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 2
6. 세차하는 남자
그리고 놀려대는 꿈이 시작되었다. 꿈들은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모욕적으로 무의식의 장벽을 함부로 성큼성큼 넘어왔다. 처음 꿈은 그가 앤과 벅 스켈튼의 정사 장면을 담은 영화를 점검하려고 국립영화진흥공사에 들렀던 날 밤에 꾸었다. 땅딸막한 카우보이모자를 쓴 이류 영화배우는 한때 런던에 온 적도 있었다. 대단치 않은 제작자의 변덕으로 애리조나에서 뜻밖에 런던 경시청으로 발령받아 온 특수요원의 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수다쟁이와 루비>라는 코미디 스릴러는 이제 장르의 충돌로 불리면서 앤이 화려한 도박 클럽의 의복 보관소 직원으로 잠시 나오는 장면을 포함하여 재방영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런 위엄을 갖췄지만 세련되고 약간은 퇴폐적인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동한 벅이 앤에게 농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앤은 아주 재미있어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녹음에 들어가려고 여기 왔지." 벅은 아주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시작하였다. "항상 이런 경우에는 남자 대 남자로 믿음이 가지." 그는 그의 수영장 가장자리에 있는 비치 라운지에 누워 있었다. 아주 흰 피부의 그레이엄은 좌석에 불편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뒤엔 여자의 벌거벗은 엉덩이가 돌고래처럼 갑자기 물 위로 올라와 꼬리를 흔들고 다시 물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태양은 수면에서 튀어 그레이엄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벅은 햇볕에 따라 명암이 조절되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그의 눈을 겨우 볼 수 있었다.
"자네에게 이곳에 들르라고 한 이유는." 영화 속의 카우보이 남자가 말을 시작했다. "그저 자네를 영화에 넣으려고 한 거야. 영화 제작자가 말한 것처럼 신인 여배우의 젖가슴을 주물러주듯이 말이지 허허. 난 그저 자네에게 자네의 그 나이 많은 마누라와 여기 있는 나, 벅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려주려는 거야. 왜 사람들이 나를 벅이라고 부르는지 아나? 자네 알아맞출 수 있겠나."
"자, <수다쟁이>는 정말 돼먹지 않은 영화지."그는 피나콜라다를 사탕 줄무늬가 있는 둥근 빨대로 깊이 들이켰다. "진짜 돼먹지 않았지. 닭대가리 감독에다 까불이 작가에다 자네가 들어 있는 배우 조합의 일일 단역의 바보들이라니. 물론 그런 게 내겐 통하지 않지. 난 프로야. 그것이 내가 왜 아직 일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야. 그것이 또 앞으로도 내가 항상 일거리를 가질 이유지. 규칙은 간단하다네, 그레이엄. 첫째, 에이전트가 제의하는 것은 언제든 받아라. 둘째, 각본을 절대 얕보지 마라. 그냥 입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씨부려라. 심지어 각본을 하늘을 나는 당나귀가 썼다 하더라도 말이야. 셋째, 촬영장에서 절대 술취하지 말아라. 넷째, 언제 촬영이 끝나는지 정확히 알 때까지는 주연 여배우와 그 짓을 하지 마라."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서 그레이엄을 잠시 노려본 다음 다시 선글라스를 꼈다.
"이 네 번째 법칙은 자네 마누라 때문에 내가 택한 것이지. 거기에도 영화 조합의 얼간이들이 있었지.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그놈들이 내 파트너와 놀자고 던진 콩주머니에 대해 욕하고 싶지는 않았지. 난 그저 그 여왕이 지나가기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몰랐던 거야. 난 최전성기에 있는 최고의 남우였단 말씀이야. 좀 안 좋을 때라도 난 그냥 좀 처지는 정도였지. 남이 아끼는 보물에다 재 뿌리는 게 얼마나 재밌어? 완전히 멋진 아이디어 아냐?" 그레이엄은 취한 듯 벅을 쳐다보았다. 약간 날카롭게 튀어나온 코, 황소 빛깔의 거무스름한 피부, 그의 셔츠의 앞섶 사이로는 털이 더부룩하게 나 있었다. 털 몇 오라기는 회색빛으로 보였다. 이것은 특히 그레이엄을 더욱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그 회색빛 가슴털은 건장한 남자의 한창 시절과 성숙과 지혜를 덧붙여 뽐내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자네의 귀여운 그것한테 처음 눈을 주었을 때 난 그 여자가 정말 폭죽처럼 터지려 한다는 것을 알았지. 내가 그녀에게 말했지. '애니, 네 카드를 잘 써봐. 내 총을 얻을 수 있을 거야.' 하하, 처음에 하는 이런 종류의 농담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게 해준단 말이야. 여자들에겐 며칠 생각할 시간을 줘야지. 그러면 그들은 살랑거리는 가랑잎처럼 네 손바닥에 떨어지지. 하여튼 이게 노숙한 벅의 개똥철학이야. 그래서 이 양반아" 갑자기 배우는 사업가다운 모습으로 좀 더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늘 그랬던 대로, 그녀에게 며칠 시간을 주었지. 말하자면 포도주가 익어가는 것을 기다리듯이 말이야. 그녀가 내게 와서 말했지. '어떻게 당신의 총집을 찾을 수 있나요? 카우보이.' 그게 바로 어린 병아리들이라는 거지. 바로 여기 벅, 나야 하고 말했지. 난 내 손안에 들어온 발랄한 여자들을 어떻게 하는지 좀 알지. 그러나 이 친구야. 고 귀여운 계집은......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내 옷을 벗기느라 안달이었지. 그녀도 진짜 벗었고, 싸움질을 했지. 발길질에다...... 할퀴고...... 내가 그녀를 오히려 정신 차리게 해야 할 정도였다니까. 촬영실에서는 우리의 목욕 장면인가 뭔가를 찍으려고 했지. 난 그녀의 손톱을 내 등에서 빼내야 했다니까. 손을 들어서 그녀를 내동댕이쳤지. 그런데 이게 그녀를 더욱 사납게 만들었던 거야. 그래서 내가 그녀를 좀 막아야겠다 싶었지. 그래서 내 바지의 도마뱀 허리띠를 벗겨다 그녀의 손목에다 묶었어. 그 뒤 우리가 침대에 뒹굴 때마다 애니는 내게 손을 묶어달라고 하는 거야. 그녀를 더욱 흥분하게 하는 것이었나봐. 거긴 그리 공간도 많지 않았지. 이 친구야. 애니는 금방 벗어 던지더군. 초특급의 태풍도 애니에게 비교하면 그저 산들바람이었지. 그러나 손목을 묶은 후에 정말 그녀가 내게 해달라고 원한 것은 그녀의 엉덩이를 씹는 거였지. 자네도 그녀에게 그 짓을 해줬나? 응? 그녀가 자네한테 그렇게 하도록 해주었나? 응? 난 그 밑으로 해서 그녀의 것을 먹었지. 말하자면 배달용 점심 코너였지. 그리고 나서 좀 더 밑으로 가면 그녀의 움찔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그녀 몸 안으로 뭔가가 흘러가는 것이야. 그다음에 좀 더 먹고. 그녀 엉덩이 뒤로 내려가지. 그것을 좀 더 씹은 다음 내 혀를 이리저리 핥는 거야. 마침내 그녀가 절정에 다다르기 전에 내 혀를 거기다가 넣어주는 거야. 그러면 그녀는 폭발하는 거지. 절대 놓칠 수 없지. 빵! 그녀는 내게 말하곤 했지. 이제 카우보이가 뭔지를 알게 되었노라고. 그녀가 자네에게도 그렇게 하게 했나?" 그는 더욱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은 자네는 그저 그런 키스를 했을 거라는 거지. 이제까지 자네 한 번이라도 진짜를 해봤나? 응? 아니면 고 귀여운 애니가 다른 놈들에게도 그것을 해달라고 했을까? 자네는 모르지. 그럴 거야. 그게 바로 자네같이 비리비리한 놈들의 문제란 말이야. 자네는 병아리를 만나지 못했을걸. 그저 그런 섹스를 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지. 아직 자네 병아리를 이해하고 있는 중이라면 내가 고것들과 해볼 텐데." 벅의 뒤로 다시 엉덩이가 수면을 가르고 나왔다. 이번에는 잠시 엉덩이가 떠 있었다. 그레이엄은 젖은 채로 약간 벌어진 그 엉덩이를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그레이엄은 혀를 내밀어 입가를 적시고 있는 벅을 바라보았다. 그레이엄은 벅에게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 카우보이는 몸을 약간 돌리더니 그레이엄의 몸을 피했다. 그레이엄이 스쳐 지나가면서 비틀거리자 프라이 부츠(장딴지까지 오는 튼튼한 가죽 부츠-역주)를 신은 벅은 그를 두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는 수영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보통 때는 수영을 잘하던 그레이엄이었지만 물이 끈적거려 느린 동작으로 몸을 움직여야 했다. 마침내 그레이엄이 두 손을 수영장 가에 댈 수 있었다. 그가 몸을 올려 밖으로 나오려 하자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지더니 구둣발 하나가 그의 오른손 끝을 세게 짓눌렀다. "이봐 친구." 벅은 그에게 침을 뱉았다. "너 아직 내 것 근처에 어른거리고 있군. 벌써 멀리 도망갔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내가 발로 찬다고 말할 때는 진짜 차버린다는 것이야." 그리고 벅은 마시던 피나콜라다 잔을 들고는 그레이엄의 얼굴에 그 거품 액체를 쏟아버렸다.
그레이엄은 어둠 속에서 잠이 깨었다. 그의 오른손 끝이 매트리스와 침대 사이에 끼어있었다. 베개 위로 침이 흘러 있었고 얼굴에도 침이 묻어있었다. 잠옷은 두 다리에 꼭 감겨 있었고 놀랍게도 그의 페니스가 꼿꼿하게 서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땅딸막하고 사기꾼 같은 카우보이하고라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러나 당신 마누라가 당신에게 반하기 전에 누구에게 반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여자들이란 참으로 이상한 이유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동정심, 외로움, 제삼자에 대한 분노 혹은 젠장, 진짜 성적 쾌락을 위해서, 그레이엄도 가끔 다른 이유로 그런 유혹에 빠져보았으면 싶었다. 다음날 그의 두뇌가 수업시간에 보나르 로(영국의 보수당 정치가-역주)와 카슨(아일랜드의 정치가이자 법률가-역주), 북아일랜드 사태를 공식적으로 다루는 동안 그는 벅의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꿈은 실현될 수 없는 거야.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왜 꿈이라고 불리는지에 대한 이유인 것이다. 꿈의 전조라는 게 있다. 현인이 홍수를 꿈꾸고 나서 그의 부족을 높은 데로 옮겨가게 한다든가 하는. 문명사회에서는, 입사 면접 전에 실수할 것 같은 사항을 경고하는 식으로 꿈꿔본 적은 없는가? 아니면 경고 후의 꿈은 어떤가? 그는 잠재의식에서 앤에 관한 것을 쉽게 집어 올릴 수 있었다. 그의 두뇌는 잠 속에서 그에게 그 소식을 기술적으로 내보낼려고 작정할지도 모른다. 괜찮지 않은가? 물론 꿈속의 벅은 실제 <수다쟁이와 루비>에 나오는 벅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꿈속에서는 상당히 위협적이고 사나운 놈이었지만 영화에서는 대초원의 신사 같은 사람이었다. 그 양쪽 이미지 모두 앤을 유혹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레이엄은 희망적으로 짐작했다. 영화 속의 이미지나 그의 머릿속의 이미지 모두 틀린 인상이었다. 진짜 벅 스켈튼은 어땠나?(그런데, 그의 진짜 이름이 뭐지.) 아마 벅은 앤이 진짜 좋아하는 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격려 같은 것은 좀처럼 받지 않아서 억제된 그레이엄의 두뇌는 복수하는 꿈으로 돌아섰는지도 모른다. 맨 처음, 그는 그 카우보이를 피나콜라다가 넘치는 수영장으로 빠뜨렸다. 벅의 죽어가는 허파에서 나오는 마지막 숨은 거품이 일고 있는 수영장 수면 위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다음 그는 누군가에게 뇌물을 주고 거대한 선인장 앞을 지나가는 벅의 말 앞에 방울뱀을 놓게 하였다. 벅이 떨어져 그대로 선인장에 걸렸다. 두 개의 거대한 선인장 잎에 난 강철만큼 센 가시가 그의 가죽바지 틈으로 들어가 소시지 같은 그의 물건을 찔러버렸다. 마지막 복수가 최고였다. 그레이엄이 가장 싫어하는 점은 벅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슨 성격을 표시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는 놈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역시 선글라스 자체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식물에 이어 이 지구상에서 제4의 영토를 구축하려고 스스로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하는 것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그는 화가 났고 심지어는 위협조차 느꼈다. 그는 운전자들에게 터널을 지날 때 선글라스를 끼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글을 자동차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빛의 변화가 너무나 갑작스러워 선글라스가 그것에 완전히 적응하는 데는 몇 초가 걸린다는 것이다. 그레이엄은 벅이 자동차 칼럼을 꼼꼼히 읽는 독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그리고 그가 로스앤젤레스의 해안도로를 끼고 북쪽으로 가면서 이 엄청난 위험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황혼녘 샌프란시스코, 그레이엄은 벅의 화려한 자동차 쿠프 드빌레 앞좌석에 창녀가 야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라디오는 벅이 가장 좋아하는 포크 뮤직에 맞춰져 있었고 뒷좌석에는 맥주 상자가 있었다. 그들이 빗서의 북쪽 자연암석 터널에 다다랐을 때였다. 잠시 자동차 속력을 줄였던 벅은 선글라스가 밝기에 제대로 적응하자 다시 자동차의 속력을 올렸다. 자동차는 굴 속을 나와 밝은 햇빛 속을 시속 육십 마일로 달렸다. 그레이엄은 벅이 적어도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말할 틈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터널 바깥 바로 앞에서 자동차는 불도저의 아래쪽 칼날 안으로 짓이겨졌다. 그레이엄이 그 조정석에서 노란 안전모와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앉아있었다. 불길이 불도저 위로 솟아올랐다. 벅의 몸이 그레이엄의 조정석 위로 높이 떠올랐다. 그는 주위를 살펴본 다음 불도저의 후진 기어를 쳤다. 그리고 천천히 생명 없는 몸체 위로 굴러갔다. 뼈와 살을 마치 파이 껍질처럼 얇게 짓이겼다. 그는 불도저의 기어를 다시 전진 방향으로 돌렸다. 부서진 자동차를 길옆으로 밀어붙이자 태평양 바닷속으로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피투성이의 납작한 사나이를 어깨 너머로 흘낏 보면서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에 대해 물어봐도 돼?" 그레이엄은 다음 날 밤 침대 가에 누우면서 말했다
"물론이지요." 앤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그녀는 지난번, 바로 이전보다는 좀 더 나은 것이기를 바랐다.
"벅 스켈톤."
"벅 스켈톤이요? 맙소사! 어디에서 봤어요? 난 함께 연기한 것조차 기억에 없는데."
"<수다쟁이와 루비>에서. 정말 돼먹지 않은 영화였어. 당신은 보관실의 여자로 나왔지. 그 주인공의 모자를 받으면서 '어머, 이렇게 큰 모자는 못 받아봤는데' 하는 대사를 하지."
"내가 그렇게 말했나요?" 앤은 안심도 되면서 재미도 있었다. 그녀는 그러나 잘못 짚인 데 화도 났다. 만약 그레이엄이 내가 벅과 함께 잤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모든 사람을 다 의심한단 말이지 않은가? 잠시 앤은 그레이엄이 그의 확신을 위해 기다리도록 하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지."
"그래서 그가 뭐라고 대답했나요?"
"기억 못 하겠어. 그냥 뭐든지 크게 만든다는 애리조나에서 먹은 붉은 살코기 요리에 대해 말했던가. 그 비슷한 거였지."
"그리고 내가 뭐라고 말했나요?"
"당신은 아무 말 안 했지. 당신 대사는 그것뿐이었어. 당신은 그냥 꿈꾸는 듯이 보이더군."
"아, 그래요. 난 자주 그랬던 것을 기억해요. 따스한 장갑에 눌린 듯한 표정이지요." 그녀는 그레이엄이 이 문장에서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 그전에 식사를 푸짐하게 한 때문이라 촬영에 집중하기 어려웠죠. 두 눈이 기분 좋게 흐릿하게 감겨오지요."
"그래서?" 옆에 있는 몸이 한 번 더 긴장을 하였다.
"그래서라니요?"
"그래서 그와 함께 잤느냐고?"
"내가 벅과 함께 잤느냐고요? 그레이엄! 게비 헤이스가 차라리 기회가 더 많았을 거예요." 그레이엄이 앤 쪽으로 돌아누워 얼굴을 앤의 팔 위쪽에 대고 눌렀다. 그의 손은 그녀의 배 중간쯤에 놓였다.
"물론 키스는 한 번 하게 했지만." 그가 너무 우습게 물었지 때문에 앤은 완전히 정직하게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레이엄의 손이 그녀의 배 위에서 뻣뻣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아직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뺨 위에요. 그는 모든 여자들에게 작별 키스를 했는데 그거였지요. 어떤 여자들은 입술에 하도록 두었지요. 어떤 여자들은 그렇지 않고. 난 뺨 위에 하도록 했어요." 그레이엄은 어둠 속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만족한 정복자의 웃음으로 낄낄거렸다. 아마 삼 분 정도 지나서 그는 앤과 섹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철저하고 애정 깊게 하였지만 앤의 마음은 계속 다른 데 있었다. 만약 실제로 그녀가 벅과 잤다면 그레이엄은 지금 자신과 섹스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앤은 생각하였다. 과거가 현재를 끌고 가는 지금의 이런 방식이 얼마나 괴상한가? 오래 전에 <수다쟁이와 루비>를 만들 때 '카우보이가 당신과 함께 자도록 놔둬. 그러면 지금부터 얼마 뒤에 전혀 모르는 남자와 끔찍한 밤을 맞게 될테니.'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면? 아마 그녀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웃기지 마, 미래.' '미래, 웃기고 있군.' '저리 비켜. 그전에 나랑 자지 않고 내 앞에서 얼씬거리다가는 혼날 줄 알아.' 그런 후 앤은 보란 듯이 그를 지나쳐서 허풍쟁이인 카우보이에게 추파를 던졌을 게다. 그레이엄은 점점 더 흥분했다. 그녀의 두 다리를 좀 더 벌리면서 그의 두 손을 펴서 앤의 어깨 밑으로 넣었다. 그는 그녀가 뺨위에 작별 키스한 이야기를 할 때는 더욱 긴장하였다. 만약 오래전 지나간 날에 그녀가 입술에다 키스를 받았다면 그 사실은 오늘밤 그레이엄이 그녀와 나누는 섹스를 멈추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나? 끼워맞추기 힘든 등식 같았다. 왜 이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관계가 있는 것일까? 만약 앞서 이런 것을 예측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삶이 이처럼 뒤죽박죽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레이엄은 그의 절정에서 잠시 멈췄다. 만약 앤이 원한다면 함께할 기회를 준다는 무언의 표시로. 그녀는 전혀 유혹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그녀의 엉덩이를 규칙적으로 당겨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클라이맥스에 오른 후 앤은 평소처럼 연민과 반사된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다소 아득한 느낌으로. 그리고 그날 밤. 그레이엄은 세차하는 꿈을 꾸었다. 세차 꿈은 <소동>에서 앤과 정사 장면을 가진 래리 피터가 사회를 맡았다. 스트리트 갱 이야기인 그 영화를 지난 몇 달간 두 번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턴 파이크 가에 있는 에이비시 극장에서였고 또 한 번은 럼포드 가에 있는 극장이었다. 앤은 세 번째 갱 여자로 분해서 갱 멤버들이 더러운 하렘 가에 들어가기 전인, 뽐내며 거들럭거리는 서투른 분위기의 장면에 출연했다. 래리 피터는 형사로 나와 자백을 얻기 위해 충분히 혐의가 없는 자들을 두들겨 패고 마침내 세 번째 여자 갱과 연인을 갈라놓는 악역을 맡았다. 피터는 책상 너머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영화에서부터 아직까지 더러운 크림빛의 바바리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자, 자." 그는 조롱 섞인 호기심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 집고양이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보라구. 어이, 너희들." 그는 피의자용 의자에 앉아 있는 그레이엄 너머로 소리쳤다. "자 이리들 와서 한번 보라고."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제각기 다른 모양이었지만 더럽고 악해 보이는 모습에 그레이엄은 놀랐다. 더럽고 형클어진 머리에 여드름투성이의 키 큰 남자와 보일러 작업복 차림의 뚱뚱한 남자 그리고 비쩍 마르고 무표정한 얼굴에 수염은 이틀 동안 깍지 않은 얼굴의 남자는 마치 몽타주 사진의 얼굴 같았다. 모두 감옥에는 분명히 다녀온 이들 같았다. 그러나 피터는 그들을 반겼다.
"자, 너희들, 뭐가 나타났는지 한 번 봐. 바로 미스터 세차라는 분이지." 세 남자들이 낄낄거렸다. 그러고 나서는 책상 너머 피터에게로 몰려갔다.
"내가 설명할 게 좀 있지." 형사가 말했다. "돌려서 말할 게 아니고, 이봐 형씨, 그렇지 않은가?" 그레이엄은 차라리 요점을 말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다름이 아니라, 그레이엄. 내가 그레이엄이라고 불러도 괜찮지? 그러니까, 내가 감히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미 자네의 요조숙녀 부인으로부터 좀 들었을지도 몰라. 만약 틀린 게 있으면 고쳐주게나." 그레이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앤이 우리의 작은 일거리에 대해 말했겠지. 우리의 과외의 일에 대해서 말이야. 내가 늘 말하는데 그건 아주 좋은 것이지. 남편과 마누라 사이의 약간의 정직이라. 자네의 결혼이 자네 친구들 사이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지, 그레이엄." 피터는 이를 드러내어 웃으면서 전혀 진지하지 않게 말했다. 그레이엄은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너무 지나친 정직이라는 것도 있지, 그렇지 않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누라에 대한 남편의 좋은 판단이지. 아니면 있었던 일을 그대로 모두 말해준다? 그것 좀 교활하지? 그렇지? 하여튼, 난 앤이 제때에 제대호 한 것이라 확신하지. 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왜 그녀를 세차하는 여자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말하기 않던가?" 세 악한들은 피터 뒤에서 킬킬거리고 있었다. "자, 만약 지루하면 나보고 그만하라고 하게, 그레이엄. 그런데 그녀가 정말 좋아한 것은 나만이 아니야. 우리 모두였지. 우리 모두 동시에, 그녀에게 모두 다르게 해주는 것이었어. 자세하게는 말하지 않겠네. 마음을 상하게 할지도 몰라. 그냥 자네 상상에 맡기겠네. 우리 모두 동시에 그녀에게 처음 한 일은 모두 그녀 위에서 일종의 꿀벌이 되는 것이지. 그녀의 온몸과 그 부분을 핥고 나자 그녀는 마치 세차하는 것 같다고 말했지.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세차 공주라고 부르는 거야. 우리는 그녀가 진짜 남자를 만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지. 우리는 그 남자를 세차하는 남자라고 부르기로 했지. 그녀는 많을수록 더욱 즐겁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지. 우리는 어떤 남편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 물론, 자네 눈에 띄는 것보다 많지만 않다면 말이야......" 피터는 씩 웃었다.
"그런데, 어쨌든." 그는 제법 어른스런 흉내를 내며 계속하였다. "여자들이란 변하지. 그들은 그래, 그렇지? 아마 그녀도 한 번에 한 남자가 핥아주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몰라. 그러면 자네는 그리 부적절하게 느낄 필요도 없지. 자네가 좋은지 어떤지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야. 그녀가 항상 덤으로 즐거움을 줄 것이니까.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 자네는 결코 모르지. 어쨌든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미스터 세차, 저 아이들과 내가 정말로 당신이 영국 제일의 남자이기를 원한다는 것이야. 정말 그래. 우리는 자네가 정말 나쁜 제비를 뽑았다고 생각하지. 우린 그저 자네가 자네의 카드를 잘 내놓기를 바라네." 그리고 나서 그들 넷은 책상 너머로 몸을 기울여 그에게 악수를 했다. 그레이엄은 한때 자기 아내의 타락한 몸을 애무한 그 뻗쳐나온 손바닥들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손을 거절하기란 어려웠다. 그들은 그레이엄에 대해 정말 신실한 동정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은 눈을 찡긋해 보이기조차 했다. 정말 그랬다면 어쩌지? 그레이엄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적막 속에서 잠이 깨었다. 정말 사실이라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성적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녀는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론 만약 이미 그랬다면 더 이상 어떤 환상도 필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럴 리는 없지. 그러나 솔직하게 말한다면 어떨까? 그녀를 정말로 만족시켜준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아니, 그래, 아니야. 그렇다니까. 모르겠어. 그럼 오늘밤을 예로 들어볼까. 그것은 전적으로 자네만을 위한 것이었지. 맞지? 그래 맞아. 그렇지만 항상 둘이 함께 절정을 맛보라는 법은 없잖아. 물론 아니지. 그러나 그녀는 자네 애무에 대해 확실하게 젖어든 것 같아 보이지 않았어. 그랬지? 아니, 그러나 그것도 괜찮아. 역시 괜찮을지도 모르지. 자네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고 괜찮다고 동의할지도 몰라. 그것은 섹스가 작용하는 방식이 아니지. 말하지 않는 것이 최고라는 경우이지. 광기와 놀라움이 지배하는 곳이지. 절정을 위해 자네의 수표가 절말의 은행을 통해 입출금되는 곳이지. 그레이엄은 다시 잠들기 위해 스스로와 천천히 언쟁을 벌였다. 그가 예측한 대로 래리 피터는 잠에서 깨어난 것만으로 사라지진 않았다. 그는 그레이엄의 뇌 뒤쪽 어느 구석에서, 반쯤만 몸을 보인 채 가로등에 구부정하게 기댄 채 담배를 피우다가 생각이 나면 게으르게 일어나 그레이엄에게 시비를 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레이엄은 그날 아침 학교로 차를 몰고 가기로 했다. 수업이 두 시간만 있었기 때문에 길가에 주차할 수도 있었다. 출발할 즈음 비가 차창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는 와이퍼를 켜고 그 다음엔 세차액을 뿌리고 그리고 라디오를 차례로 켰다. 상쾌하고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마 로시니의 현악 소나타일 것이다. 그는 감사의 물결이 출렁임을 느꼈다. 삼류 역사학도의 스릴, 이 순간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였다. 쉬운 여행, 날씨로부터의 보호, 단추 문화, 그레이엄은 이 모든 혜택이 금방 달성된 것 같은 느낌이 갑자기 들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복스힐 언덕에서 산 열매를 따먹으며 양의 울음을 잠재우던 목동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차를 몰아 거리 반대편에 있는 자동차 정비소를 지나갔다.
별 4개
별 3개
별 2개
디젤
카드 환영
화장실
세차
그런 날들은 사라졌다. 파괴되었다. 래리 피터는 골목길에서 가만히 다가와 맨홀 뚜껑를 음험하게 열었다. 고개를 들고 휘파람을 불면서 얼굴 가득 햇빛을 느끼면서 그레이엄은 바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로시니의 음악은 계속 되었지만 그레이엄은 여전히 드러누운 앤이 등뒤에 있는 네 명의 남자들에게 애무를 계속 하라고 조르는 모습만 연상되었다. 그들은 앤의 몸에 직각으로 나란히 누워있었다. 그녀 위에 누워 마치 잔디깎이 기계처럼 한 줄로 핥아가면서. 그레이엄은 그 생각을 떨쳐버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운전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좀 위축되고 희미해지긴 했지반 여전히 백미러에 매달린 채 그의 시선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정비소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그는 세차라는 표시가 된 도로 표지판을 찾으면서 표지판에다 눈을 둘 때마다 본능적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대부분 그런 표시가 없었다. 그렇게 표시되어 있지 않을 적마다 그레이엄은 의기양양해졌다. 마치 부정에 대한 그의 의심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처럼. 그다음 그는 여덟, 아홉 번째의 정비소를 지나갔다. 모욕적인 내용의 안내 표시가 된 것을 지나칠 때면 뒷거울에 비친 그 이미지의 인상이 더욱 뚜렷해졌다. 이제 그는 아내가 네 명의 남자에게 각자 다르게 몸을 다루도록 조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 명은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네 번째 남자는 안달하는 사티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주색을 좋아하는 신-역주)처럼 거울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음경을 당기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주의를 도로 쪽에 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빗줄기가 성기어졌다. 와이퍼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원래 있던 먼지만 유리에 쌓이고 있었다. 자동적으로 그레이엄은 손을 뻗쳐 차창 세제 레버를 밀어 올렸다. 거품이 이는 불투명한 액체의 줄기가 그의 얼굴 앞에서 유리 위에 쏟아졌다. 그는 좀 잘 알았어야 했다. 거울 위로 사티로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이십 분간 그의 남학생들을 지켜보며 그들 중에 영화를 보러 가서 자기 아내와 정사를 나눌 학생이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져 그는 다시 밸포어(20세기 초의 영국 수상-역주)에 대한 잠정적으로 급진적인 견해를 풀이하였다. 몇 시간 후 그는 밖으로 나와 자동차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치 간통의 도구인 양 본네트 위에 놓인 유리창문 세척기의 구멍을 노려보았다. 기운 빠진 슬픔이 그의 몸 안으로 기어들었다. 그는 이브닝 스탠다드(런던에서 발간되는 석간신문-역주)를 사서 영화란을 쭉 훑어보았다. 기분전환으로 그의 아내가 나오지 않는 영화를 하나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아내가 나오지 않는 얀크스 감독의 새 영화는 어떨까? 혹은 그의 아내가 나오지 않는 은하계 전쟁 영화는 어떨까? 아니면 아내가 나오지 않는 게 확실한, 랙샘으로 가는 히치하킹에 관한 새 로드무비는 어떨까? 그의 아내의 영화는 하나도 상영되지 않았다. 단 한 편도. 그레이엄은 마치 그에게 특별한 영향을 준 사회복지 기관의 수당 지급이 중지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지급 중단 결정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들이 알기나 할까? 그는 오늘, 런던이나 바로 인근 교외의 어떤 영화관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비록 영화에서는 고결한 숙녀로 남아 있지만 영화 밖에서는 그중 한 남자배우와 부정을 저지른 아내도 만나볼 수 없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두 개의 범주기 희미해지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종류의 영화가 더 남아 있었다. 한 종류의 영화는 그의 아내와 영화 속에서 간통을 저지른 남자배우들이 나오고 (그러나 영화 밖에서는 아니고) 또다른 종류의 영화는 그의 아내와 영화 밖에서 간통을 저지른 남자배우가 나온다(영화 속에서는 아니). 그는 이브닝 스탠다드를 다시 한번 훑어내렸다. 이번에는 선택이 두 개로 줄어들었다. 머스웰 힐에서 하고 있는, 릭 페트만이 나오는 <사디시모>(영화 안에서 했지만 밖에서는 관계없는), 아니면 래리 피터가 나오는 <잠자는 호랑이>...... 그레이엄은 갑자기 앤이 사실 피터와 간통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기억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영화 속에서만 말이다. 그 사실 때문에 그는 질투의 기쁨에 넘쳐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터파이크 레인과 럼포드로 자동차를 몰고 다녔다. 그러나 영화 밖에서는 어땠지? 그는 몇 달 전 앤에게 물었던 기억을 떠올렸지만 그 대답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이 사실 때문에 그는 상당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아마 <잠자는 호랑이>가 그를 밖으로 나오게끔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호기심의 상태로 그는 스위스 코티지로 차를 몰았다. 새로 만들어진 그 영화 속에서 피터는 정신과 의사로 분했다, 녹색 머리칼을 가진 펑크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오페어(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가사를 돕는 외국 여자-역주)로 채용했는데 그 여자는 그의 아내를 유혹하고 그의 열 살난 아들을 강간하려 하고 그 집의 고양이 목을 면도칼로 베고 갑자기 그녀의 엄마에게로 돌아간다. 그의 아내는 정신 이상이 되고 남편은 자신이 호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깊은 고통의 경험으로 진실이 얻어진다. 그 젊은 영국 감독은 여러 차례의 난간과 계단에서의 애무 장면으로 자기 인생 초기에 만났던 로지라는 익명의 연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피터는 어떤 면에선 그의 연구 대상을 가지고 장난을 치려 했지만 그레이엄이 기쁘게도, 한참 재미를 보던 중에 내팽개쳐졌다. 그레이엄은 들어갈 때만큼이나 흥분된 상태로 영화관을 나왔다. 피터가 정말로 앤과 간통하였는지 아닌지를 그가 확실히 모른다는 사실에 그가 정말 기분이 좋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머릿속에는 피터를 죽일 수 있는 한두 가지 방법이 어른거렸지만 쓸데없는 환상으로 여겨 무시하였다. 지금 그가 알고 있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사실적인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그레이엄은 스테이크용 고기에 조심스레 칼집을 내고 그사이에 마늘을 집어넣었다. 식탁을 차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촛대를 가져다 놓았다. 그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얼음통을 꺼내서 앤의 진 토닉에 쓸 얼음을 안에 채워두었다. 앤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오자 전혀 어색하지 않게 입술에 키스를 하고 마실 것을 건네다주었다. 그리고 껍질에 쌓인 피스타치오가 든 그릇과 함께. 그는 지난 수주 일 동안 한 번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 특별한 일은 없었지."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할 때 조금 은밀해 보였다. 아마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거나 아니면 앨리스가 학교에서 뭘 잘했거나 아니면 그냥 설명할 수 없게 기분이 좋아진 것이겠지. 저녁 식사 내내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나서 마침내 말하였다.
"오늘 일어난 일은 그전에는 일어난 일이 아니야." 그는 마치 앤에게 무슨 선물 꾸러미를 풀어 보이는 양 천천히 말하였다.
"그전에는 결코 없었지. 아주 도움이 되는 일이야." 그는 앤이 헛갈리게 아주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당신이 피터와 함께 잤는지 아닌지를 잊어버렸지." 그는 인정을 바라듯이 앤을 건너다보았다.
"그래서요?" 앤은 그의 복부가 고통으로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랬지. 그것은 전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이야. 다른 모든 남자들, 각각에 대해서...... 난 언제나 기억하고 있지. 당신과 잠을 잔......모두......"그는 그 단어를 아주 의미심장하게 이용했다.
"당신이 그렇게 한 게 영화 속인지, 밖인지, 혹은 벅 스켈튼처럼 그것을 하지 않은 게 언제인지까지도 알고 있지. 그날의 모든 시간을 말이야. 누군가 나를 붙잡아 세워서 '당신 아내와 같이 잠을 잔 다른 남자들의 명단을 내줘봐'라고 말한다 해도 난 그렇게 할 수가 있어. 난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할 거야. '그런데 다른 게 또 있습니다. 다른 범주이지요.' 난 그런 것도 역시 기억할 수 있지. 그들 모두를. 한 번은 내 수업을 듣는 한 학생의 이름이 <마을에서 가장 싼 곳>이라는 영화에서 당신과 마주치지 않았던 짐 케리건과 같아서 나도 모르게 점수를 올려준 적도 있었지." 다음 말을 기다리는 동안 앤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건 내가 뭔가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래요.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앤이 보기에 그레이엄은 안심하기보다는 다소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러면 계속해봐."
"무얼 계속해요?"
"날 시험해보라고."
"당신을 시험해보라고요?"
"그래, 내가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라고. '내가 누구누구와 잠을 잤는지 아세요' 하는 그런 거 말이야. '누가 어떤 영화에서 조연배우였고 무슨 영화에서 내가 누구와 잠을 잤는지.' 계속해봐. 재미있는 게임 같지 않아?"
"당신 취했어요?" 아마 그는 앤이 집에 오기 전에 혼자서 몇 잔을 미리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전혀. 조금도 취하지 않았어." 그는 확실히 취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아주 기분좋고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다.
"그러면 내가 이젝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메스꺼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고 싶군요."
"아, 그러지 말아. 떳떳하게 해. 호모 루덴스 등등."
"당신 정말이군요. 그렇지요?"
"그럼, 게임을 정말로 해야지." 앤이 목소리를 가라앉혀 말했다. "당신 미쳤군요." 그레이엄은 전혀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난 안 미쳤어. 난 그저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오늘 <잠자는 호랑이>를 보러 가서 그 사실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 놀랐어."
"그게 무슨 영화지요?"
"무슨 소리야. 래리 피터의 가장 최근작이지."
"내가 왜 래리 피터의 영화에 관심을 둬야 하지요?"
"왜냐하면 그는 안 그랬으니까.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과 잠을 잤지. 물론 <소동> 영화 속에서는 확실하게. 그런데 영화 밖에서는 글쎄, 그것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니까."
"당신 피터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갔단 말이에요?" 앤은 놀랐다. 섬뜩해졌다. "왜요?"
"<잠자는 호랑이>. 그 영화가 내 기억을 되살려줄 수 있는지 알아보러 갔지."
"아, 소극장에요. 그렇지요?"
"스위스 코티지에 있는 극장이야."
"그레이엄, 거기는 아주 먼 곳이잖아요. 단순히 피터가 나오는 그 엉터리 영화를 보러 갔단 말이에요? 당신 정말 미쳤군요." 그레이엄은 그래도 단념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명료하고 친근하게 아내를 쳐다보았다.
"기다려, 기다려봐. 요점은 말이야, 내가 그 영화 <잠자는 호랑이>를 앉아서 끝까지 보았다.는 거야. 그리고 끝이 다 되어가는 데도 아직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난 래리 피터의 얼굴이 화면에 나올 때마다 봤는데도 내가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를 기억할 수가 없었다는 거야. 정말 이상했어."
"글쎄, 그래서 어떤 면으로는 당신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군요. 놀랍군요." 그레이엄은 잠시 쉬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더 나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 앤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난 더 낫다고는 말 안 했어. 그냥 다르다고 하는게 낫겠군. 새로운 국면이지. 만약 두뇌가 그중 한 가지를 잊어 버리기로 선택했다면 그것은 래리 피터를 선택한 것이야. 피터가 뭘 갖고 있든 아니든 간에 다른 놈들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이잖아?"
"그레이엄, 난 좀 걱정되는군요. 그전엔 항상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젠 이해가 안 돼요. 옛날 내 남자친구 얘기를 할 때 당신은 화를 내곤 했지요. 나도 언짢았어요. 그런데 이젠 그게 좀 다른 식으로 당신을 흥분시키는 것 같군요."
"그냥 피터의 경우만 그래. 그건 마치 내가 처음부터 몰랐던 것 같아. 그건 정말로 당신이 래리 피터와 잤는지 안 잤는지를 막 처음 알아내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야."
"당신 정말이군요. 당신 정말로 그러는군요. 그렇지요?" 그레이엄은 식탁 쪽으로 몸을 기울여 앤의 손목을 가만히 잡았다.
"같이 잤지?" 그가 조용히 말했다. 마치 목소리가 크면 대답을 방해할 것 같다는 듯이. "그랬지?" 앤은 그녀의 팔을 빼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레이엄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기분 나쁜 연민으로 그녀를 도발시킬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내가 말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그렇지요? 지금?" 그녀는 똑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대답 안 해주는 거지? 난 알야야 할 필요가 있어. 난 알아야 돼." 그의 두 눈은 열기로 빛나고 있었다.
"안 해요, 그레이엄."
"그러지 말아, 요보. 전에는 말했었잖아. 그냥 다시 한번 말해줘."
"안 돼요."
"당신 그전에 말했어."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흥분에 들뜬 두 눈, 손은 다시 그녀의 손목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좀 더 세게.
"그레이엄, 내가 전에 말했었지요. 그런데 당신은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그것은 내가 그랬든 그러지 않았든 그렇게 당신을 괴롭게 할 수 없어요."
"난 알 필요가 있어."
"아니에요."
"난 알 필요가 있다니까." 앤은 이성에 호소할 마지막 시도를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의 화를 억누를 마지막 시도도 해보았다.
"이봐요. 그랬거나 아니면 안 그랬거나 한가지겠죠. 만약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그러면 상관이 없지요. 내가 함께 잠을 잤고 그리고 당신이 그 사실을 잊어버렸으면, 그것도 처음부터 내가 안 잤다는 것과 똑같아요. 그렇지요? 만약 당신이 기억할 수 없다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해버려요." 그레이엄은 좀 더 끈질기게 그저 되풀이할 뿐이었다.
"난 알아야 해." 앤은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물론 그랬지요. 난 즐겼어요. 그는 굉장한 남자였어요. 나도 역시 날 아주 지치게 해달라고 졸랐지요." 팔을 잡았던 손에 금방 힘이 빠졌다. 그레이엄의 눈은 희미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날 저녁 내내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 다른 방에 앉아 있다가 서로에게 아무 말도 없이 침대로 갔다. 앤이 욕실 안에서 나올 무렵-그녀는 잠시 안에서 문을 잠갔다-그레이엄은 욕실로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는 그녀가 지나갈 수 있게 필요 이상으로 멀찍이 비켜 서 있었다. 침대에서 둘은 서로 등을 대고 누웠다. 둘 사이에는 멀찍한 공간이 비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레이엄은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앤도 역시 울었다. 마침내 앤이 말했다.
"사실이 아니에요." 그레이엄은 잠시 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말했다.
"정말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둘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여전히 침대 끝에 웅크리고 누운 채로.
7. 분뇨 더미에서
이태리는 처음부터 제외되었다. 거기는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사막에 나 있는 낙타의 자취처럼 연인의 발자국이 있는 교차로였다. 독일과 스페인은 반 정도 제외된 곳이었다. 포르투갈, 벨기에, 스칸디나비아와 같이 아주 안전한 나라들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이유 중의 하나로 앤이 처음부터 아예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진 했지만. 이 '안전'이란 언제든지 위험으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레이엄은 그 안전한 나라들로 가고 싶었지만, 2주일 동안 헬싱키에서 베니와 크리스, 리만 그리고 나타나지 않은 이들이 누구든지 간에 그들 모두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생각에 겁이 났다. 그는 어느 구석지 나라의 차가운 날씨 속에서 방한복을 뒤집어쓰고 양젖을 탄 술잔을 홀짝거릴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그곳에서 할 일이란 그를 그곳까지 가게 만든 놈들이, 편안히 햇빛에 몸을 드러내놓고 비아 베내토에서 뒹굴뒹굴하며 그를 조롱하고 있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일 뿐이었다. 프랑스는 반 정도 위험한 곳이었다. 파리는 제외되었다. 르와르도 제외. 남부 지방도 아웃. 글쎄 남부 지역 전부는 아니었다. 굽이치는 절벽이 굽이진 모래톱으로 바뀌는 어떤 지역만 빼고, 니스나 칸느 지방에서는 대부분 여자들이 그랬듯이 앤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그는 상상했다. 그러나 물론 '진짜' 남부 지방이 있었다. 그 둘 중 아무도 가보지 않았고 항상 런던에 전화를 걸어 그들의 주식 투자 현황을 확인하는 금단추 옷의 잘난 인간들도 가보지 않은 곳, 진짜 남부 지방, 그곳은 안전했다. 그들은 비행기로 툴루즈로 날아가 자동차를 한 대 빌렸다. 특별히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시내 밖으로 나가는 방향 중에 하나였기에 차를 몰아 카르카손의 남동쪽 카날 뒤 미디로 갔가. 성벽을 반쯤 돌아 올라간 다음 앤이 무슨 말을 하자 그레이엄은 이 성벽이 모두 복원된 것이라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레이엄의 그 말 때문에 앤의 기쁨이 덜해지진 않았다. 그녀는 휴가를 즐기겠다는 결심이 대단했다. 그레이엄은 카르카손 지방을 무척 싫어했다.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역사적 고결함 때문이었다. 그는 반 농담조로 앤에게 설명해주었지만 그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운전을 한 첫날 그레이엄은 자신의 그런 반응에 이어 베니와 크리스, 리먼 그리고 다른 이들이 어른스럽게 신나하는 환상으로부터 달아나려고 무척 안달하였다. 당장은 그들을 모두 뒤에 따돌리고 온 것처럼 보이긴 했다. 나르본은 티자형 연결 지역이었다. 그들은 북쪽으로 돌아서 베지에를 위로 해서 에로로 갔다. 나흘째 되던 날 아침 덩치 큰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좁은 길을 조심스레 운전해서 지나갔다. 나무들은 모두 몸통 부분에 희미한 흰색의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건초를 가득 실은 마차를 지나기 위해 속력을 줄였다. 마차꾼이 졸면서 자신의 머리를 그들 쪽으로 반쯤 돌리면서 무의식적으로 고삐를 당겼을 때, 그레이엄은 갑자기 그의 내면의 모든 것이 마치 처음 느끼는 것처럼 좋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그는 호텔 침대에 시트 한 장을 달랑 덮고 누워 천정에서 벗겨져나오는 흰색 칠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나무 둘레에 감겨서 칠이 벗겨져 가던 해충 억제용 흰색 밴드가 생각났다. 그는 다시 한번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그들이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게 아니었다. 그들 중 아무도 그전에 여기에 오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어디를 찾아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만약에 그를 찾아낸다 하더라도 오늘밤, 그는 그 작자들을 저만큼 쫓아내 버릴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뭐 때문에 웃고 있어요?" 손에는 속옷 빨래를 들고 벌거벗은 채 앤은 창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빨래를 밖에 있는 단철줄에 걸어야 할지 말지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밖에 걸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음날은 일요일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불경스런 것으로 판단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냥 웃는 거야." 그레이엄은 안경을 벗어서 침대 머리캍의 탁자 위에 두었다. 앤은 속옷을 라디에이터의 끝부분에 널었다. 그리고 침대 쪽으로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레이엄은 항상 안경 없이는 너무나 무방비 상태로 보였다. 그녀는 그의 콧 등에 난 움푹 들어간 자국을 발견했다. 그 다음 그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그리고는 그의 흰 피부. 그레이엄이 처음으로 말해준 것 중 하나가 그녀를 웃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 말은 '난 너무 학구적인 몸을 가진 것 같아 걱정스럽다'였다. 그녀는 침대 이불 밑으로 미끄러져들면서 이 말을 기억해내었다.
"그냥 웃는다구요?" 그레이엄은 앞으로 며칠간만이라도 그들이 휴가를 와서 부분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한 것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그 대신 그는 그 전날 밤 그를 웃게 한 일에 대해서 말했다.
"매우 직설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으응?" 그녀는 그의 옆으로 파고 들면서 손을 그의 아카데믹한 가슴 위에 얹었다.
"바바라와의 끝 무렵, 그녀가 내게 어떤 행동을 하곤 했는지 모르지? 말해도 괜찮겠지. 당신이 화내진 않을 거야. 그녀는 이불을 내게 밀쳤지. 정말 그랬어. 내가 잠든 사이에 그녀 쪽의 침대 시트와 담요를 끄집어내서 내 쪽으로 밀었지. 그리고 솜털 이불까지도 주었더. 그리고 나서 잠에서 깬 척하며 내가 이불을 내쪽으로 전부 가져간 것처럼 만들어 나를 곤혹스럽게 했지."
"정말 미친 짓이군요. 왜 그랬지요?"
"날 죄책감 들게 하려고 한 것 같아. 난 항상 또 그렇게 생각했고. 그녀는 항상 내가 잠든 사이에도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잘못 대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곤 했지. 그녀는 일 년에 한 달 정도는 그렇게 했어."
"그것을 왜 그만뒀나요?"
"아,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잡았지. 난 밤새 깨어 있었지.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냥 누워 있었어.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에 그녀가 깨어났지만 난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어. 그래서 가만히 있었지. 그리고는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알게 되었지. 난 그녀가 이불을 몽땅 내 위에 쌓을 때까지 기다렸지. 잠시 후 그녀는 잠든 척하다가 또 잠에서 깨어나 추운 척하다가 나를 흔들어 깨우더군. 그리고는 나를 곤란하게 하기 시작하는 거야. 난 그저 이렇게 말했지. '적어도 한 시간 동안 깨어 있었어.' 그러니까 그녀가 말을 중간에 멈추더군. 그리고는 나한테 주었던 이불을 다시 잡아채고는 돌아누워버렸어. 내 기억에 그때가 그녀가 할 말을 잃은 유일한 순간이었다고 생각돼." 앤은 손을 그레이엄의 가슴에 대고 눌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방식을 좋아했다. 그는 한 번도 그녀, 앤이 기분좋게 느끼도록 단순히 바바라를 욕하지는 않았다. 그의 이야기에는 그가 그렇게 행동했는지 아니면 바바라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용했는지에 대해 약간의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 하는 경향이 늘 있었다. 그렇지만 그 태도는 그런 계획이나 속임수가 둘 사이에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불 더 필요하세요?" 그렇게 묻고 나서 앤은 그레이엄 쪽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태도를 통해 이런 경우에는 그들 사이에는 어떤 머뭇거림도 어떤 싸움도 없을 것이라고 앤은 예측했다. 그녀가 옳았다.
클레르몽 레로 근처에서 그들은 호텔을 잡고 일 주일을 머물렀다. 저녁식사 테이블에는 지방산 붉은 포도주가 어깨가 넓다란 병에 담겨 올려져 있었다. 프랑스산임을 주장하듯이 감자칩은 아주 샛노란색에 부드러운 것이었는데 그 색깔은 오래된 기름에 튀겨서 그렇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슨 문제랴. 아침이면 그들은 차를 몰아 이웃 마을에 가기 위해 덩굴이 우거진 포도밭을 지나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원래보다 어쨌든 더욱 인상 깊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진 교회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시간은 피크닉에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잡지 <미디 리브르>를 사보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아무 목적 없이 차를 몰고 가다가 가끔 차를 세워 앤은 이름도 전혀 모르는 꽃과 들풀을 꺾었다. 꽃들은 자동차 뒤편에 놓여져 대부분 말라 시들어갔다. 중간쯤에 바를 발견해 안으로 들어가 식전주를 한 잔 마시고 나서는 쉴 만한 언덕이나 평지를 찾아 나섰다. 점심 후에 그레이엄은 앤에게 <미디 리브르> 두 번째 페이지를 읽어달라고 했다. 그것은 '뉴스 단신'이라고 제목이 붙은 것으로 매일 일어나는 폭력과 사고에 관한 집중 기사였다. 해괴한 사건 사고 기사와 함께 피해를 당한 보통 사람들의 스토리가 실려 있었다. '방심한 엄마가 운하로 차를 몰아갔다.' 앤이 번역을 했다. '다섯 명 사망.' 어느 날은 '어느 농부 일가가 팔십이 넘은 할머니가 국도변에 어슬렁거리다가 사고를 당할까 봐 쇠사를로 침대에 매달아 놓았다.'는 이야기를 실었다. 도로는 팔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다음날 기사는 주차 공간을 두고 싸운 어느 두 운전사의 이야기였다. 자리를 빼앗긴 사람은 권총을 꺼내 '오 분간의 적'을 향해 가슴에 세 발을 쏘았다. 피해자는 땅에 쓰러졌는데 가해자는 덤으로 그의 자동차 타이머에 두 방을 더 쏘고 달아났다. '경찰이 추적중임.' 앤이 번역을 해주었다. 피해자는 종부성사를 받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레이엄은 아마 그가 병원에 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종부성사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라틴 사람들의 기질 때문이군." 그레이엄이 말했다.
"이전 릴리 지방인데요."
"아." 점심을 먹은 후 그들은 호텔로 돌아와 바에서 커피를 마신 후 이층으로 올라와 침대에 누웠다. 다섯 시에 다시 내려와 저녁을 위해 첫 번째 음료를 마실 시간이 될 때까지 플라스틱 마카로니로 만든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앤은 <레베카>를 다시 읽고 있었고 그레이엄은 여러 책을 동시에 읽고 있었다. 가끔 그는 앤에게 어떤 부분을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피에르 클레르그가 나를 육체적으로 알고 싶어했을 때 그는 린넨 조각으로 싼 향초를 지니곤 했다. 약 일 온스 정도로 내 작은 손가락의 첫 마디 크기였다. 성교를 할 때마다 사제는 긴 줄에 매단 그 주머니를 내 목에 걸어놓곤 하였다. 이 향초 조머니는 내 가슴 사이에 걸려 마치 내 배의 입구 같았다. 신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떠나려 할 때 나는 그것을 내 목에서 꺼내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 사제가 하룻밤에도 두 번 혹은 그 이상 나를 육체적으로 알고 싶어할 때가 있었다. 그럴 적마다 그의 몸을 나의 몸과 하나로 만들기 전에 그는 '향초가 어디 있지?'라고 묻곤 하였다.-
"언제 이야기예요?"
"약 천삼백 년 전. 여기에서 조금 아래쪽이야. 아마 오십 마일이나 그 정도."
"더러운 늙은 사제 같으니."
"사제들은 호색가들로 보였지. 내 생각에 그들은 일이 끝난 후 그 자리에서 죄를 사해줘서 따로 신부를 보러 갈 필요가 없게 해 주었을 거야."
"더러운 사제." 앤은 성직자의 육욕에 쇼크를 받았다. 이것이 그레이엄의 흥미를 자아냈다. 보통 세상사 돌아가는 것을 앤이 이야기할 적마다 충격을 받는 쪽은 그였다. 그는 말을 계속하면서 무소불위에 거의 악의적이기까지 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 모두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소년을 더 좋아했지. 그들이 꼭 괴짜라서가 아니고, 물론 나는 그들이 좀 괴상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어릴 적 사제는 나를 침대로 데리고 가서 그의 허벅지 사이에 두고 여자인 양 사용했다'라는 식으로 남자들이 고백을 하고 있는 문구가 많지."
"내게도 상당히 괴상하게 들리는군요."
"아니, 그들이 소년을 데리고 그렇게 한 주된 이유는 창녀들에게서 옮을지도 모르는 질병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지."
"호모들, 망할 호모들이군. 전부 자기들을 위해서 그랬다는 것 같군요."
"그럼,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을 위해서 했지. 매춘에 대한 규칙이 참 재미있어. 읽어줄게." 그는 책장을 거꾸로 몇 장 넘겼다. "'비달은 믿기를', 그는 사제는 아니었어. 나귀 몰이꾼이었지. 그러나 이런 결론은 그가 창녀들을 방문한 죄를 고백한 뒤에 내려진 것이지. '비달은 창녀와 가지는 성 관계는 순수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 그...... 그 '두 조건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첫째는 순수한 금전 관계로 이루어져야 한다.(물론 남자가 돈을 주지.) 둘째, 본 행동은 양쪽 모두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좋아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그 창녀도 환희를 느껴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런 말은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이 절정에 대해서 뭘 알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앤은 긴 안락의자로 다리를 뻗쳐 발가락으로 그레이엄의 다리를 찔렀다.
"그들도 항상 절정에 대해서 알았어요."
"난 이번 세기 들어서야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발견했다고 생각하는데. 불름즈베리 학파가 발견했다고 기억하는데." 그는 거의 진담으로 말하고 있었다.
"난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여튼, 난 '좋아야 한다'는 게 반드시 절정에 닿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아마 그것은 단순히 고객들이 창녀를 다치게 한다거나 두들겨 패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 것 같아. 마치 남자들이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것을 허욯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지독하군."
"물론." 그레이엄은 앤이 점점 더 혐오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즐거워하면서 말을 계속해나갔다. "그것은 오늘날의 현실과 많이 같지는 않았을 거야. 내 말은 그들은 항상 침대에서만 그러지 않았다는 거지."
"우리도 그러잖아요." 앤은 무심결에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레이엄과는 항상 침대에서만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경악했다. 움직이는 장소에서 섹스한 것은 다른 남자들과였지. 천만다행이게도 그레이엄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들이 많이 한 곳이 말이야." 그는 세밀한 표현을 아끼듯 하면서 말했다. "분뇨더미 위에서였지."
"똥더미 위에서요? 웨-엑."
"분뇨더미, 그래. 나는 그 위에서도 어떤 이점을 찾을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레이엄은 가장 학구적인 어조를 띤 채 말했다. "거기는 따뜻하지. 그리고 편하고, 그리고 그 똥더미 위에 있는 남녀보다 냄새가 더 나쁘지도 않았을 거야."
"그만, 그만하세요." 앤은 강하게 그를 중단시켰다. "이제 그만하면 됐어요." 그레이엄은 킬킬거리며 책을 덮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알고 놀랐다. 기괴한 사제, 그 냉소적인 전능, 비달, 분뇨더미, 이 모든 것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것 전부였다. 그녀가 여자들은 언제나 절정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를 몰랐다. 그녀에게는 그냥 그런 식으로 보였다. 여자들은 늘 알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이 그녀의 논쟁의 유일한 근거였다는 것을 이제사 깨달았다. 그리고 전혀 근거도 없지만 섹스란 지금처럼 그전에도 늘 그랬었다고 그녀는 짐직했다. 물론 변한 것도 있다. 고맙게도 사람들은 피임약이니 기구 같은 것을 개발했다. 그러나 그녀는 섹스란 인간에게 항구적인 것이고 새롭게 만들거나 억제해야 할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깨끗한 침대 시트와 침대 옆에 있는 꽃들과 그 생각을 연관지었다. 그리 오래지 않았던 과거에 바로 길 아래쪽에는 분뇨더미와 그 위에 더러운 사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옆에 있는 꽃 대신에 마른 향초가 있었다. 왜 사람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섹스를 원했을까? 왜 그들은 일부러 그랬을까? 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그녀는 치약 생각이 났다. 그동안 그레이엄은 계곡 책을 읽었다. 요즘 그는 이상하게도 그가 읽는 모든 역사책에 똑같게 반응한다. 길이, 수준, 가치, 책값에 전혀 상관없이, 책들은 아주 재미있거나 동시에 아주 지루하게 여겨졌다.
이제 휴가가 나흘 남았을 때였다. 그날 아침 앤은 그녀의 가슴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맨 처음에는 등쪽에서 아련한 통증도 함께 느꼈다. 발목에도 오지 않는 깊이지만 넓은 강물이 동글동글한 자갈 위로 쉼 없이 흐르고 있는 강가 모래밭에서 갖고 간 점심을 먹은 다음 앤은 그레이엄에게 낮은 소리고 중얼거렸다. 그전에 그레이엄에게 가르쳐준 적이 있는 프랑스 속담으로 말했다.
"붉은 코트의 군대(미국 독립 전쟁 당시의 영국 군대-역주)가 막 상륙하려는 것 같아요."(생리가 시작될 것 같다는 뜻-역주) 그레이엄은 오른손에 긴 조각으로 두껍게 썬 고기파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에는 이제 막 깨문 토마토를 들고 있었다. 그는 토마토즙이 그의 바지나 아니면 팔 혹은 양쪽 모두로 흘러내릴지 어떨지 막 판단을 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건성으로 물었다.
"금방 정찰했어?"
"네."
"그래도 아직은 바다 쪽에 있지?"
"네."
"물론 바람을 타고 있겠지만, 그지?"
"언제나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그는 혼자 생각에 잠겨 마치 어떻게 입찰을 할 것인지 경매장에 미리 보러 나온 딜러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앤은 자신의 생리가 시작되었다는 데 대해 그가 보인 반응으로 흐뭇했다. 가끔 그 붉은 코트의 군대가 어디에서 탐지되었는지, 그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들의 원정군이 얼마나 머무를 것인지 등 등에 관한 사지선다형의 긴 교리문단 시간이 있었다. 지금처럼 가끔 그 소식은 마치 그녀가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말한 것처럼 꽤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간혹 그것은 그를 성적으로 짓궂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를 침대 밖으로 끌어내리거나-결코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하지는 않았지만 보통 때보다 자극에 더욱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레이엄에게 이 모든 주제는 아주 생생한 관심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겨우 네 살밖에 안 된 주제였다. 그전에는 한 번도 성적인 것에 대해 곁눈질하는 것을 허용받지 못했지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생리중의 섹스는 극복할 수 없는 까다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수줍어하면서 모호하게 고백하기를, 그가 꼭 고무덧신을 신어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생리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폐점 직전에 재빨리 기쁨을 챙겨야 하는 의무라는 뜻이라고 풀이한 앤의 말에는 항상 기꺼이 동의했다. 한 번은 앤이 그보다 더 멀리 나가서, 설사 그가 고무덧신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도 좀 더 뭔가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정말이지 뭔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환상은 그를 너무 동물적이거나 동시에 너무 이성적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첫 번째 결혼생활 동안 이런 일은 결코 없었다. 바바라는 그녀의 생리 기간을 여성의 고통이 찬양받아야 할 때로 여겼다. 그리고 그녀는 이것을 집안의 결정권에 있어서도 비이성적일 정도로 많은 부분을 허용받아야 하고 그레이엄이 가능한 한 죄의식을 느껴야만 하는 시기로 여겼다. 가끔 그는 자신이 정말 바바라에게 생리를 일으키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녀를 찌르고 피를 흘리게 만든 게 그의 페니스라는 생각을 하였다. 생리는 확실히 불확실한 기분과 이상한 비판의 시기였다. 좀 너그럽게 생각하면 바바라와 앤의 태도 사이의 차이점은 세대간의 차이 혹은 고통을 느끼는 정도의 차이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요즘 관용이라는 가치에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들이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그레이엄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작고 네모난 손잡이가 달린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에도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앤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선택권을 주었다.
"오늘 오후에 산책하실 건가요?"
"아니, 아니야."
"내가 책을 가져올까요?"
"아니, 그러지 마." 그레이엄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녀의 컵이 비었는지 힐끗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일어섰다. 그레이엄의 성격으로 비추어 이것은 결정적이고 거의 강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이층 침실로 올라갔다. 침대에는 시트가 팽팽하고 부드럽게 펴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깨끗해져야 한다는 무언의 지시처럼 보였다. 창문과 덧가리개 문이 닫힌 방 안은 눈에 익숙할 만큼 어두웠다. 그레이엄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안으로 윙윙거리는 벌레들의 소리와 먼 데 부엌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 따스한 오후 정원의 소란스러움이 들어왔다. 덧문은 닫아두었다. 아마 그가 깨닫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창가에 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가 돌아섰을 때 앤은 벌써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한 팔은 그녀 머리 옆 베개 위에 놓여있었고 다른 팔은 그녀 가슴을 반쯤 덮은 시트를 잡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침대를 돌아 그의 자리 쪽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보통의 속도로 옷을 벗었다. 마지막으로 안경을 벗어 탁자 위, 앤이 그날 아침 따온 이름 모를 꽃들이 시들어가는 유리잔 옆에 두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뒤따라올지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첫 번째로 그레이엄은 침대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 확실히 다정하긴 하지만 제대로 위치를 맟추지 않은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두 번째였지 때문에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래쪽에 그리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고 짐작했다. 혹은 어쨌든 그도 좋진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가 몸을 일으킨 다음 그는 앤이 대응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옆쪽으로 거칠게 몸을 음틀거렸다. 앤은 그가 반 정도만 이것을 좋아한다고 여기면서 한 번 더 놀라움으로 반응해주었다. 잠시 후 그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를 안쪽으로 밀어넣은 후 보통은 그녀가 그에게 해주어서 좀처럼 자신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페니스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의 옆, 앞, 그리고 마침내 앤이 마음놓이게도 뒤편으로 갔다. 기쁨이라기보다는 뭔가 깊고 복잡한 동기가 짐작되는, 공들여서 계획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섹스라기보다는 섹스의 개괄이었다. 모두 해봐라. 지금, 뭐든 전부해 봐라. 언제 어떤 것을 하게 될지, 심지어는 가장 간단한 키스조차도 다시 하게 될지 결코 모른다. 그레이엄의 행동은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역시 절정에도 다르게 올랐다. 오르가슴에 오를 때 그는 숨쉬기 방법으로 뒤척거리듯이 머리를 베개에 박았는데 이번에는 침대 뒤로 떨어져 있다가 엎드려 고통과 거리를 둔 심각함으로 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의 표저은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았고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 표정은 그녀가 내미는 여권을 받아든 세관직원의 얼굴과 꼭 같은 것이었다.
"미안해." 그는 그녀 옆의 베개에 머리를 뒤로 누이면서 말했다. 그 말은 그들이 저녁때 바에 들른 이후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사실 그가 의미한 것은 미안해, 전혀 되지 않아. 내게 미안해, 미안해, 난 모든 것을 시도해보았는데 얻은 게 아무것도 없어라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바보같이."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와 어깨를 다독거려주었다.
"전부 나만을 위한 거였어. 당신에게는 충분치 않았어." 그러나 사실은 내게 충분하지 않았어,였다.
"바보 같은 소리예요. 비록 내가 하지 않아도 나쁘진 않았어요."글쎄, 이런 경웅에 거짓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그레이엄은 행복한 듯이 그렁그렁 소리를 냈다. 앤은 그레이엄의 엉덩이뼈 쪽으로 살며시 기대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광이 차올라 팽팽하게 부풀어질 때까지 아주 전통적인 자세로 누워있었다.
다음날 붉은 코트의 군대가 상륙하고 날씨는 회색빛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툴루즈를 향해 돌아왔다. 이번에는 북쪽 노선을 따라 축축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촘촘하게 심어져 있는 길로 왔다. 그들이 차를 몰아갈 때 늘어선 나무들이 솨아-솨아 소리를 냈다.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전염병 때문에 이제는 나무들이 황폐해 보였다. 불쌍한 남자 나무들(병든 나무를 성적으로 무기력하거나 문제가 있는 남성에 비유한 말-역주). 카우세의 남쪽 변두리를 따라가면서 로크포-쉬르-수론(로크포 치즈 공장-역주)의 안내판을 보았다. 둘 중 아무도 치즈에 관심은 없었지만 방향은 괜찮아 보였다. 그들은 잘라진 절벽 틈에 있는 공장으로 들어갔다. 작달막한 직공이 스웨터를 세 개나 껴입고 털로 된 덮개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직으로 갈라진 암벽 틈이 공장 전체에 늘 냉기가 돌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풍과 습기가 푸른 치즈를 만들어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공장 안내자는 늘 감기를 달고 있어야 했다. 그들이 볼 만한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치즈 만들기는 계절적인 것인데다 그들이 좀 늦게 왔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심지어 볼 만한 치즈 조각도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안내원은 로크포 치즈 크기와 똑같은 조각된 나뭇조각을 가져와서 그것을 알루미늄 호일로 어떻게 싸는지 보여주었다. 볼 만한 게 없다는 사실로 그레이엄은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앤의 통역으로 그 기분은 더 상승했다.
"양고기를 점심으로 싸 가지고 나간 사람의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하루는 동굴 안에서 빵과 치즈를 펴놓고 앉았지요. 그때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가 지나갔어요. 그 사내는 점심도 잊어버리고 아가씨를 따라갔지요. 그리고 몇 주 뒤 우연히 그 동굴에 돌아와 보니 빵과 치즈는 모두 초록색으로 변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가 치즈맛을 보았는데 아주 좋았대요. 그 사내는 그 비결을 대를 이어가며 몇 세기 동안이나 유지해왔지요.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로크포 가문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이 이야기 하기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그들은 여러 개로 갈라진 암벽 틈으로 된 방을 지나갔다. 축축하고 이상하게 밝은 초록빛 이끼가 번득이고 있었다. 그 방 창문으로 시무룩한 표정의 포장공들이 앉아 있는 조립라인이 멀리에서 보였다. 안내원은 방문 코스의 끝이라고 알려주면서 짐짓 매점 쪽 안내판을 가리켰다. 판매대에 있는 치즈를 못 본 척했고 치즈 형성 과정에서 포장까지 전 과정을 담아 둔 열두 장의 컬러 슬라이드 필름 세트도 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레이엄은 칼날이 넓고 비스듬하게 굽어져 갑자기 뾰족해지는 로크포 칼을 하나 샀다. 손잡이는 아주 얇아 섬뜩해 보였다. 가지고 다니기에 좋을 것이라고 그레이엄은 생각했다. 나머지 반나절을 서쪽으로 달려 그들은 알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둘 중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성당을 발견했다. 그 건물은 밝은 갈색 벽돌로 지어졌는데 낮은가 하면 솟구쳐오르고 교회인가 보면 성벽 같았는데 볼썽사납고 기괴하게 지어진 몇 개의 큰 부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다. 교회 군대, 교회 방비, 교회 상징. 벽돌로 지어진 그 건물은 카타리파의 이교도와 그 후예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화살촉 모양으로 갈라진 모양과 띄엄띄엄 석루조의 문양을 가진, 서쪽 끝에 있는 뭉턱하니 솟은 검은색의 탑을 바라보면서 그레이엄은 어떤 면에서 이 건물은 법석거리는 이교도들에 대한 몽테뉴의 간접적이고 지성적인 반응이라는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분뇨 더미 위의 간음자들에게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도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녀의 생리 때문에 그랬나? 아니면 그레이엄이 지난 며칠간 약간 감정이 불안정했나? 그의 쾌활함도 꾸민 것처럼 보였다. 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아무 일도 아닌지도 몰랐다. 아마 휴가의 끝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알비에서 그들은 아르마냐(프랑스 남서부 지방에서 생산되는 짙은 색의 브랜디-역주)과 야채 모양의 유리 주전자를 샀다. 그레이엄은 끈을 매는 에스파드리유(프랑스의 목욕탕용 샌들식 신발-역주) 샌들과 밀짚으로 짠 모자를 샀다. 둘 다 그레이엄이 여행 시작에서부터 찾아 헤매던 것이었다. 돈을 남기지 말고 모두 써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앤의 호두나무 상자가 넘칠지도 모르니까. 툴루즈의 교외를 달려 공항으로 오는 길에 극장을 지나면서 앤이 웃었다.
"뭔데?"
"연휴라는 표시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전부 그렇군요." 마치 이태리에서 기차를 타고 지나치는 모든 도시가 우시타라고 불린다는 것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저것이 고다르풍인가요? 아니면 트뤼포풍인가요?" 그레이엄은 미소를 짓고 적당하게 목소리로만 반응을 했다. 그러나 시선 끝에서 본능적으로 뭔가 움찔한 점을 그녀가 눈치채지 않았는가? 개트윅 공항에서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영국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비로 얼룩지고 있는 차창을 응시했다. 왜 모든 초록색이 이곳에서는 그렇게 진한 갈색으로 보여야만 할까? 사물들은 왜 동시에 먼지와 습기 둘 다 될 수 있을까? 일 마일쯤 지나 그들은 주유소를 지났다. 별 네 개, 별 세 개, 세차. 그레이엄은 마침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머리 안에 있는 영화 <연휴>는 이제 끝이 난 것이다.
8. 여성적인 사암
그레이엄은 한 번도 앨리스를 동물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 늘 미안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가 동물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공상 과학 영화에서 많이 발전시켜놓은 동물들의 그런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농담을 했지? 그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네게 좋다고 생각하는 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는 기린에게 속삭였다. 물론 높은 나뭇잎에 닿자면 긴 목이 필요하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 하지만 차라리 애초에 나무를 짧게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아니, 그렇게 치면 풍뎅이나 전갈 같은 땅 위에서 사는 놈들을 잡아먹어도 될 거 아니냐 말이야. 왜 그놈들은 그렇게 목이 긴 기린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까? 더구나 앨리스를 동물원에 데리고 가보면 그것 역시 얼마나 좋을까? 그곳은 아무리 눈치 없는 부모라도 놓칠 수 없는 장소이다. 아이들 눈에는 넌덜머리 나게 싫고 궁상맞아 보이고, 학교에서 상받는 날 옷도 제대로 챙겨입고 오지 못하는 부모라 할지라도 항상 동물원에서는 재기할 수 있는 법이다. 동물들은 아주 관대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 동물 전부가 마치 부모들 상상력의 일시적인 산물인 것처럼 말이다. 자, 봐. 우리 아빠가 이것을 전부 발명했어. 그래, 저 악어, 그리고 저 에뮤(호주산의 날지 못하는 새로 타조와 비슷함-역주), 그리고 얼룩말 좀 봐. 유일한 속임수는 섹스에 관한 것이다. 코뿔소의 물건이 발기되어 껍질 벗겨진 고릴라의 주먹이나 혹은 감히 당신도 정육점 주인에게 물어볼 수 없는 무슨 물건처럼 달려 있다. 그러나 이런 때조차도 정도를 벗어난 진화의 용어로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는 있다. 아니다. 그레이엄이 동물원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동물원이 그를 슬프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혼 소송이 막 끝난 후 그는 역시 이혼 경력이 있고 가끔 차를 함께 마시는 사이인 동료 칠튼과 아이 면접권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자네 딸이 어디에 살고 있지?" 칠튼이 물었다.
"설명하기 힘들군. 옛날에는 세인트 판크라스라고 말했지. 옛 행정구역으로 이야기할 때 말이야. 그런데 요즘은 런던 북쪽......" 칠튼은 그가 말을 마칠 때까지 두지 않았다. 짜증이 나서가 아니라 이미 충분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아이를 동물원에 데리고 갈 수도 있겠군."
"아, 사실 나도 데리고 갈까 생각하고 있었지. 글쎄, 이번 일요일, 하여튼, 고속도로 1호선 위쪽으로 가서 도로변에 있는 찻집에서 차 한잔하고, 뭔가 새로울 것 같군." 칠튼은 뭔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그냥 웃어 보였다. 몇 주 지나서 앤이 역시 지나가는 말로 다가오는 일요일 앨리스를 동물원에 데리고 가라고 넌지시 암시하였을 때 그레이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독서를 계속했다. 물론 칠튼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일요일 오후는 항상 어디를 방문하는 시간이다. 병원, 공동묘지, 양로원, 그리고 별거하는 가정. 이혼한 남자는 정부나 두 번째 부인들에게서 풍길 것 같은 부정한 분위기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는 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리고 배정받은 시간 때문에 아이를 멀리 데리고 갈 수도 없다. 그리고 오후 시간 아이들의 두 가지 주요 사항인 차와 화장실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한다. 런던 북쪽의 동물원이야말로 정답이다. 부모들이 도덕적으로 수긍하는 재미와 먹을 것과 화장실이 충분한 곳이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그 조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는 일요일 오후 동물원을 상상해보았다. 몇 안 되는 관광객들, 드문드문 지키고 앉은 수위들, 중년의 편부편모들이 쾌활한 척하며 나이가 여러 층인 아이들의 손을 불필요하게 꼭 잡고 다니는 그 슬픈 무리들이 있는 곳이다. 타임머신이 갑자기 그곳에서 멈춘다면 인간이 유성생식의 오랜 전통을 포기하고 단성생식으로 돌아섰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레이엄은 더 이상 감상에 빠져 슬퍼하기보다는 앨리스를 결코 동물원에 데리고 가지 않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한 번은 바바라가 딸이 동물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하여 데리고 가볼까 했지만 그레이엄은 동물을 가두어두는 데 대한 도덕적 반감을 강하게 견지했다. 그는 몇 번이나 전기 암탉들에 대해 말했다. 어른들에게는 그의 말이 젠체하는 것으로 들리겠지만 고상한 생각을 가진 앨리스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처럼 그녀도 자연을 인간과 다른 무엇인가로 보면서 자연에 대해서는 이상주의적이고 감상적이었다. 그레이엄은 외견상 원칙적인 저항으로 바바라를 딱 한 번 눌러 이긴 것이다. 그대신 그레이엄은 앨리스를 찻집이나 박물관으로 데리고 갔다. 한 번은 국도변의 카페에서 앨리스가 진열장에 편편하게 놓인 음식들을 고르는 데 까탈을 부리는 바람에 그레이엄은 화가 날 뻔했다. 오후 네 시경의 스테이크와 간 푸딩의 찌부러진 모양은 앨리스에게 컵케이크의 맛조차 앗아가 버렸다. 날씨가 좋을 때는 공원을 산책하거나 문이 닫힌 상점들의 진열장을 구경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가끔 그냥 차 안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왜 엄마를 떠났나요?" 앨리스가 처음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대신 전기 시스템을 작돌시킬 수 있도록 시동장치를 켰다. 그리고 와이퍼를 켜서 창문을 한 차례 깨끗하게 닦았다. 앞의 시야가 흐려지더니 다시 맑아져 비에 젖은 공원 축구장이 내려다보였다. 잠시 후 비가 그치고 축구 선수들의 모습이 안개 속에 퍼져나가는 색깔들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그레이엄은 할말을 잃었다. 왜 이럴 때 무어라 말해야 하는지 안내해주는 책자는 없는가? 파탄에 이른 결혼에 대한 소비자 단체의 보고서는 왜 없는가?
"엄마와 아빠는 함께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우리는...... 잘 지내지 못했어."
"아빠는 언제나 엄마를 사랑한다고 제게 말했잖아요."
"그래, 내가 그랬지. 그러나, 그게 말하자면 멈춘 거야."
"아빠는 멈췄다고 제게 말하지 않았어요. 아빠는 떠나기 직전까지도 제게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했었어요."
"그런데, 난...... 난...... 네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단다. 그때 넌 시험도 있었고 또 뭐 다른 일이 있었지." 무슨 일? 앨리스가 생리 중이었나?
"전 아빠가, 그 여자...... 그 여자 때문에 엄마를 떠났다고 생각했어요." '그 여자'라는 말은 별 의미도 없었고 힘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레이엄은 자기 딸이 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 그랬지."
"그러니까 아빠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떠난 것이 아니에요. 아빠는 그 여자 때문에 엄마를 떠난 거예요." 이번에는 '그 여자'라는 말에 힘이 실려 있었다. 중립적이지도 않았다.
"그래, 아니, 좀...... 엄마와는 집을 나오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사이가 안 좋았단다."
"카렌이 그러는데 아빠가 갱년기여서 엄마를 쓰레기장에 차버리고 좀 더 젊은 여자와 바꿔 살고 싶어서 도망갔다고 했어요."
"아니야, 그렇진 않아. 카렌이 도대체 누구지?" 침묵이 흘렀다. 그는 대화가 그치기를 바랐다. 그는 다시 시동장치의 키를 돌려보았다. 그러나 켜지지 않았다.
"아빠 그게......" 앨리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을 옆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게 로맨틱한 사랑이었나요?" 그녀는 그 말을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외국어 구절을 읽듯이 모호하게 발음했다. 누구든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게 무슨 질문이냐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답을 위해서는 오직 빈 칸이 두 개밖에 없다. 그중 하나에 재빨리 표시를 해야만 한다.
"그래,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또 그 대답이 앨리스에게 어떻게 들릴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게 그녀를 동물원에 데리고 간 것보다 그레이엄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첫째, 질투란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레이엄은 곰곰 생각했다. 단지 그에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말이다. 왜 질투는 시작되는가? 어떤 며에서 질투는 사랑과 연관 지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셀 수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다. 질투는 왜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서 마치 비행기 안의 저공 경보기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는가? 육과 이분의 일초. 재빠른 행동. 지금 당장. 그레이엄의 머릿속에선 가끔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왜 그를 지목했나? 그것은 일종의 요행이었나? 아니면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타고난 것인가? 그레이엄이 태어날 적부터 큰 엉덩이나 나쁜 시력을 받은 것처럼 질투도 그렇게 얻어진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얼마 지나서 그것은 닳아져 없어질지도 모르지. 아마 일정한 기간 동안만 두뇌 안에 충분한 질투라는 성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나 그레이엄은 좀 의심스러웠다. 그는 오랫동안 큰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전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 않은가? 둘째, 어떤 이유 때문에 질투가 존재해야 한다고 치더라도 왜 그것이 꼭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작용하는가? 왜 질투만이 그렇게 작용해야 하는 주요 감정인가?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았다. 앤의 어릴 적 사진이나 처녀 때 사진을 보았을 때, 그는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녀가 어릴 적에 부당하게 벌받은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는 보호본능으로 목젖이 울컹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거즈를 중간에 둔 것같이 거리가 있는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은 쉽게 끓어올랐다가 쉽게 가라앉는다. 과거가 아닌, 현재가 단순히 지속되고 있으므로 조용해진다. 그러나 이 질투의 감정은 갑자기 몰려와서 사람을 내동댕이칠 만한 힘으로 폭발한다. 그 원인은 사소한 것이자만 그 치료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왜 과거만이 사람을 그토록 미치게 만드는가? 이런 경우를 그는 역사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그의 학생 중 일부-많은 수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닌 그저 일 년에 한 명 정도만-가 과거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분노한다고 했다. 이번 학년에 도 그런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 생강빛 머리칼을 가진, 이름이 맥 뭐라는(저런, 요즘은 학생들의 이름을 아는데 일 년이 꼬박 걸린다. 그리고는 그들을 다시 못 본다. 물론 그 때문에 속이 상하지도 않는다.) 학생은 역사적으로 악에 의해 선이 패배하였다(그가 보기에는)는 사실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왜 그것이 승리하지 못했는가? 왜 이것이 저것을 제쳤는가? 그는 수업 시간에 그를 노려보던 그 맥 뭐라는 학생의 분노에 차 흥분한 얼굴을 기억해냈다. 그 학생은 역사, 혹은 어쨌든 역사가들이 틀렸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다. 말하자면 X가 역사 속에서 잠깐 숨어 있다가 몇 년 뒤 Y에서 다시 나타났다는 등 등의 말들. 보통 그레이엄은 그런 반응을 미숙함이나 좀 더 자세하게 말해서 시골 교구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성격 같은 사소한 원인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렇게 확신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맥 뭐라는 학생의 분노는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에 대한 복잡한 감정인 것이다. 아마 그는 불의에 대한 회상적 감정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셋째, 왜 20세기가 끝나가는 지금 그 반성적인 질투의 감정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레이엄은 아무것도 모르는 역사가는 아니었다. 모든 것들은 사라져간다. 국가와 대륙 간의 분쟁도 이제 차차 누그러져 가고 문명은 더욱 발전되는 것 같았다. 그레이엄의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점진적으로 세상은 하이파이 오디오 세트가 만국 공용 화폐처럼 통용되고 스포츠와 문화, 섹스에 심취하는 거대 복지국가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가끔 지진이나 화산 폭발 같은 것이 일어나긴 하지만 자연의 복수마저도 이젠 제시간에 정리가 된다. 그런데 이 질투, 원하지도 않은 원말에 찬 이 감정은 그저 사람을 괴롭히기만 하려고 이렇게 서성거리고 있는 것인가? 귓곡의 중이처럼 균형감각을 깨뜨리려고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맹장처럼 염증이 퍼지면 잘라내야 할 존재인가? 그러나 질투를 어떻게 떼내 버릴 것인가? 넷째, 왜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는가? 모든 이들 중에 하필 그에게? 그는 자신이 매우 분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바라는 그가 병적이리만큼 자기중심적이고 호색가에다 정서적으로 난쟁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믿게 하려고 꽤 노력했지만, 그것은 그저 이해될 정도일 뿐이었다. 사실 그가 그런 것을 이해했다는 것은 다시 한번 그가 지각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준 셈이다. 모든 이들이 그를 분별있다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주 편안하게, 첫 번째 아내는 조소하듯이, 그의 동료들은 전적으로 찬사를 보내며, 두 번째 아내는 애정 어린 웃음을 섞은 반쯤 흘기는 눈길로 말해주곤 했다. 예전에 그는 분별이 있었다. 그는 그런 자신을 좋아했다. 더구나 그는 세기의 바람둥이도 아니었다. 바바라가 있었고 그다음에 앤, 그뿐이었다. 바바라에 대해 그가 느낀 것은 아마 첫 번째 연애 감정의 의기양양한 고상함으로 과장된 것일지도 몰랐다. 반면 앤에 대해 느낀 감정은, 그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뭔가 조심스런 가운데 싹텄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글쎄, 그 사이에는, 그가 사랑 비슷한 감정으로 자신을 몰아가려고 한 경우가 있었지만 실제 그가 맞닥뜨린 것은 일종의 긴장된 감상주의였다. 자신에 대해 이 모든 것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가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다른 이들은 그 불덩이를 차버리는데 유독 자기만 불에 데었다. 아마 이것이 바로 요점일 것이다. 아마 이것이 잭이 말한 결혼의 분석, 그의 사시 눈을 가진 곰, 그 이론이 적용되는 시점일 것이다. 아마 잭의 이론은 어느 정도는 맞지만 어느 경우나 적용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결혼의 본질 안에는 질투가 없고-이런 경우 잭이라면 그 문제를 사회 탓으로 돌리고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바람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사랑의 본질 안에만 질투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지상 목표가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화학적으로 실패할 운명이라는 사실은 그리 유쾌한 생각이 못되었다. 그레이엄은 그런 생각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넨 학생들과 같이 잘 수도 있지."
"아니, 나 그렇게 못 해."
"왜 못 해? 모두들 그런다고. 모두 그것을 바라고 있지. 자네가 미남이 아닌 것은 알지만 학생들은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지. 자네가 미남이 아니기 때문에, 또 약간은 불손하고 엉망이고 풀죽은 사람이라면 오히려 학생들 사이에는 흥미거리가 될 수 있지. 그런 경우 난 그것을 제삼 세계의 섹스라고 부르지. 그런 게 많아. 특히 그런 나이에는." 잭은 그저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레이엄도 그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글쎄, 나는 그게 올바르다고는 생각지 않네. 내 말은 우리 같은 선생들은 부모 입장이 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야. 좀 근친상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가족은 함께 놀고 함께 지내잖아." 사실 잭은 도움이 되려고 특별히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되는 그레이엄의 방문이 지겨웠다. 그는 많은 완벽한 충고-그레이엄이 거짓말을 해야 하고, 자위를 해야 하고, 외국으로 휴가를 다녀와야 하는 것-들을 해주었다. 이제 그의 심리치료 가방 안이 텅 비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레이엄에 대해 좀 안됐다는 느낌만 있었다. 이제 그는 그의 응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친구를 바보라고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레이엄은 말을 이어 나갔다.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식욕은 먹으면서 오는 거야." 잭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그저 진부한 것인 양 그 말을 둔감하게 받아들였다.
"우스운 사실은, 그러니까 나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너무 눈에 잘 잡힌다는 것이야,"
"......?"
"글쎄, 난 언제나 글에 익숙한 사람이지. 늘 그랬지. 그랬지 않아? 언제나 내게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글이었어. 난 그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난 색깔이니, 옷이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었어. 난 심지어 책 안에 있는 사진도 싫어한다니까. 영화는 아주 질색이고. 그래, 난 영화를 아주 싫어했지. 그리고 아직도 그래, 물론 다른 방식으로 말이지."
"그래." 잭은 그레이엄이 요점에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는 왜 자기가 미친 사람보다는 정상인 사람을 더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정신 이상자들은 요점에 도달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 그들은 사람들이 버킹엄 궁전을 보기 전에 시내버스를 타고 자신들이 정신 상태를 먼저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재미있고 모든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잭은 새로운 농담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썼다. 에드가 윈드 얘기를 꺼내볼까? 아니면 관악 오중주는 어떨까? 아니, 그것은 저 늙은 괄약근을 좀 더 긴장시킬 거야. 게다가 그들은 관악 이중주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각적인 것들이 정말 어떤 계기가 된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야......" 어디 윈드러시 강 같은 곳은 없을까? 음, 계획을 짜봐야 할 것 같군.
"......앤과 결혼하는 것이 바바라와 결혼할 때와는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물론 앤은 언제나 내게 다른 남자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말했지...... 그녀가 살아온 얘기......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의......"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그러면 횡재를 할지도 몰라, 아마 상품으로 사과가 나올지도? 해변을 걸어 내려와 보면 바람과 높은 파도를 만날 수도 있지. 그것으로 설거지를 하는 것은 어떨까?
"......난 그들 중 어떤 놈들의 이름을 알고 있지. 어쩌면 한두 명의 사진도 보았을 거야. 물론 그리 열심히 본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알아. 어떤 놈들은 나보다 더 젊기도 하고 나보다 더 잘생기기도 했지. 어떤 놈들은 돈도 더 많았고 그중의 어떤 놈들은 아마 침대에서 나보다 더 잘했을 거야. 그러나 괜찮아, 그것은......" 잭은 반쯤 낄낄거리는 웃음을 억지로 누르고 정중하게 "응...... 을." 대답하는 목소리로 바꿨다.
"......정말 그랬어. 그리고 난 <달빛 너머로>를 보러 갔지.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바뀌었지. 이제 와서 왜 내가, 내 평생 시각적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내가, 왜 갑자기 그런 물건들 밑으로 들어가야지? 자네는 이런 생각해본 적이 없나? 아나 자네에게 직업적으로 영향을 줄 거야. 어떤 사람들은 책보다 영화에서 얻는 것이 많다면 말이지."
"난 항상 책이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지? 화장실에서는 영화를 볼 수 없지 않아, 그렇지?"
"아니야, 그것은 틀렸어. 내 아내를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보니까 아주 다른 느낌이 들던데. 본다는 것이 문자보다 더욱 강력한 것이더군. 그렇지?"
"그것은 좀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되는데."
"역시 공적인 것이지도 할 거야. 영화로 그녀를 보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일종의 공식적으로 오쟁이 진 남편이지."
"그녀의 영화가 그렇지는 않았잖아? 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서로 팔꿈치를 쿡쿡 찌르면서 '이봐, 저거 바로 그레이엄의 마누라 아냐?'라고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어쨌든 그때 그녀는 자네 아내가 아니었잖아."
"아니, 정말이야." 아마 공개적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각적인 것은 분명했다. 그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잭은 평화스럽게 그의 마음속의 사전을 계속해 뒤적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레이엄이 물었다.
"자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아, 저런, 그는 사실 방귀를 뀌려고 하고 있었다. 즉흥적인 요령이 필요했다.
"아니 정말로 별다른 것은 아니지. 그리 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난 그저 페미니언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궁리하고 있었지."
"......?"
"만약 그게 진짜 어느 지역명이거나, 혹은 키플링이 그저 만들어낸 것이거나 간에 말이야. 그런데 이 말이 분명히 페미닌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긴 한데, 그런데 사전에서는 못 찾겠어. 아니면 그가 만들어내긴 했어도 좀 잘못된 건지도 모르지."
"......?"
"처음 그 페미니언(여성적인) 사암 위에서 충족한 인생을 약속 받았지.(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는도다)." 이 선언으로도 그레이엄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잭은 생각했다. 그레이엄은 일어서는 대신 다른 말로 대답했다.
"자네는 내가 프랑스에서 무엇을 발견한지 아는가?"
"......"
"황소의 성기를 본 적이 있나?"
"음." 그것은 그렇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레이엄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크지, 길고. 그걸로 럭비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
"프랑스에서 푸줏간 앞을 지나갔지. 카스트레에서였어. 창문으로 그것을 본 거야. 분명히 소의 물건이었어. 말의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 정도 크기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을 거야. 그러나 분명 말고기 파는 곳이 아니었으니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고......"
"......"
"내가 앤한테 들어가서 무엇인지 물어보자고 했지. 앤이 킬킬거리더니 말하는 거야. '글쎄 확실히 그게 분명한데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 '그래, 그게 분명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물어보자는 거야.'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지. 어떻게 하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기를 자를 수 있는지 알고 있을 것 같은, 아주 전형적이고 까다로워 보이는 프랑스 푸줏간 주인이었어. 앤이 진열장 접시 위에 놓인 그 물건을 가리키면서 그에게 물었지. '저것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그가 뭐라고 답한지 알아?"
"......"
"'저건 아주 하찮은 것입니다, 마담.'이라더군. 그만 하면 됐지?"
"나쁘진 않군."
"우리는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나왔지."
"......"(제기랄, 자네가 샌드위치를 만들려고 그것을 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사소한 것이라." 그레이엄은 그 단어를 다시 한번 중얼거리더니 사십 년 전의 소풍간 생각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영감처럼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잭은 마지막 말을 던지기 위해 자신을 들썩거렸다.
"사실, 미국에는 과거가 없는 녀석이 있지."
"설마?"
"정말이야. 내가 읽었어. 펜싱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의 상대가 연습용 펜싱 검으로 그의 코를 바로 찔러 뇌까지 간 거야. 그의 기억이 파괴되었지. 그렇게 이십 년간 살아오고 있대."
"기억상실증." 그레이엄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화가 나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니, 정말은 그게 아니지. 그것보다는 낫지. 혹은 더 나쁠 수도 있겠군. 내가 읽은 기사에서는 그 남자가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더군. 그러나 요점은 그는 새로운 기억도 전혀 할 수 없다는 거야. 모든 것을 곧장 잊어버린다는 거지. 생각해봐. 문서 보관 창고가 전혀 없다는 거야. 자네는 좋아하겠지?"
"......"
"그렇지 않아? 기억의 창고가 없다. 단지 현재만 있다? 항상 기차의 차창같이 시작되는 거야. 옥수수밭, 전신주들, 빨랫줄, 터널, 아무 관련도, 어떤 인과관계도, 반복되는 것도 없지."
"......"
"아마 자네한테도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거야. 그대로 가기만 하면 그렇게 해줄 거야. 자네 같으면 지금 당장 국립 보건 제도로 그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레이엄은 가끔 잭이 정말로 자기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들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몇 주 동안 모든 일들이 진행되었다. 앤은 자기가 그전에는 겪어보지 않은 듯한 방식으로 그레이엄을 살피고 있음을 알았다. 아침 식사로 시리얼을 먹는 것이나, 기어를 변속하는 것이나, 텔레비젼 화면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 일 등 그런 일상적인 행동을 할 줄 아는 데에 점수를 줘가면서 그를 알코을 중독자나 잠재적 자살 기도자를 감시하는 것처럼 살피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그에게 알코을 중독이나 잠재적 자살 위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그전보다는 좀 더 많이 마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잭 특유의 꾀바른 식으로 그녀에게 귀띔해준 것처럼 그레이엄이 완전히 혼이 나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앤은 잭보다는그레이엄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처음보다는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잭도 잘 알고 있었다. 잭은 항상 기괴한 삶과 괴팍한 인간을 더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삶을 더욱 흥미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점은 잭의 천성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기도 했다. 생리가 끝난 후 앤은 그레이엄이 자기와 섹스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보통 그녀가 더 일찍 침대로 가곤 했다. 그는 무슨 핑계를 대어서 아래층에 늦게까지 머물렀다. 침실에 와서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서는 그대로 잠들고는 하였다. 앤은 마음에 걸렸지만 또 마음에 걸리지 않기도 했다. 만약 원하기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게 더 좋았다. 그가 그런 척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들 사이에 여전히 정직의 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자주 잠을 험하게 잤다. 꿈속에서 상상의 적을 향해 마구 발길질을 한다든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소리를 내거나 중얼중얼거렸다. 그는 침대 시트와 싸웠다. 앤이 그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 보면 그레이엄 쪽의 침대 시트는 완전히 벗겨져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앤은 돌아눕다가 그가 거의 벗고 똑바로 누운 채 잠든 것을 보았다. 두 팔은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고 손바닥은 펴져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그의 회색빛 털이 함부로 나 있는 학구적인 가슴 아래쪽을 지나 두꺼워지는 허리를 넘어 그의 성기 부분으로 더듬어갔다. 보통 때보다 더 작고 얼핏 보기에 더 분홍빛 같은 그의 페니스는 왼쪽 허벅지 쪽으로 바르게 누워있었다. 그의 음낭 중 하나가 눈에 잡혔다. 다른 한쪽은 닭의 살갗같이 팽팽하게 당겨 그의 페니스 밑에 덮여 있었다. 앤은 거친 표면의, 그 갈라지고 울툴불퉁한 피부에 놀라울 정도로 털이 하나도 없는 음낭을 응시했다. 조그맣고 이상하게 생긴 그 기관이 그렇게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게 얼마나 혼란스러운 일인지.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 이것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주인이 잠든 사이에 아침 햇살에 그 기관을 비춰보면서 앤은 이 연갈색빛의 툭 튀어나온 물건이 이상하게도 전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잠시 후 그것은 정말 섹스와 무관한 것으로 보였다. 맞아, 그랬다. 그레이엄의 두 다리 사이에 쪼그리고 있는 그것은 섹스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냥 껍질 벗겨진 새우나 호두 같았다.
그 푸주한은 푸른색 줄무늬가 있는 앞치마를 두르고 파란색 리본이 둘러진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평생 처음으로 앞치마와 그 모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기묘한 대조에 대해 생각했다. 그 보트용 모자는 수초가 넘실대는 강물 위에서 쉼 없이 젓고 있는 노에서 한가롭게 튕기는 물방울을 연상시켰다. 피로 얼룩진 앞치마는 범죄의 삶, 정신 이상자의 살인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왜 그전에는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이 남자를 보고 있는 것은 정신분열증 환자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명과 야만이 함께 정상을 가장한 채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냥 여기 서 있으면서, 이 사람이 두 모순된 사실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에 전혀 놀라지 않고 있었다.
"손님, 뭘 드릴까요?" 그녀는 왜 여기 왔는지조차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
"워커 씨, 돼지고기를 살코기로 해서 두 덩이 주세요." 그 푸주한은 고깃덩이를 넓은 저울대에 마치 생선을 놓듯이 털썩 놓았다.
"그리고 계란 반 다스도 주세요. 갈색 큰 것으로요. 아니, 한 다스로 해도 괜찮아요." 앤에게 등을 보인 채 워커 씨는 혼자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토요일까지 샤토브리앙을 주문할 수 있을까요?" 다시 등을 돌린 푸주한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동안 고기 내장과 양파에 싫증이 났으리라고 생각했지요." 앤은 웃었다. 가게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금방 저 주인이 말한 게 무슨 우스운 소리지? 그냥 수다를 떤 것인가? 손님들은 그저 모두 똑같아 보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머리를 감지 않았으니까.' 한편 그 푸주한은 생각했다. '하여튼 그 남자가 직장으로 돌아갔으니 다행이군. 아니면 새 직장이거나, 좌우지간 그게 뭐든 간에.' 앤은 그레이엄에게 푸주한이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한 말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짧게 낮은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래 괜찮아. 뭐 그리 재미있는 것도 아니지. 그래도 말할 거리론 되잖아. 앤은 생각했다. 그레이엄은 점점 더 말수가 적어지고 조용해졌다. 요즘은 그녀 혼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푸주한 이야기 같은 것도 화제로 삼아 꺼내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을 때 그레이엄은 그냥 음음 소리만 내었다. 내가 당신이 기대하는 만큼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이유란 바로 당신이 지루한 얘기만 하기 때문이라는 듯이 보였다. 한 번은 그녀가 직장에서 본 새로운 옷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중간에 그가 갑자기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상관없어."
"상관없으면 상관있게 만들어드리지." 그녀는 순간적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앤이 건방진 무관심을 표현할 적마다 할머니가 하던 말씀이었다. 그녀의 '상관없어'라는 말이 고집스러움을 뜻하고 있을 겅우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긴 대답을 들려주시곤 했다.
상관없으면 상관있게 해주지
상관없어가 매달려 있네
상관없어가 주전자에 들어가
상관있게 될 때까지 끓고 있다네.
아직도 그레이엄의 여름 휴가가 삼 주일이나 남아 있었다.(앤은 휴가를 방학이라고 하는 것에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보통 이런 시간은 그레이엄이 기분 좋을 적에는 아주 도움이 되어 일 년 중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가 집에서 어지럽히며 책을 좀 읽거나 가끔 저녁 식사도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즐겁게 직장으로 나가곤 하였다. 작년인가 아니면 재작년, 한두 번 그녀는 오후 좀 지나서 직장에서 살짝 빠져나와 더위와 입고 있는 얇은 옷과 지하철의 흔들거림으로 촉촉하게 젖어 섹시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녀가 왜 집에 일찍 돌아왔는지에 대해 얘기도 나누지 않고 앤의 온몸 마디마디가 축축하게 젖은 채로 그들은 곧장 침대로 들어갔었다. 오후의 섹스는 그중 가장 멋진 섹스라고 앤은 생각했다. 앤이 지금까지 가진 아침 섹스는 보통 '지난 밤에는 미안해. 그러나 어쨌든 지금 여기 있잖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하면 오늘 내내 날 잊지 못할 거야'도 의미했다. 그렇지만 그 양쪽 모두 앤을 매료시키지는 못했다. 저녁의 섹스, 글쎄, 아마 기본 섹스이지, 그렇지 않아? 저녁 섹스는 종류가 많았다. 그건 잠이 어슬핏해서 그냥 동의한 적당한 행복이기도 하고 또는 '이것 때문에 침대에 들어온 것 아냐. 그러니 밀고 나가자구'하는 억지이기도 했다. 저녁 섹스는 흔히 섹스란 게 그러하듯 좋은 만큼 대수롭지 않기도 하고 또 그만큼 예측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한낮의 섹스가 점잖게 다가온다는 말은 아니다. 한낮의 섹스는, 그것은 아주 격렬하고 의도적인 것이다. 때로 그것은 아주 호기심 어린 방법으로 사람들의(비록 결혼한 사람들에게도)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거야. 그리고난 이후 저녁에도 당신과 함께 지내고 싶어.' 한낮의 섹스는 이처럼 뜻밖의 평안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앤은 한낮의 섹스를 한 번 시도해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왔을 때 종일 집에 있을 것이라고 했던 그레이엄은 없었다. 그녀는 목이 타는 것 같은 느낌으로 실망하여 성마르게 집 안을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방문을 열어보았다. 커피를 한 잔 끓였다. 커피를 마시면서 마음대로 천천히 실망의 그 너머로 내려갔다. 그들은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도망가버린 것이다. 그가 만약 본능이나 무슨 상식이라도 갖고 있다면...... 그녀는 남자들이 무드를 잡거나 기회를 잡는 데 있어서 구조적으로 불능한 것에 대해 혼자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나서 좀 쉬었다. 아마 그는 제시간에 집에 돌아올 양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어쩌지? 그것을 알아내는 데 얼마나 걸릴까? 누가 그녀에게 전화를 해줄까? 십오 초 이내에 그녀는 미망인의 예측 가능한 즐거움에 다다랐다. 그래, 그러면 죽어, 돌아오지 마, 내가 상관하는가 두고 봐. 재빨리 그녀는 길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 하는 버스를 보았다. 부서진 안경. 앰뷸런스 덮개에 싸인 남자. 그리고 나서 그녀는 학교 때 친구인 마지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십 대 중반에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 그 남자는 가족을 떠나 그녀와 살림을 차리고 짐을 몽땅 옮겨 오고 그리고 이혼을 했다. 그들은 애를 가질 것에 대해 얘기했다. 두 달 뒤 그는 아주 완벽하게 정상인 채, 아주 드문 혈액병으로 죽었다. 세월이 좀 지난 후 마지는 그 느낌을 앤에게 고백했다.
"난 그를 정말 사랑했지. 나의 여생을 그와 함께 보내려고 작정했지. 내가 일을 그렇게 되게 했으면서도 사실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난 그의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그리고 그는 점점 살이 빠지고 창백해지면서 내게서 서서히 멀어져갔지. 난 그가 죽는 것을 보았어. 그런데 그가 죽은 다음 날 내 안에서 뭔가가 이렇게 소리 지르는 거야. 넌 이제 자유야.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것이었어. 넌 이제 자유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앤은 이 순간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레이엄이 지금 무사히 집에 돌아오기를 원했다. 그녀는 또 그가 버스 아래에 있기를, 지하철 철로를 가로질러 불타버린 주검으로 뻗어 있기를, 그리고 자동차의 운전대 아래 깔려 있기를 원했다. 그 두 가지 감정이 공존했다. 두 감정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일곱시쯤, 그레이엄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앤의 감정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도서관에서 찾아볼 게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믿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 그가 좋은 영화를 보았는지에 대해서도 결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미안해할 것이 있는지조차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좀 가라앉은 듯이 보였다. 그리고 목욕을 하러 가버렸다. 그레이엄은 얼마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침에 앤이 나간 다음 그는 신문을 읽고 설거지를 마쳤다. 그리고 나서 뭔가 찾아내려는 도둑처럼 집 안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그는 언제나 그의 서재에서 끝을 맺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사놓은 벨포어의 새로운 전기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요즘의 전기들이란 그가 보기에도 그렇고 또 그도 원한 바이지만 점점 더 섹스에 관한 것들이었다. 시대의 전성기에 둔감한 자들인 역사가들도 드디어 프로이트의 여과된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결국 섹스로 요약되는 것이다. 밸포어가 부부관계가 순조로웠나? 히틀러가 외동이었나? 스탈린은 침대에서도 위대한 공포였나? 그레이엄이 판단하기에 그것은 하나의 연구 방법으로 국가 문서 창고를 뒤져내는 것보다 더 큰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떤 면으로는 밸포어의 성적 불능에 대해서 좀 알고 싶었다. 그에게 필요할 것 같았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그의 더욱 근면한 학생들 중의 몇몇은 이 책을 빠르게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그는 읽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의 역사 연구에 대한 접근을 직관적인 실용주의에서 정상적 섹스로 전환시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시작 때부터 학과 전체를 너무 뒤흔들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다음 학기 학생들 전부가(그가 책을 읽지 않은 기간이 길수록 부피가 점점 더 불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밸포어의 전기를 읽는다 하더라도 그 자신, 그레이엄은 그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그 모든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학생들 중 대부분은 책 읽기 시작했을 때 이미 지루해졌거나 그럭저럭 그냥 읽어내려갔을 것이다. 그들은 시험을 위해서 서로 노트를 빌려보고 하지만 어떤 등급의 점수에도 만족한다. 교수는 겁내고 있는 학생들에게 권위라는 이름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학생들은 그 책이 분량이 많은지, 아니면 그걸 읽지 않으면 점수를 받을 수 없는지를 묻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레이엄은 처음 몇 주 동안 기운 빠지는 이름들을 던져버릴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주로 그들을 지루하게 하는 방법에 의지할 것이다. 지나친 열정은 없도록 하라. 학생들을 과도하게 흥분시키지 말라. 그는 신입생들의 수업 시간이면 스스로 말하곤 한다.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결코 알 수 없는 법이다. 밸포어 대신 그는 그의 자료철 캐비닛의 1915-19년의 서랍을 찾았다. 그 안에는 그가 정말로 함께 자고 싶은 잡지의 모델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 잡지의 대다수 여자들은 함께 놀거나 함께 섹스를 나누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손가락을 잘못 짚는다 하더라도 완벽한 대상자로 보였다. 어쨌든 어떤 잡지에서든 최소한 한 명의 최고 모델은 나오기 마련이다. 다시 되돌아가고 싶고 달콤하게 기억되고 또 길가에서 한눈을 팔 수 있는 그런 여자 말이다. 브랜디는 현재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이다. 부드러운 선을 한 얼굴에 거의 학구적인 표정의 여자였다. 정말로 한 사진에서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아마 대중적인 북클럽에서 온 책이리라. 그는 불만스레 생각했지만 그래도 안 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이 곱게 생긴 얼굴과 그 원기왕성함, 그녀의 바지를 열어 보이는 것과 같은 거친 태도 사이의 대조로 그레이엄은 언제나 강한 충동을 받았다. '브랜디가 당신을 거칠게 만들어줍니다.' 그 진부한 활자는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맞는 말이었다. 화장실에서 그레이엄은 브랜디에게 바쳐진 그 페이지만 제외한 다른 내용을 전부 다시 읽었다. 왜 그녀는 중간 접히는 부분에 있지 않을까? 그는 화가 났다. 제기랄, 연재물 <톰 존스>의 워처네임이나, 전부 수로 장식된 속옷이나 소프트 포커스보다야 훨씬 낫지 않아? 브랜디에 관해 잡지의 뒤쪽에는 아주 상세하게 밝혀놓았다. 독자 편지와 마사지룸의 광고 몇 페이지만 더 보고 브랜디 쪽으로 넘어갈 수 있어. 그는 자신에게 약속하였다. 그래, 좋아, 지금 당장. 그의 왼손이 브랜디를 찾는 동안 그의 오른손은 점점 더 신중해졌다. 그녀에 관한 페이지가 얼마나 되는지 다시 한번 알아봐. 그래, 여덟 페이지. 세 장이 양쪽으로 펴진 페이지고 앞으로 한 장, 뒤로 한 장이군. 육 페이지와 칠 페이지에 걸쳐 있는 것이 가장 멋지군. 오케이, 이제 끝까지 해보는 거야. 그래, 그녀야. 그렇지. 그리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그리고 하나, 그래, 그리고 넘기고, 그리고 세 사진을 한 번씩 천천히 사랑스럽게 보는 거야. 완벽하군. 점심 후에 그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아이 티브이(영국 상업 방송-역주) 채널을 켰다. 그는 비디오를 켜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금방 화면 정지 버튼을 눌렀다. 결정적인 이삼 초를 놓치지 않을 수 있게 하자면 이렇게 해봐야 한다. 그는 원하는 장면을 보고 녹화를 하기 위해 그전부터 한 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 앉아 무슨 연재물을 하나 보았다. 십오 초 후에 그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테이프를 전부 다시 틀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마 그는 콜린데일까지 가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아마 슬픔이 다가오지 못하겠지. 격렬한 슬픔이 어떻게 될지 이상한 일이다. 동시에 거의 행복하고 거의 슬픈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것 역시 이상했다. 아마 그동안이 행복했다면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슬픔이 다가올 차례일 것이다. 아마 그 둘은 뻐꾸기 시계의 일기예보 장치처럼 두 개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뻐꾺, 그는 생각했다. 뻐꾺. 다음에는 어떤 것이 나올 것인가?
잭은 심각한 미소뿐만 아니라 심각하지 않게 미소 짓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수가 이 발견을 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그러나 일단 차이가 발견됐다면 실패한 행동 양식이다. 그 심각하지 않은 미소란 윗니를 좀 더 많이 보이고 필요한 것보다 약간 오래 끄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다른 세밀한 차이도 있겠지만 수염 아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주말에 잭은 핸드릭 부부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새로운 진전이 없었어도 추측하느라 열심이었다. 수는 이 부부의 멜로 드라마 속의 최근 에피소드를 기다렸다. 그녀는 그들을 걱정해줄 만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금요일, 그녀의 문의에는 무심한 대답만 돌아왔다.
"이번 주에는 심리 상담이 없었어."
"그들이 어떻게 된 것 같아요?"
"모르겠어."
"그러지 말고 생각해봐요." 아마 내일 다시 얘기를 할지 몰라. 그러나 수는 잭이 보통 때보다 이를 더 드러내 보이며 그녀를 건너다보았을 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잭이 대답했다.
"내 생각에 그 얘기는 별로 재미없을 것 같군, 여보."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수는 자기가 잭을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잭은 자기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데도 항상 열심이었는데 잭이 그런 미소를 지을 적마다 그녀는, 그래,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만 머릿속으로 하였다. 언제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런 미소를 발견한 것이 잭이 바람을 피우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 발견은 그녀가 '툴리 강 흑인'이라고 불렀던 행복한 시절을 끝장내었다. 그때 수는 툴리 강 흑인이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작은 원주민 부족에 대한 글을 막 읽었는데 그때 잭의 미소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 부족들은 이 지구상에서 섹스와 임신의 관계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섹스는 마치 진흙 칠을 한다든가 뭐 그런 것처럼 그저 재미로 하는 것이고 임신은 하늘에서 신비스럽게 떨어지는 선물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뼈를 던지는 방법이나 캥거루를 죽이는 방법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믿기도 했다. 물론, 툴리 강 흑인에 대한 또다른 이론이 있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그들은 어떤 원인이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자기 부족의 잘못된 우화에 흠뼉 빠져 선심쓰는 듯한 인류학자들을 얼마나 오래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 부족은 외부 사람들이 하늘의 위대한 사녕꾼에 대해 하도 물어대는 바람에 신물이 나서 그저 이야기를 꾸며내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도 신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보다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말은 놀라울 정도로 영향을 끼쳐 그 이후 초콜릿이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계속 끊이지 않고 얻을 수 있었다. 수는 잭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얘기를 더 좋아할 것인지 짐작했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더 냉소적이었다. 여자들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그 사실을 믿는다. 이것이 그녀가 자신의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들의 결혼은 열 달 만에 사실상 끝이 났고 그즈음 그녀가 구할 수 있었던 남편의 신상 자료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실을 입증해줄 수도 있었다. 오 주 동안에 걸쳐 셔츠를 잃어버리고 치약을 사는 갑작스런 취미가 생기고 맨체스터에서 오는 마지막 기차가 취소되고 잭의 팬으로부터 오는 편지 중 한 통을 수가 읽지 못하도록 하는 문제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잭이 그녀에게 윗니를 드러내고 몇 초간 미소를 더 오래 짓고 있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다. 그 후 샤워물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심한 채 마음을 돌린 그녀에게 유일한 위로는 만약 그 툴리 강 흑인 부족이 정말로 순진했다면 인류학자들이 마지막으로 그들을 그런 이론으로 규정하려고 했을 때 그녀가 느낀 것보다 더한 메스꺼움을 느껐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처음부터 그 가짜 미소에 대해 추적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절대 묻지 말라. 그러면 마음이 덜 상할 것이고 다음번 사건까지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핸드릭 부부에 대한 잭의 마지막 충고가 무엇인지 따라잡느라고 애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의 안락의자가 심리치료 이상으로 실질적인 데 사용되었는지 어떤지에 대한 질문 같은 것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지만, 물어보았더라도 그 대답은 노였을 것이다 그주에 잭은 앤에게 약간 지분거렸다. 어쨌든 그녀는 계속 나타났다. 잭이 생각하기에 그 방문 이유가 그리 충분치 않은 구실 같아 보였다. 그는 그들의 연애관계가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앤은 모습을 드러냈고 그레이엄은 방적공장 기계처럼 자위행위를 계속하였다. 그것은 정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잭은 생각했다. 그냥 동물의 본성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서, 만약 내가 정직하지 않다면 그것은 나 스스로에 대해 진실하지 않게 되는 셈이다. 그런 생각에서 앤에게 다가가보았다. 글쎄, 가끔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예의바른 짓이 아니던가? 게다가 앤은 오랜 친구이다. 그녀는 잘못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앤을 놀라게 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떠나려 할 때 그녀를 잡고 단순히 친구간에 하는 것보다는 좀 더 정교하게 키스를 하였다. 현관문 앞에서 다시 끌어와 이층으로 올라가는 첫 번째 계단으로 데리고 왔다. 우스운 사실은 그녀가 그렇게까지 하도록 허용했다는 것이다. 조용한 동요를 뒤로 남기고 문으로 다시 가지 전까지 그의 팔에 안겨 몇 걸음을 걸어왔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른다거나 그를 한 대 때려준다거나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주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수를 바라보면서 승리의 미소를 짓던 잭은 자신이 정말로 완벽하게 정직한 남편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도대체 누가 아니라고 반박하겠는가?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에 그레이엄은 조금 놀랐을 뿐이다. 때로 그는 사진기를 감을 때, 비스듬한 손잡이가 카메라 안에서 요동치는 의혹을 그의 엄지손가락으로 전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스위치가 돌아가는 한 그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처음 여덟 장은 인화가 되었다. 앤이 농장에서 양을 잡고 찍은 장면과 카르카손 성벽 옆에 붙어 있는 농가 장면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앤이 그 사진들을 재미있고 더러는 아주 예술적이라고 했지만 그레이엄은 잠자코 있다가 모두 버렸다. 필름도 몽땅 버렸다. 좀 지나서 그는 후회했다. 그는 여행 다녀온 것을 놀라울 정도로 기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우 오 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는 여행 동안 즐거웠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서 행복했는지 그 시각적 증거 없이는 그런 감정의 기억이란 소용없어 보였다. 심지어 희미한 사진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앤의 영화 위에 잡지가 겹치다니? 그의 두뇌 위에 몇 개 장면이 갑자기 그를 시각적으로 반응하도록 스위치를 돌린 것인가? 그런데 글로만 살아온 마흔이 넘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떤 단계에 이르러 그 부드러운 상자가 그냥 지쳐버린 게 틀림없었다. 만약 머릿속에 근육이란 게 있다면, 떨어져 나가버렸거나, 지쳐서 적절하게 작동하기를 멈춘 것이다. 그레이엄은 노화 현상 연구가인 동료 벨레이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흔 나이에? 인식의 그런 전환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뭘 집어넣어 답을 얻어내는 것으로 써오던 기계처럼, 흔히 두뇌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마치 머리가 사람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스스로 모든 것이 아주 잘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스스로 생명을 가진 머리가 갑자기 배의 키를 틀어버렸다. 우리의 두뇌가 갑자기 우리의 적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하지?
9. 가끔 담배는......
파티를 열자고 제안한 것은 앤이었다. 한 가지 이유. 파티를 열면 파출소처럼 느껴지는 집안 분위기가 좀 가실 것 같았다. 그리고 파티는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그들의 일상적인 저녁 시간을 바꿔 놓아줄 것이다. 요즘은 빙 둘러서 말하는 불만 섞인 대화와 침묵 속에서 한잔하는 저녁 시간이 지나면 그레이엄은 조용히 그의 서재로 물러갔다. 앤은 거실에 앉아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본다. 그러나 주로 그레이엄이 아래층으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금속 테이블 앞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하였다. 담배 냄새가 절어 있는 공기로 숨을 쉬며, 문을 열고 두 명의 그레이엄이 함께 들어오는 상상을 하면서. 한 사람은 그저 앤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상냥한 그레이엄이었고 또 한 사람은 어깨를 툭 건드리는 것만으로 공포에 떨게 만드는 난폭하기 그지없는 야만스런 그레이엄이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그레이엄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부엌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그녀는 얼음이 술잔으로 들어가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끔 두 잔일 때도 있었다. 만약 잔이 두 개이면 그때는 그레이엄의 기분이 괜찮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중얼거리면서 그녀에게 잔을 건네곤 하였다.
책상과 침대 사이에서는
한잔 술이 큰 도움이 된다네.
그리고 나서 그녀 옆에 앉거나 아니면 함께 별로 좋지 않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거나 하였다. 아니면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녀는 자기를 사랑한다는 등의 말을 듣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것은 마치 덤으로 느껴야 하는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자주 계단을 내려오는 이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한 손에만 잔을 든 쪽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죄가 뭔지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곧장 걸어가 마치 심판관인 양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레이엄이 그런 기분일 때면-주로 사흘 밤 중에 이틀은 그랬다-앤에게 그의 끔찍한 꿈 얘기, 강간과 절단과 복수의 꿈을 반복하고 그 이름들을 줄줄 꿰면서 앤에게 욕을 퍼부었다. 가끔 그녀는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는지 그냥 그녀에게 겁을 주려고 지어낸 것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항상, 심지어는 가장 흉포한 저녁때라도 그는 결국 기진맥진해 떨어졌다.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반 후에 그녀가 자신의 잔을 계속 채우러 가고, 그레이엄은 그보다 더 자주 왔다 갔다 하고서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들을 주워섬기면서 그녀를 취조하고 나서는 갑자기 조용해지고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을 침범한 눈물은 렌즈를 가득 채우고 갑자기 쏟아져 그의 두 뺨과 코 양쪽을 타고 내려왔다. 그는 보통 때의 두 줄기 대신 네 줄기 눈물로 울었다. 그래서 두 배로 더 슬퍼 보였다. 나중에 그레이엄은 그의 이해하기 어려운 분노는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고 모두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말하곤 햇다. 그것은 그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자기는 앤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앤은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를 떠난다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둘 모두 그가 정상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잭이 지나가는 말로 앤에게 정신과 의사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얘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려면 좀 더 거만하거나 혹은 좀 더 불안해야 할 것이라고 앤은 생각했다. 더 비정상이거나 덜 영국 사람 같아야만 할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결혼생활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딸꾹질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앤은 생각했다. 심한 딸꾹질, 백일해 같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레이엄과 앤은 둘 다 결국은 이것을 극복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아직은 외로운 과정이다. 잭도 최근 들어, 특히 그녀가 그의 집 계단 참에서 일을 외면한 이후 그의 시간을 투자하는 데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대부분의 밤을 앤은 그레이엄의 울음을 견디어내다가 그 저녁의 끝에 이르러서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침대로 데리고 가서 슬픔으로 탈진한 몸을 함께 누이곤 하였다. 등을 서로 맞대고 나란히 누운 그들의 모습은 마치 무덤 속에 누워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앤은 손님들의 명단을 예의 신중하게 살폈다. 잭은 와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역사가 다시 씌어졌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하여튼 몇 잔의 술이 들어가면 그녀에게 집적댈 가능성이 있는 남자들은 안된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어쩌면 아주 싱거운 파티가 될 것 같았다.
"무슨 파티라고 하지?" 그레이엄이 점심을 먹은 후 물었다.
"아무런 핑계가 없잖아? 그지? 아마 사람들이 물어볼 거야. 파티란 언제나 무슨 일이 있으면 하는 것이잖아?"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파티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는 없을까?"
"그럼, 우리 결혼기념일이나 뭐 그런 걸로 하면 되죠." 점심 후 집 안을 치우면서 앤은 집을 정리한다는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모든 참고 자료를 비워내고 가능한 한 공공장소처럼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다. 앤은 파티에 대해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댈 것인지에 대해 곰곰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자기 부부에게 잘못된 점이 아무것도 없음을 은연 중 드러내자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잭을 제외한 그들 친구 중 누구도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으리라고 눈치챘거나 의심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앤이 문을 열어준 첫 손님은 잭이었다.
"자, 조개를 하나 찍어주시죠. 어, 어, 저런 벌써 다 끝났네. 그렇지?"
"잭, 일찍 오셨군요. 그레이엄은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젠장, 나도 준비는 안 됐지. 그런데, 얼마 전에 말이야. 이 전자시계를 샀거든. 그런데 이놈의 스물네 시간 시스템을 나는 이해를 못 하겠군. 열 시간을 뺐더니 사람들을 두 시간씩 기다리게 했어. 그래서 이젠 확실히 열네 시간을 빼기로 했어." 잭은 별로 믿기지 않는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말소리도 그랬고 모습도 좀 불안정하게 보였다.
"사실, 모든 일이 잘되어 가는지 보려고 좀 일찍 왔지. 그런데 무슨 일로 파티하는 거야?"
"아, 결혼기념일이에요."
"아주 좋군."
"그렇죠."
"음, 그런데 그건 아니지?"
".......?"
"내 말은 결혼식 날 나도 갔었다는 거지."
"저런, 잭. 내가 처음 속여보려고 한 사람이 하필...... 아, 미안해요."
"다시 써야 할 역사가 좀 더 있군. 응?"
"글쎄요."
"걱정하지 마. 비밀을 지킬게. 그런데 그...... 이유가 뭐야?"
"잭, 당신은 한 번도 그냥 지나가는 게 없군요?"
"아니 항상 쉽게 지나치려고 하지......"
"오늘 저녁엔 좀 점잖게 있으면 좋겠군요."
"아, 흐름을 잡아라, 그 말이지? 그래도 아직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그렇지?"
"와인을 따놓는 일부터 시작하면 되겠군요."
"예, 알았습니다. 사모님." 잭은 한동안 매우 불안해 보였다. 주로 그는 자연스레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감정이 넘쳐 흘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항상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바로 그가 사회적으로 꽤 유용한 인물이라는 이유였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를 원하지 않은 다음에야 입을 다물고 있어도 절대 실례가 안 된다는 안도감을 주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잭이 와인병 마개를 따는 방법은 아주 남자답고 힘찬 것이었다. 그는 공기 주입식 병따개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병아리용 자전거 펌프라고 불렀다. 그는 병목에 맞게끔 걸쳐두고 돌릴 손잡이가 나오는 나무로 된 수축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레스토랑의 웨이터들이 흔히 사용하는 콕스크류 레버식 병따개도 쓰지 않았다. 지렛대를 이용해 당기는 방법은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가 쓰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고 오래된 방법, 즉 나무 손잡이로 된 스크류식 병따개였다. 그의 연기는 세 단계로 벌어지는 의식 같았다. 첫째, 병따개를 허리 높이의 식탁이나 식기장에 놓고 병마개에 꽂는다. 둘째, 병을 병따개만으로 집어 들어 올려 두 발 사이 안쪽에 살짝 낮춰 넣는다. 셋째, 두 발로 병 아랫부분을 꼭 밀착시키고 왼손은 병목을 잡은 채로 길게 단 한 번 만에 마치 잔디깎기 기계에 발동을 걸듯이 당기면서 코르크 마개를 뽑는다. 오른손에는 그 코르크 마개를 마치 전리품인 양 높이 쳐들고 약간 늦지만 거의 동시에 왼손은 병을 들고 처음의 높이로 다시 천천히 돌아온다. 잭이 생각하기에 그 행위는 자연적인 힘을 우아한 행위로 다듬는 예술이었다. 부엌에서 그는 혼자 와인병을 여섯 개나 땄다. 그레이엄은 잭이 일곱 번째 병의 호일 껍질을 벗기고 있을 때 들어왔다. 호일 종이를 사과 껍질같이 길게 하나로 해서 벗겨내는 것도 그가 부릴 수 있는 요술 중의 하나였다.
"마침 제때에 오는군." 그는 그레이엄에게 큰 목소리로 말하고는 이내 그의 삼 단계 행위로 들어갔다. 그가 코르크 마개를 따자 그레이엄이 생각하기에 분명 메아리 같은 퐁 하는 소리가 났다. 잭은 혼자서 와인병을 응시하며 슬며시 웃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나쁜 바람이군." 그레이엄은 그가 여자들 앞에서도 방귀를 뀌는지 궁금했다. 쉽게 물어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여자들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걸 어떻게 물어보겠는가. 왜냐하면 그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새삼스레 잭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농담이란 직접 그의 입에서 듣기보다는 잭이 남과 이야기할 때 옆에서 훔쳐 듣고 혼자 음미해야 제맛이 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꾸는 그저 낮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레이엄이 '시원하겠군' 하자 잭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처음 이십 분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들 셋은 거실이 격납고 크기로 부풀어 오를 동안 앉아서 기다렸다. 그리고 마치 교통 체증이 갑자기 풀린 것처럼 손님들의 절반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코트가 여러 벌 침대 위에 곱게 얹히고 마실 것이 오고 서로 인사를 하는 동안 손님들의 눈은 재떨이와 재떨이 비숫한 것들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티는 저절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주인을 손님인 양 취급하고 술잔을 서로 채우고 음식들을 가져와 권했다. 앤은 손님들을 서로 섞이게 하기 위해 잭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레이엄은 한 손엔 포도주병을 들고 다른 손에는 위스키 잔을 들고 빈둥거리며 돌아다녔다. 소음의 정도가 보통 파티 때처럼 상당히 올라갔다. 사람들이 더 온 탓이 아니라 모두들 제멋대로 통제할 수 없는 기분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잭은 늘 이런 건전한 소용돌이의 맨 앞에 있었다. 그는 앤에 비해 아주 평범하게 생긴 두 명의 모델 아가씨에게 계속 관심의 눈길을 주며 여덟 발쯤 떨어져 있었다. 전원풍의 트위드와 트렌치 코트 광고에 주로 나오는 작달막한 여자들이었다. 그렇지만 모델들이란 모두 카멜레온 같은 존재들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스스로 아주 날씬하고 매력 있게 보이도록 잘 처신할 수 있었다. 얘기를 하고 있다가 잭은 앤과 눈을 맞춰 윙크를 보냈다. 그 모델 아가씨 중의 한 명이 돌아섰다. 앤은 고개를 끄덕이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마주치진 않았다. 잭은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수녀의 놀이 기구를 한 대 태우시지요." 잭은 가느다란 여송연을 꺼내며 의기양양하게 웃어제꼈다. 앤은 그가 그전에도 그 문구를 써먹었는지 궁금했다. 그가 언제나 얌전빼는 여자들에게 더욱 험한 농담을 한다는 것을 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쯤 시가를 피운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흥미있을 만했다. 하지만 그 담배 속임수란 이번 여자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 접근 방법이란 것을 알았어야 했다. 좀 더 독자적인 뭔가가 필요하였다. 잭은 담배를 피우듯이 시가를 그럴듯하게 피우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아주 볼 만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는 별 어려움 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술잔을 채우려고 한 바퀴를 돌고 있던 앤이 잭과 그 두 모델 아가씨들에게로 점차 가까이 다가갔다. 잭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 중 한 구절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들렸다.
"역시 좋은 시가는 연기 맛이지. 그렇지만 키플링(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역주)에게만 그렇다는 거지. 키플링 좋아하세요? 아, 모른다. 한 번도 못 본 사람이다. 알겠어요. 아니, 시가와 여자에 관한 한 키플링은 틀렸지. 그렇지 않습니까?(그의 의문형은 언제나 수사법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선 정말은 프로이트지, 그렇지요?" 모델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이 문제에 관해 프로이트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들은 몰랐다. 프로이트는 그들에게 그저 아주 기초적인 것 몇 가지만을 의미했다. 뱀과 무엇이든 진짜 섹스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 이외에 그녀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엉덩이에 관한 것이라고 그들은 예견했다. 그들은 얼마간 예상을 하면서 킥킥거리며 잭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발뒤축을 두드리며 엄지손가락을 가죽조끼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시가를 의미심장하게 위아래로 흔들다가 길게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프로이트가 말하기를,"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가끔 시가란, 그저 시가일 뿐이다." 놀라움과 안도감을 뒤섞어 두 모델 아가씨들은 소음의 정도를 높여가며 깔깔거렸다. 앤은 그들과 함께하려고 가까이 갔다. 잭이 앤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그녀를 반겼다.
"어서 와요, 내 사랑." 바로 옆에 그녀가 서 있었지만 그는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리고는 팔을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앤은 고개를 돌려 그러지 말라고 속삭였다. 잭은 앤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 고개의 움직임을 쫓아갔다. 키스하려는 표정으로 고개를 틀어 어깨 너머로 와락 덤벼들었다. 앤은 마지막 순간에 그의 입술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뺨 위로 시가 연기 가득한 수염이 스치고 있었다. "잭." 그녀가 속삭였다. "내 생각에 이 팔은 좋지 않은 생각이에요." 그녀가 부탁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지만 모델 아가씨들은 잭이 얼마나 빨리 팔을 내려놓는지 눈치챘다. 거의 멋진 열병 행진의 흉내 같았다.
"프로이트에 관한 것은......" 앤은 웃으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잭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확실한지(여자가 크라우트 스트라세를 걸어가 검은 모자를 산다. 늙은 주책바가지 주인은 그녀가 남편이 죽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오천 크로네를 매긴다.)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환상인지에 대해 그가 미리 마련해둔 연설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신과 진료를 받는 사람들의 치료 비용이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다라든가, 인간을 이해하는 과학의 용어로 얘기해보건대 역시 소설가의 이론이 훨씬 더 성숙되고 더 정제된 것이라는 등, 그의 안락의자에 한두 시간 혹은 그 이상 누워서 그에게 연수 자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이들은 누구든지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등, 그렇게만 해주면 어떤 역할이든, 어떤 게임이든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준다든가 하면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여기에서 장난꾸러기 같은 윙크를 보낸다)은 잭을 벌거벗기는 게임이라는 등 등의 얘기를 늘어놓겠지. 앤은 손님들의 잔을 채운 후 분위기가 처져 있는 방 한쪽 구석에도 활기를 불어넣은 뒤 그레이엄을 찾았다. 거실에서도 그를 보지 못해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뒤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니 노년학 연구가인 베일리였다. 그레이엄의 동료인 그는 개인적으로는 부자이면서도 언제나 가능한 한 초라하게 보이게 입고 다녔고 또 그것은 늘 성공했다. 집 안에서도 여전히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긴 머리카락은 비듬이 아니라면 벌써 세었는지 하얗게 보였다.
"내장을 좀 구워 먹어볼까 해서요." 그는 뭘 훔치려다 들킨 사람의 표정처럼 냉장고를 보면서 말했다. "편하게 드세요." 앤은 불필요하게 말했다. "그레이엄 보셨어요?" 베일리는 그저 머리를 내젓고는 계속해 고기를 싼 비닐 포장을 벗겨내고 있었다. 아마 소변을 보러 갔겠지. 몇 분간을 기다려보았다. 그리고 또 몇 분간 더 기다렸다. 아마 화장실에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지. 그다음 그녀는 서재로 올라가 그의 방문을 작은 소리로 두드리다가 손잡이를 열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 그는 숨어 있지 않았다. 얼핏 정원 쪽을 내려다보았다. 프랑스식 거실 창문으로부터 불빛을 받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구석 저쪽 끝에 그레이엄이 바위 위에 앉아 집 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와 거실의 커튼을 둘렀다. 부엌으로 돌아왔다. 베일리는 한 손에 포크를 들고 프라이팬에서 반쯤 익은 닭간을 찔러보고 있었다. 그녀는 접시를 들고 팬에서 익은 고기를 몇 점 찍어 넣고는 그의 손에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거실 쪽을 향해 일부러 무책임한 듯 들이밀었다. "한 바퀴 좀 돌려주세요, 베일리씨." 그녀는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부엌을 통하는 옆문으로 해서 정원으로 나갔다. 그레이엄에게 다가가 보니 그는 큰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왼쪽 구두는 관목숲에 구겨져 들어가 있었고 그의 두 발에 꽉 끼어있는 것은 반쯤 빈 하이그 술병이었다. 그는 이제는 커튼이 쳐진 프랑스식 창문 쪽을 향해 희미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높고 낮은 파티장의 소음이 이곳에서는 잔잔하고 평이한 밴드의 소리로 들렸다. 앤은 그레이엄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전 어느 때보다도 더 초조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갈등은 중간 톤의 아주 프로다운 목소리로 저절로 풀렸다.
"그레이엄,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취한 거예요?" 그는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금방 대답하지도 않았다. 가끔 그는 삶이 그냥 이런 것으로만 채워져 있는 듯 느껴졌다. 아내는 언제나 남편에게 공격적인 어조로 묻는다. 바바라와의 십오 년간 그랬다. 앤을 만났을 때, 그는 그런 것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시작되는 듯이 보였다. 왜 그를 평화롭게 놔두지 않는 것일까?
"그래, 취했지." 그는 마침내 대답했다. "그냥 취했어. 아무 일도 없어."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아, 문제라. 문제는 아내가 친구와 키스하는 것을 본 것이지. 문제, 문제. 친구가 마누라의 ......를 두드리는 것을 뒤에서 본 것이지. 문제야, 문제." 그랬군. 어디에 서 있었던 거지? 그러나 하여튼 왜 이놈의 파티에서 잭이 그녀에게 키스를 하는 일이 일어난 걸까? 어렵긴 하지만 그녀는 간호사 같은 음성으로 자신을 지탱시켰다.
"그레이엄, 난 잭을 만나 기뻤고 또 그가 파티가 잘 되도록 노력을 해주는 것이 고마워서 키스한 것뿐이에요.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예요. 그가 팔을 내게 두른 것은 그가, 그러니까 그가 잭이니까 그런 거죠. 난 그를 디아나와 조아니와 함께 두고 자리를 나왔어요. 그는 혼자서도 잘하니까요."
"아, 미안하군, 미안해. 내 실수야. 난 파티에 충분히 도움이 못 됐지. 잭이 도왔지. 잭은 도와준 대가로 마누라의 엉덩이를 두드릴 수 있게 되었군. 좀 더 조심했어야지. 잭 이 친구, 문제라?" 그는 하이그병을 높이 들었다.
"아무 문제 없어. 문제는 사라졌어. 마누라가 도와준 놈에게 키스를 한다. 문제는 사라졌어. 모두 사라진 거야." 앤은 자신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는 하이그병을 집어들고 집 쪽으로 몇 걸음 뒷걸음질을 치면서 잔디 위에다 부어버렸다. 그녀는 뒷문을 닫고 잠갔다. 그녀는 양손에 와인병을 하나씩 들고 다시 거실로 나타났다. 마치 그 동안 자리를 비운 것을 변명이나 하둣이. 그녀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레이엄이 너무 과해서 이층에서 잠들었다고 말했다. 그 소식은 점차 퍼져 잠자코 미소를 지은 몇몇 사람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잭은 디아나와 조아니를 떨어지게 하려고 노력하더니 결국 그 둘과 함께 떠났다. 그레이엄이 정원용 갈퀴로 거실 창문을 깨고 들어왔을 때는 손님이 겨우 세 명 정도 남아 있을 때였다. 그 갈퀴의 끝은 처음에 미끄러져 창틀을 빗나갔다. 그래서 그는 손잡이를 거꾸로 하여 유리창을 깨뜨렸다. 그리고 깨진 부분을 찬찬히 넓게 부수어 몸을 구부리고 들어올 만큼 구멍이 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창을 던지듯 갈퀴를 정원 쪽으로 휙 내던졌다. 갈퀴는 툭 걸리더니 핑글 돌아 땅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앞에 걸린 커튼을 겉어 제치고 그레이엄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몸을 일으켜 불빛에 눈을 껌뻑이면서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아내와 그의 동료 베일리와 만난 기억이 통 없는 젊은 커플을 보았다. 그중 남자는 미친 도둑일 경우 뎐지려고 포도주병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와인이 그대로 들어 있는 새 병이었다.
"주의하게, 그런 물건으로는. 지금 두 시 이십오 분이야. 이왕 던지려면 백포도주로 하지." 그는 휘청거리며 안락의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마 그의 행동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 그는 말을 꺼냈다. "문이 잠겼거군. 미안, 미안해. 열쇠가 없어서 말이야." 앤은 손님을 현관문으로 몰아갔다. 과로했어요. 파티에 너무 신경을 썼어요. 너무 많이 마시기도 했고요. 딸이 몸이 안 좋아서요.(그녀는 이 말을 급히 생각해냈다.) 길에 내려선 베일리가 아주 근심스런 표정으로 돌아서 주교가 축복을 내리듯이 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뒤섞어서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베일리 씨. 제가 잘 알아서 할게요." 그녀는 안으로 들어와 셀로판 테이프와 신문지를 가져다 창문에 기워 붙였다. 그리고는 잔에다 위스키를 한 잔 가득 따랐다. 그레이엄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는 위스키를 쭉 들이마셨다. 그레이엄은 술에서 깬 듯 아주 조용했다. 아마 그는 유리창을 깨고 들어왔을 때 일종의 연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보다 자신이 더 취한 것처럼 해서 손님들 앞에서 앤의 입장을 좀 더 낫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참으로 이상한 배려였다. 삶의 원인과 결과는 얼마나 이상한가. 앤은 생각했다. 잭이 나의 엉덩이를 만지고 그레이엄은 창문 너머로 정원 갈퀴를 던졌다. 이런 것에 대해 논리적 반응이란 무엇인가? 아니면 더 큰 인과관계인가. 몇 년 전 난 혼자서 보통의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가졌지. 그런데 그때는 알지도 못했던 남편이 나의 그 즐거웠던 시간 때문에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다. 그녀는 그레이엄이 원래는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그녀의 친구 모두가, 특히 여자친구들이 동의한 바이다. 그는 자상하고 똑똑했다. 섹스를 나눌 때에도 그는 으스대거나 뽐내며 위세를 떨치지 않았다. 그 점이 바로 친구들이 말한 것에 대해 그녀가 기꺼이 동의한 바였다. 바로 이전까지는 그랬다. 이제 서서히 그레이엄은 한때 그랬던 것처럼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보이기를 중단했다. 그녀는 그가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남자로 변했다. 자기 배우자의 감정을 엉망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그런 감정 변화에도 스스로 놀라는 그런 남자들 말이다. 그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돼 버렸다. 그 무대의 중앙으로 자신을 옮겨가도록 그는 얼마나 냉혹하게 처신을 했는가. 그녀는 약자의 독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녀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는 역시 좋은 사람들의 전횡에 대해서도 차차 알게 되었다. 착한 이들이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악한 이들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레이엄은 그녀에게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수동적인 인간의 독재. 지금 그가 연습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그녀는 뼈저리게 잘 알게 되었다.
"그레이엄." 그녀는 그가 창문을 깨고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당신 언제 사창가에 가본 적 있어요?" 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지? 물론 그는 한 번도 사창가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 말에서 곰팡내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는 수년간 그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 말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와 친구들, 대부분 동정이었던 친구들은 서로 헤어질 때마다 큰 소리로 "그럼, 그 사창가 근처에서 보자" 하면서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러면 반대편에서는 "메이지네 아니면 데이지네?" 하고 되받아 소리쳤다.
"물론 안 가봤지."
"그러면 사창가에서 주로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난 그것을 어디에서 읽었는데요." 앤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 말을 내뱉기를 미루면서 사디즘에 가까운 뭔가가 깜빡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레이엄은 말이 없었다. 그는 술잔을 옆으로 옮겨놓으면서 기다렸다.
"사창가에 가면요, 어떻게 하냐 하면, 이건 어디까지나 그 여자들이 아직 그렇게 하고 있을 경우에 말이지만, 가끔 어린 여자들이 작은 피 주머니를 만들어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내 생각에 닭의 피 같은 것인데 아무래도 상관없죠 뭐. 중요한 것은 그 주머니가 아주 얇은 물질로 만들어졌다는 거지요. 요즘은 폴리에틸렌으로 그것을 만들 거예요. 아니 아닐지도 몰라요. 내 말은 폴리에틸렌은 사실 좀 두껍잖아요, 그렇지요?" 그레이엄은 계속해서 기다렸다. 그의 머리는 이제 아주 맑아졌다. 팔이 좀 아프긴 하지만.
"그리고 그 여자는 주머니를 거기다 집어넣고 다른 여자들이 양초로 입구를 살짝 막아주는 거예요. 그러고는 처녀인 척 몸을 파는 거예요. 만약 너무 나이 들어 보이면 수녀원에 있다가 방금 나왔다는 등 그런 말을 하지요. 가끔 분위기를 돋우려고 수녀 복장을 하고 나와요. 그리고 손님들은 그 양초칠 한 것을 밀어붙이는 거죠. 분명히 좀 등급이 높은 창녀촌에서는 밀랍을 사용하였을 거예요. 그리고 여자는 소리를 지르고 움찔한 다음 허벅지를 쪼그려서 그 주머니를 터뜨리죠. 그리고 흐느끼고 과장스레 무슨 소리를 중얼거려 남자들에게 뭔가 정복한 것 같은 강한 느낌, 무엇보다 처녀를 정복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죠. 그러면 남자들은 아주 넉넉히 팁을 두고 가죠. 왜냐하면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 때문에 돈을 아껴온 것이고 마침내 손에 넣게 되었다는 느낌에다 또 여자들이 정신적으로 그를 괴롭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죠." 그레이엄은 다음에 올 말이 무엇이든 간에 그 말을 들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하면 더 비싸지요. 닭의 피가 침대 시트를 엉망으로 할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경우 어쨌든 남자들은 처녀를 사기 위해 돈을 더 쓸 거 아녜요? 내 생각엔 그 사창가가 세탁소와 거래를 해서 좀 싼 가격에 빨래를 맡길 거예요. 그 세탁소는 그 망칙한 시트를 다 빨아야 하겠지요, 그렇지요?" 앤이 그렇게 도전적으로 나오고 싶어 하는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그레이엄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울컥하고 말이 막히기도 하지만 생각은 쉽게 말이 되어 나왔다. 그런데 자꾸 망할 울음이 나온다. 망할 울음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난 그 세탁소가 실제로 창녀들과 그런 거래를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요. 그리고 그들이 별도로 표백제를 사용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들이 '자, 여기 창녀촌에서 나온 시트야. 표백제로 얼룩을 빼내야지.' 그레이엄, 그들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들이 뭐랬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보통 시트처럼 그냥 빨았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냥 한데 모아서 씻고 무슨 흔적이 남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앤은 일어나 그레이엄의 의자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계속해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말했다.
"응."
"응이라니 무엇에 대해서죠? 난 당신한테 질문을 많이 했어요. 어떤 질문에 대해 당신이 친절하게도 대답을 하신 건가요? 당신이 사창가에 가본 적이 있느냐는 데 대한 예스인가요? 맞아요?"
"아니, 난 그냥, 그게 뭐지?"
"뭐라니요? 아, 무엇이냐고요? 글쎄, 당신이 뭔가를 알아차린 것 같아 무척 기쁘군요. 자, 무엇인가 하면, 그레이엄. 무엇인가 하면 말이죠. 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우리도 곧 저녁 식사거리로 닭고기를 살 것이거든요. 호스를 대고 물로 전부 씻어낸, 박박 문질러 씻어서 닭맛을 내려고 거기다 무엇을 집어넣은 그런 것 말고 진짜 닭, 당신 알지요? 진짜 암탉 말이에요. 암탉, 깃털이 있고 다리도 있고 머리에 빨간 벼슬도 있는 것 말이에요. 그리고 나서 당신이 닭을 갈라서 베어낸 다음 피를 좀 받을 수 있겠죠. 그리고 양초도 함께 녹여서, 어느날 밤, 아주 특별한 밤에, 난 당신의 처녀가 될 수 있어요. 그레이엄, 좋아할 거죠? 그렇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아래쪽만 내려다보았다. 앤은 그의 머리 위를 노려다 보았다.
"난 당신의 처녀가 될 수 있어요." 그녀는 되뇌었다. 그레이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내려 그의 머리칼을 만졌다. 그는 따가왔다. 머리를 치웠다. 그녀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처녀가 돼드릴 수 있어요." 그레이엄은 천천히 일어나 아내를 지나갔다. 아내의 몸을 스칠까 피하면서, 특히 그녀의 눈길을 피하면서, 그리고 다시 거실 탁자를 지나갔다. 그는 계속해 카펫이 깔린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안전하게 문까지 다다랐다. 그리고는 걸음을 빨리하여 이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의 문을 잠그고 의자에 앉았다. 그날 밤 내내 그는 침실에 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그 달콤한 시간이 시작된 이후 일어난 일을 전부 생각하였다. 왜 기억은 없앨 수 없는가? 어제를 회상해보자. 그는 소리 죽여 혼자서 흐느꼈다. 새벽 네 시쯤 해서 그는 잠이 들었다. 꿈꿀 시간도 없는 짧은 밤이었다.
10. 스탠리 스펜서 증후군
몇 년 전 그레이엄은 동물학 분야에서 아주 인기 있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인용하였고 어떤 이들은 그것에 푹 빠지기도 했다. 그 책은 앞부분에서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하더니 뒷부분에서는 인간이 동물과 매우 다르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격세유전의 전율을 안겨주었고 그다음에는 격려의 말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그 책은 수백만 군이 팔려나갔다. 그레이엄에게는 좀 더 상세하게 기억되는 게 있다. 인간이 영장류 중에 가장 큰 두뇌를 가졌다는 사실 말고 또 가장 큰 페니스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이 사실은 그에게 아주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직 바바라로부터 매일 괴롭힘을 받고 있을 때였다. 계속해서 게걸음으로 그녀로부터 멀어져가려 했지만 언제나 모래밭에 걸려 넘어지곤 하였을 때였다. 이제 그 말이 이해가 되는 듯하다. 아주 조그만 음경을 가진 큰 고릴라가 그레이엄의 학생들 중에 가장 약골인 학생보다 못하다는 말이 더 이상 역설이 아니었다. 몸 크기는 능력이나 욕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골칫거리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고분고분하게 시키는 대로 기대하지 말라고. 물론 한편으로는 섹스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과거의 섹스, 역사 속의 섹스란 그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섹스는 완전히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문제가 되었다. 그레이엄은 이런 현실이 도대체 어떻게 변해나갈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런 문제는 오래 전 그의 머릿속에서 그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미 결정되었을 뿐이었다. 꺼림칙한 역사와 가족 배경과 그의 부모가 서로 상대방을 선택함으로써 졍해진 것이다. 유전인자의 독특한 결합에 의해 억지로 떼밀린 거나 다름이 없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잭은 그레이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였다. 그레이엄은 언제나 그의 친구는 폭넓은 경험과 선험적인 냉소주의로 사물에 대해 훨씬 더 통달해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규칙은 그전에 훨씬 일찍 정해졌다. 예를 들어, 잭의 주차 위반 벌금 이론은 그레이엄이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그의 행동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였다. 한 번은 그레이엄이 그를 찾아갔을 때 잭은 '최대한 훔치고 최대한 친절하라'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네도 꼬리가 잡히지?"
"아니, 아주 주의를 하지. 저 벽장 속에 잠깐 숨어 있을래요, 하는 따위는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아. 그건 애들에게나 맞지. 내 나이엔 지나친 모험이 부담이 되지."
"수에게 꼬리를 잡힐 때도 있지? 안 그래?"
"좀 그렇지. 약간은. 내가 잊어버리고 셔츠를 안으로 집어넣지 않았을 때라든가."
"그러면 자네는 그때 어떻게 하나?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나?"
"주차 벌금 원칙을 이용하지."
"......"
"주차 미터기가 처음 나왔을 때 기억하나? 그것은 가장 최근의 기술이었지. 컴퓨터에 의해 벌금이 부과되지. 기억해? 티켓이 아주 많이 쌓인 것이 우연히 발견되더라도 가장 최근 것만 지불하는 것이야. 컴퓨터는 자동적으로 그전 기록을 모두 지우게 되지. 그게 바로 주차 벌금 이론이라는 거야. 가장 최근 것만 들려주면 돼. 그러면 그전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을 안 하지." 잭은 그 말을 냉소적으로도 하지 않고 불명예스럽게 하지도 않았다. 그런 속임수를 아주 즐기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것이 일이 어떻게 되어 왔는지, 잭이 어떻게 해왔는지, 그리고 그레이엄은 어떻게 그럴 수 없는지에 관한 이유가 된다. 그레이엄이 찾아다니던 확실한 증거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한 방법으로 다가왔다. 그는 오데온 할로웨이의 극장에서 이번 주 들어 세 번째로 그의 아내가 토니 로고찌와 화면상에서 정사를 벌이고 있는 <황금을 발견한 바보>라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로고 찌는 돼지치기를 하는 보통의 이태리 남자로 분해 연기하고 있었다. 그 돼지치기는 주말에는 금속 탐지기로 고향마을의 농경지를 탐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희귀한 옛날 동전이 든 상자를 발견하여 그의 삶은 달라졌다. 그는 돼지 떼도 버리고 종교도 버리고 나서 루렉스 양복을 사 입었다. 자신의 우스꽝스런 이태리 억양을 버리려고 애쓰면서 그는 가족과 약혼녀와 멀어져갔다. 그는 나이트클럽에서 그레이엄의 아내를 만나 같이 자고 부모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돈을 쏟아부었다.
"그 여자는 널 거덜 낼 거다, 얘야." 그의 아버지는 포크 가득 스파게티를 감아올리면서 그에게 타일러주었다. "그리고 나선 널 헌신짝처럼 차버릴 게야." 그러나 토니는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비싼 선물을 갖다 바쳤다. 그녀는 선물을 받을 땐 좋아하는 척하고서는 금방 되팔았다. 그러나 그가 동전을 모두 현찰로 바꿔 그의 고향을 영원히 등지려는 찰나 그의 부모는 두 명의 방문객을 맞게 된다. 그중 한 경찰은 그 동전이 모두 도둑맞은 것이라고 한다. 앤의 늙은 엄마는 자식이 어리숙한 이태리 사내의 껍질을 벗기는 것을 자랑하고 다니고, 남자를 호려 돈을 빨아먹는 년이라고 사심 없이 떠들어댔다. 안된 일이긴 하지만 현명하게도 그는 그의 가족과 약혼녀, 그리고 돼지우리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토니가 약혼녀와 함께 그 금속 탐지기를 부수고 있는 데서(아담과 이브가 뱀을 토막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그레이엄은 했다) 오데온 할로웨이 극장 안에 있던 이태리 사람들은 큰 소리로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질러댔다. 관객들이 도덕적인 교훈에 빠져들어 가는 동안 그레이엄은 실질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로고찌가 레스토랑 한구석에서 방금 받은 보석으로 치장한 앤 앞에 꿇어앉아 촛불에 비친 그녀의 앞가슴을 목이 타게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잠시 타락한 돼지치기 청년은 속삭였다.
"안젤리카."(이것은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아니었다. 그 남자를 속이려고 지어낸 것이다.) "안젤리카, 나도 우리 고향 친구 단테처럼 당신을 위해 시를 한 편 썼지. 그에게 베아트리체(그는 이 이름을 마치 그가 제일 좋아하는 파스타처럼 발음하였다)가 있었다면 내게는 나의 안젤리카가 있지." 그래 그거야. 그레이엄은 극장을 나오면서 생각을 해냈다. 그 연애가 1970년과 1971년에 시작되었다면 직접 살펴볼 수 있는 다섯 가지 중요한 자료가 있다는 거지. 잭은 그것을 그냥 조용하게 덮어둘 친구가 아니야. 처음부터 그는 단순히 작가가 될 만큼 충분히 창의적이지 않지. 그는 만약 짧은 장면의 버스 차장 얘기를 쓰고 싶다 하더라도 버스를 한 번도 타보지 않고는 그 장면을 써낼 수 없어. 버스를 타보고 나서도 그의 소설에 나오는 버스 차장은 거기다가 몇 가지만 약간 바꿔서 다리를 절고 생강빛 콧수염을 덧붙여서 나오는 거야. 그런 것들은 잭을 위대한 시인 콜리지(영국의 서정시인이자 철학자-역주)같이 느끼게 만들 거야. 그리고 두 번째로 잭은 작가로서, 감상적인 성격 때문에 자기 주변의 이야기를 작품 속에 열심히 반영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경향은 잭이 한때 육 개월간 연극 평론을 했을 때도 아주 적나라하게 발휘되곤 했다.
"해머미스나 패컴에 있는 따라지 삼류극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봐." 잭은 설명했다. "자네라도 그 연극을 보다 말고 나올 수는 없을 거야. 참 민주주의적인 편집자 나으리께서 쓰레기 같은 작품에도 관심이 있으시면 나도 거기에 맞추는 척해야 한단 말이야. 낡은 포켓용 위스키병을 뒷주머니에 찔러넣고 삼주 공연 안에 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안달하는 수많은 군상들에 대해 단단히 대비해야지. 민주적으로 똑같이 불편한 의자들 중 하나에 푹 빠져 앉아 있다 보면 삼 분도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이렇게 소리칠 거야. '제발 여기서 나갔으면 좋겠다.' 즐길 수가 없지. 확실해. 물론 일을 하면 돈을 받지. 하지만 돈 받는 게 다는 아냐. 아니구 말구. 그래서 그 연극에서 제일 섹시한 여자를 골라 새로운 발견으로 써먹기로 하는 거지. 왜 으레 트램셰드 시어터 달스톤으로 가서 그 연극을 봐야 했는지 자신에 대해 미화하는 말로 시작할 수 있지. 그리고 연극을 좀 씹어주는 거야.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지. '그러나 이날 저녁은 내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다. 다프네 오트와트가 세 번째 물레를, 아득한 옛날에는 분명 그러했을 것임에 분명하지만, 마치 애완용 동물인 양 다독걸리며 쓰다듬었을 때 평자는 순수한 연극, 완벽한 진선미의 순간, 찡한 감정으로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 연기와 이상하게 꿈꾸는 듯한 그녀의 눈길은 고통스럽게 등이 휘도록 모질게 노동에 시달리던 우리 선조들의 노역을 초월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연기는 이 극중의 안개 낀 하늘에 갑자기 터지는 무지개처럼 둥글게 걸려 가장 비판적인 관객의 눈길조차 능히 가라앉혔다.' 잘 보라구. 난 오트와트 양이 멋진 가슴을 가졌다거나 밀로의 비너스(작자 미상의 고대 비너스 상-역주)같이 멋진 미모를 가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 그랬다가는 편집자가 눈치채고 그 부분은 뺄 거야. 그러나 나처럼 하면 편집자는 이렇게 말하지. '이봐, 이 신참 여배우의 사진을 구해와야겠는걸' 하면서 사진사를 보내지. 그러면 여배우는 '아 이게 웬 하늘이 내린 기회야. 내 가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한 이 칭찬의 말이라니.' 그리고 그 글이 나간 다음날, 라운드에 있는 디치워터로 전화를 걸어 그 여배우를 대달라고 하지. 그리곤 당신의 그 멋진 연기를 꼭 한 번 더 봐야겠다고 그리고 나중에 당신과 함께 한잔하고 싶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 만사형통이지. 늘 작전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자주 써먹을 만해." 이것이 잭의 가장 조야한 방법의 '헌정' 계략이다. 그러나 그는 좀 더 고상한 작품 속에서는 그가 '축배와 놀리기'라 부르는 방법으로 주위 사람들을 써먹곤 했다. 축배란 작품 속에서 그가 좋아하는 친구들이나 연극배우들을 은근슬쩍 칭찬하는 방법이었고, 놀리기란 잭이 인간쓰레기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씹는 내용이었다. 잭은 이렇게 하면 글쓰기가 훨씬 재미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단 하룻거리로 충분할 성싶은 말을 만들어내고 나면 글을 무한정 쓰고 싶어지지."
그레이엄은 앤의 서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책꽂이에는 잭 럽튼의 선집 중 열 권이 있었다. 다섯 권은 그에게 필요없는 것이었다. <어둠을 벗어나>로부터 시작되는 다른 다섯 권을 빼냈다. 서가의 텅 빈 자리를 가리기 위해 한쪽은 도리스 레싱(영국의 여류 작가-역주)의 책으로 밀어 넣었고 다른 쪽은 앨리슨 루리(미국의 작가이자 비평가-역주)의 책으로 메웠다. 그리고 자신의 서재에서 메리 맥카시(미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역주)의 책을 두 권 가져와 나머지 빈자리에 쑤셔넣었다. 이제 괜찮아 보였다. 그는 그 책 다섯 권을 서재로 옮겼다. 그는 사춘기 이후,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책을 대충 보아넘기지는 않았다. 그 시절에도 역시 그는 섹스를 찾아 책을 훑어보았다. 소설은 부모와 백과사전이 설명해주지 못하였을 때 결국 찾아오는 곳이었다. 잘 훈련된 눈으로 보면 브래지어나, 가슴, 허리 같은 단어들은 책 내용 중에서 마치 그것들만 굵게 인쇄되어 있는 것처럼 잘 보였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마음에 두고 찾아볼 만한 주요 단어들은 없었다. 고맙게도 그는 잭의 초기 작품집 다섯 권을 힘들게 모두 읽어낼 필요가 없었다. 처음 세 편의 소설-잭이 짐짓 겸손하게 나의 링컨셔 지방 밀렵꾼 시절이라고 명명한-은 소위 소설가들이 '나의 가족을 창작의 선반 위에 올려놓는 작업'이라고 부르는 류의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섹스와 정치적 갈등에 관한 세 편의 소설로서 그중 마지막 소설을 그레이엄은 대강이라도 훑어보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최근의 소설 네 편이 나왔다. 거기에서는 앞선 소설 여섯 편의 특징이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성적인 야망과 죄의식이 사라지고 주인공들이 냉소적인 분위기에 젖어 주가 누구에게 무엇을 했었는지, 그리고 심지어는 결말이 좋은지 안 좋은지도 그리 문제시되지 않았다. 모두 샹류 보헤미안 사회의 인간 행동을 분위기 있는 코미디로 그리고 있었다. 곧 잭이 명성 있는 세속적 작가의 한 표본적인 말로로 귀착될 뿐만 아니라 아무도 잭의 책을 읽거나 혹은 두 번 다시 출판하려 들지 않을 우리 시대의 한 본보기가 되면 좋겠다고 그레이엄은 희망했다. 그때쯤이면 잭도 자신만의 방식에 너무 절어 있어 변화를 꿈도 못 꿀 것이다. 마지막 정치와 섹스 소설 <어둠을 벗어나>는 1971년에 출판되었다. 그레이엄이 기억하기에 그 소설 중에서 잭은 자신을 총선을 앞두고 있는 수염을 기른 차관으로 살짝 분장시켜놓았다. 그는 로비 기자인 매력적인 사라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십년 결혼생활 동안 알뜰하게 살림을 맡아온 아내와의 관계는 시들해졌다. 그의 아내는 이내 사실을 알아내고 잭을 닮은 그 주인공에게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를 포기해라, 아니면 내가 신문에 폭로해서 그렇잖아도 위태위태한 선거마저 떨어지게 하고 아이들도 못 만나게 할 것이다. '잭'은 통념과는 달리 그에 도전해 그의 스캔들을 유권자와 법정 앞에서 심판받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사라는 사심 없이 당(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정당은 그녀의 소속당도 아니었다)과 아이들(또다른 아이러니는 그녀가 '잭'에 의해 임신이 되었는데도 말도 하지 않고 비밀리에 낙태를 할 계획이었다는 것이었다)을 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잭'은 마침내 때로는 사사로운 정리보다 원칙이 앞서야 한다는 논리에 굴복하게 된다. 이때 사라는 영웅적으로 '잭'의 당에서 선거 후 사회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할 계획으로 있다는 정보를 '잭'에게 알려준다. '잭'은 이렇게 될 때 저소득층이 겪을 고통을 상상하면서 자기가 계속 의회에 남아 이 사람들을 대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종 결심을 내린다. '잭'과 사라는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눈다.
"족크(소설에서 잭의 이름이었다)는 그녀를 급하게 잡았다. 그는 부드럽고 자상한 만큼 격렬하고 지나치게 요구하기도 했다. 이번에 그는 격렬하게 원하는 쪽이었다. 사라는 양쪽 모두의 방식으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두 양식 그대로의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를 밀어젖히며 몸 위를 타고 오르는 그의 수염에서 담배 내음이 났다. 그녀는 거친 남자의 내음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 냄새는 그녀를 흥분시켰다. 그녀는 한창 좋은 시절에 멋부리는 남자들의 세련된 화장수 냄새-남자 것 같기도 하고 여자 것 같기도 한-에 넌더리를 냈었다. "족크." 스커트를 거칠게 걷어 올리는 그의 손길을 내치며 그녀는 반항의 소리를 냈다. "그래, 괜찮아." 그는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명령하듯이 대답했다. "지금, 여기서." 그리고 그는 소파 위에서 거칠게 그녀를 가졌다. 그는 그녀가 저항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의 격렬한 욕구가 사라를 흥분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그녀의 왼쪽 목언저리에 있는 점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는 허리를 그의 몸쪽으로 들어 올렸다. 아직 갈색 트위드 재킷을 입고 있던 그는 격렬하게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힘을 모아 그녀를 올렸다. 그리고 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높이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높이높이 하늘 끝까지, 구름을 뚫고 태양을 볼 때까지, 하늘이 늘 푸른 그곳까지. 정상에 닿자 상처받은 짐승처럼 그는 소리를 질렀다. 작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오른쪽 눈에서 달아났다. "족크." 그녀는 속삭였다. "결코 다시는......" "아니야." 그는 점잖은 남성다움으로 대답했다. "있을 거야." "아니 없을 거예요." 그녀는 거의 고통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 그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다른 기회가 있을 거야. 나도 역시 그러길 원하고 있어. 난 늘 그곳에 있을 거야. 어디서든 당신을 늘 원하면서." 여전히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 조용히 여자의 마지막 저항을 잠재웠다. 그는 재킷에 손을 뻗쳐 그녀에게 담배를 건네주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담배를 거꾸로 물고 담배불을 기다렸다. 아주 부드럽게 그는 그녀 입술에서 담배를 뽑아다 다시 불을 붙이면서 담배 끝에 입술 자국이 약간 묻어있음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아주 감상적인 흔적, 그들의 타오르는 입맞춤에서 문질러져 도망 나온 흔적이라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367페이지와 368페이지. 그레이엄은 그 페이지를 찢어내었다. 놓칠 수 없는 실마리다. 눈물이라-간혹 일어난 경우이다. 엉덩이를 들어올리는 것-그렇지.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점이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목 옆으로 옮겨 놓았지만.(아마 이 정도가 잭이 말하는 작가의 상상력이라는 것이리라.) 점이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라 하더라도 또 담배가 있다. 앤은 가끔 담배를 거꾸로 입에 문다. 그레이엄은 이제까지 그녀가 섹스를 끝내고 그렇게 하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대인관계에서 긴장하게 되면 종종 그렇게 한다. 그런 경우에 잭이 옆에 있던 적이 없었나? 그리고 그가 이해하지 못한 그 둘만의 농담은 없었나? 그는 잘 기억할 수 없었다. 그는 <어둠을 벗어나>의 다른 페이지와 금방 발견한 문장의 앞뒤로 해서 책을 휙 훑어보앗다. 그리고 잭과 앤의 정사에 관한 다른 참고자료도 전부 잡아 뜯었다. 나중에 그것들을 전부 읽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는 최근 잭의 작품으로 관심을 돌렸다. 단편소설들, 정말이다. 네오 퍼뱅크(영국의 소설가 로날드 퍼뱅크의 작품 기법을 선호하는 문학 풍조를 말함-역주)의 의 도래다. 그레이엄은 혼자서 계속 즐거웠다. 잭의 설명은 달랐다.
"테스코(전국 체인의 슈퍼마켓. 서적류도 판매한다-역주)의 소설 군단에 소속되어 있었지." 한 번은 그가 설명했다. "알잖아, 박리다매의 싸구려 소설들. 사람들이 아주 멋진 놈의 이백 쪽짜리 소설을 사 파운드 주고 사는 것과 내 사백 쪽짜리 소설을 오 파운드에 사는 것 중 선택하리라고 생각했지. 사람들은 어떤 게 더 경제적인지 잘 알고 있지. 물론 내가 옳았어. 사람들은 내 소설을 더 좋아했지. 그런데 내 인생의 피를 반쯤은 흘린 뒤였지. 난 이렇게 생각했지. 야, 이것 봐라. 내가 너무 무리한 게 아냐? 두 배가 긴 만큼 내가 받는 인세도 두 배가 되나? 그리고 나서 난 신출내기 작가들이 작품집이랍시고 책을 내는 걸 봤지. 야, 잭. 너도 그렇게 할 수 있어. 이 따위 것을 집어치우고 뭔가 물건 같은 물건을 내보라구. 그래서 그렇게 했지. 난 이제야 짧은 작품이 왜 중요한가 알 것 같아. 부랑자 생활은 쉬워. 바로 그거야." 네오 퍼뱅크 시절에도 잭의 축배와 놀리기 방법은 계속되었다. 앤에 관한 문구, 그녀의 가슴에 관한 묘사, 성교 동안의 매너리즘, 옷, 등등. 증거를 찾아낼수록 더 많은 증거를 찾기 쉬웠다. 그리고 비판적인 추적이 주는 흥분 때문에 그는 자기가 왜 이러고 있는지 확실한 이유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나중에야 그는 찢어낸 증거들-럽튼의 최근 작품 전체의 반 정도 양이 되었다-을 한데 모으면서 곰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잭과 앤의 정사의 증거를 모은 것을 끝까지 읽으면서 그는 앤의 몸이 잭을 향해 활처럼 휘어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잭은 니코틴 냄새가 최음제라고 잘못 믿으면서 그의 냄새 나는 수염을 앤의 얼굴에 갖다 대고 있었다.(그럴 리가 없지. 그레이엄은 고집했다. 그럴 리가 없어.) 마취가 사라지고 다시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는 한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잡았다. 찢어진 종이가 뒹구는 마룻바닥에 앉으면서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옆으로 미끄러져 뱃속 태아의 자세로 엎드렸다. 양손을 다리 사이로 넣고 아픈 아이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눈을 감고 어린 시절의 소년같이 뭔가 다른 것, 뭔가 외향적이고 신나는 것을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동네의 크리켓 경기를 떠올렸지만 그 장면은 이내 축구 관중들의 '세차, 세차'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그는 어느 외국의 한 장면을 생각했지만 그것도 곧 베니가 그의 은색 포르쉐를 아레조 지방으로 몰고 가면서 창밖으로 여자 속옷을 훌렁 내던지는 장면으로 변했다. 그는 보나르 로를 가르치는 수업 시간을 생각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모두 손을 들고 영화를 보러 가자고 요구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마침내 그는 그의 어린 시절, 앤과 잭과 바바라를 만나기 전인, 오직 부모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되던 시절로 되돌아가 생각했다. 배반이 존재하기 전, 오직 독재와 복종만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한계가 선명했던 그 기억의 장소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점차 그는 그 세계로 몰입해 들어가 현실성이 그의 양쪽 귀 주위에만 몰리고 난 후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 그레이엄은 <어둠을 벗어나>의 그 문구들과 잭의 최신작을 읽고 또 읽었다. 의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 잭과 앤의 정사는 1971년에 시작되어 그가 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의 결혼생활 내내 계속되었다. <뜨거운 확신> <가라앉은 불길>과 <분노, 분노>는 필요한 증거를 담고 있었다. 만약 그 책을 출판하는 데 필요한 기간을 육 개월, 최고 일 년으로 치더라도 얼굴을 성형 수술한 전직 전투기 조종사로 약간 변장하여 나온 "잭'이 얼굴 앞면에 점이 있는 스코틀랜드 간호사로 나오는 앤과 치유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 책 <가라앉은 불길> 중에 나오는 문구들은 책이 그들의 결혼 초기 일 년간 씌여진 것임을 의미한다. 그때까지도 간통을 그치지 않았다니, 그레이엄은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일 주일쯤 뒤 그레이엄은 시골에 살고 있는 수에게 전화를 했다. 만약 잭이 받게 되면 틀린 전화번호라고 말할 준비도 했다.
"수, 그레이엄이에요."
"그레이엄...... 아, 그레이엄." 그녀는 사실 반가워하기보다는 제대로 그레이엄을 알아맞춘 것을 안심하는 목소리였다. "잭은 런던에 있어요."
"알고 있어요. 전 당신과 얘기하려고 전화했어요."
"그래요. 말씀하세요. 난 바쁘지 않으니." 그녀는 여전히 별로 반기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수, 우리 만날 수 없을까요? 언제 런던에서?"
"그레이엄......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군요."
"당신이 내가 꼭 알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야, 그리고 내게 좋은지에 대해 당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야 할 수 없지요."
"그런 것은 아니고, 글쎄, 뭐랄까, 당신과 나에 관해서......" 그의 목소리는 신중하게 들렸다.
"그레이엄, 난 당신이 무엇에 대해 신경쓰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말 않는 것보다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낫지요."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웃었다. "제 수첩을 볼게요. 아, 그래, 내가 생각한 대로야. 전 지금부터 향후 십 년 중 아무 때라도 만날 수 있겠군요." 그들은 일 주일 후의 어느 날을 약속했다.
"어, 그런데 수......"
"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의 점심 약속을 잭에게 말하지 않으면 어떨까 싶군요."
"그에게는 자신의 생활이 있죠." 그녀는 날카롭게 대답했다. "난 나만의 생활이 있구요."
"물론이지요." 그녀에게 좀 더 명확하게 암시를 해줬어야 했는가. 그레이엄은 수화기를 놓으면서 궁금해졌다. 그래, 그랬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느닷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는 일 년 넘게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그녀를 그리 많이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녀를 생기발랄하다고 칭찬했지만 그레이엄이 보기에는 약간 초점이 맞지 않는 공격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다음 주에 그는 캄파리(입술색보다 진한 이태리산 쓴 맥주-역주)와 소다수를 앞에 두고 타르델리 레스토랑에서 한쪽으로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찾아낼 수 있는 마지막 협조를 얻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바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레이엄, 저런, 간통자의 테이블이라니, 당신 심각하군요."
"......?"
"무슨 말인지 모른단 말이에요?" 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그의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는 반쯤 일어나 테이블 다리를 차면서 그녀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그전에 키스한다는 조건을 얘기했었나? 그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 조용한 테이블을 원한다고 했지요." 그가 대답했다. "우리는 방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정말 이 자리가 바람 피우는 사람들의 자리라는 것을 몰랐단 말이에요?"
"몰랐어요. 정말."
"저런 실망스러워라."
"그렇지만 아무도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볼 수는 없어요."
"바로 그 점이에요. 당신은 지금은 시야에 가려져 있어요. 그러나 만약 자리에서 일어서야 한다거나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면 이 레스토랑 안에 있는 모두에게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공표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건 유명한 얘기예요. 아마 당신들 세계에서는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들에게 확실히 그래요."
"그러면 사람들이 일부러 이 자리에 앉는단 말인가요?"
"그럼요. 그건 <타임스>지에 알리는 것보다 훨씬 유쾌한 일이지요. 이 점잖은 사회에 썩 어울리는 양식이라고 난 늘 생각해왔는데요. 자신은 감추는 척하는 동안 그 관계를 알리는 거지요. 죄책감은 덜어지고 소문은 퍼지고. 이상적인 해결 방법이지요. 난 왜 더 많은 레스토랑이 이런 테이블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여기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얘기인가요?" 그레이엄은 즐겁다는 듯이 해야 할지, 아니면 이해한다는 듯이 행동해야 할지 잘 몰랐다.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누군가 이쪽 구석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사람을 찾는 척할 때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이 그의 팔을 두드려주었다. 그후 그레이엄은 거기 앉아 점심을 먹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가끔씩 가볍게 몸이 스치는 것을 감수하면서 어색한 바람둥이의 역을 해냈다. 그녀를 훔쳐보다 들키기도 하면서 기분 좋게 그는 그녀가 예쁜 여자라는 사람들의 평가를 조심스레 되새겨보았다. 그 점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레이엄이 그녀의 남편의 부정에 대해 얘기하러 온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수는 자기가 그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그레이엄이 오늘 상의하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비유적으로 자신의 가끔씩 있는 정사에 대해 얘기하였다. 시골에서 눈에 띄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그녀의 지방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복수심에 대한 공포, 건초용 갈퀴, 짐짝 꾸리는 기계, 곡물 사일로(작물이나 목초의 저장고-역주)에 대한 공포를 얘기했다. 두 번째 물병을 비우고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어 말했다.
"지금 잭이 하는 방식을 내가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난 그것을 스펜서 증후군이라고 불러요." 그레이엄은 모른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솔직히 그것을 더욱 적절하게 만든 것이 바로 잭의 두 번째 마누라인 나라는 사실이지요."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스탠리 스펜서(영국의 화가-역주)가 두 번째 결혼을 했을 때 신혼 첫날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아니요."
"그는 새 신부를 신혼여행지로 미리 보냈지요. 짐짝 고리처럼 말이지요. 그리고는 집에 가서 첫 번째 마누라와 섹스를 벌이는 거예요."
"그렇지만......"
"아니, 아니, 기다려보세요. 그게 아니고, 그다음 그는 두 번째 마누라에게 가서 해변에 그녀를 앉혀놓고는 예술가는 아주 예외적인 성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그는 두 명의 마누라를 거느리겠다고 제의하는 거예요. 그의 예술이 그렇게 만든다고, 그의 예술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냐고 하면서요. 인정머리 없는 못된 난쟁이 같으니라고." 그녀는 스펜서가 마치 자기 남편의 술친구나 되는 듯이 덧붙였다. "그게 바로 잭이 갖고 있는 방식이지요. 어느 정도로 말이지요. 나도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된다는 것 정도야 알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꼭 그대로예요. 가끔 집에서 그가 쓴 책 앞에 서서 이런 생각을 하지요. 저 안에는 얼마나 많은 횟수의 성교가 들어가 있을까."
"그럼, 발자크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여기 또 하나의 소설이 나간다.'" 그는 이 말이 수의 말에 찬성하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확신을 못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을 느꼈다.
"난 그 책들을 좀 다른 눈으로 봐요. 잭이 늘 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난 상관하지 않기로 했어요. 처음에 마음을 다친 이후부터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결국 나도 재미를 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정말 분개하는 것은 서가에 꽂힌 그 열 권의 책을 보고 있을 때예요. 내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것이예요. 그게 거기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난 자주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자, 이봐요, 잭. 당신은 이 책들을 잊을 수 있을 거예요. 그냥 잊어버려요. 그다지 훌륭하지도 않아요. 그 책들을 포기하고 바람 피우는 데만 몰두하지 그래요. 당신은 그편이 나아요." 그레이엄은 <분노, 분노> <가라앉은 불길> <어둠을 벗어나>의 찢어진 부분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신중하게 준비해온 것을 시작했다.
"수, 난 당신이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난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면...... 아주 좋을 것 같군요." 그는 의도적으로 약간 더듬거렸다. "당신을 만나서 점심을 하고, 우리가 못 만난 지 오래됐잖아요. 난 언제나 우리, 내가 당신을 충분히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어요. 난 당신이 내가 교묘한 동기나 복수나 뭐 그런 이유로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요."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는 서둘러 말을 계속했다.
"내 말은 우리 둘 다 옛날에 잭과 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어쨌든, 만약 그들이 음, 연인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녀를 못 만났을 테니까, 어떤 면으로는 내가 일종의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레이엄은 그의 어리숙한 정직이 잘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좀 더 까다로운 부분이다. "그러나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내가 인정해야 할 부분은, 그들이 아직도 그들의 관계를 멈추지 않은 것을 알아내고서였지요. 내게는 아주 큰 충격이었어요. 난 육 개월 전에 그 사실을 알아냈어요. 앤하고는 상관없이 난 우정의 배신감이랑, 사람들이 구식 감정이라고 말하는 모든 기분을 다 맛봤어요. 난 한동안 잭에 대해 아주 좋지 않았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내가 앤의...... 욕구를 이해하는 데 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만약 그때 내가 당신에게 전화를 했다면 당신은 내 의도를 의심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 딸꾹질은 이제 끝났고 그 문제에 대해서 나도 꽤 단념이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 난 당신을 다시 만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난 나의 동기를 잘 살펴보았고 일단 그 동기에 대해 깨끗한 영수증을 써준 다음 전화를 했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여기 있게 되었지요. 무슨 말이든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레이엄은 그의 빈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고 느릿느릿한 끝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동시에 두 개의 평행선을 밀고 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그가 감히 위를 올려다볼 수 있을까 궁금해하는 즈음에 수가 앞으로 다가와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그의 수줍음이 좋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격려하듯이 미소를 짓고 내내 생각했다. 그 나쁜 놈, 나쁜 놈이 그 망할 스탠리 스펜서, 잭 럽튼 그놈. 왜 그녀는 예측하지 못했을까? 잭은 결코 옛날 애인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 그는 자기가 그 여자들을 포기하면 사람들이 자기 책을 안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레이엄에게 그녀가 화내고 있다거나 그녀가 몰랐다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번 금요일 밤에 그녀를 평화롭게 해줄 가짜 미소보다 더 엄청난 지옥일 것이다. 기회를 망치지 말아야지, 이 여자야. 물을 튀기면 안 되지. 이번 것은 낚싯줄을 아주 곱게 감아 올려야만 될 거야.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에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요. 미안하지만 난 언제나 의사가 암환자를 다루는 식대로 행동해요.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이 물어보더라도 아니란 대답을 듣고 싶어한다면 그때에는 아니라고 말해준다는 거죠. 안됐지만 당신은 제삼자로부터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했군요, 그레이엄." 그는 이 속임수를 생각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속임수를 생각하며 동정적으로 웃었다. 수는 복수로 그레이엄과 간통하는 것이 얼마나 고소할까 생각했다.
"당신이 나를 구식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는 연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사실 오후에 난 강의가 한 시간 있어서요. 우리 다음 주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수는 그의 건방기 없는 매력을 발견했다. '오후를 비워 놔두지'나 '나 지금 총각이야'와 같이 남자들이 흔히 쓰는 못돼먹은 말들이 없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는 놀란 듯이 보였다.
"이게 바로 간통자들 테이블의 이점이지요." 그녀는 활달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가 점심 중에 테이블 아래를 더듬거나 별다르게 치근대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수동적인 자세가 너무 지나치지 않길 바랐다. 아직은 이것이 아주 멋진 변화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 단계에서 잭이라면 테이블 밑에서 헤픈 여자의 허벅지 사이로 달아오른 면도날 같은 그의 발진 난 수염을 갖다 대고 있을 것이다. 그레이엄은 침대에서는 안경을 벗을까? 그들은 레스토랑 밖에서 작별 키스를 하였다. 수의 마음은 벌써 다음주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그리고 무엇이 뒤따라올지 모르지만 그것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레이엄도 역시 앞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아주 달랐다.
11. 말과 악어
그건 내장일 뿐이야. 그레이엄은 렙튼 가든으로 차를 몰면서 계속 되뇌이고 있었다. 그것 모두 내장이지. 글쎄, 전부는 아니더라도 위에는 모두 내장이지. 그는 사십 년간을 그 내장과 싸우면서 살았다. 그리고 이제 삶의 아이러니를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자신을 패배자라 생각하고 산 세월-모든 메커니즘이 조용히 고통 없이 스러져갈 때-은 사실 성공의 시대였다. 내장, 아주 영악한 물건이지. 그는 그 일이 시작된 이후 백번도 더 지나친 스타운튼 가의 정비소 앞을 지나가면서 생각했다. 영악한 물건. 그리고 물론 그는 잘 속아 넘어가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게 처음부터 지금껏 사십 년간을 지탱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것에 다른 사람들은 더 빨리 잡혔다. 그러나 결국 모든 사람이 다 걸려들었다. 그를 잡기 위해 오래 먼길을 돌아 천천히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수단으로 전혀 뜻밖의 사람을 골랐다. 그가 사랑했고 그를 사랑한 앤이 그를 잡기 위해 쓰인 도구였다. 그 물건은 중세 이후, 몽테뉴 이후, 사람들이 말 그대로 내장-피와 간, 담즙 그 외 여러 가지-을 믿었던 시대 이후 많이 변하지 않았다. 잭-모든 사람-이 최근에 그에게 설명했던 이론이 무엇이었지? 우리의 머릿속에는 계속 저희끼리 전쟁을 벌이는 두세 가지 다른 층이 있지. 이건 단지 우리의 내장이 우리를 엿 먹인다는 사실을 다른 방법으로 말하는 것일 뿐이야. 맞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란 전투 계획과 은유가 우리 몸 약이 피트 육 인치 높이에 있는 부위로 옮겨갔다는 점이지. 그리고 그 전투에서는 늘 지지. 그 점이 그레이엄이 인식하도록 배워온 거야. 그 내장이 이기지. 우리는 잠시 그 전투를 미룰 수는 있어. 가능한 한 우리의 삶을 고갈시키면서 말이야. 그래도 결국 조금만 더 지나면 자신을 더 큰 제물이 되게 할 뿐이지. 그 세계의 진정한 판가름은 전투에서 진 사람과 아직 그것과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 사이가 아니야. 진짜 판가름은 싸움에서 진사람들 중 패배를 인정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있지. 아마도 두뇌 안에는 그런 사실도 미리 정해지는 작은 청소용구 보관 칸막이가 있는 모양이야. 그는 음울한 조바심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가르지. 예를 들어 잭은 그의 패배를 받아들였지만 정말 그것을 깨닫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심지어는 그것을 자신의 이점으로 돌렸으면서 말이야. 반면에 그레이엄은 지금도 그 사실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다. 잭이 사실 더욱 호전적이고 신랄한 성격이라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레이엄은 남들이 자신을 온화하고 자애롭고 약간은 속기 쉬운 인물로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음, 전화가 왔지." 잭은 한참만에 문을 열고서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아니, 내 귀여운 아가씨." 그레이엄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면서 잭이 전화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이것 보라구, 지금 말고, 내 다시 전화할게......" 그레이엄은 그의 호주머니를 두드려 보았다. "......몰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잘 있으라구." 그레이엄은 단 며칠 전만 하더라도 잭이 누구와 전화하는지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앤일 수도 있겠지? 이제, 그건 문제가 안 되었다. 계단에서 그에게 능글맞게 웃음 짓고 있는 낯익은 속옷의 흔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레이엄은 여전히 상관이 없었다. 잭은 약간 당황스러워 보였다. "내 귓가에 속삭이는 작은 새일 뿐이지." 그는 설명하는 식으로 명랑하게 지껄였다. "들어오게......" 그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거실로 들어가면서 그는 방귀를 뀌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한 번만.
"커피 하겠나?"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똑같은 의자에 앉아 망설이면서 잭에게 그의 까다로운 무지를 이야기하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이제 그는 앉아서 잭이 커피잔에 스푼을 딸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어 잭과 앤에 대한 것을 곧이곧대로 사실적인 것으로만 안다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 얘기에는 사람들이 자라서 투쟁을 하고 불운을 당하고 결국 성숙하여 세상에 대해 통달하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그레이엄은 많은 투쟁 없이 사십 년을 지내오다가 단 몇 달 만에 성숙하게 된 것 같았고 결국 종말의 불안은 자연적인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이 지혜로 처음에는 당황하고 어쩔 줄 몰랐지만 이제 그는 이 사실에 대해 평온할 수 있었다. 손을 재킷의 주머니 안으로 넣으면서 그는 오해당할 수도 있을 것임을 인정했다. 아마 질투 때문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신 이상자로, 글쎄, 사람들 판단학 나름이겠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오해를 받는 데 좋은 점이 있다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잭이 건네주는 머그잔을 받으며 생각했다. 정말 그럴 필요가 없지. 그가 최근에 보러 갔던 영화 속에 나오는 아주 경멸스런 인물들은 자기들의 동기를 다음과 같은 대사로 지껄였다.
'널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죽였다'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슬톱을 든 채 그 벌목꾼은 엉엉 울었다. 또 괜찮아 보이는 한 흑인 소년 방화범은 '난 미워서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폭발했어요', 그리고 또 어떤 새색시는 '아빠의 손아귀에서 영영 못 벗어날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거죠.' 그레이엄은 현실적 삶과 연극적인 꾸밈 사이의 그 엄청난 거리에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삶에서는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 관객이 없어서가 아니다. 있기는 있다. 동기에 대해 태생적으로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러나 그들은 그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들은 우리의 삶을 보기 위해 입장료를 내진 않았다. 그러니 난 말할 필요가 없어.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잭은 아마 나를 우정 어쩌구 하면서 질질 끌고 가겠지.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게 되지? 아마 아무 데도 다른 곳은 없을 거야. 그러나 타협해서 반은 이해한 것으로 나머지 반은 꺼림직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되겠지.
"뭐 다른 것이 있나? 친구?" 잭은 온화한 조바심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그는 이제 이 카운셀링 서비스에 신물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얼간이들이 몇 가지 정상적인 원칙을 지켜주기를 바랐다. 내가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내 책이 어느 날 아침 굴뚝 아래서 갑자기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내가 할 일이란 그냥 검댕이를 훌훌 털어서 출판사로 보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인가? 이게 바로 저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제는 아예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냥 나타나서 바윗덩어리처럼 저렇게 앉아 있군. 오델로는 이제 이름을 오지만디어스로 바꿀 모양이군.
"기침하라구, 기침." 잭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약간 머뭇거리는 농담을 그레이엄의 침묵 속으로 계속 밀어넣었다. "기침을 하라구, 기침?" 그레이엄은 멀찍이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머그잔을 세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커피로 만족한다? 선생님?" 잭이 물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난 이런 방법으로 삼십 기니를 버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지 않아. 상관없는 일이지. 모든 정신과 의사들이 자네 같은 환자를 둔 나를 부러워할 거라고 생각하네. 그냥 좀 지루하다는 거지. 만약 내가 자네를 내 다음 소설에 등장시킨다면 난 자네 마음속이 어떤지 더 잘 알 거야. 그렇지 않겠나?" 내 다음 소설에 자네를 등장시킨다...... 아 그래, 그러면 내 코 위에다 점을 찍어 내가 나 자신을 몰라보게 하겠군? 날 마흔네 살 대신 서른아홉으로 해줄 거지? 그런 약간의 약아빠진 차이? 그레이엄은 아이러니컬한 대답을 하고 싶은 유혹을 참아냈다. 그 대신 그는 손이 점점 축축해지는 것을 걱정했다. 갑자기 잭은 그의 커피잔을 들고 긴 거실의 다른 끝으로 걸어갔다. 그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주위의 물건들을 치우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타자기에 스위치를 올렸다. 그레이엄은 전자 타자기의 낮은 울림소리와 뒤이어 빠르게 움직이는 키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그에게 적절한 타자기의 소리처럼 들리지 않고 텔레비전에서 스포츠 경기 결과를 알려주는 것처럼 들렸다. 뭐였더라? 텔레타이프? 글쎄, 그것도 틀리진 않겠군. 요즘 잭의 소설은 다소 자동적으로 생산되지. 아마 자동 비행기 안에 탄 조종사처럼 그도 자기의 기계 안에 특수 스위치가 있겠지. 잭도 그저 그 텔레타이프의 스위치만 누르면 되는 거야. 그러면 그 텔레타이프가 자동 쓰레기를 마구 쏟아내겠지.
"난 신경 쓰지 말게." 잭은 타자기 소리 너머로 소리쳤다. "있고 싶은 만큼 있게." 그레이엄은 거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소설가는 등을 이쪽으로 보이고 앉아 있었다. 그레이엄은 그의 얼굴 오른쪽 옆과 보풀보풀한 갈색 수염을 볼 수 있었다. 무모하긴 하지만 그 너무나 매력적인 방법으로 감춘 그의 담배가 어디에 있는지도 거의 알아맞출 수 없었다. "타는 냄새가 나지요?" 그가 무표정하게 물으면 그날 밤 특별 추적 대상으로 잡힌 여자는 이 괴상하고 정신없고 자기 파괴적인 그러나 확실히 창조적인 인물에게 기쁨 어린 소리고 힝힝대곤 하는 것이었다. 그레이엄은 그들에게 타자기에 달린 자동 쓰레기 스위치에 대해 말해줄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원하는 대로 커피도 더 마시게." 잭이 큰 소리로 말했다. "만약 며칠간이라도 여기 머물 생각이라면 냉장고에 먹을 것도 많고, 여분의 침대도 있다네." 그렇겠지. 침대가 언제 필요하게 될지 결코 알 수 없지. 잭은 자기 결혼생활의 침실을 거리낌 없이 포기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우습게도 그레이엄은 늘 그래 왔던 그대로의 잭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과 이번 경우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커피잔을 거실 바닥에 놓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윙하는 소리와 가끔 한꺼번에 올라오는 자판 소리에 그의 발자국 소리가 묻혔다. 지금 잭이 쳐내고 있는 문장이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그는 감상적이게 잭이 중세의 진부한 표현을 치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이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칼이었다. 검은색 뼈로 만든 손잡이가 있고 폭은 일 인치에 길이는 육 인치로 뾰족하고 날카로운 칼이었다.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며 그는 칼이 갈비뼈 사이로 더욱 쉽게 들어가도록 날을 옆으로 뉘었다. 그는 마지막 몇 피트를 걸어간 다음 찌른다기보다는 그냥 칼을 앞으로 내밀고 걸어가는 것 같아 보이는 자세로 잭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른쪽 등의 반쯤 위쪽을 겨냥했다. 칼은 뭔가 단단한 것에 걸리더니 아래쪽으로 약간 내려온 후 급격하게 칼 전체의 약 절반이 안으로 박혔다. 잭은 헐떡이는 가성을 냈다. 그리고 손이 하나 타자기 자판 위로 떨어졌다. 글자가 갑자기 쏟아져 찍히고 여러 개의 키가 한데 엉클어지더니 소음이 멈췄다. 그레이엄은 내려다보고서야 칼이 들어갈 때의 충격으로 그의 둘째손가락 윗부분이 베인 것을 알았다. 그는 칼을 뽑았다. 칼이 나올 때 그는 재빨리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잭은 의자 위에서 비틀어지며 고꾸라졌다. 그의 왼쪽 팔꿈치가 타자기를 끌어 당겨 여전히 종이에 닿으려고 뻗치고 있는 그 들러붙은 자판 키 더미 위로 몇 개의 키를 더 올려보냈다. 수염 있는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레이엄은 마지막으로 이성을 잃었다. 그는 잭의 심장과 성기 사이의 아래쪽을 되풀이해서 찔렀다. 심장과 성기 사이. 수차례의 공격이 끝나자 잭은 소리없이 피아노 의자에서 카펫 위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이것도 그레이엄을 달래주진 못했다. 아래쪽을 찌를 수 있도록 손잡이를 고쳐 잡고 그는 똑같은 쪽을 집요하게 되풀이해서 계속 찔렀다. 심장과 성기 사이가 그가 원했던 부분이었다. 심장과 성기 사이. 그레이엄은 잭을 몇 번이나 찔렀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칼이 더욱 쉽게 들어갔을 때, 잭으로부터가 아니라 잭의 몸으로부터 저항이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멈췄다. 그는 마지막으로 칼을 뽑아 잭의 스웨터에 닦았다. 그리고는 칼을 친구의 가슴 위에다 올려놓고 부엌으로 가서 손을 씻었다. 반창고를 찾아내 이상하게 펴들고 손가락 윗부분에 발랐다. 다시 거실의 의자로 돌아와 앉은 그는 팔을 앞으로 내밀어 그의 커피를 집어들었다. 머그잔에는 아직 따뜻한 커피가 반쯤 남아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혀 커피를 마셨다.
일곱 시에 앤은 요리 냄새와 그레이엄의 흔들리는 손안에 든 큰 잔의 마실 것, 그리고 눈물과 맞비난의 또다른 저녁을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문제가 더 나아질 것인지, 또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것인지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그날그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저녁이 타락해가는 그대로의 기억을 움켜잡기로 했다. 그녀는 그런 데서 몇 가지 신념을 얻었다. 첫째는 아무도 그런 부정적인 감정으로 영원히 계속 소진되는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는 그레이엄은 좀처럼 그녀, 현재의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그는 과거의 그녀와 현재 상황에는 적대적이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런 위로의 원천도 그레이엄이 없을 때에 가정 잘 작용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내었다. 그가 앞에 있을 때에는 더욱더 그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고 그레이엄이 정말 그녀를 증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덟 시에 그녀는 그레이엄의 학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기가 아는 한 그레이엄이 보통 때처럼 일을 하고 오후에 집오로 돌아갔다고 했다. 학과 비서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볼까? 앤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앤은 여덟 시 십 분에 잭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그레이엄이 또다시 영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열시에 그녀의 의지와는 반대로 바바라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앨리스가 받았다. 몇 초 후 바바라가 받았다.
"내 딸이 당신과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되는군. 그 애는, 당신이 내 남편을 뺏아간 후 이제 내가 가진 전부라는 걸 몰라?" 그것은 분명 앨리스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미안해요. 앨리스가 전화를 받을 줄 몰랐어요."
"난 당신이 우리 집으로 어떤 경우에든 전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네,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구? 아, 그거 참 다행이군. 남편을 훔쳐간 여자가 적어도 낯짝은 있다는 걸 알게 되다니. 참으로 떨릴 정도로 놀랍구만. 아마 당신은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시겠군. 아마 나를 위해 그레이엄을 훔쳐 갔는지도 모르겠군." 앤은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바바라를 상대로 이혼 협상을 하기 전까진 바바라에게 늘 안쓰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후에는 거의 탈진되는 느낌을 가졌었다. 왜 바바라는 그토록 복잡한 것을 즐기는 것일까?
"난 그냥 궁금해서요. 혹시 그레이엄에게서 소식을 들었는지요?"
"듣다니? 왜 내가? 오늘은 목요일도 아닌데."
"아니 그게 아니고, 그가 아직 집에 오지 않아서요. 혹시 그가...... 그가 앨리스를 데리고 나갔는지 아니면......"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과장된 한숨 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렸다.
"자, 자, 자, 나한테 물었으니까, 아니 그레이엄을 못 봤지. 난 법정이 허락한 날 이외에는 앨리스와 그레이엄을 절대 만나게 하지 않아. 그리고 난 그가 어디 갔는지 도대체 손톱만치도 모르겠어.(여기서부터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와졌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몰랐던 유일한 순간은 당신과 어쩌구저쩌구 할 때뿐이었으니까. 그의 여행용 가방을 한 번 살펴보셨나?"
"무슨 뜻인가요?"
"글쎄, 내가 그의 버릇을 일일이 말해줘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네? 그 사실을 당신이 알아차리도록 말이지. 물론 내가 말해줘 봐야 그가 이미 딴 데서 놀아나고 있다면 아무 소용도 없을 텐데. 얼마 됐다고 벌써 그러나? 삼 년, 아니면 사 년 전인가? 그래, 사 년 전이야. 왜냐하면 그가 집을 나갔을 때 앨리스가 열두 살이었으니까. 그에게 아이의 성장 과정 중 그렇게 중요한 시기에 어떻게 집을 나갈 수 있는지 말했던 기억이 나는군. 그리고 이제 열여섯 살이니 그를 훔쳐 간 게 사 년 된 것이 분명하군. 이것 알아? 난 요즘 날짜를 그런 식으로 계산해. 당신도 똑같은 단계에서 똑같은 일을 당할지도 모르지. 여행용 가방을 얘기하자면 그는 이제껏 가방이라곤 하나밖에 없었지. 그리고 옷 몇 벌, 그는 심지어 칫솔도 안 가져갔어. 내 생각에 그렇게 해서 죄책감을 덜 느끼려 한 것 같아. 그냥 가방 하나지. 어떻게 보면 그리 나쁜 거래도 아니야. 난 그의 값나가는 소지품을 꽤 갖고 있으니. 아, 그런데 다른 것도 있지. 그는 택시를 저쪽 코너에 불러놓았지. 음울한 표정과 한숨 섞인 가방을 들고 사라져서 코너에서 차에 올라탄다. 왜 근처 택시 회사에 전화를 해서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지 않나요? 내 말은 나도 그렇게 했다는 거지." 전화가 갑자기 끊어졌다. 앤은 좌절감을 느꼈다. 바바라는 확실히 누구에게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오랫동안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열시 반에 그는 잭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확실히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경찰에 전화를 걸어? "아마 옛날 친구를 만났겠지요, 부인. 술을 하는 분이지요?" 그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그전에 이렇게 늦어본 적이 결코 없었다. 열시 사십오분에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가 그레이엄의 서재 문을 밀었다. 그녀는 파티 이후부터 여기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자동적으로 그녀는 창가로 건너가 정원 쪽 바위틈을 살펴보았다. 안심되게도 그곳에는 없었다. 성가시게 커튼을 닫거나 하지는 않고 그녀는 불을 켰다. 그 방은 정확히 그녀에게 출입 금지 지역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레이엄에게 있어서 이곳은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나와 있는 혼자만의 장소였다. 그가 여기에서 일을 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둘러보았다. 책상, 의자, 서가, 서류함 캐비닛, 바뀌어진 것은 책상 위에 놓인 그녀의 사진뿐이었다. 그레이엄은 늘 결혼식날 찍은 그녀의 사진-그녀 생각에 평생 가장 행복한 순간의 사진이라고 여겨지는-을 놓아두곤 했었다. 이제 그것은 그에게 주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그녀의 사진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열다섯 살이었고 애송이처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고 머리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헤어밴드를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이 세상과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는 듯한 미소를 불안하게 띠고 있었다. 그녀는 그레이엄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지도 않고 한두장 밀쳤다. 그리고 무심코 서류함의 제일 위 서랍을 당겨 열었다. 1911-1915년.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철. 그녀는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1915-19년. 아주 가볍게 건드렸는데 미끄러져 나왔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열어본다는 데 대한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크리넥스 휴지통이 몇 권의 잡지 위로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제일 위의 종이가 반쯤 위로 당겨 나와 있었다. 그녀는 휴지통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약 서른 권쯤 되는 잡지더미 위에 있는 책은 뒤표지가 위로 나와 있었다. 반짝반짝하는 담배 광고. 앤은 잡지를 대충 넘겨보다가 여자들이 나오는 잡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나머지 책더미, 전부 뒤로 엎어져 쌓여 있는 책들을 샅샅이 뒤졌다. 모두 다른 제목들, 똑같이 넓게 펴진 목차들, 그래서 그레이엄이 그녀와의 섹스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아마, 아니면 아마도...... 이건 다른 방법일 수도 있는데 그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닭과 달걀. 앤은 생각했다. 그녀는 제일 위의 잡지를 다시 한번 뒤적거리면서 불안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배가 뒤틀렸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런 것이다. 그래, 그의 방식인 거야. 그러는 게 한 묶음의 연애편지를 발견하는 것보다 한결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배신감을 느꼈다. 역시 충격도 받았다. 그녀가 본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레이엄의, 남자들의 섹스에 대한 욕구에 대해서였다. 왜 남자들은 그 문제에 대해 그토록 자세히 설명해야만 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한 번 만에 수십 명의 여자를 향한 가짜 강간을 위해 잡지에 걸터 앉아야 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이토록 조잡한 시각적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들의 상상력에 무엇이 잘못되었나? 그녀가 1919-24년 서랍을 당겼을 때 희미한 아몬드 향기가 났다. 뚜껄이 열려 이제는 마른 그리픽스 항아리에 담긴 냄새였다. 그 플라스틱 주걱은 뚜껑 안의 뾰족한 꽂이 마른 채 꽂혀 있었고 몇 개의 단단한 풀 알갱이가 붙어 있는 노란 스크랩북 위에 놓여 있었다. 앤은 멈춰서서 집 안의 정적을 괜히 확인했다. 그리고 중간 부분을 열었다. 그녀의 사진 두 장-책상 위에 있던 사진이 여기에 있었다-과 신문기사를 복사한 것이 몇 장 보였다. 그것들 모두 그녀의 초기작, 가장 엉망인 영화에 대한 평론이었다. 모두 그레이엄을 만나기 몇 해 전에 나온 것들로 그녀의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녀 자신도 그런 기사를 복사해두지 않았다. 그녀는 그 책을 처음부터 펼쳐보면서 그녀 자신의 지난날을 찬찬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나기 전 그녀의 삶에 대한 그레이엄의 비밀 기록이었다. 사진들, 그녀의 영화 리뷰(이해할 만하게 그녀를 언급한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돈이 궁해서 모델로 나섰던 몇 장의 스웨터 광고의 복사물(어떻게 이런 것을 구했지?), 아주 드물게-감사하게도 아주 적었다-그녀의 이름이 가십란 제일 끝에 난 자료도 있었다. 이것들 중의 하나에 그레이엄은 붉게 동그라미를 쳐두었다.
......역시 잭 럽튼도 눈에 띄었다. 야한 통속소설을 쓰는 흙의 아들인 작가는 아직 스타가 되려면 한참 노력을 해야 하는 앤 미어스를 대동하고 있었다. 풍문에 따르면 럽튼의 이혼(아이가 둘 있다)이 임박했다는데 이 턱수염의 청년은 코멘트 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당시 이 기사가 그녀의 기분을 얼마나 나쁘게 했는지, 당시 에이전시를 통해 그녀가 어떻게 그런 소문을 잠재웠는지를 기억해냈다. 오른쪽 페이지에 있었던 이 기사 다음에 있는 서류 위에는 화살표 모양의 빨간색 펠트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표시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 표시를 따라 양면 페이지를 넘어 시작 쪽으로 갔다. <너무 늦은 눈물>에 관한 리뷰(그것은 그 가십기사가 실리기 삼 개월 전에 나온 것이다)였다. 그 지저분한 영화. 그 리뷰는 잭이 쓴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깡그리 잊고 있었다. 그는 그때 어느 일요신문의 영화비평가로 작은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녀가 파티에서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리뷰란은 붉은색으로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이 팔리지 않는 영화의 전반적인 무가치함 중에도 보상받을 수 있는 몇몇 순간이 있었다. 대부분 앤 미어스가 나오는 부분이다. 그녀는 시시한 장면에서도 눈에 드러나는 연기를 했다. 그녀의 우아함은 이 우중충한 영화 전반에 무지개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1924-29년 서랍을 무슨 숨겨진 칭찬이 들어 있는 일기, 어떤 짧은 행복의 감상적인 표현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며 힘없이 열어보았다. 왼쪽편에 그들의 비디오 레코더에서 녹음한 테이프가 있었다. 오른편에는 큰 갈색 봉투가 있었다. 그 테이프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봉투를 열고 한 권 혹은 그 이상의 책에서 찢어낸 한 뭉치의 종이를 보았다. 어떤 페이지의 옆에는 붉은 글씨로 갈겨쓴 것이 있었고 줄 친 것, 감탄사 같은 표시도 있었다. 그녀는 그 페이지들이 잭의 소설에서 찢겨져나온 것임을 대강 짐작했다. 그리고 점점 그들의 관계에 관한 자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것들을 훑어보고 그 페이지 내용이 어떤 면으로든 모두 섹스에 관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테이프를 아래층으로 가지고 내려온 것은 새벽 세 시였다. 면밀하게 그레이엄의 책상을 살펴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서가에서 손상된 잭의 소설 다섯 권을 찾았다. 걱정스레 그녀는 테이프를 기계에다 넣고 처음으로 되감았다. 내용은 새로 나온 초콜릿 비스킷 광고를 시작되었다. 킬트(체크 무늬의 스커트-역주) 차림을 한 시종이 나와 빅토리아 여왕에게 은쟁반에다 그 비스킷을 한 봉지 바쳤다. 비스킷 봉지를 뜯어 한 입 먹어보더니 그녀의 퉁명스럽고 슬퍼하는 표정이 미소로 바뀌었다. '당연하도다.'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킬트를 입은 시종들이 비스킷을 칭송하는 춤과 노래를 팔 초 정도 계속했다. 앤은 그전에 한 번도 이런 광고를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것을 다시 또 봐야할 것 같지만 말이다. 테이프에는 똑같은 광고가 여덟 번 녹음되어 있었다. 세 번째 보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뭔가 이상하게 낯익은 사람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섯 번째에서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비뚜름한 콧수염과 역시 비스듬하게 머리에 쓴 베레모의 주인공은 딕 델빈이었다. 그레이엄이 도대체 어떻게 그를 찾아냈을까? 그가 델빈이라는 것을 그녀도 다섯 번째 녹화 장면에서 겨우 알아냈는데? 그리고 왜 여덟 번이나 녹화했을까? 앤은 그 날밤 잠을 자지 않았다. 그녀는 테이프를, 그것이 암시하는 비밀과 강박관념에 의해 당황스러워질 때까지 틀고 또 틀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서류함 캐비닛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놓친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그것은 그냥 안에 깔아두는 종이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브닝 스탠다드. 채곡채곡 모아둔 그 신문이었다. 항상 같은 페이지의 영화 안내란이었다. 매번 희미한 붉은색 펠트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들어보지도 못한 영화가 매번 표시된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영화가 그녀와 무슨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잭의 소설에서 찢어낸 페이지를 잘 읽어보았다. 그리고 어떤 패턴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미쳤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점검해보았다. 그레이엄은 미치지 않았다. 그는 슬펐다. 화가 나고 가끔 취했다. 그러나 그를 미쳤다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가 질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말은 그녀가 그에 대해서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그는 슬펐던 거다. 그는 화가 났고 그녀의 과거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질투하는 게 아니다. 잭이 그를 '나의 어린 오델로'라고 언급했을 때 그녀는 속이 상했다. 너그럽게 봐준다는 태도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보는 그녀의 관점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약간 망설였지만 그녀는 바바라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레이엄의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옷은 전부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여행용 가방도 그대로 있었다. 물론 그렇지. 물론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다음날 열시에 그녀는 병원과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경찰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충고를 하였다. 그들은 그가 술을 마시는 사람인지 묻진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 '부인 혹시 말다툼을 하셨나요?" 그녀는 직장에 전화를 해서 속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잭에게 전화를 한 다음 그녀는 지하철역으로 나갔다. 자동차는 렙튼 가든에 있는 아파트 밖에 세워져 있었다. 그레이엄이 벨소리에 나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팔을 둘러 그의 허리를 안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현관 안으로 밀어 넣고 왼발로 문을 차서 닫았다. 그는 그녀를 거실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몸을 옆으로 좀 틀어야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에게 잡혔을 때에도 그녀는 아직도 그의 목과 옆모습을, 그의 주름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지나 방의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선 그녀 눈에 피아노 의자 옆에 누운 잭의 모습이 보였다. 스웨터에는 구멍이 많이 나 있었고 배 근처에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가슴 위에 칼이 평평하게 놓여 있는 것도 보았다. 그녀가 제대로 그레이엄을 바라보기도 전에 그는 이젠 매우 거센 힘으로 그녀의 어깨에다 팔을 두르고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하면서 그레이엄은 그가 이 집에 들어온 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괜찮아." 그 말은 앤을 안심시켰다. 비록 그들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레이엄이 정원을 바라보면서 싱크대 쪽으로 그녀를 세웠을 때,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을 등뒤로 잡아당겼을 때 앤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잠시 그가 사라졌을 때에도 그 자리에 선 채 기다렸다. 그는 돌아서서 그녀의 양 손목을 플라스틱 빨랫줄의 한쪽 끝으로 그리 세지 않게 묶었다. 그는 그녀가 정원 쪽을 내다보도록 했다. 십이 피트의 더러운 크림색의 빨랫줄이 그녀의 손목을 따라 내려와 있었다. 괜찮아, 라고 그레이엄은 생각했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괜찮았다. 그는 앤은 사랑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는 앤이 돌아서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놀랄 정도로 머릿속이 텅 비어 있음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영화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지. 그는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최악의 아이러니가 될 거야.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 말이야. 장막도 없었고 멜로 드라마도 아니었다. 그는 잭을 향해 걸어가 그의 가슴 위에서 칼을 집어들었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때론 담배는 그냥 담배일 뿐이지.' 그의 머릿속에서 웅얼거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때론 그렇지 않지.' '자, 자네는 여태껏 한 번도 선택다운 선택을 해본 적이 없지, 그렇지?"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시 낯익은 그 안락의자에 앉았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신중하고 용기 있게 그는 자기 목을 양쪽으로 깊이 베었다. 피가 솟구쳐오르면서 그는 갑작스레 신음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앤이 돌아보았다. 그는 시간 계산을 했었다. 앤이 전화기로 달려와 발로 수화기를 차고 등뒤로 묶인 손으로 999(응급 구조대-역주)를 돌리고 그리고 누군가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정말 충분한 시간이다. 실제로 앤은 즉시 달려왔다. 빨랫줄을 질질 끌면서 죽어가는 그레이엄을 지나, 죽은 잭을 지나서 책상을 돌아온 그녀는 머리를 숙여 할 수 있는 한 힘껏 유리 창문을 깼다. 많이 다치긴 했지만 구멍을 크게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온 힘을 모아 아주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무슨 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저 길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비명이었다. 여러 사람이 들었지만 아무도 직접 오진 않았다. 그중 세 사람은 경찰서에 전화를 했고 한 사람은 소방대를 불렀다. 그들 중 누군가 제시간에 왔다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상황의 변동 때문에 그레이엄의 계산이 어긋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맨 먼저 도착한 경찰이 깨어진 유리창문으로 들어와 앤의 결박을 풀었을 때, 그레이엄이 앉은 의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젖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