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란드에도 꽃이 핀다 1
1. 고요한 세계에의 접촉
라디오 시계의 알람이 울리면서 그녀는 눈을 떴다. 6시에서 시계는 알람을 진동시키면서, 알람에 맞추어진 라디오의 장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인가의 화산이 폭발하고 있다는 아침 뉴스가 들려왔다. 120년 만에 분출을 하기 시작한 화산은 쓰레기를 태워버릴 마그마 대신에 쓰레기 냄새가 나는 물을 쏟아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뉴스가 끝나자 짐 모리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짐 모리슨의 노래의 감촉이 서서히 현실감이 되어 오는 것을 멍하니 느끼면서, 그녀는 다리를 길게 뻗고 천천히 옷을 입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종말은 언제나 내 옆에 있기 때문에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맥주를 마신다.' 오늘 지구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기 속으로 스며 들어가 버린 듯한 희미한 비가 가느다랗게 날리고 있었다. 아파트 계단에 서서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하얀색 면 스웨터와 청바지위로 비닐 점퍼를 끼워입고 후드를 올려 머리를 덮었다.
스포츠클럽 수영장의 프런트로 다가갔을 때 단추 하나 풀어 헤쳐지지 않은 네이비 색상 제복을 단정하게 입은 데스크 걸은 노트에 연필로 무엇인가를 사가사각 써나가다 갑자기 연필심이 똑 하고 부러진 게 틀림이 없었다. 똑하고 잘려져 나가는 소리가 프런트라고 부룰 수 있는 정적에 싸여 있는 공간 구석구석을 한순간 흔들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도 그 소리는 분명하게 들려왔다. 어이가 없다는 듯 1, 2초가량 부러진 연필 끝을 내려다보고 있던 데스크걸을 곧 부러진 연필심의 잔재를 효율적인 방식으로 걷어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새로운 글쓰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2초 정도 그녀가 물끄러미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문득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데스크 걸은 눈길을 조용히 아래로 한채 그녀가 내민 회원증을 확인했다. 확인이 끝나자 흰속이 라커룸의 키를 데스크를 자로질러 조용히 그녀 앞으로 밀어주었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규칙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처럼 깔끔하게 느껴졌다. 저런 것이 바로 깔끔함이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시대의 최고의 미학 심플함은 정말 멋지다. 심플한 눈빛을 혹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녀는 몇 걸음 느릿느릿 걸어보았으나 데스크걸은 어느새 자신의 방침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른 회원이 올 때까지 시긴을 절약해서 독서라든지, 하여튼 무엇이든 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추측했다. 이것이 나의 방침, 하고 외면한 채 여자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인생이란 너무 짧아서 허비할 시간이란 없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생활 양식으로서는 편한 방식일는지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일이란 결국 연쇄성의 문제인 것이다. 생활도, 의식도 연인과의 일도, 전화조차도 하나하나는 다른 하나하나에 소속되어 있는 끝나지 않는 말 잇기 게임과 같았다. 얼굴을 마주치고 누눈가를 보는냐 마느냐의 단순하고 닫혀져 버린 차원은 아닌 것이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이미지가 세포에 새겨지고, 미소와 관심을 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후로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 되어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눈을 감아 버리고 싶어졌다. 보지 않으면 무언가 존재할 것도 없어서 공유, 그런 것도 없을 테니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서로에게 티끌 하나 남기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모든 관계를 영원히 유보시켜 놓은 채, 현실의 영역에서 순수하게 단절된 존재로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에서 불분명한 개체로서 존재한다 하더라도, 가족도 친구 하나 없어도,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이다. 하고 생각한다. 존재란 공기의 틈 사이, 병원 진찰실, 아이스크림 가게 발걸음 사이사이에 곽차 있어서 갑자기 에기치 않게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존재란 두껍고 방황을 알 수 없는 벽과 같은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피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의 연속으로 존재란 현실에 붙들어 매어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찌 되었든 이 도시를 그녀는 좋아한다. 스르르 스며들어 가 버리는 익명성의 쿠션에 기대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듯 조용히 살아 주는 거대한 고요함 안에서, 그녀의 방에 들어가 그녀의 파워를 가지고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사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소원이다.
풀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날씨에는 모두 집에 처박혀 있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지구의 비는 점차로 맹렬하게 모든 것을 부식시켜 가고 있어서 겁을 잔뜩 집어먹을 만하다.
언제나처럼 잠영으로 10미터를 나간 다음 떠올라서 배영으로 가볍게 몸을 풀었다. 풀은 캔속에 넣은 보브 체임스와 체트 아트킨스의 재즈를 꼴깍꼴깍 토해내고 있어서 음악 속에 떠서 헤엄을 치고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유형, 평영, 접영 순서로 쉬지 않고 풀을 세 바퀴 돌았다. 비록 대단한 스트로크를 자랑할 정도는 되지 못하지만 이런 정도의 체력을 그녀가 그냥 얻은 건 아니다.
그녀는 어릴 적이나 지금인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체질은 아니다. 기관지와 폐는 환절기가 되거나 공기가 조금이라도 건조해진 것을 느끼면 스스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도로 취약하고, 골격이나 근육은 염소처럼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유전적인 체질에다 느리게 먹고, 많이 먹지 않는 식습관, 성격적인 측면까지 뭐 그런 것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약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열한 살 때 피아노 콩쿠르의 자유곡이었던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연습하던 여름날, 그녀가 작은 커피잔으로 족히 반 잔 분량의 코피를 피아노 건반 위로 줄줄 쏟아낸 다음 엄마는 그녀와 언니를 스포츠 센터의 어린이 수영반에 데리고 가등록을 시켰다. 언니는 도시 대항 체육대회의 대표로까지 뽑힐 정도로 잘 해냈지만,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그저 조금씩 각 스타일의 영법을 구사할 줄 알게 된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꽤 체력을 기를 수 있었던 건, 꾸준히 수영을 한 덕분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두 개 층의 수영장과 스쿠버 풀을 지나 중간에 트레이닝센테에서 한 번 멈춰 섰을뿐, 15층 높이의 스포츠클럽 건물을 한층 한층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천장 위의 모니터 카메라는 이상하게 각도가 어긋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던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모양이었다. 스키장, 골프 클리닉, 볼링장, 테니스, 스쿼시, 에어로빅과 무용센터들을 차례로 내려가 띠링, 소리를 울리면 1층에서 엘리베이터는 문을 열었다.
여덟 개의 발이 다랑어 떼처럼 떼를 지어 나가 각각의 스타일을 만들며 흩어져 갔다. 40대의 스타일도, 어쩐지 상대를 몰아붙일 것 같은 스타일도, 자의식이 강한 스타일도 있었다. 다랑어 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를 내려서서, 가득 차 있는 고요함의 탄력을 느끼며 기다란 통로를 빠져나왔다. 후드를 올리고 점퍼 주머니의 따스한 공간에 손을 끼운 채 출입구 앞에 서자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비가 내리고 있는 휑뎅그렁한 공간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그녀 앞에 남미의 커피밭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차가 있는 곳까지 젖은 포도 위를 천천히 걸었다. 가죽 구두가 까맣게 젖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를 밀었다.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고서 어슴푸레하게 빛이 섞여든 도시의 끝을 바라보았다. 손가락뼈처럼 생긴 나무들이 달라붙어 있는 산과 하늘의 경계 위로 기상대가 삐죽 솟아 있고 희미한 서치라이트 빔이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에너지를 잃은 레이저 검처럼 보인다. 이제 봄이다. 공기도, 산도, 풀잎도 조용히 물기를 머금고 있어야 할 모습으로 소리 없이 새겨지고 있다. 믿을 수 없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자연의 재편성을 바라보면서 인간은 성실하게 되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안으로 들어가 프런트 글라스 위에 빗방울들이 비의 스크린을 만드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가방을 옆으로 내려놓고 점화 스위치를 돌렸다. 잘 분리된 스테레오로 아스투르드 질베르뜨의 <걸프롬 이파네마>가 여름 태양에 잘 태워져 엷게 변색된 여름 오후 같은 목소리로 조용히 흐른다. 훌륭하게 녹음된 스테레오다, 비 오는 날 특유의 축축한 냄새가 나는 세계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막 구운 버터 와플처럼 바삭바삭 기분이 좋다. '현실의 아파네마'와 '스탄겟츠의 이파네마'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 따위 잊어버릴 만큼 아스투르드 질베르뜨의 목소리만큼은 뭐라고 흠을 잡을 수가 없는 그런 것이니까, 오른쪽 손가락을 핸들위에서 퉁겨 리듬을 맞추며 그녀는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주차장을 자와 빌딩들이 서 있는 넓은 도로로 진입하기 직전에 신호들이 있어 차를 멈춰 세우고 아침 식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배가 고픈 것 같았다. 거리는 차가운 비를 맞으며 조용히 깨어나고 있었다. 이제 비는 3월의 비처럼 본격적으로 차고 무겁게 내리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호스로 뿌리는 가짜 비처럼 불규칙하게 프런트 글라스를 때린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치이익, 밀폐된 차 안으로 스며드는 타이어의 물을 가르는 소리는 어딘지 아득한 곳에서 들려 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프런트 글라스의 와이퍼가 심장 박동 소리를 내며 그녀를 향해 빠르게 손을 흔든다. 창밖에 묵묵히 서있는 검은 레인 코트와 검은 박쥐우산의 아침 풍경을 그녀는 눈으로 주욱 쫓았다. 그대로 장례식에 서 있어도 어울릴 것처럼 비가 묻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울해 보였다. 타워 빌딩의 꼭대기에 '다우존스'와 '이깨이' 지수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침마다 지수를 바라보며 이 도시는 눈을 뜬다. 방에 누워서도 맑은 날에는 빨간 글자의 갖가지 지수들을 공중에서 볼 수 있다. 상공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증권지수, 오존 지수, 인구 지수, 정치 지수, 그것들을 잘 보고 하루를 맞이해야 한다. 이빨을 닦으면서도 보고, 옷을 입으면서도 소리 내어 잘 읽어야 한다. 승부의 비밀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에이스도 잡을 수 있다. 오른쪽 20층 빌딩의 한쪽 벽에 붙은 와이드 스크린에서는 페퍼민트 맛 샤베트 만드는 법을 두 개의 손이 보여주고 있었다. 와이드 스크린 속의 두 손의 주인공이 그녀가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을 리가 없지만, 어쩐지 두 손과 그녀의 기가 통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두 손은 기묘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하면서 매끄럽게 움직였다. 커뮤니케이션은 있지만, 이상하게 느낌이 없는 손이었다. 비 오는 날 이른 아침에 거대한 샤베트 만들기를 보고 있으려니까, 꼭꼭 부엌에 박혀 스무 가지쯤 되는 샤베트를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멋지지 않은가, 그래서 도시의, 그녀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씩 아이스박스 선물 포장을 해 배달시키는 것이다, 비 오는 날 샤베트를 선물 받는 것은 썩 기분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페퍼민트 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스트로베리 맛이 배달되고, 멜론 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코칩 맛이 배달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정말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선물 같은 것은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전화를 해서 '저어 어떤 맛의 샤베트를 좋아하시나요' 하고 물은 다음 배달 목록을 만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초인종이 울리고 생각지도 않은 배달을 받게 되었을 때 의외의 기쁨 같은 건 반감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뒤얽히는 느낌이 들어, 선물 따위를 하지 않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라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접촉이란 그 자체로 너무나 큼 단절감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멀리 하늘 위로 기차가 가는 것이 보였다. 기차는 쇼 위도처럼 휘황한 불빛을 반짝이며, 조금씩 빨라지면서 안개에 잠긴 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저 기차의 차장은 비가 오는 날 하늘의 철로 위를 기다란 객실 차창을 끌고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시민'에 대하여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역 입구마다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고 사람들을 싣고, 미끄러지듯이 지상과 지하 사이를 통과한다. 지하로 들어가면 지하를 돌아다니고 있는 인간들을 뱃속에 생선처럼 채운다. 끝도 없이 하늘과 지하 사이의 순환로를 몇 번이고 사명감으로 달리는 것이다, 일이 끝났음을 알리는 ㄱ은 어둠이 세계를 덮는 시간이 되어서야 그 또는 그녀는 기차를 빠져나와 얼굴과 손을 씻고 땀에 접은 차장복을 벗어 라커에 간직한다. 그리고 기차 계류장을 나와서는 집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문을 닫기 직전의 텅 빈 바에서, 바텐더를 상대로 혼자 술을 딱 한 잔만 마시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소리도 없이 집에 들어서서 소리를 족이고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잠든 아이의 방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새벽이면 심해지는 위궤양을 달래는 약을 미리 한 봉지 입애 털어 넣고서, 미친 듯이 잠으로 뛰어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든지 짐작이 가능한 인생이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세상이나 주변으로부터 어떠한 평판을 받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미치자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끝없이 소비를 팽창시키고 있는 이 세게에서 그 남자가 조촐하게 품고 있을 사명감이 어느 만큼 세계에서 의미를 갖는 것인지 신호등에 걸려 멈춰서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라디오의 발명에도 컴퓨터의 발명에도 어떤 류의 이데올로기의 정립에도 관련이 없는 것처럼 '시민'이란 세계의 진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들로서 누군가 던져주는 잘 포장된 상품을 소비나 시키는 존재들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우울해져서 그런 생각 따위 집어치우고 맛있는 아침이나 먹고 싶었다.
스포츠클럽과 그녀의 아파트 중간 쯤에 위치한 카페 '비틀'로 그녀가 들어섰을 때 아침 식사부터 카페에서 해결하려는 갖가지의 인물들로 아침 여덟 시의 시각에 비틀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하얀 멜라닌을 씌운 싸구려 탁자와 핑크색 소파가 죽 창가에 달라붙은 카페이지만, 꽤 예쁜 선물 포장처럼 느낌이 좋은 친절한 웨이트리스가 맛있는 커피를 내오고,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언제나 비틀스의 <헤이주드>나 <미셀>이 흘렀다. 주인의 취향이다. 싸구려 탁자와 핑크색 소파, 그리고 비틀스, 어쩐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편안하게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빈 테이블이 없어서 금전 등록기 옆의 스탠드에 앉아 있었더니, 등록기의 서랍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끝없이 쟁반에 담겨져 나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인 여자는 금전 등록기 뒤의 의자에 앉아 두루마리 화장지의 절취선을 세고 있었다. 화장지는 무릎 위에서 파이 껍질처럼 한겹 한겹 쌓여 간다.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5분쯤 바라보고 앉아 있자, 친절한 웨이트리스가 그녀에게 눈을 찡긋했다. 방금 빈 창가의 자리에 야채오믈렛을 내려놓고 받침 위에 놓인 커피잔을 오믈렛 접시 위쪽에 내려놓은 다음, 둥그런 플라스크 안의 잘 뽑아진 커피를 따라 주었다. 커피 향은 어느새 테이블 주위의 비 냄새에 섞여들었다. 그녀의 취향을 알고 있다는 듯 설탕이라든지 크림 같은 건 없었다. 스트라이프 무늬 앞치마에 달려 있는 주머니에서 팬을 꺼내 계산서에 체크를 한 다음 테이블 위에 놓고 돌아서는 웨이트리스와 그녀는 반쯤의 우정을 얼굴로 나눴다, 이런 미소는 비인칭 미소라고 하는 것으로, 예의를 뿌리치지 않는 중립성의 거리를 유지하는 면역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녀도 역시 이런 유의 미소를 기분별로 일렬로 늘여 세울 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지구인이라면 누구든 습득하게 되는 기술인 것이다. 웨이트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웨이트리스로서 적은 나이는 아닐 것이라고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스물넷, 다섯쯤? 저런 정도의 느낌이라면 조금 더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카페 안의 사람들은 깡통 속의 꽁치처럼 묵묵히 의자 속에 파묻혀 원자적인 얼굴을 음식 접시 위로 뻣뻣하게 들이밀고 있었다. 까맣게 젖고 있는 창밖의 거리는 비구름 때문에 아직 어둠이 엷게 쌓여 있긴 했지만, 아침의 빛이 대기에 스며들어 오면서 가로등이 하나씩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거리 맞은편의 꽃가게에서 한 남자가 노란 루프 아래에 예쁘게 내놓은 양동이 속의 노란 아이리스 한 묶음을 사고 있었다. 남자가 고개를 앞으로 숙이자 머리에 쓴 까만 모자의 챙에 고여 있던 비가 주르르 발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초록색으로 쓰여진 '책'의 네온이 아직 꺼지지 않은 서점의 유리창은 창 가득 잡지로 빽빽하게 메워져 있다. 여성 잡지들 틈으로 정치, 경제, 사이언스, 음악 잡지 같은 것이 예의를 차리듯 끼워져 있고, 페넌트 모양과 그 밖의 갖가지 스티커들이 창 상단의 왼쪽에 붙어 있었다. 새 펭귄 시리즈 스티커도 있고, 건강식품 요리법 책자 스티커, 그리고 하이틴 스타들의 사진, 다음에는 줄줄줄 신용카드의 스티커들 어쩐지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회복될 수 없는 누더기처럼 축축하게 느껴졌다. 누더기는 표면이 아니라 저 깊은 곳이 있었다.
이형화를 시키자 알골에는 바이러스가 이처럼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녀는 악 하고 숨을 죽이고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아래서부터 위로 설계된 구조들이 스르르 흐려지면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미 치명적으로 감염된 것 같았다. 이형화를 시킨 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나 위안을 삼을 도리밖에는 없었다. 하루 동안 일한 분량이 간단하게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혹시 어디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지 않을까 이곳저곳을 뒤져 보았지만, 조각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그녀는 분한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디텍터를 가동시켜 놓고 의자를 쭈욱 밀어 모니터로부터 뒤로 물러났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어나 창 앞으로 가서 기지개를 켜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피로감이 뿌리를 내리듯 퍼져갔다. 턴테이블의 <짐노페디>와 <나는 너를 사랑해>는 리피트 상태로 몇 년 전인지도 모를 만큼 돌아가고 있었다. 비와 안개에 의해 그림자가 깃든 도시는 회색 커피잔 속처럼 고요했다. 빛은 조용히 반짝이고, 꺼지고 다시 켜지곤 한다. 침대 옆의 라디오를 틀어 보았다. 뉴스에서는 화성에 간 스페이스 셔틀에 대한 소식을 알린다. 화성이나 다른 생성에 대한 소식 때문에 흥분과 실망을 반복하고 있는 지구인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마치 주기적으로 발병하는 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구에는 거대한 외로움이 드리워져 있어서 소실감이라는 병을 앓으면서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우주선을 띄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주인들은 도시락 가방과 보온병을 안고 아무도 없는 빈 별에 가서, 우주의 시간이 늘어 붙은 사막이나 멍청히 바라보고 있다가 점심을 먹고 쓸쓸함이나 다시 안고 돌아오는 것이다. 아마도 소속감을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소속감을 상실하면 아마도 아이덴티티마저 희미해지는 그런 의식 시스템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한 번, 두 번, 언제나처럼 울리는 벨의 횟수를 세며 그녀는 응답기가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방안을 두르려 깨우는 것처럼 벨 소리는 날카롭게 정적을 파괴했다.
- 안녕, 나는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 메시지를 남겨 줘 이것 성가신 일이겠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리는 거야. 자아 그럼 잠시 후 시작이야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지금 죽어버려도 좋아 그래도 이해해 나도 그렇거든,
실은 이런 앤서링 따위 쓸떼없는 짓이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앤서링을 남길 상대라곤 단 한 분이다. 그냥 너무 심심할 때 한번 말해 본 것뿐이다. 자신과의 접촉을 위해
- 흐음, 안녕 부재중이신가요? (사이) 아, 그렇군요. 으음, 자, 그럼 뭐든지 말하겠다는 정신으로(웃음 같은 소리). 먼저, 테스트에 대해 예정된 스케줄을 따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좋지 않은 소식 사용자 측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몇 가지 환경 변화가 생길 것으로 예측됩니다. 미팅이 있습니다. 자체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므로 꼭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 날짜와 시간은 3월 29일 오전 10시, 22번 미팅룸입니다. 그리고 이거야말로 뭐든지 말하겠다는 정신 사탕 받으셨나요 고마워 라고 말하고 있겠죠. 이제 안녕 건강 조심조심 추신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사자'에게서 온 전화였다. 환경 변화라니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시스템의 환경이 변한다는 것은 그와 관계된 서브 시스템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는 문제였다. 지난번 미팅이 있었던 것이 2년 정도 전의 일이므로 추측건대 지금까지 한 모든 설게를 다시 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휴우, 그녀는 한숨을 쉬고 짜-아-식, 입속에서 사자에게 짜증을 내보았다. 하긴 사자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는 소식을 배달한 것뿐이겠지. 사자의 공식 호칭은 '시스템 환경 조정자'이지만 그들은 사자 즉 '죽음의 사자'라고 그를 부른다. "사자가 전화했더군" 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사자를 만나서도 "안녕하세요, 사자씨"하고 실수를 할 뻔하기도 한다. 여기서 그들이라는 것은 그녀와 그녀가 알고 있는 시스템 분석가와 프로그래머 동료, 혹은 알지 못하는 의식상의 잠정적인 동료들을 가리킨다. 사자가 전화를 하는 일이란, 지시사항이 이거나 작업을 체크하고 날짜를 어기지 말고 전송하라는 통고를 하기 위한 것이다. 사자 나름대로 아무리 예의 바르게 얘기를 한다 해도 그것은 '통고'다. 그래서 어떨 때 사자의 전화는 공포와 같아서 까짓것, 그가 전화해도 별 볼 일 없어지도록 일을 깨끗하게 시간 전에 끝내 버려야지, 그러면 얼마나 통쾌할까, 생각하지만 일이란 게 꼭 그렇게 되는가, 사물대로의 관성이 있는 것이다. 치밀한 관리와 동시에 그는 세심한 관리를 아끼지 않는다. 생일날에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쇼콜라 생크림 케이크, 그것도 세심한 관리의 하나다. 물론 그녀는 그런 짓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사생활 침해다. 그래도 그녀가 만일 그녀의 방안에서 심장발작이라도 일으키며 혼자 죽게 된다면, 아마도 최초의 확인자는 사자일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한다. 분명 그는 몇 번인가의 작업 수신에 실패했을 때 누군가 그의 개인적인 보조자를 은밀히 보내서 확인을 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결코 그녀를 위한 행위는 아니다. 작업의 보안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사자란 그런 센서 같은 존재인 것이다. 회사에 있어서 그녀 같은 실무 전문가들이야 데이터베이스에 쌓여진 데이터 같은 존재지만, 센서란 마치 전체 조직의 생명 유지 장치이자 암호 같은 것이어서 말할 것도 없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사자가 회사에 몇 명이나 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녀가 지금까지 일을 해오면서 단 한 번도 그녀의 사자가 바뀐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자도 자신의 프로젝트팀을 배당받고, 자신의 프로젝트팀과만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다른 사자의 다른 킴이 무엇을 하든지,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고 있는지, 심지어는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그녀가 일하는 회사의 시스템이다. 그런 식으로 회사는 인간들의 교류에서 붙어 다니는 불필요한 감정의 개입과 정보누출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신은 당신의 계급을 대표하나요?" 하고 그녀는 2년 전 미팅에서 사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왠지 그녀의 동료가 얼마만 한 보수를 받는지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자도 다른 사자가 무엇을 하는지 보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계급?"하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사자는 "계급이라는 것은 1980년대의 공방전 이후 사라져 버린 구도 아닐까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디시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만약 계급이란 것을 나눌수 있다면 우리는 '루틴'계급쯤 아닐까요?" 하고 말했다. 한참 그 말에 대해 생각했지만, 그럴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이제 생각한다. 이제 세계에는 세 부류의 계급이 있다. 조직과, 쌓인 데이터 간은 계급, 그리고 루틴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와 같은 컴퓨터 내의 데이터 같은 계급애 대해서 ,'조직'은 중앙 컴퓨터를 켜고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누구든 값을 지불하면 통째로 살수도 있다. '루틴'계급은 센서로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데이터의 보안과 관리, 그리고 데이터의 배열과 등급을 조정한다. 루틴 계급은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프로그램의 기술적인 문제는 개입조차 하지 않는다. 루틴이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는 단지 각각의 시스템 부분들이 연결되어 진행하도록 만드는 암호와 같은 것이다. 개개의 데이터들은 루틴이 제공하는 암호를 받아 인터페이스나 브릿지로 연결된다. 암호가 없으면 데이터들이란 하나의 데이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사자가 작성하는 데이터의 등급, 데이터를 물적적 가치로 환원한 수치, 분석가나 프로그래머들이 그런대로 냉정한 사고의 소유자들이라고는 해도 마주하기 싫은 최후의 순간에, 그것은 그들 앞에 제시된다. 그렇다 해도 결코 누구로서도 사자에게 불쾌해하는 감정 같은 것은 갖지 않는다. 사자의 평가서에는 감정의 개입이란 없다는 것을 누구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는 분명히 특별한 훈련을 받고 있고, 특별한 자질을 지닌 인간들로 선발되는 것이 틀림없다. 공정한 일이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 같은 것으로 단지 곤혹스러운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의 등급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편안한 기분은 아니니까 말이다. 데이터가 컴퓨터에서 이스케이프 루트를 통해 탈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끔씩 물을 차는 듯한 터벅터벅하는 발소리가 단단한 벽들 사이의 정적을 크게 울렸다. 내리던 비는 자정을 넘자 멎었다. 베란다 창틀에 기대어 담배를 하나 피웠다. 서치라이트가 잠이 든 도시를 구석구석 광선 빔으로 훑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 와서 시계를 보자, 시곗바늘이 막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슈베르트였다. 실내 악곡 중의 어느 하나다. 그것도 레코드가 아니고 누군가 직접 활로 켜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 시간에도 내적 생활을 가다듬고 있다. 어쩐지 동지애를 느꼈다. 시스템 체킹을 실행시켜 놓고 셔츠를 벗고 머리 끈을 풀어 버리고서 목욕탕으로 갔다. 온수를 틀어 찬물이 빠지게 내놓고 나와서 팬티와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려고 하는데, 아파트 문밖에서 부스럭하는 소라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으로 다가가 접안렌즈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문밖 복도는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문지르면서 전기 깡통따개로 수프 깡통을 따서 소스 팬에 쏟아 넣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밖에서 세계가 하나씩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 왔다. 30톤이 넘을 듯한 지면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트럭이 지나가고, 우유인지 신
문인지 모를 것을 돌리는 사람의 발소리가 통통통, 계단을 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로션을 바르는 사이 크림수프가 데워지자 후추를 뿌려 수프를 먹어 치우고, 딸기 한 접시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아침을 먹고 나자 이빨을 닦고, 위생을 생각하면서 칫솔의 솔이 위로 오도록 컵에 던져 넣고, 말라 가는 머리에 브러시를 스무 번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다른 프로그램과 연결될 브릿지를 펜으로 표시한 다음, 회사의 중앙 컴퓨터를 오프 시키고 나자, 몸 안으로 땅거미가 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존재처럼 잠들어서, 열두 시간은 줄곧 자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아침 빛이 스며들어 오기 시작하는 창을 커튼으로 뒤덮고, 옷을 벗고<고요한 세계>를 집어 들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2.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
사자가 알려준 번호가 달린 문으로 들어가자, 책상 위의 무언가에 시선을 꽂은 두 명의 비서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쪽은 근육이 흐늘흐늘하고 평평한 인상의 뚱뚱한 중년 남자고, 다른 쪽은 전형적인 실내형 인간의 창백한 얼굴을 가진 마른 여자로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인상 때문인지 마치 누군가 죽어서 입은 상복 같았다. 그녀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마른 여자 쪽이 일어나더니 미팅룸인 것으로 보이는 문 앞으로 가서 노크를 하고, 그녀를 향해 가늘고 긴 팔을 뻗어 미팅룸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거대한 화이트 색조로 꾸며진 방이었다. 푸른색이 나는 커다란 패널 유리가 끼워진 22층 창밖으로 하늘이 보이고, 방의 한가운데는 좌석마다 개별 키보드가 달린 열 개의 의자가 붙은 베이지색의 미팅 테이블이 놓여있다. 테이블 끝에는 프로젝터가 달려있고, 창 쪽으로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사자이고 다른 사람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회사 사람이었다. 그녀가 처음 이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경영정보 학위를 따도록 배려인지 촉구인지를 했던 위원회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흰 와이셔츠에 짙은 그린 색의 폴로 넥타이를 매고 있어서, 클럽의 모임에라도 참석한 기분이 들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팅 시간이 거의 가까워졌는데도 그들 외에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앉으십시오" 하고 사자가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시간을 잘못 알았나요?"
그녀는 그들 맞은 편에 앉으면서 손목시계를 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하고 회사 사람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관광 가이드처럼 패셔너블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손에 들고 있는 펜을 만지작거렸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그녀는 왠지 맥주가 간절하게 그리워졌다. 분위기가 편안하지가 않다. 회사에 왔다가 돌아간 날은 후우후우 오랫동안 기분을 다스려야 했다. 이런 자리는 좀처럼 그녀에게는 관록이 붙지 않는 것 같다.
"말씀드릴 일이 좀 있어서 오시게 한 겁니다."
회사 사람이 펜을 다이어리 위에 조용히 내려놓으면서 상냥하게 말을 꺼냈다.
"그럼, 미팅은..."
"사실 미팅은 없습니다."
두 사람을 그녀는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언가 곤란한 일을 이제 시작해야 하는 그런 투의 얼굴이었다. 사자는 어딘지 좀 미안해하는 듯한 이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녀의 느낌일 뿐이다. 더 복잡한 미소일는지도 모른다. 무엇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해 보았다. 그녀와 일을 그만하겠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그런 종류의 일이라면, 그냥 그녀에게 작업을 보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컴퓨터로나 전화로 얼마든지 알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럼 무엇일까?
"그럼 무슨 일인가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작업 수신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작업 수신이 되지 않다니."
그녀는 과민해져서 신경질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전송한 것을 받지 못하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제 그들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전송되는 것도 프로그램이 부분부분 풀어져 있어서 가치가 없는 형편입니다."
"저는, 전혀 무서운 일인지 모르겠군요." 하고 그녀는 갑작스런 피로를 느끼며 말했다.
"혹시 암호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닌가요, 아니면 제 회선과의 연결 회로에 문제가 있든지..."
"저희도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암호나 회로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습니다. 다른 작업의 수신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으니까요. 하지만 확인은 해보았죠. 특수한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암호와 회로에는 이상이 없었군요 "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회사 사람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들은 그녀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래서 제가 프로그램을 고의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요?"
모두가 편해지도록 그녀가 먼저 핵심으로 뛰어들어 말해 보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아요. 제가 만일 프로그램을 몰래 빼내기라도 하고 있다면 그렇게 드러나도록 할 리 없죠. 그리고 혹 제게서 프로그램의 정보를 사는 측이 있다 해도, 각 프로그래머를 모두 접촉해서 전 프로그램을 연결하지 않는 한 제가 설계하는 프로그램만으로는 별 가치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저희가 걱정하는 것은. 그러니까 회사에서 보내드리는 자료 때문입니다. 시스템을 구축하기 우해 보내드린 입력 자료는 저희 회사 측으로서는 사용자 측에 지켜드려야 하는 기밀 이니까요.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가 빼냈어도 프로그램의 전송을 엉망으로 만들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의심을 살 텐데."
"아아"하고 회사 사람은 한 손을 앞으로 내밀어 좌우로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자료 누출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저희도 조사를 했지만, 조사 결과 그런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하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조사까지 하셨다니, 꽤 오래전부터 문제가 있었군요."
서서히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들을 깨닫고 있었다. 얼마나 정상적인 세게인가. 이런 세계에서는 정보부 따위가 기생충처럼 손을 뻗치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한 인간의 모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머리통의 색깔이 같으냐 따위를 현미경을 들이대고 파헤친다.
"회사로서도 입장이 있는 것이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 하고 말하며 회사 사람은 입가를 바싹 조인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저의 입장은 어디에 있는 건가요
하고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언제부터죠?"
"3개월째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야 말해 주시는 건가요?"
"저희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으니까요."
그녀는 화가 나고 두렵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3개월간 그녀를 조용히 지켜본 것이다. 아마도 그녀를 미행시키고, 그녀의 컴퓨터를 걔속 감시했을 것이다. 도청은? 그녀는 쓰디쓴 기분으로 22층 창밖을 멍청히 내다보았다.
그들이 도청을 했다 해도, 무엇 하나 알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도청을 할 만한 전화란 것조차 그녀에게는 걸려 오지를 않으니까 말이다. 그녀란 전화를 받는 일도, 전화를 하는 일도 없는 그런 인간이라는 거나 알게 되었겠지. 아마도 이 여자는 애인도 없나 하고 농담이나 하면서 정말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녀가 외출조차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의혹이 더 쌓였는지도 모르지. 사람들이란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제멋대로 기묘한 상상을 하기 마련일까.
처음 이 시스템 개발사의 일을 시작한 지 얼마쯤 지났을 때, 어떤 일을 책임지기에는 그녀 자신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건 자신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일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얼마나 싫은가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회사가 먼저 그녀에게 제의를 했다 경영정보 공부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회사로서는 손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회사라는 건 절대로 그냥 투자하는 그런 멍청한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것이 회사의 속성이다. 그 속성이 엷어지거나 흔들린다면 더 이상 회사는 회사가 아닐 것이다. 그녀 편에서도 불만은 없었다. 결국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훌륭하게 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뭔가를 할 때는 성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행위의 속성상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짓 따윈 하고 싶지 않다고 누구든 생각하고 있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이미 자신이 맡은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의 문제였다. 누군가에게 피해나 주는 인간이라는 것은 자부심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회사란 건 그녀의 자부심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소리가 들려 와서 그녀는 창밖의 하늘에서 눈길을 돌려 그들을 보았다.
"저희도 유능한 인재를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시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공부를 더 하도록 제의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하고 회사 사람은 두 손으로 맞잡은 펜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면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이란 게 꼭 노력만으로 훌륭한 성과를 얻는 것은 아니니까요. 재능, 그것이 아주 중요하죠."
그녀는 묵묵히 들었다. 그저 듣고 있다는 기분밖에는 없었다. 이미 신뢰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아직 어디에서 문제가 생겨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말씀을 드릴까 해서 오늘 오시게 한 겁니다."
"저는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걸요." 하고 그녀는 물끄러미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회사 사람은 입을 다물고 여전히 펜을 만지작거리고 있고, 사자는 테이블 위의 A4용지 위에 펜 끝으로 소리 없이 점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어, 그래서, 양쪽 컴퓨터를 다시 한번 정밀 조사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몇 분인가가 흐른 후 이번에는 사자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회사의 중앙 컴퓨터와 댁에 가지고 계시는 컴퓨터를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조사시키는 거죠. LAN 상의 어딘가에서 회선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자료를 받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보내는 데에서만 문제가 발생하는 회선이라는 거죠?"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 조사를 시작하시겠어요?"
그녀가 간단히 물었다. 전화를 하고 이번 주 내로 방문하겠다고 회사 사람은 말했다.
회사의 출입구에 서서 세계에 동화되기 위해, 보이는 것들을 눈에 담고서 서 있었다. 햇빛은 그녀에게 너무 강렬해서 몇 년 만에 처음 암흑의 동굴에서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눈물이 났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몇 년간에 걸친 생활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 몫의 생활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도 나름대로 잘해보겠다고 생각했었다. 리듬감이 뚝 끊어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차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도로는 러시아워를 훨씬 지난 시간인데도 줄을 선 차들로 우정에 넘쳐 있었다. 외로워서 우정이 필요하면 도시를 한 바퀴 드라이빙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말없이 배려에 넘치는 보이지 않는 우정을 느낄 수 있다. 끼워 넣어주고, 묵묵히 줄을 서고, 노란색으로 깜박깜박 신호를 하고, 고맙다고 뒤를 향해 손을 흔들고, 동시대의 고민을 소리 없이 나누고 우정의 파티다. 그녀도 강을 건널 작정을 하고, 줄의 꽁무니에 가서 붙었다. B.B 킹의 테입을 틀어 놓고, 아무 생각 없이 멍청히 듣고 있었다. 차들의 꽁무니에서 빠져나오는 하얀 안개를 바라보았다. 에너지의 연소라고 하는 것이다. 드라이아이스처럼 신비스럽고 연약하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의 버섯구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떻게 그러한 디자인의 구름을 만들어 내는가, 비극미의 극치,
강은 어두운 색깔을 하고 늪처럼 흐름이 밋밋했다.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나 개울에는 이제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바다는 조금 사정이 나아 몇몇 고급 리조트 지역에서는 수영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잘못 바다에 들어갔다가 그날로 온몸이 피부병투성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호텔의 옥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한다. 그녀는 김을 아주 좋아하는데, 깨끗한 김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핵폐기물을 깡통 팩에 넣지 않고 몰래 바다에 흘려보내는 조직들이 있어서, 김은 방사능 덩어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내장보다 더욱 예민한 방사능 인디케이터로서의 역할 밖에는 김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어져 버렸다. 이문명의 강박관념 그것이 그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강한 햇살 때문에 창틀에 괸 팔꿈치의 손을 눈썹 위로 차양처럼 만들어서 붙였다. 빛줄기가 그녀라는 공허한 존재를 파고 들어가 조용히 몸 안을 채워 가는 느낌이었다.
어떤 때는 회사란 것을 너무 영리해서 리들리 스콧의 시리즈물에 나오는 기괴한 생명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그 괴물이 아무리 영리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와 함께 이제는 시리즈물로서의 생명을 마쳤지만 말이다. 회사가 끊임없이 꿈틀꿈틀 자기 증식을 해서 언젠가는 회사 자체가 카프카의 <성>처럼 국가 개념을 대체해 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삼성 스테이트에 사는 삼성맨이 현대 스테이트에는 현대맨이 살고 있으며, 각 스테이트맨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각 스테이트의 최고 권력자이며 스테이트는 전체 내셔널 인구의 일정 정도를 실질적으로 조정하는, 그런 세계로 상상했다. 어쨌든 회사는 끝없이 비대해지고 있는 것이다. 뭐, 어떤 조직이건 별 차이도 없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국가이건 회사이건, 차이는 짐작조차 잘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녀는 쓸데없이 과대망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퉁, 둔한 충격에 의해 의식은 표면으로 옮겨져 왔다, 그녀는 눈앞의 상황을 응시했다. 휴우,
"굉장하군요"
ㅇ은 피곤이 얼굴에 스며 있는 30대 중반 가량의 운전자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해서 그만...."
그녀는 사과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아서, 그녀는 잠자코 충들의 흔적을 쳐다보았다.
"아, 바로 그거군요. 부주의"하고 남자는 말하고서,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느껴지던 충격에 비해서는, 속도가 없었으므로 차의 손상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은회색의 M II는 후미팬더가 보기 좋게 찌그러져 버리긴 했지만 망치질 몇 대면 그대로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고, 그녀의 란트라를 앞 번호판을 제외하면 거의 외상이 없었다. 우선 차에[서 운전 면허증과 사고 양식 용지를 꺼내고 필요한 것들을 기록했다.
"그렇죠, 정말 우린 모두 때때로 실수를 하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부주의는 정말 변변치 못한 짓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안 하요?"
정말이다. 인정한다. 그녀의 인생이 별 볼 일 없다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그런 취급해서야 이런 식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우울한 건 이 남자 탓도 아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는 잠자코 서서 사고 양식을 채웠다. 아무도 이해해 줄 수 없는 그런 이유인 것이다. 필요한 건 정신의 균형, 바로 그것이다.
"왜일까요?"
남자가 물었다.
그녀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왜?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남자가 말했다.
" 왜 누군가는 그런 짓을 하고, 누군가는 당해야 하는 걸까 하는 거죠."
그녀는 강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할 수밖애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뚝 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15년 동안 운전을 하면서, 언제나 겁쟁이처럼 주의를 기울이며 그렇게 재미없이 살았다 이겁니다. 그런데 언제나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의 짐을 나에게 붙여 놓고 가버리곤 하는 겁니다. 그것도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고서."
알고 있다. 미안하다. 할 수만 있다면 없었던 일로 해주고 싶다. 하지만 계속할 생각인가? 이쯤에서 그만해 주었으면 좋겠다.
"정말 불공평한 일 아닌니까?"
"그럼요, 불공평한 세상이죠."
그녀는 잽싸게 끼어들었다.
"정말 저라는 인물은 변변치가 못합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같은 거로나 태어났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럼 누군가에에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을 테죠. 다만 저도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제발 부탁인데, 입 좀 다물어 주시겠습니까?"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그말들을 천천히 했다.
"청구서를 보내 주시면 은행 온라인을 이용해서 금액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화가 나시겠지만 이미 일은 일어나 버린 것, 하고 이해해 주십시오."
남자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운전 면혀증을 남자의 손에서 받아 들고 그녀는 훌쩍 몸을 돌려 차로 돌아왔다.
차를 천천히 움직이며 생각했다. 그녀는 싸움 같은 걸 할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탓으로 아무래도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몇 달에 한 번 정도로나 대화라는 것을 하고 있어서, 가끔씩 어떤 식으로 언어를 표현해야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낭비 없고 자연스럽고 불쾌감을 일으키지 않는 순간에 딱 들어맞는 어조란 것이 있을 터인데, 그 미세한 질감 차이를 그녀는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남자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그녀는 유감스러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내 탓만은 아니야
오래전에 광장으로 차를 몰고 돌진한 정신 이상으로 알려진 사나이도, 태양이 너무 눈이 부셔서 살인을 했던 뫼르소도 비슷한 숨 막힘이 아니었을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내 탓만은 아니야, 지긋지긋함 속으로의 곤두박질. 사람은 모든 게 넌더리가 나고, 상황에 자신을 맡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것은 내 탓이다. 우리는 모두 세계의 악에 자신의 악을 더하지 않아야 할 채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는 지긋지긋한 냄새나는 구덩이고 쓸모없는 인간과 사물로 가득 차 있지만, 또 하나의 쓰레기를 덧붙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맥주 캔 세 개를 샀다.
깜박깜박, 캠퍼스 내에 차를 주차시키기 위해 주차 티켓을 찍었다.
정직한 기께의 메모, 13: 29: 00.
3월 말, 학교 분위기는 아직 새 기분으로 어수선했다. 스판덱스 셔츠와 검은 가죽과 콤팩트 디스켓으로 사이버틱하게 무장한 신입생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랩으로 싸놓은 생물들이 세계를 재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월 신념에 불타는 캠퍼스 같은 건 황량한 시대의 이야기다. 지금은 '몰로토프 칵테일'을 칵테일 메뉴쯤으로 아는 평화로운 시대인 것이다. 하긴 마셔 버려도 되겠지. 정신이 번쩍번쩍 날 것이다. 생물학적 마모를 앞지르는 모랠러티에 대해 알고서 놀랄 것이다. 80년대는 이들을 위해 사라져 간 것이다.
태양은 다정스러웠다. 중앙 광장을 지나가는데, 잔디밭에서 '우주 정거장 연수'에 관한 대화가 들려 왔다.
도서관 지하의 '언어보관소'에 들러 세계의 대화 기술에 관한 비디오테이프를 한 시간가량 보고 나서 도서관을 나와, 차로 돌아가 맥주가 든 종이 봉지를 꺼내 숲을 향해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캠퍼스 뒤편을 싸고 있는 숲속의 벤치 하나에 앉아서 봉지 속의 맥주를 꺼내 첫 번째 깡통의 뚜껑을 땄다. 옆의 나무 벤치에도 한 남자가 헤드폰을 귀에 꽂고 책을 읽고 있었다.
오래전에 매매 소리를 듣고 노란 낙엽을 베고, 저런 모습으로 그녀도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었을 것이다. 우수수, 땅속으로 사라져 간 많은 인간들도 머릿속에 열심히 책을 저장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등을 뒤로 기대고 눈을 감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하나의 궁극적인 진실에 직면하게 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소멸의 조짐을 호흡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서 죽음을 멀리 떼어 놓아야 아무런 소용없다는 것이, 엄마의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죽음이란 언제나 일어나고,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식탁 위의 음식들처럼 지겨운 날에 비하면 죽음은 시도였고 뭔지 모를 위엄이 느껴졌다. 그녀는 달리는 차 속으로 뛰었다. 열 살짜리의 자살 소동에 대해, 사람들은 '우습다'고, '슬프다'고 했다.
정말이지 열 살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병원에 누워 있는 그녀에게 그제야 엄마는 말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거야. 그 속에는 네가 태어난 이유도 있어. 있지, 그렇게 믿어야 해."
태어난 이유, 그녀는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또 태어난 이유가 있다면 죽음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라고 사고의 균형을 맞추며, 이유는 모든 사물과 행동의 배후에 코드처럼 붙어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것을 알아내고자 생각하며 사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았다. 분명한 이유가 있고, 이유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 이유란 있는 것일까?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그리고 해야 할 바를 모르게 되었을 때, 그녀는 삶에 ㄷ해서 어떠한 주장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유란 없다.
그렇게 해서 삶에 대해서 주장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주장이 멈춰 버린 지점에서는 부드러운 외로움이 자라났다. 조개 껍질의 무늬처럼 외로움에도 여러 가지 특징이 있었다. 작은 외로움도, 좀더 큰 외로움도 있었다. 다음 날이면 사라져 버리는 외로움도 있었고,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것도 있으며, 비에 젖지조차 않는 외로움도 있고, 잡초처럼 질긴 외로움도 있었다.
외로움과 함께 지내는 것은 지겨운 일은 아니었다. 하나의 외로움을 다른 외로움과 교환하면서, 아침이면 생각한다. 그다지 지겨운 것은 아닌 일이라고.
숲을 둘러보다가 책에서 눈을 떼고 얼굴을 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캔을 입으로 가져 갔다. 머리 위에서 가지들이 얽힌 숲은 이미 초록빛의 터널이 되어 가고 있었다. 잎이 이어지지 않은 군데군데 구멍이 뻥 뚫린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건조한 싸늘함과 흐릿한 따스함이 섞인 3월의 엷은 햇살이었다. 햇살은 상수리나무와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의 잎사귀들에 스며들었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았다. 잎사귀들은 마지막 잎새처럼 보였다. 마지막 잎새들이 그려진 것처럼 조용히 대기에 그들의 존재를 맡기고 있었다. 공기가 흘러가는 대로 조용히 몸을 맡기고 있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 마시겠어요?"
두 개째의 캔을 뜯다가 바로 곁에서 혼자서만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좀 부자연 스럽게 여겨져서 옆 벤치의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한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쳐 놓고 책을 읽고 있는 남자는, 헤드폰 때문에 듣지를 못해서인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깡통 하나를 꺼내 남자가 앉은 벤치 끝에 놓아주었다. 남자가 그녀를 오려다 보며 귀에 꽂은 헤드폰을 양쪽 귀에서 빼냈다. 남자는 <문명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카키에 그린이 섞인 듯한 색상의 트위드 재킷을 곁에 벗어 놓고 몸에 꼭 달라붙는 스웨터를 입은 남자의 모습은, 테니스 선수 같은 체격에 좀 우울한 눈을 하고 있었다. 단단한 갈색의 피부에 반항하는 네덜란드인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눈이란 두 종류가 있다. 무엇이든지 알아낼 수 있는 눈과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는 눈, 저런 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기 위해서 10년이 걸려야 하겠어,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마일즈 데이비스의 절제된 재즈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체상에서 어느 만큼은 그 사람의 문화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으로서 무언가를 의미하려고 하는 법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하고 있다.
"하나 마시겠어요?"
그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려는 듯 입술을 살짝 옆으로 잡아당기고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미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즐겁게 마시겠습니다."
즐겁게 마시겠다니, 그 의미는 알겠지만 재미있는 말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의 벤치로 돌아와 앉아 그녀는 천천히 다시 맥주를 마셨다. 알루미늄 깡통 따는 소리가 툭, 들려 왔다.
"이제 봄이죠?"
워크맨 스위치를 오프시키는 소리가 나고 남자가 말했다. 날씨 얘기를 한다는 게 나이 든 노인이 되어 버린 기분이 들게 했지만, 그녀는 숲을 바라보면서 "봄이에요"하고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학교에 와 본 거예요."
"저도 거의 3년 만인 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 학교 졸업생인가요?"
"졸업은 못 했죠. 2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갔으니까요" 하고 남자가 말했다.
"유학?"
"뭐 그런 셈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더 이상 학교는 다니지 않았죠, 학교는 이제 끝 뭐 그런 거였죠."
"페다고지?" 하고 그녀가 말하자, 남자는 웃으며 "학교는 죽었다"하고 되받았다.
"우리는 반쯤 동창이네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학번을 물어보았더니 남자는 그녀보다 1년이 늦었다. 즉 후배였다.
"많이 변했어요."
남자는 잠시 생각하고 있더니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런저런 별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30분 정도, 추억의 세계에 대해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별로 그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80년 이후의 사건들을 더듬고 있자, 그 세계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렸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커트를 잡아당겨 반듯이 편 후, 종이 봉제에 빈 맥주 캔을 담고 숄더백을 어깨에 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맥주 고마웠습니다."
남자는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만지작거리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이번엔 제법 미소다운 미소였다.
"아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저어"
학교 앞의 중고 책 서점들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왔다.
"아."
학교 뒤의 숲에서 만난 남자였다.
남자는 조금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함께 맥주를 마실 것을 제안했다.
"왜죠?"
남자의 얼굴에 읽을 만한 표정 같은 건 없었다. 1, 2분 동안 그냥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남자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며들었고, 이번엔 그것은 입술 한쪽 가장자리가 비스듬히 올라가서 냉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른한 것 같기도 한 묘한 느낌의 미소였다.
"나하고 같은 데가 있으니까요"
"하아, 그럴 어떻게 알죠?"
"호출기 있어요?"
"음, 없어요"
"핸드폰도 없죠?"
"없어요."
"그것 봐요."
남자는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녀를 보고, 다음에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남자와 그녀는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무릎이 맞닿을 듯 사이좋게 앉았다.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시키는 목소리가 무언가를 끝없이 중얼거리는 듯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도대체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퍼커션의 리듬이 아니라면 이것이 음악이다. 라고 인식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노래일까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누가 알겠어요?"
"어째서요?"
"휴우, 저런 걸 누가 알겠어요?"
그녀는 킬킬 웃었다.
남자는 꾸밈이 없는 테도여서 그녀도 기분 좋게 얘기를 할수 있었다. 음악에 귀를 기울여 보려고 할 때 검은 슬립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메뉴판을 들고 왔으므로, 그들은 맥주 대신 위스키를 온더락으로 한 잔씩만 마시기로 했다. 두 사람 다 운전을 해야 했다.
주문을 받은 여자가 돌아가자 남자는 갑자기 말없이 '오리엔테이션'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으므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대칭 테이블과 의자의 형태, 구불구불 돌아서 각각의 테이블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실내 구조, 조명, 중앙의 입체형 프로젝터의 스크린으로 천천히 시선을 이동시켰다. 프로젝터에는 펫매시니의 <오프 램프> 재킷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하얀색으로 둥그렇게 선물 이루는 벽에는 각각의 배경 속에서 여행자의 모습이 침울한 분위기로 잡힌 흑백 사진이 골고루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태양은 구름 속에 숨어 있고, 모두 륙색이나 커다란 백을 메고 뺨의 뼈가 언 그런 모습으로, 여행자의 눈동자는 얼음 결정에 찔린 것처럼 반짝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는 모든 게 추워 보이는구나.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계의 특성처럼 어울렸다. 테이블 하나에는 카키색인 게 분명한 버버리 코트에 싸인 남자가 금방이라도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 것 같은 분위기로 불 속의 수프인지 죽인지를 스푼으로 떠먹고 있었다. 또 하나의 테이블에는 지하의 한 쌍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마주 잡고 연인의 느낌을 나누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다른 테이프에서는 여자 셋이서 무언가 얘기를 나누며 하나는 파르페를, 둘은 마르시노 체리가 가라앉은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스텐드 뒤의 검은 슬림 원피스의 여자는 오토 체인지 플레이어에 CD를 갈아 끼운다.
"저어, 무슨 일을 하세요?"
유리잔 속의 온더락을 가볍게 흔들고 한 모금 천천히 삼키고 나서, 그녀는 물었다. 남자는 질문을 생각하는 듯 고래를 갸웃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양 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뭐어,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욕망에 관하여 해부한 다음, 그리고 이익을 만들어 내는 거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욕망을 조장하는 그런 식으로는 일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저로서는 세계에 차 있는 식욕이라든가 성욕이라든가 하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수집하고, 가설을 세워서, 미래의 진행을 미리 시험해 보는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으음."
탁자 위에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는 이야기를 청취했다.
"어떤 식으로요?"
"빌딩 디자인을 하죠, 제 전문 분야는 특히, 셀 빌딩입니다. 자랑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셀을 배치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상을 받은 적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시간이 있으면, 취미삼아 인형 디자인을 하기도 합니다. 인형과 있으면 편안한 기분이 되거든요."
그녀는 미소 지었다.
"셀 빌딩에 대해서라면 저도 조금 아는데, 그건 어떤 아이디어였나요?"
"테제와 안티테제의 이음새 부분을 간단하게 시각적으로 영상화 시켰죠. 누구든 취향대로 3차원으로 테제와 안티체제 사이를 변환시킬 수가 있는 겁니다. 셀 빌딩에 대해서 아신다니 말씀인데, 지금까지는 테제는 동쪽 문에, 안티테제는 서쪽 문에 고정되어 있어서 번번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구조들이었으니까요."
"나쁘지 않군요. 경험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점에서요. 사실 셀 빌딩은 케이블 TV 같은 것에나 이바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입을 다문 채 살짝 미소 지었다.
"가스 오븐 레인지에도 이바지하고 있죠" 하고 그는 말했다.
"정말 나쁘진 않았죠. 하지만 테제와 안티테제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는 의미를 새기듯 천천히 말하고 나서, 유리잔을 들어 한 번 흔들었다. 유리잔을 잡은 다속 개의 손가락 마디들이 우산 살처럼 드러나고 물방울이 하나 툭, 하고 유리잔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흐름인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해 주었다.
"자아는 단련을 필요로 하는 거죠."
남자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자아는 단련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자아는 소외를 추구한다. 이제 자아는 셀 밖에서 원인을 구하지 않는다. 자아만의 특수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남자는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서 팔걸이에 팔을 괴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 뒤로 깊숙이 파묻혔다. 남자와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상대를 좀 더 잘 관찰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남자는 다소 말이 없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편이었고, 굉장히 예의가 바르고, 말을 할 때면 숱이 많은 직선의 눈썹이 이마 중앙 부분에서 위로 치며 올라가서 인상이 좋아 보였다.
"흠."
테이블 위의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주의를 톡톡, 환기시킨 후 남자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처음부터 묻고 싶었는데...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해요?"
어리둥절해져셔 작게 웃으며 그녀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카로니 그라팅"하고 말하고 나서 , "그쪽은요?" 하고 물었다.
"햄버거."
"후후, 햄버거도 음식이에요"
온더락 한 잔씩을 더 마셨다. 남자는 온더락에 자신을 비추어 보듯 잠자코 온더락 글라스를 응시하고 있다가 이따금씩 글라스를 들어서 조금씩 마시곤 했다. 그녀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멍청히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결코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꼭 조용해서라기보다는 어딘가에서 그녀와 마음 편하게 잘 융합되는 공간이 있는 것 같은 동질감, 그런 느낌이었다.
"우리,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갑자기 침묵을 깨고 들려 오는 남자의 말은 정말 불가사의했다.
저 남자는 이상한 표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취향이 있는 것 같다. '친구가 되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묘한 여러 가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피하며, 그녀는 가만히 무릎 위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친구란 하나도 없어요 " 하고 남자는 다시 조용하게 말했다.
"나도 친구 같은 건 없지만 그럭저럭 잘해나가고 있으니까요"하고 말하며 그녀는 곁에 있는 가방 속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잘은 모르지만, 가끔 누군가와 얘기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죠? 마음이라든지, 어둠이라든지, 식사의 취향이라든지,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는 일 말이에요. 누군가가 들려주는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 어떤 기분을 주었었나, 다 잊어버린 기분이에요."
"어차피 아무도 그런 얘기는 나누지 않아요."
담배에 불을 붙여서 한 모금을 후, 내 뿜고 나서 그녀는 말했다.
"오늘 난 누군가하고 싸웠어요. 왜 인지 알아요?"
"왜 싸웠죠?" 하고 남자는 물었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서 딱, 하고 뒤통수를 쳤거든요. 모두 이런 얘기를 나누는 거예요. 이런 얘기 따위 듣고 싶지 않죠?"
"정말이에요?"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에요."
그녀는 굳게 확인시켜 주었다.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 그녀가 눈을 들어 남자를 보았을 때, 남자의 눈에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구르고 있었다.
"그래도 좋은 얘기도 나룰 테죠"하고 남자는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좀 어리둥절해져서 테이블 모시리만 꼼짝 않고 쳐다보았다. 이건 뭐 완전히 새로운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기분이야, 그녀는 휴우, 한숨을 쉬고 실례하겠다고 그에게 말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스텐드로 갔다. 커피를 마시며 무언가를 읽고 있던 검은 슬립 원피스의 여자에게 메모지와 펜을 부탁했다. 여자가 건네 준 메모지를 받아들고 그녀는 종이 위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었다. 자신의 전화번호를 쓰는 일인데도, 적고 있는 그 번호가 자신의 번호가 확실한 것인지 생소한 느낌이 들어서 그녀는 한자 한자 적으면서 몇 번 숫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자리로 되돌아와 앉은 다음, 테이블 위로 가만히 그녀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밀었다.
"이건 내 번호에요, 괜찮다면, 시간이 날 때 전화해 주겠어요?"
"물론이에요."
남자는 메모지를 손에 쥔 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3. 샐러드 바
심리에 의해 배반당한 밤으로부터 깨어나지 못해 웅크리고 있다.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신경은 드드드득 갈리고 있었다. 신경을 웨이스트 트레이닝 머신에 걸고 시속 2백 킬로미터로 돌리고 난 것처럼, 신경은 갈기갈기 파괴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리였지만 심리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목욕탕으로 가서 찬물을 틀어 얼굴을 씻었다. 차가움, 손가락을 오므려 말았다.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거울 속으로 검은 하늘이 보였다.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하나 꺼내 들고, 냉장고 문에 기댄 채 뚜껑을 따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이미지의 변질은 그 대상을 부끄럽게 생각할 때 일어난다'고 바르트가 썼던 것 같다. 감정이란 것은 이해하는 차원은 아닌 것이다 하고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이해하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라져 버린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진정한 어린아이로서 꿈을 꿔봤던 게 언제였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막대 사탕을 빠는 아이가 꾸게 되는 그런 따스한 느낌의 일반적인 꿈이란 걸 그녀도 꾸었을까.
누군가 꿈, 하고 발음하면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인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어지는 것이다.
'트리아 졸람'을 사서 매일 밤 한 알씩 입에 털어 넣고 잠을 자던 때가 있었다. 꿈을 꾸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제나 같은 꿈이 반복되고 있었다.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엄마와 아버지가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듯하지만, 무슨 말인지 소리는 들리지 않고, 집안은 터질 듯한 긴장감이 조용히 고요 있는 듯한 광경. 이해할 수 없는 죄의식, 폭력, 병원으로 실려 가는 엄마, '슬픔'이 정원에 파묻히던 모습도, 순수한 휴지가 되어 구겨진 차체, 그런 것들이 두서없이 매일매일 반복되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울거나 하지 않은 채 그것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눈을 떠 보면 베개가 젖고 그녀는 울고 있었다.
인간은 상처를 받게 되면, 참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 그녀가 깨어 있다면 결코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울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으며, 그녀 자신도 무엇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울고 나면 머리가 아파와서 기분만 더 나빠진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이 나오려고 하면 중립적 사고라는 것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행동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관찰자처럼,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꿈에서도 그녀는 울고 있지 않다. 그녀는 어디에도 포함되거나 개입되지 않은 채 풍경처럼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깨어나면 울고 있었다. 그것도 찔끔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다. 얼굴이 눈물로 덮이고, 배개를 적시고, 그녀 안에 있는 물기란 모두 빠져 나가 버린 것처럼 지친 채로 누워 있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 아닌가, 억압된 심리의 반응 기제, 뭐 그런 따위의 설명을 붙일 수는 있겠지만, 좀 어리둥절해졌다.
'트리아 졸람'을 삼키고 자면 '토탈리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몇 푼의 돈으로 기억을 깨끗하게 지우고 꿈 같은 거 없는 몇 시간의 단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산타에게서 과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행복했지만, 애당초 '트리아 졸람'따위로 실재하는 인생에 대항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맥락이 부분부분 끊어지는 의식을 끌고 다니는 여자에게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마련이고, 그런 여자애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병든 닭처럼 창가에 앉아 푸딩을 파먹으며 스푼 손잡이의 무늬를 멍청히 바라보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카메라 속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의사는 일어서더니, 카메라를 끄고 연민을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먼저 '트리아 졸람'을 먹지 마라. 너는 꿈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겨야 한다.
꿈과 싸움을 하다니, 그런 엄청난 위험을 그녀가 감당하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그 진단은 그녀를 두 벽 사이에 끼워 넣고 양쪽에서 짜부러뜨리는 꼴이었다. 분명 그녀의 즙이 토마토소스처럼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병원을 나와 혼자 비참한 기분으로 거리를 걸었다. 그녀가 벽 사이에 어떤 상태로 쭈그러져 있건 하늘은 흘러가고 있었으므로 눈물이 나왔다.
'사물은 정확하게 자신의 진행 법칙을 따르고 있구나'하고 그녀는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현실은 애초부터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게 되어 있을 뿐이었다. 바보처럼 울고 있어 봤자, 자신만 너절한 꼴이 될 뿐인 것이다. 필요한 건 견뎌낼 수 있는 그녀 내부의 힘을 기르는 일이라고 그녀는 결론 내렸다.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옷을 끼워 입고 수영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집을 나왔다. 차가 세워진 곳으로 다가갔을 때, 그녀의 차는 밤새 누군가에 의해 폭력을 당해 멋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양쪽 헤드라이트 두 개가 모두 박살 난 채 잔해가 주위를 뿌려져 있고, 와이퍼는 부러진 채 하늘을 향해 아낌없이 팔을 벌리고 있었다.
이렇게 분명한 악의가 뻗쳐올 만한 잘못을 그녀가 저지른 기억이 없었다. 굉장히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타이어 펑크까지 내지 않고 이 정도에서 만족해 준 데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수밖에,
분명 여러 가지로 기분이 좋지 않은 아침이었다.
혹시나 하고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회사에서는 전화도 사람도 오지 않았다. 의심을 받으면서 해명하기 위해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런 유의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지냈을 정도로 그녀의 삶은 소박했다.
아주 아주 소박해서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도,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아주 조용하고 간단한 삶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에게도 어김없이 일이란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기다리다 포기하고, 텔레비젼의 7시 뉴스를 틀어 놓고 밥을 먹었다. 방송이란 분명 사람들의 허약함을 쪼아 먹는 독수들처럼 소모적이다. 최소한의 존재감 따위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런 무의미함으로 방송 경제는 가득 차고 흘러넘친다.
소시민 근성이 옹호할 만한 가치인지 그녀로서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알 수 없는 테마다, 하지만 모두가 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소시민성이 제대로 된 삶이라고 서로 위로하는, 그런 건 좀 창피한 일 아닌가. 그러한 자아로 세상은 지탱되고 있는 것인가? 그녀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말 첫머리에 '마'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연결사인지 감탄사를 반복적으로 연발하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화면 속의 저 남자도, 나름대로 자신의 자아에 프라이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저런 자아가 그녀에게로 향해 있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마음이 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의 자아는 어떤가, 누구도 그녀의 자아를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누구에게 그녀의 자아가 향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그릇을 씻어 접시 걸이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엷은 스모그가 찬찬히 깔린 강변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드라이브를 즐기는 토러스 한 대가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너바나의 음악을 들으며 핸들에 한 손을 엊고 기계의 음울한 진동을 느끼면서, 플라타너스와 버드나무 가로수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계속해서 달렸다.
침묵의 사막을 관통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이드미러를 조각조각 산란시키면서 뒤에서 맹렬하게 달려온 한 무리의 차가, 긴 빛의 꼬리를 끌며 그녀 옆을 심해 속의 물고기처럼 날렵하게 스쳐 질주해 겄. 그녀의 란트라는 아직 무리라구요 하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타고 있는 란트라를 그녀는 3년 전에 구입했다. 다른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소비를 우아하게 진화시켜 가고 있든, 그녀는 차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전 따위도 배우지 않았다. 필요하면 배운다. 하지만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필요하면 그때 가서 배우면 될 일이었고, 차 같은 것 없이도 사는 데 불편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그녀 나름의 양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차를 운전해서 혼자 여행을 다녀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여행할 때면 따라다니는 가까운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살피는듯한 시선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고, 아주 홀가분할 것 같았다. 내키는 대로 좀 더 깊은 곳으로 다녀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 즉시, 자동차 판매 지점의 직원과 접촉해서 그 자동차회사에서 생산되는 차들의 카탈로그를 훑어본 다음 다크 불루 란트라고 결정했다. 사스식 충격 흡수기를 옵션으로 달아주고 DOHC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녀가 DOHC로 해달라는 말에, 판매소의 직원은 "꼭 회사의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한 말씀 드리자면, DOHC로 하셔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요?"하고 말했다.
"물론 회사로서는 DOHC를 파는 것이 이익도 많고 좋지요. 하지만, 이 나라 어디서 DOHC로 달려 볼수 있겠습니까? 쓸데 없이 소음만 크고 연료 소비는 많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정직하고 제대로 생각할 줄 아는 그런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DOHC로 하겠다고 말했다.
"저는 아주 아주 험한 곳으로 다니게 될지도 몰라요. 어딘가 깊은 곳으로 처박힐는지도 모르구요, 그러니까 엔진의 힘이 아주 강해야 해요."
남자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는 여자애군, 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차를 주문하고 나자, 운전 교습소로 가서 등록을 하고 다음 날부터 운전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이것저것 명칭을 들으며 첫날 운전석에 앉아서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조금 겁이 났지만, 이틀이 지나자 운전이란 것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들과 브레이크의 감각만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되면, 의외로 간단한 테크닉이었다. 7시간 동안 교습을 받고, 등록해 놓았던 순서가 왔으므로 운전 필기시험을 봐서 합격하고, 10시간 동안 교습을 바았을 때 실기 시험을 보았다.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경험이다 생각하고 부담은 없었다.
불과 10시간 동안 교습을 받고 합격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아침에 코스 시험에 합격하고 오후에 주행 시험에 합격했다. 간단했다.
그녀에게 교습을 해주었던 운전 선생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가자, 그는 웃으면서 "보기보다 겁이 없군." 하며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치 무서운 일을 당해 봐야 제대로 정신을 차리겠군, 하는 표정 같았다.
차가 나오자, 그녀에게 차를 팔았던 직원이 서비스라며 실제 도로에서 몇 시간인가 운전 연습을 기켜 주었다. 그에게서 도로를 타는 요령이라든지, DOHC의 브레이크와 엑셀러레이터를 다루는 법, 차에 달린 미러들을 활용하는 법, 다른 차에게 신호하는 방식과 같은 것에 관해 지도와 조언을 들었다. 설명도 매너도 산뜻한 남자였다.
그리고 운전 지도책을 한 권사서 며칠 동안 도로를 익히고, 스케줄을 짜 본 다음 여행에 나섰다. 그리고 첫날 국도에서 꽝, 하고 사고를 냈던 것이다. 아주 큰 사고였고 예기된 사고였다. 급커브에서 속도를 제대로 줄이지 못해서 밀려 나가 다리 레일에 처박힌 차에서 빠져나와 지나가던 차의 도움으로 레커를 부르고, 보험사에 연락해야 했다. 란트라는 공장에서 1주일 만에 나왔다.
그 후 란트라의 엔진은 좀 무거워져 버렸다. 아무래도 감도가 떨어진 것이고, 바람 소리도 심해진 것 같고, 승차감도 좀 우둘두둘하다. 그래도 사고를 함께 겪고 난 후, 란트라에 타고 있으면 아주 편안하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아무튼 꽤 오래 생사고락을 함께한 것이다.
DOHC 엔진이 알맞게 달궈진 느낌이 액셀러레이터에 올려진 발을 통해 느껴져 왔다. 이런 상태가 되면 브레이크와 액겔러레이터는 발이 가까이 가기만 해도 착 달라붙어 저절로 움직이나. 분명히 느낄수 있다. 속도계가 어느새 160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부우웅, 뜨는 느낌이었다.
때때로 이러한 긴장감에 의해 그녀는 격려를 받았다. 그녀처럼 긴장도 흥분도 없는 인생에게는 이런 격려가 자연의 법칙처럼 필요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위태롭긴 하지만, 확실히 뭔가 확 뚫려 버리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차갑게 식은 커피를 플라스크 하나 분량 줄곧 마시고 담배를 계속해 피우면, 심장이 수축되는 느낌이 들고 육체가 내부의 어떤 정점을 향해 수렴이 되는 듯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이다. 무한대로 수렴되어 더 이상 농축될 수 없는 밀도 상태, 폭발 위기일발의 초신성 같은 극점에 다다르면, 더 이상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이 별들을 스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둠과 속도의 터널을 아무리 흘러가 봤자, 그녀가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유감스럽게도 지구의 표면에 불과하다. 그것이 현실이었고, 그녀다운 것 같기도 했다. 회색 벽이 빠른 속도로 옆을 스쳐 지나간다.
차를 몰고 기내로 들어와서 차를 유료 주차장에 세워두고, 바닐라라마 쇼핑가를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걸어 다녔다. 파스텔 색조의 네온사인이 반짝반짝 빛났다.
드라이어즈에 들어가 초코칩 아이스크림을 사서 그것을 플라스틱 스푼으로 떠먹으며, 별 생각도 없이 이것저것 물끄러미 쳐다보며 돌아다녔다. 가게를 기웃거리고 가판대 위의 잡지를 구경했다. 레코드 가게에 붙어 있는 새 디스켓 목록을 훑어보고, 거리 오른쪽을 구경하고 다시 반대쪽을 구경하면서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외국 도시에서 혼자 관광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 별다를 것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러고 있으면 따분하지는 않았다.
문득 샐러드 바 앞에서 그녀는 멈춰섰다. 유리창을 통해 대략 50미터는 될 것 같은 길이로 샐러드가 탐스럽게 담아진 볼들이 ㅌ하나 없이 죽 늘어서 있었다.
호기심이 생겨서 샐러드 바 안으로 들어갔다. 바 안의 원을 따라 진행되는 샐러드 볼을 따라 가며 50미터를 채우고 있는 야채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그녀에게는 도대체 50미터를 채울 만한 채소가 상상이 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림으로라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도저히 떠 올릴 수가 없다.
샐러드의 세계를 다 돌아보는 데 15분이 걸렸다. 막 구운 머핀과 이태리 빵으로 채워진 델리 코너와 음료와 수르 코너를 제외하면, 샐러드 바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이는 프래시 야채들의 편대였다.
구경을 하다 보니 그들의 독자성을 감복하게 되어서 핀셋을 들고 시베리아 청경채, 미니옥수수, 수세미, 무화과를 집어 올려 접시를 담았다. 기리고 해바라기 씨를 한 움큼 접시를 옮기고 테이블 하나에 앉아서 그것들을 공평하게 하나씩 집어 시식했다. 납득할 수 있는 맛도 있었고,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맛을 가진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솔직히 도저히 삼킬 수가 없는 알력을 입 안에 남겨, 냅킨에 뱉어 버려야 했다.
모든 것을 초월한 것 같은 얼굴들이 띄엄띄엄 테이블에 앉아 채소를 먹고 있는 샐러드 바는 적막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각자 자신의 둘레에 적막의 원을 하나씩 컴퍼스로 그리고 원의 중앙에 앉아, 원 밖의 세계에는 최소한도밖에 관여하지 않는 야채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의 세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외가 1인치 1인치 쌓아 올려져 봉쇄하고 있다.
샐러드 바를 스쳐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해바라기 씨를 손톱으로 하나씩 하나씩 볏겨 먹었다.
샐러드 바에서 10시까지 시간을 보내다 졸려서 나왔다.
집에 들어서자 겨우 존을 씩소 이빨을 닦고, 파자마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자마자 침대로 파고 들어가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램프 불빛을 받으면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톱 끝까지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몸살인 게 틀림없었다.
약을 먹기 위해 바닥으로 내려서자, 머릿속에서 누군가 볼링공을 굴리는 것처럼 머릿속의 뇌가 이쪽저쪽으로 달그락달그락 굴러다녔다.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평형을 되찾고, 파자마 자락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책장을 향해 걸어갔다.
소파 옆을 지나가는데, 잡고 있는 파자마 자락 천 위로 무언가 돌출된 것을 느꼈다. 파자마 주머니에 뭔가 들어 있는 것 같았지만, 만져 보아도 도대체 무엇인지 돌출된 부분의 느낌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주머니 손에는 기이하게도 코르트 마개를 따는 스크루 드라이버가 들어 있었다. 어딘가에서 와인을 살 때 넣어준 증정용인 듯, 희미덕덕한 색깔의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스크루 드라이버였다.
언제 와인을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스크루 드라이버 같은 것을 왜 파자마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지 그녀로서도 모를 일이었다.
스크루 드라이버를 손에 쥔 채, 책장 서랍의 아스피린 병에서 아스피린 두 알을 손바닥에 꺼냈다. 부엌으로 가서 손을 뻗어 천장의 식탁 등을 잡아당겨 불을 켜고, 물과 컵을 꺼냈다.
의자에 앉아 손바닥을 쭉 펼치자, 오렌지 불빛이 손바닥 위의 하얀 알약 두 조각을 비췄다. 동그란 새하얀 알약에 마호처럼 새겨진 문자가 보이고, 그것을 보고 있자 머리가 쿡쿡, 아프다.
아스피린은 말도 꺼내지 마,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을 겁에 2분의 1가량 채우고, 손에 ㅈ 아스피린 두 알을 컵 속으로 떨어뜨렸다. 단단해서 잘 녹지 않는 알약이 물속으로 천천히 풀어져 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아픈 거야?' 하고 마음이 묻는다.
'웅,'
'부탁이야, 너를 발 돌봐 줘.'
'하지만 정말 아스피린은 끔찍해. 그래도 어쩔 수가 없지, 아스피린처럼 나에게 친화적인 건 없어.'
'이렇게 생각해봐, 나는 어떤 것이 맛이 없어도 먹는 연습을 한다. 백번쯤, 그래도 맛이 없으면 그때부터는 먹지 않겠어. 하고 무엇이든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왜?'
'노력하지 않는 인간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해, 알아? 착지할 곳이 없다구.'
'상관없어.'
모서리가 둥글게 깎여 나간 아스피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컵을 들어 바닥까지 마셔 버리고, 물을 다시 한잔 따라서 마셨다.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끌어 올리고 웅크리고 누웠다. 그제서야 스크루 드라이버를 아직도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디오 시계의 초침은 빈틈없이 스르르 돌아가고 있었다. 새벽 1시 40분, 아직은 깊은 시간이었다.
내일은 수영을 쉬어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이 뼈 마디마디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딱딱한 느낌이 붙어 있는 잠이라서 몸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이쪽저쪽 돌아누우며 잠에 부딪혔다.
그때, 놀랍게도 전화벨이 울렸다. 한밤중의 벨 소리에는 기다란 파장이 느껴졌다. 누굴까? 눈을 감은 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이런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할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시간에도 그렇지만 밤에 그녀에게 전화할 만한 관계를 그녀가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전화벨은 어쩐지 비밀 요원들의 비상 암호처럼 울리고 있었다. 받아, 받아. 받아.
그녀는 손을 뻗어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체중계의 바늘이 돌아가는 것 같은 침묵밖에는, 그녀는 다시 한번 혼자서 '여보세요' 하고 말했다. 수화기는 텅 빈 느낌을 준다. 하이파이브 고감도 공허를 전달한다. 그녀는 공허를 귀에 대고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여보세요?"
묵묵히 기다리고 있자 누군가 말했다.
"내가 깨웠어요?"
말투만으로도, 셀 빌딩 전문가라던 남자임을 알 수 있었다.
"아, 당신이었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니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신경 쓸 만큼 대단한 잠도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해 주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망설였지만, 말을 할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죠. 정말 아무도,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쉐이빙 크림으로 얼굴을 가득 채우고 면도도 하고, 맥베스의 대사도 외우고, 손도 여러 번 씻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드 브레이크를 끼워입고 밖으로 나와 달을 등지고 조깅을 했죠. 그런데도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시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기분 느껴 본 적 있나요, 시간의 바다에 빠진 기분 말이에요, 시간이 제곱, 세제곱, 네 제곱으로 무한으로 부풀어 오르는 듯한 기분 느껴 본 적 있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분명 아인슈타인은 이런 시간에 시간 방정식을 깨달았을 거예요. 아인슈타인의 고독을 느낄 수 있는 기분이거든요."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닌 듯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 당신의 전화번호를 봤죠, 숫자들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고 있더군요. 마치 하이힐 소리처럼, 그래서 햄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전화번호에게 줄곧 얘기를 했죠."
그녀는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라구요?"
"오늘 있었던 일이라든가 뭐 그런 거"하고 남자는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알고 있어요"하고 그녀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게 되었다. 미안하다. 그거죠?"
"맞아요. 그것이 핵심."
"아무튼 괜찮아요. 말했죠? 아무래ㄷ 상관없는 잠이라구요. 아무 때나 잘 수 있는 그저 시시한 잠이었어요. 그건 깊은 잠도, 편안한 잠도, 아니였다구요. 그러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 되죠?"
"좋아요. 이제 신경 쓰지 않겠어" 하고 남자는 말했다.
"어디죠?"
"전화박스"하고 남자는 대답했다.
"집에서 나와 차를 달리다가 내려서 다이얼을 돌려 봤어요."
"그리고 갑작스런 침묵이 흘렀다. 싱거운 침묵.
배경이 내는 소리가 담겨져 전해져 왔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쉬며 기다렸다. 침묵은 축적되어 간다. 부쩍부쩍 축적되어서 그곳에서 사슴이 뛰어놀아도 될 것처럼 길게 뻗어간다.
"죽음을 지켜본 적 있어요?"
남자가 어쩐지 기묘하게 텅 빈 음성으로 물어왔다.
"물론"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이래 봐도 제법 많은 것을 겪은걸요."
"누구였어요? 죽은 사람 말이에요."
"제법 경혐이 많다고 그랬잖아요, 첫 번째는 슬픔."
"슬픔?"
"집에서 기르던 개에요."
"개 이름치고는 독특하군요."
남자는 희미하게 웃는 소리를 낸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었어요? 무슨 일 있나요?"
"그냥, 그저 물어봤어요,"
"아, 무언가를 손자만 간직하고 있으면 밤에 악몽을 꾸는 거에여. 난 그쪽에 전문가라구요"하고 그녀는 살짝 돌려서 물어보았다.
"그저 줄곧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예를 들어, 어떤 것들?"
"자신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했죠"
"어떤 점이?"
"모든 것이 다."
휴우, 그녀는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기댄 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누군가와 밤에 전화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머리가 다시 쿡쿡, 아파오고 있었다.
"있잖아요, 집으로 돌아가서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그다음에는 뜨거운 걸 한
잔 마시고 푹 잠을 자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분명히 내일 아침에는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자고 나서도 풀어지지 않는 거라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거예요."
"알았어요. 자고 나서 생각한다."
남자는 의미가 걸여된 어구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몇 초 후 다시 말했다.
"신경 쓰지마, 친구와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은 아니다. 라는 기분은 퍽 안심이 되는 거군, 사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비행을 하며 비행기 속에서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윙 고독한 모터가 돌아가죠."
그녀도 이해할 수 있다.
"너무 오랫동안 일상성을 잃어버리고 자신만의 침묵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테죠. 뭐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혼자 수염을 깎고 밥을 먹는 일도 좀 질리는 기분이거든요."
"또다시 기분이 나빠지면 마음 놓고 전화해요."
"고마워요" 남자는 말하고서 "이제, 잘 자요"하고 덧붙였다.
"안녕,"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엎드려 손등에 볼을 얹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했어야 했을까, 잘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푸른 달빛이 불안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저 푸른 달빛 아래 덜덜 떨며 혼자서 전화박스에 들어 있을 남자를 생각해 보았다.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그녀의 한숨이 휴우, 하고 새어 나갔다.
4. 폭스 멀더와 데너 스컬리
커튼에 의해 차단된 희미한 어둠 속에 누워서 그녀는 바깥 세계의 소음을 분석해 보았다. 커튼을 통해 비치는 빛으로 창밖의 세계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늘에 전기 드릴을 수직으로 꽂고 파들어 가는 듯한 헬리콥터 모터 소리가 간헐적으로 계속된다. 오늘 무슨 훈련이 있는 날인가? 왁왁, 하는 새 한 마리 소리도 났다.
본질과 포말이 분명치 않은 저 소리의 덩어리는 아마도 무엇이든 현상으로서 어떤 진지한 역할을 맡고 있겠지, 그밖에 별다른 소리는 잡히지 않았다.
손을 뻗어 라디오의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시계가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휴우, 한숨이 나왔다. 기분이 나쁘다. 지나치게 늦게까지 잤다. 이럴 때면 언제나 그녀 안에 불순물이 끼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 상태는 괜찮은 것 같다.
버튼을 누르자, 그녀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방안에 10시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뉴스에서는 살해된 관광객에 대해 전한다. 관광하러 이 도시에 왔던 누군가가 얼마 전에, 차에 설치된 폭탄이 터져서 죽었다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누군가가 죽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고 있을 만큼의 권리는 있을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드바이즈 다이아몬드'의 상표였다. '드바이즈' 덕분에 아파르트헤이드는 늙지 않고 몇백 년 동안 생존했을 것이다. 결국 '드바이즈 다이아몬드'를 구입한 세계인들은 모두 아파르트헤이드의 비밀 스폰서였던 셈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 '시장원리'일 것이다. 그녀는 침대 밖으로 나와 창에 쳐진 커튼을 활짝 걷었다. 훌륭한 날씨였다.
환한 태양이 강하고 따스한 빛으로 그녀를 비추었다. 아파트의 전경은 평온하고 거의 소음이 없었다. 봄 가지치기를 하는 시제복을 입은 남자들만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표 사이에는 밝은 적운이 군데군데 떠 있었다. 그녀는 하품을 하고 잠옷을 벗어 버리고 방안을 가로질러 목욕탕을 갔다.
잘 말라 바삭바삭한 냄새가 나는 하얀 면 원피스를 꺼내서 어깨에 걸치고, 듀크 앨링턴을 들으며 빵 한 조각과 커피를 마셨다. 기분이 나아져 있었다.
하얀 웨이스트의 빛바랜 원피스 사이로는 공기가 술술 드나들어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 같은 가벼움이 느껴졌다. 공중에 매달려 휘날리며 마르고 있는 옷이 된 느낌이 들었다.
두 팔을 엇갈려서 손가락 끝으로 양팔을 지그시 잡아 보았다. 따뜻하고 매끄러운 살이 타인의 살처럼 야릇한 느낌을 일으킨다. 냉장고로 가서 맥주 하나를 꺼내 소파에 앉아 마셨다.
튜크 앨링턴의 <솔러튜드>가 쓸쓸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슬픔을 모른다 라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는 조금 슬프다고 생각한다. 왜 슬프냐고 한다면... 이유 같은 것이 없어서 슬프다,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슬프다. 그런데도 아침에 일어나고 일을 하고, 이상한 일도 당한다. 상처를 입고, 섹스를 하고, 밤에 차를 몰고 도시를 배회하고, 그런 다음에는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회사에서 전문가가 찾아왔다. 그들은 분명 굉장한 전문가일 것이라고, 그들이 집으로 들어와 움직이는 것을 칼끝처럼 하나하나 느끼며 그녀는 생각했다.
두 명의 전문가는 여자와 남자 한 쌍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둘 다 더블 바지 슈트를 입은 모습으로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와서 더블 버튼을 풀어 재킷을 소파 한쪽에 벗어 놓았다.
그들은 가을 다람쥐처럼 부지런히 네모난 박스에서 장비를 꺼내 설치하고 그녀의 컴퓨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본체뿐만 아니라 모니터와 키보드, 심지어는 마우스와 모뎀이 연결된 전화선과 소켓까지 박살 냈다.
10분도 안 돼서 그녀의 방은 검시관이 해보한 시체처럼, 내장 같은 무기체들이 방 안 가득 널렸다. 윤곽조차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단일체 상태로 돌아가 버린 그것들은 처량 맞고 상실되어 보였다.
그녀는 그들에게 커피를 끓여서 갈릭 빵과 함께 대접했다. 그들은 "미안합니다"하고 커피와 빵을 사양하지 않은 채 맛있게 먹었다. 그녀는 되도록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부엌 테이블에 앉아 얼마 전에 산 스체판 크레인의 <용감한 빨간 배지>의 첫 페이지를 읽었다.
가끔씩 눈을 들어 그들을 보면, 그들은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남자는 분해된 것들을 다시 분해하는 듯했고, 여자는 감지기로 보이는 것으로 무기체 위를 더듬었다. 원심분리기 같은 데 돌리는 유리 튜브들을 잔뜩 꺼내 놓고 화학약품을 바르기도 했다. 그들은 가끔씩 수첩에 기록을 하며 조용히 의견을 교환하는 듯했다.
그들은 매우 성실한 인간들 같았다.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10년이고 20년이고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때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들은 정말 일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들이 일하는 모습에는 질서와 힘과 통찰력이 느껴졌다. 잡담이나 하며 하는 그런 시시한 일과는 질적으로 달라 보였다.
그들은 마치 <X 파일>에 나오는 폭스 멀더와 대너 스컬리처럼 멋진 한 쌍으로 보였다. 멀더와 스컬리처럼, 그들도 사물에 대한 접근 방식이 명확히 다르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정말 멋진 '팀'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그녀는 팀, 하고 생각했다.
두 사간쯤 후 그녀가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다 왔을 때도, 여전한 자세로 그들은 있는 힘껏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들은 자꾸자꾸 일의 범위를 확대시켜 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커피를 한잔 더 마시려고 일어나자 남자 쪽은 분해했던 것들을 복구시켜서 코드를 모두 전 상태로 이은 다음 소프트적인 테스트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남자가 그녀의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동안, 여자는 땅속에 묻혀있는 지뢰를 탐지할 때 사용하는 것처럼 생긴 장치를 들고 미터기를 조정하며 집안의 벽을 훑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에는 그녀도 조금 불쾌해졌다. 그녀의 방을 무슨 소굴로 여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항의를 하려다가 그녀는 그만두고 말았다. 부질없는 짓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좀 더 어렸던 시기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히 여러 가지 어휘를 사용해서 항의하고 반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빨리 자유롭게 혼자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밖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어서어서 일을 마치고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혼자 있게 해달라고 조용히 빌었다.
무와 다시마와 어묵과 곤약을 넣고 간단히 냄비국수를 만들어 그들에게 함께 먹자고 권했다. 그들은 사양했다. "3인분을 만들었는걸요. 멋진 음식은 아니지만 먹어 주세요" 하고 그녀가 말하자 그들은 사양하지 않고 부엌으로 건너와 테이블에 앉았다. 셋이서 말없이 냄비국수를 먹고, 여자와 그녀는 커피를, 남자는 아이스티를 한 잔씩 더 마셨다.
그들은 그 후로도 2시간 50분이나 더 일한 다음 마침내 주섬주섬 장비를 박스에 집어넣었다. "미안합니다" "대접 고마웠습니다" 하고 그들은 문 앞에 서서 사이좋게 한 마디 인사말을 하고, 하얀색의 꼭 앰블런스처럼 생긴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돌아가 버렸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그녀가 담배 하나를 피우고 샤워를 하고 나오자,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기계적으로는 이상이 없다"고 그들이 보고했다는 것이다. 집안도 깨끗했다고 말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물론 무언가가 감지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이 테스트하기 위해 보낸 샘플이 회사 컴퓨터로 깨끗하게 수신되었다."고 회사 사람은 말했다. 그러면 그녀도 다시 한번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무언가는 확실해지겠지요."
적어도 문제의 소재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는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암호를 입력하고, 만을을 위해 저장해 둔 지난번 작업내용을 꺼내서 곧바로 전송시켰다. 5분후, 키보드를 쳐서 회사에 문의했다.
"수신되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
모니터에는 그렇게 간단하게 찍혔다. 문제는 분명 그녀에게 있다고 그녀는 모니터 안의 문자들을 노려보면 생각했다.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수신은 끊겼다.
걸레로 마루를 오랫동안 문지르고, 손을 씻고, 파자마로 갈아입고, 머리에 브러시를 했다. 그리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 누워 그녀는 가만히 머릿속으로 상태를 정리해 보았다.
5. 그와 왕자
의식이 무언가에 의해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눈을 감은 채로 라디오 시계의 알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어제 힘든 시간을 보낸 터라 오늘은 늦게까지 자기로 했던 것을 그녀는 떠올렸다. 다시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였다. 그녀를 깨게 했던 것이 첫 번째 신호였을 것이고, 이것이 두 번째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예민한 편이다. 소리 같은 걸 놓치지는 않는다. 겨우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이렇게 이른 아침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가 올라 없었다. 분명 잘못 걸려 온 전화일 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잠을 깨다니, 그러나 회사나 셀 빌딩 전문가가 전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베개를 끌어당겨 머리를 처박고, 응답기가 돌아가도록 놓아두었다.
찰칵, 삑
"여보세요."
저 목소리, 저목소리가 누구지, 분명 셀 빌딩 전문가는 아니지만 누군지 알 듯한 목소리였다. 머릿속에서 사운드 영상이 올라가고 내려가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후."
전화 속의 목소리는 응답기를 상대로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저하는 모양이었다. 베개를 머리 위에서 치우고 몸을 숙여 사이드 테이블 위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야."
그래, 알 것 같았다.
"형이에요?"
"그래"
"형!"
소리 없는 웃음이 느껴져 왔다. 그가 거기서 그렇게 웃고 있었다.
스카이의 창가에 앉아 있는 그의 옆모습은 그다지 변한 것 같지 않았다.
지구 전체가 보수로 회귀했고, 여기저기 정치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들이 스쳐 사라져갔고, 사람들의 눈은 무뚝뚝해지다가 서서히 조용해졌다.
잠이 오지 않는 밥, 무기력감, 자질구레한 생활의 수면이 그리는 궤적 속에 빠져서 어쩔 수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누구도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콜로세움 같은 저능한 탐욕이 일상을 진행시켰다. 마음 쓰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존재 가치로서는 너무나 하찮은 것인 만큼 대단했다. 대단하다는 것은 비탈길을 굴러떨어져 내리는 그것의 괴력을 누구도 무엇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안녕."
테이블 곁에서 인사를 하자, 창으로부터 긔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돌려졌다.
"안녕."
입을 다문 채 몇 초인가 그들은 조용히 눈길을 부딪치며 웃었다. 무언가를 얼굴에서 찾고, 사소한 것이라도 세월을 느끼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 말하자면, 30대로 들어서는 내적 에너지의 얼마간의 상실이 얼굴에 피할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미소의 한가운데서도 쓸쓸한 그늘이 걸려 있고, 무엇이든 비쳐 보일 것 같던 '반짝'하는 눈빛은 조용하지만 어딘지 뿌연 안개가 서린 듯이 변해 버렸다. 머리는 자연스럽다기보다는 꽤 멋지게 뒤로 넘겨져 있고, 드높은 노래가 흘러나오던 입술은 조용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언제 온 거야?"
의자에 앉아서 그녀는 물었다.
"얼마 안 됐어."
"어디에 있어? 집에?"
"아, 그만둬, 아파트를 빌려서 살고 있어."
그는 엉터리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가슴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여자와 함께?"
그녀는 엣 기분을 느끼며, 놀리듯 턱을 내밀고 물어보았다. 그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 "잘 지냈지?"하고 물었다.
"응, 형도 잘 지냈지?"
"잘 지냈어."
눈을 마주치고 둘은 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몇 년 전 그가 갑자기 잠적하듯 떠나 버리고 난 후, 이런 친밀감은 오랜만이다. 엄마와 아버지가 그녀와의 시간을 끊어 버렸고, 언니가 캐나다인가로 떠나 버렸고, 그리고 그녀의 주위에 있던 유일한 존재이던 그가 떠나 버렸었다.
"하는 일은?"하고 웨이터가 식탁을 차리고 있는 테이블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그가 물었다.
"내 하루의 일과"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이구 또 시작이야? 하는 듯 그는 픽 웃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랜만에 옛날처럼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상황을 고하는 사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수영을 해, 다른 운동도 있지만 수영을 하는 이유는, 수영은 익숙하고 또 혼자서 즐길 수 있기 때문이야. 수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8시쯤, 아침을 먹고 일을 시작해. 1주일에 한두 번은 스포츠클럽 근처에 있는 '비틀'이라는 카페에서 아침을 먹기도 해. 작은 카페이지만 소스가 최고야. 언제 한 번 같이 가봐. 일은 잘 알고 있지? 외자계 시스템 개발사에서 계약직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어. 프로젝트에 따라 회사에서 컴퓨터로 보내주는 자료와 프로그램이 지침에 따라 집에서 작업하고 있어. LAN을 통해 온라인 상태로 무엇이든 이루어지니까 회사에는 갈 필요가 없어. 자료를 가지고 시스템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하는 첫 단계를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쉬운 일이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적응되어 가고 있어. 프로젝트와 프로젝트 사이의 스케줄을 조정하면서 휴식 시간을 가져. 일단 일에 들어가면 전체 스케줄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끝내기 전에는 개인 시간은 가질 수 없어. 그렇지만 한 가지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꽤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 참아. 참을 수 있어. 간단하지? 이것이 나야. 나라는 인생의 결정체. 그런데 이것도 좀 흔들리게 생겼지만 말이야. 하지만 대체로 그래 지금까지는 그래왔어."
그는 후후, 웃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수영을 한다구? 왠지 믿을 수 없는 기분인데?"
"물론 아무도 6시에 일어나라고 강요하지 않아,. 하지만 나도 사는 방식을 바꿨다니까."
음식이 나온 다음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밥을 먹었다. 낮게 목을 울리는 웃음소리, 소곤소곤거리는 듯한 말소리, 스테인리스 스틸 같은 것에 부딪힐 때마다 트라이앵글처럼 울리는 도자기 소리, 크리스털의 마찰음, 바로크 화성음의 깊고 둔중한 바이브레이션, 그런 것들이 분간할 수 없는 덩어리로 실내의 공기를 무겁게 꽉 채우고 있었다.
겨우 그들이 차지한 테이블 조각만 한 영역만이 소리를 삼켜 버리고 무거운 침묵이 떨어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몇 분 만에 더 지치고 무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 내 소리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뒤얽힘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일은 좋아?"하고 그녀가 침묵을 깨며 물었다.
"괜찮아."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땠어?"
"주말에는 북해에서 고기를 잡기도 하구, 극광도 구경하고, 눈 속에 파묻혀 스키도 타고, 백야라는 걸 경험하기도 하고, 뭐 여기와는 좀 다르지."
"괜찮은 시간을 보낸 것처럼 들려."
"매일 북극만 바라보는 일이야"하고 그는 식탁에 한 팔을 괴고 어쩐지 텅 빈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너는 정말 편안해 보이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하는 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글세,. 난 말하자면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 별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별다르게 요구하는 것도 없으니까 사건 같은 것도 없고."
"잘 됐어. 그렇게 지내는 것이 좋아."
그녀는 그들 쳐다보았다. 그는 손에 든 와인 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나, 가끔 생각했어. 형은 아직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하고."
이태리 남자처럼 머리를 빗어 올린 웨이터가 멋있는 포즈로 두 개의 텀블러 잔을 채워주고 지나갔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그녀는 물었다.
"말도 안 돼."
접시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는 입가를 구기며 웃었다. 입가를 따라 경련 같은 웃음이 오랫동안 남았다.
"지독했던 곳이야."
그는 고개를 몇 번인가 흔들었다.
"그래도," 말이 잘 나와 주지 않았다. "그리도, 어쩐지 슬퍼 보이는걸."
"돌아갈 곳은 없고, 빛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니까"하고 그는 말했다.
그들은 묵묵히 밥을 먹었다. 서로 자기 생각에 빠져... 허리에 생각의 무게를 떠받치고 앉아... 접시만 바라보고 있었다. 접시에 부딪히는 나이프와 포크 소리만이 예민하게 두 개의 존재 사이에서 흩어졌다.
"이를테면 나는, 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다지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지 못해. 아직도 화를 내고 있거든,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을까? 죽을 만한 그런 가치가 정말 있기는 할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아직도 밤이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말이야, 지독한 말과도 다르고 그냥 지독한 짓과도 다르잖아? 사람들이 죽었어. 사람들이 죽고, 자본은 강화됐어. 그리고 삶은 흘러가고 있어. 일을 하거나 피곤할 때는 괜찮아 그런데 혼자서 마음 놓고 쉬려고 하면 어김없이 그런 것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는 스테이크 위로 머스터드를 몇 번씩이고 끼얹으며 말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테이블에 짚고 있던 팔을 거두고 허리를 세워 의자에 기댔다. 입안의 맛에 감각을 집중시키면서 천천히 와인을 마셨다.
"자꾸 의미 같은 걸 생각하니까 그런 거야"하고 한참 만에 그녀는 말했다.
그는 양상추 조각 하나를 포크 끝으로 집어 올려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얇은 오이 조각을 집어 올렸다. 멍하니 다른 곳을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은 잊어버려요, 다른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거야.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이 인간을 죽이지 않은 적이 있어? 서로 생각이 다른 거야. 인간은 화해할 수 없어. 그뿐이야"하고 그녀는 와인을 주옥 마시고 유리잔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세상에는 일정량의 웃음밖에는 없다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잖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세계는 그런 곳이라고요, 이 세계의 정의와 균형이란 그런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해. 이를테면 누군가 한쪽에서 웃고 있으면 누군가는 울어야 되는 그런 시스탬 말이야. 생명이 있으니 죽음이 있다는 식으로, 공평하지 뭐, 가만히 있든 가만히 있지 않든, 그렇게 얽혀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거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놀라운 평균이 유지되도록 조화의 훌륭한 재료가 되는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보도록 노력하겠어. 확실히 균형 잡힌 사고방식이야. 정말 노, 프라블럼"하고 그는 머리를 천천히 크게 끄덕였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와인을 한잔 더 부탁하고 그녀에게 더 마시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만 됐다고 말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하고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손에 잡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 남는 시간에는 무얼 하며 지내야 하는 거지?"
"으응, 열심히 생활하고, 좀 우울하면 맥주를 마시고, 살이 붙기 시작하면 운동을 하면 돼, 그거 별거 아니야. 형도 할 수 있어."
그는 빙굿, 하는 듯이 웃었다. 그것이 어쩐지 보는 사람까지 서글퍼지게 하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포크를 놓고 와인을 마시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까만 거울 속에서 그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테이블 오른쪽에 놓인 냅킨을 집어 이상한 손놀림으로 몇 번이고 입을 닦는다.
'스카이'를 나와 호텔 안에 있는 미니 바로 내려갔다.
미니 바에 들어서자 막 테너 색소폰 주자의 연주가 시작되어 어둠 속을 스며들기 시작했다. 낯익은 전주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오티스 패팅이었다. 색소폰을 가슴 앞에 껴안은 금발의 백인이 오티스 파잉의 <여자, 애인, 친구>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마추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음감이 불안정하고 음색도 허스키하기는 하나 색소폰 주자로서는 모르지만, 가수로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그런 질감이다. 분명 6개월 관광비자쯤으로 들어와 호텔을 순회하는 수준의 음악가일 것이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라면 이런 곳엔 오지 않는다. 하지만 칵테일뿐만 아니라, 수동 커피 케이커인 사이폰과 알코올램프를 이용하여 만드는 최고의 엑스프레소 덕분에 미니 바는 올 때마다 외국인과 내국인들이 시간에 관계 없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드라이 마티니를 딱 한 잔만 마시기로 했다. 그는 진을 그냥 스트레이트로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재킷을 벗어 옆 의자의 백 위에 올려놓은 수,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무대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테너 색소폰 주자의 엉터리 노래가 끝나자 스탠드에 앉은 누군가가 손을 들어 "언체인드 맬로디"하고 신청했다. 말도 안 된다. 누군가 한 사람의 엉터리 같은 취향 때문에 다른 사람은 고문을 당하고 있어야 한다니,
그녀는 한숨이 나왔다. 노, 라고 소리를 질러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그저 한숨을 쉴 뿐이다. 다행히 엉터리 금발 가수도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정도의 음악적 분별력은 있다는 듯, 신청곡은 무시되었다.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뜨면 바흐를 들어?" 하고 그녀는 마티니 잔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바의 로고가 새겨진 종이 받침을 들여다보다 물었다.
앞머리가 몇 올 이마에 흘러내린 채 술을 마시는 그는 뭉크의 그림 속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소리라도 질러 버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먹어 버린 걸까.
"여전히 듣고 있어. 예전처럼 많이는 아니지만 꽤 자주 듣고 있어. 바흐는 언제나 좋아 오히려 들을수록 좋아져. 왜일까?"
"좋은 건 그런 거잖아."
"맞아. 좋은 것은 그런 거야. 아침에 이렁나서 바흐의 첼로 소리를 들으며 파자마를 벗고 세수를 하고 있으면 용기를 느끼거든,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아지지"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서른이 되던 날, 알고 있지. 난 얼마 전에 서른이 되었어. 서른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다지 대단한 인생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리도 그전까지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는 분명히 더 무거운 기분이었어. 서른 살, 미묘한 분열감이 느껴지게 하는 나이더군, 에너지 면에서도 분기점 같은 것이어서 그런 것이겠지? 자신이 어떤 인간이 되어 있는지, 그리고 나머지 인생을 어떤 인간으로 살게 될는지 예감할 수 있는 나이여서 그랬는지 우울이 깊어지는 기분이었어, 어쨌든 그 문제의 날에 밥을 먹으면서 생각한 거야. 내게 어떤 열망이 있었나? 하지만, 무언가 몸속에서 아직도 조용히 떠돌고 있는 거야."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라는 인간은 무엇이든 간단히 단념이 되는 그런 인간은 아닌 모양이야."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존재의 이유 같은 걸 찾고 있는 거지?"하고 그녀는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니 굿맨의 <원 어클럭 점프>를 둘으며 그는 스트레이트 잔 세 개를 깨끗이 비우고 있었다. 벽에 걸린 이집트풍 장식 벽걸이를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스탠드의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
한 갈래로 올려 묶은 부드러운 머리와 균형 잡힌 체격, 깔끔하고 질감이 좋아 보이는 다크 브라운 치마 정장을 입고 어둠 속에서 검정색으로 보이는 구두를 신고 있는 여자는, 정교한 고급 예술처럼 거기에 걸터앉아 옆에 앉은 남자와 가볍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여자는 머리카락이 깨끗이 뒤로 묶인 섬세한 하얀 얼굴을 옆으로 가끔씩 돌리고, 옆에 앉은 남자를 조용히 쳐다보곤 했다. 남자가 무어라고 하는지 여자는 미소를 띠면서 몸을 남자 쪽으로 기울이며 뭐라고 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에는 이상한 평화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생각했다. 왜 너는 저런 식으로 지내지 못하는 거냐? 미소를 짓고 몸을 살짝만 기울이면 된다. 왜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거냐?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다른 방식으로 물어보았다. 그건 네 탓인가? 공정해지자고 생각했다. 결국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쨌든 그녀는 사랑하는 인간 하나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계산을 하고 있는 사이에, 그녀는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고 느슨해진 스타킹을 끌어올린 다음, 그와 함께 미니 바를 나왔다.
호텔은 비스듬한 언덕에 도시를 내려다보듯 서 있어서, 그들은 포플러가 줄지어 서 있는 언덕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도로를 걸으며 맑은 밥공기에 몸으을 적셨다. 그들의 발밑에서 나는 소리가 맑고 조용한 공기를 크게 울렸다.
터보 엔진을 장착한 차종을 알 수 없는 스포츠카가 습격하듯 달려오더니 우웅, 공기를 찢으며 순식간에 언덕 아래로 스쳐 내려갔다.
몇 분 후 이번에는 가와사키가 달려 내려왔다. 까만 가와사키에 올라탄 두 개의 형광빛이 나는 헤드가, 두-두-두-두 변조된 기관단총 소리 같은 엔진 소리를 내며 S자 곡선을 그리며 포플러 가로수 사이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엔진의 요란한 파열음 사이로 질이 다른 두 개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튀어 올랐다.
뒤에서 보고 있으려니까 서부 영화에서 총잡이들이 말 잔 등에 올라타고 질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 오래 바라보니 멀어져 가는 모습이 꽁지가 없는 까만 도베르만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S자의 커브를 그릴 때마다 모터사이클과 그 위에 달라붙은 덩어리는 원심력을 타고 얇은 종이처럼 지상에 달라붙었다가 다시 일어나곤 했다. 나름대로 단련한 것으로 여겨지는 대단한 기교였다.
초록색 꽃들이 핀 부근에서 나무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라이터를 켜자 솟아오른 불길이 그의 얼굴에서 너울거리는 음영을 만드는 것을 그녀는 바라보았다.
불에 비친 인간의 프로파일은 원근감을 느끼게 하는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옆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까이에 함께 있어도 원근감이 느껴진다. 의식의 원근감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호텔 주차장까지 천천히 다시 걸어 돌아왔을 때는 술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 차를 꺼내 타고 강변을 따라서 주욱 달렸다. 차는 드물어서 속도를 올리자, 몸이 느긋이 젖혀지면서 발에 힘이 주어졌다.
"언제나 이렇게 신나게 달리는 거야?"
열어 놓은 창으로 담배 연기를 날리며 그가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멀리 산란되고 있는 가로 등의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드는 느낌이었지만 가로등 불빛을 보며 달리고 있으면 하늘의 활주로를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와 평화 협정 같은 것 없었어?" 하고 그녀는 갑자기 생각이 났으므로 물었다. 그가 대학 때 아버지와의 어쩔 수 없는 괴리로 집을 나온 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두 인간 사이의 문제였고, 신념의 문제였다. 신념이란 그럴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알고 있어? 휴전을 하기 위해선 말이야, 포옹이나 키스 같은 것이 필요한 거야. 아버지와 나의 입술은 얼음이지. 얼음과 얼음이 키스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영원히 입술이 붙어 버리는 거야. 꼭 붙어서 꼼짝 못 하고 함께 거대한 얼음 바위가 되어 가는 거지, 그 모습을 빛바랜 사진처럼 볼 수 있어"하고 그는 차의 재떨이에 담배를 끄며 말했다.
그녀는 낄깔 웃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표정을 제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아버지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지키려는 노력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손을 씻고, 몇 잔인지 알 수 없는 양의 물을 마시고, 화장을 지운 다음,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물을 한 잔 더 마시고 사이드 테이블 옆에 서서 파자마를 천천히 입고 테이블 램프만 놔두고 모든 불을 껐다. 램프 밑에 앉아서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를 조금 읽다가,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침대에 반듯이 누워서 다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펼쳤지만, 한 페이지를 읽지 못하고 잠이 엄습해 왔다.
야광 빛을 발하고 있는 라디오 시계의 알람 버튼을 확인한 다음, 램프밭을 피해 돌아누웠다. 이렇게 영원히 꺼져버린다 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을 한 줌의 물질 덩어리를 동그랗게 말아 조용히 처박았다.
땅, 땅, 땅, 이런 시간에 어디서 밤의 두께를 견디지 못해 누군가의 문 앞에 서서 노크라도 하는 것 같은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밤의 깊은 곳을 꿰뚫으려는 것 같아, 하고 그녀는 생각하며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묻었다. 저 소리는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잠은 불규칙하게 자주 흐트러졌다. 무언가 그녀에게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잠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한 번은 아련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바이올린으로 슈베르트를 연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리를 더듬어 가자, 위층 어딘가로부터 소리는 스며 나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눈을 뜨고서 시계를 보니 바늘은 4시를 겨우 지나고 있었다. 방에서 누군가 자신의 4시를 조용히 구축하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다시 얕은 잠이 들었다.
"베토벤 소나타 17번 디 마이너 오퍼스 넘버 삼십일."
득의만면해서 그는 소리쳤다.
그녀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세계를 공유한 사람을 보고 있으면 유쾌하다.
풍경 속의 정물인 그녀를 구별해 내자, 그는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그녀 곁에 소리도 없이 앉았다. 5월의 햇살에 그을고 거칠어진 피부는 자신의 세계가 확고한 사람이 지을 것 같은 그런 미소를 지었고, 조용하게 반짝이는 눈은 어릴 때 읽은 허클베리 핀과 빨간 머리 앤을 생각나게 했다.
뭐라고 할까, 거친 듯하고 소박하고 순진하지만, 선명하게 순수를 꿰뚫고 있는 듯한 그린 눈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얼굴을 턱선이 은테처럼 두르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느낌은 차가움을 느끼게 했다.
대학 1학년 1학기 봄, 낮에는 깃발과 플레카드와 집회, 최루탄, 장례식이 있었고, 밤이 되면 중앙 도서관에 책상과 의자로 바리케이드가 쌓아 올려지고, 철야 놓성, 토론이 이어지던 캠퍼스의 모습을 기억한다.
문을 닫아 버린 학교, 어딘가로 끌려갔다가 미쳐 버리거나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6월의 태양 아래서 솜 코드의 단초를 잠그고 방호 헬멧을 쓴 전투 경찰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음험한 인상의 체포조들,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가던 것도 기억한다.
문과대 뒤쪽 잔디밭에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의미 없는 정보 따위를 주고받았다. 침묵이 흐르게 되었을 때 그는 가방 위에서 그녀가 벗어둔 헤드폰을 집어 들고 웅웅 물질적인 소리를 남기며 풀밭에 누웠다.
짧게 자라난 풀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캠퍼스를 내려다보고 있자, 봄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코끝이 매웠다. 잔디밭에도 최루탄의 흔적이 흩어져 있는 것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하며, 아래 벤치에 무리 지어 앉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세계는 팬터마임 같아 보였다.
봄날은 느리게 느리게 흘러갔다.
"혁명가의 음악이지."
헤드폰을 벗어 무릎에 안으며 일어나 앉아 그가 말했다.
"의외라고 생각했어."
"그래요?"하고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에는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크고 맑은 구름 덩어리들이 조용하게 떠돌고 있었다. 그런 하늘에는 표현할 수 없는 울림이 깃들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네 얼굴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나 참, 별소리를 다 듣는다, 오늘 아침에도 거울을 봤다. 내 얼굴은 멀쩡하다.
"얼굴이 잘못됐나요?"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기분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글세, 좀 복잡하지만 혁명적인 분위기는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래, 난 세계나 캠퍼스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짐작도 생각도 해보지 않는 멍청한 여자애다, 하고 혼자서 생각했다.
"그렇군요. 뭐 진화적인 분이겠죠. 하지만 <템피스트>가 혁명가만 듣는 음악인 줄은 몰랐는 걸요."
그녀는 꼭 입술을 모았다. 그녀의 버릇이었다. 기분이 착잡해지면 입술을 비틀리는 것이다.
"아, 예컨대 취향의 사상을 검토해 본 것일 뿐, 혁명적인 분위기가 아니라고 말한 데 대해 화를 낼 줄 몰랐어."
그는 그녀의 기분을 눈치챈 듯 말을 조금 더듬거렸다.
" 그말이 어떤 의미인지쯤은 알고 있어요."
가버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남의 기분을 망쳐 놓으려고 필사적이다.
"미안, 그렇지만 나쁜 뜻 같은 것 없었으니까 너무 불쾌해하지는 말았으면 해. 사람이 착하게 사는 데 꼭 혁명적일 필요는 없잖아, 여러 가지 방식이 있으니까."
"무엇이 필요한 세계인지쯤은 알고 있어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음악사에 대한 얘기를 했고, 바흐와 보브 딜런과 보브 말리에 대해 얘기하면서 분위기가 그런대로 풀어질 때까지 그는 노력했고, 그녀는 기꺼이 잊어 버렸다. 그런 것, 담고 있어 보았자 기분만 저조해진다. 그녀는 체념했다.
"어린 왕자가 지옥계 간 이야기 알고 있어?"
그가 물었다.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
"응."
"그런 별은 읽은 기억이 없는데..."
그는 억제하는 듯한 미소를 씨익, 지었다.
"속편에 있는 거야."
그녀는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속편이 있다는 소리 같은 건 들어본 적 없어요."
"물론 생택쥐페리가 쓴건 아니고, 얼마 전에 공동 창작으로 발행됐어. 요즘은 단 창작이나 공동 창작으로 속편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라니까."
"정말이에요?"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그의 얼굴에서 뭔가를 알아내려 했지만, 실마리가 될만한 건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이야.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어쨌든 장난치는 건 그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서점에서 구할 수 있어요?"
"글세, 한정판이라 희귀하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일고 싶다면 내가 언젠가 빌려줄 수도 있어."
"에에...."
"어쨌든 어린 왕자가 B113 혹성에 가게 됐어."
그는 그녀 쪽으로 몸을 수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겠니, 하는 말 같은 건 묻지 않았다. 뭐 그런 거야 괜찮다. 어쨌든 그녀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타입이니까.
"B113 혹성은 은하계에서 수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지만, 어린 왕자는 믿지 않았거든. 어린 왕자가 얼마나 순수하고 맑은 마음의 소유자인지는 알고 있지?"
그녀는 동의했다.
"B113 혹성은 평균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열탕 같은 곳이었어. 그런데도 언제나 물이 부족해서 B113 사람들은 대부분이 물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공장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컨베이어 벨트처럼 죽 연결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물통들의 줄 앞에 사람들이 한 명씩 배당되어서 바다에서 물을 퍼 담는 거야. 상상이 되니?"
"셀 수도 없이 많은 커다란 물통의 줄, 사람들은 바다에서 물을 그 통 안으로 퍼서 채운다. 그거 아니에요?"
"맞았어. 물통 하나하나는 거기에 배당되는 한병의 사람이 하루 종일 채워야 할 만큼 커다랗지. B113 혹성은 물 공장 혹성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물통의 벽, 물통의 요새, 물통의 산맥이었어. 어린 완자는 B113에 도착하자마자, 너무 덥고 갈증이 났기 때문에 눈에 띄는 물통의 줄로 달려가서 그것의 감독관에게 물을 좀 마실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지. 그러자 아주 인상이 좋아 보이는 감독관이 말했어. 자신의 별에서는 물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물 한 방울도 마실 수가 없다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예외를 만들 수는 없다고, 그러니 물을 마시고 싶다면 한 통의 물을 채우고 물로 급료를 받아 가라고 말이야. 어린 왕자는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이해했지. 어느 혹성이건 자신들의 질서가 있게 마련이니까. 어린 왕자는 물통을 채우는 일을 하기 시작했어. 어느덧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물통은 서서히 채워져 갔지. 그런데 이미 어린 왕자의 갈증은 한계에 도달해 버려서 더 이상 숨 한 번 쉴 수 없다고 느껴진 지 오래였어. 어린 왕자는 입술만이라도 조금 축여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어린 왕자가 물을 입에 대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자신이 하루 종일 퍼 담은 통 안의 물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거야. 완벽하게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모두."
"이상한 별이군요."
"무섭게 이상한 별이었지.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누구도 몰래 물 같은 건 마실 수가 없게 되어 있었던 거야.
그다음 날 어린 왕자는 꼭 통에 물을 채우고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고 다시 갈증을 참으며 지독하게 열심히 물을 퍼 담았어. 그런데 저녁쯤이 되자 또 죽을 것처럼 갈증을 참을 수 없게 됐어 시간적으로 생체적 한계에 도달하는 지점이었던 거지, 며칠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고, 결국 무언가가 교묘하게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어린 완자는 눈치채게 되었어.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아침이면 새로운 다짐을 하지만, 희망은 희망인 거지."
"왜 그곳을 떠나 버리지 않는 거죠? 갈증을 채우고 바로 떠나 버리면 될 거 아니야?"
"그런 식은 B113에서는 허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모든 시스템에는 목적과 고유의 특성이 있다. 하나의 시스템 안에 들어가면 그곳의 규칙에 따라야 하고, 특별한 예외나 이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시스템 내의 다른 구성원에게 영향을 주어 동요를 일으키게 되면, 질서가 무너지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왜에? 자신이 채운 양만큼의 물만 마시면 될 것 아니에요?"
"거친 환경에서는 그렇게 많은 것이 논리적으로 진행되지 않아. 직접 환경에 들어가 보면 알아. 이제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 것."
그는 잠깐 유감스럽다는 듯이 그녀를 훑어 모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결국 어린 왕자는 오디세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B113 혹성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해. 그렇지만 오랫동안의 고통으로 인해 몸은 마른 나뭇잎만큼이나 약해져 있었고, 자신의 혹성으로 돌아가 매일 과일이나 먹으며 별이 뜨고 지는 모습만 말없이 앉아서 바라보다. 어느 날 꽃이 봤을 때 어린 왕자는 죽어 있었어. 어린 왕자는 꽃에게까지 마음을 닫아 버리고 말았던 거야."
잠시 그는 말을 멈추고 높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어린 왕자의 실수는 관찰자적 시점으로 살고 싶어 했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지. 거친 환경에서는 관찰자적 시점 따위 허용될 리 없거든. 이러냐, 적어야지, 따라가느냐 거부하느냐, 거친 환경을 바라보고 있는 따위,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의미 같은 것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넌, 그리고 싶어?"
어딘지 자조적인 목소리였던 것도 같다. 그는 얼굴을 돌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렇게 기억에 남아 있다. 물끄러미 그렇게 보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그렇게 물끄러미 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므로 그렇게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접촉이라는 건, 그의 말대로 관찰자적 시점이므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와의 접촉뿐만은 아니다. 그녀는 어떤 관계와도 의미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 납작 엎드려 옛 시절에 대한 회상을 하고 있으려니까, 함께 같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지냈던 이들이 지금 어디서 평온하게 잘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숙집은 캠퍼스의 산을 끼고 나무가 쭉 늘어선 호젓한 길이 이어지는 캠퍼스 동쪽 끝에 있었다.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주로 살고 있는 아담한 집들이 초록색 숲 주변에 울타리를 두른 것처럼 모여 있는 조용한 작은 사회였다.
담장마다 담쟁이덩굴이 매트처럼 덮인 거리 전체에는 조촐하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차분하게 스며들어 있어서, 처음 그곳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어딘지 유럽의 고풍스런 캠퍼스 타운에 온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해 생각해 보면, 회상의 영역 속에서 누구도 그런 아름다운 풍경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대학 3학년이 된 언니와 함께 그녀가 지내게 된 하숙집은 2층에 하숙생들의 방이 있고, 1층은 하숙집 주인 가족이 살며 그 집에 기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식탁이 있었고, 3층에는 세탁실과 함께 탁구대와 운동기구 같은 것을 놓아두고 있었다.
2층은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세 개씩의 모두 여섯 개의 방이 늘어서 있는 구조로 북도 한쪽 끝에는 목욕탕이, 다른 쪽은 1층으로 내려가는 실내 계단과 옥외계단이 있었다. 간혹 혼자서 방을 쓰는 학생도 있었지만, 각 방에는 보통 두 명씩 룸메이트가 되어 함께 기거하는 식이었다.
그들은 아침이 되면, 1층 식단에 모여 앉아 함께 식사를 하고, 무더기로 몰려서 숲길을 걸어 학교로 향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베이커리에 몰려가서 아이스크림이나 프루트 토핑을 얹은 빙수를 먹기도 했고, 서로에게 자신의 친구를 여자 친구나 남자친구로 연결시켜 주는 일도 생겨났다. 데이트를 위해 재킷 같은 것을 빌려 입고, 후일담을 나누기도 했다.
3층에 마련된 세탁실에서 세탁기를 돌려놓고 기다리는 동안 함께 음악을 듣기도 하고, 세탁실 코너의 다리미 대에서 셔츠를 다림질하면서 세탁기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동숙자의 세탁물을 바구니에 담아 주기도 했으며, 함께 밤중에 집을 빠져나가 술을 마시기도 했다.
얼마 후에는 방안에 누워 책을 읽고 있으면, 밤에 늦게 들어오거나 화장실을 가는 누군가의 발소리만으로도 그것이 누구의 발걸음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사회화를 겪고 있었으며, 그 결과 한 인간으로서 결정적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대열이라는 것을, 가자 부정되고 확인받으면서 '자기'라는 결정체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이미 조금씩 구체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난한 녀석도, 평범한 녀석도, 고시를 목표로 하고 있는 녀석도, 며칠씩 바리케이트가 설치된 중앙 도서관의 테이블 위에서 철야 농성을 하고 새벽에 몰래 빠져나와서 이빨을 닦고 가던 남자애도, 언제나 막 어딘가에 오르려는 사람이 위치를 확인해 보듯 뾰족한 턱을 치켜들고 책을 끼고 다니던 여자애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의 코스에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남자애가 생각난다. 그가 어떻게 이 도시로 보내져서 공부를 할 수 있는지가 의아할 정도로 지독하게 가난한 남자애였다. 그 하나를 위해 가족 모두 희생을 하는 그런 스토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애의 말투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 뭐든지 그에게 걸리면 구둣발 밑에 깔린 담배꽁초처럼 몸을 쭉 뻗어 버렸다. 소니 워크맨, 고급 브랜드가 붙은 핸드백, 브랜드 신발 무엇이든 '혐오스런 부르주아 냄새' '자본주의 쓰레기' 같은 낙인이 찍혔으며, 하숙집의 단합대회 같은 데서 그의 신랄함은 거리낌이 없었다.
"너희 쁘띠 부르주아들도 다 마찬가지야.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해서 잘 사는 기생충들, 너희들이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죽어라고 일해도 가난한 게 어떤 건지나 알아? 그 가난뱅이의 자식들이 그 넝마 같은 인생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0 프로야. 0 프로, 제로, 알겠어? 흥, 너희들이 상상이나 하겠어? 하긴 자본주의라는 게 노동보다 자본을 보호하는 제도니까... 이게 싫으면 김일성 자식에게나 가라고 하겠지?"
물론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다. 그는 정말 마술사의 모자만 큼이나 신랄하게 빈정대는 타입이었다.
어쨌든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막연한 죄의식이 들기도 하고 때때로 이유도 모르고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어이없고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용돈을 받아 책을 사서 공부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건 분명 유쾌하지 않다.
그는 조금은 마주치기가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조금은 감탄스러운 대상이기도 했다. 일요일 오전 같은 때 그는 그녀들의 방에 건너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자기 것처럼, 정말 자기 것 다루듯,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레코드를 골라서 들으며 그녀들의 커피를 나누어 마시곤 했다. 다른 방의 누구에게 비슷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거지처럼 지낼 각오를 하고 용돈을 몽땅 쏟아 부어, 눈 딱 감고 재학생 특별 할인 6개월 할부로 구입한 컴포넌트와 몇 장씩 사들인 그 레코드들도 물론 일찍이 그에게 혐오스러운 취급을 받은 지 오래였다.
그는 너무나도 당당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에 그녀는 그가 일부러 그런 행위를 한다고 생각했다. 딱히 무어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녀는 손톱을 깨물어야 할 정도로 통쾌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흘러갔고, 진실은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도 시위 같은 것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소니 워크맨을 빌려 가서 누구보다도 열렬한 학구열을 불태웠으며, 누구보다도 자본주의의 물질을 원했으며, 누구보다도 자본이 지배하는 체제에 부응하기 위해 악착같아 보였다.
그는 정말로 그런 것들을 죽도록 열렬히 갈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지 자신이 갖지 못한 현실에 화를 내고 있었던 겁뿐 야당 의원이었던 어떤 사람이 정권이 바뀌고 여당 의원이 되자 몇 달 만에 빌딩 몇 개를 갖게 되는 것처럼, 기회가 없었을 뿐 기회만 생기면 사람들은 모두 턱시도를 입은 돼지가 보여주는 교훈을 주는 것 같다.
우울했다. 신랄하게 굴었을 때의 그는 정말 멋있는 구석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필사적으로 신랄한 덕분에 우수한 비판적 논문들을 쓰고, 석사와 박사를 끝내고, 30대 초반에 입지전적으로 모교의 조교수 자리를 쟁취하여, 자신이 그처럼 가학적으로 열망하던 브띠 부르주아지의 대열로 우연히 들었다.
지금도 그는 강의실에서 그 옛날 그녀와 같았던 아이들에게 청산되지 않은 역사와 자본주의 문화의 저급함과 중산층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을 신랄하게 멋지게 얘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 다른 남자애가 생각난다. 어디서나 맨 뒤에 기대앉아서 모든 게 하찮다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애다. 우월감이 드리워진 웃음기 어린 얼굴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내적 성향이니 심리적 행동 양식이니 하며 프로이트를 들먹이던 부류였다.
모두 한때는 프로이트에 미치는 때가 있는 법이다. 프로이트도 좀 고달플 것이다. 아무 나부랭이나 그렇게 정신 나간 듯이 열렬히 숭배하고 있으니, 일단 프로이트의 잣대를 들이대면, 모든 행동의 동기는 우스꽝스러워지고 개인적인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졌다. 어느 한구석 쥐어짜도 자신감 같은 건 나오지 않을 그녀 같은 인간이 대하기에는, 그는 너무 단단한 안정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은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석을 붙이지 않으면, 안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진실이었던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각각의 삶의 양식은 일정한 편집을 거쳐, 특정한 경향의 단련된 한 사람으로 변모해 갔다. 그들의 입장은 분명 조금씩 달랐고, 그러므로 존재 양식 간의 간격도 어쩔 수 없이 커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위에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하나의,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일종의 정신적인 서클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느껴진다.
그것은 각자 어떤 식의 문을 통과하여, 관객석에서 마주하고 앉게 되든, 일생을 두고 언제나 옛 소리를 더듬듯 마음속에서 따라다니게 될, 무언가 유대감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시대가 만들어 낸 '저항 의식'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6. 시간의 갭
오전 11시 5분 전의 태양이 그녀를 향하여 빛의 다발을 쏘아 대고 있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집에 드는 그런 표준적인 양감의 빛이다. 벽에 걸린 세계 지도를 탐색하고 있다가 침대 위의 가득한 햇살 속에서 그녀는 몸을 굴렸다.
이런 시간이란 평온하면서도 무언가 초조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다. 시계가 제자리를 지루하게 돌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ff 버튼을 누른 것처럼 쏜살같이 미끄러져 사라져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었다.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침묵을 지키게 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듣고 있으려니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존재감과 그들의 침묵이 그녀의 감각에 어느 순간 잡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느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물질적 실체로서 존재하던 사물들, 그 사물들이 그녀의 체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갭을 그녀가 정지시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과 시간 사이의 갭에 대해서라면, 아무리 있는 힘껏 머리를 짜내어 보아도 그녀는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 시간이 직선이든 곡선이든, 모자 모양을 하고 있든 알게 뭔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정도다. 시간의 흐름 속에 던져져 쏘아 올려진 스페이스 셔틀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든지 스페이스 셔틀 '챌린저'처럼 어느 순간 영문도 모른 채 뻥, 하고 터져 버리는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시간이란 간단한 것이다. 시간을 가버리게 함으로써만 시간은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시간이란 너무 거대하고 또 이상하게도 개인적이어서, 누구든 자신이 순간을 포착해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마치 스틸 사진의 대단한 착각처럼. 아마도 그런 식으로 이해라도 하지 않고서는, 인간이란 종은 치유되지 않는 공허감을 이기지 못해 파괴되어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 틀림없다. 도대체 스틸 사진의 진실이란 얼마나 되는 거냐, 하고 묻는 타임도 분명 있겠지만, 한 인간의 소박한 삶이란 순간순간의 작은 착각들로 이루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갭과 스틸 사진을 생각하다가, 할 일도 없고 날씨는 너무 좋았으므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만들어 시립 동물원으로 산책을 갔다.
따스한 햇볕을 쪼이면서 헤드폰을 귀에 꽂고, 동물원 안의 우리를 옮겨 다니며 닭고기 샌드위치와 커리ㅍ 천천히 쪼아 먹었다. 철창 안의 호랑이는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고, 나무 위에서 앞발을 들고 사람들을 살피며 바나나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던 원숭이에게 샌드위치 반쪽을 빼앗겼다. 표범은 나무 위에서 조용히 배를 깔고 엎드려 귀찮다는 얼굴로 졸고 있었다. 뱀도 구경했다. 뱀이란 동물은 정말 표정이 없는 동물이다. 표정이 없어서 미움을 맏는다. 미움을 맏는다는 것이 뱀에게도 괴로운 일일까?
동물원은 녹색으로 덮여 있었다. DNA 핼리스 모형을 딴 분수대에서는 두 줄기 염기에서 시원스레 물줄기가 솟고 있었다. 산책로에 길게 뻗은 벚나무에서는 분홍 꽃잎이 꿈처럼 하늘에 날아올라 흩어졌다. 거대한 거울 위에 부딪힌 것 같은 줄기는 부서뜨려져, 머릿속에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처럼 눈에 비치는 모든 것에 흰빛을 발하게 만들었다. 바람은 잔잔하고, 공기는 온화하고, 대지는 브로콜리 빛의 연한 풀잎으로 포근하게 덮여 있어서, 어디에 누워도 푹신한 잠을 제공할 것처럼 보인다. 산뜻한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늘의 나무 벤치에 무릎을 접기도 하고, 반쯤 눕기도 한 채로 평화스런 우수를 즐기는 모습도 보였다. 모두가 제록스로 복사라고 한 것처럼 비슷한 무난한 얼굴이다.
자극이라고는 한 줄기 빛만큼도 없는 측량할 수도 없이 평평한 풍경이었다. 벚나무 밑으로는 잿빛 비둘기를 쫓아, 주인을 따라 나온 푸들이 발발발 기어 다녔다. 비둘기는 어린나무 줄기처럼 취약해 보이는 가느다란 빨간 발로 잘도 걷고 있었다. 짧은 멜빵 스커트를 입고 노란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레몬꽃 색깔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는 소녀의 얼굴은 환한 빛으로 충만했다.
그런 모습을 별생각도 없이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자유롭게 햇볕을 쪼이면서 완벽한 날씨를 즐기고 있으니 그런대로 괜찮다는 기분에 젖어 들었다. 그녀도 저 밝고 빛에 넘치는 소녀와 같은 때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저 소녀와 같았던 시절 따위를 기억해 낼 수도 없으며, 사실 저 소녀의 엄마 같은 역할을 그녀가 할 기회가 있을는지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뭐 아이 따위엔 그다지 신경 쓰는 편도 아니다. 그녀는 세계, 즉 어른이란 이름의 인간들이 만드는 세계에 꽤 큰 원한을 품고 있는 존재로서,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겨지는 때가 있었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어른 같은 것은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언니가 옆에 있다면 언니는 분명, 저 아이도 부모라는 것을 가져서 틀림없이 힘들 거야라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언니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틀림없다. 부모 없이 태어나는 것이 언니의 소원이였으니까. 하지만 언니란 그녀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언니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자매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말하든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언니가 몇 살에 처음 생리를 했는지, 언니에게 남자가 있었는지, 언니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무엇하나 알지 못한다. 기억이라면 언니의 말투뿐이다. '난소가 아프다' '아드레날린 이상'이라고 표현하는 식의 일상적인 말투, 결국 언니는 미생물을 전공하고 더욱 괴상한 유물론자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엄마도 아버지도, 언니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녀 혼자 남아,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 이미 굳어져 버린 인생을 질질 끌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무언가 다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정도의 자각은 그녀도 있다. 열 살 무렵인가부터라고 생각된다.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벌써 세계와는 어딘가 단절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그녀는 아이들의 장난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머뭇거렸고, 그들이 우스워하는 대상을 보고서도 그녀는 우습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웃을 수가 없었다. 웃으려고 하면 얼굴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푸딩 꼴로 찌그러지고 말았다. 도시락을 몰래 까먹는 그런 장난도 하기 싫었고, 끼리끼리 모여 앉아 배타적인 패거리를 형성하는 것도, 그렇게 하는 비밀스런 얘기도 왜 아무도 혼자 있으려고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배타적인 그룹들, 세계에는 실로 엄청난 종류의 배타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학교에서 배웠다. 학교란 전 지구적인 세뇌 공장이었다. 특히 배타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외치고 싶다. 면면히 내려온 일류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배타적인 사립 초등학교에서는 그런 배타들에 관하여 사립적 분위기로 가르쳤고, 특히 배타적 민족주의나 배타적 애국심에 관하여 가르칠 때는 감상적인 분위기까지 있어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가슴에 손을 고 얹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자발적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외우게 하기도 했다.
국기 하강식 시간, 저녁노을 속에 서서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다. 키워드는 배타적 애국심이고, 애국심의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는 시간이다. 그녀도 어딘지 가슴이 찡, 해지는 기분이었다.
거대한 동상 앞에 서서 집단적으로 울먹이는 아이들이 나오는 북쪽 도시의 화면이 그녀는 전혀 생소하지 않다.
어쨌든 그녀는 주변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어떤 가수를 좋아해 보고 싶어서 TV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지만, 그들이 왜 딕 앤 제인이나 비틀스나 레드 제플린을 듣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뭐 질적 차이 그런 걸 말하는 것 자체가 쑥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아이들의 우상들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혼자 레드 채플린이나 퀸의 음악을 듣고 지내는 편이 나았다. 그런 것은 애국심의 문제라고, 누군가가 말한 것도 같다. 그리고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원래 민족이니, 애국이니 하는 것들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건 사실인 것 같으니까, 그런 것을 체질이라고 한다.
어느 날 창가에 혼자 앉아 그렇게 유쾌한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그들과 그녀는 다르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어떻게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문제였던 것이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고 나자 마음이 후, 하고 편해졌다.
학교가 끝난 후에 그녀는 동물원에 가서 동물들을 바라보고 혼자 시간을 보냈다. 혼자 있는 것은 안전했다. 편안했다. 동화하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할 필요도 없었고, 상처 입을 일도 없고, 그녀의 우울함과 다른 아이의 행복한 얼굴을 비교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쇼핑센터에서 식료품을 샀다. 카트에 담다 보니까 비닐백 4개분이나 되었으므로, 쇼핑센터에서는 친절하게도 배달원으로 하여금 배달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차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그러라고 했다.
아파트의 우펀함에서 우편물을 꺼내 들고서, 엘리베이터 속에 우편물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두 개의 세금 청구서와 두 개의 크레디트카드 청구서, 동문회보, 그녀의 이름이 있는 청구서들을 보고 있자, 비로소 그녀가 아직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동문회보 같은 것이 아직 오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동문,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동문회보 같은 것이 필요한가. 이 도시에서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누구나 자기 마음에 드는 자기 확인 방식이 있는 것이겠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배달되어 온 1주일분의 식량을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나니, 박에 나가지 않으면 안될 일이라고는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세금 청구서는 자동 처리되도록 해놓았고, 연락 올 곳 같은 것도 없었다. 연락은커녕 완벽하게 텅텅 비어 있는 응답기는 자신의 기능을 잊어버릴 정도다. 1주일을 고스란히 그녀의 방안에 틀어박혀 보낼 것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 꼭꼭 들어앉아 조용하게 지내면서, 아마도 앞으로의 일에 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건은 그녀의 생활 양식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에 이르른 것인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상황이 그녀의 판단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녀가 백년을 집에 틀어박혀 지낸다 해도, 불평을 하거나 방해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친구도, 애인 하나 없으며, 누구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런 인간을 누가 어떤 이유로 방해하겠는가,
이런 생활은 무슨 건설적인 삶도 아니지만 그런 대로 괜찮다. 뭐, 꼭 즐겁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녀의 희망이라고 해야, 그녀의 방에서 예의 바르게 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파트 문 아래 달려있는 신문 투여함으로 누군가가 1주일에 한 번씩 식량만 넣어 준다면, 몇 주일이고 꼼짝도 않고 틀어박혀 지내게 될 것이다. <비엔나 호텔>에 나오는 비극적인 막스 와 루치아처럼, 정말 넌 그정도인가, 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사실이다. 하고 그녀가 말한다. 그 영화를 떠올리면 소외되어 사는 듯한 조금 슬픈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자신의 양식이 되어 버리고 나면 그런 것 생각하고 있지 않다. 슬픔과 소외조차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편안한 옷처럼 되어 버리는 것인 모양이다. 그러한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어찌 됐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 자신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므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사는 연락을 끊고 있다.
셀 빌딩 전문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7. 셀 빌딩 전문가
심미적으로 옷에 대한 취미가 좋은 남자였다. 그녀는 감의 선택과 재단 상태 같은 것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트위드 재킷과 블랙 톤의 니트 넥타이는 벨트까지 내려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고, 그레이 바지와 그레이 와이셔츠, 두꺼운 가죽구두의 조화는 클래식컬한 느낌을 풍겼다.
50미터 전방에서 그녀가 다가가는 동안 줄곧, 셀 빌딩 전문가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남자와 얼굴을 마주 보고 서자, 처음 보는 얼굴처럼 낯선 느낌이 들었다. 첫인상이 어땠었나..., 그녀는 생각했다.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다시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눈빛은 좋다. 쌍꺼풀도 없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매에는 정적이 있다. 마음에 든다. 단단해 보이는 피부색 때문인지, 응시하는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어딘지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주는 구석이 있지만, 실제로는 선이 아주 고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늘어놓고 선택해 보라고 한다면, 분명히 지목할 정도의 매력은 있다고 할 수 있는 편이었다.
남자의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 남자의 희미하게 수줍어하고 부드러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강한 인상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오른쪽 누 가장자리 아래로 빰의 뼈 정상 부위쯤에, 2센티미터가량 될듯한 희미한 상처의 흔적이 관자놀이를 향하고 일직선으로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가까이서도 쉽게 집어 낼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흔적이었지만, 얼굴을 배경으로 전체적인 장면을 형성하게 되자 가는 붓으로 상처에 밑줄이라도 그어 놓은 것처럼, 얼굴의 느낌을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무슨 상처에요?"
그녀는 둘째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눈 부위를 슥슥 문지르는 시늉을 하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녁 식사를 하고 미니 바로 자리를 옮겨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반쯤 비워진 위스키 잔을 테이블 오른쪽에 내려놓은 그는, 몇 차례인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눈밑의 흔적을 문질렀다. 오랜만에 생각나게 해주었다는 듯.
"무슨 상처에요? 굉장히 오래전의 상처인가 봐요. 쪽 주름처럼 자연스러워요."
"칼이 조금 스쳤어요."하고 그는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녀는 낮게 소리를 질렀다.
"에? 칼싸움도 하나요?"
"상대방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거니까, 뭐, 알고 있어도 어떤 때는 싸울 수밖에 없거든요."
금발의 테너 색소폰 주자가 올드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더 이상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다문 후, 그들은 미니 바의 무대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연주를 들으며 말없이 위스키를 마셨다. 제목을 알 수 없는 두 곡의 연주가 끝나고, 여자 가수가 나와 밴드의 연주에 맞춰 <안토니오의 노래>를 불렀다. 괜찮다. 깊은 호수에 잔잔하게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가 다시 조용히 잔잔한 수면으로 돌아가는 듯한 목소리다. 강한 굴곡은 없지만, 조용한 고동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기분이 좋아져서 세운 팔에 턱을 얹은 채 눈을 감고 있으니, 놀라울 정도로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당신은 변했어>를 부를 때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노래를 들을 때는 언제나 눈을 감나요?" 하고 남자의 목소리가 의식으로 스며들었다.
으-응, 그녀는 눈을 뜨고 턱을 가로저었다.
"음악에 따라 눈이 감기는 때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담배를 그녀 쪽으로 말없이 내밀었다. 그녀가 담배를 하나 빼어 들자 불을 붙여주고,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손가락이 참 예쁘군요."하고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담배가 끼워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무릎 위로 내리고, 턱을 고인 팔도 거두어 의자 뒤로 기댔다.
"왜죠? 어째서 손을 감추어 버리는 거죠? 내가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 싫어서인가요? 아니면 그런 표현이 포함하고 있을 수 있는 부담감 때문인가요? 나는 그저 마음을 흔든 것에 느낌을 말한 것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생각을 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에요. 그저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그런 식으로 드러나 있다는 느낌을 깨달으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일까요?"
"그러게 왜일까요?" 하고 그녀는 슬며시 웃었다.
"나는 말이죠, 체육 시간에 피구를 하다가 손가락을 부러뜨린 적이 있는데 손가락이 두 배 크기로 부어오를 때까지 그냥 참고 있었어요.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하구요. 왜 그럴까요? 나는 억압된 인간일까요?"
"억압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자제력은 강한 인간임에 틀림없군요." 하고 말하며 그는 사람 마음을 한껏 누그러지게 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발톱 빠져 본 적 있어요?" 하고 그가 마치 둘이서 공범이라도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없어요."
"난 발톱 열 개가 몽땅 빠진 적이 있어요."
으, 그녀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러져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는 킥, 웃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프진 않아요. 언제나 상상이 훨씬 감각적인 것 같거든요. 실제로는, 붙어 있는 마지막 1밀리미터를 콜라 마개처럼 툭 뜯어내는 순간에야 비로소 현실감이 나게 되죠."
"그것도, 아까 말했던 칼싸움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하고 그녀는 물어 보았다.
"음, 뭐 그런 점도 있었겠죠."
입술을 꼭 모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혼자 생각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그 발톱들을 보관했죠, 그냥 버리고 싶지가 않았던 거예요. 그리고 생각이 날 때면 열 개의 발톱이 든 발톱 상자를 꺼내서 발톱들을 들여다보곤 했죠, 발톱은 엉겨붙어 검게 변한 피까지도 전혀 부패되지 않고 잘 말라서 내게서 떨어져 나간 순수의 파편들처럼 보이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떤지 그 안에 내 한 시기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요."
"지금도 발톱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나요?"
그녀의 말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있다면 그럴는지도 모르지만,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이 도시로 올 때 짐을 정리하면서 많은 것과 함께 던져 버렸어요."
"다른 도시에서 왔어요?"
그래서 말하는 방식이 어딘지 새로운 오리엔테이션 같았던 것이다. 그 옛날 '칸트'가 예견했듯 이제 아무도 자신에 관한 스토리를 기꺼이 말하려 하지 않는다.
"별나라에서 왔나요?"
손가락을 모아 담배를 끄고, 칵테일에 고개를 막고 빨대로 주욱 한 모금 마시고서 그녀는 물었다.
"일본"하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아주 오래전에 일본을 떠나 이 도시로 왔었지만, 말하지 않았나요? 이제 학교는 더 다니고 싶지 않다, 하는 기분으로 대학을 떠났었죠, 그리고 이제 죽으러 돌아왔는지도 모르죠."
그가 장난치듯 얘기했으므로 그녀는 푸우, 하고 웃었다.
"교포인가요?"
"2세."
"아."
그는 손안에서 잔을 천천히 돌렸다.
"난 여행 같은 걸 뺀다면 당연히 내 인생은 일본에서 끝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자라난, 그냥 보통의 어디나 있는 니혼징 아이였는데, 그런데 지금의 나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어 있는지 가끔 알 수가 없는 기분이 들어요. 당신은 그런 기분 느낀 적 없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어요. 누구나 그런 기분이 드는 때가 있는 것 아닐까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열심히 길을 가죠.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 자신을 어느 날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녀는 칵테일 잔 속의 빨대를 거두어 테이블 위로 놓았다.
"계속 얘기해 봐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 몰랐어요?"
그녀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아무도 그런 얘기는 해주지 않았죠."
"그런데 어떤 상황이 변하고, 그것으로 많은 것이 변했군요."
그는 글레피디를 한 잔 더 시켰다.
"계기는 있었겠지만 그 일이 아니었어도 여러 가지 요인으로, 결국 필연적으로 이렇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을 무언가로 규정하고 싶은 나이였죠. 그래서 아이덴티티를 찾아서 그것과 한 몸이 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 사실이 조금 마음 아프지만."
그리고 그는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곳을 떠날 때까지 둘은 밴드의 연주를 들으며 알코올만 마셨다.
"무서워요?"하고 그는 물었다.
비포장도로의 끝에 그의 4WD 지프를 세워놓고, 강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바위에 그들은 앉아 있었다. 소나무들이 정연하게 늘어선 숲 앞으로는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강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는 강의 표면에서 물결무늬가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사람 그림자도 없는 깊은 어둠 어딘가에서 개구리 소리만이 끊임없이 들려 올 뿐, 소리라고는 하나 없었다. 숲도 잠이 들고, 다람쥐도 잠이 들고, 새들도 어딘가에서 잠이 들어 있는 듯 공기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채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수면 위에서 흔들렸다.
그의 손목시계를 보니, 11시 근처에서 바늘이 겹쳐지고 있었다.
"무섭지 않아요."
가슴 앞으로 낀 두 팔을 손바닥으로 삭삭 문지르며 그녀는 말했다.
"안심해요. 좋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혹시 곰 같은 거라도 나타난다면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단지, 어둠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래요. 도시에서는 어디든 빛이 있잖아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난 어둠을 싫어해요. 그래서 잘 때도 사이드 테이블의 불 켜놓고 자요"
"누군가 곁에 있어도?" 하고 남자가 물었다.
"누군가와 함께 잘 때는 나도 불을 꺼요."
남자가 소리를 죽이고 웃었다. 그녀는 뭔가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무릎 위에 턱을 앉고 멀리 잡다한 나무들이 뭉쳐져서 이루는 완벽한 어둠의 벽을 응시했다. 강은 어둠에 의해 끊겨 아득한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왜 칼싸움 같은 걸 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하고 아무 말이나 하고 싶어서 그녀는 물었다.
그는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그러고 앉아 있으려니까, 숲에는 엄숙한 기운이 떠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한 향기가 이따금 맡아졌다. 이끼 냄새가 아닐까 하고 생각되는 젖은 냄새 같은 것도 났다.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부터예요. 밖에서 얻어맞기라도 하는 날이면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면 더 심하게 매를 맞았죠. 정말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죠."
아주 오랜만에 생각났다는 듯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랬겠네요. 아버지에게 맞았나요?"
그는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알아요? 그곳을 떠난 이후, 교토에는 아, 난 교토에서 태어났어요. 그 후로 교토에는 다시 가지 않았어요. 결국 귀향 같은 것이 없을는지 모르죠."
"왜요?" 하고 그녀는 물어보았다.
"손가락 하나만큼의 굴절도 없이 깨끗하게 자신을 키우던 눈부시게 빛나던 날들이 나에게도 있었죠. 하지만 그렇게 키웠던 마사오는 죽어 보였어요. 다시 교토에 돌아간다면,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전히 나를 마사오로 기억하겠지만, 마사오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요. 마사오는 마사오라는 인간으로서의 조건과 마사오의 얼굴과 마사오의 꿈이 있을 테지만, 이제 그런 건 죽어 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이상하게도 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좀 애처로워졌는데도, 바람 소리 같은 웃음은, 파샵이나 시플렛 정도의 음을 울리며 어둠 속으로 분해되어 사라져 갔다. 하늘에는 반달이 떠 있었다.
"정말 교토를 사랑했죠. 동산(동쪽산)을 사랑했고, 비에 젖은 교토의 깊은 시간을 사랑했죠. 고다츠와 뜨거운 차, 떨어져 내리는 벚꽃 잎, 운하의 산책로, 발밑에 밟히는 젖은 플라타너스 잎으로 덮인 도시, 그 모든 걸 사랑했죠"하고 그는 말했다.
"난 코스를 달리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다시 장애물 코스가 앞에 있죠. 정말 누가 만들었는지 바보 같은 코스예요, 예술적이지도 앉죠."
어디선가 가느다란 새 소리가 애절하게 들리다 이내 사라져 갔다.
"어쩐지 아무리 해도 인생을 막을 수 없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기분, 그녀도 안다. 모든 게 자신도 모르게 너무 일찍 정해져 버리고, 자꾸만 어긋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녀 부모의 시간을 물려받았을 때 그녀란 존재는 이미 정해져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처럼 그녀 속에 축적된 다른 시간들은 그 자체의 관성을 유지하려고 그녀에게 끊임없이 요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결혼 같은 걸 하고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인생을 막아 보겠다고, 하지만 인생이란 중고차와 같아서 아무리 신경 써서 고쳐 봐야 중고차에 탄 것 같은 느낌밖에는 들지 않는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씩씩하게 타고 다닌다면 좋은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그의 무릎 위의 한 손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나는 알고 있어요, 제정신인 사람들은 믿지 않아도 나는 이해하고 있어요. 전혀 비뚤어진 것이 아니에요. 농담도 아니죠. 아마도 우리가 상처받기 쉬운 인간인 것이 잘못이에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그녀는 잠자코 부여했다.
주위는 말할 수 없이 고요했다. 지옥에 그들 둘만이 살아남아 각자 짤막한 회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고요하다. 그녀의 다섯 손가락에 그의 손가락이 살며시 끼워졌다. 온기를 품은 얇은 손가락을 나누어 쥐고서, 그들은 말없이 앉아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기분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러한 일들의 원인과 결과가 있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유가 없어도 원인과 결과는 진행되고 순환하고 반복된다. 왜 사물은 진행되는가? 왜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그가 일어서면서 그녀와 잡은 손을 끌었다.
"왜요?" 하고 미소를 띠며 그녀는 이끌려 일어났다.
"배 타고 싶지 않아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그가 물었다.
"어떻게?"
그녀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다보면서, 그를 따라서 바위 사이를 얼마 동안 걸었다. 발에 밟힌 바닥의 불규칙한 돌들이 들쑥날쑥한 소리를 냈다.
상류인지 하류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백 미터가량 걸었을 때, 몇 척의 보트가 선창의 어둠 속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배는 강 안개를 뒤집어쓰고 수면 쪽으로 2미터쯤 뻗어 나간 조그마한 다리에 달려 있었다. 하얀색의 모터보트들인 것 같았다. 유선을 이룬 몸통과 두 개의 좌석 앞에는 프런트 글라스가 달려 있는 보트였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지만, 키가 있거든."
그는 키홀더에 달린 키를 흔들어 보였다.
"괜찮을까요?"
걱정스러운 듯 얘기했지만, 그녀는 어쩐지 기분이 들뜨는 느낌이었다. 거의 소리라도 지를 것처럼 기분이 부풀어 올랐다.
그녀를 보트에 올라타게 한 다음 로프를 풀고 올라타서 그는 모터의 시동을 걸었다. 시동이 걸리자 기계의 진동하는 느낌이 몸으로 전해져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렸다. 그가 요령있개 핸들을 돌리며 보트를 몰기 시작했다.
어둠 속의 물 위를 달리자, 속도는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날리고 그의 넥타이가 공중으로 팔랑 거렸다. 가속, 바람에 귀를 기울이면서 강변의 숲을 따라서 수면 위를 미끄러져 갔다. 그는 빙그르르 보트를 한 바퀴 회전시키기도 했다. 두렵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고 하여튼 묘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두 팔을 보트의 몸에 올려 턱을 괴고서, 보트가 스치고 지나가는 수면을 내려다 보았다. 수면은 희미한 색깔의 물보라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트를 천천히 정지시키자, 순간 정적이 되돌아왔다. 강 한가운데 그들은 서 있었다. 주위로는 안개가 보일락말락 엷게 펼쳐져 있고, 강 가장자리를 따라서는 헤아릴 수 없는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가지들이 수면으로 길게 뻗어내려 늘어져 있기도 했다.
어둠 속에 떠 있자, 보트가 조용히 수면 위에서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보트가 흔들리고 그녀 앞의 수면으로 보트의 선체가 출렁 기울었다. 자신의 몸이 수면 속으로 떨어지는 건 아닐까, 아아, 깜짝 놀라 오므러들며 그런 생각이 스쳐 갔다. 하지만 배는 출렁이며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죠? 그녀가 몸을 돌려 옆을 보았을 때, 그런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수면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서서, 그가 앉아 있던 쪽으로 몸을 굽히고 수면을 여기저기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그녀는 혼란을 일으키고 잠시 멍청히 앉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수영이라도 하기로 한 것일까, 실수로 빠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너무나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 4월이다. 아무리 4월이 따스해도, 밤에 수영은 무리다. 게다가 강 속은 더 차고, 도대체 무엇이 살고 있을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두려움, 긴장, 그녀의 신경은 얼어붙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 사이를 두고 숨을 길게 내쉬어 심호흡을 해 보았다.
웅크리고 손가락을 깨물면서 꼼작 않고 앉아 그를 원망했다. 바보같이, 어딘가에 그는 멀쩡히 있는 거야, 그녀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이런 곳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의 권리겠지만, 그녀를 끌어들일 권리는 없는 거야, 그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괴로움은 충분하다, 너무 듬뿍 있어서 절망적인 정도다.
수면을 노려보아도 강은 꿈쩍도 안 했다. 주변 세계가 자신을 둘러싸는 느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척들이 한데 뭉쳐 하나의 소리로 그녀를 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길게 잡아끌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안개에 흠뻑 젖어 실크 브라우스가 착 달라붙었다. 재킷을 입었다.
어두운 건 정말 싫어
강은 가끔씩 꾸르르륵 거리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냈다. 강 위에는 친근한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었다. 동전 교환기도 없고, 페이퍼백 판매기도 하나 없고, 샌드위치 식당도 없는 곳에 있으니 그런 것들이 말할 수 없이 그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다. 그래도 그리운 것이다. 손이 시려웠다. 따뜻한 우유를 한잔 마시고 싶었다. 모두 없었던 일로 하고 그래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 이빨을 딲고 따뜻한 침대속으로 들어가 책을 읽다 조용히 잠이 들고 싶었다. 그녀만의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인간이 일반적인 잠수를 할 수 있는 한계로도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안은 거대한 암흑일 뿐이었다. 공기도 하늘도 낯설고 꼼짝하지 않는다.
'그가 돌아오지 않을는지 몰라.'
막연히, 하지만 뚜럿한 형태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죽음, 그녀는 상상에 압도 되어져 무릎을 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프리지아를 무덤에 놓고 누워 있으면, 무덤 위로 소리를 삼키고 지나가는 정적에 몸을 맡기고, 그녀도 고요 속에 잠이 들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자의식이라는 것을 갖기 시작했다고 기억할 수 있는 그 무렵부터 그녀의 세걔는 엄마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엄마의 우울, 엄마의 두 번의 자살 시도, 그녀의 지구는 엄마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지금도, 예쁜 눈송이가 사르르사르르 조용하게 내려 쌍이던 겨울 밤의 꿈을 꾼다. 알코올로 이미 제정신이 아닌 아버지는 엄마의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고, 엄마는 의자라도 되어 버린 듯 피하지도 않는다. 어느 순간 아버지의 눈빛 속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엄마는 그렇게 해서도 죽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었던가, 한숨조차 없었다.
가족을 파괴하는 아버지를 가진 집의 겨울밤은 지독하게 길다 북극의 겨울처럼 길다. 그런 밤에는 손도 발도 마음도, 빙하의 고기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웅크리고 잠이 들면 꿈속마저도 얼어붙어, 깨어나면 싸늘하게 굳어 버린 뼈들이 움직이려 할 때마다 우드드득,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조금의 비유도 없는 죽음을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풀이 죽은 채 구석에 쭈그리고 엎드려 있던 '슬픔' 위로 엄마는 쓰러졌다. 동화 같은 얘기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슬픔'은 아픈 울음소리를 내며 탁자 아래 구석으로 도망쳤다. 그녀가 한참 후에 가서 쓰다듬어 주려 하자, 바다게 납작하게 엎드린 '슬픔'은 꼬리를 흔들어 '괜찮아'하고 웃어 보이며 안심시켜 주었다.
몸이 너무 여렸던 것이다. 분명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부의 어딘가가 터져 버리기라도 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이러나 '슬픔'에게 가보았을 때는 밤새 아픔을 참다 멍한 눈길은 이미 깜박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개죽음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죽음이 었다.
딱하게도 '슬픔'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태어나서 '슬픔'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사라진다고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한쪽 귀가 없고 항문이 돌출해 있어서 누구도 '슬픔'이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귀의 모양이 형성되지 못한 것뿐 머릿속에서 청각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항문이 튀어나와 대변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워 버둥거렸진만, 항문쯤이야 병원에서 얼마든지 제자리에 단단하게 고정시켜 주었다.
왜 불행한 존재일수록 아름다움을 부여받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보는 사람들은 모두 안 된 마음을 갖고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작고 기묘하게 예쁜 모습이 비참한 신세를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일까. 누구든 '슬픔'을 보면 마음 아파했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슬픔'은 '슬픔'으로서의 인생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맑게 갠 아름다운 아침에. '슬픔'의 몸은 신분지에 둘둘 말려서 정원의 히말라야 소나무 아래에 묻었다. 구덩이를 파고. 쓰레기처럼 구덩이에 던져지고, 그 위로 까만 흙이 한 삽 한 삽 덮혀졌다. 정말 보기 싫은 광경이었다. 아버지는 의젓하게 '슬픔'을 파묻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루의 참을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책에서 읽었던 '누구든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도 눈앞에서 움직이고 웃곤 했던 존재가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공백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은 현실감이 되어 주지 않았다. '슬픔'의 코와 귓속으로 캄캄하고 축축한 흙이 살금살금 침투하는 것을 그녀는 밤마다 느꼈다.
다행히 세상에는 시간에 의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란 없는 법이다. 잊혀지지는 않아도 익숙해지기는 한다. 그것은 분명한 개념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사고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자동 세탁기처럼 사고의 표면에 쌓인 낡은 순간순간들을 마모시키고 희미해지게 하면서 존재를 밀어내는 것이다. '슬픔'과 연결된 끈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희미해져 갔다.
'슬픔'의 죽음 이후, 집 안에는 그런대로 견딜 만한 평화가 감돌았다. 뭐 꼭 그런 사건이 아니었어도 관계는 이미 더 이상 삐걱거릴 한 줌의 괴리도 없이 완전히 얼어붙어 버리고 난 다음이었는지 모른다. 마치 금이 간 유리 바닥을 조심조심 밟고 디디는 듯한 그런 평화였지만, 그래도 기적처럼 찾아온 평화를 모두 정성스럽게 쓰다듬으며 자신에게 지워진 존재 상황을 묵묵히 견뎌냈다. 모두 그 자리에서 그들의 지구가 붕괴해 버렸으면, 하고 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았다. 모두 생에 지칠 만큼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물여섯 번째 결혼기념일 그것이 그 모든 것의 끝이었다. 이그러진 차체 안에서 뭉개진 살덩이, 그것이 그들 운명의 마감 방식이었다. 처음부터 그것을 향해 그들은 달려갔던 것일까?
자살인지, 사고였는지,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어쩐지 예기된 사건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가끔 신처럼 행동할 때가 있으니까, 그 나이 때쯤에는 어떤 길이든 돌아가기에는 너무 긴 길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 그렇다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엄마는 자유로워졌으리라고 믿는다. 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게 되어 버리는 것이 자유라면 말이다.
푸우, 하아하아, 얼굴을 들자, 어둠 속에서 뿌옇게 빛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빛나는 형체는 목까지만 떠올라 입으로 숨을 내쉬며 눈앞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달빛의 그림자가 걸린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녀는 그 모습을 바라다보았다. 검은 머리, 검은 눈썹, 검은 옷, 비현실적인 모습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빈사 상태에 빠진 동물처럼 거칠고 짧은 숨을 내쉬며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머리에서 눈동자는 0.1밀리미터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무엇이든지 보고 있겠지, 그녀가 접근할 수 없는 그의 자의식의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이겠지
그는 머리를 흔들고, 하얀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소인지 서글픔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미소였다.
추운 밤이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견의 일치를 본 것처럼 행동했다. 그가 배로 기어 올라올 수 있도록 그녀는 몸을 움직여 배의 균형을 잡는 데 모든 노력을 다 바쳤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차갑게 굳은 그의 몸은 너무 무거웠다, 두 사람은 살기 위해 열심히 협동했다.
조심스럽게 그의 몸은 보트 위로 끌어 올려졌다. 엎드린 그의 등위에서 와이셔츠가 젖은 사과파이 껍질처럼 얇게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을 그녀는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물을 토해 냈다.
그녀는 감각을 잃은 채 움직였다. 보트 콘솔을 뒤져 타월을 찾아내고 그녀는 좌석 바닥에 무릎을 끓고 ㅇ아 그의 신발을 벗기고 양말을 벗겼다. 잠시 후에 그는 현실로 돌아온 모습처럼,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스물여덟 살의 얼굴은 갑자기 10년은 늙어 보였다. 왜 이렇게 비참한 모습이어야 하는 걸까?
"물리를 닦아요"하고 그녀는 타월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녀는 재킷 주머니 속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그의 발을 닦았다. 그는 타월을 들어 얼굴을 천천히 닦고 있었다. 그녀는 이럭저럭 마찰을 시켜 그의 발의 감각을 돌려주었다. 그는 손을 내리고 그녀가 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타월을 그의 손에서 집어 들고, 머리를 털어주었다. 물방울이 하나 그의 뺨을 타고 주르르 굴러내렸다. 밤을 보았다. 달빛 아래서는 모든 넋이 무의식적이고 해석을 할 수가 없구나,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생각했다.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감기가 들 거야."
와이셔츠 위로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소리가 느껴졌다.
"너무했죠?"하고 그가 목에 감긴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도대체 저런 모습으로 어떻게 물속에서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새삼스럽게 들었다.
"그런 때도 있죠"하고 그녀는 덤덤하게 말해 주었다.
그녀의 눈에 다시 되돌아가야 할 거리는 어둠이 길게 뻗어 있는,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는 암흑일 뿐이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필사적으로 별에 매달렸다. 깊은 침묵에 잠긴 채 어둠을 뚫고 희미한 달빛 아래를 미끄러져 가는 동안 그녀는 광대한 우주를 유랑하는 듯한 아득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차고 습한 안개가 숨을 쉴 때마다 폐로 스며들었다. 바닥으로부터 엉덩이뼈 속으로 찬 기운이 스며든다. 어둠도 질색이었다. 추운 것도 질색이었다.
얼음 같은 그녀의 심장만으로도 추위는 충분하다, 누구로부터도 더 나누고 받고 싶은 생각 따위, 노우,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적의에 찬 어둠은 진절머리가 나,
모든 건 이런 식으로밖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건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방심의 틈을 타 덮치는 것이다. 그녀라는 여자에 자체가 누구나 걷어차도 좋은 작은 팬티처럼 무방비한 것인가, 왜 좀 더 상냥하게 행동해 주지 않는 걸까, 엄마랑 아버지도, 언니도 미리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제 너하고 함께 있을 수 없게 됐다. 하는 정도의 작별 인사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사내도 마찬가지다, 나, 수영하겠어, 그러면 그녀는 그의 신발을 기꺼이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배반당하고 배척당하는 기분 따위, 어느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는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보트에서 내리기 전에 그녀는 표나지 않게 보트 내부의 물기를 대충 닦아 놓았다. 그래도 타월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물을 짜내도 좌석에 걸어 놓아둘 수밖에,
그는 구두와 양말을 양손에 들고 맨발로 차까지 걸어갔다, 젖은 바지가 칭칭 다리에 감겨들어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아 보였다.
차 안에 갇혀 있던 공기는 훈훈했다. 그는 넥타이를 던져 버리고 젖은 와이셔츠와 속옷을 벗고 차에 놓여 있던 트위드 재킷을 대신 끼워 입었다.
"왜 그랬어요?"
침묵의 상승감, 얼마간 망설인 끝에 그녀는 마음먹고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단단한 목소리에 단단한 대사, 풀에 막 빠져나온 것처럼 푹 젖어 뒤로 넘겨진 머리와 달라진 옷차림이 없다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안 가겠구나, 왠지 멀리 밀려나 쓸쓸해지는 기분이었다. 뭐, 그가 배신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어둠 속으로 차는 흘러 들어갔다. 4월의 마지막 밤, 차 안은 따뜻했고 어쩔 수 없고 틀림없는 존재의 벽이 거기 존재했다.
호텔 방안으로 들어서서 뒤로 문을 닫고 둘만이 남겨지자, 갑자기 사고의 잔해처럼 지친 기분이 되어 둘 다 방 가운데 놓여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10분쯤 입구를 향하고 그렇게 소파에 묵묵히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방안의 시계를 바라보면서 숄더백에서 담배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둘은 입을 꼭 다문 채 웅크리고 앉아 담배를 한 대씩 피웠다.
"저어, 옷을 벗는 게 좋겠어요."
그의 바지를 흘끗 쳐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그는 쭈뻣 일어나, "내가 먼저 샤워할게요"하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샤워를 끝내고 호텔의 고객용 샤워 가운을 입고 나오자 그는 문에 서서 양복과 속옷의 세탁을 맡기기 위해 부른 호텔 벨보이에게 옷을 건네주고 있는 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어딘가에 그녀가 늘어져 붙은 기분이 들었다. 낡은 장면 같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곳에 도달해 버려서 있을 곳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머리를 타월로 비비고 돌려서 터번처럼 고정시켰다.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그는 이미 맥주 캔 하나를 거의 해치운 후 같았다. 더 마시겠어요?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열며 묻자 좋아요, 하고 그가 대답했다. 맥주 캔 두 개를 꺼내 들고서 두 개의 더블베드 사이로 들어가,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에게 캔 하나를 건네주고 시원한 액체를 몸속으로 쏟아 넣었다. 두 개의 더불베드라니, 데스크의 여자는 트원은 모두 찼는 걸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뒤편의 키홀더 함의 키들은 그 말을 의심하게 했다.
그런 것에 거짓말을 하다니, 프라이드가 없는 것이다.
둘은 각자의 침대 속에서 나란히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차가운 맥주를 하나씩 마셔 나갔다. 결국에는 냉장고 속의 맥주를 모두 꺼내 와서, 시트를 턱까지 올리고서 오들오들 떨며 깡통 더미를 만들어 나갔다. 12개의 빈 깡통이 사이드 테이블 위에 쌓여 간다.
"나는 인생을 증오해요."
그는 맥주를 출렁출렁 흔들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짐작은 했어. 그런 이상한 짓을 했잖아, 왜 그렇게 되어 버린 거야,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그녀는 생각했다.
"어느 도시인가에서 한밤의 바에 앉아 피아노 맨이 치는 음악을 들으며 위스키를 마시고 있어도, 유럽의 시골 마을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것을 볼 때도, 뉴욕의 뒷골목에 서서 창 안에서 사람들이 껴안는 것을 바라볼 때도, 서쪽으로 가는 달을 볼 때도, 새벽 침대에서도, 동산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죠. '마사오, 투지란 말이다. 알겠나 무에서도 견디는 투지'하고 아버지가 하신 말을 생각하면서 참았어요. 피난민처럼 돌아다니며 혼자 꿋꿋하게 서 있으려고 위스키병을 붙들고 정말이지 열심히 노력했죠. 정말 나대로 노력한 거예요. 덕분에 십이지장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버렸지만, 그리도 인생을 증오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하고 그는 독백처럼 말했다.
"인간, 내 생각에는 그것 때문이야."
취해 버린 걸까? 그의 말투가 야릇하게 거세지고 있었다. 그녀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지극히 외로워지면, 알죠,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지점 말이에요. 그러면 가끔 무명용사의 무덤엘 가죠, 세계 어느 곳이나 그런 건 있으니까요. 무명용사, 생각해 봐요. 전 지구의 모든 무명용사들을, 외로움의 명백한 이치를."
침묵.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결의를 다질 수 있어요. 운명이니 뭐니, 그런 것 생각하지 않겠다, 나는 멍청하게 서 있다. 당하지는 않겠다, 하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텅 비고 복잡한 눈동자, 저 복잡함을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겠구나,
"뭐 그렇다고 덜 외로운 건 아니지만, 치환 같은 거죠."하면서, 그는 맥주를 쿨쿨 마셨다.
"운명, 그런 것 있을까요?"하고 그가 갑자기 물었다.
"운명?"하고 그녀는 물었다.
"으음, 그러니까 벗어날 수 없는 진행성 같은 거."
그녀는 머리에서 타월을 끌어내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은 부스스 아래를 향하고 서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물방울은 동전 모양으로 확대되면서 서로 만나 시트를 적셨다.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타월로 물을 짜내고, 흠뻑 젖어 버린 타월을 침대 등받이에 반듯이 펼쳐 놓은 후, 그녀는 마지막 맥주를 틀고 다시 기댔다.
"난 가끔씩, 망원경 렌즈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요. 누군가의 망원경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한 기분, 느껴본 적 없나요?"
그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짓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운명 같은 건 없다, 난 그렇게 생각해요." 하고 그가 말했다.
"몇천만, 몇억의, 또 계속될 이름 없는 묘지처럼 세계란 인간들이 서로 매달려 어처구니없이 저지르는 우연이에요. 그러니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상상하기도 두려울 때가 있어요. 그런 생각 든 적 없어요?"
"다를 게 뭐 있나요? 이유가 무엇이든, 설령 이유가 없어도, 결국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런 걸 조각조각 분석하듯 알며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의 손가락이 닿지 않아도 세계는 이미 고뇌로 충만하다. 거기에 우리의 정밀한 고뇌의 칼끝을 들고 쓰윽, 긋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이해하려 애쓰는 것은 그나름의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사실은 이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떤 불합리함이라는 생각이 그녀에게는 들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불합리함뿐, 불합리함을 아무리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해봐야 하잘것없는 단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맥주가 발가락 끝까지 구석구석 펴져 가는, 좀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골치 아픈 논쟁 같은 건 다 떠나가 버렸으면, 하는 기분으로 그녀는 말없이 눈앞의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맥주가 떨어지자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벽에 콘솔을 붙이고 거울을 매단 화장대, 소파와 테이블, 입구 도어와 화장실 사이에 서 있는 옷장, 그녀는 취기가 오른 머리를 뒤로 비스듬히 기댄 채 방안을 훑어보았다. 정적이 집중되어 간다.
그가 침대에서 뛰쳐나와 소파의 테이블에 있던 답배와 재떨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담배를 하나씩 피웠다. 더블 베드 사이에 놓여 있는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은 재떨이 밑에는, 노트 크기만 한 고무 압지판이 깔려 있었다. 호텔 방에서 혼자 압지판에 엎드려서 편지 같은 것을 쓰고 있노라면, 틀림없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쓸쓸해져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사이드 테이블 아래칸에 놓여 있는 리모컨이 보여서,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를 켜보았다.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다. 파파로티와 루치오 달라가 <카루소>를 부르는 것을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영화 촬영을 하다 죽은 스턴트맨 한 명을 알고 있어요. 나중에 자신의 집을 설계해달라고 말했었죠. 그런데 얼마 후, 별 볼 일 없는 서부극을 찍다 뒷목덜미에 도끼를 맞고 죽어버렸어요. 후일담인데, 그 모습을 보며 스태프들은 박수를 쳤다는 거예요. 실감 나는 연기라고 생각하고서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인생이죠?"
꼼짝도 않고 그대로 앉아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거예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빈틈없이 착한 얼굴을 하고서 미친 듯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왜 모두 동반 자살 같은 것이나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으음, 즐겁게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의지적으로? 편집광적으로?"
그녀는 리모컨의 버튼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물론 인간이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그런 일 따위 하지 않아요, 매 순간순간 선택을 하며 누군가에게 관여하는 거야. 당신도 분명히 이 사람과 저 사람과, 이 장소와 저 장소와, 자신의 선택을 주관하고 있겠죠? 내 인생은 나의 것. 하는 식으로."
"그렇긴 하죠... 하지만 어떤 때는 뭔가 큰 것은 이미 결정되어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알고 있어요. 그까짓 선택, 실제로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가짜 별처럼 별 볼 일 없는 거죠, 사실 우리의 선택이란 것은 처음부터 우연의 진행성으로 인해 어느 쪽인가로 이미 방향이 틀어져 있거든요."
그는 시트를 둘둘 말린 몸을 미끄러뜨리고 반듯이 누웠다.
"고양이에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의 선택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것도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운이 좋다면 좀 즐거운 선택을 하며 사는 부류도 있겠지만."
"선택의 책임?"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유머 감각을 기르기 위한 배려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존재의 무게를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요?"
그는 눈을 감고 콧노래를 부르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도 눈을 감았다. 피로가 몸 안에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반대쪽으로 몸을 뒤집고 두 손을 머리 밑으로 집어넣어 머리를 받쳤다.
"자고 있어요?"
얼마 후 그가 물었다.
"아뇨."
눈을 감은 채로 그녀는 대답했다. 이미 기분 좋은 따스함이 서서히 등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답답해져서 몸을 뒤척여 샤워 가운을 침대 밖으로 벗어 던지고, 시트 속으로 들어갔다. 바흐의 첼로 모음곡 제1번의 선율처럼 낮게 몸속을 울리며 잠은 시시각각 옮겨져 왔다. 세상이 아무리 그녀를 비참하게 해도, 오늘 하룻동안 어떤 일이 있었어도, 그녀의 잠은 구겨지지 않는다.
"오늘 일 미안."
희미하게 슬픔이 괸 목소리가 뒤에서 말한다.
"괜찮아요. 사정이 있었겠죠."
그녀는 말해 주었다.
"잘 자요."
그가 침대의 불을 끄는 소리가 들린다.
"잘 자요."
그녀도 대답하며 사이드 램프의 줄을 잡아당기고, 시트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느 순간, 이상하다, 갑자기 눈을 떴다. 왜 눈을 떴는지, 어느새 의식이 그렇게 선명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창을 통해 희미한 여명을 느끼며 명료함과 모호함이 교차하는 의식 사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으음, 안녕, 그녀는 눈을 비비고, 시트 속에서 몸을 비틀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잘 잤어요? 오래된 레코드의 변색된 음질 같은 갈라진 목소리고 그가 아침 인사를 했다. 그는 잠에서 꽤 오래전에 깼는지, 눈꺼풀은 부어 있고 머리카락은 부스스해도 눈빛만은 뽀드득, 소리가 날 것처럼 청결해 보였다.
"배고파요?" 하고 그가 물었다.
그녀는 시트를 눈 밑까지 끌어올리며 킥킥, 웃었다.
"아뇨, 배고파요?"
"아뇨."
둘은 눈을 마주치며 키득키득 소리없이 웃었다.
"너를 가져도 될까?"
갑자기 웃음을 멈춘 그가 말했다. 어머, 저런 말, 참 신기하구나. 표현이 신기해서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오래된 영화 속에서 울리고 있는 전화벨처럼 그 말을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로 그녀의 귀에 울렸다. 저런 걸 물어보는 남자는 정말로 드물다. 천 명 중에 한 명도 안된다. 그녀가 천 명의 남자와 잔 것을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상실되어 버린 것처럼 베개 위에서 머리를 끄덕였다. 시트를 뒤집어쓴 채로 그가 살며시 그녀 곁에 와서 누웠다. 움직이지 않고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을 내밀 그가 그녀의 시트를 잡아당겨 가슴 밑으로 끌어 내렸다. 짧은 순간에 그녀는 그의 시트 속으로 잡아당겨져 꺼안아졌다.
"몇 킬로그램이나 나가죠?" 그녀는 픽 웃었다. "내가 맞혀볼게요." 하고 그는 말했다. "42 내지 44?" "굉장하네요, 플레이보이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팽창된 코에서 새어 나오는 숨결이 그녀의 볼에 와 닿았다.
그들은 아이들처럼 원시적인 감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천천히, 탐문하듯이, 둘 다 어떻게 환상 속에 더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 알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느낌이었다. 희미하게 무엇인가가 마음속에 의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녀가 기대했던 평범한 성욕적인 숨은 아니었다. 물론 몇 프로의 성욕적인 경련이 섞여 있는지도 몰랐지만, 거기에는 다른 것이 들어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비가 내리는 거리를 혼자 걷고 있는 남자를 생각나게 했다. 본 적이 없어도 상상할 수 있었다. 눈물방울을 핥듯 축축한 남자의 숨을 천천히 맛보았다. 이런 맛이 나는 숨의 무게를 채어 보았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한다는 듯, 마음속에서 이는 바람보다 더욱 느리게 느리게 어둠 속에서 소리를 죽이고 절정에 이른 듯한 섹스를 했다. 어쩐지 이 섹스는 짐노페디 같은 느낌이야, 하고 그녀는 밀어 넣어지면서 생각했다. 간결하지도 들뜨지도 않는 묘한 느낌 전적으로 이 남자 탓이다. 남자가 아무리 그녀 속을 비집고 있어도, 남자는 그녀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느낌이 남자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문득 느껴지는 것이었다. 감정은 여러 번 전환점을 꺾었다. 그건 아주 복합적인 전환점이었다. 팽팽하게 가슴과 사금을 부딪치다가, 갑자기 쓸쓸한 이완감이 몸 안으로 펴져 갔다.
그녀는 섹스에만 신경을 집중시키기가 곤란해지고 말았다. 며칠 동안을 쉬지 않고 섹스를 한다 하더라도, 상대 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 비집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좁아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안락감이 몰려왔다. 존재와 존재가 겨울 호수의 얼음 조각들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세 번의 섹스가 끝나고, 서로 누구랄 것도 없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침묵을 지키며 호텔 방의 천장이나 전화기나 벽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그녀는 다시 이런 상황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마음도 쓰이지 않는 섹스가 더 나을 것도 없지만 이렇게 복잡한 기분이 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분명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