전에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봄꽃이 하얗게 핀 길을 걸어서 가는 이 땅의 배운 여편네들도 있다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옛날 양반인 양으로 '모두 역관譯官들을 시키려고 그러나?' 그렇게 나를 속여본다. 내 영어 못하는 생각에 비치면 부끄럽기도 하건만 그것보다는 먼저 그 배운 여편네들을 따라가야 할 텐데 우리 애들만 너무 늦은 건 아닌지, 게으른 건 확실하다만 '이러다 너무 늦지! 혀가 굳은 다음엔 아니 아니 이미 늦었지!'
-- 사제관이나 목사집이나 무당집이나 대감집이나 청와대나 할 것 없이 오랑캐꽃이 피어 있다.
-- 아파트 공사장 앞에는 위액처럼 개나리꽃이 엎질러졌다.
-- 목련꽃이 산모롱이에 홀로 매 맞고 나와 앉은 아이같이 지고 있다. 혀가 굳어지고 있다.
정직이 이렇게도 좋지만 그러나 비애는 정직보다 곧고 빠르지.
정직은 저렇듯 너무 늦지
봄도 여름도 가을도 너무 늦지
겨울도 너무 늦지
너무 늦지
봄도 없이 피었다 지는 꽃아
꽃아
가을도 없이 맺는 열매야
너무 늦지
노을
장석남
하나,
아주아주 옛날의
시퍼런 하늘 속에
목단씨를 한주먹 쥐고
또 당신의 손을 한줌 쥐고
이 부딪히며 가서
목단 가꾸고
손 가꾸어
아지랑이 속을 헤엄치듯
한 세상 살아가서
둘,
어머니사온 새 신
좀 작은 듯하여도 그냥 신고
풀밭길 가듯
돌자갈길 생각 않고 그냥그냥 웃어가듯
우리 마음의 캄캄절벽도 꽃대처럼 그냥그냥 커 올라가
노을 하늘을 피우듯
셋,
종소리
종소리
하관(下棺)
녹슨 솥 곁에서
장석남
부엌문이 열리고
솥을 여는 소리
-누굴까?
이내 천천히
솥뚜껑을 밀어 닫는 소리
벽 안에서
가랑잎 숨을 쉬며 누워
누군가?하고 부를 수 없는 어미는
솥뚜껑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에
크고도 깊은 쓸쓸한 나라를 세웠으니
국경처럼 섰는 소년이여
아직 솥을 닫고 그 자리에 섰는 소년이여
벽 안의 엄마를 공손히 바라보던 허기여
그립고 그렇지 않은 소년이여
팔을 들어 두 눈을 훔치라
높새바람같이는
장석남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이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높새의 저녁 - 제주에서
장석남
높새가 부는가
마부는 오늘따라 그림자가 길다
또박또박 자기 길을 확신하는 말과
함께 가는 저녁
제주 바다 멀리
말의 눈은 걸어넘는가
넘어갔다 다시 오는가
높새가 부는가 오늘 저녁
귤빛 우리집 창문은
혼절을 하겠구나
마부의 등이 삐걱이며 닳는 지상의
가장 환한 저녁
눈 그치고 별 나오니 - 산거(山居)
장석남
눈 쏟아져
마당가로 꼬부라져 오는 모퉁이 길에
새어 나간 불빛은 발목 내놓고 무작정 섰는데
어떤 젊은 유배가 저러했을라나
눈보라 위에는 허물어진 방(房)도 한 간 실린 듯
잉잉대는데
차마 우지는 못하고
빈 자루처럼 나는 쏟아졌다오
새벽녘 문 열고 이마 가실 때
눈 그치고 별 나오니
도라지 꽃밭처럼 이쁜 하늘은
귀밑머리 반짝이는 이쁜 새벽은
통증의 저승처럼 찬란했다오
눈길
장석남
밤사이 눈 멎고
햇빛들 먼 길을 와서
쌓인 적막 위에 얼굴을 비빌 때 우리는
햇빛이 오듯
그에게 갈 수 없는 것이냐
오랫동안 눈 내려
지워지지 않은 것 없는데
길은 눈에 묻혀도 여전히 두근거려
적막이여
눈길 적시며 우리가 그에게 닿을 수 없다면
상처에 아픔 안기듯 선명한 표정으로
우리를 안아다오
적막이 되어
가지 못할 곳이 있었던가
영혼까지는 멀고 험해
마른침을 넘기는 눈길
눈.................................길
눈 녹아
장석남
눈 녹아 털썩, 하고 떨어지는 소리로
내 심장이 무얼 하다가 들켜서는
먼 데를 한 번 본다네
붉은 노을,
무얼 하다 들켜서는
급속히 급속히 젖어 들어가네
장대하게
붉어 들어가네 검붉게
어두어 들어가네
장대한 결빙이 조금씩
일 밀리씩 일 센티씩
해빙을 반복하는
3월 산골짜기에 나의
마흔 살이 일 밀리씩 일 밀리씩 반복되면서
마흔 살이 된다네
눈 녹아 털썩, 자정이 될 때
두 다리 펴고 누워볼까?
완성된 공화국을 볼까?
이불 밖에 나온 발목을 볼까?
눈 녹아 털썩, 떨어지는 소리에
믿음은 무얼 하다 들켜서는 마흔 너머,
공화국 너머
먼 데를 한 번 더 본다네
눈보라 - 명동에서
장석남
막 퍼붓는, 나를
특별시 명동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집
처마 밑에 세우고
몰아치는 눈보라
한꺼번에 정신없이
명동을 두들겨
깊은 골짜기로 幻한다
목청이 제 몸보다
수천만 배가 큰
눈송이만한 새가
절[寺] 처마에 와서 목울대를
오르내리며 운다
울음이 명동을 다 덮지만
아무도 귀는 없다 아무도
휘황한 골짜기
눈사람의 스러짐
장석남
나는 녹는다
먼 옛날의 말씀이 나를 녹인다
나를 만들던 손은 나를 떠난 즉시 나를 잊었을 것
나는 소리친다 소리친다
누구도 듣지 않으므로
발밑에서 질척인다 나의 외침은
나의 스러짐/ 이것이 무엇입니까? 외침은
오래된 종소리와 같다
종소리의 멀어짐과 같고
종소리의 반복과 같다
소리가 되다 남은 종과 같이 침울하고 어두컴컴하다
나의 외침이 마저 사라지기 전
나는 이렇게 더 뇌어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자유입니까?
보일러가 으르렁대는 밤
나는 낯선 수로를 걸어갔다
눈이 오는 건 그녀가 내게 오기 때문이야
장석남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을 맞는다
눈이 오니까 그녀는 지금
눈길을 오리라
그녀 뒤의 발자국을 눈은 지우리라
자꾸 눈발은 등을 민다 그녀는
등을 밀리며 오리라 리어카 스피커에서
칙칙대는 한 생애가 쏟아져 나와
쉽게 살얼음이 되는 것 지켜보리라
사람들은 찬 이마와 머리칼을 데리고
어디로 가나 그녀는 지금
손아귀에 깊은 골짜기를 쥐고 오리라
눈길을 오며 그녀는 아기를 가지리라
재개봉 영화 간판을 올리며 눈발 속의 한 인부가
흑백 화면처럼 저녁을 가린다
강화버스 쪽으로 골목 하나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적막한 불빛을 몰고
강화버스가 두런두런 들어선다
골짜기 내게 가까와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
말없이 손을 잡고 나는
그녀에게 입산한다
눈길을 다시 가며 그녀는 호두나무꽃 같은
아기를 가지리라
다게레오타이프
장석남
1 - 경기도 정릉군 권대리에서
야목의 겨울 정원에 내리는 달빛들을 모아다가
앙상한 겨울나무들에게 나누어주기를 며칠
매일 내 그림자가 조금씩 나에게서 비켜선다
멀리 산등성이들이 잔뜩 등털을 세우고 웅크린 사이로
산간 마을이 한 아름 불빛을 안고 들어가 있지만
야목으로 불어오는 겨울바람에는
아무것도 전하여오는 말이 없다
밤이 늦어 야목의 유일한 우물에 찾아온
별자리, 하늘의 음표들, 둥근 코러스
이 야목의 겨울 정원의 쓸쓸함에 대해 누가
관대함을 베풀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 삶의 고요한 손 시림에 대해서
2 - 강원도 서초구 서영리
반달문이 하나 서 있었다
휙 지나간 새의 몸체가 짧게 걸려 있었다
가로수의 가지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낮은 하늘도 모두 처내고 있었다
내 마음은 그레이 구락부에 매일 놀러 가서
밤이 늦어도 오지 않았다
오래된 창문을 뚫고 나온 평화당주식회사
연통에서 외신종합(外信綜合)처럼 빠져 나온 연기들이
골목을 산책하고 있었다
벽보에 붙은 관보들
들춰보는 바람들
바보들
반달문이 하나 서 있었다
반달문을 열고 반달로 들어서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한 사람.
다 늦은 가을 노래 -쳇 베이커
장석남
네 목소리에 창궐하는
구름들을 봐
첫 눈발은
어느 나라 국경을 넘었는지
어느 집 뜰 앞을 서성였는지
창문에 와 잠시 발 구르는
바람의 맑은 발굽을 좀 봐
허공에 발 딛고 오는
첫 눈발들을
다시 데려가는 것은
이 시린 많은 지난날들은 아닌지
네 목소리
가슴에 몇 개의 적막을 던져
징검다리를 만들고 있다
바람에 돋는 저 징검다리들 좀 봐
다랑이길
장석남
논둑길이나 걷다 보면 낫는다
속이 울음인 사람
다랑이 논둑길을 걸으면 낫는다
울음 밑이 시퍼런 우물인
웃음 밑이 떨리는 절벽인 사람
다랑이 논둑길
약(藥)으로 걸으면
가을 가 겨울
눈길 걸어
길 잃으면
낫는다
다방을 차리다
장석남
내가 차린 다방은
2층이다
창(窓)이 넓고
밤마다 별이 와 기억에 잠겼다 간다
별이 가면 영업은 끝난다
음악엔 나뭇잎이 많고
간혹 안에 얼굴이 새겨진 것들도 있다
기우뚱한다
다방으로 오르는 계단 밑엔
잡지를 판다
폐간된 썬데이 서울 또는 지나간 논노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구석에 앉았다가 금방 간다
그녀가 가면 그녀가 내려간 계단은
사라진다
그녀가 간 자리엔 음악이 모인다
오늘은 반달이 떴다
이런 날은 손님이 많다
음악에도 나그네가 많다
다방은 이층이다
다방은 비행접시처럼
떠 있다
다시 가을볕
장석남
삐끗이 문을 열고
들여다보고는,
고요라도 더 옹근
고요
불러도 너는 끝내
거기서 사는군
문 닫고 들어가
다시 또 문 삐끗이 열어
들여다보고는
불러도 끝내 너는
거기서만 사는군
여러 번의 문으로 된
예전에 또 이런 궁전이 있었던가
다시 오동꽃
장석남
어떤 가지들은 하늘을
얽어놓았다 반달이
질려서 떴다
꽃은 달이 밟아가는 음계처럼
보라로
보라로
달렸다
납물 같은
납물 같은
납물 같은
저녁이 온다
저녁 바람이 분다
배가 고프다
내 생애보다도 훨씬 오래인 설움 같은 평화다
오동꽃보라가 진다
누가 이 평화를 쓸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짓씹은 입술들의 낙화를 쓸어서
저 새로 생긴 달을 키워낼 것인가
달은 한 음계를 더 딛어서
오동나무를 벗어나고
밤이 된다
이 생애는 악기가 될 것이다
나는 오동꽃처럼 떨어진다
다시, 오래된 정원
장석남
꽃밭에 꽃 피어나는 소리가 들리는걸
귀를 가지런히 모으고 또 두 눈도 한참씩 감아가며
듣고 있노라니
꽃이여,
꽃이여, 하고 부르게도 되는군요
꽃이여, 피어오는 꽃이여,
꽃은 꽃밭에만 있는 것이 몸 섧었던가
그 빛깔과 향기와 웃음을
내 귀에까지 또 더 먼
먼 나라까지도 보내었군요
하여 하늘은 고등어처럼 짓푸르고요
그 곁에서
고스란히 듣고 보고 앉은
저 바윗돌의 굳고 정한 표정도
겸허히 바라보게 되는군요
꽃들이, 또 저 바위가
우리의 이름을 한 번씩, 천천히, 또박또박 부를 듯도 하여
조금 더 단정한 자세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것을 해마다 새롭게 새롭게 하였으리니
꽃 피는 꽃나무들 밑뿌리 뻗어가는 소리까지
우리 귀와 눈은 따라가서
꽃이여,
꽃이여, 부르면서 그 위에
처음 솟는 웃음을
몇 바가지씩 맘껏 쏟아부어 줄
기도를 갖지 않을 수 없군요
달과 수숫대 -"빈(貧)"
장석남
막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가
낮달을
마당 바깥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아래쪽이 다 닳아진 달을 주워다 어디다 쓰나
생각한 다음 날
조금 더 여물어진 달을
이번엔 洞口 개울물 한쪽에 잇대어
깁고 있었다
그러다가 맑디맑은 일생(一生)이 된
빈 수숫대를 본다
단 두 개의 서까래를 올린
집
속으로 달이
들락날락한다
달의 길
장석남
이정표는 자꾸 내게 어디 가냐구 묻는다
달은 붉게 물들며 제 길을 가고
내겐 잃은 길도 잃은 그 자리에 있지 않다
달은 섬섬이처럼 제 빛이 모두 발이다
기울어도 제 빛에 안긴다
몸이 아프다 기울면
아픔이 나를 안아주리라
달의 방
장석남
1
늦은 밤
물먹으러 부엌에 갔다가
내 방으로 올 때
오, 나를 따라오는 게 있네
내 방까지 따라와
내 옆에 나란히 앉는 게 있네
만져볼 수 없이
함부로 바라볼 수 없이 내 옆에서
다만 느낌으로
앉아있네
"자긴 누구지?"
"........."
멍들었던 데를 만져보듯
되돌려 받는 물음
"자긴 누구지?"
"........."
다만 시늉으로 살다가
시늉으로만 살아 있다가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에
창이 가려지듯
슬그머니 눈을 감는 것인가
"자긴 누구지?"
"........."
오늘도 나는
죽음의 시늉으로
그 물음 곁에
누워보는 것이 아닌가
2
달이 뜨지 않는 밤이 잦다
오늘도 달이 없군
어슴푸레하고도 둥그런 궁금증
달이 지나가던 창에는 매일매일
처음 보는 시간이
내 표정을 흉내내다 가고
어느 날 달은 한꺼번에
내 방마저 한 아름으로 안고
떠오르려는가
달 뜨지 않는 밤이 아니라면
세상에 이러한 외진 방이 있다는 것을 나인들
어떻게 알기나 하겠나
담장
장석남
이월 하늘은 상냥하고 담장에 기대인 자두나무에 자두꽃이 다득히 나오고 그 아래 흰 돌멩이 하나
나는 나를 솎아내고 헤쳐서 그 돌멩이를 바라본다
나는 나를 반나마 허물어서 그 돌멩이를 바라본다
흰 돌멩이 처음 그 자리에 앉던 시간의 문 따고 나오는 눈빛 따스하여 나는 그걸 알뜰히 모아 새 담장을 치려 한다
문은 새삼 내지 않으려 한다
답동 싸리재 어떤 목련 나무 아래서
장석남
답동 싸리재 조흥은행 뒤꼍에 갔더니 번잡한 게 싫은 햇볕이며 봄바람결들이 비단처럼 늘어져 있었습니다. 담 옆에는 오래된 목련나무 한 그루가 이마를 닦으라고 손수건을 건네는 손처럼 꽃망울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당신 부끄러움 좀 어디 봅시다 하는 격입니다그려. 먼 유곽의 처마 밑에나 있을 듯싶은 사나운 허무들 저 목련이 나중에 한꺼번에 지는 것도 꼭 그것만 같을 것을 나는 미리 알아 허무한 것과, 울렁거리는 것과, 은은하고 어루어룽한 뒤꼍을 나와 하늘을 바라보며...... 어디로 남모르는 데로 좀 갔으면, 가서 눈도 좀 지그시 감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끝내 저녁볕을 따라나서고 마는 긴 내 그림자처럼 말이오.
당나귀에 관한 추억
장석남
1 - 마부
당나귀의 잠과 당나귀의 귓속에 자꾸만
저녁노을을 부어주는 馬夫
상수리나무 밑을 지날 때는
잎사귀마다
식솔들 눈빛도 보았으나
개울을 건너 어둠이 오고
어둠이 마을 집들의 굴뚝을 허물 땐
길도 걸음을 이기지 못하다
2 - 달밤
달빛들은 다
나귀 눈이 좋고
나귀 귀가 좋다
달빛들은
갈대의 사이를 가기도 하고
등성이 길을 넘기도 하다가
새벽이면 나귀를 타고
눈이 부어 돌아온다
슬프게 죽은 사람들은 다
나귀가 좋다
3 - 빗속 나귀
칸나꽃이 많은 여름은 비가 많다
나귀
종일 제자리에 서서 젖으며, 젖지 않게
칸나꽃을 잠속으로 불러들일 적에
이미 개울이 붉다
4 - 나귀 걸음
당나귀를 타고 가다가 배가 고프면
그걸 잡아먹어야 하나
잡아먹고 슬퍼
죽어야 하나
당나귀는 걸음이 어여쁜 짐승이다
닿지 않네
장석남
지난가을 감 딸 때
바지랑대 닿지 않던 것
어디 갔나
가장 아름다운 자기 길을 갔으리라
닿지 않는 것에 대해 찬미하려니
무궁한 자기를 데리고 있는
그것을 찬미하려니
이 마음 눈이 휑하네
휑한 눈으로도 찬미하리니
사랑과 죽음과 겨울의 야수여
똑바로 눈을 맞추자
그 부딪침,
바스러져
닿지 않네
대문
장석남
어느 새벽 한바탕 술판이 끝나 물컹물컹한 길을 걸어서 집에 당도해 보니 대문간 지붕 위에 배를 깔고 누웠던 호랑이가 두 귀를 뒤로 젖히고는 미안한 것처럼 슬금슬금 내려와 어정어정 빠르지도 않은 걸음을 옮겨 뒷산으로 간다 나는 그저 휑하니 빈 대문간을 놀라지도 않고 바라보다가 문을 따고 들어와서도 다시 뒤돌아 대문간을 바라보다가 구멍이 생겨 바람이 새듯 슬픔이 내 혼신으로 미어터지게 밀려 들어오는 것을 힘에 겨웁게 안고 만다 그만 주저앉아 울어버리고만 싶다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설 수 없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은 자가 너무 많다
한때 나의 집 대문은
다알리아 같은 것이었고
줄 끊겨 날아간 방패연 같은 것이었고
시들시들한 고추모 같은 것이었고
찔레덩굴 같은 것이었고
등잔불 같은 것이었다
꽃 같은 것이었고
바위 같은 것이었다
원(元)코 형(亨)코 이(利)코 정(貞)코……
고전을 따라서 네 귀마다 하늘을 매달아도
이 대문을 나서는 데가 결코 사랑 같지 않다
사랑이 결락된 이 대문을 어떻게 호랑이는 찾아왔던 것일까
다시 호랑이가 대문간 지붕에 배를 깔고 앉아 있어도 나는 놀라지 않을 작정이다
한바탕 소나기같이 지나간 호랑이여
나의 집 대문간 지붕에 앉았다 간 호랑이여
다시 와 나를 물어뜯어다오
굶주린 나를 뜯어먹어다오
다알리아 같은 대문을 밀고 나를 찾아와다오
아니아니 훌쩍 대문간 지붕을 넘어 나를 찾아와다오
대숲 아침 해
장석남
창 앞
대숲 아침 해
굶주린 호랑이처럼 쏟아져 들어와
내 넘치는 불면의 살들을 내어주니
서둘러 먹고는 입술을 핥으며
남쪽으로 돌아가네
대숲 아침 해
서쪽 창 닿기까지
나는 살아서 다시 가슴에 피를 보내
가문 밭을 가꾸다가
또 한 번 서창에 들이닥치는
허기진 눈빛 있으면
서로 핥으며
어둠을 덮으리
대장간을 지나며
장석남
나에겐 쇠 뚜드리던 피가 있나보다
대장간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안쪽에 풀무가 쉬고 있다
불이 어머니처럼 졸고 있다
- 침침함은 미덕이니, 더 밝아지지 않기를
불을 모시던 풍습처럼
쓸모도 없는 호미를 하나 고르며
둘러보면,
고대의 고적한 말들 더듬더듬 걸려 있다
주문을 받는다 하니 나는 배포 크게
나라를 하나 부탁해볼까?
사랑을 하나 부탁해볼까?
아직은 젊고 맑은 신(神)이 사는 듯한 풀무 앞에서
꽃 속의 꿀벌처럼 혼자 웅얼거린다
더덕을 노래함
장석남
일생 누더기 한 벌
한나절이나 잡다가 나온 이족(異族)
고구려 이전 성(姓)을 잃고 대대손손
아나키스트 그저 어느
골짜구니의 타고난 소설가로서
격세로는 시도 좀 짓고 하여
향리의 문벌을 이룬 가문
하나 매해 한탄하는 것은
그 맏이 놈의 말
"나는 봄 지나면 장인 장모나 유한 집구석의
처가살이나 가려네
나는 봄 지나면 향기나 좀 팔아서
처가살이나 가려네"
더덕순 더덕향
더덕순 더덕향
덕적도(德積島) 시(詩)
장석남
1 – 해 질 녘
아버지는 종일 모래밭에 와서 놀더라
아버지는 종일 모래밭에 숨을 놓고 놀다
모래알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놓아두고 놀다 가더라
해당화 밭이 애타는 저녁까지
소야도가 문갑도로 문갑도가 다시 굴업도로
해거름을 넘길 때
1950년이나 1919년이나 그 以前이
물살에 떠밀려와 놀다 가더라
2 - 섬집
그러니까 밀물이
모래를 적시는 소리가
고요하게 불 끄고 잠든 마을 집들의 지붕을 넘어
우리집 뒷마당 가득하게 될 때나
우리집 뒷마당도 넘쳐 내 숨을 적실 때
달팽이관 저 깊이
모래알과 모래알 사이 물방울의 길처럼 세상은
내 뒤를 따라오지 못하고 나는
배고파도 그
속에서 나오기 싫었다
지금은 그 물결 소리가 무엇을 적시는지
내가 숨차졌다
3 - 밥 먹구 자
학교에서 돌아와
내가 집이 되어 무섭게
집을 품고 있노라면 털썩
나무 갔다 온 엄마가
하얀 별 아래
헛간 아래
나뭇동 아래
까맣게 어둠 아래서
밥을 짓고
나는 아궁이에 타는 불의 뜻 모를
성언(筬言) 속에 잠이 들어
밥 먹구 자
나를 언덕에서 떨어뜨리는, 자
지금은 스물세 살 겨울 어느 날 세벽 세시 정말 밥 먹구
반성처럼 잠이 온다 밥 먹구 자
나는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4 – 가을 행(行)
차게 불이 탑니다 당신 이름이 탑니다 길을 비켜선 활엽의 나무 그루들 조금 더 목말랐으면 나는 물을 마실 뻔 하였습니다
차게 타는 불
도원(桃源)에서
장석남
복숭아를 먹고
남은 복숭아나무의 마음을 어디다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마음일 때
하늘이 나를 어쩌지 못하고
복숭앗빛을 띠어가는 서쪽 하늘일 때
노을 쪽으로 길이 나면
많은 사람들은 밀물처럼
양떼들처럼 그곳으로 가리라
복숭아나무의 마음 쪽으로
봄, 복숭아꽃 뜬 마음이
땅에 꽉! 붙어 흘러온 곳
세월의 참한 그루터기
독강에서
장석남
덕적 독강 부두에서
우럭 회 썰어놓고 먹다
소주가 달다고 말하니 갑자기 옛 하루가 돋아나
하얗게 할아버지 한 분
돛 펴고 노저어 오시네
멀리 당진(唐津)이 이웃처럼 가까이 보이네
지나가던 어린아이
노래 음절 맞지 않네
어깨 위의 듬성듬성 옷 기운 자국 보며
씀바귀처럼 웃네
웃음 이내 식어 노을로 뻗어가네
돌멩이들
장석남
바다 소리 새까만
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 놓고
읽던 책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
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돌의 새
장석남
노란 꽃 피어
산수유나무가 새가 되어 날아갔다
산수유나무 새가 되어 날아가도
남은 산수유나무만으로도 충분히
산수유나무
너는 가고
가고 남는 이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너를
달리 무엇이라고 부르나
길모퉁이에 박힌 돌에 앉아서
돌에 감도는
이 냉기마저도 어떻게 나누어 가져볼 궁리를 하는 것도
새롭게 새롭게 돋는 어떤 새살(肉)인 모양인데
이 돌멩이 속에 목이 너처럼이나 긴
새가 한 마리 날아간다
날아가긴 해도 그 자리에서만 날아가고 있다
돌의 얼굴
장석남
1
어느 하루 홍예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수만 개의 돌을 쌓아 만든 홍예문 아래를 지나다가 그 많은 돌의 얼굴들 중에서 나는 한 가지 얼굴과 눈이 맞고 말았습니다 아주 가늘은 햇살로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는 그 가늘은 숨결 하나가 내 이마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타고 발끝으로 새어 내려갔습니다 이 홍예문이 선 게 백년 남짓이니까 그 돌이 그 자리에서 그 눈빛을 쏟아낸 게 그만한 세월일 것인데 여전히 그 빛 생생하게 내 몸 속에다가 그 긴 세월의 그리움 치레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내 내 걸음은 그 자릴 지키지 못했지만 나는 그 돌로 걸어 들어가듯 어딘가로 걸어 들어가서 홍예문 아래를 지나가는 색시들이나 옷깃이 서걱이는 새아이들, 손 시리게 피어 있는 이른 봄꽃들을 바라보듯 앞바다를 바라보고 또 보곤 하였습니다 집에 와서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지나 다시 그 자릴 지나다가 그 돌을 보았더니 웬일로 거기엔 온통 신 사탕을 가득 문 봄바다의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해 봄에 그 바다로 누가 걸어들어간 걸까요 걸어나온 걸까요 나는 홍예문을 지나면서 그 돌 틈에 난 담쟁이덩굴이나 쑥부쟁인지 뭔지 하는 풍에 내 눈빛을 걸어두고야 그곳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2
삭혀야 할 것들이 있어서
속이 아플 때나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갑자기
길눈이 어두워질 때
나는 홍예문으로
돌의 얼굴을 보러 갑니다
그동안 내가 사귄 돌들은 벌써 많아서
봄 바다로 들어간 사람을 본 돌 벚꽃 떨어져 허리를 다친 돌
뱃고동에만 귀를 여는 돌 속에 음악이 가득한 돌 열에 떠서 금강석을 쥔 돌
돌의 얼굴에 새겨진 별의 자국
바람의 애무
그런 것들도 봅니다
그날 하루 버리고 싶은 발길들
그런 것들도
흔들리는 어떤 돌 밑에 괴이고 옵니다.
돌층계
장석남
저무는 돌층계를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면
저 아래는 결코 흙마당이건만
철썩이는 붉은 꽃바다가 있는 것만 같아요
멀찍이 이만큼 서서 바라보니 다행이지
무슨 멀미 나는 운명들이 생겨나듯
풀잎들 노을을 이고 마당가를 철썩여요
막돌들을 업어다가 안아다가 놓고, 놓고, 놓고
또 두어 뺨을 재서 큰 모판이라도 밀어 가듯이 판판히 놓고 하여서
서너 층계를 만들었더니
오르락내리락 종교와도 같은, 믿음과도 같은 리듬이 생겨났습니다
배고픈 김에 묵은김치 한 보시기나 며느리 몰래 먹고 물 마시고 나앉듯
무끈히 힘 빼며 올린 산돌 하나는 꽃 한 번 피고 지니
그대로 그렇게 본토박이 할아버지가 되어 있습니다
이마에 자꾸 주름 잡히어
거울 보며 손가락으로 주름 펴면서도
돌층계 아래로는 여전히
꽃바다가 와서 수근대는 것 같아요
동백꽃
장석남
아흔아홉 개의 빛나는 잎으로는
아흔아홉의 눈 마주친 얼굴들을 비춰 감추어 두네
또 아흔아홉의 그늘 쪽 검소한 잎에는
숨어서 볼 수밖에 없던 사람의 이목구비나 손의 맵시들을,
연중 몇 번 겨우겨우
짧은 햇볕 만나 젖듯 새기어 두네
숨죽여 수년을 묵혀 두면 그 내력 가장 가파른 순서가 생겨
꽃으로 차례차례 올려놓으니 그 빛깔이
정갈한 숯불 같을 수밖에는 없는 일
뻑뻑이 겹친 꽃잎의 메아리여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속으로 치솟아가는 메아리여
일생 사랑의 법칙이 그러하려니
한쪽 귀는 반드시 닫고서
그 곁에 앉아 보네
동백의 일
장석남
아흔아홉 개의 빛나는 잎으로는
아흔아홉의 눈 마주친 얼굴들을 비춰 감추어 두네
또 아흔아홉의 그늘 쪽 검소한 잎에는
숨어서 볼 수밖에 없던 사람의 이목구비나 손의 맵시들을,
연중 몇번 겨우겨우
짧은 햇볕 만나 젖듯 새기어 두네
숨죽여 수년을 묵혀 두면 그 내력 가장 가파른 순서가 생겨
꽃으로 차례차례 올려놓으니 그 빛깔이
정갈한 숯불 같을 수밖에는 없는 일
뻑뻑이 겹친 꽃잎의 메아리여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속으로 치솟아가는 메아리여
일생 사랑의 법칙이 그러하려니
한쪽 귀는 반드시 닫고서
그 곁에 앉아 보네
동지(冬至)
장석남
생각 끝에,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간다
언 내(川) 건너며 듣는
얼음 부서지는 소리들
새 시(詩) 같은,
어깨에 한 짐 가져봄직하여
다 잊고 골짜기에서 한철
얼어서 남직도 하여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오는 이 또 있을까?
꽝꽝 언 시 한 짐 지고
기다리는 마음
생각느니,
동화
장석남
산으로 가면 무지개를 만드는 공장이 나오지요. 님을 만드는 공장이 나오지요.
재를 삼킨 하늘 아래 곶감을 숨긴 호랑이가 나오지요.?
정관수술을 하고 산속 집으로 가던 홀아비는 오랜만에 삼겹살을 사고 상추를 뜯어 헹궈 입을 터져라고 싸 먹으며 허공만 바라보죠.?
산으로 가면 무지개 공장이 나오지요. 님 공장이 나오지요. 재를 삼킨 하늘 아래 곶감을 숨긴 호랑이가 나오지요. 허공만 낳는 허공이 나오지요.
두리번 선(禪)
장석남
장마가 지나자 악취가 나기 시작하였다
우선 가까운 데를 두리번대고
다시 참아보자고 앉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일어나 두리번댄다
그건 흥행과도 같은 것?
풍자와도 같은 것?
점점 원을 넓혀 두리번댄다
집 바깥까지, 남의 집 담 너머까지 두리번대다
돌아온다
그건 선(禪)과도 같은 것?
깨침과도 같은 것?
다시 제자리
이번엔 정치적으로 고쳐 앉는다
고요하다
들판에서
장석남
이제 들판에 오래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들판에 오래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들판처럼 되지 않습니다
산기슭에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산기슭같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 건가요?
진짜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 건가요?
들판에도 산기슭에도 오래 있을 수 없는데
마음이라는 게 있는 건가요?
불빛도 있고 물소리도 있지만
가야겠습니다
들판이 나를 불러
장석남
바람에 흔들리러 집 나온
들꽃들을 보겠네
봄 들판이 나를 불러 그것들을 보여주네 갑자기 저,
노을을 헤쳐가는 새들
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리네 숨가쁨이 삶이 아니라면
온 들판 저 노을이 새들을 끌고 내려와 덮인들
아름답겠나
봄은
참았던 말들 다 데려다 어디서 어디까지 웅얼대는 걸까
울컥
떠오르는 꽃 한 송이가 온
세상 흔드는 것 보겠네
오래 서 있으면 뿌리가 아프고
어둠은 어느새 내 뿌리 근처에 내려와 속닥거리고
내 발소리 어둠에 뒹굴다 별이
되면 거기
내 뿌리가 하얗게 글썽임에 젖고 있네
살아 있는 것이 글썽임이 아니라면 온
하늘 별로 채워진들
아름답겠나 그렇게 봄
들판은 나를 불러 봄 들판이게 하고
라일락 밑
장석남
바람도 없는데
라일락꽃이 후두두둑 떨어진다
매맞는 五月의
뜰 곷잎에 속이 울리고
담벽을 닫은 유인물에서
충혈된 절벽들이 뛰어내린다
일제히 발등을 들어올리는 풀포기들
라일락 밑은 죄다 멍투성이다
라일락의 집
장석남
저녁의 장독대에서 장을 푸는
그 숟가락을 탁탁탁탁 두드리는 소리로써
탁탁탁탁탁 그 유난한 소리로써
라일락나무에 내려온 하늘을 깨워
잎잎마다 사랑의 얼굴을 만드니
그 윤기를
내 허파와 심장에,
부끄러운 이마에도 발라서
살아봐야겠다고
아주 가늘은 달이 낮에서
저녁으로 옮겨가는 것 보고 또 저녁에
라일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 보고
내 발들을 보고
발가락들을 보고
라일락 나무 속으로
할머니 향기들을 거두어 걸어 들어가는 것 보고
꽃 다 빈 것 보고
또 발등을 보고
발등 위 흙 보고
마당에 배를 매다
장석남
마당에
녹음(綠陰)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세상(世上)에 온 모든 생(生)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마술 극장
장석남
서(序)
극장은 쑥의 나이와 비슷하다
쑥은 극장으로 가는 길 귀퉁이를 떠나지 않는다
잠시 극장은 사철 질서의 드라마로 흥행하였으나
말굽과 군화 자국 몇 차례 지나가고 피바람의 막장극이 한창이더니
그 주연들은 크게 영달하였다
지금은 마술 전용 극장이 되었다
여전히 전속 배우들은 분장이 두껍다 이 업종은 유별나게도 퇴직 후의 수입이
엄청나다 시나브로 예나 지금이나 입단이 만만치 않다
검은 상복 비슷한 옷을 입고 근엄한 표정이나
알고 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천혜의 연기다
대본소에서 밀어주거나 억지스럽게 지어낸 대사를 읊는다
(마술 극장이 되기 전에는 여러 대본소의 작품을 납품받았었다)
극장의 상징은 양팔 저울을 들고 눈을 가린 여신인데
한쪽 접시에는 치밀한 자신의 영화를 계산해 올려놓는다
그리고 눈을 가린 척 오늘도 무대에 오른다
마술 공연이 있는 날에는 극장에 입장하지 않고
틈으로 쥐처럼 엿보는 자들이 많다
눈치를 살피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천칭 저울 한쪽에 오늘은
봄바람이 꽃의 눈을 뜨고
앉아 있다
1 - 대본소
마술 전용 극장이 되고부터
대본은 그 전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마술 공연이지만 몇몇 우둔한 관객은 눈물을 흘리며 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면 마술사들은 굳이 정정하고 싶지 않다
십수 년 경마장의 말처럼 곁눈을 가리고 연습, 단련하다 보니 굳이 마술과 현실이 구별되지 않는다
한편 거기에는 흥행 종사자들의 몫이 크다
대외 홍보 몰이를 하는 분들인데 이분들의 업주는
시나브로 대본가들의 오랜 고용주이기도 하다
서류가 없으니 훨씬 더 끈끈한 관계다
그 홍보 문구에 속은 관객 일부가 대개 마술에 감동한다
대본가는 실질의 공연 주인공이다 무대
측면에 오르니 조연 같지만
역할은 주연이다
대본가 없이 공연은 올려지지 않으니
공연의 애초 기획자이기도 하다
대본소 뜰에 꽃이 핀다
들여다보는 이는 없다
꽃이 알고 있는 비밀이 대본가는 싫다
2 - 압구정 옛 주인같이
지난 공연 대본 중 하나가 유출되었다
대본은 공동창작이었는데 단역 겸 참여 작가 중 일부가
이탈했다 그럼에도 공연은 그대로 진행되어
흥행했다 비극의 주인공은 재상을 지낸 거물이었다
늘 그렇듯 공생하던 흥행 광고업자들의 힘이 컸다
이 극장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각본 없이 어느 날 무대 위로 끌려 나온다는 점이다
누가 끌려 나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건달 구경꾼들에게는 스릴 만점이지만
당사자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이다 구린 자,
재력가, 유력자들은 평생 노심초사 조공을 바친다
드라마의 백미는 대반전이지만 이 극에서 그런 일은 없다
대본가와 그 공연자들이 모두 같은 먹이사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반전을 이루겠지만 먼 훗날의 역사 따위는
이 극장에서는 인기 대본가들의 야식용 냄비 받침일 뿐이다
지난 공연에 불려 나간 거물 주인공은 혹독한 지옥을 살고 있고
관객들은 다음 공연을 기다린다 아직
대본가가 주인공으로 끌려 올라간 적은 없다
흥행가들은 그들이 주인공으로 올라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대로 극장 영업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숨은 관객들은 언젠가
대본가가 주인공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침을 뱉을 것이다 그러나 대본가는 언제나 힘이 세다
저, 압구정 옛 주인을 닮았다
3 - 장미 정원
장미 정원에 공연이 한창이다
대본 따위는 없다
장미가 관통해온 길을
저 마술 극장의 대본가들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왕인 이해득실 전하가 쫓겨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마술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빛깔과 향기가 지나면
적막의 비바람, 눈보라가 주인공이다
그 발성은 힘차고 음률은 비감하다
모두 수긍의 눈물을 흘리며
공연을 관람한다
꽃에 눈물을 뿌리면
찬란한 이야기가 꽃잎과 함께 떨어진다
정원은 공연 중에도 늘 고요하다
마음이 중얼중얼 떠올라
장석남
마음이 중얼중얼 떠올라 얼굴을 뭉갤 때
밖으로 나가는 길
다 비워놓고
흙 파먹고 살리라고
공책 밖에서 공책 안으로 일기를 써넣었네
온몸을 떠도는 피 속에 낙태한
집 한 채 띄우고
나를 깡그리 배반하는 내 말들
술에 풀어 띄우고 둥근
길 위로 노저어 떠돌 때
봄은 자기가 봄인 줄도 모르고 와
落傷한 사람이 몇
비바람으로 내 온몸을 떠도네
아 종일 녹두밭에 파랑새 날아드는
숨차고 지루한 또 하루를 해 질 녘의
안에서 밖으로 보겠네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장석남
보푸라기 이는 숨을 쉬고 있어
오늘은
郊外에 나갔다가
한 송이만 남은 장미꽃을 보고 왔어
아무도 보지 않은 자국
선명했어
숨결에 그 꽃이 자꾸 걸리데
보푸라기만 자꾸만 일어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가슴 뜀일까
아스라한 맥박들이 자꾸 목에 걸리데
어머니,
"얘야, 네 사랑이 힘에 겨웁구나"
"예 어머니. 자루가 너무 큰걸요"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말린 고사리
장석남
말린 고사리 한 뭉치
무게를 누군가 묻는다면
하여튼 묻는다면
내 봄날을 살아낸 보람 정도라
답으로 준비한다
곰곰이 생각하여도
그러하였으니까
말린 고사리 두어 뭉치 더 담아서
이름난 백화점 봉지에 넣어서
사랑스런 분에게 주었다 치자
또 받았다 치자
잘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며 그 무게가 궁금은 하겠지만
우리들이 한 해 살아온 보람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그렇구 말구
말린 고사리
맑은 밥 - 식탁(食卓)
장석남
다리가 넷,
거느린 의자가 넷,
의자 넷의 다리도 넷,
둥그런 모서리도 넷,
허기(虛飢)도 넷,
아무것도 없게
식탁을 치우고
내려다보면 비로소 보이는
우리들 양식
혼자 앉아,
식탁에 혼자서 앉아 바라보는
우리들 맑은 양식
다 퍼먹어도 남을 어렴풋한 빛
빈 식탁에 사는 귀신은
빈 식탁의 빛을 먹고 사는 귀신은
우리들이 씌어야 할 귀신
밥을 먹자 허기야
여기 앉아 맑은 밥을 먹자
둥그스름한 모서리가 넷,
망명
장석남
어둡는데
의자를 하나 내놓으면
어둠 속으로 의자는 가겠지
어둡는데
꽃 핀 화분도 하나 내놓으면
어둠 속으로 꽃도 잠겨가겠지
발걸음도 내놓으면 가져가겠지
어둠은 그렇게 식구를 늘려서 돌아가
어둠을 오가는 넋에게도 길 닦아주고
견고한 잠 속에는 나라를 세우고 나머진
빛으로 돌려보낼 터
어둡는데 길을 나서면
한 줌 먼동으로 돌아올 터
어둠에 살을 준다
사랑에 살을 준다
매화꽃을 기다리며
장석남
매화분 하나를 구해 창가에 두고는
꽃봉오리 올라오는 것 바라보니
피멍 든 듯 붉은빛이 섞여서
겨우내 무슨 참을 일이 저렇듯 깊었을까 생각해 본다
안에서는 피지 마 피지 마 잡아당기는 살림이 있을 듯해
무언가 타이르러 오는 꽃일지 몰라
무언가 타이르러 오는 꽃일지 몰라
생각해 본다
집은 동향이라 아침 빛만 많고
바닥에 흘린 물이 얼어붙어 그림자 미끄럽다
후일(後日), 꽃이 나와서, 그 빛깔은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인가
그 그림자 아래 나는 여럿이 되어 모여서
그 빛깔들을 손등이며 얼굴에까지 얹어보는 수고로움 향기롭겠다
매화를 걸고
장석남
연전에 묻은 문밖 매화 등걸 들여다보니
아직 아무 기별 없어
흐린 그림을 풀어 동관 벽에 걸었다
매화는 옛사람들의 취미라는데 나는
낯이라도 씻고 앉아 옛날을 맞이할까?
왼편으로 주춤주춤 뻗은 가지엔 활짝 핀 꽃송이가 다섯
꽃망울은 셋,
꺾여서 나온 자리 되돌아보는 가지엔 넷이 벌었다
음, 음, 봉우리는 다섯
그중 나는 지금 어디쯤의 것이었으면 될 건가
되돌아볼 사랑이며
내다볼 하늘 청청한데
궁리 끝에 시린 어깨 지고 나가
매화 등걸 앞에 다시 앉는다
어스름에 저녁 종소리 가까워오듯
어둠이 오고
또 어느 눈동자가 오고
오고,
맨발로 걷기
장석남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또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먹는 것에 대하여
장석남
이야기는 끝이 없고
농담처럼 죽순이 자라나는 뜰에서,
저것까지도 먹는 것이라니
온갖 곳에서 쩝쩝이며
먹는 것을 찬양하노니
겨우 먹힐 것에서 벗어난 죽순은
배와 허리와 어깨에서
팔다리가 돋아나오고 잎이 나오고 거기
바람 소리 새소리를 모아
고매한 정신이 되어
먹는 것에 대하여 질타해다오
제발 좀 숨어서 먹어다오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장석남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 꽃 피는 오이넝쿨만한 여학생에게 마음의 닷마지기 땅을 빼앗기어 허둥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다.
어쩌다 말도 없이 그앨 만나면 내 안에 작대기로 버티어놓은 허공이 바르르르르 떨리곤 하였는데
서른 넘어 이곳 한적한, 한적한 곳에 와서 그래도는 차분해진 시선을 한 올씩 가다듬고 있는데 눈길 곁으로 포르르르르 멧새가 날았다.
이마 위로,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여 끝내는 자기 속으로 불러들여 속으로 흔들리는 저것이 그때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외따로 뻗어서 가늘디가늘은, 지금도 여전히 가늘게는 흔들리어 가끔 만나지는 가슴 밝은 여자들에게는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저 저 저 저 심사가 여전히 내 마음은 아닐까.
아주 꺾어지진 않을 만큼만 바람아,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어디까지 가는 바람이냐.
영혼은 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가늘게 떨어서 바람아
어여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명년 봄
장석남
파도는 순해지고 풀이 돋고 목덜미의 비람이 기껍고 여자들의 종아리가 신나고 신입생의 노트에 새 각오가 반짝이고 밥그릇과 국그릇 위로 오르는 김이 벅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상처가 아물고 커피가 맛있고 입맛이 돌고 안 되던 드라이브가 되고 시인도 시인이 되고……시인도 다시 시인이 되고 혁명이 오고
봄,
몇 개의 바위와 샘이 있는 정원
장석남
몇 개의 바윗돌들이 있는 정원으로
우리는 숨겨놓았던 길을 꺼내서 다녀오곤 하죠.
마음을 촘촘히 하고 눈길을 아래로 내린 발걸음.
바윗돌들과 그 그림자들. 그리고 그곁에 다소곳한 샘이 있는 정원을
가장 깊게 가지고부터
가다가 막힌 길들은 모두 그곳으로 되돌아오곤 하죠.
아카시아꽃들은 초록을 피해나온 피난민처럼
만발하였고 둘레의 城에서 성을 이룬 돌들이 음악 소리를 내며
오랜 음정으로 앞으로도 오랜 시간 음악을 이루어
이 정원을 가두리할 것입니다.
밤은 하늘의 별로써 싱싱한 잇몸을 보입니다.
그 빛들이 많음으로 곧 이 정원은 유적을 이룰 것이고
우리들은 이 바윗돌에
오래 앉았다가 저녁 새를 불러 새소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할 것입니다.
그 향기와 꿀벌들을 데리고 초록의 길을 따라서 가는 시간들
우리는 그 꽃들이 간 길을 쫓아갈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까만 눈동자가 젖는 가을이 오고
우리는 이 정원에서 서로의 이름들을 호명하고 또 어떤 이름 속에서는
메아리가 되어 나오는,
저 맨 처음 이 정원을 찾았을 당시의
머리카락과 이맛빛과 말소리들을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보기도 할 것입니다.
눈이 이 정원을 덮고 눈이
바위 위에도 앉고 눈이 나뭇가지 사이의
하늘도 메우고 눈이 고요한 바람까지도 제 품으로 품어서
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리고 눈이
하늘의 언덕을 넘어 내려오는 기러기들의 소리를
우리들의 관자놀이 속까지 옮길 때
우리는 혹 이 정원의 자그만 돌맹이가 되어 그것들
모두의 음악 소리를 허밍하고
또 허밍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음악 소리를 그 다음 해의 라일락나무는 아주 익숙한 솜씨로 다 자기의 노래인 듯 이야기하죠.
자, 이 아름다운 것들
오늘은 내가 다 연주해보리다 하고, 샘의 물도 먹어 가며 그 그늘을 길고 넓게,
그 향기를 깊고 뼈저리게
우리가 밥을 먹거나 잠자리에 들거나
사랑을 하거나 꿈을 꾸거나 그것들 모두를
세상에다가 다 연주하겠죠.
커다란 바윗돌과 샘이 있는 정원
길들은 다 외출해서도 다시 그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서성이죠.
꽃이 피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날리거나 또는 오늘 같은 날이니 모두 모두
모과나무 아래
장석남
모과나무 아래
유채밭같이 아픈 몸은 앉아
많은 신산한 시간들이 모과나무에 열린 것과
떨어지는 잎사귀들 위의 햇빛을
자세히 바라보는 큰일과
내 손으로 내 뼈들을 만져보며
깊어라, 그늘은
도처에 내려진
커다란 눈동자는
모과나무 아래
가엾는 떨림 소리를 듣고 앉아
깊어라 모든 떨림들
나를 뿌리 밑으로 옮겨 포개는
노래들
노래들
나뭇가지를 날아가는 저 물들
모란의 누설
장석남
바람들이 모여 쌀겨처럼 웃다 가고
햇빛들이 어룽어울 몸을 말리다 떠나고
허기진 사랑과
여러 갈피 파본인 꿈이
매일 밤 곁에 누었다 돌아가는
혈흔 뜬 세월
누설하는
모란모란꽃모란모란모란모란꽃!!!!꽃
모란모란!!!!!!!!!!!모란꽃모
란!!!!!!모란모란꽃!!!!!!란
모란이 피어 봄은
명치가 아픕니다
모란이 피어 봄은 명치가 아픕니다.
장석남
바람들이 모여 쌀겨처럼 웃다 가고
햇빝들이 어룽어룽 몸을 말리다 떠나고
허기진 사랑과
여러 갈피 파본인 꿈이
매일 밤 곁에 누웠다 돌아가는
혈흔 뜬 세월
누설하는
모란모란꽃모란모란모란모란꽃! !! !꽃
모란모란 !! !! !!! !! !!모란꽃모
란 !!!!! !! 모란모란꽃 !! !!!!란
모란이 피어 봄은
명치가 아픕니다.
목도장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 있네
목돈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젼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같은 이 300만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로는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겹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장석남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 여러 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묘지
장석남
마른 갈대숲을 헤쳐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언덕에 올라가보니 갈대 고개가 꺾여 이어진 것이 내가 지나온 흔적이었고
갈대는 정오의 빛들을 제 모습대로 꺾으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나는 그 언덕에 서서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잊었습니다
손등에 분홍 상처가 몇 줄 나서 엷게 쓰러졌습니다만 그것은 아픔은 아니었습니다
겹겹이 산 능선들이 부드러운 물결을 이루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서두르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고 헤아릴 수 없이 오랜 동안 해온 일이건만
지친 기색도 없었습니다
나는 잠시 그 능선들의 물결 위에 앉아서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잊었습니다
조금 울렁이며 멀미가 있었지만 그것은 괴로움은 아니었습니다
무꽃
장석남
혼자 한 번 간 길도 길일까
무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몰래 숨어 가는 길
혼자 한 번 가는 길 남들 다 자리잡고
피었다가 간 언덕 아래 깃발도 없이
깃대도 없이
몸뚱이 하나로 당도하는 늦은 봄의
저 혼자 오는 가슴을
우 우 ------ 화염병처럼
무밭에 피었다
앞뒷길 모두 풀과 나무의 푸른 바리케이드로 막힌
곳에서 성스러운 늦은 봄을 위하여
숨가쁜 며칠을 살고 혼자 가는 길
아무도 걷지 않는 길
도 길일까
나의 노란 고름들이
늦봄을 이끌고 어디 어디로 간다
무성영화 - 춘사(春史)
장석남
한 여자와 원두막에 앉아 있다
저녁이 오고
원두막 근처가 어두워졌다
포도밭이 발 아래서 먼저 어둡고
마음이 따라서 어두워졌다
불이, 백열등이 들어왔다
백열등에 나방이 와서 몸뚱이를 부딪는다
우리 앉은 자리를 휘젖는, 징그럽게 큰 그림자
무서워서 우리는 물방울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풀꽃 하나가 조용히 기울었으리
무쇠솥
장석남
양평길 주방 기구 종합박물관
수만 종류 그릇의 다정함과 반짝임과 축제들 속에서
무쇠 솥을 사 들고 왔다
-꽃처럼 무거웠다
솔로 썩썩 닦아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다
푸우푸우 밥물이 끓어
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잦아든다
그사이
먼 조상들이 줄줄이 방문할 것만 같다
별러서 무쇠 솥 장만을 하니
고구려의 어느 빗돌 위에 나앉는 별에 간 듯
큰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솥에 닭도 잡아 끓이리
쑥도 뜯어 끓이리
푸푸푸, 그대들을 부르리
무인도(無人島)를 지나며
장석남
사랑의 최종점,
사랑의 열락, 꽃봉이, 타오름, 에
사람이 살지 않듯
아무도 없으나
그러나 저 사랑의 아슬아슬한 자세!
이 세상 모든
그리움이
새파란 물이 되어
옹립하는
사랑의 변주
무지개의 집
장석남
용도를 확정할 수 없는 칼이
새파란 칼이 하나 있습니다
서늘합니다 순간순간 무섭습니다
고요히 다룹니다
날 끝에는 무지개가 삽니다
매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한번은 날 위에 장미꽃 송이를 떨어뜨려 본 적이 있습니다
새가 날아갔습니다
붉은 새
그 후로 그 무지개의 집에
떨어뜨려 볼 것의 목록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곤 합니다
앞이 침침한 날이면
느리게 조심하며
숫돌에 갈아 놓곤 합니다
무지개의 집
묵집에서
장석남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문 열고 나가는 꽃을 보아라
장석남
문 열고 나가는 꽃을 보아라
꽃 위에 펼친 맵씨 좋은 구름길들 보아라
옷고름 풀린 봄볕을 보아라
작약 한창인 때 작약 밭에서 들리는,
어떤 늙은 할머니가 손주들을 대문 밖으로 내보내며 하는 말소리를
업어가는 중인
업고 가는 중인
업혀가는 중인
아침 바람을 보아라
꽃 지고 잎 돋듯 웃어라
뺨은 웃어라
조약돌 비 맞듯 웃어라
유리창에 별 돋듯 웃어라
한옥 짓는 마당가
널빤지 위에 누워 낮잠 들어가는 대목수의 꿈속으로 들어가
잠꼬대의 웃음으로 배어나오는
작약 밭의 긍정, 긍정, 긍정, 긍정.
또 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또 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긍정, 긍정, 긍정, 긍정.
문을 내려놓다
장석남
새로 짓는 집에
지고 다니던 문을 내려놓다
경첩을 달고 문을 맨다
수평자를 대고 문을 고친다
안팎으로 문은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달과 바람을 가리지 않고
식욕과 성욕을, 짐승과 꽃을 가리지 않고
어둠과 빛을
놀람없이 들이고 보낸다
가끔 문을 잠그고
적적한 어둠속에서
아이를 만든다
물맛
장석남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도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물미역 씻던 손
장석남
한밤
물미역 씻는 소리는
어느 푸른 동공을 돌아 나온 메아리 같네
간장에 설탕을 넣고 젓는 소리는 또
그 메아리를 따라 나온 젖먹이 같네
한밤에 찬장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아는가?
밥 위에 내려앉은 백열등 불빛을 아는가?
울음 세 개 간직한
물미역 씻던 손
물방울 방
장석남
뿌글거리며 저기 저 저 저 저어, 밑으로부터
떠오르는 방
안으로 버짐 핀 아낙과
새끼들이 다 들어가고
헐벗은 사내는 그
방을 껴안고
늙은 비둘기처럼,
늙은 비둘기처럼......그러고도
환한 방
그러다가 그냥 환한 것이 되는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닌 방
지는 해가 물 다 건너가도록
미명(未明)에
장석남
겨울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붕들은 조용히 헝클어져 있었다
바람들이 디딜 것이 마땅찮아 맨발일 때
헐벗은 풀들이 몰려와 맨살로 흔들려주고 있었다
발등에 얼굴을 비춰보면서
겨울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죽었는지 살었는지 우두커니는 서 있어도
家出한 하늘에는 자리를 비켜주며 서 있었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장석남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며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민가(民家)
장석남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간다
과연 이 말이 맞을까
저녁 햇빛 한줌을 쥐었다 놓는다
초록을 이제는 심심해하는
8월의 가로수 나뭇잎들 아래
그 나뭇잎의 그늘로 앉아서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간다는 말을
나무와 나와는 지금 점치고 있는 것인가
종일 착하게 살아야 보이는 별들도 있으리
안 보이는 별이 가득한 하늘 바라보며
골목에서 아득히 어둡고 있었다
첫 나뭇잎이 하나 지고 있었다
민들레
장석남
내가 밤늦도록 붙잡고 있었으나
끝내는 지워져 버리고만
몇몇 내 마음속 시구들,
그 설렘의 따스한 물무늬들을 위한
여기 호젓하고 고요한 주소지의
안타까운 묘비명들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장석남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 발걸음은 결국 바다에 닿는 것이 아닌가.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 넋은 결국 바닷가에 머물며 물 빠진 해변을 밤새 걷지 않던가.
내가 밟고 다녔던 바닷길들
때로 저녁 밀물 위에 음악처럼 노을로 떠서 출렁이고
그 노을 빛을 딛고 오라 하는 이가 있어서
수평선 너머의 바다는 가장 간절한 망설임의 표정으로
지금 내 속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고.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지금 바다에 비가 온다.
그런데 저것은 비 以外의 또 무엇인고.
바다는 매번 너무나 젊어서 저것은 파도 以外의 또 무엇인가.
바다에서 거두어 오는 발걸음은 늘 발걸음 하나만은 아니어서
바다 또한 더 멀리 아주 가지 않고 돌아오기를
아직도 너무 젊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람과 대와 빛과 그릇
장석남
바람 소리
창의 대나무
기울면서 방이 일순
밝았다 어두워지니
그
사이
살아나는
구석의 도자기 흰 한 점
나도 몰래 가만히 일어나 앉아 다시
바람을 기다리니…… 나는
바람 족속이었고
대와 그릇과 일가였고
바람 자듯
장석남
데려온 강아지가
밤을 운다
네가 울던 자리가
너의 고향이 되리라
목이 쉬던 자리가
울음들 먹어 기둥은 검게 삭고
검어질수록 그을린 밤하늘이 찬란했지
나의 그곳은
가을바람에, 걸어 놓은 옷에서
방울 소리가 들린다
바람 우는 자리에
고향을 차린다
울던 바람 자듯
젖어오는
나의 옛집
바위 그늘 나와서 석류꽃 기다리듯
장석남
바위 곁에 석류나무 심었더니 바위 그늘 나와서 우두커니 석류나무 기다리네
장마 지나 마당 골 지고
목젖 붉은 석류꽃 피어나니
바위는 웃어
수수만년이나 아낀
웃음을 웃어
그러니까
세상에 웃음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울음도 생겨나기 이미 전부터
둘의 만남이 있었던 듯이
우리 만남도 있었던 듯이
반달 간다
장석남
어깨가 무거운
게가 한 마리 별빛을 짚으며
걸어가는 서쪽 하늘
어딘가 잘리지 않은 몸으론 다 갈 수 없는 곳이 있나 보다 반달 간다
꽃 못 핀 풀들은 마른 몸 비틀어 뿌리로 숨는다 아무도
나를 보지 마라!
게가 한 마리 불빛을 찍으며 가는
골목 위 반달
흔들리던 문 걸면 전신으로 흔들리는
집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아픈 몸에서 아픈 몸으로 가는 길
누군가 날 보아 물 고이게 하고
살[肉]엔지 마음엔지 반달 가게 하나
발을 털며
장석남
탁탁탁탁 눈 녹은 진창을 건너와서 발을 털며
내가 밟고 온 길을 돌아본다
깊이 들어간 데,
미끄러진 데,
아주 빠져버린 데,
흙물이 고인 데,
신발의 상표마저도 찍힌 데,
그러한 데를 돌아보면
내 것만은 아닌 자국도 있으니
얼른 지워졌으면 하는 부끄러운 미끄러짐도
오래 굳어 있어도 좋을 허방도 있으니
발을 털면서도 허방에서 건져온 웃음기 몇은
하늘로 곧장 가는 물건이라 해서 죄 될 것 없으리
가벼워진 나는 우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웃음기의 보람을 양 겨드랑이에 끼고서는
흰, 자주 연꽃 모양으로 좀 솟아볼 것인가?
연애를 만날 때의 그 허방의 보람처럼!
밝은 방
장석남
추녀 끝에는 늘 하늘이
해변가라도 되는 듯 싱싱했다
별이 근처에 있을 때는
저녁이 아직은 젊어 푸르른 때
별은 그 속에서 소외된 눈처럼 껌벅였다
아무리 오래 보아도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지 몰랐다
추녀는 내 방안에 있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엿보아 알고 있어서
들큼한 숨결을 허공에 부비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낯이 뜨거웠다
가끔 빈혈과도 같은 비가 날리면 나는
무수한 물방울들로 추녀 끝에 매달려
수없이 영롱한 망설임들로 떨고 있었다
그때마다 방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내 기억의 두 손을
추녀 끝에까지 늘려 내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 망설임은 안심을 되찾고는 하였다
추녀 끝에서 방까지, 삶까지
하얀 명주실 같은 빛이 이어지고는 하였다.
밤 강물 - 가양대교 아래서
장석남
밤 강(江)에 나가보는 심사를
동행의 어깨 위에 가만 손으로 얹어보면
하류까지 소리 없이
공평히 어둠 실은 강이다.
밤 강물 곁에서 나는
어둠이며 어둠 위의 살림들인 가로의 불이며
하늘의 빛들 이고 내려가는
밤 강물 곁에서
늦게 본 맏이처럼 유순한
강물의 숨은 낯빛을
바로 보진 못하고
딴청으로만 걷고 있었다
망초꽃들이 작은 흰 낯으로 그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망초꽃들이 골똘한, 그 낮고 우레한 소리 속에는
나의 발소리와 숨결의 어떤 것도 실리긴 할 것인데
그에 더하여 달라는 것이 있으니
이제 마흔이 된 울음을, 그만하게 가꾼 꽃밭을, 그도 아니면
점잖은 실의失意라도 내놓으란 것을,
나는 딴청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밤 강물은 두고 갈 수 없는 것인가?
한 사나이는 여전히 강 곁을 걷고
하는 수 없는 듯 또 한 사나이는 그를 두고 돌아가고 있었다
소리 없이 공평이 하류까지
새벽을 실은 강이다
밤 기차
장석남
누군가 이 기차를 보리
환히 불 켠 기차가 눈동자를 뜨겁게 빠져나가리
그런 언덕 있으리
또 누군가는 이 기차 소리 들으리
귀 밑 베개 차가워지는 이 있으리
간이역 같아라 해당화 같던 그 이름
막차는 여수 엑스포에 닿도록 기적 소리 한번이 없네
밤길
장석남
밤길을 걷는다
걸음은 어둠이나 다 가져라
걸음 없이 가고 싶은 데가 있으니
어둠 속 풀잎이나
바람결이나 다 가져라
걸어서 닿을 수 없는데에 가고 싶으니
유실수를 풋열매 떨어뜨리는 소리
이승의 끝자락을 적신다
그러하다가
새벽달이 뜨면 올올이
풀리는 빛에 걸음은 걸려라
걸려 넘어져라
넘어져 무릎에 철철 피가 넘치고
핏속에 파란 별빛들과 여러 날 시각을 달리해서 뜨던 날
셋방과 가난한 식탁,
옹색한 여관 잠과 마주치는 눈길들의
망초꽃 같은 세미나
꼬부라져 사라졌던 또다른 길들 피어날 것이다
환하고 축축하게 웃으면서 이곳이군
내가 닿은 곳은 이곳이군
조금은 쓰라리겠지
내가 밤길을 걸어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새날이 와서 침침하게 앉아
밤길을 걸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벙어리가 되어야 하겟지
그것이 다 우리들의 연애였으니
밤바다에서 - 목 너머에서
장석남
밤바다 위로
빈 배가 한 척 스윽 흘러간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아무 흔적도 없이
빈 배가
아무 체적 없이
내 앉은 곳을 스쳐서
간다 죄 없이
바다에 닿은 바위들
해안을 깎는
물살들 나는
조금 남은 손톱달에
링거병을 걸고
누워서 율도국율도국 하며 그 배를 따라
흘러가 본다
깨어보면
아무 죄 없이
힘겹게 나를
해안에 밀어다 놓는
실낱같은 물결 소리들
섬마을에
조금 남은 감꽃이
마저 졌다
밤비
장석남
밤비는,
참으로 멀리서부터 밤비는
왔구나
낙숫물에 깎이는
섬돌귀는
이 비와 같이 다니느니라
뭉툭하게 닳아졌고
나는 새로 선 비석처럼 귀를 세우고
아득한
비의 여정을 듣는다
이 시간
오동잎 뒤에 세워둔
푸른 잠은 깊어지고
(푸르다니!)
푸른 잠이
너울대며 가는 길도
밤비의 발걸음을 닮았다
그렇지, 밤비 후득이는
오동잎이
우리 生이지
소주 생각 간절한 밤비 속
우리 생(生)이야
오동잎 박차며
코너웍하는 밤비 소리
귀의 골짜기에
흙탕물이 가득 찼다
모두 지나가면
차고 단단한 가을물이
무릎에 구름을 앉히고
동냥밥을 먹는,
또는 손 탁탁 털고
쫄쫄 굶는
그게 생(生)이지
그게,
그것이,
우리 생(生)이지
밤 술
장석남
진눈깨비의 짧은 보폭을 따라
골목 어귀를 도는데
누군가 끄지 않은 처마 등불이
쓰다 남은 희망처럼
젖은 눈발에게도 몸을 허락하고 있었다
멀리 혹은 가까이
땅그랑대는 바람들
무릎이 닳는 동안
진눈깨비는 그쳐서
늦게 뜨는 별이, 별이
오래 동거하던 여자처럼
밤의 창변(窓邊)
장석남
적적한 가정의 지붕들을 바라보며
종일 선배들의 에세이를 읽었다 때로
사랑은 헤어졌다가 나뭇잎 몇 번 지게 하고는
다시 만나더군
음악은 귀를 툭툭 치며 장마 지난 밭고랑을 따라갔고
어둠은 늘 말이 없는 가장처럼
슬픔 몇 송이를 오므려 갖더군
돋을새김한 불빛들
자세히 봐도
다 자세히 봐도 이곳에 온 내 生에서
참을 만한 것은
연애를 잃은
슬픔 정도뿐이더군
그 정도뿐이더군
약관의 나라에 태어난 것 말고는
(이제 협궤 열차도 없어지고......
남동 갯벌의 노을도 참을 만은 했었는데......)
밥때를 기다리며
장석남
얼굴 씻고 앉아 밥때를 기다린다
조반을 놓쳐 차고 뉘엿뉘엿해진 몸뚱이이지만
밥때를 기다리다니, 이런 비루한 시간이 있나
근엄한 표정으로 끼고 돌던 지식 나부랭이들 조롱하고 앉아
코 아래 짐승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니
비루한 정신이여 아궁이로 들어가는 목마여
정좌하고 신의 시간을 기다린다
밥을 먹으며
장석남
밥을 먹을 때 나는 자주
밥 냄새 끝까지 달아나 있다
밥의 기억 모두 낙엽져 앙상한
마을, 내려와 넓은 숨을 쉬는 하늘가에서
이름 버리고
빈 그릇을 달그락거리기도 한다
어느 미래에 나는 배고프지 않은 기억 밑으로
수저를 던질 것인가
내 영혼의 싱싱한 지느러미 속에
차고 단단한 잔별들이 뜰 때
나는 조용히 수저를 놓고 그들과 함께
몸 비틀며 반짝일 것이다
밥을 먹을 때 나는 자주 기억도 끝나는 곳을 病처럼
다녀오곤 한다
방
장석남
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
그 붉음이 한 칸 방이 되어 나를 불러들이고 있다
나이에 맞지 않아 이제 그만 놓아버린 몇낱 꿈은 물고기처럼 총명히 달아났다
발 시려운 석양이다
이제 나는 온화한 경치로 나지막이 기대어 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겹겹 벽을 두른다
동백이 질 때 꽃자리엔 어떤 무늬가 남는지
들여다보는, 큰 저녁이다
문 없어도 시끄러움 하나 없는
들끓는 방이다
방을 깨고 마주친 비참
장석남
날이 맑다
어떤 맑음은
비참을 낳는다
나의 비참은
방을 깨놓고 그 참담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이, 무엇인가에 비유되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려온 것이다
너무 많은 얼굴과 너무 많은 청춘과 너무 많은 정치와 너무 많은 거리가 폭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밝게 밝게 나의 모습이, 속물근성이, 흙탕물이 맑은 골짜기를 쏟아져 나오듯
그러고도
나의 비참은 또 다른 지하 방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썩은 바닥을 깨쳐 들추고 터진 하수도와 막창처럼 드러난 보일러 비닐 엑셀 선의 광경과 유래를 알 수 없는 얼룩들과 악취들이 아니고
해머를 잠시 놓고 앉은 아득한 순간 찾아왔던 것이다
그 참담이 한꺼번에 고요히 낡은 깨달음의 화두(話頭)가 되려 한다는, 사랑도, 꿈도, 섹스도, 온갖 소문과 모함과 죽음, 저주까지도 너무 쉽게, 무엇보다 나의 거창한 무지(無知)까지도 너무 쉽게 깨달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나의 비참은
나의 두 다리는 아프고
어깨는 무너진다
방바닥을 깨고 모든
견고(堅固)를 깨야 한다는 예술 수업의 이론이 이미 낡았다는
시간의 황홀을 맛보는
비참이 있었다
아직도 먼 봄, 이미 아프다
나의 방은 그 봄을 닮았다
나의 비참은 그토록 황홀하다
방을 깨다
장석남
날이 맑다
어떤 맑음은
비참을 낳는다
나의 비참은
방을 깨놓고 그참담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이, 무엇인가에 비유되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려온 것이다
너무 많은 얼굴과 너무 많은 청춘과 너무 많은 정치와 너무 많은 거리가 폭우처럼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밝게 밝게 나의 모습이, 속물근성이,
흙탕물이 맑은 골짜기를 쏟아져 나오듯
그러고도
나의 비참은 또 다른 지하 방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썩은 바닥을 깨쳐 들추고 터진
하수도와 막창처럼 드러난 보일러 비닐 엑셀 선의 광경과 유래를 알 수 없는 얼룩들과
악취들이 아니고
해머를 잠시 놓고 앉은 아득한 순간 찾아왔던 것이다
그 참담이 한꺼번에 고요히 낡은 깨달음의 話頭가 되려 한다는, 사랑도, 꿈도, 온갖 소문과
모함과 죽음, 저주까지도 너무 쉽게, 무엇보다 나의 거창한 無知까지도 너무 쉽게 깨달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나의 비참은,
나의 두 다리는 아프고
어깨는 무너진다
방바닥을 깨고 모든
堅固를 깨야 한다는 예술 수업의 이론이 이미 낡았다는
시간의 황홀을 맛보는
비참이 있었다
아직도 먼 봄, 이미 아프다
나의 방은 그 봄을 닮았다
나의 비참은 그토록 황홀하다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배를 밀며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 들어오는 배여
배호
장석남
1
내 휘파람 속을
눈발이 친다
양철북을 두드리며
산 세월
아버지는 빅사운드 카세트를 귀에 넣고
우리 집 굴뚝 위 연기는
우리 집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고 싶어 했지
그 연기를 나는
너무 많이 보았다
2
비 오다 그쳤다 해 나고
빗물 고인 길바닥
구름 지나는 것 한참 보인다
하늘의 한쪽이 문득 내려와
나를 데리러 내려와
발바닥이 시끄러워진다
3 – 눈이 오는 건 그녀가 내게 오기 때문이야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을 맞는다
눈이 오니까 그녀는 지금
눈길을 오리라
그녀 뒤의 발자국을 눈은 지우리라
자꾸 눈발은 등을 민다 그녀는
등을 밀리며 오리라 리어카 스피커에서
한 생애가 쏟아져나와
쉽게 살얼음이 되는 것 바라보며
사람들은 찬 이마와 머리칼을 데리고
어디로 가나 그녀는 지금
손아귀에 깊은 골짜기를 쥐고 오리라
눈길을 오며 그녀는 아이를 가지리라
재개봉 영화 간판을 올리며 눈발 속의 한 인부가
흑백 화면처럼 저녁을 가린다
강화버스 쪽으로 골목 하나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적막한 불빛을 물고
강화버스가 두런두런 들어선다
골짜기 내게 다가와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
말없이 손을 잡고 나는
그녀에게 입산(入山)한다
눈길을 다시 가며 그녀는 호두나무꽃 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4
돌배나무가 떨고 있다
저 나무가 꽃이 피면
살의(殺意)처럼
꽃이 피면 청춘은
돌배나무 아래 사지를 펴고
그러면 저 나무는 청춘을 묻은
흰 무덤이 되는 거야
돌배나무가 이번엔
춤 속에 가만히 서 있다
5
이화여고 앞길
나의 행방이 오랜만에 눈발 속에 들었구나
발길은 시정(市政) 밖으로 낮게 조아린 길들과 내연하며
꺾어진 한 길목의 꺾인 고백이 되어주고
주머니까지 흘러내린 가슴을
두 손은 꼭 쥔 채 놓을 수가 없구나
덕수궁아, 자꾸
자기 그림자만 물끄러미 쳐다보지 마
자기(自己)야
단추 떨어져 열린 속도 품이라고
바람든 눈송이들 기웃기웃 찾아들어
가슴을 헐값에 임대 놓고 싶구나
눈이 길을 막으면(제발 막아주었으면!)
내 죽음도 아무 데서고 일백(一伯)
맞닥뜨려야겠지
그래야겠지
6 - 귀가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나를 버리고 자꾸
어디론가 숨었다 불 꺼진
우리집 길 끝으로 흘러가 보이지 않고
파리한 입술로 뒤통수에서 별만 빛났다
별에서 돌아와 나의 생은
어딘가 유성기판처럼 돌고 있는지
걸음마다 가슴이 울리고 가슴이 울리는
여기는 어디인가 내 아가미에선
낯선 숨소리가 맑게 끓었다
밤이 제 울타리를 허물고 끝에서 끝으로 갈 때
시린 새벽달이 떴다 떠서,
잃은 길을 적셨다
달빛 아래 모든 길을 버리고
깊이깊이 냇물 소리를 내며 집으로 갔다
버스 정류장 옆 송월전파사
장석남
갑자기 한두 점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
버스 정류장 지붕 아래 들어가 잠시 접어둔
그리운 것 있나 생각할 동안
내상(內傷) 한 세월들 엿보러, 불빛에 뛰어드는 눈송이들 보이네
32번 월미도행 버스 정류장의
한 찰나를 송월전파사의 검은 롯데 파이오니아 스피커,
전도사처럼 서서 아무 일 없다고 세월 밑 세월을 흘려보내 주네
저녁의 가요 산책 여기까지 나와 세월의 파고름 습자지처럼 머금네
조금 더 농밀해진 눈송이들
그 앞에서만 노네
지금, 눈송이들
상(傷)한 것 앞에서만 노네
송월전파사 유리 진열장의 여러 불빛들이
그것들을 깜빡이며 보네
--곧 진창이 되리라
버스 정류장 지붕 밑
그리운 것 있나 생각할 동안
상(傷)한 세월만 먼 길을 오네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으로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훤히 밝힌다
또 한 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벌판
장석남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여기서부터 저 너머까지가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가 벌판이야
여기서 눈 감은 이후까지가 벌판이야
새벽부터 아침까지가
새벽부터 저녁까지가
새벽부터 밤까지, 다시 새벽까지가 벌판이야
심장 꺼진 이후까지가 벌판이야
벌판,
벌판을 걸어서 오는
애기 하나
해를 먹고 달을 먹고 또 풀 밟아
맨발로 오는
애기 하나
어디서 본 듯
애기 하나
눈빛 하나
머리칼 하나
손톱 하나가 다 벌판이야
맴돌아 나는 새까지 다
벌판이야
숨이야
법의 자서전
장석남
나는 법이에요
음흉하죠
허나 늘 미소한 미소를 띠죠
여러개예요 미소도
가면이죠
때로는 담벽에 붙어 어렵게 살 때도 있었지만
귀나 코에 걸려 있을 때 편하죠
나는 모질고 가혹해요
잔머리 좋은 종들이 있거든요
설쳐댈 때가 많지만 만류하진 않아요
그 짓 하려고 어린 시절 고생 좀 한 것들이거든요
만인 앞에 나는 평등해요 헤헤
음흉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죠
원칙이 있지만 아주 가끔만 필요하죠
이득과 기드글 좋아해요 지킬 만한 가치죠
그에 위배되면 원칙을 꼭 알리죠
나는 물처럼 맑고 평등하다고 말하죠
유죄도 무죄도 다 나의 밥이죠
너무 바빠요 너무 불러대니 쉴 틈이 없죠
나는 법이에요
양심 같은 건 우습죠 이득 앞에서
그깟 것 금방들 버려요 시류에 어긋난 소리죠
아 이만하기도 참 다행이죠
한때는 참 어려운 시절도 있었죠
너무 많은 살생을 해야 했으니
황혼이 오네요
저게 제일 싫어요
속속들이 황혼이 오네요
저 지축 속에 숨은 당당한 발소리
나는 귀를 막아요
잘 못 듣는 귀지만 다시 막지요
나는 벌벌 떠는
법이에요
벚꽃 개화 예상도
장석남
나는 한겨레신문에 난 벚꽃 개화 예상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예년보다 5~10일 먼저 꽃소식 찾아왔다, 고 한다.
삼촌이 묻힌 대전에는 3월 31일과 4월 5일 사이에 벚꽃이 피겠고
할머니와 아버지가 묻힌 경기 서해 해상 일대는 4월 5일이나 4월 10일쯤에 피겠고
철원 이북은 아직 까마득하다.
한데 나는 왜 죽은 사람에게 꽃소식을 갖다 댔던 것일까.
그들이 흙이니까? 인척이니까?
큰 제목 `매화 향기 북상중'에 밀려 나는 철원 지나 그림엔 없는 중강진 너머까지 쫓겨가고.
본문(本文) 속에
매화는 2월10일 충무에서 핀 데 이어 다시 20일 제주도 서귀포에까지 내려갔다가 27일 전주로 거슬러 올라왔다고 적혀 있다.
서귀포엔 왜 다시 내려갔던 것일까.
보급로가 막혀버렸던 것일까?
거기다가! 마산에서는 이상 난동 탓으로
1월 30일에 매화꽃이 피었단다.
왜 그 난동이......
저런, 저런 가만히 보니 꽃소식은 이북까지 가지 못하고 말았구나
이북엔 우리 외가가 있다는데.
앞마당엔 매화나무도 있었다는데.
나는 임진왜란 약사라도 읽는 듯이
맨 꼭대기에 적힌 철원이 아슬아슬하다.
벽에 걸린 연못
장석남
어느 저녁
연못을 떠다가 벽에 걸었다
거기 놀던 새들은 노는 채로
흔들리는 풀은 흔들리는 채로
풀 흔들고 간 바람은 흔들고 간 바람인 채로
벽에 걸렸다
풀이 눕고 그 위에
바람과 같이 우리가 눕던 자리는
저만큼이다
거기 머물던 적막은 그러나
이제 보니 다 적막은 아니다
못 보았던 샛길이 하나 막 어디론가 가고 있다
다시 얼기 시작하는 창(窓)이다
별의 감옥
장석남
저 입술을 깨물며 빛나는 별
새벽 거리를 저미는 저 별
녹아 마음에 스미다가
파르륵 떨리면
나는 이미 감옥을 한 채 삼켰구나
유일한 문밖인 저 별
복면을 하고
장석남
복면을 해야 해요
어서 저 빗소리도 복면을 해요
석류나무도 복면을 하고 자귀나무도 복면을 해요
불쑥 복면을 하고 나와 사랑한다 말을 해봐요
복면이 사랑의 기술
사랑의 얼굴을 자세히 봐요
복면이 사랑의 법칙
얼굴을 벗고 복면을 해요
저 해와 달도 음풍도 농월도
얼굴을 벗고 복면을 해요
여도 야도
얼굴을 벗고 복면을 해요
밤의 빗소리를 벗긴
번개여
너도 복면을 해
번개여
허물도 없이 적나라한
번개여
그렇다면,
그렇다면
복면보다는 아주 자구에 넣어다오 포근히
포근히
자루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게
그 환한 번개의 자루 속에서
봄밤
장석남
1
지금은 난세입니다
꽃피는 난세입니다
봄밤이 잦아들어 내 잠을 물구나무 세우는 달이
봄보다 낮은 자리에서 떠서 난세를 비추느라
더 높이 뜨지 못합니다
깨끗한 숲 달빛을 읽는 소리가 가슴에
오래 비워두었던 항아리에 가득 찹니다
봄밤 깊이 부녀들은
초롱 종지 같은 난세의 아이들을 낳느라 정신없고
독을 짓는 사람은 계속 독을 짓습니다
공중에서 빈 것을 가져다가
가슴 가득 짓습니다
봄밤이 그립습니다
대낮엔 사람들이 보리싹 같은 내 웃음을 모두 솎아갑니다
사랑에 쓸래도 벌써 빈 밭입니다
죽은 나무들이 빈 밭을 지킵니다
2
봄밤엔 바람나네
내외(內外) 없이 바람나네
방들을 헐고 바람들 들이네
봄밤에 나는 바람난 숨결들에 반하네
늙은 살구나무의 밤샘 신음에
개나리 울타리가 노랗게 앓네
봄밤에 나는 바람난 國境이네
내외(內外) 없이, 우국충정(憂國忠情) 없이 바람난 국경(國境)이네
그러나 봄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앓고 있네
봄비
장석남
풀린
봄
물결이여 네 고요 위에
둥글게 둥그렇게
서로서로 몸을 감고 죽는다
둥그런, 둥그런 물의 관(棺)들
물 위로 물속의 푸른 어둠이 솟아 올라와
둥근 그 소리에까지도 푸른 어둠이 스민다
풀린
봄
물결이여
네 몸 위에 받는 봄비는
먼데 골짜기까지도 봄이게 하며 몸을 터서 죽는다
아 너와 내가 잠들었던
이 한 덩어리 기슭의 바위에도 봄비는 와서
둥글게 둥그렇게/ 앉음새를 고쳐 준다
봄빛 근처 - 옛 공원에 와서
장석남
봄은 아직 일러 나뭇가지들은 내내 적막하고 나는 왜 이 공원에 앉아서 근처를 맴도는 바람결같이 침침한 눈으로 저 먼 바다 기슭을 바라다보는 것이냐.
지난 겨울 내내 나는 무슨 뉘우칠 일이 많아 저 바다는 또한 내게 저토록 많은 별을 모아 반짝이는 것이냐
늑골 속에서 부-뱃고동 소리 뽑아가지는 저 물 위의 신작로.
무엇이 그리 안타깝게 궁금해 저녁해는 자기 생각 깊이깊이 잠기는가.
잠겨......자기(自己)까지를 없애는가.
봄 산(山)
장석남
푸른 것들이
조금씩 나오고 올라오고
자란다
연록에서 떨어져 나와 연록을 뿌리치고
초록을 뿌리치고 더 크게 푸르러지고 떠오르고
밑바닥에서부터 떠올라 골짜기를 채운다
더 채우고 산을 밀고 계곡으로 올라간다
절벽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며
꼭대기로 산꼭대기로
오른다
봄 산(山)이 봄 산(山)이
걸걸거리면서 숨을
끓이면서 꽃 피워
일어서서
봄 산(山)이
천년 절간들도 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파묻어버린다
(이승이나 떠야 간혹 스님들 모습도 연기로써 보이겠다)
봄 손님
장석남
단골 침 맞는 집, 앞 못 보는 침술사님께서는 꽃철이니
꽃구경도 많이 다니시라 인사하시네
목이 쉰 손님은 그만 문득 봄 손님을 맞고 말았네
아니할 수가 없어 저녁 내내 새 손님과 술잔 나누네
먼 길 온 손님이니 다리 하나 정도는 가슴에 얹어
무게를 칭찬해줄 만하지
봄 손님
봄은 손이 다섯
장석남
봄은 손이 다섯
그중 하나를 붙잡고 나서면
강물은 온다
강물에 봄 山은 꽃까지도 안고 떠밀려 온다
봄 강물 위에 뜬 것
열넷 계집애 신학기의 웃음소리나
그 웃음 기슭의 오랑캐꽃
돌멩이에 발부리 채여 발등에 돋는 환한 꽃들도 모두
내 것이야 내 것일 뿐이야
내 것 아닌 것 하나도 없을 때가 되어
여럿의 봄 손길 중 하나를 붙잡고서 나는
속엣것 다 쫓으며 섰는 꽃나무이고
또 꽃나무이고
봄 저녁
장석남
모과나무에 깃들이는 봄 저녁
봄 저녁에 나는 이마를 떨어뜨리며 섰는
목련 나무에 깃들여보기도 하고
시냇물의 말(言)을 삭히고 있는
여울목을
가슴에 만들어보기도 하다가
이도 저도 다 힘에 부치는
봄 저녁에는
사다리를 만들어
모과나무에 올라가
마지막 햇빛에 깃들여
이렇게, 이렇게
다 저물어서
사다리만 빈 사다리로 남겼으면
봄 저녁
봉숭아를 심고
장석남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며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트릴 때
무릎 펴고 일어나며
일생(一生)을 잘 살아다고 하면 되겠나
그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 건너간
그러한 작고 간절한 일생(一生)이 여기 있었다고
있었다고 하면 되겠나
이 애기들 앞에서
봉원사 입구(入口)
장석남
봉원사 입구
135번 시내버스 종점
중국집이 하나 그 아래
기사 식당이 하나
불조심 플래카드가
바람에 몸을 팔고 있다 빵집이
하나 치킨집이 하나
정육점이 하나 약국 앞에
관절을 앓고 있는 리어카가
한 대 에로틱 비디오 가게가 하나 과일 가게에선
연신 백열등불이 밀감처럼
비디오 가게 쪽으로 굴러온다
만화방이 하나 품 넓게 어미처럼
길이 하나 새끼를 치며 올라가는
봉원사 입구
그 새끼 친 한 길 끝에
내 목숨이 하나
농담처럼 겨울비에 젖으며
농담처럼 초인종을 눌러놓고
봉평의 어느 시냇물을 건너며
장석남
저 햇빛의 찬란함 위로는 이편의 모든 것이 다 손잡고 맨발로 건너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건너보면/ 햇빛은 뒤로 물러나며 조그만 징검돌을 올리고
징검돌은 기우뚱 무슨 말인가를 건네기도 하는 것이다
봄이 오는 길도 그러하였고
너에게로 가는 길도 그러하였다
시냇물은 발랄하고
기러기가 날아간 쪽 하늘빛이 아직은 좀 남아 있고
부뚜막
장석남
부뚜막에 앉아서 감자를 먹었다
시커먼 무쇠솥이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솥 안에 금은보화와도 같이 괴로운 빛의 김치보시기와
흙이나 겨우 씻어낸 소금 술술 뿌린 보리감자들
누대 전부터 물려받은 침침함,
눈 맞추지 않으려 애쓰면서
물도 없이 목을 늘려가며 감자를 삼켰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감자를 삼킨 것인지
무쇠솥을 삼킨 것인지
이마 위에 떠도는 무수한 낮별들을 삼킨 것인지
눈물이 떨어지는 부뚜막이 있다
어머니는 부뚜막이 다 식도록, 아궁이 앞에서
자정 너머까지 앉아 있었다 식어가는 재 위의 숨결
내가 곧 부뚜막 뒤의 침침함에 맡겨진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나는 가만히
어머니의 치마 끝단을 지그시 한번 밟아보고 뒤돌아설 뿐이었다
마당 바깥으로 나서는 길에 뜬 초롱한 별들은
모든 서룬 사람의 발등을 지그시 누른다는 것이
이후의 내 상식이 되었다 그로부터
천정이 꺼멓게 그을린 부엌 찬 부뚜막에 수십년을 앉아서 나는
고구려 사람처럼 현무도 그리고 주작도 그린다
그건 문자로는 기록될 수 없는 서룬 사랑이다
그것이 나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학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시(詩)로 알고 그리고 있다
부뚜막 방
장석남
그녀가 가진 첫 방은 부뚜막이었다 한다
식구들의 잠 귀퉁이를 풀고 한밤이면
고요히 부뚜막에 나앉아 불 밝혀 쓰거운 일기를 쓰고
일기에서 덜어낸 나머지를 고요히 살았다 한다
물소리 똑, 똑 떨어졌을라
일기장 위에도 가끔은 떨어졌을라
그때 나는 다른 생이 하나 있어서
가을바람 소리로나
바깥 문고리에 숯불처럼 파르스름 피어났던 듯
새파랗게 시린 손을 그녀에게 건네었던 듯
아무리 보아도 도무지 그것은 남자의 것은 아니었던 듯
감자밭의 감자꽃들
장독대로 올라온 달
그녀가 가진 첫 방은 부뚜막이었다 한다
나는 이제 자꾸자꾸 나의 무릎팍을 모두어 더듬어보고
두드려도 본다
부뚜막 방,
부뚜막 방
부엌
장석남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 만한 곳은 역시 부엌일밖에 달리 없지. 커피를 마시자고 조용조용히 덜그럭대는 그 소리는 방금 내가 생각하다 놔둔 詩 같고.(오 詩 같고) 쪽창문에 몇 방울의 흔적을 보이며 막 지나치는 빗발은 나에게만 다가와 몸을 보이고 저만큼 멀어가는 허공의 유혹 같아 마음 달뜨고,(오 詩 같고) 매일매일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고요의 이 반질반질한 빛들을 나는 사진으로라도 찍어볼까. 가스레인지 위의 파란 불꽃은 어디에 꽂아두고 싶도록 어여쁘기도 하여라. 내가 빠져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엌의 공기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또 詩 같고, 공기 속의 그릇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다가 먼 데 보는 詩集 같고.
분꽃이 피었다
장석남
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이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비애(悲哀)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 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분장실에서
장석남
오늘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해
중얼거리며 거울을 보네
분 뚜껑을 열고 조용히
나를 지우기 시작하네
오늘 하루
걷고 먹고
말한 모든 것이
나를 지워가던 일
귀가 길에서 모란의 몰락을 보았네
오늘은 아주 조금 나를 걷어낸 것으로 족해
거울 앞에서
얼룩진 부분부터 지우네
저녁은 지워지지 않네
불 꺼진 집
장석남
집을 찾다가 눈발을 만나고
어둠을 헤매먀 겨우겨우 따라오는
찬 발자국이나 뒤돌아보면
나도 누구에겐가로 눈발처럼 한까번에
자우룩이 내려가고 싶네
단풍너무 같은 우리집 나 몰래 이사가버리고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마음으로 들어가네
불 꺼진 하얀 네 손바닥
장석남
내가 온통 흐느끼는 나뭇가지 끝에서
다가갈 곳 다한 바람처럼 정처 없어 할 때
너는 내게 몇 구절의 햇빛으로 읽혀진다
가슴 두드리는 그리움들도
묵은 기억들이 살아와 울자고 청하는 눈물도
눈에 어려
몇 구절 햇빛으로 읽혀진다
불 꺼진 하얀 네 손바닥
햇빛 속에서 자꾸 나를 부르는 손짓
우리가 만나 햇빛 위를 떠오르는 어지러움이 된다면
우리가 서로 꼭 껴안고서 물방울이 된다면
정처 없는 발자국 위에도
꽃이 피어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리
불멸
장석남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불빛을 흔들어서 - 최하림의 「詩를 태우면서」*를 읽으며
장석남
음악을 틀고
촛불을 켜고
숨결로, 몸짓의 바람으로
불빛을 흔들어서
불이 일그러뜨리는 방과 책과 음악과
내 그림자를, 서글픔들을
무슨 수로도 외면할 수 없는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다시 들여다보고
차라리 불을 끄고
방을 지우고 내 그림자를 지우고
책을 지우고 공책을 지우고 공책 속
시를 지우고
귓속에
오래 전에 들어둔
물결소리들이나 방목할까
(이미 방목되고)
물가에 찍혔던 발자국들
융융한 시간 속으로
걸어가고
음악을 틀고
촛불을 켜고
불빛을 흔들어
몸짓을 조이고
숨죽여
불빛 속을 들여다본다
숨으로 몸짓의 바람으로
불빛을 흔들어
시를 흔들어
바람벽에
시(詩)를 시의 석불(石佛)을 그린다
불을 끄면
장석남
불을 끄면 모두 눈을 달고 살아나서 무서웠지
눈 감았지
철이 들면서 불을 끄면
다 보이지 않으니 좋다,
웃음이 솟아도
눈물이 불쑥 와도
좋다,
그렇다가도
끝내 다시 불을 켜서
한꺼번에 서른도 마흔도 또 쉰도 먹는 날이 있었지
불을 끄면
그대로 새벽 포구와도 같아져서
미끄러지는 미명들을 받아안고
맥박을 세지
붉은 구름
장석남
가고 남은 길은 모두 붉은 구름
서해(西海) 해상에 둥글게 내려오는 저 붉은 구름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잘못 운 갈매기 울음도 다 붉은 구름이 공터에
아관파천한 풀아
자꾸 이곳으로 모여드는 풀아
풀아 파르르 치떠는 풀아
풀의 온몸이 저 붉은 구름 속을 부들부들 읽는다
가다가 잃은 길 다 붉은 구름
붉은 구름의 세월이었네
비 가득 머금은 먹구름떼 바라보는 할머니 눈매
장석남
불현듯
비 가득 머금은 먹구름 떼 몰린다
일손 놓고, 넋 놓고
바라보는
할머니 눈매
위에 흰 돛배 하나 떠서
위태롭다
여기는 모두
선상(船上)이다
비단 유감(有感)
장석남
등짐장수 할아버지가 팔러 온
조용히 우리 집 툇마루에 펼친
생전 처음 비단을 만져보았을 때
그거 참 비단결이었어요
어른이 되어 종각 뒤쯤인가 주단 집을 지나게 되면
몇 폭쯤 사고 싶었어요
붉거나 푸르거나 좋겠구
흰 것도 좋겠구
어디에 쓰자는 것이기보다는
손등으로 쓸어보거나
모가지에도 감어보고
팔목 위에, 발등에 떨어뜨려 놓아보는 일
아주 보람 없지 않은 일로
하늘이 읽어주는 글이듯이
자비스런 소식이듯이
무모히 되풀이하여보는 것도
우습지만은 않은 일로
우리가 아주 지치지 않은 날이라도
마침 노을이 잦아드는 저녁을 만나면
노을이 읽어주는 西녁 하늘 저편의 소식을
무모히 쓰라리게 바라봐야 하듯이
온몸 온 맘에 물들어봐야 하듯이
비 맞는 잠
장석남
1
빗방울 떨어지고
바람이 봉숭아꽃을
윽박지르며 불고
비를 피해 나는 두 다리를 싸안고
낮잠 든다
공복으로 찌르르르 이어지는 잠
2
비 맞는 풀
물 싫은 여름풀
이마를 흔들어 제 키 위에
빈 몸뚱이 하나의 살림을
흔든다
아무도 보는 이 없고
밑뿌리들이 하얗게
울고 있다
3
아들이 업고 있는 아버지풀
비가 몰아치면
업은 아버질 내려놓지 못해
같이 엎어지는
비 맞는 잠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죠
장석남
밤새 벼락이 때리고 폭풍이 몰아치고 마치 어느, 역사와도 같이
밤을 다 부숴버리는 천둥이 쏟아지고 하였습니다.
다 어디서 몰려온 불한당들처럼 그 시간의 손님들은
담을 지나 큰길가를 지나 씨앗처럼 작아져서는 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화창하니 밝아진 것 보자니 아무래도 나는 숨겨둔 비밀을 하나쯤 말씀드리고 싶죠.
내게 애인이 생겼죠.
손을 잡으면 손가락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마침내 그 자리가 그만 꽃송이가 되는 애인 말이죠.
어깨를 감싸 안으면 하늘에선 하늘의 이삭들이 패죠.
아무 때나 이런 비밀을 말하진 않죠.
계곡을 뒤집던 흙탕물도 맑아져서 계곡을 다 싣고 계곡 위의 하늘까지를 싣고 내려가는 그런 태평한 날이어야 하죠.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죠.
애인이 생겼다는 얘기죠.
애인은 가끔 비밀을 빠져나와 새벽 별이 되는 게 흠이죠.
이미 아실 분들은 아셨겠지만 애인만도 아닌 애인이죠.
빈 마당을 볼 때마다
장석남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서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어느 꽃나무 아래 앉아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풀잎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꽃이 시들고 있다
이미 무슨 꽃인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서도 너는 있다
빈 하늘을 볼 때마다 너는 떠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서 있다
훌쩍 서 있다
나는 저 마당보다도 가난하고
가난보다도 가난하다
나는 저 마당가의 울타리보다도 가난하고
울타리보다도 훌쩍 가난하다
---가난은 참으로 부지런하기도 하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고
너는 훌쩍 없고
없고 그러나
내 곁에는 언제나 훌쩍 없는
사람이
팔짱을 끼고 있다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뿐인 심장을 만진다
빈방 - 남지암(南枝庵)을 기록함
장석남
아홉 개의 계단을 가진 방
왼쪽엔 신(神)이 사는 산이,
오른쪽엔 세속(世俗)이 아홉 층
마당으론 저승을 아는 호수(湖水)
나는 그중 하늘 쪽에 가깝고 싶지만
나는 하늘에서 사는 사람이 되지 못하므로
술을 마시고 죄를 삼키고 꿈을 부른다네
나는 여럿의 방을 거쳤으나
때로 꽃 대궁 위 벌나비의 방도 있었으나 지금,
고요하여 숨도 쉴 수 없는
가습기 소리 위의 방에 머무네
추수 끝난 논밭의 숨가쁨을 모르는 인류! 인류!
물을 건너가라 물을 더듬어 가라 짚어 가라
물가의 어는 돌멩이가 이렇게 목메어 외우듯
이 방을 굴려 가라 말아 가라 쓰다듬어 먹어 가라…… 그러나 서성이는
그 어디서도 서성이는
빈방―――――――――그 방에 가 머물려네
빗물이고 잠이고 축대인
장석남
가을 오후
가장 낮은 자리의 은행잎에 빛이 들 때
침 삼키고
반은 빛이고 나머지는 잎인
그 시간을 나도 언젠가
살은 듯도 해
살은 듯도 해
내 살에 안개, 건초, 어떤 여명, 싸리꽃, 설계도,
도토리묵의 그 감촉 같은 것이 닿았을 때
이 지구의 저쪽 편에서
어떤 꼬마가 새가 운다고 또는 꽃이 젖는다고
길이 꼬부라졌다고
철공소에서 쇠가 녹는다고
처음으로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을지 모르지
하여튼 그러하였을 것만 같다
숨어서들 그러하였겠지만
가을에 우는 사람이 많은 건 자명한 일
여름보다도 봄보다도 또
가을보다도 더 많아지는 건 자명한 일
빗물이고 잠이고 축대인 겨울까진
많은 별똥들이 떨어진다
별보다도 더 많은 별똥들이
가을보다도 더 많은 가을들이
떨어지듯이
빗소리
장석남
새벽녘에 빗소리 들렸다
부스럭대며 일어나 베란다에 나간다
비 들이치지 않을 만큼
바깥창 기울여 닫고
뒤창에 가 또 닫고 다시
들어와 문 닫고 앉았다
빗소리는 멀어졌다
앉아 엊그제 소란스레 피었던
철쭉분의 꽃들 다 어디 갔나
뒤늦게 생각한다
손바닥을 펴 들여다보기도 하고
가슴께를 만져보기도 한다
베란다에 내가 잠깐 신었던
낡은 신 한 켤레가
흩어져 뒹굴고 있을 것이다
빗소리 곁에
장석남
1
빗소리 곁에
애인을 두고 또
그 곁에 나를 두었다
2
빗소리 저편에
애인이 어둡고
새삼새삼 빗소리 피어오르고
3
빗소리 곁에
나는 누워서
빗소리 위에다 발을 올리고
베개도 자꾸만 고쳐서 메고
4
빗소리 바깥에
빗소리를 두르고
나는 누웠고
빗소리 안에다 우리 둘은
숨결을 두르고
뺨에 서쪽을 빛내다
장석남
양평 골짜기 소나무 바위 밭에 이끼 농사를 지으시는 분
쓰고 남은 상품(上品) 그늘들 묵히기 너무나 아까워 매매하시길
내가 아는 한 여자의 팔월 도라지꽃을 적당히 앉혀서 내놓으시면
오명 가명 처음 보는 상품(商品)에 모두들 궁리가 깊어질 거야
녹음과 보라에 궁리를 더해 가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여들 거야
뭣에 쓰는 물건인지 궁금할 거야
눈웃음들 웃으며 궁리할 거야
아무도 사가는 이 없을 테지만
뺨의 도둑
장석남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뻐꾸기 소리
장석남
깜빡
낮잠 깨어나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봉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 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꽃빛만 같이
사랑도 꼭 그만큼쯤에서
그 빛깔만 같이
뻘밭에서
장석남
썰물에
신발을 벗고 들고
뻘밭을 걸어 들어간다
발자국이
검게 드문드문 나 있다.
물이 고였다
그 가슴에도 저런
무늬가 있을까?
이번엔 발자국 곁에
무엇인가 끌고 간 자국이다.
발자국이 끊긴 데는
수평선.
오, 무엇을 끌고 갔을까?
무엇을 끌고 가야만 했을까나!
꼭 그래야만 했을까나!
자꾸만 자꾸만
깊어진 발자국이,
느린 걸음이,
어떤, 울음이 따라간 발자국만 같아
썰물아 이젠 그만두고,
썰물 그만두고
빨리 오련.
빨리 와.
내 발목도 따라 깊어져
나는 내 뒤가 돌아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조심하며
수평선을 꼭 쥐었다.
사과 궤짝
장석남
가로 눕힌
사과 궤짝
안쪽에는 지난 여름이
비 맞고 있고
위에는
오는 가을이
두 겹이다
사과 궤짝은
참 오래된
유전이다
약간 넓은 판대는
못이 두 개
좁은 것엔 어김없이
딱 하나
찍찍 그은 매직 글씨가 번졌다
여름 한 철의
짧은 사랑 같은 건
이런 궤짝에 빨갛게
담아둘 일이다
가로 눕힌 사과 궤짝
어느 날 벼락 출세를 하여
안쪽엔 조그만 앰프에 씨디 플레이어
위엔 자그만 스피커가 한 조
임시로 맡은 면장 같다
산골
장석남
피로회복 자양강장
하늘색 파란 박카스 곽
곽 위의 타다 남은 모기향
마룻장 끝엔 까맣게 반원의 삶을 살고 간 이가 있었다고.
빗물받이 사금파리
애먼 기억력
지붕에 민들레
들에 민들레
늘어진 대발 안에 두런두런 라디오 소리
외딴 병무 상담
기침 한 개비에 수염이 까칠한 홀애비가 한 개비
허벅까지 말려 올라 구쿰한 파자마
혼자서 시드는 마당귀의
붉디붉은 칸나꽃
붉디붉은 칸나꽃
명년에도 또 피나
여가 좋아 여가 좋아
명년에도 또 피나
다른 빛도 아니고 그 빛깔로
산기슭에서
장석남
바람은 저 등성이를 넘어
저 등성이를 후드득이며 뛰어넘어
기슭을 깊이깊이 몰아넣으면서
아끼던 고백의 밑자리보다도 더 더 깊이 몰아넣으면서
바람은 무시무시하군 바람은
등성이를 훑는 소리 그러나
처마에 매단 풍경, 조그만 아픔보다도 더 작게
손톱 밑의 빼내지 못한 가시의 신음보다도 더 자그마하게 몇 번
바람의 구경꾼, 독립 운동의 구경꾼, 혁명의 구경꾼, 제10공화국, 11공화국의 구경꾼보다도 더 심드렁하게
뗑그랑 뗑그란 두어 번 한다
개도 짖지 않는 저 무지막지한 맨발인
바람 떼
죽은 아버지 죽은 할아버지, 그 속에 있었던
7대(代)까지나 올라가는 섬으로 간 할아버지,
그 전 조상이라고 더 나았을까만
오죽잖은 개인사를 넘어서
오, 바람 떼
이 산기슭에
전기장판을 뜨끈뜨끈히 깔고는 새벽녘 등성이를 훑어가는 바람 소리를
눈보라 그치고 별 나와 간절히 性이 찾아온 새벽에
바람 소리를.
저 산등성이의 것만은 아닌 듯
저 윗골짜구니의 것만은 아닌 듯 나는 사타구니를 움켜쥐고서
바람 소리를,
그래도 이 기슭까지 휘두르지는 않는구나 안심하면서
나는 사랑의 눈동자를 본다
바람 떼 속
사랑의 눈동자를 본다
우물까지도 언 어느 겨울날 어머니 기명통 속 탁한 물 속에서 보았던
그 사랑의 눈동자
오 눈동자 속 明堂의 이 초초가 나는 좋구나
좋구나,
뗑그렁 뗑그렁
명당의 이 심드렁이 나는
좋구나
산길에서 - 축(祝) 시인 이솝의 결혼
장석남
산길을 걷는다
길은 지금
산모퉁이를 돌고 있다 길은
어디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인가 길은
잠시 바위가 되었다가, 또는
솔그늘이 되었다가
가여운 바람의 스산함이 되기도 하였다가
다시 간다
사랑은 아직 아무도 본 적 없으나 사랑은 저
길이 바위가 되었다가 다시 길이 되는
그 순간은 아니었을까 사랑은
저 솔그늘이 되었다가
다시 길이 되어 이어지는
그 순간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바위에 귀를 대고 대답을 구해보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긁힌 생채기에 대답을 구해보기도 한다
사랑은 이 길을 다 가보면 보이는 것인가
새가 잠시 울다 간다
- 부디 잘 사시라
- 메아리를 가진 산처럼 잘 사시라
잠시 바위가 되었던, 솔그늘이 되었던 길에 앉아서
바위에 귀를 달아주는 일처럼 담담히
잘 사시라 생각하고 있다
나뭇잎들이 일러주는 대로 잘 사시라
산길이 산을 내려와
장석남
산길이 산을 내려와
밥풀 같은 마을의 불빛에 젖는다
들녘 끝에서 어둠이 되어 돌아오는
식구들의 그늘로 이제는
부르튼 발바닥 그림자를 깔아주며
가야겠다 늦은 저녁,
잠들면 잠 속에서 감자알이 여물고
어느 날은 몸 곳곳에 들깨를 모종하고, 울타리에서
불을 켠 해바라기의 키가
잠 밖으로 자라 오르기도 하였다
기다려도 빈 나뭇가지에서는
싹이 나지 않았다 봄으로
길을 내는 방목의 들풀들
그들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먼 불빛 하나둘 흔들리며
꺼지며 잠자리 찾고 있었다
산길이 산을 내려와 문득
뒤돌아보면 따라내려오는
저문 산, 물을 건너면
먼저 건너가 뒤돌아보는 저문 산,
얼마나 더 저물어야
우리들 꿈의 뿌리가 뒤로 돌아
우리를 부를 것인가
너무 넓은 자정의 하늘, 산길이
물결치는 하루의 언덕에서
멀미를 하고 있다
산에 사는 작은 새여
장석남
감꽃이 나왔다
신문을 접고 감꽃을 본다
참 먼길을 온 거다
벽에 걸린 달력 옛 그림엔 말 씻는 늙으니 진지하고
살찐 말은 지그시 눈 감았다
어디서 나비라도 한 마리 날아와라
날아와서 말 끌고 가라
성 밖 막다른 골목 어귀에 자리 잡고 살지만
번거롭다, 밥이나 먹고 사는 일이야 간단할 것인데
이 눈치 저 눈치 며칠째 이 소시민을 얽어맸다
나비라도 한 마리 훨훨훨훨훨 지나가라
내 말 끌고 가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사람 소리 드믄 산속으로나 들어갈까?
그러나 거기는 세상을 엿본 자나 들어갈 수 있는 곳
세상을 관통한 자만이 들어가 피빨래를 해서 들꽃으로
들꽃으로 낭자히 널어놓는 곳!
지난해엔 <산유화>를 읽으며 잘 살았지
산에 사는 작은 새여,
지금도 꽃 피고 꽃 지는가?
지금도 지금도 꽃 피고 꽃 지는가?
산역(山驛)에서
장석남
기차가 지나갔다
논바닥에 살얼음이 놀라 깨고 먼
마을 불빛이 하나 꺼졌다
기차는 불이 환한 채
측백나무 울타리를 죽어라 끌고 가고......
놓치면 악 지른다
마을은 잠에 뻗은 두 다리를
조금도 오무리지 않고
유리창마다 성애를 앉힌다
유리창에 그려진, 그려진
꿈자리들
산책(散策)
장석남
새가 날아간다
새가 없다
지상(地上)에 없는 새
새에게 없는 지상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
꽃 밖을 나가라고
때가 지나도 시들지 못하는
옛 만국공원 산책로의 수국(水菊)들
생각의 뒤통수를 비춘다
살구꽃
장석남
마당에 살구꽃이 피었다
밤에도 흰 돗배처럼 떠 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제 얼굴로 넘쳐버린 눈빛
더는 알 수 없는 빛도 스며서는
손 닿지 않는 데가 결리듯
담장 바깥까지도 훤하다
지난겨울엔 빈 가지 사이사이로
하늘이 튿어진 채 쏟아졌었다
그 하늘을 어쩌지 못하고 지금
이 꽃들을 피워서 제 몸뚱이에 꿰매는가?
꽃은 드문드문 굵은 가지 사이에도 돋았다
아무래도 이 꽃들은 지난겨울 어떤,
하늘만 여러 번씩 쳐다보던
살림살이의 사연만 같고 또
그 하늘 아래서는 제일로 낮은 말소리, 발소리 같은 것 들려서 내려온
신과 신의 얼굴만 같고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만 같고
(살구가 익을 때,
시디신 하늘들이
여러 개의 살구빛으로 영글어올 때 우리는
늦은 밤에라도 한 번씩 불을 켜고 나와서 바라다보자
그런 어느 날은 한 끼니쯤은 굶어라도 보자)
그리고 또한, 멀리서 어머니가 오시듯 살구꽃은 피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어머니에, 하늘에 우리를 꿰매 감친 굵은 실밥, 자국들
살구나무 여인숙 -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
장석남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窓엔
살구나무에 놀러 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살구를 따고
장석남
내 서른여섯살은 그저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 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 올라간 가지 사이의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살구나무에 올라
살구를 따며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살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아귀를 펴는 내 손길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무 위의 저녁을 맞네
더이상 손닿는 데 없어서
더듬어 다른 가지로 옮겨가면서 듣게 되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오래된 듯한, 내 무게로 인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은, 어떤 지혜의 말소리는 아닌가
귀담아 들어본다네
살구를 따고 그 이쁘디이쁜 빛깔을 잠시 바라보며
살구씨 속의 아름다운 방을 생각하고
또 그 속의 노랫소리, 행렬, 별자리를 밟아서
사다리로 다시 돌아와 땅에 닿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서른여섯살은 그저 어느 저녁
살구를 한 두어 되 따서는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해두는 수밖에는 없겠네
살얼음이 반짝인다 - 첫 추위
장석남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새 방에 들어 풍경을 매다니
장석남
풍경 소리는
어디를 돌고 온 이의 기별이다
하늘에 조그맣게 구멍을 내어 하늘 밖 어느 희맑은
기슭을 돌아보고 온 이의
기별이다
*
가난한 우리는 지금
엄동의 때를 기다리자
기러기가 날아가서 비로소 빈
하늘을 안아서
자꾸만 많이 안아서 엄동의 때를 기다리자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 절벽에 달라붙은
언 폭포로라도 맺혀 있자
가난한 사랑은
그러게라도 맺여 이 오후의 빛이라도
머금어보자
바람 소리, 바람 소리, 바람의 소리, 또 바람의 소리
이 오후의 빛을 몸에 들여서
머금어보자
우리는 어디를 날고 또 어디를 흘러와 이렇게 멍울
지어 맺혀 있는 것인가
바람 소리 바람의 소리
섧기로소니.
상강(霜降)
장석남
그이를 만나러 간다
여전히 오지 않고
그저 파밭 가에 앉아 있듯
푸르고 매운 자리
삭정이 끝에
잠자리 놀 듯
골똘한 오후
내일도
눈썹 그늘이 길어져서
있을 만한 자리
자리가 삭지 않아
서리를 맞는 자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맹 가리
장석남
점등 시간
77번 좌석버스를 탔다
나는 페루에 가는 것이다
시드는 화환처럼 해가 진다
바람은 저녁 내내 창 유리의 흰 페인트를 벗겨내고 있다
이른 산책의 별이 하나 비닐 봉지처럼 떴다
허공에 걸려 있는 푸른 풍금 소리들
나를 미행하는 이 깡마른 적막도
끝내 페루까지 동행(同行)하리라
철망 위에 앉아 우는 새
새의 울음 속에 등불이 하나 내어걸린다
페루의 유일한 저녁 불빛
밤새 파도들은 불빛으로
낮게 포복해 몰려와 몸을 씻고 있다
불빛을 따라간 한 목숨을 씻어주고 있다
나는 내내 페루에 가고 있는 것이다
새 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
1
찌르라기 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 떼들
찌르라기 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이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 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 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새로 생긴 저녁
장석남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가락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 게 바위도 되고
바위밑의 꽃도 되고 난도 되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 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새벽길
장석남
새벽길은 어둠 속에서 뛰어나온다
있는 힘 다해서 뛰어나온다
질주, 한때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
그러나 역시 사랑보다는 느린
질주.
내가 이렇게 새벽에 깨어나
파리한 정신으로 거리를 바라보는 것도
또 손등을 쏟아져 나간 손가락들을 바라보는 것도
어둠을 뛰쳐나온 새벽길의 저 대견을 보기 위해 선가?
욕망이 빠져나가 버린 육체의 적막을
사람이 빠져나가 버린 정신의 적막을
이미 그 얼굴이 빠져나가 버린 기다림의 적막을
그리고 또 별들이 빠져나가 버린 동편 하늘을
어지간히 익일 때 비로소
새벽길은 거리를 지나 불빛을 지나
들판에 닿아 쉬일 것이다
산모둩이 닿이 쉴 것이다
사랑이 그이의 몸속에서 쉬듯이
새벽달과 신발장
장석남
신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는
조그만 여울물 위에 뜬 꽃잎 같은
그런 울음도 떠올려보는 것이다
이런 출출한 깊은 밤에는
등나무 보라 꽃비
저벅저벅 밟았던 어느 날 오후의
조그만 신발도
거기 두고 온 크고 작은 몇 개 발자국도
옹크리고 있는 것이다
아이 젖니처럼 뜬 새벽달 아래
새벽에
장석남
1
마구 불려갈 수는 없는 것들이 모여
바람 소릴 이루어
우리 연애가 젖는다
저 어둔 밤바람 속의 고요를
눈빛 푸르도록 가꾸어 바라보는 것이
이즈음 내 연애의 습관이다
2
먼 곳이
비로소
먼 곳이다
비 가고 남은
빗물 소리 몇
허나 먼 곳이
아주 먼 곳은 아니게
다시
빗물 소리
머리맡에 자꾸
쌓아둔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3
날 개어서 돌쩌귀에
정맥인 듯 파랗게 돋은
달 본다
불현듯 달은 참으로
떨어진 꽃잎처럼 여럿이다
새의 자취 - 너무 이른 故 김소진. 문상에서 돌아와
장석남
나는 오늘
봄나무들 아래를 지나왔다
푸르고 생기에 찬 햇잎사귀들 사이로
바람은 천년의 기억 속을 들락거리고
나는 그곳을 지나
집으로 왔다
저녁 내내 나는
창문 가를 서성거리고 있다
책꽂이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먼 곳에
누군가를 떼어놓고 온 양 아는
그런 일도 없으면서
서성거리고 있다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심장이 오그라지면서
나는 왠지
내가 지나온 그 나무들 위에
바람만이, 햇살들만이, 그 새살 같은 잎들을
흔들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속에
새가 한 마리 오랫동안
오랫동안
내가 그곳을 지나치는 동안에도
앉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런 생각이 명치를 적셔온다
새는
자기가 깃들였던 자리를 찾았던 것일지
새는
새는
그 찬란한 이파리들을
자기가 기르던 새끼들의
온갖 눈빛들아고 생각하며
앉아 있었던 것일지
휙
바람 한번 지나면
온 찬란함이
아이 울음으로 뒤바뀌는
폭풍같은 고요를
삼키는 나무
밑을
나는 지나온 것이다
미망(未忘)으로 길어지는
나무 그림자를
푸드덕빠져나가는 새
새는 날았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새
미명(未明)이 가깝도록 나는 그 언저리를
작은 숨결들과 함께
서성이고 있다
생강나무 아래
장석남
생강나무꽃 피면 그 아래 돌길로
땀 뻘뻘 흘리며 큰 항아리 지게 지고 와서 앉았다
가는 사람이 있었다
항아리에 매달려 사뿐히
내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생선구이 백반
장석남
구운 생선의 뼈를 바르고 있을 때
누군가 등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뭐해?" 할 것 같다
나는 지금 뭐하는가
나는 지금
◁―|-|-|-|< 여!
비 쏟아질 듯 꾸물꾸물한 충무로 밥집 골목 위에 뜬
멍석 하늘
서울, 2023 봄
장석남
유골함을 받아 안듯
오는, 봄
이 언짢은 온기
산 송장들을 만드느라
관청의 서류마다 죄가 난무하고
공원의 쇠 울타리 안에서 정원사들은 날 선 법복 차림으로
꽃나무 뿌리마다 납 물을 붓고 있네
화창한 사오월의 봄날에도
납빛 꽃들이 신문지의 비열한 제목처럼 만발해 오리라
용답역 모퉁이에서 검은 무쇠 칼을 움켜쥐고
더덕 껍질을 서걱서걱 긁어 까는 가난한 할머니만이
망명한 봄을 숨겨 간직하였구나
나는 잠시 더덕 내음의 면회객이 되어 저편의 봄을 엿본다
흙 껍질 속의 흰색! 장지(壯紙) 빛, 신비한 향기를 맡으며
백범(白凡)의 그 두루마기 빛깔까지 허망 걸어가 보네
유골함의 온기 같은
지금 2023년 봄볕을
기록하여 두네
석류나무 곁을 지날 때는
장석남
지난봄에는 석류나무 한 그루
심어 기르자고, 봄을 이겼다
내년이나 보리라고 한 꽃이 문득 잎사귀 사이를 스쳐 나오고는 해서
그 앞에 함부로 앉기 미안하였다
꽃 아래는 모두 낭자한 빛으로 흘러 어디 담아둘 수 없는 것이 아깝기도 했음을,
그 욕심이, 내 숨결에도 지장을 좀 주었을 듯
그중 다섯이 열매가 되었는데,
열매는 내 드나드는 쪽으로 가시 달린 가지들을 조금씩 휘어내리는 게 아닌가
그래 어느 날부터인가는 석류나무 곁을 지날 때는
옷깃을 여미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중 하나가 깨어진 채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안팍을 다해서 저렇게 깨어진 뒤라야 완성이라는 것이, 위안인, 아침이었다
그 곁을 지나며 옷깃을 여미는 자세였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었으니
스스로 깨어지는 거룩을 생각해보는 아침이었다
석류 익는 시간
장석남
당신은 내게 비단을 주니
그걸 눈에 두르고
더듬어서 내 맘속 둥그런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보네
항아리에 늘 허공이나 담아두는 당신의 뜻을 모르니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 보면 알려나?
하늘이 온통 노을로 꽃핀
이 부러진 듯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
성(城)에 불이 들어오면서
장석남
성(城)이라 하면 시대를 막론하고 맥 탁 놓고 돌덩이보다도 더 작게 앉아 쉬었을 축성인부들의 표정부터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나는 부모로부터의 출신성분 탓으로 본다. 그 외의 역사(歷史)라거나 양식(樣式)이라거나 혹은 총연장 몇 킬로미터라거나 그저 성은 축성인부들의 표정으로 아랫돌은 윗돌을 괴고, 윗돌은 그 윗돌을 괴고 맨 윗돌은 시푸른 하늘을 괴고 천둥소리를 괴고 소나기를 괴고 또 그 소나기와도 같은 허기를 괴고 계절을 괴어서 수수년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 성북동 바깥 성벽에 조명 전깃불이 들어오면서부터 나는 이제 성이 무슨 새로운 임무를 맡은 것을 눈치채고는 밤마다 마당에 나와 앉아 환한 성을 바라보게 된다. 매번 내가 늘 되새겨온 그 표정들을 벗어나 밤의 성곽은 각광 속에서 참으로 아름답군, 결론이 미처 다 완성되기도 전 탁, 일제히 불이 꺼지고 (자정이다!) 나면 어둠이 성을 한입에 먹어버리고 만다. 어둠 속에서 성은 또 어떠한 제 본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끝내 출신성분을 벗어버릴 수 없는 나는 자정을 넘어뜨리는 오는 어둠이 저승에서부터의 일을 알리듯 오는 것임에도 성이 너무도 손쉽게 그의 일원이 되어버린다고 섭섭함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모든 표정들을 너무나 간단히 꺼버린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당가에서 국화 대궁들 울음처럼 솟아 있다. 나는 그와 함께 뿌리뻗어 가는 소리 들으려고 한다. 첫서리 내려 또 가을 저편의 일을 알리면 유연(悠然)이 불 켜졌다 꺼지는 남쪽 등성이 성을 바라볼 것이다. 향기로운 만리장성을 생각할 것이다.
성(城)이 내게 되비쳐주는 저녁 빛은
장석남
동향집에서는 저녁 빛이 되비쳐온다
성의 화강암들 저녁 빛 받아 던진다
저녁에 동쪽으로도 석양은 찬란하다
호랑이 가죽 같은 빛깔들 깔려온 마당가에
죽은 강아지를 묻는다
동향집에서는 저녁 빛이 가슴께에서 빛난다
세월의 집
장석남
하늘의 후문 같다
널빤지처럼 떠 있는 구름
못 끝 박힌 빛살들에
눈 다치고
어디론가 行不인 나는
도대체 만기가 없다
사랑 없이 세월의 자궁 속에
꽃들 떨어져
아 아파라
발이 빠져나오지 않는다
세월 없는 세월이 그리운 죄로
그 불법(不法)으로
하루해 시름시름 꺼져내려
눈에 긁히는
이 더러운
세탁기
장석남
우두커니
문 열린 세탁기야
때 묻은 하늘이나 넣을까
기다림이나 넣을까
커피나 한잔 내려 마시고
시골 빨래 서울 빨래
겨울 빨래나 넣을까
매일매일 덕을 쌓는 세탁기야
헤 입 벌린 바보야
천사야
봄아
세한(歲寒)
장석남
소나무들이 늘어서서 외롭다
소나무는 연대하지 않는다
독자 노선의 소나무마다는
바람의 사업장이다
대장간이 되어 연장을 벼리다가
사나운 준마들을 키운다
나의 뺨은 얼어간다
늑골 아래 연인은 기침을 한다 바람은
재빨리 기침을 모아 갈밭 속에 뿌리고
지난 모든 계절의 왕국들이
찢겨 펄럭인다
이 비탄의 풍경 속에서
나는 천천히 걸어나왔고
그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술잔을 나누던 이 여럿 바뀌지 않았는가
술에 밤하늘의 빛들이 녹는다
술잔 나누던 이들 늘어서서 외롭다
소나기
장석남
남천(南天)에서
천둥소리 하늘을 깨치는가 싶더니
머위밭을 한꺼번에 훑는
무수한 초조함들
처럼
이제 어디에라도
닿을 때가 되었는데
되었는데
소나기 지나가며
외딴 어느 집 처마 밑에 푸어준
열서넛 남짓
나일론 옷 다 젖어 좁은 등허리뼈 비쳐나는
소년, 처연한 머리카락
서 있는 곳
그 토란잎 같은 눈빛이 가 닿는 데
그 표정 그 눈빛이 자꾸만 가는 데
그런 데에 닿을 때 되었는데,……,
천둥이 하늘을 깨쳐 보여준 그곳들을
영혼이라고 하면 안 되나
가깝고 가까워라
그 먼 곳
이 땅에 팍팍
이마를 두드리다 이내
제 흔적 거두어
돌아간
오후 한때
소나기 행자(行者)들
쫓아간
내 영혼
겨울 어느 날
눈 오시는 날
다시 보리라
빈 대궁들과 함께 서서
구경꾼처럼
구경꾼처럼
눈에 담으리라
소나기 오는 날
장석남
날이 뜨겁던 이유를 서로 풀어놓으니
스물 안팎 친구에게 그런 이유란 없다 하고
노인은 비가 오려 그랬다 하네
나비는 꽃을 부지런히 순회하던가?
꽃은 나비를 야단쳐서 보내던가?
비는 여러 가지 얘기를 한꺼번에 쏟다가
아무 귀담아들을 얘기는 없다고
웃고는 가네
뉘우침 후처럼
맑고 서늘한 길가 바위
놓여 있네
소래라는 곳
장석남
저녁이면 어김없이 하늘이 붉은 얼굴로
뭉클하게 옆구리에서 만져지는 거기
바다가 문병객처럼 올라오고
그 물길로 통통배가
텅텅텅텅 텅 빈 채
족보 책 같은 모습으로 주둥이를 갖다댄다
잡어 떼, 뚫린 그물코, 텅 빈 눈,
칼쿠리손, 거품을 문 게
풀꽃들이 박수 치는지
해안 초소 위로 별이 떴다
거기에 가면 별이 뜨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별에 눈 맞추며 덜컹대는
수인선 협궤 열차에 가슴을 다치지 않으려면
별에 들키지 않아야 한다
가슴에 휑한 협궤의 터널이 나지 않으려면
소리 속의 그네 - 흥섭에게
장석남
나는 매일 소리 속에 돌담을 쌓고 왔다
소리는 허공을 떠돌다 돌로 앉고
내 사는 달팽이집 속까지
소리의 빛들이 이어졌다
달팽이집 처마에 누군가
그네를 매고 갔다
나는 위태로운 사랑 위에 앉아
흔들리며
지난밤 들은 음악을 되새김질한다
소처럼 다시 꺼내 듣는다
소리가 가는 곳까지만 가서 살겠다
그네 줄은 여기서 거기까지만
갔다가 온다
창에 일찍 온 저녁을 불러들여
돌담 속에 같이 저문다
소묘(素描)
장석남
1
산길은 늘상
하얀 명주실처럼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가로질러
건너 산으로 들어간다.
그 언저리에서 아지랑이들이
산길을 울렁이게 한다.
저녘 때면 그 흔들리는 길을 걸어서
개울을 건너 바닷가로 나가는 아이가 있다.
쪽물을 들인 광목을 펼쳐놓은 것처럼
아주 작게 숨 쉬는
앞바다 물결들과
싸르륵 싸르륵
물결소리를 받는 자갈밭.
아이는 납작한 자갈돌 두어 개를 주워
다시 산길에 올라 집으로 돌아간다.
손아귀 속에서 따뜻해지는
자갈돌
속으로 아이는 들어가
뼈를 안고
잠든다.
2
지금 그 섬마을엔
참나리꽃이 피었을 것이다.
둥글레꽃이 피었을 것이다.
마을 미루나무엔
지난겨울 날리다가 걸린 연(鳶)살들이
돋는 새잎에 가려지고 있을 것이다.
뚱뚱감자꽃이
백옥 같은 말씀들을 피워 물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둥글레꽃은 피어서
뚱뚱감자꽃들은 피어서
환하지 않아도 될 슬픔 같은 것까지도 환한
먼 마을
소일(消日) - 1998년 봄
장석남
사기그릇을 꺼내어 소주를 부어
몇 모금씩 마시며 두부를 먹는다
빨갛게 핀 철쭉분을 바라보고 또
받침 해 세워둔 검은 돌을 바라보고 있다
돌은 눌옹(訥翁)이다
음악은 모차르트인데 빠른 데는 명랑하고
느린 데는 구슬프다
마룻바닥의 번질번질한 기름때 위로
밖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 들어와 어렸다
읽다가 덮어둔 책은 여럿인데
다시 손이 가는 책이 드물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이나 다시금 들여다볼 마음이다
전화는 울리다 끊어지고 또 받으면 끊어지니
내게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가?
우편함에 가보니 세금 고지서만 수두룩해
그냥 두고 올라온다
차(茶)도 떨어졌고
지난겨울 죽은 화분 둘
치울 일을 미루어두고 있다
벽에 걸어둔 붉은 양파자루 속에서
푸른 싹이 올라왔다
아무 데나 온 봄을 미워한다
소풍
장석남
소매끝으로 나비를 날리며 걸어갔지
바위 살림에 귀화(歸化)를 청해보다 돌아왔지
답은 더디고
아래위 옷깃마다 묻은 초록은 무거워 쉬엄쉬엄 왔지
푸른 바위에 허기져 돌아왔지
답은 더디고
속삭임
장석남
솔방울 떨어져 구르는 소리.
가만 멈추는 소리.
담 모퉁이 돌아가며 바람들 내쫓는
가랑잎 소리.
새벽달 깨치며 샘에서
숫물 긷는 소리.
풋감이 떨어져 잠든 도야지를 깨우듯
내 발등을 서늘히 만지고 가는
먼,
먼, 머언.
속삭임들.
솔밭길
장석남
만삭의 둥근 달을 태운
푸른 솔밭길
비범하기만 한 한 사람이
막 지나간 듯한
그 아래
솔 그늘 사이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나즉히 흐르는
소리들에
귀 기울이러 온
수수밭 언덕이며
바다에서까지 올라온 마른 개울들
솔밭길은 저 달을
마침내는 어떻게 하려나
어떻게 하려나
우리는 이 육신을,
새끼들을, 마침내는
어떻게 하려나
다만 술렁이며 어디까지고
태우고 갈 뿐인가
그러다가 어느덧 건넛산 마루에
넘길 뿐인가
하나도 힘겨워 하지 않고
술렁이며 달을 태운
솔밭길
그저 마른침을 삼킬 뿐인
언덕이며
개울들
송내가 없다
장석남
송내 지나는데
송내가 없다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철길 건널목 통행 제한 종소리
그 속으로 다 들어간 송내
몇 남은
복숭아꽃이
바람에 날려
없어진 송내를 웅덩이에 띄운다
차를 세우고
일갈(一喝)하는
철길 건널목 종소리
어디 갔나
송학동
장석남
1
계단만으로도 한동네가 되다니
무릎만 남은 삶의
계단 끝마다 베고니아의 붉은 뜰이 위태롭게
뱃고동들을 받아먹고 있다
저 아래는 어디일까 뱃고동이 올라오는 그곳은
어느 황혼이 섭정하는 저녁의 나라일까
무엇인가 막 쳐들어와서
꽉차서
사는 것이 쓸쓸함의 만조를 이룰 때
무엇인가 빠져나갈 것 많을 듯
가파름만으로도 한 생애가 된다는 것에 대해
돌멩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2
저 대추나무에 열린 바람 소리
다다미집 창문을 넘어 긴 담쟁이덩굴을 넘어오는 바람 소리
위안부처럼 퉁퉁 불은 구름 그림자 지나간다
성공회길 모퉁이에서 지난해 마른 코스모스가
모든 살아 있던 것들의 영혼을 보여주고 있다
봄바다야 삶은 얼마나 누추한 것이냐
봄바다에 닿기 전 다시 한번 망설여보는
봄바다에 내리는 늦은 눈발의 미약한 말을
내 무릎 관절이 알아듣고 있다
구름 그림자 따라가다가 너무 멀리 가므로 다시 오는
바람 소리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반질반질
길 내는 바람의
새앙쥐 같은 발길
3 – 김종삼 부음(金宗三 訃音)
스무 살 초겨울
늦게 잠에서 놓여나
서너 줄 부음 기사 접하고
오후에는 동인천에 나가 헌혈
차창 사이로 빠끔히 보이던 하늘
되도록이면
자세히 봐두려고 애썼다
버스에서 내리다가 휘청했다
어디선가 후두둑 새들 날아오르는 소리
근처 커피집에 가서 커피 마셨다
한적했다
그때 보아둔 하늘이
가끔 등뒤를 맴돈다
어느 날은 귀밑머리가 서늘하게 환하다
천상병(千祥炳) 죽고
신동문(辛東門) 죽고
두 번 헌혈이 밀렸다
그 외(外)의 몇 번의 하관(下棺)
흰 조개 껍데기가 물에 가라앉는 것 보았는가
씰룩실룩
내 뇌에는 실룩실룩한
흰 조개 껍데기들의 하관(下棺) 자국이
몇 개 더 새겨졌다
허공중 자세히 봐두는 일이
몇 번 더 밀렸다
귀밑머리 쪽이 컴컴하니 무겁다
수락산 근처
장석남
수락산 서편 흰 바위돌에 저녁빛 놓인다 무당은 점 보러 들어가고 길은 엉거추춤 무안한 길이다 저 바위를 흘러내리는 비단결은 두루두루 감아두었다가 사랑이라도 묻어두는 데 쓰것다 사랑에 골병든 관절이라도 묻어두는데 요긴히 쓰것다 서울 북부 점집도 많은 수락산 서편 흰 바위들, 드물게 지나는 아침에도 내 맘이 어떤지 귓바퀴도 커다란 꽃이 되어서들 점쟁이 이목으로 들여다보네
수레
장석남
길모퉁이, 엉겅퀴 곁
물건을 나르던 수레가 쉬고 있다
거기 기대거나 앉아 여러 사람들이 쉬고 있다
꽃이나 청춘을 이야기하거나
질투와 노여움을 이야기한다
그때마다
'아니지 아니지'
'그렇지 그렇지'
아주 단순한 말로 뼈마디를 부딪혀
수레는 동참한다
수로(水路)에서
장석남
폭우로 불어난 흙탕물이 콸콸거리며 저수지로 들어간다. 옆구리가 결린다. 막걸리병이 부러진 주사바늘처럼 쓸려갔다
금니를 드러내며 혼자 말하며 양재기처럼 웃으며 풀 무성한 둑방길을 헤쳐가는 女人, 젖은 머리채 위로 하늘이 주름져 딸려간다
수로(水路)에 외발로 서서 고개 움츠리고 비 맞는 왜가리
어떤 기다림도 잊고 다만 기다림의 자세만으로 생을 채우려 용맹정진하는 왜가리
나는 늦도록 깊고 습한 터널을 뚫는다
시큼하고 외로운 수로(水路)
수묵(水墨) 정원
장석남
1 - 강(江)
먼 길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강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겨울이 되자 물이 얼었다
언 물을 건너갔다
다 건너자 물이 녹았다
되돌아보니 찬란한 햇빛 속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아이가 벌써 둘이라고 했다
2 - 마른 시냇가
마른 시냇가에 서서
지난 어느 시간
내가 보았던 구름의
자국을 찾아본다
마른 시냇가에 앉아서
한때 구름이었던 데를 만져본다
병상에서
어머니의 정강이를 만져보듯
깡마른 정강이를 만져보듯
3 - 물 긷는 사람
물통(通) 하나 들고 가는 사람
물통(通) 하나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
물통(通) 지고 가는 사람
물 길으며 길바닥에 흘린 물자국
물 출렁이는 소리
통(通)에 바가지 부딪는 소리
젖는 쑥대궁들
물通, 물항아리에 쏟는 소리
물항아리에
물 차 오르면
어룽대는 물의 빛
고개 갸웃하면 물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람의 가슴에도 그런 윤기 같은 게 있을 뿐
우리가 가장 나중까지 지녀야 할
가난의 보고(寶庫)
물통(通) 하나 지고 가며
4 – 북두칠성(北斗七星)
삶은 저렇듯 명료한 것도 아니니
너에게 하는 말은,
말도
우물 속에다 하는 말처럼
울음도
우물에 빠치는 울음처럼
너에게 하는 말처럼
걸어 내려가는 길
무릎이 시려지는 걸음
그래서 차츰
소슬(蕭瑟)히 희미해지는 걸음
5 - 물의 길
바다에 나가는 수많은 길들 중에
내가 택한 길은 작은 냇물을 따라가는 길이었네
내가 닿는 바다는 노인처럼 모로 누운
해안선의 한모퉁이였네
나를 내려놓고 길은 바닷속으로 잠겨들어가버리곤 했네
그러면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어둠이 되곤 했네
어둠을 이고 서 있는 소나무가 되어버리곤 했네
누군가 왜 그런 길을 택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네
발을 다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지만
그것이 대답이 될 수는 없다네
누군가 더 묻지 않은 것 참 다행이네
6 – 모색(暮色)
귀똘이들이
별의 운행을 맡아 가지고는
수고로운 저녁입니다.
가끔 단추처럼 떨어지는 별도
있습니다
7 - 우리는 늙으면
우리는 늙으면
저녁별을 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문턱에 앉아서 부는
바람도 느껴볼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매일
저녁별 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날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늙음 끝까지 신작로를
바라보고 창문 아래에
앉아서
저녁별을 볼 것이다
그리고 먼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8 – 대숲
해가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또 파란 달이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대숲은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밤새 수런수런대며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싯푸른 빛으로만 만들어서
먼데 애달픈 이의 새벽꿈으로도 보내는가
대숲을 걸어나온 길 하나는
둥실둥실 흰 고름처럼 마을을 흘러 질러간다
9 -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수월(水月) 스님
장석남
수월 스님은
호랑이와도 잘 놀았다고 하는데
그 호랑이가 찾아오면
무슨 말을 해서
잘 달래서 놀았을까
그 건넨 말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을까?
물이 좋지?
달이 좋지?
출가 전 머슴살이 덕으로
짚신도 잘 삼아서
스승 경허에게도 삼아 드리고
저승에도 짚신을 이고 앉아
가셨다 하네
나는 그 호랑이에게 한 말이 내내 궁금해
찾아보려 하네
진급 영 안 되는 시라도 이고 앉아
찾아보려 하네
수집가
장석남
나는 밤을 모으죠
오래전부터
하나 쓸 만한 밤은 드물어요
대개 버려지죠
숲속의 인형처럼
낮도 모아보았죠
다 버렸죠
도로의 신발처럼
없었죠
집으로 가져갈 만한 게
수집가로서
재능 부족이죠
수장고도 너무 작고요
그래도 수집은 계속될 거예요
알려주세요
사랑과 일
노래와 분노
쓸 만한 것
여기 있노라
하여 나의 수장고엔
꽃이 가득해요
빛과 어둠만이 넘쳐요
바람이 흘러가요
낮은 노래처럼
숟가락
장석남
가루 커피를 타며 무심히 수저통에서 제일 작은 것이라고 뽑아들어 커피를 젓고 있는데 가만 보니 아이 밥숟가락이다 그 숟가락으로 일부러 않던 버릇처럼 커피를 홀짝 홀짝 떠삼킨다
단가 쓴가
가슴이 뻐근하다
빈집에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발치에 와 있는 햇빛
커피 한잔 주고 싶다
술래
장석남
1
신발 벗어놓고 꽃속으로 들어간 매화 분홍
신발 벗어놓고 열매속으로 들어간 살구 분홍
신발 벗어놓고 겨울 속으로 들어간 첫서리의 분홍
신발장을 정리하며
지워지지 않는 분홍의 핏자국들을 만진다
나는 그 얼룩들의 술래였다
2
사내의 곡괭이가 사내의 머리 위 하늘을 한번씩 찌른다
돌을 파내고 나면 삽으로 흙을 퍼낸다
파인 하늘에도 피가 흐르고 흉터가 남는다
무릎이 지평 아래로 잠긴다
허리가 잠긴다
그리고 조금씩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미망인과도 같은 물이 고여서
앙금을 가라앉히고는 차츰
사물을 비추기 시작한다
사내를 비추기 시작한다
나는 물그림자의 술래였다
3
황사가 온 담장
한 차례 기침을 쏟고
나는 저절로 꽃을 기다리는 자세가 되어 앉았다
아직은 가시만 사나운 장미 넝쿨들
해마다 곡마단 같이 장미는 와서
허기와 과식을 치장해주고
기침 너머의 쓰고 지린 사랑의 풍경을 가려주던
나는 더는 보여줄 것이 없는 듯한데
장미는 또 뭇 식솔들을 데리고 올 것이다
해마다 나의 봄 기침을 열람하러 오는 고된 술래
바랜 심장에 핏빛을 더해주며 장미는 무엇을 찾을 까?
유서가 깊은 봄의 이별과
끝내 숨기지 못하는 가쁜
기침이 있을 뿐이다
숨은 꽃
장석남
1
너……숨은
꽃이 아름답다
겨울 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또아리를 틀고
짓누르는 땅거죽 헤집고 돋는 초록의 들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태연히 떠나갈 수는 없다
핏방울 떨어지듯 앙징맞게 맺힌 꽃망울이여
숨어서 앙칼지게 쏘아보는 꽃이여
2
징그러워라, 상처 아문 뒤 철죽보다 더 짙은 붉음으로
타는 이 삶이 괴로움은 죄보다 더 가시같다
세상에 태어나 이 괴롬보다 더 큰 괴롬은 없었다
널 향한 미친 피의 참을 길 없는 줄달음질에
난 서릿발 풀린 흙덩이마냥 부서지고 싶었다
그러나, 보라…… 삶은 징그럽고도 다정한 것,
가랑비 흐릿한 저 들녘에 하염없는 꽃상여 행렬을……
우린 더욱 살아봐야 하리,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것
살아서 타는 괴롬으로 더욱 생생히 빛나야 하리
숨의 사랑
장석남
어제는 창경궁 후원에 많은 키 큰 나무들이
꽃피는 걸 보았습니다
담장들은 지붕을 얹은 채 키를 낮추고
내 숨이 분홍빛으로
그 큰 나무들에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람이 불거나 바람 속에 초생달이 걸린 때면
내 숨의 사랑은
그곳으로도 가리라
숨결들
다시 돌아와
꽃 핀 창경궁 후원이 몸에 가득했습니다
시를 다 지우다
장석남
새벽빛도
홑겹만 남고
시인으로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벽뿐인 자리에 떨고 앉아
공복을 즐기다
언제 스민 건가?
먹물 스민 손톱을 보며
그믐달처럼 웃는다
공복 창자의 이랑마다
무슨 꽃씨를 뿌릴까
무슨 망아지를 풀어볼까
시의 나라의 국경을 부수고
시의 마을의 약도를 지우고
시를 지우고
시의 자리에 앉아
어라, 아침이 와서
함께 덜덜 떨다
시법(詩法) - 샘물이며 갈증인
장석남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갈증
그건 아무도 모르게 영혼을 찢어놓는,
남은 모르는 갈증
갈증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물
맛있는 물
이끼 낀 돌처럼 조용히,
한번 더 낮게
조용히
시에도……
시월(十月)
장석남
홑것차림의 이런 말소리도 들려오는 것이다
단풍 들어
단풍이 들어
이제는 띄엄띄엄 말도 놓는 사이가 되어
청색시대(靑色時代)를 살러 오는 새털구름에게
나는 또 이런 응답을 놓아본다
그 근면(勤勉)으로
내 눈과 귀의 단추 좀 풀어다오
내 혀는 네가 주는 노래로 반짝일 테야
서녘 바람에 해바라기가
거짓을 쏘아보던 눈과도 같이 익어가고 있다
시월 보름
장석남
푸른 녹이 낀 거울 속의 작은 부스러기 하늘이라고 해두자
나는, 냇가 모난 돌밭 틈에 난 작은 버드나무라고 해두자
나는, 가을날 라일락 밑동의 어둠이라고 해두자
- 거기 어디 향기의 자죽이라도 있던가?
나는 성곽의 가장 밑돌 틈에 가장 늦게 나와 핀 민들레라고 해두자
그리고 너는, 人類平和의 신앙은
그 민들레의 보름달이라고 해두자
키 크고
속눈썹 긴
보름달이다
시인은
장석남
시인은 시를 근심할 뿐이다
정치를 근심한 이후에도
정치는 저희들의 똥을 뭉개고 저희들끼리 헹가래를 친다
시인은 정치를 근심하기 이전에 이미 정치가이므로
시를 근심할 뿐이다
시인은 시를 행위(行爲)할 뿐
깨진 환경을 근심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샛강은 썩고 소는 비닐을 낳는다
근심할 시간이 없을 때
근심을 뚫고 즉각 행위여야 하므로
시 이전에 이미 행위여야 하므로
시인은 스스로를 근심할 뿐
자신의 무지와 우둔과 속됨과 거지 근성을 근심할 뿐
시가 시가 아닌 것을 노닥거릴 때
시가 사랑이 아닌 것을 노닥거릴 때
단 것을 먹어 이가 삭듯
기교도 없이 노닥거릴 때
이미 치욕은 아픈 목구멍을 지지라고 뜨거워진다
시는 이미 무위를 넘어가는 행위여야 했으므로
행위를 넘어가는 무위여야 하므로
깨지는 얼음장 위를 달려서 너에게로 가는
전속력(全速力)이어야 하므로
시 읽던 바위
장석남
들릴락 말락
바위, 웅얼대는 바위
오래전에 내게서 들은 시들을 읽어주는 바위
너무 오래전에 들은 시인가?
잘 들리지 않고 웅얼웅얼대는 소리로만
외줘주는 시
들리다, 알아들을 듯하다가도 이내
너무 오래전에 들어 가물가물한 듯
곰곰 무거운 표정으로
나올 듯 나올 듯
그러나 이번엔 누가 들려주었는지
기억할 수 없는 것이 괴로운 듯
웅얼대는 바위
이끼 푸른
밑에는 질척하니 샘이 나는
바위
노란 농약 통을 맨 노인 한 분
산 아래 밭으로 사라졌다
오, '모던 보이'같이
실내악(室內樂)
장석남
피아노 속에서 누군가 나와서 눌렸던 건반을 제자리에 놓고 다시 들어간다
누군가 내 귓속의 막힌 널빤지에 구멍을 파고 오른쪽과 왼쪽 두 귀 사이에 빨랫줄을 매고 피 빨래를 건다
피아노 소 ㄱ에서, 내 환(幻)의 발목뼈에 금갔을 때
내 까망 눈동자에도 쩡, 금이 가고
물컹한 내 입술 명아주잎으로 부채질해 말려주고 있다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 두리번대면서도
누군가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
장석남
한덩어리의 밥을 찬물에 꺼서 마시고는 어느 절애서 보내는 저녁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처마 끝의 별도 생계를 잇는 일로 나온 듯 거룩해지고 뒤란 언덕에 보라빛 싸리꽃들 핀 까닭의 하나쯤은 알 듯도 해요
종소리 그치면 흰 발자국을 내며 개울가로 나가 손 씻고 낯 씻고 내가 저지른 죄를 펼치고 가슴 아픈 일들을 펼치고 분노를 펼치고 또 사람을 펼쳐요 하여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의 다른 하나를 알아내곤 해요
아버지를 기억함
장석남
깊은 밤중에 작은 물소리와 만나
아버지에게로 가네
하얀 돛배 떠다니고
꽃 떠다니고
깊은 돌 속에는 아버지가 그리워하던 그의 아버지
윗골 오르는 길마다 굶주림처럼 달빛 무너져
묵은 밭들과 대[竹]와 집을 적시네
온 생에 고운 것으로 아프던 꽃
길 처음에서 길 끝까지 열 손가락이 다 저린
눈물 가득한 꽃
손자 젖니 나고 말 배워 할아버지 이름 알 때
어디선가 수천수만의 꽃잎들이 떠와
설움을 덮고 맴돌았네
깊은 밤 작은 물소리에
아버지 이름 꽃피어나
아버지 그늘 아래 아무도 몰래
한반도가 쑤욱 들어가 눕는 것 보이네
아주 조그만 평화를 위하여
장석남
어느 대합실에서였던지 나는 당신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당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문득 내 손으로 감싸 쥐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그러한 생각에 당신이 그리워져
가슴아래께가 먹먹해집니다.
이 아름다운 빛이 갑자기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먹먹한 띠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환한 빛입니다.
종일을 이 빛의 띠가 내 가슴을 두르고 있겠군요.
정말로 아픔이랄까, 환함이랄까, 설렘의 뒤끝이랄까,
딱히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느낌이
아주 구체적으로 가슴속 살에 느껴져
저는 가끔 손으로 그 언저리를
만져보기도 합니다.
내 삶을 내내 묶는 한 아름다운 띠가 되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아코디언
장석남
두루 가슴에다 무끈히 둘러메고
조이며 피어내며 노래하니
그만 해도 좋을 노래만을 연주해야 할 악기인데
그게 어쩌다가 우리 집에까지 와 있는 사연은 대강 이러하였으니
일가를 방문한 아침나절이었다
봉숭아가 한창이었다
마당가론 파밭이 일품逸品이었다
곧 칠십(七十)인 노장은
파(罷)한 지 얼마 안 된 새 아코디언을 얼른 꺼내 넘기고는
파밭 속으로 들어갔다
곧 칠십인 노장의 부인은 부엌간에서 못 본 척하였는데도
수돗물 소리가 컸다
채송화는 마당 복판 쪽으로 기어나왔다
악기나 하나 들고
장석남
악기를 한가지 새로 배워야겠어
가뿐한 것으로 배워야겠어
혼을 닮은 것으로, 어깨 위 빛 같은 무게로
배워서 나는
비양도쯤에나 가야겠어
마당에 바다를 들였더군
파도 가장 자리에 앉아 악기를 불어야지
소리 나지 않겠지
바다를 위한 거니까
마당에 들인 바다 속으로
나의 노래 가라앉고
바다에 들인 하늘이
나의 숨을 집어먹고
나는 온몸을 파랗게 펄럭여서
못 깨우친 사랑을
거기서 깨우칠 거야
악기를 하나 배워
비양도쯤에나 가야겠어
가슴에 바다를 들여야겠어
악기점 자리
장석남
눈발 속
문득 둘러보니
구시가의 악기점 터
더러 부끄러이 기웃대면
새 피가 생겨 돌고
생머리 끝에 빛이 치렁했던
그녀의 진홍색 스웨터 속 같던
유리관의 악기점
꽃도 꽃대도 다 허물어진 꽃밭
가장자리
바다가 생겨서 그만
데려가 버린
로만악기점
눈발은 미처 못 가고 남아
우리들의 목덜미를 찾아들고
들어가 보니 간이술점
침침히 앉아 취한 친구의 자꾸 쏟아지는 고개 뒤로
희미하게 웃는 소년 소녀
간재미찜을 시켜놓고
퍼런 소주병을 비틀어 따고
그날 낮의 백일장 심사를 되새겨보는데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시를 쓰고 있었다
악기점을 생각하며 시를 쓰고 있었다
어머니 나도 악기가 하고 싶어요
어머니는 이름도 모르는 악기 바람의 악기
나의 시 나의 악기 나의 저녁
나의 악기들, 첼로 전기기타 거문고 트럼펫 모두 책꽂이 위에서
먼지에 젖고 있다 한 번씩 두 번씩 안아보던 악기들
친구는 한때 숨어 지내던 연인의 방을 찾아보겠다며 비틀비틀 문을 나섰다
나는 또 새로 병마개를 비튼다
전쟁의 폐허 때도, 쿠데타가 있던 해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로만악기점
우리들은 무너진 악기들 위에 함부로미
술을 흘린다
이제는 논쟁도 싸움도 하지 않는다
어둡구나
어둡구나
더 어두운 데로 귀를 기울여
음악을 듣는다
별이 나올 것이다
뭇별이 파도칠 것이다
귀에서 별이 쏟아질 것이다
뺨과 목덜미가 빛으로 낭자할 것이다
세상에 없는 악기*가 될 것이다
* 김종삼 「배음(背音)」.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손 쥐고 가고 있었다."
안부
장석남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가 하는 물리(物理)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그 방에도 들겠는데
가꾸시는 매화분(盆)은 피었다 졌겠어요
흉내 내어 심은 마당가 홍매나무 아래 앉아 목도리를 여미기도 합니다
꽃봉오리가 날로 번져 나오니 이보다 반가운 손님도 드물겠습니다
행사(行事) 삼아 돌을 하나 옮겼습니다
돌 아래, 그늘 자리의 섭섭함을 보았고
새로 앉은 자리의 청빈한 배부름을 보아두었습니다
책상머리에서는 글자 대신
손바닥을 폅니다
뒤집어보기도 합니다
마디와 마디들이 이제 제법 고문(古文)입니다
이럴 땐 눈도 좀 감았다 떠야 합니다
이만하면 안부는 괜찮습니다 다만
오도카니 앉아 있기 일쑵니다
어느 겨울날 오후에 내 발은
장석남
그날 이름은 몰라
그건 7일이어도 되고 12일이어도 상관없지
평범한 어느 하루 늦은 잠에서 깨었지
베란다 창에서 햇빛 한 자락 다가왔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책을 뒤적이고 있었지
한데 어느덧 햇빛 한 자락이 문득
내 발가락 하나를 물더군
아프지는 않았지 나는
놀라지도 않고 바라보았지 햇빛은 계속해서
내 발을 먹었지 발목까지 먹었지
나는 우는 대신 깔깔대고 웃었어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지
내 발을 먹고 햇빛은 사라졌지
그날 저녁부터 난 기우뚱거리며 걷게 되었지
그런데 아무도 모르더군 내가 왜 기우뚱거리는지
아니 기우뚱거리는 것조차 모르더군
내 한쪽 발은 햇빛으로 바뀌었거든
황금 웃음으로 바뀐 거거든
어느 겨울날 오후의 일이었지
어느 다방의 약사(略史) - 서성임
장석남
나는 그 다방의 유래를
내 오랜 설움으로부터 엿본다
동쪽 창으론
비와 바람과 눈발이
서성이다 가고(창은 덜컹여주고)
가고, (아주 가지는 않고)
어두운 계단에
오래된 삐걱 소리들이 살고
남몰래 한 찬 입술, 불화한
입맞춤의 순간들이 고스란히 사는
그 다방의 내력을 나는 감히
내 청색(靑色)
역사라고 여기면서
1층 전파사 바깥 스피커에
잠시 들렀다 가는 음악 목록처럼
서성이다 간다
어느 해 낙산사 새벽종 치는 일을 권해 받았으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함
장석남
종소리가 온다 어느 절에서 오는지 모른다 나는 슬며시 방문을 밀고 나와 앉는다 좀 더 맑게 온다 이제 몇 번째인가? 나는 하던 일도 없어지고 해야 할 일도 없어진 채 그저 좀 앉아 있기로 한다 맛 좋고 영양 많은 횟감용 생굴 장수가 지나가는 그 위에 또 한 번 종소리 덩- 하고 울려온다
어느 해 봄 불타기 전 낙산사 뒷방에 얼마쯤 머물자고 청했을 때 스님 한 분, 밥값으로 종두 일을 권했으나 그만 못 하고 말았는데 이제 와 후회한다
꽃 같은 손을 만들어 종을 밀어 때리면
뜰에선 목단꽃도 피었을 테지
목단꽃 겹겹처럼 곱디고운 뉘우침도 많았을 테지
후회는 기도를 낳고 나는
죽으면 동해에 움터오는 먼동이나 되어
어느, 밤 지새운 기도객의 맑은 눈자위에 불그스레 서려서 그를 보는 가슴을 아프게 할 거야
그를 보는 가슴을 꽃 쥐듯 아프게 할 거야
어둠이 귀에 익어
장석남
이즘은 어둠이 귀에 익어
십리 안팎은 되는 듯 먼 데까지
귀는 나갔다 오고 나갔다 온다
이주하는 들쥐 일가를 데려오더니
구절초 시들키는 개울물을 가져온다
오늘은 이승을 긋는 별의 비명도 벌었다
아버지 제(祭)가 지나고 나서는
들어본 지 오래된 기침소리 한 지게
지고 온다
시린 연못물에 별은 참되고 참되다
어떤 가을날
장석남
1
소금 장수도 지나갔다
사과 장수도 지나갔다
햇사과라고 했다
가을 대낮,
신발 끈을 고쳐 매듯 뜰에
햇볕들 서서 일부는
앉아서 있다
벌레 먹은 모과 몇개
내 손길의 상부(上部)에 모여 있다
처음 보는 사랑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무 한 그루를 옮겼다
조금 기울어진 것 같아 다시 가
똑바로 세우고 뿌리 쪽을 밟는다
다시 보니 서 있는 것은
지상의 가장 단순한 죽음
꼿꼿한,
헌데 오, 죽음을 옮기다니
갑자기 겨울로 옮겨 심은 가을
죽음의 상부(上部)에서 처음 보는 사랑이
처음 보는 죽음을 내려다보고 있다
2
손을 씻어서 손을 감씨처럼 맑게 씻어서
조그만 길목 하나 가지고 싶다
담쟁이넝쿨 빨갛게 물든
자꾸만 담쟁이넝쿨 같은 한 여인이
모퉁이를 돌아들어 가는 길목 하나
감씨처럼 손 씻어서
지녀야겠다
어스름
장석남
내 기억되는 모든 어스름들을 불러다,
겨울 철길 밑을 지나가는 사람들
귓바퀴에 모이는 어스름들도 다 불러다가
노름빚으로도 갚고
소주값으로도 물고
레코드 가게에도 좀 쓰고
그러고 싶었는데
아주 가끔씩만 세월의 물밑에서 반짝이던
사랑의 금모래빛이
거기에 섞여나갈까
아무것도 못 하고
또 한 어스름을 열 손가락에 반지로 끼워주고 있네
세월의 물밑
금모래빛 혹은 너의 살(肉)
어지러운 발자취 - 해변에서
장석남
이제 저 어지러운 발자취들을 거두자
거기에 가는 시선을 거두고
물가에 서 있던 마음도 거두자
나를 버린 날들 저 어지러운 발자취들을 거두어
멀리 바람의 길목에 이르자 처음부터
바람이 내 길이었으니
내 심장이 뛰는 것 또한 바람의 한
사소한 일이었으니
어찌하여 민들레 노란 꽃은 이리 많은가?
장석남
막대기로 연못 물을 때렸습니다
축대 돌을 때렸습니다
웃자란 엉겅퀴를 때렸습니다
말벌 집을 때렸습니다
사랑을 때리듯이 때렸습니다
헌 신발도 신은 채로 때렸습니다
밥솥도 밥그릇도 때렸습니다
어둠이 오면 어둠도 때릴 것이고
새벽도 소쩍새도 때릴 겁니다
하루를 다 때렸습니다
긴 하루 지나고 노을 물들면* 오늘도
아무 지나는 이 없는 이 외진 산길을
늦봄인 양 걸어내려가며
길에, 하늘에, 민들레 노란 꽃을 총총히 피워두면
이쁘다 이쁘다 하면서 올라오는 이 있겠지
그 말이 누군가를 막 때리는 말인 줄은 까맣게 모를 테지
여전히 나는 민들레 노란 꽃을 남기면서 내려가고 있을 거야
민들레 노란 꽃을 여럿 때렸습니다
* 전인권 노래에서.
얼굴을 닫고
장석남
언 땅이 녹아
엉망진창의 봄날 난데없이
개개비가 운다 여기는 마폰데
먼 곳까지 왔다
귀를 따고 들어오는 개개비
울음에 질척이는 밥벌이 길
후레자식처럼
보도블록 틈서리에
무슨 풋것들이 삐죽삐죽 올라온다
자세히 보니 화농 같다
내가 그들에게 들켰다
자동차 수리점에서 개개비 울음을 들은 죄
그게 죄다
보도블록 틈서리 속 실눈빛아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은
눈이 아주 곱다
난 얼굴을 닫고
흐르는 구름에게 얼굴을 다 준다
엉망의 봄날 마포 밥벌이 길
따귀 맞은 검은 구름의 표정으로 얼굴을 닫고
염소처럼 다시 길을 간다
얼룩에 대하여
장석남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천수천안(千手天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룩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얼음의 일
장석남
조선 무쇠 솥을 길들여 난로 위에 얹고
물을 부어 끓이네
물이 끓으면
물이 끓으면
밤은 덩달아 깊고
되돌아 갈 수 없이 깊어지면
저편 하늘은 비어
또 동구 밖으로 나설 일 생길거야
묵은 가위를 닦고
걸레를 빠네
엉겅퀴의 풍경
장석남
돌멩이가 생겨나고 돌멩이가 생겨나면
울음보도 생겨나고 울음보의 입술 같은 그 옆의
엉겅퀴꽃도 피어나서
말귀를 알아듣는 돌멩이는 언제든
조용하고 조용하고
팔다리도 없이 사는
메아리가 되어서
절벽을 밀고
가는 할아버지를 밀고
가는 할머니를 밀고
가는 할머니를 밀고
가는 손수레 바퀴
아래서
다시
돌멩이가
생겨나고
엉겅퀴가
피어나고
여름 산
장석남
둥글게 흰 풀잎의 둥금
둥금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 산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 산 메아리 속으로
먼 훗날 살 집을
걸린다
둥글게 흰 풀잎의 둥금
둥금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
여름 숲
장석남
저만치 여름 숲은 무모한 키로서 반성도 없이 섰다
반성이라고는 없는 녹음(綠陰)뿐이다
저만치 여름 숲은 성(城)보다도 높이, 살림보다도 높이 섰다
비바람이 휘몰아쳐 오는 날이면 아무 대책 없이 짓눌리어 도망치다가,
휘갈기는 몽둥이에 등뼈를 두들겨 맞듯이 휘어졌다가 겨우,
겨우 펴고 일어난다
그토록 맞아도
그대로 일어나 있다
진물이 흐르는 햇빛과 뼈를 익히는 더위 속에서도 서 있다
그대로 거느릴 것 다 거느리고 날 죽이시오 하듯이
삶 전체로 커버한다 조금의 반성도 죄악이라는 듯이
묵묵하다
그건, 도전 이전(以前)이다
그래도 그 위에 울음이 예쁜 새를 허락한다
휘몰아치는 그 격랑 위의 작은 가지에도 새는 앉아서 운다
떠오르며 가라앉으며 아슬아슬이 앉아
여름의 노래를 부른다
새는
졸아드는 고요 속에서도 여름 숲을 운다
성(城)보다도 높이, 살림보다도 높이
여름을 운다
여름의 끝
장석남
여름의 끝으로 물소리가 수척해진다
초록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내려간다
나리꽃과 다알리아를 어깨에 꽂고 다녀간
구름도 이제 어느 집 내전(內殿)의 자개장에서나 보리라
노예와도 같이
땀을 쏟아가며, 진땀을 닦아가며
타고난 손금을 파내던 일을 이젠 좀 쉬리라, 여울목
여울물 소리가 수척해진다
여정(旅程)
장석남
장미가 진다
바람 속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이 저녁 외로움이 더 달지 않도록
어느 길모퉁이의 어떠한 표정에도 조심한다
우리는 늘 어디가 아팠던가
그것은 어디에 접안할 수 있었던가
모랫배들이 해안에 닿아 모래를 부리고 있다
바람이 불어 바람 속을 걸어
우리가 바람이 부는 곳마다 갈 수 있다면
장미가 지고
모래 언덕이
생을 무너뜨려도
해가 지는 곳으로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나 했던가
장미가 졌고
비바람이 몰려와 장마가 시작된다
여행의 메모
장석남
이 여행은 순전히
나의 발자국을 보려는 것
걷는 길에 따라 달라지는
그 길이
끌림의 길이
흐릿한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어떤 멜로디
내 걸음이 더 낮아지기 전에
걸어서, 들려오는 소리를
울음이 들어보려는 것
모래와 진흙, 아스팔트, 자갈과 바위
낙엽의 길
거기에서의 어느 하모니
나의 걸음이 다 사그라지기 전에
또렷이 보아야만 하는 공부
저물녘의 긴 그림자 같은 경전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끝없는 소멸을
보려는 것
이번의 간단한
나의 여행은,
연꽃 심을 때
장석남
물에 노래를 심다니요
그것도 지금 노래가 아니라 훗날
하지夏至 때의 그 노래를 심다니요
매일 아비를 잃는, 그믐마다 어미를 잃는
울음 아닌 노래를 심다니요
물에서 피는 꽃이라니요
꽃에서 나는 노래라니요
쌀농사가 아닌 노래 농사라니요
매년 풍년의
노래 농사라니요
연못
장석남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바위와
바위와
구름과 구름과
바위와
손 씻고
낯 씻고
앉아 있었다
바람에
씻은 불처럼
앉아 있었다
연못은 혼자
꽃처럼 피었다 지네
연못을 파서
장석남
내 마음의 노동은 연못을 파는 것
나는 길가에 앉아서도 지나가는 예쁜 여자의 품에 연못을 파고
빵집 파리 크라상 '파리 크라상' 하는 발음의 생기에도
연못을 판다
지난날은 모두 거짓말의 날들
연못은 온몸의 영특한 빛으로 지난 시간을 비춘다
나는 신문지 위에도 신문지 위의 독재자 위에도
백만 마리의 되새 떼 위에도
연못을 판다 조그만 눈길들
물방울처럼 모여
하늘의 구름 하늘의 못인 별
몸에 들인다
버스 정류장에도 지하철 정거장에도
병원을 빠져나가는 가엾은 목숨에도
나는 연못을 파고 나는 그 연못을
풍금과도 같이 연주한다
나의 연못은 지금 만국공원에도 있고
진부령에도 있고 유동 생맥주집에도 있고
동숭동 거리에도 있고 신포동 대성 불고기집에도 있다 나는
새로 단 간판 밑으로 들어가는
聖骨들 어깨에도 연못을 파고
잎 진 모과나무 나뭇가지 사이에도
연못을 판다 나는 그 연못이 끊지 못하는
긴 여운을 듣는다
나의 연못은 그러나
그렁그렁하기만 할 뿐
언제나 그렇기만 할 뿐
연못 허리를 밤낮 건너가는 것은
몇 개의 영롱한 빛일 뿐 아무 자국도 남기지 않는
나의 시는 세월 속에
그렁그렁하게 연못을 팔 뿐
2
연못을 파서
나를 연못에 다 주었네
연못 주위로
정원이 와서 놀다간 돌아가고
돌아간 자리마다
낙과(落果)들이 즐비했네
연못을 파서
지나가는 낮달의 발자국을 만들어줄 때
내 등허리를 파내려 오는 허구렁들을
나는 삼킬 수밖에 없네
처마에 매달아 놓은, 연못 물을 종일
퍼내고 있는 풍경(風警)소리
생(生)을 거기에 다 바치고 있네
연못을 파서 물을 퍼내는 것인 생(生)인가?
어둡자, 찾아드는 반짝임들 늘고 연못은
시골 여인숙처럼 환한 상흔들을 안고 잠드네
밤새 연못의 관자놀이를 흔드는 풍경의 바람 바가지
연못을 파서 나를 연못에 주네
정원이 와서 나를 들여다보네
연못이 있던 자리
장석남
이 자리는 본래 연못이었어
다 메워버렸군
버들 몇 그루만 서서
없어진 물위를 들여다보고 있네
물위에 빛나던 波紋들 모아
품 안으로 조심스레 가둔 채
어머니,
연잎 같은 발자국
장석남
처음 듣는 가락으로 바람들은 와서
처마의 풍경소리는 뜰을 넘쳐 일부가
뼛속으로도 스민다
헝클어진 뼈들도
우두둑우두둑 가지런해지고자 한다
저 허공의 말씀 가락들을 따라나서서
우리는 새벽에만 뜨는 푸른 별처럼
어느 너럭바위 위에라도 오목하게 앉아 보자
앉아 보자
사람들도,
어디든 지나다가 이 겨울 길가에 선
뭇 나뭇가지들의 그림자라도 있다면
그 뼈아픔 속에라도 들어가 또한 앙상하게 서 있어 보자
서서 그 나무의 어떤 청담이라도 들어보자
그러한 여러 가락 속에 앉아서 또는 서서 우리는
가슴에서 돌고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가슴에 돌고 있는 것이 혹 지나온 시간의
돌부리를 차고 온 아픔들은 아닌가
처음 듣는 가락으로 바람들은 와서
처마의 풍경소리는 허공을 내려와
단설의 첫길을 또박또박 걸어갔구나
저 연잎 같은 발자국
발자국
열쇠
장석남
잃어버린 열쇠를 끝내 찾지 못하고는
치매의 아름다움 속을 순례한다
열쇠 구멍에 입김을 불어 넣는다
열쇠 구멍 속에 장미꽃 가지를 넣어 돌린다
(꽃은 손안에 그득히 쥐고는!)
남들은 저녁이 온다고 하겠으나
나는 바람의 그윽한 방문이라고 한다든가
늑대 한 무리를 몰고서는 늘상 교묘한 악한의 집 앞을
지나갈 수도 있다
잃어버린 열쇠는 제 임무에서 놓여나 건달이 되었으리라
그를 발견한 자는 자신에게는 전혀 필요치 않은
그 귀골의 자태를
시인을 대하듯 갸웃거리며 지나치리라
습득한 자도 순간 복잡해지는 감정 아래
쉽게 쓰레기통에 넣어버릴 수는 없으리라
나는 여전히
열쇠 구멍 앞에서
그 잠금쇠가 삭기를 기다린다
우리 가계가 언제나 그래 왔듯이
기다림이 삭는 줄도 모르고 기다린다
이미 털린 줄도 모르고
옛 노트에서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옛 친구들
장석남
근 십 년이나 못 만난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래 그것은
나이도 나이이지만 새것이 되어 서 있는 가을 나무 아래 오래 앉아 있게 만든다
간혹 물든 잎들이 떨어지는 각도를 손바닥을 펴서 받아든다
만난지 십 년이 넘은 친구를 만나서 나는 이 낙엽의 각도를
십 년간 키워온 나의 사상이라고 말해주련다
나의 사상, 나뭇잎이 떨어지는 각도를 알아차렸다는 것은 위대하다
지난봄에도 몇 개의 묘목들을 사다가 수돗물을 뿌리면서 계단 아래 흙에 묻었었다
나의 사상,
계단을 오르내리며
오르고 내리는 것의 섭리를 생각한다
국제 정세와 남북경협을 생각하기도 한다 위대한 진리인 미국을 생각하고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끽 소리 나지 않게 우아하게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목숨을 그래도 끝까지 부지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찍 소리 나지 않게 나를 단속하고 간혹은 딴청을 부려야 한다는 기교까지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또 한 친구는 영업을 하려 든다
물이 중요하다고, 요는 정수기를 들이라는 친구가 있고
낡은 차를 바꾸라는 친구가 있다
신문에서 두어 번 보았노라고 대뜸 술을 사라고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느냐고 정치인 취급을 하는 친구가 있다
어떤 친구는 과거를 험담한다
나의 정직은 과거에도 있지 않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다
나의 정직은 모든 시간 속에 長江萬里와도 같이 유유하다
유유한 시간 속의 정직을 나뭇잎이 떨어지는 각도는
아름답게 수식한다 나는 저 수식이 좋구나
나는 이 가을 나무 아래 더 앉아 있다가
더 오래 앉아 있다가 불이 켜지는 서울을 내려다보며
더, 더 앉아 있다가
이 나뭇잎이 수북이 한 인간을 다 덮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뭇잎이 어깨를 친다는 사실에도 놀란다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점점 새롭게, 새롭게 서고 있다
저 정직이 오랜 우정이라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겠다
귀는 얼고
오동(梧桐)꽃
장석남
다른 때는 아니고,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고 한참만에 고개를 들면 거기에 오동꽃이 피었다
살아온 날들이 아무런 기억에도 없다고, 어떡하면 좋은가...... 그런 평화로움으로 고개를 들면 보라 보라 보라
오동(梧桐)꽃은 피었다 오오
무엇을 펼쳐서 이 꽃들을 받을 것인가
오래된, 오래되었다는 고백
장석남
그에게 남은 말은 없고
서서히,
선반의 백자 항아리에 먼지가 앉듯이
말을 꺼내게 될 것인데
약간의 분홍빛이 섞인 억양으로
솟은 어깨에 펼쳐진 빛무리와
머릿결의 갑작스런 쏟아짐에 머물다가
종내 그에게 남는 말은 하나도 없고
나의 입술은 풀잎처럼 마르고
날고기처럼 피 흘리리
오래된 정원
장석남
나는 오래된 정원 하나를 가지고 있지
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은 밤낮없이 빛으로 낭자했어
더 이상은 아물지도 않았지
시간을 발밑에 묻고 있는 꽃나무와 이마 환하고 그림자 긴 바윗돌의 인사를 보며
나는 그곳으로 들어서곤 했지 무성한
빗방울 지나갈 땐 커다란 손바닥이 정원의
어느 곳에서부턴가 자라나와 정원 위에
펼치던 것 나는 내
가슴에 숨어서 보곤 했지 왜 그랬을까
새들이 날아가면 공중엔 길이 났어
새보다 내겐 공중의 길이 더 선명했어
어디에 닿을지
별은 받침대도 없이 뜨곤 했지
내가 저 별을 보기까지
수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나는
떡갈나무의 번역으로도 읽고
강아지풀의 번역으로도 읽었지
물방울이 맺힌 걸 보면
물방울 속에서 많은 얼굴들이 보였어
빛들은 물방울들을 안고 흩어지곤 했지 그러면
몸이 아프고 아픔은 침묵이 그립고
내 오래 된 정원은 침묵에 싸여
고스란히 다른 세상으로 갔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삶이 상처라고
길을 나서는 모든 아픔과 아픔의 추억과
저 녹슨 풍향계만이 알 뿐이지
오막살이 집 한 채
장석남
나의 가슴이 요 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지만 저렇게 멀리 있는, 저녁빛 받는 연(蓮)잎이라든가 어둠에 박혀오는 별이라든가 하는 건 떨게 할 수 있으니 내려가는 물소리를 뿥잡고서 같이 집이나 한 채 짓자고 앉아 있는 밤입니다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 할지 사원이라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야 할지 여전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나의 가슴이 이렇게 떨리지만 떨게 할 수 있는 것은 멀고 멀군요 이 떨림이 멈추기 전에 그 속에 집을 한 채 앉히는 일이 내 평생의 일인 줄 누가 알까요
오솔길을 염려함
장석남
나는 늘 큰길이 낯설므로
오솔길을 택하여 가나
어머니는, 내가 가는 길을 염려하실 테지
풀이 무성한 길, 패랭이가 피고 가을이라
나뭇잎이 버스럭대고 독한 뱀의 꼬리도 보이는
맵디매운 뙤약볕 속으로 지워져 가는 길
어느 모퉁이에서
땀을 닦으며 나는 아마 나에게
이렇게 질문해볼 거야
나는 어찌하여 이, 뵈지도 않는 길을 택하여 가는가?
어머니의 기도를 버리고 또
세상의 불빛도 아늑하게
누군가 내 속에서 이렇게 답하겠지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이 길이, 내 발 앞으로, 가슴속으로,
눈으로 와 데려가고 있다고
가을 아침의 자욱한 첫 안개와
바짓단에 젖어 오르는 이슬들도
오래전부터 아는 듯 걸어갈 테지
어머니의 염려나 무거워하면서 여전히 걸어갈 테지
안개 속으로 난 아득한 오솔길을
옥수수밭의 살림
장석남
옥수수밭가에 와 살고부터
나는 지금 옥수수밭가에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옥수수밭의 수런거림과 두근거리는 살림을 살피고부터
나도 저 옥수수밭의 살림이구나 생각했다
폭풍우가 검은 스크럼으로 덮치는 여름밤
조용히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그리고
사랑이 없던 때도 생각했다
이 옥수수밭을 떠나 살고부터
이 옥수수밭을 생각할 것이다
그때는 옥수수밭 사이로 반딧불이들도 날을 것이다
허밍처럼 눈시울 속을 날을 것이다
와운산방(臥雲山房)
장석남
그 집은 아침이 지천이요
서산 아래 어둠이 지천
솔바람이 지천이다
먼지와 검불이, 돌멩이와 그림자가 지천이다
길이며 마당가론 이른 봄이 수레째 밀렸고
하늘론 빛나며 오가는 것들이 문패를 빛낸다
나는 큰 부자가 되길 원했으므로
그 부잣집에 홀로 산다
쓰고도 쓰고도
남고 남아 밀려 내리는 고요엔
어깨마저 시리다
외딴집
장석남
겨울 이른 아침
맑은 공기 속에
싸락눈 쏟아지기 시작하자
동그마한 흙 마당에
나보다도 더 작은
하나님들이
여기저기에 들떠
왔다갔다 하시네
살구나무들이
뿌리를 가지런히 하는 소리
싸락눈 제일 많이 쌓이는
그 그늘
모퉁이에서 들리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痛症)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 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요를 편다
장석남
요는 깔고 몸을 뉘는 물건
사랑을 나누는 물건
어느 날 죽음을 맞는 물건
도가(道家)풍으로
요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거니
매미 우는 삼복 한여름에도
요를 펴고 누워
하늘을 부른다
몸은 요를 부르는 물건
사랑은 요를 부르는 물건
죽음은 요를 부르는 물건
꽃을 펴듯 요를 편다
우리 집에 내려오는 양은 쟁반 하나
장석남
생(生)은 때로 먼 길을 원한다
마른 저수지처럼 외로운 그것은 낡고 서툰 다큐멘터리
나는 우리 집에 내려오는 누렇고 때 묻은 양은 쟁반 속으로 떠난다
(잘잘거리며 필름 도는 소리)
묵은 소나무 가지가 휘어졌고
그 위에 날마다 가슴 쓸어내리는 소리 찰랑대는
칠 벗겨진 휘영청한 달 아래로
나는 가는 것이다
적당한 시간에서 등걸 위에 쉴 때는
멀리 산등성 너머로 바다가 있을까
행복이 있을까 아낙네가 광주리를 이고 가는 뒤를
싫지만 그렇지만 나는 꼭
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 쟁반 속을
그 바닷가까지 오막살이 지나서
양은 쟁반 속을 걸어서 가는 것이다
왜 그렇게 가난했던가
기럭아
나는 따라가기 싫었지만 이렇게
여기까지 와서 손등을 펼치고 열 손톱 속에
나란히 날아가는 까만 기러기들을 본다
(다음 필름을 갈아 끼우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그 틈에 쟁반 같은 달 속으로
재난처럼 파란 별이 뜬다
우산들
장석남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기억 속에서는 자꾸만
해당화가 피어났다
살얼음 편광 속으로
빨간 우산들이 지나갔다
멀리로부터
불어오는 바람들
그 중의 제일 큰 것은
구름을 그림자째 끌고 가기도 했다
적요는
사랑 끝에 매달린 고드름
우산들은
가벼운 음계들을 맞으며
계단을 내려온다
계단 아래는
평안한 곳
누군가 그랬다
그곳은 평안한 곳
빙점 아래
울음의 순서(順序) - 어느 겨울 여행에서
장석남
-어떤 커다란 열락도 없었다. 널빤지의 나뭇결 같은 것에서나 조그만 웃음을 발견할 뿐이었다. 방 유리창에 눈 맞아 휘어진 대나무 가지가 조금 흔들리며 긁어대는 소리마저 어떤 기별로 삼고 싶은 심장이었다.
오랜만에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 보니
꽝꽝한 소나무 숲이 너 혼자 오느냐 묻고
나는 눈썹을 조금 떨고 지나쳐 산모퉁이에 이르렀다
저만치 귀신과 함께 쉰 살이 서 있다
아, 나는 글씨체 하나 바뀐 것 없이
누구에게도 꽃대 하나 제대로 뽑아 던진 바 없이
웃음의 절반을 이렇게 내놓는구나
조금씩 걸음을 빨리하여 산등성이를 넘어 나는
그대로 기러기 떼가 되고 싶다
해마다 내 어린 잠결의 뒷밭에
커다란 달밤을 떠메고 내려앉아 쉬고 가던 기러기떼
어떤 지킬 言約이 꼭 있어서
분명히 그걸 가지고 가는 길이 아니라면
그러한 찬 밤하늘을 수놓는 울음의 순서가 있었을까?
나는 그 외롭고 추운 순서를 감지하며
내 마음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가고 싶다
커다란 붉은색 버스가 한 대 큰 행사를 끝내고 돌아오는가 보다
실내등 다 끄고 마을 운동장에 선다
초상이라도 났던가?
잔치집이라도 있었던가?
몇 사람 잔뜩 웅크리고 내려 인사 시늉들을 하고 헤어져 간다
나는 웅덩이를 펄쩍 뛰어 건넌다
유곽 앞에 서 있던 오동나무처럼
장석남
알고 보니 그곳은 유곽이었다
대낮이었으므로 적적했다
서둘러 빠져나오다 뒤돌아보고
어쩌다 나는 무엇하러 이곳까지 왔던가
다시 뒤돌아보고
일어선 돌부리에 걸려 휘철했다
잠시 얼굴도 닫고
근처 구멍가게 평상 모퉁이에 앉았다
나는 어느 후미진 生을 빠져나온 듯
바카스라도 한 병 마실까?
발치에 다가오는 그림자 한 자락
평상 뒤에 오동나무 한 주 서 있다
누군가 맡긴 수많은 심장들을 펄럭이며 서서
내 심장을 보여달란다
벌써 무릎까지 올라온 심장 그림자 한 자락
낯설고 눈부신 노래를 눈으로 불러
심장을 주고 일어서니
내내 내 일생(一生)은 그
유곽 앞에 서 있던 오동나무처럼
가련히 아무데서고 서 있는 거였다.
의미심장(意味深長)
장석남
돌 위에도 물을 부으면
그대로 의미심장
내게 온 소용돌이들이
코스모스로 피어 흔들리는
병후(病後) 문밖에
말뚝이 서넛 와 있다
오늘 밤 내 머리맡에는
티눈 같은 웃음들이 모일 것 같다
길 잃은 웃음들이, 막차 놓친 웃음들이
갈데없이 모일 것 같다
찔레 넝쿨도 바람 불면
그대로 의미심장
이름 부르는 일
장석남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린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온다
그 사람 이름을 불러 본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 보는 이름만으로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이명(耳鳴)을 따라서
장석남
무엇하러 나는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시퍼렇게 번져오는 새벽 유리창을 쳐다보다 나는
내 귀에 살고 있는 이명(耳鳴)을 따라나서기로 한다
깨어 있는 새벽에만 오는 손님이기에
멀리서 온 손님이기에 나는
조급하다 그것은 미숙한 사랑이다
조급한 손길, 떠는 음성, 그리고 조급한 구애 직전의
아슬아슬한 망설임
얼음보다 더 차가운 연못 물 같은 절제
늦추위에, 일찍 꽃망울 맺은 나무의 가지들은
몰래 받은 기침을 한 말(斗)이나 쏟아낸 듯 새파랗다
이명(耳鳴)은 조용히 조용히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고 뜰을 나선다
그리고 저 조급의 풍경을 지나서 나를 끌고는
팔당으로도 가는 듯 또는 새벽 순댓국집으로 가는 듯
그러나 나는 좀 근사한 도둑이라도 되어서
물욕을 버리고 싶지 않고
성욕을 버리고 싶지 않고
정치를 버리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너를 버리고 싶지 않다
너,
너,
너,
너,
너, 너,
육신을 끌고 육신 밖으로 나가는 길을
나는 배운 바 없어
육신을 끌고 육신 안을 떠돌 뿐
복숭아가 복숭아를 끌고 복숭아를 떠돌 뿐
마당이 마당을 끌고 마당을 헤맬 뿐
밀물이 밀물을 이끌고 썰물을 헤맬 뿐
새벽 별빛은 점점 옅어진다
조금씩 핏기가 가시는 마흔
이명(耳鳴)은 나를 데려다가 오래 깨인
창백을 보여주려는 듯
하지만 나는 눈감을 수 없다
차가운 꽃나무도 어떤 耳鳴을 따라온 거겠지
사랑의 조급을 따라온 거겠지
그러나 지금은
망설임의 시절!
얼음보다 더 차가운 연못 물 같은 절제!
육신을 끌고 육신 밖으로 나가는 길을
배운 바 없어 나는
배운 바가 없어 이명(耳鳴) 끝으로 다시
돌아오고
돌아온다
이슬비 속으로
장석남
이슬비 속에 들어가
이슬비가 많은 곳으로 걷는다
머리카락이 다 젖을 즈음
수술등처럼 적막을 해부하는
불빛 하나를 지나친다
그 위에서 비를 미는
바람, 몸이 다 노래였던 바람은
제 몸을 이슬비로 열어
내 어깨를 감는다
노래가 젖으면 무엇이 되는가
울음의 뒤처럼 어깨가 꺼억꺼억 한다
이슬비에 안겨 걷다 보면
누군가 자꾸만 부른다
멈추고 삼키는 톱밥, 손가락, 꼬쟁이,
납물 같은
이슬비가 되어가며
이슬비가 많은 곳으로 걷는다
익살꾼 소나무
장석남
오후나 되어야 햇빛들 받을 수 있는 서편 산 아래 길가의 작은 소나무 한 그루는 참 익살스럽기도 하지. 가지 사이에 날려온 비닐을 달고는 비닐 속에다 대견한 듯 제 저녁의 모습 일부를 비춰보고 있으니. 발가락 열 개를 활짝 벌리고 발가락 사이에 바람을 쏘이는 표정으로
인연
장석남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오 그래,
네 젖은 눈 속 저 멀리
언덕도 넘어서
달빛들이
조심조심 하관(下棺)하듯 손아귀를 풀어
내려놓은
그 길가에서
오 그래,
거기에서
파꽃이 피듯
파꽃이 피듯
일모(日暮)
장석남
저기 뒹구는 것은 돌멩이
저것은 자기 그늘을 다독이는 오동나무
저것은 어딘가를 올라가는 계단
저것은 곧 밤이 되면 보이지 않을 새털구름
그리고 저것은 근심보다 더 낮은 데로 떨어지는 태양
화평(和平)한 가운데
어디선가 새소리 짧게 들리다 만다
오늘 저녁은 새의 일생(一生)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 시장기
입맞춤
장석남
큰 소나무 아래
빛도 비스듬한 자리
입맞춤, 서두를 수 없는
늦출 수도 없는
불의 말
새가 푸드득 날아가기 전에
입술은 닿아야 했지만 장미가 아주 피기 전
그만 놓쳐버린
얼음의 말
소나무에 그 새가 깃들어 있으리라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었으니
새는 그만 날아간 것이다
입춘
장석남
아버지의 사진틀을 갈았다
수염을 깎은 듯 미소도 조금 바뀌었다
이발소를 데리고 가던 아버지의 손가락 마디가 두엇 없던 손을 생각한다
언 몸을 금세 녹여주던 이발소의 연탄난로도 생각한다
연통에 쓱쓱 비누 거품을 데우던 이발사의 거품 붓도 생각한다
전쟁통에 열 번을 살아나와 열한 번을
총알 속으로 되몰려갔다던 무심한 대화를 생각한다
아무도 몰래 어금니를 꽉 물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미 이십년이 가까워 얼굴 하관이 마구 빠져나오는 낡은 사진틀을 새로 갈아
식탁 의자에 기대놓고 아버지의 관상을 본다
박복한 이마를, 우뚝한 콧날을,
어투를, 기침 소리를 형제들은 골고루 나누어 받았다
길지 않은 인중만은 아무도 물려받지 않으려 했으리․―허나 그도 알 수는 없다
날은 언제 풀리려나?
강추위다
돌절구에 물이 얼어 쩍하니 금이 갔다
할 수 없이 이번 봄엔 절구에 흙을 담아 꽃을 심으리
아버지가 가꾸던 꽃이 있었던가?
어느 핸가 샘가에 심었던 사철나무만 생각난다
늙도록 꽃도 없이 지루한 나무다
날은 언제나 풀리려나
기왓장도 반달도 새파랗게 얼어붙는다
입춘 부근
장석남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 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잎
장석남
어여쁘고 어여쁘도다
숨도 몇 번은 크게 내쉬어 눌러서야
가지런해지던 지난
봄 이야기야 하여서 무엇 하리
무엇 해! 너와 처음 손잡던 그 햇빛을
그래도 한 번은 더! 새로 보는 추억처럼
어여쁘고 어뼈뻤어라
새 잎 날 때
저 떡갈나무, 느티들
어여쁨이 초록이 되어 시간의 시퍼런 여울일 때
그 그늘의 청담(淸淡)을 잊을 수는 없어라
그렇지, 그렇지 하던
입술과 치열(齒列)을 잊을 수는 없어라
그렇지, 그렇지 하던
입술과 치열(齒列)들
하긴 연두를 이긴 말들이라니!
헌데 지금 마당가에 앉아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하며 쓸리는
나뭇잎들
내 두 귀마저 떨어뜨려서는
마당에 주고 나서
한참 만에야 트이는 명암(明暗)
"그렇지
그렇지 않지."
자전거 주차장에서
장석남
새로 생긴 아파트 입구
자전거들이 순하게
나란히 서 있다
으레 부서진 것이
가운데
기우뚱 묶여 있다
(알고 보면 다 묶여 있다)
아이들이 떨어뜨리고 간 말소리들이
흩어져서
청색이다
웬일인지
어제보다는 몇 대 줄었다
봄은 간 모양이다
팥배나무에 꽃은 없어지고
이파리 사이로 하늘이
나풀댄다
팥배나무에 딸린 고요가
밤새 하늘을 꿰매고 있으나
소용없는 걸 보면
이 봄에
어른이 되는 아이가 있나 보다
자화상(自畵像)
장석남
무쇠 같은 꿈을 단념시킬 수는 없어서
구멍난 속옷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여행 가방처럼
종자로 쓸 녹두 자루 하나밖에 아무것도 없는 뒤주처럼
그믐 달빛만 잠깐 가슴에 걸렸다 빠져나가는 동그란 문고리처럼
나는 공허한 장식을 안팎으로 빛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외롭다는 것은 알았어도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산을 보곤 하는 것이 모두 외롭다는 것은 알았어도
저 빈 잔디밭을 굴러가는 비닐 봉지같이
비닐 봉지를 밀고 가는 바람같이 외로운 줄은 알았어도
알았어도 다시 외로운,
새로 모종한 들깨처럼 풀 없이 흔들리는
외로운 삶
은하수야 새털구름아 어디만큼 가느냐
배거번드(vagabond)처럼 함께 흐르고 싶다
만돌린처럼 외로운 삶
고드름처럼 외로운 삶
저녁 강(江)작약
장석남
빈 방에서 속눈썹 떨어진 걸 하나 줍다
또 그 언저리에선 일회용 콘텍트렌즈 마른 걸 줍다
이 눈썹과 눈으로는 무엇을 보았을까
이 눈썹과 눈이 주인을 생각한다
눈물 위에 이럭 띄워서 무엇을 보았을까
작약 싹 올라온다
작약꽃이 피어 세상을 보다가
떨어질 것을 생각한다
작약 겹겹 꽃잎이 바라본 그 속에
이 눈의 주인과 내가
눈 꿈쩍꿈쩍하며 나눈 말들을
숨겨 두리라
장마
장석남
벽에서 얼룩 하나 걸어 나온신다
벽에서 얼룩 한 벌 걸어 나오신다
벽에서 얼룩 한 분 걸어 나오신다
펄럭이는 얼굴과 쏟아진 소매
속에 모아 쥔 손,
속에 예쁘디예쁜, 웃음으로 싸맨 울음 한 웅큼
얼룩 한 채 걸어 나오신다
작년, 재작년의
모란꽃 속을 황홀하게 걷던 영광
너무 컸던지
다 젖은 얼굴 펄럭이며 오신다
신발 머리에 이고 오신다*
신발 머리에 이고 오신다
* 조주(趙州)선사
장마 끝물
장석남
산 넘어온 비가
산 넘어간다
비단옷으로 와서 무명옷으로 간다
들 건너온 비가들 건너간다 하품으로 와서진저리로 간다
물 건너온 비가 물결 건너간다 뛰어온 비가 배를 깔고 간다
아주아주 오랜만에 국밥집에 마주 앉은
가난한 연인의 뚝배기가 식듯이
이슬비가 되어서
비가 간다
장미밭
장석남
말들이 마구 달려갔다
말발굽
큰 장미 송이들
숨이 찼나 보다
심장인 듯한 검붉은 덩어리들
새끼 말도 있었나 작은 송이들도 종종종
--장미밭에 안장을 얹어라
올라앉아 박차를 가하네
누군가를 사랑한 자리
--눈에 장미들이 일렁이는군요
--야생의 말 떼가 지나갔군요
--사랑 말고는 그럴 게 없어요
재갈을 물리러 오는 흐릿한 비구름 수만 근(斤)에서
장석남
나도 언젠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강 곁을 걷는 날들 많아
향기에 굳은살 배기는 들꽃들 많아
꽃의 향기여
얼마나 많은 살 벗어야
물 위를 걷는가
길은 이미 물에 젖어 물 건너에 있는데
산그늘에 눌려도 나는
바람에 떠밀리기만 할 뿐
그뿐
저녁 산보
장석남
비로소 밀물이다
모래들은
한 번 꾹 감았다 뜬 눈으로
밀물 허리를 안는다
물빛 속이나 엿보며 잔잔히
건너오는 바람들은
해당화 숲 깊은 곳으로만 들어가 긁히고
나는 내가 만든 말이나
스스로 엿들으며 가나
그게 무슨 내용인지
어느덧 눈(目)은
새파란 하늘을 깨뜨린
첫 별이다
저 구멍으로
내가 보고 싶은 얼굴들이나 줄줄이
찢고 나왔으면,
너무 빨리 들어차는
밀물이다
저녁의 우울
장석남
여의도 분식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강변을 걸었다
강은 내게 오래된 저녁과 속이 터진 어둠을 보여주며
세상을 내려갔다
청둥오리도 몇 마리 산문처럼 물 위에 떴다
날곤 날곤 했다 그러면 강은 끼루루룩 울었다
내가 너댓 개의 발걸음으로 강을 걷는 것은
보고 싶은 자가 내가 닿을 수 없는 멀리에 있는
사사로운 까닭이지만, 새가 나는데 강이 우는 것은
울며 갑작스레 내 발치에서 철썩이는 것은 이 저녁을
어찌하겠다는 뜻일까
저녁 해가 지다 말고
장석남
저녁 해가 지다 말고
내 얼굴에 왔다
낮불을 켜놓은
내 얼굴
얼굴을 버리고 놀다 보면
저녁해를 비끼는
새도 될 수 있으련만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 - 섬진강에서
장석남
어미 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준다
막 이삭 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
아, 저 혓자국!
나는 그곳의 낮아지는 저녁해에
마음을 내어 말린다
저만치 바람에
들菊 그늘이 시큰대고
무릎이 시큰대고
적산가옥
청춘의 주소 위를 할퀴며
흙탕물의 구름이 지나간다
아, 마음을 핥는 문밖 마음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장석남
보푸라기 이는 숨을 쉬고 있어 오늘은 교외에 나갔다가 한 송이만 남은 장미꽃을 보고 왔어 아무도 보지 않은 자국 선명했어 숨결에 그 꽃이 자꾸 걸리데 보푸라기가 자꾸만 일어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가슴 뜀일까 아스라한 맥박들이 자꾸 목에 걸리데어머니, "얘야, 네 사랑이 힘에 겨웁구나" "예 어머니. 자루가 너무 큰걸요"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저문 날 24
장석남
모과나무야 너도 저무는구나
나도 저문다
비로소 실현되는 침묵 하나
그러므로
잃어버린 유리창을 녹여서
저 달빛을 들여야 하는 거야
그래야 그걸 타지
저물녘 - 모과의 일
장석남
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고요의 눈망울 속에 묻어둔
보석의 살들 이마 눈 코
깨물던 어깨,
점이 번진 젖, 따뜻한 꽃까지 다 어루어서
잠시 골라 앉은 바윗돌아 좀 무겁느냐?
그렇게 청매빛으로다가 저문다
결국 모과는 상해버렸다
절벽
장석남
바다엘 가네
꽃 진 꽃밭
당긴 소매 끝으로 지우고
일어설 만하네
바다엘 가네
흰 돌 삶아 먹고 사는 이 그려*
서른 번도 세고
아흔 번도 세는
파도 소리
그래서는
눈에 머금던 꽃 빛들
다 풀어주리
바다에
바다엘 가네
하늘 끝 청명하네
* '돌을 삶아 먹는 이'는 당나라 위응물(韋應物)의 것이다.
절터
장석남
절터엔 오롯이
탑 한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빈 절터에서 밤이 올 때까지
오래 앉아 있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주춧돌만 남은 절터는
사랑이 지나간
가슴과도 같습니다
정자(亭子)
장석남
1
내게 정자가 하나 있다 무엇보다
여편네와 싸워서 이긴 거지만
전위를 말하는 촌스런 시들로부터
현학의 무지한 시들로부터
정치를 외면한 가여운 은일(隱逸)로부터 싸워 이긴
빛나는 승리다
모든 승리의 보답은 수려하다
승리의 보답은 고적하다
고적은 영하 삼십 도를 견디고 고적은
섭씨 삼십 도를 견딘다
오, 육십 도가 넘는 진폭 아래 정자는 의연한다
짜개진 달이 뜬다
바람을 검문하다 밀리는 시퍼런 버드나무 아래
바늘방석처럼 퍼지는 물소리
촌스런 시들보다도 더
속이 뻔한 시와
끓어오르기보다는, 치솟기보다는
폭포와 같은 추락보다는
계산된 사랑과 농월과 음풍을
다시 읊조리기 위하여
조그만 가책마저도 지참한 나의 소풍은
오늘도 정자로 향한다
2
이리 온,
이리 온,
나는 원래 정치를 해야 했지만
구름을 보고 있다
이리 온,
오대산 월정사 길 걸어나오면서 왜 미합중국을 생각했을까 저만큼, 저 전나무 숲만큼 깊고 아름답고 컴컴하고 두렵고 부들부들 떨리고 눈감아버리고 단 한 번도 도약으로 넘어버리고 싶은 나라, 진리의 나라 그래서 직관(直觀)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생각을 나는 왜 하필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월정사 숲길을 걸어 나오면서 곱씹어야 했을까 그곳이 무슨 요세미티라도 되었단 말인가?
세상의 지고지선이 정치에 있다는 깨달음은
가장 뒤늦게 들어맞는 서글픔
정치가 파멸을 낳고 또 정치를 낳듯
이미 맛본 서글픔 뒤에 다시 오는 서글픔
사람의 일생은 대략 몇 개의 댓돌을 가졌는가?
그 위에 지붕을 올림에 부족함이 없도록
이리 온,
이리 온,
작약꽃, 뒤
흰 바위들도 이리로 온,
3
연못 속에 쳐박혀 구긴 정자에 들락거리며
구름은, 집달리처럼 구름은
다 불어 터진 서글픔들을 조금씩 꺼내다가
노을도 만들고, 잠기면
흩어진 별로도 만들고, 잠기면
지나가는 불빛으로도 만들고, 잠기면
모두 건져
네 귀퉁이 주춧돌만 풀에 덮어놓을 것이다
초인이 오기까지 돌을은 저희끼리 정다울 것이다
젖은 달이 떴어
장석남
젖은 달이 떴어
충치 많은 마음은
철길 근처에서
녹슬고
임신한 나방들 나의
욕망의 잎사귀 밑에서 날았어
몇 개월째 잠으로 하역되는 달빛
이곳 저곳 태업하는 잠
젖은 달이 떴다가 지는 동안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어
아름다운 파탄이었어
철길 근처에서
녹슨 마음 다시 녹슬고 사랑의
동공(瞳孔) 속엔
이를 잡아 배를 채우는 거지들이
가득했어
젖은 달이 떴어
조율사
장석남
나는 조율사
꽃 잃은 꽃받침
부재의 조율사
북서풍의 음률이
나의 피
정든 긴장
비애의 허벅지와
꽃을 적시는
나는 조율사
11월의 나뭇가지
오랜
부재를 감고 푸는
노을 곁
낮과 밤의
조율사
종일 손가락을 깨물다
장석남
앓다 나와
물끄러미 장미꽃을 바라본다
눈 감은 사이 문득
낙타가 걸어온다
눈 뜨면
우리나라의 모든 국경이
모래바람으로 날아드는
철책 위 봄날
넘어가는
피투성이 낙타떼
비단길을 바라보며
종일 손가락을 깨물었다
주춧돌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며 - 이상에게
장석남
마당을 메우느라 마사토를 스무 번 차나 실어다 붓고 그 위에 사모 정자를 놓기 위하여 네 귀퉁이에 수평자를 놓아가며 시멘을 이겨 넣어가며 주춧돌을 놓았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쩐 일로 그중 하나가 기울어가더니 아주 땅 아래로 겸손해져 버렸다.
삽을 들고 파내기 시작하여 한나절을 흙을 걷어내었다. 지렛대를 사용하여 들추어도 으끗도 하지 않으니 어인 일인가. 궁리 끝에 주춧돌을 조금 들추어 버텨 놓고는 그사이에 물을 부어서 돌 아래로 흙을 흘려 넣고 땀을 쏟아 넣는 새 공법으로 조금씩 올리니 가라앉는 섬을 길어 올리듯 참 세상에서는 드문 일을 해보는지라 잠시 손 놓고 앉아 쉬며 바라보니 참 진귀한 일이로다. 참 진귀한 구경이로다. 한쪽으로 옮겨 심은 매화나 대나무나 모두 이 구식 정자 주인의 꼬락서니를 바라보며 웃고 웃고 하더니 돌로 비스듬히 올라선 채 웃고 있다. 나는 문득 어느 오랜 시간 아래의 주춧돌이 된 양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어둠이 밀려오는 속으로 잠기어간다. 돌은 진솔한 자서전처럼 멀찍이서 빠딱하니 의젓하다.
중년
장석남
봉숭아는 분홍을 한 필
제 발등 둘레에 펼치었는데
마당은 지글거리며 끓는데
하산(下山)한 우리는 된 그늘을 두어 필씩 펼쳐놓고서
먹던 물 대접 뿌려서 마당귀 돌멩이들 웃겨놓고서
민둥산을 이루었네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진흙별에서
장석남
요즘은
바람 불면 뼈가
살 속으서 한쪽으로 눕는다
꽃잎이 검은 무늬를 쓰고
내 눈에서 떨어져
발등을 깨친다
나는 안 보이는 나라를 편애하는 것이 틀림없어
이 진흙별에서 별빛까지는 얼마만큼 멀까
창에 넘치는 달
장석남
감나무가 있는 밑자리를 파서
마당귀의 수북한 감잎들을 묻었습니다.
어느덧 다 가 버린 가을을 묻듯
밤이 내려 망연히 창변에 앉아 있는데 와 --
대단한 달이 창이 넘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달을 본 지 오래입니다.
언제 저만하지 않았던가요.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습니다.
저 달의 한 자지를 터서
당신의 손을 붙잡고 들어서고 싶었습니다.
두근두근 떠오르는 달입니다.
창(窓)을 내면 적(敵)이 나타난다
장석남
국유(國有) 하천(河川) 부지 위의
나의 방
반지하의 눅눅한 방에서 옮겨갈
쾌적한 정신의 거리
수리를 한다고 칸막이를 뜯어내고 남향으로 창을 내고자 인부를 불러 벽을 자르고 벽을 자루에 담으며 왜 여기 창이 없었을까 생각한다 그때 한 육십으로 진입할 듯한 여자가 나타났다
"왜 이쪽으로 창을 내느냐, 내 집 마당에서 보이지 않느냐? 얼토당토 않은 소리가 나타나 아직 문짝도 달지 않은 벽구멍을 나무란다. "다시 막아요 존말 할 때" 평생 한군데에만 투표했을 듯싶은 그 무서움, 구청에 전화를 걸고 규정을 묻고 당신 집과는 아무런 관계도 관련도 없다 하여도 막무가내다 나의 남향이 쾌적한 정신이 내려다보이는 모양이다
먼지가 가라앉고 나자
바닥에 햇빛이 낭자하고
햇빛이 내 발등을 핥는다
여자가 가고 동시에 적이 나타났다
왜 나의 적은 이토록 매번 작은가?
붙잡을 수도 없이 작고 작은가?
동시에 또 하나의 적이 나타난다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싸움은 거룩한 것인가?
작고 작은 싸움, 좁쌀만 한 싸움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나의 정직은 서글프다
좁쌀만 한 정직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개는 짖고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원하던
확철대오(確哲大悟)는 까무라친다
싸우고 싶지 않아도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
깨우침은 오고 만다
창을 내면 적이 나타난다
창 앞에서 싸움은 꽃처럼 핀다
꽃처럼 꽃처럼
꽃처럼
처서
장석남
마른빨래는 방안으로 던지고
덜 마른빨래들을 처마 아래 건다
나뭇잎이 쩡쩡 소리 내며 물든다
전기 검침원의 오토바이 소리 오솔길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나는 바지춤이 풀린 줄도 모르고 그를 배웅했다
담장 밖에 아무렇게나 몸 버린 구절초는 구절초
빈 몸의 옥수숫대 끝에서 새가 울어
건너 산이 건너온다
이해가 가지 않던 일들 몇 내놓기 좋다
덜 마른빨래를 한 번 더 손에 쥐어본다
첫 겨울 - 추억에게
장석남
내가 네 가슴속에 묻어둔 항아리에서
때로 무슨 소리가 들리나
들어봐라
감나무잎이 한순간 저녁빛에 환히 붉을 때 첫
눈이 오다...... 오다
목이 잠기는 것이 너무 많아져
가만히 그치는 때
무슨 눈보다 낮은 소리가
들리나 귀를 막아 봐라
시간은 청미래덩굴처럼
수십의 손바닥으로
네 입김들이 눈 맞는 것을 받아 들고
서 있다
내 청색 손바닥이 무슨 소리 내니
나는 청동의 풍경을 긁고 있는
시간의 부드러운 가지 끝을 쥐고 있다
첫눈을 기다림
장석남
녹이 슨 수레바퀴가 담장에 기대어 있네
낮게 드리운 하늘과 숲과는 아침부터 손톱 발톱 깎고
흐린 날을 골라 오는 더딘 객을 기다리는데
어스름에 불 켜면 불빛이나 들여다보러 오려는지
벗어놓은 신발짝이나 적시러 오려는지
허기진 소년배들처럼 몰려오려는지
하긴 정갈히 차리고 오는 새 풍경을
손발톱이나 좀 깎고 설레어 기다리니
그 참을성 많이 길러서 억울할 것 하나 없네
첫서리
장석남
옛날은 말씀을 첫서리로도 내려놓으신다
간밤엔 청량 하늘에 찬란한 수를 놨던 목소리들을
오랜 창호지 빛으로다 고루고루 말아 사뿐히 펼쳐놓으셨다
언젯적 말씀이신지
아직 철없이 푸르던 것들은 다 수굿이 고개 숙였다
그러나 이대로 命이 끊어지는 것!
단호한 글자들이
구르는 벚나무 색동 잎사귀에도 곱디곱다
이제 모두 숨들을 삼키고 새 귀를 갖는다
첫서리 온 아침엔 모두 새파란 귀를 갖는다
초생달에서
장석남
어스름 막 지난 때
노란 불을 하나 켜서 맞는
마지막 저물어가는 하늘빛 속으로
오너라
아픈 사람의 이마를 짚는 손길처럼
떡쌀에 머무는 흰빛처럼*
오늘 하루
마음에 가장 오래 머문 일,
시들어 떨어지는 분꽃들
눈여겨 바라봐야 했던 일
말갛게 삭히러
허공을 파낸 이 풀씨만한 석굴(石窟)로
분꽃 지듯,
오너라
분꽃 지듯.
* 이성복의 시<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중 '명절 떡쌀에 햇살이 부서질 때" 에서.
초승달이 딸린 방
장석남
벗은, 발 오랫동안
벗엇던 맨발을 말갛게 씻고
넋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내 몸 어딘가에 초승달이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나는 지나가는 노래를 불러
그걸 타고 초승달에 가보곤 하였습니다
혈육인 듯 뒷산에 떡갈나무 숲길도 가꾸어
하늘로 올려보내곤 하였습니다
노래도 방도 한 칸 들이다
푸르르 깨어났습니다
한쪽을 터놓은 커다란 원무(圓舞)가
내 어깨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초저녁 ‘밥별’이라는 별
장석남
저녁때 밥을 먹습니다
저녁때 된장에 마른 멸치를 찍어 먹습니다
자꾸 목이 막혀 찬물도 몇 모금씩 마십니다
좀 더 어둡자 남쪽 하늘에 별이 떴습니다
그 별 오랫동안 쳐다보며 씹는 저녁밥
속으로 나는 그 별을 ‘밥별’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어느 틈엔가 그 별이 무척 신 얼굴로 진저리치며 빛납니다
눈에 어려 떨어질 듯
어느덧 그 별 내 들숨을 타고 들어가
마음에 떴습니다
누군가가 떠서 초저녁 마음을 내려다봅니다
삶은 드렁칡, 삶은 드렁칡, 마음 엉키고
눈에 드렁칡처럼 얽히는 별의 빛이여
추억에서의 헤매임
장석남
1
추억이 아픈 모양이다
손톱 속으로 환한 구름이 보이고
길모퉁이를 지키는 별이
낭하 긴 가슴을 눈여겨 쳐다본다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눈발들에게 방을 내줄
커다란 나뭇잎
추억의 음악이 떨리는 모먕이다
답십리쪽에서 구겨진 도화지처럼 연기가 올라간다
황무지 다섯 평
나의 마음이
눈빛이 딱딱한 마른 물고기를 구워 소풍가고 싶어 한다
2
옛집 앞 옥수수밭에 바람이 덮치나
가슴이 실타래처럼 얽힌다
얽힌 실타래 속 물고기 한 마리
입 속에 환한 불이 켜져 있다
어머니는 해마다 밭둑에 옥수수를 심어
우리집 울음을 대신 울게 했지 아침이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옥수숫대가 있었어
3
새벽에 가을 나무를 보면
애정이 꽃피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 다 바람 불어간 후
근심의 밑바닥을 바라보면
비로소 애정이 꽃피는,
가지들이 너무 무거었으므로 나는 너그럽지 못했다
나는 오늘 밤 마른 물고기를 타고
진흙별에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 두 눈 친친 동여맨 나의 사랑이 있으므로
춤꾼 이야기
장석남
놀잇배 하나 맞추어 깊은 밤중에 썰물을 타고 덕적(德積)*까지 내려가면서 나는 자월(紫月)**앞에 이르러 스스로 검문받고 싶다.
홀딱 벗고 그 붉은 달 앞에서. 내 속에 도는 원무(圓舞) 잘 돌고 있나.
출항증(出港證) 없이 몰래 인천항 빠져 나가 자월 앞에 이르러 나는 내 원무를 터서 구애(求愛)하고 싶다. 낭패까지를 겸하여 내 구애는 눈이 깊어 멀리멀리 내가 이 세상에서는 못 본 것들 볼 수 있을지 몰라. 가령 빈 돌절구에 쏟아지는 달빛 보고 눈물짓는 바닷가 아낙네들의 슬픔 같은 것, 미간에 미지근히 남은 사랑 같은 것. 그런 것과 저승까지가 이어지는 모양을 썰물에 드러나는 뻘밭을 보듯 볼 줄도 몰라.
붉은 달에서 줄사다리를 타고 덕적 해변에 내려오는 저 춤꾼들.
* 인천 앞바다의 섬.
** 인천 앞바다의 섬.
측은(惻隱)을 대하고
장석남
피누더기가 되어 늘어진
어미 개의 뱃구레를
어쩌다 나는 봄 야윈 볕 아래
살펴보게 되었던 것인데
울컥 가슴이 미어진 것은
나의 어디에 무슨 측은(惻隱)이 있던 것인가
쉬지 않고 허공을 지지는 변압기의 소리 같은 것이
정수리를 타고 내려 등골 지나 발바닥 밑으로 내려간다
닫힌 청각을 지져대는
이 어미의 굴곡진 숨소리 곁에
소리 내어 울 수 없는 이
측은을 대하고 나는 당황한다
쉽사리 어머니를 떠올릴 수 없고
모성 같은 것 떠올릴 수 없고
좀더 손쉽게 순리를, 희생을 떠올릴 수 없고
이 측은이 나의 적은 아닌가
적은 아닌가
거창한 장애는 아닌가
이 측은을 대하고 나는
빛보다도 더 빨리 어머니를 다녀왔으며
순리를 다녀왔으며 그보다 더 간단히
치받던 울음까지를 다녀왔던 것인데
이 간단(簡單)이 나의 적은 아닌가
죄는 아닌가
어느새 어미 개는 새끼들에게 잡혀 뜯어 먹히고 있다
나는 근심의 몇 길 아래까지 뻗친 그 눈빛에
아스라이 밧줄을 타고 내려간다
위태롭게 위태롭게
더 위태롭게.
치졸당기(稚拙堂記)
장석남
이젠 잠자리에 들어서도 반성이랄 것도 없어 그냥 배가 부르면 배가 부른 채로 불은 배가 부른 잠을 그대로 받아 안는다.
올해도 몇 그루의 나무들을 사다가 차례도 질서도 없이 계단 앞에 묻어 본다. 사과나무, 배나무, 불두화, 석류, 매화, 넝쿨장미---- 모두가 살아난다면 이 좁은 마당은 얼마나 치졸해질까? 그러나 그 치졸을 나는 즐기련다.
속물은 할 수 없다. 잠 속에서도 이것저것을 묻어둔 모양이다. 어떤 때는 여자가 보이고 또 어떤 때는 돈다발이 보이기도 한다. 안팎 빨갱이가 있다더니 안팎 속물들과 별 수 없이 어울리고, 웃고, 거래한다, 뭐 좀 서로 속여보자는 속셈이다. 이름자라도 팔고 돈냥이라도 좀 얻어먹어 보자는 속셈이다. 참, 차례도 질서도 없이 피어나는 잠 속의 종이꽃들.
이젠 잠이 깨어서도 막막함이 없다. 막막하기 전에 신문지를 찾고 막막하기 전에 마당에 심은 치졸들을 들여다보고 막막하기 전에 시를 읽는다. 시를 읽는다. 막막하기 전에 강의를 듣고 막막하기 전에 뭐 또 가르칠 만한 게 있다고 학생들 앞에까지 나선다. 막막하기 전에 술을 마신다. 막막하기 전에 취하고, 막막하기 전에 잠을 부른다. 배가 불러도 반성이랄 것도 없다. 부른 배가 부른 잠을 그대로 받아 안는다.
멀리서 호오이 호오이 밤새가 운다 저것이 비명이란 것도 모르고 나는 잠을 자고 있었구나.
카메라를 팔고
장석남
놀던 카메라를 팔고
눈이 멀었네
내 푸른 피의 사치였던 물건
첫 아이의 똥 누는 표정을, 그 동생의 부러진 앞니의 웃음을,
그 에미의 아직 밝던 고단을 찍던
설렘의 여닫이문
셔터 소리는 아직 귀에 남아 진주가 되네
이제 가까운 사물은 흐리고 흐리니
가까운 일은 모두 물기에 젖었네
먼 데를 자주 보네
카메라를 건네고 나오니 내
눈은 이민자가 되었네
국적이 여럿인 몸으로
밤바람 속을 가네
쾌청
장석남
이 꽃은 신발을 닮았다
이 꽃은 발바닥을 닮았다
이 꽃은 입술을 닮았다
이 꽃은 사랑에 쓰린 가슴을 닮았다
모여서 어디를 가는가
만장일치
하늘로 갑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딱따기를 치면서
하늘로 갑니다
저 별은 눈물을 닮았다
저 별은 선한 이들의 감옥을 닮았다
저 별은 혁명을 닮았다
보이는 하늘 모두 텅 빈 가슴을 닮는다 그,
너비와 높이를 오무려서 어디로 가는가
거기로 갑니다
만장일치
사람 사는 땅으로 갑니다
무섭도록 서러운 노래도 좀 부르면서
멋도 좀 알려 주려
반짝이며 갑니다
느티나무가 겨우내 애써 모은
창(窓)을 한꺼번에 일제히 내달고서
서 있네 그 창문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세어 볼 참인,
헛갈리면 처음부터
다시 세어 볼 참인
하루
푸른, 한
숨과
잎
탑(塔)
장석남?
바람 불면 나는 춤꾼
어깨에서 초승달을 쳐올리면
댓잎 소리가 쏟아지고
발끝으로 다시 받아쳐 올리면
그믐달이 되어 정수리 너머로 숨었다
오므린 손끝에서 붉은 해당화가
술래도 없는데 바삐 떨어져 내렸다
바람이 자면 나는 돌멩이에 앉아
가르마를 타며
춤을 꿈꾼다
탱자 향기
장석남
두 다리 오그리고
손은 모아 가슴에 붙이고
눈 감아 귀뚜라미의 개금불사(改金佛事) 듣는다
'이제 탄식은 없어
벌써 늦가을이야'
탱자 향기
탱자의 향기
오솔길로
가면 거기
나오는 나라
깨금발로 나오는 나라
파도 소리
장석남
아파트에 살아도
성벽 뒤에 살아도
밤이 거울 속처럼 깊어지면
귀에는 파도 소리가 져
동해 홍련암 마루 밑장에서처럼
들려오는 것이었다
내가 태어난 건 그러니까 파도소리
마침내
책장 속이나 발치의 노을에서도
파도 소리가 들리었으니
나의 앞날이 또한
파도 소리 속으로 나 있는 것이리
내 신발 속 파도 소리
내 단추 구멍 속 파도 소리
모든 풍문도 음악도 다 이긴
나의 파도 소리
파란 돛
장석남
바다는
어디서부터 가져온 파도를 해변에, 하나의 사소한 소멸로써
부려놓는 것일까
누군가의 내부를 향한 응시를
이 세계의 경계에 부려놓는 것일까
바다는 질문만으로 살아 오르고
함성을 감춘 질문인 채 그대로 내려앉는다
우리는 천상 돛을 하나 가져야겠기에
쉬지 않고 사랑을 하여
파란 돛을 얻는다
팔당을 지나며
장석남
애인의 발가락을 입에 넣어
쪽쪽쪽쪽 빨아먹는 소리라니까?
부처나 예수나 그런 분들도
손가락 깨물며 감탄할 어여쁨이라니까?
팔당 여울 오른쪽 겨드랑에 넣으며 만나는,
여울에 큰 집 올려 짓는 오전 아오
열 시 햇빛들은 애인의 명치 아래
쑥뜸 자국 아래 동그란 배를
쪽쪽쪽쪽 빨아먹는 소리라니까?
물빛은 비로소 팔랑이고 간사하고 뒤척임 빠르다
빛의 흐름을 압도하며 쏟아져온다
빛을 압도하며 오는
사상(思想)은 저래야 한다니까?
팥죽
장석남
노모에게 가느라 장에서 팥죽을 한 그릇 사 포장을 부탁하니
사발에 되어서는 비닐에 묶어주네 (점잖지는 않은 형세야)
전해오는 뜨끈한 온도가 손바닥을 깨우네
후후 불어 식히던 그 뜨거움
동그란 입술
동그란 눈
동그란 숟가락
동그란 숨결
적절한 母子의 허기
오랜만에
봄 꽃밭 앞에 앉으니
피어 있네
오늘은 어디선가 휑하니 쉬고 있을 커다란 가마솥과
동글납작한 꽃들이
함께 얼려 피어 있네
편자 신은 연애
장석남
겨울나무여 내 발등을 한번 찧어볼래? 달빛아
내 광대뼈를 한번 후려쳐볼래? 흐르다 멈춰버린 얼음장아 내 손톱을 한번 뽑아볼래?
사랑아 낮에 켜진 가로등을 찾아내볼래? 기어코?
저녁이 되자 길가의 소나무들이 어두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조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래 어쨌다는 거야? 하고 묻노라면 재빨리 이번엔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해주었다던 여인 이야기를 금방 돋는 별빛들도 좀 섞어 말한다 여전히 어두운 이야기지만 말한다--- 잊을 만하면 으르렁 으르렁대는 한밤의 보일러 소리
평심
장석남
낙양성에서 가을바람을 보고
집으로 보낼 편지를 쓰려 하니 생각이 첩첩하다.
그런데도 총총히 쓰느라, 할 말을 못다한 듯하여,
가는 사람이 떠나려 하는데 다시 뜯어본다.
폭설
장석남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찍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직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업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
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꽃집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 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루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오, 사랑이란
저러한 대적(大寂)의 이력서다.
폭포 -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장석남
1
폭포는 아무 데나 있지 않다
폭포는 아무 데도 있지 않다
폭포는 고매한 절벽을 선호한 때문에
폭포는 그토록 급락急落을 사랑한 때문에
아무 데나 있지 않다
웃으며 웃으며
수수만년을 웃으며 망설임이라곤 없다
폭포는 한번 또 웃고
회고라고는 없다
오늘도 어제도 그 전전날도
회고라고는 없다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다음도
여전히 회고라고는 없이 회고이다 또 회고이고
혁명이고 회고이다 하여
승천이고 회고이다
2
혁명이 없으니 추락을 낳았지
또렷한 정신이 없으니 급박한 낙하를 낳았지
사랑이지 사랑이지
마지막
사랑을 낳았지
3
나는 폭포를 사랑하고
폭포보다는
폭포를 사랑한 이유를 더 사랑하고
그보다는 다시
폭포를, 폭포를 더더욱 사랑하고
절벽을 사랑하고
절벽 위의 절벽을 사랑하고
사랑의 낙차를
더 더 사랑하고
4
폭포에
폭포에
무지개를 보았니?
보았니?
오, 무지개를 단
한없은 추락을 보았니?
폭포는 아무 데나 있지 않다.
* 김수영의 시 <폭포>에서
푸른 이마
장석남
이마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바람이 지나가고 머리카락이 눈썹을 건드립니다.
언제 머리를 잘랐더라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 머리카락이 막 눈썹을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그만큼 지나갔음을 압니다.
그리고 소년처럼 즐거움을 느낍니다.
어떤 때는 입으로 훅 불어서 머리카락을 날리는 불량스런 모양도 흉내냅니다.
그렇게 얼마쯤은 이마를 흔들면서 그 느낌을 즐기기도 하다가
그 느낌까지 시들해지면 머리를 자르러 가게 됩니다.
자른 머리가 자라나 눈썹을 건드리는 그 시간의 흐름만큼 자연스레,
그리고 그 머리카락이 눈썹을 간지럽히는 불편한 즐거움만큼 당신은 있는 듯 없는 듯합니다.
당신은 이제 그만큼 내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풍적(風笛)
장석남
1
네 눈동자 속 마른 나뭇잎
네 눈동자 속 때 절은 내
청춘의 숙박부
네 눈동자 속
느닷없는 우박떼
허공 가득 한꺼번에 두리번두리번, 토란잎들
2
날 개이면 나
햇빛을 따라나서리
부르튼 걸음걸이를 갈아끼우고 가리
추억은 마르고
영혼은 얼마나 가벼울 것인가
가슴으로 걸어본 사람은 기억하리
햇빛은 내 헐거운 손목을 붙잡고
석양까지 가리
적막이 내 걸음을 다 가지리
캄캄해오는 저녁,
지푸라기들로 마른 목을 축이던
세월들을 탄식하리
탄식 속에 박힌 모래들 손등으로 문지르리
비단 같은 탄식은 얼굴을 흐르리
내 눈은 드넓은 노래를 가득 반짝이리
3 - 경포
바닷가에 가
바닷가에 놓아둔다
소나무숲은 마음속에 있다
어둔 시간에 와 있다
가슴에서 누군가 살림을 하고
작은 시냇가를 건너가는 나무다리
지나가면, 솎아냈던 슬픔들이 삐걱삐걱
알은체를 한다
나는 바닷가가 되어 있고
소나무숲은 육신 가득 수런거린다
4 - 물치 근처
종일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랑에 관하여 하늘은
눈이 내릴 듯하고
새가 와서
발자국을 선물하고 갔습니다
마음에, 속씨가 말갛게 비치는 빨간
겨울 팥배 같은 등불을
달아놓고 싶습니다
서러움이 안 보일까 무서워
하늘은 두근두근
눈이 내릴 듯하고
5 - 홍대 앞
장미꽃이 피었네
열매도 없는 게 한량없이 붉네
나는 열망으로 가득한 桶
빈 바다의 뗏목
시퍼런 가시들을 들고
얼마나 멀리까지 가서
구걸해 온 빛깔들인가
붉은 탁발승이 담장에 누더기 누더기 피었네
6 - 한강변
몸의 길은 서풍을 따라서 흘러간다
골육상잔에 엉기어
저녁이면 늘 피멍이 가까운 하늘을 모두 덮어 나는
멀리 몸의 길 끝까지...... 나뭇잎 다 지도록
온 대지가 맑은 눈동자 속인 그곳으로
서풍에 휘어진 붉은 햇살들을 붙잡고
7
충무로 입구 얼룩진 바람이 팔짱을 꼈어
나는 그때 숨을 풀고
땅에 배를 대고 흐르기 시작했어
퇴계로에 이르고
퇴계로는 다시 불빛 아래 아래 생각에 잠겼다
사라져버렸어
깨어보니 걸어가고 있었어
온 몸뚱이가 지팡이가 되어
발등에 못 보던 별자리가 생겼군
8
어디 고요한 곳에 가 누우면
살은 고요함이 다 불러가고
뼛속으로 들어간 내 눈은
고요한 바람을 적시리
고요함에 귀를 하나 더 달아주면
가슴은 귀에 다 들어가
하염없이 낮아지고,
낮아짐에 다 잦아들어 버리고
9 - 소월로
창백한 시간들이 밀려
바람이 다 자고
나뭇잎들이 으습, 이빨 시린 표정들을 할 때
ㅡㅡ한낮인데
찬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눈이 깊은
바람은 자면서 나를 울린다
보고 있다
눈이 시다
세상엔
죽음만 눈이 부신 것이 아니라
10
그대에게 올라가는 사다리가
너무 길었구나
허공에 방을 들이고 앉았다가
진눈깨비처럼 쏟아진다
하문(下問)
장석남
1
눈 오는 날
말을 트자
눈 속
드문 드문
봄동 배추
그렇게 말을 트자
눈이 녹으면 다시
서로는
말을 높이자
그러하면 나는
살이 없으리
그러하면 나는
살이 없으리
기름진 것 먹지 말고
말을 트자
2
눈 내리는 밤
눈 내리는 밤
눈은 내리는 밤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는,
아무 답 없는
이 질문
다만
앉아 있는 것
서성이는 것
그것만이 대답인
눈 내리는 밤
눈이 내리는 밤
다만 눈이 쉬 그치지 않기만을
높은 소망처럼 기원해보는
눈 내리는 밤
물음이 내려오는 밤
서성이는 밤
한겨울 목련 나무
장석남
싸락눈이 내렸는데 목련 나무 가지에도 톡톡 부딪치며 내렸는데 목련 나무 살 속에 숨은 창백한 햇살 한 올은 물먹은 흰 솜을 둘둘 말고 서서 발등의 싸락눈 녹이는데 시간은 이 몸이 차다고 외풍이 세다고 어느 깊이로 고개를 처박고 추억을 표백해 잎사귀며 꽃들을 빚고 있는가
한결같이
장석남
등기소가 되어 있는 만국공원 아래, 韓末(한말) 르네상스풍 건물 앞에 우연찮게도 우두커니 서 있는 기회가 되어 있자니 덧니나듯 한결같이 상냥한 여인이 희망으로 그리워진다. 왜 그런가 곰곰 생각하자니 돌기둥에 비끼는 찬 겨울 오후 햇살들 그리고 또 햇살들, 한결같이 상냥한 그 계집애들, 희디흰 옥니들, 역광에 빛나는 머리카락들 가슴을 벼이고 들어오네
한 소식
장석남
마당 밖에 잠언 한 구가 나무 그림자처럼 옮겨갑니다
풀이 돋아날 겁니다
아무도 보호하지 않겠으나 풀은 웃고
제 주권을 주장하지 않고 풀은 웃고
문 열어놓고 살 겁니다
그러나 아직 눈밭이고
여자를 업은 한 남자가 두사람 무게의 깊은
발자국을 남긴 것 말고는
아무것 없습니다
풀뿌리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으니
곧 발자국에서
흙이 올라올 겁니다
무거웠던 자국에서
가장 먼저 흙이 올라올 겁니다
한진여
장석남
나는 나에게 가기를 원했으나 늘 나에게 가기 전에 먼저 등뒤로 해가 졌으며 밀물이 왔다 나는 나에게로 가는 길을 막았으나 길은 물에 밀려가고 물 속으로 잠기고 안개가 거두어갔다
때로 오랜 시간을 엮어 적막을 만들 때 저녁연기가 내 허리를 묶어서 참나무 숲속까지 데리고 갔으나 빈 그 겨울 저녁의 숲은 앙상한 바람들로 나를 윽박질러 터트려버렸다
나는 나인 그곳에 이르고 싶었으나 늘 물밑으로 난 길은 발에 닿지 않았으므로 이르지 못했다
이후 바다의 침묵은 파고 3내지 4미터의 은빛 이마가 서로 애증으로 부딪는 한진여의 포말 속에서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침묵은 늘 전위 속에만 있다는 것을
항아리 - 감포에 갔을 때
장석남
동해 바다에 바로 이웃해 접한 소주집이었다 주인은 귀가 셋으로 하나는 파도 소리가 제집으로 드나들고 있었다 우리 같은 것들은 엄두가 날 일이 아니었다 그 집 뒤안에는 장독대가 있었는데 그중에도 배가 커다란 항아리가 있어서 나는 줄창 그 마당에 앉아 소주를 바람과 함께 털어 넣으면서도 그 항아리 속이 궁금했다 그 여럿의 파도 소리 중에 어느 것이 그곳에 들어가 둥그렇게 부검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인가 그 드나들던 길이 하도나고자 처갓집 드나들 듯하는 것이어서 반질반질하게 윤이 배겨 있을 것이어서 눈에 선해도 거기에 그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의 눈빛 같은 것도 묻어 있을 것인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건 금방 녹아버릴 만큼 그곳은 서늘한 뜨거움이 미끈했었으니까 나는 파도 하나를 불러 망설이며 망설이며 내 속을 거기에 딸려 보내보아도 도대체 되돌아오는 놈이 하나 없어서 마음은 줄창 한밤중이었다 그래 자꾸만 소주잔만 털었다 그 저물 무렵 그 장독대의 빈 항아리 하나는 어느덧 내 살친구들이 되어서 내게 한시도 귀를 막지 못하게 하는 귀를 하나 더 달아주어서 내 차지한 이승의 자리 중 한 자리를 그 파도들에게 한편 내줘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끔 하였다 그 파도 소리에 배부른 항아리를 나는 내 속엣살림 한쪽에도 하나 들이고 흔들리지 않게 새끼돌로 괴어 그곳에 어지간한 씁쓸하고 들큼한 일들을 파도 소리 같은 걸루 단련해서는 넣어두었다가 그게 좀 필요할 때마다 술을 푸듯이 퍼다가 목을 적셔보아야겠다고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앞의 바다 빛깔이 꼭 거기 속살처럼 청량하고 부드럽고 부드러워서가 아니라
꼭 그래서만이 아니라
해남 들에 노을 들어 노을 본다
장석남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
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
어찌할 수 없이
서서 노을 본다
새는
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
노을은
나를 떠메러 온 노을도 아닌데
나를 떠메고 그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
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저 노을 탓이다
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문다
해남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
여러 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
모두 모여서 가지런히
잦아드는 저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슴 속까지 잡아 당겨 보는 일이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
덮어 보는 일이다
그렇게 한번 덮어 보는 것뿐이다
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
해남 들에 뜬 노을
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게로 와서
내 뒤의 그림자까지를 떠메고
잠긴다
(잠긴다는 것은 자고로 저런 것이다)
잠긴다
해도 너무 한 일
장석남
이제 겨우 배가 떠서 기어다니기
시작하는 첫애기에게
복숭아 꽃물을 들여주겠다고
덤비는 엄마가 있었으니
그건 해도 너무 한 일
아이와 실랑이를 하는 엄마에게
남편은 핀잔을 주어도
그 맘속에는 엄마와
한가지인 어떤 게 있던 터라
외면하며 바라보는 여러 가지가
다 꽃 피어나듯 잔잔한 물결 속인데
그렇기는 해도 그 예닐곱 달 된 애기에게
복숭아 꽃물을 들이겠다고 한 것은
너무하긴 너무한 일이다
해바라기
장석남
홑것차림으로
--나 놀러가?
--가득가득 놀러가?
--노래 한 소절 물고 가?
이제는 띄엄띄엄 말도 놓는 사이가 되어
청색시대(靑色時代)를 살러 오는 새털 뜬 구름 사이에
나는 또 이런 응답을 놓아본다
그럼그럼, 어서어서,
내 모든 단추를 풀어다오
내 혀는 네가 주는 노래로
저녁 강처럼 반짝일거야
서녘 바람에 해바라기가
거짓을 쏘아보던 눈과도 같이 익어가고 있네
해변 - 서른 살의 불편함
장석남
물이 아주 잔잔한 해변을 걸어가며는
실오라기 같은 파도와
야쿠르트 삼립빵 껍질도 구르지만 간혹
바다의 귀엣발이 가득한 조개 껍데기도
뒹굴어서
이제 서른 살이 되니
그런 것들을 내 살에도 지녀서 오래
사귀던 여자의 귀엣발도 지어 듣고
교보문고 앞에서 넋놓고 바라보던 미모
여자의 그것도 지어 들으며
내 침침한 心境을 넓힐 수 있다면
맑은 물이 잔잔한 내
살의 해변의 걸어가면서
물로리도 후두둑 날릴 수 있다면
내 뒤에 남는 발자국은 아예 자취도 없이 사라져도 좋을 건데
능청스럽게도 나는 지금 마음속으로
맑은 물과 해변의 고운 모래들을
비단처럼 풀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변의 묘지
장석남
내 어린 날 속엔 해변의 묘지
노간주나무가 울창했고
중국 할아버지들을 묻던 나무
햇빛이 테라스에서처럼 내려앉으면
햇빛을 파헤쳐
손등을 마저 묻던 곳
밀물과 썰물이 몸 섞으며 웅성대던
노간주나무 그늘 속
스러지는 것들이 많고
눈이 별을 행해 뚜벅뚜벅 석어들어가는
묘지 언덕
모래가 슬그머니 무너져
바다로 행보를 옮긴다
밤바람 소리가 정막을 정찰한다
해변의 자화상
장석남
그 물가에 갈 수 없으므로
그 물가를 생각한다
그 물가에 선 생각을 하고
그 물가의 풍경을 생각한다
물소리를 생각한다
그리움 따위는 분명 아니고 기운 떨어지면 찾아오는
향수 같은 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깊은, 그보다는 더 해맑은 것이
나를 데려간다
나는 천상 회고파(回顧派)지만
그곳에서는 회고파만은 아니다
어느덧 그 물소리 속 수레바퀴들이 나를 실어
석양을 앞질러 간다
갈잎과 바람을 넘어
기러기들의 순례를 넘어간다
빛의 화살 끝에 묻어 어느 별을 뚫고
죄를 뚫는다
허나 이내 나는 그 수레 위에 있지 않고
그저 그대로 그 물가에 서서
어느새 밑단이 젖은 바지를 걷고 서서
물소리를 바라본다
그 물가에 서 있는 나를 나는
생각한다
그리움도 향수도 아닌 그보다도 더
해맑은 것이 나를 안아다
그 물가에 놓는다
그 물가를 생각한다
해 질 녘
장석남
아버지는 종일 모래밭에서 와서 놀더라
아버지는 저녁까지 모래밭에
숨을 놓고 놀다
모래알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낳아두고 놀다 가더라
해당화밭이 애타는 저녁까지
소야도가 문갑도로
문갑도가 다시 굴업도로
해걸음을 넘길 때
1950년이나 1919년이나
그 이전(以前)이
물살에 떠밀려와 놀다 가더라
햇빛이 날 사랑하사
장석남
햇빛이 맑으니까 애인이 쑤신다
지난 겨울 쑤시다가 멈춘 가는
나무의 곁가지가 쑤시고
시냇물이 말갛게 쑤신다
햇빛이 맑으니까 맑음도 쑤시고
판자가, 미문하원이
교보가, 구리 이순신이 쑤신다
햇빛이 날 사랑하사
落法에 익숙한 꿈
귀에 왜가리 울음만 가둑한 하루
향기들이 좀처럼 향기로워지지 않는다
햇소금
장석남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신청한 김장용 햇소금을 받았다고,
그것도 세 포씩이나 받아
뒤꼍 처마 밑에 작년 것의 후배로 나란히 쌓아두고
돌아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쉬자는데
집 어디선가 조용한 흥얼거림이 시작되었다고.
잔잔한, 손바닥만 한 소리가
흰빛의 손수건과도 같이 자꾸만 내게 건네 오는 거야
왜인지 나는 무섭지도 않았지
누가 시키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나 나는
차돌멩이 하나를 찾아 찬물에 씻어서는
그 새 소금 포대 위에 작년 것과 같이 올려두었지
그러자 흥얼거림도 잦아드는 거였어
그것은 어떤 영혼이었던 거
먼 고대로부터 온 흰 메아리
모든 선한 것들의 배후에 깔리는 투명 발자국
나는 명년에도 그 후년에도 이장님께 신청할 테야
그 희고 끝없는 메아리
행주
장석남
개량한 시골집 부엌
알루미늄 쪽창 안에
흰 행주가 걸려 있네
손자국도 남아 걸려 있네
할머니는 집 뒤꼍에 묻혔는데
행주는 걸려 있네
사이렌 불빛에 숨죽이던 개울물 소리와
간혹 건네던 인사가 희게 걸려 있네
오늘도 어둑어둑 걸려 있네
어느 날 늦은 눈물을 머금게 되리
흰 행주 한 장 걸려 있네
고독의 시
조각, 간명한
꿈, 아름다움
가볍고 흥겨운
고독의 자서전
고독의 레슨!
호수(湖水)
장석남
단추를 한 다섯 개쯤 열면 돼요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리고
근심처럼 흐르는 안개를 젖히면 그만이에요
갈대나 물결
새나 바람
평수 많은 밤
어디서 오는지
아주 커다란 보석이죠?
익숙한 별자리가 무어에요? 가령
웃거나 울던 하늘 기슭 같은 것 말이에요
그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해요
단추를 한 다섯쯤 풀면
지나던 메아리 멈춘 듯
어디서 왔는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 호수를 찾는 일이
흰 꽃
장석남
꽃 핀 배나무 아래
나이 어린 돌들과 앉아
'너는 희구나'
'너는 희구나'
앉아
'너는 희구나'
그렇게 하고
또 희고
또 희고
정신 놓지 않고
허튼 흰빛 하나 없이
다섯 살에 깨친 글자들처럼
발등에도, 발톱 위에도 놓아보는
흰 꽃,
흰 꽃
3월이 오고
장석남
3월이 오고
저녁이 오네
열두 겹으로 사랑이 오네
물이랑이 밀고 오는 것,
물이랑이 이 강안(江岸)을 밀어서 내 앉은 자리를 밀어서
나를 제 어깨에 초록으로 앉히고는 밀어서 가는데
불이 한 점이 켜지고 또 꺼지고
목련이 정수리에서부터 피어 내려오는데
처음의 서늘한 입맞춤이 조금씩
더워지고 더워지고
3월이 오고 꽃밭이다
꽃이 와 앉고
잎이 솟고 솟고
열두 겹 사랑이 오네
조금 더 작아져서 살아갈 일을
우리는 이마에 물들이네
초록 이마로 물들이네
5월
장석남
아는가,
찬밥에 말아먹은 사랑을
치한처럼 봄이 오고
봄의 상처인 꽃과
꽃의 흉터로 남는 열매
앵두나무가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앵두꽃잎을 내밀 듯
세월의 흉터인 우리들
요즘 근황은
사랑을 물말아먹고
헛간처럼 일어서
서툰 봄볕을 받는다
11월
장석남
이제 모든 청춘은 지나갔습니다 덥고 비린 사랑놀이도 풀숲처럼 말라 주저앉았습니다 세상을 굽어보고자 한 꿈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안 것도 겨우 엊그제 저물녁, 엄지만 한 새가 담장에 앉았다 몸을 피해 가시나무 가지 사이로 총총히 숨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뒤 였습니다
세상을 저승처럼 둘러보던 새 이마와 가슴을 꽃같이 환히 밝히고서 몇줄의 시를 적고 외워보다가 부끄러워 다시 어둠 속으로 숨는 어느 저녁이 올 것입니다
숲이 비었으니 이제 머지않아 빈 자리로 첫눈이 내릴것입니다 눈이 대지를 다 덮은, 코끝이 시린 아침 나는 세상에 다시 나듯 문을 열고 나서고 싶습니다 가시넝쿨 위로 햇빛은 무덤처럼 내리쌓일 것입니다 신(神)은 그 맨몸을 흐르던 시냇가 살얼음으로도 보이시고 바위틈의 침침한 어둠으로도 보이시며 첫눈의 해석을 독려할 것입니다
살던 집도 그림자도 점점 길어집니다 첫딸을 낳은 아침처럼 잃었던 경탄을 되찾고 숲으로 이어진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득한 숲길이 되려 합니다 햇빛 아래의 가여운 첫눈이 되려고 합니다 누군가의 휘파람이 되려고 합니다 밥과 국을 뜨던 소리들도 식어서 함께 바람소리를 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