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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슬픔

Bollnow 2025. 2. 19. 13:10

1부 고백하기 어려운 이야기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일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쓰지 않으면 아무 쓸모도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을 말한 다음에는 반드시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 썼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쓰려고 결심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렸습니다.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오늘 아침에 약 한 시간쯤, 겨울이 되어 마른 숲속을 산책하고 돌아와 드디어 이 이야기를 써야 할 때가 되었다고 결심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나의 자식과 같은 자녀를 둔 부모들로부터 오랫동안 걸쳐서 받은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물음에 대답하는 나로서는 다만 내가 해온 일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들은 편지에서 나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첫째는 이 자녀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런 자녀를 둔 슬픔을 어떻게 하면 견디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질문에 대해서는 나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을 참고 견딘다는 것은 혼자 터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다만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고 견딘다는 것, 생활에서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쓰디쓴 뿌리가 되어 거기 영그는 독한 열매는 남들의 생활까지 파괴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종(참을 인, 따를 종)은 단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슬픔은 거기서 얻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슬픔에도 하나의 연금술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도 예지로 바뀌는 경우가 있으며 그것이 설사 쾌락을 주지는 않더라도 행복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쓰려고 결심한 또 다른 이유는, 내 자식의 생명이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원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 그 아이는 지능적으로는 유아의 수준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지금쯤은 진즉 결혼하여 자기 자식(나한테는 결코 태어나지 않을 손자)을 낳아도 좋을 나이인데도 여전히 어린이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내 아이가 태어난 지 몇 해가 지나도 어린이로부터 성장하지 못하고 지능이 그 이상 발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가슴에서 뛰쳐나온 최초의 외침은 "나는 어째서 이런 변을 당해야 할까" 하는, 피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수없이 되풀이해 온 그 외침, 그래요. 그와 똑같은 외침이었습니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있을 리가 없고, 사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코 아무 대답도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가 깨달았을 때, 나는 의미가 없는 것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사 자기가 만들어낸 대답이라고 하더라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분명히 남들과는 다른 것을 하늘로부터 받고 태어난 내 자식을, 설사 그 받은 것이 무엇인지 밖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결코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음악에 소질이 뛰어나 그 소질을 통하여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못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리고 그녀의 건강한 육체에서는 결코 아기가 태어나지 못하더라도, 또는 그녀의 강한 정신이 어떤 창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자기 나름대로 과거에 생존했고 현재도 생존해 있다는 이 사실은 인류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 일에 있어서만은 그녀의 생명도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쩌면 그 병을 예방하고 고치지 못한 것을 위로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의 결심이 그쪽으로 굳어져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거기에 도달한 후에는 한평생 이 결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는 몰래 이 결심에 따라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두려워했던 사람들의 일을 잊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많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친절을 베풀어 준 많은 사람들의 일을 상기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내가 이 이야기를 쓰게 된 목적을 이해하여 줄 것이며, 또 이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도움도 주실 것입니다. 그 목적은 바로 그들의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선량한 사람들을 만날 적마다 감사하고 경탄합니다. 일을 까다롭게 따지고 캐거나 악의에 찬 비평을 하거나 혹은 남의 괴로움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적은 반면에, 친절한 사람들의 수는 많아 수천수만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원래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한 본성은 저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어 있으며,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들이 많더라도 이 본성은 자랄 수 있고 또 실제로 자라고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아왔습니다. 이 선한 본성 하나만으로도 세계는 얼마든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내가 자식을 위해 하려고 생각한 것 중에는 그녀의 이야기를 쓰는 것도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때때로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두려워했으며 또 지금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도우려는 새로운 운동이 미국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딸이 그 도움으로 구제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그러나 슬픈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많은 어린이들, 또는 앞으로 태어날 다른 어린이들에게는 그것이 결코 너무 늦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능의 발달이 뒤떨어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우리 인간 사회에서의 중요성이나 그 의미를 우리가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의 100명에 한 사람은 이처럼 지능의 발육이 뒤떨어진 사람 혹은 장차 그렇게 될 사람이며, 또 그들 중에 대부분은 유전 이외의 원인으로 지능의 발달이 뒤떨어진 것입니다. '가족의 혈통이' 하고 낡은 낙인을 찍는 것은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지능 발육이 뒤떨어진 사람의 전 인구에 대한 비율은 결코 큰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 숫자는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전혀 자기의 잘못이 아닌데도 지능의 발육이 뒤떨어진 이들 때문에 가정이 불행해지고, 부모는 미칠 지경에 이르고, 학교에서는 교실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가 죽거나, 돌봐 줄 사람이 없거나, 또는 학교에서 선생이 포기하거나 하면 이 어린이들은 의지할 데가 없어 세상을 헤매고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횡포를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자기들보다 영리한 아이들의 노리개감이 되고 구제할 길 없는 범죄자가 되어, 어쩔 수 없이 범죄의 길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하는 일은 모두가 순진한 동기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 이들만큼 순진한 아이들이 없으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어린이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을 나는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 아이들에 대한 세상 일반인들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의 발육이 더디거나, 학교에서 기억력이 나쁘거나 혹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에 부모는 당황할 뿐만 아니라 창피하게 여겨왔습니다. 그런 일은 쉬쉬하고 덮어둬야 할 불행이었던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은 누구누구의 아이는 '이상하다'고 수군거리고, 한편 가족들은 가엾은 해리나 수지는 다만 발육이 더딜 뿐이라고 속이도록 지시를 받게 됩니다. 부모가 창피하게 생각하는 심정이 모든 아이들에게 감염되어 어두운 분위기를 확대시키고, 그 아이 자신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열등감을 갖게 됩니다. 그 아이는 울적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볼 적마다 얼굴이 굳어지고, 그 아이가 보이면 아버지는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부모의 부드러운 애정에도 불구하고(인간의 명예를 걸고 인간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극진히 보호할 수 있으나) 그 아이는, 자기에게는 뭔가 불행한 데가 있다고 알아차릴 정도의 이해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아이가 가는 곳은 어디나 그 아이의 그림자가 앞에 드리우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이 그림자는 제거되었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지능의 발육이 정지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 자신이 행복해지고 또 사회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인류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냉철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먼저 지금까지 실시한 적이 없는 근본적인 조사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찌하여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지능적으로 충분한 발육을 할 수 없는지, 그 원인을 어떻게 해서든지 발견해야 합니다. 반드시 고칠 수 있는 원인도 있을 것이며, 또 예방할 수 있는 원인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임신 후 3개월 이내에 어머니가 홍역(붉을 홍, 염병 역)에 걸리면 태어나는 아기는 지능적인 결함을 갖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몽고인형 백치 어린이(어머니의 갑상선 이상 등으로 정신적, 육체적 발육이 불완전한 어린이; 역주)는 어느 가정에나 태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는 사실은 미완성의 어린이로, 보통은 첫아이가 아니면 막내 아기입니다.

우리는 모태의 어디에 이런 아기가 태어날 원인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재능이나 능력이 결코 완전히 자랄 수 없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아기가 있다는 것이 손쓸 여지가 없는 필연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인생의 한구석을 비춰주는 창문도 드디어 열릴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빛나는 광명이 불행한 어린이들의 얼굴에도, 그리고 그 어린이들의 부모의 마음에도 비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식도 이 새로운 빛을 만들어 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나는 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아이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와 같은 운명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더 이해되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아이 대신에 그 아이의 이름으로 그 아이의 어머니인 내가 그 소임을 다하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일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쓰지 않으면 아무 쓸모도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을 말한 다음에는 반드시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 썼기 때문입니다.

나는 먼저 나의 어린 시절,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무렵, 그러니까 일곱 살도 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중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에 나는 처음으로 정신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까지 나는 멋대로 노는 버릇없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나의 소꼽친구들은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와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으로 젊은 미국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주 짧은 동안이지만 우리집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결혼하여 딸을 낳았습니다. 나로서는 이 아이가 처음 보는 미국인 아이였습니다. 나는 이 아기를 보고 보통 미국인 아기들이 얼마나 극진한 애호를 받고 있는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침마다 아기를 목욕시킬 때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더운 물을 따라 주기도 하고, 물수건을 짜기도 하고, 또 부인에게 아기의 옷을 집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향기로운 비누 냄새와 신선한 아름다운 머리를 가진 푸른 눈의 아기를 내 팔에 안았을 때에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것은 하루 동안에 나에게 가장 즐거운 한때였습니다. 여러 인종(사람 인, 종류 종)의 다른 아이들을 많이 안아본 지금에 와서도 나는 처음으로 그 아기를 안았을 때의 기쁨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얼마 후 이웃이었던 그녀가 이사갔을 때, 당시 우리집이 있던 양자강 연안의 옛 거리 중심지에서 만일 여동생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척 슬펐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집에 태어나 아기 때문에 대단히 바빠졌습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낳은 후 회복할 가망이 없는 중병에 걸려 어린 여동생의 시중은 늙은 중국인 하녀 아줌마와 내가 맡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기뻐서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 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이처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이제 와서 내가 아이를 낳기 전부터 아기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던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의 모든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내 자신의 아기를 여럿 낳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생명에 대한 애착은 자연히 동경 이상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나는 생활에서 무엇보다도 자식을 존중하는 중국인에게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중국인들은 자식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동시에 그것을 훨씬 초월해서도 사랑합니다. 그들에게 자식은 인간의 생명의 지속을 의미하며 또한 인간의 생명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라온 환경의 분위기를 자연히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내 아이는 내가 한창 젊었을 때에 태어났습니다. 나는 정력과 활기와 인생의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곳은 미국인에게는 진기하기만 했으나, 나에게는 별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되었습니다. 우리집은 중국 북부의 성벽으로 에워싸인 작은 도시의 성 밖에 있었습니다. 내 방의 창문에서는 몇 마일이나 계속된 평평한 밭이 내다보였으며, 여름이면 그 밭은 보리나 사탕수수로 초록 일색이 되고 겨울에는 흙먼지에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푸른 보리밭 위로 신기루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처에는 호수도 산도 없었으나, 신기루가 그것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호수나 산이 수평선 위에 꿈결처럼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을 수는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모든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꿈이 많았습니다. 세상을 알 만한 나이가 된 나는 써보고 싶은 책이 몇 권 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풍부하고 활기에 넘치는 생활을 하려고 생각했으나, 지금 당시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그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언제나 아이를 낳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느 해 봄에 처음으로 아기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나에게 아기가 하나밖에 생기지 않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모든 점에서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집이 아이들로 가득차 있는 광경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나의 딸아이와 이 세상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의 일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월의 어느 따스한 봄날 아침이었습니다. 중국인 친구가 전날 봉오리가 달린 자두 화분을 갖다주었는데, 그 봉오리가 그날 아침에 활짝 피어났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난 내 눈에 맨 처음 보인 것은 그 자두나무의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다음에 내 눈에 보인 것이 아기의 얼굴이었습니다.

어린 중국인 간호사가 아기를 분홍 담요에 싸서 나에게 보이도록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아기였습니다.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얼굴 윤곽이 분명히 돋보이고 그때 이미 그 눈은 예리한 듯이 조용한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나를, 나는 아기를 서로 이해하는 듯이 마주보고 나는 웃었습니다.

"나이에 비해서는 영리해 보이잖아요?"

하고 나는 간호사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래요. 그리고 무척 예뻐요. 틀림없이 아기에게는 남보다 뛰어난 데가 있을 거예요."

하고 간호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몇 번이나 상기했는지 모릅니다. 아기가 언제나 튼튼하고 훌륭히 성장해 감에 따라 나는 처음의 이 말을 상기하고는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딸이 태어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라고 생각되는데, 나의 오랜 친구가 처음으로 아기를 보러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기는 아직 검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를 본 적이 없었으므로 처음엔 잠시 그의 얼굴을 보다가 이윽고 작은 입을 일그러뜨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기는 아기에게도 어떤 자랑스러운 마음이 있었던지 참으로 눈물을 흘리고 울지는 않았습니다.

"이거 신기하군. 아기가 벌써 낯가림을 하고 있어요."

하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아기를 작은 바구니 속에 넣고 배의 갑판 위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침 여행중이라 나도 아기에게 아침 공기를 마시게 하기 위해 밖에 나와 있었습니다. 갑판을 산책하고 있던 사람들은 흔히 내 딸아이 옆에 멈춰서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아기를 보기 드물게 예쁘게 생겼다거나 푸른 눈이 참으로 영리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적마다 나의 프라이드는 점점 커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어디서 혹은 언제 그 아이의 지능 성장이 중지되었는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하고, 또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가족 중에는 그 아이가 정신박약아가 될지도 모른다고 나에게 두려움을 갖게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의 부계나 모계 조상들은 모두 훌륭했습니다. 아버지의 가족은 언어학이나 문학 분야에서 훌륭한 일을 해온 것으로 유명했으며, 모계의 가족도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딸애의 부계 조상들도 모두 몸이 건강했으며 유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며 두려움을 갖기에는 너무나 순진한 편이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본 정신박약아라고 하면 어느 선교사의 아들 정도이며, 나는 그 아이를 측은하게 생각한 것 말고는 이렇다할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인 어린이들 중에서는 그런 아이를 하나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의 수는 매우 적었던 것 같고, 또 설사 있어도 집 안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그런 아이는 반드시 어렸을 때 죽어버리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아무리 젊은 어미들이라고 하더라도, 돌아올 운명에 대해 나만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여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꼬마 딸아이는 그 후에도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 무렵 우리는 중국 북부지방을 떠나 남경에 살고 있었는데, 남경은 아마도 북경 다음으로 중국에서는 역사도 풍부하고 또 인정(사람 인, 정 정)도 많은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집은 성 안에 있었으나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우리집은 잔디가 깔린 뜰이 대나무숲과 큰 나무들에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수백 년 전 옛날에 성벽을 쌓을 때 비록 도성이 적에게 포위되어도 성안의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풍부한 땅을 성 안에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 대지는 밭과 물고기가 살고 있는 연못으로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린이에게 즐겁고 건강에 좋은 집이었습니다. 내 꼬마 딸아이는 그 무렵에 아주 예쁜 아이였습니다. 지금도 만일 그 아이에게 정신이 빛나 있다면 대단히 아름다워 보일 것으로 생각될 그런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제일 나중에야 내 딸에게 어떤 이상한 데가 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나의 첫아이로, 견주어볼 상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애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한 가닥 의심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 살이 되어도 그 아이는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양자(기를 양, 아들 자)를 주선하여 나도 잘 알게 되었지만, 말을 한다는 것을 정상적인 어린이의 경우에는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린이는 말을 배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잘 알지도 못한 채 말을 듣고 하루하루 자기 안에서 성숙되어 가고 있는 자기 생각을 남에서 전하는 방법을 늘려 나갑니다.

그런데 자연에 맡겨두면 차츰 말하게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쩐지 불안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국민당 정부가 큰 희망을 걸고 그 토대를 다지기 시작하는 중국 역사상의 새 시대에 큰 흥미를 갖고 있던 나에게, 생활은 자극에 가득찬 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딸애에 대한 불안이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 아이는 아주 건강해 보였습니다. 뺨은 분홍빛을 띠고, 잘 자란 머리카락은 금빛으로 빛나고, 눈은 선명한 푸른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이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할까요! 나는 내 아이에 대한 불안을 친구들에게 말하고, 그들의 아이들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위로의 말뿐이었습니다. 그 위로가 지나칠 정도로. 아이에 따라 말을 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다르다고도 말하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아이가 일찍 말하기 시작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들은 선의(바를 선, 뜻 의)에 충만한 친구들이 흔히 사용하는 온갖 피상적인 보증만을 나에게 들려 주었으나, 나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훨씬 나중에 내가 이 슬픈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이 친구들에게 내 딸아이에게 덮쳐온 슬픈 운명에 대해 훨씬 전부터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역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하고 생각한 친구도 있고,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친구도 있고, 또 나이가 많은 친구들 중에는 정말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나 아무도 자진해서 나에게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어째서 이들이 자진해서 나에게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평소부터 진실이야말로 거짓말 위로보다 훨씬 귀한 것이며, 솔직한 말이 껍질을 쓴 애매한 말보다 친절하고, 또 참된 친구일수록 사실을 그대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오히려 일찌감치 받아들이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이리하여 내가 딸아이의 정신 발육이 정지된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애는 이미 네 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슬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꺼번에 그것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깨닫기도 하지만, 나처럼 조금씩 서서히 깨닫는 사람도 있나 봅니다. 나는 끝까지 아무래도 사실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으며 또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 여름, 폭풍이 불어올 때에도 파도가 조용한 중국의 어느 바닷가에서 나는 진상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등에 업은 바닷가의 여름은 상쾌하여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침에는 바닷가에서 아이와 함께 보내고, 오후에는 바닷가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빌려주는 몸집이 조그마한 잿빛 당나귀를 타고 골짜기를 산책했습니다.

그 무렵 딸아이도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몇 마디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뜸 나의 두려움을 완화시켜 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지만, 그 무렵 나는 정말로 그런 아이에 대한 경험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나는 어떤 군중 속에서도 내 딸아이와 같은 정신박약아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런 아이가 있으면 먼저 그 아이가 내 눈에 뜨이고, 아이에게 웃어 보이며 즐거운 듯이 말을 건네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내 주목을 끌게 됩니다. 어머니가 즐거운 듯이 말을 건네는 것은, 그 아이를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는 어머니의 배려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나는 내 딸아이가 실제로 이미 발육이 정지된 것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아이의 동작이나 몇 마디 토막말의 의미를 알아들으려고만 했습니다. 한번은 한 친구가,

"이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뜻대로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잠자코 있는 거예요."

하고 나를 탓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딸아이에게 먼저 자기가 바라는 것을 말하도록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기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무렵부터 이미 자신도 모르게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어떤 소아과 전문의의 취학 전 어린이에 대한 강연을 들으러 가서 이야기를 듣는 중에 내 딸아이는 뭔가 매우 이상한 면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했으나 말입니다. 그 의사는 내가 미처 몰랐던 여러 가지 위험한 징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걷기 시작하는 것이 늦거나,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 더디거나, 혹은 걷기 시작해도 여기저기 끊임없이 뛰어다니면서 언제나 침착하지 못한 현상 등은 모두가 위험한 징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지금까지 무럭무럭 자란 생명력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육체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정신의 과잉정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에 나는 그 의사에서 집에 와서 딸아이를 진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의사는 이튿날 오겠다고 나에게 약속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나는 점점 커지는 걱정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그날 밤에는 한잠도 자지 못하고 그 애는 제 손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거나, 제 손으로 아직은 단추를 채우지 못하지만 옷을 입을 수 있다거나, 혹은 그림책을 아주 좋아한다거나, 말은 잘 못해도 이해력은 있는 것 같다거나, 이런 위로가 될 만한 것들을 자주 마음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거짓말 위로는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한시바삐 사실을 그대로 알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이튿날 의사가 와서 오랫동안 앉아서 살펴보더니 이윽고 머리를 옆으로 흔들며,

"어딘가 이상(다를 이, 형상 상)이 있기는 한데 나도 정확히는 알 수 없군요. 딴 의사에게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일 그 의사들이 어디가 나쁜지 알아낸다면 가르쳐 주실 거예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사는 그 무렵에 내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 그 후에도 나로서는 알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위험한 징후를 몇 가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딸아이의 주의력이 극히 한순간밖에는 집중되지 않는다는 것(그것은 그 애의 나이로 보더라도 보통 기준보다 훨씬 짧은 것이었습니다), 가볍게 밟고 걸어가는 동작의 대부분은 뚜렷한 목적이 없다는 것, 맑고 푸르른 눈동자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공허한 그늘이 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눈은 침착성도 반응도 보이지 않고 변화도 없다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확실히 나의 딸에게는 어딘가 큰 결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의사에게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뭔가 좀 섭섭한 느낌도 들었으나, 생각해 보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이상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우리집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아마 의사도 그 이상의 것은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그들의 사랑하는 자식이 순조롭게 자라 한 사람의 어엿한 어른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처럼 싫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후에 나도 몇 번이나 그런 말을 남에게 했으며, 또 나의 성격상 결코 잠자코 있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역시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픈 경험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음날 몇 사람의 의사가 우리집에 모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이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집에는 바다 쪽으로 넓은 베란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햇살이 유난히 눈부신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보랏빛이 감도는 푸른 바다에는 잔잔한 파도가 서서히 몰려와 기슭에서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중국인 간호사와 함께 바닷가에서 모래 장난을 하기도 하고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도 했습니다. 내가 불렀더니 두 사람은 대나무숲 샛길을 지나 돌아왔습니다. 마음속으로 공포와 비슷한 걱정을 하면서도 의사들 앞에 나선 딸아이를 나는 자랑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흰 수영복을 걸친 딸아이는 몸집이 단단하고 햇볕에 타서 억세면서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딸아이는 한 손에 물통과 삽을 그리고 또 한 손에는 흰 조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아무 데도 이상이 없어 보이는군요."

하고 한 의사가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은 여러 가지 일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되도록 정직하게 모든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이제 와서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딸아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알아차리기 시작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딸아이의 손에서 조개가 떨어졌습니다. 딸아이는 그 조개를 주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려는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습니다. 나의 부모와도 아는 사이인 가장 나이가 많은 의사가 딸아이를 무릎 위에 안아올리고 아이의 반사작용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의 반사작용은 약하여 거의 나타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모인 의사는 모두 친절한 분들이었습니다. 나는 진단의 결과와 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의사들은 성의를 가지고 의견을 들려주려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어디가 나쁜지 알지 못했으며, 또 설사 이상이 있어도 어떻게 하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말없이 앉아서 딸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모두 딸아이의 발육이 정지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었으나 그 원인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육체에 나타난 징후는 아주 얼마 되지 않았으며, 내가 앞에서 말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의사들은 딸아이가 전에 어떤 병을 앓은 적이 없느냐, 어디서 떨어진 적은 없느냐 하고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전혀 짚이는 데가 없었습니다. 딸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튼튼하고, 잘 돌봐주었기 때문에 한 번도 다치거나 한 적이 없었습니다.

"따님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셔야 해요."

하고 마지막으로 의사들이 말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의사라면 어디가 나쁜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어딘가 이상이 있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어요."

이때부터 이런 자식을 가진 부모만이 알고 있는 슬프고도 지루한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자식을 가진 부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경험의 내용은 누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아이를 고쳐줄 사람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줄로 믿고, 그 사람을 찾아 부모들은 전세계를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갖고 있던 돈은 모두 탕진하고 이제 아무도 꿔주지 않을 때까지 돈을 꾸었습니다. 의사라면 아무나 그의 실력은 불문에 붙이고 희망을 걸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이런 부모들의 걱정을 미끼로 삼아 돈을 벌려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의 손에 걸려 기만당한 적도 있었으나, 한편 부모들의 걱정에 동정하고, 또 돈이 없는 것을 알고 자기는 고쳐줄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하고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면서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지구상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희망은 점점 희미해져 갔으나, 딸아이는 절대로 낮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희망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전혀 희망이 없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어요."

마지막에는 으레 듣게 마련인 이 말에 이끌려, 나도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계속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도 또 다른 이유로 나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맥이 빠졌습니다. 딸아이는 점점 크게 성장하여 더듬거리는 말씨나 어린애 같은 행동이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나는 창피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람들의 모든 결함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중국인 사이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소경도, 절름발이도, 벙어리도, 기형아도 내가 중국에서 사는 동안에 본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태연스럽게 살아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결함을 아주 도외시한 것은 아니고, 때로는 그 결함이 그대로 장본인의 별명이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예컨대 나의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 중에는 '절름발이 꼬마'라고 불리는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서구식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 아이의 신체적인 결함을 별명으로 부른다는 것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인에게는 그런 감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실제로 중국인들은, 그 아이가 별명대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고, 절뚝거리는 다리도 그 아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불행을 단념하고 이는 그 아이 자신에게도 어떤 깨달음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미국인 친구들처럼 일부러 그 아이가 절뚝거리는 것을 보지 않는 체하기보다는 분명히 절름발이라고 말하는 편이 그 아이에게는 덜 께름칙했습니다. 불행을 짊어지고 있는 장본인은 구태여 자기의 불행을 숨길 필요가 없었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도 사실대로 인정할 경우에는 자기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취급되는 쪽이, 설사 동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보지 않은 체하는 것보다는 바람직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서 중국인은 한번 하늘이 준 이상 어떤 처지로 태어나더라도 그것이 그의 운명이며, 그것은 본인의 죄도 아니고 또 가족의 잘못도 아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인의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인지, 한편으로 불행을 당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반드시 하늘이 보상해 준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소경은 언제나 존경심을 갖고 대했으며, 때로는 두려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경은 다만 사물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훨씬 고매한 것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딸아이와 내가 중국인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동안, 줄곧 우리는 이 가식없는 분위기에 충분히 젖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인 친구들은 마치 자기 자식의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 딸아이에 대해 나와 함께 이것 저것 말하기도 하고, 또 생각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어디가 나쁜지 알 만한 경험도 없고, 때로는 딸아이에게 이상이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아 아이는 아직 지혜의 눈의 열리지 않았군요."하고 어떤 친구는 생각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지혜를 빨리 깨치기도 하고 더디 깨치기도 해요. 그러니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해요." 하고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꾸불꾸불한 낡은 거리는 걸어가다가 딸아이가 까닭도 없이 손뼉을 치거나 깡충깡충 뛰어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중국인들은 내 딸아이나 나에게 친절했습니다. 그리고 설사 딸아이의 거동이 이상한 걸 알아 차린 사람도, 그 거동이 기쁨의 표시인 줄 알고 웃어 보이거나 또는 딸아이와 함께 크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이렇게 친절하지는 않다는 것을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우리 모녀가 상해로 갔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미국 본토로부터 막 도착한 스마트한 양장 차림의 두 미국 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녀들과 엇갈렸을 때 그 둘 중의 한 여자가,

"저 애는 너츠(백치)."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속어(속된말 속, 말 어)를 처음으로 들었으며, 무슨 소린지 뜻도 잘 몰랐으므로 사람들에게 물어보아야만 했습니다. 그 의미는 지독한 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나는 딸아이를 남의 눈으로부터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슬픈 여행의 상세한 이야기를 시시콜콜히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를 건너 아동진료소나 갑상선(갑옷 갑, 모양 상, 땀줄기 선) 전문가나 심리학자를 찾아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에게 모두가 무익한 일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들 중에는 알고 있던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그들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마다 나에게 딴 사람을 찾아가 보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1,000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어느 유명한 갑상선 전문가가 나에게 상당한 희망을 안겨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딸아이는 갑상선에 관한 약을 먹으면서 1년 동안 치료를 받았습니다. 1년 동안에 내가 알게 된 여러 가지 경험에 의해, 나는 몇 해 후 그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는 소년을 발견하여 그 아이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네 살이 되어도 손과 무릎으로 기어 다니는 남자아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까칠한 피부와 윤기 없는 머리칼, 창백한 얼굴, 그리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연약한 몸집과 발육이 더딘 지능 등의 징후를 보고, 그 아이가 갑상선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아이의 어머니를 잘 알지 못했으나, 친구들이 나에게 사실을 그대로 말해 주지 않았던 지난 일을 상기하고, 나는 그 어머니에게 가서 내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얼굴을 붉히고 잠자코 있었으나, 나는 그녀가 마음속으로 얼마나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사실을 올바로 알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알 것은 알아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대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내가 돌아간 후에 아이를 갑상선 전문의에게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정상적인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병은 갑상선 분비 부족에 있었던 것입니다. 몇 해가 지나 나와 그 아이의 어머니가 다시 미국 땅에 서 만났을 때, 그녀는 그날의 내 충고에 대해 나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사실 용기가 없이는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나와 딸아이의 슬픈 여행은 어느 해 겨울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곳 메이요 크리닉 병원에 가서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가 진행됨에 따라 나는 자신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만한 연구와 지식이 있으면 반드시 병의 원인이 밝혀져 치료 방법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소아과장의 방으로 갔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고 병원 직원들은 대부분 퇴근해 있었습니다. 커다란 건물은 적막하고 공허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창밖에서는 다만 어둠이 짙어갈 뿐이었습니다. 딸아이는 피로하여 나에게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안아 올려 꼭 껴안고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후리후리한 젊은 분으로 눈은 정다워 보이고 태도는 진중하여, 다른 사람들이 서두르거나 초조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듯이 여유가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딸아이가 검사를 받은 각 과에서 수집된 보고서를 한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보고의 대부분은 딸아이에게 좋은 것이었습니다. 신체는 어느 기관이나 최상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건강했습니다.

그 밖에도 좋은 보고가 나와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어떤 뛰어난 재능, 특히 음악에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종의 결함에 대해 억세게 싸우는 보기드문 개성도 딸아이는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능은 몹시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날마다 되풀이해 온 질문을 그때에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의사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알 수 없어요. 생전인지 생후인지 발육이 정지되어 버렸어요."

그는 나를 다그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딸아이를 안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부모라면 알 수 있는 것처럼, 한없이 큰 마음의 고통은 육체의 고통이 되어 근육이나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입니다.

"가망이 없을까요?"

하고 나는 물었습니다.

친절한 그 사람은 가망이 없다는 비참한 말을 차마 입밖에 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자신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끝으로 그가 한 말은 "나는 단념하지 않고 여러 모로 손을 써보려고 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소아과장인 의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며 또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주었습니다. 나와 딸아이는 다시 의사의 방에서 나와 넓고 텅 빈 홀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날도 저물어 나는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감사해야 할 순간이 다행히 나를 찾아왔습니다. 만일 딸아이가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더라면 나의 이 감사하는 마음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나는 역시 우리가 갔던 방에서 조용히 나온 그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몸집이 작고 남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분으로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뜻 보아도 또 말의 악센트에서도 그가 독일 사람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소아과장의 방에서 그는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보고서 뭉치를 갖고 와서 말없이 놓고 간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그때 분명히 그를 주목해 보았습니다.

방에서 조용히 나온 그는 손짓을 하여 나를 부르더니, 빈방으로 들어오라고 말했습니다. 다소 당황한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있는 딸아이를 데리고 그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서투른 영어로 재빨리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소리는 거칠고 눈은 나를 노려보는 것 같습니다.

"과장은 따님이 나을지 모른다고 말했나요?"

하고 그는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물었습니다.

"그분은 가망이 없다고는 말씀하지 않았어요."

하고 나는 더듬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요."

하고 명령조로 말했습니다.

"부인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따님은 절대로 정상아가 될 수 없어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속이지 말아요. 당신의 희망을 버리고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의 목숨을 단축하고 가족은 거지가 될 뿐이에요, 따님은 결코 낫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내 말을 귀담아듣고 있어요? 나는 알아요. 나는 이런 아이를 많이 보았어요. 미국인은 모두 너무 낙관적이에요, 나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알려면 가혹한 편이 나아요. 따님은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당신에게 무거운 짐이 될 거예요, 그 부담을 감당할 준비를 하십시오. 이 따님은 절대로 정확하게 말하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글을 읽거나 쓰지도 못할 거예요, 부인,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특히 따님이 당신의 전부를 삼켜버리게 해서는 안 돼요. 따님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곳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그곳에 따님을 놓아두고 당신은 자기 생활을 하세요. 나는 당신을 위해 진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는 지금도 그가 한 말을 이처럼 상기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충격이 이 말을 내 기억 속에 사진처럼 분명히 새겨 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키가 작은 그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작게 기른 턱수염 아래서 그의 입술은 쓸쓸한 느낌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잔인해 보였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가 말하는 동안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진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으며, 과연 뭐라고 말했는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기억하고 이는 것은 내가 다시 딸아이와 단둘이서 무척 넓어 보이는 홀을 걸어 밖으로 나온 것 뿐입니다. 나는 그때의 내 감정을 펜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말로 표현해도 알 수 없을 터이므로, 그것을 표현하는 길이 있다면 다만 그때 내 몸 안에서 절망적인 피가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딸아이는 넓은 곳으로 나와 기뻐서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고 큰 소리로 웃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딸아이의 일이 걱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물론 그 몸집이 작은 독일인이 나에게 해준 말 때문에 단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마음 속에는 언제나 그의 말이 옳고 이제 가망이 없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최후의 판결이 내려졌을 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 이전부터 무의식중에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딸아이를 데리고 다시 중국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영원한 감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내 마음의 상처를 깊이 도려내는데, 그 솜씨는 훌륭하고 또 신속했습니다. 나는 한순간에 피할 수 없는 진실과 직접 마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2부 피할 수 없는 슬픔

 

내가 세상 사람들을 피할 수 없는 슬픔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두 종류로 나누게 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슬픔에는 진정시킬 수 있는 것과 진정시킬 수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은 결코 나만의 체험은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우리들에게도 공통된 체험입니다. 지능 발육이 불충분한 아이는 이미 가정에 두통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 나는 지능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기 위해 만든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아직 젊은 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 때문에 나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도 그들 중 한 사람이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우리 아이를 받아주지 않아요. 이웃 사람들도 우리 집 근처에서 사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합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우리 아이를 놀려 줘요. 나는 대체 어떡하면 좋을까요! 우리 아이도 역시 미국인이에요, 그 아이에게도 몇 가지 권리는 있을 거예요.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도 권리가 있을 거예요, 그렇지요? 우리 아이와 같은 자식이 있다고 해서 죄가 될 리는 없잖아요."

분명히 그것은 범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학교 선생들이나 이웃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무슨 범죄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어요. 만일 당신도 지능박약아를 두었다면 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딸아이가 어쩔 수 없이 다른 아이들처럼 정상으로 자라지 못하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자신에게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다 나로서는 감당해 내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하나는 딸아이의 장래 문제였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늙도록 살아남을 텐데 누가 이 아이를 잘 돌봐줄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딸아이는 나보다 오래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장수하는 편이었습니다. 물론 오래 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내가 슬픔과 두려움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데 비해, 딸아이의 어린 마음은 아무 부담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걱정도 두려움도 일체 그 아이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만일 딸아이가 나보다 더 오래 살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경우에 누가 그 아이를 돌봐줄까요. 그런데 이 아이의 행복 속에는 이 아이만이 받는 신기한 위로가 있습니다. 딸아이가 마음에 슬픔을 안고 있으면서도 천연스럽게 노는 것을 보고, 나는 이 아이를 틀림없이 천국의 천사처럼 일생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생존의 어려움을 한평생 모르고 살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조차 모를 것입니다. 그 아이는 영원히 어린이들의 즐거움을 느끼며 무책임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의무는 그 아이의 안전과 나날의 양식, 살집, 그리고 친절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는 그 아이가 자기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있는데 대해 크게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 아이가 남들처럼 정상으로 자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타고났다면, 나는 그 아이가 남들처럼 자리지 못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가엾은 사람들은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으며, 이들이 자기를 "나는 바보야"라거나 "천치인 건 나도 알고 있어"라거나 혹은 "나는 병신이라 결혼하지 못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한 말의 뜻조차 잘 모르고 있지만, 가엾게도 자기의 이상(다를 이, 항상 상)을 조금이라도 아는 것만으로도 괴로움을 당하기에 충분합니다.

나는 딸아이가 그들처럼 되지 않은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개인 날이나 비 오는 날을 각각 즐길 수 있고, 스케이트를 타거나 세발자전거를 타는 것을 무척 기뻐하며 또 기꺼이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소꿉장난을 하거나 모래 장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바닷가에서 뛰어나가기도 하고, 파도가 희롱하는 것도 좋아하며,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몇 시간 동안이라도 계속해서 레코드를 들으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아이 안에 숨은 천부적인 재질을 위대한 교향악을 듣는 그 아이의 황홀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나도 알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심취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어떤 종류의 음악을 유난히 좋아합니다. 교회 음악, 특히 찬송가를 들으면 흐느껴 울기 때문에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됩니다 나로서는 그 아이가 무엇을 느껴 그렇게 감동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께 바친 신도들의 합창에 어떤 무한한 비애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부르는 멜로디나 안이한 리듬을 모두 싫어하고, 유행가 따위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가 재즈 레코드라도 틀면 그 아이는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 "싫어, 싫어. 저건 싫어!"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레코드는 축음기에서 치워 버려야 할 뿐더러 어디 딴 곳에 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위대한 음악에는 무한한 기쁨을 느끼면서 귀를 기울입니다.

금년 여름에 집에 돌아가 있을 때, 딸아이는 축음기 옆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베토벤 '5교향곡'을 끝까지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이 끝나자 아이는 다시 한번 처음부터 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취미는 고상합니다. 그리고 어떤 본능적인 힘이 작용하는지 그 아이는 자기의 수많은 레코드를 하나하나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레코드마다 정확히 구별하여 자기가 요구하는 레코드를 스스로 곧잘 찾아냅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은 그것이 보상(더할 보, 갚을 상)의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이들도 저마다 자기의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작은 남자아이(나는 일부러 '작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실 그 사람은 이미 육체적으로는 훌륭한 어린이 되어 있지만)는 밝은 깔의 헝겊 조각을 모으는 데서 독특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헝겊 조각의 색깔이나 천의 차이를 보고 신이 나서 그것을 여러 가지고 분류해서 싫증을 느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이의 부모는 그것을 보고 무척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적어도 그 아이에게 만족을 주고, 그 아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니 부모로서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수량으로 말하면 수많은 밝은 색깔의 헝겊 조각과 화가가 사용하는 그림물감 상자와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질적으로는 소년이나 화가가 똑같은 기쁨을 느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년과 화가는 그것에서 똑같이 정신적인 만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부모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당신들의 자기 자녀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자녀가 자기의 상태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는 결코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그 경우 생활의 부담은 그 자녀에게서 제거되어, 어떻게 하면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당신들의 어깨에 그 부담이 얹혀 있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는 슬픔,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교훈을 배우게 된 나는 오늘에 와서야 겨우 내가 배워 온 길을 하나하나 되돌아볼 수 있지만, 전에 그것을 배우는 과정에 있었을 무렵에는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또 눈앞에 다가오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참으로 넘기 어려운 난관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보다도 오래 살지 못하는 아이의 생명을 어떻게 하면 보호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이외에 자기 자신의 비참한 생활을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하느냐는 문제까지도 겹쳐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도 부모로서의 자존심도 사라져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 그 아이로 말미암아 끊겨 버리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입니다. 세대에서 세대로 흘러가는 생명의 흐름이 정지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쪽이 더 편할지 모릅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니까. 전에 있던 것이 지금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내 아이가 죽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무서운 생각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별로 충격을 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딸아이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기꺼이 맞아들였을 것이며, 지금도 그런 심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게 되었을 때, 딸아이는 영원히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친절한 죽음의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연한 일입니다. 나는 때때로 지능적인 결함을 가진 자식을 죽인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지만, 진심으로 그들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와 같은 행위의 이면에 있는 사랑과 절망을 잘 알고 있습니다.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에 느끼는 절망뿐만 아니라, 그 후의 생활에서 그 절망은 날마다 커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식은 어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가는 동안 절망은 점점 커지고, 이런 자식을 돌보는 일이 어려운 데다가, 아무리 자라도 다만 육체밖에는 성장하지 않는 몸, 전혀 생생한 표정으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를 바라보거나, 앞이 캄캄한 의무를 언제까지나 다해야 한다는 심정은 모든 절망을 더욱 깊은 낭떠러지고 몰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절망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대체 내가 죽으면 누가 이 일을 맡아 해줄까?'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신문에서 읽은 것처럼 만일 부모가 자기들의 것이 아닌 권리를 마음대로 자기 것으로 행사하여 자기의 목숨을 끊는다면, 그것은 너무 잘못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애정이 넘쳐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옳지 못합니다. 인간의 생명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신성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그 신성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죽이는 행위를 죄로 여기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회는 어떤 무거운 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죽음을 명합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가 죽임을 당해도 무방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 아이들처럼 죄 없는 자는 없습니다.

살인은 어디까지나 살인입니다. 만일 부모하고 해서 그 아이를 죽일 권리가 있다면 이 세상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만일 모든 죄 없는 자를 죽일 권리를 사회가 갖는다면, 그 결과는 생각만 해도 두렵지 않습니까. 처음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마도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어린이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에는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는 노인을 죽여도 무방하게 될지 모르며, 한 걸음 나아가서 양심이 마비되면 편견이 남을 죽이는 것을 하나의 권리로 인정하여 어떤 피부 색깔이 다른 인종이나 또는 어떤 교의를 신봉하는 사람들까지 죽이게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없도록 미리 막는 안전한 방법은, 설사 아무리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라도, 죄 없는 자의 목숨을 끊을 가능성이 있는 일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인정하고 피해를 받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자가 아니라 죽이는 자이니까요.

유사네이사(안락사: 불치병 혹은 심한 고통이 따르는 병에 걸린 환자를 죽게 하는 것으로, 현재 어느 나라에서도 법률상으로는 살인죄로 인정하고 있다; 역주)라는 말은 부드러운 어조를 갖고 있습니다. 대체로 길고 부드러운 어조를 가진 말이 위험을 느끼게 하지 않는 것처럼 이 말도 그 위험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험은 역시 위험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내가 피할 수 없는 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역시 내가 발뺌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 험한 인생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내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투쟁이 계속되어 온 것을 솔직히 말하고자 합니다. 나의 상식 혹은 의무를 어겨서는 안된다는 신념은, 나에게 언제나 재앙이 내 자신의 생활이나 나의 친척 또는 친구들의 생활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나에게 타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혼란이 일어나 있을 때에는 언제나 상식이나 의무가 가르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에서 상식이나 의무의 신념이 명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타협책으로서 생각해낸 것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웃거나 혹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흥미를 갖고 있는 체하거나 되도록 표면상으로는 나에게 변한 데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나의 영혼은 반항의 불길에 타오르고, 혼자 있을 때에는 눈물이 나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표면상의 행동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과 진실한 마음으로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분명히 나의 표면적인 명랑성이나 천박한 거동을 알아차리고 그들의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냉엄한 것에 반발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표면을 장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나 자신을 지키는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의 나로서는 내 마음속 밑바닥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나는 태연하게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이미 끝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교훈을 지금까지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제거할 수 없는 슬픔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도 흥미있는 일이며, 또 몇몇 사람들이 겪은 그 과정이 어떠했는가를 알기 위해 다소라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거할 수 없는 슬픔을 지닌 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과정의 첫째 단계는 비참하게 또 산만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것에서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풍경이나 꽃이나 음악이나, 내가 전에는 기쁨을 느꼈던 것이 모두 공허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나는 실제로 음악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다시 음악에 귀 기울이게 되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나야만 했습니다. 이 깨닫는 과정이 상당히 진전되어 내 영혼이 거의 타협할 수 있는 경지에 가까워졌을 무렵에도 나는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 무렵 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다 했습니다. 집안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도록 감독하고 화병에는 꽃꽂이를 뜰에는 화단을 만들어 장미가 피어나게 하고, 식사를 제때에 준비하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손님을 초대하기도 하여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다만 내 손이 혼자서 움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살아 있었던 때는, 내가 딸아이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뿐이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 있을 때에는 전신이 슬픔으로 가득차 마냥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운명에 대해 힘껏 반항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우는 모습을 딸아이이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딸아이는 내가 울고 있는 것을 보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웃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나중에는 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딸아이의 웃음에 내가 압도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언제 내 영혼에 전환이 왔는지 기억하고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 탓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겉으로는 너무 명랑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아무도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것이 그 이유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자제하여 표면에 나타난 것 외에 속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은 것도 그 원인의 하나였습니다. 피할 수 없는 슬픔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갈 것입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을 피할 수 없는 슬픔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두 종류로 나누게 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슬픔에는 진정시킬 수 있는 것과 진정시킬 수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한번 죽은 부모는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슬픔입니다. 몸이 불구라는 것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슬픔은 건강한 사람들의 생활과는 다른 종류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도 의미하게 됩니다.

진정시킬 수 있는 슬픔이란 생활에 의해 해소할 수 있는 슬픔을 가리키지만, 진정시킬 수 없는 슬픔은 생활도 변화시켜 슬픔 자체가 생활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죽어서 멸망하는 슬픔은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슬픔은 결코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일찍이 브라우닝이 쓴 것처럼 그것은 흐름 속에 던진 큰 돌과 같은 것입니다. 물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쪼개어 또 하나의 흐름이 되는 수밖에 길이 없습니다. 물은 그 돌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나는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그 사람이 끝나지 않을 슬픔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를 알고, 또 그들의 슬픔도 나의 경우와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나는 한편 놀라고 슬펐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결코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찌하여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면 나도 그 슬픔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 영혼의 전환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딸아이를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고, 딸아이가 그 후에도 계속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에 느낀 절망은 내 자신까지도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밑빠진 진창 속에 빠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길고 끝없는 절망은 모든 것을 독(독할 독)으로 오염시켜 사상도 정력도 파괴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타고난 건강도 내 영혼의 전환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습니다. 나는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네 계절이 왔다가 지나가는 것도, 집 뜰에 꽃이 피고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가는 것도, 그리고 거리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슬픔과의 융화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단계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는 하루 사이에 이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 슬픔은 결코 변치 않는 것이며 결코 나한테서 떠나지 않고 또 아무도 나를 도와 줄 수 없는 이상, 나는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분명히 내 자신에게 타이른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문제에 있어서는 단번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진창 속에 빠졌습니다. 무럭무럭 자연히 자라나는 이웃 아이들이 내 딸아이에게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거나 얕보는 것을 보기만 해도 나는 기가 꺾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기어나오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절망에서 딛고 일어나 "이것이 나의 생활이다. 나는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내 자신에게 타이르게 되었습니다.

시일이 지나감에 따라 나는, 생명을 유지하는 한 슬픔과 함께 살아도 그 가운데서 즐길 수 있는 것을 즐기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에도 내가 좋아하던 음악은 아직 즐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밖에 내가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당시의 일을 회상해 보면, 내가 맨 처음에 기쁨을 찾아낸 것은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꽃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나는 열중하지는 못했지만 집에 기르고 있는 장미를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한번 마음이 변하기 시작하자 나는 "그래 그래,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지."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다시 생각해 내고, 또 그때까지 내 신변에 일어났던 딸아이의 불행한 일들은 사실상 내게 충격을 주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딸아이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내 생활을 되찾지 못했었습니다. 내가 하려고만 생각하면 할 수 있었던 일, 또 해야 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딸아이를 언제까지나 내 곁에 둬야 하는가 혹은 같은 정신박약아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야 하는 것도 그 하나였습니다. 물론 만일 그 아이가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안전하기만 하다면,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나만큼 딸아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으며, 또 다른 사람이 나만큼 그 아이를 잘 돌봐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낳은 것은 사실 나이며 그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내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딸아이는 참으로 외톨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 일이 그 무렵에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외톨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젊어서 죽었다면 대체 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 무렵 중국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되는 것은, 딸아이를 우리들이 모국인 미국에 보내어 그 아이와 같은 정신박약아들만 다니는 학교에 입학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그곳에서 혼자, 어머니도 없고 또 그 아이를 무척 좋아한 중국인 간호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에게 이런 것이 짐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은 하나도 없는, 오직 혼자서 살아야 하는 생활에 자기를 적응시키는 방법을 배워야 했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이와 같은 환경의 변화에 순응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아이는 어째서 자기의 환경이 그처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며, 또 당혹과 슬픔으로 그 아이는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하여 내가 그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동안에 그 아이가 그런 생활에 적응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 이유의 이면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내가 언제든지 자기를 만나러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서서히 우리집에서 이 새로운 집으로 그 아이의 생활 기반을 옮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의 장래의 안전에 관해서 이미 나는 결심을 하고 있었으나, 내 신변에 일어난 특수한 사정에 의해 그것은 더욱 앞당겨졌습니다. 그 특수한 일이란 중국에 대전이 일어 혁명이 돌발한 것을 말합니다. 전에 다른 책에도 쓴 적이 있지만, 어느 날 공산군이 미국인과 그 밖의 외국인 집을 습격하여 몇 사람의 미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지키기 위해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나는 이 결심을 앞당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친절한 중국인 부인이 우리를 자기의 오두막에 숨겨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척 지루하게 생각되었던 그날 하루를 나는 가족과 함께 죽음에 직면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이때 나는 누구보다도 딸아이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면, 딸아이가 나보다 먼저 죽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나로서는 저 난폭한 군대들의 손에 딸아이를 남겨두고 갈 수는 도저히 없었기 때문입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이것은 특수한 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는 분들에게는 아마도 이런 변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신박약아를 가진 우리에게 문제의 본질은 모두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우리가 죽은 후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감에 따라 딸아이에게는 친구가 있어야겠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집에 놀러오는 그 아이의 친구들도 결코 끝까지 그 아이의 친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친절하고 딸아이를 가엾게 생각하는 친구들도, 우리 아이와 함께 있으면 어쩐지 으스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딸아이나 나한테도 서먹서먹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딸아이를 위해서는 그 아이의 세계를 찾아내어 그 세계에서 살게 해야만 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사소한 사건으로 나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우리집 근처에 있는 많은 중국인들과 함께 몇 사람의 미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미국인 가정에 우리 딸아이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언제나 서로 파티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놀러온 그 딸아이가 꼬마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엄마가 앞으로는 저 가엾은 아이는 파티에 부르지 않겠대. 그래서 다음부터는 부를 수 없어."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 아이의 말대로 초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그리하여 넘을 수 없는 깊은 틈새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딸아이를 위해 다른 세계(딸아이가 멸시나 배척을 받지 않는, 그리고 딸아이와 같은 수준의 친구와 사귈 수 있는 세계)를 찾아내어, 딸아이가 이해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나는 딸아이를 위해 좋은 학교를 물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나의 경우에 일어난 또 한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나는 두세 사람의 가장 친한 중국인 친구에게 나의 이 결심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나의 이 결심을 듣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신박약아들을 수용하여 가르치는 특수한 학교에 대해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정신박약아는 어린이나 늙은이를 막론하고 집안 식구가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도 타인은 가족만큼 친절하지 못하다는 그럴듯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중국에는 양로원도 없고, 또 서양의 영향을 받아 지은 것 이외에는 고아원도 없었으며, 미친 사람이나 정신박약자를 수용하는 기관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은 모두 죽을 때까지 가정에서 돌봐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딸아이를 집에서 내보내려는 나를 그들 중국인 친구들은 잔인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미국 가정과 중국 가정의 다른 점을 설명했으나 그것은 헛일이었습니다. 중국의 가정은 안정되어 있으며, 같은 건물 안에 가족이 대(번갈을 대)를 이어 삽니다. 여러 대가 같은 지붕 밑에서 살면서 서로 책임을 분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정신박약자들에게 이런 가족 구조는 이상적인 것입니다.

중국인은 나의 고향에는 이런 가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나는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자랐기 때문에 친척들은 나에게 남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더구나 내가 죽은 후 내 딸아이의 시중을 부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친척들은 저마다 서로 떨어져 가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내 딸아이를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죽는다면 그들은 귀찮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미국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옛날 문명사회에서 가족이 돌봐야 하는 개인은 국가에서 돌봐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인 친구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또 딸아이를 집에 있게 해야 한다고 권하는 그들의 말에 기억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일단 결심을 하고 나니 다음의 문제는, 어떻게 또 언제 그 결심을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까지 나는 경험에 의해 딸아이를 받아주겠다는 곳은 적지 않은 경비가 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의 나에게는 그만한 경비를 부담할 돈이 없었습니다. 나는 딸아이를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습니다.

여기까지 나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으나, 내가 해온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17세 때 학교를 다니면서 생활비의 일부를 손으로 마련한 후부터 돈이 없어 고생한 적은 없었습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면서 나는 가장 소중한 일은 자기의 소원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반드시 길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나의 생활습성은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미국으로 가서 딸아이의 집이 될 곳을 찾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결심을 한다는 것은 안도감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일을 결심할 경우에는 목표가 전제됩니다.

나는 진창 속에 던져진 그 목표와 관련된 밧줄에 매달려, 날이 갈수록 절망에서 기어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목표를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도,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도 나는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알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나는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을 반항으로 말미암아 지치게 하는 폐단이 없어졌습니다. 또한 나는 전과 같이 '어째서'라는 의문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내 자신의 걱정과 슬픔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딸아이의 일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인생과의 투쟁을 중단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서서히 혹은 맹목적으로 인생에 순응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한, 인생은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고의 중심이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설사 슬픔을 쉽사리 감당할 수 없더라도 감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딸아이를 떼어놓기 전에, 그 아이가 앞으로 살 집을 잘못 택하는 일이 없도록 아이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고, 또 아이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를 위해 1 년 동안 집안 일로 할애해야 할 시간 이외에는 모두 딸아이를 위해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딸아이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색깔의 구별을 가르치고, 아이가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악보를 익히게 하고, 또 노래도 조금은 부를 수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과연 딸아이가 이런 것을 해낼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도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뜻밖에도 내가 하려는 계획을 도와 준 결과가 되었습니다. 새로 대두된 혁명 세력이 난폭하게 남경을 점령하여 모든 백인들은 한동안 남경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남경이 점령된 것은 초봄이며,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가까운 아름다운 산 속에서 평화로운 여름을 보내기 위해 일본으로 피난했습니다. 평화로운 여름이라는 의미에서 그 해 여름은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우리는 숲속의 한 일본 집에 살면서 돈은 없었지만 책임도 없는 자연으로 돌아간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고뇌에 찬 세월을 보내 온 나에게는 확실히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침마다 게나 생선을 팔러 오는 일본인 어부뿐이었습니다. 내가 원시적인 부엌일을 하는 동안에 딸아이는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일본 부인과 마찬가지로 숯불을 피워 요리를 하고 쌀밥과 생선과 과일을 먹고 살았습니다.

나는 여기서 잠시 펜을 멈추고, 어쩔 수 없이 보내게 된 이 즐거운 휴가 동안에 우리가 만난 일본인들에게 약간의 감사의 선물을 하려고 합니다. 그 해 여름도 끝나갈 무렵, 나는 휴가를 이용하여 일본을 두루 여행했습니다. 돈을 절약하고 일반 일본인과 만나보기 위해 나는 딸아이와 함께 3 등석 기차를 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역에서 팔고 있는 밥과 짠지와 생선이 들어 있는 깨끗한 나무상자도시락을 사서 먹고 차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딸아이는 이 여행에서 생전 처음으로 병에 든 살균된 신선한 우유를 마셨습니다. 밤이 되면 기차에서 내려 일본인밖에 없는 작고 청결한 마을 여관에 묵었습니다. 입구에서 구두를 벗고 일본인 하녀가 내주는 슬리퍼를 신고 욕실에 안내된 다음, 방을 잡게 되었습니다. 저녁 식탁에는 고깃국이 사기그릇에 담겨 있고 달걀과 생선과 밥과 차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벽장에서 부드러운 이불을 꺼내 깨끗한 자리 위에 깔면 침상이 마련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자주 밤중에 잠이 깨어 희미한 달빛으로 훤한 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사방이 몇 자(자 척) 되지 않는 작은 뜰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어떤 넓은 공간과 무한을 암시하는 무엇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일본인의 천재적인 재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우리는 친절하고 정중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딸아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사람들이 정상으로 여겨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가을도 저물어 갈 무렵, 우리는 중국으로 돌아와 상해에서 1년 동안 살게 되었습니다. 남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직 위험하다고 사람들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딸아이와 단둘이 보낸 그 1년 동안은 나에게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 1년을 돌이켜 보면 내가 인간 정신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다운 지식은 모두 그 동안에 내 것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집에는 같은 피난민 가족이 두 세대 살고 있었으며 우리는 맨 위쪽 방 세 개를 세내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딸아이와 함께 하루하루의 예정을 세웠으며, 그중에는 많은 시간을 딸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나는 끈기 있게 딸아이의 낮은 지능과 보조를 맞춰 나가기 위해 자기를 계속 억제해 나갔습니다. 성급한 것은 하나의 죄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일과 공부와 유희가 혼합된 그간 1 년이 시작되었습니다.

1년 동안에 일어난 자질구레한 일들은 이제 와서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나, 다만 딸아이가 쉬운 문장을 읽을 수 있고, 노력하면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것, 혹은 노래를 대단히 좋아하여 간단한 노래는 혼자 부를 수 있다는 갓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그 자체로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연습을 잘 시키면 딸아이는 더욱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답게 아이에게 글을 쓰게 할 때(정답게라고는 하지만 공부할 때에는 어느 편인가 하면 나는 엄격했고, 또 때로는 열심인 나머지 무정한 경우도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나는 우연히 아이의 손을 잡고 글자를 쓰게 하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손은 뜻밖에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나는 아이의 양손을 잡고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양손이 모두 흠뻑 젖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나는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를 기쁘게 하려는 천사와 같은 심정에서 오직 어머니를 위해 아주 긴장하면서 글자 쓰는 법을 열심히 배우려고 애쓰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와 냉정해졌을 때, 나는 거기 있던 책을 모두 버리고 영원히 다시는 눈에 띄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 가엾은 아이에게 무리해 가며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시켜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땀흘려 수고하면 딸아이도 조금은 책을 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책을 읽게 되었다고 해서 결코 기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쯤은 쓸 수 있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자기의 의사를 남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글을 쓰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딸아이는 음악을 듣고 즐길 수는 있었지만 작곡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도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행복이란 그 아이의 지능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행복이란 그 아이의 지능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 밖에 나가 고양이와 놀자."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 아이의 작은 얼굴은 뜻밖의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쁨을 보기만 해도 아,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행복이 그 아이의 세계라고 혼자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한 모든 자랑과 야심을 단념하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대로 받아들여 그 이상은 일체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속에 다짐했습니다. 만일 그 아이의 갇힌 지능이 개발될 때가 온다면, 그때 나는 다만 감사만 하면 되니까요. 나는 딸아이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내 곁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의 영원한 집을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3부 행복을 위한 이별

 

내가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가장 비참한 길을 가는 동안에 나는 인간의 마음은 모두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평등하며 누구나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준 것은 바로 내 딸이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오히려 외국인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는 친구도 없었고,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편리한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며, 또 나는 중국인 가운데서 살아온 덕분에 가장 중요한 것(즉 인간의 가치)을 구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돈만으로 사물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습니다. 만일 이상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데 돈이 많이 들면 나는 그 돈을 마련할 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나는 젊고 건강하고 훌륭한 교육도 받았습니다. 이처럼 조건이 갖춰지면 아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듬해에도 나는 아이를 위해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여러 특수학교와 요양소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일람표를 갖고 찾아다니며 여러 가지 사항들을 문의했습니다. 이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학교의 탐지서는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처럼 그런 학교를 알아보려는 분들에게는 유용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나는 건물이나 운동장이나 시설만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훌륭한 시설을 갖춘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장 불성실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학교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어떤 특수학교 여교장의 안내로 구내를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장은 설계가 잘 된 운동장과 건물 구석 구석까지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확실히 영양상태도 좋아 보이고 잘 돌봐주고 있었습니다. 그 학교에 전속된 의사도 있고, 또 심리학 전문가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람들도 산뜻하고 친절해 보였습니다. 학교 건물도 훌륭하고 아이들이 손수 만든 수공예품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학교에는 음악부까지 있었습니다. 교장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갖고 있는 숨은 재능이 최고로 발휘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교장 자신도 유능하고 명랑한 사람으로 불친절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내 딸아이가 교장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온정이 결여되어 있는 듯이 생각되었으나, 아이들을 일일이 교장이 돌볼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이 학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를 그 학교에 입학시킬 심산이었고, 놀랄 만큼 막대한 경비를 마련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어 내가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교장과 둘이서 넓은 현관 앞에 서 있을 때 한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날 하루를 허비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한 대의 자동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서자, 한 떼의 소녀들이 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와 현관을 지나갔습니다. 소녀들은 모두 이 학교의 학생들로 10대의 어린이들뿐이었습니다. 교장 앞을 지나갈 때 소녀들은 예의바르게 교장에게 인사를 하고 교장도 일일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교장이 날카로운 눈으로 소녀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장은 갑자기

"여러분 잠깐만!"

하고 소녀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소녀들은 약간 놀란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얼굴을 쳐들고 걸어야 한다고 몇 번 말해야 너희들을 알아듣겠느냐. 계단까지 되돌아가 다시 해봐."

하고 교장은 분명히 명령조로 말했습니다.

감시하는 듯한 교장의 눈 앞에서 소녀들은 곧 그 말에 복종했습니다.

소녀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교장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설명하는 듯이 말했습니다.

"소녀들에게 얌전히 방을 출입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내 임무의 하나예요. 지능 발달이 더딘 아이들은 모두 얼굴을 숙이고 걸어 다니거든요. 그것이 그 아이들의 특징이에요. 나는 그걸 완전히 고쳐 놔야 해요."

"왜요!"

하고 나는 물었습니다.

교장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 학교에 있는 소녀들은 모두 사교계에서도 이름있는 훌륭한 가정의 자제들뿐이에요. 부모들은 자기 딸을 데리고 다니는 부끄러움을 면하려고 해요."

하고 반쯤 경멸하는 어조로 말하고 웃었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반문하고 싶으시죠? 뿐만이 아녜요. 나는 브리지(카드 놀이의 한 가지; 역주)를 할 때에는 어떻게 카드를 갖고 해야 하는가도 가르쳐야 해요."

"그건 또 왜요?"

하고 나는 반문했습니다.

"나도 살아야 하니까요."

교장은 솔직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작별했습니다. 그때 딸아이를 이 학교에 넣을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구하는 사람은 남녀를 막론하고 먼저 딸아이의 일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가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빵 문제를 그렇게 앞세우지 않아도 빵은 쉽사리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나는 훌륭한 사람이 교장을 맡고 있는 학교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직원들이 교장이나 원장보다 훌륭할 리가 없으므로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의 인품이 좋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설이나 건물이 좋은 학교를 찾지 않기로 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충분히 뛰놀 수 있는 장소와 햇볕과 신선한 공기는 필요했습니다. 나는 북부 지방에 있는 학교는 밖에 나갈 수 있는 계절이 짧으므로 피하기로 했습니다. 딸아이는 아열대 기후에 익숙하고 밖에서 놀기를 좋아했으므로, 넓은 운동장과 불결하지 않고 아이들을 잘 돌봐주는 최소한도의 조건 이외에 나는 믿을 만한 학교 책임자를 찾게 되었습니다. 친절하고 온정이 있는 사람들을.

지금까지 미국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느 주에도 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립 학교에 딸아이를 넣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립 학교에 자녀를 넣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모두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주립 학교에 가보았는데, 아이들은 엄격한 일과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큰 방에서 시무룩한 얼굴로 말없이 벤치에 걸터앉아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많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저 아이는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느 날 나는 안내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무것도 기다리고 않지 않아요. 단지 앉아 있을 뿐이에요. 저 아이들을 저렇게 앉아 있고 싶은 거예요."

하고 그 사람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어째서 저 아이들은 다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하고 나는 물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쯤 아이들을 방에서 나와 건물 주위를 걷게 하고 있어요."

하고 그는 내 질문을 따돌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정말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뭔가 좋은 일, 재미있을 일이 일어나기를 아이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마 아이들 자신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리 둔감한 영혼이라도 고통이나 기쁨을 느끼지 못할 만큼 둔한 영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도,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능의 발육이 더딘 아이들은 결코 인간으로 완성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인간으로서의 괴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기로서는 영문을 모르지만 깊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한낱 동물은 아닙니다.

나는 이것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영원히 짐승 이상의 존재입니다. 정신을 잃고, 말을 잃고, 타인과의 의사 소통이 부자유해도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의 뭔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도 인류의 일원인 데는 변함없습니다.

어느 주립 수용소를 보러 갔을 때,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무서운 광경을 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그 수용소를 방문한 내 눈에는 그곳이 마치 공포의 집처럼 보였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청년이나 노인이 된 아이들은 보기만해도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평균 정신연령은 언뜻 보아 한 살 이하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개처럼 한 군데 처박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옥양목이나 거친 베로 된 자루 같은 것을 걸치고, 음식은 마루에 놓인 것을 손으로 집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변소에 가는 습관도 가르치지 않는 이 수용소에서는 콘크리트 바닥에 하루 두세 번 물을 흘려 오물을 처리했으며, 침대도 불결한 짚이불을 깐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이 수용소의 처지에도 그 나름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이 아이들을 무엇을 가르쳐도 안 되고, 다만 죽을 때까지 생존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언짢게 생각된 것은, 이 수용소에는 어딜 가나 아름다운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아이들을 볼 만한 것도 없고, 아이들이 얼굴을 쳐들거나 손을 뻗으려고 해도 그 대상이 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 나는 다시 이 수용소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기 전에 나는 수용소 소장이 젊은 사람으로 교체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가보았더니 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장이 바뀐 수용소는 옛날과 크게 달랐습니다. 그곳은 전과 같이 사람으로 가득차 있었으나 전혀 딴 곳처럼 달라져 마치 한 가정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창문에는 밝은 색깔의 커튼이 걸려 있고, 또 마루에는 리놀륨이 깔려 있었습니다. 많은 방에는 유아만 수용하고 더 큰 어린이는 모두 같은 나이 또래 어린이와 함께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벤치와 의자도 있고 어린이들은 거기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가에는 꽃이 피어 있고 마루에는 완구가 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어린이는 얌전해지고, 깨끗한 옷을 입고, 그리고 모두 정성껏 보살핌을 받고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그 숨막히는 악취는 깨끗이 사라지고, 식당도 생기고, 식탁에는 접시도 스푼도 물주전자도 놓여 있었습니다.

"지금 수용된 아이들은 전의 아이들보다 정도가 높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 대부분은 전부터 있던 아이들입니다."

하고 젊은 소장은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에 이곳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쳐도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뭔가 가르칠 수 있어요.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된다면, 누가 도와줍니다."

하고 그 소장은 조그마한 바구니나 깔개 등 아이들이 만든 물건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간단한 것들로 서툴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모두 놀랍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모두 자기가 만든 것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린이들은 모두 나와 소장의 주위에 모여 자기들이 만든 것을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이 아이들의 지능은 나아졌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보았습니다.

"대체로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능이 나아지고 나아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는 그것은 누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 아이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지 않지만."

하고 소장은 대답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취급하고 계십니까?"

하고 나는 물었습니다.

"다만 이 아이들을 인간으로 대하고 있어요."

소장은 이렇게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어느 다른 학교에서 나는 이 젊은 소장과 같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의 학교 물색은 끝났습니다. 건물이나 운동장 둥에는 주목하지 않고 사무실에 들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습니다. 조용한 백발의 노인과 악수만 하고 나는 내가 찾던 사람을 만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충동적으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딸아이의 일을 설명하고 어떤 곳에 아이를 맡기고 싶어하는가를 말했습니다. 그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습니다. 그 태도는 동정적이었으나 애써 동정적이 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또 별로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 학교가 마음에 드는지 알 수 없지만 우선 학교를 구경하실까요?"

하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를 돌아보았는데, 어느 건물에 들어가 보아도 아이들이 모두 그를 보고 반가운 얼굴을 하고, "어드 아저씨"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아이들과 함께 장난을 치기도 하고, 아이들이 무릎에 매달리기도 하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초콜릿 조각을 찾는 것을 말없이 받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초콜렛도 아이들의 식욕을 더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 작게 쪼개져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아이나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리한 눈동자는 어느 것 하나도 간과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또 그 사람이 예컨대 지미의 의자는 좀 더 낮은 것이 좋으므로 지미가 가장 좋아하는 의자의 다리를 조금 잘라 주라고 주의시키는 말을 듣고 아이의 시중을 드는 사람은 곧 그렇게 했습니다.

건물은 산뜻하게 잘 지어져 있었으나, 내가 그때까지 본 몇몇 학교에 비하면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았습니다. 학교의 분위기는 내가 느낀 대로 아늑하고 자유롭고, 또 아이들이 모두 사이좋게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학교 뒤뜰에는 진흙파이를 만들기도 하고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마치 자기 집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느 벽에도 문방구에도 '먼저 행복을, 모든 일은 행복에서'라는 모토가 씌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토는 교장 자신의 책상 위에도 있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더니,

"그것은 단지 감상(깨달을 감, 상할 상)이 아니라 오랜 경험의 산물입니다. 아이들의 영혼과 정신이 불행해서 해방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행복한 아이들만이 일을 배울 수 있어요."

하고 교장은 말했습니다.

정신박약아를 가르치는 데 다소의 경험을 가진 나에게는, 그 교장의 말이 건전한 교육의 원칙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학교는 이 원칙 위에 모든 것이 쌓여 있는 것을 알고 크게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제 더 이상 학교를 물색할 필요가 없다고 혼자 말을 했습니다.

9월 어느 날, 나는 딸아이를 데리고 그 학교에 갔습니다. 새 운동장에서 딸아이를 길들이기 위해 우리는 사방을 걸어다니고, 또 딸아이의 침실에도 가보았습니다. 딸아이를 돌봐줄 여자 아이들을 감독하는 부인도 만났습니다. 딸아이는 나와 그 부인의 손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틀림없이 어떤 암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나와 딸아이는 한 번도 떨어져 있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이별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몇 번이라도 딸아이를 만나러 올 수 있을 것이며 또 딸아이도 때로는 나를 만나러 집으로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제 함께 살 수 없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헤어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나는 딸아이의 영원한 거처를 찾아내는 것이 아이의 앞날의 안전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아이가 일생 살 집을 찾아내어 그곳에서 살게 한다는 것이 나한테는 잔인하게 생각되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나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무섭게 생각되었습니다. 교장은 나에게 딸아이와 함께 강당으로 오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음악을 듣기 위해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친절한 교장은 나와 함께 단 위에 앉아 아이들에게 5, 6분 동안 중국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습니다. 아이들 중에는 남의 말을 알아듣는 아이도 더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에는 오랫동안 일어났던 일의 의미가 갑자기 결정(맺을 결, 수정 정)되는 순간이 간혹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 강당의 단상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백 명의 아이들의 얼굴을 목격했을 때 그런 순간이 닥쳐온 것입니다. 이 아이들의 배후에는 얼마나 큰 마음의 고통이 있었을까요. 그 아이들을 위해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리고 무서운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아이들은 운명의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학교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 중에 내 딸아이도 이제부터 끼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옆에 서 있던 친절한 교장은 내 마음을 헤아린 것이 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슴이 벅차서 말문이 막힌 나를 보고, 그는 짤막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아이들을 웃겼으나 말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말을 계속할 여유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내 일생에 그때처럼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한 적은 없었습니다. 3분 동안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던 때처럼 한 가지 일에 전력을 다해 열중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슴속에 뭉쳐 있는 이야기를 하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다른 어떤 사람을 이해하기보다는 "여러분의 생활을 잘 알고 있어요. 나는 여러분들과 생활을 내 딸아이와 함께 해 왔으니까요"하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나는 아이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한 이야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얻은 보수는 아이들의 신선한 웃음소리였습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교장은 나를 옆으로 불러서 조용히 그러나 정중하게 말했는데, 나는 그때의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모두 행복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이곳에 있으면 안전해요. 저마다 괴로움이나 결핍을 모르고 살아요. 투쟁이나 패배도 모를 것이고, 또 슬픔을 느끼는 일도 없을 거예요. 이 아이들에게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다른 아이들과 서로 나눠 갖게 되어요. 당신의 따님도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어요. 이것을 잘 기억하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의 슬픔보다도 더욱 참기 어려운 슬픔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도 자기가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슬픔입니다. 당신은 이제 그 슬픔을 느끼는 일이 없을 거예요."

하고 그 교장은 말했던 것입니다.

그 후 나는 여러 번 딸아이를 생각하고 다시 절망에 빠지려고 할 적마다 이 친절하고 또 분별있는 말을 상기하고, 딸아이가 행복한 이상 어찌 내가 참을 수 있는 일을 감당해 낼 정도로 강해질 수 없겠느냐고 자문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날 딸아이를 학교에 남겨 두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학교의 부각을 받아들여 한 달 동안은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교장은 새로운 생활이 완전히 땅에 뿌리를 내리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리며, 그동안에 아이가 부모를 만나게 되면 그만큼 새로운 생활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늦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 알려 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는 생전 처음으로 딸아이를 혼자 떼어놓고 전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아픔을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한 달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부모들은 내가 얼마나 딸아이를 생각하고 마음 아파했는지 알 것입니다. 편지도 쓸 줄 모르고,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알릴 줄도 모르는 아이를 놓아두고 온다는 것은, 때로는 더없이 잔인한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나는 밤이면 딸아이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아이가 나이를 먹고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하고, 부랴부랴 가까운 역에 뛰어가 기차를 타려다가 간신히 참았습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밤을 보내는 괴로움을 알고 있는 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지루한 한 달이 지나 학교에 찾아갔을 때, 딸아이는 행복하고 건강했다고 지금 여기서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딸아이의 곤혹스러운 얼굴이나 나를 만났을 때에 보여 준 가엾을 정도의 기쁨을 보고, 나는 다시 과거의 의혹에 빠져 딸아이의 물건을 트렁크에 넣어 가지고 집으로 데리고 올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늙은 보모 한 사람이 우리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따님은 장난이 심해서 애를 먹고 있어요. 따님은 다른 아이들이 즐겨하는 일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툭하면 울어요. 그래서 우리는 따님을 혼내줘야 해요."

"혼내줘요?"

하고 나는 반문했습니다.

"그래요. 따님이 맘대로 집으로 뛰쳐나갔을 때에는 집 안에 가둬놓아야 했어요."

"그 아이는 자유에 익숙해 있어요. 그리고 집을 뛰쳐나간 것은 물론 나를 찾기 위해서였을 거예요."

하고 나는 더듬거리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혼자서 집을 뛰쳐나가서는 곤란해요. 따님은 복종하는 것을 익혀야 해요. 만일 그렇게 되면, 따님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해질 수 있어요."

하고 그 보모는 말했습니다.

항의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 것을 삼키고

"아이를 데리고 잠깐 산책하겠어요."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 단둘이 되자 딸아이는 다시 새처럼 행복해 보이고 다시는 나를 놓지 않으려는 듯이 내 손을 꽉 잡았습니다. 나는 교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교장은 사무실에서 나를 기꺼이 맞아들이고 딸아이에게도 말을 걸었습니다. 딸아이는 교장을 잘 알고 있는지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딸아이를 이곳에 그대로 둘 수 없어요. 보모의 이야기에 의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딸아이를 집에 가둬 놓았다고 해요. 어린 아이가 갑자기 지금까지 살고 있던 집에서 떠나 있으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은 뻔한 일이에요. 딸아이는 어째서 자기 생활이 갑자기 변하게 되었는지 까닭을 알지 못해요. 이곳 아이들은 모두 일정한 일과를 억지로 지켜야 하는 걸까요. 예컨대 아이들은 모두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식당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하고 나는 교장을 보자마자 말했습니다.

나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말을 했습니다. 교장은 친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을 마치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따님도 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행동할 수는 없어요. 이곳에서는 따님도 많은 아이들 중에 한 사람이에요. 개인적으로 돌봐주기도 하고 주의도 주고 또 가르치기도 하는데, 자기 멋대로 행동해서는 곤란해요.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는 따님에게도 다소 자유가 없게 돼요. 그러나 자유가 다소 없게 되더라도 그것으로 얻게 되는 것과 비교해 봐야 해요. 따님은 이곳에서는 안전하고 또 많은 친구가 있어요. 대가족이 되면 어디서나 필요한 약간의 일과에 익숙해지면, 여러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은 오히려 기쁨이 되는 거예요. 아시다시피 따님도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해요. 그러나 다른 일에 대해서는 결코 억지로 따님에게 가르칠 수는 없어요. 앞으로 1년 후 또는 5년 후에 따님이 어떻게 될지 좀 생각해 보세요. 이 학교가 따님에게 좋은 집이 될지 어떨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불만 때문에 큰 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딸아이는 그 모든 일이 어째서 필요한지 알 수 없고, 또 어찌하여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엾어서 참을 수 없어요."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아무도 그 이유는 알지 못해요. 당신도 어째서 이런 따님과 같은 아기를 낳게 되었는지 알 수 없잖아요. 이런 자식을 갖고 어디에 낙이 있는지 당신도 알 수 없지요?"

하고 교장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따님을 떼어 놓을 수는 없어요."

하고 교장은 말을 이었습니다.

"따님도 인간인 이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자기의 작은 소임만은 다해야 해요."

교장은 이밖에도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앉아서 그 말을 들었습니다. 내 곁에는 딸아이가 만족스러운 듯이 바싹 붙어서 앉아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나는 교장의 말이 나를 완전히 설득한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교장의 말에 의해, 딸아이를 위해 보다 더 큰 행복을 생각할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해서 나는 그날 안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딸아이가 작은 팔로 내 목을 껴안고 매달리는 것을 떼어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와야 했던 그날의 일을 나는 한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보모가 딸아이를 꽉 붙잡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용기가 꺾이지 않도록 뒤돌아보아서는 안된다고 되풀이하여 나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도망치다시피 돌아왔습니다.

그 후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나는 딸아이와 같은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미국에 살게 되고, 그것도 딸아이 학교에서 얼마 멀지 않는 곳이었으므로 자주 그 애를 만나러 학교에 갔습니다. 지금은 딸아이도 내가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데 익숙해졌으나, 그래도 내가 돌아갈 때가 되면 딸아이는 한참 내게 매달려 있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듯이 몇 번이나 "집으로 가고 싶어." 하고 나에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집에 돌아오면 며칠 동안은 기쁨에 넘쳐 있었으나, 한 주일쯤 지나면 학교에 돌아가고 싶어서 다른 '소녀들'의 일이나 또 학교에 놓고 온 완구나 악기, 레코드에 대해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나한테는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딸아이는 나중에 내가 며칠 안으로 학교에 가겠다는 약속을 하면 자진해서 기꺼이 학교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오랜 투쟁은 끝났습니다. 딸아이도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밤에도 나는, 만일 내가 내일 아침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딸아이는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되어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버는 돈의 대부분은 딸아이의 안전한 생활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아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살아 있건 없건 간에, 그 아이는 이 점에 있어서는 누구의 신세도 지지 않게 된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였으니까.

나처럼 이런 자녀의 장래에 안전을 해결할 수 있는 행운을 갖지 못한 부모가 세상에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내 딸아이와 같은 자녀를 데리고 나를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의논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돈이 없는 분도 있고, 또 자녀가 많아 재산을 자녀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어도 희망이 없는 아이에게 재산을 모두 줄 수는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물론 옳은 말입니다. 냉혹하게 말해서 모든 자녀에게 재산을 고루 나눠준다면 정상인 자녀 쪽이 희망이 없는 자녀보다 확실히 사회를 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나는 내 딸아이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중에서도 딸아이는 내게 인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누구나 어리석은 일이나 어물어물하는 것을 잠자코 보고만 있지 못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둔감한 사람을 싫어하는 우리 가족의 버릇을 고스란히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문을 알 수 없는 결함을 지닌 딸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대체 나는 전혀 딸아이의 죄가 아닌 그 결함을 경멸할 수 있을까요. 이런 아이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고 부당하다고까지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애정과 정의감에서 딸아이의 재능을 조금이라도 알려고 노력한 결과 내가 비운 것은, 상냥하고 조심스럽게 참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타고난 짜증이 폭발하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딸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도 헛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에서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이 아이의 영혼도 완전히 성장할 권리를 갖고 설사 조금밖에 자라지 못하더라도 그 권리는 누구의 권리와도 같을 것이며, 이 아이가 알 수 있는 것을 알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가장 비참한 길을 가는 동안에 나는 인간의 마음은 모두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갓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평등하며 누구나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준 것은 바로 내 딸아이였습니다. 나는 누구나 인간인 이상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누구나 이 세상에서 살 곳과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이것을 이해할 기회를 갖지 못했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자기보다 무능한 사람을 멸시하는 교만한 태도를 지속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딸아이는 지능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분명히 나에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 의사를 나에게 전하는 길은 그 밖에도 있었습니다. 딸아이의 성격에는 이상하리만큼 어떤 일관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거짓말을 분명히 아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이는 어떤 거짓말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딸아이는 어떤 위대한 순수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더러운 모든 관습을 그 아이는 결코 용납하지 않고, 존엄한 것에 대해서는 완전에 가까운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아이를 얕보지 못했으며, 또 그 아이 자신도 결코 잔인한 일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 아이와 같은 기숙사에 사는 다른 아이가 소리내어 울기라도 하면 딸아이는 어째서 그 아이가 울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아이가 그 아이를 때렸거나 혹은 보모가 너무 심하게 야단을 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딸아이는 큰소리로 사감(집 사, 감독할 감)을 부르면서 찾으러 갔습니다. 딸아이는 다른 아이를 구박하는 아이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딸아이는 부정한 일은 결코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성질이었습니다. 어느 날 딸아이를 돌봐주던 사람이 나에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따님은 참으로 공평하게 취급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주 귀찮게 굴어요."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지능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반드시 개성이 있으며, 지능의 발육이 더딘 아이들도 다른 좋은 소질에 의해 그 결함을 보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또 전문가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뉴저지주의 바인랜드에 있는 트레이닝 스쿨(The Training School)에서 지능 발육이 더딘 아이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는 심리학 전문가들은, 설사 어린이의 지능 검사 성적이 대단히 나쁘더라도 그 아이의 사교성이나 언동, 자랑, 친절, 남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는 마음가짐 등에 의해 그 아이는 검사에 나타난 결과보다 훨씬 훌륭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찰 결과 얻게 된 이 사실을 기초로 하여 그들은 사교성 성숙도율(Social Maturity Scale)을 발달시켜 훨씬 전에 프랑스에서 전해지고 미국에서도 채용된 비네율(Binet Scale)의 산출에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지능의 발육이 더딘 어린이의 경우에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도 통용됩니다. 대단히 높은 지성도 종래의 예에서 잘 아는 것처럼 만일 사교적으로 성숙한 소질이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때때로 사회에 해를 끼치기도 하며, 또 반대로 지능은 별로 우수하지 않은 아이가 사교적인 소질이 풍부하여 지성만 뛰어난 사람보다도 훌륭한 사회인이 되고, 또 개인적으로 큰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군대나 학교에서도 정상인의 소질을 측정하는 적응검사에 이 바인랜드의 사교성 성숙도율이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지성만으로는 인간으로서 불충분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 이 희망이 없는 아이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이 가르쳐 준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인간이 어떤 것을 익힐 수 있는가 하는 것도 가르쳐 줍니다. 지능의 발육이 더딘 아이들의 정신도, 다만 장애가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더디다는 점을 제외하면 정상인의 정신과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들도 여러번 되풀이하여 한 가지 일을 익히는, 정상적인 아이들이 사물을 익히는 그 과정을 지나게 됩니다. 심리학 전문가들은 지능의 발달이 더딘 아이들의 정신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마치 고속도 영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새로운 지식을 얻고 새로운 관습을 익혀나가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발육이 더딘 아이들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아이들의 교육법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딸아이를 자기 세계에 살게 한 후로, 나는 딸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 중진에 크게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벗어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것은 동시에 그 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면 위안을 찾을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됩니다.

내가 위로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부모들을 위해서입니다. 자녀를 데리고 나를 찾아와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묻는 분들의 일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거의 예외 없이 먼저 묻는 것은, "설사 이 아이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희생되더라도 주립 학교나 수용소에 넣기보다는 사립학교 쪽이 더 좋을까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대답은 이러합니다. 주립보다 일반적으로 좋은 사립 쪽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립의 경우는 그다지 혼잡하지 않고, 아이들은 각자 보살핌을 잘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주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주에 따라서는 시설도 좋고 직원의 대우도 좋으며 은급제도(은혜 은, 족할 급, 제도 제, 법도 도)도 있어 좋은 사람들이 오래 그곳에 머물러 일하는 곳도 있고, 또 주에 따라서는 시설이 떨어지는 곳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먼저 주위의 시설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의 재정이 허용하는 한 좋은 사립 시설은 여러 모로 편리하지만, 사립의 약점은 창립자가 죽은 후까지 계속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용의주도하게 훌륭히 창립된 학교 중에도, 그 교장이 죽었기 때문에 폐쇄되어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되풀이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맡길 학교를 물색할 때에는 한 사람에게 의존하여 운영하는 곳은 피하고, 도중에 폐쇄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관리위원회와 같은 것이 있고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갈 만한 자금이 있는 곳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주립은 영속적이며 자녀도 한번 들어가면 일생 안전하다는 점에서는 사립보다 유리합니다.

만일 사립 시설에 자녀를 맡기면 다른 가족들이 그 자녀 한 사람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 분들에 대해서는, 나는 설사 다른 주로 이사를 하더라도 좋은 주립 시설을 물색하여 그곳에 자녀는 맡길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자녀를 새집으로 보낸 후에 부모에게는 어떤 책임이 남게 될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책임이 따릅니다. 자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자주 자녀를 찾아봐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잊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딸아이를 찾아갈 적마다 아이들이 내 곁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우리 엄마는 어디 있어요?" 하고 묻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을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사감이 그 아이의 머리 위에서 속삭인 말은,

"가엾게도 이 아이의 가족은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아요. 2 년 전에 할머니가 한 번 다녀간 것이 마지막이었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엾은 아이의 마음은 서서히 타격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어린이며, 따라서 모든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애정이나 애착도 갖고 사랑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들 중에는 나한테 와서 눈을 반짝이면서, "아빠와 엄마가 지난 주에 만나러 왔어요." 하고 알려 주는 아이도 있고, 또 말을 할 수 없는 아이도 부모가 갖다 준 인형을 나에게 보여주러 왔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저마다 알고 있습니다. 정신은 이런 것을 느끼는 능력에도 큰 영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부모로서의 둘째 책임은 자녀를 직접 돌봐주는 사람을 언제나 주의깊게 살피는 것입니다. 전에 딸아이의 영원한 집을 찾을 때 나는 먼저 신뢰할 수 있는 교장부터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만일 내가 다시 한번 학교를 찾는다면 모든 기숙사를 돌아보고 어떤 사람들이 아이들을 돌보는지 먼저 알아볼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인상이 좋지 않는 직업적인 사람이거나, 또는 자주 옮겨다니는 사람이거나, 냉담하고 잔인하며 아이들을 때리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학교에 아이를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에 관한 한, 따라서 부모에게도 학교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관리자도 아니고 사무직원도 아니고 또 의사나 심리학 전문가나 선생도 아닌 직접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이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이기적인 보모는 선생이나 심리학 전문가들이 애써 이룬 일을 모두 망쳐 놓습니다. 자녀가 날마다 기숙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다면 어떤 것을 가르쳐도 그것을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보모는 애정을 가진 친절한 사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이 따르는 가운데 아이들에게 규율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 사람이 고등교육을 받고 못 받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하루하루의 임무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모에게 잔인한 면이 있거나 혹은 덜렁한 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모는 즉시 그것을 학교 책임자에게 알려야 할 것입니다.

몰래 뇌물을 주거나 돈을 쥐어 주면 보모의 버릇만 나빠집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보모들은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는 자녀에게 친절을 베풀겠지만, 일단 자녀와 단둘이 대하게 되면 으레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자녀도 심하게 다룰 것입니다. 보모는 당신들이 보지 않는 때가 훨씬 많습니다.

자녀를 학교에 맡긴 부모의 세번째 책임은, 자녀가 생활하고 있는 장소의 분위기가 희망에 차 있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학교가 업무의 하나로서 연구도 겸하고 있는 곳이 이 분위기에 관한 한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10 년을 하루같이 되풀이하고 있는 곳에서는 분위기가 침체되어 활기를 잃기 쉽습니다.

그저 아이들을 돌봐주고 위험에서 지켜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단순해도 아이들의 생명은 어떤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며, 또 뭔가 발견할 수 있는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설사 그 아이는 나을 수 없고 변할 수 없더라도, 또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남에서 가르침을 제공하여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완전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인랜드의 트레이닝 스쿨은 이런 의미에서 대단히 좋은 예입니다. 오랫동안 이 학교는 연구 부문의 일을 해 왔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학교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바네 검사를 실시했으며, 성숙도율(School Maturity Scale)은 이 학교에서 발달되었습니다. 태어날 때 방해를 받은 아이나 뇌수마비의 아이에 관한 이 학교의 연구는 유명하며, 또 어떻게 하면 지능이 더디 발달하는 것을 예방하고 고칠 수 있는가를 좀더 알기 위해 생애를 바친 사람들이 이 학교에서 전심전력을 쏟아 지능적 결함을 초월한 문제 전체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부모는 이런 자녀의 생명이 결코 헛되지 않고, 한정된 범위이기는 하지만 인류 전체에 대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에서와 마찬가지로 슬픔에서도, 건강에서와 마찬가지로 질병에서도, 장점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점에서도, 아마도 이 후자 쪽에서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충분히 채워진 상태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반대로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뻗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행복보다는 슬픔이, 건강보다는 질병이, 그리고 부유보다는 가난이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나에게 운명을 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몇 번이고 딸아이를 위해 건전하고 정상적인 운명을 원하고, 오늘날 한 사람의 부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나는 딸아이가 영원히 저능아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보통 사람이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결코 체념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체념하지 않을 것입니다. 체념은 어떤 정체된 죽은 것이며, 성과가 없는 것은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체념과는 반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딸아이에게 덮쳐 성장을 정지시킨 운명에 대해 반항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아무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내 신상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 슬픔이 어떤 것인지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딸아이의 모든 것을 바쳐서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로 당하는 고통을 예방할 수 있다면 그 연구에 힘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내가 자주 만나러 가는 딸아이의 학교에는 가엾은 한 소년이 있습니다. 그 아이의 정신은 일 곱 살쯤 되는 어린이 정도에 머물러 있으므로 나는 '꼬마 소년'이라고 부르는데, 실은 그 사람은 이미 40세에 가깝습니다. 어쩐지 어두운 얼굴을 하고 눈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큰 부자로 유명하지만 결코 아들을 만나러 오지 않습니다. 어떤 새로운 연구를 위해 누가 그의 아버지에게 기부금을 얻으러 갔더니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나는 한 푼도 낼 수 없어요. 내 돈은 정상인을 위해 쓸 거예요."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냉혹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는 피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라이드에 상처를 받는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은 백치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기의 일을, 즉 오랫동안 자기가 잃었던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강했더라면 자기 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을 기쁨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한 사람의 불행한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아버지만이 아니지만. 그의 아들은 소를 돌보기를 무척 좋아하는 미남 청년으로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목장 곳간에 기거하면서 소를 솔로 쓸어 주거나 어루만지면서 돌보고 있습니다. 한 번은 내가 그 목장에서 그 청년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아버지는

"이 아이는 소의 젖을 짜는 기계를 사용할 줄 알므로 좀더 나는 기술을 익힐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예요."

하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자리를 함께 한 딸아이의 학교의 교장이 그 말을 듣고

"그렇지만 이 청년에게는 이 이상으로 좋은 일은 없어요. 아시겠어요? 우리들 각자에게 가장 좋은 일은 우리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하면 우리는 자기도 사회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행복 아닐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런 정신박약아의 부모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오랫동안 직접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여러 가지 일을 계속 익혀 가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들의 자녀가 당신들이 희망한 대로 정상적이고 건전하게 태어나지 못하고 육체나 정신에 혹은 그 양쪽에 결함이나 장애를 갖고 태어났더라도, 그 자녀는 역시 당신들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설사 어떤 인생을 보내더라도 살 권리가 있고 또 행복해질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그 자녀의 행복은 당신들이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자녀를 받아들여,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호기심에 찬 눈초리에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그 자녀의 존재는 당신에게나 다른 아이들에게도 반드시 의의가 있습니다. 당신들은 지금은 알지 못해요. 그러나 자녀의 생존의 목적을 이루게 하면서 그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 반드시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얼굴을 들고 자기 길을 가십시오.

나는 같은 자녀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과거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완전히 자랄 수 없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 되풀이하여 그동안 절망을 경험하면서 어떤 희망이 씨앗을 바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나은 병도 있고 고치는 방법을 모르는 병에 대해서는 지금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병은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암이나 소아마비나 심장마비로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되며, 또 예방도 할 수 있도록 치료도 할 수 있다면, 지능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것을 먼저 하고 어느 것을 나중으로 돌리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싸움은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이들이 모두 건전하고 완전한 몸으로 태어날 권리를 갖도록 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장할 수 없는 어린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어린이의 수는 예방할 수 있는 원인을 모두 예방하여 해마다 줄어야 합니다. 사태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주립 수용소는 위험할 만큼 초만원이며, 만일 연구가 빨리 진척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시설을 좀더 확충해야 합니다. 기숙사의 수를 몇 갑절 늘려도 그 아이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경비는 국가의 재원에서 지출되어야 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게 하는 과학적인 연구에 돈을 쓰는 편이 얼마나 현명하고 또 보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지능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미국 어린이들의 절반 이상은 원인이 유전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 원인만 알게 되면 그 어린이들은 모두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현재 이런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는 곳에서 적절하게 돌봐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린이를 잘 보호하면 교육에 의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경우에도 주립 수용소의 시설에서는 그런 교육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느 주에서는 이런 시설의 높은 자리가 여전히 정치적인 매직(팔 매, 직분 직)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생명을 무지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립 쪽이 대체로 좋기는 하지만, 그 경비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많이 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같은 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사립 시설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주목할 만한 과학적인 진보가 거의가 사립 기관에서 개인적으로 일한 사람들이 연구 결과입니다. 국가의 재정은 군사적인 목적에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과학적인 성과는 별로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가장 긴급한 지능적 결함의 원인과 치료법의 연구는, 지금까지의 미국의 전통에 따라 어느 소규모의 사립 기관에서 일하는 과학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구는 중복하여 헛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락을 잘 취해야 합니다.

물론 이미 몇 가지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앞에서 뉴저지주의 바인랜드에 있는 트레이닝 스쿨의 조사부에서 올린 주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말했습니다. 현재 이미 지능적인 결함이 있는 미국 어린이의 50퍼센트 이상은 교육에 의해 사회를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현재 만원이 되어 있는 공립 수용소에서 어린이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교육뿐입니다. 이미 연구에 의해 지능 정도가 6세 가량 되는 어른도 할 수 있는 일일이 19종류에 이른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모든 일의 20퍼센트는 숙련공이 아닌 사람들의 손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미 뇌의 장애에 대해서는 생전과 생후를 막론하고 몇 가지는 원인이 판명되어 있지만, 단지 아직 이에 대한 지식이 불충분할 뿐입니다. 지능적인 결함의 주요한 원인이 되어 있는 뇌의 장애에 관한 간단한 물리적인 요법이 현재 이미 실시되고 있으나 아직 실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뇌의 혈액 순환이 나쁘기 때문에 지능적인 결함이 일어난다는, 중요한 뇌수마비의 분야에만 그 요법이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의 결과도 아직 신뢰하기엔 불충분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수술을 받은 환자의 34 퍼센트는 확실히 지능의 발육이 나아지고, 51 퍼센트는 주의력이나 근육을 충분히 움직이고, 주의력을 집중하고 있는 시간이나 식욕, 그 밖에 자극을 받는 감각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바람직한 결과 보고가 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언젠가 지능적 결함의 원인이나 치료법의 분야도 다른 질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규모의, 그리고 근본적인 연구가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희망이야말로 모든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발육이 정지된 자녀를 가진 분들은(이런 분들의 수는 가정을 살펴보면 상당히 많지만)현재 지능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어린이들의 절반 이상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새로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며, 또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분들은 반드시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 분들이, 이미 지능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자녀들의 절반 이상은 적절한 교육과 좋은 환경의 혜택만 있었더라면 불편한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대신에 정상인과 다름없는 생활과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노력해야 하며 또 노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위안을 줍니다. 전에 그랬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그래야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자녀의 일부는 어떤 방법을 강구해도 이미 때가 늦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아이들의 괴로운 처지가, 사람들이 비극의 대부분을 피하는 방법에 도움이 된다면, 그 아이들의 생명은 설사 기형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경험한 한 사람으로서 되풀이하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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