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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16화

Bollnow 2025. 1. 9. 09:14

시진과 헤어진 임충(林沖)은 산동으로 길을 잡고 여남은 날을 걸었다. 때는 한겨울이라 날은 찬데 하늘에는 구름이 검은 장막을 드리운 듯하고 매서운 바람은 끊임없이 일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늘에서 한 송이 두 송이 눈꽃이 휘날리더니 드디어 천지는 눈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임충(林沖)은 눈 속에서도 발길을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나아갔다. 하지만 하늘을 보니 차게 얼어붙은 대로 날이 저물어 오는 것 같아 하룻밤 묵을 곳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임충(林沖)의 눈에 멀리 주막 한 채가 들어왔다. 호숫가에 눈을 뒤집어쓰고 내려앉을 듯 서 있는 작은 주막이었다. 임충(林沖)은 뛰듯이 그 주막으로 가서 발을 걷어붙이고 들어섰다. 몸에 묻은 눈을 털며 술청 안을 살피니 자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 그중에 하나를 골라 앉은 임충(林沖)은 짚고 있던 칼을 탁자에 기대 세우고 등에 맨 보따리를 풀어 내렸다. 전립을 벗고 허리에 찬 칼까지 풀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웠다.

"손님, 술을 드시렵니까?"

임충(林沖)이 이것저것 벗고 풀기를 마쳤을 무렵 주막 주인이 나타나 물었다. 임충이 얼른 청했다.

"우선 술 두 각만 갖다 주시오."

그러자 주인은 말없이 들어가 술 두 각을 내왔다. 술을 본 임충(林沖)이 잊고 있었던 걸 물었다.

", 술안주로는 무엇이 있소?"

"쇠고기 날것과 삶은 게 있고 오리고기, 닭고기도 있습니다."

"그럼 우선 삶은 쇠고기 두 근만 내오시오."

임충(林沖)의 그 같은 주문에 주인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잖아 주인은 큰 쟁반 가득 삶은 쇠고기를 썰어 내오고 곁들여 몇 가지 채소도 술상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큰 술잔 하나를 가져다 한 잔을 치며 마시기를 권했다. 술 생각이 간절하던 임충(林沖)은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큰 잔으로 서너 잔을 단숨에 비웠다. 언 몸이 좀 풀리는 듯했다. 그때서야 안주로 내온 쇠고기를 집으며 임충(林沖)은 비로소 술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어떤 사내가 술집 안에서 뒷짐을 진 채 나오더니 문간에 서서 눈 내리는 걸 바라보다 불쑥 주인에게 물었다.

"술 마시는 사람이 누구요?"

임충(林沖)이 그 사내를 보니 머리에는 귀밑까지 덮이는 털모자를 쓰고 몸에는 담비 갖옷에, 발에는 노루 가죽으로 만든 신을 꿰고 있었다. 귀가 크고 생김이 우락부락한 데다 광대뼈가 나오고 세가닥 누런 수염을 드리운 게 까닭 모르게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그 사내가 자신을 무시한 채 바깥만 내다보고 서 있자 은근히 아니꼬워진 임충(林沖)이 그를 못 본 척 주인을 불렀다. 그리고 술 한잔을 따르게 한 뒤 술집 주인에게도 한 잔을 권하고 물었다.

"주인장, 여기서 양산박(梁産泊)까지 얼마나 되오?"

"여기서 양산박까지 몇 리 되지는 않지만 물길뿐이고 뭍길은 없습니다. 배를 타셔야만 거기까지 갈 수 있습죠."

주인이 그렇게 대답했다. 이왕 말을 낸 김이라 임충(林沖)이 한층 거리낌 없이 주인에게 말했다.

"그럼 주인장께서 배 한 척 구해 주시오. 양산박엘 가 봐야 할 일이 있소."

주인이 펄쩍 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눈이 심하고 또 날까지 저물었는데 어디 가서 배를 구한단 말입니까? 그건 안 됩니다."

"돈은 넉넉히 드리겠소. 어디 가서 배 한 척만 구해 와 나를 좀 건네주시오."

임충(林沖)이 이번에는 돈으로 달래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안 됩니다. 어디 가도 구할 데가 없어요."

주인은 그런 대답과 함께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꼭 당장에 나설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되자 임충(林沖)은 갑자기 막막해졌다.

'이거 어떻게 해야 좋지.....'

그런 기분으로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미 마신 술에 다시 몇 잔이 더해지자 갑자기 생각이 자신의 처지에 머물러 마음이 울적해지기 시작했다.

'전에 동경에서 교두 노릇을 할 때는 매일 온 장안을 휩쓸며 마셔 댔는데 빌어먹을, 하필이면 고태위 같은 놈에게 걸릴 게 뭐람. 그 나쁜 놈에게 모함을 당해 얼굴에는 먹자가 새겨지고 여기까지 흘러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가 없고, 나라가 있어도 의지할 수 없게 됐으니 이 답답하고 외로운 심경을 어디에 비한단 말이냐...'

감정이 거기까지 흐르자 임충은 더 배겨 낼 수가 없었다. 주인에게 벼루와 붓을 가져오게 해 주막의 흰 벽에다 휘갈겼다.

 

의로움을 짚고 사는 임충

사람됨은 순박하고 충실하였다.

 

강호에 이름 드날리고

도성에선 영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하되 어찌하랴, 삶은 뒤틀려

옛 공명도 뒹구는 마른 쑥 같아졌다.

 

바라건대 뒷날 뜻 이룰 수 있기를

위엄으로 태산 동쪽 뒤덮으리.

 

본래 문장에 능숙한 임충(林沖)은 아니었으나 마음속에 쌓인 정한이 크니 그 여덟 구가 쉽게 나왔다. 쓰기를 마친 임충(林沖)은 그래도 다 풀리지 않은 가슴속의 응어리를 달래기 위해 다시 술을 청했다. 전보다 더욱 술맛이 나 거푸 잔을 비우고 있는데 잠깐 잊고 있었던 털가죽 옷의 사내가 임충 쪽으로 다가왔다.

"이놈, 정말로 간도 크구나. 네놈은 창주에서 천하에 몹쓸 죄를 짓고 이리로 도망 온 놈이 아니냐? 지금 관청에서는 네 목에 삼천 관의 상금을 걸고 너를 잡으려 야단인데, 어쩔 작정으로 이따위 수작이냐?"

사내는 다짜고짜로 임충의 허리춤을 움켜잡으며 그렇게 소리쳤다. 취한 중에도 임충(林沖)은 번쩍 정신이 났다. 전에 늘 하던 대로 발뺌부터 했다.

"무슨 말씀이오? 당신은 내가 누군지나 알고 하는 소리요?"

"그야 표범 대가리(豹子頭) 임충이지."

"틀렸소, 나는 성이 장()가요."

임충(林沖)은 거짓 성을 대며 그렇게 버텨 보았다. 사내가 껄껄 웃으며 임충을 몰아댔다.

"헛소리 마라. 방금 벽에다 네 이름을 써 놓고도 딴소리냐? 그리고 네 뺨에 새겨진 그 먹자는 또 뭐냐? 그래도 사람을 속이려 하느냐?"

그 말에 임충(林沖)도 더는 속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때에 따라서는 한바탕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만히 몸의 힘을 끌어모으며 차갑게 물었다.

"그럼 나를 잡아다 관청에 바칠 생각이오?"

그러자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말이 그렇다 그거지, 내가 당신을 붙잡아 무엇하겠소?"

목소리뿐만 아니라 말투도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허리춤을 잡은 손을 놓아주는 것도 딴 뜻이 없음을 넌지시 밝히고 있었다.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합시다."

허리춤을 놓은 사내가 임충의 옷깃을 끌며 한층 은근해져 말했다. 임충(林沖)도 왠지 그가 싫지 않아 따라 들어갔다. 임충과 함께 집 뒤 작은 정자로 오른 사내는 술집 주인을 불러 등불을 밝히게 했다. 그리고 새삼 처음 만나는 예()를 나눈 뒤에 임충과 마주 앉았다.

"내가 보니 형은 양산박이 어디 있는가를 묻고 또 그리로 가는 배를 구해 달라고 했소. 하지만 그곳은 흉악한 도둑 떼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오. 도대체 거길 가서 무얼 하려 하시오?"

그 사내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임충(林沖)이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있는 대로 속임 없이 말씀드리지요.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관가에서는 급하게 나를 뒤쫓고 있으나 나는 숨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산채에는 호걸들이 무리 지어 있다기에 그곳을 찾아가 보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반드시 누군가가 형을 이리로 가라고 권한 사람이 있겠구려. 그게 누구요?"

"창주 횡해군(橫海郡)에 있는 옛 친구올시다. 그가 이곳을 권했지요."

그러자 사내는 대뜸 임충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혹시 그분은 소선풍 시진(柴進)이란 분이 아닌가요?"

"당신도 아시는 모양이구려."

임충(林沖)이 반가워 그렇게 받자 사내가 한층 공손한 말투가 되어 말했다.

"시대관인과 산채의 큰 두령님은 교분이 두텁지요. 늘상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원래 산채의 큰 두령 왕륜(王倫)은 옛날 과거를 치르기 전 둘째 두령 두천(杜遷)과 함께 시진을 찾아가 여러 날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떠날 때는 적잖은 은자까지 받아 쓴 터라 둘 다 시진에게 마음 빚을 지고 있었다. 거기까지의 이야기로 사내가 양산박에서 온 사람임을 알아차린 임충(林沖)은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절을 하며 몰라본 죄를 빌었다.

"눈이 있으면서도 태산 같은 분을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크신 이름은 무엇인지요?"

임충(林沖)이 원래 비루한 위인은 아니었지만 이제 양산박(梁産泊)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만큼 겸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내가 놀라 맞절을 하며 자신을 밝혔다.

"저는 왕 두령의 눈과 귀 노릇을 하는 주귀(朱貴)란 자올시다. 고향이 기주(沂州) 기수현으로 세상 사람들은 저를 한지홀률(旱地忽律)이라 부르지요. 산채에서는 저를 이곳으로 내려보내 주막을 하는 체하며 지나가는 장사치를 살펴보게 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패거리가 지나가면 산채에 알려 뺏도록 하고, 홀몸으로 다니는 것들은 제가 바로 처리하는 식입니다. 홀몸이라도 가진 게 없으면 그냥 보내지만 재물이 많은 자는 다르지요. 몸무게가 적게 나가면 몽한약(夢汗藥)을 써서 재물만 뺏고 죽이지만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 그 고기까지도 씁니다. 살코기는 소금에 절이고, 기름기는 끓여 등불을 밝히지요. 형에게도 당장 몽한약(夢汗藥)을 먹이려 했으나 양산박을 물으시기에 함부로 쏜을 쓰지 못한 것입니다. 거기다가 형께서 벽에 쓰신 이름을 보고 비로소 누군지 알았습니다. 일찍이 동경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형이 대단한 호걸이란 말을 들었으되 뵈올 기회가 없더니 이제 이렇게 뜻밖에 뵙게 되었군요. 더구나 시대관인(柴大官人) 서찰까지 받아 오셨다니 역시 형의 이름이 온 세상을 떨쳐 울리고 있음을 알겠습니다. 왕 두령님께서도 반드시 형을 무겁게 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코기와 생선에 갖가지 안주를 갖춰 임충을 대접했다.

'마른 땅을 기는 악어(旱地忽律)'라는 섬뜩한 별명이나 나그네를 상대로 벌이는 끔찍한 강도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융숭함이었다. 그런 주귀(朱貴)와 더불어 밤늦도록 술을 마시던 임충(林沖)이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인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배는 어떻게 구해 그리로 건너갈 수 있소?"

주귀(朱貴)가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배는 이미 여기에 있으니 형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오경(五更) 무렵 일어나 함께 가시면 됩니다."

그 말에 임충(林沖)도 마음을 놓고 몇 잔 더 마시다가 각기 방을 정해 쉬었다.

다음 날 새벽이었다. 오경(五更) 무렵하여 먼저 일어난 주귀가 임충을 소리쳐 깨웠다. 임충(林沖)이 얼굴을 씻고 들어오자 주귀(朱貴)는 다시 술과 고기를 내어 임충에게 권했다. 서너 잔을 받아 마셨으나 날은 아직 밝지 않았다. 주귀(朱貴)가 갑자기 정자 창문을 열더니 가지고 있던 활에다 살 한대를 먹여 쏘았다. 물 건녀편 기슭 우거진 갈대숲 쪽으로 향해서였다. 보고 있던 임충(林沖)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무얼 하시는 거요?"

"산채에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배가 올 것입니다."

주귀(朱貴)가 그렇게 일러 주었다. 과연 오래잖아 맞은편 갈대숲 근처가 술렁거리더니 졸개 서넛이 배 한 척을 저어 주막 쪽으로 다가왔다. 잠깐 사이에 배가 정자 앞에 이르자 주귀(朱貴)는 임충을 배에 타게하고, 그의 보따리와 칼도 함께 실었다. 졸개들이 부지런히 노를 저어 배는 금세 금사탄(金沙灘)을 건넜다. 배가 언덕에 닿자 주귀(朱貴)와 임충(林沖)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졸개들이 임충의 칼이며 보따리를 안고 따랐다. 나머지 졸개들은 어딘가 후미진 포구에 배를 감추러 갔다. 임충(林沖)이 언덕을 오르며 보니 양쪽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서 있고 그 한쪽 트인 곳에 정자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편액을 살피니 '단금정(斷金亭)'이라 쓰여 있었다. 단금정을 돌아 얼마쯤 가자 이번에는 관문 하나가 보였다. 창칼과 활, 쇠뇌, 도끼 따위가 빽빽이 늘어섰고, 굴림 통나무와 바윗덩이가 쌓여 있는 게 그 어떤 관문에도 뒤지지 않았다. 졸개들이 먼저 달려가 알려 두 사람은 아무런 막힘없이 관문을 지났다. 양편 좁은 길로 깃발이 줄지어 서 있는데 다시 관문 못지않은 험한 길목 둘을 도니 저만치 산채 어귀가 보였다.

임충(林沖)은 거기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트인 높은 산 위에 자리 잡은 산채를 세 관문이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가로세로, 사오백 장은 될 듯한 펀펀한 들판이 펼쳐있었다. 자기들이 들어온 쪽이 바로 산채의 정문이요, 나머지 둘은 곁문인 듯싶었다. 거기다가 산발치를 두른 물을 더하면 그야말로 하늘이 만들어 준 성채 같은 곳이었다.

주귀(朱貴)는 임충을 데리고 취의청(聚義廳) 위로 올라갔다. 취의청 마루 한가운데 높다란 교의(交椅)에 한 호걸이 앉아 있는데 그가 바로 백의수사 왕륜(王倫)이었다. 그 왼편 교의에는 모착천 두천(杜遷)이 앉았고, 오른편 교의에는 운리금강 송만(宋萬)이 또한 위엄을 뽐내며 앉아 있었다. 주귀와 임충(林沖)은 적잖이 주눅이 들어 조심조심 그들 앞으로 나갔다. 주귀(朱貴)가 곁에 선 임충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말했다.

"이분은 동경 팔십만금군의 교두로 계시던 임충(林沖)이란 분입니다. 별명은 표자두(豹子頭)라 불립니다. 고태위의 모함을 당해 창주로 귀양 오게 되셨지요. 그러다가 이번에는 또 지키던 대군초료장을 불태우고, 사람을 셋씩이나 죽이게 되어 시대관인(柴大官人)의 장원으로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전부터 임교두를 높이 보던 시대관인(柴大官人)은 관가의 추적이 심해 집 안에 두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특히 편지를 세 분 두령께 올리며 임교두를 받아 주기를 청하기에 제가 이렇게 데려왔습니다."

주귀(朱貴)에 이어 임충(林沖)도 품 안에 감추고 있던 시진의 편지를 꺼내 바치며 공손히 말했다.

"보잘것없는 임충도 세 분 두령께 감히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시진의 편지를 뜯어본 왕륜(王倫)은 곧 교의 둘을 더 내오게 해 임충을 네 번째 자리에 앉히고 주귀를 다섯 번째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졸개들을 시켜 술을 내오게 한 뒤 임충에게 권했다. 임충(林沖)이 서너 잔을 비웠을 무렵 왕륜이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 시대관인(柴大官人)께서는 요즈음 별일 없소?"

"매일 성 밖을 나가 사냥을 즐기며 지내십니다. 이 임충의 일 말고는 별일 없지요."

임충(林沖)이 본대로 대답했다. 세 두령의 깍듯한 대우에 적잖이 감격한 터라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하지만 임충(林沖)이 감격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왕륜(王倫)은 겉으로는 임충을 반갑게 맞는 척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제 나름의 셈을 하느라 한창이었다.

'나는 본시 과거에 낙방한 수재(秀才)로 두천과 뜻이 맞아 이렇게 도둑 떼의 우두머리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송만(宋萬)이 찾아들고 졸개들도 많이 모여들어 이만큼 되었지만, 실은 내가 잘하는 일은 별로 없다. 저 두천(杜遷)과 송만의 무예도 대단한 건 못 되고, 그런데 이제 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좀 생각해 봐야 될 일이 아닐까? 저 사람은 동경에서 금군교두를 지냈다니 틀림없이 무예가 뛰어날 것이다. 만약 저 사람이 우리 셋의 솜씨가 보잘것없음을 알고 우리 자리를 힘으로 빼앗으려 든다면 무슨 수로 맞서겠는가. 좀 억지스럽더라도 적당한 핑계를 대어 저 사람을 이 산에서 빨리 내쫓는 게 뒷날의 걱정거리를 없애는 셈이 될 것이다. 시진(柴進)을 볼 낯이 없고, 지난날의 은혜를 잊었다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저 사람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왕륜(王倫)은 다시 졸개들을 불러 따로 큰 술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졸개들이 술을 거른다, 안주를 장만한다, 법석을 떨어 잔치 같은 술자리를 마련하자 왕륜(王倫)은 임층을 불러들였다. 송만(宋萬), 두천(杜遷), 주귀(朱貴)도 함께해 처음에는 임충을 맞이하는 두령들의 술자리 같았다. 그러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해 왕륜(王倫)이 갑자기 졸개들을 부르더니 오십 냥의 은자가 당긴 쟁반 하나와 비단 두 필을 내오게 했다. 졸개들이 시킨 대로 하자 왕륜(王倫)이 몸을 일으켜 임충에게 말했다.

"대관인께서 추천해 임교두가 우리 산채를 찾아오신 것은 반가운 일이나 받아들일 수 없음이 안타깝소이다. 우리 산채는 작고 식량이 모자랄 뿐만 아니라 거처할 곳도 마땅치 않고 세력도 보잘것없어 오히려 임교두의 앞날을 그르칠까 두렵소. 내드리는 돈과 피륙이 비록 적으나 비웃지 말고 거두시고 달리 큰 산채를 찾아보시는 게 좋겠소. 교두 같은 호걸(豪傑)이 몸담을 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을 터인즉, 내 말을 너무 괴이쩍게 듣지 마시오."

그 뜻밖의 말에 술기운이 싸악 걷힌 임충(林沖)이 간곡히 사정했다.

"세 분 두령께서는 다시 한번 헤아려 주시오. 저는 의로운 이름을 우러러 천 리를 닫고, 참다운 주인을 찾아 만 리를 헤매다가 시대관인(柴大官人)의 체면을 빌러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 임충(林沖)이 비록 재주 없으나 무리에 끼워 주시기만 한다면 모든 일에 죽음을 마다 않고 앞장설 각오였습니다. 돈냥이나 베필을 얻자고 이렇게 달려온 것은 아니니 부디 이 고단하고 외로운 처지를 밝게 헤아려 주십시오."

왕륜(王倫)이 그런 임충의 말을 차게 잘랐다.

"이곳이 좁아서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오. 조금도 이상하게는 생각하지 마시오."

그때 보고 있던 주귀(朱貴)가 딱했던지 임충을 편들어 한마디 했다.

"형님께서는 아우의 말 많음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한번 귀 기울여 주십시오. 우리 산채에 식량이 모자란다고 하지만 가깝고 먼 마을에서 빌려다 쓸 수도 있는 일이고, 거처가 마땅치 않다해도 이곳에는 재목으로 쓸 나무가 널렸으니 천 칸의 집을 지어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더구나 저분은 시대관인(柴大官人) 께서 천거해 보내신 분인데 어찌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라도 우리가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시대관인(柴大官人)이 아신다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또 저분은 여러 가지 재주를 지녔으니 우리가 받아들여 주기만 하면 반드시 지닌 힘을 다 쏟아 일할 것입니다."

두천(杜遷)도 보기가 딱했던지 임충을 편들었다.

"우리 산채에 저 사람 하나 더 있다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시대관인(柴大官人)이 섭섭히 여기실겁니다. 우리도 받은 은덕과 의리를 저버린 인간들이 되고 맙니다. 전날 그토록 큰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사람 하나 보낸 걸 어찌 받지 않고 내쫓는단 말입니까? 시대관인(柴大官人)의 낯을 보아서라도 저 사람을 두령의 하나로 받아 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강호의 모든 호걸들이 우리의 의리 없음을 비웃을 것입니다."

송만(宋萬)까지도 그렇게 임충을 돕고 나섰으나 왕륜(王倫)은 좁은 속셈을 버릴 줄 몰랐다. 이번에는 엉뚱한 의심을 내세워 셋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아우들이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저 사람은 창주에서 끔찍한 죄를 짓고 쫓기는 사람인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오늘 이 산에 오른 것이 만약 우리의 허실을 엿보기 위함이라면 그때는 어찌 하겠소?"

그 기막힌 소리를 듣다 못한 임충(林沖)이 버럭 소리를 질러 말했다.

"제가 죽을 죄를 짓고 쫓기다가 한 무리가 되자고 이곳에 왔는데 어찌 그런 의심을 하십니까?"

그러자 왕륜(王倫)도 스스로 너무했다 싶었던지 기세가 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그대로는 안 된다는 듯 조건을 달았다.

"당신이 진심으로 우리의 한 무리가 되려고 왔다면 먼저 투명장(投名狀)을 쓰시오."

임충(林沖)이 얼른 대답했다.

"글자라면 약간 쓸 줄 아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종이와 붓을 청했다. 투명장(投名狀)을 말 그대로 어떤 무리에 처음 낄 때 쓰는 서약문쯤으로 안 까닭이었다. 주귀(朱貴)가 빙긋 웃으며 임충을 깨우쳐 주었다.

"교두님, 무얼 잘못 알고 계시오. 두령께서 말씀하시는 투명장(投名狀)은 그런 게 아니외다. 이곳 호걸들 사이에 끼어들 때 필요한 투명장(投名狀)은 산 아래로 내려가 한 사람을 죽이고 그 목을 바치는 것이오. 그래야만 더 의심하지 않고 무리에 받아들이기에 그 목을 투명장이라 한다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습니다. 얼른 산 아래에 내려가 기다리지요. 다만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까 걱정입니다."

어떻게든 그곳에 남고 싶은 임충(林沖)이 그렇게 선뜻 대답했다. 왕륜(王倫)이 그런 임충에게 다짐받듯 말했다.

"그럼 당신에게 사흘 말미를 주겠소. 만약 사흘 안으로 투명장(投名狀)을 바친다면 그 즉시로 받아들여 주겠지만, 사흘을 넘기면 당신을 내보내더라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라도 남을 수 있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기며 임충(林沖)이 선선히 응했다.

그날 밤 술자리가 끝나자 주귀(朱貴)는 임충과 이별하고 밤길로 산을 내려갔다. 산채의 눈과 귀가 되는 주막을 하룻밤이라도 비워둘 수 없어서였다. 임충(林沖)은 자신의 보따리와 함께 산채의 객방(客房)으로 안내되어 거기서 하룻밤을 쉬었다. 다음 날 일찌감치 눈을 뜬 임충(林沖)은 졸개 하나를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왕륜에게 약속한 투명장(投名狀)을 얻기 위함이었다. 허리칼은 차고 큰 칼은 손에 거머쥔 채 배를 타고 물을 건넌 임충(林沖)은 한 군데 으슥한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재수 없는 나그네가 걸리기를 기다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꼬박 길목을 지켰으나 첫날은 헛일이었다. 홀로 지나가는 장사치는커녕 어리친 개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임충(林沖)은 걱정스럽기 그지없었으나 날이 저물자 하는 수 없이 물을 건너 산채로 돌아갔다 왕륜(王倫)이 그런 임충을 기다렸다는 듯 심술궂게 물었다.

"그래, 투명장(投名狀)은 어디에 있소?"

"오늘은 길을 지나는 놈이 하나도 없어 얻지 못했습니다."

임충(林沖)이 저도 몰래 음츠러든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왕륜이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내일까지요. 만약 내일까지도 투명장을 가져오지 못하면 이곳에는 더 남아 있을 생각을 마시오."

술 마시고 지낸 첫날 밤을 하루로 쳐서 제하고, 다음 날로 기한을 앞당겨 버린 것이었다. 임충(林沖)은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게 있었으나 그걸 따지지는 못했다. 저 마음속으로만 이를 갈며 거처로 돌아가 저녁 술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전날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 임충(林沖)은 자기에게 딸린 졸개를 두들겨 깨워 새벽밥을 먹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나가 사람의 목을 얻을 기회를 노려 볼 생각에서였다.

"오늘은 남쪽 산길에 가서 기다려 보시지요."

배에 오르면서 따르던 졸개가 그렇게 권했다. 아무래도 오래 그곳에 머문 사람이 그쪽 사정에 밝지 싶어 임충(林沖)은 그대로 따랐다. 배를 남쪽으로 몰아 물을 건넌 뒤 길가에 있는 숲에 숨어 다시 재수 없는 행인이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정오쯤 엎드려 기다리다 보니 한 떼의 행인들이 나타났다. 합쳐 삼백 명에 가까운 머릿수라 아무리 임충(林沖)이라도 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음만 급해 노려보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그들은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임충(林沖)은 다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슬슬 저물어 오는데도 홀로 지나가는 행인은 영 보이지 않았다. 막막해진 임충(林沖)이 졸개를 잡고 하소연하듯 물었다.

"정말 너무하는구나. 이틀을 기다려도 혼자 다니는 놈은 하나도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내일 하루가 더 남았지 않습니까? 내일은 저와 함께 동쪽 산길로 나가 기다려 보시지요."

한 이틀 따라다닌 정에서일까, 졸개가 그렇게 임충을 위로했다. 임충(林沖)은 왕륜이 전날 한 말을 떠올리고 아득해졌으나, 원래 사흘이라 했으니 하루를 더 뻗대 볼 셈 잡고 산채로 돌아갔다. 임충(林沖)이 물을 건너 산 위로 돌아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둑했다. 기다린 듯 왕륜(王倫)이 임충의 빈손을 뻔히 보면서 흉물스레 물었다.

"오늘은 투명장이 어찌 됐소?"

그러나 임충(林沖)은 대답 대신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왕륜(王倫)이 비웃음을 섞어 몰아댔다.

"벌써 오늘도 다 가지 않았소? 내가 말미를 준 게 사흘이었는데 이제 이틀이 지났소. 내일도 투명장(投名狀)을 못 얻으면 다시 와 나를 볼 것도 없소. 바로 산을 내려가 다른 곳을 찾아보시오."

그래도 임충(林沖)이 조르기 전에 하루를 되돌려 준 것은 고맙기 짝이 없었다. 임충이 이틀이나 허탕을 치는 걸 보자 마음에 여유가 생겨 나중에라도 야박했다는 소리나 면하려고 인심을 쓴 듯했다. 시늉뿐인 저녁 끼니를 때우고 제 방으로 돌아온 임충(林沖)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늘을 안고 누워 길게 탄식했다.

"고구 그 몹쓸 놈의 모함에 걸려 오늘 이 지경으로 굴러떨어졌구나. 내 잘못이 아닌데도 아무도 받아 주지 않으니 세상에 이같이 기구한 운명도 있을까!"

하지만 그런 중에도 밤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다시 날이 밝았다. 날이 밝기 무섭게 일어난 임충(林沖)은 먼저 보따리부터 꾸려 방구석에 챙겨 두었다. 왕륜의 말대로 그날도 머리를 얻지 못하면 그대로 떠날 참이었다. 그런 다음 넘어가지도 않는 아침밥을 몇 술 뜬 임충(林沖)은 다시 전날 데리고 갔던 졸개와 함께 산을 내려갔다. 이번에는 양산박 쪽으로 난 산길 쪽이었다.

"오늘 또 투명장을 얻지 못하면 별수 없지. 딴 곳을 찾아가 보는 수밖에."

임충(林沖)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길가 숲속에 몸을 숨겼다. 기다리는 중에도 해는 속절없이 솟아 어느덧 하늘 가운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날도 혼자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는 눈에 띄지 않았다. 눈 온 뒤에 갠 하늘이라 날은 눈부시게 맑았지만 임충의 가슴속은 어둡기만 했다.

"보아하니 일은 모조리 글러 버린 것 같구나. 차라리 날이라도 저물기 전에 보따리를 꾸려 딴 곳을 찾아가 보는 게 낫겠다."

이윽고 기다리기에 지친 임충(林沖)이 곁에 있는 졸개에게 한숨 섞어 그렇게 말했다. 그때 졸개가 한곳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마침 잘됐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저기 한 놈이 오고 있지 않습니까?"

임충(林沖)이 그쪽을 보니 정말로 사람 그림자 하나가 멀리 산그늘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구나!"

임충(林沖)은 죄 없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게 새삼 마음에 걸렸으나 하는 수가 없었다. 자신을 달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그림자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임충(林沖)이 숨어 기다리는 걸 알 리 없는 그 행인은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임충은 그만하면 놓치지 않겠다 싶을 때까지 엎드려 기다리다가 칼을 꼬나 쥐고 달려 나갔다. 갑자기 달려 나온 임충(林沖)을 본 그 행인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지고 있던 짐을 벗어 던지고 몸을 돌려 달아났다. 임충(林沖)은 얼른 그를 뒤쫓았으나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는 사람을 잡을 수는 없었다. 행인의 뒷모습이 차츰차츰 멀어지더니 어느새 산그늘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세상에 나같이 재수 없는 놈을 본 적이 있나? 사흘을 기다려 겨우 한 놈이 나타났는데 그마저 놓쳐 버리다니."

맥이 빠진 임충(林沖)이 뒤따라온 졸개를 보며 탄식처럼 말했다. 졸개가 다시 임충을 위로했다.

"비록 그 머리를 얻지는 못했지만 남기고 간 짐으로 어찌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재물과 피륙이 제법 많아 보이는데요."

그 말을 들은 임충(林沖)은 다시 한 가닥 희망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낙담으로 풀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졸개에게 일렀다.

"그럼 네가 먼저 이 짐을 지고 산으로 돌아가거라. 나는 여기서 한 번 더 기다려 보겠다."

졸개도 임충의 말을 옳게 여겼는지 군소리 않고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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