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사냥꾼 2
19. 야생(野生) 물소
20. 난쟁이 부족(部族) 피그미
21. 사나운 코뿔소
22. 아가씨 수렵가(狩獵家)
23. 재미나는 수렵가(狩獵家)들
24. 수렵(狩獵) 관리인
25. 사자(獅子)와 소녀
26. 첫 대면
27. 황소 브리트
29. 사자(獅子) 킹
30. 목격(目擊)
31. 마사이족(族)
19. 야생(野生) 물소
마사이랜드에서 식인 사자 사냥이 끝났다. 헌터가 마사이족들에게 이별인사를 했는데 마사이 추장이 제안을 했다. 양 500마리를 보수로 줄테니까 가지 말라고 했다. 마사이족은 양 세 마리면 예쁘고 젊은 아내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헌터는 수락할 수가 없었다. 케냐에 있는 행정관청에서 또 다른 임무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소사냥이었다. 나이로비에서 약 100km 떨어진 마을에 물소 떼가 설쳐서 주민들 피해가 막심한데 토인이 네 사람이 죽었다. 물소는 초식동물이다. 그러나 물소가 맹수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냥꾼들은 물소를 사자, 범들과 같이 가장 위험한 맹수로 알고 있으며 물소를 사냥하다가 희생된 포수도 많았다. 물소는 가축 소와는 다르다. 우선 뿌리 부분의 뿔은 사람의 허벅지만큼 굵고 활 모양으로 휘어진 끝은 창 보다도 더 날카롭다. 엄청난 몸무게와 빠른 속도를 지니고 있다. 보통 500kg이 넘는 몸무게에 빠른 속도에 창처럼 날카로운 뿔을 휘두르면 감히 대적할 적이 없다. 사자도 그 뿔에 받히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물소를 피한다. 더구나 물소는 코끼리나 코뿔소처럼 두꺼운 가죽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어 보통 총탄 따위에는 끄떡도 하지 않으며 섣불리 총탄으로 부상이라도 입혀놓으면 반드시 습격을 하여 상대를 죽이고 만다. 헌터는 물소사냥의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작전을 계획했다. 우선 특별한 총을 마련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총 제작회사 제페리회사에서 5백구경 2연발총을 구입했다. 총신이 길고 총구멍이 크고 가장 무거운 사냥용 총이었다. 무거운 총을 메고 밀림을 돌아다니는 것은 고역이었으나 배에 구멍이 뚫려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헌터는 개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나이로비 야견수용소에서 잡견 7마리를 구입했다. 형편없는 똥개들이었고 훈련시킬 수도 없었지만 도움이 된다. 사자 사냥에서 리더 역할을 했던 그레이하운트종 바트와 섞어놓았더니 영리한 바트는 곧 리더가 되었다. 잡견 중에는 바트 보다 몸집이 두 배나 되는 놈이 있어 두목 자리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으나 승패는 예상 보다 간단히 끝났다. 사자, 표범들과 싸운 바트는 보통 개들이 싸우는 것과 달랐다. 큰 개가 귀를 무는 것을 내버려 두고 바로 급소인 목줄기를 물어뜯었다. 헌터가 말리지 않았으면 그 똥개는 죽었을 것이다. 이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바트는 두목이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개들을 훈련시켰다. 바트는 주인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부하들에게 전달했으며 명령을 듣지 않거나 멍청한 개들은 바트의 무서운 질책을 받았다. 그러나 바트에게는 나쁜 버릇도 있었다. 목적지 톰슨즈 힐에 도착했을 때 바트는 야생본능이 발발하여 헌터의 지시 없이 토인이 관리하는 양떼를 습격하여 양떼 중에서 가장 큰 놈에게 달려들어 눈 깜박할 사이에 목줄을 끊어버렸다. 토인이 기겁을 하고 바트가 개가 아니고 늑대라고 주장했으나 헌터는 사과하고 보상을 해주고 바트는 가죽 혁대로 맞았으나 그 버릇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 마을은 인데로족의 마을이었으며 사냥과 농업을 하는 부족이었다. 바트가 인데로족의 여자를 습격하여 벌거숭이로 만들어도 손뼉을 치고 웃는 유머러스한 부족이었으나 물소 얘기를 꺼내자 얼굴이 굳어졌다. 절름발이 사내가 말했다. 사내는 나무를 하러 갔다 돌아오다가 등 뒤에서 거친 짐승의 숨소리를 들었다. 물소였다. 기겁을 하고 마을로 도망갔다. 무거운 발굽 소리가 쫓아왔다. 사내는 죽을힘을 다하여 도망쳤으나 물소가 더 빨랐다. 급해서 나뭇가지에 뛰어올라 매달렸다. 씩씩거리는 물소는 그 밑으로 지나쳤다.
(살았구나!)
사내가 나무에서 내려오려고 했는데 물소가 되돌아왔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내의 한쪽 다리 발끝을 물었다. 헌터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기가 막혔다. 초식동물인 물소가 왜 사람을 습격했을까? 그리고 주무기인 뿔을 사용하지 않고 입으로 물었을까? 물소는 사자나 호랑이처럼 상대를 잡아먹으려고 습격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화가 나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말도 화가 나면 입으로 무는데 입이 강한 물소가 물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내는 절름발이가 되었으나 다음 사내의 이야기는 더 황당했다. 사내는 성기가 잘려 나가고 없었다. 물소의 공격을 받아 잘려버린 것이다. 마치 면도날로 잘린 것처럼 매끈했다. 그는 양봉을 하고 있었는데 벌집을 돌보다가 숲속에서 자고 있던 물소의 단잠을 깨우는 실수를 했다. 일어난 물소는 대뜸 사내에게 덤벼들어 뿔로 사내를 받았다. 1m 이상 공중에 떠올라 떨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떨어진 곳이 물소 등이었다. 사내는 두 다리를 벌리고 물소 등에 탔다. 더 화가난 물소가 사내를 등에 태운 체 가시덤불 안으로 돌진했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물소 등에서 떨어졌는데 물소는 그때 사내의 양 다리 사이를 공격했다. 사내는 실신을 하여 다음 날 아침에야 정신을 차리고 집에까지 기어왔다.
‘부와나(나리, 주인님), 복수를 해야겠어요. 그놈의 물소를 잡아 이번에는 그놈의 그것을 도려내 먹어야겠습니다. 제발 이번 사냥에 나를 좀 데리고 가 주십시오.’
헌터는 물소사냥에 그 사내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물소들은 마네트 밀림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나무들이 밀생하고 숲이 우거져 사냥에는 최악의 사냥터였다. 물소는 통제 불가능한 평야의 악마였다. 헌터가 믿는 것이라고는 바트를 위시한 사냥개들뿐이었다. 밀림에 들어서지 말자 물소 발자국이 발견되었고 개들이 물소 냄새를 맡고 추적을 시작했다. 얼마지 않아 나무 뒤에 물소가 지나갔다. 개들이 짖으며 용감하게 물소를 따라갔다. 물소와 개들의 경주는 개들의 승리였다. 곧 물소는 개들에게 포위되었다. 코리종 개가 물소를 얕보고 정면에서 덤벼들었다가 물소의 일격으로 고무공처럼 공중에 떠올랐다. 개는 즉사했다. 면도날에 잘린 것처럼 배가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개들은 공격을 계속했다. 리더 바프가 물소에게 덤벼들었다. 한두 번 가볍게 공격을 해서 물소의 반응을 살폈다. 물소가 사자나 표범처럼 행동이 기민하지 못 하다는 걸 눈치챘다. 한편 물소는 공격하는 바프를 공중으로 쳐올리려다가 번번이 실패하자 동작을 멈추고 바프를 살폈다. 물소가 공격을 멈추자 바프가 돌격하여 물소의 코를 물었다. 코가 물소의 약점이고 급소였다. 코뚜레가 걸리면 소 종류는 온순해진다. 바프에게 코를 물린 물소는 동작이 거북해졌으며 자꾸 밀어붙이려고만 했다. 바프는 물소의 코를 놓아주지 않고 뒤로 밀리다가도 나무나 바위에 걸리면 살짝 비켜서 버렸다. 바프와 물소의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헌터의 길고 무거운 총에서 발사된 커다란 탄환이 물소의 심장을 뚫어버렸다. 바프는 헌터의 총 솜씨에 만족한 듯했으나 물소의 코는 놓아주지 않았다. 개에게 습격당하면 물소는 머리를 숙이고 그 무서운 뿔로 개를 받으려고 했다. 이런 물소의 습성을 바프는 역이용했다. 바프는 한두 번 위장 공격을 하여 물소를 당황하게 한 뒤에 순식간에 덤벼들어 코를 물었다. 그리고 물소의 미는 힘을 네 다리를 쫙 펴고 버틴다. 이런 경우 물소는 머리가 땅에 눌려있기 때문에 꼼짝을 할 수 없었고, 적을 앞으로 밀어붙이려고만 했다. 미련한 힘자랑이었다. 이 때가 헌터의 발사 기회였다. 바프의 도움으로 물소사냥은 아주 편했다. 물소는 강가의 숲에 살고 있었는데 하양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으로 물소를 찾아냈다. 하얀 새들은 물소의 등에 앉아 벌레를 잡았다. 새카만 물소와 하얀 새들은 다정한 사이였으며 등에 새가 앉아 벌레를 찍어 먹노라면 물소는 실눈을 뜨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하얀 새들 때문에 물소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헌터는 늪 부근에까지는 접근하지 않았다. 늪은 걷기에 불편했고 물소의 정면공격을 피할 수도 없었다. 이럴 때 바프가 물소를 몰아냈다. 물소는 일직선으로 다릴 때는 매우 빨랐으나 회전을 하거나 방향을 바꿀 때는 느렸다. 바프는 이 물소의 약점을 알고 물소를 놀리 듯 가깝게 다가가기도 하고 멀리 떨어지기도 하며 물소를 헌터 쪽으로 유인했다. 너무 총명하고 영리해서 자신감 넘치는 용맹성이 불안할 정도였다. 어느 날 굉장히 큰 물소를 몰았다. 개들은 강가로 늘어서서 물소가 강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막아 헌터 쪽으로 몰고 있었다. 그러나 늙은 물소는 능글맞게 침착했다. 개들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다. 물소는 개들과 충돌을 피하여 강과 나란히 달렸다. 강을 막아선 개들도 피하고 반대편에 대기하고 있는 헌터도 피하려는 작전이었다. 늙은 물소가 의외의 방향으로 달리자 개들이 당황했다. 전속력으로 물소를 쫓았다. 물소도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약이 오른 개들이 그만 물소를 앞질러 물소의 진로를 막아버렸다. 물소가 방향을 바꿔 강으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 강쪽의 돌파구를 막고 선 것은 영리한 바프 한 마리뿐이었다. 물소가 바프에게 덤벼들었다. 무시무시한 뿔을 휘두르며 물소가 돌진해오자 부득히 바프가 몸을 피했으며 물소는 강물로 뛰어들었다. 물속으로 들어서지 물소는 여유를 보였다. 어깨까지 물속에 잠겨서 점잖게 개들을 보고 있었다. 닭 쫓던 개가 된 꼴인 개들은 강물 속의 물소를 어찌할 수 없어 시끄럽게 짖어대기만 했다. 물소와 개들의 싸움은 끝난 것 같았다. 물소가 그대로 반대편으로 강을 건너가 버리면 될 일이었다. 물소는 방심했다. 설마 개들이 강물에까지 따라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머리만 내놓고 시원한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바프는 헌터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걸 보고 강물로 뛰어들어가 물소의 코를 물었다. 순간 물소는 그 자그마한 동물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놀라 멈칫하더니 곧 분노에 몸을 떨며 코를 물린 체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중싸움을 하자는 의도였다. 물소와 개가 수중싸움을 하면 결과는 뻔했다. 그때 헌터가 발포했다. 수면에 보일 듯 말 듯한 물소의 등을 어림잡아 연달아 두 발 그리고 스패어총으로 또 두 발을 발사했다. 헌터가 목표 동물에 확고한 치명상을 줄 자신 없이 총을 연사한 것은 드문 일이었으나 총탄이 명중된 듯 강물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윽고 바프의 몸이 물속에서 솟아올라 헤엄쳐나왔다. 바프는 땅에 오르자 물을 토해냈는데 앞이 두 개가 빠져버렸다. 물속에서도 물소의 코를 물고 있다가 연골에 박혀버린 것 같았다. 이 수중결투가 바프의 열일곱 번째 결투였는데 그다음 결투는 더 처참했다. 바프의 다음 싸움은 개들과 물소들의 집단싸움이었다. 여섯 마리의 개들이 다섯 마리의 물소를 쫓다가 그중 세 마리를 포위했다. 물소들도 개들의 포위망 속에 원진을 치고 있었으며 여섯 개의 뿔이 번쩍거렸는데 그 무서운 뿔들 때문에 개들이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이윽고 바프가 뛰어들었다. 두목 물소의 코를 물었다. 물소의 입과 코에서 선지피가 쏟아지고 신음소리가 처량했다. 그때 다른 물소가 바프에게 달려들었다. 젖비린내가 날 것 같은 어린놈이었는데 아마도 코를 물린 물소의 새끼 같았다. 새끼물소가 바프의 배를 겨냥하고 달려들었다. 코를 물고 있었던 바프가 코를 놓지 않고 몸을 틀었으나 허벅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바프가 위험했다. 키라칸카노가 창을 던졌다. 동시에 헌터도 어미 물소에게 발사했다. 창은 새끼 물소의 가슴팍 깊이 박혔고 탄환은 어미물소의 심장을 꿰뚫었다. 바프는 위기일발에서 구했으나 다리의 상처는 중상이었다. 바프의 상처가 완치될 때까지 물소사냥은 중지되었다. 주인을 믿는 바프는 헌터가 바늘로 상처를 꿰매도 날뛰지 않고 참았다. 원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키라칸카노가 바프를 날마다 이웃마을로 데려가서 신선한 우유를 먹였는데 어느 날 사고가 생겼다. 이웃 마을로 가던 중 사냥을 못해서 몸이 근질거리던 바프에게 산돼지가 나타났던 것이다. 산돼지를 발견한 바프는 키라칸카노의 제지를 뿌리치고 산돼지에게 돌진했다. 달아나던 산돼지가 동굴 속으로 도망갔다. 물소에 비하면 산돼지는 체구도 작고 동작도 우둔해서 위험한 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돼지에게도 무서운 무기가 있었다. 뾰족하게 입 밖으로 나와 있는 송곳 이빨이다. 때에 따라서 그 이빨은 물소의 뿔처럼 위험한 무기였는데 바프는 산돼지를 너무 얕봤다. 산돼지는 동굴에서 방향을 바꿔 뒷걸음질 치면서 엉덩이를 뒤로 하고 송곳 이빨을 내밀고 완전한 전투 태세를 하고 있었다. 바프는 그 걸 무시하고 돌진하여 산돼지의 코를 물려고 했다. 동시에 산돼지도 바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바프가 일순 빨랐다. 그러나 바프는 물소를 잡았을 때 앞니 두 개가 빠져 코를 꽉 물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고쳐 물려고 했을 때 산돼지가 바프의 코를 찔렀다. 물소와 달리 산돼지의 무기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있다는 걸 몰랐다. 바프가 후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산돼지가 바프의 가슴을 찔렀다. 바프는 즉사했다. 뒤따라온 키라칸카노가 창으로 산돼지를 찔러 죽였으나 바프를 살릴 수는 없었다. 바프의 시체 앞에서 헌터가 눈물을 흘렸다. 바프는 죽었지만 물소 사냥은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바프가 없는 물소사냥은 어려웠고 위험했으며 계속 비극이 일어났다. 헌터에게 물소사냥은 생애 최악의 사냥이었다. 우선 바프를 잃은 잡견들은 아무 쓸데 없는 똥개들로 바뀌어버렸다. 그들은 덮어놓고 짖기만 했고 물소를 몰아오거나 한 군데로 잡아두지도 못했다. 개들에게 쫓긴 물소가 큰 나무나 커다란 바위 뒤를 돌아 맹렬한 반격을 했는데 그때마다 그때마다 개들이 한두 마리씩 죽었다. 바프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텐데 …. 헌터는 신경질이 났다. 물소사냥에 바보 같은 개들을 더 이상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키라칸카노의 소개로 즈로가나족 바베야를 채용했다. 즈로가나족은 날카로운 칼을 팔에 동그랗게 팔찌처럼 감고 다녔다. 팔찌는 강력한 무기였는데 팔찌로 사람 목을 따는 건 약과였다. 헌터가 바베야를 만났을 때 바베야는 실오라기 한 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으며 머리칼에는 쇠똥을 발라 마치 투구를 쓴 것 같았다. 관청에 조회해봤더니 바베야는 밀렵전문가였으며 전과 4범이었다. 그러나 바베야는 날카로운 눈, 꽉 다문 입, 턱도 야무졌고 몸에 난 무수한 상처가 그의 사냥경력을 알려주었다.
‘밀렵을 했다지?’
‘예, 부와나. 사자와 표범을 많이 죽였는데 백인들은 상으로 나를 감옥에 가두었지요.’
‘밀렵은 뭣으로 했나?’
‘총이지요. 한 방 쏘고 두 방을 쏠 수 없는 총이지만 화살보다는 낫지요.’
사격 연습을 시켜 봤더니 제법이었다. 헌터는 바베야를 몰이꾼두목으로 채용했는데 바베야는 오랜 밀렵의 경험을 살려 능란하게 헌터를 안내했다. 단점이라면 너무 무모했고 그것은 동시에 장점이기도 했다. 헌터는 바베야의 간청에 못 이겨 총 한 자루와 몰이꾼 두 명을 딸려 단독사냥을 시켜봤다.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떠났는데 이틀 후에 몰이꾼 두 명만 돌아왔다.
‘부와나, 바베야는 우리 같은 멍충이 몰이꾼하고는 사냥을 할 수 없다고 화를 내면서 우리를 버리고 갔어요.’
바베야가 헌터의 명령을 거역한 것인데 웬지 불안했다. 물소 같은 맹수사냥에는 사격수 옆에서 경계를 해주고 도와줄 조수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혼자 어떻게 하겠다는 말일까?‘
헌터는 크게 화를 내고 바베야가 돌아오면 엄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바베야는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바베야는 집에도 없었고 마누라는 울고 있었다.
‘부와나, 그이는 성미가 급해서 며칠이나 걸리는 사냥은 하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뭣인가 사고가 났습니다.’
헌터도 사고를 직감했다. 수색대를 조직하여 광대한 마넷트삼림을 수색했다. 수색 이틀만에 바베야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마넷트삼림의 동쪽 경사면에 나무가 드문 공지가 있었는데 그 공지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는 하이에나와 독수리들에게 먹혀 뼈만 남아 있었으나 이빨을 확인해서 바베야를 알았다. 바베야의 시체는 늑골 두 개가 부러져 있었고 곤봉으로 맞은 것 같은 흔적도 있었다. 창 같은 것으로 찔린 흔적이 있었고 총과 탄약이 사라졌다. 의사 제이시와 헌터는 범죄의 증거를 잡기 위해 부근을 면밀하게 조사했다. 곧 커다란 물소를 발견했다. 물소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으나 사파리개미들이 달라붙어 접근할 수 없었다. 개미들은 뼈를 갉아 먹고 있었으며 산 사람도 위험했다. 헌터가 작대기로 물소 뼈를 뒤집었는데 늑골에 총구멍이 나 있었다. 바베야가 쏜 것이다. 늑골을 맞은 물소는 숲속으로 도망을 가다가 돌아서서 뒤 따라오는 바베야를 덮쳤다. 총도 발견되었다. 한 발이 남아 있었다. 바프와 바베야의 참사, 헌터는 우울했다. 헌터가 숙소에 돌아오니 마을에서는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잔치판이라니? 헌터가 대노했는데 영국에서 아주 높은 분이 자동차를 타고왔기 때문에 열리는 환영 잔치라고 추장이 말했다. 영국의 높은 분은 왕족으로써 공작이었는데 점잖은 사람이었다. 공작은 영국왕립수렵협회 회원증을 제시하고 나이로비 수렵관의 정중한 소개장도 내놓았다. 공작은 맹수사냥의 명수이며 헌터를 도와 물소사냥을 지원하겠다고 자원했으니 알아서 잘 모시라는 내용이었다. (나를 도와?) 헌터는 쓴웃음이 나왔으나 상대의 신분을 존중하여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공작은 귀족답게 부드럽고 만사에 관대했으나 사냥솜씨는 의심스러웠다. 우선 총이 물소사냥에 맞지 않았다. 장식용 금은이 번쩍이는 416구경(口徑)의 고급총이었으나 사자 사냥을 몰라도 물소사냥에는 적합지 않았다. 그 총으로는 탄환이 물소의 급소에 맞지 않은 이상 포수가 위험했다. 그래서 헌터는 500구경 제페리총과 바꾸어 갖자고 정중하게 제의했다. 공작은 제페리 500구경을 한 번 들어보더니 엄청난 무게에 놀라 얼굴을 찌푸리고 도리질을 했다. 공작이 데리고 온 토인 조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인 조수는 스스로 맹수사냥의 전문가이며 총에도 자신이 있는 것처럼 허풍을 떨고 있었으나 공작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헌터는 속이지 못했다. 사냥 얘기란 전문가가 몇 마디만 물어보면 거짓말이 탄로 나는 법이었다. 헌터가 토인 조수에게 절대로 앞서지 말 것, 호락 없이 총 쏘지 말 것을 엄명했다. 토인 조수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마지못해 수용했다. 이튿날 새벽 도이 트기도 전에 공작은 헌터를 재촉했다. 정오께 밀림에서 물소 떼를 발견했다. 키라칸카노가 창을 들고 앞장서서 작전을 지휘했다. 물소 떼는 앞을 가리는 나무들과 바람의 방향 때문에 20m 가까이 접근한 사냥대를 모르고 있었다. 헌터와 공작은 각각 목표물을 결정하고 동시에 발포했다. 헌터가 쏜 물소는 한발 물러서더니 픽! 쓰러졌으나 공작의 물소는 비틀거리더니 뒤로 돌아 달아났다. 가장 크고 훌륭한 뿔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헌터가 공작에게 양보한 것이었으나 아마도 총탄이 위장에 맞은 것 같았다. 부상한 물소는 숲속으로 잠적했다.
(재미 없는데.)
헌터가 혀를 찼다.
‘저놈은 저하고 키라칸카노가 잡아올 테니 각하는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각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나는 저 훌륭한 물소뿔을 트로피로 만들어 런던에 갖고 갈 텐데 내가 저놈을 직접 잡지 않으면 의미가 없소. 더구나 저놈은 부상을 당했으니 잡기도 쉬울 것 아니요.’
말은 점잖케 했으나 귀족의 버릇으로 상대방의 반박을 놀리는듯 한 단호한 어감이었다.
‘그러하오나 각하! 부상을 입은 물소는 그냥 물소보다 더 위험합니다.’
‘다소의 위험이야말로 수렵의 스릴이잖소.’
40m 정도 추적을 했을 때 헌터와 키라칸카노는 부상 당한 물소가 키만큼 큰 나무들이 밀생한 숲속에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공작에게 손짓을 했으나 공작은 나뭇가지와 물소뿔을 분간 못한 듯 망원경을 들었으나 공작이 물소를 발견하기 전에 물소가 먼저 공작을 발견했다. 그리고 재빨리 도망을 쳐버렸다. 추격이 어려워졌다. 선두에 선 키라칸카노는 핏자국과 발자국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는 코로 냄새까지 맡으면서 조심스럽게 전진했으며 그 뒤를 헌터가 따랐다. 밀림이 깊어지자 자그마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시야가 막혔다. 피가 멈췄는지 핏자국도 없어지고 발밑이 초지라 발자국도 없었다. 그래서 코로 추적을 했다. 목장이나 외양간에서 풍기는 비릿한 소똥 냄새다. 헌터와 키라칸카노는 물소의 기척을 몇 번이나 느꼈으나 그때마다 물소는 야릇한 기성을 지르면서 도망쳤다. 공격을 할 듯하다가 도망치고 또 도망을 치는 일이 서너 번 되풀이 되었다. 긴장감으로 공작이 먼저 말했다.
‘헌터군, 이거 안 되겠는 걸, 숨바꼭질에 지쳤어. 불길한 예감도 들고.’
‘각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날 여기서 탈출시켜줘.’
(진작 그랬어야지, 이제사?)
이런 곳에서 어떻게 탈출시키겠는가? 고민하다가 공작을 안전한 곳으로 안내했다. 60m쯤 떨어진 곳에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사방 20m 정도의 시야가 트였으므로 맹수가 습격해온다고 해도 공작은 첫발과 두 번째 사격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작은 공터에 혼자 남아있는 것이 불안한 듯 헌터에게 총을 바꿔달라고 했다. 공작을 공터에 모셔놓고 키라칸카노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없었다. 두리번거리며 두 사람을 찾고 있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단 한 방이었으며 조용해졌다. 3, 4초 후 헌터는 스스로 놀랐다. 총탄이 적중하는 뒷소리~맹수의 몸을 뚫고 들어가는 퍽! 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고 제2탄도 발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첫탄이 맞지 않고 2탄이 발사되지 못했다면 …? 예감은 적중했다. 곧 물소의 노호 소리를 들었다. 목 쉰 사람이 목에서 쥐어짜는 듯한 목청껏 외치는 소리 같았으며 그것은 물소가 희생자를 처치하는 소리였다. 헌터가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잡초줄기가 다리를 감았다. 헌터는 쓰러졌다. 그때 또 물소의 거친 소리가 들렸다. 뿔이 부딪치고 부드러운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헌터가 반사적으로 고함을 쳤다.
‘가만 있거라, 물소 이놈!’
잠깐이라도 물소의 공격을 멈추게 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그리고 다리에 감긴 잡초를 뿌리채 뽑으며 돌진했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하복부가 벌겋게 물든 물소가 앞다리로 키라칸카노의 배를 누르고 뿔을 마치 칼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물소는 살육에 정신이 팔려 눈앞에 뛰어든 헌터도 보지 못했으나 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거리는 불과 2m, 사람과 물소의 시선이 마주쳤다. 물소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증오심이 가득했다. 헌터는 주저 없이 눈과 눈 사이에 탄환을 보냈다. 탄환은 정확하게 물소의 머릿속을 꿰뚫었으나 제2탄환을 심장에 맞고나서야 쓰러졌다. 구경이 큰 총 같았으면 한 방으로 되었겠지만 공작의 작은 총이라 첫발을 쏘고 한발 물러서면서 2탄을 쏘았다. 물소가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고 키라칸카노의 배 위에 쓸어졌다.
‘이 새끼, 어디에!’
헌터가 물소를 키라칸카노의 배 위에서 떼어내려고 뿔을 잡아끌었으나 500kg이 넘는 물소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무에 등을 대고 누워 양 다리를 힘껏 뻗치면서 밀어내려고 해도 끔쩍도 하지 않았다. 큰 몽둥이를 물소 몸 밑에 받치고 들어 올리려고 했으나 역시 허사 그래서 큰 소리로 공작을 불렀다.
‘빨리 오라!’
‘무슨 일이냐?
‘잔말 말고 빨리 오라!’
헌터가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 키라칸카노는 숨이 붙어 있었으나 중상이었다. 헌터와 공작이 힘을 합쳐 겨우 물소를 키라칸카노의 몸 위에서 밀어낼 수 있었다. 헌터는 급한대로 마취제를 주사했다. 고통이 사라지자 키라칸카노가 말했다.
‘공작의 조수 그 녀석 어디 있어요? 그놈 죽지 ㅇ낳았다면 내 손으로 죽여 ….’
조수가 이 비극의 원인이었다. 헌터가 공작을 안내하고 간 사이에 헌터의 지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조수란 녀석이 물소를 추격하겠다고 종알거리면서 나섰다. 키라칸카노가 강력하게 제지했으나
‘창을 가진 놈이 총을 가진 사람에게 명령을 하느냐!’
빈정대면서 추적을 했다. 물소는 약 50m 떨어진 곳에 숨어있었다. 물소는 사람들의 동정을 살피면서 숨어있다가 경망스런 조수가 달려오는 것을 지근거리에서 덮쳤다. 조수가 기겁을 하고 발포했다. 그런 총탄이 맞을 리 없었다. 조수는 총을 던져버리고 도망을 쳤다. 하필 키라칸카노가 오고 있는 쪽으로 달렸다. 키라칸카노는 조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물소에게 창을 던질 수가 없었다.
‘비켜! 비켜!’
키라칸카노가 고함을 쳤으나 조수란 놈은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키라칸카노의 정면으로 달려왔다. 할 수 없이 키라칸카노는 옆으로 비켜서면서 창을 견주려고 했으나 미련한 조수는 자기도 옆으로 비켜서 달려왔다. 그래서 물소가 먼저 조수를 받았다. 조수는 킥! 소리를 내며 공중에 솟아 올라 떨어지면서 공교롭게도 양손으로 키라칸카노의 목을 껴안았다. 창을 던지려는 자세였던 키라칸카노는 그만 엉덩벙아를 찧었다. 그리고 물소의 일격을 받아 공중우로 날아갔다. 키라칸카노가 땅에 떨어지자 물소가 재차 공격을 했고 다시 땅에 떨어지자 또 공격을 했다. 키라칸카노의 시체는 처참했다. 배가 터져 창자가 삐져나오고 관절이란 관절은 모두 부러져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누더기처럼 보였다. 키라칸카노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한 얘기를 들은 공작이 조수를 찾았다. 몇 미터 떨어진 숲속에 조수가 누워 있었다. 혀를 길게 빼물고 허공을 보고 있는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물소의 일격으로 목뼈가 부러졌다.
‘마지, 마지 ….’
조수는 물을 찾았다. 공작이 수통의 물을 주니 몇 모금 마시고 숨이 끊어졌다. 헌터가 키라칸카노에게 조수가 죽었다고 알렸다. 키라칸카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부와나, 앞으로는 비겁한 놈들과는 사냥을 하지 마시오.’
그 말에 공작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손이 떨렸다. 헌터는 키라칸카노를 등에 업고 공작은 죽은 조수의 시체를 끌고 캠프로 돌아왔다. 공작이 키라칸카노를 차에 싣고 손수 운전을 하여 병원으로 데려갔다. 길이 울퉁불퉁하여 진동이 심했으나 헌터는 진동을 막기 위해 키라칸카노를 줄곧 안고 갔다. 도중에 소나기가 내려 차가 진흙탕에 빠지자 공작이 흙투성이가 되어 진흙밭에서 차를 끌어냈다. 영국 귀족이 토인을 위해 이런 일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키라칸카노의 죽음에 대한 자책인 것 같았다. 차를 타고가는 동안에 키라칸카노는 숨이 붙어 있었다. 지나가는 산돼지를 보고 꽤 큰 놈이라고 손짓을 했다. 키라칸카노는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끝까지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헌터에게 자식들과 마누라를 부탁했다.
‘부와나, 마누라에게 자식들은 제발 사냥꾼으로 만들지 말라고 전해주시오.’
헌터는 곧 치료를 하면 다시 같이 사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키라칸카노는 쓸쓸하게 웃었다. 키라칸카노는 병원에 도착하자 숨을 거두었다. 헌터는 키라칸카노를 마사이 전통예식으로 장례를 치뤘다. 마사이전사들이 용감한 선배에게 영웅칭호를 주었다.
20. 난쟁이부족(部族) 피그미
1930년대 이트리삼림은 백인 탐험가나 수렵가들이 발을 디디지 못 하는 신비의 세계였다. 벨기에영토로써 콩고의 북동부에 위치한 이트리는 광대한 천고의 원시림이었다. 수령 몇 백 년 거목의 가지들이 서로 엉키고 설켜서 전혀 햇빛이 들지 않아 영원한 어둠의 나라였다. 유령의 나라로 알려진 거기에는 식인종 토인들과 난쟁이 토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동물들도 비정상이었다. 아프리카의 밀림을 모두 다녔던 헌터도 이트리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1936년 여름에 기회가 왔다. 영국의 겟싱턴 박물관에서 파견한 조사대가 이트리 탐험을 하는데 헌터가 안내자로 선발되었다. R. Agloide박사가 대장인 영국탐험대는 이트리 삼림의 동식물수집이 목적이었다. 흔쾌히 수락했으나 전혀 이트리 삼림에 무지했기 때문에 두려움도 있었다. 실은 안내인이 아니라 안내를 받아야 할 처지였던 것인데 탐험대는 왜 안내인으로 선정했을까? 헌터는 콩고국경 동쪽에 있는 우간다의 간파라에서 탐험대와 합류했다. 헌터가 아그로이드 박사에게 이트리 삼림에 가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박사는 가볍게 웃었다.
‘헌터군, 우리가 필요한 것은 자네의 총솜씨일세. 둘째는 밀림 생활의 지식이고, 다음이 안내지. 적당한 용어가 없어 안내인이지 사실은 경호 대장이야.’
‘그리고 안내에 대해서 우리는 별도로 전문적인 안내인을 채용했어. 이트리에서 야생 오가피를 발견하여 사진을 학계에 발표한 인물이야.’
베제튼하우트라고 자기소개를 한 사나이는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베제튼하우트는 네델란드 출신의 깡마른 체구에 강철 같은 강인성이 보였고 아름다운 금발과 날카로운 푸른 눈의 소유자였다.
‘아, 당신이 그 유명한 헌터요? 염려마시오. 저 사람들을 끌고 가는 일은 내가 맡을테니 총질이나 잘 해주시오.’
거칠고 상스러운 말투였는데 일부러 그런 것 같았다. 어두운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자책하고 비웃는 말투였다.
(보통내기가 아닌데 ….)
탐험대는 7명의 유명한 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안내인과 포수를 합하여 총 9명이었다. 일행은 우간다를 떠나 세미리기강이 보이는 무베레무례에 도착했다. 앞에는 콩고국경이고 벨기에경찰이 주둔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온 일해의 페스포트를 검열한 대장은 헌터와 안면이 있어 농담을 했다.
‘요즘 정력이 떨어져 마누라가 투덜대고 있어. 돌아올 때 코뿔소의 뿔을 좀 갖다주게나.’
농담을 주고받다가 대장이 베제튼하우트의 페스포트를 보더니 안색이 달라졌다.
‘이 건 가짜야! 페스포트 주인 나오시오.’
베제튼하우트가 없었다. 앞서 통과된 사람들 틈에 끼어 이미 관문을 통과한 후 화장실 가는 체하면서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경비대장이 펄쩍 뛰었다.
‘안 돼! 그놈은 코끼리 밀렵자야. 작년에도 본관의 부하에게 뇌물을 주고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토인 사병 두 명을 유혹해서 탈주를 시킨 놈이야.’
(탈주?)
‘코끼리 밀렵의 조수로 쓴 거요. 그놈들은 밀렵한 상아를 들고나와 또 다시 여기를 빠져나가 달아났단 말이요.’
‘또 귀관의 부하를 매수했나요?’
‘아니요, 그때 우리는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저 강을 헤엄쳐서 빠져나갔소.’
‘뭐요! 저 강을 헤엄쳐? 악어가 우글거리는데 ….’
‘그렇지, 좌우간 그놈은 안 돼! 그놈을 잡아 오기 전에는 당신들도 통과 못해!’
경찰대장의 수염이 부르르 떨었다. 헌터가 슬쩍 말을 돌렸다.
‘검은 코뿔소 뿔은 좋지요. 정력제로서는 그만이야. 그 것을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마누라들이 놀라지.’
‘이번 이트리에서 나올 때 서너 개 갖고 나올 계획이지. 물론 귀관에게도 선사할 거고 ….’
경찰대장의 노여움이 좀 풀렸다. 그래서 헌터가 이 탐험대의 입국을 거절하면 영국과 벨기에 사이에 곤란한 국제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설득을 했다. 그리고 박사도 베제튼하우트는 자기가 책임지고 잡아서 출국할 때 인계하겠다고 약속했다. 관문에서 몇 백 미터쯤에 베제튼하우트가 시치미를 떼고 길 가 나무뿌리에 앉아 있었다. 대뜸 헌터가 악어가 우글거리는 강을 어떻게 건넜느냐고 물었다. 베제튼하우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무거운 상아를 들고 있었지. 경찰들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강 상류와 하류에 돼지 한 마리씩을 던졌어. 악어들은 돼지를 먹으려고 상류와 하류로 몰려갔지. 그사이에 우리는 강을 헤엄쳐 건넜을 뿐이요.’
박사가 깔깔 웃었다.
‘자네가 밀렵전문가고 전과 2범이며, 여자 버릇과 술버릇도 나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러나 나는 도덕학자가 아니라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나는 자네가 이트리삼림에 우리를 안전하게 안내해주는 걸 바래.’
탐험대는 무보가에서 준비를 했다. 50명의 포터(짐꾼)를 모집했는데 그들은 담배 한 갑 살 돈만 주면 80kg이나 되는 짐을 머리에 이고 운반한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행진을 했다. 선두에 선 베제튼하우트는 장난감 같은 총을 어깨에 덜렁거리면서 마치 소풍을 나온 사람처럼 천천히 걸었다. 그레이트 이트리강을 건넜다. 사원하게 트인 초원을 하루 종일 걸었다. 그 날 오후 일행은 울창한 삼림의 입구에 캠프를 쳤다. 헌터는 커다란 물소 한 마리를 쏘아 저녁밥 반찬으로 제공했다. 물소는 50m 전방을 달리고 있었으나 헌터는 선 자세로 겨냥, 단 한 발로 쓰러뜨렸다. 이 사냥을 본 토인들이 탄성을 질렀다. 베제튼하우트도 놀랍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펴 보였다. 이튿날 정오에 이트리삼림에 들어섰는데 시원하고 걷기에 편했다. 거목들이 가지를 펴서 햇빛을 차단하였기에 잡초나 가시덤불이 자라지 못했다. 삼림에는 가느다란 물줄기도 흘렀는데 맑았다. 아프리카의 강들은 예외 없이 탁류였는데 이트리의 물은 수정처럼 맑았다.
‘이트리의 밀림은 아름답군!’
박사가 웃음을 띠면서 말했는데 베제튼하우트가 대꾸했다.
‘박사님, 진짜 이트리삼림은 아직도 1주일 더 가야 구경합니다.’
첫인상이 시원스럽고 편했던 이트리삼림은 안으로 들어감에 따라 모습이 바뀌었다. 우선 시야가 너무 어두웠다. 전등을 켜야 했다. 또 습기가 많았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땅이 축축했고 군데군데 늪이 있어 행진에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습지에 서식하는 모기, 독거미들이 우굴거렸다. 모기는 대낮에도 달려들어 말라리아 환자가 속출했으며, 커다란 독거미는 대낮에도 천막을 제집인 양 기어 다녔다. 독거미는 물리면 3~4일 간 드러누워야 하고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건 코브라였다. 이곳의 스피칭코브라는 피리소리에 춤추는 인디아의 코브라 하고는 달랐다. 화가나면 목덜미가 부풀어오르고 대가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스피칭코브라는 사람을 물어 죽이는 게 아니라 독액을 뿌려 죽인다. 몸을 빳빳하게 세우고 대가리를 뒤로 젖히면서 입에서 두 줄기의 독액을 분수처럼 뿌린다. 분출된 노란 독액은 보통 3m까지 도달한다. 코브라는 헌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적의 눈을 겨냥하여 독액을 쏜다. 백발백중이다. 독액이 눈에 들어가면 고통이 심하고 대개 실명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헌터 앞장을 섰던 잡역부가 갑자기 손으로 눈을 가리고 무서운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넘어졌다. 그의 발밑에서 짙은 녹색의 코브라가 나무 그늘로 사라졌다. 토인이 실수로 그놈의 꼬리를 밟았으며 코브라는 토인의 두 눈에 두 줄기의 독액을 정확하게 쏘았다. 토인이 고함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늙은 토인이 토인들을 소리쳐 불러 사나이를 꼼짝 못 하게 누르고 앞가림을 젖히더니 토인의 두 눈에 오줌 줄기를 퍼부었다. 다른 토인들도 빙 둘러서서 오줌줄기를 소방호스처럼 분사했다. 치료가 끝나자 나뭇잎으로 눈을 가렸다. 오줌 치료를 서너 시간 뒤에 한 번 더 했다. 두 번째 치료가 끝났을 때 사내는 눈이 좀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곧 시력을 완전히 회복했다. 박사는 오줌에 들어있는 암모니아와 요산이 독액을 중화시키는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박사는 식량을 현지 조달할 계획이었으나 식량이 될 사슴, 산돼지, 물소 등 짐승이 보이지 않았다. 산돼지가 나타났다는 기별을 듣고 추적했으나 허사였다.
(또 기름기 없는 밥을 먹게 되었군.)
헌터가 숙소로 돌아가던 중 여나문 명의 토인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는데 냄비에 고깃국이 끓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풍겼으며 국을 마시는 토인들의 얼굴에서도 만족하는 빛이 역력했다.
(아하, 이 친구들이 특별요리를 만들어서 자기네들끼리만 먹고 있군.)
헌터는 그 자리에 끼어 앉았다.
‘쿠커장, 나도 한 그릇 주게나.’
쿠커장이 아무 말 없이 국그릇을 내밀었다. 맛있었다. 좀 짠 것 같았으나 산돼지 고기 맛이었다. 한 그릇 더 달라고 그릇을 내밀었는데 토인 늙은이가 말했다.
‘부와나, 이 고기는 백인들에게는 금지된 고기입니다.’
‘뭐! 무슨 고기야? 설마 뱀고기는 아니겠지, 아니면 원숭이고기인가?’
토인들이 킬킬거렸다.
‘마고노.’
쿠커장이 말했다. 마고노는 팔이라는 토어(土語)다.
‘팔 … ? 무슨 팔?’
그제서야 헌터는 자기가 먹은 고기가 무슨 고기인 줄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마고노는 사람 팔이라는 의미였다. 헌터가 식량 조달 사냥을 나간 뒤 토인들도 사냥을 나갔다. 토인들의 사냥은 허사였으나 수확이 있었다. 그들은 밀림에서 식인종 원주민들과 만나 물물 교환을 했다. 소금을 주고 식인종들이 이웃 마을에서 구한 사람 팔 두 개를 얻었다. 원주민들에게 소금은 귀한 물품이었고, 캠프 토인들에게 사람 팔은 별미였다. 이 사건으로 쿠커장은 해임되어 잡역부로 전락했다. 그는 시치미를 떼고 헌터에게 사람고기를 먹이고는 염소고기라고 할 작정이었으나 방정맞은 포터 때문에 탄로가 나버린 것이다. 쿠커장은 무보가에서 급료를 5배나 주고 고용했던 토인이었는데 그가 사람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쿠커였을 줄이야 …. 콩고 지방에는 식인종이 많았다. 육식을 좋아하는 그들은 식량난 때문에 식인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식인습관은 백이들이 엄금했고, 그들도 나쁘다고 판단하여 사라져가고 있었으나 그래도 일부지방에서는 사람고기를 은밀하게 거래하고 있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다른 마을과 전쟁에서 잡은 포로나 범법자를 마을 시장터에 묶어 진열해놓고 주부들이 쇠고기 등심 고르 듯 옆구리를 쿡쿡 찔러보거나 엉덩이살을 철썩철썩 쳐보기도 했다. 상품은 멀뚱멀뚱 눈을 뜨고있는 산 사람이다. 사람 고깃값이 돼지고깃값 보다도 싸다고 한다. 고깃값으로 팔리는 사람은 한 구매자가 몽땅 사가기도 했으나 대개 많은 고객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부분을 나눠 가졌다. 고객들은 자기가 필요한 부분에 백분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모든 부분의 매매거래가 끝난 뒤 사람이 도살되면 자기가 그려놓은 부분을 가져갔다. 불행한 노예는 모든 부분이 매진될 때까지 몇 주일 동안 진열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박사가 특별채용한 쿠커장은 옛날에 사람고기가 공공연히 거래되었을 때 사람고기의 부분품 값을 정해주는 감정사였고 후에 식인이 금지되자 비밀리에 사람고기를 요리하여 식도락가들에게 팔았다.
탐험대는 이트리삼림에 들어선지 6일만에야 피그미족을 만났다. 난쟁이 나라 주인이다. 그들은 벌써 며칠 전부터 탐험대의 도착을 알고 비밀리에 탐험대를 감시했다. 헌터도 큰 나무 뒤에 원숭이 보다 좀 큰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목격했고 어쩌다 길을 되돌아갔을 때 탐험대의 발자국 위에 자그마한 발자국이 덮혀 찍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피그미가 탐험대를 미행했다. 탐험대는 좀 불안했다. 일행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헌터도 긴장했다. 아무리 미개인이라지만 짐승이 아닌 사람과 싸우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헌터는 장총에 총탄을 장전하였고 허리에도 권총을 찼다. 다른 대원들에게도 권총을 차도록 권유했으며 기습을 예견하고 행진대열도 바꾸었다. 그러나 안내인 베젠튼하우트는 헌터의 작전을 비웃었다.
‘포수 양반, 사람사냥을 할 셈이요?’
헌터가 발끈했다.
‘난 일행을 보호할 의무가 있소, 일행에게 위험한 사람은 누구든 쏘아야지.’
헌터가 일부러 장총의 안전장치를 철컥! 풀었다. 베제든하우트가 좀 질렸다.
‘염려마시오. 피그미족은 백인을 해치지 않소. 그들은 싸움을 싫어하는 부족입니다.’
베제튼하우트의 설명에 의하면 피그미족이 탐험대를 감시하는 것은 세무반이 아닌가 의심해서라고 한다. 벨기에정부는 식민지인 이곳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있는데 피그미족은 세무반이 오면 모두 숨어버렸다. 그래서 1년에 한 번 출장나오는 세무관리는 피그미족과 숨바꼭질을 하게 되는데 세무관이 징수한 것은 고작 염소 몇 마리 정도다. 베제튼하우트의 설명은 일행을 안심시켰다.
‘피그미들과 만나서 얘기할 수 없을까?’
‘피그미들과 만나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나 뿐입니다.’
‘내일쯤 내가 그들을 데리고 오지요.’
이튿날 오후 베제튼하우트는 단신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피그미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피그미는 갈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 사람보다는 컸다. 백인의 배꼽 정도 키였고 몸과 얼굴은 털복숭이였다. 그들은 그들의 체구에 맞도록 작은 활을 어깨에 메고 작은 창을 들고 있었다. 베제튼하우트는 캠프를 보여주면서 피그미말로 이야기했다. 자기가 추창과 부락장의 친구라고 했다. 피그미는 활짝 웃으며 좀 기다리라고 하고는 토끼처럼 민첩하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곧 숲에서 떠드는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피그미들이 모여들어 캠푸로 몰려왔다. 그들은 순진난만하게 탐험대와 악수를 하고 춤을 추었다. 환영 인사였다. 부락장들이 달려와 베제든하우트와 목을 껴안고 반가운 인사를 했다. 베제튼하우트는 마치 개선장군 같았다. 요란한 환영식이 끝나자 그들은 백인들이 가지고 온 이상한 물건들의 용도를 물었다. 그리고 괴상한 질문을 했다.
‘백인도 꿈을 꾼다고? 꿈을 꾸는 사람은 우리들 뿐인데 ….’
그들은 크게 놀랐으나 부락장이 말했다.
‘꿈을 꾸는 사람은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는 우수한 부족인데 당신들도 우수한 부족임에 틀림없다.’
피그미들은 포수를 좋아했다. 포수는 그들의 사냥 무기인 활이나 창보다도 우수한 총을 가지고 짐승들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피그미들 가운데 너무 늙어 사냥을 못 하는 늙은이들이 헌터에게 원숭이를 잡아달라고 했다. 원숭이고기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였다. 헌터가 원숭이사냥을 승낙했으나 사냥은 어려웠다. 밀림은 수십 미터나 되는 나뭇가지가 엉켜 햇빛도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얼키고 설킨 나뭇가지들 때문에 원숭이들의 소리만 들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헌터가 노인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갔을 때 베제튼하우트가 먼저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여나문 발을 쏘고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실망한 표정이었다. 헌터가 연달아 두 발을 쏘았다. 두 마리의 원숭이가 떨어졌으나 중간에서 나뭇가지에 걸려버렸다. 그러나 염려할 일은 없었다. 피그미 젊은이들이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에 올라가 원숭이를 잡아왔다. 수천수만 개의 나뭇가지들이 수십 미터 엉켜있는 나뭇가지에 걸린 원숭이를 정확하게 예측해서 가지고 내려왔다. 피그미는 농경을 하지 않는다. 활, 창, 함정, 덫으로 야생 짐승을 잡아 주식으로 했다. 그들의 활은 타부족의 활에 비해 작고 그만큼 힘이 약했다. 그래서 그들은 화살촉에 독을 발라 사용했다. 독은 죽은 벌레, 독초를 섞어서 만들었는데 누런 겨자 비슷했다. 학술반이 시험한 결과 염소는 다리에 가벼운 상처를 냈는데 하룻만에 죽었다. 그러나 피그미의 특기는 함정과 덫이다. 짐승 길의 땅을 깊이 파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엮어 덮고 흙과 나뭇잎을 뿌려놓으면 감쪽같았다. 부근 나뭇가지에 걸린 표식이 없다면 사람도 분별하기 어려웠다. 함정 밑바닥에는 끝이 뾰쪽한 대나무를 촘촘히 박았고 그 끝에 독을 발라놓았으므로 어떤 짐승이라도 함정에 빠지기만 하면 죽는다. 코끼리, 물소는 물론 조심스럽기로 이름난 사슴이나 오가피도 걸렸다. 피그미가 장치한 덫도 정교했다. 짐승의 통로 위에 뻗은 나뭇가지에 창을 거꾸로 매달았다. 창대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놓았기 때문에 짐승이 지나가다가 창을 고정한 줄을 건드리면 창이 낙하하면서 짐승을 찔러 죽인다. 사소한 상처를 입더라도 창끝에 발라놓은 독 때문에 창에 찔린 짐승은 곧 죽게 된다. 피그미는 이런 함정과 덫을 수없이 많이 설치해놓고 매일 새벽이면 순회를 한다. 어느 날 헌터가 피그미의 순회에 따라갔다. 피그미는 이트리삼림을 자기들의 농장으로 보고 마치 농작물을 수확하는 것처럼 짐승을 수확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함정은 없었다. 일곱 번째 함정에 자그마한 사슴이 한 마리 빠져있었고 열네 번째 함정에는 큰 뱀과 산돼지가 함께 빠져있었다. 뱀이 함정에 빠지는 것은 드문 일이었는데 아마 뱀과 산돼지가 싸움을 하다가 같이 빠진 것으로 추측했다. 덫은 빈탕이었기 때문에 오늘의 식량은 산돼지고기 등으로 200여 명이 먹었다. 좀 부족했으나 이틀 전에 잡은 코끼리고기가 남아있었으므로 배를 곯지는 않을 것이라는 부락장의 말이었다. 특별손님인 헌터에게는 통째로 구운 원숭이가 제공되었으나 헌터는 원숭이고기를 보며 며칠 전에 먹은 마고노가 생각되어 구은 원숭이고기를 사양했다. 피그미는 이트리삼림 여기저기에 산재했는데 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나뭇가지를 엮어 나뭇잎을 두껍게 덮은 움막이었다. 얼핏 보면 짐승의 굴 같았으나 내부는 상쾌하고 깨끗했다. 짐승을 따라 이동했으므로 정성들여 집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또 피그미는 밤에 잘 때만 움막을 이용했고 낮에는 밖에서 활동했으므로 움막은 공들여 지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공동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분배하는데 관리직, 점장이, 의료업, 대장간, 목수는 사냥에 참가하지 않아도 분배했다. 여자들은 그물, 덫, 짐승껍질 다듬기 등 특기를 가진 사람은 기능정도에 따라 한몫 또는 반몫을 받았다. 피그미는 일부다처제도였으나 부인을 3명 이상 가진 특권층은 별로 없었다. 농경을 하지 않아 큰 부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피그미는 대부분 일부일처였으며 여자는 정조 관념이 강했다. 어느 날 마을 뒤 숲속에서 여자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젊고 예쁜 그 여자는 오랫도록 굶주린 것 같았다. 피그미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는데 유독 그 여자는 방치되었다. 헌터가 마을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 여자는 간음을 했다. 몇 년 전 남편이 코끼리에게 밟혀 죽은 뒤부터 혼자 지내다가 최근에 이웃 홀아비와 눈이 맞아 밀회를 했다. 두 남녀는 밤에 밀림에서 만나 정사를 했는데 여자가 매일 밤 외출을 하는 걸 수상하게 여긴 시어머니가 미행을 해서 남녀가 밀회를 한 현장을 잡았다. 그래서 젊은 과부는 마을 사람들의 처벌과 냉대가 두려워 스스로 가출을 하여 밀림을 배회하다가 굶어 죽었다. 탐험대가 그 말을 듣고 여자를 묻어주고 꽃다발로 슬픔을 표시했다. 그러나 베제튼하우트는 탐험대의 그런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피그미들에게는 피그미들의 도덕과 질서가 있는데 백인사회의 도덕을 피그미에게 적용하지 말라고 했다. 피그미 여자들은 세계적으로 정조 관념이 가장 강한 부족이며 그것은 미덕으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여자 꾀는 솜씨가 있지. 흑인 여자는 작은 선물을 주거나 서비스를 하면 쉽게 드러눕고, 선물을 주기 싫으면 추장이나 부락장에게 부탁해도 쉽게 얻을 수 있어.’
헌터도 추장이나 부락장이 보내주는 여자들을 거절하느라 고통스러웠다.
‘네 꾐에 넘어가지 않은 유일한 여자가 피그미 여자들이지. 피그미 추장이나 부락장들도 자기 목숨을 주었으며 주지 여자는 주지 않아.’
베제튼하우트는 미남이고 여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의 여자 후리는 솜씨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피그미여자들의 정조를 칭찬하는 걸 보면 피그미 여자의 정조 관념은 대단하였다.
탐험대가 이트리에 체류하는 동안 이웃 마을에서 괴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트리에는 코끼리가 많아 백인 밀렵자들이 침입했다. 그들 중에는 백인사회의 쓰레기 같은 부랑자들도 많았는데, 금발의 키가 2m가 넘는 거인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밀림속을 돌아다니다가 피그미 여자를 만나 덤벼들었다. 피그미여자는 동을 쳤다. 그러나 욕정에 미친 백인이 피그미 여자의 뒤를 쫓았다. 2m 거구의 남자가 욕정으로 1m 남짓한 여자를 쫓고 쫓기는 광경은 추악했다. 좀처럼 잡히지 않던 여자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마을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달아났다. 몸집이 가벼운 여자는 함정 위로 달아났으나 100kg이 넘는 거구의 백인은 함정에 빠져 대나무에 목이 찔려 죽었다. 헌터 일행이 사고 현장에 갔을 때 피그미 여자는 백인의 시체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쨌든 백인을 죽였으니 처벌을 두려워했다. 베제튼하우트가 짐승처럼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백인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힘으로 여자를 폭행하려던 놈은 죽어 마땅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 건 정당방위야. 경위서에 그렇게 내 의견을 싸주게.’
박사가 동의했다. 그 후 피그미와 탐험대는 매우 친숙해졌다. 피그미가 박사의 동식물 연구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자원했다. 피그미는 백인들이 돈과 시간을 허비하면서 왜 하잘것없는 곤충이나 뱀, 새 따위를 잡으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밤 박사는 피그미 대표 20여 명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수천 마리의 동물사진이 게재된 책을 보여주면서 이런 것들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피그미는 그 부탁을 들어주려고 초조한 나머지 터무니없는 일까지도 맡겠다고 나섰다. 이것도 잡아주고 저것도 잡아주겠다고 약속하다가 북극이나 남극에서만 사는 바다코끼리, 물개들도 잡아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들은 바다코끼리 사진을 보더니 눈을 번쩍거리면서 이놈을 서너 마리 잡아 오겠다고 약속했다.
‘음, 이놈이야 이놈. 나는 이 동물을 봤어. 숲속 깊이 숨어있다가 한밤중에만 나오는 놈들인데 무서운 놈들이지. 이 긴 이빨로 받으면 호랑이도 죽는단 말이지. 그렇지만 당신들이 원한다면 난 함정을 파서 이놈들을 잡아 오지. 몇 마리 필요하오?’
아프리카 초원에서 바다코끼리를 잡아 오겠다는 허풍은 탐험대원들을 폭소케 했다. 대체로 피그미의 말은 과장되었고 부정확했다. 그러나 피그미의 말에는 진실도 있었다. 백인이 믿지 않았던 오가피와 난쟁이 코끼리를 잡아 왔다. 난쟁이하마도 존재를 증명했다. 아프리카밀림에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진귀한 동물들이 많았다. 다음 날부터 피그미의 협력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헌터는 피그미에게 대형 짐승을 공급해야 했다. 피그미는 헌터에게 밀림에 소금이 나오는 장소가 있으며 짐승들이 모여든다고 했다. 헌터는 그곳에 잠복소를 만들었다. 그곳은 바위가 많았는데 소금 성분의 바위를 짐승들이 핥아 번들번들했다. 모기떼가 극성이었으므로 첫날 사냥은 실패했다. 박사가 모기장을 친 움막을 다시 지어주었다. 그리고 조명장치를 했다. 그날 밤 고릴라와 표범의 싸움을 구경했다. 고릴라가 나타났을 때 헌터는 사람으로 착각하여 하마터면 누구냐?고 고함을 칠 뻔했다. 나무 그늘에서 나타난 일곱 마리의 고릴라는 꼭 피그미만 했다. 고릴라들은 신중했다.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웅얼거리면서 바위로 갔다. 그때 희미한 불빛에 시커먼 그림자가 소리 없이 뛰어들어 앞장선 고릴라의 목을 물었다. 검은 표범이었다. 대담한 표범은 단신으로 고릴라의 무리에 뛰어들어 한 마리와 뒹굴었다. 기습을 당한 고릴라는 그 무서운 완력을 쓸 여유가 없었다. 고릴라가 표범을 꽉 껴안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표범이 고릴라의 목줄을 뜯어버렸다. 그런데 헌터가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다른 고릴라들의 태도였다. 두목이 표범하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도 괜히 소리만 꽥! 꽥! 지를 뿐 어느 한 마리도 표범에게 덤벼드는 놈이 없었다. 헌터가 발포했다. 표범이 공중으로 1m나 튀어올라 죽은 고릴라 위에 떨어졌다. 뒤이어 헌터가 비겁한 고릴라무리에 발포하여 한 마리를 죽였다. 마을의 장로들은 고릴라가 죽은 얘기를 듣더니 말했다.
‘고릴라가 나무 위에서 싸움을 하면 표범에게 이길 수 있다.’
헌터가 잠시 생각하더니 수긍했다.
피그미는 매우 열정적으로 일을 했다. 동물을 잡기 위해 새로운 함정을 파고 덫을 만들고 활로 새를 잡았다. 그래도 바다코끼리나 물개는 끝내 잡지 못했지만 벼라별 동물들이 잡혔다. 수십 미터를 날아다니는 날다람쥐도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무늬의 족제비가 사로잡혔다. 열대 난과 식물의 원색에 맞춰 이곳의 동물들은 색상이 화려했다. 앵무새, 채양새들이 아름다웠다. 30cm가 넘는 나비는 아름다움을 넘어 독성으로 보였다. 코프라, 만비도 있었는데 만비는 뱀 중에서도 가장 독성이 강한 뱀이다. 길이가 3m나 되면서도 몸통은 사람의 손가락만 하다. 나무에서는 초록색, 잡초에서는 다갈색으로 위장한다. 박사는 동굴의 동물을 잡기 위해 연막탄을 사용했는데 튀어나온 동물을 헌터가 총으로 쏘아 잡았다. 어느 날에는 동굴에서 표범이 튀어나왔다. 박사를 호위하고 있던 헌터가 공중에 나는 표범을 맞히지 못했다면 박사는 표범에게 목줄을 물렸을 것이다. 그런데 박사보다도 더 놀란 것은 헌터였다. 헌터가 발사한 총은 산탄총이었는데 여나문 개의 총탄이 박사에게 맞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탐험대의 연구반은 잡혀온 동물들을 해부하고, 알콜에 넣고, 박제를 만들었다. 박사가 떠나는 날 인사를 했다.
‘이번 임무가 성공적으로 수행된 건 피그미 여러분들의 절대적인 협조 때문이었습니다. 그 보답으로 남은 소금과 설탕을 선물로 드립니다.’
피그미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헌터와 베제튼하우트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총명하고 비정한 사나이이긴 했으나 베제튼하우트는 밀림과 피그미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문명사회에서는 밀렵전과자였고 방탕아였으나 밀림에서는 신사였고 피그미의 우상(偶像)이었다. 헌터는 돌아오는 길에 코뿔소를 네 마리 쏘아 훌륭한 뿔을 경비대장에게 선물했다. 경비대장은 너무 기뻐 위조 페스포트를 가진 베제튼하우트가 슬그머니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못 본 체했다. 이틀 후 헌터와 베제튼하우트는 술집에서 밤새 술을 마신 뒤 이별하고 그 후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어느 백작 부부를 안내해서 이트리에 들어가 사냥을 하다가 백작 부인과 눈이 맞았는데 백작 부인이 같이 도망가자고 유혹했으나
‘사랑하는 마담, 난 이트리가 좋아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영국영토였던 아프리카 마차고스 지방에 웬만한 벌만큼 크고 독침을 가진 체체파리가 극성을 부렸다. 다행히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병원체는 없었으나 가축들에게는 무서운 병균을 전염시켰다. 특히 소들은 체체파리가 전파시키는 윌스병에 감염되어 하루에도 몇십 마리씩 죽었다. 두 번째 문제는 코뿔소가 토인들의 집이나 논밭을 마구 짓밟고 인명피해도 났다. 코뿔소는 체체파리의 윌스병에 면역력이 있어 공생하면서 무섭게 증식했다. 그래서 코뿔소 외의 동물들도 얼씬거리지 않았고 영국 정부는 밀림을 아예 폐쇄해버렸는데 문제는 그 밀림에 와간바족이 살고 있었다.
21. 사나운 코뿔소
와간바는 체체파리 때문에 가축들이 몰살당했고, 코뿔소들에게 경작지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고 여러 번 진정을 했다. 와간비족은 사냥족이기 때문에 코뿔소와도 싸움을 했으나 그 결과로 사태가 더 악화되었다. 와간비족은 활을 사용하는 부족들이었기 때문에 활로 코뿔소사냥을 했으나 코뿔소가 숨어있는 숲은 작은 나무들이 밀생했으며 잡초가 우거져있어 활은 좋은 무기가 되지 못했다. 화살이 코뿔소에 맞아도 두꺼운 껍질을 뚫지 못해 가벼운 상처를 입힐 뿐이었는데 상처를 입은 코뿔소는 더욱 사납게 날뛰기 마련이었다. 그렇잖아도 심술궂은 놈들인데 상처라도 입으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코뿔소는 상처를 입힌 토인을 쫓아 마을까지 달려들어 집을 부수고 뿔에 받히고 발에 짓밟혀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영국 행정관들이 회의를 했으나 모두 실천 불가능하거나 효과를 기대하기 곤란한 내용들이었다. 사태를 수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밀림의 나무들을 잘라버리고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밀림을 없애고 개간을 하면 와간바족들에게 경작지를 제공할 수 있으므로 일석삼조였다. 그러나 나무를 자르고 불태우려면 코뿔소가 우글거리는 숲속에 사람들이 들어가야 하는데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수 있을까? 영국 관리는 결국 그 일을 헌터에게 의뢰했다. 헌터가 먼저 밀림에 들어가 코뿔소를 소탕하면 벌채꾼들이 뒤따라 들어가 벌채를 하기로 했다.
‘헌터군, 어려운 부탁을 해서 미안하네만 이 일은 자네밖에 할 사람이 없어. 실은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는데, 영국군대가 코뿔소하고 전투하는 군대냐고 사령관한테 핀잔만 들었네.’
헌터의 책임은 밀림에서 코뿔소를 한 마리도 남김없이 사살하거나 쫓아내는 임무였다. 만약 코뿔소가 한 마리라도 남아 작업대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전적으로 헌터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헌터는 그 일을 맡았고 맨 먼저 한 일은 조수를 선발하는 일이었다. 이런 위험한 일에 나설 사람이 없기 때문에 행정청의 협조를 얻어 밀렵전과자들을 수소문 했다. 밀렵은 행정청의 눈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 중에는 숙련된 자들이 있었고 용감했다. 수소문 끝에 세 사람의 용사들을 선발했는데 이들은 평생 밀렵과 감옥에서 살아온 밀렵전문가였다. 세 사람 중 한 명은 마흔이 좀 넘어 보였는데 헌터는 한눈에 이 사람이 발자국 추적 전문가라는 걸 간파했다. 그 사람의 몸 전체에 가시덤불에 할킨 자국이 무수히 남아있었고 그의 발바닥은 짐승처럼 두꺼웠다. 두 번째 사나이는 30대였는데 나무타기 명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몸은 고무처럼 탄력이 있고 부드러웠다. 그가 헌터에게 실기를 보여주었는데 그의 몸은 나무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10m 높이의 나무를 단 3분 만에 소리 없이 올라갔다.
‘부와나, 나는 고릴라나 원숭이보다도 더 나무를 잘 탑니다. 급하면 부와나를 업고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어요,’
헌터는 그이 등에 업혀 나무에 올라갈 생각은 없었으나 그가 나무 높이 올라가 먼 곳의 지리나 정탐이 필요했다. 세 번째 사나이는 아직 앳된 20대였다. 그는 헌터의 총을 갖고 수행하는 조수 역할을 맡았다. 헌터가 이번 일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웃고 있었다.
‘부와나, 당신과 같이 다니면 밀렵자로 몰려 산림 경찰에게 잡혀갈 일은 없겠지요?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들은 상당히 많은 보수를 받게 되었으나 그들에게 보수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큰소리치면서 당당하게 사냥을 할 수 있었고 총을 만질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모두 창과 활의 명수였으나 상대가 코뿔소였으므로 창과 활은 무용지물이었으므로 헌터는 그들에게 총을 주고 사격 연습을 시켰다. 총을 만져보고는 처음에는 크게 흥분했는데 헌터는 좀 불안해졌다. 백인 같으면 아무리 사냥에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며칠만 연습을 하면 총을 다룰 수 있다. 총의 메카니즘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은 활만 다루었기 때문에 활과 총의 차이점을 모른다. 토인은 총이 짐승을 쏘아죽이는 것은 탄환이 튀어 나가 짐승에 맞았기 때문이 아니고 그 무서운 화약 폭발 소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활을 쏠 때에는 마치 연주자들이 바이올린을 켜듯이 그들의 감각으로 활을 조종한다. 그들의 감각과 활이 일체가 되어 화살이 발사되는데 총은 그런 도구가 아니며 전혀 별개의 심리에서 다루어지는 단순한 기계인 것이다. 헌터는 3일 동안이나 토인들에게 총의 원리를 습득시키려고 무한히 애를 썼으나 효과 여부는 미지수였다.
나이로비에서 마구엔까지는 로라(사냥용 반 트럭)를 타고 갔다. 토인들은 검문소에서 산림감독관들이 헌터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동시 그들에게도 너그러운 미소를 띠는 것을 보고 의기양양했다.
‘부와나, 당신과 영국 총리 중 어느 쪽이 더 높지요?’
헌터는 쓴웃음을 지었으나 옆에 있던 산림감독관이 단호하게 답변했다.
‘밀림이나 숲속에서는 부와나가 총독 각하보다 높은 분이시다.’
영국통치의 아프리카 일대에는 괴상한 숲들이 있었다. 이들 숲은 대개 1천 평에서 3천 평 정도로써 광대한 밀림 여기저기에 산재하였는데 키가 큰 나무는 없고 3m 이내의 나무와 그 정도 높이의 잡초와 가시덤불 따위가 밀생했다. 나무와 덤불과 풀이 엉켜있기 때문에 사람은 그 속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고 코뿔소만 살고 있었다. 헌터 일행이 도착하자 와간바족들이 대환영을 했다. 이웃에는 마사이족이 살고 있었다. 마사이족은 유럽의 백인들보다도 키가 컸으나 와간바족은 백인보다는 작았으나 동양인보다는 컸다. 와간바족은 보통 흑인들과 달라 눈, 코 등이 단정했고 지능 수준도 높았다. 와간바족은 이웃 마사이족과는 오랫동안 사이가 나빠 싸움을 했으며 타 부족과는 달리 호전적인 마사이도 와간바를 만만하게 보지 못했다. 마사이가 전투족이라면 와간바는 수렵족이었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가 농사를 지으면서 최근 십여 년 동안은 평화롭게 살았지만 코뿔소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헌터가 와간바의 활을 조사했는데 와간바의 활은 훌륭했다. 재료가 무트바라는 흑색 나무인데 단단하면서도 대나무처럼 탄력이 있었다. 활의 장력은 약 33kg 정도였는데 그것은 화살이 50m까지 나갈 수 있으며 50m 이내에서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이었다. 화살도 훌륭했다. 특히 화살의 끝부분이 아주 정교했다. 여자가 수를 놓는 바늘 크기로 날카로왔는데 끝부분에는 무서운 독이 발라져 있었는데 그 독은 아무리 큰 짐승이라도 몇 시간 이내에 죽는다. 마사이와 전투에서도 화살은 창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날아갔으므로 마사이를 전멸시켰다고 주장했다. 헌터는 아프리카 토인들 중에서 마사이가 가장 용맹한 부족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와간바의 주장에 동의했다.
‘부와나, 우리의 활은 천하무적인데 그 코뿔소에게만은 ….’
와간바 추장의 호소였다.
헌터는 와간바족의 본부가 있는 마을에서 1주링 간 머물면서 와간바와 친해졌는데 와간바는 모두 부지런했으나 특히 여자들은 쉴 새 없이 일을 했다. 노경은 물론 모든 가사를 도맡았다. 어린아이들도 땔감을 했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이 염소를 처가에 바쳤다. 그리고 시집에서도 부지런히 가사를 돌봐 돈을 모아 남편의 첩을 사들였다. 첩이 많을수록 본처의 가사노동이 쉽고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헌터가 마을에 머물렀을 때 좋은 친구를 얻었다. 무른베는 마을의 부락장이었는데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또한 사교적이어서 부하들을 잘 다루었다. 헌터의 좋은 친구였던 마사이의 용사 키라칸카노를 잃은 다음 헌터는 자기를 대신하여 사냥 조수나 포터를 지휘할 지배인이 필요했다. 헌터가 사냥계획을 수립하고 조수와 몰이꾼둘에게 사냥지시를 하고 있을 때 개들이 요란하게 짖었다. 라이노(코뿔소)가 나타났다고 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에 토인들이 와서 옥수수밭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울쌍을 지었다. 곧 추적이 시작되었다. 라이노는 한 마리였으며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건조기라 발자국 추적이 어려웠다. 나이로비에서 대려온 트렉커(추적꾼)가 아니었으면 추적을 포기할 뻔 했다. 트렉커는 와간바족 추적꾼과 합동으로 추적을 했는데 얼만 안 가서 와간바의 추적꾼이 트렉커를 형님을 모시는 것 같았다. 와간바의 추적꾼이 발자국을 놓치면 트렉커가 곧장 앞장을 섰는데 트렉커는 발자국을 보는 게 아니라 나뭇가지나 잡초를 보고 추적을 했다. 정오께 커다란 숲에 들어섰다. 숲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라이노가 지나간 숲에 터널처럼 길이 생겼다. 라이노길을 따라가면서 헌터는 추적대의 편성을 바꾸었다. 트렉커가 앞장을 서고 헌터가 뒤를 따랐다. 만약 라이노가 역습을 하면 트렉커가 땅에 엎드려 헌터가 발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무모한 추적이었다. 원래 맹수추적은 맹수 쪽에서 바람이 불어야 가능했다. 맹수는 냄새에 민감해서 바람 반대 방향에서 추적을 해야 한다. 평지추적이라면 바람 부는 곳을 따라 포수들이 이동을 하면서 추적을 했는데 터널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고 만약 라이노가 뒤돌아서 공격을 한다면 피할 길이 없어 몰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라이노는 눈이 근시인 반면 코가 아주 예민했기에 위험은 더 했다. 한 시간쯤 추적을 했을 때 트렉커가 신호를 했다. 라이노가 무엇인가 단단한 것을 씹는 소리가 들렸다. 헌터는 미국제 고무바닥 구두를 신고 있었고 토인들은 맨발이었기 때문에 발소리를 죽일 수 있었다. 라이노는 먹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한 발 한 발 라이노가 보일 때까지 전진했다. 다시 트렉커가 신호를 했다. 발견했다는 신호다. 사냥대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헌터만 다가갔다. 라이노가 보였다. 기척을 눈치챘는지 머리를 들고 귀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라이노는 좌우 귀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서 소리를 집으려고 했다. 헌터는 라이노가 스스로 움직여서 사격 위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라이노의하반신과 급소가 나무에 가려서 쏠 수가 없었다. 토인들이 초조해졌다. 라이노가 보이는데도 헌터가 발포를 하지 않자 초조해졌다. 토인들은 급소는 모르고 총만 발사되면, 총소리에 라이노가 죽는다고 알고 있었다. 이런 토인들의 마음이 라이노에게 전달된 것 같았다. 라이노의 등에 앉있던 새들이 날아올랐다. 라이노의 피부에 기생하는 벌레를 잡아먹는 새들이었는데 라이노의 감시병역할을 하고 있었다. 라이노가 전투태세가 되었다. 그는 주위를 뱅뱅 돌아보더니 사람을 발견하고 헌터의 정면으로 걸어왔다. 라이노가 모습을 들어내자 토인들이 흥분했다. 그런 동작이 라이노를 자극했다. 라이노가 머리를 숙이고 돌진했다. 쿵쾅쿵쾅 땅이 울리는 진동이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다. 헌터는 당황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첫탄이 발사되었다. 라이노가 앞으로 꼬꾸라졌으나 곧 일어났다. 탄환이 분명코 이마에 맞았을텐데 다시 돌진했다. 제 2탄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심장이었으므로 라이노는 폭탄을 맞은 탱크처럼 크게 몸을 흔들더니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 자세로 숨졌다. 총소리가 나자 헌터 뒤에서 대기하고 잇던 토인들이 환성을 질렀다. 토인들은 미친 듯이 환성을 지르면서 라이노 시체로 달려갔다. 사냥대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사냥상황을 살피려고 왔다가 달려왔다. 그들은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었다. 그들은 라이노가 옥수수밭을이나 감자밭을 짓밟혀 굶주리고 있었으며 라이노고기를 얻으려고 달려왔다. 라이노의 껍질이 벗겨지자 수십 개의 칼들이 난도질을 했다. 자칫 다찰까 염려되었다. 이 소동에 독수리들이 한몫 끼었다. 독수리는 광란의 토인들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다가 토인들이 잘라낸 고기덩이를 잽싸게 채서 날아갔다. 어떻게나 그 동작이 빠른지 고기를 빼앗긴 토인은 자기 고기가 어디로 간자를 몰라 여우에게 홀린 사람처럼 멍 하니 서 있었다. 라이노의 가죽은 고급책상덮개로 사용하였으며 뿔은 상아 보다도 더 비쌌다. 이디아와 아라비아인들에게 정력제로 사용되었다. 할렘에서 수십 명의 여자를 거느린 아라비아의 왕족들에게는 요긴한 물건이었다. 헌터가 시험삼아 라이노뿔을 가루로 만들어 복용해봤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 헌터의 첫 번째 라이노사냥은 고통스러웠으나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는 더 위험했다. 바람과 지형이 좋지 않았다. 화산지대였는데 사람이 걸어가면 통통소리가 났다. 기공이 많아 바람의 방향도 일정하지 않았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사람낸새를 맡은 라이노가 도망쳐버렸다. 그래서 나무를 잘 타는 마이어에게 총을 주고 라이노를 발견하면 쏘라고 지시했다. 마이어는 사격연습도 했으므로 무서운 것이 없었고 아주 신이 났다. 그래서 너무 전진을 했다. 바람을 안고 있었으므로 안신했다. 그러나 밀림 한가운데서 옆바람이 불어와 라이노가 마이어의 냄새를 맡았다. 쫓기던 라이노가 갑자기 돌아서 돌격을 했다. 추격에만 정신을 쏟았던 마이어는 땅이 우르르 울리는 소리에고개를 들었는데 그때는 이미 라이노가 3m 앞에서 달려들었다. 총을 겨눌 여유도 없어서 마이어는 머리 위로 뻗은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나무에 매달린 마이어의 왼쪽다리를 라이노가 뿔로 받았다. 마이어는 나무에서 떨어졌으며 그 충격으로 총이 오발되었다. 뒤따르던 헌터가 총소리를 듣고 뛰어와 라이노를 발견했다. 라이노는 마이어에게 덤벼들다가 뒤에서 달려오는 헌터를 보고는 뒤돌아섰다. 전속력으로 달려왔기 때문에 조준할 여유가 없어 총을 앞으로 내밀면서 발포했다. 2m 정도의 거리였는데 총탄이 두꺼운 라이노의 갑옷을 뚫고 심장에 박히는 소리를 들었다. 라이노늬 빨갛게 충혈된 눈에 분노가 서렸다. 돌격하려고 했으나 이미 다리가 마비되어버려 간신히 머리를 한 번 흔들고는 뿔로 받는 동작을 하더니 쓰러졌다. 마이어는 헌터가 몸을 잡아 일으키자 일어나면서 말했다.
‘부와나, 쏠 틈이 없었어요. 저놈은 기차보다도 빨리 덤벼들었어요. 나뭇가지를 붙잡지 못했더라면 지금쯤은 ….’
헌터가 두 번째 라이노를 끌고 돌아오니 마을 뒤에서 라이노와 코끼리가 싸움을 한다고 알려주었다. 초식동물끼리의 싸움은 드문 일이었으나 목격자 토인이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무 위로 올라갔다. 라이노가 숲에 있었다. 뭔가 심기가 편찮아 보였다. 이윽고 숲에서 코끼리가 나타났다. 코끼리는 천천히 걸어오다가 라이노를 발견했다. 동시에 라이노도 코끼리를 발견했다. 심술궂은 라이노와 난폭한 코끼리가 서로 상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둘 다 근시이기 때문에 더 잘 보려고 대가리를 내밀면서 상대편을 관찰하고 있었다. 토인은 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소동이 벌어질 것 같았다. 소동이 벌어지면 나무 위에 있다고 안심할 수 없었다. 화가 난 코끼리나 라이노에게 받치면 나무가 통째로 넘어질 수도 있었다. 코끼리와 라이노가 대결하고 있는 숲에는 길이 하나뿐이었다. 둘 중 하나가 길을 양보해야 하는데 라이노는 길을 비켜주지 않을 뿐더러 상체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코끼리도 화가 났다. 그는 코를 치켜세우고 서너 발 전진했다. 통행 방해자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러나 라이노는 여전히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었다.
(네깐 놈이 뭔데, 어디 맘대로 해봐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라이노 쪽에서 보면 그 숲은 자기 영토고 코끼리는 침입자였다. 그래서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코끼리도 그 고집불통에게는 기가 막혔던 모양이다. 코끼리는 홧김에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라이노 옆으로 빠져나갔다. 슬금슬금 라이노의 눈치를 살피면서 얌전하게 지나갔는데 라이노는 여전히 심술궂은 낯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코끼리가 사라지자 라이노도 숲을 떠났다. 라이노는 애초부터 숲에 머물 생각이 없었는데 코끼리에게 심술을 부렸고 라이노가 신경질을 부린 것은 소화불량 때문이라고 토인들이 설명했다. 라이노의 배설물을 보고 한 말이었다.
‘저놈은 소화불량으로 심술이 났으니 무슨 짓을 할런지 몰라요,’
토인들이 걱정을 했는데 그 예감은 적중했다. 며칠 후 이웃 마을 여자가 라이노에게 살해되었다. 여자는 나무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가슴이 움푹 패이고 늑골이 여러 개 부려졌다. 헌터가 추격을 했는데 라이노는 숲으로 들어갔고, 도중에 어미와 새끼가 합류했다. 라이노가 신경질이 된 것은 배앓이가 아니라 새끼 때문인 것 같았다. 헌터가 망설였다. 새끼를 데리고 있는 맹수사냥은 위험하고, 금기였다. 그러나 사람을 해쳤으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낮은 산이 나왔고 계곡이 있어 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숲이 있었다. 추적을 중단하고 산 위로 올라가 라이노의 동태를 살폈다. 20분 정도 기다리자 라이노들이 숲을 빠져나와 다른 숲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거리는 약 1km 정도고 바람은 사람에게 유리했다. 산에는 한 사람이 남아 라이노의 동정을 살피고 나머지는 추적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추적을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새끼를 데리고 있어 민감했으므로 추적을 간파했다. 어미와 새끼를 피신시킨 수컷이 숨어있다가 돌진했다. 진지를 짓밟아버리는 탱크 같았다. 헌터는 수놈을 최대한 가까이 잡아 당겨놓고 첫탄으로 승부를 가렸다. 그놈의 뿔에는 토인 여자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때 산 위에서 감시를 하던 토인이 달려와 어미와 새끼가 숲을 빠져나와 산 위로 올라가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헌터는 지름길로 달려 산 중턱에서 암컷 라이노를 기다렸다. 수놈이 죽을줄 모르는 암컷은 수놈을 기다리는 듯 가끔 뒤를 돌아다보며 천천히 바위산을 올라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 젓을 달라고 보채고 있었으나 암컷은 귀찮다는 듯 새끼를 밀어냈다. 그러나 집요하게 달라붙는 새끼에게 젖을 물렸다. 그러는 사이에 토인들이 시끄럽게 지껄이면서 라이노고기를 얻으려고 산 위로 올라왔다. 어미가 사람 소리를 듣고 긴장했다. 젖을 빨던 새끼를 밀어내고 전투 태세를 했다.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헌터가 바위 뒤에서 나와 천천히 어미를 향해 걸어갔다. 어미는 그 자그마한 눈으로 헌터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감히 자기에게 덤벼드는 생물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한참동안 멍하니 보고만 있더니 그만 화를 냈다. 그리고 덤벼들었다. 헌터는 젖먹이 짐승을 쏘는 게 싫었으나 이때는 주저할 여유가 없었다. 연달아 두 발을 쏘았다. 고통을 덜어주려는 배려였다. 새끼가 어리둥절하더니 어미 곁으로 가서 쓰러진 어미를 일으켜 세우려고 코로 어미의 배를 떠받치고 있었다.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총소리를 듣고 토인들이 시끄럽게 조잘대며 달려왔다. 사람들 소리를 들은 새끼가 긴장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오는 토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용감하게 군중들에게 덤벼들었다. 어미를 보호하려는 효성이었다. 돼지만 한 크기에 뿔도 자라지 않은 젖빨이였지만 어마어마한 기세로 군중들에게 덤벼들었다. 앞장섰던 토인들은 달아나고 뒤따르던 청년들이 창과 칼을 들고 새끼에게 덤벼들었다. 새끼는 윗입술을 부르르 떨며 창과 칼 사이를 뚫고 돌진했다. 헌터는 그런 새끼의 태도에 크게 감탄해서 공포를 한 방 쏘고 새끼를 사로잡으라고 고함쳤다. 토인들이 창과 칼을 버리고 청년 네 명이 새끼와 뒹굴었으나 새끼는 의외로 강했다. 새끼의 박치기에 장정들이 비명을 질렀다. 10분 동안이나 싸웠으나 끝내 기진맥진해서 사로잡혔다. 헌터는 코뿔소 새끼를 캠프에 가두어두고 염소 젖을 먹였다. 새끼가 이틀 동안 버티다가 염소 젖을 빨았다. 그리고 차차 헌터에게 따랐다. 헌터는 한 달 뒤 새끼를 동물원에 기증했는데 새끼는 헌터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헌터가 라이노 사냥을 한 지 한 달 만에 20여 마리를 죽였으나 밀림개척단은 아직 일을 하지 못하고 헌터를 재촉했다. 헌터도 초조하고 신경질이 났다. 라이노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라이노를 찾아 죽이기로 하고 조수 세 명만 데리고 밀림을 돌아다녔다. 이런 방법으로 하루 한 마리씩 라이노를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헌터 일행은 숲속에서 라이노가 부르릉 부르릉 하는 소리를 들었다. 라이노는 좀체 소리를 내지 않은 동물이었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라이노는 암수 두 마리였는데 서로 꽁무니에 코를 비비며 빙빙 돌고 있었다. 연애 중이었다. 그런데 암컷은 수놈의 구애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수놈의 동작이 느리고 적극성이 부족했는데 암컷은 그게 못마땅한 것 같았다. 암컷이 자기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수컷에게 덤벼들어 난폭하게 배를 찔렀다. 장난이 아니라 사납게 찔렀기 때문에 수놈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러나 곧 아첨하듯 다시 꽁무니를 따라왔다. 두서너 번 구박을 당하고 나서야 수컷이 암놈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적극 공세를 벌였다. 앞다리를 들어 암컷의 등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때 토인이 헌터의 등을 치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또 한 마리의 수놈이 나타났다. 그놈은 암내를 맡고 왔는데 선참자가 암컷과 전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한 태도였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전희를 벌이고 있는 암수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빈 공간을 향해 맹렬한 공격 시늉을 하고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자기가 얼마나 강한 놈인가를 과시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런 제 2의 수컷을 암놈이 흘끔거리면 보는 걸 눈치챈 제 2의 수컷이 암놈에게 따라오라는 듯 숲으로 들어갔으나 암컷은 첫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암놈이 따라오지 않자 제2의 수컷은 숲속에서 나와 혼자 열심히 돌격 연습을 했다. 암컷이 귀찮다는 듯이 첫사랑을 유인하여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실연을 당한 제2의 수컷은 원망스럽게 암수가 사라진 숲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긴장했다. 조수가 기어가다가 소리를 낸 것이다. 제2의 수컷이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놈은 화풀이 상대가 생겨 돌진했다.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겠다는 공격이었다. 숨어서 밀회를 엿보던 헌터는 총을 쏘고 싶지 않았으나 하는 수 없었다. 신방을 차렸던 신혼부부도 뛰어나왔다. 교미를 방해당해서 부르릉 부르릉 화를 내 주위를 들러보다가 사람들을 발견했다. 교미 중이었다는 표식인 거품이 암컷의 어깨에 묻어있고 암수의 입에도 거품이 잔뜩 묻어있었다. 헌터는 이미 재장전을 끝낸 총을 난폭한 신부의 심장을 겨눠 발포했다. 이 광경을 보고 무정한 신랑은 숲속으로 도망가버렸다. 라이노의 교미기는 9월부터였는데 라이노들이 사나와진 것은 교미기였기 때문이었다. 교미기가 되면 암컷들이 암내를 풍기는데 그 고리타분한 냄새는 사방 몇천 미터 내외의 수컷들을 흥분시킨다. 호랑이는 생식기에 암내를 풍기는 암컷 주위에 반경 천 킬로미터 안의 수놈들이 모여들어 생사를 가름하는 싸움을 벌이지만 라이노는 다른 동물처럼 싸우지 않고 암컷들에게 상대를 선택하게 한다. 암놈이 마음에 드는 수놈을 신랑으로 선택하면 다른 수놈은 그 결정에 따른다. 그리고 새끼를 임신해도 동거하며 새끼가 독립할 때까지 가족으로 지낸다. 어쩌다 잘 못 헤어지게 되면 암컷은 남편을 찾으려고 허파에서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내는데 사냥꾼들은 그 소리를 흉내 내어 수컷을 유인하여 사냥을 한다. 그러나 헌터는 부부애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는 그런 방법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랬던 헌터가 교미 중인 러이노를 사살한 적이 있었다. 헌터는 아카시나무와 딸기 덩쿨이 밀식한 숲속에 누워있었다. 추적을 하다가 조수들과 헤어져 혼자만 그 꼬락서니가 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이면 가시에 찔릴 뿐만 아니라 부근에 라이노들이 설치고 있어 목숨이 위험했다. 헌터는 추적을 포기하고 조수들이 찾아주기를 기다렸는데 약 20여 미터 전방에서 러이노의 힉힉거리는 숨소리와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상하운동을 했는데 숨소리와 운동의 박자가 맞았다. 라이노가 교미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다른 라이노 수컷이 교미 중인 라이노에게 접근했다. 교미 중인 암수가 앙칼진 항의를 받고 주춤거리던 라이노가 헌터의 조수 오라 소년을 발견했다. 오라 소년은 기습을 하는 라이노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라, 조심해라! 라이노가 덤벼든다.’
헌터는 위험한 자기 처지를 잊고 고함을 쳤다. 교미 중이던 라이노가 헌터를 발견했다. 돌격할 것이 분명하고 헌터는 누운 채로 짓밟혀 죽을 것이 분명했다. 헌터가 누운자세로 발포했다. 수놈의 이마를 겨냥했다. 수놈은 암컷의 등에 올라탄 자세로 총탄을 받았으며 그 충격으로 암수가 다 무릎을 꿇었다. 암수가 같이 고꾸라졌지만, 암놈은 일어섰다. 분노해서 새빨갛게 충혈된 눈알이 보였다. 암컷이 헌터에게 돌진했다. 오라 소년에게로 가려던 다른 수놈도 헌터에게로 돌진했다. (아뿔사!) 몸은 반신불수 상태고 총탄은 한 알뿐인데 두 마리의 라이노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동시에 덮쳐들고 있으니 결과는 뻔했다. 그러나 헌터에게는 사냥꾼으로써 본능이 있었다. 어쨌든 쏘아야 한다는 본능이다. 헌터는 정면에서 돌격해오는 암컷의 귀밑을 겨냥해서 쏘았다. 총탄이 뇌신경을 마비시켜 일순간 동작을 정지시킬 심산이었는데 아슬아슬하게 그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암컷은 헌터의 1m 앞에서 꼬꾸라졌다. 만약 탄환이 다른 곳에 맞았더라면 암컷은 달려오는 그 탄력만으로 헌터를 짓밟았을 것이었다. 바로 그때 헌터는 목덜미에 거치른 라이노의 콧김을 느꼈다. 또 한 마리의 라이노가 불과 2m 거리에서 돌진하고 있었다. 재장탄을 할 시간이 없었다.
‘오라, 총을 쏴 총을!’
헌터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오라는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맨손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축구에서 태클을 하듯 달려들어 라이노의 두 뿔을 잡고 늘어졌다. 라이노는 격노했다. 상투를 잡힌 양반처럼 노호 소리를 지르면서 공격 대상을 바꿨다. 라이노는 헌터의 코앞에서 정지하여 오라소년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힘차게 흔들었으나 오라 소년은 그 무서운 힘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뿔을 쥔 양손을 놓지 않았다. 라이노는 맹렬한 속도로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고 오라 소년의 몸은 마치 풍차처럼 돌고 있었다. 헌터가 그 광경을 우두커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재빨리 재장탄을 하고 라이노가 대가리를 땅에 쳐박고 오라 소년을 짓밟으려고 하는 찰라 발사했다. 헌터 쪽에서는 라이노의 대가리만 보였으므로 대가리를 겨냥했는데 쏜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라이노와 오라 소년이 동시에 넘어진 것이다.
(아차, 양쪽 다 맞았구나!)
헌터는 아카시아 줄기와 딸기 덩쿨을 박차고 일어섰다. 오라 소년에게 달려갔다. 오라 소년은 뻣뻣한 자세로 누워 꼼짝도 하지 못했다. 헌터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런데 몇 초가 지나자 오라 소년이 움직였다. 헌터가 와락 달려들어 오라 소년을 일으켜 세워 몸을 조사했다. 탄환 자국은 없었다. 오라 소년은 라이노가 넘어지면서 다리로 쳐서 실신했을 뿐이었다. 헌터는 오라소 년을 꼭 껴안았다, 두 사람 다 구사일생이었다.
‘부와나, 나도 이제 사냥을 잘하지요?’
‘훌륭해, 아주 훌륭했어!’
이 일이 있은 후 오라 소년은 영웅이 되었다. 그 후 오라 소년이 총을 달라고 간청을 해서 헌터는 아직 쓸만한 벨기에 연발총을 주었다. 그리고 마이어와 함께 사냥을 하겠다고 했다. 헌터는 기분 좋게 허락하고 말했다.
‘나도 함께 가겠어. 그러나 사냥은 너희들이 하고 나는 구경꾼이다.’
그 이튿날 오후 나무타기 명수 마이어와 오라 소년은 몇 분 전에 찍힌 라이노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마이어가 아카시아 나무 위에 올라가 정탐을 했다. 라이노 네 마리가 앞에 있었다. 마이어는 제페리 2연총을 갖고 오라소년은 벨기에 2연총을 들었다. 헌터는 약속대로 구경만 하기로 했으나 만약의 경우 위험한 상황이 되면 자기가 원호 사격을 하겠다고 명령했다. 숲은 예상보다 깊지 않았고 곧 라이노의 풀 먹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방정맞은 원숭이들이 나무 위에서 킥킥거리며 러이노에게 추적을 알려주었다. 오라 소년이 버럭 화를 내고 원숭이를 노려봤으나 이미 늦었다. 라이노의 탁한 노호소리와 같이 커다란 수놈 한 마리가 돌진했다. 다행히 라이노와 사이에 직경 2m 정도의 공터가 있어 라이노가 그 공터를 달려올 때 사격할 기회가 있었다. 라이노가 공터에 나타나자 전신이 훤히 드러났는데 마이어가 조준만 해놓고 사격을 하지 않았다. 라이노가 공터를 통과하여 나무들 사이로 들어왔을 때에야 발사를 했다. 마이어는 라이노를 가까이 당겨놓고 쏠 심산이었으나 나뭇가지들에 라이노가 가려져 머뭇거리다가 발사 기회를 놓치자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맞을 리 없었다. 그 사이에 라이노가 한 마리 더 나타났다. 한꺼번에 두 마리가 덮쳐들자 마이어는 당황했다. 또 한 방을 쏘았는데 역시 빗나갔다.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한 마리의 배를 겨냥해서 뒤에 있는 놈까지 관통을 예상하고 쏘았으나 빗나가버렸다. 오라 소년이 연발총을 겨냥했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다시 방아쇠를 당겼으나 역시 반응이 없었다. 라이노가 불과 몇 발짝 앞에 왔을 때 오라 소년이 헌터를 바라보며 총을 흔들었다. 총이 고장 났다는 걸 알렸다.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엎드려! 내가 쏜다.’
다행히 그 두 사람은 절대절명의 위기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헌터의 지시를 들었다. 헌터의 시야에 두 마리의 라이노가 클로즈업되었다. 헌터가 두 발을 연달아 쏘았다. 회심의 총솜씨였다.
‘부와나, 우리들에게는 역시 활과 창이 총보다 좋네요,’
11월이 되자 라이노 사냥이 끝났다. 10여 마리를 죽였기에 나머지는 멀리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임무 완료. 복귀하겠음’
헌터는 나이로비 행정청에 전보를 쳤다. 오랜 가뭄 끝에 때마침 비가 왔다. 텐트 속에서 헌터는 파이프 연기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마이어는 라이노의 뿔과 껍질에 기름칠을 하였으며, 오라 소년은 총을 손질하였다. 그리고 토인 조수는 저녁 준비를 했다.
‘오늘 저녁밥 수프는 뭔가?’
‘라이노의 등심입니다.’
‘밥 반찬은?’
‘라이노의 허벅다리 고기 구이지요.’
‘내일 메뉴는?’
‘라이노의 심장이 남아있어요.’
헌터가 웃었다.
‘라이노고기는 이제 질렸어. 그놈들과 싸운 생각을 하니 이젠 소화액이 나오지 않아.’
‘부와나, 그렇다면 뱀고기를 요리할까요? 어젯밤에 천막 밖에서 꽤 큰 놈을 한 마리 잡았는데요.’
‘천만에, 뱀고기 요리는 사양하겠네, 그놈의 말만 들어도 소화가 되지 않은 라이노 고기가 입으로 올라올 지경이야.’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로 누렇게 말라 있던 초원이 파랗게 살아나고 있었다.
1920년 초, 헌터가 나이로비 호텔에 있을 때 젊은 미국인 두 사람이 방문을 받았다. 택사스 출신의 사업가이며 수렵가로서도 꽤 이름이 알려졌다고 했다. 키가 2m 가까운 그들은 커다란 손으로 헌터의 손을 쥐고 흔들며
‘미스터 헌터,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사냥터에 가고 싶소. 처녀 사냥터 말이요,’
‘위험한 곳도 좋소. 우리는 모험을 좋아하니까.’
양키답게 유쾌한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쎄랭게티의 온고론고에 갈 예정이었으므로 유능한 안내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온고론고는 남쪽 케냐의 쎄랭게티 대초원의 하반구였으며 아프리카에서 짐승들이 가장 많이 서식하는 지대였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사방 수백km나 되는 반사막지대인 쎄랭게티 대초원을 횡단할 수 없어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헌터는 그 계획이 무모하며 자칫 사막 귀신이 될 수 있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보다시피 요즘은 건조기입니다. 두서너 달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은 건조기인데 어떻게 사막을 횡단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충고가 모험을 자극했다.
‘우린 돈이 있소. 포터를 많이 고용해서 물을 충분히 갖고가면 되지 않소. 헌터가 안내한다면 충분한 돈을 드리리다.’
돈 보다도 그들의 모험심이 마음에 들었고 실상은 헌터도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쎄랭게티의 온고론고는 짐승들의 낙원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있었다. 헌터는 숙고한 끝에 승락하고, 우선 후리라는 네덜란드 출신의 백인 포수를 조수로 채용했다. 후리는 50이 넘은 포수였으나 쎄랭게티 대초원의 지리에 밝았다. 일행은 나이로비 남쪽 2백km 알샤에서 준비를 했다. 첫째는 포터였다. 거기서 고용할 수 있는 포터는 와알샤족 뿐이었는데 와알샤는 농사꾼이었으나 게으르고 싸움을 일삼는 부족이었다. 농경 부족이었으나 농사는 마누라에게 맡기고 종일 술이나 마시고 황토와 짐승 뼛가루로 만든 염료로 몸치장을 하여 마치 도깨비 같았다. 다행히 거기서 유명한 박제사를 수소문하여 그를 조장으로 고용하고 포터를 모집했다. 사파리(유렵)의 성공 여부는 포터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포터는 머리에 30kg 정도의 짐을 이고 하루 20km를 걸어가는 임무인데 물 없는 사막, 험준한 산길, 위험한 밀림들을 지나갈 때는 말썽을 일으켰다. 이 지대는 사람이 못 들어가는 악마의 땅이라고 우기든가, 새들이 태영을 등지고 북쪽으로 날아가니 불길하다고 고집을 부려 도망을 치는 일도 있고, 마누라 생각이 나서 뺑소니치는 토인도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도망을 치면 그 짐을 버려야 되는데 고용포터의 1/ 3이 탈주하면 사냥대는 되돌아와야 한다. 이를 예상하고 헌터는 무려 150명의 포터를 고용했다. 포터는 물, 식량, 모기장, 취사도구, 총기와 화약을 가지고 갔고, 돌아올 때는 사냥수확물을 운반했다. 포터 모집이 끝나자 포터의 사기 진작을 위해 대환영연을 열었다.
22. 아가씨 수렵가(狩獵家)
네 발의 총탄은 동전 하나만 한 동그라미에 적중했다.
‘캡틴 나는 아빠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사탕 과자를 얻어먹으려는 게 아니에요. 혼자 맹수를 잡고 싶어요. 내 총솜씨에 불만이라도 ….’
옆에서 지배인이 거들었다. 미스 페이는 부유한 실업가의 딸이고, 대학을 졸업한 학사고, 총 뿐만 아니라 낚시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승마도 수준급이라고 부연했다. 헌터는 그래도 시무룩했다. 헌터는 나이로비에서 가장 유명한 포수로써 명망있는 유렵가(遊獵家)가 아니면 안내를 하지 않았는데 하필 이런 새파란 여자를 상대로 안내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불만이었다.
지배인이 또 끼어들었다.
‘미스터 헌터, 당신이 아로이나 백작 일행과 한 계약을 이 아가씨가 파기시켜버렸어요. 계약금 보상을 하고.’
헌터는 출발할 때 서너 마리의 당나귀를 구입, 짐을 실었는데 그중 두 마리가 심술을 부려 짐을 싣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그러나 짐을 다 실어놨는데도 당나귀들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내 다리가 다 땅에 붙은 듯 당근을 주어 달래도 소용이 없었고, 엉덩이를 밀어도 눈을 내리깔고 꼼짝을 안 했다. 헌터가 신경질을 내고 애먼 포터들에게만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포터와 당나귀의 씨름을 가만히 보고 있던 미스 페이가 나섰다. 그녀는 자기 짐꾸러미 속에서 캉가루 가죽으로 만든 가죽 채찍을 끄집어냈다. 굵은 자루가 달린 그 채찍은 길이가 3m나 되었으며 여자가 다룰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미스 페이는 그 긴 채찍을 손목만으로 휘둘렀다. 손에서 날아간 채찍은 휘리릭! 소리와 함께 날아가 당나귀의 엉덩이를 쳤다. 그때까지 업수이 여긴 눈빛으로 미스 페이를 흘끔거렸던 당나귀가 기겁을 하고 뛰어올랐다. 그러자 미스 페이는 회오리 소리가 나는 채찍으로 당나귀의 등을 쳤고, 당나귀들은 죽는 시늉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미스 페이는 당나귀들이 뛰든 말든 계속 채찍질을 하더니 다음에는 당나귀의 고삐를 쥐고 구둣발로 당나귀의 배를 사정없이 찼다. 뽀족 구두였으므로 당나귀들은 채찍보다 더 아픈 듯 길길이 뛰었으나 미스 페이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발길질을 멈춘 미스페이가 고삐를 끌자 당나귀는 대가리를 푹 숙이고 미스 페이가 끄는 대로 따라왔다.
‘캡틴, 당나귀도 말의 사촌이니까 말 다루는 식으로 하니 얌전해졌지요?’
당나귀는 얌전해졌지만 헌터는 대노했다. 당나귀가 날뛰는 바람에 몇 시간이나 결려 꾸려놓은 짐들이 당나귀 등에서 떨어져 당나귀 발굽에 밟혀 산산히 흩어지고 일부는 아주 망가져 버렸다. 미스 페이는 헌터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헌터는 당나귀를 파면시켜버리고 짐을 우(牛)마차에 실었다. 소는 점잖았다. 짐을 산더미처럼 싣고도 불평 없이 끌고 갔으나 그 걸음걸이가 거북이처럼 느렸다. 원래 소는 그런 동물이었으므로 헌터는 만족했으나 이번에는 미스 페이가 발끈했다. 성미가 급한 미스 페이는 소를 싫어했다.
‘캡틴, 저놈의 소는 걸어가는 거요 기어가는 거요?’
‘또 채찍질을 해보시지.’
소는 말고 전혀 다른 동물이기 때문에 채찍질은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미스 페이는 자기 자동차를 불렀다. 스체트베카라는 자동차는 지프처럼 생긴 차였는데 미스페이는 차에 중요한 물건과 캠프 도구만 싣고 헌터에게 타라고 했다.
‘이 차로 먼저 목적지에 가고 우마차는 천천히 오라고 해요.’
헌터가 반대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런던의 하이웨이가 아닌 바위와 숲이 험한 길이고 개울도 있어요. 그런 데를 자동차가 어떻게 가겠소?’
‘염려마세요. 이 차는 내가 운전하면 산도 물도 넘을 수 있어요.’
차는 출발할 때부터 무서운 스피드를 내기 시작했으며 바위나 숲을 마구 뛰어넘었다. 자그마한 개울 따위는 맹렬한 스피드로 달려 뛰어넘었다. 점프를 했는데 사고가 안 난 것을 보면 운전실력은 믿을만 했다. 그러나 덮개가 없는 무개차에서 짐꾸러미에 불안하게 앉아있는 헌터는 위험했다. 몇 번이나 떨어질 뻔한 위기에서 간신히 짐꾸러미를 붙들고 있었는데 끝내 사고가 났다. 차가 개울을 하나 뛰어넘고 아주 넓은 초원에 들어서자 미스 페이가 전속력을 냈다. 마치 자동차경주에서 달리듯 달려 나갔으며 미스 페이의 머리칼은 풍압으로 휘날려 뻣뻣하게 일어섰다. 그러다 차가 개미집에 부딪혔다. 별것 아닌 장애물이었으나 워낙 빨리 달리고 있었으므로 짐꾸러미가 퉁겨저 올랐고 짐꾸러미를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헌터도 짐꾸러미와 함께 공중에 떠올랐다. 그러나 차는 짐꾸러미가 떨어졌던 사람이 떨어지던 아랑곳없이 계속 달려갔으며 자동타가 지나간 풀은 바다에서 배가 지나간 물길처럼 바퀴 자국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었다. 공중에 떠오른 헌터는 다행히 먼저 떨어진 짐 위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헌터는 한숨을 쉬고 파이프를 태웠다. 한편 난폭한 아가씨 운전자는 약 2km나 달려가다가 다른 짐이 퉁겨나가는 걸 알고 뒤를 돌아다보고야 비로소 헌터가 없어진 걸 알았다. 뒤로 돌아간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헌터의 코앞에서 멈췄다.
‘캡틴, 이 게 무슨 장난이지요? 파이프는 뽀빠이에게나 태우라고 하세요.’
헌터가 조용하게 말했다.
‘아가씨, 운전을 하다가 몇 사람이나 죽였소? 그 리스트에 나는 들어가기 싫은데.’
‘단 한 사람도 죽인 일 없어요. 갈비뼈가 부러진 사람하고 팔이 부러진 사람은 서너 명 있었지만 ….’
‘아가씨 자신의 뼈는 부러뜨리지 않는 것이 아가씨의 운전 솜씨로구만.’
미스 페이는 그 말을 유머로 받아들이고 또 깔깔거렸다. 헌터는 쓰디쓴 얼굴로 파이프를 털고 일어났다. 이런 개구쟁이 아가씨와 같이 사냥을 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우울하기만 했다. 미친 듯이 달린 미스 페이의 자동차는 3일이나 걸릴 것으로 예정했던 목적지에 그날 밤에 도착했다. 헌터와 아가씨는 자동차에 싣고 온 천막을 치고 같이 사용했다.
미스 페이는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사냥꾼에게 가장 중요한 대담성이 있었다. 이 아가씨는 맹수 무서운 줄 몰랐다. 그녀는 위험에 몸을 던져놓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재미로 여기는 태도가 보였다. 보통 사냥꾼의 태도가 아니었다. 욕구불만일까? 인생에서 뭔가 갈구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아 자포자기한 태도였다. 미스 페이는 런던의 윌리엄 에반스 제품의 360구경 2연총을 애용하는데 그 게 사자 사냥에는 적합했으나 구경이 너무 좁아 코끼리나 라이노사냥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총으로 코끼리를 쏘아 쓰러뜨렸다. 총솜씨가 워낙 정확했다. 오래 겨냥하는 법이 없었다. 총을 떨어뜨리고 있다가 들어 올리는 순간 아무렇게나 발사를 해버렸다. 마치 겨냥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태도로 갈겨버렸는데 결과는 정확했다. 헌터는 그런 사격법을 결코 환영하지는 않았으나 충고도 하지 않았다. 미스 페이에게 사격지도를 하기에는 너무 총을 잘 쏘았고 충고해봐야 듣지도 않을 것이었다. 첫 번째 코끼리사냥에서 헌터가 숲속에 숨어있는 코끼리를 몰아 미스 페이가 대기하고 있는 자그마한 공터로 훌쳐냈다. 숲속에서 사격을 하기에는 미스 페이의 총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그 총으로는 귓구멍을 정확히 뚫어야만 치명상을 줄 수 있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는 코끼리의 귓구멍이 잘 보이지 않을 염려가 있었다. 코끼리가 초원으로 가는 것을 보고 헌터는 미스 페이에게 신호를 했다. 쏘라는 신호였는데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헌터는 불안했다. 아무리 총을 잘 쏜다고는 하지만 여자 혼자 코끼리와 대결하게 한 것이 후회되었다. 미스 페이는 지정된 곳에 있었다. 미스 페이는 10여 미터까지 육박한 코끼리를 그저 멍! 하니 보고 있었다.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보고만 있었다. 헌터가 전속력으로 코끼리 옆 모습을 보면서 달렸다. 옆에서 코끼리를 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코끼리를 자극했다. 코끼리는 옆으로 달려오는 헌터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고, 발소리가 옆으로 이동하는 것을 퇴로가 차단된 걸로 알고 코끼리는 단숨에 미스 페이를 짓밟아버리고 그쪽으로 달아날 심산으로 미스 페이에게 덮쳤다. 헌터가 달리면서 총을 들어 올렸다. 사격 위치가 워낙 나빴으나 그래도 코끼리에게 부상이라도 입혀 놓을 생각이었는데 그때 미스 페이가 움직였다. 다리가 사격자세로 벌어지고 눈에 이상한 광채가 비쳤다. 코끼리를 보고있는 눈에 증오가 서렸다. 그 얼굴은 요정(妖精)처럼 차갑고 싸늘했다. 헌터는 원호 사격을 중지했다.
(저 여자에게 덤벼드는 코끼리는 죽는다!)
미스 페이는 코끼리가 7, 8m까지 와도 총을 든 손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다가 코끼리의 코끝이 눈앞에 접근해오자 총을 올렸다. 발사했다. 코끼리가 으왕!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꼬꾸라졌다. 절명했다. 총탄이 코끼리의 귓구멍에 명중한 것이었다. 미스 페이가 천천히 걸어오면서 헌터에게 말했다.
‘캡틴, 다음부터는 원호 사격 같은 거 아예 할 생각 마세요!’
그 이튿날 벌어진 사자 사냥은 더 기가 막혔다. 헌터와 미스 페이는 자그마한 숲속에서 세 마리의 사자들이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놈과 암컷 그리고 새끼였다. 그들은 만복이 되어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는 중이었다. 백수의 왕은 경계를 하지 않고 수놈은 하품을 하고 새끼는 눈을 감고 있었다. 거리는 약 20여 미터. 그대로 발사를 해도 될 거리였으나 미스 페이는 헌터에게 원호 사격을 하지 말라고 다짐을 받은 후 단신 사자들에게 접근했다. 마치 런던의 공원을 산책하는 듯 축 늘어뜨린 손에 총을 쥐고 사자들에게로 걸어갔다. 사자들은 미스 페이를 흘끗 봤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듯 그대로 누워 하품을 했다. 미스 페이는 사자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계속 걸어갔다. 사자들 하고 악수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미스 페이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가까이 접근해오는 것을 보고 사자들이 비로소 엉거주춤 일어서려고 했으나 미스 페이의 마술사 같은 눈길에 현혹되어 덤벼들지도 도망가지도 못했다. 그때 미스 페이가 총을 들어 연거푸 두 방을 쏘았다. 치명타였다. 암컷과 새끼가 쓰러졌다. 한꺼번에 처와 아들을 잃은 수놈이 쓰러진 암컷을 물어뜯어 보고 죽은 것을 확인한 후 그만 미스 페이에게 덮쳐들었다. 그때 미스 페이는 재장탄을 하고 있었다. 사자가 세 마리인데 총은 2연총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위험을 각오하고 한 짓이었다. 더구나 미스 페이는 일부러 암컷과 새끼를 먼저 쏘아죽이고 가장 위험한 수컷을 남겨둔 것 같았다. 사자가 세 번째 도약을 했을 때 헌터가 총의 방아쇠를 당길 뻔했으나 그 직전에 미스 페이가 쏘았다. 사자는 공중에서 몸을 동그랗게 움츠리고 떨어졌다. 미스 페이 1m 앞이었다. 헌터기 화가 나서 미스 페이를 힐난(詰難)했다.
‘수놈이 암컷을 확인 안 하고 바로 덤볐으면 어쩔 뻔했소?’
미스 페이의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런던의 신문들이 <미스 페이 사자에게 희생되다> 라고 대서특필했겠지요. 그리고 런던의 사교계에서는 <그 여자는 품행은 좀 나빴으나 그래도 용기만은 있는 여자였다>라고’
헌터가 입을 다물었다. 미스 페이에게는 런던의 사교계 생활과 아프리카 밀림 생활에 공통되는 생활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약간 병적(病的)이었지만 ….
그날 밤 헌터와 미스 페이는 한 천막에서 자게 되었다. 굼벵이 우마차에 실려 오는 짐이 4일이나 되어도 도착하지 않았다. 미스 페이는 축음기를 틀고 술을 마셨다. 그녀에게는 무진장의 에너지가 있었다. 헌터는 밤새 노는 것만은 사양했다. 미스 페이는 활력이 넘쳐 잠을 자지 않았다. 혼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캡틴, 우리 얘기 좀 합시다,’
헌터가 자는 체했다. 미스 페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자는 체하지 마요. 일어나지 않겠다면 일어나게 해주지.’
다음 순간 미스 페이가 탄환꾸러미를 헌터에게 집어던졌다. 헌터가 하는 수 없이 일어났다.
‘미스 페이, 난 노래도 못하고, 춤도 추지 못해요. 그러나 술은 좀 마시지요. 같이 술이나 마십시다.’
헌터는 그 젊은 아가씨의 넘치는 에너지를 진압시키는 것은 오직 술뿐이라고 판단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독한 스카치를 물도 타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아무 말 없이 한 병을 비웠다. 미스 페이가 한 병을 더 가져오면서 중얼거렸다.
‘캡틴 당신은 사냥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술도 잘 마시네요, 난 취했는가 봐요,’
두 번째 병을 따다가 그녀는 침대에 엎드렸다.
‘캡틴, 나는 아프리카에 피난 왔어요. 쫓겨난 것이지. 품행이 나쁘고 하는 짓이 고약하다고 친척들이 날 쫓아낸 거지.’
‘난 원래가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지요. 남자사냥을 많이 했지. 남자란 짐승은 사냥하기 쉽지. 그런데 ….’
캠브리지 대학을 나온 점잖은 청년을 유혹했는데 목석(木石)이었다. 아무리 술을 먹여도 도무지 걸려들지 않아 하루는 그의 친구들을 호텔로 불러내어 술을 잔뜩 먹이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친구 중 한 사람과 섹스판을 벌였다. 목석도 흥분하여 달려들었다.
‘그만 그만 미스 페이. 그런 얘기 듣자고 술 마신 게 아니야. 술이나 더 마시지고.’
미스 페이가 다시 일어났다. 술을 마시고 웃고 또 웃었다. 너무 웃어서 나중에는 웃음 속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미스 페이의 자지러진 웃음소리가 밀림에 퍼져나갔다.
‘캡틴, 당신도 목석이야. 짐승이나 잡을 줄 아는 목석. 그런데 매력이 있어. 뭇 야수들이 울부짖고 있는 이 밀림에서는 당신이 왕이야. 그리고 멋있어.’
미스 페이가 헌터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헌터가 당황했다. 그러나 스카치 한 병은 그를 짐승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미스 페이의 몸을 때어내려고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미스 페이가 이미 잠이 들었다.
(불쌍한 여인.)
헌터는 문명의 도끼에 맞아 생의 의욕을 잃은 그 여인을 가볍게 안고 그녀의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 돌아와서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 밤을 새우고 말았다. 그 이튿날 미스 페이가 신경질을 부렸다. 그녀는 쌀쌀한 눈초리로 헌터를 노려보더니 나이로비에 다녀오겠다고 차를 몰고 가버렸다. 그녀에게 헌터는 밤을 새우는 상대로써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스 페이는 그 이튿날 저녁에 나이로비에서 알게 되었다는 미남 청년을 데리고 왔다. 낮에는 헌터와 사냥을 하고 밤에는 미남 청년과 밤을 새웠다. 무진장 에너지를 가진 그녀는 양쪽 일을 모두 정열적으로 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생겼다. 사냥터에 청년을 데리고 가자는 것이다. 청년도 사냥에 자신이 있다고 했다. 헌터는 마지 못해 허락을 하고 사자사냥을 나섰다. 청년은 275구경 총을 가지고 있었고 미스 페이는 360구경을 가지고 있었다. 청년의 총은 사자 사냥을 하기에는 너무 작았으나 그런대로 급소만 맞히면 가능할 것 같았다. 헌터는 475구경 총을 갖고 나갔다. 신중한 그는 코끼리나 라이노를 만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셋은 사람 키만큼 풀이 무성한 숲으로 들어갔다. 큼지막한 동물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고 경고했다. 곧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짐승의 배설물을 발견했다. 물소 똥이다.
‘뭣이요?’
미스 페이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물소 같소, 아니 물소요.’
‘물소? 그거 재미있군.’
미남 청년이 아는 체 중얼거렸다.
‘잘 됐어요. 난 아직 물소를 잡아보지 못했으니까.’
미스 페이가 동의했다.
‘안 돼! 그건 안 돼! 당신들이 갖고 있는 총으로는 물소를 잡지 못해! 돌아갑시다.’
헌터는 물소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아마추어포수를 만류하고는 돌아서 걸었다.
‘캡틴 난 물소를 잡겠어요. 굼뱅이 같은 물소가 싫어. 물소는 원시동물이야. 나 혼자서라도 물소를 잡겠어.’
미스 페이가 앙칼진 어조로 선언하자 미남 청년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동조했다. 헌터는 울화가 치밀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물소는 우리가 집에서 기르는 소와는 전혀 다른 맹수요. 그놈은 사람만 보면 덮어놓고 달려들며, 그놈이 덤벼들 때는 대가리를 푹 숙이고 달려들어. 그러니까 포수가 쏠 곳이라고는 물소의 대가리뿐인데 물소의 대가리는 큼직한 뿔로 덮여 있어 그따위 총으로는 뚫을 수가 없소. 알겠소?’
미스 페이가 발끈했다.
‘대가리에 총탄이 들어가지 않으면 심장을 쏘면 되잖아.’
‘철없는 소리. 물소의 심장은 푹 숙인 대가리에 감춰져 보이지 않소. 그리고 물소는 1초에 20m나 뛸 수 있는 짐승이요.’
미스 페이에게 그런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미스 페이는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고 숲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런던에서 모험담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자포자기의 모험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미스 페이와 청년은 10m도 가기 전에 물소를 만났다. 동시에 물소도 사람을 발견했다. 헌터의 말이 맞았다. 물소가 곁눈질로 사람을 힐끗 보더니 대뜸 돌진했다. 대가리를 푹 숙이고 돌진했는데 정면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뿔 뿐이었다. 뿔은 잘 다듬어진 창끝 같이 번쩍이고 땅을 차는 양다리는 말 보다 더 힘찼다.
‘미스터 제임스, 쏘아요 쏘아!’
미스 페이는 연인에게 첫탄을 양보할 여유가 있었으나 그 연인은 벌써 제정신이 아니었다. 돌진해오는 뿔 귀신을 본 그는 공포에 표정이 일그러지고 손발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 떨리는 손으로 쏜 총탄이 맞을 리 없었다. 첫탄은 어림없이 빗나갔고 두 번째는 물소의 뿔 끝에 맞아 퉁겨나갔다. 물소가 7, 8m 거리에까지 육박했다. 그 위기에서도 미스 페이는 냉정했다. 그녀는 재장탄할 생각조차 못 하고 멍! 하니 서 있는 연인을 보호하듯 그 앞을 가로막고 물소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 언저리에 가벼운 미소를 띄우고. 물소는 입에서 거품을 물고 덤벼들었다. 거리는 불과 5, 6m. 비로소 미스 페이의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첫탄이 발사되고 뒤이어 재탄입 발사됐다. 서부의 총잡이 같은 멋있는 속사였다. 미스 페이는 첫탄을 물소의 이마에 두 번째는 심장을 겨누어 물소의 대가리 바로 밑을 쏘았다. 첫탄은 정확하게 맞았다. 그러나 킥! 하는 마찰음만 나오고 물소는 계속 돌진했다. 탄환이 뿔 뿌리에 맞아 관통을 못했다. 미스 페이의 다음 총탄도 정확히 목표에 맞았다. 그러나 그곳은 심장이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목 아래 껍질이 늘어져 있는 곳으로 물소에게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두 발의 총탄을 발사한 뒤 당연히 물소의 거구가 거꾸러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미스 페이는 다음 순간 죽음을 각오한 듯 총을 던져버리고 뒤돌아서 연인을 꽉 껴안았다. 물소의 거칠은 콧김이 느껴졌다. 그때 미스 페이는 헌터의 노호를 들었다. 마치 타잔의 외침 같은 밀림을 위압하는 늠름한 고함 소리였다.
‘이 바보야, 엎드려, 엎드려!’
미스 페이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힘껏 연인을 떠밀어 같이 쓰려졌다. 그 순간 총소리가 울렸다. 길고 무거운 475구경에서 발사되는 대포 소리와 같은 굉음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물소가 대가리의 뿔 뿌리 사이를 뚫고 들어간 총탄의 충격으로 크게 한 번 몸을 흔들더니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300kg의 고깃덩어리가 쓰러지는 진동이 굉장했다. 물소가 왼쪽으로 쓰러졌으니 망정이지 만약 반대쪽으로 떨어졌다면 미스 페이와 연인은 거대한 물소에 깔려 압사당할 뻔했다. 물소는 즉사했고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미스 페이가 일어났다. 숨을 거둔 거대한 짐승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성난 헌터를 보았다. 헌터의 푸른 눈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캡틴, 내가 또 졌군요. 또 한 번 창피를 당했어.’
미스 페이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는 연인을 보며 깔깔거렸다.
‘일어나요, 제임스. 물소는 죽었어. 캡틴이 쏘아죽였어. 당신이 죽이지 못해 안타깝지만 염려말아요. 오늘 밤 저놈으로 비프스테이크를 해먹고 기운을 내서 다시 한번 싸워봅시다.’
‘땡큐! 미스 페이, 여기서 나이로비는 얼마나 되죠? 차가 없이도 돌아갈 수 있겠지요?’
미스 페이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알아채고 깔깔거렸다. 공허한 웃음이었다. 미스 페이의 수확물은 어떤 포수보다도 훌륭했으나 미스 페이는 수확물에 흥미가 없었다.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불만이었을까?
‘캡틴, 다시 한번 사냥을 하고 싶은데 어때요?’
헌터가 쓴웃음을 지으며 거절했다.
‘캡틴, 난 이 세상에서 나 이상 가는 사냥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에게는 당하지 못하겠어요. 당신은 정말 프로 헌터였어!’
헌터는 그 후 나이로비에서 미스 페이의 소문을 들었다. 날마다 술집이나 노름판을 돌아다니고, 남자친구를 수없이 갈아치우고, 영국의 귀족에다 미모의 여인이었으므로 미스 페이의 일거수일투족은 가십거리가 되었고, 또 좀 과장되었다. 사냥도 계속했다. 그녀는 잡은 물소, 코끼리, 표범, 코뿔소, 사자를 나이로비의 영국 귀족 사냥꾼들에게 팔았다. 그러나 수확물을 처분한 돈으로는 유흥비가 모자랐다. 그 소문을 들은 헌터는 걱정스러웠다. 미스 페이는 뛰어난 사냥꾼이었으나 프로로서는 결점이 있었다. 양손을 축 늘어뜨린 체 맹수가 1~2m 앞에 들이닥칠 때까지 기다리는 그 대담한 사냥 자세, 총을 들어 올리자마자 갈겨버리는 속사법은 언젠가 불행을 자초할 수 있었다. 헌터의 예상대로 비극은 머지않아 일어났다. 미스 페이는 표범사냥을 하다가 표범에게 바른쪽 팔을 물려 팔을 못 쓰게 되었고, 아름다운 얼굴에도 두 줄기 표범의 발톱 자국이 남았다. 팔을 완전히 못 쓰지는 않았으나 사냥만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자살행위였습니다.’
미스 페이와 표범사냥을 했던 조수가 말했다. 부상 당한 표범을 추적한 미스페이는 표범이 나무 위에 숨어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하면서도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표범이 나무 위에 숨어있을 경우 포수와 표범의 승산은 반반이다. 어느 쪽이 상대를 먼저 발견하느냐? 그리고 표범을 발견했을 때의 속사가 승부를 결정한다. 일반적으로 표범이 나누 위에 숨어있을 때는 라이플 보다는 쇼트건(산탄총)이 유리하다. 라이플은 사정거리가 길고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총탄이 단 한 발이기 때문에 정확한 조준을 해야 한다. 그러나 쇼트건은 사정거리는 짧아도 수십 발의 총탄이 한꺼번에 발사되므로 몸집이 작고 피부가 약한 표범에게는 알맞은 총이다. 그런데 미스 페이는 대담하게 라이플로 나무 위에 숨어있는 표범과 대결했다. 표범이 숨어있는 나무들은 거목들이었고 가지가 무성해서 어디에 표범이 숨어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미스 페이는 총구를 밑으로 떨어뜨리고 나무에 접근했다. 표범은 맨앞의 나무에 숨어있다가 미스 페이가 접근하자 소리없이 덮쳤다. 표범을 먼저 발견한 것은 미스 페이가 아니라 토인 조수였다. 표범을 발견한 토인 조수가 고함을 질렀으며 그 고함소리에 미스 페이가 총을 들어 발사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표범이 앞발로 미스 페이의 얼굴을 할킨 직후였다. 표범과 미스 페이는 같이 뒹굴었다. 미스 페이가 쏜 총탄이 표범의 어깨에 맞았으나 치명상이 아니었으며 표범은 미스 페이의 다리를 물었고 이어 목줄을 더듬었다. 같이 갔던 토인 조수가 칼로 표범의 머리를 치지 않았다면 미스 페이는 절명했을 것이다.
(불쌍한 여인.)
헌터가 마지막 들은 소식은 더 처참했다. 아편 중독자가 되었다. 사냥에서 맛본 스릴을 잃은 그녀는 나이로비의 고급술집을 전전하며 술을 마시고 도박에 심취했는데 남자의 유혹에 빠져 아편을 했고 중독되었다.
‘미스 페이는 화장도 하지 않고, 얼굴의 상처도 가리지 않았으며,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얼굴은 창백하였습니다. 나는 그녀가 약국에서 아편을 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것을 봤지요. 아편쟁이였으나 아직 예뻤습니다.’
딸의 소식을 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런던에서 나이로비에 왔다. 런던에서도 이름난 부자였던 아버지는 막대한 비용과 현상금을 걸고 딸의 행방을 찾았으나 미스 페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이로비 사람들은 아버지가 도착한 그 전날 밤에도 미스 페이를 목격했으나 그 이튿날부터 행방불명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자살했다, 도피했다, 아버지가 찾아서 데리고 갔다는 풍문만 무성했다.
(불쌍한 여인.)
배덕자였고 퇴폐적이었으나 총솜씨는 빼어났다. 정확하기도 하고 멋이 있었다. 총을 들어 올리자마자 겨냥을 하고 발사했는데 그 순간적인 동작은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운전 솜씨도 탁월했다. 무서운 속도로 달리다가 개울을 뛰어넘는 실력은 가히 스턴트맨을 능가했다. 말을 다루는 기술도 기사급이었다.
(정력과 재치와 담력 그리고 미모가 출중한 여인.)
그 후 미스 페이의 소식은 없었다.
23. 재미나는 수렵가(狩獵家)들
헌터가 소속된 사파리랜드회사 지배인과 헌터는 가끔 말다툼을 벌였다. 헌터가 싫어하는 귀족을 안내하는 일을 강요했다. 귀족안내를 헌터가 싫어하는 걸 지배인도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시 유럽의 귀족사회에서는 아프리카 맹수사냥이 유행이었고, 살롱(객실)에 맹수 트로피가 없으면 경멸했다. 그래서 나이로비에는 세계각국의 귀족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나이로비에서 가장 큰 사파리 회사인 사파리랜드의 좋은 고객이었다. 귀족들은 덮어놓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하고 유능한 포수를 안내인으로 고용하는 것 또한 유행이었으므로 지배인은 다른 회사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헌터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사냥터에서 짐승을 잡는 게 아니라 다른 일에 더 몰두하였으므로 직업포수인 헌터는 귀족들의 안내를 기피했다. 헌터가 처음 안내한 프랑스귀족은 트럭 30대를 동원하였는데 발전기, 냉장고, 목욕조까지 있었다. 천막을 치면 웬만한 마을이 되었고, 귀족이 거처하는 거대한 천막은 호텔 수준이었다. 귀족은 본국에서 데려온 요리사를 동원하여 7개 코스 정찬을 마련했고 댄스파티를 벌였다. 그들은 사냥에는 관심도 없었다. 헌터가 안내한 백작 부부는 탄약보다도 위스키와 포도주를 더 많이 싣고 왔다.
‘캡틴, 우리 집사람의 관심은 사냥이 아니라 술입니다. <가령, 오늘 잡은 사자는 굉장한 놈이니 축배를 듭시다> 라고 말하는 거죠.’
백작 부인의 충고였다. 그래서 헌터는 우선 사자를 한 마리 찾아냈다. 정말 훌륭한 갈기를 지닌 수컷이었다. 그러나 사자를 본 백작 부인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버렸고 백작은 부인에게 술을 주라고 고함을 치면서 헌터의 등 뒤에 숨어버렸다.
‘백작, 쏘아보시오. 거리가 좀 멀지만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백작은 헌터의 권유에 마지못해 총을 들었다. 술기가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데 손이 와들와들 떨었다. 백작은 한참 동안 겨냥을 하더니 헌터에게 말했다.
‘캡틴, 내가 만약 실수를 해서 저놈을 맞히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요?’
‘그야, 사자가 덤벼들겠지요.’
‘뭐, 덤벼들어? 버릇없이 나에게 ….’
‘염려 마시오. 그렇게 되면 내가 쏘아죽이겠습니다.’
‘그래, 그렇구만. 그래도 자네도 실수를 한다면 ….’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백작.’
‘아니야,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어.’
백작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모험인데…, 온 파리에 소문이 퍼져나갈 큰 모험인데 …. 그러니 우선 한잔해야 되겠는 걸. 천막에 가서 우리 한잔하고 다시 오세.’
천막에서는 그날 밤 사자 사냥의 전야제가 요란스럽게 벌어졌다. 백작 부인이 헌터에게 손수 술을 권했다. 술이 얼큰해지자 백작이 헌터의 어깨를 쳤다.
‘캡틴, 지금 막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자넨 직업 포수지?’
‘그렇지요,’
‘틀림없지. 그렇다면 내가 부탁하는 대로 해줘. ‘캡틴, 자네는 내일부터 혼자 사냥터에 가서 사자나 코끼리를 잡아주게. 난 여기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터이니. 그리고 자네가 잡아 온 짐승들을 가지고 파리에 가면 돼.’
백작 부인이 손뼉을 쳤다.
‘여보, 역시 당신은 천재야. 그런 훌륭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했어.’
헌터도 그 천재적인 아이디어에 이의가 없었다. 서툰 사냥꾼과 동행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 이튿날부터 백작은 사냥터에 나가지 않았다. 호텔처럼 호화로운 캠프에서 잡아온 짐승고기로 요리를 해서 술을 마셨다. 헌터도 편했다. 혼자 밀림을 돌아다니다가 한두 마리 짐승을 잡아 캠프에 갖다주었다. 짐승을 잡아 캠프에 가져오면 의례히 백작 부인은 멋있는 사냥복을 입고 총을 들고 짐승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런 저런 포즈로 수십 장 사진을 찍으면서도 백작 부인은
‘정말 멋있게 찍어졌을까? 총을 너무 들어 올린 것 같은데, 바보처럼 웃지 않았나?’
걱정을 했다. 그런 때면 헌터가 대답했다.
‘마담, 훌륭합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헌터를 좋아한 마담은 가끔 밀림을 산책했다. 어느 날 그들이 밀림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오고 있었을 때 초원에는 얼룩말들이 있었다. 헌터는 얼룩말무리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얼룩말 한 쌍이 교미를 하고 있었다. 귀부인에게 쑥스러운 광경이라 헌터가 등을 돌려 다시 밀림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백작 부인이 움직이지 않고 얼룩말의 교미를 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도시생활을 하는 백인들이 아프리카밀림에 오면 일상이 급격하게 변해서인지 머리가 돌아버리는 일이 가끔 일어났다. 특히 여자들이 더 심했다. 성적(性的) 방종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백작 부인도 그랬다. 나이 40이 넘은 점잖은 부인이었으나 그날은 눈에 이상한 빛을 띠고 정신없이 얼룩말을 보고 있었다.
‘캡틴, 저놈이 저렇게 커요?’
백작 부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점점 더 흥분되어갔다. 얼룩말의 동작이 빨라지자 백작 부인이 고함을 쳤다.
‘캡틴, 캡틴, 저것 봐요, 저거 ….’
헌터는 아예 외면을 해버렸는데 그 태도가 부인을 더욱 도발시켰다. 부인이 갑자기 웃옷을 홀랑 벗어 던져버리고 헌터에게 달려들었다.
‘미스터 헌터, 난 쓸쓸해요. 난 외로워요. 나는 저 얼룩말보다 더 불행한 여자예요.’
난처했다. 그래서 총을 들어 얼룩말에게 발포했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다시 두 발을 쏘았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얼룩말이 도망가도록 발밑을 쏘았다. 얼룩말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치자 부인도 뜨거운 열이 식어 도전행위를 중지했다.
‘마담 죄송합니다. 아무리 짐승이라 할지라도 저놈들이 고귀한 분의 면전에서 더러운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쫓아버렸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그 말에 부인이 이성을 되찾았다.
‘캡틴 당신은 … 좋아, 위트가 있어 좋아요. 물론 오늘 일은 백작에게 비밀로 해주겠지요?’
‘물론이죠, 마담.’
‘그렇지만 캡틴, 얼룩말들에게 미안한 일을 했어.’
그건 그랬으나 술주정꾼 백작에게 미안한 일을 안 한 것만은 다행이었다.
헌터가 도이치 남작 부부를 사냥터에 안내한 일이 있었다. 남작은 미모의 젊은 부인을 대동하였는데 병적인 의처증이 있었다. 그래서 도이치 육군 소령 출신을 고용하여 늘 부인을 감시했다. 풍문으로는 부인이 젊은 청년과 교제를 하는 걸 눈치채고는 싫어하는 부인을 강제로 아프리카로 데리고 왔다. 남작은 사냥에 취미가 없어 천막에서 늘 잠만 잤는데 부인이 사냥에 재미를 붙여 헌터를 대동하고 밀림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만 남작이 헌터를 의심하기 시작하여 소령에게 감시를 명령했다. 부인도 헌터도 소령을 싫어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감시하는 것도 싫었지만 사냥을 방해했다. 모처럼 몰아놓는 짐승을 소리를 내거나 기침을 하거나 총구 앞을 막아 사격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부인이 마지못해 좀 떨어져 있으라고 해도 남작의 명령에 따른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꾸했다. 사냥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부인이 남작에게 항의를 했다.
‘여보, 제발 저 바보 소령을 좀 치워주세요. 내일은 사자 사냥을 할 예정인데 저 바보가 따라오면 위험하답니다. 그렇지요, 헌터?’
헌터도 거짓말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사자가 숨어있는 곳이 좁은 계곡인데 그 계곡은 두 사람 이상 걸어가기 힘든 곳입니다.’
남작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령이 헌터를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헌터군, 위험하든 말든 따라가겠소. 도이치 육군 소령을 모독하지 마시오.’
그 이튿날 새벽, 세 사람은 사자계곡으로 출발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자는 없었고 대신 커다란 산돼지 한 마리를 발견했다. 부인이 그 산돼지를 잡겠다고 해서 헌터는 산돼지를 부인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훌쳐냈다. 그런데 별안간 부인이 펄펄 뛰며 고함을 질렀다.
‘헌터, 빨리 와, 빨리! 큰일났어!’
헌터는 사자가 나온 줄 알고 총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돌진했다. 헌터는 숲을 해치고 달려가다가 그만 기겁을 하고 총을 떨어뜨렸다. 남작 부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알몸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순간, 헌터는 부인이 미친 줄 알았으나 곧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파했다. 부인은 죽을 힘을 다하여 자기 몸에 달라붙은 개미를 털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개미가 아니다. 사냥 개미였다. 몸이 2cm나 되고 펀치처럼 강력한 턱이 있었다. 놈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자나 호랑이도 습격하여 살을 뜯어먹었다. 피부가 부드러운 사람고기를 특히 좋아했다. 헌터도 습격을 받아 몸을 홀라당 벗고 칼로 놈들의 머리를 밀어버렸는데 그놈들은 대가리가 잘려서도 살점을 물고 있었다. 헌터는 부인의 알몸을 꽉 껴안았다. 칼로 부인의 몸에 붙어있는 개미를 칼로 저며냈다.
‘부인, 부인! 어디 계세요? 계시는 곳을 알려주지 않으면 남작에게 보고하겠소!’
부인이 헌터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고 손짓을 한 뒤 옷을 입었다.
‘헌터, 헌터! 당신도 보고하겠소! 숲속에서 뭘 하고 있소?’
소령이 씨근덕거리며 달려왔다.
‘여기서 두 분이 뭘 하고 계셨소?’
부인이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산돼지를 놓쳐 화가 나서 이렇게 있는 거요.’
소령은 그 말을 믿지 않은 듯 부인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헌터는 가슴을 조였다. 부인이 옷을 입기에 급한 나머지 팬티를 미처 입지 못하고 돌돌 뭉쳐 손에 쥐고 등 뒤에 감추고 있었다. 만약 소령이 그걸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때 신의 비호(庇護)가 일어났다. 소령이 비명을 지르면서 길길이 뛰었다. 개미였다. 소령은 비명을 지르면서 옷을 벗었다. 알몸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미스터 헌터, 좀 살려주시오!’
헌터가 빙그레 웃었다.
‘소령, 이게 무슨 짓이요. 고귀한 부인 앞에서 그 꼴이 뭐요! 도위치 육군 소령의 체면을 지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남작에게 보고하겠소.’
도이치 육군 소령은 체면이 없었다. 그는 발가벗은 체 강으로 달려갔다. 그 일 이후 소령은 헌터를 웬수로 여겼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때로는 결투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헌터는 좀 불안해졌다. 결투를 하겠다는 사람에게 등을 보이고 사냥을 하는 것이 위험스러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헌터와 소령이 대결을 하게 되었다.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방금 지나간 듯한 코끼리 발자국을 발견하여 부인과 헌터가 뛰어갔다. 다리에 부상을 입어 약간 절름발이 소령이 뒤쳐졌다. 소령과 거리가 멀어져 헌터가 약간 주춤하는 사이 별안간 총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도망쳐오는 부인과 부딪혔다. 부인은 총도 버리고 달려와서는 헌터의 목을 껴안았다. 그때 헌터는 바로 눈 앞에 큰 뱀 같은 코끼리 코가 덮쳐드는 것을 보았다. 헌터가 부인을 안은 체 옆으로 뒹굴었다. 달려오던 코끼리는 관성으로 옆을 지나쳤다. 7, 8걸음 지나쳤다가 되돌아섰다. 그리고 돌진했다. 헌터도 부인을 밀쳐내고 총을 겨냥하고 있었다. 누운 자세로 총을 발사했다. 코끼리는 앞다리를 꿇고 쓰러졌다. 헌터와 부인이 쓰러져 있는 코앞이었다.
‘헌터, 당신이 이겼어! 이겼어!’
이성을 잃어버린 듯 부인은 헌터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부인의 키스는 강렬했고 길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소령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아하, 드디어 잡았군. 부정의 증거를 잡았어!’
‘이놈 헌터! 증거를 잡았으니 네 놈을 가만두지 않을 테야. 도이치 육군 소령은 부정을 묵과하지 못해!’
소령이 헌터를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 얼굴에 살기가 가득했다.
‘소령, 미쳤어? 총을 거둬!’
헌터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소령이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할 수 없이 헌터가 먼저 발사했다. 총탄은 소령의 총에 맞아 그 충격으로 총이 튀어 나갔다. 소령이 놀라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여 멍하니 서 있었다.
‘기습은 비겁해! 난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하겠다는 건데 ….’
‘좋아, 그럼 결투를 하지!’
헌터가 쌀쌀하게 말했다. 남작 부인의 총을 던져주며 말했다.
‘그 총을 갖고 저쪽 나무 밑으로 가시오. 서로 총을 쏘기로 합시다.’
소령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헌터의 총솜씨를 상기했다. 잡으려는 짐승의 어느 부분 어느 점까지를 겨냥하여 정확하게 맞추는 무서운 솜씨였다. 결투를 해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도이치 육군 소령이 결투를 신청해놓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자, 소령 싸웁시다. 나는 아직까지 사람을 죽여본 일은 없지만 이젠 할 수 없소.’
소령의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무슨 말인지 혼자 중얼거리며 총을 들었다. 그리고 한두 발 걸었다. 그러다가 멈췄다. 돌아다봤다. 애원의 표정이 역력했으나 헌터는 냉혹했다. 맹수를 향한 차디찬 표정이었다.
(아차, 이 사나이는 정말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소령이 부인 쪽을 봤다. 부인의 표정에는 경멸과 연민이 교차되고 있었다.
‘마담, 저는 말하자면 ….’
소령이 중얼거리며 부인의 동정을 사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말이 막혔다.
‘마담, 난 그저 남작께서 너무 엄하게 지시를 하셨기 때문에 임무가 좀 지나쳤습니다.’
부인이 비꼬듯 대꾸했다.
‘그래요. 내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으니까 그대로 보고하세요. 만약 당신이 죽지 않는다면 ….’
죽는다는 말에 소령이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마담, 나는 부인의 부정을 목격한 일이 없습니다. 부인이 깨끗한 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아까는 그만 제정신이 좀 돌아서 …. 아시다시피 더위가 이렇게 심하면 머리도 도는 법이지요.’
‘그럼, 남작에게 그렇게 보고할 것입니까?’
‘아니요, 오늘 일은 일체 보고 안 합니다. 그 건 내 자신의 창피이니까. 도이치 육군 소령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만약 제가 살아남는다면 ….’
헌터도 그제야 노기가 풀렸다.
‘소령! 만약 소령이 결투 신청을 취소한다면 나도 이의가 없소. 이런 곳에서 결투를 한다는 것은 야만적인 짓이요.’
소령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미스터 헌터! 난 결투 신청을 취소하겠소!’
도이치 육군 소령은 남작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으며 헌터는 무사히 나이로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헌터는 귀족들의 사냥 안내를 기피했다.
헌터가 나이로비에 돌아오자 큰 사건이 터져 있었다. 미모의 부인을 데리고온 영국의 부호(富豪)가 사냥터에서 변사(變死)를 했다. 그들을 안내했던 백인 사냥꾼은 밀렵자 포획으로 유명한 포수였는데 그가 부인만 데리고 나이로비에 돌아와서 남편이 노이로제에 걸려 권총자살을 했다고 보고했다. 나이로비 경찰은 그 보고에 의심을 품었다. 헌터도 의심을 했다. 사실 애초에 그 부부는 헌터에게 안내를 의뢰했으나 헌터가 그 부인을 보고 거절을 했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너무 젊고 예뻤으며 뭔가 남편에게 불만족스러운 눈치가 보였다. 나이로비 경찰은 내사를 착수, 헌터에게 현장안내를 부탁했다. 출발 3일 후 부호가 천막을 쳤던 곳을 발견했다. 백인안내인은 천막 부근에 시체를 매장했다고 보고했으나 없었다. 경찰들이 긴장했다. 그러나 증거를 잡아야 했다. 헌터는 천막을 중심으로 발자국을 추적했다. 발자국만으로 추적이 어려웠으나 담배꽁초나 통조림깡통들이 발견되었다. 늙은 부호는 술만 마셨고 10여 명의 포터들도 사냥은 별로 하지 않았다고 추측되었다. 천막에는 40여 개의 술병들이 나뒹글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냥은 부인과 백인 안내인이 했다고 결론지었다. 포터들이 증언했다.
‘그렇습니다. 죽은 노신사는 술만 마셨고, 부인은 백인 안내인과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토인 한두 사람을 데리고 사냥했으나 나중에는 단 둘이서만 사냥을 나갔습니다.’
‘노신사가 죽은 날은?’
‘그날은 안내인과 토인 두 사람이 먼저 사냥터에 갔다가 돌아온 뒤 오후 3시경에 세 분이 사냥을 나갔습니다.’
헌터는 세 사람이 사냥을 갔다는 방향으로 추적을 했다. 엽총탄피가 발견되었다. 구경이 넓은 직업 포수의 총이었다. 헌터가 경찰과 포터들을 모두 불러모아 반경 20m 안을 철저히 수색했다. 2시간의 수색 끝에 노부호의 안경이 발견되었다. 도수가 높은 안경이라 안경을 잃었다면 물체를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얼마 전에 패인 땅을 팠더니 노부호의 시체가 나왔다. 이마에 총상이 있었다. 자살했다던 권총이 아니라 구경이 넓은 사냥용총이었다. 더구나 뒤에서 쏜 총상이었다. 남편에게 불만이었던 부인이 안내인과 정을 통하고 남편을 밀림으로 유인하여 죽인 것이다. 결론은 그렇게 지어졌으나 범인들은 잡지 못했다. 경찰이 호텔에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그 후 헌터는 또 괴상한 귀족을 안내했다. 유럽의 작은 나라 왕족이었다. 40대의 왕족은 비서와 의사를 데리고 다녔는데 의사의 처방에 의해 왕족은 하루에 열두 번씩 약을 먹었다. 의사는 자기 처벙을 따르면 정력감퇴를 막고 무병장수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양복 포켓 가득히 약병이나 환약을 가지고 다녔다. 한 무리의 물소가 발견되자 왕족이 발사했다. 물소들이 가시덤불 속으로 도피하였는데 왕족은 자기 총탄이 물소에게 맞았다고 주장했다. 비서와 의사도 틀림없이 맞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헌터는 맞지 않았다고 했다. 맞았을 때 픽! 하고 탄환이 살속을 파고 들어가는 소리가 없었다.
‘그럼 내기를 하지. 탄환이 맞았다면 헌터에게 줄 보수를 주지 않고, 맞았다면 두 배를 주겠어.’
‘좋습니다, 각하! 그렇지만 물소들이 멀리 도망을 가버려서 확인할 방법이 없어 유감입니다.’
그때 비서와 의사가 발자국을 추적하면 된다고 참견했다. 그리고 스스로 추적을 했다. 그러나 10여 미터도 못 가서 추적을 멈췄다. 뜻밖에 물소가 아니라 코뿔소가 나타났던 것이다. 가시덤불 속에서 나타난 코뿔소가 의사와 비서에게 덤벼들었다. 코뿔소는 총소리가 나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정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의사가 조용히 있었더라면 코뿔소도 그냥 지나가 버렸을 텐데 겁쟁이 의사가 코뿔소의 기괴한 모습을 보고 그만 히스테리에 걸린 여자처럼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비명소리에 놀라 서 있던 비서 쪽으로 달아났다. 그렇게 하면 코뿔소가 자기를 그만두고 비서에게 달려들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았다. 이번에는 비서가 대경실색했다. 그는 위험을 감지하자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면서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꺼져!’
라고 의사에게 고함을 쳤다. 그러나 의사는 비서의 꽁무니에 붙었다. 그런데 코뿔소는 비서를 도외시하고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의사를 따라다녔다. 의사가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고함소리를 듣고 헌터가 총을 들었다. 그러나 곧 총을 내렸다. 코뿔소와 의사의 간격이 불과 1m 남짓이라 발사를 할 수가 없었고, 코뿔소가 의사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코뿔소는 불과 1m 정도 간격으로 의사를 쫓으면서 뿔로 의사의 엉덩이를 슬쩍슬쩍 찌르고 있었다. 코뿔소가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면 그 날카로운 뿔로 사람을 걷어올려 공중으로 띄웠다가 당에 떨어진 사람을 발로 짓뭉개버린다. 그런데 코뿔소는 장난을 했다. 의사가 뛰면 자기도 뛰고, 의사가 쉬면 자기도 멈췄다. 의사가 천천히 뛰면 빨리 뛰라고 엉덩이를 뿔로 툭! 툭! 쳤다. 드디어 의사가 기진맥진하여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코뿔소는 재미없으니 어서 일어나라는 듯 옆에서 기다렸다. 그래도 의사가 정신을 차리지 못 하자 코뿔소는 어슬렁어슬렁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헌터는 사격을 멈추고 코뿔소와 의사의 술래잡기를 구경했다. 의사가 새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헌터에게 돌아왔다.
‘다친 데는 없소?’
‘그놈의 코뿔소, 쏘아 죽이려다가 그만 살려주었소, 의사는 살생을 싫어하니까.’
의사도 의사지만 왕족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물소를 추격하자고 우겼다. 혼쭐이난 의사와 비서가 건강에 해롭다고 반대했으나 왕족은 끝내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히 물소들은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 물소들이 보이지 않았으나 헌터는 퀴퀴한 냄새로 그들이 덤불속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좋소, 캡틴. 당신이 반대편으로 돌아가 물소를 이쪽으로 몰아주시오.’
‘각하! 물소는 위험한 맹수입니다. 그놈은 사자나 호랑이보다도 ….’
‘염려 말아요. 우리 가문은 선조 대대로 무용으로 알려진 가문이요. 그리고 나는 총을 당신만큼이나 잘 쏘아요. 그렇지, 비서?’
비서가 모기 우는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그럼. 각하!’
할 수 없었다. 헌터는 숲을 크게 우회하여 물소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물소를 왕족이 있는 곳으로 훌칠 생각은 없었다. 그 건 너무 위험했다. 총을 쏘아 큰 놈 한 마리를 잡고 나머지는 엉뚱한 방향으로 훌쳐 버릴 작전이었다. 물소들은 열서너 마리였다. 헌터가 사격준비를 끝냈을 때 두목이 헌터를 발견했다. 헌터가 자리를 이동했기 때문에 바람을 타고 사람 냄새를 맡았다. 두목이 대뜸 돌진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물소의 사회에서는 두목과 몇 마리만 전투에 참가하고 나머지는 피신을 하는데 오늘은 열서너 마리의 물소떼가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다른 물소들은 헌터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두목이 달려가는 걸 보고 같이 달린 것이다. 총탄은 두 발인데 물소는 30여 개의 뿔을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헌터가 선수를 쳐서 발포했다. 되든 안 되든 재장탄을 해서 선두의 네 마리를 쓰러뜨릴 심산이었다. 첫 탄과 다음 탄에 선두의 두 놈이 꼬꾸라졌으나 물소들은 계속 달려왔다. 헌터는 뒷걸음질 치면서 재장탄을 했다. 재장탄을 마치자 물소들이 2, 3미터 앞에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헌터는 자기 정면에서 달려드는 두 녀석에게 납덩어리를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장탄을 하면서 전진했다. 두 번째 총탄을 맞은 두 마리가 쓰러지면서 공간이 트였다. 나란히 달려오던 물소들은 쓰러진 물소와 충돌을 피하려고 간격을 넓혔던 것이다. 헌터는 그 공간에 들어섰다. 그 순간 뜨거운 열기와 부연 먼지가 몸에 덮쳤고 돌풍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헌터는 몸을 동그랗게 오므려 엎드렸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물소들이 헌터의 옆을 통과한 것이다.
(살았구나!)
헌터는 한숨을 쉬었으나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헌터를 지나쳤던 물소들이 되돌아서고 있었다.
(다시 오는구나!)
헌터는 위기 속에서 침착함과 기민성을 잃지 않는 사냥꾼이었다. 내 마리의 동료를 잃고 진열을 가다듬던 물소들이 동요하였다. 맨 앞에 있던 놈이 헌터의 시선과 총을 보더니 별안간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뿔사!)
당황했다. 남쪽에는 왕족이 대기하고 있었다.
‘물소가 거기로 간다!’
고함을 치고는 달려갔다. 그러나 물소와 사람의 경주는 게임이 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총소리가 들렸다. 단 한 방.
(왜, 한 방만 쏘았을까?)
(두 발째를 솔 여유가 없었을까?)
헌터가 뛰어들었다. 그러나 사람도 물소도 없었다.
(모두 다 죽었을까?)
헌터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고함을 쳤다.
‘각하! 각하!’
아무 소리가 없어서 물소 발자국을 추적하려는 찰라 어디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서, 비서 녀석 어디 있나? 날 내려주지 못해!’
‘예, 각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내려드릴 테니 ….’
그들은 모두 나무 위에 있었다. 왕족은 헌터가 물소를 몰러 나간 뒤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나무 위에 있다가 물소들이 몰려오면 나무 위에서 사격을 하려고 했다.
24. 수렵(狩獵)관리인
헌터가 마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나이로비지구 마킨즈 지방 행정관으로 추천되었다. 마킨즈는 마궈니 지방에서 남쪽 80km 지점이었는데 영국 정부가 수렵보호지로 지정했다. 헌터는 독립생활을 하는 아이들을 두고 부인 힐라 여사와 막내딸과 아들 그리고 무른베와 그의 세 마누라들과 철도관사에 입주했다. 마킨즈는 화성암 지대로 자동차로 하루가 걸리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헌터의 집에서 그 광대한 삼림이 보였고 밤이면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침 해가 뜨면 헌터는 보호자를 순찰했다. 삼림에는 길이 없었으나 헌터가 자동차로 길을 냈다. 먼저 자동차로 순찰을 하고 이상이 발견되면 도보로 순찰했다. 물론 충실한 조수 무른베가 따라다녔는데, 이상이란 독수리가 모여든다거나 얼룩말이 혼자 돌아다닌 것을 말한다. 독수리가 모여드는 것은 죽은 짐승이 있다는 뜻이고, 얼룩말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병에 걸렸다는 걸 의미했다. 무서운 전염병이 퍼질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헌터는 얼룩말을 사살하여 피를 뽑아 나이로비의 병원에 보냈다.
어느 날 헌터는 숲속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비실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코끼리가 지나가도록 나무 뒤에 숨었는데 코끼리는 계속 헌터에게로 다가왔다. 그래서 코끼리를 위협하여 훌쳐버릴 생각으로 공포를 한 방 쏘았다. 그러나 코끼리는 계속 걸어왔고 아마 병이 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헌터가 총을 들어 올렸는데 쏠 필요가 없었다. 코끼리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한참 몸부림치더니 숨져버렸다. 헌터는 코끼리의 몸을 조사했다. 코끼리의 배에 화살이 하나 꽂혀있었다. 화살은 그 두꺼운 코끼리의 가죽을 뚫고 20cm쯤 깊이 들어갔다. 무서운 활 솜씨였다. 화살 끝에 독이 발라져 있었다.
‘부와나, 그 건 와간바족(族) 화살입니다. 그리고 저렇게 코끼리를 죽일 수 있는 부족은 와간바뿐입니다.’
무른베가 말했다. 와간바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우수한 수렵족이었다. 그들은 무서운 활을 갖고 있었으며 그 화살은 침략족인 마사이족들이 갖고 있는 물소 가죽으로 만든 방패를 뚫고 방패 뒤의 사람을 죽였다. 그 화살은 나무 위의 표범을 뚫고 나무에 박혀 표범도 화살을 맞으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다고 했다. 와간바들이 화살에 바르는 독약도 강력했다. 독약은 피그미족이 잘 만들지만 와간바족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무른베, 이 코끼리를 죽인 와간바를 잡아야 해. 이놈들을 놔두면 짐승들이 멸종하겠어.’
무른베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참 뒤 말했다.
‘그건 어렵습니다. 와간바는 이 밀림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고, 몸놀림이 재빠르기때문에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잡으려다가 도리어 우리가 잡힐 염려가 있고요.’
헌터는 이튿날부터 토인 조수를 데리고 밀림을 수색했다. 무른베가 말한 대로였다. 와간바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들의 소리도 발자국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밀림을 계속 돌아다니는 것은 분명했다. 코끼리, 코뿔소 때로는 사자들을 죽인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소리도 흔적도 없이 밀림을 돌아다니면서 밀렵을 계속하고 있었다. 헌터는 화가 났다. 마치 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며칠 후 헌터는 커다란 성성이 한 마리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성이는 껍질이 벗겨져 있었으며 아직 몸이 따뜻했다. 와간바가 가까이에 있는 것이 확실했다. 헌터가 무른베에게 수색을 명령했다. 그러나 무른베는 거부했다. 무른베가 헌터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짐승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죽이는 것 보다 그들이 우리를 죽일 확률이 더 큽니다. 그들은 정지! 손 들어! 라는 경고를 하지 않습니다. 대뜸 활을 쏘아 죽이지요.’
헌터가 화가 많이 났다. 그래서 단독으로라도 수색을 하겠다고 나섰다. 토인 조수와 무른베가 하는 수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헌터가 100m쯤 걸어갔을 때 흭!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화살이 헌터의 귀를 스칠 듯 지나갔다. 헌터가 재빠르게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나는 수렵관리인이다. 대항하면 총을 쏘겠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헌터가 고함을 쳤으나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용한 밀림에는 살기가 떠돌고 있었다. 무른베의 경고대로였다. 와간바는 짐승과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다. 헌터는 나무 뒤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와간바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먼저 움직이는 쪽이 상대의 표적이 될 것이다. 밀림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계속되었다. 한 시간이 지날 무렵 아까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소리가 났다. 헌터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발포했다. 화살이 날아왔다. 헌터가 발포를 한 뒤 몸을 수그리지 않았다면 헌터의 가슴에 꽂힐 화살이었다. 이번에 날아온 화살은 아까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와간바가 어느새 장소를 이동하였다. 분명 와간바는 헌터가 숨어있는 곳을 알고 있고, 헌터는 와간바가 있는 곳을 모르고 있었으며 정세가 불리했다. 그러나 더 이상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으며 떠돌고 있었던 살기도 사라졌다. 와간바 밀렵자들이 어느 새 사라져버린 것이다. 헌터는 추적을 단념했다. 그러나 헌터와 와간바의 대결은 며칠 후에 또 벌어졌다. 우연한 일이였다. 헌터가 숲속에서 자그마한 잠복소를 발견했다. 땅을 파서 사람 서너 명이 들어갈 구멍을 만들고 위에 대나무를 걸쳐서 지붕을 만들었는데 헌터는 그속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가까이 갔다. 발소리를 들은 듯 잠복소에서 네 명의 사내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이미 화살을 당기고 있었다. 총과 화살이 거의 동시에 발사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무른베가 헌터와 밀렵자들 사이로 뛰어들며 고함을 쳤다.
‘염려 말라! 이 백인은 코끼리 밀렵자다. 너희들과 같은 밀렵꾼이니 안심하라!’
그 기민한 행동이 헌터의 목숨을 살렸다. 헌터가 총구를 내리니 그들도 활을 내렸다. 헌터는 와간바의 말로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사냥이 잘 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와간바의 말을 할 줄 아는 백인을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표범 한 마리와 물소 한 마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헌터가 그들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들은 담배를 받고 경계심을 풀었다.
‘백인 양반, 조심해야 돼. 최근에 고약한 수렵관리관이 와서 돌아다니니까. 그놈을 총을 잘 쏴. 아주 잘 쏴. 이것 봐.’
그들의 두목쯤 되는 노인이 모자를 벗어 보여주었다. 성성이 가죽으로 만든 모자에 총구멍이 났다.
‘며칠 전에 그놈과 싸웠는데 내가 그놈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기 위한 술책으로 이 모자를 벗어 숲속에 던졌지요. 그놈의 총에 맞은 자국이요. 무서운 놈이었소.’
헌터가 웃었다. 노인의 술책에 넘어간 것이 스스로 우스웠다. 헌터가 두목 노인과 사냥 얘기를 했는데 이내 그 노인이 매우 숙련된 사냥꾼임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동물들의 습성을 헌터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와간바의 노인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였으나 몸이 근육질이었고 눈이 번쩍였다. 노인은 몸에 무수한 상처가 있었는데 사자, 표범, 물소, 코뿔소 등 모든 동물들이 한 번씩은 자기 몸에 상처를 냈노라고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몸에 상처를 낸 놈들은 한 놈도 살아나지 못했어.’
헌터는 노인의 말을 믿었다. 며칠 전에 헌터 자신을 희롱했던 솜씨로 봐서 노인에게 이길 짐승은 없을 것 같았다. 노인도 헌터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그는 헌터에게 영양을 한 마리 잡아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헌터가 노인을 따라갔다. 그리고 놀랐다. 노인과 그 부하들은 표범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들은 바람같이 밀림을 달렸다. 그들이 넓은 공터를 지나갔는데 코뿔소 한 마리를 발견했다.
‘저 미련한 놈을 잡아주리다.’
헌터가 코뿔소는 원치 않는다고 했다.
‘좋소. 그럼 위협만 하지요.’
그들이 독을 묻힌 화살 대신 보통 화살을 꺼내 들었다. 헌터가 만류했다.
‘그럼, 훌쳐버립시다.’
노인은 별로 힘들지 않게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코뿔소의 뿔에 명중했으며 코뿔소는 그 충격으로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잠시 후 피거품을 뿜으면서 숲속으로 도망쳤다. 헌터도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무서운 밀렵자들이었다. 그들은 활과 칼, 그리고 불을 일으키는 나무조각만 가지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밀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솜씨로 봐서 맹수에게 죽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노인이 헌터에게 사냥 방법을 물었다. 헌터는 백인의 사냥법을 말했다. 노인은 헌터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긴장했다. 헌터도 눈치를 챘다.
‘왜 그래, 노인 친구?’
헌터를 빤히 보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보통 사냥꾼이 아니야. 동물을 그렇게 잘 아는 사냥꾼은 별로 없어. 그리고 당신은 밀렵자도 아니야. 밀렵자는 그런 사냥을 하지 않아. 밀렵자는 동물을 마구 잡아 죽이고 팔아먹는 사람인데, 당신은 수렵관리인이야. 전에 나와 싸웠던 바로 그 사람!’
헌터가 사실을 고백했다.
‘그래도 우리는 친구가 됐어. 나는 당신을 잡지 않을 거요.’
헌터는 노인에게 자기 임무를 설명해주고 코끼리와 코뿔소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노인이 웃었다.
‘알았소, 코끼리와 코뿔소는 당신 것이요. 다른 짐승은 내 것이요.’
정부는 모든 수렵을 관리하기 때문에 노인의 주장은 틀린 말이었다. 그러나 헌터는 노인의 주장을 정면 반대하지 않고 다른 짐승도 가족의 식량을 위해 몇 마리씩 잡는 것은 반대하지 않으나 팔려고 잡는 것은 안 된다고 노인을 설득했다. 그리고 두 사나이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와간바의 노인은 약속을 지켰다. 헌터와 노인이 다시 만나 것은 몇 달 후였다. 헌터는 무른베와 함께 백인 밀렵자를 수색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한 조인 밀렵자들은 뿔을 얻기 위해 코뿔소 열세 마리를 죽였다. 내버려두면 그들은 그들의 륙색이 가득 찰 때까지 밀렵을 할 것이다. 전방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뛰어갔는데 코뿔소가 죽어있었고 뿔은 없었다. 헌터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밀렵자들을 수색할 생각으로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큰 바위를 넘는데 화살이 날아와 헌터의 발밑에 박혔다. 와간바 노인었다. 노인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기어 왔다. 백인 밀렵자들 중에는 탈옥수가 있었고 그들은 헌터의 추적을 눈치채고 높은 곳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로 올라가면 밀렵자들의 저격을 받게 되므로 멀리 돌아서 뒤로 접근하라고 충고했다. 돌아서 가보니 밀렵자들이 나무 뒤에 숨어서 총을 겨누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총을 버려라!’
헌터는 유효사거리까지 접근하여 고함을 쳤다. 등 뒤에서 기습을 당한 밀렵자들은 당황했다. 젊은 두 놈은 체념하고 총을 버렸으나 탈옥범은 뒤돌아서면서 총을 겨냥했다. 순간 헌터가 발포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차마 사람을 쏠 수 없어 총신을 겨냥했다. 탄환이 총신에 맞고 탈옥범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버렸다. 중년의 탈옥범이 손을 들었다.
‘신사 여러분, 이렇게 내 구역에 오신 손님을 거칠게 대접해서 미안하오. 나는 밀림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할 생각은 없소. 여러분들이 신사적으로 대해주신다면 ….’
수렵관리인의 차가운 인사였다. 밀렵자들은 바위 뒤에서 나온 사람이 단 둘이란 것을 보자 어리둥절했다.
(두 명 정도라면 ….)
눈신호가 오갔다.
‘왜 이래요. 우리는 관광 온 사람인데.’
시치미를 뗐다.
‘당신네들은 코뿔소를 마구 죽였소.’
‘우린 코뿔소를 죽이지 않았소. 증거가 있소?’
‘그 말은 재판소에서 하고 수갑을 받으시오.’
‘수갑? 무슨 권리로 우리를 구속하겠다는 거요. 증거를 대시오.’
분위기가 험악해졌으며 밀렵자들이 반항을 할 기세였다.
그때 와간바노인과 부하 서너 명이 나타났다. 노인은 백인 밀렵자들이 코뿔소를 죽이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활을 들어 언제든지 쏠 자세를 했다. 수렵관리인과 와간바가 한 패인 걸 알자 밀렵자들은 기가 죽어 순순히 수갑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밀렵자들이 죽인 코뿔소시체를 보며 헌터가 노인에게 말했다.
‘저 시체를 그냥 둘 수 없으니 당신들이 처리해주시오.’
헌터와 약속에 따라 오래도록 큰 짐승고기 맛을 보지 못했던 노인에게 선심을 썼다. 와간바 노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헌터가 체포한 밀렵자들은 법정에서 징역형을 받고 탈옥범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백인 밀렵자들 중에서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악질이 있었다. 치타를 죽인 박스라는 포수였다. 감찰 포수였으나 수렵 금지된 치타사냥을 했다. 치타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동물이었으나 온순하고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박스는 치타를 사냥하여 껍질을 비싼 값에 팔다가 헌터에게 잡혔다.
‘치타가 습격하여 정당방위였다.’
고 주장하여 무죄를 받았다. 헌터는 계속 박스를 추적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박스가 밀림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얻었다. 박스가 와간바 마을에 와서 몰이꾼을 모집했다는 정보였다. 헌터는 와간바마을을 방문하여 노인을 만났고 박스가 채용한 몰이꾼을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렸다. 며칠 후 박스가 치타 두 마리를 잡았다고 몰이꾼들이 알려주었다. 헌터가 출동하여 치타껍질을 차에 싣고 있던 박스를 만났다.
‘미스터 박스, 이번엔 유죄를 받아야겠소.’
꽃무늬처럼 아름다운 치타껍질을 만지면서 헌터가 말했다.
‘천만에, 이놈의 치타는 나만 보면 덤벼든단 말이요. 나하고 웬수 진 일도 없는데. 그래서 부득히 쐈소.’
박스는 이번에도 변호사를 내세워 정당방위라고 우겼다. 헌터가 몰이꾼을 증인으로 증언했으나
‘토인 같은 미개인은 증언 가치가 없다.’
고 반박했다. 헌터는 치타의 몸에서 뽑은 총탄을 제시했고, 과학연구소의 감정서를 제출했다. 치타가 덤벼들어 정당방위라는 거짓말도 13m 정도의 원거리 사격이었다는 증거도 제시했다. 이번에는 변호사의 웅변도 통하지 않았다. 박스는 막대한 벌금을 물었으나 실형을 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치타사냥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헌터의 관할지역이 아니었는데 그 게 불행이었다. 헌터의 관할지역에서는 동물이 보호받고 있었으므로 사람을 습격하지 않았으나 다른 지역은 사정이 달랐다. 박스는 와치리라는 지역에 잠입했다. 와치리는 바위가 많고 물도 없어 동물들이 살지 않았다. 박스는 수렵보호지역이라는 말만 듣고 동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몇 시간을 돌아다녔으나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고 보이는 것은 뱀뿐이었다.
‘야, 박스. 치타는 없어. 돌아가자.’
‘안 돼. 이곳은 수렵보호지란 말야. 틀림없이 있어.’
그날 오후 커다란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거야 이거. 틀림없이 치타발자국이야.’
그들이 치타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은 표범이었다. 박스 일행이 300미터나 따라갔을 때 발자국이 사라졌다.
‘박스, 이상한데. 발자국이 사라졌어.’
‘… ?’
박스가 불안하게 주위를 돌아보고 있을 때 주변 나무 위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박스가 그 소리를 듣고 그쪽을 향했을 때는 이미 일행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무 위에서 밀렵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표범이 일행을 덮쳐 앞발로 얼굴을 할퀴고 목줄을 물었다. 목의 동맥이 끊겨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런데 하도 순식간의 일이라 박스는 멍! 하고 서 있기만 했다. 온순한 치타를 사냥했던 그는 표범의 이런 공격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정신을 잃고 있었던 박스는 표범이 목줄을 놓고 자기를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발포를 했다. 산탄총이었기에 총탄이 표범에게 맞았다. 표범은 마치 시계의 태엽이 풀리는 듯 앙칼진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길길이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뛰어오르는 그대로 박스에게 덮쳤다. 제2탄을 쏠 여유가 없어 표범과 같이 뒹굴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표범의 목을 쥐고 졸랐다. 표범은 앞발로 박스의 얼굴을 마구 할켰으나 중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목줄이 눌려 힘이 빠져 죽었다. 일행은 목줄이 끊기고 동맥이 들어나고 얼굴은 형태도 없었다. 박스는 일행의 시체를 업었으나 몇 발자국 걷다가 쓰러졌다. 그 자신도 출혈이 심해 힘이 빠졌고 한 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박스는 방향을 알지 못해 그냥 일직선으로 걸었으나 걸어도 걸어도 밀림이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고함쳤으나 그 밀림에서 그를 살려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박스는 기진맥진하여 나무 밑에 쓰러졌다. 박스 일행의 실종 소식은 그 이튿날 헌터에게 보고되었다. 헌터는 무른베와 함께 수색에 나섰다. 와치 삼림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우선 가장 높은 지대에 올라가 삼림을 살폈다. 무른베가 헌터의 등을 치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독수리 떼들이었다.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부와나, 사고가 났지요?’
‘그래, 그런 것 같아. 빨리 가보자.’
현지에 도착하자 헌터는 몸서리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10m나 되는 금사(뱀)가 다뱅이를 틀면서 뭔가를 삼키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뱀의 아가리에 사람의 다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사람의 상체는 이미 뱀의 몸속에 들어가 버렸고. 더 기괴한 일은 뱀이 사람을 삼키고 있는 곳에서 불과 5, 6m 떨어진 곳에 표범 한 마리가 죽어있었고, 표범 옆에는 온통 피범벅이 된 사내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무른베가 뱀에게 총을 쏘았다. 총탄을 맞고도 뱀은 사람을 뱉어내지 않고 도망치려고 했다. 헌터와 무른베가 교대로 뱀에게 난사를 했다. 칼로 뱀의 배를 갈라 간신히 사람을 끄집어냈다.
‘부와나, 죽었어요. 이미 틀렸어요.’
자고 있는 사람은 박스였다. 그는 요란한 총소리에도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헌터가 박스를 흔들어 깨웠다. 첫마디는 물을 달라고 했다.
‘치타를 몇 마리나 잡았지?’
박스는 고개를 흔들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울다가 곧 통곡했다. 박스는 밀렵을 하지 않았다. 아예 총을 들지 않았다. 헌터는 수렵관리인 임무를 매우 유능하게 수행했고 여러 번 표창을 받았다.
헌터가 수렵관리인이 된 지 1년 만에 엉뚱한 문제가 생겼다. 헌터의 영내에서 짐승들이 너무 많이 번식을 하여 피해가 많다는 진정서가 들어왔다. 과잉보호라는 말이었다. 헌터도 그런 사실을 시인했다. 과잉 번식을 한 맹수들은 보호지의 경계선을 몰랐다. 경계선 밖으로 나가 토인의 논밭을 짓밟고, 가축 피해, 인명피해까지 생겼다. 헌터는 경계반을 3조로 편성하여 순찰을 강화했고 경계선 밖으로 나온 맹수들을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맹수피해 진정서는 사라졌으나 이번에는 작은 짐승의 피해가 일어났다. 하이에나와 성성이였다. 사자나 코끼리가 번화가의 깡패라면 하이에나와 성성이는 뒷골목 악당이었다. 하이에나는 밀림의 청소부로 불리우는 것처럼 썩은 고기를 먹었으나 산 짐승도 잡아먹었다. 하이에나의 피해가 격심하다는 마을에 도착한 그 날밤에 헌터는 하이에나의 준동을 목격했다. 헌터가 천막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회중전등을 들고나와 보니 전등 불빛에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이 비췄다. 커다란 황소가 등에 하이에나를 태우고 달렸다. 황소는 공포로 눈이 뒤집어졌으며 등에 탄 하이에나는 황소를 물어뜯고 있었다. 네 다리가 못질을 한 것처럼 황소의 배에 박혀있고 여나문 마리의 하이에나가 황소를 쫓고 있었다. 헌터는 황소등에 탈 수 있는 동물은 표범이나 사자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보고 당황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큰 동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애송이 깡패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는 황소에게 화가났지만 제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하이에나에게 증오심이 일어났다. 헌터는 황소를 따라갔다. 100m쯤에 조그마한 초원이 있었다. 거기에서 황소의 우엉! 우엉! 하는 울음소리가 났다. 소리나는 곳에 전등을 비췄더니 황소가 넘어져 있었고 열 마리가 넘는 하이에나들이 숨도 끊어지지 않은 황소를 뜯어먹고 있었다. 아가리를 크게 벌려 고기를 한입 물고는 대가리를 흔들어 뜯었다. 하이에나 힘이 센 줄은 알고 있었으나 제 몸뚱이만 한 고깃덩이를 뜯어내는 걸 보고는 헌터도 놀랐다. 고기를 뭉텅뭉텅 잘라내서 거의 씹지도 않고 삼키던 하이에나들이 잔치판에 뛰어든 헌터에게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전투태세를 갖춘 놈들도 있었다.
(이 버릇없는 것들!)
헌터가 덩달아 두 발을 쏘아 전투 태세를 갖춘 놈들을 쏘았고 앞으로 전진하며 재장탄을 했다. 간사한 놈들이라 후퇴를 하면 달려들 위험이 있었다. 하이에나들이 헌터의 기세에 눌렸다. 단 한 사람이지만 사자와 같이 용감한 적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다음 총탄으로 또 두 마리가 쓰러지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이에나의 산개 전술이다.
(나리, 그것은 우리가 잡은 것이지만 나리께서 먼저 잡수시지요. 그리고 저희들에게도 좀 남겨주십시오.)
총소리를 듣고 무른베와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로부터 하이에나의 극악무도한 행패를 들었다. 하이에나는 소 여섯 마리, 돼지 네 마리, 닭 100여 마리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두 명이 희생되었다는 말이었다. 네 살 된 어린이와 여든두 살의 노인이었다.
‘할머니는 자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집 밖에 멍석을 펴놓고 자고 있었는데 별안간 그놈들이 덮쳤다. 열서너 마리나 되는 놈들이 부근에 사람이 있었는데도 할머니를 물고갔어요,’
몇 분 후에 마을 사람들이 쫓아갔을 때는 할머니의 머리칼과 굵은 뼈만 남아있었다. 하이에나가 사람을 잡아먹게 된 데는 토인들의 잘못도 있었다. 토인들은 온갖 쓰레기를 밀림에 버렸다. 밀림에 버린 쓰레기는 독수리, 개미, 하이에나들이 깨끗이 청소를 했다. 그런데 그 쓰레기에는 사람의 시체도 있었다. 사람이 병들어 죽으면 그렇게 장사를 치뤘다.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하이에나가 사람고기 맛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살인의 원인이 된 것이다. 헌터는 그곳에 적어도 200마리 이상 하이에나가 있다고 말했다. 먼저 손쉬운 방법으로 병든 돼지를 한 마리 잡아 하루 종일 햇볕에 두었다가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 사격의 방해물이 없는 들판에 던져두고 무른베와 함께 부근에 잠복했다. 한 시간도 못 되어 열서너 마리의 하이에나가 모여들어 돼지고기를 뜯었다. 연사(連射)를 했다. 7연발의 총탄을 다 쏘고 재장탄을 했는데 하이에나들이 다 도망쳐버렸다. 일곱 마리의 시체를 남겨두고. 이 방법으로 30 마리를 죽였는데 돼지고기를 던져두어도 하이에나가 눈치를 채고 오지 않았다. 다음에는 독살 방법을 썼다. 독살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하이에나에게는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 노인이 한 사람 죽었다. 하이에나에게 물려 죽은 할머니의 남편이었다. 친척들은 할아버지도 하이에나를 죽이는 일이라면 자기 시체를 사용해도 마누라의 복수를 위해 허락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튿날 현장에 가니 열두 마리의 하이에나가 죽었다. 토인들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으나 헌터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른베, 여기를 봐. 여기 온 하이에나는 다 죽었는데 단 한 마리는 살아서 돌아갔어. 이 발자국을 봐.’
(어째서 이 한 마리는 살아서 돌아갔을까?)
무른베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무른베, 이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까짓 한 마리를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이에나의 생태를 연구해보고 싶었다.
‘부와나, 이놈은 사람고기를 한 보따리 물고 가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군. 그런데 그 녀석은 놈이 아니라 년인 것 같아.’
한참 가다가 무른베가 말했다.
‘이 년도 독이 오른 것 같아요. 발자국이 비틀거리고 있군요.’
그때에야 헌터는 수수께끼를 풀었다. 하이에나 중에는 새끼를 가진 암컷이 한 마리 있었는데 암컷은 최소한 자기 배를 채우고는 새끼들을 위해서 사람의 팔을 뜯어 물고 새끼가 기다리고 있는 굴로 돌아간 것이다. 큰 고목 뿌리 밑에 하이에나의 굴이 있었다. 잡초가 무성해서 그런 것에 하이에나의 글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곳이었다. 헌터가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구멍에 접근했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전등을 비춰보니 어미 하이에나와 네 마리의 새끼들이 죽어있었다. 옆에는 사람의 팔뼈가 뒹굴고. 독살 방법으로는 오십여 마리를 잡았다. 독살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헌터는 토인들을 시켜 수십 개의 우리를 만들었다. 우리에는 썩은 고기를 미끼로 두고 하이에나가 썩은 고기를 물면 우리가 자동으로 닫혔다. 첫날에 스무 마리가 잡혔고 다음 날에도 십여 마리씩 잡혔다. 모두 100여 마리를 잡았다. 이 방법도 하이에나가 눈치를 채서 차차 수확이 줄었으나 그 후부터는 하이에나가 잡히지 않았다. 하이에나는 멀리 도망을 간 것 같았다. 토인들은 대만족이었다. 하이에나가 없어져 안심하고 살 수 있었고, 하이에나의 고기도 한 집에 두 마리씩 배급되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하이에나의 고기는 천하 진미라고 했다. 그러나 헌터는 고기 맛을 볼 용기는 없었다. 헌터는 그 마을에서 한 달가량 머문 뒤 다른 마을로 출동했다.
이번에는 성성이와 대결했다. 성성이는 사람과 같은 영장류에 속하는 동물이며 그만큼 영리했다. 성성이는 식물성이며 나무 열매, 나뭇잎, 감자, 고구마 때로는 곡물도 먹었다. 그래서 위험이 없는 동물이며 원숭이가 좀 커진 동물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 성성이는 위험한 동물이며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무서운 동물이다. 헌터가 찾은 보아 마을에서는 성성이 때문에 마을이 몰락, 아사자(餓死者)가 나올 정도였다. 그들은 옥수수밭을 습격하고 감자밭을 짓밟았으며 때로는 가축도 죽였다. 헌터가 성성이가 짓밟은 감자밭에 가봤는데 참혹했다. 거의 삼십여 마리나 되는 성성이들이 대낮에 습격을 했는데 성성이 한 마리가 5kg 정도 먹고, 또 2kg 정도 가져가고, 사방 10m 정도의 밭을 짓밟아버렸다. 또 그들은 용감하고 영리했다. 그들이 습격을 할 때 그중 몇 마리는 부근의 나무에서 망을 본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경고 소리를 내서 두목이 앞장서는데 사람들의 수가 적으면 웍! 웍! 하며 오히려 위협을 한다. 달려온 사람이 여자, 어린이, 노인 같으면 아예 상대하지도 않고. 이럴 때 성성이는 맹수다. 깡패집단으로 보면 된다. 성성이는 표범 못지않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졌다. 보야마을의 개 일곱 마리가 성성이에게 희생당했다. 서른 마리나 되는 성성이가 쳐들어왔는데 개들은 성성이를 얕보고 덤벼들었다. 개들이 몰려오자 성성이 두목이 앞장선 개에게 덮쳤다. 대뜸 목줄을 물어 날카로운 송곳니로 동맥을 끊어버렸다. 목줄이 끊어진 개의 양다리를 잡더니 무서운 힘으로 찢어버렸다. 그 무서운 광경을 본 개들이 도망치려고 했으나 성성이들은 개들을 포위하여 두목이 했던 것처럼 개들을 처치했다. 그래서 보야마을의 개들은 전멸했고, 돼지 두 마리와 닭 열서너 마리가 희생됐다. 옥수수밭에 방사한 돼지는 성성이가 찢어죽였고 닭들도 털이 뽑혀 죽었다. 그러나 성성이는 돼지와 닭은 먹지 않았다. 성성이의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사람들이 달아났거나 싸움을 피했기 때문이다. 어떤 토인이 성성이들이 여자를 포위하여 여자가 하반신에 걸친 헝겊을 찢어버리고 여자를 안으려고 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여자는 자기가 포위되었으나 비명을 지르자 성성이들이 도망갔다고 변명했다.
성성이들과 사람들의 싸움은 그 이튿날 벌어졌다. 성성이들이 옥수수밭을 습격했다는 말을 듣고 헌터와 무른베가 마을 사람 10여 명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헌터일행이 옥수수밭 가까이 가자 보초가 킥! 킥! 경고를 했다. 폭풍우를 맞은 것처럼 파도 치던 옥수수밭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두목이 달려나왔다. 사람만큼 키가 큰 놈이었는데 그놈은 첫눈에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했다. 대적을 하기에 사람의 수가 너무 많고 토인들이 활을 가지고 있었다. 두목이 도피 신호를 하자 모두 옥수수대 밑을 기어 도망갔다. 헌터가 발포했다. 높은 언덕 위에서 지휘를 하고 있던 두목이 쓰러졌다. 두목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으나 또 쓰러져서는 일어나지 못했다. 헌터는 전장(戰場)의 사령관을 떠올렸다. 용감하고 현명한 사령관이었다. 두목이 죽자 혼란이 일어났다. 우왕좌왕,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토인들이 활을 쏘았으나 옥수수대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적 전사 여섯 마리 아군의 피해는 경상 한 사람이었다. 놀라 달아나던 성성이가 토인을 뛰어넘으면서 어깨를 할켰다.
‘부와나,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성이의 시체를 확인한 무른베가 물었다.
‘뭐가?’
‘내가 여덟 발을 쏘았고 네 마리를 잡았다고 자신하는데 부와나가 그만큼 쏘았는데 명중률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헌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25. 사자(獅子)와 소녀
수렵안내인은 꽤 취했다.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가장 고급 바(Bar)였으며 나는 아까부터 취한 체하면서 안내인에게 연거푸 술을 권했다. 미리 조사해두었던 그의 경력을 인용하면서 그의 환심을 샀다. 그는 감격했다.
‘이건 정말 영광인데요. 선생님 같은 유명한 수렵가가 저 같은 안내인을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다면 뭣이든 해드리겠습니다.’
바로 그 말을 나는 사흘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색은 않고 가벼운 말투로 슬쩍 물었다.
‘사실 나는 <사자의 딸>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는 데를 알고 싶은데 ….’
아주 좋은 기회를 잡아 아주 자연스럽게 얘기했지만 그 말이 나오자 안내인의 낯 빛깔이 확! 달라졌다. 붉으스레 취했던 낯빛이 창백해졌다. 입 언저리의 웃음이 얼어붙어 일그러졌다. 술잔을 든 양손도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아차! 역시 뭣인가 있구나.)
나는 아프리카 수렵계 그것도 극히 한정된 전문 수렵가들 사이에서 귓속말로 오가던 풍문을 확인하려고 나이로비에서 무려 1주일간 돌아다녔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이름난 어느 수렵안내인을 술과 돈으로 매수한 결과 그 일이라면 A. kanebski-러시아인 늙은 수렵안내인-바로 지금 나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가 잘 알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그래서 노름판에서 사내를 만나 사흘 동안 구슬려 절대로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만든 것인데 …. 바의 조명은 희미했고 냉방시설이 잘되어있었으나 사내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뚜렷했고 이마에 땀이 솟고 있었다. 그는 뭣인가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 비밀이 바로 <사자의 딸>이라는 소녀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에 대한 의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노름꾼인 그는 노름판에서 돈과 시계까지 털려 울쌍이 되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영국 신사가 아무런 담보도 없이 돈을 꾸어주었고 코치까지 해줘 잃었던 돈의 두 배를 따게 해줬던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영국 신사는 노름버릇 때문에 취소되었던 수렵 안내 허가증을 찾아주었고 이틀 동안 고급 바에서 술도 사주었다. 그런데 그 은인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다가 넌지시 말했다.
‘안, 꼭 지켜야 할 비밀 같으면 말 안 해도 좋소.’
이 말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내게 바짝 다가앉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갑자기 목이 쉬어 목소리가 갈렸다.
‘킬리만자로 남쪽 C 지구 국립공원 금렵구지요. 안내는 못 해 드립니다. 내 신변이 위태로와요. 아니, 이미 위태로운 상태지만 ….’
그는 떨고 있었다. 나 자신도 공포를 느꼈다.
‘고맙소.’
더 이상 공포를 주지 않으려고 일어서려는데 그는 내 소맷자락을 쥐고 귓속말로 소근댔다.
‘거기는 당신은 물론 어떤 수렵가도 들어가지 못하는 특수지역이니, 몇 년 전 어거지로 거기 들어갔던 관광객 서너 사람은 행방불명되었소. 아시겠소?
‘맹수 때문이요?’
안내인의 입이 야릇하게 삐뚤어졌다.
‘위험은 사자뿐만이 아니죠. 그곳은 모든 것이 위험해요. 동물, 식물, 광물 그리고 사람도. 모두 위험하지요.’
‘사람도?’
‘좌우간 거기는 가지 마시오. 알았습니까?’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호텔로 돌아왔으나 쉽게 잠들지 못했다. 풍문(風聞)은 아프리카 어디에서 백인 소녀가 사자와 같이 살면서 다른 짐승을 습격하고 때로는 사람도 습격한다는 말이었는데 풍문이 사실이라니 ….도무지 믿지 못할 얘기였으나 가네프스키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사자의 딸>이라는 소문은 소년소녀 소설처럼 낭만적이 얘기가 아니라 기괴(奇怪)하고 음산(陰散)했다. 위스키의 힘으로 불러들인 잠속에서도 상체는 사자고 하체는 소녀인 괴물이 춤을 추고 있었다. 희대(稀代)의 사건을 마음속에만 품고 있을 수 없었다.
(오냐, 현지로 가자.)
나는 한 번 결심하면 죽어도 해야 하는 성미다. 거기에 들어가는 허가가 안 나올 것이라지만 나는 그 허가를 얻을 자신이 있었다. 나이로비의 수렵관리관 로엘과 친한 사이였다. 이때껏 내가 부탁해서 안 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비서실에서 대기한 서너 명의 선객(先客)을 제쳐놓고 먼저 만나주었다.
‘켓썰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오카피요, 난쟁이 하마요. 백색 뱀은 어떻소?’
‘아니요. 관광허가서입니다. 킬리만자로 남쪽 C 지구.’
사교성이 풍부한 관리관이 확답을 피했다. 커피를 권한 후 비서에게 금렵구역의 허가방침을 가져오라고 하여 보여주었다. 남쪽 C 지구는 붉은 글씨로 특명지구라고 기재되었다. 사자와 맹수들이 자연 상태로 살고 있어서 수렵이 금지된 곳이었다.
‘그렇지만 관리관, 나는 총에 대해서는 ….’
‘알고말고요. 당신의 총솜씨는 프로 포수 이상이고 사자 소굴에 던져놓아도 사자에게 잡아먹힐 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러나 그곳에 관광객을 보낼 수 있는 허가서는 사실상 내가 발급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내 명의(名義)로 되어 있지만 ….’
나는 그 말투가 좀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파이프에 담배를 천천히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럼 넌 로보트야?)
눈치가 빠른 관리관이 좀 당황한 것 같았다. 문제가 된 지역의 관리관은 프랑스인 존 브리트라고 했다. 대담무쌍(大膽無雙)하고 정확한 속사(速射)로 이름난 사냥꾼이었으며 나도 그의 명성은 들었다. 그는 맹수를 근거리에 당겨놓고 첫탄으로 쓰러뜨린 후 두 번째 탄환으로 숨통을 끊어버린다는 소문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아주 위험한 사냥방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사냥기법을 연구해보려고 한 일도 있었다. 나이로비의 중앙수렵관이 그를 남쪽 C 지구에 임명한 것도 그의 사냥 실력과 무관하지 않다. 브리트는 수렵관직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흠집이 있다면 성격이 너무 강하고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그는 한번 결정하고 선언하면 절대로 번복하지 않았다. 그가 안 된다고 한 것 중에 C지구에 관광객이나 수렵가를 들이지 말라는 조건이 있었는데 중앙수렵관 로엘이 만사에는 예외가 있다고 하면서 브리트의 의견을 묵살하고 서너 명의 관광객을 C 지구에 보냈다. 그런데 사고가 나서 그 후 로엘은 브리트의 자필서명 동의서가 없으면 C 지구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해명이었다. 해명이 아니라 창피를 무릅쓴 고백이었다.
‘그곳에 갔던 미국인 관광객들이 모두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
관리관이 얼굴을 붉혔다.
‘사실이 아닙니다. 너무 과장되었어요. 맨 처음 그곳에 갔던 미국인 학생은 고용한 포터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 도주했기 때문에 되돌아왔습니다. 두 번째로 그곳에 들어간 미국의 여행잡지 기자 두 사람은 숲속에서 마사이족을 만나 겁을 먹고 도망쳐 나왔고 세 번째는 사자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습니다.’
‘총솜씨가 훌륭했으나 사자들이 캠프를 습격해서 총을 쏠 겨를 없이 바른팔을 물려 절단했다고 합니다. 그를 안내했던 안내인도 경상을 입었는데 약간 정신이상이 되었고요.’
나는 그 안내인이 바로 러시아인 가네프스키임을 직감했다. 친구인 로엘씨를 더 괴롭히기 싫어 돌아섰다. 로엘씨는 킬리만자로지구 관리인에게 나의 여행 허가 여부를 정식으로 문의했으나 예상대로 <No!>였다. 로엘씨가 나의 사냥경력과 능력을 상세히 알리고 특별고려를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고집불통의 현지 관리인 황소 브리트가 상관의 부탁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무안을 당한 로엘씨는 브리트의 콧대가 높은 것은 성격이지만 영국의 귀족이고 아프리카에서 꽤 힘을 쓰는 처가가 배경이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브리트의 부인 이름이 뭐더라?’
‘아마, 시빌일겁니다. 키가 크고 ….’
(시빌.)
나는 웃었다. 잘만하면 허가서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프랑스 사내란 원래 여자에게 약한 놈들이니까.
아프리카에 건너오기 전에, 그러니까 두 달 전이지만 파리에서 중학 동창생 한 친구와 며칠 같이 지냈는데 그 친구의 동거인 리즈 달보아 부인으로부터 시빌 부인의 얘기를 들은 것이다. 리즈부인과 시빌 부인은 여고 동창생이고 결혼식에서는 서로 들러리를 서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는 아메리카 화장품회사의 프랑스 대리점을 한 리즈 부인하고 극진하게 지냈다. 오래도록 아프리카에서 산 부인은 아프리카 얘기를 시작하면 밤을 새웠다.
나는 리즈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생생한 아프리카 현지 소식을 담은 편지였는데 편지 끝에 킬리만자로 C 지구에 들어갈 허가장이 나오도록 현지 관리관 부인인 시빌 부인에게 보낼 소개장을 부탁했다. 곧 답장이 왔으며 소개장을 시빌 부인에게 보냈다. 다시 며칠 뒤 로엘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C 지구에 들어와도 좋다는 서류가 왔습니다. 조건은 자위용 무기 외에는 휴대하지 말 것, 현지 관리관의 지시를 따를 것, 한 명 이상의 포터는 안 된다는 것 등입니다.’
지프 운전사 겸, 몸종 겸, 보호관 보고에게 C 지구로 갈 준비를 명령했다. 장총은 버리고 체코제 권총을 포켓에 넣었다. 사냥용 대형권총이기 때문에 맹수 서너 마리쯤은 처치할 수 있었다.
이튿날, 1930년 3월에 나이로비를 출발했다. 보고에게 자동차 길이 그려진 정밀지도를 주었으니 나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잠자는 일뿐, 비몽사몽(非夢似夢)의 몽롱(朦朧)한 의식 속에서 상체는 사자고 하체는 여자인 괴물이 어른거렸다.
26. 첫 대면
토고에게 운전을 맡긴 지프가 사흘 후 킬리만자로에 도착했다. 그날 밤늦게 남쪽 C 지구에 들어가 지정된 방갈로에 묵었다. 아스팔트길, 자갈길, 모래길 그리고 험한 산길을 연사흘 동안 달렸기에 몸이 막대기처럼 뻣뻣했다. 방갈로에 들어서자 말자 대나무 침대에 곯아떨어졌다. 그건 잠이라고 하기보다는 혼수상태라고 하는 것이 알맞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보드라운 붓으로 얼굴에 간지럼을 태는 기분에 눈을 떴다. 원숭이였다. 갓난아기보다 작은놈이 머리맡에 앉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장난감처럼 귀여운 모습이었고 윤기나는 긴 털이 온몸에 덮여 있었다. 얼굴은 도미노 가면 같았고 반짝이는 두 눈이 가면 속에서 반짝거렸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원숭이는 곧장 창문을 넘어 아침 안개가 자욱한 바깥으로 사라졌다. 내 방갈로는 짙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정면은 넓은 초원이었다.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두 번째의 방문객이 나타났다. 송아지만 한 영양이 천천히 그리고 수줍은 몸짓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새끼 영양은 곧장 내게 다가와 코로 내 손등을 비벼댔다. 나는 영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는데 그의 선량한 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양은 답례로 내 손등을 핥고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 사라졌다. 상상처럼 음침하고 무서운 곳이 아니라 평화롭고 조용했다. 아침 안개가 걷히자 지평선에 킬리만자로의 위용(威容)이 펼쳐졌다. 만년설(萬年雪)에 덮힌 거봉(巨峰)이 눈앞에 전개됐다. 나는 방갈로를 나와 초원을 걸었다. 언덕을 넘자 대평원이 나타났다. 초록색 양탄자를 펼친 대초원에 수만 수십만 마리의 동물들이 있었다.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 영양, 얼룩말, 기린, 코뿔소, 코끼리들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서 동물을 관찰하다가 좀 더 가까이 가려고 했을 때 또렷한 영어가 들렸다.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더 나가면 안 됩니다.’
돌아보니 2~3m 떨어진 나무 그늘에 가냘픈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열두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칼이 이마를 가리고 토인처럼 검었다. 커다란 눈은 푸른색이었고 가냘픈 목덜미는 백인이었다. 소년은 나의 존재 따위는 무시하고 동물들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출입 금지구역이냐?’
소년이 머리를 끄덕였다.
‘틀림없지?’
‘물론이죠. 나 이상 금지구역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 금렵구의 관리관도?’
‘내 아버지? 아버지도 나만큼 몰라요.’
‘그러면, 너만 허락하면 금렵구에 들어갈 수도 있겠구나.’
‘안 됩니다.’
‘내가 이대로 들어가면 넌 아버지에게 말해서 쫓아내겠지?’
‘난 고자질은 하지 않아요.’
‘그럼 왜? 내가 동물들과 싸워 다칠까봐?’
‘나는 아저씨가 총을 잘 쏘는 사냥꾼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허리에 찬 권총도 보통 총이 아니란 것도 알고요.’
‘나는 동물을 함부로 죽이는 사냥꾼이 아냐. 난 동물들과 친해지고 싶은 거야.’
‘동물들은 아저씨를 환영하지 않아요. 동물들에게는 지금이 가장 즐거운 시간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아요.’
소년의 말은 단호했으며 나는 더 이상 금렵구에 들어가겠다고 요구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내가 실망하는 표정을 알고 동정하는 말로 달랬다.
‘미스터 켓셀, 실망하지 말아요. 기회를 봐서 내가 안내할테니 ….’
나는 놀랐다.
‘너, 어떻게 내 이름을 … ?’
‘이름뿐만 아니지요. 난 아저씨가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아요. 니코라스와 신뻬린이 보고해주었어요.’
(니코라스, 신뻬린?)
‘원숭이와 영양입니다. 아까 인사를 했다면서요? 둘 다 내 친구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내 이름까지?’
소년이 웃었다. 여성적인 웃음이었다.
‘이름은 보고에게서 들었습니다. 아저씨 운전사.’
‘보고가? 보고는 주인 얘기는 안 할 텐데 ….’
‘바보! 보고는 영어로는 얘기를 안 하지요. 토인 말로는 잘해요.’
‘토인 말을 하니?’
‘보고는 기구유족인데 난 기구유 말도 하고, 와간바 말도, 수와히리 말도 하고, 모든 토인 말을 할 줄 알아요. 그리고 동물 말도 ….’
‘동물을 잘 아느냐?’
‘모두 친구지요. 보세요, 저기 늪가에 있는 물소는 얼룩얼룩한 반점이 있지요?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반년이나 되었는데 낫지 않은 고질병(痼疾病)입니다. 성미가 불같아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되요.’
성질이 불같은 물소는 기분이 나쁘면 코끼리에게도 덤벼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불 같은 물소가 몇 달 전에 피부병이 번져서 성질이 나 강가의 나무에 몸을 부비면서 뿔로 받고 발로 차고 미쳐 날뛰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큰 사자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사자는 배가 불러 별생각 없이 강가를 산책한 것이었으므로 물소들도 경의(敬意)를 표(表)하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는데, 그 미친 물소는 곁눈질로 사자를 힐끗 쳐다보고도 무시했다. 사자가 다가섰는데도 물소는 피하지 않았다. 둘의 거리는 20여 미터. 마침내 사자가 대노(大怒)했다. 긴 갈기가 크게 흔들리고 꼬리를 쭉 뻗고 돌진했다. 사자가 공중에 도약(跳躍)하는 걸 보고 심술쟁이 물소가 당황하여 몸을 돌려 머리를 숙여 사자에게 맞섰다. 어처구니없는 만용(蠻勇)이었다. 하긴 몸무게나 힘으로는 물소도 사자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싸움의 기술이다. 속도다. 사자는 매일 싸움으로 동물을 잡아 먹이로 삼는 프로선수고 물소는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아마추어 초식동물 아닌가? 바람을 차고 날아온 사자가 뿔을 내밀고 있는 물소의 머리를 앞발로 힘껏 내리쳤다. 500kg이나 되는 물소가 그 일격으로 나가떨어졌는데 천만다행(千萬多幸)이었던 것은 떨어진 곳이 물이었다. 물소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물속으로 줄행랑을 놓았는데 그 동작이 몇 초만 늦었으면 물소는 목줄이 끊어질 뻔했다.
‘그 후 저놈은 풀이 죽어 얌전해졌지요. 보세요. 옆에 있는 젊은 놈이 까불어도 가만히 보고만 있잖아요.’
소년의 얘기를 듣고 있는 사이에 해가 올랐다.
‘그런데 저 동물 중에는 사자나 표범 따위가 보이지 않는데 어찌된 일이냐?’
소년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맹수들은 딴 곳에 있어요. 비밀장소에 …. 나중에 안내할께요.’
‘언제쯤 ….’
소년은 해가 올라온 것을 보고 놀라더니 내 물음에 대답없이 가버렸다. 홱! 몸을 돌려 관목숲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방갈로에 돌아오니 원숭이가 베란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니코라스.’
이름을 부르니 원숭이가 킥킥거리며 내 어깨로 올라왔다. 내가 내민 손바닥에 앉았다. 운전사 보고가 왔다.
‘부와나, 관리관 부인께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아름다운 글씨로 <빨리 뵈었으면 한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관리사무소까지는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60평 정도의 관사는 가시덤불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맹수로부터 보호막이다. 키가 큰 금발의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안경은 벗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이렇게 일찍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바깥은 너무 덥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했다.
‘용서하세요. 이런 만지(蠻地)에서 살다 보니 예의를 잃어버렸답니다.’
부인은 소개를 한 리즈 달보아 부인의 얘기를 꺼냈다. 좀 당황스러웠다. 프랑스 파리 얘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닌데 ….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을 때 자동차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노크 없이 사람들이 들어왔다. 사람이라고 했지만 괴물 같았다. 절름발이 흑인은 한쪽 눈이 찌그러졌으며 몸에는 상처투성이였고 허리도 굽었다. 추악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허리의 권총에 손이 갔는데 부인이 제지했다. 부인은 그 흑인이 남편의 조수이며 키호로라는 와간바족 토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여기서 30여 년 간 살고 있으며 남편과 함께 20여 년을 살았습니다. 그의 몸의 상처는 모두 맹수들과 싸움의 흔적(痕迹)입니다. 이젠 너무 고된 일은 못 하고 딸을 돌봐주고 있습니다.’
(딸?)
내 의아한 표장을 알아차린 부인이 해명했다.
‘우리 부부 사이에 딸이 있습니다. 13세의 파트리샤입니다. 아! 주인이 옵니다.’
‘어서 오시오!’
‘난 존 부리트입니다. 관리관이지요,’
거친 말투였으나 불쾌감을 주는 태도는 아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졌으며 손에 코뿔소 가죽으로 만든 긴 채찍을 쥐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체구도 컸으나 행동은 민첩했다. 그는 나에게 위스키를 하겠느냐고 묻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위스키를 두 잔 들고 왔다.
‘사실은 오늘 새벽 모시러 가려고 했는데 금렵구에 수상한 토인들이 침입했다는 정보를 받고 현지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밀렵자들인가요?’
‘아니요. 오해였습니다. 마사이족이었습니다.’
마사이족이었다는 그 말투에는 마사이족은 한몫 봐준다는 뜻이 포함되는 것 같았는데 시빌 부인이 참견을 했다.
‘마사이는 동물을 죽여도 밀렵자로 간주하지 않나요?’
마사이에 대한 비꼬임과 혐오감이 묻어 있었다.
‘아니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부리트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마사이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호전적인 수렵족이다. 아프리카에는 수렵족, 농업족, 유목족, 전투족들이 있는데 마사이는 수렵족이며 전투족이다.
‘당신은 다른 부족이 금렵구에 들어오면 총을 쏘아 축출하지만 마사이계는 관대하군요. 여기 동물을 가장 많이 죽이는데도.’
시빌 부인의 추궁이 날카로왔다. 손님이 있는데도 부인은 남편에 대한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여보, 오늘은 큰 피해가 없었소,’
‘그래요? 피해가 있는지 없는지 한 번 보세요!’
시빌 부인이 히스테리컬하게 커튼을 걷고 들판의 하늘을 가리켰다. 독수리 떼들이 원을 그리면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대형 동물의 시체가 있다는 증거였다. 브리트가 당황했다.
‘별거 아니요. 병든 영양이나 한 마리 잡은 거겠지. 당신도 아다시피 마사이는 육식 부족이요. 식량을 하기 위한 사냥은 봐줘야지.’
부리트는 나를 보면서 보충 설명을 했다.
‘못된 밀렵자들은 백인의 앞잡이가 되어 코끼리 상아, 코뿔소 뿔을 팔기 위해 밀렵을 합니다. 사자의 껍질을 벗기고.’
이상한 부부였다. 말을 마친 부리트가 부인 곁으로 다가가더니 양팔로 우악스럽게 끌어안고 부인의 안경을 벗긴 뒤 창백한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부인은 반항을 하려고 했으나 힘에 눌려 안겼고 억센 포옹에 반항을 체념하고 남편의 두터운 품에 찰싹 붙었다.
‘여보, 파트리샤를 부릅시다. 손님에게 인사드리게.’
‘켓셀씨, 용서하세요. 저 사람은 거친 이곳 생활에 아직 적응을 못해서 ….’
부인이 딸 파트리샤와 함께 들어왔다. 파트리샤는 목에 진주 레이스를 걸고 긴 원피스를 끌고 있었다. 우아한 의상과 단정한 몸가짐이었다.
(예쁜 소녀다!)
라고 한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럴 수가?)
파트리샤는 내가 아침에 본 야생 소년과 똑 닮았다. 가냘픈 목덜미, 푸른 눈과 짧은 머리카락은 아침에 만났던 소녀가 분명했다.
‘안녕하십니까? 파트리샤입니다.’
아는 척하려다가 소녀의 예의 바르고 냉정한 인사에 점잖게 인사를 받았다.
‘미스 파트리샤. 엄마 닮아 예쁜데 ….’
시빌 부인이 미소 지었다. 어머니다운 자애 깊은 미소였다.
‘예, 고맙습니다. 나는 저 아이를 밀림의 숙녀로 키울 생각입니다. 그렇지 파트리샤!’
‘네, 고맙습니다. 엄마.’
이 얌전한 소녀가 밀림을 뛰어다니는 야생 소년이라니. 나는 이 가족의 병적인 분위기가 숨 막힐 것 같아 작별했다.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는데 큰 나무 그늘에서 부리트가 막아섰다. 나는 2m가 넘는 키였는데 그는 나 보다 30cm는 더 컸다.
‘켓셀씨, 하나만 묻겠는데 당신 차를 운전하는 친구는 토인들이 자는 방에서 자지 않고 차에서 자는 이유가 뭐요?’
항의 조였다.
‘아니죠. 보고는 나와 오랫동안 여행을 했는데 도시의 호텔에서는 보고를 받아주지 않아 차에서 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현지 토인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험한 인상이 좀 풀렸다.
‘오늘 새벽 당신은 금렵구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따님이 얘기했어요?’
‘딸? 아까 나는 응접실에서 딸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애는 그런 고자질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금렵구에 간 걸 알지요? 난 거기가 금렵구인 줄 몰랐습니다. 금렵구인 줄 알았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되었나요?’
내가 화를 내자 브리트가 웃었다.
27. 황소 브리트
‘켓셀씨, 오해 마시오. 난 당신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아까 새벽에 당신이 파트리샤와 금렵구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처에게 했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처는 딸이 밀림을 돌아다니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알면 또 히스테리를 일으킬 것입니다.’
‘….’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왜 당신이 그것을 비밀로 해주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따님을 만난 일은 우리 끼리 비밀입니다. 이유는 그것뿐입니다.’
이 대답이 그를 만족시켰다.
‘켓셀씨, 당신은 시빌의 동무인 리즈 달보아 부인과 친하다고 하는데 ….’
‘정확하게 말하면 리즈 부인의 비공식 남편인 화가의 친구지요. 나는 당신과 같이 사냥꾼이며 도시의 귀부인과는 사귀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묻겠는데, 리즈부인과 사귄다고 했으면 당신은 그 채찍으로 나를 칠 작정이었지요?’
‘그래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브리트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대부분 사냥 얘기였지만 얘기가 끝이 없었다. 얘기에 열중하다 보니 금렵구에 들어왔다.
‘괜찮아요. 나와 함께라면 금렵구는 없습니다.’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키호로가 나타났다. 브리트는 키호로가 들고온 두 자루의 총에서 한 자루를 받아들었다. 구경이 넓고 긴 총이었으나 브리트의 커다란 손에는 마치 장난감 같았다.
‘아까 처에게 지적을 당했는데 요즘 마사이가 너무 설쳐 좀 단속을 해야겠습니다.’
총을 쥐고 밀림에 들어서자 브리트는 사람이 달라졌다. 그의 움직임은 동물과 같았다. 나무 뒤에 착 달라붙어 주위를 살피다가 바람 같이 전진했고 숲속에 납작 엎드리기도 했다. 밀림에서 일어나는 소리나 냄새도 놓치지 않았고 자신의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약 2시간 동안 밀림 속을 걸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밀생하고 자그마한 늪이 있는 곳에 이르자 우리는 큰 바위 위에 엎드렸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원숭이도 떠들지 않고 새 울음소리도 끊겼다. 5~6분 후 30~40미터 앞 나무 사이에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밀림의 무뢰한이며 앞길을 막는 것은 걸레처럼 찢어버리는 밀림의 깡패 물소들이었다. 눈이 충혈되어 살기를 띠고 있고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추격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물소들이 가까이 다가왔으나 브리트는 물소에게는 흥미가 없이 물소들의 등 너머 숲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랜 사냥 경험으로 나도 숲속에 요기妖氣가 있음을 느꼈다. 사자나 표범 같으면 요기는 한군데 몰려있는 법인데 지금의 요기는 숲 전체에 퍼져있었다. 물소들도 포위되었다고 알아차린 것 같았다. 리더가 주위를 살피더니 머리를 돌려 다른 놈을 봤다. 리더가 자신을 잃은 것이다. 앞으로 갈까? 뒤로 돌아갈까? 돌진을 할까? 리더가 머리를 숙이고 흔들었다. 돌진의 버릇이다. 그때 숲에서 창이 하나 솟아올랐다. 공격 신호다. 4~5명의 토인들이 나타났다. 온몸에 얼룩덜룩한 칠을 한 토인들이 창을 날렸다. 그중 두 개의 창이 리더의 어깨와 배를 찔렀다. 400kg이 넘는 거대한 물소가 타격으로 비실거리더니 털썩 쓰러졌다. 숲속의 토인들이 모두 몰려나와 물소에게 덤벼들었다. 물소가 토인들의 칼로 무참하게 도륙(屠戮)될 위기에 브리트가 공포를 한 방 쏘고 물소와 토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총구가 토인들을 향했다. 토인들은 휘두른 창을 던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토인들의 등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토인들의 등 뒤에 키호로가 나타났다. 토인들의 창이 밑으로 내려졌다. 그 바람에 물소들이 도망쳤다. 그러나 부상을 입은 물소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더니 반격을 시도했다. 물소는 엉뚱하게 브리트에게 덤볐다. 내가 권총을 빼들고 발사한 것과 동시에 브리트가 돌아서면서 발사했다. 물소에게 맞은 것이 확실한데 물소는 돌진했다. 그러나 브리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소가 돌진한 것은 뛰어오던 탄성(彈性)이라는 걸 알았다. 과연 물소는 브리트의 발밑에 쓰러졌다. 브리트는 물소가 더 다가왔으면 황소처럼 물소와 육박전을 벌일 태세였다. 토인들 중에서 두목인 듯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몹시 흥분하여 브리트에게 따졌다. 입에 거품을 물고 창을 휘둘렀다. 브리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뱃속에서 올라오는 노여움을 폭발시켰다.
‘아니코!’
나쁜 놈이라는 토어(土語)였다. 길길이 날뛰던 두목이 놀란 듯 풀이 죽었다. 브리트는 분을 참지 못하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토인들은 브리트와 영양 한 마리를 잡기로 언약을 했는데 약속을 어겼다. 토인들은 변명을 하자가 나중에는 사과를 하고 끝내는 애원을 했다. 토인들은 영양을 한 마리 잡았으나 내일 벌어질 추장 생일잔치에 모자라 물소를 서너 마리 잡으려고 했노라고 애원했다. 브리트는 애원에 약했다. 죽은 물소를 추장잔치에 쓰라고 토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시빌이 내가 마사이에게는 약하다고 했는데 사실입니다. 이들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
우리는 마사이의 간청으로 초대받았다. 마을에는 영양 한 마리가 운반되어 있었는데 물소가 운반되자 환성이 터졌다. 내일 축제를 기다리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춤을 추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인사를 했고 악수를 했으며 아이들이 브리트의 어깨에 매달렸다. 아이들은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옷과 구두를 잡아당겼으며 브리트는 막느라고 애를 썼다. 그때 나는 그 아이들 사이에 아는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금렵구에 들어가지 말라>고 나에게 경고했던 소년~아니 얌전한 소녀 파트리샤였다. 놀라운 변신이었다. 남자 옷을 입은 토인 아이들과 똑같았다. 파트리샤는 아버지에게 달라붙은 아이들을 떼어내고 어깨 위로 기어 올라가 아버지의 다갈색 머리칼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야만인처럼 거친 동작이었으나 강력한 애정이 넘쳤다. 파트리샤가 흥분하여 고함을 지르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나무에서 내려오듯 미끄러져 내려와 아이들 속으로 숨어버렸다.
‘저 숙녀는 좀 부끄러운가 봅니다.’
우리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방갈로로 돌아왔다. 위스키를 마시며 얘기가 시작되었다.
브리트의 부친은 아프리카에 근무하는 영국의 고급 관리였다. 브리트는 아프리카에서 났고 자랐으며 열 살 때 이미 엽총으로 사냥을 했다. 열다섯 살 때는 이미 프로급 포수로 인정을 받았는데 부모는 사냥꾼이 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부모는 그를 영국에 보내 학교에 넣으려고 했는데 그는 총 한 자루를 가지고 밀림으로 도망쳤다. 토인들은 그를 환영했다. 토인들과 어울려 살았던 그는 짐승의 습성을 잘 알았으므로 프로 포수가 되었다. 황소 브리트의 소문은 온 아프리카에 퍼졌다. 그는 상아를 얻기 위해 200여 마리의 코끼리를 죽였고 토인 마을에 팔기 위해 물소 300여 마리를 사냥했다. 사자와 표범도 100여 마리를 쏘았다. 그래서 돈을 벌었고 시빌 부인과 결혼했다. 그리고 부인의 간청으로 관리가 되었으며 동물보호관이 되었다.
‘나는 동물을 잘 압니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습성도 알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 보다 더 동물을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 알겠소?’
‘파트리샤!’
내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사냥을 하기 위해 동물의 습성을 연구했지만, 그 애는 달라요. 그 아이는 동물의 친구지요,’
파트리샤는 동물의 말을 알아듣고 동물에게 말도 할 수 있다. 그 아이는 엄마의 눈을 피해 동물들과 놀았는데 엄마는 그것 때문에 반 미친 상태요. 그 아이를 파리의 숙녀로 기르려고 하는데 맘대로 들판을 뛰어다니며 동물들과 어울리니 용납이 되겠소. 그래서 절름발이 키호로를 붙여두고 감시를 합니다. 오늘 새벽 당신이 금렵구에 있었다는 걸 키호로가 보고했소. 키호로는 총을 지니고 파트리샤를 미행(尾行)하는데 감시가 아니라 보호지요. 내가 그 역할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상당히 취했으므로 브리트가 돌아간 뒤 침대에 누웠는데 운전수 보고가 들어왔다. 이런 경우 보고는 그냥 나가기로 되었는데 보고가 나가지 않았다. 램프에 비친 그의 얼굴에 공포가 어려있었다.
‘뭐야? 보고. 얘기해봐!’
‘부와나, 그 계집애. 파트리샤에 대한 얘기인데요.’
‘알았어. 너는 그 아이에게 내 얘기를 지꺼렸다지? 앞으로는 입을 다물어!’
‘아닙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고 그 아이에 대한 괴상한 소문입니다.’
‘소문? 무슨 소문인데.’
‘무서운 소문입니다. 이 부근 토인들은 다 알고 있지요. 그들은 파트리샤를 좋아하고 있지만 무서워해요.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해요.’
‘왜?’
보고는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혔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관리인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뭣이 어째!’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누구란 소문이야?’
‘사자, 라이온이 그 애의 아버지랍니다.’
‘사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 아이는 사자와 같이 살고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면서 다른 동물을 사냥한답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이로비의 그 소문이 정말이었단 말인가?)
‘임마! 그런 엉터리 같은 얘기가 어디 있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요. 그 애는 동물에게 마술을 걸줄 알아요. 오늘 새벽에 봤던 그 원숭이는 그 애 말을 알아듣고 심부름을 해요. 컵에 물을 따라 가지고 오는 것을 내 눈으로 봤어요. 그리고 그 애가 커다란 수사자하고 같이 다니는 것은 본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애가 사자 등에 타고 가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공포의 기색을 보이기 싫어 보고를 내쫓았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날 밤 나는 또 상체는 사자고 하체는 소녀인 괴물의 꿈을 꾸었다. 이튿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악몽과 보고의 바보같은 얘기를 털어버렸다. 적어도 털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래서 아무 목적도 없이 보고를 데리고 나섰다. 벌판을 지나 금렵구라고 써 붙인 게시판을 무시하고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혹시 파트리샤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밀림은 울창했다. 밑에는 60cm 정도의 잡초가 무성하고 위는 150m가 넘는 거목들이 하늘을 가렸다. 그 밀림을 얼마나 걸었을까? 아무 말 없이 따라오던 보고가 말했다.
‘부와나, 돌아갑시다. 위험해요.’
위험한 일이었다.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이런 밀림을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이지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뒤돌아섰다. 그때 나무들 사이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사람 그림자가 움직였다.
‘누구야? 이리 나와!’
허리의 권총을 빼들고 고함을 쳤다. 토인 두 사람이 나왔다. 권총 따위야 안중에도 없는 듯 천천히 걸어왔다. 첫눈에 마사이인 줄 알았다. 아프리카에는 엔부족, 간바족, 기구유족 등 여러 종족이 있었으나 마사이는 독특하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는 춤추듯 가벼웠고 임금님처럼 자존심이 넘쳤다. 머리를 치켜들고, 어깨에는 붉은 천을 걸치고, 키 보다 긴 창을 들었다. 가늘었으나 날카로웠고 그들은 그 창을 30m 안에서는 어김없이 적중시켰다. 마사이는 옛 이집트인의 후손이다. 그들은 다른 종족들의 유목과 농경을 경멸하고 오로지 수렵을 천직으로 살았다. 배가 고파도 구걸은 하지 않고 약탈을 했다. 나타난 마사이는 늙은이와 젊은이였는데 둘 다 모라네(전사(戰士))다. 마사이들 중에서 사냥과 전투를 하는 무사(武士)며 귀족이다. 젊은 병사(兵士)가 공(功)을 세우면 모라네가 되는데 모라네는 무기를 연마(鍊磨)하고 몸치장에만 전념한다. 모라네는 머리칼로 식별한다. 동아프리카의 종족은 남녀 구분 없이 대부분 머리를 박박 깎는데 다만 모라네만은 그 곱슬머리를 깎지 않으며 긴 머리를 땋아 소기름으로 붙인다. 그리고 그 위에 붉은색 진흙을 두껍게 발라 굳히는데 마치 투구처럼 된다.
보고에게 통역을 하라고 명령했다. 보고는 낯빛이 창백해지고 떨고 있었다.
‘부와나, 이 사람은 마사이입니다. 나는 기구유고요.’
아프리카의 모든 종족들은 마사이를 겁냈으며 특히 농경을 하는 기구유는 마사이라는 말만 들어도 어린이가 울음을 멈춘다. 기구유는 수백 년간 마사이들에게 식량을 약탈당하고 집이 불살라졌으며 여자들이 잡혀갔다. 보고를 타일렀다.
‘겁내지 마라. 내가 있지 않은가. 내 권총은 7연발이야.’
보고가 나를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권총은 믿는다.
‘구아헤리(인사).’
보고가 인사를 했다. 붉은 천을 두른 마사이가 서양 양복을 입은 보고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훑어봤다.
‘구아헤리.’
내가 권총을 집어넣고 인사했다.
마사이 노인은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인사를 했다.
(보통 놈은 아니다.)
‘구아헤리.’
모라네들은 창을 내려 땅에 꽂고 몸을 기댔다. 보고를 통해 내가 관리인의 친구라고 말했다. 내가 이름을 물었다.
‘나는 오륜가, 젊은 친구는 올갈이다. 당신들은 여기서 뭘 하오?’
‘나는 동물을 구경하러 왔지. 너희들은 뭘 하나?’
‘가족등의 캠프를 칠 장소를 찾고 있어. 우리가 이 밀림의 주인이야. 관리인도 그건 알고 있어.’
그런 건 나와 관계없었으나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들의 창에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피 묻은 창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노인이 웃었다.
‘도중에 표범을 만났어. 허벅다리에 창을 맞은 표범이 입으로 창을 빼고 도망갔어,’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작별을 하자 보고는 안도(安堵)의 한숨을 쉬었다.
29. 사자(獅子) 킹
오후 늦게 시빌 부인으로부터 정중한 만찬회 초청을 받았다. 히스테리 상태의 부인을 만나기 꺼렸으나 파트리샤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초처에 갔다. 시빌 부인은 가슴이 깊게 패인 비단 야회복(夜會服)을 입었다. 고독에 시달린 시빌 부인의 욕구가 이상(異常) 상태로 분출(噴出)된 것 같았다. 만찬회는 영국의 상류 가정 만찬회처럼 주전자, 설탕 그릇, 우유 그릇, 포크, 나이프 등이 모두 은제(銀製)였다. 브리트도 하얀 다기시드(예복(禮服))를 입고 머릿기름을 발랐다.
‘이렇게 훌륭한 자리를 ….’
시빌 부인은 나의 인사에 만족한 듯 자리를 권했다. 격식대로 하얀 의복을 입은 하인들이 시중을 들었다. 식탁 의자가 네 개였는데 하나가 비어 있었다. 시빌 부인은 빈 의자를 보면서 초조한 듯 남편의 얼굴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여보, 보면 알지 않소. 바깥은 아직 밝지 않소.’
‘곧 어두워질 것 같은데요.’
부인이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손님인 나를 의식해서 억지로 웃음을 지며 말했다.
‘과자 드십시오. 영국에서 가져온 과자입니다.’
나는 그 비싼 과자 보다도 물소고기를 먹었다. 어색한 만찬이었다. 셋 다 화제를 잃고 묵묵히 식사만 했다. 시빌 부인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 듯 말했다.
‘난 오늘 마사이를 두 명 만났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마사이로부터 보고를 받았지요,’
브리트가 말을 받았는데 부인의 히스테리가 폭발했다.
‘그만두어요. 그만둬!.’
‘난 그들을 잘 알아요. 벌거숭이고 눈이 미친 것처럼 뒤집어진 친구들이지요. 그런 야만인들과 살아야 하니 미칠 것 같아요. 여긴 지옥이야.’
브리트가 일어섰다. 시빌 부인이 발작을 멈추었다. 부인이 남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여보. 파트리샤가 아직도 오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불평을 해서 미안합니다.’
브리트가 얌전히 앉았다. 분위기는 조용해졌으나 다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여보, 손님에게 우리들이 처음 만났을 때 얘기를 해드려요.’
‘그렇지, 그걸 얘기하지.’
브리트가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호소하는 듯한, 한탄하는 듯한 동물의 울음이 울렸다. 거리는 30m 이내였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알았다. 뱃속에서 뿜어내는 사자의 포효였다.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시빌 부인은 공포가 떠올랐고 브리트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여보, 날이 어두워졌는데 빨리 나가서 파트리샤를 찾아와요, 제발!’
‘음, 그러지. 내가 나가보지.’
브리트가 문으로 가다가 되돌아섰다. 문이 열리고 파트리샤가 들어섰다. 하양 칼라, 커프스가 달린 하늘색 옷을 입고 하얀 스타킹에 에나멜 구두를 신었다. 머리에는 하얀 리본을 묶었다. 파트리샤는 빈틈없는 숙녀의 예의로 나에게 눈인사를 하고 부모에게는 키스를 한 다음 의자에 사뿐히 앉았다.
‘자, 이제 우리 예쁜 숙녀가 오셨으니 재미나게 놉시다.’
브리트가 웃었다. 시빌 부인은 반은 웃고 반은 우는 표정으로 파트리샤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킹이 늦었습니다. 킹은 늦었으면서도 기어히 나를 집에 대려다 주겠다고 우겼지요. 킹의 소리를 들었지요?’
‘물론이지. 킹의 소리를 듣고 나는 안심했어.’
브리트가 딸의 말을 가볍게 받았는데 그게 또 부인을 미치게 했다.
‘킹, 킹이 어쨌다고?’
‘미스터 켓셀, 킹이 누군지 아십니까? 보이프렌드도 아니고, 하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닙니다. 사자랍니다. 진짜 맹수 말입니다.’
시빌 부인이 울음을 터뜨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올 것이 왔다. 소문이 정말이었구나. 몸이 떨렸다. 소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빠, 엄마에게 가봐요. 지금 엄마는 아빠가 필요합니다. 엄마를 위로해줄 사람은 아빠뿐이니까요.’
단호한 명령이었다. 브리트는 그 말에 따랐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는 게 무서워 집에서 나왔다. 방갈로에 돌아오니 보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는 나의 지시를 받아 주변 토인 마을을 돌아다니며 파트리샤와 사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첫 번째 정보, 양치기는 재작년 무리에서 떨어진 양을 찾으러 양의 발자국을 따라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가다 보니 양의 발자국이 증발되었다.
‘… ?’
수수께끼는 곧 풀렸다. 양의 발자국이 없어진 곳에서 다른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쟁반만 한 큰 발자국, 사자 발자국이었다. 핏자국도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양치기는 10m쯤 되는 바위에 커다란 사자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걸 봤다. 양치기는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노려보고 있던 사자가 눈을 껌벅거리다가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양치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자야, 사자. 사자가 양을 죽였어!’
마을에는 소동이 벌어졌다. 마을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져서 다음 날 토벌대가 출동하기로 했는데 출동을 하지 못했다. 파트리샤가 나타나 토인들이 좋아하는 양주를 세 병이나 가져와서 마을 장로들에게 선물했다. 큼직한 양도 한 마리 주면서 사자 사냥을 중지하라고 했다. <그 사자는 이미 금렵구 안으로 도망갔으니 사냥을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미 장로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므로 중지할 수 없다>고 했더니 파트리샤가 차디차게 웃으면서
‘금렵구에 들어가서 사자 사냥을 하면 아버지가 절대로 승인하지 않을 것이니 할 테면 해보라’고 했다. 그 협박에 토인들이 졌다.
두 번째 얘기는 더 이상했다. 사자는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밀렵 토인이 밀림에서 그 사자를 보았다. 그 사자는 다른 사자 보다 몸집이 더 크고 갈기가 훌륭했기 때문에 잘 못 본 건 아니다라고 했다. 밀렵자들은 여덟 명이었으며 모두 와간바족 사냥 명수들이었다. 와간바는 마사이 다음으로 용맹한 부족이고 활솜씨는 따라올 부족이 없었다. 마사이의 창과 와간바의 활은 대둥하게 평가되었다. 와간바의 화살촉에는 맹독이 발라져서 코끼리가 맞아도 백 보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엄청난 크기의 사자 발자국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았다. 사자는 금렵구 동쪽 바위산으로 갔다. 그들이 바위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 두목이 놀란 표정으로 발자국을 가리켰다. 발자국을 본 동료들도 크게 놀랐다. 도저히 설명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자 발자국 옆에 사람발자국이 있었으며 사자와 사람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핏자국도 없고 그렇다고 싸운 흔적도 없이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가는 게 아닌가? 토인들이 그 사태를 이해하려고 떠들었으나 설명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 발자국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의 발자국으로 결론이 났다. 악마의 발자국은 사람의 발자국 보다 작았으며 백인처럼 신을 신었다. 추적을 해야 하느냐 중단해야 하느냐 격론이 벌어졌는데 리더가 추적을 지시했다. 추적을 시작하려고 출발하려는데 등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돌아다보니 정말 악마가 있었다. 한쪽 눈이 없고 절름발이고 온몸이 상처투성이 흑인이었다. 총구가 리더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으며 여차하면 발포할 기세였다. 와간바는 그 악마를 알고 있었다. 키호로-지금은 그들 곁을 떠났지만 한때 용감무쌍(勇敢無雙)한 그들의 두목이었다. 두목이 인사했다.
‘형님, 오랜만이요. 설마 우리를 쏠 생각은 아니지요?’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
키호로가 쌀쌀하게 말했다. 키호로의 냉정한 표정을 보고 와간바는 얼어붙었다.
‘키호로,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이상한 것을 발견해서 ….’
‘듣기 싫어, 여기는 금렵구야!’
‘난 금렵구에 들어온 사람은 모조리 사살(射殺)할 권리를 갖고 있어. 내가 바로 발포를 하지 않는 것은 너희들이 모두 옛 친구이기 때문이야.’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어 사냥대는 사자와 사람 발자국의 의문을 풀지 못하고 돌아왔다. 돌아서는 등 뒤에서 사자의 포효가 드렸다. 휘파람 소리도 들렸으나 무슨 일이지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얘기는 더 무서운 얘기였다. 이곳의 수렵관이며 관광안내인 가네프시키가 미국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와 와간바 두 명이 조수 일을 했다. 이틀 후 미국인은 캠프를 금렵구 경계로 이전했다. 그날 밤 미국인은 경비원에게 통조림과 양주를 대접했다. 경비원이 아침에 눈을 뜨자 해장술을 권해 경비원은 대낮부터 골아떨어졌다. 경비원이 곯아떨어지자 미국인은 의미심장(意味深長)하게 웃더니 총을 들고 나섰다. 불법이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토인들은 상당한 보수를 받고 따라나섰다. 얼마 안 가서 사자 발자국을 발견했다. 금방 지나간 발자국이었다. 미국인들은 총에 장탄을 하고 토인들은 창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그들이 추적하는 사자의 발자국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사자 발자국을 발견했다. 엄청나게 큰 발자국이었다. 토인은 큰 발자국을 알고 있었다. 토인이 <이 사자는 무서운 사자니 추적을 포기하자>고 경고했으나 백인은 웃었다. 백인은 큰 사자는 우연히 목표 사자를 가로질러 갔으므로 염려 없다고 우겼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이번에는 큰 사자가 목표 사자를 우회하는 발자국이 나타났다. 미국인들이 좀 당황했다. 큰 사자가 목표 사자가 도망치는 걸 보호하려고 추적자를 위협하는 것 같았다. 백인은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포효가 울렸다. 참지 못해 폭발하는 무서운 노호(怒虎)였다. 되돌아가라는 경고였다.
‘저 녀석이 우리에게 도전을 하고 있어. 미국 서부사나이는 도전을 받으면 물러서지 않지.’
토인들이 이것은 사자의 술책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반대했으나 백인은 막무가내였다.
‘…?’
아무 일도 없었다. 사자도 노호도 없었다. 발자국을 따라갔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노호가 터졌다. 어느새 사자가 등 뒤로 돌아온 것이다. 사자의 트릭을 알고 미국인들은 기겁을 했으나 가네프스키는 대담했다. 사자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사자는 없었다. 사자에게 조롱당한 가네프스키가 자기는 그 자리에 머물고 미국인들에게 반대편으로 가라고 했다. 사자는 발견될 수밖에 없었다. 양쪽에서 협공이었다. 그러나 사자는 없었다. 가네프스키가 주변을 살폈다. 3~4백 미터 아래 개울이 흐르고 양쪽에 숲이 무성했다. 사자가 좋아하는 서식지(棲息地)다. 가네프스키와 미국인들이 일렬횡대(一列橫隊)로 숲에 들어섰다. 토인들이 뒤따라오면서 돌멩이를 숲에 던졌다. 사자는 숨어있다가도 돌멩이가 옆에 떨어지면 참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법인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여기도 없는 것일까?)
백인들이 실망과 안도감을 느꼈는데 그때 비극이 일어났다. 사자가 그들의 등 뒤에서 덮쳐든 것이다. 돌멩이 세례를 받고도 사람들이 바로 옆을 지나가도 가만히 엎드려있다가 사람들이 지나가자 뒤에서 덮친 것이다. 사자는 앞발로 총을 든 미국인의 팔을 후려쳤고 돌아서는 가네프스키의 총도 후려쳤다. 그리고 놀라 멍! 하니 서 있는 미국인에게 덮쳤다. 경악한 미국인이 엉겹결에 엎드렸는데 사자는 미국인의 몸을 타 넘고 숲으로 사라져버렸다. 가네프스키가 허둥지둥 일어나 총을 찾아들었으나 사자는 이미 사격권을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사자에게 습격을 당한 미국인의 상처는 뼈가 드러났다.
‘그놈의 사자, 정말 신들린 놈이었나?’
가네프스키가 중얼거렸다.
네 번째 얘기는 더 황당했다. 와간바 토인들이 몰래 장치한 덫을 보려고 밀림에 들어갔다. 그들은 맹수의 습격도 습격이려니와 관리인이 두려워 몰래 행동했다. 큰 나무, 바위, 숲 등을 이용하여 몸을 숨기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밀림을 순회하다가 묘한 물체를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긴 것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뱀인 줄 알았으나 표범의 꼬리였다. 표범은 앞을 응시하느라고 뒤에 사람들이 있는 걸 알지 못했다.
(뭘 노리는 걸까?)
표범의 앞 4~50미터 바위 그늘에 사람이 있었다. 소녀인지 소년인지 분간이 안 가는 백인이었다.
(앗!)
토인들이 깜짝 놀라는 사이 표범이 도약했다. 단거리에서 표범을 능가할 동물은 없다. 표범의 달리기는 달리는 게 아니라 날아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표범이 아이에게 막 덮치는 순간, 큰 동물이 표범에게 덮쳤다. 갈기를 세운 사자였다. 사자가 공중에 뜬 자세로 표범에게 앞발치기 일격을 했는데 표범이 야구 방망이에 타격을 당한 야구공처럼 뱅그르르 굴러떨어졌다. 일어나자 말자 도망쳤다. 사자는 표범을 쫓지 않았다. 그까짓 표범보다 더 맛 좋은 먹을거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토인들은 판단했다. 표범의 습격을 피한 아이는 사자의 밥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바위 아래서 일어난 아이는 사자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다. 강아지에게 하듯 손을 내밀면서 사자에게 다가갔다.
(미친 아이인가?)
토인들은 머리끝이 쭈뼛했다. 사자가 백인 아이의 주변을 천천히 돌더니 아이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자와 아이는 나란히 바위 뒤로 사라져버렸다.
이 얘기를 전달한 보고가 목격자들이 두 손을 하늘에 올리고 <자기들의 얘기는 거짓이 없다고 맹세했다>고 말했다. 나도 그 얘기가 사실, 적어도 근거가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토인들이 본 사자는 킹이고 아이가 파트리샤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30. 목격(目擊)
늦잠을 잤다. 나를 깨운 것은 원숭이 니콜라스가 아니고 운전사 보고였다.
‘식사 준비가 됐습니다.’
‘벌서 아침밥인가?’
‘아니요, 점심밥입니다. 지금은 정오가 지났지요.’
모래를 씹는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는데 현관에서 맑은 소녀의 말이 들렸다. 들어가도 되느냐고 보고에게 묻는 소리였다.
파트리샤는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으나 어머니와 같이 있었을 때의 예의가 배어있었다. 원숭이 니코라스는 어깨에 그리고 영양 신베린이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선생님의 체류 기간이 오늘로 끝이나 연기 조치가 되어 있으니 원하는대로 머물러도 좋다고 말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요.’
‘고맙소. 두 분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나는 좀 더 체류할 예정입니다.’
사무적인 얘기를 끝내고 말했다.
‘파트리샤,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더 머무르겠다는 거,’
‘왜 출발을 연기했지요?’
‘킹 때문이지. 나는 너와 친구 킹을 만나보고 싶어. 우린 친구지? 친구의 친구는 친구고.’
‘그렇지만, 킹의 의사를 물어봐야 합니다.’
파트리샤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고에게 위스키를 한 잔 가져오라고 하면서 파트리샤에게 뭘 좀 마시라고 했다.
‘보고, 레모네이드가 있을까 몰라?’
보고는 파트리샤가 오자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다가 파트리샤가 말을 걸자 펄쩍 뛰었다. 더듬더듬
‘아가씨, 그건 없지만 소다수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소다수도 좋아. 설탕을 많이 타고 레몬을 넣어주면 …. 그래 주면 내가 레모네이드를 만들지요.’
파트리샤는 칵테일을 정성 들여 만들었다.
‘오늘도 금렵구에 갔나?’
‘아니요. 오전에는 어머니 곁에서 공부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불쌍해요. 내가 공부를 하면 아주 기뻐하지만 …. 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파트리샤는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수재(秀才)지요. 학교 다닐 때는 늘 우등생이었고. 역사, 지리, 수학 등 뭣이든 다 잘해요. 나도 공부를 하려고 하면 잘해요. 이건 비밀이지만, 전에 제 아버지가 나를 나이로비에 보내 억지로 학교에 입학시켰는데 나는 거기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공부를 잘 했지만 밀림에 오고싶어 못 한 체했어요. 시험지에 아무것도 기입하지 않았으니까 낙제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쫓겨나 되돌아왔습니다.’
우리들은 같이 웃었다. 소녀의 깜찍한 발상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이 파트리샤의 감정에 영향을 주었다.
‘아까, 킹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지요? 보고에게 자동차 출발 준비를 시키세요. 빨리빨리!’
파트리샤는 니코라스를 어깨에서 내려 신베린의 등에 태우고 신베린의 엉덩이를 가볍게 치면서 지시했다.
‘둘 다 돌아가, 집으로 가!’
신베린이 니코라스를 등에 태우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나 혼자 같으면 걸어가는데 아저씨는 걷지 못할테니 ….’
파트리샤가 휘파람을 불며 차에 올랐다. 보고는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가씨?’
내가 기구유 말로 말했다. 보고가 또 펄쩍 뛰었다. 공포로 일그러져 고함을 쳤다.
‘안 됩니다. 안 돼! 나는 그 밀림에 절대로 들어가기 싫어요!’
‘임마, 잔소리 말아! 넌 가자는 대로 가면 돼!’
고함을 질러 보고를 제압했는데 그때 또 말썽이 일어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절름발이 키호로가 한 손으로 차를 잡고 있었다. 키호로는 관리인 브리트로부터 파트리샤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언제 어디서나 파트리샤를 따라다녔으므로 차에 동승(同乘)하려고 한 것이다.
‘파트리샤, 우리 키호로도 데리고 가자. 차를 타고 싶은 거야.’
가장 불만은 보고였다. 주인의 엄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기는 했으나 밀림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운 일인데 곁에 괴상한 와간바족 한 놈이 앉아있는 것은 더 무서웠다. 와간바족은 마사이 외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무서운 부족이다. 전쟁을 좋아하고 약탈을 일삼는 부족이다. 그러나 키호로는 얌전한 기구유 따위야 별 관심이 없었지만 비밀리에 아가씨를 보호해야 하는데 정체를 드러내 아가씨를 보호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인 켓셀도 불안했다. 그래서 울쌍이었다.
‘저 꼴 좀 보세요. 우리 속의 원숭이들 같지요?’
파트리샤가 키호로와 보고의 벌레 씹은 것 같은 표정을 보며 깔깔거렸다. 동정이 갔다.
‘키호로는 왜 저렇게 상처투성이야?’
‘모두 금렵구에서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곳을 금렵구로 지정했을 때 동물들에게 통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마음대로 금렵구를 지정했으나 동물들은 그걸 몰랐어요. 그래서 자기들을 보호하려는 키호로에게 덤벼들었어요.’
‘키호로, 너 얘기 좀 해봐!’
키호로의 목소리는 마치 뱃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부와나, 다리의 상처는 물소에게 물린 것이고, 허리뼈가 아스러진 건 라이노(코뿔소)가 밀어붙여서 생겼습니다. 브리트나리가 총을 쏘지 않았다면 나는 ….’
‘얼굴의 상처는 표범의 짓인 것 같은데 ….’
‘녜, 내가 잘못 쏘았지요. 가슴팍에 구멍이 뚫렸는데도 그 악착같은 놈이 덤벼들었습니다. 그놈은 발톱으로 나를 할키고 나는 칼로 그놈을 찌르고, 결국 그놈은 죽고 나는 살았습니다.’
파트리샤가 만세!를 불렀다.
‘키호로는 정말 용감해요. 그렇지요, 아저씨?’
‘그래, 그러나 네 아버지는 더 용감해!’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파트리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건 달라요. 아버지는 용감한 게 아니라 잔인했어요. 아버지뿐만 아니라 최신제 총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백인들은 모두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토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동물과 싸우지만 백인들은 단순히 재미로 동물들을 죽이지요. 난 백인 사냥꾼들은 모두 싫어요!’
파트리샤는 마구 고함을 지르다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듣고 있는 나를 보더니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아저씨는 예외고 우리 아빠도 예외입니다. 아버지는 이제 동물을 보호하고 있으니까. 예전에는 좀 잔인한 일을 했지만 지금은 동물을 사랑합니다. 아저씨도 그렇지요?’
‘물론!’
‘우리 킹도?’
‘그럼.’
파트리샤가 바위 앞에서 차를 정지시켰다. 뒤를 따라오라고 한 뒤 숲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통과하지 못할 가시덤불로 들어갔다. 나는 가시에 옷이 찢어지며 따라갔다. 뒤를 따라오던 키호로는 사라졌다. 앞서가던 파트리샤가 멈추며 속삭였다.
‘아저씨 권총을 버려요. 내가 얘기를 할 때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말아요. 내 말을 꼭 지켜야 합니다!’
파트리샤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권총을 버리고 기다렸다. 적도(赤道) 아프리카에서 가장 더운 시기에 깊은 숲속에 홀로 서 있었다.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불덩어리처럼 타고 있었고 사방은 불붙는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잠시만에 땀을 비 오듯 흘렸고 현기증이 일어나고 경련이 일어났다. 그때 기쁨에 넘치는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수많은 은방울이 한꺼번에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소리에 응답하듯 울린 또 하나의 소리는 나를 경악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그건 웃음소리였다. 분명히 웃음소리였으나 사람의 피를 말리는 무서운 소리였다. 사실 그건 웃음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소리였는데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다. 성량이 풍부한 소리와 소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함께 울렸다. 웃음의 합창이 끝났을 때 파트리샤가 나를 불렀다. 나는 미끄러지고 비슬거리며 숲속으로 들어갔다. 잔디가 자란 공터가 나타났고 가지와 잎이 방사형으로 퍼져 마치 우산을 펴놓은 것처럼 그늘을 만드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그늘 아래 파트리샤가 앉아있었고 파트리샤 옆에는 커다란 사자가 누워있었다. 털이 반짝이고 갈기가 아름다웠다. 파트리샤는 사자에게 등을 기대고 있었으며 사자의 목털을 만지작거렸다. 킹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왕의 기품이 보였다. 사자가 나를 봤다. 드르르! 목을 굴리고 꼬리를 쳤다. 눈에 누런빛이 일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공포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미친 소녀와 사자. 파트리샤가 억양없이 낮은 소리로 명령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더 기다려요.’
파트리샤가 쥐고 있던 사자의 목털을 힘껏 잡아당겼다. 다른 손으로는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용해! 킹. 저 사람은 우리의 친구야. 친구라니까, 친구!’
사자가 목털을 당기는 힘에 끌리듯 누웠다.
‘아저씨, 한 발 앞으로 나와요.’
나는 한 발 전진했다. 사자는 움직이지 않았으나 눈은 여전히 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 한 발.’
조심스럽게 또 한 발 전진했다. 파트리샤가 시키는 대로 한 발 또 한 발 전진했다. 거리가 5m가 되었는데도 사자는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깜박이지도 않고 노려보는 노란 눈빛에 나는 몸이 마비되는 걸 느꼈다. 다만 기계적으로 파트리샤의 명령을 쫓을 뿐이었다. 그 순간에는 파트리샤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유일하게 사는 길이었다. 설사 미친 소녀라 하더라도 나는 계속 전진했다. 이젠 손을 내밀면 사자가 닿는 거리까지 왔다. 사자가 시선을 돌리더니 슬그머니 일어서려고 했다.
‘앉아! 킹, 앉으라니까!’
파트리샤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 소리에는 굉장한 자신과 위엄이 서렸다. 사자도 그 소리에 눌려 머리를 흔들면서 주저앉더니 아예 누워버렸다.
‘자, 여기에 손을 얹어요.’
파트리샤의 말대로 나는 손을 사자의 머리에 얹었다.
‘쓰다듬어요.’
나는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대체 무슨 짓인가?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다니? 허허! 웃었다. 긴장이 풀렸다.
‘킹은, 처음에는 아저씨를 두려워했으나 이젠 수줍어하고 있어요. 아까 일어나려고 했던 것은 수줍어서 피하려고 했던 것이야요.’
사자는 수줍어하지도 않고 머리를 나에게 밀어붙이면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이제 다 알았다는 듯 크게 하품을 하고는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이젠 됐어요. 아저씨도 친구가 됐어요.’
파트리샤도 긴장이 풀린 듯 웃었다.
‘무서웠어요?’
‘지금도 무서워.’
나는 통쾌하게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너무 높았던지 사자가 나를 나무라듯 쳐다보았다. 파트리샤가 또 목털을 잡아당겼다. 사자는 안심한 듯 앞발을 쭉 뻗고 눈을 감았다.
‘됐어요. 킹이 아저씨를 알았어요. 냄새도 음성도 모든 것을 알았어요. 뭣 보다도 아저씨가 자기를 해치지 않는 친구라는 것을 ….’
나도 안심하고 킹 옆에 앉았다. 사자는 눈을 떠 나를 빤히 보면서 점검했다. 나의 얼굴, 옷, 손을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나는 무섭지 않았다. 나는 사자의 눈에 뜬 친애감(親愛感)을 보았다. 킹의 눈속에는 호기심과 더불어 강자가 약자에게 보이는 관대함이 있었다.
(이 사람아, 이제는 겁낼 것 없네.)
파트리샤는 자신의 연출에 크게 만족했다. 킹의 배에 기대 양 다리를 쭉 뻗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원시의 숲과 사자 그리고 인간. 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목털을 가볍게 당겼다. 킹은 나를 보며 입을 반쯤 벌렸다. 굵고 날카로운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봐요. 킹이 아저씨를 보고 웃고있어요.’
나는 파트리샤의 말을 믿었다. 사자는 정말로 웃고 있었다.
‘난 아저씨를 킹에게 소개하기 위해 택일(擇日)을 했어요. 오늘은 킹이 한가로운 날이고 또 맛있는 먹이를 포식해서 기분이 좋아요.’
그 소리에 나는 내 처지를 떠올렸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포식동물 옆에 앉아있다. 이 짐승의 포효에 모든 동물들이 벌벌! 떠는데.
‘파트리샤, 파트리샤는 어떻게 킹의 친구가 되었어?’
파트리샤가 한동안 침묵했다. 말하기 어려운 사연이 있다고 판단했다.
‘듣고 싶어요? 그럼 얘기를 해주겠지만 비밀입니다. 어머니는 이 비밀이 밖에 새어나가 나이로비나 파리, 런던에 퍼지면 아마 자살할 것입니다. 유력한 명문 출신의 자기 딸이 사자와 같이 어울린다는 소문 말입니다.’
‘절대로 비밀은 지키겠다.’
‘키호로가 킹을 나에게 데려다주었을 때 킹은 젖먹이였지요. 굶주림과 병 때문에 겨우 숨만 붙어있었어요.’
파트리샤는 어머니가 성장한 아이의 과거를 회상하듯 자상한 눈으로 킹을 보면서 말했다. 키호로는 아버지의 조수였는데 관리소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듣고 가보니 태어난 지 이틀 정도의 새끼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째서 사자 새끼가 거기 있었을까?’
두 가지의 경우이지요. 사자의 어미가 금렵구로 나갔다가 총에 맞아 죽었을 경우, 어미가 새끼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버렸을 경우였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맞을 거예요. 처음에는 큰 쥐만 했다. 뼈와 가죽뿐 몸에는 털 하나도 없었다. 너무나 가엾어서 시빌 부인이 먼저 살려보자고 제의했다. 그 제안이 나중에 치명적인 상황으로 발전하는 건 몰랐다. 당시 열 살이었던 파트리샤는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자 새끼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부모의 용인 아래. 파트리샤는 형제도 친구도 없는 외톨이였기에 외롭게 자란 소녀는 사자 새끼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우유를 먹였더니 의외로 힘차게 우유병의 고무젖꼭지를 빨았다. 살아날 가능성이 보였다. 어머니의 조언대로 규칙적으로 우유를 먹이고 간식으로 오트밀도 먹였다. 사자 새끼를 품에 안고 잤다. 사자 새끼는 파트리샤의 품을 파고들었다. 사흘 후에는 피부에 기름기가 돌고 보드라운 털도 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온몸에 털이 났다. 어디를 가거니 파트리샤를 졸졸 따라다녔고 손을 핥았다. 파트리샤의 열한 번째 생일에 키호로도 지켜보는 앞에서 파트리샤는 열한 개의 촛불을 껐고 사자 새끼도 한 개의 촛불을 껐다. 사자 새끼를 킹이라고 명명했고 뽀뽀를 했다. 사자 새끼는 무서운 속도로 자랐다. 한 달 만에 고양이만 했고 두 달에는 개만큼 컸다. 그리고 넉 달째에는 파트리샤가 등에 타도 끄떡없이 돌아다녔다. 파트리샤는 킹과 붙어살았다. 달리기도 하고 응접실에서 뒹굴었다. 이때부터 시빌 부인의 표정에 우려의 빛이 보였다. 시빌 부인이 파트리샤에게 말했다.
‘파트리샤, 내일부터는 킹을 바깥에서 재워라!’
‘엄마, 킹은 아직 새끼인데 ….’
‘아냐, 이젠 다 큰 사자야.’
킹이 바깥에서 자게 되었어도 파트리샤와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시빌 부인은 점점 우울해졌다. 다 큰 사자와 껴안고 뒹구는 꼴이 보기 싫었고 불안했다. 6개월이 되자 시빌 부인의 불안은 공포로 변했다. 킹이 어른 사자가 된 것이다. 킹은 당당한 수사자였다. 야생사자 보다도 몸집이 월등하게 크고 힘도 셌다. 그러나 파트리샤에게는 어린사자처럼 졸졸 따라다니고 파트리샤의 눈치를 봤고 파트리샤의 명령에는 절대복종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어린시절과는 달리 파트리샤에게 상처를 입힐 염려가 있어 밀거니 때릴 때는 각별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시빌 부인은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시빌 부인에게 킹은 다른 사자와 똑같이 보였고 위험했다. 야만인(野蠻人)처럼 사자와 어울린다는 일 자체가 모욕이었다. 그래서 딸에게 킹하고 어울리는 걸 금지시켰다. 파트리샤는 엄마의 명령에 복종했다. 파트리샤는 킹과 놀지 않았다. 적어도 시빌 부인이 볼 수 있는 낮에는. 어느 날 시빌 부인은 밤 2시께 잠이 깨어 마당으로 산책을 나갔다. 달밤이었으므로 사자우리에 사자가 아닌 그림자를 보고 대경실색(大驚失色)했다. 사자가 가축을 잡아온 것으로 여겨 키호로를 깨워 가축을 구조했는데 사자우리에서 나온 것은 가축이 아니라 파트리샤였으므로 부인은 기절했다. 이튿날부터 시빌 부인은 남편 브리트에게 덤벼들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에 브리트도 그만 항복하고 말았다. 숲에 사는 사자는 숲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시빌 부인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킹을 트럭에 태워 밀림에 방면하는 날 파트리샤는 방 안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킹이 그냥 있지 않았다. 밀림 깊숙이 방면된 킹이 집 부근을 돌아다니면서 밤새 슬프게 울었다. 낮에는 사라졌다가 밤이 되면 되돌아왔다. 시빌 부인은 사자 소리가 들릴 때마다 히스테리가 폭발했는데 일주일이 지나자 사자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제 되었어. 우리 집에 평화가 왔어.)
시빌 부인이 기뻐했으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트리샤가 자기 몰래 밀림에 들어가 사자와 밀회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뭇 맹수들이 우굴거리는 밀림으로? 사태가 더 악화되었다. 시빌 부인이 파트리샤에게 진상을 추궁을 했으나 소녀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시빌 부인이 지쳤다. 그래서 상대가 남편으로 바뀌었다. 브리트는 표면적으로는 모른 체 하였으나 딸 편이었다. 브리트는 딸도 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이를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극성스러운 부인의 히스테리에 이기지 못해 딸을 나이로비의 학교에 보내는 데 동의했다. 파트리샤는 어머니의 처사에 침묵으로 대항했다. 나이로비로 떠나던 날 파트리샤는 프랑스식 우아한 치장을 하였으나 엄마에게는 물론 아빠에게도 작별의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이로비 기숙사에 들어간 뒤에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물론 공부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흥미를 보인 것은 동물학이었는데 동물학도 시험 때는 다른 학과와 마찬가지로 한 문제도 쓰지 않아 영점이었다. 학교에서 더 이상 받아드릴 수가 없어 권고퇴학을 시켰다. 파트리샤는 킬리만자로에 돌아왔는데 돌아온 날 벌써 킹을 만났다. 킹은 1년 만에 파트리샤를 만나자 미친 듯이 날뛰며 기뻐했다. 마치 강아지처럼 따라붙었다.
‘친구를 다시 찾았어요. 매일 킹과 만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요.’
‘그래도 사자가 혹시 굶주린다거나 화가 났을 때는 위험하지 않을까?’
나의 반문이 파트리샤를 화나게 만들었다.
‘아저씨, 보세요!’
소녀는 갑자기 공중에 뛰어올라 사자의 등에 떨어졌다. 그리고 두르르 굴러내렸는데 사자가 얼핏 앞발로 소녀의 몸을 잡았다. 소녀가 다시 재빨리 일어나더니 양 주먹으로 힘껏 사자의 배를 후려쳤다. 그리고 사자의 등에 오라타고 갈기를 잡아 흔들었다.
‘자, 덤벼라! 이 녀석, 덤벼!’
사자가 아픈 듯 머리를 흔들더니 옆으로 누워 소녀가 덤벼들지 못하게 앞발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 큰 입을 쫙 벌렸다.
(이크, 큰일 났구나!)
난 기겁을 했다.
(키호로, 키호로. 어디 있어 키호로. 총을 쏘아!)
속으로 외쳤는데 딱 벌어진 사자의 입에서 굵은 소리가 울려 나왔다. 웃음이었다. 파트리샤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소녀는 계속 공격했다. 이번에는 사자도 응수를 했다. 거대한 두 앞발을 내밀어 소녀가 접근하는 것을 교묘하게 막았다. 발톱을 감춘 부드러운 앞발은 소녀의 몸을 슬금슬금 밀어내면서 자기 몸을 방어했다. 소녀는 사자의 방어에 더욱 약이 올랐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돌진했다. 사자는 앞발로 소녀의 머리를 잡을 수 없어 돌격을 허용했다. 한 덩어리가 된 사자와 소녀는 난타전을 벌였다. 소녀의 일반적인 승리였다. 이 놀이가 끝나자 소녀는 사자의 배에 기대 누웠다.
‘아저씨, 이제 킹과 접견은 끝났어요. 이후에는 킹을 겁낼 필요가 없어요. 이만 돌아가세요.’
소녀는 나에게 돌아가는 길을 가르켜준 다음 사자의 등에 타고 사라져버렸다.
31. 마사이족(族)
파트리샤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줄을 지어 행진하는 마사이족을 만났다. 마사이는 수렵족이므로 빈번하게 주거지를 옮겼다. 한 장소에서 사냥을 하고 살다가 사냥감이 없어지면 가제도구(家製道具)를 이고 이사를 했다. 집은 나무와 풀로 만들었고 가제도구라야 냄비 몇 개였으므로 그들은 수시로 이사를 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난에 시달린 표정이나 비굴한 표정은 전혀 없었고 남녀노소 모두가 자존심으로 충만한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이들처럼 마음이 풍부한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으리라. 차의 속도를 늦추고 그들 옆을 지나가면서 <구와헤리(안녕)>라고 인사를 했다. 노인과 아이들은 정답게 인사를 받았다. 차는 행렬을 앞질러 약 5km 정도 나갔다. 그때 앞 숲에서 번쩍이는 창을 봤고 마사이가 서너 명 숲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보고가 설명했다. 그들은 선발대이며 정찰을 하고, 야영 장소를 찾고, 그날 먹을 양식을 사냥한다. 모라네(전사(戰士))라고 부르는 그들은 옛날 같으면 다른 부족을 약탈하였는데 지금은 사냥만 한다. 차를 정지했다. 그리고 단신 선발대가 움직이는 숲으로 갔다. 모라네는 그물을 던지는 방식으로 동물이 있을만 한 숲을 포위한다. 차츰 포위망을 압축시켜 조여들면 포위된 동물들이 탈출을 기도(企圖)하는데 그때 모라네들이 던지는 창에 잡혔다. 그 날의 사냥은 포위망이 20m 이내로 압축되었으나 키가 큰 잡초와 바위 그리고 나무들이 있어 사냥에는 최악의 장소였다. 모란은 내가 접근하는 것을 봤으나 지휘자 노인~언젠가 숲에서 인시를 했던 올가루가 눈짓으로 제지하자 모두 모른 체 하고 몰이에 열중했다. 올가루는 오랜 경험으로 내가 별로 환영할 사람은 아니나 적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라네가 포위한 숲에서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심상찮은 요기妖氣가 떠돌았다. 사냥꾼만은 그 요기를 느낄 수 있다. 맹수(猛獸)의 냄새, 맹수의 숨소리 그리고 깊은 침묵이 요기의 본질이다. 사람의 코는 냄새를 맡는데 빈약한 감각기관으로 퇴회했다. 그러나 대형 맹수가 가까이 있을 때는 희미하게나마 맹수 특유의 시큰한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맹수의 숨소리도 고막에 전달된다. 깊은 침묵이란 맹수가 있으면 새, 원숭이 등 소동물들이 모두 달아나버리기 때문에 생긴다. 나는 그때 그 요기를 느꼈다. 숲 한가운데 자그마한 바위 부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란들의 시선도 거기에 집중되었다. 모란들이 모두 일어섰다. 완전히 포위했으므로 숨을 필요가 없었다. 포위망이 압축되고 리더가 긴 창을 던졌다. 휘루르! 소리를 내며 날아간 창은 숲 가운데 떨어졌다. 일부러 위협을 하기 위해 만든 창이었다. 창이 떨어지자 부근의 숲이 파도처럼 울렁거리며 움직임이 있었다. 표범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다. 나는 순간 아찔했다. 표범을 사냥하기에 모라네의 수가 너무 적었다. 저녁거리를 사냥하려다가 맹수를 만났다. 그러나 모라네는 표범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리더의 신호를 따라 <이어이! 이어이!> 기성(奇聲)을 지르며 포위망을 압축했다. 그때 숲에서도 크윽! 하는 표범의 포효가 터졌고 표범이 뛰어올랐고 모라네의 창들이 날았다. 그러나 표범은 잽싸게 바위틈에 숨었으며 창들은 바위 위에 불꽃을 내며 떨어졌다. 표범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고무공처럼 탄력 있게 바위틈에서 튀어나와 모라네의 정면 즉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모라네가 표범에게 덤벼들었다. 모라네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표범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미 공중을 날던 표범이 모라네에게 덮쳤다. 모라네는 왼팔을 굽혀 내밀면서 오른손에 쥔 칼을 표범을 향해 내리쳤다. 표범의 앞발이 모라네의 왼팔을 할킨 것과 모라네의 칼이 표범의 어께를 친 것이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모라네와 표범이 동시에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는데 일어서는 동작은 표범이 빨랐다. 늦게 일어나 싸움의 자세를 잡지 못한 모라네에게 표범이 덤볐다. 찰라, 내가 권총을 발사했다. 불과 6~7m였으므로 권총 탄환이 표범의 가슴을 뚫었다. 표범이 다시 쓰러졌고 뛰어든 모라네들에게 난도질을 당했다. 리던 올가루 노인이 고함을 쳐 난도질을 제지시켰다. 나는 얼핏 그 용감한 모라네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모라네는 진흙과 기름이 두껍게 발라진 헝겊이 둘둘 말려있었기 때문에 상처가 깊지 않았다. 모라네는 올가루 노인과 같이 있었던 오륜가였다. 오륜가는 분노에 찬 얼굴로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으나 올가루 노인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주춤했다. 그리고 차디찬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는 내가 총을 쏘아 표범을 쓰러뜨린 것이 불만이었다.
(왜? 남의 사냥을 방해했느냐?)는 태도였다. 그러나 영리한 올가루 노인은 나의 총질이 오륜가를 살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짓으로 죽은 표범을 반으로 나누어 갖고 가든지 껍질을 가져가라고 제안했다. 나는 그의 손짓 몸짓을 겨우 알아차리고 다 가지라고 하고 돌아섰다. 방갈로에 돌아와 피곤하여 꿈도 꾸지 않고 잤다.
이튿날, 요란스러운 소녀의 웃음소리에 잠이 깼다.
‘빵! 빵! 빵!’
소녀는 손으로 권총 모양을 하며 고함쳤다.
‘아저씨는 권총의 명수라고 해요. 마사이는 장총을 쏘는 것은 봤으나 권총 쏘는 것은 처음 봤으며 권총이 연달아 발사되는 것을 보고 놀랐답니다. 아버지는 죽은 표범의 몸을 조사하고 세 발의 총탄이 모두 표범의 심장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고 있어요. 아저씨 권총 솜씨가 훌륭하다고 칭찬했어요.’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파트리샤, 너는 내가 표범을 죽였는데도 비난하지 않니?’
‘그건 정당방위입니다. 그리고 나는 표범이 싫어요.’
‘파트리샤, 오늘은 나에게 구경시켜줄 게 없느냐?’
파트리샤의 큰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움직이더니 자신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마사이로부터 초청이 왔어요. 마사이 마을에 갑시다. 그들은 오늘 새 정착지로 이사를 했어요.’
마사이 마을로 차를 몰았다. 키호로가 어느새 나타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금렵구 내 나무들이 없는 벌판에 올가루 노인이 새 정착지를 만들고 있었다. 마사이는 초원에 마을을 조성했고 부근에 마실 물을 확보했다. 우리들의 뒤를 보고와 키호로가 따라왔는데 마음이 심란하다고 얼굴에 씌어있었다. 보고는 마사이와 접촉을 꺼렸고 기구유는 수백 년 동안 마사이의 침략을 받았다.
‘아저씨, 보고는 겁을 먹고 있지만 키호로는 와간바며 와간바는 마사이에게 대항한 부족입니다. 마사이는 창을 잘 쓰고 와간바는 활을 잘 쏩니다. 아프리카에서 마사이에 대항하는 부족은 와간바뿐입니다. 키호로는 마사이에 겁을 먹지 않습니다. 단지 싫을 뿐입니다.’
마사이 마을에 들어서자 환영을 받았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의 백인에게만 인사를 했다. 보고는 인사 따위는 관심 없고 언제나 내 등 뒤에 섰다. 키호로는 마사이를 외면했다. 마을은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가시덤불에 둘러싸이고 지붕을 만들 소똥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코를 싸쥐었으나 파트리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사이는 영리합니다. 소똥으로 집을 만드니까요.’
서너 명의 사내들이 나뭇가지로 집의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가시덤불로 아치형 지붕을 만들었다. 올가루 노인의 지휘에 따라 남녀 모두가 달려들어 소똥을 지붕 위에 발랐다. 찐득찐득한 소똥은 강한 햇볕에 금방 말랐다. 소똥을 다시 한번 더 지붕에 발랐다.
‘2~3일 지나면 소똥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집니다. 냄새도 없어지고.’
모라네의 생활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다. 모라네들이 소 우리에 있었다. 모두 젊고 건강했다. 그들은 마을에서 가려 뽑은 용감한 젊은이들이며 용사고 귀족이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미혼(未婚)입니다. 마사이의 여자는 열두서너 살 되면 시집을 가지만 몇몇은 시집을 가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장차 모라네들과 결혼할 특수층입니다. 가장 예쁘고 부지런한 귀부인들인데 모라네의 수양(修養)이 끝나기를 기다려 결혼을 합니다.’
‘수양?’
‘일종의 수도(修道) 생활입니다. 잠자리, 먹는 것에서부터 엄격한 규율에 따라야 합니다. 옛날에는 창과 칼로 사자를 한 마리 죽이기 전에는 수양이 끝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완화되어 사냥에서 훌륭한 공적을 세우면 수양이 끝나지요.’
모라네는 우리들이 접근해도 모른 척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거나 당황해서는 안 되는 규율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소에게 접근해서 창끝으로 소의 목덜미에 작은 상처를 내고 피를 빨아먹었다.
‘그들은 아침에는 소피를 마시고 저녁에 우유를 마시는 것 외에 수양기간 동안에는 어떤 것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건강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졌으며 온몸이 근육질이었다. 특히 오륜가의 몸은 훌륭했다. 오륜가는 내 옆을 지나가면서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가슴을 펴고 유유히 지나갔다.
‘그는 이 마을의 영웅입니다. 그는 이미 몇 번의 공적을 세웠으나 사자를 한 마리 죽이기 전에는 수양을 계속하겠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가장 용감하나 가장 위험한 사내입니다.’
마사이 마을 구경을 끝내자 다시 차를 몰았다. 파트리샤는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차가 파트리샤의 명령에 의해 한참 달려가더니 언젠가 가보았던 바위산 앞에 정지했다. 높은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니 서쪽에 강이 있었고 그 부근에 수천 마리의 동물들이 몰려있었다. 코끼리, 얼룩말, 영양, 기린 등등.
‘지금은 식사가 끝나고 물을 마시는 시간입니다.’
동물들은 평화롭고 행복했다. 파트리샤가 키호로에게 지시했다. 키호로가 들판으로 걸어가더니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저쪽 숲에서 커다란 사자가 뛰어나와 전속력으로 키호로에게 덮쳐들었다. 킹이라는 걸 알았으나 무서운 속도에 겁을 먹었다. 사자는 키호로 바로 앞에서 멈췄고 키호로는 사자의 커다란 머리를 양손으로 껴안았다.
‘킹은 키호로가 생명의 은인(恩人)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키호로가 킹을 데리고 왔다. 킹은 흥흥거리고 내 주변을 돌면서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들고 쳐다보며 아는 체했다.
‘킹이 사냥을 해야 합니다.’
‘사냥해야 할 때?’
‘그럼요. 킹도 먹어야 살아갈 것 아닙니까? 우리는 킹의 사냥을 도와줍니다.’
어떻게 킹의 사냥을 돕는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키호로가 숲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짐작했다. 키호로는 서아프리카의 유명한 몰이꾼이었다. 파트리샤는 킹의 갈기를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약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서너 마리의 들소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키호로는 표범처럼 빠르게 달리며 들소를 우리가 숨어있는 곳으로 몰아넣었다. 20m쯤 거리가 좁혀지자 파트리샤가 킹을 놓아주었다. 휘파람을 불며 킹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킹은 대포알처럼 돌진했다. 킹은 들소들 중에서 가장 큰 놈을 노렸다. 들소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사자를 보자 방향을 바꿔 달아났다. 코에서 거품을 내뿜으며 발굽으로 힘차게 땅을 찼으나 사자가 들소보다 빨랐다. 사자의 발굽은 딱딱한 들소의 발굽에 비해 고무처럼 탄력이 있었으며 공처럼 공중에 튀어 올라 도약했다. 사자가 들소와 간격이 좁혀지자 무서운 힘으로 들소의 등에 뛰어올랐다. 들소가 휘청거렸으나 넘어지지 않고 달렸다. 사자의 발톱이 들소의 가죽을 뚫고 박혔으므로 들소는 떨어지지 않았다. 달리는 중에 사자는 자기 무게로 들소에게 중압(重壓)을 가하면서 들소의 목덜미를 물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목덜미를 깊이 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들소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킹은 쓰러진 들소의 목줄-동맥(動脈)과 식도를 물어뜯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끝났어요.’
파트리샤의 차가운 말투였다. 킹이 들소를 추격하자 소녀는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추격을 보고 있었다. 야생의 살육자와 같은 눈빛이었다. 킹이 들소의 목덜미를 물었을 때는 잔인한 미소가 떠돌았다. 나는 옆에 있는 소녀가 무서워졌다.
‘파트리샤, 난 저런 구경을 싫어. 저런 구경을 사절(謝絶)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구경을 보고 싶다.’
‘왜요?’
차가웠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순진한 소녀의 눈동자였다.
‘파트리샤, 넌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했지?’
‘예.’
‘그래서 킹도 사랑하는 거지. 그러나 킹에게 잡아먹힌 저 들소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저 들소도 동물이고 살아갈 권리가 있어. 동물을 사랑하는 우리는 들소도 보호해야 하고. 그러나 넌 들소를 킹에게 몰아줬다.’
‘아저씨, 그건 자연입니다. 킹도 다른 맹수처럼 들소사냥을 할 권리가 있고 저 들소는 그 대상이 되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