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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 가르다

Bollnow 2025. 2. 20. 14:24

중남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 근처에 작은 호수가 있다. 사막에서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호수의 소금기는 점점 더 진해져 간다. 언젠가 호수는 염전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 호수에 수십만 마리의 홍학 떼가 해마다 찾아온다. 유럽에서 여름을 난 홍학 떼들이 지중해를 건너 사하라를 지나 아프리카 중남부의 보츠와나까지 회귀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홍학 떼들은 알을 낳는다. 알이 다 부화할 즘이면 건기가 찾아오고 호수의 곳곳은 소금 웅덩이로 변해버린다. 홍학떼들은 그곳에서 25Km나 떨어진 작은 담수호까지 갓 태어난 새끼들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한다. 날 수 없는 새끼들 때문에 홍학들은 걸어서 간다.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사막 속을 무연히 걷고 또 걷는다. 그 죽음의 행진에서 1/4 가량의 홍학이 모래 더미 위에 긴 다리를 꺾으며 쓰러진다. 비로소 담수호에 이른 홍학들은 그곳에서 물과 먹이를 섭취한 후에 새끼들이 날갯짓을 시작하는 대로 다시 북쪽으로 날아간다.

다른 새끼들이 어미 새들을 따라 죽음을 호수를 떠났을 무렵에야 알에서 깨어나 두리번거리는 것들.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북쪽을 향해 걸어간다. 그렇게 걸어가면 갈수록 족쇄는 두꺼워져 간다. 나중에는 몸통보다 더 두꺼운 소금 덩이가 발목에 감긴다. 그 소금 덩이의 접착 강도는 놀라울만큼 강해서 톱으로도 쉽게 체거하지 못할 정도이다. 눈도 채 뜨지 못한 홍학 새끼는 제 몸보다 무거운 소금 덩이를 발에 차고 북쪽으로 향하다 하나둘 쓰러져간다. 아마 그들은 썩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먹히지도 않을 것이므로 어쩌면 영원히 절여진 채 남아 있을 것이다.

 

 

1

- 생각보다 옷이 잘 어울리는구나.

- 그러니? 고맙다.

벌써 사위는 어둑해져 있다.

- 네가 무당이 될 줄은 몰랐어.

- 나도 몰랐어.

나는 수연의 빈 잔에 맥주를 따라준다. 수연은 맥주를 들이켠다. 주위는 여전히 소란스럽다. 신내림굿의 여운이 수락산 어귀를 떠나지 않는다. 수연이는 유쾌해 보인다. 그녀의 얼굴에는 채 가시지 않은 작두춤의 여운이나마 있다.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고 입은 열려 있다. 나는 잔을 비우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다.

- 사람이 작두 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게 난 아직도 신기해.

- 신기할 것 없어. 사람은 더한 것에서 올라설 수 있어.

그녀의 말투는 무당의 그것을 닮아 있다.

- 사진을 몇 컷 더 찍어야 해.

- 아까 굿할 때 안 찍었어?

- 찍었는데, 이런 장면도 하나 찍어 둬야지. 무당이 맥주 마시는거.

- 찍어.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만지작거린다.

 

2

베가르기라는 춤이 있다. 내가 베가르기를 처음 본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875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날이 무척이나 더웠고 사람들은 봄을 탓하며 거리를 거어다녔다. 낮잠이 그리운, 그러나 잠은 오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맥주나 한잔 할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친구 하나가 그렇게 제안했고 아마 세 명쯤 되는 친구들이 의기투합하여 학교 앞 맥주집으로 향하던 참이었을 게다. 그렇게 걸어나오다 교문 앞쯤에서 우리는 긴 행렬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행렬 중에는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시위 때면 언제나 마주치는 면면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그 해열 뒤를 졸졸 따라가게 되었고 행렬은 교문 앞에서 멈추었다. 오늘 집회가 있나? 우리 중 한 친구가 물어왔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은 행렬의 선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문 앞에서 멈춘 행렬은 둥굴고 긴 타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태양은 더 뜨거워진다. 모두들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행렬 사이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흰 광목천으로 만든 홑옷을 걸친 그녀, 머리는 질끈 동여맸지만 여러 가닥이 풀어져 앞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여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북과 장고들이 그 여자의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몇몇의 사내들이 30미터는 좋이 됨직한 긴 베를 가지고 그녀 앞에 섰다.

그 여자가 수연이었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그녀에 대하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녀가 나와 같은 과라는 것, 그러나 수업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풍물을 하는 동아리에 있다는 것 정도였다.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이 없는 눈을 가졌고 호리호리한 몸매, 화장이나 몸치장을 전혀 하지 않는 여자. 하지만 그날 우윳빛 소복을 입은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귀기까지 느껴지는 모습으로 아스팔트 위에 맨발로 직립해 있었다.

둥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길 건너편에 전경들이 도열해 있는 게 보였다. 언제라도 최루탄을 쏘며 달려들 것 같은 긴장감이 돌았다. 반면에 학생들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전경과 학생, 모두가 하얀 소복의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북소리에 맞춰 그녀의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그때쯤 누군가 이 집회가 얼마 전에 고문으로 죽은 학생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열렸으며 이 춤의 이름이 베 가르기라는 것을 내게 일러주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베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 앞에 놓인 베는 네 사람의 건장한 학생들이 팽팽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때로는 주먹을 불끈 쥐어 하늘로 향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스팔트 바닥에 널브러지기도 하면서 그녀의 춤은 계속되었다. 허리 높이에서 땅과 평행하게 펼쳐져 있는 베는 그녀가 다가오자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찢어진 틈으로 그녀의 몸이 들어섰다. 그때부터 그녀의 춤이 베를 가르며 진행되었다.

춤이 계속될수록 베는 점차 두 갈래로 벌어져갔다. 그녀의 얼굴은 땀으로 질펀했고 머리카락은 모두 풀려 흘러내렸다. 춤은 점차 격렬해져 갔다. 그에 따라 북과 장고의 소리도 높아지고 빨라져갔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찢어져 가는 베, 그녀는 그 베 속에서 이리저리 출렁였다. 그녀가 몸을 숙일 때면 저고리와 치마 사이에서 속살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한치의 베마저 갈라져 베는 드디어 두 조각이 되었지만 그녀는 몰아지경에 빠져 베가 모두 갈라진 후에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다. 눈을 풀렸고 몸은 유연하게 흐느적거렸다. 그 장면은, 집회를 기획한 이들에게는 미안 하지만, 참으로 색정적이었다.

이상한 얘기지만, 그때 나는 그녀의 발을 보고 있었다. 몸의 다른 모든 부분은 이완되었지만 그녀의 발만은 그렇지 않았다 뒤꿈치를 먼저 땅에 대고 흘러가듯이 스텝을 밟는 한국 무용 특유의 발동작만큼은 생생하기 긴장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맨발이었다.

그녀의 발을 씻겨주고 싶다.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저 뜨거운 아스팔트에 달궈진 그녀의 발을 차가운 물로 깨끗하고 시원하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추고 싶다.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그녀는 관중들 사이로 스르르 사라져버렸고 그제야 나는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 눈부셨고 땅이 뜨거웠다. 춤이 끝나자 누군가의 선창으로 구호가 터져 나왔고 대열은 불어나기 시작했다. 전경들은 SY44 최루탄 발사기를 하늘로 향했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한동안 그녀의 춤, 그리고 벌거벗은 발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그녀의 발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3

사진을 찍은 수연은 동료 무당들에게 이끌려 잠시 자리를 뜬다. 여기저기 질펀한 술자리가 펄쳐져 있다. 나는 굿 음식을 집어 먹으며 필름을 되감고 있다. 그러면서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 왜 바로 이런 때 그 여자가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대학가의 한 오피스텔에서 기거하던 시절의 여자다. 열세 평짜리 방들이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형태. 문밖에는 쓰레기만이 놓여 있다. 옆방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쓰레기를 통해 밖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녀는 쓰레기봉투를 문밖에 내어놓지 않았으므로 잘 노출되지 않았다.

그녀의 방에는 하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커튼이라기보다는 하얀 천이라고 말해두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슈퍼마켓을 끼고 돌면 내가 살고 있던 그 오피스텔이 보였는데 그녀는 내 바로 옆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슈퍼마켓을 끼고 돌던 나는 내 방 쪽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형광등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스탠드의 불빛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불빛은 희미했고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촛불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발길을 멈추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흰 카ㅓ튼에 어른거리던 검은 그림자였다. 한 손을 둥글게 구부려 머리 위로 올리고 다리는 곧게 올려 뻗은 여자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게 여자라고 믿었던 까닭은 우산처럼 펼쳐진 짧은 치마의 윤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 여자의 춤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반복되던 회전. 인간이라면 저럴 수가 있나? 한 발을 든 채로 저토록 천천히. 그러면서 저렇게 많은 회전을 할 수는 없다. 기괴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에 한없이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열쇠를 꺼내 들고 오피스텔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내 방으로 들어서기 전에 다시 한번 그녀의 방쪽을 힐끔거렸으나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피스텔 주차장 옆 정원에 심어놓은 철쭉이 피었던 걸로 보아 4월 언제쯤이 아닐까 싶은 날. 그녀와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그날따라 취재가 오후에 있어 느지막이 방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걸 처음 목격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의 집 문을 잠그듯 서툰 동작으로 열쇠를 끼워 돌리고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어딘가 이상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사뿐사뿐 출렁이며 걸어갔다. 아니 걸어갔다기보다는 흘러갔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녀가 계단에 이르러서야 그 걸음걸이의 비밀이 드러났다. 그녀의 뒤꿈치는 땅에 떨어진 채 살짝 들려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몸 전체에 탄성을 추었던 게다.

흰 커튼에 비친 그림자가 저 여자였을까? 방안에서는 믿을 수 없이 긴 회전을 반복하던 여자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여자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오피스텔의 현관 앞에 내려서자 그녀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내가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나서였다. 오피스텔에서 슈퍼마켓을 지나 좀 더 내려오면 길가에 연한 카페가 하나 있다. 퓨어(Pure), 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였는데 이름 그대로 내부에는 아무런 그림도 장식도 걸려 있지 않은 다소 삭막해 보이는 곳이었다. 좁은 방안이 지겨워지면 가끔 그 카페에 들러 술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가끔은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카페의 바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이다.

어떻게 그녀의 옆에 앉게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가 전화기 옆에 앉아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몇 마디쯤 말을 붙여보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내가 건넨 말들은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으로 되돌아왔던 것 같다. 이 집에 처음 오시나요? 이 음악 아세요? 따위의 질문들 말이다.

대화를 포기하고 앉아서 계속 술을 마시던 나는 그녀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예의 출렁거리는 발걸음. 그런데도 어딘가 불균형한, 그 걸음걸이 말이다. 그건 무용수의 움직임을 닮아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지나가는 말처럼 다시 말을 붙여보았다.

- 혹시, 누레예프의 발을 본 적이 있나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은 조심스레 밝아졌다. 루돌프 누레예프, 전설적인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1928년에 바이칼호에 면한 아름다운 호반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태어나 1993년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나의 아버지와 출생 연도가 같은 그가 죽던 해에 나는 집을 떠나 독립했다.

- 당신은 보셨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사진이 누레예프의 움직임을 기록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모두 정지 화면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었다.

- 누레예프와 공연할 수만 있었다면, 아니 그의 공연을 볼 수만 있었더라면.

그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뜨리고 어깨는 한껏 올려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슬쩍 곁눈질 해 보았다. 허벅지와 90도를 이룬 채 꺾인 무릎.그리고 그 무릎에서부터 엄지발가락까지는 일직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는 발레리나의 포즈였다.

- 발레를 하시나 보죠?

- ?

몽환적인 표정으로 하얀 벽 쪽을 응시하던 그녀는 내 말에 깜짝 놀라며 반문을 해왔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자신이 취한 자세의 변화를 모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자세는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다. 바에 엎어질 듯한 자세로 팔을 괴고 맥주를 들이켜던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 옛날에, 아주 옛날에 했었지요. 지금은 하지 않아요. .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었지요?

- 누레예프의 발이요.

- 맞아요. 누레예프의 발. 그의 발은 완벽해요. 토슈즈 따위가 필요 없는 발. 두 개의 점으로 전신을 지탱하죠. 완벽하게. 그의 모든 근육은 발레를 위해 바쳐졌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동의했다. 누레예프의 그 멋진 발. 그 발만 찍은 흑백사진을 그년도 본 것이다. 그 흑백사진은 누레예프의 발 곳곳에 배어 있는 긴장감을 빛과 그늘로 표현해냈다. 주름 하나하나가 모두 생생하다. 발에 새겨진 그 주름과 근육들만큼 누레예프를 잘 표현하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옆방 여자는 계속 주저리주저리 누레예프 이야기를 했다. 에이즈로 죽어도 좋아. 그렇게 춤출 수만 있다면. 그녀는 여전히 꿈꾸는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사도라 던켠과 최승희와 최근에 드라마에서 최승희 역을 했던 채시라 이야기까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무용 이외의 화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 왜 지금은 무용을 안 하세요?

내 질문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빠른 어조로 대답했다.

- 다리를 다쳤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저는 예중을 다녔더랬는데 선생님께서 절더러 콩쿠르에 나가보라고 하셨어요. 선생님께서 절 지명한 이유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온갖 콩쿠르를 휩쓸었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저는 열심히 연습했어요. 선생님이 퇴근하신 뒤에도 집에 가지 않고 밤늦도록 춤을 추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때였지요. 하지만 연습이 과했던 모양이에요. 콩쿠르를 이틀 앞둔 어느 날, 무릎의 인대가 끊어져 버렸어요. 저야 물론이고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낙담이 대단했어요. 의사는 무용을 더 할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미칠 것 같았어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새 그녀의 몸은 조금 전의 무용을 하는 듯한 긴장된 자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저보다 훨씬 못하던 애들이 지금은 미국이나 러시아에 가서 프리마돈나가 돼 있는 걸 보면 화가 나요.

그러면서 그녀는 가끔 신문지상에 이름이 나오는 몇몇 사람의 이름을 댔다. 무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보스턴과 페테르부르크, 키로프 같은 도시의 이름들이 술술술 튀어나왔다.

- 제 인생은 그때 끝난 거에요. 전 지금도 꿈만 꾸면 춤을 추고 있어요. 제가 가장 연기하고 싶었던 역이 뭔지 아세요? 지젤이에요. 지젤 아세요? 지젤이라는 여자가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는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지요. 혹시 그 공연 보셨어요? 강수진이라고 있잖아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돈나. 그 여자가 작년에 한국에서 올린 공연이 바로 지젤이에요. 거기서 강수진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듯이 춤을 추어대다가 자결하는 1막의 결말부는 정말 압권이었어요. 강수진이 제 중학교 때 동기였어요. 그땐 저보다 훨씬 못했었는데. 그리고 2막이 되면 그 여자 지젤이 요정이 되어 호숫가에서 춤을 추어요. 그러면 지나가던 남자들이 지젤에 홀려 밤새도록 함께 춤을 추다가 죽어버리거나 실성해버리죠. 지젤 역은 모든 발레리나들이 꿈꾸는 역이에요. 왠지 아세요? 지젤 역을 맡은 배우는 1막에서는 아주 촌스러운 여자를 연기해야 하고 2막에서는 반대로 요염하고 고혹적이면서 화려한 연기를 구사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어려워요.

그녀의 발은 꼿꼿해져 있었다. 그녀의 발을 보며 나는 베르니니(1598--1680)가 조각한 '성 테레사의 황홀경(Ecstast of St. Therese)'이라는 작품을 생각하고 있었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있는 이 작품은 성 테레사가 정령을 접하여 황홀경에 빠지는 장면을 조각하여 놓았다. 아빌랴의 성 테레사(1512--1582)는 성령을 통해 계시를 받아 신비주의적인 까멜 수녀회를 창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베르니니의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묘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조각 속에 묘사된 성 테레사의 표정이 오르가슴에 오른 여인의 모습과 흡사하여 별반 구별이 되질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성 테레사 위쪽에는 한 어린 천사가 화살을 들고 그녀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그건 사랑의 신 큐피트이다. 그러니 이 조각가가 정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성녀 테레사가 아니라 오르가슴에 도달한 여인이 아니었을까 싶은 의심을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조각 속의 성 테레사는 탈진한 모습으로 비스듬히 늘어져 있고 주름이 많은 옷자락이 그녀의 몸을 덮고 있다. 눈은 지그시 감고 입은 약간 벌려져 있으며 손은 아래를 향해 수직으로 처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비밀은 발에 있다. 옷자락 사이로 비어져 나온 테레사의 발은 발등이 아닌 발바닥 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그 긴장된 발가락들은 테레사가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 극도의 흥분 상태에 도달해 있음을 알려준다. 베르니니의 천재성은 그 발가락을 통해 드러난다.

 

4

수연은 돌아오자마자 제 잔을 내게 넘기며 술을 따른다. 잔을 권하는 동작에 옛날 수연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술 마셔.

- 발이 예뻐졌더군.

나는 작두 위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발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얗게 날이 서 태양빛을 퉁겨내던 작두와 그 위에 올라선 그녀의 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을까. 한없이 무거워지면 또한 한없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일까.

- 또 발을 씻겨주고 싶나 보지?

수연이 웃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버선발을 흘끗 살펴본다.

- 너희 신문사는 별걸 다 취재하는구나.

수연이 화제를 돌린다.

- 요새 지면이 늘어났잖아. 매일매일 신기한 사람들을 구해서 대문짝만하게 싣는 게 우리 임무지. 신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신기하게 만들어야 하고 신기한 사람들은 더 신기하게 만들어야 해.

- 기사 타이틀은 뭐야?

- 글쎄. 내가 정할 건 아니지만 신세대 무당 어쩌구로 나가겠지. 우리 데스크는 신세대란 말에 중독돼 있거든.

나와 수연은 한참을 침묵 속에 앉아 있다. 수락산의 어둠이 더 깊어 가는 걸 느낀다.

- 손님이 왔구먼.

등 뒤에서 기척도 없이 다가온 이가 대뜸 말을 던져 나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크게 놀란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수연은 자리에서 성큼 일어서며 고개를 숙인다.

- 인사드려. 우리 선생님이셔. 이쪽은 제 대학 때 친구예요.

나도 얼결에 일어나 그녀의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아까 굿을 주재하던 수연의 신어머니가 검은 어둠을 등지고 우뚝 서 있다. 키는 작지만 어딘가 사람을 위압하는 데가 있다.

- 귀한 손님 겉으니 잘 채려서 대접하더라고.

- , 쉬세요.

수연의 신어머니가 허위적허위적 지나쳐 간다. 그녀의 옷자락이 스치며 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 인간문화재시라며?

- .

-그럼 넌 전수자가 되는 거야?

- 그런 셈이지.

- 무병을 앓지 않고도 내림굿을 받을 수 있구나.

수연의 대답은 않고 그저 웃는다. 머릿속으로는 연신 작두를 타던 그녀의 하얀 발이 명멸한다.

 

5

대학원에서 수연을 다시 만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게 과에서도 화제였다. 4년 내내 수업 한번 제대로 듣지 않고 아스팔트 위에서 생활하던 그녀였다. 그녀가 왜 대학원에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아마 그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의 연애도 유명했다. 그녀의 상대는 한 학번 위의 총학생회장이었다. 인물이 수려했고 달변이었다. 그러나 수배가 떨어졌고 일찍 검거되었다. 총학생회장이 구치소와 교도소를 전전하는 동안 그녀가 부지런히 뒷바라지를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동안 그녀는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편지 쓰기와 면회 날짜 기다리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가 수감되어 있는 사이 그녀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 무렵 정권이 바뀌었다. 특사가 있었고 그 남자가 풀려났다. 남자는 살이 많이 쪄 있었다 한다. 다시 자유의 맛을 본 남자가 수연에게 헤어지자고 했고 그녀는 울며 매달렸다 한다. 친구들이 모두 그 남자를 비난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 후 정치에 투신한 그 남자는 지금 야당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되어 있다.

어쨌거나 내가 수연과 잠시나마 연애 비슷한 걸 했던 때가 그 무렵이었다. 아마도 여름이었을 것이다. 공동 연구실에 그녀와 나만이 남아 늦게까지 책을 뒤적이고 있었던 그 여름밤. 그녀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창가에 면한 그녀의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머리 뒤로 스탠드의 불빛이 역광으로 번지고 있었다.

- 술 마시자. 그녀가 짧게 말했다.

- 내일 발표는 어쩌고? 너 내일 발표잖아? 준비 다 했어?

- 발표는 발표고 술은 술이니까 마시자.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시계를 보았다. 이미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 술 사올 테니 기다려.

- 아니, 같이 가.

우리는 같이 걸었다. 아스팔트의 열기는 채 식지 않아서 더운 숨을 불어올리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유난히 힘들어하며 학교를 내려갔다. 교내의 가로등도 하나둘 꺼지고 수위들의 플래시 불빛만이 여기저기서 반딧불처럼 움직였다. 학교 앞 슈펴에서 맥주 몇 병과 안주거리를 사서 돌아오니 1시쯤이었다.

그녀는 빨리 취했다. 나는 취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밤새도록 들었다. 그런데 왜였을까. 나는 계속 그녀의 발을 씻겨주고 싶다는 생각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그녀가 맥주병을 타고 그녀의 가슴께로 한참 동안 주르르 흘러내렸다. 시원하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져버렸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는 깨어났다. 질펀하게 널려 있는 술병들을 치우는 소리에 나도 소파에서 일어났다.

- 집에 갈 거야?

- .

- 바래다줄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둘은 안개가 깔린 새벽 교정을 걸어 교문 건너편에 밀집한 주택가로 휘적거리며 걸어갔다. 어떻게 그녀의 방까지 들어가게 됐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녀가 권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내처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억나는 한 가지는 그날 내가 처음으로 그녀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것이다.

- 기분이 참 좋아.

문턱에 앉은 채로 그녀가 말했다.

- 나도 그래.

가스 온수기에서 나오는 물은 쉬이 뜨거워지지 않았다. 그 미지근한 물에 그녀의 발을 담그고 나는 정성스레 비누칠을 했다. 엄지발가락에 굳은살이 많이 박여 있었다. 물이 뜨거워질수록 그녀는 더 간지럼을 탔다. 내 손이 그녀의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발톱과 발가락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어루만지는 동안 그녀는 두 손을 등뒤로 짚고 나를 굽어보았다.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발을 닦고 나서 우리는 합성수지 이불 위에 나란히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약속이나 하 듯이 갑자기 서로 껴안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혀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핥다가 그녀의 발에 이르렀고 뒤꿈치와 앞꿈치 사이의 부드러운 부분에 오래 머물렀다. 엄지발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 나는 그녀의 발에 박인 굳은살들이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그 굳은살엔 그녀가 사 년 동안 달려갔던 아스팔트 위의 삶이 아로새겨 있었다.

 

6

옆집 여자는 그 뒤로 그 카페에 나타났다. 나는 커튼에 비친 그림자의 비밀이 궁금했다.

- 발레리나들이 최대 몇 회전을 할 수 있나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6회전 반.

그녀는 아주 자신 없는 어조로 말하며 내 쪽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나는 재차 물었다.

-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도는 거겠죠?

- 그렇겠죠.

- 아주 이상한 걸 봤어요.

- 뭔데요?

- 당신의 창 커튼에 수십 회의 회전을 아주 천천히 하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요. 그거 알고 있어요? 당신은 아닐 테고.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비웃는 듯한. 그러면서도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안면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문을 열자 옷걸이에 걸려 있는 발레복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빈 벽에 걸려 있는 하얀 옷은 어딘가 음침해 보였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소파에 나를 앉혔다.

- 조금만 기다리세요. 커피를 가져올게요.

소파 앞 다탁 위에 보석함처럼 생긴 상자가 놓여 있었다.

- 열어보세요.

그녀는 싱크대 앞에서 커피를 만들면서 말했다. 나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를 열자 작은 인형이 튀어나오며 음악이 흘렀다. 오르골이었다. 인형은 흰 발레복을 입고 있었고 한 손은 머리 위로 둥굴게 올리고 왼쪽 다리를 곧게 펴올린 채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띵띵띵띵. 오르골 특유의 단조로운 음악이 계속 반복되었다.

커피를 가져온 그녀가 탁자 위에 놓은 촛대에 불을 붙이고 중앙 조명을 껐다.

- 이걸 보신 거지요?

촛불의 불빛이 오르골을 비춰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오르골 속의 발레리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회전을 거듭했다. 나는 멍하니 그 오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 지젤이에요. 예쁘죠?

촛불이 그녀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 전 발톱이 없어요. 한두 번 빠지더니만 아예 나질 않아요.

그녀가 자신의 발을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나는 커피를 엎지를 뻔했다. 정신차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그녀의 엄지발가락엔 발톱에 없었다. 발톱에 있어야 할 부분에는 검게 죽은 피부만이 어둡게 그림자져 있었다. 따뜻한 물로 오래오래 그녀의 발을 씻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 발레를 그만둔 지가 오래됐는데 새로 나지 않아요?

- 요즘도 하는걸요.

- 어디서요?

- 여기서요.

그녀는 손을 들어 침대와 소파 사이의 빈 공간을 가리켰다.

- 네에.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커피 잘 마셨습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오래도록 오르골 소리의 환청에 시달렸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기계음이 이명처럼 남아 있었다.

 

7

수연은 예전만큼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그녀와 비슷한 연배의 동료 무당들이 청바지 차림으로 오가면서 그녀에게 술을 권했지만 그녀는 다 받아 마시지 않는다.

- 요새 무당들은 참 세련됐구나.

- 삐삐하고 핸드폰도 있어. 참 내 명함 한 장 줄까?

그녀가 건네준 명함에는 그녀의 이름과 호출기 번호 등속이 적혀 있다. 인간문화재 전수자 이수연. 나는 그녀의 명함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 뭘 그렇게 열심히 봐?

- 재미있잖아. 인생이라는 게.

- 난 재미없어.

그녀가 웃는다.

- 작두에 올라설 때 기분이 어땠어?

- 그땐 잘 기억나지 않고 올라서기 전은 기억나. 죽는다는 기분이 들었어. 어머니가 비단을 작두 위에 비비다가 올려놓을 때, 그래서 그 비단이 두 쪽으로 갈라질 때 말야. 단절이랄까. 그런 느낌.

아까 그 비단이 날 선 작두 위에서 스르르 두 쪽으로 갈라질 때. 나는 대학교 1학년 때의 베가르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5, 뜨거운 햇살, 지열, 군중들, 전경들과 학생들, 그녀를 사이에 두고 감돌던 긴장감. 그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베를 온몸으로 찢으며 춤추던 그녀의 모습 따위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 혹시 지젤이라는 발레 알아?

- 아니. ?

- 그냥. 모르면 됐어.

어쩌자고 지젤 이야기를 꺼낸 걸까. 나는 자신을 책망했다.

- 춤을 추니 좋아. 모든 걸 잊을 수 있으니까.

- 다행이다. 나이 서른에 좋은 것도 있고.

- 심심하면 호출해. 술이나 마시자. 난 그만 가봐야 해. 장군님 맞아야지.

그녀의 마지막 농담이 너무 쓸쓸해서 우리는 크게 웃는다. 장군님 오신다. 그녀의 신어머니는 작두춤 끝에 땅에 널브러진 그녀의 몸 위에 삼전불이 그려진 부채를 휘두르며 외쳤었다. 장군님 오신다. 무병도 앓지 않고 신내림을 받은 그녀에게 어떤 장군이 찾아올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가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멀어져간다. 어둠 속이어서 그녀의 발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발이 있어야 할 부분을 계속 응시한다. 어쩌면 이게 그녀를 보는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울긋불긋 단청이 그려진 사당의 치마 밑에서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수연과는 왜 연애를 할 수 없었을까. 나는 수연의 발을 씻어주던 나날을 생각한다.

- 넌 날 매혹시킨 첫 여자야.

기억 속의 내가 옷을 벗은 채 수연에게 말하고 있다.

- 매혹 따윈 필요 없어. 어서 나를 안아줘.

기억 속의 나는 당혹스러워한다. 다시 한 번 말한다.

- 그건 내게 아주 중요한 얘기야. 난 너의 베가르기를 보는 순간 너에게 매혹됐어.

- 그게 어쨌다는 거야?

기억 속의 수연이 화를 내고 있다. 나와 수연은 섹스를 시작한다. 수연의 모든 몸짓에 그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남자와의 섹스를 통해 익숙해진 모든 동작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등뒤에서 나를 짓누르는 그 남자의 그림자를 느낀다. 수연은 눈을 뜨지 않는다. 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한다. 나는 오래도록 사정하지 못한다.

그 무렵, 오직 발을 씻어주는 순간만큼만 나는 그 남자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웠다. 발에는 그 남자의 손길도, 정액도, 입술도 닿질 않았다고 나는 믿었다. 발을 씻어줄 때면 그녀의 하루가 느껴진다. 나는 그녀의 자취방에 누워 하루종일 책과 비디오를 보면서 그녀의 귀가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말한다.

- 이제 내 발에 손대지 마.

- ?

- 난 네가 필요해. 왜 그걸 모르지? 기억 속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겁이 나. 두려워. 그러나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한다. 더 이상 발을 만지지 못하게 된 나는 그녀를 떠난다. 그게 전부였다.

 

수락산에는 어느덧 밤안개가 자욱하게 깔린다. 천천히 수락산 어귀에 있는 주차장까지 내려오면서 어느새 나는 다시 옆집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그해 가을, 오피스텔에서 투신자살했다. 옆방은 경찰과 구경꾼들로 붐볐다. 경찰은 내게도 찾아왔다. 뭐 이상한 점 없었습니까? 경찰은 별반 신통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눈치로 물었다. 뭐 이상한 점 없었나요?

- 발레를 무척 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지요.

- 발레요?

- 어렸을 적 사고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프리마돈나가 되어 무대에 섰을 거라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했어요.

그녀의 언니는 멍하니 서 있었다.

- 그 애는 발레를 한 적이 없어요. 발레를 한 건 저였지요. 사고를 당한 것도 저였구요. 그 애는 집에서는 단 한번도 발레를 하고 싶다거나 하지 않았어요. 늘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했어요. 집에서 가라는 간호학과로 순순히 진학했고 서울에 와서 간호사가 됐지요. 그게 전부예요.

그녀의 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는 그 때 그녀의 발을 씻겨주지 않았던 일을 후회했다.

- 왜 죽었을까요?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나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게 전부예요.'라고 말하는 이가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발레를 하고 싶어서 죽었다고 믿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언니를 따라 사건 현장인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때 나는 보았다. 그녀가 몸을 던진 창가에 놓여진 하얀 발레 슈즈 한 켤레. 그건 그녀가 t상에 던진 마지막 퀴즈였을지도 모른다. 후일 경찰은 그녀가 남자 문제로 고민하다가 투신자살했다고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했다. 사망 당시 그녀는 임신 5개월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자살자들은 왜

신발을 벗을까?

 

차에 시동을 걸면서 뒤를 돌아다본다. 수락산의 그림자가 깊다. 어디선가 오르골 소리가 들려온다. 홍학들이 떼지어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뒤늦게 태어난 홍학 새끼들이 저마다 발에 소금 족쇄를 차고 그들의 뒤를 따라 염전 속을 걸어간다. 한없이 가벼워져 작두날 위에서 춤추는 수연과 역시 무한히 가볍게 생애 마지막 춤을 추어버린 옆방 여자와 한없이 무거운 다리를 지닌 홍학 떼들이 사막 속에서 어울려 논다.

여전히 나는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싶을 따름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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