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 83화
군사들은 명을 받고 소양 등 세 사람에게 칼을 씌우고 옷을 벗겨 늘어세웠다. 원수부 앞에 구경하러 온 군사들과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그 광경을 보고 분노한 진정한 대장부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소가수란 사람으로, 원수부 남쪽 거리의 종이 파는 가게 옆집에 살고 있었다.
그의 고조부 소담은 자(字)가 승달인데,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형남의 자사(刺史)를 지낸 사람이었다.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둑을 무너뜨리자. 소담은 친히 군사들과 관리들을 이끌고 나와 비를 무릅쓰고 둑을 쌓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수세가 거세지자, 군사들과 관리들이 잠시 피하라고 하자 소담이 말했다.
“한나라 때 동군태수였던 왕존은 몸으로 강물을 막았는데, 내가 어찌 물러나겠는가?”
말이 끝나자, 강물이 뒤로 물러나고 제방이 무사하게 되었고 한다. 그 해에 벼 한 줄기에 이삭[穗]이 여섯 개나 달렸다고 하였다. 소가수(蕭嘉穗)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취한 것이었다.
소가수가 우연히 형남에 가게 되었는데, 형남 사람들이 그 조상의 인덕을 사모하여 소가수를 아주 공경하였다. 소가수는 성격이 호탕하고 뜻이 높았으며 도량도 넓었다. 힘도 남들보다 세고 무예도 뛰어났으며, 담력도 대단하였다. 그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귀천을 막론하고 사귀었다.
왕경이 반란을 일으켜 형남성을 침략하였을 때 소가수는 적을 방어할 계책을 바쳤는데, 장수가 그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아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역적들은 백성들에게 성으로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지만 성을 나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가수는 성중에서 밤낮으로 역적들을 도모할 궁리를 했지만, 실 한 가닥으로는 밧줄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역적들이 소양 등 세 사람을 옷을 벗겨 늘어세운 것을 보았고, 또 송군이 소양 등을 구하기 위해 성을 급하게 공격하여 성중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소가수는 생각했다.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성중의 많은 목숨들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소가수는 일단 거처로 돌아갔다. 이때는 오후 4시쯤 되어 있었다. 심부름하는 아이를 불러 먹을 갈게 하고, 이웃의 종이 가게에서 두터운 종이 여러 장을 사왔다. 그리고 저녁에 등불 아래에서 큰 글씨로 격문을 지었다.
성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송나라의 양민이어서 결코 역적을 기꺼이 돕지는 않을 것이다. 송선봉은 조정의 훌륭한 장수로서 오랑캐들을 죽이고 전호를 사로잡았으며, 이르는 곳마다 그 예봉을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그 수하에는 108명의 장수들이 있어 그 정이 팔다리와 같다.
지금 원문 앞에 세워져 있는 세 사람은 의기를 지켜 무릎을 꿇지 않고 있으니, 송선봉을 비롯한 영웅들의 충의를 알 수 있다. 오늘 역적들이 만약 이 세 사람을 죽인다면, 성중에는 병사와 장수들이 적어 조만간에 성이 깨뜨려지게 되면 옥석(玉石)이 모두 불타게 될 것이다. 성중의 군사와 백성은 목숨을 보존하고 싶다면, 나를 따라 역적들을 죽이자!
소가수는 격문을 여러 장 쓴 다음 몰래 성중의 동정을 정탐해 보았더니, 집집마다 백성들이 우는 소리만 들렸다. 소가수는 생각했다.
“민심이 이러하니, 내 계획이 성공하겠구나!”
새벽에 거처를 나와, 격문을 원수부 앞의 거리에 뿌렸다. 잠시 후 날이 밝자, 군사들과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격문을 주워 읽기 시작했고 잠깐 사이에 많이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읽었다. 그때 순찰을 돌던 군졸 하나가 격문을 주워 나는 듯이 달려가 양영에게 알렸다.
양영은 크게 놀라, 급히 선령관(宣令官)을 내보내 명을 전하여 군사들은 원문과 각 영채를 잘 지키는 한편 첩자를 체포하라고 하였다.
소가수는 몸에 칼을 감추고서, 사람들 틈을 뚫고 들어가 격문을 큰 소리로 두 번이나 낭독했다. 군사들과 백성들은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선령관이 주장의 명을 전하기 위해 말을 타고 5~6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다가왔다.
소가수는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나아가 감추고 있던 칼을 꺼내 말 다리를 베었다. 선령관이 말에서 떨어지자, 한칼에 그 목을 잘라 버렸다. 소가수는 왼손에는 수급을 들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서 큰 소리로 외쳤다.
“살고 싶으면, 이 소가수를 따라 역적을 죽이러 갑시다!”
원수부 앞에 있던 군사들은 평소에 소가수가 무쇠 같은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삽시간에 5~6백 명이 모여들었다. 소가수는 군사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백성 중에서도 담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 도우러 오시오!”
소가수의 음성이 백 보 밖에까지 울려 퍼지자, 사방에서 호응이 일어났다. 백성들이 몽둥이나 탁자 다리 등을 들고 5~6백 명이 모여들어 함성을 질렀다. 소가수가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고 원수부로 쳐들어갔다.
양영은 평소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포학하고 툭하면 부하들을 매질했기 때문에, 호위장수들까지도 원한이 골수에 맺힌 터였다.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자마자, 모두 소가수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원수부로 돌입하여 양영을 비롯하여 그 가족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소가수가 사람들을 이끌고 원수부를 나섰을 때에는, 따르는 사람이 이미 2만을 넘었다. 소가수는 소양 · 배선 · 김대견의 칼을 벗기고 힘센 장정 세 사람에게 그들을 업게 하였다. 소가수는 양영의 수급을 들고 북문으로 달려가, 문을 지키던 마강을 죽이고 군사들을 쫓아 버린 후 성문을 열고 조교를 내렸다.
그때 오용은 북문 앞에서 성을 공격하는 장병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갑자기 성중에서 함성이 울리면서 성문이 열리자, 역적들이 쳐들어 나오는 줄 알고 급히 군마를 후퇴시켜 진을 벌렸다. 그때 소가수가 사람 머리를 들고 나오는데, 그 뒤에는 세 군사가 등에 소양 등을 업고 황급히 조교를 건너오고 있었다.
오용이 깜짝 놀라 바라보고 있으려니, 소양 등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군사! 이 장사들이 사람들을 이끌고 역적을 죽이고 우리를 구해 주었습니다.”
오용은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놀라면서 한편으로 기뻐하였다. 소가수가 다가와 오용에게 말했다.
“창졸간에 일이 벌어져 인사드릴 여가가 없습니다. 군사께서는 빨리 병력을 이끌고 입성하십시오!”
조교 곁에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소리쳤다.
“송선봉은 입성하십시오!”
오용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장병들에게 입성하되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자는 그 대오까지 모두 참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성의 북쪽을 지키던 군사들은 사세가 급하게 된 것을 보고 모두 무기를 내던지고 성을 내려와 투항했다.
동서남 세 방면의 군사들도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적장들을 포박하고 성문을 활짝 열고서 향화와 등촉을 밝히고 송군을 영접하여 입성시켰다. 오직 미생이란 놈만 용맹하여,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틈에 서문을 빠져나가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오용이 사람을 보내 송강에게 보고하자, 국가를 걱정하고 형제들을 위해 눈물 흘리던 송강의 병세가 보고를 받자 거의 나아 버렸다. 송강은 기뻐하면서 영채를 뽑고 장수들과 대군을 거느리고 형남성으로 들어갔다. 송강은 원수부에 좌정하여 군사들과 백성들을 안무하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송강은 소가수를 원수부로 불러 성명을 물은 다음, 상좌에 앉히고 절을 올리며 말했다.
“장사의 쾌거로 역적들을 죽이고 많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으며,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성을 수복하였습니다. 게다가 저의 세 형제까지 구해 주셨으니, 송강이 마땅히 절을 올리겠습니다.”
소가수는 답례하고서 말했다.
“이번 일은 제 능력이 아니라, 모두 여러 군사들과 백성들의 힘이었습니다.”
송강은 그 말을 듣고서 소가수를 더욱 공경하였다. 송강 이하 장수들의 인사가 끝나자, 성중의 군사들이 적장들을 끌고 왔다. 송강은 투항하는 자들을 모두 용서하였다. 그러자 성중에는 환호 소리가 진동하였고, 투항한 자가 수만 명이 되었다. 그때 마침 수군두령 이준 등이 배를 거느리고 한강에 당도하여, 송강을 찾아와 뵈었다.
송강은 술을 내어 소가수를 대접하면서, 친히 술잔을 권하고서 말했다.
“족하의 재능과 덕이 크니, 제가 조정으로 돌아가면 천자께 아뢰어 높이 등용되도록 하겠습니다.”
소가수가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오늘 거사한 것은 공명이나 부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살아왔고, 장성해서는 고향을 빛낸 적도 없는 고루하고 무식한 자에 불과합니다. 지금처럼 아첨하는 자들이 출세하고 현명한 선비들이 무명으로 있는 때에는, 비록 수후(隨侯)의 구슬이나 화씨지벽(和氏之璧) 같은 뛰어난 재능이 있고 허유(許由)나 백이(伯夷) 같은 고결한 뜻이 있더라도 끝내 조정에 알려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저는 큰 뜻을 품은 영웅들이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국가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거사에 한 명이라도 자신의 처자만 보전하려는 자가 있으면, 조그만 잘못이라도 모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권력을 가진 간사한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더군요. 저는 지금 책임 있는 관직도 없이 한가로이 떠도는 구름이나 들판의 학과 같으니, 어느 하늘인들 날아가지 못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송강 이하 모든 장수들은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좌중에 있던 공손승 · 노지심 · 무송 · 연청 · 이준 · 동위 · 동맹 · 대종 · 시진 · 번서 · 주무 · 장경 등 10여 명은 소가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뜻을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그날 저녁 연회가 끝난 뒤, 소가수는 원수부를 나갔다.
다음 날 아침, 송강은 대종을 진안무에게 보내 승첩을 알리게 하고, 친히 소가수의 거처를 찾아갔다. 하지만 거처는 텅 비어 있었다. 옆집 종이가게 주인이 말했다.
“소가수는 오늘 새벽 해가 뜨기 전에 거문고와 칼과 책 보따리를 수습하여 소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습니다.”
송강이 원수부로 돌아가 여러 두령들에게 소가수가 표연히 떠났다는 얘기를 하자,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저녁에 대종이 돌아와 말했다.
“완주와 산남에 소속된 고을로서 아직 수복하지 못한 곳이 있는데, 진안무와 후참모가 나전 · 임충 · 화영 등에게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이미 신관들을 보내 교대하고, 진안무는 장수들을 거느리고 출발하여 곧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송강은 오용과 상의하여, 진안무가 도착하면 형남을 맡기고 대군을 일으켜 역적 괴수를 토벌하러 가기로 하였다. 송강은 형남에서 대엿새 조섭하여 병이 완전히 나았다.
며칠 후, 진안무의 병마가 당도하여, 송강이 성중으로 영접하였다. 인사를 나눈 다음, 진안무는 장병들에게 크게 상을 내렸다. 뒤를 이어 산남을 지키던 사진 등도 신관과 교대하고 당도하였다. 송강은 형남을 진안무에게 맡기고,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병진하여 남풍의 역적 소굴을 토벌하러 떠났다.
이때는 108명 두령들이 모두 모였고, 손안을 비롯한 하북 항장 11명도 더해졌다. 군마 20여 만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연전연승하였다. 위세를 크게 떨쳐 가는 곳마다 적군들은 바람에 불려오듯 귀순하였다. 송강은 고을을 수복할 때마다 진안무에게 알렸고, 진안무는 나전으로 하여금 병마를 이끌고 가서 지키게 하였다.
송강의 대군이 수륙으로 병진하여 남풍 경계에 당도하자, 탐마가 달려와 보고하였다.
“왕경이 이조를 통군대원수로 삼아 수륙으로 병마 5만을 내보냈습니다. 또 운안 · 동천 · 안덕 세 곳에서 각각 병마 2만을 보내 병마도독 유이경과 상관의 등이 이끌고 오고 있습니다. 모두 수십 명의 맹장과 11만 웅병이 쳐들어오고 있는데, 왕경이 친히 독려하고 있습니다.”
송강은 보고를 받고 오용과 상의하였다.
“적군이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쳐들어오고 있으니, 필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모양이오. 어떤 계책으로 저들을 이길 수 있겠소?”
오용이 말했다.
“병법에 ‘여러 가지 방략으로 적을 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장병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는데, 여러 갈래로 나누어 공격함으로써 적군들이 서로 접응할 여가가 없게 해야 합니다.”
송강은 계획대로 장병들을 나누었다.
그 전날, 박천조 이응과 소선풍 시진은 송선봉의 명령을 받고, 마보두령 단정규 · 위정국 · 시은 · 설영 · 목춘 · 이충과 병력 5천을 거느리고 군량과 화포 등의 군수물자를 수레에 싣고 대군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용문산이란 곳에 당도하였는데, 남쪽 기슭 아래에 한 마을이 있었다. 사면이 모두 높은 흙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토성과 같았는데, 세 방면으로 출입로가 나 있었다. 주민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빈 기와집과 초가집 수백 채가 있었다.
그날 저녁, 동북풍이 크게 불면서 짙은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이응과 시진은 군량이 비에 젖을까 염려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집 문짝을 뜯어내고 수레를 집안으로 들여놓게 하였다. 그리고서 군사들이 밥을 지어 먹고 쉬고 있는데, 병대충 설영이 순찰을 돌다가 첩자 하나를 붙잡아 와서 시진에게 보고하였다.
“첩자를 심문했더니, 적군 미생이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오늘 밤에 우리를 기습하여 군량을 불태우려고 한답니다. 지금 용문산 속에 매복하고 있답니다.”
원래 용문산은 양쪽에 절벽이 마주보고 있어 그 사이가 문처럼 되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배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응이 설영의 보고를 듣고, 시진에게 말했다.
“제가 가서 저 좆같은 역적 놈들이 갑옷 한 조각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쳐부수겠습니다.”
시진이 말했다.
“저 미생이란 놈은 아주 용맹하여 힘으로는 이길 수 없네. 게다가 우리는 병력도 적으니, 내가 작은 계략을 써서 화포 대여섯 수레와 땔나무 수레 백여 채를 버려 적을 막겠네. 우선 저 첩자를 죽여 당빈의 원수를 갚자고.”
군사들로 하여금 군량과 화포를 실은 수레를 끌게 하고, 이응으로 하여금 병력 3천을 거느리고 활과 불화살을 가지고서 군량 수레를 호위하게 하였다. 황혼 무렵에 모두 언덕을 넘어 남쪽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리고 땔나무를 실은 수레 백여 대를 서남쪽에 있는 초가들의 처마 아래에 늘어놓았다. 또 백여 대의 빈 수레를 대여섯 곳에 늘어놓고, 위에는 군량을 조금만 싣고 아래에 화포와 염초 · 유황 · 땔나무 등을 숨겨 두었다.
시은 · 설영 · 목춘 · 이충으로 하여금 병력 2천을 거느리고 동쪽 언덕 아래 길목에 매복하게 하고, 단정규로 하여금 병마 1천을 거느리고 남쪽 길목에 매복하게 하여, 적군이 당도하면 여차여차 하라고 하였다. 시진은 신화장군 위정국과 함께 보병 3백을 거느리고 화기와 불씨를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 수목이 울창한 곳에 매복하였다.
밤 10시쯤 되자, 과연 적장 미생이 2명의 편장과 1만여 명의 군마를 이끌고서, 사람은 가벼운 갑옷을 입고 말은 방울을 떼고 깃발을 감추고 북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남쪽 언덕 아래 길목으로 달려왔다. 단정규는 적병이 오는 것을 보고, 군사들로 하여금 횃불에 불을 붙이게 하고 나가 싸웠다. 단정규는 미생과 4~5합을 싸우다가 말을 돌려 병력을 이끌고 마을 안으로 후퇴하였다.
미생은 용맹하지만 지략이 없는 자라, 병력을 이끌고 곧장 추격해 왔다. 설영과 시은은 남쪽 길에서 횃불을 오르는 것을 보고, 즉시 이충과 목춘으로 하여금 병력 1천을 나누어 마을 남쪽으로 달려가서 길목을 막게 하였다.
그때 적병은 함성을 지르며 마을로 뛰어들어, 바람이 불어오는 동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빈 집들만 있고 군량은 보이지 않았다. 미생은 병력을 이끌고 사방으로 수색하다가,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쪽인 서남쪽에 1~2백 대의 군량 수레를 발견하였다. 5~6백 명의 군사들이 수레를 지키고 있다가, 적병이 오는 것을 보고 함성을 지르며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미생이 말했다.
“군량이 많지 않군!”
군사들에게 횃불을 켜게 하여 비춰 보니, 중간에 비단을 실은 수레가 몇 대 있었다. 적병들은 그걸 보자 서로 차지하려고 달려들었다. 미생이 급히 제지하려고 할 때, 산 위에서 불화살에 날아와 초가와 땔나무를 실은 수레에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적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급하게 몸을 피하려는데, 화포에 불이 붙어 벽력같은 소리를 내면서 줄줄이 터지기 시작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적병들은 화포에 맞아 죽고, 순식간에 치솟은 불길과 뜨거운 연기에 휩싸여 버렸다.
불길은 점점 더 거세지고 화포가 터지는 소리는 마치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터지는 것 같았다. 잠깐 사이에, 백여 채의 초가가 불덩이로 변했다. 미생은 화포에 맞아 죽고, 적병들 태반이 화포에 맞거나 불길에 휩싸여 죽었으며, 머리가 타고 얼굴에 화상을 입은 자가 무수하였다. 그때 단정규와 시은 등이 세 길에서 쳐들어왔다. 적군의 편장 둘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1만 인마 가운데 겨우 천여 명만 언덕 위로 기어 올라가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날이 밝자, 시진은 이응의 군마와 합쳐, 군량 실은 수레를 대채로 운송해 갔다. 송선봉은 적의 소굴을 공격하기 위해 군마를 정돈하였다.
송강이 지휘대에 올라서자, 화포가 터지고 북과 징이 울렸다. 각 영채의 장수들이 차례로 나와 두 손을 마주 잡고 서서 숙연하게 명을 기다렸다. 주장의 명령을 전하는 선령관(宣令官)이 송강의 명을 전했다.
“함성을 지를 때 함께하지 않거나, 대오를 어지럽히거나, 시끄럽게 떠들며 명을 위배하거나, 진에 임하여 달아나는 자는 중벌에 처할 것이다!”
각 영채로 다니며 명령을 전달하는 기패관(旗牌官)들이 좌우에 20명씩 늘어서자, 송선봉이 친히 훈시하였다.
“너희들은 각 영채로 가서 싸움을 독려하되, 적을 만났는데 진격하지 않는 자나 뒤로 물러나 명을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붙잡아 처벌하라!”
기패관들이 명을 받고 각 영채로 가자, 징이 크게 울리며 각 영채에서는 대오를 짓고 출발 준비를 하였다. 송강이 수륙의 여러 장수들에게 각각 임무를 부여하자, 깃발이 오르면서 각 부대가 출전하였다. 북소리가 천지와 산악을 진동하고 깃발이 해를 가리면서 귀신들이 도망쳤다.
한편, 역적 왕경도 군병을 배정하였다. 수군장수 문인세숭 등은 이미 출발하였고, 운안주의 가짜 병마도감 유이경은 정선봉이 되고 동천의 가짜 병마도감 상관의는 부선봉이 되었다. 남풍의 가짜 통군 이웅과 필선은 좌대가 되고, 안덕의 가짜 통군 류원과 반충은 우대가 되었다. 가짜 통군대장 단오는 정합후(正合後)가 되고, 가짜 어영사(御營使) 구상은 부합후(副合後)가 되었으며, 가짜 추밀 방한은 중군우익(中軍羽翼)이 되었다.
왕경은 중군을 장악하고, 많은 가짜 상서(尚書) · 어영금오(御營金吾) · 위가장군(衛駕將軍) · 교위(校尉) 등을 거느렸으며, 그들은 또 각기 수하에 편장과 아장들을 수십 명씩 두었다. 이조는 원수가 되었는데, 대오를 이룬 군마가 질서정연하였다. 왕경은 친히 감독하였다.
군사들은 물론 말들에게도 갑옷을 입히고, 북을 세 번 울리자 모든 부대가 일제히 진격하였다. 10리를 채 못 갔는데, 먼지가 일어나면서 송군의 정탐부대가 점점 다가왔다. 말방울이 울리면서 약 30명의 기마가 달려오는데, 모든 파란 두건을 쓰고 푸른 전포를 입었다. 말에는 모두 붉은 술을 매달고 술마다 수십 개의 방울이 달렸으며, 뒤에는 꿩 꼬리를 꽂고 있었다. 군사들은 모두 은빛의 가늘고 긴 창을 들고 가벼운 활과 짧은 화살을 메고 있었다.
앞장선 장수는 도군황제의 칙명으로 원래의 직책으로 돌아온 호기장군(虎騎將軍) 몰우전 장청이었다. 머리에는 금이 박힌 파란 두건을 쓰고, 몸에는 수놓은 푸른 전포를 입고, 은빛 안장을 얹은 말을 타고 있었다.
그 왼편에는 칙명으로 정효의인(貞孝宜人)에 봉해진 경시족 경영이 머리에는 금이 박힌 자줏빛 주봉관(珠鳳冠)을 쓰고, 몸에는 수놓은 자줏빛 비단 전포를 입고 은빛 갈기의 준마를 타고 있었다. 오른편에는 칙명으로 의복정배군(義僕正排軍)에 임명된 섭청이 깃발을 들고 있었다.
장청 일행은 이조의 부대 앞까지 와서 정탐하다가, 거리가 백 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말을 돌려 돌아갔다. 적군 선봉 유이경과 상관의가 그걸 보고 병력을 몰고 돌격해 왔다. 장청은 흰색 이화쟁(梨花鎗)을 들고 말을 박차고 나가 두 장수와 맞붙었다. 경영도 방천화극을 들고 달려 나가 싸움을 도왔다.
네 장수가 10여 합을 싸웠는데, 장청과 경영이 적장의 무기를 밀쳐내면서 말을 돌려 달아났다. 유이경과 상관의가 병력을 몰아 추격하자, 좌우에서 소리쳤다.
“선봉은 추격하지 마시오! 저 두 사람의 안장에 매달려 있는 비단 주머니 속에는 돌이 가득 들어 있는데, 백발백중입니다!”
유이경과 상관의는 그 말을 듣고 말을 멈춰 세웠다. 그때 용문산 뒤편에서 북소리가 울리면서 5백 명의 보병이 달려 나왔다. 앞장선 네 보군장수는 흑선풍 이규, 혼세마왕 번서, 팔비나타 항충, 비천대성 이곤이었다. 그들은 산 아래에 ‘一’ 자로 늘어서고 양쪽에 방패수들이 둥글게 둘러막았다.
유이경과 상관의가 병력을 몰아 쳐들어가자, 이규와 번서는 보군을 두 길로 나누어 방패를 거꾸로 들고 산을 돌아 달아났다. 그때 왕경과 이조의 대군이 당도하여 일제히 돌격하였다. 이규와 번서 등은 나는 듯이 산으로 올라가 고개를 넘어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조는 명을 내려, 넓은 평원에 진을 벌리게 하였다.
그때 산 뒤편에서 포성이 울리더니, 산 남쪽 길에서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세 장수가 앞장섰는데, 중간에는 왜각호 왕영, 좌측에는 소울지 손신, 우측에는 채원자 장청이었다. 세 장수가 마보군 5천을 이끌고 앞으로 돌격해 왔다.
왕경이 군대를 내보내 대적하려고 하는데, 또 산 뒤편에서 포성이 울리더니 이번에는 산 북쪽 길에서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세 여장수가 앞장섰는데, 중간에는 일장청 호삼랑, 좌측에는 모대충 고대수, 우측에는 모야차 손이랑이었다. 세 여장수가 마보군 5천을 이끌고 앞으로 돌격해 왔다.
세 여장수는 적병의 우대 류원과 반충의 병마를 만나 싸우고, 왕영 등은 적병의 좌대 이웅과 필선을 만나 싸웠다. 양쪽에서 각각 10여 합을 싸웠는데, 남쪽의 왕영 · 손신 · 장청이 말을 돌려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자, 북쪽의 호삼랑 · 고대수 · 손이랑도 말을 돌려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왕경이 그걸 보고 웃으며 말했다.
“송강의 수하는 모두 저런 좆같은 연놈들뿐인데, 우리 장병들이 어째서 누차 패했단 말인가?”
왕경은 대군을 휘몰아 추격하기 시작했다. 5~6리를 채 못 갔는데, 홀연 징소리가 울리면서 조금 전에 달아났던 이규 · 번서 · 항충 · 이곤 네 보군두령이 산 왼쪽 숲속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화화상 노지심, 행자 무송, 몰면목 초정, 적발귀 유당 네 보군장수가 방패와 단도를 든 5백 보병을 이끌고 함께 달려 나왔다.
적장 부선봉 상관의가 보군 2천을 이끌고 맞부딪혔다. 이규와 노지심 등은 적병과 몇 합 싸우다가 감당하지 못한 척하면서 방패를 거꾸로 들고 두 길로 나누어 다시 숲속으로 달아났다. 적병이 추격했지만, 이규 등은 재빨리 달아나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이조가 그걸 보고 황망히 왕경에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추격하시면 안 됩니다. 저건 우리를 유인하는 계책입니다. 우리는 진을 벌리고 있다가 적을 맞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조가 지휘대에 올라가 진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미처 진을 완성하기 전에 산 뒤편에서 굉천포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대군이 쏟아져 나와 들판 가운데에 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왕경이 직접 지휘대에 올라가 송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정남쪽의 인마는 모두 붉은 깃발. 붉은 갑옷, 붉은 전포, 붉은 술을 단 붉은 말이었다. 전면에 휘날리는 붉은 깃발 아래 서 있는 대장은 벽력화 진명이었고, 왼쪽에는 성수장군 단정규, 오른쪽에는 신화장군 위정국이 있었다. 세 장수는 병기를 들고 모두 붉은 말을 타고서 진 앞에 서 있었다.
동쪽의 인마는 모두 파란 깃발, 파란 갑옷, 파란 전포, 파란 술을 단 파란 말이었다. 전면에 휘날리는 파란 깃발 아래 서 있는 대장은 대도 관승이었고, 왼쪽에는 추군마 선찬, 오른쪽에는 정목안 학사문이 있었다. 세 장수는 병기를 들고 모두 파란 말을 타고 진 앞에 서 있었다.
서쪽의 인마는 모두 흰 깃발, 흰 갑옷, 흰 전포, 흰 술을 단 흰 말이었다. 전면에 휘날리는 흰 깃발 아래 서 있는 대장은 표자두 임충이었고, 왼쪽에는 진삼산 황신, 오른쪽에는 병울지 손립이 있었다. 세 장수는 병기를 들고 모두 흰 말을 타고 진 앞에 서 있었다.
후면의 인마는 모두 검은 깃발, 검은 갑옷, 검은 전포, 검은 술을 단 검은 말이었다. 전면에 휘날리는 검은 깃발 아래 서 있는 대장은 쌍편 호연작이었고, 왼쪽에는 백승장 한도, 오른쪽에는 천목장 팽기가 있었다. 세 장수는 병기를 들고 모두 검은 말을 타고 진 앞에 서 있었다.
동남방 문기 아래의 군마는 파란 깃발을 들고 붉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전면에 휘날리는 수놓은 깃발 아래 서 있는 대장은 쌍쟁장 동평이었고, 왼쪽에는 마운금시 구붕, 오른쪽에는 화안산예 등비가 있었다. 세 장수는 병기를 들고 모두 전마를 타고 진 앞에 서 있었다.
서남방 문기 아래의 군마는 붉은 깃발을 들고 흰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전면에 휘날리는 수놓은 깃발 아래 서 있는 대장은 급선봉 삭초였고, 왼쪽에는 금모호 연순, 오른쪽에는 철적선 마린이었다. 세 장수는 병기를 들고 모두 전마를 타고서 진 앞에 서 있었다.
동북방 문기 아래의 군마는 검은 깃발을 들고 파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전면에 휘날리는 수놓은 깃발 아래 서 있는 대장은 구문룡 사진이었고, 왼쪽에는 도간호 진달, 오른쪽에는 백화사 양춘이었다. 세 장수는 병기를 들고 모두 전마를 타고 진 앞에 서 있었다.
서북방 문기 아래의 군마는 검은 깃발을 들고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전면에 휘날리는 수놓은 깃발 아래 서 있는 대장은 청면수 양지였고, 왼쪽에는 금표자 양림, 오른쪽에는 소패왕 주통이 있었다. 세 장수는 병기를 들고 모두 전마를 타고 진 앞에 서 있었다.
팔방의 배치는 철통같았다. 진문 안에서 마군은 마군 부대를 따르고, 보군은 보군 부대를 따르고 있는데, 각자 칼이나 도끼, 장창을 들고 있었다. 깃발은 질서정연하고 대오는 엄숙하였다. 팔진의 중앙은 모두 살구색 행황기(杏黃旗)인데, 사이사이에 64개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 위에는 64괘가 금박으로 수 놓여 있었다. 네 개의 문이 있는데, 남문은 모두 마군이었다.
정남쪽 누런 깃발 아래 두 장수가 있는데, 위에는 미염공 주동, 아래에는 삽시호 뇌횡이었다. 군사들은 누런 깃발을 들고 누런 갑옷과 전포를 입고 누런 술을 단 누런 말을 타고 있었다. 중앙진의 동문에는 금안표 시은, 서문에는 백면낭군 정천수, 남문에는 운리금강 송만, 북문에는 병대충 설영이 있었다.
황기 뒤에는 화포가 늘어서 있고, 포수 굉천뢰 능진이 조수 20여 명을 거느리고 화포를 둘러싸고 있었다. 화포 뒤에는 적을 사로잡는 갈고리와 올가미를 든 군사들이 늘어서 있고, 그 뒤에는 28수(宿)의 별자리를 수놓은 갖가지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수놓은 깃발들 중간에 ‘帥’ 자가 써진 담황색 수자기(帥字旗)가 펄럭이고 있는데, 가장자리는 진주로 둘렀고 밑에는 금방울이 달렸으며 위에는 꿩 꼬리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수자기를 지키는 장사는 머리에 쓴 관에 물고기 꼬리 모양의 비녀를 찌르고, 용 비늘 같은 갑옷을 입고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는데, 바로 험도신 욱보사였다.
수자기 옆에 호위장사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똑같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손에는 강쟁을 들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모두성 공명이고, 또 한 사람은 독화성 공량이었다. 두 사람의 앞뒤로 낭아곤을 들고 철갑을 입은 군사 24명이 배열하고, 그 뒤에 또 수놓은 깃발 양쪽에 방천화극을 든 24명의 군사가 배열하였다. 그 앞에 선 두 명의 장수는, 소온후 여방과 새인귀 곽성이었다. 두 장수는 각각 방천화극을 들고 말을 타고 있었다.
방천화극을 든 군사들 가운데에 보군장수 두 명이 같은 차림을 하고 서 있는데, 바로 양두사 해진과 쌍미갈 해보였다. 각각 삼고연화차(三股蓮花叉)를 들고 중군을 수호하고 있었다. 그 뒤에 비단 안장을 얹은 말을 타고 있는 두 사람이 있는데, 성수서생 소양과 철면공목 배선이었다.
두 사람 뒤에 자주색 옷을 입고 큰 칼을 든 군사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는 회자수(劊子手) 두 명이 서 있는데, 철비박 채복과 일지화 채경이었다. 그 뒤 양편에 금창(金槍)을 든 군사들과 은창(銀槍)을 든 군사들이 늘어서 있는데, 금창수 부대의 대장은 금쟁수 서녕이고, 은창수 부대의 대장은 소이광 화영이었다.
그 뒤에 또 비단 전포를 입고 꽃가지를 꽂은 모자를 쓴 군사들이 쌍을 이루어 황월(黃鉞)과 백모(白旄)를 들고 늘어서 있는 가운데 일산(日傘) 세 개가 있고, 그 아래에 비단 안장을 얹은 세 필의 준마 위에 세 영웅이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는 성관(星冠)을 쓰고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입운룡 공손승, 왼쪽에는 윤건(綸巾)을 쓰고 우선(羽扇)을 든 지다성 오용, 가운데는 조야옥사자(照夜玉獅子)를 타고 있는 정서정선봉(征西正先鋒) 산동 급시우 호보의 송공명이었다.
세 사람 앞 왼쪽에는 군령을 전달하는 신행태보 대종, 오른쪽에는 중군의 기밀을 전달하는 낭자 연청이 있고, 그 뒤에는 35명의 아장들이 장창과 활을 들고 말을 타고 서 있었다.
진 뒤편에는 또 두 부대의 유병(游兵)이 양측에 매복하여 중군을 호위하는 우익(羽翼)이 되어 있는데, 왼쪽에는 석장군 석용이 구미구 도종왕와 함께 보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몰차란 목홍이 아우 소차란 목춘과 함께 마보군 3천을 거느리고 있었다.
왕경이 이조와 함께 지휘대에 올라가 송강의 병마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구궁팔괘진(九宮八卦陣)을 펼쳤다. 군병들은 용맹하고 장수들은 영웅이었으며, 군용이 질서정연하고 창칼은 예리하였다. 왕경은 깜짝 놀라 혼이 몸에 붙어 있지 않은 것 같고 간담이 서늘해져서 말했다.
“아군이 누차 패한 이유를 알겠다! 원래 저들이 이렇게 대단했구나!”
그때 송군 진영에서 북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왕경과 이조는 지휘대에서 내려와 말에 올랐다. 좌우에 호위 장병들과 내시들이 둘러쌌다. 선봉부대가 출전하여 싸우라고 왕경이 명을 내렸다.
동서 양진이 대치하였다. 그날은 간지(干支)로 ‘木’에 속하는 날이었다. 송군 진영의 서방 문기가 열리면서 표자두 임충이 앞으로 나왔다. 양군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임충이 말을 세우고 장팔사모를 비껴 든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무지한 반역자들, 모반한 미친 무리들아! 천병이 당도했는데 아직도 투항하지 않고 있느냐! 골육이 곤죽이 된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적진의 이조는 본래 점쟁이어서,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급히 명을 내려 우대의 류원과 반충으로 하여금 홍기를 든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게 하였다. 류원과 반충이 명을 받고 홍기군을 이끌고 달려 나가자, 양진에서 함성이 오르고 북이 일제히 울렸다.
임충은 류원을 맞이하여 싸웠다. 네 개의 팔이 종횡으로 움직이고, 여덟 개의 말발굽이 어지럽게 엇갈렸다. 두 장수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살기를 번득이며 앞뒤로 밀고 밀리며 좌로 돌고 우로 돌면서 50여 합을 싸웠는데 승부가 나지 않았다.
류원은 적군 중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였는데 임충을 이기지 못하자, 반충이 칼을 들고 말을 박차고 싸움을 도우러 달려 나갔다. 임충은 두 장수를 상대로 싸우다가, 큰 소리를 지르면서 신위(神威)를 떨쳐 류원을 장팔사모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다. 임충의 부장 황신과 손립이 나는 듯이 달려 나가, 황신이 상문검(喪門劍)을 휘둘러 반충의 목을 베자 한 줄기 피를 뿜으면서 금빛 투구를 쓴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반충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수하의 군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적병들이 중군으로 달려가 보고하자, 왕경은 급히 명을 내려 후퇴하였다. 그때 송군 진영에서 포성이 울리면서 병마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기는 흑기를 이끌고, 흑기는 청기를 이끌고, 청기는 홍기를 이끌더니 장사진(長蛇陣)으로 변했다가 다시 둥글게 변하면서 적군을 포위하였다.
왕경과 이조는 병력을 보내 돌격했지만, 포위가 철벽같아서 쉽게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송군과 적병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적병은 대패하고, 송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왕경은 남풍성으로 후퇴하여 다시 작전을 세우려고 했는데, 후군에서 포성이 울리면서 탐마가 달려와 보고했다.
“대왕님! 뒤편에서도 송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뒤편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송군의 대장은 바로 부선봉 옥기린 노준의였다. 노준의는 점강쟁을 들고, 왼쪽에는 병관색 양웅이, 오른쪽에는 변명삼랑 석수가 칼을 들고 1만 정병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웅은 단오를 베어 쓰러뜨리고, 석수는 구상을 찔러 죽이고 적병을 무찔렀다.
왕경이 당황하고 있는데, 또 한 발의 포성이 울리더니, 왼편에서 노지심 · 무송 · 이규 · 초정 · 항충 · 이곤 · 번서 · 유당 등 8명의 용맹한 두령들이 1천 보군을 이끌고 선장 · 계도 · 도끼 · 박도 · 상문검 · 비도 · 표창 · 방패 등을 휘두르며 쳐들어와 이웅과 필선을 죽이고, 마치 오이를 베고 채소를 썰 듯이 적병을 베면서 쳐들어왔다.
오른편에서는 장청 · 왕영 · 손신 · 장청 · 경영 · 호삼랑 · 고대수 · 손이랑 네 쌍의 부부가 1천 기병을 이끌고 이화쟁 · 편강창 · 방천화극 · 일월쌍도 · 강창 · 단도 등을 휘두르며 적의 좌대 군병을 마치 마른 나무나 썩은 나무를 베듯 하면서 쳐들어왔다. 적병들은 사분오열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어지럽게 달아났다.
노준의 · 양웅 · 석수는 중군으로 돌입하여 방한과 마주쳤는데, 노준의가 쟁으로 방한을 찔러 죽였다. 중군의 우익 군병들을 물리치고 왕경을 잡으러 달려가다가, 금검선생 이조와 마주쳤다. 이조는 검술을 제법 아는 자라, 검을 휘두르며 노준의에게 덤벼들었다.
노준의가 이조와 싸우고 있는데, 송강의 중군이 당도하여 입운룡 공손승이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소리쳤다.
“가라!”
그러자 이조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 틈에 노준의가 달려들어 원숭이 같은 긴 팔을 뻗어 이조의 허리를 붙잡아 말에서 끌어내려 군사들로 하여금 포박하게 하였다. 노준의는 쟁을 들고 말을 박차고 다시 왕경을 잡으러 갔다. 마치 독수리가 제비를 추격하고 맹호가 양을 잡아먹으러 가는 것 같았다.
적병들은 징과 북을 버리고 칼과 창을 내던지고, 아들을 찾고 아비를 찾으면서 형을 부르고 아우를 부르면서 달아났다. 10만여 적병 가운데 태반이 죽임을 당해, 들판에는 시체가 즐비하고 흐르는 피가 개울을 이루었다. 항복한 자가 3만이고, 열 명 중 아홉 명이 죽고 상처를 입고 땅에 쓰러져 말발굽에 밟혀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유이경과 상관의 두 맹장도 초정이 그들이 탄 말을 베어 땅에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죽여 버렸다. 이웅은 경영이 던진 돌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는데, 경영이 달려가 화극으로 찔러 죽였다. 필선은 달아나다가 활섬파 왕정륙을 만나 박도를 맞고 말에서 떨어졌는데, 왕정륙이 다시 박도로 가슴을 내려쳐 끝장나고 말았다.
그 외에 가짜 상서 · 추밀 · 전수 · 금오 · 장군 등도 모두 달아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는데, 역적 수괴인 왕경만 보이지 않았다. 송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송강은 징을 울려 병마를 거두어 남풍성을 향해 진격하면서, 장청과 경영으로 하여금 앞서 가서 정탐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신행태보 대종을 보내 손안이 남풍성을 기습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대종이 명을 받고 신행법을 써서 장청과 경영을 앞질러 갔다 와서 보고하였다.
“손안이 선봉의 명을 받고 적군으로 변장하고 갔는데, 적군이 알아채고 성문 안에 함정을 파놓았습니다. 그리고 동문을 열어 손안의 군마가 들어오게 했는데, 손안의 수하인 매옥 · 김정 · 필첩 · 반신 · 양방 · 풍승 · 호매 7명의 부장이 앞 다투어 성으로 들어가다가 5백 군사와 함께 모두 함정에 빠졌습니다. 양변에서 복병이 일제히 일어나 장창과 화극으로 매옥 등 5백여 명을 모두 찔러 죽였습니다.
다행히 손안은 뒤에 있다가 용맹을 떨쳐 성문 안으로 쳐들어가 군사들로 하여금 함정을 메우게 하였다. 손안은 단기로 앞장서서 병력을 이끌고 성중으로 돌입했는데 적병이 막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손안은 동문을 탈취하였지만, 뒤에 적병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손안의 병마는 동문에 갇혀 있습니다. 제가 소식을 탐지하고 돌아오다가 중도에 장청과 경영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자, 두 사람은 인마를 재촉하여 달려갔습니다.”
송강은 보고를 듣고 대군을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가 남풍성을 포위하였다. 그때 장청과 경영은 동문으로 들어가 손안으로 하여금 동문을 지키게 하고, 장청과 경영은 적군과 한창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송강의 장수들이 병마를 이끌고 동문으로 돌입하여 성을 빼앗고 적병을 모두 쫓아 버렸다. 네 성문에 모두 송군의 깃발이 꽂히고, 범전을 비롯한 성중의 많은 가짜 문무관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때 가짜 왕비 단삼랑은 송군이 성중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힘도 세고 말도 잘 탔기 때문에, 갑옷을 입고 백여 명의 힘센 내시들과 함께 병기를 들고 왕궁을 나와 후원을 통해 서문으로 탈출하여 운안군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후원에 당도했을 때 마침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던 경영과 마주쳤다.
단삼랑은 보검을 빼들고 결사적으로 돌격했지만, 경영이 던진 돌에 정통으로 이마를 맞고 선혈을 흘리며 말에서 떨어졌다. 경영의 군사들이 달려들어 포박하였다. 내시들은 모두 송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경영이 병력을 이끌고 내궁으로 들어가자, 후궁들과 궁녀들은 송군이 입성했다는 것을 듣고 혹은 목을 매고, 혹은 우물에 투신하고, 혹은 칼로 자결하고, 혹은 섬돌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태반은 그렇게 자결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경영의 군사들에게 포박되어 송강 앞으로 끌려갔다. 송강은 크게 기뻐하면서 모두 감금하게 하고, 왕경을 사로잡은 후 함께 경성으로 압송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다시 장병을 사면팔방으로 내보내 왕경을 추격하게 하였다.
한편, 왕경은 수백 명의 철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나가 남풍성 동쪽으로 달아났다. 성중에 이미 송군이 들어와 싸움이 벌어진 것을 보고 너무 놀라 혼이 달아난 것 같았는데, 뒤에서 대군이 추격해 오자 북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아나면서 왕경이 좌우를 돌아보니, 불과 백여 기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비록 평소에 가장 믿었던 자들이었지만, 오늘 형세가 기울어지자 모두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왕경은 백여 기와 함께 운안을 향해 달아나면서, 근시에게 말했다.
“과인에게는 아직 운안 · 동천 · 안덕의 세 성이 있다. 강동(江東)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왕 노릇하기는 족하지 않겠느냐? 이제까지 나를 따르다가 방금 도망친 관원 놈들은, 평소에 과인이 준 봉록을 받던 놈들인데, 오늘 일이 생기자 모두 도망쳐 버렸다. 과인이 다시 병력을 일으켜 송군을 물리치게 되면, 도망친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젓갈을 담아 버릴 것이다.”
왕경은 멈추지 않고 쉼 없이 달려, 날이 밝을 무렵에는 저 멀리 운안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왕경은 말 위에서 기뻐하면서 말했다.
“성중의 장병들이 아주 성실하구나. 깃발이 질서정연하고 병기들이 엄숙한 것을 봐라!”
왕경이 무리를 이끌고 성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무리 중에 글자를 아는 자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좋아하실 일이 아닙니다! 성 위에는 모두 송군의 깃발입니다!”
왕경이 그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니, 과연 동문 위에 휘날리고 있는 깃발에 크게 ‘송선봉 휘하 수군대장 혼강……’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 다음의 세 글자는 깃발이 바람에 나부껴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왕경은 그걸 보고 깜짝 놀라 온몸이 마비되어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진정 송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였다.
근시가 말했다.
“대왕님!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빨리 곤룡포를 벗고 동천으로 가시지요! 성중에서 보고 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왕경이 말했다.
“경의 말이 옳네.”
왕경은 즉시 황금 두건과 곤룡포를 벗고 옥대를 끄르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시종들도 의복을 갈아입고, 상갓집 개처럼 그물에서 벗어난 물고기처럼 급히 소로를 통해 운안성을 지나 동천을 향해 달아났다. 사람과 말이 모두 피로하고 기갈에 시달리며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백성들은 오랫동안 역적들에게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몸을 숨겨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닭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물 한 모금 얻어 마실 데도 없으니, 밥이나 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왕경을 따르던 자들 가운데 동쪽으로 가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자들이 6~70명이나 되었다. 왕경은 30여 기만 거느리고 저녁 무렵에 운안에 속하는 개주 지방에 비로소 당도하였는데 한 줄기 강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강은 달주의 만경지라는 연못에서 발원했는데, 강물이 아주 맑아 청강(清江)이라 불렸다. 왕경이 말했다.
“어디서 배를 구해 강을 건널 수 있을까?”
뒤에서 한 근시가 말했다.
“대왕님! 저기 남쪽에 갈대가 드문드문 있고 기러기가 내려앉은 곳에 어선들이 모여 있습니다.”
왕경은 그걸 보고 무리를 이끌고 그쪽 강변으로 갔다. 때는 한겨울이었지만, 날씨가 맑고 따뜻해서 수십 척의 어선들이 물고기를 잡거나 그물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 위에 떠 있는 몇 척의 배들에서는, 어부들이 큰 사발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왕경이 그걸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저놈들은 저렇게 즐거운데, 나는 오늘 저놈들보다도 못하구나! 저놈들은 나의 백성들인데, 어찌하여 과인이 이렇게 곤핍한 것을 모른단 말이냐.”
근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배를 이리 갖다 대라! 우리를 건네주면 뱃삯을 많이 주겠다!”
그 소리를 들은 두 어부가 술잔을 내려놓고는 작은 어선을 삐걱삐걱 저어서 기슭으로 다가왔다. 뱃머리에 선 어부가 대나무 삿대로 배를 밀어 기슭에 갖다 대더니, 왕경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살펴보다가 말했다.
“잘 됐군! 또 술값이나 벌게 되겠네. 어서 타시오!”
근시가 왕경을 부축하여 말에 내리게 했다. 왕경이 어부를 보니, 체격이 우람하고 눈썹은 짙고 눈이 컸으며 뺨은 붉었다. 수염은 철사 같고 음성은 종소리처럼 우렁찼다. 어부는 한 손으로 삿대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왕경을 부축해 배에 태웠다. 그리고는 삿대를 기슭에 대고 밀자 배는 기슭에서 한 길 정도 떨어져 나갔다. 근시들이 기슭에서 소리쳤다.
“빨리 배를 갖다 대라! 우리도 강을 건널 사람들이다!”
그러자 어부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배를 대라고? 그런데 어디를 이렇게 급하게 가시나?”
어부는 삿대를 내려놓더니, 왕경의 멱살을 두 손으로 붙잡아 배 바닥에 메다꽂았다. 왕경이 일어나려고 버둥대자, 노를 젓던 어부도 노를 내려놓고 달려들어 둘이서 왕경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때 강변에서 그물을 말리던 어부들이 왕경이 사로잡히는 것을 보자, 모두 달려들어 30여 명의 근시들을 모조리 사로잡아 버렸다.
삿대를 잡은 어부는 혼강룡 이준이고, 노를 잡은 어부는 출동교 동위였으며, 어부들도 모두 수군이었다.
원래 이준은 송선봉의 명을 받고, 수군의 배를 거느리고 와서 적의 수군과 싸웠다. 이준 등은 구당협에서 적의 수군과 싸워 그 주장인 수군도독 문인세숭을 죽이고 부장 호준을 사로잡았으며 적병을 크게 이겼다. 이준은 호준의 용모가 범상하지 않음을 보고 풀어 주었다. 호준은 은혜에 감동하여 이준과 함께 가서 운안의 수문을 속여서 열게 하고, 성을 빼앗고 가짜 유수 시준 등을 죽였다.
이준은 적병이 궤멸하면 필시 소굴로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장횡과 장순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동위 · 동맹과 함께 수군을 거느리고 어선으로 변장하고 여기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완씨 삼형제로 하여금 어부로 변장하고, 염여퇴 · 민강 · 어복포의 각 길목에 매복해 있게 하였다.
마침 이준은 왕경이 말을 타고 앞장서고 뒤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적군의 두목쯤으로 여겼지 그가 정작 원흉인 줄을 알지는 못했다. 이준은 종자들을 심문하여 왕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이준은 왕경의 무리를 포박하여 운안성으로 돌아갔다.
사람을 보내 완씨 삼형제를 불러 장횡 · 장순과 함께 성을 지키게 하고, 이준은 항장 호준과 함께 왕경 일행을 압송하여 송선봉에게로 갔다. 도중에 송강이 이미 남풍을 깨뜨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준은 곧장 남풍성으로 가서 왕경을 끌고 원수로 갔다.
송강은 왕경을 붙잡지 못해 근심하고 있었는데, 이준이 왕경을 사로잡아 왔다는 보고를 받고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이준이 원수부로 와서 인사하자, 송강은 칭찬하며 말했다.
“아우가 큰 공을 세웠네.”
이준이 항장 호준을 인도하여 송강에게 인사시키며 말했다.
“이번 공로는 모두 이 사람 덕분입니다.”
송강은 호준의 성명과 운안성을 속여서 취한 일에 관해 묻고 상을 내리고 위무하였다. 송강이 장수들과 동천과 안덕을 공략할 일을 의논하자, 항장 호준이 아뢰었다.
“선봉께서는 조금도 마음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의 한 마디 말이면, 두 성은 손바닥에 침 뱉는 것만큼이나 쉽습니다.”
송강은 크게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호준에게 읍하고 계책을 물었다.
송강이 항장 호준에게 동천과 안덕을 취할 계책을 묻자, 호준이 말했다.
“동천성을 지키는 장수는 소장의 형제 호현입니다. 소장은 이장군의 불살지은(不殺之恩)을 입었으니, 동천으로 가서 호현 형제가 투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남은 안덕성은 고립되어 싸우지 않고서도 절로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송강은 크게 기뻐하며 이준도 함께 가게 하였다. 한편으로 장병들을 파견하여 아직 수복하지 못한 고을들을 평정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대종으로 하여금 표문을 가지고 가서 조정에 아뢰는 동시에 진안무와 숙태위에게도 서신을 전하게 하였다.
송강은 장병들을 왕경의 궁으로 보내, 금은보화를 수색하여 가져오게 하고 가짜 궁궐과 누각들 그리고 의장들을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또 사람을 운안으로 보내, 장횡 등으로 하여금 가짜 행궁과 의장 등 역시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한편, 대종은 표문을 가지고 먼저 형남으로 가서 진안무에게 보고하였다. 진안무도 표문을 써서 함께 조정에 올리게 하였다. 대종은 동경에 당도하여 숙태위에게 서신과 예물을 바치고 표문을 전했다.
숙태위가 조정에 들어가 표문을 올리자, 휘종황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즉시 성지를 내렸다.
반적 왕경은 동경으로 압송하여 처결을 기다리게 하고, 나머지 가짜 왕비와 관원들을 비롯하여 역적을 따른 자들은 모두 회서의 저자거리에서 참수하고 효시하도록 하라. 왕경의 포학에 시달린 회서의 백성들에게는 군량을 나누어주고, 공을 세우고 전사한 항장들에게는 관작을 추증하라. 관원이 없는 회서의 각 고을에는 속히 신관들을 보내도록 하라. 각 고을의 관원들 가운데 역적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따르다가 귀순해 온 자는, 모두 진관에게 맡겨 경중을 헤아려 처분하게 하라. 이번 토벌에 공을 세운 장수와 편장들은 동경으로 돌아오면 공에 따라 상을 내리겠노라.
칙명이 내리자, 대종은 돌아가 송강에게 보고하였다. 진안무 등은 이미 남풍성에 와 있었다. 그때 호준은 형제 호현을 귀순시켜 동천의 군량과 호적 등을 바치고 죄를 청하였다. 그러자 안덕의 적군들도 모두 바람에 불려오듯 귀순하였다. 운안 · 동천 · 안덕 세 곳이, 농부는 밭을 떠나지 않고 장사꾼은 가게를 떠나지 않고서도 평정되었으니, 모두 이준의 공이었다. 이리하여 왕경이 점거했던 8군(郡) 86주현(州縣)이 모두 수복되었다.
대종이 동경에서 남풍으로 돌아온 후 10여 일이 지나자 천자의 사신이 조서를 가지고 왔다. 진안무와 관원들은 성지를 받들어 일일이 봉행하였다. 다음 날 아침, 사신은 동경으로 돌아갔다.
진관은 감옥에 있던 단삼랑과 이조 및 반역자의 무리들을 끌어내어 참형의 판결을 내리고, 남풍 저자거리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수급을 각 성문에 효수하게 하였다. 단삼랑은 어릴 때부터 규방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배우자를 얻더니, 하늘에 미치는 대죄를 지어 몸과 머리가 나뉘고 가족들도 연루되게 하였다. 그 부친 단태공은 방산의 산채에서 이미 죽고 없었다.
한편, 진안무와 송선봉은 이준 · 호준 · 경영 · 손안의 공을 차례로 기록하게 하고, 방을 내붙여 백성을 안무하였다. 86주현은 다시 밝은 해를 보게 되었고 백성들은 양민으로 돌아갔다. 역적을 따르기는 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은 자들은 가산을 돌려받고 향민으로 돌아갔다.
서경을 지키던 교도청과 마령도 신관이 부임하자, 남풍으로 왔다. 각 고을에도 관원들이 속속 당도하여, 이준, 장씨 형제, 완씨 형제, 동씨 형제도 임무를 교대하고 남풍으로 와서 송강에게 인사했다. 송강 이하 108두령들과 하북 항장들이 모두 남풍에 모이자, 진안무는 태평연을 열어 축하하고 삼군의 장병들에게 상을 내리고 위로하였다.
송강은 공손승과 교도청으로 하여금 7일 밤낮으로 제사를 지내, 전쟁터에서 죽은 장병들과 회서의 원혼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제사가 끝나자, 홀연 손안이 영채에서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송강은 비통함을 금치 못하며 예로써 장례를 치르고 용문산 밑에 묘를 만들었다. 교도청은 손안이 죽자 통곡하면서 송강에게 말했다.
“손안은 빈도와 동향으로 빈도와 아주 친했습니다. 그는 부친의 원수를 갚느라 죄를 짓고 역적의 무리에 가담했으나, 선봉께서 거두어 주신 덕분에 훗날의 좋은 결과를 바랐는데 뜻하지 않게 중도에 죽고 말았습니다. 빈도가 선봉의 은혜를 입게 된 것도 그가 미망을 깨우쳐 준 덕분이었는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빈도가 그 정을 어떻게 갚겠습니까? 저는 두 분 선봉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각골명심하였으나, 끝내 은혜를 갚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골을 빌어 전원으로 돌아가 남은 삶을 마치고자 합니다.”
교도청이 떠나려는 것을 보고 마령도 송강에게 청하였다.
“저도 교법사와 함께 가고자 하니, 선봉께서 윤허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송강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슬펐지만, 두 사람의 뜻이 견고하여 만류할 수가 없었다. 송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전별하였다. 공손승은 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도청과 마령은 송강과 공손승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또 진안무에게도 인사한 다음 표연히 떠나갔다. 후에 교도청과 마령은 나진인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도를 배우면서 천수를 마쳤다.
진안무는 회서의 여러 고을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회서는 회수(淮水)와 독수(瀆水)의 서쪽에 있어서, 송나라 사람들은 완주와 남풍 등을 회서라고 불렀다. 진안무는 송선봉에게 군대를 수습하여 경성으로 올라가라는 명을 전했다.
송강은 먼저 중군 군마를 보내 진안무 · 후참모 · 나무유를 호송하게 하고, 다른 한편 수군두령들에게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동경으로 가서 대기하라고 하였다. 송강은 소양으로 하여금 전적을 쓰게 하고 김대견으로 하여금 비석을 새겨 남풍성 동쪽 용문산 아래에 세우게 하였는데, 그 고적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항장 호준과 호현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송선봉을 전별하였다. 후에 송강이 입조하여 두 사람의 공을 천자께 아뢰어, 두 사람은 동천의 수군단련사라는 관직을 받게 되었다.
송강은 병마를 다섯으로 나누어 날을 정해 출발하였다. 군사들 가운데 각 고을에 남아 성을 지키는 자들과 전원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을 제외하고, 10만의 병마가 남풍을 떠나 동경을 향했다. 송강의 군대는 기율이 엄하여 지나는 지방마다 추호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길에 나와 향화와 등촉을 밝히고 군대를 전송하였다.
며칠간 행군하여 추림도(秋林渡)라는 곳에 당도하였는데, 완주에 속하는 추림산의 남쪽에 있었다. 산의 경치가 아름다워 송강이 말 위에서 구경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기러기 몇 마리가 줄지어 날아가지 않고 아래위로 어지럽게 날면서 놀란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송강이 그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앞서 가던 부대에서 갈채하는 소리가 들렸다.
송강이 군졸을 보내 연유를 알아보게 했더니, 군졸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낭자 연청이 처음 활쏘기를 배워 공중을 날아가는 기러기를 쏘았는데, 쏘는 화살마다 적중하여 잠깐 사이에 기러기를 열 마리나 쏘아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이 놀라 마지않고 있습니다.”
송강이 연청을 불렀더니, 연청이 활을 들고 나는 듯이 말을 달려왔는데 뒤에 죽은 기러기 여러 마리를 매달고 있었다. 연청은 송강을 보자 말에서 내려 길옆에 섰다. 송강이 연청에게 물었다.
“방금 자네가 기러기를 쏘았나?”
연청이 대답했다.
“제가 처음 활쏘기를 배웠는데, 마침 공중에 날아가는 기러기를 쏘았더니 뜻밖에 쏘는 화살마다 적중하였습니다.”
“군인으로서 활쏘기를 배우는 것은 본래 해야 할 일이고, 잘 맞추는 것은 자네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기러기는 겨울이 되면 추위를 피하여 천산(天山)을 떠나 갈대를 입에 물고 관을 넘어 따뜻한 강남으로 가서 먹이를 구하다가,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고 하네. 이 기러기는 인의(仁義)를 아는 새인지라, 수십 마리가 함께 날아가도 서로 겸양하여 높은 자는 앞서고 낮은 자는 뒤를 따라 차례를 지켜 날아가며 무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네. 밤이 되어 잠잘 때에는 번을 서는 자가 있고, 짝을 잃으면 죽을 때까지 다른 짝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네. 이 새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五常)을 갖추고 있네. 공중을 날다가 죽는 자가 있으면 모두 슬피 울고, 짝을 잃은 외로운 자는 결코 침범하지 않으니, 그것이 인(仁)이네. 짝을 잃으면 죽을 때까지 새로운 짝을 구하지 않으니, 그것은 의(義)일세. 차례를 지켜 날아가며 앞뒤를 넘어서지 않으니, 그것은 예(禮)이네. 매나 독수리를 미리 피하기 위해 갈대를 물고 관을 넘어가니, 그것은 지(智)일세, 가을이 되면 남으로 갔다가 봄이 되면 어기지 않고 북으로 돌아오니, 그것은 신(信)이네. 기러기는 이처럼 오상을 모두 갖춘 새이니, 어찌 차마 해칠 수 있겠는가? 하늘에서 무리를 지어 서로를 부르는 기러기들은 마치 우리 형제들과 같네. 자네가 활을 쏘아 몇 마리를 떨어뜨렸는데, 우리 형제들 가운데 몇 사람을 잃는다면 우리들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아우는 이제부터 이런 예의 있는 새를 다시는 해치지 않도록 하게.”
연청은 말없이 죄를 뉘우쳤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송강은 무언가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 마상에서 시를 한 수 읊었다.
산마루는 험준하고 강물은 아득한데
기러기 떼는 공중에 줄지어 날아가네.
홀연 함께 날던 짝이 떨어지니
차가운 달빛 서늘한 바람 속에 애간장이 끊어지네.
송강은 시를 읊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심중에 슬픈 감정이 복받쳐 무엇을 봐도 감상에 젖었다. 그날 저녁 추림도 어귀에 둔병하였는데, 송강은 장막에서 연청이 기러기를 쏘았던 일을 다시 생각하며 탄식하다가,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여 사(詞)를 한 수 지었다.
넓은 하늘에 기러기 무리지어 만 리를 날다가 홀연 놀라서 흩어지네.
스스로 발자취 돌아보며 차가운 못에 내려앉으려는데
풀은 마르고 모래는 깨끗한데 수평선은 저 멀리 보인다.
몇 자 적어 보지만 글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한 점 생각뿐이라.
해는 저물고 물가는 쓸쓸한데 새벽안개 옛 진지에 어려 슬픔이 끊이지 않네.
갈대꽃 우거진 곳에 잠잘 곳 없고 언제 옥관(玉關)을 다시 볼까 탄식하네.
근심하여 우는 소리 목이 메어 강변을 떠나기 서운하네.
봄이 돌아오면 고운 대들보에 제비 한 쌍을 보려나.
송강은 쓰기를 마치자, 오용과 공손승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도 글을 읽고서 더욱 슬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송강은 오용 등과 술을 마시면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모두 말에 올라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때는 마침 겨울도 깊어가서 경치는 더욱 처량했다. 송강은 가는 내내 슬픈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며칠 후 경성에 당도하여, 군마를 진교역에 주둔시키고 성지를 기다렸다.
한편, 진안무는 후참모와 중군 인마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가, 송강 등의 공로를 천자께 아뢰고 송선봉의 병마가 회군하여 성 밖에 당도했음을 보고하였다. 진안무가 송강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전쟁을 치르면서 겪은 노고를 얘기하자, 천자는 크게 칭찬하였다. 천자는 진관 · 후몽 · 나전의 관작을 높여주고 은냥과 비단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그리고 황문시랑에게 성지를 전하게 하여, 송강 등은 갑옷을 입은 채로 도성으로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라고 하였다.
한편, 송강을 비롯한 108명의 장수들은 성지를 받고, 갑옷과 전포를 입고 투구를 쓰고 금패 혹은 은패를 차고 동화문으로 들어가 문덕전에서 천자를 알현하여 만세를 세 번 불렀다. 황상이 송강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보니, 모두 비단 전포를 입었는데, 오용 · 공손승 · 노지심 · 무송은 원래 복색이었다. 천자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과인은 경들이 역적을 토벌하는 데 노고가 많았다고 들었다. 역적을 토벌하느라 다친 자도 많았다고 하니 과인이 심히 염려하였다.”
송강이 재배하고 아뢰었다.
“성상의 홍복 덕분에 신들이 비록 다치기는 하였지만 모두 무사하옵니다. 이제 원흉을 잡고 회서가 평정된 것은 실로 폐하의 성덕으로 인한 것이니, 신들의 공로가 아니옵니다.”
송강은 다시 재배하고 아뢰었다.
“신들이 성지를 받들어 왕경을 사로잡아 궐하에 바치오니, 폐하께서 처결하시옵소서.”
천자가 성지를 내렸다.
“법사회(法司會)의 관원들에게 맡겨, 왕경을 능지처참하라.”
송강은 소가수가 기이한 계책을 써서 성을 수복하고 많은 목숨을 살렸으나, 공을 자랑하지 않고 초연히 떠나간 일을 아뢰었다. 천자가 칭찬하며 말했다.
“그것은 모두 경들의 충성에 감동한 것이로다!”
천자는 성원(省院)의 관원들에게 명하여, 소가수를 찾아 경성으로 불러올려 등용하라고 하였다. 송강은 머리를 조아려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성원의 관원들은 소가수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하늘에 기러기 무리지어 만 리를 날다가 홀연 놀라서 흩어지네.
스스로 발자취 돌아보며 차가운 못에 내려앉으려는데
풀은 마르고 모래는 깨끗한데 수평선은 저 멀리 보인다.
몇 자 적어 보지만 글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한 점 생각뿐이라.
해는 저물고 물가는 쓸쓸한데 새벽안개 옛 진지에 어려 슬픔이 끊이지 않네.
갈대꽃 우거진 곳에 잠잘 곳 없고 언제 옥관(玉關)을 다시 볼까 탄식하네.
근심하여 우는 소리 목이 메어 강변을 떠나기 서운하네.
봄이 돌아오면 고운 대들보에 제비 한 쌍을 보려나.
송강은 쓰기를 마치자, 오용과 공손승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도 글을 읽고서 더욱 슬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송강은 오용 등과 술을 마시면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모두 말에 올라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때는 마침 겨울도 깊어가서 경치는 더욱 처량했다. 송강은 가는 내내 슬픈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며칠 후 경성에 당도하여, 군마를 진교역에 주둔시키고 성지를 기다렸다.
한편, 진안무는 후참모와 중군 인마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가, 송강 등의 공로를 천자께 아뢰고 송선봉의 병마가 회군하여 성 밖에 당도했음을 보고하였다. 진안무가 송강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전쟁을 치르면서 겪은 노고를 얘기하자, 천자는 크게 칭찬하였다. 천자는 진관 · 후몽 · 나전의 관작을 높여주고 은냥과 비단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그리고 황문시랑에게 성지를 전하게 하여, 송강 등은 갑옷을 입은 채로 도성으로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라고 하였다.
한편, 송강을 비롯한 108명의 장수들은 성지를 받고, 갑옷과 전포를 입고 투구를 쓰고 금패 혹은 은패를 차고 동화문으로 들어가 문덕전에서 천자를 알현하여 만세를 세 번 불렀다. 황상이 송강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보니, 모두 비단 전포를 입었는데, 오용 · 공손승 · 노지심 · 무송은 원래 복색이었다. 천자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과인은 경들이 역적을 토벌하는 데 노고가 많았다고 들었다. 역적을 토벌하느라 다친 자도 많았다고 하니 과인이 심히 염려하였다.”
송강이 재배하고 아뢰었다.
“성상의 홍복 덕분에 신들이 비록 다치기는 하였지만 모두 무사하옵니다. 이제 원흉을 잡고 회서가 평정된 것은 실로 폐하의 성덕으로 인한 것이니, 신들의 공로가 아니옵니다.”
송강은 다시 재배하고 아뢰었다.
“신들이 성지를 받들어 왕경을 사로잡아 궐하에 바치오니, 폐하께서 처결하시옵소서.”
천자가 성지를 내렸다.
“법사회(法司會)의 관원들에게 맡겨, 왕경을 능지처참하라.”
송강은 소가수가 기이한 계책을 써서 성을 수복하고 많은 목숨을 살렸으나, 공을 자랑하지 않고 초연히 떠나간 일을 아뢰었다. 천자가 칭찬하며 말했다.
“그것은 모두 경들의 충성에 감동한 것이로다!”
천자는 성원(省院)의 관원들에게 명하여, 소가수를 찾아 경성으로 불러올려 등용하라고 하였다. 송강은 머리를 조아려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성원의 관원들은 소가수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그날 천자는 성원의 관원들에게 특명을 내려 송강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관작 봉할 일을 의논하라고 하였다. 태사 채경과 추밀 동관이 상의하여 아뢰었다.
“지금 천하가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아 높은 관작을 봉할 수는 없습니다. 송강은 보의랑(保義郎) 겸 황성사(皇城使), 노준의는 선무랑(宣武郎), 오용 등 36명은 정장군(正將軍), 주무 등 72명은 편장군(偏將軍)에 봉하고, 삼군에게는 상으로 금은을 지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자는 인준하고, 성원에 칙명을 내려 송강 등에게 관작을 봉하고 상을 지급하게 하였다. 송강 등은 문덕전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성은에 감사하였다. 천자는 광록시(光祿寺)에 명하여 연회를 열게 하고, 송강에게는 비단 전포 한 벌, 황금갑옷 한 벌, 명마 한 필을 상으로 내리고 노준의 이하 장수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송강 등은 사은한 다음 궁궐을 나와 서화문 밖에서 말에 올라 영채로 돌아갔다.
그날 법사회의 관원들은 성지를 받들어 왕경을 함거에서 끌어내 죄상을 적은 패를 적어 사형에 처한 뒤 살을 발라내는 형벌인 과형(剮刑)에 처하기로 하였다. 왕경이 저자거리에 끌려나오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더러는 침을 뱉고 욕을 하기도 하고 더러는 탄식하기도 했다.
왕경의 부친 왕획과 전처 · 장인 등 친인척들은 이미 왕경이 반란을 일으킨 초기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고 없었다. 그날은 단지 왕경 하나만 창칼이 늘어선 가운데 끌려나왔을 뿐이었다. 북소리가 두 번 울리고 징소리가 한 번 울리자 서릿발 같은 창칼이 늘어서고 검은 깃발이 검은 구름처럼 펼쳐졌다. 회자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오시삼각(午時三刻)이 되자, 죄상이 낭독되고 왕경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사형을 감독하는 감참관(監斬官)은 왕경의 수급을 효시하였다.
한편, 송강 등이 영채로 돌아온 다음 날 공손승이 중군 장막으로 와서 송강에게 말했다.
“지난날 스승 나진인께서 저에게 분부하시기를, 형님을 경성으로 모셔다 드린 후 곧 산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형님께서 공을 이루고 이름을 떨치셨으니, 빈도는 형님과 형제들을 작별하고 산중으로 돌아가, 스승님을 따라 도를 배우고 노모를 봉양하면서 천수를 마칠까 합니다.”
송강은 공손승의 말을 듣고 말릴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예전에 형제들이 모여들 때는 마치 꽃들이 피어나는 것 같더니, 이제 형제들이 이별하려니 꽃들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과 같네. 내 비록 자네의 말을 어길 수는 없지만, 또 어찌 차마 이별할 수 있겠는가?”
공손승이 말했다.
“만약 제가 중도에 형님을 버렸다면 인정 없는 자가 되었겠지만, 이제 형님께서 공을 이루고 이름을 떨치셨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송강은 서너 번 만류하다가, 할 수 없이 송별연을 열어 형제들과 작별하게 하였다. 모두 술잔을 들면서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형제들이 저마다 금은과 비단을 건넸지만, 공손승은 받지 않았다. 형제들은 보따리 속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다음 날, 공손승은 형제들을 작별하고 짚신을 신고 보따리를 메고서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송강은 며칠 동안 공손승을 생각하며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설날이 다가오자, 관원들은 신하들이 천자께 인사를 올리는 조하(朝賀)를 준비하였다. 채태사는, 송강 등이 모두 와서 조하를 하면 천자가 필시 중용할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천자께 아뢰어, 관작이 있는 송강과 노준의만 조하하고 나머지 관작이 없는 자들은 모두 예를 면해 주도록 명을 내리게 하였다.
설날 아침, 백관이 조하하는데 송강과 노준의도 예복을 입고 대루원에서 기다리다가 반열을 따라 조하하였다. 그날 천자는 자신전(紫宸殿)에서 조하를 받았는데, 송강과 노준의는 반열에 따라 조하하고 전상에 올라가지는 못하였다.
송강과 노준의가 전상을 올려다보니, 옥비녀를 꽂고 구슬 박힌 신을 신고 자줏빛 인끈을 단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며 잔을 들어 헌수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연회는 오시가 되어 끝나고 어주가 하사되었다. 천자가 일어나자 백관은 해산하였다.
송강과 노준의는 내전을 나와 예복을 벗고 두건을 쓰고 말에 올라 영채로 돌아왔는데, 얼굴엔 시름이 가득하였다. 오용 등이 맞이하였는데, 송강의 얼굴에 시름이 있는 것을 보고 다들 근심하였다. 두령들이 모두 와서 세배하고 양쪽으로 나뉘어 섰는데, 송강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오용이 물었다.
“형님은 오늘 천자께 조하하고 돌아오셨는데, 무슨 근심이 있습니까?”
송강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 팔자가 천박하고 명운이 막혔나 보네. 요나라를 격파하고 역적을 평정하면서 많은 노고를 겪었건만, 오늘 형제들이 그 공을 보답 받지 못하여 그 때문에 근심이네.”
오용이 말했다.
“형님께서는 운수가 사나운 것을 이미 아시면서 뭣 때문에 근심하십니까? 세상만사는 다 정해진 바가 있으니, 우울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흑선풍 이규가 말했다.
“형님은 그런 생각 마시오! 애초에 양산박에 있을 때에는 이런 기분 든 적이 없었는데, 오늘도 초안 내일도 초안하다가 막상 초안을 받게 되니 이런 번뇌가 생긴 것 아니오? 지금 형제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으니, 차라리 다시 양산박으로 올라가는 것이 상쾌하지 않겠소?”
송강이 소리쳤다.
“저 시커먼 짐승이 또 무례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이제 나라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네놈은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런 반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단 말이냐!”
이규가 또 응답했다.
“형님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일 또 수모를 당할 거요!”
두령들이 모두 웃으면서 술잔을 들어 송강에게 축수하였다. 그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헤어졌다.
다음 날, 송강은 수십 기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가 숙태위와 조추밀을 비롯한 성원 관료들에게 신년 인사를 드렸다. 오가는 도중에 송강 일행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채경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
다음 날 채경이 천자께 아뢰어, 성원에서 각 성문에 다음과 같은 방을 내붙이게 하였다.
출정하였던 모든 관원들과 장수들은 성 밖에 주둔하여 명을 기다리고, 조정에서 부르기 전에는 함부로 도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불허한다. 만약 어길 시에는 군령에 의거하여 벌을 내릴 것이다.
방이 곳곳에 나붙자, 누군가 보고서 송강에게 가서 알렸다. 송강은 더욱 우울해졌다. 여러 장수들은 그걸 알고 모두 화가 나서 반심을 품게 되었는데, 다만 송강 때문에 참고 있었다.
한편, 수군두령들이 군사 오용을 사무를 상의할 게 있다고 하면서 불렀다. 오용이 배에 오르자, 이준 · 장횡 · 장순과 완가 삼형제가 오용에게 말했다.
“조정은 신의를 잃었습니다. 간신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어진 이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 형님이 요나라를 격파하고 전호를 토벌했으며, 지금은 또 왕경을 평정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황성사라는 관작뿐이고 우리에게는 관작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도리어 그따위 방을 내붙여 우리가 도성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저 간신 놈들은 우리 형제를 차츰 흩어 놓고서 각기 따로 처리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형님과 상의해 봤자 보나마나 들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니, 지금 군사께 저희의 주장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기서 들고 일어나 동경을 약탈하여 다시 양산박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습니다.“
오용이 말했다.
“송공명 형님은 결코 찬성하지 않을 거네. 자네들이 헛되이 힘을 써 봤자, 화살은 쏘지도 못하고 활만 부러뜨리기 될 걸세. 자고로 뱀이 대가리가 없으면 갈 수 없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런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은 반드시 형님이 수긍해야만 비로소 행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 형님이 수긍하지 않는데 자네들이 그런 일을 벌인다면 그건 반역에 지나지 않네.”
오용이 감히 주장할 수 없다고 하자, 여섯 수군두령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용은 중군 영채로 돌아와 송강과 한담을 나누다가 군정(軍情)에 대해 말을 꺼냈다.
“예전에는 형님도 항상 자유자재하셨고, 여러 형제들도 역시 쾌활하였습니다. 그런데 초안을 받은 이후로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건만, 뜻밖에 우리는 도리어 구속을 받고 임용도 되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송강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그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굳이 누가 말했다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부귀는 사람이 바라는 것이고, 빈천은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기색과 태도를 보면 그 속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 만약 형제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죽어 황천에 가는 한이 있어도 충심을 바꾸지 않을 것이네!”
다음 날 아침, 군사 기밀을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장수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송강이 말했다.
“나는 운성현의 하찮은 아전 출신이고 또 큰 죄를 범했는데, 여러 형제들의 도움으로 두령이 되고 오늘 또 조정의 신하가 되었소. 예로부터 이르기를, ‘사람이 되면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로우면 사람이 못 된다.’고 하였소. 조정에서 방을 내붙여 우리가 마음대로 도성을 드나들지 못하게 한 것은,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오. 이제 여러 장병들은 이유 없이 도성에 들어가지 마시오. 우리는 산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친 군사들이 아주 많소. 만약 그로 인해 일을 일으키면 필시 법에 의거해 벌을 받게 될 것이며 또 우리의 명성이 무너질 것이오. 지금 우리에게 입성을 불허한 것은 우리에겐 도리어 다행한 일이오. 여러분이 만약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여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먼저 내 수급부터 참한 다음에 마음대로 하시오. 나를 참하지 않는다면 나는 얼굴을 들고 세상에 살 수 없으니, 자결하고 말 것이오. 여러분은 알아서 하시오!”
두령들은 송강의 말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맹세하고 헤어졌다. 송강과 여러 장수들은 그날 이후로 일이 없으면 성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정월 보름이 다가오자, 동경성에서는 연례대로 등불을 많이 달아놓고 대보름을 경축했다. 거리마다 관아마다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한편, 송강의 영채 내에서 낭자 연청이 악화와 상의하였다.
“지금 동경성에서는 등불을 밝혀 놓고 놀면서 풍년을 기원하고 있고, 금상 천자께서도 백성과 함께 즐기고 있네. 우리가 옷을 갈아입고 몰래 성으로 들어가서 구경하고 돌아오세.”
그때 한 사람이 끼어들어 말했다.
“자네들이 등불 구경을 갈 거면, 나도 데려가게!”
연청이 보니, 흑선풍 이규였다. 이규가 말했다.
“자네들이 등불 구경 가려고 상의하는 걸 내가 이미 다 들었네.”
연청이 말했다.
“형님과 함께 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형님은 성질이 사나워서 무슨 일을 낼까 봐 걱정이오. 지금 성원에서 방을 내붙여 우리가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형님과 함께 성으로 들어가 등불 구경을 하다가 사단을 일으키면 성원의 계략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이번에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자네가 하라는 대로 하겠네.”
“그러면 내일 옷을 갈아입고 나그네처럼 꾸미고서, 함께 성으로 들어갑시다.”
이규는 아주 기뻐하였다.
다음 날 이규는 나그네 차림을 하고 연청을 기다렸다. 그런데 악화는 이규와 함께 가기가 두려워 몰래 시천과 함께 먼저 성으로 들어가 버렸다. 연청은 할 수 없이 이규와 함께 성으로 들어갔는데, 진교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 돌아서 봉구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연예장 앞에 이르자, 안에서 징소리가 들렸다. 이규가 들어가 보자고 졸라, 연청은 할 수 없이 이규와 함께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얘기꾼이 『삼국지』의 관운장이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하는 장면을 얘기하고 있었다.
당시 관운장은 왼쪽 팔에 독화살을 맞아, 독이 뼈까지 스며들었다. 의원 화타(華陀)가 말했다.
“이 독을 치료하려면, 구리 기둥을 하나 세우고 거기에 쇠고리를 단 다음 팔을 그 고리에 끼우고 밧줄로 단단히 묶어야 합니다. 그리고 살을 째고 뼈를 삼분 정도 긁어내 독을 제거한 다음 기름 먹인 실로 봉합해야 합니다. 상처에는 고약을 바르고 또 약을 복용하여 보름쯤 지나면 원래대로 회복될 겁니다. 아주 어려운 치료법입니다.”
관공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부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까짓 팔 하나쯤이야. 구리 기둥이나 쇠고리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냥 살을 째시오.”
관공은 바둑판을 가져오라 하여 객과 바둑을 두면서, 왼쪽 팔을 내밀어 화타에게 뼈를 깎고 독을 치료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객과 태연히 담소하였다.
얘기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이규가 사람들 속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사람 대단한 호남아로구먼!”
그 소리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두 이규를 바라보았다. 연청은 황망히 가로막으며 말했다.
“형님! 왜 이러십니까! 연예장에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 어떡합니까?”
이규가 말했다.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갈채하게 되었네.”
연청은 이규를 이끌고 도망치듯 연예장을 빠져나왔다. 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어떤 사내가 남의 집에 벽돌과 기와를 집어던지고 있었다. 그러자 집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이 깨끗한 세상에 빚을 두 번이나 지고서도 돈을 갚지 않으면서, 도리어 남의 집을 때려 부수느냐!”
흑선풍이 그 말을 듣자, 그 사내를 치려고 하였다. 연청이 사력을 다해 이규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이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사내를 치려고 하자, 사내가 말했다.
“내가 저놈하고 다투고 있는데, 네가 왜 간섭이냐? 나는 지금 장초토(張招討)를 따라 강남으로 출정할 거니까, 넌 끼어들지 마라. 거기 가도 죽을 거니까, 치려면 어디 한 번 쳐 봐라! 여기서 죽으면 좋은 관이라도 얻겠지.”
이규가 말했다.
“강남으로 간다는 게 무슨 말이냐? 조정에서 군대를 파견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연청은 이규를 끌고 골목길을 나와 작은 찻집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고 있는데, 맞은편에 노인이 앉아 있는 걸 보고 연청이 차를 권하며 말했다.
“어르신께 뭐 좀 여쭤 보겠습니다. 좀 전에 골목에서 어떤 군인이 싸움을 하면서, 장초토를 따라 강남으로 출정할 거라고 하던데, 어디로 출정하는 건지 아십니까?”
노인이 말했다.
“손님은 아직 모르시는군요. 지금 강남의 도적 방랍이 반란을 일으켜 8주(州) 25현(縣)을 점거하고서 목주부터 윤주까지 자기 나라라고 하면서 조만간 양주를 치려 하고 있소. 그래서 조정에서 장초토와 유도독(劉都督)을 보내 방랍을 토벌하려 한답니다.”
그 말을 들은 연청과 이규는 얼른 찻값을 치르고 성을 나와, 영채로 돌아가 군사 오용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오용은 그 말을 듣고 심중으로 크게 기뻐하면서, 송선봉에게 가서 강남의 방랍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정에서 장초토를 파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송강이 말했다.
“우리 장수들과 군마가 여기서 한가롭게 머물고 있는 것은 별로 좋지 않네. 차라리 숙태위로 하여금 천자께 아뢰게 하여, 우리가 병력을 일으켜 방랍을 토벌하러 가겠다고 청하는 것이 좋겠네.”
송강이 장수들을 모아 상의하자, 모두 기뻐하였다.
다음 날 송강은 옷을 갈아입고 연청을 데리고 성으로 들어가 숙태위를 찾아갔다. 송강이 절을 하자, 숙태위가 말했다.
“장군은 무슨 일로 옷을 갈아입고 오셨소?”
송강이 말했다.
“근래에 성원에서 방을 내붙여, 출정했던 관군들은 조정에서 부르지 않으면 멋대로 도성을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소장이 사사로이 이곳에 온 것은 상공께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들으니, 강남의 방랍이 반란을 일으켜 주군(州郡)을 점거하고 멋대로 연호를 고쳤다고 합니다. 윤주까지 침략하고 조만간 강을 건너 양주를 치려고 한답니다. 송강 등의 인마가 이곳에 오래도록 한가롭게 주둔하고 있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병마를 거느리고 가서 역적을 토벌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오니, 상공께서 천자께 아뢰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숙태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징군의 말이 내 뜻과 같소. 내가 천자께 힘껏 아뢸 테니, 장군은 돌아가 계시오. 내일 아침 천자께 아뢰면, 반드시 중용할 것이오.”
송강은 숙태위를 작별하고 영채로 돌아와, 형제들에게 알렸다.
한편, 숙태위가 다음 날 아침 입조하니. 천자는 피향전에서 문무백관과 방랍에 관해 논의하고 있었다. 천자가 말했다.
“이미 장초토와 유도독에게 토벌을 명했건만, 아직 진척이 보이지 않는구나.”
숙태위가 반열에서 나와 아뢰었다.
“소신이 생각건대, 이 도적은 이미 큰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이미 장초토와 유도독을 파견하셨지만 다시 회서를 토벌하고 온 송선봉을 보내셔서, 두 군마가 선봉이 되어 역적을 토벌하게 하면 필시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천자는 숙태위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급히 성원의 관원들을 불러 성지를 내리는 한편 장초토와 종참모 · 경참모에게도 송강의 인마를 선봉으로 보낸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성원의 관원들은 성지를 받들어, 즉시 가서 송선봉과 노선봉은 피향전으로 와서 천자를 알현하라고 전하였다.
송강과 노준의가 피향전으로 와서 절을 올리자, 천자는 칙명을 내려 송강을 평남도총관(平南都總管)에 봉하여 방랍을 토벌하는 선봉이 되게 하고, 노준의를 병마부총관(兵馬副總管)에 봉하여 부선봉이 되게 하였다. 천자는 두 사람에게 각각 황금혁대 하나, 비단 전포 한 벌, 황금 갑옷 한 벌, 명마 한 필, 비단 25필을 하사하고, 나머지 정장과 편장들에게도 각각 비단과 은냥을 하사하고 공에 따라 관작을 더하기로 하였다.
송강과 노준의가 성지를 받고 천자를 작별하려 하는데, 천자가 말했다.
“경들 가운데, 옥석에 글을 잘 새기는 김대견과 좋은 말을 잘 알아보는 황보단이 있다고 들었다. 그 두 사람을 남겨 궁궐에서 명을 받게 하라.”
송강과 노준의는 성지를 받들어 재배하고 사은한 다음, 궁을 나와 영채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기뻐하면서 말을 나란히 하여 성을 나와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떤 사내가 막대기 두 개에 줄을 꿰어 잡아당겨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송강이 그걸 보고 사내에게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사내가 대답했다.
“이건 호고(胡敲)라는 건데, 손으로 줄을 당기면 소리가 나는 겁니다.”
송강은 그 말을 듣고 시를 한 수 읊었다.
낮은 소리도 나고 높은 소리도 나는데
맑은 소리가 저 푸른 하늘까지 울리네.
헛되이 많은 힘센 기력을 지니고서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헛된 노력만 하는구나.
송강이 마상에서 노준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저 호고가 꼭 우리 같네. 헛되이 하늘을 닿을 만한 실력을 지니고서도, 끌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노준의가 말했다.
“형님은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가 흉중에 지닌 학식은 고금의 명장들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실력이 없다면, 끌어주는 사람이 있다 한들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우의 말이 틀렸네! 숙태위가 천거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천자께서 우리를 중용하셨겠는가? 사람은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네.”
노준의는 실언했음을 자각하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영채로 돌아와, 장수들을 소집하였다.
그때 경영은 임신을 했고 또 병이 났었다. 그래서 동경에 남아 있게 하고, 섭청 부부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나머지 장수들은 모두 방랍 토벌을 떠날 준비를 하게 하였다.
후에 경영은 병이 낫고 달이 차서 얼굴이 넓적하고 귀가 큰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장절(張節)이라 하였다. 훗날 남편 장청이 독송관에서 적장 여천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영은 애통해 하다가 혼절했는데, 섭청 부부와 함께 독송관으로 가서 장청의 영구를 모셔다가 고향인 창덕부에 안장하였다. 섭청이 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경영은 섭청의 아내 안씨와 함께 아들을 길렀다.
장절은 장성하여 오개를 따라가 화상원에서 금나라 장수 올출을 크게 이겼는데, 올출은 수염까지 자르고 도망쳤다. 그리하여 장절은 관작을 받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며 천수를 마쳤다. 또 장절은 천자께 어머니의 정절을 아뢰어 표창을 받게 하기도 하였다.
한편, 송강은 방랍 토벌의 조칙을 받은 다음 날, 조정에서 내려온 비단과 은냥을 장수들과 삼군의 우두머리들에게 나누어주고 김대견과 황보단을 대궐로 보냈다. 송강은 수군두령들로 하여금 배를 정비하여 먼저 양자강으로 나아가게 하고, 마군두령들로 하여금 갑옷과 무기 등을 정돈하여 수륙으로 병진하게 하였다.
그때 채태사가 사람을 영채로 보내 성수서생 소양을 대필인(代筆人)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였고, 다음 날에는 왕도위(王都尉)가 직접 찾아와 철규자 악화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니 도위부에서 쓰겠다고 송강에게 요청하였다. 송강은 허락할 수밖에 없어, 두 사람을 보냈다. 그리하여 김대견 · 황보단 · 경영 · 소양 · 악화 다섯 형제를 떠나보내고, 송강은 마음이 우울하였다.
송강은 노준의와 의논하여, 장수들에게 출정 준비를 하라고 명하였다.
한편, 강남의 방랍은 반란을 일으킨 지 이미 오래되어 세력이 점점 커져서 생각 밖으로 큰 사업이 되었다. 방랍은 원래 흡주의 산속 나무꾼이었다. 어느 날 시냇가에서 손을 씻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머리에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몸에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때부터 방랍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천자의 복을 타고났다고 말했다.
그때 주면이라는 자가 오나라에서 화석강(花石綱)을 강제로 징수하여, 백성들이 크게 원한을 품고 반란을 생각하게 되었다. 방랍은 그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청계현 방원동에 궁전을 짓고 목주와 흡주에 각각 행궁을 지었다. 문무백관의 관직을 설치하여, 성원(省院)의 관료를 두고 재상과 장수 등을 임명하였다.
목주는 지금의 건덕인데, 송나라는 엄주로 개명하였고, 흡주는 지금의 무원인데 송나라는 휘주로 개명하였다. 방랍은 목주와 흡주에서부터 윤주까지 점거했는데, 지금 진강이라 부르는 곳이다. 모두 8주 25현을 차지했는데, 8주는 흡주 · 목주 · 항주 · 소주 · 상주 · 호주 · 선주 · 윤주였다. 25현은 모두 이 8주 관할이었다.
방랍은 국왕이라 자칭하면서 한 지방을 제패하였으므로,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방랍은 위로 천서(天書)에 응했다고 하는데, 당나라 때의 예언서인 추배도(推背圖)에 이런 말이 있었다.
“십천(十千)에 점을 하나 더하고, 겨울이 끝나면 존귀함을 칭하게 된다. 종횡하여 절수(浙水)를 건너 오나라 땅에서 자취를 남겨 흥하리라.”
‘十千’은 ‘만(万)’이고 그 위에 점을 하나 찍으면, ‘방(方)’ 자가 된다. 겨울이 지나면 섣달 곧 ‘납(臘)’이 된다. 존귀함을 칭한다는 것은 남면하여 임금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방랍(方臘)’ 두 글자에 응한다는 것이다. 강남 8주를 점거하였는데, 장강(長江)에 의해 중원과 격리된 천연의 요새지였으므로 회서와는 많이 달랐다.
한편, 송강은 군대를 일으켜 성원의 관료들을 작별했는데, 숙태위와 조추밀이 친히 나와 전송하면서 삼군을 위로하였다. 수군두령들은 이미 배를 타고 사수(泗水)와 회하(淮河)를 지나 양주 회안현에 모여 있었다. 송강과 노준의는 숙태위와 조추밀에게 인사하고 인마를 다섯 부대로 나누어 양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전군(前軍)이 회안현에 당도하여 둔영하자, 본주의 관원들이 연석을 마련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송선봉을 맞이하여 성중으로 들어가 대접하였다. 관원들이 말했다.
“방랍의 세력이 커서 가벼이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전면이 양자강인데, 그곳은 강남 제일의 험준한 요해처입니다. 강 건너편이 윤주인데, 지금 방랍 수하의 추밀 여사낭이 12명의 통제관과 함께 강안을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 윤주를 얻어 근거지로 삼지 못하면 방랍을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송강은 그 말을 듣고, 군사 오용을 불러 계책을 의논하고 전면에 큰 강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수군의 배를 이용하여 나아가려 하였다. 오용이 말했다.
“양자강 안에 금산과 초산이 있는데, 이 두 산은 윤주의 성곽과 맞닿아 있습니다. 형제 몇 명을 보내 길도 정탐하고 강 건너편의 소식도 알아본 다음에 강을 건너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송강이 수군두령들을 불러 말했다.
“형제들 가운데 누가 먼저 가서 길을 정탐하고 강 건너편의 소식을 알아오겠는가?”
그러자 네 명의 장수가 자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