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 17화
빼앗은 짐을 진 졸개가 막 숲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조금 전 행인이 달아난 산언덕 쪽에서 몸집 큰 사내가 달려 나왔다. 그를 본 임충(林沖)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잘됐다..'
임충(林沖)은 그 사내의 머리를 얻어 왕륜에게 바칠 투명장으로 삼을 작정이었으나 그만의 꿈이었다. 그사이 달려온 사내는 오히려 칼을 꼬나들고 벼락같은 소리로 외쳤다.
"이 나쁜 놈, 죽여도 죄는 남을 도둑놈아. 네놈이 감히 내 보따리를 뺏어 가? 그러잖아도 너 같은 놈들을 싹 쓸어 잡으려는 판인데, 도리어 네놈이 범의 수염을 뽑아?"
그러고는 몸을 날려 임충을 덮쳐 왔다. 임충(林沖)은 그 기세가 사나운 걸 보고 슬쩍 걸음을 옮겨 피하면서 그 사내를 살펴보았다. 붉은 끈 달린 범양(梵陽) 전립부터가 여느 나그네 같지 않았다. 거기다가 흰 비단 내리닫이에 회색 행전이며 노루 가죽과 털 붙은 쇠가죽신 같은 것도 날렵한 싸움 차림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리에 찬 짧은 칼이나 손에 든 칼이 아니라도 솜씨깨나 있는 무부(武夫)임이 분명해 보였다. 키는 한 일곱 자 반쯤이나 될까, 얼굴 한쪽에 있는 시퍼런 반점과 뺨에 난 붉은 수염이 그런 사내를 한층 사납게 보이게 했다.
"이놈아, 내 보따리는 어따 두었으냐?"
사내가 전립을 등 뒤로 젖혀 머릿수건으로 묶은 머리를 내보이며 소리쳤다. 손에 든 칼은 금세라도 임충을 쪼개 놓을 듯 치킨 채였다. 하지만 임충(林沖)이 또 어떤 사람인가. 그런 상대의 기세에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뜨거운 전의에 휘말렸다. 둥근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 수염을 빳빳이 세운 채 칼을 들어 상대와 맞붙었다. 그사이 눈은 그치고 하늘이 개이기 시작했다. 둘은 흩어지는 구름 아래서 가진 힘과 재주를 다해 겨루었다. 얼어붙은 개울가의 길바닥이며 언덕 어름에 두 줄기 살기가 엉기었다. 치고받고 찌르고 베고 하는 사이에 어느덧 서른 합이 지났으나 승패는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잠깐 떨어져 숨결을 가다듬은 그들은 다시 수십 합을 더 겨루었다. 그래도 여전히 승패는 가려지지 않았다.
"두 분 호걸(豪傑)은 이만 싸움을 멈추시오."
한차례 맞붙었던 둘이 다시 숨결을 가다듬으려고 잠깐 떨어져 있는데 누군가 산등성이 쪽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훌쩍 몸을 뺀 임충(林沖)이 돌아보니 백의수사 왕륜(王倫)과 두천(杜遷), 송만(宋萬)이 수많은 졸개들과 함께 산 위에서 구경을 하다가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오래잖아 산을 내려온 왕륜(王倫)이 개울을 건너며 소리쳤다.
"두 분 호걸, 정말로 칼을 잘 쓰시는구려. 그야말로 신출귀몰이오! 그런데 하나 물읍시다. 이쪽은 우리 형제인 표자두 임충(林沖)이지만, 그쪽 얼굴 푸른 친구는 누구요? 바라건대 이름이라도 들려주시오."
그러자 몸집 큰 사내가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삼대에 걸쳐 장수가 난 집안의 자손으로, 오후(五侯) 양영공(楊令公)의 손자가 되는 양지(楊志)다. 지금은 이 모양 이 꼴로 관서를 떠돌고 있지만 한때는 좋은 시절도 있었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해 제사관(制使官)으로 계시던 어른이시란 말이다. 그런데 도군(道君) 황제께서 만세산에 쓰실 화석강(花石綱, 송대에 공물을 운하로 나르던 제도로, 주로 남방에서 좋은 돌을 많이 날라 왔기 때문에 화석강이란 이름이 붙음)을 맡을 제사(制使) 열 명을 뽑을 때 내가 걸려 신세를 망쳤지. 화석강을 나르다가 황하에서 풍랑에 배가 뒤집혀 몽땅 잃어버렸으니 무슨 낯으로 돌아가겠는가. 그 바람에 딴 곳으로 달아나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번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준단 말을 듣고 돌아가는 길이다. 돈을 한 보따리 싸 들고 동경으로 가서 추밀원(樞密院)에 뿌리면 옛날 벼슬까지 되찾게 되었단 말이다. 그래서 일꾼 놈에게 그 돈을 지워가는데 여기서 뜻밖에도 네놈들에게 털리고 말았다. 네놈들도 귀가 있다면 이제 내 돈 보따리를 되돌려 주는 게 어떠냐?"
사내의 말투가 거만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왕륜(王倫)은 어찌 된 셈인지 더욱 공손하게 물었다.
"혹시 당신의 별호가 청면수(靑面獸) 아니오?"
그러자 양지(楊志)란 사내도 조금 풀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바로 그렇다."
"짐작대로 양 제사(制使)셨군. 그렇다면 함께 우리 산채로 올라가시지 않겠소? 술 몇 잔 대접해 올린 뒤에 보따리를 내드리지. 어떻소?"
왕륜(王倫)이 조금 전과 다름없는 공손함으로 그런 제의를 했다. 양지(楊志)도 그제야 상대방에게 별로 악의가 없음을 느꼈는지 말투가 완연히 바뀌었다.
"호걸께서 이미 나를 알아보셨다면 보따리나 얼른 돌려주시오. 구태여 술까지 먹이려 할 거야 없지 않소?"
"양제사, 괴이쩍게 생각할 건 없소. 몇 년 전 과거를 보러 동경에 갔을 때 제사의 큰 이름을 들은 뒤로 나는 늘 한번 뵙게 되기를 바랐소이다. 뜻밖에도 오늘 이렇게 만났는데 어찌 그냥 가시게 할 수 있겠소이까? 그러지 말고 잠시 산채로 가서 좋은 말씀이나 들려주고 떠나시오. 결코 딴 뜻은 없소."
그러는 왕륜(王倫)의 말투에는 진정이 배어 있었다. 양지(楊志)도 왕륜이 그렇게 나오는 데는 더 박정하게 마다할 수 없었다. 몇 번 더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척 따라나섰다. 양지와 함께 물을 건너 산채로 돌아간 왕륜의 패거리는 주막에 나가 있는 주귀(朱貴)까지 불러들였다. 모두 취의청에 둘러앉는데, 왼편으로는 왕륜, 두천, 송만, 주귀 네 사람이 교의에 앉고 오른편으로는 양지와 임충 두 사람이 역시 그들이 내놓은 교의에 앉았다. 양지(楊志)가 임충보다 윗자리에 앉게 된 것은 그가 산채의 가장 새로운 손님인 까닭이었다. 왕륜(王倫)은 무슨 인심이 뻗쳤는지 양을 잡고 술을 퍼 오게 해 한껏 후하게 양지를 대접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도 왕륜의 머릿속은 나름의 속셈으로 바빴다.
'만약 임충(林沖)이 이곳에 머물게 된다면 우리는 임충의 상대가 안 된다. 인심을 써서 이 사람 양지(楊志)를 붙들어 두는 게 낫겠다. 그래서 일이 벌어질 땐 양지로 하여금 임충에게 맞서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정한 왕륜(王倫)은 술이 몇 순배 돌기를 기다려 속셈을 털어놓았다.
"저 형제는 동경에서 팔십만 금군교두로 있었던 표자두 임충(林沖)이외다. 고태위의 미움을 받아 모함을 쓰고 창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죄를 더하게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지요. 이 왕륜(王倫)은 일찍이 글을 익혔으나 마침내는 뜻을 이루지 못해 칼을 잡고 도둑의 무리에 끼게 된 사람이올시다. 동경으로 가시려는 분께 이런 소리를 하기는 외람되지만 저희와 함께 이 곳에 머무실 뜻은 없는지요? 양제사(楊制使) 또한 죄를 지은 분이라 설령 이번에 용서를 받는다 해도 그전 벼슬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오. 고구(高俅) 같은 돼먹잖은 것이 군권을 쥐고 있는데 어떻게 제사 같은 분을 써 주겠소이까? 차라리 이곳에 머무시어 큰 저울로 금은을 나누고 큰 잔으로 술이나 마시며 호걸들과 함께 지내심만 못할 것 같소이다만 양제사(楊制使)의 뜻은 어떠하오?"
하지만 양지(楊志)의 생각은 달랐다.
"여러 두령께서 이처럼 대해 주시는 것은 고맙기 그지없으나 저는 가족이 동경에 살고 있습니다. 전에 저지른 일만으로도 누를 끼쳤는데 다시 이곳에 머물러 어찌하겠습니까. 지금은 오직 동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니, 바라건대 여러 두령께서는 내 보따리나 돌려주십시오. 정히 돌려주지 않으시겠다면 이 양지(楊志)는 빈손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양지(楊志)가 그렇게 완강히 거절하자 왕륜(王倫)은 더는 억지를 쓰지 못했다. 마음속의 아쉬움을 너털웃음으로 감추며 말했다.
"제사께서 이곳에 머무시기를 굳이 마다하시는데야 어떻게 저희 무리에 들기를 강요할 수 있겠소. 더는 잡지 않을 터이니 하룻밤 편히 쉬시다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하시오."
이에 양지(楊志)는 기쁜 마음으로 왕륜의 뜻을 따랐다. 밤이 이윽도록 그들과 더불어 마시고 즐기다가 그들이 마련한 자리에 들어 하룻밤을 편히 쉬었다.
이튿날이었다. 양지(楊志)가 아침 일찍 일어나니 두령들이 다시 술상을 차려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해장술에 이어 아침 식사를 마치자 졸개 하나가 어제 빼앗은 양지의 보따리를 지고 나왔다. 두령들은 그 졸개를 앞세우고 양지와 함께 산을 내려가 작별했다. 양지(楊志)가 배를 타고 떠난 뒤, 왕륜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임충을 받아들였다. 주귀(朱貴)를 다섯 번째로 밀어내고 그를 네 번째 두령으로 세운 것이었다. 그로부터 양산박(梁産泊)은 왕륜, 두천, 송만, 임충, 주귀의 다섯 두령 아래 새롭게 짜였다.
한편 큰길로 나간 양지(楊志)는 거기까지 짐을 지고 따라온 졸개에게서 짐을 찾아 원래 데리고 있던 일꾼에게 지우고 동경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길이라 둘은 며칠 안 되어 동경성에 이르렀다. 양지(楊志)는 한 군데 객점을 정해 짐을 부리게 하고, 거기까지 지고 온 일꾼에게 품삯을 넉넉히 주어 돌려보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몸에 찬 칼까지 끄른 뒤 술과 고기를 시켜 배불리 먹었다. 며칠 있으려니 추밀원에서 전에 벼슬살이하던 이들을 점고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양지(楊志)는 지워 온 보따리 속의 금은을 아낌없이 풀어 추밀원의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을 매수했다. 전에 있던 전사부의 제사(制使) 자리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지니고 있던 재물을 몽땅 턴 뒤에야 양지(楊志)는 가까스로 자신의 잘못을 변명해 주는 문서 한 장을 얻었다. 남은 일은 전수부(殿帥府)의 고태위가 그런 양지를 다시 써 주는 것이었다. 고태위 앞으로 나간 양지(楊志)가 문서를 바치자 그걸 읽은 고태위는 다자고짜 화부터 냈다.
"그때 화석강(花石綱)을 가지러 간 제사 열 명 중에서 아홉은 벌써 오래전에 경사(京師)로 돌아와 화석강을 바쳤다. 그런데 오직 네놈 하나만이 화석강을 모두 잃어버렸다니! 더구나 일찍 와서 그걸 알리지도 않고 요리조리 도망만 다니다가 이제 와서 다시 옛날 벼슬자리를 되찾겠다고? 어림없는 소리 마라. 설령 지난 일을 용서한다 쳐도 그런 죄를 지은 놈을 다시 쓸 수는 없다."
그렇게 소리치며 문서를 내던지고 양지(楊志)를 전수부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뇌물 한 푼 안 바치고 옛날 자리를 되찾겠다고 나서는 데 심사가 틀어진 것이었다. 그만한 재물을 흩었으니 모든 게 잘되리라 믿었던 양지(楊志)는 욕만 얻어먹고 쫓겨나자 기가 막혔다. 암담한 심경으로 객점에 돌아오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역시 왕륜(王倫)이 내게 말한 대로구나. 하지만 나는 깨끗한 이름을 지닌 장부로서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어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더럽힐 수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변방에 가서 병졸 노릇을 하며 처자를 먹여 살리더라도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자. 그러나 고태위 이놈, 두고 보자. 네가 나를 모질게 대했으니 나도 반드시 앙갚음을 하고야 말겠다!'
양지(楊志)는 마음을 그렇게 다잡아 먹었으나 몸에 지닌 게 없으니 당장이 낭패였다. 며칠 되지 않아 방값 밥값에 푼돈까지 씨가 마르자 고민 끝에 한 가지 궁리를 냈다.
'이거 정말 큰일이로구나. 하는 수 없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보도(寶刀)를 파는 수밖에. 지금까지는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은 것이지만 이걸로 몇천 관 돈을 만들어 살 만한 곳을 찾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날로 보도(寶刀)에 '팔 물건'이란 꼬리표를 써 붙인 뒤 거리로 들고 나갔다. 양지는 마행가(馬行街)란 거리에 이르러 반나절이나 칼을 안고 서 있었으나 누구 하나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래도 한낮이 되도록 거기 서 있던 양지(楊志)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천한주교(天漢州橋) 쪽으로 가 보았다. 그쪽이 오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해서였다. 양지(楊志)가 천한주교 어귀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길 양쪽에서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개울 아래쪽으로 난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양지(楊志)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을 보니 허둥대던 사람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빨리 도망쳐라! 호랑이가 온다."
그 말에 양지(楊志)는 어리둥절했다.
'거참, 괴상한 일이로군. 이 든든한 성안에 어떻게 호랑이가 들어온단 말인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람들이 가리킨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양지(楊志)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시커멓고 몸집이 큰 사내였다. 어디서 퍼마셨는지 사내는 술이 거나해 걸음걸이가 온전치 못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다가오는 사내를 자세히 보니 양지도 알 만한 건달이었다.
'털 없는 호랑이(沒毛大蟲)'란 별명이 있는 그 건달은 우이(牛二)란 자로 동경 사람들에게는 이름깨나 알려져 있었다. 거리에서 한다는 게 모조리 모질고 흉악한 짓이라 관가에도 여러 번 끌려갔지만 워낙 겁내는 것 없이 설쳐 대니 관가에서도 손을 들어 버린 악종이었다. 그 때문에 동경 사람들은 그를 보기만 하면 그저 멀리 달아나는 걸 상책으로 삼았다.
그 우이(牛二)가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대뜸 양지(楊志)가 팔려고 들고 있던 보도를 움켜잡으며 물었다.
"어이, 이 칼 이거 얼마야?"
"조상이 물려주신 보도(寶刀)라 삼천 관은 받아야겠소."
양지(楊志)는 우이가 그 보도를 살 만한 위인 같지는 않았지만 행여나 싶어 그렇게 대답했다. 우이(牛二)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시원찮은 칼을 그토록 많이 받겠다고? 야, 나는 삼십 문(文) 주고 칼을 사도 고기, 두부 할 것 없이 잘만 썰어지더라. 그런데 네놈이 이 칼이 무슨 대단한 게 있다고 보도(寶刀)라는 거야?"
흥정을 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시비를 건다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양지(楊志)는 속을 꾸욱 눌러 참으며 대꾸했다.
"내 칼은 보통 가게에서 파는 백철도(白鐵刀)와는 다르오. 보도란 말이외다."
"보도(寶刀)란 소리는 벌써 들었다. 그래 어째서 보도라는 거냐?"
"첫째는 구리나 쇠를 베어도 칼날이 말리지 않고, 둘째는 칼날에 터럭을 놓고 불면 잘라지며, 셋째는 사람을 죽여도 칼에 피가 묻지 않소."
양지(楊志)가 다시 속 좋게 보도의 자랑을 일러주자 우이(牛二)가 거짓말 말라는 듯 물었다.
"그럼 동전을 잘라 보일 수 있느냐?"
"원하신다면 잘라 보여 드리지."
그 말을 들은 우이(牛二)는 다리 아래 향 파는 가게로 가서 삼 전짜리 동전 스무 개를 뺏어 왔다.
"자아, 어디 이걸 한번 잘라 봐라. 네놈이 그렇게만 한다면 삼천 관을 내놓겠다."
우이(牛二)는 가져온 동전 스무 개를 다리 난간에 재 놓고 양지에게 소리쳤다. 못 자르면 그 보도(寶刀)를 거저 뺏아 가겠다는 수작이었다. 양지(楊志)와 우이(牛二)의 그 같은 승강이에 그때는 구경꾼도 제법 모여 있었다. 그러나 우이(牛二)가 겁나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일이 어떻게 되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양지(楊志)는 우이의 말투며 하는 짓이 하나같이 거슬렸지만 이미 시작한 흥정이라 그가 바라는 대로 따랐다. 그 동전을 한칼에 잘라 우이(牛二)의 기라도 죽여 쫓아 버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양지(楊志)는 그 말과 함께 소매를 걷어붙이고 보도를 빼 들었다. 가벼운 기합 소리와 함께 칼 빛이 번쩍하더니 다리 난간에 재어 있던 동전은 한칼에 모두 두 쪽으로 갈라졌다. 구경꾼들은 그 놀라운 솜씨에 떠들썩하게 손뼉을 쳤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양지(牛二)의 그 같은 칼 솜씨를 본 것만으로도 기가 죽었을 것이나 우이(牛二)는 달랐다.
"뭐가 대단하다고 떠들어 대는 거야?"
구경꾼들을 흘기며 그렇게 소리치고는 다시 양지에게 눌어붙었다.
"아까 두 번째는 뭐라고 했지?"
"터럭을 칼날에 놓고 불면 잘라진다 했소. 머리칼 몇 개를 놓고 위에서 한번 불어 보시오. 틀림없이 모두 잘려 나갈 거요."
"거 못 믿겠는걸."
우이(牛二)가 그러면서 이번에는 제 머리에서 머리카락을 한 줌 뽑아 내밀었다.
"어디 한번 해 봐라."
양지(楊志)는 또 참았다. 말없이 그 머리카락을 받아 보도의 날 위에 얹고 후욱 불었다. 정말로 양지(楊志)가 말한 것처럼 머리카락이 두 토막으로 잘려 칼날 양편으로 흘러내렸다. 그걸 본 구경꾼들이 다시 손뼉을 치며 감탄의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구경꾼들은 점점 늘었다. 그만하면 그만둘 법도 하건만 우이(牛二)의 떼쓰기는 그칠 줄 몰랐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구경꾼들을 성난 눈길로 흘긴 뒤에 다시 양지에게 물었다.
"세 번째는 뭐라고 했지?"
"사람을 죽여도 칼에 피가 묻지 않는다 했소."
양지(楊志)가 그렇게 대답하자 우이(牛二)는 이번에야말로 잘 걸려들었다는 듯 심술궂게 되물었다.
"정말로 사람을 죽여도 피가 묻지 않는단 말이냐?"
"그렇지, 사람을 한칼에 베면 피가 묻지 않아. 그만큼 이 칼은 잘 든다구."
어지간한 양지(楊志)도 말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우이(牛二)가 더 기막힌 어거지로 나왔다.
"나는 못 믿겠다. 어디 네가 사람을 베어 보라. 그래도 칼에 피가 묻지 않은 걸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달란 말이야."
"이 엄중한 성안에서 사람을 어떻게 베어 보이겠나. 하지만 정히 믿지 못하겠다면 개나 한 마리 끌어와 베어 보이지."
양지(楊志)가 그렇게 뒤로 빼자 우이(牛二)는 더욱 기가 살아 양지를 몰아댔다.
"너는 사람을 죽인다 했지 개를 죽인단 소리는 안 했다. 이게 어따 대고 거짓말을 해."
드디어 참지 못한 양지(楊志)가 그렇게 감겨드는 우이를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이봐, 칼을 살 힘이 없으면 그냥 꺼져. 뭣 때문에 사람을 잡고 이렇게 어거지를 쓰지?"
그러면서 험상궂은 표정까지 지어 보였건만 우이(牛二)란 놈은 뭣에 씌우기라도 했는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척주척 양지(楊志)에게 다가들며 그러잖아도 부글거리는 속을 건드렸다.
"그럼 어디 그 칼이나 한번 보자."
"이거 경우를 통 모르는 놈이구나. 내가 네놈의 노리개나 되는 줄 아느냐?"
"어어, 이 자식 봐라? 네놈이 노려보면 어쩔 테냐? 나를 죽이기라도 할 작정이냐?"
이때 양지(楊志)는 속마음 같아서는 벌써 한칼에 우이를 베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홀로 한 다짐이 있어 화를 억누르고 차갑게 쏘았다.
"나는 네놈하고 원수진 일도 없고 지금 보물을 다투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 뭣 때문에 네놈을 죽인단 말이냐?"
그쯤에서만 끝냈어도 우이(牛二)는 더러운 한목숨을 건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머릿속이 뒤집히기라도 하는지 놈은 물러날 줄 몰랐다. 덥석 양지(楊志)를 움켜잡으며 또 다른 떼를 썼다.
"좋아, 어쨌든 이 칼은 내가 사야겠어."
"칼을 사려거든 돈을 가져오너라."
"돈은 없다!"
"돈도 없으면서 사람은 왜 잡느냐."
"나는 네놈의 그 칼을 가지고 싶다."
"거저 줄 수는 없어!"
그렇게 옥신각신하던 끝이었다. 귀신이 재촉이라도 하는지 우이(牛二)가 다시 어거지를 바꾸었다.
"그래? 좋다, 네놈이 호걸이거든 어디 한번 나를 죽여 봐라."
드디어 분통이 터진 양지(楊志)가 그 말에 대꾸도 않고 우이를 세차게 밀쳐 버렸다. 벌렁 자빠졌던 놈이 기어 일어나더니 느닷없이 양지를 부둥켜 잡았다. 양지(楊志)가 둘러선 구경꾼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여기 계신 여러분이 잘 보셨을 것이요. 이 양지(楊志)는 여비가 떨어져 칼을 팔러 나왔는데 저 나쁜 건달 놈이 내 칼을 뺏으려 들 뿐 아니라 나를 치려고 하기까지 했소!"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기 전에 미리 자신의 결백을 여럿에게 확인시켜 뒷날의 증거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양지(楊志)의 태도가 심상찮게 느껴졌으나 우이란 놈이 겁이 나 말려 볼 엄두를 못 냈다. 아무리 취했다 해도 그만하면 사태를 알아볼 만도 하건만 우이(牛二)는 그렇지가 못했다. 한번 움찔하는 법도 없이 생애의 마지막이 될 떼를 썼다.
"내가 널 때렸다 했겠다. 그래 너 같은 놈을 때려죽인들 어떻단 말이냐."
그 말과 함께 우이(牛二)는 오른 주먹을 들어 내질렀다. 양지(楊志)는 재빨리 몸을 날려 피했으나 참는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누르고 불렀던 불같은 성미가 일시에 터져 한칼로 우이의 목줄기를 베어 버렸다. 칼을 맞은 우이(牛二)는 비명 한마디 제대로 못 지르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 양지(楊志)는 쓰러진 우이의 가슴에 두 번이나 칼질을 했다. 마침내 우이(牛二)는 피를 줄줄이 쏟으며 숨을 거두었다.
"내가 이 못된 건달 놈을 죽여 버렸소! 여러분도 이 일에 연루되지 않으려거든 나와 함께 관가로 갑시다. 가서 보신 대로만 일러 주시오."
양지(楊志)가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쳤다. 구경꾼들은 함께 연루되는 게 걱정되어서라기보다는 양지(楊志)를 변호해 주기 위해 기꺼이 따라나섰다. 그들과 함께 개봉부(開封府)로 간 양지(楊志)는 곧 부윤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칼을 바치며 자신이 온 까닭을 밝혔다.
"저는 원래 전사의 제사(制使)였으나 화석강을 실으러 갔다가 도중에 잃어버리는 바람에 쫓겨난 놈이올시다. 이제 여비가 떨어져 칼이라도 팔아 쓸까 하고 거리에 나갔는데 뜻밖에도 못된 건달 놈에게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그놈은 제 칼을 그저 뺏으려 들었을 뿐만 아니라 주먹으로 저를 치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저는 분함을 참지 못해 그만 그놈을 죽여 버렸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이 모두 그걸 보았습니다."
따라온 구경꾼들도 양지를 편들어 자기들이 본 것을 그대로 고해 올렸다. 말을 다 듣고 난 부윤(府尹)이 첫 결정을 내렸다.
"좋다, 너는 제 발로 찾아와 죄를 비니 감옥에 넣을 때 때리는 매는 면해 주겠다."
그리고 양지(楊志)에게 큰 칼을 씌우게 한 다음 시체를 검안하는 오작행인(검사관)을 시켜 양지와 구경꾼들을 끌고 현장인 천한주교(天漢州橋)로 가 보게 했다. 죄명이 살인인 만큼 한쪽말만 듣고 처리할 수 없어서였다. 오작행인(仵作行人)은 죽은 우이의 시체를 살피고 당시의 정황을 헤아린 뒤 문서를 꾸몄다. 그때 그곳 사람들이 모두 나와 양지(楊志)의 죄 없음을 밝히고 놓아주기를 빌었으나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양지(楊志)는 관청의 처결이 날 때까지 사형받을 죄인들이 갇혀 있는 감방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감옥의 압로(押窂), 금자(禁子), 절급(節級) 같은 하급 벼슬아치들은 양지가 그 골치 아픈 모대충(毛大蟲) 우이를 죽이고 잡혀 온 것을 한결같이 동정했다. 따라서 양지를 괴롭히거나 돈을 뺏기는 커녕 오히려 모두가 나서서 잘 돌봐 주었다. 천한주교의 사람들도 양지(楊志)가 못된 건달을 죽여 없애 준 일을 고맙게 여겼다. 돈을 거둬 음식을 넣어 준다, 옥리를 구워삶는다, 양지를 위해 애를 썼다.
관가에서도 양지를 잘 봐주었다. 양지(楊志)가 원래 이름 있는 호걸인데다 동경성의 골칫거리 중 하나인 우이(牛二)를 죽여 준 걸 은근히 반가워하며 그의 죄를 줄여 주었다. 원래 살인범이 겪게 마련인 삼추육문(三推六問)을 면해 주고 우연한 싸움 중에 잘못하여 사람을 죽인 걸로 죄를 결정했다. 살인죄 중에서 가장 가벼운 형벌을 받게 되는 죄명이었다. 그런 죄인이 살게 된 육십 일이 다 채워지자 양지(楊志)는 다시 부윤 앞으로 끌려 나갔다. 부윤(府尹)은 양지가 쓴 큰 칼을 벗기고, 등허리에 매 스무 대를 때렸다. 그런 다음 문묵장인(文墨匠人)을 불러 얼굴에 먹자를 새기게 하고 북경 대명부 유수사(留守司)에 충군(充軍)으로 보냈다. 우이와의 시비에 발단이 된 양지(楊志)의 보검은 당연히 관가에 압수되었다.
모든 판결이 끝나자 양지(楊志)는 죄상을 적은 문서와 함께 장룡(張龍)과 조호(趙虎)라는 두 명의 공인에게 이끌려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목에는 귀양 가는 죄인들이 쓰는 일곱 근 반짜리 쇠칼이 채워졌다. 천한주교(天漢州橋) 사람들은 집집마다 재물을 거두어 양지(楊志)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양지와 두 공인이 오자 술집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거둔 재물로 세 사람 모두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한 뒤 적잖은 은자를 두 공인에게 나눠 주며 당부했다.
"양지(楊志)는 훌륭한 호걸로서 백성들을 위해 해로운 사람을 죽였다가 이번에 북경으로 귀양 가게 되었소이다. 두 분께서는 부디 그 점을 잊지 마시고 가는 도중 양지를 잘 돌보아 주시오."
그러잖아도 양지를 좋게 보고 있던 장룡(張龍)과 조호(趙虎)는 생각지 않은 은자까지 생기자 입이 헤벌어졌다.
"우리 두 사람도 그가 호걸인 줄 이미 알고 있소. 여러분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잘 모실 테니 마음 놓으시오."
그렇게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천한주교(天漢州橋) 사람들의 인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거둔 것의 나머지를 모두 양지에게 여비로 주고 거리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그들과 작별한 양지(楊志)는 전에 묵던 객점으로 돌아갔다. 양지는 그동안 밀린 방값과 밥값을 치르고 보따리를 찾은 뒤 다시 두 공인에게 술과 밥을 대접했다. 그리고 매 맞은 자리에 바를 고약까지 사고서야 북경으로 길을 떠났다.
세 사람은 그로부터 오 리마다 쉬고 십 리마다 주막에 들며 마을을 지나고 고을을 거쳤다. 양지(楊志)는 주막을 만날 때마다 술과 고기를 사 장룡(張龍)과 조호(趙虎)를 대접하니 셋은 죄수와 죄수를 호송하는 공인이라기보다는 함께 유람하는 나그네들 같았다. 며칠 걷지 않아 양지와 두 공인은 북경에 이르렀다. 성안으로 들어간 셋은 한 군데 객점을 정하고 첫날을 편히 쉬었다.
원래 북경 대명부의 유수사는 말에 오르면 군사를 지휘하고 말에서 내리면 백성을 다스리는 곳으로 그 권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유수인 양중서(梁中書)는 이름을 세걸(世傑)이라 하며, 당시 동경에서 태사로 있는 채경(蔡京)의 사위였다. 다음 날인 이월 열아흐렛날 두 공인은 양지(楊志)를 그 양중서에게로 끌고 갔다. 공인이 양지에 관한 문서를 바치자 양중서(梁中書)는 그걸 받아 읽었다.
"너는 어찌하여 이리로 오게 됐는가?"
전에 동경에 있을 때부터 양지를 알고 있던 양중서(梁中書)는 문서를 다 읽고 난 뒤 부드럽게 물었다. 양지(楊志)는 고태위를 찾아가 복직하려다 실패한 일부터 우이(牛二)를 죽이게 된 경위까지 하나하나 고해 올렸다. 다 듣고 난 양중서(梁中書)는 오히려 양지가 자기 밑으로 오게 된 걸 기뻐하며 목에서 칼을 벗기게 한 뒤 곁에 두고 부리기로 했다. 일이 끝난 두 공인은 양지와 아쉬운 듯 작별하고 동경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양지(楊志)는 양중서의 부중에서 일하게 되었다. 낮이든 밤이든 찾기만 하면 달려 나가 궂은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일하는데 그 정성이 또한 여간 아니었다. 양중서(梁中書)는 양지의 사람됨이 신중하고 부지런함을 보고 그를 더 높이 쓰고 싶었다. 우선 양지(楊志)를 군중의 부패(副牌) 자리에라도 앉혀 다달이 생기는 게 있도록 해 주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따라 주지 않을 게 걱정되었다. 양지(楊志)가 죄수로 귀양 온 사람인 까닭이었다.
그래서 양중서(梁中書)가 짜낸 궁리가 무예 시합이었다. 무예가 뛰어난 양지에게 기회를 주어 다른 사람의 불평을 사지 않고 부패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할 속셈이었다. 양중서는 군정사(軍政司)에 일러 영내의 높고 낮은 모든 장수들은 다음 날 동곽문(東郭門)으로 나와 무예 시합에 참가하도록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양지의 무예를 본 적이 없는 양중서(梁中書)라 궁리는 그리 내어놓아도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그날 밤 가만히 양지(楊志)를 불러 물었다.
"나는 자네를 군중의 부패(副牌)로 올려 얼마간이나마 생기는 게 있도록 해 주고 싶네. 그런데 자네 무예는 어떤가?"
양지(楊志)가 그 뜻을 알고 겸손히 대답했다.
"저는 무과에 급제해 전사부의 제사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열여덟 가지 병기 쓰는 법을 약간은 익혔지요. 오늘 은상(恩相)께서 써 주시겠다니 자욱한 구름이 걷히고 해를 보게 됨이나 다름없습니다. 비록 배운 것은 보잘것없으나 있는 힘을 다해 저를 알아주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이 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겠습니다."
말은 겸손해도 믿음이 가는 대답이었다 이에 양중서(梁中書)는 몹시 기뻐하며 갑옷 한 벌을 양지에게 내렸다.
다음 날이 되었다. 때는 이월 하순이라 바람은 부드럽고 햇볕은 따뜻했다. 아침상을 물린 양중서(梁中書)는 양지를 데리고 말에 올라 동곽문으로 나갔다. 무예 시합장으로 정한 훈련장에 이르니 벌써 높고 낮은 장수들이 모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양중서(梁中書)는 말 위에서 그들의 접견은 받은 뒤 연무청(演武廳) 아래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연무청 마루에는 은장식이 덮인 교의가 마련되어 있었다. 양중서(梁中書)는 그 교의에 앉아 아래를 굽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