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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30화

Bollnow 2025. 2. 5. 10:33

그때껏 현청에 나와 있던 지현(知縣)은 주동과 뇌횡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까닭을 물었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집 안팎을 두 차례나 샅샅이 뒤졌으나 송강(宋江)은 없었습니다. 또 그 아비 송 태공은 앓아누워 오늘 어떨지 내일 어떨지 모르는 판이고, 아우 송청(宋淸)은 지난달에 집을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합니다. 다만 송 태공이 이 일에 증거 될 만한 문서를 내주기에 우선 그것만 가져왔습니다."

지현(知縣)도 굳이 송강의 가족을 괴롭힐 마음이 없던 터라 그런 두 사람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들이 가져온 문서를 보고 오히려 잘 됐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 문서를 부윤에게 보내는 한편 널리 방을 붙여 송강을 잡게 하라."

그렇게 일을 얼버무려 버렸다. 현청에서 일 보는 사람들 중 평소 송강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장문원을 찾아가 좋은 말로 달랬다. 장문원은 그들의 낯을 봐서라도 그 권유를 뿌리치기 어려운 데다, 계집도 이미 죽어 버린 터라 송강에 대한 앙심을 풀었다. 따지고 보면 그 또한 그 계집의 일이 있기 전에는 송강과 가깝던 사이였다. 장문원이 입을 다물자 주동(朱仝)은 다시 염씨 할멈을 구워삶았다. 적잖은 돈과 재물을 쥐여 주며 할멈이 주부(州府)에 고소장 내는 걸 말렸다. 염씨 할멈은 딸 잃은 한과 슬픔이 적지 않았지만 받은 재물이 상당한 데다 장문원까지 뒷짐을 지자 기세가 꺾였다. 이에 송강을 벌해 달라는 할멈의 고소장이 주()까지는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주동(朱仝)은 다시 재물을 써서 주의 벼슬아치들을 달랬다. 송강에 관해 올라간 현청의 문서들을 적당히 구겨 박아 버리게 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지현을 달래, 송강을 잡는 데 일천 관의 상금을 거는 것으로 겉만 요란하게 처리하게 했다. 또한 당우아(唐牛兒)의 일은 범인은 놓아 보내게 한 죄를 물어 등허리에 매 스무 대를 때린 뒤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보았다. 그 밖에 송강과 관련해 잡아들인 사람, 모아들인 증거도 흐지부지 놓아 보내고 흩어 버리게 하니 곧 모든 게 잠잠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짚어 봐야 할 일은 송강의 집 안에 만들어져 있던 땅굴이다. 왜 그런 피신처가 필요했을까. ()나라 때는 정치가 썩어 높은 벼슬아치는 살기가 편했고, 낮은 벼슬아치는 매우 어려웠다. 높은 벼슬아치가 편했던 것은 간신이 권력을 잡고 아첨만으로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가까운 피붙이나 재물을 많이 내는 자만 아랫사람으로 썼기 때문이었다. 한편 낮은 자리에 있는 벼슬아치가 살기 어려웠던 것은 그런 못된 벼슬아치들이 위에 있어 생기는 것은 적고 일만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송강(宋江)이 하던 압사(押司)란 일은 맡은 지역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가벼워야 얼굴에 먹자를 넣고 귀양 가는 것이고, 무거우면 가산을 몰수당하고 목숨까지 잃는 것이었다. 따라서 송강(宋江)에게는 그 같은 피신처가 필요했다. 송 태공이 내놓은 문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한 사람이 죄를 쓰면 그 부모 처자까지 연루되어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문서로 부모 자식의 절연을 밝히고 관청에 가서 인정을 받아 둠으로써 그 연루됨을 피할 수 있었다. 송강(宋江)도 그걸 위해 미리 그런 문서를 만들어 두고 거처까지 따로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두 가지 준비로 급한 고비를 넘긴 송강(宋江)은 주동과 뇌횡이 돌아가기 바쁘게 땅굴에서 나와 아버지와 아우를 모아 놓고 의논했다.

"이번에 주동(朱仝)이 보아주지 않았으면 관가에 잡혀갈 뻔했습니다."

"그 사람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그렇지만 이제 더는 여기 숨어 있을 수 없게 되어 이만 아우와 함께 멀리 달아날까 합니다. 하늘이 불쌍히 여기시어 천하에 사면령이 내린다면 그때에나 다시 돌아와 아버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남몰래 주동에게 재물을 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저를 위해 뇌물로 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또 염씨 할멈에게도 약간의 금은을 주어 할멈이 더는 고소장을 들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송강(宋江)은 송 태공에게 그렇게 의논 겸 당부를 했다. 송 태공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지 아들의 말을 따랐다.

"뒷일일랑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다만 너희 형제나 몸조심하고, 어딜 가든 자리 잡히는 대로 소식이나 전해 다오."

그렇게 떠남을 허락했다. 그 밤 송강(宋江) 형제는 먼 길 떠날 보따리를 꾸리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사경이 되어 날이 희끄무레 밝아 왔다. 세수를 마친 형제는 이른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났다. 송강(宋江)은 범양 전립에 흰 비단옷을 걸치고 삼으로 짠 짚신을 신었으며, 아우 송청(宋淸)은 그 하인같이 꾸미고 보따리를 등에 졌다. 형제가 나란히 송 태공 앞에 나가 하직 인사를 올리자 송 태공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갈 길이 머니 부디 여기 일일랑 걱정 마라. 너희 형제 몸조심이나 하여라."

그렇게 분부하다 말끝을 맺지 못했다. 송 태공에게 큰절을 올린 형제는 집 안의 머슴들을 보아 놓고 당부했다.

"언제나 곁에 있으면서 아버님을 돌봐 드려라. 특히 음식 수발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머슴들도 여러 해 송강의 집에서 은덕을 입어 온 사람들이라 눈물을 글썽이며 그러마고 다짐했다. 이윽고 집안 처리를 모두 끝낸 송강(宋江)과 송청(宋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송가촌을 떠났다. 때는 가을도 깊어 날이 매우 찼다. 길을 걸으면서 송강(宋江)이 탄식처럼 말했다.

"나서기는 했다마는 이제 누구를 찾아간단 말이냐?"

송청(宋淸)이 조심스레 그 말을 받았다.

"제가 듣기로는 창주 횡해군에 시대관인(柴大官人)이란 분이 있다 합니다. 그는 대주(大周) 황제의 적손(嫡孫)으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를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의()에 재물을 아끼지 않으며, 천하의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죄지어 귀양 가는 이도 반겨 준다 합니다. 이 시대의 맹상군(孟嘗君)이라고도 불린다니 우리 그리로 한번 가 보지요?"

"나도 그 생각은 했다마는 선뜻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구나. 그 사람과 글로는 자주 왕래가 있었지만 인연이 없어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으니...."

송강(宋江)이 그렇게 자신 없어 했으나, 그렇다고 달리 더 좋은 곳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은 시진(柴進)을 한번 찾아보기로 하고 창주로 길을 잡았다.

송강(宋江) 형제는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길이라 그 고생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넓고 고른 길을 마다하고 산등성이를 넘고 다리를 피해 찬 냇물을 건넜다. 음식은 길 가는 떠돌이 장사꾼에게서 돈을 주고 나눠 받았으며, 잠은 숲속에서 새우잠을 잤다. 그렇게 주()를 넘고 현()을 지나 며칠을 걷던 끝에 형제는 그럭저럭 창주에 이를 수 있었다.

"시대관(柴大官人) 댁이 어디요?"

창주에 이른 것을 안 송강(宋江) 형제가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물었다. 그 사람이 아는 대로 일러 주었다.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고생고생 먼 길을 온 뒤끝이었으나 그 말을 듣자 송강과 송청은 힘이 났다. 뛰듯이 시진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지키는 머슴에게 물었다.

"시대관인께선 안에 계십니까?"

머슴이 별 표정 없이 대답했다.

"대관인께서는 지금 동장(東莊)에 수세를 거두러 가셔서 안 계십니다."

"그 동장이란 곳이 여기서 멉니까?"

기다리기가 멋쩍다 싶어진 송강(宋江)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머슴이 별 표정 없이 일러 주었다.

"한 사십 리 됩니다."

"어느 길로 가면 됩니까?"

송강(宋江)이 내처 그렇게 묻자 머슴도 예사롭지 않다 싶었던지 비로소 관심을 나타냈다.

"그 전에 두 분의 존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운성현의 송강이 바로 이 사람이오."

이제야 어떠랴 싶어 송강(宋江)이 바로 이름을 밝혔다. 그 머슴이 문득 알은 체를 했다.

"그렇다면 급시우 송공명이란 분이십니까?"

"그렇소이다."

"대관인께서 늘 말씀하셔서 크신 이름은 듣고 있었습니다만 한스럽게도 여지껏 뵈올 영광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 송 압사시라면 제가 길을 안내해 드리지요."

머슴이 갑자기 굽신대면서 길잡이로 나섰다. 송강(宋江)과 송청(宋淸)은 그를 따라 동장으로 갔다. 동장(東莊)은 시진의 저택에서 세 시진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동장에 이르자 거기까지 길잡이를 해 온 머슴이 공손하게 말했다.

"두 분께서는 저 정자에 앉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가서 대관인께 여쭤 올리겠습니다."

"좋소이다."

송강(宋江)은 아우와 함께 가까운 정자로 올라갔다. 칼을 풀고 보따리를 내려놓은 뒤 정자에 앉으니 벌써 먼 길을 온 피로가 다 가시는 듯했다. 그 머슴이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 장원의 가운데 대문이 크게 열렸다. 반갑게 달려 나오는 것은 사람 서넛을 거느린 시진이었다. 정자에 오른 시진(柴進)은 송강을 보자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정말로 이 기쁨을 뭐라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이 돌보아 평생의 원을 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겠습니까?"

송강(宋江)도 땅바닥에 엎드려 공손하게 맞절을 하면서 받았다.

"이 송강은 하찮은 벼슬아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와 존안을 뵙게 되니 실로 큰 광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자 시진(柴進)이 진심으로 자신을 반겨 맞는 걸 보고 마음속으로 기껍기 한량없었다. 곧 아우 송청을 불러 시진을 보게 했다. 시진(柴進)은 머슴들을 불러 송강의 짐 보따리를 지게 하고 그들 형제를 안내해 서편 집채에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다음 송강의 손을 잡고 큰 마루로 끌어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듣기로 형님께서는 운성현청에서 일을 보고 있다 했는데 어인 일이십니까? 이 보잘것 없는 아우를 찾으셨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진(柴進)은 대뜸 송강을 형의 예로 대하며 물었다. 송강(宋江)이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대관인의 우레 같은 이름을 들어 왔고 글도 여러 번 오갔습니다. 하지만 한스럽게도 찾아올 겨를이 없다가 이런 일을 당한 뒤에야 뵙게 되었습니다. 이 송강(宋江)은 재주 없는 데다 죄까지 짓게 되어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아우와 함께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대관인의 의로움과 너그러우심을 떠올리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님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비록 십악(十惡, 송대에 가장 무거운 형벌을 내리던 죄, 주로 반역에 관계된 처벌)의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이미 저희 장원에 오신 다음에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범죄인을 잡는 군관이라 할지라도 이곳은 함부로 넘보지 못하니까요."

시진(柴進)이 웃으며 그렇게 송강을 안심시켰다. 송강(宋江)은 이어 자신이 염파석을 죽이게 된 경위를 조금도 거짓 없이 말하고 도움을 구했다. 듣고 난 시진(柴進)이 시원스레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설령 조정의 대관을 죽이고 나라의 창고를 털었더라도 이 시진은 개의치 않고 이곳에 숨겨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송강 형제에게 씻기를 권한 뒤 옷이며, 머릿수건, 신발까지 새것으로 갈아입게 했다. 모두가 값진 천에 정성 들여 지은 것이었다. 송강 형제가 씻기를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자 머슴들은 헌옷을 가져다 깨끗이 빨았다. 그리고 언제든 다시 입을 수 있게 손질한 뒤 그들이 거처하는 곳에 갖다 놓는 것이었다. 시진(柴進)은 다시 송강 형제를 뒤채 깊숙한 방으로 청해 들였다. 송강 형제가 가 보니 이미 상다리가 휘도록 푸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시진(柴進)은 송강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그 맞은편에 앉았다. 손님을 맞는 예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예()였다. 송청이 그들 곁에 앉아 자리가 정해지자 집 안의 심부름꾼과 머슴들이 번갈아 드나들며 술 시중을 들었다. 시진(柴進)은 송강 형제에게 석 잔 넉 잔 거듭 술을 권하고 자신도 그만큼 받아 마셨다. 송강(宋江)은 그런 시진에게 감사해 마지않으며 오랜만의 편한 술자리를 즐겼다. 술이 오르자 셋은 그동안 서로 그려 왔던 정을 털어놓아 술자리는 점점 무르익었다. 그사이 날이 저물어 집 안에는 등불이 하나 둘 밝혀졌다. 술이 별로 세지 못한 송강(宋江)이 반 겸양으로 말했다.

"이제 술은 그만하지요."

그러나 시진(柴進)이 송강을 놓아주려 들지 않아 술자리는 초경까지 이어졌다. 술을 못 이긴 송강(宋江)이 손이라도 씻고 올 양으로 몸을 일으켰다. 시진(柴進)이 머슴들을 불러 그런 송강을 세수간까지 안내하게 했다. 세수간은 동쪽 행랑채가 끝나는 곳에 있었다. 송강(宋江)은 머슴 하나가 등불을 들고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늘어선 낭하를 지나 한참을 가니 동쪽 행랑채가 나왔다. 그때 이미 송강(宋江)은 꽤나 취해 있었다. 자신은 손님의 예를 지키려고 애써도 걸음은 벌써 팔자걸음이었다. 송강(宋江)이 팔자걸음으로 비틀거리며 세수간으로 난 낭하를 지날 때였다. 어떤 몸집 큰 사내가 무언가를 껴안고 다가오고 있었다. 학질이라도 앓아 한기가 든 탓인지 사내가 껴안듯 들고 오는 것은 불이 벌건 화로였다. 송강(宋江)도 그 사내를 보았다. 조심스레 지나간다고 지나갔으나 취해 비틀거리는 몸이라 자기도 모르게 화로의 손잡이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 갑작스러운 충격에 벌건 불덩이가 화로를 안고 있던 사내의 얼굴로 튀었다. 사내가 깜찍 놀라 화로를 내던지고 물러섰다. 비록 얼굴을 데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사내의 온몸에 식은땀이 번질거렸다. 성난 사내가 송강의 멱살을 거머쥐며 소리쳤다.

"이놈, 너는 누구냐? 나를 불고기로 만들 작정이냐?"

그 벽력같은 고함 소리에 이번에는 송강(宋江)이 깜짝 놀랐다.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아 무어라 할 말을 찾고 있는데, 등불을 들고 가던 머슴이 나섰다.

"이분에게 무례하게 굴지 마시오. 이분은 대관인(大官人)께서 가장 극진히 대접하는 손님이오."

그러자 사내가 코웃음과 함께 말했다.

", 손님 손님 하지 마라. 나도 처음 올 때는 손님이었지만 이제는 너희 대관인이 가장 꺼리는 놈이 되고 말았지 않으냐? 처음에는 잘 대접하다가 지금 와서는 마구잡이지. 사람 사이가 좋다 해도 천 날을 가지 않는다 하지 않더냐/"

그러고는 다시 송강을 때리려 했다. 등불 든 머슴이 등불을 놓고 둘 사이에 끼어 말렸지만 사내의 힘이 워낙 세어 잘 되지가 않았다. 그 바람에 송강(宋江)이 자칫하면 볼썽사나운 꼴을 당하게 되었을 무렵 갑자기 등불 셋이 빠르게 다가왔다. 시진(柴進)이 직접 달려온 것이었다.

"압사께서 돌아오시지 않아 이렇게 와 보았습니다.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시진(柴進)이 으르렁대는 사내를 제쳐 두고 송강에게 물었다. 안내하던 머슴이 송강을 대신해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일러바쳤다. 듣고 난 시진(柴進)이 껄껄 웃으며 사내에게 말했다.

"이봐, 덩치 큰 친구, 자네는 이분 압사님을 모르겠나?"

"압사면 다요? 제 놈이 운성현의 송 압사라도 되면 모를까?"

사내가 뒤틀린 목소리로 그렇게 받았다. 시진(柴進)이 더욱 크게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자네, 송 압사를 아나?"

"알지는 못하지만 세상에 도는 소문은 많이 들었소. 급시우 송공명이라면 천하가 다 아는 호걸 아뇨?"

"그 사람이 어째서 천하가 다 아는 호걸이던가?"

"말로는 다 할 수가 없지요. 그는 진짜 대장부로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한결같답니다. 내가 지금은 병이 들어 그렇지 낫기만 하면 당장 그를 찾아갈 겁니다."

사내가 거기까지 말하자 시진(柴進)은 다시 송강을 끌어넣었다. 송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내에게 말했다.

", 그럼 내 말을 잘 듣게. 이분이 바로 급시우 송공명일세."

"그게 정말이오?"

사내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놀라 물었다. 송강(宋江)이 조용히 대꾸하였다.

"그렇소. 내가 바로 송강이오."

그러자 사내는 한참이나 송강을 살피고 또 살피다가 넙죽 절을 하였다.

"오늘 뜻밖에도 형님을 뵙게 되니 어떻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저 같은 걸 어인 까닭으로 그토록 좋게 보시오?"

송강(宋江)이 겸손하게 마주 절하며 물었다. 사내는 그제야 송강에게 함부로 군 게 부끄러운지 땅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조금 전의 무례함을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실로 눈이 있으면서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송강(宋江)이 그를 일으켜 세우며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성과 이름은 어찌 되오?"

"저는 청하현에 사는 무송(武松)입니다. 둘째로 태어났다고 무이랑(武二郞)이라고도 하지요. 여기 온 지는 한 해 남짓 됩니다."

"무이랑의 이름은 전부터 들어 왔소. 오늘 이렇게 만나 보게 되니 정말로 반갑소이다."

하마터면 그에게 크게 욕을 볼 뻔했지만 송강(宋江)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무송과의 만남을 기뻐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시진(柴進)이 둘에게 권했다.

"뜻밖의 호걸들이 서로 만나게 됐으니 쉽지 않은 일이오. 모두 함께 가서 이야기나 나눕시다."

송강(宋江)도 무송의 손을 잡아끌듯 해 셋은 후당으로 돌아갔다. 송강은 거기 있던 아우 송청에게도 예를 갖춰 무송을 보게 했다. 우락부락하게 군 무송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송강의 응대가 여간 은근하지 않았다. 시진(柴進)이 무송에게 앉기를 권하자 송강이 얼른 자신의 자리까지 내놓았다. 무송이 어찌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겠는가. 한참이나 사양하던 끝에 셋째 자리에 가 앉았다. 시진(柴進)이 술상을 다시 봐 오게 해서 셋은 이내 흥겹게 마시기 시작했다.

송강(宋江)은 불빛 아래서 무송의 생김새를 살펴볼수록 그가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서 여러 호걸들을 만나 보았지만 무송처럼 훤칠하고 활달한 인물은 흔치 않았던 것이다. 술잔이 몇 순배 돌기도 전에 송강(宋江)은 무송에게 물었다.

"그래, 무이랑(武二浪)은 어찌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들은 소문에다 그새 겪은 인품으로 더욱 송강에게 반한 무송(武松)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우는 청하현에 살았는데 하루는 술에 취해 그곳 기말(機密, 송대의 관직)과 싸움이 붙었지요. 성난 김에 한주먹 내질렀더니 그만 자빠져 정신을 잃고 말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가 죽은 줄 알고 허겁지겁 달아나 이곳 대관인 댁에 와 숨었습니다. 이제 한 일 년쯤 되지요. 그런데 나중에 소문을 들어 보니 그놈이 죽지는 않았다는군요. 그래서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 형님이나 찾아볼까 하는데 덜컥 학질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까 화로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도 그걸로 땀을 빼 학질을 떼어 볼까 해서였지요. 그런데 형님에게 부딪혔을 때 놀라서였는지 땀이 쭉 빠지더니 이제는 아주 좋아졌습니다."

무송(武松)이 그 말에 이어 고마움의 뜻까지 내비치자 송강(宋江)은 더욱 흐뭇했다. 잘하지 못하는 술이지만 마다 않고 잔을 받으니 술자리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삼경 무렵 해 술자리가 끝나자 송강(宋江)은 굳이 무송을 자기가 거처하는 서쪽 집채로 데려갔다. 무송(武松)도 그런 송강이 싫지 않아 이끄는 대로 따르니, 비록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되었지만 둘의 정은 십 년이나 사귀어 온 사이처럼 되었다. 시진(柴進)의 대접은 극진했다. 이튿날 송강(宋江)이 일어나자 시진은 양과 돼지를 잡고 다시 잔치를 벌였다. 덕분에 송강 형제는 쫓기고 숨어 그곳까지 오는 동안의 피로와 근심을 깨끗이 씻어 내고 편히 쉴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송강(宋江)은 무송의 차림이 추레한 걸 보고 가지고 있던 은자를 내어 옷을 지어 주려 했다. 시진(柴進)이 그걸 알자 펄쩍 뛰며 막았다. 그리고 좋은 비단 한 필을 내어 세 사람 모두에게 옷 한 벌씩을 지어 주었다. 그러면 시진은 무엇때문에 무송을 송강과는 달리 별로 좋지 않게 대접했을까? 그 까닭은 시진에게보다는 무송에게 있었다는 편이 옳았다. 그도 처음 왔을 때는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았으나 탈은 그의 고약한 술버릇이었다. 술을 많이 마시는 데다 성정이 거칠어 머슴들이 조금이라도 소홀한 데가 있으면 거침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렇게 되니 얼마 가지 않아 시진의 장원 안에서 무송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직접 무송의 주먹맛을 본 머슴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머슴들도 그 골치 아픈 손님을 싫어하고 피했다. 그리고 주인인 시진에게는 틈이 날 때마다 무송의 그른 짓만 일러바쳤다. 시진(柴進)도 사람마다 무송을 헐뜯자 아무래도 그와 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내놓고 내쫓지는 않았으나 대접은 절로 소홀해졌다. 그게 송강이 찾아들 무렵 무송(武松)이 떨어져 있던 처지였다. 하지만 송강이 오면서부터 무송의 형편도 달라졌다. 송강(宋江)이 밤낮으로 그를 끼고돌자 시진도 그전같이 대접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송강과 같이 대접하니 며칠 안 되어 무송(武松)은 신수가 훤해지고 앓던 병도 나았다. 짧은 기간인데도 무송(武松)이 그토록 깊이 송강을 따르게 된 까닭에는 그런 데 대한 고마움도 틀림없이 있었다.

무송(武松)이 송강과 함께 지낸 지 한 보름이나 됐을 때였다. 그사이 고향 생각이 점점 더해진 무송(武松)은 송강과 시진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친형을 만나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아직은 돌아가기 이른 듯하다며 말렸으나 무송(武松)은 듣지 않았다.

"너무 오래 형님의 소식을 모르고 지낸 터라 꼭 가 봐야겠습니다."

두 번 세 번 붙들어도 무송이 그렇게 나오자 송강도 말리기를 그만두었다.

"무이랑(武二郞)이 굳이 가기를 고집하니 더는 붙들 수가 없구려. 틈이나거든 다시 돌아와 만날 수 있기를 빌겠소."

송강(宋江)이 그렇게 놓아주자 시진도 더는 붙들지 않았다. 이에 무송(武松)은 송강과 시진에게 작별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시진(柴進)이 은자를 내어 무송이 돌아갈 때 쓸 여비를 주었다.

"고맙습니다. 여러 가지로 대관인께 걱정만 끼쳐 드렸습니다."

무송(武松)은 그런 감사와 함께 시진의 집을 나섰다. 시진(柴進)은 다시 술과 고기를 내어 길 떠나는 무송을 위로했다. 새로 지은 비단옷에 흰 범양 전립을 쓰고, 등에는 보따리를 맨 무송이 지팡이 삼아 쓸 몽둥이를 끌며 떠나려는데 송강(宋江)이 아쉬운 듯 말햇다.

"이보게, 아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네."

그러나 아무래도 그냥을 보낼 수 없었던지 자기 거처방으로 돌아가 은자 몇 냥을 챙긴 위 무송을 뒤쫓았다.

"여보게, 같이 가세. 우리 형제가 아우를 몇 마장만 바래다주겠네."

송강(宋江)이 아우 송청을 데리고 따라나서며 그렇게 소리치자 무송의 얼굴에는 다시 한번 감격의 빛이 스쳤다.

"대관인, 조금만 전송해 주고 얼른 돌아오겠습니다."

송강(宋江)은 문께에서 시진에게 한마디하고 장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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