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 23화
제주 부윤(府尹)은 북경의 양중서로부터 공문을 받고 양지와 나머지 여덟 도둑을 잡으려고 밤낮으로 애를 썼다. 그러나 자취도 찾지 못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다시 문지기가 들어와 아뢰었다.
"동경의 태사부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아주 급한 공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말을 들은 부윤(府尹)은 한층 더 걱정이 되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생신강(生辰綱)을 잃은 일에 대한 것이다.'
그런 짐작으로 그 사람을 맞아들인 뒤 설설 기듯 말했다.
"그 일은 제가 이미 북경 대명부의 공문으로 읽어 알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도둑들을 찾고 있으나 아직 자취를 찾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일에 대해 작은 실마리라도 잡힌다면 즉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태사부에서 온 사람이 거들먹대며 말했다.
"저는 태사께서 특별히 뽑아 보내신 사람입니다. 떠나올 때 태사께서 몸소 나오시어 이르시기를 저더러 이곳 관아에 묵으면서 일이 해결되는 걸 살피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여덟 도둑과 도망친 양지(楊志)란 군관이 잡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열흘 안으로 그들을 끌고 태사부로 돌아오라는 분부셨지요. 만약 열흘 안으로 그들을 잡지 못하면 부윤께서는 사문도(沙門島, 산동의 아주 작고 궁벽한 섬)으로 쫓겨나시게 될 겁니다. 저도 태사부로 돌아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어찌 될지 모를 거구요. 부윤께서 정히 믿기지 않으시면 여기 태사께서 내리신 서찰을 읽어 보십쇼."
그러면서 채태사의 글을 내주었다. 그 말대로 엄한 분부가 담긴 글이었다. 글을 읽고 난 부윤(府尹)은 몹시 놀랐다. 그 자리에서 바깥을 향해 즙포인(緝捕人, 도둑 잡는 일을 맡은 관리)을 불러들이라 소리쳤다. 뜰 아래 있던 관리 중 하나가 기어드는 소리로 대답하며 발 앞으로 나와 섰다.
"너는 뭣 하는 놈이냐?"
부윤(府尹)이 그렇게 묻자 그 사람이 더욱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삼도(三都) 즙포사신 하도(何濤)올시다."
"전날 황니강에서 태사의 생신 예물 털린 일을 해결하라 했는데, 네가 바로 그 일을 맡은 놈이냐?"
부윤(府尹)이 역정부터 내며 그렇게 물었다. 부윤의 역정에 하도가 몸을 떨며 대답했다.
"이 하도(何濤)는 명을 받은 뒤로 밤잠 한번 제대로 자지 못하고 그 일에 매달려 왔습니다. 눈 밝고 솜씨 날랜 공인들을 황니강에 보내 탐지케 했지만 아직껏 종적조차 잡지 못해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는 제가 일에 게을렀음이 아니옵고, 정말로 어찌할 수 없어 그리되었습니다."
"무슨 소리냐? 예로부터 이르기를 위에서 죄지 않으면 아래는 게을러진다 했다. 나는 진사로 몸을 일으켜 이제 한 군의 제후에 이르기까지 쉬운 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동경의 태사께서 그 일로 또 사람을 보내시어 열흘을 기한으로 도둑들을 잡아 보내란 분부를 하셨다. 만약 그동안에 잡지 못하면 나를 파직시킬 뿐 아니라 사문도(沙門島)로 보내리란 엄명이시다. 너희들 즙포사신(緝捕使臣)들이 제대로 애쓰지 않아 화가 내게 미치게 된 것이다. 먼저 네놈들부터 기러기도 못 날아들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야겠다."
부윤(府尹)이 그렇게 으르렁거렸다. 말뿐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먹자 뜨는 사람을 부르더니 하도(何濤)의 뺨에 '아무 고을로 귀양'이라는 먹자를 쓰게 하는데 고을 이름 자리만 비워 놓았다. 먹자를 다 뜬 뒤 다시 부윤(府尹)이 소리를 높였다.
"하도(何濤)는 듣거라. 만약 정한 기일 안에 도적을 잡지 못하면 너는 중죄를 면하지 못하리라!"
마른날에 날벼락이라고, 갑자기 뺨에 먹자까지 뒤집어쓰게 된 하도(何濤)는 부윤 앞을 물러나기 바쁘게 공인들을 모조리 사신방(使臣房)으로 불러 모았다. 그러나 그때껏 못 잡은 도적을 잡는 수가 공인들을 들볶는다고 나올 리 없었다.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입을 떼 놓지 못했다.
"너희들이 관가의 돈만 헛되이 쓰고 일을 게을리해 이 지경이 되었다. 너희들은 이 뺨에 쓰인 먹자가 보이지도 않느냐?"
보다 못한 하도(何濤)가 그렇게 인정에 호소해 보았다. 공인들이 그제야 어물어물 입을 뗐다.
"저희들도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산속 허허벌판에서 장사치를 가장한 도둑 떼가 재물을 뺏고 산채에 숨어 버렸으니 어찌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 살펴 그 종적을 쫓는 도리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러잖아도 답답하던 하도(何濤)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더 다그친다고 될 일도 아니어서 한숨만 쉬며 사신방을 나왔다. 하도(何濤)는 그길로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이른 하도(何濤)가 뒤뜰 말뚝에 말고삐를 묶는데 그 아낙이 나와 놀란 소리로 물었다.
"아니 여보, 당신 뺨에 그게 뭐예요?"
"말 마시오. 전에 부윤께서 내게 황니강의 도둑들을 잡으란 분부를 하신 적이 있소. 거 왜, 북경의 양중서가 장인인 동경의 채태사에게 보내려던 생신 예물 열한 짐을 도둑맞은 일 말이오. 나는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보았으나 영 찾을 수가 없었소. 그런데 오늘 태사께서 사람을 보내 닦달하자 부윤이 나를 불러 그 일이 어찌 됐나 묻더구려. 내가 곧이곧대로 아직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했더니 내 뺨을 이 모양으로 만들고 말았소. 이제 나는 어디로 가게 될지, 아니 목숨이나 붙어 있을지 알 수 없게 되었소."
하도(何濤)가 처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아낙도 금세 울먹임 섞어 걱정을 했다.
"그럼 이제 어찌하면 좋단 건가요? 무엇을 해야 되나요?"
그렇게 그들 내외가 주고받을 때였다. 하도의 아우 하청(何淸)이 형을 보러 왔다. 심사가 뒤틀려 있던 하도(何濤)가 대뜸 아우를 꾸짖고 나섰다.
"너는 무슨 일로 왔느냐? 또 노름 밑천이라도 뜯어 가려고 왔어?"
평소에도 노름방이나 기웃거리는 아우를 못마땅해하던 참이라 화풀이 삼아 지르는 소리였다. 그러나 하도의 아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런 하도를 눈짓으로 말리고 하청에게 말했다.
"도련님, 잠깐 저하고 부엌으로 가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리고 부엌으로 가 술잔까지 내주며 자못 은근하게 대접했다. 술 몇 잔에 기분이 좋아진 하청(何淸)이 형수에게 물었다.
"형수님, 형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게 말씀해 보십쇼. 무엇보다도 저는 형님의 친아우가 아닙니까?"
하도의 아낙이 기다린 것은 바로 그런 물음이었다. 하청(何淸)이 날건달로 노름방 뒷전이나 저자 골목을 싸다니는 중에 주워들은 게 남편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하도(何濤)의 아낙은 하청의 물음에 대답 않고 뜸을 들였다.
"도련님, 말도 마세요. 형님은 요즘 속이 제 속이 아니랍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듣자니 형님은 매일 돈을 보따리에 싸들고 다니신다는데 대체 어디로 가신답니까? 형제간에 얼굴도 잊을 지경입니다."
하청(何淸)이 그렇게 물어 오자 비로소 하도(何濤)의 아낙이 남편의 곤경을 털어놓았다.
"아직 모르시는군요. 바로 황니강에서 북경의 양중서(梁中書)가 동경의 채태사에게 보낸 생신 예물이 털린 일 때문이랍니다. 채태사가 부윤에게 열흘 말미를 주고 그 도적들을 잡아 올리라고 하자, 부윤(府尹)은 애꿎은 형님만 닦달하는 거지요. 만약 열흘 안으로 도적들을 잡지 못하면 얼굴에 먹자를 뜨고 멀리 귀양을 보내겠답니다. 도련님도 형님의 뺨에 쓰인 먹자를 보셨지요? 이제 가는 곳만 써넣으면 그만이에요. 그런 형님이신데 어찌 도련님과 마음 편히 술이나 마실 수 있겠어요. 제가 술상을 봐 드린 것도 도련님께서 그런 형님을 달리 생각지 마시라는 뜻이에요.'
"저도 도적들이 생신 예물을 털어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놈들 참, 어디로 숨었는지......"
듣고 난 하청(何淸)이 딱하는 듯 그렇게 받았다. 하도(何濤)의 아낙이 행여나 하는 기분에서 한 번 더 장소를 상기시켰다.
"바로 황니강(黃泥岡)에서 그랬답니다."
"그게 어떤 놈들인데요?"
"대추 장수로 꾸민 일곱 명이라는군요."
"아하, 그랬군요. 이왕 그들이 대추 장수 차림을 하고 있었다면 왜 사람을 풀어 잡지 않는답니까?"
하청(何淸)이 갑자기 껄껄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하도(何濤)의 아낙이 정색으로 쏘아붙였다.
"속 편한 소리 하지 마세요. 어디 있는지 알아야 잡든지 말든지 할 거 아네요?"
그래도 하청(何淸)은 웃음을 거두지 않고 대꾸했다.
"형수님, 너무 그러지 마십쇼. 형님은 평소 친형제에게 술 한잔 내지 않고 못 본 척하시다가 이제 일이 생기니까 엄살이군요."
"진작부터 좀 더 가깝게 지냈으면 이럴 때 그 도적놈들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실 수나 있지...."
그 말에 귀가 번쩍 트인 하도(何濤)의 아낙이 매달리듯 물었다.
"도련님, 그럼 도련님께서 그들이 간 곳을 아세요?"
"친형님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는데 아우 되어 마땅히 구할 방도를 내봐야겠지요."
하청(何淸)이 더욱 자신에 찬 말투로 그렇게 말해 놓고 몸을 일으켰다. 하도의 아낙은 그런 시동생을 잡아 술 몇 잔을 권한 뒤 밖으로 나갔다. 아내로부터 아우가 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하도(何濤)는 얼른 아우를 제 앞으로 불렀다.
"아우야, 네가 이미 그 도적들이 간 곳을 알고 있다면서 어찌 나를 구해 주지 않느냐?"
하도(何濤)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하청에게 말했다. 하청(何淸)이 어찌된 셈인지 갑자기 꽁무니를 뺐다.
"저는 영문을 모르겠군요. 그저 형수님과 긴찮은 이야기나 나누었을 뿐인데....제가 무슨 힘으로 형님을 구한단 말입니까?"
"얘야, 너무 서운한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지난날 다소 너를 멀리하기는 했다마는 형제간에 이럴 수가 있느냐? 부디 옛일을 잊고 내 목숨을 구해다오!"
하도(何濤)가 더욱 은근하게 형제의 정에 매달렸다. 그러나 하청(何淸)은 평소 건달로 돌아다니면서 형에게서 받은 구박에 뒤틀린 심사가 잘 풀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삐딱하게 형의 말을 받았다.
"형님은 눈 밝고 솜씨 날랜 공인들을 몇백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잖습니까? 왜 그들더러 잡으라 하시잖고 이 못난 아우에게 구해 달라고 궁상을 떠십니까?"
"그것들 이야기는 하지도 마라. 있으나 마나 한 것들이니까..... 그러지 말고 네가 아는 것이 있으면 제발 좀 말해 다오. 내 반드시 네게 무거운 상이 내리게 하마. 얘야, 부디......."
하도(何濤)는 형제의 정으로 안 되자 포상까지 들먹여 아우에게 사정을 했다. 그래도 하청(何淸)은 왼고개를 풀 줄 몰랐다.
"그놈들이 어디 갔는지 저는 몰라요!"
그러는 하청에게 하도(何濤)가 한 번 더 간곡하게 사정했다.
"너무 그리 나를 몰아대지 마라. 한 어머니의 배를 빌려 난 정으로라도 부디 나를 좀 도와 다오."
"필요없어요. 급하니까 이제 내게 도적 떼를 잡아 달라구요?"
하청(何淸)이 여전히 그렇게 뻗대는데 하도의 아낙이 남편을 거들어 말했다.
"도련님, 형제의 정분으로 어찌 그러실 수 있어요? 더구나 이 일은 태사께서 직접 사람을 보내 해결을 재촉하는 큰일 아녜요? 어서 말해 보세요."
평소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형수까지 거들고 나서자 하청(何淸)도 좀 누그러졌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걸 밝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형수님은 아시지요. 내가 노름을 한다고 형님이 얼마나 욕했는지 말입니다. 그래도 나는 형님이 두려워 감히 맞서지 못하고 술 밥 간에 언제나 남의 신세만 졌지요."
하청(何淸)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듣자 하도(何濤)는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얼른 품에서 은자 열 냥을 꺼내 탁자 위에 놓으며 한 번 더 아우를 달랬다.
"얘야, 우선 이 은자부터 거둬 둬라. 만약 그 도둑놈들을 잡기만 하면 금은 비단을 바리로 상 받도록 내가 힘쓰마."
그제야 하청(何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급하면 부처님 발을 안고 빌고, 일없으면 향조차 사르지 않는다더니, 형님이 바로 그렇군요.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이걸 받아 넣겠어요? 정히 이러시면 정말로 말 않을 테니 이 은자는 거두세요. 공연히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형제로서는 꼬일 대로 꼬인 사이지만 그래도 그 은자를 넙죽 받기가 안됐던 듯했다. 하도(何濤)가 아우의 그런 어색함을 덜어 주었다.
"이 은자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관가에서 내리는 거야. 다 나오면 사오백 관은 될걸. 그러니 사양하지 마라. 대신 내게 말이나 해 달라구. 그래, 그 도적들을 어디 가면 잡을 수 있지?"
그러자 하청(何淸)이 넓적다리께를 치며 기세 좋게 말했다.
"그놈들은 내가 모두 잡아 이 주머니 속에 가둬 뒀습니다."
"얘야, 그게 무슨 소리냐? 도적들이 모두 네 주머니 속에 있다니?"
하도(何濤)가 놀라 그렇게 물었다. 하청(何淸)이 주머니에서 잡기장 하나를 꺼내 가리키며 말했다.
"그 도적들은 죄다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거기다 적었느냐?"
하도(何濤)가 아무래도 미덥지 않아 다시 그렇게 물었다. 하청(何淸)이 그제야 진작부터 자신 있어 하던 것을 털어놓았다.
"형님께 속이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얼마 전 저는 노름에서 돈이 털리고 돈 한 푼 없이 북문 밖 십오 리에 있는 안락촌(安樂村)의 왕가객점엘 간 적이 있습니다."
하청(何淸)의 말은 이어졌다.
"안락촌의 왕가객점(王家客店)에 갔을 무렵 마침 관가에서 공문이 내려와 객점마다 장부를 만들고 투숙하는 나그네에 대해 적게 하였지요. 곧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이름은 무엇이며, 팔고 사는 건 무언지를 물어 적은 뒤 매달 한 번씩 관가나 이정(里正)에게 보이란 겁니다. 그런데 마침 그 집 주인이 글씨를 쓸 줄 몰라 제가 대신 그 장부를 적어 주고 한 보름 그 집에 붙어 있게 됐습니다. 그날이 유월 초사흘이었는데, 바로 그날 대추 장수 일곱 명이 일곱 대의 손수레를 끌고 그 객점에 들었지요. 제가 보니 우두머리 장사치는 운성현 동계촌의 조보정(晁保正)이었습니다. 전에 어떤 노름꾼을 따라 그 집에 묵은 적이 있어 조보정을 알아본 겁니다. 제가 그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세 갈래 수염에 낯이 희고 깨끗한 자가 대신 나와 자기들은 모두 성이 이(李)씨이며 호주에서 와 동경으로 대추를 팔러 가는 길이라더군요. 나는 그대로 적었지만 속으로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이었습니다....."
거기서 하청(何淸)은 한차례 숨길을 돌린 뒤에 다시 이었다.
"그날 주인은 나를 데리고 가까운 마을로 노름하러 갔는데, 세 갈래 길에서 나무통을 둘 메고 가는 한 사내를 만났습니다. '백 대랑(大郞), 어디 가나?' 하고 술집 주인이 물으니 그 사내는 통속의 초를 이웃 마을 부잣집에 팔러 간다더군요. 그가 간 뒤에 주인은 그가 바로 백일서 백승(白勝)이라 일러 주었습니다요. 그래서 그 이름도 외워 두었지요. 얼마 뒤 황니강에서 도둑들이 생신 예물을 턴 이야기가 요란스레 나돌았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맞춰 보니 틀림없이 조보정(晁保正) 패거리의 짓 같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백승(白勝)이란 놈을 잡아 엄하게 문초해 보면 모든 게 드러날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적힌 이름들은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지요."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하도(何濤)는 놀랍고도 기뻤다. 곧 하청을 데리고 주아(州衙)로 달려가 부윤을 찾았다.
"그 일은 어찌 되었느냐?"
부윤(府尹)이 하도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하도(何濤)가 기세 좋게 말했다.
"대강의 단서는 잡았습니다."
그러자 부윤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펴졌다. 하도(何濤)를 후당으로 불러 자세한 내력을 물었다. 하도(何濤)는 아우에게서 들은 대로 낱낱이 일러바친 뒤, 공인 여덟을 뽑아 그날 밤으로 안락촌을 덮쳤다. 먼저 왕가객점으로 가 주인을 앞세운 하도(何濤)와 여덟 공인은 이어 백승(白勝)의 집으로 갔다. 객점 주인이 문을 두드리자 곧 불이 켜지고 문이 열렸다.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이 든 백승(白勝)은 자리에 누운 채 아낙을 내보내 말하게 했다.
"남편은 열병이 들어 약을 먹고 누웠습니다. 아직 땀을 빼지 못한 터라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온 하도(何濤), 하청(何淸)과 공인들은 전혀 물러날 기색들이 아니었다. 견디다 못한 아낙이 들어와 백승에게 바깥 형편을 전하자 백승(白勝)은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얼굴을 내밀었다. 정말로 열병이 들린 사람처럼 얼굴이 붉고 희었다. 하지만 열병 따위로 일껏 찾은 범인을 그냥 두고 갈 하도(何濤)가 아니었다. 공인들을 호령해 백승을 묶게 하며 소리쳤다.
"네 이놈, 황니강에서 한 짓을 스스로 알고 있겠지?"
말할 것도 없이 백승(白勝)은 모른다고 우겼다. 그 아낙 역시 펄쩍 뛰며 남편을 편들었다. 이에 공인들은 백승의 집 안팎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잖아 백승(白勝)이 누워 있던 침상 밑이 고르지 않은 게 눈에 띄었다. 수상쩍게 여긴 하도(何濤)가 공인들을 시켜 그곳을 파 보게 했다. 석 자도 못 파 공인들은 기쁜 소리를 내지르고 백승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거기서 나온 한 자루의 금은 때문이었다. 하도(何濤)는 백승과 그 아낙에다 장물인 금은까지 싸서 밤길로 되돌아갔다. 제주 부중에 이르니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 오고 있었다. 대청 아래 백승을 꿇어 앉히자 부윤(府尹)이 백승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 을러댔다. 그러나 백승(白勝)은 무겁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특히 조보정(晁保正)을 비롯한 일곱 사람은 죽어도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매질이 시작되었다. 백승(白勝)이 뻗대는 가운데 매질이 서너 차례 되풀이되자 살가죽이 찢어지고 속살이 드러나며 피가 철철 흘렀다. 부윤(府尹)이 그런 백승을 꾸짖었다.
"이 흉측한 놈아, 우리가 이미 운성현 동계촌의 조보정(晁保正)을 알고 있는데, 네놈이 뭘 믿고 뻗대느냐? 어서 나머지 여섯 명이 누구누구인지를 대라. 그러면 당장에 매질을 멈추겠다."
그래도 백승(白勝)은 한 번 더 버텼으나 끝내 매를 이겨 내지는 못했다. 마침내 헐떡이는 소리로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두머리는 조보정(晁保正)이 맞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여섯은 조보정이 끌어모은 사람들이라 저와 술잔을 나눈 적은 있지만 누군지는 잘 모릅니다."
부윤(府尹)은 그것만으로도 넉넉하다는 듯 여럿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거야 어렵잖지. 조보정(晁保正)을 잡아들이기만 하면 나머지 여섯은 절로 밝혀질 것 아닌가?"
그러면서 백승에게는 스무 근자리 칼을 씌워 중죄인이 드는 감옥으로 보내게 하고, 그 아낙은 족쇄를 채워 여죄수를 가두는 감옥으로 보내게 한 뒤, 하도에게 명했다.
"너는 이제 눈 밝고 솜씨 날랜 공인 스무 명을 골라 이끌고 운성현으로 가거라. 현청에 가서 이 일을 알리고, 조보정(晁保正)과 이름을 모르는 나머지 여섯 도둑놈을 모두 잡아 와야 한다. 그리고 갈 때는 생신강이 털릴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우후(虞候) 둘도 데리고 가도록 하라."
이에 하도는 부윤이 말한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밤길을 달려 운성현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