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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까레니나 5부

Bollnow 2025. 2. 13. 10:19

셰르바쯔까야 공작부인은 5주밖에 남지 않은 사순절 전에 혼례를 치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혼수품의 절반밖에 마련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순절 이후에는 너무 늦을 거라는 레빈의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셰르바쯔끼 공작의 연로한 고모가 병환이 매우 깊어 곧 돌아가실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장례 때문에 혼례가 더더욱 지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공작부인은 혼수품을 큰 것과 자잘한 것, 두 부류로 나누기로 하고 사순절 전에 혼례를 치르기로 동의하였다. 자잘한 혼수품은 모두 지금 당장 마련하고 큼직한 것은 나중에 보내기로 했는데, 레빈이 그러한 결정에 대해 가타부타 진지한 응답이 없어 그녀는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다. 사실 그러한 판단이 적절한 조처였던 것이, 혼례를 치른 직후 신혼부부는 곧장 시골로 갈 예정이었고, 거기서 큼직한 혼수품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넋이 나가 있던 레빈으로서는 자신과 자신의 행복이 모든 존재의 유일하고 중요한 목표였으니, 지금 자신은 그 어떤 것도 고민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를 위해 모든 일을 남들이 해주고 앞으로도 해줄 것만 같았다. 심지어 그는 미래의 삶을 위한 계획이나 목표도 전혀 세우지 않았다.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 여기고는, 그런 결정일랑 남들에게 내맡겨 버린 것이었다. 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와 스쩨반 아르까지치, 그리고 공작부인이 그가 해야 할 일에 관한 지침을 내려 주었고, 사람들의 권유에 그는 전적으로 따르기만 했다. 형은 그를 위해 돈을 빌렸고, 공작부인은 결혼식을 치른 뒤 모스끄바를 떠나라고 조언해 주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조언은 해외로 가라는 것이었다. 레빈은 그 제안들을 죄다 받아들였다. '그러는 게 여러분에게 즐겁다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나는 행복하며, 여러분이 뭘 하든 내 행복은 늘지도 줄지도 않을 테니까.'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외국으로 가라는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조언을 키티에게 전했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러한 권유에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생활과 관련하여 나름의 요구 사항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레빈이 시골에 애착을 느끼는 일이 있다는 걸 키티는 알고 있었다. 레빈이 보기에 그녀는 그 일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그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한 연유로 그녀는 그들이 살 집이 시골에 마련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며, 앞으로 살지도 않을 해외로 가느니 살 집이 있게 될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와 같은 그녀의 분명한 의사 표명에 레빈은 적이 놀랐다. 그러나 어찌하든 그는 상관없었기에 곧장 스쩨빤 아르게지치를 찾아가 마치 그게 그의 의무라도 되는 양, 시골로 가서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예의 다채로운 취향대로 장만해 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이보게.." 신혼부부의 입주를 위해 시골에 일체의 것을 정비해 놓고 돌아온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한번은 레빈에게 물었다. "자네 영성체를 받았다는 증명서는 갖고 있나?"

"아니. 그건 왜?"

"그게 없으면 결혼식을 올릴 수가 없단 말이야."

"!" 레빈이 소리쳤다. "난 이미 9년가량 성찬식에 참례하지 않았단 말일세. 그런 건 생각도 못 했네."

"잘났군그래!"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놓고 나보고 니힐리스트 라는 등 지껄이다니! 어쨌든 간에 그거 없이는 안 되네. 성찬식에 참석해야만 해."

"언제 그걸 한단 말인가? 이제 나흘밖에 안 남았는데."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그 일 또한 주선해 주어 레빈은 성찬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신을 믿지는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신앙은 존중하는 사람이 으레 그렇게 느끼듯이, 교회의 온갖 의식에 출석하고 참례하는 것은 레빈으로서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모든 것에 대해 민감해져 있고 순화되어 있는 지금 같은 정신 상태에서 신자인 척할 수밖에 없는 그 불가피한 상황은 단지 괴로움을 넘어 완전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지금, 이 영예와 절정의 상태에서, 거짓을 말하거나 신성을 모독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둘 중 어떤 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성찬식에 가지 않고 증명서를 받을 길이 없느냐고 스쩨빤 아르게지치에게 아무리 물어도 그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대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는가, 고작 이틀 아닌가? 그분은 아주 친절하고 영리한 노인이라네. 순식간에 자네의 앓던 이를 뽑아 줄걸세."

첫 아침 예배에 참석한 레빈은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무렵 체험했던 강렬한 종교적 신심을 젊은 날의 추억처럼 되살려 보고자 했으나, 곧바로 그건 전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공식적인 방문인 양 아무 의미 없는 공허한 관례로 간주하려 들었지만, 그것 또한 도저히 못 할 짓 같았다. 대다수의 동시대인들처럼 레빈은 종교에 대해 아주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게 옳지 않다고 확신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행하는 일의 중요성을 믿을 수는 없었으되, 마치 허례허식을 대하듯 무심하게 넘길 수도 없었다. 성찬식에 참례하는 내내 그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따라서 그의 내면의 음성이 일러 주듯이 무언가 거짓되고 불순한 것을 행하는 것 같아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예배 시간에 그는 때론 기도문을 들으며 거기에 자신의 세계관에 어긋나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를 썼으며, 때론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고 비난할 수밖에 없기에 기도문을 듣지 않으려 애썼다. 대신 자신만의 생각이나 관찰에 전념하거나, 교회에 서 있는 이 한가한 시간에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들에 몰입하곤 했다.

그는 아침 예배와 철야 예배, 저녁 기도에 끝까지 참례했고, 이튿날에 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차도 안 마친 채 아침 기도와 참회의 기도를 청하기 위해 8시에 교회로 왔다.

교회에는 거지 병사와 두 명의 노파, 그리고 하급 사제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얇고 긴 사제복 아래 양쪽으로 갈라진 기다란 등판 양쪽이 도드라져 보이는 젊은 부제가 그를 맞이해 주고는 곧바로 벽 옆에 놓인 작은 탁자로 가서 기도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기도문을 읽을수록, 특히 '자비를 베푸소, 자비를 베푸소'라는 것처럼 들리는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동일 어구가 재빠르게 반복될 때마다 레빈은 자신의 생각이 봉쇄되고 봉인되는 기분이었다. 그것을 건드리거나 뒤적거려서는 안 되며, 그러지 않을 경우 혼돈이 빚어질 것만 같았다. 따라서 그는 부제 뒤에 서서 귀를 기울이지도 곱씹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혼자만의 생각을 이어 갔다. '키티의 손은 참으로 수많은 표정을 지니고 있어.' 어제 둘이서 구석 자리의 탁자에 앉아 있던 것을 떠올리며 그가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그 시간이면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그녀는 한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였고, 그런 동작을 보며 제풀에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 손에 입을 맞추고서 분홍빛 손바닥의 손금을 살펴봤던 일을 레빈은 떠올렸다. '<자비 베푸소>로군.' 절을 하는 부제의 등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성호를 긋고 절을 하던 레빈이 생각했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서 손금을 살폈지. <손이 참 멋져요>라고 말했어.' 그는 자신의 손과 마디가 짧은 부제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이제 곧 끝나겠군……아니야, 다시 처음부터 하려나 봐.' 기도문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생각했다. '아니군, 막판이야. 저것 봐, 벌써 땅바닥에 절을 하잖아. 저건 항상 끝나기 직전에 하던 거야.'

벨벳 소맷부리에 감싸인 손으로 3루블짜리 지폐를 슬쩍 받아 쥔 부제가 기록해 두겠노라고 말하고는 텅 빈 교회의 바닥에 새 장화의 굽 소리를 씩씩하게 울리면서 제단 뒤편으로 갔다. 몇 분 뒤 그는 제단 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다보면 눈짓으로 레빈을 불렀다. 그때까지 막혀 있던 생각이 레빈의 머릿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황급히 그것을 떨쳐버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는 속으로 뇌까리고서 설교대 쪽으로 갔다. 층계 위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사제가 보였다. 반백의 성긴 턱수염에 피로한 기색이 어린 선량한 눈을 지닌 사제 영감이 제단 앞에 선 채 기도서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레빈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곧바로 습관적인 음성으로 기도문을 읽기 시작했다. 낭독을 마치고는 땅바닥을 향해 절을 하더니 레빈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보이지 않게 임하시어 당신의 고백을 듣고 계십니다." 그가 십자가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 사도들의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를 모두 믿으십니까?" 사제가 레빈에게서 눈을 돌리고서 견대 밑에 손을 넣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모든 것을 의심해 왔으며, 지금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레빈은 자기가 듣기에도 불쾌한 목소리로 뇌까린 다음 입을 다물었다.

사제는 그가 뭔가 더 얘기하지 않을까 싶어 몇 초간 기다리다가 눈을 감고서 <o> 발음에 강세를 주는 블라지미르 지역 사투리로 빠르게 말했다.

"의심은 인간 본연의 약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우리를 굳건하게 해주십사 기도해야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지은 죄가 있나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는 듯, 사제는 잠시도 틈을 두지 않았다.

"제가 지은 가장 큰 죄는 의심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대체로 의심에 잠긴 채 살고 있습니다."

"의심은 인간 본연의 약점이지요." 사제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어떤 것을 주로 의심하십니까?"

"모든 것을 의심합니다. 심지어는, 간혹 가다 하느님의 존재마저 의심하지요." 무심결에 대답한 레빈은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례함에 적이 놀랐다. 그러나 사제에게는 레빈의 말이 별다른 인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 같았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도대체 어떠한 의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재빠르게 말했다.

레빈은 대답이 없었다.

"창조주가 지으신 피조물을 보고 있으면서 그분에 대해 무슨 의심을 품으신단 말입니까?" 사제가 입에 밴 사투리로 재빠르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천체들로 천궁을 장식하신 분이 누구겠습니까? 누가 대지에 그 아름다움을 입히셨겠습니까? 창조주가 없다면 그게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그가 묻는 기색으로 레빈을 응시했다.

사제와 철학적인 토론을 벌이는 것은 무례한 짓 같았기에, 레빈은 답변으로 질문에 직접 관련되는 것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모른다고요? 그렇다면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사제가 의아스러워하면서도 쾌활하게 물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레빈이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말이 어리석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러지 않을 수도 없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청하십시오. 성스러운 교부(敎父)들조차 의심을 품었으며 하느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악마는 커다란 힘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악마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청하십시오. 그분께 기도하십시오." 그가 빠르게 되풀이했다.

그러고서 사제는 상념에 잠긴 듯이 잠시 침묵하였다.

"듣기로는 내 교구의 신도이자 참회자인 셰르바쯔끼 공작의 따님과 결혼하실 거라지요?" 그가 웃음 띤 얼굴로 덧붙였다. "훌륭한 아가씨죠."

", 그렇습니다." 레빈이 사제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고는 생각했다. "고해 성사 중에 왜 그걸 묻는 거지?"

그러자 마치 그의 생각에 응답하듯 사제가 말했다.

"결혼을 하실 테니, 하느님께서 아마도 후손을 상으로 내려 주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신으로 유혹하는 악마의 꼬임을 마음속에서 이겨 내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부드러운 어투로 질책하듯이 말을 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선량한 아버지로서 아이를 위해 단지 부와 호사, 명예만을 바라지는 않겠지요. 아이의 구원을 바라고, 진리의 빛으로 아이의 영혼이 깨어나기를 바라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순진무구한 아이가 '아빠,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드는 모든 것들, 땅과 물, 태양과 꽃, 풀들을 누가 만드셨나요?'라고 묻는다면 뭐라 답하시겠습니까? 아이에게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시렵니까? 주 하느님께서 크나큰 자비로움으로 당신에게 계시해 주셨는데, 당신이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혹은 당신 아이가 '저세상에서는 뭐가 나를 기다리고 있죠?'라고 물어볼 때, 아무것도 모른다면 뭐라 말하실 건가요? 아이에게 어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이를 세상과 악마의 유혹에 내맡기시겠습니까?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가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숙이고는 선량하고 온순한 눈빛으로 레빈을 바라보았다.

레빈은 이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제와 논쟁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누구도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그런 질문을 던질 때 뭐라 답할지,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당신은 인생의 절정기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사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은 견지해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당신을 도와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사 기도하십시오." 그가 말을 맺었다. "우리의 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하심과 인간에 대한 너그러우신 사랑으로 이 아들을 용서하시기를.." 죄 사함의 기도를 마친 사제는 레빈을 축복한 다음 보내 주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뒤 레빈은 거북스러운 상황이 끝났고, 특히 거짓말을 안 해도 되게끔 끝났다는 점에서 기쁨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그 선량하고 친절한 노인이 했던 말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어리석지 않았으며, 거기에는 규명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내포되어 있다는 인상 또한 어렴풋하게 남았다.

'물론 지금은 때가 아니야.' 레빈은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이해해야겠지.' 그는 불명료하고 어지러운 어떤 것이 자기 마음속에 존재함을, 종교에 관해서만큼은 자신 또한 남들에게서 똑똑히 봐오며 못마땅해했던 것과 똑같은 입장에 서 있음을 예전보다 지금 더 강하게 느꼈다. 그러한 입장을 이유로 그는 친구인 스비야시스끼를 비난하기도 한 터였다.

그날 저녁을 신부와 함께 돌리의 집에서 보내면서, 레빈은 유달리 쾌활한 모습이었다. 그가 스쩨빤 아르게지치에게 자신의 흥분된 상태에 대해 설명한 바에 의하면, 마치 테를 뛰어넘는 법을 배우던 개가 마침내 자신에게 요구되는 바를 깨닫고 완수한 다음 기쁨에 겨워 꼬리를 흔들며 마구 짖어 대면서 탁자나 창문으로 펄쩍펄쩍 뛸 때처럼 기분이 좋다는 것이었다.

 

결혼식 날 레빈은 관례대로(공작부인과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모든 관례를 이행해야 한다고 완고하게 고집하였다) 신부를 만나지 않고 자신의 호텔 방에 우연히 모이게 된 세 명의 독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와 현재 자연 과학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 동기 까따바소프(레빈은 거리에서 마주친 그를 자기 방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결혼식 들러리를 설 곰 사냥 동무인 모스끄바의 치안 판사 치리꼬프가 그들이었다. 식사 자리는 매우 흥겨웠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까따바소프의 독특한 화법에 재미를 느꼈다. 까따바소프는 자신의 독특함이 제대로 된 평가와 이해를 받고 있음을 감지하고는 거드름을 피웠다. 치리꼬프는 호인다운 쾌활함으로 모든 대화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정말이지.." 까따바소프가 강단에서 익힌 습관대로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리의 젊은 친구 꼰스딴친 드리뜨리치는 정말 재능이 넘쳤지요.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그는 학문을 사랑했고 인간적인 관심사도 갖고 있었어요.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친구가 지닌 능력의 절반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데 쓰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런 기만을 정당화하는 데 소모된답니다.

"당신처럼 단호한 결혼 반대자는 본 적이 없소이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반대자가 아닙니다. 저는 노동 분담의 지지자이지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을 생산해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계몽과 행복을 도모해야만 합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 직분을 뒤섞으려 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그런 축에 속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네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면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 레빈이 말했다. "부디 결혼식에 꼭 불러 주게."

"나는 이미 사랑에 빠졌다네."

"그래, 오징어하고 말이지. 형님도 아시잖아요." 레빈은 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하일 세묘니치는 책을 쓰고 있는데요, 뭐냐 하면 영양과.."

"제발, 얘기를 좀 뒤죽박죽으로 만들지 말게! 뭐에 대해 쓰건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건, 내가 정말로 오징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야."

"하지만 오징어는 자네가 아내를 사랑하는 걸 방해하지 않을 텐데."

"오징어는 방해하지 않겠지만, 아내 쪽에서 방해하겠지."

"아니, 어째서 그런가?"

"곧 알게 될 거야. 자네는 영지 경영이랑 사냥을 좋아하잖나. 그러니 어디 두고 봄세!"

"오늘 아르히쁘가 다녀갔는데, 쁘루드노에 사슴 떼가 있고 곰도 두 마리나 살고 있다더군." 치리꼬프가 말했다.

"그럼 나 없이 잡으러 가게나."

", 그래야지."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곰 사냥과는 미리 작별을 고하려무나. 아내가 보내주지 않을 테니!"

레빈이 씩 웃었다. 그를 놓아주지 않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니 영원히 곰을 보는 기쁨을 포기할 마음이 생길 만큼 흐믓했다.

"그래도 자네 없이 그 두 마리 곰을 잡을 생각을 하니 아쉽구먼. 일견에 바삘로보에서의 일을 기억하나? 이번 사냥도 정말 멋질 텐데 말이야."

레빈은 사냥 없이도 어딘가에 무언가 다른 좋은 게 있을 수 있다는 사실로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독신 생활을 청산하는 이런 풍습도 다 이유가 있지." 세르게이 이바니치가 말했다. "아무리 행복해진다 해도 자유는 아쉬운 법이니까."

", 인정하네. 내심 고골의 신랑처럼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은가?"

"분명 그런 마음이 있겠지만 인정하지 않겠지!" 까따바소프가 말하고는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 그럼 창문은 열려 있으니..지금 당장 뜨베리로 가세! 암곰이 한 마리 있어. 굴에 들어가 볼 수도 있고. 그래, 5시 열차를 타고 가자고! 여기 일은 알아서들 하겠지." 치리꼬프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늘에 맹세코……" 레빈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유가 아깝다는 느낌은 내 마음 속에서 찾을 수가 없는걸!"

"지금 자네의 마음속은 온통 뒤죽박죽이라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을 걸세." 까따바소프가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보게, 정신을 좀 차리면 금방 찾게 될테니!"

"아닐세, 나 자신의……감정과(레빈은 까따바소프가 있는 자리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행복 말고도 자유를 잃는다는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법도 하지만……그 반대로 나는 자유를 잃는 게 기쁘다네."

"글렀군! 가망 없는 위인 같으니!" 까따바소프가 말했다. ", 이 친구의 회복을 위해서 건배합니다. 아니면 이 친구의 망상 가운데 1백분의 1이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라자고요. 그러면 정말이지 지상에서 유례없는 엄청난 행복이 이루어지겠군요!"

식사가 끝나자 손님들은 결혼식에 늦지 않게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곧바로 떠났다.

홀로 남아 독신자들과 나눈 대화를 돌이켜 보던 레빈은 다시 한번 자문했다. 그들이 얘기했던 자유를 아쉬워하는 감정이 자신의 마음속에 정말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그는 씩 웃었다. '자유라고? 자유가 왜 필요한데? 행복은 오로지 그녀의 바람과 그녀의 생각대로 사랑하고 소망하고 생각하는 데 있을 뿐인걸. 그러니까 그 어떤 자유도 없는 거야. 바로 그게 행복이라고!'

'한데 난 그녀의 생각과 그녀의 소망, 그녀의 감정을 알고 있기나 한건가?' 문든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였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두려움과 의혹이, 모든 것에 대한 의혹이 그를 엄습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쩌지? 그녀가 단지 결혼이란 걸 하기 위해서 나에게 오는 거라면? 그런데도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그녀 스스로도 모른다면 어쩐다?' 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가 제정신을 차릴 수도 있어. 그러면 결혼하자마자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사랑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러자 그녀에 대해 너무도 기괴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년 전과 같이 브론스끼에 대한 질투심이 느껴졌고, 그녀가 그와 함께 있는 걸 보았던 그날 밤이 마치 어제인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야, 이래서는 안 돼.' 그가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그녀한테 가서 물어보고, 마지막으로 얘기하자. 우리는 자유로우니까 여기서 중단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그게 무엇이든 영원한 불행과 수모와 불신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그는 가슴속에 절망을 품은 채, 그리고 자기 자신과 그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 악의를 품고서는 호텔을 나와 그녀에게로 갔다.

아무도 그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내실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트렁크 위에 앉아 의자 등받이와 바닥에 널려 있는 한 무더기 다양한 빛깔의 드레스를 가려내면서 하녀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던 참이었다.

"어머나!" 레빈을 본 그녀가 만면에 희색을 띠고 소리쳤다. "자기가 어떻게, 당신 어쩐 일로 왔어요?(이 마지막 날까지 그녀는 그를 때론 정중한 호칭으로, 때론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곤 했다) 정말 뜻밖이에요! 처녀 적 입던 드레스를 정리하던 중이에요. 누구한테 어떤 걸 줄지 말이에요."

"! 그것 참 좋은 일이군요!" 레빈이 음울한 눈길로 하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가 있으렴, 두냐샤. 내가 다시 부를게." 키티가 말했다. "자기, 무슨 일이에요?" 하녀가 나가자마자 그녀가 분명하게 '자기'라고 부르며 물었다. 그의 흥분되고 어두운, 이상스러운 낯빛을 눈치챈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키티! 나는 괴로워요. 혼자서만 끙끙 앓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녀 앞에 선 채 애원하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절망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진실하고 정다운 얼굴을 보자 자신이 하려던 말 가운데 아무것도 꺼낼 수 없다는 걸 그는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쪽에서 그의 의심을 털어내 줄 필요가 있었다. "아직 때를 놓치지 않았다ㅏ는 말을 하려고 왔습니다. 이 모든 걸 다 없던 일로 하고 바로잡을 수 있단 말입니다."

"뭐라고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내가 수천 번 말해 온 것, 도무지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은…….내가 당신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당신이 나와 결혼할 생각을 하다니요.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실수한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어요..만일…….차라리 말해줘요." 그가 그녀를 외면한 채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겁니다. 다들 제멋대로 떠들라고 하죠. 뭐든 불행해지는 것보다 나으니까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지금이 더 낫습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취소하고 싶다..결혼할 필요가 없다는 건가요?"

"그래요,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정신이 나갔군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너무나 안쓰러웠기에, 그녀는 화를 참고서 의자에 걸쳐 놓았던 드레스를 치워 버리고는 레빈 가까이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뭔지 말해 봐요."

"당신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뭣 때문에 나를 사랑합니까?"

"맙소사, 어쩜 좋아?" 이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람!" 그가 소리치고는 키티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두 손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5분 뒤에 공작부인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은 완전히 화해한 상태였다. 키티는 자신의 사랑을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왜 사랑하느냐는 그의 질문에 대해 그 이유까지 설명해 주었다. 자신이 그의 전부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사랑을 해야만 하며, 그가 사랑하는 것은 전부 다 좋은 것들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그에게 너무나 확실한 이유로 여겨졌다. 공작부인이 방에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은 트렁크 위에 나란히 앉아 드레스를 정리하면서 입씨름을 벌이는 중이었다. 레빈이 청혼할 때 입고 있던 갈색 드레스를 키티는 두나샤에게 줄 생각이었는데, 그가 그 옷은 아무에게도 주면 안 되니 두냐샤에게는 하늘색 드레스를 주라고 우겼던 것이다.

"어쩜 그렇게 이해를 못 해요? 그 아이의 머리는 검단 말이에요.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요..내가 다 생각해 둔 건데."

레빈이 온 까닭을 알게 된 공작부인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화를 내고는, 곧 샤를이 올 테니 키티의 머리 손질을 방해하지 말고 가서 옷을 갈아입으라며 그를 호텔로 보냈다.

"얘가 요즘 아무것도 먹질 않아서 가뜩이나 보기 흉해졌는데, 자네가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얘를 더 못살게 굴고 있구먼." 공작부인이 그에게 말했다. "어서 가게, 어서 가, 이 사람아."

죄스럽고 무안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심한 레빈은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형과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그리고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이미 몸단장을 다 마치고서 성화(聖畵)로 그를 축복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신부와 함께 성화를 나르기로 되어 있는, 머리를 말고 포마드를 잔뜩 바른 아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집에도 들러야 했다. 그런 뒤에는 혼례식 들러리를 태우러 마차 한 대를 보내야 했고,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를 태우고 갈 또 한 대는 되돌려 보내야 했고..아주 복잡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벌써 630분이니 우물쭈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성화로 축복하는 일은 무사히 끝났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장엄한 자세로 아내와 함께 나란히 선 채 성화를 들고는 레빈에게 땅을 향해 절하라고 이른 뒤, 조롱기 어린 선량한 미소를 띤 얼굴로 축복해 주고서 세 번 입을 맞추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역시 똑같이 한 다음 떠나려고 허둥대다가 미리 정해 놓은 마차의 동선을 또다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 이렇게 합시다. 당신은 우리 마차를 타고 아이를 데리러 가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선심을 베푸셔서 먼저 출발하신 후 도착하시거든 마차를 돌려보내 주시지요."

"물로이지, 기꺼이 그렇게 함세."

"나는 이 친구와 곧 가지요. 짐은 보냈나?"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레빈을 향해 물었다.

"보냈네." 레빈은 대답한 뒤 꾸지마에게 갈아입을 옷을 달라고 일렀다.

 

떼 지어 모여든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결혼식을 위해 불을 밝혀 놓은 교회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미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창가에 무리를 이루어 창살 사이로 들여다보고 서로 밀치며 갑론을박을 해댔다.

이미 스무 대도 넘는 마차들이 헌병들의 지휘하에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경찰관은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제복을 빛내며 출입구를 지켰다. 또 다른 마차들이 쉴 새 없이 당도했으며, 꽃단장을 한 부인들은 치맛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리면서, 남자들은 군모나 검은색 중절모를 벗으면서 교회로 들어섰다. 교회 안에는 벌써 양쪽 샹들리에의 불이 밝혀져 있었고, 구것에 놓인 성화 곁의 촛불들도 죄다 켜져 있었다. 성화 벽의 붉은 배경 위로 퍼져 가는 금빛 광휘, 성화 테두리의 금빛 세공, 성상 앞은 큰 촛대와 작은 촛대들의 은빛, 바닥의 마루판, 양탄자, 성가대 위에 걸린 성화 깃발, 설교대의 계단, 오래되어 시커메진 서적들, 사제의 평상복과 미사복, 이 모든 것들이 빛에 휩싸여 있었다. 온기가 감도는 교회의 우측에서는 연미복과 흰 넥타이, 제복과 비단, 벨벳, 공단, 머리카락, , 드러난 어깨오 팔, 긴 장갑 등으로 어우러진 군중 사이로 점잖으면서도 생기 넘치는 이야기 소리가 오가며 둥근 천장에 미묘한 메아리를 퍼뜨렸다. 삐걱거리며 문 열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사람들 사이의 말소리는 잦아들었고, 모두가 신랑과 신부의 입장을 기대하면 뒤를 돌아보곤 했다. 그러나 이미 열 번도 넘게 문이 열렸건만, 그때마다 들어서는 건 늦게 도착한 남자 하객이나 오른편의 초청객 무리에 합류하는 여자 하객, 혹은 경찰관을 속이거나 그의 동정심을 사서 왼편의 연고 없는 사람들 무리에 합류하는 구경꾼이었다. 친척들도 일반 하객들도 이미 기다릴 만큼 기다린 참이었다.

처음에는 이제 곧 신랑 신부가 오겠거니 생각할 뿐 식이 지체되는 데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던 사람들도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문 쪽을 흘깃거리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더 지나자, 친척들도 하객들도 모두 내심 안짢아져 애써 신랑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네들 대화에만 열중했다.

부제장(副祭長)은 자신의 시간이 귀중하다는 점을 상기시키려는 듯, 창문의 유리가 떨릴 만치 초조하게 헛기침을 해댔다. 성가대석에서는 지루해진 성가대원들이 목소리를 가다듬거나 코를 푸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사제는 집사나 부제를 쉴 새 없이 내보내 신랑이 왔는지 알아보도록 했으며, 그 자신 또한 신랑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리띠에 수를 놓은 보랏빛 예복 차림으로 자꾸만 옆문으로 나가 보는 것이었다. 마침내 부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한데!"라고 말하자 하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불안해하며 큰 소리로 놀라움과 불만의 소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들러리 한 명이 어찌 된 사정인지 알아보려 마차를 타고 갔다. 한편 키티는 이미 오래전에 채비를 다 마치고서 흰색 드레스와 긴 면사포, 등자나무 꽃 화환을 쓴 채 혼례식 대모인 친언니 리보바 부인과 함께 셰르바쯔끼 일가 저택의 홀에 서서는, 신랑이 교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자기 쪽 들러리가 전해 오기를 벌써 반 시간이 넘도록 헛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 레빈은 조끼도 연미복도 없이 바지만 달랑 입은 차림으로 호텔 방 안에서 앞뒤로 서성이며 방문 사이로 수도 없이 고개를 내밀고는 복도를 살피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도통 나타나질 않았으며, 그러면 그는 낙담한 채 되돌아와 두 손을 내저으며 차분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 스쩨빤 아르게지치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그가 말했다.

"그래 어처구니없긴 해."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기분을 달래주는 미소와 함께 맞장구를 첬다. "진정하게, 곧 가져올 테니."

"됐네, 어림도 없지!" 레빈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앞이 훤히 트인 이 거지 같은 조끼는 또 뭐람! 기가 막혀서!" 그는 자신의 꾸깃꾸깃한 루바시까 앞자락을 쳐다보았다. "짐을 벌써 기차역에 보냈으면 어쩌지?" 그가 절망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면 내 걸 입게."

"진즉에 그랬어야 했어."

"그래도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건 좋지 않잖나..가만 좀 있어 보게! '다 잘 수습될 테니.'"

문제가 생긴 것은 다름이 아니라 레빈이 자신의 늙은 시종 꾸지마에게 갈아입을 옷을 달라고 하고, 그가 연미복과 조끼와 그 밖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대령했을 때였다.

"그런데 루바시까는?" 레빈이 소리쳤다.

"루바시까는 지금 입고 계시잖습니까." 태연자약한 미소를 지으며 꾸지마가 대답했다.

모든 짐을 꾸려서 그날 저녁 신혼부부가 출발할 곳, 즉 셰르바쯔끼 댁으로 날라 놓으라는 명을 받았을 때, 세탁된 새 루바시까를 남겨 둘 생각을 꾸지마는 미처 하지 못했다. 그래 연미복 상하의를 제외한 모든 짐을 챙겨서 지시한 대로 처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침에 입었던 레빈의 루바시까는 구김이 심한 터라 앞이 트인 조끼 스타일과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사람을 보내기에는 셰르바쯔끼가가 너무 멀어 하는 수 없이 루바시까를 사 오게 했는데, 하인이 다녀와서 말하기를 일요일이라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는 것이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 집으로 사람을 보내 루바시까를 가져오게 했지만 그 루바시까는 품이 넓고 기장이 짧아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셰르바쯔끼가로 가서 짐을 풀도록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교회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신랑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방 안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키티에게 지껄였던 말과 그녀가 지금 하고 있을 생각을 떠올리며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복도를 내다보곤 했다.

마침내 실수를 저지른 꾸지마가 루바시까를 들고서 숨을 헐떡이며 방안으로 쏜살같이 들어왔다.

"가까스로 맞닥뜨렸습니다. 벌써 짐마차에 올리고 있지 뭡니까?"

3분 뒤에 레빈은 아픈 곳을 자극하지 않게 시계도 보지 않은 채 복도를 내달렸다.

"그런다고 나아질 거 없네." 미소를 지은 채 여유 있는 속보로 그의 뒤를 따르며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말했다. "자네에게 내가 이르노니, '다 잘 수습될 걸세, 수습될 거라고.'"

 

"왔어요!", "저기 왔군요!", "누구 말이에요?", "저 젊어 보이는 사람인가요?", "에구머니, 신부는 거의 초주검이에요!" 레빈이 현관에서 마주친 신부와 함께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아내에게 지체된 까닭을 이야기하자 하객들은 웃으면서 자기네들끼리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레빈은 아무것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자신의 신부만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요 며칠 새 그녀가 보기 흉해졌으며 화환을 쓴 모습이 평소만큼 예쁘지 않다고들 말했지만, 레빈은 그런 점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긴 면사포와 흰 꽃이 달린 그녀의 높이 솟은 머리채를, 그 긴 목을 옆으로는 특별히 청아하게 가려 주고 앞쪽으로는 드러내 주는 높다랗게 주름 잡힌 옷깃을,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뻐 보였는데, 이는 꽃이라든가 면사포라든가 파리에서 주문해 온 드레스가 미모에 뭔가를 더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위적인 화려한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과 시선, 그 입술의 표정이 여전히 똑같은, 그녀만의 순진무구한 진실함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도망치려는 줄로만 알았어요." 키티는 이렇게 말하고 살포시 웃었다.

"정말이지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지 뭡니까. 말하기조차 창피해요!" 그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자기 곁으로 다가온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로 눈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 루바시까 사건은 참으로 대단하더구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 사람들은 형에게 뭐라 말했는지도 모른채 레빈은 그저 그렇게 대꾸했다.

", 꼬스짜,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하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짐짓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문제야. 지금이야말로 자네는 이 문제의 중차대함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걸세. 사람들이 나한테 쓰던 초를 켤 건지, 아니면 새 초를 켤 건지 물어보지 뭔가. 둘의 차이는 10루블이라네." 그가 입술을 모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덧붙였다. "나는 결정을 내렸는데, 자네가 동의하지 않을까 봐서."

그 말이 농담임을 알았지만, 레빈은 웃을 수가 없었다.

", 어찌할 건가? 태우다 만 것이냐, 새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알겠네, 알겠어! 새것으로 하겠네."

"좋았어. 문제가 해결되었구먼!"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웃고는,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레빈이 신부에게로 다가서자 치리꼬프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아주 아둔해지기 마련이거든."

"키티, 명심해, 네가 먼저 주단을 밟는 거야."[혼인 서약을 마친 뒤 교회 중앙의 제단 앞에 부부가 서게 될 주단이 깔리는데, 속설에 따르면 신랑과 신부 중에서 그 주단을 먼저 밟는 쪽이 결혼 생활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고 한다.]

노드스톤 백작 부인이 다가와 언질을 주고는 레빈을 향해 말했다. "멋져요!"

"그래 어때, 겁나지 않아?" 연로한 숙모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가 물었다.

"너 좀 추운 거 아니야? 얼굴이 창백해. 잠깐만, 고개 좀 숙여봐!" 키티의 큰언니 리보바 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통통한 두 팔을 둥글게 모아 동생의 머리 위에 얹힌 꽃을 바로잡아 주었다.

다가와 무언가 말하려던 돌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키티는 레빈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들을 하나같이 넋 나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건네는 모든 말에, 지금 그녀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복의 미소로만 답할 수 있었다.

그사이 하급 성직자들은 법복으로 갈아입었고, 사제는 부제를 대동하고서 교회의 현관 계단 앞에 세워진 제단으로 다가갔다. 사제가 뭔가를 말하고서 레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레빈은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신부의 손을 잡고 인도하세요." 들러리가 레빈에게 일러 주었다.

레빈은 자기더러 뭘 하라는 건지 한참 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도 한참이나 그의 동작을 바로 잡아 주다가 급기야는 그냥 포기할 태세였다. 그가 계속해서 엉뚱한 쪽 손을 내밀거나, 아니면 신부의 엉뚱한 손을 잡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위치를 바꾸지 않은 채 오른손으로 그녀의 오른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격식에 맞게 신부의 손을 잡자, 사제가 그들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와 제단 앞에 멈춰 섰다. 친척들과 친지들이 웅성대고 옷자락을 사각거리면서 그들 뒤로 다가갔다. 누군가 몸을 숙여 신부의 치맛자락을 매만져 주었다. 교회 안은 촛농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법관을 쓴 사제가 은빛으로 빛나는 두 갈래의 백발 머리채를 양쪽 귀 뒤로 넘긴 채, 등 위에 금빛 십자가가 달린 묵직한 예복 자락 밖으로 조그맣고 늙수그레한 손을 꺼내어 제단 앞에서 뭔지 모를 책을 뒤적거렸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이더니 레빈에게 눈짓을 하고는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사제는 꽃으로 장식된 두 자루의 초에 불을 붙인 뒤 왼손으로 비스듬히 쥐어 촛농이 천천히 떨어지게 하고는 신랑 신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빈의 고해 성사를 집전한 바로 그 사제였다. 그는 피로와 우수에 젖은 눈길로 신랑과 신부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다음 예복 자락 밑에서 오른손을 내밀어 신랑을 축복하고는 똑같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부드러운 자세로 고개를 조아린 키티의 머리 위에 오므린 손가락을 얹었다. 그러고서 마침내 그는 두 사람에게 초를 건네고는 향로를 든 채 그들에게서 천천히 물러났다.

'이게 정말 생시일까?' 신부를 돌아보며 레빈이 생각했다. 그녀의 옆얼굴이 약간 위로부터 내려다보였다. 보일락 말락 한 입술과 속눈썹의 움직임으로 보아 자신의 시선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높다란 옷깃이 자그마한 분홍빛 귀를 향해 살짝 들썩였다. 그녀의 가슴에서 숨이 멎고, 긴 장갑을 낀 채 초를 쥐고 있는 조그만 손이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그는 보았다.

루바시까 소동과 지각, 친지들과의 대화, 그들의 불만과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처지,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지고 기쁨과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은빛 미사복을 입고 둥글게 만 고수머리를 양쪽으로 빗어 넘긴, 키가 크고 잘생긴 부제장이 씩씩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오더니 익숙한 몸짓으로 두 손가락 위에 걸친 성대(聖帶)를 살짝 들어 올리고는 사제 맞은편에 멈춰 섰다.

"주여, 축복 하--!" 장엄한 음성이 공중에 파동을 일으키며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언제나, 지금도, 이후로도, 영원히 찬양받으시는도다." 사제 영감이 여전히 제단 위에 놓인 무언가를 뒤적이며 검허하게 노래하듯 응수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성가대의 충만한 화음이 창문에서 천장까지 교회 전체를 가득 메우며 가지런하고 드넓게 퍼지면서 점점 높아지고 커지다가 한순간 멎은 뒤 아득히 잦아들었다.

언제나처럼 모두가 하늘나라와 구원, 종무원과 황제를 위한 기도를 올렸고, 오늘 결혼하는 하느님의 종 꼰스딴찐과 예까쩨리나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 하느님, 이들에게 더욱더 완전하고 더욱더 평화로운 사랑과 도움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께 기도하나이다." 마치 교회 전체가 부제장의 음성으로 호흡하는 것만 같았다.

기도 소리를 경청하던 레빈은 그 말에 적이 놀랐다. '도움이, 다른 것도 아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불과 얼마 전에 느꼈던 두려움과 의심을 떠올리며 그가 생각했다. '내가 뭘 알겠어? 이 두려운 일을 겪으며 도움 없이 내가 뭘 할 수 있겠냐고! 지금 나에게는 다름 아닌 도움이 필요해.'

부제가 호칭 기도를 마치자 사제는 기도서를 들고서 혼인을 갓 서약한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따로 떨어진 자들을 하나로 모아 주시며......."

그가 부드럽고도 낭랑한 음성으로 기도문을 읽었다.

"이들에게 굳건한 사랑의 결합을 예정하신 영원한 하느님, 이삭과 리브가를 축복하시고 그들의 후손들에게 당신의 서약을 증명해 주신 주님, 주님의 종 꼰스딴찐과 예까쩨리나를 축복해 주시옵고, 모든 일에서 이들을 선의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자비로우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 하느님께 영광있도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지금도, 이후로도, 영원히 임하시옵기를 기원하나이다."

"아멘." 그리고 또다시 보이지 않는 합창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따로 떨어진 자들을 하나로 모아 주시며, 굳건한 사랑의 결합을 예정하신.......이 얼마나 심오하며, 이 순간의 느낌과 얼마나 기막히게 어울리는 말인가!' 레빈은 생각했다. '그녀도 내가 느끼는 걸 똑같이 느끼고 있을까?'

그 순간 옆을 돌아본 그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눈에 담긴 표정을 본 그는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예배와 기도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으며, 결혼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말들을 경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저차 더 강력해져 가는 단 하나의 감정 때문이었다. 이미 한 달 반가량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일, 최근 여섯 주 동안 지속적으로 기쁨과 고통을 번갈아 안겨 주었던 바로 그 일이 마침내 온전하게 완성되었다는 기쁨의 감정이었다. 아르바뜨 거리에 있는 저택의 홀에서 갈색 드레스 차림으로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몸과 마음을 모두 내맡겼던 그 날,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지나간 모든 삶과의 완전한 결별이 이루어졌고, 완전히 다르고 전적으로 새로운 미지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과거의 삶이 지속되고 있었으니, 그 여섯 주는 그녀에게 가장 행복하고도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녀의 모든 생활, 모든 욕망과 소망이 그녀로서는 아직 다 이해할 수 없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으며, 사람 자체보다도 더 이해할 수 없는, 때론 밀착시켜 주고 때론 소원하게 만드는 감정이 그녀를 그 사람과 묶어 놓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예전과 같은 삶의 조건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예전의 방식대로 생활하던 중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한 무관심을 전혀 극복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 경악하였다. 그것은 물건들, 습관들, 그녀를 사랑해 줬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 자신의 무관심 때문에 마음 상한 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에는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했던 사랑스럽고 다정한 아버지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그러한 무관심에 그녀는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그렇게 무심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바로 그 사람과의 삶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바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삶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으며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그려 볼 수조차 없었기에 오직 하나의 기대, 새로운 것,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기쁨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기대와 미지의 세계도, 과거의 삶과 결별하는 것에 대한 회오도 이제 이렇게 다 끝이 나고, 마침내 새로운 것이 시작될 참이었다. 이 또한 미지의 것이므로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렵거나 말거나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진 것이 지금 이렇게 성화(聖化)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제단으로 돌아온 사제는 키티의 조그만 손에서 반지를 간신히 빼낸 다음 레빈의 손을 청하여 그의 손가락 첫 마디에 끼워 주었다. "하느님의 종 꼰스딴찐과 하느님의 종 예까쩨리나가 혼인을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안쓰러울 정도로 가녀린 키티의 조그만 분홍빛 손가락에 커다란 반지를 끼워 주고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신랑 신부는 몇 차례나 뭘 해야 하는지 어림짐작해 보았으나 매번 어긋났고, 그러면 사제가 귀엣말로 바로잡아 주곤 했다. 마침내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사제는 두 사람에게 반지로 성호를 그어 준 다음 다시 키티에게는 큰 반지를, 레빈에게는 작은 반지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또다시 혼동한 두 사람은 자기 손에서 상대방의 손으로 두 번이나 반지를 다시 건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돌리와 치리꼬프,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잘못을 바로잡아 주려고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주변에 소요가 일고 소곤거리는 소리와 웃음이 번져갔지만, 신랑 신부의 얼굴에 드리운 엄숙하고 감동에 찬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손이 뒤엉키면서 그들은 더욱 심각하고 엄숙하게 서로를 바라보았으며, 그 때문에 이제는 각자 자신의 반지를 끼라고 속삭이며 웃음 짓던 스쩨빤 아르게지치마저 무심결에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여하한 웃음이라도 그 두사람에게는 모욕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던 터였다.

"태초에 당신께서 남자를 지으시고 뒤이어 여자를 지으셨으니....." 반지 교한에 이어 사제가 낭독을 시작했다. "당신의 뜻에 따라 서로 돕고 인류의 자손이 번창하도록 아내가 남편과 결합하옵니다. 진리의 유산을 내려보내 주시며, 당신의 종인 우리의 아버지들, 당신의 선택받은 민족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성약을 내려 주시는 우리 주 하느님, 당신의 종 꼰스딴찐과 당신의 종 예까쩨리나를 굽어살펴 주시옵고, 저들이 결혼과 신앙 속에서, 일치된 생각과 진리와 사랑 속에서 굳건해질 수 있도록 해주소서......"

레빈은 결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삶을 어떻게 꾸려 갈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공상이 전부 어린애 장난 같은 것이었음을,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그 무엇이며, 눈앞에서 지금 막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임을 점점 절실하게 느꼈다. 그의 가슴에서 전율의 파동이 갈수록 높게 일었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두 눈에 솟구쳤다.

 

교회에는 모스끄바에 있는 친척과 지인들이 모조리 모여 있었다. 결혼식이 거행되는 동안 불빛 찬란한 교회 안에는 성장(盛裝)을 한 부인들과 아가씨들, 흰 넥타이에 연미복과 제복 차림의 남자들이 끼리끼리 모인 곳마다 점잖고 조용한 이야기 소리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야기는 주로 남자들이 꺼냈고, 여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감동시키는 성스러운 예배 의식의 온갖 세세한 면들을 관찰하는 데 매료되어 있었다.

신부와 가장 가까운 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는 그녀의 두 언니, 돌리와 외국에서 온 차분한 성격의 미녀 리보바 부인이 있었다.

"저기 저 보라색 옷을 입고 있는 마리는 뭐죠? 결혼식인데 꼭 검은색처럼 보이잖아요?" 꼬르순스까야 부인이 말했다.

"얼굴색이랑 어울리려면 그러는 수밖에요." 뜨루베쯔까야 부인이 대꾸했다. "저녁때 결혼식을 올리는 게 좀 황당하네요. 상인들이나 하는……"

"더 아름다운걸요. 저도 저녁때 결혼식을 올렸어요." 꼬르슨스까야 부인이 대꾸했다. 그녀는 결혼식 날 무척이나 예뻤던 자기 자신과 우스울 정도로 자신에게 흠뻑 빠져 있던 남편, 그리고 모든 게 달라진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열 번 넘게 들러리를 서는 사람은 장가를 못 간다더군요. 보험에 드는 셈 치고 열 번째를 채우려 했지만, 자리가 꽉 찼지 뭡니까." 시냐빈 백작이 그를 이성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아리따운 차르스까야 공작 영애에게 말했다.

차르스까야는 그에게 미소로만 대꾸했다. 키티를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키티와 같은 입장에서 시냐빈 백작과 나란히 서게 될지, 그리고 그때 자신이 백작에게 지금 그가 한 농담을 어떤 식으로 상기시켜 줄지를 생각하고 잇었다.

셰르바쯔끼는 연로한 궁녀 니꼴라예브나에게 키티가 행복해지도록 그녀의 장식용 가발 위에 왕관을 얹어 줄 작정이라고 말했다.

"가발까지 쓸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죠." 오래전부터 자신이 점찍어 둔 홀아비랑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식은 아주 간소하게 치르리라 마음먹고 있던 니꼴라예브나가 대답했다. "나는 그런 호화로운 장식이 싫더라고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다리야 드미뜨리예브나에게 농담을 건네면서 결혼식 후에 여행을 떠나는 관습이 널리 퍼진 이유는, 신혼부부라면 어느 정도는 부끄러움을 타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동생분은 자랑스러울 거예요. 신부가 저토록 아름다우니까요. 제 생각엔, 형님도 동생분을 부러워하실 것 같은데요?"

"그건 저도 이미 다 겪었습니다. 다리야 드미뜨리예브나." 그가 이렇게 대답한 뒤 예상 외로 우수에 젖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처형에게 이혼에 관한 말장난을 건네고 있었다.

"화관을 바로잡아 줘야겠어요." 그녀가 그의 말은 듣지도 않고 대꾸했다.

"키티 모습이 저렇게 상하다니, 너무나 안됐어요." 노드스톤 백작 부인이 리보바 부인에게 말했다. "그래도 신랑이 키티의 발끝도 못 쫓아오는군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요, 저는 신랑이 아주 맘에 들어요. 저의 beau-frere(제부)가 될 사람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리보바 부인이 대꾸했다. "얼마나 처신을 잘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처신하기란 힘들거든요. 우습게 보이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저 사람은 ㅇ스워 보이지도 않고, 경직되지도 않았어요. 보아하니, 감동받은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당신은 이렇게 되기를 바랐던 건가요?"

"그런 셈이죠. 키티는 항상 저 사람을 사랑했으니까요."

"글쎄요, 둘 중 누가 먼저 양탄자를 밟는지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 내가 키티에게 일러 줬거든요."

"상관없어요." 리보바 부인이 대답했다. "우리는 하나같이 양순한 아내들이랍니다. 집안 내력이죠."

"나는 바실리랑 결혼할 때 작정하고 앞장섰어요. 당신은 어땠어요, 돌리?"

돌리는 그들 곁에 선 채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잇었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감격에 겨웠던 것이다.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던 그녀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키티와 레빈으로 인해 기뻤다. 자신의 결혼식에 대한 기억을 돌이켜 보면서 환하게 빛나는 스쩨빤 아르게지치를 바라보았고, 현재의 모든 것을 잊은 채 순진무구했던 첫사랑만을 추억했다. 그녀는 또한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가깝고 친분이 있는 모든 여자들의 과거까지 회상했다. 그들 인생에서 유일하고 엄숙했던 순간을, 그들이 키티와 똑같이 사랑과 소망과 두려움을 품은 채 관을 쓰고서 과거와 결별하고 비밀스러운 미래로 들어서던 때를 떠올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 모든 신부들 중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안나의 이혼에 관한 자세한 얘기를 들은 터였다. 그녀 역시 순결한 신부로서 등자나무 화관과 면사포를 쓰고서 서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너무나 이상한 일이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예배 의식을 속속들이 지켜보는 것은 언니들과 친구들, 친척들뿐만이 아니었다. 낯선 여인들, 구경하러 온 여자들도 숨을 죽이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랑과 신부의 동작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칠세라 면밀히 살피는 한편, 우스갯소리나 별 관련 없는 언급을 일삼는 무심한 남자들의 얘기에는 언짢아하며 대꾸도 하지 않았고 대개는 듣지도 않았다.

"왜 저렇게 울었대요? 혹시 억지로 시집가는 거 아냐?"

"저런 멋진 신랑한테 억지로 시집을 가다니? 공작이라나, 뭐 그렇다던데요?"

"저기 흰 공단 옷을 입은 여자가 신부의 언니죠? 저 소리 좀 들어 봐요. 부제가 '남편을 두려워하라'라고 고함을 치네요."

"추도프스끼 합창단인가?"

"아뇨, 종무원 소속이에요."

"내가 하인한테 물어봤거든요. 영지에 있는 자기네 집으로 데리고 간대요. 엄청난 부자라네요. 그래서 시집보내는 거겠죠."

"아닐 거예요,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인걸요."

"마리야 블라시예브나, 크리놀린을 다들 옆으로 입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저기 저 암갈색 옷을 입은 여자 좀 보세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대사 부인이래요. 어떻게 입고 있는지 좀 보시라고요..역시 또 저렇게 입었잖아요."

"신부가 어쩜 저리도 고울까. 꽃단장을 한 새끼 양 같아요!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자매님이 아깝네요."

용케 교회 문을 통과한 여자 구경꾼들 사이에서는 이런 얘기들이 오갔다.

 

혼인 서약식이 끝나자 교회의 심부름꾼이 회당 중앙에 놓인 제단 앞에 분홍빛 주단을 깔고, 성가대는 능숙한 솜씨로 베이스와 테너 파트가 서로 화답하는 오묘하고 복잡한 시편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제가 돌아서서 신랑과 신부에게 바닥에 깔린 분홍빛 주단을 가리켰다. 먼저 양탄자를 밟는 쪽이 가정을 주도하게 된다는 속설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수없이 들어 왔지만, 그 몇 발자국을 떼는 동안 레빈도 키티도 그 이야기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신랑이 먼저 밟았다는 둥, 둘이 같이 밟았다는 둥, 사람들이 벌이는 요란한 입씨름에도 그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혼을 원하느냐,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약속하지는 않았느냐는 관례적인 질문과 그들 자신에게도 이상하게 울리는 대답이 오간 뒤 새로운 의식이 시작되었다. 키티는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의미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의식이 진행되어 갈수록 숭엄함과 해맑은 환희의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점점 더 충만하게 채움으로써 주의력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저들에게 순결과 배 속의 태아를 베풀어 주시옵고, 저들이 아들과 딸을 보고 기뻐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낭독되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고, "그러니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니, 이는 참으로 신비롭도다"라는 말에 이어 하느님께서 이삭과 리브가, 요셉, 모세와 십보라에게 하셨듯이 이 부부에게 다산과 축복을 내려 주시고, 저들이 아들의 아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이 이어졌다. '모든 게 훌륭하구나.' 기도 소리를 들으며 키티가 생각했다. '모든 게 틀림없이 그대로 될 거야.' 그 해맑은 얼굴에서 환하게 빛나는 기쁨의 미소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무심결에 전해졌다.

"왕관을 씌우세요!" 사제가 그들의 머리 위에 왕관을 올리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셰르바쯔끼는 키티의 머리 위에 왕관을 높이 든 채, 세 개의 단추가 달린 장갑을 낀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씌워 주세요!" 키티도 웃으면서 속삭였다.

키티를 돌아본 레빈은 그녀의 얼굴에 퍼진 환한 기쁨의 표정을 보고 놀랐다. 그러한 감정은 부지불식간에 그에게 옮아갔고, 그 역시 키티처럼 밝고 명랑해졌다.

<사도행전>을 낭독하는 소리도, 낯선 구경꾼들이 조급증을 내며 기다리던 마지막 구절을 낭독하는 부제장의 우렁찬 목소리도 그들은 즐겁게 들었다. 넓적한 잔에 따른 따뜻한 적포도주를 물과 함께 마시는 것도 즐거웠고, 찬송가 <이사야여, 기뻐하라>를 선창하는 베이스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제가 제의 자락을 젖히고는 그들의 손을 맞잡아 이끌며 제단 주변을 돌 때는 한층 더 즐거웠다. 왕관을 들고 가던 셰르바쯔끼와 치리꼬프는 신부의 치맛자락에 발이 뒤엉키면서도 역시 웃으면서 무언가에 기뻐했으며, 때로는 뒤처지다가도 사제가 걸음을 멈출 때면 신랑 신부와 맞부딪치곤 했다. 키티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기쁨의 불꽃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옮아간 듯했다. 레빈이 보기에는 사제도 부제도 자기처럼 벙실벙실 웃고 싶은 심정인 것 같았다.

사제가 그들의 머리에서 왕관을 거둔 뒤 마지막 기도문을 낭독하고는 젊은 부부를 축복했다. 레빈은 키티를 흘낏 보았는데, 그녀의 그런 모습을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만면에 가득한 새로운 행복의 광채로 인해 그녀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레빈은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예식이 끝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곤경에서 구해 준 것은 사제였다. 그는 특유의 선량해 보이는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는 조용히 말했다.

"아내에게 입 맞추세요, 아내도 남편에게 입을 맞추세요." 그런 뒤 그가 그들의 손에서 촛불을 거두었다.

레빈은 조심스럽게 키티의 미소 띤 입술에 입을 맞추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그는 새롭고 미묘한 친밀감을 느끼며 교회 밖으로 나왔다. 이것이 생시라는 게 믿기지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의 어리둥절하고 수줍은 듯한 시선이 마주쳤을 때 비로소 그는 이것이 생시임을 믿었으니, 그 순간 두 사람이 이미 하나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저녁 식사 후에 신혼부부는 시골로 떠났다.

 

브론스끼와 안나는 벌써 석 달째 함께 유럽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베네치아와 로마, 나폴리를 둘러본 뒤, 이탈리아의 어느 소도시에 지금 막 도착한 참이었고, 거기서 한동안 체류할 생각이었다.

포마드를 잔특 바른 머리카락을 목덜미에서부터 가르마를 타 넘기고 가슴팍이 희고 넓은 목면으로 된 셔츠에다 연미복을 걸친 차림에, 볼록한 배 위로 장식 줄을 잔뜩 늘어뜨린 잘생긴 급사장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경멸하듯이 실눈을 뜬 채 앞에 선 신사에게 고압적으로 뭐라고 대꾸하고 있었다. 그러다 현관의 다른 쪽에서 계단으로 오르는 발소리가 들리자, 급사장은 뒤로 돌아서서 자기네 호텔에서 제일 좋은 방에 묵는 러시아 백작을 발견하고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낸 뒤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는 급사가 다녀갔으며, 저택을 빌리는 일이 성사되었다고 전했다. 총지배인이 계약서에 서명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오호라! 그것 참 잘됐군." 브로스끼가 말했다. "부인은 방에 계신가, 아니면 출타 중이신가?"

"산책하러 나가셨다가 방금 돌아오셨습니다." 급사장이 대답했다.

브론스끼가 부드러운 재질의 챙 넓은 모자를 벗고는 땀에 젖은 이마와 대머리를 가리려고 귀까지 뒤로 내려 넘긴 머리카락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여전히 선 채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신사를 멍한 눈초리로 힐끗 쳐다본 후 그냥 지나치려 했다.

"저 신사분도 러시아인인데, 손님에 관해 붇더군요." 급사장이 말했다.

도대체가 지인들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는 언짢은 기분과 뭐가 됐든 생활의 단조로움을 달랠 만한 건수를 찾고 싶다는 욕망이 뒤섞인 심정으로 브론스끼는 거기서 한발 물러서 있는 신사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반짝였다.

"골레니셰프!"

"브론스키!"

브론스끼의 빠제스끼 사관학교 동기생인 골레니셰프였다. 빠제스끼 사관학교에서 골레니셰프는 자유주의 당파에 속해 있었는데, 문관 신분으로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공직 생활은 전혀 하지 않았다. 졸업한 뒤 두 동기생은 완전히 멀어졌고, 그 후로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당시의 만남에서 브론스끼는 골레니셰프가 꽤나 지적으로 여겨질 법한 자유주의 계열의 활동을 선택했으며, 그러므로 자신의 활동이나 직위를 얕잡아 보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골레니셰프와 마주하는 동안, 그는 사람들에게 능히 그러듯 냉담하고 오만한 태도로 반격을 가했다. 그것은 이런 의미였다. '내 생활 방식이 당신의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만, 그런 건 나에게 하등의 상관도 없소. 단지 당신이 나를 알고 싶다면 당신은 나를 존중해야만 하오.' 한편 골레니셰프는 브론스끼의 행동거지를 깔보듯이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으니, 그 만남은 응당 두 사람을 한층 더 갈라놓았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는 환호성을 지르며 만면에 희색을 띠는 것이었다. 브론스끼는 자신이 골레니셰프로 인하여 그토록 기뻐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필시 스스로 얼마나 권태로웠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 만남에서 받은 불쾌한 인상을 까맣게 잊고는 반가움이 역력한 기색으로 옛 동료에게 악수를 청했고, 그러한 모습이 좀 전까지 골레니셰프의 얼굴에 감돌던 불안한 표정을 싹 바꿔 놓았다.

"자네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갑군!" 브론스끼가 예의 희고 튼튼한 이를 드러내며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브론스끼라는 이름은 들었네만, 어느 브론스끼인지는 몰랐지 뭔가. 정말 반갑군!"

", 들어가세. 그래, 뭘 하며 지내나?"

"여기서 지낸 지 벌써 2년 째야. 일하고 있네."

"아하!" 브론스끼가 관심을 보였다. "어서 들어가세."

하인에게 감추고 싶은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러시아인들이 으레 그러듯이 그는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로 얘기를 꺼냈다.

"자네 까레니나 부인과 안면이 있나? 우리는 같이 여행하는 중이거든. 지금 그녀한테 가는 길이라네."

그가 골레니셰프의 얼굴을 주의 깊게 응시하며 프랑스어로 말을 이었다.

"! 난 몰랐네(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골리니셰프가 무슴하게 대답했다. "온 지 오래되었나?" 그가 덧붙였다.

"? 오늘로 나흘째야." 브론스끼가 한 번 더 동료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며 대답했다.

'그래, 이 친구는 점잖은 사람이야. 상황을 도리에 맞게 대하는 걸 보면 말이지.' 골레니셰프의 표정에 담긴 의미와 그가 화제를 바꾼 의도를 눈치채고는 브론스끼는 생각했다. '안나에게 소개해도 괜찮을 것 같아, 도리에 맞게 처신하는 친구니까.'

브론스끼는 안나와 외국에서 함께 보낸 석 달 동안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릴 때마다 그 새로운 인물이 자신과 안나의 관계를 어떻게 대할지 자문해 보곤 했으며, 대부분의 남자들에게서 '도리에 맞는' 이해심을 발견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에게, 그리고 '도리에 맞게' 이해하는 예의 남자들에게 대체 그게 어떠한 이해심이냐고 묻는다면, 그도 그들도 퍽이나 난감할 터였다.

사실 브론스끼가 생각하기에 '도리에 맞게' 이해한 사람들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삶을 에워싼 사방의 모든 복집하고 난해한 문제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처신했을 뿐이었다. 즉 예의를 지키고, 뭔가를 암시한다든가 불쾌한 질문을 던지는 일을 삼가는 것 말이다. 그들은 상황의 취지와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승인하고 찬동하지만, 그에 대해 일일이 해명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쓸데없는 짓이라는 듯 행동했다.

브론스끼는 골레니셰프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고, 따라서 그를 만난 것이 더더욱 기뻤다. 실제로 안나의 방으로 안내받은 골레니셰프는 브론스끼가 바라던 대로 처신해 주었다. 보아하니 그는 전혀 힘들이지 않으면서 분위기를 거북하게 만들 만한 대화는 삼가는 듯했다.

안나를 몰랐던 골레니셰프는 그녀의 미모에 놀랐고, 그녀가 스스로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소박한 태도에 더욱 놀랐다. 브론스끼가 골레니셰프를 데리고 들어오자 안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는데, 그녀의 정직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번진 어린애 같은 홍조가 그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가 그 즉시, 마치 일부러 그러듯, 낯선 사람 앞에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브론스끼를 그저 '알렉세이'라고 부르면서, 그와 함께 그 지역에서는 '팔라초'라 부르는 세낸 저택으로 다시 옮겨 갈 예정이라고 말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그와 같이 솔직하고 소박한 태도에 골레니셰프는 호감을 느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브로스끼를 모두 알고 있는 그는 안나의 상냥하고 쾌활하며 정력적인 태도에 그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심지어 그녀 자신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마저 알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남편을 불행 속에 빠뜨리고 남편과 아들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훌륭한 명성을 포기한 결과 그녀 스스로가 활기 있고 행복해졌음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여행 안내서에 나와 있더군요." 골레니셰프는 브로스끼가 세낸 저택에 대해 언급했다. "거기에 틴토레토의 훌륭한 작품이 있답니다. 말년의 유작이지요."

"이러면 어떨까요? 날씨가 아주 좋으니 거기나 가봅시다. 가서 한 번 더 보는 거예요." 브론스끼가 안나에게 말했다.

"그래요, 좋아요. 바로 가서 모자를 쓰고 오겠어요. 그러니까 날이 덥다는 얘기죠?" 그녀가 문가에 멈춰 선 채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브론스끼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홍조가 그녀의 얼굴에 또다시 피어올랐다.

그 눈빛을 본 브론스끼는, 자신이 골레니셰프를 어떻게 대하길 바라는지 몰라 원하는 대로 잘 처신하고 있는 건지 염려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를 온화한 눈길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뇨, 그리 덥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한 기분이었다. 중요한 건 자신에 대해 그가 흡족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브론스끼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빠른 걸음으로 문밖으로 나섰다.

두 친구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들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운 기색이 일었다. 안나로부터 감명을 받은 게 분명한 골레니셰프는 그녀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고, 브론스끼는 그의 얘기를 듣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웠다.

"그러니까 말이야......" 브론스끼가 어떻게든 대화를 시작해보려고 말을 꺼냈다. "자네가 여기에 정착했단 말이지?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건가?" 골레니셰프가 뭔가를 쓰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가 물었다.

"맞아, <두 가지 원리>2부를 쓰고 있지." 질문이 반가워서 불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골레니셰프가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쓰는 건 아니고, 준비중이야. 자료를 모으고 있지. 2부는 훨씬 더 광범위해질 걸세. 거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게 될 거라고. 우리나라, 러시아에서는 우리가 비잔티움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알려 들질 않아." 그가 열을 올리며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브론스끼는 자신이 <두 가지 원리>1부를 모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저자는 뭔가 유명한 것을 들먹이듯이 그에게 설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골레니셰프가 자신의 사상을 개진하기 시작하고 그 맥락을 따라갈 수 있게 되자, <두 가지 원리>를 모르면서도 그의 얘기를 흥미롭게 경청하게 되었다. 골레니셰프가 워낙 달변인 탓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골몰하는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내비친 울분에 못 이긴 태도는 브론스끼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야기를 할수록 그의 두 둔은 점점 더 불타올랐고, 점점 더 조급하게 가상의 적들에게 반격을 가했으며, 얼굴에는 불안하고 굴욕적인 표정이 점점 더 짙어져 갔다. 호리호리하고 생기 넘치며 친절하고 우아한 소년이자 사관 학교에서 늘 1등을 차지하는 학생이었던 골레니셰프를 기억하는 브론스끼로서는 그가 그렇게 격분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입장에 찬동할 수도 없었다. 특히나 못마땅했던 점은, 골레니셰프같이 출신 배경이 좋은 사람이 자신의 성질을 돋우는 글쟁이들과 동렬에 서서 그들에게 화를 낸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런 점이 브론스끼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골레니셰프가 불행하다고 느꼈고, 이윽고 그가 안쓰러워졌다. 심지어 안나가 돌아온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가 조급하게 열을 내며 자기 생각을 토로하고 있을 때, 그토록 표정이 다채로우며 잘생긴 그의 얼굴에는 불행과 광증에 가까운 징후가 역력했다.

모자와 망토를 걸치고 온 안나가 예쁜 손으로 양산을 날렵하게 돌려 가며 브론스끼의 곁에 서자, 그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골레니셰프의 하소연 하는 듯한 시선에서 눈을 떼어 새로운 애정을 품은 채 생기와 기쁨이 넘치는 자신의 매력적인 연인을 바라보았다. 어렵사리 정신을 차린 골레니셰프는 처음에는 침울하고 어두웠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정하게 대하는 안나가(이즈음 그녀의 성향은 그러했다) 특유의 소박하고 명랑한 태도로 그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녀는 여러 이야기들을 주워섬기다가, 마침 골레니셰프가 설명을 아주 잘하는 회화 분야로 화제를 돌리고는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세 들어 살 집까지 걸어가서 그 주변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기쁜 일이 한 가지 있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안나가 골례니셰프에게 말했다. "알렉세이에게 멋진 아틀리에가 생길 거예요. 꼭 그 방으로 정하세요."

그녀가 브론스끼에게 '자기'라고 부르면서 러시아어로 말했다. 골레니셰프가 고립된 생활을 하는 자신들과 가까운 사람이 될 것이므로, 그의 앞에서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네가 정말 그림을 그린단 말인가?" 골레니셰프가 황급히 브론스끼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오래전에 그렸지. 요즘 다시 조금씩 시작하는 중일세." 브론스끼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이이한테는 대단한 재능이 있어요." 안나는 기쁨에 찬 미소를 지었다. "저는 물론 감식가가 아니랍니다! 하지만 식견 있는 감식가들도 같은 말을 했어요."

 

자유로워진 몸으로 속히 건강을 회복하던 그 첫 시기에, 안나는 죄스러울 정도로 행복했고 삶의 기쁨으로 충만했다. 남편의 불행에 대한 반추도 그녀의 행복을 망치지는 못했다. 한편으로 그러한 기억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남편의 불행은, 그로 인해 뉘우치기에는 너무나 크나큰 행복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병이 난 뒤로 그녀에게 벌어졌던 모든 일들, 남편과의 화해와 불화, 결렬, 브론스끼의 소식, 그의 출현, 이혼 준비, 가출, 아들과의 이별까지 그 모든 기억이 열에 들떠서 꾼 꿈만 같았고, 브론스끼와 외국으로 왔을 때에야 비로소 깨어난 것 같았다. 남편을 향해 치미는 악의는 그녀 안에서 일종의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사람을 뿌리쳐 버릴 때 느끼는 심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 사람은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물론 이는 잘못된 행동이었지만 유일한 구원책이었으며, 그 무시무시한 세부 상황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위안을 삼을 만한 생각이 결별 직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요즘 들어 지난 일을 전체적으로 돌이켜 볼 때마다 그녀가 떠올리는 유일한 생각이기도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어. 하지만 그 불행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 나 역시 고통받고 있고, 고통을 받게 될 거야.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었잖아. 내 명예와 아들을 잃었다고. 나쁜 짓을 저질렀으니 난 행복도 이혼도 원하지 않아. 그저 치욕으로 인해, 아들과의 이별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될 뿐이야.' 그러나 아무리 진심으로 고통받기를 원해도, 안나는 도무지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치욕스러운 일도 전혀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은 타고난 풍부한 기지를 발휘하였으니, 외국에 있는 동안 러시아 귀부인들을 피해 다님으로써 거짓되게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가는 곳에서마다 그들의 입장을 그들 자신보다도 더 사려 깊고 완변하게 이해하는 척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사랑하는 아들과의 이별, 그것마저도 처음에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브론스끼의 자식인 딸아이가 안나 곁에 남아 그녀에게 너무나 사랑스럽게 굴며 몹시 애착을 갖게 만들었기에 아들 생각을 하는 일도 드물어졌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삶에 대한 욕구는 너무나 강렬해졌고, 삶의 조건은 너무나 새롭고 흡족하여 안나는 죄스러울 정도로 행복했다. 브론스끼를 알아갈수록 그녀는 그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브론스끼라는 사람 자체로 인해, 그리고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으로 인해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를 완전하게 소유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항구적인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가 가까이 있는 게 즐거웠고, 갈수록 새롭게 드러나는 그의 성격과 기질이 형언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평복으로 탈바꿈한 그의 외모 또한 사랑에 빠진 젊은 여자에게 느껴지듯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말과 생각, 행동, 그 모든 것에서 그녀는 특별히 고결하고 고상한 무언가를 발견하곤 했다. 그에게서 느끼는 황홀한 감정은 종종 그녀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에게서 뭔가 좋지 못한 것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브론스끼에 비하면 자신은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감히 티를 내지 못했다.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곧바로 자신을 싫어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럴 만한 어떤 동기도 없었음에도, 그의 사랑을 잃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그녀에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대하는 그이 태도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이 그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브론스끼는 공직자로서 천품을 타고났으며, 그것을 통해 남다른 역할으 수행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자신을 위해 공명심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애석함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는 예전보다 그녀를 더 정중하고 극진하게 대해 주었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거북하게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었다. 그토록 남자다운 사내임에도 그녀의 의사에 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자신의 의지는 뒤로한 채 오로지 그녀의 바람을 헤아리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녀로서는 그런 점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따금씩 그토록 긴장된 그의 주의 깊은 관심과 주변에 둘러쳐진 염려의 분위기가 그녀를 부담스럽게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편 브론스끼는,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온전히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행복하지가 않았다. 소망했던 바의 실현이 기대했던 행복 가운데 겨우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임을 그는 이내 절감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행복을 소망의 실현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영원한 과오를 그에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처음에 그녀와 생활을 함께하고 평복을 입었을 때는 전에는 몰랐던 자유와 또한 사랑의 자유가 지닌 매력을 만끽하며 만족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마음속에서 욕망에 대한 욕망이, 권태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 순간 뒤바뀌는 기분을 소망이자 목표라고 여기며 그것들에 매달렸다. 무슨 일이든 하면서 하루 중 열여섯 시간가량을 보내야 했다. 뻬쩨르부르끄에서 소일거리를 제공해 주던 사교계의 관습적 틀을 벗어나 외국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외국 여행을 다닐 때 탐닉했던 독신 생활의 향락은 생각조차 못 할 일이었다. 한번 그런 얘기를 꺼냈다가 지인들과의 늦은 저녁 식사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안나의 우울증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지역의 사교 모임이나 러시아인들의 회합에 드나드는 것도 그들의 처지가 애매한 관계로 삼갈 수밖에 없었다. 명소를 구경하는 일도, 이미 볼만한 건 다 봤다는 점은 차지하더라도, 영리한 러시아인인 그로서는 영국인들이 으레 갖다 붙이는 형언할 수 없는 의미 따위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굶주린 짐승이 먹을거리가 있기를 바라며 굴러 들어오는 건 뭐든지 붙잡고 늘어지듯, 브론스끼 역시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때론 정치에, 때론 신간 서적에, 때론 그림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젊어서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가진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판화를 수집하기 시작하다가 그림에 뜻을 두고 배우게 되었고, 충족을 요하는 여분의 욕망을 그렇게 해소하였다.

무술에 대한 이해력, 정확히 말하자면 미술 작품을 모방하는 취미를 가진 그는 스스로에게 화가로서의 자질이 보인다고 생각하여, 종교화나 역사화 혹은 사실주의 회화 중 어떤 종류를 선택할지 한동안 망설인 뒤 그림 그리기에 착수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회화를 이해했고 어떤 그림에서든 영감을 받곤 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회화가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그리는 것이 기존의 어떤 유파에 속할지도 유념하지 않은 채 마음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쪽으로는 감이 없는 데다 직접적인 삶 대신 이미 미술로 구현된 삶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감을 얻었으므로 그 과정은 아주 빠르고 쉬웠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모방하고 싶은 화풍과 매우 흡사해지는 경지에 쉽게 도달하였다.

다른 무엇보다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프랑스의 우아하고 인상적인 화풍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런 화풍으로 이탈리아식 의상을 차려입은 안나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브론스끼 자신은 물론 그 초상화를 본 모든 사람이 그것을 성공적인 작품이라 생각했다.

 

방치되어 있던 고택은 부조로 장식된 천장이며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벽면, 모자이크 장식이 깔린 바닥, 높다란 창문을 가진 노란색의 두터운 비단 커튼, 화병이 놓인 콘솔과 벽난로, 세공된 문, 그림들이 잔뜩 걸린 어둠침침한 홀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이사한 뒤로 그 저택이 브론스끼가 내심 품고 있던 기분 좋은 망상의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외관 덕택이었다. 그는 자신이 러시아의 지주이자 관직을 떠난 기병대 장교라기보다는 교양 있는 예술 애호가이자 비호자이며,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사교계와 인간관계와 공명심을 모두 버린 겸허한 예술가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택으로 이사를 오면서 브론스끼가 택한 배역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처음에 그는 골레니셰프의 소개로 몇몇 흥미로운 인물들과 안면을 트고는 얌전히 지냈다. 이탈리아인 교수의 지도하에 모델을 스케치하고 중세 이탈리아의 풍속을 공부하기도 했다. 최근 브론스끼는 중세 이탈리아의 풍속에 매료되어 모자와 숄마저 중세식으로 입고 다닐 정도였는데, 그러한 스타일이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살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한번은 브론스끼가 아침 일찍 찾아온 골레니셰프에게 말했다. "자네는 미하일로프의 그림을 본 적이 있나?" 그는 조금 전 아침에 받아 본 러시아 신문을 그에게 건네며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러시아 출신 화가에 관한 기사를 가리켰다. 오래전부터 소문이 돌던 그의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었는데, 그 그림은 이미 팔린 상태였다. 기사에는 뛰어난 화가가 격려금이나 보조금을 전혀 받지 못한다며 정부와 예술 아카데미를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봤지." 골레니셰프가 대답했다. "물론 재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날조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더군. 그리스도와 중교화에 대한 이바노프-슈트라우스-르낭 유파의 입장과 거기서 거기야."

"뭘 그렸는데요?" 안나가 물었다.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를 그렸습니다. 그리스도가 새로운 유파의 철저한 사실주의 화풍에 의해서 유대인으로 그려졌더군요."

그림의 내용을 묻는 질문 덕분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로 말머리들 돌리게 된 골레니셰프는 장황하게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한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선인들의 작품 속에 이미 일정하게 구현되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신이 아니라 혁명가나 현자를 그리고 싶다면 소크라테스나 프랭클린, 샤를로트 코르테 같은 인물들을 역사 속에서 고르면 되는 거지, 그리스도는 안 될 말이지요. 그들은 미술이 골라서는 안 되는, 딱 그런 인물을 고른 겁니다. 게다가.."

"그런데, 그 미하일로프라는 사람이 그렇게 가난하다는 게 사실인가?" 러시아의 마이케나스로서, 그림이 좋건 나쁘건 화가를 지원해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브론스끼가 물었다.

"그럴 리가, 그는 탁월한 초상화가인걸. 그가 그린 바실치꼬바 부인의 초상화를 보셨는지요? 하긴, 더 이상 초상화는 그리지 않을 모양이더군요. 어쩌면 그래서 궁한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안나 아르까지예브나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하면 안 될까?" 브론스끼가 물었다.

"왜 나예요?" 안나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그려 준 것 말고는 다른 어떤 초상화도 싫어요. 아니(그녀는 딸아이를 이렇게 불렀다)를 그려 달라곡 하는 게 낫죠. 바로 저기 있네요." 그녀가 정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온 아름다운 이탈리아 유모를 창밖으로 내다보고는 곧바로 브론스끼를 살며시 돌아보았다. 브론스끼가 자기 그림에서 머리 부분을 그리기 위해 모델로 삼았던 미녀 유모는 안나의 삶에 숨겨진 유일한 고통이었다. 브론스끼는 유모를 그리면서 그녀의 미모와 중세적인 풍모에 탄복했고, 안나는 그런 유모를 질토할까 봐 두려워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인정할 엄두가 나질 않아 유모와 그녀의 어린 아들을 특별히 정답게 대해 주고 응석을 받아 주고 있었다.

브론스끼 역시 창밖을 바라보고는 안나의 눈을 힐끗 곁눈질하더니 곧바로 골레니세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자넨 그 미하일로프라는 사람을 아나?"

"만난 적이 있지. 한데 괴짜에다가 교양 머리라곤 전혀 없는 자라니까. 요즘 종종 볼 수 있는 미개한 신인류 중 한 사람이야. 불신과 부정, 유물론적 관념을 d'emblee(단번에) 익힌 자유사상가들 중 하나라고. 예전에는 말이지." 안나와 브론스끼가 뭔가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알려고 들지도 않는 건지, 두 사람에겐 도통 아랑곳없이 골레니셰프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자유사상가라고 하면 종교나 법, 윤리의 개념을 함양하고서 스스로 싸우고 노력해서 자유사상에 도달한 사람이었지. 한데 지금은 타고난 자유사상가라는 새로운 유형이 출현해서는 도덕이나 종교 같은 법이 있다거나 권위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성장한다니까. 곧바로 일체의 것을 부정하는 관념 속에서 커간단 말이지. 한마디로 야만인이 되는 거야.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네. 모스끄바 궁정 시종의 자식인가 본데,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것 같아. 그가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명성을 얻었을 때 나름 영리한 사람으로서 교육을 받고 싶어 했나 봐. 그래서 교양의 원천이라 생각한 것, 바로 잡지에 주목한 거야. 생각 좀 해보게. 옛날엔 교육받고 싶은 사람이면, 가령 프랑스인이라면 온갖 고전들을 탐독했겠지. 신학자, 비극 작가, 역사학자, 철학자들의 책들 말이야. 눈앞에 보이는 지적인 산물은 죄다 섭렵했을 거라고. 하지만 요즘에는 곧바로 부정적인 문헌들을 접하여 부정적인 학문의 요지들을 모조리 순식간에 습득하고는, 그걸로 됐다 이거야. 그뿐 아니라고. 20년 전 같으면 그런 문헌들에서 권위라든가 해묵은 견해와 싸우는 징후들을 발견하고서 그런 투쟁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게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을 테지만, 지금은 해묵은 견해들을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그런 학문에 곧장 달려드는 걸세. 그러고서 이렇게 말하는 거지. '아무것도 없다. evolution(진화), 자연 도태, 생존 투쟁, 그게 전부다.' 나는 그 가시에서 말이야."

"있잖아요.." 벌써 한참 전부터 브론스끼와 눈길을 주고받던 안나가 입을 열었다. 브론스끼가 그 화가의 교육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그를 도와주고자 초상화를 주문할 생각에만 빠져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세요?" 그녀가 신나게 떠들던 골레니셰프를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우리 그분한테 가요!"

골레니셰프는 정신을 차리고 기꺼이 동의했다. 화가가 멀리 떨어진 구역에 살고 있어서 마차를 부르기로 했다.

한 시간 뒤 안나는 골레니셰프와 브론스끼와 나란히 마차의 앞 좌석에 앉아 먼 구역의 외관이 흉한 새 건물에 당도했다. 방문객을 맞이하러 나온 수위의 아내로부터 미하일로프가 보통을 화실로 사람들을 들이지만 지금은 코앞에 있는 자기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들은 명함과 함께 그림을 보길 청한다는 의사를 전하도록 수위의 아내를 미하일로프에게로 보냈다.

 

브론스끼 백작과 골레니셰프의 명함을 가져왔을 때, 화가 미하일로프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작업 중이었다. 아침에 그는 화실에서 대형 그림을 그렸고, 집에 와서는 돈을 요구하는 집주인에게 제대로 대응할 줄 모른다고 아내를 향해 화를 쏟아 냈다.

"변명하지 말라고 스무 번도 더 얘기했잖아.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이탈리아어를 변명을 하려 드니까 더더욱 멍청해질 수밖에." 길게 이어진 말싸움 끝에 그가 말했다.

"그렇게 나 몰라라 하지 말아요. 나는 잘못한 거 없다고요. 돈만 있어도...."

"제발 나 좀 조용히 내버려 둬!" 미하일로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함을 치더니 귀를 막고서 칸막이 너머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미련한 여자 같으니!'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탁자 앞에 앉아 화첩을 열고 막 그리기 시작한 그림을 지체 없이, 유달리 열정적으로 이어 가기 시작했다.

생활 형편이 어려울 때, 특히 아내와 싸웠을 때만큼 그가 열과 성을 다해서 일을 하는 적은 없었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다!' 작업을 계속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예전에 단지 이미 그려 놓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니야, 저번 게 나아......그게 어디에 있더라?' 그는 찌푸린 얼굴로 아내한테로 가서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이 큰딸에게 줬던 종이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내버린 그림을 찾긴 했으나 종이가 촛농으로 얼룩지고 더렵혀져 잇었다. 그래도 그는 그림을 집어다가 탁자 위에 놓은 다음 멀찌감치 떨어져 실눈을 뜨고 살펴보았다. 갑자기 그가 미소를 짓더니 기쁨에 겨워 두 팔을 흔들었다.

'이거야, 이거!' 그는 이렇게 뇌까리더니 연필을 쥐고 민첩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촛농 얼룩이 그림 속 인물에게 새로운 자세를 더해 주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자세를 그리던 그는 문득 여송연을 샀던 가게 주인의 불거진 턱과 활력 넘치는 얼굴을 떠올리고 그 얼굴과 턱을 그림 속 인물에 그려 넣었다. 그러고는 기쁨에 못 이겨 웃음을 터뜨렸다. 죽어 있던 인위적인 형상이 이제는 더 이상 바꿀 것이 없는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 있었으며, 분명하고 확실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 형상에 맞추어 그림을 고칠 수도 있었고, 심지어 다리의 자세를 달리하거나 왼팔의 위치를 완전히 바꾸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고치면서도 그는 인물의 형상을 바꾸지 않았고, 단지 그 형상을 가리고 있던 것들을 걷어 낼 뿐이었다. 마치 형상을 덮어 전부 가리고 있었던 덮개를 벗겨내는 것만 같았다. 새로 긋는 선들마다, 촛농 얼룩 덕분에 별안간 발현된 넘치는 활력과 더불어 그 형상을 더욱더 드러내 보였다. 명함을 가져다주었을 때 그는 조심스럽게 인물 형상을 마무리 짓던 참이었다.

"지금 갈게, 간다고!"

그가 아내에게 왔다.

"이제 그만해, 사샤, 화내지 말라니까!"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말했다. "당신이 잘못했잖아. 나도 잘못했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이윽고 아내와 화해한 그는 벨벳 옷깃이 달린 올리브색 외투 차림으로 모자를 쓰고 화실로 향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인물 형상은 이미 잊은 뒤였다. 이제 그를 기쁨으로 들뜨게 하는 것은, 마차를 타고 온 지체 높은 러시아인들이 자신의 화실을 방문하리라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젤 위에 놓여 있는 그림에 대해서는 마음속 깊이 한 가지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바로 그와 같은 그림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린 적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자신의 그림이 라파엘로의 작품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그림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했고 실제로 전달한 것을 그 누구도 전달한 적이 없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그러한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판단은, 그게 어떠하든지 간에 그에게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졌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그를 흥분시키곤 했다. 자신이 그 그림에서 본 것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라 할지라도 심판관들 또한 보고 있음을 드러내는 논평이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언정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전율케 했다. 그는 항상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크고 심오한 이해력이 자신의 심판관들에게 있다고 여겼으며, 자기 그림에서 그 자신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그들이 보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종종 관람객의 의견에서 그런 경우를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화실 문으로 다가간 그는, 흥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현관 그늘 아래 선 채 온후하게 빛을 발하는 안나의 자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열을 올리며 떠드는 골레니셰프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리로 다가오는 화가를 돌아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손님들에게 다가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송연을 팔던 상인의 턱을 보고 그랬듯이, 그 인상을 포착하여 집어삼킨 뒤 필요할 때 꺼낼 수 있도록 어딘가에 숨겨놓았다. 반면 화가에 대한 골레니셰프의 얘기를 듣고 일찌감치 실망했던 방문객들은 그의 외모를 보고 더더욱 실망했다. 중키에 살이 찌고 걸음걸이가 경박한 미하일로프는 갈색 모자와 올리브색 외투에 이미 오래전부터 통이 넓은 바지가 유행하고 있는데도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특히 넓적한 얼굴의 평범한 생김새와 수줍어하면서도 위엄 있게 구는 태도가 불쾌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들어가시지요." 그가 태연한 척 애쓰며 현관으로 들어서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화실로 들어서면서 화가 미하일로프는 손님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는 브론스끼의 얼굴 표정, 특히 그의 광대뼈를 머릿속에 아로새겨 놓았다. 그의 예술적 감각은 쉬지 않고 일하며 자료를 모았고, 작품 품평의 순간이 임박하여 점점 흥분이 커지는 와중에도, 기민하고 섬세하게 눈에 띄지 않는 특징들을 관찰함으로써 세 인물에 대한 나름의 개념을 구축하고 있었다. 저이(골레니셰프)는 이곳에 사는 러시아인이다. 미하일로프는 그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은 물론 언제 그를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은 죄다 기억하는 버릇대로, 오로지 그의 얼굴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얼굴이 의미심장한 척할 뿐 표정이 빈곤하여 자기 머릿속의 거대한 서랍 속에 내팽개쳐 버린 얼굴들 중 하나라는 것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풍성한 머리카락과 무척이나 넓은 이마가 얼굴에 외견상의 의미심장함을 가미해 주긴 했지만, 단지 어린애처럼 불안해하는 왜소한 인상만이 좁은 양미간에 몰려 있을 뿐이었다. 미하일로프가 보기에 브론스끼와 까레니나 부인은 지체 높고 부유한 러시아인으로서, 부유한 러시아인들이 다 그렇듯이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예술 애호가이자 감정가인 양 구는 인물들임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옛날 것들은 다 둘러봤으니 이제는 독일 사기꾼이나 라파엘전파[영국에서 19세기 중반 결성된 미술 유파. 르네상스 전성기를 대표하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미술을 추종하는 아카데미적인 전통을 비판하고 그 이전의 미술, 즉 중세와 고딕, 르네상스 초기 화풍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였다] 추종자인 영국 머저리 같은 새 인물들의 화실을 구경하러 다니는 중이겠지. 그러다가 그저 교양을 더 보충하겠다는 요량으로 나를 찾아 왔을 테고.' 그가 생각했다. 그는 예술 애호가들의 습성(그들은 똑똑할수록 더 문제가 많았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술이 타락했으며, 새로운 것을 보면 볼수록 위대한 고장의 거장을 모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될 뿐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현대 화가들의 화실을 둘러보는 자들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예견할 수 있었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거나 마네킹이나 흉상들을 쳐다보고 그림의 덮개를 열어 보여 주기를 기다리며 자유롭게 거니는 그들의 얼굴에서 풍기는 무성의한 무관심을 통해 그 모든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습작을 하나씩 넘기거나 커튼을 걷어 올리고 천으로 된 덮개를 벗길 때 그는 몹시 떨렸으며, 지체 높고 부유한 러시아인들은 모조리 비열하고 멍청한 놈들이 틀림없다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브론스끼와 특히 안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마을을 졸였다.

"이 그림 좀 보시겠습니까?" 그가 경박한 발걸음으로 옆으로 물러나더니 그림을 가리켰다. "빌라도의 심문 장면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27장에 나오죠." 흥분되어 입술이 떨리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그가 말했다. 그는 몇 발짝 물러서서 손님들 뒤에 섰다.

그들이 말없이 그림을 보는 짧은 사이, 미하일로프 역시 무심한 제삼자의 시선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 몇 초 동안 그는 지극히 고매하고 정당한 판단이 이 방문객들, 자신이 몇 분 전까지 경멸했던 바로 그들에 의해서 내려지리라 지레 확신하고 있었다. 그 그림을 그리던 3년 동안 품었던 생각들은 깡그리 잊고 말았다.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고 여겼던 모든 장점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공평무사한 새로운 시선으로 그림을 바라보니 거기서 그 어떤 좋은 점도 보이지 않았다. 전면에는 빌라도의 유감스러워하는 얼굴과 그리스도의 평온한 얼굴이, 후면에는 빌라도의 심복들의 모습과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지난했던 탐색과 수많은 오류와 수정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을 갖게 된 그 얼굴들, 무수한 고통과 기쁨을 안겨 주었던 그 각각의 얼굴들,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서 수없이 재배치했던 그 하나하나, 그토록 어렵사리 이루어 낸 온갖 색조와 음영이며 그 모든 것이 지금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니 수천 번 반복되어 온 범속한 그림처럼 여겨졌다. 처음 발견했을 때 그토록 큰 희열을 그에게 안겨주었던, 그에게 가장 소중한 얼굴이자 그림의 중심인 그리스도의 얼굴이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본 순간 의미를 모조리 잃고 말았다.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 풍의 무수한 그리스도 형상과 맨 거기서 거기인 병사들과 빌라도의 형상을 잘 베낀(심지어 잘 베낀 것도 아닌 게, 이제 보니 결점들이 수두룩하게 눈에 띄었다) 모사화로 보일뿐이었다. 그 모든 게 범속하고 볼품없고 구식이었으며, 심지어 엉망으로 그려져 있었다. 어지럽고 힘이 없었다. 손님들이 옳을 터였다. 그들은 화가가 있는 자리에서는 위선을 떨며 정중한 말을 내뱉겠지만, 자기들끼리만 남게 되면 그를 동정하고 조롱할 것이었다.

그는 그 침묵이(비록 1분도 채 안 되었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침묵을 깨고 자신이 떨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는 자제력을 발휘하며 골레니셰프에게 말을 걸었다.

"언젠가 뵌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서 그는 브론스끼와 안나의 표정을 하나도 안 놓치려고 걱정스레 그들을 번갈아 살폈다.

"물론이죠! 로시 집에서 만났었잖아요.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왜 그 새로운 라셸이라는 이탈리아 아가씨가 시를 낭송하던 연회에서 말이죠." 골레니셰프가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그림에서 눈을 떼고는 화가를 바라보며 거리낌 없이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미하일로프가 그림에 대한 논평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당신의 그림이 아주 많이 진전된 것 같군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유달리 나를 놀라게 하는 건 빌라도의 형상입니다. 사람들은 이 인물을 선량하고 멋진 호인이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고 있는, 뼛속까지 관료인 사람으로 이해하지요. 하지만 제 생각엔.."

표정이 풍부한 미하일로프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며 두 눈이 반짝였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자 했으나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기에 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는 척했다. 골레니셰프의 예술에 대한 이해력을 아무리 낮게 평가할지언정, 관료 빌라도의 얼굴 표정에 드러난 진정성에 대한 옳은 지적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언정,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는 참에 처음으로 행해진 그러한 논평이 몹시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을지언정, 미하일로프는 그 논평으로 인해 감격스러웠다. 그 자신도 빌라도의 형상에 대해서 골레니셰프가 얘기한 것과 똑같은 것을 생각했던 터였다. 미하일로프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바 그것이 하나같이 지당한 여타의 수백만 가지 생각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도, 골레니셰프의 언급이 그에게 지니는 의미를 축소시키지는 않았다. 바로 그 언급으로 인하여 그는 골레니셰프가 좋아졌으며, 우울한 기분도 갑자기 황홀감으로 뒤바뀌었다. 그러자 곧 그의 그림 전체가 눈앞에서 온전한 생명체의 형언할 수 없는 복작함을 띠면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미하일로프는 다시금 입을 열어 자신도 빌라도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자 했지만 입술이 부르르 떨리는 바람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브론스끼와 안나 역시 무언가를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 화가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흔히들 내뱉는, 가령 미술 전시회에서 떠들어 대곤 하는 예의 얼토당토않은 말을 큰 소리로 지껄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미하일로프가 보기에 그들 역시 그림을 인상 깊게 느낀 것 같았다. 그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스도의 표정이 정말이지 놀라워요!" 안나가 말했다. 자신이 본 것들 중에서 바로 그 표정이 가장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림의 중심이라 느껴졌기에, 그녀는 그에 대한 칭찬이 화가에게 기분 좋게 들릴 것이라 생각했다. "빌라도를 가엾게 여기는 것 같군요."

이 역시 그의 그림과 그리스도의 형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백만 가지 온당한 지적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가 빌라도를 가엾게 여기는 것 같다고 했는데, 사실상 그리스도의 표정에는 반드시 연민이 담겨 있어야 하는바, 왜냐하면 그 속에는 사랑과 하늘나라의 평화, 죽음에의 각오, 말의 덧없음에 대한 자각이 어려 있기 때문이었다. 빌라도에게 관료의 표정이, 예수에게 연민의 표정이 나타나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한 사람은 육체적인 삶의 화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영적인 삶의 화신이니 말이다. 이 모든 것과 다른 많은 것들이 미하일로프의 머릿속에서 어른거렸고, 또다시 그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히 빛났다.

", 이 인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좀 보세요. 저 광활한 분위기 좀 보시라고요. 사방으로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네요." 골레니셰프가 말했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그는 인물이 뜻하는 바나 그의 생각에 자신이 찬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입니다." 브론스끼가 입을 열었다. "저 인물들은 후경에 있으면서도 너무나 뚜렷하게 부각되는군요! 바로 이런 게 기술이지." 골레니셰프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함으로써, 브론스끼는 일전에 자신이 그러한 기술을 습득하지 못해 낙담하곤 한다면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암시했다.

"그래그래 놀랍군!" 골레니셰프와 안나도 수긍했다. 흥분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에 대한 언급은 미하일로프의 심장을 아프게 후벼팠고, 그래서 그는 성난 표정으로 브론스끼를 쳐다보며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술'이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지만, 그게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 말을 하면서 내용과는 완전히 무관한, 그림을 그리는 기계적인 능력을 염두에 둔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지금 들은 칭찬과 마찬가지로, 마치 나쁜 것도 좋게 그릴 수 있다는 듯 사람들은 종종 내면적인 장점과 기술을 대립시키곤 했다. 그가 아는바 외피를 벗겨내면서 작품 자에에 해를 입히지 않게 하려면, 그리고 외피를 모조리 벗겨내기 위해서는 많은 주의력과 세심함이 요구되었다. 그림이라는 예술, 거기에는 그 어떤 기술도 관계하지 않았다. 만일 어린아이나 혹은 그의 집 식모에게 그가 본 것이 똑같이 계시된다면 그들 역시 자신이 본 것의 외피를 벗겨 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노련하고 숙달된 화가 -기술자-라 할지라도, 내용의 윤곽이 먼저 계시되지 않는다면 기계적인 능력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는 법이었다. 그뿐 아니라 기술에 관해서 논한다 치면, 기술 때문에 자신을 칭찬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그리고 있거나 그려 놓은 모든 것에서, 외피를 벗겨 낼 때의 부주의함에서 생긴, 자신의 눈을 찌르는 듯한 결함들이 보였다. 이제는 이미 작품 전체를 망치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채 그림을 망쳐 놓는 외피의 잔여들은 거의 모든 형상들과 인물들에서 드러났다.

"괜찮다면,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골레니셰프가 입을 열었다.

", 얼마든지요, 어서 말씀하시지요." 미하일로프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건 당신이 그린 그리스도는 인신(人神)이지 신인(神人)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바로 그걸 바랐던 것 같군요."

"저로서는 제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는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미하일로프가 음울하게 말했다.

", 그렇다고 한다면 제 소견을 말씀드리지요..당신의 그림은 너무나 훌륭해서 저의 지적 때문에 손상을 입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당신은 다르게 생각하시겠지요. 모티프 자체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이바노프를 예로 들어 보죠. 제 생각에는, 만일 그리스도가 역사적 인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질 거라면 차라리 이바노프는 다른 역사적 주제를, 이를테면 더 신선하고 아무도 다루지 않은 주제를 고르는 편이 더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예술 앞에 제시된 가장 위대한 주제라면요?"

"찾아보기만 한다면 다른 것들이 있겠죠. 문제는 예술이 논쟁이나 추론을 허용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바노프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신자든 불신자든 '이 사람은 신인가, 신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거든요. 그래서 통일된 인상이 깨지고 말죠."

"어째서죠? 그런 건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만." 미하일로프가 대꾸했다.

골레니셰프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예술에는 통일된 인상이 필수적이라는 처음의 입장을 고수하며 미하일로프에게 반박했다.

미하일로프는 흥분했지만 자신의 견해를 옹호할 만한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안나와 브론스끼는 한참 전부터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면서 유식하기 짝이 없는 친구의 수다를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마침내 브론스끼가, 주인이 나서길 기다리다 못해 크기가 작은 다른 그림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너무 멋져오, 이렇게 멋질 수가! 놀라워요! 정말 근사해요!"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까?' 미하일로프가 생각했다. 3년 전에 그린 그 그림을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그림이 몇 달 동안 밤이고 낮이고 집요하게 그를 사로잡던 시절에 그것과 더불어 겪었던 모든 고통과 기쁨을 깡그리 잊고 있었으니, 작업을 끝낸 그림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러하듯 망각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그림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었고, 그것을 내놓은 것도 오로지 그림을 구입하고자 하는 영국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말이죠, 오래전에 그린 습작입니다." 그가 말했다.

"정말 좋네요!" 골레니셰프 역시 진심으로 그림의 매력에 푹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두 소년이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낚싯대로 물고기를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나이가 더 많은 소년은 막 낚싯줄을 던지고서 덤불 숲에서 열심히 찌를 끌어당기는 그 일에 완전히 몰입해 있고, 어려 보이는 다른 소년은 풀밭에 엎드려 헝클어진 금발을 두 팔에 괸 채 사색에 잠긴 파란 눈으로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 그림 앞에서 사람들이 내지른 탄성은 미하일로프에게 아까와 같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지난 것에 대한 쓸데없는 감정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런 찬탄이 기뻤음에도 세 번째 그림으로 그들의 주의를 돌리려고 애썼다.

그때 브론스끼가 그 그림을 팔 것인지 물었다. 방문객 때문에 흥분한 미하일로프에게 이 순간 돈 문제와 관련된 얘기는 매우 불쾌하게 여겨졌다.

"팔려고 내놓은 겁니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음울하게 대답했다.

손님들이 돌아가자 미하일로프는 빌라도와 그리스도 그림 앞에 앉아서 아깐 나온 얘기들, 그리고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손님들이 염두에 두었을 것들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들이 거기 있었고 자신도 그들의 입장이 되었을 때는 그토록 큰 비중을 지녔던 것이 별안간 모든 의미를 잃고 마는 것이었다. 자신의 그림을 온전히 예술적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 그는 완벽함에 대한 확신에, 따라서 자기 그림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에 도달하였다. 그것은 다른 모든 관심사를 배제하는 긴장 상태를 위해 그에게 필요한 일이었고, 오로지 그런 상태에서만 그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발은 원근법상 여전히 완벽하지 못했다. 그는 팔레트를 집어 들고서 작업에 착수했다. 발을 고치면서는 끊임없이 후면에 있는 요한의 형상을 주시했다. 방문객들은 요한의 형상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그것이 최고로 완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발을 다 그린 뒤 그 형상을 손보고자 했으나 그러기에는 자신이 너무 흥분한 상태인 것 같았다. 냉랭할 때도, 너무 온화해져 모든 게 훤히 보일 때도 그는 마찬가지로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작업이 가능해지는 단 하나의 단계는 그러한 냉랭함과 영감 사이에 존재했다. 어쨌든 지금은 너무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그림을 덮으려다가 동작을 멈추고서 덮개를 손에 쥔 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 동안 요한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림에서 눈을 떼기가 애석하는 듯한 표정으로 천을 덮은 그는 피곤한 모모가 행복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브론스끼와 안나, 골레니셰프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달리 활기차고 명랑했다. 미하일로프와 그의 그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재능'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지성이나 감성과는 상관없는, 거의 육체적인 천부적 능력을 염두에 둔 채 예술가가 체험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려 했다. 그 단어는 그들의 대화 속에 특히 자주 등장하였으니,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얘기는 하고 싶은 뭔가를 지칭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얘긴즉슨, 미하일로프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교육의 부족으로 그 재능은 발전할 수 없었으며, 그런 점이 러시아 예술가들의 전반적인 불행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들을 그린 그림이 기억에 깊숙이 각인되었기에 이따금 그들은 그 그림에 대한 얘기로 돌아오곤 했다.

"아주 아름답더군! 정말이지 제대로 그렸어. 너무나 소박해! 정작 그는 그 그림이 얼마나 훌륭하지 모르고 있다니까. 그래, 그걸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내가 사야겠어." 브론스끼가 말했다.

 

미하일로프는 브론스끼에게 그 그림을 팔았으며, 안나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다. 그는 예정된 날에 와서 작업을 시작했다.

다섯 번째 작업부터 초상화는 모든 이들, 특히 브론스끼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 단지 모델과 닮아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독특한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미하일로프가 어떻게 그녀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그는 의아스러웠다.

'그녀의 가장 사랑스러운 저 내면의 표정을 발견하려면 내가 사랑하듯이 그녀를 사랑하고 알아야만 할 텐데.' 브론스끼가 생각했다. 실은 그 역시 초상화를 보고서야 사랑스러운 내면의 표정을 알아차린 터였으나, 그것이 너무나 진실해서 자신과 더불어 다른 이들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여겨질 정도였다.

"나는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겁을 내면서 아무것도 못 했는데.." 브론스끼가 자신이 그린 초상화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그는 딱 보고서 그냥 그리잖아. 저런 게 바로 기술인 거지."

"자네한테도 그런 게 생길 거야." 골레니셰프가 그를 위로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브론스끼는 재능도 있고, 무엇보다 예술에 대한 고상한 안목을 갖게 해주는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브론스끼의 재능에 대한 골레니셰프의 확신은 또한 그 자신의 논문과 사상에 대한 브론스끼의 공감과 찬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지탱되기도 했으며, 칭찬과 지지란 상호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느끼고 있었다.

남의 집에서, 특히 브론스끼의 저택에서 미하일로프는 자기 화실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마치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과 친해지기를 꺼리는 것처럼 적대적인 태도로 점잔을 떨었다. 그는 브론스끼를 '각하'라고 불렀고, 안나와 브론스끼가 식사에 초대해도 절대로 남아 밥을 먹는 법이 없었으며, 작업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오는 일도 없었다. 안나는 그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다정하게 대했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준 것에 대해서도 고마워했다. 브론스끼 또한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게 굴었는데, 자신의 그림에 대한 화가의 평가가 궁금한 게 틀림없었다. 골레니셰프는 기회만 닿으면 미하일로프에게 예술에 대한 진정한 개념을 깨우쳐 주려 들었다. 그러나 미하일로프는 그들 모두를 한결같이 냉랭하게 대했다. 그의 시선을 통해 안나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감지했지만, 그는 안나와의 대화를 피했다. 브론스끼와 그의 그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경우에도 완강하게 침묵을 지켰고, 사람들이 그에게 브론스끼의 그림을 보여 줬을 때도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골레니셰프와의 대화가 고역스러운 게 분명한데도 그에게 반박하는 일을 없었다.

미하일로프를 더 가까이서 알게 될수록, 그들은 예의 점잖으면서도 흡사 적대적인 듯한 기분이 나쁜 그의 태도로 인해 몹시 못마땅했다. 그래서 작업이 긑나 자기들 손에 훌륭한 초상화가 주어지고 그다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을 땐 다들 몹시 기뻤다.

모두가 품고 있던 생각을 가장 먼저 토로한 것은 골레니셰프였다. 다름이 아니라 미하일로프는 단지 브론스끼를 질투할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에게는 '재능'이 있으니 그걸 부러워하지 않는다 치자고. 하지만 궁정 출신의 부자에다가 백작이기까지 한 사람이(그런 사람들은 정말이지 이런 모든 걸 증오하지) 특별한 노력도 없이 자신은 평생을 바쳐 온 그 일을 더 잘해 내거나 아니면 똑같이 하잖나. 중요한 건 교육인데, 그는 그걸 못 받았단 말일세."

브론스끼는 미하일로프를 변호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럴 거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기에 다른 세계, 즉 하층 세계 출신이라면 자신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브론스끼와 미하일로프가 똑같이 실물을 보고 그린 안나의 초상화에는 틀림없이 그와 미하일로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드러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는 다만 미하일로프가 작업을 마친 뒤 이제는 더 이상 그리는 것이 쓸데없다고 단정하고서 안나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그만두었을 뿐이다. 반면에 중세의 풍속을 소재로 한 그림은 계속해서 그려 나갔다. 그 자신은 물론 골레니셰프도, 그리고 안나는 특히 그 그림이 아주 훌륭하다고 느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미하일로프의 그림보다 훨씬 더 유명한 걸작들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미하일로프는 안나의 초상화 작업에 무척이나 매료되긴 했지만, 작업이 끝나 골레니셰프의 예술에 대한 강론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게 되고 브론스끼의 그림에 대해서도 잊을 수 있게 되자 그들보다 더 기뻤다. 그는 브론스끼가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브론스끼를 포함한 모든 예술 애호가들이 뭐든 그릴 권리를 갖고 있다는 걸 그는 알았지만, 그럼에도 못마땅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엇다. 어떤 사람이 밀랍으로 커다란 인형을 만들어서 거기다 입 맞추는 것을 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창 열애 중인 사람 앞에 인형을 갖고 와서 자리에 앉고는 마치 열애 중인 사람이 사랑하는 여자를 애무하듯이 인형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면 열애 중인 사람은 불쾌할 게 뻔하지 않겠는가. 그와 똑같은 불쾌감을 미하일로프는 브론스끼의 그림을 보면서 느꼈다. 우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모욕적이기도 했다.

그림과 중세에 대한 브론스끼의 몰입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미술에 대한 그의 취미는 끝까지 완성시키지도 못하는,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림은 중단되었다.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자기 그림의 결함이 작업을 계속하면 현저하게 드러나리라는 사실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던 차였다. 골레니셰프와 똑같은 일이 그에게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다고 느끼면서도, 생각이 아직 여물지 않은 거라고, 생각을 키우고 자료들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그런 처신이 골레니셰프를 악에 받치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반면, 브론스끼는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괴롭힐 줄은 몰랐고, 특히 격분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특유의 단호한 성품을 발휘하여 아무런 설명이나 변명도 없이 그림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그림 공부가 사라지자 브론스끼에게도, 그의 실의에 깜짝 놀란 안나에게도 이탈리아 도시에서의 생활이 너무나도 무료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지내던 저택의 풍모가 별안간 확연히 낡고 지저분하게 변했고, 커튼의 얼룩과 바닥의 갈라진 틈, 창문턱의 떨어져 나간 회칠까지 몹시도 흉해 보였으며, 늘 매한가지인 골레니셰프도, 이탈리아인 교수와 독일인 여행객도 참을 수 없이 권태로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요컨대 생활을 바궈야만 했다. 그들은 러시아로, 시골로 가기로 결정했다. 뻬쩨르부르끄에서 브론스끼는 형과 재산을 분할할 계획이었고, 안나는 아들을 만나 볼 예정이었다. 여름은 브론스끼의 드넓은 가족 영지에서 보내기로 했다.

 

레빈이 결혼한 지 석 달이 되었다. 그는 행복했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행복이었다. 그는 매번 보여지는 과거의 바람에 낙담하는 한편, 예기치 않은 새로운 매혹을 느꼈다. 행복을 느끼면서도, 가정생활의 시작과 함께 매 순간 그것이 자신이 상상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수를 떠다니는 보트의 유연하고 행복한 운행에 감탄하던 사람이 그 보트에 타고 나서 겪게 되는 일들을 매번 체감했다. 그는 흔들림 없이 균형을 잡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상을 생각해야 했다. 어디로 가는지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하고, 발아래는 물이니 노를 저어야 하며, 능숙하지 않은 팔로 그 일을 하면 아프다는 것,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 일을 대해야 한다는 것, 그 일을 해내기란 매우 기쁘면서도 무척 힘들다는 것을 유념해야만 했다.

독신이었을 때는 남들의 부부 생활, 즉 자잘한 걱정거리나 언쟁과 질투 등을 보며 내심 경멸의 미소를 짓곤 했었다. 확신컨대 미래에 꾸져질 자신의 부부생활에서 그런 것들은 있을 수 없으며 외적인 형태조차도 남들의 생활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아내와의 생활은 특별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예전에는 그토록 경멸했던,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논박할 수 없는 대단한 중요성을 갖게 된 예의 자잘한 일들로 꾸려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모든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예전에 생각했던 것과 다릴 전혀 쉬운 게 아님을 레빈은 깨달았다. 스스로 가정생활에 대해 아주 정확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간주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남지들이 죄다 그러듯이 무심결에 그것을 그저 사랑의 향유로만 그려 왔던 것이다. 그는 사랑이란 어떤 것으로도 방해받을 수 없으며, 자잘한 걱정거리 때문에 그로부터 한눈을 파는 일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자신의 일을 하고 사랑의 행복 속에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아내는 사랑을 받아야 하며, 오로지 그걸로 족했다. 역시 남자들이 모두 그러듯이, 그는 아내 역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 또한 그토록 시적이고 아리따운 키티가 처음 몇 주도 아니고 단 며칠 사이에 식탁보와 가구, 손님용 요, 쟁반, 요리사, 식사 등등에 대해 그렇게 고민하고 기억하고 부산을 떨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직 약혼자였던 시절 그는 뭐가 뭔지, 뭐가 필요한지 다 알고 있으며 사랑이 아닌 다른 일들도 생각할 줄 안다는 듯 외국 여행을 거절하고 시골로 가기로 결정하는 키티의 그 똑 부러진 면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는 그런 일이 그저 기분에 거슬리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자잘한 일에 신경을 쓰고 집안일로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몇 차례나 그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그러나 곧 그는 그런 일이 아내에게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녀를 사랑했기에,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지언정, 그리고 그런 집안일들을 비웃을지언정,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내가 모스끄바에서 배송된 가구들을 배치하는 모습이라든지, 자신과 남편의 방을 새롭게 정리하는 모습, 커튼을 다는 모습, 앞으로 손님들과 돌리가 묵을 방을 지정하거나 새로 들인 몸종이 묵을 방을 마련하는 모습, 요리사 영감에게 식사 준비를 지시하거나 식재료를 다루고 있던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를 옆으로 떼어 놓고서 말다툼에 돌입하는 모습을 보며 우습게 생각하곤 했다. 서투르고 얼토당토않은 지시를 내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놀라서 미소를 짓는 요리사 영감과 곳간을 새롭게 관리하는 젊은 주인마님의 모습에 정감 어린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의 모습을 그는 보았다. 키티가 와서는 하녀 마샤가 이제는 아예 자기를 어린 아씨로 대한다고, 그 때문에 아무도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며 웃다가 울다가 했을 때는 그녀가 유달리 사랑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이상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일이 없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가 겪는 감정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친정에 살 때는 가끔 끄바스를 곁들인 양배추 절임이나 사탕 같은 것을 먹고 싶어도 어느 것 하나 손에 넣을 수 없었지만, 이제 그녀는 원하는 걸 시키거나 사탕 한 무더기를 살 수도 있었고, 원하는 만큼 돈을 쓰고 원하는 종류의 생과자를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기쁜 마음으로 돌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올 날을 꿈꾸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각자 좋아하는 생과자를 주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자신이 꾸며 놓은 그 모든 새살림을 돌리가 칭찬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는지, 무엇 때문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집안 살림은 그녀의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이 매료시켰다. 봄이 다가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궂은날 또한 오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혼신을 다하여 자신의 둥지를 틀었고, 서둘러 둥지를 트는 동시에 살림을 해내는 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렇게 자잘한 키티의 걱정거리들이야말로 신혼의 고상한 행복을 꿈꾸었던 레빈의 이상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실망스러운 점 중 하나였다. 한편 그로서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앙증맞은 걱정거리들은 새롭게 발견한 매력적인 것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또 다른 실망과 매력을 안겨 준 건 바로 부부 싸움이었다. 레빈은 자신과 아내 사이에 다정하고 정중하며 애정 어린 관계가 아닌 다른 것이 존재할 줄은 상상조차 못 했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 며칠 안 되어 싸움이 벌어졌고, 아내는 그에게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두 손을 내젓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첫 번째 싸움은 새로 지은 농가에 갔던 레빈이 지름길로 돌아오려다 길을 잃는 바람에 반 시간가량 지체했기 때문에 벌어졌다. 짖ㅂ으로 가면서 그는 오로지 아내와 그녀의 사랑,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했으며,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애정이 더욱더 달아올랐다. 그는 청혼을 하러 셰르바쯔끼 일가로 가던 때와 똑같은, 어쩌면 더 강렬한 감정을 품은 채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정작 그를 맞이한 것은 그녀에게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음울한 표정이었다. 아내에게 입을 맞추고자 했지만, 그녀는 그를 밀쳐 냈다.

"왜 그러는 거예요?"

"당신은 기분이 좋으시군요……" 그녀는 침착하면서도 독기 어린 표정으로 지으려 애쓰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입을 열자마자 얼토당토않은 질투와 비난의 말들이, 창가에 앉은 채 꼼짝 않고 보냈던 그 반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것들이 터져 나왔다. 그는 결혼식을 마친 뒤 그녀를 교회에서 데리고 나올 때까지는 전혀 몰랐던 사실을 그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녀와 자신이 단지 가까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어디까지가 그녀이고 어디서부터가 자기 자신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그 순간 경험한, 둘로 쪼개지는 듯 고통스러운 느낌을 통해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모욕적인 기분이 들었지만, 바로 그 순간 그는 아내에게 모욕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이 분노와 복수심을 품고 범인을 찾고자 뒤로 돌아섰으나, 실은 자신이 무심결에 스스로를 때렸고 따라서 화풀이할 상대도 없으며 아픔을 이겨 내고 달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와 유사한 심정을 그는 처음으로 맛보았다.

나중에는 그토록 강하게 느껴 본 적이 없지만, 처음 그러한 감정을 느꼈을 때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본능은 그로 하여금 자신을 변호하고 아내에게 그녀의 잘못을 입증해 보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을 입증한다는 건 그녀의 화를 더욱 돋우고 모든 고통의 원인인 단절을 심화하는 것을 뜻했다. 습관은 그로 하여금 책임을 벗어 버리고 아내에게 그것을 전가하라고 유혹했지만 보다 강렬한 또 다른 감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기왕 벌어진 단절을 더 키우지 말고 최대한 빨리 아물게 하는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부당한 비난을 감수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나, 변명을 하고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것은 더 나빴다. 비몽사몽간에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아픈 데를 떼어 내팽개치려 했으나, 이윽고 정신을 차려 아픈 부분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다만 고통을 견뎌 내도록 아픈 데를 도와주고자 노력해야 할 뿐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하고자 애를 썼다.

그들은 화해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키티는,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앗지만 남편에게 더 상냥하게 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곱절의 새로운 행복을 맛보았다. 그럼에도 그 일은 더 이상의 충돌을 막지 못했고, 심지어 충돌은 아주 자주, 전혀 예기치 않은 하찮은 동기들에 의해서 반복되곤 했다. 그 까닭은 서로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신혼 초반인 그 시절에는 양쪽 모두 종종 감정이 예민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쪽은 기분이 좋고 다른 쪽은 나쁠 경우 평화는 깨지지 않았지만, 양쪽 모두 기분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하찮은 일로 인해 충돌이 일어나곤 했으며, 나중에 가서는 자기네가 뭘 가지고서 싸웠는지 기억조차 못 할 정도였다. 둘 다 기분이 좋을 때면 삶의 기쁨이 두 배가 되긴 했으나, 어쨌든 간에 신혼 초기는 그들에게 힘겨운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내내 특히 생생하게 느껴진 것은 바로 긴장감이었는데, 마치 두 사람을 묶어 주는 쇠사슬이 이쪽과 저쪽으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만 같았다. 레빈이 풍문으로만 듣고서 너무나 많은 것을 고대했던 허니문, 즉 결혼 직후 한 달은 꿀맛 같기는커녕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고되고 굴욕적인 시절로 남았다. 뒤이은 삶 속에서, 그들 두 사람은 똑같이 그 병적이었던 시절의 흉하고 수치스러웠던 상황들을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자 노력했다. 양쪽 다 정상적인 심리 상태일 때가 흔치 않았으며, 온전한 제정신일 때가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결혼 생활 석 달째로 접어들어 모스끄바에 가서 한 달을 보내고 돌아온 이후에야, 그들의 삶은 한층 평탄해졌다.

 

막 모스끄바에서 돌아온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있게 되어 기뻤다. 레빈은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키티는 신혼 초에 입던 그래서 레빈에게는 특히 소중하고 기억에 오래 남을 짙은 자줏빛 드레스를 오늘 다시 꺼내 입고는 레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부터 늘 서재에 놓여 있던 오래된 가죽 안락의자에 앉아 broderie anglaise(영국식 자수)를 놓았다. 레빈은 그녀가 곁에 있음을 끊임없이 흐뭇해하며 생각에 잠기거나 글을 썼다. 농사 일도, 새로운 영농의 기본 원리가 서술되어야 할 책을 쓰는 일도 그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삶 전체를 뒤덮고 있는 암흑에 비하면 그런 일들과 생각들은 작고 하찮게만 여겨졌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온통 행복의 빛으로 물든 눈앞의 생에 비해서 그것ㅇ들이 너무나 시시하고 사소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일을 계속했지만 지금은 관심의 초점이 다른 데로 옮겨 갔으며, 극 겨로가 자신이 하는 일을 전혀 다르게, 보다 명료하게 바라보게 되었음을 느꼈다. 예전에는 일이 그를 삶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다. 일이 없다면 삶이 너무나 어두울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삶이 너무나 천편일률적으로 밝기만 하지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 일들이 필요했다. 원고를 다시 손에 들고서 예전에 써놓은 것을 읽어 보니 그 일이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 흡족했다. 작업은 새롭고 유익했다. 예전에 했던 생각들 중 많은 것들이 과하고 극단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모든 것을 기억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자 여러 빈틈들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는 지금 척박한 러시아 농업 현황의 원인에 관한 장()을 쓰고 있었다. 러시아의 빈곤은 토지의 옳지 못한 분배나 잘못된 발전 방향 때문만은 아니며, 최근 들어 그러한 빈곤을 촉발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러시아에 접목된 외부 문명, 특히 도시로의 집중화 현상을 초래하는 교통로와 철도 및 사치 행각의 만연과 그 결과 초래된 농업의 손실, 그리고 공업, 금융, 또 그 부산물인 주식 투기의 발달이라는 점을 그는 논증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일국의 부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을 경우, 이 모든 현상들은 오로지 농업에 이미 상당한 공을 들였을 때, 농업이 올바른 조건, 적어도 일정한 조건 속에 진입했을 때만 나타나는 법이었다. 일국의 부는 골고루 성장해야 하며, 특히 부의 다른 분야들이 농업을 앞서가서는 안 되었다. 농업의 일정한 현황에 조응하여 그것에 맞는 교통로가 생겨나야 하는데, 토지의 오남용 속에서 경제적 필요성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러시아의 철도는 시기상조로서, 기대했던 대로 농업을 촉진하는 대신 그것을 추월하고 공업 및 금융의 성장을 부추겨 결국에는 농업의 발목을 잡게 될 터였다. 마치 생명체의 경우 한 기관의 일면적이고 때 이른 발달이 전체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현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필요 불가결하고 시기적절하게 출현한 금융, 교통로, 공업의 강화가 러시아에서는 농업의 정비라는 당면한 주요 문제를 밀쳐 내고 부의 전체적인 성장이라는 면에서 볼 때 해악만 끼칠 뿐이었다.

레빈이 책을 쓰는 동안, 키티는 모스끄바를 떠나기 전날 밤 자신에게 경우 없이 지나치게 살갑게 구는 젊은 차르스끼 공작을 남편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신경 썼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질투했던 거야.' 그녀가 생각했다. '맙소사! 정말이지 저이는 귀엽고 바보 같아. 나를 두고 질투를 하다니! 나한테 그런 남자들은 죄다 요리사 뾰뜨르 같은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할 텐데.' 그녀는 스스로도 희한하게 느껴지는 소유욕을 품은 채 남편의 뒤통수와 붉은 목덜미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한눈을 팔게 해서 좀 미안하지만(그래도 저이는 시간에 맞춰서 해내겠지!) 얼굴을 봐야겠어.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느낄까? 돌아봐 주면 좋겠는데……그러면 좋으련만!' 그러고서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는 자신의 시선이 강하게 작용하기를 바랐다.

"맞아, 그것들이 단물을 다 빨아먹고는 빛 좋은 개살구만 내주고 있다니까." 글스기를 멈추고 이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아내가 자신을 모며 미소 짓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가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물었다.

'돌아봤어.' 그녀가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돌아봐 줬으면 했어요." 한눈을 팔게 해서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닌지 알아내고자 남편을 주시하며 그녀가 대답했다.

"우리 둘만 있으니 참 좋죠! 내 기분은 그런데.." 그가 행복에 겨운 미소를 환히 빛내며 아내에게 다가섰다.

"너무 좋아요. 이제 아무 데도 안 갈래요, 특히 모스끄바에는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저요? 뭐냐면..아니, 아니에요. 가서 글 써요. 딴 데 한눈팔지 말고요." 그녀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나는 지금 여기를 오려서 구멍을 내야 해요. 여기 보이죠?"

그녀는 가위를 쥐고서 오려 내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요. 뭐였는데?" 그가 아내 곁에 다가앉아 둥글게 움직이는 조그만 가위를 눈으로 좇았다.

",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요? 모스끄바랑 당신 뒤통수 생각."

"무슨 연유로 나한테 이런 행복이 주어졌을까? 이렇게 좋다니, 부자연스러워요." 레빈이 아내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반대로, 좋으면 좋을수록 더 자연스러운걸요."

"당신 머리채 좀 봐요." 그가 아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돌리며 말했다. "이 머리채 좀 보게. 여기 말이에요. 아니, 아니지, 우리는 일하던 중이었는데."

일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고, 꾸지마가 차가 준비되었다고 아뢰려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은 나쁜 짓을 하던 사람들처럼 서로에게서 황급히 떨어졌다.

"읍내에 갔던 사람들은 돌아왔나?" 레빈이 꾸지마에게 물었다.

"방금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습니다."

"빨리 오세요." 그녀가 서재에서 나가며 레빈에게 말했다. "안 그러면 당신 빼고 혼자서 편지를 읽어 버릴 거예요. 그리고 우리 같이 피아노 쳐요."

혼자 남은 레빈은 아내가 사다 준 새 서류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는 역시 아내와 더불어 새롭게 생긴, 우아한 용품들을 갖춘 새 세면대에서 손을 씻기 시작했다. 그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에 웃음을 짓다가, 문득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그를 괴롭히는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지금의 그의 삶 속에는 무언가 부끄럽고 유약한 것, 그의 표현에 의하면, 카푸아적인 것이 있었다. '이렇게 사는 건 좋지 않아.' 그가 생각했다. '벌써 석 달이 다 되어 가는데, 한 게 거의 아무것도 없어.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진지하게 일을 시작했지만, 어떻게 됐지? 시작하자마자 내팽개쳤잖아. 심지어 일상적인 일들, 그것들마저도 손을 놓고 있어. 농사일을 거의 둘러보지도 않고 있다고. 아내를 혼자 두기엔 안쓰럽기도 하고, 심심할 것 같기도 하니까 말이야. 결혼 전에는 생활이야 어떻게든 굴러가는 법이고 별거 아니지만, 결혼하고 나면 진짜 생활이 시작될 거라 생각했어지. 그런데 벌써 석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까지 이렇게 무사안일하고 부질없이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어. 아니야, 이래서는 안 돼. 일을 시작해야 해. 물론 아내는 잘못한 게 없어. 그녀를 탓할 건 없다고. 나 자신이 좀 더 확고해지고, 남편으로서 독립된 삶을 지켜 내야만 해. 안 그러면 이렇게 나 자신도, 그녀도 길들여질 수밖에.., 당연히 그녀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뭔가 불만스러운 사람이 누군가 제삼자를, 그것은 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그 불만스러운 점과 관련지어서 탓하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녀 자신은 잘못이 없지만(그녀 탓은 전혀 아니었다) 너무나 피상적이고 경박한 그녀의 교육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레빈에게 들었다(그 머저리 차르스끼 같으니 장담하건대 그녀는 그를 제지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줄 몰랐던 거야!). '집안일에 대한 관심(이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단장과 broderie anglaise(영국식 자수) 말고 그녀에게 진지한 관심사란 없어. 내 일에도, 농사일이나 농부들에 관해서도, 실력을 꽤 갖추고 있는 음악에도, 독서에도 관심이 없단 말이야.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면서 저렇게 흡족해하다니'. 레빈은 내심 이렇게 질책했는데, 사실 그가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키티가 그녀에게 닥쳐올 수밖에 없는 시기를, 남편의 아내이자 집안의 안주인인 되는 동시에 아이를 갖고 양육하게 될 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직감적으로 그걸 알고서 그 어마어마한 수고를 감당할 준비를 하기 위해, 지금 누리고 있는 태평하고 행복한 순간들 속에서 아무런 자책감 없이 즐겁게 미래의 보금자리를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레빈은 모르고 있었다.

 

레빈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아내는 새로 장만한 은제 사모바르와 새 다기 세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연로한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를 작은 탁자 앞에 앉히고서 차를 따라 준 다음 돌리의 편지를 읽었다. 그들 부부는 돌리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것 좀 보세요. 마님께서 나를 여기에 앉히셨답니다. 자기랑 같이 앉자고 하시지 뭐예요."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키티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말에서 레빈은 요 근래 그녀와 키티 사이에서 펼쳐졌던 드라마의 결말을 읽어 냈다. 새 안주인은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의 곳산 열쇠를 앗아감으로써 그녀를 슬픔에 빠뜨렸으되, 어쨌거나 그녀를 이겼을 뿐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게 만든 것이었다.

"자 여기, 당신한테 온 편지도 내가 읽어 봤어요." 기티가 그에게 문법과 철자가 엉망인 편지를 건넸다. "아마도, 당신의 형님의 ……그 여자분한테서 온 것 같은데요." 그녀가 말했다. "다 읽진 않았어요. 이건 친정 부모님과 돌리한테서 온 거예요. 상상 좀 해봐요! 돌리가 사르마쯔끼가에서 열리는 아이들 무도회에 그리샤랑 따냐를 데리고 갔었대요. 따냐는 후작 부인 차림을 했고요."

그러나 레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붉힌 채 형의 정부였던 마리야 니꼴라예브나의 편지를 손에 쥐고서 읽기 시작했다. 벌써 그녀가 보내온 두 번째 편지였다. 첫 번째 편지에서 마리야 니꼴라예브나는 자기한테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형이 자신을 쫓아냈다고 적어 보냈고, 비록 자신은 또다시 거지 신세가 되었지만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는다면서, 다만 니꼴라이 드미뜨리예비치가 쇠약하기 때문에 자기 없이는 죽고 말 거라는 생각에 괴롭다고 가슴을 울리는 순진한 어투로 덧붙이며 동생분이 형을 좀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었다. 이번에 적어 보낸 내용은 달랐다. 그녀가 니꼴라이 드미뜨리예비치를 찾아내 모스끄바에서 다시 살림을 합쳤으며, 그러다가 그의 근무지가 있는 어느 현청 소재지로 함께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상관과 싸우는 바람에 다시 모스끄바로 돌아왔는데, 오는 도중에 형이 병을 얻었고 아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분은 줄곧 당신 생각을 하셨어요. 게다가 더 이상은 돈이 없습니다.'

"이것 좀 읽어 봐요, 돌리가 당신에 대해서 뭐라고 썼냐면요 -" 키티가 웃으며 얘길 꺼내려다가 남편의 표정이 변한 걸 알아채고는 곧바로 말을 멈췃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그러는데, 니꼴라이 형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군. 가봐야겠어요."

순간 키티의 표정이 변했다. 후작 부인처럼 꾸몄다는 따냐나 돌리에 대한 생각,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언제 갈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내일."

"나도 같이 갈래요. 그래도 되죠?" 그녀가 말했다.

"키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가 힐난하는 투로 말했다.

"무슨 소리냐뇨?" 남편이 자신의 제안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꺼려하는 것 같아 그녀는 기분이 상했다. ", 가면 안 되나요? 방해하지 않을게요. 나는."

"나는 형이 죽어 가기 때문에 가는 거라니까." 레빈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왜."

"왜냐고요? 당신이랑 같은 이유 때문이죠."

'나한테 이토록 중요한 순간인데도 아내는 오로지 혼자서 심심할 거라는 걱정뿐이군.' 레빈이 생각했다. 그 엄중한 상황에서 그런 핑계를 대는 것이 그의 화를 돋우었다.

"그건 안 될 말이에요." 그가 엄하게 말했다.

싸움이 벌어질 기미를 감지한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방을 나갔다. 키티는 그녀가 나가는 것조차 몰랐다. 남편의 마지막 말에 내비친 어조가 그녀에게 모욕감을 불러일으켰는데, 무엇보다 자신이 한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 말은, 당신이 간다면 나 역시 반드시 당신과 같이 갈 거라는 얘기에요." 그녀가 성난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왜 안 될 말이냐고요!"

"왜냐하면 어디로 가게 될지, 어느 길로, 어떤 병원으로 가게 될지 모르니까. 당신 때문에 나는 운신하기 어려워질 거예요." 레빈은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전혀,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나 역시 거기 있을 수."

"글쎄, 당신이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여자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안 된다니까."

"거기 누가 있고 뭘 하는지 나는 아무거솓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내가 아는 건 단지 내 남편의 형님이 죽어 가고 있고, 남편이 형님을 보러 간다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나도 남편이랑 함께."

"키티! 화내지 말고, 생각을 좀 해봐요. 이거 ㄴ중요한 일이고,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단 말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혼자 남기 싫은 여린 마음에서 상황을 혼동하고 있어요. 혼자 있는 게 적적하면 모스끄바로 가든지."

"그것 봐요, 당신은 '항상' 나한테 천박하고 저열한 생각들을 뒤집어씌우고 있잖아요." 그녀가 모욕감과 분노를 못 이기고서 눈물을 쏟아 냈다. "전혀 그게 아녜요. 나약함 때문도, 그 무엇 때문도 아녜요……나는 남편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남편과 함께 있는 게 나의 도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당신은 일부러 내 속을 아프게 하고 일부러 이해하려 들지 않는군요.."

"이런, 끔찍하군. 무슨 노예가 된 것 같다고!" 레빈이 치미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스스로를 때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면 왜 결혼을 했나요? 자유롭게 살지 그랬어요. 후회할 거라면 결혼을 왜 했죠?"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응접실로 뛰쳐나갔다.

레빈이 뒤쫓아 갔을 때 그녀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생각을 되돌릴 말이 아니라 그저 그녀를 진정시킬 말을 찾고자 애쓰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듣지 않았고,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숙이고서 싫다고 버티는 아내의 두 손을 잡았다. 그 손에 입을 맞추고, 머리에도 입을 맞춘 뒤 다시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줄곧 말이 없었다. 하지만 레빈이 그녀의 양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포갠 다음 "키티!"라고 부르자 불현듯 정신을 차리더니 잠시 울고 나서 마음을 풀었다.

두 사람은 다음 날 함께 떠나기로 결정했다. 레빈은 그녀가 오로지 도움을 주기 위해 가려고 한다는 걸 믿는다고 했고, 형 곁에 마리야 니꼴라예브나가 있다 해도 그 어떤 불미스러운 상황도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 그는 마음 깊은 곳에 아내와 자신에 대한 불만을 품었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시점에 자신을 놓아줄 마음을 먹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내가 불만스러웠으며(참으로 기묘하게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다는 그 행운을 감히 믿지 못하던 그였는데, 이제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 줘서 불행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가!) 고집을 관철하지 못한 스스로가 불만스러웄다. 그보다 더 마음 깊은 곳에서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형과 함께 사는 그 여자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키티의 주장이었다. 그는 맞닥뜨릴 수 있는 온갖 충돌을 두려운 마음으로 떠올려 보았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키티가 창녀와 한방에 있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혐오감과 공포감이 밀려와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니꼴라이 레빈이 병들어 누워 있는 곳은 새롭게 개량된 모델들을 본떠 청결, 편의, 심지어 우아함까지 최상의 수준으로 갖춘 현청 소재지의 여러 호텔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투숙객들이 몰려들면서 그러한 호텔들은 현대적 개량이라는 간판만 그럴듯하게 내걸었을 뿐, 실상은 지저분한 주점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고, 겉만 번드레한 허의 때문에 그냥 더럽기만 한 낡은 호텔들보다 더 흉물스럽게 되어 갔다. 니꼴라이 레빈이 있는 호텔 또한 이미 그러한 상태에 다다랐다. 마치 수위라도 되는 양 출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지저분한 군복 차림의 병사도, 어둡고 불쾌한 철제 계단도, 지저분한 연미복을 입은 건방진 급사도, 밀랍으로 만든 먼지 쌓인 부케가 탁자를 장식하고 있는 중앙 홀도, 쓰레기와 먼지와 온 사방의 불결함도, 더불어 호텔의 새로운, 말하자면 현대 철도식의 자아도취적인 서비스도, 그 모든 것이 레빈 부부에게 신혼 이후 가장 참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호텔이 자아내는 허위적인 인상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실상과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느 정도 가격의 방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뒤이어 좋은 방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괜찮은 방 하나는 철도 감찰관이, 또 다른 하나는 모스끄바에서 온 변호사가, 나머지 하나는 시골에서 온 아스따피예바 공작부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더로운 방 한 개만 남았는데, 그 옆방이 저녁 무렵 빌 거라도 했다. 레빈은 자신이 걱정했던바, 즉 형의 상태가 어떨지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도 도착하자마자 형에게 바로 달려가는 대신 아내를 챙겨 줘야 하리라는 예상이 그대로 실현되자 아내를 원망하며 그녀를 데리고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가보세요, 어서요!" 그녀가 미안함과 두려움이 어린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재촉했다.

말없이 문밖으로 나온 레빈은 곧바로 마리야 니꼴라예브나와 마주쳤다. 그가 도착한 걸 알면서도 감히 방에 들어갈 생각은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모스끄바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모직 드레스와 드러난 팔과 목, 선량하면서도 아둔해 보이는, 약간 살이 오른 듯한 얽은 얼굴도 여전했다.

"그래, 어떻습니까? 형은 어때요? 어떤 상태죠?"

"아주 안 좋아요.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내내 동생분을 기다렸어요. 그 이는 동생분이.부인과 함께.."

처음에 레빈은 그녀가 왜 그렇게 쩔쩔매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바로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전 나가 있을게요, 부엌에 가 있으려고요." 그녀가 사정 얘기를 했다.

"그이가 기뻐할 거예요. 얘기를 들었거든요. 게다가 외국에서 부인을 만났었다며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레빈은 그녀가 자신의 아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갑시다, 어서 가요!"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떼자마자 방문이 열리더니 키티가 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레빈은 그녀 자신과 남편을 이런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은 아내에 대한 노여움과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마리아 니꼴라예브나의 얼굴이 그보다 더 빨개졌다. 온몸에 주눅이 들어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무슨 말을 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두 손으로 머릿수건 끄트머리를 잡아 불그레해진 손가락으로 배배 꼬고 있었다.

처음 한순간 레빈은 그 몰골 흉한 여인을 바라보는 키티의 시선에서 자기로서는 영문 모를, 굉장한 호기심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일 뿐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형님은 좀 어떠세요?" 그녀가 남편을 쳐다본 다음 마리야 니꼴라예브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복도에서 떠들면 안 돼요!" 마침 그때 볼일을 보러 가느라 양다리를 떨며 복도를 지나가는 어느 신사를 돌아보며 레빈이 말했다.

"그러면, 방으로 들어오세요." 키티가 상태가 좀 나아진 듯한 마리야 니꼴라예브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남편의 놀란 기색을 보더니, "아니면 가보시든가요. 가보세요. 그리고 저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 주세요."라고 말하고 방으로 도로 들어갔다. 레빈은 형에게로 갔다.

형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되고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 레빈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익히 들어 왔고, 가을에 형이 찾아왔을 때 자신을 그토록 놀라게 했던 모습, 폐결핵 환자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자기만을 또다시 보게 되리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임박한 죽음의 징후들이 좀 더 분명해져 더 쇠약해지고 더 여위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번과 거의 똑같은 상태일 거라고 그는 예상했었다. 지난번에 겪었던 것과 똑같은, 사랑하는 형을 잃는 슬픔과 죽음 앞에서의 공포의 감정을 좀 더 강도 높게 느끼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칠이 된 벽의 널빤지에는 침 자국이 선연하고 벽의 얇은 칸막이 너머로 말소리가 다 들려오는 작고 더러운 방 안, 불결한 공기의 후덥지근한 냄새가 곳곳에 밴 가운데, 벽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 위에 사람의 몸뚱어리가 이불에 덮여 누워 있었다. 그 몸뚱어리의 한쪽 팔은 이불 위로 나와 있었는데,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평평한, 가늘고 기다란 요골에 기묘하게 갈퀴처럼 거대한 손이 붙어 있었다. 머리는 베개 위에 옆으로 뉘여 있었다. 땀에 젖어 관자놀이에 듬성듬성 붙은 머리카락과 거의 투명하다시피 한 평평한 이미가 레빈의 눈에 들어왔다.

'저 끔찍한 몸뚱어리가 니꼴라이 형일 리는 없어.' 레빈이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얼굴이 엄청나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빈은 방문객을 향해 치켜뜬 그 살아 있는 두 눈을, 달라붙은 콧수염에 가려진 채 가볍게 들썩이는 입술을 알아보고는 이 죽은 듯한 몸뚱어리가 살아 있는 형이라는 무서운 진실을 깨달았다.

빛나는 두 눈이 방으로 들어선 동생을 책망하듯 엄하게 주시했다. 그러자 곧바로 그 눈길에 의해서 산 자들 간에 살아 있는 관계가 맺어졌다. 형의 눈길 속에서 책망의 기색을 감지한 레빈은 자신의 행복에 죄책감을 느꼈다.

꼰스딴찐이 손을 잡자 니골라이가 미소를 지었다. 간신히 눈에 띌 정도로 희미한 미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눈의 엄한 기색은 여전했다.

"내가 이런 꼴을 하고 있을 줄 몰랐겠지." 그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아니에요." 레빈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왜 진작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결혼식 무렵에 말이에요. 온 데 수소문을 했었어요."

침묵을 깨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했으나, 레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더군다나 형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눈을 치켜뜬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뜻을 곱씹고 있는 게 분명했다. 레빈은 아내도 함께 왔다고 알렸다 니꼴라이는 흡족해했으나, 자신의 몰골로 인해 그녀가 놀랄까 봐 염려된다고 말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니꼴라이가 몸을 들썩이면서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형의 표정을 본 레빈은 무언가 대단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말이 나오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니꼴라이는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의사를 비난했으며, 모스끄바 출신의 저명한 의사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레빈은 형이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침묵이 깃들자 레빈은 잠시만이라도 괴로운 심정에서 벗어나고자, 아내를 데리고 오겠노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하려무나. 여길 좀 치우라고 하마. 더럽고 악취가 풍기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마샤! 여기 좀 치워." 병자가 간신히 말했다. "치운 다음엔 나가 있도록 해." 그가 묻는 듯한 눈길로 동생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레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복도로 나온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내를 데려오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순간 자신이 느낀 감정을 돌이켜 보고는, 그게 아니라 병자한테 가지 말라고 아내를 설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뭣 때문에 그녀가 나처럼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고!'

"어떻게 됐어요? 어떠신가요?" 겁먹은 표정으로 키티가 물었다.

"아아, 정말 끔찍해, 끔찍하다니까! 당신은 대체 뭣하러 온 거예요?"

레빈이 말했다.

키티는 남편을 조심스럽고도 안쓰럽게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그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그의 팔꿈치를 잡았다.

"꼬스짜! 나를 그분에게 데려가 주세요. 함께 있으면 덜 힘들 거예요. 나를 데려가만 주세요, 제발요. 데려다주고 나가 계세요." 그녀가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신을 보면서도 그분은 횝지 않는 건 내게 훨씬 더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아주세요. 내가 거기 있으면 아마도 당신과 형님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제발 가게 해줘요!" 그녀는 애걸하다시피 했다. 마치 평생의 행복이 그 일에 달려 있다는 투였다.

레빈은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음을 추스리고 마리야 니꼴라예브나에 대해서는 벌써 까맣게 잊은 채 다시 키티와 함께 형에게로 갔다.

키티는 사뿐사뿐 걸음을 내디디며 쉴 새 없이 남편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자신의 용감하고 연민이 깃든 얼굴을 보여 주었다. 병자의 창으로 들어선 그녀는 찬찬히 뒤로 돌아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런 뒤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재빨리 병상으로 다가갔는데, 병자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되도록 건너편으로 가서는 자신의 젊고 싱싱한 손으로 뼈만 앙상한 그의 커다란 손을 꼭 쥔 채 오로지 여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용한 활기로 상대가 모욕감을 느끼지 않게끔 하면서 병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뵌 적이 있었죠, 서로 인사는 못 나눴지만요. 조덴에서 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제가 제수가 될 줄은 모르셨을 거예요."

"날 못 알아볼 텐데?" 그녀가 들어올 때부터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말했다.

"아뇨, 알아보겠는데요. 우리에게 소식 주시길 참 잘하셨소! 꼬스짜는 하루도 아주버님을 생각하며 걱정하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그러나 병자가 생기를 띤 것은 잠시였다.

그녀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책망하는 듯한 그의 엄한 얼굴 표정에서는 죽어 가는 자가 산 자에 대해서 품는 질투가 내비쳤다.

"아무래도 여기는 아주버님이 계시기에 썩 좋은 곳이 아닌 것 같아요." 키티는 병자의 집요한 시선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방을 둘러보았다.

"주인에게 다른 방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어요."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방에서 더 가까이 계실 수 있도록 말이에요."

 

레빈은 차분하게 형을 바라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형 앞에서 자연스럽고 침착하게 굴 수도 없었다. 병자의 방에 들어설 때면 그의 시선과 주의력은 무의식중에 차단되어 형의 상태를 세세하게 살펴보지도, 분별하지도 못했다. 끔찍한 악취를 맡고 더러움과 난잡함, 고통스러운 상태와 신음을 목도하면서도 그것을 개선할 길은 없다고 느낄 뿐이었다. 병자가 어떻게 누워 있으며 이불 속에서 저 몸을 어떻게 구부리고 있는지, 저 여윈 정강이와 허벅지와 등허리는 어떻게 놓여 있는지, 어떻게든 더 편하게 놓일 수는 없는지, 더 좋아질 수 없다면 덜 나쁘게라도 할 수는 없는지, 병자의 상태를 세세하게 헤아릴 생각을 그는 전혀 하지 못했다. 그 모든 세세한 점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치곤 했다. 그는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도,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서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의심할 바 없이 확신하고 있었다. 어떤 도움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그의 의식이 병자에게도 전해져 그의 화를 돋우었다. 그로 인해 레빈은 더욱 힘들었다. 병자의 방에 있는 게 괴로웠고, 거기 있지 않는 건 더 괴로웠다. 그는 끊임없이 온갖 구실을 대면서 나갔다가, 혼자 있을 수가 없어 다시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키티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했다. 환자를 보면 그녀는 그에 대해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그 연민은 그것이 그녀의 남편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혐오의 감정과는 전혀 다르게, 몸을 움직여서 병자의 상태를 세세하게 알아보고 그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그녀의 여성적인 심성에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를 도와야 한다는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 역시 의심하지 않았으며, 주저 없이 그 일에 착수했다. 생각만으로도 그의 남편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세세한 점들이 곧바로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그녀는 의사를 부르는가 하면 약국에 사람을 보냈고, 그곳에 데려온 하녀와 마리야 니꼴라예브나에게 먼지를 쓸고 닦도록 시켰으며, 자신 또한 이것저것을 씻거나 닦아 내고 이불 밑에 뭔가를 덧씌우곤 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병자의 방에 들이거나 내갔다. 그녀는 지나치며 마주치는 사람들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소 자기 방에 몇 번씩이나 들러서 면포나 베갯잇, 수건, 루바시까를 가져오곤 했다.

홀에서 기술자들에게 식사를 나르던 급사가 그녀의 호출을 받고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몇 차례나 다녀가곤 했는데,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끔 그녀가 너무나 상냥하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빈은 그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그는 그런 처사가 병자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병자가 노여워할까 봐 염려했다. 하지만 병자는 그런 처사에 무심한 듯 노여워하지 않았고, 다만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녀가 자기를 이해하는 일들에 그는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키티의 심부름으로 의사에게 다녀온 레빈은 방문을 열자마자 키티의 지시에 따라 병자의 속옷을 갈아입히는 장면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큼직한 견갑골과 갈비뼈와 추골이 불거져 나온 병자의 길고 하얀 등이 훤히 드러난 가운데, 마리야 니꼴라예브나와 급사가 늘어진 긴 팔을 루바시까의 소매에 제대로 넣지 못해 허둥거리고 있었다. 키티가 황급히 레빈의 뒤로 가서 문을 닫은 다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병자가 신음하자 그녀는 잽싸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빨리 좀 입혀 드려요." 그녀가 말했다.

"오지 말아요." 병자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뇌까렸다. "내가 알아서."

"뭐라고 하셨어요?" 마리야 니꼴라예브나가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알아들은 키티는 그가 자기 앞에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럽고 꺼림칙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니, 안 볼게요!" 그녀가 팔을 바로잡아 주면서 말했다. "마리야 니꼴라예브나, 건너편으로 가서 좀 잡아 주세요." 그녀는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편을 향해 말했다. "저기, 방에 가면, 내 작은 주머니에 작은 유리병이 있거든요. 옆 주머니에요. 그것 좀 가져다줘요. 그 사이에 여기를 다 치워 놓을게요."

유리병을 갖고 돌아온 레빈은 병자가 이미 자리에 누워 있고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 광경을 목도했다. 지독했던 악취는 향수 섞인 식초 냄새로 바뀌어 있었다. 키티가 입술을 내밀고 불그레한 뺨을 부풀려 대롱을 통해 그걸 내뿜었던 것이다. 먼지는 온데간데없어졌고, 침대 밑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탁자에는 유리병들과 물병이 가지런히 세워지고, 필요한 속옷들과 키티의 broderie anglaise(영국식 자수) 용품도 보였다. 병자의 침상 옆에 있는 또 다른 탁자 위에는 음료와 양초, 가루약이 놓여 있었다. 한편 병자는 깨끗이 씻고 머리도 빗질된 채 깨끗한 시트 위에 푹신한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가느다란 목을 감싸는 흰 옷깃이 달린 깨끗한 루바시까를 입은 채 키티를 주시하는 그의 표정에는 희망이 어려 있었다.

클럽에 있는 걸 발견하고 레빈이 데려온 의사는 니꼴라이 레빈이 불평했던 원래의 담당 의사가 아니었다. 새로운 의사는 청진기를 꺼내 환자를 진찰한 다음 고개를 내젓더니 처방전을 써주었다. 그러고는 먼저 약의 복용법에 대해서, 그다음에는 식이요법에 대해서 각별히 세심하게 설명하며 날달걀 혹은 삶은 달걀과 일정한 온도로 중탕한 우유를 섞은 탄산수를 권해 주었다. 의사가 나가자 병자는 동생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나 레빈은 "너의 까짜"라는 마지막 두 마디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키티를 바라보는 형의 눈빛을 보고서야 그는 형이 그녀를 칭찬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형은 늘 하던대로, 그녀를 까짜라고 부르며 오라고 했다.

"훨씬 나아졌어요." 그가 말했다. "제수씨와 함께 있었더라면 한참 전에 병이 나았을 텐데.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가 키티의 손을 잡고는 자기 입술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녀가 불쾌해할까 봐 저어했는지 생각을 고쳐먹고는 손을 내려놓고 그저 쓰다듬기만 했다. 키티가 양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서 꼭 쥐었다.

"이제 나를 왼쪽으로 눕혀 주고 그만 가서 자요." 그가 말했다.

누구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키티만은 알아들었다. 병자가 뭘 필요로 하는지를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살피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이해했던 것이다.

"반대편으로 눕혀 달라시네요."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다. "항상 그쪽으로 누워서 주무시거든요. 고쳐 눕혀 드리세요. 하인을 부르기가 뭣해서요. 나는 못 해요. 당신은 할 수 있나요?" 그녀가 마리야 니꼴라예브나를 향해서 물었다.

"못 하겠어요." 마리야 니꼴라예브나가 대답했다.

저 무시무시한 몸뚱어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알고 싶지 않았던 이불 속의 그 부위들을 만지는 일이 너무나 두려웠지만, 아내의 영향에 압도된 레빈은 아내가 익히 알고 있는 예의 결연한 얼굴을 하고는 두 손을 밀어 넣어 형의 몸을 안아 올리려 했다. 그러나 힘이 모자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쇠약해진 사지가 기이할 정도로 무거워 그는 깜짝 놀랐다. 그가 자신의 목에 감긴 큼지막하고 깡마른 손을 느끼며 형을 돌아눕히는 사이, 키티는 소리 없이 재빠르게 베개를 뒤집어놓고서 살짝 두드린 다음 병자의 머리와 또다시 관자놀이에 들러붙은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가다듬어 주었다.

병자는 동생의 손을 부여잡았다. 형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하고자 그것을 어디론가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레빈은 심장을 졸이며 몸을 내맡겼다. 그러자 형은 그의 손을 자기 입술로 가져다가 입을 맞추었다. 레빈은 흐느낌이 북받쳐 올라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방을 나왔다.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없는 어린아이들과 무지한 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다" 그날 밤 레빈은 아내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에 대해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가 복음서의 구절을 떠올린 것은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와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보다 똑똑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는 없었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면 전력을 다해 숙고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숱한 위대한 남자 지성인들이 그 문제에 관하여 생각하였음을 알고 그들의 사상을 책에서 접하기도 했으나, 이제 그들은 자신의 아내나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알고 있는 바의 1백 분의 1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가피아 미하일로브나와 까짜(니꼴라이 형은 키티를 그렇게 불렀고, 이제 레빈도 그녀를 그렇게 부르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서로 아무리 다를지언정, 그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닮아 있었다.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지, 두 사람 모두 확실히 알고 있었다. 레빈이 생각하는 문제들에 대해 대답은커녕 이해조차 못 할지언정 그러한 현상이 지니는 의미애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고, 둘만이 아니라 수백만 사람들과 관점을 공유하며 그것을 한결같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죽음이란 게 무엇인지 두 사람이 확고하게 알고 있다는 증거는,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해하며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반면 레빈이나 다른 이들은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논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모르는 게 분명했으니,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사람들이 죽어 갈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연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레빈이 지금 니꼴라이 형과 둘만 있었더라면 그는 두려움을 품은 채 형을 쳐다보고 그리하여 더 큰 두려움을 품은 채 기다릴 뿐, 그 이상의 그 무엇도 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쳐다봐야 하는지, 어떻게 걸어 다녀야 하는지도 그는 몰랐다. 상관없는 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무례하다는 생각에 할 수가 없었고, 죽음이나 음울한 것에 대해서도 역시 언급할 수 없었다. 침묵하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쳐다보면 내가 자기를 탐색한다고 생각할 테고, 쳐다보지 않으면 딴전을 피운다고 생각 할 테지. 까치발로 다니면 기분 나빠 할 테고, 성큼성큼 걷자니 미안하고.' 반면에 키티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럴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었기에, 오로지 형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시아주버님에 대해 생각했으며, 그로써 모든 게 순조롭게 되어 갔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결혼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고, 미소를 짓기도 했고, 그를 가엾이 여기기도 했으며, 위로하기도 했고, 완쾌될 경우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그 모든 일의 결과가 좋았다. 그런즉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아가야 미하일로브나의 처신이 본능적이거나 동물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가피아 미하일로브나도 키티도 육체적인 간병이나 고통의 완화 외에 죽어 가는 자를 위해 또 다른 무언가를, 육체적인 간병보다 더 중요하고 육체적 조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었다.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는 죽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이런 말을 했었다. "천만다행히도 성체 성혈 성사도 받고 성유 성사도 받았다지 뭐예요. 부디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죽을 수 있게 해 주시길." 까짜도 마찬가지로 속옷이나 욕창, 음료 같은 데 신경 쓰는 것 말고도, 첫날부터 성찬식과 성유 성사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병자를 설득했다.

밤이 되어 부부가 병자의 방에서 자신들이 묵는 방으로 돌아왔을 대 레빈은 뭘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떨군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한다거나 잠자리를 챙긴다거나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궁리한다거나 하는 것은 고사하고, 심지어 아내와 얘기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반면에 키티는 평소보다도 더 활동적이었고, 심지어 더 생기 있기까지 했다. 저녁 식사를 내오도록 이르는가 하면 짐을 손수 정리했으며, 이부자리 까는 것을 돕고 거기 빈대 약을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은 각성되어 있었고, 사리 분별이 빨랐다. 그것은 전투를 목전에 둔 남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징후로, 삶의 위급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가치와 그의 모든 과거가 헛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위한 준비였음을 단 한 번, 그리고 영원히 보여 주게 될 그러한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모든 일이 잘 진척되고 물건들 또한 모두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것은 자정이 채 안 된 시각이었다. 호텔 방이 희한하게도 그들의 집, 그녀의 방과 비슷해져 있었다. 이부자리가 깔리고, 브러시와 빗과 거울이 놓이고, 냅킨이 펼쳐졌다.

레빈은 지금 먹는 것이나 자는 것, 심지어 말하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점잖지 못한 것만 같았다. 반면에 그녀는 브러시들을 정돈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무례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다는 듯 그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먹는 것에 한해서는 둘 다 전혀 내키지 않았으며,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은 오랫동안 잠자리에 들지도 않았다.

"내일 성유 성사를 받으시도록 설득해서 너무 기뻐요." 그녀가 얇은 상의 차림으로 접이식 거울 앞에 앉아 보드랍고 향기 나는 머리카락을 참빗으로 빗으며 말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병자의 회복을 위한 기도에 대해서 엄마가 말씀해 주신 적이 있어요."

"정말로 형이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쪽으로 빗을 가져갈 때마다 계속 가려지는 그녀의 동그랗고 조그만 뒤통수의 좁다란 가르마를 바라보며 레빈이 물었다.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사흘 이상은 못 버틸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과연 그들이 확신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간에 나는 아주버님을 설득해서 정말 기뻐요." 그녀가 머리카락 사이로 남편을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거잖아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얼굴에 떠오르곤 하는 예의 특이하고 다소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아직 약혼한 사이였을 때 둘이서 종교에 관한 대화를 나눈 이후로는 그도 그녀도 그 문제에 관해서 얘기를 꺼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던 대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올렸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혼자만의 조용한 생각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남편이 자신과는 반대되는 신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 역시 똑같은, 심지어 자신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교도라고 그가 종교에 대해 말하는 온갖 얘기들은 남자들이 저지르는 우스꽝스러운 객기 중 하나로, '착한 사람들은 구멍을 깁는데, 그녀는 일부러 구멍을 내고 있다'는 둥 broderie anglaise(영국식 자수)에 관해서 그가 운운했던 것과 다를 게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 그 여자, 마리야 니꼴라예브나는 그 모든 일을 잘 처리할 줄 모르더군." 레빈이 말했다. "그리고..고백하건대, 당신이 와줘서 너무, 기뻐요. 당신은 참으로 정결하고.." 레빈이 아내의 손을 잡더니 입은 맞추지 않고(죽음이 그토록 임박한 상황에서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는 건 예의에 어긋난 행동 같았기 때문이다) 죄스러운 표정으로 환히 빛나는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면서 다만 꼭 쥐었다.

"당신 혼자였더라면 힘들었을 거예요." 그녀가 만족감으로 붉게 상기된 뺨을 가리고 있던 양손을 높이 들어 올려, 머리채를 잡고 뒤통수에 돌돌 감은 뒤 핀을 꽂기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그녀는 할 줄 몰랐던 거예요. 다행히도 나는 조덴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거기에 정말 저런 병사들이 있단 말인가요?"

"거기 사람들은 상태가 더 안 좋아요."

"나로서는 형에게서 젊었던 시절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가 없어서 참담해요……형이 얼마나 매력적인 청년이었는지, 당신은 믿지 못하겠지. 그때 나는 형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믿어요, 굳게 믿는다고요. 정말이지 아주버님과 나는 아마도 참 친하게 지냈을 거예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가 한 말에 깜짝 놀라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 아마도 그랬겠지." 그가 음울한 어조로 응수했다. "속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앞으로도 여러 날을 보내야 하니,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 키티가 자신의 자그마한 시계를 흘낏 보고는 말했다.

 

이튿날 병자는 성체 성혈 성사와 성유 성사를 받았다. 의식을 치르는 내내 니꼴라이 레빈은 열렬히 기도했다. 꽃무늬 냅킨이 깔린 카드놀이용 탁자 위의 성상에 고정된 그의 커다란 눈에는 레빈으로서는 쳐다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열렬한 간구와 소망이 어려 있었다. 레빈의 눈에 이 열렬한 간구와 소망은 형이 그토록 사랑하는 삶과의 작별을 가일층 힘들게 만들 뿐이었다. 레빈은 형이라는 사람을, 그의 사상의 궤적을 알고 있었다. 형에게 신에 대한 불신이 생겨난 것은 신앙 없이 사는 게 더 수월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현상들에 대한 현대 과학의 설명이 차츰차츰 신앙을 몰아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제 와서 형을 신앙으로 복귀하는 행위는 바로 그와 같은 사상의 궤도를 거쳐 이루어지는 합벅칙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치유에 대한 광적인 소망이 내포된 일시적이고 이해타산적인 것이었다. 레빈은 또한 키티가 자신이 들었던 놀라운 치유에 대한 이야기로 그러한 희망을 더욱더 증폭시켰음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알았기에, 소망으로 가득한 저 애원하는 눈길이나, 힘겹게 치올려진 쭈글쭈글한 이마나, 병자가 간원하는 생명을 이미 수용할 수 없는 불거진 어깨나, 쌕쌕거리는 텅 빈 가슴에 둔중하게 성호를 긋는 몹시 여윈 손을 바라보는 것도 그로서는 괴롭기 짝이 없었다. 성찬식이 이루어지는 동안 레빈 또한 기도를 올리며, 불신자로서 수천 번도 더 행했던 바를 행하였다. 그는 신을 향해 이렇게 읊조렸다. '만일 당신이 존재한다면, 이 사람이 치유되게 해주시옵소서(이는 정말이지 수없이 반복되었던 말이 아니던가). 그리하면 당신은 이 사람과 저를 구원하실 것이옵니다.'

성유 성사를 치른 뒤 병자는 갑자기 상태가 훨씬 호전되었다. 그는 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기침을 하지 않았고, 내내 미소를 띤 채 키티의 손에 입을 맞추거나 그녀에게 눈물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자신은 괜찮다고, 아무 데도 아프지 않을 뿐 아니라 입맛이 돌고 힘이 솟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프를 내왔을 때는 심지어 혼자서 몸을 일으켰으며, 커틀릿까지 달라고 했다. 아무리 가망이 없다 해도, 또 그를 보면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게 아무리 확연하다 해도, 레빈과 키티는 그 한 시간 동안 똑같이 행복을 느끼며 소심한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니기를 바랐다.

"한결 나아지셨잖아." "그래요, 훨씬 좋아지셨네요." "놀랍군요." "놀라울 건 전혀 없어요." "어쨌거나 나아지셨어요." 그들은 서로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그와 같은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병자는 편하게 잠들었지만, 반 시간 뒤에 기침이 그를 깨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에게서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의심할 바 없이, 심지어 불과 조금 전에 품었던 희망에 대한 기억조차 온데간데없이, 레빈과 키티 그리고 병자 자신에게서 희망을 박살 내버렸다.

반 시간 전에 자신이 뭘 믿고 있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그걸 떠올리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양, 그는 구멍이 숭숭 뚫린 종이로 덮인 작은 유리병에 담긴 흡입용 요오드를 달라고 했다. 레빈이 그에게 병을 건넸다. 성유 성사 때와 똑같은 그 열렬한 희망의 눈빛이 이제는 동생에게 꽂혀, 요오드 흡입이 기적을 낳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거듭 확인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까짜는 없는 거지?" 레빈이 마지못해 의사의 말을 확인해 주는 사이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쉰 소리로 말했다. "없구나, 그러면 얘기해도 되겠어..실은 제수씨를 위해서 이 코미디를 연출한 거다. 그녀는 참으로 사랑스럽지만, 너와 나만큼은 더 이상 스스로를 기만해서는 안 돼. 내가 믿는 건 바로 이거다." 그는 뼈마디가 앙상한 손으로 유리병을 움켜쥐며 이렇게 말하고는 거기에 대고 숨을 들이쉬기 시작했다.

저녁 7시경 레빈이 방에서 아내와 차를 마시고 있는데, 마리야 니꼴라예브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입술은 바르르 떨고 있었다.

"죽어 가고 있어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곧 돌아가실 것 같아요."

부부는 병자의 방으로 내달렸다. 그는 예의 기다란 등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낮게 수그린 채 침대 위에 몸을 일으켜 한쪽 팔꿈치를 괴고 앉아 있었다.

"좀 어때요?" 침묵을 뒤로하고 레빈이 속삭이듯 물었다.

"저세상으로 가는 중인 것 같다." 니꼴라이가 힘겹게, 그러나 너무나도 또렷한 어조로, 속에서 쥐어짜듯 천천히 웅얼거렸다. 고개를 들지는 않았지만 눈은 치켜뜨고 있었는데, 동생을 눈에 담지는 못했다. "까짜, 저리 나가 있어요!" 그가 웅얼거렸다.

레빈이 벌떡 일어서서 그녀에게 나가라고 명령조로 속삭였다.

"저세상으로 가는 중이야." 형이 되뇌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기에 이렇게 레빈은 물었다.

"왜냐하면 저세상으로 가고 있으니까." 이 표현이 맘에 든 양 그가 되풀이했다. "임종인 거지."

마리야 니꼴라예브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리에 누우시는 게 좋을 텐데요. 그러면 좀 더 편안해지실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곧 조용히 눕게 될 거야." 그가 중얼거렸다. "죽은 채로 말이야." 그러고는 조소와 노기 띤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눕혀 줘."

레빈은 형을 바른 자세로 눕히고 그 곁에 앉아 숨을 죽인 채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죽어 가는 이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으나, 그의 이마 근육은 마치 깊은 생각에 골몰한 사람의 것처럼 간간이 씰룩거렸다. 레빈은 무심결에, 지금 형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 형과 함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과 행보를 함께하고자 아무리 생각에 힘을 써도, 저 조용하고 근엄한 표정과 눈섭 위 근육의 떨림을 보건대, 자신에게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죽어 가는 이에게는 명백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깨우칠 뿐이었다.

"그래그래, 그거야." 죽어 가는 이가 간헐적으로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잠깐만." 그는 다시 침묵했다. "그렇지!" 갑자기 모든 게 해결이라도 된 듯 이번에는 안심하는 투로 길게 말을 끌었다. "오 주여!" 그는 무거운 숨을 내쉬면 뇌까렸다.

마리야 니꼴라예브나가 그의 발을 만져 보았다.

"식어 가고 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오랫동안, 레빈이 느끼기에는 아주 오랫동안 병자는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간간이 숨을 쉬었다. 레빈은 긴장으로 이미 지쳐 있었다. 아무리 집중하여 생각해 봐도 '그거야'라는 그것을 자신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죽어 가는 자에게서 뒤쳐져 있음을 느꼈다. 이미 죽음이라는 문제 자체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었고, 곧 자신이 해야 할 일들, 즉 눈을 감기고 수의를 입히고 관을 주문하는 따위의 일들을 자기도 모르게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스스로가 완전히 냉담해진 기분이었다. 비애도 상실감도 들지 않았으며, 형에 대한 연민은 더더욱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형을 향해 드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죽어 가는 자는 가졌으나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깨달음에 대한 질투였다.

그는 그렇게 형 곁에서, 내내 임종을 기다리며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임종은 오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키티가 나타났다. 레빈이 그녀를 멈춰 세우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그 순간 죽어 가는 자가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 니꼴라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레빈은 형에게 제 손을 건네고는, 아내에게는 저리 가라는 듯 성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죽어 가는 자의 손을 잡은 채 그는 다시 반 시간, 한 시간, 그리고 또 한 시간을 앉아 있었다. 이제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키티는 뭘 하고 있을지, 옆방에는 누가 묵고 있을지, 의사가 사는 집은 자기 집일지 따위밖에 없었다.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싶었다. 조심스레 손을 빼내고는 형의 발을 만져 보았다. 발은 차가웠지만 병자는 숨을 쉬고 있었다. 다시금 까치발을 하고서 방을 나가려 했으나, 병자가 또다시 꿈틀거리더니 말했다.

"가지 마."

날이 밝았다. 상태는 여전했다. 레빈은 죽어 가는 이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살며시 손을 빼낸 뒤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가 접한 소식은 기다리던 형의 부고가 아니라, 병자가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왔다는 얘기였다. 그는 또다시 앉아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다시금 먹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죽음에 관한 언급은 그만두고 다시금 쾌유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는가 하면, 전보다 더 예민해지고 침울해졌다. 동생도 키티도, 그 누구도 그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모두에게 화를 냈고, 모두에게 불쾌한 말을 내뱉었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모두를 책망하며 모스끄바에서 저명한 의사를 데리고 와달라고 청했다. 좀 어떠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원망과 비난조로 응수했다.

"고통스러워. 끔찍해. 견딜 수가 없어!"

병자는 점점 더 고통스러워햇고, 특히 더 이상은 치료가 불가능한 욕창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그는 온갖 일에, 특히 모스끄바에서 의사를 데려오지 않은 것에 대해 주위 사람들을 책망하며 점점 더 심하게 화를 냈다. 키티가 그를 돕고 진정시키고자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온갖 노력이 허사였다. 그녀는 인정하지 않았어도, 레빈은 키티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임을 눈치챘다. 형이 자신을 불러 세웠던 그날 밤 그가 삶에 작별을 고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불러일으켰던 죽음에 대한 감정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곧 죽을 것이며, 절반은 이미 죽어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두가 단 한 가지, 가능한 한 빨리 그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 사실을 숨긴 채 약을 따라 주고 약이나 의사를 찾아다니면서 그를, 그들 자신을, 서로를 속였다. 그 모든 게 추잡하고 모욕적이고 불경스러운 거짓이었다. 그리고 레빈은 타고난 성품 탓에,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죽어 가는 자를 사랑하는 탓에 그 거짓을 특히 뼈아프게 감지하고 있었다.

비록 죽음을 앞둔 시점일지언정 형들을 화해시켜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품어 왔기에 레빈은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편지를 썼고, 그에게서 받은 답신을 병자에게 읽어 주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몸소 오지는 못한다고 적었지만, 가슴 절절한 표현으로 동생에게 용서를 구했다.

병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에게 뭐라고 쓸까요?" 레빈이 물었다. "설마하니 큰형한테 화가 난 건 아니죠?"

"아무렴, 전혀 아냐!" 그 질문에 니꼴라이가 성을 냈다. "의사 좀 보내 달라고 써보내."

고통스러운 사흘이 또 흘러갔다. 병자는 여전히 같은 상태였다. 이제 그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었다. 호텔 급사나 주인도, 투숙객들과 의사도, 마리야 니꼴라예브나도, 레빈과 키티까지, 죄다 그랬다. 오로지 병자 혼자서만 그러한 심정을 표출하지 않은 채, 오히려 의사를 데려오지 않는다고 활르 내고 계속해서 약을 복용하면서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편이 끊임없는 고통을 일순간 잊게 만드는 드문 경우에만, 그는 비몽사몽간에 이따금씩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그의 마음속에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을 "아아, 제발 끝나기만 했으면!" 혹은 "언제 이게 끝나려나!"라고 털어놓곤 했다.

고통은 균일한 속도로 증대되어 가면서 자신이 할 바를 하였다. 즉 죽음을 맞이하도록 그를 준비시켰던 것이다. 그가 고통을 겪지 않는 상황이란 없었으며, 망아의 순간도 없었고, 육신의 지체들 가운데 아프지 않고 그를 괴롭히지 않는 곳이란 없었다. 심지어 육신에 대한 기억과 인상과 생각조차 이제는 육신 자체인 양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타인들의 모습이나 그들이 하는 말,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정황을 감지한 주변 사람들은 병자 앞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대화하거나 욕망을 표현하는 것도 자제하였다. 그의 삶 전체가 오로지 고통의 감정과 그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갈망으로 융합되었다.

그에게서 죽음을 갈망의 충족으로, 행복으로 바라보게끔 만들 수밖에 없는 일대 격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전에는 배고픔, 피로, 갈증 같은 고통이나 결핍에 의해 유발한 각각의 욕망이 육신의 작용에 의해서 쾌감을 얻으며 충족되었으나, 이제는 결핍과 고통을 충족시킬 수 없었고 충족의 시도가 오히려 새로운 고통을 유발하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욕망은 오직 한 가지, 온갖 고통과 그것의 원천인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바람으로 수렴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해방의 욕망을 표현할 만한 언어가 그에게는 없었기에, 그것에 관해 말하는 대신 과거의 버릇대로 더 이상은 채워질 수 없는 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반대편으로 돌려 눕혀 줘"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원래대로 눕혀 달라고 청했다. "고깃국을 다오. 고깃국은 치워라. 그렇게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뭐든 이야기를 좀 해봐." 그래 놓고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곧바로 눈을 감고서 피로와 무관심, 혐오감을 드러내었다.

그 도시로 온 지 열흘째 되던 날 키티는 병이 났다. 두통이 생기고 구토가 일어 오전 내내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의사가 말하기를 피로와 걱정 근심 때문에 병이 났다면서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라고 처방을 내렸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지나자 키티는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처럼 일감을 챙겨 병자에게로 갔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서자 병자는 엄한 눈길로 쳐다보았고 몸이 아팠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날 그는 끊임없이 코를 풀고 애처롭게 앓는 소리를 냈다.

"좀 어떠세요?" 키티가 그에게 물었다.

"더 나빠졌어." 그가 간신히 뇌까렸다. "아파!"

"어디가 아프세요?"

"온 데가."

"보아하니, 오늘 돌아가실 것 같아요." 마리야 니꼴라예브나가 말했다. 비록 속삭이듯 말하긴 했으나, 레빈이 눈치챈 바로는 아주 예민한 병자는 그 말을 알아들은 게 틀림없었다. 레빈은 그녀에게 ""하면서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고는 병자를 돌아보았다. 듣기는 했지만, 그 말은 니꼴라이에게서 그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의 시선에는 여전히 똑같은 책망과 긴장이 서려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마리야 니꼴라예브나가 말했다.

"어떻게 움켜쥐던가요?"

"이렇게요." 그녀가 자신이 입은 모직 드레스의 주름을 잡아당겼다. 사실 그 역시 그날 하루 종일 병자가 뭔가를 벗겨 내려는 듯 자기 몸을 움켜쥐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마리야 니꼴라예브나의 예측은 정확했다. 밤이 될 무렵 병자는 이미 손을 들어 올리지도 못했고, 변함없이 주의 깊고 집요한 시선으로 앞만 응시할 뿐이었다. 심지어 동생이나 키티가 자기를 보라고 몸을 숙여도 똑같이 앞만 응시했다. 키티는 임종 기도를 올리도록 사제를 불러오게 했다.

사제가 임종 기도문을 읽는 동안, 죽어 가는 이는 그 어떤 생명의 징후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줄곧 감긴 채였다. 레빈과 키티, 마리야 니꼴라예브나는 침상 곁에 서 있었다. 사제가 기도문을 다 읽기도 전에 문득 죽어 가는 이가 몸을 쭉 펴더니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기도를 마친 사제는 차가운 이마에 십자가를 댄 다음 천천히 견대로 감싸더니 2분 가량 말없이 서 있다가 이내 핏기 없이 차갑게 식은 커다란 손을 만져 보았다.

"돌아가셨습니다." 사제가 이렇게 말하고는 물러서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착 달라붙어 있던 망자의 콧수염이 움찔거리더니,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모종의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 속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아직……이제 곧."

1분쯤 지나자 그의 얼굴이 환해지며 콧수염 밑으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모여 있던 여자들은 세심하게 고인을 거두는 일에 착수했다.

형의 모습과 임박한 죽음은 레빈의 마음속에 죽음의 불가해성, 그리고 죽음의 임박과 그 필연성 앞에서 느꼈던 공포를 되살려 놓았다. 그것은 형이 찾아왔던 그 가을날 저녁에 느꼈던 감정이었다. 지금 그 감정은 전보다 강렬했다. 그는 전보다도 더욱 자신이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며, 죽음의 불가피성에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가 곁에 있는 덕에, 그 감정이 그를 절망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고 사랑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사랑이 자신을 절망에서 구해 주었음을, 절망의 위협 속에서 그 사랑이 더욱더 강해지고 순결해졌음을 그는 느꼈다.

여전히 불가해한 것으로 남아 있는 죽음이라는 하나의 신비가 그의 눈앞에서 채 다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만큼 불가해한, 그를 사랑과 삶으로 불러내는 또 다른 신비가 일어났다.

의사가 키티에 관해서 자신이 예상한 바를 확인해 주었다. 그녀의 병은 임신이었다.

 

벳시와 스쩨빤 아르게지치와 나눈 대화를 통해 자신에게 요구되는 바는 곁에 있음으로 해서 아내를 힘들게 하지 말고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뿐이며, 당사자인 아내 또한 그것을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자신이 지금 뭘 원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기꺼이 자신의 일을 맡아 주는 이들의 손에 스스로를 의탁하고는 모든 것에 동의한다고 답하였다. 안나가 이미 집을 나가고, 가정 교사인 영국 여자가 함께 식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따로 할지를 물어보러 사람을 보냈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경악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자신의 과거를 결코 지금 현재의 상황과 연결짓거나 융화시킬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내와 행복하게 살았던 지난 시절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힌 건 아니었다. 저 과거로부터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이미 고통스럽게 겪어 왔고, 그러한 정황은 괴로웠지만 납득이 되었다 만일 그때 아내가 자신의 부정을 공표하고 떠나 버렸더라면, 그는 슬프고 불행했겠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막막하고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자신이 얼마 전에 베풀었던 용서와 자비, 병든 아내와 남의 자식에게 베풀었던 그 사랑을 지금의 상태, 즉 그 모든 것에 대한 포상인 양 주어진 것과 도무지 용화시킬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인간으로서 모두에게 멸시당한 채 홀로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떠난 뒤 처음 이틀 동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평소대로 의뢰인들과 주임을 접견하고 위원회에 출석했으며, 식당에 가서 밥을 먹기도 했다.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채, 그 이틀 동안 그는 오로지 태연하고 무심한 척하는 데 온 정신력을 쏟아부었다. 안나 아르까지예브나의 물건과 방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해 질문에 답하면서는, 지금 벌어진 일이 예상치 못한 바가 아니며 자신에게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의 틀을 전혀 벗어나는 것이 아닌 듯 보이기 위해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그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아무도 그에게서 절망의 징후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이틀째 되던 날, 꼬르네이가 안나가 결제하는 걸 깜박 잊었던 유행복 상점의 계산서를 그에게 건네주며 점원이 집에 와 있다고 아뢰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점원을 불러오라고 일렀다.

"감히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각하. 부인께 가서 알아보라고 하실 거라면, 부디 그분들이 계시는 곳의 주소를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점원이 보기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돌아서서 책상 앞에 앉았다. 두 손에 머리를 괴고서 한참을 그 자세로 앉아, 그는 몇 차례 말을 꺼내려다가 그만두곤 했다.

꼬르네이가 주인 나리의 심경을 알아채고는 점원에게 다음에 와달라고 일렀다. 또다시 혼자 남게 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계속해서 의연하고 침착하게 처신할 기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대기 중이던 마차를 풀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이르더니, 식사하러 나가지도 않았다.

그 점원이나 꼬르네이, 그리고 이틀 동안 마주친 모든 이들의 얼굴에서 예외 없이 명백하게 드러났던 멸시와 악의의 압력을 자신은 버텨 낼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증오를 막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증오는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그랬더라면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을 터였다). 자신이 수치스럽고 역겨울 정도로 불행한 탓에 생긴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심장이 갈가리 찢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자비하게 대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마치 상처를 입고 자지러지게 짖어 대는 한 마리 개의 숨통을 다른 개들이 끊어 놓듯이, 사람들이 자신을 죽여 없앨 것만 같았다. 사람들로부터 구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숨기는 것뿐이라고 여겼기에 이틀 동안 무의식중에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 하였으나, 이제 자신에게는 그러한 불공평한 싸움을 계속할 힘이 없음을 그는 절감하였다.

자기만의 비애를 품은 채 전적으로 혼자라는 자각으로 인해 그의 절망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가 자신이 겪은 바를 죄다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 고위 관료나 사교계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고통받는 한 인간으로서 그를 가엾이 여길 만한 사람은 뻬쩨르부르끄에만 없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그런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고아로 자랐다. 형제라고는 둘뿐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열 살 때 돌아가셨다. 재산은 보잘것없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한때 황제의 총신이자 고위 관료였던 까레닌 숙부가 그들을 양육했다.

중학교와 대학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숙부의 도움을 받아 곧장 명망 있는 공직의 길로 들어섰으며, 그때부터 오로지 공직자로서의 공명심에만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중학교에서도 대학에서도, 이어서 공직에 올라서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형이 그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으나, 그는 외교부에서 근무하는 탓에 늘 외국에서 지내다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결혼한 직후에 역시 타지에서 죽었다.

그가 현 지사로 재직 중일 때, 현의 부유한 귀부인인 안나의 숙모가 이미 젊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현 지사로서는 그래도 젊은 편이었던 그에게 자기 조카딸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고, 청혼을 하든지 아니면 그 도시를 더나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그를 몰아넣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긍정적인 근거만큼 부정적인 근거들이 있었으며,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삼가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을 위배하도록 강요할 만한 결정적인 요인도 없었다. 그러나 안나의 숙모는 지인을 통해서 그가 이미 처녀를 농락했으니 명예의 의무에 따라 청혼을 해야 한다고 자꾸만 암시를 불어넣었다. 결국 그는 청혼을 했고, 신부이자 아내에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감정을 바쳤다……

안나에 대한 그의 애착은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진실한 인간관계에 대한 마지막 바람까지 말끔히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지금 그 많은 지인들 가운데 그와 친한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른바 넓은 인맥을 보유했지만, 친우는 없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식사 자리에 초대하거나,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일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그에게 아첨하는 자를 옹호해 달라고 청탁하거나, 여러 인사들과 고위 각료들의 활동을 터놓고 함께 심의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는 관례와 습관에 의해 확고하게 규정된 하나의 영역 안에 갇혀 있었으며,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중에 친해져서 개인적인 고뇌도 털어놓을 수 있게 된 대학 동창생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그는 멀리 떨어진 교육 관구에서 장학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끄의 인물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가깝고 소통이 가능한 이는 사무실 주임과 주치의뿐이었다.

사무실 주임인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슬류진은 영리하고 선량하며 청렴한 사람이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가 자신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품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5년간의 업무 활동이 둘 사이에 장벽을 쌓아 정신적인 교감을 가로막아 버렸다.

서류 서명 작업을 마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미하일 바실리예비치를 쳐다보면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몇 차례 입을 떼려 했으나, 그는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네, 나의 불운에 대해 얘기 들었나?'라는 문구를 이미 준비해 둔 터였다. 그러나 평소대로 ", 이걸 준비해 주게"라는 말로 접견을 마치고는 그를 내보내고 말았다.

또 다른 한 사람인 주치의 역시 까레닌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러나 둘 다 산적한 일 때문에 경황이 없다는 점이 서로 간에 묵인되고 있었다.

여성 친구들, 그들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리지야 이바노브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에 간해서는 아예 떠올리지도 않았다. 모든 여자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두렵고 껄끄러운 존재였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에 관해서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고독과 절망에 빠져 있던 바로 그 가장 힘겨운 순간에 그녀는 그를 찾아와서는 자신의 방문을 고하지도 않은 채 그의 서재로 들어섰다. 그녀는 여전히 양손에 머리를 괴고 앉아 있는 그를 맞닥뜨렸다.

"J'ai force la consigne(감히 들어왔어요)." 흥분하고 서두른 탓에 무거운 숨을 몰아쉬며 잰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선 그녀가 말했다. "얘기 들었어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나의 벗님!" 양손으로 그의 손을 꼭 쥐고는 상념에 잠긴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리지야 이바노브나가 말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얼굴을 찌푸리며 엉거주춤 일어서서 그녀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내고는 의자를 내주었다.

"앉으시겠습니까, 백작 부인?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던 참입니다. 몸이 좀 불편해서요, 부인." 이렇게 말하는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나의 벗님!" 리지야 이바노브나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불현듯 그녀의 눈썹이 안쪽으로 치켜 올라가더니 이마에 세모꼴을 그렸고, 그러자 그녀의 못생기고 누르스름한 얼굴이 한층 더 밉상이 되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녀가 자신을 가엾게 여기고 있으며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러자 감동스러운 마음이 솟구쳐, 그는 백작 부인의 통통한 손을 잡고서 입을 맞추었다.

"나의 벗님!" 흥분한 탓에 더듬거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비탄에 잠겨서는 안 돼요. 상심이 너무나도 크겠지만, 위안을 찾아야만 해요."

"나는 파멸했어요. 만신창이랍니다. 더 이상 나는 인간도 아닙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지만 눈물이 가득한 그녀의 두 눈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내 처지가 끔찍한 건, 그 어디에서도, 나 자신에게서도 버팀목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버팀목을 찾게 되실 거예요. 다만 저한테서는 그걸 찾지 말아 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우정을 믿어 주시길 바라고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의 버팀목은 사랑이에요,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사랑 말이에요. 그분의 짐은 가볍답니다." 그녀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익히 알고 있는 예의 황홀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 "그분이 당신을 지지하고 도와주실 거예요."

그 말속에는 스스로의 고결한 감정에 대한 감탄과 함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보기에는 지나치다 싶은, 얼마 전부터 뻬쩨르부르끄에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열광적인 신비주의적 정서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그것이 듣기 좋았다.

"저는 나약합니다. 능멸당했고.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했고, 지금은 그 무엇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벗님…….." 리지야 이바노브나가 재차 그를 불렀다.

"지금 없는 건, 그것을 잃은 건 문제가 아닙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을 이었다. "아쉬울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처한 이 상황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끔찍한 생각이긴 하죠.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안 그럴 수가 없어요."

"당신은 용서라는 고결한 행위를 실행에 옮기셨고, 저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일로 탄복하고 있어요. 그건 당신의 가슴속에 살아 계신 그 분이 하신 일이에요."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두 눈을 황홀하게 치켜뜨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돼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손을 오므리고서 손가락 마디를 꺾기 시작했다.

"자세한 사정을 아셔야만 합니다." 그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지요. 백작 부인, 저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온갖 일들을 처리했어요. 저의 이 생경한, 고독한 상황이 초래한(그는 '초래한'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집안일들을 처리했단 말입니다. 하녀, 가정 교사, 청구서 등등……그런 자잘한 불꽃들이 저를 소진시켜 버렸고, 이제는 버틸 힘이 없습니다. 점심 식사 때도 그렇고……어제는 식사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 뻔했지요. 저를 쳐다보는 아들의 눈길을 견딜 수가 없더군요. 이 모든 사태의 의미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애도 실은 묻고 싶은 겁니다. 그런 그 눈빛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 녀석은 처를 쳐다보는 걸 두려워한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점원이 가져온 청구서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바람에 말을 멈추었다. 파란 종이에 적힌, 모자와 리본 대금에 대한 그 청구서를 그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 없이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해합니다, 나의 벗님……"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말했다. "전부 이해해요. 저에게서 도움이나 위안을 찾으실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만 있다면 돕겠다는 생각만으로 온 거예요. 그런 자잘하고 굴욕적인 걱정거리들을 덜어 드릴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제가 생각하기에는, 여성적인 말솜씨와 여성적인 일처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저한테 맡겨 주시겠어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말없이 고맙다든 뜻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우리 함께 세료자를 돌보기로 해요. 제가 실제적인 일에는 영 소질이 없지만, 한번 해보겠어요. 댁의 가정 관리인이 되겠어요. 저한테 고마워하실 거 없어요. 이일은 저 자신이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저로서는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말씀하셨던 그런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지는 마세요. 그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질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인의 가장 고결한 덕목을 부끄러워하는 태도랍니다. 그리고 저한테 고마워해서도 안 돼요. 그분께 감사드리고, 그분께 도움을 청하셔야 합니다. 오직 그분한테서만 우리는 평온과 위로, 구원과 사랑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는 두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침묵을 통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짐작한 대로, 그녀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딱히 불쾌하게 여겨지진 않을지언정 과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표현들을 이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경청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지금은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위로가 되는 것만 같았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신흥 열성 신앙이라는 조류가 탐탁지 않았다. 신자이긴 해도 주로 정치적인 의미에서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으니, 논재오가 분석에 스스로를 개방함으로써 몇몇 새로운 해석을 허용하는 새로운 교의는 원칙적으로 냉담하게, 심지어 적대적으로 대했으며, 거기 심취한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과 단 한 번도 이야기르 ㄹ해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참여를 권유할 때마다 애써 침묵으로 회피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처음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기꺼이 경청하고, 마음으로도 그에 대해 반발하지 않게 된 것이다.

"부인의 처신과 말씀에 정말이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기도를 마치자 그는 말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친구의 양손을 다시 한번 꼭 잡았다.

"이제 일을 시작하겠어요."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아 내고는 미소를 지었다. "세료자한테 가볼께요. 불가피한 경우에만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그러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세료자의 방으로 갔다. 거기서 그녀는 놀란 소년의 뺨을 눈물로 온통 적시면서, 너의 아버지는 성인이시며 어머니는 죽었다고 말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정말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집안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모든 잡다한 일들을 도맡았다. 그러나 실제적인 일에 능하지 않다는 그녀의 말은 겸손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린 지시들은 곧 변경될 수밖에 없었으니, 죄다 실행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주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몸종인 꼬르네이에 의해 변경되곤 했다. 그는 지금 아무도 모르게 까레닌의 집안 전체를 좌지우지하면서, 주인 나리가 옷을 갈아입을 때면 곁에서 조용히 조심스레 필요한 일들ㅇ르 보고하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지야 이바노브나의 도움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그를 향한 자신의 애정과 존경을 인식시킴으로써, 특히 그를 그리스도교로 전향시킴으로써(그녀로서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정신적인 지지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요컨대 무심하고 나태했던 신자를 최근 뻬쩨르부르끄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는 신흥 그리스도교 교의의 열성적이고 확고한 지지자로 변모시킨 것이다. 그 교의에 대해 확신을 갖는 일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로서는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나 그녀와 관점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상상력의 깊이를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었다. 즉 상상력이 불러일으킨 관념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다른 관념들이나 현실과의 상응을 필요로 하는 정신적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존재하는 죽음이 자신에게는 없으리라는 생각, 자신은 완전한 믿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그 믿음의 정도를 판단하는 자는 그 자신이었다) 마음속에 죄악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이곳 지상에서 이미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고 있다는 관념 속에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 어떤 가당치 않은 점이나 불합리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그러한 관념에 내포된 경박함이나 오류를 그도 어렴풋하게 느끼기는 했다. 그리고 매 순간 자신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며,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도 그리스도가 자시의 의지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금보다, 자신이 베푸는 용서가 숭고한 힘의 작용이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없이 그저 직접적인 감정에 자신을 내맡겼을 때 더 큰 행복을 느꼈다는 사실을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굴욕을 겪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로서는 비록 날조된 것일지언정, 모두에게 멸시당한 지금 남들을 멸시할 수 있을 만큼의 고결함을 지녀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그것이 진짜 구원인 양 자신의 가짜 구원에 매달렸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한창 젊고 열정적인 처녀였을 때 부유한 명문가 출신의 선량하고 방탕한 익살꾼에게 시집을 갔었다. 시집간 지 두 달째 접어들었을 때 남편은 그녀를 버렸고, 열정적이고 확신에 찬 그녀의 다정다감한 태도에 오로지 조롱으로, 심지어 적개심으로 응답하였다. 백작의 선량한 심정을 잘 알고, 열정적인 리지야에게서 그 어떤 결점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조롱과 적개심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비록 이혼은 안 했지만 각자 떨어져서 살았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만날 때면 변함없이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독기 어린 조소로 그녀를 대하는 것이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이미 오래전에 남편에 대한 흠모의 정을 거두었지만 그때부터 누군가에게 흠뻑 빠져 지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몇몇 사람들한테 느닷없이 흠뻑 빠졌는데, 그 대상은 남자이기도, 여자이기도 했다. 무언가 특출한 점이 있는 사람이면 그녀는 거의 다 열렬히 사모하곤 했다. 황제 일가와 친족 관계를 맺으면서 새롭게 출현한 모든 공주들과 왕자들을 흠모했으며, 어느 대주교와 부주교, 어느 사제에게 반하기도 했다. 어느 언론인을 사랑하기도 했고, 슬라브인 세 명과 꼬미사로[Osip Komissarov, 1838-1892. 실존 인물로 농노 출신의 모자 직공이었다. 18664월 우연히 뻬쩨르부르끄의 여름 정원에 들른 그가 그곳에서 알렉산드르 2세에게 총을 쏴 암살하려 했던 인물을 저지했다는 풍문이 돌면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를 열렬히 사랑한 적도 있었다. 어느 장관, 의사, 어느 영국인 선교사, 그리고 까레닌을 그녀는 사랑했다. 그 모든 사랑은 약해지거나 강해지면서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그녀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했으며, 엄청나게 넓게 포진된 궁정과 사교계의 복잡한 관계들을 건사하는 일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행이 까레닌을 덮치고 그녀가 그를 자신의 비호 아래 둔 시점부터, 즉 그녀가 까레닌의 집에서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그의 안녕을 돌보게 된 이후로, 그녀는 그 모든 나머지 사랑들은 진짜가 아니었으며 이제 까레닌 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고 느끼게 되었다. 지금 까레닌에게 느끼는 감정이 예전에 겪었던 그 모든 감정들보다 강렬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고 그것을 예전의 것들과 비교하면서, 그녀는 만일 꼬미사로프가 황제의 생명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며, 만일 슬라브 문제[러시아와 유럽 전역에서 1870년대에 첨예하게 제기된 이슈로, 오스트리아와 터키의 지배에서 슬라브 민족을 해방시키고 연방제를 실현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가 없었더라면 리스티치-쿠지츠키[세르비아의 정치가. 자국을 향한 터키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 맞서 투쟁한 인물로 당시 그의 이름은 러시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를 흠모하지도 않았으리라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반면에 까레닌의 경우, 그녀는 그를 그 자체로서 사랑했다. 그의 고결하고 오묘한 영혼, 그녀에게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길게 끄는 억양과 가느다란 목소리, 노곤한 눈빛, 그의 성품, 힘줄이 불거져 나온 희고 부드러운 손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와의 만남에서 기쁨을 느꼈을 뿐 아니라, 그의 얼굴에서 자신이 그에게 불러일으킨 인상의 징후들을 찾곤 했다. 그녀는 말뿐만 아니라 존재 전체로서 그의 마음에 들고자 했다. 만일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가 독신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몽상에 잠겨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가 방으로 들어올 때면 가슴이 설레어 얼굴을 붉혔고, 그가 무언가 듣기 좋은 말을 할 때면 환희에 찬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벌써 며칠째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나가 브론스끼와 뻬쩨르부르끄에 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그녀와 만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런 끔찍한 여자와 한 도시에 있으며 어느 순간이고 그녀와 마주칠 수 있다는 괴로운 자각에서조차 그를 구해 내야만 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는 지인들을 통해서,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저 혐오스러운 작자들'이 뭘 하려고 하는지를 탐색하는 한편, 자신의 벗이 그 며칠 사이에 그들과 마주치지 못하도록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려 애썼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정보통이 되어 줌으로써 이권을 얻고자 했던 브론스끼의 친구이자 젊은 부관이 전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볼일을 다 보았고 다음 날 떠날 예정이었다. 따라서 리지야 이바노브나는 이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튿날 아침 전갈이 왔다. 그 필체를 알아본 그녀는 경악했다. 그것은 안나 까레니나의 필체였다. 봉투는 나무껍질처럼 두꺼운 재질의 종이로 만든 것이었다. 길다랗고 누런 종이 위에 커다랗게 이니셜이 젹혀 있었고 편지지에서는 감미로운 향기가 났다.

"누가 가져왔나?"

"호텔 급사가 가지고 왔습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앉아서 편지를 읽으려 했지만 한참 동안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고질병인 흥분으로 인한 발작적 호흡 곤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웬만큼 진정된 뒤에 그녀는 프랑스어로 씌어진 다음과 같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Madame la comtesse(백작 부인), 당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심성을 믿고 감히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들과 떨어져 있기에 저는 불행합니다. 떠나기 전에 단 한 번만 아들을 볼 수 있게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저의 존재를 상기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아니라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저의 존재를 상기시킴으로써 그토록 관대한 분으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에 대한 당신의 우정으로 미루어, 저를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세료자를 저에게 보내 주실는지요, 아니면 정해진 시간에 제가 집으로 갈까요? 혹은 집 밖에서, 언제 어디서 볼 수 있다고 일러 주실는지요? 이 일의 결정권을 갖고 계신 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잘 알기에 거절하시리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보고 싶어 하는 저의 열망이 큰지 모르실 테죠. 그러므로 당신의 도움이 저에게 얼마나 깊은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실 겁니다.

 

안나

 

편지에 담긴 모든 것이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편지의 내용도, 관대함에 대한 암시도, 특히 건방지게 느껴지는 말투가 그러했다.

"답장은 없을 거라고 전하게."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이렇게 이르고는 곧바로 압지첩을 열더니, 12시경 궁전에서 열리는 축하연에서 만나고 싶다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적어 보냈다.

"중요하고도 서글픈 일에 관해서 당신과 의논을 해야겠습니다. 어디서 이야기를 나눌 것인지는 그곳에서 만나 정하기로 하죠. 제일 좋은 곳은 저의 집입니다. '당신'이 마실 차를 준비하라고 이르겠어요. 꼭 만나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지워 주십니다. 또한 견뎌 낼 힘도 주시지요."

마지막 부분은 까레닌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덧붙이 내용이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보통 하루에 두세 통의 쪽지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보내곤 했다. 그러한 소통 방식이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다른 사적인 관계들에게는 결여된 우아함이나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축하연이 끝나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리를 뜨면서 서로를 대면하고는 새로 수여된 포상이나 주요 관료들의 관직 이동 같은 최신 뉴스들을 교환했다.

"마리야 보리소브나 백작 부인한테는 국방부 장관직을 주고, 참모 총장직에는 바뜨꼬프스까야 공작부인을 임명하는 겁니다." 금실로 수를 놓은 제복 차림의 백발 노인이 관직 이동에 대해 묻는 키 큰 미녀 여관(女官)을 향해 말했다.

"그럼 저는 부관이 되는 거고요." 여관이 웃으며 응수했다.

"당신한테 내릴 관직은 따로 있습니다. 종무 관련 직첵이지요. 게다가 당신의 보좌관은 까레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노인이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과 악수를 했다.

"까레닌에 대해 뭐라고 하신 겁니까?" 공작이 물었다.

"그 사람과 뿌짜또프가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훈장을 받았답니다."

"이미 받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저길 좀 보십시오." 노인이 자신의 수놓인 모자로 국가 의회의 영향력 있는 의원과 함께 홀의 문가에 서 있는 까레닌을 가리켰다. 까레닌은 궁정 제복 차림에 어깨에는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는군요, 마치 2꼬뻬이까 동전처럼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는 운동선수 같은 체격의 미남 궁중 시종에게 악수를 건네려고 멈춰 섰다.

"아닙니다, 저분은 늙어 버렸습니다." 궁중 시종이 말했다.

"신경 쓸 일이 많으니까요. 요즘은 종일 기획안을 쓰신답니다. 이제 항목별로 설명을 다 마치기 전까지는 저 불운한 위인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늙다니요? Il fait des passions(연애를 하고 계신걸요). 제 생각엔 이제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저분의 아내를 질투하고 계실 겁니다."

"무슨 말씀을!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에 관해서라면 악담을 삼가 주시지요."

"아니, 그분이 까레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게 무슨 악담입니까?"

"그런데 까레니나가 여기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러니까 여기 궁정이 아니라 뻬쩨르부르끄에 있습니다. 어제 그들과 마주쳤지 뭡니까. 알렉세이 브론스끼와 bras dessus, bras dessous(서로 팔짱을 끼고 있더군요), 모르스까야 거리에서 말입니다."

"C'est un homme qui n'a pas(그 사람한테는 부족한 게 있는데)……" 궁중 시종이 말을 꺼내려다 중단하고서 지나가는 황족 부인에게 길을 내주며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사람들은 쉬지 않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 관해 뒷공론을 펼치며 그를 헐뜯고 조롱했다. 한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국회 의원이 가던 길을 막고 그를 붙들어 놓은 채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며 재정 기획안에 관하여 조목조목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내가 떠난 것과 거의 동시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는 공직자로서 가장 비통한 일이 일어났다. 진급이 중도에 멈춰 버린 것이다. 그의 진급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명백하게 인지했으나, 정작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본인은 자신의 출세 가도가 이제 막을 내렸음을 깨닫지 못했다. 스뜨레모프와의 충돌 때문인지, 아내와의 파경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에게 정해진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해 모두에게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그의 공직 행로가 끝장났다는 사실이었다. 여전히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고 여러 위원회와 기구의 위원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미 더 나올 게 없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뭘 말하든, 뭘 제안하든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다 알려진 것이자 쓸데없는 것을 제안한다는 듯 그를 대했다.

그러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런 점을 눈치채지 못했으며, 오히려 행정 업무에의 직접적인 참여를 면한 지금 전보다 더 분명하게 다른 사람들의 활동에서 결함이나 오류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들을 교정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여기는 것이었다. 아내와 결별한 뒤 곧바로 그는 새로운 사법 제도에 관한 자신의 첫 기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가 쓰기로 정해져 있는 것으로 관청의 온갖 부서에 관한,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무수한 기록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공직 세계에서 자신의 입지에 전망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기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업무 수행에 만족하고 있었다.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쓰게 되지만,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이제 모든 일에 있어 성서의 지도를 받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이 구절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아내 없이 혼자 남은 뒤로 그는 그러한 단순한 업무 구상들을 통해서 자신이 예전보다 더 주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국가 의회 의원이 그에게서 놓여나고 싶어 안달하며 초조한 기색을 보여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흔들림이 없었다. 의원이 황실 가문의 인사가 지나가는 틈을 타 그에게서 빠져나갔을 때에야 그는 장광설을 그쳤다.

홀로 남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생각을 모으느라 고개를 숙였다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 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을 만날 요량으로 문가로 향했다.

'다를 얼마나 굳세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는가.' 가지런히 빗질된 향내 나는 구레나룻에 단단한 체격을 지닌 궁중 시종과 제복을 딱 맞게 차려입은 공작의 불그레한 목을 보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생각했다. 그는 그들 곁을 지나쳐 가야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악이라더니, 정말 옳은 소리야' 궁중 시종의 장딴지를 다시금 힐끔거리면서 그는 생각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평소처럼 노곤한 듯 위엄 있는 모습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에 대해 쑥덕거리던 신사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문 쪽을 쳐다보며 눈으로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을 찾았다.

"!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자신과 나란히 서게 된 까레닌이 냉담하게 목례를 하자 노인이 두 눈을 사악하게 빛내며 말했다. "여태 축하 인사를 못 했네요." 까레닌의 새 훈장 띠를 가리키며 그가 말을 이었다.

"고맙습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대꾸했다. "이 얼마나 '근사한' 날입니까." 그가 버릇대로 '근사한'에 힘을 주며 덧붙였다.

그들이 자신을 비웃는다는 것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애초에 그들에게서 적의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 일에 익숙해진 것이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코르셋 위로 솟은 누런 어깨와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아름답고 상념 어린 눈을 발견하고 변함없는 흰 치아를 드러내 씩 웃어 보인 뒤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최근 선보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리지야 이바노브나의 치장은 엄청난 공을 들인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30년 전 추구했던 것과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목적으로 몸단장을 했다. 그때 그녀는 무엇으로든 자신을 꾸미고 싶어 했고, 치장을 많이 할수록 더 예뻤다. 지금은 반대로 치장이 그녀의 나이와 생김새에 어울릴 수가 없었기에, 오로지 몸단장과 외모의 대비가 너무 흉측하게 드러나지 않게끔 신경을 써야 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는 그러한 목적이 달성되어서, 그에게 그녀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그녀는 자신을 에워싼 적의와 조소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선량한 호의의 섬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한 사랑의 섬이기도 했다.

조소 어린 눈길들의 대열을 통과하면서, 마치 식물이 빛을 향하듯 그는 사랑에 잠긴 그녀의 눈길 쪽으로 자연스레 이끌려 갔다.

"축하드려요." 그녀가 훈장 때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만족감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억제하면서 그는 눈을 감고 양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그런 건 자신을 그리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본인은 결코 인정하지 않지만, 그것이 그의 주된 기쁨 중 하나라는 것을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천사는 어떤가요?"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세료자를 염두에 두고 물었다.

"전적으로 만족스럽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눈썹을 치올리며 눈을 떴다. "시뜨니꼬프 역시 못마땅해하고 있죠(시뜨니꼬프는 세료자의 훈육을 담당하는 교사였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아들 녀석한테서 모든 사람들과 아이들의 영혼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어딘지 냉담하게 대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공직 업무 외에 유일하게 관심을 두는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시작했다. 바로 아들의 교육 문제였다.

리지야 이바노브나의 도움으로 다시 일상생활과 업무에 복귀했을 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의 손에 남겨진 아들의 교육에 전념하는 것이 스스로의 의무라고 느꼈다. 예전에는 교육 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던 그가 이제는 교과 교육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에 일정 시간을 할애했다. 인류학, 교육학, 교수법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며 교육에 대한 나름의 계획을 세웠고, 뻬쩨르부르끄 출신의 훌륭한 교육자를 초빙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그 일은 항상 그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씨를 보세요. 제가 보기엔 그 아이는 아버지와 같은 심성을 갖고 잇어요. 그런 아이가 나쁜 아이일 리는 없죠."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감탄조로 말했다.

"그래요, 어쩌면 그럴지도.저로서는 그저 제 의무를 이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죠."

"저희 집으로 좀 와주세요." 잠시 침묵하던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좀 서글퍼할 일에 대해 의논을 해야 해서요. 저야 당신이 몇몇 기억에서 놓여나기 위해서라면 모든 걸 다 내놓을 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나 봐요. '그 여자'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그 여자'가 여기, 뻬쩨르부르끄에 있어요."

아내 얘기가 나오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바로, 죽은 사람 같은 굳은 표정이 그의 얼굴에 드리웠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그도 완전히 무력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정이었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는 황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존엄한 영혼과 마주하며 밀려드는 희열로 인해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솟구쳤다.

 

골동품 도자기가 놓여 있고 초상화가 걸린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자그맣고 안락한 서제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들어섰을 때, 방의 주인은 아직 거기 업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식탁보가 깔린 둥근 탁자 위에 중국산 다기 세트와 은제 술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서재를 장식한 수없이 많은 지식인들의 초상화들을 멍하니 둘러보고는, 탁자 앞에 앉아 거기 놓인 복음서를 펼쳤다. 백작 부인의 비단 드레스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 이제 우리 편안히 앉아요."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설렘이 감도는 미소를 띤 채 탁자와 소파 사이를 황급히 빠져나왔다.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도록 하죠."

운을 띄우기에 앞서 몇 마디 건넨 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붉히더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손에 자신이 받은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읽은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저한테 그녀의 청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가 눈길을 들면서 소심하게 말했다.

"나의 벗님! 당신은 그 누구한테서도 악을 보지 못하시는군요!"

"그 반대로, 저는 모든 게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는 게 정당할까요……?"

주저함이 엿보이는 그의 얼굴에,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하여 조언과 지지와 지도를 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요…….."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든 일에는 한도라는 게 있어요. 저도 패륜까지는 이해해요." 전적으로 솔직한 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자들을 패륜으로 몰고 가는 게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잔인함은 이해할 수 없어요. 누구한테 잔인하냐고요? 당신한테죠! 어떻게 당신이 있는 도시에 머물 수 있죠? 그래요,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해요. 저는 당신의 고결함과 그 여자의 저열함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하지만 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자신의 배역에 흡족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는 모든 것을 용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이 요구하는 바를, 아들에 대한 사랑이 요구하는 바를 그녀에게서 박탈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라고요, 나의 벗님? 그게 진정으로 그럴까요? 당신이 용서했고, 용서하신다고 쳐요..하지만 저 천사의 영혼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요? 아드님은 그 여자가 죽은 줄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 여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그 여자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있다고요..그리고 그러는 게 나아요. 대체 아드님은 뭐라 생각하겠어요?"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분명하게 동의를 표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말이 없었다.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만일 저에게 조언을 구하신다면……." 기도를 마친 그녀가 얼굴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조언드리겠어요. 당신이 얼마나 고통받고 계신지, 그 일이 당신의 모든 상처를 어떻게 건드려 놓았는지, 제가 그걸 모르겠어요? 언제나처럼 당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망각한다고 쳐요. 하지만 그게 과연 어떻게 귀결될까요? 당신 입장에서는 새로운 고통으로, 아드님으로서도 고뇌로 귀결되지 않겠어요? 만일 그 여자에게 인간적인 무엇인가 남아 있었더라면, 스스로가 그런 걸 바랄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요, 저는 망설임 없이 그러시지 말았으면 해요. 그리고 만일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쓰겠어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고,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부인,

부인의 아드님께 부인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일은 아드님으로 하여금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을 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대답해 줄 수 없는 까닭은 신성한 의미를 지니는 것에 대해 책망하는 마음을 아드님에게 심어 주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남편께서 기독교적인 사랑의 정신으로 청을 거절하심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부인에게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백작 부인 리지야 이바노브나

 

이 편지로 리지야 이바노브나는 자기 자신에게도 감춰 놓았던 비밀스러운 목적을 달성하였다. 편지가 안나에게 뼛속 깊이 모욕감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한편 그날 리지야 이바노브나의 집에서 돌아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평소 늘 하던 일들에 전념할 수가 없었으며, 신앙인이자 구원받은 자로서 예전에 느끼던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도 없었다.

자기 앞에서 아내는 너무나 큰 죄인이고,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정당하게 지적한 대로 그녀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 성스러운 존재이므로, 아내에 대한 기억은 그의 심사를 어지럽힐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책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를 대했던 자신의 태도와 그녀에게 저질렀던 잘못들에 대한 괴로운 기억들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경마장에서 돌아오던 길에 그녀의 고백을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특히 그녀에게 외견상의 예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결투 신청은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기억이 마치 회한처럼 그를 괴롭혔다.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용서를 베풀고 남의 아이를 보살폈던 일이 수치심과 회환으로 그의 심장을 불태웠다.

또한 그는 지금 그녀와 함께했던 지난날을 전부 돌이키며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에게 청혼했을 때 내뱉었던 옹색한 말들을 떠올리면서 마찬가지의 수치심과 회환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그가 생각했다. 그에게 이 질문은 항상 또 다른 질문을 낳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브론스끼나 오블론스끼.장딴지가 단단한 그 궁중 시종 같은 이들은 다른 식으로 느끼고 다른 식으로 사랑하며, 다른 식으로 결혼한단 말인가?' 그러자 예의 싱싱하고 체력 좋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무심결에 언제 어디서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호기심 가득한 주의를 끌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런 생각들을 떨쳐 버리고, 자신은 이승의 한시적인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해서 살아가며 자신의 영혼 속에는 평화와 사랑이 거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키고자 애썼다. 그럼에도 이 덧없고 하찮은 삶 속에서 그의 생각으로는 몇 가지 너절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 괴롭혔으니, 그리하여 여태 믿어 왔던 영원한 구원이라는 건 없다고까지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유혹은 오래가지 않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마음속에는 곧 예전의 평화와 고결함이 복구되었고, 그 덕분에 그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래 어찌 됐어, 까삐또니치?" 생일 전날 산책을 나갔다가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기분 좋게 돌아온 세료자가 늙은 수위에게 주름 잡힌 외투를 건네면서 물었다. 키가 큰 수위는 껑충한 높이에서 조그만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 그 붕대 감은 관리가 왔다 갔어? 아빠가 그를 만나 주셨어?"

"접견하셨습니다. 주임님이 나가자마자 제가 아뢰었습죠." 유쾌한 표정으로 눈짓을 하면서 수위가 말했다. ", 제가 벗겨 드리죠."

"세료자!" 내실로 통하는 문 앞에 선 채, 슬라브인 가정 교사가 외쳤다.

"직접 벗으세요."

가정 교사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료자는 그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수위의 멜빵을 붙잡고 선 채 그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서, 아빠가 그 사람한테 필요한 걸 해줬어?"

수위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붕대를 감은 그 관리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무언가 청탁하러 일곱 번이나 다녀갔기에 세료자와 수위의 관심을 끌었다. 한 번은 그를 현관에서 마주쳐, 자신과 아이들이 다 죽게 생겼다면서 자신이 찾아왔음을 아뢰어 달라고 수위에게 애처럽게 부탁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후에 세료자는 한 번 더 현관에서 그 관리와 마주쳤고, 그에게 관심을 쏟게 되었다.

"어땠어? 아주 기뻐했지?" 세료자가 물었다.

"기뻐하다마다요! 거의 펄쩍펄쩍 뛰면서 나가더군요."

"그런데 혹시 뭐 온 건 없고?" 잠시 말이 없던 세료자가 이렇게 물었다.

"글쎄요, 도련님.." 수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귀엣말로 말했다.

"백작 부인한테서 온 게 있지요."

수위가 얘기하는 것이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자기한테 보낸 생일 선물이라는 걸 세료자는 금방 알아챘다.

"뭐라고? 어디 있는데?"

"꼬르네이가 아버님 방에 갖다 뒀습니다. 틀림없이 아주 좋은 걸 겁니다."

"얼마나 큰데? 이정도 돼?"

"그보다는 좀 작습니다만, 좋은 겁니다."

"책이야?"

"아니요, 물건이던데요. , 어서 가보십시오, 바실리 루끼치가 부르십니다." 가정 교사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자 수위가 자신의 멜빵을 붙들고 있던, 장갑이 반쯤 벗겨진 손을 조심스레 바로잡아 주면서 눈을 찡긋하고는 고갯짓으로 부니치를 가리켰다.

"바실리 루끼치, 지금 가요!" 맡은 의무에 충실한 바실리 루끼치를 늘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예의 쾌활하고 정다운 미소를 지으며 세료자가 대답했다.

세료자는 너무나 즐거웠고 모든 게 너무나 행복했기에, 여름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조카달에게서 들은 또 하나의 집안 경사를 자신의 친구인 수위와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경사가 관리의 기쁨과 장난감을 받은 자신의 기쁨에 더해져 그에게는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세료자에게 그날은 내내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는 그런 날이었다.

"있잖아, 아빠가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훈장을 받았다는 거 혹시 알고 있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벌써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하러 다녀갔는걸요."

"어때, 아빠는 기뻐하셔?"

"황제가 내려 주신 은덕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만큼 공을 쌓으셨다는 뜻이지요." 수위가 근엄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료자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훤히 알고 있는 수위의 얼굴을, 특히 희끗희끗한 구레나룻 사이로 늘어진 턱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그 턱은 언제나 수위를 아래로부터 쳐다볼 수밖에 없는 세료자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할아범 딸은 집에 다녀간 지 한참 됐지?"

수위의 딸은 발레 무용수였다.

"평소에 다녀갈 겨를이 있겠습니까? 걔들도 수업이 있으니까요. 도련님도 수업이 있으시잖습니까. 어서 가보세요."

방으로 온 세료자는 수업을 받기 위해 책상에 앉는 대신, 선물로 가져온 물건은 자동차가 틀림없다는 추측을 교사에게 얘기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가 물었다.

그러나 바실리 루끼치는 오로지 2시에 도착할 교사를 위해서 문법 수업을 준비시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그럼 이것만 좀 얘기해 주세요, 바실리 루끼치."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양손에 책을 들고 있던 세료자가 갑자기 물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끼보다 더 높은 게 뭐예요? 아빠가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훈장을 받은 거 아세요?"

바실리 루끼치는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훈장보다 더 높은 건 블라지미르 훈장이라고 대답했다.

"그것보다 더 높은 건요?"

"모든 것 중에서 제일 높은 건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안드레이> 훈장입니다."

"안드레이 훈장보다 더 높은 건요?"

"모르겠는데요."

"어떻게 선생님이 모르실 수가 있어요?" 그러고서 세료자는 팔꿈치를 괸 채 깊은 공상에 빠졌다.

그의 공상은 아주 복잡하고 다채로웠다. 그는 아버지가 별안간 블라지미르와 안드레이 훈장을 받는 상상을 하다가 이어서 자신이 수업 시간에 훨씬 더 착해지고, 자라서는 그 모든 훈장은 물론 사람들이 고안해 낸, 안드레이 훈장보다 더 높은 훈장까지 받는 상상을 했다. 새 훈장을 고안하자마자 자신은 그걸 받을 만한 공적을 쌓게 될 것이었다. 사람들이 더 높은 훈장을 고안해 내면, 그 즉시 자신이 그에 걸맞는 공적을 쌓은 식이었다.

그러한 공상 속에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래서 교사가 왔을 때는 시간 및 장소의 상황어와 행위 양상의 상황어 수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교사는 불만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서글펐고, 그의 슬픔이 세료자의 심금을 울렸다. 학과를 다 외우지 않은 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사가 설명해 주는 동안에는 확신이 서고 이해가 가는 것 같다가도, 혼자 남게 되면 그 즉시 '갑자기'라는 짤막하고 너무나 명백한 단어가 행위 양상을 나타내는 '상황어'라는 것을 도저히 기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엇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선생님을 슬프게 했다는 게 안타까웠고, 선생님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는 선생님이 말없이 책을 보는 순간을 포착했다.

"미하일 이바니치, 선생님의 영명 축일은 언제인가요?" 세료자가 느닷없이 물었다.

"공부 생각이나 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영명 축일은 이성적인 인간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여느 날들과 똑같이 공부를 해야 하는 날일 뿐이죠."

세료자는 선생님을, 그의 성긴 턱수염과 콧등에 생긴 자국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온 안경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고, 이미 교사가 설명해 주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선생님이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선생님의 어조에서 그 사실을 감지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사람들은 저렇게 지루하고 쓸데없는 걸 죄다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기로 약속한 걸까? 대체 왜 선생님은 나를 자기한테서 밀어내는 걸까?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일까?' 그가 우수에 잠긴 채 자문했다. 대답은 찾을 수 없었다.

 

교사와의 수업 다음으로 아버지와의 수업이 있었다.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세료자는 책상 앞에 앉아서 가위로 장난을 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산책하는 동안 어머니를 찾는 것은 세료자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을 대체로 믿지 않았으며, 특히나 어머니의 죽음은 믿지 않았다. 비록 리지야 이바노브나가 그렇게 일러 주었고, 아버지까지 확인해 주었어도 그랬다. 그래서 어머니가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뒤에도 그는 산책을 하는 동안 어머니를 찾곤 했다. 통통하고 우아한 검은 머리의 여자는 다 어머니였다. 그런 여자가 눈에 띄면, 세료자의 가슴속에서는 애틋한 감정이 북밭쳐서 숨이 막히고 눈물이 솟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자기한테 다가와 베일을 벗어 올리기를 가만히 기다리곤 했다. 얼굴이 모두 드러나고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를 끌어안으면, 그녀의 냄새를 맡고 그 손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행복의 눈물을 흘릴 터였다. 언젠가 저녁때 어머니의 다리를 베고 눕자 어머니가 그에게 간지럼을 태우길래 까르르 웃으며 그녀의 반지 낀 흰 손을 깨물었던 때처럼 말이다. 나중에 어머니는 죽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리지야 이바노브나가 그에게 어머니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 까닭은 어머니가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걸(이 점은 그는 결코 믿을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유모로부터 우연히 알게 되고도, 그는 예전과 똑같이 어머니를 찾거나 기다리곤 했다. 오늘 여름 궁전에는 보랏빛 베일을 쓴 어느 귀부인이 있었다. 그는 죄어드는 가슴으로 어머니이길 고대하면서 그녀가 좁다란 길을 따라 자기네 일행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 귀부인은 세료자 곁에 채 다가서기도 전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북받치던 세료자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걸 망각하고는, 책상 귀퉁이를 주머니칼로 온통 그어 대며 반짝이는 두 눈으로 자기 앞을 응시한 채 어머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버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바실리 루끼치의 말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세료잔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에 입을 맞추고는 그의 얼굴을 주의 깊게 응시하면서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훈장을 받아서 기뻐하는 기색을 찾아보려 했다.

"산책은 잘했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안락의자에 앉아 구약성서를 앞에 가져와 펼치면서 말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성스러운 역사를 확실하게 알아 둬야 한다고 세료자에게 수차례나 일렀으면서도, 그 자신 또한 구약성서에 한해서는 책을 들추며 원문을 참조하곤 했다. 세료자도 그 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 아주 즐거웠어요, 아빠." 세료자가 비스듬히 앉은 채 의자를 흔들면서 말했다. 의자를 흔드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나젠까를 봤어요(나젠까는 리지야 이바노브나가 양육하고 있는 그녀의 조카딸이었다). 나젠까가 그러는데, 아빠가 새 훈장을 받으셨다고요. 기쁘시죠, 아빠?"

"첫째, 제발 의자 좀 흔들지 말아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둘째, 귀중한 건 상이 아니라 노력이란다. 네가 이 말을 이해해 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네가 말일 상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공부한다면, 그 노력은 힘들게 느껴질 거다. 하지만(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118장의 서류에 서명을 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노동을 수행하면서 의무감으로 스스로를 이겨 낸 그날 아침나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일이 좋아서 노력한다면, 그 속에서 자신을 위한 상을 발견하게 될 거야."

다정하고 쾌활하게 빛나던 세료자의 두 눈이 생기를 잃고 아버지의 시선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대할 때마다 구사하는 말투, 아주 오래전부터 익숙한 그 말토를 세료자는 이미 흉내 내는 법까지 터득하고 있었다. 세료자가 느끼기에, 아버지는 자기와 대화할 때면 언제나 그 어떤 상상 속의 소년을 대하는 듯 굴었다. 책에서나 나올 법한, 하지만 자기와는 전혀 닮지 않은 소년이었다. 그래서 세료자도 항상 아버지와 있을 때면 책에 나오는 그런 소년인 척 꾸며대곤 했다.

"내 말 이해하겠지?" 아버지가 물었다.

", 아빠." 세료자가 상상 속의 소년인 척하며 대답했다.

수업 내용은 복음서의 몇몇 구절을 암송하고 구약의 첫 대목을 복습하는 것이었다. 세료자는 복음서의 구절들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암송하며 세료자는 관자놀이에서 너무 심하게 구부러져 있는 아버지의 이마뼈를 바라보는 데 정신이 팔려 그만 머릿속이 헷갈렸고, 그래서 한 구절이 시작되는 대목에서 같은 단어로 된 다른 구절의 끝 대목을 갖다 붙이고 말았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보기에는 아들이 암송하는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기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세료자가 이미 여러 차례 들었으며, 너무나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절대로 외울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갑자기'가 행위의 양상을 가리키는 상황어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설명이었다. 세료자가 겁먹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던 건 오로지 한 가지, 간호 가다 그랬던 것처럼 외웠던 것을 다시 되풀이해 보라고 시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 생각에 너무나 겁을 먹는 바람에 이제 그는 아무것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되풀이해 보라고 시키지 않고 구약 수업으로 넘어갔다. 세료자는 역사적 사건들 자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썩 잘해 냈다. 그러나 몇몇 사건들이 어떤 미래를 예시하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되자, 그 수업 때문에 이미 벌을 받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태초의 족장들에 관한 대목에 이르자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우물쭈물 하면서 책상에 가위질을 하거나 의자를 흔들어 댔다.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 에녹 말고는 그들 중에 아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는 다 외운 그 이름들을 지금은 에녹을 빼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이는 특히 구약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에녹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에녹이 산 채로 승천했다는 일화가 그가 지금 아버지의 시곗줄과 반쯤 채워진 조끼의 단추를 가만히 응시하며 온 정신을 쏟고 있던 길고 긴 상념의 행로와 접목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자주 언급하는 죽음을 세료자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특히 자기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건 그에게 전적으로 불가능했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모두가 다 죽을 거라고 말했다. 심지어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들마저 그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유모 역시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에녹은 죽지 않았다. 그런즉 모두가 죽는 건 아니었다. '어째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똑같이 공을 세우고서 살아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는 겁니까?' 세료자는 생각했다. 나쁜 사람들, 즉 세료자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을 수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은 모두 에녹처럼 될 수 있었다.

"그래, 어떤 족장들이 있었지?"

"에녹, 에노스요."

"그건 이미 얘기했잖아. 형편없구나, 세료자, 아주 형편없어. 그리스도교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면."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 뭐가 네 관심을 끌 수 있단 말이냐? 정말 못마땅하구나. 뾰뜨르이그나찌치(그는 주임교사였다)도 너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어..너에게 벌을 내려야겠다."

아버지와 교사 두 사람 모두 세료자를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으니, 실제로 그가 공부를 아주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능한 소년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반대로, 세료자는 교사가 그에게 본보기로 드는 학생들보다 더 재능 있는 학생이었다. 아버지의 관점에서 볼 때는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우려 들지 않는 아이였지만, 본질을 말하자면 그는 그런 걸 배울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나 교사가 제기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욕구가 잠재하고 있었다. 그 두 가지 욕구가 충돌하자 그는 곧바로 자신의 교육자들에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홉 살 먹은 어린애였을지언정 세료자는 자신의 마음만은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소중했다. 눈꺼풀이 눈동자를 소중히 간직하듯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리고 사랑의 열쇠가 없으면 아무도 마음속에 들이지 않았다. 그를 훈육하는 이들은 그가 공부를 하려 들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세료자의 마음은 지식욕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그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는 까삐또니치, 유모, 니젠까, 바실리 루끼치였지 교육자들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주임 교사가 자신의 물레방아에 흘러내리길 고대하던 물줄기는 이미 다 새어 나가 다른 곳에서 흐르며 제 일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리지야 이바노브나의 조카인 니젠까에게 못 가게 함으로 써 세료자에게 벌을 내렸다. 그러나 이 벌은 오히려 세료자에게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 벌은 오히려 세료자에게 행운이었다. 기분이 좋았던 바실리 루끼치가 풍차 만드는 법을 보여 주었으니 말이다. 위에 올라타 뱅뱅 돌 수 있는 풍차를 어떻게 만들지 궁리하고 공상하느라 그날 저녁은 통째로 흘러가 버렸다. 풍차 날개에 두 팔로 매달리면 될까? 아니면 몸을 거기에 묶은 다음 뱅뱅 돌면 되는 걸까? 저녁 내내 어머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자 불현듯 어머니가 떠올랐다. 세료자는 내일, 자신의 생일에 맞춰서 어머니가 이제 숨바꼭지를 그만두고 곁에 와주기를 소리 내어 기도했다.

"바실리 루끼치, 본래 하던 거 말고 내가 또 뭘 기도드렸는지 아세요?"

"공부를 더 잘하게 해달라고요?"

"아니요."

"장난감을 갖게 해달라고요?"

"아니에요, 못 알아맞히실 거예요. 멋진 건데 비밀이에요! 기도가 이루어지면 말씀드릴게요. 아직 못 맞혔죠?"

", 모르겠네요. 도련님이 얘기해 보세요." 바실리 루끼치가 평소답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 누우세요, 촛불을 끌 테니."

"그런데 저는요, 촛불을 끄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거랑 기도드렸던 게 더 잘 보여요. 이것 좀 봐, 하마터면 비밀을 말할 뻔했네!" 세료자가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촛불을 내가자 세료자는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느꼈다. 어머니는 세료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사랑 가득한 눈길로 그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나 풍차와 주머니칼이 나타나더니 모든 게 뒤섞여 버렸다. 곧 그는 잠이 들었다.

 

뻬쩨르부르끄에 도착한 브론스끼와 안나는 최고급 호텔 중 한 곳에 묵었다. 브론스끼는 아래층에 따로 방을 얻었고, 안나는 아이와 유모, 하녀와 함께 위층의 방 네 칸짜리 넓은 객실에 들었다.

도착 당일 형을 찾아간 브론스끼는 뜻밖에도 볼일이 있어 모스끄바에서 온 어머니와 만났다. 어머니와 형수는 평소처럼 그를 맞이했다. 외국 여행에 관히 이것저것 묻고, 모두가 아는 지인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에 형은 이튿날 브론스끼를 찾아와 자기 쪽에서 먼저 그녀에 대해 물었다. 알렉세이 브론스끼는 형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를, 자신은 까레니나와의 관계를 결혼한 사이처럼 여긴다고 했다. 그녀의 이혼이 성사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때 가서는 그녀와 결혼할 생각지만 그 전이라 해도 다른 모든 아내들과 매한가지로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간주할 거라고, 그러니 어머니와 형수에게도 그렇게 전해 달라고 그는 형에게 부탁했다.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상관없어." 브론스끼가 말했다. "하지만 친척들이 나와 친족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내 아내와도 똑같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해."

동생의 생각을 항상 존중했던 형으로서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동생이 옳은 건지 틀린 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기로서는 그런 관계에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그는 알렉세이와 함께 안나를 보러 갔다.

브론스끼는 남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형이 있는 데서도 안나를 격식을 갖추어 '당신'이라고 부르며 가까운 친지를 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는 형이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음을 고려한 처사였다. 또한 그는 안나가 자신의 영지로 갈 거라는 언질을 내비치기도 했다.

사교계에서 쌓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브론스끼는 새로운 상황에 처한 뒤로 이상하게도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잦았다. 이제 자신과 안나에게 사교계가 닫혀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할 터였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그런 건 옛날 얘기일 뿐 세상은 빨리 진보하고 있으며(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진보의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사교계의 시선도 바뀌었으니 자기네들이 사교계에서 받아들여질지 말자는 아직 결정된 문제가 아니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곤 했다. '물론 궁정 사교계야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당연히 이해해 줄 거야.'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무엇도 자신이 자세를 바꾸는 걸 방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느 ㄴ경우,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있어야만 한다는 걸 알게 되면, 쥐가 나고 경련이 이는 다리는 원하는 곳으로 뻗치고자 움찔거리기 마련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브론스끼는 사교계에서 체감하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들에게 사교계의 문이 굳게 닫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이제 세상이 변할 것이며 그러면 자기들도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시험해 보곤 했다. 그러나 자기 개인에게는 사교계가 열려 있다 해도 안나에게만큼은 닫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순식간에 알아채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이 쥐 잡기 놀이에서처럼, 그에게는 들어 올려진 팔이 안나 앞에서는 내려가는 형국이었다.

브론스끼가 제일 먼저 대면한 뻬쩨르부르끄 사교계의 귀부인 중 한 사람은 그의 사촌 누이인 벳시였다.

"마침내 돌아왔군요!" 벳시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나는요? 정말 반가워요! 어디서 묵고 있나요? 멋진 여행을 다녀온 직후이니 우리 뻬쩨르부르끄가 두 분에게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이 되네요. 로마에서의 허니문이 얼마나 좋았을까! 이혼은 어찌 됐나요? 다 마무리된 건가요?"

이혼이 아직 성사되지 않았음을 알자 벳시의 반가운 표정이 누그러드는 것을 브론스끼는 눈치챘다.

"나한테 돌을 던질 거라는 거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안나를 만나러 가겠어요. 그래요, 꼭 가겠어요. 여기 오래 머물지는 않을 거죠?"

정말로 그녀는 그날 안나에게 갔다. 그러나 그녀의 어조는 결코 예전같지 않았다. 자신의 용기를 자랑스레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고, 안나가 자신의 신의를 정당하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티가 역력했다. 그녀는 사교계의 소식들을 늘어놓으며 10분이 채 안 되는 동안 머무르다가, 떠나면서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이혼할 건지 말씀 안 해주셨죠. 저야 이런 거 저런 거 안 따진다고 쳐요. 하지만 완고한 사람들은 당신들이 결혼할 때까지 냉기를 퍼부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이제 너무나 간단해요. Ca se fait(원래 그렇죠). 그럼, 금요일에 떠나시는 건가요? 더는 못 만날 테니 아쉽네요."

그녀의 어조만 보고도 브론스끼는 사교계의 반응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자기 가족들에게 시험을 해보았다. 어머니한테는 기대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안나에게 그토록 열광했던 어머니가 지금은 아들의 출셋길을 망쳐 놓은 원인이라며 그녀에게 냉혹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형수인 바랴에게는 큰 기대를 걸었다. 그녀라면 돌을 던지지 않고, 담백하고도 단호하게 안나를 찾아가 그녈ㄹ 받아들여 줄 것만 같았다.

도착한 다음 날 브론스끼는 바랴를 찾아갔다. 그녀 혼자 있는 걸 보고서 그는 자신의 바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봐요, 알렉세이." 그녀가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나는 도련님을 좋아하고, 도련님을 위해서는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내가 도련님과 안나 아르까지예브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던 거예요." 그녀는 '안나 아르까지예브나'를 특히 공들여 발음했다. "내가 그녀를 비난하리라는 생각은 부디 하지 말아 주세요. 결코 그런 일은 없어요. 아마 그녀의 입장에 섰더라면 나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세세한 부분까지는 들먹거리지 않겠어요. 그럴 수도 없고요." 겁먹은 눈빛으로 브론스끼의 침울한 얼굴을 흘끔거리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릴 건 가려야 해요. 도련님은 내가 그녀를 사교계에 다시 복귀시켰으면 하는 마음이겠죠. 하지만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주세요. 나는 달들을 키우고 있고, 사교계에서는 남편을 위해 살아야만 해요. 안나 아르까지예브나를 찾아가긴 하겠어요. 내가 지기를 집으로 초대할 수 없다는 것, 혹은 초대한다 해도 자기를 달리 보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건 그녀도 이해하겠죠.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그녀는 모욕감을 느낄 거예요. 나는 그녀를 들어 올려 줄 수가 없어요……"

"나는 형수가 집에 들이는 수백 명의 여자들보다 그녀가 더 타락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가 한층 더 침울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형수의 결심이 변함없으리라는 걸 알아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세이! 나한테 화내지 말아요. 나한테는 잘못이 없다는 걸 제발 알아주세요." 바랴가 소심한 미소를 띤 채 브론스끼를 바라보았다.

"형수한테 화내는 게 아닙니다." 그가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마음이 곱절로 아프군요. 또한 이 일이 우리의 우정을 깨뜨린다는 것도요. 깨뜨리지는 않더라도 상하게는 하겠죠. 짐작하시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일은 다른 식으로는 안 됩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더 이상의 시도는 무의미하며, 뻬쩨르부르끄에 머무는 며칠간 마치 낯선 도시에 체류하는 양 한때 몸담았던 사교계와는 일체의 왕래를 피하면서 지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브론스끼는 깨달았다. 그래야만 자기로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불쾌하고 치욕스러운 일들을 겪지 않을 터였다. 뻬쩨르부르끄에 있음으로 해서 가장 불쾌한 것 중 하나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그의 이름이 가는 곳마다 눈에 띄고 입에 오른다는 점이었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얘기로 넘어가지 않는 법이 없었고, 어딜 가더라도 그와 마주치는 기분을 느끼지 않는 적이 없었다. 마치 한 손가락이 아픈 사람이 일부러 오만 곳에 바로 그 아픈 손가락을 부딪쳐 대는 것처럼, 적어도 브론스끼에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뻬쩨르부르끄에서 지내는 내내 안나에게서 그 어떤 새로운, 자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를 느꼈기에 그는 더욱더 힘들었다. 그녀는 브론스끼를 사랑하는 것처럼 굴다가도 어느 때는 차갑게 돌변하여 신경지릉ㄹ 내고 속을 열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로 괴로워했으며, 무언가를 그에게 숨기고 있었다. 또한 그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치욕들, 섬세한 이해력을 가진 그녀로서는 한층 더 고통스러울 게 틀림없는 예의 치욕들을 그녀는 마치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안나가 러시아로 돌아온 목적 중 하나는 아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를 떠난 날로부터 아들과 만나리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녀를 설레게 했고, 뻬쩨르부르끄에 가까워질수록 그 만남이 가져다줄 기쁨과 의미는 더욱더 크게 다가왔다. 만남을 어떻게 성사실킬 것인지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 둘이 같은 도시에 있게 되면 아들을 만나는 일이 자연스럽고 간단해질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뻬쩨르부르끄에 도착하자마자 문득 사교계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명확히 드러났고, 그리하여 아들과 만남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걸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뻬쩨르부르끄에서 벌써 이틀을 보냈다. 단 한간도 아들 생각을 놓은 적이 없건만 그녀는 아직도 아들을 보지 못한 채였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마주칠 수 있는 그 집으로 곧장 찾아갈 권리느 ㄴ자신에게 없는 것 같았다. 집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고 모욕이나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연락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녀는 남편 생각을 하지 않을 때에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아들이 언제 어디로 산책을 가는지 알아내서 산책길에 나서는 아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오랫동안 아들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해온 만큼 아들에게 할 이야기가 많았고, 아들을 품에 안아 입 맞추고 싶은 생각도 너무나 간절했다. 세료자의 늙은 유모라면 그녀를 도와주고 방법을 가려쳐 줄 수도 있었겠지만 유모는 이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집을 떠난 뒤였다. 그러한 망설임 속에서 유모를 찾는 사이 이틀이 흘렀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게 된 안나는 사흘째 되던 날,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으나 백작 부인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편지에는 짐짓 아들과의 만남이 남편의 관대함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남편이 편지를 보게 될 경우, 그는 계속해서 관대한 역할을 연기할 테니 자신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편지를 가져갔던 급사가 회신은 없을 거라는 가장 잔혹하고도 예기치 못한 답변을 전했다. 급사를 불러들여 이것저것 묻던 중, 한참을 기다린 그에게 '답신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하더라는 얘기를 자세히 전해 들은 순간만큼 그녀가 모욕감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안나는 모욕당하고 멸시당한 기분이었지만, 리지야 이바노브나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처신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기에 더욱컸다. 그 슬픔을 브론스끼와 나눌 수는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겪는 불행의 중요한 원인이 브론스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아들이 만나는 문제는 그에게 아주 하찮은 일로 여겨질 것임을,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깊이를 브론스끼는 결코 헤아리지 못할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일을 언급할 적에 그가 내비치는 차가운 어조로 인해 그를 증오하게 되리라는 것 또한 그녀는 알았다. 그리고 그 점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웠으며, 그래서 아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그에게 숨겼다.

하루 종일 숙소에 앉아 아들을 만날 방도를 궁리하던 그녀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러고서 한창 편지를 쓰고 있는데, 리지야 이바노브나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백작 부인의 침묵이 안나를 굴복시키고 복종시켰던 반면에 편지는, 즉 안나가 행간에서 읽어 낸 모든 것은 그녀를 격분케 했다. 아들에 대한 자신의 열렬하고 정당한 애정에 비하면 그녀의 악의는 너무나도 괘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스스로를 책망하기를 그만두고 타인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 냉정함은 위선이야!' 그녀가 생각했다. '저들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나를 모욕하고 아이를 괴롭히는 것뿐이지. 그런데 내가 저들에게 순종하려 들다니! 어림없는 소리! 그녀는 나보다 더 나빠. 나는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 즉시 그녀는 내일 당장, 즉 세료자의 생일에 남편의 집으로 찾아가 사람들을 매수하든, 속임수를 쓰든,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만나고 불쌍한 아이를 에워싼 저 흉측한 기만을 깨부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가게로 가서 장난감을 잔뜩 사고는 작전을 짰다. 아침 일찍, 아직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일어나지 않았을 시각인 8시에 가는 것이다. 수위와 하인에게 건넬 돈을 손에 쥐고서 말이다. 돈을 받은 그들은 집 안으로 들여보내 줄 것이다. 그런 다음 베일을 벗지 않은 채, 자신은 세료자의 대부가 보내서 생일을 축하라러 온 사람으로 장난감을 아이에 침대 곁에 두고 오라는 당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작 아들에게 해줄 말은 준비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전혀 없었다.

이튿날 아침 8시에 안나는 삯마차에서 홀로 내려 한때 자신이 살던 집의 커다란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울렸다.

"가서 무슨 용건인지 알아봐. 어떤 마님이 오셨어." 아직 복장을 갖추지 않아 외투에 덧신만 걸친 끼삐또니치가 창문 너머로 베일을 쓴 채 문 앞에 서 있는 귀부인을 내다보고는 말했다.

안나와는 초면인, 수위의 조수 노릇을 하는 젊은 사내가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안으로 들어서서 머프에서 3루블짜리 지폐를 꺼내 황급히 그의 손아귀에 찔러 넣었다.

"세료자……세르게이 알렉세이치…….." 그녀가 이렇게 뇌까리고는 앞으로 내처 걸었다. 수위의 조수는 지폐를 살펴본 뒤 또 다른 유리문 앞에서 그녀를 멈춰 세웠다.

"누구를 찾으시나요?" 그가 물었다.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낯선 여인이 당황하는 걸 눈치챈 끼삐노니치가 그녀에게 다가와 안으로 들여보내고는 용건이 뭔지 물었다.

"스꼬로두모프 공작의 심부름으로 세르게이 알렉세이지를 만나러 왔네." 그녀가 말했다.

"아직 일어나시기 전입니다." 그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수위가 말했다.

안나는 9년 동안 살았던 집의 조금도 변하지 않은 현관방 정경이 자신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오리라고는 전혀 예기치 못했다. 기쁘고 괴로웠던 추억들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하나둘씩 꼬리를 물며 떠올랐다. 한순간 그녀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잊어버렸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털외투를 벗는 것을 거들며 까삐또니치가 말했다.

외투를 벗겨 주고 나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본 끼삐또니치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서 말없이 몸을 깊이 숙여 인사했다.

"어서 드시지요, 마님"그가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미안함과 애원이 서린 눈빛으로 노인을 쳐다보고는 가볍고 재빠른 걸음으로 계단에 올랐다. 까삐또니치는 앞으로 몸을 숙인 채 덧신이 계단에 걸릴 듯 휘청거리면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거기엔 가정 교사가 계시는데, 아마도 잠옷 차림일 겁니다. 제가 가서 아뢰겠습니다."

안나는 노인이 하는 말도 못 알아듣고 낯익은 계단을 계속해서 올라갔다.

"이쪽으로, 왼쪽으로 가십시오. 불결함을 용서하십시오. 지금 도련님은 예전에 소파가 있던 방을 사용하십니다." 수위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님, 제가 얼른 들여다보고 오겠습니다."

그가 그녀 앞쪽으로 나와 높다란 문을 열더니 그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안나는 멈춰 서서 기다렸다.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나셨습니다." 다시 문밖으로 나온 수위가 말했다.

수위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안나의 귀에는 아이가 하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로지 그 하품 소리만으로 그녀는 그것이 아들임을 알아챘고, 눈앞에 생생하게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들여보내 줘, 어서, 저리 비켜!" 그녀는 이렇게 내뱉고서 높다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 오른편에 침대가 놓여 있고, 침대 위에는 앞섶이 벌어진 루바시까만 달랑 입은 소년이 일어나 앉은 채 자그마한 몸뚱어리로 기지개를 펴면서 하품을 끝내고 있었다. 입술이 모이는 순간 잠에 취한 행복한 미소가 퍼졌고, 그 미소와 함께 소년은 천천히 기분 좋게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세료자!" 그녀가 살그머니 아들에게 다가서며 속삭였다.

아들과 헤어져 있는 동안, 그리고 최근 들어 내내 아들에 대한 사랑이 북받쳐 오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네 살짜리 소년의 모습으로 아들을 상상하곤 했다. 지금의 아이는 그녀가 버리고 갔을 때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네 살을 훌쩍 넘긴 세료자는 키가 더 자랐고 조금 야윈 모습이었다. 이게 뭔가! 얼굴은 왜 저리도 홀쭉해졌고, 머리는 또 왜 저렇게 짦은가! 팔은 어찌 저리도 길단 말인가! 그녀가 두고 간 뒤로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그러나 그 모습 역시 본연의 두상과 그 입술, 보드라운 목과 넓은 어깨를 지닌 세료자였다.

"세료자!" 그녀가 바로 아이의 귀에 대고 되풀이했다.

아이가 팔꿈치를 괴고 몸을 일으키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 헝클어진 머리를 좌우로 돌리고는 눈을 떴다. 그는 자기 앞에 꼼짝 않고 서 있는 어머니를 몇 초간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불현듯 행복한 웃음을 지으면서 졸린 눈을 꼭 감은 채, 이번엔 뒤로가 아니라 어머니 쪽으로, 그녀의 두 팔을 향해 벌렁 엎어졌다.

"세료자! 사랑스러운 내 아들!"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들의 토실토실한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엄마!" 세료자가 외쳤다. 아이는 몸의 구석구석 어머니의 손이 닿도록 그녀의 팔 안에서 이리저리 옴지락거렸다.

졸음 섞인 미소를 띠고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침대 등받이에서 손을 떼어 어머니의 어깨를 잡고는, 오직 잠결의 아이들한테서만 나는 사랑스러운 냄새와 온기를 풍기며 그녀에게 안겨 목과 어깨에 얼굴을 비벼 댔다.

"이럴 줄 알았어요." 세료자가 눈을 뜨고는 말했다. "오늘 내 생일이잖아요. 엄마가 올 줄 알았어요. 이제 일어날래요."

이렇게 말하고서 아이는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안나는 정신없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없는 동안 아이가 얼마나 자라고 변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지금은 이렇게 커버린 아이의 벗은 발을 알아볼 듯도, 못 알아볼 듯도 했지만, 약간 야윈 볼과 그토록 자주 입을 맞추곤 했던 목덜미의 짦은 곱슬머리는 그대로였다. 그 모든 것을 더듬어 만져 보면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로 목이 메었던 것이다.

"왜 울어요 엄마?" 어느새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세료자가 물었다. "엄마, 왜 울어요?" 그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다시 소리쳤다.

"나 말이야? 엄마 안 울 거야……기뻐서 그래. 너무 오랫동안 너를 못봤잖아. ', 이제 옷 입어야지.' 감정을 추스른 뒤 이렇게 덧붙이고서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아들의 손을 잡은 채로 옷이 놓인 침대 곁 의자에 앉았다.

"엄마 없이 어떻게 옷을 입니? 어떻게.." 그녀는 담담하고 쾌활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찬물로는 세수 안 해요. 아빠가 하지 말랬어요. 근데 바실리 루끼치는 보셨어요? 이리로 오실 거예요. , 엄마가 내 옷을 깔고 앉았잖아!" 세료자가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엄마, 사랑하는 엄마!' 아이가 거듭 몸을 던져 어머니를 끌어안으면서 소리쳤다. 마치 어머니의 미소를 본 지금에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이건 필요 없잖아요." 세룢가가 그녀의 모자를 벗기더니, 모자를 벗은 어머니를 새롭게 알아본 양 다시 달려들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엄마에 대해 무슨 생각 했어? 엄나가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절대로 믿지 않았어요."

"안 믿었어? 내 귀염둥이!"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다고요!" 그가 자기가 즐겨 하는 말을 뇌까렸다. 그러고는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을 부여잡아 그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술을 곡 누르더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한편 바실리 루끼치는 처음에는 그 귀부인이 누구인지 모르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서야 그녀가 남편을 버리고 간 세료자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안나가 떠난 뒤에 들어온 그로서는 그녀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세료자에게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니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알려야 하는 건 아닌지 망설였다. 마침내 자신의 의무는 정해진 시간에 세료자를 기상시키는 것이며, 어머니든 다른 누구든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것 없이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판단을 내린 그는 옷을 입고 문쪽으로 가서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들의 애무와 그들의 목소리, 그들이 나누는 얘기들, 그 모든 게 그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고개를 내젓고 한숨을 내쉰 뒤 문을 닫았다. '10분만 더 기다리자' 그가 헛기침을 하고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그 시각 집안 하인들 사이에서는 작은 소요가 일었다. 마님이 오셨으며 까삐또니치가 그녀를 집 안으로 들였다는 것, 그래서 그녀가 지금 도련님 방에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된 터였다. 한편 주인 나리는 항상 9시 조금 지난 시각에 도련님 방에 들르시는데, 부부가 마주쳐서는 안 되니 그녀를 제지해야 한다고 다들 생각했다. 조인 나리의 몸종인 꼬르네이는 수위실로 달려가 누가 어떻게 그녀를 들여보냈는지 묻고는 까삐또니치가 들여보내고 데리고 갔다는 걸 알게 되자 노인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이 일로 그를 쫓아내야 한다고 꼬르네이가 말하자, 완강하게 침묵을 지키던 수위는 마침내 꼬르네이에게 달려들더니 그의 얼굴 앞에서 두 팔을 휘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자네 같으면 들여보내지 않았겠지! 10년 동안 마님을 모셨는데, 내가 본 건 인자한 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네. 그래, 지금 가서 말하지 그래. , 어서 나가라고 말이야! 자네는 정치라는 걸 세세하게 잘 알고 있지 않나! 아무렴! 주인 나리의 너구리 털 외투를 몽당 긁어다가 훔쳐 가질 않나, 자신이 한 짓이나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걸!"

"졸병 놈 같으니!" 꼬르네이가 경멸스럽다는 투로 내뱉고는 집 안으로 들어서는 유모를 돌아보며 말했다. ", 생각을 좀 해보세요, 마리아 예피모브나. 집에 들이고서 아무한테도 말을 안 했답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께서 이제 나오셔서 도련님한테 가실 텐데 말이죠."

"일 났네. 일 났어!" 유모가 말했다. "꼬르네이 바실리예비치, 어떻게든 나리를 붙잡아 두세요. 나는 어서 가서 마님을 모시고 나올 테니. 일 났군, 일 났어!"

유모가 들어섰을 때 세료자는 어머니에게 나젠까랑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오다가 둘이 같이 엎어져 세 바퀴나 굴렀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안나는 세료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얼굴과 변화무쌍한 표정을 바라보며 손의 감촉을 느꼈지만, 그가 하는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가야 한다, 아이를 두고 가야만 한다. 그녀가 느끼고 생각하는 건 오로지 이 한 가지뿐이었다. 문가로 와서 기침을 하는 바실리 루끼치의 발소리와 점점 가까워지는 유모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앉은 채로 목석이 된 듯 말을 하지도, 일어나지도 못했다.

"마님, 사랑스러운 우리 마님!" 유모가 안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과 어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하느님께서 생일을 맞으신 도련님께 기쁨을 안겨 주셨네요. 마님께서는 하나도 안 변하셨군요."

", 유모, 집에 있는 줄 몰랐어요." 순간적으로 정신이 든 안나가 말했다.

"여기 사는 건 아니에요. 딸아이랑 살고 있답니다. 도련님 생일을 축하드리려고 왔어요, 안나 아르까지예브나, 어여쁘신 마님!"

유모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니 또다시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세료자는 두 눈과 미소를 환히 빛내며 한 손으로는 어머니를, 다른 한 손으로는 유모를 잡고서 통통한 맨발로 양탄자 위를 굴렀다. 자기가 좋아하는 유모가 어머닐르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자 신이 났던 것이다.

"엄마! 유모는 자주 날 보러 와요. 그리고 올 때면.." 세료자가 하던 말을 멈췃다. 유모가 어머니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건네자 그녀의 얼굴에서 수치심 비슷한 겁먹은 표정이 번지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어머니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안나는 세료자에게 다가갔다.

"사랑스러운 내 아들!"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안녕'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 주었고, 세료자 또한 알아차렸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꾸찌끄!" 그녀가 세료자가 아기였을 때 부르던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엄마 잊지 않을 거지? 너는……." 그러나 더 이상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들에게 해줄 수 있었던 말들을 그 뒤로 얼마나 많이 떠올리곤 했던가!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세료자는 어머니가 자기한테 뭘 말하고자 하는지 전부 이해했다. 어머니가 불행하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심지어 그는 유모의 귓속말도 알아들었다. "항상 9시 지나서……." 그것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며,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이는 눈치챘다.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왜 어머니의 얼굴에서 수치심과 두려움이 번진 것일까…….. 어머니는 잘못한 게 없는데도 아버지를 두려워했고, 무언가를 부끄러워했다. 의혹을 풀기 위해 그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어머니가 가여웠기 때문이다. 그는 말없이 어머니에게 꼭 안긴 채 속삭였다.

"아직 가지 마세요. 금방 오시지는 않을 거예요."

어머니가 아들을 품에서 떼어 냈다. 아들이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나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세료자의 겁먹은 표정에서, 그녀는 아들이 아버지에 관해서 말하고 있을 분 아니라, 마치 자신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듯한 기색을 읽어 냈다.

"세료자, 아가야……." 그녀가 말했다. "아빠를 사랑해 줘. 아빠는 나보다 더 착하고 좋은 분이야. 그리고 나는 아빠한테 잘못을 저질렀어. 네가 어른이 되면 판단할 수 있을 거야."

"엄마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어요……..!"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어깨를 부여잡고서, 긴장한 탓에 떨리는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내 사랑하는 아가!" 안나가 말했다. 그녀 역시 세료자처럼 가늘게, 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바실리 루끼치가 들어왔다. 다른 쪽 문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유모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시나 봐요." 그러고는 안나에게 모자를 건넸다.

세료자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안나가 세료자의 두 손을 떼어내 눈물 젖은 아이의 얼굴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춘 다음 재빨리 문밖으로 나갔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를 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걸음을 멈추고서 목례를 했다.

바로 조금 전에 그가 자기보다 더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첩한 눈길로 그의 외모를 세세한 부분까지 한눈에 포착하자마자 그에 대한 혐오와 악의,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있다는 질투의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재빠른 동작으로 베일을 내리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거의 뛰쳐나가다시피 방을 빠져나갔다.

어제 가게에서 그토록 절절한 사랑과 슬픔에 잠긴 채 골랐던 장난감을 꺼내 놓을 경황조차 없었기에, 그녀는 그것들을 그대로 숙소로 가져오고 말았다.

 

아들과의 만남을 아무리 간절히 바랐다 해도, 그에 대해 아무리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준비했다 해도, 그 만남이 자신에게 그토록 강력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안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쓸쓸한 호텔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한참 동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 모든 게 끝났고, 나는 또다시 혼자야.’ 그녀가 모자도 벗지 않은 채 혼잣말을 하고는 벽난로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았다. 창문 사이에 놓인 탁자위의 청동 시계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외국에서 데려온 프랑스인 하녀가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을 것을 권했다. 안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더보며 말했다.

나중에

급사가 커피를 권했다

나중에그녀가 말했다

이탈리아인 유모가 딸아이에게 옷을 입혀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안나에게 건넸다. 토실토실하니 발육이 좋은 딸아이는 언제나처럼 어머니를 보더니 실로 꼭 졸라맨 듯 통통한 맨손을 손바닥이 아래로 오도록 뒤집고는 이가 나지 않은 자그마한 입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수놓은 치마의 풀 먹인 옷자락을 사각대면서 마치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자그마한 두 팔을 휘젓기 시작했다. 미소 짓지 않을 수도, 입 맞추지 않을 수도, 새된 소리를 내며 온몸을 팔딱거리는 딸아이에게 부여잡히곤 하는 어머니의 손가락을 내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입 맞추는 시늉을 하면 자그마한 제 입으로 빨려고 드는 아기에게 입술을 내밀어 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안나는 그 모든 것을 해주었다. 딸아이의 두 팔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게 해주었고, 아기의 싱싱한 볼과 벗은 팔꿈치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나 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 한층 더 명백해진 것은, 세료자에 대해 느끼는 것에 비하면 자신이 이 아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심지어 사랑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딸아이의 모든 면이 사랑스러웠지만, 어느 것 하나 애절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첫아이에게는, 비록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생긴 아이였음에도 충족을 모르는 사랑의 힘을 죄다 쏟았는데 말이다. 딸아이는 너무나 힘든 여건 속에서 태어났고, 그래서인지 그 애에게는 첫아이에게 쏟은 것의 1백 분의 1도 안 되는 보살핌을 베풀었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걸 기다려야 하는 딸아이와 달리, 세료자는 이미 거의 인격체, 그것도 사랑받는 인격체였다. 아이의 내면에는 벌써 상념과 감정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아이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고 평가해 준다고, 세료자의 말과 시선을 떠올리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영원히,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아들과 격리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그것을 바로 잡을 길은 없었다.

딸아이를 유모에게 건네 내보낸 다음 그녀는 거의 딸아이 또래였을 때의 세료자 사진이 들어 있는 메달을 열었다. 그런 다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벗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앨범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아이들 사진이 나이별로 들어 있었다. 그녀는 사진들을 비교해보고 싶어서 한 장 한 장 앨범에서 꺼내기 시작했다. 전부 꺼내 이제 가장 잘 나온 마지막 한 장만 남았다. 흰 루바시까를 입은 채 말을 타듯이 의자 위에 걸터앉은 세료자는 눈은 찌푸린 채 입으로만 웃고 있었다. 아이의 가장 독특하고도 멋진 표정이었다. 그녀의 조그맣고 민첩한 손, 오늘 특히 긴장한 채 가늘고 흰 손가락들을 움직였던 그 손으로 사진의 끄트머리를 몇 차례나 잡아당겨 보았지만, 자꾸 미끄러지는 바람에 사진을 빼낼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는 페이퍼 나이프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란히 꽃혀 있던 사진(그것은 로마에서 찍은, 머리는 기르고 둥근 모자를 쓴 브론스끼의 사진이었다)을 꺼내 그것으로 아들의 사진을 밀어냈다. ‘여기 그 사진이 있었네!’ 그녀가 브론스끼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불현듯 그녀는 지금 자신이 겪는 슬픔의 원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그날 오전 내내 한 번도 브론스끼를 떠올리지 않은 터였다. 그러나 너무나 낯익은, 사랑스럽고 남자답고 품위 있는 그 얼굴을 보자 별안간 그에 대한 사랑이 예기치 않게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겼다.

대체 그이는 어디 있는 거지? 어떻게 이렇게 나 혼자서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지?’ 자신이 아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숨겼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서, 갑자기 그를 책망하는 마음에 휩싸였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지금 바로 자기한테 와달라고 전하게 하고는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때 구사할 단어들과 자신을 위로해 줄 그의 사랑의 말들을 떠올리면서 조여드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그에게 갔던 하인은 손님이 와 있지만 곧 가겠노라는 답을 갖고 돌아왔다. 아울러 빼쩨르부르끄에서 온 야시빈 공작과 함께 가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라고 했다고 전했다. ‘혼자 오지 않겠다니, 어제 식사 때 이후로 나를 못 봐놓고 말이야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 혼자 오지 않고서 야시빈과 같이 오겠다니그러나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이가 나한테 싫증이 난 거라면 어쩌지?’

요 며칠의 일들을 하나둘씩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그 무서운 생각을 확인시켜 주는 것만 같았다. 그가 어제 숙소에서 식사하지 않은 것도, 뻬쩨르부르끄에서 각방 생활을 하자고 고집한 것도, 심지어 지금 자신과 둘이서 마주 대하기를 피하려는 듯 혼자 오지 않는 것도 그러했다.

허지만 그렇다면 그이는 나에게 말해 줘야 해. 내가 알아야만 해. 그걸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뭘 해야 할지는 알고 있어그녀가 생각했다. 브론스끼가 냉담해졌다고 확신한 그녀는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을 상상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가 이제 자신에게 싫증이 난 거라고 생각하니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 이른 기분이었다. 이에 몹시 흥분한 그녀는 벨을 울려 하녀를 부른 다음 드레스 룸으로 갔다. 옷을 입으면서는 요 며칠 그 어느 때보다도 공을 들여 몸치장을 했다. 마치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드레스와 머리 모양을 갖추면 싫증이 난 그가 다시 자기를 사랑해 줄 수도 있다는 듯 말이다.

그녀가 준비를 다 마치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응접실로 나가니 그가 아니라 야시빈이 눈길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브론스끼는 그녀가 책상 위에 놔둔 채 잊고 있던 세료자의 사진들을 보느라 그녀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도 않았다.

우린 구면이죠부끄러워하는(그의 어마어마한 키와 투박한 얼굴을 감안하면 무척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야시빈의 커다란 손에 자신의 조그만 손을 넣으며 안나가 말했다. “작년에 경마장에서 뵈었었죠. 이리 주세요.” 안나는 브론스끼가 보고 있던 아들의 사진들을 재빨리 치우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올해 경마는 멋졌나요? 저는 대신에 로마의 코르소 경마를 봤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외국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죠.”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뵌 적은 별로 없지만 저는 당신과 당신의 취향에 관해서 죄다 알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매우 유감이군요. 왜냐하면, 제 취향이라는 게 다 형편없는 것들이라서요.” 야시빈이 왼쪽 콧수염을 씹으며 대답했다.

한동안 이야기를 이어 가던 야시빈은 브론스끼가 시계를 보는 걸 눈치 채고서 안나에게 뻬쩨르부르끄에 오래 머물 예정이냐고 물으며 예의 겨대한 몸을 펴고서 군모를 집었다.

얼아 안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당황한 기색으로 브론스끼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면 이제 못 만나는 건가요?” 자리에서 일어난 야시빈이 브론스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식사는 어디서 할 건가?”

이곳에 소혀서 같이 식사하세요.” 안나는 당황한 기색을 보인 스스로에게 화가 난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 앞에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얼둘을 붉히고 말았다. “여기 식사가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적어도 아이와 만날 수 있잖아요. 연대 사람들 중에서 당신만큼 알렉세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야시빈은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방을 나갔고 브론스끼는 뒤에 남았다.

당신도 갈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벌써 늦었어요.” 그가 대답하고는 야시빈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가게! 금방 쫓아갈 테니.”

안나는 브론스끼의 손을 잡고서 치켜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붙들어 두기 위해 할 말을 찾는 중이었다.

잠시만요. 할 말이 있어요.” 그녀가 그의 작달막한 손을 잡고서 자신의 볼에 갖다 댔다. “그이를 식사에 초대하는 건 괜찮죠?”

아주 잘했어요.” 그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면 잔잔한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알렉세이, 나에 대한 마음이 변한 건 아니죠?” 그녀가 양손으로 그의 손을 꼭 취며 물었다. “이곳에 있으니 마음고생이 너무 심해요. 알렉세이 우리 언제 떠나죠?”

곧 떠나야지. 여기서 지내는 게 나에게도 얼마나 힘든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뺐다.

그래요. 가요. 어서 가!” 기분이 상한 그녀는 이렇게 내뱉고서 황급히 그의 곁은 떠났다.

 

브론스끼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안나는 아직 외출 중이었다. 그가 나간 뒤 곧바로 어떤 귀부인이 안나를 찾아와서 그녀와 함께 나갔다고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말하지 않고 나간 것, 여태 돌아오지 않은 것, 아침에도 자기한테 아무 말하지 않고 어딘가에 다녀온 것, 그 모든 것들과 더불어 오늘 아침에 본 그녀의 이상하게 상기된 표정, 그리고 적의 어린 말투로 쏘아붙이며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아들의 사진들을 낚아채다시피 했던 기억이 그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그녀와 작정하고 얘기를 좀 나눠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의 응접실에서 기다렸지만, 안나는 혼자가 아니라 독신녀 고모인 오블론스까야 공작 영애를 데리고 왔다. 아침에 와서 안나와 쇼핑하러 나갔다는 부인이 바로 그녀였다. 안나는 걱정과 의혹에 잠겨 있는 브론스끼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양, 오늘 아침에 뭘 샀는지를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그는 그녀에게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자신을 힐끗 쳐다보곤 하는 반짝이는 두 눈은 팽팽하게 긴장된 주의력을 발하고 있었다. 말과 동작에서는 신경질적인 민첩함과 우아함이 풍겼다.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 그를 몹시 매혹시켰던 그런 점들이, 지금은 그를 불안하고 겁먹게 만들었다.

네 사람을 위한 식탁이 차려졌다. 뚜시께비치가 공작부인 벳시의 부탁을 받고 안나를 찾아왔을 때, 모두가 작은 식당으로 가기 위해 모여 있었다. 공작부인 벳시는 작별인사를 하러 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몸이 좋지만, 안나에게 630분에서 9시 사이에 자기 집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지정해 줬다는 얘기를 들으며 브론스끼는 안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도록 손을 써두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안나는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한 듯 굴었다.

안타깝게도 바로 그 630분에서 9시 사이에는 제가 갈 수가 없네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작부인께서 무척 아쉬워하실 겁니다.”

파티 공연은 들으러 가실 거죠?” 뚜시께비치가 물었다.

파티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특별석 표를 구할 수 있다면 갈 텐데요.”

제가 구해오지요.” 뚜시께비치가 자진해서 나섰다.

그래 주시면 너무너무 감사하고요.” 안나가 말했다. “참 저희와 함께 식사하지 않으시겠어요?”

브론스끼는 눈에 띌 듯 말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안나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왜 이 늙은 공작 영애를 데려왔을까. 왜 뚜시께비치더러 식사하고 가라고 붙들었으며, 정말이지 어이없게도, 왜 그한테 표를 구해 달라고 부탁한 걸까. 지금 저런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사교계 인사들이 죄다 모일 파티의 공연에 갈 생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가 심각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예의 도전적인 눈빛으로 응수했다. 그 눈빛의 의미를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식사하는 내내 안나는 공격적으로 보일 만큼 쾌활했다. 뚜시께비치나 야시빈에게는 교태를 부리듯 행동하기까지 했다. 식탁에서 다들 일어난 뒤 뚜시께비치는 특별석 표를 구하러 가고 야시빈은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야시빈과 함께 아래층의 자기 방으로 내려와서 잠시 앉아 있던 브론스끼는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안나는 벌써 가장자리에 벨벳을 두른 비단 드레스로 갈아입은 모습니었다. 파리에서 맞춘 드레스였다. 가슴을 드러내고 값비싼 흰색 레이스를 머리에 썼는데, 그녀의 얼굴을 감싼 레이스 더게 그녀의 눈부신 미모가 유달리 돋보였다.

정말로 극장에 가려는 거예요?” 그가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물었다.

왜 그렇게 놀란 듯이 물어요?” 그가 자기를 보지 않아아 또다시 기분이 상한 그녀가 말했다. “왜 나는 가면 안 되는데요?”

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척 굴었다.

물론 그럴 까닭은 전혀 없지만알굴을 찌푸린 채 그가 대답했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그의 말에서 풍기는 빈정거림을 모르는 척, 그녀가 향내 나는 긴 장갑을 차분이 걷어 올리면서 대꾸했다.

안나, 제발!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언젠가 그녀의 남편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정신차리라는 투로 그가 말했다.

당신이 뭘 물으려는 건지 모르겠네요.”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왜요? 혼자 가는 게 아니에요. 바라바라 고모가 옷을 갈아입으러 가셨어요. 그분이 나랑 같이 가실 거예요.”

그는 의아함과 낙담의 표시로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모른단 말이지....” 그가 말을 꺼내려다 멈추었다.

그래요. 알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싫다고요. 내가 저지른 일을 후회하느냐고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에요. 만일 또다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똑같이 처신할 거예요. 우리에게, 나와 당신에게 중요한 건 딱 한 가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느냐예요. 다른 것들은 고민할 게 못 돼요. 뭣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각방을 쓰면서 얼굴도 안 보고 지내는 거죠? 왜 내가 가면 안 되는 거냐고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녀가 특이하고도 오묘한 광채를 내뿜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러시아어로 덧붙였다. “당신만 변하지 않았다면요. 도대체 왜 나를 쳐다보지 않는 거죠?”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과, 언제나처럼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화려한 의상의 아름다움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허지만 지금은 바로 그 아름다움과 우아함 때문에 울화가 치밀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내 감정은 변할 수가 어 ㅂㅅ어요. 하지만 부탁하는데, 가지 말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가 다시금 프랑스어로 부드럽게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의 말은 들리지 않고 차가운 시선만 보였기에, 그녀는 성을 내며 대꾸했다.

내가 왜 가면 안 되는지 알려 달라고 했잖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당신한테 벌어질 일이...” 그가 말끝을 흐렸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야시빈이면 n’est pas compromettant(남부끄러울 것 없잖아요), 공작 영애 바르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지 않아요. 아 저기 오셨네요.”

 

브론스끼는 처음으로 안나에게 노여움을 느꼈다. 자신의 처지를 고의적으로 모른 체하는 그녀에 대한 거의 적의에 가까운 그 감정은, 자신이 분노하는 까닭을 표현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더욱 증폭되었다. 만일 마음에 품은 생각을 그녀에게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렇게 잘 자쳐입고 모두가 다 아는 공작 영애와 함께 극장에 나타난다는 건, 타락한 여자로서의 처지를 인정하는 꼴일 뿐만 아니라 사교계에 도전장을 내미는 셈이에요. 즉 영원히 사교계와 인연을 끊는 일이란 뜻이라고요.’

그는 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를 존중하는 마음이 줄어드는 동시에,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의식하는 스스로를 느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자기 방으로 돌아온 브론스끼는, 의자 위에 긴 다리를 뻗은 채 코냑에 탄산수를 섞어 마시고 있던 야시빈 곁이 앉아 자기한테도 같은 것을 갖고 오라고 일렀다.

자네가 말했었지. 란꼬프스끼의 모구치 말이야. 거참 멋진 말이더군, 자네가 그놈을 사지 그래.” 야시빈이 친구의 음울한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엉덩이는 좀 처졌지만 다리랑 머리는 더할 나위가 없어.”

살 생각이네.” 브론스끼가 대답했다.

말에 관한 얘기에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안나를 잊지 않았으며, 무심결에 복도를 따라 울리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벽난로 위의 시계를 들여다보곤 했다.

안나 아르까지예브나께서 지금 극장으로 출발하신다고 전하라 하였습니다.”

야시빈이 쉭쉭거리는 탄산수에 코냑 한 잔을 털어 넣어 들이키고는 옷의 단추를 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건가? 같이 가지 그래.” 그가 콧수염 아래로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브론스끼가 우울한 까닭을 알고 있지만 자신은 거기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태도를 은슨히 내비치는 미소였다.

나는 안 갈래.” 브론스끼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나는 가야 해. 약속했거든. 그럼 잘 있게. 만일 오게 되면 일반석으로 오게. 끄라신스끼 자리에 앉으라고.” 야시빈이 나가면서 덧붙였다.

아니, 볼일이 있어.”

아내도 골치 아프지만, 아내가 아닌 여자는 더 문제군.’ 야시빈이 호텔을 나서며 생각했다.

혼자 남은 브론스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네 번째 공연이면... 예고르와 형수가 올 테고, 어머니도 분명 오시겠지. 그렇다면 뻬쩨르부르끄 사람들이 모조리 모이는 거다. 이제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서 외투를 벗고 세상 앞에 나서는 거야. 뚜시께비치, 야시빈, 바르바라 공작 영애...,‘ 그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런데 나는 뭐지? 두려운 건가? 아니면 뚜시께비치에게 그녀를 보호할 임무를 내맡겨 버린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바보 같은 짓이다. 바보 같은 짓이야. 그녀는 대체 왜 나를 이런 상황에 몰아넣는 걸까?’ 그가 한 손을 내저으며 되뇌었다.

손짓을 하다가 탄산수와 코냑 병이 놓인 탁자를 건드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탁자가 쓰러질 뻔했다. 그가 붙잡으러 했으나, 병들은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성질을 부리며 탁자를 발로 걷어차고는 벨을 울렸다.

내 곁에서 일을 하려거든 말이야...” 시중 드는 하인이 방으로 들어오자 그가 말했다. “할 일을 잘 기억해 두라고. 이런 일이 없도록 말이야. 이것들을 치웠어야지.”

자기가 잘못한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한 하인은 변명을 하려 했지만, 주인 나리의 표정을 보고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겠다 싶어 얼른 굽실거리며 양탄자에 몸을 순긴 채 깨진 것이나 멀쩡한 것이나 가리지 않고 술잔과 술병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건 자네가 할 일이 아니야. 가서 급사더러 치우라고 하고, 연미복을 준비해 주게.”

브론스끼가 극장 안으로 들어선 것은 830분이었다. 공연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외투 벗는 걸 거들던 안내원 영감이 그를 알아보고 각하라고 부르더니, 번호표를 가져가지 마시고 그냥 표도르하고 소리쳐 부르라고 했다. 불빛 환한 복도에는 안내원들과 두 손에 털 외투를 든 채 문가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하인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교향악단의 조심스러운 스타카토 반주 소리와, 노래 구절을 탁월하게 발성하는 여자의 독창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안내원이 슬쩍 들어가자 끝나가던 악구가 브론스끼의 귀청을 때렸다. 그러나 문은 곧 닫혔고, 브론스끼는 악구의 끝부분과 카덴차를 듣지 못했다. 문 안쪽에서 들리는 우레 같은 박수 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카덴차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가 샹들리에와 뿔 모양의 청동 가스등이 불빛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홀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박수 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무대 위의 여가수는 벗은 어깨와 보석 장신구들을 빛내며 미소를 지은 채 허리를 굽히고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테너의 도움을 받아 각광등 너머러 서툴게 날아드는 꽃다발을 주워 모으더니, 가르마를 타고 포마드를 바른 머리를 빛내며 어떤 물건이 들린 긴 팔을 각광등 사이로 쭉 뻗은 어느 신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일반석과 특별석의 청중들이 일제히 부산을 떨었고,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치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악단장은 단상에서 꽃다발 등을 전하면서 흰 넥타이를 바로잡곤 했다. 브론스끼는 일반석 열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멈춰 선 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인파로 가득한 극장의 낯익은 정경과 저 무대와 저 소음, 저 시시하고 재미없는 관객 무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특별석에는 여전히 그렇고 그런 부인들이 그렇고 그런 장교들을 뒤편에 대동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는 한결같은 모습의 알록달록한 여자들과 제복과 프록코트 차림의 남자들, 맨 위층 입석에 지라 잡은 매한가지로 꾀죄죄한 무리들 그리고 그 모든 군중 가운데, 특별석 맨 앞 열에 마흔 명가량의 진짜남자와 여자들이 있었다. 브론스끼는 바로 그 오아시스에 즉시 주목하였고, 곧바로 그들과의 사교활동에 돌입했다.

그가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막이 내렸기에. 그는 형의 자리에 들르지 않고 곧장 앞 열로 가서는 세르뿌호프스고이와 나란히 각광등 옆에 섰다. 무릎을 굽힌 구두 뒤축으로 각광등을 두드리던 그가 멀리서 브론스끼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보내며 자기 쪽으로 오라고 부른 참이었다.

브론스끼는 아직 안나를 보지 못했고, 일부로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길을 통해서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를 찾는 건 아니었다. 운이 나쁠 경우를 예상하면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눈으로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극장에 오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군인 티가 일허게 안 날 수가!” 세르뿌호프스꼬이가 말했다. “외교관이나 예술가, 뭐 그런 부류 같군.”

그래 귀국하자마자 이렇게 연미복을 입었네.” 브론스끼가 웃으면서 오페라글라스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자네가 부럽구먼. 외국에서 돌아와서 이걸 달 때면...” 그가 군복의 장식 술을 매만졌다. “자유가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

세르뿌호프스꼬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브론스끼를 공직에 복귀시키는 일을 단념한 터였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를 좋아했고, 지금은 특히나 그에게 다졍했다.

늦어서 1막을 못 봤으니 안타깝네.”

브론스끼는 그이 말을 한 귀롤 흘려들으며 오페라글라스를 1층 특별석에서 2층석 족으로 돌린 다음 특별석 부스를 살폈다. 움직이는 오페라글라스의 유리알 너머 터번을 쓴 부인듫과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박이는 대머리 노인 곁에서 브론스끼는 문득 레이스에 감싸인 채 미소 짓고 있는, 오만하고도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안나의 두상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로부터 스무 걸음 떨어진 아래층의 다섯 번째 특별석에 앉아 있었다. 앞쪽이 앉은 채 몸은 살짝 돌리고는 야시빈에게 뭔가를 얘기하는 모습이었다. 넓고 아름다운 어깨 위로 솟은 머리의 자태며, 절도 있으면서도 상기된 눈과 얼굴 전체의 광채는 그에게 모스끄바의 무도회에서 봤을 때의 모습을 완벽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글나 이제 그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 대한 감정 속에는 그 어떤 신비한 것도 없었으며, 따라서 그녀의 미모는 비록 예전보다도 더 강렬하게 그를 매혹시킬지언정 그와 동시에 굴욕감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브론스끼 쪽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이미 자신을 봤음을 감지했다.

브론스끼가 다시 그쪽으로 오페라글라스를 돌렸을 때, 그는 바라바라 공작 영애의 유달리 붉은 얼굴,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끊임없이 옆의 부스를 돌아보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반면에 안나는 부채를 접어서 붉은색 벨벳을 두드리며 어딘가를 주시할 뿐 옆 부스에서 벌어지는 일은 보지도, 보려 하지도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야시빈의 얼굴에는 그가 내기에 졌을 때 짓곤 하는 표정이 드리워 있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왼쪽 콧수염을 점점 더 깊숙이 입안으로 빨아들이면서 바로 그 옆 부스를 향해 곁눈질을 해댔다.

왼쪽 특별석 부스에는 다름 아닌 까르띠소프 부부가 있었다. 브론스끼는 그들을 알고 있었고, 안나와 그들의 친분도 잘 아는 터였다. 빼빼 마르고 몸집이 작은 까르따소바 부인이 자신의 부스에 서서 안나를 향해 등을 돌린 채 남편이 건네는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창백하고 화가 난 얼굴로 격앙되어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다. 뚱뚱한 대머리 신사 까르따소프는 부단히 안나를 돌아보며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아내가 나가 버리자 그는 한참을 미적거리며 안나의 시선을 살폈다. 그녀에게 인사를 할 요랑인 듯했다. 그러나 일부러 못 본 체하는 게 분명한 안나는 뒤로 몸을 돌리고서, 자신을 향해 짧게 깍은 머리를 숙이고 있는 야시빈에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까르따소프는 인사 없이 나가고, 부스는 텅 비었다.

까르따소프 부부와 안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안나에게 무언가 모욕적인 일이 벌어졌음을 브론스끼는 알아챘다. 무엇보다도 안나의 얼굴에서 드러났기에 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스스로 자초한 배역을 감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고, 겉으로 태연한 듯 굴며 그 배역을 완벽히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일행을 모르는 사람들, 그녀가 감히, 그것도 예의 레이스 장식을 달고 미모를 뽐내며 보란 듯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여자들이 표했던 그 모든 연민과 분노의 경악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이여인의 조용한 기품과 아름다움에 감탄할 뿐, 그녀가 치욕의 기둥에 내걸린 사람의 심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무언가 일이 있는 건 알았으되, 정확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던 브론스끼는 극심한 불안에 무엇이든 알아보려고 형이 있는 부스로 갔다. 일부러 안나의 반대편에 있는 일반석 통로를 택해 나오던 그는 지인 두 사람과 얘기 중이던 자신의 옛 연대장과 마주쳤다. 그는 그들 사이에서 까레니나라는 이름이 거론되고, 연대장이 큰 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지인들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지를 것을 알아챘다.

이런, 브론스끼 아닌가! 대체 연대에는 언제 들를 텐가? 환송연도 d jqt이 자네를 보낼 수는 없지. 자네는 우리 토박이 아닌가,” 연대장이 말했다.

겨를이 없네요. 참으로 유감입니다만, 다음 기회에 들르죠.” 브론스끼가 말하고 계단을 따라 2층에 있는 형의 부스로 뛰어 올라갔다.

브론스끼의 모친인 늙은 백작 부인은 예의 은회색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린 채 형의 부스에 앉아 있었다. 그는 2층 복도에서 소로끼나 공작 영애와 함께 있던 바라와 마주쳤다.

바라는 소로끼나 공작 영애를 시어머니에게 모시고 간 뒤 시동생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곧바로 그가 궁금해하는 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브론스끼로서는 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흥분한 모습이었다.

저열하고 추잡한 짓이에요. 게다가 마담 까르띠소바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요. 마단 까레니나는...” 그녀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나는 모릅니다.”

아니, 못 들으셨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그 얘길 맨 마지막으로 듣게 될 사람이니까요.”

저 까르따소바처럼 못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러니까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요?”

남편이 그러는데... 그녀가 까레니나를 욕보였대요. 남편이 부스 너머로 까레니나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난리를 피운 거예요. 큰 소리로 모욕적인 말을 내뱉고는 나가 버렸다네요.”

백작님, 어머님(maman)께서 부르십니다.” 소로끼나 공작 영애가 부스의 문틈으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내 너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통 보이질 않더구나.”

기쁨의 미소를 억제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아들은 감지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이렇게 왔잖습니까.”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왜 까레니나 부인의 시중을 들지(faire la cour a madame Karenine) 않는 거냐?” 소로끼나 공작 영애가 물러나자 그녀가 덧붙였다. “그녀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말이야. 그녀 때문에 다들 파티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었단다(Elle fait sensation. On oublie la Patti pour elle).”

어머니(Maman), 부탁인데 그 얘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가 인상을 찌푸였다.

모두가 하는 말을 하는 것뿐이다.”

브론스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소로끼나 공작 영애에게 몇 마디 건넨 후 부스를 나갔다. 문 앞에서 그는 형과 마주쳤다.

, 알렉세이!” 형이 말했다. “이 얼마나 추잡한 일이냐! 어리석은 여자야.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그녀에게 가볼 참이었다. 같이 가자꾸나.”

브론스끼에게는 형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갔다. 무언가를 해야할 것 같았지만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은 물론 자기까지 이토록 난처한 상황에 몰아넣은 안나에 대한 분노가 그녀의 고통을 향한 연민과 함께 그를 흥분시겼다. 그는 아래층 일반석으로 내려가 곧장 안나의 특별석 부스로 향했다. 부스 옆에서 스뜨레모프가 선 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더 이상 테너는 없어요. 그들은 멸종했답니다(Le moule en est brise).”

브론스끼는 그녀에게 고갯짓을 하고 그 자리에 서서 스뜨레모프와 인사를 나누었다.

늦게 와서 제일 멋진 아리아를 놓친 것 같네요.” 그녀가, 그가 느끼기에 조소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건넸다.

나야 형편없는 애호가니까요.” 그는 애답하며 엄한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야시빈 공작처럼 말이죠.”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분은 파티가 너무 큰 소리로 노래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고마워요.” 브론스끼가 집어 올린 공연 프로그램을 긴 장갑에 감싸인 조그만 손으로 받아 들며 그녀가 말했다. 그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흠칫 떨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특별석 부스 안쪽으로 갔다.

다음 막이 올랐을 때 그녀의 부스가 비어 있는 것을 알아챈 브론스끼는 카바티나의 선율에 조용해진 극장에 하는 소리를 불러일으키며 일반석을 빠져나와 숙소로 향했다.

안나는 이미 숙소에 와 있었다. 브론스끼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안나는 극장에 입고 간 옷차림 그대로, 벽에 붙은 안락의자에 혼자 앉아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힐끗 보고는 곧바로 조금 전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안나그가 입을 열였다.

모든 게 당신 탓이에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절망과 적의와 눈물이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부탁했잖아요. 가지 말라고 빌었잖아요.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불쾌한 일을 겪게 되리라는 걸...”

불쾌히요!” 그녀가 소리쳤다. “끔찍하다고요! 평생 그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 여자가 말하길,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치욕스럽다고 하더군요.”

어리석은 여자가 한 말이에요.” 그가 말했다. “그러게 뭣 때문에,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일을 자초한 건지...”

당신의 침착함이 증오스러워요. 당신을 나를 그 지경까지 몰고 가지 말았어야 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안나! 여기서 왜 내 사랑을 문제 삼는 건지...”

그래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나처럼 괴로워했다면, 나처럼...”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가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신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오직 그것만이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는 터였다. 말로써 책망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속으로 그녀를 질책하고 있었다.

브론스끼로서는 입 밖에 내기가 부끄러운 정도록 저속하게 여겨지는 사랑의 맹세를 그녀는 자기 안에 깊숙이 빨아들였고, 그럼으로써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완전히 화해한 두 사람은 시골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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