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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를 삼킨 여자(Beloved) 3

Bollnow 2025. 2. 23. 13:31

3

 

누구나 그녀가 뭐라고 불리었는지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 사람들이 그녀를 생각해주지도 않았다.

 

124번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덴버는 소리가 없는 세계의 일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굶주림이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을 알고는 놀랐다. 굶주림은 인간을 침묵하게 한다. 세스와 비러브드는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고 어떤 징조가 보여도 개의치 않았다. 서로 다투는 것에만 얽매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받는 것은 덴버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 명이, 셋이 모두 죽어버릴 우려가 있었다.

엄마는 옛날에 입었던 어느 옷을 입어도 헐렁헐렁하여 축 늘어졌다. 비러브드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잤다. 날마다 크고 토실토실하게 살쪄가는데도 단것이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다. 달걀을 낳아주는 두 마리의 암탉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복이 올수록 세 사람은 쇠약해졌고, 쇠약해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격렬한 말다툼보다는 나았다. 격렬한 말다툼 끝에 부젓가락이 벽에 내던져지고 아우성치는 소리는 난생 처음이었다. 덴버는 평상시처럼 함께 놀면서도 약간 뒤로 물러나 있었다.

두 여자는 덴버를 놀이에서 제외시켰다. 놀이에 열중한 나머지 엄마는 일터에 날마다 지각하여 마침내는 예상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소야가 세스에게 더이상 나오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다른 일을 찾는 것보다는 세스는 비러브드와 노는 데에 집중시켰다. 엄마는 제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옛날에 하고 있던 일을 모두 중지하고 분홍색만 갖고 싶다고 했다. 베이비 할머니와 색을 좋아하는 것은 비슷했지만 세스는 덴버를 따돌렸다. 옛날에는 덴버를 위해 들려 주었던 노래까지도 이제는 비러브드를 위해서만 불렀다.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자 세스는 열이 대단했다. 그런데도 야채밭과 꽃밭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밭에서 어떤 색이 나오기를 자꾸 반복하여 말했다. 비러브드의 머리를 가지고 땋았다가 풀렀다가 하는 세스를 보고 마침내 비러브드가 안절부절하게 되었다. 두 여자는 옷을 교환했으며 팔짱을 끼고 끊임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3월 말경에는 세 사람 모두 무료한 가설무대의 여자 같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에게 밖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덴버는 놀이로부터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러브드에게 위험이 닥칠까봐 두 사람이 노는 것을 지켜보았다. 겨우 위험한 징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덴버가 경계를 풀자 사태는 악화되었다. 그녀가 직면했던 최초의 문제는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 어느 여자인지를 아는 것이었다.

덴버의 감시의 눈은 엄마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엄마의 내부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 다시 살인을 범할까봐 방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비러브드였다. 세스가 줄 것이 없어지면 비러브드는 다른 욕망을 일부러 만들어 냈다. 강바닥에서 갈색 낙엽을 몇 시간이고 같이 보고 있자고 세스에게 졸랐다. 그곳은 어린 시절에 덴버가 비러브드와 놀았던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 놀고 있는 것은 덴버와 비러브드가 아니었다.

날이 따뜻해지자 비러브드는 최초의 화초를 따서 바구니에 가득 채워 세스에게 내밀었다. 세스는 그것을 꽃꽂이하기도 하고 온 집안에 감기도 했다. 세스의 옷을 껴입고 비러브드는 자신의 살을 손등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세스의 흉내를 냈다. 세스와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웃었다. 가끔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세스이고, 어느 쪽이 비러브드인지 덴버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윽고 형세가 변하여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서서히 시작되었던 것이 나중에는 비러브드가 세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결국 세스가 잘못을 빌었다. 세스의 특별한 노력이 전만큼 기쁨을 주지 않게 되었다. 비러브드는 뭐든지 제일 좋은 것을 가졌다.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세스는 자기가 아이를 위해 얼마만큼 괴로움을 견디어 왔는지를 장황하게 변명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할 만한 일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세스의 이야기는 비러브드에게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했다. 비러브드는 자기를 놔두고 떠났다고 세스를 비난했다.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자기에게 웃어 주지 않았다며 비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세스는 울면서 절대로 그렇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때의 상황에서는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야만 했다.

엄마의 계획은 모두 저쪽에서 함께 살게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러브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소리를 내어 울었는데도 아무도 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내 위에 죽은 남자들이 누워 있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피부가 없는 유령이 나에게 어두운 곳에서는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말했고, 밝은 곳에서는 매춘부라고 말했었어.

세스는 계속 되풀이해서 이유를 늘어놓고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내게 있어서 너는 내 생명보다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으므로 언제든지 원하는 것을 주고 싶다고 했다. 비러브드가 흘린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면 세스는 자기의 남은 인생을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리고 저택으로 달려갈 때 너를 땅바닥에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되어 미칠 것 같았던 심정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비러브드는 모른다고 말했다. 그녀는 물건을 내동댕이치고 테이블 위의 접시를 몽땅 엎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유리창을 깼다. 비러브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야생의 짐승처럼. 그런데도 나가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두 여자는 접시를 붙이고 유리 조각을 쓸어놨다. 조금씩 덴버는 세스가 나이프를 잡지 않는다면 비러브드가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보다 어린 여자에게 어머니가 하녀같이 시중들고 있는 것을 보고 덴버는 민망함을 느꼈다. 밤에 비러브드의 변기를 버리러 가는 엄마를 보고 덴버는 뛰어가 그녀의 손에서 변기를 빼앗았다. 하지만 먹을 것이 바닥이 났었을 때의 고통은 견디기 힘들었다. 덴버는 어머니가 식사하지 않고 테이블과 화덕 구석에서 무엇을 주워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냄비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옥수수 가루나 음식물 찌꺼기를 먹었다. 또 잼병을 헹구어 버리기 전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훑어 먹는 모습도 보았다.

세 사람은 지쳐갔다.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비러브드는 부젓가락을 휘두르는 일도 그만두고 숨만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24번지는 고요했다. 기아에 허덕이면서 덴버는 어머니의 손가락이 말라가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런데도 세스의 눈은 오로지 비러브드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스는 비러브드의 모든 부분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볼록하게 나온 배는 보지 않고 있었다. 덴버는 자기의 블라우스 소매가 손가락까지 내려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원래는 손목에 있었는데, 이제는 스커트 자락까지 바닥을 쓸고 있었다.

이윽고 세스가 입에 넣었던 적도 없는 음식물을 토해내자, 덴버는 총성을 들은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비러브드를 세스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없어졌다. 오히려 엄마를 비러브드로부터 보호하는 일로 바뀌었다. 덴버는 엄마가 두 사람을 남기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비러브드는 무슨 짓을 저지를까?

그래도 세 사람이므로 그럭저럭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안 된다. 비러브드나 세스나 내일의 일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비러브드의 기분이 좋아지면 세스는 행복해했고, 비러브드는 크림을 핥듯이 세스의 헌신을 탐했다. 그렇기 때문에 덴버는 일 처리를 하는 것은 자기의 책임이라고 느꼈다.

집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두 사람을 놔두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러 가야만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스탭이라고 불리는 백발의 노인과 레이디 존스이다. 물론 포올 디도 알고 세스에 대한 것을 덴버에게 가르쳐 주었던 넬슨 로드도 안다. 하지만 포올 디와 그 소년은 안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4월의 날씨는 맑고 따뜻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덴버는 머리와 어깨를 숄로 감쌌다. 화려한 옷을 껴입고 누구 것인지 모르는 신발을 신고 124번지의 포치에 섰다.

어머니가 말했듯이 딸인 그녀에게까지도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는 스위트 홈과 같은 장소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 무서운 것은 저쪽에는 백인이 있고 놈들은 쉴새 없이 마음이 변하며, 인간의 도리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한다고 했다.

세스는 베이비 색스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감옥에서 꺼내주었어요."

"감옥에 집어 넣은 것도 놈들이 아니냐."

"그 사람들은 어머니를 남부에서 데리고 와 강을 건너게 해 주지 않았습니까."

"내 아들에게 뼈를 깎는 고생을 시키고 있다."

"그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이 집을 주었지 않습니까."

"공짜로 뭔가를 주는 놈는 한 놈도 없다."

"나는 그 사람들한테 일을 받았습니다."

"그야, 너를 고용한 인간은 요리사를 손에 넣은 것뿐이지."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도 우리를 진지하게 대우해 주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깜짝 놀랄 테지?"

"전에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일일이 말대꾸하지 말거라. 놈들은 우리 종족들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혔어. 칼을 놓으렴. 절대 싸움이 되지 않아. 완패야."

이런 대화와 할머니가 임종 시 말했던 결정적인 말을 떠올리면서 덴버는 포치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러나 떠나야만 했다.

오른쪽으로 가니 집 네 채가 서로 딱 붙어 나란히 있었다. 첫 번째 집은 2층 계단이 붙어 있고 포치에는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다. 두 번째 집의 계단은 3층이었고 포치의 기둥에 빗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개나리가 있었다. 어린 소년이 땅바닥에 앉아 나무토막을 씹고 있었다. 세 번째 집은 창에 노란 차양이 달려 있고 화분이 죽 늘어져 있었다.

네 번째 집에는 플라타너스가 지붕 위에 떨어져 마당 전체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바로 앞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녀는 한 발 나아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백인일 경우를 생각하고 길 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이 걷고 있는 장소를 만일 내가 걷고 있다면 어떻게 하나. 또 그들이 얘기를 걸어와 내가 대답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길을 건너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덴버가 채 건너기 전에 벌써 그들이 앞으로 다가왔다. 두 명이었는데 다행히도 흑인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인사를 하더니 아무 말없이 덴버의 왼쪽으로 지나갔다.

순조롭게 진행된 이 만남을 계기로 용기가 생겼다. 덴버는 걸음을 재촉하여 주위의 즐비한 집들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작게 느껴졌던지 덴버는 어안이 벙벙했다. 길가에 있었던 큰 바위덩이는 겨우 걸터 앉을 만한 크기의 돌밖에 안 되었다. 그리고 개들은 덴버의 무릎에도 미치지 않았다. 덴버는 레이디 존스의 집을 찾았다. 아무리 오래전에 알았던 집이라도 분명히 기억할 수 있다. 석조 포치의 주위에는 담쟁이 덩굴이 얽히고 창문에는 옅은 노란색 커튼이 보였다. 벽돌을 깐 샛길이 현관을 향해 뻗어 있다. 분명히 그 집이었다. 덴버는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나 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이 갑자기 근심스러운 마음 때문에 사라졌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혹시 옛날 학생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는지 걱정이 앞섰다. 덴버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노크를 했다.

현관의 작은 노크 소리를 듣고 레이디 존스가 나와 문을 열었다. 이미 어른이 되어 어른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존스는 한눈에 그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열여덟 살이나 열아홉쯤 되었을 텐데도 굉장히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머나 덴버로구나!"

그녀는 말했다.

"맞지?"

소녀가 겨우 할 수 있었던 것은 빙긋이 웃는 것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디 존스는 덴버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듯이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애가 머리가 좀 모자란다고 생각하지만 레이디 존스는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이 애를 가르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과 숫자를 탐하듯이 공부했었다. 갑자기 덴버가 공부를 그만두었을 때는 5센트를 지불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디 존스는 어느 날 그녀의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그래서 돈은 늦어도 상관없으니 덴버를 보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할머니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듣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 생각을 하고 레이디 존스는 그녀에게 말해 보았다. 그러나 덴버는 똑똑히 알아 들었다.

"정말 잘 왔구나. 무슨 일로 왔니?"

덴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누구를 방문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 차를 끓여 오마."

레이디 존스는 혼혈아였다. 회색의 눈과 노란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났던 남자 중에서 제일 피부가 검은 남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다섯 명의 갖가지 피부색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 응접실에 앉은 다른 아이들과 자기 아이들을 나란히 앉혀놓고 최대한으로 가르쳤다. 그 후 다섯 명 전부를 흑인 대학에 보냈다.

옅은 피부 덕분에 레이디 존스는 선발되어 펜실베이니아주의 흑인 여자 사범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그녀는 선발되지 못한 사람들을 교육함으로써 그것에 보답했다. 잡일을 할 수 있는 연령이 될 때까지 진흙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남편을 제외하고 레이디 존스는 온 세계가 자기의 머리카락을 경멸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새까만 아이들밖에 없는 집에서 지냈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하얀흑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을 싫어하기도 했다. 그래서 교육을 단단히 받은 후에 자기의 애정을 신시내티의 선발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쏟았다. 그중 한 명이 그녀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설탕은?"

", 먹어요."

덴버는 차를 다 마셨다.

"더 마실래?"

"아뇨, 괜찮아요."

"자아, 더 들거라."

", 먹겠어요."

"모두 안녕하시지?"

덴버는 목의 움직임을 딱 정지해버렸다. 가족의 상황은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용건부터 말했다.

"일을 하고 싶어요, 선생님."

"?"

". 뭐든지 좋아요."

레이디 존스는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해요. 하지만 도움이 되도록 배우겠어요. 그리고 조금 남는 것을 주신다면."

"남는 것?"

"먹는 음식요. 엄마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덴버는 부인을 보았다.

레이디 존스는 쌀과 달걀 네 개, 그리고 차도 조금 주었다. 어머니의 상태가 걱정되어 오랫동안 집을 떠나있을 수 없다고 덴버는 말했다. 그리고 아침 동안만 집일을 하게 해 달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녀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이다. 너희 어머니가 좋아질 때까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마."

레이디 존스는 자기가 소속해 있는 교회의 위원회가 굶주리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이 어린 방문자는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아니, 당치도 않아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레이디 존스는 덴버에게 또 놀러 오라고 하며 작별을 고했다.

이틀 후, 덴버가 포치에 나가 보니 마당 구석의 그루터기에 뭔가가 놓여져 있었다. 다가가 살펴보았다. 하얀 강낭콩이 들은 주머니였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식은 토끼고기가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어떤 날은 같은 장소에 달걀이 들은 자루가 있었다. 자루를 쳐들자 종잇조각이 펄럭이며 떨어졌다. 주워서 보았다. 'M. 루시루 월리엄스'라고 서툰 글씨로 씌어 있었다. 안을 보니 풀 얼룩이 붙어 있었다.

거기서 덴버는 포치 밖의 세계로 두 번째 방문을 감행했다. 자루를 되돌려 주면서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밖에 못 했다.

"천만에."

M. 루시루 월리엄스는 대답했다.

봄 동안은 계속해서 여러 이름으로 음식이 날라져 왔다. 이름을 명시하는 이유는 자루를 되돌리기 쉽도록 하자는 의도였다. 이름의 대부분은 글자가 아니라 각자의 이름 대신 어떤 표시를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디 존스가 음식물이 담겨 있던 용기를 그 소유자에게 찾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 사람들은 모두 베이비 할머니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개간지'에서 할머니와 함께 춤을 추었던 적까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124번지가 연락소였을 당시에 모두 모여 정보를 입수하고, 스프를 맛보곤 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덴버에게 베개 카바를 보여 주었다. 석유 램프에 의지하여 프랜치너트 스티치로 자수한 짙은 물색의 꽃모양이었다.

반드시 1주일에 한 번 덴버는 레이디 존스를 방문했다. 레이디 존스는 특별히 덴버를 위해 건포도가 들은 빵을 만들었다. 덴버는 단것을 매우 좋아했다. 레이디 존스는 덴버에게 성경에서 발췌한 시집을 주고, 덴버가 낭독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6월까지 덴버는 52항을 모두 읽고 암송해버렸다.

덴버는 밖의 세계에서의 생활이 나아짐에 따라서 집에서의 생활은 악화되었다. 세스와 비러브드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선의로 모아진 음식 덕분으로 체중이 날로 불어갔다. 비러브드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저앉아 먹고, 침대에서 침대로 이동했다.

또 다른 때에는 비러브드는 바닥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주 강에 나가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그고 정강이에 물을 끼얹으며 놀았다. 그런 다음 세스의 곁으로 가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손가락을 세스의 입에 대고 이리저리 움직거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덴버에게는 보였다.

비러브드가 뭔가 할 일을 시킬 때를 제외하고 세스는 방구석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스에게 몸을 수그리고 있는 비러브드가 엄마처럼 보였고, 제스가 이가 돋아나기 시작한 아이처럼 보였다.

비러브드의 몸이 커지면 커질수록 세스는 작아지고 있었다. 비러브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면 빛날수록 세스의 눈은 비러브드를 응시하느라고 거의 실눈으로 되어 있었다.

세스는 머리를 빗는 일도 없다. 가볍게 얼굴을 씻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비러브드가 세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그녀는 점점 키가 자라는 데 세스는 잡도리를 당한 아이처럼 입술을 자꾸만 핥으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이 많은 여인은 불평하나 하지 못하고 그 목숨을 포기했던 것이다.

덴버는 자신을 두 사람에게 봉사했다. 세탁과 요리를 담당했고, 때를 보아 두 사람을 말리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음식을 먹게 하고, 비러브드를 달래기 위해 자주 달콤한 것을 주었다. 비러브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더위가 심해지면 알몸으로 배를 불쑥 내밀고 온 집안을 배회하는 것이었다.

덴버는 어머니와 비러브드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스는 그녀를 죽인 것을 보상하려고 했고, 비러브드는 세스에게 그 보상을 지불케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끝없이 계속 될 것 같았다. 자기 어머니가 점점 작아져 가는 모습을 보고 덴버는 격한 분노를 느꼈다.

덴버는 세스가 제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비러브드에게 내쫓기는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를 비러브드가 알기 전에 쫓겨나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세스는 톱을 작은 턱밑에 대고 켜는데 어떤 각오가 있었는지를 알게 하고 싶었다. 아기의 피가 석유처럼 자기 손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아야만 했던 고통을. 이 모든 것을 알기 전에 비러브드가 집을 나가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백인이라면 누구나 어떤 일시적인 생각을 만족하기 위해 흑인의 모든 인격을 박탈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너무나 비참하게 더럽히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릴 정도이다. 세스도 다른 흑인도 그것을 극복해 왔지만 그것이 아이에게까지 반복되는 것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아이였다. 백인은 그녀를 더럽히는 일은 가능해도 그녀의 아이까지 더럽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플래카드를 달고 목도 다리도 없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동체가 그녀의 남편이었는지, 아니면 포올 에이였는지 모른다.

그런 악몽의 생각을 맛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녀는 식육 처리장의 뒤뜰에서 딸에게는 절대로 그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욱 많은 것을 비러브드에게 설득시키려고 구석진 의자에서 세스가 얘기하는 것을 덴버는 듣고 있었다. 비러브드야말로 세스가 꼭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에서 나온 행위이다.

비러브드는 의자에 앉아 다른 의자에 두 발을 얹고 세스를 보고 있었다. 세스는 자기 얼굴을 가져가 미소지어 주는 것을 잊어버린 채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드디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고개를 쳐들었다. 덴버는 그루터기 위에 무엇을 놓아주는 친절에 의지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어딘가에 고용되어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한다. 세스와 비러브드를 하루종일 단둘이 있게 하는 것도 두렵기도 했지만, 자기가 집에 있어도 어느 한 사람도 행실을 똑바로 할 것 같지가 않았다.

덴버는 두 사람이 죽지 않도록 돌보아 주었는데도 두 사람은 그녀를 무시했다. 어떤 때는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비러브드가 조용해져 멍청히 자기 일에만 얽매이고 있을 때는 세스가 다시 그녀를 흥분시킨다. 마치 세스는 용서받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비러브드는 그런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누군가를 구해 주어야만 한다. 덴버는 곧 일자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파이를 얻은 사례를 하기 위해 넬슨 로드의 할머니 집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그곳에서 나오는 넬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덴버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생끗 웃으며,

"자기를 소중히 할 줄 알아야 해, 덴버."

라고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덴버에게는 마치 이 한마디를 위해 말이 만들어진 것처럼 들렸다. 마지막으로 넬슨이 덴버에게 한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정하게 했다. 보드윈가 사람들은 전에도 두 번을 도와준 적이 있으므로 제일 힘이 되어 줄 것 같았다. 한 번은 베이비 색스를, 그뒤 또 한 번은 세스를 도와주었다.

3대에 걸쳐 도와주지는 않을까? 신시내티 거리에서 몇 번씩이나 길을 잃었으므로 해가 뜨기 시작했을 때 집을 나섰는데도 도착한 것은 정오가 되어서였다. 그 집은 보도에서 쑥 들어간 곳에 있었다. 흑인 여인이 현관을 열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용무는?"

"보드윈 부부를 좀 뵈었으면 합니다만."

"그분들에게 무슨 볼일이?"

"전 일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아시는 데가 많을 것 같아서요."

"아가씨는 베이비 색스의 손녀로군. 그렇지?"

"그렇습니다."

"들어와요. 그곳에서 있으면 파리가 들어오니까."

여인은 덴버를 부엌으로 인도했다. 푹신푹신한 것 위를 밟고 있어서인지 덴버는 흥분이 되어 들떠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두툼하고 부드러웠으며 청색 바탕이었다.

"앉아요."

여인이 말했다.

"이름을 알고 있나요??"

"아아뇨."

"제이니, 제이니 왜곤."

"잘 부탁합니다."

"그래, 어머니가 병중이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

"누가 돌보고 있지?"

"제가요. 하지만 저는 일자리를 찾아야만 해요."

제이니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저 말이야, 나는 14살 때부터 이 집에 있었어. 그런데 베이비 색스가 이곳에 와서 마침 아가씨가 지금 있는 곳에 앉았던 것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어. 백인에게 끌려 와서 말이야.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 당신들이 살고 있는 그 집을 베이비가 제공받게 되었어. 다른 것도 말이야."

"그렇습니까?"

"세스는 어디가 나쁘지?"

제이니는 개수대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얼마 안 되는 대상이었지만 덴버는 모든 것을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얘기하지 않으면 제이니는 도와주지도 않거니와 보드윈 남매를 만나게 해주지 않을 것도 분명했다. 그래서 덴버는 처음 만난 이 여성에게 레이디 존스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것을 얘기했다.

이 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제이니 한 사람뿐이라고 했다. 그녀의 고용주 두 사람은 나이를 너무 많이 먹고, 제이니 역시 옛날처럼 두 사람의 시중을 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밤에도 이 집에서 자도록 부탁받는 일이 많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보드윈 남매를 설득해 덴버가 이 집에서 묵으며 야간 당번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저녁 식사 후 곧 이 집으로 와서 아침 식사 준비를 마치고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덴버는 낮에는 세스의 시중을 들 수 있고, 밤에는 적지만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덴버는 자기 집에서 어머니를 괴롭히고 있는 비러브드를 놀러온 사촌 여동생이라고 설명했다. 그 아가씨까지 병이 들어 자기들 모녀에게 짐이 되고 있다고 했다. 제이니는 사촌 여동생이란 아가씨보다 세스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가 말하는 세스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세스와 다르군. 지금 얘기를 들은 세스는 완전히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았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어. 왜냐하면 교만스럽게도 모든 것을 혼자 타개해 나가려고 했으니까."

어머니에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자, 덴버는 참을 수 없었다. 자세를 고쳐 앉거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제이니 왜곤은 아직도 어머니에 관해 계속 지껄였고, 얘기는 베이비 색스에게까지 미쳤다. 베이비 할머니 얘기를 시작하자 제이니는 좋은 일만 말했다.

"그녀가 개설한 숲의 예배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언제나 내게 잘해 주었어. 그런 여인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거야."

"저도 할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자주 생각합니다."

"그렇다마다. 누구나가 그녀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좋은 여자였어."

덴버는 그 밖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동안 제이니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오빠들 중에서 아무도 집안 형편을 살피러 돌아온 적은 없나?"

"아아뇨."

"소식은?"

"없어요. 전혀."

"오빠들은 그 집에 대해 대단히 괴로운 생각을 갖고 있겠지. 저말이야, 아가씨의 집에 있는 사촌이라고 하는 그 여자의 손에 힘줄이 드러나 있나?"

"아뇨."

"그래? 역시 신은 있는 것 같군."

제이니가 이삼일 뒤에 다시 오라고 덴버에게 말하고 얘기는 끝났다. 두 사람의 고용주에게 이해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집안 일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지만 밤에까지 있는 것은 아무래도 곤란해서 말이야."

덴버는 밤에 무엇을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이곳에 있으면 돼. 만일을 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제이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만일 집이 불타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가 많이 내려 두 분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이곳에 올 수 없게 되는 일도 있을지 모르니까. 또 밤늦게 온 손님에게 식사를 주게 될지도 모르지. 백인들이 밤에 무엇을 시킬지 내게 묻지 말아."

"그 사람들은 좋은 백인이 아닌가요?"

"물론 좋은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이 좋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지."

이런 식으로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덴버는 이 집을 나섰다. 나오기 전에 선반 위에 있는 동전을 가득 넣은 흑인 소년의 입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의 머리는 부자연스럽게 뒤로 젖혀졌고, 양손은 호주머니에 넣어져 있었다. 입에는 송달되는 물건이나 뭔가의 일을 해준 자에게 주는 심부름용 용돈을 넣어두고 있었다. 소년이 무릎을 짚고 있는 자리에는 '자유롭게 사용해 주세요.'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자기가 포착한 정보를 제이니는 다른 흑인 여자들에게도 퍼뜨렸다.

"세스가 목을 자른 딸 말이야, 그 아이가 복수하러 돌아온 거야. 세스는 지칠 대로 지쳐 몸은 비실비실하고 모습도 완전히 변해 있대. 그 딸이라는 것이 세스를 때리거나 침대에 붙들어 매기도 하고 세스의 머리를 쥐어뜯기도 한대..."

여자들이 얘기를 그럴싸하게 부풀렸기 때문에 당사자인 덴버도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이윽고 평정을 되찾아 상황을 판정하기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그녀들의 의견은 셋으로 갈라졌다. 최악의 사태를 믿는 사람,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엘라처럼 철저히 생각해 본 사람으로.

"엘라, 세스의 일로 소문이 자자한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것이 그녀와 함께 그 집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어. 그것밖에는 몰라."

"그 딸이? 살해됐다던?"

"모두들 내게 그렇게 말하지만..."

"모두들 어떻게 그것이 살해당했던 딸이라는 것을 알지?"

"그 집에 있으면서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난폭하게 날뛰기도 하지. 글쎄, 매일 세스를 채찍으로 때린다는 거야."

"놀랄 일이군그래. 갓난아기래?"

"아니야, 어른이래. 죽지 않았다면 그쯤 되었을 나이 또래의."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 여자에게는 당연한 응보라고 생각되지만."

"그런 응보는 누구에게도 올 수 없어."

"하지만, 엘라."

"하지만이란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공평한 것이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어."

"아이를 죽인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맞아. 그렇다고 그 아이도 어머니를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다른 여자들에게 세스를 구해야 된다고 납득시킨 것은 우선 엘라였다. 엘라는 모든 병에는 씹으면 낫는 뿌리라든가, 만지면 병에 걸리는 뿌리가 있다고 믿는 여자였다. 아무도 엘라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했다 해도 그녀가 불쾌하게 여겼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을 일종의 질병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그의 자식한테 강간당하며 사춘기를 보냈었다. 이 두 사람은 엘라에게 성에 대한 혐오를 가지게 했다.

세스가 감옥에서 나와 어느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 않고, 마치 친구도 이웃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 엘라는 그녀를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추방해 버렸다. 하지만 124번지의 소문은 엘라를 격노하게 했다.

엘라의 분노 중에는 극히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다. 세스가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엘라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세스의 범죄에는 질렸었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그 범죄보다도 더한 것이었다. 그러나 엘라는 그녀의 과거가 어떻든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루 하루의 삶은 그녀의 모든 정력을 흡수해버렸다.

노예의 생활이나 자유의 생활이나 모두가 시련이며 고난이었다. 그 날에 일어난 악은 그날 하루로 충분한 것이다. 아무도 그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함께 기도할까요?"

여자들이 물었다.

"좋아, 우선은 기도부터 하기로 하지.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행동 개시야."

덴버가 보드윈 가에 머무르기로 되어 있던 날 보드윈 씨는 교외에 볼일이 있었다. 그래서 새로이 오게 되는 아가씨를 저녁 식사 전에 맞으러 갈 생각이라고 제이니에게 알렸다. 덴버는 무릎에 보따리를 얹고 포치의 계단에 앉았다. 그리고 보드윈씨가 올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대 방향에서 무리로 다가오고 있는 여자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덴버는 보드윈 남매가 만족해 줄지 어떨지 걱정이었다. 꿈을 꾸다가 울면서 잠을 깬 탓으로 불안했다.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에도 기분이 우울했다. 몇 사람은 가지고 있던 중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건을 가져왔다. 호주머니에 넣거나, 목에 걸치거나, 가슴의 우묵한 곳에 넣어 오는 등 여러 가지였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독교도의 신앙을 가져왔다.

그녀들은 블루스톤 거리를 걸어 약속한 시간에 모두 모였다. 가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더위 때문에 집을 나서지 못한 여인도 있었다. 그 밖에도 유령과의 대면은 딱 질색이라고 하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자도 있었다. 레이디 존스처럼 인간의 무지를 증오한 사람도 있었다. 30여 명 정도의 여자들이 한 부대를 편성해 124번지를 향했다. 30명 남짓한 전원이 줄을 이루어 124번지에 도착하자 제일 처음에 보였던 것은 계단에 앉아 있는 덴버가 아니라 자기들 자신의 모습이었다. 지금보다도 젊고 늠름하며 풀 속에서 누워 자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샐러드를 접시 위에 건져 올리고 있는 자기들의 모습을 보았다.

강까지 달려 나가 남자들을 놀려대거나 아이들을 안아 올렸다.

베이비 색스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자꾸만 권했다. 나이가 들어 늙어버린 어머니들은 하모니카의 소리에 맞추어 어깨춤을 추었다. 여자들이 기대거나 기어오르던 목책은 없어져 버렸다. 호도나무 그루터기는 부채꼴로 금이 가고 틈이 생겨 갈라졌다. 하지만 젊고 행복스러운 모습이었다. 질투 따위는 아직 모르는 채 베이비 색스의 뜰에서 놀고 있었다.

덴버는 분명치 않은 얘기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여자들의 모습을 보고 일어섰다. 그녀들은 한 곳에 뭉쳐 얘기하거나 속삭이고 있었는데, 뜰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덴버는 손을 흔들었다. 두세 사람이 돌아보았지만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면서 덴버는 도로 앉았다.

한 여인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도 따라 했다.

덴버는 고개를 숙인 수많은 머리를 보았지만 기도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함께 합창하는 뜨겁고도 짧은 말만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굽어보소서, 주여. 들어주시옵소서..."

무릎을 꿇지 않고 선 채 124번지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여자 가운데는 엘라도 있었다. 그 눈들은 벽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집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규명해 내려고 했다. 죽은 딸이 돌아왔다는 것이 사실인지를 가려내야만 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여자들이나 서 있던 여자들은 지체하지 않고 엘라를 따라 소리쳤다. 기도드리는 것을 그만두고 한 발 물러나 태초로 돌아갔다. 태초에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 있었던 것은 소리였다. 여자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그것이 어떤 소리를 내었는지 알고 있었다.

보드윈은 말 하나를 맨 이륜마차를 몰고 블루스톤 거리를 나아갔다. 프린세스에 올라탄 자기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마차를 모는 것은 다소 본의가 아니었다. 양손을 덮듯이 등을 구부리고 고삐를 잡으면 나이에 걸맞게 노인 같아 보였다. 하지만 여동생에게 새로 오게 될 아가씨를 태우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다. 가는 길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자기가 태어난 집으로 가는 중이었으니까. 그의 생각을 옛날로 향하게 한 것은 아마 이 목적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집을 30년간 보지 못했었다. 정면에 심어진 호두나무도, 뒤켠으로 흐르는 냇물도, 그사이에 끼워 있는 목재로 지은 건물도 보지 못했다. 그의 가족이 중심가로 이사해 온 것은 그가 두 살 때였으니까 집안의 세부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취사는 집 뒤켠에서 하고 있었다는 것, 우물 가까이에서 노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 여자들이 그 집에서 계속 죽었다는 것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할머니, 큰어머니, 그리고 그가 태어나기 전에 누나 한 명이 죽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그와 갓난아기였던 여동생을 데리고 67년 전 코트 거리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토지가 주요한 재산이었지만 그는 토지보다도 집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집세로 이 집을 빌려 주었던 것이다. 완전히 빈집으로 두는 것보다는 세 든 사람이 황폐를 막아주기 때문에 집세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개의치 않았다. 말은 빠른 속도로 계속 달렸고 에드워드 보드윈은 훌륭한 콧수염을 숨으로 식히고 있었다. 콧수염이 그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이란 것이 '협회' 여인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까맣고 윤기가 있었는데 파랗게 면도를 한 완강한 턱과의 대조로 그 아름다움은 돋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여동생과 마찬가지로 하얀색이었다. 백발 덕분에 모든 회합에서 제일 돋보였고, 기억하기 쉬운 인물이 되었다.

20년 전 '협회'의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 운동이 활발해 있던 때, 그의 흑색 몸이 문제의 핵심이 되었었다. 그의 적은 에드워드 보드윈이라는 이름 대신 '표백된 검둥이'라고 불렀다. 여행중에 미시시피강의 뱃사람들이 장사의 경쟁 상대가 된 검둥이의 뱃사람들을 향해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때 보드윈을 붙들어 얼굴과 머리카락을 구두약으로 새까맣게 만든 일이 있었다. 그 과격한 시대는 지금은 과거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날씨마저 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너무 덥지 않으면 얼어붙을 만큼 추웠다. 일사병에 걸리는 것이 두려워 모자를 반드시 썼었다. 목숨의 취약함을 안 것은 오늘에 시작된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70세를 넘어섰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에 대한 생각은 그를 불쾌하게 했다.

옛날 농장이 있었던 곳으로 다가감에 따라 그는 한층 강하게 시간의 흐름을 의식했다.

에드워드 보드윈은 아버지를 괴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점에서 대개의 인간들과 달랐다. 아버지는 뚜렷한 하나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은 물론 목숨이 붙어 있는 모든 생물은 신성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믿음은 점점 감소되기는 했지만 그는 지금도 아버지의 이념을 믿고 있었다.

편지를 보내고 청원서를 제출했었다. 화합과 토론을 열고 동지를 늘여 대담하게 폭동까지 일으켰던 지난 세월이 새삼 떠올랐다.

지금 그는 자기의 장난감 병정과 시계가 없는 사슬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신참 가정부 아가씨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과 보물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를 정확히 생각해 내는 것이 문제였다. 그 후에는 집에서 느긋이 쉬고 저녁식사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길은 팔꿈치처럼 휘어졌다. 다가감에 따라 노래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들이 124번지의 바깥에 모였을 때 세스는 얼음덩어리를 부수고 있었다. 그녀는 부순 얼음을 물이 들어있는 통에 넣었다. 노랫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비러브드의 이마에 얹을 얼음 수건을 짜고 있었다. 비러브드는 줄줄 땀을 흘렸고 소금덩어리를 손에 들고 거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노랫소리를 들었고 일시에 머리를 쳐들었다.

목소리가 커지자 비러브드는 침대에서 일어나 소금을 한 번 핥은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계단에 앉아 있는 덴버가 보였고, 뜰이 도로와 접하는 곳에는 이곳에 사는 30여 명의 여인들의 황홀경에 빠진 얼굴들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도 있었다.

세스는 입구의 문을 열고 비러브드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나란히 두 사람은 문간에 섰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들은 세스를 보자마자 즉석에서 그녀의 모습을 인정했다. 그런 다음 세스의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 자기들 자신에게 놀랐다. 악마의 아이는 아름답고 영리하다고 그녀들은 생각했다. 눈은 검고 반짝반짝 빛났으며 날씬하게 뻗은 긴 다리로 서 있었다. 그런데 배는 부풀어 팽팽했고 머리카락은 덩굴처럼 얽히듯 자라 있었다. 모두들 그녀의 미소가 아찔할 만큼 눈부셨기 때문에 놀랐다. 세스가 백인 남자를 알아본 것은 자기에게 향해진 여자들의 얼굴을 다시 보려고 할 때였다. 암말이 방향을 바꾸어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넓은 차양의 까만 모자로 사나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적은 알 수 있었다. 놈은 나의 뜰로 들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빼앗으려고 온 것이다.

혼자 포치에 서서 비러브드는 미소 짓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은 비어있다. 세스가 그녀로부터 도망친다. 비러브드는 세스가 붙들어 주고 있던 손의 공허함을 느낀다. 지금 세스는 저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도망쳐 간다. 그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비러브드를 내버려 두고 가버린다.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덴버와 그녀가 비러브드에게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혼 속으로 도망쳐 간다.

저 사람들 모두의 위에서 채찍을 손에 들고 마부석에서 일어나 피부가 없는 사나이가 비러브드를 보고 있다.

 

맨발에 물들어요, 카밀레 풀물

구두를 벗었네. 모자를 벗었네

맨발에 물들어요, 카밀레 풀물

내 구두를 돌려다오. 내 모자를 돌려다오.

고구마 자루가 나의 베개

악마가 슬며시 숨어드는데

외로이 울고 있는 증기 엔진

사랑할 거야 그녀를

네 눈이 돌이 될 때까지, 찌브러질 때까지

 

돌이 될 때까지 찌브러질 때까지

돌이 될 때까지 찌브러질 때까지

스위트 홈의 착한 여자여

그리하여 그대는 황홀경이 된다.

 

포올 디의 귀가는 나갔을 때와 반대의 순서를 밟았다. 냉장헛간, 창고, 부엌 순으로 들어갔다. 히야보이가 노쇠하여 여기저기 털이 빠진 채 우물가에서 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러브드가 정말로 나갔다고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어떤 이들은 말했다. 그러나 엘라는 그다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다음 기회를 살피며 숲속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올 디는 늙은 개가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 이제 124번지에는 비러브드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래도 혹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생각에서 냉장헛간의 문을 절반쯤 열어 보았다. 볏짚 요는 펼쳐져 있는 채 그대로였고 가장자리를 쥐가 뜯어먹은 헌신문지가 흐트러져 있었다.

포올 디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빠져들게 하고 몸부림치게 한 욕망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마치 해면의 맑은 공기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위로 가려고 버둥대며 여자의 속으로 돌진해간 것이다. 그녀와의 성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것은 성교라기보다 이 세상에 머무르려고 하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 소녀가 찾아와 스커트를 쳐들 때마다 생명에의 굶주림이 포올 디를 엄습해왔다.

새어드는 한낮의 햇살은 기억을 녹여 빛줄기로 떠도는 미세한 먼지의 입자로 바꾼다. 포올 디는 문을 잠궜다. 집은 너무도 고요하다. 스탭 페이드가 말한 그대로였다.

"집 주위가 온통 떠들썩했었는데 지금은 잠잠해."

스탭은 말했다.

"두세 번 지나쳤는데 어떤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어. 야단을 맞고 얌전해진 것같은 생각이 들어. 보드윈 씨가 되도록 빨리 그 집을 팔 작정이라고 말했어."

"그건 그녀가 찌르려고 했던 사람의 이름인가? 그 사람이야?"

"그래. 그분 누이동생은 저 집에 재앙이 차 있다고 말하더래. 저 집을 액땜으로 없애버릴 생각이라고 제이니가 말하더래."

"그래서 그분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데?"

"제이니 말로는 보드윈씨는 반대하지만 동생을 말릴 생각은 없대나 봐."

"그 사람들은 누가 그런 집을 살 줄 아나보지? 그만한 돈을 갖고 있으면서 누가 그런 집을 사겠어. 안 그래?"

"난 모르겠어."

스탭이 대답했다.

"그 집이 보드윈 씨의 손을 떠나려면 좀 시간이 걸릴 테지."

"그 사람은 그녀를 고소할 생각이 없을까?"

"아무래도 없나 봐. 제이니의 말로는 그분이 알고 싶은 것은 포치에 서 있던 벌거벗은 흑인 여자뿐인가 봐. 그녀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세스가 하려고 했던 행동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야. 그가 본 것은 몇 명의 흑인 여자가 실랑이하고 있는 것뿐이었어. 세스는 이 사람들 중 한 사람을 향해 달려 온 것이라고 생각했대나 봐."

"제이니는 보드윈 씨에게 사실대로 말했나?"

"아니, 제이니는 자기 주인이 죽지 않아서 마음을 놓았다고 말했어. 엘라가 세스를 때리지 않았으면 자기가 때렸을 거라고 했어. 그 여자에게 자기 주인이 살해되는 줄 알고 두려워했던 거야. 만일 보드윈씨가 죽었더라면 그녀와 덴버는 둘이서 지금쯤 일할 곳을 찾고 울지 모르지."

"제이니는 보드윈 씨에게 벌거벗은 여자가 누구라고 말했다던가?"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대."

"당신은 여자들이 그걸 보았다고 믿나?"

"그래, 여자들은 뭔가를 본 거야. 나는 어쨌든 엘라를 믿어. 그 사람의 눈을 노려보았다고 엘라는 말하고 있어. 세스의 바로 옆에 서 있었대. 그렇지만 그녀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내가 보았던 그 처녀는 아닌가 봐. 내가 본 처녀는 몸이 굉장히 가늘었는데 그녀들이 본 것은 무척 컸대.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있었는데 오히려 세스가 더 작더래."

"어느 정도까지 그녀는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갔었나?"

"바로 옆까지 갔었다고 여자들은 말하고 있어. 마지막 순간에 덴버와 그녀들이 세스의 몸을 붙잡았고, 엘라가 턱 밑을 한 방 먹였다더군."

"그 사람은 세스가 자기를 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어."

"그럴지도 모르지. 만약 세스가 그 사람 몸에 손을 댔다면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거야.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분은 세스가 교수대에 올라가는 것을 막는데 가장 큰힘이 되어 준 분이야."

"그래 맞아. 큰일 날 뻔했지. 그 여자는 미쳤어. 미쳐버렸다구."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들 모두가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은 웃었다. 처음에는 녹슨 것 같던 웃음이 커져서 마침내 스탭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을 닦았다.

"백인이 입구에 접근할 때마다 그녀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얘기야?"

"집세를 받으러 오는 남자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놈들이 우편을 그쪽까지 배달하지 않은 것은?"

"아무에게도 편지가 가지 않게 될 테니까."

"받는 것은 배달부뿐일 거야."

"아주 나쁜 소식을 말야."

"게다가 최후의 편지."

웃을 만큼 웃어버리자 두 사람은 길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아직 자기 집에 덴버를 묵게 하고 있나봐. 놀라운 일이야."

"잠깐, 덴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 포올. 나의 보물이야. 나는 그 애가 자랑스럽다구. 그 소녀가 처음에 엄마에게 마구 매달려 넘어뜨리려고 했었어. 누군가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럼 그녀가 그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군."

"그래,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그렇게 대답하면서 스탭은 갑자기 자신의 날쌘 동작을 상기했다. 두개골이 부서질 뻔한 갓난아기를 구해냈을 때의 광경을.

"나는 그애가 자랑스러워. 그 애는 훌륭하게 자랄 거야. 훌륭하게."

스탭이 말한 그대로였다. 포올 디는 이튿날 아침에 일하러 가다가 근무하고 돌아오는 덴버를 만났다. 전보다 여위고 눈에는 침착함이 없었다. 이전보다 더 할리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그녀가 먼저 방끗 웃었다.

"안녕하세요."

", 날씨 참 좋지?"

그녀의 미소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 조소가 아니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였다. 그녀의 미소 짓는 입이 놀랄 만큼 세스와 비슷했다. 포올 디는 챙이 달린 모자에 손을 댔다.

"잘 되어 나가니?"

"불평해 보았자 나아질 것이 없으니까요."

"집에 돌아가는 길이야?"

덴버는 셔츠 공장에 오후부터 일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보드윈 집의 일 외에도 다른 일이 있으면 다소 저축도 할 수 있어서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포올 디는 보드윈 씨가 너를 제대로 대우해 주느냐고 물었다.

것을 가르쳐 주어

"그 이상이어요. 미스 보드윈은 여러 가지의 것을 가르쳐 주어요. 내가 흑인 대학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어요. 나를 가지고 실험하나 봐요."

그 말을 듣고도 포올 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돌려 다른 것을 물었다.

"엄마는 괜찮으시니?"

"아뇨. 전혀요."

"내가 들리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니? 나를 보면 엄마가 기뻐할까?"

"글쎄요."

덴버는 말했다.

"나는 엄마를 잃어버렸나 봐요, 포올 디."

두 사람 모두 잠시 침묵한 뒤에 포올 디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아가씨 말인데, 왜 비러브드라고 하는."

", 그런데요?"

"그녀가 확실히 네 언니였다고 생각하니?"

덴버는 자기 구두에 눈을 떨구었다.

"때때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덴버는 갑자기 눈을 들고 포올 디의 눈을 응시했다.

"하지만 당신이 제일 잘 알고 계시잖아요, 포올 디. 당신은 그녀와 아주 친했으니까요."

그는 혀로 입술에 침을 발랐다.

"네가 나의 생각을 알고 싶다면..."

"알고 싶지 않아요. 나도 나의 생각이 있으니까."

"어른이 되었구나. 그래, 그럼 일이 잘 되기를 빌겠다."

"고마워요, 포올 디. 마음 놓고 집에 오셔도 좋아요. 하지만 엄마한테 말할 때는 조심해 주세요, 아시겠어요?

"걱정하지 말아라."

이 때 한 젊은이가 덴버를 불렀다. 활짝 얼굴을 빛내며 젊은이를 돌아다 보았다.

포올 디는 하는 수 없이 덴버에게서 떠났다. 지금까지 들어온 갖가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백인이 일 때문에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서 온 것이다. 정말로 갓난아기 유령이 세스를 충동질해 그녀를 교수형에서 살려준 남자를 죽이려고 했는지 알고 싶었다. 단 하나 일치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처음에 여자들은 그것을 보았는데 다음에 봤을 때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여자들이 세스를 땅바닥에 넘어뜨리고 집쪽을 돌아다보니 그것은 없어져 버렸다.

포올 디는 124번지의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너무도 조용하다. 황량한 채 아무것도 없는 집으로 변한 것이다. 부재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그는 잽싸개 흰 계단에 시선을 보냈다. 난간에는 빈틈없이 리본이 꽃다발처럼 감겨져 있었다.

포올 디는 주저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세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가 너무도 작아 보여 어떻게 자기들 두 사람이 그곳에서 함께 잤을까 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침대에는 시트가 없고 지붕창이 열려 있지 않아 방안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선명한 색깔의 옷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벽의 못에 걸려 있는 것은 맨 처음 비러브드가 입고 있었던 드레스였다. 스케이트용 구두 한 켤레가 구석의 바구니 속에 들어 있었다. 시선을 다시 침대로 옮겨 가만히 계속 보았다. 그곳은 그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땀이 날 만큼 생각을 집중시켜 거기에 누워 있는 자기 모습을 회상했다. 그러자 힘과 용기가 생겼다.

또 다른 침실로 갔다. 덴버의 방이었는데 방금 나온 방과는 대조적으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스의 모습은 여기에도 보이지 않았다. 좁은 침대에 자기의 옛 모습을 확실하게 남긴 뒤에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부엌의 식탁 앞에 앉았다.

뭔가가 124번지에서 없어져 버렸다. 거기에 살고 있던 사람들보다 큰 뭔가가. 오른쪽을 보니, 거실 문이 반쯤 열린 채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자장가처럼 조용히 부르고 있었다. 포올 디는 그녀가 그곳에 있다고 믿으면서 가보았다. 역시 세스였다. 화사한 색색의 퀼팅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세스의 머리는 식물의 뿌리처럼 베개 위에 펼쳐져 물결치고 있었다. 세스의 눈은 빨려들 듯이 창으로 향해 있었다. 너무도 무표정해서 그로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줄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이 방은 너무 밝았다. 세스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포올 디는 기침을 하여 노래를 중단시켰다. 그녀는 머리를 돌렸다.

"포올 디."

"아아, 세스."

"잉크를 만든 것은 나예요, 포올 디. 내가 잉크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 녀석은 그걸 못했을 거야."

"무슨 잉크 말이야? 누구 얘기야?"

"당신, 수염을 깎았군요."

"그래, 보기 싫어?"

"아니. 좋은 남자같이 보여요."

"악마의 장난이야. 당신이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빙그레 웃더니 다시 창으로 눈을 돌린다.

"당신과 얘기하고 싶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덴버를 만났어. 그녀가 당신에게 말했나?"

"그 애는 낮에 와요. 덴버는 아직 나하고 있어요. 나의 덴버."

"여기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돼."

"피곤해요, 포올 디. 몹시 피곤해요. 좀 쉬어야겠어요."

그때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 포올 디는 세스에게 소리쳤다.

"나를 두고 죽지 마! 이건 베이비 색스의 침대 아냐! 당신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지?"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그녀를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덴버의 경고가 생각나서 자기를 억눌렀다.

"뭘 계획하고 있는 거야. 세스?"

"계획 같은 것은 없어요."

"덴버가 낮에는 여기에 있으니까 나는 밤에 여기에 있기로 하겠어. 당신을 도와주겠어. 듣고 있는 거야? 세스, 지금부터 시작해 볼까. 우선 당신은 더러우니까 내가 더운 물을 데워올께. 괜찮겠지, 세스?"

"나의 발을 씻겨줄 거예요?"

그녀는 묻는다.

"물론 당신의 발을 닦아 주겠어."

세스는 눈을 감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창가 한구석에 있는 것이 나의 바램이니까. 지금은 씻어 준다고 해도 씻겨줄 몸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남자를 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스는 눈을 떴다.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 남자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울며 서로의 사연들을 이 남자에게 얘기했었다.

"포올 디?"

"왜 그래. 세스?"

"그 애는 나를 남겨두고 가버렸어요."

"아아, 울지 말아."

"그 애는 나의 보물이었는데."

포올 디는 흔들의자에 앉아 화려한 채색으로 이어붙인 퀼팅 이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양손을 무릎 사이에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엘라의 주먹에 얻어맞고 아직 부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인데도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입이었다. 엄한 것 같은 검은 눈동자. 모닥불 앞에서 김이 올라오던 젖은 드레스!

지금 이 여자 세스만이 그의 내부에 있는 남자의 긍지를 소중히 마음 써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인생을 이 여자의 인생곁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스, 당신과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과거를 짊어지고 있어. 이제 우리들에게도 내일이 필요한 거야."

그는 몸을 굽혀 세스의 손을 잡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당신 자신이 당신에게 둘도 없는 보물인 거야 세스. 당신이 말이야."

의지하는 것처럼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다.

 

흔들어 줄 수 있는 외로움이 있다. 그것은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움직임이다. 피부처럼 꼭 싸인 채 헤매도는 외로움이기도 하다. 아무리 흔들어 주어도 얌전해지지 않는다. 살아 있어서 멋대로 돌아다닌다. 걷고 있는 자기 자신의 발소리가 아득히 먼 나라에서 찾아오듯이 울리면서 황량하게 확산해 간다.

 

누구나 그녀가 뭐라고 불렸는지를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 사람들이 그녀를 생각해주지도 않았다. 더욱이 찾고 있지도 않았으므로 미아도 아니었다. 만약 찾고 있더라도 이름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녀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녀는 '나를 사랑해줘요' 하고 졸랐지만 그녀를 '나의 것'이라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았다.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에게 전해질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두 악몽처럼 그녀를 잊었다. 멋대로 얘기를 만들어 내 그럴듯하게 정리하여 분석한 후 그날 포치에서 그녀를 본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그녀를 잊었다. 그녀와 생활하고 그녀에게 빠져 있던 사람들은 잊어버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도 그녀가 한 말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끝내는 그 여자의 존재도 잊었다. 생각해내는 것은 무분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서, 왜 웅크리고 있었는지,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물속의 얼굴은 누구였는지 마침내 모른 채 넘어가버렸다.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에게로 전해질 이야기는 아니었다.

 

124번지의 뒤꼍 강변에 그녀의 발자취가 보였다. 그 발자국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자기 발을 얹어 보면 발과 발자국이 딱 들어맞는데 발을 치우면 발자국 역시 사라져 아무도 그곳을 걷지 않은 것 같았다.

때가 지나면 흔적은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 잊혀지는 것은 발자국뿐만 아니라 물도, 물속의 풍경도 잊혀져 뒤에는 기억만이 남는다. 기억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것의 숨이 아니라 처마끝을 가르는 바람이나 재빨리 풀리는 봄 얼음의 기척뿐이다. 물론 키스를 조르는 시끄러운 목소리도 없다.

비러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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