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 39화
무송(武松)이 그런 시은을 미리 다그쳤다.
"소관영께서는 말을 길게 꾸며 하실 것 없소. 필요한 것만 간단히 말해 주시오."
이에 드디어 시은(施恩)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우는 어렸을 적부터 여러 곳에서 스승을 모셔 와 창봉을 익혔습니다. 그래서 맹주에서는 제법 솜씨가 알려져 금안표(金眼彪)란 별명까지 얻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쾌활림(快活林)에서 적잖은 낭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쾌활림?"
"이곳 동문 밖에 있는 저잣거리 이름이지요. 산동과 하북의 장사치들이 모여들어 아주 번창한 곳입니다. 주막만 해도 백여 개가 되고, 전당포와 노름방도 스무 군데가 넘습니다. 저는 그곳에다 술집 하나를 열었는데, 첫째는 그곳에서 만나는 호걸들을 통해 무예를 익히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이 노영에서 달아난 수십 명의 죄수들을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자 그곳의 주막들과 노름방, 전당포가 모두 제 세력 밑에 들어오게 되어 심지어는 그곳을 찾아오는 광대나 기생들까지도 먼저 저를 찾아본 뒤에 판을 벌일 정도였지요. 절로 굴러 들어오는 눈먼 돈도 많아 한 달에 은자 이삼백 냥은 어렵잖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장(張)씨 성을 쓰는 단련(團練, 지방의 군 지휘관, 훈련소장 격임)이 동로주에서 새로이 부임해 오면서 일이 생겼습니다. 장 단련은 장문신(張門神)이란 자를 데려왔는데, 그자는 몸이 굵고 키가 클 뿐만 아니라 무예까지도 뛰어난 자였습니다. 창봉에다 주먹 쓰기, 발길질에 능하고, 특히 씨름을 잘해 스스로 큰소리치기를, '나는 삼 년이나 태악(泰嶽)의 씨름터에서 겨뤄 보았지만 맞수를 만나 보지 못했다. 세상에서 나를 당할 놈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장문신은 이곳에 오자마자 쾌활림에 뛰어들어 그때까지 제가 거머쥐고 있던 모든 이권을 빼앗으려 들었지요. 저도 그냥 뺏길 수는 없어 결국은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저는 놈의 적수가 못 돼 한판 드잡이질로 두 달이나 병상에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되고, 모든 건 그놈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형이 오시던 날만 해도 저는 머리를 싸매고 있었습니다. 팔도 다쳐 아직 낫지 않은 채입니다. 하기야 제 밑에도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들을 시켜 머릿수로 밀고 들 생각도 있었지만 놈의 뒤에 있는 장 단련에게도 군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나서면 우리 노영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 갚을 길이 없어진 저는 그저 이만 갈고 있는데 형께서 오신 겁니다. 만약 형께서 저와 함께 가서 저의 뼈에 사무친 한을 풀어 주신다면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형께서는 먼 길을 어렵게 오신 분이라 당장은 기력이 모자랄까 걱정이었습니다. 제가 몇 달을 기다리려 한 것은 형께서 기력을 온전히 되찾으신 뒤에 이 일을 의논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하인 놈이 말을 낸 바람에 이렇게 앞당겨 말씀드리게 된 겁니다."
첫날 무송(武松)이 시은을 볼 때 흰 머릿수건으로 생각한 것은 기실 터진 머리를 싸맨 붕대였던 셈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무송(武松)이 껄껄 웃으며 물었다.
"그 장문신이란 놈, 머리가 몇 개고 팔은 몇 개였소?"
"그야 머리 하나에 팔은 둘이었지요. 그게 더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시은(施恩)이 어리둥절해 그렇게 받았다.
무송(武松)이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나는 그놈이 머리 셋에 팔다리가 여섯은 되는 줄 알았소. 그게 아니라면 나타(哪吒, 불법을 보호하는 신 이름) 같은 무예라도 지녔든지. 그런데 머리 하나에 두 팔뿐이고 나타 같은 무예도 없다면 겁날 게 뭐요?"
"그러나 제 무예가 얕고 힘이 보잘것없으니 어쩝니까? 저로서는 그를 당해 낼 길이 없습니다."
시은(施恩)이 좀 무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송(武松)은 금세라도 떨치고 일어날 듯 서둘렀다.
"내가 큰소리치는 게 아니라, 실은 내가 평생 해 온 일이 그런 못된 놈들을 때려눕히는 것이오. 이왕 말씀하셨으니 당장 그리로 가 봅시다. 술이 있으면 가는 길에 몇 잔 걸치는 것도 좋지. 가서 그놈을 호랑이 때려잡듯 잡아 놓겠소! 만약 내 주먹에 그놈이 죽는다면 까짓거 나도 이 목숨 내놓으면 될 거 아니오!"
그런 무송을 시은(施恩)이 붙들었다.
"형은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 아버님께서 곧 나오실 것이니 가시더라도 아버님을 한번 뵙고 가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또 그놈을 찾아가는 것도 무턱대고 불쑥 가서는 안 되지요. 먼저 사람을 보내 그놈이 집에 있나 없나를 알아본 뒤, 집에 있다면 적당히 날을 잡아 찾아가고 없다면 다시 의논해 보는 게 옳습니다. 공연히 섣불리 건드렸다간 그야말로 풀숲을 때려 뱀을 놀라게 하는 격이 될 겁니다. 그래서 놈에게 달리 손쓸 기회를 주게 되면 좋을 게 없지요."
그러자 무송(武松)은 짜증까지 냈다.
"이보시오, 소관영. 도대체 당신은 그놈을 잡겠다는 거요, 아니 잡겠다는 거요? 사내답지 못하게 그게 뭐요? 가려면 당장 갈 일이지 오늘내일 따져 뭐하겠소? 어서 갑시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오히려 그놈이 대비를 할까 걱정이오!"
그러면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을 때였다. 병풍 뒤에서 관영(官營)이 나오며 그런 무송에게 말을 건넸다.
"의사(義士)! 늙은이가 오래전부터 의사의 소문을 들었더니 오늘 다행히 뵙게 되었구려. 어리석은 자식놈은 이제 구름 걷힌 하늘의 밝은 해를 보게 된 듯하오. 뒤채로 가서 조용히 말씀이나 나눕시다."
관영이라면 무송 같은 죄수에게는 하늘 같은 벼슬아치다. 무송(武松)도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뒤채로 따라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관영(官營)이 말했다.
"여기 잠시 앉으시지요."
"저는 한낱 죄수로서 어찌 상공과 나란히 앉을 수 있겠습니까?"
무송이 그렇게 사양하자 관영(官營)이 더욱 간곡하게 권했다.
"그런 말씀 마시오. 내 아들놈은 의사를 만난 게 어둠 속에서 등불을 만난 듯할 거요. 겸양할 것 없소."
이에 무송도 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시은은 자리에 앉지 않고 그들 옆에 서 있었다.
무송(武松)이 그런 시은에게 말했다.
"소관영께서는 어찌하여 서 계시오?"
"아버님이 계신데 어찌 마주 앉을 수 있겠습니까? 형께서는 개의치 마시고 편히 몸을 두십시오."
"그렇다면 나도 앉아 있을 수가 없구려."
무송이 그러면서 일어나려 하자 관영(官營)이 시은에게 일렀다.
"얘야, 너도 앉아라. 의사의 말씀도 그러하거니와 보는 사람도 없지 않느냐."
이에 시은도 무송 곁에 앉았다. 그사이 하인들이 들락거리며 술과 안주를 푸짐히 차려 냈다. 관영이 손수 잔을 따라 무송에게 권하며 말했다.
"의사께서 이렇게 호걸스러우니 누군들 흠모하지 않겠소? 내 아들이 쾌활림(快活林)에서 장사를 한 것은 사사로운 잇속을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크게는 이 맹주 고을을 위하고, 작게는 호걸의 기상을 기르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이제 갑자기 장문신(張門神)이란 자가 나타나 드러내 놓고 그 근거를 뺏아가 버렸구려. 의사 같은 호걸이 아니면 아무도 그 원한을 씻어 주지 못할 거요. 부디 어리석은 내 아들놈을 버리지 마시고 도와주시오. 이 술 한 잔을 마시고, 저놈의 절 네 번을 받아 저놈의 의형(義兄)이 되어 주시면 더 바랄 게 없겠소."
"제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소관영의 절을 받겠습니까?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면 오히려 운수를 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송(武松)이 그렇게 겸양을 떨었으나, 시은은 무송이 잔을 비우기 바쁘게 네 번 절을 했다. 무송도 하는 수 없이 황망히 답례했다. 그러자 그 술자리는 그대로 무송과 시은의 결의형제를 위한 잔치로 변했다. 그날 무송(武松)은 관영 부자가 주는 술을 쉬지 않고 받아 마셔 몹시 취했다. 하인들이 부축해 그를 자리에 누일 정도였다.
다음 날이 되었다.
시은 부자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도두가 어젯밤 몹시 취했으니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야 오늘 어떻게 장문신(張門神)을 잡으러 갈 수 있겠느냐? 사람을 보내 보니 그놈이 집에 없더라고 해서 가는 걸 하루 미루도록 하자."
관영의 그 같은 말을 시은(施恩)도 옳게 여겼다.
거기 따르기로 하고 무송을 찾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되겠습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더니 그놈이 제집에 없다는군요. 내일 함께 가 보도록 하시지요."
"내일 가는 거야 별것 아니지만 오늘 하루 기다릴 일이 꿈같소."
무송(武松)이 간밤에 술에 절었던 사람 같지 않게 멀쩡한 얼굴로 대답했다.
시은(施恩)은 그런 무송과 함께 아침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영내를 한바퀴 돌고 방안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곧 무술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창 쓰는 법이 어떻고 봉 쓰는 법이 어떠니, 주먹은 어떻게 내질러야 힘 있고 발길질은 어떤 게 가장 무섭느니 신이 나서 떠드는 사이에 반나절이 가고 점심때가 되었다.
시은(施恩)은 무송을 집으로 데려가 점심을 대접했다. 차려져 나온 음식은 푸짐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술은 몇 잔 안 되었다. 무송(武松)은 속으로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상대가 권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밥과 반찬만 배불리 먹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무송이 돌아와 보니 시중들던 두 사람이 다시 목욕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송(武松)이 그들에게 물었다.
"오늘은 소관영이 어째서 고기와 밥만 잔뜩 내놓고 술은 주지 않는가? 아무래도 무슨 뜻이 있는 것 같던데?"
"숨김없이 말씀드리자면 관영 부자분께서 의논하신 끝에 정한 일입지요."
"원래 도두께서는 오늘 쾌활림(快活林)으로 가게 되어 있었으나 간밤에 술을 많이 하셨기에 내일로 미뤄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술에 취하시면 일이 어찌 되겠습니까? 그 바람에 술을 적게 내셨을겝니다. 내일 일이 제대로 되려면 그 수밖에 없다 생각하신 거지요."
시은의 하인이 숨김없이 그렇게 털어놓았다. 무송(武松)이 어이없어 하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술에 취하면 일을 그르친다는 것이냐?"
"아마 그렇게들 생각하신 게지요."
하인의 그 같은 말을 들은 무송(武松)은 그날 밤을 가까스로 참고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한 무송은 머리에 만자건(卍字巾)을 매고 한 벌 흙색 옷에 붉은 끈을 동였다. 발에는 날렵한 삼신을 꿴 뒤 얼굴의 먹자를 가릴 고약 한 장을 붙이고 시은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래잖아 시은이 아침 식사를 위해 무송을 부르러 왔다. 식사를 들기 전 차를 내놓은 시은(施恩)이 무송에게 말했다.
"뒤뜰에 오늘 타고 가실 말 한 필을 매 놨습니다. 한번 가 보시지요."
무송(武松)은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그 말에 대꾸했다.
"내 다리는 든든한데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무엇이든 망설이지 말고 들려 주십시오. 아우가 어찌 형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은(施恩)이 얼른 그렇게 받았다.
무송(武松)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자네와 내가 성을 나선 뒤에는 '무삼불과망(無三不過望, 셋 또는 석 잔 없이는 지나지 않는다)' 해야 되네."
"셋 없이는 지나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시은(施恩)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무송(武松)이 껄껄 웃으며 그 뜻을 일러 주었다.
"우리가 장문신을 잡으러 가려면 성을 나서야 하지 않는가? 가는 도중에 주막이 있을 텐데 주막마다 술 세 사발씩 마시게 해 달라는 걸세. 세 사발 술이 없으면 주막을 지날 수 없다는 게 바로 무삼불과망일세."
그 말을 들은 시은(施恩)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성 동문에서 쾌활림까지는 십사오 리나 되고 그 사이에 있는 주막만도 여남은 개나 되지 않는가. 만약 한 주막에서 세 사발씩 마신다면 합쳐 서른대여섯 잔을 마셔야 그곳에 이를 것이다. 그 사이 형님이 먼저 취할 것인데, 이 일을 어쩐다?'
시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생각에 잠긴 걸 보고 무송(武松)이 다시 껄껄거리며 물었다.
"자네, 내가 술에 취해 일을 그르칠까봐 그러나? 나는 술에 취했다고 힘을 못 쓰는 사람이 아닐세. 오히려 술 한 잔을 더 마시면 힘이 한 푼 더 솟고 다섯 잔을 더 마시면 다섯 푼 더 솟는 사람일세. 만약 실컷 마시게 해 준다면 못할 일이 없을 거네. 뿐인가, 술에 취하면 간도 커지지. 경양강에서 호랑이를 때려잡은 것도 다 술 덕분이란 걸 알아야 하네!"
시은(施恩)은 그런 무송을 믿어 보기로 했다.
"형님이 그러신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 집에 좋은 술이 있기는 하나 형님께서 취해 좋은 솜씨가 무디어질까 봐 간밤에는 술을 많이 대접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술에 취할수록 힘이 솟고 솜씨가 빛난다니 아예 집안의 하인 둘을 시켜 좋은 술과 안주를 메고 먼저 가서 기다리게 하지요."
"형님은 가시면서 천천히 마시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무송의 청을 들어주었다. 무송(武松)이 흐뭇해하며 큰소리를 쳤다.
"내 마음을 알아주니 고맙네. 가서 장문신인가 뭔가 하는 놈을 때려눕히려면 먼저 간부터 커야 하는데 술이 없으면 어떻게 손이 나가겠나? 오늘은 그놈을 때려잡아 뭇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도록 해 주겠네!"
이에 시은(施恩)은 하인 두 사람을 불러 술독을 지게 하고 돈을 지닌 채 무송보다 앞서 떠나게 했다.
관영(官營)은 관영대로 힘깨나 쓰는 장정 여남은 명을 골라 몰래 무송을 뒤따르며 필요할 때 돕게 했다.
안평채(安平寨)를 떠난 무송과 시은은 맹주 동문을 나가 쾌활림으로 향했다. 한 사오백 걸음을 걷기도 전에 관도(官道)가에 벌써 주막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주막 처마에는 술이 있음을 알리는 깃발이 걸렸는데 그 아래 미리 간 시은의 하인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은(施恩)이 무송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앉자 하인 둘이 안주를 차리고 술을 따랐다.
무송(武松)이 그들에게 말했다.
"작은 잔으로 번거롭게 따르고 자시고 할 것 없다. 큰 사발을 가져오너라. 석 잔만 마시고 가겠다."
하인들이 그 말대로 큰 사발을 내와 술을 따랐다. 무송(武松)은 사양하는 법도 없이 세 사발을 거푸 비우고 일어났다. 하인들이 얼른 술잔과 그릇들을 거둬 무송보다 앞질러 달려 나갔다. 다음 술집에 가서 다시 차려 놓고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무송(武松)은 술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진 듯 허허거렸다.
"이제 뱃속이 확 펴지는 것 같군. 자, 어서 가 보세."
그리고 시은과 함께 주막을 나섰다.
때는 칠월이라 더위가 아직 다하지 않았지만 가끔씩 산들바람이 일었다. 무송과 시은은 앞섶을 시원스레 풀어 헤치고 천천히 걸었다. 한 마장쯤 가니 마을도 아니고 성곽도 없는데 다시 저만치 숲속에 술집 깃발 하나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수풀 사이에 탁배기를 파는 작은 술집 하나가 있었다.
"이곳은 촌사람들에게 탁배기 잔이나 내어 파는 곳인데, 여기도 술집으로 치시렵니까?"
시은(施恩)이 그냥 지나갔으면 하는 눈치로 물었다. 무송(武松)이 모르는 척 대답했다.
"그래도 술집은 술집이니 석 잔을 마시지 않고는 지나가지 못하겠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무송과 시은이 자리 잡기 바쁘게 먼저 와 있던 하인 둘이 다시 술과 안주를 차려 내왔다. 무송(武松)은 거기서도 세 사발만 마시고 일어났다. 하인들이 전처럼 급히 술과 안주그릇을 챙겨 먼저 떠나고 무송과 시은은 천천히 일어나 그 술집을 나섰다.
두 사람이 길을 나선 지 두어 마장 되어 다시 술집이 하나 나왔다. 무송(武松)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들어가 세 사발을 들이켜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남은 군데 술집을 한 곳도 빼지 않고 세 사발씩 비웠으나 시은(施恩)이 보기에도 무송은 그리 취한 것 같지가 않았다. 실로 대단한 주량이었다.
"아직도 쾌활림은 멀었나?"
열몇 번째인가의 술집을 나오면서 무송(武松)이 물었다. 시은(施恩)이 얼른 대답했다.
"이제 멀지 않습니다. 저 앞 숲이 바로 그놈이 있는 곳이지요."
아마도 장문신에게 가까워지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무송(武松)이 그런 시은에게 멀쩡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다 왔다면 자네는 다른 곳에서 나를 기다리게. 나 혼자 한번 찾아가 보겠네."
"옳은 말씀입니다. 아우는 다른 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지요. 그렇지만 형님, 결코 놈을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되십니다."
시은(施恩)이 한 번 더 무송을 깨우쳐 주었다.
"그건 걱정 말고 내가 부르거든 하인이나 보내 주게. 앞에 술집이 있으면 또 마실 테니까."
무송(武松)이 태연스레 그렇게 대꾸했다. 시은(施恩)은 그대로 해 주고 자신은 무송과 헤어져 모습을 감췄다. 무송(武松)은 남은 길 서너 마장을 걸으며 생각날 때마다 시은의 하인을 불러 술을 마셨다. 거기서 다시 열 사발이 넘는 술이 무송의 뱃속에 부어졌다.
때는 한낮이라 해는 한창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송(武松)은 옷깃을 풀어헤치고 아직 별로 취하지 않았으면서도 곤드레가 된 사람처럼 비틀비틀 걸었다. 적을 안심하게 만들려는 꾀였다. 시은이 말한 숲 앞에 이르자 따르던 하인이 한 곳을 손가락질 하며 일러 주었다.
"이 앞 세 갈래 진 길에 장문신의 술집이 있습니다."
무송(武松)은 그 말에 따라 그 숲 쪽으로 갔다. 숲을 막 지나니 한 힘꼴깨나 써 보이는 몸집 큰 사내가 파리채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느티나무 아래 의자를 내놓고 더위를 피하는 중인 듯했다.
무송(武松)은 일부러 취한 척 비틀거리면서 슬쩍슬쩍 그 사내를 곁눈질해 보았다.
'저 허우대 큰 놈이 장문신인 모양이로구나. 어디 두고 보자.'
무송(武松)은 그러면서 그 사내 앞을 지나 술집을 찾았다. 몇십 발짝 걷기도 전에 세 갈래 길이 나오고 큰 술집 하나가 보였다. 처마 아래 큰 깃발이 걸렸는데 거기에는 '하양풍월(河陽風月)' 넉 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술에는 물과 햇빛 그리고 바람과 달이 어울린다는 말이다.
시골 구석에 걸린 주기(酒旗)치고는 제법 풍취가 있어 보였다. 그 술집의 풍취는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문 앞에 초록 칠을 한 난간이 있고 그 양쪽에는 다시 금빛 글씨로 쓴 깃발 둘이 걸려 있는데, 거기 쓰인 다섯 글자가 또한 그럴듯했다.
'취리건곤대(辭裡乾坤大)'
'호중일월장(壺中曰月長)'
아마도 시은이 그 술집의 주인이던 시절에 내다 건 것인 듯했다.
'술만 들어가면 천지가 내 것이야, 술 먹을 동안은 세월이 없는 법이니라' 하는 뜻임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술집 안에는 고기 써는 큰 도마가 있고, 도마 위에는 여러 개의 칼이 늘어져 있었다. 또 만두를 찌는 큰 가마솥도 걸려 있고 마당에는 술독이 셋이나 묻혀 있는데 그 모두가 그 술집의 크기를 잘 일러 주고 있었다.
그런 것들 가운데 있는 계산대에 한 젊은 계집이 앉았다가 무송을 보고 되바라진 눈길을 보냈다. 장문신이 맹주에 와서 새로 얻은 계집으로 원래는 서쪽 유곽에서 노래를 팔던 기생이었다.
무송(武松)이 취한 눈을 찡긋하자, 계집은 얼른 일어나 술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막 굴리던 몸이라도 이제는 한 사내의 계집이 되었으니 함부로 외간 남자의 수작을 받기 싫다는 뜻 같았다.
계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무송(武松)은 자리를 찾아 앉기 바쁘게 탁자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술 파는 사람은 어딜 갔나?"
그러자 심부름꾼인 듯한 사내가 무송에게 다가와 물었다.
"손님, 술을 하시겠습니까?"
"우선 술 두 각만 내오너라. 맛 좀 보고 이야기하자.'
무송(武松)이 그렇게 대꾸하자 사내는 아까 들어간 계집에게 술 두 각을 따라오라 소리쳤다.
계집이 술을 따라 주자 사내가 한 잔을 따라 무송에게 내밀었다.
"손님, 맛 좀 보십시오."
무송(武松)은 그 술을 냄새만 킁킁 맡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시원찮아, 바꿔 오라구!"
무송(武松)이 그렇게 취한 소리를 내지르자 사내놈은 못마땅한 듯 무송을 보다가 다시 계산대로 가서 계집에게 말했다.
"아씨, 술을 다른 걸로 바꿔 주셔야겠는데요."
계집이 아무 소리 않고 다른 술독을 기울여 보다 질이 좋은 술을 다시 따라 주었다. 사내가 그 술을 받아 무송의 잔에 따랐다. 무송(武松)은 이번에도 입술만 술잔에 갖다 댄 뒤 소리쳤다.
"이것도 시원찮아. 어서 더 나은 걸루 바꿔 오란 말이야!"
사내놈이 성난 속을 억누르며 술을 거두어 계산대 쪽으로 갔다.
"아씨, 귀찮으시겠지만 더 좋은 놈으로 바꿔 주셔야겠습니다. 여느 손님 대하듯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술에 잔뜩 취해 시빗거리라도 찾는 눈치니 가장 좋은 술을 내주십시오."
사내가 그렇게 말하자 계집은 이번에도 아무 소리 않고 그 집에서 가장 좋은 술을 꺼내 따라 주었다.
사내가 그 술을 가져와 무송에게 내놓았다. 맛을 본 무송(武松)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건 마음에 드는군."
그러고는 불쑥 사내에게 물었다.
"이봐, 자네 주인 이름이 뭔가?"
"장(張)씨 성을 쓰는 분이신데요."
심부름꾼 사내가 별생각 없이 그렇게 일러 주었다. 무송(武松)이 그말을 삐딱하게 받았다.
"왜 이(李)가가 아니고 장간가?"
그러자 계집이 뾰족한 소리를 했다.
"저 양반이 어디서 취해 가지구 와서는...... 무얼 잘못 먹었나? 보아하니 어디 촌구석에서 온 놈 같은데 제정신이 아니군요. 못 들은 척하십쇼."
심부름꾼 사내도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그렇게 계집에게 맞장구를 쳤다. 무송(武松)이 눈을 딱 부릅뜨며 그 사내에게 물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느냐?"
"우리끼리 한 이야기요. 손님, 상관 마시고 술이나 드슈."
사내가 그렇게 능청을 떨었다. 무송(武松)이 넘어가 주는 척하며 엉뚱한 요구를 했다.
"알았어. 이봐, 그럼 저기 계산대에 있는 저 여자더러 여기 와서 술 한잔 치라고 해."
그러자 사내가 소리를 높였다.
"이게 정말 취했나? 어따 대고 헛소리야? 저 아씨는 주인댁 마님이라구."
"주인댁 마님이면 어때? 나하고 술 한잔 못할 것도 없지 않나?"
무송(武松)이 그렇게 사람의 부아를 질렀다. 그러잖아도 자신이 기생질하다가 마님이 되어 걸리는 게 많던 계집은 그 소리에 성이 발칵났다. 믿는 것도 있고 해서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저 죽일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그러고는 계산대 뒤로 사라지려 했다. 웃통을 벗어부치듯 하고 있던 무송(武松)이 훌쩍 몸을 날려 그런 계집을 붙잡았다. 호랑이를 때려잡은 그 힘으로 붙드니 힘없는 계집은 꼼짝없이 무송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무송(武松)은 한 손으로 계집의 허리께를 잡고 한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 번쩍 들고는 계산대를 나왔다. 그리고 몇 발 걷다가 바닥에 있는 큰 술독에다 계집을 내던졌다. 불쌍한 계집은 비명 한번 제대로 못 지르고 술독에 쳐박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기생질 하다가 마님이 된 계집이 술독에 처박혀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자 술집의 심부름꾼 네댓이 한꺼번에 무송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무송의 손길이 슬쩍 미치자 한 녀석이 공중에 가볍게 떠서 술독에 처박혔다.
이어 또 다른 녀석도 그 꼴이 나고, 다른 두 녀석은 각기 무송의 한주먹 한 발길질에 나동그라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두 녀석이 술독에 처박히고 두 녀석이 꼼짝없이 뻗어 버리자 하나 남은 녀석은 무송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하고 얼이 빠졌다. 바짓가랑이가 오줌에 젖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무송(武松)이 녀석을 보고 이죽거렸다.
"네놈이 장문신에게 알리러 가는 모양이지만 그럴 것 없다. 내가 가서 직접 잡지. 큰길로 끌어내 때려잡아 여럿에게 웃음거리가 되도록 해 주마."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 달아나는 녀석을 뒤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간 녀석은 장문신을 잡고 술집에서 있은 일을 모조리 일러바쳤다.
깜짝 놀란 장문신(張門神)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고 있던 파리채를 내던지고 술집 쪽으로 달려갔다.
무송(武松)이 그런 장문신과 마주친 것은 사람의 눈이 많은 큰길가에서였다.
장문신(張門神)은 겉보기에는 여전히 키가 크고 몸집이 우람했지만, 그 무렵에는 술과 계집에 곯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심부름꾼 녀석이 전하는 말에 놀라 달려오기는 해도 걸음조차 그리 힘차지 못했다.
장문신(張門神)은 무송과 맞닥뜨리자 속으로 가만히 가늠해 보았다. 무송이 힘꼴깨나 써 보이기는 해도 대단한 몸집은 아닌 데다 몹시 취해 있는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게 그의 낭패를 더욱 크게 했다.
무송(武松)은 장문신을 보자 짐짓 취한 척 비틀거려 그를 마음 놓게 해놓고, 가까이 다가서기 바쁘게 두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정말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볼 근처를 때리는 시늉이었다.
이어 무송(武松)은 마치 자기 주먹이 맞아 주지 않아 겁먹은 것처럼 몸을 돌려 얼른 달아났다. 맞지는 않아도 자칫하면 선수에 걸려들 뻔했던 장문신(張門神)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앞뒤 살필 것 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무송을 뒤쫓았다.
그때 달아나던 무송(武松)이 갑자기 한 발길을 날렸다. 발길이 장문신의 아랫배에 꽂히자 장문신(張門神)은 두 손으로 그 발을 잡으려 했다. 무송(武松)이 날쌔게 몸을 빼더니 다시 오른발을 매섭게 차올렸다.
그 발길은 그대로 장문신의 얼굴을 맞히고 못 견딘 장문신(張門神)은 나무토막 쓰러지듯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무송(武松)은 그런 장문신의 가슴을 밟고 떡메 같은 주먹질을 퍼부었다.
원래 장문신(張門神)은 씨름꾼이었다.
무송(武松)은 그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먼저 헛주먹질로 그의 눈을 속인 뒤, 왼발길질로 그를 주춤하게 만들고 다시 오른발길질로 차넘긴 것이었다.
바로 '옥환보 원앙각(玉環步 鴛鴦脚)'이라는 싸움 기술의 하나로, 무송이 평생 익힌 재주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였다.
거기 걸린 장문신이 무슨 재주로 배겨 내겠는가.
무송에게 깔린 채 떡메 같은 주먹질을 당하다가 죽는 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살려 줍쇼. 부디 목숨만 살려 줍쇼."
무송(武松)이 주먹질을 거두고 그런 장문신을 을러댔다.
"네놈이 정히 살고 싶다면 세 가지 조건을 들어줘야겠다. 들어 주겠느냐?"
"살려만 주신다면 세 가지가 아니라 삼백 가지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장문신(張門神)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무송(武松)이 엄한 목소리로 세 가지 조건을 일러 주었다.
"첫째, 너는 당장 이 쾌활림을 떠나야 한다. 물론 이 집에 있는 가재도구와 모든 재물은 원주인인 금안표 시은에게 돌려줘야 하고. 도대체 어떤 놈이 네게 그에게서 이 술집을 뺏으라고 시켰는지 모르지만 이젠 모두 단념해라."
"알겠습니다. 꼭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둘째, 이제 너를 놓아줄 터이니, 너는 모든 쾌활림 패거리의 우두머리들을 모아 시은에게로 가서 잘못을 빌어라."
"그것도 그리하겠습니다."
"셋째, 너는 오늘 밤으로 쾌활림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되 다시는 이 맹주 근처에는 얼씬 마라. 만약 네가 돌아가지 않았다가 내 눈에 띄게 되면 그때마다 얻어터질 줄 알아라. 가벼우면 반죽음일 것이고, 무거우면 이 주먹 아래 영영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렇게 하구말구요! 반드시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장문신(張門神)은 어떻게든 한목숨 건질 요량으로 무송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게 다만 급해서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 무송(武松)은 그쯤에서 주먹을 거두었다.
무송(武松)이 장문신을 일으켜 세워 놓고 보니 그 꼴이 참으로 말이 아니었다. 두 볼이 퉁퉁 부어 제 얼굴이 아니었고, 코는 반이나 돌아갔으며, 이마빼기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놈아, 넌 내가 누군 줄 아느냐? 경양강 고갯길에서 큰 호랑이를 맨주먹으로 때려 죽인 게 바로 이 어르신네다. 그따위 솜씨를 가지고 나에게 다시 대들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날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인 줄 알아라."
무송(武松)은 한 번 더 그렇게 엄포를 놓았다.
그제야 무송이 누군지 안 장문신(張門神)은 더욱 간이 오그라 붙었다. 그저 죽어 가는 소리로 머리만 조아릴 뿐이었다.
그때 시은(施恩)이 장정 둘과 함께 달려왔다. 시은(施恩)은 무송이 장문신을 때려 엎은 걸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와락 무송을 껴안으며 감격의 소리를 내질렀다.
무송(武松)이 장문신을 손가락질하며 엄하게 말했다.
"원래의 주인이 여기 와 있는데 너는 무엇하느냐? 어서 가서 사람들을 데려와 사죄를 드려라."
"알겠습니다. 나리, 우선 안으로 들어가 앉아 계십시오."
장문신(張門神)이 그렇게 대답하고 무송을 술집 안으로 모셔 들였다. 무송(武松)이 술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쏟아진 술과 음식이 흥건한데, 두 녀석은 아직도 술독에 처박힌 채였고 계집만 겨우 기어 나온 판이었다. 그나마 머리와 옷에서는 술이 줄줄 흐르고 있는 게 물에 빠진 생쥐란 말이 바로 그녀를 형용하기 위해 있는 것 같았다. 바닥에 뻗어 있던 두 녀석은 어디로 내뺐는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모두 어서 일어나라!"
무송(武松)은 그렇게 고함을 질러 술집 일꾼들을 모은 뒤 먼저 수레 한 대를 마련하게 해 계집부터 태워 보냈다.
그리고 다치지 않은 심부름꾼 녀석을 하나 찾아내 근처 건달패의 우두머리를 모두 불러 모으게 했다. 무송(武松)은 성한 술독을 헐어 탁자 위에 차려 놓게 하고 모여든 사람들을 앉혔다.
시은을 장문신의 윗자리에 앉게 한 무송(武松)은 모두에게 큰 잔으로 술을 돌리게 했다. 술이 몇 자 돈 뒤 무송(武松)이 여럿을 보고 말했다.
"여러 이웃분들은 들으시오."
"나 무송(武松)은 양곡현에서 사람을 죽여 이곳으로 유배 오게 되었소. 그런데 여기 와서 들으니 쾌활림의 술집은 소관영 시은의 것인데 장문신이란 자가 대낮에 공공연히 빼앗고 들어앉았다 하지 않겠소? 여러분은 혹시 내가 장문신을 때려잡게 된 게 옛주인이 시켜서가 아닌가 생각하시겠지만 그건 잘못이오. 나는 결코 그와는 상관없소. 나는 다만 그런 천하에 고약한 놈을 보아 넘길 수가 없어 주먹을 쓴 것뿐이오! 길 가다가 이런 일을 보았더라도 나는 칼을 뽑아 억울한 자를 도왔을 것이오. 그런 일 때문이라면 죽게 되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소. 오늘도 내 성미대로 했다면 저 장가 놈은 이 주먹 아래 살아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여러 이웃분의 낯을 보아 목숨은 붙여 두었소. 대신 나는 오늘 밤 안으로 저자를 딴 곳으로 가라 하였소. 만약 오늘 밤이 지난 뒤 다시 내 눈에 띄면 저자는 저 경양강 고갯길의 호랑이 꼴이 나고 말 거외다!"
사람들은 그가 다름 아닌 무송임을 알아보고, 장문신을 대신해 사죄했다.
"호걸께서는 부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우리가 이 사람을 여기서 내보내고 모든 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때껏 제 뜻대로 부려 오던 그들까지 그렇게 나오자 장문신(張門神)은 더욱 기댈 곳이 없어졌다. 끽소리 못하고 무송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시은(施恩)은 가재도구가 다 그대로인가를 살펴본 뒤 창고까지 모두 열어 보았다.
장문신(張門神)은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작별을 한 뒤 수레 한 대를 구해 제가 원래 가져온 보따리만 싣고 쾌활림을 떠났다.
모든 게 예전처럼 되돌아가자 무송(武松)은 모인 사람들과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돌아간 뒤 곯아떨어져 이튿날 한낮이 되어서야 겨우 깨어났다.
노관영은 아들 시은이 쾌활림의 술집을 되찾았다는 말을 듣자 몸소 말을 타고 달려왔다. 모든 게 무송의 덕분인 만큼 감사가 클 것은 당연했다.
그날부터 연일 술자리를 벌여 무송을 융숭히 대접했다.
그 일로 해서 무송(武松)이 쾌활림에 온 것이 널리 알려지자 근처에 사는 사람치고 찾아와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시은의 술집은 전보다 훨씬 더 흥청거렸다. 노관영은 그걸 보고 흐뭇하기 그지없는 기분으로 안평채로 돌아가 제 할 일에 전념했다.
시은(施恩)은 사람을 시켜 장문신의 거처를 알아보고, 그가 가솔들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는 말을 듣자, 다시 자신이 술집을 맡아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영 마음을 놓지는 못해 무송을 자신의 술집에 머무르게 한 채였다.
그 뒤 시은(施恩)은 술장사로서도 전보다 남는 게 많은 데다, 여러 노름방이며 전당포 색시집 따위에 흘러들어 오는 뒷돈도 훨씬 늘었다. 그 모든 게 무송의 덕분임을 잊지 않는 시은(施恩)은 무송을 마치 부모님 모시듯 하니 무송에게도 오랜만에 편안하고 넉넉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한 달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햇볕이 점점 엷어지더니 이슬이 서늘함을 불러오고 소슬바람이 더위를 몰아가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어느 날 무송(武松)이 한가롭게 앉아 창봉이며 주먹질, 발길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 앞에 군졸 세 사람이 말 한 필을 끌고 나타났다.
"어떤 분이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 도두님이십니까?"
술집 안으로 들어온 그들 중의 하나가 시은에게 물었다. 시은(施恩)은 그들이 맹주를 지키는 병마도감 장몽방(張蒙方) 아래 있는 군졸임을 알아보았다.
그들이 무송을 찾는 게 이상해 대답 대신 되물었다.
"당신들, 무 도두는 무엇 때문에 찾소?"
"병마도감 나리의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나리께서는 무 도두님이 호걸이란 말을 들으시고 특히 저희들을 보내 모셔 오라며 말까지 보내셨습니다. 여기 그 뜻이 적힌 글이 있습니다."
군졸들 가운데 하나가 그런 대답과 함께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그걸 읽은 시은(施恩)은 속으로 생각했다.
'병마도감이라면 아버님의 윗분이 되고 아버님은 그분의 명에 따라야 한다.'
'지금 무송도 유배온 죄수니 또한 그 아래 있는 셈이다. 아니 보낼 수 없구나.'
그리고 무송에게 물었다.
"형님, 저 사람들은 장 도감이 특히 형님을 데리러 보낸 사람들입니다. 말까지 끌고 왔는데 어쩌시겠습니까?"
"그가 이왕 나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면 가 봐야 하지 않겠냐?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한번 들어 보기로 하지."
무송(武松)이 아무런 의심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만진 뒤 말에 올라 데리러 온 군사들과 함께 맹주성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