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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13화

Bollnow 2025. 1. 9. 09:08

육겸과 두 공인(公人)은 다시 술 한 잔을 더 나눈 뒤에야 일어났다. 육겸(陸謙)이 술값을 치르고, 세 사람은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다. 동초(董超)와 설패(薛覇)는 육겸에게서 받은 금을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가 싸던 보따리를 마저 쌌다. 그리고 수화곤(水火棍, 반은 붉고 반은 검은 짧고 단단한 방망이)을 찾아 들고 사신방으로 갔다. 사신방(使臣房)에서 임충을 꺼낸 두 사람은 곧 길을 떠났다. 출발이 늦어서인지 그날은 성()을 나간 지 삼십 리도 안 되어 날이 저물었다.

"그만 쉬어 가세."

마음속으로는 흉측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두 놈은 조금도 내색 하지 않고 그렇게 의견을 맞추었다. 그들이 육겸과 한 거래를 알 길이 없는 임충(林沖)은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 송대(宋代)의 길가 주막은 죄수를 끌고 가는 공인들에게는 방값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밥값은 그렇지가 않아서, 대개 죄수와 공인들은 제 손으로 밥을 지어 먹곤 했다. 임충(林沖)과 두 공인(公人)도 마찬가지여서, 잠은 머무르는 주막에서 그냥 잤으나 아침 식사는 지어 먹기로 했다.

이튿날 날이 새기 바쁘게 일어난 그들은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은 뒤 길을 떠났다. 때는 유월이라 날이 몹시 더웠다. 임충(林沖)은 처음 매를 맞을 때는 괜찮았으나 날씨가 더워지자 매 맞은 곳이 덧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처음 매를 맞아 본 터라 몸도 좋지 않았다. 전날은 그럭저럭 걸었지만 둘째 날이 되자 한 발짝 한 발짝 떼어놓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설패(薛覇)가 조금씩 본색을 드러내며 임충을 몰아대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할! 여기서 창주까지는 이천 리가 넘는 길인데 그 꼴로 언제 간단 말인가!"

"제가 태위부에서 적잖이 골탕을 먹은 데다 어제는 매까지 맞아 매 맞은 자리가 덧난 듯합니다. 게다가 날까지 찌는 듯해 한 발짝 옮기기가 괴롭군요."

임충(林沖)이 처량한 심경을 억누르고 그렇게 사정했다. 곁에 있던 동초(董超)가 퉁을 놓았다.

"늑장을 부리는 주제에 엄살은."

그러고는 저희끼리 수군거리다가 해를 살폈다. 마침 날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에 큰 선심이나 쓰듯 가던 길을 그만두고 가까운 마을로 접어들었다. 마을의 주막에 이른 세 사람은 가까스로 방 하나를 얻어 들게 되었다. 방 안에 이른 동초(董超)와 설패(薛覇)는 방망이를 내려놓고 짐을 풀었다. 그들을 따라 짐을 푼 임충(林沖)은 그들이 뭐라 하기도 전에 쇄은(碎銀)을 내어 술과 고기를 샀다. 그리고 쌀을 꺼내 밥을 짓고 반찬을 마련해 둘에게 함께 먹기를 청했다. 두 놈은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밥과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임충에게도 억지로 권해 취하게 만들더니 칼을 씌워 방 한구석에 밀쳐놓았다. 영문도 모르고 취해 방 한구석에 누워 있는 임충을 두고 밖으로 나간 설패(薛覇)는 한참 뒤에 어디서 펄펄 끓는 물이 든 솥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그 물을 대야에 쏟은 설패(薛覇)가 얼큰하게 술에 취해 누워 있는 임충에게 소리쳤다.

"어이, 임교두 발 좀 씻지. 그럼 잠이 잘 올 거야."

그 소리를 들은 임충(林沖)이 얼른 일어나려 했으나 칼을 채워 놓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사정을 잘 안다는 듯 설패(薛覇)가 얼른 말했다.

"그럼 내가 씻겨 주지."

"아니 되오!"

임충(林沖)은 너무 황송스러워 고개까지 저었다. 설패(薛覇)가 여전히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길 떠난 사람이 무얼 그리 이것저것 따지나?"

그렇게 되니 그 속을 알 길 없는 임충으로서는 다리를 그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설패(薛覇)가 비죽이 웃으며 임충의 다리를 끌어 뜨거운 물 속에 집어넣었다.

"으악!"

임충(林沖)이 비명과 함께 급하게 발을 뺐지만 이미 그의 발은 뜨거운 물에 데어 군데군데 붉은 물집이 부풀어 올랐다.

"이 무슨 짓이오? 나를 삶아 죽일 작정이오?"

임충(林沖)이 성난 눈으로 노려보며 설패에게 소리쳤다. 설패(薛覇)가 도리어 벌컥 화를 내고 임충을 꾸짖었다.

"뭐라구? 내 지금까지 죄수가 공인을 시중드는 것은 보아도 공인(公人)이 죄수 시중드는 것은 보지 못했다. 나는 좋은 뜻으로 네 발을 씻어 주었건만 너는 물이 뜨겁다는 이유로 불평을 해? 이거 정말 웃는 낯에 침 뱉는 격이로구나!"

그리고는 밤늦도록 임충(林沖)이 무슨 큰 배은망덕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나무랐다. 임충(林沖)은 속이 터질 듯했지만 그들의 미움을 샀다가는 또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 대꾸 한마디 더 하지 못하고 방 한구석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두 놈은 물이 식기를 기다려 밖으로 들고 나가더니 번갈아 발을 씻고 들어왔다. 임충(林沖)은 쓰라려 오는 발을 주무르다가 밤이 늦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

다음 날 이른 새벽이었다. 아직 주막에서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설패(薛覇)가 부산을 떨었다. 불을 피운다, 밥을 짓는다, 한참 수선을 피우던 끝에 임충을 흔들어 깨우고 아침밥을 먹으라고 했다. 임충(林沖)은 마지못해 일어났으나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두 놈이 저희끼리 밥을 먹고 떠나기를 재촉했을 때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매 맞은 자리가 덧난 데다 전날 끓는 물에 데인 발이 부어오른 까닭이었다. 설패(薛覇)가 몽둥이를 둘러메며 그런 임충을 몰아댔다. 거기 한술 더 뜬 게 동초였다. 동초(董超)는 허리춤에서 새 미투리 한 켤레를 꺼내더니 억지로 임충에게 신겼다. 새것이라 거칠기 짝이 없는 미투리를 임충의 반쯤 익다 만 발에 끼워 넣자 임충(林沖)은 저도 모르게 죽는소리를 내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초(董超)가 새 미투리를 기어이 신긴 뒤에 임충(林沖)이 자기 발을 보니 발등, 발바닥 할 것 없이 물집이 터지고 살갗이 찢겨 피와 진물이 줄줄 흘렀다. 임충(林沖)은 헌 신을 신고 가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이미 두 놈은 본색을 완연히 드러낸 다음이었다. 임충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주막 심부름꾼을 소리쳐 불렀다. 저희가 마신 술값을 셈한 두 놈은 비틀거리는 임충을 끌고 주막을 나왔다. 그때야 겨우 날이 훤히 밝아 오고 있었다.

임충(林沖)은 악귀 같은 두 놈의 몽둥이가 겁이 나 억지로 걸었지만 두어 마장도 못 가 주저앉고 말았다. 새 미투리에 찢기고 해진 발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임충(林沖)이 주저앉아 끙끙 않는 걸 본 설패(薛覇)가 다시 몰아댔다.

"어서 일어나! 빨리 가잔 말이야! 말을 안 들으면 이 몽둥이가 너를 뛰게 만들 거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내가 어찌 게으름을 피워 이러겠습니까? 다만 이 발이 아파 꼼짝을 못하고 있습니다."

임충(林沖)이 그렇게 죽는소리로 사정을 했다. 그때 곁에 있던 동초(董超)가 이죽거리듯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부축해 모시지."

그리고 임충을 부축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축이라기보다는 질질 끄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다시 한 네댓 마장이나 갔을까,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 짙은 숲이 나타났다. 바로 야저림(野猪林)이라 불리는 곳으로 당시 동경에서 창주로 가는 길에서는 맨 처음 만나게 되는 험한 곳이었다. 귀양 가는 죄수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공인에게 돈을 먹이고 그 죄수를 없애 달라고 할 때, 공인(公人)들은 대개 거기서 손을 썼다. 따라서 거기서 원통하게 죽은 호한(好漢)이 하나둘이 아니었는데, 이제 두 놈이 임충을 그리고 끌고 갔으니 속셈을 알 만했다.

"온종일 걸어도 십 리를 못 왔으니 이러다간 창주에 이를 수 있기나 하겠나."

"더 갈 수 없을 바에야 저 숲속에서 하룻밤을 쉬고 가세."

동초(董超)와 설패(薛覇)는 능청스레 주고받으며 임충을 데리고 숲 깊숙이 들어간 뒤 짐을 풀었다. 임충(林沖)은 신음 소리와 함께 큰 나무 아래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동초와 설패가 그런 임충 쪽을 보지도 않고 투덜거렸다.

"한 발짝 걷고 한 번씩 기다려야 하니 지루해서 어디 견딜 수 있겠나? 여기서 잠깐 눈을 붙이고 가세."

그리고 두 놈 모두 나무 아래 벌떡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있을 때만 해도 한숨 자고 가려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두 놈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왜 일어나시오?"

임충(林沖)이 까닭 없이 불안해져 두 놈을 보고 물었다. 두 놈이 한 목구멍에서 나온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둘이 잠깐 눈을 붙이려 해도 네놈 때문에 그럴 수가 있어야지. 손발에 채울 자물쇠도 없는 마당에 그냥 두고 자다간 네놈이 달아나고 말 것이 아닌가. 도무지 마음이 안 놓여 잠을 못 자는 게야."

"내가 이래 보여도 호걸이란 소리를 듣던 사람입니다. 결코 달아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임충(林沖)이 그들을 안심시키려 했으나 두 놈은 믿어 주려 하지 않았다.

"네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아무래도 네놈을 꽁꽁 묶어 두어야 우리 마음이 놓이겠다."

설패(薛覇)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임충(林沖)이 선선히 응했다.

"두 분이 그래야만 마음 놓을 수 있다면 제가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그러자 설패(薛覇)가 기다렸다는 듯 허리에서 포승줄을 꺼내 임충을 그 나무에 꽁꽁 묶었다. 그런데 그다음이 이상했다. 임충을 묶고 제자리에 돌아간 설패(薛覇)는 거기 드러누워 자기는 커녕 오히려 수화곤이란 몽둥이까지 찾아들고 동초와 함께 되돌아왔다. 두 놈의 눈에 살기가 번쩍이는 걸 보고 임충(林沖)은 비로소 모든 게 짐작되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다치고 지친 몸에 포승줄까지 꽁꽁 묶였으니 움치고 뛰려야 뛸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임충에게 다가온 설패(薛覇)가 음산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임충, 이제 이쯤서 죽어 줘야겠다. 우리가 널 죽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높으신 분의 당부가 있어서다. 실은 그저께 동경을 떠날 때 육겸이란 분이 와서 고태위님의 분부를 전했다. 너를 죽이고 네 뺨의 금인을 벗겨 돌아오라는 분부셨다. 이제 이만큼 왔으니 죽는 것도 네놈 운수인 줄 알고, 우리 두 사람을 원망하지 마라.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마다할 수 있겠느냐?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으면 내년 이맘때를 기다려라. 그날은 네놈의 첫째 기일이 되니 그때 제사상 머리에서 모든 걸 다 일러주마."

그 말을 들은 임충(林沖)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임충(林沖)은 이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두 분과는 원수진 일이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한목숨 구해 주신다면 그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그렇게 사정해 보았으나 쇠귀에 경 읽기였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네놈은 살려 둘 수 없다."

동초(董招)가 퉁명스레 쏘아붙이고 설패(薛覇)는 벌써 수화곤을 쳐들고 임충에게로 다가들었다. 단번에 임충의 머리통을 쪼개 놓겠다는 기세였다. 하지만 미처 그 몽둥이가 임충의 머리 위에 떨어지기 전에 뜻밖의 구원이 왔다. 어디선가 철 선장(禪杖)이 날아들어 설패의 몽둥이를 멀리 쳐내 버리더니 몸집이 큰 스님 하나가 몸을 날려 두 놈 앞에 우뚝 서며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꼼짝 마라! 내가 숲속에서 네놈들이 하는 짓을 엿본지 오래다."

그러고는 선장을 휘둘러 두 놈을 후리치려 했다. 호통 소리에 임충(林沖)이 놀라 눈을 뜨고 보니 그 스님은 다름 아닌 노지심이었다. 그를 알아본 임충(林沖)이 급한 소리로 말렸다.

"형님,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에 두 놈을 당장에 박살 내려고 별렀던 노지심(魯智深)이 꼬나든 선장을 거두었다. 얼이 빠진 두 놈은 그대로 얼어 버린 사람마냥 뻣뻣이 굳은 채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저 둘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고태위가 육겸(陸謙)이란 놈을 시켜 저 두 공인에게 나를 죽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놈들이 아니었다면 저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지금 저들을 죽인다면 저들은 너무도 억울하게 됩니다."

임충(林沖)이 다시 노지심을 말린 까닭을 차근차근 밝혔다. 그 말을 들은 노지심은 둘을 버려두고 계도(戒刀)를 뽑아 임충을 묶고 있는 줄부터 끊었다.

"이보게 아우, 자네가 그 칼을 사던 날 이후 난 늘 자네 걱정을 했다네. 그 뒤 자네가 관부에 잡혀갔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구할 길이 없어 애만 태우던 차에 자네가 창주로 귀양 가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지. 개봉부를 죄다 뒤지다시피 해 자네를 찾아봤지만 어디 있는지 볼 수가 없더군. 그러다가 겨우 자네가 사신방에 갇혀 있단 걸 알게 되고 또 술집에서 어떤 놈이 저 두 놈을 불러 뭔가 수작을 부린 것도 알게 됐지. 그걸 알게 되니 갑자기 자네가 창주로 가는 도중에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아무래도 자네를 혼자 보낼 수 없다 싶어 뒤를 밟았지. 전날 밤 쉰 주막 있잖나? 나도 거기 쉬면서 저놈들이 짐승 같은 짓을 하는 것도 다 봤네. 저놈들이 자네 발을 끓는 물로 괴롭힐 때만 해도 당장 달려 나가 때려죽이고 싶었다네. 그러나 그곳에는 보는 눈이 많아 일만 그르치고 자네를 구하지 못하게 될까 봐 참았지. 나는 저놈들이 자네를 해칠 마음이 있는 걸 알고, 그러자면 여기가 가장 알맞은 곳이라 싶어 먼저 이 숲속에 와서 기다렸네. 아니다 다를까, 저놈들은 자네를 끌고 이 숲으로 들어오더군...."

노지심(盧智深)이 그렇게 자신이 거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미움이 치미는지 동초와 설패를 노려보며 선장(禪杖)을 꼬나들었다.

"어쨌든 이 나쁜 놈들부터 때려죽이고 보세."

"아니 됩니다. 형님께서 정말로 나를 구해 주시려면 저 둘을 죽이지 마십시오."

임충(林沖)이 다시 한번 그런 노지심을 말렸다. 노지심(盧智深)이 애써 화를 억누르며 두 놈을 꾸짖었다.

"이 나쁜 놈들, 내가 아우의 낯을 보아 참는다. 그러지 않으면 네놈들을 다져서 육장(肉醬)을 만들었을 게다. 아우의 낯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 준다!"

그리고 계도(戒刀)를 칼집에 꽂으면서 을러댔다.

"이놈들, 내 아우를 업지 않고 무얼 하느냐. 어서 업고 나를 따라오너라!"

노지심(盧智深)은 그 말을 끝으로 선장을 끌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으나 두 놈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노지심에게는 감히 대꾸할 엄두도 못 내고 임충에게만 거듭 빈다.

"임교두, 어쨌든 우리 둘의 목숨만 살려 주시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한 놈은 셋의 보따리를 맡고 다른 한 놈은 임충을 업었다. 숲을 빠져나온 일행이 한 서너 마장 가다 보니 마을 어귀에 작은 주막이 나타났다. 노지심(盧智深)이 앞장서 주막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임충, 동초, 설패가 따랐다. 네 사람은 다 나름대로는 한껏 용을 쓴 뒤끝이라선지 속이 출출했다. 노지심(盧智深)이 주인을 불러 고기 대여섯 근과 술 두 각()을 시켰다. 이어 국수야 떡이야 한참을 욱여넣은 뒤에야 네 사람은 어느 정도 배가 찼다.

"그런데 저......스님은 어느 절에 계십니까?"

그사이 놀란 가슴도 어지간히 가라앉았는지 두 공인(公人)이 머뭇머뭇 노지심에게 물었다. 노지심(盧智深)이 씨익 웃으며 받았다.

"네놈들이 내가 어느 절에 있는지를 알아 무엇하려느냐? 가서 고구한테 내가 한 짓을 일러바치기라도 할 작정이냐? 아서라, 다른 놈들은 그놈을 겁낼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놈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 내가 그놈을 만나기만 하면 이 선장(禪杖)으로 삼백 대를 때려 줄 작정이다."

그러자 두 공인은 움찔해 두 번 다시 물어볼 마음을 버렸다. 먹기를 마치고 셈을 한 뒤 주막을 나서는데 임충(林沖)이 노지심에게 물었다.

"형님은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사람을 죽이려면 반드시 피를 볼 때까지라야 하고 사람을 구해 주려면 끝까지 구해 줘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자네를 이대로 보낼 수 없으니 창주까지 바래다주겠네."

그 말을 들은 두 공인(公人)은 속으로 괴롭게 중얼거렸다.

'이거 큰일 났구나! 이 일을 어쩌나? 돌아가서는 뭐라고 말하나?'

하지만 노지심(盧智深)이 무서워 마다하는 말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제 넷으로 불어난 그들 일행은 색다른 귀양길을 떠났다. 곧 임충과 노지심은 상전이 되고 동초와 설패는 종 같은 길이었다. 노지심(魯智深)은 빨리 가고 싶으면 빨리 가고 쉬고 싶으면 쉬었다. 그리고 동초와 설패를 개 몰듯 하는데 잘해야 욕설이요, 잘못되면 매질이었다. 두 놈은 지은 죄가 있어 소리 한번 크게 질러 보지 못하고 괴로운 길을 가야 했다. 마침 수레가 있어 몸이 성치 못한 임충(林沖)을 태우게 된 덕에 임충을 업고 가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두 놈의 고생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까딱 잘못해 노지심의 성미를 건드렸다간 언제 맞아 죽을지 몰라 조심조심 따라가려니까 절로 피가 마르는 듯했다. 주막을 만나 술과 고기를 먹을 때는 노지심과 임충이 먹다 남은 것이라야 겨우 차례가 돌아왔고, 밥을 짓고 반찬을 장만해야 할 때는 그 모든 일이 두 놈 차지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 가다 보니 두 놈의 가슴속에서는 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건 뭐 우리가 저 중놈에게 잡혀 압송돼 가는 꼴이구나. 이제 돌아가면 고태위님은 또 우리에게 어떻게 나올지.'

그러던 어느 날 설패(薛覇)가 동초에게 가만히 말했다.

"듣자니 대상국사의 채마밭에 중놈 하나가 새로운 채마밭지기로 왔다던데 대단한 놈이라더군."

"이름이 노지심이라던가. 그런데 이제 보니 아무래도 이 중놈이 바로 그놈 같단 말이야......"

그러다가 갑자기 좋은 꾀가 생각난 듯 한층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우리 이렇게 하세. 돌아가거든 고태위님께 사실대로 아뢰는 거야. 우리가 야저림에서 임충을 죽이려는데 그 중놈이 와서 구해 줬다고. 그리고 창주까지 따라오며 살피는 바람에 결국 임충에게 손을 쓸 수 없었다고. 그러면 아마도 이미 받은 금 열 냥은 도로 내놓지 않아도 될 것일세."

"육겸 그 사람이 저 중놈을 찾아가 보면 우리 허물은 절로 씻어질 게 아닌가?"

"그게 좋겠네. 그리하세."

동초(董超)도 달리 길이 없는지라 그렇게 따라 주어 그날부터 두 놈은 그 일로 다시는 머리를 썩이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날은 가고 길은 줄어 노지심(魯智深)이 함께 걸은 지 보름 남짓 되자 일행은 창주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창주까지는 한 칠십 리 남은 곳이었다. 갑자기 길이 넓어지며 길가로 마을이 주욱 늘어선 걸 본 노지심(魯智深)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것저것 묻더니 드디어 생각을 정한 듯 임충을 불러 가만히 말했다.

"이보게, 아우. 여기서 창주까지는 길도 멀지 않을뿐더러 인가가 총총히 박혀 있네. 두 놈이 다시 흉측한 마음을 먹을 만큼 외진 곳은 없는 듯하니 나는 이쯤서 자네와 헤어져야겠네."

"뒷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만 헤어지세."

노지심(魯智深)이 여기저기서 알아보고 하는 말이라 임충도 더는 노지심을 붙들지 않았다.

"그리하십시오. 그리고 동경에 돌아가시거든 장인어른께도 제가 탈 없이 창주에 이르렀다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살려 주신 형님의 은혜는 또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형님, 이 은혜 죽어서도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임충(林沖)이 그렇게 작별의 말을 하자 노지심(魯智深)은 괴춤에서 은자 스무 냥을 꺼내 임충에게 주었다. 그리고 다시 은자 두어 냥을 꺼내 두 공인에게 나눠 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 두 놈은 잘 들어라. 네놈들은 원래 그때 거기서 모가지를 날려야 했다만, 아우의 낯을 보아 목숨을 붙여 놓았다. 이제 얼마 안 남은 길 잘 모시고 가거라. 행여라도 흉측한 마음을 품었다가는 그 목이 어깨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저희들이 어찌 다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모든 게 태위가 시켜 한 일이니 그 일은 이제 그만 잊어 주십시오."

두 놈은 그 말과 함께 은자를 거두어들였지만 노지심(魯智深)은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한 번 더 겁을 주기로 작정하고 물었다.

"네놈들 생각에는 네놈 돌머리가 저 소나무보다 단단하다 싶으냐?"

"천만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들의 머리는 부모님께 받은 살가죽이 해골바가지를 싸고 있을 뿐입니다."

두 놈이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대꾸했다. 노지심(魯智深)은 그들에게 보란 듯 선장을 휘두르다 조금 전에 가리킨 굵은 소나무 둥치를 후려쳤다. 선장(禪杖)이 두 치는 실히 되는 깊이로 둥치에 박히는가 싶더니 우지끈 소나무가 부러졌다. 노지심(魯智深)이 그 소나무를 가리키며 두 놈에게 엄하게 말했다.

"만약 네놈들이 두 번 다시 흉측한 마음을 먹었다간 네놈들 골통은 이 소나무 둥치 짝이 날 줄 알아라!"

그러고는 선장을 어깨에 들러메며 임충에게 작별을 했다.

"아우, 그럼 잘 가게."

동초(董超)와 설패(薛覇)는 노지심의 그 엄청난 힘에 얼이 빠져, 그가 떠나간 한참 뒤까지도 혀를 한 발이나 빼물고 굳어 있었다. 임충(林沖)이 그들을 일깨웠다.

", 우리도 이제 가 봅시다."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두 공인이 때늦은 감탄의 말을 토해냈다.

"정말 대단한 스님이구나! 선장 한번 휘둘러 저 큰 소나무를 꺾어 놓다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대상국사에서는 버드나무 한그루를 뿌리째 뽑아 젖힌 적도 있소."

임충(林沖)이 그렇게 전에 본 것을 이야기해 한층 더 겁을 주었다. 쉬고 있던 소나무 숲을 빠져나온 세 사람은 다시 창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나절을 걷고 나니 길가에 주막 하나가 보였다. 지치고 시장한 세 사람은 마침 잘됐다 싶어 그리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주막이 이상했다. 그들 셋이 자리를 차고앉은 뒤 한 시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와서 무얼 먹겠느냐고 묻은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없다면 모르되, 주인 심부름꾼 합쳐 네댓 명이 오락가락하면서도 그러는 게 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13장 소선풍 시진

주막에서 누구 하나 와서 무얼 먹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자 참다못한 임충(林沖)이 탁자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봐요 주인장, 이거 손님 접대를 어떻게 하는 거요? 내가 끌려가는 죄수라고 손님으로 보이지도 않는 거요?"

"무얼 좀 먹으러 왔는데 본 척도 안 하니 이게 무슨 도리요?"

그러자 술집 주인이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그 말을 받았다.

"손님은 남의 호의를 영 몰라주시는구려."

"술과 고기도 팔려고 하지 않으면서 호의는 무슨 호의요?"

임충(林沖)이 알 수 없어 다시 물었다. 주인이 차근차근 일러 주었다.

"이 마을에는 시진(柴進)이란 부자 한 분이 계시는데, 저희들은 그분을 시대관인(柴大官人)이라 높여 부르고 바깥사람들은 소선풍(小旋風)이란 별호로 부르지요. 우리 태조 황제께 나라를 넘겨주신 대주(大周) 시세종(柴世宗)의 자손으로, '서서철권(誓書鐵券, 송제종(宋帝宗)이 시세종의 후예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적은 철판)'을 집에 간직하고 있어 누구도 업수이 여기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호걸(豪傑)들을 좋아해 이곳을 오가는 호걸들을 모두 불러들이니 그 집에는 평소에도 수십 명씩 득실거리지요. 저희들에게도 늘 말씀하시기를, '죄짓고 귀양 가는 사람들 중에도 호걸(豪傑)들이 많으니 내 집으로 보내다오. 내가 그를 돕겠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손님에게 술과 고기를 팔아 손님이 배부르고 술에 취하게 된다면 그분 집으로 간들 그분이 어떻게 손님을 도와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호의로 술과 고기를 팔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임충(林沖)은 대접 때문이 아니라 시진이란 인물이 궁금해서 한번 그 집으로 가 보고 싶어졌다. 노지심 때문에 아직도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두 공인에게 슬며시 물었다.

"내가 동경에 있을 때 시대관인(柴大官人)의 이름을 자주 들었는데, 이제 보니 이곳에 사셨군. 우리 한번 그 집으로 가 보는 게 어떻겠소?"

설패(薛覇)와 동초(董超)는 그 말에 잠시 속으로 생각하다가 선뜻 승낙했다.

"그렇다면 함께 가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보따리를 둘러메며 임충과 함께 술집 주인에게 물었다.

"그럼 시대관인(柴大官人) 댁은 어디 있소? 우리가 한번 찾아가 보겠소."

"이 앞으로 서너 마장 걸으면 큰 돌다리가 나올 거요. 그 건너 물굽이를 돌아가면 끄트머리에 큰 장원이 하나 있는데, 그게 시대관인(柴大官人) 댁이요."

주인이 어서 가 보라는 듯 그렇게 일러 주었다. 술집을 나온 임충(林沖)과 두 공인은 주인이 가리킨 길로 걷기 시작했다. 서너 마장 가다 보니 정말로 큰 돌다리가 하나 나왔다. 그 돌다리 건너서는 평평한 큰길이 나왔는데, 그리로 걸은 지 얼마 안 되어 한 채의 큰 장원이 푸른 숲속에 싸여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장원을 빙 둘러 물이 있고, 물 양쪽 언덕에는 큰 수양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수양버들 숲 아래 한 줄기 회벽 친 담이 쳐져 있어 셋은 그 담을 따라 걸었다. 물굽이 하나를 도니 장원 문이 나오고 그 앞 넓은 널판 다리에는 장정 서넛이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들에게로 다가간 세 사람은 가볍게 예()를 나누었다.

"번거롭지만 대관인께 동경에서 귀양 온 죄수 임() 아무개가 뵙기를 청한다고 일러 주시오."

임충(林冲)이 예를 마치고 그렇게 청하자 장정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정말로 복 없는 분이시군. 대관인(大官人)께서 집에 계셨다면 술과 밥에 돈까지 두둑이 주실 텐데..... 하지만 오늘은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셨소."

"내가 복이 없어 뵙지 못하는 걸 어쩌겠소?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겠소."

임충(林冲)은 별수 없이 그렇게 말하며 장객들과 작별을 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세 사람이 길을 되짚어 나오기를 한 반 리쯤 갔을까, 문득 멀리 숲가에서 한 떼의 인마가 나는 듯 달려왔다. 가까이 오는 걸 보니 눈같이 흰말을 탄 벼슬아치 하나와 그를 에워싼 장정들이었다. 말 위의 사람은 용()의 눈썹에 봉()의 눈이요, 붉은 입술 사이로 흰 이가 가지런한데, 세 갈래로 기른 수염이 또한 여간 당당하지 않았다. 나이는 한 서른서넛쯤 되었을까. 머리에 쓴 두건이며 몸에 걸친 옷이며 두른 띠가 한결같이 화사하기 그지없었고, 메고 찬 활과 화살통 역시 예사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여럿을 딸리고 나타나는 걸 보자마자 임충(林冲)은 속으로 짐작했다.

'저 사람이 시대관인(柴大官人)이로구나.....'

하지만 감히 물어보지를 못해 속으로만 애를 태우며 망설이고 있는데, 그 젊은 벼슬아치가 먼저 물어 왔다.

"거기 칼을 쓰고 가는 사람은 누군가?"

임충(林冲)이 황망해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저는 동경의 금군교두로 있던 임충이란 자입니다. 고태위의 미움을 받아 개봉부로 얽혀 갔다가 거기서 처결이 나 얼굴에 먹자를 뜨고 창주로 귀양을 가는 중입지요. 주막 주인으로부터 시대관인(柴大官人)이란 분이 천하의 호걸들을 맞아들이신단 말을 듣고 외람되게 찾아왔다가 인연이 얕아 못 뵈옵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그 벼슬아치는 말을 몰아 임충에게로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이 시진(柴進)의 소홀함을 용서하시오. 자칫하면 호걸 한 분을 못 뵈올 뻔했소."

그리고 말에서 뛰어내려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임충(林沖)은 더욱 몸 둘 곳을 몰라 하며 엉거주춤 답례를 했다. 시진(柴進)이 임충의 손을 잡고 장원 앞에 이르니 거기 있던 머슴들이 크게 대문을 열고 맞아들였다. 집 안으로 들어간 시진(柴進)은 임충을 데리고 곧바로 대청으로 올랐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한번 새로 만난 예()를 나눈 뒤 임충을 보고 말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교두의 큰 이름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보잘것없는 이곳까지 오셨으니 실로 평생 애타게 바라던 바를 이룬 듯합니다."

임충(林沖)도 공손하게 답했다.

"천한 임충도 대인의 우레 같은 이름이 천하에 널리 떨쳐 울리는 걸 잘 듣고 있었습니다. 누군들 그 이름을 우러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렇게 죄짓고 귀양 가다 존안(尊顔)을 뵙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다행도 없을 것입니다."

", 넘치는 말씀을........제가 어떻게 그만한 위인이 되겠습니까?"

시진(柴進)은 그렇게 겸양을 떨며 임충을 손님 자리에 앉혔다. 동초(董超)와 설패(薛覇)는 머뭇머뭇 그 아랫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정해 앉기 바쁘게 머슴들을 부른 시진(柴進)은 술상을 내오게 했다. 오래잖아 머슴들이 각기 무언가를 들고 줄줄이 들어왔다. 고기 한 쟁반, 떡 한 쟁반, 데운 술 한 병, 돈 열 관을 얹은 쌀 한 말 따위였다.

"촌것들이라 높고 낮음을 모르는구나. 교두(敎頭)께서 오셨는데 어찌 그같이 가볍게 모시려 하느냐? 그것들은 가져가고 먼저 과자와 술부터 내오너라. 그런 다음 양을 잡아 제대로 갖춘 상을 차리도록 하라!"

임충(林沖)이 일어나 그런 시진을 말렸다.

"대관인(大官人), 너무 그러실 거 없습니다. 저는 지금 나온 것만으로도 넉넉합니다."

"그런 소리 마십시오. 교두(敎頭)께서 이런 데 오기가 쉽지 않은데 어찌 소홀히 대접하겠습니까?"

시진(柴進)이 그러면서 머슴들을 재촉하자 머슴들이 얼른 마른안주와 술을 내왔다. 몸을 일으킨 시진(柴進)이 스승을 대하듯 술 석 잔을 받쳐 올렸다. 임충(林沖)이 마지못해 받아 마신 뒤에 두 공인(公人)도 한 잔씩 얻어 걸칠 수가 있었다.

"교두님, 이제 안으로 드시지요."

술이 한 순배 돌은 뒤 시진(柴進)이 다시 그렇게 청했다. 임충(林沖)이 따라 들어가니 시진도 활과 화살통을 벗어 걸고 공인 둘을 끼워 새로운 술자리를 만들었다. 시진(柴進)은 주인 자리에, 임충(林沖)은 손님 자리에, 그리고 동초와 설패는 임충 뒷자리에 앉는 식이었다. 시진(柴進)과 임충(林沖)이 이런저런 세상일을 이야기하는 사이에 붉은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날이 저물었다. 곧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술상이 들어오면서 술자리다운 술자리가 다시 벌어졌다. 시진(柴進)이 잔을 들어 석 잔이나 비운 뒤에 자리에 앉으며 소리쳤다.

"이제 탕()을 내오너라."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잘 끓인 탕이 나왔다. 그들이 탕 그릇을 비운 뒤 다시 대여섯 잔을 더 마셨을 때 머슴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한곳으로 모셔 앉혀 함께 마시는 게 좋겠다. 빨리 여기 술상과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하라."

시진(柴進)이 머슴에게 그렇게 시켰다. 오래잖아 두건을 비뚜름히 쓴 비쩍 마른 중년 한 사람이 뒤채로부터 들어왔다.

'머슴이 선생님이라 했으니, 틀림없이 시대관인의 스승일 것이다.'

그렇게 지레짐작한 임충(林沖)이 몸을 굽히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임충이 귀하신 어른을 뵙습니다."

그러나 그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답례조차 없었다. 그 거만함에 더욱 기가 죽은 임충(林沖)이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있는데 시진(柴進)이 그 사내에게 말했다.

"홍교두님, 저분은 동경 팔십만 금군의 창봉교두(槍棒敎頭)로 계시던 임충이란 분입니다. 서로 인사 나누시지요."

그 말을 들은 임충(林沖)은 자신의 예가 모자랐나 싶어 이번에는 홍교두에게 절을 했다.

"절까지 하실 건 없소. 일어나시오."

홍교두란 사내는 입으로만 그럴 뿐, 자신이 맞절로 답례 하려들지 않았다. 그걸 본 시진(柴進)의 얼굴에 유쾌하지 못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임충(林沖)은 두 번이나 절을 올린 뒤에야 제자리를 두고 홍교두 자리로 가서 앉았다. 홍교두는 한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임충(林沖)이 비워 준 윗자리에 처억 앉았다. 그걸 본 시진(柴進)의 얼굴에 다시 한번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어수선하던 술자리가 제대로 가라앉기도 전에 홍 교두가 시진에게 물었다.

"대관인(大官人),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저런 귀양 가는 죄수를 이토록 두텁게 대접하시오?"

"저분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요. 팔십만 금군을 가르치시던 분입니다. 그런 분을 어찌 함부로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시진(柴進)이 밝지 못한 얼굴로 그렇게 대꾸했다. 홍교두가 피식 웃으며 빈정댔다.

"대관인(大官人)께서 그렇게 창봉을 좋아하시니까 온갖 것들이 다 꾀지. 귀양 가는 어중이떠중이가 모두 '나는 창봉교두입네.' 하고 장원으로 모여들어 술과 밥에 쌀과 돈까지 후려 가질 않습니까? 대관인(大官人)은 무턱대고 그게 참말인 줄 믿어 탈이라니까!"

어지간한 임충도 그 말을 듣고는 불끈했으나 아직 맞대들지는 못했다. 시진(柴進)이 그런 임충을 가로막듯 홍교두의 말에 퉁을 놓았다.

"()은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분을 너무 하찮게 보지 마십시오."

홍교두는 시진의 그 같은 말에 심사가 틀어졌다. 얼른 몸을 일으키며 거칠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을 못 믿겠소. 나와 봉술을 한번 겨뤄 보면 저 사람이 정말 교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오!"

시진(柴進)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껄껄 웃으며 임충에게 말했다.

"그것 참 잘됐소. 좋소. 임 무사의 생각은 어떠시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임충(林沖)이 여전히 그렇게 겸양을 보였다. 그러나 홍교두는 그런 임충의 겸양을 저 좋을 대로만 해석했다.

'저놈이 거짓말을 해 놓고, 겁을 먹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한층 더 거만을 떨며 봉술을 겨뤄 보자고 나섰다. 임충의 무예를 보고 싶은 시진(柴進)도 양쪽을 부추기고 나서니 임충도 더는 마다하기 어려웠다.

"그럼 술을 더 마시다가 달이 뜨거든 술자리를 끝내도록 하지요."

임충이 반승낙을 하는 걸 보고 시진(柴進)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여럿에게 술잔을 돌렸다. 대여섯 잔이 더 돌았을 무렵 달이 높이 떠 뜰 안이 대낮같이 밝았다. 시진(柴進)이 술잔을 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자아, 이제 됐습니다. 두 분 교두께서 한번 겨뤄 보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임충(林沖)은 아직도 마음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다. 한 번 더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이 홍교두란 사람은 틀림없이 시대관인의 무예 스승일 것이다. 그런 사람을 꺾어 놓는다면 시대관인 낯이 뭐가 되는가.'

그래서 다시 주저하고 있는데 시진(柴進)이 불쑥 말했다.

"저분 홍교두께서는 이곳에 오신 지 오래지 않아 아직 이렇다 할 적수를 만나 본 적이 없으십니다. 임무사께서는 너무 사양하지 마시고 한 수 겨뤄 보십시오. 저도 두 분 교두의 솜씨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임충(林沖)이 자신의 낯을 보아 머뭇거리는 줄 짐작한 시진(柴進)이 스스로 나서서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임충(林沖)도 시진이 진정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음 놓고 홍교두와 겨뤄도 되리라 싶어 그리하기로 작정하고 있는데 홍교두가 먼저 일어나 서둘렀다.

"나가자구, 나가잔 말이야. 자신 있으면 몽둥이로 말하라구."

임충(林沖)도 더 망설일 까닭이 없어 방 밖으로 나온 그들은 집 뒤 빈터로 갔다. 머슴들이 여러 종류의 몽둥이를 한 아름 가져왔다. 먼저 겉옷을 벗어젖힌 홍교두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몽둥이 하나를 골랐다.

", 어서 와. 덤벼!"

임충을 얕볼 대로 얕보고 그렇게 몰아대는 홍교두가 밉살스러운지 시진(柴進)도 임충을 재촉했다.

"임무사, 어서 몽둥이를 고르시지요. 한번 겨뤄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보잘것없는 솜씨를 너무 비웃지 마십시오."

임충(林沖)이 그 말과 함께 몽둥이 하나를 고르고 홍교두와 마주 섰다.

"자아,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임충(林沖)이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갖추자 홍교두는 가만히 임충을 살폈다. 한스럽게도 한 치의 빈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홍교두가 함부로 덤비지 못하는 걸 보고 임충(林沖)이 먼저 몽둥이를 내질렀다. 홍교두가 자신의 몽둥이를 휘둘러 임충의 몽둥이를 막았다. 달은 휘영청 밝은데 두 사람의 봉술 겨루기는 차츰 달아올랐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몽둥이가 다섯 번이나 맞부딪쳤을까, 임충(林沖)이 문득 몸을 빼쳐 싸움판에서 물러나며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교두, 왜 그러시오?"

시진(柴進)이 까닭을 몰라 임충에게 물었다. 임충(林沖)이 무언가 억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졌습니다."

"아니, 제대로 겨뤄 보지도 않고 졌다니 그 무슨 말씀입니까?"0

시진(柴進)이 더욱 이상한 듯 다시 물었다. 임충(林沖)이 한숨과 함께 실토했다.

"제가 목에 칼을 쓰고 어떻게 저분을 이겨 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예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시진(柴進)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 사죄를 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칼을 벗고 하도록 하시지요. 그쯤은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머슴들을 불러 은자 열 냥을 내오게 했다. 머슴들이 은자를 가지고 오자 시진(柴進)은 그 은자를 설패(薛覇)와 동초(董超)에게 나누어 주며 말했다.

"제가 좀 간 큰 부탁을 두 분께 드려야겠습니다. 임교두의 칼을 잠시만 벗겨 주십시오. 내일 노성 안에서의 일은 모두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원래 죄수를 압송할 때는 칼에 봉인을 찍어 길 가는 도중에 함부로 벗기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그걸 벗겨 달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동초(董超)와 설패(薛覇)는 시진의 사람됨에 눌리어 감히 마다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은자까지 열 냥 생겼으니 마지못한 척 임충의 목에 쓴 칼을 벗겨 주었다.

"자아, 그럼 이제 두 분이 다시 한번 겨뤄 보십시오."

홍교두는 임충(林沖)이 다시 몽둥이를 들고나오는 걸 보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 임충(林沖)이 싸움판에서 달아난 게 겁을 먹어서인 걸로 단정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한층 더 임충을 얕보게 된 홍교두는 단번에 임충을 혼내 주려 덤벼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시오!"

시진(柴進)이 갑자기 그렇게 소리치더니 장객을 시켜 스물닷 냥이나 되는 은덩이를 내오게 했다. 오래잖아 머슴들이 은덩이를 내왔다. 시진(柴進)이 그 은덩이를 가리키며 임충과 홍교두에게 말했다.

"두 분은 힘껏 겨뤄 주시오. 이기시는 분에게 이 은덩이를 드리겠소."

시진이 속으로 그 은덩이를 주고 싶은 사람은 임충이었다. 그러나 그냥 주면 받지 않을 것 같이 일부러 그런 구실을 만든 것이었다. 그만큼 시진(柴進)은 임충을 믿었다. 홍교두는 임충이 꽁무니를 빼지 않고 덤벼 오는 게 괘씸한 데다 그 은덩이도 탐이 났다. 시간을 끌다가 날카로운 기세가 꺾이는게 싫어 얼른 몽둥이를 고쳐 잡고 파화소천세(把火燒天勢)란 자세를 취했다. 곧 횃불을 들어 하늘을 사르는 형국으로 봉을 쳐든 것이었다.

'시대관인(柴大官人)은 속으로 내가 저 사람을 이겨 주기를 바라는구나.'

그렇게 시진의 속셈을 짐작한 임충(林沖)도 몽둥이를 고쳐 잡고 자세를 취했다. 발초심사세(撥草尋蛇勢), 곧 수풀을 쳐 뱀을 찾는 듯 몽둥이를 비스듬히 내민 자세였다.

"덤벼! 덤비라니까!"

그렇게 소리친 홍교두가 갑자기 몽둥이를 번쩍 쳐들고 덮여왔다. 임충(林沖)이 주춤주춤 몸을 뺐다. 홍교두가 그런 임충을 한 발짝 따라붙으며 번쩍 쳐든 몽둥이를 내리쳤다. 임충(林沖)은 홍교두의 발놀림이 어지러운 걸 보고 몽둥이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훌쩍 뛰었다. 임충의 번개 같은 움직임에 홍교두는 손발이 맞지 않았다. 급하게 몸을 돌리는데 임충의 몽둥이가 목덜미에 떨어졌다. 홍교두는 정신이 아뜩해 들고 있던 몽둥이를 떨어뜨리고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임충(林沖)으로서는 싱거운 한판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시진(柴進)은 기뻐해 마지않았다. 얼른 술잔을 가져오라 소리치자 보고 있던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머슴 한 사람의 부축을 받고 겨우 정신을 차려 일어난 홍교두는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을 띠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시진(柴進)은 임충의 손을 잡아끌며 다시 술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잔이나 거푸 권한 뒤에 은덩이를 가져오게 해 임충에게 주었으나 임충(林沖)이 굳이 받지 않자 도로 거둬들였다.

시진(柴進)이 붙들어 임충은 며칠을 더 그곳에 묵었다. 온종일을 좋은 술과 맛난 음식으로 보내는 사이 대엿새가 지나갔다. 죄인을 압송해 가는 길이라 더 지체할 수 없게 된 두 공인(公人)이 드디어 임충에게 떠날 것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임충을 더 붙들어 둘 수 없게 된 시진(柴進)이 다시 크게 잔치를 열어 떠나는 임충을 위로하며 편지 두 통을 내놓았다.

"창주 대윤(大尹)과 저는 매우 가까운 사입입니다. 또 노성의 관영(官營, 교도소장 격)과 차발(差撥, 간수장 격)도 저와 교분이 두터우니 이 편지를 그 둘에게 내보이도록 하십시오. 반드시 교두님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진(柴進)의 호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시 은자 스물닷 냥을 내오게 해 스무 냥짜리 큰 덩이는 임충에게 주고 나머지 닷 냥은 두 공인에게 나눠 주는 것이었다. 하룻밤을 새다시피 시진과 술을 마신 임충(林沖)은 다음 날 날이 밝기 바쁘게 길을 떠났다. 시진(柴進)은 머슴들을 시켜 임충과 두 공인의 보따리를 져 주게 했다. 다시 전처럼 목에 칼을 쓴 임충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어 창주 노성으로 향했다. 시진(柴進)은 장원 문밖까지 따라 나와 작별을 고했다.

"좀 있으면 겨울이 올 것입니다. 그 전에 겨울옷을 지어 보내 드리겠습니다."

"대관인(大官人)의 지극하신 보살핌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아득합니다."

임충(林沖)이 진심 어린 말로 그렇게 감사를 하고 두 공인도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나타냈다.

길을 떠난 세 사람은 정오가 될 무렵 창주 성 밖에 이르렀다. 거기서 임충(林沖)은 짐을 지고 온 시진의 머슴들을 돌려보내고 두 공인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주아에 이른 두 공인(公人)은 동경부에서 보낸 공문을 바치고 임충을 보였다. 공문을 읽은 대윤(大尹)은 임충을 거둬들이고 두 공인에게는 답신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에 임충(林沖)은 노성의 관영으로 보내지고 두 공인은 오던 길을 되짚어 동경으로 돌아갔다. 노성 영내로 보내진 임충(林沖)은 우선 독방에 갇혔다. 먼저 와 갇혀 있던 옆방의 죄수들이 우르르 창살가로 몰려와 임충을 보더니 이것저것 일러주었다.

"이곳의 관영(官營)과 차발(差撥)은 모두가 나쁜 놈들이오. 죄수들을 어르고 후려 돈과 물건을 빼앗는다오."

"뇌물을 주면 잘 보아주지만 돈이 없으면 토방으로 던져 죽지도 살지도 못할 지경에 빠뜨리는 거요."

"또 감옥에 들 때는 살위봉(殺威棒)이란 게 있는데, 돈을 쓰고 거짓말로 아프다고 하면 한 대도 안 맞게 된다오."

"하지만 돈이 없어 그들을 구슬리지 못하면 백 대를 다 맞아야 한다오. 그 백 대를 다 맞고나면 반 이상은 죽고 말지."

그 말을 들은 임충(林沖)이 물었다.

"여러분이 이렇게 알려 주시니 고맙기 짝이 없소. 그런데 돈은 어떻게 쓰며 또 얼마나 써야 되오?"

"관영(官營) 닷 냥, 차발(差撥) 닷 냥쯤이면 될 거요. 관영에게는 차발을 통해 전하게 하면 되오."

다른 죄수들이 그렇게 알려 주었다. 그때 차발(差撥)이 기세등등하게 감옥으로 들어섰다.

"오늘 새로 온 놈이 어디 있느냐?"

차발이 뻔히 알며 그렇게 소리쳐 물었다. 임충(林沖)이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차발(差撥)은 임충이 대답만 하고 돈을 내놓지 않자 금세 낯빛이 변했다. 다짜고짜 욕설을 섞어 임충을 꾸짖었다.

"이 신출내기 도둑놈아, 어째서 나보고 절을 하지 않는 거냐? 내가 부르는데 대답은 하지 않고 딴 수작을 부려? 네놈이 동경에서 어떤 못된 짓을 하며 굴러먹었는지 내가 다 안다. 어서 네놈의 낯짝에 새긴 먹자부터 보여라. 보아하니 그놈의 볼따구니에 가득 찬 먹자는 평생 가도 지워지지 않겠구나. 이 때려 죽여도 죄는 남을 나쁜 놈아! 하지만 네놈의 게 바가지 같은 골통은 이제 내 손에 들어왔단 말이다. 어물거리면 단숨에 부수어 놓겠다. 조금 있다 맛을 보여 줄 테니 기다려라."

그러고는 계속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게거품을 뿜었다. 갇힌 몸인 데다 차발이 워낙 거세게 나오는 판이라 어지간한 임충도 대꾸를 못 했다. 몰려 있던 죄수들도 겁을 먹었는지 슬금슬금 흩어져 버렸다. 임충(林沖)은 차발의 욕지거리가 좀 가라앉기를 기다려 품에서 은자 닷 냥을 꺼내 바치며 넌지시 말했다.

"차발 어른, 적으나마 예()로 받아 주십시오."

차발(差撥)이 임충의 은자를 넘겨보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너는 이 은자를 나더러 관영에게 전해 달란 말이냐?"

관영에게 줄 뇌물도 내놓으란 말이나 다름없었다. 임충(林沖)이 얼른 열 냥을 더 내놓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 은자는 차발님께 드리는 것이고 관영님께 바칠 것은 여기 열 냥이 더 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차발님께서 좀 전해 주십시오."

그러자 차발(差撥)은 임충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임교두, 실은 진작부터 당신 이름을 듣고 있었지. 대단한 호걸이라더군. 고태위가 자네를 해치려 들어 잠시 고생은 하겠지만 오래잖아 밝혀질 거야. 당신의 큰 이름이나 그만한 생김으로 보아 틀림없이 하찮은 인물은 아닌 것 같단 말씀이야. 나중에 반드시 높은 벼슬아치가 될 거라구."

임충(林沖)도 속 좋게 맞받아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어쨌든 번거로움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앞일은 너무 걱정 말라구. 우리가 잘 보아줄 테니."

돈을 받아 기분이 좋아진 차발(差撥)은 그렇게 임충을 안심시켜 주기까지 했다. 임충(林沖)은 그제야 시진이 써 준 편지를 꺼냈다.

"여기 차발님께 전해 달라는 편지가 두 통 있습니다."

제 것을 뜯어 읽고 난 차발(差撥)이 더욱 은근해져 말했다.

"시대관인(柴大官人)의 편지까지 가졌으면서 무얼 그리 걱정하나? 이 편지 한 통은 은 한 덩이와 맞먹는 거네. 우선 이렇게 하게. 관영 어른이 자네를 점검하면 살위봉이란 걸 일백 대 때리게 되어 있는데 그때 자네는 병이 나서 아직 앓고 있다는 말을 하란 말이야. 내가 곁에서 거들면 매도 면할 수 있고, 딴 사람 눈도 속일 수 있지. 알겠나?"

"고맙습니다."

임충(林沖)은 그 말과 함께 허리까지 굽혔으나 마음속으로 떠올리고 있는 것은 소선풍 시진의 훤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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