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까레니나 4부
까레닌 부부는 남편과 아내로서 계속해서 한집에 살면서 매일같이 마주치고 있었지만 사실상 서로가 완전히 남남이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하인들이 제멋대로 추측하지 못하도록 매일 아내와 대면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되, 집에서 식사하는 건 피하고 있었다. 브론스끼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집에 일체 발을 들여놓지 않았지만 안나는 집 밖에서 그와 만났으며, 남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 돌변할 것이며 곧 지나가게 될 일시적인 고난일 뿐이라는 기대가 없었다면, 셋 중 어느 누구도 그러한 상태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모든 게 지나가듯이 이 열정도 지나가기를, 그리하여 모두가 이 일에 대해 잊어버리고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기를 고대했다. 이러한 상황의 근본 원인이자 그로 인해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안나는 이 모든 게 곧 끝장나고 결판이 나리라 고대할 뿐 아니라 굳게 확신했기에 그 상태를 견디고 있었다. 무엇이 이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 무엇인가 곧 닥쳐오리라고 그녀는 철썩 같이 믿었다. 무심결에 그녀의 생각에 물들어 버린 브론스끼 역시, 자기 자신과는 무관하지만 모든 난관을 해결해 줄 그 무언가를 고대하고 있었다.
겨울의 중턱에서 브론스끼는 몹시 무료한 한 주를 보냈다. 그는 뻬쩨르부르끄를 방문한 외국 왕자를 접대하는 소임을 맡게 되어 수도의 명소를 안내해 주어야만 했다. 브론스끼 자신이 풍채가 좋은 데다, 위풍 있고 정중하게 처신하는 법을 그는 터득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인물들을 대하는 데도 익숙했으므로, 그가 왕자를 접대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소임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왕자는 고향에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러시아에서 그건 봤어?'라고 물을 만한 것이라면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고, 동시에 최대한 러시아적인 유흥을 누리기를 원했다. 브론스끼는 양쪽 방면에서 모두 그를 안내해야만 했다. 아침마다 그들은 명승지를 구경하러 다녔고, 저녁에는 전통적인 향락을 맛보았다. 이 왕자는 왕자들 중에서도 특히 유별난 건강의 소유자였다. 과도하게 쾌락에 몰두하는데도 불구하고 체조와 성실한 몸 관리로 정력을 키워 온 결과 그는 초록빛의 윤기 나는 큼직한 네덜란드산 오이처럼 싱싱해 보였다. 여행을 많이 다녀 본 왕자는 현대적 교통수단의 편리함이 가져다주는 주된 이점 중 하나가 나라별로 고유한 유흥을 접하기가 수월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에 방문했을 때 그는 세레나데를 몇 곡 부르다가 만돌린을 연주하던 스페인 여자와 사귀었다. 스페인에서는 '알프스 산양'을 쏘아 죽였다. 영국에서는 붉은색 연미복을 입고서 경주마에 올라 울짱을 넘었으며, 내기 사냥에서 꿩 2백 마리를 쏘아 죽였다. 터키에서는 하렘에 가보았고, 인도에서는 코끼리를 타고 다녔다. 이제 러시아에 왔으니 러시아만의 특별한 향락을 죄다 맛보아야 했다.
왕자의 의전을 담당한 브론스끼에게 가장 고된 일은 여러 인사들이 왕자에게 제공하는 온갖 러시아식 유흥을 적절하게 안배하는 것이었다. 승마도 있었고, 블린[러시아식 팬 케이크. 기름에 얇게 부쳐서 버섯, 허브, 치즈 등 갖가지 소를 넣어 먹는다] 시식도 있었으며, 곰 사냥과 뜨로이까[세 필의 말이 끄는 러시아 특유의 마차. 보통 때는 마차로 이용하다가 겨울이 되면 바퀴를 떼어 내서 차체를 큰 썰매 위에 싣고 달린다.] 시승, 그리고 집시들과의 여흥에다 러시아식으로 술잔을 깨부수며 즐기는 주연도 있었다. 너무나 쉽게 러시아의 기운을 습득한 왕자는 잔이 놓인 쟁반들까지 깨부쉈고, 집시 여자를 무릎에 앉히기도 했다. 그러고는 '뭔가 더 있소? 아니면, 러시아의 기운은 겨우 이게 다요?'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사실, 러시아의 온갖 향락 중에서 가장 왕자의 마음에 든 것은 프랑스 여배우와 발레리나, 그리고 하얀 레벨이 붙은 샴페인이었다. 브론스끼는 왕자들을 대하는 일에 익숙했지만, 최근 들어 그 자신이 변한 탓인지, 아니면 이 왕자와 너무 가까이 지낸 탓인지, 그 한 주간은 지독한 고역으로 느껴졌다. 일주일 내내, 그는 마치 미치광이를 곁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그 미치광이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와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정신까지 어찌 될까 봐 걱정스러워하는 심정과 유사한 심정을 쉴 새 없이 느꼈다. 모욕당하지 않으려면 엄중하게 격식을 갖춘 경의를 표함에 있어서 단 한 순간도 그 강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줄곧 브론스끼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러시아식 향응을 제공하겠다며 브론스끼로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안달복달하는 인사들을 왕자는 멸시하는 투로 대했다. 또한 그는 러시아 여인들을 탐구하고자 했는데, 이 여인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브론스끼로 하여금 여러 차례 분노로 얼굴을 붉히게끔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브론스끼에게 왕자를 상대하는 일이 특히나 힘들었던 주요 원인은 뜻밖에도 그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그 거울 속에서 본 모습이 그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것은 무척 어리석고 자신만만하며 아주 건강하고 깔끔한 인간의 모습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신사였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었고, 브론스끼도 그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윗사람을 대할 때 알랑대는 기색 없이 의연했고, 대등한 이들을 대할 때는 거리낌 없고 소탈했으며, 아랫사람에게는 멸시 섞인 친절함을 드러냈다. 브론스끼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그러한 점을 스스로 커다란 장점이라 여긴 터였다. 그러나 왕자에게 그는 아랫사람이었다. 예의 멸시 섞인 선량함에 그는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아둔한 고깃덩어리! 정말이지 내가 저런 인간이란 말인가?' 그가 속으로 내뱉었다.
어쨌거나 이래째 되던 날 모스끄바로 떠나는 왕자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고서 그와 헤어졌을 때, 브론스끼는 그토록 거북스러운 상황과 불쾌한 거울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했다. 그는 곰 사냥에서 돌아오던 길에 기차역에서 왕자와 헤어졌다. 사냥터에서 그들은 밤새도록 러시아식 용맹함의 시범을 보인 터였다.
집으로 돌아온 브론스끼는 방에서 안나가 보낸 쪽지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몸이 아프고 불행해요. 외출도 못 하겠어요. 하지만 더 이상 당신을 안 보고 견딜 수는 없어요. 저녁에 와주세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7시에 회의에 갔다가 10시까지는 거기 있을 거예요.' 집에 들이지 말라는 남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집으로 자신을 부르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한순간 스쳐 갔지만, 그는 가기로 마음먹었다.
올겨울 대령으로 승진한 브론스끼는 연대에서 나와 혼자 지내고 있었다. 그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요 며칠 목격했던 추잡한 장면들이 5분가량 뒤죽박죽 혼란스레 떠오르더니 안나에 대한 인상과 곰 사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몰이꾼 사내의 이미지와 뒤섞였다. 그러다가 이내 브론스끼는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며 잠에서 깨어난 그는 황급히 촛불을 켰다. '그게 뭐지? 뭐더라? 꿈에서 본 그 무서운 게 대체 뭐지? 그래 맞아, 몰이꾼 사내였어. 몸집이 작고 지저분하고 뻣뻣한 턱수염이 났던 것 같아. 그가 허리를 굽힌 채 뭔가를 하다가 갑자기 프랑스어로 이상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지. 그래, 거기까지가 꿈에서 본 전부였어.' 그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끔찍했을까?' 그는 그 사내와 그가 지껄였던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를 다시 한번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러자 싸늘한 공포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망상이내!' 브론스끼는 속으로 이렇게 뇌까리고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8시 30분이었다. 그는 벨을 울려 하인을 부른 다음 꿈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늦을까 봐 안달하며 서둘러 옷을 입고 현관으로 나섰다. 까레닌가의 현관에 당도하여 시계를 보니 9시 10분 전이었다. 회색 말 한 쌍이 매인, 천장이 높고 폭이 좁은 사륜마차가 현관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그것이 안나의 마차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한테 오려고 했군.' 브론스끼는 생각했다. '그게 더 나았을 텐데. 도무지 이 집에는 발을 들이기가 싫단 말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어릴 적부터 몸에 밴 당당한 자세로 썰매에서 내려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문이 열리더니 모포를 손에 든 수위가 손짓으로 사륜마차를 불렀다. 세세한 것들에는 둔감한 편이었던 브론스끼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쳐다보는 수위의 놀란 표정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바로 그 문가에서 브론스끼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원추형의 가스등 불빛이 검은 모자 밑의 창백하고 해쓱한 얼굴과 비버 털가죽 외투 깃 사이로 반짝이는 하얀 넥타이를 곧장 비추었다. 까레닌의 흔들림 없는 흐릿한 시선이 브론스끼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브론스끼가 목례를 하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입을 꽉 다문 채 모자 위로 손을 올리고는 그대로 지나쳐 갔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사륜마차에 오르더니 창문으로 모포와 쌍안경을 건네받고는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브론스끼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의 눈썹은 일그러져 있었고, 두 눈은 오만과 독기가 서린 빛을 뿜고 있었다.
'꼴좋게 됐군!' 그는 생각했다. '그가 결투를 해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면, 나 역시 거기에 응하며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저건 나약하거나 아니면 비열한 거야…..그가 나를 비겁한 인간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그럴 마음은 없어.'
브레데 부인의 별장 정원에서 안나와 속 얘기를 서로 털어놓은 뒤 브론스끼의 생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그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오로지 그의 결단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있는 안나의 나약함에 자신도 모르게 굴종하였고, 지레 앞서서 모든 것에 굴복해 버렸으며, 그 무렵 그에게 들었던 생각, 즉 이런 식으로 지속되는 관계가 끝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다. 그의 야심 찬 계획은 또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는 모든 것이 규정되어 있는 행동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고 느끼면서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를 통째로 내맡겼으며, 그러한 감정은 그를 점점 더 강하게 그녀에게 얽어맸다.
대기실에서 그는 멀어져 가는 안나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이내 응접실로 돌아갔음을 알아챘다.
"안 돼요!" 그를 보자마자 안나가 소리쳤다. 그 외마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이렇게는 안 돼요.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훨씬, 훨씬 더 빨리 그 일이 일어날 거예요!"
"뭐가 말입니까?"
"뭐냐고요? 나는 괴로워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시간, 두 시간을…….아니요, 더 말하지 않을래요! 당신과 싸울 수는 없어요. 그래요,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던 거예요. 됐어요, 그만 말할래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서 그윽하고 환희에 찬 눈빛으로 한참동안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지 못한 동안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떠올려 곱씹은 터였다. 모든 남녀의 만남에서 그러듯이,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을 자신이 상상한(비할 데 없이 멋진,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이미지와 합쳐 놓곤 했다.
"그이와 마주쳤죠?" 두 사람이 램프 아래 놓인 탁자 앞에 앉았을 때 그녀가 물었다. "늦게 온 벌이에요."
"그런데, 어찌 된 겁니까? 회의장에 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거기 갔다가 돌아와서는 다시 어디론가 외출한 거예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 얘기는 그만두죠. 어디에 있었어요? 줄곧 왕자와 함께 있었던 거예요?"
그녀는 브론스끼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는 밤새 잠을 못 잔 탓에 그만 잠들어 버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행복에 겨워 흥분된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왕자가 출발했다고 보고하러 가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죠? 그분은 떠난 거죠?"
"다행히도 끝났어요. 그 일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모를 겁니다."
"아니, 어째서요? 그건 당신네들 젊은 남자들이 모두 다 늘 겪는 일상이잖아요."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이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뜨개질감을 집어 들고서 브론스끼에게서 눈길을 거둔 채 바늘 코를 빼내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런 생활을 청산한 지 오랩니다." 안나가 표정을 바꾸자 놀란 그가 그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리고 고백하건대……"그는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이번 주 내내 그 생활을 지켜보면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어요. 불쾌했답니다."
그녀는 뜨개질은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뜨개질감을 손에 쥔 채, 기묘하게 반짝이는 적의 어린 눈초리로 브론스끼를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리자가 들렀어요.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버티고 있는데도, 아직 사람들은 나를 보러 오늘 걸 꺼려하지 않더군요." 곧이어 그녀가 덧붙였다. "당신네들의 그 음탕한 주연에 관해서 들었어요. 정말이지 추잡해요."
"막 그 얘길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녀가 말을 가로챘다.
"당신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그 테레즈인가 하는 여자도 있었다면서요?"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네들, 남자들이란 정말 추잡하기 짝이 없어요! 여자는 그런 일을 잊지 못한다는 생각을 왜 못 하느냔 말이에요." 그녀는 점점 더 열을 올렸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의 생활에 대해 알 수가 없는 여자는 특히 더 그렇다고요. 내가 뭘 알고 있죠? 내가 뭘 알고 있었냐고요? 당신이 나에게 얘기해 준 것뿐이죠. 그런데 그 얘기가 진실인지, 내가 어찌 알겠어요……."
"안나! 당신은 지금 나를 모욕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나를 못 믿는단 말입니까? 당신에게 털어놓지 못할 생각 따위는 없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알겠어요. 알겠어." 그녀가 질투 어린 생각을 쫓아 버리려 애쓰는 투로 대답했다.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당신이 안다면! 당신을 믿어요, 믿고말고요……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려던 거였죠?"
그는 자신이 뭘 얘기하고자 했는지 얼른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최근들어 점점 더 자주 안나를 사로잡는 폭발적인 질투심은 브론스끼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리고 그녀의 질투가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그녀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식어 갔다. 그는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곧 행복이라고 수없이 스스로에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그녀 역시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축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라 여기는, 그런 여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를 사랑해 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뒤쫓아 모스끄바를 떠나왔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행복은 미래에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반면 지금의 그는 진정한 행복이 이미 지나가 버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안나는 그가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모습과 전혀 달라져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더 나쁜 쪽으로 변해 버렸다. 몸배는 전체적으로 펑퍼짐해졌고, 여배우에 관해 얘기할 때면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곤 했다. 그는 자신이 꺾은 꽃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애초에 그로 하여금 그것을 꺾어 망가뜨리게 만든 아름다움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랑이 더 강렬했던 당시에는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 사랑을 자신의 심장에서 떼어내 버릴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반면,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 버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왕자에 관해서 뭔가 말하려 했던 거 아녜요? 악령은 쫓아 버렸어요, 쫓아 버렸다니까요." 그녀가 덧붙였다. 둘 사이에서 질투는 악령이라 불렸다. "그래요, 왕자에 관해 뭔가 얘기를 꺼냈었잖아요. 왜 그렇게 괴로웠는데요?"
"어휴,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가 놓쳐 버린 실마리를 다시 붙잡으려 애쓰며 말했다. "그는 가까워질수록 호감을 잃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잘 사육된 짐승 같아요. 가축 전시장에서 1등 메달을 딸 만한 그런 종류 말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는 불쾌한 어조로 이야기하며 그녀의 흥미를 끌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녀가 되받아쳤다. "어쨌거나 견문이 넓고 교양 있는 분이잖아요."
"그건 전혀 다른 종류의 교양이에요. 그들만의 교양이죠. 오로지 교양을 경멸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 교육을 받은 게 분명해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동물적인 향락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 당신네들 모두가 그런 동물적인 향락을 좋아하지 않나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또다시 그를 피해 달아나는 음울한 시선을 알아챘다.
"왜 그를 옹호하는 겁니까?"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옹호하는 게 아니에요. 나랑은 뭐 전혀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에는, 당시 자신이 그런 향락을 싫어한다면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런데도 당신은 이브의 의상을 차려입은 테레즈를 음미하며 쾌감을 느끼고….."
"또다시 그놈의 악령이군요!" 브론스끼가 탁자 위에 놓인 안나의 손을 붙잡아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요, 어쩔 수가 없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나는 질투심 강한 여자가 아니에요. 그런 여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이 여기,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당신을 믿어요. 하지만 당신이 어디선가 혼자서 나는 모르는 당신만의 생활을 꾸려 갈 때면……"
안나는 그에게서 몸을 떼고 뜨개질감에서 코바늘을 마침내 빼내더니, 검지를 놀려 램프 아래 빛나는 하얀 털실의 뜨개코를 하나씩 떠나갔다. 자수가 놓인 소매 아래서 가녀린 손목이 빠르게 신경질적으로 움직였다.
"그래, 어땠나요? 어디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마주친 건가요?" 돌연 그녀의 음성이 부자연스럽게 울렸다.
"출입문에서 마주쳤어요."
"당신에게 이렇게 인사했죠?"
그녀가 얼굴을 쑥 내밀더니 눈을 반쯤 감고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순간 브론스끼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아까 자신에게 인사하던 때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얼굴 표정과 똑같은 모습을 읽었다. 그가 미소를 짓자, 안나는 그녀의 커다란 매력 가운데 하나인 예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사랑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쾌활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브론스끼가 말했다.
"별장에서 당신의 속 얘기를 들은 뒤에 당신과 헤어졌더라면, 아니면 나에게 결투라도 신청했더라면……하지만 이런 경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런 상태를 그는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거죠? 괴로워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던데."
"그이가요?" 그녀가 비웃는 투로 말했다.
"그는 전적으로 만족스러워하고 있어요."
"모든 게 다 잘될 수 있는데, 대체 왜 우리 모두 이렇게 고통받는 겁니까?"
"그이만은 그렇지 않아요. 내가 그 사람을, 그 사람이 흠뻑 젖어 사는 그 허위를 모르겠어요? 만일 그이가 무언가를 느낀다면, 나랑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가 있겠어요? 그이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못 느껴요. 무언가 느끼는 사람이라면, '부정한' 아내와 한집에서 살 수가 있겠어요? 그런 아내와 말을 섞을 수 있겠어요? '여보', 하고 부를 수나 있겠느냐고요."
무심결에 그녀는 또 그를 흉내 냈다. "여보, ma chere(여보), 안나!"
"그이는 남자가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에요. 그이는 인형이에요! 아무도 모를 테지만, 나는 알아요. 오, 내가 만일 그의 입장에 놓였더라면, 누구라도 그의 입장에 놓였더라면! 만일 내가 그 입장에 섰더라면, 나 같은 여자는 진작 죽였을 거예요.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거라고요. 그리고 ma chere(여보), 안나, 따위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겠죠. 그이는 사람이 아니라 관청의 기계예요. 그이는 내가 당신의 아내라는 걸, 자신은 남이며 군더더기라는 걸 이해하지 못해요. 이제 더 이상 이 얘기는 하지 말아요, 하지 말자고요!"
"그런 말은 '옳지 못합니다, 옳지 못해요." 브론스끼가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맙시다. 뭘하고 지냈는지 얘기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체 무슨 병이 났다는 겁니까? 의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안나는 조롱기가 역력한 눈초리로 브론스끼를 바라보았다. 남편에게서 또 다른 우스꽝스럽고 흉한 면을 찾아내어 그걸 이야기하려고 뜸을 들이는 듯했다.
브론스끼가 말을 이었다.
"병이 난 게 아니라 당신의 몸 상태 때문이 아닐까 짐작했어요. 그건 언제쯤이죠?"
그녀의 눈에서 조롱기가 사라지고 다른 종류의 미소가, 그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기색과 잔잔한 우수가 조금 전의 표정을 대체했다.
"머지않았어요. 금방이에요. 당신은 우리의 처지가 고통스럽다고, 그걸 해결해야만 한다고 말했죠.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나 한다면! 자유롭게 마음 놓고 당신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나는 뭐든지 다 내놓을 텐데요! 질투심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당신을 괴롭히지도 않을 텐데요…..머지않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 일을 생각하니 그녀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불쌍하게 여겨지고 눈물이 솟구치는 바람에 하던 얘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램프 아래서 반짝이는 반지와 흰 살결을 드러내고 있던 손을 브론스끼의 소매 위에 얹었다.
그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되지 ㅇ낳을 거예요. 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신이 털어놓게 만들었어요. 머지않아, 곧 모든 게 해결될 거예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편안해지고 더 이상은 괴로워하지 않게 될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언제쯤이냐고 물었죠? 곧 닥칠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걸 견뎌 내지 못할 거예요. 내 말을 가로막지 말아요!" 그녀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나는 알아요, 확실하게 알고 있단 말이에요. 나는 죽을 거예요. 죽음으로 나 자신과 당신을 해방시켜 줄 수 있을 테니 정말 기뻐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브론스끼가 몸을 숙여 안나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떨쳐 버릴 수 없는 불안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게 더 나아요. 그녀가 그의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그게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거예요."
그가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얼토당토않은 얘깁니까!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군요!"
"아니요, 그건 진실이에요."
"뭐가, 대체 뭐가 진실이란 말입니까?"
"내가 죽으리라는 거 말이에요. 꿈을 꿨거든요."
"꿈이라고요?" 브론스끼가 되물었다. 그 순간 그의 꿈에 나타났던 사내가 떠올랐다.
"네, 꿈요." 그녀가 말했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 꿈을 꾸곤 했어요. 내가 침실로 뛰어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서 뭔가를 가져가거나 뭔가를 알아내야만 하거든요. 알다시피, 꿈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잖아요." 그녀는 공포에 잠긴 눈을 크게 뜨고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침실에, 거기 한구석에 무언가 서 있는 거예요."
"에잇,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깁니까? 그런 걸 믿다니…."
그러나 그녀는 도중에 끼어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금 하는 말은 그녀 자신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때 그 무언가가 뒤돌아서요. 알고 보니 그건 몸집이 작고 뻣뻣한 턱수염을 기른 무시무시한 농부예요. 나는 달아나고 싶은데, 그 사내가 자루 위로 몸을 숙인 채 두 손으로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거예요…."
그녀는 농부가 꿈지럭대며 자루 속을 뒤적이는 모습을 흉내 냈다. 그 얼굴에는 공포가 드리워 있었다. 브론스끼 또한 자신의 꿈을 떠올리면서 똑같은 공포가 자신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가 꿈지럭대면서 프랑스어로 재빠르게 뇌까리지 뭐예요. 'r'을 파리식을 발음하면서 말이에요. 'Il faut le battre le fer, le broyer, le petrir(쇠를 버려야 해, 두드리고 주물러야 해)……'라고 말이죠. 나는 두려움에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만, 깨어나도 여전히 꿈속이에요. 그러면서 이게 무슨 뜻일까, 자문하기 시작해요. 그러면 꼬르네이가 나한테 이렇게 말하죠. '출산 중에 돌아가실 겁니다, 출산 중에요, 마님……' 그러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정말이지 말도 안 돼요, 쓸데없는 망상이라고요!" 브론스끼가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설득력이라곤 전혀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자신이 느끼고 있었다.
"그 얘긴 이제 그만하죠. 벨을 울려 주세요. 차를 내오라고 하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깐 동안 나는….."
갑자기 그녀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표정이 일순 돌변했다. 공포에 휩싸인 격정이, 침착하고 진지하며, 행복하고 신중한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그는 그러한 변화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기 집 현관에서 브론스끼와 맞닥뜨린 뒤 예정대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관람하러 갔다. 거기서 2막까지 내리 앉아 있다가 만나야 할 인사들을 모조리 대면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옷걸이를 유심히 살피며 군용 외투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평소대로 자기 방으로 갔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달리 잠자리에 들지 않은 채 새벽 3시까지 방 안을 서성였다. 예의를 지키려 들지 않고, 정부를 집 안에 들이지 말라는 자신이 제시한 단 한 가지 조건조차 이행하지 않는 아내에 대한 분노가 그에게서 안정감을 앗아 가버렸다. 아내가 그의 요구를 이행하지 않았으니 그녀를 벌하기 위해 이혼을 청구하고 아들을 빼앗아 버리겠다고 협박했던 바를 실행에 옮겨야만 했다. 그 일이 수반하는 온갖 골치 아픈 사안들에 대해 그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은 이상 이제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리지야 이바노브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그 길만이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돌파구이며, 최근 이혼에 관한 실무 절차가 개선되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로서는 형식상의 난항들을 극복할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언질을 주기도 했었다. 마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민족 정착에 관한 사안과 자라이스끄현 농경지 관개 사업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업무상 지독한 불쾌감을 안겨 주는 바람에, 요 근래 그는 내내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던 참이었다.
밤새 잠이 오질 않았다. 곱절에서 곱절로 늘어 가던 그의 분노가 아침녘에는 극한에 이르고 말았다. 아내가 깨어난 기척을 느끼자마자 그는 황급히 옷을 입고는 분노로 가득 찬 잔을 혹여 엎지를까 봐, 그리고 분노와 함께 아내와 담판을 짓는 데 필요한 정력마저 쏟아 버릴까 봐 초조해하는 듯한 기색으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에 대해 그토록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 온 안나이지만, 방으로 들어왔을 때의 그 모습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이마는 잔뜩 주름져 있었고, 두 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음울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경멸을 머금은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걸음걸이나 몸짓, 목소리에는 안나가 여태까지 본 적 없는 단호함과 결연함이 배어 있었다. 방에 들어온 그는 아내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곧장 그녀의 책상으로 가서 열쇠로 서랍을 열었다.
"뭘 원하는 거죠?"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당신 정부가 보낸 편지들." 그가 대답했다.
"그건 여기 없어요." 안나가 서랍을 닫으며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 행동으로 그는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깨닫고는 아내의 손을 거칠게 밀어내고서 그녀가 가장 긴요한 문서들을 담아 두는 서류 가방을 잽싸게 낚아챘다. 안나가 서류 가방을 빼앗으려 했으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런 그녀를 밀쳐 냈다.
"자리에 앉아요! 당신과 얘기를 좀 해야겠소." 그가 서류 가방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어깨가 올라갈 정도로 팔꿈치로 단단히 누른 다음 말했다.
충격을 받고 겁을 먹은 그녀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남편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 정부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건 허락하지 않겠노라고 말했잖소."
"그를 만나야만 했어요,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 구실도 떠올리지 못하고 중간에 말을 멈췄다.
"무엇 때문에 여자가 정부를 만나야만 하는지, 자세히 알아볼 생각은 없소."
"나는 단지….." 그녀가 발끈했다. 그의 거친 행동으로 울컥 화가 치밀자 갑자기 용기가 솟았다. "당신이 얼마나 함부로 나를 모욕하는지, 정말 모르는 건가요?" 그녀가 말했다.
"모욕이란 순결한 사람, 순결한 여자한테나 쓸 수 있는 말이오. 도둑에게 도둑이라고 말하는 건 la constatation d'n fait(사실의 확인)일 뿐이지."
"당신에게 이런 새로운 면이, 이토록 잔혹한 면이 있는 줄 몰랐네요."
"오로지 예의를 지키는 조건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명예로운 은신처를 제공해 주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을 잔혹함이라고 부르는군. 그게 잔혹한 거란 말이요?"
"잔혹한 것보다 더 나쁘죠. 그게 뭔지 정말 알고 싶나요? 그건 비열한 거예요!" 안나는 악에 받쳐 고함을 지르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안 돼!" 그가 평소보다 한 음계 더 높은 특유의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러고는 예의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목에 팔찌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서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비열하다고? 그런 표현을 쓸 생각이라면 내가 알려 주지. 비열함이란 이런 거요. 정부 때문에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서도 남편이 벌어 오는 밥을 먹는 것 말이오!"
안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 정부에게 했던 말, '당신'이야말로 나의 남편이며 그이는 군더더기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남편의 말이 전부 정당하다고 느꼈기에 다만 조용히 이렇게 대꾸했을 뿐이다.
"내 처지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당신도 그보다 더 나쁘게 묘사하지 못해요.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왜 내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왜냐고?" 그가 여전히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예의를 지켜 달라는 내 뜻을 당신이 이행하지 않았으니, 이 상태를 끝장내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요."
"곧, 곧 끝장날 거예요." 그녀가 속엣말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곧 다가올, 이제는 바라는 바인 죽음이 떠올라 또다시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당신과 당신의 정부가 예상한 것보다는 더 빨리 끝날 거요! 당신들에게 필요한 건 동물적 욕구의 충족이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관대하지 못하다는 말은 않겠어요. 하지만 이건 점잖지 못하잖아요. 쓰러진 사람을 때리다니요."
"그래, 당신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뿐, 한때 당신의 남편이었던 사람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지. 남편의 삶이 통째로 무너져 버렸는데도, 당신은 아무 상관도 없는 거야, 그가 심히…….심히……고통스러…….한다는 것도."
너무 황급히 말하다가 혀가 꼬여 버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마지막 단어를 도무지 제대로 발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고통스러버'라고 내뱉고 말았다. 안나는 내심 우스웠지만, 이런 순간에 뭔가를 우스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내 부끄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처음으로 남편이 짠하게 여겨져 그의 입장에 서보았다. 그러자 그가 거련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역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아까보다는 덜 날카로운, 그러나 여전히 차가운 소리로, 특별한 의미라곤 전혀 없이 생각나는 대로 튀어나오는 단어들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온 건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그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건 내 착각이었어…..' 그가 '고통스러버'라고 말했을 때의 표정을 떠올리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눈빛이 흐리고 자기만족을 위해 냉정함을 고수하는 사람이 과연 무언가를 느낄 수가 있겠어?'
"나는 어떤 점에서도 달라질 수가 없어요." 그녀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내일 나는 모스끄바로 떠나 더 이상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하러 왔소. 당신은 이혼 실무를 맡게 될 변호사를 통해 내가 내린 결정들을 전해 듣게 될 거요. 내 아들은 누이에게 보낼 작정이요." 아들 얘기를 하려 했던 것을 간신히 떠올리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당신한테 세료자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필요한 거죠." 그녀가 남편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당신은 그 애를 사랑하지 않아요….세료자는 그냥 놔두세요!"
"그렇소, 나는 아들에 대한 사랑마저 잃었소. 왜냐하면 당신에 대한 나의 혐오감이 그 아이에게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를 데려가겠소. 그럼 이만!"
그러고서 나가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붙잡았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세료자는 두고 가주세요!" 그녀가 다시 한번 속삭이듯 말했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어요. 세료자는 그냥 두세요, 그때까지만…..곧 출산하게 될 거예요. 그 애는 두고 가세요!"
순간 발끈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말없이 방을 나갔다.
뻬쩨르부르끄의 저명한 변호사의 접견실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들어섰을 때, 그곳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노파와 젊은 처자, 상인의 아내를 포함한 세 명의 숙녀와 세 명의 신사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손에 보석 반지를 낀 독일인 은행가였고 다른 이는 턱수염을 기른 상인, 나머지 한 명은 십자가를 목에 건 채 잔뜩 화가 나 있는 제복 차림의 관리였다. 한참 전부터 대기하고 있던 게 분명해 보였다. 두 조수가 책상에 앉아 펜촉을 삐걱대면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필기구는 유난히 좋은 것들로 갖춰져 있었는데, 필기 용품 애호가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그 점을 놓칠 리가 없었다. 조수 중 하나가 앉은 채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변호사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소."
"변호사님은 바쁘십니다." 조수가 기다리는 손님들을 펜으로 가리키며 깐깐하게 대답하고는 필기를 계속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없겠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한가할 틈이 없으십니다. 항상 바쁘시거든요. 좀 기다리십시오."
"수고스럽겠지만 내 명함을 좀 건네주시오." 본명을 밝힐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위엄 있게 말했다.
명함을 건네받은 조수는 거기 적힌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공개 재판 제도에 원칙적으로 동의했지만, 그것을 러시아에서 적용하는 데 있어 몇 가지 세부적인 사항들과 관련해서는 자신에게 매우 익숙한 고위 공직상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최고위급에서 승인된 무언가를 비판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것들을 비난하곤 하였다. 그는 일평생 행정 일을 하며 보냈다. 때문에 그가 무언가에 동의하지 않을 때는, 모든 일에는 불가피한 오류가 있기 마련이며 개선될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그 반발심을 누그러뜨리곤 했다. 새로운 재판 제도에서도, 그는 다름 아닌 변호사 제도 도입과 관련된 사항들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까지는 변호사와 아무런 볼일이 없었으므로 단지 이론적으로만 그 제도에 반대해 왔는데, 변호사 사무실에서 받은 불쾌한 인상 때문에 그의 반발심은 더욱더 커졌다.
"곧 나오실 겁니다." 조수가 말했다. 그러자 정말로 약 2분 뒤, 변호사와 뭔가 논의 중인 키 크고 호리호리한 늙은 법률가가 문가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침내 변호사가 나타났다.
변호사는 땅딸막하고 몸집이 다부진 대머리의 사내로 검붉은 턱수염과 기다란 금빛 눈썹, 툭 튀어나온 이마를 지니고 있었다. 넥타이와 두 줄의 체인에서부터 에나멜 부츠에 이르기까지 마치 새신랑처럼 성장(盛裝)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영리해 보였지만 촌티가 흘렀고, 한껏 멋을 낸 옷차림은 저급한 취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서 이쪽으로 드시지요." 변호사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향해 말했다. 그러고는 침울한 표정으로 까레닌을 자기 방으로 들여보낸 뒤 문을 닫았다.
"앉으시겠습니까?" 그가 서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책상 옆의 안락의자를 가리키더니 그 자신은 좌장 자리에 앉아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숙인 채 짤막한 손가락에 하얀 솜털이 덮인 자그마한 두 손을 비벼댔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 자리를 잡자마자 책상 위로 나방이 날아들었고, 그러자 변호사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날쌘 동작으로 두 손을 벌려 날벌레를 후려잡고는 다시 좀 전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내 용건을 얘기하기 전에……."변호사의 행동을 놀란 눈으로 주시하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이야기를 꺼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당신과 논의하게 될 사안은 비밀에 부쳐져야만 하오."
눈에 띌까 말까 한 희미한 미소로 인해 변호사의 늘어진 붉은 콧수염이 살짝 벌어졌다.
"위임된 비밀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변호사라고 할 수도 없겠죠. 그렇지만 확실하게 해두고 싶으시다면….."
그의 얼굴을 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총기 어린 잿빛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있으며, 이미 그가 모든 것을 훤히 알고 있음을 눈치챘다.
"내 이름을 아시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유익한……." 그가 또다시 나방을 잡았다. "활동에 대해서도요. 러시아 사람들 모두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변호사가 몸을 수그리며 말을 맺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용기를 내고자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한번 마음을 굳게 먹은 다음부터는 우물쭈물하거나 더듬거리는 일 없이, 몇몇 단어들을 강조하며넛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불행하게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남편으로서 기만당했고, 따라서 아내와의 관계를 법적으로 정리하려 하오. 요컨대 이혼을 하려는데, 다만 한 가지, 아들은 엄마한테 내주지 않았으면 하오."
웃음 짓지 않으려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변호사의 잿빛 눈동자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번득였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 눈에 어린 것이 단지 짭짤한 건수를 수임하게 된 사람의 기쁨만이 아님을 알아챘다. 거기에는 승리의 환희가 담겨 있었고, 언젠가 아내의 눈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사악한 광채가 번득이고 있었다.
"이혼을 성사시키는 데 제가 도움을 드리기를 바라신단 말씀이시죠?"
"바로 그거요. 하지만 한 가지 경고해 두겠는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내가 당신의 배려를 악용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오. 나는 당신과 단지 사전 논의를 하기 위해 찾아온 거요. 이혼을 원하지만 나에게는 이혼을 가능케 하는 형식들이 중요하오. 만일 그 형식들이 내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법적인 절차를 포기할 가능성이 크오."
"오, 그거야 늘 그렇습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그거야 항상 선생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죠."
변호사는 자신의 눈에서 발하는 가눌 수 없는 기쁨이 고객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발치를 향해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고는 코앞을 날아가는 나방을 발견하고서 손을 움찔하기는 했으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처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나방을 잡지는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국내 법규의 전반적인 윤곽은 나도 알고 있소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을 이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들이 실제적으로 처리되는 형식에 관해서 전체적으로 좀 확인했으면 하오."
"그러니까 원하시는 게….." 변호사가 눈을 내리깐 채 고객의 말투를 흉내 내어 득의만만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의 희망 사항을 실현해 낼 방도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으신 거로군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군데군데 붉어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얼굴을 힐끗힐끗 곁눈질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법에 따르면….." 나라의 법에 찬동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살짝 풍기며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혼은, 아시다시피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가능한데요……잠시 기다리게!" 그가 문틈으로 고개를 쑥 내민 조수를 향해 말하고는, 그러고도 못내 일어나서 몇 마디 이른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한합니다. 배우자에게 신체적 결함이 있을 때, 5년간 행방불명일 때……." 털이 수북이 덮인 짤막한 손가락을 꼽으며 그가 말했다. "그다음은 간통을 했을 경우입니다. ('간통'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그는 흡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앞서 말한 세 경우와 세부 사항은 함께 분류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통통한 손가락을 꼽으며 말을 이었다). 남편 혹은 아내의 신체적 결함, 그다음으로는 남편 혹은 아내의 간통이지요." 손가락을 전부 꼽아버렸기에, 그는 손가락을 전부 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이건 이론적인 견해이고, 선생님께서는 그것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응용되는지 알아보시고자 영광스럽게도 저를 찾아오신 거라 사료됩니다. 따라서 저는 선례에 의거하여, 이혼하게 되는 경우란 대부분 다음의 사항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제 추측입니다만, 신체적 결함은 없으시죠? 행방불명 또한 아니시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귀결됩니다. 부부 중 한쪽이 간통을 하여 쌍방 합의하에 죄행을 증명하는 경우 내지는 쌍방 합의와는 별개로 뜻하지 않게 죄행이 증명되는 경우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실제로는 드물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군요." 말을 마친 변호가사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곁눈질로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총포상 주인이 이런저런 무기들의 이점을 설명한 뒤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형국이었다. 하지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쪽에서 아무 말이 없기에 변호사는 다시금 설명을 해나갔다. "제 생각에 가장 흔하고 간단하고 합리적인 경우는 쌍방의 합의하에 간통을 증명하는 겁니다.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을 대할 때는 이런 표현은 절대로 입에 담지 않습니다만….." 변호사가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쌍방의 합의하에 간통을 증명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눈빛으로 의혹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자 변호사가 당장 그를 거들어 주었다.
"부부가 더 이상 함께 살 수가 없다, 이게 하나의 사실입니다. 만일 쌍방이 그 점에 동의한다면, 세부적인 혀익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게다가 그게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지요."
그제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모든 걸 이해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방식을 채택할 수 없게 만드는 종교적 요구 사항이 있었다.
"이 경우에 그런 방식은 불가능하오." 그가 말했다. "여기서는 오직 한 가지 경우만 가능하오. 즉 뜻하지 않은 죄행의 적발 말이오. 내가 소지하고 있는 편지들이 그걸 확증해 줄 거요."
편지 얘기를 들은 변호사는 입을 꽉 다물더니, 동정하는 동시에 멸시하는 듯한 가느다란 음성으로 말했다.
"제 말씀 좀 들어보십시오."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선생님께서 아시다시피 종교 기관에서 해결하곤 합니다. 신부들과 사제장들은 이런 일이라면 아주 자잘한 사항들까지 캐내려 들지요." 그가 사제장들의 취향에 공감하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을 이어 갔다.
"편지들이 물론 부분적으로 죄상을 확인해 줄 수야 있겠지요. 하지만 유죄 증거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즉 증인들에 의해서 입수되어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선생님께서 저를 신뢰하신다면 어떠한 방도를 취해야 할지는 제가 선택하게 해주십시오. 결과를 얻고자 하는 자가 방법도 택하는 법이니까요."
"만일 그렇다면….." 갑자가 얼굴이 창백해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또다시 문가에서 그를 방해하는 조수 쪽으로 갔다.
"그 부인에게 전하게, 우리는 싸구려 사건은 맡지 않는다고!" 그는 이렇게 이르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그는 눈에 띠지 않게 나방을 또 한 마리 잡았다. '여름이 올 때쯤 멋진 우단 커버가 생기겠군!' 그가 눈썹을 치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그가 말했다.
"내 결정은 서면으로 알려 드리겠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하고 책상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을 종합하여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혼이 가능하다는 거요. 당신의 수임 조건 역시 내게 알려주시오."
"저에게 전적으로 권한을 일임해 주신다면 뭐든지 가능합니다만." 번호사가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언제쯤 선생님으로부터 통보를 받을 수 있을까요?" 변호사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눈동자와 에나멜 부츠를 반짝였다.
"일주일 안에 알려 주겠소. 그럼 당신도 이 일을 맡을 건지, 맡는다면 어떤 조건으로 할 건지 알려 주기 바라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깍듯이 인사하고 고객을 문밖으로 내보낸 변호사는 홀로 남게 되자 기쁨에 흠뻑 젖어들었다. 너무나 신이 난 나머지 자신의 원칙을 어기고 수임료를 흥정하던 부인에게 값을 깎아 주기까지 했으며, 나방을 잡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올겨울 시고닌네처럼 가구들을 우단으로 갈아 씌우기로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8월 17일 위원회 회의 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승리의 후과가 그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이민족의 생활상을 전면적으로 연구할 새로운 위원회가 구성되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주도하에 이례적으로 신속하고도 정력적으로 현장에 투입되었고, 석 달 뒤에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이민족들의 생활이 정치적, 행정적, 경제적, 민속학적 측면과 물질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연구되었다.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변이 훌륭하게 기술되었고 그러한 답변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늘 오류를 범하곤 하는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전부 공무 활동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답변들은 모두 군수들과 관구장들의 보고에 기초하여 현 지사와 고위 성직자들이 올린 보고문과 공식적인 자료들의 결과였다. 군수들과 관구장들의 보고 역시 면의 관리들과 교구 사제들의 보고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 모든 답변들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했다. 가령 왜 흉작이 발생하는지, 왜 주민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는지 등등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 공무 기관에서 제공하는 설비들 없이는 해결되지 않으며 수 세기가 흘러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명료하고 확실한 해결책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해결책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회의에서 몹시 자존심이 상한 스뜨레모프가 위원회의 보고를 받을 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로서는 미처 예기치 못한 전술을 구사했다. 몇몇 다른 위원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인 스뜨레모프가 갑자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편이 되어서는 그가 제안한 조치들을 실행에 옮기는 안은 열렬히 옹호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취지하에 다른 극단적인 방안들마저 제안한 것이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기본 구상과는 어긋나는 방향으로 강화된 그 조치들은 결국 채택되었으며, 그러자 스뜨레모프의 전술의 전모가 드러났다. 극단으로 치달은 그 방안들이 곧바로 황당무계한 것으로 판명 나면서, 정부 관료들과 사회 여론 및 똑똑한 귀부인들과 일간지들이 일제히 그 방안 자체는 물론 그것의 공인된 원흉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 대한 공분을 표하며 비난을 퍼부어 댔던 것이다. 반면 스뜨레모프는 그저 까레닌의 계획을 맹목적으로 추종했을 뿐이라는 듯, 벌어진 일에 대해서 그제야 놀라고 당황하는 척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 일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또 가정사로 인한 마음고생에도 불구하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굴하지 않았다. 위원회는 분열되었다. 스뜨레모프를 수장으로 삼은 일군의 위원들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지도하에 보고서를 제출한 조사 위원회를 신뢰했을 뿐이라고 자신들의 오류를 정당화하며, 해당 위원회의 보고서는 엉터리에다 단지 글자만 가득한 종잇장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공문서에 대한 그처럼 극단적인 태도의 위험성을 감지한 분파 사람들과 함께 조사 위원회가 작성한 자료들을 계속해서 지지하였다. 그 결과 고위층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일대 혼란이 일었다. 그 사건이 모든 사람들에게 첨예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민족들이 가난에 찌들어 몰락하고 있는지, 아니면 번창하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의 결과와 더불어, 부분적으로는 아내의 부정으로 인한 멸시로 인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입지는 매우 불안해졌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는 본인이 직접 사안의 조사를 위해 현장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노라고 공표하여 위원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리하여 허락을 받아 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멀리 떨어져 있는 현으로 출발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행차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더군다나 출발에 앞서 그가 목적지까지 여비로 지급된 역마 열두 필 치의 비용을 서면을 통해 공식적으로 반납한 터였다.
"그건 참으로 고결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벳시도 그 일에 관해서 마흐까야 공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은 어디나 철로가 깔려 있다는 걸 만인이 알고 있는 판에 역마 삯은 뭣하러 지급한답니까?"
하지만 먀흐까야 공작부인은 동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의 견해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인께서는 그렇게 말하실 수 있겠죠. 몇백만인지도 모른 재산을 갖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난 여름에 남편이 감찰하러 다니는 게 참 좋은걸요. 그이도 여행 다니는 걸 아주 좋아할뿐더러, 나한테는 마차랑 마부를 부릴 돈도 들어오니까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먼 곳에 있는 현으로 가는 도중에 모스끄바에 사흘간 머물렀다.
모스끄바에 도착한 다음 날 총독을 알현하러 나선 그는, 마차들과 삯마차들로 늘 붐비는 가제뜨니 골목의 교차로에서 우렁차고 쾌활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문득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엇다. 인도 모퉁이에 최신 스타일의 짧은 외투 차림에 역시 최신식 작달만한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서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이를 드러낸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젊고 명랑하며 화색이 도는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서서 까레닌의 마차를 멈춰 세우려고 있는 힘껏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모퉁이에 멈춰 서 있는 사륜마차의 창문을 한 손으로 붙들고서 웃으며 손짓으로 매제를 부르고 있었고, 그 창문 밖으로 벨벳 모자를 쓴 부인과 두 아이의 머리가 불쑥 나왔다. 부인 역시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돌리였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모스끄바에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처남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는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고 지나가려 했지만,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마부에게 멈추라고 이르더니 쌓인 눈을 밟으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아무런 전갈도 없다니, 이러기요! 온 지 오래되었소? 어제 뒤소 호텔에 갔다가 거기 흑판에 '까레닌'이라고 적힌 걸 봤었지. 그런데 그게 매제인 줄은 생각을 못 했어!"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고는 말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방에 들렀을 텐데. 만나서 반갑구먼!" 그러고는 한쪽 발로 다른 쪽 발을 툭툭 쳐 눈을 털어냈다. "연락도 없다니, 너무 했소!"
"짬이 없었소. 무척 바빴던 탓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집사람한테 갑시다. 집사람이 매제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니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추위를 잘 타는 두 다리에 감싸두었던 담요를 걷어 내고는 마차에서 내려 눈을 간신히 헤치며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로 다가갔다.
"어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이렇게 우리를 외면하시다니요?" 둘리가 서운함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척 바빴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스러운 마음을 분명히 드러내는 말투로 그가 말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그보다 우리 안나 아가씨는 어떻게 지내나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그를 멈춰 세웠다.
"자, 그럼 내일 이렇게 합시다. 돌리, 메제를 식사에 초대해요! 모스끄바의 인텔리겐치아들이 손님 대접을 할 수 있도록 꼬즈니셰프와 뻬스쪼프도 부릅시다."
"부디 저희 집에 와 주세요." 돌리가 말했다. "5시나, 원하신다면 6시에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런데 우리 안나 아가씨는 어떻게 지내나요? 본 지가 너무 오래되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그러고서 그는 자신의 마차로 향했다.
"오실 거죠?" 돌리가 소리쳤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무언가를 중얼거렸으나, 돌리는 지나가는 마차들의 소음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내일 들르겠소!"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그에게 소리쳤다.
마차에 올라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그리고 자기 모습도 보이지 않도록 안쪽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괴짜라니까!"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아내에게 이렇게 한마디 던진 뒤 시계를 흘낏 보고는, 얼굴 앞에서 손짓으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애정을 표하고서 씩씩하게 인도를 따라 걸어갔다.
"스찌바! 스찌바!" 돌리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샤에게 외투를 사줘야 한단 말이에요, 따냐한테도요. 돈 좀 주고 가요!"
"괜찮아, 내가 나중에 계산할 거라고 전해." 그는 마차를 타고 지나가던 지인을 향해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발레 시연이 열리는 볼쇼이 극장에 들러서 무용수들에 대한 자신의 후원으로 새롭게 입단하게된 미녀 마샤 치비소바에게 전날 밤 약속했던 산호 목걸이를 전해 주고, 대낮에도 어두운 극장 무대 뒤편에서 그의 선물 덕택에 환하게 빛나는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에 입을 맞추기까지 하였다. 산호 목걸이를 건네는 일 말고도 그녀와 발레 공연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그는 공연이 시작될 때는 올 수가 없다고 사정을 설명하고는, 막이 끝날 즈음 와서 저녁 식사 자리에 그녀를 데리고 가겠노라 약속했다. 극장을 나선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오호트리 랴뜨로 가서 만찬용 생선과 아스파라거스를 손수 골랐고, 12시에는 이미 뒤소 호텔에 당도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세 사람을 만나야 했는데, 운 좋게도 셋이 모두 같은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터였다. 얼마 전에 외국 여행에서 돌아와 여기에 묵고 있는 레빈, 고위직에 막 임관하여 모스끄바 감찰을 나온 신임 상관, 그리고 반드시 만찬에 데리고 가야 하는 메제 까레닌이 바로 그들이었다.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만찬을 즐겼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음식과 음료, 그리고 손님들을 엄선하여 소규모로 연회를 베푸는 일이 좋았다. 오늘의 구성이 그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우선 음식과 음료로 살아 있는 민물 농어와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la piece de resistance(메인 메뉴)로 근사하면서도 단순한 로스트비프와 그것에 적절하게 어울리는 포도주들이 나올 예정이었다. 손님으로는 키티와 레빈이 올 텐데, 그들의 만남이 눈에 띄지 않도록 사촌 누이와 셰르바쯔끼 일가의 젊은 친구도 불렀고, la piece de resistance(메인 메뉴)로 세르게이이 꼬즈니셰프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까레닌이 참석하기도 되어 있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꼬즈니셰프는 모스끄바에서 온 철학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뻬쩨르부르끄에서 온 실무가였다. 여기에 추가로 이름난 괴짜이자 열성분자이며, 자유주의자, 수댜쟁이, 음악가, 역사가인, 쉰 살짜리 귀여운 청년 뻬스쪼프를 부를 생각이었다. 꼬즈니셰프와 까레닌에게는 양념이나 곁들인 음식 같은 존재로서 그들의 활기를 북돋아 주거나 싸움을 부추길 인물이었다.
상인으로부터 2차로 받은 삼림 대금이 아직 탕진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돌리는 최근 들어서 아주 다정하고 순하게 구는 데다 오늘 만찬에 대한 구상이 여러 면에서 스쩨빤 아르까지치를 흡족하게 해주었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약간 불쾌한 사안 두 가지가 있기는 했지만, 모두 스쩨빤 아르까지치의 마음에 일렁이는 호인다운 쾌활함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 두 가지 사안이란 이러한 것이었다. 첫째는, 어제 길거리에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만났을 때 눈치챈바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냉담하고 고압적이었으며, 그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표정과 그가 집으로 찾아오지도 않고 왔다는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다는 점을 안나와 브론스끼에 관해서 들려오는 소문들과 연결 지어본 결과, 그들 부부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불쾌한 사안 중 하나였고 또 다른 약간 불쾌한 사안은, 신임 상관이 다른 모든 신임 상관들과 마찬가지로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소처럼 일하고 아랫사람들한테도 자기와 똑같이 일할 것을 요구하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평판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신임 상관은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곰처럼 답답하게 구는 데다, 소문에 따르면 전임 상관이 지켜 왓고 지금까지 스쩨빤 아르까지치 자신이 고수해 온 입장과는 정반대는 노선을 견지한다는 것이었다. 어제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제복 차림으로 출근했을 때, 신임 상관은 마치 지인을 대하듯이 그를 친근하게 대하고 그와 서슴없이 담소도 나누었었다. 그래서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프록코트를 차려입고 그를 방문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다. 그런데 신임 상관이 그런 자신을 홀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바로 그것이 또 하나의 불쾌한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는 모든 게 다 '잘 수습될 거라고'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 모든 인간들은 매한가지로 죄인인 법이야. 그런데 서로 아귀다툼을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고.' 호텔 안으로 들어서며 그가 생각했다.
"잘 있었는가, 바실리." 모자를 비뚜름하게 쓰고서 복도를 지나가던 그가 안면이 있는 급사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구레나룻을 길렀구먼? 레빈은 7호실에 있는 게지? 어서 안내해 주게, 그리고 아니치낀 백작(이 사람이 신임 상관이었다)을 좀 뵐 수 있는지 알아봐 주게."
"예, 알겠습니다." 바실리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찾아 주셨군요."
"어제도 왔었네. 다른 출입구로 들어왔었지. 여기가 7호실인가?"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레빈은 뜨베리에서 온 농부와 함께 방 한가운데 선 채 갓 사냥한 곰의 가죽을 자로 재고 있었다.
"어이구, 자네가 잡았나?"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소리쳤다.
"아주 좋은 가죽이로군! 암컷인가? 잘 있었나, 아르히쁘!"
그가 농부와 악수를 하고서 외투와 모자도 벗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았다.
"외투는 좀 벗고서 앉아 있게!" 그의 모자를 벗기면서 레빈이 말했다.
"아닐세, 시간이 없어. 잠깐만 있다 가려고."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외투 자락을 펼치더니 아예 벗어 버리고는 한 시간을 내리 앉아서 레빈과 사냥 얘기라든가 다른 정겨운 얘기들을 나누었다.
"얘기 좀 해보게. 외국에서는 무얼 했나? 어딜 갔었어?" 농부가 나가자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물었다.
"독일이랑 프로이센, 프랑스, 영국에 갔었네. 수도에 갔던 건 아니고 공업 도시를 방문했지. 새로운 것들을 많이 봤어.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네."
"그래, 노동자 조직에 대한 자네 생각을 잘 알지."
"전혀 아닐세. 러시아에 노동자 문제는 있을 수가 없어. 러시아가 안고 있는 문제는 노동 대중과 토지의 관계라네. 외국에도 이 문제는 존재하지만, 거기서는 망가진 것을 수리하는 식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레빈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래, 맞아!" 그가 말했다. "분명 자네 말이 옳을 거야. 뭣보다 자네가 활기차 보여서 좋구먼. 곰 사냥도 하고, 일도 하고, 문젯거리에 열중하고. 셰르바쯔끼가 그러더군. 자네와 마주쳤다면서? 그런데 어쩐지 우울해 보였다던데, 내내 죽음에 관해서 얘기하질 않나……"
"정말 그렇다네,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 레빈이 말했다. "죽을 때가 됐지 뭔가. 그러니 모든 게 무의미하네. 진실을 말하는 걸세. 나는 내 일과 사상을 아주 소중히 여기네. 하지만 생각 좀 해보게.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아주 작은 행성에서 자라난 미미한 곰팡이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말이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뭔가 대단한 게 있다고 생각하지, 사상도 있고 과업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다 모래알에 불과해."
"이 친구야, 그런 건 이 세상만큼이나 낡아 빠진 얘기라고!"
"낡은 얘기지. 하지만 그걸 분명히 깨닫게 되면 모든 게 하찮아진다네. 오늘이나 내일 죽어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모든 건 하찮을 뿐이지! 나는 내 사상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하찮다는 말일세. 저 곰을 잡듯이 그것을 실현한다 해도 말이야. 그러니 삶을 살아가고 사냥도 즐기고 일을 하지만, 그게 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리기 위한 거라고."
레빈의 이야기를 듣는 스쩨빤 아르까지치의 얼굴에 희미하게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물론이지! 이제야 자네가 내 편이 되었군. 기억하나? 삶에서 쾌락만을 찾는다고 자네가 나를 나무라지 않았나? 오, 도덕주의자여, 그렇게 엄격하게 굴지 마시오!"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 좋은 게 있긴 해……" 레빈은 갈팡질팡했다. "아니, 나도 모르겠네. 다만 내가 아는 건 곧 죽을 거라는 거야."
"어째서 곧 죽는다는 건가?"
"그게 말이지,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살맛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마음은 더 편해지거든."
"그 반대로, 끝이 다가올수록 더 신나는 법일세. 어쨌거나 이제 가봐야겠네." 벌써 열 번째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말했다.
"무슨 소린가, 더 있다 가게!" 레빈이 그를 만류했다. "안 그러면 언제 또 보겠나? 나는 내일 떠날 걸세."
"내 정신 좀 보게! 그래서 내가 온 건데 말이지. 오늘 꼭 우리 집에 저녁 식사하러 오게! 자네 형님도 오실 거고, 매제 까레닌도 올 거라네."
"그가 여기 있단 말인가?" 레빈이 말했다. 실은 그는 키티에 관해 묻고 싶었다. 초겨울에 그녀가 뻬쩨르부르끄에 사는 외교관 부인인 언니 집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그 뒤로 돌아왔는지 안 왔는지는 모르는 채였다. 하지만 그는 물어볼 생각을 접었다. '왔건 안 왔건, 상관없어.'
"올 거지?"
"음, 물론이지."
"5시에, 프록코트를 입고 오게."
그러고서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에 묵고 있는 신임 상관에게 갔다. 그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무섭다는 신임 상관은 알고 보니 아주 온화한 사람이었다.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그와 오찬을 함께한 뒤 한참을 더 앉아 있다가 3시가 되어서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방으로 갔다.
아침 예배에 참례하고 돌아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오전 내내 방 안에만 있었다. 이날 오전 중에 그는 두 가지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첫째로는 뻬쩨르부르끄로 이주하는 도중에 마침 모스끄바에 머물고 있는 이민족 대표단을 접견하고 그들에게 지침을 내려 주는 일이요, 둘째로는 변호사에게 보내기로 약속한 편지를 써야 하는 것이었다. 대표단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자신이 발의해서 소환된 것이긴 했지만 여러 가지 난처하고 심지어 위험한 상황마저 불러일으켰으므로, 그는 모스끄바에서 그들을 접견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대표단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 아무런 자각이 없었다. 순진하게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과 작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는 게 임무라고 믿을 뿐, 자신들이 올린 몇몇 청원이 오히려 반대파를 도와주는 바람에 모든 일을 망치고 있다는 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들과 오랫동안 씨름한 뒤 그들이 결코 어겨서는 안 되는 강령을 써주고 그들을 보낸 다음, 뻬쩨르부르끄로 대표단의 지도를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이 일에 중요한 조력자가 되어 줄 사람은 리지야 이바노브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었다. 대표단에 관해서라면 그녀는 전문가였고, 그녀만큼 대표단을 선전해 주고 그들에게 진정한 지침을 내려 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 일을 끝내고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변호사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변호사가 재량껏 조치를 취할 것을 허락했다. 편지에는 자신이 가로챈 안나의 서류철 속에 들어 있던 것들, 즉 브론스끼가 안나에게 보낸 석 장의 쪽지를 동봉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을 작정을 하고 집을 나온 이후로, 그리고 변호사에게 들러 비록 단 한 사람에게나마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은 이후로, 특히 일생일대의 문제를 서류상의 문제로 전환시킨 이후로 그는 자신의 결심에 더욱더 애착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제는 그것의 실행이 가능하다고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가 변호사에게 보낼 편지를 보낼 때 쓰쩨빤 아르까지치가 내지르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시종과 언쟁을 하면서 자신이 온 걸을 아뢰라고 다그치는 소리였다.
'아무러면 어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생각했다. '차라리 더 잘된 걸지도 몰라. 그의 누이에 대한 내 입장을 지금 알리고, 자기 집에서 열리는 만찬에 왜 갈 수 없는지 설명해야겠군.'
'들어오시라고 하게!' 그가 종이들을 모아 압지첩에 끼워 넣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
"자, 보게, 자네가 거짓말을 했잖은가, 여기 이렇게 계시는데!"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던 시종에게 대꾸하고는 외투를 벗으면서 방에 들어섰다.
"만나서 반갑소! 자, 그럼……."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쾌활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갈 수 없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선 채로, 손님에게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고서 냉담하게 말했다.
그는 이제 막 착수한 이혼 소송 상대인 아내의 오라비에게 응당한 냉담한 태도를 취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쩨빤 아르까지치의 영혼으로부터 바닷물처럼 밀려드는 온화함의 물결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해맑게 반짝이는 두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왜 못 온다는 거요? 무슨 얘길 하려는 건데?"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프랑스어로 말했다.
"그건 안 되지, 이미 약속했잖소? 우리 모두 매제가 오는 걸로 알고 있는걸."
"내 말인즉, 우리 사이에 있었던 친족 관계가 이제 끝장날 거라고 갈수가 없다는 거요."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뭣 때문에?"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의 누이, 즉 내 아내와의 이혼 소송을 시작했기 때문이오. 나는 응당……"
그러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얘기를 다 마치기도 전에 스쩨빤 아르까지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 한숨을 내쉬고는 안락의자에 풀썩 주저앉은 것이다.
"아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오블론스끼가 소리쳤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대로요."
"미안하지만, 그런 얘기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얘기가 기대했던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며 정황 설명을 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설명하든 처남과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어가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렇소, 나는 이혼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소." 그가 말했다.
"한 가지만 얘기하겠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나는 매제를 훌륭하고 공정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안나 역시 마찬가지라오. 미안하지만, 누이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꿀 수가 없구려. 그 애 역시 훌륭하고 멋진 여자라고 나는 알고 있으니 말이오. 따라서 미안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소. 뭔가 오해가 있나 보오." 그가 말했다.
"정말이지, 단지 오해일 뿐이라면…"
"잠깐만, 나는 이해하오."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물론…….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거요. 서두를 필요는 없단 말이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서두르지 않았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차갑게 말했다. "게다가 이런 일은 그 누구와도 의논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굳게 마음먹었소."
"정말이지 끔찍하군!"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제발 이 청은 들어 주시오!" 그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 아직 소송이 시작된 건 아닌 것 같은데, 시작되기 전에 내 아내와 만나서 얘기를 좀 나눠 보길 바라오. 집사람은 안나를 친자매처럼 사랑하고 매제도 좋아하오. 게다가 집사람은 정말 비범한 여자요. 제발 부탁이니, 그녀와 이야기를 좀 나눠 보시오! 이 우정만은 꼭 베풀어주길, 제발 부탁이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생각에 잠겼다.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침묵을 깨뜨리지 않고 연민을 품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집사람을 만나러 가겠소?"
"잘 모르겠소. 사정이 그러해서 처남에게 찾아가지 않았던 거요. 우리의 관계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왜 그래야 하지? 그래야 하는 까닭을 나는 도통 모르겠소. 내가 생각하기엔, 사돈 간이라는 것과 별개로 매제는 나에 대해 비록 부분적일지언정 우정 어린 감정을 품고 있었고, 나 역시 매제에 대해 항상 같은 감정을 품어 왔는데…..그리고 진심 어린 존경심도 말이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심지어 매제가 품고 있는 최악의 가정이 사실이라 해도 나는 그 어느 쪽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 않을 거고, 앞으로도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며, 우리의 관계가 변해야만 하는 이유도 납득하지 못하겠소. 어쨌든 지금은 내가 청한 대로 아내한테 가주시오."
"우리는 이 일을 서로 다르게 보고 있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아니, 왜 올 수 없다는 거요? 오늘 만찬조차 안 된단 말이오?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제발 와주시오. 그리고 중요한 건, 집사람과 얘길 나눠 보라는 거요. 그녀는 비범한 여자라니까. 제발 부탁이오, 무릎 꿇고 빌겠소!"
"그토록 원한다면 가겠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고는 화제를 돌리고자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인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신임 상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아직 그럴 만한 연배가 아닌데도 갑자기 고위직에 오른 터였다.
예전에도 아니치낀 백작을 좋아하지 않았고 늘 그와는 의견을 달리하였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이제 공직에서 패배를 겪은 사람이 승진하는 사람에 대해 느끼는, 관료들이라면 이해할 만한 증오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 그분은 만나 보셨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독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서 물었다.
"당연하지, 어제 우리 사무실에 들르셨는걸. 보아하니 업무를 훤히 파악하고 계시고 활동적인 분인 것 같소."
"그렇군. 그런데 그분의 활동이 대체 무얼 지향하는 것이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물었다.
"일이 되게끔 하는 쪽이오? 아니면 이미 다 된 일ㅇ르 변경하는 쪽이오? 우리나라의 불행은 관료주의적 행정이고, 그 분은 그 대표 격이라 할 수 있소."
"정말이지 나는 그분에게서 비난할 만한 구석이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소. 그분이 지향하는 바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가 아주 멋진 사람이라는 거요."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대꾸했다.
"방금 전에 그분 방에 있었는데, 정말이지 멋진 분입디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내가 바로 그 음료, 그러니까 포도주에 오렌지를 곁들여 마시는 법을 가르쳐드렸지. 그걸 마시면 기분이 아주 상쾌해지니까. 놀랍게도, 그걸 아직 모르고 계셨지 뭐요. 아주 좋아하시더군. 정말 멋진 분이오."
그러면서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시계를 힐끗 보았다.
"아이고 맙소사, 벌써 4시로군. 돌고부신한테 마저 들러야 하는데! 자, 그럼 우리 집 만찬에 부디 와주시오. 안 오면 나랑 집사람이 얼마나 낙담할지 상상도 못 할거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까 그를 맞이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처남을 배웅했다.
"약속했으니 가겠소." 그가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오. 그리고 매제도 후회하지 않을 거요."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걸어 나가면서 외투를 입던 그는 시종의 머리를 손으로 툭 치고는 씩 웃어 보이고서 방을 나갔다.
"5시에, 프록코트를 입고 오시게, 꼭!" 그가 문 쪽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집주인이 귀가했을 때는 벌써 5시가 지난 시각이었고, 몇몇 손님들은 이미 와 있었다. 그는 현관에서 마주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꼬즈니셰프와 뻬스쪼프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오블론스끼가 일컫듯이 모스끄바 지성계의 주요 대표자들로 두 사람 모두 성품이나 지식에 있어서 존경받는 인물들이었다. 그들 역시 서로를 존경했지만, 거의 모든 사안에 있어서 가망이 없다 할 정도로 전적으로 의견을 달리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대립적인 유파에 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진영에 속해 있으면서도(반대파들은 그들을 같은 사람인 줄 혼동하곤 했다) 그 안에서 각자의 색깔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절반쯤 추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의견 차이처럼 일치시키기 어려운 것은 없었기에 그들은 의견을 같이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그뿐 아니라 어쩔 도리가 없는 서로의 오해에 대해 화내지 않고 그저 웃어 넘기는 데 익숙해진 지도 이미 오래였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뒤쫓아 왔을 때, 그들은 날씨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현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응접실에는 이미 오블론스끼의 장인 알렉산드르 드미뜨라예비치 공작과 젊은 셰르바쯔끼, 뚜로프찐, 키티 그리고 까레닌이 앉아 있엇다.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자신이 없는 사이 응접실 분위기가 영 말이 아니었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하려한 잿빛 실크 드레스 차림의 다리아 알렉산드로브나는 아이들 방에서 저희들끼리 밥을 먹어야 하는 아이들 때문에도, 아직 오지 않은 남편 때문에도 신경이 곤두선 기색이 역력했고, 워낙에 남편 없이 혼자서 사람들을 잘 융화시킬 줄 모르기도 했다. 모두들(노공작의 표현대로) 남의 집을 방문한 사제의 딸처럼 앉아서 자신들이 대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다만 침묵을 면하고자 억치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성격 좋은 뚜로프찐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가 스쩨빤 아르게지치를 보고서 두툼한 입술에 드리운 미소는 "이보게, 아주 똑똑한 양반들 속에 나를 앉혀 놨구먼! Chateau des Fleurs(꽃들의 성)에서 한잔하는 게 나한테는 어울리는데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노공작은 말없이 앉아서 반짝이는 조그만 두 눈으로 까레닌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노공작이 이미 손님들의 철갑상어 요리로 초대된 저 관료의 기를 죽일 만한 경구를 생각해냈음을 눈치챘다. 키티는 꼰스딴친 레빈이 들어올 때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문 쪽만 바라보고 있었고, 아무도 소개를 해주지 않아서 까레닌과 인사를 나누지 못한 젊은 셰르바쯔끼는 이 상황이 전혀 거북하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까레닌은 뻬쩨르부르끄의 관습대로 귀부인들과 함께하는 만찬에 참석할 때 으레 그렇듯이 프록코트와 흰 넥타이 차림이었는데, 그의 표정을 본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그가 단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왔을 뿐이며, 이 모임에서 자리를 지키며 힘겨운 의무를 이행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오기 전까지 모든 방문객을 얼어붙게 만든 냉기의 근원이 바로 그였다.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응접실로 들어서면서 손님들에게 사죄를 하고, 그가 지각하거나 외출할 때면 늘 구실이 되어 주던 어느 공작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 때문에 지체되었다고 변명했다. 그는 단숨에 모두를 소개한 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세르게이 꼬즈니셰프를 함께 앉히더니 폴란드의 러시아화라는 주제를 슬쩍 꺼냈고, 그러자 두 사람은 뻬스쪼프와 함께 곧바로 그 얘기에 달려들었다. 이어 그는 뚜로프찐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무언가 우스갯소리를 속삭인 다음, 그를 아내와 공작 곁에 앉혔다. 그런 다음에는 키티에게 오늘따라 아주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고서, 셰르바쯔끼를 까레닌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런 식으로 그가 이 사교계의 밀가루 반죽을 단번에 주물러 이겨 놓은 덕택에 응접실 분위기는 나무랄 데 없이 좋아졌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활기 있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 꼰스딴친 레빈만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식당으로 들어가 보니 포트와인과 셰리주가 레비 상점이 아닌 데프레 상점에서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빨리 마부를 레비 상점으로 보내라고 이른 다음 다시 응접실로 발길을 돌렸다.
식당에서 그는 꼰스딴친 레빈과 마주쳤다.
"내가 늦지는 않았나?"
"자네가 안 늦을 리가 있나!"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그의 팔을 잡고서 말했다.
"손님들은 많이 오셨고? 누가 왔나?" 레빈이 장갑으로 모자 위의 눈을 털면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물었다.
"다 친한 분들일세. 키티도 왔고. 가세, 까레닌에게 자네를 소개해 주겠네."
특유의 자유주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까레닌과의 통성명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내심 생각했기에 친한 친구들을 그렇게 대접했다. 그러나 그 순간 꼰스딴친 레빈은 새로운 만남이 주는 기쁨을 제대로 느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전에 대로변에서 잠깐 마주쳤던 그 순간을 제외하면, 그는 브론스끼와 대면했던 잊지 못할 그날 밤 이후로 키티를 만난 적이 없었다. 내심 오늘 여기서 그녀를 보게 되리라는 것을 감지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제멋대로 나래를 펼치지 못하도록 제어하며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던 터였다. 그런데 그녀가 여기 있다는 얘기를 들은 지금, 갑자기 기쁨과 동시에 공포가 느껴져 숨이 막히는 바람에 그는 하려던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예전 같을까, 아니면 마차를 타고 가던 그때 같을까?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지? 아니 대체 뭣 때문에 진실이 아닌 얘기를 하겠어?' 그가 생각했다.
"아, 그래, 까레닌을 소개해주게." 그는 간신히 말을 내뱉고서 필사적이고도 단호한 걸음으로 응접실로 들어서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예전 같지 않았고, 마차를 타고 가던 때의 모습과도 달랐다.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겁먹은 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는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응접실로 들어선 바로 그 순간 그녀도 레빈을 보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뻐하면서도 자신이 느끼는 기쁨으로 인해 얼마나 당황했는지, 레빈이 안주인에게 다가와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을 때 그녀 자신은 물론 레빈도, 또 모든 걸 보고 있던 돌리도, 한순간 그녀가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키티는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얼굴을 붉히는가 싶다가 파리해졌고, 다시 얼굴을 붉히더니, 입술을 떨면서 거의 자지러질 지경이었다. 레빈은 그녀에게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입술의 미세한 떨림과 두 눈에 어린 반짝이는 물기만 아니라면,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미소는 평온해 보였을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네요!"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차가운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못 보셨겠지만, 저는 당신을 봤습니다." 레빈이 행복에 겨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차역에서 예르구쇼보로 가실 때 말이죠."
"언제요?" 그녀가 놀라서 물었다.
"마차를 타고 예르구쇼보로 가고 계셨죠?" 레빈이 영혼을 가득 채우는 행복으로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어찌 감히 내가 그런 불순한 생각을 이 감동적인 존재와 연결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한 게 진실이었나 보다.' 그는 생각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그의 손을 잡고서 까레닌 쪽으로 데려갔다.
"서로 인사하시죠." 그가 두 사람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레빈과 악수하며 냉담하게 말했다.
"서로 구면이신가?"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놀라서 물었다.
"기차간에서 세 시간을 함께 있었지." 레빈이 웃으면서 말했다. "가면 무도회에 있다가 나올 때처럼 호기심을 잔뜩 품고 기차에서 내렸었네. 적어도 나는 말이야."
"저런, 그랬군! 자, 여러분, 어서 가시지요."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식당쪽을 가리켰다.
남자들은 식당으로 가서 전채 요리가 놓인 식탁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여섯 종류의 보드까와 그만큼 다양한 치즈가 은수저와 함께 혹은 수저 없이 놓여 있었고, 어란, 청어, 각종 통조림과 프랑스 빵이 담긴 접시가 차려져 있었다.
남자들은 향이 좋은 보드까와 전채 요리 곁에 섰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꼬즈니셰프와 까레닌, 뻬스쪼프 사이에서 오가던 폴란드의 러시아화에 대한 대화는 만찬을 기다리는 중에 잦아들었다.
몹시 추상적이고 심각한 논쟁을 느닷없이 아티카의 소금을 뿌림으로써 끝내고 대화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그 누구보다 능숙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이번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폴란드의 러시아화가 러시아 행정 당국이 도입해야 할 차원 높은 원칙에 의해서만 완수될 수 있음을 논증하려 했다.
뻬스쪼프는 하나의 민족이 다른 민족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려면 인구밀도가 더 높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꼬즈니셰프는 양쪽 견해를 다 인정했으나 몇 가지 단서를 달았다. 그들이 응접실에서 나오던 중에 그는 대화의 결론을 맺고자 웃으면서 말했다.
"따라서 이민족을 러시아화하는 데는 한 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죠. 동생과 내가 남들보다 무능한 점이 바로 그겁니다. 기혼자이신 여러분들은, 특히 당신,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철저하게 애국을 행하고 계시지요. 아이가 몇이시죠?" 그가 고개를 돌리고는 주인에게 조그만 술잔을 내밀며 정겨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고, 특히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아주 유쾌하게 웃었다.
"맞습니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그가 치즈를 씹으며 내민 술잔에 뭔가 특별한 종류의 보드까를 따르면서 말했고, 사실상 대화는 정말로 농담으로 끝난 셈이었다.
"이 치즈는 나쁘지 않군요. 좀 드시겠습니까?" 주인이 말하고는 왼손으로 레빈의 근육을 더듬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설마 다시 근력운동을 하는 건 아니겠지?" 레빈이 웃으면서 팔에 힘을 주자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손 아래, 프록코트의 얇은 나사 천에서 무쇠처럼 단단한 알통이 둥근 치즈처럼 올라왔다.
"이 이두박근 좀 보게! 삼손이 따로 없군!"
"곰 사냥을 하려면 대단한 힘이 필요할 테죠." 사냥에 관해서는 아주 막연하게 알고 있을 뿐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빵의 연한 부분에 치즈를 발라 거미줄처럼 얇게 뜯어내며 말했다.
레빈이 미소를 지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린아이들도 곰을 잡을 수 있지요." 안주인과 함께 전채 요리가 놓인 식탁 쪽으로 다가오는 귀부인들의 위해 뒤로 물러서서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가 말했다.
"얘기 들었는데, 곰을 잡으셨다면서요?" 키티가 하얀 팔이 내비치는 레이스 소매를 흔들면서 자꾸 미끄러지는 버섯을 포크로 집으려 헛되이 애를 쓰며 말했다. "정말 영지에 곰이 있나요?" 그녀는 귀여운 머리를 그를 향해 비스듬히 돌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녀의 말에 특별한 것이라곤 없어 보였다. 그러나 레빈에게는 그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그녀의 입술이며 눈이며 손의 모든 움직임 속에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는지! 거기에는 용서를 구하는 마음과 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부드럽고 수줍은 애무와 약속과 희망, 믿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를 행복으로 숨 막히게 하는 그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영지는 아니고, 뜨베리현에 다녀왔답니다. 거기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당신의 형부, 아니, 형부의 매제와 만났지 뭡니까."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재미있는 만남이었죠."
그러고서 그는 밤새 한잠도 못 자고서 반코트 차림으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타고 있던 기차간에 뛰어든 얘기를 신나고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격언과는 달리, 차장이 복장만 보고서 나를 끌어내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고상한 말투로 설명하기 시작했죠. 그리고……..선생님께서도 역시…….." 까레닌의 이름을 잊은 레빈이 그를 향해서 말했다. "처음에는 반코트를 보고 쫓아내려 하셨지만, 나중에는 고맙게도 저를 두둔해 주셨지요."
"대체로 승객이 자리를 선택할 권리라는 게 아주 애매해서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닦으며 말했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레빈이 호인다운 미소를 머금었다. "제 반코트의 죄과를 씻어 내기 위해 서둘러 기지 넘치는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안주인과 대화를 이어 가면서도 한쪽 귀로는 동생이 하는 말을 들으며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았다. '쟤가 오늘 웬일이지? 기세등등하네.' 그는 생각했다. 레빈이 날개를 단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걸 그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레빈은 자신이 하는 말을 그녀가 듣고 있다는 것, 자신의 얘기를 들으며 그녀가 즐거워한다는 것을 의식했고, 오직 그 사실 하나에 사로잡혀 있엇다. 이 방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통틀어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커다란 의미와 중요성을 띠게 된 그 자신과 그녀뿐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기분이 들었고, 저 아래 멀리 어딘가 선량하고 멋진 까레닌들과 오블론스끼들, 그리고 세상 전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전혀 눈에 띄지 않게, 두 사람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마치 다른 데는 앉힐 자리가 없다는 듯이 레빈과 키티를 나란히 앉혔다.
"여기라도 앉게." 그가 레빈에게 말했다.
만찬은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취향이 드러나는 식기만큼이나 훌륭했다. 마리루이즈 수프는 훌륭했으며, 입에서 살살 녹는 작은 삐로끄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흰 넥타이를 맨 두 하인과 마뜨베이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하고 날렵하게 요리와 포도주를 챙겼다. 만찬은 물질적인 면에서 성공적이었으며, 비물질적인 면에서도 못지않게 성공적이었다 때론 전체가, 때론 일부가 참여하던 대화는 잦아들 줄 모르다가 만찬 말미에는 무척 활기가 넘쳐서 남자들은 식탁에서 일어나면서도 얘기를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마저 생기를 띠었다.
논의를 끝까지 끌고 가기를 원했던 뻬스쪼프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발언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견해가 그릇되었음을 느끼던 터였다.
"내 생각은 결코….." 수프를 먹으면서 그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말했다. "인구 밀도만 높으면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토대와 결부된 문제입니다. 원칙이 아니라요."
"내가 보기에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나른한 어투로 느긋하게 대답했다. "같은 얘기라고 생각됩니다만. 제 소견상 다른 민족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족은 오로지 더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또……"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얘기를 얼른 하고 싶어서 늘 조바심을 내고, 자신이 하는 말에 온 신경을 쏟는 뻬스쪼프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어떤 점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영국인들, 프랑스인들, 독일인들, 그들 가운데 누가 더 발전 수준이 높습니까? 누가 누구를 자민족화하겠느냐고요? 알다시피 라인 지방은 프랑스화되었지만, 독일인들이 더 저급한 건 아닙니다!" 그가 소리쳤다. "여기에는 다른 법칙이 존재한단 말입니다."
"제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쪽은 언제나 참된 교육이 이루어지는 쪽인 것 같습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눈썹을 살짝 치올리며 대꾸했다.
"하지만 대체 어떤 점들을 참된 교육의 징후로 볼 수 있을까요?" 뻬스쪼프가 물었다.
"그 징후들은 잘 알려져 있다고 봅니다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대답했다.
"그것들이 전부 다 알려져 있을까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날 인정되는 바로는 진정한 교육이란 순수하게 고전적인 교육일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알다시피 양편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반대편 진영 역시 자기들에게 유리한 유력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선생님은 고전주의자이시시군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적포도주 한잔 드시겠습니까?"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말했다.
"이런저런 교육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린 아이를 대할 때처럼 관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잔을 내밀면서 대꾸했다. "다만 내가 하려는 말은, 양쪽 모두 유력한 논거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고개를 돌리고서 말을 이어 갔다. "나도 교육받은 바로는 고전주의자입니다만, 이 논쟁에서 만큼은 개인적으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왜 실제적인 학문에 비해서 고전주의적 학문이 우월하다는 건지, 명백한 근거가 보이질 않아요."
"자연 과학도 그만큼의 교육적이고 발전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요." 뻬스쪼프가 그의 말을 받아 이었다. "천문학만 해도 그렇고, 식물학이나 보편적인 법칙들의 체계를 갖춘 동물학을 보십시오."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응수했다. "제 소견으로는, 언어의 형태를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정신적 발전에 특히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그뿐 아니라, 고전주의적 작가들이 미치는 영향이 고도로 윤리적인 것임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반면에 불행하게도 자연 과학 강의는 우리 시대의 종양을 이루는 해롭고 거짓된 학설들과 결부되어 있지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무언가 얘기하려 했지만, 뻬스쪼프가 굵직한 저음으로 그의 말을 가로채더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견해가 왜 부당한지에 대해 열을 내며 논증하기 시작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말을 마치기를 잠자코 기다렸는데, 상대편을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반박을 준비해 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까레닌을 향해 말했다. "내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양쪽 학문의 모든 이점과 단점들을 모조리 완벽하게 저울질하기는 어려우며, 어느 학문을 선호하느냐의 문제도 선생님이 방금 지적하신 것처럼 고전주의적 교육에 그 윤리적인 우월성이 없다면, 그러니까 disons le mot(직설적으로 말해서) 반(反) 니힐리즘적인 영향이 없다면, 빠른 시일 내에 최종적으로 해결이 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만일 고전주의적 학문 쪽에 반니힐리즘적 영향이라는 그 우월성이 없었다면, 우리는 좀 더 고민했을 테고, 쌍방의 논거들을 더 저울질해 보았을 겁니다." 옅은 미소를 띤 채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을 이었다. "양쪽 유파 모두에 여지를 좀 더 주었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고전주의적 교육이라는 알략에 반니힐리즘이라는 치유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것을 우리의 환자들에게 대담하게 처방하는 겁니다……그런데 치유력이 없으면 어떡하지요?" 그가 '아티카의 소금'을 부리며 결론을 맺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알약 이야기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화를 들으면서 우스운 얘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마침내 그것을 듣게 된 뚜로프찐은 유달리 큰 소리로 유쾌하게 웃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뻬스쪼프를 초청하며 예상했던 바는 틀리지 않았다. 그가 있으니 기지 넘치는 대화가 단 한 순간도 그칠 줄을 몰랐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방금 전 농담으로 대화를 끝맺자마자, 뻬스쪼프는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이런 견해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정부가 그러한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견해 말입니다. 정부는 채택된 방안이 지니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일반적인 생각에 이끌리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가령 여성 교육의 문제는 유해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데도, 정부는 여학교와 여자 대학을 설립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 순간 대화는 갑자기 여성 교육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옮겨 갔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여성의 교육은 보통 여성의 자유라는 문제와 혼동되기 마련이며,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도 유해한 것으로 간주될 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와 반대로, 나는 그 두 가지 문제가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뻬스쪼프가 말했다. "이건 악순환이에요. 여성은 교육이 부족해서 권리를 박탈당하는데, 교육의 부족은 또한 권리의 부재에 의해서 비롯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성의 예속을 너무나 방대하고 오래된 일이라 우리는 종종 그들을 우리와 구분하는 저 깊은 어둠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말했다.
"권리라고 하셨는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뻬스쪼프가 입을 다물기를 기다렸다가 얘길 꺼냈다. "그게 배심원직이나 지방 자치회 의원직, 지방 관청장직에 오를 권리, 공직자나 국회 의원이 될 권리를 뜻하는…."
"당연하지요."
"하지만 여성이 예외적이고 드문 경우로서 그러한 직위를 맡을 수가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당신은 '권리'라는 표현을 잘못 사용하신 겁니다. 의무라고 해야 더 옳을 겁니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배심원이나 지방 자치회 의원, 전신국 관리 같은 직무를 수행하면서 우리는 의무를 수행한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여성들은 의무를 찾고 있다고 해야 옳을 테고, 또한 그래야 전적으로 합법적일 겁니다. 또한 남성 일반의 일을 돕고자 하는 그들의 그러한 바람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지요."
"전적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문제는 여성들에게 그러한 의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느냐 하는 점이겠지요."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끼어들었다. "그들에게 교육이 널리 제공되면 말입니다. 그걸 우리는 지금 확인하고….."
"그런데 속담이 있잖소?" 한참 전부터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노공작이 예의 조롱기 어린 작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딸들 앞이지만 얘기하자면, 여자의 머리카락은 길지만….."
"흑인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해방되기 전까지는 똑같이 그렇게 생각했단 말입니다!" 뻬스쪼프가 성을 냈다.
"나로서는 다만 여성이 새로운 의무를 찾고 있는 게 이상할 뿐입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보다시피, 불행하게도 우리 남자들은 보통 의무를 회피하는데 말이지요."
"의무는 권리와 결부되어 있는 법이니까요. 권력, 돈, 명예, 바로 이것들을 여성들은 원하는 것입니다." 뻬스쪼프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유모가 될 권리를 얻으려 하는 것과 똑같군. 여자들한테는 보수를 주는데, 나한테는 줄 생각이 없다고 화를 내는 격이라니까." 노공작이 말했다.
뚜로프찐이 박장대소를 터뜨렸고,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그 말을 자신이 하지 못했다는 것에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마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남자는 젖을 먹일 수가 없지요." 뻬스쪼프가 말했다. "반면 여자는…."
"아니요, 어느 영국 남자는 배에서 자기 애를 길렀답니다." 늙은 공작은 딸들 앞에서도 이런 대화에 자유롭게 끼어들 수 있는 특권을 마구 누리며 말했다.
"그런 영국 남자들의 머릿수만큼, 딱 그만큼의 여자들이 관리가 되겠군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응수했다.
"그렇다면, 가정이 없는 여자는 대체 어떡하란 말입니까?" 내내 치비소바를 염두에 둔 채 뻬스쪼프에게 공감하며 그의 입장을 지지하던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개인사를 잘 캐보면, 그 아가씨가 자기 가정을 버렸거나 아니면 언니의 가정을 버렸다면 걸 알게 될 거예요.. 거기서 여자가 할 일을 찾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예기치 않게 대화에 뛰어들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어떤 여자를 염두에 두었는지 짐작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원칙과 이상을 옹호하고 있단 말입니다!" 낭랑하게 울리는 저음으로 뻬스쪼프가 반론을 폈다. "여성들을 자립할 수 있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억눌려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보육원에서 나를 유모로 받아들여 주지 않을 거라서 기가 죽어 있는 게로군." 노공작의 한마디가 또다시 뚜로프찐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는 웃다가 아스파라거스의 굵직한 끝부분을 소스 속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모든 이들이 공통의 대화에 가담하였으나, 키티와 레빈만은 예외였다. 처음에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한 대화가 오갈 때, 그 주제에 관해서라면 자기한테도 할 얘기가 있다는 생각이 레빈에게 떠올랐었다. 그러나 예전에 그에게 무척이나 중요했던 그 생각은 마치 꿈속인 양 머릿속을 스치고 자나갔을 뿐, 지금은 눈꼽만큼의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아무에게도 소용이 없는 것을 왜 저렇게 열심히 떠들고 있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키티도 매한가지로 여성의 교육과 권리에 대한 사람들의 대화에 응당 흥미를 느껴야만 했다. 외국에서 만난 친구 바렌까, 그녀의 예속된 처지를 떠올리며 얼마나 많이 이 문제를 생각했던가! 만일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자기 자신에 관해 얼마나 많이 생각했으며 그 문제를 두고서 언니와 얼마나 많이 말다툼을 했던가! 하지만 지금 그런 것들은 전혀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녀와 레빈 사이에서는 두 사람만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화라기보다 일종의 신비한 소통으로서 매 순간 그들을 더욱더 가까이 묶어주었으며, 그들이 들어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희열과 두려움을 쌍방 모두에게 불러일으켰다.
먼저 작년에 어떻게 자기를 보게 되었느냐는 키티의 질문에, 풀베기를 마치고서 큰길을 걸어가다가 그녀를 보았던 일을 들려주었다.
"아주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에서 막 깨어난 것 같았어요. 상신의 maman(어머니)은 구석에서 주무시고 계셨죠. 경이로운 아침이었습니다. 나는 걸으면서 '저 사륜마차에 탄 사람은 누굴까?' 생각했습니다. 작은 방울들이 달린 멋진 사륜마차였죠. 그런데 순간적으로 당신이 어른거렸어요. 그래서 마차 안을 바라보니, 당신이 양손으로 머리쓰개를 붙잡고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더군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마나 궁금했는지 몰라요. 뭔가 중요한 것이었나요?"
'내 꼴이 흉하진 않았으려나?'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세세한 사항들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는, 반대로 자신이 아주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켰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서 기쁨에 겨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기억이 안 나요."
"뚜로프찐은 참 흥겹게 웃는군요!" 레빈이 뚜로프찐의 눈물에 젖은 눈과 마구 흔들리는 몸을 홀린 듯 바라보며 말했다.
"저분을 안 지 오래됐나요?" 키티가 물었다.
"저 친구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보아하니, 당신은 저분을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여기는군요?"
"형편없는 게 아니라, 하찮은 인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런 생각일랑 얼른 그만두세요!" 키티가 말했다. "나 역시 저분이 아주 저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저분은 너무도 친절하고, 놀라울 정도로 착한 사람이에요. 마음씨가 황금같아요."
"아니, 어떻게 당신이 저 사람 마음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답니까?"
"막역한 친구 사이예요. 저분을 아주 잘 알지요. 지난겨울에…..당신이 우리 집에 다녀가시고 얼마 안 돼서…." 그녀가 미안해하면서도 신뢰가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돌리 언니의 아이들이 모조리 성홍열에 걸렸었는데, 그때 어쩌다가 저분이 언니를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그녀가 속삭였다. "저분은 언니를 너무나 가엾이 여기고는 집에 그대로 남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도와주었답니다. 그렇게 3주를 언니 집에서 지내면서 마치 유모처럼 아이들을 돌봐 줬지 뭐예요."
"꼰스딴친 드미뜨리치에게 아이들이 성홍열에 걸렸을 때 뚜로프찐이 도와준 얘길 해주고 있어." 그녀가 언니 쪽으로 몸을 굽히며 말했다.
"그래, 놀라웠지. 정말 멋졌어!" 돌리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뚜로프찐에게 눈길을 주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빈은 다시 한번 그를 흘끗 보며 자신은 어째서 저 사람의 그런 엄청난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절대로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가 지금 막 느낀 생각을 정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쾌활하게 이야기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 시작된 대화 중에는 부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얘기하기가 좀 껄끄러운, 결혼 생활에 있어서 권리의 불평등에 관한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뻬스쪼프는 만찬 중에 몇 차례 이 문제에 달려들었지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와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조심스레 그를 제시하였다.
모두가 식탁에서 일어서고 부인들이 밖으로 나갔을 때, 뻬스쪼프는 그들을 따라나서지 않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향해 불평등의 주된 이유에 관해 논하기 시작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부부지간의 불평등은 아내의 부정과 남편의 부정이 법과 여론에 의해 불평등하게 심판받는다는 데 있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재빨리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다가가 담배를 피우자고 권했다.
"아니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마치 자신이 그런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부러 보여 주려는 듯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뻬스쪼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소견으로는, 그러한 관점의 근거는 문제의 분질 자체에 있는 것 같군요." 말을 마친 뒤 그는 응접실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뚜로프진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전했다.
"쁘랴치니꼬프에 관한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샴페인을 잔뜩 마셔서 생기가 오른 뚜로프찐이 말했다. 그는 한참 전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오랜 침묵을 깨뜨릴 기회를 노리고 있던 터였다. "바샤 쁘랴치니꼬프 말입니다." 그는 축축한 붉은 입술에 특유의 선량한 웃음을 드리운 채 주빈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겨냥하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들었는데, 그가 뜨베리에서 끄비쯔끼와 결투를 하다가 결국 그를 죽였답니다."
때릴 때는 마치 일부러 그러는 양 꼭 상대의 아픈 곳을 때리기 마련이듯이,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느끼기에 오늘의 대화는 운수 사납게도 매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매제를 다시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본인은 흥미롭다는 듯이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쁘랴치니꼬프가 결투를 했답니까?"
"아내 때문이지요. 아주 용감한 처사지 뭡니까! 결투를 신청해서 죽여버렸으니 말이죠!"
"아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무심하게 대꾸한 다음, 눈썹을 치올리고는 응접실로 향했다.
"와주셔서 정말 기뻐요." 응접실로 향하는 통로에서 돌리가 그를 맞이하며 겁먹은 듯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얘기를 좀 나눴으면 해요.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치오른 눈썹 덕분에 더 두드러져 보이는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다리야 알렉산드로브타의 옆자리에 앉아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부인께 양해를 구하고 이제 막 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내일 떠나야만 해서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안나의 결백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이토록 태연하게 자신의 무고한 친구를 파멸시키리라 작정한 이 냉혹하고 비정한 사람에 대한 분노로 얼굴이 파리해지고 입술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 그녀가 안간힘을 쓰며 단호하게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나의 안부를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해주셨네요.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죄송합니다. 이럴 권한이 저에겐 없지만…….하지만 저는 안나를 친자매처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제게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로 안나를 질책하시는 건가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찌푸린 얼굴로 눈을 감다시피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왜 안나 아르까지예브나와의 관계를 변화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는 남편분한테서 전해 들으셨을 텐데요." 그가 돌리의 시선을 외면한 채, 응접실을 지나가는 셰르바쯔끼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면서 대꾸했다.
"저는 믿기지가 않아요. 못 믿겠어요. 그런 얘긴 믿을 수가 없어요!" 돌리는 뼈마디가 앙상한 손을 맞잡으며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손 위에 얹었다. "여기는 방해꾼이 많아서 안 되겠어요. 저쪽으로 가시지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흥분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 공부방으로 갔다. 그들은 여기저기 주머니칼로 베인 자국투성이인 방수포에 덮여 있는 책상 앞에 앉았다.
"못 믿겠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돌리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그의 눈길을 붙잡으려 애쓰며 말했다.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그가 사실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녀가 뭘 했다는 거죠?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데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물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저지른 일이 정확히 뭔가요?"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남편을 배신했습니다. 그게 바로 그녀가 저지른 일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니에요, 분명 오해하신 걸 거예요!" 돌리가 관자놀이에 두 손을 얹으며 눈을 감았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녀와 자기 자신에게 확고한 입장을 보여주려는 듯 입술로만 차가운 미소를 드러냈다. 이러한 열렬한 변호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는 못했지만, 그의 상처를 자극하긴 했다. 그는 자못 활기 있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내 스스로가 남편에게 공표하는데, 그걸 오해하기란 힘들지 않겠습니까. 8년간의 결혼 생활과 아들, 그 모든 게 실수였으며 처음부터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다더군요." 그가 코를 씩씩거리며 말했다.
"안나와 죄악이라니, 저로서는 이 두 가지를 결부시킬 수가 없네요. 믿을 수가 없어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이제는 선량함과 흥분이 뒤섞인 돌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문이 저절로 터지는 것을 느끼며 그가 말했다. "아직도 의심하는 게 가능하다면, 전 아무리 비싼 대가라도 치를 겁니다. 의심을 했던 때도 괴로웠습니다만 지금보다는 괜찮았어요. 그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여전히 모든 걸 의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게 의심스럽고, 아들이 밉습니다. 때로는 그 아이가 제 아들이라는 것도 못 믿겠어요. 저는 아주 불행합니다."
이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그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자마자 사태를 알아차린 터였다. 그러자 그녀는 그가 가엾어졌고, 친구가 결백하다는 믿음 또한 마음속에서 잠시 흔들렸다.
"아아! 끔찍해요, 끔찍한 일이에요! 그게 정말인가요? 이혼하기로 결심하셨다는 거 말이에요."
"최후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할 수 있는 게…."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없지는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이런 종류의 재앙을 겪을 때 끔찍한 것은, 다른 경우들, 상실이나 죽음의 경우처럼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점이지요." 그가 마치 그녀의 생각을 알아맞힌 듯 말했다. "자신이 처한 모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셋이 같이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죠."
"저는 이해해요, 그런 상황을 너무나도 잘 이해합니다." 돌리가 말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말없이 자기 가정의 불행을 떠올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힘차게 고개를 들고서 애원하듯이 두 손을 포갰다. "잠시만요! 당신은 그리스도교 신자이시잖아요. 그녀 생각을 좀 해보세요! 당신이 안나를 버리면 그녀는 어떻게 되겠어요?"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많이 생각햅 봤어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대꾸했다. 그의 얼굴은 군데군데 불그스레해졌고, 흐릿한 두 눈은 돌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리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브나 이제 온 마음을 다해서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녀가 저의 치욕을 공표한 직후에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모든 걸 예전 그대로 놔두고 개선의 여지를 주었지요. 그녀를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녀는 예의를 지켜 달라는 가장 간단한 요구조차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열을 올렸다. "파멸을 원치 않는 사람만 구할 수 있는 법이죠. 하지만 파멸 자체가 구원처럼 여겨질 정도로 본성이 전부 망가지고 타락했을 때는, 뭘 어쩌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혼만은 안 돼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대꾸했다.
"하지만 다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안 돼요, 그건 끔찍해요. 그녀는 그 누구의 아내도 되지 못할 거예요, 파멸하고 말 거예요!"
"제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어깨와 눈썹을 치올리며 다시 물었다. 아내의 마지막 행동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어 그는 대화를 시작했을 때처럼 다시 냉담해지고 말았다. "관심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니, 잠시만요! 그녀를 파멸시켜서는 안 돼요. 잠시만요, 제 얘기를 해드릴게요. 결혼한 후에 남편은 저를 기만했어요. 저는 분노와 질투에 사로잡혀서 모든 걸 버리려고 했지요. 저 자신마저…..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누구 덕분인지 아세요? 안나가 저를 구해 줬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답니다. 아이들은 커가고, 남편은 가정으로 돌아오고, 자기 잘못을 느끼면서 더 깨끗해지고, 더 나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저는 용서했어요. 당신도 용서해야만 해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그 말은 이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혼을 결심했던 그 날의 노여움이 그의 마음속에서 다시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저는 그럴 수 없고,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여자를 위해서 모든 걸 다 했습니다만, 그녀는 전부 자신의 본질인 그 진흙탕 속에 짓밟아 버렸어요. 저는 악한 사람이 아니며 그 누구도 결코 증오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만은 온 마음으로 증오합니다. 그녀가 나한테 저지른 그 모든 악행이 너무나도 증오스럽게 때문에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악에 받쳐 울먹이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너를 증오하는 자들을 사랑하라는 말도……"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수줍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경멸스럽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 경구를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적용할 수 없었다.
"자기를 증오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이지, 나 자신이 증오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각자의 고통만으로 충분한데 말입니다!" 이윽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마음을 추슬러 침착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길을 나섰다.
사람들이 식탁에서 일어났을 때 레빈은 키티를 따라서 응접실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노골적으로 그녀의 꽁무니를 쫓는 것만 같아서 그녀가 혹시 불쾌해자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남자들 편에 남아 공통의 대화에 끼어든 그는 키티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움직임과 그녀의 시선, 응접실에서 그녀가 머무는 자리가 어딘지를 감지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을 항상 좋게 생각하고 모든 이들을 사랑하겠다는 그녀와의 약속을 그는 지금 조금의 노력도 들이지 않고 이행하고 있었다. 대화는 농촌 공동체에 관한 얘기로 접어들었는데 뻬스쪼프는 거기서 모종의 특수한 원리, 그가 명명하기로는 <합창의 원리>를 발견했다고 하였다.
레빈은 뻬스쪼프의 의견에도, 그리고 러시아 농촌 공동체의 의의에 대해 나름대로 인정하다가도 부인하는 형의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화해시키거나 반박을 누그러뜨리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하는 얘기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으며, 단 한 가지, 그들과 모든 사람들이 기분 좋고 유쾌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는 이제 중요한 단 하나만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처음에는 거기, 응접실에 있다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문가에 멈춰 섰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한 시선과 미소를 느꼈으며, 그래서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셰르바쯔끼와 함께 문가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러 가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녀에게 다가가며 그가 말했다. "그게 바로 시골에는 없는 것이죠."
"아니에요, 당신을 부르러 가던 중이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녀가 마치 선물인 양 미소로써 그에게 보답했다. "이렇게 와 주신 것 말이에요. 뭣 때문에 저리도 논쟁을 하는 걸까요? 정말이지 결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설복시킬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네, 맞습니다." 레빈이 말했다. "대부분의 경우 열띠게 논쟁을 하는 이유는 단지 상대편이 무엇을 입증하려고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레빈이 종종 목도한 바로는 아주 똑똑하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 엄청난 정력을 들이고 엄청난 논리적 섬세함을 발휘하고 수많은 말들을 쏟아 낸 다음, 논쟁의 당사자들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곤 했다. 즉, 그들이 한참을 싸우면서 서로에게 논증해 보이려고 했던 것은 이미 한참 전부터, 논쟁이 시작될 때부터 그들이 잘 알고 있던 내용이고, 그들은 서로 다른 것을 좋아할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논쟁에서 지고 싶지 않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그것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다. 레빈은 가끔씩 논쟁 중에 상대편이 좋아하는 것이 뭔지 깨닫고 갑자기 그것을 자신도 좋아하게 됨으로써 그 즉시 그것에 동의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으며, 그럴 때면 모든 논거들이 효력을 잃고서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반면에 가끔씩은 그 반대의 경우를 경험하곤 했다. 즉 논거를 대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던 중, 어쩌다가 조리 있고 진실한 설명이 나오면 갑자기 상대방이 그에 동의하고 논쟁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던 키티는, 그러나 설명을 듣자마자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무엇 때문에 논쟁을 하는 건지, 무엇을 상대가 좋아하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그녀가 난삽하게 표현된 레빈의 생각을 전부 알고 표현해 내자 레빈은 기쁨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뻬스쪼프와 형과 벌이던 어지럽고 장황한 논쟁에서 벗어나 복잡한 생각들이 이토록 간단명료하게, 말조차 필요 없이 전달되는 국면으로 이행하게 된 것이 그는 너무나 놀라웠다.
셰르바쯔끼가 그들 곁에서 물러난 뒤, 키티는 거기 놓여 있던 카드놀이용 탁자에 다가가 앉더니 분필을 쥐고서 새로 깐 녹색 나사 천 여기저기에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만찬 때 오갔던 여성의 자유와 일에 대한 대화를 다시 이어 갔다. 레빈은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가정에서 여성이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그 근거로서 어떤 가정도 도와주는 여자 없이는 유지될 수 없으며, 가난하건 부유하건 간에 모든 가정에는 고용된 혹은 친척인 유모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들었다.
"그렇지만은 않아요." 키티가 얼굴을 붉힌 채, 그러나 그만큼 대답하게, 진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미혼 여성은 치욕스러움을 느끼지 않고서는 가정생활을 할 수 없게끔 되어 있는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 자신은……."
이에 그는 그녀가 암시하는 바를 곧장 이해했다.
"아, 맞아요! 그래요, 그래, 당신이 옳아요, 당신이 옳습니다."
키티가 마음속에 미혼 여성으로서의 두려움과 굴욕감을 품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 것만으로, 그는 뻬스쪼프가 만찬 때 여성의 자유에 대해서 논했던 모든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 두려움과 굴욕감을 느끼자마자 그는 곧바로 자신의 논거를 내던져 버렸다.
침묵이 드리웠다. 그녀는 여전히 탁자 위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고요한 빛을 뿜으며 반짝였다. 그 분위기에 매료된 레빈은 점점 더 강렬해지는, 행복에 겨운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머나, 내가 탁자 한가득 낙서를 해버렸네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는 일어설 듯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키티 없이……나 혼자 남게 되면 어떡하지?' 문득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힌 그가 분필을 쥐었다. "잠깐만요." 그가 탁자 쪽으로 다가앉으며 말했다. "전부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그는 놀라움이 어려 있는 키티의 다정한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물어보세요."
"자, 이겁니다." 그가 말하고는 '당, 나, 그, 없, 수, 대, 때, 그, 절, 안, 된, 건, 아, 그, 그, 건'이라고 단어의 첫 글자만 적었다. 이 글자들은 다음을 의미했다. "당신이 나에게 그럴 수는 없다고 대답했을 때, 그것은 절대로 안 된다는 건가요, 아니면 그때만 그랬던 건가요?" 그녀가 이 복잡한 어구들을 이해할 리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이 말을 이해 하느냐 못 하느냐에 자신의 일생이 달려 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티는 그를 진지하게 응시한 다음, 찌푸린 이마를 손으로 받치고서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가끔씩 그녀는 '이게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요?'라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알겠어요."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게 무슨 단어죠?" 레빈이 '절대로'를 뜻하는 '절'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절대로'를 뜻해요." 그녀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레빈은 적어 놓은 글자들을 재빨리 지운 다음 그녀에게 분필을 건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그, 내, 달, 대, 수 없'이라고 적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나눈 대화로 인해 수심에 잠겨 있던 돌리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마음이 완전히 편해졌다. 키티는 수줍고도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분필을 손에 쥐고는 탁자 위로 몸을 숙인 레빈의 아름다운 모습을 올려다보았고, 그의 타는 듯한 두 눈은 탁자와 그녀를 번갈아 가며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알아맞힌 것이다. 그것은 다음을 의미했다. '그때는 내가 달리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그가 궁금해하는 눈초리로 수줍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만 그랬던 건가요?"
"네." 그녀가 미소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지금….지금은요?" 그가 물었다.
"자, 이걸 읽어 보세요. 내가 원하던 걸 얘기할게요. 간절히 원하던 것을요!" 그녀가 '그, 일, 잊, 용, 바'라고 적었다. '그날 일은 잊고 용서하길 바라요'라는 뜻이었다.
그가 긴장하여 떨리는 손가락으로 분필을 쥐다가 부러뜨리고는 첫 글자만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잊어야 할 것도 용서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그만둔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가실 줄 모르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가 자리에 앉아서 긴 문구를 적었다. 모든 걸 파악한 그녀는 '이런 뜻인가요?'라고 묻지도 않고 분필을 쥐더니 곧바로 대답을 적었다.
그는 그녀가 쓴 것을 한참 동안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의 눈만 자꾸 쳐다보았다. 너무 행복한 탓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녀가 염두에 둔 말을 도저히 알아맞힐 수 없었다. 그러나 행복으로 빛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빛에서 그는 알아내야 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글자 세 개를 적었다. 끝까지 다 적기도 전에, 그의 손만 보고서 이미 글자를 읽어 낸 그녀는 자신이 직접 그 문장을 끝내고는 '네'라고 대답을 적었다.
"서기 흉내 내기를 하는 겐가?" 공작이 다가와서 말했다. "극장에 늦고 싶지 않으면 어서 가자꾸나."
레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까지 키티를 배웅했다.
이 대화 속에서 모든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일 아침 그가 집으로 올 거라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겠노라는 얘기였다.
키티가 떠난 뒤 홀로 남은 레빈은 그녀가 없다는 사실에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고, 그녀를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하게 될 내일 아침이 어서 빨리 오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고대하였다. 그녀 없이 보내야 하는 열네 시간이 마치 죽음인 양 두려웠다. 혼자 남지 않기 위해, 그리고 시간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그에게는 가장 좋은 말멋이지만, 그는 연회에 가려는 참이라고 했다. 실제로는 발레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레빈은 그에게 자신은 행복하며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가 자신을 위해 해준 일을 절대로 잊지 않겠노라는 말만 가까스로 전할 수 있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눈빛과 미소는 레빈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 역시 잘 알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래, 어떤가? 아직 죽을 때는 아니지?"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레빈의 손을 잡으며 감격스럽게 말했다.
"아니고 말고!" 레빈이 대답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역시 레빈과 작별 인사를 나누며 축하한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키티와 다시 만나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오래된 우정이니 소중히 여기셔야죠."
그러나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이 말은 레빈에게 그리 유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 모든 게 얼마나 고결하고 그녀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것에 대해 감히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레빈은 그들과 헤어진 뒤 혼자 남기 싫어서 형에게 들러붙었다.
"형은 어디로 가세요?"
"회의하러 간다."
"나도 같이 갈래요. 그래도 되죠?"
"왜 그러는데? 그래, 같이 가자꾸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웃으면서 말했다. "너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저요? 행복해서요. 행복이 찾아왔거든요." 레빈이 형과 함께 탄 마차의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좀 답답해서요. 행복하거든요! 형은 왜 결혼을 안 하셨어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살며시 웃었다.
"아주 기쁘구나. 그 아가씨는 참 매력적인 처자인 것 같더라……"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이야기를 꺼냈다.
"말하지 마세요. 말하지 마시라고요!" 레빈이 두 손으로 형의 외투 깃을 잡고 여며 주면서 소리쳤다. '참 매력적인 처자'라는 말은 그가 느끼는 감정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단순하고 저속적인 표현이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아주 기쁘다는 말은 해도 되겠지."
"내일은 해도 돼요, 내일요. 더 이상은 안 돼요! 안 된다고요. 이제 그만, 조용!" 레빈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한번 형의 외투를 여며 주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형을 너무나 사랑해요. 그런데, 내가 회의에 같이 가도 될까요?"
"물론 되고 말고."
"오늘 안건은 뭔가요?" 레빈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그들은 회의장에 도착했다. 레빈은 서기가 더듬거리면서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회의록을 낭독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서기의 얼굴을 보고서 곧 그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착하고 좋은 사람인지를 알아챘다. 회의록을 읽으면서 머뭇거리고 당황하는 모습에서 그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제 발언이 시작되었다. 일정한 금액을 공제하는 문제와 어떤 관(管)을 부설하는 안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두 명의 의원을 공격하여 기분을 상하게 했고, 무언가에 대해 한참 동안 의기양양하게 떠들었다.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 또 다른 의원은 처음에는 기가 죽어 있더니, 나중에는 그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멋지게 응수했다. 그다음에는 스비야시스끼(그도 거기에 있었다) 역시 뭔가 아주 멋들어지고 우아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레빈은 공제된 액수나 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님을, 저들은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며 죄다 아주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들임을, 저들 사이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들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ㄱ, 모두가 흡족해했다. 레빈에게 놀라웠던 점은, 지금 그들 모두가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작은 징후를 통해서 그는 사람들 각각의 영혼을 알아보게 되었으며, 모두가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특히 오늘은 그를, 레빈을 모든 이들이 너무나도 사랑해 주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마저 죄다 그를 사랑스럽게, 다정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 어떠냐, 만족스러웠느냐?"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물었다.
"무척요. 이렇게 재미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멋져요, 훌륭합니다!"
스비야시스끼가 레빈에게 다가와 자기 집에 차를 마시러 가자고 권했다. 레빈은 자기가 스비야시스끼의 어떤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었는지, 그에게 뭘 찾아내려고 했었는지 이해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는 지혜롭고 놀라울 정도로 선량한 사람이었다.
"아, 좋고말고." 레빈은 대답하고는 그의 아내와 처제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스비야시스끼의 처제에 대한 생각은 이상한 연상 작용에 의해서 결혼과 관련되어 있었기에, 자신의 행복에 관해 얘기하는 데 스비야시스끼의 아내와 처제보다 더 좋은 상대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러 가는 게 참으로 기뻤다.
스비야시스끼는 그에게 시골 영지의 농사에 관해 물었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유럽에서 볼 수 없는 무언가를 거기서 발견할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레빈에게 그런 것쯤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스비야시스끼의 생각이 옳으며, 농사일이고 뭐고 다 하찮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스비야시스끼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발언을 놀라울 만치 점잖고 온화한 태도로 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차렸다. 스비야시스끼의 아내와 처제 또한 아주 상냥했다. 레빈은 그들이 모든 걸 이미 다 알고서 자신에게 공감하고 있으면서도 조심하느라 얘길 꺼내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산을 내리 앉아서 온갖 것에 대해 떠들었지만 오직 자신의 영혼을 가득채우고 있는 그 한 가지만을 암시했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몹시 싫증이 났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스비야시스끼는 하품을 하면서, 친구의 상태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여기며 그를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다.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레빈은 아직도 남아 있는 열 시간을 이제 혼자서 초조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겁을 먹었다. 불침번을 도는 하인이 그의 방에 촛불을 켜주고 나가려는 걸 레빈이 멈춰 세웠다. 예고르라는 이름의 그 하인을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아주 영리하고 성격 좋고, 무엇보다 선량한 사람이었다.
"어떤가, 예고르, 잠을 못 자서 힘들지?"
"뭐 어쩌겠습니까! 제 직무가 그런 건데요. 주인 나리 댁에서 일하면 더 편하겠지만, 그 대신 여기 있으면 수입이 더 들어오니까요."
예고르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아들 셋과 재봉사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은 마구상 점원에게 시집보낼 작정이라고 했다.
그 참에 레빈은 예고르에게 결혼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사랑만 있다면 항상 행복할 것이라고, 왜냐하면 행복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레빈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은 예고르는 그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한 게 분명했고, 레빈으로서는 느닷없는 언급으로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얘기인즉, 그는 좋은 주인을 모시고 살 때면 항상 주인 나리에게 만족했으며, 지금도 비록 주인이 프랑스인이긴 하지만 그에게 전적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착한 사람이야.' 레빈은 생각했다.
"그런데, 예고르, 자네는 결혼할 때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나?"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고르가 대답했다.
레빈이 보기에는 예고르 역시 가슴이 벅차올라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제 인생도 참 희한했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그가 눈동자를 빛내며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품에 전염되듯이, 레빈의 환희가 그에게도 전염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초인종이 울리는 바람에 예고르는 가버리고 레빈 혼자 남았다. 만찬 때 아무것도 안 먹다시피 한 데다 스비야시스끼 집에서도 차와 저녁 식사를 사양했음에도, 레빈은 저녁밥 생각이 나질 않았다. 간밤에도 잠을 못 잤지만, 잠잘 생각 역시 나질 않았다. 선선한 방 안에서도 그는 열기 때문에 답답했다. 레빈은 양쪽 통풍창을 모두 열고서 창문 맞은편의 탁자 옆에 앉았다. 눈 덮인 지붕 너머 사슬 무늬가 돋아 있는 십자가가 보였고, 그 위로는 노랗게 빛나는 카펠라성과 세모꼴의 마부좌가 드높이 솟아올라 있엇다. 그는 십자가와 별자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방 안으로 고르게 들어오는 냉랭하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고, 마치 꿈속인양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기억들을 좇았다. 3시경 그는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를 듣고서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와 안면이 있는 도박꾼 먀스낀이 클럽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기침을 내뱉으며 걷고 있었다. '가여워라, 불쌍한 사람 같으니라고!' 레빈은 생각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달랑 루바시까만 걸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마음을 돌렸고, 차가운 공기에 멱을 감기 위해, 말이 없으되 그에게는 의미로 충만한 저 신기한 모양의 십자가와 높이 떠올라 노랗게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기 위해 다시 창가에 앉았다. 6시가 되자 청소부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레빈은 온몸에 스며드는 한기를 느꼈다. 그는 통풍창을 닫고서 세수를 한 다음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아직 황량했다. 레빈은 걸어서 셰르바쯔끼 일가의 저택으로 갔다. 출입문은 잠겨 있었고, 아직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 그는 다시 호텔 방으로 되돌아가서는 커피를 주문했다. 이제 예고르가 아닌 당직 하인이 커피를 날라 왔다. 레빈은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벨이 울리는 바람에 그는 나가 버렸다. 레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서 흰 빵을 입에 넣었으나, 입은 도무지 그 흰 빵을 가지고서 뭘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레빈은 빵을 뱉어 내고는 외투를 입고서 다시 나와 거리를 거닐었다. 그가 두 번째 셰르바쯔끼 저택의 현관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지나 있었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이제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었고, 요리사는 식료품을 사러 가는 중이었다.
적어도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그 전날 밤과 당일 오전 내내 레빈은 완전히 무의식 속에서 지냈고, 물질적인 삶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틀 밤을 꼬박 세우고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채 영하의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을 보냈는데도 그는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고 건강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러면서도 육신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근육에 힘을 들이지 않고도 움직일 수가 있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필요하다면 공중으로 날아오르거나 건물 한구석을 옮겨 놓을 수도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끊임없이 시계를 들여다보거나 주위를 둘러보면서 거리를 거닐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때 그는, 그 후로 다시는 보지 못할 것들을 보았다. 등교하는 이이들과 지붕에서 보도로 날아드는 회청색 비둘기들, 보이지 않는 손이 진열해 놓은 밀가루가 뿌려진 둥그런 흰 빵이 특히 그를 감동시켰다. 그 흰 빵과 비둘기들, 두 명의 사내아이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한 소년이 비둘기를 향해 달려왔고, 미소를 지은 채 레빈을 쳐다보았다. 비둘기는 날개를 퍼덕이더니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대기를 떠다니는 눈먼지 속으로 날아올랐다. 조그만 창문에서는 구운 빵 냄새가 풍기더니 흰 빵들이 놓여졌다. 한꺼번에 벌어진 이 모든 일이 너무나 좋아서 레빈은 웃었고, 또 기쁨에 겨워 울었다. 그는 가제뜨니 골목과 끼슬로프까 거리를 한참을 우회하여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는 시계를 앞에 놓고 앉아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옆방에서 사람들이 무슨 기계와 속임수에 관해 뭔가 얘기를 나누면서 아침결의 마른기침 소리를 냈다. 그들은 시곗바늘이 벌써 12시를 향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켰다. 레빈은 현관으로 나왔다. 마부들도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레빈을 에워싸고는 서로 말다툼을 하면서 자기 마차를 타라고 권했다. 레빈은 남은 마부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나중에 그들 것도 타겠노라고 약속한 뒤 그중 한 사람을 불러다가 셰르바쯔끼 댁으로 가자고 일렀다. 마부의 못브은, 까프딴 바깥으로 나온 셔츠 깃이 굵고 다부진 불그레한 목 주변에 빳빳하게 세워져 있는 게 꽤 멋졌다. 이 마부의 썰매는 높다랗고 편안했는데, 레빈은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그런 것을 타볼 수 없었다. 말도 멋졌다. 말은 달리려고 기를 쓰면서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셰르바쯔끼가의 저택을 잘 알고 있던 마부는 승객에 대한 예의로서 유달리 정중하게 양쪽 팔꿈치를 약간 굽히고서 "프루!"하고 외치고는 현관 앞에 말을 멈춰 세웠다. 셰르바쯔끼 저택의 문지기도 모든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눈에 머금은 미소와 그가 하는 말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꼰쓰딴찐 드미뜨리치!"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레빈에게 확연히 느껴지는바 기쁨으로 벅차 있었으며 그런 기색을 감추려 애쓰는 것 같았다. 늙은이의 정다운 두 눈을 바라보면서 레빈은 자신의 행복에 무언가 새로운 점이 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일어나셨는가?"
"어서 드시지요! 이건 여기 두시고요." 레빈이 모자를 가지러 되돌아오려고 하자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무언가를 의미하는 미소였다.
"어느 분께 아뢸까요?" 하인이 물었다.
나이 어린 신출내기로, 멋을 잔뜩 부렸지만 아주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 역시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다.
"공작부인께……공작님께……아가씨에게도….." 레빈이 말했다.
그가 처음으로 마주친 사람은 마드무아젤 리농이었다. 그녀는 홀을 가로질러 걸어왔는데. 말아 올린 머리채와 얼굴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레빈이 그녀와 막 대화를 시작했을 때, 갑자기 문 뒤에서 발소리와 옷자락이 가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마드무아젤 리농은 레빈 곁에서 사라져버리고, 자신의 행복이 가까이 있다는 기쁨에 찬 두려움이 그의 온 몸에 퍼졌다. 마드무아젤 리농은 그를 남겨 둔 채 서둘러 다른 쪽 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막 나갔을 때 가벼운 종종걸음 소리가 마룻바닥을 따라 울렸다. 그의 행복이자 그의 삶이며 그 자신,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원했던, 자기 자신보다 더 훌륭한 존재가 그를 향해 전속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걷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레빈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과 똑같은 사랑의 기쁨으로 두려워하는 그녀의 맑고 진실한 눈동자뿐이었다. 그 눈동자는 점점 더 가까이서 반짝이며 눈부신 사랑의 빛으로 그의 눈을 멀게 했다. 그녀가 레빈에게 기대며 그의 곁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팔을 올려 그의 어깨 위에 앉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에게 다가와, 두려움 속에서도 기뻐하며 온몸을 내맡겼다. 그는 그녀를 안고서 그의 입맞춤을 갈구하는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
그녀 또한 밤새 잠을 못 이루었고, 오전 내내 그를 기다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찬성이었으며, 그녀의 행복으로 자신들도 행복했다. 그녀는 레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그를 만나 자신과 그이 행복을 고하고 싶었던 것이다. 혼자서 그를 맞이할 작정이었고, 그런 생각에 흐뭇해하면서도 겁을 내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했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갈팡질팡했다. 그녀는 그의 발소리와 목소리를 듣고서 문 뒤에 선 채 마드무아젤 리농이 물러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드무아젤 리농이 떠났고, 그러자 그녀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자문하지도, 생각하지도 않고서, 그에게 다가가 방금 전의 일을 해낸 것이다.
"어머니를 뵈러 가요!"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고귀한 감정을 망쳐 버릴까 염려했다기보다는, 뭔가 말하려고 할 때마다 매번 말 대신 행복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입을 맞췄다.
"이게 정말 사실입니까?" 그가 마침내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당신'이라는 말과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 어린 수줍음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이에요!" 그녀가 천천히,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너무나 행복해요!"
그녀는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응접실로 들어섰다. 극들을 본 공작부인이 잦은 숨을 들이쉬더니 울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레빈으로서는 예기치 못한 힘찬 발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얼굴을 부여잡고는 입을 맞추며 그의 뺨을 눈물로 적셨다.
"이제 다 됐구나! 나는 기쁘다네. 이 아이를 사랑해 주게. 엄마는 기쁘단다, 키티!"
"일이 빨리도 풀렸구먼!" 공작이 무심한 척하려 애를 쓰며 말했다. 그러나 레빈은 자신을 돌아보는 그의 두 눈이 젖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오래전부터 늘 이렇게 되기를 바랐었네!" 그가 레빈의 손을 잡고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 바람기 많은 딸년이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을 때도 나는….."
"아빠!" 키티가 소리를 지르고는 얼른 공작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래, 그만하마!" 그가 말했다. "나는 너무, 너무, 기쁘……허! 참! 내가 이토록 바보같이….."
그는 키티를 품에 안고서 그녀의 얼굴과 손에, 그리고 다시 얼굴에 입을 맞추고는 성호를 그어 주었다.
레빈은 키티가 아버지의 통통한 손에 한참을 다정하게 입 맞추는 것을 보고서, 이제껏 낯설기만 했던 이 사람, 노공작에 대한 새로운 애정에 사로잡혔다.
공작부인은 안락의자에 앉아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공작도 그녀 곁에 앉았다. 키티는 여전히 공작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의 의자 옆에 서 있었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공작부인이 먼저 나서서 온갖 것을 주워섬기며 생각과 감정을 온통 현실의 문제로 돌려놓았다. 처음에 그것은 모두에게 똑같이 이상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졌다.
"언제 하죠? 축복도 해주고 모두에게 알려야 하잖아요. 결혼식은 언제 할까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알렉산드르?"
"여기 이 친구가 있잖소." 노공작이 레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이 사람이 주인공이요."
"언제 하냐고요?" 레빈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일요. 만약 제 의견을 물으신다면, 제 생각으로는 오늘 축복을 받고 내일 결혼식을 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됐네, mon cher(이 사람은), 터무니없는 소리!"
"그럼, 일주일 뒤에 하죠."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군."
"아니, 왜 그러십니까?"
"아이고, 그만하게!" 그토록 서두르는 모습에 공작부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참금은 어떻게 할까?"
'정말로 지참금이니 뭐니 하는 그 온갖 것들을 다 챙겨야 하나?' 레빈은 속으로 경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참금이니 축복이니 하는 것들이 과연 나의 행복을 망칠 수 있을까? 그 무엇도 망칠 수 없어!' 키티를 힐끔 쳐다본 그는 지참금에 대한 생각이 그녀의 기분을 전혀 상하게 하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그러니까, 이건 필요한 거야.'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제 바람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그가 사죄하듯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정하겠네. 이제 축복해 주고 사람들에게 알려도 되겠군. 그러면 되겠어."
공작부인은 남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는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공작이 그녀를 붙잡아 끌어안고는 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다정하게 미소 띤 얼굴로 그녀에게 여러차례 입을 맞추었다. 자기들이 다시 사랑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자기네 딸이 그런 것인지, 노부부가 순간적으로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헷갈린 게 틀림없었다. 공작과 공작부인이 나가자 레빈은 다시 자신의 신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는 이제 스스로를 제어하고,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는 키티에게 많은 얘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해야 할 말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결코 희망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확신하고 있었어요." 그가 말했다. "이건 예정되어 있었다고 믿어요."
"나는 어떤 줄 아세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심지어 그때도…." 그녀가 하던 말을 멈추고서 특유의 진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단호하게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심지어 내가 나 자신에게서 행복을 밀어냈을 때조차도 나는 믿고 있었어요. 나는 늘 당신 한 사람만을 사랑했지만, 정신이 팔렸던 거예요. 이 말은 해야겠어요…….. 그 일을 잊어 줄 수 있나요?"
"아마도 전화위복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저의 많은 것들을 용서해야 해요.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키티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한 것 중 한 가지였다. 그는 그녀에게 첫날부터 두 가지 사실을 고백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하나는 그가 키티처럼 순결하지 않다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신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는 두 가지 모두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은 아닙니다. 나중에 하죠!" 그가 말했다.
"좋아요, 나중에 하세요. 하지만 꼭 얘기해 줘야 해요.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나는 모든 걸 알아야 해요. 이제 다 정해졌으니까요."
그가 마저 덧붙였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당신은 나를 받아주기로, 나를 거부하지 않기로 정해진 거죠? 그렇죠?"
"네, 그래요."
그들의 대화는 마드무아젤 리농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녀는 가식적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정다운 미소를 지은 채 와서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축하해 주었다. 그녀가 나가기도 전에 이번에는 하인들이 축하 인사를 전하러 왔다. 그다음으로는 친척들이 찾아와 행복으로 가득한 북새통을 이루었고, 레빈은 결혼식 다음 날까지 그런 난리법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내 거북하고 무료했지만 행복한 긴장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로서는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자신에게 요구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끊임없이 실감하면서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온갖 것들을 그는 다 해냈으며, 그 모든 것이 그에게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자신의 혼사는 다른 경우들과 비슷한 점이 전혀 없을 것이며, 혼사의 흔한 조건들은 자신의 행복을 망쳐 버릴 뿐이라고 생각해 온 그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하였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행복은 점점 커지기만 할 뿐 다른 경우와 비슷한 점이라곤 전혀 없고 앞으로도 없을 특별한 것이 되어 갔다.
"이제 당과를 좀 먹읍시다." 마드무아젤 리농이 말하자, 레빈은 썰매를 타고 당과를 사러 갔다.
"참으로 기쁘네." 스비야시스끼는 이렇게 말했다. "부케는 포민의 가게에서 사게나."
"그래야 하나요?" 그래서 그는 포민의 가게로 갔다.
형은 선물이니 뭐니 하여 지출이 많아질 테니 돈을 빌려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선물을 사야 하나요?" 그래서 그는 풀데의 가게로 갔다.
과자 가게, 포민의 가게, 풀데의 가게 모두에서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최근 그와 용무가 있었던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반기며 행복을 축하해 주었다. 기묘했던 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해 줄 뿐만 아니라 전에는 그에게 냉담하고 차갑고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감탄하면서 매사에 그의 뜻을 따르고, 그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대하고, 신붓감이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그의 확신에 공감해 주는 것이었다. 키티 역시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노드스톤 백작 부인이 자신은 좀 더 나은 상대를 바랐다는 암시를 주었을 때, 키티는 화를 벌컥 내면서 레빈보다 더 나은 상대는 이 세상에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하여 노드스톤 백작 부인은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으며, 이제 키티 앞에서 기쁨의 미소를 짓지 않고서 레빈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약속했던 고백이 그 시절에 벌어진 단 하나의 비통한 사건이었다. 그는 노공작과 의논하고 그의 허락을 받아, 자신을 괴롭혀 온 사연이 적혀 있는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네주었다. 미래의 신붓감을 염두에 두고서 썼던 일기였다. 두 가지 사실, 즉 자신이 순결하지 못하다는 점과 신앙이 없다는 점이 그를 괴롭혔다.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갔다. 그녀는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종교의 진리를 한 치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외면적인 불신앙은 그녀에게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사랑으로 그의 영혼을 샅샅이 알고 있었으며 그의 영혼 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바를 발견하곤 했기에, 그러한 영혼의 상태가 불신자라고 일컬어진다는 것은 그녀에게 일컬어진다는 것은 그녀에게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고백은 그녀로 하여금 쓰디쓴 눈물을 흘리게 했다.
레빈이 내면의 갈등 없이 그녀에게 자신의 일기장을 건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는 비밀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고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응당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처사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녀의 입장에 서보지도 못했다. 다만 그날 저녁 극장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집으로 와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자신이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고통으로 눈물범벅이 된 불행하고 가엾고 사랑스러운 그 얼굴을 보았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그녀의 비둘기 같은 순결함으로부터 갈라놓는 그 수렁의 존재를 이해하였고,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경악하였다.
"이 끔찍한 공책들을 가져가세요, 가져가라고요!" 그녀가 책상 위에 놓인 공책들을 밀쳐 내면서 말했다. "왜 나에게 저것들을 줬나요!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는 편이 더 나아요." 절망에 잠긴 그의 얼굴을 보고서 연민을 느낀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이건 끔찍해요, 끔찍하단 말예요!"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 테죠."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에요, 용서했어요. 하지만 끔찍해요!"
그러나 행복이 너무나 컸기에, 그 고백조차 그것을 깨뜨리지 못했고 단지 새로운 뉘앙스를 더해 줄 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용서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는 더욱더 자신을 그녀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으며, 그녀 앞에서 도덕적으로 스스로를 더욱 낮추고 자신의 과분한 행복을 한층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만찬 때와 그 후에 나누었던 대화에서 받은 인상들을 하나씩 음미하듯 무심결에 떠올리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의 쓸쓸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용서하라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말은 그에게서 노여움만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이 겪은 일에 그리스도교적 규범을 적용할 것이나 말 것이냐는 쉽게 논할 수 없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으며, 이미 오래전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 의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매듭지어진 터였다. 그날의 발언들 가운에 그의 머릿속에 가장 인상 깊게 박힌 것은 우둔하지만 선량한 뚜로프찐의 말이었다. "아주 용감한 처사다. 결투를 신청해서 죽여 버렸으니." 예의를 차리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말에 공감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니 이걸 가지고서 더 이상 고민할 건 없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목전에 다가온 출장과 감찰 업무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호텔 방으로 가서 그를 안내해 준 수위에게 자신의 시종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시종은 방금 전에 나갔다고 수위가 전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차를 시킨 다음 탁자에 앉아 프룸[철도여행 안내서]을 집어 들고 여행 경로를 따져 보기 시작했다.
"전보가 두 통 왔습니다." 호텔로 돌아온 시종이 방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방금 전에 나갔다 들어오는 길입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전보를 받아 들고서 봉투를 뜯었다. 첫 번째 것은 그가 오르자고 했던 자리에 스뜨레모프가 임명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전보를 내던지고는 얼굴을 붉힌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는 "Quos vult perdere dementat(신은 자신이 파멸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성을 앗아가 버린다)"라고 중얼거렸는데, 여기서 quos(사람들)은 이 인사에 협력한 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나, 자신이 틀림없이 배제되었으리라는 점은 억울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다쟁이에다 허풍쟁이인 스뜨레모프가 그 누구보다도 그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랐다는 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고 놀라울 뿐이었다. 이런 인사가 자기 자신을, 자신의 prestige(위신)를 망쳐 버린다는 걸 어떻게 그들은 모른단 말인가!
'또 이런 유의 소식이겠지.' 그가 두 번째 전보를 뜯으면서 신경질적으로 뇌까렸다. 전보는 아내에게서 온 것이었다. 파란색 연필로 적인 '안나'라는 서명이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띄었다. "나는 죽어 가고 있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돌아와 주세요. 용서를 받으면 더 편하게 눈감을 수 있을 거예요." 그는 경멸에 찬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내던졌다. 처음 든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교활한 속임수라는 추측이었다.
'그녀가 저지르지 못할 속임수는 없어. 분명 아이를 낳았을 테지. 어쩌면 산증(酸症)일지도 몰라. 한데, 저들의 목적이 대체 뭘까? 아이를 호적에 올려서 내 명예를 훼손하고 이혼을 방해하려는 건가.' 그가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얘기더라…..죽어 간다고 했나……' 그는 전보를 다시 읽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기 적힌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그에게 충격을 가했다. '이게 만일 사실이라면?' 그가 자문했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고통과 임박한 죽음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는 거라면? 그건 단지 잔인한 처사에 그치지 않아. 모두가 나를 비난할 테고, 내 입장에서도 어리석은 짓이 될 거라고.'
"뾰뜨르, 마차를 잡게. 뻬쩨르부르끄로 가겠네." 그가 시종에게 말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뻬쩨르부르끄로 가서 아내를 만나 보기로 결심하였다. 만일 그녀의 병이 속임수라면,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떠날 것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서 그를 보고 싶어 하는 거라면, 그는 그녀를 용서할 참이었다. 아직 살아 있을 때 보게 된다면 말이다. 만약 하나 너무 늦게 도착하게 된다면 영결식에라도 참석할 작정이었다.
길을 가는 내내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한밤중의 기차간에서 물려드는 피로감과 씻지 못해 꺼림칙한 느낌을 품은 채, 뻬쩨르부르끄의 새벽안개를 뚫고서 텅 빈 네프스끼 대로를 지나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떠올리면 아내의 죽음이 이 힘든 상황을 단번에 타개해 주리라는 기대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기에, 그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빵집들, 문이 닫힌 상점들, 밤거리의 마부들, 보도를 쓸고 있는 문지기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감히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갈망하고 있는 것을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려 애쓰면서 그 모든 것을 관찰하였다. 그가 탄 마차가 현관 앞에 당도했다. 삯마차와 잠든 마부가 타고 있는 유개 마차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머릿속 귀퉁이에서 결심을 꺼내듯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만일 속임수라면 조용히 경멸을 표하고 떠날 것. 만일 사실이라면 예의를 지키는 거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초인종을 울리기도 전에 수위가 문을 활짝 열었다. 뻬뜨로프 혹은 까삐또니치라고 불리는 수위는 넥타이도 없이 낡은 프록코트를 입고 단화를 신은 기묘한 차림이었다.
"마님은 어찌 되셨느가?"
"어제 무사히 해산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멈춰 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의 죽음을 바랐는지 그는 이제야 분명히 깨달았다.
"건강은 어떠신가?"
꼬르네이가 앞치마 차림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아주 안 좋으십니다." 그가 대답했다. "어제 의사가 왕진을 다녀갔고 지금도 와 있습니다."
"짐을 들여놓게." 그래도 어쩌면 죽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에 한결 마음을 놓으며 그가 수위에게 일렀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니 옷걸이에 군용 외투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물었다.
"집에 누가 와 있나?"
"의사와 산파, 그리고 브론스끼 백작님이 계십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발소리를 듣고서 보라색 리본이 달린 머리쓰개를 쓴 산파가 안나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임박한 임종에 익숙한 태도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서 침실로 데려갔다.
"천만다행으로 오셨군요! 시종일관 나리 얘기만, 나리 얘기만 하셨지 뭡니까." 그녀가 말했다.
"얼음을 가져오게, 얼른!" 의사가 명령조로 말하는 음성이 침실에서 들려왔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책상 옆 나지막한 의자에 브론스기가 옆구리를 등판 쪽으로 향한 채 걸터앉아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울고 있었다. 의사의 목소리에 두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발견하더니 당황하여 다시 제자리에 앉아 마치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길 바라는 듯 목을 어깨 쪽으로 깊숙이 움츠렸다. 그러나 이윽고 스스로를 제어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안나는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의사 말로는 희망이 없다는 군요. 당신 뜻에 달려 있습니다만, 제가 여기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하지만 당신 뜻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브론스끼의 눈물을 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남들이 고통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러듯 정신적 혼란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고는,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서둘러 문 쪽으로 걸어갔다. 침실에서 무언가 말하는 안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생기 있고 활달했으며, 억양이 너무나도 또렷한 목소리였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침실로 들어가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안나는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누워 있었다. 뺨은 홍조를 띠었고 눈은 빛났으며 웃옷 소매 밖으로 나온 하얗고 조그만 손은 장난치듯 이불 귀퉁이를 돌돌 말고 있었다. 건강하고 생기 있을 뿐만 아니라, 기분도 최고로 좋아 보였다. 그녀는 유달리 또렷하고 감정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어조로 빠르고 낭랑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알렉세이가….내가 말하는 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랍니다(둘 다 알렉세이라는 이 얼마나 기이하고 끔찍한 운명인가)- 내 청을 거절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나는 잊을 테고, 그이는 용서해 줄 거예요….그런데 왜 안 오는 거죠? 그이는 착한 사람이에요, 자기가 얼마나 착한지 그이 자신이 모를 뿐이죠. 아아, 하느님, 너무 갑갑해요! 어서 나에게 물을 가져다주세요, 어서요! 아아, 그건 아기에게, 내 딸아이에게 해로울 거예요! 그래, 좋아요, 아기에게 유모를 붙여 주세요. 그래요, 동의해요, 그게 더 나을 거예요. 그이가 올 텐데, 아기를 보는 게 괴로울 거예요. 아기를 이리 주세요."
"안나 아르까지예브나, 남편께서 오셨답니다. 자, 여기 계시잖아요!" 산파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쪽으로 안나의 주의를 돌리려 애쓰며 말했다.
"아아, 이 무슨 허튼소리람!" 안나는 남편은 보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아기를, 딸아이를 나에게 줘요, 달라니까요! 그이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이가 용서하지 않ㅇ르 거라고 하지만, 그건 그이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아무도 몰라요. 나 혼자만 알죠. 그래서 힘들어졌어요. 그이의 눈 말이에요. 그걸 알아야만 해요, 세료자의 눈도 그이 것과 똑같아요. 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어요. 세료자에게 밥은 먹였나요? 정말이지 나는 알아요. 모두가 잊을 거예요. 그이는 잊지 않겠죠. 세료자를 구석방으로 데려가서, 마리에트에게 걔랑 같이 자달라고 해야 돼요."
그녀가 갑자기 몸을 움츠리고 조용해지더니 놀란 표정을 하고서, 마치 타격이 가해질 것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방어하듯 두 팔을 얼굴을 향해 들어 올렸다. 남편을 알아본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이를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두려워하는 건 죽음이야. 알렉세이, 이리로 다가와요. 마음이 급해요. 나는 시간이 없거든요. 살아 있을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어요. 곧 열이 나기 시작할 거예요. 그러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지금은 이해해요. 다 이해하고, 다 보고 있어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주름진 얼굴이 고통에 찬 표정으로 뒤덮였다. 안나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말하려 해봐도, 도무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고 아랫입술만 덜덜 떨렸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격정과 여전히 싸우며 가끔씩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매번 그의 시선은 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는, 환희에 차 감격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다정한 눈과 마주쳤다.
"잠시만요, 당신은 몰라요…….잠시만, 잠시만요….." 그녀가 생각을 모으려는 듯 말을 멈추었다. "그래요…."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그래요, 맞아요. 내가 말하려는 건 이런 거예요. 나를 보고 놀라지 마세요. 나는 여전히 그대로예요……하지만 내 안에는 또 다른 여자가 있어요. 나는 그 여자가 무서워요. 그 여자가 그 사람을 사랑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을 증오하려 했죠. 그런데 나는 예전의 나를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 여자는 내가 아니에요. 이제 나는 진정한 나, 온전한 나예요. 지금 나는 죽어가고 있어요. 내가 죽을 거라는 걸 나는 알아요. 저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지금 내 두 손에, 두 발에, 손가락에 몇 뿌드가 들려 있는 게 느껴져요. 이 손가락 좀 보세요. 이렇게 커다랗잖아요! 하지만 이제 곧 끝날 거예요…..나한테 필요한 건 딱 한 가지예요. 나를 용서해 주세요. 깨끗이 용서해 주세요! 나는 끔찍한 여자예요. 하지만 유모가 말했어요. 성스러운 수난자,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그녀는 더 형편없었대요. 나는 로마로 갈 거예요. 거기에는 사막이 있어요. 그러면 나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게 될 거예요. 다만 세료자랑 딸아이는 데려가겠어요…..아니에요, 당신은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나는 알아요, 그건 용서할 수가 없다는 걸! 아니요, 아니에요, 가세요. 당신은 너무나 좋은 사람이에요." 그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한 손으로는 그이 손을 잡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그를 밀쳐 내고 있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혼란은 점점 더 심해져서 이제 그는 그것과 씨름하길 그만둘 지경에 다다랐다. 그러다 문득, 정신적 혼란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그 반대로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행복을 느닷없이 안겨 주는 지극히 행복한 정신 상태라는 사실을 그는 느꼈다. 평생 따르고자 했던 그리스도교의 율법이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자신에게 명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수들에 대한 사랑과 용서의 기쁜 감정이 그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그녀의 팔꿈치에 머리를 얹고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그녀의 팔꿈치에서 윗옷을 투과하며 뿜어져 나온 열기가 그를 태울 듯했다. 그녀는 숱이 앙상한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서 그에게로 바짝 다가붙어 오만하고도 도전적으로 두 눈을 치떴다.
"이게 그이예요. 나는 알아요. 이제 모두들 안녕, 잘 있어요!……또 다시 저 사람들이 왔군요. 왜 저 사람들은 나가지 않는 거죠? ……이 모피 코트 좀 벗겨 주세요!"
의사가 그녀의 팔을 떼어 내어 조심스레 그녀를 베개에 눕히고는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얌전히 똑바로 누운 채 반짝이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 줘요. 나에게 필요한 건 용서뿐이라는 것, 그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걸요…..대체 왜 그이는 오지 않는 거죠?" 그녀가 브론스끼가 있는 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리 와요, 가까이 오라고요! 이이에게 손을 내미세요."
브론스끼가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가서 그녀를 보고는 또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에서 손을 떼고, 이이를 보세요. 이이는 성자예요." 그녀가 말했다. "자, 얼굴을 열어 보이라니까요!" 그녀가 성을 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저이의 얼굴을 열어 보여 주세요! 저이를 보고 싶어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브론스끼의 손을 잡아 얼굴에서 떼어 냈다. 내면에 담긴 고통과 수치심으로 그의 얼굴은 흉측했다.
"저이에게 손을 내미세요. 저이를 용서해 주세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그녀가 말을 꺼냈다. "이제 준비가 됐어요. 다리만 좀 펴면 되겠어요. 그래, 이렇게요. 그래요. 아주 좋아요. 이 꽃들은 정말이지 멋이 없게 생겼네요. 제비꽃이랑 하나도 안 닮았잖아요." 그녀가 벽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느님, 하느님! 이게 언제 끝날까요? 모르핀을 좀 놔주세요. 의사 선생님! 모르핀을 놔주세요. 하느님, 하느님!"
그러고서 그녀는 침상 위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주치의와 의사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산욕열이며 1백 명 중 아흔아홉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했다. 하루 종일 고열과 헛소리, 실신이 이어졌다. 자정쯤에 환자는 감각도 맥박도 거의 없이 늘어져 있었다.
매 순간 사람들은 임종을 기다렸다.
브론스끼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침에 어찌 되었는지 알아보러 다시 왔다. 현관 대기실에서 그와 마주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남아 있어 주시요, 아내가 당신을 찾을지도 모르니." 그러고서 직접 그를 아내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아침 녘에, 안나는 다시 흥분하여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생각과 말이 빨라졌다가 또다시 실신으로 끝이 났다. 사흘째 되는 날도 마찬가지였는데, 의사는 희망이 있다고 했다. 그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브론스끼가 앉아 있는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담판을 지을 순간이 다가온 것을 느끼며 브론스끼가 말했다. "저로서는 말도 못 하겠고,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믿어 주십시오, 저는 더 괴롭습니다."
그는 자리를 뜨려 했지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얘길 들어주길 바라오. 이건 꼭 해야 할 말이오. 나를 이끌어 주었던, 그리고 앞으로 이끌어 줄 나 자신의 감정을 당신에게 설명해야겠소. 당신이 나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말이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이혼을 결심했고 심지어 절차를 밟기 시작했소. 숨기지 않겠소. 그 일에 착수하면서 나는 망설이게 되었고, 고통스러웠소. 고백하건대, 당신과 아내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망이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녔소. 전보를 받고서도 같은 감정을 품은 채 이리로 왔고, 그 이상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녀가 죽길 바랐소.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지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서 나는 용서했소. 용서함으로써 얻은 행복감이 나에게 나의 의무에 대해 알려 줬소. 나는 깨끗이 용서했소. 심지어 다른 쪽 뺨도 내밀고 싶소. 내 겉옷을 채 간다면 속옷까지 내주고 싶소. 그리고 하느님께 오로지 용서함의 행복을 거둬 가시지 말라고 기도할 뿐이오!" 눈물이 맺힌, 밝고 고용한 그의 시선이 브론스끼를 놀라게 했다. "내 입장은 그러하오. 당신은 나를 진흙탕에 짓밟아도 되고, 세상의 웃음 거리로 만들어도 괜찮소. 하지만 나는 그녀를 버리진 않을 거고, 당신을 비난하지도 않을 거요." 그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의 의무는 분명하게 예정되었소. 나는 그녀와 함께 해야만 하고 그렇게 할 것이오. 그녀가 당신을 만나길 원한다면, 당신에게 알려주겠소. 하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야기는 흐느낌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브론스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엉거주춤하게 숙인 상태로 의아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눅 들어 있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무언가 고결한 것이며, 심지어 자신의 세계관으로는 도달 불가능한 경지임을 느꼈던 것이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대화를 나눈 뒤 브론스끼는 까레닌가의 현관으로 나와 멈춰 선 채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걸어서 가야 하는지 아니면 마차를 타고 가야 하는지조차 간신히 생각해 냇다. 그는 창피당하고 모욕당한 기분, 그리고 죄스러운 기분이었으며, 자신의 굴욕을 씻어 낼 기회마저 박탈당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그토록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다니던 궤도에서 내동댕이쳐진 것만 같았다. 그토록 굳건해 보였던 모든 습관과 생활의 규칙들이 갑자기 거짓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까지 가엾은 존재이자 그의 행복을 우연히 가로막은 약간 희극적인 방해물로만 보였던 그 남편, 기만당한 남편이 갑자기 그녀에 의해 호출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굴종을 불러일으키는 저 높은 경지로 들려 올라간 것이다. 저 높은 곳에서 그러한 남편의 모습은 사악하고 위선적이고 우스꽝스럽기는커녕 선량하고 소탈하며 위풍당당했으니, 그 점을 브론스끼는 그의 높은 경지와 자신의 굴욕, 그리고 공정함과 자신의 허위를 절감했다. 남편은 비애 속에서도 관대하며, 자신은 스스로의 기만속에서 저열하고 치졸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러나 자신이 부당하게 경멸했던 인간 앞에서 스스로의 저열함을 자각하는 것은 슬픔의 작은 일부일 뿐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형언할 수 없이 불행하다고 느꼈다. 그 이유는 최근 들어 식어 가는 듯했던 안나에 대한 열정이, 그녀를 영원히 잃고 말았음을 알게 된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해졌기 때문이었다. 병을 앓는 내내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영혼을 알게 되자 이제까지 자신은 그녀를 사랑한 적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녀에 대해 알게 되고 그에 마땅한 사랑을 하게 된 지금, 그는 그녀 앞에서 굴욕을 겪고, 그녀에게 자신에 대한 수치스러운 기억 하나만을 남긴 채 그녀를 영원히 잃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자신의 양손을 겸연쩍은 얼굴에서 떼어냈을 때의 그 수치스러운 형국이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까레닌가의 현관에 넑이 나간 듯 서 있었다.
"삯마차를 불러올까요?" 수위가 물었다.
"그래, 불러 주게."
사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집으로 돌아온 브론스끼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엎드려서 엇갈린 양팔 위에 머리를 얹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잔상들, 기억들, 상념들이 너무나도 빠르고 또렷하게 차례로 교차했다. 그것은 그가 병자에게 따라서 숟가락으로 떠먹여준 약이었다가, 산파의 흰 손이기도 했고, 침대 앞 바닥을 딛고 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기묘한 자세이기도 했다.
'잠이나 자자! 잊어버리자!' 지쳐서 자고 싶으면 곧바로 잠들 거라고 믿는 건강한 사람의 확신에 찬 태연한 어조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정말로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혼돈이 일었고, 그는 망각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의식이 벌써 바다의 물결처럼 그의 머리 위로 밀려왔다. 그때, 마치 아주 강력한 전하(電荷)가 내면에 갑자기 흘러들기라도 한양, 그는 소파의 용수철 위에서 온몸이 펄떡거릴 정도로 흠칫 몸을 떨더니 화들짝 놀라 두 손을 짚고 무릎을 꿇은 채 벌떡 일어났다. 마치 전혀 잠을 자지 않은 듯 두 눈이 휘둥그랬다. 조금 전에 느꼈던 머리의 무거움과 사지의 나른함이 별안간 싹 가셨다.
"당신은 나를 진흙탕에 짓밟아도 되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말소리가 들렸고, 눈앞에 그가 보였다. 이어 고열로 인해 홍조를 띤 채 두 눈을 반짝이는 안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온유하고 애정 어린 표정으로 그가 아니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을 때의 자신의 모습, 그의 생각에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다시 다리를 펴고 조금 전의 자세로 소파에 몸을 내던져 두 눈을 감았다.
'자자, 자자!' 그가 속으로 되뇌었ㄷ. 그러나 눈을 감자 경마가 있던 날, 그 잊지 못할 저녁에 본 안나의 얼굴이 더욱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 일은 없었던 거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 일을 지워 버리고 싶어 해. 하지만 나는 그것 없이 살 수가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화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화해를 할 수 있겠냐고!' 그가 소리 내어 내뱉고는 무의식중에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렇게 되풀이해 이야기하자 머릿속에서 무리 지어 있는 듯한 새로운 형상들과 기억들이 떠오르지 않고 억제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생각을 제어하는 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또다시 좋았던 순간들과 얼마 전에 겪은 굴욕이 빠르게 연이어서 떠올랐다. "손을 떼세요"라고 안나의 음성이 말한다. 그는 손을 떼어내고는 자신의 얼굴에 드리운 검연쩍고 바보 같은 표정을 절감한다.
그는 한 가닥 희망도 없다고 느끼면서도 여전히 누운 채 잠들려고 애를 썼고, 아무 상념이든 거기서 비롯한 우연한 단어들을 반복하여 속삼임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들이 떠오르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귀를 기울이니 광인의 기이한 속삭임이 반복적으로 들렸다. '소중히 여길 줄도 몰랐고, 이용할 줄도 몰랐다. 소중히 여길 줄도 몰랐고, 이용할 줄도 몰랐다.'
'이게 뭐지? 혹시 내가 미쳐 가는 걸까?' 그가 생각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왜 사람들은 미치는 걸까, 왜 사람들은 권총 자살을 하는 걸까?' 스스로 묻고 답하다가 눈을 뜬 그는 머리맡에 바랴 형수가 수놓아 만들어 준 베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베개의 숱을 만지작거리면서 바랴를,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러나 무언가 다른 일을 생각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그래, 자야 해!' 그는 베개를 끌어다가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것 역시 고역이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 '나에게 이 일은 끝장난 거다.' 그가 되뇌었다. '뭘 할 건지 생각해야 한다. 뭐가 남아 있지?' 그는 머릿속으로 안나에 대한 사랑을 제외한 생활을 재빠르게 훑었다.
'야심? 세르뿌호프스꼬이? 사교계? 궁정?' 그 어떤 것에도 그는 미련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지녔었지만, 이제 그런 것들일랑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프록코트를 벗고 혁대를 푼 뒤, 좀 더 편게 숨을 쉬기 위해 털이 무성한 가슴팍을 풀어 헤치고는 방안을 서성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미치는 거야.' 그가 되뇌이고는 천천히 덧붙였다. '그리고 이러다가 자살하는 거고….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려고 말이지.'
그는 문쪽으로 다가가 방문을 잠갔다. 그러고서 흔들림 없는 눈초리로 이를 악다물고 책상으로 가 리볼버를 꺼내 들어 살핀 다음 탄창을 장전된 쪽으로 돌려놓고는 생각에 잠겼다. 2분가량 그는 권총을 두 손에 쥐고 골똘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물론이지.' 마치 논리적이고 지속적이며 명료한 사고의 행보가 그를 의심할 바 없는 결론으로 이끌어 주기라도 한 듯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사실 확신에 찬 이 '물론이지'는 한 시간 동안 벌써 수십 번을 되풀이한 똑같은 기억과 상념의 결과일 뿐이었다. 영원히 잃어버린 행복에 대한 회상도, 삶에서 닥쳐올 모든 것들의 무의미함에 대한 상념도, 자신의 굴욕에 대한 자각도 똑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념과 감정들의 순서 역시 똑같았다.
'물론이지.' 그가 되뇌었다. 그의 생각은 또다시 예의 마법에 걸린 회상과 상념의 원을 따라 세 번째로 돌고 있었다. 그는 리볼버를 왼쪽 가슴에 겨누고는 갑자기 주먹을 쥐려는 듯 손 전체에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다가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나, 가슴에 가해진 강한 일격에 그는 넘어지고 말았다. 책상 끄트머리를 잡고서 간신히 서 있던 그가 리볼버를 떨어뜨렸다. 이어 잠시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않아서는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방을 알아보지 못한 채 휘어진 책상다리와 서류함, 그리고 호랑이 가죽을 아래로부터 바라보았다. 응접실을 허겁지겁 지나쳐 오는 하인의 삐걱거리는 발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간신히 생각을 집중하여 자신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음을 깨달았고, 호랑이 가죽과 손에 묻은 피를 보고서 스스로에게 총을 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바보 같으니! 명중시키지 못했군.' 손을 더듬어 리볼버를 찾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권총은 바로 옆에 있었지만, 그는 멀리서 그걸 찾고 있었다. 계속해서 권총을 찾던 그는 다른 쪽으로 몸을 뻗었고, 이윽고 균형을 유지할 힘을 잃고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의 섬약한 신경에 관해서 지인들에게 수차례 하소연하곤 했던, 구레나룻을 기르고 차림새가 우아한 하인은 바닥에 드러누운 주인 나리를 보고 너무나 놀라 피를 흘리는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도움을 청하러 뛰쳐나갔다. 한 시간 뒤 바랴 형수가 세 명의 의사들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그녀는 백방으로 사람을 보내 의사들을 찾아냈는데, 그들이 동시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녀는 부상당한 브론스끼를 침상에 눕히고 그를 돌보기 위해 그의 집에 남았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저지른 실수는, 아내와 만날 채비를 하면서 그녀의 참회가 진실하여 자신이 그녀를 용서하는 경우, 그리고 그녀가 죽지 않는 경우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실수는 모스끄바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이 되었을 때 위력을 발휘하며 그의 눈앞에 전모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모든 경우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아내와 조우하던 날까지 스스로의 속마음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병든 아내의 침상 곁에서, 그는 생전 처름으로 타인의 고통이 불러일으키논 했던 바로 그 측은지심에 몸과 마음을 모두 내맡겼다. 예전에는 그러한 감정을 이롷비 못한 나야감이라 생각하고 부끄럽게 여기던 그였다. 아내에 대한 연민도, 그녀가 죽기를 바란 마음에 대한 회오도, 중요하게는 용서의 기쁨 자체도 그에게 갑작스러운 고통의 경감뿐 아니라 예전에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고통의 원천이었던 것이 갑자기 정신적 기쁨의 원천으로 변모하는 것을 느꼈으며, 비난하고 질책하며 증오할 때는 해결될 수 없다고 여겨지던 것이 용서하며 사랑하고 나니 간단명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내를 용서했고, 그녀의 고통과 참회를 가엾이 여겼다. 그는 브론스끼를 용서했고, 특히 그의 절망적인 행동에 대한 소문을 접한 뒤로는 불쌍히 여기기까지 했다. 그는 예전보다 더 아들을 가엾게 생각했으며, 아들에게도 너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어린 여자아이에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연민뿐 아니라 애틋함에 가까운 어떤 특별한 감정이었다. 자신의 딸도 아니며, 산모가 병치레를 하는 동안 방치된 채 아마도 그 자신이 보살피지 않았더라면 죽고 말았을 갓 태어난 연약한 여자아이를 처음에는 오로지 연민의 감정에 의해 돌보았다. 자신이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아기방에 찾아가서는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그 앞에서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던 유모와 보모도 그에게 익숙해졌다. 간혹 잠든 아이의 노르스름하고 불그레한 얼굴을, 주름지고 솜털이 난 조그만 얼굴을 반 시간가량 말없이 바라보면서, 찌푸린 이마의 움직임과 손가락을 오므린 채 손등으로 양미간을 매끄럽게 문지르곤 하는 그 자그맣고 통통한 손을 관찰하였다. 특히 그런 순간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완전한 내면의 평정과 조화로움을 느꼈다. 자신의 처지에서 어떤 이상한 점이나 바꿔야겠다 싶은 그 무엇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상황이 지금 자신에게 아무리 자연스러울지언정 사람들이 자신을 이 상태로 있게끔 용납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점점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영혼을 이끄는 선한 영적 힘 외에,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강력하게 자신을 삶을 주도하는 또 다른 난폭한 힘이 존재하며, 그 힘이 그가 바라는 겸허한 마음의 평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모두가 자신을 의아스럽게 바라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고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특히 그는 아내와의 관계가 견고하지 못하며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서 아내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던 그 온유함이 사라지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안나가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자신으로 인해 중압감을 느끼고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으면서도 이야기를 꺼낼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듯했으며, 역시나 그들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느끼면서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2월 말, 역시 안나라고 이름을 지어 준 그녀의 갓난 딸아이가 병이 났다. 아침에 아기방을 들여다본 알렉는 의사를 불러오라고 지시를 내린 뒤 부처로 출근했다. 일을 마치고서 그는 오후 3시가 넘어서 귀가하였다. 현관에 들어서자 금줄이 박힌 정복 차림에 곰 털 망토를 걸치고서 미국산 개털로 지은 흰 부인복을 들고 있는 잘생긴 하인이 눈에 띄었다.
"누가 오셨는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물었다.
"엘리자베따 표도로브나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께서 와 계십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보기에 하인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힘겨웠던 시절 내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사교계의 지인들, 특히 여성들이 자신과 아내의 삶에 유달리 참견하고 있음을 느끼던 터였다. 그 모든 지인들에게서 그는 간신히 감춰진 모종의 기쁨을 발견했으니, 예의 변호사의 눈에서, 그리고 방금 하인의 눈에서 발견한 바로 그 기쁨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시집이라도 보내는 양 모두가 환희에 들떠 있었고, 그와 마주칠 때면 애써 희색을 감추며 안나의 건강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의 방문은, 그녀와 관련한 기억들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으며, 따라서 그는 곧장 아이들 방으로 향했다. 첫 번째 방에서는 세료자가 책상에 가슴을 대고 엎드린 채 의자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는 쾌활하게 조잘대면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안나의 병중에 프랑스 출신 여교사를 대신하여 들어온 영국인 여교사가 세료자 옆에 앉아서 손뜨개로 레이스를 뜨고 있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는 세료자를 끌어당겼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들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아내의 안부를 묻는 가정 교사의 질문에 대답한 다음 baby(아기)에 관해서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물었다.
"위험한 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목욕 처방을 내려 주었습니다, 나리."
"그런데 아기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군." 옆방에서 아기가 울부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제 생각에 유모는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나리." 영국 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서 물었다.
"폴 백작 부인 댁에서도 그랬거든요. 의사가 아기를 치료하긴 했는데, 알고 보니 아기는 그저 배를 곯았던 것이었죠. 유모한테 젖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나리."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몇 초 동안 선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옆문으로 들어갔다. 아기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젖힌 채 몸을 꿈틀거리며 유모의 팔 위에 누워 있었다. 풍만한 젖가슴을 권하는데도 그것을 쥐려 하지 않았고, 유모와 그녀 위에서 몸을 숙이고 있던 보모가 두 번이나 "쉬…..쉬……"하며 어르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여전히 차도가 없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그녀에게 물었다.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보모가 속삭이듯 말했다.
"에드워드 양이 그러는데, 어쩌면 유모한테 젖이 없을지도 모른다더군."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그런데 왜 얘길 하지 않았나?"
"누구한테 얘길 합니까? 안나 아르가지예브나는 여전히 편찮으신걸요." 보모가 불만스러운 투로 대꾸했다.
보모는 집안에서 오래도록 일해 온 하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이 단순한 몇 마디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암시로 들렸다.
아기는 목쉰 소리로 자지러지듯 더 크게 울어 댔다. 보모는 한 손을 내젓더니 아기에게 다가가 유모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고 서성이며 흔들어 달래기 시작했다.
"의사에게 유모를 살펴봐 달라고 해야겠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잘 차려입은 차림에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는 유모는 해고당할까 겁이 나 무언가 혼잣말을 웅얼거리더니 커다란 젖가슴을 가리고는 자신에게 젖이 없다는 의심을 향해 경멸 어린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 속에서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조소를 발견하였다.
"가없은 아가!" 보모가 아기에게 "쉬…쉬!"하면서 계속해서 걸음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탁자에 앉아 고통에 잠긴 침울한 얼굴로 앞뒤로 서성이는 보모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잠잠해진 아기를 깊숙한 침대에 내려놓고 베개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보모가 아기 곁에서 물러나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힘겹게 까치발로 아기에게 다가갔다. 잠시 그는 여전히 침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아기를 바라보았지만 갑자기 그의 머리칼과 이맛살이 움찔하더니 미소가 얼굴에 번져갔고, 이윽고 그는 여전히 조용하게 방을 나섰다.
식당에서 그는 벨을 울리고는 하인이 들어오자 사람을 보내 의사를 다시 불러오도록 일렀다. 저토록 귀여운 아기를 보살피지 않는 아내에게 그는 화가 났다. 이렇게 화가 난 기분으로는 그녀에게 가고 싶지 않았고, 공작부인 벳시 역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왜 평소처럼 자기 방으로 오지 않는지 아내가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었기에, 결국은 스스로를 다잡고서 침실로 향했다. 부드러운 양탄자를 밟으며 문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무심결에 듣고 싶지 않은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가 떠나는 것만 아니라면, 당신의 거절과 그이의 거절도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의 남편은 분명 그런 건 초월한 분이잖아요." 벳시의 목소리였다.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원치 않아요. 그 얘기는 하지 마세요!" 안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 때문에 자살까지 시도한 사람과 작별 인사를 하기조차 원치 않다니 그럴 수가 있나요……"
"바로 그래서 싫은 거예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한 표정으로 멈춰 서 있다가 살그머니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위신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한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침실로 향했다. 대화가 멎었고, 그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나는 잿빛 실내 가운 차림으로, 짧게 자른 둥근 머리에는 솔이 빽빽한 브러시처럼 검은 머리털이 자라나 있었다. 그녀는 침대 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편이 나타나자 그녀의 얼굴에서 일순 생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는 불안한 눈초리로 벳시를 살폈다. 벳시는 최신 스타일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머리 위 어딘가에 높이 떠 있는 고깔 모양의 램프 갓 같은 모자를 썼고, 몸통과 치맛자락에 서로 반대 방향으로 비스듬하고 가느다란 줄무늬가 들어간 회청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녀는 납작하고 긴 상반신을 곧게 펴고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조소 띤 얼굴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맞이했다.
"어머나!" 그녀가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댁에 계시다니 무척 반가워요. 아무 데도 안 나타나셔서 안나가 병석에 누운 뒤로는 통 못 뵈었네요. 걱정하신다는 얘기는 늘 듣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훌륭한 남편이세요!" 마치 아내를 대하는 그의 행동에 대해 아량 넘치는 훈장이라도 하사하는 양 의미심장하면서도 상냥한 태도로 그녀가 말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차갑게 목례를 한 뒤 아내의 손에 입을 맞추고는 건강 상태를 물었다.
"좀 나아진 것 같아요." 안나가 남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얼굴색은 열이 있는 듯하구려." 그가 '열'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저희가 너무 수다를 떨었네요." 벳시가 말했다. "너무 제 생각만 했나 봐요.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나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 돼요, 조금만 더 있어 줘요, 제발. 당신에게 할 얘기가….아니, 그러니까 당신에게요." 그녀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홍조가 그녀의 목과 이마를 뒤덮었다. "당신에게 나는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고, 숨길 수도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고개를 숙였다.
"벳시가 그러는데, 브론스끼 백작이 따시껜뜨로 떠나기 전에 작별 인사를 하러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한대요." 그녀는 남편을 쳐다보지 않았다. 힘들지언정 얼른 전부 말하려고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어요."
"이봐요, 나한테는 그 일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잖아요." 벳시가 그녀의 말을 바로잡았다.
"아니에요,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리고 그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갑자기 그녀가 말을 멈추고는 의문스러운 눈길로 남편을 바라보았다(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원치 않아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다가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손을 찾고 있는, 굵은 힘줄이 튀어나온 축축한 남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아마도 스스로를 제어했는지 마침내는 그의 손을 쥐었다.
"나를 신뢰해 줘서 감사하오. 하지만……" 그가 입을 열었다. 당혹감과 울화가 치미는 가운데, 독자적으로 쉽고 명료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인데도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이 있는 자리에서는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그에게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은, 사교계가 주시하는 그의 삶을 주관하고 사랑과 용서의 감정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그를 방해하는 예의 난폭한 힘의 화신인 양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을 바라보며 하는 말을 멈췄다.
"그럼 잘 있어요, 내 사랑스러운 친구." 벳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고는 안나에게 입을 맞춘 뒤 방을 나섰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녀를 배웅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저는 당신이 진정으로 관대한 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녀가 작은 응접실에서 멈춰 서더니 다시 한번 그의 손을 각별히 꼭 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야 제삼자이지만, 그래도 전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고 당신을 존경한답니다. 그래서 감히 조언을 드리는 거예요. 그를 받아들여 주세요. 알렉세이는 명예의 화신이에요. 게다가 따시껜뜨로 떠날 거고요."
"관심과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공작부인. 하지만 아내가 누군가를 집에 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녀 자신이 결정할 겁니다."
그는 습관대로 눈썹을 치올리고서 당당하게 얘기했지만, 어떤 말을 하든 자신의 처지에서 당당함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곧바로 떠올랐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듣고는 사악함과 조소가 어린 절제의 미소를 짓고 있는 벳시의 표정을 보고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응접실에서 벳시에게 목례를 한 뒤 아내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누워 있다가 그의 발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조금 전의 자세로 앉아서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내가 울고 있었다는 걸 그는 알아챘다.
"나를 신뢰해 줘서 무척 고맙소." 그가 벳시에게 프랑스어로 했던 말을 러시아어로 온화하게 되풀이한 다음 그녀 곁에 앉았다. 그가 러시아로 얘기하거나 그녀에게 '당신'이라고 말할 때마다, 그 '당신' 소리는 안나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짜증 나게 했다. "그리고 당신의 결정에 무척 감사하오. 나 역시 브론스끼 백작이 떠날 거라면, 여기 올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내가 이미 말했잖아요. 왜 그걸 반복하는 거죠?" 안나가 미처 억누르지 못한 화를 내지르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올 이유가 전혀 없다고.' 그녀가 생각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그녀를 위해 죽으려 했었고 자살 시도까지 했었는데, 자신이 없으면 못사는 여자인데, 그래도 올 이유가 전혀 없단 말이지!'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남편의 힘줄 솟은 손 위로 반짝이는 두 눈을 떨구었다. 그는 한 손으로 다른 손을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
"그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기로 해요." 그녀가 한결 침착해진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그 문제의 해결을 당신에게 맡겼고, 무척 기쁘게 생각하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문을 열었다.
"나의 바람이 당신의 바람과 일치해서 말이죠." 그녀가 재빨리 끝을 맺었다. 남편이 뭐라 말할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마당에 그가 천천히 말을 잇자 짜증이 치밀었다.
"그렇소." 그가 확실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은 심히 복잡 미묘한 가정사에 너무도 부적절하게 개입하고 있소. 특히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에 관해서 하는 말들, 난 전혀 믿지 않아요." 안나가 재빠르게 말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좋아한다는 걸 난 알아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육체적인 혐오의 감정을 고통스럽게 품은 채 그를 바라보면서 실내 가운에 달린 술을 불안스레 만지작거렸다.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를 질책하곤 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지금 바라는 건 단 한 가지, 역겨운 남편의 존재로부터 해방되는 것뿐이었다.
"의사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나는 건강한데 뭣 하러 의사를 부르나요?"
"그게 아니라, 아기가 울고 있소. 유모한테 젖이 부족하다는구려."
"내가 그토록 간청했는데, 왜 내가 젖을 먹이는 걸 허락하지 않는 거죠? 어차피(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이 '어차피'라는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걔는 갓난아이잖아요. 사람들이 걔를 죽이고 말 거예요." 그녀는 벨을 울려서 아기를 데려오라고 일렀다. "젖을 먹이게 해달라고 간청했는데, 다들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래 놓고 지금에 와서는 나를 책망하고 있죠."
"나는 책망하지 않…."
"아니에요, 당신은 나를 책망하고 있어요! 하느님 맙소사! 나는 왜 죽지 않은 걸까!" 그녀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내가 신경이 날카로워요. 내가 잘못했어요." 제정신을 차리고서 그녀가 말했다. "어쨌든 이제 가보세요."
"그래, 이 상태로 둘 수는 없어." 아내의 방을 나서면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스스로에게 단호히 되뇌었다.
세상이 눈여겨보는 한 현상 유지는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신에 대한 아내의 증오심,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는 반대 방향으로 삶을 이끌며 자기 의지의 실행이나 아내와의 관계에 변화를 요구하는 예의 난폭하고 비밀스러운 힘의 막강한 위력이 지금처럼 그에게 분명하게 현시된 적은 없었다. 그는 온 세상과 아내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지만, 꼭 집어서 무얼 요구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평온함은 물론 모든 공로와 위업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파괴해 버리는 사악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는 안나를 위해서는 브론스끼와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나, 두 사람 모두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면 또다시 그 관계를 허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다만 아이들에게 망신을 줘서는 안 되며, 아이들을 빼앗겨서도 안 되고, 자신의 입지에 변화가 생겨도 안 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게 아무리 꼴사납다 해도, 결별보다는 나았다. 결별할 경우 그녀는 헤어날 길 없는 치욕스러운 처지에 놓이고, 그 자신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는 모두가 자신의 뜻에 반대할 것임을, 지금 자신의 눈에는 이토록 자연스럽고 좋게만 보이는 일을 실행하도록 사람들이 놔두지 않을 것임을, 모두가 나쁘지만 응당 그래야 한다고 여겨지는 일을 실행하도록 종요할 것임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벳시는 미처 응접실을 나서기도 전에 문가에서 스쩨빤 아르게지치와 맞닥뜨렸다. 그는 생굴을 들여온 옐리세예프의 가게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다.
"앗! 공작부인! 이렇게 뵙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댁에 갔었거든요."
"아쉬운 만남이네요. 제가 이제 떠나는 길이라." 벳시가 미소 띤 얼굴로 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잠시만요, 공작부인. 장갑을 잠시 거두시고 손에 입 맞출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지요. 손에 입 맞추는 것만큼 해묵은 유행이 되살아나서 고마운 경우도 없지요." 그가 벳시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럼 언제 뵐 수 있을까요?"
"별 볼 일 없는 분이라." 벳시가 웃으며 말했다.
"별 볼 일 많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엄청나게 진지한 사람이 되었거든요. 제 집안일뿐만 아니라 남의 가정사까지 돌본답니다."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머나, 반가운 소리네요! 그것이 안나를 겨냥한 얘기임을 곧바로 알아챈 벳시가 말했다. 그들은 응접실로 되돌아와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가 안나를 죽이고 말 거예요." 벳시가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기쁩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연민의 정이 담긴, 괴롭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그 일 때문에 뻬쩨르부르끄에 왔답니다."
"온 도시가 이 일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녀는 바짝바짝 말라만 가고요.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하죠. 둘 중 하나예요. 그녀를 데리고 가서 단호하게 대처하든가, 아니면 이혼을 해주든가. 지금의 상황은 그녀를 질식시킬 뿐이에요."
"그래요, 그래, 바로 그겁니다……" 오블론스끼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가 온 겁니다. 그러니까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고….제가 시종관 자리에 오르게 됐거든요. 그래서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해서요.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 일을 처리하는 겁니다."
"하느님이 도와주시길 빌어요!" 벳시가 말했다.
현관까지 벳시를 배웅한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손에, 장갑 위쪽 맥박이 뛰는 자리에 입을 맞추고는 그녀로서는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점잖지 못한 허튼소리를 뇌까린 뒤에 누이에게로 갔다. 그가 갔을 때 누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기분은 아주 즐겁고 신이 난 상태였지만, 그는 즉시 누이의 기분에 맞추어 연민과 시적인 감흥에 젖은 분위기로 자연스레 옮겨 갔다. 그는 건강 상태가 어떤지, 오전은 어찌 보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아주, 아주 안 좋아요. 낮이나. 아침이나, 지난 모든 날들이나 앞으로 다가올 날들 모두요." 그녀가 말했다.
"내 생각에 너는 우울한 기분에 빠져든 것 같아. 털어 버려야 해. 인생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고. 힘들다는 거 알아, 하지만……"
"여자들은 상대방이 지닌 결함 때문에도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안나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이게 베푼 선행 때문에 그이를 증오해요. 그이와 함께 못 살겠어요. 그거 아세요? 그의 모습은 나한테 물리적으로 영향을 미쳐요. 그래서 난 자제력을 잃고 마는 거예요. 못 살겠어요, 그이랑은 못 살겠다고요. 어쩌면 좋죠? 나는 불행했었고, 더 불행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겪고 있는 이런 끔찍한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요. 아마 믿지 못하실걸요. 그이가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그이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이를 증오한단 말이에요. 그이가 관대한 사람이라 그이를 증오하는 거예요. 나에게 남은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그녀는 죽음을 언급하려 했지만,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끝가지 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병이 나서 신경이 예민해진 게야." 그가 말했다. "너는 지금 정말이지 상황을 엄청나게 과장하고 있어. 그렇게까지 끔찍할 건 전혀 없다고."
그러고서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 누구도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입장에서 서서 그토록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감히 미소를 짓지는 못할 터이지만(미소는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의 미소에는 넘치는 선량함과 거의 여성적인 상냥함마져 담겨 있었으며, 따라서 상대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기는커녕 기분을 완화시키고 안정시켜 주곤 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그의 조용한 화술과 미소는 아몬드 기름처럼 진정 작용과 완화 작용을 했으니, 안나 또한 이내 그 점을 느꼈다.
"아니에요, 쓰지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글렀어요, 파멸했다고요! 파멸한 것보다 더 나빠요. 아니, 아직 파멸하지 않았어요, 모든 게 끝장났다고는 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아직 끝장나지 않았다는 걸 느껴요. 나는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줄 같아요. 필시 끊어지고 말겠죠. 아직은 끝나지 않았지만….끔찍하게 끝나고 말 거예요."
"괜찮아, 줄은 조금씩 늦출 수 있잖아. 출구 없는 상황은 없는 법이야."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오직 한 가지뿐이에요…."
그녀가 생각하는 그 한 가지 출구란 곧 죽음임을 그녀의 겁먹은 눈초리에서 또다시 읽어 낸 그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전혀 그렇지 않아." 그가 말했다. "내 말 좀 들어 봐. 너는 너 자신의 상황을 나처럼 볼 수가 없어. 내 의견을 솔직하게 얘기하마." 그는 또다시 조심스럽게 예의 아몬드 기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부터 시작할게. 너는 너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사람에게 시집을 갔어. 애정도 없이, 혹은 사랑이란 걸 모른 채 결혼을 한 거지. 그게 말하자면 실수였어."
"끔찍한 실수였죠!" 안나가 말했다.
"하지만 거듭 말하건대, 그건 이미 기정사실이야. 그다음에는, 말하자면 남편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불행에 처한 거야. 그건 불행이야. 하지만 그 또한 기정사실이지. 그리고 네 남편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했어."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그는 반박을 기다리며 잠깐씩 뜸을 들였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된 거야. 이제 문제는 네가 네 남편이랑 계속해서 살 수 있느냐, 바로 그거야. 너는 그러길 원하니? 그러길 원해?"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조금 전에 네 입으로 말했잖니, 그를 견딜 수가 없다고 말이야."
"아니요, 나는 말하지 않았어요. 취소하겠어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이해가 안 돼요."
"그래, 하지만 있잖니……"
"오라버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 나는 고개를 거꾸로 처박고서 어떤 수령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거기서 빠져나와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럴 수도 없고요."
"괜찮아, 우리가 담요를 깔아 두고 너를 받아 낼 테니까. 너를 이해한다. 네가 감히 자신의 바람을,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지 못하는 걸 이해한다고."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어요….그저 모든 게 끝나기를 바랄 뿐이에요."
"한데 그 사람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잖니. 그가 이 문제로 너보다 덜 괴로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도 괴롭고 그도 괴로운데, 과연 이 상황에서 뭘 얻을 수 있겠니? 반면에 이혼은 만사를 해결해 줄 거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어렵사리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서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부정의 뜻으로 짧게 깎은 머리를 내저었다. 그러나 갑자기 전과 같은 미모로 환히 빛나는 누이의 얼굴 표정을 보고서, 그는 그녀가 이혼을 바라지 않는 이유가 오로지 그것을 불가능한 행복으로 여기기 때문임을 눈치챘다.
"너희 부부가 너무나 가엾구나!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어느덧 아까보다 더 과감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 말 말아라, 아무 말도! 하느님이 내 심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그 사람한테 가봐야겠다."
안나는 생각에 잠긴 형형한 두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자기 사무실의 좌장 자리에 앉아 있을 때처럼 다소 엄숙한 표정을 하고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서재에 들어섰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거닐며 스쩨빤 아르게지치와 안나가 나누었던 바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닌지?" 매제를 본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평소와는 달리 문득 당혹감을 느꼈다.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그는 방금 전에 구입한, 여는 방식이 색다른 담뱃갑을 꺼내서 가죽 향을 맡아 보고는 궐련 한 개비를 집어 들었다.
"아니요, 무슨 용건이라도 있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마지못해 대꾸했다.
"있잖소…….그게 말이오….그러니까, 얘기를 좀 했으면 싶소." 평소와는 달리 소심한 자신의 태도에 내심 놀라며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한 감정은 너무나 뜻밖이고 생소해서, 이것이 지금 그가 하려는 일에 대해 경종을 올리는 양심의 소리라는 사실을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제력을 발휘하여 갑자기 밀어닥치는 두려움을 이겨 냈다.
"바라건대 누이에 대한 내 사랑, 그리고 매제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과 존경을 믿어 주었으면 하오." 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가만히 선 채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드리운 온순한 희생양 같은 표정을 보고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적이 놀랐다.
"그러니까…….누이에 대해서, 그리고 두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하고 싶소."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여전히 전에 없던 수줍음과 씨름하며 말을 이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음울한 미소를 띠고 처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대꾸도 없이 탁자로 다가가서 쓰다 만 편지를 집어다가 처남에게 건넸다.
"나 역시 같은 문제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싶소. 자, 내가 막 쓰기 시작한 편지요. 내 존재가 그녀를 언짢게 하기에 글로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었소." 그가 편지를 건네며 말했다.
편지를 받아든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흐릿한 눈동자를 의아스럽게 바라보고는 읽기 시작했다.
내 존재가 당신을 힘들게 한다는 걸 알고 있소. 나로서는 그 사실을 믿기가 무척 어렵지만 실제로 그러하며 상황은 달라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소. 나는 당신을 비난하지 않소. 그리고 하느님이 입증해 주실 터, 병석에 누워 있는 당신을 보고서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진심으로 결심했소. 나는 내가 행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어쨌든 내가 바라 온 것은 단 하나, 당신의 행복, 당신 영혼의 행복이오. 그리고 지금 나는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걸 잘 알고 있소. 무엇이 당신에게 진정한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당신 스스로 말해 주시오. 내 모든 것을 당신의 의지와 공명정대한 감정에 의탁하겠소.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편지를 돌려주고는 할 말을 잊은 채 아까와 같은 의아한 눈초리로 매제를 바라보았다. 그러한 침묵은 양쪽 모두에게 몹시 거북스러운 것이어서, 입을 꼭 닫고 까레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입술에 경련이 일기까지 했다.
"이게 내가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그의 눈길을 외면하게 말했다.
"그, 그래….."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눈물로 목이 메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그래, 이해하오." 마침내 그가 이렇게 내뱉었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싶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아무래도 누이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소. 걔는 판관이 아니니까." 마음을 가라앉히며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말했다. "누이는 위축되어 있소. 다름 아닌 매제의 관대함에 위축되어 있단 말이오. 누이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일 거요."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소? 그녀의 처지를 어떻게…..그녀가 원하는 바를 어떻게 알아내면 좋겠소?"
"내 의견을 말해 보라면, 이러한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매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안을 허심탄회하게 밝히는 건 매제 자신한테 달려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거로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어떻게?" 그가 눈앞에 대고 익숙지 않은 손짓을 하면서 덧붙였다. "그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가 않는데 말이오."
"어떤 상황이든 돌파구는 있는 법이오."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활기를 띠며 말했다. "매제가 결별을 원했던 때가 있어지……만일 부부지간의 행복을 이룰 수 없다고 지금도 확신한다면….."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오. 하지만 내가 모든 것에 동의하고,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도대체 어떤 출구가 있단 말이오?"
"내 의견을 말하자면…."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얼굴에 안나와 얘기할 때 보였던, 아몬드 기름처럼 부드럽고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 선량한 미소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로 하여금 무심결에 스스로의 나약함을 느끼고 그것에 자신을 내맡긴 채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하는 말을 믿으려 들게끔 만들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다. "누이는 결코 이 얘길 입 밖에 내지 않을 거요. 하지만 한 가지 가능한 게, 걔가 바랄 수 있는 게 딱 한 가지 있소."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말을 이었다. "그건 인연을 끝내는 것이오. 인연과 거기 엮인 모든 추억도 말이오. 내 생각에, 두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는 새로운 관계의 정립이 불가피하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오직 쌍방이 자유로워짐으로써 정립될 수 있소."
"이혼 말씀이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소, 내가 말하는 건 이혼이오. 그래, 이혼 말이오."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상기된 표정으로 되풀이했다. "두 사람과 같은 그런 관계에 놓인 부부에게는 그게 모든 면에서 가장 합리적인 돌파구란 말이오. 부부가 함께 생활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이상 뭘 더 할 수 있겠소? 그런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여기서 고려해야 하는 건 단 하나, 부부중 한쪽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하는가, 그것뿐이오. 원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오." 소심함을 점점 떨쳐 내면서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말을 이어 갔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흥분하여 얼굴을 찌푸린 채 무언가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스쩨빤 아르게지치에게는 그토록 간단해 보이는 그 일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수천 번 심사숙고했었다. 그 모든 게 그에게는 그리 간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상세한 절차를 이미 알아보기까지 했던 이혼이 이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자존심과 종교에 대한 경외심이 그로 하여금 허구적인 간통에 대한 비난을 감수하도록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가 이미 용서했고 사랑하는 아내의 죄상이 세상에 폭로되어 망신을 겪는 일은 더더욱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 더욱더 중요한 이유로 이혼은 그에게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혼을 하게 되면 아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이혼한 엄마는 합법적이지 못한 가정을 갖게 될 것이고, 의붓아들의 처지와 양육은 필시 형편없으리라. 그렇다면 자신이 아이를 맡는다? 자기 쪽에서는 그게 복수가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러길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이혼이 다른 모든 방안들보다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 이유는, 그가 이혼에 동의할 경우 바로 그 때문에 안나느 ㄴ파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스끄바에서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이혼하기로 결정을 내리려는 그에게 했던 말,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맞이할 안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던 그 얘기가 그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겨 놓은 터였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을 자신이 베푼 용서와 아이들에 대한 애착과 결부시켜 이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혼에 동의함으로써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그의 관념으로는 마지막 생명 줄이나 마찬가지인 사랑하는 아이들을 스스로에게서 앗아 가는 짓이며, 그녀에게서는 선으로 향할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버팀목을 앗아 가 결국은 그녀를 파멸로 몰아넣을 짓을 의미했다. 이혼을 하면 그녀는 브론스끼와 같이 살 게 뻔한데, 그 관계는 불법적일 뿐 아니라 죄악이 될 것이다. 교회의 법에 따르면 남편이 살아 있는 한 아내에게 재혼이란 허용되지 않는 일이니 말이다. "아내가 그와 같이 살게 되면, 한두 해 지나서 그가 아내를 버리거나 아니면 그녀가 새로운 내연관계에 빠져들겠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비합법적인 이혼에 동의함으로써 그녀를 파멸시키는 장본인이 되는 셈이다." 이런 생각을 수백 번 거듭한 그였으니, 이혼이 처남의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은 물론 심지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한 말 중 한 마디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수천 가지 논박할 근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처남의 말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끌며 자신의 순종을 요구하는 예의 강력하고 난폭한 힘이 드러나는 것을 느꼈기에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문제는 단지 매제가 어떤 조건하에서 이혼에 동의할 것인지에 달려 있소. 누이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감히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오. 그 애는 모든 것을. 매제의 아량에 맡기고 있다오."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 대체 뭘 위해서 그런단 말인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남편 쪽에서 그 책임을 떠안게 되는 이혼의 세부 절차를 떠올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는 얼굴을 가리던 브론스끼의 모습처럼, 수치스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심란한 모양이군. 이해하오. 하지만 말이오, 깊이 생각해 본다면……."
'오른쪽 뺨을 때린 자에게 왼쪽 뺨도 내밀어라. 겉옷을 가로채 간 자에게 속옷까지 내주어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생각했다.
"그래, 좋소!" 그가 새된 소리로 외쳤다. "내가 치욕을 감수하고 심지어 아들까지 내주겠소. 하지만…..하지만 이대로 두는 게 낫지 않겠소? 아니, 원하는 대로 하라지."
그러고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처남이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몸을 돌려 창가에 놓인 탁자 앞에 앉았다. 그는 슬펐고,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이나 수치심과 더불어, 스스로의 고결한 검허 앞에서 희열과 감동 또한 느꼈다.
스쩨빤 아르게지치 역시 감동을 받았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알렉세이, 정말이지 누이는 처남의 관대함을 높이 평가할 거요."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암마도 이건 신의 뜻이겠지." 그는 자기가 덧붙인 말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닫고 자조의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 했지만 눈물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불행이오. 그러니 그것을 인정해야만 하지. 나는 이 불행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처남과 누이를 돕고자 애쓰고 있소." 스쩨빤 아르게지치가 말했다.
메제의 방을 나왔을 때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감동에 젖어 있었지만, 그러한 감동도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만족감을 느끼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자신이 한 말을 철회하지 않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만족감에 또 하나의 생각이 더해졌으니, 그는 이 일이 수습되면 아내와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질 심산이었다. '나와 국왕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왕이 라즈보뜨[러시아어 '라스보뜨'는 '각자의 위치에 배치하는 것'과 '서로 떼어 놓는 것(이혼)'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추상명사다. 여기서 국왕이 행하는 라즈보뜨는 군사용어로서 보초병을 제 위치에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이러한 중의적인 의미를 활용하여 재미난 수수께끼를 지어내려는 것이었다.]를 행할 경우 그로 인해 형편이 더 좋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 내가 라즈보뜨를 추진했더니만 셋이 더 좋아졌다는 거 아니겠나……..아니면, 나와 왕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을까? 가령……아니야, 더 괜찮은 걸 궁리해 낼 테야.' 그가 미소 띤 얼굴로 생각했다.
심장을 비껴가긴 했지만 브론스끼의 부상의 위험한 것이어서, 그는 며칠 동안이나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처음으로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방에는 형수인 바랴밖에 없었다.
"바랴!" 그가 그녀를 엄숙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나 자신을 쏘았어요. 그러니 제발 이 일에 대해 절대로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모두에게도 그렇게 일러 주시고요. 그러지 않으면 일이 아주 우스꽝스럽게 될 거예요."
바랴는 아무 대답도 없이 몸을 숙이고는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해맑았고 열이 오르지도 않았지만, 표정만은 엄숙했다.
"천만다행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아프지는 않아요?"
"여기가 약간." 그가 가슴을 가리켰다.
"붕대를 다시 감아 줄게요."
자신의 몸에 붕대를 새로 감는 동안 그는 넓적한 광대뼈에 힘을 꽉 주고서 말없이 형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일을 마치자 입을 열었다.
"허투루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제발, 내가 자살 기도를 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끔 해주세요."
"아무도 그런 말 안 해요. 단지 앞으로는 본의 아니게 총을 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녀가 의혹의 기색이 어린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하지만 차라리……"
이어 그의 얼굴에는 음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랴로서는 무척이나 염려스러웠던 그 말과 미소에도 불구하고 염증이 사라지고 회복되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일부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그러한 처신을 통해 지금껏 겪은 수치심과 굴욕감을 모두 씻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이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 대해서도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의 관대함을 인정했지만, 자신이 굴욕을 당했다는 느낌은 이미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전의 생활 패턴을 되찾았다. 수치심 없이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습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그는 실감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감정과 씨름을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털어 버릴 수가 없었던 단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녀를 영원히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에 가까운 회한이었다. 그녀의 남편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지금 그녀와 절연해야만 하며, 앞으로는 참회한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에 결코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굳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사랑을 잃은 데 대한 상실감은 도무지 마음 한구석에서 털어 낼 수가 없었으며, 그녀와 함께하며 알게 된, 당시에는 소중히 여길 줄 몰랐으나 지금에 와서는 온갖 매력을 띠고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그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한 추억을 그는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세르뿌호프스꼬이가 그를 위해 따시껜뜨로 부임하는 방법을 궁리해 냈고, 브론스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떠날 때가 다가올수록 그래야 마땅하다고 여기며 치르는 희생은 점점 더 괴로워졌다.
상처가 아물었고, 그는 이미 밖을 나다니며 따시껜뜨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를 딱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어딘가에 파묻혀 살든 죽든, 아무려면 어떠리.' 그는 이런 생각을 했고, 작별 인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벳시에게 그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의 의사를 전달하러 안나에게 갔던 벳시는 부정적인 답변을 가지고 그에게 왔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라.' 소식을 접한 브론스끼가 생각했다. '그건 나의 마지막 남은 힘을 거세해 버릴지도 모를 나약함이었어.'
다음 날 아침 벳시는 몸소 브론스끼를 찾아와 오블론스끼로부터 긍정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공표했다. 얘긴즉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이혼을 하기로 했으며 따라서 안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브론스끼는 벳시를 배웅할 생각조차 못 하고, 자신이 결심한 바도 모조리 잊어버린 채, 언제 만날 수 있는지, 그녀의 남편은 어디 있는지 묻지도 않고서 그 즉시 까레닌가로 갔다. 계단을 내달리면서 그는 아무도,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달음질을 간신히 자제하며 재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방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지도, 알아채지도 못한 채 그녀를 껴안고서 얼굴과 두 손과 목덜미에 입맞춤 세례를 퍼부었다.
안나는 이 만남을 준비하면서 그에게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중 한마디도 할 틈이 없었다. 그의 열정에 그녀 또한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를 진정시키고 자기 자신도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그의 감정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입술이 너무 떨려서 한참 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요, 당신이 나를 사로잡았어요. 나는 당신 거예요."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그녀가 마침내 내뱉었다.
"그렇게 되었어야 했어요!" 그가 말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이제야 그걸 알겠어요."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점점 더 파리해져 가는 낯빛으로 그녀가 그의 머리를 얼싸안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야 이렇게 되었다니, 무언가 무서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모든 게 지나갈 겁니다, 다 지나갈 거라고요. 우리는 아주 행복해질 겁니다! 만일 우리의 사랑이 더 강렬해진다면, 바로 그 속에 무언가 무서운 면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가 고개를 들고서 예의 단단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자 그녀 또한, 그의 말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그의 눈동자에 미소로써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집어다가 자신의 차가워진 두 뺨과 짧게 깎은 머리털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머리를 짧게 깎다니 몰라보겠습니다. 참 예뻐졌군요. 소년 같아요. 하지만 너무나 창백해요!"
"네, 무척 쇠약해졌어요." 그녀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입술이 또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 이탈리아로 갑시다. 그러면 당신도 회복될 거예요." 그가 말했다.
"정말로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남편과 아내처럼 단둘이서, 당신과 내가 한 가족처럼 될 수 있을까요?" 그녀가 그의 눈을 가까이 응시하며 물었다.
"나로서는 지금까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희한할 뿐입니다."
"스찌바가 그러더군요. '그이'가 모든 것에 동의했다고요. 하지만 나는 '그이'의 관용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녀는 생각에 잠겨 브론스끼의 얼굴을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나는 이혼을 원치 않아요.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다만 그이가 세료자에 대해 어떻게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조우하게 된 이 순간 어떻게 아들과 이혼 문제를 떠올리고 생각할 수 있는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그 얘긴 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아요." 그는 그녀의 손을 돌려 잡고 관심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를 외면했다.
"아아, 왜 나는 죽지 않은 걸까요,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이 말에 이어 흐느낌도 없이 눈물만 그녀의 두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브론스끼의 애를 태우지 않도록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과분하고도 위험한 따시껜뜨로의 임관을 고사하는 것은 과거 브론스키의 관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를 거절하였으며, 고위층에서 자신의 처신에 대한 비난이 오간다는 걸 눈치채고는 곧바로 퇴역해 버렸다.
한 달 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 남고, 안나와 브론스끼는 이혼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단호하게 거부한 채 외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