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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6

Bollnow 2025. 3. 21. 10:57

51: 동호가 직필로 조돈을 책망하고 초장왕이 투월초를 주살하고 절영대회를 열다.

 

한편, 진영공은 음모를 꾸며 조돈을 죽이려고 하여, 비록 그 일이 성공하지 못했으나, 조돈이 강성(絳城)을 떠난 것을 기뻐했다. 영공은 마치 스승을 떠난 촌아이처럼, 주인을 떠난 어리석은 종놈처럼, 어떻게 가슴이 후련하고 기쁜지 말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궁궐의 시녀들과 시종들을 데리고 도원으로 가서 머물러 자고, 밤낮으로 놀며 돌아가지 않았다. 한편, 조천은 서쪽 교외에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조돈과 조삭 부자를 만나 수레를 멈추고 연유를 물었다. (조돈의 말을 듣고) 조천이 말하기를, “숙부께서는 잠시 국경을 넘지 마십시오. 며칠 안에 제가 기별을 보내면 다시 거취를 결정하십시오.” 하니, 조돈이 말하기를,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잠시 수양산(首陽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 너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재앙 위에 재앙을 보태지 말아라!” 했다. 조천이 조돈과 조삭 부자를 이별하고 강성에 돌아와서, 진영공이 도원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 거짓으로 알현을 청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말하기를, “신은 비록 군주의 인척이지만 죄인이 종족입니다. 감히 다시 전하의 좌우에서 모시지 못하게 되었으니, 원컨대 소신을 파직하여 물리쳐주십시오.” 했다.

진영공은 조천의 말을 진심이라고 믿고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조돈이 여러 번 나를 기만하고 멸시하여 과인이 사실 참을 수 없었소. 경과는 무슨 관계가 있겠소? 경은 안심하고 직무를 맡아보시오.” 했다. 조천은 감사하고 다시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 ‘백성의 주인이 된 사람에게 귀중한 것은 오로지 노래와 여색을 마음껏 즐기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주공께서 종과 북을 비록 걸어 놓으셨으나 내궁이 비어 있으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제환공은 비첩으로 궁궐을 가득 채웠고 정부인 이외에도 부인과 같은 여자를 여섯이나 두었습니다. 선군이신 진문공께서 비록 망명하여 곤궁한 처지에서도 여자를 여럿 취하시어 환국 이후에 불러왔습니다. 나이가 육순이 넘어서도 잉첩(媵妾)을 무수하게 거느리셨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미 높은 누대를 짓고 넓은 동산을 갖추셨으니 이곳을 침소로 삼아 많은 양갓집 여자들을 골라 그곳을 채우시고 좋은 선생을 시켜 가무를 가르치게 하여 오락을 준비하게 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진영공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나의 뜻과 같소! 지금 나라 안의 미녀들을 찾아내려면 누구를 시키면 되겠소?” 하니, 조천이 대답하기를, “대부 도안고를 시키면 될 것입니다.” 했다.

진영공이 즉시 도안고에게 명을 내려 그 일을 전담하게 했다. 성안이건 성밖이건 얼굴이 아름답고 시집가지 않은 20세 미만의 여자는 모두 이름을 등록하고 그중에서 뽑아서 한 달 안에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다. 조천은 이렇게 공무 출장을 맡겨 도안고를 영공의 곁에서 떼어놓았다. 다시 진영공에게 아뢰기를, “도원을 경비하는 군사들이 너무 약합니다. 신이 군중에서 사납고 용감한 정예 병사 2백 명을 뽑아 이곳을 지키도록 하겠으니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진영공이 다시 그 말을 받아들였다. 조천이 군영에 돌아와 과연 2백 명의 무장병을 선발하였다. 그 무장병이 묻기를, “장군께서는 저희들을 어디로 보내려 하십니까?” 하니, 조천이 말하기를, “주상이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종일 도원에서 행락만을 일삼으면서 나에게 명하여 너희들을 선발하여 도원을 경비하라고 하셨다. 너희들은 모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인데 이번에 가면 바람 속에 노숙하며 어느 날에 끝날지 모르겠다.” 했다. 군사들이 모두 탄식하고 원망하기를, “이 같은 무도 혼군이 왜 빨리 죽지 않는가? 만약에 조돈 상국께서 계셨더라면 반드시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했다.

조천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과 상의할 일이 하나 있는데 너희들이 찬성할지 모르겠다.”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장군께서 능히 우리들의 고생을 구해 주신다면 그 은혜는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했다.조천이 말하기를, “도원은 궁궐에 비해 그다지 깊지 않다. 너희들은 이경(10시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동산 속으로 들어와 상을 타러 왔다고 핑계를 대고, 내가 소매를 흔드는 것을 신호로 하여 너희들은 진영공을 죽여라. 나는 상국을 다시 모셔와 따로 군주를 세우겠다. 나의 이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주 좋습니다.” 했다. 조천이 군사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위로하고 도원 밖에 줄지어 서게 했다. 조천은 진영공에게 경비병들을 선발하여 세웠다고 보고했다. 진영공이 누대에 올라 살펴보니, 군사들은 하나같이 정예하고 용맹하여 개개인이 굳세고 강하게 생겼다. 진영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조천을 머물러 두고 술자리를 같이하여, 이경이 되도록 마셨다. 갑자기 바깥에서 함성이 들려와. 진영공이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조천이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도원을 지키는 군사들이 밤길 가는 행인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신이 가서 타일러 주군이 놀라지 않게 하겠습니다.” 했다.

그때 조천이 등불을 켜라고 명하여 걸어서 누대를 내려갔다. 2백 명의 무사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조천은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그들을 이끌고 누대 앞에 이르러서, 혼자 누대에 올라 아뢰기를, “군사들이 주공께서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고 있음을 알고 남은 술이나마 얻어먹고자 소란을 피웠습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니, 진영공이 내시들에게 명하여 군사들에게 술을 나누어주게 하고, 난간에 기대어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았다. 조천이 영공 곁에 있다가 소리치기를, “주군께서 친히 너희들을 위로하니 모두 잘 받아라.” 했다. 조천이 말을 마치고 소매를 휘저으니, 군사들이 진영공임을 알아보고 모두 몸을 솟구쳐 누대 위로 올라왔다. 영공이 당황하여 조천에게 말하기를, “군사가 누대 위로 올라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경은 나의 명을 전하여 빨리 물러가게 하시오.” 하니, 조천이 말하기를, “군사들이 조돈 상국을 그리워하여 주공께서 다시 귀국시키라고 하려는 듯합니다.” 했다. 진영공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극에 찔려서, 끌어 일으켰을 때 몸이 이미 죽어 있었다. 좌우에 있던 시종들은 모두 놀라 달아났다. 조천이 말하기를, “혼군이 이미 제거되었으니, 너희들은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를 따라 조돈 상국을 조정으로 다시 모셔와야 한다.” 했다.

진영공이 무도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여, 근시들이 아침저녁으로 죽기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무사들이 반역하여 진영공을 시해했음에도 구하는 사람이 없었다. 백성들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원한에 사무쳤기 때문에 진영공의 죽음을 오히려 통쾌하게 생각하고 한 사람도 조천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7년 전에 혜성이 북두를 침입하자 점괘에 이르기를 (), (), () 세 나라의 군주는 모두 반란을 당하여 죽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에 이르러 들어맞았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높은 누대 위에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바깥 군사들이 일어나 화려한 누각에 피를 뿌렸구나! 누대 앞에 구하려는 자 없음을 이상하게 생각 말라. 탄환을 피한 후에는 백성들이 떠났음이라.” 했다. 도안고는 도성 밖에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미녀들을 뽑고 있었는데, 갑자기 보고하기를, “주군께서 시해되었습니다.” 했다. 도안고가 크게 놀라 마음속으로 조천의 짓임을 알고 감히 말하지는 못하고, 몰래 집으로 돌아왔다. 사회 등이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도원으로 달려갔으나 도원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조천이 상국을 맞이하러 갔다고 생각한 사회 등은 도원의 문을 봉쇄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조돈이 수레를 타고 돌아와서 강성(絳城)에 들어왔다. 조돈은 도원을 둘러보고 백관도 일시에 도원으로 몰려들었다. 조돈이 진영공의 시체 옆에 엎드려 한바탕 통곡했다. 그 슬퍼하는 곡소리가 도원 밖에까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상국의 충성과 애정이 이같은데, 진영공이 화를 자초한 것이지 상국의 잘못은 아니다.” 했다. 조돈이 분부하여 진영공을 염하여 곡옥에 장사지냈다. 한편으로 여러 신하를 모두 모아 새 군주를 세우는 일을 의논했다. 그때 진영공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조돈이 말하기를, “선군 양공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항상 나이 든 사람을 군주로 세우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협조하지 않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에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했다. 사회가 말하기를, “나라 안에 나이 든 공자가 있다면 사직의 복입니다. 진실로 상국의 말과 같이 하겠습니다.” 했다. 조돈이 말하기를, “아직 문공의 아들이 한 분 살아있습니다. 태어날 때 그 모친의 꿈에 신인(神人)이 검은 손으로 아기의 볼기를 칠해서 이름을 흑둔(黑臀)이라 했습니다. 지금 주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이가 이미 장년이 되었으니 내 생각에 그 분을 모셔다 군주로 세우면 어떻겠습니까?” 했다.

백관들이 감히 조돈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상국의 처분이 가장 합당합니다.” 했다. 조돈이 조천의 주군을 살해한 죄를 벗기고자 조천을 주나라에 사자로 임명하여 공자 흑둔을 진()나라로 모셔 오게 했다. 흑둔이 돌아와 태묘에 고하고 진()나라 군주로 즉위하니, 이가 진성공(晉成公)이다. 진성공이 군주가 되자, 국정을 오로지 조돈에게 맡기고, 그 딸을 조삭과 혼인시켰다. 진성공의 딸이 장희(莊姬). 조돈이 성공에게 아뢰기를, “소신의 모친은 오랑캐의 딸이었습니다. 군희씨(君姬氏)가 겸양의 미덕이 있어 사람을 보내 저희 모자를 진()나라로 데리고 왔습니다. 신이 참람하게 적자가 되어 마침내 중군을 주관했습니다. 지금 군희씨(君姬氏)의 세 아들 동(), (), ()이 모두 장성하였으니 원컨대 제 자리로 돌려주기를 바랍니다.” 했다. 진성공이 말하기를, “경의 동생은 곧 내 누이의 사랑하는 아들들이라. 내 마땅히 불러 쓰겠으니 너무 겸양하지 마시오.” 했다. 이에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趙嬰) 등을 대부로 삼았다. 조천은 옛날처럼 중군의 보좌로 있게 했다. 조천이 조용히 조돈에게 말하기를, “도안고가 진영공을 모시고 아첨하여 조씨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도원의 거사도 오직 도안고만이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이자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조씨가 편안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했다.

조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너의 죄를 묻지 않고 있는데 네가 도리어 다른 사람의 죄를 묻고자 하는가? 우리 종족들이 귀하고 번성하고 있으니 마땅히 그들과 조정에서 서로 화목해야 하고 남과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된다.” 하니, 조천은 이에 그만두었다. 도안고도 역시 근신하여 조씨를 섬겨서 스스로 화를 면하려고 하였다. 조돈은 도원에서 영공이 시해된 일을 늘 껄끄럽게 여겼는데, 하루는 발걸음을 사관(史館)으로 옮겨 태사 동호(董狐)를 만나 죽간을 을 찾아보자고 했다. 동호가 영공의 일을 기록한 죽간을 바쳤다. 조돈이 죽간을 보니, 분명하게 기록하기를, “가을 7월 을축 일에 조돈이 그 군주 이고(夷皐)를 도원에서 시해했다.”라고 했다. 조돈이 깜짝 놀라 말하기를, “태사는 잘못 기록했오! 나는 이미 하동(河東)으로 달아나서 강성 밖 2백여 리에 있었는데 어찌 군주를 살해한 일을 알았겠습니까? 그대가 죄를 나에게 돌리는 것은 또한 모함이 아닙니까?” 하니, 동호가 말하기를, “그대는 상국이었고, 달아났지만 국경를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도성에 돌아와서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그대가 꾸미지 않았다고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했다. 조돈이 말하기를, “이 기록을 고칠 수 없겠소?” 했다.

동호가 말하기를,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야 참다운 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이 죽간은 고칠 수 없습니다.” 했다. 조돈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 사관의 권세가 상국보다 더 무겁구나! 내가 국경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 만세에 악명을 남기는 일을 면하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후회막급이로구나.” 했다. 이때부터 조돈이 진성공을 받들기를 더욱 공경하고 근신했다. 조천은 자기의 공을 믿고 정경의 자리를 원했으나, 조돈은 공론을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조천은 분노하여 등창이 나서 죽었다. 조천의 아들 조전(趙旃)이 부친의 직책을 잇게 해 달라고 청하니, 조돈이 말하기를, “후일에 네가 공을 세우게 되면 비록 정경의 자리인들 구하기가 어렵겠는가?” 했다. 후세의 사관들은 조돈이 조천 부자에게 사정을 봐주지 않은 것은 모두가 동호의 직필 때문이라고 논했다. 동호의 직필을 찬양하여 이르기를, “보통의 사관은 사실대로 기록하지만, 훌륭한 사관은 뜻으로 부정(不正)을 죽인다. 조천이 군주를 시해했는데, 조돈이 그 죄를 뒤집어썼다. 비록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어찌 감히 붓으로 아첨하리오. 장하다, 동호여! 시비를 가리는 일은 두려운 일이구나!” 했다. 이때가 주광왕 6(기원전 606)이었다. 그해에 주광왕이 죽고 그 동생 유()가 즉위했는데, 이가 주정왕(周定王)이다.

주정왕 원년에 초장왕이 군사를 일으켜 육혼(陸渾) 땅의 융족을 치고, 마침내 낙수(洛水)를 건너 주나라 경계에서 군세를 떨쳐 천자를 위협하여 주나라와 천하를 나누어 제압하려고 했다. 주정왕이 대부 왕손만(王孫滿)을 사자로 보내 초장왕을 찾아가 위문하게 했다. 초장왕이 묻기를, “과인이 듣기에 대우(大禹)께서 솥 아홉 개를 주조하여 삼대(三代 ; 夏商周)에 걸쳐 내려왔는데 그것은 세상의 보물이고 합니다. 지금 낙양(洛陽)에 있는데, 그 솥의 생김새와 크기 및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과인은 그것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했다. 왕손만이 말하기를, “하상주(夏商周) 삼대(三代)는 덕으로써 천하를 서로 전했지 어찌 솥으로 천하를 전했겠습니까?! 옛날에 우임금이 천하를 다스렸을 때, 아홉 지방 장관이 쇠를 바쳐서 아홉 개의 솥을 주조하였습니다. ()나라의 걸왕(桀王)이 무도하여 그 솥은 상()나라로 옮겨졌고,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포학하여 그 솥은 다시 주()나라로 옮겨졌습니다. 만약 천자가 유덕하면 비록 솥이 작아도 무거울 것이며, 만일 덕이 없다면 비록 커도 오히려 가벼울 것입니다. 주나라 성왕(成王)께서 정을 겹욕(郟鄏)에 안치하신 이래 30, 700년이 되도록 천명이 이어졌는데, 제후가 솥에 대해 물을 수는 없겠지요?” 했다. 초장왕은 부끄러워하며 군사를 물렸다. 이로부터 초장왕은 감히 주나라를 넘보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한편, 초나라 영윤 투월초(鬪越椒)는 초장왕이 투월초의 권세를 나누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을 때부터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어 이미 싫어하는 틈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재주와 용기에서 견줄 사람이 없다고 믿고, 또 선조들의 공로로 백성들이 믿고 복종한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모반의 뜻을 품고, 항상 말하기를, “초나라의 인재는 오직 사마 백영(伯嬴; 위가(蔿賈)의 자) 한 사람뿐이다. 나머지는 셀 것도 없다.” 했다. 초장왕이 육혼을 칠 때, 또한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특별히 위가를 나라 안에 남겨 두었다. 투월초는 초장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자 마침내 내란을 일으키려고 결심하여, 투씨 일족을 모두 동원하려 하였으나 투극(鬪克)이 따르지 않자 살해하고 곧바로 사마 위가를 습격하여 죽였다. 위가의 아들 위오(蔿敖)가 그 모친을 모시고 몽택(夢澤)으로 피난했다. 투월초가 증야(蒸野)의 들판에 진을 치고, 초장왕이 돌아오는 것을 맞이하여 공격하려고 했다. 초장왕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밤낮없이 행군을 재촉하여 장서(漳澨)에 이르자, 투월초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서 막으니, 군사의 위세가 매우 강했다. 투월초가 활을 메고 극을 꼬나 쥐었으며 본진에서 말을 달려 왕래하니. 초장왕의 군사들이 바라보고 모두 얼굴에 두려운 기색을 띄웠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투씨는 대대로 초나라에 세운 공훈이 있으니, 비록 백분(伯棼 ; 투월초의 자)이 나를 져버렸지만 내가 백분을 져버릴 수는 없다.” 하고, 이에 대부 소종(蘇從)을 시켜 투월초의 진영으로 가서 강화를 청하도록 했다. 사마 위가를 멋대로 죽인 죄를 용서할 것이며 또 왕자를 인질로 보내기를 허락했다. 투월초가 말하기를. “나는 영윤이 된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용서를 바라지 않소. 싸울 수 있으면 오라고 하시오.” 했다. 소종이 재삼 권유했지만, 투월초는 듣지 않았다. 소종이 돌아간 후에, 투월초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북을 치고 전진하게 하였다. 초장왕이 여러 장수에게 묻기를, “누가 투월초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니, 대장 낙백(樂伯)이 묻는 소리에 응해 나가니, 투월초의 아들 투분황(鬪賁皇)이 문득 맞서 싸웠다. 낙백이 투분황과 싸워 떨어뜨리지 못하는 것을 반왕(潘尪)이 보고, 즉시 전차를 바삐 몰아 진영을 나갔다. 투월초의 종제 투기(鬪旗)가 역시 전차를 몰아 응했다. 초장왕은 큰 전차에 타고 있다가 친히 북채를 잡고 북을 울리며 독전했다. 투월초가 멀리서 바라보고 전차를 나는 듯이 몰아 초장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강궁에다 화살을 메어 초장왕을 향해 쐈다.

그 화살이 곧바로 날라가 수레의 끌채를 지나 북을 매단 시렁 위에 꽂혔다. 초장왕이 놀라서 북채를 버리고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초장왕이 급히 좌우에게 큰 삿갓 방패로 화살을 막아 자기를 보호하라고 했다. 투월초가 또 화살을 쏘니 바로 왼쪽의 방패를 뚫었다. 초장왕은 전차를 뒤로 돌리게 하고 징을 쳐서 군사들을 거두어들였다. 투월초가 용기를 떨쳐 쫓아왔으나, 우군 대장 공자 측(公子側)과 좌군 대장 공자 영제(公子嬰齊)가 양쪽에서 일제히 쇄도하니, 투월초가 비로소 물러났다. 낙백과 반왕도 징 소리를 듣고, 진영을 버리고 돌아왔다. 초장왕의 군사는 자못 손실을 입고 물러나 황호(皇滸)에 영채를 세웠다. 투월초가 쏜 화살을 가지고 와서 보니, 그 길이는 다른 화살보다도 반 배가 길고, 활의 깃은 황새의 깃털로 만들었으며, 표범의 이빨을 화살촉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끝이 아주 날카로웠다. 좌우에서 보고 모두 혀를 내둘렀다. 밤이 되자 초장왕이 진영을 한 바퀴 돌다가 진영 안의 군졸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말하기를, “영윤 투월초가 쏘는 화살은 귀신같아서 두려우니 이기기가 어렵겠다.” 했다.

초장왕이 이에 사람을 시켜 군중에 헛소문을 퍼뜨리기를, “옛날에 선군이신 초문왕 때에 오랑캐 융만(戎蠻)이 화살을 아주 날카롭게 만든다는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 물으니 융만이 두 개의 화살을 보냈는데, 이름을 투골풍(透骨風)이라 부르고 태묘에 보관하였다가, 이번에 투월초에게 도둑맞았다. 지금 두 화살을 다 쏘았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일은 마땅히 깨트릴 것이다.” 했다. 군사들의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초장왕은 이에 수()나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소문을 퍼뜨리기를, “한수 동쪽 여러 나라의 군사들을 모아 투씨를 토벌할 것이다.” 했다. 소종이 말하기를, “강적이 앞에 있는데 한 번 뒤로 물러난다면 적군은 승세를 탈 것이니, 왕은 계책을 잘못 쓴 것이다.” 했다. 공자 측이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헛소문입니다. 우리가 들어가 만나보면 반드시 별도의 처분이 있을 것입니다.” 했다. 두 사람과 공자 영제가 밤에 초장왕을 뵈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역적 투월초의 군세가 강하니 계략으로 취해야지 힘으로 대적할 수는 없소.” 하고, 두 장수에게 분부하기를 이러저러하게 미리 매복하라고 했다. 두 장수는 명령을 받들어 갔다.

다음 날 새벽 닭이 울자, 초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후퇴했다. 투월초가 그 사실을 탐지하고 군사를 인솔하여 추격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하루에 이틀 길을 질주하여 이미 경릉(竟陵)을 지나 북쪽으로 달아났다. 투월초가 하루 밤낮에 2백 리를 행군하여 청하교(淸河橋)에 이르렀다. 초장왕의 군사들이 다리 북쪽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다가 추격병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솥과 아궁이를 버리고 도망쳤다. 투월초가 명령하기를, “초장왕을 사로잡은 후에 아침을 먹겠다!” 하니, 군사들이 피곤하지만 다시 배고픔을 참고 애를 써서 전진하여, 후대인 반왕(潘尫)의 군사를 따라잡았다. 반왕이 전차 위에 서서 투월초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초장왕을 잡으려고 하면서 어찌하여 빨리 달리지를 못하는가?” 했다. 투월초는 호의를 갖고 하는 말이라 믿고 반왕의 군사들을 버리고, 앞으로 60여 리를 달려서 청산(靑山)에 이르렀다. 초장왕의 장수 웅부기(熊負羈)를 보자 묻기를, “초장왕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웅부기가 말하기를, “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했다. 투월초가 의심이 나서 웅부기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내가 왕이 되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면, 나라를 얻어 그대와 함께 나누어 다스릴 용의가 있소.” 했다.

 

웅부기가 말하기를, “내가 장군의 군사들을 보니 굶주리고 지쳐있어 일단은 군사들을 배불리 먹여야만 싸움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하니, 투월초가 그렇다고 생각하여 전차를 멈추고 아궁이를 만들게 했다. 아궁이에서 밥이 되기도 전에 공자 측과 공자 영제의 두 갈래 군사가 쇄도해 오는 것을 보았다. 투월초의 군사는 싸움을 다시 할 수 없어서 남쪽으로 달아났다. 돌아와 청하교에 이르렀으나 다리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원래 초장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다리의 좌우에 매복하고 있다가 투월초의 군사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바로 다리를 끊어 그들의 귀로를 끊었다. 투월초가 크게 놀라 좌우에 분부하여 수심을 재게 하여 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러자 강 건너편에서 포 소리가 한번 울리더니 초장왕의 군사들이 강 언덕에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낙백이 여기 있다. 역적 투월초는 빨리 말에서 내려 오랏줄을 받아라!” 했다. 투월초가 대노하여 강 건너를 향해 활을 쏘도록 명했다. 낙백의 군중에는 활쏘기에 정통한 양요기(養繇基 ; 養由基)라는 하급 장교가 있었다. 군중에서는 그를 신전(神箭) 양숙(養叔)이라고 불렀다. 양요기가 낙백에게 자청하여 투월초와 활쏘기를 겨루어 보겠다고 했다.

이에 그는 강 언덕에 서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강이 이렇게 넓은데 화살이 어찌 능히 미치겠소? 들으니 영윤께서 활을 잘 쏘신다고 하니 제가 마땅히 누가 잘 쏘는지 비교해 봅시다. 다리가 있던 담장 위에 서서 각각 세 번 쏘아 생사를 걸고 겨루어 봅시다!” 하니, 투월초가 묻기를, “너는 누구인가?” 했다. 양요기가 응답하기를, “저는 낙백장군 휘하의 소장 양요기입니다.” 하니, 투월초가 그가 무명 소장이라는 말에 업신여기며 말하기를, “네가 나와 활 솜씨를 겨루겠다고 하면 너는 나에게 먼저 세 번 화살을 쏘게 양보해야 할 것이다.” 하니, 양요기가 말하기를, “세 번 화살을 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백 번 화살을 쏜들 내가 어찌 두려워하겠소? 화살을 피한다면 대장부로 치지 않겠소!” 했다. 이에 각각 군사들을 뒤로 물리고 다리가 있던 담장의 남북에 마주 섰다. 투월초가 먼저 활을 당겨 화살을 쏘았다. 그는 양요기의 머리를 꿰뚫어 강물에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자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일을 이루는 자는 서두르지 않는다.’라는 것을 누가 알았으리오. 양요기는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들고 있던 활로 쳐서 화살이 어느새 강물에 떨어져 버렸다.

양요기가 큰소리로 외치기를, “빨리 쏘시오. 빨리 쏘아!” 하니, 투월초가 다시 두 번째 화살을 활에 메어 자세히 노려보더니 쉿 하고 쏘았다. 양요기가 몸을 한번 굽히자 그 화살은 머리 위로 지나갔다. 투월초가 소리치기를, “너는 몸을 피하지 말자고 해놓고, 어찌하여 몸을 굽혀 화살을 피하는가? 너는 대장부가 아니다!” 하니, 양요기가 대답하기를, “너에게 화살이 하나 더 남아 있다. 나는 이제 피하지 않을 테니, 네가 만약 이번 화살을 맞히지 못하면, 틀림없이 내가 활을 쏠 수 있도록 하겠느냐?” 했다. 투월초가 생각하기를, “네가 만약 피하지 않는다면 이 화살이 틀림없이 너를 맞출 것이다.” 하고, 세 번째 화살을 집어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발사했다. 외치기를, “맞았다!” 했다. 양요기는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움쩍도 하지 않았다. 화살에 날아왔을 때 입을 크게 벌려 정확하게 화살촉을 물었다. 투월초가 세 개의 화살이 모두 맞추지 못하자 마음속으로 이미 황망하게 되어, 좀 전에 대장부라는 말을 꺼낸 데 대해 실언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외쳐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활을 세 번 쏠 것을 허락한다. 네가 쏘아서 맞추지 못한다면 다시 내가 화살을 쏘겠다.” 했다.

양요기가 웃으며 말하기를, “화살을 세 번 쏘아 너를 맞힌다면 그것은 초보자다. 나는 단지 화살 한 개로 네 목숨을 끊을 것이다.” 했다. 투월초가 말하기를, “네 입으로 큰소리를 친다마는 아무튼 네가 활을 쏘아 봐야 알지 않겠느냐?”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어찌 화살 한 개로 나를 맞출 수 있겠는가? 만약 화살 한 개로 맞추지 못한다면 내가 큰소리를 쳐서 그를 멈추게 해야겠다.” 했다. 투월초는 대담하게 양요기로 하여금 활을 쏘도록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리오, 양요기의 화살은 백발백중인 것을. 그때 양요기가 화살을 한 대 뽑아 손에 들고 소리치기를, “영윤은 나의 활 솜씨를 한번 보시라!” 하고, 빈 활을 한번 잡아당겼다 놓았으나, 아직 화살을 쏘지는 않았다. 투월초가 활시위 소리를 듣고 화살이 날아오는 줄 알고 몸을 왼쪽으로 한번 피했다. 양요기가 말하기를, “화살이 아직 내 손에 있고 활에 메기지도 않았는데, ‘피하는 것은 대장부가 아니다.’ 해놓고 어찌하여 피하는 거요?” 했다. 투월초가 말하기를, “내가 몸을 피할까 두려워서 화살을 쏘지 않은 것은 쏜 것으로 치지 않겠다!” 했다. 양요기가 다시 빈 활시위를 당기자 투월초가 다시 오른쪽으로 피했다.

양요기가 그 순간을 틈타 손에 들고 있던 화살을 쏘자 투월초는 화살이 날아오는 줄도 모르고 미처 피하지 못하여, 그 화살이 머리를 꿰뚫었다. 가련하게도 수년간 초나라의 영윤이던 투월초가 오늘 소장 양요기의 화살 한 개에 죽고 말았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인생은 만족을 아는 것이 가장 좋은데, 영윤은 욕심이 많아 왕의 꿈을 꾸었구나! 귀신같은 활 솜씨의 장군이 시험 삼아 재주를 겨루었는데, 다리 건너편의 투월초는 이미 숨을 거두었구나.” 했다. 투씨 종족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피곤하여 주장이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을 보고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져서 달아났다. 초나라 장수 공자 측과 공자 영제는 길을 나누어 추격하여 죽인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강을 붉게 물들였다. 투월초의 아들 투분황이 진()나라로 달아나니, ()나라 군주가 대부로 삼아 묘()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고, 묘분황(苗賁皇)이라고 불렀다. 초장왕이 이미 전승을 거두고 회군을 명령하였으며, 사로잡은 자들은 바로 영문 앞에서 참수했다. 초장왕의 군사들은 개선가를 부르며 영도(郢都)로 돌아갔다. 투씨 종족들은 어른이나 아이를 불문하고 모두 참수되었다.

다만 투반(鬥班)의 아들 극황(克黃)은 잠윤(箴尹)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초장왕이 그를 제나라와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투극황은 명을 받들어 제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다가 송나라에 이르러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초나라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라고 했지만, 투극황은 말하기를, “군주는 하늘과 같다. 하늘의 명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수레를 몰게 하여 영도(郢都)에 들어와 복명한 후에 스스로 사구(司寇)에게 가서 구속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내 조부 자문(子文)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투월초는 반골의 상을 갖고 있어 틀림없이 투씨 일족을 멸족시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부께서 임종하실 때 제 부친에게 다른 나라로 도피하라고 하셨지만, 부친께서는 초나라로부터 대대로 은혜를 입어서 차마 다른 나라로 가지 못했다가 결국 투월초에게 주살되었습니다. 오늘 과연 조부의 말씀이 들어맞습니다. 이미 불행하게도 역적의 가족이 되었고, 또한 불행히 선조의 가르침을 어겼으니, 오늘 죽는 것은 제 운명입니다. 어찌 감히 형을 피하여 도망치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자문은 참으로 신인(神人)이다. 하물며 초나라를 다스려 공이 크니, 어찌 차마 그의 후사를 끊겠는가?” 했다.

초장왕이 이에 투극황의 죄를 용서하고 말하기를, “투극황은 형벌을 피하여 도망가지 않고 죽음을 자청하였으니 그는 곧 충신이다.” 하고, 그를 관직에 복귀시키고, 이름을 투생(鬪生)으로 바꾸게 했는데, 마땅히 죽으려고 하여 살았다는 뜻이었다. 초장왕은 양요기가 화살 한 개로 세운 공을 표창하여 큰상을 내리고 근위대를 이끌게 하고 차우 장군의 직을 맡게 했다. 영윤을 맡길 사람을 얻지 못하다가 심() 땅의 윤()으로 가 있던 우구(虞邱)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국정을 주관하는 권한을 맡겼다. 초장왕은 점대(漸臺) 위에서 여러 신하를 모아 큰 잔치를 열고 비빈들도 참석하게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내가 풍악을 멀리한 지 이제 6년이 되었다. 오늘은 역적의 목을 쳤으니 나라 안이 이제 안정이 되었다. 여러분들과 하루의 즐거움을 함께 하고자 하여, 태평연(太平宴)이라 이름을 지었소. 문무 대소 관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자리에 앉아 즐기기를 바랄 뿐이오.” 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재배하고 순서대로 앉았다. 요리사들은 음식을 내오고 태사들은 음악을 연주했다. 해가 질 때까지 마시고 흥이 아직 끝나지 않아, 초장왕이 불을 밝히고 다시 잔을 따르라고 명하여, 총애하는 허희(許姬) 강씨를 시켜 여러 대부에게 술을 두루 따르게 하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서 마셨다.

갑자기 한 줄기 돌풍이 불어 당내의 등불이 모두 꺼졌다. 좌우에서 미처 불을 켜지 못했는데 연회석에 있던 한 사람이 허희의 미모를 보고 어둠 속에서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허희가 왼손으로 소매를 끊고 오른손으로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당겨 갓끈이 떨어지자 그 사람이 놀라 손을 놓았다. 허희가 갓끈을 손에 쥐고 돌아서 초장왕 앞으로 걸어와서는 귓속말로 아뢰기를, “첩이 대왕의 명을 받들어 백관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는데 어떤 무례한 자가 등불이 꺼진 틈을 타서 강제로 첩의 소매를 잡아당겼습니다. 첩이 이미 그의 갓끈을 쥐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불을 켜서 그자를 찾으십시오!” 하니, 초장왕이 등불을 밝히려는 자에게 급히 명하기를, “잠시 등불을 켜지 말아라! 과인이 오늘 연회를 연 것은 여러 신하와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이다. 여러 신하는 모두 갓끈을 끊고 마음껏 마시기 바라오. 갓끈을 끊지 않은 자는 즐기지 않는 것이오.” 하니, 이에 백관들이 모두 갓끈을 끊었다. 그제야 등불을 켜게 하니, 마침내 소매를 잡아당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연회가 끝나고 궁궐로 돌아오니, 허희가 아뢰기를, “첩이 듣기로 남녀 간에는 서로 무례하게 굴면 안 된다.’ 했습니다. 하물며 군신 간이겠습니까? 오늘 대왕께서 첩을 시켜 여러 신하에게 술을 따르게 하여 제가 공경함을 보였습니다. 제 소매를 잡아당긴 자를 대왕께서 찾아내지 않으셨으니, 무엇으로 상하의 예를 엄숙히 하고, 남녀 간의 유별함을 바르게 할 것입니까?” 했다.

초장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 일은 부녀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옛날에 군주와 신하가 같이 술 마실 때 석 잔을 넘기면 예가 아니었다. 다만 그것도 낮에만 허용되고 밤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오늘 과인이 군신들에게 마음껏 즐기라고 하고, 등불을 밝혀서 계속하게 했다. 술을 마신 후에 미친 짓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만약에 내가 무례한 자를 찾아내어 벌을 주었다면 부인의 절제는 드러나겠지만, 나라의 사대부들은 마음을 상했을 것이다. 군신들의 마음이 모두 불쾌하게 되면 그것은 과인이 명령을 내린 의도가 아니다.” 하니, 허희도 감탄하여 복종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연회를 절영회(絶纓會)라고 이름 붙였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어둠 속에서 소매를 잡아당김은 취중의 정인데, 섬섬옥수가 바람과 같이 갓끈을 이미 끊었네! 군왕의 마음이 강과 바다처럼 넓다고 말할 것이니, 고기를 기르려면 물이 너무 맑아서는 안 된다네.” 했다. 하루는 영윤 우구(虞邱)와 정사를 논하다가 어느덧 밤이 되어서야 궁궐로 돌아왔다. 부인 번희(樊姬)가 묻기를, “조당에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늦게서야 파하셨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우구와 정사를 논하다가 이렇게 시간이 늦은 줄 몰랐소.” 했다. 번희가 말하기를, “우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초나라의 어진 사람이오.” 했다. 번희가 말하기를, “제가 망령되이 보건대 우구는 틀림없이 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부인이 어떻게 우구가 어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오?” 하니, 번희가 말하기를,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것은 부인이 남편을 섬기 것과 같습니다. 첩은 중궁의 일을 주재하고 있는데 궁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대왕께 바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구가 대왕과 국정을 밤늦도록 논하면서 아직 한 사람의 현인도 천거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무릇 한 사람의 지혜는 유한하고 초나라의 인재는 무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구는 자기 한 사람의 지혜로써 무궁한 인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찌 그를 어질다고 하겠습니까?” 했다. 초장왕이 그 말을 옳다고 생각하여, 다음 날 아침에 번희의 말을 우구에게 전했다. 우구가 말하기를, “신의 지혜가 여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곧 인재를 찾아보겠습니다.” 했다. 우구가 여러 신하를 두루 찾아다니며 물으니, 투생이 위가의 아들 위오(蔿敖)가 현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투월초의 난을 피해 몽택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장상의 인재입니다.” 했다. 우구가 초장왕에게 말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백영(伯嬴 ; 蔿賈)은 지혜로운 선비였소. 그의 아들이라면 틀림없이 범상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잊을 뻔했소.” 하고, 즉시 우구에게 명하여 투생과 함께 수레를 몰고 몽택으로 가서, 위오를 데려와 임용하려고 했다.

한편, 위오(蒍敖)의 자는 손숙(孫叔)인데, 사람들이 손숙오(孫叔敖)라 불렀다. 어머니를 모시고 투월초의 난을 피하여 몽택에 살며 밭을 갈아 자급했다. 하루는 괭이를 메고 나갔는데, 밭 가운데에서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을 보았다. 위오가 놀라며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머리가 둘 달린 뱀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그것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데 내가 죽게 되었구나!” 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만약에 이 뱀을 살려 두었다가 다른 사람이 다시 보게 되면 또한 그 사람도 목숨을 잃을 것이니, 내 한 사람이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즉시 괭이를 휘둘러 뱀을 죽여서 밭둑에 묻은 후, 어머니에게 달려가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가 우는 까닭을 묻자 위오가 대답하기를, “제가 들으니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본 사람을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지금 그 뱀을 보았으니, 앞으로 어머님을 모시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그 뱀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니, 위오가 대답하기를, “뒤에 다른 사람이 다시 볼까 두려워서 이미 죽여 파묻었습니다.” 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사람이 한번 선을 생각해도 하늘은 반드시 그를 돕는다. 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고 뒤에 볼 사람을 걱정하여 죽여서 묻었다니, 그 선행이 어찌 한번 선하게 생각한 것에 그치겠느냐? 너는 반드시 죽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장차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했다.

며칠이 지나서, 우구와 투생이 초장왕의 명을 받들어 손숙오를 데려가 임용하려고 도착했다. 그 모친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뱀을 묻은 선행에 대한 보답이구나.” 했다. 손숙오와 그 모친이 우구를 따라서 영성(郢城)으로 돌아왔다. 초장왕이 손숙오를 한번 만나 그와 하루 종일 대화하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초나라의 여러 신하 중에서 그대와 견줄 사람은 아무도 없소.” 했다. 초장왕은 그날로 손숙오를 영윤으로 임명하였다. 손숙오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농사 짓다가 올라온 사람인데 갑자기 큰 정사를 맡기면 어찌 사람들이 신에게 복종하겠습니까? 청컨대, 여러 대부들의 뒤에서 따르기를 원합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경을 알고 있소. 경은 사양하지 마시오.” 했다. 손숙오가 재삼 사양하다가 결국 명을 받아 영윤이 되었다. 손숙오는 초나라의 제도를 살펴서 군법을 세웠다. 무릇 군대 조직은 군우(軍右)와 군좌(軍左)로 나누고, 군우에 속한 군사들은 전투 준비를 하고, 군좌에 속한 군사들은 마초와 깔개를 구하여 군사들의 숙영을 준비하게 했다. 전대(前隊)는 모려무(茅慮無), 중군(中軍)은 중권(中權), 후대(後隊)는 후경(後勁)이라고 했다. (전대인 모려무는 깃발을 앞세우고 적병의 유무를 살핀다는 뜻에서 꾀하여 살핀다[謀慮]라고 했으며, 중권이라는 것은 모든 군령과 작전 지시가 이곳에 나오니, 외부로부터 흔들릴 수 없다는 뜻이고, 후경은 강한 군사로 뒤를 맡는데, 싸울 때는 기습 군사로 쓰고, 후퇴할 때는 뒤를 끊는 임무를 담당했다.)

왕의 호위군은 이광(二廣)으로 나누었다. 매 광은 전차 15대로 하고, 전차 한 대에 보졸 100명과 뒤에 25명의 유병(遊兵)이 따랐다. 우광은 축(;2), (;4), (;아침6), (;아침8), (;아침10) 다섯 시각을 경비하고, 좌광은 오(;정오), (;오후2), (;오후4), (;오후6), (;저녁8) 다섯 시각을 경비했다. 매일 닭이 울 때가 되면 우광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사방을 순시하다가 정오가 되면 좌광과 임무를 교대하고, 황혼이 되면 순찰을 중지했다. 궁궐의 내시들도 반을 나누어 순서에 따라 해시(亥時;10)와 자시(子時;12)에 순찰하게 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우구를 중군장으로 삼고, 공자 영제를 좌군장으로 삼았으며, 공자 측을 우군장으로 했다. 양요기는 우광의 장수가 되고, 굴탕(屈蕩)은 좌광의 장수가 되었다. 사시(四時)로 군사들을 집합시켜 사열하니, 각 부서에 법이 있어 삼군의 기율이 엄격했다. 그래서 백성들도 동요하지 않았다. 또한 작피(芍陂)에 둑을 쌓아 수리 공사를 일으키고 육() 땅과 요() 땅에 논 만경(萬頃)을 개간하여 백성들이 모두 칭송했다.

초나라의 여러 신하가 초장왕이 손숙오만을 총애하자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았으나, 손숙오가 처리하는 일이 하나하나가 모두 조리가 있어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르기를, “초나라에 복이 있어 이렇게 현명한 신하를 얻었으니, 자문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라고 했다. 당초 영윤 자문이 초나라가 잘 다스렸는데, 지금 손숙오를 얻어 마치 자문이 다시 살아났다고 한 것이다. 이때 정목공(鄭穆公) ()이 죽고, 세자 이()가 즉위하니, 이가 정영공(鄭靈公)이다. 공자 송(公子宋)과 공자 귀생(公子歸生)이 정나라의 정사를 맡았는데, 그때까지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를 우물쭈물하면서 어느 쪽을 섬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초장왕과 손숙오가 상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치려고 했다. 갑자기 정영공이 공자 귀생에게 시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내가 정나라를 치는 것이 더욱 명분이 있겠구나.” 했다.

 

공자 귀생이 왜 군주를 죽였는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52: 공자 송이 자라탕을 맛보려다가 역모를 꾀하고, 진영공이 속곳으로 조정을 희롱하다

 

한편, 정나라의 공자 귀생(公子歸生)은 자가 자가(子家)이고, 공자 송(公子宋)은 자가 자공(子公)이다. 두 사람은 모두 정나라 주군의 친척으로 경()을 맡고 있었다. 정영공(鄭靈公) () 원년에 공자 송은 공자 귀생과 일찍 일어나 정영공을 뵙기로 서로 약속했다. 공자 송의 식지(食指)가 갑자기 저절로 떨렸다. (왜 식지(食指)라고 하는가? 첫째 손가락은 무지(拇指)라 하고, 셋째 손가락은 중지(中指), 넷째 손가락은 무명지(無名指), 다섯째 손가락은 소지(小指)라 하는데, 오직 둘째 손가락만은 대체로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그 손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식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공자 송의 손가락이 떨리는 모습을 공자 귀생이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공자송이 말하기를, “다른 게 아니오라, 제 손의 식지가 떨릴 때마다 그날은 반드시 별미를 맛보게 됩니다. 저번에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식지가 떨리더니 석화어(石花魚)를 먹었고, 뒤에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한번 식지가 떨리더니 고니를 먹었고, 또 한번 식지가 떨리더니 합환귤(合歡橘)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식지가 미리 떨리면 효험이 없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오늘은 어떤 별미를 맛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두 사람이 조당 문을 들어서자 내시가 궁중 요리사를 급히 부른다고 정영공의 명을 전했다.

공자 송이 묻기를, “그대는 무슨 일로 요리사를 찾는가?” 하니, 내시가 말하기를, “어떤 손님이 한강(漢江)에서 오셨는데 무게가 2백 근이나 되는 큰 자라 한 마리를 가지고 와서 주공께 바쳤습니다. 주공께서 자라를 받으시고 손님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지금 그 자라를 대청 아래에 묶어 놓으시고 요리사를 불러 자라 요리를 해서 여러 대부와 같이 맛보려고 하십니다.” 했다. 공자 송이 말하기를, “별미가 여기에 있군요. 저의 식지가 어찌 헛되이 떨렸겠습니까?” 했다. 두 사람이 입조하여 대청 기둥에 묶여 있는 아주 큰 자라를 보고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정영공을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웃음기를 여전히 머금고 있었다. 정영공이 묻기를, “두 분 경들께서 오늘 무엇 때문에 웃음기를 띠었습니까?” 하니, 공자 귀생이 대답하기를, “공자 송과 제가 입조할 때 공자 송의 식지가 갑자기 저절로 떨렸는데. 말하기를 매번 이같이 식지가 떨리면 반드시 별미를 맛보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청 아래에 매여 있는 큰 자라를 보니 틀림없이 주공께서 자라를 요리하여 여러 신하에게 맛보시게 하시려는 것 같아 공자 송의 식지가 효험이 있어서 웃었습니다.” 했다. 정영공이 장난쳐서 말하기를, “공자 송의 식지가 효험이 있고 없고는 과인의 마음에 달려 있소!” 했다.

두 사람이 영공 앞에서 물러 나와, 공자 귀생이 공자 송에게 말하기를, “별미가 비록 있다 하나 만약 주군이 그대를 부르지 않으면, 어쩌지요?” 하니, 공자 송이 말하기를, “이미 여러 사람에게 맛보이려고 하시는데 어찌 우리만 빼놓겠습니까?” 했다. 저녁나절이 되자 내시가 과연 여러 대부들을 두루 불렀다. 공자 송이 기쁜 마음으로 조당으로 들어가면서 공자 귀생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저는 원래 주군께서 우리를 꼭 부를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모이자 정영공이 자리에 앉으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자라는 물짐승 중에 별미라! 과인이 혼자서만 즐길 수 없어서 여러 경들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하니, 여러 신하가 한목소리로 감사하며 말하기를, “주공께서 한 끼를 드시는데도 저희를 잊지 않으시니 저희는 무엇으로 은혜를 갚겠습니까?” 했다. 자리를 정하자 요리사가 자라 요리가 다 되었다고 고하고 먼저 정영공에게 바쳤다. 정영공이 맛보더니 맛있다고 했다. 요리사에게 명하여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상석에 이르기까지 자라탕 한 그릇과 상아 젓가락 한 쌍을 놓으라고 하였다. 마침 첫째와 둘째 자리에 남는 것이 한 그릇밖에 없었다, 요리사가 여쭙기를, “자라탕이 모두 떨어지고 단지 한 그릇만 남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어느 분에게 드려야 하지요?” 했다.

정영공이 말하기를, “자가(공자 귀생)에게 주어라.” 했다. 요리사가 자라탕을 귀생 앞에 놓았다. 정영공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과인이 두루 여러 경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했는데 자공(공자 송)에게만 자라탕을 맛볼 차례가 돌아가지 않게 되었소! 식지가 어찌 효험이 있겠소?” 했다. 원래 정영공은 고의로 요리사에게 분부하여 한 그릇을 부족하게 준비시켜 공자 송의 식지가 효험이 없다는 것을 보여 웃음을 자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영공은 공자 송이 이미 공자 귀생의 면전에서 잔뜩 자랑한 것을 몰랐다. 오늘 백관들이 모두 음식을 받았는데 자기 혼자 받지 못하자 공자 송은 수치심이 분노로 변했다. 공자 송이 정영공 앞으로 달려가 손가락을 정영공의 자라탕 그릇에 넣어 고기 한 덩어리를 꺼내 먹고 말하기를, “신이 이미 자라고기를 맛보았으니 저의 식지가 어찌 효험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했다. 말을 마치고 곧바로 달려 나갔다. 정영공도 역시 노하여 젓가락을 던지면서 말하기를, “송이란 놈이 불손하여 과인을 업신여기는구나! 정나라에 어찌 칼이 없어 그놈의 목을 칠 수 없겠는가?” 하니, 공자 귀생 등이 모두 자리에서 내려와 엎드려서 말하기를, “공자 송은 주공의 깊은 총애를 믿고 주공의 은혜를 고르게 받고자 오로지 장난으로 그랬을 뿐입니다. 어찌 감히 주군에게 무례를 범했겠습니까? 원컨대 주군께서는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했다. 정영공이 노여움을 풀지 않자 주군과 신하들은 모두 즐겁지 않게 흩어졌다.

공자 귀생이 즉시 공자 송의 집에 가서 주군이 노여움을 풀지 않고 있다고 전하면서 말하기를, “내일 입조하여 사죄하는 게 좋겠소.” 하니, 공자 송이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남을 업신여기는 자는 남들도 그를 업신여긴다.’라고 합니다. 주군께서 먼저 나를 업신여기셨는데, 먼저 자책하지 않고 나를 꾸짖는다는 말입니까?” 했다. 공자 귀생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군주와 신하 사이에 군주에게 사죄하지 않을 수 없소.” 했다. 다음날 두 사람이 함께 입조하였다. 공자 송은 군신의 반열에서 예를 드리고, 벌벌 떨며 사죄하는 말이 전연 없었다. 오히려 공자 귀생이 마음이 불안하여 아뢰기를, “공자 송이 주공께서 그릇에 손가락을 넣은 무례를 꾸짖을까 두려워서 특별히 와서 죄를 고하고 무슨 말로 사죄드릴지 전전긍긍합니다. 주공께서는 넓으신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했다. 정영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자공(공자 송)에게 죄를 지었음을 근심하고 있는데, 자공이 어찌 과인을 두려워하겠소?” 하고, 옷소매를 떨치며 일어났다. 공자 송도 조당에서 물러 나와 귀생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귓속말로 속삭이기를, “주공께서 나에게 심히 노하고 계시니 주살 당할까 두렵습니다. 차라리 먼저 난을 일으켜서 일이 성사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공자 귀생이 귀를 막으며 말하기를, “육축(六畜 ; , , 돼지, , , )도 오래도록 기르면 차마 죽이지 못하거늘, 하물며 한 나라의 군주를 감히 가볍게 시역하겠다고 말하시오?” 하니, 공자 송이 말하기를, “제가 농담을 했습니다. 그대는 누설하지 마시오!” 했다. 귀생이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공자 송은 공자 귀생과 정영공의 동생 공자 거질(公子去疾)이 서로 친하여 왕래가 잦다는 것을 알고, 조당에서 큰 소리로 떠들기를, “자가(공자 귀생)와 자량(子良 : 공자 거질)이 아침저녁으로 만나는데 무엇을 모의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사직에 이롭지 않은 일을 모의하지 않는지 걱정된다.”라고 했다. 귀생이 급히 공자 송의 팔을 잡아당겨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서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이오?” 하니, 공자 송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협조하지 않으니 내가 반드시 그대를 나보다 하루라도 먼저 죽게 하려고 그럽니다.” 했다. 공자 귀생은 원래 유약한 사람이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공자 송의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가?” 하니, 공자 송이 말하기를, “주상의 무도함은 자라탕을 나눌 때 이미 보았을 것입니다. 만약 대사가 성공한다면 나와 그대가 자량(공자 거질)을 옹립하여 군주로 받들고 진()나라와 수호를 한다면 정나라는 수년간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했다.

귀생이 한번 생각하더니 천천히 대답하기를, “나는 그대가 하는 대로 맡기고, 누설하지 않겠소!” 했다. 공자 송은 남몰래 집안의 장정들을 모아, 정영공이 가을 제사를 지내려고 재계하고 하룻밤을 머무는 틈을 이용하여, 정영공의 측근들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한밤중에 제궁에 잠입하여, 흙 부대로 자고 있는 영공을 죽이고 가위눌려 갑자기 죽었다고 둘러댔다. 공자 귀생은 그 일을 알았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다. (공자(孔子)께서 춘추를 지을 때, ‘정나라 공자 귀생이 그 군주 이()를 시해했다.’라고 썼는데, 공자 송을 풀어주고 공자 귀생에게 죄를 돌린 것은 그 자신이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 모함이 두려워 역모를 따랐으니, 이른바 중책을 맡은 자는 그 책임도 역시 중하다라는 것이다. 성인께서 이같이 글을 써서 후세의 신하를 경계하셨으니 가히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다음날 공자 귀생과 공자 송이 함께 의논하여 공자 거질을 받들어 군주로 세우려고 하였다. 공자 거질이 크게 놀라 사양해 말하기를, “선군의 아들은 아직 8명이 남아 있소. 만약 어진 사람을 세운다면 나는 내세울 만한 덕이 없고, 만약 맏이를 세운다면 공자 견(公子堅)이 있소. 나는 죽더라도 그 순서를 뛰어넘지 않겠소.” 했다. 이에 공자 견을 맞이해서 군주의 자리에 나아가게 하니, 이가 정양공(鄭襄公)이다.

정목공에게는 모두 1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정영공 이()는 시해되고, 정양공(鄭襄公) ()이 그 뒤를 이었다. 그 아래로 아직 열 한 명이 남아 있었다. 열 한 명의 공자들은 공자 거질(公子去疾 : 子良), 공자 희(公子喜 : 子罕). 공자 비(公子騑 : 子駟), 공자 발(公子發 : 子國), 공자 가(公子嘉 : 子孔), 공자 언(公子偃 : 子游), 공자 서(公子舒 : 子印) (七穆), 또 공자 풍(公子豊), 공자 우(公子羽), 공자 연(公子然), 공자 지(公子志) 등이 있었다. 정양공은 동생들의 무리가 번성함을 꺼리어 후일에 변란이라도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몰래 공자 거질과 상의하여 거질만 남겨두고, 나머지 동생들을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거질이 말하기를, “선군은 꿈에 난초를 보고 태어났는데, 점괘에 이르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희씨(姬氏) 종족을 번창하게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무릇 형제들이 공족이 되어 마치 가지가 무성하듯 해야 줄기가 번영하는 것이지, 만약 가지와 잎을 쳐버리면 줄기와 뿌리가 모두 드러나서 머지않아 말라 버립니다. 주군께서 형제들을 용납하는 것이 제가 진실로 원하는 바입니다. 만약 용납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다른 형제들과 같이 가겠습니다. 어찌 차마 혼자 여기에 남아 후일에 무슨 면목으로 선군을 지하에서 뵙겠습니까?” 했다.

정양공이 감동하고 깨우쳐 이에 11명의 아우들을 모두 대부로 삼아 정나라 정사에 참여하게 했다. 공자 송을 진()나라에 사절로 보내어 수호를 청하고 나라의 안정을 꾀했다. 이때가 주정왕 2(기원전 605)의 일이었다. 다음 해 정양공 원년에 초장왕이 공자 영제를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치면서 묻기를, “무엇 때문에 군주를 시해했는가?” 했다. ()나라가 순림보를 시켜 구원하게 하니, 초나라는 마침내 군사를 이동하여 진()나라를 쳤다. 정양공은 진성공(晉成公)과 흑양(黑壤)에서 회맹을 맺었다. 주정왕 3년에 진()나라 상경 조돈이 죽자, 극결(郤缺)이 대신하여 중군 원수가 되었다. ()나라가 초나라와 강화했다는 소식을 들은 극결이 진성공에게 고한 후, 순림보를 시켜 진성공을 모시고 송(), (), (), () 4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정벌했다. 진성공은 도중에 병이 나서 죽었다. 이에 군사들은 회군했다. ()나라에서 세자 유()를 군주로 세웠는데. 이가 진경공(晉景公)이다. 그 해에 초장왕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유분(柳棼)에서 정나라 군사를 쳤다. ()나라의 극결이 군사를 인솔하여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초나라 군대를 습격하여 패퇴시켰다. 정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으나, 공자 거질은 홀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정양공이 괴이하게 여겨 묻자, 거질이 대답하기를, “()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물리친 것은 우연입니다. 초나라는 장차 정나라에다 노여움을 풀 것인데 진()나라를 길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머지않아 초나라 군사들을 정나라 교외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했다. 다음 해(기원전 602)에 초장왕이 다시 정나라를 치려고 영수(潁水)의 북쪽에 진을 쳤다. 그때 마침 공자 귀생이 병들어 죽자, 공자 거질은 자라탕 사건을 치죄하여 공자 송을 죽여서, 그 시체를 조문 앞에 드러내 놓았다. 자가(공자 귀생)의 관을 쪼개고 그 족속들을 추방했다. 사자를 초장왕에게 보내어 사죄하여 말하기를, “과인은 역적 귀생과 송을 지금 모두 주살했습니다. 과인은 진()나라 군주와 함께 초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기로 입술에 피를 발라 맹세하겠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허락했다. 마침내 진()나라와 정()나라를 진릉(辰陵) 땅에서 모이게 하려고 사자를 보내어 진()나라 군주와 약속하려 했다. 사자가 진()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나라 군주는 대부 하징서(夏徵舒)에게 시해되어 나라 안에 난리가 났습니다.” 했다. 시가 있어 증언하기를, “주나라가 동쪽으로 옮긴 이래 천하에 난리가 끊이지 않고, 어지럽게 군주를 죽여서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요성(妖星)이 북두를 침범하니 세 나라에 군주가 죽었건만, 또다시 진()나라 군주가 하징서에게 죽임을 당했구나!” 했다.

한편, 진영공의 이름은 평국(平國)인데, 곧 진공공(陳共公) ()의 아들이다. 진영공은 주경왕(周頃王) 6(기원전 612)에 군주의 자리를 이었다. 위인이 경망스럽고 게으르며 위엄이 없었고, 주색과 유희에 탐닉하여 나라의 정사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 진영공이 총애하는 두 사람의 대부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공녕(孔寧)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의행보(儀行父)였다. 이들은 모두 군주에게 주색을 권하는 자들이었다. 한 임금과 두 신하가 의기투합하여 입으로 하는 말이 경박하고 각기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 진나라 조정에 한 어진 신하가 있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설야(泄冶)인데,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정직한 사람으로 일이 생길 때마다 감히 바른말을 하여 진영공과 그 두 신하가 매우 두려워하고 꺼렸다. 또 하어숙(夏御叔)이라는 대부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공자 소서(少西)로 진정공(陳定公)의 아들이었다. 소서(少西)의 자가 자하(子夏)였으므로 어숙(御叔)은 하()로써 성씨를 삼고, 또는 소서(少西)씨라고도 했다. 하어숙은 진()나라의 사마(司馬) 벼슬을 세습하고, 주림(株林)을 식읍으로 하였다. 하어숙이 정목공(鄭穆公)의 딸을 맞이하여 처로 삼아 하희(夏姬)라고 불렀다.

그 하희는 타고나기를 누에 눈썹과 봉의 눈에, 살구꽃 뺨과 복사꽃 볼을 지녔다. 여희(麗姬)와 식규(息嬀)의 용모에 달기(妲己)와 문강(文姜)의 요염함과 음욕을 겸했다. 하희를 한 번 본 사람은 혼백을 빼앗겨 정신이 돌아 버렸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하희가 15세 되던 때 꿈에 훌륭한 장부를 만났는데, 별 장식 갓에 깃털 옷을 입고 스스로 하늘의 신선이라면서, 그와 교합을 하면 남자의 정기를 빨아들이는 기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그 사람과 교접을 하여 곡진한 즐거움을 다했으며 나아가 양기를 빨아들이고 음기를 보충하여 늙음을 버리고 젊음으로 돌아오는, 이름하여 소녀채전지술(素女采戰之術)’을 배웠다. 정나라에서 시집가기 전에 이미 정영공의 서형인 공자 만(公子蠻)과 오빠 누이가 사통했다. 3년이 되지 않아서 공자 만은 요절했다. 뒤에 하어숙에게 시집을 가서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징서(徵舒)라고 했다. 징서의 자는 자남(子南)인데, 나이 열두 살 때 하어숙이 병이 들어 죽었다. 하희가 바깥사람들과 사귀었기 때문에, 징서를 성내에 머물러 두어 스승을 따라 글을 배우게 했다. 자신은 주림에 물러나 살았다.

공녕(孔寧)과 의행보(儀行父)는 전부터 하어숙과 같이 조정에서 같이 벼슬하여 서로 친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하희의 미색을 엿보고 각각 유혹할 뜻을 품고 있었다. 하희에게는 하화(荷華)라는 시녀가 있었는데, 영리하고 눈치가 빨랐으며, 옛날부터 자기 주인을 위해 남자를 불러들이는 일을 습관적으로 해 오고 있었다. 공녕이 하루는 하징서와 같이 교외에 사냥을 나갔다가 하징서를 집에다 데려다주느라고 주림에 와서 그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공녕은 오로지 마음을 써서 먼저 하화에게 비녀와 귀고리를 선물로 주어 환심을 산 후에 그녀의 주인에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남녀 사이가 무르익었고, 하희의 비단 속곳을 훔쳐 입고 나와서 의행보에게 자랑했다. 의행보가 부러워하며 그 역시 많은 선물로 하화와 사귀어 하희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희가 평소에 의행보를 보니 신체가 장대하고 콧날이 오뚝하여 그녀도 마음이 있었다. 마침내 하희는 하화를 의행보에게 보내어, 몰래 만날 것을 약속했다. 의행보는 기묘한 강장제를 널리 구해 먹고 하희를 즐겁게 했다. 하희는 공녕보다 의행보를 두 배나 더 사랑하였다. 의행보가 하희에게 말하기를, “공대부에게 비단 속곳을 주어 이미 배려를 했으니, 또한 나에게도 한 가지 기념품을 주어 똑같이 사랑해 주시오.” 했다.

하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비단 속곳은 그가 훔쳐 간 것이지 제가 준 것이 아닙니다.” 하고,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비록 같이 잤지마는 어찌 차별이 없겠습니까?” 했다. 이에 하희가 입고 있던 푸른 비단 속적삼을 벗어서 주었다. 의행보가 크게 기뻐했다. 이로부터 의행보가 자주 왕래하게 되었고, 공녕과는 사이가 점차 멀어졌다. 옛 시가 증언하기를, “정나라의 풍속은 어찌 그리 음탕한가? 환공과 무공의 교화는 이미 멀어졌네. 사내와 계집들 사통하기에 분주하고, 거리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 중자(仲子)는 담을 넘으려 하고, 아름다운 남자는 교활한 놈이 되어 버렸다. 동문 밖의 꼭두서니 풀을 생각하면, 들판의 덩굴도 무성하겠다. 치마를 올리기란 어렵지 않을 테니, 수레에 그녀 태워 어디로 데려갈까? 새파란 님의 옷깃 내 마음을 잡아끌고, 허리에 단 방울 소리 늙어감을 잊게 한다. 비바람이 불고 새벽닭이 울 때라도, 서로가 교묘히 남모르게 만난다. 출렁이는 물결에 장작 묶음 흘러가듯, 비방하는 말로 흔들지 말아라. 습관이 되면 많은 사람이 알게 되니, 어찌 이를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했다. 의행보는 공녕이 비단 속곳을 가지고 그에게 자랑한다고 생각하다가, 지금은 푸른 비단 속적삼을 얻게 되자, 역시 공녕에게 자랑했다.

공녕은 하화에게 물어서, 하희와 의행보가 서로 긴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질투하게 되었으나 그들을 갈라놓을 계책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계책을 생각해 냈다. (진영공은 성품이 음란한 즐거움을 탐하여 오래전에 하희가 미색이라는 소문을 듣고 여러 번 말하면서 간절히 사모했으나 손을 쓸 수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공녕이 생각하기를, “주군을 끌어들여 함께 즐기면 진영공이 틀림없이 나에게 감격할 것이다. 더욱이 진영공은 의서에 호취(狐臭) 혹은 액기(腋氣)라고 하는 성병을 앓고 있으니, 하희가 틀림없이 좋아하지 않겠으나, 내가 진영공 곁에 바싹 붙어서 틈을 타 희롱하여 애쓸 것이다. 그러면 의대부와 적지 않게 멀어질 것이고, 나의 서운한 감정도 어느 정도 풀어지지 않겠는가? 좋은 계책이야, 좋은 계책이야!” 하고, 즉시 영공을 독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하희의 아름다움은 천하에 비할 바가 없다고 말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과인도 역시 오래전에 그 이름을 들었소! 다만 그녀의 나이가 이미 40이니, 3월 복숭아꽃 같을 것이라 그 아름다움이 변함을 면치 못했을 것이오.” 했다.

공녕이 말하기를, “하희는 방중술에 능하여 그 얼굴이 날이 갈수록 젊어지고 있으며, 항상 17, 18세의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의 성행위는 교묘하여 보통과 전혀 달라서 주공께서 한번 해보시면 저절로 혼이 달아날 것입니다.” 했다. 진영공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달아올라 얼굴을 붉히면서, 공녕을 향해 말하기를, “경은 무슨 방법으로 과인과 하희를 만나게 해 주겠소? 과인이 맹세컨대 그대의 수고로움을 잊지 않으리라!” 하니, 공녕이 아뢰기를, “하희는 쭉 주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대나무가 번성하여 놀 만한 곳입니다. 주공께서 내일 아침 일찍 다만 주림에 행차한다는 말만 하시면, 하희가 틀림없이 주연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주공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희에게는 하화라는 몸종이 있는데, 그녀는 자못 남녀 정사를 압니다. 신이 주공의 뜻을 하화에게 전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했다. 진영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일은 전적으로 경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했다. 다음날 진영공은 수레를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 후에 미복(微服) 차림으로 주림에 놀러 나갔다. 다만 대부 공녕을 수행하게 했다. 공녕이 먼저 하희에게 편지를 보내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하화에게 진영공이 방문하는 목적을 밝혀 하희에게 전하도록 했다.

하희로서도 주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맞이할 준비를 했다. 진영공은 오직 하희를 욕심내어, 주림에서의 놀이는 명색뿐이라 이야말로 옥과 향수를 도적질하는 데 마음이 팔렸는데, 산수를 감상하는 데 무슨 관심이 있으랴?’ 였다. 진영공이 주림에서 놀이를 대충 생략하고 발길을 옮겨 하희의 집에 도착하니, 하희가 예복을 갖추고 맞이하여 대청으로 모셨다. 하희가 진영공을 뵙고 말하기를, “첩의 아들 하징서가 스승에게 공부를 하는 중이라 주공께서 왕림하는 줄을 몰라 영접하는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했다. 하희의 목소리는 마치 신록 속의 꾀꼬리가 노래하는 듯 아름다웠다. 진영공이 하희를 보니 참으로 하늘의 선녀였다. 여섯 궁궐 안의 비빈들은 하희와 견줄 수가 없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우연히 이곳에 한가로운 놀이를 나와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으니 너무 놀라지 마시오.” 하니, 하희가 옷깃을 여미고 대답하기를, “주공께서 귀한 발걸음으로 왕림하시니 누추한 집이 빛나게 되었습니다. 소첩이 채소와 술을 준비하여 아직 감히 헌상치 못했습니다.” 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이왕 음식을 준비했다니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고, 들으니 이 집의 정원이 그윽하고 아름답다니, 한번 들어가 구경하면서 주인이 차린 성찬을 먹으면서 폐를 끼쳐야 하겠소.” 했다.

하희가 대답하기를,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로 오랫동안 소제를 하지 않아 후원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주군을 그리로 모시기가 송구하오니 미리 죄를 고합니다.” 하고, 하희의 응대가 공손하니 진영공이 더욱 사랑스럽게 보았다. 하희에게 명하기를, “예복을 벗어버리고 과인을 안내하여 한번 놀아 보자.” 하니, 하희가 예복을 벗고 몸이 은은히 보이는 옷에 옅은 화장을 하여 마치 달빛 아래 배꽃이요 눈 속의 매화 같아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희가 앞장을 서서 영공을 후원으로 인도했다. 비록 땅이 넓지 않았지만 커다란 소나무와 빼어난 잣나무에 기이한 바위와 아름다운 꽃들이 있고 한쪽에는 연못이 있고 정자가 몇 군데 있었다. 가운데에 높은 집 한 채가 있었는데 붉은 난간에 비단 장막을 쳤고 아주 상쾌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었다. 그 건물 양쪽 곁에는 행랑채가 있었고, 그 뒤에 밀실이 있으며 회랑을 따라 구부러져 들어가면 침실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정원 안에 마구간이 있어 말을 기르고 있었다. 정원 동쪽 빈 곳에 활터가 있었다. 진영공이 한번 둘러보고 나니, 건물 안에 잔칫상이 차려져서, 하희가 술잔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진영공이 옆에 앉으라고 했으나 하희가 사양하며 감히 앉지 못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주인은 어찌하여 가까이 다가와 앉지 않는가?” 하고, 공녕은 오른쪽에 앉게 하고, 하희는 왼쪽에 앉게 하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군신 간의 신분을 버리고 마음 놓고 즐겨 보자.” 했다. 술을 마시는 사이에 진영공은 눈을 깜박이지 않고 하희를 주시하고, 하희도 역시 추파를 던졌다. 진영공이 취흥이 일어나 치정이 발동하니 또한 공녕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술을 마셔 술기운이 오르자 얼마를 마셨는지 모르게 되었다. 해가 서산에 기울자 주위에 등불을 켜라고 하여 술잔을 씻어 다시 술을 마셨다. 진영공이 대취하여 자리에서 쓰러지더니 코를 골면서 잠에 떨어져 버렸다. 공녕이 목소리를 낮추어 하희에게 말하기를, “주공께서 그대의 미모를 오랫동안 사모하다가 오늘 이곳까지 오시어 그대와 즐거움을 나누고자 하니 절대 그 뜻을 어겨서 꺾지 마시오!” 했다. 하희가 미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공녕이 술자리를 파하고 밖으로 나가 어가를 몰고 온 사람들을 쉬게 한 후에 자기도 숙소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희는 비단 이불과 수놓은 베개를 준비하여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고 향초를 넣어 끓인 물에 목욕하여 영공의 부름에 대비하고, 하화에게 영공 곁에 머물며 시중을 들게 했다.

조금 지나자 진영공이 자다가 깨어나 눈을 크게 뜨고 묻기를, “너는 누구냐?” 했다. 하화가 무릎을 꿇고 응답하기를, “천비 하화입니다. 마님의 명을 받들어 군주님을 모실 것입니다.” 하고, 매실탕을 가져다 드렸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이 탕은 누가 끓였는가?” 하니, 하화가 대답하기를, “제가 끓였습니다.” 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너는 매실탕도 끓일 줄 아니, 나를 위해 능히 중매도 하겠느냐?” 하니, 하화가 거짓 모르는 체하며 대답하기를, “천비가 비록 중매는 익숙지 않지만 또한 심부름은 바삐 다닐 줄 압니다. 다만 군주님께서 어느 분에게 뜻을 두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과인은 너의 마님 생각에 정신이 산란하다. 너는 능히 나를 위해 이 일을 성사시켜 주면 내가 마땅히 너에게 상을 주겠다.” 하니, 하화가 대답하기를, “저희 마님께서는 과부의 몸이라 군주님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사오나 만일 버리지 않으신다면 천비가 군주님을 마님 계시는 곳으로 인도할까 합니다.” 했다. 진영공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하화에게 명하여 등불을 들고 인도하라고 했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을 따라 내실 문 앞에 당도하니, 하희는 등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기다리는 듯했다.

하희가 발자국 소리를 듣고 문을 열려고 하는데, 진영공이 이미 방안으로 들어왔다. 하화가 얼른 은촛대를 들고 나가자, 진영공은 다시 말을 걸지 않고 하희를 안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동침했다. 하희의 살과 피부는 부드럽고 매끄러워서 몸이 닿자 녹을 듯했다. 기쁘게 합칠 때 마치 처녀와 같았다. 영공이 괴이하여 물으니, 하희가 대답하기를, “첩은 내시법(內視法 : 두 눈을 집중하여 단전이나 몸의 한 부분을 보는 것)을 지녀서 비록 아이를 낳은 뒤에라도 불과 3일이면 예처럼 충실해집니다.” 했다. 진영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비록 천상 선녀를 만났다 한들 이보다 낫겠느냐?” 했다. 진영공의 성기를 말할 것 같으면 원래 공녕이나 의행보 두 대부의 것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더욱이 성병에 걸려 좋은 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 나라의 군주라 부녀자들이란 권세와 이익을 좋아하는 관계로 감히 성내거나 싫어하지 못하고 잠자리에서 거짓으로 진영공을 기쁘게 하였다. 진영공은 마침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일을 경험했다. 닭이 울 때까지 잠들었다가 하희가 진영공을 깨웠다. 영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그대와 사랑을 나누고 여섯 궁궐의 비빈들을 돌아보니, 마치 썩은 흙과 같구나! 다만 그대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했다.

하희가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과 왕래하는 일을 진영공이 이미 알고 있는지 의심하여, 이에 대답하기를, “천첩은 사실 주공을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남편을 잃은 이래 자제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몸을 허락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이미 군주님을 모셨으니 이로부터 마땅히 영원히 외간 남자와 사귀기를 사절하고 감히 다시 두 마음을 품어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진영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랑하는 그대가 평상시 사귀는 사람을 한번 과인에게도 알려다오. 숨길 필요가 없다!” 하니, 하희가 대답하기를, “공녕과 의행보 두 대부는 저의 남긴 고아를 돌본다고 하여 마침내 어지럽게 되었지, 다른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했다. 영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과연 공녕이 그대의 방중술이 보통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만약에 그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하니, 하희가 대답하기를, “천첩이 먼저 죄를 지었으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십시오.” 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공녕이 아름다운 여인을 천거해 주어 과인은 감격하고 있으니 그대는 의심하지 말라. 단지 원하는 바는 그대를 항상 만나 애정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대가 하는 대로 맡기니 나는 그대를 말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하회가 대답하기를, “주공께서 끊임없이 오신다면 어찌 항상 만나는 데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했다. 조금 뒤 진영공이 일어서자 하희가 입었던 속적삼을 벗어 진영공에게 입혀 주면서 말하기를, “주공께서 이 적삼을 보시고 천첩을 본 듯이 여겨주십시오.” 했다. 하화가 등불을 들고 들어와 왔던 길을 되돌아 원래 머물렀던 건물로 왔다. 날이 밝은 후 마루 위에 이미 아침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공녕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어가를 대령하고 문안을 드렸다. 하희는 진영공에게 당상에 오르기를 청하여 문안 인사를 드리고, 요리사가 음식을 바쳤다. 시종들에게도 모두 술과 음식을 주어 배불리 먹게 했다. 식사가 끝나자, 공녕이 진영공을 위해 수레를 몰아 조정으로 돌아왔다. 백관들은 진영공이 성밖에서 잤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날도 모두 모여 조문에서 문안을 올렸다. 진영공이 명령을 내리기를, “조회를 취소한다.” 하고, 곧바로 궁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의행보가 공녕을 붙잡고 주공이 간밤에 어디서 잤는지 캐물었다. 공녕이 숨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솔직히 말했다. 의행보는 공녕이 추천한 것임을 알고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그와 같은 좋은 인정을 쓰려면 어찌하여 나에게 양보하지 않고 혼자서만 했소?” 하니, 공녕이 말하기를, “주공께서 십분 기뻐하셨으니 두 번째는 그대가 인정을 베풀면 되겠소.” 했다. 두 사람이 큰 소리로 웃으면서 헤어졌다.

다음날, 진영공이 아침 일찍 조회에 나와 조례를 마치고, 백관들이 모두 물러가자, 공녕을 앞으로 불러서 하희를 천거한 일을 치사하고, 또 의행보를 불러 묻기를, “그처럼 즐거운 일을 어찌하여 진작 과인에게 고하지 않았소? 그대들 두 사람은 나보다 선점했으니 그것이 무슨 도리요?” 하니, 공녕과 의행보가 일제히 말하기를, “신 등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그 미인이 직접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 경들은 구태여 숨길 것이 없소.” 하니, 공녕이 대답하기를, “비유하자면 마치 주군께서 맛있는 음식을 드실 때 신하들이 먼저 맛을 보고, 아버지께 맛있는 음식을 드릴 때 자식이 먼저 맛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맛을 보고 좋지 않다면 감히 주군께 바칠 수 있겠습니까?” 했다. 진영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이번 일은 곰 발바닥 요리에 비유함과 같으니, 과인에게 먼저 맛보게 양보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래도 괜찮소.” 했다.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모두 웃었다. 진영공이 다시 말하기를, “그대 두 사람은 비록 먼저 남녀의 즐거움을 맛보았지만, 그녀는 나에게 기념하는 선물을 주었소.” 하며 속옷을 들추어 보이며 이것은 미인이 준 것인데, 그대 두 사람도 이런 게 있는가?” 했다.

공녕이 말하기를, “신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하니, 진영공이 말하기를, “경에게 무슨 물건을 주었소?” 했다. 공녕이 옷을 걷어 올리더니 비단 속곳을 보여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하희가 준 것입니다. 신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의행보도 가지고 있습니다.” 했다. 진영공이 의행보에게 묻기를, “경은 또 무엇을 받았소?” 하니, 의행보도 푸른 비단 속적삼을 진영공에게 보여주었다. 진영공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 세 사람이 모두 정표를 가졌으니 훗날에 함께 주림에 가서 침상을 이어놓고 큰 모임을 가져 봅시다!” 했다. 군주와 두 신하가 조당에서 희롱했다. 이 이야기가 조당 문밖으로 퍼져서 고뇌하는 한 정직한 신하가 이를 갈며 크게 외치기를, “조정은 법과 기강이 있는 곳인데, 이같이 문란하니 진()나라의 멸망은 손가락을 꼽아 기다릴 수 있겠구나,” 하고, 곧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죽간을 들고 조당 문을 열고 들어와 간언을 올렸다.

 

그 관원이 누구인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53: 초장왕이 간언을 듣고 진나라를 다시 세우고, 진경공이 군사를 내어 정나라를 구하다.

 

한편, 진영공과 공녕, 의행보 등 두 대부가 함께 하희가 준 속옷을 껴입고 조당에 올라 서로 희롱했다. 대부 설야(泄冶)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옷깃을 여미고 홀()을 잡고 다시 조당으로 들어갔다.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은 평소에 올곧은 설야를 싫어했다. 오늘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오니 반드시 직간을 올리러 온 것이라고 짐작했다. 두 사람은 즉시 진영공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러 나왔다. 진영공도 역시 옥좌에서 일어나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설야가 진영공 앞으로 뛰어 올라가 옷깃을 붙잡으며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 ‘군신 간에는 서로 공경해야 하며 남녀 간에는 서로 구별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금일 주공께서는 <시경> 주남(周南)에서 이르는 교화를 전혀 깨닫지 못하시고 나라 안의 부녀자에게 정조를 잃게 하시며, 또 군신 간에 음란한 쾌락을 자행하면서 서로 표방하여 조당에서 듣기 거북한 더러운 말을 하며 염치를 모두 잃어버리고 체통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군신 간의 공경과 남녀 간의 구별이 이미 없어져 버렸습니다. 무릇 군신이 공경하지 않으면 태만해지고, 남녀가 구별이 없어지면 기강이 문란해집니다.태만하고 문란한 것은 나라가 망하는 길입니다. 주군께서는 반드시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했다.

진영공은 얼굴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말하기를, “경은 더 말을 마시오. 과인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있소!” 했다. 설야가 인사를 하고 조문 밖으로 나갔다.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아직 조문 밖에서 엿듣다가, 설야가 노기등등하여 나오는 것을 보고, 얼른 사람들 속으로 피했다. 설야가 이미 두 사람을 보고 불러내어서 꾸짖기를, “군주가 선한 일을 하면, 신하는 마땅히 널리 알려야 하고, 군주가 나쁜 짓을 하면 신하는 마땅히 그것을 숨겨야 하오. 지금 그대들은 스스로 나쁜 짓을 행하고 그로써 군주를 꾀어내어 다시 그 일을 퍼뜨려서 백성들이 공공연히 보고 듣게 하였으니 무엇으로 백성을 가르칠 것이오? 어찌 부끄럽지도 않소?” 했다. 두 사람이 대꾸하지 못하고, ‘, 하며 가르침에 감사했다. 설야가 가버리자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진영공에게 뵙기를 청하여, 설야가 군주를 책망한 말을 늘어놓고 말하기를, “주공께서는 이제부터 다시는 주림에 놀러 가지 마십시오.” 하니, 진영공이 말하기를, “경들 두 사람도 주림에 다시는 안 갈 것이오?” 하니,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는 신하로서 주군에게 간한 것이지 저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희는 갈 수 있지만, 주군께서는 갈 수가 없죠.” 했다. 진영공이 힘주어 말하기를, “과인이 차라리 설야에게 죄를 지을망정 어찌 그 즐거운 곳을 버릴 수 있겠소?” 했다.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다시 아뢰기를, “주공께서 만약 다시 간다고 하면 아마 설야가 성가시게 하여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어쩌시겠습니까?” 하니, 진영공이 말하기를, “경들 두 사람에게 설야가 말을 못하게 할 좋은 계책이 있소?” 하니, 공녕이 말하기를, “설야가 말을 못하게 하려면, 그의 입을 열지 못하게 하면 됩니다.” 했다. 영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에게 입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입을 열지 못하게 금할 수 있겠소?” 하니, 의행보가 말하기를, “공녕의 말은 신이 능히 알아듣겠습니다. 대저 사람이란 죽으면 입을 닫습니다. 주공께서는 왜 설야를 죽이라고 전지를 내려서 평생의 즐거움이 무궁하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과인은 그렇게 할 수 없소!” 하니, 공녕이 말하기를, “신이 사람을 시켜 찌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진영공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경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했다. 두 사람이 진영공에게 인사를 올리고 조문을 나가 한 곳에서 상의했다. 많은 재물로 자객을 사서 지나다니는 길목에 매복하여 설야가 입조하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일어나 죽이게 했다. 나라 사람들은 모두 진영공이 시킨 것으로 알았지,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모의하여 죽인 줄은 몰랐다. 사관이 설야를 찬양하여 이르기를, “진나라가 밝은 덕을 잃어, 군주와 신하가 음란했네. 벼슬아치가 부녀 속곳을 가지고 희롱하니, 주림 땅이 조정이 되었구나. 장하도다, 설야여! 혼자서 군주에게 직간을 하다가, 몸은 비록 죽었으나 그 이름은 높아져, 관용방(關龍逄)과 비간(比干)과 비슷하다.” 했다.

설야가 죽고 나서부터 군주와 신하가 거리낄 것이 없게 되어 세 사람은 수시로 주림에 같이 다니면서 한두 번 차례로 정을 통하더니, 이후로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 공공연히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주림(株林)’이라는 노래를 지어 풍자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주림에는 왜 가는가? 하남을 만나러 간다네. 주림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남을 만나러 간다네. 나는 말과 수레를 타고 가서 주림의 뜰에서 쉬리라. 나는 망아지와 수레를 타고 가서, 주림에서 아침을 먹으리라.” 했다. 하징서(夏徵舒)의 자()가 자남(子南)이므로, 시인이 충직하고 순후하여 하희(夏姬)라고 하지 않고 하남(夏南)이라고 했으며, 자남(子南)을 만나러 갔다고 말했다. 진영공이 본래 보잘것없는 사람이어서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영공의 뜻을 받들어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하희와의 일을 거들어 주는 동시에 화기롭게 한 여자와 세 남자가 함께 즐기며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징서가 점점 장성하여 모친이 하는 일을 알게 되었다. 하징서는 심장이 칼로 에는 듯했으나 진영공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매번 진영공이 주림에 오겠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하징서는 핑계를 대고 피하여 눈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 이 음란한 즐거움에 빠진 남녀들은 하징서가 자리를 피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다.

세월은 화살같이 흘러서 하징서의 나이가 18세가 되었다. 그 생김새가 크고 건장하여 힘이 무척 세었을 뿐 아니라 활을 잘 쏘았다. 진영공이 하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징서에게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게 하여 사마(司馬)로 삼고 병권을 장악하게 했다. 하징서가 진영공에게 감사하고, 주림으로 돌아와 어머니 하희를 뵈었다. 하희가 말하기를, “이것은 진영공의 은전이니, 너는 마땅히 그 직분에 충실하여 나라를 위해 근심하고, 집안일에 대해서는 절대 신경을 쓰지 말아라.” 했다. 하징서가 모친에게 인사를 올린 후에 다시 조정에 들어가 나랏일을 처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진영공이 공녕과 의행보 두 대부와 더불어 다시 주림에 놀러 가서 하희와 함께 잠을 자게 되었다. 하징서가 부친의 작위를 잇게 해 준 은혜에 감사하려고 특별히 집에 돌아와 잔치를 열어 진영공을 접대했다. 하희는 아들이 연회석에 앉아 있어 감히 나와서 배석하지 못했다. 술이 거나해진 후에 주군과 신하들은 다시 서로 희롱하면서 손발로 춤을 추었다. 하징서가 그 꼴이 보기 싫어 물러나 병풍 뒤에 들어가 그들이 하는 말을 엿듣게 되었다. 진영공이 의행보에게 말하기를, “하징서의 체구가 크고 늠름하니 그대를 닮았는데 혹시 그대의 자식이 아니요?” 하니, 의행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징서의 두 눈이 밝고 빛나니 아주 주공을 닮았습니다. 혹시 주공의 소생이 아닌지요?” 했다.

공녕이 곁에서 거들며 말하기를, “주공과 의대부는 나이가 적으니 그런 아들을 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아비가 극히 많아서 그는 잡종이고, 하부인 스스로도 기억을 못할 것입니다.” 하니, 세 사람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하징서가 못 들었으면 모를까 듣고 보았으니 자기도 모르게 수치심과 분노가 울컥 일어나 참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분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면 담대한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라는 경우였다. 하징서가 아무도 모르게 하희가 있는 내실의 문을 잠그고, 곁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자기가 데려온 군사들에게 분부하기를, “집 주위를 단단히 포위하고 진영공과 공녕 및 의행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아라!” 하니, 군사들이 명령을 듣고 함성을 한번 지르며 하씨의 집을 포위했다. 하징서는 갑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손에 쥐고 가병 몇 명을 이끌고 대문으로 달려들어 갔다. 그가 입으로 크게 외치기를, “빨리 음탕한 도적을 잡아라!” 하니, 진영공은 그때 술을 마시며 너절한 농담을 하고 있었고, 공녕이 하징서의 고함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주공, 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하징서가 마련한 이 자리가 좋은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군사들을 끌고 오면서 음탕한 도적놈들을 잡아라라고 했습니다. 빨리 달아나야 합니다.” 했다.

의행보가 말하기를, “앞문은 포위되었으니 뒷문으로 달아나야 합니다.” 했다. 세 사람이 항상 하씨 집에 드나들었으므로 집안의 구조를 모두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진영공이 내실로 가서 하희에게 구원을 청하려고 했으나 중문이 잠겨있음을 보고, 황망한 중에 더욱 황망하게 되어 급히 후원으로 달아났다. 하징서가 뒤를 추격했다. 진영공이 동쪽 마구간의 낮은 담장이 넘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마굿간을 향해 달아났다. 하징서가 외치기를, “혼군은 달아나지 마라!” 하고, 활을 잡아 쉿 하고 한 발을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진영공이 마굿간으로 달려 들어가 몸을 숨기려 했으나 말들이 놀라서 우니, 바삐 마구간에서 나왔다. 하징서가 바짝 따라와 또 화살 한 발을 쏘아 진영공의 심장을 정확히 맞혔다. 가련하게도 진나라 군주 평국(平國)은 제후의 자리에 있은 지 15년 만에 오늘 마구간에서 죽었다. 공녕과 의행보는 진영공이 동쪽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고, 하징서가 틀림없이 쫓아간 줄 알고, 그들은 서쪽을 향하여 도망쳐서 활터로 나갔다. 하징서는 과연 진영공의 뒤를 쫓아갔다.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은 마침내 개구멍을 빠져나와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맨몸으로 초나라를 향해 달아났다.

하징서는 이미 진영공을 쏘아 죽이고, 군사들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다만 진영공이 술을 마시고 갑자기 병이 나서 죽으면서 세자 오()를 군주를 세우라는 유명을 남겼다고 말했다. 세자 오()가 진성공(陳成公)이 되었다. 진성공이 마음속으로 하징서를 원망하였으나 힘으로 제압할 수가 없어서 참으면서 말하지 않았다. 하징서도 역시 제후들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진성공을 강박하여 진()나라에 조현하고 수호를 맺도록 했다. 한편, 초나라의 사신이 초장왕의 명을 받들어 진()나라 군주에게 진릉(辰陵)에서 회맹을 맺자고 전갈하러 가다가, ()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변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그때 마침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도망하여 와서 초장왕을 뵙고, ()나라 군주와 신하들의 음란한 사정은 숨기고, 단지 말하기를, “하징서가 반란을 일으켜서 진후 평국(平國)을 시해했다.”라고 했다. 그들의 말은 초나라의 사신의 말과 서로 일치했다. 초장왕은 즉시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대책을 상의했다. 그때 초나라에는 한 공족 대부가 있었는데, 굴씨(屈氏)에 이름은 무()이고 자는 자령(子靈)이며 굴탕(屈蕩)의 아들이었다, 이 사람은 용모가 수려하고 문무를 겸전한 인재이나, 다만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음행을 즐기고 색을 밝혔으며 팽조(彭祖) 방중술을 오로지 익혔다.

굴무가 몇 년 전에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연히 밖으로 놀러 나온 하희의 용모를 엿보고, 또 그녀가 방중술에 능하여 나이 들수록 더욱 젊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속으로 매우 사모하게 되었다. 이에 하징서가 진영공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기회를 빌려서 하희를 사로잡으려고 초장왕에게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했다. 영윤 손숙오도 역시 말하기를, “()나라의 죄는 마땅히 토벌해야 합니다.” 했다. 초장왕이 마침내 마음을 결정하였다. 그때가 주정왕 9(기원전 598)으로 진성공 오() 원년이었다. 초장왕이 먼저 격문을 진()나라에 전달하니, 격문에 쓰기를, “초왕이 그대에게 보이노라! 소서씨(少西氏 ; 하징서)가 그 군주를 시해하여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였다. 그대 나라가 치죄하지 못하니 과인이 그대들을 위해 죄를 물으려 하노라. 벌은 오로지 죄 지은 자만이 받을 것이니, 나머지 신하와 백성들은 조용히 듣고 소동하지 말라!” 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격문을 보고 모두가 그 죄를 하징서에게 돌렸다. 그들은 간절히 초나라의 손을 빌려 하징서를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에 적을 막아낼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초장왕이 친히 3군을 이끌고, 공자 영제(公子嬰齊), 공자 측(公子側) 및 굴무 등의 일반 장군들과 함께 구름과 바람처럼 무인지경을 달리듯 진()나라 도성에 이르렀다. 진나라 백성을 위로하여 안심시키고 군사들에게 터럭 하나도 범하지 못하게 했다. 하징서는 백성들이 자기를 원망하는 것을 알고, 몰래 주림으로 달아났다.

그때 진성공은 아직 진()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대부 원파(轅頗)가 여러 신하와 상의하기를, “초장왕이 우리를 위하여 역신을 토벌하러 왔는데 하징서만 죽이려 합니다. 차라리 하징서를 잡아서 초나라 군대에 바치고 사자를 보내 강화를 청한다면 사직은 보전할 수 있으니 그것이 상책입니다.” 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그렇다고 생각했다. 원파가 즉시 그 아들 교여(僑如)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주림에 가서 하징서를 잡아오게 했다. 교여가 미처 가기도 전에 초나라 군사가 이미 도성 밑에 이르렀다. ()나라에는 오랫동안 정령이 없었고, 더욱이 진성공마저 나라 안에 없으니, 백성들이 주인이 되어 성문을 열어 초나라 군사들을 맞아들였다. 초장왕이 군대를 질서정연하게 이끌고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초나라의 여러 장군이 원파 등을 초장왕 앞에 데려오자 초장왕이 묻기를, “하징서는 어디에 있는가?” 했다. 원파가 대답하기를, “주림에 있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묻기를, “누가 진후(陳侯)의 신하가 아닌가? 어찌하여 그런 역적을 용납하여 죽이지 않는가?” 했다. 원파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힘이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즉시 원파에게 길을 인도하라고 명하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주림을 향해 출발하고, 공자 영제에게 일군을 거느리고 진()나라 도성 안에 주둔하게 했다.

한편, 하징서는 집안 재물을 수습하여 모친 하희를 모시고 정나라로 도망치려고 했다. 시각을 다투고 있는 참에 초나라 군사들은 주림을 에워싸서 하징서를 붙잡았다. 초장왕이 뒷수레에 가두도록 명하고, 좌우에 묻기를, “어찌하여 하희는 보이지 않는가?” 했다. 장수와 군사들을 시켜 집을 수색하여 정원 속에서 하희를 찾았다. 하화는 도망가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하희가 초장왕에게 재배하고 말하기를, “불행히도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고 집안이 망하여, 아녀자인 천첩의 목숨은 대왕의 손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불쌍히 여겨 용서하시면 노비에라도 채워 주십시오.” 했다. 하희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말은 조용하고 온아하여 초장왕이 한번 보자 마음에 미혹하여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초나라에 후궁이 비록 많지만, 하희만한 여자는 아주 드물다. 과인이 후궁으로 데려가 비빈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여러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굴무가 간하기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주군께서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에 온 것은 군주를 죽인 죄를 토벌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하희를 맞아들이신다면 그것은 여색을 탐하는 것입니다. 죄를 토벌함은 의()를 세우기 위함이며 여색을 탐하게 되는 일은 음란함을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로 시작했다가 음란으로 결말을 내시는 것은 천하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대왕께서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자령(子靈 ; 굴무)의 말이 매우 옳다! 과인은 감히 하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다만 이 여자는 세상에서 빼어난 미인이니 만약에 다시 과인의 눈에 다시 뜨인다면 필연코 내가 자제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군사들에게 명하여 후원의 담을 헐어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하였다. 그때 공자 측이 옆에 있다가 역시 하희의 미모를 탐내었다. 초장왕이 하희를 취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신이 중년에 아내가 없으니, 저에게 아내로 주십시오.” 했다. 굴무가 또 아뢰기를, “대왕께서 허락하시면 안 됩니다.” 하니, 공자 측이 노하여 말하기를, “자령은 내가 하희를 아내로 삼겠다는 것을 무엇 때문에 용납하지 못하는가?” 했다. 굴무가 말하기를, “이 여인은 천지간에 상서롭지 못한 요물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근거로 말해 보면, 정나라의 자만(子蠻)을 요절하게 하고, 다시 하어숙(夏御叔)을 젊은 나이에 죽게 만들으며, 진영공이 시해되게 하였고, 하징서는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며, 공녕과 의행보가 도망치게 하고,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니, 불길하기가 막대합니다. 천하에 아름다운 여인이 많은데, 하필 이 음란한 여인을 취하여 후회를 남기려 하십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자령의 말과 같으니 과인도 또한 두렵구나!” 했다.

공자 측이 말하기를, “이미 그렇다면 나도 역시 그녀를 취하지 않으리다. 다만 이 일에 대해서 그대도 그녀를 취하지 않겠다고 주공께 말하면 나도 역시 취하지 않겠소. 그대는 하희를 취하겠다고 말하지 못하겠지요?” 하니, 굴무가 곧이어 말하기를, “감히 취하지 않겠소. 감히 취하지 않겠소.”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미인에게 주인이 없으니 사람들이 반드시 다툴 것이다. 내가 들으니 연윤(連尹) 양로(尹襄老)가 얼마 전에 아내를 잃었다 하니, 그에게 후취 부인으로 주어야 하겠다.” 했다. 그때 양로는 군사를 이끌고 초장왕을 따라와서 후대에 있었다. 초장왕이 양로를 불러 하희를 주니, 부부가 감사하고 물러갔다. 공자 측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다만 굴무는 장왕에게 간하여 공자 측을 좌절시키고 원래 자기가 데려가려고 했으나, 장왕이 하희를 양로에게 주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부르짖기를, “아깝다, 아까워!”하고, 또 몰래 생각하기를, “그 사람은 이미 늙었으니 어찌 그 여자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일 년이나 반년이면 과부로 만들 것이고 그때가 되면 다시 변통하여 처리해야지.” 했다. 이것은 굴무의 속마음이고 입으로는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초장왕이 주림에서 하루를 묵고, ()나라 도성으로 돌아오니 공자 영제가 영접하여 입성했다.

초장왕이 명령을 내려 하징서를 감옥에서 율문(栗門)으로 끌어내어 거열형에 처하여 죽였다. 이것은 제양공이 고거미를 죽인 형벌과 같았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진영공이 황음하여 비록 스스로 화를 당했지만, 하징서도 군주를 죽여 또한 국법을 어겼다. 초장왕의 토벌은 때맞추어 내린 비와 같았고, 사수 강변의 제후들은 초나라 깃발을 우러러보았다.” 했다. 초장왕이 하징서의 시체를 조리돌리고 나서, ()나라의 영역을 자세히 파악한 후에 진나라를 멸하여 초나라의 현으로 만들었다. 공자 영제를 진공(陳公)에 봉하여 그 땅을 지키도록 했다. ()나라 대부 원파 등은 모두 초나라 도성 영성으로 끌려갔다. 남방의 속국들은 초장왕이 진나라를 멸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와서 조정에서 축하했고, 각처의 현공(縣公)들도 스스로 와서 축하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대부 신숙시(申叔時)는 홀로 제나라에 사자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제나라에서는 혜공(惠公)이 죽고 세자 무야(無野)가 즉위하니 그가 제경공(齊頃公)이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그 후에 죽 수호를 맺었으므로 초장왕이 신숙시를 보내어 제혜공의 문상과 제경공의 즉위 축하를 하게 했다. (그가 사자로 갈 때는 아직 진나라를 치기 전이었고, 초장왕이 초나라로 돌아온 3일 후에 신숙시가 막 돌아와서 복명하고, 물러나면서 축하하는 말이 없었다.)

초장왕이 내시를 시켜 신숙시를 책하는 말을 전하기를, “하징서가 무도하여 그 군주를 죽였으니 과인이 그 죄를 물어 죽였다. 그리고 그 영역을 우리나라에 합쳤으니 의로운 소문이 천하에 떨쳤다. 제후들과 현공(縣公)들이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유독 그대만이 한마디도 없으니 어째서 과인이 진나라를 토벌한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했다. 신숙시가 사자를 따라와서 초장왕을 뵙기를 청해 면전에서 말하겠다고 하니, 장왕이 허락했다. 신숙시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혜전탈우(蹊田奪牛 ; 밭을 밟았다고 소를 빼앗음)’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들어보지 못했소.” 했다. 신숙시가 말하기를, “지금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남의 밭을 가로질러 갔는데 곡식을 밟았습니다. 밭 주인이 노하여 그 소를 빼앗았습니다. 이 송사를 대왕 앞으로 가져와 판결을 내리라고 한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소를 끌고 가다 밭을 밟은 것은 손상이 많지 않은데 그 소를 빼앗는 것은 너무 심하오! 과인이 만약 이 송사를 판단한다면 소를 끌고 간 자에게는 가벼운 벌을 내리고 소를 돌려주겠소. 그대는 마땅하다고 생각하시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오?” 했다.

신숙시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송사에는 밝은 판단을 하시면서, 진나라에는 어찌하여 어두운 판단을 하셨습니까? 무릇 하징서가 지은 죄는 진나라 군주를 죽인 것이지 나라를 망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왕께서는 하징서의 죄를 물어 처형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고도 진나라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소를 빼앗은 일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니 어찌 축하하겠습니까?” 했다. 초장왕이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그 말이 옳소! 과인은 아직 그런 말을 듣지 못했소!” 했다. 신숙시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신의 말이 옳다고 하시고서 어찌하여 빼앗은 소를 되돌려 주는 일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했다. 초장왕이 즉시 진나라 대부 원파를 불러 묻기를, “()나라 군주는 어디 있소?” 하니, 원파가 대답하기를, “전날에 진()나라에 갔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원파가 말을 마치고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초장왕이 측은해하며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그대의 나라를 회복시킬 테니 그대는 진()나라 군주를 맞아 옹립하여 대대로 초나라를 받들어 남북으로 우물쭈물하지 말고 과인의 은덕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또 공녕과 의행보를 불러 분부하기를, “그대들도 귀국시킬 테니 함께 진()나라 군주를 보필하시오!” 했다.

원파는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나라를 망친 화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초장왕 앞에서 설명하지 못하고, 다만 우물우물 함께 감사의 말을 올린 후에 귀국했다. 그들이 초나라 국경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마침 진성공(陳成公) ()를 만났다. 그는 진()나라에서 돌아와 나라가 이미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초나라에 가서 초장왕을 만나려고 오던 길이었다. 원파가 이에 초장왕의 아름다운 뜻을 상세하게 전하고, 진성공과 신하들이 수레를 나란히 하고 진나라에 도착했다. 진나라를 지키던 장수 공자 영제는 이미 초장왕의 명령으로 본국에 소환되어 마침내 진나라의 영역을 진나라에 돌려주고 자기는 초나라로 돌아갔다. 이것은 초장왕의 가장 훌륭한 일이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속현이 된 진나라를 회복시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도척도 순임금도 마음을 먹기에 달렸는데, 남방의 초나라가 의기를 사해에 떨쳤으니, 어진 군주가 어진 신하에게 힘입었음을 알아야 한다.” 했다. 공녕이 귀국한지 한 달이 되지 않아서 대낮에 하징서가 찾아와 목숨을 돌려 달라는 허깨비를 보고 그로 인해 미쳐서 스스로 연못에 빠져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의행보도 꿈에 진영공과 공녕과 하징서 세 사람이 와서 상제 앞으로 끌고 가서 심문을 받았다. 꿈속에서 크게 놀라서 이로부터 역시 갑자기 병을 얻어 죽었다. (이것이 음탕한 사람들의 업보였다.)

한편, 공자 영제는 초나라에 돌아와서 초장왕을 뵙고 자기를 진공(陳公)이라고 자칭했다. 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이미 진나라를 회복시켰으니 마땅히 별도로 경에게 보상을 하겠다.” 하니, 영제가 즉시 신()과 여()의 땅을 청하여 초장왕이 허락하려고 하였다. 굴무가 아뢰기를, “이곳 북방의 세금으로 국가가 믿고 북쪽의 진()나라의 침략을 막고 있습니다. 그곳을 상으로 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그만두었다. 이에 신숙시가 늙었다며 물러가려 하자, 초장왕은 굴무를 신공으로 삼았다. 굴무는 사양하지 않았다. 영제가 이 일로 인해 굴무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주정왕 10(기원전 596)은 초장왕 17년인데, 초장왕은 진나라가 비록 남쪽 초나라에 붙었다고 하지만, 정나라는 진()나라를 따르고 초나라에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여러 대부와 대책을 의논했다. 영윤 손숙오가 말하기를, “우리가 정나라를 치면, ()나라의 구원병이 틀림없이 이를 것입니다. 그러니 대군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의 뜻도 바로 그와 같소.” 했다. 이에 삼군과 양광의 군사를 모두 일으켜 호호탕탕하게 형양(滎陽)을 향해 달려갔다. 연윤(連尹) 양로(襄老)가 앞 부대를 맡았다.

앞 부대의 양로가 출발할 때, 늠름한 장수 당교(唐狡)가 청하기를, “정나라는 작은 나라라 대군을 번거롭게 할 것이 없습니다. 제가 부하 백 명을 거느리고 하루를 앞서가서 삼군을 위해 길을 열겠습니다.” 하니, 양로가 그 뜻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당교가 이르는 곳마다 힘을 다해 싸우니 맞선 자들이 모두 패하여 군사를 가로막지 않았다. 매일 저녁때가 되면 영채 자리를 깨끗이 청소해 놓고 대군을 기다리곤 했다. 초장왕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정나라 도성 밖에 당도하였으나 중도에 한 명의 군사들도 막지 않았고 하루도 지체시키지도 않았다. 초장왕이 그 신속함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양로에게 말하기를, “뜻밖에 경이 늙을수록 더욱 씩씩하여 이처럼 용감하게 전진하였소.” 하니, 양로가 대답하기를, “신의 힘이 아닙니다. 부장 당교가 힘써 싸운 덕분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즉시 당교를 불러 후한 상을 내리려고 했다. 당교가 대답하기를, “신은 이미 대왕으로부터 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 오로지 그 은혜를 갚고자 하는데 감히 다시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의아해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전에 경을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과인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가?” 했다.

당교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절영회(絶纓會)를 열었을 때 미인의 소매를 잡아당긴 사람은 신이었습니다. 군왕께서 저를 죽이지 않은 은혜를 입고 목숨을 걸고 보답하려고 했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 설사 과인이 그때 촛불을 밝혀 죄인을 잡아 다스렸던들 어찌 이와 같이 목숨을 바쳐 힘써 싸운 장수를 얻었겠는가?” 했다. 초장왕이 군정(군 법무관)에게 명하여 당교의 공을 일등으로 기록하게 하고는 정나라를 평정한 후에 돌아가 장차 중용하려고 했다. 당교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군주에게 죽을죄를 지었으나 군주가 이를 감추어서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 일을 밝혔으니 감히 죄인으로서 후일에 상을 받을 수는 없다.” 하고, 그날 밤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아무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초장왕이 듣고 탄식해 말하기를, “참으로 열사다!” 했다. 초나라의 대군이 정나라 교외의 관문을 깨뜨리고 곧바로 도성 밑에 도착했다. 초장왕이 명령을 내려 사면에서 도성을 포위한 후 공격했다. 초군은 열흘하고도 7일 동안 주야로 쉬지 않고 성을 공격했다. 정양공은 진()나라의 구원군이 올 것이라고 믿고 초나라와 강화하지 않았다. 죽거나 부상당한 정나라 군사들이 아주 많았다. 도성의 동북쪽 모서리의 수십 길이 무너지고, 초나라 군사들이 성 위로 오르려고 했다. 초장왕이 도성 안에서 땅을 흔드는 곡성을 듣고, 마음속으로 차마 듣지 못해 군사들을 10리 뒤로 물러나게 했다.

공자 영제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성이 무너졌으니 바야흐로 이 형세를 타야지, 어찌하여 군사를 물리십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정나라가 우리의 위세를 알지만 우리의 덕을 모르고 있소. 그래서 잠시 물러나 우리의 덕을 보여주는 것이오. 그들이 우리를 따를 것인지 거역할 것인지를 살펴보고 나서 군사들의 진퇴를 결정해야 할 것이오.” 했다. 정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진()나라 구원군이 이미 도착한 줄 알고, 즉시 백성들을 시켜 무너진 성벽을 쌓고 남녀 모두가 성 위에서 지키게 했다. 초장왕은 정나라가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다시 군사를 진격시켜 포위하게 했다. 정나라는 3개월 동안이나 굳게 지켰으나 더 버틸 힘이 없었다. 초나라 장수 낙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황문(皇門)을 먼저 올라 성문을 깨뜨려 열었다. 초장왕이 명령을 내려 노략질을 금하고 삼군이 질서 정연하게 큰 길로 행진하여 이르니, 정양공은 웃통을 벗고 양을 끌고 나와 초나라 군사를 맞이하여, 사죄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덕이 없어 대국을 받들어 복종하지 않고 군왕을 노하게 하여 우리나라에서 항복하게 되었으니, 제가 그 죄를 압니다. 이 나라의 존망과 생사는 오로지 대왕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만약 선인들의 우호 관계를 생각하여 은혜를 베풀어 이 나라를 멸하지 않고 종사를 잇게 해주시면, 부용국(附庸國)과 비슷해도 군왕의 은혜입니다.” 했다.

공자 영제가 나와 말하기를, “정나라가 힘이 다하여 항복했는데 우리가 용서한다면 다시 배반할 것입니다. 정나라를 멸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신공(신숙시)이 만약 있다면 또 혜전탈우(蹊田奪牛 ; 밭을 밟았다고 소를 빼앗음)로써 나를 책망하지 않겠느냐?” 하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30리 밖으로 퇴군했다. 정양공이 초나라 군영에 친히 방문하여 사죄하고 회맹을 청하며 그의 동생 공자 거질(去疾)을 인질로 초나라 군영에 머물게 했다. 초장왕이 군사를 돌려 북쪽으로 가서 연() 땅에 머무르니, 첩자가 보고하기를, “()나라가 순림보를 대장으로 삼고 선곡을 부장으로 삼아, 전차 600대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진격하여 이미 황하를 건넜다고 합니다.” 했다. 초장왕이 여러 장수에게 묻기를, “()나라 군사들이 장차 도착할 것인데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싸워야 하는가?” 하니, 영윤 손숙오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정나라와 강화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진()나라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정나라의 항복을 받았으니 또 진()나라와 싸워 원수가 되면 무엇 하겠습니까?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가는 것이 만 가지 중에 하나도 잃지 않는 것입니다.” 했다. 초장왕의 총애를 받는 오삼(伍參)이 아뢰기를, “영윤의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정나라는 우리의 힘이 진()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진()나라를 따른 것입니다. 만약 진()나라 군사들이 오는데 그들을 피한다면 참으로 우리가 진()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진()나라는 정나라가 초나라를 따르는 것을 알면 진()나라 군사는 정나라로 진군할 것입니다. ()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구하러 왔는데, 우리도 역시 정나라를 구하러 가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했다.

손숙오가 말하기를, “작년에 진나라를 쳤고 올해에 또 정나라를 쳤으니 초나라 군사들은 이미 피로에 지쳐 있소. 만약에 진()나라 군사와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면 비록 그대 오삼의 살을 먹은들 어찌 족히 속죄하겠소?” 하니, 오삼이 말하기를, “만약 진()나라 군사와 싸워서 이기면 영윤께서는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없는 것이며, 만일 우리가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면 이 오삼의 고기는 장차 진()나라 군사에게 먹힐 것이니, 어찌 능히 초나라 사람의 입에 돌아가겠습니까?” 했다. 초장왕이 여러 장수에게 두루 물어 각기 붓을 잡고 손바닥에 쓰게 하여, 싸움을 주장하는 자는 ()’자를 쓰고, 퇴각을 주장하는 자는 (退)’자를 쓰게 하여 살펴보았다. 오직 중군원수 우구(虞邱)와 연윤(連尹) 양로(襄老), 비장(裨將) 채구거(蔡鳩居)와 팽명(彭名) 네 사람만이 손바닥에 자를 쓰고 그 나머지 공자 영제(公子嬰齊), 공자 측(公子側), 공자 곡신(公子穀臣), 굴탕(屈蕩), 반당(潘黨), 낙백(樂伯), 양요기(養繇基), 허백(許伯), 웅부기(熊負羈), 허언(許偃) 20여 명은 모두 자를 썼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노신 우구의 견해가 영윤의 견해와 같으니 퇴군하는 것이 옳다.” 하고, 즉시 명령을 내려 수레를 남쪽으로 돌리고 깃발을 돌려서, 다음날 황하에서 말에 물을 먹이고 돌아가기로 했다.

오삼이 밤에 초장왕을 찾아와 말하기를, “군왕께서는 어찌하여 진()나라를 두려워하십니까? 정나라를 버려서 그들에게 주려고 하십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아직 정나라를 버린다고는 하지 않았다.” 했다. 오삼이 말하기를, “초나라 군사가 정나라 도성 밑에 90일 동안 주둔하다가 간신히 정나라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 군대가 온다고 하니 초나라 군사가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면 진()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구원하여 정나라를 거둘 것입니다. 초나라는 이로부터 다시 정나라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나라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영윤은 진()나라 군사와 싸우면 반드시 이기지 못한다고 하니, 그래서 물러가려는 것이다.” 했다. 오삼이 말하기를, “신은 이미 헤아려 살펴보았습니다. 순림보는 중군 원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엄과 믿음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보좌인 선곡(先穀)은 선진의 손자이며 선차거의 아들인데 자기 조부와 부친의 공적을 믿고 깐깐하고 고집이 세며 인자하지 않아서 명령을 따를 장수가 아닙니다. 난씨(欒氏)와 조씨(趙氏)의 무리는 모두가 여러 대의 명장이라 각기 제 뜻대로 하려고 하여 군령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나라 군사가 비록 많다고 하나 패퇴시키기가 쉽습니다. 또한 대왕께서는 한 나라의 주인이신데, ()나라의 신하들을 피하면, 장차 천하에 웃음거리를 남길 것이니, 하물며 능히 정나라를 지배하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깜짝 놀라 말하기를, “과인이 비록 군사를 부리는데 능하지 않아도 어찌 진()나라의 신하들보다 못하겠는가? 과인은 그대의 말을 쫓아 진()나라 군사와 싸우겠다!” 했다. 즉시 밤에 사람을 시켜 영윤 손숙오에게 고하게 하고 수레를 일제히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 관성(管城)에 진격하여 진()나라 군사를 기다렸다.

 

승부가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54: 순림보가 부하를 풀어놓아 군사를 잃고, 광대 우맹이 초장왕을 깨우치다.

 

한편, 진경공(晉頃公)은 즉위 3년에 초장왕이 친히 정나라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했다. 이에 순림보를 중군 원수로 삼고, 선곡을 부원수로 삼았으며, 사회를 상군 원수로 하고 극극(郤克)을 부원수로 했고, 조삭을 하군 원수로 하고 난서(欒書)를 부원수로 했다.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는 중군 대부에, 공삭(鞏朔), 한천(韓穿)은 상군 대부에, 순수(荀首), 조동(趙同)은 하군 대부로, 한궐(韓厥)은 사마로 임명했다. 그 밖에 위기(魏錡), 조전(趙旃), 순앵(荀罃), 봉백(逢伯), 포계(鮑癸) 10여 명은 부장(部將)이 되어, 전차 600대를 동원하여 그해 여름 6월에 강주(絳州)를 출발하여 황하구(黃河口)에 도착했다. 정탐병이 탐지하여, 정나라 도성이 초나라의 공격에 오래 시달리다가 기다리던 구원군이 당도하지 않아 이미 초나라 군대에 항복하고, 초나라 군사들도 또한 장차 북쪽으로 우회하여 돌아가려고 하는 중이라고 했다. 순림보가 여러 장수를 불러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상의했다. 사회가 말하기를, “정나라를 구원하러 왔으나 미치지 못했으니 초나라와 싸울 명분이 없습니다. 군사를 돌려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순림보가 좋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여러 장수에게 회군할 것을 명령했다.

중군의 한 상장이 나와서 말하기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나라가 능히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제후국이 기울면 붙들어주고 어려울 때 구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나라가 구원병을 기다리다가 오지 않자 부득이 초나라에 항복하였는데, 우리가 만약 초나라를 좌절시킨다면 정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 편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지금 정나라를 버리고 초나라 군사를 피해 도망친다면 작은 나라들이 어찌 우리를 믿겠습니까? 그러면 진()나라는 다시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원수께서 반드시 군사를 돌리고자 한다면 소장만이라도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겠습니다.” 했다. 순림보가 보니 중군 부원수 선곡(先穀)으로 자가 체자(彘子)였다. 순림보가 말하기를, “초왕이 직접 군중에 있고, 군사들은 강하고 장수들이 많은데 그대가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혼자 건너간다는 것은 마치 고기를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져주는 것과 같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소?” 했다. 선곡이 울부짖으며 크게 외치기를, “내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당당한 진()나라에 용감하게 싸울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할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가서 비록 진영 앞에서 죽더라도 저는 뜻을 꺾을 수 없습니다.” 했다. 말을 마치고 마침내 영문 밖으로 나가다가 조동과 조괄 형제를 만나 고하기를, “원수가 초나라 군사들을 두려워하여 회군하려고 하니, 나 혼자만이라도 황하를 건너가 싸우겠소.” 했다.

조동과 조괄이 말하기를, “대장부라면 이같이 바르고 옳아야 합니다. 우리 형제도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뒤를 따르겠습니다.” 했다. 세 사람이 원수의 명령을 듣지 않고 휘하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넜다. 순수(荀首)가 조동이 보이지 않아 물으니, 군사가 보고하기를, “이미 선곡 장군을 따라 초나라 군사와 싸우러 갔습니다.” 했다. 순수가 크게 놀라 사마 한궐에게 고하자 한궐이 중군으로 달려가 순림보를 만나 말하기를, “원수께서 체자(선곡)가 황하를 건넜다는 것을 모릅니까? 만약 초나라 군사를 만나면 틀림없이 패할 것입니다. 원수께서 중군을 총지휘하는데, 체자가 군사를 잃으면 그 허물이 원수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장차 어찌할 것입니까?” 했다. 순림보가 깜짝 놀라 대책을 물었다. 한궐이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삼군을 모두 전진시키는 게 낫습니다. 만약에 이기게 되면 원수의 공이 될 것이며, 이기지 못하더라도 여섯 사람의 대장들이 그 책임을 나누어서 질 것이니, 혼자서 죄책을 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니, 순림보가 아래로 내려와서 절을 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하고, 마침내 삼군에 명령을 내려 황하를 건너서, ()와 호() 두 산 사이에 진영을 세웠다. 선곡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본디 원수가 내 말을 어기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정양공은 진()나라의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아침에 진()나라 군사가 이겨서 정나라가 초나라에 항복한 죄를 추궁할까 두려웠다. 이에 여러 신하를 모아 대책을 의논하니, 대부 황수(皇戍)가 나와 말하기를, “신이 주군을 위해 진()나라 군영에 사신으로 가서 초나라와 싸우도록 권하겠습니다. ()나라가 이기면 진()나라를 따르고, 초나라가 이기면 초나라를 따르면 될 것입니다. 강한 나라를 택하여 섬기면 그뿐일 텐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했다. 정양공이 그 계책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즉시 황수를 사자로 삼아 진()나라 군영으로 보내어, 정양공의 명이라고 하여 전하기를, “저희 주군께서는 상국의 구원병을 마치 가뭄에 단비를 바라듯 기다리다가, 사직이 장차 위태로워서 잠시 초나라에 항복하여 나라의 패망을 면한 것이지 감히 진()나라를 배반하겠습니까? 초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이겨 교만해졌고 또한 오래 나와 있어서 피로에 지쳐 있습니다. 만약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한다면 정나라도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니, 선곡이 말하기를, “초나라를 패퇴시키고 정나라를 복속시키는 것은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습니다.” 했다. 난서가 말하기를, “정나라는 이랬다저랬다 하니 그들의 말을 믿으면 안 됩니다.” 하니, 조동과 조괄이 말하기를, “속국이 싸움을 돕겠다고 하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체자(선곡)의 말이 옳습니다.” 했다.

마침내 순림보의 명을 거치지도 않고 조동과 조괄은 선곡과 함께 황수에게 초나라와 싸우겠다는 약속을 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정양공이 또 별도의 사자를 초나라 군영에 보내어, 역시 초장왕을 권하여 진()나라와 싸움을 부추겨서, 양쪽이 서로 싸우게 하고 앉아서 성패를 보려고 한 것을. 손숙오가 진()나라 군사의 수가 매우 많음을 걱정하여 초장왕에게 말하기를, “()나라 군사가 우리와 결전할 뜻이 없으니, 화친을 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청해서 응하지 않은 연후에 교전하면 전쟁의 책임은 진()나라 쪽에 있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채구거(蔡鳩居)를 사자로 진()나라 진영으로 보내어 전쟁을 피하고 화친을 맺자고 청했다. 순림보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두 나라의 복이오!” 했다. 선곡이 채구거에게 욕하기를, “너희들이 우리의 속국을 빼앗아간 후에 다시 화친하여 우리를 누그러뜨리니, 우리 원수께서는 화친에 동의하겠지만 나 선곡은 결코 동의하지 않고, 너희들 군사들을 한 사람도 살려 돌려보내지 않을 작정이다. 곧 나 선곡의 솜씨를 볼 것이다. 빨리 돌아가 초장왕에게 보고하여 빨리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하라고 해라!” 했다. 채구거가 욕을 먹고 머리를 싸고 달아났다.

채구거가 영문에서 나오다가 다시 조동과 조괄 형제를 만나니, 그들이 칼을 잡고 채구거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 다시 오면 이 칼이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했다. 채구거가 진()나라 군영을 나오는데, 또 진나라 장수 조전(趙旃)을 만나니, 그가 활을 당겨 겨누면서 말하기를, “너는 내 화살로 쏘아죽일 고기라, 조만간 너를 잡을 것이다. 너는 내 말을 너희 만왕(蠻王)에게 확실히 전해라!” 했다. 채구거가 초나라의 본채에 돌아와서 초장왕에게 아뢰니 초장왕이 대로하여 여러 장수에게 묻기를, “누가 용감히 나가서 싸움을 돋우겠는가?” 하니, 대장 낙백이 응답하여 나오며 말하기를, “원컨대 신이 가겠습니다.” 했다. 낙백이 전차에 올라 허백(許伯)을 어자(御者), 섭숙(攝叔)을 차우(車右)로 삼으니, 허백이 전차를 바람같이 몰아 진()나라 군 보루로 달려갔다. 낙백이 일부러 대신 고삐를 잡고 허백에게 전차에서 내려 말의 장식과 가슴걸이를 바로잡게 하여 한가한 척했다. 그때 유격병 10여 명이 지나가자 낙백이 침착하게 화살을 쏘아 한 명을 거꾸러뜨렸다. 섭숙이 펄쩍 뛰어 전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한 명을 사로잡고, 몸을 날려 전차를 타니, 나머지 진나라 군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모두 달아났다.

허백이 말고삐를 건네받아 진()나라 군의 본영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진나라 군은 초나라 장수가 싸움을 돋우어 사람을 죽인 것을 알고, 세 갈래로 나누어 추격해 왔다. 포계(鮑癸)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봉녕(逢寧), 오른쪽에는 봉개(逢盖)가 있었다. 낙백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왼쪽으로 말을 쏘고 오른쪽으로 사람을 쏘겠다. 화살이 빗나가면 내가 진 것이다.” 하고, 이에 조궁(雕弓)을 잡아 힘껏 당겨 왼쪽과 오른쪽으로 한 발씩 바삐 쏘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나라 군의 말과 병사를 맞추었다. 낙백이 왼쪽으로 연달아 쏘아서 서너 마리 말을 쓰러뜨리니, 전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쪽의 봉개(逢盖)가 얼굴에 화살을 맞았고, 화살을 맞은 군사들이 아주 많았다. 좌우 양쪽의 추격병이 모두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다만 포계(鮑癸)가 바짝 뒤쫓아왔다. 낙백에게는 단지 한 개의 화살이 남아 있었다. 그가 화살을 활에 메어 포계(鮑癸)를 향하여 쏘려고 하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이 화살로 만약 맞추지 못하면 틀림없이 그의 손에 당할 것이다.” 하고, 정신을 가다듬을 때 전차가 달리는 소리에 사슴 한 마리가 달려 나와 낙백 앞을 지나갔다. 낙백이 마음을 바꾸어 남은 화살 한 대를 고라니를 향해 쏘니, 화살은 곧바로 고라니의 심장을 뚫었다.

이에 섭숙을 시켜 수레에서 내려 고라니를 가져다가 포계(鮑癸)에게 바치게 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뒤따르는 자들에게 주시오.” 했다. 포계가 보니 낙백의 화살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매우 놀라고 두려워하던 차에 사슴을 바치니 마침내 일부러 말하기를, “초나라 장수가 예의가 있으니 내가 범할 수가 없구나!” 하고, 좌우 군사를 거느리고 전차를 돌려 돌아갔다. 낙백도 천천히 돌아왔다. 이것을 시로 증명하여 이르기를, “전차 한 대로 싸움을 걸고 적장을 맞이했으니, 전차는 우레 같고 말은 용과 같았다. 귀신 같은 활 솜씨의 장군을 누군들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뒤쫓던 군사들은 머리를 움츠리고 바람같이 달아났네.” 했다. ()나라 장수 위기(魏錡)는 포계가 낙백을 놓아준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대로하여 말하기를, “초나라 장수가 도전해 왔는데 진나라 진영에서는 한 사람도 감히 진영 앞에 나가지 않았으니, 아마도 초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오. 소장이 역시 전차 한 대로 초나라 군사들의 강약을 살펴보겠소.” 하니, 조전(趙旃)이 말하기를, “소장도 위장군과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했다. 순림보가 말하기를, “초나라가 화친을 청한 후에 싸움을 걸어왔소. 그대가 만약 초나라 진영에 이르면 장차 화의를 말해 보시오. 그래야만 답례가 되는 것이오.” 하니, 위기가 대답하기를, “소장이 가서 화의를 청해 보겠습니다.” 했다. 조전이 전차에 오른 위기를 먼저 보내면서 위기에게 말하기를, “장군은 채구거에게 답례를 하고, 저는 낙백에게 보복을 하여, 각기 일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했다.

한편, 상군 원수 사회(士會)는 조전과 위기 두 장수가 초나라 진영에 앙갚음을 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황망히 순림보를 만나 그들이 가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중군에 도착했으나 두 장수는 이미 가 버렸다. 사회가 순림보에게 넌지시 말하기를, “위기와 조전은 선대의 공이 높음을 믿고 있는데 중용되지 않아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혈기가 방장한 자들이라 나아가고 물러서는 때를 모릅니다. 이번에 가면 틀림없이 초나라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만약에 초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우리를 덮친다면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했다. 그때 상군 부원수 극극도 와서 말하기를, “초나라의 전략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선곡이 크게 외치기를, “조만간 적을 무찌를 것인데 무슨 준비를 한다는 말이오!” 했다, 순림보가 결정을 하지 못했다. 사회가 물러 나오면서 극극에게 말하기를, “순림부는 나무 인형일 따름이오.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계책을 세워야겠소.” 하고, 사회는 즉시 극극을 시켜 상군 대부 공삭과 한천을 불러 모아서 약속하기를, 각각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삼대로 나누어 오산(敖山) 앞에 매복하기로 했다. 중군 대부 조영제도 역시 진()나라 군사가 패배할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사람을 보내 황하구에 배를 갖추어 놓게 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위기(魏錡)는 한마음으로 순림보가 중군 원수가 된 것을 질투하여 그 명예를 떨어뜨리고자, 순림보의 면전에서는 강화를 청하겠다고 했지만, 초나라 진영에 가서는 끝내 싸움을 청하고 돌아오려고 했다. 초장 반당(潘唐)은 채구거가 진()나라 군영에 사절로 가서 진나라 장수들로부터 모욕을 당한 사실을 알았다. 오늘 위기가 온 것을 보고 원수를 갚을 기회라고 생각하여 황급히 중군 막사로 들어갔으나, 그때 위기는 이미 초군 진영의 영문을 나간 후였다. 반당이 말을 채찍질하여 추격했다. 위기가 큰 늪지에 이르렀을 때 추격하는 장수가 바짝 따라오는 것을 보고 싸우려고 했다. 갑자기 늪 가운데에서 사슴 여섯 마리를 보고, 위기는 지난번에 초나라 장수가 사슴을 잡아서 선물했던 일을 상기하여 활을 당겨 사슴 한 마리를 쏘아 쓰러뜨려서, 마부를 시켜 사슴을 반당에게 바치게 하면서 말하기를, “지난번 낙백 장군이 준 선물을 받고 보답하는 것입니다.” 하니, 반당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우리의 흉내를 내는구나! 내가 만약 더 추격한다면 우리 초나라 사람들이 무례한 것을 드러낼 것이다.” 하고, 반당도 역시 수레를 돌려 돌아갔다. 위기가 진영으로 돌아와서 거짓말로 말하기를, “초장왕이 강화를 승인하지 않고 싸워서 승부를 내자고 했습니다.” 했다.

순림보가 묻기를, “조전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위기가 말하기를, “내가 앞서가고 그는 뒤에 왔는데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했다. 순림보가 말하기를, “초나라가 이미 강화를 거부했으니 조전은 틀림없이 낭패를 당하고 있을 것이다.” 하고, 이에 순림보는 순앵(荀罃)에게 전차 20대와 보졸 1500명을 거느리고 조전을 구해 오라고 했다. 한편, 조전은 밤에 초나라 진영에 이르러 군영 문밖에 전차 안에 숨겨두었던 술병을 꺼내 앉아서 술을 마셨다. 수하 군사 20여 명에게 초나라 말을 흉내 내어 사방을 순찰하는 척하며 군호를 알아내어 초군 진영 안으로 섞여 들어갔다. 어떤 초나라 병사가 거짓임을 눈치채고 그들을 캐물었다. 진나라 군사가 칼을 뽑아 초군에 대항하자 초나라 진영은 발칵 뒤집혀서, 횃불을 들고 침입자들을 수색하여, 10여 명을 붙잡았다. 나머지 진나라 군사는 도망쳐 나와, 조전이 그때까지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부축하여 수레에 태운 후 마부를 찾았으나, 그 마부는 이미 초나라 군사에게 붙잡힌 후였다. 하늘이 점점 밝아 오자 조전이 친히 말의 고삐를 잡고 채찍질했으나 말들은 굶어서 달릴 수가 없었다. 초장왕은 자기 진영 안에 적군이 잠입하였다가 도망갔다는 보고를 받고, 친히 전차에 올라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했다. 초장왕 전차의 속도는 아주 빨랐다.

조전이 따라 잡힐까 두려워서 전차를 버리고 소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달아났다. 초나라 장수 굴탕(屈蕩)이 그것을 보고 역시 수레에서 내려 뒤쫓았다. 조전은 자기의 갑상(甲裳 ; 슬갑)을 작은 소나무에 걸어 놓고 가벼운 몸으로 달아났다. 굴탕이 갑상과 전차를 거두어서 돌아와 초장왕에게 바쳤다. 초장왕이 전차를 돌리려는데 바라보니 전차 한 대가 바람같이 달려와 이르렀는데, 반당이 타고 있었다. 반당이 북쪽에서 일어나는 전차 먼지를 가리키며 초왕에게 말하기를, “()나라 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했다. 이 전차 먼지는 순림보가 조전을 구하기 위해 보낸 20대의 전차가 일으킨 것이었다. 반당이 멀리서 보고 대군이라고 오인하여, 가벼운 일을 큰일이라고 보고했다. 초장왕이 깜짝 놀라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갑자기 남쪽에서 하늘을 진동시키는 북과 뿔나팔 소리가 들리더니 맨 앞에 한 사람의 대신이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나는 듯이 이르렀다. 이 대신은 누구인가? 그는 영윤 손숙오였다. 초장왕이 가슴을 조금 진정시키며 묻기를, “상국께서는 어떻게 진나라 군사들이 진격해 오는 줄 알고 과인을 구하러 오십니까?” 했다.

손숙오가 대답하기를, “신은 몰랐습니다. 다만 대왕께서 너무 경솔하게 전진하여 잘못 진()나라 군사들의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서 신이 먼저 와서 구하려고 한 것입니다. 뒤따라 삼군이 모두 이를 것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북쪽을 향해 다시 보니 먼지가 높지 않아서, 말하기를, “대군이 아니다.” 하니, 손숙오가 대답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아군이 적군을 쫓을지언정 적군에게 쫓겨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장수가 이미 도착하였으니 대왕께서는 명령을 내려 오로지 앞으로만 진격하라고 하십시오. 만약에 적의 중군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나머지 상하 2군은 더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과연 명령을 내려서 공자 영제에게는 부장 채구거와 함께 좌군을 이끌고 진나라의 상군을, 공자 측에게는 부장 공윤제와 함께 우군을 이끌고 진나라의 하군을 각각 공격하도록 하고, 자신은 중군과 양광의 군사들을 이끌고 곧바로 순림보의 본영을 덮치려고 했다. 초장왕이 친히 북채를 잡고 북을 쳤다. 여러 부대가 일제히 북을 치니 북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다. 전차와 말들이 달리고 보졸들이 전차와 말을 따라 나는 듯이 진격했다.

()나라 군사들은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순림보가 북소리를 듣고 그제야 탐지해 보니, 초나라 군사가 산과 들에 가득 퍼져서 이미 진나라 진영 밖으로 포진한 다음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뜻하지 않은 곳으로 나온 것이었다. 순림보는 황급하여 아무런 계책이 없어 힘을 다하여 싸우라고 명령했다. 초나라 병사들은 저마다 무용을 뽐내고 위세를 떨치며 마치 파도가 소리치고 산이 무너지듯,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지는 듯했다. ()나라 군사들은 마치 오랫동안의 꿈속에서 잠시 돌아오거나, 술에 크게 취했다가 막 깨어난 듯, 동서남북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싸울 마음이 없는 군사가 투지에 불타는 군사를 만난 것같아서, 어떻게 적을 막을 것인가? 일시에 달아나는 고기 떼나 흩어지는 새 떼가 되어, 초나라 병사들에게 오이나 채소가 토막 나듯이 어지럽게 살해되어, 사분오열하고 열 가운에 일여덟이 깨어지고 말았다. 순앵은 전차를 타고 조전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초나라 장수 웅부기(熊負羈)를 만나, 두 사람이 교전을 했으나, 초나라의 대군이 몰려오자 중과부족으로 보졸이 흩어져 달아나고, 순앵은 전차의 왼쪽 곁말을 타고 달아나다가 화살에 맞아 넘어져 마침내 웅부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한편, ()나라 장수 봉백(逢伯)은 그의 두 아들 봉녕(逢寧)과 봉개(逢蓋)와 함께 작은 전차를 타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조전이 발가락이 모두 찢어진 채 도망치며 앞에 지나가는 전차를 쳐다보고 큰소리로 외치기를, “전차 안에는 누가 탔는가? 나를 태워 달라!” 했다. 봉백이 그것이 조전의 목소리인 줄 알고 두 아들에게 분부하기를, “뒤돌아보지 말고 빨리 달려라!” 했다. 두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못 알아듣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조전이 즉시 고함치기를, “봉군은 나를 태워 달라!” 했다.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조씨 어른이 뒤에서 부릅니다.” 하니, 봉백이 화를 크게 내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조씨 어른을 이미 봤으니 양보하고 태우는 것이 합당하다!”하고, 두 아들을 꾸짖어 수레에서 내리게 하고 고삐를 조전에게 건네어, 전차에 오르게 하여 함께 타고 갔다. 봉녕과 봉개는 전차의 자리를 잃고, 마침내 난군 중에서 죽었다. 순림보는 한궐과 함께 후진을 따라 전차에 올라 패잔병들을 이끌고 산 오른쪽 길을 택하여 황하 가를 따라 달아났다. 진나라 군사가 버리고 간 전차와 말과 병장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선곡이 뒤에 따라오는데, 얼굴에 화살을 맞아 피를 뚝뚝 흘리며 전포를 찢어 감싸고 있었다. 순림보가 그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용감하게 싸우자던 자도 이같이 되었소?” 했다. 일행이 하구(河口)에 이르니, 조괄도 역시 도착하여 이르기를, 그의 형 조영제가 몰래 준비해 둔 배를 타고 먼저 황하를 건너갔다면서,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았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했다. 순림보가 말하기를,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어느 겨를에 서로 알리겠는가?” 했다. 조괄이 원망해 마지않아 이때부터 조영제와 틈이 벌어졌다. 순림보가 말하기를, “우리 군사로는 다시 싸울 수 없다. 당장의 계책은 황하를 건너는 것이 급하다.” 하고, 이에 선곡에게 명하여 황하의 하류 쪽으로 가서 배들을 불러 모으게 했다. 그러나 배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정박해 있어서 한꺼번에 모을 수가 없었다. 선곡이 배를 모으느라 어수선한 사이에 황하 연안에 많은 인마가 어지럽게 몰려들었다. 순림보가 보니 그들은 하군 원수 조삭과 부원수 난서가 초나라 장수 공자 측(公子側)에게 습격당한 패잔병들을 이끌고 역시 이 길로 온 것이었다. 양군이 일제히 강변에 도착하니 어떻게 한 부대라도 건널 수 있겠는가? 배의 수효는 한 번에 건너기엔 부족했다.

멀리 남쪽에서 먼지가 다시 일어나자, 순림보는 혹시나 초나라 군대가 승세를 타고 추격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여 북을 쳐서 명령하기를, “먼저 황하를 건너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 하니, 진나라 양군의 군사들이 배를 빼앗으려고 서로 싸워 죽였다. 배 위에 오른 사람들이 가득 하자 뒤에 온 사람이 계속해서 기어올라 붙어서 배가 뒤집혔다. 게다가 부서진 배들이 30여 척이었다. 선곡이 배 안에서 군사들에게 호령하기를, “뱃전에 기어올라 삿대를 잡아당기는 자들은 칼로 그 손을 베어라.” 하니, 다른 배들도 모두 따라 했다. 손가락이 잘려 배 안에 떨어지니 마치 조각조각 꽃잎이 날리듯 했다. 몇몇은 배를 잡지 못해 모두 황하 물속에 떨어졌다. 강가의 통곡 소리가 진동하고 산과 계곡도 모두 울렸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도 처참하여 태양도 빛을 잃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배가 큰 물결에 뒤집히고 돛대는 쓰러지니, 군사들은 피를 흘리며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가련하다! 수만 명의 태항산 서쪽에서 온 군졸들이여! 그중에서 반이 황하에서 수중고혼이 되었구나.” 했다. ()나라 군사 후방에서 먼지가 또 일어나더니, 이에 순수(荀首), 조동(趙同), 위기(魏錡), 봉백(逢伯), 포계(鮑癸) 등 여러 패장이 계속해서 도망쳐서 도착했다. 순수가 이미 배에 올랐으나, 그의 아들 순앵이 보이지 않자 사람을 시켜 언덕에 올라가 부르게 했다. 순앵이 초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힌 것을 보았다고 어린 군졸이 순수에게 알렸다.

순수가 말하기를, “내 아들을 잃고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고, 다시 강가 언덕으로 올라와 전차를 정비해 쳐들어가려고 했다. 순림보가 그를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순앵은 이미 초나라에 사로잡혔으니 가봐야 아무 이득이 없소.” 하니, 순수가 말하기를, “남의 아들을 얻어서 내 아들과 교환할 수 있을 것이오.” 했다. 위기가 평소에 순앵과 서로 친해서 또한 같이 가겠다고 자원했다. 순수가 매우 기뻐했다. 순수가 순씨의 가병들을 모이게 하니 그 수효가 수백 명이었다. 또한 그는 평소에 백성들을 보살피고 선비들을 사랑하여 군사들의 인심을 크게 얻고 있었다. 그래서 강안에 있던 하군의 군사들이 즐겨 따르겠다고 했다. 이미 배를 타고 있던 군사들도 하군 대부 순수가 작은 장군 순앵을 구하러 초나라 진영으로 쳐들어간다고 하자, 그들 역시 모두 강안에 올라 순수를 따라가 사력을 다하여 돕고자 했다. 이때 한줄기 날카로운 기운이 일어나, 전군이 처음에 영채를 세울 때의 강하고 왕성한 기세로 돌아갔다. 순수는 진()나라에서도 일 이등을 다투는 명궁이어서, 좋은 화살을 많이 가지고 초나라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마침 노장 연윤(連尹) 양로(襄老)가 진()나라 군사가 버리고 간 전차와 무기를 수습하고 있을 때 뜻밖에 진나라 군사들이 몰려들자,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가 순수가 쏜 화살이 그의 뺨을 꿰뚫려 전차 위에 넘어졌다. 공자 곡신(公子穀臣)이 양로가 화살에 맞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고 전차를 몰아 달려 나왔다. 위기가 그를 맞아 싸웠다. 순수가 옆에서 노리고 다시 화살 한 대를 쏴서 그의 오른쪽 팔을 맞추었다. 곡신이 아픔을 참고 화살을 뽑는 사이에 위기가 승세를 타고 달려들어 곡신을 사로잡아 양로의 시신과 함께 수레에 태웠다. 순수가 말하기를, “이 둘이면 내 아들과 바꿀 수 있겠다. 초나라 군사들이 아주 강해서 당해 낼 수가 없다.”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급히 달렸다. 초나라 군사들이 알고 그 뒤를 추격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들을 쫓을 수 없었다. 한편, 초나라의 좌군을 이끌던 공자 영제는 진()나라 상군을 공격했으나, 사회는 미리 일이 있을 것을 헤아리고 일찍이 초군의 정세를 탐지하여 이미 진영을 연결하여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했다. 공자 영제가 오산(敖山)의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포성이 진동하더니 한 떼의 군마들이 뛰어나오는데, 앞선 대장이 전차 위에서 외치기를, “공삭(鞏朔)이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린 지 오래다!” 했다.

공자 영제가 깜짝 놀랐다. 공삭이 영제와 맞붙어 싸운 지 20여 합에 싸울 마음이 없어져, 사회를 보호하면서 서서히 달아났다. 영제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추격했다. 전면에서 다시 포성이 울리더니 이번에는 한천(韓穿)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다. 편장 채구거가 전차를 몰아 적을 맞이하여 바야흐로 창끝을 맞대려는 순간, 오산의 움푹 파인 곳에서 포성이 진동하면서 기치(旗幟)가 마치 구름처럼 일어났다. 대장 극극(郤克)이 군마를 이끌고 이르렀다. 영제가 매복한 군사들이 아주 많음을 보고 그들의 계략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징을 울려 군사들을 물렸다. 사회가 군사들을 점검하니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마침내 오산의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7개의 작은 영채를 세우게 하고 각 영채를 북두칠성처럼 연결하니 초나라 군사가 감히 닥치지 못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다 물러간 뒤에 비로소 깃발을 정리하여 돌아갔다.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다. 한편, 순수가 군사를 돌려 하구에 이르니, 순림보의 대군은 아직도 황하를 다 건너지 못하여 매우 당혹해하고 있다가, 조영제가 북쭉 언덕으로 건너가서 빈 배를 남쪽으로 돌려보내자 매우 기뻐하였다.

이미 날이 저물자, 초나라의 군사들은 필성(邲城)에 이르렀다. 오삼이 빨리 진()나라 군사를 추격하자고 청하자, 장왕이 말하기를, “초나라가 성복의 싸움에서 패한 이래로 사직에 치욕을 남겼었다. 그러나 이번 한 번의 싸움으로 전날의 수치를 씻었다. 진나라와 초나라는 결국 강화를 맺어야 할 것인데 하필 많은 사람을 죽이겠는가?” 하고, 즉시 명령을 내려 영채를 세워 쉬게 했다. ()나라 군사들은 밤을 타 황하를 건너려고 아주 소란스러웠다. 이 소란은 날이 밝아 오자 비로소 그쳤다. 사관이 논하기를, 순림보는 지혜가 모자라 적을 헤아리지도 못했고, 재능이 부족해서 장수들을 통제하지도 못해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여 이런 패배에 이르렀으니, 중원의 패권을 모두 초나라로 돌아가게 하여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했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왕성 밖에서의 원수는 천지간에 전권을 쥐는데, 어찌하여 비장이 원수의 권한을 흔들었는가? 배 안에서 손가락들을 집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로다! 비록 황하를 건넜지만 부끄러운 일이다!” 했다. 정양공은 초나라가 이긴 것을 알고, 친히 필성으로 찾아가서 초나라 군사들을 위로했다. 초장왕을 영접하여 형옹(衡雍)으로 가서 왕궁(주왕의 이궁)에 거처하게 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축하했다. 반당이 진()나라 군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관(京觀)을 쌓아 만세에 무공을 빛낼 것을 청하였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나라 군이 죄가 있어서 토벌된 것이 아니라 과인에게 행운이 있어서 이겼다. 무슨 무공을 세웠다고 자랑하겠는가?” 하고, 군사들에게 명하여 유골을 매장해 주고, 제문을 써서 황하의 신에게 제사지낸 후 개선하여 돌아갔다. 논공행상을 하여, 오삼의 계책을 가상히 여겨 대부로 임명했다. 오거(伍擧), 오사(伍奢) 부자와 오상(伍尙), 오원(伍員) 형제는 그의 후손이다. 영윤 손숙오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라와 싸워 이긴 큰 공이 총신에게서 나왔으니, 나는 참으로 부끄러워 죽겠구나!” 하고, 마침내 답답하여 울화병이 들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순림보가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와 진경공을 알현하니, 진경공이 순림보를 참수하려고 했다. 여러 신하가 힘써 보호하여 말하기를, “순림보는 선조의 대신입니다. 비록 군사를 잃은 죄를 지었으나 모두 선곡이 군령을 어겼기 때문에 패전하게 되었습니다. 주공께서 다만 선곡을 참하시는 것으로 장래를 경계함이 족할 것입니다. 옛날 초나라가 성득신을 죽이니 진문공께서 기뻐하셨고, ()나라가 맹명시를 살려두자 진양공이 두려워하셨습니다. 주공께서 순림보의 죄를 용서하시어 후에 공을 세우도록 도모하십시오.” 했다. 진경공이 그 말에 따라 마침내 선곡을 참수하고, 다시 순림보를 원래 직책에 복직시켰다.육경에게 명하여 군사와 장수들을 훈련하여, 후일 초나라에 원수를 갚도록 했다. 이때가 주정왕 10(기원전 596)의 일이었다.

주정왕 12년 봄 3월에, 초나라 영윤 손숙오가 병이 위독하여 그 아들 손안(孫安)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표문 한 통을 남길 것이니, 내가 죽고 나서 대왕에게 전해라. 초장왕이 만약 너에게 관작을 주면 너는 받아서는 안 된다. 너는 재주가 평범한 사람이라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건질 만한 인재가 못 된다. 그러니 지위를 차지하여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는 짓을 하지 말아라. 만약 너를 큰 읍에 봉하면 너는 마땅히 굳이 사양해야 한다. 네가 사양해도 봉하려 하면 침구(寢邱)의 땅을 청해라. 그 땅은 척박하여 다른 사람들이 욕심을 내지 않을 곳이라 거의 후세에 이르도록 봉록을 받을 것이다.” 했다. 말이 끝나자 손숙오는 죽었다. 손안이 손숙오의 유표를 바치자 초장왕이 열어서 읽었다. 표에 이르기를, “신은 죄를 짓고 버려진 사람이었는데도 대왕께서 재상의 자리에 발탁해 주는 은혜를 입었으나, 여러 해 동안 부끄럽게도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중임을 져버렸습니다. 지금 대왕의 보살핌을 입어 집안의 창문 아래에서 죽게 되니 신으로서는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신은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변변치 못하여 벼슬을 감당할 만한 위인이 못됩니다. 신의 조카 원빙(薳憑)은 제법 재능이 있어 한 자리를 맡길 만합니다. ()나라는 대대로 방백의 자리를 유지해 오다가 비록 우연히 싸움에서 졌으나,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백성들은 오랜 싸움으로 고통스러워하니, 오직 병사를 쉬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 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살펴주십시오.” 했다.

초장왕이 읽기를 마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손숙오가 죽으면서도 나라를 잊지 않았구나. 과인이 복이 없어 하늘이 나에게서 좋은 신하를 빼앗아갔구나!” 했다. 즉시 어가를 타고 손숙오의 집으로 가서 그 관을 어루만지면서 통곡했다. 초장왕을 따라갔던 측근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음날, 초장왕은 공자 영제를 영윤으로 삼고, 원빙(薳憑)을 불러 잠윤(箴尹)으로 삼았다. 그가 원씨(薳氏)의 시조가 되었다. 초장왕이 손안을 공정(工正 ; 공사와 공업 담당)을 삼으려 했으나 손안이 유명을 지켜 굳이 사양하고 초야에 돌아가 밭을 갈아 살았다. 초장왕에게는 총애하는 배우 맹주유(孟侏儒)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우맹(優孟)이라고 불렀다. 우맹은 키가 다섯 자가 되지 않았으나 평소에 익살을 부려 웃겨서 좌우를 즐겁게 했다. 하루는 우맹이 교외에 나가 손안이 땔감을 베어 스스로 지고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우맹이 손안을 알아보고 묻기를,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고생스럽게 나뭇짐을 지십니까?” 하니, 손안이 말하기를, “부친께서 여러 해 동안 재상을 지냈으나 한 푼도 집안에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집안에 남은 재물이 없으니 내가 어찌 나뭇짐을 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우맹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수고하십시오. 대왕께서 장차 그대를 부르실 것입니다.” 했다. 이에 우맹이 손숙오의 의관, , 신발 등 일체를 장만하여 손숙오의 생전의 언동을 연습하고, 사흘을 흉내 내니 비슷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 마치 손숙오가 다시 살아온 것 같이 되었다.

마침 이때 초장왕이 궁중에서 연회를 열고 여러 배우를 불러 놀이를 하게 했다. 우맹이 먼저 다른 배우를 초장왕으로 분장하게 하여 손숙오를 사모하는 역할을 맡긴 후에, 자기는 손숙오로 분장하고 무대에 등장하였다. 초장왕이 한번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손숙오는 별고 없습니까? 과인은 경을 너무 절실하게 사모했습니다. 와서 과인을 도와주시오.” 하니, 우맹이 대답하기를, “신은 진짜 손숙오가 아니라 손숙오로 분장한 배우일 뿐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손숙오를 그리워했으나 다시 볼 수 없었는데, 손숙오와 비슷한 사람을 보니 과인에게 조금 위로가 되는구나! 경은 사양하지 말고 영윤의 자리에 취임하여라.” 하니, 우맹이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과연 신을 쓰시고자 하신다면 신도 매우 원하는 바입니다. 다만 집에 늙은 아내가 있는데 제법 세상 물정에 능통합니다. 돌아가서 늙은 아내와 상의하게 해 주신다면 비로소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다.” 했다. 우맹이 즉시 무대에서 내려가더니 잠시 후에 다시 올라와서 말하기를, “신이 집에 가서 늙은 아내와 상의를 했는데 늙은 아내가 신에게 벼슬을 살지 말라고 했습니다.” 했다. 초장왕이 묻기를, “무엇 때문인가?” 하니, 우맹이 대답하기를, “제 아내가 촌 노래를 불러주며 신에게 벼슬을 살지 말라고 권하였는데 청컨대 제가 한번 불러 보겠습니다.” 했다.

우맹이 즉시 노래 부르기를, “탐관오리들은 하면 안 되는 일을 골라서 하고, 청백리는 해야 할 일밖에는 하지 않네. 탐관오리들이 하는 일이란 더럽고 비열하고, 하는 짓들은 자손들을 호사스럽게 살게 하는 것이네. 청백리가 하는 일은 높고도 깨끗해서, 몹쓸 짓을 하지 않아서 자손들은 헐벗고 굶주리네. 그대들은 초나라 영윤 손숙오를 보지 못했는가? 생전에 사사로이 재산을 늘린 바 없더니, 하루아침에 그가 죽어 집안이 망했네. 그 자손은 걸식하며 쑥대밭에서 산다네.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손숙오를 본받지 말아라. 군왕도 옛 신하의 공로를 생각하지 않는다네.” 했다. 초장왕이 자리에 앉아서 우맹의 문답을 보니 흡사 손숙오와 같아서 마음속에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 우맹이 노래를 끝내자 초장왕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손숙오의 공을 과인이 어찌 잊겠는가?” 하고, 즉시 우맹에게 손안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손안이 낡은 옷에 짚신을 신고 이르러 초장왕에게 절하고 뵈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곤궁함이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했다. 우맹이 옆에서 대답하기를, “어찌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영윤 손숙오의 청렴결백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손안이 벼슬 살기를 원치 않았으나, 이제 마땅히 만호의 읍에 봉하겠다.” 하니, 손안이 굳이 사양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의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경은 절대 물리치지 말라!” 했다. 손안이 아뢰기를, “군왕께서 만일 저의 부친이 세운 조그마한 한 공을 생각하시어 신에게 생활기반을 주려고 하신다면, 원컨대 침구(寢邱)의 땅으로 만족하겠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침구의 땅은 척박하여 경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했다. 손안이 말하기를, “선친께서 유언으로 명하기를, 그 땅이 아니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니, 초장왕은 이에 따랐다. 뒷사람들이 침구는 좋은 땅이 아니라고 아무도 빼앗지 않아서 마침내 손씨가 대대로 지킬 수 있었다. 이것은 곧 손숙오의 선경지명이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우맹의 일을 말했는데, 시에 이르기를, “청백리가 한가하게 자식들의 가난을 신경 쓰겠는가? 죽고 나서 표창하여 높이는 건 군주에게 매었을 뿐! 맹주유가 능히 그 일을 풍자하여 간하지 않았다면, 초장왕이 어찌 죽은 신하를 생각이나 했겠는가?” 했다.

한편, ()나라의 순림보는 손숙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나라 군사가 갑자기 출병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이에 진경공에게 청하여 군사들을 일으켜 정나라로 쳐들어가 교외를 크게 노략질했다.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돌아가려고 하니, 여러 장수가 정나라 도성을 포위하기를 청했다. 순림보가 말하기를, “정나라 도성을 포위해도 금방 이길 수는 없소. 만일 초나라의 구원병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이것은 적을 부르는 셈이오. 잠시 정나라 사람을 두렵게 했다가 그들이 스스로 계책을 만들게 할 뿐이오했다. 정양공이 과연 크게 두려워하여 사자를 초나라에 보내 대책을 강구했다. 또 한편으로 정양공은 그 아우 공자 장(公子張)을 공자 거질과 바꾸어 귀국시켜, 함께 국정을 다스리려고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정나라가 진실로 신의가 있는데 어찌 인질이 필요하겠는가?” 하고, 모두를 보내주고, 인하여 여러 신하를 모아 대책을 의논했다.

 

의논한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55: 화원이 침상에 올라 자반을 위협하고, 노인이 풀을 맺어 두회에 저항하다.

 

한편, 초장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진()나라 군사를 물리칠 계책을 의논했다. 공자 측이 나와서 말하기를, “초나라와 사이가 좋기로는 제나라만한 나라가 없고, ()나라를 굳게 받들기로는 송나라보다 더한 나라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토벌한다면 진()나라는 송나라를 구하느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감히 정나라를 놓고 우리와 다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계책은 비록 훌륭하기는 하지만, (명분으로 내세울) 빈틈이 없소. 돌아가신 초성왕께서 홍수에서 송나라 군사들을 패배시키고 송양공의 팔에 상처를 입혔으나, 송나라는 인내하였소. 궐맥(厥貉)의 회맹에서 송소공(宋昭公)이 친히 일을 당하였고, 그 뒤 송소공이 시해되고 공자 포()가 자리를 이어받아 지금 18년이 되었소. 마땅히 무슨 명분으로 토벌하겠소?” 했다. 공자 영제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제나라 군주가 여러 번 사자를 보냈으나 우리는 아직 한번도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마땅히 제나라에 답례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결국 사신이 송나라를 지나가야 하는데 길을 빌려주지 않을지 탐지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따지지 않고 길을 빌려준다면 이는 우리 초나라를 두려워함이니 대왕께서 회맹을 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무례하게 우리 사신을 욕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구실 삼을 수 있으니, 어찌 명분이 없음을 걱정하십니까?”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누구를 사자로 보내면 되겠는가?” 하니, 공자 영제가 대답하기를, “신무외(申無畏)가 일찍이 궐맥(厥貉)의 회맹에 따라갔으니, 그를 사자로 보내면 됩니다.” 했다.

초장왕은 즉시 신무외(申無畏)를 불러 제나라에 사자로 가라고 했다. 신무외가 아뢰기를, “제나라에 가려면 반드시 송나라를 지나가야 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길을 빌려 달라는 문서를 확인한 다음에 관문을 통과시킬 것입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경은 길이 막힐까 두려워 사신으로 가지 않겠다는 것이오?” 했다. 신무외가 대답하기를, “지난날 궐맥의 회맹에서 여러 나라 군주들이 맹제(孟諸)에서 사냥할 때 송나라 군주가 명령을 어겨 신이 그 종들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송나라는 신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 만일 길을 빌려 달라는 문서도 없이 송나라로 들어간다면 그들은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문서상에 그대의 이름을 바꾸어 신주(申舟)로 하고 무외(無畏)라는 옛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될 것이오.” 했다. 신무외가 여전히 가지 않으려 하며 말하기를, “이름은 바꿀 수 있어도 얼굴은 바꿀 수 없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만일 그대를 죽이면 내가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멸망시켜 그대의 원수를 갚겠소!” 했다. 신무외는 이에 감히 다시 사양할 수 없었다. 다음 날 그는 아들 신서(申犀)를 데리고 와서 초장왕에게 알현시키면서 말하기를, “신이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신하의 본분입니다. 다만 원하옵건대, 이 아들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그것은 과인의 일이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했다.

신주는 사신이 가져가야 할 예물을 수령하고 초장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 후에 영성(郢城)을 나갔다. 아들 신서는 송별하려고 교외에 나왔다. 신무외가 당부하기를, “네 아버지는 이번에 가면 반드시 송나라에서 죽을 것이다. 너는 반드시 군왕에게 청하여 나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내 말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했다. 부자가 눈물을 뿌리면서 헤어졌다. 곧 신무외 일행이 수양(睢陽)에 이르니, 관문을 지키던 관리가 초나라 사신을 알아보고 길을 빌리는 문서를 요구했다. 신주가 대답하기를, “초장왕의 명령을 받들어 제나라에 가는 사신이라 제나라의 초빙 문서는 가지고 있지만, 길을 빌리는 문서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하니, 관문을 지키던 관리가 신주를 관문 밖에 머물게 하고 송문공에게 급히 알렸다. 그때 송나라는 화원(華元)이 정사를 맡고 있었다. 화원이 송문공에게 아뢰기를, “초나라는 우리와 대대로 원수지간입니다. 지금 사자가 공공연히 송나라를 지나가면서 길을 빌리는 예의도 차리지 않으니 우리를 심히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청컨대 사자를 죽이십시오.” 하니, 송문공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신을 죽이면 초나라는 반드시 우리를 칠 것이오. 그때는 어떻게 하겠소?” 했다. 화원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업신여김을 받는 수치가 침략을 받는 것보다 더욱 심합니다. 더욱이 우리를 업신여기는 형세로 보아 반드시 우리를 칠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정벌을 받을 바에야 우리가 받은 치욕을 갚아야 합니다.” 했다.

이에 송문공은 사람을 보내 신주(申舟)를 송나라 조정으로 잡아오게 했다. 화원이 초나라의 사신을 한 번 보고 그가 신무외라는 것을 알았다. 화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일찍이 우리 선군의 종들을 죽여놓고, 지금 이름을 바꾼다고 죽음을 피할 것 같으냐?” 하니, 신주가 자신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 송문공 포()를 보고 크게 꾸짖기를, “너는 할머니를 범하고 적자인 조카 소공(昭公)을 죽였다. 요행히 하늘의 죽임을 면했으나, 또한 대국의 사자를 함부로 죽여서 초나라 군사가 도착하면 너희들 군신들은 가루가 될 것이다.” 했다. 화원이 명령하여 먼저 신무외의 혀를 자른 후에 죽였다. 제나라에 바치려고 가져가던 문서와 예물은 교외에서 불태워 버렸다. 수행원들이 수레를 버리고 달아나 초장왕에게 보고했다. 초장왕이 바야흐로 점심을 먹다가 신주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젓가락을 자리에 던져 버리고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곧 사마 공자 측(公子側)을 대장으로 삼고 신숙시(申叔時)를 부장으로 삼아 바로 전차를 정비하여 친히 송나라를 쳤다. 신서를 불러 군정(軍正 ; 군 법무관)으로 삼아 종군하게 하였다. 신주가 그해 여름 4월에 피살되었고 초군이 송나라 경계에 도착한 것은 그해 가을 9월이니 아주 신속한 출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잠연(潛淵) 선생은 시를 지어 이르기를, “송나라를 업신여겨 목숨을 잃게 될 줄은 분명히 알았지만, 하늘과 같은 군왕의 명령이라 감히 몸을 아끼리오?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군사를 일으켜 비바람처럼 도착하니, 화원은 지나가는 손님을 죽인 것을 응당 후회하게 되었다.” 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수양성을 포위하고 성 높이와 같은 누거(樓車)를 만들어 사면에서 성을 공격하였다. 화원은 군사들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순찰하는 한편 대부 낙영제(樂嬰齊)를 진()나라에 보내 위급을 알렸다. 진경공(晉景公)이 군사를 일으켜 구하려고 하니, 꾀가 있는 신하 백종(伯宗)이 간하기를, “순림보가 600대의 전차로 정나라를 구하러 갔다가 필()에서 초나라에게 패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초나라를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송나라를 구하러 군대를 보내도 틀림없이 공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지금 오직 송나라와 진()나라가 친한데 만일 구하지 않는다면 송나라를 잃을 것이다.” 하니, 백종이 말하기를, “초나라는 송나라까지 2천 리나 떨어져 있어, 군량을 운반하기가 쉽지 않아 반드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사자 한 사람을 송나라에 보내, 다만 말하기를, ‘()나라가 이미 대군을 일으켜 구하러 온다.’라고 하고, 견고히 지키게만 하십시오. 그러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초나라 군사는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초나라와 대적하는 수고를 치르지 않고 송나라를 구하는 공로가 있게 될 것입니다.” 했다. 진경공이 그 말을 옳다고 생각하여 묻기를, “누가 능히 송나라에 사자로 갈 수 있겠는가?” 하니, 대부 해양(解揚)이 가기를 청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자호(子虎 ; 해양)가 아니면 이 임무를 맡을 수 없다.” 했다. 해양이 미복으로 송나라 도성 밖에 도착했다가 초나라의 순찰병에게 발견되어 심문당하여 초장왕에게 바쳐졌다.

초장왕은 진나라 장수 해양을 알아보고 묻기를, “그대는 무슨 일로 왔는가?” 하니, 해양이 말하기를, “진경공의 명령을 받들어 진()나라 구원병이 올 때까지 굳게 지키도록 송나라에 권유하러 왔습니다.”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원래는 진()나라 사신으로 왔겠지! 너는 전날 북림(北林)의 싸움에서 우리 위가(蔿價) 장군에게 사로잡혀 온 것을 내가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 주었더니, 이번에 다시 우리의 그물에 걸렸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하니, 해양이 말하기를, “진나라와 초나라는 원수 간이니, 죽임을 당할 뿐이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했다. 초장왕이 해양의 몸을 수색하여 문서를 얻었다. 그 문서를 읽고 말하기를, “송나라 도성은 아침저녁에 함락될 것이다. 너는 편지의 내용과는 반대로 진나라에 일이 있어서 급히 구해줄 수가 없어, 너희 나라의 일이 잘못될까 걱정되어 특별히 나를 보내 입으로 전하게 했다.’라고 하면, 송나라 사람들은 절망하여 반드시 나와서 항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초나라와 송나라의 많은 인민을 죽이는 참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성사되면 마땅히 너를 봉하여 현공으로 삼아 초나라에 머물러 벼슬하게 하겠다.” 하니, 해양이 머리를 숙이고 응하지 않았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그러지 않겠다면, 마땅히 너를 참수할 수밖에 없다.” 했다.

해양은 원래 초장왕의 말을 따르지 않으려고 했으나, 초나라의 군중에서 죽으면 진나라 군주의 명을 송나라에 전할 길이 없음을 걱정하여, 거짓으로 허락하여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 했다. 초장왕은 해양을 누거(樓車) 위에 올려서 사람을 시켜 재촉하게 했다. 해양이 마침내 송나라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진나라 사신 해양이다. 나는 지금 초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들은 나에게 송나라가 항복하도록 권유하라고 한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항복하면 안 된다. 우리 주공께서 친히 대군은 거느리고 여러분들을 구원하려고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다.” 했다. 초장왕이 그 말을 듣고 빨리 누거에서 끌어내리라고 명령하여, 그를 꾸짖기를, “너는 이미 나의 말을 따르겠다고 하고, 다시 배신했으니 네 스스로 신의가 없어서 죽는 것이지 나의 잘못은 아니다.” 하고, 좌우에 소리쳐 해양을 참한 후에 보고하라고 했다. 그러나 해양은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신은 신의를 잃은 적이 없습니다. 신이 만약 오로지 초나라에 신의를 지킨다면, 반드시 진나라에 신의를 잃는 것입니다. 가령 초나라의 신하가 주군의 말을 배신하여 외국의 뇌물을 받는다면 군주께서는 그것을 신의라고 하겠습니까? 신의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신은 죽기를 청하여, 초나라의 신의는 외국 사람에게만 적용하고, 자기 나라 사람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했다. 초장왕이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대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해양을 석방하여 돌아가게 했다.

송나라의 화원은 해양이 전한 말을 듣고, 성을 수리하여 더욱 굳게 지켰다. 공자 측(公子側)은 군사를 시켜 성밖에 토산을 쌓았다. 토산은 마치 높은 망루와 같아 그 안에서 거처하면서 수양성 안의 일거일동을 살펴 알았다. 화원도 역시 성안에서 토산을 쌓아 마주 보게 했다. 가을 9월부터 포위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여름 5월이 되었다. 피차간에 아홉 달 동안 대치하여 수양성 안에는 식량과 마초가 모두 바닥나고 사람들도 많이 굶어 죽었다. 화원은 다만 충의로 그 부하들을 격려하고 백성들을 감읍시켜, 심지어 자식들을 바꾸어 잡아먹고 해골을 주워 땔감으로 했지만 투지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초장왕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군리(군 사무관)가 아뢰기를, “군중에 다만 7일분의 양식이 있습니다.”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나는 송나라를 파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하고, 스스로 전차를 타고 송나라의 도성을 살펴보면서 송나라의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아주 엄하게 정돈된 것을 보고, 입으로 한숨을 쉬고 곧 공자 측을 불러 철군을 의논했다.

신서가 초장왕의 말 앞에서 절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신의 아비는 왕의 명령을 받들다가 죽었는데, 왕께서는 신의 아비에게 신의를 잃을 것입니까?” 하니, 초장왕의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그때 신숙시가 초장왕의 전차에서 말고삐를 잡고 있다가 계책을 말하기를, “송나라가 항복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머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군사들에게 막사를 짓고 농사를 짓게 하여 오래 버틸 계획을 보여주면 송나라는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그 계책이 아주 좋소.” 하고, 이에 명령을 내려 군사들에게 수양성을 따라 그 일대에 성 밖 민가를 헐거나 대나무를 잘라서 막사를 짓고, 군사 10명 중 5명은 남아서 성을 공격하고 5명은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리며, 열흘에 한 번씩 교대했다. 군사들이 서로 말을 전하여, 화원도 그것을 듣고 송문공에게 말하기를, “초장왕이 물러갈 뜻이 없습니다. ()나라 구원병이 오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신이 청컨대 초나라 진영에 들어가서 자반(子反 ; 공자 측)을 만나 겁박하여 화의를 맺겠습니다. 혹시 요행으로 성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니, 송문공이 말하기를, “사직의 존망이 이번 행차에 달렸으니 부디 조심하시오.” 했다.

화원은 공자 측이 토산 위의 망루 위에서 숙식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 좌우 측근들의 성명을 탐문하여 미리 알아 놓고, 또한 지키는 초병들의 거처도 자세하게 파악했다. 밤이 되자, 화원은 전령 모습으로 분장하고 조심스럽게 성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곧바로 토산 쪽으로 다가갔다. 순찰병이 딱딱이를 치며 오는 것을 만나자 화원이 묻기를, “원수께서는 위에 계시는가?” 하니, 순찰병이 말하기를, “계십니다.” 했다. 화원이 또 묻기를, “벌써 주무시는가?” 하니, 순찰병이 말하기를, “연일 노고가 많아서 오늘 밤에는 대왕께서 술 한 통을 하사하셔서 술을 마시고 이미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했다. 화원이 토산 쪽으로 달려가니 토산을 지키는 군사가 저지했다. 화원이 말하기를, “나는 대왕의 전령 용료(庸僚). 대왕께서 긴급한 기밀 사항을 원수께 분부하셨다. 조금 전에 하사한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웠을까 걱정하여 특별히 나를 보내어 원수께서 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대면하여 분부를 전달하라고 하셨다.” 하니, 군사가 그것이 참말인 줄 알고 토산 위로 올라가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토산 위의 망루에 등불이 밝게 켜져 있고, 공자 측이 옷을 입은 채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 화원이 곧바로 침상 위에 올라가 가벼이 손으로 밀었다. 공자 측은 깨어나서 몸을 움직이려 할 때 양쪽 소매를 화원이 깔고 앉았다. 공자 측이 급히 묻기를, “너는 누구냐?” 했다.

화원이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하기를, “원수께서는 놀라지 마시오. 나는 송나라의 우사(右師) 화원(華元)이오. 주공의 명을 받들어 특별히 밤에 강화를 요청하러 왔소. 원수께서 만약 내 요청을 따른다면 지금 동맹을 맺겠지만, 만일 요청을 허락하지 않으면 너와 원수의 목숨은 오늘 밤에 끝나게 될 것이오.” 하고, 말을 마치자 왼손으로는 누워 있는 공자 측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소매 안에서 한 자루의 예리한 비수를 꺼냈다. 등불 아래 비수가 밝게 빛났다. 공자 측이 황망 중에 대답하기를, “일이 있으면 여러 사람이 상의하여 해결하면 되지 이렇게 거칠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니, 화원이 비수를 거두고 감사하며 말하기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만 괴이하게 생각지 마시오. 정세가 이미 급하여 조용히 할 수가 없었소.” 했다. 공자 측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형편은 어떠하오?”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아이들을 바꿔서 잡아먹고 해골을 주워다 땔감으로 하니, 참으로 낭패한 지경이오.” 했다. 공자 측이 놀라 말하기를, “송나라의 곤란함이 이렇게까지 되었소? 내가 알기로 병법에 ()는 실()처럼 보이게 하고 실()은 허()처럼 보이게 한다고 했소. 그대는 무엇 때문에 실정을 나에게 고하시오?”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군자는 남의 어려움을 동정하고, 소인은 남의 어려움을 이용한다.’고 하였소. 원수께서는 군자이지 소인이 아닐 것이오. 그래서 성안의 사정을 감히 숨기지 않았소.” 했다.

공자 측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소?”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나라 안은 이미 곤궁한 형편이지만 사람들의 투지는 시들지 않았소. 임금과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성과 함께 깨어지려 하는데 어찌 성을 내려와서 항복하겠소? 만일 송나라의 어려움을 동정하는 어진 마음을 베풀어서 군사를 30리만 물려 주시면 우리 주군께서 초나라를 따르고 맹세컨대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오.” 했다. 공자 측이 말하기를, “나도 속이지 못하겠소. 초나라의 군중에는 다만 7일분의 양식이 있을 뿐이오. 만약 7일이 지나도 성이 함락되지 않으면 우리도 역시 회군해야 하오. 막사를 짓고 밭을 갈라는 명령은 오로지 상대를 두렵게 하려는 것일 뿐이오. 내일 내가 대왕께 아뢰어서 일사(一舍 ; 3십리)를 퇴군하겠소. 그대 나라의 주군과 신하도 또한 신의를 잃지 마시오.” 했다. 화원이 말하기를, “이 화원이 진정으로 몸소 인질이 되어 원수와 함께 맹세를 하겠으니, 각각 후회하여 뒤집지 않기를 바라오.” 했다. 두 사람이 맹세한 다음, 공자 측은 마침내 화원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공자 측은 화원에게 영전(令箭 ; 군령전달용 화살) 한 개를 주며, 분부하기를 , “빨리 가시오.” 했다. 화원은 영전을 가지고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성 밑에 와서 암호를 외치니, 성 위에서 바구니가 내려와서 화원을 성 위의 토산으로 끌어 올렸다. 화원은 밤사이에 돌아와 송문공에게 복명하니 아주 기뻐하며, 다음 날 초나라 군사가 물러났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다음날, 날이 밝자 공자 측은 지난밤에 화원이 한 이야기를 초장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신의 목숨이 비수에 거의 끊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화원이 인정을 베풀었고, 송나라 도성 안의 사정을 사실대로 알리면서 군사를 물리쳐 주기를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신은 이미 그의 청을 허락했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송나라가 이렇게까지 곤란한 지경이라면 과인은 마땅히 송나라를 취한 뒤에 돌아가겠다.” 했다. 공자 측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군사들의 군량이 7일분 밖에 없다고 신이 이미 알려 버렸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버럭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자하(子何 : 공자 수)는 무슨 생각으로 우리의 실정을 적에게 알려 주었단 말인가?” 했다. 공자 측이 대답하기를, “작고 약한 송나라가 남의 신하에게 속이지 않았는데, 어찌 당당하고 큰 초나라가 도리어 그보다 못하겠습니까? 신은 그래서 감히 숨기지 못했습니다.” 하니, 초장왕의 얼굴에 노여움이 사라지며 말하기를, “사마(司馬)의 말이 맞소!” 하고, 즉시 명령을 내려 30리 밖으로 퇴군하여 주둔했다. 신서는 군령이 이미 내려져서 감히 다시 간하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했다.

초장왕이 신서에게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너무 상심하지 말라. 언젠가는 그대의 효심이 이루어질 것이다.” 했다. 초나라 군사가 진영을 이미 세우자, 화원이 먼저 초나라 진영에 도착하여 송문공의 뜻을 전하여 맹약을 맺겠다고 청했다. 공자 측이 화원을 따라 송나라 도성에 들어가서 송문공과 피를 입술에 발라 맹세했다. 송문공은 화원을 시켜 신주(申舟)의 관을 초나라 진영에 보내고, 초나라에 인질로 머물게 했다. 초장왕은 군대를 거두어 초나라에 돌아갔다. 신주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게 하고, 모든 조정 대신들이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장례가 끝나자 신서에게 대부의 직을 잇게 했다. 화원이 초나라에 있을 때 공자 측으로 인해 공자 영제와도 서로 사귀어 친하게 되었다. 하루는 서로 모여 시국에 관해 논했는데, 공자 영제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하니, 천하가 언제 태평하겠는가?”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자웅을 겨루어 서로 간에 상하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한 사람이 나서서 두 나라를 화친케 하고, 각기 그 속국의 조현을 받으며 군대를 쉬고 수호를 맺게 하면,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여 진실로 세상을 위한 큰 다행이 될 것입니다.” 했다.

공자 영제가 말하기를, “그 일을 그대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저와 진()나라 장수 난서는 서로 친합니다. 지난날 제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역시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서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했다. 다음날 공자 영제가 화원의 말을 공자 측에게 전하니, 공자 측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아직 군사를 거둘 뜻이 없으니, 이 일을 가볍게 거론할 수 없습니다.” 했다. 화원은 초나라에서 6년을 머물다가, 주정왕 18(기원전 588)에 송문공 포()가 죽고 그 아들 송공공(宋共公) ()가 즉위하자, 화원이 국상을 치르려고 귀국을 청해 비로소 송나라로 돌아갔다. 이것은 후일의 일이다. 한편, 진경공(晉景公)은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포위하고 1년이 지나도록 풀지 않자, 백종에게 말하기를, “송나라가 도성을 지키느라 지쳤을 것이다. 과인이 송나라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마땅히 군사를 보내 구원해야겠다.” 하고, 구원군을 동원하려고 할 때, 갑자기 보고하기를, “()나라에서 밀서를 보냈다.”라고 했다. ()나라는 적적(赤狄)의 별종으로 외()성이며 봉호는 자작(子爵)이고 여()나라와 이웃하였다. 주평왕 때 노()나라 군주가 여()나라 군주를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여 이에 적적(赤狄) 노나라가 더욱 강해졌다.

그때 노()나라 군주는 이름이 영아(嬰兒)인데, 경공의 여동생 백희(伯姬)를 부인으로 삼았다. 영아가 나약하여 그 나라 재상인 풍서(酆舒)가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전에 진()나라 장군 호사고(狐射姑)가 이 나라에 피신해 왔는데, 그는 진나라 공신으로 식견이 넓고 재능이 많아서 풍서가 약간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했다. 호사고가 죽은 후에 풍서는 꺼릴 것이 없이, ()나라 군주와 진나라의 친선관계를 끊기 위해 백희를 무고하여 죄를 씌워서 그 군주로 하여금 그녀를 목매달아 죽이게 하였다. 또한 풍서는 노()나라 군주와 함께 교외로 사냥을 나가서 취한 후에 군주와 신하가 같이 술에 취해 탄환 쏘기 놀이를 하다가 나는 새를 쏴서 맞추는 내기를 하였다. 풍서가 탄환을 쐈으나 잘못하여 노나라 군주의 눈을 상하게 했다. 풍서가 활을 땅바닥에 던지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탄환이 맞지 않았으니 신이 벌주 한 잔을 들겠습니다.” 했다. 노나라 군주가 풍서의 학대를 참을 수 없었으나 힘으로 제어할 수가 없어, 마침내 밀서를 써서 진나라에 보내,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풍서를 토벌해 달라고 했다. 모신 백종이 나와 말하기를, “만일 풍서를 죽이고 노나라 땅을 차지하면 그 이웃인 적()나라도 다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서남쪽의 강역을 개척하여 진나라의 군사와 세금을 확충시킬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했다.

진경공도 역시 노()나라 군주 영아가 아내를 보호하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즉시 순림보를 대장으로 삼고 위과(魏顆)를 부장으로 삼아 전차 3백 대를 동원하여 노()나라를 쳤다. 풍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곡량(曲梁)에서 맞섰으나 싸움에서 져서 위()나라로 달아났다. 위목공(衛穆公) ()은 얼마 전에 진()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풍서를 잡아서 진나라 군에 보냈다. 순림보가 풍서를 묶어서 강도(絳都)로 보내어 죽였다. 진나라 군대가 노나라 도성으로 진격해 들어가니, 노나라 군주 영아가 말 머리에 나와 마중했다. 순림보는 노나라 군주가 백희를 무고하여 죽인 죄를 물어 묶어 서 돌아왔다. 그러면서 핑계로 말하기를, “()나라 백성들이 그 군주를 그리워한 지 오래되었다.” 했다. 이에 여()나라 군주의 후예를 찾아서 노나라의 5백 호를 떼어 봉하고 성을 쌓아 살게 한 다음 여나라를 회복시킨다는 명분으로 노나라를 멸망시켰다. 영아는 그 나라가 망한 것을 원통해하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사당을 지었다. 지금 산서성 여성(黎城) 남쪽 15리에 노사산(潞祠山)이 그것이다. 진경공은 순림보가 성공을 못 할까 걱정하여,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 직산에 진을 쳤다. 순림보가 직산에 이르러 승리를 고하고, 부장 위과를 머무르게 하여 적적(赤狄 )의 땅을 점령하게 했다.

(위과가 적적을 점령하고) 돌아오다가 보씨(輔氏)의 못[]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먼지가 크게 일어나서 해를 가리고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키자, ()나라 군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전초병이 급히 보고하기를, “()나라에서 대장 두회(杜回)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왔다.”라고 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나라 강공(康公)이 주광왕(周匡王) 4년에 죽고 그 아들 공공(共公) ()가 즉위했다. ()나라 조천(趙穿)이 숭()을 침범하자 진()나라와 틈이 벌어졌고, ()나라 군사가 초()를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해, 마침내 풍서(酆舒)와 결탁하여 함께 진()나라를 도모하려고 했다. 진공공(秦共公)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죽고, 그 아들 환공(桓公) ()이 즉위했다. 진환공 11년에 진()나라가 풍서를 친다는 말을 듣고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려 하다가, 다시 진()나라가 이미 풍서를 죽이고 노()나라 군주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두회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노나라 땅을 다투게 한 것이었다. 두회(杜回)는 진()나라의 유명한 장사였다. 그는 날 때부터 어금니로 은을 뚫었으며 눈은 튀어나와 눈동자가 금빛이었고, 주먹은 구리 망치 같았으며 빰은 쇠 발우 같았고 머리와 수염은 곱슬이었다. 키는 한 길이 넘었다. 힘은 천 균(; 1균은 30)을 들었으며 항상 120근이 나가는 큰 도끼를 사용했다. 원래 백적(白翟) 사람인데, 일찍이 청미산(靑眉山)에서 하루에 호랑이 다섯 마리를 주먹으로 때려잡아 모두 가죽을 벗겨서 가지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진환공(秦桓公)이 두회의 용맹함을 듣고 불러서 차우 장군으로 삼았다. 또 두회는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차아산(嵯峨山) 산적 만여 명을 깨트려서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쳤다. 그리하여 대장이 되었다. (()나라 군사를 확인한) 위과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교전에 대비했다. 두회는 전차에 타지도 않고 큰 도끼를 손에 들고, 역전의 용사 300명을 거느리고 큰 걸음으로 진()나라 진영 쪽으로 돌입해 왔다. 밑으로는 말의 발을 찍고 위로는 무장한 장수들을 찍으니, 분명히 하늘에서 하강한 악귀들 같았다. ()나라 군사는 여태까지 그런 흉악한 군사를 본적이 없어서, 막지 못하고 한 떼의 군사가 대패했다. 위과는 명령을 내려 진영과 보루를 세우고 출전하지 못하게 했다. 두회가 한 떼의 도부수를 거느리고 진영 밖에서 3일 밤낮을 뛰어오르며 욕설을 했지만, 위과는 감히 싸움에 응하지 못했다. 갑자기 본국에서 군사들이 왔다고 보고했는데, 그 장수가 위과의 동생 위기(魏錡)였다. 위기가 말하기를, “주공께서 적적(赤狄)의 무리가 진()나라와 연합하여 변을 일으킬까 걱정하여, 특별히 저를 보내어 돕게 했습니다.” 했다. 위과가 진()나라 장수 두회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설명하고, 용력으로 당할 수가 없어 마침 본국에 사람을 보내 원병을 청할 참이었다고 했다. 위기가 믿지 않으며 말하기를, “저 산적 같은 놈이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내일 제가 교전하여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했다.

다음날 두회가 다시 와서 싸움을 걸었다. 위기가 성을 내어 출전하려 하자 위과가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위기는 자기가 새로 데려온 무장병들에게 명령을 내려 전차를 몰아 곧바로 진격했다. ()나라 군사가 사방으로 흩어지니 위기는 전차들을 나누어 추격했다. 갑자기 한번 휘파람 소리가 나더니 300명의 도부수가 하나로 합쳐 모두 두회를 따라 큰 칼과 큰 도끼를 휘두르며 밑으로는 말의 발을 찍고 위로는 무장 장수를 찍었다. 북쪽의 보졸들이 전차를 따랐다가 방향을 바꾸니, ()나라 전차는 미처 방향을 바꿀 수가 없어 좌우와 전후에서 편할 데를 엿보아 찍으니 위기가 대패했다. 다행히 위과가 병사들을 끌고 와서 구원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위과는 막사에서 앉아서 여러 가지로 궁리했으나 좋은 계책이 없었다. 앉은 채 삼경이 되어 몸이 피곤하여 몽롱한 상태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귀에 대고 청초파(靑草坡)’라는 석 자를 말해 줬다. 꿈에서 깨어났으나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잠들었는데 똑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위기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위기가 말하기를, “보씨(輔氏)의 땅에서 십 리를 가면 큰 언덕이 있는데 그 이름이 청초파(靑草坡)입니다. 혹시 그곳에서 진()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 무리 군사를 끌고 먼저 가서 매복하고 있겠습니다. 형님은 이곳으로 적군을 유인하십시오. 좌우에서 협공한다면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위기가 매복을 하러 가자, 위과가 명령을 내리기를, “영채를 뽑아 모두 일어나라.” 하고, 공공연히 말하기를, “여성(黎城)으로 돌아간다.” 했다. 두회가 과연 뒤를 추격했다. 위과는 두회를 막아 몇 합을 싸우다가 전차를 돌려 달아났다. 점점 청초파 가까이 왔을 때, 포 소리가 한번 나더니 위기의 복병이 쏟아져 나왔다. 위과도 몸을 돌려 돌아와서 두회의 군사를 단단히 포위하여 양쪽에서 협공했다. 그러나 두회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120근 도끼를 종횡으로 휘두르며 맞서는 자를 모두 죽였다. 그러나 두회가 거느린 도부수들이 손상을 입어 이길 수가 없게 되었다. 위씨 형제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두회와 힘써 싸워 물러서지 않았다. 청초파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두회가 갑자기 한 발이 걸려서 넘어졌다. 마치 기름 신발로 빙판을 밟은 듯이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군사들의 함성을 질렀다. 위과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한 노인이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은 농부의 모습인데, 파란 풀들을 계속해서 묶어서 그것이 두회의 발목을 붙들게 했다.

위과와 위기의 전차 두 대가 굴러가서 두 개의 창을 함께 들어 두회를 찔러 땅바닥에 쓰러뜨린 다음에 생포했다. 두회의 도부수들은 두회가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다가 모두 진()나라 병사들의 추격에 사로잡히고 4~50명만 도망쳤다. 위과가 두회에게 묻기를, “너는 스스로 영웅이라고 하더니 어찌하여 사로잡혔는가?” 하니, 두회가 말하기를, “내 두 발이 풀에 걸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늘이 내 목숨을 끊으려 함이니 내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했다. 위과가 속으로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위기가 말하기를, “두회는 힘이 절륜하니 군중에 놔두면 변란이 날까 두렵소.” 하니, 위과도 말하기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고 즉시 두회를 참수하게 하고 직산으로 목을 가져가 공로를 청했다. 그날 밤에 위과가 막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낮에 본 노인이 앞으로 와서 읍하고 말하기를, “장군은 두회가 잡힌 까닭을 아십니까? 그것은 이 늙은이가 풀을 맺어서 발이 걸려 넘어져 잡힌 것입니다.” 했다.

위과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나는 본래 노인과는 모르는 사이인데, 이렇게 도움을 받았으니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까요?”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곧 조희(祖姬)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장군이 옛날 부친이 돌아가실 때 내린 명령을 받들지 않고 내 딸을 잘 개가시켜 주었습니다. 늙은이가 저승에서 딸의 목숨을 살려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특별히 보잘것없는 힘을 써서 장군을 도와 군공을 이루게 했습니다. 장군께서 노력하시면 이후에 대대로 영화를 누리고 자손이 귀하게 되어 왕후(王侯)가 될 것이니, 제 말을 잊지 마십시오.” 했다. 원래 위과의 부친인 위주(魏犨)에게는 한 애첩이 있었는데 이름이 조희(祖姬)였다. 위주가 매번 전쟁터에 나갈 때는 위과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만일 전쟁터에서 죽으면, 너는 반드시 좋은 배필을 골라서 이 여자를 개가시켜 주어라. 이 말을 어기지 말아야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위주가 병이 위독할 때에 다시 위과에게 말하기를, “이 여자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여인이다. 반드시 나와 함께 순장을 해서 내가 구천에서 짝을 삼도록 해라.” 하고, 말을 마치자 죽었다. 위과는 그 부친을 장사지낼 때 조희를 순장하지 않았다. 위기가 말하기를, “형님은 아버지가 임종 때 하신 당부를 잊으셨습니까?” 했다.

위과가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평일에는 조희를 반드시 개가시키라고 분부하시고, 임종하실 때는 정신이 어두워서 어지러운 말씀을 하셨다. 효자는 맑은 정신을 가졌을 때의 유언을 따라야지, 정신이 어지러운 임종시에 하신 유언을 따르면 안 된다.” 했다. 장례가 끝나자 위과는 마침내 좋은 선비를 골라서 조희를 개가시켰다. 이러한 음덕을 쌓았기 때문에 노인이 풀을 맺어서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위과가 꿈에서 깨어나서 위기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시 부친을 정성을 다해 곁에서 모시면서 평소에 하신 말씀대로 조희를 순장시키지 않고 개가시켰을 뿐인데 뜻밖에 그녀의 부친이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여 지하에서 이렇게 은혜를 갚았다.” 했다. 위기가 탄식해 마지않았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누가 결초하여 두회를 잡게 했는가? 꿈속의 노인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음덕을 널리 쌓으라고 권하노라! 순리에 맞춰 마음을 편안히 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했다. ()나라 군사가 싸움에 패하여 옹주로 돌아가니, 두회가 전사했음을 알고 군주와 신하의 사기가 꺾였다. 진경공(晉景公)은 위과의 공을 가상하게 생각하여 영호(令狐)의 땅에 봉하고, 다시 큰 종을 주조하여 그 위에다 날짜와 공적을 기록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종을 진경공이 주조했다고 하여 이름을 경종(景鐘)이라고 했다. 진경공은 다시 사회에게 군사를 주어 적적(赤狄)의 남은 종족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때 함께 멸망한 세 나라는 갑씨(甲氏), 유우(留吁), 그리고 유우(留吁)의 속국(屬國)인 탁진(鐸辰)이었다. 이로부터 적적(赤狄)의 땅은 모두 진()나라에 귀속되었다.

그 후 진()나라에는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들끓었다. 순림보가 나라 안에서 도적을 잘 잡는 사람을 찾다가 한 사람을 얻었다. 극씨(郤氏) 종족 사람인데, 이름을 옹()이라 했다. 이 사람은 예측하는데 재주가 있었다. 일찍이 거리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한 사람을 가리키며 도적이라고 했다. 사람을 시켜 잡아다가 심문해 보니 과연 진짜 도적이었다. 순림보가 묻기를, “어떻게 도적인 줄 압니까?” 하니, 극옹이 말하기를, “제가 그 사람의 미간을 살펴보니 시중의 물건을 욕심내는 기색이 역력했고 거리의 사람들을 보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 수 있었습니다.” 했다. 극옹(郤雍)은 매일 돌아다니며 도적 수십 인을 잡았다. 시가지의 도적들이 두려워했으나 도적은 오히려 더욱 많아졌다. 대부 양설직(羊舌職)이 순림보에게 말하기를, “원수께서 극옹에게 도적을 잡게 했는데 도적들이 아직도 다 잡히지 않아 극옹이 죽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했다. 순림보가 놀라서 묻기를, “무슨 까닭입니까?” 했다.

 

양설직의 말은 무슨 이야기에서 왔는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56: 소부인은 누대에 올라 사신들을 회롱하고, 방추보가 어의를 바꿔 입고 제후를 위험에서 구하다.

 

한편, 순림보가 극옹을 채용하여 도적을 잡는데, 양설직이 말하기를, 극옹은 반드시 바르게 죽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순림보가 까닭을 물으니, 양설직이 대답하기를, “주나라 속담에 깊은 물 속에 사는 고기를 본 사람은 상서롭지 않고, 숨겨둔 일을 아는 사람은 재앙이 있게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극옹 한 사람만의 능력만을 믿고, 세상의 모든 도적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적들이 힘을 합쳐 도리어 극옹을 제압하려 한다면 그가 죽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했다. 사흘이 되지 않아서 극옹이 우연히 교외에 나갔는데, 도적 떼 수십 명이 힘을 합쳐 공격하여 그 머리를 잘라서 가 버렸다. 순림보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이 나서 죽었다. 진경공은 양설직의 말을 전해 듣고 불러서 묻기를, “그대는 극옹이 당할 것을 미리 헤아렸으니, 그러면 도적을 없애는 대책은 무엇이오?” 하니, 양설직이 대답하기를, “대개 꾀로써 꾀를 막는 것은 마치 돌로써 풀을 눌러 두는 것과 같습니다. 풀은 반드시 돌 틈을 비집고 자라게 됩니다. 엄격한 법으로 무법자를 금하는 것은 마치 돌로써 돌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두 개의 돌은 다 부서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도적을 없애는 방법은 그들의 마음을 교화하여 염치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도적을 많이 잡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주군께서는 조정에서 어질고 착한 사람을 골라 높은 지위와 영화로움을 내려서 백성들이 다 알 수 있게 한다면, 마음이 착하지 않는 사람들도 스스로 감화될 것입니다. 어찌 도적을 근심하겠습니까?” 했다.

진경공이 또 묻기를, “지금 진()나라에서 가장 착한 사람은 누구인가? 경이 한번 천거해 보시오.” 하니, 양설직이 말하기를, “사회(士會)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람됨이 말은 신의에 의지하고, 행동은 의로움에 따르며, 화목하게 지내지만 아첨하지 않으며, 청렴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강직하지만 도도하지 않고, 위엄이 있지만 사납지 않습니다. 주군께서는 반드시 그를 쓰십시오.” 했다. 사회가 적적(赤狄)을 평정하고 돌아오니, 진경공이 적적의 포로를 주나라에 바치면서 사회의 공을 주정왕(周定王)에게 아뢰었다. 주정왕은 사회에게 무릎 가리개와 관()을 하사하고 상경의 벼슬을 내렸다. 진경공은 사회를 중군 원수로 삼고 태부의 직을 더했다. 사회를 범() 땅에 고쳐 봉하여 그는 범씨의 시조가 되었다. 사회는 도둑을 잡기 위한 법 조항들을 모두 없애고 오로지 백성들을 교화하여 선행을 권장했다. 이에 간악한 백성들은 모두 진()나라로 도망가고, 도적이 한 명도 없게 되어 진()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진경공이 다시 제후의 우두머리가 될 뜻을 품게 되었다.

모신 백종이 나와 말하기를, “선군 진문공께서 천토(踐土)에서 회맹하기 시작한 이래 열국(列國)은 그림자처럼 따랐습니다. 진양공 때에도 신성(新城)에서 맹약을 맺어 열국들은 감히 두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영호(令狐)에서 신의를 잃은 뒤부터 비로소 진()나라와는 우호 관계가 끊어졌고, 곧이어 제()나라와 노()나라에서 주군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어도 우리가 응징하지 못하여, 산동의 여러 나라는 마침내 진()나라를 무시하고 초나라를 따랐습니다. 게다가 정나라를 구하려다가 실패하고, 송나라를 구출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두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진()나라의 지배 아래에는 오직 위()나라, ()나라 등 겨우 서너 개 나라가 있을 뿐입니다. 대개 제()나라와 노()나라는 천하에서 명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주군께서 다시 맹주의 업을 다시 일으키고 싶다면 제나라와 노나라에 친선을 도모하는 게 좋습니다. 두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들과 친선을 맺고 있다가 초나라와 틈이 생길 때를 엿보면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진경공이 그렇다고 생각하여, 이에 상군 원수 극극(郤克)을 사신으로 삼아 예물을 후하게 준비하여 노나라와 제나라에 보냈다. 한편, 노선공(魯宣公)은 제혜공(齊惠公)의 도움으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어 극진히 섬기고 있었다. 제경공(齊頃公) 무야(無野)가 자리를 이었어도 여전히 예전의 관례에 따라 아직 결례한 적이 없었다.

극극(郤克)이 친선사절로 노나라에 이르러 노선공(魯宣公)에게 예를 마치고, 제나라에 가려고 하직 인사를 하니, 노선공도 또한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야 할 때가 되었으므로, 상경 계손행보(季孫行父)로 하여금 사자로 삼아 극극과 함께 동행하도록 했다. 바야흐로 제나라 교외에 당도했을 때, 마침 위()나라의 상경 손량부(孫良夫)와 조()나라의 대부 공자수(公子首)도 역시 제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만나게 되었다. 네 사람이 서로 만나 오게 된 내력을 말하니, 뜻밖에 같은 임무를 띠고 왔음을 알게 되었다. 네 사람의 대부가 객관에 같이 들었다. 다음 날 제나라 군주를 뵙고 각기 자기 나라 군주의 뜻을 전했다. 예를 끝낸 제경공은 네 대부의 용모를 살펴보고 마음속으로 기이하다고 생각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말하기를, “대부들은 잠깐 공관에 돌아가 계시면, 곧 연회를 준비하여 대접하겠습니다.” 했다. 네 대부는 궁궐문을 나왔다. 제경공이 입궁하여 그의 모친인 소태부인(蕭太夫人)을 뵙자 웃음을 터뜨렸다. 태부인은 소()나라 군주의 딸로 제혜공에게 시집을 왔다. 제혜공이 죽은 후에 소부인은 밤낮으로 슬퍼했다. 제경공은 모친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서 매사에 모친의 뜻을 기쁘게 하려고 했다. 항간에 우스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흉내내면서 자세히 이야기하여 두루 그 얼굴을 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날은 건성으로 웃기만 할 뿐, 그 연유를 말하지 않았다.

소태부인이 묻기를, “밖에서 무슨 즐거운 일이 있어서 그렇게 웃기만 하는가?” 하니, 제경공이 대답하기를, “바깥에 특별히 즐거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괴이한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진()나라, ()나라, ()나라, ()나라 등의 네 나라에서 각기 대부들을 사신으로 보내왔는데, ()나라 대부 극극은 애꾸눈이라 단지 한 눈으로만 보는 사람이고, 노나라의 대부 계손행보는 대머리라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없으며, 위나라의 대부 손량부는 절름발이라 두 다리가 높고 낮으며, 조나라의 공자수는 곱사등이라 두 눈이 땅을 쳐다봅니다. 저는 사람이 병을 앓고 나면 몸이 온전치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만 네 사람은 각기 한 가지씩의 질병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같은 시간에 우리나라에 이르러 당에 올라와, 모여서 기괴함을 이뤘으니 어찌 우습지 않겠습니까?” 했다. 소태부인이 믿지 않고 말하기를, “나도 한번 보고 싶은데 되겠는가?”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사신이 도착하면 공식적인 연회가 있고, 관례에 따라 사적인 연회를 엽니다. 내일 제가 명을 내려 후원에다 잔치를 열도록 해서 여러 대부가 잔치에 참석하면, 그들은 반드시 숭대 밑을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모친께서 숭대 위로 올라가 장막 사이로 몰래 보십시오. 그리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했다.

이야기 중에 공적인 연회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이 지났다. 각설하고 다음 날 사적인 연회가 열렸는데, 소태부인이 이미 숭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옛날의 관례로는,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무릇 수레와 종들을 모두 잔치를 베푸는 나라에서 제공하여 손님들의 노고를 잠시 쉬게 해 주었다. 제경공은 오로지 그 모친에게 한번 웃게 해 줄 목적으로 나라 안에서 애꾸눈, 대머리, 절름발이, 곱사등이를 몰래 뽑아서 네 나라 사신들의 수레를 몰게 했다. 극극은 애꾸눈이라 애꾸눈이 수레를 몰고, 계손행보는 대머리라 대머리가 수레를 몰았으며, 손량부는 절름발이라 절름발이가 수레를 몰고, 공자수는 곱사등이라 곱사등이가 수레를 몰았다. 제나라 상경 국좌(國佐)가 간하기를, “나라에서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국가의 대사라 손님과 주인은 공경을 주로 하여 예의를 차려야 하는데, 장난을 치면 안 됩니다.” 했다. 제경공은 듣지 않았다, 수레에는 두 애꾸눈, 두 대머리, 두 절름발이, 두 곱사등이가 타고 숭대 밑을 지나갔다. 소부인이 숭대 위에서 휘장을 열고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고, 좌우의 시녀들도 입을 가리지 못해 웃음소리가 밖으로 퍼졌다.

극극이 처음에는 애꾸눈 마부를 보고 우연으로 생각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숭대 위에서 부녀자들의 웃는 소리를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대충 술을 몇 잔 마시고 황급히 몸을 일으켜 객관으로 돌아와서 심부름꾼에게 따져 묻기를, “숭대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경공의 모친 소태부인입니다.” 했다. 조금 있다가 노나라, 위나라, 조나라 등 세 나라의 사신들도 모두 와서 극극에게 호소하기를, “제나라가 고의로 마부를 시켜 우리들을 희롱하여 부인들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했다. 극극이 말하기를, “우리는 좋은 뜻으로 수교를 위해 사신으로 왔는데 도리어 욕을 당했으니, 이 치욕을 갚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오!” 했다. 계손행보 등 대부 세 사람이 목소리를 함께 하여 말하기를, “대부께서 만약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토벌한다면 우리도 주군에게 상주하여 나라를 기울여 돕겠습니다.” 했다. 극극이 말하기를, “여러 대부들이 결국 한 마음이 됐으니 마땅히 피를 입술에 발라 맹세합시다. 제나라를 토벌하는 날에 함께 힘을 다하지 않는 자는 천지신명께서 죽일 것이오!” 했다. 네 대부가 한 곳에 모여 밤이 새도록 의논을 하고 날이 밝자, 제나라 군주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수레에 올라 마부에게 급히 달리게 명하여 각기 본국으로 돌아갔다.

국좌(國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제나라의 환란이 이 일로부터 시작되겠구나!” 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주인과 손님은 서로 공경을 우선하여 만나야 하거늘, 불구자들이 어찌하여 말채찍을 잡게 되었나? 숭대 위의 웃음소리가 나라의 고요함을 깨뜨리자, 제나라의 변경에는 전쟁을 알리는 봉화가 올랐네!” 했다. 그때 노나라에는 동문중수(東門仲遂)와 숙손득신(叔孫得臣)이 모두 죽었다. 계손행보(季孫行父)가 정경이 되어 정권을 맡았다. 그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제나라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어 돌아와서 치욕을 갚겠다고 맹세했다. 계손행보는 극극도 진경공에게 군사를 청했으나, 태부 사회와 뜻이 맞지 않아서 진경공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져서 노선공에게 아뢰어 사신을 초나라에 보내 군사를 빌리려고 했다.마침 초나라에서는 초장왕이 여행 중에 병을 얻어 죽고, 세자 심()이 즉위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다. 이가 초공왕(楚共王)이다. 사관이 초장왕을 찬양하여 이르기를, “, 훌륭하다! 초장왕이여, 조상이 못다 한 일을 성취했다. 처음엔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더니, 마침내 초나라의 국세를 떨쳤도다. 번희가 궁 안에서 그를 도왔고, 손숙오는 밖에서 보좌했다. 하징서를 죽여 의를 세상에 세우고, ()나라 군사를 물리쳐 무력을 드날렸다. 주왕실을 엿보고 송나라를 포위했고, 위엄 있는 목소리는 호랑이 같았다. 꿈틀거리는 남쪽 오랑캐였지만, 제환공, 진문공과 같은 반열에 섰도다!” 했다.

초공왕은 부왕의 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고 거절했다. 계손행보는 초나라에서 돌아온 사자로부터 보고를 받고 분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진()에서 돌아와 서술하기를, “극극은 밤낮으로 제나라를 토벌하는 이점을 말하고, 제나라를 토벌하지 않고는 패업을 이룰 수 없다고 하여 진나라 군주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사회는 극극의 생각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나이가 많다며 정권을 양보했습니다. 지금은 극극이 중군 원수가 되어 진()나라의 정사를 주관하고 있어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에 보복할 것입니다.” 했다. 계손행보가 크게 기뻐하여 노선공에게 동문중수(東門仲遂)의 아들 공손귀보(公孫歸父)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첫째로는 극극에 대한 답례이고, 둘째로는 제나라를 토벌할 시기를 정하기 위해서라고 아뢰었다. 노선공은 동문중수의 도움으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중수의 아들 공손귀보를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총애하고 신임했다. 그때 노나라는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 등 세 집안의 자손이 번성했으므로 노선공은 매양 근심하고 있었다. 자기 자손이 반드시 세 집안에게 능멸당할 것을 알고, 이에 공손귀보가 사신으로 떠날 때 손을 잡고 은밀히 부탁하기를, “삼환(三桓)은 날로 번창하고, 공실은 날로 쇠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도 잘 알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이번 행차에 기회를 엿보아 진나라 군주와 신하에게 은밀히 우리의 사정을 고한 후에 만약 군사를 빌려 세 집안을 축출해 주면 해마다 조공을 바쳐 진나라의 은덕에 보답하고 영원히 두 마음을 품지 않겠다고 하시오. 경은 조심해서 이 뜻을 간직하여 누설하지 마시오.” 했다.

공손귀보는 노선공의 명을 받들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진()나라에 이르러. 도안고(屠岸賈)가 다시 아첨으로 진경공의 총애를 받아 사구(司寇)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도안고에게 뇌물을 바치고, 노나라 세 집안을 축출해 달라는 노선공의 뜻을 진나라 군주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도안고는 조씨 집안에 죄를 지어, 마음먹고 난씨(欒氏)와 극씨(郤氏)의 두 종족과 친분을 맺기 위해 긴밀히 왕래하고 있었다. 이에 공손귀보의 말을 난서(欒書)에게 고하니 난서가 말하기를, “극극 원수께서 지금 막 계손행보와 함께 제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하는데 이 일은 아마도 협조를 얻기 힘들겠습니다. 제가 한번 원수의 의중을 떠보겠습니다.” 했다. 난서가 극극을 만나 기회를 보아 공손귀보의 일을 말하니, 극극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노나라를 변란에 빠뜨리고자 하는데 들어줄 수가 없소.” 했다. 마침내 극극은 밀서 한 장을 써서 사람을 보내 밤낮으로 노나라에 달려가게 하여 계손행보에게 급히 전하게 했다. 계손행보가 편지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공자오(公子惡)와 공자시(公子視)를 죽인 것은 모두 공손귀보의 아비인 동문중수(東門仲遂)가 모의한 짓이었다. 나는 나라의 안정을 위하여 그 일을 묻어두고 그들을 비호하고 있는데, 지금 그 아들이 나를 쫓아내려고 하니, 어찌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만드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즉시 극극의 밀서를 가지고 숙손교여를 만나 그것을 보여 주었다.

숙손교여가 말하기를, “주공이 조정에서 정사를 보지 않은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말로는 병이라 하지만 아마도 핑계일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가서 병문안을 하고, 주공의 침상 앞에서 죄를 청하여 어떻게 나오나 살펴봅시다.” 했다. 계손행보는 또한 사람을 보내 중손멸(仲孫蔑)을 부르니, 중손멸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군신 간에 대질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법은 없습니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했다. 계손행보는 이에 사구(司寇) 장손허(臧孫許)를 불러 함께 갔다. 세 사람이 궁문에 이르렀으나 노선공의 병이 위독하다고 뵙지 못하여 다만 노선공의 병세만을 묻고 되돌아갔다. 다음날 노선공이 죽었다. 그때가 주정왕 16(기원전 590)이었다. 계손행보 등이 세자 흑굉(黑肱)을 노나라 군주로 옹립했다. 그때 나이가 13세였다. 이가 노성공(魯成公)이다. 노성공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든 정무는 계손행보가 전결했다. 계손행보가 여러 대부를 조당에 모아 놓고 의논해 말하기를, “임금은 어리고 나라는 허약합니다. 정치와 형벌을 크게 밝혀야만 합니다. 지난날 적자를 시해하고 서자를 임금으로 세워 제나라의 환심을 샀으나 진()나라와 좋은 관계를 잃었습니다. 이것은 동문수가 저지른 짓으로 그는 나라를 그르친 큰 죄를 지었습니다.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합니다.” 했다.

여러 대부가 모두 , 하고 명령을 따랐다. 계손행보는 즉시 사구 장손허를 시켜 동문씨 종족들을 나라 밖으로 추방하도록 했다. 공손귀보가 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다가 국경에 미처 이르기 전에 노선공이 이미 죽고, 계손씨(季孫氏)들이 선친(先親)의 죄를 물었다는 것을 알고 제나라로 망명했다. 중손씨 종족들은 공손귀보의 뒤를 따라 모두 제나라로 들어갔다. 후에 유자(儒者)들이 논하기를 중수(仲遂)가 직접 세자를 죽이고 노선공을 세웠으나 그가 죽은 지 오래지 않아 자손들이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악행을 저지른 자가 무슨 이익을 보겠는가?’라고 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몹쓸 짓을 하며 천추만대로 부귀를 바랐는데, 삼환과 원수가 되어 쫓겨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동문(東門)의 기둥은 부러지고 큰 나무는 말라죽으니, 오로지 푸른 죽간에는 악명만 남았네!” 했다. 노성공 즉위 2(기원전 589)에 제경공은 노나라와 진나라가 힘을 합쳐 제나라를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초나라와 친선관계를 맺기 위해 사신을 보내어 위급할 때 도움을 받고자 했고, 한편으로는 전차와 군사를 정돈하여 직접 노나라를 먼저 치기 위해서 평음(平陰)을 지나 용읍(龍邑)으로 진격했다. 제나라 군주의 총애를 받고 있던 노포취괴(盧蒲就魁)가 경솔하게 앞으로 나아갔다가 용읍의 북문 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제경공이 사람을 누거(樓車)에 올라가게 해서 성 위의 사람들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의 노포 장군을 돌려주면 즉시로 군사를 물리겠다.” 했다. 용읍 사람들이 믿지 않고 노포취괴를 죽여 시체를 찢어 성루에 늘어놓았다. 제경공이 크게 노하여 삼군에 명령하여 사방에서 공격하기를 사흘 밤낮을 쉬지 않았다. 성곽이 무너지자 제경공이 성곽 북쪽 귀퉁이로 들어가서 군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서 취괴의 한을 풀었다. 바로 노나라로 깊이 들어가려는데, 정찰 기병이 돌아와 위()나라의 대장 손량부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 국경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위나라가 우리의 빈틈을 엿보고 우리의 경계를 침범해왔으니, 마땅히 군사를 되돌려 맞아 싸워야겠다.” 하고, 즉시 용읍에는 수비하는 군사만을 남겨 두고, 군사들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행군하여 신축성(新築城) 경계에 이르니. 마침 위나라 군사의 선봉인 부장 석직(石稷)이 이미 도착하여, 양군이 각각 영채를 세웠다. 석직이 중군에 나아가 손량부에게 고하기를, “우리가 주군의 명을 받아 제나라의 허를 찔러 쳐들어왔습니다. 지금 제나라 군사가 이미 되돌아오고, 그 군주가 친히 군사들을 이끌고 있으니 가볍게 대적할 수 없습니다. 군사를 물려서 제나라 군사가 돌아가는 길을 양보했다가, ()나라와 노()나라 군사를 기다려 힘을 합쳐서 친다면 만전을 기할 수 있습니다.” 했다.

손량부가 말하기를, “원래 나는 옛날 제나라 군주가 비웃은 원한을 갚으려 했소. 이제 원수가 앞에 있거늘 어찌 피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석직의 말을 듣지 않고 그날 밤 중군을 거느리고 제나라 진영을 습격하였다. 제나라 군사는 위나라 군사의 야습을 우려하여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손량부가 제나라 진영에 쇄도해 들어가니 진영이 모두 비어 있었다. 회군하려고 하니, 좌측에는 국좌(國佐), 우측에는 고고(高固), 두 사람의 대장이 포위망을 치고 공격해 왔다. 제나라 군주도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엄습하며 크게 소리치기를, “절름발이 사내야, 너의 목을 내놓아라!” 했다. 손량부는 사력을 다하여 버텼으나 한 곳도 당해 내지 못하고 아주 위급하게 되었다. 그때 영상(寧相)과 상금(向禽)이 이끄는 두 부대의 전차가 앞에서 지원하여 손량부를 구해 북쪽으로 달아났다. 위나라 군사들이 대패했다. 제나라 군주는 두 대장을 이끌고 손량부의 뒤를 추격했다. 위나라 장수 석직의 군사들이 다시 이르러, 손량부를 맞아 외치기를, “원수께서는 앞만 보고 가십시오. 제가 뒤를 맡겠습니다.” 했다. 손량부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달아나다가 1리도 미처 가기 전에 전면을 보니 먼지가 일어나는 곳에 전차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손량부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제나라가 다시 복병을 두었으니 내 목숨도 끝났구나!” 했다. 전차와 말이 점점 가까이 오는데, 한 장수가 전차 위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말하기를, “소장은 원수께서 교전하는지 알지 못하여 구원이 늦어 잘못되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손량부가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하니, 그 장수가 대답하기를, “소장은 신축성을 지키는 대부 중숙우해(仲叔于奚)입니다. 경내의 군사를 모두 모은 병력이 이처럼 전차 백여 대라 한번 싸워볼 만하니 원수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했다. 손량부가 비로소 겨우 안심했다. 중숙우해에게 말하기를, “석직 장군이 뒤에 있으니 그대가 가서 도와주시오!” 했다. 중숙우해가 그 말에 응해 전차부대를 몰아 달려갔다. 한편 제나라 군사가 뒤를 맡은 석직의 군사를 만나서, 곧 교전하려 하는데, 보니 북쪽에 전차가 일으키는 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탐지해 보니 중숙우해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 것이었다. 제경공은 위나라 영토 안에서 병력이 이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징을 쳐서 군사들을 거두어들였다. 다만 위나라 군사가 버리고 간 치중을 거두어 돌아갔다. 석직과 중숙우해도 역시 제나라 군사를 추격하지 않았다.

뒤에 위나라가 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쳐서 이기고 돌아오니, 위나라 군주는 중숙우해가 손량부를 구한 공이 있다고, 상으로 한 고을을 주려고 했다. 중숙우해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고을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곡현(曲懸 ; 악기)과 번영(繁纓 ; 말 장식)을 내려 주셔서 대부의 광영을 누리게 해주시면 원이 없겠습니다.” 했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천자의 음악은 사면에 악기를 걸었는데 이를 궁현(宮懸)이라 했다. 제후의 음악은 삼면에만 걸고 남쪽에는 걸지 못했는데 이것을 곡현(曲懸) 또는 헌현(軒懸)이라 했다. 그리고 대부는 좌우 두 면에만 걸었을 뿐이다. 번영(繁纓)이라는 것은 제후들이 타는 말의 장식품을 일컫는다. 이 두 가지 의례는 모두 제후들만이 행할 수 있는 제도인데, 우해가 자기의 공을 믿고 이것을 행할 수 있도록 청했다. 위나라 군주가 웃으면서 허락했다. 공자(孔子)가 춘추를 편찬하면서 이 일을 논했다. 오직 작위(爵位)와 수레 및 의복은 그 신분의 귀천을 분별하기 위해서 마련한 것으로, 함부로 아무에게나 허락해서는 안 되는데, 위나라 군주는 그 상주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렇다 치고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이다.

각설, 손량부가 패군을 수습하여 신축성으로 들어가서 며칠을 쉬었다. 여러 장수가 돌아갈 기한을 묻자, 손량부가 말하기를, “내가 본디 제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했으나 도리어 싸움에서 패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주군을 뵐 수 있겠는가? 마땅히 진()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제경공을 사로잡아 내 가슴속의 분한 기운을 풀어야겠다.” 했다. 이에 석직 등을 신축성에 머물게 하고 자기는 몸소 진나라에 가서 군사를 빌리려고 했다. 마침 노나라의 사구 장손선숙(臧孫宣叔 ; 장손허)도 진나라에 들어가서 군사를 청하려는 참이었다. 두 사람은 먼저 극극을 통한 다음에 진경공을 뵙고, 안과 밖이 한마음이 되어, 한쪽에서 주장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화답하여 진경공이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극극이 제나라의 강함을 염려하여 8백 대의 전차를 청하니 진경공이 허락했다. 극극은 중군을 거느리고, 해장(解張)을 어자(御者)로 삼았으며, 정구완(鄭丘緩)을 차우장군으로 삼았다. 사섭(士燮)이 상군을 거느리고, 난서(欒書)가 하군을 거느렸으며, 한궐(韓厥)은 사마가 되었다. 주정왕(周定王) 18(기원전 589) 여름 6월에, 진나라 군사가 강주성(絳州城)을 출발하여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장손허가 먼저 노나라에 돌아와서 진()나라 군사의 출진을 알렸다. 계손행보는 숙손교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 군사와 합류하려고 신축성에 이르렀다. 위나라 손량보도 다시 조나라의 공자수에게 연락하여 군사를 이끌고 만나기로 했다. 각 나라의 군사가 신축성으로 모두 모여서 대오를 짜고 순서를 정해 전진하는데 그 길이가 3십 리에 달하고 전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제경공이 미리 사람을 시켜 노나라의 경계에서 염탐하게 하여, 노나라의 사구 장손허가 진()나라 군사를 청해 오는 것을 이미 알았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만약 진()나라 군사가 국경에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면 백성들이 놀랄 것이니, 마땅히 국경에서 적군을 맞이해야겠다.” 하고, 전차와 군사를 크게 사열하여 전차 500대를 뽑아서 3일 밤낮으로 500여 리를 행군하여 안() 땅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전초병이 보고하기를, “()나라 군사가 이미 미계산(靡笄山) 밑에 주둔하였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사자를 보내 전쟁을 청하자, 극극이 다음 날 결전하기로 약속하였다. 제나라 대장 고고(高固)가 제경공에게 청하기를, “제나라와 진()나라는 아직 교전한 일이 없어서 진()나라 군사들이 용감한지 겁이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시험해 보고자 합니다.” 하고, 홀로 전차를 몰아 진()나라 보루로 달려가 싸움을 걸었다.

진나라의 말직 장수 한 사람이 역시 전차를 타고 진영 문에서 나왔다. 고고가 큰 돌을 던져 그 장수의 뇌를 맞춰서 전차 위에 쓰러지자 마부가 놀라 달아났다. 고고가 훌쩍 뛰어 진나라 군의 전차 위로 뛰어올라가 그 장수를 발로 차서 떨어뜨리고, 말고삐를 잡아 전차를 몰아 제나라 보루로 돌아오다가 주위를 돌면서 크게 외치기를, “남아도는 용기를 부려보았다!” 했다. 제나라 군사들이 모두 웃었다. 진나라 진영에서 뒤늦게 이를 알고 고고를 쫓았으나 이미 미칠 수가 없었다. 고고가 제경공에게 말하기를, “진나라 군사가 비록 많으나 싸움에 능한 자가 적은 듯하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했다. 다음날 제경공이 친히 갑옷을 임고 출진하여 병하(邴夏)가 전차를 몰고 방추보(逄醜父)가 차우(車右)가 되었다. 양쪽 군사는 각각 안() 땅에 진을 쳤다. 국좌(國佐)가 우군을 거느리고 노나라 군사를 막고, 고고는 좌군을 거느리고 위나라와 조나라 군사를 막아, 두 진영이 대치하면서 각각 교전을 미루고 중군의 동정을 살폈다. 제나라 군주는 자기의 용맹함을 믿고 진나라 군사를 얕보았다. 비단 전포를 입고 수놓은 갑옷에 금빛 전차를 타고 군사들에게 활을 당겨 기다리라고 명령하며 이르기를, “내 말이 가는 쪽으로 화살을 쏘아라!” 했다.

북소리가 한번 울리자 제경공은 전차를 몰아 진나라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화살이 마치 황충이 나는 것 같아 진나라 군사가 아주 많이 죽었다. 진나라 어자(御者 ; 전차의 마부) 해장(解張)이 팔꿈치에 연이어 화살 두 대를 맞아 흘린 피가 전차 바퀴에 이르렀지만 아픔을 참으며 말고삐를 놓지 않았다. 극극이 군사들을 진격시키기 위해 북을 치다가 왼쪽 옆구리에 화살을 맞아 피가 신발까지 적시게 되어 북소리가 갑자기 느려졌다. 해장이 말하기를, “군사들의 이목이 중군의 기와 북에 쏠려 있어서 삼군은 이로 인해 진격과 퇴각을 합니다. 상처가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니 있는 힘을 다하여 군사들을 독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우(원수 오른쪽에 타는) 장군 정구완이 말하기를, “해장의 말이 옳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하니, 극극은 이에 북채를 잡아 연이어 치고, 해장이 말을 채찍질하여, 화살을 무릅쓰고 앞으로 진격했다. 정구완도 왼손으로 방패를 들어 극극을 호위하며 오른손으로 과를 휘둘러 적을 찔러 죽였다. 진나라 군사가 좌우에서 일제히 북을 치니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진나라 군사들은 본진이 이미 이겼다고 생각하고 상하 양군이 선두를 다투어 쫓으니 그 형세가 마치 산을 밀고 바다를 뒤집을 만했다. 제나라 군사들이 당할 수가 없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한궐이 극극의 상처가 중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원수께서는 잠시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힘을 다하여 이 적을 쫓겠습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본부군을 이끌고 전차를 몰아 제나라 군사를 추격하니, 제나라 군사들은 어지러이 흩어졌다. 제경공은 화부주산(華不注山)을 돌아 달아났다. 한궐이 멀리 금빛 수레를 발견하고 있는 힘을 다해 그 뒤를 쫓았다. 방추보가 병하를 돌아보면 말하기를, “장군은 빨리 포위망을 돌파하여 구원병을 데리고 오시오. 내가 대신 장군의 말고삐를 잡겠소.” 하니, 병하가 전차에서 내려 달려갔다. 진나라 대군이 더욱 많이 밀려들어 화주부산을 삼면에서 포위했다. 방추보가 제경공에게 말하기를, “사태가 급합니다! 주공께서 빨리 비단 전포와 갑옷을 벗으시면, 제가 대신 입고 주공 행세를 하겠습니다. 주공은 제 옷을 입고 곁에서 말고삐를 잡고 있다가 진나라 군사의 눈을 속이도록 하십시오. 만약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가 주공을 대신해서 죽을 것이니, 주군은 탈출하십시오.” 했다. 제경공이 그 말을 쫓아 그 옷을 바꿔 입었다. 제경공의 전차가 화천(華泉)에 이르자 한궐의 전차가 이미 가까이 이르렀다.

한궐은 비단 전포에 수를 놓은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자 그가 제경공이라고 생각했다. 제경공의 전차에서 말고삐를 뺏어 머리를 숙여 재배하면서 말하기를, “저희 군주께서 노나라와 위나라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서 신 등으로 하여금 상국의 죄를 묻게 하였습니다. 외신 궐()은 군문에 있는 사람이라 저희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까지 가셔야겠습니다.” 했다. 방추보가 목이 말라 대답을 못하겠다면서 표주박을 제경공에게 주며 말하기를, “내가 목이 마르니 방추보는 물을 떠 오너라!” 했다. 제경공이 수레에서 내려서 화천의 샘물에서 물을 떠서 가져왔다. 그러나 방추보가 물이 더럽다며 다시 깨끗한 물을 떠오라고 했다. 제경공이 마침내 산 왼쪽으로 돌아 달아나다가, 마침 제나라 장수 정주보(鄭周父)가 여벌 수레를 끌고 오는 것을 만났다. 정주보가 말하기를, “병하는 이미 진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진나라 군세가 아주 크지만, 오직 이 길은 진나라 군사가 드뭅니다. 주공께서는 빨리 수레에 오르십시오.” 했다. 이에 말고삐를 제경공에게 넘겨주니 제경공이 수레를 몰아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한궐은 먼저 사람을 보내 진나라 중군에 보고하기를, “이미 제경공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니, 극극이 매우 기뻐했다. 한궐이 방추보를 바치자, 극극이 보고 말하기를, “이 자는 제경공이 아니다.” 했다. 극극은 일찍이 제나라 사신으로 갔기 때문에 제경공을 알고 있었다.

한궐은 제후를 알아보지 못해서 방추보의 계략에 속았음을 알고, 성을 내어 방추보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니, 방추보가 대답하기를, “나는 제나라의 차우 장군 방추보다. 우리 주군은 바로 화천에서 물을 뜨러 간 사람이 다.” 했다. 극극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군법에 삼군을 속인 자는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다. 너는 제나라 군주로 가장하여 아군을 속였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하고, 좌우에 소리치기를, “방추보를 묶어다가 목을 쳐라.” 했다. 방추보가 크게 외치기를, “진나라 군사들은 내 말을 한번 들어보시오. 오늘 이후로는 환난에 주군을 대신할 자가 없을 것이다. 방추보는 주군을 환난에서 구하고 지금 죽음을 당한다.” 했다. 극극이 방추보의 결박을 풀어 주라고 명령하며 말하기를,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않다.” 하고, 뒷 수레에 태우게 했다. 잠연거사(潛淵居士)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산을 에워싼 창칼이 숲을 이루었는데, 비단 옷에 갑옷을 입은 군주가 포로가 될 처지였다. 천 척 화천(華泉)이야 마르지 않겠지만, 방추보의 계책만큼 깊기야 하겠는가?” 했다. 뒷사람이 화불주산을 금여산(金輿山)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제경공의 금빛 수레가 머물러서 얻은 이름이다.

제경공이 진()나라 군사의 포위망을 벗어나서 본영으로 돌아가, 방추보가 목숨을 살린 은덕을 생각하고 다시 가벼운 전차를 타고 진나라 진영을 세 번이나 드나들면서 방추보를 찾았다. 국좌와 고고 두 장수가 중군이 이미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경공이 잘못될까 걱정하여 각기 군사들을 이끌고 제경공의 전차를 구하러 가서, 제경공이 진나라 진영 쪽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주공은 어찌하여 천승(千乘)의 귀한 몸을 가볍게 여겨 친히 호랑이 굴을 드나드십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방추보가 나를 대신하여 적진에 빠졌는데, 생사를 알 수 없소. 내가 편안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그래서 그를 구하려고 이러는 거요!”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찰 기병이 보고하기를, “진나라 군사가 다섯 갈래로 나누어 쳐들어옵니다.” 하니, 국좌가 아뢰기를, “군사의 사기가 이미 꺽여서 주공께서는 오래 여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 곧 본국으로 돌아가 굳게 지키면서 초나라의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옳습니다.” 했다. 제후가 그 말을 쫓아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임치(臨淄)로 되돌아갔다. 극극은 대군을 이끌고 노()나라, ()나라, ()나라 3국의 연합군과 함께 거침없이 쳐들어가서 지나는 관문을 모두 불 사르고 제나라의 도성 임치(臨淄) 성에 이르러, 제나라를 멸망시킬 생각이었다.

 

제나라가 어떻게 대적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57: 하희를 취한 무신이 진나라로 달아나고, 하궁을 둘러싸 정영(程嬰)이 조씨 고아를 숨기다.

 

한편, ()나라 군사들이 제경공을 쫓아 450리를 행군하여 한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 이름이 원루(袁婁)였다. 진나라 군사가 영채를 세우고 성을 공격하려고 했다. 제경공은 마음이 황망하여 여러 신하를 모아 계책을 물었다. 국좌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신이 기()나라 군주의 보물인 시루와 옥으로 만든 경쇠를 진나라에 뇌물로 주고 강화를 체결한 후에,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우리가 빼앗은 땅을 돌려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경이 말한 바와 같이하면 나로서는 성의를 다한 것이오. 만약 진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직 전쟁이 있을 뿐이오!” 했다. 국좌가 제경공의 명을 받들고 기나라 시루와 옥으로 만든 경쇠를 가지고 진나라 진영에 도착하여, 먼저 한궐을 만나 제경공의 뜻을 전달했다. 한궐이 말하기를, “노나라와 위나라가 제나라의 침략으로 땅이 자꾸 깎이자 우리 군주께서 이를 불쌍히 여겨 그들을 구해주려고 했지, 우리 군주가 제나라에 무슨 원한이 있겠소?” 했다. 국좌가 대답하기를, “제가 우리 주군께 말씀을 드려서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한궐이 말하기를. “중군 원수께서 계시니 제가 감히 맘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했다.

한궐이 국좌를 안내하여 극극을 만나니, 극극이 성을 내어 대했으나 국좌의 말씨와 얼굴빛은 모두 공손했다. 극극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아침저녁이면 곧 망할 것인데, 교묘한 말로 나를 누그러뜨리려 하느냐? 만일에 진심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가 제시하는 두 가지 조건을 따라야만 할 것이다.” 하니, 국좌가 말하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무슨 조건이지요?” 했다. 극극이 말하기를, “첫째 소()나라 군주 동숙(同叔)의 딸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둘째 제나라 땅의 모든 밭고랑을 동서로 고쳐야 한다. 만일 앞으로 제나라가 맹약을 배반하면 인질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토벌할 때 수레와 말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격하게 되어 제나라 도성에 곧바로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니, 국좌가 벌컥 성을 내어 말하기를, “원수의 말은 틀렸습니다. ()나라 군주의 딸은 바로 우리 주군의 모후입니다. 제나라는 진나라에 필적하는 나라이니 말하자면 우리 주군의 모후는 진나라 군주의 모후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국모를 다른 나라의 인질로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밭고랑은 가로세로로 모두 자연의 지세에 따르게 되어 있는데 오직 진나라를 위해서 밭고랑을 고친다면 나라가 망한 것하고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원수께서 이렇게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니, 화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했다.

극극이 말하기를, “내가 화의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면 너희 제나라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니, 국좌가 말하기를, “원수께서는 제나라를 너무 얕보지 마시오. 제나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나 군비가 전차 천 대를 지탱하고, 여러 신하의 사병도 전차 몇 백 대는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한번 꺾였지만 크게 패하지는 않았소. 원수께서 제나라와 화의를 맺을 뜻이 없다면 우리는 남은 병사를 모아 원수와 성 아래에서 결전을 하겠소. 한번 싸워서 못 이기면 두 번 싸우고 두 번 싸워 못 이기면 세 번 싸울 것이며 만약 세 번 패한다면 제나라 영토는 모두 진나라의 소유가 되는데, 하필이면 국모를 인질로 보내고 밭고랑을 동쪽으로 낼 필요가 있겠소? 국좌는 이만 물러갈까 하오!” 했다. 국좌는 시루와 옥경을 땅에 버리고 읍을 한번 하더니 당당하게 진나라 진영 밖으로 나가 돌아갔다. 계손행보와 손량부가 장막 뒤에서 그 말을 듣고 나와 극극에게 말하기를, “제나라가 우리를 깊이 원망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죽을 각오로 덤벼들 것입니다. 군사의 일이란 항상 이길 수 없습니다. 제나라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좋습니다.” 하니, 극극이 말하기를, “제나라의 사신이 이미 가 버렸으니 어찌하지요?” 했다. 계손행보가 말하기를, “쫓아가면 돌아올 것입니다,” 했다.

즉시 좋은 말이 끄는 전차를 달려 10리 밖을 쫓아가 강제로 국좌를 붙들어 진나라 진영으로 돌아왔다. 극극이 계손행보, 손량부와 같이 국좌를 만나서 말하기를, “제가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우리 군주에게 죄를 짓게 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가볍게 화의를 허락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노나라와 위나라 대부께서 한뜻으로 화의를 주장하여 제가 그 뜻을 어길 수 없어서 제나라의 화의 신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니, 국좌가 말하기를, “원수께서 이미 우리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니, 원컨대 동맹을 맺어 신의를 보여야 합니다. 제나라가 진나라에 조공을 들이고, 또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면 진나라는 군사를 물려서 추호도 제나라 영토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노나라와 위나라 대부들도 글로 써서 맹세해야 합니다.” 했다. 극극이 희생의 피를 가져오게 하여 함께 입술에 바르고 맹약한 후에 헤어졌다. 방추보도 석방하여 제나라로 돌려보냈다. 제경공은 방추보를 상경으로 삼았다. 진나라, 노나라, 위나라, 조나라의 군대는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송나라 때 선비들이 이 맹약을 논하여 이르기를, 극극이 승리를 믿고 교만하여 불공스러운 태도로 명령을 내려 국좌의 분노를 샀다. 비록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돌아갔지만 제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승복시키지 못했다고 했다.

()나라 군사가 돌아와 제나라에 승리했음을 아뢰자 진경공(晉景公)이 안()에서의 승전을 가상히 여겨 극극 등에게 땅을 넓혀 주었다. 다시 상중하 삼군을 새로 만들어, 한궐을 신군(新軍)의 중군 원수로 삼고, 조괄(趙括)이 보좌하게 했다. 공삭(鞏朔)을 신 상군 원수로 삼고 한천(韓穿)이 보좌하게 했으며, 순추(荀騅)를 신 하군 원수로 삼고, 조전(趙旃)이 보좌하게 하여, 작위는 모두 경()으로 했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육군(六軍)을 두게 되어 다시 패업을 일으켰다. 사구(司寇) 도안고(屠岸賈)가 조씨 집안이 다시 번성하는 것을 보고, 시기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는 밤낮으로 조씨의 잘못한 점을 찾아내어 경공에게 참소하였다. 또한 그는 난씨(欒氏)와 극씨(郤氏) 두 집안과 친밀히 지내어 원군으로 삼았다. 이 일은 한편으로 밀어버리고 뒤에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제경공(齊頃公)은 안() 땅의 싸움에서 패패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죽은 자를 조문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며 정치를 개혁하여 진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나라 군주와 신하들은 제나라가 쳐들어와 패업을 다시 무너뜨릴까 두려워하여, 제나라가 공손하게 자기들을 섬기고 있다고 하면서, 각국으로 하여금 제나라로부터 찾은 땅을 다시 돌려주라고 했다. 이 일로 해서 제후들은 진()나라가 신의가 없다고 생각하여 점점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다.

한편, ()나라 하희(夏姬)가 연윤(連尹) 양로(襄老)에게 시집을 간 지 1년이 되지 않아 양로가 필()의 싸움에 출전하자, 하희는 마침내 양로의 아들 흑요(黑要)와 정을 통했다. 양로가 전사하자 흑요는 하희의 미색에 빠져 그 부친의 시신을 찾으러 가지도 않았다. 백성들이 자못 그 일을 두고 의논이 분분하자, 하희가 부끄럽게 여겨 양로의 시신을 찾는다는 핑계를 대고 정나라로 돌아가려고 했다. 신공(申公) 굴무(屈巫)가 그녀의 시녀를 매수하여 하희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신공의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절실하여 만약 부인이 정나라로 돌아가게 되면 신공도 곧 뒤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또 사람을 시켜 정양공(鄭襄公)에게 말하기를, “군주의 동생 하희가 친정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데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정양공이 과연 사신을 초나라에 보내 하희를 데려가려고 했다. 초장왕이 여러 대부에게 묻기를, “정나라 사람이 하희를 데려가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오?” 하니, 굴무가 홀로 대답하기를, “하희가 양로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려고 정나라 사람이 그 일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희를 데려가라고 해야겠지요.” 초장왕이 말하기를, “양로의 시신은 진()나라에 있는데 정나라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했다.

굴무가 대답하기를, “진나라 장수 순앵(荀罃)은 순수(荀首)가 애지중지하는 아들입니다. 순앵이 초나라의 포로가 되자 순수의 아들 생각은 매우 절실합니다. 지금 순수가 진나라 중군 보좌가 되었는데 정나라 대부 황술(皇戌)과는 원래 매우 친한 사이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정나라의 황술에게 중간에서 초나라와 교섭하여 왕자(공자 곡신)와 양로의 시신을 순앵과 교환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정나라 군주는 필()의 싸움 이후 진나라가 토벌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진나라에 아첨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했다. 말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하희가 조정에 들어와 초장왕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며 정나라로 돌아가려는 까닭을 말하고, 주옥같은 눈물을 비처럼 흘리며 말하기를, “만약 제가 지아비의 시신을 찾지 못하면 결코 초나라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했다. 초장왕이 가엽게 여겨 정나라로 돌아가겠다는 청을 허락했다. 하희가 바야흐로 정나라로 떠나려고 하는데, 굴무가 정양공에게 편지를 써서, 하희를 자기의 부인으로 삼겠다고 했다. 정양공은 옛날에 초장왕과 공자 영제도 하희를 취하려 했던 사실을 알지 못하고, 굴무가 초나라에서 중용되고 있으므로 인척을 맺어 두려고 하여 굴무가 보낸 예물을 받아들였다. 초나라 사람 중에는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굴무가 다시 사람을 시켜 진나라에 가서 순수에게 편지를 전하여, 공자 곡신과 양로 두 사람의 시신을 초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는 순앵과 교환하라고 했다. 순수가 황술에게 편지를 보내, 중간에서 성사되도록 도움을 청했다. 초장왕은 아들 공자 곡신의 시신을 찾아오고 싶어서 곧 순앵을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진나라도 역시 두 사람의 시신을 초나라에 보냈다. 초나라 사람들은 굴무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아무도 그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 후 진나라 군사가 제나라를 치자 제경공이 초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초나라는 초장왕의 상을 당하여 구원병을 보낼 수가 없었다. 뒤에 제나라 군사가 안()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국좌(國佐)가 이미 진나라와 이미 맹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공왕(楚共王)이 말하기를, “제나라가 진나라를 따르는 것은 우리가 제나라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제나라의 본뜻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과인이 마땅히 제나라를 위해 위나라와 노나라를 쳐서 안()에서 진 치욕을 갚도록 해야겠소. 누가 능히 과인의 이 뜻을 제나라 군주에게 전달하겠소?” 하니, 신공 굴무가 초공왕의 말을 받아서 말하기를, “소신이 가기를 원합니다.” 했다. 초공왕이 말하기를, “경은 이번 길에 정나라에 들러 정나라 군사들을 겨울 시월 보름에 위나라 경계에서 합류하도록 약속하고, 곧 이 기한을 제나라 군주에게 알려 주시오.” 했다.

굴무가 초공왕의 명령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 신읍(申邑)에 세금을 거두려고 간다고 말하고, 먼저 가속들과 재물을 십여 대의 수레에 실어서 계속하여 성 밖으로 내어 보냈다. 자기는 작은 수레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밤낮으로 달려서 정나라에 도착하여 정나라 군주에게 군사를 출동시켜 시월 보름에 위나라 경계에서 초군과 합류하라는 초왕의 명령을 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굴무와 하희는 관사에서 성례를 치렀다. 두 사람의 즐거움을 알 만하였다. 시가 있어 증명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은 원래 늙은 요정이었다. 이르는 곳마다 사통하여 그 이름이 이미 높았고, 방중술에 달통한 한 쌍이 드디어 짝을 이루었으니, 마침내 온 힘을 다해 기필코 승부가 나겠구나!” 했다. 하희가 베갯머리에서 굴무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초왕에게 아뢰었습니까?” 하니, 굴무는 옛날 초장왕과 공자 영제가 하희를 취하려고 한 일을 상세히 이야기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부인을 얻기 위해서 많은 정신을 써오다가 오늘 다행히 고기가 물을 얻어 평생 원하는 바를 얻었소! 내가 감히 초나라로 돌아갈 수는 없소. 내일 부인과 같이 편안히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백년해로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했다. 하희가 말하기를, “원래 계획이 그러하여 당신이 초나라로 돌아가지 않으시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초왕의 명을 수행하는 일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했다.

굴무가 말하기를, “나는 제나라에 가지 않겠소! 지금 초나라와 서로 버틸 수 있는 나라는 진()나라 만한 나라가 없소. 나는 부인과 진나라로 가겠소.” 했다. 다음 날 아침, 굴무는 표문 한 통을 써서 시종에게 주어 초공왕에게 가서 바치게 하고, 마침내 하희를 데리고 당진으로 달아났다. 진경공(晉景公)은 필()에서 패한 일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굴무가 망명해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이 사람을 나에게 보내준 것이다.” 하고, 그날로 굴무를 대부에 임명하고 형() 땅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했다. 굴무는 굴()성을 버리고 무씨(巫氏)로 바꾸고 이름은 신()이라고 했다. 지금껏 사람들은 신공(申公)을 무신(巫臣)이라고 했다. 무신은 이때부터 진()나라에서 편안히 살았다. 초공왕이 무신이 보낸 표문을 받아 열어 읽어보니 대략 이르기를, “정나라 군주가 하희를 저의 내실로 삼게 해준 은혜를 베풀어 불초 신은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주군께서 저의 죄를 물을까 두려워서 잠시 진()나라에 가 살겠습니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일은 주군께서 따로 훌륭한 신하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했다.

초공왕은 표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공자 영제와 공자 측을 불러 굴무의 표문을 보여주었다. 공자 측이 말하기를, “초나라와 진()나라는 대대로 원수지간입니다. 지금 무신이 진나라로 간 것은 반역입니다. 토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공자 영제가 다시 말하기를, “흑요(黑要)가 계모와 사통한 것 역시 죄가 되니, 마땅히 함께 죄를 물어야 합니다.” 했다. 초공왕이 그 말을 따라서 공자 영제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무신의 족속들을 몰살시키고, 공자 측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흑요를 잡아서 참하도록 했다. 무신과 흑요 두 족속들의 재산과 노비들은 공자 영제와 공자 측이 나눠 가졌다. 무신은 그 가족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써서 두 장군에게 보냈다. 그 편지에 이르기를, “그대들은 탐욕과 아첨으로 군주를 섬겨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내가 반드시 그대들을 도로에서 지쳐 죽게 만들 것이다!” 했다. 공자 영제 등은 그 편지를 비밀에 부치고 초공왕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무신은 진()나라를 획책하여 오나라와 통호하라고 청하여 전차전의 방법을 오나라 사람에게 가르쳐 주게 했다. 그 아들 호용(狐庸)을 보내 행인(行人;외교 담당)으로 벼슬하게 하고 진나라와 오나라의 통신을 맡아서 사신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오나라의 국세와 병력은 날로 강성해지고 초나라의 동방 속국을 모두 빼앗았다.

수몽(壽夢)이 마침내 왕이라고 참칭했다. 초나라는 변경을 침범당하여 편안한 해가 없었다. 뒤에 무신이 죽고 호용이 원래의 굴씨 성을 회복했다. 그는 마침내 오나라에 머물러 벼슬하였다. 오나라는 그를 상국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다. 겨울 시월에 초공왕이 공자 영제를 대장으로 삼아 정나라 군사와 함께 위나라를 침공하여 성 밖까지 무찌르고, 그 연합군이 계속해서 노나라를 침범하여 양교(楊橋)에 진을 쳤다. 노나라의 대부 중손멸(仲孫蔑)은 뇌물을 바치자고 주장하여 나라 안에서 양장(良匠), 직녀(織女), 침녀(針女) 100명을 선발하여 초군에게 바치고 화의를 청하자 초군이 물러갔다. ()나라 또한 사신을 노나라에 보내 함께 정나라를 치자고 하니 노성공이 그에 따랐다. 주정왕(周定王) 20(기원전 585)에 정양공(鄭襄公) ()이 죽고 세자 비()가 자리를 이었다. 이가 정도공(鄭悼公)이다. 정나라가 허나라와 국경 문제로 다투어 허나라 군주가 초나라에 호소하니, 초공왕이 허나라 군주의 호소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을 보내 정나라를 책망했다. 정도공이 노하여 초나라를 버리고 진()나라를 따랐다. 그해에 진()나라 극극(郤克)이 안()의 싸움에서 화살에 맞아 난 상처가 치료에 실패하여 왼쪽 팔을 결국 잘라냈다. 이에 늙었다고 물러났다가 얼마 후 죽었다. 난서(欒書)가 대신하여 중군 원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 초나라의 공자 영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치자 진나라는 난서를 보내 정나라를 구원했다.

그때 진경공(晉景公)은 제나라와 정나라가 모두 자기에게 복종하자 자못 자만심이 생겼다. 그는 도안고를 총애하여 중용하고 사냥하며 술을 마셨다. 다시 진영공(晉靈公)의 때와 같아졌다. 조동(趙同)과 조괄(趙括)은 그 형 조영제(趙嬰齊)와 화목하지 않았다. 조영제를 음란한 일로 모함하여 제나라로 쫓아냈는데, 진경공은 이를 금지할 수 없었다. 그때 양산(梁山)이 까닭 없이 저절로 무너져서 하수의 물길을 막아 3일 동안이나 물이 흐르지 못했다. 진경공이 태사를 시켜 점을 치게 하였다. 도안고가 태사에게 뇌물을 주어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다라는 말을 하게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내가 아직 형벌을 과용한 적이 없는데 어찌 공정하지 못하다고 하는가?” 하니, 도안고가 아뢰기를,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형벌을 내리지 않은 것도 모두 공정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옛날 조돈이 선군 진영공을 도원에서 시해한 일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이지만, 진성공이 주살하지 않고 오히려 국정을 맡겼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서 역신의 자손들은 조정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어찌 그들의 죄를 물어 뒷사람을 징계하지 않으십니까? 또한 신이 들으니, 조삭(趙朔), 조원(趙原), 조병(趙屛) 등이 종족이 많고 번성함을 믿고 장차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누영(조영제)이 간하여 막으려고 했다가 쫓겨나 제나라로 달아났습니다. 또한 난()씨와 극()씨 두 집안도 조씨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참고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산이 무너진 것은 주공으로 하여금 조씨들에게 죄를 물어 영공의 원한을 풀어 주라는 하늘의 뜻입니다.”라고 했다.

진경공은 진나라와 초나라가 필에서 싸울 때 조동과 조괄이 제멋대로 행동한 사실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도안고의 말을 따르려고 했다. 진경공이 한궐에게 물으니 한궐이 대답하기를, “도원의 일은 조돈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물며 조씨는 성계(成季 ; 조쇠)이래 대대로 진나라에 큰 공훈이 있습니다. 주공은 어찌하여 소인의 말을 듣고 공신의 후손을 의심하십니까?” 했다. 진경공은 심중이 석연치 않아서 다시 난서와 극기(郤錡)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먼저 도안고의 부탁을 받고 말을 얼버무리며 조씨들을 위해 기꺼이 변명하지 않았다. 진경공은 마침내 도안고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곧 조돈의 죄를 목판에 적어 도안고에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처분을 잘 내려서 백성이 놀라지 않게 하라!” 했다. 한궐이 도안고의 음모를 알고 밤에 하궁(下宮)으로 가서 조삭(趙朔)에게 알리고 미리 달아나서 숨으라고 했다. 조삭이 말하기를, “저의 부친은 선군 진영공의 주살을 막으려다가 흉악한 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도안고가 군주의 명을 받들어 나를 반드시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내 처가 임신 중이라 산달이 가깝습니다. 만약 딸을 낳으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천행으로 아들을 낳으면 조씨의 제사를 잇게 될 것입니다. 이 일점혈육을 장군께서 맡아서 보전해 주시면 제가 비록 죽어도 오히려 산 것과 같겠습니다.” 했다.

한궐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선맹(宣孟 ; 趙盾)에게 인정을 받아 오늘 장군의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은혜가 부자간과 같습니다. 오늘 힘이 부족하여 간사한 도적의 목을 처단할 수 없음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부탁하신 일은 어찌 감히 힘써 맡지 않겠습니까? 다만 간사한 도적이 원한을 쌓은 지 이미 오래되어 일단 난을 일으키면 옥석을 함께 탈 것이니 내가 힘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난이 일어나기 전에, 어찌하여 공주를 궁궐로 몰래 보내어 이번의 대란을 벗어나게 하지 않으십니까? 후일 그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언젠가는 그 원수를 갚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했다. 조삭이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하고, 두 사람이 눈물을 뿌리며 헤어졌다. 조삭이 몰래 장희(莊姬)에게 약속하기를, “딸을 낳으면 이름을 문()이라 하고, 만약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무()라고 지으시오. 문은 쓸모가 없고 무라면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오.” 했다. 홀로 문객 정영(程嬰)에게 이 일을 말했다. 장희는 후문에서 온거(溫車 ; 누워서 타는 수례)를 타고 정영의 호송을 받아 궁중에 들어가서 그 모친 성부인에게 몸을 의탁했다. 부부가 이별할 때의 괴로움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 도안고가 무장 군사를 친히 인솔하고 하궁(下宮)을 포위했다.

도안고는 진경공이 조돈의 죄를 쓴 목판을 대문에다 걸고 소리치기를, “주군의 명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하러 왔다.” 하고, 마침내 조삭(趙朔),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전(趙旃) 등과 그 가속들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남김없이 죽였다. 조전의 아들 조승(趙勝)은 그때 한단에 있다가 홀로 참변을 면했다. 뒤에 참변을 듣고 송나라로 달아났다. 당시 살해된 시체가 집 안을 가득 메워 피가 뜰과 계단을 적셨다. 도안고가 살해한 사람 수를 헤아리고, 오직 장희가 보이지 않자, 말하기를, “공주의 시체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임신 중이라 들었는데, 장차 해산하여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역신의 종자를 남겨 놓게 되어 반드시 훗날의 화근이 될 것이다.” 했다. 어떤 사람이 보고하기를, “지난밤에 온거가 입궁했다고 합니다.” 하니, 도안고가 말하기를, “그것은 반드시 장희일 것이다.” 하고, 즉시 진경공에게 아뢰기를, “역신의 가문은 모두 주살되었습니다. 단지 장희공주가 궁중으로 몸을 피했을 뿐입니다. 주공께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내 고모는 모친께서 총애하시기 때문에 그 죄를 물을 수 없소!” 하니, 도안고가 말하기를, “공주가 임신 중이라 장차 해산하여 만일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역신의 종자가 살아남아 앞으로 장성하면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또다시 도원의 변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주공께서는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사내아이를 낳으면 제거하시오.” 하니, 도안고가 밤낮으로 사람을 시켜 장희의 해산 소식을 탐문하게 했다. 며칠 후 장희가 과연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성부인(成夫人)이 궁중에 분부하여 여아를 낳았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도안고가 믿지 않고 자기 집안의 유모를 궁궐로 들여보내 알아보게 했다. 장희가 당황하여 그 모친 성부인과 상의하여 낳은 여아가 이미 죽었다고 말하게 했다. 그때 진경공은 음탕한 풍악에 빠져 나라 일은 모두 도안고에게 맡겨 제 맘대로 처리했다. 도안고는 또한 태어난 아이가 여아가 아니고 또한 죽지도 않았다고 의심하여, 직접 여종을 데리고 궁중을 두루 수색했다. 장희는 갓난아이를 속바지 속에 감추고 하늘에 빌기를, “하늘이 만약 조씨 종족을 끓으려고 한다면 아이를 울게 하시고, 만약 조씨에게 다시 맥을 잇게 하려거든 울지 않게 해 주십시오!” 했다. 도안고의 여종들이 들어와서 장희를 끌어내고 궁 안을 뒤졌으나 갓난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장희의 속바지 속에서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안고는 그때 비록 궁궐 밖으로 물러갔지만, 마음속으로는 깊이 의심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갓난애는 이미 궁 밖으로 내보냈을 것이다.” 했다. 도안고는 마침내 궁궐의 대문에 상금을 걸고 이르기를, “조씨의 갓난아이를 신고하는 사람에게 천금을 주겠다. 알고도 말하지 않는 자와 숨기는 자는 반역 죄인과 같이 취급하여 전 가족을 처단할 것이다.” 하고, 또한 궁궐 문지기에게 출입하는 사람을 철저히 검색하라고 분부했다.

한편, 조돈이 살아 있을 때 두 사람의 심복 문객이 있었다. 한 사람은 공손저구(公孫杵臼)이고, 한 사람은 정영(程嬰)이었다. 전에 도안고가 하궁(下宮)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먼저 들은 공손저구는 정영과 함께 조씨의 조난에 동참하자고 했다. 정영이 말하기를, “도안고가 군주의 명령을 빙자하여 역적을 토벌한다고 퍼뜨리는데, 우리가 그들과 같이 죽으면 조씨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니, 공손저구가 말하기를, “조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알지만, 다만 은혜를 입은 주인이 어려움에 빠졌는데 감히 죽음에서 도망갈 수는 없다!” 했다. 정영이 말하기를, “장희가 임신 중인데 만일 아들을 낳으면 나와 네가 같이 모셔야 하고, 불행히 딸을 낳으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했다. 얼마 후 장희가 여아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자, 공손저구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하늘이 조씨의 명맥을 끊었구나!” 하니, 정영이 말하기를, “믿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살펴봐야겠네.” 하고, 궁인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고 장희에게 연락을 취했다. 장희가 정영의 충의를 알고 밀서에 ()’라는 한 글자를 써서 정영에게 보냈다. 정영이 가만히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공주께서 과연 아들을 낳으셨구나!” 했다.

그때 도안고가 궁중을 수색했으나 아이를 찾지 못했다. 정영이 공손저구에게 말하기를, “조씨의 갓난아이가 궁중 안에 있으나 도안고가 찾지 못했다니 이는 천행이네. 다만 속이는 일은 일시적일 뿐이네. 후일에 사실이 드러나면 도안고가 다시 궁중을 수색할 것이니, 반드시 계략을 써서 궁중에서 몰래 빼내어 먼 곳에 피신시켜야 걱정 없이 보전할 수 있네.” 하니, 공손저구가 반나절을 깊이 생각한 후에 정영에게 묻기를, “고아를 길러 원수를 갚게 하는 것과 지금 죽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정영이 말하기를, “지금 죽는 것은 쉽고, 고아를 키우는 일은 어렵네.” 했다. 공손저구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려운 일을 맡고 나는 쉬운 일을 맡겠네. 어떤가?” 하니, 정영이 말하기를,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가?” 했다. 공손저구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갓난아이를 구하여 조씨고아라고 속여서 내가 그 아이를 안고 수양산(首陽山) 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으면, 자네는 도안고에게 가서 나와 갓난아이가 숨어 있는 곳을 말하게! 도안고 도적놈이 가짜 아이를 얻으면, 진짜 아이는 화를 면할 것이네.” 했다. 정영이 말하기를, “갓난아이는 쉽게 구할 수 있네. 반드시 진짜 조씨고아를 궁궐 밖으로 빼내어야 비로소 만전을 기할 수 있네.” 했다.

공손저구가 말하기를, “여러 장군 중에서 오직 한궐이 조씨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었다고 할 수 있네. 궁중에서 갓난아이를 빼내 오는 일을 부탁할 수 있을 것이네.” 하니, 정영이 말하기를, “나에게 갓 낳은 아이가 하나 있는데 조씨고아와 태어난 날이 비슷하네. 그 애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그대는 조씨고아를 감춘 죄로 반드시 아이와 함께 죽임을 당할 것이네! 자네가 나보다 먼저 죽으면 내 마음이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하고,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손저구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이것은 큰일이고, 또한 아름다운 일이거늘 어찌하여 눈물을 흘리는가?” 하니, 정영이 눈물을 거두고 돌아갔다. 밤중에 그의 아들을 안고 와서 공손저구의 손에 넘겼다. 즉시 가서 한궐을 만나 먼저 ()’자라고 쓴 밀서를 보여주고 그런 뒤에 공손저구의 계책을 말했다. 한궐이 말하기를, “장희가 방금 병이 나서 나에게 의원을 구해 달라고 했소. 그대가 만약 도안고 도적놈을 떠들썩하게 속여서 수양산으로 데려가면, 나는 그사이에 조씨고아를 궁궐에서 빼내어 오겠소.” 했다. 정영이 이에 여러 사람 앞에서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도안고 사구(司寇)께서 조씨고아를 찾고 있는데 어찌하여 궁중만을 수색하는가?” 하니, 도안고의 문객이 그 말을 듣고 묻기를, “그대는 조씨고아가 있는 곳을 아시오?” 했다. 정영이 말하기를, “나에게 천금을 주면 당신에게 알려 주겠소.” 했다.

문객이 정영을 도안고에게 인도하니, 도안고가 그 성씨를 물었다. 정영이 대답하기를, “성은 정()이고, 이름은 영()입니다. 공손저구와 함께 조씨를 섬겼습니다. 공주가 고아를 낳아서 즉시 부인을 보내 아이를 안아 궁문 밖으로 내보내서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 감추도록 했습니다. 제가 후에 이 일이 탄로 나서 다른 사람이 고발하면 그가 천금을 가질 것이고 나는 전 가족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렇게 고합니다.” 했다. 도안고가 말하기를, “고아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정영이 말하기를, “좌우를 물리쳐 주시면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했다. 도안고가 즉시 좌우의 사람들을 물러가게 명했다. 정영이 고하기를, “수양산 깊은 곳에 있습니다. 급히 가면 잡을 수 있습니다. 머지않아 진()나라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대부께서 스스로 가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조씨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함부로 맡길 수 없습니다.” 하니, 도안고가 말하기를, “그대는 다만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되네. 사실이면 무거운 상을 줄 것이고, 거짓이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네.” 했다. 정영이 말하기를, “제가 산중에서 오느라고 배가 매우 고픕니다. 식사 한 끼를 내려 주십시오.” 하니, 도안고가 그에게 술과 음식을 주었다. 정영이 식사를 끝내고 나서 도안고를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도안고가 직접 가병 3천 명을 인솔하여 정영을 앞세우고 지름길로 수양산에 들어갔다. 몇 리를 구부러지고 돌며 길이 아주 그윽하고 외진 곳 개울 옆에 몇 칸 초가가 있는데 사립문이 닫혀 있었다. 정영이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집이 공손저구와 고아가 사는 곳입니다.” 하고, 정영이 먼저 문을 두드리자 공손저구가 나와 맞았다. 무사가 많은 것을 보고, 놀라서 급히 달아나려고 했다. 정영이 외치기를, “너는 달아나지 말라. 사구께서 이미 조씨고아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친히 오셨다. 빨리 데려와서 바치도록 해라.”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사들이 공손저구를 결박하여 도안고 앞으로 끌고 왔다. 도안고가 묻기를, “고아는 어디 있는가?” 하니, 공손저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기를, “없다!” 했다. 도안고가 집안을 수색하라고 명령하여, 무사들이 벽실에 자물쇠를 채운 것을 보았다. 무사가 자물쇠를 부수고 벽실 안으로 들어가니, 벽실 안은 매우 어두웠다. 대나무 침상 위에 무엇인가가 있고,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갓난아이를 안아서 밖으로 나오니, 수놓은 비단 포대기에 싸여서 귀한 집 아이가 분명했다. 공손저구가 보고 어린아이를 뺏으려고 했으나 결박을 당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에 큰소리로 꾸짖기를, “이 소인배 정영아! 옛날 하궁에서 조씨가 변란을 당할 때 나와 네가 함께 죽기로 약속하고, 네가 말하기를, ‘공주가 잉태했으니 우리가 만일 죽으면 누가 고아를 돌보겠느냐?’ 라고 하더니, 지금 공주가 우리 두 사람에게 아이를 맡겨 이 산중에 숨은 것은 너와 내가 같이 상의하여 행한 일인데, 천금의 상이 탐이 나서, 몰래 가서 고발했느냐? 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무엇으로 조선맹(조돈)의 은혜를 갚을 것이냐?” 하고, 천번 만번 소인배라고 욕하여 마지않았다. 정영이 얼굴 가득히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도안고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저놈을 죽이지 않으십니까?” 하니, 도안고가 소리쳐 명령하기를, “공손저구를 끌어다 참수하라!” 하고, 고아를 땅바닥에 던지니 갓난아이가 울음을 터트렸고, 무사들이 저민 고기를 만들었다. 슬프구나!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조씨의 일점혈육이 궁중 안에서 위험에 처하자, 차라리 자기의 혈육으로 조씨고아를 대신했다. 간신 도안고가 비록 천지에 경계망을 폈으나, 누가 알았으랴? 공손저구가 이미 속임수를 썼음을,”이라고 했다.

도안고가 직접 수양산에 가서 조씨고아를 잡아 죽인 일은 성중 백성들 간에 두루 퍼졌다. 도안고의 집안사람들은 기뻐하였고, 조씨 일파는 한탄했다. 궁문 출입의 검사도 해이해졌다. 한궐이 심복 문객을 시켜 민간 의원으로 꾸며 장희를 진찰하러 간다고 궁궐로 들어가서, 정영이 전한 ()’자를 약주머니에 붙여, 장희가 보고 그 뜻을 알게 했다. 한궐의 심복이 진맥을 끝내고 산후에 몸조리하는 처방을 몇 마디 알려 주자, 장희는 좌우를 살펴보아 모두 심복인 것을 확인하고, 즉시 갓난아이를 싸서 약주머니에 넣었다.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장희가 약주머니를 쓰다듬으며 빌기를, “조무야! 조무야! 우리 조씨 가문의 원수를 갚는 것이 일점 혈육인 너에게 달려 있다. 궁 밖에 나갈 때 절대 울면 안 된다!” 하고 당부를 마치니, 고아는 울음을 뚝 그쳤다. 의원이 궁문을 나갈 때 아무도 검문하지 않았다. 한궐이 조씨고아를 구하여 마치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깊은 밀실에 감추고 유모를 시켜 돌보게 했으나 집안 식구들은 아무도 그 일을 몰랐다.

도안고가 자기의 부중에 돌아와서 정영에게 천금의 상을 주려고 했다. 정영이 사양하며 상 받기를 원치 않았다. 도안고가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 상을 바라고 신고를 했는데, 어찌하여 사양하는가?” 하니, 정영이 말하기를, “소인은 조씨의 문객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고아를 죽이고 내 목숨을 건진 행위는 의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감히 많은 상금을 바라겠습니까? 만일 소인의 조그만 공로를 생각해 주신다면, 원컨대 그 상금으로 조씨 가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게 해주신다면, 또한 소인이 조씨 문하에 있었던 정을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겠습니다.” 했다. 도안고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진실로 신의가 있는 선비로다. 조씨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내 주는 일을 금하지 않겠다. 이 상금으로 장례를 치르는 데 써라.” 했다. 정영이 인사를 올리고 상금을 받았다. 정영은 조씨 집안의 해골을 수습하여 염하여 관에 넣고 조돈의 묘 옆에 분별하여 매장했다. 일을 끝내자, 다시 도안고에게 가서 감사하니, 도안고가 정영을 머물러 두고쓰고자 했으나 정영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소인은 한때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이런 불의한 일을 했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진나라 사람들을 보겠습니까? 이제 저는 먼 곳에 가서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겠습니다.” 했다. 정영이 도안고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한궐을 찾아갔다. 한궐이 유모와 고아를 정영에게 주었다.

정영은 조무를 자기 아들로 삼아 품에 안고 우산(盂山)에 들어가 숨었다. 뒷날의 사람들이 그 산 이름을 장산(藏山)으로 불렀다. 조씨고아가 숨었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3년 후에, 진경공이 신전(新田)에서 사냥하다가 그 땅이 기름지고 물맛이 단 것을 보고, 도읍(都邑)을 옮기고 신강(新絳)이라고 불렀다. 옛날의 도읍은 고강(故絳)이라고 했다. 벼슬아치들이 축하하니, 진경공은 내궁에 잔치를 열어 여러 신하를 대접했다. 해가 저물자 좌우에게 촛불을 밝히라고 했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어나더니 집 안을 휩쓸어 사람들이 찬 기운을 느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놀라 떨었다. 잠시 후 그 바람이 지나가자, 진경공이 혼자 보았는데, 머리를 산발한 큰 귀신이 키는 한 길이 넘고 긴 머리카락을 땅에 끌며 문밖에서 안으로 들어와 팔을 걷어올리고 욕하기를, “하늘이여! 우리 자손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네가 모두 죽였느냐? 내가 이미 상제에게 호소하여 너의 목숨을 취하러 왔다.” 했다. 귀신이 말을 마치고 구리 망치를 들어 진경공을 쳤다. 진경공이 크게 외치기를, “여러 신하는 나를 구하라!” 하고, 칼을 뽑아 귀신을 베려고 했으나 잘못하여 자기 손가락을 잘랐다. 여러 신하가 왜 그러는지 모르고 황망히 칼을 빼앗았다. 진경공이 입에서 선혈을 토하더니 땅바닥에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생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58: 진나라 군주를 설득하여 위상이 명의를 빌리고, 위기를 보복하여 양요기가 재주를 뽐내다

 

한편, 진경공(晉景公)은 머리를 풀어 헤친 큰 귀신에게 맞아 피를 토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내시들이 부축하여 내실로 옮겨 한참 뒤에 깨어났다. 여러 신하는 모두 걱정하며 흩어졌다. 진경공이 마침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좌우의 내시들이 말하기를, “상문(桑門) 근처의 큰 무당은 대낮에도 귀신을 볼 수 있다는데 어찌하여 부르지 않으십니까?” 하니, 진경공의 부름을 받고 상문의 대무가 불려와서 경공의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문득 말하기를, “귀신이 있습니다.” 했다. 진경공이 묻기를, “귀신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니, 대무가 대답하기를, “봉두난발에 키는 한 길이 넘고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데 대단히 화가 난 모습입니다.”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무당의 말과 내가 본 것이 딱 들어맞는다. 귀신이 말하기를 내가 그의 자손을 잘못 죽였다는데 나는 그 귀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하니, 대무가 말하기를, “선대에 공이 있던 신하로 그 자손이 가장 참혹하게 화를 입은 사람의 귀신입니다.” 했다. 진경공이 깜짝 놀라 말하기를, “설마 조씨의 조상은 아니지?” 했다.

도안고가 옆에 있다가 아뢰기를, “무당은 조돈의 문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빌미로 조씨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들어서는 안 됩니다.” 했다. 진경공이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대무에게 묻기를, “그 귀신을 쫓아버릴 수 없느냐?” 하니, 대무가 말하기를, “매우 화가 나 있어 굿을 해 봐야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는 언제까지 살 수 있겠는가?” 하니, 대무가 말하기를,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을 드리면 군주의 병은 햇보리를 맛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했다. 도안고가 말하기를, “보리는 한 달 안에 익을 것인데 군주께서 비록 병이 들었지만, 정신은 오히려 왕성한데 어찌 그렇게 된다는 것이냐? 만약 주공께서 햇보리를 맛보면 너는 마땅히 죽을 것이다!” 했다. 도안고가 경공이 꾸짖기도 전에 대무를 쫓아냈다. 대무가 물러간 후에 경공의 병은 더욱 심해졌다. 진나라의 의원들이 와서 보았지만, 그 병을 알지 못하여 감히 약도 쓰지도 못했다.

대부 위기의 아들 위상(魏相)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진()나라에 명의가 두 사람 있는데, 고화(高和)와 고완(高緩)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편작(扁鵲)에게서 의술을 전수 받아 음양의 도에 능통하여 내외의 증상을 잘 다루어 진()나라의 태의가 되었다고 합니다. 주공의 병을 고치려 한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찌하여 가서 청하지 않을까요?”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와 우리는 원수의 나라인데 어찌 기꺼이 좋은 의원을 보내어 우리 군주를 구해 주겠는가?” 했다. 위상이 또 말하기를, “환난을 구제하고 재난을 나누는 것은 이웃 나라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세 치의 혀를 놀려 반드시 명의를 진()나라로 데려오겠습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온 조정이 모두 그대에게 절을 할 것이오.” 했다. 위상이 그날로 행장을 꾸려 밤낮으로 수레를 몰아 진()나라로 갔다. 진환공(秦桓公)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니, 위상이 아뢰기를, “저희 군주께서 불행히 광질(狂疾)에 걸렸습니다. 신이 들으니, 상국에는 고화와 고완이라는 명의가 있어 기사회생의 의술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신이 특별히 와서 청하오니 저희 군주를 구해 주십시오.” 했다, 진환공이 말하기를, “()나라는 이유도 없이 우리 군사를 여러 번 패퇴시켰다. 우리나라에 비록 명의가 있다 하나, 무엇 때문에 너희 군주를 구해 주겠는가?” 했다.

위상이 정색하면서 말하기를, “군주님의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대저 진()나라와 진()나라는 이웃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진헌공(晉獻公)과 상국의 목공(穆公)께서는 혼인을 맺어 대대로 친했습니다. 또한 진목공(秦穆公)께서는 우리의 혜공(惠公)을 진()나라 군주로 세워 주셨지만, 다시 한원(韓原)에서 싸웠습니다. 이어서 진문공을 진()나라 군주로 세워 주셨지만, 또 사남(汜南)에서 맹약을 어겼습니다. 그 끝이 좋지 않게 된 것은 모두 귀국 때문이었습니다. 진문공께서 돌아가시자 목공은 다시 맹명시의 말을 지나치게 믿고 진양공이 어리고 약하다고 얕보아 군사를 효산(崤山)으로 내어 보내서 우리나라의 속국을 습격하게 하여 스스로 피를 흘리고 싸움에서 패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귀국의 삼수(三帥)를 사로잡아 죽이지 않고 방면했으나 곧바로 서약을 어기고 우리의 관리들을 잡아갔습니다. 우리나라 진영공(晉靈公)과 귀국의 강공(康公) 때 우리가 귀국의 속국 숭()을 한번 쳐들어가자 귀국은 즉시 우리나라에 정벌군을 일으켰습니다. 이어서 우리 진경공(晉景公)께서 제나라의 죄를 물어 토벌할 때 군주께서는 두회(杜回)를 보내 제나라 군사를 도왔습니다. 실패했을 때 교훈을 얻지 못하고, 성공했을 때 만족할 줄 모르며, 좋은 관계를 버리고 원수 사이가 된 것은 모두 진()나라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군주께서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가 진()나라를 범했는가? 아니면 진()나라가 진()나라를 범했는가?’. 지금 저희 주군께서 병환을 앓고 계셔서 제가 이웃에 있는 상국에서 명의를 데려오자고 말하자 우리나라의 많은 신하가 말했습니다. ‘()나라는 우리나라와 절교한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명의를 보내 주겠는가?’ 했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라 군주께서는 여러 번 실수를 하셨지만, 어찌 후회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겠소? 이번에 가서 진()나라의 태의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선군 때 맺은 우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오.’ 했습니다. 그런데 군주께서 만약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나라 신하들이 한 말이 맞게 됩니다. 무릇 이웃의 환난을 구해 주는 우의가 있어야 하는데 군주께서는 그것을 폐하려 하시고, 의원이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을 군주께서는 막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군주께서 취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했다. 진환공(秦桓公)이 위상의 말이 분명하고 정의로운 것을 알고,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공손한 태도로 말하기를, “대부께서 올바른 말로 과인을 깨우쳐 주니 감히 그 가르침을 듣지 않을 수 없소.” 하고, 즉시 태의 고완에게 명하여 진()나라로 가게 했다. 위상이 감사의 말을 드리고 고완과 함께 옹주(雍州)을 나와서 밤낮으로 신강(新絳)으로 달려왔다. 시가 있어 증명하기를, “혼인을 맺었으나 지금은 원수가 되었고, 원수 나라의 재난을 자기 나라의 행운이라 생각했네. 만약 위상이 능란한 말로 호소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명의가 신강(新絳)에 왔겠는가?” 했다. 그때 진경공의 병이 위독하여 밤낮으로 진()나라 명의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진경공이 문득 꿈을 꾸었는데 두 동자가 자기 콧구멍에서 뛰어나오더니 한 동자가 말하기를, “()나라 고완(高緩)이 당세의 명의라는데 만약 그가 와서 약을 쓰면 우리는 상하게 되는데 어디로 피하면 되겠는가?” 했다.

다른 한 동자가 말하기를, “만약 명치끝에 들어가 숨어 있으면 제가 우리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했다. 곧 경공이 명치 끝의 통증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앉아 있을 수도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조금 지나서 위상이 고완을 안내해 입궁하여, 진맥을 하고 나서 고완이 말하기를, “이 병은 고칠 수 없습니다.”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인가?” 하니, 고완이 대답하기를, “이 병이 고황(膏肓 ; 명치끝)에 있어 뜸을 뜰 수도 없고, 침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즉 약을 사용하여도 약이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은 거의 천명입니다.” 했다. 진경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 말이 내 꿈과 일치한다. 참으로 명의로다!” 했다. 진경공이 고완에게 예물을 후하게 주고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때 강충(江忠)이라는 어린 내시가 있었는데 진경공을 모셔 고생이 심했다. 어느 날 아침 깜빡 잠이 들었는데 진경공을 업고 날아서 하늘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자 꿈 이야기를 좌우에 있던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그때 마침 도안고가 진경공의 병문안을 드리기 위해 입궁했다가 그 꿈 이야기를 듣고 경공에게 축하하여 말하기를, “하늘은 밝은 것이고 병은 어두운 것입니다. 하늘로 날아서 올라갔다는 것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갔음을 뜻하니 주군의 병은 틀림없이 점차 나아질 것입니다.” 했다.

진경공도 역시 이날은 명치끝의 통증이 조금 나아져서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갑자기 보고하기를, “전인(甸人 ; 공물 담당)이 햇보리를 바칩니다.” 했다. 진경공이 햇보리를 맛보려고 요리사에게 그 반을 절구에 찧어서 죽을 쑤어 오라고 했다. 도안고는 상문(桑門)의 대무가 병의 원인이 조씨의 원귀 때문이라고 한 말에 앙심을 품고 진경공에게 아뢰기를, “전날에 상문의 무당이 주공께서 햇보리를 맛볼 수 없다고 말했는데, 금일 그 말이 맞지 않으니, 불러서 그에게 보여주십시오.” 하니, 진경공이 그 말을 따라 상문의 대무를 입궁토록 불러서 도안고를 시켜 꾸짖기를, “햇보리가 여기 있는데 오히려 맛보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느냐?” 하니, 무당이 말하기를,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했다. 진경공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도안고가 말하기를, “하잘것없는 무당이 주군을 저주하니, 당장 참하라!” 했다. 도안고가 즉시 좌우의 무사들에게 끌고 나가도록 명했다. 대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작은 재주에 밝아서 스스로 화를 불러 몸을 망치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좌우의 무사들이 대무의 목을 가져와 진경공에게 바쳤다. 그때 마침 궁중 요리사가 햇보리 죽을 바쳤는데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있었다.

진경공이 바로 햇보리 죽을 맛보려는 순간에 갑자기 배가 더부룩해지면서 설사가 나오려고 했다. 강충을 불러서, “나를 업고 변소에 가자.” 했다. 겨우 변소에 내려놓으니 가슴 통증으로 버틸 수가 없어서 변소 안으로 떨어져 버렸다. 강충이 더러운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진경공을 안아 일으켰으나 이미 숨이 넘어간 뒤였다. (진경공은 끝내 햇보리를 먹지 못하고, 상문의 대무를 죽였으니, 모두가 도안고의 잘못이었다.) 상경 난서가 백관을 거느리고 세자 주포(州浦)를 모시고 장례를 주관하고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진여공(晉厲公)이다. 대신들이 의논하기를 강충이 꿈속에서 진경공을 업고 하늘로 올라갔고, 뒤에 진경공을 업고 변소에 모시고 갔으니 그 꿈이 잘 부합된다고 하여, 마침내 강충을 순장하기로 했다. (당시에 만약 강충이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혀를 잘못 놀려 몸을 망치게 되었으니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경공이 무서운 귀신의 구리 몽둥이에 맞아 죽었으므로 많은 진나라 사람들이 조씨 가문의 원한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난씨와 극씨 두 집안은 도안고와 서로 가깝게 지냈고, 다만 한궐은 한 손으로 손뼉을 칠 수 없어 감히 조씨 가문의 원한을 풀어 줄 수가 없었다.

이때 송나라의 공공(共公)이 상경 화원(華元)을 보내 진()나라에 조문하고 겸하여 새 군주의 즉위를 축하했다. 화원은 난서와 상의하여 진나라와 초나라가 화의를 맺어 남북 간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야 한다고 하니, 난서가 말하기를, “초나라는 믿지 못합니다.” 했다. 화원이 말하기를, “저는 초나라의 자중(공자 영제)과 친분이 있습니다. 한번 저에게 맡겨 보십시오.” 하니, 난서가 곧 그의 어린 아들 난침(欒鍼)을 사신으로 해서 화원과 함께 초나라로 보내어, 먼저 공자 영제를 만나보게 했다. 공자 영제는 난침이 어린 나이에도 풍채가 뛰어난 것을 보고, 화원에게 물어서, 그가 진()나라 중군 원수의 아들임을 알고, 그의 재능을 시험하려고 묻기를, “귀국의 군사를 부리는 방법은 어떠한가?” 하니, 난침이 대답하기를, “가지런히 하는 것입니다.” 했다. 공자 영제가 또 묻기를, “또 다른 좋은 방법이 있는가?” 하니, 난침이 대답하기를, “느긋하게 합니다.” 했다. 공자 영제가 말하기를, “상대방이 어지러울 때 아군은 질서정연하고 상대방이 분주할 때 아군은 느긋하니 어찌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겠는가? ()과 가() 두 글자는 가히 간단하면서도 뜻이 무궁하다고 하겠소.” 했다. 이로 말미암아 공자 영제는 난침을 더욱 존중했다. 마침내 화원 일행을 초공왕에게 인도하여 초나라와 진나라 양국이 화의를 맺어서 경계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천지신명으로부터 천벌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날짜를 정해 맹약을 맺자고 했다. ()나라 사섭(士燮)과 초나라 공자 파(公子罷)가 송나라의 서문 밖에서 만나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약의 의식을 치렀다.

그러나 초나라 사마 공자 측은 자기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대로하여 말하기를, “남북이 서로 통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자중(子重 ; 공자 영제)이 자기 멋대로 진()나라와 초나라 간에 맹약을 맺은 행위는 자기 혼자 공을 차지하려고 하는 짓이다. 내가 반드시 깨뜨려 버리겠다.” 하고, 무신(巫臣)이 오나라 군주 수몽(壽夢)과 진(), (), (), (), (), () 등의 제후국 대부들을 종리(鍾离)에 모아서 규합하려 한다는 것을 탐지하여 알았다. 공자측이 마침내 초공왕을 설득해 말하기를, “()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수호하려는 것은 반드시 초나라를 도모하려는 뜻입니다. 송나라와 정나라까지 모두 따르고 있으니 초나라 편은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했다. 초공왕이 말하기를, “내가 정나라를 치려는데, 송나라 수양성 서문에서 남북이 화평하기로 한 맹약을 어찌해야 하오?” 하니, 공자 측이 말하기를, “송나라와 정나라가 초나라와 맺은 맹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맹약을 저버리고 진()나라에 붙었습니다. 오늘날은 이익이 있으면 나아가는 것이지 맹약을 지켜 어디에 쓰겠습니까?” 했다. 초공왕이 즉시 공자 측을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치니, 정나라는 다시 진()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를 따랐다. 이것은 주간왕(周簡王) 10년의 일이었다. 진여공(晉厲公)이 대로하여 여러 대부들을 소집하여 정나라 토벌을 논의했다.

그때에는 난서가 비록 정사를 맡아 하였지만 삼극(三郤)이 권력을 마음대로 했다. 삼극이란 극기(郤錡), 극주(郤犨), 극지(郤至) 등으로, 극기는 상군 원수가 되고, 극주는 상군 부장이 되었으며, 극지는 신군 부장이 되고, 극주의 아들 극의(郤毅), 극지의 동생 극걸(郤乞)은 모두 대부가 되어 일을 보았다. 백종은 위인이 정직하고 바른말을 하여 여러 번 진여공에게 말하기를, “극씨 종족이 커지고 세력이 성하니 마땅히 현자와 어리석은 사람을 구분하여 그 권세를 조금 눌러 놓아야 다른 공신들의 후예들도 보전할 수 있습니다.” 했지만, 진여공이 듣지 않았다. 삼극은 백종을 뼛속 깊이 원망하여 마침내 백종이 조정을 비방하고 헐뜯는다고 모함했다. 진여공이 그 말을 믿고 도리어 백종을 죽였다. 백종의 아들 백주리(伯犨犁)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가 백주리를 태재로 삼아 그와 더불어 진()나라를 치려고 상의했다. 진여공은 원래 성질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팍으로 총애하는 남녀가 대단히 많았다. 남자로는 서동(胥童), 이양오(夷羊五), 장어교(長魚矯), 장려(匠麗) 등 일반 소년들인데 모두 대부로 임명했다. 진여공이 총애하는 미녀와 여종들은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매일 음탕한 짓을 일삼고, 아첨하는 사람을 좋아했으며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진여공이 정사를 돌보지 않자 여러 신하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사섭은 진()나라 조정이 날로 아닌 것을 보고 정나라를 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극지가 말하기를, “정나라를 치지 않으면 어떻게 제후들을 규합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난서가 말하기를, “오늘 정나라를 잃으면 노나라와 송나라도 또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온계(溫季 ; 극지)의 말이 옳습니다.” 했다. 초나라에서 항복한, 투월초의 아들 묘분황(苗賁皇)도 역시 정나라를 토벌하라고 권했다. 진여공이 그 말을 쫓아, 순앵(荀罃)을 본국에 남겨 도성을 지키도록 명하고, 대장 난서(欒書), 사섭(士燮), 극기(郤錡), 순언(荀偃), 한궐(韓厥), 극지(郤至), 위기(魏錡), 난침(欒鍼) 등의 장수와 전차 6백 대를 친히 인솔하여 호호탕탕 정나라로 쇄도해 쳐들어갔다. 한편으로는 극주를 노나라와 위나라에 사자로 보내 군사를 일으켜 싸움을 돕도록 청했다. 정성공이 진()나라 군사의 세력이 큰 것을 알고, 성문을 나가 항복하려고 했다. 대부 요구이(姚鉤耳)가 말하기를, “정나라의 땅은 좁고 두 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 그중 강한 나라를 택하여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아침에는 초나라를 섬기고 저녁에는 진나라를 섬겨 해마다 침략을 당하고만 있습니까?” 했다. 정성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요구이가 말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초나라에 구원을 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초군이 도착하면 우리가 그와 함께 협공하여 진()나라 군사를 크게 이길 수 있어 몇 년간은 편안히 지낼 수 있습니다.” 했다.

정성공은 요구이를 초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초공왕은 송나라 도성의 서문에서 맺었던 서문지약(西門之約)을 어기는 것을 싫어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초공왕이 영윤 공자 영제에게 물으니, 공자 영제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실은 신의를 지키지 않아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또 정나라를 비호하여 진()나라과 전쟁을 하면, 백성들을 고생시키게 될 뿐만 아니라 싸움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군사를 출동시키지 말고 기다려 봄이 좋을 듯합니다.” 했다. 공자 측이 나와 말하기를, “정나라 사람들이 초나라를 배반할 수 없어서 이렇게 급하게 구원을 청한 것입니다. 전날 제나라를 구하지 않았고, 지금 또 정나라를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를 섬기는 나라는 하나도 없게 됩니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으나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어가를 모시고 출전하여 공을 이루겠습니다.” 하니, 초공왕이 크게 기뻐했다. 이에 사마 공자 측을 중군 원수, 영윤 공자 영제를 좌군 원수, 우윤 공자 임부(公子壬夫)를 우군 원수로 삼고, 초공왕이 친히 양광(兩廣)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을 향하여 정나라를 구하려고 출발했다. 초나라 군사는 하루에 백 리를 행군하여 질풍같이 나아갔다. 어느새 정찰 기병이 진()나라 군대에 보고했다.

사섭이 가만히 난서에게 말하기를, “군주께서 어려서 나랏일을 모르니 우리가 초나라를 두려워하는 체하면서 이 싸움을 피하여 경계를 주면 주군께서 조심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오히려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했다. 난서가 말하기를, “두려워서 피했다는 오명을 저는 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사섭이 물러 나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번 싸움에 우리가 져야만 나라에는 다행이겠지만 만일 싸움에서 이긴다면 나라 밖은 안정이 되겠지만 나라 안에서는 반듯이 걱정거리가 생길 것이니, 내가 몹시 두렵다.” 했다. 그때 이미 초나라 군사가 언릉(鄢陵)을 통과했기 때문에 진()나라 군사는 전진할 수가 없어 팽조강(彭祖崗)에 머물러 주둔했다. 양군이 각각 진영을 세워 대치했다. 그 이튿날은 유월 갑오(甲午)일 그믐날이었다. 그믐날은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므로 진()나라 군사는 초군의 기습에 대해 준비하지 않았다. 오경(새벽 4시쯤)이 지나고 동녘이 아직 밝지 않았을 때 갑자기 진영 밖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 진영을 지키던 군사가 황급히 보고하기를, “초나라 군사가 본영 앞으로 바짝 다가와 진을 쳤습니다.” 했다.

난서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적군이 이미 아군을 압박하여 진을 쳤으니, 우리 군사들이 대오를 갖추기가 어렵게 되었소. 이런 상태로 교전에 들어가면 불리할 것 같소. 영채를 굳게 지키고 조용히 기다려 계책을 세워 깨뜨려야 하오.” 했다. 장수들이 분분히 의논하여, 정예군사를 뽑아 진영으로 돌격하자는 사람도 있고, 군사를 이동하여 물러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사섭의 아들 사개(士匄)가 종군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겨우 16살이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사개가 중군 막사에 들어와 난서에게 아뢰기를, “원수께서는 싸울 장소가 없는 것을 걱정하십니까? 그것은 쉬운 일입니다.” 했다. 난서가 말하기를, “너에게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가?” 하니, 사개가 말하기를, “원수께서 영을 내려 영문을 굳게 지키게 한 후 영채 안의 군사들에게는 몰래 아궁이를 무너뜨려 평평하게 하고, 우물은 널빤지로 덮으면, 불과 반 시각이면 전투대형을 갖추고도 땅이 남습니다. 이미 대오를 갖춘 군사를 이끌고 영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 싸우면, 초나라 군사가 우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했다. 난서가 말하기를, “우물과 아궁이는 군무의 요긴한 것인데 아궁이를 평평하게 하고 우물을 막으면 어떻게 군사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 하니, 사개가 말하기를, “먼저 각 군에 하루 이틀을 버틸 마른 식량과 맑은 물을 준비하라고 하고 대형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려 노약자를 가려내어 진영 뒤에서 우물과 아궁이를 짓게 하면 됩니다.” 했다.

사섭은 원래 초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가, 아들이 계책을 내놓는 것을 보고, 크게 노해 꾸짖기를, “군사의 승패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데, 어린 녀석이 무엇을 안다고 감히 여기에서 입과 혀를 놀리느냐!” 하고, 과를 꺼내어 찌르려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사섭을 싸안아 막아서 사개는 거기서 도망칠 수 있었다. 난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린애의 지혜가 그 아버지 범맹(范孟 ; 사섭) 보다 낫소.” 했다. 이에 난서는 사개의 계책에 따라 각 영채에 마른 식량을 준비하게 한 후에 아궁이를 메우고 우물을 널빤지로 덮어 전투대형을 갖추어 다음날의 교전에 대비했다. 호증(胡曾)선생의 영사시(역사를 노래한 시)에 이르기를, “영채 안에서 진을 친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했는데, 사섭은 과를 뽑아 자식을 원수처럼 대했다. 어찌 사섭의 깊은 뜻이 동자보다 못해서였겠는가? 나라를 걱정하는 늙은이의 깊은 염려였다.”라고 했다. 한편, 초공왕은 진나라 진영 바짝 가까이 다가가서 진을 세우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뜻밖의 곳에 나가서 군사들이 반드시 혼란에 빠졌을 것이라고 했으나, 오히려 진나라 진영에서는 적막하고 별다른 동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태재 백주리에게 묻기를, “진나라 군사들이 진영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니 그대는 진나라 사람이라 틀림없이 그 사정을 알 것이오.” 했다.

백주리가 말하기를, “제가 망루 차에 올라가서 적진을 살펴보게 해주십시오.” 하니, 초공왕이 백주리를 망루 차에 올라와서 자기 옆에 서게 하고, 묻기를, “진나라 군사들이 말을 타고 빨리 달리는데 어떤 군사는 좌로 어떤 군사는 우로 다니는데 왜 그런가?” 하니, 백주리가 대답하기를, “군리(軍吏; 군대 사무관)들을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했다. 초공왕이 말하기를, “지금은 중군 막사 앞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소.” 하니, 백주리가 말하기를, “모여서 계책을 의논하는 중입니다.” 또 바라보고 말하기를, “갑자기 천막을 치고 있는데 무슨 까닭이오?” 하니, 백주리가 말하기를, “선군의 영령에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했다. 또 바라보고 말하기를, “지금 장막을 걷었소.” 하니, 백주리가 대답하기를, “곧 군령을 내릴 것입니다.” 했다. 또 바라보고 말하기를, “진영 안이 어찌하여 시끄럽고 흙먼지가 그치지 않소?” 하니, 대답하기를, “그들은 아직 대오를 갖추지 못해서 우물을 덮고 아궁이를 메워서 전쟁할 땅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했다. 또 바라보고 말하기를, “전차에 모두 말을 메우고 장수와 군졸이 전차에 올라탔소.” 하니, 백주리가 대답하기를, “전투대열을 갖추려는 것입니다.” 했다. 또 바라보고 말하기를, “전차에 탔던 사람이 왜 다시 내리는가?” 하니, 백주리가 대답하기를, “싸움에 임하여 신에게 기도하려는 것입니다.” 했다. 또 바라보고 말하기를, “중군의 형세가 매우 성한 것 같은데, 그 군주는 어디에 있소?” 하니, 백주리가 대답하기를, “난씨와 범씨 종족이 주공을 호위하고 진을 쳤습니다. 경적하시면 안 됩니다.” 했다.

초공왕이 진나라 군사의 정세를 다 살펴보고 군사들에게 내일 교전에 대비하여 점검을 철저히 하도록 했다. 초나라에서 항복한 장수 묘분황(苗賁皇)도 역시 진여공 옆에서 모시면서 계책을 드려 말하기를, “초나라 영윤 손숙오가 죽고 나서 군정이 안정되지 않고, 양광의 정예 군사들은 오랫동안 바꾸지 않아 늙어서 싸움을 감당하지 못할 자가 많습니다. 또 좌우 두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않습니다. 이번의 한번 싸움에 초나라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초나라가 쓴 백주리는 본래 진나라의 훌륭한 신하였고, 진나라도 초나라의 장수 묘분황을 썼다. 인재는 구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소중히 여겨야지, 지모 있는 신하를 나라 밖으로 보내지 말아라.” 했다. 이날 두 나라 군사들은 각각 자기 진영을 굳게 지키고 교전하지 않았다. 초나라 장군 반당(潘黨)이 진영 뒤쪽에서 시험 삼아 활을 쏘아 과녁의 붉은 중심을 세 번 연달아 맞추니, 여러 장수가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때 마침 양요기(養繇基)가 이르자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신궁이 왔다!” 하니, 반당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나의 활 솜씨가 어찌하여 양요기보다 못하단 말인가?” 했다. 양요기가 말하기를, “그대는 과녁의 중심을 잘 맞출 수 있지만 뛰어난 경지에 이르지 못했소. 내 화살은 능히 백 보에서 버들잎을 꿸 수 있소.” 했다.

여러 장수가 묻기를, “백 보에서 버들잎을 꿴다는 게 무슨 말인가?” 하니, 양요기가 말하기를, “일찍이 어떤 사람이 버드나무 잎사귀에 색칠을 해놓았는데, 내가 백 보 밖에서 활을 쏴서 그 잎의 중심을 꿰뚫었소. 그래서 백 보에서 버들잎을 꿴다고 한 것이오.” 했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이곳에도 버드나무가 있으니 쏴보지 않겠소?” 하니, 양요기가 말하기를, “못 할 것도 없습니다.” 했다. 장수들이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오늘 우리가 양요기의 귀신같은 활 솜씨를 구경하게 되었구려!” 하고, 즉시 버드나무의 한 잎사귀에 먹으로 칠을 하고, 양요기에게 백 보 밖에서 활을 쏘라고 했다. 화살은 보이지 않았으나, 여러 장수가 가서 살펴보니 화살은 버드나무 가지에 꽂혀 있는데 그 화살촉은 버들잎 한가운데를 꿰뚫고 있었다. 반당이 말하기를, “한번이야 우연히 맞출 수 있소! 내 생각에는 버들잎 3개에 표식을 하고 차례로 쏘아 맞추어야 비로소 고수라고 할 수 있소.” 하니, 양요기가 말하기를, “반드시 다 맞출지는 모르지만 한번 시험해 보지요.” 했다. 반당이 버드나무에 높낮이가 같지 않게 세 잎을 칠해 놓고 1, 2, 3 숫자를 썼다.

양요기가 확인한 후에 백 보 밖으로 물러가서 화살 세 개에도 1, 2, 3이라고 숫자를 써서 순서대로 쏘니, 순서대로 명중하여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다. 여러 장수가 두 손을 모으며 말하기를, “양요기는 참으로 신궁입니다!” 했다. 반당이 비록 마음속으로는 기이함에 놀랐으나, 끝내 자기의 장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양요기에게 말하기를, “양숙(양요기)의 활 솜씨는 정말 훌륭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일 수 있으려면 힘이 뛰어나야 합니다. 나는 여러 겹의 갑옷을 활로 꿰뚫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여러분에게 시험해 보이겠습니다.” 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말하기를, “보고 싶습니다.” 했다. 반당이 수행하던 무사들의 갑옷을 벗겨서 포개 놓으니 다섯 겹이 되었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됐습니다.” 했지만, 반당이 두 겹을 더 포개어 모두 일곱 겹이 되었다. 여러 장수가 생각하기를, “일곱 겹 갑옷은 거의 한 자에 가까운데 어떻게 그것을 꿰뚫겠는가?” 했으나, 반당은 일곱 겹 갑옷을 과녁에다 묶었다.

그리고 백 보 밖으로 물러나서 흑조궁(黑彫弓 ; 조각한 검은 활)에 낭아전(狼牙箭 ; 이리 이빨처럼 날카로운 화살)을 메워, 왼손은 태산같이 버티고, 오른손은 어린아이를 안듯이 하여, 똑바로 보고 힘을 다해 쏘았다. 딱 소리가 나자 맞았다!” 하고 외쳤다. 화살을 쏘는 것은 보았으나, 과녁을 꿰뚫는 순간은 보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과녁에 가서 본 다음에야 일제히 박수를 치며 말하기를, “훌륭한 솜씨다, 훌륭한 솜씨야!” 했다. 원래 활을 당기는 힘이 아주 강했으므로 일곱 겹의 갑옷을 뚫고 들어간 화살은 마치 못을 박은 것같이 단단히 박혀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반당이 얼굴에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군사들에게 소리쳐 화살이 박힌 갑옷을 가져오라고 하여 진영에 두루 자랑하려고 했다. 양요기가 지시하기를, “군사들은 움직이지 말라. 나도 한번 쏴봐야겠다. 어떨지 알 수 없지만.” 했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양요기의 귀신같은 힘을 또 보아야겠군.” 했다. 양요기가 활을 당겨 화살을 쏘려다가 다시 멈추었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양숙은 어찌하여 활을 쏘지 않소?” 하니, 양요기가 말하기를, “갑옷에 구멍을 뚫는 것은 희한하지 않소. 나는 화살을 보내는 다른 방법을 보여주겠소.” 했다.

말을 마치자, 화살을 장전하여 쉿 소리를 내며 쏘았다. 여러 장수가 외치기를, “명중이다!” 했다. 그 화살은 상하좌우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바로 반당이 쏜 화살의 한가운데를 맞추어 반당의 화살을 과녁 밖으로 밀어냈다. 양요기가 쏜 화살은 겹겹이 쌓은 갑옷의 구멍을 그대로 뚫었다. 여러 장수가 그것을 보고 혀를 내두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반당도 비로소 겨우 승복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양숙의 솜씨는 내가 미치지 못하겠소!” 했다. 역사책에 전하기를, 초왕이 형산(荊山)에 사냥을 나갔는데 산꼭대기에 팔이 긴 원숭이가 살고 있었다. 그 원숭이는 날아오는 화살을 잘 잡아내었다. 초나라 군사가 원숭이를 몇 겹으로 에워싼 후, 초왕이 좌우에 명하여 활을 쏘았으나 원숭이가 모두 잡아냈다. 그래서 양요기를 부르니 원숭이는 양요기의 이름을 듣고 곧 울부짖었다. 이에 양요기가 도착하여 화살을 한 발 쏘아 원숭이의 심장을 맞혔다고 했다. 그는 춘추시대 제일의 사수여서 이름이 헛되이 전한 것이 아니었다. 잠연(潛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나는 새를 떨어뜨리고 이[]를 관통하는 궁사가 있었다지만, 백 보 밖에서 버들잎을 꿰뚫는 경지는 전에 없었다. 갑옷을 뚫는 장군의 솜씨는 신기할 게 없고, 강한 중에도 더 강한 솜씨를 가진 자가 있었다.” 했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나라 군사와 초나라 군사가 대치하고 있어, 우리 대왕께서 유능한 인재를 쓸 때인데, 두 장군이 이렇게 귀신같은 활 솜씨를 가졌으니 마땅히 대왕께 아뢰어야지, 아름다운 구슬을 함 속에 감추어 놓으면 안 됩니다.” 하고, 이에 여러 장수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화살이 뚫은 여러 겹 갑옷을 초공왕 앞에 가져가게 했다. 양요기와 반당이 함께 초공왕 앞으로 갔다. 여러 장수가 두 사람이 화살로 시합한 이야기를 공왕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아뢰기를, “우리나라에 이와 같은 신궁이 두 분이나 있으니 어찌 진나라 군사가 백만 명이라 한들 걱정하겠습니까?” 하니, 초공왕이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장차 싸움에서 이길 생각을 해야지, 어찌 화살 한 개로 요행을 바라느냐? 그대들이 스스로 이렇게 믿으니 후일 반드시 이 재주로 죽을 것이오!” 하고, 양요기의 화살을 전부 몰수하고 다시는 화살을 쏘지 못하도록 했다. 양요기가 부끄러움을 머금고 물러갔다. 다음날 오경 때가 되자 두 나라 군중에서 각각 북을 울리며 군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나라 상군 원수 극기는 초나라 좌군을 공격하여 공자 영제와 대적하고, 하군 원수 한궐은 초나라 우군을 공격하여 공자 임부와 대적했다.

난서와 사섭이 각각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중군의 진여공을 호위하면서, 초공왕과 공자 측에 대적했다. 이편의 진여공은 극의(郤毅)가 전차의 말을 몰았고 난침이 차우장군을 맡았다. 극지는 신군을 이끌고 후대가 되어 접응했다. 저편은 초공왕이 출진했는데, 원래 오전에는 우광의 군사를 이끌고 나올 차례였으나, 그 우광은 양요기가 대장이라 초공왕이 양요기의 궁술 자랑을 괘씸하게 여겨 우광을 쓰지 않고 도리어 좌광을 끌고 나왔다. 그리고 팽명(彭名)이 말을 몰았고, 굴탕이 차우장군을 맡았다. 정성공이 정나라의 전차를 이끌고 뒤에서 접응했다. 한편 진여공이 머리에 봉황의 날개를 본뜬 충천봉시(沖天鳳翅) 투구를 쓰고, 몸에는 용을 수놓은 붉은 비단 전포를 입었으며, 허리에는 보검을 차고, 손에는 방천대극을 잡고서 금빛 철판을 두른 큰 전차에 올라탔다. 우측에는 난서가 있고, 좌측에는 사섭이 있어 영문을 열고 초나라 진영을 향하여 돌진해 갔다. 누가 알았으리요? 진영 앞에 한 진펄 구덩이가 있어 여명이라 자세히 보지 못해 극의가 용맹스럽게 전차를 몰다가 바로 진여공의 전차 바퀴가 진창에 빠져서 말이 달릴 수가 없게 되었다.

초공왕의 아들 웅패(熊茷)는 나이는 어렸지만, 용기가 있었다. 초나라 군사의 선봉을 맡아서 진여공의 전차가 구덩이에 빠진 것을 보고 전차를 나는 듯이 몰아 달려왔다. 저편의 난침이 황급히 전차에서 뛰어내려 진창구덩이 속에 서서 온 힘을 다하여 두 손으로 전차의 바퀴를 떠밀어 올렸다. 바퀴를 들자 말이 움직이고 한 발 한 발 진흙 구덩이 속에서 빠져나왔다. 저쪽의 웅패가 장차 덮치려고 했으나, 이쪽 난서의 군마가 도착하여 큰소리로 외치기를, “어린 장수가 무례하지 않은가?” 했다. 웅패가 깃발에 중군 원수라고 쓴 글자를 보고, 대군이 몰려오는 것을 알고 놀라 전차를 돌려 도망치려고 했으나 난서에게 추격당해 사로잡히고 말았다. 초나라 군사가 웅패의 실수를 보고 일제히 구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사섭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고, 후방에 있던 극지 등이 모두 달려오자 초나라 군사는 매복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갔다. 진나라 군사도 추격하지 않고 각자 영채로 돌아갔다. 정찰 기병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초나라의 좌군은 움직이지 않았고 진나라의 상군도 출전하지 않았으며, 하군은 20여 합을 싸웠으나 서로 살상했다고 했다. 승부를 가리지 못하여, 다음날 다시 교전하기로 했다.

난서가 웅패를 잡아다가 진여공에게 바치자 진여공이 참하려고 하였다. 묘분황이 나와서 말하기를, “초공왕이 그의 아들이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면 내일은 반드시 친히 출전할 것입니다. 웅패를 함거에 가두어 진영 앞에 세워 놓고 오가며 유인하십시오.” 하니, 진여공이 말하기를, “좋은 계책이오.” 하고, 그날 밤은 편히 쉬고 별말이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난서가 진영 문을 열고 싸움을 걸었다. 대장 위기(魏錡)가 난서에게 말하기를, “제가 간밤에 꿈을 꿨는데 하늘에 둥근달이 떠 있는데 제가 활을 쏘아 달 가운데를 맞췄습니다. 그러자 달 속에서 한 가닥 금빛이 아래로 쏟아져 나와 제가 황망 중에 뒤로 물러나던 중 저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진영 앞의 진창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놀라 꿈을 깨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이겠습니까?” 하니, 난서가 상세히 해몽하기를, “주왕실과 같은 성은 해()가 되고 다른 성은 달()이 됩니다. 달을 쏘아 맞힌 것은 틀림없이 초나라 왕을 쏘아 맞힐 것이오. 그러나 진흙 웅덩이 속에 빠진 것은 길조가 아니오. 장군은 부디 조심하시오.” 했다. 위기가 말하기를, “진실로 초나라 군사를 격파할 수 있다면 비록 죽는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했다. 난서는 위기의 출전을 허락했다.

초나라 장수 공윤(工尹 ; 공업담당) ()이 나와서 위기를 상대했다. 그러나 공윤양이 위기와 몇 합을 겨루지 않아서, ()나라 군사가 웅패를 함거에 싣고 나와 진영 앞을 왕래했다. 초공왕이 아들 웅패가 함거에 실려 진영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서 분노의 불꽃이 일어났다. 그는 급히 팽명을 불러 말을 채찍질해서 함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했다. 위기가 이것을 보고 공윤양을 버리고 곧바로 초공왕의 뒤를 추격했다. 위기가 화살 한 대를 메겨 쉿 소리와 함께 날리니 화살은 초공왕의 왼쪽 눈을 정확히 맞췄다. 반당이 죽을힘을 다하여 초공왕의 전차를 호위하여 달아났다. 초공왕이 아픔을 참고 화살을 뽑으니 눈동자가 화살촉에 달려 빠져나와서 땅에다 던져 버렸다. 소졸이 주워서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용안입니다. 함부로 버릴 수 없습니다.” 했다. 초공왕이 받아서 화살통에 담았다. 진나라 군사는 위기가 초공왕을 활로 쏘아 이긴 것을 보고 일제히 쇄도해 들어갔다. 공자 측이 군사들을 이끌고 죽기를 각오하고 진나라 군사의 공세를 막아내어 초공왕을 구출했다. 극지는 정성공을 포위했으나, 성공의 마부가 대장기를 거두어 활집에 감춘 덕분에 정성공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때 초공왕은 매우 화가 나서 급히 신전 장군 양요기를 불러 빨리 왕의 전차를 구하라고 명했다.

양요기는 초왕의 부름을 받고 서둘러 왔기 때문에 몸에 화살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초공왕이 자기의 전통에서 화살 두 대를 꺼내 주며 말하기를, “과인을 쏜 자는 푸른 전포를 입은 곱슬머리 수염을 기른 자요. 장군은 나를 위해 원수를 갚아 주시오. 장군의 절묘한 활 솜씨로는 많은 화살이 필요 없을 것이오.” 했다. 양요기가 초공왕으로부터 화살을 받아 들고 나는 듯이 전차를 몰아 진나라 진영 쪽으로 달려가서 푸른 전포에 곱슬머리 수염을 한 장군을 찾으니 바로 위기임을 알았다. 양요기가 큰소리로 꾸짖기를, “필부가 무슨 일로 우리의 임금에게 화살을 쏘아 상처를 입혔느냐?” 하니, 위기가 막 그 말에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양요기가 쏜 화살이 날아와서 위기의 목을 정확히 맞추었다. 위기는 화살을 맞고 활집 위에 엎어져 죽었다. 난서가 군사를 끌고 와서 위기의 시신을 빼앗아 돌아갔다. 양요기는 남은 한 개의 화살을 초공왕에게 돌려주면서 아뢰기를, “대왕의 위엄에 의지하여 푸른 전포에 곱슬머리 수염의 적장을 쏘아 죽였습니다.” 하니, 초공왕이 대단히 기뻐하며 자기의 비단 전포를 벗어 양요기에게 주고, 또 낭아전(狼牙箭) 백 개를 하사했다. 초나라 군중에서는 양요기를 양일전(養一箭 ; 양요기의 화살 한 개)이라고 불렀다. 말인즉 두 번째 화살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시에 이르기를, “전차를 달려 호랑이와 같이 산을 내려오니, 진나라 군사가 한번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구나! 만인이 보는 앞에서 명장을 활로 쏘아 죽이니, 화살 한 개로 공을 이루어 개선하고 돌아가네.” 했다.

한편, 진나라 군사는 초나라 군사를 바싹 추격했으나 양요기가 화살을 뽑아 들고 활을 메겨 초나라 진영 앞에 서서 추격하는 진나라 군사를 하나하나 쏘아 죽였기 때문에, 진나라 군사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초나라 장군 공자 영제와 임부가 초공왕이 화살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싸움을 돕기 위해 각기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자 전장은 혼전 상태가 되었고, 진나라 군사가 물러갔다. 난침이 초나라 영윤의 깃발을 멀리서 보고, 공자 영제의 군사임을 알고 진여공에게 청하기를, “신이 예전에 사신의 임무를 띠고 초나라에 갔을 때 초나라 영윤 자중(子重 ; 영제)이 저에게 진나라의 용병하는 전술을 물었습니다. 신은 정제할 ()’자 한가로울 ()’자 두 자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혼전을 하다 보니 그 정제됨()을 보여주지 못했고 비록 각각 후퇴하였으나 한가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제가 행인(외교담당)을 시켜 초나라 장군에게 술 한 통을 보내어 전날의 말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하니, 진여공이 말하기를, “좋은 생각이오.” 했다. 난침이 즉시 행인에게 술통을 들려 영제의 진영으로 가서 바치고 말을 전하게 하기를, “저희 군주께서 인재가 부족하여 이 난침에게 오른쪽에서 창을 잡는 차우 장군에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종군하는 사람을 시켜 저를 대신하여 장군에게 술을 한잔 올리겠습니다.” 했다.

공자 영제는 옛날 난침이 말한 ()과 가()’라는 말을 생각해 내고는 탄식하기를, “나이 어린 장군이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했다. 공자 영제는 난침이 보내 준 술통을 받고 사신을 대하여 술을 마신 후 사신에게 말하기를, “내일 진영 앞에서 면대하여 인사를 올리리다.” 했다. 행인이 돌아와서 영제의 말을 전했다. 난침이 말하기를, “초공왕이 활에 맞았는데도 그 군사가 아직 후퇴할 생각이 없는 듯하니 어찌하지요?” 하니, 묘분황이 말하기를, “전차를 모아 살펴보고, 사졸을 보충하며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병장기를 갈아놓고, 진채는 수리하여 대열을 견고하게 하여 날이 밝기 전에 병사들에게 식사를 배불리 먹여 한 번 결사적으로 싸우게 한다면 어찌 초나라 군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했다. 그때 극주(郤犨)와 난염(欒黶)이 노나라와 위나라에 지원군을 얻기 위해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두 나라가 진나라를 돕기 위해 각기 군사를 일으켜 20리 밖에 이미 왔다고 했다. 초나라 첩자가 이를 탐지하여 초공왕에게 보고했다. 초공왕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진나라 군사도 이미 많은데 노나라와 위나라 군사가 도우러 왔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했다. 즉시 좌우를 시켜 중군 원수 공자측을 불러 상의했다.

 

뒷일이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59: 서동을 총애하여 진나라가 혼란해지고 도안고를 죽여서 조씨가 부흥하다

 

한편, 초나라의 중군 원수 공자 측은 평소에 술을 좋아했다. 그는 한번 마시면 백 잔이 되어도 그만두지 않아서 취하여 하루종일 깨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초공왕은 그의 주벽을 알고 출군할 때마다 반드시 경계하여 술을 못 마시게 했다. 오늘 진()나라 군사와 초나라 군사가 대치하여 공자 측은 대사가 자신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날 초공왕은 화살을 눈에 맞고 진영으로 돌아와서 부끄럽고 분함을 참지 못했다. 공자측이 나와 말하기를, “이미 두 나라 군사들은 피로에 지쳤습니다. 내일 하루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신은 주공의 치욕을 씻을 계책을 조용히 숙고해 보겠습니다.” 했다. 공자측이 중군으로 돌아와 밤이 깊도록 앉아서 계책을 생각했으나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자 측에게 시중드는 곡양(穀陽)이라는 동자가 있었는데, 공자 측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주인이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고 객지에서 보관하고 있던 세 번 빚은 좋은 술을 사발에 데워 드렸다. 공자 측이 냄새를 맡아 보고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술이 아니냐?” 하니, 곡양이 술을 마시고 싶은 주인의 마음을 알고 좌우에서 말을 퍼뜨릴 것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대답하기를, “이것은 술이 아니라 후추탕입니다.” 했다. 공자측도 그 뜻을 짐작하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술맛이 달고 향기로우며 상쾌하여 형언할 수 없었다. 공자측이 묻기를, “후추탕이 더 없느냐?” 하니, 곡양이 말하기를, “더 있습니다.” 했다.

곡양은 다만 후추탕이라며 큰 사발에 가득 따라서 바쳤다.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못한 공자 측은 입으로 오로지 외치기를, “후추탕이 맛있구나. 네가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했다. 술을 가지고 오는 대로 다 마셔서 얼마를 마셨는지 알지 못하고 대취하여 비틀거리다가 자리에 쓰러졌다. 그때 초공왕은 진나라 군사들이 닭이 울 무렵에 출전할 계획이며 노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도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내시를 보내 공자 측을 불러서 응전할 대책을 상의하려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공자 측이 술에 깊이 취하여 잠들었으니 시종들이 부르고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자 측의 입에서 술 냄새를 맡은 내시가 과음이라는 것을 알고, 초공왕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초공왕이 계속해서 십여 차례나 사람을 보내 재촉했지만, 공자 측은 재촉할수록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자 곡양이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본시 원수님을 생각하여 술을 갖다 바쳤는데 도리어 원수님을 해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초공왕이 알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 도망가느니만 못하리라!” 했다. 그때 초공왕은 사마인 공자 측이 오지 않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영윤 영제를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공자 영제는 원래 공자 측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에 아뢰기를, “신은 진()나라 군세가 강하여 반드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나라를 구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사마가 주장한 탓에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 사마가 술을 탐하여 일을 그르쳤으니 신 역시 별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밤을 타 조용히 군사를 거두어 회군하면 패전의 치욕만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초공왕이 말하기를, “일이 비록 이렇게 되었으나 사마가 술에 취해 중군에 있소. 반드시 진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힐 것이니, 그 치욕도 작지 않을 것이오.” 하고, 곧 양요기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의 귀신같은 활을 믿으니 사마를 호위하여 귀국하게 하시오.” 했다. 초공왕은 즉시 조용히 명령을 하달하여 영채를 모두 거두어 퇴군하고, 정성공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 밖에까지 호송했다. 다만 양요기가 남겨 배후를 끊게 했다. 양요기가 생각하기를, “사마가 술에서 깨어나기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 하고, 즉시 좌우에 명하여 공자 측을 부축하여 일으켜 가죽끈으로 수레 위에다 묶고, 군사들에게 먼저 떠난 군사들의 뒤를 쫓아가게 하였다. 양요기 자신은 궁노수 300명을 인솔하고 천천히 후퇴했다.

날이 밝자 진()나라 군사가 진영을 열고 싸움을 걸려고 초나라 진영으로 곧바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빈 막사를 보고 초나라 군사가 이미 달아나 버린 것을 알았다. 난서가 추격하려고 했지만 사섭이 불가하다고 간곡히 말렸다. 첩자가 보고하기를, “정나라가 각 요처에 군사를 배치하고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했다. 난서는 정나라를 함락시킬 수 없음을 헤아리고 개선가를 부르면서 돌아갔다. 노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들도 역시 자기 나라로 되돌아갔다. 한편, 공자 측은 50리쯤 와서 비로소 술이 깼다. 그리고 자기 몸이 단단히 묶여 있음을 알고 크게 외치기를, “어떤 놈이 나를 묶었느냐?” 하니, 좌우에 있던 군사들이 말하기를, “사마께서 술에 취하여 양요기 장군께서 수레 위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이렇게 결박했습니다.” 하고, 급히 가죽끈을 풀었다. 공자 측은 두 눈이 아직도 몽롱하여 묻기를, “이 수레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니, 좌우의 군사들이 말하기를,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했다. 공자 측이 또 묻기를, “어찌하여 돌아가느냐?” 하니, 좌우의 군사들이 말하기를, “지난밤에 초공왕께서 계속해서 사마를 불렀으나, 사마께서는 취하여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초공왕께서 진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면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여 퇴군하는 것입니다.” 했다.

공자 측은 대성통곡하면서 말하기를, “동자 녀석이 나를 망쳤구나!” 하고, 급히 곡양을 불렀으나 이미 도망쳐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초공왕이 2백 리를 가서 추격군의 동정이 없자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초공왕은 공자 측이 자기의 죄를 두려워하여 자살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사자를 보내 명령을 전하기를, “옛날 대부 자옥이 성복에서 패했을 때 성왕께서 군중에 없었기 때문에 자옥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죽었소. 오늘의 싸움에서는 죄가 과인에게 있으니, 사마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오.” 했다. 공자 영제는 공자 측이 죽음을 면할 것을 걱정하여 따로 사람을 시켜 공자 측에게 말하기를, “옛날 대부 자옥이 패하여 어떻게 했는지는 사마도 알고 있는 일이오. 비록 대왕께서 그대를 주살하지 않았지만 사마는 무슨 면목으로 다시 초나라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겠소?” 하니, 공자 측이 한탄하기를, “영윤이 대의로 나를 책망하니 내가 어찌 삶을 탐하겠는가?” 했다. 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초공왕이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이것은 주간왕 11년의 일이었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술 때문에 일을 망친 것을 읊기를, “애꾸눈 군주가 불러 계책을 묻고자 했으나, 영웅이 지게미 더미에 빠져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동자는 주인을 생각하여 오히려 목숨을 잃게 만들었으니. 술이 만 가지 근심을 없앤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진여공(晉厲公)은 초나라를 이기고 돌아오자,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교만하고 사치해졌다. 사섭이 진나라에 반드시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답답함이 병이 되어 의원의 치료를 거부하고 태축(太祝 ; 제사 기도 담당)을 불러 자기를 빨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했다. 그리하여 얼마 되지 않아 죽고, 그의 아들 범개(范匃)가 직위를 이었다. 그때 진나라에서는 서동(胥童)이 교활하고 아첨하여 진여공의 비위를 맞춰 가장 총애를 받았다. 진여공이 서동을 경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빈자리가 없어서 시킬 수가 없었다. 서동이 아뢰기를, “지금 세 극씨(郤氏)가 병권을 잡고 있어, 그 종족의 세력이 너무 커져 거동이 제멋대로이니 앞으로 틀림없이 모반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금 제거하여야 합니다. 만약 극씨 종족을 제거하면 자리가 많이 빌 것이니, 그때 주군께서 아끼는 신하들을 가려서 임명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니, 진여공이 말하기를, “극씨들의 반역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잡아 죽인다면 여러 신하가 아마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했다. 서동이 또 아뢰기를, “언릉 싸움에서 극지가 정성공을 포위하여 두 사람이 전차에서 내려 오랫동안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눈 후 마침내 포위를 풀어 정성공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틀림없이 먼저 초나라와 내통하려는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포로로 잡혀있는 초나라 공자 웅패(熊茷)에게 물어보면 사실을 알 것입니다.” 했다.

진여공이 즉시 서동에게 명하여 웅패를 불러오게 했다. 서동이 웅패에게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초나라에 돌아가고 싶습니까?” 하니, 웅패가 대답하기를, “매우 돌아가고 싶으나 할 수가 없으니 한스럽습니다.” 했다.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부탁한 일을 한 가지 해주면, 마땅히 그대를 귀국시켜 주겠습니다.” 하니, 웅패가 말하기를,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했다. 서동이 마침내 귀에 대고 말하기를, “만약 주군을 뵐 때 극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이러이러하게 대답하면 됩니다.” 하니, 웅패가 응락했다. 서동이 마침내 웅패를 이끌고 조정에 나아가 진여공을 알현했다. 진여공이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웅패에게 묻기를, “극지가 일찍이 초나라와 내통을 했는지 네가 마땅히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그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겠소.” 하니, 웅패가 말하기를, “신에게 죄를 주지 않는다면 신이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했다. 진여공이 말하기를, “사실대로 말하라고 해놓고 어찌 죄를 주겠소?” 하니, 웅패가 말하기를, “극지와 우리나라의 자중(공자 영제)은 이전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여러 번 편지도 주고받았는데, 편지에 말하기를 군주께서 대신들을 믿지 않고 과도하게 음란한 즐거움에 빠져, 백성들이 원망하여 임금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진양공(晉襄公)을 사모하여, 진양공의 손자 주()가 주나라 도읍에 있는데, 후일 진나라와 초나라가 싸울 때 다행히 진나라가 지면, 우리는 양공의 손자 주를 받들어 초나라를 섬기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저만 알고 있는 사실이며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했다.

(살펴보면, 옛날 진양공(晉襄公)의 서장자 담()은 조돈이 영공(靈公)을 추대하자 주나라로 몸을 피신하여 선양공(單襄公)의 문객이 되었다. 후에 담이 아들을 낳았는데 주나라에서 낳았다고 해서 이름을 주()라고 했다. 그때 진영공이 시해되자 백성들이 문공의 치세를 그리워하여 공자 흑둔(黑臀)을 맞이하여 진나라 군주로 세웠다. 흑둔은 진경공(晉景公) ()에게, 진경공 유()는 진여공(晉厲公) 주포(州蒲)에게 군위를 전하여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진여공 주포(州蒲)가 황음무도하고 자식을 낳지 못하자 진나라 사람들이 다시 진양공(晉襄公)의 치세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동이 웅패에게 교사하여 양공의 손자 주()를 데려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위증하여 진여공의 마음을 흔들게 했다.) 웅패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서동이 중간에 나서서 말하기를, “지난번 언릉 싸움에서 또 이상한 일은 극주(郤犨)와 영제(嬰齊)가 대치하고 있는 중에도 화살 한 발 쏘지 않았으니, 그들이 서로 내통한 정황을 알 수 있습니다. 극지(郤至)가 정나라 군주를 놓아준 것은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주공께서 만약 믿지 않으신다면 어찌하여 극지를 주나라에 보내어 승첩을 올리고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과연 음모를 꾸민다면 반드시 공손 주(公孫周)와 사사로이 만날 것입니다.” 했다. 진여공이 말하기를 그 계책이 매우 합당하다.” 하고, 즉시 극지를 주나라에 보내 초나라에 이긴 승전보를 올리게 했다.

서동이 몰래 사람을 보내 공손 주에게 말하기를, “()나라 정사의 절반은 극씨(郤氏)들에게 있습니다. 지금 온계(溫季 ; 극지)가 왕도에 가서 언릉 싸움의 승첩을 천자께 올리려 하니, 어찌 만나보지 않겠습니까? 후일에 공손께서 고국에 돌아오실 때를 대비하여 서로 알아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했다. 공손주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극지가 주나라에 도착하여 공무가 끝나자 공손 주가 공관에 가서 서로 인사를 했다. 공손 주는 본국의 일을 상세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고, 극지는 하나하나 대답하여 반나절이나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진여공이 보낸 사람이 그 일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했다. 웅패가 한 말이 과연 사실이었다. 마침내 극지를 제거할 뜻을 굳히고 아직 그 뜻을 밝히지 않았다. 어느 날 진여공이 부인과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사슴고기 요리를 찾았다. 내시 맹장(孟張)을 시켜 시장에 가서 사슴을 구해 오라고 했다. 시장에도 마침 구할 수 없었다. 그때 극지가 성 밖에서 잡은 사슴 한 마리를 수레에 싣고 성안으로 들어와 지나갔다. 맹장이 설명할 것도 없이 그 사슴을 빼앗아 갔다. 극지가 대로하여 화살을 쏘아 맹장을 죽이고 사슴을 되찾았다.

진여공이 듣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계자(극지)라는 놈이 나를 몹시 업신여기는구나!” 하고, 곧 서동과 이양오(夷羊五)등 여러 총신을 불러 극지를 죽일 것을 의논했다. 서동이 말하기를, “극지를 죽이면 극기(郤錡), 극주(郤犨)가 반드시 반역을 할 것입니다. 한꺼번에 제거하는 게 좋습니다.” 하니, 이양오가 말하기를, “궁궐 군사와 사병이 약 800명인데, 주군의 명으로 밤에 거느리고 가서 준비가 안 된 극씨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했다. 장어교(長魚矯)가 말하기를, “극씨 세 집안의 사병이 궁궐의 갑사보다 두 배가 더 많아서 싸우면 이길 수 없습니다. 화가 주군께 미치게 됩니다. 얼마 전에 극지가 사구(司寇)의 직을 겸했고, 극주가 또 사사(士師)를 겸했습니다. 우리가 거짓으로 송사를 벌여서 그들에게 나아가 기회를 보아서 찌르고 그대들이 군사를 이끌고 접응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진영공이 말하기를, “묘한 계책이다! 나는 장사 청비퇴(淸沸魋)를 시켜 너희를 돕겠다.” 했다. 장어교는 그날이 바로 극씨들이 강무당(講武堂)에 모여 일을 의논하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그는 청비퇴와 함께 각기 닭 피를 얼굴에 바르고 각자 날카로운 칼을 지니고 마치 서로 죽이려고 싸우는 사람처럼 서로 엉켜서 강무당에 이르러 옳고 그름을 판결해 달라고 고소했다.

극주가 그 음모를 모르고 자리에 앉아 물었다. 청비퇴가 거짓으로 고하는 척 하며, 몸이 극주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칼을 뽑아 극주를 찔렀다. 극주는 허리에 칼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곁에 있던 극기가 급히 칼을 빼서 청비퇴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장어교가 달려들어 극기를 가로막아 두 사람이 강무당 아래에서 싸웠다. 극지가 그 틈을 타서 뛰어나가 수레를 타고 달아났다. 청비퇴가 극주를 다시 한번 칼로 찔러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극기를 협공했다. 극기는 비록 무장이었으나 천근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청비퇴와, 젊고 손이 빠른 장어교 두 사람을 자기 혼자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었다. 극기도 역시 청비퇴의 칼에 찔려서 쓰러졌다. 장어교가 도망치는 극지를 보고 말하기를, “이거 야단났소! 내가 저놈을 추격해야겠소.” 했다. 세 극씨가 같은 날 죽게 될 운명이었던지 극지가 수레를 타고 달아나다가, 마침 8백 명의 무사를 이끌고 오는 서동과 이양오와 마주쳤다. 그들은 일제히 큰소리로 외치기를, “주군의 명이다. 모반한 극씨를 잡아라. 놓쳐서는 안 된다.” 했다.

극지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수레를 돌리자 장어교와 마주치게 되었다. 장어교가 몸을 솟구쳐 수레에 뛰어올랐다. 극지가 이미 황망하여 미쳐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장어교의 칼에 무수히 찔렸다. 장어교는 극지의 목을 잘랐다. 청비퇴도 극기와 극주의 목을 잘라서 가지고 왔다. 그들은 피가 뚝뚝 흐르는 세 사람의 수급을 들고 궁궐로 들어갔다. 증거하는 시에 이르기를, “무도한 혼군에 망나니 신하로다. 못된 총신들이 조당을 함부로 어지럽히니, 어느 날 아침에 참소하는 말을 듣고, 연무당(演武堂) 앞을 전쟁터로 만들었구나!” 했다. 한편, 상군 부원수 순언(荀偃)은 상군 원수 극기가 연무당에서 도적을 만나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누가 그랬는지 모르고 있었다. 순언은 즉시 수레를 몰아 입조하여 주군께 아뢰고 도적들을 토벌하려고 했다. 중군 원수 난서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서로 만나 조문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서동이 이끄는 군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난서와 순언이 부지중에 크게 노하여 꾸짖기를, “나는 어떤 놈들이 변란을 일으켰나 했더니 바로 쥐새끼 같은 네 놈들이었구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위엄 있는 곳에 감히 갑사들을 데리고 가까이 오다니, 빨리 군사들을 해산시키지 못하겠느냐?” 하니, 서동이 대답하지 않고 즉시 무사들을 향하여 소리치기를, “난서와 순언은 세 극씨와 같이 반역을 꾀한 자들이다. 우리가 잡으면 큰상이 있을 것이다.” 했다.

무사들이 용기를 내어 덤벼들어 난서와 순언을 에워싸서 조당으로 끌고 갔다. 진여공이 장어교 등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어전에 나가서 무사들이 떠드는 것을 보고, 놀라서 서동에게 묻기를, “죄인들이 이미 죽었는데 무사들을 왜 해산시키지 않는가?” 하니, 서동이 아뢰기를, “반역자의 일당인 난서와 순언을 잡아 왔습니다. 주공께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했다. 진여공이 말하기를, “이번 일은 난서와 순언과는 무관한 일이다.” 하니, 장어교가 진여공 앞에 무릎을 꿇고 몰래 아뢰기를, “난서와 극씨들은 공을 함께 세운 한 몸 사이이며 순언 또한 극기의 부원수입니다. 세 극씨가 모두 주살되었으니 난서와 순언도 반드시 불안함을 느껴 머지않아 극씨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주공께서 오늘 두 사람을 죽이지 않으신다면 조정은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진여공이 말하기를, “하루아침에 삼경을 죽였는데 또다시 다른 종족에게 파급시키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하고, 즉시 난서와 순언은 죄가 없다며 용서하고 원래의 직을 유지시켜서 돌려보냈다. 난서와 순언은 은혜에 감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장어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주군이 두 사람을 차마 죽이지 못했으나, 두 사람은 주군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하고, 즉시 서융으로 달아나 버렸다.

진여공이 무사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세 극씨의 시신을 조문에 늘어놓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장례를 지낼 수 있게 했다.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극씨 종족들은 겨우 죽음을 면하여 모두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내려갔다. 서동이 상군 원수가 되어 극기의 자리를 대신하고, 이양오가 신군 원수가 되어 극주의 자리를 대신했으며, 청비퇴가 신군 부원수가 되어 극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초나라 공자 웅패도 석방하여 초나라로 돌려보냈다. 서동이 육경 중의 한 명이 되니, 난서와 순언이 그와 함께 일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매번 병이라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서동은 진여공의 총애를 믿고 못하는 짓이 없었다. 하루는 진여공이 서동과 함께 총신 장려씨(匠麗氏)의 집으로 놀러 갔다. 그 집은 태음산(太陰山) 남쪽에 있는데, 강성(絳城)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진여공이 거기에서 3일 밤을 자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순언이 몰래 난서에게 말하기를, “주군의 무도함은 그대도 알 것이오. 우리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아서, 지금 당장은 연명하고 있지만, 후일 서동 등이 의심하여 다시 우리가 원망하고 있다고 모함하면, 세 극씨가 당한 화를 끝내 면하지 못할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소.” 했다.

난서가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순언이 말하기를, “대신의 도리에는 사직이 중하고 군주는 가볍습니다. 지금 우리 진()나라 백만대군을 그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상할 수 없는 일을 일으켜 어진 군주를 세우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소?” 했다. 난서가 말하기를, “일을 일으키면 틀림없이 성공하겠소?” 하니, 순언이 말하기를, “용이 연못에 있으면 아무도 엿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연못을 떠나 뭍에 나오면 삼척동자라도 용을 잡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주군이 장려씨 집에 놀러 가서 3일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연못을 떠난 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일이 성공하기를 의심하겠소?” 했다. 난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종족은 대대로 진()나라에 충성했는데, 오늘 사직의 존망을 위해서 부득이 이 계책을 내었으나, 후세에 반드시 나를 주군을 죽인 자라고 할 것이니, 나 또한 어쩔 수 없구나!” 했다. 그들은 상의한 후에 문득 병이 나았다고 칭하고 군주를 뵙고 중요한 일을 의논해야겠다고 했다. 미리 아장 정활(程滑)을 시켜 무장병 300명을 태음산 좌우에 매복시켰다. 두 사람이 장려씨의 집에 이르러 진여공을 뵙고 아뢰기를, “주공께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놀러 나와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시니 신하와 백성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 등이 특별히 와서 주군의 어가를 모시고 조정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하니, 진여공이 억지를 부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어가를 타고 출발했다. 서동이 앞에 서고 난서와 순언이 뒤따랐다.

행렬이 태음산 아래 이르렀을 때 포 소리가 한번 울리더니 복병이 일제히 달려 나왔다. 정활(程滑)이 먼저 서동을 베어 죽였다. 진여공이 크게 놀라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난서와 순언이 무사에게 분부하여 진여공을 잡아오게 했다. 태음산 아래에 영채를 짓고 진여공을 군중에 가두었다. 난서가 말하기를, “범씨(范氏)와 한씨(韓氏) 두 집안 사람들이 앞으로 다른 소리를 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군주의 명령을 가장하여 부릅시다.” 하니, 순언이 말하기를, “좋은 생각이오.” 했다. 이에 날랜 수레 두 대를 보내어 사개(士匄 ; 범개)와 한궐 두 장수를 부르러 보냈다. 사자가 사개의 집에 도착하니, 사개가 묻기를, “주공께서 무슨 일로 나를 부르시는가?” 했다. 사자가 대답을 못하자, 사개가 말하기를, “수상한 일이로구나!” 하고, 즉시 심복을 보내 한궐이 갔는지 어떤지 탐문하게 했다. 한궐은 먼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고 했다. 사개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의 의견은 대략 같다.” 했다. 난서가 사개와 한궐이 모두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순언에게 묻기를,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순언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는데 어찌 내리려고 하시오?” 하니, 난서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 뜻을 알아들었다.

그날 밤에 정활에게 명하여 진여공에게 짐주(독주)를 바쳤다. 진여공이 그것을 마시고 죽었다. 곧 군중에서 염을 한 후에 익성(翼城)의 동문 밖에 장사지냈다. 사개와 한궐은 진여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같이 성을 나와 문상을 하였으나 임금이 어떻게 죽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진여공의 장례가 끝나자 난서가 여러 대부들을 모아, 누구를 군주로 세워야 하는지를 의논했다. 순언이 말하기를, “세 극씨가 죽은 것은 공손 주를 모셔다 군주의 자리에 앉히려 한다고 서동이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영공이 도원에서 죽자 진양공의 후사는 마침내 끊어졌습니다. 하늘의 뜻이 (공손 주에게) 있으니, 마땅히 가서 모셔 와야 합니다.” 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기뻐했다. 난서는 즉시 순앵을 주나라 도읍에 보내 공손 주를 모셔와서 진()나라 군주로 세우기로 했다. 그때 공손 주는 나이가 14살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지략이 출중했다. 순앵이 모시러 온 것을 보고 국내 사정을 자세히 물어본 후, 그날로 선양공(單襄公)을 하직하고, 순앵과 함께 진()나라로 돌아왔다. 공손 주의 행렬이 청원(淸原)이라는 곳에 이르자, 난서, 순언, 사개, 한궐 등의 대부들이 모두 모여 영접했다.

공손 주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과인은 타국에서 생장한 사람이며 그렇다고 고국에 돌아오기를 원한 것도 아니오. 그러니 어찌 군주가 되기를 바랐겠소? 군주가 존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오. 만일 이름뿐인 군주로 받들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군주는 없는 편이 낫소. 경 등이 과인의 명령을 따르겠다면 오로지 오늘 중에 결정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다시 다른 사람을 찾아서 모시기 바라오. 나는 허울뿐인 이름을 갖고 있었던 주포(州蒲 ; 진여공)처럼 되지는 않겠소.” 했다. 난서 등이 모두 몸을 떨면서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여러 신하는 어진 임금을 받들어 모시기를 원하옵니다. 감히 전하의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했다. 공손 주 앞에서 물러 나와서 난서가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새 주군은 옛날 진여공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마땅히 조심해서 모셔야겠습니다.” 했다. 공손 주가 신강성에 입성하여 태묘에 고하고 진()나라 군주 자리를 이었다. 이가 진도공(晉悼公)이다. 즉위한 다음 날, 즉시 이양오와 청비퇴 등을 불러다 임금을 잘못 모신 죄를 꾸짖었다. 좌우에 명하여 조문 밖으로 끌어내어 참수하게 하고, 그 종족들은 모두 국경 밖으로 추방했다. 또한 진여공을 죽인 죄를 정활에게 물어 시장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도록 하였다. 난서가 깜짝 놀라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그는 늙었다고 벼슬을 그만두고 한궐을 자기의 후임으로 천거했다. 오래지 않아 놀라고 근심하여 병이 들어 죽었다. 진도공이 평소에 한궐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한궐을 중군 원수로 삼아 난서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한궐이 감사의 말을 드린다는 핑계로 도공에게 몰래 아뢰기를, “신 등은 모두가 선대의 공로에 힘입어 군주의 좌우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대의 공로로는 조씨보다 큰 집안이 없습니다. 조쇠가 진문공을 보좌했고, 조돈이 진양공을 보좌하여 모두 충성을 바치고 정성을 다하여 나라에 위엄을 갖추게 하여 패업을 이루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진영공께서 실정을 하고 간신 도안고를 총애하여 조돈을 죽이려고 하자, 달아나 겨우 면했습니다, 진영공은 군사들의 반란을 맞아 도원에서 피살되고, 진성공, 진경공이 이었으나 역시 도안고를 총애했습니다. 도안고는 조돈이 이미 죽었으므로 조씨에게 시역의 죄를 덮어씌워 그 죄를 다스린다고 조씨 종족을 멸절시켜 버렸습니다. 신하와 백성들이 그 일을 원망하여 지금도 불평합니다. 천행으로 조씨의 유복자 조무(趙武)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주공께서 지금 공을 상주고 죄를 벌하여 진나라 정사를 크게 고치시니. 이미 이양오 등의 죄는 벌하여 바로 잡으셨으면서 어찌 조씨의 공로에 대해서는 추가하여 살피지 않으십니까?”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그 일에 대하여는 나도 역시 선친에게서 들었소. 지금 조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한궐이 대답하기를, “당시 도안고가 조씨고아를 아주 급하게 찾았지만, 조씨의 문객 공손저구와 정영이 조씨고아를 구하고자, 공손저구는 정영의 갓난아이를 안고 스스로 도안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무를 위급한 지경에서 빼내었습니다. 정영이 고아 조무를 데리고 우산(盂山)에 가서 숨은 지 이제 15년이 되었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경이 과인을 위해서 그들을 불러오시오.” 하니, 한궐이 아뢰기를, “도안고가 아직 조정에 있으니, 주공께서는 반드시 이 일을 비밀에 부치셔야 합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알겠소!” 했다. 한궐이 진도공에게 인사를 드리고 궁문을 나가서 몸소 수레를 몰아 우산으로 조무를 맞이하러 갔다. 15년 전에 정영이 수레를 몰아 강성(絳城)을 나갔다가, 지금 신강성(新絳城)으로 돌아오니 성곽이 모두 달라서 정영의 마음은 감상에 젖었다. 한궐이 조무를 데리고 내궁으로 들어가서 진도공을 뵈었다. 진도공은 조무를 내궁에 감춰두고 자기는 거짓으로 병이 났다고 했다. 다음날 한궐이 백관들을 인솔하고 궁궐에 들어가서 문안을 올렸다. 도안고 역시 백관들 중에 있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경들은 내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아시오? 조정의 공적부에 분명치 않은 일이 있어 그 일로 불쾌하여 병이 났소!” 했다.

여러 대부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묻기를, “공적부에 분명하지 않은 일이 무엇입니까?” 하니, 진도공이 말하기를, “조쇠, 조돈 부자는 나라에 공을 세웠는데 어찌하여 그 집안의 종사가 끊어졌소?” 했다. 여러 사람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조씨 집안이 멸족된 것은 이미 15년 전 일입니다. 이제 주공께서 비록 조씨 집안의 공로를 추모하여 상을 주시려고 해도 그 후손이 없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즉시 조무를 불러내어 여러 신하에게 두루 인사를 드리게 했다. 여러 신하가 묻기를, “이 젊은이는 누구입니까?” 하니, 한궐이 말하기를, “이 젊은이가 이른바 조씨고아 조무입니다. 지난날 죽은 조씨고아는 바로 조씨 집안의 문객 정영의 아들이었습니다.” 했다. 도안고는 이때 넋이 나가고 얼이 빠져서 아무말도 못하고 땅에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도안고가 저지른 일이오. 지금 도안고를 족멸(族滅)하지 않고는 어찌 지하에 있는 조씨들의 원혼을 위로할 수 있겠소?” 하고, 좌우에 외치기를, “도안고를 결박해서 밖으로 끌고 나가 참수하라!” 했다. 즉시 한궐에게 명하여 조무와 같이 군사를 끌고 가서 도안고의 집을 포위하여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라고 했다.

조무가 도안고의 수급을 청하여 조삭의 묘에 바쳐 제사지냈다. 나라 안의 백성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잠연(潛淵) 선생의 영사시에 이르기를, “전날에는 도안고가 조씨를 멸했는데, 이제는 조씨가 도씨를 멸했구나. 15년 동안의 세월을 다투어, 원한을 원한으로 원수를 원수로 갚았도다!” 했다. 진도공은 이미 도안고를 처형하고 즉시 조무를 조당에 불러 관을 씌워 주고 사구(司寇)로 임명하여 도안고의 벼슬을 대신하게 했다. 그리고 옛날 조씨의 전답과 녹봉을 모두 돌려줬다. 또 정영의 의리를 듣고 그를 군정(軍正 ; 군 법무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정영이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조씨를 따라 죽지 않은 이유는 조씨의 고아를 돌봐 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미 조씨의 관직이 복구되고 원수도 갚았으니 어찌 내가 스스로 부귀를 탐하여 공손저구만 홀로 죽게 하겠는가? 나는 지하에 있는 공손저구에게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조무가 그 시체를 어루만지면서 통곡했다. 진도공에게 청하여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공손저구와 함께 운중산(雲中山)에 묻었다. 사람들이 그 무덤을 두 의인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조무가 정영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시가 있어 증거하기를, ”깊은 골짜기에 숨은 지 15년 만에, 바지 속에 숨겼던 아이가 문중의 원한을 갚았다. 정영과 공손저구를 한 쌍의 의로운 사람이라고 일컬으니, 한번 죽었는데 어찌 선후를 묻겠는가?” 했다.

한편, 진도공이 이미 조무를 다시 세워주고, 곧 송나라에 망명한 조승을 불러서 한단의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지위를 크게 바로잡아 어진 이는 높여서 존중하고, 재능 있는 자는 기용하며, 전날의 공로를 기록하고, 작은 죄는 용서하며, 많은 관리가 각각 능력과 자격에 따라 벼슬을 받았다. 그중에서 유명한 관원만 열거해 보면, 한궐이 중군 원수가 되고, 사개가 부원수 됐으며, 순앵(荀罃)이 상군 원수가 되고, 순언이 부원수가 되었으며, 난염(欒黶)이 하군 원수가 되고, 사방(士魴)이 부원수가 되었으며, 조무가 신군 원수가 되고, 위상이 부원수가 되었으며, 기해(祁奚)가 중군위가 되고 양설직이 부위(副尉)가 되었으며, 위강(魏絳)이 중군 사마가 되고, 장로(張老)가 후엄(候奄 ; 정찰 담당)이 되었으며, 한무기(韓無忌)는 공족대부(公族大夫)가 되고, 사악탁(士渥濁)은 태부(太傅)가 되었으며, 가신(價辛)은 사공(司空)이 되고, 난규(欒糾)는 친군융어(親軍戎御)가 되었으며, 순빈(荀賓)이 차우장군(車右將軍)이 되고, 정정(程鄭)이 찬복(贊僕)이 되었으며, 탁알구(鐸遏寇)는 여위(輿尉)가 되고, 적언(籍偃)은 여사마(輿司馬)가 되었다. 여러 벼슬이 갖추어지자 국정이 크게 쇄신되었다. 체납한 세금을 면제하고 부세를 가볍게 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부역을 줄여주었다. 쇠잔한 것을 일으키고 막힌 것을 뚫고, 홀아비와 과부를 돌봐 주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송나라과 노나라 등이 그 소식을 듣고 조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직 정성공만은 초공왕이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한쪽 눈을 잃은 것에 감복하여 진()나라를 섬기지 않았다.

한편, 초공왕은 진여공이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희색이 만면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새 군주가 자리를 이어 상벌을 분명히 하고 어진 이를 기용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조정에 기강이 서고 나라 안팎으로 인심을 얻어 다시 패업(覇業)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이 수심으로 변했다.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상의하기를, 중원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진()나라가 패업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 영윤 영제(嬰齊)가 별다른 계책을 내지 못하자 공자 임부(公子壬夫)가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중원의 나라 중에 오직 송나라가 작위도 높고 나라도 큽니다. 게다가 위치가 진()나라와 오나라 사이에 있어, 지금 우리가 진나라의 패업을 방해하려면 반드시 송나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송나라 대부 어석(魚石), 상위인(向爲人), 인주(鱗朱), 상대(向帶), 어부(魚府) 등 다섯 사람이 송나라 우사 화원을 미워하여 지금 초나라로 도망쳐 와 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병력을 주어서 송나라를 치게 하여 송나라 도읍을 얻게 되면 그들에게 봉하겠다고 하십시오. 이것은 적을 이용하여 적을 치는 계책입니다. ()나라가 만약 구하지 않으면 제후들의 신임을 잃게 되며, 만약 송나라를 구하러 오면 반드시 어석(魚石) 등을 공격하게 되니, 우리는 앉아서 그 성패를 관망하면 되니, 또한 한 계책입니다.” 했다. 초공왕은 이에 그 계책을 써서, 임부를 대장으로 삼고, 어석 등을 향도로 삼아 대군을 거느리고 송나라로 쳐들어갔다.

 

승부가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60: 지무자(순앵)가 군사를 나누어 적군을 지치게 하고, 복양성 싸움에서 세 장수가 힘을 다투다.

 

한편, 주간왕 13(기원전 572) 여름 4월에 초공왕은 우윤 공자 임부의 계책을 받아들여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정성공과 함께 송나라를 쳤다. 어석 등 송나라 다섯 대부를 향도로 삼아 팽성(彭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초공왕은 어석 등에게 전차 300 대를 주어 팽성을 지키게 했다. 초공왕이 다섯 대부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오나라와 국교를 맺어서 초나라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다. 팽성은 오나라와 진나라가 왕래하는 길목이다. 지금 많은 군사를 주둔시켜 그대들을 돕게 하였으니, 앞으로 나아가 싸우면 송나라 땅을 잘라서 봉읍을 만들 수 있고, 물러나서 지키면 또한 오나라와 진나라의 왕래를 막을 수 있다. 그대들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일을 맡아 과인의 부탁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초공왕은 초나라로 돌아갔다. 그해 겨울 송성공(宋成公)은 대부 노좌(老佐)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팽성을 포위했다. 어석이 수비병을 거느리고 송나라 군사를 맞아서 싸웠으나 노좌에게 패했다. 초나라 영윤 공자 영제가 팽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군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노좌는 용맹을 믿고 적을 얕잡아 보고 초군 진영에 깊이 들어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영제가 마침내 군사를 진격시켜 송나라 도성으로 쳐들어갔다. 송성공이 크게 놀라 우사 화원을 진나라에 보내 위급함을 고했다.

한궐이 진도공에게 말하기를, “옛날 진문공(晉文公)께서 방백이 된 것은 송나라를 구원하고부터였습니다. 흥망성쇠의 계기도 지금 이 거사에 달려 있으니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했다. 이에 사자들을 각국에 보내어 제후들에게 군사를 소집하게 했다. 진도공이 친히 대장 한궐, 순언, 난염 등을 거느리고 먼저 태곡(台谷)에 진을 쳤다. 공자 영제는 진()나라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곧 군사를 거두어 초나라로 돌아갔다. 다음 해 주간왕 14년에 진도공이 송(), (), (), (), (), (), (), () 등 여덟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하여 팽성을 포위했다. 송나라 대부 상술(向戌)이 사졸을 시켜 망루 차에 오르게 해서 성 위의 사면를 향해 외치게 하기를, “어석 등 군주를 배반한 도적놈들을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진나라 20만 대군이 외로운 성을 밟아 깨뜨려서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이 만약 하늘의 순리를 안다면 어찌 역적을 잡아서 항복하여 무고하게 도륙당함을 면하지 않느냐?” 했다. 이렇게 성 주위를 몇 바퀴 도니, 팽성의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 어석의 잘못을 알아서 성문을 열고 진나라 군사에게 항복했다.

이때 초나라 수비군이 비록 많았지만, 어석 등이 잘 보살피지 않아서 아무도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았다. 진도공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성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한궐은 어석을 사로잡고, 난염과 순언은 어부(魚府)를 생포했으며, 송나라 상술은 상위인(向爲人)과 상대(向帶)를 사로잡았고, 노나라의 중손멸(仲孫蔑)은 인주(鱗朱)를 잡아서 각기 끌고 와 진도공에게 바쳤다. 진도공이 다섯 대부를 참수에 처하고, 그 족속들은 황하 동쪽의 호구(壺邱)라는 땅에 안치했다. 마침내 군사들을 정나라로 이동시켜 그 죄를 묻고자 했다. 초나라 우윤 임부(任夫)가 정나라를 구하려고 송나라를 공격하자, 제후들의 연합군이 돌아와 송나라를 구했고, (초나라 군사가 퇴각하자) 그로 인해 각기 흩어져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해에 주간왕이 죽고, 세자 설심(泄心)이 즉위하니. 이가 주영왕(周靈王)이다. 주영왕은 태어날 때부터 콧수염이 있어서 주나라 사람들이 그를 자왕(髭王)이라고 불렀다. 자왕 원년(기원전 572) 여름에 정나라 성공의 병이 위독하여 상경 공자 비(公子騑)를 불러 당부하기를, “초나라 군주가 우리나라를 구하려다가 한쪽 눈을 잃었소. 나는 그 은혜를 감히 잊을 수가 없소. 내가 죽은 후에도 경들은 절대로 초나라에 등을 돌리지 마시오!” 하고, 죽었다. 공자 비 등이 세자 곤완(髡頑)을 받들어 정나라의 군주 자리에 앉혔다. 이가 정희공(鄭僖公)이다.

진도공은 정나라가 복종하지 않자 제후들을 척()에 초청하여, 이 일을 상의했다. 노나라 대부 중손멸(仲孫蔑)이 계책을 내놓기를, “정나라에서 제일 험한 땅은 호뢰(虎牢)인데 초나라와 정나라가 서로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입니다. 이곳에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한 후에 많은 군사를 주둔시켜 압박을 가하면 정나라는 틀림없이 복종할 것입니다.” 했다. 초나라의 항장 무신도 계책을 내어 말하기를, “오나라와 초나라는 하나의 강물로 서로 통합니다. 신이 지난날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우리와 같이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조했습니다. 오나라 사람이 여러 번 초나라의 속국들을 침략하여 초나라 사람이 고초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약 다시 사신을 보내 오나라로 하여금 초나라를 치게 한다면 초나라는 동쪽으로 오나라 군사를 괴로워할 것이니, 어찌 북쪽으로 우리와 정나라를 놓고 다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진도공은 두 사람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그때 제나라 영공(靈公)은 자기 대신 세자 광()과 상경 최저(崔杼)를 함께 척 땅의 회맹에 참석시켜 진나라의 명을 듣게 했다. 진도공은 아홉 나라 제후들의 군사를 규합하여 호뢰에다 큰 성을 쌓게 하고 돈대(墩臺)를 돋우었다. 제후국들 중에서 대국은 1000, 소국은 500에서 300명씩 군사들을 차출하여 호뢰성을 함께 지켰다. 정희공이 과연 두려워하여 진()나라에 비로소 화친을 청했다. 진도공은 정나라와의 화친을 허락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때 중군위(中軍尉) 기해가 나이 칠십여 세라 은퇴를 하겠다고 했다. 진도공이 묻기를, “누가 경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하니, 기해가 대답하기를, “해호(解狐)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해호는 경의 원수라고 하던데 어찌하여 그를 천거하시오?” 하니, 기해가 대답하기를, “주군께서는 적임자를 물으셨지, 신의 원수를 묻지 않았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이에 해호를 불렀으나, 관직에 임명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진도공이 다시 기해에게 묻기를, “해호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하니, 기해가 말하기를, “그다음은 기오(祁午)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기오는 경의 아들이 아닙니까?” 하니, 기해가 대답하기를, “주군께서는 적임자를 물으셨지, 신의 아들을 묻지 않았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지금 중군 부위 양설직(羊舌職)도 죽었으니, 경이 그를 대신할 사람도 선택하시오.” 하니, 기해가 말하기를, “양설직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과 힐()이라고 합니다. 둘 다 모두 어질어서 주군께서 쓸 수 있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그 말에 따라 기오를 중군위로 하고, 양설적(羊舌赤)을 중군 부위로 임명했다. 여러 대부가 기뻐하며 승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야기가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무신(巫臣)의 아들 무호용(巫狐庸)은 진도공의 명을 받아 오나라에 가서 오왕 수몽(壽夢)을 만나 오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청했다. 수몽이 허락하여 세자 제번(諸樊)을 대장으로 삼아 강구(江口)에서 수군을 훈련시켰다. 첩자가 이 사실을 초나라에 보고했다. 초나라 영윤 공자 영제가 아뢰기를,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침범한 적은 아직 없었습니다. 만약 한 번 우리나라 경계를 침범하면 후에 다시 올 것입니다. 먼저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초공왕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공자 영제가 수군을 크게 사열한 후에 정예병 2만 명을 뽑아 장강을 거쳐 구자(鳩玆)를 습격하여 점령하고 마침내 장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오려고 했다. 사납고 용감한 장수 등요(鄧廖)가 나아가 말하기를, “장강은 물살이 세차서 나아가기는 쉽지만 물러나기는 어렵습니다. 소장에게 한 무리의 군사를 주시면, 앞서가서 싸움에서 이기면 진격하고 져도 크게 꺾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수께서는 학산기(郝山磯)에 주둔하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변화에 응하면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공자 영제가 그 계책을 옳게 여겨, 무장병 300명과 명주 전포로 무장한 군사 3000명을 골라 주었는데, 모두 용감하고 힘이 세어 혼자서 열 명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크고 작은 배 100척이 한 번 포 소리를 울리면서 뱃머리를 동쪽으로 향하여 나아갔다. 어느새 오나라 정탐선이 구자가 함락된 소식을 오나라 세자 제번에게 보고했다.

제번이 말하기를, “구자가 이미 함락되었으니 초나라 군사가 반드시 승세를 타고 동진해 올 것이다. 마땅히 미리 준비해야겠다.” 하고, 이에 공자 이매(夷昧)를 시켜 전선 수십 척을 거느리고 양산(梁山)의 동쪽과 서쪽에서 적을 유인하게 하고, 공자 여제(餘祭)는 채석항(采石港)에 매복하게 했다. 등요의 초나라 군사가 학산기를 지나 양산 쪽에 전선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앞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갔다. 이매가 싸우는 척하다가 곧 거짓 패하여 동쪽으로 달아났다. 등요가 추격하여 채석기(采石磯)를 지나자 제번의 대군과 만나 곧바로 접전했다. 십여 합이 되지 않아서 채석항 속에서 포성이 크게 울리며 여제의 복병이 뒤에서 협공을 해와, 앞뒤에서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졌다. 등요는 얼굴에 화살을 세 발이나 맞았으나 뽑아버리고 힘을 다해 싸웠다. 이매가 큰 전선을 타고 이르러 함상의 정예 용사들이 큰 창으로 적선을 짓찧어 배들이 많이 전복되어 가라앉았다. 등요는 힘이 다하여 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나머지 초나라 군사 중 도망간 자는 오직 무장병 80명과 명주 전포를 입은 군사 300명뿐이었다. 공자 영제는 패전의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패전을 숨기고, 구자의 승리를 공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리오. 오나라 세자 제번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오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진격하여 구자의 초나라 본영을 습격하니, 공자 영제가 대패하여 돌아가고, 구자는 다시 오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공자 영제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병을 얻어 영도(郢都)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침내 죽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오나라 사람에게 전차전과 궁술을 가르쳐서, 이로써 초나라 동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초나라의 무장병이 포로가 되고 명장이 죽은 것은, 지난날 무신의 종족들을 무고하게 죽였기 때문이었다.” 했다. 초공왕은 이에 우윤 임부(任夫)를 올려 영윤으로 삼았다. 임부는 천성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초나라의 속국에 재물을 요구했다. 진성공(陳成公)이 참지 못하고 원교(轅僑)를 진()나라에 사자로 보내 복속하기를 청했다. 진도공이 계택(鷄澤)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다시 척()에서 제후들과 재차 회맹했다. 오나라 군주 수몽도 그 회합에 참석했다. 이로써 진()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위세는 크게 떨쳤다. 초공왕은 진()나라가 초나라를 등진 것에 분노하여 그 죄를 임부에게 물어 죽였다. 초공왕은 그 동생 자낭(子囊) 공자 정(公子貞)을 영윤으로 삼아 그 뒤를 잇게 했다. 초공왕은 군사를 대대적으로 사열하고 전차 500대를 동원하여 진()나라를 정벌했다. 그때 진성공(陳成公) 오사(午巳)가 죽고, 세자 약()이 뒤를 이으니, 이가 진애공(陳哀公)이다. 진애공은 초나라 군사의 위세에 겁을 먹고, 다시 초나라에 돌아와 붙었다. 진도공(晉悼公)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를 얻기 위해 초나라와 싸우려 했으나, 그때 갑자기 무종국(無終國) 군주 가보(嘉父)가 대부 맹락(孟樂)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호랑이와 표범 가죽을 각각 100장씩을 바쳤다.

그리고 아뢰기를, “산융의 여러 나라는 제환공이 정복한 이래 지금까지 평온했으나, 요즘 연나라와 진()나라의 국력이 약해지자 산융이 중원에 방백이 없어진 틈을 타서 다시 침략을 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군주께서는 진()나라 군주께서 영명하시어 장차 제환공과 진문공의 패업을 계승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나라의 위엄과 덕을 선전한 결과 융족의 여러 나라가 진정으로 맹약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저희 군주께서 저를 귀국에 보내어 군주님의 명을 받들게 하였으니 부디 가부간 결정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진도공이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상의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융적(戎狄)은 친할 수가 없으니, 정벌함이 옳습니다. 옛날 제환공이 방백으로 있을 때 먼저 산융을 정벌하고, 그 후에 다시 남쪽 초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승냥이 같은 성정을 갖고 있어 무력이 아니면 제압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했다. 그러자 사마 위강(魏絳)이 홀로 말하기를, “그건 안 됩니다. 지금 제후들과 회맹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패업이 공고해지지 않았는데, 만일 군사를 일으켜 융족을 정벌한다면 초나라 군사가 반드시 빈틈을 타서 중원의 여러 제후국을 침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후들은 우리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에 붙게 됩니다. 이적(夷狄)들의 나라는 짐승과 같으며, 제후국들은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지금 금수의 나라를 얻고, 형제의 나라를 잃는다면 그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진도공이 말하기를, “융족들과 화의를 맺을 수 있겠는가?” 했다.

위강이 대답하기를, “융족과 화의를 맺게 되면 다섯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융족과 진()나라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그 땅이 광활하여 땅은 천하고 재물은 귀합니다. 우리가 재물로 땅과 바꾸어 영역을 넓힐 수 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이로움입니다. 융족이 침략하지 않으면 변경에 사는 백성들이 안심하고 농업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이로움입니다. 덕을 멀리까지 베풀면 군사를 동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이 세 번째 이로움입니다. 융적이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천하가 진동하게 되어 제후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게 됩니다. 그것이 네 번째 이로움입니다. 우리는 북쪽을 근심할 필요가 없고 남쪽에만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섯 번째 이로움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는데 주군께서는 어찌하여 따르지 않으십니까?” 했다. 진도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위강을 사신으로 삼아 융족과 화의를 맺도록 했다. 위강은 맹락(孟樂)과 함께 먼저 무종국으로 가서 그 국왕 가보(嘉父)와 일 처리를 상의했다. 가보는 이에 산융의 여러 나라 군주들을 불러 무종국으로 모이게 하여 삽혈의 의식을 행하며 맹약하기를, “요즘에 진()나라 군주가 중원의 맹주로서 패업(覇業)을 이어받았다. 여러 융족의 나라는 진()나라 군주와 한 약속을 잘 받들고, 북방을 방위하며, 침략하지도 배반하지도 않을 것이며, 각자 자기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기로 한다. 만일 이 맹약을 배반한다면 천지신명께서 돕지 않을 것이다!” 했다. 여러 융족의 군주들이 맹약을 맺고 모두가 기뻐했다. 그들은 토산물을 위강에게 선물로 바쳤으나, 위강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융족의 군주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상국의 사신이 참으로 청렴하구나!” 하고, 더욱 존중했다. 위강이 맹약하고 돌아와 진도공에게 보고하니, 진도공이 크게 기뻐했다.

그때 초나라 영윤 공자 정이 이미 진()나라의 항복을 받고, 다시 그 군사를 움직여 정나라를 쳤다. 그러나 호뢰(虎牢)에 많은 군대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사수(汜水)를 건너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허나라를 거쳐 영수(潁水)를 건너 쳐들어갔다. 정희공(鄭僖公) 곤완(髡頑)이 크게 두려워하여 육경을 모아서 함께 의논했다. 그 육경은 자사(子駟) 공자 비(公子騑), 자국(子國) 공자 발(公子發), 자공(子孔) 공자 가(公子嘉) 세 사람은 모두 정목공의 아들로서, 정희공의 할아버지뻘이며, 자이(子耳) 공자첩(公孫輒)은 공자거질(公子去疾)의 아들이고, 자교(子蟜) 공손 채(公孫蠆)는 공자 언(公子偃)의 아들이고, 자전(子展) 공손 사지(公孫舍之)는 공자 희(公子喜)의 아들인데, 이 세 사람은 모두 정목공의 손자로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경이 되었으며, 정희공의 아저씨뻘이었다. (이 육경들은 모두 정희공보다 항렬이 높았고 이전부터 정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었다.) 정희공의 성격이 오만무례했으므로 그들을 별로 대우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군주와 신하가 서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상경 공자 비와는 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날 회의를 할 때 정희공은 굳게 지키며 진()나라 구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공자 비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멀리 있는 물은 가까이 있는 불을 끌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초나라를 따르는 게 낫습니다.” 하니, 정희공이 말하기를, “초나라를 따르면 진()나라 군사가 또 올 것인데,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했다. 공자 비가 대답하기를, “진나라와 초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가 우리를 더 사랑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역시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만을 선택해 섬길 것입니까? 오직 강한 나라만 섬기면 됩니다. 이제부터 희생과 옥과 비단을 가지고 국경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초나라 군사가 오면 초나라와 맹약을 맺고, 진나라 군사가 오면 진나라와 맹약을 맺으면 됩니다. 두 강대국이 서로 다투면 반드시 한쪽이 크게 꺾이게 됩니다. 강약이 이미 나뉘면 우리는 강한 나라를 택하여 섬겨서 백성들은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했다. 정희공이 그 계책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자사(공자 비)의 의견을 따르게 된다면 정나라는 아침저녁으로 맹약만을 맺느라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지 않겠소?” 했다. 정희공은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여러 대부는 공자비의 뜻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여, 기꺼이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정희공이 분노하여 자기가 직접 진나라로 길을 나서 그날 밤에 역사에서 잤다. 공자 비가 문객을 매복시켜 정희공을 찔러 죽이고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고 둘러댔다. 공자 비는 그 동생 공자 가()를 군주로 세웠다. 이가 정간공(鄭簡公)이다. 그리고 사람을 초나라 군영에 보내어 알리기를, “우리가 진나라를 섬긴 것은 곤완의 뜻이었다. 지금 곤완은 이미 죽었고, 원컨대 상국을 섬기고자 하니 군사를 물리쳐 주십시오.” 했다. 초나라 공자 정이 정나라의 화의를 받아들여 맹약을 맺고 물러갔다.

진도공이 정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따른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대부에게 묻기를, “지금 진()나라와 정나라가 모두 우리를 배반하니 어느 나라부터 정벌해야 하겠소?” 하니, 순앵이 대답하기를, “()나라는 작고 땅이 치우쳐 있어 패업의 성패에는 무관한 곳입니다. 그러나 정나라는 중원의 중추에 있습니다. 자고로 패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정나라를 굴복시켰습니다. 차라리 열 개의 진()나라를 잃어도, 한 개의 정나라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했다. 한궐이 말하기를, “자우(子羽 ; 순앵)의 식견이 매우 훌륭합니다. 정나라를 평정할 사람은 틀림없이 이 사람입니다. 신은 기력이 이미 쇠하고 지력도 늙었으니 중군의 부월(斧鉞)을 순앵에게 넘겨주고 싶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불허하자 한궐이 완강하게 청해 마지않았다. 이에 한궐의 청을 받아들였다. 한궐이 나이가 많다고 정사에서 물러나자, 순앵이 한궐의 뒤를 이어 중군 원수가 되어 대군을 통솔하고 정나라를 쳤다. 군사가 호뢰에 이르니, 정나라 사람이 맹약을 청했다. 순앵이 화의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키자, 초공왕이 친히 정나라를 쳤다. 정나라가 다시 화의를 청하자 초나라 군사가 돌아갔다. 진도공이 대로하여 여러 대부에게 묻기를, “정나라 놈들이 반복하여 군대가 가면 복종하고 군대가 철수하면 다시 배반하니 지금 정나라를 단단하게 붙들어 놓으려면 어떤 계책을 써야 하겠소?” 했다.

순앵이 계책을 바쳐 말하기를, “우리가 정나라를 붙들어 놓을 수 없는 까닭은 초나라와 힘을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나라를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초나라를 제압해야 합니다. 초나라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이일대로(以逸待勞 ; 편안함으로써 피로해지기를 기다린다)’의 계책을 써야 합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이일대로의 계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하니, 순앵이 대답하기를, “군사란 자주 움직이면 안 되는데, 자주 움직이면 피로하게 됩니다. 제후들도 자꾸 소집하여 부르면 안 됩니다. 자꾸 소집하면 원망을 듣게 됩니다. 안으로는 피로하게 되고 밖으로는 원망을 듣게 되면, 이렇게 초나라와 싸워서는 이기기 힘들게 됩니다. 신이 청하건대 우리 사군(四軍)의 군사들을 삼군(三軍)으로 나누고, 다시 제후들의 군사를 나누어서 배합합니다. 출정할 때마다 다만 일군(一軍)만 출동시키고 순번을 바꾸어 출입하여 초나라 군사가 진격하면 우리는 퇴각하고 초군이 퇴각하면 우리가 다시 진격해서 우리의 일군이 초나라의 전군를 견제합니다. 그러면 초군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으며 또한 쉬고 싶어도 쉴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들판에 뼈를 버리지 않아도 초군은 길 위에서 고생에 시달릴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 이동할 수 있지만, 초군은 빨리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초군은 피곤하게 되고 정나라를 굳게 붙들 수 있습니다.” 했다.진도공이 말하기를, “그 계책이 참으로 훌륭하오!” 하고, 즉시 순앵에게 명해 곡량(曲梁)에서 군사를 집합시켜 사군 체제를 삼분하여 윤번제로 개편했다.

순앵이 단상에 올라가 명령하기를, 단상에 중군 원수 지라고 쓴 적황색의 큰 깃발을 한쪽에 세우게 했다. (순앵은 본디 순씨이나 중군 원수기에 왜 지()를 썼는가? 그 이유는 순앵과 순언은 숙질간으로서 모두 대장이므로 군중에서 같은 성을 군사들이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앵의 부친 순수는 식읍이 지()였고 순언의 부친 순경(荀庚)은 지난날 진나라 군제를 삼군 삼행으로 증편했을 때, 중행 원수에 임명된 적이 있어서, ()씨와 중행(中行)씨로 구별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순앵을 지앵(智罃)으로 부르고, 순언을 중행언(中行偃)으로 부르게 하여, 군사들이 서로 혼동하는 일이 없게 했다. 이것은 모두 순앵이 군사를 지휘하는 방법이었다.) 단 아래에는 삼군이 나누어 서고, 1군은 상군 원수 순언, 부장 한기(韓起)와 노(), (), () 세 나라 군사들을 속하게 하고, 중군 부장 범개가 지원했다. 2군은 하군 원수 난염, 부장 사방(士魴)과 제(), (), () 세 나라 군사들을 속하게 했으며, 중군 상대부 위힐(魏頡)이 지원했다. 3군은 신군 원수 조무, 부장 위상(魏相)과 송(), (), () 세 나라 군사들을 속하게 하고, 중군 하대부 순회(荀會)가 지원했다.

순앵이 명령하기를, 1, 2, 3군의 순서로 출정한다고 했다. 중군의 장병들도 셋으로 나뉘어 윤번제로 지원하며 계속 반복하여 출정하게 했다. 다만 정나라의 맹약을 받아 돌아오는 것을 전공으로 치고, 초군과의 교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자 양간(楊干)은 진도공의 동모제(同母弟)로 나이가 19세였다. 새로 중군 원수의 융어(戎御 ; 원수의 전차를 모는 사람)로 임명되어, 혈기가 방장하고 전장에 나간 경험이 없었다. 그는 진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정벌한다는 소리를 듣고 공을 세우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당장 한 떼의 군사를 단독으로 지휘하여 앞으로 나아가 싸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앵(智罃)이 자기를 써 주지 않자 마음속에 한줄기의 혈기가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봉이 되어 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자청했다. 지앵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군대를 나눈 계책은 다만 빨리 나아가고 빨리 퇴각하기 위해서이지, 싸워 이겨서 전공을 세우자는 게 아니오. 군사를 나누기로 이미 정했으니 소장군이 비록 용감하지만 쓸 곳이 없습니다.” 했다. 양간이 선봉에 서기를 고집하니, 순앵(지앵)이 말하기를, “소장군의 청이 간곡하니, 임시로 중군 하대부 순회(荀會)의 아래에서 신군을 지원하시오.” 했다.

양간이 또 말하기를, “신군은 세 번째로 출병을 하는데 기다릴 수 없으니, 1군에 넣어 주기 바라오.” 하니, 지앵이 들어주지 않았다. 양간이 자기가 진도공의 친동생이라는 것을 믿고 곧바로 본부의 전차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직접 한 부대를 편성하여 중군 부장 범개의 뒤에 열을 지어 섰다. 그때 사마 위강이 지앵의 장령을 받들어 대오를 엄하게 단속하다가 양간이 순서를 뛰어넘어 열을 지은 것을 보고 즉시 북을 울려 여러 장병에게 알리기를, “양간이 일부러 장령을 위반하여 대오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군법을 논하면 이것은 참수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주군의 친동생이라는 점을 참작하여 그 마부를 대신 참하여 군정을 엄숙히 하겠다.” 하고, 즉시 장교에게 명하여 양간의 마부를 붙잡아 참수하고 그 목을 단상 아래에 거니, 군중이 숙연해졌다. 양간이 교만 방자하여 군법을 몰랐다. 자기의 마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그는 십분 겁이 났으나, 곧 수레를 몰아 군영을 나가서 진도공 앞으로 달려가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위강이 이렇게 사람을 업신여겨 여러 장수들을 대할 면목을 잃게 만들었다고 호소했다.

진도공이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자세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위강이 내 동생을 모욕한 것은 나를 모욕한 것과 같다. 반드시 위강을 죽여야지 그대로 두지 않겠다.” 하고, 즉시 중군 부위 양설적을 불러 위강을 잡아오라고 명했다. 양설적이 입궁하여 진도공을 뵙고 말하기를, “위강은 지조와 절개가 있는 사람입니다. 일이 있으면 어려움을 피하지 않으며, 죄가 있으면 형벌을 피하지 않습니다. 군사를 점검하는 일이 이미 끝났으니 반드시 스스로 와서 자기의 죄를 고할 것입니다. 신이 갈 필요는 없습니다.” 했다. 조금 지나자 과연 위강이 도착하여 오른손에 장검을 쥐고 왼손에 상주문(上奏文)을 들고 조당으로 들어가 대죄하려고 했다. 오문(午門 ; 남문)에 이르러 진도공이 사람을 시켜 자기를 잡아오게 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상주문을 종복에게 주어 진도공에게 올리라 명하고는 곧 칼로 자살하려 했다. 바로 그때 두 관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하군 부장 사방(士魴)과 주후대부(主侯大夫) 장로(張老)였다. 위강이 스스로 목을 찌르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칼을 빼앗으면서 말하기를, “사마가 입조한 소식을 듣고, 틀림없이 양간 공자의 일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급히 쫓아온 것이오. 우리가 함께 주공께 아뢸 것이오. 사마는 어찌 목숨을 이처럼 가볍게 여깁니까?” 했다.

위강은 진도공이 양설적을 부른 것을 이야기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 일은 국가의 공적인 일입니다. 사마가 군법을 집행한 일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 반드시 자기의 몸을 버리려고 합니까? 종복에게 상주문을 올리게 할 필요 없이 우리가 같이 들어가서 주청을 드리겠습니다.” 했다. 세 사람이 함께 궁문에 이르자, 사방과 장로가 먼저 들어가서 진도공께 뵙기를 청하고, 위강의 상주문을 받쳤다. 진도공이 열어서 보니, 대략 이르기를, “주군께서 신을 불초하게 여기지 않고 중군 사마의 빈자리를 이어받게 하셨습니다. 신은 삼군에 대한 명령은 원수만이 내릴 수 있으며 원수의 권한은 명령을 내리는 데 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명령이 내렸는데 지키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곡(河曲)에서는 공을 이룰 수 없었고, 필성(邲城)에서 패했습니다. 신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군법으로 처단한 행위는 사마의 직책에 충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은 주군의 동생 되는 사람을 욕보여 그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주군 앞에서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하시어 주군의 동기간 정을 밝히기 바랍니다.” 했다. 진도공이 상주문을 다 읽고 나서, 사방과 장로에게 급히 묻기를, “지금 위강은 어디 있소?” 하니, 사방 등이 대답하기를, “위강이 지은 죄를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여, 신 등이 말려 궁문 밖에서 대죄하고 있습니다.” 했다.

도공이 두려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궁문 밖으로 나가 위강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과인이 한 말은 형제지간의 사사로운 정이고, 그대의 행동은 군사에 관한 공적인 행위요. 내가 동생 교육을 잘못시켜서 군법을 범하게 했으니 과실은 나한테 있지, 경과는 무관한 일이라 하겠소. 경은 속히 일어나 직책을 다하도록 하시오!” 했다. 양설적이 진도공의 옆에 서 있다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주군께서 이미 위강이 죄가 없다고 하셨으니 위강은 속히 물러가시오!” 했다. 위강이 즉시 머리를 조아려 죽이지 않은 은혜에 감사했다. 양설적과 사방, 장로가 동시에 머리를 조아려 축하하며 이르기를, “주군께서 이같이 법을 지키는 신하를 두셨으니 어찌 패업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걱정하겠습니까?” 했다. 네 사람이 일제히 진도공에게 인사를 하고 조당을 나갔다. 진도공이 궁으로 돌아와서 양간을 크게 꾸짖기를, “네가 예법을 알지 못하여 하마터면 나를 과실에 빠뜨려서 훌륭한 장수를 죽일 뻔했다.” 하고, 내시를 시켜 양간을 공족대부(公族大夫) 한무기(韓無忌)에게 압송하여 석 달 동안 예를 배운 후에 상면할 것을 허락했다. 양간이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물러났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군법에는 육친도 없거늘 감히 어지럽히려 했으니, 중군 사마의 얼굴이 추상같았다. 진도공이 패업을 이루려고 애를 썼으니, 충신이 칼 아래 죽도록 했겠는가?” 했다.

지앵이 군사를 나누어 바야흐로 정나라를 치려고 했다. 궁정의 신하가 보고하기를, “송나라에서 국서를 보냈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받아서 보니, 초나라와 정나라가 서로 합심하여 여러 번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 경계를 침략하고, 복양(偪陽)을 동쪽 길로 삼았다고 위급함을 알려온 것이었다. 상군 원수 순언이 청하기를, “초나라가 진()나라와 정나라를 얻어 다시 송나라를 침범하니 그 뜻은 진()나라와 방백을 다투려는 데에 있습니다. 복양은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는 길목입니다. 만약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먼저 복양으로 진격하면 한번 북을 쳐서 함락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 팽성을 공격할 때 송나라의 상술(向戌)이 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그곳에 봉해 송나라의 부용(附庸)으로 삼아, 그를 시켜 초나라의 길을 차단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계책입니다.” 하니, 지앵이 말하기를, “복양은 비록 작지만 그 성이 매우 견고하여 만약 포위해도 함락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했다. 중군 부장 사개(범개)가 말하기를, “팽성의 싸움은 우리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가 송나라를 침략하여 정나라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호뢰(虎牢)의 싸움은 우리가 정나라를 평정하자 초나라가 다시 송나라를 침입하여 그 원수를 갚으려고 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정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송나라를 단단히 해놓아야 합니다. 순언의 말이 옳습니다.” 했다.

순앵(지앵)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복양을 틀림없이 함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하니, 순언과 사개가 대답하기를, “모든 책임은 우리 두 사람이 지겠습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군령을 달게 받겠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백유(순언)가 주장하고 백하(사개)가 도우면 어찌 일이 안 될까 걱정하겠는가?” 했다. 즉시 제일군을 복양으로 가서 공격하게 하고, (), (), () 3국의 병사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한편, 복양 대부 운반(妘斑)이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노나라 군사가 북문 밖에 영채를 세웠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가서 싸우는 척하면, 그 군사들이 반드시 공격하여 성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들이 반쯤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현문(매달린 성문)을 떨어뜨려 노나라 군사를 반으로 자르겠습니다. 노나라 군사가 패하면 조나라와 주나라 군사도 틀림없이 두려워할 것이고, 그러면 진()나라의 예기가 꺾일 것입니다.” 하니, 복양의 군주가 그 계책을 따랐다. 한편, 노나라의 장군 맹손멸(孟孫蔑)은 그 부장 숙량흘(叔梁紇), 진근보(秦菫父), 적사미(狄虒彌) 등을 인솔하여 복양성 북문을 공격하니 현문이 닫히지 않아서 진근보와 적사미가 용감하게 먼저 진격하고, 숙랼흘이 뒤를 이었다. 갑자기 성 위에서 큰 소리가 나면서 현문이 숙량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왔다. 숙량흘이 즉시 과를 땅에 던지고 두 손을 들어 현문을 가볍게 떠받쳤다.

후군이 징을 울리자 진근보와 적사미 두 장군이 후대에 변고가 있는 줄 알고 두려워하여 급히 방향을 돌렸다. 그러자 성안에서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크게 진동하더니 운반이 한 무리의 병졸과 전차를 이끌고 뒤를 추격해 왔다. 멀리 쳐다보니 한 거인이 현문을 손으로 받치고 노나라의 군졸들과 장수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운반이 크게 놀라 생각하기를, ‘저 현문은 위에서 떨어뜨리는 것이라 천근의 힘이 아니면 어떻게 버티겠는가? 만약 밀고 나갔다가 도리어 저 장수가 문을 내려놓으면 이로울 게 없다.’ 하고, 잠시 전차를 멈추고 관망했다. 숙량흘은 진나라와 노나라 군사가 모두 성 밖으로 빠져나오기를 기다려 큰소리로 외치기를, “노나라의 유명한 상장 숙량흘이 여기 있다.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손을 떼기 전에 빨리 나가라!” 했다. 그러나 성안의 아무도 그 말에 감히 반응하지 않았다. 운반이 활에 화살을 장전하여 숙량흘을 향하여 쏘려는 순간 숙량흘은 두 손을 놓으니, 현문이 땅으로 떨어져 문이 닫혔다. 숙량흘이 본영으로 돌아와 진근보와 적사미에게 말하기를, “두 분 장군의 목숨은 저의 양팔에 달려 있었소,”했다.

진근보가 말하기를, “만약 징을 울리지 않았으면 우리가 복양성 안으로 쳐들어가서 큰 공을 이루었을 것이오.” 했다. 적사미도 말하기를, “내일 내가 혼자서 복양을 공격하여 노나라 사람의 본때를 보여 줄 테니 잘 보시오.” 했다. 다음 날이 되자 맹손멸이 대오를 다시 정비하여 백 명씩을 일대로 하여 성 위를 향하여 싸움을 걸게 했다. 적사미가 말하기를, “제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단신으로 공격해 보이겠습니다.” 하고, 이에 큰 전차 바퀴 한 개를 뽑아서 그 위에 갑옷을 둘러씌워 단단히 묶어서 방패로 삼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자루가 긴 창을 잡은 후에 날 듯이 뛰어올랐다. 복양성 위에서 노나라 장군이 용력을 뽐내는 것을 보고 베 한 필을 풀어서 내려뜨리고 외치기를, “우리가 너희들을 성에 오르게 끌어주겠다. 누가 감히 오른다면 진정한 용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했다.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노나라 군사 중에서 한 장군이 응해 나서면서 말하기를, “어찌 감히 할 수 없겠는가?” 했다. 그 장군은 바로 진근보였다. 곧 손으로 베를 끌어 잡고 손을 좌우로 바꿔 가며 삽시간에 성가퀴에 이르렀다.

복양성의 군졸이 칼로 베를 자르자 진근보가 허공에서 곤두박질쳐서 떨어 졌다. 복양성 높이가 여러 길이라 다른 사람 같으면 한번 떨어져 죽지 않았더라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진근보는 전연 아무렇지 않았다. 성 위에서 다시 베를 늘어뜨리면서 묻기를, “감히 다시 올라오겠느냐?” 하니, 진근보가 또 응하여 말하기를, “어찌 감히 오르지 못하겠는가.” 하고, 손으로 베를 잡고 성을 다시 올라갔다. 다시 복양성 군사들이 베를 잘라 진근보가 땅에 떨어졌다. 또 넘어졌지만 곧 다시 일어났다. 성 위에서 베를 또 늘어뜨리며 묻기를, “다시 감히 해 보겠느냐?” 하니, 진근보가 더욱 큰 소리로 대답하기를, “감히 하지 못한다면 사내가 아니다.” 하고, 전처럼 베를 잡고 올랐다. 복양성의 군사들이 진근보가 다시 떨어졌다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오르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급히 베를 잘랐다. 그러나 그때 이미 진근보가 군사 한 사람을 붙잡아 성 아래로 던져 버리니, 반죽음이 되었다.

진근보도 역시 잘린 베와 함께 성 밑으로 떨어졌으나, 도리어 성 위를 향해 외치기를, “다시 베를 드리워 줄 테냐?” 하니, 성 위에서 응답하기를, “장군의 뛰어난 용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히 베를 다시 내릴 수 없습니다.” 했다. 진근보는 곧 잘린 베 세 자락을 들고 와서 군사들에게 보여 주니, 군사들이 혀를 내두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맹손멸이 찬탄하기를, “<시경>에 이르기를, ‘힘이 호랑이 같다.’라고 했는데, 이 세 장군에게 족히 해당하는 말이다!” 했다. 운반이 노나라 장수들이 하나같이 흉맹함을 보고, 감히 성 밖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군민들에게 힘을 다해 굳게 지키라고 분부했다. 각 제후의 군사들이 4월 병인(丙寅) 일에 포위하여 5월 경인(庚寅) 일까지 무릇 24일이 되니, 공격하는 측은 이미 지쳤으나 수비하는 측은 여유가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평지의 물 깊이가 석 자가 되니 군사들이 놀라서 불안해했다. 순언과 사개는 물난리로 무슨 변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함께 중군 원수를 찾아가 지앵(순앵)에게 회군하기를 청했다.

 

지앵이 기꺼이 듣고 따를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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