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 11화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였다. 하루는 노지심(魯智深)이 속으로 생각했다.
'매일 저것들이 가져오는 술과 고기만 얻어먹어 미안하구나. 오늘은 내가 저것들을 대접하는 자리를 한번 마련해야겠다.'
그러고는 부리는 사람을 불러 시켰다.
"오늘은 저자에 나가 좋은 술 세 독, 그리고 돼지 양 한 마리씩을 사다 주게."
그때는 삼월도 다해 가는 늦봄이었다. 날씨가 더워 방 안은 안되겠다 싶어진 노지심(魯智深)은 음식이 마련되자 그것을 집 밖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차리게 했다. 모든 채비가 갖춰지자 노지심(魯智深)은 평소 그를 찾아오던 건달패들을 모조리 불러 한턱을 썼다. 큰 술잔에 크게 자른 고깃덩이를 안주로 배불리 먹은 건달 하나가 말했다.
"며칠 동안 스님의 주먹 쓰는 법은 잘 보았습니다만 무기 쓰는 것은 아직 구경을 못 했습니다. 저희들에게 무기 쓰는 모습을 한번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야 어려울 것도 없지."
노지심(魯智深)이 선뜻 그렇게 대답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 쇠로 만든 선장(禪杖)을 꺼내 왔다. 길이 다섯 자에 무게 예순두 근이나 되는 선장(禪杖)을 본 건달패는 하나같이 놀라움을 이기지 못했다. 둘러서서 구경하다가 입을 모아 말했다.
"한 팔로 소 한 마리씩 붙잡아 둘 힘이 없다면 어떻게 저런 선장(禪杖)을 쓸 수 있겠는가!"
그 소리를 들은 노지심(魯智深)은 더욱 우쭐해졌다. 보란 듯이 그 쇠로 된 선장을 잡아 휙휙 소리가 나도록 휘둘러 댔다. 곧 그의 몸은 삑삑한 선장(禪杖) 그림자 뒤에 감추어져 한 점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노지심(魯智深)이 제 흥에 겨워 한참 선장을 휘둘러 대고 있을 때였다. 담 밖에서 한 관원이 들여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좋다! 정말로 잘하는구나."
그 소리를 들은 노지심(魯智深)이 선장을 거두고 보니 담장 무너진 곳에 한 관원이 서 있었다. 머리에는 푸른 망사관에 백옥 발환(머리 묶개)이요, 몸에는 초록의 비단 전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은띠를 둘렀으며, 발에는 참외 모양의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손에는 부채 하나를 쥐고 있는데 얼굴 생김은 표범 같은 머리에 눈이 둥그렇고 제비턱에는 호랑이 수염을 길렀다. 여덟 자 키에 나이는 한 서른대여섯쯤 될까. 노지심(魯智深)이 자기를 바라보자 겸연쩍어졌는지 그 관원이 다시 한마디를 했다.
"저 스님, 여느 분이 아니시군. 정말로 좋은 솜씨를 지니셨소."
나쁜 소리가 아니라 듣기 싫지는 않았지만, 낯 모르는 사람이라 좀 쑥스러워진 노지심(魯智深)이 건달패에게 물었다.
"저 군관은 누구냐?"
"저분은 팔십만 금군의 창봉교두((槍棒敎頭, 창술과 봉술을 가르치는 교관)이신 임무사(林武師)이십니다. 존함은 임충(林冲)이라 하구요."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아는 대로 일러 주었다. 노지심(魯智深)이 그만하면 벗할 만하다 싶었던지 임충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모셔 들이지 않느냐?"
그러자 임충(林冲)이 훌쩍 몸을 날려 담을 뛰어넘었다. 그도 노지심에게 호감을 품은 듯했다. 노지심(魯智深)과 임충(林冲)은 누가 끼어들 것도 없이 인사를 나누고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한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어디에서 오신 분이며 법명은 어떻게 됩니까?"
마주 앉기 바쁘게 임충이 궁금한 걸 물었다. 노지심(魯智深)은 간략하게 자신의 내력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문득 옛일 하나가 떠올랐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혹시 어렸을 적 한번 동경에 온 적이 있소? 그때 영존 되시는 임제할(林提轄)을 뵈었소이다."
노지심(魯智深)이 자기 선친을 안다고 하자 임충(林冲)은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그 자리에서 형제를 맺고 노지심을 형으로 모시기로 했다. 결의의 술잔을 나눈 뒤에 노지심(魯智深)이 물었다.
"그래, 교두는 오늘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소?"
임충(林冲)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집사람과 함께 악묘(嶽廟)에 향을 사르러 나온 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혼자요?"
"가다가 봉 쓰는 소리가 들리기에 심부름하는 계집아이 금아에게 집사람을 데리고 악묘로 가게 하고 저만 이곳으로 왔지요. 그 바람에 뜻밖에도 형님 같은 분을 뵙게 된 것입니다."
임충(林冲)이 그렇게 말하자 노지심(魯智深)도 흐뭇해져 대꾸했다.
"나는 이곳에 온 이래 아는 사람이 없어 적적하기 그지없었소.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과 매일 만나 적적함을 달랬는데 오늘 임교두를 만나게 되었구려. 거기다가 교두가 나를 못났다고 버리지 않고 형제까지 맺게 되었으니 이 아니 좋은 일이오?"
그러고는 부리는 사람을 불러 술을 더 가져오게 하고 함께 마셨다. 노지심(盧智深)과 임충(林沖) 두사람이 술을 서너잔쯤 걸쳤을 때였다. 임충의 계집종 금아(錦兒)가 새빨개진 얼굴로 무너진 담 곁에 나타나 째지는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여기 앉아 계실 때가 아니에요. 어떤 못된 놈들이 아씨를 잡고 희롱을 하고 있어요."
"어디냐? 그곳이!"
임충(林沖)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금아(錦兒)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오악루 아래예요. 어떤 못된 놈이 아씨를 보더니 다짜고짜로 끌고 가서 놓아주려 하지를 않아요."
그러자 임충(林沖)은 노지심에게 서둘러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나중에 다시 형님을 만나러 오겠습니다. 너무 괴이쩍게 여기지 마십시오."
다시 몸을 날려 담장을 뛰어넘은 임충(林沖)은 뒤따라온 금아와 함께 악묘로 달려갔다. 오악루 아래 이르러 보니 건달패 서넛이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난간에 기대서 있는데, 그중 젊은 놈 하나가 뒤에 서서 임충의 아내를 붙들고 추근대는 것이었다.
"이봐요 아가씨, 잠깐만 누각으로 올라갑시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임충의 아내는 화가 나서 새빨개진 얼굴로 쏘아붙였다.
"이 밝은 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에요? 멀쩡한 사람을 붙들고 놀리다니?"
눈이 뒤집힌 임충(林沖)은 그 광경을 더 보지 못하고 훌쩍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젊은 놈에게 다가가기 무섭게 어깻죽지를 잡아 돌려세우며 소리쳤다.
"네 이놈, 무고한 양민의 처자를 희롱하는 죄가 어떤 건지 아느냐?"
원래 임충(林沖)은 그 말과 함께 그 젊은 놈의 상판대기에 주먹을 안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희뜩 돌아보는 얼굴에 주먹을 내지르려다 보니 뜻밖에도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다름 아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고태위(高太尉)의 수양아들 고아내(高衙內)였던 것이었다.
고태위 고구(高俅)는 공차는 재주 하나로 높이 출세는 했지만 친아들이 없었다. 거기다가 가까이서 도울 친척도 없어 종형인 고삼랑(高三郞)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고아내였다. 고아내(高衙內)는 그 위인이 보잘것없어 양아버지의 권세만 믿고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녔는데, 특히 여염의 아낙을 건드리는 데 남다른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동경 사람들은 고태위의 위세에 눌려 아무도 그와 다투지 못하고, 그저 화화태세(花花太歲)란 별명으로 부르면서 멀리서 피할 뿐이었다. 화화태세란 난봉꾼이나 색골을 듣기 좋게 부르는 소리였다. 임충(林沖)은 주먹을 부르쥐고 그를 돌려세우기까지는 했으나, 그가 고태위의 양자인 걸 알아보고는 차마 주먹을 내지를 수는 없었다. 힘없이 주먹을 푸는데 고아내(高衙內)가 도리어 임충을 알아보고 기세 좋게 소리쳤다.
"임충, 네가 웬 간섭이냐? 너는 아무데나 나서지 마라!"
아직 자신이 희롱하는 여자가 임충의 아내라는 걸 모른 까닭이었다. 아무리 고아내라 하더라도 그걸 알았다면 그렇게까지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임충(林沖)은 기가 막혔다. 당장 무어라 할 말이 생각 안 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서 있는데, 시비가 벌어진 걸 본 고아내의 졸개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교두님, 너무 노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내께서 모르셔서 한 짓입니다. 젊은 혈기에 불쑥 그러다 보니......."
고아내를 따라다니던 건달의 한패는 그렇게 임충을 달래고, 다른 한패는 고아내에게 달려가 잡고 있는 여자가 임충의 아내라는 걸 알렸다. 그제야 고아내(高衙內)도 머쓱해져 임충의 아내를 놓아주었다. 그 뒤로도 고아내의 졸개들은 여러 가지 좋은 말로 임충을 달랬으나, 임충(林沖)은 영 화가 풀리지 않았다. 고리눈을 부릅뜨고 고아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놀란 고아내의 졸개들이 더욱 힘써 임충을 권해 겨우 고아내와 화해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임충의 속이 풀리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바람에 고아내(高衙內)는 열적은 웃음만 흘리다가 말에 올라 악묘를 떠났다. 고아내가 떠난 뒤 임충(林沖)도 아내와 금아를 데리고 악묘를 나왔다. 그때 노지심(盧智深)이 쇠로 만든 선장을 둘러메고 건달패 스무남은 명과 함께 악묘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형님, 어디로 가십니까?"
임충(林沖)이 그런 노지심에게 물었다. 노지심(盧智深)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자네를 도우러 왔네. 그래, 어찌 되었나?"
"알고 보니 고태위의 아들놈이 제 아내인 줄 모르고 잠시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한주먹 안겨 주고 싶었으나 고태위의 낯을 보아 차마 그러지는 못했지요. 옛말에 관리를 무서워하지 말고 몸가짐이나 잘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임충이 비록 고태위의 봉록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니나 하는 일이 그의 다스림 아래에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임충(林沖)이 그렇게 맥없이 대답하자 노지심이 불끈해 소리쳤다.
"자네는 고태위를 겁낼 거 없네. 내가 혼내 줄 테니. 언제 그놈을 만나기만 하면 이 선장으로 삼백 대를 때려주지!"
"고맙습니다. 그럼 어디 가서 무얼 좀 드시지요."
임충(林沖)은 노지심이 몹시 취한 걸 보고 오히려 그렇게 달랬다. 노지심이 더욱 기세등등해 꽥꽥거렸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거든 꼭 내게 먼저 알려 주게. 당장 달려가 어떤 놈이건 박살을 내 놓을 테니......."
그때 건달패도 노지심(盧智深)이 취한 걸 보고 그를 부축하며 구슬렸다.
"스님, 우리는 이만 가지요. 내일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노지심도 선장을 끌며 돌아섰다. 그러나 임충 내외에게 한 번 더 큰소리치기를 잊지 않았다.
"제수씨,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거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이보게 아우, 우리는 내일 다시 만나세."
그러고는 건달패들과 어울려 산을 내려갔다. 임충(林沖)도 아내와 금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꺼림칙하고 즐겁지가 못했다. 마음이 즐겁지 못하기는 고아내(高衙內)도 마찬가지였다. 임충에게 쫓기듯 제 패거리와 함께 부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영 허전하고 찜찜했다. 거기다가 한편으로는 임충의 아리따운 아내가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 어른거리니더 미칠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고아내(高衙內)는 문을 닫아걸고 바깥 출입을 딱 끊고 말았다.
며칠이 지난 뒤였다. 고아내(高衙內)를 따라다니던 건달들이 몰려와 문안을 드리다 보니 고아내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무슨 걱정이 있는지 얼굴은 비쩍 마르고 눈빛이 흐릿한 게 꼭 병든 사람 같았다. 원래는 어디 가서 한바탕 흥겹게 놀다 오자고 꾀러 갔으나 그걸 본 건달들은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그 건달 중에는 건조두(乾鳥頭, 마른 새대가리)란 별명을 가진 부안(富安)이란 자가 있었다. 부안(富安)이 고아내의 심사를 알아차리고 가만히 홀로 찾아갔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앉게 되자 부안이 고아내에게 다가가 소곤거렸다.
"아내(衙內)께서 얼굴색이 영 좋지 않으신 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신 듯합니다. 제게 일러 주실 수는 없는지요?"
사람이 마음이 답답하면 그걸 털어놓을 상대를 찾게 마련이다. 고아내(高衙內)가 짐짓 놀라는 체하며 부안에게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다 아는 수가 있습지요."
"그럼 무엇 때문인지도 알겠구나?"
"그까짓 거 어려울 게 무에 있습니까? 아내께서는 임충(林沖)이 힘꼴깨나 쓴다고 두려워 함부로 어쩌지 못하시는 듯한데 그럴 거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잘나도 그놈은 태위님 밑에서 일하고 그 봉록으로 살아가는 놈 아닙니까? 그런 제놈이 어찌 태위님을 함부로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간 가벼워야 얼굴에 먹자를 넣고 귀양을 갈 것이요, 무거우면 목숨을 잃을 뿐입니다. 제게 마침 한 가지 좋은 계책이 있으니 아내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반드시 그 계집을 손에 넣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부안(富安)은 고아내가 털어놓을 필요도 없이 바로 임충을 꼬집어 내어 그렇게 속살거렸다. 더 감출 것도 없다 싶은지 고아내(高衙內)가 얼른 그 말을 받아들였다.
"나도 이렇다 할 계집을 여럿 본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반하기는 처음일세. 정신이 아뜩아뜩하고 가슴이 터질 듯하네. 만약 자네가 그 계집을 얻게 해 준다면 내 자네에게 큰 상을 내리지."
그러자 부안(富安)이 처음부터 품고 왔던 꾀를 일러 주었다.
"가까이 데리고 있는 사람 중에 우후(虞候) 육겸(陸謙)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임충과 친하니 한번 써 보시지요. 내일 아내(衙內)께서 육겸을 불러 그의 집 으슥한 방에 술과 음식을 차려 두게 하고 다시 그를 보내 임충을 부르게 하십시오. 그래서 임충의 집에서는 임충(林沖)이 육겸의 집으로 간 줄 알게 해 놓고 실제로 육겸은 임충을 번루(樊樓, 당시 장안에서 제일가던 술집)로 데려가게 하는 겁니다. 육겸의 집 으슥한 방에는 다만 아내(衙內)께서 혼자 남으시게 되는데 그때 제가 임충의 집으로 달려가 그 아낙에게 거짓말을 하겠습니다. 임충(林沖)이 육겸과 술을 마시다가 별안간에 쓰러졌으니 빨리 와서 보살피라면 제까짓 게 아니 속고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아내(衙內)께서 혼자 계신 방으로 임충의 아낙이 들게 되면 일은 거지 반 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여자란 정에 끌리기 쉬워 풍류를 싫어하지 않는 데다 아내(衙內)께서는 말솜씨까지 좋으시니 아니 넘어가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이런 제 꾀가 어떻습니까?"
그럴듯하다고 여긴 고아내(高衙內)가 부안을 칭찬하며 말했다.
"좋은 계책이야. 오늘 저녁 당장 육겸(陸謙)을 불러 한번 꾸며 봐야겠다."
그리고 그길로 곧 일을 시작했다. 육겸의 집은 고태위의 집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고아내에게 불려간 육겸(陸謙)은 조금도 꺼리는 기색 없이 그 청을 받아들였다. 권세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친구 간의 우정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것이었다.
한편 임충(林沖)은 오악묘에서의 일이 있은 뒤로 연일 울적함을 이기지 못했다.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혀 집에 틀어박혀 있는데 누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임교두, 집에 있나?"
임충(林沖)이 얼른 나가 보니 평소 친하게 지내는 육우후였다.
"아니, 육 형이 웬일인가?"
임충(林沖)이 놀라 그렇게 묻자 육겸이 은근히 다가오며 대꾸했다.
"하도 안 보이기에 마음먹고 찾아보러 왔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거리에서는 통 볼 수가 없나?"
"좀 그럴 일이 있네. 마음이 울적하니 어디 나가고 싶어야지."
임충(林沖)이 무심코 그렇게 받자 육우후가 기다렸다는 듯 임충의 소매를 끌었다.
"가세, 가서 나하고 술이나 한잔해 속을 풀도록 하지."
술 이야기를 들으니 임충(林沖)도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어 그대로 나서려는 육우후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렇더라도 차나 한잔하고 나가지."
그러자 육우후(陸虞候)는 잘됐다는 듯 임충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차 한잔을 나누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을 나서던 육우후(陸虞候)가 문득 안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 전 임 형하고 우리 집에 가서 술 한잔합니다."
평소 남편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 임충의 아내는 별생각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발 건너서 다만 임충에게 한마디 당부했다.
"너무 많이 드시지 말고 일찍 돌아오세요."
그런데 갑자기 육우후(陸虞候)의 말이 달라진 것은 둘이서 집을 나와 한참을 걸은 뒤였다.
"임 형, 우리 집으로 가지 말고 번루로 가지. 술맛이야 역시 거기가 아니겠나?"
그런 육우후의 말에 임충(林沖)도 마다할 까닭이 없어 둘은 곧 번루(樊樓)로 갔다. 임충과 육겸 두 사람은 술집 주인에게 좋은 술과 비싼 안주를 시키고 술이 나오기 바쁘게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술잔과 더불어 이런 저런 세상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을 때였다. 임충(林沖)이 저도 몰래 한숨을 푹 내쉬자 육우후(陸虞候)가 물었다.
"임 형, 무슨 까닭으로 그리 한숨인가?"
임충(林沖)이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육 형은 모를 것이네. 사내로 태어나 좋은 주인을 못 만나고 소인배 아래서 몸을 굽히며 사는 게 어떤 건지. 온갖 더러운 욕을 보고도 참아야 하는 게 한심스러워 절로 한숨이 나온 모양일세."
"지금 금군에 교두가 여럿 있다고는 하지만 임 형과 견줄 만한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거기다가 태위께서도 잘 보아주시는 것 같은데 속상할 게 무엇 있는가?"
육겸(陸謙)이 아무것도 모르는 체 다시 그렇게 물었다. 순진한 임충은 며칠 전 고아내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한바탕 울분을 토했다. 육겸(陸謙)이 좋은 말로 그런 임충을 달랬다.
"아내께서는 아주머니가 누군지 몰라서 그랬을 거야. 이제 그만 분을 삭이고 술이나 드세."
그말에 임충(林沖)은 거푸 여덟, 아홉 잔을 비우더니 문득 몸을 일으켰다. 오줌이라도 마려워진 듯했다.
"내 손 좀 씻고 오겠네."
임충이 그러면서 술집을 나갔다. 그를 술집 안에 붙잡아 두는 게 육겸의 할 일이었으나 손 씻으러 나간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육겸(陸謙)은 불안한 대로 임충이 술집을 나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 술집 위층에서 내려온 임충(林沖)은 서쪽 문을 나와 골목 저편에 있는 세수간으로 갔다. 그런데 일을 마친 임충(林沖)이 손을 씻고 술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심부름 하는 계집아이 금아(錦兒)가 어디선가 주르르 달려와 숨 넘어가는 소리를 했다.
"나리! 여기 계셨군요.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무슨 일이냐?"
공연히 불안해진 임충(林沖)이 얼른 그렇게 물었다. 금아(錦兒)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나리와 육우후께서 함께 나가신 지 반 시진쯤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웬 사람이 아씨에게 자신을 육우후네 머슴이라며 나리께서 술을 마시다가 기절해 쓰러지셨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쓰러지신 나리께서 아씨를 찾으신다는 말에 놀란 아씨는 이웃 왕(王) 할머니에게 집을 맡기고 저와 함께 그 사람을 따라나섰지요. 그런데 태위부 곁에 있는 어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이게 또 웬일입니까? 나리는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술상만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저와 아씨는 그래도 할 수 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또 그놈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악묘에서 아씨를 붙들고 희롱하던 그 젊은 것 말입니다. 그놈이 나리께서 곧 오실 것이니 기다리라며 수작을 걸고 들지 않겠어요? 놀란 제가 그 집을 뛰쳐나오는데 아씨의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 살리라는 소리 같았어요...."
"그래,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이곳저곳을 뛰어다녀 보아도 나리를 찾지 못해 허둥대다가 약장수 장 선생을 만났지요. 내가 나리를 찾는다고 하자 나리가 어떤 사람과 이 술집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뛰어온 것입니다. 나리, 어서 가 보십시오!"
금아의 말이 아니더라도 임충(林沖)은 이미 눈이 뒤집혀 있었다. 금아가 따라오는지 마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육겸의 집으로 달려갔다. 한 발짝이 여느 사람 세 배는 되게 내닫는 게 정말로 성난 표범이 뛰는 것 같았다. 임충(林沖)이 대뜸 육겸의 집으로 달려가게 된 데는 나름대로 짚이는 게 있어서였다. 태위부 곁에 있는 집으로 고아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집은 그뿐인데다,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육겸(陸謙)이 자기 집을 두고 술집으로 가자고 한 것도 수상쩍었다. 더군다나 거짓말로 아내를 꾀어낸 놈도 스스로를 육겸의 머슴이라 했다지 않은가. 아내의 일이 급하지 않았더라면 먼저 육겸부터 요절을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날듯이 육겸의 집에 다다른 임충(林沖)은 곧장 계단을 뛰어올라 금아가 말한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방문은 굳게 걸려 있고 아내의 비명 같은 꾸짖음 소리만 밖으로 새어 나올 뿐이었다.
"이 밝은 세상에 무슨 짓이에요? 양민의 아낙을 속여서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낭자, 이 몸을 가엾게 보아 주시오. 쇠와 돌로 된 사람이라도 다시 한번 돌려 생각해 주실 수 있을 것이오...."
고아내(高衙內)가 들척지근한 목소리로 그렇게 임충의 아내에게 매달렸다. 임충(林沖)은 그 소리를 더 들을 수가 없어 방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여보, 문 여시오. 내가 왔소."
그게 임충의 목소리임을 알아들은 임충의 아내는 고아내를 뿌리치고 달려가 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고아내(高衙內)는 그대로 누각 창문을 박차고 아래로 뛰어내려 담을 넘어 달아나 버렸다. 고태위의 아들놈이건 뭐건 잡히기만 하면 골통을 부숴 놓으려고 뛰어 들어간 임충(林沖)은 고아내가 방 안에 없는 걸 보자 맥이 풀렸다.
"그래 욕이나 보지 않았소?"
임충(林沖)이 묻자 그의 아내가 도리질을 하며 대답했다.
"아뇨, 때맞춰 와 주셔서....."
하지만 그것으로 풀릴 화가 아니었다. 임충(林沖)은 고아내의 골통 대신 육겸의 집 안을 가루가 나도록 들부숴 놓은 뒤에야 아내를 데리고 그 집을 나왔다. 문을 나오다 보니 겁을 먹은 이웃집들이 모두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임충(林沖)은 아내와 금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대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곧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품고 번루(樊樓)로 달려갔다. 앞뒤를 재어 보니 모든 게 육겸의 수작 같아 살려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러나 번루에 가보니 육겸(陸謙)은 이미 달아나고 보이지 않았다. 임충의 성깔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인지라, 일이 꼬인 걸 알자 얼른 피해 버린 것이었다. 화가 가라앉지 않은 임충(林沖)은 다시 육겸의 집으로 돌아가 밤늦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겁을 먹은 육겸(陸謙)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할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 임충에게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만두세요. 제가 욕을 본 것도 아닌데 너무 그러실 것 없어요."
분을 삭이지 못한 임충(林沖)이 이를 갈며 대꾸했다.
"아니오, 육겸(陸謙)이란 놈은 결코 용서할 수 없소. 나와 형이야 아우야 하며 지내던 놈이 어찌 그런 짐승 같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감히 나를 속이려 들다니!"
임충의 아내는 더욱 간곡히 그를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임충(林沖)은 다시 집을 나가 육겸의 집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때 고태위의 부중에 숨어 있던 육겸(陸謙)은 몇 날이고 감히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못 냈다. 그 바람에 임충(林沖)은 사흘이나 기다려도 육겸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흘째 되는 날 점심때였다. 노지심(魯智深)이 문득 임충을 찾아와 물었다.
"교두, 요즈음 무슨 일이 있나?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군."
"아우가 좀 바빠 형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이왕 저희 집까지 오셨으니 전에 말한 대로 한잔하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갑작스러워 저희 집에서는 술상 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함께 거리로 나가 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임충(林沖)이 굳은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눈치 없는 노지심은 술이란 말에 그저 반가워 입이 헤벌어졌다. 이에 거리로 나간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술을 마신 뒤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부터 임충의 술타령이 시작되었다. 임충(林沖)은 모든 걸 팽개치고 노지심과 어울려 술만 퍼마시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가슴속 울분으로 노지심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한편 괴로운 나날을 보내기는 고아내(高衙內)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누각에서 뛰어내려 담을 넘고 도망쳐야 했던 자신의 꼴이 한심스러워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못 하고 홀로 속을 삭이자니 절로 병이 되었다. 그길로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고아내(高衙內)가 드러눕자 걱정이 된 육겸과 부안이 보러 왔다. 고아내의 얼굴색이 누르께하고 말이 헷갈리는 게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육겸(陸謙)이 물었다.
"아내(衙內)께서는 무슨 일로 이렇듯 괴로워하십니까?"
고아내(高衙內)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털어놓았다.
"자네들이니까 속이지 않고 다 말하지. 나는 두 차례나 임충의 아낙을 건드려 봤지만 일은 안 되고 망신만 당했네. 공연히 내 병만 무겁게 만든 꼴이라 이제는 오래 살지도 못할 듯싶으이."
"아내(衙內)께서는 마음을 편하게 지니십시오. 저희 두 놈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 그 계집을 얻게 해 드리겠습니다. 임충(林沖)이란 놈은 목이 매달리게 하고....그 모든 게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니 죽는단 말씀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마십쇼."
부안(富安)과 육겸(陸謙)이 그렇게 고아내를 위로했다. 그 소리에 고아내(高衙內)도 기운이 나 셋이서 한창 수군거리고 있는데 태위부의 늙은 청지기가 들어왔다. 양아들이 병들어 누웠단 말을 들은 태위가 병세를 살피러 보낸 것이었다. 청지기가 고아내의 병세를 살피는 동안 바깥에 나와 있던 부안(富安)이 육겸에게 속살거렸다.
"우리 이렇게 이렇게 해 보세......."
그 말이 그럴듯하다 싶은 육겸(陸謙)이 찬성해 둘은 곧 한 가지 계책을 정하고 태위부의 청지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