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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26화

Bollnow 2025. 2. 5. 10:28

이튿날이 밝았다. 졸개 하나가 객관으로 와 알렸다.

"임 교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오용(吳用)이 조개에게 나지막이 말해 주었다.

"그 사람이 살펴보러 왔으니 일은 제 계책대로 되겠습니다."

그러나 조개(晁蓋)는 미처 그 까닭을 물어볼 틈도 없이 다른 여섯 사람과 함께 임충을 맞으러 나갔다. 조개와 더불어 임충을 객관 안으로 맞아들인 오용(吳用)이 공손히 감사의 뜻부터 표했다.

"어젯밤에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절을 올려 감사드려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자 임충(林冲)이 펄쩍 뛰며 오히려 낯없어 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여러 호걸분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비록 받들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제 자리가 그만큼 높지 못하니 어쩌겠습니까? 그저 너그럽게 보아주시기를 빌 뿐입니다."

오용(吳用)이 때를 놓치지 않고 임충의 속마음을 건드려 보았다.

"저희가 비록 재주 없으나 나무와 풀같이 느낌조차 없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를 아껴 주시는 임 두령님의 마음을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그 은혜만도 결코 얕지 아니합니다."

그때 조개(晁蓋)가 나서 임충에게 윗자리를 권했다. 임충(林冲)이 어찌 그런 겸양을 받아들이겠는가. 두 번 세 번 권해도 듣지 않고 기어이 조개를 윗자리에 앉게 했다. 임충(林冲)은 오용을 비롯한 여섯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란히 아랫자리에 앉았다.

"교두의 크신 이름은 오래전부터 들어 왔으나 오늘 이렇게 만나니 정말 뜻밖입니다."

모두 자리를 정하고 앉자 조개(晁蓋)가 먼저 임충을 향해 그렇게 입을 뗐다. 임충(林冲)이 공손히 그 말을 받았다.

"제가 동경에 있을 때도 벗을 사귀는 데는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존안을 뵙고 보니 평생의 원이 다 풀린 듯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와 뵙고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저를 그토록 좋게 보아주시니 무어라 고마움을 나타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개가 그렇게 겸양으로 받는데 오용(吳用)이 끼어들어 불쑥 임충에게 물었다.

"제가 듣기로 교두께서 동경에 계실 때는 대단한 호걸이셨다더군요.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고구(高俅)와 사이가 나빠져 모해를 입게 되었는지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또 들으니 창주에서 대군의 말먹이풀 쌓아 둔 걸 몽땅 태웠는데 그것도 고구의 못된 계책 때문이었다지요? 그런데 이곳 산채에는 누구의 천거로 오게 되었습니까?"

"지금도 고구(高俅) 그놈이 한 짓을 생각하면 온몸의 터럭이 일일이 곤두서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어떻게 그 원수를 갚아야 할지........ 제가 이곳에 와서 몸을 숨기게 된 것은 시 대관인(柴 大官人)이 천거해 주신 덕분입니다."

임충(林冲)이 간략하게 오용의 물음에 대답했다. 오용(吳用)이 그 말을 받아 다시 물었다.

"시 대관인이라면 저 소선풍(小旋風) 시진 말입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그때 조개(晁蓋)가 흠모하는 눈길로 말했다.

"나도 시 대관인이 의를 위해서라면 재물을 아끼지 않으며 사방의 호걸들을 항시 기꺼이 맞아들인단 소리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소. 대주황제(大周皇帝)의 적파(嫡派) 자손이라더군요. 그를 한번 만나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오용(吳用)이 조개를 이어 물음을 계속했다.

"그 시 대관인이라면 이름이 세상에 널리 떨쳐 울리고 소문이 사방에 퍼져 있는 분 아닙니까? 교두의 무예가 남보다 빼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 산채로 천거했겠습니까? 이 오용이 함부로 말하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이 산채의 첫째 두령은 마땅히 힘 교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고 또 천거해 주신 시 대관인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길 같습니다."

"선생의 좋은 이야기 고맙습니다만, 제게도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저는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큰 죄를 짓고 시 대관인께 갔으나 저로 인해 그분이 해를 입는 게 싫어 제 스스로 산채에 들기를 원했지요.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이곳에 와서 보니 이 임충(林冲)은 갈 곳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넷째 두령의 자리가 낮고 하찮아서가 아니라 왕륜(王倫)의 마음을 믿지 못해서입니다. 말로 다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한마디로 왕륜(王倫)은 결코 함께 무슨 일을 꾀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짐작대로 오용(吳用)이 건드리기 무섭게 임충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오용(吳用)은 아무 내색 않고 알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왕 두령은 사람을 맞아들일 때 보면 아주 부드러워 보이는데, 마음이 그토록 좁고 비뚤어져 있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구려. 오늘 이 산채에 여러 호걸들이 오셔서 서로 돕게 된 것은 비단옷에 꽃수를 놓는 격이요, 말라 들어가는 새싹에 단비가 오는 것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속 좁은 위인은 저보다 똑똑하고 잘난 인물을 시기하는 마음뿐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이 힘으로 자기를 억누를까 겁이 나서지요. 지난밤 여러분께서 관병들을 쳐부순 이야기를 할 때 왕륜(王倫)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받아들일 뜻이 없음이 제 눈에는 뚜렷이 비쳤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관 아래의 객관에 쉬게 한 겁니다."

오용(吳用)이 얼른 그런 임충의 말을 받았다.

"왕 두령의 속셈이 이미 그러하다면 우리는 더 기다릴 것도 없구려. 달리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가야겠소이다."

"아닙니다. 여러 호걸분들은 결코 딴 곳을 찾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임충(林冲)도 알아야 할 것은 알지요. 실은 제가 이렇게 찾아 온 것도 혹시 여러분이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할까 봐 걱정이 돼서였습니다. 그걸 미리 말리려고 이렇게 온 겁니다. 오늘 한 번 더 왕륜(王倫)이 하는 수작을 봅시다. 그가 하는 말이 전날과 달라 이치에 맞다면 더 따질 게 없지요. 그러나 만약 한마디라도 되잖은 소리를 한다면 이 임충이 알아서 모든 걸 처리하겠소!"

임충(林冲)이 결기 서린 말로 그렇게 나왔다. 조개(晁蓋)가 감격 섞어 말했다.

"임 두령께서 그토록 우리를 생각해 주시니 다만 그 후의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새로이 얻은 형제 때문에 예전의 형제들과 사이가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약 받아들여 줄 만하면 받아들이시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는 그 즉시로 떠나겠습니다."

오용(吳用)이 조개에 이어 그렇게 보탰다. 임충(林冲)이 더욱 엄숙하게 잘라 말했다.

"그건 선생의 말씀이 맞지 않소. 옛사람이 이르기를, 원숭이는 원숭이를 아끼고 호걸은 호걸을 아낀다 했소. 그런데 하물며 형제 같은 여러분이겠소.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이 임충이 하는 양이나 지켜보아 주시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떠나면서 뜻있는 한마디를 더했다.

"이따가 다시 뵙도록 하겠소."

그런 임충을 일행은 문밖까지 배웅했다. 오래잖아 산 위에서 졸개 하나가 내려와 조개를 찾아보고 말했다.

"오늘 산채의 두령들께서 여러분을 산 남쪽의 물가 정자로 청하셨습니다. 거리서 잔치가 있을 거랍니다."

"곧 올라가 뵙겠다고 이르시오."

조개(晁蓋)가 그렇게 그 졸개를 돌려보낸 뒤에 오용에게 물었다.

"선생이 보기에는 이번 자리가 어떨 것 같소?"

임충이 남기고 간 말 때문에 물어본 것이었다. 오용(吳用)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 마음 놓으십시오. 이번 모임에서는 산채의 주인이 가려질 겝니다. 오늘 임 교두는 반드시 왕륜의 속셈을 힘으로 억누르겠지요. 만약 그의 마음이 약해져 있으면 제가 세 치 썩지 않은 혀로 그를 부추겨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할 작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몸에 무기를 숨겼다가 제가 손을 들어 수염을 쓰는 걸 신호로 임 교두를 돕도록 하지요."

이미 그날 술자리에서 있을 일을 훤히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꾀를 쓰는 일이라면 오용이라, 조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은근히 기뻐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진시(辰時)가 지나자 산채에서 서너 번이나 사람을 보내 산 위로 오르기를 청해 왔다. 조개(晁蓋)와 그를 따르는 호걸들은 각기 몸속에 무기로 쓸 만한 것을 감춘 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잔치에 나갈 채비를 했다. 산채의 셋째 두령 격인 송만(宋萬)이 직접 말을 타고 맞으러 나오고 졸개들은 일곱 채의 가마를 준비해 오르기를 권했다. 조개(晁蓋)를 비롯한 일곱 호걸은 조금 사양하는 척하다가 모두 가마에 올랐다. 산 남쪽 물가 정자에 이르니 벌써 잔치를 위한 장막이 처져 있었다. 그들이 장막 앞에서 가마를 내리자 왕륜(王倫), 두천(杜遷), 임충(林冲), 주귀(朱貴)가 한꺼번에 나와 맞고 정자에 오르기를 청했다. 주인과 손님이 자리를 나누어 앉는데 왕륜을 비롯한 산채의 두령들은 모두 왼쪽 주인 자리에 앉고 조개를 비롯한 일곱 호걸은 모두 오른쪽 손님 자리에 앉았다. 계단 아래는 졸개들이 각기 순서대로 자리를 잡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곧 술잔이 돌고 음식이 번갈아 나왔다. 조개(晁蓋)는 왕륜과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천하의 호걸을 끌어모으는 일을 꺼내게 되었다. 왕륜(王倫)이 얼른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려 딴전을 피웠다. 조개의 패거리를 받아들일 뜻이 없음을 다시 한번 간접으로 밝힌 것이었다. 오용(吳用)은 가만히 임충을 살펴보았다. 임충(林沖) 또한 왕륜이 조개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세밀히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길은 결코 곱지가 않았다. 마시며 떠드는 사이에 한나절이 지나갔다. 오후가 되자 왕륜(王倫)이 고개를 들어 졸개들에게 무어라 눈짓을 했다. 졸개 서넛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 큰 쟁반 하나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주먹만 한 은덩이 다섯 개가 얹혀 있었다. 왕륜(王倫)이 그걸 보자 몸을 돌려 조개에게 말했다.

"여러 호걸께서 이곳을 찾으시어 의()로 함께 어우르기를 청하신 것은 고마우나 한스러운 것은 이 산채가 너무 좁고 구석진 것입니다. 한낱 도랑물에 지나지 않는 곳에 어떻게 이토록 많은 용()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작으나마 이 은덩이를 예()로 마련했으니 웃으며 거둬 주시고 따로이 큰 산채를 찾아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때는 기꺼이 아랫것들과 함께 저도 그리로 찾아들겠습니다."

말은 비단결 같지만 뜻인즉 받아 줄 수 없으니 딴 데로나 가 보라는 거였다. 조개(晁蓋)는 속으로 울컥 치미는 게 있었으나 내색 않고 점잖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저희가 듣기로 이 산채가 의롭고 재주 있는 호걸들을 받아 준다기에 특히 함께 지내보고자 무리 지어 찾아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히 받아들이실 수 없다면 저희는 스스로 물러가겠습니다. 지금껏 잘 대접해 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은덩이까지 어떻게 받아 가겠습니까? 감히 가진 것 자랑하는 건 아닙니다만 재물이라면 저희도 쓸 만큼은 있습니다. 그 은덩이는 이만 거두십시오. 저희는 이제 이곳을 떠날까 합니다."

"무얼 그리 사양하십니까? 저희가 이러는 것은 이 산채가 여러분 호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아니라 양식이 모자라고 거처할 곳이 좁아서 못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혹시라도 뒷날 불편을 끼쳐 여러분을 섭섭하게 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그보다 더 큰 낭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붙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왕륜(王倫)이 그렇게 천연덕스레 주워섬겼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임충(林冲)이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부릅떠 왕륜을 쏘아보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지난번 내가 왔을 때도 양식이 모자라고 거처할 곳이 좁다고 하더니, 이제 조()형과 여러 호걸들이 찾아왔는데도 또 그따위 수작이냐?"

그때 오용(吳用)이 나서서 임충을 말리는 척했다.

"임 두령은 화를 참으시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산채의 정분을 깨려 함이 아니외다. 이번에 왕 두령은 예()를 다해 우리를 대접하고, 이제는 또 여비까지 내려 주시었소. 우리는 이만 이 산채를 떠날 테니 부디 서로 간에 의() 상하는 일은 없기 바라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말은 얌전해도 임충을 은근히 부추기는 소리였다. 임충(林冲)은 이미 뽑은 칼이라 그대로 왕륜을 몰아댔다.

"너는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는 놈이며, 겉은 깨끗한 척하면서 속은 더럽기 짝이 없는 소인배다. 오늘 정말로 이 산채에서 쫓아내야 할 건 바로 네놈이다!"

"저 짐승 같은 놈이 취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개소리냐? 네놈이 감히 아래위를 뒤집고 내게 덤비려느냐?"

왕륜(王倫)도 지지 않고 임충을 마주 꾸짖었다. 임충(林冲)이 더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네놈은 과거에 떨어진 한낱 궁한 선비로 가슴속에 든 학문도 없으면서 어찌 이 산채의 임자 노릇을 하려 드느냐?"

오용(吳用)이 그런 왕륜과 임충의 싸움에 기름을 부었다. 두 사람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조개를 부르며 말했다.

"형님, 공연히 우리가 이 산채로 와서 두령들 간에 다툼만 일게 한 것 같습니다. 어서 작별하고 배를 내 떠나시지요."

그 말에 조개를 비롯한 일곱 호걸이 선뜻 몸을 일으켰다. 임충(林冲)은 급했다. 만약 그들이 그냥 떠나 버린다면 자신도 앞길이 막막했다. 무예야 왕륜, 송만, 두천이 한꺼번에 덤빈다 해도 겁날 게 없지만 졸개들까지 모두 저희 두령을 편들어 덤비면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떠나려는 이들에게 먼저 입을 뗀 것은 왕륜이었다.

"고정들 하시지요. 이 술자리가 끝나거든 떠나도록 하십시오."

제 딴에는 아직도 말로 어떻게 수습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때 임충(林冲)이 술상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켰다. 품속에서 한 자루 날카로운 칼을 빼내 달려드는 품이 화가 나도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임충이 술상을 걷어차며 칼을 빼내 왕륜에게 덤벼드는 걸 보고 오용(吳用)은 가만히 손을 들어 수염을 쓸었다. 미리 정한 그 신호에 조개를 비롯한 나머지 여섯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조개(晁蓋)와 유당(劉唐)은 얼른 정자 위로 뛰어 올라가 왕륜을 가로막고 임충을 말리는 척했다.

"이래서는 아니 되오! 말로 하시오. 임두령, 윗사람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오용(吳用)도 그렇게 임충을 말리는 척했다. 공손승(公孫勝)도 오용을 거들어 왕륜과 임충에게 권했다.

"우리 때문에 의()가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완씨 삼 형제는 또 그들대로 할 일을 했다. 곧 완소이(阮小二)는 두천을 막아서고 완소오(阮小五)는 송만을 막아섰으며 완소칠(阮小七)은 주귀를 막아섰다. 만약 그들이 왕륜을 편들어 나선다면 금세라도 손을 쓸 것 같은 기세였다. 그 돌연한 사태에 놀라고 겁먹은 졸개들은 그대로 입이 얼어붙은 듯 끽소리 못 내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사이 왕륜의 멱살을 움켜쥔 임충(林沖)이 무섭게 소리쳤다.

"너는 한낱 시골의 비렁뱅이 선비로 송만(宋萬)과 함께 운 좋게 이 산채를 차지한 놈이다. 시대관인께서 네게 노자를 대어 주고 보살펴 준 인연에 의지해 나를 이곳으로 천거해 보냈을 때 네놈이 어쨌느냐? 이 핑계 저 핑계로 사람을 괴롭히더니, 이제 여러분의 호걸들이 오셨는데 또 산 아래로 쫓아 보내려 들어? 어디 이 양산박(梁山泊)이 네놈의 물건이라도 된단 말이냐? 재주 있고 의로운 호걸들을 시기하는 너같이 나쁜 놈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두어 무엇에 쓰랴. 통도 크지 못하고 별 재주도 없는 주제에 무슨 놈의 첫째 두령이며 산채의 임자냐?"

두천(杜遷)과 송만(宋萬), 주귀(朱貴)는 원래 임충과 왕륜 곁으로 가서 말리려 했다. 그러나 범 같은 완씨 삼 형제가 막고 있으니 어떻게 움직여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왕륜(王倫)도 그제야 일이 크게 잘못된 걸 알았다. 길을 찾아 도망치려 해 보았으나 조개(晁蓋)와 유당(劉唐)이 길을 막고 있어 그것도 뜻대로 안 되었다. 임충에게 멱살을 잡혀 캑캑거리다 겨우 한마디 내질렀다.

"내 심복은 다 어디 갔느냐!"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그에게도 수족 같은 졸개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떻게 구해 보려 해도 임충의 기세가 워낙 사나워 감히 내닫지를 못했다. 그사이 임충(林沖)은 왕륜을 끌어내 그 죄목을 낱낱이 꾸짖은 뒤에 한칼에 베어 버렸다. 조개를 비롯한 일곱 호걸은 임충(林沖)이 왕륜을 베는 걸 보고 일제히 감추었던 무기를 빼 들었다. 임충(林沖)이 다시 왕륜의 목을 잘라 높이 쳐들었다. 송만과 두천, 주귀가 시퍼렇게 질려 무릎을 꿇으며 입을 모아 말했다.

"저희들은 모두 형님을 따르겠습니다. 부디 버리지 마시고 개나 말처럼이라도 써 주십시오."

조개(晁蓋)가 얼른 그런 그들을 부축해 일으켰다. 오용(吳用)은 피가 튀어 시뻘건 교의를 끌어다 거기에 임충을 앉히며 여러 졸개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직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왕륜처럼 만들어 주겠다. 오늘부터 이 산채의 어른은 여기 계신 임 교두시다!"

임충(林沖)이 펄쩍 뛰며 그 교의에 앉기를 마다했다.

"아니오, 그건 선생이 틀렸소. 나는 오늘 의기로 어질지 못한 자를 죽인 것이지, 이 자리에 앉자고 왕륜을 죽이지는 않았소. 오형은 내게 첫째 두령 자리에 앉으라고 하나, 만약 내가 거기 앉는다면 천하 영웅들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아무리 어거지로 권한다 해도 죽을지언정 이 자리에 앉을 수는 없소! 그러지 말고 내 말을 한번 들어 보시오. 우리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임충(林沖)이 그렇게 소리치자 주인과 손님의 구별 없이 입을 모아 말했다.

"두령의 말씀이라면 누가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시오."

임충(林沖)이 비로소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임충은 비록 금군에 몸담고 있었으나 죄를 짓고 쫓기다 보니 이곳까지 이르게 되었소. 하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오늘 왕륜을 죽인 것은 왕륜이 속이 좁고 현능(賢能)한 사람을 시기하여 천하의 호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의 자리를 노린 건 결코 아니었소. 오히려 이 자리는 여기 조() 형에게 가야 할 듯싶소. 조 형은 의를 위하여는 재물을 아끼지 않는 데다 지혜와 용기를 아울러 갖추었소. () 형은 그 이름만 들어도 엎드려 따르지 않는 자가 없소. 의기를 중히 여겨 이 조 형을 우리 산채의 으뜸으로 모시고 싶은데 여러분의 뜻은 어떠시오?"

그러자 이번에도 여럿이 입을 모아 말했다.

"두령의 말이 매우 이치에 맞습니다."

그때 조개(晁蓋)가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아니 되오. 예로부터 이르기를, 손님이 힘이 있다 해서 주인을 억누르는 법은 아니라 했소. 이 조개(晁蓋)는 그저 멀리서 온 손일 뿐인데 어떻게 이 산채의 윗자리를 차고앉을 수 있단 말이오?"

그래도 임충(林沖)은 듣지 않고 조개를 떠밀다시피 해 첫째 두령의 교의에 앉혔다.

"이미 오늘의 일은 결정이 났으니 더 사양하지 마십시오."

임충(林沖)은 조개에게 그렇게 말해 놓고 다시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만약 여기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왕륜을 본보기로 삼으리라!"

조개(晁蓋)는 두 번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첫째 두령의 교의에 앉았다. 임충(林沖)은 모두에게 소리쳐 조개를 절하며 보게 했다. 그리고 졸개들에게 큰 잔치를 준비하게 함과 아울러 왕륜의 시체를 묻고 산채 밖에 나가 있는 크고 작은 두령들까지 모조리 불러들이라 일렀다. 모든 지시를 끝낸 뒤 임충(林沖)은 조개를 가마에 태우고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대채 안으로 다시 모셔 들었다. 취의청에 이르러 조개(晁蓋)가 가마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그를 부축해 첫째 두령의 자리에 앉혔다. 향로에 불을 지핀 임충(林沖)이 피어오르는 향내 속에 엄숙히 말했다.

"이 임충은 한낱 보잘것없는 사내로, 창봉이나 조금 쓸 줄 알뿐, 배움도 재주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다행히도 이같이 여러분 호걸이 오셔서 대의는 이미 바로잡았으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오학구 선생이 여기 계시니, 군사(軍師)로 모시어 병권을 쥐게 하고 장졸들을 부리게 함이 좋을 듯합니다. 따라서 오 선생을 둘째 두령의 자리에 앉히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사람에 앞서 오용(吳用)이 먼저 겸양의 말을 했다.

"이 오 아무개는 촌구석에서 글줄이나 읽었다고는 하지만 천하를 경륜할 만한 재주는 못 됩니다. 손자, 오자의 병서를 읽었으되 아직 작은 공도 세운 게 없는데 어찌 감히 여러분의 윗자리에 앉겠습니까?"

"일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겸양하지 마시고 어서 둘째 자리에 앉도록 하십시오."

임충(林沖)이 다시 그렇게 권하고 다른 호걸들도 떠들썩하게 임충을 지지했다. 이에 오용(吳用)도 하는 수 없이 둘째 두령의 의자에 가 앉았다. 임충(林冲)이 다시 소리 높여 말했다.

"공손승(公孫勝) 선생은 셋째 자리에 앉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는 아니 되오. 만약 그렇게 사양만 하시면 나도 이 자리에서 물러나겠소!"

이번에는 조개(晁蓋)가 나서서 공손승을 대신해 말했다. 조개가 나선 것은 자기 편 사람들이 양산박의 첫재 둘째 셋째 자리를 모두 차지하는 게 마음에 걸러서였다. 셋째 두령의 자리라도 원래 양산박에 몸담고 있던 임충에게 내주고 싶었으나, 임충은 임충대로 미리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이었다.

"() 형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공손승(公孫勝) 선생은 이미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군사를 잘 부리고 비바람을 일으키는 재주까지 지닌 분이십니다. 누가 그분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공손승(公孫勝)이 직접 나서서 사양했다.

"제가 비록 술법을 약간 안다 하나 큰 재주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같이 높은 두령의 자리에 앉겠습니까?"

"이번에 관군을 쳐부순 것도 선생의 신통한 도술이 있어서였으니, 조 형과 오 선생, 공손승 선생은 솥의 세 다리와 같아 어느 한 분도 빠져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공손승(公孫勝) 선생은 사양 마시고 셋째 두령의 자리에 앉도록 하십시오."

임충(林沖)이 그렇게 우겨 기어이 공손승을 셋째 자리에 앉혔다. 임충(林沖)은 다시 넷째 자리도 다른 호걸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다른 호걸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조개(晁蓋)와 오용(吳用), 공손승(公孫勝)이 입을 모아 말했다.

"임두령께서 솥의 세 다리에 견주어 말하시니 명을 어기지 못해 우리 셋이 모두 윗자리에 앉기는 했습니다만, 더는 안 됩니다. 두령께서 다시 자리를 양보하신다면 우리 세 사람도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임충을 넷째 자리에 끌어 앉히니 임충(林沖)도 그것까지는 마다하지 못했다. 조개(晁蓋)가 다시 주인 대접으로 두천과 송만을 불렀다.

"다음 자리는 두 두령께서 앉도록 하시오."

그러나 두천(杜遷)과 송만(宋萬)은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감히 다섯째 여섯째 자리에 앉으려 들지 않았다. 한참 승강이를 벌인 뒤에 유당(劉唐)이 다섯째, 완소이(阮小二)가 여섯째, 완소오(阮小五)가 일곱째, 완소칠(阮小七)이 여덟째가 되었다. 두천(杜遷)은 아홉째 자리에 이르러서야 겨우 응낙했고, 송만(宋萬)은 열째, 주귀(朱貴)는 열한 번째가 되었다. 이렇게 열한 명의 큰 두령이 순서를 정해 앉자, 칠백 졸개들이 모두 나와 새 두령들에게 절하고 그 마당에 늘어섰다. 양산박(梁山泊)은 이제 예전의 좀도둑 떼가 아니라 위계질서와 명분을 갖춘 무력 집단으로서 첫발을 내디디게 된 것이었다. 모든 게 정해지자 조개(晁蓋)가 여럿을 향해 말했다.

"산채의 여러분은 들으시오. 오늘 임 교두가 나를 산채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 오학구를 군사(軍師)로서 공손승 선생과 함께 병권을 쥐게 했소. 임 교두는 산채의 모든 일을 두루 살피는 일을 맡을 터이니, 나머지 여러분은 전에 하던 일을 그대로 해 주시오. 산채 앞뒤의 길목이나 목책을 지키는 일이며, 나루와 물길을 살피는 일에 이르기까지 잘못됨이 있어서는 아니 되오.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대의를 이루도록 해 주시오."

그리고 다시 따라온 가솔들과 졸개들이 거처할 곳을 정한 뒤, 가져온 생신강(生辰鋼)의 금은보화를 풀어 크고 작은 두령들과 졸개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왕륜의 죽음으로 겁에 질려 있던 졸개들은 새로운 두령들의 그 같은 대접에 감격했다. 지난날과 달리 의()를 아는 무리로 새롭게 살 것을 다짐했다. 조개(晁蓋)는 소와 말을 잡아 천지신명에게 크게 제사를 드리고, 양산박(梁山泊)이 의로 맺은 형제들로 들어차게 된 걸 잔치로 즐겼다.

그날 밤늦게서야 끝난 잔치는 그 뒤로도 며칠이나 더 이어졌다. 그러나 무작정 마시고 즐기는 놀자판은 아니었다. 조개(晁蓋)와 두령들은 술잔을 나누면서도 양산박을 위한 계책을 짜내는 데 골몰했다. 그 의논에서 나온 결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창고를 점검해 군량을 확보한다.

둘째, 양산박(梁山泊)을 둘러싼 돌성과 나무 울타리를 든든하게 고친다.

셋째, , , , 화살 같은 무기와 투구, 갑주를 더 많이 마련해 관군과의 싸움에 대비하자.

넷째, 크고 작은 배를 더 장만하고 졸개들에게 물 위에서의 싸움을 교련시킨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스스로를 지킬 채비를 꼼꼼히 갖추니 양산박(梁山泊)은 임자인 두령들뿐만 아니라 물과 땅까지 새로워진 듯했다.

흥청거림 속에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임충(林沖)은 조개가 산채의 일을 너그럽게 처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라온 사람들의 가솔까지도 세심하게 보살펴 주는 걸 보자 문득 동경에 두고 온 아내 생각이 났다. 떠나올 때 슬피 울다 혼절하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며칠을 망설이다 조개를 찾아보고 속을 털어놓았다.

"제가 이 산채로 들어온 뒤로 아내를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매양 있었습니다만, 왕륜의 속셈을 알 수 없어 이제껏 미뤄 오고 있었습니다. 떠나올 때 슬피 울다 혼절해 쓰러지는 걸 보고 동경에 남겨 두었는데 지금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릅니다."

"아우의 가솔이 동경에 있다면 어찌하여 사람을 보내 데려오지 않나? 어서 빨리 집으로 보내는 글을 쓰게. 그러면 사람을 보내 몰래 산채로 불러들이겠네. 그 길이 아마도 자네를 위해 가장 나을 것이네."

조개(晁蓋)가 선뜻 그렇게 받았다. 이에 임충(林沖)은 그 자리에서 글 한 통을 쓴 뒤 평소 가까이 두고 부리던 졸개 둘에게 주어 산을 내려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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